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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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문화칼럼) 문학혼 댓글:  조회:3715  추천:0  2018-09-20
(문화칼럼)                         문학혼                                              최 균 선                 문학의 령혼이란 무엇인가? 공인하는바 문학의 령혼은 작품의 내용 및 그로부터 체현되는 사상이다. 이런 론단은 문학에서의 불문률로서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화되는것이 아니다. 그런데 현대서방문학리론과 그 경전작품들의 미혹된 이 시대의 선구자들의 눈에는 이 불문률이 가히 던져버릴수 있는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중국의 한 작가는 “어떠한 경전적 의의를 가지고 있는 문학작품에서 령혼은 풍격과 결구에 있다”고 하면서 작품의 도덕적 의의는 왕왕 무료한 설교의 대명사이고 위대한 사상은 한무더기 정확한 쓸데없는 말”로 전락된다고 했다. 그런가? 답은 부정적이다. 왜냐? 일종의 문학으로 소유의 “도덕”, “의미”를 부정하고 “사상”의 가치의의를 부정할 때 그게 무슨 문학이 될것인가?     로신선생은 일찍 “일체문예는 결국 선전이지만 일체 선전이 모두 문예인것은 아니라”라고 말하였다. 이 말은 기실 문학은 반드시 두개의 기본공능을 구비해야 한다는것을 뜻하는바 첫째는 선전교화의 공능이고 둘째는 그의 예술특징이다. 지금 적지 않은 작가들이 자기의 작품은 정치, 사상류의 선전, 교육작용과 무관하다고 말하기 좋아하는데 자가당착이다.     무릇 어떤 작가이든 자기의 작품이 독자대중에게 접수되고 즐겨 읽는 문학예술작품이 되기를 바란다. 아닌체 할 작가도 없으려니와 이런 사실을 부인할 방법도 없을 것이다. 뚜렷한바 “사상”  정확한 쓸모없는 말이고 “선전”이 무료한 설교의 대명사라고 말하는 저의를 캔다면 곧 세계의 대문호들의 문학활동은 아무런 의의도 가지지 못하고 아울러 허위적이고 심지어는 반인성적이라는것이다. 참으로 경세지언이라 할것이로되 사람을 놀래우지는 못하는 유감을 안고있다.     “선전”은 문학예술이 떨쳐버릴수 없는 숙명이다. 이러한 “숙명”을 거부한다면 그들이 주장하는 문학이란 무슨 소용이 있는 물건짝인가? 그래 이 세상에 정녕 “도덕함 의”가 전혀 없고 어떠한 정확한 “사상”을 배제한 “순수”예술을 위한 예술인 문학예술작품들이 있단말인가? 아무런 사상도 없는 작가는 작가도 아니거니와 대중에게 쓸모 있고 유익한 작품을 만들어낼수도 없다.     여기서 단언할수 있는바 ”문학혼”이란 바로 작가의 정신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시학에서 “시는 가장 위대한 인간의 영혼에 불을 지피는 영원한 생명의 빛”이라고 하였다. 또 시는 인생의 행복을 최고 목적으로 추구함으로써 가장 조화적이며 자연스러운 즐거움의 예술이라고 했다.” 프로이드는 시인을 가리켜 “고달픈 아름다움을 먹으면서 찬란한 은실을 뽑아내기 위해 뼈를 깎는 아픔을 참아내는 려정의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영국의 드킨스는 문학은 가르치는것과 감동시키는 일을 한다고 했다. 이 말은 문학이야우리를 감동시키는 최상의 예술이라는 뜻이다.     201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페루출신 소설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문학이란 처음부터 우리 생각처럼 돌아가지 않는 이 세상에 대항하기 위한 무기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불행을 읽어가면서 그것을 향유하고있다. 그런것으로 인간이 위로를 받는다. 그래서 세상을 바꾸기 위한 문학적 활동은 필요하다. 작품을 읽은 이들이 선과 악을 분별하는 법을 배우고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데 일조했다는 점은 증명할수 있다”고 말했다. 뮐러는 “문학은 불행을 말할수밖에 없고 그 안에 불행이 반드시 있다. 문학은 위로를 준다. 고통을 말하지만 위로도 덤으로 준다. 문학은 가벼운 주머니로도 만날 수 있는 심리치료사”라고 정의했다. 문학대가들의 론술이 그래 정확한 “사상”,“선전”이 아니며 “무료하게” 설교가 아닌가?     사실 모든 문학은 저자가 의도했든 아니했든간에 교훈적으로 해석할 개연성을 가지고있다. 훌륭한 문학은 인간적호소력 즉 보편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결국은 사 람의 정신개조작업이 아닐수 없다. 이런 정신적작품은 작가와 독자의 묵결속에 재창조된다. 문학은 보여주는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감동을 수반한 비판적기능을 가지고 래일을 이야기하는데까지 나가야 한다. 괴테는 위대한 작품은 우리를 가르치지 않고 변화시킬뿐이라고 했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이 바로 문학의 혼에서 나오는것이다.     이처럼 많은 경우에 문학은 작가의 명백한 교훈적목적을 추구함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인간성에 호소하는 자유로운 상상의 질을 구현하고 있는 까닭에 그런 작품들은 당시에만 효과가 있는것이 아니라 ‘고전(古典)’이라는 이름으로 시간공을 초월하여 독자들을 확보한다. 이로써 교훈문학은 하나의 전문적 구분일뿐 그 작품의 가치를 폄하 하는 배타적용어가 아니라는것을 알수 있다.       인간의 삶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그 모든 사건, 사실들의 변증법적관계를 가장  형상적이고 생동하게 보여줄수 있는 예술로는 문학밖에 없다. 그래서 문학은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하는것이다. 그래서 문학은 글의 예술이 된다. 참다운 문학은 옛말과 경험을 따르는데 있지 않고 자신의 시대와 경험에 충실해야 한다. 그것이 문학정신이다. 작가가 모순된 사회를 고발, 비판하는 자기반성과 함께 비정한 사회를 해학적으로 풍자, 비판하는 글은 음풍영월보다 독자들을 못견디게 감동시킨다. 민초들의 모순된 삶의 현장을 사실주의 기법으로 조명하는 작업은 그래서 필요하다.     글을 쓴다는것은 세계를 조명함과 더불어 그것을 독자의 정감세계에 투사하는 작업이다. 작가와 독자의 묵결이 있기에 문학, 작가가 존재리유를 확보한다. 사회인으로서 독자와 함께 숨쉬는 작가는 사람 사는 세상이야기를 독자와 공유함으로써 자아를 실현하고 독자는 자아완성 진일보 다가서게 된다. 그래서 문학이 인간의 생명의 빛이 되고 가장 깊은 마음에서 피여나는 생명의 꽃이 되는게다.     물론 문학이 인류구원의 유력한 수단, 도구일수는 없다. 그러나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안내할수는 있다. 문학의 화원에서 독자들이 말로 형언할길 없는 위로와 힘을 얻는것은 부인할수 없다. 전통적 관념에서는 문학의 제일 기능을 쾌락보다 교훈에 두고 문학의 가치를 사회적효용성(현실적효용성)에서 찾는다. 교훈주의적 문학관이라고 힐난받을수 있는 현시대이지만 문학의 교훈성을 영원히 배제할수도 없는 일이다.      회고해보면 지난세기 80년대,90년대의 서구문학사조의 격류에 어덩덩해서 휘감겨들 때 의식, 무의식간에 문학이 가벼워지고 창작이 문자유희로 되여지면서 독자대 중들에게 소외당하게 된 인과관계를 우리는 자성해야 마땅하다. 본격적문학은 문학성, 예술성이 도외시하고 상업성을 내세운 책들에 의해 뒤로 밀리게 되였다. 시대를, 누 구를 원망할것도 없다. 자승자박에서 이미 예견된 자업자득이다.     루마니아태생의 작가 게오르규는 “문인이란 시대를 증언하고 어둠속에서 횃불을 밝히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만큼 문학의 길은 어렵고 위험천만한 길이다. 그러나 문인은 이 길을 가야 할 사명을 버리려하지 않는다. 배는 바다위에 떠야 제구실하듯 작가는 오직 문학의 길에서만 자기의 존재리유를 확보할수 있다.     아무런 사상도 없이 무엇을 쓰고 싶으면 무엇을 쓰면서 인류가 몇천년의 문명건설에서 쌓아온 인류의 도덕, 륜리, 습속, 인성, 론리 등을  “무료한 설교”혹은 “정확한 쓸데없는 말” 로 치부하고 내버리는 이른바 현대파작가들의 작품은 무엇을 전달하고 있는가? 두서없이 횡설수설 내키는대로 엮어놓은 “령혼”이 부재한 작품들의 범람은 실로 문학의 비애일뿐이다.                                                                           2018년 2월 13일
3    (잡문) 작가의 량지 댓글:  조회:3540  추천:0  2018-09-20
                                           작가의 량지                                              최 균 선       량지란 사람들에게 내재한 도덕판단과 도덕평가 체계로서 환경과 교육에 의거하지 않고 자연적으로 구비되는 도덕의식과 도덕정감이다. 작가의 량지는 사회의 일원인 사람이면 공동히 가지고 있는 량지이면서도 이외에 예술량지와 사회량지가 구비 되여야 하는바 이것이 일반 사람과 한차원 높은 량지이다,     인간의 생존과 발전에 발을 붙이는것은 문학예술발전의 영원한 규률이고 동요될수 없는 준칙이다. 그러므로 문학으로서 인류생존의 침체, 타락, 부패, 퇴화, 기형적인 이화 등에 대하여 편달하고 질타해야 한다. 그러자면 순수한 마음과 성실한 태도로 문학을 시작해야 한다. 이것은 예술이 작가에게 부여한 량지이다. 사회량지는 예술량지의 외재저표현이라면 예술량지는 작가의 몸에서의 인격화이다.     작가의 사회적량지는 신분증처럼 작가 자신의 확인이다. 작가의 량지는 문학정신의 근원이며 문학정신은 되돌아와 작가의 량지를 체현힌다. 심오하게 생각할것도 없이 “량지(良知)” 란 바로 어떻게 해야 좋은것이고 어떻게 하면 나쁜것인가를 잘 아는것이다. 착함과 성실과 자률 등은 좋은것이고 가치로운것임을 아는것이 량지로서 량지가 있은 연후에 비로소 량호한 창작행위가 있게 된다.     문학창작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생명활동이다. 좋은 말이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작가의 방종에 대한 변명으로 되였다. 창작을 일종 정신사업이라 할진대 작품은 사회에 향한 공공연한 납함이다. 아무도 알아들을수 없는 뇌까림으로는 독자들을 김화시킬수 없다. 작가는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글을 짓는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의 심목속에 작가로 존재할수밖에 없다.     작가가 자기의 자유의지에 따라 글을 쓴다는것은 개인의 창조성으로서 작가적 존재의 리유이고 기초이다. 그가 명작가이든 무명작가이든 다른 사람들의 심목속에 작가라는 사실을 부인하려 하지 않을것이다. 달리 말하면 작가는 반드시 사회, 독자들의 어떤 질문에 대답할 사명을 지니고있다. 즉 원하든 원치않든 부여받은 사회적 작용이다. 세상을 향해 발언한다는것이 바로 작가의 존재리유이다.     자고로 인간사회에 고난과 눈물이 보편적이고 악세력은 아직도 그처럼 악랄하게 횡행하는데 작가로서 이런 현실에 눈을 감고 싱이탑속에서 간지러운 피리만 불어댄다면 이것은 문학의 비애가 아닐수 없다. 문학은 지혜로 모종의 조우와 생활경험을 증명하는데 그칠것이 아니라 작가내심에 있던 용기로써 존재의 불행과 사회의 비리와 모순을 파헤쳐야 량지가 있는 작가로 자리매김 할것이다.     당전 우리 문학은 현실을 회피하는 자기 기편적인 모순을 안고 용속한 소비문화의 포로가 되였다. 20세기 80년대까지만도 작가들은 보편적으로 시대의 앞장에 섰고 문학은 사상의 선소리로 메아리쳤다. 그런데 90년대후 작가들은 주류무대에서 자진 퇴장하면서 오늘에 이르러서는 글쟁이군체로 되여버렸다. 작가가 사회상에서 중요한 각색을 맡던 시대는 이미 과거의 언덕에 묻혔지만 스스로를 추락시킨다는것은 자업자득으로서 작가 자신만이 아니라 사회, 독자들도 속상한 일이다.    오늘날 작가들은 민중이 관심하는것을 작가들이 관심하지 않으며 민중이 기뻐하는 일을 작가들이 기뻐하지 않는다. 민중은 다 꿰뚫어보고 있는데 작가들은 잘 모르고있다. 아닌게 아니라 갈수록 더 많은 작가들이 서재에 숨어들어 소용돌이치는 현실생활을 외면하고 민중의 고난을 도외시 하면서 가렵지도 않은 문제를 가지고 대서특필하면서 문자유희에 열중하다보니 작가가 반드시 납함해야 할 때는 결석한다.     따라서 작품들은 련속부절히 쏟아져 나오지만 보편적으로 정신취약성이 낳은 굴욕감으로 점철되여 있다. 많은 작가들의 량지가 혼탁해졌고 정신이 연약해졌기에 문학이 격정과 리상적경지를 상실하게 된것이다. 창백무력한 창작시대가 도래한것이다. 현실은 엄혹하건만 문단이라는 울타리안에서 스스로 즐기고 자족하고 끼리끼리 자축하는 이런 현상은 작가들의 비애만이 아니라 독자들의 비애이기도 하다.     작가는 자기 심령의 화원에 원예사이다. 맞다. 누구나 간섭할수 없는 정신왕국이다. 그러나 온 사회가 공유하게 되여먹은 문학의 존재리유는 오직 인간사회의 구석구석을 탐색하고 새로운것을 발굴해내는데 있다. 그러나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괴테의 말처럼 용속해지지 말아야 한다.     작가가 일반 사람들과 다른 점은 무엇일가? 자신의 골수에 슴배여 있는 작가적 사명감이 곧 그것이다. 그런 사명감을 지니고 붓대를 꼬나들고 생활의 소용돌 이속에 들어가 민중의 대변인 나아가서 나팔수가 되느냐 하는데 근본적 구별이 있는것이다. 자기가 가려고 작정한 길로 견정불이하게 나아가는것이 작가의 옳바른 자세이다.     작가의 량지에는 작가적 분노의 감정의 분출도 포함되여 있다. 작가의 격분이란 바로 현재 존재상황에 대한 불만의 표시이고 일종의 거부와 현실의 모순을 조화시키려는 작업이다. 작가의 분노는 결코 감정적 충동이 아니라 리성사유를 거친 호소이다. 문학작품에 비판성과 리상적품격이 결여하면 그에서 파생된 문학은 기필고 연약한 문학, 용기를 상실한 문학이 될수밖에 없다.     리상적인 자유창작을 할수 없는 원인을 시대의 제약성에서 찾는것은 교묘한 핑게만은 아니다. 자유로운 창작의 “황금시대”는 그 어느때에도 없었다. 따라서 창작의 황금시대는 먼곳에 있는것도 아니며 미래에 있는것도 아니다. 진정한 문인으로 되지 못하는것은 개체의 비애이고 참된 문인을 용납하지 않는것은 시대의 비애이고 우리 문학인들의 가장 처절한 비극이다.     작가에게 가장 리상적인 정신가원이고 생존방식의 일종이던 문학이 곤궁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되였다. 문학의 성당은 이미 “실락원” 이 되였다는것을 부인할수 없다. 작품과 생활과 독자 사이에 벽은 날로 높아지고 두터워지고 있기때문이다.     작가를 존중하라고 요청할수 없지만 문화발전에 헌신하려는 지성인들이 소박받게 된 금전만능의 현실이 개탄스럽지 않으랴, 작가군체에 절대 대부분 작가들은 업여작가들로서 문학을 경영하여 부자가 된 사람이 거의 없다. 그러면서도 작가들은 문학창작에 혼신을 불태운다. 왜? 문학은 일종 고상한 정취이고 일종의 책임이여 나아가서는 일종의 사명이기때문이다.     작가가 현실을 직시하고 발언할수 없다면 굴욕적인 현실의 노예로 될수밖에 없다. 작가들이 자신들이 처경에 분노할줄 모르고 항쟁의 립장을 상실하였디면 초롱속에서 노래하는 꾀꼬리로 될뿐이다. 허용범위내에서 동네가 부산하도록 왝왝 거리는 게사 니가 될수도 있고 숲속에서 전문 해충을 쫏아먹는 딱따구리도 될수 있다. 많은 작가들이 현실은 현실이고 문학은 그저 문학일뿐이라고 하는데 문학정신을 외면하거나 포기한 글짓기는 모두 문학량지의 상실이다.     누가 뭐라든 정의는 영원히 사람들로 하여금 밝은 앞날을 향해 매진하도록 격려하며 정의의 힘은 인민대중의 량지와 각성속에 존재하면서 사악과 투쟁하는 길에 횃불로 타오를것임은 의심할바 없다. 물론 작가도 우선은 인간인만큼 비속한 생존자가 될수 있지만 비속한 작가로 되는것은 독자가 용납하지 않는다. 이 시점에서 작가로 말할 때 량지는 창작의 기준이자 출발점이라고 하는것이다.                                    2018년 3월 20일
2    ( 잡문) 작가정신을 기리다 댓글:  조회:3812  추천:0  2018-09-20
                                            작가정신을 기리다                                                      최 균 선       작가정신이란 총체적으로 말하면 자기 작품에서 체현된 사상이고 개체적으로 말하면 한 작가의 특유한 주의, 주장이다. 한 사람의 도덕관, 가치관, 사회관, 세계관 등은 한순간에 이루어지는것이 아니고 개개인의 삶과 생애 전체와 련결되여 형성되듯 작가의식ㅡ정신도 그 형성과정이 있다. 작가의식은 작가의 생애 전체에 걸쳐서 그가 인식하고 느끼고, 깨닫고, 사색하고 행동하는 그 모든것들이 모여 형성되는것이므로 그 자신의 우주적 총체라고 해야 할것이다.      공익을 위한 정의를 신장시킴에서 작가는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의 양상을 여실히 보여주기 위해 사회에 참여함으로써 현실감이 있고 생명력이 있는 글을 지어내고 생동한 인물형상을 부각해 낼수 있다. 사람은 각자 리해득실로 하여 색안경을 쓸수 있지만 작가의 시각은 편협하지도 않고 편향되지도 않은 광명정대한 시각이여야 한다. 우리 조선문학에서 이런 작가를 꼽으라면 우선 최서해를 추천하고싶다.     최서해는 일본의 식민지 수탈이 극대화해 가는 시기의 작가로서 비교적 성실하게 시대의 의미를 모색하였다. 그의 삶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불행하였으며 그의 작가적 책임은 식민지적 현실―즉 궁핍한 현실에 대한 문제로 집약된다. 그가 다룬 이야기의 대부분이 가난, 기아였던것처럼 그의 소설세계는 모두 하층민, 소작민, 류랑민, 로동자의것이였다. 그의 작품은 모두가 절대 대부분의 조선사람들의 삶의 참상과 체험을 토대로 재현된것이여서 그 간결하고 직선적인 문체에 힘입어 한층 더 호소 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예술적인 형상화가 미흡하다는 탓으로 초기의 인기를 지속하지 못하고 불우한 작가의 길을 헤쳐가다가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그가 신경향파의 대표적 작가이면서도 25년의 카프발족에 가담하지 않은것은 그의 “빈궁문학”이 어디까지나 목적의식적인것이 아니라 자신의 체험과 생리에서 우러나온 자연발생적인것이였음을 말해준다고 단언하는 사람도 있지만 시각편차이다. 괴테는 “눈물과 더불어 빵을 먹어보지 않은 자는 인생의 참다운 맛을 모른다”고 했다, 배부른 자가 어찌 배고픈자의 고통을 알며 납함하는 리유를 설명할수 있으랴,     작가 서해는 웨치고있다. “나는 이 세상 사람과 같이 그렇게 미적지근한 자극속에서 살고싶지 않다. 쓰라리면 오장이 찢기도록 기꺼우면 3백 64절골이 막 녹듯이 강렬한 자극속에서 살고싶다. 시퍼런 칼을 이 심장에 콱 박고 시뻘건 피를 확확 뿜으면서 종로 네거리를 이이저리 뛰고 뛰여서 온 거리를 이 피로 물들였으면 나는 퍽 통쾌하겠다. 나는 미친듯이 통쾌하겠다. ” 이런 처절한 고백은 그의 인간적인 개성, 심리적특질이 아니라 바로 그렇게 되고저하는 작가적 정신의 납합이라 하겠다.     눈물에 젖지 않은 눈으로는 인간삶의 밑바닥을 들여다 볼수 없으며 아픔을 겪어보지 못한 가슴으로는 정으로 보듬어주어야 할 사람들의 고충을 알수도 없다. 작가 최서해의 정신세계에 일관하고 있는것은 빈궁과 박해속에서 무한한 고통을 겪는 근로인민들에 대한 동정과 지지,불합리한 사회제도에서의 분노와 규탄, 계급적원쑤들에 대한 증오와 투쟁정신, 인간에 대한 사랑과 빼앗긴 생활의 권리를 찾아내려는 높은 인도주의정신이다. 이로써 최서해의 작가적정신의 핵은 저항적, 민족주의적, 사실적, 현실고발이다.     문학은 시대가 나아가는 앞길을 비춰주는 홰불이고 그 시대 삶의 현장과 인간상, 정서의 뉴앙스를 비추는 거울로서 인간의 정신세계의 구축을 도모한다. 저 낮고 낮아 보이는 일상의 삶을 문학사랑을 지닌 가슴으로 체험하고 그래서 세상에 알리고 사람들에게 나갈 길을 잡아주는게 문학이다. 문학사랑이 아니고는 폭넓은 삶의 현장 을 체험할 길이 없다. 우리는 찰스 디킨스의《올리버 트위스트》를 읽고 19세기 영국의 빈민가의 그 험악한 삶의 양상을 알수 있었고 현진건의 “빈처”를 읽고 지금은 흘러가버린 시대의 지식인의 삶이며 그리고 지금도 도처에서 재연되는 부부생활의 한 바람직한 단면을 련상할수 있다.     중외고금의 대문호들은 시대의 선지선각자들이였으며 그들이 쓴 글은 나라의 운명까지 바꾸어 놓았다. 괴테는 유럽변방의 언어였던 독일어를 세계어로 진입시켰으며 볼테르나 루소는 프랑스에 민주화를 이루었다. 레브 똘스또이와 뚜르게네브는 로씨아의 농노들이 자유를 찾게 했다. 그리고 미국의 스토우 부인은 엉클 톰스 캐빈을 통해 노예해방의 위업을 이루어냈으며 존스타인백은 분노의 포도를 통해 19세기초 미국에서 불황을 벗어날수 있게 했다.     작가의 눈길은 그냥 서리발치는 칼날만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무심하게 스쳐 지난 꽃을 보고 감동는것, 그 자체가 작가적인 가슴에 새겨진 작가정신이다. 눈을 들어 광막하고 고요하고 신비한 우주를 보고 허리굽혀 땅위에 무성한 수림과 풀숲을 본다. 그렇게 아름답고 온전한것을, 언젠가 거미줄에 얽힐 나비한마리에도 정을 가지고 보고 곧 시들어갈 꽃잎에도 무심하지 않다. 이처럼 아주 미미한것에까지 감동어린 눈길로 보는것이 작가의 시각이자 마음이다. 이렇게 작은것에서도 감동되는 마음이란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다. 이것이 문학정신이다.     작가의 마음은 고요한 련못이거나 목가적인 초원에 호수만은 아니다. 때로는 그 속에 살고있는 무서운 괴물도 보아내고 비리한 바람에 엄청난 격랑을 일굴수도 있다. 당대 시대의 다종다양한 삶의 양태를 문학이라는 화폭에 담으려면 객관현실과 시공을 넘어서서 새로운 의미를 지니는  예술품을 만들어내야 문학예술을 흔상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진리를 알려주고 감동을 줄수 있다     식물학자는 가시밭 엉겅퀴이거나 이름모를 들풀이거나를 막론하고 장미꽃처럼 소중하게 다룬다. 그 가시나무에 찔려서 피가 나도 나무라지 않는다. 오직 그 식물을 깊이 있게 관찰하고 분명하게 분석하여 철저하게 파악하려는 일념이 앞설뿐이다. 그러기에 문학에서도 삼라만상의 모든 줄기와 뿌리를 인간과 아름답게 련관시켜야 철학과 력사가 깃든 깊이 있고 차원 높고 생명력이 있는 아름다운 작품을 창조해낼수 있다. 그것이 곧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까지 충실히 감당해 가는것이다. 거기에 저자의 인품과 인격과 능력이 반영되여 작품으로서 생명의 빛을 발산한다.     병든 꿀벌은 좋은 꿀을 만들수 없다. 문학도 작가의 인격이 훌륭할수록 진실한 예술경지를 펼쳐보일수 있다. 다산 정약용은 글을 쓰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덕목에 대해서 “나라를 걱정하지 않은 글은 글이 아니다.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을 분개하지 않는 글은 글이 아니다. 아름다움을 아름답다. 하고 미운것을 밉다하며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는 뜻이 담겨 있지 않는 시는 시라고 할수 없다고 말했다. (不愛君憂國非詩也,不傷時憤俗非詩也,非有美刺勤徵之羲非詩也). 낡은 레코드에서 나오는 소 리로 여기고 우습게 흘려버릴수 있을것인가? 아니라면 설득력있는 답을 내놓으라.     좋은 작품은 시공을 뛰여넘어 인간의 본질적인 터전이 얼마나 소중하고 영원한가를 보여준다. 천년이 지나도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사랑문학으로 기록될 리도령과 춘향의 사랑이야기는 쉐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쥴리에트”이나 “햄리트”, “오셀로” 등 처럼 영원히 살아남을것이다. 한때 잘 팔리다가 시간과 함께 잊혀진 작품들은 문학사랑, 인간사랑으로가 아니라 자기 감각의 충족을 앞세우고 쓴 오락품들이다. 영원히 살아남을수 있는 예술성이 깃든 본격 문학만이 진정 세월과 더불어 사람들의 사랑속에서 영생할것이다.                                                                         2018.2.18
1    ( 칼럼) 왜 기어이 “북한”이고 “주민”이 되냐? 댓글:  조회:3252  추천:0  2018-09-20
      왜 기어이 “북한”이고 “주민”이 되냐?                                          진 언       한국에서 애용되고 있는 어떤 개념들은 얼토당토 않다. “얼토당토”란 “얼하지도 당(当)하지도 않다'는 뜻이다. 쉬운 실례로 “북한과 북한주민”이라는 개념이 얼토당토 않다. 일컬어 “북한”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모를 사람은 없으되 묻거니와 “한국”이 언제 분단되여 “북한” “남한”이 되였는가? 누가 똑 부러지게 날자, 원인을 말할수 있을가? 하긴 일제에 통채로 먹혀버린 소위 “대한제국”을 기점으로, 혹은 “상해 망명정부”를 근거로 조선반도가 한반도로 지칭되면서 북한으로 칭하는것이라고 할수도 있겠다. 하지만 극구 부정해도 조선은 엄연히 주권국가로 존재해 있지 않는가?     생떼질은 존재가 리유라는 진리를 마멸할수 없다. 이미 확고하게 존재하는 조선을 시종 “반국가단체”로 치부하고 싶던들 뜻대로 되였던가? 그게 옳다면 국가도 아닌것을 성원국으로 받아들인 유엔은 뭐가 되는가? 그렇게 앙앙불락이시면 왜 “반국가단체”를 유엔에 받아들였는가고 발을 구르고 침을 튕기며 고래고래 호통쳐야 명정언순(名正言順)이 되지 않겠냐?     일언이페지하고, 조선인민도 왜 한사코 “북한주민”으로 호칭돼야 하냐? 주민이란 뭐냐? “일정한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이다. 《현대조선말사전》의 해석과 똑같다. 하건만 조선이 한국의 일부인 “북한”이여야 하고 그 나라의 인민은 기어코 “주민”으로 지칭되여야 한다는데 그저 엉터리도 못된다.     “북한주민”이라는 부르는 그 저의는? 물으나마나 우문인데 그 호칭이 론리적으로 맞기나 한가? 어떤 고명한 이가 가라사대 “억압과 통제속에서 살고있는 북녘 동포를 '북한 주민' 또는 '북한 거주민' 으로 칭합니다.”라고 하는데 론점도 못된다. 론점이 론점이 아니면 설득력있는 론거를 들이댈수 없다     조선이라는 국명을 가지고 제 나라 땅에서 사는 사람들인데 한국 국민인양 지칭하는것은 너무 맹랑하다. 36년간 일제치하에 있다가 겨우 광복을 맞은 조선반도가 뒤미처 렬강들에 의해 분단된후 제 나름대로 세운 나라가 대한민국, 조선이 아닌가? “대한민국”이 갈라져 “북한”이란 생긴게 아님을 잘 알면서도 눈감고 야옹 하긴가?      욕심은 정서의 일종이지 객관적 판단이 아니다. 물론 광의적의미에서의 주민이란 호칭도 전혀 의미불통인것은 아니지만 이 지구촌에 억압과 통제속에 살고있는 수많은 나라 사람들은 그 나라 국민 혹은 인민이 아니고 주민이 되는가? 역지사지로 조선에서 대한민국 국민을 남조선주민이라 지칭한다면 곧 엎음갚음이 되는건가?     아주 고명한 어떤 제씨가 “그러나 그들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인민'이라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사전적 정의상 인민은 '법률을 구성하고 있는 자연인' 또는 '국가나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로 정의됩니다.”, “그러나 북한에서의 인민이란 그 사전적 정의를 살리지 못한, 단순 포괄 개념으로 통하는 '호칭 수준'에 머무 르는게 현실입니다.”라고 하는데 묻거니와 그래 조선사람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법률적 제약속에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근거를 댈수 있는가? 분명 딱 부러지게 근거를 대지 못하고 심증만 횡설수설할것이다.         “그들은 철학적 의미의 '자연인' 즉, 태어날 때부터 사회를 구성할 권리를 가진 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어불성설이다. “단순한 구성원 개념이지요. 일당 독재체제 아래서 인민이란 개념은 부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이 인민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그렇게 통용 될수 없다는 뜻입니다.” 넋나간 년이 횡설수설하다가 제 혀를 씹고만다더니 닮은 꼴이라 할가부다.     “본래 인민이란 단어는 국민과 시민을 포괄하는 민주적이면서도 원초적인 단어입니다. 권리의식을 가진 인간을 가장 잘 표현한 단어이지요. 때문에 더 좋은 단어를 북한에게 뺏겼다는 소리도 나오는 것이지요. 가령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북한에서 널리 통용되기에 우린 '동무'라는 좋은 우리말을 잘 쓰지 않는 면도 있습니다.”     자아팽창에 량지도 말아먹는데 유치해도 한참 유치하다. 옆구리터진 도토리의 키재기인가? 심통이 어떻게 뒤탈려 있든간에 정상적인 사유인이라면 모든 문제는 상대적으로 분석하고 존재하는 실체를 객관적으로 직시해야 한다.     “북한 사회는 우리나라가 명백히 규정하고 있는 헌법 조항처럼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개념에 상당히 벗어나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그대로 어불성설이요 언어도단이다. 그래, 조선이란 나라의 사회를 한국헌법을 기준으로 판정해야 한다는 권리를 누가 주었는가? 제 생각이면 다 진리인가?     인민은 계급적 정의로서 적과 상대되는 개념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인민, 국민은 부동한 개념이다. 비록 그것들이 일정한 사회관계 와 한 국가에서 사람들의 지위를 반영하고 있지만 말이다. 또한 인민은 정치개념으로서 일정한 계급내용과 력사내용을 함유하고있다. 인민은 집합개념이나 아무나 인민이라고 칭할수 없다. 이처럼 “인민” 은 “국민”과 동등한것이 아니다.     “인민”과 “국민”은 한글자 차이지만 단어의 의미, 정치리념, 국가의의상에서 완전히 달리 표현된다. 인민은 중성(中性)이지만 국민은 성격성이 내포된다. 즉 백성 민(民)에 “국가성”을 부여한것이다. 허다한 정황하에서 “국민”과 “신민(臣民)”은 같거나 비슷한 함의를 가졌였는바 이런 의미상 “국민”이란 개념은 “군신(君臣)” 관계를 반영하기도 하였다. “대한제국”시절에도 인민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적이 있었고 당시 아나운서가 인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중국의 중화민국 시절이라던가 공산주의를 혐오했던 장개석이나 김구같은 사람도 인민이라는 단어는 잘 썼다고 한다. 적어도 그들이 활동하던 시대에서는 리념색채가 없는 표현이였던것이다. 이런 고증으로 봐도 절대 인민이라는 용어가 흔히 말하고 있는 조선및 공산권 사회주의국가들에서만 쓰이던 개념이 아니란것이 실증된것이다. 그런데도 웬 감정 앞세우기의 오판 혹은 무지를 고집할가?     한걸음 물러서서“인민”은 그 어떠한 정치리념상, 국적상의 구분없이 상호간에 위계가 없는 자연인들의 집단을 가리키는 단어라고 인식할 때 우리 조선말과 글에서 “인민”이란 단어를 아예 삭제해버릴수 있을건가? 오히려 인문학, 사회과학, 무엇보다 특히 정치학처럼 단어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구별하는 경우, 자연인의 뉘앙스를 강조할 때는 국민이나 시민보다는 인민이라는 개념이 더 잘 사용된다. 정확히 말하면 인민이 더 포괄적인 개념이고 국민은 특수성을 가미한 개념이다.     문제는 조선이라는 국호에 반감을 가지고 “인민”마저 거부하는데 세계에서 쓰는 보편적인 개념을 단지 적대편이라는 리유로 부정하는것은 곧 취약성의 표백이다. 인민이란 단어가 정치적으로 더 많이 사용되는데도 그냥 “나몰라!”이면 “곤란”하다. 랭전시대, 독일도 서독국민, 동독인민 등으로 표기하였는데 그로써 통일에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한국에서의 “국민” 이라는 개념에는 력사적인 그림자가 비껴있다. 그쯤해서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랭정하게 생각해 보는개 현명하지 않을가? 세계에 “북한”이라는 국명은 없으니 말이다. 언어의 한계는 인식의 한계이다.  대결보다 민족융합의 아량을 좀 가져보삼.                                             2017년 12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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