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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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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포스트구조주의의 탈영토화 개념으로 본 이선의 시 세계 / 김혜천(시인) 댓글:  조회:1043  추천:0  2018-11-09
포스트구조주의의 탈영토화 개념으로 본 이선의 시 세계     김혜천(시인)         이선 시인(이하 이선)의 두 번째 시집『갈라파고스Gala̍pagos 섬에서』1부는 카니발을 연상케 한다. 중세의 카니발(carnival)은 민중들의 축제였다. 욕망을 절제하는 금욕의 시간인 사순절을 맞아하기 전 민중들이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는 문화적 해방구였다. 비(非)카니발적 위계질서에 의해 고립되고 분리되어 있던 모든 것들이 카니발의 공간 안에서 서로 연계되었다. 카니발은 민중들을 억압과 학대로부터 해방시키고 민중의 웃음을 찾아내는 대중의 축제이며 가치와 권력 그리고 권위와 위계에 대한 도전과 해체의 장이었다. 이선은『갈라파고스Gala̍pagos 섬에서』에서 50여 종이 넘는 동물, 곤충, 조류 등 여러 대상을 등장시키고,등장시킨 대상에 무의식을 투영하여 내면에 깊숙이 도사린 억압과 분노, 그리고 트라우마를 끌어올려 상상력과 무의식 속 영상들과 연결한다. 대상을 현실적이면서도 초현실적인 이미지로 확장시킬 뿐 아니라,대상으로 치환된 스스로와 우리 모두의 상황을 반전시켜 해방시키고 꿈을 갖는 유토피아를 지향시킨다. 또한 사물과 상상력으로 동원한 텍스트에만 한정하여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단지 이미지로만 말하고 사유의 문을 열어두었다. 끝없는 이미지의 변주를 통하여 독자의 상상력을 증폭시켜 독자 스스로 의미를 찾고 재생산하게 하여 텍스트를 탈영토화시킨다. 하이퍼시를 쓰면서 하이퍼시 쓰기 운동을 해온 문덕수 오남규 심상운 김규화 시인 등과 동인이며 끊임없이 새로운 시론을 모색하는 평론가이기도 한 이선이 어떻게 자신의 시세계에 탈영토화를 추구하였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들뢰즈/카타리는 “글쓰기는 모든 종류의 것을 운반할 수 있도록 해주는 분열증적 흐름”으로 간주하였다.지적 신경증의 회로에 갇히기를 거부하고 대상의 다의성을 읽어내며 다의성의 라인을 타고 끝없이 탈주하면서 시세계를 “탈영토화(deterritorialization)”하는 것이다.탈영토화는 욕망을 끝없이 생산, 혹은 “̔생성” 하여 무엇이 “되기”̕의 도정에 풀어 놓는 것이며 구분과 경계와 가둠에 대한 거부이다. 사상의 고원을 계속해서 이탈하는 지적유목민과 같아서 물길을 찾아 자신의 영토를 확장시킨다. 반면, 미로와 퇴로가 있는 텍스트에 단일하고 고정된 의미를 찾는 것은 다양성으로 열려 있는 텍스트를 가두는 것이며 “영토화(territorialization)”하는 것이다.   “탈영토화(deterritorialization)”를 가능케 하는 리좀(rhyzome)   1. 리좀의 특질   리좀은 원래 다양한 뿌리줄기식물을 지칭하는 용어로 뿌리가 중심이 되는 줄기가 없이 다양한 방향으로 끝없이 뻗어가는 상태를 의미한다. 고구마의 줄기가 땅에 닿는 접점마다 새 뿌리가 만들어지는 것처럼 각 줄기들이 사방으로 경계 없이 새로운 것들과 만나서 끊임없이 증식해 나간다. 들뢰즈/카타리는 리좀을 “계통수(系統樹)” 구조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계통수는 군대조직처럼 위계적이고 상하적이며 직선적인 관계를 지칭하는 반면, 리좀은 모든 형태의 위계를 부정하며 다양한 접속과 생성으로 열려있는 관계이다. 그 어떤 동질성, 통일성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비위계적이고 수평적인 다의성을 의미한다. 2. 리좀이 가동되는 원리   들뢰즈/카타리의 리좀이 가동되는 다섯 가지 원리를 통하여 이선의 시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첫째, 접속(connection)의 원리   계통수 모델이 동일성과 통일성 위에 세운 위계와 질서 세우기라면 리좀은 다양한 각도와 방향으로의 접속을 특징으로 한다. 방향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점에서 분열증적이며 끝없이 새로운 방향을 만들며, 그 어떤 다른 텍스트와도 접속시켜 나간다.   왼쪽 발목이 절단된 저 비둘기가 제대로 날 수 있을까? 한쪽 타이어가 펑크 난 자동차 바퀴처럼 의심은 뒷좌석을, 불안케 한다 비둘기를 관찰하는, 27분 43초 공원 벤치 왼쪽 다리도, 관절이 아픈지 삐걱댄다   피카디리 극장에는 1989년 3월 7일, 기형도의 지문을 기억하는 아침 9시에 눈을 뜨는 의자가 있다 희미한 극장 비상구는 짜라투스트라의 눈빛을 닮았다   어린 날 갖고 놀다, 분질러버린 방아깨비 뒷다리 누나가 구워준, 방아깨비 길다란 배를 먹던, 물컹한 느낌 분실된 뒷다리를 찾기 위해 신문과 고문을 반복하는, 자학적 패턴은 종종, 그의 꿈을 방해한다 프로이트는 ‘잃어버린 꿈 조각’을 가져오라 명한다   잃어버린 꽃게 앞 다리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것인지? 방아깨비 뒷다리에 대한 권리를 위임할 것인지? 인터넷은 늘 누군가를 성토 중이다   지진의 소문이 있는 밤엔, 특히 꿈을 조심하라 꿈 조각 틈새로, 큰 새의 날갯짓 소리 범람하리라   한쪽 다리를 잃어버린 詩의 나라로 뭉게구름, 조각조각, 시시각각, 이미지를 배송한다 예언의 아침이 지고 있었다 떨어지는 복숭아 꽃잎 ㅡ흰색이거나 분홍색이거나   붉은 의자는, 기형도의 이름을 만지작거리며 짜라투스트라의 눈빛은 버드나무 잎사귀를 닮았다고 중얼거린다.   ㅡ「기억의 초상肖像」 전문 위의 시는 좌절과 불안한 미래에 맞서는 자의식을 표현한 시로서 니힐리즘을 넘어서서 영원회귀에 대한 초극의 삶의 태도를 지향한 니체의 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관절이 아파 삐걱대는 비둘기”, 어두운 세월의 지문을 일일이 기억해 내는 “기형도의 지문”, “발목이 절단된 방아깨비”, “잃어버린 꿈 조각” 등의 언술로 좌절과 불안을 표상하였고 “꿈 조각의 틈새”, “큰 새의 날갯짓”, “짜라투스트라의 눈빛”, “버드나무 잎사귀”등의 언술로 현재에 대한 극복의지와 상승, 그리고 미래지향적 삶의 태도를 표현하였다. 서로 다른 이미지의 단락을 접속시켜 독자의 상상력을 증폭시키고 끝없이 새로운 방향의 텍스트와 무한대로 접속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둘째, 이질성(heterogeneity)의 원리   리좀적인 접속은 이질적인 것들과의 다양한 접속을 전제로 한다. 손기계는 무한히 다른 이질적인 기계들과 만나면서 동일성이 지배하는 정주(定住)가 아니라 무수히 새롭고 다른 강(밀)도를 생성한다.   모래고양이 발톱과 사막의 낙타 발자국은 푸른색인가요, 신이여 그래, 새끼 낙타를 삼켜버린 밤도 푸른색이지 어미낙타 눈동자가 점점 줄무늬하이에나를 닮아가요 괜찮아 곧 나이를 먹을 테니까, 뱀의 푸른 눈이 살아 있어요 그래 파푸아뉴기니로 날아가는 8000피트 상공에서도 살아 있더구나 모래고양이가 파 놓은 동굴에 숨어 새끼를 낳는 도마뱀 빨간 엉덩이를 보았지? 거울 속, 염색한 빨강 머리카락을 보고 있어요 오늘을 부정하면서, 벌써 내일을 초대한 거니? 이 거리에서 입양에 대하여 말하는 건 금기어예요 그 아이들은 곧 자기의 성이나 이름을 버리게 될 거다 11세 초등학생이 화장실에서 아기를 낳았어요 신이여, 날기를 거부한 새가 새벽 공원에는 많아요 밤새 도둑고양이를 피해 잠을 설쳤나 보다 그래 삭제할 게 많은 서울거리는 참 부지런하구나 경계경보를 울릴까요, 지금? 땅! 총을 쏘기 전에 선을 넘으면 아웃이라고 ㅡ「소금꽃을 꺾다」전문   위의 시는 현대문명의 부조리한 상황을 입양아를 통해 고발한 시로 제목부터가 이질적이다. “소금 꽃을 꺾다”니, 꺾을 무엇조차 없는 대상을 꺾는다 하여 낯설게 했다. 역설적 표현이다. “사막의 낙타”, “상공의 뱀”, “모래고양이”, “도마뱀의 빨간 엉덩이”, “화장실에서 아기를 낳은 초등학생”, “도둑고양이” 등 서로 이질적인 대상들을 한 공간 안에 접속시켜 혼란을 야기하고 의미를 단절시켜 새롭고 다양한 사유의 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셋째, 다의성(multiplicyty)의 원리   리좀은 하나로 통일되지 않는다. 다양한 접속들의 집합이며 다른 하나가 추가될 때 전체의 의미가 달라지는 다양성을 추구한다. 배치라는 개념은 이와 같은 리좀의 다양성을 잘 보여준다. ‘배치’란 접속되는 항목에 따라 그 성질과 차원의 수가 달라지는 다양체이다. 예를 들면 붉은 색이 어떤 맥락의 어떤 방식으로 배치되느냐에 따라 무한히 다양한 차원들로 생성된다.   새벽 로데오 거리, 안개 숲은 포옹을 풀고 창세기 1장 28절은, 개화와 낙화를 반복합니다   내 입술은 당신의 펜촉 끝에서, 빨갛게 채색되거나 억압된 욕망은, 당신의 손바닥에서 결박이 풀립니다. 당신, 기억의 저장고에는 패턴 분리가 되지 않은, 욕망 알갱이들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언제부턴가 당신은 창세기를 거꾸로 읽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여자여, 당신의 욕정은 아직 생리를 합니까? 당신 심장의 빠른 박동은, 욕정의 첫 단계 그 긴장과 공포를 압축하여 옥죄면, 오르가즘이 증폭됩니다.   양버즘나무 열매가 슬몃슬몃, 떨어집니다 잎새들 눈빛이 흔들립니다   가로수들은, 등과 등이 결박당하는 꿈에서 깨어나 허공을 잉태합니다   결박된 거리의 욕정이 해체되며, 2단계로 발효 중입니다 ㅡ「칵테일파티 효과」전문   술이 새로운 술과 혼합될 때, 어떤 술과 혼합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맛의 칵테일로 변화되듯이 다양한 집합체의 접속인 리좀은 다른 하나가 추가될 때 전체의 의미가 달라지는 다양성을 추구한다. 6연으로 완성된 위의 시는 연관성이 없는 각 단락을 배치하여 의미를 다양하게 변화시켰다. ‘억압된 욕망의 로데오 거리’는‘해체’와 ‘발효’를 통해서 성질 자체가 바뀐다. 본성의 변화를 예고하여 독자에게 새로운 세계와 이미지의 끝없는 탈주를 경험하게 한다.   넷째, 비(非)의적 단절(asignyifying ruture)   리좀의 다양성은 기표와 기의 사이에 안정된 관계를 전제로 하지 않기 때문에 구조주의적 의미의 의미화와 다르다. 그것은 다양한 접속을 통하여 무엇이 되기도 전에(영토화 되기도 전에) 의미화 과정에서 벗어난다. 의미가 아니라 비의미의 끝없는 단절을 통해 항상 새로운 생성의 도정에 있다.   공룡새 발자국 화석 옆에 시인새가 ‘발가락 낙관’을 찍는다 700만년 뒤에도 발톱은 날개에 집착할 것 날개가 꺾여, 날지 못하는 시인새   사막독수리부엉이 부리로 잡은, 물고기자리별 비늘 껍질을 떼어내는, 시인새   유행에 민감한 낮달의 귀걸이가 팔랑거린다 시조새의 부리에 입을 맞춘 채 크레타섬에 왼발을 딛고 카리브해를 궁금해 한다   시조새는 큰 입을 벌려 낮게 뜬 헬레니즘 구름 몇 조각 비잔티움ㅡ콘스탄티노플 문명조각을 푸딩처럼 맛나게 먹는다 이오니아해, 뽀얀 안개숲을 소스로 얹어서 날쥐, 작은새, 도마뱀, 곤충은 노벨섬의 소중한 간식 여우나 뱀들이 낚아채기 전에 낚아채야   사막박쥐가 떼 지어 노벨섬을 날아다닌다   원시부터 불어온 모래태풍은 달빛에 맨발을 드러내고 모래고양이 털 속에서 콜콜 낮잠을 잔다   다시 깨어날, 환상의 노벨섬! 일곱 번째 인을 떼고 ㅡ「노벨섬을 향하여 달리는 새」전문   위의 시는 미래를 향한 시인 자신의 끝없는 욕망을 표현한 시다. 원시로부터 현재까지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날아다니는 “시인새”가 되어 끝없는 욕망과 새로운 생산의욕을 표현하고 있다. 텍스트를 의미화 영역으로 한정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의미의 단절을 통하여, 무엇이 되기 전의 새로운 도정으로 넘어 설 때 가능하다 1연에서 “날개가 꺾여 날지 못하는 시인새”가 2연으로 넘어와 “물고기자리별 비늘껍질을 떼어내고” 다시 3연에서는 “크레타섬에 왼발을 딛고 카리브해를 궁금해 한다”. 다시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 문명조각을 푸딩처럼 맛있게 먹다”가 “박쥐가 날아다니고” “모래태풍이 고양이 털 속에서 잠을 자는 환상의 노벨섬”을 깨우는, 시간과 공간이동을 통하여 머물지 않고 끝없이 새로운 이미지를 확장시켜 나간 것이 그것이다.   다섯째, 지도 그리기(cartogrnphy) 혹은 데칼코마니(decalco mania) 원리   리좀적 다양성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베끼기, 즉 재현으로서의 모상을 지향하지 않는다. 리좀의 다양한 흐름을 추적하는 것이다. 데칼코마니는(오스카 도밍게즈가 개발, 1906ㅡ1958) 물감을 칠한 부분을 접어서 다른 면과 접속시킴으로써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 낸다. 이 접속의 순간 접촉한 면들의 성질과 압착의 강도에 따라 원래의 물감은 다양한 방식으로 파열되고 변형되어 새로운 작품이 탄생한다. 리좀적 지도는 접촉하는 순간의 강(밀)도와 원래의 물감에 따라 그리지만 원본(현실)이 변형될 때가 많다. 데칼코마니 시는 현실과 심리작용에 의한 작가의 창작을 독자가 재경험하는 기법이다.   강가에 서성거리는 사슴을 잡아먹고 황색 암구렁이, 한 마리 여러 마리 수컷과 둥글게 한데 엉키어 구애를 하네 물속 나라에도 꽃 피고, 잎이 돋네 몸을 휘말고 황색 얼룩무늬를 잉태하네 ㅡ 대지의 어머니, 고구려 유화   백번, 죄가 허물을 벗네   하늘과 땅이 껍질을 벗고 꽃물 흘러, 흘러 유화의 자궁 속으로 밀려오네 뱃속에서 알이 꿈틀대네 천둥 번개 타고 구름 속으로, 용이 승천하네   함지박만한 달이 황색구렁이 몸통에 올라앉아 힘을 주네 광활한 우주가 알을 낳는다네 대지의 아들, 주몽   ㅡ「황색구름용무늬 항아리」전문   잘 구워진 한 점의 분청사기, 국보 제259호인 ‘분청사기 구름용무늬 항아리’를 보고 쓴 시라면, 국보 제259호에는 황색구렁이가 없다. 데칼코마니 하듯 구름의 변화무쌍함을 보면서 황색 구렁이 여러 마리가 얽혀 있는 문양과 용이 천둥 번개를 타고 승천하는 파열과 변형을 나타냈다. 또한 달의 음기를 받은 “유화의 자궁”을 빌려 “우주의 알”, “대지의 아들, 주몽”의 탄생 신화를 탄생시켰다. 내부에 갇혀 있는 무의식을 복사에 그치지 않고 시적 상상력으로 재구성하여 독자들에게 또 다른 새로운 세계를 펼쳐 보여주었다.       이상과 같이 이선은『갈라파고스Gala̍pagos 섬에서』카니발을 열어 소외된 대상들을 호명하여 대상들과 함께 스스로 ‘다리가 파란 커다란 새’가 되어 춤을 추면서대상들과 말하고 노래하며 그들을 억압과 분노,깊은 트라우마에서 해배시킨다.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꿈과 희망을 제시한다.   이선의 시작법을 다섯 가지 ‘리좀이 가동되는 원리’로 살펴보았다. 이선은 의미를 고정하는 어떠한 틀에도 갇히지 않는다. 생산 흐름을 열어두고 계속해서 텍스트의 영토를 확장시켜 나가는 과정을 확인하였다. 1) 접속의 원리를 통하여, 서로 다른 이미지를 접속시켜 새로운 방향의 무한대한 접속을 시도하였다. 2) 이질적 대상의 접속을 통해, 의미를 단절시키고 새롭고 다양한 사유를 확장하였다. 3) 다의성의 원리를 통해, 추가적 이미지를 배치하여 독자로 하여금 끝없는 이미지의 탈주를 경험하게 하였다. 4) 비(非)의 단절의 원리를 통해, 텍스트가 영토화되기 전 의미를 벗어난 새로운 생성의 도정을 보여주었다. 5) 데칼코마니 원리를 통해, 있는 그대로 베끼지 않고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 낸다. 새로 접촉하는 것들의 성질과 압착 강도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파열과 변형이 가능케 했다.   이선은 전통적 어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어법을 만들면서, 현재에 머물지 않고 역동적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상력의 힘이 필요한데, 이선의 상상력의 힘은 현실과 동떨어진 공상세계가 아니다.그것은 깊은 사유와 사유를 자극하는 내면의 힘, 영감, 무의식을 의식화시키는 정신의 힘에서 나온다. 내면을 바라보는 그의 심리적 에너지는, 현실을 탈주하는 힘이 되어 자신의 시세계를 끊임없이 탈영토화 시켜 나간다.   이 외에 다수의 시편에는 리비도가 바탕에 깔려 넘실거리는 생명력으로 출렁인다. 이선이 자신의 두 번째 시집 해설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색채 이미지를 통하여 역동성을 부여하였다. 또한 공간 이동과 시간이동을 통하여 상상력을 확장시켰으며, 환타지 기법을 통하여 영상미를 추구하였으나 이 부분들에 대한 관점은 논외로 하였다.   파란 스카프를 휘날리며 퍼포먼스를 통하여 온 몸으로 독자와의 소통을 모색하는 갈라파고스 섬의 한 마리 파랑새 이선 시인. 최근 양평 대흥리 300번지에 더 깊은 사유의 산실을 마련한 그가, 그의 시세계를 어디까지 확장시켜나갈지 다음이 매우 기대된다. 참고 문헌   들뢰즈, 질, 카타리, 펠릭스. 김재인 역.『천 개의 고원』. 새물결. 2001 들뢰즈, 질. 김상환 역.『차이와 반복』. 믿음사. 2012 오민석.『현대문학이론의 길잡이』. 문학의 전당. 2017         약력   2015년 월간『시문학』으로 등단 윤동주서시문학상 제전위원 한국문학비평가협회 이사 한국전통차문화협회 회장 겸 지도교수
2    배치, 기계, 탈영토화, 되기의 개념을 어떻게 몸으로 살까./ 작성자 / 이야기밥 댓글:  조회:1058  추천:0  2018-11-09
[들뢰즈] 배치, 기계, 탈영토화, 되기의 개념을 어떻게 몸으로 살까.     서평 글에서 옮겨본다.    지은이가 에서 가장 먼저 해명하는 것이 '배치'라는 개념이다. '배치'는 을 떠받치고 있는 개념적 토대이자 전략적 거점이다. 이 배치 개념을 이해하려면 배치의 요소라 할 '기계'라는 독특한 개념에 먼저 익숙해져야 한다. 들뢰즈는 각종 생명체들을 포함해 모든 개체들을 두고 '기계'라고 부른다. 왜 기계인가. 다른 것들과 접속함으로써 그 자신의 속성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개체들은 각자 변치 않는 단일한 속성을 지닌 단독체가 아니라 다른 것들과 어떤 식으로 연결되느냐에 따라 성격이 달라지는 존재다. 가령 '혀'를 예로 들어보면, 혀-기계는 관계의 성격에 따라 거짓말 하는 혀가 되기도 하고 '맛보는 혀'가 되기도 하고 '사랑하는 혀'가 되기도 한다. 기계는 접속을 통해 기능이 규정되는 존재인 셈이다. (한겨레. 2008.10.25)    -우리를 다른 목숨들, 개체들과 관계 맺는 기계라고 부르는데, 이 기계라는 말이 참 재미있기도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무언가 좀 그야말로 너무 딱딱한 느낌도 듭니다. 기계는 그 스스로는 존재하기 힘든 무언가 만들어진 존재가 아닌가 싶은데요. 기계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는 존재인 반면에 생명체는 관계를 맺으면서 사니 기계라고 말하긴 힘들지 않을까요. 존재 자체가 스스로 하나의 유기체를 형성하고 있으니까요. 동양의 사고로 본다면 이 기계라는 말이 어딘가 좀 어감에 거슬리는데, 하여튼 서양 철학을 하는 사람들은 이 기계란 말을 쓰면서 요즘 우리 근대 사회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하는데요. 근대 사회를 말할 때는 기계라는 말이 어쩌면 어울릴 것도 같구요.      그런데 이 다음 말은 재미있습니다. 생각해볼 점이 있어요.    이 기계들이 접속하여 선을 이루고 나아가 면을 이루면, 그 장을 가리켜 '배치'라고 한다. 기계들의 배치가 말하자면 '기계적 배치'다. 그러나 배치에는 기계적 배치 외에 언표적 배치도 있다. 야구 경기를 예로 들어보자. 아구는 야구장에 심판과 선수가 모여 공과 글러브와 방망이를 들고 하는 경기다. 이 배치가 바로 기계적 배치다. 동시에 야구가 성립하려면, 규칙이 있어야 한다. 그 규칙이 바로 언표적 배치다. 이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가 합쳐져 야구 경기를 성립시킨다. 세계란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가 합쳐진 장이다.   -언표적 배치란 말은 참 어려운데요. 규칙이 바로 언표적 배치라는 거지요. 이 언표적 배치는 사람들이 정하는 것이고, 늘 변화 무쌍하게 변해가지요. 기계적 배치란 말도 참 어렵습니다. 충분히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나중에 알아봐야겠습니다. 더 들어보지요.    들뢰즈는 배치를 이루는 모든 기계를 가리켜 '욕망하는 기계'라고 말한다. 이때의 욕망은 '차이를 생성하는 의욕'을 뜻한다. 들뢰즈는 모든 개체에 이런 의욕이 있다고 본다. 그러니까 모든 개체의 존재 양식은 '차이 생성'이다. 스스로 변화하고 달라지는 종결 없는 과정이 개체들의 운명인데, 이 차이 생성의 일시적 응결 상태가 존재이고 동일성이다. "동일성의 섬들은 차이 생성의 바다 위에 구성되고 해체된다."   -재미있는 말입니다. 욕망하는 기계라는 말은 좀 이해가 될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그 욕암은 차이를 생성하는 의욕이라는 거지요. 이것도 좋습니다. 차이를 생성하는 의욕이 되면 좋겠는데, 대개의 사람들은 무언가의 권력이나 유행에 그냥 따라서 동일화되어 버리는 경향이 있는 게 아닐까요. 차이를 생성하는 의욕을 가진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어떤 권력이나 유행이 생기면 거기에 동일시되어 동일성의 섬이 아니라 동일성의 거대한 육지를 형성하면서 고착되고 있는게 아닐까요. 자본주의라는 하나의 체제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차이를 생성하는 의욕을 보이는 것 같지만, 결국 그 속에는 자본의 독점과 이윤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동일성의 섬들이 하나의 게릴라처럼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타자성의 형태로 존재한다면 참 좋겠는데요. 동일성의 섬이 너무나 확대되어 하나의 권력을 이루고 있을 때, 차이 생성의 바다는 점점 무기력해지고 오염되는 거지요. 차이 생성의 바다라는 것이 어찌보면 이 세상의 근원적인 원시 자연의 그 무엇 같기도 합니다. 물론 저 동일성의 섬들은 크든 작든간에 어떤 형태로든 부서지게 되어 있지요. 해체되고 재 구성되게 되어 있습니다.    아동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저 동일성의 섬에 안주해서 지금 자본의 힘 앞에 모여 있는 게 아닐까, 늘 우리의 무의식을 점검해봐야 겠습니다. 상당히 중요한 화두입니다. 어떤 권력을 추구하는 섬에 안주해 있을 때는 자연 비평은 존재하기 힘듭니다. 지금 우리가 그런 상태로 가는 것이 아닌가. 그런 싯점에서 우리가 쓰는 언어라는 것, 저 위에서 말하는 언표적 배치라는 것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해 봐야 할 것도 같습니다.  또 옮겨보지요.    이 욕망하는 기계들의 배치는 그 욕망 때문에 끝없이 변화할 수 밖에 없다. 배치가 만들어지는 것을 '영토화'라고 하면, 그 배치가 풀리는 것이 '탈 영토화'이고, 그 배치에서 벗어난 것이 바로 '탙주'다. 욕망이 있는 한 기존의 배치를 뛰어 넘으려는 움직임은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삶, 다른 존재 방식, 지금의 나를 규정하고 있는 울타리 바깥을 꿈꾸게 된다." 이때 "그 배치를 바꾸고 싶은 욕망, 그 욕망은 우리 삶을 지탱해주는 생명의 불꽃과도 같은 것이다" 이렇게 다른 삶으로, 바깥으로 이행하는 것을 두고 들뢰즈는 '되기'(becoming)라고 부른다.   -기존에 이루어진 배치, 이미 동일성의 섬을 이루고 고착화되어 가는 섬의 배치를 푸는 작업이 바로 탈영토화가 되겠군요. 그렇다면 이런 철학적 개념들을 우리는 지금 우리가 사는 삶의 현장에서 몸으로 살아내야 합니다. 아동문학을 하는 사람들, 특히 판타지를 하는 사람들은 이게 아주 중요한 화두가 되어야 하겠지요. 판타지의 생명은 기존의 동일성의 섬에 하나의 영토를 더 해주는 그런 재영토화가 되어서는 곤란하겠지요.재영토화가 아니라 탈영토화의 상상력을 가진 사람이 판타지의 세계에 뛰어 들어야 합니다. 특히 어린이문학에서 말하는 판타지는 더욱 이런 의미가 있어요. 그래서 판타지와 전복의 문제는 또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탈영토화의 길을 가려면 당연히 기존의 가치관이 지배하는 삶의 배치에서 탈주하려는 상상력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저 상상력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이게 아주 중요합니다. 상상력은 그냥 현실과는 동떨어지는 어떤 공상이라고 보면 안될 것 같습니다. 상상력은 하나의 사유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 사유를 자극하는 내면의 힘, 영감, 무의식을 의식화시키는 정신의 힘에서 나옵니다. 그렇기때문에 여기에서 내면을 바라보는 그런 심리에너지의 문제가 역시 개입됩니다. 지금 이 자리를 탈주하는 상상력의 힘, 세계관의 힘은 바로 자신의 마음 속 우주에서 태어나는 거지요. 그런 사유, 에너지 모두가 태어납니다. 그렇게 밖에는 말할 수 없어요. 여기서 우리는 노자와 통하는 길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외부 현실은 모두가 내면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무에서 유가 태어나는 거지요. 노자의 말을 빌면요.     그래서 우리는 무언가 되는데, 이 된다는 말이 참 여럽군요. 판타지에서 어떤 한 시공간을 창조하는데, 그 창조된 시공간은 역시 스스로 그러한 자연으로 돌아가는 그런 차원으로 가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그 어떤 일시적인 섬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역시 헤체되기 위해 존재하는 하나의 섬일 수가 있겠지요. 아니면 그런 일시적인 섬을 뛰어 넘는 근원적인 도의 세계를 닮은 그 어떤 시공간으로 상징되는 곳일 수도 있겠지요. 이건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더 공부해야 할 문제가 많습니다.  더 옮겨보지요.    이 되기의 존재론적 지평 위에서 이제 윤라학적 사유가 펼쳐진다. '되기'는 차이를 가로지르는 실천적 활동이다. 흑인과 백인의 차이, 남자와 여자의 차이에서 볼 수 있듯 차이가 차이로 남아 그 차이들의 관계가 굳어질 때, 이 차이를 뚫는 저항과 창조의 행위가 '되기'이다. '되기론'은 동일성의 고착, 그리고 그렇게 고착된 동일성 들 사이에 성립하는 차이의 윤리를 극복하기 위한 사유이다. '흑인 되기', 여성 되기, 아이 되기, 장애인 되기가 되기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하루 감옥 체험이나 시각 장애인 체험은 이 되기의 극히 작은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서 지은이는 되기가 진정한 윤리적 내용을 획득하려면 언제나 '소수자 되기'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소수자 되기'는 모든 되기의 보편적 지평이며, 정치적 실천의 윤리적 도태다. 소수자 되기를 통해, 자기 내부의 '다수자'를 극복하고 기존의 지배질서를 바꿔 새로운 배치를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끝이 참 좋습니다. 판타지는 그냥 나오는 게 아니지요. 바로 저 되기의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겠지요. 마음 속 우주에서 되기의 과정을 거칩니다. 마음 속 우주에서 되기의 과정을 거치는 사람은 당연히 그 되기가 밖으로는 하나의 상징이 되어 현실에서 새로운 배치를 만들어내고, 탈주와 탈영토의 자리를 만들어가는 거지요. 외부현실에서 탈영토화와 탈주를 꿈꾸며 몸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몸에서는, 내면에서는 당연히 새로운 되기의 상징이 태어나는 거지요. 아마도 꿈에서 다 그런 상징을 올려보내주지 않을 까도 싶습니다. 꿈만이 아니라 사유나 명상이나 상상력을 통해 저런 마음 속 우주에서 먼저 되기의 시공간이 생겨나겠지요. 태어나겠지요. 하여튼 판타지를 얘기할 때도 이 들뢰즈의 철학은 재미있는 점이 있습니다. 공부해 봅시다. 실제 작품을 통해 이런 사유를 더 발전해 나가면 좋을 것도 같습니다.  
1    천의 고원 댓글:  조회:1037  추천:0  2018-11-09
천의 고원   제1강 들뢰즈/가타리 사유 개관   ▶ 이 강의는 『천의 고원』 중 「변신」장을 생명철학적으로 심화시켜 이해하려는 강의이다. 피어슨의 저작(Pearson, Germinal Life, Routledge, 1999)을 따라 강의할 것이다. 마누엘 데란다의 저작 (Manuel DeLanda, Intensive Science & Virtual Philosophy, Continuum, 2002)이 들뢰즈 사유의 자연과학적 이해/확장에 매우 중요한 저작이다. 브라이언 마수미의 저작들(Brian Massimi, A User's Guide to Capitalism & Schizophrenia, MIT Press, 1992; Parables for the Virtual, Duke Uni. Press, 2002) 또한 뛰어나다. 군지-페기오 유키오의 『生成する生命』도 들뢰즈를 기초적인 원천으로 삼고 있다.     ▶ 변신에 대한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를 베르그송, 둔스 스코투스, 스피노자와 연결시켜 이해하는 것이 중요 하다. 개별화된 존재들, 개체들은 카오스의 바다 위에 떠 있는 섬들과도 같다. 그러나 카오스는 단순한 암흑이나 무질서가 아니라 개체들이 거기에서 나와 거기에로 돌아가는 근원적 氣, 太虛와도 같은 이를 ‘공재면(plan de consistance)’이라 부른다.   따라서 개체화되어 있는 차원을 근거로 하는 사유들은 적어도 이런 관점에서는 피상적이다. “배경(ground)을 일깨우고 형태[피겨]를 와해시키는 것보다 더 큰 죄(sin)는 없다.”(『차이와 반복』) 그러나 피상적 차원이 소홀히 되는 것은 아니다. ‘superficial’의 차원, 즉 표면의 차원은 깊이의 차원과 대등하게 중요하다. 것이다.   『차이와 반복』이 잠재성과 강도 개념을 중심으로 한 깊이의 철학이라면, 『의미의 논리』는 사건과 계열화 개념을 중심으로 한 표면의 철학이다.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는 베르그송적 구도를 띤다. 형상들은 물질-생명의 운동에서 파생하는, 그것도 우발적으로 파생하는 것으로 전락한다. 시간이 우주의 근본 주재자가 된다.   전개체적-비인칭적 차원을 염두에 두고서 ‘존재론’(전통적 의미)을 생각할 때 ‘이것(haecceitas)’에 관한 둔스 스코투스의 생각이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된다.   기존의 존재론들이 포착하지 못했던 존재들(entities)을 우리 시야에 펼쳐 주는 존재론. 이 존재론은 또한 ‘이것들’의 잠재적장으로서의 ‘탈기관체(corps sans organes)’를 설정하게 만든다. (공재면은 궁극적 탈기관체이다)    개체화된 존재들 ― ‘기계들’(이 말에는 스토아,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로부터 현대적 맥락까지 다양한 맥락이 스며들어 있다) ― 사이에서는 한편으로 영토화/탈영토화의 과정이 발생하고, 그와 더불어 감응(affectus)에서의 변화도 발생한다.   이로부터 갖가지 윤리적-정치적 문제들이 발생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창조적 행동학(ethology)을 구상한다.        제2강 복잡성과 유기체    ▶ 들뢰즈/가타리의 주요 개념은 ‘creative involution’이다. 이 개념은 들뢰즈/가타리를 다윈뿐만 아니라 베르그송과도 구분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리고 스피노자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우리를 이끈다. (『스피노자와 실천철학』에서 「스피노자와 우리」 참조)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생물학적 유기체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기계적 배치의 한 요소로서의 인간이다. 이제 인간의 ‘진화’가 논의된다면 자연 및 생명체들과의 관련 하에서의 진화보다 기계들과의 관련 하에서의 진화가 더 중요하다. ‘환경’의 의미 자체가 바뀌었다. ‘기계적 퓔룸(machinic phylum)’의 개념이 중요하다. 퓔룸은 연속적 변이(정도의 사유, 베르그송주의)의 바탕/주체로서 특이성을 실어 나른다. 퓔룸의 차원에서는 인간과 自然이 통합된다. 퓔룸은 디아그람과 쌍을 이루어 추상기계를 형성한다. 추상기계가 구체적인 형상을 띠게 되면 배치가 된다.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   메카닉들은 인간-주체의 발명품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배치로서 다루어진다. 그러나 인간이 메카닉에 흡수된 비관적 현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인간과 메카닉, 그리고 동식물들 등이 함께 형성하는 기계적 배치가 문제될 뿐이다. 아울러 언표적 배치가 함께 고려되면서 문화의 차원이 함께 다루어진다.  ‘공재면’, ‘내재면’은 카오스에   대한 들뢰즈/가타리의 개념화로 보아도 무방하다. 구조-섬들 아래에 또는 그것들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장, 구조-섬들이 거기에서 개별화되어 나오고 또 그리로 돌아가는 기(氣)가 공재면, 내재면이다. 태허(太虛)에 해당한다. 氣, 太虛는 또한 스토아학파와 스피노자적 의미에서의 실체=자연=신이기도 하다. 같은 논리가 보다 구체적인 여러 층차들에서 적용될 때 ‘탈기관체’ 개념이 성립한다.   ▶ 들뢰즈/가타리는 다윈, 바이스만, 베르그송으로 이어지는 한 생각을 이어받고 있다. 유기체보다 그 아래에서 지속되고 있는 ‘생식질’(바이스만)에 중점을 두고서 사유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시몽동으로 대변되는) 개체화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것은 구조주의와는 다른 성격의 탈주체주의 사유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는 이런 생각의 한 급진화인 유전자 결정론을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이들에게 유전이나 진화는 생물학에서 보다는 더 복잡하고 넓은 함의를 띠기 때문이다. 들뢰즈/가타리는 현재 주류 이론인 신다윈주의, 유전학, 분자생물학을 흡수하지만 그 테두리에 갇히지는 않는다.  바이스만의 생물학과 더불어 복잡성 이론 및 자기조직화 이론 또한 중요하다. 여기에서 복잡성 이론은 물리학적 맥락보다는 생물학적 맥락을 가리킨다. ‘complexity’는 글자 구성 그대로 “함께-접혀-있음”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는 곧 ‘공진화(共進化=coevolution)’의 이론이다. 자연도태의 주인공은 환경이고 생명체는 도태/생존의 순서를 기다리는 존재가 아니다. 생명체와 환경은 연속적이며, 생명체는 개방계(open system)을 구성한다. 생명체는 단지 삶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환경에 응답하는(repliquer) 것이다.(베르그송)   굿윈의 말처럼 생명체는 단순한 내적(유전자 수준에서의) 변이의 결과가 아니며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능력을 갖춘 존재이며, 또 캠피스의 말처럼 적응이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그 자체 진화 과정의 산물이다. 과정과 산물들은 변증법적 관계에 있는 것이다.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도 이런 구도에서 이해해야 한다)   바렐라에 따르면 생명체와 환경은 ‘상호 종화’와 ‘공결정(codetermination)’의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보다 발달한 생명체일수록 이런 연계성의 복잡성도 커진다. 이 생각은 ‘탈영토화’ 개념으로 이어진다.    철저한 다윈주의자인 모노에게도 이런 생각은 나타나 있다. ‘도태압(淘汰壓=selective pressures)’은 유사한 생태권들(ecological niches) 내에서 살아가는 상이한 유기체들 사이에서의 종적(種的) 상호작용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유기체는 이 과정에서 ‘선별적인’ 역할을 하며, 유기체가 더 발달될수록 자율성은 점점 더 커진다.   ▶ 들뢰즈/가타리의 사유가 ‘기계’와 ‘메카닉’을 구분하며, 모든 기계들을 내재면에 놓고서 생각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내부는 단지 선별된 외부이며, 외부는 단지 투영된 내부일 뿐이다.” 이는 윅스켈과 메를로-퐁티를 거쳐 들뢰즈/가타리로 이어지는 생각이다 (메를로-퐁티와 들뢰즈/가타리의 차이도 음미).   그리고 생명체의 자율성은 배치와 탈영토화에 관련해 이해되며 자기조직화도 이런 개념틀 속에서 이해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칸트로부터 오늘날의 자기조직화 이론에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통일성, 안정성, 동일성의 개념은 비판된다(그러나 이케다가 강조하는 동일성의 역할도 음미).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유는 유전자 결정론과 대립한다. 최근의 생물학은 생명 현상을 더 이상 물질적 구조의 부대현상(epiphenomenon)으로 보지 않으려는 입장을 다듬어 왔다.   유기체의 생명은 비선형적인 피드백 공정들을 포함하는, 복잡한 자기조직계들(autopoietic systems)의 창발성(創發性)으로 이해된다. 유기체들은 자기조직 및 자기조절(self-regulation) 능력을 가진다. 생명은 DNA가 아니다. 분자들의 활동, 유전자들의 활동, 형태발생적 맥락 등은 단순한 연역관계를 맺지 않는다. 로버트 로젠은 바이스만의 생각을 전복시킨다. 체세포와 유기체가 중요한 것이다. 생명이란 형태발생의 과정을 통해 나타나는, 복잡계들의 창발적 현상이다.   진화 없이 생명을 생각할 수는 있어도, 생명 없이 진화를 생각할 수는 없다. 생명체들은 단지 진화 과정의 매듭들인 것이 아니다. 생명체의 활동이 진화의 가능성의 조건들을 제공하는 것이다.   제3강 탈기관체와 유기체     ▲ 들뢰즈/가타리는 분자 수준과 단백질 수준을 내용과 표현으로  파악. ▲ 내용으로부터 표현이 연역되는 것이 아니다. → 일방향적 설명(환원주의), 유전자 결정론을 비판. ▲ ‘번역’이 아니라 코드의 잉여가치. ▲ 다윈주의는 대수(大數) 개념에 입각한 통계적 덩어리들을 다루는 몰적 사유. ▲ ‘비정상적인’ 동물-되기들. ▲ 탈영토화 개념이 코드의 잉여가치에서 자연스럽게 도출. (탈주선의 일차성도 상기.)    이로써 바이스만의 생식질 개념(동일성의 사유)에서 벗어난다. ▲ ‘진화’라는 개념의 뉘앙스 자체를 비판적으로 볼 것. ▲ 단지 이행, 다리 놓기, 턴넬 뚫기가 있음. creative involution! 퇴행도 점진도 아닌 되기가 있을 뿐.     ▶ 들뢰즈와 가타리는 층화(stratification)의 세 양태로서 유기체화, 기표화, 주체화를 든다. 유기체화로부터의 탈주는 탈기관체(corps sans organes) 개념에 응축되어 있다. 유기체는 하나의 통일성을 보존하려는 존재이기 때문에, 마투라나와 바렐라가 지적했듯이 그 부분들은 그것 들이 유기체를 위해 존재하는 한에서 극소의 자율성만을 가진다.   지구라는 탈기관체는 ‘자유 강도들’과 ‘유목적 특이성들’을 나른다. 그러나 거기에서는 또한 층화가 발생한다. 층들의 체계는 코드화와 영토화를 통해 강도들과 특이성들을 ‘포획’한다.   유기체적 층화는 자유 강도들과 유목적 특이성들로 구성된 ‘체(corps)’를 ‘유기체’로 만드는 과정이다. 유기층에서 유기체가 형성되는 것이다. 유기체와 탈기관체 사이에서의 ‘윤리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들뢰즈와 가타리는 아르토에게서 유래한 탈기관체 개념을 자신들의 체계로 흡수해 독특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탈기관체는 내재적 장이다. 그것은 강도들을 산출하고 분배하는 ‘욕망’(의 장)이다. 탈기관체는 유기체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달리 말해 유기체들이 탈기관체“위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탈기관체는 유기체와 함께 있으며 늘 일정한 과정 속에 있다. 탈기관체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탈기관체는 한 유기체의 구성에 포함되어 있는 접힘들, 침전들, 엉김들의 발생의 터가 되는 ‘초저속의(얼음 같은) 실재’를 구성한다.   그에 비해 유기체는 이 체 위에 존재하는, 그것에 형식들, 기능들, 위계적 조직화들, 초월성들을 주는/부과하는 층(stratum)을 구성한다.그러나 유기체와 탈기관체가 불연속적 타자로서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1) 탈기관체는 층들 속에서 작동하기도 하고 또 탈층화된 공재면 위에서 작동하기도 한다. 즉 하나의 층으로 간주 되는 유기체에 (기관들의 견고한 조직화에 대립하는) 탈기관체가 존재하지만, 동시에 유기체의 층에 속하는 그것[유기체]의 탈기관체가 존재하기도 한다. 즉 유기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유기체를 힘들, 강도들, 지속들의 보다 넓은 장 속에 위치시켜 보자는 것이다. 이 장 안에서 탈유기적 생명과 층화된 생명의 끝없는 상추(相推)가 계속된다. 베르그송 및 기학과 비교.   2) 탈기관체들의 ‘되기’는 ‘이것-임’/특이성을 통한 개체화, 그리고 영도(零度)에서 시작하는 강도들의 산출을 포함 한다. 이는 구분되는 계통들을 가로지르는 횡단성(橫斷性)을 낳는다. 결국 들뢰즈/가타리가 비판하는 유기체 개념은 위계화되고 초월화된 조직화로 이해된 유기체이다.   들뢰즈/가타리는 분자적 층위 또는 리좀적 층위를 선험적 장으로 제시함으로써 카오스와 코스모스가 얽히는 카오스모스의 자연철학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러나 탈기관체 개념은 자연철학만이 아니라 윤리학적 함축을 띠기도 한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조차 모른다고 했다.   신체=‘기계’에는 무한한 잠재성이 내재해 있다. 신체의 잠재성을 이끌어내는 것, 다른 신체들과의 좋은 만남을 이루는 것, 새로운 변양과 감응을 시도하는 것, 의미 있는 배치를 만들어내는 것, …이 중요하다. 이것은 들뢰즈/가타리와 기학을 함께 사유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거친 탈층화는 오히려 불행한 결과들을 낳기도 한다. 강도 높은 신체가 되는 것, 유기체로서 탈영토화의 운동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제4,5 강 복수성: 베르그송과 다윈     ▶ 베르그송은 두 종류의 복수성(multiplicite)을 구분 :  ①수적, 공간적, 현실적 복수성과                                                                                 ②질적, 시간적, 잠재적 복수성.     → 이 구분은 과학적 사유와 형이상학적 사유, 물질과 생명을 구분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질적 복수성을 ‘다양체’로 부를 수 있다.   전통 사유가 일자와 다자의 조각그림-오려-맞추기의 사유(樹木型 사유)를 펼쳤다면, 베르그송-들뢰즈에게서 문제가 되는 것은 생성하는 다양체이다.     ▶ 베르그송과 들뢰즈의 차이 1) 들뢰즈에게는 베르그송적인 급진적인 연속주의는 함축되지 않는다. 2) 들뢰즈에게는 물체와 생명체의 날카로운 구분보다는 이들이 함께 형성하는 배치가 문제가 된다. 3) ‘진화’의 뉘앙스가 훨씬 복잡하게 된다. (리좀, ‘산종(散種)’,  ‘창조적 첩화’.) 4) 베르그송 :  氣가 물질성과 생명성으로 이원화되는 구도 /     들뢰즈    :  氣가 리좀 상태로 탈주하는 방향과 층화되고 석화되는 방향으로 이원화되는 구도.   ▶ 베르그송-들뢰즈에 의해 ‘복수성’이라는 말은 실사(實辭)가 되었다. 다시 말해, 이미 존재하는 실체들을 셈으로써 성립하는 서술어로서 ‘많음’이 아니라 그 자체 하나의 실사인 ‘다양체’가 되었다.   다양체가 포함하는 차이들은 ‘크기들(magnitudes)’이 아니라 ‘거리들(distances)’이다. 크기들은 등질적 공간에서 성립하고, 거리들은 연속적 변이가 발생하는 다질적 공간에서 성립한다. 전자에서 성립하는 수는 ‘소산적 수’이고 후자에서 성립하는 수는 ‘능산적 수’이다. 능산적 수는 곧 잠재적 수이다.   다양체는 강도들을 통해 측정된다. 강도는 크기들이 아니다. 20도와 20도를 합친다고 40도의 날씨가 되지는 않는다. 시속 60킬로로 10킬로를 두 번 달리는 것과 시속 120킬로로 10킬로를 달리는 것은 같지 않다. 단순한 양이 성립하는 것은 등질적 공간에서이다. 세계를 강도로 볼 때 수학적 환원주의는 거부된다. ‘intensity’는 ‘intension’과 통한다.(우리말 ‘강도’와 ‘내포’가 잘 결합되지 않기 때문에 이 경우에는 ‘intension’을 ‘내포도’ 또는 ‘內含度’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다양체는 선들과 차원을 가진다. 다양체는 계열들로 형성된다. 다양체가 함축하는 질적 복수성은 차원으로 이해될 수 있다. 차원이 달라지는 것은 (재)영토화와 탈영토화 때문이다. 다양체는 늘 생성한다. 접속, 영토화/탈영토화, 탈주선, ‘코드의 잉여가치’, 리좀, 창조적 첩화 등이 모두 이와 연관해서 이해된다.    생명체/주체 또한 다양체이다. 들뢰즈에게서 ‘균열된 나   ’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 ‘진화’는 다양체의 생성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다양체들의 생성은 곧 복합적인 형태의 소통을 함축한다. 이것은 매걸리스의 ‘공생적 발생(symbiogenesis)’ 개념과 통한다. 이는 리좀적 진화로서 기존의 분류학적-계보학적 틀을 깨는 횡단적 배치들(transversal assemblages)을 통해 진화를 이해한다.   DNA는 작은 레플리콘들(복제 단위들) ― 플라스미드들(자기 복제를 통해 증식하는 유전인자), 비루스들, 트랜스포손들(레플리콘들 사이에서 전이되는 유전자군) 등 ― 의 형태로 쉽게 돌아다닌다.   리좀 형태의 횡단적 소통들은 창조적 첩화를 낳는다. 중요한 것은 계열들의 속도와 방향이다. 때문에 리좀학은 ‘반계보학’이며 라마르크적인 방향성은 거부된다.   베르그송과 다윈은 공히 개체군들을 사유한다는 점에서 복수성의 사상가들이다. 특히 신다윈주의는 발생을 속도, 비율, 계수들, 미분적 관계 등으로 파악한다. 발생은 미리 접혀 있는 것이 펼쳐지는 것이아니다. 이제 발생의 정도는 증가하는 완전도, 또는 분화, 부분들의 복잡성의 증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도태압, 촉매작용, 전파 속도, 성장비, 진화, 돌연변이 등과 같은 미분적 관계들과 계수들에 의해 측정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개체군을 몰적으로 이해하는데 그치지 않고 분자적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대수의 법칙에 근간하는 통계학, 그리고 이에 근거하는 고전적 다윈주의에 대한 비판을 함축한다.   리좀적 차원에 주목하는 것은 곧 분자적 운동들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는 개체들의 역할에 주목하는 것이며, 사유의 수준을 개념적 유기성의 차원에서 구체적 지각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것에 해당한다. 이는 곧 가장 구체적인 차이의 운동들에 주목하는 경험주의적 태도를 함축한다.   제6강 공재면, 창조적 첩화     ▶ 공재면으로서의 자연    조프루아 쌩-틸레르의 ‘추상동물’은 퀴비에가 그어놓은 경계선들을 무너뜨린다. 기관과 기능, 구조와 발생 유형들의 존재 가능성을 열어젖힘으로써 속도와 강도에 기반하는 자연의 보편적인 면(面)을 발견했다. 조직화의 도안(조직면)은 무한히 유연한 추상기계로 화한다. 그것은 모든 것이 거기에서 발생한다는 점에서 내재면이고, 또 모든 것에 대해 같은 의미에서 존재한다는 점에서 일의성의 면(일의면)이다.   이는 곧 스피노자의 자연이며, 장횡거의 태허(太虛)이다. 이 개념을 통해 개체화된 현실성의 세계로부터 전개체적-비인칭적 잠재성의 세계로 사유를 확장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생명계에서의 비정상적 결연, 창조적 첩화, 횡단적 소통들이 사유될 수 있다.   * 태허(太虛): 중국 사상의 기본적 개념의 하나로 우주의 본체 또는 기(氣)의 본체. 장자에게 있어 도는 일체의 것, 전체 공간(空間)에 확산되고 명칭도 표현도 초월한 실재(實在)이므로 이를 ‘태허’ 라 불렀다. ‘태허’가 기의 본체를 가리킨다고 한 사람은 송(宋)의 장횡거(張橫渠)로 그는 기일원론(氣一元論)의 입장에서 ‘태허즉기(太虛卽氣)’라 하고 기는 태허에서 생기고 모여서 만물을 생성하며 기가 흩어지면 함께 만물은 소멸하나 기는 다시 태허로 돌아간다. 즉, 기가 흩어진 모습이 태허라고 설명하였다.     ▲ 공존면: 현실화된 존재들의 공존 / 공재면: 잠재적 차원에서 모든 것들이 공존.  ▲ 일자성과 일의성의 차이  ▲ 장자의 제동(齊同)의 의미  ▲ 공재면 자체의 생성 (베르그송적 차이를 사유하기)  ▲ 차이와 동일성       제7강 공재면, 창조적 첩화 Ⅱ     ▶ 들뢰즈 사유의 구도는 결국 고대의 본질철학과 근대의 주체철학에 대립한다. 또 철학을 언어철학이나 사회철학, … 등으로 환원시키려는 경향들과도 대조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동시에 사유하지만 그러나 경험주의적 태도를 견지하였다.  → 자연과학과의 연관성, 예술과의 연관성, 종합적-횡단적 사유를 통해 새로운 개념들을 창조.   ▶ 창조적 첩화    들뢰즈와 가타리는 진화를 일체의 목적론적 함축을 배제하고서 사유하고자 한다. 발생의 정도, 복잡성에 입각한 위계를 비롯해 일체의 일방향적 사고는 배제된다. 횡단적 소통에 의한 ‘괴물들’의 탄생, 분자적 층위에서의 탈영토화, 퓔룸이라는 물질적 바탕에서의 새로운 존재들의 생성이 사유된다. 횡단적 소통들은 창조적 첩화를 가능케 한다. 리좀의 개념. 베르그송에 여전히 함축되어 있는 진화의 방향성조차 거부된다.   창조적 첩화는 ‘동물-되기’와도 관련된다. 동물-되기는 인간의 의식적 되기의 맥락과 생명철학적 맥락으로 구분된다. 후자의 경우 동물-되기는 횡단적 소통을 통한 창조적 첩화를 뜻하며, 횡단적 소통은 또한 ‘되기의 블록’, ‘생성의 블록’과 관련된다.  첩화는 퇴행이 아니다. 예컨대 프로이트에게서 나타나는 퇴행은 창조적 첩화와는 대극적인 사유이다. 또 들뢰즈/가타리에게서 중요한 것은 분화(differenciation)가 아니라 블록들의 생성이다.   다윈주의자들이 볼 때, 또 결정론적 태도를 가진 과학자들이 볼 때 리좀적 생성을 무조건 강조하는 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말해 주는 바가 없다고 할 수도 있다. 조금 완화된 결정론자들의 경우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는 법칙의 복잡성이나 유연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받아 들여질 수 있다. 그에 비해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는 훨씬 급진적이며, 실증적 연구들의 통해 이런 대립이 해결되어 나가야 할 것이다.   ▶ 들뢰즈/가타리의 가설을 받쳐 주는 요소들 중 하나는 진화에서의 전염성, 유행성 변화이다. 이는 리좀적 방식의 진화를 뒷받침해 주는 좋은 예이며, 도킨스 같은 유전자 결정론자조차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비루스=바이러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이질적인 존재들(인간, 동물, 박테리아, 비루스, 분자, 미세기관들,…) 사이에서의 전염과 유행은 분명 진화를 복잡하게 만드는 핵심적인 요인이다.   도킨스는 이런 점을 인정하면서도 유전자 결정론과 다위니즘을 견지한다. 캠피스는 이 점을 비판하면서 도킨스의 ‘extended phenotype’을 보다 급진적으로 발전시켜 나간다.   들뢰즈/가타리의 생각은 매걸리스가 『세포 진화에서의 공생』에서 전개한 논의와 매우 가깝다. 진화에서 도태의 역할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신다윈주의로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진화에서의 진정 새로운 변화는 상이한 퓔룸들을 가로지르면서 나타나는 합병, 연합을 통해서이다. 합병과 연합을 통해서 유전자 자체에서의 큰 변화가 나타난다. 따라서 유전자에 입각한 일방향적 인과나 유전자를 항구적인 동일성으로 보려는 생각들은 거부된다.   더 나아가 개체군의 사유는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개체들 이하로까지 내려가야 한다. 중층결정.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는 최근 나타나고 있는 ‘개방계적 연구방식(open systems approach)’을 선취하고 있다 하겠다.     제8강 자기조직화와 기계적 이질생성 ※ 지금까지 배운 내용 복습 ▶ ‘기계적 이질생성(machinic heterogenesis)’이라는 가타리의 개념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자기조직화 이론은 현대 사상의 중요한 한 요소이고 들뢰즈/가타리에 의해서도 수용되지만 (이 이론은 ‘센트럴 도그마’로 대변되는 환원주의와 결정론을 논박할 수 있는 중요한 개념이다), 동시에 들뢰즈/가타리의 시각에서 볼 때 일정한 한계를 노정한다. 이는 진화의 ‘기계적’ 성격과 관련된다.   ▶ ‘횡단적 소통’은 진화에서의 계통수들(genealogical trees)을 뒤섞는다. 물론 이 뒤섞임의 개념은 계통수 들의 존재를 전제한다. 그러나 뒤섞임까지 포함한 전체적 지형도를 볼 필요가 있다. 계통적 계열들은 그보다 근본적인 기계적 퓔룸을 전제한다. 기계적 퓔룸은 여러 계통들을 낳지만 동시에 물질적 힘들의 횡단적 움직임들을 통해 새로운 생성들을 낳는다. 계통수들은 덜 분화된 것에서 더 분화된 것으로 진행되며, 친자관계/分岐(filiations)에 입각해 진행된다. 그러나 새로운 생성들은 새로운 결연들(alliances)을 통해 진행된다. 생성의 선은 특정한 매듭들을 가지지 않는다. 거기에는 오로지 ‘중간(middle)’만이 있다. 이 중간을 통해서 생명은 ‘운동의 절대 속도’를 향유한다.   들뢰즈/가타리에게 ‘사이(entre=in-between)’ 개념은 중요하다. 모든 것은 사이에서 벌어진다. 사이는 카오스이다. 카오스는 생성의 장이다. 카오스를 통해서 개체들의 코스모스가 생성한다. 이러한 생성이 도태압을 무너뜨린다. 물론 도태압은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도태압은 그것에 대응하는/응답하는 유기체들의 활동을 고려해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활동들은 곧 행동학적 배치들(ethological assemblages)을 함축하고 있다.   ▶ 기계적 배치들에의 주목은 ‘창조적 진화’의 이해를 위해 중요하다. 자기조직화와의 비교를 통해 계방계들 로서의 생명계들에 대한 이해를 넓혀 주기 때문이다. 자기조직화 개념은 생명체란 자기차이성(自己差異性)을 보여주는 존재임을 잘 설명해 준다. 이는 곧 생명체가 계방계임을 말해 준다. 자기조직적 유기체 즉 ‘기계’(= 신체)의 기능은 그것의 특수한 유전적 구조 또는 조성(composition)으로 환원 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계의 구성요소들이 아니라 그것들 사이의 역동적인 관계들이다. 자기조직적 존재들은 스스로의 조직화와 경계들을 만들어낸다. 즉 그것들은 “조직화를 통해 닫힌” 존재들이다. 따라서 자기조직적 존재들의 진화는 차이들의 와류에서 계속 메타동일성들을 만들어내는 과정들로 이해된다.(이케다 기요히코)   그런 동일성을 만들어내지 못할 때 해체(disintegration)가 발생한다. 따라서 자기조직화 이론은 자기동일성을 지키려는 개체들의 속성에 주안점을 두고 있으며, 바로 그 때문에 진화 전체의 창조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학문적 사실의 문제를 넘어 삶 자체를 바라보는 시선과 관련된다.   ▶ 기계적 진화는 이질생성들을 종합하며 또 ‘공재(共在=consistency)’의 형성을 포함한다. 기계적 배치들은 포텐셜 장들과 잠재적 요소들을 통해서 場을 만들어나가며, 종과 유의 구조를 넘어 기술적 -존재론적 문턱들을 가로지른다. 자기조직화가 있다면 그것은 이 장 위에서이다. 이것은 기계적 자기조직화를 기계적 이질생성으로 봄을 뜻하며, 자기조직화라는 모델에 창조적 진화의 이해를 위한 비평형 개념을 도입함을 뜻한다. 여기에서 타자성(alterity)은 보다 넓은 경지에서는 창조적 진화를 위한 조건으로서 이해된다. 이는 배치들의 행동학과 관련된다.   제9강 ‘behaviour’의 행동학에서 배치들의 행동학으로 I     ▶ 지능에 대한 보다 역동적인 이해를 추구한 선구적인 인물로서 폰 윅스퀼이 거론된다. 하이데거, 메를로-퐁티, 들뢰즈 등이 모두 윅스퀼을 중요하게 다루었다.   윅스퀼 (1864~1944) 독일의 동물학자, 비교심리학자 인간이 아닌 동물을 중심으로 동물의 행동을 객관적으로 관찰하여 동물과 그 동물이 속해 있는 환경과의 관계를 '기능환(機能環)'으로 표현하고, 각 동물은 다시 넓은 자연 속에서 그 종(種 )의 독특한 환경 세계를 주체적으로 만든다는 이른바 '환경세계론'을 제창하였다. 그의 환경 세계론은 새로운 생물행동학의 기초가 되었으며, 생물행동학자인 로렌츠나 틴버겐에게 사상적 으로 영향을 주었다.   오늘날 클라크 같은 사람도 마음을 ‘a leaky organ’으로 규정하면서 행동주체(agent)의 표상주의적 개념화 들을 벗어난 심신론을 전개하고 있다. 이런 입장들에 따르면 지능은 상이한 물질적 공재(共在)들에 입각해 이해되어야 한다. 즉 지능은 행동의 다각도의 측면들과 더불어 이해되어야 하며, 행동은 개체들을 관통하는 복잡한 물질적 체계들(배치들) 및 계통적 혈통들과 유기체의 경계들을 가로지르는 리좀들에 입각해 이해되어야 한다.   창조적 진화는 되기의 블록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제 ‘행동학(ethology)’은 행동주체의 ‘behaviour’에 대한 관한 담론에서 배치들의 운동에 대한 담론이 된다.   배치들의 관계는 선형적인 인과관계들이 아니라 횡단적 소통들에 의한 영토화와 탈영토화에 있다.       제10강 ‘behaviour’의 행동학에서 배치들의 행동학으로 Ⅱ     ▶ 배치들의 관계는 선형적인 인과관계들이 아니라 횡단적 소통들에 의한 영토화와 탈영토화에 있다. 부위에 초점을 맞추어 자극 -반응의 메커니즘을 연구한다. 로렌츠는 본능적 행동은 해부학적 구조만큼이나 항상적이고 고정적이라고 말한다. 보다 복잡한 상황에서는 ‘본능적 복잡화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로렌츠나 틴버겐은 이 메커니즘에 근거해서 종, 유, 나아가 문(phylum)까지도 분류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생각은 환원주의와 실체주의의 전형을 보여준다.   최근의 행동학은 행동의 패턴을 행위의 강도 조절, 시간 조절, 속도 조절에 기인 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Thorpe, Merleau-Ponty) 더 중요한 것은 환원주의와 실체주의를 벗어나 동물과 환경의 관계에 초점이 맞추어진다는 점이다. 선천성과 후천성을 둘러싼 게으른 논쟁에서 벗어나 하나의 행동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항목이 환경적으로 안정적인가 그렇지 않은 가가 다루어지고 있다.   나아가 동물들의 적응(adaptation) 자체가 학습에 크게 의존한다는 것도 강조 되고 있다. (McFarland) 가변성과 유연성이 중요하다. 관계는 타자를 향해 열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설사 자기가 자기를 완벽하게 안다 가정해도 타자가 어떻게 나올지는 시간 속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최근의 행동학은 이런 존재론적 진리에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   ▶ 모든 영토는 다른 종들의 영토들을 포괄하거나 가로질러 간다. 로렌츠가 말한 것처럼 공격성이 영토성을 낳는 것이 아니라 영토성이 공격성을 낳는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윅스퀼을 따라, 이런 구도에서의 자연을 음악적으로 파악 한다. 즉 자연에 대한 선율적인, 다성음악적인, 대위법적인 파악이다. 새들의 노래, 거미의 집짓기, 연체동물(예컨대 소라)의 껍질, 진드기 등이 그 예이다.   연체동물의 죽음은 소라게의 거주지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목적론적 자연 개념 에서 선율적 자연 개념으로의이행을 함축한다.여기에서 자연의 기예(技藝)와 인간의 기예는 날카롭게 구분되지 않는다. 연체동물의 껍질과 게 사이에는 대위법적 관계가 성립하며, 여기에서 성립하는 되기에는 기능적인 요소들(성, 생식, 출산, 양육 등)만이 아니라 ‘sensibilia’도 포함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진화의 이 창조적 양태를 ‘art=기예’라 부른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윅스퀼의 분석을 더 밀고 나아가, 동물-되기는 적응의 대상들(traits)의 선별만이 아니라 물리-화학적 강도들과 근접성의 영역들(zones of proximity)의 작용까지 포함한다고 말한다. 이것들이 퓔룸적 혈통들을 가로지르며, 따라서 생명은 음악적인 ‘생성/되기’를 포함하는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본능과 학습을 둘러싼 논의가 아니라 ‘공재성(consistance)’에 주목하는 것이다. 공재성에 주목했을 때 리좀적 배치를 탐구할 수 있다.   ▶ 들뢰즈와 가타리는 행동을 중심들과 활동(activation) 사이의 선형적이고 위계적인 관계들로 모형화할 수 없다고 본다. 생물학적-행동적 기계학(machinique)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선천적인 것은 탈코드화되고 획득된 것은 영토화된다. 행동에서 배치로. 어떤 국소적 작용도 다른 것들과 얽혀 있고(coordinated) 중심적 주체가 없이 거대한 결과가 현실화된다/동시화된다. 여왕개미는 없다.   이는 곧 창발성(emergence)의 논리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뇌들, 신체들, 분자들, 세계들(이들 모두는 서로의 영토들과겹치면서 존재한다)을 포괄하는 ‘산포된 지능(distributed intelligence)’을 통해 행동이 이해되어야 한다고 본다.   카우프만이 강조했던 자기촉매작용은 하나의 유기체 내에서가 아니라 배치들 전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인간의 탄생도 특정한 메커니즘의 결과가 아니라 새로운 산포의 결과일 뿐이다. 지연된 발생(예컨대 幼生生殖), 기관들의 특별한 탈영토화(예컨대 손과 발), 그리고 특히 환경의 상관적인 탈영토화(숲에서 초원으로). ‘잃어버린 고리’는 하나의 메커니즘이 아니라 배치의 변환인 것이다.       제11강 동물-되기   ▶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는 층화와 공재면/탈기관체가 밀고 당기는 세계를 그리고 있다. 생명체는 층화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인간의 비인간적 되기들’이 존재함을 역설한다.   모든 되기는 분자적이다. 이는 곧 생명체를 본질=종을 넘어 개체군으로 보는 것이고, 나아가 개체군으로 통계처리를 할 수 없는 ‘분자’의 차원에서 봄을 뜻한다.   의식적인 동물-되기는 인간에게서만 성립하지만, 자연세계에서도 동물-되기는 성립한다. 말벌의 양란-되기와 양란의 말벌-되기가 그 좋은 예이다.       양란 (tropical orchid)                                                                                                    ▶ 행동학적 접근에서 신체는 기관들과 기능들, 종과 유로 규정되기보다는 ‘감응(感應)’(스피노자의 ‘affectus’)하는 신체는해부학이나 분류학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동물들에 감응하고 스스로의 특이성들과 강도들의 장, 즉 ‘氣’를 변화시켜 자신의 존재 여건을 자발적으로 바꾸어가는 존재이다. 감응하는 신체의 감각은 식별 불가능 또는 규정 불가능의 지대 (地帶)를 통과한다.   한 개별화된 배치의 부분을 형성하는 동물의 능동적/수동적 감응들에 대한 윅스퀼의 논의는 스피노자와 연결될 때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예컨대 진드기의 예에서 중요한 것은 생리학적 특성들이 아니라 관계, 정도, 그리고 속도의 리듬이다.     ▶ 동물-되기는 태초의 시원으로 돌아가려는 융적인 시도가 아니라 차라리 층화가 더욱더 무너지고 공재면이 두드러질 미래를 염두에 둔 논의이다. 동물-되기는 인간적 욕망을 오이디푸스 삼각형에 가두어 이해하는 정신분석학과 대립한다.   동물-되기는 표상/재현의 문제가 아니라 감응의 문제이다. 꼬마 한스와 말의 관계는 주관적 몽상의 관계가 아니다.   동물-되기의 감응은 실재적인(real) 것이다. 분자-되기는 종과 유라는 몰적 질서를 일탈한다.   ▶ 표상/재현은 인간적 형식과 질서를 절대시하는 문화주의와 도덕주의를 은폐 하고 있다. 동물-되기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표상의 함정에 빠지는 것, 즉 신체를 기관들과 기능들의 질서로 국한시키는 것이다.   첩화에 있어 동물의 왕국은 강도와 근접성(진동들과 운동들)의 지대들에 의해 정의되는 탈기관체로 화한다. 여기에서 꼬마와 동물은 ‘주체들’이 아니라 복잡한 배치들에서의 ‘사건들’로 화한다. 배치들은 환경과 얽혀 있다. 시공간적 관계들은 사물의 술어들이 아니라 배치들 또는 복수성들의 차원들이다. 동물들은 공생적 복합체들에 들어가 활동한다. (포식 동물의 시공간)   ▶ 둔스 스코투스는 ‘이것’ 즉 개체화하는 차이 개념을 제시했다.(라이프니츠의 ‘완전 개념’과 비교) ‘이것’은 기존의 분류 방식을 깨는 무수한 ‘entities’들이다. 그것은 분자들/입자들 사이의 운동과 정리라는 경도적 관계들과 감응을 주고받는 위도적 능력들에 관련된다. 그것은 전통적인 실체도 주체도 아닌 어떤 개체이다. 주체들은 이 속도의 경도들과 감응의 위도들의 카르토그라피 내의 개체군들로서 존재한다.   자연은 집단적 배치들로 존재하며 이는 ‘탈주체적 개체화들’로 채워진다. 그리고 속도들과 역능들/감응들을 통해 진화한다.   중요한 것은 몰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을 단순히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다. 모든 몰적 구성체는 분자적 무의식을 가지는 것이다. 또한 되기는 언제나 몰적 외연을 포함한다. 정신분석학은 되기들을 하나의 콤플렉스에, 몰적 규정의 콤플렉스(오이디푸스, 거세)로 환원시킨다. 프로이트가 늑대 인간의 여러 늑대들을 하나 즉 아버지로 환원시킨 것이 그 예이다.   ▶ 분열분석 또는 리좀학의 목적은 인종, 혈족, 종, 유 등과 같은 몰적 구분들의 한계를 비판하고 이 덩어리진 현상들의 선험적 환상을 폭로하는 것이다. 생물학적 맥락에서 이것은 미시물리적 차원과 생물학적 차원이 별개가 아님을 말한다. 이 차원에서는 열역학조차도 통하지 않을 수 있다. 배치는 통계학이 무너지는 탈주선들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계의 생성은 분열생성(schizogenesis)이며, 횡단적 소통, 포함적 선언들(inclusive disjunctions), 다성적(多聲的) 연언들(polyvocal conjunctions)을 통한 생성이다.   ▶ 몰적 구성체들은 분자적 힘들의 통합이자 총체화이다. 분자적 무질서의 부분적 대상들이 결핍으로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욕망은 결핍으로 파악된다. 예컨대 정신분석학은 분자적 복수성의 적극적 산포가 아니라 (신경증이나 거세 유형들에서 볼 수 있는) 거시적 규정성들의 주체들만을 다룬다. 욕망을 결핍으로 봄으로써 사람들은 욕망을 개인적인 것이든 집단적인 것이든 특정한 목적, 목표, 의도에 연관시킨다. 이로써 욕망은 생산의 실제 과정에서 유리되어 표상의 구조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12강 기억을 넘어선 되기들 I     ▶ 『천의 고원』에서 바이스만의 생식질 개념은 탈기관체 개념으로 변환된다. 그리고 여기에는 중요한 윤리학적 함축이 깃든다. 탈기관체는 하나의 알(卵)로서, 이것은 강도=0의 순수 잠재성이다. 탈기관체는 하나의 자아가 자신의 되기를 실험하는 환경이다. 그러나 탈기관체가 층화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아니다. 탈기관체는 층화와 함께 있다. 탈기관체에의 추구는 기원에로의 되돌아감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조건의 자발적 변이일 뿐이다. 탈기관체는 유기체적 차원에서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기표화와 주체화를 변이시켜 가는 것 또한 탈기관체를 통해서이다. 탈기관체는 탈아적(脫我的) 알(卵)이다. 그것은 타자성(alterity)의 장소이다. 그것은 창조적 첩화의 장소이다. 탈기관체는 ‘intense germen’(강도적 유아幼芽)이다. 그러나 이는 기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 생성/되기의 잠재성을 가리킨다. 기계적 이질생성과 리좀적 배치들에는 이런 생성/되기들이 항상 함축되어 있다.   ▶ 일직선적인 계보학적 기억들로부터 창조적 되기로의 이런 이행을 예시하기 위해 토마스 하디의 『더버빌 家의 테스』를 생각해 보자. 테스는 유전자 결정론을 깔고 있는 비관주의적 소설이다. 여주인공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생식질’의 또 하나의 예이며, 하디는 철저한 다윈주의에 입각해 테스나 주드 같은 부적응자들이 어떻게 사회에서 도태되는가를 그린다. 주인공들은 “잔혹한 자연법칙이 그들에게 떨어뜨린 감정(emotion)의 무게에 눌려” 신음한다. 모이라와 하마르치아는 본능과 유전형질(inheritance)로 바뀐다. 테스는 여섯 명의 데비필드 아이들을 보면서 맬서스를 생각하게 된다. 이들은 모두 자연의 도안의 결과들일 뿐이다. 노도처럼 닥쳐오는 산업사회라는 객관적 환경, (에인젤 클레어를 실망하게 했던) 도덕적-문화적 환경 또한 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힘이다.   ▶ 로렌스는 하디와 다른 입장에서 그의 작품을 분석한다. 로렌스에게 생명이란 잉여이며 넘침이다. 약동이 없는 것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계속 약동이 있다는 것이다. 로렌스에게 생명은 탄력적인(elastic) 것이고 불연속적인(discontinuous) 것이다. 로렌스는 하디의 소설들이 언제나 같은 결론 으로 치닫는다고 본다. 자연과 사회에 의한 개인의 압살. 로렌스는 이 점에서 근대의 비극에는 소포클레스나 셰익스피어에게도 볼 수 있는 위반(transgression)의 계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적 맥락에서 그렇다) 하디의 소설에서 여성은 철저하게 수동적인 존재로 묘사된다. 법(칙)을 인식하고 사랑 안에서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강조하는 로렌스는 하디의 소설에서 사랑은 늘 법(칙)과 그것이 가져오는 죽음이라는 결과에 의해 으깨어진다고 본다. 기억이 있을 뿐 생성/되기는 없다. DNA를 물신화(物神化)하는 도킨스의 생각도 바이스만-하디의 연장선상에 있다.     제13강 기억을 넘어선 되기들 Ⅱ     ▶ 그러나 『테스』를 반드시 이렇게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테스가 리좀이, 탈주선이 되는 특이점들이 존재한다. 테스는 짙은 어두움 한가운데에서 모든 사람들과 떨어져 있다. 그 때에는 자연도 그녀에게 적대적이지 않다. 내부는 선별된 외부이고 외부는 투영된 내부인 시점이 도래한다. 거기에서 테스는 모든 것들과 격리되어 야생 동물이 된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속에서 ‘희망찬 삶의 맥놀이’가 뛰는 것을 느낀다. 그녀는 그 어떤 기억도 없는 외딴 곳을 꿈꾼다. 그렇다면 테스가 알렉 더버빌을 죽이는 장면은 운명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테스의 한계를 뜻하는가, 아니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행위를 통해 새로운 여인으로 탄생하는 되기를 뜻하는가? 후자로 읽는 것은 하디를 배치들을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만들어나가는 인물들을 그린 작가로 보는 것이고, 그것은 곧 ‘되기의 블록’ 이라는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기도 하다.   ▶ 들뢰즈/가타리에게 글쓰기란 되기이다. 그것은 재현의 이야기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선/삶의 선의 창조이다. 탈기표적, 탈주체적 창조, 얼굴 없는 창조. “모든 사람들처럼 되기. 그러나 이것은 어떻게 그 누구도 아닌 사람, 어떤 사람도 아닌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되기이다. 회색 위에 회색을 덧칠하면서 스스로를 그리기.”   ▶ 베르그송의 전통에 따라 들뢰즈와 가타리는 ‘souvenir’와 ‘memory’를 구분한다. “우리는 어릴 적 기억을 가지고서 쓰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아이-되기인 아이와의 블록을 통해서 쓴다.” 사건에 실존을 부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건을 시원이나 기억으로 흡수시키는 대신 그것을 특이점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곧 사유와 감응의 새로운 길을 내는 것이다. 들뢰즈에게 이런 글쓰기는 정치적 함축을 띤다. 즉 그것은 소수 문학이며 ‘도래할 민중의 씨앗들’을 뿌리는 작업이다. 소수 문학은 한 몰적 집단은 민족학도 아니고 사적 관심사의 표현도 아니다. 그것은 분자적 개체군들에 주목한다.       제14강 절대적 탈영토화로서의 철학   ▶ 들뢰즈와 가타리는 ‘절대적 탈영토화’로서의 철학에 정치적 과제를 부과한다.(『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새로운 민중’과 ‘새로운 대지’의 구성이다. 이런 맥락에서 철학의 ‘절대적 탈영토화’와 자본의 ‘상대적 탈영토화’가 구분된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주체와 대상’은 사유의 빈곤한 근사치일 ㅃ ㅃㅜㄴ이다. 사유는 영토(territory)와 대지(earth)의 관계를 포함해야한다. 이 관계에서 일차적인 것은 대지 위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ㅌㅏㄹ영토화의 운동들이다. (영토는 대지 위에서 일정한 형태를 취한다) 탈영토화를 상대적으로 만드는 것은 대지가 영토의 운동들과 맺는 관계가 역사적으로 결정된다는 사실에 있다.   대지가 특정한 역사적 규정들에 제약되지 않는 ‘순수 내재면’으로 이행할 때, 그리고 ‘무한한 디아그람적 운동들’을 포함하는 존재와 자연에 대한 사유의 내재성에 들어갈 수 있을 때 탈영토화는 ‘절대적’이 된다.   1) 내재면 위에서의 탈영토화는 (형식들, 기능들, 감응들의) 재영토화를 배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래의 새로운 대지의 창조’에 입각해 재영토화를 정립한다.   2) 절대적 탈영토화는 “상대적 탈영토화와의 여전히 규정되어야 할 관계들에 관련해서 파악되고 작동된다. 따라서 여기에서 ‘절대적’이란 사회와 역사의 초월을 함축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의 극복을 이끄는 개념이다.(베르그송의 지속과 비교)   ▶ 근현대 철학과 자본의 관계는 단지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아니다. 근현대의 철학들은 사회적-역사적 규정을 하나의 무한점(無限點)에까지 밀어붙여 다른 어떤 차원으로 넘어가곤 했다.   들뢰즈/가타리에게 철학은 그 고유의 교환가치를 띤 ‘정신의 부드러운 상업행위’도 아니고 ‘서구의 민주주의적 대화’에 고유한 순수한(disinterested) 사교성도 아니다. 그것은 영토들 및 인구들(개체군들)의 운동과 긴밀한 연관성을 가져 왔다. 즉 소통, 교환, 합의, 의견에 복종하지 않는 것, 통념과 명제에 속하지 않는 ‘para-doxa’의 추구가 철학이며, 때문에 새로운 대지와 새로운 민중을 지향하는 철학은 늘 탈시대적 성격을 띤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은 유토피아적이다.   즉 철학은 자기 시대에 대한 비판을 극점(極點)으로까지 밀어 붙이는 정치적 행위이다. 문제는 단지 자아도취적일 뿐인 비판이나 강도론적 방법의 무능함에 빠지지 않고 어떻게 철학이 (절대적 탈영토화의 구축을 통해) 정치적이 될 수 있는가이다.   들뢰즈의 사건론에는 이런 물음이 깃들어 있다. 사건을 위해 산다는 것(“사건의 자식이 되라”)이 중요하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철학이 현재에 관련되는 대목은 부끄러움 이라고 본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 시대 바깥에 있지 않다는 것, 그것과 부끄러운 제휴를 지속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것은 다음 물음을 야기시킨다  : 내재면은 생명/삶을 해방시키는가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에    예속시키는가?   -끝-     (소설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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