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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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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는 왜 그 “엘레지”를 불러야만 했나 댓글:  조회:1192  추천:12  2018-10-31
  .김혁 신간 장편소설 출간기념회 소감문. 나는 왜 그 “엘레지”를 불러야만 했나     “춘자의 남경”에 마침표를 찍고 작품의 후기를 쓰면서 그 소제목을 저는 “못다 핀 꽃들을 위한 엘레지”라고 달았습니다. 여기서 엘러지(Elegy)란 슬픔을 노래한 악곡이나 가곡으로 풀이 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그 슬픈 엘레지를 여러분 들과 함께 부르고자 합니다.    20여년 리력의 언론인 출신이라 매일이고 어김없이 경청하는 프로가 있습니다. 바로 cctv의 일곱시 뉴스입니다. 하지만 뉴스를 접하며 혹한에 들린듯 부르르 진저리를 쳤던적이 있었습니다. 그 진저리는 나의 엄청 많은 영상물 관람 리력중에서도 자주 경험하지 못했던 혹독한 떨림이였습니다.    길림성 당안국에서 소장한 일본 관동군이 작성한 10만건의 문서중에서 뒤늦게 발견된 기록에 대해 공개하는 뉴스였습니다. 뉴스는 남경대학살 기간 당시 "남경에 조선인 위안부가 36명 있었다”, “한명이 열흘 동안 일본 병사 267명을 상대했다"고 보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2014년 가을, 나는 저 유명한 남경대학살의 현장에 섰습니다. 사비를 팔아 굳이 남경으로 향했던 것은 남경대학살기념관을 찾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남경역에서 지하철을 타니 터미널 표시판과 지하철 도어의 전광판에 그리고 도시 네 거리 곳곳에 “남경대학살기념관”으로 가는 선로가 뚜렷이 표기되여 있었습니다.  기념관 입구부터 내부 곳곳에서 커다랗게 새겨져있는 “300000”이라는 수자가 나의 동공을 모나게, 강렬하게 찔렀습니다. 그것은 당시 일본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중국인의 수자였습니다.    남경대학살은 종전 후인 1946년 이 사건을 다룬 남경군사법정에서도 명백하게 확인된 참안입니다. 남경대학살의 전범들은 남경군사법정과 도꾜에서 열린 극동군사법정을 통해 처형됐습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일부 량심세력만이 이를 인정할뿐 “학살은 없었다”는 뻔뻔한 부인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일본은 위안부 강제동원 역시 부인하고 있습니다.  불과 수십년전에 우리의 할머니 세대들은 일본군의 추악한 만행의 희생자로 전락되였습니다. 수십만의 여린 하얀 꽃들은 누런 제복의 일본군에 끌려가 청춘을 검게 유린당했습니다. 위안부 배상촉구문제는 1992년 부터 한국을 비롯한 동남아 여러 나라들에서 시작되였으나 일본 정부는 이후 22년이 넘도록 이를 랭랭하게 외면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남경대학살의 부인에 이은 위안부에 대한 후안무치한 태도와 궤변 그 억지주장을 펴는 사람들 중에 중국과 한국에서 베스트셀러를 펴낸 유명한 일본녀류작가도 있었습니다. 력사를 왜곡하는 그들의 역주행에 같은 소설가로서 나는 커다란 유감을 느꼈습니다. “력사를 왜곡하며 세계의 도덕적 심판을 벗어나려는 일본인들의 단체기억상실증”이 외려 그 력사를 다시 기억해 내고 기록하게끔 나의 창작충동을 건드렸습니다.    남경에서 돌아와서 서재를 뒤적여 보니 내가 소장한 작품들 중에 위안부소재의 작품은 몇부 안되였습니다. 품을 들여 검색해봐도 뜻밖에 위안부 소재에 관한 작품이 너무나 적었습니다. 관련 보고서나 르포, 론문들은 적지않았으나 예술적으로 재현한 픽션물이 적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는 더러 있었으나 그중 소설작품이 유독 적었습니다.  거기에서 우리 민족 작가들이 쓴 소설작품은 더구나 적었고 외려 가해자 쪽인 일본에서 쓴 작품들이 몇부 있을뿐, 작품성이 들쭉날쭉해 수작(秀作)은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중국문단과 조선족 문단에서 이 소재에 대한 픽션작품은 아예 전무하다싶이 되여 있었다.  지성화된 기계적 감정에 길들어 있는 우리 작가들과 가련할 정도로 적은 독자군은 이런 제재에 흥미를 가지지 않는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소설, 인물전, 칼럼, 기행수필등을 동원해 우리의 영욕이 엇갈린 력사를 조명하는 나의 작업은 이 십수년간 지속되고 있습니다. 역마살처럼 가고있는 이 외줄타기가 나의 근래의 창작과 생활에서의 성향이요, 소신입니다. 그래서 다섯부의 장편을 펴내고 다음 소재에 대한 선택에 심려와 숙고를 거듭하던 중 여섯번째 장편소설의 소재로 단연 위안부와 남경대학살 소재를 골라 잡았습니다.   그렇게 “춘자의 남경”은 2015년 “연변문학”지에 일년간 련재되였고 드디여 오늘 출간에 이르게 되였습니다. 지면을 할애해 작품을 연재해 준 “연변문학”지와 책을 선정, 출간해준 연변인민출판사에 감사를 드립니다. 도꾜 불교대학의 시노무라 리에 박사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윤동주 연구차 연변행차를 했던 박사님은 “춘자의 남경”에서 큰 편폭으로 나오는 일본어 대화들을 까근히 교정해 주었고 일본으로 말하면 “뜨거운 감자”격인 위안부소재의 작품에 사뭇 학술적이면서 심도있는 해설을 달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휴식일, 명절을 할애 해 민족의 력사유적지답사에 동행하며 땀을 휘뿌린 우리네 룡윤회 력사동아리 성원들과 함께 읽고 싶습니다.     “문학적 다큐멘터리’로 특징지을 수 있는 저널리즘적 글쓰기가 자신의 금후의 모든 창작성향이다”고 저는 저의 창작성향에 대해 천명한적 있습니다. “소설의 본령이 곧 '허구적 사실성'의 설득력을 주요한 미덕으로 삼는 것인데” 매체기자와 소설가로서의 병행된 삶을 수십년간 이어 왔기에 그 와중에 더듬어낸 이 것이 바로 남보다 차별화되는 창작성향이라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한 민족, 한 인물의 련대기적 사건에 대한 예술적인 재현만으로도 문학의 영원한 주제인 인간 내면을 탐사할 수 있습니다. 민족의 력사에 대한 화두와 메세지를 끈임없이 던지면서 그 안에 “인간이라는 존재의 다면성과 립체성을 규명하는” 방대한 제재들을 성실하고 우직한 작가정신으로 밀고 나가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1    내 인생의 뼈골 속 피 같이 스며든 작품 댓글:  조회:1148  추천:13  2018-10-31
.김혁 신간 장편소설 출간기념회 소감문. 내 인생의 뼈골 속 피 같이 스며든 작품     갑작스러운 마가을의 추위와 휴일의 소중함도 물리치며 한 작가의 작품의 출간의 자리를 함께 해주셔 감사합니다.     이 소설은 여느 작품의 구상때보다 나의 창작충동을 특히 강렬하게 불러준 작품입니다. 창작 당시 소설가와 기자라는 이중의 신분으로 활개짓하고 있던 필자에게 가장 크게 안겨온 것은 농촌인구의 대거 도시진출과 그속에 선봉으로 나선 녀인들의 운명이였습니다. 80년대말로부터 산해관이남을 넘어선 조선족수는 20여만, 90년대 중기로부터 한국에 진출한 조선족수는 이제 100만을 기록한다고 합니다. 200만 안으로 헤아리는 중국조선족의 인구수효로 볼때 이는 그야말로 놀라운 수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마을을 비우고 집을 비우고 사랑을 비우고 떠나간 우리의 녀인들이 곳곳에서 보이는 오늘의 현실입니다. 그 막중한 현실을 정시하고싶었습니다.  글에서 나는 산업화과정의 부산물로서의 시골녀성들이 고향을 떠나고 산업예비군으로 충당되며 그한 과정에 육체적파멸 내지 정신적 파멸로 이어지는 도식과 현사회를 증언하는 녀인들의 다양한 삶의 양상을 한 인물에 집대성시켜 풀이하려 했습니다.    작가라면 자신의 출산아와도 같은 작품 전반에 애정이 가겠지만 이 작품은 여느 작품에 비해 잊을수 없는 작품입니다.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태여난 작품으로 내 창작생애에 기록될 작품이 될겁니다. 내 인생의 뼈골 속에 피같이 스며든 작품으로 영원히 잊지 못할겁니다.     이 작품은 첫 장편 “마마꽃, 응달에 지다”에 마침표를 찍기 바쁘게 두달도 못되여 “연변문학”지에 련재를 시작했습니다. “연변문학”지에 2003년 10월호부터 2005년 2월호까지 일년반 가량, 16회에 거쳐 련재를 마쳤습니다.  여태 작가라는 이름으로 글밭을 경작해 오면서 도합 6부의 장편소설을 발표, 출간했고 그외에도 10여부의 여러 쟝르의 작품집들을 출간했지만 이 작품은 내 인생이 송두리째 뽑히던 그 절실했던 시기에 창작한 작품이여 각별히 사랑이 가고, 화인처럼 기억에 남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작품은 기성작품이 아니고 한편 쓰면서 한편 련재하는 형테로 창작되였습니다. 그런데 겨우 4회째 련재하고 내 신상에 거대한 변고가 일었다. 나는 어수룩한 사람들, 두수없는 사건에 휘말려들어 수십년간의 공직을 일조일석에 떼우고 처연히 한지에 쫓겨나게 되였습니다. 온 세상이 들고 일어나 나에게 돌을 던지는 형국에 문인가정으로서는 천문수자 같은 엄청난 액수의 금액을 꾸어서 부과해야도 했습니다.   그런 사면초가에서도 련재는 이어나가야 했습니다. 이를 옥물고 등짝이 으깨질듯한 거대한 압력을 이겨내며 썼습니다. 안해와 함께 여기저기 찾아가 하소하면서 돈을 꾸어들고 돌아와서, 저녁도 거른 채 1만5천자를 치고 윤색하고 나니 동이 번히 밝아오던 그때가 생각 납니다. 어떻게 그 형국에 컴퓨터앞에 앉을수 있었고 또 두드려댈수 있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 과정이 이 소설의 행간 속에도 은연중 스며들어 있고 녹아있습니다.     이 작품의 주요편집이였던 “연변문학” 조성희 편집님의 로고가 컸습니다. 번마다 투고가 늦어졌고 세상이 번거로와 전화를 끊어버린 나에게 메일로 기마다 간절한 청탁을 해주었습니다. 아울러 수십통의 메일편지에서 위안과 격려의 말을 내내 잊지 않았습니다. 후문이지만 조성희 선생님은 나 때문에 편집부 상벌제도에 따라 벌금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 자리를 빌어 감격의 인사를 전합니다.    그외에도 많은 분들이 좋은 글 그냥 보고있다, 문학의 끈을 놓지말고 시련을 이겨내라고 근근간간히 격려를 주었습니다. 그들의 따뜻한 위무(慰撫)가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 이 글을 이어나가지 못했을런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나는 인생에서 가장 곤고(困苦)했던 시간을 16회 40여만자의 처절한 글쓰기로 메워나갔습니다. 어쩌면 당시의 련재잇기는 내 삶 잇기의 그 자체가 아니였는지도 모릅니다.    재액 속에 탄생한 불운아같은 작품은 련재 당시와 그 이후에도 독자들중에서 커다란 반응을 자아냈다.    출판이 언제 되냐는 문의가 쇄도했고 작품이 련재된 수년이후에도 나는 서점가에서 책이 언제 나오냐고 묻는 생면부지의 독자들과 자주 맞닥뜨려야 했습니다.     이 작품을 애대한 나머지 련재된 작품의 낱장을 한장 한장 복사해 묶어서 세상에 단 한권 밖에 없는 책자로 만들어 나에게 선물한 애독자도 있었습니다. 그 고마운 분들이 오늘 이자리에 와 계십니다.   주인공 박신애의 불운한 운명을 설계한 나에게 “신애를 작작 못살게 구시요!”하고 타매하는 전화가 오는가 하면, “왜 신애를 죽였소? 당신은 악마요!” 하고 저주의 메일이 오기까지 했고, 퇴근하니 마누라의 눈이 퉁퉁 부어있기에 따져 물으니 이 작품을 읽고 방성통곡했다는 말에 자신도 읽고는 베란다로 나가 목청깨져라 소리쳤다는 데퉁스러운 어떤 사내도 있었습니다. 계속되는 독자들의 성원과 청탁에 밀려 나는 4년후인 2008년경에 연변일보”종합신문”주간에 작품을 “각설탕”이라는 새로운 표제로 다시 일년여동안 련재하기도 했습니다. 그후 이 작품에 대한 연구로 평론가가 묵직한 상을 수상했고, 연변대학의 연구생이 석사학위를 받기도 했습니다.    작품이 발표된이후 10년만인 2014년에는 50회 방송소설로 개작되여 청중들과 새로운 쟝르의 얼굴로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자비출판이 란무하는 형국에도 빈한도골(貧寒到骨) 문인의 신세라 내내 출판하지 못했던 작품이 오늘 14년만에 드디여 빛을 보게 되였습니다. 감개라 할지 아이러니할지 쓰라린 마음입니다.   불우한 작가만큼 불운했던 작품의 마침내의 출간에 관계자 여러분에게 감사를 전하며 축하차 모여오신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작품 속 주인공의 원형이 되여 준 모든 조선족 여인들, 작품에 간간이 비친 나를 닮은 세상에 소외된 문인들, 문인가장을 둔 죄로 내내 불운에 시달렸지만 꿋꿋이 서로 의지해 지금은 한국에서 영화감독으로 성장해 준 내 딸 소정이, 잔약한 어깨에 산악같은 인고의 사연과 세월을 함께 짊어져 준 내 안해 주향란에게 오늘 이 책을 바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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