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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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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언어(소재)를 공깃돌 놀리듯 가지고 놀기 / 시골풍경 [스크랩 ] 댓글:  조회:1779  추천:0  2018-02-03
언어(소재)를 공깃돌 놀리듯 가지고 놀기 / 시골풍경   소재를 첫눈으로 했을때          ~ 잠재의식으로 가지고 놀기 ~   1.하늘에서 내려온 첫눈들이 지상이 이렇게 아름다워요 라며 호들갑을 떤다 2.나뭇가지마다 꽃으로피어 서로 더 예쁘다며 자랑이다 3.첫눈들이 지상풍경을 사진에 담아 하늘 식구들에게 전송하고 있다 4.하늘에서 먼길 오느라 배고프다며 도시락을 열고 밥을 먹고 있다 5.첫눈들이 각자 자리를 잡고 지상 백일장 글짓기를 하고있다         ~ 5감각(육체)으로 가지고 놀기 ~   1.(눈)ㅡ바람에 떠 밀리면서도 산새에 짓밣히면서도 토끼발에 체이면서도 박수를 치고있는 첫눈 2.(귀)ㅡ쫑알 쫑알 깔깔 하하 헤헤 첫눈들의 수다 좀 보아 3.(코)ㅡ눈송이들의 화장품 냄새가 날아와 내 코를 마구 간질이고 있어요 4.(입)ㅡ첫눈 냄새와 웃음 소리를 비벼 먹는 이맛 좀 봐요 5.(촉감)ㅡ알몸으로 눈위에 엎어진다 첫사랑 그여자의 피부인가 차갑던 내몸이    잉걸불처럼 달아 오르네             ~ 아이러니 (엉뚱한이미지)로 가지고 놀기   1.나무껍질 속으로 숨은 눈송이가 겨우네 싹이틀어 내년여름에 반딪불이 되는    꿈을꾸고잇다  2.꽃이되어 헤헤 웃다가 햇빛이 뜨거워 울더니 고드럼 형제가 되어 나란히 메달려 있디 3.회오리 바람에 날려 하늘로 올라간 눈들이 오늘밤 하늘에 별로 떠있다 4.하늘에 달빛을 켜놓고 허수아비 위에 않은눈이 바람을 불러와 팽그러러 땐스를 추고있고 그림자도 덩달아 똑같이 추고있다 5.밤사이 출산한 첫눈들의 영혼이 오늘 저 하늘에 구름으로 떠있다     원문 주소 다음카페  
2    디지털 시론의 실제 외 3편 / 이선 댓글:  조회:1427  추천:0  2018-02-03
디지털 시론의 실제 -회화 기법을 중심으로   이선     Ⅰ. 서론     1. 디지털 시의 정의     ‘디지털 시란 무엇인가?’   거부와 부정을 하면서도 디지털 시는 사람들의 눈길을 받는 관심주제가 되었다. 세인의 관심과 비난은 디지털 시가 기존의 시와 어떤 변별력을 갖는지 증명해보이라고 한다. 디지털 시론은 새로운 실험시의 존재증명을 위하여, 시문학 시인들을 중심으로 여러 시인들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러나 디지털 시론은 아직 명확하게 정립되지 않았다. 과도기적 과정에 있기 때문에 더 매력적으로 여러 시인들에 의해 탐구되고 있다.   오남구는 이상의 시를 디지털적으로 분석하여 ‘디지털 선언’을 하였다. ‘탈관념’과 ‘염사’ ‘접사’ ‘사진찍기’ 기법을 디지털 시의 조건으로 제시하였다. 타계하기 직전, 오남구는 그의 시론이 담긴 시집 『빈자리 X 』를 디지털 실험시로 세상에 내 놓았다. 그러나 오남구의 시가 디지털 시의 필요충분조건을 모두 만족시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남구는 ‘어떻게?’라는 물음표를 던지고 떠났다.   심상운은 오남구의 디지털 선언에 컴퓨터 용어를 차용하여 새로운 디지털 시론의 정의를 정립하였다. 심상운은 디지털을 컴퓨터의 최소단위(unit)들의 ‘합성’과 ‘분리’로 인식하여 ‘모듈’ 이론을 시에 도입하였다. 또한 문덕수가 주장한 새로운 시론 ‘하이퍼텍스트 시론’에도 새 정의를 정립하였다. 인터넷의 ‘링크’의 기능과 ‘리좀’을 하이퍼 시론에 도입하여 ‘양방향성’의 ‘교환’ 이론을 정립하였다. 또한 심상운은 아날로그 시를 ‘단선구조’의 시, 하이퍼텍스트 시를 ‘다선구조’의 시로 정의하여 ‘의미 시’와 ‘무의미 시’로 차별화하였다. 심상운은 디지털 시와 하이퍼텍스트 시를 동일 개념으로 파악하여 다수의 논문에서 용어사용을 혼용하고 있다. 심상운은 디지털 시론과 하이퍼 시론에 맞는 시를 실험적으로 창작하여 발표함으로써 디지털 시와 하이퍼 시에 객관성과 구체성을 부여하였다.    문덕수는 기존의 하이퍼 소설론을 차용하여 을 주장하였다. 문덕수의 ‘하이퍼 시론’은 포괄적이고 광범위하여 추상적이던 디지털 시론을 축소하고 보다 분명하고 명확한 범위를 설정해 주었다. 심상운은 디지털 시론에서 주장한 컴퓨터의 ‘모듈’과 ‘리좀 이론’을 하이퍼 시에도 대입하였다. 또한 새로운 ‘무의미 사물시’를 발표하여 문덕수의 ‘무의미 시론’을 증명하였다. 문덕수의 하이퍼텍스트 시론을 간단히 살펴보자.   하이퍼텍스트 이론은 컴퓨터 용어인 하이퍼와 텍스트를 합한 단어로서 1960년대 컴퓨터 개척자 테오도르 넬슨이 만든 말이다. 미국작가 조지 피 랜도(George P. Landow)의 저서 『Hypertext』(1992)에서 유래된 문학이론이다. 하이퍼링크와 쌍방향성이라는 컴퓨터의 특성을 결합한 용어를 문덕수가 시에 처음 도입하였다. 컴퓨터의 링크는 기존의 텍스트의 선형성, 고정성, 유한성의 제약을 벗어나 마음대로 검색할 수 있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리좀이라고 불리는 그물상태를 구축하여 단어와 이미지를 연결한다. 하이퍼텍스트의 병렬구조는 탈중심적으로 텍스트를 링크하며 무한한 상상력을 한 공간에 집합한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무의미를 추구한다. 각각의 연들은 병렬적으로 리좀이 되어 단어와 이미지들이 그물망을 형성하는 것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론의 모듈(module) 이론은 최소 독립된 단위인 단어들이 연속적으로 연계되어 한 공간에 나열된다. 그 단어나 문장, 연은 바꾸거나 버려도 전체에 전혀 영향을 미치거나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모듈 이론이다. 교환 가능한 이미지, 독립된 기능을 가지면서도 분리될 수 있는 덩어리들이 하이퍼텍스트 시 쓰기 방법론이다.      그러나 오남구와 심상운, 문덕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디지털 시론은 아직 완전하게 정립된 것이 아니다. 하이퍼 시론이나 디지털 시론은 시론이 작품으로 완성되어 나타날 때까지라는 제한성을 갖는다. 디지털 시나 하이퍼 시는 새로운 구조를 실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험적인 것이 안정되어 획일적인 포지션을 가지면 새로움은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끝없는 실험정신이 요구되는 것이 디지털 시다.   문예사조는 작품이 선행하고, 작품에 이름이 붙여진 경우가 대부분인데, 디지털 시의 경우 시론이 먼저 주장되고 시가 후속으로 창작되었다. 시론에 맞는 시작품이 아직 실험적으로 생산되고 있는 과정에 있으므로 앞으로 더욱 완성도 있는 작품을 기대한다.   디지털 시에 대한 여러 사람의 정의를 위에서 살펴보았다. 지금은 디지털 시 대신 하이퍼 시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디지털이란 말이 너무 광범위하고 전자적이기 때문이다. 하이퍼는 구체적이고 범위가 더 한정적이며 명시적이다. 본 장에서는 정리되지 않은 광범위한 디지털 시에 대한 정의를 잠시 뒤로 미루고자 한다. 오히려 디지털 시의 기법을 객관적이고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으로 디지털 시에 대한 정의를 완성하고자 한다.          2. 디지털 시의 기법(방법론)     디지털 시의 정의는 문덕수, 심상운, 오남구의 시론을 토대로 간략하게 위에서 언급하였다. 그래도 ‘과연 어떤 시가 디지털 시란 말인가?’라는 의문점을 갖게 될 것이다. 본 논문은 예시작품을 분석하여 어떤 요소들이 디지털 시를 구성하는 조건인지 밝혀내어 새로운 디지털 시의 개념을 정립하고자 한다. 디지털 시와 아날로그 시의 차별화된 창작 기법과 방법론을 밝혀서 분류의 기점을 세우려는 것이다. “너네 도대체 디지털 시가 뭐냐?”라는 질문에 대한 객관성을 가진 구체적인 답변자료가 되길 바란다. 본 논문에서는 디지털 시 창작 기법을 미술의 회화 기법을 중심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정보화 시대가 가속화되면서 매일 새로운 전자제품들이 사람들의 구매욕을 충동하고 있다. 디지털시계, 디지털 계산기, 디지털 사진, 디지털이란 말이 들어간 전자제품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디지털은 컴퓨터 시스템을 적용하여 연속적이며 분절적인 오차가 없는 정확한 시스템이다. 디지털은 무한 반복적이며 합성과 재결합이 가능하다. 자기의 기본적인 본질을 버리지 않으면서 다른 시스템과 만나 새로운 합성구성, 새로운 시스템으로 변화할 수 있다. 반면 아날로그는 연속적이지만 조금씩 오차가 난다. 아날로그가 직선이라면 디지털은 점선이다. 또한 모자이크다.   디지털 그림은 점묘화 기법으로 여러 스타일로 합성되기도 하고 형태를 아주 바꾸기도 하고, 다른 이질적인 그림이 들어와 덮어버리기도 하면서 ‘움직이는 그림’을 그린다. 네모 박스 안에서 물고기가 모였다가 흩어지고, 물풀이 돋아나 바람에 흔들린다. 그 물풀 사이로 무수히 많은 고기떼가 지나간다. 빠르게 화면이 바뀌면서 새로운 그림들이 나타난다. 디지털 그림의 중요한 포인트는 화면이 빠르고 운동감 있게 움직이며, 장면이 계속 전환되며, 사물도 임의로 바꿀 수 있는 편집기능이 있다는 것이다. 즉 고정적 정물화가 아니다. 움직이며 변화하는 그림을 무한정 반복 감상할 수 있는 ‘움직이는 그림’이다.       아날로그 시를 지향하여 새로운 감각의 젊은 시, 곧 디지털 시를 쓰는 시인들의 감각도 디지털 그림과 다르지 않다. 그 화면이 빠르게 전개되고 장면 전환이 빠르다. 아날로그 시가 검정과 흰색. 빨강, 파랑색으로 구성된 ‘보여주기’ 위주의 정지된 단일구성의 시라면 디지털 시는 ‘다초점’ ‘다시점’으로 복합적 구조를 갖는다. 여러 방향의 상상력에 움직임을 가미하여 ‘상상력의 이동’을 보인다. 디지털 시는 한 마디로 ‘움직이는 그림’, 또는 ‘움직이는 영상’이다.   젝슨 플록의 페인팅 기법이나 미술의 표현기법처럼 시인의 ‘상상력의 이동’이 생각지도 않았던 기하학 무늬나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무의미한 ‘단어던지기’나 ‘언어충돌‘로 우연적 미술기법처럼 예술작품이 탄생하는 것이다. 무의미한 ‘단어’의 ‘결합’과 ‘분리’가 만든 ‘모자이크 이미지’가 시에 ‘낯설게하기’를 실현한다. 또한 사물을 각각 다른 연에 임의적으로 배치하여, ‘병렬배치’된 사물들이 서로 다른 질서와 의미로 재탄생하기도 한다. 다른 의미와 세계로 확산된 무의미하고 낯선 사물들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뱉어내면서 한 폭의 ‘추상화’가 그려진다. 의도성을 가지고 쓴 의미추구의 ‘아날로그 시’보다 새로운 감각의 시 작품이 탄생하는 것이다.      디지털 시는 ‘디지털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새로운 감각’이다. 새로운 감각의 시는 ’시스템의 혁명’이 필수적이다. 새로운 기법의 실험을 통하여 보다 새로운 ‘무엇’을 추구하여야 한다.   아날로그 시가 ‘보여주기’ 의 평면적인 그림이라면 디지털 시는 ‘움직이는 그림’으로 입체적이며 운동감이 있는 그림이다. ‘움직이는 그림’은 정지된 그림이 아니라, ‘시간 이동’과 ‘공간 이동’ 가능하다. 또한 ‘상상력의 이동’을 하여 새로운 공감각적 시로 탄생한다.   공간이동은 그림의 내용물인 화면이 변화한다. 합성사진처럼 합성과 분리, 삽입이 가능하다. 즉 ‘시간, 공간, 상상력의 이동’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진다. 시의 새로운 디자인이 만들어진다. 새로운 디자인은 새로운 시스템이다. 시스템의 변화가 새로운 시창작 기법의 주요 이슈다. 새로운 구조, 새로운 의미, 새로운 상상력, 즉 시에서의 새로움은 새로운 철학이다.    본 논문에서는 디지털 시의 요소로서 새로운 시 창작 기법으로  정물화 기법, 겹쳐 그리기 기법, 움직이는 그림 기법, 옴니버스 기법, 기호시 기법, 모자이크 기법, 추상화(구성) 기법 등 입곱 가지 방법론을 소개한다.   본 논문에서는 예시된 디지털 시 작품에서 디지털 시의 요소를 집중적으로 추출해서 분류해 보고자 한다. 내용과 형식, 의미와 디자인을 모두 조명해 보기로 한다.   2. 정물화 기법- ‘탈관념’     디지털 시의 내용, 즉 의미의 영역을 먼저 살펴보자. 디지털 시 쓰기 방법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이 탈관념이다. 아날로그 시들이 의미를 추구했던 관습에서 벗어나 시인의 관념을 배재하고 ‘사진찍기’를 하여 ‘보여주기’하는 방법이다. 아직 시에 공간이동은 없이 보여주기 한다. 정물화와 같다. 그러나 어떤 영상물도 작가의 의도성을 완전히 배재할 수는 없다. 다만 의식적인 강요를 배재하고 객관적 ‘정황’을 ‘보여주기’함으로써 ‘절대상황’만 독자에게 제시할 뿐이다. ‘시적 거리’가 먼 객관적인 사물 시가 탈관념 시에 속한다. 물론 무의미 단어들의 연합인 ‘언농’도 포함한다. 탈관념 시는 의미를 강요하지 않고 독자에게 관찰하도록 한다. 미술작품을 감상하듯 감사하게 한다. 시는 시로서 현존할 뿐이다. 그냥 작품으로 ‘놓아둔다’. 아래 시는 문덕수의「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전문이다.   빨간 저녁놀이 반쯤 담긴   유리컵 세 개.   횅하니 열린 문으로는   바람처럼 들이닥칠 듯이 차들이   힐끗힐끗 지나간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이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속에 재떨이는 오롯이 앉아 있었다.   열린 문으로는   서 있는 한 사나이,   길 건너 어느 고층으로 뛰어오를 듯이   서 있는 그 신사의 등이 실은   유리컵을 노려보고 있었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그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금 밖으로 밀려나   금박金箔의 청자 담배와 육각형성냥갑이 앉아 있고   그 틈새에 조그만 라이터가   발딱발딱 숨을 쉬고 있었다.      ― 문덕수,「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전문     문덕수의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은 철저히 감정을 배제한 ‘사물 시’다. 한 공간에 존재하는 사물을 철저히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빨간 저녁놀’ ‘재떨이’ ‘서 있는 사나이’ ‘유리컵’ ‘담배’ ‘육각형성냥갑’ ‘라이터’들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존재하고 있다. 작가는 자기의 감정을 담지 않고 냉정하게 ‘정물화’를 그리듯 탁자 주변의 상황을 그림처럼 보여준다. 여기에 관념은 들어설 공간이 없다.   건조하고 딱딱한 사물들의 ‘정물화’는 무념무상이다. 그냥 이발소 그림처럼 걸려있다. 주목을 받지 않아도 좋다. 위의 정물화가 시적 미의식을 갖는 것은 1연 1행의 ‘빨간 저녁놀이 반쯤 담긴/ 유리컵 세 개.’부분이다. 빨간 유리컵은 사실적 표현이지만 ‘저녁놀이 반쯤 담긴 유리컵’은 시적 이미지다. 1행을 시적 이미지로 무르익혔기 때문에 이 그림은 '감성적인 서정화‘다.   또한 위의 시가 시적 긴장감을 가지고 돌발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사물에 ‘의식’을 넣었기 때문이다. 차들이 ‘힐끗힐끗’ 지나가고, 신사의 등이 유리컵을 ‘노려보고’ 라이터가 ‘발딱발딱’ 숨을 쉰다는 구절이 이 시에 ‘의미’영역을 대변한다. 시의 백미다. 무념무상의 사물에 ‘의식을 넣어’, ‘사물의 감정’을 ‘의인화’하였다. 사건을 유발시키고 있다. 정지된 ‘정물화’는 폭풍전야의 고요와 같은 긴장된 정적일 수 있다.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의 긴장감이다.   ‘사나이의 등’이 ‘노려보고’ 있는 ‘세 유리컵’은 세 사람에 대한 거부를 객관적으로 나타낸다. 독자는 순간적으로 상상할 것이다. 이혼서류를 찍기 직전의 풍경일 수도 있다. 친정엄마나 시어머니가 합석했을 수도 있고, 어린 딸아이가 주스를 마시고 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마약 흥정과 거래가 이루어지는 배반의 현장일 수도 있다. 독자는 자기의 체험을 바탕으로 각인된 무의식의 세계와 연상작용하여 순간상황을 파악할 것이다. 이와 같이 사물 시는 작가의 지시나 의도성을 배제하고 작가의 관념을 집어넣지 않는다. 독자의 감상과 해석 영역이 넓다.   이 시에서는 최소한의 사물과 최소한의 동사와 부사만을 사용했다. ‘힐끗힐끗’이나 ‘발딱발딱’ 같은 부사어와 ‘노려본다’는 최소한의 동사를 사용하여 현장성과 긴장감을 주었다.「탁자를 중심으로 풍경」은 냉정하게 최소한의 요소만 조건적으로 ‘보여주기’하고 있는 ‘정물화’다. 그러나 이 시는 퍼포먼스에 적당한 여러 배경을 제시한다. 극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 어떤 사건이 ‘침묵하는 사물’들의 배후에 음모처럼 숨어 있다. 최소한의 상황제시를 하면서도 시적 긴장감을 갖도록 배치한 것은 작가의 저력이다. 작가의 숨은 의도는 한껏, 독자의 호기심을 부추겨놓고는 짐짓 '모르는 척' ‘시침떼기’다.   문덕수는 「탁자를 중심으로 풍경」에서 자신의 을 증명하고자 한다. 탈관념이 관념보다 설득력이 있으며 사물의 시점에서 한 ‘상상력의 이동’은 시에 질서를 부여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하이퍼 시’와 ‘디지털 시’를 혼용된 개념으로 볼 때, 이 시는 새로운 실험시의 모델로서 ‘디지털 시는 탈관념의 시‘라고 주장한 오남구의 시론에 당위성을 부여한다.     3. 겹쳐 그리기 기법- ‘다시점’ ‘다초점’     오남구는 염사와 접사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디지털 시를 정의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수학적 공식과 시론은 많은 사람들이 해독하지 못하고 어려워한다. 본 논문에서 필자는 염사나 접사라는 남이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를 피하려고 한다. 심상운의 다선구조와 오남구의 염사와 접사와는 달리 필자는 ‘겹쳐 그리기’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다선구조와 염사, 접사와 비슷한 면이 있을 수도 있으나 ‘겹쳐 그리기’는 미술기법으로 ‘미술 구성’에 가깝다. 여러 개의 선과 면을 겹쳐서 새로운 구성을 ‘보여주기’ 하는 것이다. 여러 선이 될 수도 있고, 여러 면이 될 수도 있는 ‘겹쳐 그리기’는 심상운의 ‘다선구조론’과는 다른 개념이다. 심상운의 ‘다선구조론’은 오히려 ‘옴니버스 형식’에 가깝다.    '겹쳐 그리기‘는 ’외면의 겹쳐 그리기‘와 ’내면의 겹쳐 그리기‘가 있다. 외면의 ’겹쳐 그리기‘는 피카소의 처럼 앞, 뒤, 옆, 위, 아래, 여러 방향으로 직관하고 관찰하여 한 화면 위에 펼쳐 놓은 그림이다. 또한 내면을 여러 방향에서 여러 각도로 관찰하고 직관하여 한 화면 위에 형상화하여 그려내는 것이 ’겹쳐 그리기 기법‘의 시 창작 기법이다. 투시도를 여러 개 겹쳐 놓은 것과 같은 시창작 방법론이다.   피카소는 ’다초점, 다시점’의 그림을 그렸다. ‘다른 방향에서 여러 개의 눈으로 바라보기’이다. 단순히 ‘사실 대로 보여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발상의 전환’을 하여 보여주기 하는 것이다. ‘투시도’라고 보면 된다. 여러 각도에서 투시한 그림이다. 찍는 각도와 방향, 위치에 따라서 피사체가 달라진다. 시에서 비유와 비유의 비유와 같은 개념이다. 디지털 시는 한 방향에서 본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복잡하고 입체적인 구조의 그림이다.   한 단계 더 심연으로 느껴서 ‘투시’하여 ‘보여주기’하는 ‘무엇’이다. ‘무엇’은 보다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분명하게 방법(기법)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아날로그 시가 ‘대상’을 바라보고 그리던 것을 넘어 보다 본질적인 것을 진정성을 가지고 ‘투시’하여 보여주어야 한다. ‘여러 겹의 투시도‘라고 명명해 보면 어떨까? 그 시각은 시인의 새로운 발상이어야 한다. 누군가 시도한 헌 기법이 아닌, 새로운 시 쓰기 기법이어야 한다. 다음  오남구의 시「부드러움의 단상」전문이다     비, 비, 파란 신호등이 켜지자, 부드러운 산들이 팔딱팔딱 숨을 쉰다. 에워싸 나를 가둔다. 금시 차다, 단단하다, 날카로운 날을 세운다. 수직으로 솟으면서 수평으로 퍼지면서 나무들이 솟아오르고 녹색이 번지고 빗물이 번지고 속도가 날을 세운다. 빨간 신호등이 켜지자, 모두 갇혀 버린 빗길, 팔딱팔딱 선들이 곡선을 그리다가 부서져 떨어진다.    ― 오남구,「부드러움의 단상」전문     작가는 ‘신호등이 켜진’ 거리에서 아주 짧은 찰라의 시간 동안 ‘비’를 직관한다. 아날로그 시에서‘비’는 ‘슬픔’과 ‘이별’의 이미지와 관념의 동의어로 쓰여 왔다. 그러나 오남구의 ‘비’는 군더더기 없이, 직관적이다. ‘보여지는 것’그 너머 존재하는 비의 속성을 내면의 눈으로 투시한다. 그것도 여러 방향에서 관찰한 비다. 내면의 눈으로 투시한 비다. 피부로 느껴 접촉한 비다. 이렇게 여러 겹의 ‘겹쳐 그리기 기법’으로 그린 그림 같은 비다.   팔딱팔딱 숨을 쉬는 비, 단단한 비, 날카로운 날을 세운 비, 수직으로 솟는 비, 수평으로 퍼지는 비, 팔딱팔딱 곡선을 그리다가 부서지는 비, 시인은 비를 직관적으로 여러 방향에서 본다. 직관의 날카로움은 사물성의 비가 운동감을 가지고 변화하는 모습을 생동감있게 감각적으로 그리고 있다.   디지털 시에서 중요한 것은 감각의 운동성이다. 아날로그 시의 그림이 정지된 ‘정물화’라면 디지털 시의 그림은 ‘움직이는 정물화’라고 할 수 있다. 디지털 시는 지금까지 흔히 보던 정지되고 일상적인 그림이 아니다. 움직임이 있는 특별한 그림이다. 정지된 사물의 운동감은 시에 감각적 새로움을 제공한다. 오남구의 「부드러움의 단상」은 사물을 직관하여 투시한다. 또한 사물에 운동감을 주어 감각의 새로움을 창조하여 디지털 시의 요건을 충족시켰다. ‘겹쳐 그리기 기법’의 또 다른 예를 소개한다. 위상진의 시 「사진촬영금지 구역」1연을 살펴보자.     마그리트 그림 속, 눈 하나가 방에 가득 차있다   어둠의 속눈썹을 따라 들어가면   나방처럼 날아다니는 불빛,    흰 가루약처럼 내 얼굴에 쏟아진다     위의 시도 ‘겹쳐 그리기 기법’의 시다. 빛이 얼굴에 쏟아진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여러 단계의 층위적인 묘사를 하고 있다. 속눈썹 위에 여러 개의 성냥개비를 올려놓은 것을 상상해 보라. 몇 겹으로 ’겹쳐 그린 그림‘이 보일 것이다.������겹쳐 보여주기������다시점������������다초점������의 시다.   위의 시는 ‘마그리트 그림- 눈- 어둠의 속눈썹- 나방처럼 날아다니는 불빛- 흰 가루약- 내 얼굴’까지‘화살표’를 따라 층위적으로 공간이동하고 있다. ‘내 얼굴에 비치는 불빛'의 한 가지 사실을 점층적으로 ’겹쳐 그리기‘하고 있다. ‘그림- 눈- 속눈썹- 나방- 불빛-흰가루 약- 내 얼굴’까지 여러 개의 층위를 거쳐 도달하도록 한다. 단일구성의 단순함을 극복하고 복합적 구조를 갖는다. 시가 감각적인 구성기법의 그림이 된다.   이때 사물성에 기초를 두고 시를 써야 한다. 관념에 층위를 여러 개 두면 개념이 불분명한 넋두리 시가 된다. 객관화가 되지 않은 대부분의 토로시들은 관념의 층위를 여러 개 겹친 시들이다.   위의 시가‘겹쳐 그리기’를 하며 여러 개의 층위를 거쳤지만 객관성을 가지는 것은 사물성의 힘이다. 사물성은 관념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인식시키는 힘이 있다. 시를 쓸 때 관념에 옷을 입혀서 사물화하는 것은 객관화를 회복하기 위함이다.   이 시가 디지털 시로서의 요건을 갖추고 있는 것은 현대성이다. 복잡한 여러 겹의 층위와 ‘흰 가루약’등 현대인의 아픈 뇌를 연상시키는 단어들이 현대인의 고달픔을 연상시킨다. ‘겹쳐 그리기 기법’은 새로운 구성의 시 창작 법이다. 송시월의  「물웅덩이」를 살펴보자.     비 그친 후, 물웅덩이   붉은 하늘 한 조각   하늘 속의 물구나무 선 가로수   거꾸로 처박힌 빌딩의 모서리와   육교 한 토막,   그 틈새에 납작이 끼인 나   한 조각   언뜻 멧새 한 마리 휙 일렁이며 간다     ― 송시월, 「물웅덩이」전문              이 시도 ‘물웅덩이’에 비친 그림자를 ‘겹쳐 그리기’ 하고 있다. 물웅덩이 속에는 여러 그림자 들이 ‘겹쳐 그려져’ 있다. ‘붉은 하늘 한 조각’ ‘거꾸로 처박힌 빌딩’ ‘육교 한 토막’ ‘틈새에 끼인 나’ 맷새 한 마리‘가 ‘겹쳐 그려져’ 있다.       일상적인 정물이 아니다. 조각나고, 부서지고, 거꾸로 처박힌, 모서리진 삶을 보여주고 있다. 그 부조리한 사물들 ‘틈새’에 시인도 끼여 있다. 극한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압박 속에 있다. 작가가 사물 속에 뛰어들어 함께 만든 ‘정물화’다. 정지된 부조화의 그림 속에서 ‘멧새 한 마리 휙 일렁이며 간다’. 날아가는 새를 정물화 속에 집어넣어, 그림에 운동감을 준다. 그림에 속에 ‘새를 날림’으로써 정물화는 생동감과 현장성을 갖는다. 시가 확장된다. 따라서 이 시는 정물적인 그림에 운동감을 줌으로써 새로운 디지털적인 생동감을  갖는다. ‘겹쳐 그리기’를 하여 여러 정황을 동시에 ‘보여주기’하고 있다.    물웅덩이는 아주 작은 공간이다. 그런데 거기 하늘과 나무, 빌딩, 나, 새가 끼어 있다.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지만, 웅덩이에 비친 그림자를 확장하여 ‘상상력을 이동’ 하고 있다. ‘상상력의 이동’을 한 ‘겹쳐 그리기’ 시창작 기법이다.       4. 움직이는 그림 기법- ‘상상력의 이동’     아날로그 시에서도 ‘이미지’와 ‘시적 상상력’은 시의 중요한 필요충분 요소이다. 그러나 디지털 시에서는 ‘상상력’의 부재는 디지털 시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김규화의「한강을 읽다」는 ‘공간이동’과 ‘시간이동’ ‘상상력의 이동’이라는 복합적 요소를 동시에 실현하며 ‘어머니’라는 보통명사를 특별한 그림으로 다시 그렸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한다. 아래 시는 김규화의 「한강을 읽다」전문이다.     이젤을 거꾸로   일요일의 한강이 그림을 그린다   부우우 몰려와 늘어선 물가의 아파트군   단숨에 세우고   짐짓 흔들어본다   하늘을 제 가슴 깊숙이 클릭하고   그 위에 구름 몇 송이 흘러내리는   이내 지워버린다   아파트를 흑수정으로 꾸며놓고   올랑촐랑 물살 속의   창문을 열고 들어가시는 구부정한 어머니   뒤 따르는 나를 덥석 안는다   돛단배 하나 지나가면서   한강은 우리를 지운다   피사로의 「수문」을 물새가 가로 지른다      ― 김규화, 「한강을 읽다」전문   「한강을 읽다」는 감정을 배재한 냉정한 관찰자의 시점을 끝까지 흐트러뜨리지 않고 보이는 대로 충실하게 그린 객관적 그림이다. 감정을 통제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시가 힘을 갖는다. ‘그린다, 흔들어본다, 지워버린다’ 지나간다, 지운다, 가로 지른다‘는 최소한의 동사가 장면전환을 하게 한다.   한 폭의 수채화를 감상하는 것 같다. 지우개처럼 ‘물살’과 '돛단배‘와 ’새‘가 화면을 지운다. ’이젤을 거꾸로 세워‘ 그린 그림은 몇 번이고 장면이 바뀌며 ’공간이동‘ ’시간이동‘ ’상상력의 이동’이 진행된다. 정지된 ‘정물화’가 운동감을 가진 ‘움직이는 그림’이 된다.   김규화의 시는 사물, 즉 피사체의 시점에서 사물을 관찰한다. 많은 아날로그의 시들이 시인의 관점에서 시에 접근했다면 이 시는 역발상으로 사물의 시점에서 사물을 관찰한다. ‘한강’이 ‘거꾸로 이젤’을 들고 그림을 그린다. 순행적인 시간의 시점을 거꾸로 돌려 ‘반시계 방향’으로 진입하며 시에 긴장감을 준다.   ‘이젤을 거꾸로/ 일요일의 한강이 그림을 그린다’ 1행은 이 시를 시간, 공간, 지각을 모두 열고 심미적으로 인도하는 구실을 하는 서정적 묘사다. ‘시간’ ‘공간’ ‘지각’ 다초점, 다시점의 시적 구조를 세운다. 직선, 평면 시를 입체시가 되게 하는 요건이다.   이 시는 정지된 그림이 아니다. 여러 부분에서 운동감을 준다. 한강변에 서 있는 부동성의 ‘아파트’라는 사물을 ‘부우우 몰려와 늘어선’이라는 운동성을 줌으로써 시는 생동감을 갖고 움직임을 갖는다. ‘여기 무슨 구경거리가 있나?’ 궁금하여 몸을 기웃 기울이고 호기심을 갖게 된다.   ‘한강’은 ‘단숨에 세우고/ 짐짓 흔들어본다’ 물살이 ‘출렁’ 하고 움직이는 모양이 시각적으로 그려진다. 여러 번 물결이 ‘출렁거림’으로써 이 시는 딱딱한 획일성과 고정성에서 벗어난다. 정서환기의 장이 열리는 것이다.   ‘하늘을 제 가슴 깊숙이 클릭하고/ 그 위에 구름 몇 송이 흘러내리는’ 부분은 수채화의 여백의 공간처럼 시적여운을 남긴다. ‘하늘’을 ‘가슴에 클릭’하는 새로움이 감각적이다. ‘흘러내리는’이라는 미완의 동사, 어미변화가 수채화를 그릴 때의 붓놀림처럼 여유로 흐른다.  시인의 무의식 속에서 그렸다가 ‘지우고, 지우고, 또 지우고, 지워도’ 여러 번 지워도 사라지지 않는 ‘어머니’의 뿌옇게 아련한 향수 속으로 끌려들게 한다.   ‘올랑촐랑 물살 속의/ 창문을 열고 들어가시는 구부정한 어머니’ 부분에서 사용한 ‘올랑촐랑’ 의태어가 큰 역할을 한다. ‘올랑촐랑’은 살가운 모녀의 대화처럼 작고 정다운 의태어다. ‘창문을 열고 들어가시는 구부정한 어머니’라는 표현은 시적 미의식을 고조시킨다. 웅변하지 않아도 시인의 어머니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이 ‘창문을 열고’ 독자들의 무의식을 깨운다.   이 시는 사실적인 표현과 정서적인 표현이 아우러져 심상에 한폭의 그림을 그리게 한다. ‘돛단배 하나 지나가면서/  한강은 우리를 지운다’ 부분은 붓으로 물을 찍어 그림을 그리듯 감각적인 표현이다. 또한 정지된 화면을 바꾸어 ‘장면전환’을 한다.   ‘피사로의 「수문」을 물새가 가로 지른다’ 는 부분에서 ‘가로 지른다’는 동사를 눈여겨보자. 만약 ‘날아 간다’로 하면 어떤 시적 이미지가 생길까? 모두 떠나버린 공허와 고독한 이미지를 전할 것이다. 어머니의 부재가 강조되며 냉정한 현실이 부각된다. 그러나 ‘가로 지른다’는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는 미련과 아쉬움의 이미지다. ‘눈가에 어머니가 어른거리는’ 차마 떠나보내지 못하는 그리움의 정서를 남긴다.    ‘물새가 가로 지르며‘ 정지된 그림이 또 한 번 출렁, ’움직이는 그림‘이 된다. 감각적 운동감을 갖는다.   김규화의 「한강을 읽다」는 아날로그 시가 아닌 파스텔톤의 ‘움직이는 풍경화’다. 여러 번 출렁거림을 주어 ‘정물화’에 ‘움직임’을 주었다. ‘시간 이동’ ‘공간 이동’ ‘상상력의 이동’이 이루어진다. 사물을 이동시켜 붓으로 지우듯 현대적 디지털 기법으로 장면전환을 하였다. 「한강을 읽다」가 현장성과 운동감, 정서환기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은 이 시가 고정된 ‘정물화’가 아닌 ‘움직이는 정물화’이기 때문이다.        5. 옴니버스 기법   심상운의 대부분의 시들은 옴니버스 소설 형식을 취하고 있다.「맨살에 링크하기」는 아날로그 시와 디지털 시의 분기점을 비교해 볼 수 있는 품이다. 단어와 제목, 내용에서 신선한 디지털적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맨살에 링크하기」시 제목은 현대적이며 감각적이다. 또한 ‘맨살’의 선정적 이미지와 ‘링크하기’의 컴퓨터 용어가 낯설게 맞물려 신선한 현대적 감각을 준다. 다음 시 내용을 살펴보자.   한 청년이 공원 풀밭에서 통조림 캔을 툭하고 딴다. 그 속에 꽁치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다. 유통기한이 찍힌 주검이 눈부신 5월의 햇살 속에서 검푸른 살을 드러낸다. 눈감고 있던 맨살이 꿈틀거린다.   물에 젖은 살에서 하얀 거품을 일으키는 비누의 살을 만진다. 비누는 아무에게나 포동포동한 맨살의 향기를 풍기며 몸뚱일 비틀다가도 가끔 미끄러져나와 세면대 바닥에서 통통거린다.   누가 푸른 바다를 유리병 속에 넣고 어항이라고 했을까? 열대어 두 마리 맨살 번득이며 유유히 지느러미를 흔들고 있는 오전 11시 20분 한 쌍의 남녀가  산호초 화려한 바다 속을 보며 어깨를 감싸고 있다.   (                                                               )                                                                * ( ) 안은 당신의 상상이 들어가는 공간입니다. 링크해서 펼쳐보세요.  그러면 당신의 마음이 반짝이며 나타날 것입니다.      ― 심상운,「맨살에 링크하기」전문         이 시는  ‘통조림’과 ‘비누’, ‘어항’ 세 가지 사물을 각 연에 배치한 옴니버스 형식의 시다. 또한 4연은 긴 ( )를 제시하여 독자에게 시 창작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시인은 새로운 시 형식과 디자인을 실험하고 있다.   1연의 ‘ 통조림 속의 맨살의 꽁치의 검푸른 살’과  2연의 ‘포동포동한 맨살의 향기를 풍기는 비누’와 3연의 ‘맨살의 열대어 두 마리’는 감각적이며 선정적인 이미지를 풍긴다. ‘맨살’이라는 공통된 이미지 때문이다.   4연의 긴 ( )는 새로운 시도로서 독자를 시 쓰기에 초대하고 있다. 어떤 이야기를 여기 넣을까? 상상력을 펼치게 한다. 독자와 시인이 50%씩 시를 쓴다. 필자도 ‘아가씨 입술과 이빨 사이에 끼어서 신음하는 빨간 사과의 하얀 맨살’을 상상력을 동원하여 써 본다. 감각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농염한 문장이 만들어질 것 같지 않은가?   심상운은 새로운 구성과 디자인의 시 형식을 차용하여 디지털적인 요소를 이 시에서 실현하고 있다. 또한 각각의 옴니버스적인 이야기는 한편의 각각 다른 시로 만들어도 좋은 소재다.   1연은 사물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 한 청년이 공원 풀밭에서 통조림 캔을 툭하고 딴다.’ 이 부분에서 새로움은 없다. 사실만 적었다. 냉정한 관찰자 시점이다. 그러나 다음 시행 ‘그 속에 꽁치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다.’ 부분에서 ‘웅크리고 있는’ 사물에 조건적으로 의식을 집어넣었다. ‘통조림 속의 꽁치’에게 시인은 어떤 역할을 부여하려 한다. ‘유통기한이 찍힌 주검’은 정확하게 죽은 날짜를 명시하고 있다.   ‘눈부신 5월의 햇살 속에서 검푸른 살을 드러낸다.’ 부분에서 ‘어떤 주검’이 선명하게 시인의 무의식을 잡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그 주검은 생생하고 감각적이다. 마지막 부분 ‘눈감고 있던 맨살이 꿈틀거린다.’에서 시인이 나타내려고 하는 의식이 표출된다. ‘눈감고 있던 꽁치 맨살의 꿈틀거림’은 시인의 무의식 속에 자리잡은 ‘주검’이 의식 표면으로 튀어나온 순간이다. ‘꽁치’라는 대상을 통하여 시인의 무의식은 ‘어떤 주검’을 의식화하고 표출시킨 것이다. 간단한 몇 줄의 시가 시적 긴장감을 가지는 것은 ‘주검’은 삶과 마찬가지로 생의 주요한 중심 단어이기 때문이다. 종결이면서 시작이다. 누구에게나 아픈 ‘주검’에 얽힌 사연들이 있다. ‘꽁치의 주검’은 승화된 육감적이고 관능적인 맨살의 주검이다.   2연의 ‘물에 젖은 살에서 하얀 거품을 일으키는 비누의 살을 만진다.’는 부분을 살펴보자. 사물인 비누가 대상이지만, 애인의 ‘맨살’을 만지는 것 같은 감각적 쾌락을 느낀다. 다음 행의 ‘비누는 아무에게나 포동포동한 맨살의 향기를 풍기며 몸뚱일 비틀다가도 가끔 미끄러져나와 세면대 바닥에서 통통거린다.’는 부분에서는 ‘몸을 줄 듯 줄듯’ 하다가 결정적인 순간, 뒤로 빼버리는 여자의 모습이 병치된다. 시인이 남자이기 때문이다. 또한 ‘비누의 포동포동한 맨살’과 ‘미끄러운 여자의 맨살’의 이미지가 겹쳐 연상작용을 한다. 독자에게 관능적 상상의 공간을 제공한다.   3연의 1행 ‘누가 푸른 바다를 유리병 속에 넣고 어항이라고 했을까?’ 화두를선문답처럼 탁, 던진다. 독자에게 ‘어??“ 정서적 환기를 시킨다. 긴장감은 다음 시행에 집중하게 한다. 마지막 행 ’열대어 두 마리 맨살 번득이며 유유히 지느러미를 흔들고 있는 오전 11시 20분 한 쌍의 남녀가  산호초 화려한 바다 속을 보며 어깨를 감싸고 있다.‘ 부분은 '맨살의 열대어 두 마리’와 ‘한 쌍의 남녀’를 병치하면서 묘한 관능적 섹슈얼리즘을 풍긴다. ‘맨살의 열대어 두 마리’와 ‘한 쌍의 남녀’가 간질간질한 욕망을 부추긴다.   「맨살에 링크하기」는 시의 내용과 제목, 디자인에서 새로움을 추구하고 있다. 각각 다른 내용을 담은 연들이 연상작용을 부추겨 시적 상상력을 증가시킨다. 이 시는 사물 시로서 내용과 형식에 디지털적인 요소를 모두 담고 있다.       6. 기호 시(詩) 기법     소쉬르는 단어를 기표(記表:signifiant)와 기의(記意:signifié)가 결합하여 의미작용(signification)을 하는 기호라고 정의하였다. 기표는 사물의 본질이 아닌 형식이다. 가상의 무의미한 문자인 기호는 송신자의 메시지와는 상관없이 수신자의 수용 태도에 따라서 다의적 해석이 가능하다. 기표란 단일 의미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다의적이고 상징적 의미작용을 하기도 한다. 자연과 사물에 인간이 이름을 붙이고 감정을 넣었으나 원래의 자연과 사물은 감정이 없다. 기호 시는 소쉬르의 기호학을 바탕으로 문자를 원래의 무의미한 원상태로 돌려주자는 것이다. 따라서 기호시론은 무의미시론과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문덕수의 ‘하이퍼 시론’ 에서 추구하는 ‘무의미 시’가 바로 기호시의 원리를 차용한 시론이다. 아래 시는 필자의 졸시 「( )와 ( ) 사이에」전문이다.     너와 나, 사이, 강물   ( ) 안에서   넘치지도 않고 유유히 흐른다     하늘과 땅의 큰 괄호{ } 사이로   빌딩이 자란다   가로수, 긴 괄호[ ] 사이로 자동차가 쌩쌩 달린다     ( )를 치고 ( )를 치고 ( )를 치고   ( )작은 괄호, ( )큰 괄호 끼리끼리 몰려다니다,   큰 괄호가 작은 괄호를 (((())))먹어버린다     철길을 홀로 걷던, 그 사내   누구의 잃어버린 ( )인가?   쇠파리 몇 마리, 사내 입술에 달라붙어   ( ) 속, 갇힌 말을 열려고 버둥댄다     입맞춤과 포옹은 ( )를 열고 닫는 것   꽃잎 닫혔던 괄호( )가 화르르, 열린다     가로수 귀를 막고   ( )를 치고   위로만 나뭇가지를 뻗어가는       ― 이선, 「( )와 ( ) 사이에」전문     위의 시는 제목에 ( )를 사용함으로써 디지털적 감각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또한 사물과 관계성을 ( )라는 미지수로 보았다. 만약 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꽃이 피고, 나무가 자라고, 자동차가 달리는 것을 어떻게 인식할까?라고 질문해 보았다. 사물은 단어가 아직 붙지 않았으므로 미지수 ( )가 열리고 닫히는 것으로 인식할 것이다.   ‘하늘과 땅의 큰 괄호{ } 사이에 갇혀서’ 무생물인 빌딩과 생물인 동물과 사람과 나무가 공존한다. 대상인 괄호( )를 열려고 집착하는 관계성을 살펴보고 자 하였다. ( )를 사물이나 관계로 인식하는 것도 고정관념이다. 소통에 장애를 갖는 것은 현대인의 ( ) 인식 때문이다.   단어와 말을 버리고 세계와 사물을 ( )라고 인식하여 본 것이다. ( )를 의미의 공간으로 해석한 것은 모든 의미를 해석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역설이다. 사물은 그냥 ( )로 존재한다.     4연의 ‘사내의 주검’에 달라붙어 ( )를 열려고 ‘버둥대’는 ‘쇠파리’처럼 의미 없는 행동이다. 누구도 사내의 닫힌 ( )를 열고 말을 끄집어내지 못하는 것처럼 ( )는 ( )로서 존재한다. 모든 관계와 사물을 ( )로 인식한 것은 ( )로 사물화한 것이다. 소쉬르가 주장한 ‘말’, 즉 언어는 소통에 여러 장애들을 겪고 있다. 그것은 곧 우리가 무의미한  괄호( )라는 기표 속에서 살기 때문이다. 소통되지 않는 ( )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 ) 기호시를 시도한 것은 무의미 기표인 ( )를 시에 도입하여 언어와 사물, 관계의 무의미를 ( )화하여 디지털적인 실험시를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단어와 문장을 의미적으로 한 것은 여러 개의 의미로 분산되고 해석되는 ( )를 역으로 추적해 본 것이다. 본래의 ( )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단절되고 결합되지 못하는 의미(기의)인  ‘인간’ ‘빌딩’ ‘꽃’ ‘입맞춤’ ‘포옹’ ‘나무’를 간접적으로 ( )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7. 모자이크 기법     디지털은 ‘단절’과 ‘결합’이 작게 나누어지는 최소 단위의 조합인 ‘모자이크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디지털시계는 빨간 불을 반짝이면서 불이 들어왔다 나갔다 한다. ‘단절’과 ‘결합’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진다. 디지털 시에서도 단절과 결합을 통한 ‘추상화 미술기법’과 미술의 ‘구성’과 같은 배열, 즉 몬드리안의 그림이나 샤갈의 그림처럼 시의 새로운 디자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현대적이고 추상적인 이미지들이 불특정하게 결합하고, 분리된 모자이크 시를 예시 작품으로 들고자 하였다. 젝슨 플록의 페인팅 기법처럼 언어충돌이 난무한 작품을 찾았으나 완전히 무의미한 단어들의 나열과 투척이 첨예한 미의식적 예술성을 가진 ‘언어 그림’이 될 수 있는지는 미지수다.   양준호의「비상구」를 골라보았다. 양준호의 시는 의미해석을 하려고 하면 어렵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 ‘단절’과 ‘단절’. 절대고독의 이미지. 현대인의 위기와 부조리를 ‘극한상황’으로 느끼면 된다. 다행히 시인 자신도 단어의 의미를 분석하여 주기를 바라며 ‘의미 추구의 시’를 쓰려고 시도하지는 않은 것 같다.     바람은 비늘 흔든다 귓속에   파란 새 날아간다   꽃은 피어라 말의 콧등에도   소금은 준비되었을까   뼈들 파도처럼 춤춘다   눈알만 남아 귀만 남은   고무공 뛰어간다      ― 양준호,「비상구」전문     그럼에도 이 짧은 시가 주목받는 것은 시인의 은둔과 고독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단어’를 공기돌 던지듯 허공중에 흩트려 놓은 것 같다. 그러나 ‘바람’ ‘비’ ‘파란 새’ ‘꽃’ ‘소금’ ‘뼈’ ‘파도’ ‘눈알만 남은 고무공’ ‘귀만 남은 고무공’은 「비상구」라는 제목과 부조리하게 흩어졌다가도 묘하게 단어들이 결합한다. 꽉 막힌, 비상구도 없는 곳에서 새처럼 날아보려고 시도하는 시인의 몸부림이 감지된다. ‘절대 고독’과 ‘외로움’이라는 의미를 생성하고 있다. 비상구를 잃어버린 현대인. 친구가 없는 현대인. 이기주의 시인. 그리고 너. 나.   양준호의 단어들은 결합하고 분리되어 ‘모자이크 이미지’를 구성한다. 단어들의 흩뿌림이 역으로 새로운 디지털 시적 방법론을 제공한다. 디지털 시론이 나오기 훨씬 전인 80년대부터 양준호는 이미 디지털 시를 써 왔다.    8. 추상화(구성) 기법- 시스템 바꾸기(변화)     시스템의 변화를 시에서 시도한다는 것은 형식과 디자인, 기법, 표현기법까지 다양한 요소들을 함의한다. 필자의 졸시「귓속말하기」는 디지털 기법의 새로운 시의 형식으로 쓰고자 고민하며 쓴 시다. 결국 디지털 시가 무의미 단어들의 조합이나 연과 연의 단절만 추구한다면 똑같은 이미지와 형식의 시들이 양산될 것이다. 개성을 추구하다 비개성적인 작품들이 만연할 수 있다. 디지털 시가 이름만 가리면 똑같아서 누구의 시인지 모를 정도로 몰개성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것도 그 때문이다. 디지털 시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시스템의 변화’가 필요하다.   아래 시는 필자의 졸시다. 이 시는 각각의 독립된 다른 이야기들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병렬배치하였다. 「귓속말하기」부제로 ‘-때, 장소, 시간, 그리고??’라는 제목을 붙여서 각각의 ‘현장상황’을 연상시키고자 하였다. 반복적인 ‘귓속말로’라는 똑같은 말을 넣어 언어의 디자인을 하였다. 추상화기법의 구성 기법이다. 내용은 옴니버스 형식으로 펼핀 그림으로 디자인하였다.   추상화 기법으로 시의 형식은 ( ) 속에 들어간 ‘귓속말로’가 포인트다. 노랑, 파랑, 빨강, 초록 등 다양한 색깔의 구성 디자인 중, ‘귓속말로’는 보라색 포인트와 같은 것이다. 연마다 똑같은 ‘보라색 포인트’ 말을 넣음으로써, ‘보라색을 주조로 한 그림’을 완성하였다. 디자인과 시스템 바꾸기(변화)를 실험적으로 시도한 작품이다. ‘추상화 그림’ 기법으로 ‘몬드리안 무늬’를 기하학적으로 구성한 시다.     개미가 벌에게 엉덩이를 한방 냅다 쏘였어요   이를 악 물고,   입술이 노랗게 물들도록, 호박꽃잎 물어뜯는데   ( “꿀맛 좋니?” 귓속말로 )     오랫동안 기우뚱한 안방 벽이   너덜너덜 갈라지고 금이 간, 건넌방 벽에게 묻는다   ( “나한테 너무 오래 기대고 살지 않았니?” 귓속말로)     숫모기만 보면 간이라도 빼 줄 것처럼   애~앵 앵앵, 암모기   머리카락처럼 가늘고 부드러운 끈질긴 구애    여자 뒤통수치기 여왕모기, 그녀   (질투도 힘이니? 귓속말로)     초생달이 허공에 밀려   헛바퀴 돌아, 돌아   거꾸로 매달려, 그믐달로 서 있네요   ( “하늘이 노랗게 보이니?” 귓속말로)     하이힐 소리 또각또각, 입술 빨간 꽃바람   피사의 탑에 미~쳐서 리포트를 못 썼다나?   빨간 하품이 강의실 앞 붉은 장미가시에 걸렸다가,   억대 소나무에 걸렸다가,   초록잔디밭 위를 떼구르르,     대학정문에 대자보가 걸렸다고요?   보석자랑? 차자랑? 구찌핸드백 자랑? 꽃바람   맨 먼저 대학교단에 선다고?   ( “쯧 공부해서 남 주니?” 귓속말로)     나뭇잎은 하늘을 한 입 베어 물고   파랗게 멍든 입술로 벙긋거린다   ( “후~욱 불어 버릴까?” 귓속말로)     가랑비, 눈썹에 내려앉아 가볍게 소곤댄다   ( “슬픔도 키스처럼 부드럽지 않니?” 귓속말로)      ― 이선, 「귓속말하기/-때, 장소, 시간, 그리고??」전문     프로이드는 문학을 사회와 화합하지 못하는 인간이 소외와 고독을 승화하여 예술작품으로 생산한 것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독자들이 공감하는 것으로 정의하였다. 누구나 인생에서 ‘어느 때’ ‘어느 장소’ ‘어느 시간’ 뒤통수를 맞은 당혹스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억울한데, 차마 반박하지도 못했던 경험. 그 비열한 인간이 사회적으로 출세하는 경우를 지켜보는 역겨움. 프로이드는 해결되지 못한 상처를 꺼내서 치유하는 과정을 문학창작 과정으로 보았다.   이 시는 인간 속에 숨어 있는 비밀스런 속성을 ‘추상화(구성) 기법’으로 보여주고자 하였다. 소통을 위하여 내용은 의미추구를 디자인은 디지털적으로 시도하였다.  모든 시가 무의미만 추구한다고 개성적이며 새로운 시는 아니기 때문이다.         9. 결론      본 논문은 디지털 시론의 정의와 시창작 방법론을 재조명하여 디지털 시의 구성 요소를 미술의 회화 기법을 도입하여 논의해 보았다. 디지털 시의 요소를 가지고 있는 일곱 편의 시를 분석하여 일곱 가지 시 창작 기법을 소개하였다. “디지털 시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답이 되기를 바란다.   디지털을 선포한 오남구의 ‘탈관념’ ‘염사’ ‘접사’ ‘사진찍기’ 시창작 시론과 심상운의 ‘디지털 시’와 ‘하이퍼텍스트 시’에 대한 정의인 ‘모듈’과 ‘리좀’, ‘단선구조와 다선구조론’을 소개하고 문덕수가 최초로 주장한 ‘하이퍼텍스트 시론’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최첨단 시창작 기법인 디지털 시와 하이퍼 시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기법을 탐구하는 과정에 있으며 여러 시인들이 실험정신을 가지고 도전하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기존의 탈관념과 염사, 접사, 사진 찍기 기법 외에 무의미 시론과 다선구조를 총체적으로 규합하여 몇 가지의 새로운 시창작 기법으로 정리해 보았다. 또한 필자가 디지털 시와 하이퍼 시 쓰기에 참여하면서 느꼈던 구조적인 시론의 핵심 테마를 디지털 시창작 기법으로 정립하였다.   본 논문은 디지털 시가 몬드리안이나 샤갈의 그림처럼 추상화 기법을 쓰고 있으며, 피카소의 그림처럼 ‘다초점’, ‘다시점’의 관찰자 시점으로 한 공간에 여러 방향의 그림을 펼쳐 구성하고, 디자인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본 논문에 언급한 ‘다초점’과 ‘다시점’의 디지털 시론은 ‘겹쳐 그리기’와 ‘움직이는 그림’이다. 여러 방향에서 ‘상상력의 이동’을 하여 ‘그린 입체 그림’이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을 예로 든 것도 디지털 시가 한 방향성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를 구성하고 있는 일곱 가지 시 창작 기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첫째, 정물화 기법- 탈관념  둘째, 겹쳐 그리기- 다시점, 다초점  셋째, 움직이는 그림 기법- 상상력의 이동  넷째, 옴니버스 기법  다섯째, 기호 시 기법  여섯째, 모자이크 기법  일곱째, 추상화(구성) 기법- 시스템 바꾸기(변화)      그 중에서도 본 논문에서 강조한 내용은 디지털 시 창작 기법을 회화적 용어를 차용하여 ‘움직이는 그림’으로 정의하고 예시작품을 제시하여 분석한 점이다. 그러나 ‘움직이는 그림’은 아날로그 시가 지향하던 표면의 ‘보여주기’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사물을 투시하여 직관하고, ‘상상력의 이동’을 여러 방향으로 뻗어가서 상상력을 극대화시켜 운동감을 준다.   직관은 사물의 내면을 투시하여 뼈 속까지 엑스레이 찍고, DNA를 분석하며 의미를 확장한다. 새로운 사물의 철학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상상력의 이동’은 독자와의 소통공간을 넓히고 참여의 폭을 넓힌다. 또한 시에 운동감과 생동감을 준다. 새로운 감각과 직관으로 사물의 내면까지 투시한다. 본 논문에서는 ‘움직이는 그림-‘상상력의 이동’에 포인트를 두었다. 필자의 새롭게 펼치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여러 방향으로 뻗어가며 만들어내는 새로운 감각의  ‘움직이는 그림’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또한 ‘겹쳐 그리기 기법’도 소개하였다.    제목과 내용, 디자인, 기법에서 실험적이고 새로운 방법론을 찾아 규명하는 것이 디지털 시의 목표다. 따라서 디지털 시는 새로운 감각의 시 창작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 소개한 일곱 가지 디지털 시 창작 기법이 복합적이고 광범위한 디지털 시 창작 기법을 모두 소개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앞으로 내용, 기법, 형태, 등 여러 방향에서 다각적으로 연구되고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은 실험단계에 있어 ‘과정 수행 중’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나 새로운 시가 완성되고, 새로운 이즘으로 분류될 날이 곧 올 것이라 믿는다.   앞으로 디지털 시는 시인과 비평가들의 공격과 혹독한 비난과 질문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아직도 디지털 시론은 완성되지 않았고, 디지털 시를 쓰는 시인들이 치열하게 고민하고 연구하여 새로운 기법의 작품으로 나타내 보여야 한다는 과제를 숙제로 남긴다.   이선 시의 하이퍼시 구조와 시창작 기법     이 선(시인)      이선의 하이퍼시의 특징은 사물시에서 출발한다. 사물시는 ‘객관화’를 추구한다. 하이퍼시 구조와 시창작 기법에 입각하여‘링크(link)- 리좀(Rhyzome)-무의미 시- 환타지 영상기법- 상상력의 공간이동 및 시간이동’등 다섯 가지로 분류하여 필자의 하이퍼시 창작기법을 분석하여 보고자 한다. 필자의 시는 단일구성보다는 복합구성을 갖고 있다.     1. 링크(link)  링크(link)는 두 개의 프로그램을 결합하는 것을 말한다. 하이퍼 시의 링크 기능은 , 각 행과 연의 자립성과 독립성이다. 이선의 시에서 하이퍼시의 링크 기능이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다음 시는 필자의 「북극에서 온 편지」중 일부다.     “툰드라의 아침밥상은 눈꽃 천지인 걸요…”/ 북극여우가 긴 꼬리로 허공을 흔들며, 빗줄기의 허리를 자릅니다(1연)//  내 아버지는 툰드라가 되지 못한, 어둠/ 겨울을 낳다가, 바다로 침몰한 내 어미의 눈빛은/ 북극성(3연)// 습지의 낮은 구릉을 지나, 수컷의 향기를 뽐내며/ 눈향나무 언덕 향해 달리는, 어린 순록의/ 맑고 유순한 눈빛을 나도 지닌 적 있는데(6연)// 보름달 저주가 아직 풀리지 않았습니까?/ 얼음을 녹이는 것은, 내 원죄를 지우는 일(8연)// 나는 퇴화한 꼬리를 치켜세우고, 어둠을 힘껏 문지릅니다/ -흰색이거나 얼룩무늬거나(9연)// 눈향나무 향기로/ 추위를 녹이며, 나의 젖은 몸을 말립니다/ 길은 추울수록, 달빛 투명하고 향기로와서(11행)   위의 시는 각 행과 연이 독립적이며 자립적이다. 또한‘제목- 행- 연’은 서로 링크된다. 그러나 위의 1-11연 중‘2연, 4연, 5연, 7연, 10연’을 뺐는데도 시의 구조는 그대로 유지된다. 시의 각 행과 연이 독립적이며 자립적이기 때문이다.  이선의 시는 하이퍼시의 주요한 요소인, 링크 기능을 실현하고 있다.      2. 리좀(Rhyzome)  리좀(Rhyzome)은 그물망처럼 얽혀, 확장되는 기능이다. 리좀의‘이질성, 다양성, 무의미적 단절’은, 하이퍼시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하이퍼시의 리좀 기능은‘중첩 이미지’와 ‘낯설게하기’를 실현한다. 필자의 다음 시「소금꽃을 꺾다」 전문을 읽고‘리좀’기능을 살펴보자.      모래고양이 발톱과 사막의 낙타 발자국은 푸른색인가요, 신이여/ 그래, 새끼낙타를 삼켜버린 밤도 푸른색이지/ 어미낙타 눈동자가 점점 줄무늬하이애나를 닮아가요/ 괜찮아 곧 나이를 먹을 테니까,/ 뱀의 푸른 눈이 살아 있어요/ 그래 파푸아뉴기니로 날아가는 8천 피트 상공에서도 살아 있더구나/ 모래고양이가 파 놓은 토굴에 숨어/ 새끼를 낳는 도마뱀 빨간 엉덩이를 보았지?/ 오늘을 부정하면서, 벌써 내일을 초대한 거니?/ 이 거리에서 입양에 대하여 말하는 건 금기어예요/ 그 아이들은 곧 자기의 성이나 이름을 버리게 될 거다/ 14세 여중생이 화장실에서 아기를 낳았어요/  신이여, 날기를 거부한 새가 새벽 공원에는 많아요/ 밤새 도둑고양이를 피해 잠을 설쳤나보다/ 그래 삭제할 게 많은 서울거리는 참 부지런하구나/ 경계경보를 울릴까요, 지금?/ 땅! 총을 쏘기 전에 선을 넘으면 아웃이라고// ―「소금꽃을 꺾다」 전문    위의 시의 배경은 현재와 과거, 미래가 한 공간 안에서 거미줄처럼 합성되어 있다. 하이퍼시의 ‘리좀 기능’을 장치한 것이다. 현대문명 속의 부조리한 상황을 초현실주의 작품으로 드라마틱하게 재구성하였다. 젝슨 플록의 페인팅 기법처럼, 한 공간에 마구‘불안’한 현재를 던진다.  위의 시는 ‘신’과 ‘인간’의 ‘질문과 대답’ 형식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필자의 하이퍼시는 상투어와 일상적 문장을 거부한다. 그 대화는 혼돈스럽고, 낯설며, 단절적이다. 미성숙한 여중생이 낳은 아기는 곧 외국으로 입양되어‘알렉스’나‘미미’로 자랄 것. 위의 시는 제목에서 ‘낯설게하기’를 실현하고 있다. ‘소금’은 잎도 줄기도 없는 몸통만 있는 사물이다. ‘소금’과 ‘꽃’을 합성한 ‘소금꽃’도 꽃만 있지 줄기나 뿌리가 없다. 꽃받침도 없다. ‘소금꽃을 꺾다’라고 행위를 강조한 제목에 주목하여 보자. 제목이 아이러닉하며 역설적이다. 소금꽃은 꺾을 그‘무엇’이 없다.  ‘사막의 낙타- 파푸아뉴기니 상공의 뱀- 모래고양이-도마뱀-화장실에서 아기를 낳은 여중생-도둑고양이와 공원’까지 시간과 공간을 초월적으로 이동한다. 필자는 리좀 기능을 적용한 사회고발 부조리 시를 발표함으로써, 하이퍼시는 철학과 사유가 없는 말장난이라는 비난을 극복하였다.     3. 무의미 시   하이퍼시의 ‘무의미 시’는 김춘수가 주장한 ‘무의미 시’이론과는 다르다. 하이퍼시의 무의미 시는 ‘열린 문장’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옳다. 시의 내용을 한정적이거나 제한하지 않는다. 독자에게 지시적이거나 명령적이지도 않다. 무의미 시는 불확정적이며 무제한적 상상력의 세계로 독자를 초대한다.  이선의 다음 시 「랭보와 베를렌느, 사이에서」일부를 살펴보자.    눈썹연필을 깎는데 심이 자꾸 부러집니다/ 랭보와 베를렌느, 사이에는/ 푸른 침대와 흰구름, 부러진 연필심이 있습니다(1연)// 사랑에도 면허증이 필요합니까?/ 파도가 나선형을 그리며 밀려오는 긴 밤입니다/ ⊂거나 ∪∩거나(2연)// 지느러미를 흔들며, 당신이 떠난 뒤/ 나는 미장원에서 긴 파마머리를 자릅니다/ 곧 “보라색으로 염색할 걸” 후회합니다(5연)// 랭보는 베를렌느의 마침표가 됩니다(6연)//   위의 시는 랭보와 베를렌느의 부적절한 사랑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지만, 어디에도 그 사랑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하이퍼시는 내용을 중시하는 시 형식이 아니다. 서정시의 지시적이고 명령적인 해석을 거부한다.     이선의 하이퍼시의 문장은 확장적이며 무의미 시에 가깝다. 그러나 김춘수의 무의미시와는 전혀 다르다. 김춘수의 대표적인 무의미 시로 알려진「처용단장」2부-5는 ‘무의미 시’라기보다는, 두 개의 ‘말’과 ‘이야기’를 번갈아가며 읊조리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필자의 무의미 하이퍼시는 각각 다른‘이미지’의 삽입이다. ‘이미지 충돌’로 시를 디자인하고 있다. 김춘수와 필자의 무의미 시의 차이는,‘말’과‘이미지’의 차이다.   당신이 ‘망상중독’이라고 말하는-/ 유칼립투스 꽃을 채취하던, 푸른 달빛을/ 흰 샴 고양이, 어깨 위에 올려놓는다/ (당신의 웃음소리거나, 나의 울음소리거나)// ― 「자서전」일부   위의 시는 몽상적이며, 애매모호한 분위기를 연출한다.‘당신의 웃음소리거나, 나의 울음소리거나’ 부분을 주목하여 보자. 한정적이거나 지정적이지 않다. 허용적 놓음의 미학이다.   4. 환타지 영상기법     이선의 하이퍼시는 ‘환타지기법’과 ‘영상기법’을 조합하고 있다. 다음 시 「겨울, 카페테라스에서 바라본 TV풍경」전문을 읽어보자.      “당신의 연애는 언제부터 해빙을 시작한 것일까요?”// 그녀의 눈은 웃고 있지만, 울고 있다/ 나는 그녀 눈길이 머무는 곳마다, 파랑색 벽을 칠한다/ 그녀 눈빛은, 비의 얼룩 같은 것이어서// 네모난 탁자 위에선 레몬차 식어가고// 그녀의 툰드라 언덕에, 나는 야생 히아신스 꽃밭 향기를 내려놓는다/ 두꺼운 스웨터처럼, 내 몸은 그녀의 향기로 체온이 급상승 한다/ 여자의 하늘색 머리카락이 허공을 흔들며, 어둠을 자른다// 흰 망사장갑은, 여자의 가늘고 긴 손가락을 조용히 빠져나간다/ 북극곰 발톱처럼 뾰족한 그녀 손가락이, 움켜 쥔 공허// 해빙기, 그녀 심장은 더 이상 얼지 않아서/ 습지의 낮은 구릉을 지나, 노을빛 구름을 뱉어내는/ 북극양귀비꽃 언덕을 지향하고 있다// -40°C 빙하기 옷을 벗고/ 다시 사랑을 시작할까? 예감하는 저녁에// 백야의 푸른 들판을 건너가는 순록 떼,/ 툰드라가 녹고 있다// 그녀의 눈꼬리가 내 눈을 어루만진다/ “빙하는, 빗방울의 힘을 버틸 수 있을까요?”//          위의 시는 몽환적 ‘환타지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환타지 영상기법’은 시에 운동감을 준다. 겨울 카페테라스에서 바라본 여자 손님과 TV에서 상영하고 있는 해빙기의 ‘북극 툰드라’의 모습을 ‘오버랩 영상기법’으로 처리하였다. 낯선 ‘그녀’는 시의 환타지다.   인간의 DNA는 남의 연애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호기심이 많다. ‘그녀’와 해빙기의 툰드라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 이질적 환경에‘적응’해야 하는 위기의 목표가 있다. 툰드라의 ‘북극양귀비꽃’과 그녀는 치환은유 관계다. 시인의 드라마틱한 상상력을 전개하여 ‘보여주기’한 것이다.  김용오 시인은 「물고기의 레이스 전봇대 위를 날다」에서, 이선 시의 특징을 ‘환타지’라고 표현한 바 있다. 필자는 하이퍼시를 무의미한 언어유희로 전락시키지 않고, 의미화를 추구한다. 인간과 환경을 깊이있게 다룬다.    5. 상상력의 공간이동, 상상력의 시간이동   필자가 최초로 명명한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상상력의 시간이동’은 필자의 다른 논문에서 여러 번 언급하였다. 이선의 하이퍼시의 한 특징은 상상력의 확장이다. 그 효과는 문장의 감각적 미의식과 운동감이다. 문장 표현이 신선하고 젊다. 이선의 하이퍼시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한 공간과 시간 안에서 ‘순간이동’한다.   상상력의 ‘공간이동, 시간이동’을 통한 ‘순간이동’의 시는 ‘대비효과’가 크다. - 색상대비, 문명대비, 시적거리가 먼 것 끼리의 대비. 확장성, 연상의 폭이 넓다. 이선의 아래 시를 살펴보자.        내 아버지는 툰드라가 되지 못한, 어둠/ 겨울을 낳다가, 바다로 침몰한 내 어머니의 눈빛은/ 북극성// ―「북극에서 온 편지」 3연 1-3행   이질적인 것들이 한 공간에서 조우한다. ‘툰드라’와 ‘북극성’은 먼 이질적인 사물이다. 그러나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친밀한 대상을 끌고 와서, 화자와 밀접하게 연결하였다. 상상력으로 먼‘시간’과 ‘공간’을 초월적으로 현대에 초대하였다.     바람이 꽃씨의 발화점을 외우는 동안/ 바다는 구름을 잉태하지/  늙은 토인여자의 자궁은, 그린파파야 향기// ―「탁상공론 문명일지」 부분  ‘바람과 꽃씨, 바다와 구름, 늙은 토인여자와 그린파파야 향기’는 이질적인 사물들이다. 그러나 한 문장에 나란히 배치함으로써 친화적 관계로 만들었다.     꽃잎 문을 닫는, 저녁입니까?/ 별빛 부엉이 항문을 닦는, 저녁입니까?//  고비사막, 켜켜이 쌓인 주름살커튼을, 펼치는 저녁/ 두물머리에는, 황사비, 초미세먼지 자욱자욱,/ 물결을 지우는 데 말입니다// 맨드라미 꼬불꼬불, 꽃길에 갇혀/ 별빛에 몸을 적시며 잠들어도 좋은 저녁인데 말입니다/  -쉿,/ 꽁지 붉은 어미 새,/ 대문 우편함에, 새끼 일곱 마리를 부화시키고 있습니다// ―「저녁입니까?」 1, 5, 8행    같은 저녁이지만 각각의 저녁은 의미가 다르다. 위의 시의 ‘저녁’은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대비시키고 있다.‘환경파괴’와 ‘생명의 잉태’라는 이중적 메시지를 던진다.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시간이동은 환타지성과 운동감, 전이와 반전의 매력을 연출한다.     이사벨라섬 항문을 간질이며, 춘분점이 지나간다/ 축축하고 비릿한 땅거미를 삼키는/   갈라파고스 거북,// 용암(Lava)을 삼킨 ‘아술산’ 입술, 석양에 붉다// ―「갈라파고스Galάpagos 섬에서」 4행    “ 내 안의 시가 날 잠재우지 않아”/ 내 춤의 날개인, 우주의 긴 푸른 스카프에/ 소리와 빛을 담고, 나는 뜬 눈으로 그의 꿈을 지킨다// ―「이사도라 덩컨」 끝행   위의 시는 시간과 공간으로 이미지가 확장되어 흐른다. 확장된 이미지는 마음과 눈을 시원하게 하는 감각적 미의식을 갖는다.  6. 결론 ‘링크- 리좀- 무의미 시’는 하이퍼시의 기본 시론이다. 필자의 하이퍼시의 구조와 시창작 기법은 위의 기본 하이퍼 시론을 포괄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또한‘환타지 영상기법-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상상력의 시간이동’이라는 용어를 새로 만들었으며, 하이퍼시 창작기법을발전시켰다.  유미주의 시는 표현주의를 지향한다. 하이퍼시는 표현주의에 적합한 시다. 그러나 필자의 시는 표현주의가 지향하는 감각적 미의식과 사유와 철학을 동시에 추구하며 젊은 시를 생산하고자 노력하였다.      예감처럼, 꿈처럼 시는 온다. 필자는 시를 쓸 때, 꿈속 같을 때가 있다. 꿈을 꾸고 나면, 과거 언젠가 현실에서 일어났던 사건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또 현실의 극한 상황이 꿈을 꾸는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평자와 독자에게 ‘하이퍼시’가 앞으로 예리하게 조명받기를 바란다. 또한 필자의 하이퍼시 창작기법도 예민하게 독창적으로 발전할 것을 확신한다.  **       하이퍼텍스트 詩 들여다보기 - 심상운의                                                                이선      밤 12시 05분. 흰 가운의 젊은 의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을지병원 응급실에 실려 온 40대의 사내. 눈을 감고 꼬부리고 누워있는 그의 검붉은 얼굴을 때리며 “재희 아빠 재희 아빠 눈 떠 봐요! 눈 좀 떠 봐요!“ 중년 여자가 울고 있다. 그때 건너편 방에서 자지러지는 아이의 울음소리.     그는 허연 비닐봉지에 싸여진 채 냉동고 구석에서 딱딱하고 차갑게 얼어붙은 밥을 꺼내 후끈후끈한 수증기가 솟구치는 찜 통에 넣고 녹이고 있다. 얼굴을 가슴에 묻고 웅크리고 있던 밥 덩이는 수증기 속에서 다시 끈적끈적한 입김을 토해 내고, 차 갑고 어두운 기억들이 응고된 검붉은 뼈가 단단히 박혀 있던 밥의 가슴도 끝내 축축하게 풀어지기 시작한다. 푸른 옷을 입고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는 그는 나무젓가락으로 밥의 살을 찔러 보며 웃고 있다.     이집트의 미라들은 햇빛 찬란한 잠속에서 물질의 꿈을 즐기고 있는 것일까? 나는 미라의 얼굴이 검붉은 색으로 그려진 둥근 무화과나무 목관木棺의 사진을 본다. 고대古代의 숲 속에서 날아온 새들이 씨이룽 찍찍 씨이룽 찍찍 쪼로롱 쪼로롱 5월의 청계산 숲을 휘젓고 다니는 오전 11시.                                           ― 심상운, 「검붉은 색이 들어간 세 개의 그림」       심상운의 시 은 하이퍼텍스트 시론에 입각하여 쓴 새로운 시 쓰기 방법을 모색한 시다. 심상운 시인은 컴퓨터의 모듈(module)과 리좀 용어를 시론에 도입하여 하이퍼텍스트 시의 정의를 새롭게 하였다. 아직 하이퍼텍스트 시론은 학계의 학문적인 검증을 거쳐야 하고 더 연구하고 발전할 과제가 많지만 심상운 시인은 하이퍼텍스트 시론을 증명할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기 위하여 열심히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도 그의 그러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심상운의 시 에 나타난 하이퍼텍스트적 요소를 살펴보고 하이퍼텍스트 시론을 역으로 추정해 보고자 한다.   하이퍼텍스트 이론은 컴퓨터 용어인 하이퍼와 텍스트를 합한 단어로서 1960년대 컴퓨터 개척자 테오도르 넬슨이 만든 말이다. 미국작가 조지 피 랜도(George P. Landow)의 저서 『Hypertext』(1992)에서 유래된 문학이론이다. 하이퍼링크와 쌍방향성이라는 컴퓨터의 특성을 결합한 용어를 문덕수 시인이 시에 처음 도입하였다. 컴퓨터의 링크는 기존의 텍스트의 선형성, 고정성, 유한성의 제약을 벗어나 마음대로 검색할 수 있다. ‘건너뛰기, 포기하기, 다른 텍스로의 이동’ 등 한 블록에서 다른 블록으로 이동하며 텍스트를 검색한다. 하이퍼텍스트는 한 편의 시 안에서 단어, 행, 연을 동시적으로 나열하여 한 공간에서 공존하게 한다. 리좀이라고 불리는 그물상태를 구축하여 단어와 이미지를 연결한다. 하이퍼텍스트의 병렬구조는 탈중심적으로 텍스트를 링크하며 무한한 상상력을 한 공간에 집합한다.   하이퍼텍스트 시론에 맞게 은 3연이 각각 다른 이야기를 담은 몽타쥬 기법을 쓰고 있다. 1연은 병원 응급실, 2연은 밥, 3연은 이집트 미라, 세 개의 이야기를 짜깁기 하였다. 시적 거리가 먼 각각 독립된 이야기를 한 공간에 펼쳐 놓았다. 소설의 옴니버스 구조를 도입한 짧은 이야기는 극적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시에서 다루고 있는 ‘병’과 ‘밥’, ‘죽음’의 문제는 인간과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큰 관심 주제였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이야기는 ‘인생’과 ‘인간’이라는 큰 그림 속에 그려진 또 작은 세 개의 그림이다. 시인은 독자에게 작가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객관적으로 사건과 사실을 펼쳐 ‘보여주기’ 하고 있다. 그 그림에 색칠을 하는 것은 독자의 상상력의 몫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아날로그 시보다 자유로운 상상적 공간을 독자에게 제공한다. 독자는 가상현실의 플롯을 각각 다르게 상상하여 해석하고 감상한다.   ‘병원 응급실’, ‘냉동고의 찬밥’, ‘이집트 미라’는 평범한 듯 보이는 짧은 이야기지만 많은 얘깃거리를 담고 있다. 세 개의 그림은 하이퍼텍스트의 리좀 이론에 따라 다양한 얼개를 가지고 그물망을 짠다. 1연, 2연, 3연 모두 각각의 객체이지만 또한 서로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 1연의 ‘재희 아빠’는 2연의 중심 주제인 ‘밥’을 구하려고 피곤한 몸으로 일에 몰입하다 큰 사고를 당했을 것이다. 또한 응급실의 ‘재희 아빠’는 통상적으로 병원 응급실 바로 곁에 붙어 있는 장례식장, 죽음을 연상시킨다. 그러므로 3연의 ‘이집트 미라’인 고대 인간의 주검은 1, 2연과 전혀 다른 이야기가 아니다. 1, 2, 3연이 본질적 인간 생활과 일맥상통하며 연계된다. 동서양을 떠나서 남자는 기본적으로 가족부양이라는 가장의 책임을 떠맡고 있다. 이렇게 한 공간 안에서 세 개의 이야기는 각각 다른 이야기를 하지만 서로 링크되어 공존하면서 연상작용을 하며 상상력을 자극한다.   1연, ‘병원 응급실’에 실려온 ‘40대 사내’라는 객관적 사실을 가지고 시는 출발한다.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화하여 ‘보여주기’ 한다. 극한상황을 제시하여 사건을 구성한다. 그런데 2연에서 생뚱맞게 사물인 ‘밥’이 등장한다. 전혀 다른 이물질들의 결합이다. 병렬적 구조인 ‘사내’와 ‘밥’은 서로 내포적이거나 종속적이지 않으며 등가적이다. 그런데 그 밥은 정상적인 밥이 아니다. ‘허연 비닐봉지에 싸여진 채 냉동고 구석에서 딱딱하고 차갑게 얼어붙은 밥’이다. 마치 냉동고에 안치된 시체처럼 서늘한 기운이 나는 ‘찬밥’이다. 1연의 ‘사내’는 세상에서 ‘찬밥신세’로 살다가 사고를 당했을 수도 있다. 사내가 세상의 밥이었을 수도 있고 ‘세상’이 사내의 '밥‘이었을 수도 있다. 사내는 ‘재희 엄마’와 ‘재희’에겐 그들을 먹이는 밥일 수도 있다. 가족을 먹이려고 밥을 구하려고 동분서주 뛰어다니다 응급실에 실려온 것이다.. ‘밥’은 냉동고에서 찜통으로 들어가고 여러 단계를 거쳐서 녹는다. 차갑고 어두운 기억이 응고된 밥. 검붉은 뼈가 단단히 박혀 있는 밥의 가슴. 2연의 ‘밥’은 1연의 ‘사내’와 치환되어 동일시된다. 그러나 이 또한 고정적이지 않다. 자유롭게 독자는 상상력을 펼칠 수 있다. 그것이 사물시의 장점이다.   심상운 시에서의 ‘밥’은 무생물이 아닌, 생각과 고통을 느끼며 가슴이 얼어붙은 활유화된 밥이다. ‘밥’과 ‘사내’의 아픔을 병치시켜 사내의 극단적으로 어려웠던 삶을 상상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단순한 밥이 아니다. 이 ‘밥’은 먹을 수 있도록 녹기까지 상당히 복잡한 사연을 가진 밥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또한 2연은 ‘그’라는 3인칭을 써서 1연의 ‘사내’와 ‘그’가 다른 사람일 수도 있는 여지를 준다. ‘밥’의 살을 찔러보며 웃는 ‘그’는 전혀 1연과 다른 사내일 것이다. 2연의 ‘그’는 1연의 ‘사내’를 진찰하는 의사일 수도 있다. 의사는 사내를 찔러보며 관찰하고, 진찰하고, 엑스레이를 찍고 검진한다. 또 어쩌면 2연의 ‘그’는 관을 꺼내서 염을 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이렇게 1연과 2연은 다초점, 다원화된 구조의 그물망을 짜서 독자에게 복잡한 리좀을 만들고 있다. ‘그’는 여러 정황적 상황과 상징성을 가지며 독자에게 상상력을 제공한다. 지금까지의 의미시보다 해석의 폭이 넓다. 이렇게 하이퍼텍스트 시는 아날로그 시의 단선구조를 다선구조로 바꾸었다. 이미지와 이미지를 링크하여 관념에 묶이지 않고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 또한 그 상상력은 사실에서부터 출발한 객관화된 상상력이다.   그런데 3연은 1, 2연과 또 동떨어진 소재 ‘이집트 미라’가 등장한다. 1연과 2연과 3연은 각각 다른 이야기로 ‘낯설게하기’를 극대화하고 있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지금까지 연과 연이 결합하여 의미를 생산하던 시 쓰기 방법을 버리고 연과 연의 연결을 일부러 끊어버린다. 시적 거리가 먼 사물을 등장시켜 시적 논리와 질서를 파괴한다. 인간인 ‘사내’와 무생물인 ‘밥’, ‘사진’을 한 공간에 병렬 배치하여 같은 값을 준다. 지금까지 시의 연에서 이뤄지던 내포와 종속의 관계를 부정한다. 3연의 미라는 실제의 미라가 아니라 사진에서 본 ‘목관’ 속의 ‘미라’다. 고대의 숲에서 날아온 새들이 “씨이룽 찍찍 씨이룽 찍찍 쪼로롱 쪼로롱” 현대의 ‘5월 청계산 숲을 휘젓고’ 다닌다. ‘오전 11시’라는 시간을 제시함으로써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현재성을 제공하여 실감을 더하고 있다.   1연- 객관적 사실. 2연- 객관적 사물과 상상력. 독자를 연상작용으로 유도한다. 3연- 객관적 사물인 사진. 다시 사진에서 상상력을 더하여 현재로 이동. 심상운 시인은 거실 벽에 걸린 ‘사진’ 한 장을 보고 위의 시를 썼을 수도 있다. 시인은 벽에 걸린 이집트 미라의 목관 사진을 보면서 주검을 생각하고, 죽음은 병원응급실에 대한 심상운 시인의 사전지식인 기억과 만난다. 죽음은 다시 직업과 연결되고 직업은 밥을 구하기 위한 과정이다. 단순한 이집트 미라 목관 사진 한 장이 병원, 밥을 연상작용으로 연결하여 이야기를 꾸민 것이다. 또한 현재의 ‘새소리’를 등장시켜 화자인 시인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의 시간과 공간으로 돌아온다. 흡사 영화의 회상 기법처럼 현재와 과거를 넘나든다. 사진을 ‘본다’는 작은 사실에서 출발하여 ‘바라본다 - 관찰한다 - 상상한다 - 이야기를 조립한다 - 뼈대를 세운다 - 꾸민다’는 시적 발상과 완성까지, 시 쓰기의 전 과정을 심상운 시인은 여과 없이 시로써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눈을 감고 상상력의 가지를 뻗어 ‘무화과나무 목관- 무화과나무 숲- 숲에 사는 고대의 새- “씨이룽 찍찍 씨이룽 찍찍 쪼로롱 쪼로롱” 새소리- 현대 청계산- 오전 11시의 화자인 나’까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연상을 한다. 시간과 공간, 인간과 사물에 같은 값을 주고 병렬 배치한다. 사진에서 생물과 사건이 뛰쳐나오게 만들었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상상력의 줄기를 잡고 우주 끝까지 연상작용을 하는 상상력을 중시한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논리성을 파괴하며 무의미를 추구한다. 논리를 버리고 의미찾기를 버린다. 연과 연의 연결고리를 일부러 끊어버린다. 연과 연의 지시, 명령을 받지 않은 언어는 상상력의 폭이 넓어져 독자는 감각적이며 청량한 정서적 미의식을 경험한다. 또한 하이퍼텍스트 시는 사물시의 본질, 사물에서 파생된 상징과 본질적 이미지와 만나게 된다. 2연의 ‘밥’처럼, 밥이라는 사물은 일과 직업이라는 묵계된 상징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찬밥’을 녹이는 과정은 ‘찬밥’이 아웃사이더 인간을 의미하는 단어로 변이된 것처럼 굳어버린 변형된 의미체계나 이미지를 가질 수 있다. 또한 ‘병원 응급실’과 ‘미라’도 단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학습된 섬뜩한 무서운 이미지가 독자에게 연상작용을 하여 상상력을 증폭시킨다. 독자는 상상력의 범주를 넓혀 1, 2, 3연을 조합하여 극적으로 사건을 만들고 이야기를 꾸민다. 스스로 사건을 구성하는 토대는 경험과 지식, 극적구조물을 짜는 능력에 따라 독자마다 다를 것이다. 이것이 하이퍼텍스트 시가 추구하는 텍스트의 명령과 지시, 패턴에 얽매이지 않는 시 감상의 매력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무의미를 추구한다. 무의미한 단어와 무의미한 사실들을 혼합시켜 미술의 표현기법처럼 의도하지 않은 효과를 보는 것이다. 젝슨 플록의 페인팅 기법처럼 독립된 연과 단어를 나열하여 독자가 각기 다른 감상을 할 수 있도록 상상력의 여지를 남겨주는 것이다. 각각의 연들은 병렬적으로 널브러져 있지만 서로 말을 하고 연관을 갖는다. 리좀이 되어 단어와 이미지들이 그물망을 형성하는 것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론의 모듈(module) 이론은 최소 독립된 단위인 단어들이 연속적으로 연계되어 한 공간에 나열된다. 그 단어나 문장, 연은 바꾸거나 버려도 전체에 전혀 영향을 미치거나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모듈 이론이다. 교환 가능한 이미지, 독립된 기능을 가지면서도 분리될 수 있는 덩어리들이 하이퍼텍스트 시 쓰기 방법론이다. 또한 시는 작가의 의도성에서 이탈하여 독립된 생명력을 가지고 독자에게 다가갈 수 있다. 모듈의 객체지향성은 시를 새롭고 감각적이게 한다.     또한 연과 연은 병렬배치 되어 있지만 각 연들은 서로 링크된다. 블록과 블록은 서로 연계성을 가지고 검색된다. 또한 각 연의 단어와 단어, 이미지와 이미지들도 병렬 배치되어 있지만 서로 링크된다. 모듈처럼 단어와 이미지, 사건들이 한 연 안에서 모자이크처럼 내밀한 구조로 연합되어 있다. 단어와 단어, 연과 연, 이미지와 이미지는 동시다발적 구도를 가지고 서로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의존적이며 주장적이다.   하이퍼텍스트는 컴퓨터 용어로서 한 개의 모티브를 검색하기 위해서 여러 번 클릭한다. 이 시의 화자는 ‘검붉은 색의 그림’을 클릭한다. 또한 디지털의 모자이크 기능처럼 ‘을지병원 응급실’이라는 절박한 상황과 ‘밤 12시 05분’이라는 시간을 클릭하고, ‘재희 아빠, 울고 있는 중년 여자, 아이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 를 클릭하여 모자이크 하여 빠르게 빤짝빤짝 보여주고 있다.   2년에서도 ‘허연 비닐봉지, 냉동고, 딱딱, 후끈후끈, 찜통, 얼굴, 가슴, 밥덩이, 수증기, 끈적끈적, 입김, 차갑고, 어둡고, 기억, 응고, 뼈, 가슴, 축축, 푸른, 옷, 가스레인지, 나무젓가락 등, 밥의 살, 찔러본다, 웃다’ 등 많은 명사와 형용사들이 모자이크 되어 있다.   3연에서는 ‘이집트, 미이라, 햇빛, 찬란, 꿈, 무화과나무, 목관, 사진, 고대 숲, 날다, 새, 씨이룽 찍찍, 쪼로롱 쪼로롱, 5월, 청계산, 숲, 오전 11시’ 등 시간, 사물, 공간, 시대를 짜깁기 하여 종적, 횡적으로 모자이크하였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추상화와 같다. 연과 연은 흩어져 있지만 전체로 집합된다. 단어와 단어는 모듈과 리좀으로 얽혀 하나의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는 여러 색깔이 섞인 구성과 같다. 그 구성의 덩어리들이 떠다니는 것이 연이다. 여러 개의 연은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전체적인 그림의 인상을 결정한다. 독자는 추상화를 일일이 색깔을 분석하여 해석하려고 하지 않고 전체적인 인상으로 감상한다. 즉 하이퍼텍스트 시는 상황시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유기체의 결합은 모자이크처럼 여러 색깔이 모여 하나의 이미지를 만든다. 하나의 그림 속에는 여러 개의 구성물과 색들이 혼합되어 있다. 그러나 일일이 의미를 분석하지 않고 전체적인 상황으로 그림을 받아들인다. 즉 추상화는 감상자의 직관과 느낌이 중요하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의성어와 의태어, 무의미한 단어 나열로 가볍다는 지적을 받았다. 의미를 추구하던 아날로그 시를 버리고 하이퍼텍스트 시가 무의미를 추구하면서 경박하고 진정성이 없다는 비난을 계속 받아왔다. 상황제시만 있지 인간 삶에 대한 진정한 고민이 없는 철학의 부재가 하이퍼텍스트 시의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또한 똑같은 형태의 시가 난립하여 개성적인 작품생산이 어렵고 자기 상표가 없다는 지적도 받았다. 이름만 가리면 누구 작품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단어 던지기는 어떤 단어로 대체하여도 되기 때문에 절실함과 진정성이 없다고 부정적 시각으로 보았다. 그에 반하여 심상운의 에서는 하이퍼텍스트 시에서 실현하기 어려웠던 사유와 철학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심상운 시인은 ‘죽음’과 ‘병’, ‘밥’이라는 인간의 근원적 질문을 던짐으로써 하이퍼텍스트 시에서 치명적인 결함으로 지적된 사유의 부재와 무작위 단어들을 연결하여 만들어낸 무의미한 이미지 나열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진정성의 결여를 극복하고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되는 것이 ‘밥’이다. 또한 ‘밥’을 얻기 위해서 죽도록 일하다가 병과 죽음을 얻는다. 인간생활에서 죽음과 밥, 병이라는 테마는 ‘전쟁과 사랑’만큼 절실한 문제다. 인간이 영원히 관심을 가지고 추구해야 하는 예술의 테마다.     심상운은 에서 하이퍼텍스트 시의 한계성으로 지적된 사유와 철학의 부재를 극복하고 있다. 또한 하이퍼텍스트 시가 단어 던지기와 무의미 단어 나열로 가볍고 정신없다는 비난을 무력화시켰다. 위의 시는 여러 상황을 모자이크하여 보여주면서도 산만하거나 어지럽지 않고 질서정연한 폼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하이퍼 시의 문제점은 바로 그 파괴된 형태를 보여주는 시 쓰기를 실현하면서 보여주는 단어던지기와 무분별한 단어의 조합과 나열, 각각 다른 연의 ‘낯설게하기’ 기법이 무작위적으로 여러 편의 시를 생산했을 때 그 새로운 방법론이 시인의 목을 조이는 올가미가 될 수 있다. 천편일률적인 방법으로 양산된 시가 과연 새로움을 가질 수 있는지, 창조성과 유일성, 철학을 가진 예술의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론이 새로운 문예사조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새로운 표현기법으로 쓰여진 하이퍼텍스트 시로써 시론을 증명하여야 한다. 이 문제는 필자를 포함하여 하이퍼텍스트 시를 쓴다고 주장하는 시인들이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다. 크로스오버시대의 몽상 시인     유한근 문학평론가 · 전 SCAU대 교수       이선 시는 난해하다.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느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난해시는 아니다. 시의 종류에 난해시는 없다. 그러나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난해시라는 종류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묻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난해시는 편의상 구분이지 그 경향의 시는 없다고 말한다. 보통 사람들이 시를 이해하는 데 이해하기가 까다로울 뿐이고 낯설기뿐이라고 설명하곤 한다. 이선의 시가 그러하다. 낯설고 이해하는데 까다로울 뿐이다. 이선 시인은 첫 시집을 이른바 ‘퍼포먼스 시집’이라고 명명하고, 《빨간 손바닥의자》(2012. 시문학사 간)라는 이름으로 묶어 냈다. 이 시집의 ‘시인의 시론’ 〈나의 하이퍼시 쓰기에 대한 견해〉 결론에서 이렇게 하이퍼시에 대해 언급한다. “하이퍼시는 앞으로도 많은 공격을 받을 것이다. (…) 하이퍼 시인들도, 천편일률적인 단어조합에 머물지 않고 시적 진정성과 표현의 새로움을 찾기 위해 더 고민하여야 한다. 하이퍼 시인들이 비슷한 닮은꼴 시들을 양산하지 않기를 바란다. 앞으로 하이퍼시는 예술의 필요조건인, 유일성과 창조성, 철학성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 하이퍼 시론에 입각한 개성적이고 변별력 있는 작품을 생산해 줄 것을 과제로 제안한다”고 마무리한다. 이는 시인의 하이퍼 시에 대한 일단의 시론이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셈이며, 이선의 두 번째 시집 《갈라파고스Galápagos 섬에서》에서도 ‘시인의 에스프리’로 〈하이퍼시 구조와 시창작 기법〉을 묶여, 자신의 시론과 시에 대한 해설을 게재하고 있다. 따라서 나는 그의 시를 하이퍼 시의 시각에 맞추어 보지 않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그의 두 번째 시집을 탐색하여야 한다. 하지만 이보다 먼저 살펴야할 문제는 그의 하이퍼 시에 대한 시단의 평가이다. 문덕수는 이선의 첫 시집 서문에서, 그의 시를 “일률적으로 하이퍼시라고 단정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하며 “그녀의 시는 매우 다양”하다. “그녀는 하이퍼 시라는 전제로 시를 쓰지 않”는다. “모더니즘, 전통시, 낭송시, 드라마- 이러한 여러 가지 요인들이 돋”보인다고 말한다. 그리고 “1)하이퍼성은 시의 본질적인 구조의 확대하는 점, 2)하이퍼시에서 대상과 주체 사이에 반드시 ‘거리’를 두어야 함을 강조했”다, 여기에서 ‘거리’는 J.C. 랜슴의 ‘심미적 거리(審美的 距離 aethetic distance)’임도 밝히고 있다. 이에 반해 첫 시집의 해설을 쓴 심상운은 〈퍼포먼스시와 하이퍼시의 창조적 공간 속에 펼쳐지는 사유의 세계〉에서 그는 “답답한 언어의 틀에서 벗어나서 노래와 춤이 서로 어울렸던 ‘시의 원형’을 재현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시집으로” 퍼포먼스 시집을 평가하고, “또 하이퍼시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인간의 피가 흐르는 하이퍼시를 창작하고 있다. 유리판 같은 냉랭한 이미지에 사유와 감정을 넣자는 것이 그의 하이퍼시 창작정신”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러한 평가를 전제하고, 나는 다른 시각에서 이선 시에 접근하려 한다.     1. 하이퍼시 혹은 시네마 포엠   먼저 시 한 편을 보자. 이 시집의 표제시인 〈갈라파고스Galápagos 섬에서 1〉이다. 갈라파고스(Galápagos) 섬은 남미 에콰도르에 있는 원시적 풍광이 그대로인 휴양지이다. 이곳은 밝은 파란색 발의 새인 ‘부비’가 유명하다.     갈라파고스 섬에는 파란 발의 새가 산다 바다코끼리를 향해 활을 겨누는, 원시사내의 팔뚝에 조개를 삼킨 새가 부리를 닦는다 “달빛 잎눈이 점점 어두워가요, 초록바다에 지쳤어요” 맹그로브나무 그늘에 누워, 원시여자는 맨발로 벌거벗은 원시사내의 무성한 가슴털을 헤집으며 투정한다 “들꽃이 시들었구려, 비단뱀 옆구리에 기대어 낮잠을 청해 봐요” 원시사내는 원시여자의 조그만 발을 쓸어 당긴다 (사내의 거친 숨소리, 주술처럼 여자는 눈을 감고) (열아홉 개 작은 섬, 슬몃슬몃 눈을 뜨고) ‘날개가 퇴화한 코바네우 전설’을 들려주는 바다이구아나, ―갈라파고스 거북이, 귀를 쏭긋쏭긋 다윈의 노란 손바닥책 속에서 방금 튀어나온 핀치 새가 베로~롱 베~롱 쫑쫑 낮잠꾸러기, 이사벨라 섬을 깨우러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시 〈갈라파고스Galápagos 섬에서 1〉 전문     이 시의 표현구조는 희곡적이다. 대사와 지문의 형식을 시의 구조로 차용한다. 한때 장호, 문정희 시인이 벌였던 시극운동의 ‘시극’적인 요소가 강하다. 그러나 연극적인 요소라기보다는 영상·영화적인 요소가 다분한 시이다. 영화의 한 신(scene)을 보듯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단순한 시의 이미지가 아닌 움직이는 이미지들이 여러 개 모여 하나의 시퀀스(sequence)를 보여준다. 이런 구조로 시를 길게 쓰면 한 편의 단편영화의 영상을 보는 듯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나는 ‘영상시’라 지칭했는데, 기존의 영상시가 인터넷 상에서나 지면상에서 시와 그림이나 사진을 같이 게재하고 영상시라 불렸다는 점에서 적절한 명칭이 아니기 때문에 시네마포엠, 혹은 영화시, 영상·영화시라 지칭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이 시는 대사와 액션, 그리고 이야기가 있다는 점에서 영상시대의 젊은이들의 구미에 맞는 ‘실험시’이다. 나는 여기에서 실험시라는 언어를 사용했다. 실험시라는 언어가 진부하고 도식적인 명칭이라 해도, 이 시는 시의 영역을 확대시켜 나가는 새로운 지평의 시 반열에 종속되기 때문에 편의상 그런 용어를 차용한 것이다. 그가 지향하는 하이퍼시 혹은 퍼포먼스시도 이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선은 첫 시집의 ‘시인의 시론’에서 “하이퍼시가 엘리엇보다 발전된 ‘사물시’를 쓰면서, 연과 연의 ‘낯설게 하기’를 실현하여 하이퍼시가 주장하는 ‘객관화’를 실현한 것이다. 그러나 하이퍼시가 엘리엇보다 발전된 ‘새로움’을 보여주는 것이다.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시간이동’은 엘리엇보다 앞선다. 문덕수가 ‘하이퍼시론’으로 주장하는‘무의미’ 시론은, 독자에게 감각의 새로움과 새로운 미의식, 무한대의 상상과 자유를 제공한다”고 말하고 있다. 덧붙여 “그러나 하이퍼시 쓰기에서는 주제는 ‘드러나지 않게’, 시적 표현은 ‘강렬’하게 써야 한다. 미의식과 상상력을 증폭시킬 것, 주제보다는 ‘표현주의’를 지향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이렇듯 이선은 하이퍼시에 대한 신뢰가 강렬하다. 나는 이에 대한 반론이나, 설명을 덧붙일 생각은 없다. 다만 여기에 주목해야 하는 부분인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시간이동’인데, 이러한 상상력의 실현은 위에서 언급한 시네마 포엠에서는 필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위의 시 〈갈라파고스Galápagos 섬에서 1〉에서의 시적 공간과 시간이 1연 → 2~5연 → 6연 → 7연으로 자연스럽게 구조되고 있다. 1연의 파란 발의 부비와 원시사내가 공간과 대상을 이동해서 한 신(scene)을 보여주고, 다시 이동하여 “‘날개가 퇴화한 코바네우 전설’을 들려주는/바다이구아나,/갈라파고스 거북이”의 이미지로, 그리고 다시 핀치새와 이사벨라 섬으로 공간과 시간을 이동하여 보여준다. 그러나 이 시의 모티프는 지쳐 있는 초록바다, 그 적요를 깨우는 것은 지문처럼 처리한 “(사내의 거친 숨소리……)”가 적막을 깨어, “(주술처럼 여자는 눈을 감고)”, “다윈의 노란 손바닥책 속에서 방금 튀어나온/핀치 새가 베로~롱 베~롱 쫑쫑/낮잠꾸러기, 이사벨라 섬을 깨우러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는 상승적이고 역동적인 이미지이다. 평화롭고 적요한 갈라파고스(Galápagos) 섬을 깨우는 것은 새의 비상과 사내의 열정이다. 이렇게 설명되면 이 시의 주제는 분명해진다. 시에 있어서의 주제는 관념적인 이념이나 사상이 아니라 어떤 느낌, 분위기도 주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 〈겨울, 카페테라스에서 바라본 TV 풍경〉도 같은 맥락의 시이다. “당신의 연애는 언제부터 해빙을 시작한 것일까요?”로 시작되는 이 시는 제목이 시사하는 바 북극 해빙기의 TV 다큐의 장면을 보고,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재생된 풍경을 그리고 있는 시이다. 이 시에서의 모티프는 위에서 인용한 시행이다. 해빙과 사랑이다. “-40°C 빙하기 옷을 벗고/다시 사랑을 시작할까? 예감하는 저녁//백야의 푸른 들판을 건너가는 순록 떼,/툰드라가 녹고 있다//그녀의 눈꼬리가 내 눈을 어루만진다/빙하는, 빗방울의 힘을 버틸 수 있을까요?”(시  결말 부분)가 그것이다. 한 편의 짤막한 영상을 보는 느낌이다. 그 영상은 TV 영상을 모사했다 하더라도, 시인의 상상력을 투과하여 나온 움직이는 이미지이기 때문에 시인의 미학이 함유되어 있다. 예컨대 북극의 흰색 이미지에서 파랑색 벽, 레몬차, 여자의 하늘색 머리카락, 노을빛 구름, 북극양귀비꽃 언덕, 백야의 푸른 들판으로 공간이동 되면서 색의 이미지가 변용되어 시의 미학을 빛낸다. 시 〈소금꽃을 꺾다〉에서도 이런 시학은 엿보인다.     모래고양이 발톱과 사막의 낙타 발자국은 푸른색인가요, 신이여 그래, 새끼낙타를 삼켜 버린 밤도 푸른색이지 어미낙타 눈동자가 점점 줄무늬하이에나를 닮아가요 괜찮아 곧 나이를 먹을 테니까, 뱀의 푸른 눈이 살아 있어요 그래 파푸아뉴기니로 날아가는 8000피트 상공에서도 살아 있더구나 (…) -시 〈소금꽃을 꺾다〉의 서두 부분     이 시의 질료는 위에서 보듯이 모래고양이, 낙타, 그리고 뱀이다. 이 질료의 연결은 푸른색 이미지를 통해서이다. 이 시의 공간은 사막이다. 파푸아뉴기니의 상공에서 서울 거리로, 서울 거리에서 파푸아뉴기니로 이동하지만, 이 시의 모티프는 ‘입양’ 문제이다. 어미낙타와 새끼낙타 이미지를 통해서 한국의 유아 입양을 비판하는 시이다. “이 거리에서 입양에 대하여 말하는 건 금기어예요/그 아이들은 곧 자기의 성이나 이름을 버리게 될 거다/11세 초등학생이 화장실에서 아기를 낳았어요/신이여, 날기를 거부한 새가 새벽 공원에는 많아요”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 시의 제목 ‘소금꽃을 꺾다’의 의미는 뜬금없다. ‘소금꽃’은 염전의 물기가 증발하면 남은 엉긴 소금 결정을 비유한 언어다. 그리고 땡볕에 땀을 많이 흘려 마르면 옷에 하얗게 생기는 얼룩을 비유한 말이기도 하다. 그것을 꺾다는 의미가 이 시의 제목이 의미하는 바인데,의미 단절을 느끼게 한다. 아니면 터무니없지만 인천에 소재한 소금꽃 도서관에 설치된 영·유아 수면실을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시 〈까미유 끌로델의 외출〉의 구성은 신(scene) 표시인 ‘#’ 표시로 이루어져 있다. 이 시는 로댕과 까미유 끌로델 이야기를 세 토막의 신(#)으로 구성한 것으로, 시인은 자신에게 까미유 끌로델을 투영시켜 그녀의 입장에서 극적으로 노래한다. #1에서는 “빨강, 주황, 흰색 아네모네 꽃을 내 젖가슴에/탐스럽게 그려 줄래요?”라고. “오, 나의 어여쁜 신神이여”라고 부르는 시적인 ‘당신’에서 구어체로 노래한다. “북두칠성 자리에 둥둥 떠 있어요/나는 그 별을 ‘나의 거북이별’이라고 불러요/나는 ‘나의 별’에 천년 동안 등뼈를 문질러댔죠”라고 노래하는 부분이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북두칠성을 거북이별로 인식하는 것은 시인의 주관정신에 의한 것이라 해도 그 별을 천년 동안 등뼈를 문질러댄다는 의미는 동질성에 대한 희구 혹은 인식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입술을 “부드럽게 열리는, 돌의 입술/오, 돌의 처녀성”라고 인식한 것은 까미유의 침묵을 시적 화자와 동일화하기 위한 설정일 수도 있다. 그리고 #2에서는 ““아~악, 난 미치지 않았어요!”/점점 야위어가는, 수백만 년 풍화된 흰 돌의 갈비뼈/내 천재를 염탐질하는, 당신/차가운 회색 눈,/달그락, 누군가 내 전두엽 뚜껑을 열어요//로댕의 길고 하얀 손톱이 돌의 입술을 찢어요”라고 까미유의 천재성을 시기했다는 로댕과의 이야기를 모티프로 한다. 그리고 #3에서는 “로댕, 당신 눈동자가 어두워요/나의 미소로,/당신 눈동자를 반짝반짝 닦아 드릴게요//별똥별 우르르 쏟아지는, 봄밤/아직, 아기별은 등불을 끄지 않았나요?//1억 만년 뒤에도,/로댕, 나는 당신의 초록별로 다시 태어날 거예요”라고 로댕에 대한 영원한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이 시의 제목 ‘까미유 끌로델의 외출’의 의미는 미지수다. 하지만 이 시의 마지막 구절 1억만 년 뒤에도 당신이 초록별로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것이 그녀의 외출일지도 모른다.     2. 해체와 융합시대의 실험시   하이퍼시에 대한 실험 이외에 이선 시인이 실험하고 있는 시는 종교와 신화와의 크로스오버적 해체와 융합이다. 그리고 이에 덧보태 문화역사적 인물에 대한 자신 나름의 인식을, 한편에서는 혹은 하이퍼시에서 실험하기도 한다. 이러한 시도가 우리 시단에 없던 바는 아니지만 이 또한 이 시대에 적절한 시적 실험이다. 시 〈붓다를 찾아가는 길〉을 먼저 보자.     기원문 AUM 오~옴 aapyaayantu mamaaN^gaani vaakpraaNashchakshuH 아피아얀투 마만가니 박프라나샥슈흐 shrotram atho balam indriyaaNi cha sarvaaNi 슈로트람 아토바람 인디야니 차 샤르바니 오움 나의 팔 다리와 내가 하는 말, 호흡 눈, 귀를 강하게 해 주소서, 나의 감각들이 활력을 얻도록 해 주소서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읽다가 네가 잠들었느냐, 네가 무지개에 두 다리를 걸치고 거꾸로 누워 온 세상을 측은히 내려다보느냐, 네가 곤히 잠들었으나, 정신은 청량하더냐, 머리가 땅에 닿아, 세상이 답답하더냐, 불면과 편두통에 시달렸더냐, 두 팔이 자꾸 길어져 온 땅을 네가 감싸 안는구나, 울지 마라, 울지 마라, 울지 마라, -네 안에 부처가 있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네 입이 세상 허물 다 받아들여, 완도 앞바다가 되었구나, 반야산, 수효사 안고 우주의 심지가 되었구나, 울지 마라, 울지 마라, 울지 마라, -네 안에 부처가 있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시 〈붓다를 찾아가는 길〉 전문     위 인용시에서의 “AUM 오~옴”은 불교의 진언眞言인 산스크리트어 ‘옴’일 것이다. 이 음절은 헤브라이어의 ‘아멘’과도 같은 것으로, 이 언어의 의미는 태초의 소리, 우주의 모든 진동을 응축한 기본음으로 본다. 부처에게 귀의하는 자세를 상징하는 언어이기도 하다. 고대 인도에서는 종교적인 의식 전후에 암송하던 신성한 음이었다고 한다. 그 “오움”을 시인은 “나의 팔 다리와 내가 하는 말, 호흡”으로 인식하고, “눈, 귀를 강하게 해 주소서, 나의 감각들이 활력을 얻도록 해 주소서”라는 기원문으로 대신하는 음절로 인식한다. 이러한 인식을 이 시에서는 전문前文 혹은 전연前聯으로 서두에 놓는다. 이 시에서의 ‘너’는 시인의 특정 사람일 수도 있지만, 불특정한 사람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읽다가 네가 잠들었느냐,/네가 무지개에 두 다리를 걸치고/거꾸로 누워 온 세상을 측은히 내려다보느냐”을 보면 싯다르타 왕자로 태어나기 전 선혜보살로 보인다. 천상계에서 미륵보살과 함께 수행을 하다가, 지상에서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을 구원하겠다는 마음에서 미륵보살보다 먼저 천상에서 내려와 싯다르타 왕자로 태어난 선혜보살로 보인다. 그러나 그 뒤에 전개되는 시행을 볼 때, ‘너’는‘깨달음을 얻기 위한 사람’, 깨달아 부처가 된 사람으로 보인다. 이 시의 제목이 ‘붓다를 찾아가는 길’에서 붓다의 의미가 석가모니라기보다는 ‘깨달을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시의 특징은 3행 “울지 마라, 울지 마라, 울지 마라,/-네 안에 부처가 있다/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의 반복이다. ‘옴’의 반복처럼 반복한다. “울지 마라. 네 안에 깨달음이 있다. 가자. 가자.피안彼岸으로 가자. 우리 함께. 아 깨달음이여. 영원永遠하라”라고 반복한다. 진언으로 지속적인 기원을 하듯이 음을 반복하면서 운율을 통해 무의미공간에 이르는 시적 트릭도 이선 시의 특성이다.     주여, 내 몸의 마디는 부끄러움과 죄로 뚱뚱합니다 마조히즘으로 뭉쳐진, 내 관절의 혹들 겨울밤, 가난한 초록별들은 지독한 마디의 아픔에 〈보라색 형벌〉이란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만, 학자들은 〈밤나무혹벌〉이라 분류하여 명명합니다 내 마디의 벌레혹들, 초봄에 비밀리에 잉태하여 보리밭에 종달새 알을 낳을 때쯤, 무성하게 자랍니다 눈의 조직들, 3-6개씩 무더기로 산란하고 유충을 부화시켜 원죄의 잎사귀 왕국을 번식시킵니다 (…) -시 〈저녁에 드리는 기도〉 첫 연에서     시 〈저녁에 드리는 기도〉는 위에서 보듯이 가운데정렬로 시행을 모아 놓았다. 그것은 아마도 ‘+’자 모양이 의미하는 바 형벌과 종교적 상징인 십자가의 중앙 집중을 염두에 둔 배열로 보인다. 그리고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를 대속代贖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기 때문에 시의 모티프와 일치하기 위해서 그리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는 첫 행 “주여, 내 몸의 마디는 부끄러움과 죄로 뚱뚱합니다”라는 속죄의 고해만 보아도 그러하다. 하지만 이 시에서 간과할 수 없는 점은 이러한 종교적 상상력이 시적 화자의 몸의 마디인 관절의 혹으로 인식하고 있는 점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밤나무혹벌’로 상상력을 증폭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밤나무를 자기화하여 죄의 표상인 관절의 혹을 밤나무혹벌로 연결시켜 나가는 발칙한 상상력이 춤추는 꿀벌로 그것을 “반전과 아이러니의 원”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벌레들이 탐내는 유충으로 그 상상력을 증폭시킨다. 그런 뒤 이 시의 결말부분에서 기도한다. “주여, 벌레들이 갉아먹다 남긴 부끄러움으로/겨울 별꽃 밭에, 하얗게 한 줄 시를 쓰게 하소서”라고. 이렇듯 이선의 종교적 상상력은 〈붓다를 찾아가는 길〉와 〈저녁에 드리는 기도〉에서처럼 신앙고백적인 기원의 의미보다는 시를 발상하는 모티브로 사용한다. 그리고 그와 관련된 아이러니적 표현구조로 시를 차용하여 종교신앙시로서의 가치를 거부한다. 시 〈성덕대왕신종〉과 〈황색구름용무늬 항아리〉는 《삼국유사》를 모티프로 한다. 《삼국유사》를 원형으로 하여 시로 형상화한 작품은 대표적으로 미당의 많은 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미당의 시가 변용된 소재로 불교적 상상력을 통해서 불교사상을 함유한 시를 쓰는데 비해, 이선의 시는 질료와 차용할 뿐 그것을 현대적인 의미로 변형시킨다는 점이 다르다.     누구의 목소리인가? -에밀레, 에밀레 어느 잃어버린 왕조의 꿈에 좌표를 긋고 달려오신, 당신 불국사 다보탑, 돌사자 머리에 접혀져 -에밀레, 에밀레 4월, 벼이삭 돋아나는 함성 6월, 보리이삭 익히는 바람소리 삼국유사 13페이지부터 소리의 굴절은 시작되었다 탑돌이 하는 신라 처녀, 하얀 버선목 살결 소리 -에밀레, 에밀레 해당화 꽃잎 위로 별빛, 치맛자락 끌리는 소리 청동곰팡이에 섞인 미나리아재비 냄새   비천상 선녀여, 역사의 꽃뿌리 더듬고 있더냐 한반도 긴 맥박 소리, 함성으로 뭉쳐 한라에서 백두까지 힘차게 뻗어 천년 동안 숨죽인 소리의 뿌리 “어허 둥둥∽, 에밀레∽ 에밀∽레∽∽” 소리의 투명한 관을 열고, 맨드라미꽃 낮잠을 깨운다 -시 〈성덕대왕신종〉 전문     위의 〈성덕대왕신종〉은 “에밀레, 에밀레”라는 신종 소리가 “4월, 벼이삭 돋아나는 함성” 소리로, “6월,보리이삭 익히는 바람소리”로, “삼국유사 13페이지부터 소리의 굴절” 소리로, “탑돌이 하는 신라 처녀,하얀 버선목 살결 소리”로, “해당화 꽃잎 위로/별빛, 치맛자락 끌리는 소리”로, 급기야는 “청동곰팡이에 섞인 미나리아재비 냄새”로 도도한 역사의 물결처럼 내려와 “한반도 긴 맥박 소리, 함성으로 뭉쳐/한라에서 백두까지 힘차게 뻗어” “천년 동안 숨죽인 소리의 뿌리”로 남아 “‘어허 둥둥∽, 에밀레∽ 에밀∽레∽∽’/소리의 투명한 관을 열고, 맨드라미꽃 낮잠을 깨운다”고 성덕대왕 신종을 인식하고 쓴 시이다. 그리고 그것을 “역사의 꽃뿌리를 더듬”는 “비천상 선녀”로도 인식한다. 신화를 원형으로 하여 현대적으로 변용하여 쓰는 시나, 또는 신화를 화소로 하여 제재전통에 맥을 같이하는 시는 우리 현대시에서 소중한 자산이다. 이에 시에 대한 가능지평을 이선의 시는 열어 놓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강가에 서성거리는 사슴을 잡아먹고 황색 암구렁이, 한 마리 여러 마리 수컷과 둥글게 한데 엉키어 구애를 하네 물속나라에도 꽃 피고, 잎이 돋네 몸을 휘말고 황색얼룩무늬를 잉태하네 ―대지의 어머니, 고구려 유화   백 번, 죄가 허물을 벗네 -시 〈황색구름용무늬 항아리〉 전반부     시 〈황색구름용무늬 항아리〉는 위의 예시에서 보듯이 유화와 주몽을 모티프로 한 시이다. 국보 제259호인 ‘분청사기 구름용무늬 항아리’는 회청색 바탕흙의 몸체에다 상감 장식의 역동적인 용을 조형한 분청사기다. 황색 바탕의 사기가 아니다. 이 시의 화소가 된 ‘황색구름용무늬 항아리’가 있는지는 몰라도,국보 제259호를 상상력으로 변용하여 쓴 시로 보인다. 그 무늬를 시인은 위의 시에서 보듯이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신화를 시적 상상력으로 황색 암구렁이가 수컷의 구애로, 황색얼룩무늬를 잉태하는 것으로 신화를 새롭게 창조한다. 그리고 이 시에서 “대지의 아들, 주몽” 신화는 “하늘과 땅이 껍질을 벗고/꽃물 흘러, 흘러 유화의 자궁 속”에서 잉태하여 “천둥 번개 타고 구름 속으로, 용이 승천하”는 것으로 표현하다. 그리고 ‘황색구름용무늬 항아리’를 “함지박만한 달이/황색구렁이 몸통에 올라앉아 힘을 주”어 “광활한 우주가 알을 낳는” 것으로 인식하고 새로운 이미지로 그려낸다.     눈썹연필을 깎는데 심이 자꾸 부러집니다 랭보와 베를렌느, 사이에는 푸른 침대와 흰 구름, 부러진 연필심이 있습니다   바다뱀이 S자로 리드미컬하게 헤엄칩니다 파란 발광체를 발사하는, 등줄기 깊은 바다에는 도로가 따로 없습니다 천지사방 어느 방향으로든 새 도로가 납니다 물고기는 부리로 초고속 도로를 내며 헤엄칩니다 사랑에도 면허증이 필요합니까? 파도가 나선형을 그리며 밀려오는 긴 밤입니다 ⊂거나 ∪∩거나 달빛은 어둑어둑 춥습니다 허공을 밀어내는 바람에서 두-둥 빈 소리가 납니다 젖은 낙엽 어디쯤에선가 살모사, 풀잎 위로 소리 없이 헤엄치던 밤 바람이 방향을 잃고, 내 속눈썹에 눕던 그 밤 당신은 첫눈처럼 어둠 속에서 빛났습니다 지느러미를 흔들며, 당신이 떠난 뒤 나는 미장원에서 긴 파마머리를 자릅니다 “보라색으로 염색할 걸” 곧 후회합니다 랭보는 베를렌느의 마침표가 됩니다 -시 〈랭보와 베를렌느, 사이에서〉 전문     랭보와 베를렌느는 프랑스의 동시대 시인이다. 십대의 나이로 파격적인 시를 쓴 랭보의 천재성에 매료된 베를렌느. 그들의 열정과 광기를 그린 영화가 〈토탈 이클립스〉(1995년)이다. 이 영화를 모티프로 삼아 쓴 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들 랭보와 베를렌느의 나이 차이는 10살이다. 그러나 나이가 많은 베를렌느가 랭보보다 다섯 해를 더 산다. 랭보는 조숙하고 반항적인 천재시인이며 방랑시인이다. 이 둘이 만난 해는 랭보가 16살일 때이다. 랭보는 ‘견자(見者, voyant)의 편지’에서 베를렌느를 칭송함으로써 그와 만나게 되고 끝내는 베를렌느를 아내와 자신 사이에서 방황하게 한다. 이러한 이들의 광기와 열정을 위의 시〈랭보와 베를렌느, 사이에서〉는 그들의 사이에는 “푸른 침대와 흰 구름, 부러진 연필심이 있”다고 표현한다. 이 표현은 그들의 실제 관계를 비유한 것인가. ‘푸른 침대’는 베를렌느의 아내이고, ‘흰 구름’은 랭보의 천재성과 영혼이며, 부러진 연필심은 이들의 사랑을 갈라놓은 랭보에게 권총을 발사한 베를렌느의 총이거나, 그로 인해 일찍 절필하게 되는 랭보의 시 창작일까? 이러한 배경을 1연에 깔고, 2연에서는 깊은 바다의 바다뱀, 물고기의 해로海路, 사랑의 면허증, 허공을 밀어내는 바람의 빈 소리, “살모사, 풀잎 위로 소리 없이 헤엄치던/바람이 방향을 잃고, 내 속눈썹에 눕던 그 밤”, “첫눈처럼 어둠 속에서 빛”나는 당신으로 이미지를 단절적으로 연결되어 진행된다. 이러한 이미지의 불연속적인 연결이 하이퍼시의 기법인지에 대한 여부와는 관계없이 이 시에서 핵심이 되는 부분은 시적 화자의 이미지가 구축된 마지막연이다. “지느러미를 흔들며, 당신이 떠난 뒤/나는 미장원에서 긴 파마머리를 자릅니다/“보라색으로 염색할 걸” “곧 후회합니다/랭보는 베를렌느의 마침표가 됩니다”가 그것이다. 여기에서도 ‘당신’이라는 시어가 두 번 노출된다. 마지막에서의 ‘당신’이 지느러미를 흔들며 떠난 바다뱀이라고 할 때, 그 바다뱀이 의미하는 바는 불확정적이다. 다음 행의 미장원과 관계된 객관적 상관물로 머리카락 혹은 머리의 가르마라는 이미지로 생각해 볼 수는 있지만 이 또한 불투명하다. 그래서 그의 시가 난해하다는 느낌이 들게 되는 셈이다. 행과 행, 이미지와 이미지의 연결이 비약적이고 단절적이라는 점에서이다. 그리고 마지막행인 “랭보는 베를렌느의 마침표가” 된다는 표현은 수미상관법에 의해 장치미학이기는 해도 이 천재시인들의 열정과 광기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나의 젖가슴은 보름이면 살이 오르고/조금 때는 살이 빠진다/해와 달과 별이 내/줄기세포를 키우는가 보다/누군가 나를 지었다,/작은 키, 급한 성격, 갈색 눈동자, 예민한 입맛/가는 목소리, 위의 크기와 창자길이,/누군가 내 유전자를 조립한 거다//내 정신의 줄기세포는 어디에서 이식받은 것일까?//페이지가 접혀,/뇌혈관 어디쯤 파묻혀 있을 니체, 보들레르, 토스토에프스키,/이사도라 덩컨, 까미유 끌로델, 열기와 헛소리/내 피는 샤갈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가?/파랑색 스카프, 파랑색 가방, 파랑색 원피스,/나의 詩도 파랑색이다./착하지도 부지런하지도 않은 나의 詩,/나의 詩에는 적도의 피가 들끓고 있는데/러셀의 연애론보다 더 겁쟁이인 불쌍한 나의 詩,/감염되지 않은 단어가 내 시에 한 줄이라도 있을까?/생각의 껍질까지, 타인의 유전자가 흐른다/(어머니의 눈으로 본 아버지,)/(언니의 코로 맡은 돈 냄새,)/내 몸의 세포조직엔 적도의 바람과 햇빛이 녹아 있다/(한국인의 조상은 동남아인이라고 흥분하던 KBS,/9시 뉴스앵커, 내 두툼한 입술과 주먹코는 분명 남방계다)//하늘은 초록색 보자기를 뒤집어쓰고/나무들 밑둥 잡고, 오늘도 땅에다 부지런히 글씨를 쓴다/제 생각을 뿌리 채 땅속에다 모두 이식하고 싶은 거다.//나뭇잎의 떨림을 이식받아/바람 앞에 내 줄기가 떨리듯/내 굴절된 파장이/혹, 누군가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할지도 모른다/어머니가 당신 심장 한쪽을 떼어내/내 할딱이는 심장에 마저 붙여주고 갔듯이,//지금, 나는 누구의 푸른 눈동자로 응고되어 가는 너를 보는가? -시 의 전문     위의 시의 제목인 ‘셀룰러 메모리Cellular Memory’는 주에 의하면 “장기이식 후 기증자의 성격과 습성까지 전이되는 현상”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선 시인의 다른 시보다 이 시는 비교적 쉽게 자신을 드러낸 시, 혹은 자기 고백시라는 판단이 든다. 이 시는 굳이 설명이나 해설이 요하는 시는 아니다. 그냥 읽으면서 이해해도 좋을 시이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자신의 시를 “착하지도 부지런하지도 않은 나의 詩”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이선은 좋은 시, 새로운 시, 독자들에게 충격 혹은 전율을 주는 시를 쓰려고 부지런히 공부하는 시인이다. 그의 시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공부해야 한다. 사전을 찾아보고 인터넷을 검색하고 관련서적을 뒤져봐야 한다.그의 상상력은 어떤 때는 지적이고 정적일 때도 있지만 대범하고 발칙하다. 앞서 개진했지만, 이미지 연결의 비약성과 예기하지 못한 이미지의 증폭 등은 낯설게 하기가 아닌 그의 시의 참신성과 독창성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니체, 보들레르, 토스토에프스키,/이사도라 덩컨, 까미유 끌로델, 열기와 헛소리”등에 대한 흠모와 그들 작가들의 문학혼에 대한 탐색은 부지런히 공부하지 않는 시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부분이다. 그는 공부해서 시를 쓰는 시인이기도 하지만, “내 피는 샤갈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가?/파랑색 스카프, 파랑색 가방, 파랑색 원피스,/나의 詩도 파랑색이다”의 키워드인 파랑색 이미지가 의미하는 바 젊은 시를 쓰는 감성적인 시인이며 판타지를 몽상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그뿐 아니라, 우리민족의 전통적인 정신사와 역사에 한 발을 디뎌놓고 있는 시인이기도 하다. 통시적으로 시간이동과 공시적으로 공간이동이 가능한 크로스오버시대의 첨단을 몽상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1    심상운, "디지털시에 대한 이해", 한국시문학아카데미 특강 자료 외 2편 댓글:  조회:3094  추천:0  2018-02-03
「디지털 시」에 대한 이해 --디지털 시의 원리와 언어의 특성   심 상 운   1. 들어가는 글-디지털 시대의 문화감각 21세기 문화의 핵심 동력으로 자리 잡은 디지털(digital)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 없이 디지털 감각, 디지털 시를 말한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나 다름없다. 따라서 디지털이 펼치는 놀라운 세계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디지털 시대의 문화에 대한 이해와 참여가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의사소통 방식은 아날로그 형식에서 디지털 형식으로 바뀌었고, 여기서 생기는 모든 변화를 통틀어 디지털 혁명이라고 한다. 혁명이라는 과격한 단어를 사용한 것은 컴퓨터 체계와 그에 따른 커뮤니케이션의 시스템 변화 때문이다. 즉 CD, 정보통신기기, 휴대폰, 개인컴퓨터(P.C.), 인터넷(Internet), 통신위성, 광섬유, HDTV, 디지털 영상 등, 영상을 공학적으로 처리하는 영상공학, 영상신호처리(Image Signal Processing) 등의 영역은 현대사회의 커뮤니케이션의 구조를 밑바닥에서부터 뒤바꾸는 근원적인 동력이 되어 사회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는 현대인들은 부지불식중에 생활 패턴, 사고방식, 감각, 감성, 언어 등에 변화를 겪으며 살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변화의 현상을 디지털 문화라고 하고, 디지털 문화를 향유하고 사는 사람들은 나이와 관계없이 디지털 세대라고 한다. 인터넷 네트워크 속의 이 세대는 새로운 정보기술의 활용능력의 차이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디지털 세대의 특성은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요인에 의해서 움직이고, 소외에 짓눌리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함께 나누고 공유하는 집단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강한 독립성과 감성을 드러내며, 지적 개방성을 나타낸다. 자유로운 표현, 확실한 소신, 혁신적 태도, 탐구정신, 즉각적인 반응, 공동 관심사에 대한 민감성은 햄릿 같은 아날로그 시대의 세대들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그들은 익명성에 숨어서 자신의 본래적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선입견에서 해방되어서 세대와 성(性)을 뛰어 넘기도 한다. 그리고 파도와 같이 무분별한 군종성(群從性)에 휩쓸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만이 통용하는 상징이 있으며 언어(문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용 가능한 커뮤니케이션을 사용하는 자기표현에도 익숙하다. 따라서 그들은 귀에 대응하는 라디오, 눈에 대응하는 신문 등 하나의 미디어에 하나의 감각능력으로만 대응하는 아날로그 시대의 ‘감각분할’ (그것을 한쪽으로의 미디어에 치중하는 모노미디어 Monomedia 라고도 한다.)의 불완전성에서 벗어나서 디지털의 ‘감각통합의 시대’ 에 사는 세대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인간의 몸 안에서 오감을 자유로이 융합하듯 하나의 미디어 안에서 사운드, 이미지, 텍스트, 데이터의 다양한 요소를 자유자재로 혼융하여 저장, 전달, 재생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통제 범위를 넘는 전달성과 재생(재창조)성은 그 한계를 규정하기 어렵게 만든다. 고대 중국의 한 황제가 궁정 수석 화가에게 “벽화 속의 물소리가 잠을 설치게 한다.”고 궁궐에 그려진 벽화를 지워버리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인간은 원래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 등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감각능력을 응집시켜 수용하는 감성통합의 존재임을 암시한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의 문화감각을 향유할 수 있는 현대인의 자질로 연장된다. 이런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변화의 중심 원리와 특성(디지털과 컴퓨터의 특성)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시 창작의 방법론을 모색하는 것은 현대시의 피할 수 없는 과제다. 그 이유는 시란 대상에 대한 정서의 표현이고, 새로운 해석이고, 이름붙이기이고, 혼란한 생각들을 질서화 하여 깨달음을 주는 것이라는 현대시의 이론에 디지털 시대의 독자들이 과거와 같이 언뜻 그대로 동의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에 대한 이런 인식은 전통적인 서정시나, 지성의 기능을 우월하게 내세우는 모더니즘 시의 일반적인 경향에 대한 반동(反動)이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의 독자들은 시인이 안내하는 대로 끌려가고 설득을 당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따라서 시를 의미의 예술에서 해방시켜서 의미보다는 감각과 이미지의 예술로 전환시키고 독자에 대한 일방적인 설득이 아닌 독자 참여의 공간을 확대시키는 시의 방법론은 시대적인 당위성을 갖는다. 그런 의미에서 디지털의 특성과 디지털 시대의 감성을 탐구․수용하고 그것을 현대시의 표현기법으로 활용하는 것은 현대시의 새로운 길 열기라고 말할 수 있다. 2. 디지털의 컴퓨터 공학적 특성   디지털은 손가락을 뜻하는 라틴어 ‘digitus’에서 숫자 ‘digit’, 2진법을 의미하는 ‘digital’이란 단어로 형성되었으며, 모든 계산을 ‘0과 1’, ‘켜짐과 꺼짐(on-off)’, ‘있음과 없음’의 구조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아날로그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자료를 1,2,3,4,5,6...과 같은 연속적인 실수가 아닌, 특정한 최소 단위를 갖는 이산적인 수치를 이용하여 처리한다. 이런 원리를 지닌 컴퓨터의 정보처리 방식이 만들어내는 디지털의 특성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디지털은 정수로 이루어진 최소 단위들(unit)이기 때문에 분리와 합성에 의한 변화가 자유롭다. 그것은 물리적인 힘에 의해서 연속적으로 운용되는 아날로그에 비해 디지털은 숫자나 문자로 표시되는 *데이터(data)에 의해서 불연속적인 변화를 순간적으로 구현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카메라에서 화소(畵素)는 화소(畵素)의 위치와 색상을 숫자화 한 데이터에 의해서 구현된다. 이 데이터는 소리의 높이 성량 음색 등도 숫자로 처리하고 보존하기 때문에 언제나 정확한 소리의 재생과 전달이 가능하다. 수리적(數理的) 데이터로 처리되는 이 최소 단위들(unit)은 컴퓨터에서 문서와 통계 자료 뿐만이 아니라 음성 및 영상 자료까지 재편집 재창조를 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을 편집(edit)이라고 하는데, 사용자가 컴퓨터를 이용하여 어떤 문서를 작성하거나 흩어져 있는 여러 자료들을 필요한 형식에 맞추어 재배열하는 것을 말한다. 이 때 편집을 하기 위해 이용되는 워드프로세서 등의 편집 도구를 편집기 또는 에디터(editor)라고 한다. 따라서 디지털은 복제, 삭제, 편집이 간편하며, 복사물과 원본의 차이가 없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 최소 단위들의 결합과 분리 즉 편집은 디지털의 기본적 특성이 된다. 그 대표적인 예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만들어내는 컴퓨터 그래픽의 기능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컴퓨터그래픽은 어떤 그림의 부분을 떼어내고 다른 것들과 합성시켜서 원래의 그림과는 전혀 다른 그림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 이 때 그림의 의미도 바뀌게 된다. 또 은행나무 뿌리와 버드나무의 줄기와 벚나무의 꽃을 합성(집합적 결합)하여 새로운 나무를 만들 수 있다. 현실세계에서 이런 변형은 실제 생명체의 유전자(DNA) 조작(생명공학)에 의해서 가능하지만, 디지털의 가상현실에서는 데이터의 조작(최소 단위들의 수리적 조합과 분리)에 의해서 순간적으로 구현된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 그림을 형성하는 단위의 데이터 속에는 원래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탈-관념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적인 근거가 존재한다. 이 가상현실의 세계는 가상적인 세계를 현실로 착각하게 한다. 영화 에 나오는 동물들은 버추얼 그래픽(Virtual graphic)이 만든 그림이다. 이 “버추얼”의 영상은 색깔, 모양 등을 마음대로 변화시킨다. 어떤 사람이 누워 있을 때, 그의 옷을 바꿔 입히기도 하고, 옷의 색깔을 변화시키기도 하고, 그 사람의 얼굴 팔 다리 등을 바꿀 수도 있다. 또는 그 사람의 주변 환경을 마음대로 바꿀 수가 있다. 또 현실세계의 소리의 일부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등)를 채집하여 그것을 여러 음계의 소리로 확대․변형시키기도 한다. 아직 후각의 디지털화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그것도 가능하다고 한다. 따라서 아날로그 시대에는 사진이 사실 확인의 증거가 될 수 있었지만 디지털 시대의 사진은 단순한 이미지가 될 뿐이다. 이런 디지털의 기능들은 모듈(module)화에 의해서 더 효과적으로 운영된다. 컴퓨터의 여러 부분에서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 요소로서 작용하는 모듈은 시스템을 구성하는 독립적 단위가 되어서 기능의 효과를 높이고 더 분화된 독자적 역할을 수행한다. 모듈은 컴퓨터에서 전체와 부분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제시하고 있다. 중앙통제의 시스템에 의해서 일괄적으로 정보가 처리(입력, 편집, 출력 등)될 때, 한 부분의 기능이 장애를 일으키면 그 장애로 인해서 전체적인 장애현상이 발생한다. 그래서 그런 비능률적 중앙통제의 기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기능을 분산하고 독립시켜서 시스템 전체의 능률을 강화하고 장애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한 구조가 컴퓨터의 모듈이다. 이 모듈은 건축 재료의 효과적인 사용을 위한 방법으로 고안된 것을 컴퓨터에서 프로그램 시스템의 구조에 응용한 것이다. 정밀한 조직의 네트워크 속에서 다른 부분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는 운용과 독립성을 갖는 모듈화의 특성은 새로운 프로그램(시스템)을 만들 때, 이미 만들어진 모듈을 가져다 쓰면 된다는 재사용성과 다른 부분과 연관이 없이 자기 일만 수행하기 때문에 기능을 고도화하고 확대하는데 있다. 그리고 이미 만들어진 모듈은 새로운 프로그램(모듈)을 생산하는 모체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듈은 객체지향성에 의해서 독립된 영역을 구축한다. 디지털의 자료(데이터)는 아날로그에서 채집한 자료(화상, 소리 등)를 바탕으로 성립된다. 그것을 샘플링이라고(sampling 견본추출) 하는데, 아날로그의 소리가 디지털로 변화될 때 아날로그에 있던 노이즈(noise 잡음) 현상은 말끔히 제거된다. 그것은 디지털의 명료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디지털은 감각자체의 변화가 아니고 기법의 변화에 한정되기 때문에 고도의 디지털 그림(동영상)이나 음악의 감각은 아날로그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디지털의 단절적 현상(초기의 계단현상)은 아날로그의 연속적인 현상(경사진 언덕)으로 점차 복귀된다. 그것은 디지털시계가 외형상으로는 아날로그시계의 모양을 닮아 가는 것과 같다. 이 밖에 아날로그는 고갈되거나 변질되는데 비해 디지털은 무한히 재사용해도 고갈되거나 변질되지 않는다는 것도 디지털의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데이터(data- 컴퓨터가 통신, 해석 및 처리를 할 수 있도록 형성된 사실 및 개념의 표현을 어떠한 조건, 값 또는 상태로 나타내는 숫자나 문자)   3. 현대시에 나타난 디지털적인 요소 가, 이상(李箱) 시에 나타난 디지털적 요소 현대시에서 1930년대 이상(李箱)의 시만큼 난해하면서도 많은 연구 과제를 던져주는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의 시 중에서도 대표적인 난해시(難解詩)로 꼽히는 시가「오감도烏瞰圖」(詩第一號)다. 이 시가 난해한 이유는 현실적 관념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불확실한 의미의 공간” 때문이다. 그래서 다양한 해석의 방법과 의미가 생산되었으며 앞으로도 누구나 도전해 볼 가치가 있는 매력적인 공간을 남겨놓고 있다. 그러나 그 “불확실한 의미의 공간”은 디지털의 특성과 만날 때 선명하고 명료한 공간이 된다. 그 특성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는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글자나 그림)을 구성하는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 같다는 것. 2) 이 시의 언어들은 어떤 의미에도 감염되지 않아서(탈-관념) 분리와 결합을 통한 변형이 자유롭다는 것. 3) 이 시의 언어들의 결합은 집합적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4) 이 시가 표현하는 것은 가상현실의 영상 즉 추상적인 버추얼 그래픽(Virtual graphic)이라는 것. 5) 이 시는 컴퓨터 그래픽의 자유로운 그림 바꾸기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適當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五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六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八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九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事情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아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길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의兒해가道路를疾走하지않아도좋소. -----이상(李箱)「烏瞰圖」(詩第一號)전문 디지털의 기본적 특성을 나타내는 이 다섯 가지의 개념에「오감도烏瞰圖」(詩第一號)를 대입해보면 이 시가 안고 있는 새로운 시의 공간이 열린다. 먼저 이 시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는 도로(道路)를 질주하는 13인(十三人)의 아해(兒孩)들(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들)에 대한 해석이다. 그 아해(兒孩)들을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는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글자나 그림)을 구성하는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 같다는 첫 번째 특성에 대입하면 그들은 고정된 의미가 없는 이미지 또는 재료(object)라는 디지털적 해석이 나온다. 따라서 시 속의 아해(兒孩)들를 수식하는 제1,제2,제3....제13이라는 서수(序數)에도 어떤 의미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 확실해 진다. 그것은 이 서수(序數)가, 작가가 임의로 지정한 추상적인 숫자라는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1의 아해를 제2의 아해로 바꾸어도 되고 제3의 아해를 제10의 아해로 바꾸어도 된다는 가설이 성립된다. 그것은 의미가 없는 서수(序數)로 표시된 이 시의 아해(兒孩)들은 시인이 독자들의 호기심을 유발시키고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의미와 무의미의 이중적 이미지가 들어 있는 재료(object)라는 판단의 근거가 된다. 따라서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를 “ 하이퍼시와 포스트구조주의                                             심 상 운     1, 롤랑 바르트의 이상적 텍스트와 하이퍼시의 구조적 특성   프랑스의 문예비평가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구조주의적 분석에서 해체 비평으로 넘어가는 접점에 위치한『S/Z』(1970)에서 이음, 노드, 네트워크, 다중 경로 등의 개념을 사용하여 이미지들의 덩어리들(그의 말로는 lexia)로 구성된 이상적인 텍스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 이상적인 텍스트에서는 네트워크는 다양하고 상호작용적이며, 그들 중의 어떤 것도 다른 나머지를 초월할 수 없다. 이 텍스트는 기표(signifier)들의 거대한 별무리이지 기의(signified)들의 구조가 아니다.그것은 시작도 없다. 그것은 뒤집을 수 있다. 우리는 그것에 여러 입구에서 접근할 수 있다. 그것들 중 어느 것도 자기가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다. 그것이 동원하는 부호들은 눈이 미치는 한 확장된다. 그 부호들은 결정 불가능하다.”   그의 말은 텍스트의 의미에 내재적인 통일성이 전혀 없는, 다양한 언어가 기표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그가 상정한 이상적인 텍스트에 관한 것이지만 그것을 하이퍼시에 대입할 때‘기표(signifier)들의 거대한 별무리(이미지들의 덩어리들)’란 말과 함께 하이퍼시의 구조적 특성을 예리하게 집어낸 것 같아서 놀라움을 준다. 초기 구조주의에서 랑그(langue)를 말하면서‘저자(著者)의 죽음’을 지적한 바르트는 포스트구조주의에서는 독자들이 텍스트 속으로 들어가는 문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과 독자들은 저자가 깔아놓은 기의(記意)에 구속되지 않고 텍스트의 의미부여과정을 자유롭게 개방하고 폐쇄해야 한다는 이론을 내세운다. 그의 이론은 독자들을 고정된 의미의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만든다. 그것은‘진리’나‘실재’에 대해 위압적인 강요를 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언어에 대한 반발로 초기의 구조주의에서 전환된 1970년대의 포스트구조주의의 면모를 보여준다.   하이퍼시와 비하이퍼 시의 기본적인 차이는 비선형/ 선형, 비순차/ 순차, 다선구조/단선구조라는 대조적 형태에서 찾아진다. 따라서 하이퍼시에는 기승전결(起承轉結) 등 전통적인 시의 구조가 배제 되고, 새로운 연결구조가 성립된다. 그 구조는 독자들의 생각을 의미(정해진 정보)’로부터 벗어난 상상의 네트워크로 퍼져나가게 하는 구조다. 그 속에는 어떤 정해진 중심 즉 기의가 없다. 그것은 하이퍼시가 은유의 시가 아니고 환유(換喩)의 시 즉 기의가 아닌‘기표(記標)의 시’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저자에 의해 정해진 순서와 기의에 익숙해진 독자들은 기표만으로 끝나는 하이퍼시에서 당황한다. 하이퍼시의 기본구조는 이미지의 단위(unit)들로 형성된‘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다. 산발적으로 퍼져있는 이미지들은  ‘의식의 링크(link)’에 의해 연결된다. 이 링크는 하이퍼텍스트의 용어이지만 하이퍼시에서도 사용된다. 그 단위들은 한 단어 또는 몇 개의 단어일 수도 있고 독립된 이미지 또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 단위들은 의식과 무의식이 섞여있는 의식의 흐름으로 형성된다. 땅속줄기들의 연결과 같은 개념으로도 인식되는 이 흐름은 무엇을 무엇과 연결시키며 어떤 상상(想像)이 다른 상상의 앞에 나오거나 뒤따라오는지를 결정하는데, 독자의 공간도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에 다양한 방법을 수용하고 정해진 구조(경계)를 고수하지 않는다. 그것이 하이퍼시 구조의 특성이다. 따라서 하이퍼시는 전통적인 시에서 중요시하는 메시지(주제, 관념)의 전달보다 상상이나 공상(空想) 속의 현상(現象)에 대한 감지(感知)를 중요시한다. 따라서 고정된 기의에서 벗어나서‘이미지의 덩어리’를 감각하게 하는 하이퍼시에서는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 메시지는 이미지와 이미지의 충돌과 결합이 만들어내는 암시(暗示)에서 찾게 된다.   이러한‘무경계(無境界)의 기법’은 상상의 무한한 생산과 확산의 구조를 형성하는 기반이 되어 포스트구조주의의 이론가들(들뤄즈, 가타리)이 말한 '경계를 만드는 분절선(分節線)들의 감옥으로부터의 해방'과 상통한다. 층(層)이나 영토(領土)를 만드는 선(線)으로부터의 탈출과 해방은 인간의 전통적 의식에 혼란스러움을 수반하지만 그것이 인간의 무의식(無意識)의 사고(思考)와 연관된다는 점에서 자연(自然)에 더 가깝게 접근된다.   2. 하이퍼시와 리좀의 관계   20세기 후반 프랑스의 철학자, 사회학자, 작가인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년 1월 18일 ~ 1995년 11월 4일)는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1930〜)와 위계적(位階的)이고 계층화, 영토화된 철학적 사고를 수평적 사고의 구조로 개혁하기 위해서『천 개의 고원』(1980년)에서 하나의 새로운 은유를 제안하는데 그것은 바로 리좀이다. 하이퍼시의 다선구조는 앞에서 언급한 탈-경계의 상상과 사유의 이미지로서 땅속줄기 즉 리좀(Rhizome)의 이론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땅 밑 줄기인 리좀은 뿌리나 곁뿌리와 전적으로 다르다. 구근(球根, bulbs)이나 덩이줄기(tubers)가 리좀이다. 뿌리나 곁뿌리를 가진 식물들도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보면 리좀 형태를 하고 있을 수 있다. 두더쥐 굴 같은 것도 그것이 가진 서식, 식량조달, 이동, 은신, 출몰하는 기능에서 보자면 리좀이다. 리좀 그 자체는 매우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감자나 개밀(couchgrass)에서 잡초에 이르기까지 리좀은 가장 좋은 것에서 가장 나쁜 것까지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리좀, 즉 수평으로, 사방으로 펼쳐지는, 중심이 없는 뿌리줄기식물(박하나무, 풀들)은 뿌리를 중심으로 위로 솟아나가는 위계적으로 조직화된 나무뿌리들과는 상반된 구조를 보여준다.곁뿌리나 잔뿌리들이 모이는 중심이 없는 덩이줄기들은 가지 또는 줄기는 서로 만나고 흩어지는 방식으로 접속하고 분기(分岐)하며 우발적, 역동적으로 뻗어나가는 생명력을 지닌다. 들뤄즈와 가타리는『천 개의 고원』에서 이런 리좀적 구조를 제시하면서 그들이 지향하는 새로운 개념을 표출하고 있다. "글쓰기는 의미작용(signifying)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영역을 측량하고 그곳의 지도를 만드는 것과 관계한다." 는 말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책의 형식으로도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의 에서 책의 형식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혀놓고 있다. "이 책은 장(章)이 아니라‘고원들(plateaus)‘로 이루어져 있다. 맨 마지막에 읽어야만 하는 결론을 제외하고는, 이 고원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서로 독립적으로 읽힐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리좀을 통해서 새로운 형태의 글쓰기와 책의 개념을 제시하는『천 개의 고원』은 현대 철학의 한 복판에서 포스트구조주의의 탈-주체, 탈-중심, 탈-영토의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도의 표출로 인식된다. 이 책에서 리좀의 특성을 보여주는 여섯 가지 원리는 다음과 같다.    연결과 이질성의 원리(principles of connection and heterogenity) 다양체의 원리(principle of multiplicity) 의미작용 없는 단절의 원리(principle of asignifying rupture) 지도 제작과 전사(轉寫)의 원리 (principles of cartography and decalcom ania)   연결과 이질성의 원리   "리좀 체계 내의 어떤 점이든 다른 점과 연결될 수 있고 연결되어야 한다." 리좀은 구조상 반위계적이며 수평적이다. 어느 것이 먼저고 어느 것이 나중이라고 할 수도 없고, 어떤 점은 다른 어떤 점과만 연결되어야 한다고도 말할 수 없다. 모든 점들은 연결되어 있고 또 연결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연결은 이질적인 것들 간의 연결이고, 이질적인 것과의 연결은 미지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가 만들어 놓은 공간을 통과하는 모든 독자들은 새로운 경로를 찾는 탐험가, 미개의 땅을 찾아가는 모험가, 미지의 것에 대한 예언가의 경험을 하게 된다. 하이퍼시의 마디들(이미지)의 연결도 이와 같은 효과를 위한 것이다.   다양체의 원리   "다양체는 주체도 객체도 갖지 않는다. 다양체는 결정들(determinations), 크기들, 그리고 차원들만을 가질 뿐이다. 그리고 여기서의 차원은 그 단계가 높아지기 위해 다양체의 본성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하나의 모임(assemblage)은 정확히, 그 연결이 증가함에 따라 필연적으로 본성상의 변화를 겪는 다양체의 차원들의 이러한 성장이다. 리좀에는 구조, 나무, 뿌리 속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점들이나 위치들(positions)이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선들만이 존재한다." 이 이론은 하이퍼시는 위계적 구조가 강요하는 각각의 단위에 대한 고정된 해석을 거부하고,  다양한 이미지들과 그 이미지들의 집합(이미지 덩어리)이 빚어내는 새로운 세계와 감각을 중시한다는 것과 연결된다.   의미작용 없는 단절의 원리   "리좀은 어느 한 지점에서 끊어지거나 산산히 부서지더라도 예전의 선들 중의 하나나 또는 새로운 선들 위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이 구절은 모든 리좀은 층을 만들고, 영토를 만들고, 의미작용을 수행하는 고정된 틀의 선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또한 끊임없이 달아나는 탈영토화의 선들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선들이 파생될 때마다 리좀 안에는 단절이 있게 된다. 하이퍼시 속에도 의미작용을 하는 이미지와 의미작용을 거부하는 이미지들이 섞여 있다. 이 두 이미지들은 단절되기도 하고 연결되기도 한다.   지도 제작과 전사(轉寫)의 원리   “지도를 갖고 길을 찾아가는 경우를 상상해 보자. 우리는 지도를 찢어서 다닐 수도 있고, 거꾸로 뒤집어서 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자기에게 필요한 새로운 정보나 기호를 그 위에 덧붙여 기록해 넣을 수도 있다. 여기서 지도는 실제 세계와 계속해서 맞닿는다. 지도는 그 자체가 리좀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다양한 입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것이 리좀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이다. 지도는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와 맞닿아 있다. 지도는 벽에 그려질 수도 있고, 예술 작품처럼 구상될 수도 있고, 정치적 행동이나 명상의 일환으로 구성될 수도 있다.”   리좀의 원리에서 현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지도(map)의 이미지는 가상공간을 바탕으로 하는 하이퍼시의 발상원리와 접합된다. 하이퍼시는 의식의 흐름 속에서 발생하는 이미지의 덩어리지만 현실과의 관계 속에 생명력을 얻는다. 그리고 시인과 독자의 관계를 암시한다. 시인이 지도를 만들어 내지만 지도(가상현실) 속에서 독자와 시인은 동반여행자가 되기 때문이다. 지도는 스스로의 내부에 갇혀 있는 무의식을 복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구성해 내고 창조한다. 지도의 에너지는 현실세계와 접점을 이루는데서 발생한다. 그리고 그것을 현실의 공간 속에 재현하여 수행(performance)함으로써 더 큰 에너지가 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포스트구조주의의 들뤄즈와 가타리의 리좀 이론은 하이퍼시의 창작이론과 상통하는 접점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리좀의 이론은 하이퍼시 창작에 많은 영감과 동력을 제공한다. 컴퓨터의 하이퍼텍스트 원리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컴퓨터에서 벗어나서 독자적 형태를 취하고 있는 하이퍼시의 에너지는 의식의 흐름, 탈-관념(사물성), 다선구조, 가상현실(상상과 공상의 공간), 기표, 등을 바탕으로 한 새롭고 다양한 감각과 상상의 무한한 확대에서 분출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지의 구조를 통합하고 변화시키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은유, 상상과 추리, 수평적 공간이동의 사상과 합치된다. 하이퍼시의 다양한 이미지들의 결합을 리좀에 대한 논의와 연결지어보면 그 유사성이 두드러진다. 리좀이 포스트구조주의의 탈-주체, 탈-중심, 탈-영토의 이념을 실현하는 어떤 시스템을 보여주기 위한 비유라면, 하이퍼시는 그러한 시스템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기표의 이미지 덩어리로 인식된다.   3, 하이퍼시와 무의식의 관계-자크 라캉의 무의식에 대한 이해   하이퍼시의 중심에는 의식의 흐름이 놓여 있다. 이 의식의 흐름은 의식과 무의식의 뒤섞음이 만들어내는 이중 삼중의 다차원의 공간을 만들어 내고 시간의 질서도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기표와 기의의 관계, 무의식의 기표, 기표의 미끄러짐, 기표가 기의에 닻을 내리는 곳 등은 하이퍼시를 창작하는 데만이 아니라 시인의 내면의식을 이해하고 즐기는 중심요소로 작용한다. 따라서 하이퍼시의 이론에서 20세기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 -Marie-Émile Lacan, 1901~1981)의 이론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20세기 중엽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등과 더불어 활동한 그는 ‘구조주의 정신분석학’의 대표자로서 프로이트(Anna Freud)의 정신분석학을 구조주의적 맥락에서 새롭게 재창조했으며, 거기에 인간존재에 대한 중요한 철학적 성찰을 가미함으로써 포스트구조주의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였다.   주체를 지배하는 무의식( unconsciousness)   무의식(unconsciousness)은 프로이트 학파에서 사용하는 정신분석의 용어로, 의식적인 자각을 할 수 없거나 의식을 통해 접근할 수 없는 사고, 기억, 욕망 등을 가리키는 마음의 세계이다.   “자크 라캉은 S. 프로이트를 구조주의적으로 재해석해서 무의식이 언어적으로 구조화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개인의 말이 특히 정신과 의사와 환자 사이의 관계에서 동시에 두 수준에서 작용한다고 본다. 개인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의식하면서 말하지만, 동시에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전혀 다른 것을 무의식적으로 얘기한다고 한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주체는 '코기토'(cogito:생각하는 나)에 의해 구성된다. 이때 의식적·반성적 주체가 자아라면 다른 하나는 누구인가? 라캉은 이 다른 하나를 무의식이라고 본다. 그는 무의식이 언어처럼 은유와 환유의 체계로 구조화해 있다고 본다. 이 무의식은 한 개체 안에서 그를 이끄는 타자(他者)이다. 이 타자는 자아에 앞서서 얘기하며 자아의 욕망을 통제한다. 개인들은 자신이 행위하고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 구조가 말하게 하고, 행위하게 하고 욕망을 갖게 하는 것이다.”(-브리테니카 백과사전에서 부분발췌) 이런 사유는 인간을 이성과 주체로 정의했던 서구 사유의 전통(데카르트의 명제)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무의식의 발견이란 의식 속의 나가 모르는 나에 대한 인식이다.의식적인 나는 무의식의 나를 모르지만 무의식의 나에서 발생하는 움직임이 의식적 나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이 ‘무의식의 나’로 인해 인간은 원초적으로「분열증」환자가 된다는 것이 라캉의 주장이다.주체(나)가 의식적 주체와 무의식적 주체로 갈라진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은 분열적 존재임을 증명한다.   라캉에 의하면 유아기(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아이는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없는 에 있는 존재이다. 아이는 의식의 거울에 나타나는 파편화된 자아의 이미지 속으로 어떤 통일성을 투사하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아이는 하나의 ‘허구적인 이상’ 즉 자아를 만들어 낸다. 라캉은 이 세계를 상상계라고 한다. 이 상상적 경향은 아이가 자란 후에도 계속된다. 그러나 언어를 배우면서(언어의 바다 속에서) 아이의 의식 속에는 상징의 세계가 펼쳐진다. 라캉이 말하는 무의식 즉 타자(他者)는 어린아이가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옮겨갈 때 어린아이의 무의식에 자리 잡는 언어, 기표의 세계다. 어린아이는 상상계의 달콤함과 환상을 포기하는 대신 상징계 안에서 인간으로서, 주체로서 일어선다. 그래서 타자란 ‘나와 남’을 분별하는 상호주체성의 장이기도 하다. 상징계에 들어서는 동시에 개인들의 무의식에는 상호주체성이 각인된다. 상호주체성이라는 말 속에는 바라봄과 보여짐이라는 두 개의 주체가 있다. 보여짐을 모르는 주체는 상상계인 에 있는 주체이기 때문에 대상을 실재로 믿고(동일시함)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소외된 나르시즘의 신경증환자에 해당된다. 이 고착에서 벗어나 상징계로 이행할 때, ‘나’는 바라봄과 보여짐의 두 가지 의식을 갖게 되고, 대상이 허구임을 깨닫고 다시 또 연기된 대상을 향해서 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상계와 상징계의 차이가 이성에 환상을 개입시키는 작용을 함으로써 인간은 현실적인 면과 비현실적인 면을 공유하게 된다   무의식의 한 가운데에는 욕망(desire)이 자리 잡고 있다. 욕망은 인간의 근원적인 결핍에서 생긴 것이다. 결핍은 어린 아기가 어머니의 몸에서 분리되어 나올 때 형성되는 인간의 원초적 조건에 의해서 발생한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는 최초의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기억은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는다. 따라서 라캉은 욕망이 지향하는 곳은 어떤 분열(결핍)도 없는 미지의 ‘신화의 세계’라고 한다. 의식 속에는 욕구(need)와 요구(demand)가 들어 있다. 욕구는 사물들을 향하지만 요구는 사람들을 향한다. 어린 아기는 장난감을 욕구하지만 무의식 속에서는 엄마의 사랑을 요구한다. 욕구와 요구는 합쳐지지 않는다. 그래서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간극이 생긴다. 라캉은 욕망과 욕구 사이에 ‘충동(pulsion)’을 넣는다. 충동은 욕구와 유사하지만 ‘성애적(性愛的)’ 모양을 띤다는 점에서 욕구와는 다르게 해석된다. 이 성애적(性愛的) 충동은 예술적 에너지의 원천되기도 하는데, 작가에 따라서 작품의 내면에 잠재되기도 하고 표면으로 솟구치기도 한다.   욕망은 영원한 그리움(결핍에 대한 충족희망)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다. 시인이 시를 창작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욕망은 번뇌의 원천이기도 하다. 욕망의 허상을 실재라고 믿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때 욕망은 위험해진다. 그러나 자신의 시선 속에 타인을 억압하는 욕망의 시선이 깃들어 있음을 깨달을 때 좀 더 쉽게 타인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집착하는 대상이 허상임을 스스로 인식할 때 집착에서 해방된다. 따라서 라캉이 말하는 ‘실재계와의 만남’은 스스로가 욕망하는 주체임을 인정할 때 열리는 정신의 자유로운 경지이다. 그것은 불교경전『금강반야바라밀경』의 끝부분 “일체의 함이 있는 것들은 /꿈과 허깨비와 거품과 그림자 같으며/이슬 같고 또한 번개와도 같으니/마땅히 이와 같이 관할지니라.//와 상통한다.   라캉의 언어관   꿈은 억압된 욕망들의 배출구라는 프로이트의 이론은 라캉에 의해 재해석된다. 그는 왜곡되고 수수께끼 같은 꿈의 현상이 은유와 환유라는 기표의 법칙에 따른다고 한다. 기호에 대한 라캉의 설명에 의하면 기의는 ‘떠 있는’ 기표 밑에서 계속 ‘미끄러진다.’ 그의 이론에는 왜곡되지 않은 기표들은 없다. 이런 그의 정신분석은 무의식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이라는 점에서 구조주의의 객관성과 부합된다. 따라서 그의 이론은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이론과 맥을 같이 한다. 먼저 기표들의 장(랑그, 언어의 법칙)이 존재하고, 각 개인의 무의식이 그 언어법칙에 따라 작동한다는 라캉의 언어인식은 의식으로부터 기의가 생기고 기의를 나타내기 위해 기표가 존재하는 것이라는 현상학적 언어인식(선관념후사물)과 상반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캉에게서는 소쉬르에게서처럼 기표와 기의가 일대일의 대응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존재와 사유의 일치’라는 전제 위에서 활동했던 소쉬르와 기의의 ‘미끄러짐’에 대해 이야기한 라캉 사이에 합치될 수 없는 지점이 생긴다. 소쉬르나 레비-스트로스에게는 기표/기의의 대응관계가 성립하며 때로 그 관계를 일탈하는 경우들이 존재하는데 반해 라캉에게는 기표와 기의는 처음부터 일치하지 않으며 다만 경우에 따라 기표가 ‘기의에 닻을 내리는 곳’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라캉은 기표들의 무의식적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기의들에 접근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의는 끝내 그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기의가 숨어 있다는 것, 기의는 언어가 포획할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것, 그 곳은 상징계를 넘어선 실재계라는 것이다. 인간은 기표라는 껍데기를 사용하면서 그 껍데기에는 약속된 기의가 포함되어 있으리라는 생각을 할 뿐이다. 따라서 눈앞에 실재하는 것은 기표의 이미지일 수밖에 없다. 시가 지리 잡는 곳도 기표의 이미지다.   인간의 의식이 은유와 환유의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은 라캉이 시도한 프로이트의 재해석이다. 그에 의해 욕망은 환유의 기표로 부상(浮上)한다. 그러나 그것은 완벽한 기의를 갖지 못하고 끝없이 의미를 지연시키는 기표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언어가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고 계속 지연시키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지칭하는 뜻으로 차연(Différance)이란 용어를 만들어 사용했다. 이것은 지연시키다(to defer)와 차이짓다(todiffe r) 두 개의 단어를 결합해 만든 단어다. 대상은 실제처럼 보이지만 허구일 뿐이다. 따라서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기의의 심연’이 놓이게 된다. 불교에서 말이나 글로 표현하지 않고 마음으로 뜻을 전한다는 염화시중(拈華示衆)도 기표와 기의의 불합치를 대변하는 예가 된다. 라캉이 정신분석의 과정을 거쳐 무의식의 세계에서 인식한 기표와 기의의 불합치 관계는 하이퍼시에서 이미지와 대상과의 관계와 같다. 이미지는 이미지일 뿐 대상의 기표로서 고착되지 않기 때문이다.   월간 시문학 2011년 12월호 발표 재료 2   하이퍼시와 포스트 구조주의                                                                                       심 상 운     1, 하이퍼시의 구조적 특성   구조주의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S/Z』(1970)에서 이음, 노드, 네트워크, 다중 경로 등의 개념을 사용하여 이미지들의 덩어리들(그의 말로는 lexia)로 구성된 이상적인 텍스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 이상적인 텍스트에서는 네트워크는 다양하고 상호작용적이며, 그들 중의 어떤 것도 다른 나머지를 초월할 수 없다. 이 텍스트는 기표(signifier)들의 거대한 별무리이지 기의(signified)들의 구조가 아니다. 그것은 시작도 없다. 그것은 뒤집을 수 있다. 우리는 그것에 여러 입구에서 접근할 수 있다.그것들 중 어느 것도 자기가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다. 그것이 동원하는 부호들은 눈이 미치는 한 확장된다. 그 부호들은 결정 불가능하다."   그의 말은 텍스트의 의미에 내재적인 통일성이 전혀 없는(다양한 언어가 기표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그가 상정한 이상적인 텍스트에 관한 것이지만 그것을 하이퍼시에 대입할 때‘기표(signifier)들의 거대한 별무리(이미지들의 덩어리들)’이란 말과 함께 하이퍼시의 구조적 특성을 예리하게 집어낸 것 같아서 놀라움을 준다. 초기 구조주의에서 랑그를 말하면서‘저자의 죽음’을 지적한 바르트는 포스트구조주의에서는 독자들이 텍스트 속으로 들어가는 문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과 독자들은 저자가 깔아놓은 기의에 구속되지 않고 텍스트의 의미부여과정을 자유롭게 개방하고 폐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론을 내세운다. 그것은 독자들을 고정된 의미의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만든다. 그것은 또‘진리’나‘실재’에 대해 위압적인 강요를 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언어에 대한 반발로 초기의 구조주의에서 전환된 1970년대의 포스트구조주의의 면모를 보여준다     하이퍼시와 비하이퍼시의 기본적인 차이는 비선형/ 선형, 비순차/ 순차, 다선구조/단선구조라는 대조적 형태에서 찾아진다. 따라서 하이퍼시에는 기승전결(起承轉結) 등 전통적인 시의 구조가 배제 되고,새로운 연결구조가 성립된다. 그 구조는 독자들의 생각을‘의미(정해진 정보)’로부터 벗어난 상상의 네트워크로 퍼져나가게 하는 구조다. 그 속에는 어떤 정해진 중심 즉 기의(記意)가 없다. 그것은 하이퍼시가 은유의 시가 아니고 환유(換喩)의 시 즉 기의(記意)가 아닌‘기표(記票)의 시’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저자에 의해 정해진 순서와 기의(記意)에 익숙해진 독자들은 기표(記票)만으로 끝나는 하이퍼시에서 당황한다.   하이퍼시의 기본구조는 이미지의 마디들 속에 산발적으로 퍼져있는‘이음(link)’에 의해 연결되는‘마디(node)들의 집합(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다. 그 마디들은 한 단어 또는 몇 개의 단어일 수도 있고 독립된 이미지 또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 마디들은 의식과 무의식이 섞여있는 의식의 흐름으로 형성된다. 이 흐름은 리좀의 선(line)과 같은 개념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무엇을 무엇과 연결시키며 어떤 상상이 다른 상상의 앞에 나오거나 뒤따라오는지를 결정하는데, 독자의 자유가 훨씬 더 많이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에 하이퍼시의 구조는 다양한 방법을 수용하고 정해진 경계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러한‘무경계(상상의 무한한 생산과 확산)의 구조’는 포스트구조주의의 이론가들(들뤄즈, 가타리)이 말한 '선(단선)의 횡포로부터의 해방'과 상통한다. 선으로부터의 해방은 혼란스러움을 수반하지만 인간의 사고과정(思考過程)을 닮았다는 점에서는 기승전결의 논리성보다 자연에 더 가깝게 인식된다. 따라서 하이퍼시에는 전통적인 시에서와 같이 메시지(주제, 관념)를 중시하지 않는다. 기의에서 벗어나서‘이미지의 덩어리’를 감각하게 하는 하이퍼시에서는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 메시지를 말할 수 없다.   2. 하이퍼시와 리좀의 관계   하이퍼시의 다선구조는 리좀 이론과 관련된다. 20세기 후반 프랑스의 철학자, 사회학자, 작가인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년 1월 18일 ~ 1995년 11월 4일)는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1930〜)와 하이퍼텍스트의 수평적 구조를 표현하기 위해『천 개의 고원』(1980년)에서 하나의 새로운 은유를 제안하는데 그것은 바로 리좀(rhizome)이다.   "땅 밑 줄기인 리좀은 뿌리나 곁뿌리와 전적으로 다르다. 구근(球根, bulbs)이나 덩이줄기(tubers)가 리좀이다. 뿌리나 곁뿌리를 가진 식물들도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보면 리좀 형태를 하고 있을 수 있다.두더쥐 굴 같은 것도 그것이 가진 서식, 식량조달, 이동, 은신, 출몰하는 기능에서 보자면 리좀이다.리좀 그 자체는 매우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감자나 개밀(couchgrass)에서 잡초에 이르기까지 리좀은 가장 좋은 것에서 가장 나쁜 것까지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리좀, 즉 사방으로 펼쳐지는, 중심이 없는 뿌리줄기식물(박하나무, 풀들)은 뿌리를 중심으로 바깥으로 퍼져나가는 위계적으로 조직화된 나무뿌리들과는 상반된 구조를 보여준다. 이런 리좀 적 구조를 제시하면서 들뤄즈와 가타리는 그들이 지향하는 새로운 개념을 표출하고 있다. "글쓰기는 의미작용(signifying)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영역을 측량하고 그곳의 지도를 만드는 것과 관계한다." 는 말이 그것이다.  그리고 『천 개의 고원』의 형식으로도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의 에는 이 책의 형식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혀놓고 있다. "이 책은 장(章)이 아니라 "고원들"(plateaus)로 이루어져 있다. 맨 마지막에 읽어야만 하는 결론을 제외하고는, 이 고원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서로 독립적으로 읽힐 수 있다." 따라서 리좀의 제시는 새로운 형태의 글쓰기와 책의 개념을 통해서 포스트구조주의의 탈-주체, 탈-중심, 탈-로고스의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도의 표출이라고 생각된다.『천 개의 고원』에서 리좀의 특성을 보여주는 여섯 가지 원리는 다음과 같다.    연결과 이질성의 원리(principles of connection and erogenity)  다양체의 원리(principle of multiplicity)  의미작용 없는 단절의 원리(principle of asignifying rupture)  지도 제작과 전사(轉寫)의 원리 (principles of cartography and decalcomania)    연결과 이질성의 원리   "리좀 체계 내의 어떤 점이든 다른 점과 연결될 수 있고 연결되어야 한다." 리좀은 구조상 반위계적이다. 어느 것이 먼저고 어느 것이 나중이라고 할 수도 없고, 어떤 점은 다른 어떤 점과만 연결되어야 한다고도 말할 수 없다. 모든 점들은 연결되어 있고 또 연결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연결은 이질적인 것들 간의 연결이고, 이질적인 것과의 연결은 미지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가 만들어 놓은 공간을 통과하는 모든 독자들은 새로운 경로를 찾는 탐험가, 미개의 땅을 찾아가는 모험가,미지의 것에 대한 예언가의 경험을 하게 된다. 하이퍼시의 마디들(이미지)의 연결도 이와 같은 효과를 위한 것이다.    다양체의 원리   "다양체는 주체도 객체도 갖지 않는다. 다양체는 결정들(determinations), 크기들, 그리고 차원들만을 가질 뿐이다. 그리고 여기서의 차원은 그 단계가 높아지기 위해 다양체의 본성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하나의 모임(assemblage)은 정확히, 그 연결이 증가함에 따라 필연적으로 본성상의 변화를 겪는 다양체의 차원들의 이러한 성장이다. 리좀에는 구조, 나무, 뿌리 속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점들이나 위치들(positions)이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선들만이 존재한다." 이 이론은 하이퍼시는 위계적 구조가 강요하는 각각의 마디에 대한 고정된 해석을 거부하고 하나의 마디를 관통하는 다양한 선들(이미지)과 그 선들의 집합(이미지 덩어리)이 빚어내는 새로운 세계와 감각을 중시한다는 것과 연결된다.    의미작용 없는 단절의 원리   "리좀은 어느 한 지점에서 끊어지거나 산산히 부서지더라도 예전의 선들 중의 하나나 또는 새로운 선들 위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이 구절은 모든 리좀은 층을 만들고, 영토를 만들고, 의미작용을 수행하는 선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또한 끊임없이 달아나는 탈영토화의 선들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선들이 파생될 때마다 리좀 안에는 단절이 있게 된다. 하이퍼시 속에도 의미작용을 하는 이미지와 의미작용을 거부하는 이미지들이 섞여 있다. 이 두 이미지들은 단절되기도 하고 연결되기도 한다.    지도 제작과 전사(轉寫)의 원리   “지도를 갖고 길을 찾아가는 경우를 상상해 보자. 우리는 지도를 찢어서 다닐 수도 있고, 거꾸로 뒤집어서 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자기에게 필요한 새로운 정보나 기호를 그 위에 덧붙여 기록해 넣을 수도 있다. 여기서 지도는 실제 세계와 계속해서 맞닿는다. 지도는 그 자체가 리좀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다양한 입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것이 리좀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이다. 지도는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와 맞닿아 있다. 지도는 벽에 그려질 수도 있고, 예술 작품처럼 구상될 수도 있고, 정치적 행동이나 명상의 일환으로 구성될 수도 있다.” 리좀의 원리에서 현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지도(map)의 이미지는 가상공간을 바탕으로 하는 하이퍼시의 발상원리와 접합된다. 하이퍼시는 의식의 흐름 속에서 발생하는 이미지의 덩어리지만 현실과의 관계 속에 생명력을 얻는다. 그리고 시인과 독자의 관계를 암시한다. 시인이 지도를 만들어 내지만 지도(가상현실) 속에서 독자와 시인은 동반여행자가 되기 때문이다. 지도는 스스로의 내부에 갇혀 있는 무의식을 복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구성해 내고 창조한다. 지도의 에너지는 현실세계와 접점을 이루는데서 발생한다. 그리고 그것을 현실의 공간 속에 재현하여 수행(performance)함으로써 더 큰 에너지가 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포스트구조주의의 들뤄즈와 가타리의 리좀 이론은 하이퍼시의 창작이론과 상통하는 접점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리좀의 이론은 하이퍼시 창작에 많은 영감과 동력을 제공한다. 컴퓨터의 하이퍼텍스트 원리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컴퓨터에서 벗어나서 독자적 형태를 취하고 있는 하이퍼시의 에너지는 의식의 흐름, 탈-관념, 다선구조, 가상현실(상상과 공상의 공간), 기표, 등을 바탕으로 한 새롭고 다양한 감각과 상상의 무한한 확대에서 분출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지의 구조를 통합하고 변화시키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은유, 상상과 추리, 수평적 공간이동의 사상과 합치된다. 하이퍼시의 마디(node)를 리좀에 대한 논의와 연결지어보면 그 유사성이 두드러진다. 리좀이 포스트구조주의의 탈-주체, 탈-중심, 탈-로고스의 이념을 실현하는 어떤 시스템을 보여주기 위한 비유라면, 하이퍼시는 그러한 시스템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환유(기표, 이미지의 덩어리)로 인식된다. 하이퍼시에서 링크는 환유의 수평이동이다.   3, 하이퍼시와 무의식의 관계-자크 라캉의 무의식에 대한 이해   하이퍼시의 중심에는 의식의 흐름이 놓여 있다. 이 의식의 흐름은 의식과 무의식의 뒤섞음이 만들어내는 이중 삼중의 다차원의 공간을 만들어 내고 시간의 질서도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기표와 기의의 관계, 무의식의 기표, 기표의 미끄러짐, 기표가 기의에 닻을 내리는 곳 등은 하이퍼시를 창작하는 데만이 아니라 시인의 내면의식을 이해하고 즐기는 중심요소로 작용한다. 따라서 하이퍼시의 이론에서 20세기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Marie-Émile Lacan, 1901~1981)의 이론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현대철학에서는 그에 대한 이해는 현대철학의 관문통과 의례라고도 한다.)   20세기 중엽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레비-스트로스, 바슐라르 등과 더불어 활동한 그는 ‘구조주의 정신분석학’의 대표자로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구조주의적 맥락에서 새롭게 재창조했으며, 거기에 인간존재에 대한 중요한 철학적 성찰을 가미함으로써 후기구조주의 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였다.   주체를 지배하는 무의식( unconsciousness)   무의식(unconsciousness)은 프로이트 학파에서 사용하는 정신분석의 용어로, 의식적인 자각을 할 수 없거나 의식을 통해 접근할 수 없는 사고, 기억, 욕망 등을 가리키는 마음의 세계이다.   “자크 라캉은 S. 프로이트를 구조주의적으로 재해석해서 무의식이 언어적으로 구조화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개인의 말이 특히 정신과 의사와 환자 사이의 관계에서 동시에 두 수준에서 작용한다고 본다. 개인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의식하면서 말하지만, 동시에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전혀 다른 것을 무의식적으로 얘기한다고 한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주체는 '코기토'(cogito:생각하는 나)에 의해 구성된다. 이때 의식적·반성적 주체가 자아라면 다른 하나는 누구인가? 라캉은 이 다른 하나를 무의식이라고 본다. 그는 무의식이 언어처럼 은유와 환유의 체계로 구조화해 있다고 본다. 이 무의식은 한 개체 안에서 그를 이끄는 타자(他者)이다. 이 타자는 자아에 앞서서 얘기하며 자아의 욕망을 통제한다. 개인들은 자신이 행위하고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 구조가 말하게 하고, 행위하게 하고 욕망을 갖게 하는 것이다.”(-브리테니카 백과사전에서 부분발췌) 이런 사유는 인간을 이성과 주체로 정의했던 서구 사유의 전통(데카르트의 명제)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무의식의 발견이란 의식 속의 내가 모르는 나에 대한 인식이다.의식적인 나는 무의식의 나를 모르지만 무의식의 나에서 발생하는 움직임이 의식적 나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이 ‘무의식의 나’로 인해 인간은 원초적으로「분열증」환자가 된다는 것이 라캉의 주장이다.주체(나)가 의식적 주체와 무의식적 주체로 갈라진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은 분열적 존재임을 증명한다.   라캉에 의하면 유아기(생후 6개월에서18개월 사이)의 아이는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없는 에 있는 존재이다. 아이는 의식의 거울에 나타나는 파편화된 자아의 이미지 속으로 어떤 통일성을 투사하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아이는 하나의 ‘허구적인 이상’ 즉 자아를 만들어 낸다. 라캉은 이 세계를 상상계라고 한다. 이 상상적 경향은 아이가 자란 후에도 계속된다. 그러나 언어를 배우면서(언어의 바다 속에서) 아이의 의식 속에는 상징의 세계가 펼쳐진다. 라캉이 말하는 무의식 즉 타자(他者)는 어린아이가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옮겨갈 때 어린아이의 무의식에 자리 잡는 언어, 기표의 세계다. 어린아이는 상상계의 달콤함과 환상을 포기하는 대신 상징계 안에서 인간으로서, 주체로서 일어선다. 그래서 타자란 ‘나와 남’을 분별하는 상호주체성의 장이기도 하다. 상징계에 들어서는 동시에 개인들의 무의식에는 상호주체성이 각인된다. 상호주체성이라는 말 속에는 바라봄과 보여짐이라는 두 개의 주체가 있다. 보여짐을 모르는 주체는 상상계인 에 있는 주체이기 때문에 대상을 실재로 믿고(동일시함)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소외된 나르시즘의 신경증환자에 해당된다. 이 고착에서 벗어나 상징계로 이행할 때, ‘나’는 바라봄과 보여짐의 두 가지 의식을 갖게 되고, 대상이 허구임을 깨닫고 다시 또 연기된 대상을 향해서 가게 된다는 것이다.   무의식의 한 가운데에는 욕망(desire)이 자리 잡고 있다. 욕망은 인간의 근원적인 결핍에서 생긴 것이다. 결핍은 어린 아기가 어머니의 몸에서 분리되어 나올 때 형성되는 인간의 원초적 조건에 의해서 발생한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는 최초의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기억은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는다. 따라서 라캉은 욕망이 지향하는 곳은 어떤 분열(결핍)도 없는 미지의 ‘신화의 세계’라고 한다. 의식 속에는 욕구(need)와 요구(demand)가 들어 있다.  욕구는 사물들을 향하지만 요구는 사람들을 향한다. 어린 아기는 장난감을 욕구하지만 무의식 속에서는 엄마의 사랑을 요구한다. 욕구와 요구는 합쳐지지 않는다. 그래서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간극이 생긴다. 라캉은 욕망과 욕구 사이에 ‘충동(pulsion)’을 넣는다. 충동은 욕구와 유사하지만 ‘성애적(性愛的)’ 모양을 띤다는 점에서 욕구와는 다르게 해석된다. 이 성애적(性愛的) 충동은 예술적 에너지의 원천되기도 하는데, 작가에 따라서 작품의 내면에 잠재되기도 하고 표면으로 솟구치기도 한다.   욕망은 영원한 그리움(결핍에 대한 충족희망)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다. 시인이 시를 창작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욕망은 번뇌의 원천이기도 하다. 욕망의 허상을 실재라고 믿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때 욕망은 위험해진다. 그러나 자신의 시선 속에 타인을 억압하는 욕망의 시선이 깃들어 있음을 깨달을 때 좀 더 쉽게 타인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집착하는 대상이 허상임을 스스로 인식할 때 집착에서 해방된다. 따라서 라캉이 말하는  ‘실재계와의 만남’은 스스로가 욕망하는 주체임을 인정할 때 열리는 정신의 자유로운 경지이다. 그것은 불교경전『금강반야바라밀경』의 끝부분 “일체의 함이 있는 것들은 /꿈과 허깨비와 거품과 그림자 같으며/이슬 같고 또한 번개와도 같으니/마땅히 이와 같이 관할지니라.//와 상통한다.   라캉의 언어관   꿈은 억압된 욕망들의 배출구라는 프로이트의 이론은 라캉에 의해 재해석된다. 그는 왜곡되고 수수께끼 같은 꿈의 현상이 은유와 환유라는 기표의 법칙에 따른다고 한다. 기호에 대한 라캉의 설명에 의하면 기의는 ‘떠 있는’ 기표 밑에서 계속 ‘미끄러진다’. 그의 이론에는 왜곡되지 않은 기표들은 없다. 그의 정신분석은 무의식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이라는 점에서 구조주의의 객관성과 부합된다.그의 이론은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이론과 맥을 같이 한다. 먼저 기표들의 장(언어의 법칙)이 존재하고, 각 개인의 무의식이 그 언어법칙에 따라 작동한다는 라캉의 언어인식은 의식으로부터 기의가 생기고 기의를 나타내기 위해 기표가 존재하는 것이라는 현상학적 언어인식(선관념후사물)과 상반된다.  그러나 라캉에게서는 소쉬르에게서처럼 기표와 기의가 일대일 대응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존재와 사유의 일치’라는 전제 위에서 활동했던 소쉬르와 기표와 기의의 ‘미끄러짐’에 대해 이야기한 라캉 사이의 합치될 수 없는 지점이 생긴다. 소쉬르나 레비-스트로스에게는 기표/기의의 대응관계가 성립하며 때로 그 관계를 일탈하는 경우들이 존재하는데 반해 라캉에게는 기표와 기의는 처음부터 일치하지 않으며 다만 경우에 따라 기표가 ‘기의에 닻을 내리는 곳’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라캉은 기표들의 무의식적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기의들에 접근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의는 끝내 그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기의가 숨어 있다는 것, 기의는 언어가 포획할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것, 그 곳은 상징계를 넘어선 실재계라는 것이다. 인간은 기표라는 껍데기를 사용하면서 그 껍데기에는 약속된 기의가 포함되어 있으리라는 생각을 할 뿐이다. 따라서 눈앞에 실재하는 것은 기표의 이미지일 수밖에 없다. 시가 지리 잡는 곳도 기표의 이미지다.   인간의 의식이 은유와 환유의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은 라캉이 시도한 프로이트의 재해석이다. 그에 의해 욕망은 환유의 기표로 부상(浮上)한다. 그러나 그것은 완벽한 기의를 갖지 못하고 끝없이 의미를 지연시키는 기표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언어가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고 계속 지연시키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지칭하는 뜻으로 차연(Différance)이란 용어를 만들어 사용했다. 이것은 지연시키다(to defer)와 차이짓다(todiffe r) 두 개의 단어를 결합해 만든 단어다. 대상은 실제처럼 보이지만 허구일 뿐이다. 따라서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기의의 심연’이 놓이게 된다. 불교에서 말이나 글로 표현하지 않고 마음으로 뜻을 전한다는 염화시중(拈華示中)도 기표와 기의의 불합치를 대변하는 예가 된다. 라캉이 정신분석의 과정을 거쳐 무의식의 세계에서 인식한 기표와 기의의 불합치 관계는 하이퍼시에서 이미지와 대상과의 관계와 같다. 이미지는 이미지일 뿐 대상의 기표로서 고착되지 않기 때문이다.       구조주의 [構造主義, structuralism] 이론   좌장: 심 상 운     구조주의자 롤랑 바르트는 문학에서도 작가들은 기존의 글들을 혼합하는 능력, 재조립하거나 재배치하는 능력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작가는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글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이미 씌어진”언어와 문화의 방대한 사전에 의존할 따름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존 베일리는 구조주의 문학론이 문학작품은 작가의 창조적 삶의 산물이며 작가의 본질적 자아를 표현한다는 기존의 관념을 거부한다는 것, 소설이나 희곡이 ‘사물을 있는 대로 말해’주려 한다는 종래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 다는 것, ‘작가는 죽었으며’ 문학 담론은 어떤 진리의 기능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론을 지적하고 비판한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기호학의 죄는 픽션에서 진실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파괴 한 것이다. 훌륭한 이야기에서 진실은 허구보다 앞서고 허구와 분리될 수 있다”는 반구조주의의 이론을 펼친다. 따라서 구조주의는 문학에서도 철학과 같이 ’반인본주의‘를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1. 언어학적 배경 언어는 그 자체 안에 독립된 상관구조를 갖고 있으며, 그 구조를 이루는 요소들은 글이나 말 속에서 작용과 반작용을 거듭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끌어낸다는 이론을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은 스위스 학자인 페르디낭 드 소쉬르(1857~1913)이다. 소쉬르의 언어학은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구조주의 형성의 토대를 만들었다. 소쉬르는 20세기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처음으로 ‘체계의 개념’을 언어학에 도입시켰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구조주의적 사유방식의 기초가 만들어졌으며 그의 언어학적 모델은 다양한 사회 문화 현상들에 폭넓게 적용되었다. 그의 사후에 출간된〈일반언어학 강의 Cours de Linguistique Générale〉에서 그는 ‘언어학 연구의 대상은 무엇인가’와 ‘언어와 사물의 관계는 무엇인가’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세 가지의 이론으로 내놓았다. 그 첫째가 언어의 체계를 랑그(langue)와 빠롤(parole)로 구별한 것이다. 랑그는 한 언어의 발화들의 기저를 이루는 형성 규칙들과 패턴들의 총체이며, 빠롤은 실제적인 발화들 자체를 말한다. 따라서 랑그는 언어의 사회적 측면으로서 우리가 화자로서 ‘무의식적’으로 의존하는 공유체계인데, 반해서 빠롤은 이 체계가 언어의 실제 용례를 통해 개별적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이 랑그와 빠롤은 그의 언어학에서 기본적인 연구 대상이 된다.   둘째는 언어학에서 언어의 통시태보다 공시태를 강조한 것이다. 공시태는 정해진 시점에서 작동하는 동시적 요소들 사이의 관계를 의미하며, 통시태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언어 체계와 그 요소들의 변화를 의미한다. 여기서 소쉬르는 통시태보다 공시태의 우월성을 강조한다. 그렇다고 하여 언어가 변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특정한 시점의 언어 구성요소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보는데, 그 이유는 빠롤에 대한 랑그의 강조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어떤 곡이 다른 기회에 다른 오케스트라에 의해 연주되어도 같은 곡으로 인정되듯이, 빠롤은 같은 형식이 다른 실체로 실현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랑그는 개인적인 화자가 처한 사회적인 맥락과는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기호들의 체계를 의미한다. 이런 랑그에 대한 논의에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에 대한 논의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즉, 소쉬르는 언어 상태가 변한다는 사실도 언어가 공시적인 체계라는 사실에는 아무런 변화를 가져다주지 못한다고 보았다. 셋째는 언어를 기호의 체계로 본 것이다. 소쉬르에 따르면 언어는 기호들의 체계이다. 여기서 기호란 개념을 의미하는 시니피에(signifie')와 청각 이미지를 의미하는 시니피앙(signifiant)이 결합된 것이다. 즉, 시니피에(기의)와 시니피앙(기표)의 결합은 어떠한 필연성 없이 결합한 것으로 단지 그 언어집단의 사회적인 약속에 의해 자의적(恣意的)으로 결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기호의 의미는 본래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기호가 속해 있는 체계 안의 다른 가치들과 맺는 관계에 따라 정해진다. 그러므로 기호의 의미에 관해서 말한다는 것은 그 기호가 언어체계 안에서 다른 기호에 대해서 갖는 ‘차이’에 관해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종래의 ‘기호=사물’의 모델이 ‘기호=기표/기의’의 모델로 바뀐 것이다. 이 모델에는 사물의 자리가 없다. 언어의 요소들은 낱말과 사물 사이의 결속의 결과로서 의미를 얻는 것이 아니라 어떤 관계체계의 일부로서만 의미를 얻는다는 것이다. 기호체계로서의 언어의 독자성은 ‘언어와 사물의 관계’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교통신호체계에서 신호가 ‘빨강-노랑-파랑’ 세 가지일 때, 기표(빨강)/기의(서시오), 기표(파랑)/기의(가시오), 기표(노랑)/기의 (기다리시오)의 약속체계를 갖는 것과 같다. 이때 체계는 일종의 임의적 약속으로 빨강과 서시오 사이에 고유의 절대적인 의미관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의미는 색깔의 차이에 의해서 생길 뿐이다. 그것은 파랑과 노랑도 같다. 여기서 차이란 대립 및 대조의 체계 내에서 이루어지는 구별이다. 예컨대, 신호등 빨강은 파랑이 아님이며 파랑은 빨강이 아니라는 뜻이다. 음성언어도 소리의 차이로 형성된다. 음성언어의 최하위단위인 음소(音素)는 유의미한 음 즉 언어 사용자(발화자, 청취자)에게 인지·지각되는 음이다. 음성언어의 체계는 음들의 관계 즉 대립항들이 짝을 이룬 이항대립의 패턴으로 이루어진다. 음소의 차원에서 보면 이 대립항은 ‘비음/비(非)비음, 모음/비(非)모음, 유성음/무성음, 긴장음/이완음 등이 있다. 이런 언어관의 요점은 언어 사용의 기반을 이루는 것은 하나의 ’체계‘ 즉 구조라는 점이다. 이런 구조는 화자들이 내재화하고 있는 언어능력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저절로 드러나는 것처럼 보인다. 구조주의와 기호학은 동일한 이론적 영역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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