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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하이퍼시(hyper poetry) 이해/ 崔進淵 댓글:  조회:977  추천:0  2019-01-17
하이퍼시(hyper poetry) 이해 崔進淵 1. 하이퍼시란 용어와 개념 지는 몇 년 전부터 하이퍼시라는 새로운 시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필자를 포함하여 참여시인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이다. ‘하이퍼라시’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심 상운은 디지털시와 하이퍼시에 관한 시론을 중심으로 시론집을 낸 바 있고, 필자는 그에 대한 서평을 주로 그의 하이퍼시론을 중심으로 써서 (2009.9)에 발표한 일이 있다. 하이퍼시(Hyper poetry)란 ‘하이퍼+시’를 뜻하는 조어(造語)이다. 인터넷상에서 전개되고 있는 하이퍼텍스트문학(Hypertext Literature)에서 ‘Hyper’를 차용해서 만든 말이다. Hyper는 ‘과도, 초과, 초월, 건너뜀, 최고도’를 의미하는 접두사로서 Hyper-bole(과장법),Hyper-optic(원시), Hyper-content(대만족), Hyper-sensitivity(과민증) Hyper-bo-rean(북극의, 북극인),등 그 용례는 볼 수 있다. 하이퍼시가 어떤 점에서 Hyper한 시인가? 그 대답을 단순하게 하자면, 표현형식에서 Hyper하다고 할 것이다. 하이퍼시를 쓰는 시인들이 추구하는 바는, 기본적으로 탈 관념적인 사물시와 같은 입장에서 시를 쓰되, 그 구성 양식에 있어서 초월, 건너뜀의 기법을 쓴다. 연과 연, 또는 한 연 속의 문장과 문장을 인과적 관계의 논리성 없이 구성하며, 상상력의 비약에 의해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초월한 언어 단위(unit)들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Hyper하다고 하겠다. 하이퍼시 상론은 뒤로 미루고, 우선 하이퍼시가 출현하게 된 배경부터 살펴보는 게 좋을 듯하다. 2. 관념시와 사물시 하이퍼시(hyper poetry)를 말하려면 먼저 관념시(觀念詩)와 사물시(事物詩)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종래에도 사물시를 쓰는 시인들이 없지 않았지만, 시단에서 의식적 집단적인 하나의 ’운동(Movement)’으로서 시 쓰기는 관념시에 대한 반동으로 근래에 와서 시작되었고, 하이퍼시는, 라는 진화과정을 거쳐 출현했기 때문이다. 주지하는 대로 랜섬(J. C. Ransom)은 시를 관념시(Platonic poetry), 사물시(Physical poetry), 형이상시(Metaphysical poetry)로 구분하였다. 관념(Idea)은 사물(Thing)의 대칭어로서, 철학적 의미를 떠나 시론상의 개념을 범박하게 말하면, 시에 담긴 감정이나 의미(사상, 주장, 의도 등)를 뜻한다. 관념시는 이런 관념들을 표현하고 있는 시이다.⒜ 워즈워드(W. Wordsworth)가, “모든 좋은 시는 강력한 감정의 자발적 발로다.”라고 한 말이나, 아널드(M. Arnold, 1822.12.24~1888.4.15)가 “시는 기본적으로 인생에 대한 비평이다.”라는 의 말은 시의 관념성을 강조하고 있다.동양시론의 근원인 상서(尙書)의 순전(舜典)에 나오는 ‘詩言志’란 말은, ‘마음(心)이 가는(之) 대로(志) 표현(言)하는 것이 시(詩)라는 말인데, 이는, 시가 마음-사상 감정을 표현한다는 관념성을 말하고 있다. 우리 시론에서 빠짐없이 언급되는 ‘思無邪’란 말도 그렇다. 공자가 자신이 편집한『詩經』의 시편들을『論語』「爲政篇」에서 총평한 ‘詩三百一言以蔽之曰思無邪’에서 따온 이 말도 시가 ‘사특한 마음이 아닌 바른 마음이 담겨 있다.’는 뜻이니,시의 관념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시에 대한 이런 전통적 인식이, 관념시가 전통적으로 우리 시의 주류를 이루게 한 배경이 되었다고 본다. 문학은 시대적 산물이라고 말한다. 한국시의 연원인 唱歌와 그에 이어진 新體詩가 발생 ․ 전개된 시기가 국권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1910 전후의 개화기여서, 우국충정의 감정과 의지 곧 관념이 그 詩歌 속에 강하게 표현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시작된 현대시의 효시인 주 요한의「불놀이」도 민족 수난기를 맞은 비애의 감정이 충일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이후의 작품들 역시 국권을 침탈당한 시대의 고통과 분노, 인고의 감정, 투지와 희망의의지 등의 관념이 그대로 또는 굴절되어 반영된 작품이 주류를 이루었다. “식민지 한국의 작가 ‧ 시인으로서 그 시대에 대해서 절망하고 괴로워하고 잃어버린 조국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우리 시는 그 관념시의 전통을 아무 반성 없이 그대로 답습하여 시에서 관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물론 관념을 떠난 이 장희, 정 지용 등 순수시, 이 상의 기호시나 조 향 등의 초현실주의 시, 김 춘수의 무의미 시, 형이상시(Metaphysical poetry)에 속할 시도 없지 않았으나, 이 육사, 한 용운, 윤 동주 등의 경우처럼 정신과 의지가 강하거나 아니면, 이 상화, 김 소월 등과 같이 감정 노출이 심한 관념시들을 지금까지도 이어받아 쓰고 있다. “관념시는 개화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100년이 넘게 주류로 군림해왔다.” 이런 한국시의 관념성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시의 모색은 문 덕수에 의해 주창되어왔다. 주지하는 대로 문 덕수는 모더니스트로서 처음부터 주지성이 강한 사물시 내지 형이상시로 간주될 수 있는 시를 주로 써왔는데, 그는 2천 년대 들어와서 탈 관념의 사물시를 비롯한 새로운 시 쓰기 운동에 열정을 쏟기 시작했다. 그 뜻을 확산하기 위해 그의 주도로 2004년에《한국시문학아카데미》를 개설, 배재학당 건물에서 을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다. 그 모임에서 발표된 논문을 모은 시론집『새로운 시론 탐구』의 제목부터가 관념을 떠난 새로운 시 쓰기를 모색하고 있음을 잘 말해준다. 사물시란 사물을 다시점(多視點)에서 현상학적 입장에서 있는 그대로 관찰한 것을 기초로 쓴 시이다. 다시점이란 동일한 사물이라도 보는 사람의 위치, 때, 광선의 밝기, 조명의 색깔, 양의 다소, 다른 사물과의 매치, 원근 등 여러 조건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띄게 되므로 그런 다양한 모습을 객관적이나 개성 있는 눈으로 포착해서 쓴다는 것이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사물시란 대상을 주체의 사상과 감정이란 관념을 개입시키지 않고 관찰한 현상들을 이미지로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시는 ‘탈 관념(무의미)’의 시이다. 문 덕수는 사물시를 설명하면서 “시에서 관념이나 어떤 사상보다 물리적 이미지를 중요시한다는 뜻이다.…관념도 반드시 물리적 이미지에 의해 운반되어져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은 관념을 형상화해서 사물시로 쓸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나⒞, 추상적 관념 예컨대 애국, 사랑, 증오, 분노 등을 대상으로 쓸 경우도 五感에 의해 감각되도록 표현해야 한다는 말과 다름없다. 이것을 T.S. 엘리엇은 “사상의 감각화”라고, E. 파운드는 "관념의 형상화“라고 말했다. 심 상운은, 관념덩어리인 언어로 표현하는 시에서 사전적 의미의 관념을 벗어날 수는 없으나, “시인(화자)의 주관적 생각(감정 의미 판단 등)이 들어간 것이면 관념이고. 인지적 사실 제시에 그치면 ‘탈 관념”이라는 말로 관념과 탈 관념의 기준을 세웠다. 대상에 대한 주체의 객관적이고 다각적인 관찰에 의한 현상의 인지적 묘사에 그친 시가 사물시라는 것이다. 이 시운동에 적극 나선 시인은 오 진현이다. 그는 탈 관념을 강조한 시론집『꽃의 문답법』을 내면서 직관에 의한 사물시를 써왔다. 그는 『이 상의 디지털리즘』출간 전후로 사물시와 다름이 없어 보이는 작품을 ‘디지털시’라는 이름으로 발표하였다. 그는, 직관적인 사물시 쓰기에 뛰어났으나, 시론은 정리되지 못한 면이 있었다. 그의 시론을 정리, 발전시킨 심 상운은 디지털시론에서 나아가 하이퍼텍스트문학의 요소를 살린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 ‘하이퍼시’에 관한 일연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그 시론에 따른 시를 써서 발표하기 시작했다. 3. 하이퍼시 출현의 필연성 우리는 앞에서 하이퍼시가 관념시에 대한 반동으로 나온 사물시와 디지털시를 거쳐 출현했음을 살펴보았다. 이런 하이퍼시의 출현은 21세기의 시대적 요청에 따른 것이라 본다. 하이퍼시 출현의 더욱 두드러진 필연성은, 현대의 철학적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현대는 탈구조주의 내지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배하고 있다. 절대자, 절대자아, 절대가치, 권위주의, 중심주의 등이 부정되고 복잡다단한 현대에 맞는 다양한 개성과 상대성이 지배하고 존중되는 시대이다. 따라서 예술 표현에 있어서도 기존 질서를 부정하고 절대유일의 재현(Representation)이나 동일성(Sameness)을 거부하며, 어느 것만을 절대시하지 않고, 현대사회를 수용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을 가지도록 요구받게 되었다. 시에서도 작자의 일방적인 정서나 사상이 지배하는 획일적인 전통적 관념시에서 떠나 다원화되고 전문화된 이 시대에 맞는 새롭고 다양한 시를 써보자는 것이다. 또 전자기술이 지배하는 디지털시대가 우리 시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이 하이퍼시 출현의 세 번째 필연성이라 하겠다. 현대는 IT를 비롯한 새로운 전자기술의 발달로 A. 토플러가 예언한 ‘제3의 물결’이 산업 및 생활전반에 혁명적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황의 법칙’이 지배하는 반도체 기술의 진화가 야기하는 IT 등의 신기술은 혁신적 발전을 거듭하면서 우리의 삶의 방식과 질에 혁명적 변화를 초래하고 있는데, 이 변화는 한마디로 말해서 종래의 아날로그문화에서 디지털문화로의 변혁을 의미한다. 전 세계의 모든 정보는 유‧무선인터넷과 PC, 스마트 폰 등으로 어느 곳에서나 거의 동시에 접속, 통신 또는 샘플링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이 지식 정보(데이터)는 주지하다시피 0과 1의 2진법 형태의 비연속적 단속적 신호체계 즉 디지털 방식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현대의 이 두 가지 시대적 특성은 예술 분야에도 혁명적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 변화는 이미 뿌리를 내리고 있다. 미술에 있어서 한국인 백 남준이 열어놓은 비디오아트는 미적 상상력에 의해 디지털 기기와 기술을 채용 구성하는 일종의 하이브리드 디지털아트로 발전하고 있음을 젊은 작가들의 작품전시회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시인 작가들도 이 디지털문화의 거센 물결에 적응하기 위해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서양 여러 나라에서는 하이퍼텍스트문학 이 시작된 지 오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는 아직도 본격적인 하이퍼텍스트문학을 탄생시키지 못하고 있는 형편인 줄 안다. 디지털시에 이어 거의 동시에 하이퍼시가 출현한 것은 위와 같은 배경과 필연성의 시대적 요청에 부응한 것이라 본다. 3. 하이퍼시의 특성 필자는, 오 진현이 탈 관념만을 강조하면서 언어의 본질적 가치인 관념을 도외시하는 발언을 하는 것에 한 마디 하는 것이 언어에 대한 균형감각을 갖는 데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탈 관념은 가능한가?’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시문학,2006.7). 심 상운은 사물시를 쓰는 입장에서 오 진현의 생각을 옹호하는 ‘탈 관념시에 대한 이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으며(시문학,2006.8). 그 이후 사물시 내지 디지털시론을 다수 발표하다가 하이퍼시에 관한 본격적인 논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하이퍼시의 특성은, 무엇보다 그 구성에 있어서, 문 덕수 시인이 오래 전부터 주창하고 그의 시에서 적용해온 시적 방법으로서 “집합적 결합” 이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예컨대 컴퓨터, 책, 확대경, 볼펜, 찻잔, Secret Card, … 이런 물품들은 서로 필연적 인과 관계가 없으나 지금 필자의 책상 위에 놓인 물품이란 점에서 하나의 집합으로서 결합되어 있다. 이와 같이 시에서 행과 행, 연과 연 상호간에 별 관계가 없는 이미지들로 한 편의 시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건너 뜀 초월’이 있게 된다. 나는 이것을 미술에서 말하는 구성(Composition)이라 생각한다. 가령 클레의 나 큐비즘을 연 피카소의 등 서양 그림 가운데 구성적인 작품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사실 이 기법을 등단 초기부터 지금까지 사용해왔다. 심 상운이 말하는 하이퍼시와 전혀 다를 것이 없음을 하이퍼시인들의 모임에서도 확인되었다.⒟ 아무튼 상관성이 별로 없어 보이는 이미지들의 불연속적 결합이 하이퍼시의 중요한 특성이다. 그러므로 심 상운은 이를 종래의 관념시처럼 단선구조가 아닌 다선 구조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종래와 같은 단선(單線)구조도, 다선(多線)구조도 아닌 뚜렷한 여러 가닥의 선을 찾을 수 없으므로 비선(非線) 또는 무선(無線)구조라고 함이 더 합리적이라고 본다. 하이퍼텍스트문학의 특징을 인쇄텍스트인 하이퍼시에 살린 점에서도 그렇다. 논리적 인과관계가 없는 이미지들은 연과 연, 행과 행은 순서를 바꿔놓아도 상관없다. 이미지 단위들이 각기 독립성을 갖기 때문이다. 이것은 디지털의 모듈(Module)이론이나 들뢰즈와 가타리의 리좀(Rhizome)이론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므로 의미론적 혹은 정서적 통일성을 찾을 수 없는 게 하이퍼시의 특징이다.⒠ 그러나 화자의 의식 혹은 무의식의 흐름이 시의 저변에 깔려 있으며, 이것이 하이퍼텍스트문학에서 링크 역할을 하는 유사한 소리나 단어, 구문의 반복 등과 함께 연상에 의해 시의 통일성을 유지해준다. 세 번째 특성은 상상력에 의한 시적 공간 확장이라 할 것이다. 우리가 애니메이션이나 동영상에서 볼 수 있듯이 컴퓨터에 의한 사이버공간에서 3차원의 입체적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란 또 다른 현실이 현실세계와 조금도 다름없이 존재하게 되었다. 하이퍼시는 클릭에 의해 즉시 열리는 ‘준비된 현실’이라는 이 가상현실의 세계로 문학적 공간을 상상에 의해 무한하게 확대하자는 것이다. 과거 시적 이미지는 현실세계를 따오는(Sampling) 데 그쳤으나, 하이퍼시에서는 그 이미지들이 의식 무의식의 세계를 넘나드는 자유의 자성(自性)을 갖게 되었다. 단순한 상상을 넘어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공상에 의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경계가 무너지고, 공간도 자기로부터 세계와 우주에까지 제한 없이 넘나드는 이미지창출을 보여준다.⒡ 그러나 바술라르가 그의 공간시학에서 말하는 이미지의 보편성이란 질서를 잃지 않는다. 독자 누구나가, 시인이 이 두 현실의 구별이 없이 만들어놓은 이미지들을 상상에 의해 교감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이퍼시의 또 다른 특징은 그 표현에 디지털 감각의 영상성과 동시성, 정밀성을 강조하는 점이다. 따라서 그 이미지들이 동영상과 유사한 동적 입체적 특성을 가진다. 하이퍼시를 구성하는 단위(Unit, 연과 행)의 이미지들은, 앞에서 말한 상상과 공상에 의한 이미지 창출과도 관계가 깊은 말이거니와, 마치 TV장면이 순간적으로 제한 없이 바뀌거나 또 채널을 돌릴 때 순간적으로 전혀 다른 화면이 나타나는 것과 흡사한 특성을 가진다. 하이퍼시에 사용되는 이미지들은 직관이나 관찰의 경험이 의식 무의식을 통한 사유에 의해 표현의 정확한 정밀성을 가지되 디지털의 이 순간적 단속적 사실(寫實)적 특성을 시에 원용하고 있다. 종래의 단선적인 시는 지속적 사유의 산물로 디지털의 순간적 단속의 직관적 사고와는 거리가 멀다. 하이퍼시에는 이런 생동하는 이미지의 현장성이란 리얼리티가 강하다. 아날로그적 종래의 시에도 없지 않으나, 하이퍼시는 서사(敍事)구조라는 특성도 가진다. 물론 시의 얼굴은 각 편마다 다르게 되기 때문에 천편일률로 서사적인 짜임으로 되지 않을 수 있으나 대체로 서사구조를 갖는 특성을 보여준다. 이런 여러 특성을 살려서 관념성을 탈피하고, 디지털문화가 보편화됨과 동시에 다양성과 개성이 존중되는 현대문화에 부응하는 새로운 시의 패러다임이 하이퍼시라 하겠다. 이제 이쯤에서 하이퍼시와 그 시 형식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있어온 여러 가지 양상의 시들을 괄호문자로 표시한 대로 살펴봄으로써 하이허시와 종래의 시가 어떻게 다른지를 작품을 통해 직접 이해하기를 바란다.   ⒜ 관념시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 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김 현승, 「가로수」6연 중 전반 3연 이 시는 가로수인 플라타너스가 푸른 잎으로 행인의 반려자가 되어준다는 일관된 관념을 볼 수 있다. 이 시에 상상력에 의한 창조적 이미지는 첫 연의 제3행에서 볼 수 있으나 전반적으로 볼 때 관념이 지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관념시는 관념의 평면적 설명의 서술에 그치는 예를 흔히 볼 수 있다. ⒝ 순수사물시 포탄으로 뚫은 듯 동그란 船窓으로/ 눈썹까지 차오른 水平이 엿보고,// 하늘이 한 폭 나려앉어/ 큰악한 암탉처럼 품고 있다.// 透明한 魚族이 行列하는 位置에/ 홋하게 차지한 나의 자리여!// -정 지용, 「海峽」7연 중 전반 3연 이 시는 감각적 즉물적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순수 사물시이다. 화자의 어떤 의견이나 주장의 관념이 전혀 없다. 이런 이미지 창조는 곧 언어창조로 고정관념을 벗어난 새로운 생명력을 언어에 불어넣는다. 자기만의 이런 언어창조가 없는 시는, 엄격하게 말해서, 창작물로서 시의 전당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관념이 깔려 있는 사물시 어느 날 정원에서 가위를 들고 나무를 다듬다가, 문득 눈이 맞아서 나무가 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어? 화단에 서있는 나무는 나무가 아니라 꽃!”하고 바로 눈에 보이자, 국어대사전의 견고함이 무너지고 있었다. 눈물이 주룩 쏟아지고 이날, 나무의 이름이 모두 없어져서 내 앞에 선다. -오 진현,「꽃!」전문 이 시는 사물시이지만 화자의 의도가 들어 있다고 본다. 사물을 물리적 언어로 쓴 작품이므로 사물시에 속하나, 이 시는 화자(시인)가 사물을 새로운 눈으로 볼 때 국어사전적 고정관념이 깨어지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감격이 그대로 나타나 있으며, 그 감격을 시화하겠다는 의도가 녹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시는 순수한 의미에서 사물시라고 보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 ⒟ 하이퍼시와 다름없는 종래의 시 보기 빛의 그물에 걸려 대롱거리는 녹색 공/ 오늘 아침 내 귀는/ 컴퓨터의 그래픽 속에/ 남쪽 하늘 반달처럼 떠 있더라.// 스치로폼 눈이 내리는 겨울 밤/ 비닐 순대를 먹은 창자가/ 밤새 꿈틀꿈틀/ 페르시아 만(灣) 쪽으로 기어간 자국.// 연필을 깎아 향나무 냄새가 나는 시를 쓰는/ 수녀님의 시간은/ 그녀 생가의 마루 밑에 잠든/ 청동(靑銅)화로// 모나리자의 신비한 미소를 찍어내는/ L. 다빈치의 키 펀칭/ 고난 주간 마지막 밤에 흘리던 피땀/ 우리 구주 로봇 씨의 이마에도/ 수은빛 진짬이 베어 나더라.// -최 진연, 「그래픽 ‧ 1」전부 이 시는 80년대에 쓴「그래픽」이란 제목의 연작 중 첫 작품이다. 이 시의 이미지들은 낡은 지폐처럼 때 묻은 이미지들이 아닌 독창성을 보여주며, 각 연의 그림언어들이 상관성이 거의 없이 구성되어 있다. 맨 끝 연에 관념성을 약간 노출하고 있으나 종래의 관념시와는 다른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으며, 이 시 전체가 앞서 설명한 요즘의 하이퍼시와 다를 게 없다는 평을 받은 작품이다. 그러므로 하이퍼시라고 종래의 시와 전혀 관계없는 게 아니다. 시인들에 따라서는 이미 하이퍼시적 특성들을 시작에 사용하고 있을 수 있으므로 이제 하이퍼시를 써보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 하이퍼시 보기 그는 눈 덮인 12월의 산속에서 누군가가 두드리는 북소리를 듣고 있다고 한다.// 그가 촬영한 여름 바다 푸른 파도는 우 우 우 우 밀려와서 바위의 굳은 몸을 속살로 껴안으며 흰 가슴살을 드러낸다.// 나는 식탁 위의 빨간 방울토마토 하나를 입에 넣고 TV를 켰다. 무너진 흙벽돌 먼지 속에서 뼈만 남은 이라크 아이들이 뛰어나온다. 그 옆으로 완전무장한 미군 병사들이 지나가고 있다.// 갑자기 눈보라가 날리고 1951년 1월 20일 새벽 살얼음 진 달래강 얼음판 위 피난민들 사이에서 아이를 업은 40대 아낙이 넘어졌다 일어선다. 벗겨진 그의 고무신이 얼음판에 뒹굴고 있다.// 나는 TV를 끄고 밖으로 나왔다. 벽에 붙어서 여전히 거품을 토하여 소리치고 있는 파란 8월의 바다// 그때 겨울 산 속으로 드어갔던 그가 바닷가로 왔다는 메시지가 핸드폰에 박혔다. -심 상운. 『빨간 방울토마토 또는 여름 바다 사진』 이 시는 화자가 식탁에 앉아 방울토마토를 먹으면서 여름 바다 사진을 보고 느낀 것을 서술형식으로 쓴 하이퍼시이다. TV에서 본 것으로 되어 있는 이라크 아이나 미군, 겨울풍경은 화자가 상상으로 만들어내었거나 샘플링 한 가상현실이다. 이 시가 위에 설명한 하이퍼시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 공상에 의한 이미지 보기 앉아 있는 그녀를 하얀 구름이 휩싸고/ 빨간 버스가 그녀와 구름을 싣고 달린다.// (중략) 도시를 빠져나온 빨간 버스는 돌고래들이 솟구치는 태평양 바다 위를 달린다. (후략) -심 상운,「파란 의자」부분 이 시는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할지 모르나, 《윤리학》의 쾌락을 문학에도 그대로 적용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칸트의 ‘무목적의 목적’라는 말로 일컬어져온 문학의 유희성을 생각하면 하등 이상할 게 없다. 시에서 상상력을 공상세계에까지 확대한 점은 우리 詩史에서 심 상운이 처음이 아닌가 한다. 하이퍼시 몇 편을 감상 자료로 더 제시하겠다. 시인들과 함께 아이스크림 황제*를 읽어서인지 내 심장이 핑크빛 아이스크림이 되는 것을 보았다. 여름 태양보다 뜨겁게 운동장을 달구는 관중의 함성이 세상을 뒤덮는 나라에서 지하철 칸칸마다 하얗게 죽어서 밟히는 시간의 시체들을 보고 피라미 같은 낱말들의 떼죽음을 보자니, 눈사람 같은 내 사랑 아이스크림 황제를 위한 눈물이 났다.// 그날 저녁 하나님과 불타는 인공위성을 생각하면서 돌아올 때 푸줏간의 고깃덩이들 틈에 어느 시인의 심장에서 튀어나온 듯한 빨간 장미꽃 한 송이를 만났다. 아침에 죽은 팝송 황제 마이클 잭슨의 새까만 안경과 하얀 페인트 얼굴의 입술에 칠한 빨강, 아이스크림 황제를 모르는 그 황제는 죽어서 더 날뛰면서 그 입술 색깔로 노래하고 있었다.// 새싹 밥이 소화되는 그날 밤, 낮에 본 지하철 공사장에 쌓인 철 빔들이 모두 일어서서 천년을 꿈꾸는 숲을 이루고, 팝송 황제를 위해 노래하는 숲의 나뭇잎들. 꽃다발을 바치는 소녀들은 눈물을 흘리고, 나는 더위를 식히라고 아내가 주는 아이스크림을 내 사랑 아이스크림 황제가 생각나서 먹을 수 없었다. *월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Wallace Stevens)의 시 제목 - 최 진연,「아이스크림」전문 커피를 마시던 사람들이 떠난 뒤에도 그들이 자리에 두고 간 가슴선이나 허리선이나 다리선이 보인다. 20대 아가씨들이 벗어놓고 간 불룩한 가슴선에선 노란 분꽃냄새가 풍긴다. 종업원들이 그 선들을 모아 쓰레기통에 버려도 빛 밝은 오전엔 구석에 숨어 있던 붉은 선들이 제각기 반짝이는 물방울이 되어 유리창 밖 허공으로 둥둥 떠다니는 게 선명하다.// 2월 중순 달리는 승용차 유리창에 윙윙 휘날리며 떼 지어 달라붙는 선들. 브러쉬는 백색 환각제 같은 무수한 선들을 계속 지우지만 도로 옆 막 피어나는 하얀 꽃송이들 속으로 자주 끌려들어가는 바퀴. 차는 발긋발긋한 딸기를 잔뜩 안고 맨살 그대로 누워 있는 비닐하우스의 둥근 허리선이 보이는 시골 눈길 뿌연 안개 속에서 미끄러진다.// 그때 라디오에선 미국 인기 가수의 죽음에 대해 심층보도하며 죽음의 원인이 환각제의 과다 복용이라고 한다. 봄눈 오는 날 오후 3시 20분. 죽은 가수의 뜨겁고 경쾌한 목소리가 전라북도 부안 고랑 진 눈밭에 선홍빛 물방울을 뿌리고 있다. - 심 상운,「환각제 복용」전문 청계천 늪지대, 하늘 장대에/ 양 팔을 끼운 꽃무늬 바지저고리/ 바람이 십육 배 속으로 끌어올렸다내렸다 한다.// 살수차가 엎어진 도로 위,/ 버스는 오후의 해를 끄려고 허공으로 올라가고/ 소풍 나온 아이들의 구름 모자는 물줄기를 따라간다.// 시간을 ‘뒤로뒤로’ 클릭 해보세요./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이 많음”/ 담임선생의 긴 손가락이 남아 있는 생활통지표./ 전학 간 친구가 건네준 올챙이 편지,/ 살구색 치맛자락을 치켜든 어머니/ 오월의 꽃그늘로 걸어가신다./ 나는 은하철도를 타고 티브이 속으로 들어간다.// “디지털이 무엇입니까?”/ “자연이 진화한 것이다.// 디지털 이후는 무엇이 올까?/ 잭슨 폴록은 아직도 바람의 염료를 뿌리고 있다./ 아드리아해의 물결은/ 세이랜의 노래를 내 방으로 쏟아놓는다.// - 위 상진,「설치미술」전문 맺는 말 우리는 앞에서 사물시에서 관념을 함유하고 있는 경우를 보았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하이퍼시에서도 사물에 대한 인지적 단계를 넘어 무엇을 지향하는 의미를 외표하지 않는다면 형상화 된 관념은 허용해도 상관이 없으리라 보고 그런 작품을 쓰고 있다. 위의「아이스크림」이 그 한 예이다. 하이퍼시에서 일체의 관념적 요소를 배제한다면, 문학의 양대 가치인 유희성만 남고 관념에 의한 공리성은 전혀 무시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최소한의 관념이라도, 심 상운의 표현을 빌자면 ‘지장수 같은 관념’을 살려 쓰고 있다. 대상에 대한 감각과 인식의 인지단계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엷고 투명한 정도의 관념을 함유하게 함으로써 시적 가치를 높이는 것이 더 좋으리라 생각해서이다. 또 초현실주의 시 등에서 볼 수 있는 정서를 느낄 수 없는 시는 문제가 되므로 하이퍼시에서도 정서를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종래의 시와 다를 게 없다는 점도 부기해둔다. 관념의 과잉은 한국시가 벗어나야 할 당면 과제로 생각한다. 근본적으로 시는 ‘무엇을’ 쓰느냐가 중요하지 않고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는 표현 방법 공 형식이 더 중시되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많은 시인들이 무엇인가를 써내려고, 시 속에 감정이나 생각들을 많이 담으려고 해서 시가 무겁고 재미가 없게 된다. 시가 무언지도 모르면서 시 공부를 전혀 하지 않는 사람들이 ‘시’입네 하고 시 이전의 자기감정과 주장을 늘어놓은 잡초 같은 글을 발표하고 있어서 더욱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 필자: 시인 ․ 목사) *이 논문은 문학회의 하계 세미나(2011.8.1)에서 발표 후 창조문학지에 싣게 될 것이다. [출처] 하이퍼시(hyper poetry) 이해|작성자 최진연  
3    [스크랩] <의식-무의식-언어의 징검다리와 하이퍼링크 댓글:  조회:937  추천:0  2019-01-17
      전문    이 시의 화자는 늦겨울 산행중에 대지가 혼곤한 잠속에서 새싹을 피우려 기지개켜는 듯한 초봄의 정경을 의식과 무의식간 상상으로 넘나들고 있다. 소재나 정서는 지극히 한국적이지만 기법은 매끄러운 언어구사와 하이퍼텍스트적 구성이다. 한국인이라면 깍궁놀이 하던 모성에의 추억과 그리움이 애잔할 것이다. 엄마가 사랑스런 갓난애와 눈을 맞추고 깜짝 숨었다 깍궁! 하고 다시 나타나면 까르르르~ 아이의 천진한 웃음이 폭발되는 전통적 사랑놀이요, 육아법이다. 엄마나 아이 둘다 실존재이지만 갓난애 입장에서는 깍궁하는 엄마는 현실이요, 잠시 안보이는 엄마는 부재의 가상현실이기에 느닷없는 재출현에 그토록 자지러질 것이다. 배낭을 벗고 양지에 앉은 화자 자신도 싹이 트려는 듯 몸이 근질근질하고, 산곡을 넘나드는 작은 새와 진달래, 철쭉과의 정겨운 수작이 새싹들의 겨울잠을 일깨우는 깍궁놀이로 들린다. 이 시의 연상 고리는 양지에 앉은 화자--계곡의 진달래, 철쭉-- 작은 새의 재재거림--어머니의 깍궁! ---새싹을 어르는 작은 새들의 깍궁! --이에 화답하는 진달래 철쭉들의 잉잉거림 등 엄마와 새들의 깍궁을 회상하는 리드미칼한 환청 하머니이다. 그리고 시상의 각 유니티들을 매끄럽게 하는 하이퍼링크로 ‘깍궁!’ ‘ 포르~포르르~’ ‘이~잉~잉’ 같은 의성어들이 유려한 테크닉을 보여주고 있다.   햇빛은 무색이다가도 단풍나무에 가 닿으면 단풍잎이 된다/ 노랑은 노랑금빛 빨강은 빨강금빛/ 갠지스강가에 쌓아놓은 나무더미에 빨간 불꽃을 당긴다/ 빨간 불꽃에 금빛 영 혼이 하루종일 번쩍이며 탄다/ 아무 말 없이 타는 시체 위로 허공에 고루 숨어 사는 햇 빛이/ 모조리 몰리어간다. 타다닥 탁탁 단풍무더기/ 햇빛은 단풍을 좋아해, 단풍에 닿자 마자 크게 웃어/ 마릴린 몬로는 입을 약간 벌리고 금빛 머리칼을 / 신사의 가슴에 올려 놓는다 <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포스터를 보는 18살 소녀도 크게 웃어/ 학교가 끝 나면 곧바로 동방극장엘 갔지 내친구와 몰래/ 웃음소리가 크게 퍼지고 먼 마을로 간 마 릴린 몬로가 /타는 단풍속으로 들어와 앉는다 , 햇빛이 심지를 돋운다 --- 김규화 < 햇빛과 단풍 > 전문    시문학 발행인이며 왕성한 창작으로 수 십 년의 시력을 지닌 김규화 시인이 뒤늦게 하이퍼시에 경도되면서 시적변신에 나서 주목되고 있다. 하이퍼텍스트시에 대한 김규화 시인의 인식은 시문학 4월호의 심상운-김규화의 대담 “하이퍼텍스트 지향의 동인지”에서 엿볼 수 있다. 위에 인용한 외에도 등에서 하이퍼텍스트시의 실험적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인용 시에서는 햇빛과 단풍을 매개로 한 자유연상과 의식. 무의식의 가지치기, 청소년 시절 추억 등이 행간에 배어 있다. 시상전개의 각 유니트와 연상단락의 하이퍼링크적 징검다리로 동서양과 현재, 과거를 넘나들고 있다. '무색인 햇빛이 단풍잎이 되는 것을 시작으로 --노랑 빨강 금빛--갠지스강 나무더미-- 빨간 불꽃--금빛 영혼 --타는 시체--단풍무더기 --단풍에 웃는 햇빛으로 확산된다. 이어서 -- 마릴린 몬로의 금빛 머리칼----영화 포스터 보는 18살소녀--친구와 몰래 간 동방극장으로 증폭되고 --단풍속으로 돌아와 앉는 마릴린 몬로--심지 돋는 햇빛'으로 제자리를 찾는다. 여기서 하이퍼링크적 연결고리는 햇빛과 단풍의 교호작용을 통해 마치 끝말잇기 놀이하듯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미지군이며, 이것이 매끄러운 시읽기와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독자로서는 이런 하이퍼시에서 의미나 결론을 애써 찾기보다는 파노라마 경관 감상하듯 화자의 자유분방한 공상과 의식의 흐름을 따라 즐기며 음미할 일이다.   그의 방 우측 벽에 걸려 있는 첫 번째 그림-검은 철제 의자위에 사람 대신 활활 불타 는 붉은 꽃 한 다발이 앉아있고, 그 밑엔 “ 죽은 뱀의 영혼은 발가숭이로 꿈틀거리며 꽃 밭의 환한 햇빛속으로 들어 갔을까? 라는 글이 붙어있다. 나는 그 글 밑에 ” 영하 10도 의 겨울 밤 시멘트 도로 바닥에 귤장수가 떨어 뜨리고 간 노란 색종이 같은 귤의 꿈을 보았느냐?고 쓴다. 그는 그밑에 “ 시인들은 밤마다 죽은 언어가 새로 태어나는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고? ”라고 또 쓴다. --2연 생략--   그때 그의 두 번째 그림 속에서 나온 파랑 공, 초록 공, 노랑 공, 빨강 공, 하양 공이 거실을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점점 부풀어 식탁이 되고 놀이터가 되고, 침대가 되고, 의 자가 되고, 남자 여자 어른 아이들과 들판을 통통통통 신나게 튀어가고, 마을 언 덕에 봄빛이 눈부신 한낮 하늘을 나는 마차가 되어 지붕 위를 둥둥 떠간다. 나는 찬란한 햇빛속에서 공이 터지는 환상에 전율한다. ---심상운 < 미완성의 시-- 그림 감상하기> 1연, 3연    심상운 시인은 최근 몇 년 논란의 초점이었던 탈관념시, 디지털시에 대한 명쾌한 해설과 이론적 배경을 제공함으로써 독자들의 이해를 촉구해 왔다. 그런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시문학 4월호에서는 김규화 시인과의 ‘하이퍼텍스트 지향의 동인지’ 라는 대담을 통해 하이퍼시론을 피력하고 이를 토대로 창작과 동인활동을 시도함으로써 우리 현대시의 물꼬를 틀고자 노력하고 있다. 시문학 5월호에는 하이퍼시 특집으로 < 북한산의 레몬 향기> < 미완성의 시>도 선보이고 있다. 심시인이 수십년 동안 추구해온 토속적 서정과 이미지 위주의 모더니즘에서 벗어나 디지털리즘과 전자미디어의 하이퍼텍스트적 특성에 주목하고 동인 에콜로 변신을 시도하는 노력을 높이 살만하다.  인용한 에는 하이퍼시에 대한 그의 애착과 기법적인 특성이 나타나 있다. 하이퍼시가 방사성 자유연상, 공상적 의식의 흐름 따라가기이면서 말하기 보다는 보여주기에 치중한다는 점에서 ‘그림감상하기’라는 부제를 달고, 실험단계라 라는 제목을 붙이지 않았나 추측된다. 일반 독자입장에서는 난해하고 생경한 이 시에서 어떤 특정한 의미나 순서, 상식적 질서, 교훈을 찾으러 들지 않는다면 오히려 디지털적 하이퍼시의 특성을 따라 흥미 있게 읽을 수 있다. 추상화 감상의 요점이 그림 자체의 감흥을 중시하고 사실에 입각해 무엇을 그렸는지, 무슨 의미인지는 부차적인 사항인 것과 같다. 실제로 지금 이 시공간에도 미쳐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다차원적 상황들이 앞뒤 없이 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고, 천지만물의 존재나 사건, 사물들이 불가측, 불연속적이어서 어찌 보면 뒤죽박죽이지만 나름대로 혼돈 속에 우주순행의 질서가 있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이 시는 그의 방에 걸린 다섯 개의 그림 중 첫 번째 그림 감상을 시작으로 자유연상과 분방한 의식, 무의식의 흐름을 환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시 첫 연의 골격은 첫 그림: 검은 철제의자위에 불타는 붉은 꽃다발--그 글 밑에 그와 내가 주고받는 컴퓨터 댓글 형식으로 -- “ 꽃밭의 햇빛 속으로 들어 간 죽은 뱀의 영혼” ”영하 10도의 겨울밤 시멘트 도로 위 귤의 꿈“ ” 죽은 언어가 새로 태어나는 나라로 시인의 여행“ 등 다소 난해한 글귀들이 화답한다.  다섯 개의 그림 감상도 차례대로가 아니라 1.3.5.4.2로 비순서적이며 세 번째 그림을 지나 다섯 번째 그림으로 가자 네 번째 그림에서 태평양의 물이 흘러내리고 동시 다발적으로 두 번째 그림에서 나온 색색공이 굴러다니다 식탁 , 놀이터, 침대, 의자가 되고, 남자, 여자, 아이들이 뛰고, 하늘을 나는 마차가 되어 지붕 위를 뜬다. 나는 찬란한 햇빛 속에서 공이 터지는 환상에 전율한다. 난해한 암호풀이 하듯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골똘히 캐기보다는 디지털매체의 그림 감상이나 댓글달기처럼 비선형적, 비순조적으로 독자 나름대로 상상하거나 언어이전의 언어로 작자가 보여주는 대로 그저 따라가 볼 일이다. 이시에서의 하이퍼링크는 ·의식의 흐름을 매개로 시공간 순서없이 다발적으로 나타나고 사라지는 이미지의 집합적 덩이들이다.    이상에서 필자 나름의 독법으로 세시인의 하이퍼시를 읽었지만, 작가의 의도와 달리 추상화감상처럼 개개 독자들에 따라 천차만별인 시읽기의 무정부상태가 불가피 한듯하다. 이 점이 하이퍼시의 묘미라 할 수 있고, 살펴본 세 시인의 작품도 각기 개성이 보인다. 아직 실험단계라 확언할 수는 없지만 하이퍼링크에서도 오남구 시인은 매끄러운 언어구사를, 김규화 시인은 의식의 흐름과 링크의 완성도 여부를, 심상운 시인은 이미지 마디간의 집합적 결합을 중시하는 듯하다. 수용미학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시 텍스트 제공자인 시인과는 별도로 이를 수용하는 독자태도에 따라 한스 야우스의 ‘현실독자’, 리퍼테르의 ‘초독자’, 스탠리  피쉬의 ‘정통독자’, 조나단 컬러의 ‘이상적 독자’, 볼프강 이저의 ‘내포독자’, 움베르트 에코의 ‘모범독자’ 등으로 분류될 만큼 독자의 역할과 중요성이 부각된다. 독자는 작품의 주제나 내용뿐 아니라 형식과 이미지 등에서도 즐거움을 향유한다. 특히 오랫동안 전통을 답습해온 재래시의 진부함에 질린 독자에게는 첨단 디지털 시대에 부응하고, 미학적 제약을 벗어난 하이퍼텍스트시의 정서적 해방감과 자유분방함에 매력을 느낄 것이다.  
2    이론과 창작이 동행하는 시대의 예술가 / 김철교(시인, 평론가) 댓글:  조회:1297  추천:0  2019-01-17
  이론과 창작이 동행하는 시대의 예술가   김철교(시인, 평론가)   1. 예술가의 ‘지금-여기(now & here)’     예술가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신의 예술작품에 얼비치는 색깔을 갖게 된다. 이러한 예술관은 주변 환경에 따라 변화하기 마련이나 큰 틀의 색채는 바뀌지 않는다. 주변환경에는 정치, 사회, 문화적 환경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고유한 신체적, 정신적, 지식적 환경 등을 모두 포함한다. 큰 틀이 바뀌지 않는 것은 사람마다 고유한 육체적 DNA를 가지고 있듯이, 정신적 DNA에 해당하는 내재된 무의식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다만 학습과 의지에 따라, 페르소나가 형성될 수 있지만 말이다.     페르소나는 '외적 인격' 또는 '가면을 쓴 인격'을 의미하며, 융(Carl Gustav Jung)에 의하면, 무의식의 열등한 인격이며 자아의 어두운 면을 반영한다. 누구나 집단 사회의 행동 규범에 따라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예술가에게는 특히 경계해야 할 그림자같은 성격이다. 시류 혹은 소속 집단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형성된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으면 기교에 의존하게 되어 작품의 진정성에 의문을 갖게 되고 예술성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인간은 하나의 완벽한 생명체다. 복잡한 신체구조가 모두 일사분란하게 자기의 역할을 다하면서 질서정연한 우주를 이루고 있다. 태어날 때 창조주의 완벽한 설계도라 할 수 있는 DNA는 이미 결정되어 있고, 다만 성장과정에서 부딪히는 환경과 학습에 의해 인테리어가 갖추어지고, 끊임없이 리모델링되고 있다.     육체적 DNA에 상응하는 정신적 DNA는 무의식이라 하겠다. 우리는 무의식의 역동에 휘둘리며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DNA는 각각의 신체 및 정신적 기능들을 조화롭게 다독이면서 인간을 완전한 통일체로 운행시킨다. 인간세상은, 각 개인의 신체조직은 물론 개인들이 모여 이루고 있는 사회조직도, 모든 개체들이 각기 맡은 역할에 충실하면서 조화를 이루어가는 것이 근본 원리다.     이성과 감성, 각종 욕망들이 얽히고설키면서도 조화로운 인류의 삶을 만들어 내고 있다. 특히 예술은 어느 한 분야나 역할만 강조하면 전체적인 화합을 깨뜨리게 마련이다. 최근 나름대로 각 예술분야들이 세분화되어 있으나 본래의 목적, 즉 인류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서는 이웃예술과 손잡고 나가는 종합화가 필연적이며, 이를 통해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문학은 언어를 통해 자기 예술혼을 드러낸다. 미술은 시각으로, 음악은 청각으로 즉시 받아들이지만, 문학은 일단 언어로 뇌에 접수되어 재해석한 후에 수용된다. 문자가 생기기 전에는 그림과 음악이 우리 삶을 지배했고 문학은 음악과 뒤섞여 있었다. 문학은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의식에서 주문과 기도의 형태로 존재했으나 형태를 잡고 널리 유포된 것은 종이와 인쇄술이 발명된 후의 일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사포의 서정시, 아이스킬로스·소포클레스·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등이 BC 5세기경에 터를 잡았다. 이후 철학, 역사, 소설 등이 등장하여 문학이 장르별로 세분화되었다. 21세기에 이르러서는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하이퍼미디어 시대가 도래하여 장르의 벽이 무너지고 있다. 더욱이 첨단과학기술의 영향에 힘입어 장르 구분이 무색해지며 예술은 물론 모든 분야가 융·복합이 일상화되어가고 있다.     하이퍼미디어 시대에는 “한 작품 안에서 서로 다른 매체가 융합하고 분열하며 경쟁하는 상호매체성”을 특징으로 하면서, 수용자(독자나 관객 등)에게 기울었던 무게가 점차 예술가에게로 옮겨가고 있다. 디지털 예술에서 예술가의 권력은 오히려 어느 때보다 강화되고 있다. 예술가는 프로그래머로서 혹은 프로젝트의 지휘자로서 수용자의 연상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되었다. 수용자는 “작품을 ‘즐기는’ 것이며, 여기에 상호작용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을지라도, 이것은 순수하게 유희의 성격이지 ‘생산’이나 ‘창작’의 성격을 가지지 않는다.” ( 유현주, 『텍스트, 하이퍼텍스트, 하이퍼미디어 :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문예학』, 문학동네, 2017, 17~19쪽).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예술가는 더욱 이론과 창작 모든 분야에 정통해야 한다. 현대는 창작과 이론이 분리된 시대에 살고 있으나 예술이 완전해지려면 창작과 이론이 함께 가야한다. 예술작품에는 치밀한 논리적 구성과 함께 감각과 지각과 영감도 있어야 한다. 따라서 주변 예술인 미술, 음악, 문학에서 상호영향을 얻는 것은 물론, 철학을 비롯한 주변 모든 학문과 교류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2.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조화     창작과 이론의 공존, 인접예술 및 학문과의 교류가 원활하기 위해서는 맨 먼저, 예술의 본령인 감성, 즉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이성, 즉 아폴론적인 것의 조화가 필요하다.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는 그리스 비극이야말로, 그리스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두 신(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갈등과 조화가 담겨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리스 정신의 총화로 보았다.(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 김남우 역, 열린책들, 2014, 참조) 아폴론 신은 이성과 지혜를 상징한다. '아폴론적인 것'이라는 것은 균형 잡힌 아름다운 형상들을 지칭한다. 즉, 조형예술의 원리다.     디오니소스는 술을 관장하는 신으로서 인간들에게 도취와 광란을 통해 삶의 고통을 망각하게 도와준다. 디오니소스적 힘은 음악에서 나온다. 디오니소스를 찬양하는 노래를 통해 사람들은 하나가 될 수 있다. 음악은 개별화된 인간들을 보편적 쾌감과 도취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니체는 아폴로적인 것의 주요 개념 중에 하나인 ‘개별화의 원리’로 무장한 소크라테스적 도덕이 비극을 무력화시켰다고 보았다. 디오니소스적 도취로 인해 적대적이었던 자연과 인간은 화해하고, 노예는 자유민이 되며, 인간은 보다 화합하는 공동체로 융화된다는 것이다.     아폴론은 윤리의 신으로 절제를 중요시하지만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니체는 아폴론적인 것을 지주로 하고 있는 그리스문화의 주춧돌이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그것을 그리스 비극에서 읽은 것이다. 비극은 합창단으로부터 나오며, 민중 가운데에서 선정된 합창단은 무대 위에서 연기자들이 신들의 이야기를 공연할 때, 신이 된 것 같은 합일의 경지를 경험한다. 또한 합창단은 무대 위의 인물들과 관객을 관조하는 또 다른 관객이 되기도 한다. 관객들은 합창단에 의해 비극적 서사의 고통이 한층 강화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장엄한 합창에 의해,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예술의 역할이 바로 이런 합창단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은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연결하고, 관객에게 고통을 극복하고 위로를 받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스 비극은 디오니소스적 음악정신에서 탄생했고, 신화적 정신이 투영되었을 때 위대한 힘을 발휘했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의식(이성)의 빗장을 풀고 인간의 무의식(신화적인 것)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돕기 때문이다. 집단무의식에는 인류가 오랫동안 경험한 것들이 축적되어 있고, 신화는 우리 인간의 생사화복에 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다. 니체는 음악의 역할을 서사가 담당하고 신화가 극에서 사라지면 비극이 주는 카타르시스가 어렵다고 보았다.     아리스토델레스가『시학』에서 비극이 관객에게 미치는 중요한 요소로 주장한 카타르시스는, 비극을 봄으로써 마음에 쌓여있던 긴장과 불안 등 심적 부조화가 정돈되어 마음이 정화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정신분석에서도 자유연상과 꿈의 분석 등을 활용하여, 마음속에 쌓인 억압된 감정 등 무의식을 밖으로 끄집어내어 정면으로 대면함으로써 치유를 모색하고 있는데 그 역할을 예술도 충분히 담당할 수 있다. 예술가는 자기의 무의식을 작품에 투영하고, 관객들은 그 작품을 통해 유사한 경험을 함으로써 위안을 받을 수 있다.     니체는 바그너의 음악에서, 무대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는 그리스 비극의 근원적 힘이 부활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 바그너의 음악극(Musikdrama)에는 독일과 북유럽의 신화가 사용되었다. 또한 니체는 바그너의 음악극을 통해서 그리스 비극의 정신이었던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의 조화를 발견한 것이다.   3. 이성으로 정제된 서정     시에 있어서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가장 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 ‘이성으로 정제된 서정시’라 할 것이다. 예술사조의 큰 흐름을 보면 항상 이성과 감성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가며 단지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두느냐가 관심사였지만 대부분 이성과 감성의 조화가 균형을 이룰 때 예술적 가치를 높여주고 우리 인간에게 호소력이 컸다. 그 중에 특히 산문은 이성에, 시는 감성에 더 무게의 중심이 있었다.  아무리 산문이라 해도, 그것이 예술을 지향한다면, 서정성이 어느 정도 물들여 있어야 호소하는 힘이 크다. 모든 예술에 있어서 서정성은 주춧돌이 되고 있다. 더구나 시는 무엇보다도 서정성이 가장 핵심으로 여겨져 왔다.       서정시는 인간의 삶을 반영하기도 하고 현실을 비판하기도 하고 아름다운 세상의      모습을 먼저 제시하기도 한다. 서정시는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세계를 변화     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와 아울러 거기 담긴 언어와 정서의 아름다움     은 상처받은 인간의 영혼을 위무하고 그것을 더 높은 차원으로 고양시키는 승화     의 기능도 함유한다.(이숭원, 「시와 서정」, 『현대시론』, 서정시학, 2014, 49쪽).     물론 과유불급이라고 서정성이 넘치다보면 값싼 감정의 늪에 허우적대는 경우가 적지 않고 시인 개인의 독특한 향기가 실리기 어렵다. 가장 이상적인 서정시는 이성으로 정제된 감성에 의해 써진 시라고 할 것이다.         서정은 서정이되, 인간의 심성을 고양하고 삶의 확충에 기여하는 서정, 그러면서     도 기존의 틀에 박힌 서정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발현하는 서정,      그런 자질을 함유한 시가 뛰어난 시라는 점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숭원, 앞의 책, 58쪽).     서정시를 거부하는 시도도 적지 않았지만 서정을 벗어나서는 시의 가치가 빛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육체의 생존을 위해서 음식물을 먹듯이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는 예술, 그 중에서도 감성을 다독여주는 서정시에 둥지를 틀어야 하지 않겠는가. 요즘 복잡하고 삭막해져가는 현대에서 피폐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 예술치료가 융성하고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예술은 감성을 다독여 깊은 무의식에 접근하도록 돕고 이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주기 때문이다.       서정을 배제하는 정신도, 서정을 극복하고자하는 시도도, 서정에 바탕을 두고 있     었으며 이때마다 시와 비시의 경계가 새롭게 확장되며 시의 영역 또한 확대되었     다. (김현자,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서정의 본질과 의미」, 『한국시학연구』 16, 2006. 8쪽)     예술가는 익숙한 것에 반감을 갖는 경향이 있어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모색하고 있다. 새로운 예술사조는 항상 감성과 이성, 주관과 객관, 형식과 자유, 통제와 해체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가며 생성 소멸되어 왔다. 그럼에도 예술에서 차지하는 서정성,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무게가 전혀 줄지 않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무의식에 기대고 있는 감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술은 감성에 근거하지만 이성으로 정제되지 아니하면 정돈된 작품이 될 수 없다.   4.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     서정이 주조를 이루고 있는 많은 예술 중에 특히 음악-미술-시가 한데 어우러져 지금까지 인간의 정신 밭을 풍성하게 가꾸어 왔다. 김춘수의 무의미시론도 결국 신화(처용)를 매개로 하여 미술(세잔, 피카소, 폴록: 추상미술, 소위 니체가 말하는 아폴론적인 요소)과 음악(모차르트: 절대음악,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기능을 아우르는 방법의 하나였다. 김철교, 「예술의 융·복합과 고정된 틀로부터의 자유 – 시와 미술을 중심으로」,『한국시학연구』제 49호, 97~118쪽.    칸딘스키와 끌레는 음악과 미술의 융합을 이론적으로 실천적으로 시도하였고, 피카소와 호안 미로는 시와 미술을, 바그너와 클림트는 시와 미술과 음악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1) 모든 학문의 총화로서의 예술     과학과 철학도 예술의 영역에 끌어들이는 것이 현대예술의 추세라고 할 수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미술전시장은 음향이미지와 빛의 이미지, 색의 이미지들이 통합되고, 여기에 아서 단토의 철학적인 것이 가미되지 않으면, 즉 ‘예술은 이런 것이다’라는 해명이 없으면 예술로 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찌그러진 깡통이 쓰레기통에 버려지면 폐기물이지만, 전시장에 전시되어 철학의 옷을 입으면 예술이 된다.     “철학이 이성적인 시각에서 개념을 통해 삶을 이해하려는 시도인 반면에, 예술은 감성을 통해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이주영, 『예술론 특강』, 미술문화, 2007, 9쪽).  미술에 철학이 가미되어야 비로소 예술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은 이성과 감성의 통합으로 예술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성과 감성의 줄다리기가 팽팽할수록 시를 읽는 기쁨과 맛이 승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제는 모든 학문의 총합이 예술을 떠받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까지 이성과 감성을 오가며 많은 실험을 해보았고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러서는 해체를 논하게 되었다. 이제는 모든 것이 통합되어 질서를 세우고 구원(해방, 자유)을 향해 나가는 시대가 되었다. 이런 것을 ‘모던낭만주의’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모던낭만주의는 이성과 감성의 통합과 추상성을 큰 특징으로 할 것이다. 추상성은 예술가나 수용자 모두에게 무한 자유를 허용하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추상예술은, 모든 수용자들에게 각기 다른 이미지를 제공함으로써 구원(해방)을 준다. 모든 수용자는 무의식에 침전된 경험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추상성이 지나쳐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들은 낙서와 다름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낙서와 추상의 차이는 예술성을 담보하는 통일적 이미지가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 낙서도 예술이 될 수 있다. 화장실에 있을 때는 낙서이지만 시집(詩集)으로 들어오거나 전시회장 액자 속에 넣어 걸면 예술이 되기도 한다. 변기가 화장실에 있는 것과 전시장 진열대에 있는 것의 의미가 다름을 듀샹이 잘 보여주었다. 허접쓰레기가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예술가나 수용자에게 통일된 예술적 이미지를 안겨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일상성을 벗어난 예술적 추상성일 것이다.   (2)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예술의 융·복합     앞에서 누누이 언급한 바와 같이, 미술가는 형상이미지를 통해, 음악가는 음향이미지를 통해, 시인은 언어이미지, 즉 은유와 상징을 통해 무의식을 다룬다. 따라서 보다 무의식에 가까이 다가가서 능숙하고 효과적으로 무의식에 침전된 찌꺼기들을 다루어 치유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이 모든 이미지들이 함께 작동해야 할 것이다.     문자나 소리언어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미술과 음악 등 다른 예술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 “기존의 언어 질서나 체계로는 정확히 그 의미가 드러나지 않는 세계, 재현되지 못하는 세계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 시는 기존 언어의 한계 위에 서서, 그 너머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향해 끊임없이 손짓하며 불러보는 안타까운 기다림”( 김유중, 「김춘수 시 의 정신분석적 이해」, 『국제한인문학』 16집, 2015, 국제한인문학회, 125~126쪽.)을 머금고 있다. 언어의 한계로 인해 속이 타는 예술가는 미술이나 음악에서 차용한 은유로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다. 여기서 ‘어느 정도’라 함은, 시인은 색깔이나 음향의 이미지조차도 언어로 은유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절대음악의 경우는 물론이려니와 표제음악의 경우에도 수용자들이 주제와 대상과 예술가의 이미지를 알지 못하여도 아름다움에 빠질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시가 언어의 의미에 매달리지 않더라도 즐길 수는 없는가? 우리 수용자가 그 내용을 알지 못하는 외국어로 된 가곡을 듣고도 아름다움에 빠질 수 있다. 김춘수가 자신의 무의미시론을 말하면서, 염불에서 리듬만 남는 시의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했는데 이 역시 시를 절대음악에 빗대어 말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추상미술의 경우에도 주제와 대상과 예술가의 이미지를 모르더라도 훌륭하게 수용자들은 자신이 창조하는 이미지로 즐길 수 있다.     문학과 미술의 만남이 점화된 시기는 낭만주의다. 이 시기에 선포된 예술통합이념은 바그너의 종합예술품 개념을 거쳐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빛을 본다. 바그너에 의하면 종합예술품은 여러 다른 예술을 새로운 유형의 예술작품으로 용해시키는 것이다.    바그너가 생각하고 있던 종합예술이란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① 예술이란 일부 계층의 오락도구가 아니라 사회 각계 각층을 망라한 국민 전체의 예술적 표현이어야 한다. ② 가장 근원적이며 순수한 국민적 시작(詩作)의 소재는, 모름지기 한 시대의 성격에 사로잡히지 말고 본질적인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신화(神話)이어야 한다. ③ 예술이란 근원적이며 인간적인 것, 또한 인간 전체의 표현이어야 한다. 단순히 개개의 예술이 고립된 채로는 전체 인간을 표현할 수 없다. ④ 개개의 예술은 근원적으로는 공통의 기반을 가지고 있다. 멜로디는 말에서 생겨난 것이다. 시는 뜻깊은 선율을 낳기 위해서는 두운(頭韻)을 써야 한다. 관현악은 그리스비극에 있어서의 합창과 같은 몫을 하며, 이야기의 일반 인간적(一般人間的)인 것을 표현하여, 과거를 회상케 하며 또한 미래를 예감하도록 한다. ⑤ 일반적인 사상면에서는 쇼펜하우어의 의사부정적(意思否定的)인 염세철학과 그리스도교, 그리고 불교에서 영향을 받아 인간존재의 비극적인 모순을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독일 낭만파의 한 사람으로서 그는 ‘구제의 이데아’를 그 작품의 중심에 두었다. ⑥ 음악은 여성이며 시는 남성이다. 양자의 결합으로 비로소 예술은 성립된다. 음악은 시의 의도를 존중하여 시에 봉사해야한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의 음악을 독립적인 장르로 보지 않고,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개하는 것을 돕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그의 후기 작품은 오페라(가극)이 아닌 악극(musikdrama)으로 불리게 되었다. 음악을 중심으로 한 오페라와 달리 연극적인 요소를 더 강조한 새로운 장르를 최초로 탄생시킨 것이다.”(금난새, 『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 여행』, 생각의 나무, 2008, 203~205쪽)    문학의 입장에서 보면 문자표현의 한계와 딜레마를 통합적인 악극의 개념으로 극복하는 일이었다. 여기에는 언어와 음이 갖는 음성적, 음향적 측면뿐만 아니라 시각적, 조형적 요소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매체융합의 역사적 물결은 20세기 초 프랑스와 유럽 아방가르드 예술에서 고조된다. (고위공, 『문학과 미술의 만남』, 미술문화, 2004, 55쪽).        바그너(Richard Wagner)와 니체(Friedrich Nietzsche),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의 영향은 음악을 미학적인 표준으로 만들었다. (······) 음악은 극       의 본질을 표현하는 도구로 인식되고, 무대는 음악화되었다. (······) 바그너는 예       술의 분리가 효율을 강조하는 사회의 분권화와 개인적 이기주의의 산물이라고        비판하며, 온전한 인간 본성의 직접적인 표현을 위해 종합예술이 모든 예술장르       를 다시 아울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 우선 ‘순수한 인간적’ 예술의 형태인       무용예술, 음악예술, 언어예술에 (······) 세 개의 미술적 장르를 더한다. ‘건축예       술, 조형예술, 회화예술’이 그것이다. (······) 이상의 여섯 예술 장르는 역사상 그       리스 비극에서만 하나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이다. (남상식, 「음악의 정신으로부터 나온 ‘미래의 예술작품’ - 바그너의 종합예술론과 그 영향에 대한 연구」, 『한국연극학 24호』, 2004, 181~186쪽).     시인으로써 회화와 음악을 잘 활용한 사람은 표현주의 시인 트라클(Georg Trakl 1887-1914)이라 할 수 있다. “특이한 시어조음 및 배열, 무엇보다 잦은 색체은유의 사용은 당시 발아하기 시작한 초기 표현주의 추상미술과 맥을 같이한다. 그 어느 현대시인보다 강한 음악 리듬으로 구성되어 있다. (······) 추상이란 문자, 형상, 음의 통합으로 전개된다. 반세기 전 바그너가 선포한 종합예술품 이념이 구현된 셈이다. 추상은 표현주의 회화와 서정시를 묶어주는 중요한 고리가 된다. 칸딘스키와 트라클이 추상예술의 추구라는 표현주의 이념의 실현에 있어 공통됨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구체적으로 색체와 언어 또는 음향의 결합으로 나타난다.” (고위공, 앞의 책, 66~72쪽).   (3) 문학(시)-음악-미술의 상호의존성   1) 시와 음악     시와 음악의 관계에 대해서는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논쟁거리가 되어오고 있다. 이를 요약하면 크게 세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시와 음악을 동등한 위치에서 바라보는 견해, 둘째, 타협이 불가능하여 어느 하나는 다른 것에 동화될 수밖에 없다는 견해, 셋째, 서로 상승효과를 가져온다는 견해가 그것이다. 가사와 음악의 변증법적 관계를 주장하는 뤼베(Nicolas Ruwet, 1933~2001)의 견해에 따르면, 시에 곡이 붙여진 가곡의 경우, 시는 음악과 연합하여 보다 폭넓은 전체를 이루면서 그 의미 또한 시너지 효과를 준다는 것이다. (최인령, 「시와 음악의 관련성을 바라보는 인지주의의 관점 – 말라르메의 시와 라벨의 음악 분석」, 『프랑스문화예술연구』19집, 2007, 411~415쪽).     음악의 최근 경향은 미술처럼 철학화되어 가고 있다.  “‘음악이 아름다울 필요는 없다. 단지 진실해야 할 뿐이다’라고 한 리게티(G. Ligeti, 1923~2006)의 언급은 20세기 작곡가들의 음악관을 함축적으로, 명료하게 잘 표현하고 있다.” (전상직,『음악의 원리』, 음악춘추, 2017, 18쪽).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음악과 미술의 영역에 깊숙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추구한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이지만, 그 부작용의 하나가 수용자들로부터 외면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문학도 이러한 예술적 경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숱한 실험들이 우리나라에서도 특히 1990년대부터 다양하게 시도되어 왔다. 여전히 실험은 계속되고 있고 확실한 흐름을 형성하기에는 좀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예견컨대, 시문학의 경우에도 이성과 감성이 손을 잡고, 신과 인간이 화해하며,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의 조화를 표방하면서, 다양한 과학기법을 활용하는 예술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2) 시와 미술     문학과 미술, 특히 미술과 시는 깊은 우정을 쌓아왔다. 본고에서는 화가의 이론을 시에 실험한 아폴리네르, 화가이면서 시인인 피카소를 예로 들고 싶다. 특히, 석학들의 글을 다소 많이 인용한 것은 어설픈 해설보다 전문가들의 생생한 주장을 듣고자 함이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1918)는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면서 20세기 초의 예술정신을 가장 충실하게 구현한 예술가’의 한사람이다. 특히 입체파 화가들과 교제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 피카소에게 브라크를 소개하고 당시 낯선 예술운동이었던 입체파 화가들을 격려하는 글을 썼다. 그의 시도 입체파 미술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다.   아폴리네르는 “입체파 회화에서 시간을 지속적으로가 아니라 동시적으로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가 보기에 입체파 화가들은 한 사물의 여러 면을 하나의 화폭에 그려 넣음으로써 시간을 뛰어넘고 있기 때문이다.” (기욤 아폴리네르,『알코올』, 황현산 역, 열린책들, 2010, 31~35쪽.)  아폴리네르의 입체주의 기법의 시는 『알콜』의 첫 번째 시 가 가장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입체주의적 기법의 시, 합성적 또는 ‘동시주의적’ 기      법의 시이다. 감각과 기억이, 꿈과 현실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아무런 원근법      적 질서도 없이, 그리고 겉으로 드러난 논리적 관계도 없이 동일한 평면상에 병      치되어 있다. 이는 마치 브라크의 파피에 콜레가 보여주는 바와 같은 자연의 질      서와는 다른 질서를 갖추고 있는 이질적인 여러 마티에르들의 병치 또는 편재의       구성을 떠올리게 한다. 이같은 파격적인 이미지 나열의 수법은 아폴리네르의 두       번째 시집이며 마지막 시집인 『상형시집(Calligrammes, 1918)』에 이르러서는      물체의 형태를 인쇄술의 배열에 의해서 재현하는 좀더 파격적인 실험으로 발전      다. ‘브라크와 막스 자코브 / 새벽 같은 잿빛 눈의 드랭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시구가 나오는 같은 시편은 『상형시집』의 특징       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가림, 『미술과 문학의 만남』,     월간미술, 2002, 63~65쪽).     여기 제시된 그림은 아폴리네르의 시 전문이다. 시어와 시행을 평면적으로 쓰지 않고 비둘기와 분수의 형태를 입체적으로 표현한 파격적인 실험시다.       비수에 찔린 비둘기와 분수   비수에 찔린 다정스런 형상들 꽃핀 사랑하는 입술들 미아 마레이 이예트 로리  애니 그리고 그대 마리 너희들은 어디에 있는가 오 아가씨들이여 눈물짓고 기도하는 분수 곁에서 저 비둘기는 넋을 잃고 있다 옛날의 모든 추억이 오 전쟁터로 떠난 내 친구들이여 창공을 향해 솟아오르고 그대들의 시선이 잠자는 물속으로 우울하게 사라진다 브라크와 막스 자코브 새벽 같은 잿빛 눈의 드랭은 어디 있는가 레날 빌리 달리즈는 어디 있는가? 그 이름들이 우울하게 울린다 교회 안에서 발자국 소리가 울리듯 참전한 크렘니츠는 어디 있는가 아마 그들은 이미 죽었을 것이다 내 영혼은 추억으로 가득하다 분수가 내 고통 위로 눈물짓는다 북쪽 전쟁터로 떠난 이들이 싸우고 있다 땅거미가 내린다 오 핏빛 바다여 월계수 장미 전쟁의 꽃이 피 흘리는 정원     피카소의 시선집 『피카소 시집』이 우리나라에서 번역되었다. 미카엘이 쓴 서문에 의하면, “대단한 열정으로 시 쓰기에 전념했던 그는 1935년에서 1936년까지 거의 매일 시를 썼고 오늘날까지 피카소가 마지막 시 작품을 남긴 것으로 세간에 알려진 1959년에 이르기까지 몇 번 펜을 놓았을 뿐 꾸준하게 시 쓰기를 계속했다. 피카소는 스페인어와 프랑스어로 시를 썼다. 피카소는 한계가 없었다. 충동적으로 시를 썼으나 그렇다고 해서 자동기술법으로 써내려간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작업하고 있는 부분을 확실하게 인식하며 글쓰기를 진행해 나갔고 언어를 다루는 데에 있어서 크나큰 자유를 누렸다. 피카소는 예술 속의 모든 장벽을 거부한다. ‘단어로 그림을 쓸 수 있고 시에 느낌을 그려 낼 수도 있으니 어쨌거나 모든 예술은 하나다.’ 피카소는 텍스트의 공간성을 강조한 말라르메의 영향을 받아 텍스트의 각 페이지들은 시각적으로 구성하였다. 그의 시 어디에서나 그림과 관련된 어휘가 끊임없이 등장한다. (······) 피카소에게 글쓰기는 임시로 가져본 직업이나 취미가 아니라 열정을 다 비친 하나의 활동이었다.” (파블로 피카소 지음, 『피카소 시집』, 서승석 허지은 역, 문학세계사, 2009,9~16쪽).    3) 음악과 미술: 간딘스키, 끌레     음악과 미술의 관계는 화가들이 음악을 자신의 그림에 투영시키려는 노력이 중심이 되었다. 물론 음악가들도 그림을 보고 영감을 받아 작곡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림에서 음악을 듣고, 음악 속에서 그림의 이미지를 얻게 된다. 특히, 간딘스키와 끌레는 음악에 정통한 화가들이다.       미술사조는 구체적 영역, 즉 비례와 균형에 바탕을 둔 실사(實寫)에서 점차 벗어     나 쇼펜하우어가 적시한 대로 ‘음악의 상태’, 곧 추상의 영역으로 옮겨왔다. 드디     어 ‘그림으로부터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구체적 표현 대상이     나 의미가 배제된 순수한 시각적, 청각적 형태는 각기 눈과 귀라는 상이한 경로     를 통해 지각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뇌와 가슴 속에서 공통된 미적 감흥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추상미술에 있어서의 음악적 속성에 관하여는 이미 칸딘스키     (W.Kandinsky, 1866-1944)가 그의 저서 과 를 통해 화폭에 담긴 형태들의 크기, 색채, 위치, 방향성, 운동성 등을 음     악적 관점에서 논한 바 있다. (전상직, 앞의 책, 33쪽).     칸딘스키는 렘브란트 그림에서 명암이 주는 강력한 화음을 발견했으며, 바그너의 음악에서 예술의 위대함을 발견하고, 음악의 힘이 반영된 회화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는 색을 음악과 연관시킴으로써 화가에 의해 구현된 음악은 우리에게 그림을 감상하는 또 다른 방법을 제시한다. 음악을 ‘눈으로’, 그림을 ‘귀로’ 감상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클레는 회화와 음악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으며, 바우하우스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라는 글로 ‘문화적 리듬’을 언급하면서 음악에서의 장단 구조를 풍경화에서의 리듬으로 보았다. 이런 시각은 그의 회화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며, 칸딘스키의 견해와도 일치한다. 클레는 들로네의 색상 대비에서 영향을 받아 이를 리듬으로 표현하는 데 적극 활용했다.” (김광우, 앞의 책, 22~25쪽).     이러한 미술-음악-문학의 다양한 만남과 조화는 결국 예술이란 장르의 세분화가 큰 의미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시-소설- 희곡 등의 구분도 예술의 영역을 축소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설을 시로 쓰고, 시에 서사가 있고, 희곡에 시와 그림과 음악이 융·복합되면 예술적 효과가 극대화될 수 있을 것이다.   5. 요약과 제언     예술가는 내적 안테나를 곧추세우고 주변 예술과 사회 정치 경제에서 다양한 시각을 받아들이고, 예술적 감각으로 소화시켜 새로운 작품을 생산함으로써  ‘낯설게 하기’의 전도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웃 예술에서 혹시 얻을 것은 없는지 끊임없이 훔쳐보고, 특히 문학은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통해 그 영역을 무한히 넓혀갈 수 있다.     그리스 비극은 이성적 측면이 강한 아폴론적인 미술과 감성적 측면이 강한 디오니소스적인 음악, 그리고 대사를 이루고 있는 시(詩)가 조화를 이루어 치유효과를 극대화하였다. 이 셋이 합쳐질 때 극의 효과, 치유의 효과, 카타르시스가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이 셋을 아우를 수 있는 시극(poetic drama)을 통해서, 예술이 수용자들에게 다가가 효과적으로 구원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시극은 단지 언어이미지, 음향이미지, 색채이미지의 결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스토리텔링이 가미되어 있다.     현대를 ‘영상의 시대’라 일컬을 만큼 이러한 효과를 영상예술에서 비교적 잘 구현하고 있다. 그러나 영상은 나와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남의 이야기를 관조하는 측면이 강하고, 시극은 내가 극 속으로 빨려 들어가, 마치 니체가 칭송해 마지않은 그리스 비극의 합창단원처럼, 함께 할 수 있는 장점을 살릴 수 있겠다.(*)  
1    수퍼비니언스의 원리 / 문 덕 수 댓글:  조회:1263  추천:0  2019-01-17
수퍼비니언스의 원리                                                             문 덕 수     [1]   시 「침묵」(ꡔ현대문학ꡕ, 1955. 10), 「화석(化石)」(ꡔ현대문학ꡕ, 1956. 3), 「바람 속에서」(ꡔ현대문학ꡕ, 1956. 6) 등은 나의 작품활동의 효시이다. 이전에도 물론 동인활동을 하면서 작품을 선보였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약 반세기 동안, 나름대로 한눈 팔지 않고 땀을 흘려 온 셈이다. 시집은 ꡔ새벽바다ꡕ(성문각, 1975) 등 모두 열댓 권 되고, 논저로는 ꡔ한국모더니즘시연구ꡕ(시문학사, 1981), ꡔ시론ꡕ(시문학사, 2002) 등이 있다. 시도 쓰고, 연구도 하고, 논문도 써 왔지만, 시에 대한 의문은 눈덩어리처럼 더 불어났다. 내 나이도 80 밑자리인데, 인제는 문제 속에서 허덕이기보다는 한두 가지라도 풀어서 분명한 형식으로 가닥을 잡아 놓아야 하겠다. ꡔ오늘의 시작법ꡕ(시문학사, 1986) 같은 저서도, 내가 무슨 시 쓰기의 스승이라는 입장에서보다 시에 관한 여러 가지 문제를 풀고 싶은 욕망의 소산이라고 하겠다. 정직하게 말하면, 나의 복잡한 의문의 실타래는 최근에 와서 한두 가닥으로 가시화되었다. 우리는 광복 직후부터 문학의 좌우 대립, 순수 대 참여의 논쟁, 모더니즘 대 민중주의의 대립에 이어, 1970년대부터 분열의 폭은 극에까지 이른 ‘형식주의 대 역사주의 갈등’에 직면했다. 이러한 논쟁, 대립, 갈등의 혼란을 다원주의 특징으로 간주하여 예삿일로 보아 넘길 수도 있지만, 적대적 극한상의 경우에는 밑바닥에 잠재된 어떤 일관된 근원 탐색이 필요하지 않을까. 시를 쓰면서 토픽을 만들어 서로 논전하고 대립하고 갈등하더라도(이는 바람직한 현상일 것이다.) 어떤 ‘원칙’에 서서 시를 쓰고 시론을 말해야 하지 않을까. 스포츠에서 양측이 지켜야 할 경기규칙과 같은 것이다. 나는 그 원칙을 나름대로 다음과 같이 명제화해 본다.         이 명제는 시에서의 ‘수퍼비니언스(supervenience)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민중시건 모더니즘시건 즉 어떤 형태의 시건, 모든 시는 ‘누가, 누구에게, 왜, 무엇을, 어떻게, 언제, 어디서, 무엇으로’라는 8가지 조건으로 총체적 상황(total situation)을 구성한다. 나는 이것을 시(시쓰기, 시론)의 팔하원칙(八何原則)이라고 말하고 싶다. 시인이란 무엇인가(메이커인가, 에이젠트인가, 정치가인가), 독자란 무엇인가(수용자인가, 해석자인가, 창조자인가), 동기는 무엇인가(개인적, 사회적 등), 무엇을 쓸 것인가(재료, 주제, 내용 등),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운율, 수사, 방법), 언제 썼는가(시기, 시대적 의미), 어디서 썼는가(지리적, 자연적인 환경이나 장소), 어떤 매재로 썼는가(언어, 기호, 기타 매재) 등의, 이른바 시에 관한 모든 문제가 이 팔하원칙에 내재된다. 그러나 앞에서 제시한 명제(‘시에서 모든 관념은 어떤 형태든 물리적 존재에 실려 운반되어야 한다’)는 팔하원칙에 다 관련되지만, 특히 ‘무엇’과 ‘어떻게’에 집중적으로 관련된다. ‘무엇’이란 시의 재료, 주제, 내용 등을 말하고, ‘어떻게’는 시쓰기의 모든 방법을 총칭한다. 오늘날 시단에서 시의 양극화 현상을 보여주는 역사주의 대 형식주의는 ‘무엇/ 어떻게’의 관계된다.     [2]   1950년에 경남 통영에서 처음으로 청마와 지용을 만났다. 청마는 역사주의가이고 지용은 모더니스트(즉 형식주의자)다. 나는 이 때 역사주의와 형식주의를 처음 만난 셈이다. 그 후, 나는 역사주의와 형식주의에 줄곧 시달려 왔다. 이러한 고뇌와 갈등은 이 땅에서 시를 쓰는 모든 시인들의 공통적 숙명인지도 모른다. 8.15 직후의 좌우대립, 대한민국과 북한 정권 수립, 6.25 한국전쟁,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 분단과 통일 과제― 이러한 역사 현실은 시인을 가만히 놓아두지 않고 시보다는 역사 쪽으로 더 끌어당겼다. 시와 정치를 뒤섞어 버리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순수와 참여, 전통과 이데올로기,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대립을 가져왔고 이 과정 전체를 역사주의 대 형식주의의 갈등 구조로 개괄할 수 있다. 1930년대에 그처럼 열렬했던 형식주의자 김기림(金起林) 씨는 광복 직후 시집 ꡔ새노래ꡕ(아문각, 1947)를 전후해서 역사주의로 방향을 돌렸지만 거기에서도 버림을 받았다. 역사주의자 임화(林和)는 역사주의에 의해 처형되었고, 김춘수(金春洙)는 형식주의에 순교했으며, 김수영(金洙暎)은 역사주의에 휩쓸렸다가 예술을 버려야 했다.   너희들의 적을 사랑하라 나는 이때 예수교도임을 자랑한다   적이 나를 죽도록 미워했을 때 나는 적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미움을 배웠다. 적이 내 벗을 죽임으로써 괴롭혔을 때 나는 우정을 적에 대한 잔인으로 고치었다. 적이 드디어 내 벗의 한 사람을 죽였을 때 나는 복수의 비싼 진리를 배웠다. 적이 우리들의 모두를 노리었을 때 나는 곧 섬멸의 수학을 배웠다.   적이여! 너는 내 최대의 교사. 사랑스런 것! 너의 이름은 나의 적이다. ― 임화 「적․1」에서   이 시는 관념시 또는 역사주의시다. 첫째로 적과 우리라는 적대관계가 텍스트 밖의 정치현실과 연결되어 있고, 둘째로 “사랑, 미움, 잔인”과 같은 관념만이 거리낌 없이 토로되어 있으며, 셋째로 그러한 관념을 실어 운반해주는 물리적 이미지가 없다. 역사주의의 전형적인 작품이다. “너희들의 적을 사랑하라”나 “나는 이때 기독교도임을 자랑한다”는 대목엔 약간의 역설이 내재하나 ‘시’일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엄격하게 따지면 이런 대목이 시가 되기 위해서는 언어의 물리성에 실려 운반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임화는 앞서 제시한 명제, 즉 ‘수퍼비니언스의 원리’를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그러면 다음에는 이와는 대립되는 형식주의 시를 보기로 한다.   산골에서 자란 물도 돌베람빡 낭떨어지에서 겁이 났다.   눈덩이 옆에서 졸다가 꽃나무 알로 우정 돌아   가재가 기는 골짝 죄그만 하늘이 갑갑했다   갑자기 호숩어질랴니 마음 조일 밖에 ― 정지용, 「폭포」의 1~4연에서   이 시에 대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산에 관련된 작품의 이미지도… 매우 청결하고 투명하고 신선하다. 그 속에 어떤 이데올로기나 휴머니즘이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와 현실에 관련된 사상, 휴머니즘적인 일체의 감정이 개입되는 것을 철저히 막고 있다”고.(졸저, ꡔ한국모더니즘시연구ꡕ, p.111) 1930년대의 극단적인 ‘사물시’라고 할 수 있고, 임화의 「적」과는 대극에 놓인다. 정지용의 「폭포」를 사물시로 간주하더라도 그 사물이 어떤 관념을 운반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즉 관념(이데올로기나 휴머니즘 등)은 결여되어 있다. 청정 무욕의 철학을 암시한다는 것은 독자의 해석일 따름이고, 독자의 해석도 해석을 가능하게 했다는 의미에서 운반된 관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시에서 모든 관념은 어떤 형태든 물리적 존재에 실려 운반되어야 한다”는 명제는, 시에서의 관념 자체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과 물체와의 공존을 전제한 것이다. 정지용의 시에서 관념이 없고 물체만이 존재하지만, 이러한 순수성을 극단으로까지 밀고 나가면 그 물체가 가지는 의미마저 거세될 수 있음을 암시하는 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사물시의 궁극적 형태를 ‘순수시’라고 하더라도 순수성이 그러한 시의 정당성을 얻을 수 있을까는 의문이다.     [3]   수퍼비니언스의 원리를 기호화한 명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관념, 물리적 존재, 실려 운반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먼저 알아야 한다. 관념은 생각하고 믿고 의지(意志)하는 모든 사고(思考), 개념, 사상, 이데올로기를 의미하지만, ‘사랑한다, 그리워한다, 미워한다, 슬프다, 아프다’와 같은 감정도 포함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물리적 존재’의 의미는 자연과학의 개념을 빌려와야 하겠지만, 여기서는 언어가 가지는 지향성(志向性) 특히 외재적 지향성과 물리성(物理性)을 두고 하는 말이다. ‘실려 운반된다’는 말은 관념이 물리적인 존재에 부수(附隨)된다, 또는 관념이 물리적인 것에 붙어서 따라간다는 뜻이다. 종래의 비유나 상징도 이 범주에 속하나 더욱 넓은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시인은 무엇인가를 느끼고 상상하고 생각하여 그것을 언어로 표현한다. 그 ‘무엇’이란 자기가 과거에 체험하고 인식한 물체인 경우도 있고, 어떤 사건(사태)인 경우도 있고, 어떤 관념(자본주의, 공산주의, 인권, 이성, 존재, 고독 등)인 경우도 있다. 그런데, ‘무엇’이란 시인의 의식이 그것으로 향하고 있음을 나타내며, 그 무엇으로 향하고 있음을 지향성(志向性, intetionality)이라고 말한다. 시쓰기도 일종의 지향적 행위다. “길바닥에 마른 풀잎이 떨어져 있다”(문덕수, 「마른 풀잎」에서)에서는 ‘풀잎’으로 지향하고 있으며, “많은/ 태양이/ 죄그만 공처럼/ 바다 끝에서 튀어오른다”(문덕수, 「새벽바다」에서)에서는 ‘태양’을 지향하고 있다. 시에서 시인의 의식이 풀잎이나 태양으로 지향한다는 것은 결국 풀잎이나 태양을 표상(表象)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시에서 어떤 관념을 지향한다면 그 관념은 물리적 존재에 실려 운반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언어의 ‘물리성’이란 무엇이냐 하는 문제가 일어난다. ‘물리성’이란 무엇일까. 언어가 어떤 물체를 지향하여 그 물체를 표상할 수 있음은, 그 언어에 ‘물리성’(物理性)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즘에서는 사물 이미지를 강조하지만, 그 때의 사물 이미지도 언어의 외재적 특징과 더불어 그 물리성을 전제로 한 것이다.(이미지스트들은 물론 그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시라고 하더라도 따지고 보면 ‘잉크를 묻힌 글자꼴’에 지나지 않고, 글자 그 자체에 무슨 물체에의 지향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물체에의 지향성은 인간이 읽고 해석하여, 시텍스트 바깥에 있는 물체와 연결을 시켜주는, 다시 말하면 해석에 의하여 물리적 지향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시텍스트 자체는 본래적 지향성을 가지지 않고 의사적 지향성(擬似的 志向性, as-if intentonality)을 갖는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 언어가 가지는 물리성은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 일찍이 비트겐슈타인(L.J.J. Wittgenstein)이 말한 대로, 그 언어가 어떻게 사용되는가, 하는 그 사용법이나 용도, 또는 기능을 통해서 물리성을 인식할 수 있다. “유리상자 속에 다리를 포개고 앉아서/ 유행 스타일의 원피스를 입은 마네킹은”(문덕수, 「마네킹에서」에서)에서의 ‘마네킹’의 물리성은, 백화점 같은 진열장에 세워놓고 유행복이나 장신구를 입혀 사고 싶은 욕망을 유발하는 인체 모형이라는 용도나 기능에서 알 수 있다. “라이터, TV, 휴대전화, 종이” 등의 물리성도 그 용도나 기능을 생각해 보면 그 물리성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모든 물체의 물리성은 기존의 관념에서 벗어난 탈관념의 물리성, 또는 날 것의 무리성이 중시되어야 한다. 1910년대 무렵 일어난 ‘이미지즘’은 “명확한 이미지”, “정확한 사물의 언어” 등을 강조했다.(졸저, ꡔ한국모더니즘시연구ꡕ, p.47) 이미지즘에서 강조한 이미지는 ‘언어 이미지’이다. “정확한 사물의 언어”라고 했지만, 이미지스트들은 언어가 가지는 외재적 특징이나 물리성에 대한 이해도 없이 이런 어구를 막연히 사용했다. 특히 “정확한 사물”이라고도 했는데, “정확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들은 분명한 논리를 제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영미계열의 모더니즘을 다 안 것처럼 이 땅에 소개․도입되었다. 시의 언어에는 외재적 특징과 물리성이 있다. 그러한 외재적 특징과 물리성은 “정확한 사물의 언어”라는 이미지즘의 모호한 개념을 어떤 관점에서든 분명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벽이 걸어온다. 늙은 홰나무가 걸어온다 머리가 없는 인형이 걸어온다 (어디서 오는 것일까) 노트르담 사원의 회랑의 벽에 걸린 청동시계가 밤 한 시를 친다 ― 김춘수, 「벽이」에서   “벽”, “홰나무”, “인형” 등은 물체어이지만, “벽이 걸어온다”나 “늙은 홰나무가 걸어온다”는 대목은 현실에서는 전혀 그 실현이 가능하지 않는 물체이다. “향수병이 몸을 옴츠리더니 벽을 민다”(김춘수, 「향수병」에서)도 그렇다. 벽, 홰나무, 인형 등의 언어가 가지는 왜재적 특징이나 물리성은 이 시에서는 현실의 물리적 가능성이 박탈되어 무의식 세계나 관념세계에서의 실현 가능성 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김춘수는 시집 ꡔ꽃의 소묘ꡕ(1959) 무렵부터 무의미시의 징조를 보이고 있었던 것 같다.) 다시 말하면 물체어의 외재적 특징이나 물리성의 현실적 실현 가능성이 없을 경우, 이처럼 이미지들을 “명확한 이미지”나 “정확한 사물의 언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남향 영창을 열고/ 볕을 쪼이고 앉다”(김윤성 「신록」에서)와 같은 시구의 외재적 특징과 물리성은 현실에서의 실현 가능성을 갖는다. “봄 바다는/ 유난히 반짝이다”(박명용, 「보길도․2」에서)도 그렇다. 이 경우 시의 언어 이미지와, 시텍스트 바깥의 사물로서의 물리적 실현 가능성이 부합할 때 “정확한 사물의 언어”라고 규정할 수 있지 않을까. “시에서 모든 관념은 어떤 형태든 물리적 존재에 실려 운반되어야 한다”는 수퍼비니언스의 원리에서, 물리적 존재나, 그것에 실려 운반되어야 할 관념은 가급적 현실에서 실현 가능성이 있는 것이면 좋을 것 같다. 따라서 무의식 속에서의 실현 가능성을 전제로 한 무의미시의 이미지는 수퍼비니언스의 명제에서 는 멀어지는 것 같다. 이와 같이, 수퍼비니언스의 원리는 이미지즘의 개념을 명확하게 규정해 준다.     [4]     이 명제는 세 가지의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형식주의는 역사주의를 받아들이고, 역사주의는 형식주의를 받아들일 것을 시사하며, 이것이 오늘의 한국시의 위기를 처방할 한 방안이 되지 않을까. 둘째, 현실에서의 물리적 실현 가능성이 없는 형식주의나, 물리성이 없는 관념위주의 역사주의 시의 성격을 분명하게 규정해 준다. 이런 점에서 실험적 언어주의나 극단적 관념시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셋째, 이 명제는 시사적(詩史的) 기준 설정에도 기여할지 모른다. 그리고 이 명제는 내 나름으로 정립한 명제일 따름이다. 이 원리와 더불어 시의 대상을 1, 2, 3과 같은 추상적 기수(基數)로서 개개의 구체성을 사상(捨象)하고 조직할 수 있는 ‘집합적 결합’도 최근에 정립한 나의 시의 한 방법임을 밝혀 둔다. 다음 기회를 기다리겠다.     문덕수   * 靑馬 柳致環 선생의 추천으로 ꡔ현대문학ꡕ지를 통해 등단(1955) * 제 12차 세계시인대회 집행위원장 *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장 역임, 명예회장,  * 홍익대 교수(명예교수),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 역임,  *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현) *수상 :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서울특별시 문화상, 문화훈장, 예술원상 * 저서 : ꡔ한국모더니즘시연구ꡕ, ꡔ現實과 휴머니즘文學ꡕ, ꡔ文學一般의 理解ꡕ, ꡔ시론ꡕ,           ꡔ금붕어와 文化ꡕ, ꡔ世界文藝大辭典ꡕ』(편저) * 시집 : ꡔ線.空間ꡕ, ꡔ새벽바다ꡕ, ꡔ다리놓기ꡕ, ꡔ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ꡕ, ꡔ사라지는 것들과의                       만남ꡕ, ꡔ꽃잎 세기ꡕ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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