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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검색날짜 : 2017/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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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약진시대에 벌어진 황당한 일들 댓글:  조회:5798  추천:0  2017-05-21
대약진시대에 벌어진 황당한 일들   중공중앙정치국은 1958년 8월에 북대하에서 확대회의를 열었다. 회의후에 중국은 “영국을 따라잡고 미국을 초과한다”는 구호를 내걸고 전민이 강철을 제련하는(全民炼钢)운동과 농촌인민공사화운동을 시작했다. 그 시기의 대약진운동에서 별의별 기이한 일들이 다 발생되였다. 《염황춘추》 2006년 제8기에 실린 리개원이 쓴 글을 보면 대약진기간중에 많은 간부들은 기층에 내려가서 선전하고 공산주의인민공사의 아름다운 미래를 묘사했다. 당시 국무원의 한 부총리는 하남성 수평현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연설했다. 그는 인민공사의 좋은 점을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첫째, 좋은 먹을거리는 배만 채우는것이 아닙니다. 매끼에 돼지고기, 닭고기, 물고기, 닭알이 있을것이며 더욱 멋진 음식도 있을것입니다. 례를 들면 원숭이머리, 제비집(燕窝), 해산물 등도 필요한만큼 공급합니다. 둘째, 옷을 입는것도 모두 원하는대로 만족시켜 드립니다. 하나같이 검은색이나 푸른색이 아닌 각종 색갈과 모양의 옷이 있습니다. 멀리 않은 장래에는 보통옷은 그냥 업무복으로 사용하고 퇴근하면 사람들은 가죽옷, 나일론옷, 양털옷으로 갈아입을것입니다. 인민공사는 모두 여우를 키워서 여우가죽옷을 만들어입을것입니다. 셋째, 집은 현대도시의 기준에 맞춥니다. 현대화가 무엇입니까? 인민공사입니다. 집의 북쪽에는 난방설비를 하고 남쪽에는 랭방설비를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높은 건물에 사는것은 더 말할것도 없고 안에는 전등, 전화, 상수도, 무선전화와 텔레비죤이 있을것입니다. 넷째, 달리기선수를 제외하고는 려행객이나 행인들이 모두 교통수단을 가지게 될것입니다. 항공로선도 각방향으로 다 다닐것이고 모든 성에는 비행장을 만들고 모든 지방에 비행기공장이 세워질 날도 멀지 않았습니다. 다섯재, 모든 사람은 고등교육을 받을것입니다. 교육은 이미 보급되였습니다.” 당시 중앙정치국 후보위원이던 강생은 “공산주의는 천당이고 인민공사는 교량”이라고 허튼소리를 치기도 했다. 먼저 인민공사라는 교량을 세운후 다리를 넘어가면 바로 공산주의라는것이였다. 하북성 서수현에서는 인민공사대식당을 건설하자는 기치를 높이 들고 먼저 “밥먹는것은 무상”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전현에 6.4만여호의 주민호와 32만명의 인구, 248개의 농업합작사가 있었다. 대약진기간중에 전현에 모두 1777개의 공공식당을 만들어 28.5만명이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이렇게 전현의 식당화를 실현했다. 서로 다른 업무, 임무의 필요에 따르기 위하여 이외에 야외전투군인식당 1410개, 유아식당 119개, 로년식당 248개도 내왔다. 가가호호 모두 쌓아두었던 량식을 무상으로 식당에 헌납했다. 나중에 인민공사라는 이 교량은 900만평방킬로메터의 중국대지 곳곳에 세워졌다. 공공식당도 전국각지에 생겨났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오래 가지 못했다. 인민들이 다리를 건너가고 나서 보게 된것은 꿈에 그리던 천당과는 완전히 상반된 광경이였다. 원숭이머리, 제비집료리, 해산물은 고사하고 멀건 죽마저도 먹을수 없게 된것이다. 대약진은 전방위적으로 시작되였다. 교육도 례외가 아니였다. 새로운 공장은 학교를 둘수 있다. 중학생을 모집해서 여기서 공부한다. 한 공장이 바로 하나의 대학이다. 하루에 몇시간은 공부하고 몇시간은 일한다. 공장이 바로 학교이고 학교가 바로 공장이다. 나중에 졸업하면 대학을 졸업한 동시에 기술자가 되는것이다. 이것도 공산주의로 가는 하나의 조건이였다. 하남성 방성현 성관진에는 모두 1.1만명 인구가 있었는데 몇개월내에 종합홍전대학, 위생학교, 희극학원, 음악학원, 무도학원, 사범 등 9개의 전문학교가 설립되였다. 각종 공농대학, 홍전대학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1958년 7월부터 10월까지 대약진기간동안 강생은 중앙문교소조(中央文教小组) 부조장의 신분으로 북경과 하남성의 일부학교를 시찰하면서 “교육혁명”의 진행상황을 파악했다. 북경사범대학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범대학은 두가지 임무가 있습니다. 하나는 학교를 운영하는것이고 하나는 공장을 운영하는것입니다. 모든 반은 공장을 하나씩 운영해야 합니다. 학교는 소학교, 중학교에서 대학교까지 해야 합니다.” 1958년에는 이런 일하고 공부하는 학교를 적어도 100개를 만들려고 하였는데 설립할 상황이 되는지 안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강생은 농업생산에서도 “사람이 얼마나 대담하게 하는지에 따라 땅은 그만큼 생산해준다”고 했었는데 설마 교육도 “사람이 얼마나 대담하게 하는지에 따라 학교도 얼마든지 설립할수 있다”는것인가? 교수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강생은 “대약진”중에 아주 황당한 견해를 밝힌바 있다. 그는 북경농업대학을 시찰할 때 명확하게 지시했다: “학교는 최소한 학교, 공장, 농장, 연구소, 농업국 5개의 간판을 내걸어야 한다. 만일 10여개의 간판을 내걸수 있으면 더 좋다. 교수는 심는 작물의 생산량에 따라 급을 평가해야 한다. 무당 1000근을 생산하면 5급교수이다. 2000근이면 4급교수, 3000근이면 3급교수, 4000근이면 2급교수, 5000근이면 1급교수이다.” 1958년 8월 4일에 하북성 서수현 당위서기는 시찰을 내려온 중앙수장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금년의 전현 평균무당생산량은 2000근에 달했습니다. 총생산량은 12억근입니다.” 이외에 그는 또 허풍을 떨어 “1개의 배추가 520근이고 보리는 무당 12만근이며 면화는 무당 5000근을 생산합니다”라고 보고했다. 중앙수장이 이렇게 물었다: “그렇게 많은 량식을 거두었습니까? 당신들의 전체 현이 31만명인데 어떻게 그렇게 많은 량식을 다 먹을수 있겠습니까? 당신들은 량식이 너무 많으면 어떻게 합니까?” “량식이 많으면 기계와 바꿉니다.” “기계와 바꿔도 다 안되면 어떻게 합니까? 당신들의 량식이 남아돌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기계와 바꾸지 않으려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우리는 산약(山药)으로 알콜을 만듭니다.” “모든 현마다 알콜을 만들면 그렇게 많은 알콜을 어디에 쓰려고?” “우리는 그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량식을 얻을지만 생각하고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먹어치울지는 생각하지 않고있습니다. 사실 량식이 많으면 좋지 않습니까? 많아서 국가가 필요없다고 하고 아무도 필요없다고 하면 인민공사사원들끼리 많이 먹으면 됩니다. 하루에 다섯끼도 먹을수 있습니다.” “전인민이 강철을 제련하라”는것은 대약진의 핵심이였다. 1958년 1월 하순에 북경에서 개최된 최고국무회의에서 이렇게 제안했다: “15년후에 4000만톤의 강철, 5억톤의 석탄, 4000만킬로와트의 전기를 만들어야 한다.” 이때로부터 보수사상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1958년 6월 21일에는 야금부가 대약진의 사상지도에 따라 중앙에 보고했다. 1959년의 강철생산량은 3000만톤을 초과할수 있고 1962년에는 8000~9000만톤에 이를수 있다고 보고했다. 이 보고서는 전국에 돌려지면서 선전되였다. 중공중앙은 그해 8월 17일부터 30일까지 북대하에서 거행된 정치국확대회의에서 “전당전민이 1070만톤강철생산을 위하여 분투할것을 호소함”이라는 문건을 채택했다. 전인민의 강철제련은 불꽃처럼 전국으로 번져갔다. 심지어 중남해의 안에도 작은 고로(小土炉)를 가설했다. 농촌이나 도시나 할것없이 모든 곳에서 작은 고로를 가설하고 강철생산을 시작했다. 국가기관의 마당, 공장, 학교, 거리에는 모두 강철제련의 열기가 뿜어져나왔다. 북경, 상해 등 11개도시의 18개 대학에서만 매년 69.2만톤의 강철을 제련할수 있었는데 이는 1949년 전국강철생산량의 4.38배였다. 제남시의 중학교에서는 1주일내에 77개의 소형고로를 만들었다. 할빈시의 19중학교에서는 10명의 대원이 5일만에 강철제련기술을 익혔고 하루만에 작은 공장을 지었다. 그리고 하루반나절만에 강철제련설비를 가설했으며 전교의 지원하에 3일만에 3000여근의 페철을 만들어냈다. 이리하여 “소년위성강철제련공장”이 생긴것이다. 1958년 7월중순에 첫번째 쇠물이 녹아져나왔다. 이 작은 공장의 년간생산품은 1800대의 뜨락또르부속품으로 사용되였다. 어린아이들이 10여일만에 야금기술자가 되다니 어찌 기적이 아니겠는가? 그 시기에는 누구나 강철을 제련할수 있었다. 어느 시의 중산로에는 10여명의 가정주부가 맨손으로 일어나서 기술도 모르고 재료도 없는데 그날로 소형고로를 만들었고 그날로 강철을 만들어냈다. 의과대학부속병원의 의사, 간호사들은 환자를 돌보지 않고 병원내에서 고로를 만들고 철강을 만들어냈다. 이런 가지가지 황당한 일들이 대약진시기에 일어났다. 리성적으로 보면 이런것들은 모두 말도 안되는 일이였지만 당시에는 이런 거짓말이 횡행했다. 아마도 거짓말도 백번을 중복하면 진리로 바뀌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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