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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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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롤랑 바르트 댓글:  조회:1337  추천:0  2019-01-14
후기 롤랑 바르트   “글쓰기는 우리의 주체가 도주해 버린 그 중성, 그 복합체, 그 간접적인 것, 즉 글을 쓰는 육체의 정체성에서 출발하여 모든 정체성이 상실되는 음화(negative) 이다.” 1. “나는 ~을 좋아한다” 나는 롤랑 바르트를 좋아한다. 그러나 누가 나에게 롤랑 바르트가 어떤 사람인가요 하고 묻는다면, 나는 더듬거리면서, 바르트를 치장하는 형식적인 단어 몇 가지로 그를 설명하려고 애쓰리라. 즉 나는 몇 가지의 단어를 알고는 바르트를 좋아한다고 떠벌인다. 그렇다면, 나는 다시금 살펴보아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롤랑 바르트’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그리고 바르트 본인은 정작 어떤 사람인지. 이렇게 해서 나는, 조금의 생각할 시간을 가진 후, 이 글의 첫 문장을 다음과 같이 고친다; 나는 롤랑 바르트의 문체, 특히 (이라고 번역됨. 문학과지성, 김희영 옮김)에서의 그의 글쓰기를 좋아한다. 커다란 혹은 추상적인 주제를 다루면서 그는 주제와 그다지 상관이 없을 듯한 사소한 일∙사물들에 집중하여 그것의 모습을 섬세한 펜터치로 묘사를 한다. 그러한 단상들은 색종이 조각들처럼 여기저기 모아지고 흩어지면서 하나의 형태/모자이크를 이룬다. 나는 그 조각들의 색깔을 보면서 감탄한다. 색종이 조각들의 틈새, 그 휴지부들 또한 내가 메우어서 형태를 완전히 하게 만들거나, 혹은 그 틈새의 빔[空虛]에 의해 주제를 확장, 또는 주제에서 벗어나게 만들도록 유도한다. 그것은 나에게 책을 읽는 즐거움을 가져다 준다.  이 즐거움을, 나는 좀더 이성적으로 알고자 한다. 또한 구조주의자에서부터 기호학자, 포스트 구조주의자까지, ‘현기증 나는 전이’라고 까지 불리우는 롤랑 바르트의 정체를 밝히고 싶다. 이러한 작업은 우선적으로 롤랑 바르트의 역사적∙사회적∙문화적 위치를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나는 롤랑 바르트를, 그의 글쓰기의 정체를 구조적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포스트구조주의에 위치하는 후기 바르트를 구조적으로 파악하려는 것은 잘못 끼우는 단추일까? 2. 계보적 나열 2-1. 이후(post)로서의 구조주의 후기 롤랑 바르트 혹은 후기 구조주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구조주의에 대한 윤곽이 어느정도 숙지되어 있어야 하나, 구조주의가 일정한 틀을 가지고 있는 거대 담론이 아닌 탓에 그 윤곽을 파악하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여기서는 구조주의를 그 전 단계의 사상들의 후기(post)로서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이정우의 에 의하면 구조주의는 19C 이래 전개되어온 실증주의, 변증법, 주체철학(임의적 용어)과 동시에 대립하면서 등장했다. 멘느 드 비랑에서 실존주의로 이어지는 반성(反省)철학(내면의 철학)과 정면 대립함과 동시에, 경험주의적(유명론적)인 실증주의에 반하는 구조주의는 기본적으로 합리주의(실재론적)를 표방한다. 현상을 바로 그렇게 만드는 본질적인 것을 찾는 입장인 합리주의의 전통 속에 위치지울 수 있는 구조주의는 대상 이면에 법칙성이 선재(先在)한다고 가정한다 . 또한 그것은 거대 이론으로서의 변증법과는 달리, 각 영역에서 구체적 연구를 행한 후, 서로 얽히면서 복잡한 장을 형성함으로써 거대 이론의 약점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칸트적 의미에서의 선험적 주체를 이어받고 있는 헤겔, 후설,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로 이어진 사조(현상학, 주체철학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가 갖고 있던 이분법—인식론[對象]과 반성철학[人間]의 양분 구도—과는 다른 시각으로, 즉 자연(대상)이 아닌 사람과 문화를 결정론적(과학적)으로 다루었다. 다시 말하면, 구조주의는 과학적 토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실증주의의 한계를 벗어나 있고, 거대 이론이면서도 변증법적 무모함을 벗어나 있으며, 인간과 사회를 사유하면서도 현상학적 주체주의를 벗어났다. 그러나 68혁명을 분기점으로 구조주의가 갖고 있는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첫째, 구조주의는 시간을 제거해버린 공간적 사유(빠롤보다 랑그를, 통시적 사고보다 공시적 사고를 선호)라는 것, 둘째, 결정론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구조주의는 우연과 불연속의 문제에 대해서 설명을 할 수 없다는 것, 셋째, 법칙화할 수 없는 몸/신체의 가변성, 역동성, 개체성, 주체성 등에 대해서 역시 설명할 수 없다는 점, 시간, 카오스, 욕망, 권력 같은 개념이 등장하면서 기존의 구조주의자들은 자신의 사유 이후(post)에 천착하기 시작했다. 2-2.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구조주의는, 부언하자면, 이전에 과학적인 기호 세계를 인위적으로 만들고자 했던 자신들의 모습(구조주의)을 조롱하면서 1960년대 후반에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주의의 반석이었던 소쉬르의 언어 이론에서 역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는데, 그는 랑그는 개별적 표현행위인 빠롤을 지탱하는 체계적 언어 양상이라고 한 반면(구조주의적 맥락), 기호는 기의와 기표로 이루어지고 이 둘의 관계는 필연적이지 않다고 하였다(포스트구조주의적 맥락). 이것은 곧, 의미화 과정이 불안정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기호는 두 층위(기의/시니피에와 기표/시니피앙) 사이에 존재하는 순간적 ‘고정물’임을 의미한다. 여기에 주의를 집중시킨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미끄러지는 기의로부터 저항하는 기표의 새로운 위치 형성에 천착한다. 그들은 ‘항존하는’ 언어 구조에 의해 ‘주체’가 형성된다는 기존의 자신들의 입장(구조주의)이 개인들의 주관적 과정을 거세시킨다고 보면서, 언어는 몰개성적 체계가 아닌, ‘사용중인’ 언어, 즉 주관적인 과정들과 항상 접합해 있다고 간주하고 ‘말하는 주체’ 혹은 ‘과정 안의 주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이는 언어가 항상 역동적이며 사회적 맥락 속에서 사용되어진다고 보는 바흐친 학파와 유사한 맥락을 갖고 있으나,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단지 담론만이 존재할 뿐이다”라는 슬로건을 강조한다.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또한, 주체는 객체를 파악하고 그것을 투명한 언어 매체로 표현한다고 주장한 경험주의적 전통에 반기를 들고, 주체와 객체는 분리할 수 없으며 지식은 주체의 경험에 선행하는 담론들로부터 형성된다고 보는 ‘담론적 형성 discursive formation’ 이론을 내세우면서 주체는 언제나 ‘과정 중에’ 있으며, 자율적이고 통합된 정체성은 없다고 주장한다. 푸코는 이러한 담론적 형성의 권력/지배에 대한 관계에 천착하면서, 담론은 모든 제도권이 사회를 지배하고 질서를 부여할 때 사용하는 매체이므로 권력과 분리될 수 없다고 역설하는 반면, 담론 이론에 중요한 기여를 한 루이 알뛰세는, 푸코가 너무 비관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이데올로기라는 용어로서 담론을 대체하고 그것의 이론화를 제안한다. 그는 우리가 우리로 하여금 모두 사회 구조 속에서 일정한 입장을 취하도록 소환(호명 interpellation)하는 이데올로기의 ‘주체들’이라고 주장하면서, 라캉의 정신분석을 활용하여(좀더 정적(靜的)으로), 상상계적 단계로부터 파생된 통합된 주체성이라는 환상을 거부하고, 자아의 의식적 생활과 욕망의 무의식적 생활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는 영속적으로 불안정한 실체라고 정의 내린다. 3. 롤랑 바르트 구조주의에서 후기구조주의로의 움직임은 부분적으로는 작품에서 텍스트로의 움직임이다  (테리 이글턴, , 창작과비평, 1986, 171쪽) 바르트의 후기를 결정 짓는 것을 한 단어로 압축하자면 텍스트(론)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에서 텍스트로의 움직임.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텍스트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이 작품과 다른 점은? 상식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텍스트’라는 용어는 ‘글’이라는 광범위한 의미를 나타내는데 쓰인다. 이 쓰임새는 최근의 포스트구조주의적 담론의 유입/유행으로 인해 더욱 그 범위를 넓혔는데, 단순히 문자를 매개체로 하는 ‘글’을 가리키는 것 뿐만 아니라, 어떤 내용/사건/의미를 갖고 있는 갖가지 표현수단들을 지칭하고자 한다; 한 영화가 갖고 있는 ‘텍스트’, 공간의 ‘텍스트’, 등등.. 반면 형식주의나 구조주의 비평가들이 말하는 텍스트는 “문학 작품의 현상적인 표면, 즉 작품 안에 나타나는 말들의 짜임으로 단일하고도 안정된 의미를 드러내는 것”을 가리킨다.(바르트, ‘Texte’, 세계 대백과 사전) 텍스트는 직물을 뜻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사람들은 이 직물을 그 뒤에 다소간의 의미(진리)가 감추어져 있는 하나의 산물, 완결된 베일로 간주해 왔다. 이제 우리는 이 직물에서 지속적인 짜임을 통해 텍스트가 만들어지며 작업하는 생성적인 개념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 직물, 이 짜임새 안으로 사라진 주체는 마치 거미줄을 만드는 분비액을 토해 내며 약해지는 한 마리의 거미와도 같이 자신을 해체한다. 우리가 신어 사용을 좋아한다면, 우리는 텍스트론을 거미학(hyphologie, 그리스어 어원인 히포스[hyphos]는 직물/거미줄을 뜻한다)이라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론’, 111쪽) 3-1. 거미학(Hyphologie) 바르트가 말하는 ‘텍스트’를 ‘작품’과 비교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테리 이글턴이 말한 것처럼 이 둘을 가른다면, ‘작품’은 구조주의를, ‘텍스트’는 포스트구조주의를 상징할 수 있는 용어라 할 수 있다. 구조주의적 관점에서의 ‘작품’이 단일하고도 안정된 의미를 드러내는 기호체계라면, 이런 고정된 의미로 환원될 수 없는 무한한 기표들의 짜임이 곧 텍스트이다. '작품'은 항상 이분법적인 구조로서(상징/비상징, 정신/물질) 지금까지 비평이 추구해 온 것이 총체적이고도 단일한 의미(기의)의 발견과 재구성에 있다면 그것은 의사소통이 지니는 결정적이고도 고정적이며 목적론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문학은 언어이며, 이 언어는 내용이 아닌 구조, 그 순수한 형태 체계안에서 연구되어야 한다”며 문학을 과학적으로 실천할 수 있다고 믿었던 구조주의자 바르트는 점차 이런 로고스 중심주의에 입각한 작품이라는 개념으로는 의미의 흔들림과 다양한 층을 포착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바르트는 크리스테바의 작업, 즉 기의가 생산되기 이전 기표들의 역동적인 유희 및 작업에 시선을 돌려 기표에 자율성을 부여한 작업에 영향을 받아, 텍스트를 다각적이고도 물질적, 감각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기표의 무한한 의미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열린 공간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정의내리게 된다. 그렇게 하여 텍스트는 더 이상 ‘작품’이 아닌 ‘언어 생산의 장’으로 변모한다.  텍스트가 더 이상 산물이나 기의의 창 창출 도구로 간주되지 않고, 의미 실천의 장, 언술 행위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된다면, 이젠 글읽기가 창조적 행위로 변모된다. 바꿔 말하면 저자의 위치는 배제된다. 저자란 중세 이후에 종교개혁의 개인적 신앙, 합리주의, 실증주의와 더불어 생겨난 자본주의의 소산물이다. 이런 저자의 제국은 말라르메 이후 흔들리기 시작하며, 글쓰기를 위해 저자를 제거하는 작업이 시작된다. 이후 저자의 탈신성화, 언술행위가 하나의 텅 빈 과정이라고 보는 언어학, 바흐친의 상호 텍스트 개념은 우리에게 저자가 더 이상 글쓰기의 근원이 아니라는 것을, 글쓰기에는 기원이 부재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따라서 저자라는 개념은 이제 설 자리가 없으며, 다만 여러 다양한 문화에서 온 글쓰기들을 배합하며 조립하는 조작자, 또는 남의 글을 인용하고 베끼는 필사자(scripteur)가 존재할 뿐이다. 바르트는 에서 , "저자를 계승한 필사자는 이제 더 이상 그의 마음속에 정념이나 기분, 감정,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고, 다만 하나의 거대한 사전을 가지고 있어, 거기서부터 결코 멈출 줄 모르는 글쓰기를 길어올린다. 삶은 책을 모방할 뿐이며, 그리고 이 책 자체도 기호들의 짜임, 상실되고 무한히 지연된 모방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이제 이런 저자의 배제는 독자의 탄생을 불러들인다. 그런데 이 독자는 심리나 역사가 부재하는, 다만 일 뿐이다. 독자는 그의 일시적인 충동이나 기벽, 욕망에 따라 텍스트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해체하는 자이다.() 이렇게 바르트는 저자와 독자, 글쓰기와 글읽기, 창작과 비평, 실천과 이론 등 그 이분법적인 경계를 파기하고, 즐거움의 대상으로서의 텍스트를 실천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3-2. 육체의 즐거움 “그 독자, 나는 그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를 찾아나서야 한다(나는 그를 [draguer] 한다). 그때 즐김의 공간이 생겨난다. 내게 필요한 것은 타자의 이 아니라 공간이다. 욕망의 변증법, 예측불허의 즐김이 가능한 그런 공간”(, 51쪽)   글읽기의 주체는 더 이상 소비자가 아니라 의미 생산의 주체로서 의사 소통적/표현적/재현적 언어를 해체하고 무한한 기표들의 유희를 조작, 분산, 재분배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글읽기는 곧 글쓰기를 의미하며,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텍스트론은 새로운 인식론적 대상을 부각시킨다. 바르트의 텍스트는 작가와 독자가 서로 찾아 만나야 할, 구체적이고도 관능적인 만남의 공간이다. 그러므로 글을 읽거나 쓴다는 것은 사랑에서와 마찬가지로 결합에의 꿈을 실현시켜 준다. 이에 대해 주브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독서란 그 자체로서 구조화의 행위이고, 이 구조화의 근거는 바로 육체이다. 즉 독자를 개인적이고도 개별체적인 주체로 정의하게 하는 것은 하나의 사상이 아닌 바로 육체이다. 그러므로 텍스트의 즐거움은, 비록 그것이 문화에 연유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우선은 각 주체의 육체에서 찾아야 할 필요가 있다. 주체의 개인적이고도 주관적인 일련의 접촉이나 성찰을 통해서만 비로소 작품의 문화적 양상이 독자에게, 독자의 특이한 욕망 속에 스며들기 때문이다. 의미과정의 수용은 이렇듯 우리를 주조한 문화보다는 개별적인 육체의 움직임과 더 깊은 관계를 맺게 한다.(V. Jouve, , 민음사, 1986, 100-101쪽.) “내게 즐거움을 준 텍스트를 하려 할 때마다, 내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내 이 아닌 내 이다. 그것은 내 육체를 다른 육체들과 분리시키며 내 육체에 그것의 고통, 또는 즐거움을 적응시키는 소여(所與)이다. 그러므로 내가 발견하는 것은 내 즐김의 육체이다.”(, 110쪽) 육체를 통해 이루어지는 글읽기의 체험을 바르트는 즐거움(plaisir)과 즐김(jouissance)으로 구분한다. 그는 즐거움과 즐김의 구별을 위해 정신분석학적 개념에 의존하는데, 즐거움의 텍스트는 문자를 인정하지만(즐거움은 말해질 수 있는 것이기에), 즐김의 텍스트는 작가와 더불어 가 시작된다(왜냐하면 즐김의 텍스트는 말해질 수 없는 것이기에, 혹은 말해진 것 사이에 놓여 있기에). 따라서 즐김의 텍스트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다만 그것을 쓰는 것만이 가능하다. 즐거움의 텍스트는 문화에서 와 문화와 단절되지 않으며, 글읽기의 마음 편한 실천을 허용하여 우리를 행복감으로 채워주는 텍스트이다. 이때 주체는 모든 종류의 문화에 대해 깊은 쾌락과 자아의 놀라운 강화, 또는 그 진정한 개별성을 체험하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그것은 의 동의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즐김의 텍스트는 독자의 역사적, 문화적 심리적 토대나, 그 가치관, 언어관마저도 흔들리게 하여 자아가 회복되는 것을 원치 않는, 절대적으로 자동사적인 것이다. 그것은 어떤 목적성도 가지지 아니하며, 모든 규범적인 것을 전복시키는 변태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즐거움과 즐김의 구별은 그리 엄격하지 않으며, 대립적이라기 보다는 상호보완적인 의미로 해석되어져야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장애물을 치우고 더 멀리 나아가도록, 혹은 단순히 말하고 글을 쓰도록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194-195쪽) 에서 바르트가 말하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다. “왜 나는(나를 포함한 몇몇 사람들은) 소설, 전기, 역사적 작품에 한 시대, 한 인물의 이 재현되는 것을 보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일까? 시간표, 습관, 식사, 숙소, 의복 등 이런 하찮은 세부적인 것에 대한 호기심은 왜일까?” (, 101쪽) 이것은 텍스트의 전복적 양상과 관계된다. 물질적이고 감각적/세부적인 것이 지적이고 추상적인 언어의 나열 속에 불쑥 끼어들 때, 그것은 하나의 틈새를 자아내며, 그리하여 텍스트를 불연속성의 공간으로, 관능적인 공간으로 변형시킨다. 바르트에 의하면 문학의 전복적인 양상은 기존의 문화나 언어의 파괴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언어를 변형하고 재분배하는 데 있다고 말해진다. 왜냐하면 언어의 재분배에는 반드시 틈새가 있게 마련이며, 이 틈새가 즐거움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위반이란 파괴가 아닌 인정하고 전도하는 것이다.”(뱅상 주브, 앞의 책 89쪽) 3-3. 결어 : 필사자(scripteur) & 푼크툼(punctum) 또 하나의 필사자가 되어 여기에 롤랑 바르트를 재생산해 내었다. 롤랑 바르트를 이해하기 위한 본 텍스트는 여기에 여러 필사자의 글들을 발췌, 조합, 재조합해 내어 변형된 일그러진 ‘나의’ 롤랑 바르트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바르트를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한 시도는 얽키설키 짜집기 되어 내가 좋아하는 바르트의 주관적인 이미지에서 그다지 손상되지 않은채 재생산되었다. 물론 바르트는 내가 상상하는 대로의 바르트는 결코 아니리라. 문학사회학자로서 그리고 텍스트를 자신만의 즐거움 속에만 가두려고 하지 않고, 복수태적인 권력 담론으로서의 언어체(langue)를 해체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글쓰기로 이동하는 그의 자세를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바르트는 ‘바르트’가 아니다. 바르트는, 내가 ‘좋아하는’ 바르트는 내향적인 성격으로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소한 일/사건들이 자신에게 가져다주는/찌르는 푼크툼(라틴어로 點을 가리키는 말이다)에 천착하는 가상의 혹은 역사적 인물이다. 이것이 나만의 진실이며, 나의 푼크툼이다. 나는 어쩌면 그의 앞에서 그가 말하고 있는 필사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뜻하는, 글 읽는 독자로서 나는 글을 쓰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를 읽으면서 혹은 쓰면서 즐거움(plaisir)을 느끼는지 즐김(bliss)을 느끼는지 명확하지 않다. 그를 고전으로서, 즉 스투디움(studium, 스투디움은 문화에 속한다)으로서 받아들이는/읽는 와중에, 보이지 않는 구덩이(點)에 빠지는 나는 그가 설치해 놓은(의도하건/하지 않건 간에) 틈새/푼크툼에 걸려 혼란스러워 한다. 이 즐김(bliss)! 나는 롤랑 바르트를 좋아한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1차 대전 중인 1915년 프랑스 남서부의 작은 해안도시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후 1년만에 해군으로 복무하던 아버지가 사망하여, 어머니와 조부모의 슬하에서 자랐다. 바르트는 아홉 살 때 서적 제본소에 조촐한 일자리를 얻은 어머니를 따라 파리로 이주하여, 젊은 시절을 가난하게 살았을 뿐만 아니라, 건강상의 문제로 두 번이나 요양소 생활을 하였다. 그래서 제 2차 대전 중에는 병역면제를 받고 1942년부터 약 5년 동안 알프스의 폐결핵 요양소에서 치료를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련의 기간에도 바르트는 엄청난 분량의 서적을 독파하여 요양소를 떠날 때는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에 상당한 지식을 축적했다고 한다.    건강을 회복하여 파리로 돌아 온 후, 외국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자리를 얻게 되어, 처음에는 루마니아, 그 다음에는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어를 지도하면서, 거기서 기호학자로 유명한 그레마스(Greimas)와 친하게 되었다. 1952년에 귀국하여 친구들의 도움으로 정부로부터 어의학(lexicology)에 관한 연구비지원을 받았으나, 이 연구보다는 오히려 문학평론과 문화비판에 몰두하여, 1953년에는 『글쓰기 영도』를 출판하고, 대중문화의 이면에 은폐된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수많은 기사를 투고함으로써, 1957년에는 이 원고들을 모아, 대중문화 비판서로 유명한 『신화·Mythologies』를 출판하였다.    전후의 지적 위기에 대응하여 사르트르와 메를로 퐁티가 헤겔과 훗설 및 하이데거의 현상학을 도입하였으나, 바르트는 매스미디어가 매개하는 문화에 함축된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기 위해 소쉬르와 옐름슬레브 등의 구조주의를 원용한다. 1964년에 낸 『기호학의 원리』에서 바르트는 구조주의를 기호의 사회학으로 발전시켰다. 바르트는 이처럼 활발한 창작활동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그렇게 유명하지는 않았으나, 1965년 이후에 격렬하게 진행된 문학비평을 둘러싼 소위 신구논쟁을 통해서 그는 프랑스 사상계의 중앙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하게 된다.    바르트는 1963년에 출판한 『라신에 대하여』를 통해서, 소르본느대학 교수로 역시 라신을 연구하고 있던 피카르(Raymond Picard)가 발표한 『라신의 생애』를 공격하였고, 이에 분개한 피카르가 『새로운 비평이냐, 새로운 사기냐』(1965)를 통해서 마르크스주의와 현상학적 실존주의 및 구조주의적 비평 경향을 대변하는 바르트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이 비판에 대한 대응으로 출판한 『비평과 진실』에서, 바르트는 다시 소르본느의 피카르를 비롯한 모든 전통적 비평을 대학비평 혹은 랑송주의로 취급하고, 이를 실증주의적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포섭된 정치적 및 지적 보수주의라고 싸잡아 비난하였다.    이 논쟁에 거의 모든 지식인들이 끼어 들고 저널리즘까지 가담하여 구비평과 신비평간의 열띤 논쟁이 전개되었고, 이 논쟁을 통해서 바르트는 저명인사가 되었고, 바르트가 소속된 고급연구실습학교(Ecole Practique des Hautes Etudes)는 진보적인 좌파 사상과 정치의 중심지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구비평을 대표하는 사례는 20세기 초부터 존경을 받아온 랑송(Lanson)의 『문학사의 방법』이며, 랑송의 방법론이 제자들에 의하여 경직된 실증주의 비평으로 교조화되면서 랑송주의로 불리게 되었고 이를 대학비평이라고도 한다. 한편 신비평은 실존주의, 정신분석학, 구조주의, 마르크스주의 등 주로 반실증주의적인 비평경향을 총칭하는 것이다.     진보적 경향의 신비평을 대변하는 바르트가 보기에, 보수적인 실증주의 비평은 문학의 궁극적 본질에 대한 철학적 성찰은 외면하고, 세밀한 문헌조사에 치중함으로써 마치 문학이 그 자체로서 자연스럽고 자명한 진리인 것처럼 당연시하는 결정론적 관점을 조장하는 것이다. 어떻든 실증적 비평과 해석적 비평간의 대립을 둘러싼 신구논쟁을 통해서, 바르트는 레비스트로스, 푸코, 알뛰세, 라깡 등 걸출한 사상가들과 함께 구조주의 사상의 대가로 인정받게 되었고, 이러한 업적을 인정받은 바르트는 1977년에 드디어 명성 높은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1980년 2월 어느 날 그 대학의 앞길을 건너다가 트럭에 치어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가난과 질병으로 불안정한 삶을 살아 온 것처럼, 바르트의 문학적 관심도 끊임없이 변화해왔기 때문에 그의 입장을 단정적으로 범주화하기는 어렵다. 그는 한 때 실존주의자였고, 마르크스주의자였고, 전위적인 텍스트 비평가로 유명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바르트는 문화현상에 대한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접근을 강조하는 대표적인 구조주의 사상가이자 기호학자이면서도, 후기 저작인 『S/Z』와 『텍스트의 쾌락』 이후에는 과학성과 구조의 엄격성을 강조하던 종래의 관심을 스스로 비판하면서, 텍스트의 해석에 있어서 복수성을 인정하고 다양한 해석을 즐기는 쾌락주의를 선언하게 된다. 그러나 학문적 관점의 끊임없는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든 저작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다음과 같은 일관성이 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첫째로, 바르트는 영원불변의 본질이 있다고 확신하는 본질주의를 거부한다. 본질주의에 대한 바르트의 일관된 거부감은, 인간에게 불변의 본질 같은 것은 없다고 주장하는 사르트르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사르트르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인간뿐만 아니라 사물에도 불변의 본질 같은 것은 없다고 보기 때문에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항상 열어놓는다.    둘째로, 현대사회의 지배 세력은 기존의 사회 제도와 규범이 가장 자연스럽고 정당한 것이라는 신화를 유포하는 경향이 있고, 이는 중세 사회가 모든 것을 신의 섭리로 정당화한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일상적인 문화현상에 있어서 정당하고 자연스러움을 표방(the voice of the natural)하는 모든 것을 일관성 있게 비판한다.    셋째로, 바르트는 불변의 본질도 없고, 인간세계에 자연스러운 사실도 없다고 본다. 모든 사회적 및 문화적 현상은 그 나름의 역사적 기원이 있고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불가피하고 자연적인 것처럼 보일 뿐이며, 그 이면에는 은폐된 이데올로기가 있다고 본다. 따라서 소쉬르의 기호학적 관점을 수용하면서도 바르트는 이를 한 단계 더 극단화하여 이면에 숨겨진 이데올로기를 폭로한다.   (출전: 전경갑 외, 『문화적 인간·인간적 문화』, p.73-76)         내용요약 top 롤랑 바르트가 사진에 대해 전문적인 기술이나 식견이 없었다는 게 흥미롭다. 그는 심지어 자신이 `아마튜어조차도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카메라 루시다」p.17]. 다소 뻔한 얘기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진의 본질에 대해 명료한 인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바라보여지는 사람과 바라보는 사람이라는 두 가지 경험만을 이용할 수 있을 뿐이었다[위의 책, 같은 쪽].` `이미지는 무겁고 움직이지 않으며 완고하지만(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회는 이미지에 의지한다), `자아`는 가볍고 분열되며 흩어지고[…]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사진이란 내 자신이 마치 타인처럼 다가오는 일`이다[p.19]. `사진은 주체를 객체로, 심지어는 박물관의 진열품으로도 변형시킨다`  사진에 찍힌 존재는 `죽는다`. ` `죽음`은 사진의 본질이다[p.22].` 죽음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는 맥락도 모르는 채 사르트르가 했다는 `죽은 자는 산 자들의 먹이` 라는 말을 되씹곤 한다.  죽음으로써 그에게선 무수한 역동의 가능성이 제거되었고, 산 자들은 움직일 수 없게 된 그를 마음껏 요리한다. 필자는 가끔 `험담`이란 것에 대해 생각하면서 이 말을 변형시켜 본다 : `여기 없는 자는 여기 있는 자의 먹이`라고. `부재(不在)`는 완벽한 피동성을 의미한다. 여기 없는 자는 여기 있는 자들이 형성하는 자신에 대한 이미지에 완전히 무력하다. 그의 존재의 풍부한 울림과 떨림 같은 것은 말의 칼날에 가차없이 재단된다. 말은 말 자체의 힘과 흐름에 따라, 그를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변형시킨다. 부재는 곧 죽음이다. 죽음은 곧 부재다.  `나[바르트]에게 있어서 사진가의 대표적인 기관은 눈이 아니라[…]손가락이다[p.22].` 총의 방아쇠를 당기듯 셔터를 눌러 일거에 그 사물을 지배하는 사진, 세계를 화석화시키는 무기, 이처럼 무서운 무기는 달리 없다.  그러나 사진에는 매력적인 반대면이 있다.       롤랑 바르트에 의하면 사진가는 죽음의 대행자다. 죽음은 사진의 본질이며, 사진의 시작은 기본적으로 대상의 파국을 의미한다. 사진 밖의 대상은 사진 속에 담기는 순간부터 죽음을 맞이한다. 대상이 하나의 이미지로 남는 순간, 그 대상은 죽음을 시작하고, 이미지는 새로운 의미로 태어난다. 이렇듯 욕망의 대상은 욕망되어지는 순간, 다시 말해 욕망의 주체에 의해 잡히는 순간, 또다른 욕망을 낳으며 저만치 도망친다. 그리고 더 큰 허무와 아픔을 남긴다. 사진은 부재하는 것, 한때 존재했던 그 무언가가 던지는 아픔인 것이다. 따라서 ‘빛으로 쓴다’는 포토그래피는 ‘죽음을 기록하는’ 타나토그래피(thanatography)이다.     Roland Barthes    ロラン・バルトについて、なにかを書こうと試みたことのある人なら、経験したであろうが、彼の著作に思いを巡らせて書いた文章は、自然と彼の文体に似てきてしまう。彼の記述はそれだけ伝染性の高いものであり、一種独自のものである。1970年から80年代に多くの読者を魅了した理由のひとつは、彼のその独特の文章スタイルにある。  彼の言語学的な主張はいささか曖昧なもので、ドイツ観念論的な精緻な構造をとらない。理解しようと努力すれど、しばらくすると微妙に変化した形で提示され、あたかも理解されることを拒んでいるかのようだ。ひとつの事象を時代の文脈で追っていくときに、社会的な変化に応じてその認識が変容するのに似ている。まるで、あらゆる事象が相互作用のなかで規定され、認識される「現在」を比喩しているかのようだ。  彼の、文学的な主張を読めば読むほど、それは彼の「美学」に他ならないという事に次第に気付く。悲しいかな、論理であるようで論理ではないのである。彼に対する多くの批評・批判がどこか的外れで陳腐なものに感じてしまうのは、そういった理由によるのかも知れない。  騙されるのなら甘美な夢を伴ったものの方が良いに決まっている。しかしてバルトの書物は読み継がれていくのである。 年表 1915年 フランスのシェルブールに生まれる  1916年 父の死        幼年期をバイヨンヌで過ごす  1934年 結核発症  1935年 ソルボンヌ  1941年 結核再発(5年間のサナトリウム生活)  1948年 ブカレストにてフランス語講師  1949-50年 アレキサンドリアにてフランス語講師  1952年 国立科学研究センター研究員  1962年 高等学術研修院研究指導教授  1976年 コレージュ・ド・フランス教授  1977年 母の死  1980年 交通事故死 著作 Le Degre zero de l'ecriture, Editions du Seuil, 1953  Writing Degree Zero  『零度のエリクチュール』、みすず書房、1971年 Michelet par lui-meme, Editions du Seuil, 1954  Michelet  『ミシュレ』、みすず書房、1974年 Mythologies, Editions du Seuil, 1957  Mythologies  『神話作用』、現代思潮社、1967年 Sur Racine, Editions du Seuil, 1963  On Racine  「ラシーヌ論」 Essais critiques, Editions du Seuil, 1964  Critical Essays  『エッセ・クリティック』、晶文社、1972年 Critique et Verite, Editions du Seuil, 1966  Criticism and Truth  「批評と真実」 Systeme de la mode, Editions du Seuil, 1967  Fashion system  『モードの体系』、みすず書房、1972年 L'Empire des signes, Skira, 1970  Empire of Signs  『表徴の帝国』、新潮社、1974年 S/Z, Editions du Seuil, 1976  S/Z  沢崎浩平訳、『S/Z』、みすず書房、1973年 Sade, Fourier, Loyola, Editions du Seuil, 1971  Sade, Fourier, Loyola  『サド、フーリエ、ロヨラ』、みすず書房、1975年 Nouveaux Essais critiques, Editions du Seuil, 1972  (New Critical Essays)  花輪光訳、『新=批評的エッセー』、みすず書房、1977年 Le Plaisir du texte, Editions du Seuil, 1973  Pleasures of the Text  『テクストの快楽』、みすず書房、1977年 Roland Barthes par Roland Barthes, Editions du Seuil, 1975  Roland Barthes  佐藤信夫訳『彼自身によるロラン・バルト』、みすず書房、1979年 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 Editions du Seuil, 1977  A Lover's Discourse: Frangments  三好郁朗訳『恋愛のディスクール』、みすず書房、1980年 lecon, 1978  "Inaugural Lecture"  花輪光訳、『文学の記号学』、みすず書房、1981年 Sollers ecrivain, Editions du Seuil, 1979  Writers Sollers  『作家ソレルス』、みすず書房、1986年 La Chambre claire: note sur la photographie, Gallimard et Seuil, 1980  Camera Lucida. Reflections on Photography  花輪光訳、『明るい部屋』、みすず書房、1985年 Le Grain de la voix: entretiens 1962-1980, Editions du Seuil, 1981  The Grain of the Voice: Interviews, 1962-1980  「声の肌理: 1962-1980年の対談集」 Litterature et Realite (en collaboration), 1982 Essais critiques III, L'Obvie et l'Obtus, Editions du Seuil, 1982  The Responsibility of Forms. New Critical Essays on Music, Art and Representation  沢崎浩平訳、『第三の意味』、みすず書房、1984年  沢崎浩平訳、『美術論集』、みすず書房、1986年 Essais critiques IV, Le Bruissement de la langue, Editions du Seuil, 1984  The Rustle of Language  花輪光訳、『言語のざわめき』、みすず書房、1987年  沢崎浩平訳、『テクストの出口』、みすず書房、1987年 L'Adventure semiologique, Editions du Seuil, 1985  The Semiotic Challenge  花輪光訳、『記号学の冒険』、みすず書房、1988年 Incidents, 1987  沢崎浩平・萩原芳子訳、『偶景』、みすず書房、1989年 La Tour Eiffel (en collaboration avec Andre Martin), 1989  花輪光訳、『エッフェル塔』、みすず書房、1991年 Oeuvres completes tome 1, 1942-1965, Editions du Seuil, 1993  「ロラン・バルト全集 第一巻」 Oeuvres completes tome 2, 1966-1973, Editions du Seuil, 1994  「ロラン・バルト全集 第二巻」 Oeuvres completes tome 3, 1974-1980, Editions du Seuil, 1994  「ロラン・バルト全集 第三巻」 花輪光訳、『物語の構造分析』、みすず書房、1979年 沢崎浩平訳、『旧修辞学』、みすず書房、1979年 『バルト、<味覚の生理学>を読む』、みすず書房、1985年 下澤和義訳、『小さな神話』、青土社、1996年 下澤和義訳、『小さな歴史』、青土社、1996年    参考文献 邦文 鈴村和成著、『バルト テキストの快楽』、講談社、1996年 渡辺諒著、『バルト以前/バルト以後 : 言語の臨界点への誘い』 水声社、1997年 遠藤文彦著、『ロラン・バルト : 記号と倫理』、近代文芸社、1998年 篠田浩一郎著 『ロラン・バルト : 世界の解読』、岩波書店、1989年 花輪光著 『ロラン・バルト : その言語圏とイメージ圏』、みすず書房、1985年 荒木亨著 『ロラン・バルト/日本』、木魂社、1989年 原宏之著 『〈新生〉の風景 / ロラン・バルト、 コレージュ・ド・フランス講義』、冬弓舎、2002年 出版社サイト 翻訳 G.ド・マラク, M.エバーバック著 ; 篠沢秀夫訳 『ロラン・バルト』 青土社、1974年 L.J.カルヴェ、花輪光訳 『ロラン・バルト伝』 みすず書房、1993年 R.カワード, J.エリス共著 ; 磯谷孝訳 『記号論と主体の思想 : バルト・ラカン・デリダ・クリステヴァなど』、誠信書房、1983年 スティーヴン・アンガー著 ; 千葉文夫訳 『ロラン・バルト : エクリチュールの欲望』 勁草書房、1989年 ジョナサン・カラー著 ; 富山太佳夫訳 『ロラン・バルト』 青弓社、1991年    
6    예술의 융·복합과 고정된 틀로부터의 자유 시와 미술을 중심으로 / 김철교 댓글:  조회:1345  추천:0  2019-01-14
예술의 융·복합과 고정된 틀로부터의 자유 시와 미술을 중심으로   김철교*     I. 들어가는 말 II. 시와 미술에 있어서의 이미지 1. 시와 미술의 상호관련성 2. 시화 회화의 결합방식 3. 시와 미술의 이미지 4. 이미지 해석의 다양성 III. 나오는 말       I. 들어가는 말   현대예술은, 특히 세계 2차 대전이후 과학기술이 깊숙이 스며들어, 앞으로의 방향을 종잡을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시간의 테스트’를 거쳐 어떤 것은 클래식으로 자리를 잡고, 어떤 것은 한때의 유행으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 키이란(Matthew Kieran)은 『예술과 그 가치(Revealing Art)』에서 좋은 예술작품이란, 삶에 대한 통찰력과 이해, 세계를 보는 방식을 풍부하게 해주는, 다소 불편하고 낯설지만 마음에 와 맺히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반면 나쁜 작품은 경험의 확장이라는 문제의식이 없고, 단선적인 주장을 반복하는 작품들이다.   모든 예술이 21세기에 들어와 더욱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은 바로 ‘다소 불편하고 낯설지만 마음에 와 맺히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아이디어를 짜 내는 예술가들의 다양한 시도 때문이기도 하다. 끝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예술에만 그치는 현상은 아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보다 낳은 편리성의 발견, 새로운 아름다움의 추구, 다양한 사상의 부침 등 전반적인 가치관의 변화 양상이 바로 역사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럽각지에서 혁신적인 미술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르네상스 이래 전개되어 온 전통적인 미(美)의 개념을 초월하여, 사실적이고 표피적인 것 보다는 본질적인 것을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 현대 예술과 예술론의 변화에 가장 중요한 특성 중의 하나는 무엇보다 예술 장르들 간의 경계 붕괴 내지는 융·복합에 있다. 특히 21세기에 들어와서는 모든 예술에 과학기술이 접목되면서 경계허물기 혹은 상호협력과 보완이 가속화되고 있다.   화가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는 베토벤을 위대한 예술가의 표본으로 보았으며, 베토벤의 에서 영감을 얻어 를 그렸다. 베토벤은 실러(Friedrich von Schiller, 1759-1805)의 시 에서 영감을 얻어 을 작곡한 것이다. 오스트리아 미술관의 대형 벽화 는 시와 음악, 조형을 통합한 총체적인 예술을 창조하고자 했던 클림트의 열망을 구현한 작품이다.   문학과 음악, 특히 시와 음악은 시 자체가 운율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어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엘리엇은 음악연구가 시에 기여한다고 주장하였는데 그의 는 바로 베토벤의 라는 표제가 붙은 음악과 연결되어 있다. 소설에 있어서도 헉슬리는 에서 대위법이라는 음악적 기법을 사용하였다. 대위법이란 음악에서 2개 이상의 선율들을 결합하는 기법을 말하듯이, 문학에서는 서로 다른 감정이나 주제를 병치시키는 기법이다.   “모든 예술이 서로 가까워지도록 한 장소에 모으고, 한 예술에서 다른 예술로 옮겨가는 변화를 추구해야만 한다.······잭슨 폭록과 추상표현주의······화가들에게서······마침내 주제와 의미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회화만이 아니라 문학도 주제를 벗어던지고, ‘단어가 논리에서 해방될’ 경우에만 비로소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주장은 예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모든 학문과 예술이 융·복합을 모색하고 있는 요즘, 미술 분야에서는 활발하게 음악, 영상, 사진, 회화, 조각, 스토리텔링 등이 함께 협력하여 등장함으로써,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음악-미술-문학에서 각각의 이론과 방법론들이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음으로써 상호의 영역을 풍부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김춘수의 ‘무의미시’이론은 미술과 음악에서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고 본인이 밝히고 있다. 또한 그가 주장하는 ‘서술적 이미지’는 미술의 ‘미니멀리즘’과 비견되며, 무의미시이론을 적용하여 쓴 시들은 피카소의 ‘분석적 큐비즘’의 영향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이처럼 시문학 분야에서도 새로운 이론과 기법의 개발을 위해서 이웃 예술이론과 방법론을 차용하는 것도 예술 융·복합의 긍정적인 효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의 융·복합문제와 고정된 틀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과제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본고에서는 음향예술인 음악을 제외하고, 언어예술의 하나인 시와 형상예술에 속하는 회화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한다. 특히, 예술 융·복합의 시대에 시문학과 미술의 상호관계를 살펴보면서 앞으로의 발전방향에 대한 시사점을 찾고자한다.   II. 시와 미술에 있어서의 이미지   1. 시와 미술의 상호관련성   문학과 미술의 상호관련은 내용(주제), 형식, 수용 등 여러 방면에서 조명해 볼 수 있다.   첫째, 작품의 제재나 주제 측면이다. 그리스-로마 신화나 성서는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두 예술의 공통된 소재를 제공한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들의 불후의 명화는 후세의 많은 시인들에게 시를 쓰는 동기가 된다. 작가들은 인접 예술의 작품에서 얼마든지 창작의 영감을 얻을 수 있다. 상상력이란 모든 예술에 공통된 창조의 원류이기 때문이다.   둘째, 표현방식과 매체사용에서의 관계이다. 모방(미메시스)의 개념으로 환원하는 시학원리는 고대 이후 두 예술의 공통성을 설명하는 기초가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 25장에서 시인과 화가를 함께 모방하는 작가로 소개한 이후 두 예술가는 매우 가까운 사이에 있는 것으로 인정되어 왔다. 호라티우스 『시학』에서도 ‘시는 그림과도 같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구체적 매체사용의 이질성은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셋째, 예술작품의 해석과 수용의 문제이다. 미술, 음악 그리고 문학은 추구하는 목표, 기능, 영향이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예술작품의 수용자(독자 및 관객 등)들은 모든 예술작품이 제공하고 있는 이미지들에 대한 해석과 수용이 제각각일 수밖에 없으나, 예술이라는 큰 틀에 함께 묶일 수 있는 것이다.   시와 그림과의 관계에서, 송나라 소식(蘇軾, 1037-1101)은 당나라 왕유(王維, 701-761)의 시와 회화를 칭찬하면서 ‘왕유의 시 속에 그림이 있고, 왕유의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고 하였다. 북송(960-1127) 화가 곽희의 『임천고치(林泉高致)』에 “시는 무형의 그림이고 그림은 유형의 시이다”라는 말이 있다. 남송(1127-1279)시대의 오룡한(吳龍翰)은 ‘그려내기 어려운 정경을 그려낼 때에는 시로써 보완하며, 읊조리기 어려운 시를 읊을 때는 그림으로써 보완한다.(畵難畵之景, 以詩湊成; 吟難吟之詩, 以畵補足)’라고 하여 시와 회화의 결합 가능성뿐만 아니라 그 필요성까지도 언급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중국의 시와 그림에 대한 입장을 받아들여, 고려에서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시화일치는 사대부 문인들의 삼절의 추구와 맞물려 장려되었다. 이인로(1152-1220)는 “시와 그림이 묘한 곳에서 서로 도와주는 것이 한결같다 하여 옛 사람이 그림을 소리없는 시라 이르고, 시를 운율이 있는 그림이라 일렀다”고 하였다. 사대부 문인화가로 시를 잘 짓고 그림에 뛰어난 인물은 강희안(1419-1464)이다. 동생 강희맹은 시화일치의 경지를 가장 이상적으로 구현한 인물로 왕유를 거론하면서, 그의 형 강희안을 왕유와 비견하고 있다. 이러한 시화일치는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까지 활동한 백악그룹, 18세기 후반에 활동한 연암그룹, 그리고 19세기 당대 최대의 삼절로 이름 높았던 추사 김정희(1786-1856) 등으로 그 흐름을 이어왔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문학, 음악, 무용처럼 뮤즈 여신의 보호를 받는 뮤즈 예술과 회화나 조각처럼 기술, 즉 손재주를 필요로 하는 미술을 구분하였다. 미술이 문학과 음악의 버금가는 위치로 올라서게 된 것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이르러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레오나르도(Leonardo da Vinci, 1452-1519)는 회화가 시와 수사학보다 우월하다고까지 주장하였다. 르네상스 시대 시인이자 문학이론가인 시드니(Philip Sidney, 1554-86)는 「시의 옹호: Apology for a Poetry」에서 ‘시는 말하는 그림’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은 ‘그림과 같은 시’를 이상적으로 대표한 화가로 여겨졌다.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그림으로 그려진 시’라고 칭찬했는데, 이는 글(성경)에서보다 더 많은 것을 읽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776년 레싱(G.E. Lessing, 1729-81)에 따르면, 문학은 시간의 영속을 특징으로 하고, 회화나 조각 등의 미술은 공간에 의존하기 때문에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회화의 대상은 형, 색채, 선 등의 ‘공간적 병존’으로 파악되지만, 문학은 ‘시간적 순서’, 즉 ‘행위’의 진행으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또한 레싱은 회화우위 가치관을 반박하면서, 창조적 상상력은 회화와 시 모두에 해당하지만, 화가보다는 시인의 환상적 재능에 더 높은 무한성을 부여하고 있다. 괴테(J.W. von Goethe, 1749-1832) 역시 『시와 진실, 1833』에서 레싱의 견해에 동의하고 있다. 미술가는 미에 의해서만 만족되는 외형의 의미를 위해 작업하나, 언어예술가는 추(醜)와도 함께 하는 상상력으로 작업하기 때문에 더 광범위하고 중요하다는 것이다. 괴테도 문학과 미술은 “매체조건, 대상, 예술법칙과 영향형식에 있어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말한다.   한편, 낭만주의 예술론에 있어서 예술의 통합은 ‘공감각’ 개념을 통해 설명된다. 서로 다른 감각의 연상과 교환 작용인 ‘공감각’은 예술이 함께 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한다. 낭만주의 예술의 공감각적 표현기법은 바그너(R. Wagner, 1813-1883)의 ‘총체예술작품(Gesammtkunstwerk)’의 이념으로 발전한다. ‘총체예술작품’은 바그너가 1849년 「미래의 예술작품」이라는 자신의 글에서 사용한 말로서, 음악, 춤, 시, 시각예술, 무대기술을 종합한 개념이다. 슐레겔(A.W. Schlegel, 1767-1845)은 낭만주의자들의 기관지 『아테네움 Athenäum, 1798』에서 시, 음악, 회화의 내면의 친밀성을 주장한다. 이처럼 낭만주의에서 추구된 예술의 통합화 경향은 19세기 말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초현실주의와 상징주의 운동 등으로 계승된다. 상징주의 시인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1821-67)의 「교감(Correspondances)」과 랭보(A. Rimbaud)의 「모음들(Voyelles)」은 공감각을 잘 활용한 작품이다.   2. 시와 회화의 결합 방식   시와 회화의 결합방식에는 (1) 시에 의거해서 그림을 그리는 방법, (2) 그림을 제재나 대상으로 하여 시를 짓는 방법, (3) 그림과 문자가 한 화면에 공존하며 상호보완하는 문자도(文字圖), 구체시, 문인화 등이 있다. 시에 의거해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은 적지 않았다. 글을 얼마나 그림으로 잘 표현할 수 있는가를 연구했던 라파엘전파(Pre-Raphaelites)의 말레이(J.E. Millais)는 테니슨의 시 「마리아나(Mariana, 1830)」를 그림(Mariana, 1851, Oil on Mahogani, 59.7x49.5, Tate Gallery, London)으로 그렸으며,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오필리아를 그림(Ophelia, 1851-52, 76.2x112.8Cm, Oil on canvas, Tate Gallery, London)으로 그렸다. 이중섭도 백석의 시에서 많은 영감을 얻어 그림을 그렸다. 갤러리 서림에서는 1987년부터 매년 우리나라 유명한 시인들의 작품을 한국중견화가들이 그림으로 그려서 전시하고 있다.   그림을 대상으로 시를 짓는(이를 형상시라고 한다) 방법은, 시인이 그림을 감상하고 시적 감흥을 얻어 시를 쓰는 것이다.   아킬레스의 방패무늬 제작과정을 서술한 호머의 『일리아드』(18번째노래)가 형상문학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조각가 로뎅의 비서였던 릴케는, 화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한 경험을 살려,『형상시집』과 『신시집』을 통해 조형예술의 소재들을 시에 활용하였다. 여기에 실린 소네트「고대 아폴로의 토르소」는 조각작품인 ‘밀레의 토르소’를 보고 지은 시로, “독자는 시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시인의 형상적 관조의 배후에 깃든 심오한 내면의 정신세계와 만나게 된다.”   우리나라도 이중섭, 샤갈, 고흐, 뭉크, 피카소, 김정희 등의 작품 및 작가의 삶을 주제로 쓴 형상시가 적지 않다. 특히, 『시집 이중섭』(문학과비평사, 1987)은 화가 이중섭의 삶과 그림을 주제로, 시인들이 쓴 시와 ‘시인의 말’, ‘해설’ 등을 묶어 한권으로 엮은 것이다.   문자도(文字圖)는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義廉恥) 등 유교덕목을 중국의 옛 이야기들과 연관시켜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글자 속에는 잉어, 죽순, 할미새, 용, 파랑새, 거북이, 복숭아꽃, 봉황, 충절비 등 글씨의미와 관련된 그림들이 글자마다 포함되어 있다. 글씨의 의미를 그림이 보완해줌으로써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해낸다.   구체시의 사례는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비롯하여, 고대 중국이나 인도의 전통회화 및 서예에서도 찾을 수 있다. 특히 말라르메 「주사위던지기(Un Coup de Des, 1897)」, 아폴리네르 「칼리그람(Xalligrammes, 1913-6)」 등의 시에서는 종이 위에 자유로이 시행을 배열, 알파벳을 사용한 그림과 같은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말라르메나 아폴리네르의 작품은 시각적, 언어적 표현이 하나로 합쳐지는 이중예술품이라 하겠다.   문인화에서는 시와 그림이 함께 존재한다. 시와 회화는 창작방법만 다를 뿐 작가 정신의 반영물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고 보는 시각이다. 똑같은 그림이 그려졌어도 각기 다른 시를 써 넣으면 느낌이 달라질 수 있다. 또 그림 안에 시를 쓰는 경우, 시를 쓰는 위치는 화면 구성에 영향을 주며, 시를 쓴 형식, 공간의 크고 작음, 글씨체도 영향을 미친다.   조선 초기부터 중국 문인화의 시화일치사상(詩畵一致思想)이 유입되어, 우리나라 사대부들에게 문인화의 기법적(技法的) 토대를 제공해 주었고, 외적인 기교보다 내적인 사상이나 철학 등을 중시하는 우리나라 문인화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문인화에서는 시의 의미와 글씨의 미적 이미지 그리고 그림의 이미지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글씨도 그림의 하나로 볼 수 있으며, 그림의 주제는 시의 주제와 일맥상통하고 있다.   3. 시와 미술의 이미지   시와 미술이 같은 울타리에 존재한다는 것을 이미지의 개념을 통해서 설명할 수 있다. 마음속에 그리는 그림을 뜻하는 이미지는, 엘리엇의 ‘객관적 상관물’이 의미하는 것처럼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을 구체화하여, 내용을 보다 잘 인식하도록 함으로써 독자의 정서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모든 예술은 이미지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는데, 이미지의 어원을 보면, 거울에 비친 상이라는 뜻의 모상(模像: eidolon)이다. 플라톤은 현상계가 진리의 세계(이데아)를 모방한 모상이라고 보았다. 이는 에이콘(eikon)과 판타스마(phantasma)로 나눌 수 있다. 에이콘은 원본(이데아)을 곧바로 묘사한 것으로 유사관계(resemblance)를 말하며, 실재와 닮은꼴로 실재를 적절하게 표현한 것으로 간주된다. 판타스마는 복사물을 다시 복사한 것, 즉 시뮬라크르(simulacre) 관계를 말하며, 실재를 부적절하게 표현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들뢰즈는 시뮬라크르가 단순한 복제의 복제물이 아닌 독립성과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예술의 미학적 담론에는 이미지(image)와 상상력(imagination)이 핵심으로 등장한다. 드브레(R. Debray, 1940-)의 견해에 의하면 이미지는 마술(magic)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마술이란 무의식적인 꿈과 마찬가지로, ‘비가시적인 것의 가시화’의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술에 있어서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드러냄이다. 마술과 마찬가지로 이미지는 가시적인 것의 배후에 들어있는 비가시적인 것의 기호이며, 인류의 집단적인 기억이 머물고 저장된 장소인 것이다. ‘인류의 집단적인 기억’이란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이 말하는 집단무의식을 지칭한다고 여겨지지만, 개인무의식까지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 이래 서구 예술론을 지배해 온 ‘실재의 재현으로서의 예술’이라는 ‘모방론’의 관점에서든 그에 대한 반발로서 등장한 18세기의 낭만주의적 ‘감정의 표현으로서의 예술’이라는 ‘표현론’의 관점에서든, 예술은 이미지를 매개체로 한 의미작용이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특히, 이미지에 대한 공통의 인식을 통해 서구 예술사에서 문학과 미술이 가장 근접한 정신 활동으로 인정된 것은 초현실주의와 상징주의 운동을 통해서라고 할 수 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예술이 공통적으로 무의식적인 정신 활동에 기반을 둔 이미지의 생산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예술작품은 대상을 보고 그리되 대상과는 무관한 창조된 가상객체(virtual object)요 창조된 이미지이다. 가상(假象)이란 주관적으로는 실제 있는 것처럼 보이나 객관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거짓현상을 말한다. 수용자(독자 및 관객)들마다 다른 이미지로 받아드리며 또 받아드리기 어려운 부분도 있을 수 있다. “비평가도 해석을 내리는 데 고심하여, 의문스러운 곳은 그 의미를 부연하는 것이 고작인 난해함도 하나의 시적 요소다. 때로는 독자에게 그 중 한 행의 의미조차 분명히 알 수 없는 정도여서, 그것은 명암화법적인 회화 속 형식의 윤곽선이 뚜렷하지 않은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예술이 창조한 이미지라는 것이 추상적인 이유 중의 하나는 예술가가 창조한 이미지와 수용자가 받아드리는 이미지가 다르다는 것이다. 수용자가 받아들이는 이미지는 ‘또 다른 창조’라 할 수 있다. 예술가가 창조한 이미지를, 수용자는 나름대로 자신의 경험과 무의식을 참조하여, 자신의 이미지로 변환하여 수용하는 것이다. 이미지는 예술가와 수용자 사이의 의사소통수단이 된다.   4. 이미지 해석의 다양성   이미지의 생산 못지않게 해석도 중요하다. 특히 예술의 가치 평가는 수용자들의 해석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 미술, 음악의 공통분모로서의 언어는 ‘의미하는 언어’가 아니라 제2언어라고 할 수 있는 ‘해석’이다.   예술 혹은 예술가는 나무에 있어서 큰 줄기와 같다. 예술가는 정치 사회 역사 문화 등 제반 환경 그리고 자신의 무의식과 지정의(知情意)에 뿌리를 내리고, 거기서 모든 자양분을 흡수하여 큰 줄기를 통과해 잎, 꽃, 열매라는 작품을 생산한다. 예술가는 자기를 포함하여 자기를 둘러싼 모든 역사적, 현재적 환경에 대한 예술가 자신의 해석을 작품에 투영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산된 예술작품을 소비하는 수용자들은, 생산자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모든 주어진 역사적, 현재적 환경을 참조하여 독자적인 해석을 통해 수용한다. 이처럼 예술작품의 생산과 소비 사이에는 해석이라는 단계가 존재한다. 그 생산과 소비를 매개하면서, 수용자들이 해석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는 것은 바로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이미지는 세계 인구의 수만큼이나 많은 해석의 가능성과 다중의 의미를 지닐 수 있기 때문에, 어떤 해석도 권위있는 것으로 받아드릴 수 없다.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이 이미지의 특성이다. 개개 언어나 문장, 그림의 색조나 명암 등이 생산하는 개별 이미지뿐만 아니라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이미지(작품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도 중요하다. 예술가와 수용자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 심리적 역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독자반응이론에서 ‘독자가 텍스트를 구성한다’고 주장하는 시각과 일치한다. 생산자(예술가)가 생산한 제품(예술작품)의 이미지를, 수용자는 나름대로의 해석을 거쳐 자신의 이미지로 치환한 후 수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가의 이미지 – 수용자의 해석 – 수용자 이미지로 치환 – 수용자의 수용 단계를 연결하는 고리가 형성된다.   그렇다면 수용자는 어떻게 예술적 이미지를 해석할까? 이를 롤랑 바르트의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이라는 개념을 원용하여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롤랑 바르트에 의하면 스투디움(studium)이란 우리가 지식과 교양에 따라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영역으로, 양식화될 수 있고 전형적인 정보로 되돌려질 수 있는 부분이다.······감상자는 이와 같은 평균적 정보로 환원될 수 있는 영역을 인지하고 이를 감상하게 된다는 말이다.······그런가하면 어떤 그림과 시진의 경우, 작품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작품이 구성하는 시각장의 어느 영역에서 갑자기 감상자의 눈을 찔러오는 부분도 있다. 롤랑 바르트는 바로 이것을 푼크툼(punctum)이라고 지칭했다. 어원상으로 이 푼크툼은 평균적 교양과 상식으로 이해되는 스투디움의 영역을 깨뜨리며 마치 화살처럼 감상자를 찌르는 어떤 것이라고 설명될 수 있다.······감상자의 시선이 작품에 오래 머물게 되는 것은 바로 그 푼크툼 때문이다.······좋은 시들은 인식의 스투디움을 깨뜨리며 인지 충격을 안겨주는 푼크툼들을 품고 있기 마련이다. 소위 사물을 새롭게 보게 하고 기존의 인식을 뒤흔드는 효과 역시 시적 푼크툼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지의 두 가지 층위, 곧 정보적 층위와 상징적 층위에서 읽혀지는 두 의미는 이 이미지를 제작한 예술가에 의해 계획되고 의도된 것이다. 이러한 의도와는 달리 바르트가 제3의 의미라 부른 이미지의 세 번째 층위는 그만큼 자명하지도 않고 포착하기도 어렵다. 묘사는 불가능하고 헤아리기만 가능하며 지적(知的) 인식이 아닌 사적(私的)인 파악을 통해서만 포착된다. 언어로 환원될 수 없는 것, 그리하여 언어가 어찌할 수 없는 이미지의 요소를 푼크툼이라고 한다. 이러한 제3의 의미는 주로 수용자에 의해 형성되기 마련이다.   “주제를 간추리고자 시를 읽는 것은 지나치게 비경제적 행동이다. 시에는 리듬과 이미지 그리고 비유와 상징 등, 그림의 경우 회화적 중심에 비견될 만한 다채로운 요소들이 있다. 시를 읽으면서 이런 요소들을 놓치고 테마적 중심에만 현혹되는 것은 시인이 애써 여러 요소를 활용해 구성해 놓은 텍스트를 다시 평범한 전언으로 풀어 놓는 것과 같다.” 그림도 주제 못지않게 색과 선과 면의 어울림 등 기법에도 주목해야 하는 것처럼, 시에서도 각종 언어적 장치(리듬, 이미지, 비유 등)들이 유기적 통일성을 가지고 있는지 등에 주목해야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은 더 나아가 수용자들은 그 작품이 가지고 있는 제3의 의미, 즉 푼크툼까지 천착해야 한다.   물론 생산자인 예술가도 푼크툼까지 헤아려 작품을 제작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된다. 랭보가 말하는 투시자(voyant)가 되어야 한다. 무한한 시간과 공간을 꿰뚫어 볼 수 있고, 모든 인습적 제약과 통제를 무너뜨려 영원한 목소리를 내는 도구로서의 예언자가 투시자인 것이다. 예술가나 수용자 모두 라깡이 말하는, 현상이라는 커튼 뒤에 있는 실재(the real)까지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도록 부단히 예술작품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읽고 보고 사색해야 한다.   III. 나오는 말   예술의 생산과 수용 그리고 이를 중개하는 이미지에 초점을 맞추면, 그림과 시는 단지 표피적인 표현매체만 다를 뿐이지 동일한 것이다. 특히 초현실주의 등 추상예술에 있어서는 표피적인 것 마저 구분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추상에 의해 다른 영역에 속해 있던 문학과 미술, 나아가 음악은 하나의 차원으로 총괄된다. 예술적 언어가 생산하는 추상은 생산자가 똑같은 이미지를 생산해서 내놓아도 수용자가 푼크툼 영역까지 확장하여 풍성하게 해석할 수 있도록 돕는다.   피카소는 시인이자 화가이며, 칸딘스키와 클레는 미술과 음악이 통합될 수 있음을 보였다. 바그너는 음악, 시, 미술의 통합을 시도하였다. 이들에 의하면 예술, 특히 미술과 음악과 시는 보이지 않은 것을 보이게 한다는 의미에서 동일한 뿌리를 가지고 있다. 이미지의 도움을 받아 그림에서 시를 읽고 음악을 들으며, 시에서 그림을 보고 음악을 듣는다. 음악을 들으며 상상력의 지원을 받아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쓴다.   “호안 미로는 회화와 시 사이에 경계를 두지 않으며, 그의 그림의 총합은 새로운 종류의 언어를 구성하는 시각적인 글이라고 할 수 있다.” 호안 미로가 그린 그림 (1968, 캔버스에 유채, 목탄, 259.5 x 173.5 Cm)는 ‘그림으로 시를 쓴 것’이다. 이 그림에서 수용자들은 나름대로 시의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 한국 시단에서 ‘독해가 불가능한 시’의 경우보다는 오히려 호안 미로의 라는 그림이 훨씬 수용자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시(詩)가 아닐까? ‘시는 반드시 언어로만 창작해야 하는가?’, ‘시가 언어의 장벽을 무너뜨릴 수는 없는가?’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매체의 이합집산은 20세기 후반부터 다양한 형태로 진전되고 있다. 특히 지난 수십 년간 컴퓨터를 위시한 신매체의 등장은 말, 형상, 음의 융·복합을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오늘날 다매체 예술에서는 장르나 형식의 독자성은 이미 찾아보기 힘들다. 다원적이고 총체적인 텍스트에서는 읽기, 보기, 듣기 등 개별 지각방식이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다. 이러한 융·복합을 통해 예술적 효과가 극대화되고 있는 것이다.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과 SBS문화재단이 공동주최하는 수상 작품을 보면 이러한 예술 장르의 통합적 경향이 잘 반영되어 있다. 수상자인 믹스라이스(조지은, 양철모)는 “급격한 도시화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이식되어는 식물들의 '이주' 과정과,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강제 '이주'된 아시아 근대 이주민들의 이야기를 추적”하고 있는데, 특히 에서 음악, 사진, 벽화, 영상, 그리고 스토리텔링이 어우러져 주제를 부각시키는데 통합적 효과를 연출하고 있다. 다만, 스토리텔링에 있어서 단순한 사실의 소개에 머물고 있어 아쉬움이 남았고, 시적 형상화 작업이 좀 더 이루어졌으면 전체적인 예술적 효과가 증대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현대예술의 다양화, 융·복합화가 진전됨에 따라, 앞으로 시와 음악과 미술 등이 서로 경계를 허무는 작품들이 많이 창작되고, 이러한 예술의 융·복합을 연구하는 통합학회 내지는 예술단체가 구성되어, 예술 특히 시문학의 품을 더 넓히는 방안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예술을 아우를 수 있는 ‘시극의 활성화’가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시극의 경우, 단순히 대화와 지문을 시로 표현하는 것에 그치지 아니하고, 무대 및 의상 디자인 등 미술영역과, 음악과 무용 등 다양한 예술분야를 충분히 활용함으로써 관객에게 좋은 작품으로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예술의 융·복합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시 쓰기와 관련하여, 호안 미로가 ‘그림으로 시를 썼다’고 말한 바와 같이, ‘시를 문자언어로만 창작해야한다.’는 고정된 틀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고민도 필요해 보인다. ‘시는 문자로 써야만 한다.’고 고집하더라도 다른 매체(영상, 음악, 미술 등) 등과의 융·복합을 통해 더 수용자에게 다가갈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아서 단토의 다음과 같은 주장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예술이라고 하는 핵심적인 개념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거의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다는 것과, 한때 예술에게 본질적으로 보였던 속성들이 아예 없더라도 어떤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참고문헌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라오콘: 미술과 문학의 경계에 관하여』, 윤도중 역, ㈜ 나남, 2008. 고위공, 『문학과 미술의 만남』, 미술문화, 2004. 곽희,『임천고치』, 신영주 역, 문자향, 2003. 괴테, 『시와 진실』, 최은희 역, 동서문화사, 2007.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 「오늘의 작가상 2016」. 권혁웅,「이미지, 사유의 체계-문학연구 방법론으로서의 이미지」,『한국시학연구』제47호, 2016. 김광우,『칸딘스키와 클레』, 미술문화, 2015. 김남시,「말에는 없고 이미지에만 있는 것: 언어화되지 않는 이미지에 대한 이론들」,『한국 시학회 제38차 전국학술대회 자료집』, 2016.10.22. 김명철,「백석 시와 이중섭 그림에 나타난 대이상향의 세계」,『비평문학』43, 2012. 김연주,「시중유화 화중유시 – 시와 회화의 관계를 중심으로」,『미학예술학연구』 제14호, 한국미학예술학회, 2001. 김영진,『이중섭을 훔치다』, 미다스북스, 2011. 김춘수, 『意味와 無意味』, 문학과지성사, 1976. 드브레,『이미지의 삶과 죽음』, 정진국 역, 시각과 언어, 1994. 로이스 타이슨, 『비평이론의 모든 것』, 윤동구 역, 앨피, 2012. 롤랑 바르트,『이미지와 글쓰기–롤랑 바르트의 이미지론』, 김인식 역, 세계사, 2011. 릴케,『두이노의 비가 외 (릴케 전집 2)』, 김재혁 역, 책세상, 2000. 매튜 키이란,『예술과 그 가치』, 이해완 역, 북코리아, 2011. 보들레르,『악의 꽃』, 윤영애 역, 문학과 지성사, 2011. 볼프강 올리히,『예술이란 무엇인가』, 조이한 김정근 역, 휴머니스트, 2013.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호안 미로 특별展』, ㈜디커뮤니케이션, 2016. 수잔 K. 랭거,『예술이란 무엇인가』, 박용숙 역, 문예출판사, 2009. 신혜경 김진수, 「이미지 측면에서 본 문학과 미술의 관계」,『경기대학교 논문집』제44집 제1호, 2000. 아르튀르 랭보, 『랭보 시선』, 곽민석 역,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천병희 역, 문예출판사, 2013. 아서 단토,『예술의 종말 이후』, 이성훈 김광우 역, 미술문화, 2012. 여지선,『문학, 그림을 품다』, 푸른사상, 2013. 이부영, 『분석심리학탐구, 제1부작, 그림자』, 한길사, 2004. 이창용,『비교문학의 이론』, 일지사, 1990. 조강석, 「시와 회화」, 『현대시론』, 최동호 외 편저, 서정시학, 2014. 주영중, 「김춘수와 오규원의 이미지 시론 비교연구」, 『한국시학연구』 제48호, 2016. 최숙인,「문학과 미술의 상호조명」,『비교문학』24, 한국비교문학회, 1999. 파울 클레,『현대미술을 찾아서』, 박순철 역, 열화당, 2014. 피카소, 『피카소 시집』, 서승석 허지은 역, 문학세계사, 2013. 한국경제, 2017.1.4. 호라티우스,『시학』, 천병희 역, 문예출판사, 2013. 호메로스,『일리아스/오디세이아』, 이상훈 역, 동서문화사, 2009.    
5    참신한 이미지 연상기법을 통한 동심적 상상력의 확대 -박방희 동시집 『바다를 끌고 온 정어리』의 시세계- 김관식 댓글:  조회:1064  추천:0  2019-01-14
참신한 이미지 연상기법을 통한 동심적 상상력의 확대   -박방희 동시집 『바다를 끌고 온 정어리』의 시세계-     김관식             1. 들어가는 말           우리나라 현대동시는 그 출발이 동요동시 형식에서부터다. 운율과 리듬이라는 음악적 요소를 바탕으로 노래로 동심에 접근하는 동요로 민족정신을 일깨웠다. 그러다가 어린이의 동심을 노래보다는 현대시의 경향인 이미지를 중심으로 한 회화적인 접근으로 방향이 전환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동시는 언어의 리듬을 중심으로 한 음악적인 요소와 이미지와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회화적인 요소, 그리고 시어의 의미를 중심으로 한 의미적인 요소가 복합적으로 적용되는 동심으로 표현되는 게 이상적인 동시라고 보겠다. 동시든 시든 간에 참신한 은유구조로 텍스트화해야 언어의 내포기능을 통해 상상력을 환기시켜 줄 좋은 동시의 틀을 갖추게 된다. 짧은 언어로 정서를 환기시키고 시적 대상의 사물을 기존의 고정관념으로 보기보다는 ‘낯설게 하기’작업으로 상상력을 증폭시켜 주는 동시가 바람직한 동시라고 하겠다. 동시의 표현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은 시적 대상의 사물에 대한 의인화 접근법이다. 모든 사물을 물활론적으로 보는 동심의 세계를 시적으로 생동감있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의인화 표현이 참신해야 정서를 환기시켜 줄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동시집을 발간한 박방희 시인의 시가 시적 대상이 되는 사물을 의인화 접근을 시도하여 참신한 은유로 상상력을 촉발시키는 수작의 동시들이다. “바다를 끌고 온 정어리”라는 시집은 제목부터 독자들을 사로잡는다. 그의 시집에 수록된 작품을 중심으로 그의 시세계를 살펴보기로 한다.               2. 참신한 이미지 연상기법을 통한 동심적 상상력의 확대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은유란 “낯선 이름의 전의”라고 했다. ‘낯선’이라는 낱말은 ‘또 다른 사실을 나타내거나 하나의 다른 사실에 속함을 뜻하는 말로 일상적인 언어가 아니라 일탈을 의미하기도 하며, 전의란 유(類)에서 종(種)으로 종에서 유로, 종에서 종으로 또는 유추 방식으로 일어나는 유별이라는 닮음의 의미와 다른 낱말로 대체시키는 유비 전의를 포함하는 낱말이다. 은유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수사학은 물론 시 쓰기에 기본적인 방법론으로 자리 잡아왔다. 리콰르와 그 밖의 많은 학자들과 시인들에 의해 은유에 대한 연구와 실험이 이루어졌고 앞으로도 수많은 시인들이 이 작업을 계속 이어갈 것이다. 누가 얼마나 참신한 은유로 사물을 표현해내느냐의 문제가 바로 시를 잘 쓰느냐 못 쓰냐를 변별하는 척도가 된다. 사물의 새로운 발견은 바로 은유적인 발상을 바탕으로 한다. 은유적인 발상과 사고를 통해 언어로 표현된 참신한 동시가 “바다를 끌고 온 정어리”다. 정어리가 바다를 끌고 왔다는 놀랍게 과장된 발상은 은유적으로 사물을 바라본 데서 파생된 상상의 세계이다. “정어리 통조림”이라는 시적 대상물을 보고 상상해서 언어로 통조림한 시다.         비좁고 꽉 막힌 통 속으로   바다를 끌고 온 정어리   -『정어리 통조림』전문-           19자의 짧은 언어로 『정어리 통조림』속의 정어리가 바다를 끌고 왔다는 생각이 재미있고 과장되었으나 공감을 일으킨다. 이 시가 바로 시집을 여는 시다. 여는 시가 참신하고 호기심을 끌기 때문에 이 시집에 실려 있는 시 또한 여타의 시 또한 참신성이 확실하다. 4부로 짜인 46편의 시 모두가 시적 대상을 의인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각 부의 제목만 보아도 신선하다. 『산의 귀가 닳는다』, 『새의 문자』, 『졸음의 무게』, 『따로따로 섬이다』 제4부의 표제들이다. 은유적인 신선한 시어가 참신성을 증명해준다.          졸졸졸졸   졸졸졸졸   ------   산허리를   감아 도는   물소리에   산의 귀가   다 닿는다.   -『산의 귀』』전문-           산을 인체에 비유하여 상상력을 발휘하여 형상화 한 물소리를 듣는 산의 귀, 산의 의인화가 빚어낸 은유다. 참신하고 새롭다. 그의 시의 시적대상은 항상 역동적이다. 움직인다.          조약돌에서   돌돌돌   소리가 난다.         수만 년   닳고 닳으며   스며든 물소리         돌돌돌   돌 속에서   흐르고 있다.   -『조약돌』전문-           조약돌까지 역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무생물인 조약돌에 생명을 불어넣어 조약돌이 소리를 내고 흐르기까지 한다는 발상은 냇가에 흐르는 물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물속에 들여다보이는 조약돌까지 흐르고 있는 생명의 역동성까지 표현한 수작이다. 박방희 시인의 눈은 예리하다. 그리고 참신한 것을 볼 줄 아는 시인다운 눈이다. 냇가에 흐르는 물만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조약돌 속의 물 흐름까지 감지하고 볼 줄 아는 혜안을 가졌기 때문이다. 『징검돌』에서 부처님을 보기도 하고, 『목련나무』에서 구름 방을 보기도 하고, 『봄』에서 개구리가 봄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을 본다. 또한 『별』에서 금단추를 보고, 『섣달』에서 늙은 감나무에서 까치밥을 통해 식은 밥을 보는 눈은 시인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시인의 눈에 보이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이는 세계로 끌어내 보여준다.         찍찍, 찌익, 찍   이 가지 저 가지   이 나무 저 나무에서   문자를 주고받는 새들   저들끼리 눈 맞추며   고갯짓 까닥까닥   시시덕거리다가   놀러 가고   군것질하러 가고   게임하러 간다.   -『새들의 문자』전문-           나무 위에 앉아있는 새들의 모습을 어린이의 세계로 그려낸 역동적인 시로 그 모습을 『새들의 문자』로 시각화해내고 있다.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압축해내는 시의 참신한 제목이 눈길을 끈다. 디지털시대 핸드폰으로 문자를 주고 받는 오늘의 시대 어린이들의 모습을 나무에 앉아 있는 새들을 통해 보고 있다. 그의 시편 전반에 참신한 은유와 의인화 표현이 담겨있는 시적인 표현이 돋보인다. 그의 참신한 은유를 예를 든다면, 『매미 허물』=배냇저고리, 『거미집』= 하늘의 입, 『푸른 자』=하늘을 재는 대나무, 『기린의 밥상』=긴 목, 『기러기』=하늘에 쓴 글씨 등등 모두 참신성이 돋보인다.          뭐라 뭐라 해 쌓아도 세상에 무거운 건         눈 위로 쏟아지는 졸음의 무게지요.         스르르   눈꺼풀을 닫치며         목까지   툭!   툭!   -『 졸음의 무게』전문-           잠이 올 때 눈꺼풀이 감기고 고개를 꾸벅거리며 졸고 있는 상황을 『졸음의 무게』로 압축한 은유적 표현은 참신하다. 그의 시는 시의 제목 자체가 어떠한 사물과 상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은유 그 자체이다. 따라서 호기심을 유발시킨다. 도대체 무슨 시일까 궁금증을 유발시킨다. 그래서 시를 읽지 않으면 안 될 강한 흡인력으로 독자를 끌어당긴다. 상상력을 유발하는 시제로 인해 시를 스스로 읽어야겠다는 호기심을 유발시킨다. 오늘날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어린이들에게 강한 흡인력으로 생각하는 힘을 길러 줄 좋은 동시가 박방희의 동시다.      『육지에도 섬이 있다 』는 호기심을 유발시킨다. 산짐승들이 이리 저리 오가지 못하게 고속도로가 생긴 오늘날의 육지 모습을 섬으로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다. 오늘날 도시문명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섬을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편리함을 위해 고속도로를 만들고, 각종 첨단미디어 매체를 만들어냈지만 그로 인해 사람과 사람 사이가 섬으로 전락되고만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앞에   가로놓인   바다도   배를   띄우면   길이 된다.   -『배』전문-           바다가 섬을 만들 듯 섬과 섬을 오고 가려면 배가 필요하다. 사람사이에 단절을 몰고온 바다에 배를 띄우면 길이 되듯이 동시와 어린이와 단절된 상황에서 박방희 시인이 띄운 동시라는 배를 통해 동시와 어린이가 서로 소통하는 길이 될 것이 틀림없다.                3. 나오며           그의 시는 참신하다. 새롭다. 구태의연한 동시들이 주류를 이루는 동시단에 오랫만에 좋은 동시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시적인 테크닉이 넘치는 참신한 박방희 동시는 동시가 재미없다고 식상해하는 오늘날의 어린이들에게 비타민 같은 동시다. 그의 동시는 한마디로 “참신한 이미지 연상기법을 통한 동심적 상상력의 확대”가 넘치는 동시다. 『바다를 끌고 온 정어리』는 통조림 같이 동심과 단절된 어린이들에게 “동심을 끌고 온 동시”이며, "무한한 상상력을 끌고 온 동시”이다. 좋은 동시를 많이 빚어 생각하기 싫어하고 사랑과 우정이 단절된 어린이들에게 진정한 삶의 가치를 깨우쳐줄 박방희 시인의 무한한 상상력 비타민 동시가 많이 창작되어 우리나라 어린이들이 동시의 맛과 멋을 즐길 수 있는 윤기 나는 삶을 살아가도록 했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하다.     
4    병치기법 댓글:  조회:1078  추천:0  2019-01-14
퍼온 글임 현대시의 창작방법과 실제 김관식(시인, 문학평론가)   5. 병치기법   1) 프롤로그      단순하게 이미지를 평면적으로 시간 순서로 배열하여 시를 형상화하게 되면, 너무 시가 단조롭다. 초보자들은 대부분 사물의 외형을 보고 그 느낌을 장황하게 늘어놓거나 시적 대상에 감정이입하여 진술한다. 여기에서 시의 원리를 모르는 초보시인은 사물의 외형에서 느낀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거나 자신의 감정을 주로 하여 토로하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모든 예술의 원리는 자신이 직접 무대 위로 올라가는 경우는 노래나 춤을 출 때이다. 여타의 나머지 예술작품은 자신이 직접 나타나지 않고 등장인물이나 사건, 배경을 만들어 허구의 이야기를 진짜 이야기로 꾸며서 무대 위에 올리게 된다. 시는 언어 예술이다. 따라서 시인이 하고 싶은 말을 마구 털어놓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언어로 형상화하여 무대 위에 올리는 연출자인 셈이다. 연출자가 아 슬프다하고 무대 위에 올라가 감정을 토로하는 것은 낭만주의 시대의 감정토로의 시 아닌 시인 것이고. 슬픈 느낌이 들도록 상황을 적절히 한 컷의 사진을 찍는 듯이 언어로 형상화하여 이미지로 시각화하여 보여주는 것이 현대시인 것이다.    많은 시인들이 이 간단한 예술의 원리를 망각하고 직접 자신이 무대 위로 올라가 감정을 토로하려고 하니 그 시를 누가 읽으려들겠는가? 무대 위로 올라가는 경우는 노래나 춤을 출 때임을 명심하고 가급적 무대 위로 올라가지 말고 느낌을 자아내는 이미지로 시각화하여 전달하여야 한다.    이때 단조롭게 하나의 이미지만을 배열하면 시가 너무 평면적이고 단조롭기 때문에 두 개 이상의 사물을 병치시켜서 재미있게 보여주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병치기법인 것이다. 병치기법은 여러 개의 공간이나 시간, 사물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 같으나 실제로 그 원리는 간단하다. 우리나라 조향이나 이상 등 초현실주의 시들도 병치기법을 적용한 시들인 것이다. 이러한 병치 원리에 의해 숨겨진 이미지를 숨은 그림 찾듯이 찾아내면 쉽게 시가 이해되는데 대부분 시적 감수성이 청각적 이미지에 고착이 되어 시각적인 이미지로 치환되거나 병치된 시들은 무조건 어렵다고 생각하니 현대시는 어렵다고 구시대적인 낭만주의 감정토로의 시들을 선호하는 것이다. 실제로 병치기법은 어렵지가 않다, 두 가지 상황이나 사건 또는 사물을 교묘하게 엮어서 하나의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방법인 만큼 처음에는 어렵더라도 자꾸 숙달이 되면 시를 쓰는 재미에 푹 빠져들게 될 것이다.   2) 병치비유의 개념      병치란 국어사전에 “한 장소에 나란히 놓이거나 동시에 설치되다”, “두 가지 이상의 것을 같은 장소에 나란히 놓거나 동시에 설치함”을 의미한다. 즉 두 가지 이상을 한 곳에 나란히 배치하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에 두 가지는 사물이 될 수도 있지만, 두 가지 이상의 시간이 병치될 수도 있으며. 공간이 병치될 수 있다. 따라서 현실과 환상이 병치되었을 때 초현실주의 기법 중의 하나인 데페이즈망 기법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한 존재와 다른 존재가 병치될 수도 있다. 병치기법으로 흔히 시에서는 병치비유로 표현되기도 한다. 비유는 크게 치환비유와 병치비유로 나눌 수 있다. 치환 비유는 사물의 형태, 정서, 상징. 행동, 언어 등의 유사성에 의해 한 대상을 다른 대상으로 이동하여 자리바꿈을 하는 것이다. 대체로 비유의 본질은 어떤 사물을 드러내기 위해 그와 유사한 다른 사물을 비교하여 설명하는 어법이다. 비교를 위해서는 먼저 설명하려는 대상이 있어야 하고 그것과 빗대어 볼 보조대상도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두 사물간의 유사성이나 이질성을 통하여 대상을 보다 확실히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비유를 의미의 전이로 설명했고 이러한 의미의 이동을 대치론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 대치론의 맥락에 치환은유, 즉 옮겨놓기 은유가 있다. 치환은유란 두 사물간의 비교가 아니라 A라는 사물의 의미가 B라는 사물에 의해 자리바꿈되는 것을 뜻한다.    그 반면에 병치비유는 자리 이동이 아니라 함께 놓아두는 방식이다. 두 개 이상의 사물들을 함께 놓아두어서 그것들이 서로 다른 사물들이 당돌하게 병치되어 서로 기능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게 되는 새로운 결합의 형태이다.    휠라이트는 병치비유를 조합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조합이란 치환비유처럼 사물들 사이에 유사성에 의한 자리바꿈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물들이 나란히 병치시킴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내는 '새로운 결합'의 형태을 말한다.    병치비유는 나열하거나 병치하여 비유하기 때문에 치환 비유와 달리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찾기가 어렵다. 그 까닭은 치환비유에서는 어떤 한 방향으로 의미가 전이가 되지만, 병치 비유에서는 한 방향으로 의미가 전이되지 않기 때문에 시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다른 시어들과 대등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시어가 원관념, 보조관념이 아니라 각각의 시어가 원관념의 역할을 한다.    이러한 시어의 나열과 병열을 통해 그 사이에서 이미지 또는 의미가 제시된다. 나열된 시어들은 무의미하게 배열된 것 같아 보이지만, 그 시어들이 시로 한자리에 구성됨으로써 이미지 또는 의미를 갖게 된다. 따라서 병치비유의 시어들은 그 시에서 하나의 묶임으로 인해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이미지 내지는 어떤 의미를 찾는 것이 치환 비유보다 더 어렵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결합을 통해 의미가 형성되기 때문에 이미지의 병치라고 볼 수 있다. 또는 병치 비유는 마치 퍼즐을 맞추는 듯이 형상을 엮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병치 비유의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시를 해석할 때 언어 그 자체를 집중하여 맥락을 찾는 외적인 요소보다는 시 그 자체 즉, 내적 요소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따라서 병치 비유는 시 자체에 더욱 집중을 할 수 있게 한다.    휠라이트는 전이가 아닌 병치가 비유의 한 형태로 성립되는 근거는 비유를 어디까지나 의미론적 변용 작용으로 본 데 있다. 자연계의 요소들이 새로운 방법으로 결합하여 새로운 자질을 생성하듯이 시에서도 이전에 없었던 방법으로 언어와 이미지들을 병치시킴으로써 새로운 의미가 생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휠라이트는 병치 비유의 예로 "군중 속에서 유령처럼 나타나는 이 얼굴들,/까맣게 젖은 나뭇가지 위의 꽃잎들."(「지하철 정거장에서」)이란 에즈라 파운드의 시를 인용했다. 이 시에서 병치되어 있는 것은 '얼굴들'과 '꽃잎들'이다. '지하철 정류장'에서 첫 행의 '얼굴들'과 둘째행의 '꽃잎들'이라는 이미지는 단순히 하나의 인상적 대조하여 두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옮겨보기의 뉘앙스를 내포하고 있다. 얼굴들의 환영과 나뭇가지에 걸린 꽃잎들은 서로 병치된 인상을 주는 것 같으면서도 얼굴이 꽃잎으로 대치된 치환적 구성이다. 그러므로 병치와 치환의 어법은 엄격히 구분되기보다는 병치에 가까운 치환의 시법을 요구하게 된다.     이 두 가지가 서로 같은 것인지 또는 다른 것인지 판단이 유보된다는 점에서 병치은유는 해체주의적 관심까지 불러일으킨다.    병치기법에는 공간의 병치, 시간의 병치, 시공간의 병치, 이질적인 두 사물의 병치, 자연과 인간의 병치, 존재와 존재의 병치 등 다양한 방법으로 병치시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할 수 있다. 병치비유의 활용한 예시를 들어 살펴보기로 하자.   3) 병치비유의 활용      가) 공간의 병치      병치기법에서 먼저 공간의 병치를 살펴보기로 하자. 병치라는 의미 자체가 공간적인 형식을 내포하고 있다. 시간적으로 지속되는 언어의 연계성에 의해 진술되기보다는 이질적인 이미지를 공간적으로 배치하는 것이 병치기법이기 때문이다. 김종삼의 다음의 시는 현실과 환상의 공간을 병치시킨 구조로 되어 있다. 현실공간에 대조적인 환상공간을 병치시킴으로써 부정의 현실을 비춰보는 거울의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세계의 불연속성을 허물고 새로운 연속성의 세계로 나아가는 통로를 마련하고 있다.   미구에 이른 아침 하늘을 파헤치는 스콥 소리   하늘 속 맑은 변두리 새 소리 하나 물방울 소리 하나   마음 한 줄기 비추이는 라산스카       -김종삼의 「라산스카」 전문      이 시는 하늘이라는 환상공간으로 환유된 천상의 세계와 결합된 양상으로 1〜2연은 환상공간이고, 3연은 현실공간으로 병치되어 있다. “하늘을 파헤치는/스콥 소리”가 지상에서 천상으로 올라가는 상승의 청각적 이미지 “소리”이고, “마음 한 줄기 비추이는/라산스카”는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시각적 이미지로서의 “빛”이다. “스콥 소리”의 청각적 이미지와 “라산스카”의 시각적 이미지가 천상과 지상의 다리로 연결되는 매개 항이다. 스콥은 낯선 시어로 “scop”은 중세 서양의 음유시인과 땅을 파는 도구인 “삽”을 일컫는 중의적인 말이다. 라산스카는 뉴욕 출신의 소프라노 가수, 헐더 라산스카이다.    동이 터 오르는 이른 아침에 어디선가 “하늘을 파헤치는 수콥 소리”가 들려온다. “파헤치는” 이미지와 “콥”이라는 파열음이라는 청각적 이미지가 파괴의 이미지를 강하게 삽이라면 한 삽 한 삽 파헤치는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로 파문을 일으키고, 음유시인이라면 그 천상을 뚫을 듯한 강렬한 음성으로 하늘로 상승하고, 그 삽질소리나 음유시인의 노래는 다시 새소리, 물방울 소리로 변형되어 하강한다. 결국 화자의 마음을 비추는 라산스카로 연결되면서 시적 주체가 의도한 은유의 의미가 드러난다.    상승하는 소리인 “스콥소리”가 하강하는 빛 “라산스카”로 전이되어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결국 천상의 소리로 인간의 마음을 밝게 비추고 싶다는 시인의 의도가 드러나게 된다.    천상과 지상의 공간은 먼 거리로 불연속적이지만 라산스카가 연속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두 공간을 서로 병치시켜 의미와 충돌이나 대립 없이 통일된 연속성으로 마무리된다.    이처럼 병치비유는 공간을 병치시켜 현실 공간과 환상 공간이라는 이질적인 공간을 연속성 있게 자연스럽게 연결했을 때 공간의 병치라고 할 수 있다.      나) 시간과 공간의 병치      병치비유의 예시로 이형기의 「폭포」를 보자. 이 시는 높은 벼랑 위에서 낙하하는 폭포와 바위가 만들어진 지질시대 石炭紀의 과거 시간과 공간을 병치시켜 상상력을 발휘하여 형상화한 시이다.   나의 등판을 어깨서 허리까지 길게 내리친 시퍼런 칼자욱을 아는가 疾走하는 전율과 전율끝에 斷末魔를 꿈 꾸는 벼랑의 直立 그 위에 다시 벼랑은 솟는다 그대 아는가 石炭紀의 종말을 그때 하늘 높이 날으던 한마리 장수잠자리의 墜落을 나의 자랑은 自滅이다 무수한 複眼들이 그 무수한 水晶體가 한꺼번에 박살나는 盲目의 물보라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시퍼런 빛줄기 2億年 묵은 이 칼자욱을 아는가 -이형기의 「폭포」      이 작품을 부분적으로 보면 병치은유이지만 작품 전체로 보면 치환은유가 됨으로써 병치은유와 치환은유의 결합형태가 된다. 원관념인 폭포가 '시퍼런 칼자국', '질주하는 전율', '벼랑의 직립', '석탄기의 종말', '장수잠자리의 추락' 등으로 자리이동의 모습을 보인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 이질적인 보조관념들이 조합됨으로써 폭포가 새로운 의미체로 부상되기도 한다.    이 시에서 화자인 나는 폭포의 암벽이다. 폭포의 암벽에 폭포수가 쏟아지는 모습을 “시퍼런 칼자국”으로 비유되고 있다. 폭포수가 흘러내리는 현재의 순간과 공간을 “疾走하는 전율과/전율끝에 斷末魔를 꿈 꾸는/벼랑의 直立”으로 하강의 이미지로 묘사하고, 환상공간을 병치시켜 지질시대의 순간과 공간을 “그 위에 다시 벼랑은 솟는다”로 묘사하고 있다. 환상공간인 지질시대는 “石炭紀의 종말”이다. 환상공간인 지질시대 石炭紀가 종말한 순간, “그때 하늘 높이 날으던/한마리 장수잠자리의 墜落을/나의 자랑은 自滅이다”라고 진술하고 있고, 다시 현실공간의 현재 시간에 폭포수가 흘러내리는 모습을 “무수한 複眼들이/그 무수한 水晶體가 한꺼번에/박살나는 盲目의 물보라”로 병치시켜놓고 있다. 현재 “나의 등판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시퍼런 빛줄기”는 물이 쏟아지는 촉각적 이미지를 시각적인 이미지인 빛의 이미지로 병치시켜 다시 “2億年 묵은 이 칼자욱을 아는가”라고 현재의 모습이 과거의 지질시대의 모습으로 새로운 의미를 과거와 현재, 환상공간과 현실공간을 의미와 충돌이나 대립 없이 통일된 연속성을 미무리하고 있다.      다) 이질적인 두 사물의 병치      두 개 이상의 사물들을 함께 놓아두어서 그것들이 서로 다른 사물들이 당돌하게 병치되어 서로 기능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게 되는 새로운 결합으로 병치기법을 작용하나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두 사물을 병치하여 조합하기가 어려우므로 처음에는 사물의 형태, 정서, 상징. 행동, 언어 등의 유사성에 의해 한 대상을 다른 대상으로 이동하여 자리바꿈을 하는 치환비유를 적용하여 비유하다가 고정적으로 병치시키는 방법을 적용하는 것이 좋다. 이는 엄격하게 치환비유와 병치비유를 구분할 필요 없이 치환비유와 병치비유를 적절히 배합하는 방법이 더 쉽기 때문이다.    아래의 예시를 보도록 하자. 이 시는 식혜 만드는 과정과 미혼모가 아기를 낳아 고아를 다른 나라에 입양하는 과정을 병치시켰다.   둘이 좋아서 몸을 섞었습니다 사랑은 젖은 이슬이 되고 어머니 아닌 처녀 뱃속에서 사랑을 확인했습니다  단단히 조여 오는 압박 벨트도 저희들의 몸부림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남이 볼까 두근두근 스스로 싹을 틔우고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달콤한 사랑도 모두 멈추고 엄마의 품을 떠나 영아원의 엿기름이 되었습니다  이제 사랑도 산산이 부셔져 가루가 되고 허공으로 흩어져 낯선 나라 물과 밥알에 섞여 분노를 삭혀왔습니다  타국 땅에서 밥알로 동동 한때 뜨거웠다 차갑게 식어버린 미혼모의 젊은 날 한 순간 엿 먹은 은혜입니다           -김관식의 「식혜」      이 시는 식혜 빚는 과정과 젊은이들의 사랑과 미혼모들의 출산, 해외 입양으로 보내는 과거 우리나라의 고아수출이라는 사회병리적인 현상을 전체적으로 병치시켜놓고 있다.    식혜를 만들 때는 엿기름으로 만들게 됩니다. 엿기름은 싹이 튼 곡물, 즉 생맥아는 가마에서 말려 더 이상 자라지 못하게 하는데, 구멍이 뚫린 가마 바닥을 통해 들어오는 뜨거운 공기로 말린 것을 말한다. 맥주를 만드는데데 쓰이지만 엿기름은 주로 엿이나 식혜를 만드는 데 이용한다. 이 엿기름은 식혜를 만드는 원료가 되는데, 만드는 과정을 보면 껍질째 빻은 엿기름을 따뜻한 물에 우러나게 하여 고운 체에 받친 다음 그 물을 가만히 가라앉힌다. 되게 지은 밥을 사기 항아리에 담아 엿기름의 윗물만을 붓고, 온도를 60~70℃로 4~5시간 유지시켜 밥을 삭힌다. 이때 온도가 낮으면 밥이 쉬고, 너무 높으면 당화가 잘 안 된다. 약 4시간 후에 열어보아 밥알이 동동 떠 있으면 밥알을 조리로 건져 찬물에 헹군 뒤 다른 그릇에 담고 나머지 식혜물을 끓이면서 설탕을 적당히 탄다. 끓일 때 떠오른 거품은 숟가락으로 걷어낸다. 식혜물에 생강·유자 등을 가미하여 맛과 모양을 내기도 한다.    이러한 식혜 만드는 법을 미혼모들이 젊은 혈기로 사랑을 나누다 그만 임신을 했을 때 몰래 아이를 낳아 영아원에 맡기고 이 아이들이 다른 나라에 입양이 되어 갔다. 가끔 신문과 방송에 이 입양간 아이가 자라서 친모를 찾겠다고 나서나 대부분은 타국에서 한국 사람으로써의 정체성을 작지 못하고 입양된 나라의 국민이 되어 살아간다. 이러한 두 사건의 유사성은 엿기름이 보리 싹의 자람을 멈추게 하여 만든다는 점, 그리고 식혜를 만들면 단맛을 내며 우리나라의 고유한 전통음료라는 점, 식혜를 더 졸이면 엿이 된다는 점, 식혜에는 밥알이 동동 떠있다는 점 등의 식혜 특징과 미혼모들의 사랑이야기가 처음에는 달콤하여 빠져든다는 점, 남에게 말을 못하고 숨겨오다가 몰래 아이를 낳게 된다는 점, 이 아이는 영아원에 맡겨져 고아가 되고 다른 나라에 입양된다는 점 등 미혼모의 사랑이야기가 전혀 유사점이 없는 것 같으나 곰곰이 살펴보면, 사물의 형태, 정서, 상징. 행동, 언어 등의 유사성이 발견되게 된다.    따라서 식혜 만드는 과정과 미혼모의 입양이라는 두 사건을 병치시켜놓고 유사점을 찾아서 빈틈없이 엮어내면 이질적인 두 사물의 병치가 완성된다.      라) 자연과 인간의 병치      자연은 모든 생명을 포용하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다. 우리 인간은 자연 속에서 의식주 필요한 모든 것을 얻는 등 자연을 이용하여 살아간다. 그러나 인간들의 욕망이 극대화하면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망각하고 자연을 마구 훼손하여 생태계의 질서를 망가뜨려 오늘날 인간들은 자연의 재앙으로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다.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보는 일원론적인 생각보다 자연과 인간을 따로 분리하여 이분법적인 사고로 자연을 무조건 지배함으로써 인간만의 행복과 풍요를 누리려는 인간위주의 생태의식이 오늘날 생태계의 위기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과 인간을 병치시키는 기법을 활용할 수 있다. 이 기법은 자연과 인간의 대립적인 구도에서 갈등양상을 노출시키기 보다는 자연과 인간을 병치시킴으로써 시적 대상에 대한 시야를 확대시켜서 세계에 대한 객관적인 시선을 획득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눈보라 휘몰아간 밤 얼룩진 壁에 한참이나 맷돌 가는 소리 高山植物처럼 늙으신 어머니가 돌리던 오리 오리 맷돌 가는 소리    -박용래의 「雪夜」 전문      이 시는 “눈보라 휘몰고 간 밤”이라는 자연과 “맷돌 가는 소리”로 어머니를 병치시켜놓고 있다. 눈보라 몰아치는 겨울밤이면 맷돌을 돌리시던 어머니를 떠올려 현재와 과거를 병치시켜놓고 있다.    1행과 2행은 “눈보라”가 휘날리는 밤이라는 시간 집 밖의 공간에서 “얼룩진 壁”이 있는 방안으로 공간이 이동한다. 3행과 4행은 방안에서 어머니께서 밤이 이슥하도록 맷돌 가는 어머니가 떠올리고 있다. 5행과 6행에서 “얼룩진 壁”에 맷돌 가는 소리가 부딪혀 “高山植物”의 서정적인 시각적 이미지로 전달이 되다가 7행과 8행에서 맷돌 소리를 여운을 청각적 이미지로 화자의 내면 정서를 공감각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자연과 인간을 병치시킨 김관식의 「죽방림」을 보도록 하자.   아파트 분양 떴다방 밀물이 몰려든다   기회는 이때다 밀려들 때 분양받아 웃돈 얹어 잽싸게 빠져야 한다   떴다방들 다 빠지고 어물어물 썰물인 줄 모르고 모델하우스 분양사무실 꾸역꾸역 멸치 떼들이 몰려든다   죽방령 입성 로또 당첨 환호성을 지르며 펄쩍펄쩍 남해 바다    -김관식의 「죽방렴」 전문      이 시는 남해바다에 고기를 잡기 위해 설치해놓은 죽방렴, 즉 좁은 바다의 물목에 대나무로 만든 그물을 세워서 물고기를 잡는 일, 또는 그 그물을 말하는데 이는 자연현상을 이용한 인간의 지혜이다. 그렇지만 자연의 현상을 이용한 것이다. 밀물과 썰물의 조류에 따라 물고기들이 죽방림에 갇히게 되는데, 이러한 상황을 아파트 분양으로 떴다방들이 몰려드는 모델하우스와 병치시킨 시이다.    이와 같이 자연과 인간을 병치시켜서 자연 속에서 조화롭게 시공간을 병치시켜 극도의 절제된 서정을 공감각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다.      마) 언어의 해체, 의미를 바꿔서 병치      언어를 해체시켜서 그 의미가 바꿔지는 것을 병치시키는 방법이다. 우리나라 말에는 한 낱말을 분해시켰을 때 두 가지 의미가 생긴다. 이 두 가지 의미를 서로 병치시키는 방법인데, 최근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경향으로 장르간의 해체, 낱말의 해체 등의 방법을 이용하여 병치할 수 있다.   나 비다   구름 동동 하늘 떠돌다 되돌아올 줄 정말 몰랐다   팔랑팔랑 꽃을 찾아다닐 때 나를 잊었다   그땐 정말 눈물 흘릴 줄 전혀 몰랐다 비틀비틀 낙하하는 나비 나 비다        -김관식의 「나비」      이 시는 “나비”라는 시어를 “나”와 “비”로 분해해서 해체시켰다. “나”라는 인간과 “비”라는 자연현상으로 분해하여 병치시킴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낸 것이다.   4) 에필로그      이상에서 병치기법을 살펴보았다. 병치기법은 단순한 시상을 복합적으로 엮어서 시를 시답게 하는 현대시의 기법 중의 하나이다. 일부 초현실주의 데페이즈망 기법도 병치기법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소설의 구성법에서 단순구성이 아니라 복합구성, 평면구성이 아니라 입체구성, 액자식 구성, 피카레스식 구성보다는 옴니버스식 구성이 바로 시의 병치기법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병치기법에서 치환 비유를 하기 위해 유사점을 찾아 자리바꿈하는 요령은 첫째, 형태의 유사점→모양의 유사점을 찾는다. 예) 빌딩-하모니카. 둘째, 정서의 유사점→느낌의 유사점을 찾는다. 셋째, 상징의 유사점→의미의 유사점을 찾는다. 넷째, 행동의 유사점→움직임의 유사점을 찾는다.   다섯째, 언어의 유사점→동음이의어, 발음의 유사점을 찾는다.    이와 같이 유사점을 찾아 자리바꿈하다가 함께 놓아두는 방식으로 병치비유를 완성해 나가면 된다. 오늘날 현대시에서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많은 시들이 병치기법이 적용되고 있음을 알고, 이의 방법을 터득하는 일은 바로 현대시를 바로 이해하는 방법일 것이며, 시를 창작하는 즐거움을 맛보게 하는 방법이 바로 이 병치기법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서정문학 2018년 11.12월호에 실린 연재6회분의 원고입니다)  
3    詩의 이미지 댓글:  조회:1102  추천:0  2019-01-14
1. 詩의 이미지      이미지(Image)는 원래 영화에서 나온 말로 映像․心象․寫像 등의 여러 가지 말로써 표현된다.  시의 언어는 음악성과 회화성을 갖고 있는데 회화성을 이미지라고 한다. 영국의 시인 루이스(Lewis, Cecil Day)도 이미지를 가리켜 ꡒ시어에 의한 회화적 표상ꡓ이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시적 이미지는 문맥 속에 인간의 정서를 저류로 가진 어느 정도 은유적인 언어를 사용한 다소의 감각적인 회화이다. 라고 정의하고 있다. 종래의 시가 창조가 아닌 재현이었음에 비하여 현대시는 창조이지 재현은 아니다. 그러므로 시에서 강조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성이요, 독창성이었다. 따라서 시는 객관적 대상을 이미지에 의하여 재현하는 것, 흉내내는것, 복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국화꽃 한 송이를 사람이 눈으로 보았으면, 마음속에 그 꽃의 이미지, 즉 象이 寫像된다.  시적 이미지들은 존재하는 대상을 전달하기 위한 수식적 형식이었다. 현대시의 이미지는 서로 모순되거나 이질적 정서 또는 관념들의 텐션에 그 가치가 있는 것이다.  가령 엘리어트가 ꡒ4월은 잔인한 달ꡓ이라고 표현했을 경우 우리는 언뜻 여기서 ꡐ탄생과 죽음ꡑ, ꡐ정열과 이성ꡑ 등의 서로 대립된 관념과 정서들의 텐션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실체 그 자체가 아니라, 실체의 모방으로 나타난다. 이미지를 말의 흐림(Word Picture)이라 했을 때, 그 의미는 대상을 재현하되 색채와 선에 의해서가 아니라, 말에 의해서라는 것이다. 철학자들의 ꡐ정신ꡑ은 곧 ꡐ언어ꡑ라는 생각은 바로 언어가 실재를 형성한다는 말이 된다. 언어에 의한 이미지의 실체화에는 비유적 방법과 상징적 방법이 주로 사용된다.  예를 들자면 엘리어트의 ꡒ나는 내 생애를 커피 스푼으로 되질하였네ꡓ라는「프루프록의 연가」의 일절은 생의 일상적 반복을 뜻하는 내용으로서 그 자신이 말하는 ꡐ객관적 상관물ꡑ에 의한 시적 이미지 형식인 것이다.  이미지를 감각, 혹은 지각적 체험을 지적으로 재생하는 인식수단으로 보는 웰렉과 웨린(Wellek & Warren)은 이미지의 유형을 다음과 같이 나누고 있다.  시각적 이미지․청각적 이미지․미각적 이미지․후각적 이미지․근육감각적 이미지․색채적 이미지․역동적 이미지․공감각적 이미지 등으로 구분했다. 이 밖에도 프라이(Frye, Northmp)는 예시적 이미지와 악마적 이미지 그리고 유추적 이미지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  한편 이미지는 육체적 지각을 통하여 산출되는 경우와 육체적 지각을 통하지 않고 산출되는 경우로 나누어 고찰될 수 있다.  이것을 바꿔 말하면 전자는 지각과 관계되고 후자는 상상력이나 환상과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각과 관계가 되든 상상력이나 환상과 관계되든 간에 이미지는 모두 정신 속에 기록되는 감각적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미지라는 말과 이미져리라는 말이 쓰이는데 이는 개념의 혼란을 야기한다. 이미지는 去時的으로도 사용되고 未時的으로도 쓰인다. 이미져리(Imagery)란 말은 언어에 의해 정신 속에 생산되는 이미지들을 말한다. 이미지와 이미져리라는 말이 함께 사용되나 이미져리는 개별적 이미지들의 집합이라는 측면에서 이미지보다 훨씬 개념적으로 분명 해진다.    여기서는 일반성 있게 편의상 이미지라는 용어를 통일해서 쓰기로 한다. 이미지에는 대체로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는 경우가 있다. ①정신적 이미지 ②비유적 이미지 ③상징적 이미지 등이다.  정신적 이미지는 시를 대할 때, 오로지 독자의 정신에 야기되는 감각적 경험만을 강조한다. 표현에 있어서도 축어적 방법이나 비유적 방법인가를 분별하지 않으며 때로는 축어적으로, 때로는 비유적으로 그리고 더러는 두 가지 개념이 동시에 사용된다.  정신적 이미지를 많은 심리학자들은 몇 가지 유형으로 다시 분류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앞에서 말한 웰렉과 웨렌(Wellek & Warren)의 유형과 거의 비슷하다. 곧 ①시각적 ②청각적 ③후각적 ④미각적 ⑤촉각적 ⑥기관적 ⑦근육감각적 이미지 등이다.  그 예시를 들면 다음과 같다.    ① 시각적 이미지의 경우    향료를 뿌린 듯 곱다란 노을 위에  전신주 하나하나 기울어지고  먼 고가선 위에 밤이 켜진다.    구름은 보라빛 색지 위에  마구 칠한 한 다발 장미    목장의 깃발도 능금나무도  불면 꺼질듯이 외로운 들길  - 김광균 「뎃상에서」 에서-    여기서 시각적 이미지를 볼 수 있다. 향료를 뿌린 것처럼 고운 노을/과 같은 시각적 이미지는 물론/구름=장미/와 같은 은유며. 보라빛 색지 위에/마구 칠한 /것과 같은 시각적 심상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ꡐ목장ꡑ의 ꡐ깃발ꡑ, ꡐ능금나무ꡑ와 같은 실재하는 사물의 시각을 통하여 ꡐ들길ꡑ 의 이미지를 강조하기도 했다.    ② 청각적 이미지의 경우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서 곱게 풍화 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세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 우는 사람처럼 가자  배골 물래  아름다움 또 다른 고향에 가자.  - 윤동주 「또 다른 고향전문」 전문 -    이 시에서 소리처럼 부는 바람/ 눈물짓는 것/ 백골이 우는 것/ 내가 우는 것/과 그리고 어둠을 짖는 개처럼 이 시는 나와 혼 백골의/ 울음소리/와 개의/ 어둠을 짖는 소리/의 청각적 심상에 의하여 정조 되어있다. 청각적 이미지 즉 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로 전체가 상징적 분위기를 이루고 있다. 이 밖에도 자연의 소리를 묘사하거나 의성․의음 등으로 나타내는 방법도 있다.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 한하운 「보리피리」에서 -    이 시에서는 소리의 상징으로 리듬을 살려 음악성을 높이고 있다.    ③ 후각적 이미지의 경우    내 가슴속에 가늘한 내음  애끈히 떠도는 내음  저녁 해 고요히 지는 제  머 ㄴ 山 허리에 슬리는 보랏빛    오 그 수심 뜬 보랏빛  내가 잃은 마음의 그림자  한 이틀 정열에 뚝뚝 떨어진 모란의  깃든 향취가 이 가슴 놓고 갔을 줄이야  - 김영랑 「가늘한 내음」에서 -    여기서 가늘한 내음/과 떠도는 내음/은 깃든 향취와 동질적인 것으로 모란의 내음을 후각적 이미지로 형성하고 있다.    ④ 미각적 이미지의 경우    소년이었던 나는  담배에 입맛을 붙여  숨어 피우던 그 쌉쏘름한 담배 맛을  시방도 아예 잊을 길이 없다.  - 신석정 「오는 팔월에도」에서 -    이 시에 ꡐ쌉쏘름한ꡑ과 같은 관형어가 미각적 이미지로 나타났는데, 대개의 경우 달디단, 쓰디쓴, 시디신 둥과 같이 표현되고 있다.    ⑤ 촉각적 이미지의 경우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아른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타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 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흘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 정지용 「유리창」에서-    이 시에서 촉각적 이미지를 볼 수 있는데 그것은 熱, 令 등의 감각을 표상한다. 더 좀 자세한 분석적 해설을 정한모에게서 들어보기로 한다.    유리창이라는 시각․청각․촉각적 연상의 복합적 이미지를 가진 소재를 시적 오브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선 이 시는 성공적이다.  유리창에/ 차고라는 촉감과 슬픈 것이라는 시적 정서와/ 어른거린다/는 시각이 화합하여/ 시 전체의 분위기를 형성하며, 여기에 다시/입김을 흐리운다/는 촉감적인 모호한 슬픔의 심상을 결합하고 아울러 생명의 발돋움처럼/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라는 사건의 역동적 이미지를 부가하여 시의 전체적 結構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지우고 보고/새까만 밤이 밀려오고/와 같은 시각적이고 역동적인 이미지를 조형하고 다시/물먹은 별이라는 다감각적 이미지의 시어가/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라는 多重的 감각으로/ 인각되어 시의 영역을 확대 심화하고 있다. 아울러/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다/는 상황과 사건 그리고 대상을/ 외로운 황홀한 심사/라는 多感的 정서와 결합시켜 객관적 상관물에 의한 시의 총체적 정서효과를 완결하고 있는 것이다.    ⑥ 기관적 이미지의 경우    한밤에 불 꺼진 재와 같이  나의 정열이 두 눈을 감고 잠잠할  나는 조선의 한없는 맥박을 짚어 보노라.  나는 임의 모세관, 그의 맥박이로다.    이윽고 새벽이 되어, 휜한 동녘 하늘 밑에서  나의 희망과 용기가 두 팔을 뽐낼 때면  나는 조선의 소생된 긴 한숨을 듣노라  나는 임의 기관이요, 그의 숨결이로다.  - 梁柱東 「조선의 脈搏」에서 -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 徐廷柱 「花蛇」에서 -    이 두시에서 보는 바 ꡐ맥박ꡑ, ꡐ모세관ꡑ, ꡐ기관ꡑ 그리고 ꡐ가쁜 숨결ꡑ 같은 것이 기관적 이미지다. 기관적 이미지는 대체로 고통, 맥박, 호흡, 소화 등의 감각을 표상 한다. 따라서 흐느끼는, 할딱이는, 답답한, 숨이 차는 따위의 관형어에 조응한다.    ⑦ 근육감각적 이미지의 경우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 조차 흘리고 싶다.  - 김종길 「성탄제」 에서 -    이 시에서 ꡐ쥐어ꡑ 나 ꡐ발목이 시도록ꡑ과 같은 근육감각적 이미지를 느낀다. 근육 감각적 이미지는 근육의 긴장과 움직임을 표상 한다.  이러한 이미지의 유형들이 詩 해석에 다음과 같은 도움을 준다고 이승훈은 말하고 있다.  -이기반         첫째로 기호의 보편성을 강화한다. 모든 시인들은 상이한 유형의 감각적 능력을 지니며, 따라서 우리는 그들의 상이한 감각적 능력을 체험함으로써 우리들의 기호의 편협성을 극복할 수 있다. 둘째로 시인의 상상력을 이해하는 하나의 색인이 된다. 이를테면 김광균은 시각적 이미지를, 김영랑은 청각적 이미지를 지향한다는 점은 두 시인이 성취한 상상력의 세계를 기술함에 있어 하나의 중요한 열쇠가 된다. 셋째로 교육적으로 유용하다. 교사나 비평가는 시의 이러한 양상을 강조함으로써 보다 훌륭한 독서 방법을 개발할 수 있다.    라고 했는데 또 한편으로는 문학 논의에 있어서는 이미지에 있어서 몇 가지 약점을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그 첫째는 이미지 창조력이 시인들마다 다르듯이 독자 혹은 비평가의 이미지 창조가 다르다. 그러므로 시에 대한 상대주의적 해석이 나타난다. 둘째는 시의 감상에 있어 정신적 이미지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실제로 시에서 맛볼 수 있는 즐거움과 시가 구현하는 의미에서 멀어진다. 셋째는 이미지의 감각적 특질만 강조함으로써 시의 문맥 속에 놓이는 그 이미지의 기능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게 된다는 것 등이다.  스켈튼(Skelton Robin)이 지적한 바대로 시의 이미지에 있어서 세 가지 기능은 상징, 은유, 직유이다. 이 세 가지가 상호 종합적인 양식으로 기능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비유적 이미지는 비유적 양식으로서의 이미지들을 말하는데 대체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전통적 수사학자들의 견해와 둘째는 이것을 극복하는 신비평가들의 견해가 그것이다. 수사학자들의 견해는 문면과 문리, 혹은 매체와 취의를 기준으로 하여 제유법, 환유법, 직유법, 은유법, 의인법, 만화법, 상징법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모든 비유법 이론의 핵심은 문명과 문리의 관계, 혹은 매재(媒材)와 취의(取意)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제유법이나 환유법은 문면과 문리 관계가 種과 類, 원인과 결과 같은 일종의 접촉성에 기초를 두며 그 외의 것은 ꡐ비상사성 속의 상사성ꡑ에 기초를 두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서로 다른 즉 상이한 두 사물을을 병치함으로써 과학적 인식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세계의 진리를 시가 통찰할 수 있다는 인식론적 의의가 신비평가들에 의해 진술되기도 했다. 여기서 예시를 들어 설명해 보기로 하자.    ① 두 사물이 모두 이미지인 경우    구름은  보라빛 색지 위에  마구 칠한 한 다발 장미    ꡐ구름ꡑ을 ꡐ장미ꡑ로 은유한 시각적 심상은 두 사물이 모두 이미지로 나타나 있으며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확연하게 나타나 있다.    ② 두 사물이 감정들이거나 관념들인 경우    사랑하는 나의 하느님 당신은  늙은 悲哀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의 마음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 김춘수 「나의 하느님」에서 -    이 시에서 시인의 강렬한 의식을 통한 관념의 세계를 볼 수 있다.    ③ 취의는 이미지요 매재는 감정이나 관념인 경우    空間을  조용히 흔드는  종소리  너 향기로운  果實이여!  - 조지훈 「梵鐘」에서 -    이 시에서는 ꡐ종소리ꡑ가 매재로서 관념적이라면 ꡐ과실ꡑ은 취의로서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④ 취의는 감정이나 관념이며 매재는 이미지인 경우    잣나무와 잣나무  사이로 보이는 깊은 산협에  단풍이  타는 듯 붉은 단풍이 고웁고  - 장만영 「만추」에서 -    ꡐ단풍ꡑ이 매재요 ꡐ고웁고ꡑ는 취의이다. 여기서 매재는 이미지이지만 취의는 감정이요 관념으로 나타난다.  사물과 사물이 서로 만남에 있어서는 형이상학적 명제로 수용된다. 과학적 진술이나 산문의 진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식의 양식, 이해의 양식으로 비유적 이미지가 드러나며, 이때 논의의 핵은 은유가 된다.  신비평가들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지니는 동일화에의 욕망 때문에 비유어가 존재한다고 본다. 현대는 과학의 시대이기 때문에 통합된 감수성의 세계가 시이며 통합된 감수성은 과학의 세계가 노출하는 비인간적이고 추상적인 측면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된다. 훌륭한 시는 시적 상상력을 수단으로 체험의 전체성을 노린다. 체념의 전체성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능력이 은유적 인식능력이다. 시적 이미지는 시의 주제와 조화되어야 하며 아울러 신선하면서도 독창적이며 감각적 체험을 재생시킬 수 있고 비유법이나 기타 상징법 등과 역동적으로 결합되어야 한다.  상징적 이미지는 논의의 기본 가정이 반복과 회귀이다. 대체로 반복과 회귀의 양상은 이미지들로 나타나지만, 때로는 이미지가 아닌 낱말들의 유형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현대시가 노래하는 시로부터 탈피하여 읽고 생각하는 시로 매력의 초점이 移行된 것은 현대시가 이미지 중심으로 전환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이미지스트인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가 말했듯이 이미지는 융용 상태에 있는 관념의 소용돌이 또는 덩어리이며 따라서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 또한 이미지란 지적․정적 복합체(Complex)를 일순간에 제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적․정적 복합체이며 융용 상태에 있는 에너지를 지닌 소용돌이 같은 것이 이미지라는 것이다. 우리는 지와 정의 표현을 언어를 통해서 하게 된다. 그런데 언어로써는 완전히 풀이하기 어려운 마음의 상태를 효과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이미지의 효과이기도 하다.  그 방법의 하나인 상징적 이미지는 은유처럼 서로 다른 사이의 비슷한 성질 위에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가령 태극기가 우리 나라를 상징하고, 십자가가 기독교를 상징하듯이 형식에 있어서는 은유와 비슷한 데가 있다. 그러나 은유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태극기가 우리 나라와 유사한 점은 없으면서도 그것이 우리 나라를 상징하는 것은 국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십자가가 기독교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그 위에 못 박혔다고 해서 그렇게 상징된 것이다. 어떤 하나의 사실이 반복과 회귀에 의해서 이미지로 성립되기도 하지만 상징은 엄격하게 말해서 이미지는 아니다. 이미지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고 본다.  시에 있어서 상징은 전통적이거나 개인적으로 미리 정해진 것과 그리고 시의 문맥 중에서 비로소 정해지는 것이 있다. 예를 들면 ꡐ비둘기ꡑ가 ꡐ평화ꡑ를 ꡐ무궁화ꡑ가 ꡐ우리 나라ꡑ를 상징하는 것은 전자의 경우요, ꡐ하늘ꡑ이 ꡐ자기만의 높은 이상의 세계ꡑ, ꡐ어느 시에서의 문맥상으로ꡑ라면 이는 후자에 속한다. 그런데 전자도 후자도 다 함께 나타내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 예시로 윤동주의 시 「십자가」에서 그 첫 연만을 들어본다.    쫓아오는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십자가는 전통적으로 상징화되어 있지만, 이 시에서는 문맥에 의해서 의미가 특수화되어 있다. ꡒ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ꡓ에서 시인 자신이 도달하기 어려움을 느끼면서도 동경하여 마지않는 종교적 또는 도덕적 생활의 목표를 상징하고 있다.  이미지는 현대시의 대명사라고 부를 만큼 시에 있어서 강조되어 왔다. 따라서 그 기능도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앞에서 정신현상으로서의 이미지, 언어현상으로서의 이미지, 상징현상으로서의 이미지에 대하여 언급했지만, 그러한 이미지들이 시에서 어떠한 기능을 가질 것인가? 이것이 논의의 초점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이미지가 시를 형성하는 다른 요소들과 잘 조화되고 종합되는 가운데 시의 성패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미지는 시의 율격, 음율, 리듬, 문체, 문법의 체계, 시점, 압축방식과 확대 방식, 선택과 생략의 방법, 인물, 행동, 사상의 양상들과 적절히 통합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스켈톤(Skelton Robin)이 말한 이미지의 세 가지 기능은 상징․은유․직유라고 했다. 이것도 역시 호존 하는 것이며 시의 형성은 이미 삼자를 포괄하여야하며 삼자의 관계로 하여 시의 이해는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지의 기능은    첫째로 이미져리는 詩속의 화자가 말하고 있는 제재(Subject)를 지시한다. 화자가 詩 속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이미져리이며, 그것은 화자의 앞에 현전하 거나, 뒤에서 회상된다. 전경과 후경으로 나타나는 일체의 인간, 대상, 장소, 행동 사건들이 모두 제재가 된다. 둘째로 제재는 그러나 축어적 이미져리에서 비 유적 혹은 상징적 이미져리로 전환된다. 따라서 화자의 진술을 통하여 주어진 제재가 다른 제재와 대조됨으로써 이미져리는 제재이면서, 동시에 상징이 되기 도 한다. 셋째로 이미지들은 시속에서 하나의 유추가 된다. 곧 축어적 제재에서 벗어나 순전히 비유적 양식으로서의 기능을 나타낸다.    여기서 시 한 편을 놓고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가끔 편지를 받는다  발끝에 걸리는 일년의 마지막 낙엽  또는 살아 남은 겨울의 나비다    어둠을 뚫는 징검다리  그러나 어느새 돌 뿌리는 패어  삭은니처럼 흔들린다    가끔 편지를 쓴다  그대 흐린 눈의 원근을 밝히거나,  아니면 구멍 뚫린 암호다    그대 창 앞에  방긋이 피어날 꽃봉오리  아니면 떨어질 기러기의 날개다    이것은 문덕수의 시 「편지」의 전문이다. 여기서 ꡐ편지ꡑ를 사실적 기술이나 객관적 서술, 그리고 묘사적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다. 시인의 내면적 체험의 세계를 주관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첫째로 이 시의 화자는 시인 자신으로서 그가 말하는 ꡐ편지ꡑ는 ꡒ마지막 낙엽, 겨울의 나비, 징검다리, 구멍 뚫린 암호, 꽃봉오리, 기러기의 날개ꡓ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둘째로는 화자가 편지를 통해 체험한 양면성이다. 편지를 받는 경우와 편지를 쓰는 경우다. 여기서 시인의 내면적 이중성이 나타나는데 그 하나는 은유적인 국면이요 또 다른 하나는 상징적인 기법에서의 전환이다.  셋째는 이 시는 비유적 상징적 방법에 의하여 이미지가 유추로 나타나 있음을 본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이미지의 기능은 첫째로 화자의 말하는 내용을 보다 선명하게 깨닫게 한다. 둘째로 화자의 반응은 화자의 정서와 연결되며 시의 독특한 정조를 자아나게 한다. 셋째로 화자의 의식을 환기시켜 화자의 정신 활동을 자극하여 그 활동을 외면화한다. 넷째로 독자에게 시적 상황을 암시하며 이미지를 통해 다양한 시적 요소에 대한 독자의 반응을 유발케 한다. 다섯째로 독자의 기대를 인도하고 환기하는 방법으로서의 기능을 나나내기도 한다.  특히 현대시에 있어서는 심상이 그 자체로서 배경을 배제해 버리고 독립하여 한편의 시 속에서 제 구실을 하는 때가 많다. 따라서 시의 독자들은 이미지를 통하여 시인의 사상이나 정서를 읽어낼 수 있다. 이처럼 현대시에서 이미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할 것이다   2. 詩의 象徵      상징이라는 말의 Symbol 은 본래 희랍어의 symballein이라는 말에서 온 것이다 Symballein은 동사로서 ꡐ짜맞추다ꡑ를 뜻하며, 명사형으로서의 Symbolon으로 ꡐ표시ꡑ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문학의 경우에 있어서는 상징이란 용어의 설명은 단순하지 않다. 상징은 감각적 대상으로서의 보조관념이 본래의 고유의미 외에 비 본래의 의미를 표현하는 일종의 수사법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비유적 방법과는 성질을 달리하는 상징은 유추적으로 가시의 세계, 즉 물질 세계가 연상작용에 의하여 불가시의 세계, 즉 정신 세계와 일치하게 되는 표현의 양식을 말하는 것이다. 연상이란 두 사물이 상징적으로 연결되고 종합되는 정신활동이다. 이런 점에서 문학에서 말하는 상징이란 심상과 관념의 결합이며 관념은 심상이 암시적으로 환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흔히 상징은 비유법과 유사한 것으로 논의되어 오기도 했다. 비유란 관례적인 언어의 사용에서 벗어나 특수한 의미나 효과를 위하여 언어가 인용되는 것을 뜻한다. 브룩스(Brooks. C)와 워렌(Warre. R)은 은유와 상징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상징은 원관념이 생략된 은유법이다. ꡒ소녀들은 장미 동산에 있는 여왕장미ꡓ 라고 하면 은유지만, 시인이 단순히 그가 취급하는 사랑의 성질을 암시하기 위하여 장미를 지시한다면 그것은 상징이 된다. 예를 들면 ꡒ저 소녀는 장미꽃이다ꡓ 라고 하면 장미의 특질은 소녀에게 전화된다. 그러나 다른 어떤 것을 대신하는 것으로 대상이나 사건을 생각할 때, 우리는 상징이란 용어를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징은 의미를 지적하는 기호이다.    그러니까 상징은 비유적인 기교가 아니라 自制的 독립적 존재인 것이다. 비유는 어디까지나 비교의 양식으로 다른 지시 대상에 의해 매개화 되었을 때 일어나기 때문에 독립적 현실성이 없다. 이에 비하여 상징은 독립적 현실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유가 하나의 체험의 묘사방법이라고 한다면, 상징은 의의 있는 체험의 심화방법이라고 말할 것이다.    가령 ꡒ고향은 아늑한 보금자리ꡓ라고 하면 은유가 되지만 ꡐ고향ꡑ을 빼고 그냥 ꡐ보금자리ꡑ라고만 표현하여 ꡐ고향ꡑ을 대신하면 이것은 상징이 되는 것이다.  상징에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하나는 인습(관습)적 상징이며, 다른 하나는 개성(창조)적 상징이다.  인습적 상징이란 태극기가 우리 나라를 그리고 십자가가 기독교를 표상 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개인적 상징이란 시인이 창조적 의미를 부여한 상징을 말한다. 시에서의 상징이란 후자의 것에 비중을 두고 있다.    어느 먼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 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 가며  서글픈 옛 자취인 양 횐 눈이 나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에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먼 곳의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 이리 가뿌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디찬 의상을 하고  횐 눈은 나려 나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 김광균 「雪夜」전문 -    이 시에서 눈(설)을 ꡒ그리운 소식ꡓ, ꡒ서글픈 옛 자취ꡓ, ꡒ잃어진 추억의 조각ꡓ 등으로 상징하고 있는데 이것은 개성(창조)적 상징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어느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드리지요  - 趙炳華 「의자」에서 -    의자는 우리 인간이 앉는 도구로 쓰이나, 어떤 자리 즉 지위라는 인습(관습)적 상징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단순한 지위라는 의미를 넘어서서 또 하나의 다른 의미 즉 세대교체라는 개성(창조)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ꡒ아침을 몰고 오는 분ꡓ이라고 하는 문맥 의미의 특수한 관계와도 연결이 되는 까닭이다.    이 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 柳致環 「깃발」에서 -    세상에는 여러 가지의 많은 깃발이 있다. 어떤 종류의 깃발이건 그 깃발에는 공통성이 있다. 각자가 지향하는 이상 혹은 이념의 표상으로서 그것들은 높이 나부끼게 된다. 그러므로 깃발은 이상을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대표된다.  상징주의 시인들의 암시의 미학은 시인의 내적 우주가 상징적으로 파헤쳐지기 시작한 데서 비롯된 방법이며, 이러한 것은 보오들레에르(Baudelare. C)의 ꡐ교감ꡑ에 집중적으로 담겨져 있다.    자연이란 신전이며  산나무 두리기둥은  신비로운 소리로  때로 주절주절 말씀한다.  사람은 상징의 숲을 비껴 가고  숲은 낯익은 눈초리로 그를 살핀다.    아득한 먼 데서 합치는 긴 메아리처럼  어둡고 깊은 속에서  하나가 되는 메아리처럼  밤처럼 대낮처럼 가 없는 통일에서  향과 색과 소리는  서로 부르며 대답한다.    향기도 저마다  어린이 살결처럼 싱싱한 것  ꡐ오보에ꡑ 소리처럼 부드러운 것  풀에 덮인 들처럼 푸르른 것  또한 썩고 호사롭고 기승스러운 것에  만상이 피워져서 나타나는  용연향, 사향, 안식향 혹은 祭香처럼  정신과 감각의 황흘을 노래한다.  - 보들레르의 「만상의 조응」전문 -    이처럼 상징의 방법은 물질 세계의 상징의 숲을 지나서 비로소 인간의 내면 세계와 접하게 됨을 말해 주는 듯한 상징주의 시인의 시를 보았다. ꡐ자연 이라는 신전ꡑ과 ꡐ숲ꡑ은 상징이다. 그런데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지 본의는 분명치 않으며 암시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상징적 수법을 통해서 본의에 접근할 수밖에 없다. 송욱도「만상의 조응」이 물질 세계와 영혼의 세계가 마치 소리와 메아리처럼 서로 짝을 지어 부르고 대답한다는 생각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시에서 자연과 숲은 물질 세계인 동시에 영혼의 신비로운 세계라고 할 수 있다.  현대시의 구성원리이자 그 방법인 상징은 은유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비슷한 양식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판별할 때 은유는 언어적 기교임에 대하여 상징은 언어적 연락만이 아닌 이중성을 지니게 된다. 그리하여 인간의 사유가 물질세계의 대상들과 갖는 상호반응을 그 조건으로 하여 형성되어진다.  -이기반       3. 詩의 類推      類推라는 것은 하나의 대상이 다른 또 하나의 대상과 많은 표징에 관해서도 유사하리라는 것을 추정해 내는 추리를 말한다. 바꿔 말하면 기지의 언어와 미지의 언어가 함께 나눠 가지고 있는 공통성을 말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유사는 다음과 같다.    무엇보다 위대한 일은 은유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힘이다. 그것만은 다른 사람에게서 배울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창조적인 천재의 표징인 것이다 우수한 비유는 유사안식(an eye far resemblance)을 검출할 것을 의미한다.    라고 했을 때에 유사안식이란 바로 유추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자유로운 비유 즉 우수한 은유는 유추의 발견에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바이다. metaphor라는 어원 그 자체가 이동(motion-phora)과 변화(Changometa)의 뜻을 갖고 있는 것처럼 미지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하여 그것과 유사한 기지의 언어를 이동 변화시키는 것이므로 유추는 비유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인 것이다. 동시에 유추는 시인의 상상력에 기인한다. 상상력이란 베이컨(Bacon Francis)이 말하였듯이 ꡒ자연이 결합시켜 놓은 것을 분리하고 자연이 분리해 놓은 것을 결합시키는 인간의 힘이다.ꡓ 라고 했듯이 상상은 평범과 습관의 타성을 초월하는 새로운 발견과 창조의 능력으로 인정하기도 한다. 확실히 발명․발견․창조는 상상(비전도 그것의 일종이다)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시에서 상상력이란 기존자연에 대립하는 또 하나의 자연 창조가 가능한 것이며, 상상력의 작용에 의해서 미지의 언어와 기지의 언어 사이에 유추가 형성되며 그것으로 인하여 토운(tone)은 풍요로워지고 미지의 언어가 기지의 언어보다 훨씬 더 풍성해 지게 마련이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 뿜으며  새로 두 시의 완행열차가 들을 달린다.  - 金光均 「秋日抒情」에서 -    이 시에 나타난 유추관계에서 먼저 ꡐ길ꡑ과 ꡐ넥타이ꡑ를 놓고 생각하기로 하자. ꡐ길ꡑ 은 미지의 언어이며 ꡐ넥타이ꡑ는 기지의 언어이다. 이것을 리처드(Richards. I.A)의 용어로 말한다면 관념과 매체로 설명된다.  ꡐ길ꡑ과 ꡐ넥타이ꡑ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인데도 시인 김광균은 딴 사람이 미쳐 생각지 못했던 공통점을 발견하여 비유를 창조해 낸 것이다. 꼬불꼬불한 산길과 구겨진 넥타이와는 동질적인 일면이 있다. 이것으로 하여 ꡐ길ꡑ이 과연 어떻게 생긴 길인가를 쉽게 알 수 있다.  또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에 나오는 ꡒ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이여ꡓ 이 구절에서 ꡐ국화ꡑ와 ꡐ누님ꡑ 사이를 유추의 관계로 연결시켜 놓고 있다.  유사에는 관념(tenor)과 媒體 그리고 비유 등의 작용이 서로 뒤섞여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추사는 A는 B이다. A는 B와 같다. 또는 A와 X의 관계는 B와 Y의 관계와 같다. 이와 같은 식으로 명료하게 또는 함축적으로 기술된다. 이런 관계를 예의 파악한 김춘수도 그의 시론에서 유추를 직유와 은유의 방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상사관계를 성립시킴에 있어서는 외형적인 상태나 특질도 있겠으나, 시에 있어서의 경우라면 보다 내재적이며 정서적이며 가치적인 유사성의 추구가 있어야 할 것이므로 유사도 역시 내재적 정서적 가치적인 것에의 성취에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기반     4. 詩의 修辭    (1) 直 喩    직유는 라틴어 Similis에서 온 말로서 ꡐ명유ꡑ라고 말하기도 한다. 두 가지 사물 또는 의미를 보조형용사인 (~와 같이, ~처럼, ~듯이, ~같은, ~만큼, ~인냥, ~마냥) 등의 연결어로 종합하여 표현하는 수사법의 하나이다. 연결어가 없는 은유보다는 분명하고 직접적이어서 그만큼 비유의 밀도는 약하나 어떤 상태를 보다 구체적으로 알릴 때에 쓰인다. 즉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 A에 다른 대상 B를 끌어다 직접 연결 시켜 빗대는 방법이다. 이 때 A는 원관념이며 B는 보조관념이다.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朴木月 「나그네」에서 -    흰 누더기 만국기처럼 펄럭이는 곳  - 김용호 「청계천변」에서 -    새악시 볼에 떠오르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 김영랑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에서 -    직유의 방법을 구분하자면, 단지 사상을 선명하게 기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기술적 직유와 事象이 주는 인상을 강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강의적 직유로 대변된다. 기술적 직유는 단일직유와 확충직유로 세분된다. 단일직유는 ꡒ그는 여우 같다ꡓ, ꡒ장대같은 비ꡓ와 같이 단어와 단어가 보조형용을 매개로 하여 비교됨으로써 어떤 상태를 보다 구체적으로 알리고 있는 그러한 경우를 두고 일컬을 것이다.  여기서 예시를 들어 살펴보기로 하자.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하다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달이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나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 나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들 마을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들이라도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혼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 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셈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네 영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스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띄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명이 잡혔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전문 -    이 시에서 ꡒ가르마 같은 논길ꡓ, ꡒ아가씨 같이 ……웃네ꡓ, ꡒ삼단 같은 머리털ꡓ, ꡒ젖가슴과 같은 흙ꡓ 등 모두 ꡐ같은ꡑ과 ꡐ같이ꡑ의 연결어를 매개로 하여 단일직유로 간결한 비유를 보였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 徐廷柱 「국화 옆에서」에서 -    이 시에서 ꡐ내 누님ꡑ 그 이전의 부분이 길게 확장된 보조관념이다. 그러므로 단일직유처럼 단어와 단어가 보조형용을 매개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단어와 문 또는 문장과 문장이 서로 비유됨으로써 어떤 事象을 보다 구체화하는 것이다.    비가 옵니다  밤은 고요히 깃을 벌리고  비는 뜰 위에 속삭입니다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같이    이즈러진 달이 실낱 같고  별에서도 봄이 흐를 듯이  따뜻한 바람이 불더니  오늘은 이 어둔 밤을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다정한 손님같이 비가 옵니다  창을 열고 맞으려 하여도  보이지 않게 속삭이며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뜰 위에 창밖에 지붕에  남 모를 기쁜 소식을  나의 가슴에 전하는 비가 옵니다.  - 朱耀翰 「빗소리」전문 -    이 시에서 첫 연의 끝 행은 본디 도치법으로 구성이 되었거니와 ꡒ몰래 지껄이는 병아리ꡓ는 ꡐ같이ꡑ를 매개로 하여 문장과 문장이 연결되었다. 그리하여 ꡒ몰래 지껄이는 병아리 같이ꡓ, ꡒ비는 뜰 위에 속삭입니다ꡓ와 같은 정감의 표현을 구체적으로 하고 있다.  삼 연 이 행의 ꡒ다정한 손님같이 비가 옵니다ꡓ는 ꡐ손님ꡑ 이라는 단어가 ꡐ같이ꡑ를 매개로 하여 ꡒ비가 옵니다ꡓ 라는 문장과 연결을 시키고 있다.  강의적 직유는 두 가지의 사상을 기술적으로 비유하는 것이 아니라 뜻을 강조하기 위해서 쓰이는 것이다. 그 예를 들면 ꡒ유태인처럼 인색한ꡓ, ꡒ순이처럼 예쁜ꡓ 등과 같은 것으로 속담직유라고도 한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 卞榮魯 「論介」전문 -    이 시는 ꡐ보다도ꡑ라는 매개로 ꡐ분노ꡑ를 ꡐ종교ꡑ보다 강조하고 ꡐ정열ꡑ을 ꡐ사랑ꡑ보다 강조했으며, 또한 ꡐ바다ꡑ를 ꡐ강낭콩 꽃ꡑ보다 푸르게, ꡐ마음ꡑ을 ꡐ양귀비꽃ꡑ보다 붉게 강조하여 시인이 표상 하고자 하는 논개의 애국적 정열을 고양하고 있다.    (2) 隱 喩    은유(Metaphor)는 transferring의 뜻으로 그리스어 metapherein에서 온 말이다. 직유가 (A=B) 의 관계라면 은유는 (A는 B다) 라는 관계를 갖는다. 따라서 (A는 B와 같다) 라는 직유의 형식이 아니라A를 B로 대치시키는 것으로 본의와 유의를 결합시키는 비유법의 하나이다. 말뜻 그대로 은유는 ꡐ숨겨진 비유ꡑ로 원관념은 뒤에 숨고 보조관념이 표면에 나타나게 되므로 명유에 대립되는 암유라고도 한다.  은유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최초로 전이의 개념으로 파악한 이래 많은 개념의 굴절을 나타내면서 가장 중요한 문학적 요소로 수용되는 용어이다. 허버트 리이드(Read Herbert)에 의하면 직유와 은유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직유와 은유의 차이는 단지 문체상의 정련도에 있다. 비교가 직접 두 개의 사물로 이루어지는 직유는 문학표현의 초기 단계에 속하는 것인데, 사물의 일치를 나타내기 위한 교묘한 조탁이며, 이따금 그 자체를 위해서 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은유는 등가물을 민활하게 조명해내는 것이다. 두 개의 심상, 하나의 관념과 하나의 심상은 대등하게 서기도 하고 반대로 서기도 하는데, 서로 부딪치는가 하면 재미있게 조화하여 돌연한 조명으로 독자를 놀라게 하는 것이다.    리이드는 은유를 ꡐ조명적인 것ꡑ과 ꡐ장식적인 것ꡑ으로 나누고 있다. 시에서는 이 두 가지가 필요하다. 은유는 도입되는 보조관념이 ①주어가 되는 경우 ②목적어가 되는 경우 ③술어가 되는 경우 ④관형어가 되는 경우로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횐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내 마음은 촛불이요  그대 저 문을 닫아 주오.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최후의 한 방울도 남김 없이 타오리다.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어 주오  나는 달 아래 귀를 기울이며, 호젓이  나의 밤을 새어 오리다    내 마음은 낙엽이요  잠깐 그대의 품에 머무르게 하오  이제 바람이 일면 나는 또 나그네 같이, 외로이  그대를 떠나리오다  - 金東鳴 「내 마음」전문 -    이 시에서 ꡒ내 마음은 호수요ꡓ, ꡒ내 마음은 촛불이요ꡓ, ꡒ내 마음은 나그네요ꡓ, ꡒ내 마음은 낙엽이요ꡓ 등은 모두 은유가 주관념인 ꡐ마음ꡑ 이 본의가 되고 ꡐ호수ꡑ, ꡐ촛불ꡐ, ꡐ나그네ꡑ, ꡐ낙엽ꡑ 등이 보조관념으로 유의가 된다.  이 경우에 있어서 ꡐ마음ꡑ과 ꡐ호수ꡑ는 유이성의 범위가 넓어 래디칼(rhetorical)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적 능력을 발동하여 은유를 깊이 분석할 필요가 없이 정서로서 그대로 받아들여진다.  휠라이트(Wheelwright Phillip)에 따르면 ꡒ치환은유(epiphor)와 병치은유(diaphor)가 있다.ꡓ 앞의 김동환의 시는 치환은유의 예가 된다. 치환은유란 취의와 매재 상호간에 어떤 유사성을 토대로 하여 그 의미를 전환시키는 것이다.  또 한 편의 예시를 들어보자.    사랑하는 나의 하느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의 마음 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 김춘수 「나의 하느님」에서 -    이 시에서 ꡐ하느님ꡑ이나 ꡐ비애ꡑ라는 일상적 의미가 다른 의미, 즉 이 시의 문맥에 따라 포착될 수 있는 시적 의미로 치환된다. ꡒ하느님은 비애ꡓ, ꡒ하느님은 살점ꡓ, ꡒ하느님은 놋쇠항아리ꡓ 등에서는 혼합은유를 생각할 수 있다. 단일은유는 형식을 매재와 취의의 관계에서 볼 때 1 :1의 공식이 나타나지만 혼합은유의 관계는 多 :1의 공식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보인 김춘수의 「나의 하느님」은 혼합은유의 형식에다 치환은유의 방법을 쓰고 있다.  한편 병치은유는 문자 그대로 병치의 방법을 취하는 것인데 휠라이트에 의하면 이것은 의미론적 전이가 신선한 방법으로 어떤 체험 ꡐ실질적이거나 상상적인ꡑ의 특수성을 통과함으로써 오직 병치에 의해서만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한 모퉁이는 달빛 드는 낡은 구조의  대리석, 그 마당 (사원) 한구석  잎사귀 한 잎 두 잎 내려앉았다.  - 김종삼 「주름간 대리석」에서 -    이 시는 병치은유의 좋은 예가 된다. ꡒ달빛 드는 낡은 구조의 대리석ꡓ과 ꡒ잎사귀가 한 잎 두 잎 내려앉는 마당 한구석ꡓ의 관계가 병치되어 있다. 얼핏 보기에는 은유라기보다는 이미지로 보아 넘길 수 있다. 그러나 매우 이질적인 두 요소 즉 ꡐ대리석ꡑ과 ꡐ잎사귀ꡑ의 병치로 말미암아 기존의 의미를 새로운 의미로 전환시키기 때문이다.  시에는 치환은유와 병치은유의 결합 양상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치환은유의 역할은 의미를 암시함에 있고, 병치은유의 역할은 존재를 창조함에 있는 것이다. 은유는 ꡒ등가의 신속한 조명ꡓ이라고 하버트 리이드는 말했지만 20세기의 시 예술이 대체로 일시적인 은유의 원리, 자기 동일성 증명에 집착하고 있다. 특히 일반적인 은유의 형식보다 예기치 않은, 혹은 난폭한 은유의 형식으로 현대시는 삶의 동일성을 증명하고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도 시의 본질적 구조는 은유가 그 근간을 이루고 있으며 참된 은유는 치환은유와 병치은유를 동시에 요구하는 비유의 방법이기도 하다.    (3) 擬 喩    의유란 의인․의성․의태를 통괄하는 개념이다.  의인법은 인간 이외의 사물이나 추상개념에 인격적 요소를 부여하여 표현하는 수법이다. 그리스말의 prosopopocia가 어원인 것으로 (Person+Fication)의 곁합어로서 (to make persons) 즉 ꡐ사람을 만들다ꡑ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비인격적인 용어를 인격적인 용어로 전용하는 것을 말한다.  비록 폭 넓고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의인화는 단순히 은유의 한 변형이다. 보통의 은유가 대상과 대상 사이의 융합인데 비해서 이 의인화는 대상과 인간의 융합이다. 이러한 종류의 융합은 특별히 원시적인 상상력이 특성이었다. 의인법은 대상을 주체화하여 인간의 차원으로 대치하지만 때로는 인간의 주관이 대상의 존재론적 관여를 기도하기 위하여 미학에서 말하는 감정이입의 방법을 쓰기도 한다.    은빛 잠옷을 길게 끌어  온 마을을 희게 덮으려  나의 신부가 이 아침에 왔습니다.  - 노천명 「첫눈」에서 -    외등들이 입초하는  싸늘한 바람 속을  내게 허락된 하나의 귀로  - 정한모 「Limit time」에서 -    이 두 시에서 노천명의 시는 정적인 데 비하여 정한모의 시는 지적인 데가 있어 시대성 같은 것이 결부되어 보인다.    늙은 산의 고요히 명상하는 얼굴이 멀어가지 않고  머언 숲에서는 밤이 끌고 오는 그 검은 치맛자락이  발길에 스치는 발자국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 신석성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니다」에서 -    산은 사람과 친하고 싶어서  기슭을 끌고 마을에 들어오다가도  사람 사는 꼴이 어수선하면  달팽이처럼 대가리를 들고 슬슬 기어서  도로 험한 봉우리를 올라간다.  - 김광섭 「산」에서 -    이 두 시가 모두 ꡐ산ꡑ을 의인화하여 인격과 생명을 부여하고 산의 내면에 시인의 지혜와 통찰을 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시인의 정신적 저류에 깔린 종교적 자연관까지도 엿볼 수 있다.  김동명의 「파초」는 의인법의 표본적인 시이다. 은유법만큼이나 현대시에서도 많이 쓰이고 있는 의인법은 ①불완전의인화 ②완전의인화 ③추상개념의 의인법 둥이 있다.  불완전의인법은 의인화 작용이 철저하지 못한 것으로 그 인격성은 단지 연상에 의해 시사될 정도로 이미지가 전체로서 선명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가령 ꡒ책상다리ꡓ, ꡒ산허리ꡓ, ꡒ뺨부비며 열려있는 꽃봉오리ꡓ 서정주의 「밀어」둥은 의인화되어 있으나 그 이미지는 여전히 책상, 산 꽃봉오리이며 단지 물리적인 인간 속성이 부여되어 있을 뿐이다.  완전의인법은 대상의 인격이 전체적으로 선명하게 나타나 있으며, 특히 신화적 배경을 갖고 표현된 (해․달․별․바람) 등의 의인화가 그것이다. 예를 들면 ꡒ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고 살아라 한다ꡓ 박목월의「산이 날 에워싸고」같은 시이다.  추상개념의 의인법은 (진리․사랑․희망․이상) 등이 의인화된 것으로 예를 들면 ꡒ희망의 손짓ꡓ, ꡒ민주주의 미소ꡓ, ꡒ역사의 눈ꡓ, ꡒ회상의 계곡ꡓ 등이다.  의성법은 사물의 소리, 움직임, 모양, 의미 등을 음성으로 묘사하는 수사법의 하나다. 언어학에서는 의성, 수사학에서는 성유로 구별해서 쓰이기도 한다.  성음을 묘사하는 것은 음성상징으로서 그 만큼 어떤 사물의 표현에 실감을 주려는 의도에서 쓰인다.    삐이 호이, 비이 호이, 홀로 우는 새의 소리…, 머언 산에서 뻐구욱, 뻐구욱, 울며오는 뻐국소리…, 또, 물소리…, 돌을 씻고 돌틈으로 돌돌돌 쪼로로록 흘러오는 물소리….  - 박두진 「햇볕살 따실때에」에서 -    이처럼 자연의 교감에 민감한 박두진의 표현에서 의성법이 많이 나타난다.    물에 젖은 꿈이  북청 물장수를 부르면  그는 삐꺽삐꺽 소리를 치며  오 자취도 없이 다시 사라진다.  - 김동환 「북청 물장수」에서 -    충암절벽상에 폭포수는 콸콸 수정렴(水晶簾) 드리운 듯 이골 물이 주루루룩 저골 물이 솰솰…저 건너 병풍석으로 으르렁 콸콸 흐르는 물결이 은옥같이 흩어지니…  - 「유산가」에서 -  툭 툭 털고 손 놓고 돌아서는 자리  - 조병화 「시간」에서 -    부 - 엉 부 - 엉  양식 없다 부 - 엉  걱정 마라 부 - 엉  낼 모래가 장이다  부 - 엉 부 - 엉  걱정 마라 부 - 엉  - 구전민요 「부 - 엉」에서 -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고대가요와 민요 같은 데서 의성법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으며 현대시에서도 많이 쓰이고 있는 수사법이다.  다음에는 의태법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의태법은 사람의 말이나 동작, 사물의 상태 등을 그대로 모방해서 표현하는 수사법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의태어로 된 의태법은 음성상징의 하나이기도 하다. 음성상징은 그 언어의 음성과 사물의 소리 또는 실물의 모양과의 종합관계의 정도에 따라서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즉 단순한 의성어, 단순한 의태어, 묘사의 대상이 되는 동작을 흉내내기 위하여 입술, 혀, 이 등을 움직이는데 덧붙이는 암시적 음이 있는 경우, 음은 비슷하지 않으나 암시적인 것이 그것이다.    ① 찍찍찍, 쭈우쭈우, 찌이찌이, 삐이 호이, 비이 호이, 삐이삐이배, 뱃종 뱃종(이상 새의 울음소리), 철석철석, 돌돌돌, 쪼로록 (물소리)  ② 소곤소곤, 쑤근쑤근, 쑥덕쑥덕, 휘청휘청, 활활, (불꽃이 활활 타오른다),너울너울, (불꽃이 너울너울 거린다), 덥석덥석, 벌떡  ③ 오싹, 반짝반짝, 빤짝빤짝, 우뚝, 원산은 첩첩, 태산은 주춤하야 기암은, 층층, 장송은 낙낙    이러한 구분은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므로 매우 힘들다. ①은 사물의 소리를 직접적으로 흉내내고 있으므로 알기 쉽다. 그러나, ②와 ③은 구분하기 힘이 든다. ②는 언어의 음성과 사물의 소리나 동작과 직접적인 관련이 적고, 발음할 때 우리의 입술과 혀와 이를 움직여서 나는 소리를 암시적으로 나타내고 있으며, ③은 사물의 소리나 상태와 같지 않고, 단지 그것을 암시하는 음으로 사물의 상태나 소리와 관련되어 있다.    해는 오르네.  둥실 둥실 둥실 둥실‥‥  어어 내 젊은 가슴에도 붉은 해 떠 오르네.  둥실 둥실 둥실 둥실‥‥    바다는 춤추네.  추울렁 출렁 추울렁 출렁  어어 내 젊은 가슴에도 바다는 춤추네  추울렁 출렁 추렁 출렁  - 金海剛 「출범의 노래」에서 -    이처럼 음성상징이 사물의 형태를 역동성 있게 표현함으로써 실감을 줌은 물론, 생명이 있는 언어가 독자에게 주는 인상은 평면적이나 단순하지가 않고 보다 입체적임을 볼 수 있다.    (4) 알레고리    알레고리(Allegory)는 諷諭 혹은 寓喩라고 풀이된다. 어원은 Speaking otherwise의 뜻으로 그리스어 allegoria 즉 allos (other)+(agora[speaking])에서 온 말이다. 원관념을 배후로 두고 보조관념으로 본래의 의미를 암시하는 알레고리는 은유적 과정의 전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더러는 확장된 은유로 규정되기까지 한다. 나타내고자 하는 어떤 원관념 A를 다른 구체적인 보조관념인 B를 사용하여 그 유사성을 적절하게 암시하면서 원관념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 방법은 풍자․독설․냉소․야유 등의 비판적 표현에 적합하므로 예로부터 격언이나 속담 등에 잘 쓰인 비유이었다. 우화시나 풍자시 그리고 사회시 등은 이런 방법의 결과라고 하겠다. 굳이 우화와 구별을 해서 본다면 반드시 교훈성이 없어도 무방하고 동식물 외의 인물도 등장시킬 수 있다. 알레고리는 비유의 입체사진인 것이라고 할만큼 비유의 방법상 포괄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므로 아이러니(irony), 파라독스(paradox), 유우머(humour) 등이 부대조건처럼 따라다니며 이로써 표현 효과를 높인다. 알레고리의 대표적인 것은 「이솝의 우화」이다. 우화는 동물이나 식물의 생활 풍습으로 구성되는데 「이솝의 우화」에는 동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나 「구약성서」의 「사사기」에는 식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다.  알레고리로 씌어진 시조도 많이 있다.    가마귀 검다고 백로야 웃지 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소냐  아마도 겉 희고 속 검은 건 너 뿐인가 하노라    - 길 재 -    가마귀 싸우는 골에 백호야 가지 마라  성낸 가마귀 흰빛을 새오나니    청강에 잇것 씻은 몸을 더럽힐가 하노라    - 정몽주 모친 -    감장새 작다 하고 대붕아 웃지 마라  구만리 장천을 너도 날고 저도 난다.  두어라 일반비조이니 네오 지오 다르랴    - 李 澤 -    모두 동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교훈시요 풍자시이다. 그러나 알레고리라 해서 반드시 동물이나 식물이 등장해야 할 필요는 없다. 「신약성서」의 「마태복음」 에 나오는 ꡐ씨 뿌리는 자ꡑ 는 즉 ꡐ목자ꡑ요, ꡐ씨ꡑ는 ꡐ천국의 복음ꡑ으로 비유되고 있다. -이기반         5. 客觀的 相關物      객관적 상관물은 시작의 방법으로서 표현하고자 하는 어떤 정서나 사상을 그대로 표현할 수 없으므로 그것을 표현해 주는 어떤 사물, 정황, 혹은 일련의 사건을 발견하여 표현해야 한다. 이러한 사물, 정황, 사건을 객관적 상관물이라고 한다.  엘이어트(Eliot. T.S)가 말한 바    정서를 예술의 형식으로 표현하는 유일한 방도는 ꡐ객관적 상관물ꡑ 을 발견하는 것, 말을 바꾸면 그 특정한 정서의 형식을 심는 한 묶음의 사물, 하나의 정황 일련의 사건을 발견하는 것으로 그 형식이란 감각적 경험으로 끝나야 하는 외적 사실이 주어지면 정서가 즉시 환기되는 그러한 것이다.    그러면 가보세, 자네와 나와  수술대 위에 에테르로 마취된 환자처럼  저녁이 하늘에 퍼질 무렵,  밤 내 잠 못 이루는 헐찍한 일박여관과  굴 껍질을 내놓은 톱밥 깔린 식당에서  중얼거림이 새어나는 골목,  거의 인기척도 없는 거리를 빠져서 가보세  음흉한 의도에서 우러나오는  진저리나는 시비처럼 나닫는 거리는  압도적인 문제로 자넬 인도할 걸세․  오 ꡐ무엇이냐?ꡑ 고 묻걸랑 말게.  우리 가서 방문이나 하세.    방안에는 오가는 아낙네들이  미켈란젤로를 이야기하고    창 유리에 둥을 문지르는 노오란 안개  창 유리에 주둥이를 문지르는 노오란 연기    이 시는 (J. 앨프릿 프루프록의 연가) (The love Song of J. Alfred Prufrock)의 첫 부분이다. 주인공의 모노로그로 되어 있는 이 시는 수술대 위에 에테르로 마취가 된 환자 같은 저녁, 미켈란젤로를 이야기하는 하잘 것 없는 응접실 아낙네들과, 노오란 안개와는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면서도 모두가 다 프루프록이라는 인물의 세계와 분위기를 잘 나타내고 있다.  또 위의 시 가운데서 한 부분을 찾아보면    나는 이미 그것들을 다 알았네, 그것들을 다 알았네  그 저녁들, 아침들, 오후들을 다 알았네,  나는 커피 스푼으로 나의 생을 되질해 나누었네.    이 시의 삼 행인 ꡒ나는 커피 스푼으로 나의 생을 되질해 나누었다ꡓ는 자기 생을 구체화해 주고 있는 객관적인 상관물 ꡐ커피 스푼ꡑ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상징적 수법이라고 하겠다.      6. 自動記述法      자동기술법(Automatisme)은 초현실주의자 앙드레브르통(Breton andre)이 창시한 방법이다. 그 후 초현실주의자들은 세계와 인간을 새로이 들여다보려는 진지한 태도를 보였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독특하고도 새로운 인식론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이론은 현실은 도덕, 철학, 법률, 미학 등의 낡은 관념에 의해 왜곡되어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조작된 현실을 탈피하여 진정한 삶의 공간을 찾아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사용되지 않던 꿈의 세계를 기술하게 되고 자동연상(the automatic association)을 문학에 끌어들인 것이다.  의식이나 의도에서 쓰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세계를 무의식의 상태로 대할 때 거기서 솟구치는 이미지의 분류를 그대로 기록하는 방법인 것이다. 이것을 자동기술법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아니하고 이성을 발동하여 합리성이나 논리성이 개재되면 자동연상작용에 의하여 자동적으로 전개되는 무의식의 흐름이 중단되거나, 그 이미지가 파괴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브르통이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Freud)를 응용하여 정신병 환자에게서 들으려고 한 것을 자기 자신에게서 들으려고 시도한 데서 발명케 되었다는 자동기술법은 많은 동조자를 얻어 세계적인 영향을 끼쳤다.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에서도 이상을 비롯한 신백수, 이시우 둥 1930년 대의 시인들에 의해서 실천되었다.    싸움하는사람은즉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고또싸움하는사람은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었기도하니까싸움하는구경하고싶거든싸움하지아니하던가사람이싸움하는것을구경하든지싸움하지아니하지아니하는사람의싸움하는구경을하든지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나싸움하지하니하는사람이싸움하지아니하는것을구경하든지하였으면그만이다.    - 李箱 「詩第三號」전문 -    이 시를 읽으면 브르통이 말한 ꡒ이성의 모든 속박을 배제하고 미학적 혹은 도덕적인 일체의 고려도 계산되지 않은 채 행해지는 사고의 받아쓰기ꡓ 라는 표현을 수긍케 된다.  ꡒ싸움하는 사람 = 싸움하지 아니하던 사람ꡓ, ꡒ싸움하는 사람이 싸움하는 구경을 하고 싶거든 싸움하지 아니하던 사람이 싸움하는 것을 구경하든지ꡓ 등에서 보는 바처럼 논리에 어긋날 뿐 아니라 정상인의 사고로써는 이해조차 어렵다. 그러므로 잠식의식의 자동기술을 떠나서는 포착할 수 없는 독특한 인간정신의 내면을 조명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무의식의 세계만이 참된 삶의 공간이라고 말하는 초현실주의자들은 인간을 어떤 정신적 구속에서 풀어 자아의 인식에 도달 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가장 새로운 방법임을 자부할 것이다.    초현실주의자는 파괴적 요소가 강하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서도 이단시하는 경향이다. 이것은 우리 나라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하다.   
2    시의 구조와 행•연 댓글:  조회:11058  추천:0  2019-01-14
현대시의 시작법 - 시의 구조와 행•연      1.시의 행과 연    시의 구조는 행과 연을 나눠볼 수 있다. 행은 단어, 구, 절 또는 그것들의 연합으로 구성되고, 연은 하나의 행 또는 행의 연합으로 구성된다.  김춘수는 시의 행과 연이 이루워지는 이유를 세가지로 들고 있는데, 리듬의 단락, 의미의 단락, 이미지의 단락이 그것이다.    그 길에 아지랑이가 피듯 태양이 타듯  제비가 날 듯 길을 따라 물이 흐르듯 그렇게  그렇게    天然히    울타리 밖에도 花草를 심는 마을이 있다  오래오래 殘光이 부신 마을이 있다  밤이면 더 많이 별이 뜨는 마을이 있다  박용래,「울타리 밖」    이 시에 '天然히'가 한 연으로 놓여있는데 그만큼의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작품 속의 '天然히'는 앞과 뒤에 있는 각 연과 맞먹는 이미지의 중량을 작가가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2. 시의 형태와 행•연    시를 형태상으로 구분하면 정형시, 자유시, 산문시로 나누어진다. 이 중 정형시는 자유시나 산문시와 달리 형태가 우선하므로 그 형태로부터 작가가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가 시조에서 보았듯 정형시는 틀이 우선하므로 행과 연은 그 틀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런 만큼 틀이 우선하고 작가의 의도는 그 다음이다. 정형시의 행과 연은 그 틀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루만지듯  당신  숨결  이마에 다사하면    내 사랑은 아지랑이  春三月 아지랑이    장다리  노오란 터밭에    나비  나비  나비  나비  이영도, 「아지랑이」    이 작품은 정형시의 현대적인 모습으로 현대시조의 모습을 갖고 있다.  회화적인 형태로 시행의 리듬을 시조의 음수율에 기대기 보다,  음수율을 뒤로 숨기고 시각적으로 행을 배열하여 회화적 리듬을 살리고 있다.  이와는 달리 자유시는 틀에 우선하지 않는다. 행과 연은 작가의 의도에 맡겨져 있다.  자유시에서 우리가 리듬을 느끼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유사한 어구나 어절을 사용 때문인데,  리듬이란 반드시 정형의 틀에서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3. 리듬과 행•연    Ⅰ. 외국 시와 우리 시의 정형율    정형시의 리듬은 압운과 율격을 기본으로 한다. 압운은 영시나 한시에서 볼 수 있는 바처럼  시행의 시작, 끝, 중간에 유사한 소리는 음절을 반복시키는 것이다.  그 반복은 단순한 소리의 반복이 아니라 엄격한 체계를 가진 소리의 반복이란 점에 유의해야하는데  우리의 언어는 첨가어로 음절 의식이 약해서 소리의 반복이 음수 또는 음보 단위로 형성된다.  그러니까 우리의 정형시에서는 압운 형태의 구조를 주장하기 어려운 것이다.      2. 자유시의 리듬    자유시에서 리듬을 창조하는 데는 크게 세 가지의 방법이 있는데,  그 첫째가 전통적인 시의 율격을 적절하게 변형시켜 운용하는 방법이다.    별똥 떠러진 곳,    마음에 두었다    다음날 가보려,    벼르다 벼르다    인젠 다 자랐오  정지용,「별똥」    이 시를 2음보로 읽으면 우리의 전통 시가의 율격을 금방 느낄 수 있다.  2음보로 된 한 행을 각각 한 연으로 놓고 있어, 한 행 한 행에 여운이 감도는 효과를 느낄 수 있다  자유시에서 리듬을 살리는 둘째 방법은 전통적인 시가, 무가, 민요 등의 양식 또는 그 어투를 적절히 차용하는 것이다.  셋째는 동일한 형태소, 낱말, 이미지, 어절, 통사 및 그 형식의 반복이다.      3. 이미지와 행•연    Ⅰ. 이미지의 개념    문학적 용어로서 이미지는 대개 3가지의 의미로 사용된다.  첫째, 넓은 의미로 시나 그 밖의 문학 작품에서 축어적 묘사나 암시 또는 직유, 은유에 사용되는 보조관념들로  언급된 감각적 지각의 모든 대상과 특성들을 의미한다.  둘째, 좁은 의미로 시각적 대상이나 장면의 묘사만을 의미한다.  셋째, 비유의 보조관념들을 의미한다.      4. 이미지의 강조와 행•연    나무마다 하나씩 마음을 걸어두고  노을을 받으며 드러눕는 그림자  돌아갈 것이 없는 빈 몸이다.  뒷산은 뒷산은 내 몸이다.  신달자,「뒷산」    이 작품은 감각적 특성보다 그림자→빈 몸→내 몸이라는 의미를 따라가다보니,  감각적 특성은 시행 속에 숨고, 의미의 단락을 분명히 하는 보다 논리화된 시행을 이룬 것이다.    5. 이미지의 종류와 행•연    시에서의 이미지는 언어발달의 단계에 따라 정신적 이미지, 비유적 이미지, 상징적 이미지로 나누기도 하고,  관념에 봉사하느냐 아니하느냐에 따라 서술적 이미지와 비유적 이미지로 나누기도 한다.  정신적 이미지는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 등의 감각기관에 의해 이루지는 현상으로  두 개 이상의 다른 감각이 합해진 형태는 공감각이라 한다.  비유적 이미지는 비유의 보조관념, 상징적 이미지는 상징적 표현 그 자체가 이미지가 된다.  시의 행과 연은 이미지의 종류에 따라 달라지기보다,  첫째는 개별적 이미지 또는 이미지의 단락에 주어지는 작가의 강조에 따라 다르고,  둘째는 회화적 구성에 따라 달라진다.      6.회화적 구성과 행•연    회화적 리듬은 그 특성상 시각적 형태로 강조된다.  시각적 형태를 드러내는 대체로 세 가지 방법이 사용되고 있다.  사실적 구성과 기하학적 구성, 그리고 기성품을 모방한 구성이 그것이다.  사실적 구성은 한 편의 시가 한 폭의 풍경화가 되도록 언어를 구사하는 방법이다.  언술형태로 보자면 묘사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기하학적 구성은 시행을 적극적으로 시각화하는 형태이다.  사실적 구성이 언어의 표현 방법에서 찾아진다면 기하학적 구성은 시행 그 자체의 배열에서 찾아진다.  기성품을 모방한 구성의 한 예로는 오규원의 시 「프란츠 카프카」에서의 식단표 형식을 빌어온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7. 의미와 행•연    Ⅰ. 의미와 양태    시에서의 의미란 시 속에 묘사되어 있는 것 또는 진술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묘사라 하더라도 서경적, 서사적, 심상적인 작품 구조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 있기도 하고,  그것들은 또 축어적으로 표현되어 있기도 하고 비유적으로 표현되어 있기도 한 만큼  그 의미의 가시적 양태는 다양하다.  진술 역시 독백적, 권유적, 해석적으로 드러나 있기도 하며, 서로 섞여 있기도 하다.    2. 의미와 연의 기능    정형의 시행을 가진 형태가 아닌 모든 시에서는 연은 작가의 의도에 맡겨져 있다.    가느다란 갈비뼈가 가만히 만져지는 한 마리 참새의 여윈 가슴과 같다 햇볕이 오히려 춥다  마지막 술 한사발이 조금씩 조금씩 엎질러지고 있다  정진규,「봄이 올 무렵」    이 작품은 이미지 도는 의미의 단락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산문적으로 엮고 있다.  그 의도 속에는 단락별의 이미지라든지 의미보다 그것들이 어울려서 얻어지는  전체적인 정서의 질량을 중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의미와 전형적 형태의 행•연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는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기형도, 「빈 집」    이 작품에서 보듯, 각 연은 시행의 다수와 관계없이 의식의 이동 단위로 연이 나누어져 있다.  그러니까,  '사랑'을 잃었다는 지각(1연)→"잘 있거라"라고 인사하고 싶은 것들(2연)→"내 사랑"을 본 것(3연)→ 이런 의식의 편차와 단속(단절과 이어짐)이 연으로 구체화되어 있는 것이다.        4. 양행 걸침과 행•연    양행 걸침이란 일상적 구문의 형태가 시행에서 의도적으로 분절되어 두 행에 걸치는 것을 두고 일컫는다.  즉 일상적인 구문과 시행의 구문이 동일하지만 행의 배열이 달라지는 것이다.  
1    시의 표현 및 비유와 상징 댓글:  조회:3153  추천:0  2019-01-14
시의 표현  (1) 비유(比喩, metaphor) ① 비유란 말하고자 하는 사물이나 의미를 다른 사물에 빗대어서 표현하는 방법이다.   ② 비유에는 표현하고자 하는 것(원관념)과 비유하는 사물(보조 관념)의 상관 관계가 성립된다. 즉 원관념과 보조 관념 사이에 유추가 이루어질 수 있는 유사성이 있어야 한다.   ③ 대개의 경우 비유는 표현의 구체성, 직접성, 선명성을 높이는 수단이 되며, 일상어에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시에서 특히 많이 쓰인다.   ④ 비유의 종류   ㈀ 직유(直喩) : 원관념과 보조 관념을 '∼처럼', '∼같은', '∼인듯'과 같은 말로 직접 연결시키는 표현 기법→ 유사성 ㈁ 은유(隱喩) : 원관념과 보조 관념을 'A=B' 또는 'A=B 이다'로 연결하는 방법→동일성 ㈂ 대유(代喩) : 어떤 사물을 다른 사물로 나타내는 표현법 ㉠ 환유(換喩) : 사물의 속성 특징으로 그 사물을 대표함. ㉡ 제유(提喩) : 사물의 일부분으로 그 사물 전체를 대표함. ㈃ 풍유(諷喩) : 원관념을 숨기고 보조 관념만으로 뒤에 숨겨진 본래의 의미를 암시하는 방법. ㈄ 의인(擬人) : 인간이 아닌 사물이나 관념에 인격을 부여해서 인간적인 요소를 지니게 하는 표현법. (2) 상징(象徵, Symbol) ① 어느 대상이 다른 대상을 표시하거나, 본래의 고요한 의미 외에 다른 의미를 나타내는 표현 기법이다. ② 상징은 의미의 암시성과 다의성을 지닌다. ③ 비유에서는 원관념:보조 관념=1:1의 유추적 관계를 보이지만 상징에서는 1:다수의 다의적 관계이다. ④ 상징의 종류 ㈀ 관습적 상징(고정적 사회적 제도적 상징) 일정한 세월을 두고 사회적 관습에 의해 공인되고 널리 보편화된 상징                 십자가 → 기독교, 비둘기 → 평화 ㈁ 개인적 상징(창조적 문화적 상징) 관습적 상징을 시인의 독창적 의미로 변용시켜 문화적 효과를 얻는 상징              윤동주의『십자가』에서 십자가의 의미→윤동주 자신의 희생 정신을 나타냄. ※ 기타 상징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1. 자연적 상징 : 자연물이 인간에게 주는 보편적 의미의 상징              해→희망, 밤→절망 2. 우의적 상징 : 풍자적 우희적 통로로 상징하는 것              빼앗긴 들→일제 치하의 조국 3. 기호적 상징 : 약속에 의해 정해진 것             숫자, 문자, 부호, 신호 4. 원형적 상징 : 시대와 공간에 관계없이 신화 이후에 문화에 빈번하게 되풀이 되어 나타나는 상징             날개에서의 『방』→단군 신화에 나오는 『동굴』의 원형 상징. * 상징과 은유 은유는 두 대상간의 유사성을 통한 유추적 결합을 추구하는 데 반하여 상징은 상관성이 먼 상징어를 연결함으로써 의미가 확대, 심화되는 언어 사용의 방법이다.    비유와 상징의 차이   비유와 상징은 근본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다. 비유는 그 구조가 아무리 복잡한 것일지라도 궁극적으 로는 원관념에 해당하는 뜻의 파악이 가능하나, 상징은 원칙적으로 그것이 불가능하다. 이것은 비유가 원관념과 보조관념간에 1:1의 대응 관계를 지니지만 상징은 보조 관념이 여러 가지 원관념으로 쓰일 수 있는 다의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즉, 솜이불을 덮고 선 겨울 나무'라는 표현에서 솜이불의 원관념은 '눈[雪]'이 분명하므로 이것은 비유적 표현이다. 하지만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의 '님'은 연인이나 조국에 한정되지 않고 여러 의미로 해석 가능하다.  상징 은유 ① 암시적, 다의적이다 ② 한 편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③ 상징 의미가 상징 뒤에 숨어 있다. ① 비교, 유추적이다. ② 한 편의 작품에서 1회적으로 나타난다. ③ 원관념과 보조 관념의 관계가 명확하다. * 직유 직유와 은유의 차이는 비유의 효과적인 차이이다. 따라서, 시밀리가 축적된 것이 메타퍼이고, 그와 반대로 메타퍼가 부연된 것이 시밀리라고 말할 수 있다. 시밀리가 두 사물을 직접 비교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메타퍼는 두 사물중 하나를 다른 것과 순간적으로 동일시하거나, 한 사물을 통해서 말하거나 하는 것이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변영로 이 시는 전적으로 직유에 의하여 이루어진 시로서 분노와 종교, 정열과 사랑, 강낭콩 꽃과 푸른 물결, 양귀비 꽃과 붉은 마음 등이 모두 유사한 것으로 비교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유는 매우 쉽고 독자들이 바로 알아볼 수 있는 경우지만, 현대의 어려운 시에서는 원관념과 보조 관념의 관계가 불분명하고 비논리적 이어서 어리둥절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너무 작위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비유는 기발은 할지언정 결코 좋은 비유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면 갑시다. 그대와 나는 저녁이 하늘을 향해 퍼져가고 있으니 마치 수술대 위에 마취된 환자처럼.                    T.S.Eliot 여기에서는 저녁과 마취된 환자를 비교하고 있는 직유의 기법을 쓰고 있지만, 저녁(evening)과 환자(patient)가 어떻게 해서 유사성을 지니는지 독자들은 당황하게 된다. 그러나, 저녁의 어두움이 퍼져가고 있는 모습은 곧 마취되어 몽롱해지는 환자의 의식과 비슷함을 알게 될 때, 비로소 엘리어트가 쓴 비유의 참뜻을 이해하게 된다. 현대시의 이미지나 비유가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직유는 그 형태에 따라서 단일직유(simple simile)와 확충직유(enlarged simile or expanded simile)의 둘로 나누는데, 전자는 단어 사이의 비교이고 후자는 문장이나 구절 사이의 비교이다. 앞에 인용한 『논개』에서 씌여진 비유라든지 서정주의 『문둥이』에는 단일 직유가 나타나 있다.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서정주 특히 '꽃처럼 붉은 울음'은 공감각적 이미지가 나타난 직유로서 매우 독창적이다. 다음의 영랑시는 확충직유의 한 예이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살같이 풀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르는 부끄럼 같이 시의 가슴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김영랑 * 은유 은유의 구조적 특질은 다음과 같다.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한 번만의 어느 날의 아픈 피 흘림 먼 별에서 별에로의 길 섶 위에 떨궈진 다시는 못 돌이킬 엇갈림의 핏방울 커질듯 보드라운 황홀한 한 떨기의 아름다운 정적. 펼치며 일렁이는 사랑의 호심아.    박두진 이 시에서 시인이 표현하고자 한 원관념은 꽃이다. 그 꽃은 여러가지 다양한 사물에 바로 맺어져 있다. 그리하여 시적인 긴장을 고조시킴과 동시에 의미의 함축성도 높여주고 있다. 원관념인 꽃은 모호하고 불확실한 꽃의 개념이지만, 이것이 '속삭임', '울음', '피흘림', '핏방울', '정적', '호심' 등 상대적으로 구체적이고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여러 개의 보조관념과 동일성을 근거로 결합되어져 있다. 그러나, 꽃과 이상의 보조관념들은 내부 관계의 공통성의 불일치를 가져와 정적 은유를 형성한다. 未堂시의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처럼 외형상의 유사나 동일성보다는 정신적이고 정서적이며 가치적인 동일성이다. 이렇게 시에 있어서 은유는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의 동일성이 희박할수록 좋은 시가 된다. 현대시는 두 사물 사이의 유사성이 없이 이질적인 사물과 결합시키는 경향이 더욱 시의 성과를 얻는다. 현대시의 특징이 바로 은유의 독창적인 사용에 있음을 생각할 때 시에 있어서 은유의 비중은 크다. 어느 먼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가며 서글픈 옛 자취인 양 흰눈이 나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여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나리면 먼 곳의 여인의 옷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김광균 이 시에서 눈은 '그리운 소식' '여인의 옷벗는 소리' '추억의 조각' 등으로 정적인 은유가 된다. 은행나무 그늘엔 노오란 音符들이 떨어진다. 은행 잎파리들에다 내 귀여운 語彙들을 적어 본다 적어 놓은 어휘들은 제법 노오란 발음을 한다.         양명문 원관념 은행잎은 보조관념인 '노오란 音符'로, '제법 노오란 발음'은 공감각으로 표현되어 복합은유(mixed metaphor)로 구성되어 있다. 광화문은 한 채의 소슬한 종교.        서정주 바다는 대낮에 등불을 켜고 추억의 꽃물결 우에 소북이 지다.        김광균 보드레한 에머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김영랑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玉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내 마음은 燭불이요. 그대 저 門을 닫아 주오.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최후의 한 방울도 남김 없이 타오리다.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어 주오. 나는 달 아래에 귀를 기울이며, 호젓이 나의 밤을 새이오리다. 내 마음은 落葉이요. 잠깐 그대의 뜯에 머무르게 하오. 이제 바람이 일면 나는 또 나그네 같이, 외로이 그네를 떠나리다.          김동명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도 그림자 지는 곳.          김광섭 위에 든 시들은 단순한 은유가 나타나 있는 비교적 성공한 작품이다. 따라서 '내 마음은 호수요' '내마음은 燭불이요'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등의 은유에서 '내 마음'이라는 원관념과 '호수', '燭불', '나그네','낙엽', '물결'이라는 보조관념은 분명하게 나타나 있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 鳥籠도 없이 原罪의 噴水가 넘치는 입에서 한 마리 두 마리 띄워 보낸 다.  들은 울지도 않는다. 시간은 앞에 서서 달음박질하고 는 항상 시간의 뒤안에서 나고 있다가는 파다닥 파다닥 날개쭉지를 뒤채기고는 시간 위에 머리 박고 죽어가는 다.             신기선 이 시에는 '새'라는 보조관념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 있지만 원관념은 없어서 매우 당황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탄식』이라는 시제목이 곧 원관념인 것을 알게 되고, 구체적으로 그 『탄식』이 무늬 놓는 이미지를 깨닫게 된다. *  의인법(personification)-활유 사물이나 사람이 아닌 생물에서 사람과 같은 성질을 부여해서 표현하는 비유로서, 활유라고도 부른다. 예로부터 많이 쓰던 이 수사법은 메타포(metaphor)의 한 변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즉, '성난 파도', '시냇물이 소근댄다', '구름이 달린다'등 자연물을 인간화해서 그 성질과 동작을 표현하는 이러한 의인법은 얼마든지 우리 주변에서 씌어지고 있다. 우리의 조선소설 중에는『장끼전』,『별주부전』,『서동지전』과 같이 전체가 의인법으로 되어진 작품들이 있다. 시에 있어서도 이 의인법은 널리 씌어지고 있다. 조국을 언제 떠났노,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남국을 향한 불타는 향수. 너의 넛은 수녀보다도 더 외롭구나.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 나는 샘물을 길어 너의 발등에 붓는다. 이제 밤이 차다, 나는 또 너를 내 머리맡에 있게 하마.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너의 그 드리운 치맛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자.          김동오  동명의 파초는 김현승의『푸라타나스』, 이육사의『광야』와 더불어 의인법을 써서 성공한 대표적인 시다. 그밖에도 시 속에 부분적으로 의인법이 씌어진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이상의 시에서 門을암만잡아다녀도안열리는것은안에生活이모자라는까닭이다. 밤이사나운꾸지람으로나를졸른다. 나는우리집내門牌앞에서여간성가신게아니다. 나는밤속에들어서서제웅처럼자꾸만滅해간다. 食口야封한窓戶어데라도한구석터놓아다고내가수입되어들어가야하지않나. 지붕에서리가내리고뾰족한데는鍼처럼月光이묻었다. 우리집이앓나보다. 그리고누가힘에겨운도장을찍나보다. 壽命을헐어서典當잡히나보다. 나는그냥門고리에쇠사슬늘어지듯매여달렸다. 門을열려고안열리는門을열려고 이상 라고 한 것은 띄어쓰기를 전혀 안한 시로 '밤이 사나운 꾸지람으로 나를 졸른다'라든지 '우리 집이 앓나보다' 등은 곧 의인법으로 수식되어 있는 시구이다 다음의 시도 활유법을 적절히 구사하고 있다. 먹구름이 몰고온 여름에 수많은 이야기들이 들판으로 모여 든다. 할아버지 수염을 달고 익어가는 옥수수가 치마폭에 감싸여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알맹이 하나 하나에 이쁘디 이쁜 개구장이 꼬마들이 웃음소리가 가득차 있다. 신나는 것은 수많은 이야기들이 멋진 노래가 되어 입안 가득히 살아져 내리는 것이다. 여름이 오면 멋진 하모니카를 신나게 불고 싶어진다.        용혜원 '이야기들' '옥수수'를 의인화하여, 동심에 어린 생활의 서정이 옥수수에 이입되어 해학미를 더하고 있다.   * 인유(引喩, allusion) 인유라는 것은 고대의 신화, 전설이라든지 고전, 역사, 성서, 고사 등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 스토리, 시구 등을 인용하여 쓰는 비유를 말한다. 동서를 막론하고 이 인유는 널리 씌어진 표현법으로서 동양에서 고대 중국의 문헌이라든지 서양에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및 성경 등은 시와 산문을 통털어서 널리 사용되어 왔다. 껍데기는 가라. 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漢拏에서 白頭까지 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신동엽 위 시 중 첫 연의 '4월'은 4 19학생혁명을 비유한 것이고, 둘째 연의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은 민중의 자각이 봉기했던 동학혁명의 함성을 뜻하며, 세째 연의 '아사달 아사녀'는 신라 시대에 불국사의 무영탑을 조각하느라고 비연을 감수한 석수와 그 아내를 두고 말한 인유이고, '한라에서 백두'는 한반도 3천리강산을, '쇠붙이'는 모든 무기를 말한 대유이다. 신동엽은 특히『진달래 산천』을 노래하고, 평화를 추구한 레지스탕스 시인이었다.  * 성유(聲喩) 의성어(onomatopoeia)라든지 의태어는 곧 음성을 되풀이 하여 효과를 내는 표현법이다. 전자는 자연이나 인간의 소리 등을 흉내내어 표현한 것이고, 후자는 사물의 모습이나 태도 등을 흉내내어 적는 표현법이다. 산아, 우뚝 솟은 푸른 산아,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아, 숱한 나무들 무성히 무성히 우거진 산마루에 금빛 기름진 햇살은 내려오고, 둥둥 산을 넘골어 흰 구름 걷는 자리 씻기는 하늘, 사슴도 안오고, 바람도 안 불고, 너멋 골짜기서 울어오는 뻐꾸기. 박두진 박두진의『청산도』라든지 『해』에는 의성어와 의태어가 많이 씌어졌다. * 상징 비유(은유)와 비교해서 말하면 상징은 원관념을 떼어 버리고 보조관념만 남아 있는 형태이다. 사과 한 알이 떨어졌다. 지구는 부셔질 그런 정도로 아팠다. 이내 어떤 정신도 발아하지 않았다. '사과'는 도입해온 보조관념이다. 원관념도 쉽게 알 수 없다. 그러나 상상력을 통해서 사과의 의미는 '죽음'을 암시할 뿐이다. '떨어지다' '부서지다' '움트지 않음' '아픔'은 다 죽음에 가까운 의미를 지닌 동일성이다. 그래서 원관념의 '최후'인 죽음은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감춰져 있을 뿐이다. 상징의 본질적 성격으로서 동일성을 든다. 눈은 살아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김수영 눈이 살아있다는 생명을 느낀다. 눈과 기침의 내부관계는 공통성의 일치를 찾지 못한다. 다만 상상력으로 '눈'과 '기침'은 상징으로서, 이 감각적 이미지는 순결과 진실성이라는 관념과 밀착된 상징이다. 3연의 눈의 생명성은 이 순결의 생명성이며 기침을 하는 행위는 화자의 내면세계를 표현하고자 하는 진실성의 관념과 밀착되어 있다.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서정주 이 시에서 '문둥이'는 시인 자신의 정신적 고뇌 자학을 상징하며 그것은 이 시의 문맥 속에서만 의의를 지닌 개인적 상징이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져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 이 시의 리듬은 상징의 암시성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 소리의 신비감으로써 무엇인가를 우리의 영혼에 공명케 하려는 것이 상징주의 순수시가 노린 상징의 기능이라면, 이 시의 리듬이 이미지와 결합되어 시인이 전달하고자 한 관념을 노출시키지 않고 상징의 암시성을 효과적이게 한다. '풀'이 지닌 드러냄은 감춤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조화는 리듬이 빠른 템포로 흐르면서 주술성의 어떤 오묘한 맛을 내고 있는 데서 발생한다. 특히 풀이 바람보다 빨리 눕고 울고 일어난다는 반복되는 논리적 모순과 융합되어 이 시의 리듬은 주술성을 느낀다. 이 주술의 리듬속에 풀은 민중을 감추고 바람은 그 민중이 살고 있는 실존적 상황을 감추고 있는 상징의 의미를 느낄 수 있는것이다. 바람과 대비된 풀의 동작에서 민중의 끈질기고 활발한 삶의 양식만을 시인과 독자가 다같이 관심을 두었다면 이 시도 영락없이 드러남의 알레고리시가 되었거나 단순한 알레고리로서만 수용되었을 것이다. '풀'을 삶의 움직임의 과정을 보여주는 '상징동력'으로 느끼게 한 것은 주술적 리듬, 음악적 성격의 개입으로 드러남과 감춤의 조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만물은 흔들리면서 흔들리는 만큼 튼튼한 줄기를 얻고 잎은 흔들려서 스스로 살아있는 잎인 것을 증명한다 바람은 오늘도 분다 수만의 잎은 제각기 잎을 엮는 하루를 가누고 들판의 슬픔, 들판의 고독, 들판의 고통 그리고 들판의 말똥도 다른 곳에서 각각 자기와 만나고 있다 피하지 마라 빈들에 가서 비로소 깨닫는 그것 우리도 늘 흔들리고 있음을      오규원 '만물의 흔들림'은 상징이다. 역동적 이미지는 "잎은 흔들려서" "바람은 오늘도 분다" "우리도 늘 흔들리고 있음을" 등 여러 장면과 결합되어서 작품 전체를 지배한다. 곧 '흔들림'의 역동성은 작품 전체를 확산, 생의 여러 감각을 일깨운 상징이다.   상징과 기호   상징과 은유 은유는 두 대상간의 유사성을 통한 유추적 결합을 추구하는 데 반하여 상징은 상관성이 먼 상징어를 연결함으로써 의미가 확대, 심화되는 언어 사용의 방법이다. (3) 현대시의 표현 기교 ① 반어(反語, irony) : 작가가 의도와는 전혀 다른 표현을 하여 날카로운 멋과 예리한 감각을 발휘하는 기법이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반어적 구조를 통해 주제를 형상화하였다. ② 역설(逆說, paradox) : 본질적으로는 참이나 외견상으로는 모순, 충돌되는 진술 형태, 모순되는 사물이나 관념을 연결하여 경이감, 신선감을 주는 기법. 모순 어법, 모순 형용의 표현 등이 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얐습니다-모순어법,  찬란한 슬픔의 봄-모순 형용 ③ 자동 기술법 : 인간 내면의 깊은 생각, 관념을 아무런 제재없이 의식의 흐름에 따라 표출시키는 것이 인간의 진실에 가장 가까운 길이라 믿고 꿈을 꾸는 자가 그 순간 그대로 스스로의 내면 세계를 표출하듯이 무의식의 세계를 기술하는 기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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