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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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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생각 속의 여우 / T․휴즈 댓글:  조회:1548  추천:0  2019-02-04
생각 속의 여우 T․휴즈   나는 이 한밤 순간의 숲을 상상한다. 무언가 살아 있다. 시계의 고독과 내 손가락이 움직이는 이 백지 옆에서.   창 밖엔 별 하나 보이지 않는다. 비록 어둠 속에서 깊어졌으나 더욱 가까워진 무엇인가 고독 속으로 들어오고 있다.   차갑고 검은 눈(雪)처럼 섬세하게, 한 마리 여우의 코가 잔가지와 잎을 건드린다. 두 눈이 하나의 동작을 대신한다, 그리고 또 그리고 지금,   흰 눈 속에 선명한 자국을 찍는다, 나무들 사이에서 그리고 조심스럽게 한 절룩거리는 그림자가 그루터기 옆을 느릿느릿 지나간다 그리고 숲 속의 빈터를 대담하게 가로질러 나온 몸뚱아리의 움푹 둘어간 공동(空洞) 속에서, 눈 하나가, 넓어지고 깊어지는 초록 하나가, 휘황하게 골똘하게 제 일을 시작하고 있다   문득 여우의, 코를 찌르는 악취와 함께 그게 어두운 머리 속으로 들어올 때까지, 창에는 여전히 별이 보이지 않는다. 시계는 똑딱거리고 백지가 채워진다. (글이 쓰여진다)     *테드 휴즈(Ted Hughes, 1930~1998 : 영국의 시인.극작가.비평가). 시작법(한기찬 역,청하출판사,1993)   [감상] 여우의 움직임을 통해 시 창작 과정을 밝히고 있는 이 시에서 1연은 한밤중 화자인 나는 시상을 정리하기 위해 숲의 모습을 생각한다. 그 숲속에는 시인 이외 다른 무언가가 살아 있다. 방안에는 시계의 째깍거림 이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고요한 적막이다. 적막 가운데 화자는 백지를 펼쳐 놓고 그 위에 손을 올려 놓고 있다. 2연에서는 화자가 숲속 광경을 마음 속으로 상상하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창문을 통해 별을 볼 수 없다고 하는 그는 별과 같이 멀리 떨어져 있는 상상의 대상이 아니라, 보다 가까이에 있는 대상을 느낀다. 그것은 어둠 속에 보다 깊이, 보다 가까이에 위치해 있다. 고독 속에서 시상은 떠오르는 법. 3연은 보다 가까이 있는 그것은 다름아닌 여우다. 여우는 코로 나뭇가지와 나뭇잎을 살며시 만진다. 여우의 코가 나뭇잎과 나뭇가지에 닿는 모습이, 흡사 어두운 밤에 눈이 살포시 내리는 것 같다고 한다. 시상이 매우 부드럽게 착상되는 순간이다. 여우는 두 눈으로 자신의 움직임을 본다. “지금”이라는 말이 계속 반복된 것은 여우가 한 발짝 한 발짝 발걸음을 옮기는 것을 보여 준다.    
11    환유적으로 시 쓰기/윤석산 댓글:  조회:1697  추천:0  2019-02-04
[공유] 환유적으로 시 쓰기/윤석산   3) 환유적으로 시쓰기       자아 이제 서정적 줄거리를 완성했으니 환유적 어법으로 시를 써보기로 할까요? 지금 쓰자면 ‘나중에 쓰지요’라고 말할 테니까 저랑 함께 써보기로 합시다. 어떤 것을 쓸까요? 앞에서 시인이 직접 나서서 이야기하는 1인칭 화제로 쓴 경우는 예문을 통해 확인했으니 3인칭 화제로 써보는 건 어떻겠어요?  대답이 없으니 제 경우를 예로 들겠습니다. 어느 날 글을 쓰다가 피곤해 차를 몰고 해안도로에 있는 카페에 갔습니다. 커피를 시켜놓고 창 밖으로 펼쳐지는 바다 풍경을 보면서 피로를 풀고 있는데 옆자리에 앉은 커플 가운데 한 사람이 ‘자기 말 속에는 또 다른 말이 있는 것 같아’라고 하더군요.   순간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대요. 그래서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말 속’에 말이 있다면 ‘말 밖’에도 말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안’과 ‘밖’이 있다면 말은 입체적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공간이라면 사람도 살고, 도시도 있고, 빌딩도 있고, 구멍가게도 있고, 그 구멍가게 안에는 사탕항아리도 있을 테고, 그 아래에는 지하실도 있을 수 있고, 밤마다 고양이가 계단에 올라와 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더군요.   그러다가 언어철학(言語哲學)을 공부하느라고 읽은 책들의 구절들이 떠오르대요. 그러니까, ‘언어는 이데올로기’라든지, ‘언어는 존재다’라든지, ‘존재에 이르는 통로’라는 말들입니다. 그리고 ‘이데올로기는 폭력을 낳는다’는 말도 떠오르대요. 평소 이 지구상의 모든 전쟁은 이데올로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말이 떠오른 모양입니다. 그러더니 다시 언어가 존재라면 화살로도 만들 수 있고, 고래로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대요. 그 때 아마 바다 저편에 여객선이 지나가고, 그 여객선을 고래의 모습으로 바꿔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종업원에게 종이를 달라고 해 다음과 같이 메모하기 시작했습니다.   ①글을 쓰다가 피곤해서 해안도로 드라이브를 하고 카페에서 차를 마심 ②옆자리의 젊은 커플이 ‘당신 말 속에는 또 다른 말이 있다’고 말함. ③순간 말 속에 말이 있다면 언어는 입체적 공간이고 사물이며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음. ④그리고 또 언어는 이데올로기라는 생각이 떠올랐음 - 이 세상의 모든 분쟁은 언어로부터 시작됨…   뭐, 이런 식으로 시의 줄거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집에 와서 어떻게 쓸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3인칭 지향형으로 쓰기로 했습니다. 물론 어느 지향형으로도 쓸 수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유형을 택한 것은 언어에 대한 제 느낌이나 말 속에는 말이 들어 있으니 말할 때 상대에게 오해받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교훈보다 언어 그 자체의 속성을 드러내고 싶어서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화제 지향형은 자기감정을 자제하면서 객관적으로 말하기에 적합한 유형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줄거리를 검토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가운데에서 제일 먼저 제외한 것은 ①번이었습니다. 이 모티프는 과정을 나타내는 로서, 이들을 그냥 놔둘 때는 서사적 산문이 되기 때문입니다.   ‘동적  모티프’가 뭐냐구요? 이 용어는 러시아 형식주의자인 토마쉐프스키(B. Tomaševski)가 쓴 것으로서, 그는 이야기를 이루는 최소 단위인 모티프의 유형을 , , , 로 나눕니다. 그리고 고정 모티프는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단위로서 탄생이나 죽음 같은 것을 이야기하는 단위를 말하고, 동적 모티프는 ‘뛰었다’든지 ‘결혼했다’와 같이 정황(情況)의 변화를 알리는 단위를 말합니다. 그리고 자유 모티프는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갈 때 날씨가 화창했다든지 음악을 들으며 갔다는 식으로 생략해도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 단위를 말하고, 정적 모티프는 ‘그녀는 아름답다’와 같이 묘사하는 단위를 말합니다.   하지만 완전히 동적 모티프를 배제하면 화자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를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능한 축소하고, 자유 모티프와 정적 모티프를 이야기할 때 포함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흔히 시를 평할 때 ‘서사성이 강하다’든지 ‘산문적’이라는 소리를 듣는 작품들은 이들을 그냥 놔두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을 다 뺀 다음 줄거리에 따라 쓰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쭉 쓰다가 보니까 주제가 잘 드러나지 않대요. 그리고 어떤 곳은 너무 장황하고, 설명으로 흐르는 곳이 생기데요.  그래서 주제에 해당하는 ‘말 속에는 말이 있다’와 ‘말 밖에도 말이 있다’라는 구절을 적당히 바꾸면서 각 연마다 배치했지요. 그리고 줄줄이 이어지는 곳을 잘라 연(聯)을 바꾸면서 자른 빈 틈에서 독자들이 상상하도록 만들어 작품으로 완성했습니다. 한번 보실래요?   말 속에는 말이 있고 말 밖에는 말이 있다.   말과 말 사이에는 빌딩이 있고  빌딩과 빌딩 사이에는 구멍가게가 있고 구멍가게 한 가운데에는 꿈을 담은 사탕 항아리가 있고 그 뒤 쪽 지하실 계단 아래에는 빨간 장화를 신은 고양이가 있고 그 고양이는 밤마다 층계 위에 올라와 밤새도록 운다.   말과 말 사이에는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는 숲이 있고 발랑발랑 뒤집히는 물푸레나무 이파리들 뒤엔 명털 뽀얀 소녀들이 있고 깔깔대는 그 소녀들 웃음은 화살이 되어  산등성이를 달리는 사슴 정갱이를 꺼꾸러뜨린다.   그러나  지상의 말과 말 사이에는 또 다른 말이 있고 또 다른 말 내부에는 눈부신 이데올로기가 있고  이데올로기는 도시 상공에서 펄럭이는 깃발이 되고 펄럭이는 깃발은 저를 위해 다른 말들을 공격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간혹 전쟁터에서 혼자 죽는다.   말과 말 사이에는  쓸쓸히 비가 내리는 바다가 있고 비 내리는 바다에는 죽은 고래 한 마리가 있고 그 고래는 밤마다 제 짝을 찾아 울며 지구 저쪽으로 떠나고  그래서 지상의 우리 사랑은 언제나 슬프다.         -필자, 「지상의 말과 말 사이에는」   어때요? 재밌지요? 환유적으로 시 쓰는 방법을 정리해드릴 테니 여러분들도 앞에서 만든 줄거리를 가지고 작품 한편을 완성해보세요.   □ 환유적으로 시 쓰기 순서   ① 화제가 떠오르면 자유연상(自由聯想)을 하면서 시상을 풍부하게 만든다. ② 시상을 검토하면서 지향성을 결정한다. ③ 시적 인물과 배경, 어조 등을 결정한다. ④ 줄거리를 검토하면서 고정모티프와 동적 모티프를 제거하거나 자유모티프와 정적 모티프에 포함시키면서 이야기를 만든다.  ⑤ 주제에 해당하는 모티프를 군데군데 배치하여 주제를 강화하고, 모티프 단위로 연을 구성하면서 작품을 완성한다.   동적 모티프를 어떻게 약화시키느냐구요? 아, 그에 대한 설명을 빠뜨렸군요. 흔히 시의 제재로 택한 화제에 과거의 이야기를 오버랩(overlap)하거나 몽타주(montage)하는 방법을 쓰지요. 다시 예를 들어볼까요? 어떤 사람이 쓸쓸해서 하루 종일 방황하고 아래와 같은 시적 줄거리를 만들었다고 합시다.   ① 그녀가 떠난다게 해서 항구로 갔다. ② 하루 종일 밀려오는 파도 소리와 갈매기의 울음을 들으며 방황했지만 여전히 쓸쓸했다.  ③ 해가 지고, 어두워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 포장마치에서 소주를 마셨지만, 여전히 쓸쓸했다.   만일 이 이야기를 차례대로 쓴다면 틀림없이 ‘산문적’이라든지 ‘서사적’이라는 평을 들을 겁니다. 그러므로, 아래와 같이 마지막 모티프인 포장마차에서 술 마시는 장면에 그녀가 떠나는 장면을 비롯하여 바다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겹쳐 놔야 합니다.   차가운 소주잔 아래 항구로 가는 사내가 보인다. 파도는 밀려오고, 갈매기는 울고 차가운 소주잔 아래 바바리코트 깃을 여미며 돌아서는 여인이 보인다. 여객선은 부우부우 고동을 울리며 항구를 빠져나가고 차가운 소주잔 아래 늦가을 저녁 혼자 술마시는 사내가 보인다. 술잔 밑으로 저녁 해가 지고, 포장마차 비닐 포장이 펄럭이고…   뭐, 이런 식으로 겹쳐 놓거나 비유하면 지나간 일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아, 그럼 써봅시다. 나중에 쓰겠다구요? 한 마디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자기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은 그럴 능력이 없거나 운이 없어 그런 게 아닙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길러야 할 기초적인 능력을 내일 하지 모레하지 미루고, 그렇게 미룬 것들이 누적되어 그렇게 된 겁니다. 이 강의가 끝나기 전에 시인이 되고 싶은 분들은 어서 쓰기 시작하세요. 자아, 씁시다. 시자악!  
10    낭만주의에서 고답파, 상징주의로/ 민 용 태 댓글:  조회:1729  추천:0  2019-02-04
낭만주의에서 고답파, 상징주의로     민 용 태(고려대 명예교수.스페인 왕립 한림원 위원)   1. 그리움의 미학   “산 너머 저 산 너머 어느 먼 곳에/ 행복이 산다고 사람들은 말 하네”, 독일의 시인 카알 붓세(Busse,1872-1918)의 이런 그리움이 낭만주의 냄새이다. 초기 낭만주의의 자연과 원시인에 대한 그리움, 빅또르 위고의 동양인에 대한 향수가 소위 ‘이국취향(exoticism)’의 유행을 낳았다면, 후기 낭만주의와 상징주의는 보다 깊은 형이상학적 우주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으로 메아리친다. 오르떼가 이 가셑(Ortega y Gasset)은 토인비의 ‘세계사’를 언급하면서, 인간의 그리움에 대한 철학을 말한다. 사람은 애초에 어떤 크막한 우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 따라서 시인들은 늘 그 잃어버린 원초적 고향에 대한 향수를 느낀다고 말한다. 프로이트가 태초의 태아의 자궁 속 행복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욕망을 죽음의 욕망(Thanatos)으로 본다. 이들 사고 또한 인간에게는 어떤 잃어버린 원형적 상태로 되돌아가고 싶은 그리움이 상존한다는 생각이다. 초기 낭만주의에서 떼오필 고띠에(Théophile Gautier,1811-1872)의 고답파(Parnasse)에 이르는 이국 취향(exoticisme)의 문학은, 고띠에의 주장처럼 시간과 공간에서 먼 것이 아름답다는 시각을 발전시켰다. 이 아름다운 것, 즉 먼 것, 먼 곳은 시인의 끝없는 그리움이 향하는 지표이다. 그들은 시간상의 먼 시대, 자연과 원시 속에 호랑이와 사자의 원초적 힘이 용솟음치는세계와 전설적인 중세를 그리워했다. 동시에 공간적으로 먼 이짚트나 동양을 늘 그리움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 그리움의 지표는 낙타를 타고 사막을 헤매는 아라비아인들부터, 만리장성을 넘어 이태백이 달을 보고 시를 읊조리는 당 나라까지 갔던 것.   “중국 시인들은 오래된 예절에 익숙해 있지. 그래서 이 태백도 이를 쓸 때는 책상 위에 마가리트 꽃병을 놓고 썼느니...”   1865년 7월 15일, ‘고답파’ 그룹이 형성되던 때에 쓴 고티에의 이런 중국 타령은 이들의 이국 취향이 단순한 그리움의 차원을 넘어, 동양에 대한 호기심과 지적 관심으로 기울고 있음을 시사한다. 실제 이 시기로부터 중국과 일본의 시가와 예술은 서양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엑조티시즘은 현실을 추한 것으로 보았던 낭만주의자들이, 한편으로 적극적인 이상을 추구하고, 또 다른 한 편 소극적으로는, 먼 곳으로의 도피를 꿈꾸었던 성향에서 비롯된다. 이들의 이상주의는 자유와 조국, 여성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미학적으로는, 추하고 싫증나는 현재나 현실보다는, 멀고 아름다운 과거, 꿈같이 먼 나라의 이야기 속에 그들이 추구하는 심미적 세계가 오롯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극도의 상상의 자유를 꿈꾸었던 낭만파 시인들의 고향은 그 고재 면에서 엑조티시즘을 낳았다. 즉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는 꿈의 세계, 낮보다는 밤, 눈에 보이는 오늘보다는 먼 어제의 세계, 손에 잡히는 여기보다는 닿을 수 없는 먼 고향을 그리워하는 시풍(詩風)이 그것이다. 이들은 그 먼 곳에 자유롭게 그들이 꿈꾸던 아름다움의 이상향을 그렸다. 따라서 낭만주의자들이 꿈꾸던 아라비아나 중국, 일본의 예술은 그것이 원형 그대로 이해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꿈의 색깔로 얼룩진 안타까운 그리움의 지표였을 뿐. 그러나 낭만파들의 먼 곳에 대한 그리움은 곧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 플라톤의 ‘이데아’의 이미지에 가까운 어떤 우주적 원형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으로 변한다. F. 슐레겔은 말한다.   “낭만주의는 전진하는 우주의 시(詩)다. 그 사명은 단순히 시의 색다른 장르를 통합하여, 시를 철학이나 수사학과 결부시키는 일이 아니다. 낭만파 시가 사명으로 알고 의도하는 것은, 시와 산문, 독창성과 비평, 예술과 자연을 때로는 혼합하고, 때로는 융합하여, 시를 생기 있고 친근하게 만들어, 인생과 사회를 시적으로 만들고, 재치를 시화하고 예술의 재형식을 여러 가지 내용이 풍부한 형성소재로 충일 포화시키고, 또한 유머를 불어넣음으로써 활기를 부여하는 일이다. 낭만주의 시는 모든 시적인 것을 포괄한다. 그 범주는 엄청나게 복잡한 예술의 소우주로부터, 문학 소년의 꾸밈새 없는 노래에서 내뿜는 한숨과 입맞춤에까지 이르고 있다. (중략 )낭만주의 시는 무한하며 낭만 시만이 자유이다. 시인의 자의는 어떠한 법칙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최고 원리로 삼는다.” 우선 낭만주의의 상상의 자유는 절대적이다. 그것은 독일의 엑조티시즘이 선호하는 이딸리아에 대한 향수나 르네상스 예술에 대한 그리움을 넘어, 우주에 대한 무한한 동경으로 나아간다. 문학이나 예술이 대상으로 삼는 개개의 자연이나 현실, 사랑은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린 크막한 우주의 열쇄를 푸는 끄나풀들이다. 그 우주는 무한한 만큼 개인의 상상력에 또한 무한한 자유를 허용한다. 개인주의, 주관성에 뿌리한 낭만주의는 내가 꿈꾸는 환상세계, 내가 생각하는 우주에 대한 창조적 사고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신(神)은 죽었다!”라고 한 니체 이전에, 낭만주의는 크리찬이즘의 유일신(唯一神)적 우주관을 흔들어 놓았다. 개인감정을 중시하고 개성을 추구하는 낭만주의는 궁극적으로 사람 개개인, 시인 개개인이 우주를 생각하고 모시는 “사제(司祭)”가 된다. 카알 슈미트(Carl Schmitt)는 “낭만주의와 낭만적 재현상의 가장 밑바탕에는 사적(私的)인 사제를 모시는 현상이 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그 때까지는 신을 받드는 주체가 성직자였다면 이제 일반 개인으로 믿음의 주체가 넘어는 오는 것. 그러나 그 낭만주의가 모시는 신은 독재(獨裁)자가 아니라 무한한 자유와 가능의 신이다. 서방 세계에서 우주나 초월적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신이였다면, 낭만주의로부터는 운명과 귀신, 요정 등, 불가사이의 현실들이 현상 세계의 저 너머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 때로부터 우주는 그야말로 형언할 수 없는 신비의 베일을 쓰고는 시인들을 끝없이 유혹한다. 따라서 낭만주의 시인들이 막연한 것을 동경하고, 꿈, 모험, 동화, 마술, 마약, 알코올, 도취의 상태로 접근하려고 하는 초의식(超意識)적 노력 또한 어떤 잃어버린 낙원이나 우주에 대한 그리움의 소산이었던 것. 낭만주의 시인에게 늘 현실의 삶은 천국에서 추방당한 이방인의 설음이 아우른다. 노발리스 또한 자신을 이방인으로 본다. 추위와 피로에 쌓인, 그대 이방인(Fremdling)이여, 이 하늘이 그대에게는 낯설 뿐이겠지-- 그대 고향에서는 보다 따스한 바람이 불고 옛날에는 젊은 가슴 한층 꿈에 부플었으리.   고향의 들판에는 항상 봄의 입김이 빛나는 삶의 씨를 뿌려주지 않았던가? 늘 평화가 굳게 자리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리고 한 번 싹텄던 것은 반드시 꽃이 피곤 했었지?   아, 부질없이 무언가를 찾아 해매는 그대여-- 저 천상의 나라는 이미 멸망하였나니-- 아무도 모르리, 그 오솔길, 영원히 광막한 대양에 묻혀버린 그 길.   노발리스는 항상 봄이 살아 숨 쉬는 평화로운 고향을 꿈꾼다. 고향으로 가는 오솔길은 이미 바다와 파도와 현실이라는 세상 풍파에 깊이깊이 묻혀버렸다. 잃어버린 천국에 대한 슬픔과 그리움은 낭만주의로부터 상징주의 시인들에게 이르는 긴 긴 안타까움의 이정표들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이 코와 피부로 느껴지던 이상향을 꿈꾸었던 것이 보들레르(C.Baudelaire,1821-1867)가 아니었던가. 그는 “교감(Correspondences)”에서, “어린애 살처럼 싱싱하고/오보에처럼 부드럽고, 풀밭처럼 푸른 향기가 살아 숨쉬는” 영원한 고향을 꿈꾼다. 자연의 생명력이 그 원형으로 숨쉬는, 때 묻지 않은 우주의 주소를, ‘숲’은 ‘이따금 어렴풋한 말’들의 ‘교감’을 통하여 알려준다. 그래서 자연은 그에게 하나의 신전이며 그 ‘상형문자’이며, 그 속에서 시인은 우주의 크막한 숨소리를 듣는다. F. 슐레겔은 “모든 인간에게는 무한한 것에 대한 그리움이 개발되어야 한다” 고 말한다. 이런 충고는 낭만주의와 상징주의 시인들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받아드려졌다. 슐라이에르마하(Schleiermacher)는 동경이 모든 종교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종교뿐만 아니라 모든 철학과 시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신에 대한 동경뿐만 아니라, 무한한 우주, 어떤 아름다움과 생명성의 근원에 대한 동경과 열망, 그리고 절망이 현대 시정신의 바탕이 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불교적 깨달음에 대한 관심이나 사물의 본 모습에 대한 그리움, 또 그 본 모습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때 묻지 않은 언어에 대한 탐구가 말라르메로부터 발레리에 이르는 순수시의 몸부림이 아니었겠는가. 낭만주의로부터 현대시는 태어난다. 그것은 이성(理性)적이고 관념적인 사추의 방법보다는 동화같은 어린애스러운 동경이나 그리움이 삶이나 아름다움의 원형에 접근할 수 있다는 새로운 믿음의 출발이기도 하다. 플라톤으로부터 우리는 우리가 보고 경험하는 현실 세계는 어떤 보이지 않는 틀의 모조품이라는 직감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그 잃어버린 참 세계를 감지하기 위해서는, 이성보다는 감성, 감성보다는 꿈, 자유로운 상상과 환상을 통하여 접근이 더욱 용이하다는 생각을 현대는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현실적 사고보다는 그리움이, 눈 뜨고 보는 세상보다는 눈 감은 제3의 눈이 시인이나 철학자에게 보다 참스러울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 주었다. 낭만주의의 그리움은 엑조티시즘처럼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먼 것에 대한 동경에서 출발했다. 인간의 역사와 지리 속에서, 멀고 아득한 것에 대한 미적 가치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런 사고는 이제, 낮보다는 밤, 깨어있는 것보다는 꿈꾸는 것, 똑똑한 것보다는 흐리 멍텅한 것, 확실한 것보다는 희미한 것이, 그 자체로 훨씬 아름답고 참에 가깝다는 것을 배웠다. 후기 낭만주의에서 상징주의에 이르는 시적 에스프리의 깊어짐은 이런 원초적 그리움의 애틋함이 더욱 진솔해지면서 나타난다. 말라르메로부터 시인은 이미 어느 사물도, 그 사물을 감지하는 느낌도, 그 느낌을 표현하는 언어도 시인이 꿈꾸는 원형적 아름다움의 세계에 다다르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더 나아가서, 시가 표현하는 확실한 시어일수록, 사람들의 관습이나 일반적 편견에 길들여진 순수하지 못한 언어의 조작이 만들어낸 허상들임을 깨닫는다. 그런 쉬운 시, 확실한 시어, 비순수한 언어의 시는 첫째, 확실한 만큼 그리움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아름답지 못하다. 둘째, 참스러운 우주적 비젼을 마치 자기가 다 아는 신인 것처럼 확실히 표현하는 그 자체가 이미 엄청난 위선이다. 따라서 말라르메의 “천지 창조의 첫날같이 순수하고 성스러운 모습”을 구현할 수 있는 언어에 대한 그리움은 일상적 언어에 대한 끝없는 부정으로 나타난다. 그의 시와 시어는 우리가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어떤 형태도 거부한다. 그는 현실을 경멸하듯 현실적 언어를 거부한다.   나는 도망친다. 그리고 누구나 삶에 등을 돌리는 모든 창에 나는 매달린다. 그리고 축복을 받아, ‘무한’의 순결한 아침이 금빛으로 물들고 영원한 이슬로 씻겨 진 그 창 유리에 나를 비추니, 나는 천사다! 그리고 나는 죽는다. 그리고   --그 유리가 예술이건 신비로움이건-- 내 꿈을 왕관으로 쓰고 다시 태어나리라 ‘아름다움’이 꽃피는 전생의 하늘에!   --‘창(窓)’에서   말라르메의 시학은 끝없는 언어 파괴를 통해 ‘창’을 닦음으로서 ‘전생의 하늘’에 다시 태어나고 싶은 안타까움의 몸부림이다. 그의 시의 매력은 바로 그 시어의 모호함, 희미함 자체이며, 그것은 동시에 불교의 깨달음을 위한 수행처럼, 다시 죽지 않고 다시 태어나지 않는 초월적 아름다움의 세계를 향한 그리움의 철저한 고행 행위이다.     2. 예술을 위한 예술 : 탐미(眈美)주의와 데까당(頹廢主義)   19 세기인들의 현실에 대한 혐오는 “그리움의 미학”을 낳고 “예술을 위한 예술”에 탐익하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라는 신화가 유효했다면, 이제 예술은 자연적인 것도 아닌, 인간적인 것도 아닌, 플라톤이 이데아의 세계에 가까운 지고의 이상 현실의 구현으로 생각된다. 자연이나 현실은 인공(人工)이나 예술보다 아름답지 못하다는 생각이 이들에게 지배적이다. 휘슬러(Whisler)는 말한다. “자연이 항상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예술적으로 맞지 않은 주장이다. 비록 인반적으로 자연스럽다는 것이 무조건 좋은 것, 옳은 것이라는 사고가 늘 지배적이어왔지만, 자연이 옳은 경우는 극히 드물다. 따라서 차라리 자연은 늘 옳지 않다고 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하나의 그림으로 그릴만큼 완전한 조화를 가진 사물들의 모습이란 흔치 않은 법.” 이런 비슷한 사고의 뿌리는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있어왔다. 희랍의 철인이 예술은 자연을 완전한 방향으로 모방한다고 이야기했을 때부터, 이미 자연은 완전하지 않을 수 있음을 염두에 둔 생각이었을 법하다. 이제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라는 속박으로부터, 인간 현실의 모방이나 도덕적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어 한다. 이것들보다 더욱 차원 높은 영원한 아름다움의 이상향을 인공적으로 구축하려 한다. 호라티음으로부터 오랜 전통을 가진 예술의 효용성, 즉 예술은 교훈적인 유용한 내용을 재미있게 표현한다는 생각이, 이제 그 도덕 선생 같은 위선자적 탈을 벗고 지고한 쾌락주의자로 변신한 것도 이들 “예술을 위한 예술”을 사는 작가들의 모습이었다. 예로부터 예술은 아름답고 재미있으면 된다는 생각이 없어온 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사고가 적극적으로 하나의 미학과 생활할 방식을 택한 것은 19 세기 중반 이후에 나타난 현상이다. 칸트의 “판단 비판”에서의 미적 판단의 무관심성(無關心性=desinterestness)은 “예술을 위한 예술” 운동의 이론적 바탕이 된다. 칸트는 위 책의 14 장에서 “오직 순수한 미적 판단들만이(그 판단들이 형식에 의거한 것들이기 때문에) 가장 올바른 취향의 판단이다.”라고 말한다. 한 예술 작품이나 자연물이 아름답다고 판단되는 것은, 칸트 생각에는, 어떤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그 아름답다고 하는 판단의 대상이 된 그 “형태”에 대한 순수한(따라서 보편적인) 성찰에 말미암는다. 이런 판단이야 말로, 어떤 특별한 목적이나 이해 관계에서 나온 것이 아닌 만큼 순수하다. 칸트의 생각은 상상과 이해 사이의 어떤 특별한 관계를 설명하는데, 상상력이란 생각들을 정리하고 그 모습을 재생시키는 기능이고, 이해는 그것을 관념화시키는 작용이다. 보통의 경우 우리가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볼 때는, 우리 이미 가지고 있는 관념에 따라, “이 장미가 아름답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거기에 따른 상상력이 작용한다. 그러나 칸트의 미적 판단 개념을 따르면, 상상은 자유로워서, 상상과 이해 사이의 관계 또한 결정적인 것이 아닌, 끝없는 생각과 연상을 유도한다는 것. 어떤 미적 판단도 결국 정해 진대로 객관화되거나 관념화될 수 없으며, 상상력의 자유로운 놀이에 따라, 순수하게 주관적으로 어떤 미적 쾌감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 이것이 칸트가 “무관심성”이라고 말한 “미적 쾌감”의 성격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체험은 “이것이 장미이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식의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자유롭고 순수한 주관적 느낌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동시에 누구에서나 통하는 보편성을 갖는다. 이런 칸트의 무관심성 미학은 19 세기 이후 구라파와 미주 대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특히 심미주의, 데까당, 쿠비즘, 추상화 같은 현대 예술론에 크나큰 파문을 던진다. 그것은 예술을 위한 예술론의 발화시기 때부터 독일의 미학이 주효했음을 말해준다.   “쉴러가 부른다. 그는 그의 예술에서 날카로운 감성의 소지자이며 거의 그 자신이 시인이라고 해야 한다. 나는 쉴러파의 제자인 헨리 크랩 로빈슨(Henry Craa Robinson)을 만난다. 그의 칸트의 미학에 관한 작품은 몇 가지 대단히 강력한 사고를 제시한다. 모든 목적성이란 예술을 타락시킴으로, 아무 목적 없는 ‘예술을 위한 예술!’!그러나 예술이 목적이 없을 때 진정한 목표를 달성한다.” 윌리엄 K.윔사트는 이민간 프랑스 지성인(꽁스땅과 그의 친구 마담 드 스탤)들이 파리 로 돌아오고, 1814년 보르봉 가의 왕권 복귀로, 프랑스에는 이런 칸트의 미학을 반추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고 말한다. 소위 ‘독일 미학’이라는 이름으로 유행하는 예술 풍조는 ‘순수 예술’ ‘무관심성’ “자유‘ ’순수 아름다움‘이라는 이름으로 19 세기 초 프랑스와 영국 문단을 누빈다. 1832년에 나온 고띠에(Théophile Gautier,1811-1872)의 “초기 시(Premiéres poésies)”의 서문에서는 “이 책이 무슨 목적이 있는가? 아름다움이라는 목표 이외에는 없다.”라고 하면서, 당시 유행하던 공리주의자들, 경제학자, 산 시몬의 사회주의파들을 공격한다. 고띠에가 창안하고 발전시킨 “고답파” 시학, 특히 르꽁 드 릴르(Leconte de Lisle,1818-1964)를 비롯한 이들 시인들은 모두 예술 지상 주의자들이다. “고답파”가 주장하는 시 쓰기의 이론 몇 가지를 보자. “--시는 인간의 고통을 쏟아내는 배출구가 아니다. 결괴적으로 시는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는다. --예술은 효용성에서 벗어나야 한다.“아무 쓸모없는 것이 진정 아름다운 것이다”라고 고띠에는 말한다. --예술은 형식의 순수성만을 지향해야 한다.” 이상에서 보듯, 고답파 시인들에게 칸트의 미학의 무관심성, 무효용성, 그리고 특히 “형식의 순수성”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중요했는가를 알 수 있다. 공꾸르 형제는 칸트가 그림에 대해서 이야기한 “색깔은 부수적이며, 디자인이 중요하다”는 형식주의를 본따라, “세련미(préciosité) 와 정확성(présicion)을 시 표현의 핵심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시는 현미경으로 관찰하듯 세부 묘사에 정확성을 기하고, 그리스나 라틴어 등에서 따온 새로운 말을 만들어 내거나, 남들이 사용하지 않는 이상한 말, 중국의 당시나 이태백까지 들먹이게 된다. 고띠에의 이국취향은 우리가 앞서 이야기한 바 있다. 특히 그의 중국이나 중국시에 대한 관심, 공꾸르 형제의 일본 “우끼요에(浮世畵)”에 대한 관심은 물론 이국적인 예술에 대한 호기심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칸트가 말한 예술적 ‘느낌’의 주관적 보편성, 세계성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 고답파의 예술 이론가들은 이처럼 오래고 먼 예술에서, 오히려 변하지 않는 정확한 미적 ‘느낌’의 공통분모를 찾고자 했던 것이다. 윌리엄 K.윔사트는 영미 문학에서의 예술을 위한 예술론, 혹은 오스카 와일드의 탐미주의를 비교문학적 입장에서 자세하게 서술한다. 그는 우선 애드가 앨런 포우(Edgar Allan Poe)가 슐레겔의 드라마론(Drmatic Lectures)을 번역으로 읽고, “이상성의 기능이 시적 감정이다”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1840년 이후 쉘리가 낭만주의의 상상력을 격찬하는 시를 알게 되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문학론을 설립하게 되는데, 이것이 “문학 창작론(Philosophy of Composition)”, “시학 원리(Poetic Principle)”를 쓰게 한다고 말한다. 거기에 또한 애매하나마 칸트의 미학이 녹아있음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 위 학자가 인용한 포우의 주장들을 보자. “무덤을 넘어서 전해오는 영광스런 광휘들을 황홀하게 감지하고, 영감을 받아, 우리는 싸운다. 시간의 소산인 생각들과 사물들 사이, 수많은 짜 맞추기를 통해, 어쩌면 오직 영원의 세계에만 속할지 모르는 요소들로 이루어진 사랑스러움(Loveliness) 몇 조각을 얻기 위하여. 그 즐거움은 동시에 가장 순수하고, 가장 고양되고, 가장 강렬한 것으로, 나의 주장은 그것이 아름다움의 성찰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 아름다움의 성찰에서만이 우리는 쾌락의 승화(昇華)와 영혼의 열락을 얻을 수 있는 것. 그것을 우리는 시적 감정으로 인지하게 된다. 나는 아름다움을 만든다, 고(故)로--숭고미와 같은 의미로 말해서--나는 아름다움을 시의 마을로 꾸민다.” 이런 천상의 아름다움(supernal beauty)은 물론 일시적 센티멘탈리즘이나 열정에 나온 것이 아니며, 누구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영혼의 최대 고양 상태”에서 느껴지는 것인만큼, 감정이나 이성의 산물일 수 없다. 포우의 이런 숭고한 아름다움 지상주의는 보들레르에서 가장 훌륭한 동반자를 만난다. 프랑스 시인의 “악의 꽃(Les Fleurs du Mal)”이라는 이름부터 악(惡)을 넘어선 아름다움에 대한 믿음이 깔려 있다. 보들레르는 예술을 위한 예술은 결국 아무것도 될 수 없다고 반대 의견을 표시한다. 그것은 인간 본성을 거부하기 때문이란다. 그는 생명 중심의 높은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예술이 생명적인만큼 도덕적이라고 말한다. “시인은 단순이 인간의 본성을 넘쳐나리만큼 풍성하게 갖추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도덕주의자다.”라는 애매한 표현을 쓴다. 결국 보들레르는 기존의 선과 악의 구분에 의한 도덕률을 존중하지는 않는다. 생명과 삶의 의지로 충만한 활동이 시작활동인 만큼 그 자체가 이미 도덕적이라고 보들레르는 말한다. 악과 부패로부터 피어난 꽃도 보들레르에게는 생명적인만큼 도덕적이다. 그래서 그는 “악의 꽃의” 서시에서 “불명예스러운 도시여,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외친다. 보들레르는 자연 숭배자는 아니다. 예술이 자연의 모방이라고 믿지는 않는다. 예술은 마술적 매혹이다. 마술인 만큼 고양된 기술이며 “존재의 화장“이다. “루즈와 화장이 가장 고양된, 초자연적으로 강력한 존재의 방법에 대한 상징이다.”보들레르 또한 인공적 매혹의 천국을 꿈꾼다. 예술로 이루어진, 아름다움을 위에 두는 새로운 도덕률을 꿈꾼다. 영국의 탐미주의 또한 좁은 기존 도덕의 벽을 허물고 출발한다. 오스카 와일드가 그 대표적 작가이다. 보들레르와 같이 와일드의 인생 또한 타락과 시련과 죽음으로 점철되어 있다. 와일드는 “나는 예술을 최상의 현실로, 현실을 단순한 일종의 허구로 생각했다.”라고 고백한다. 탐미주의는 예술 지상주의인 만큼 반도덕적, 반사회적인 특성이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데 킨세이(De Quincey)의 에세이, “예술의 하나로서의 살인에 대하여”라는 책 제목만 들어보자. 시간의 변화 속에 퇴색되어 가는 아름다움을 시간의 늪에서 구원하기 위해, 한 여자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영원화 시키기 위해, 그 아름다움의 절정의 순간에 여자를 죽여, 원형 그대로의 조각으로 만든다. 영원한 아름다움으로 머물게 한다. 흔히 이런 사고가 탐미주의 작품의 바탕이 되곤 했다. 오스카 와일드는 예술이 비도덕적인 이유를 “감동을 위한 감동이 예술의 목표이다. 행동을 위한 감정이 인생이 목표이듯이.”라고 설명한다. 즉 인생의 도덕률과 예술의 도덕률이 같을 수 없으며, 예술은 인생의 도덕의 예속물일 수 없다는 것. 이렇게 해서 탐미주의는 일부러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소름 끼치게 타락한, 추한 현실을 기꺼이 소재로 삼았다. 우리의 알반 상식과는 전연 무관한 현실 속에서 예술성만으로 살아있는 “최상의 현실”을 그려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퇴폐주의나 댄디즘이 “예술을 위한 예술”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의 아름다움, 그 순수성, 진솔성에 대한 집착이다. 사회에 유용하고 도덕적인 것에는 진정한 아름다움이 없다. 현실적으로 부서지고 허물어지고 타락한 현실 속에 지고한 예술성이 오롯이 살아갈 수 있다. 이런 심미적 쾌락주의는 한 편으로 세기 말적 염세주의에 물들면서 많은 시인과 예술가들에게 전염병처럼 퍼져나갔다. 보들레르, 베를레느, 말라르메, 랭보 등 거의 모두 데까당들이다. 베를레느는 말한다. “나는 데까당스 말기의 제국이다.” 이들은 인간의 원죄와 양심의 가책을 느낀 크리스천들인 데가 있었다. 보들레르는 “사랑을 한다는 것은 악(惡)을 저지르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은 악마적 낭만주의자였다. 사랑이 악(惡)이라면, 그 최고의 기쁨은 바로 그 악을 저지른다는 의식에 있다고 했다. 창녀에 대한 동정과 연민은 데까당과 낭만주의자들에게 공통된 것으로, 우리 작가 이 상의 기녀와의 삶이나 “날개” 속의 주인공의 창녀와의 동거가 바로 비슷한 취향에서 출발한 것들이다. 이들은 기존의 도덕률과 사회, 그리고 부르조아지적 가정의 타성과 관습에 반발하는 순수한 저항아들이었다. 같은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가지고, 운명의 질곡 속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모든 고난 받은 자들에 대한, 순수한 이해와 사랑은 퇴폐주의가 개척한 또 하나의 진실이었다.  
9    인과 관계를 비틀거나 풍경 바꾸기 댓글:  조회:1299  추천:0  2019-02-04
인과 관계를 비틀거나 풍경 바꾸기    우리가 새롭게 느끼는 것은 그것이 새로운 것이라기보다  인식의 주체가 새롭게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제재들을 택하려는 것은 누구나 듣고 생각한 것들을 말할 경우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스쳐 듣기 때문에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부부간의 대화만 해도 그렇습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아내가 조금만 눈빛이 달라도 무슨 일이냐고 민감하게 묻습니다.  그러나, 결혼 후에는 아내가 힘들다고 하소연해도 그냥 스쳐 지나가기 일수입니다.  일상 생활에서 너무 자주 그런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흔히 말하던 방식을 택하지 말고, 하늘을 보며 하이얗게 웃는다든지,  한 1분쯤 움직이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는 것과 같은 낯선 방식을 택해야 합니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이와 같이 일반적인 방법과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것을  라고 합니다.    낯설게 만들기는 작품의 을 비롯하여 과  에 이르기까지 전 국면에서 시도할 수 있습니다.  아직은 발상의 단계이므로 의미적 국면에서 낯설게 만들기의 방법만 살펴보기로 하면,  크게 인관관계를 단절시키는 방법과 낯선 배경을 설정하는 방법을 꼽을 수 있습니다.    다음 작품은 인과관계를 단절시키는 방법에 의하여 쓰여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밤에 보는 오갈피나무,  오갈피나무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은  새가 되었다고 한다.  발바닥만 젖어 있었다고 한다.  - 김춘수, [눈물]에서    이 작품은 원관념을 잠재시킨 3개의 치환은유를 인과관계를 맺지 않고 병치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가 무엇을 의미하여,  왜 다음에 이야기하는지 짐작할 수 없습니다.  그 다음 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로 인해 독자들은 나름대로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들을 연결시키면서 새로운 의미들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인과관계를 설정하면 숙친한 것들이 되고 맙니다.    (밤에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의/아랫도리가 젖어 있(었)다./밤에 (사랑하다가 창문 너머로 바라본)보는 오갈피나무,/오갈피나무의 아랫도리가 (마치 사랑하는 자기들처럼) 젖어 있(었)다./(누군가 사랑한다는 것은 나와 너의 영혼의 바다를 건너는 것)/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은/새(처럼)가 되었다고 한다./(새처럼 가벼워)발바닥만 젖어 있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수정에서 오직 추가된 것은 라는 상황 하나뿐입니다.  는 원작의 경우 시에서는 과거도 현재로 표현하는 때문이고,  수정한 것의 경우는 산문에서는 현재의 일도 과거로 표현하는 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서  우리의 의식 속에 내재된 랑그(langue)를 살펴볼 때에는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도 마찬가지입니다.  랑그의 층위에서는 입니다.    우리는 흔히 , , 은 완전하게 끊어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직선은 무수한 점의 연속이고, 논리와 비인과 같은 상반된 개념은  한 쪽은 논리적이고 다른 쪽은 비논리적이라고 가정한 직선상의 한 지점을 이야기할 뿐입니다.  그로 인해 비인과적인 것들도 그 빈틈을 메워주면 인과적인 것들이 되고,  이와 반대로 인과관계를 자르거나 비틀면 새롭게 보이게 됩니다.    작품의 의미적 국면을 이루는 요소는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논의한 것들은 화자와 화제를 새롭게 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화자와 화제가 등장하는 배경을 아래의 예처럼 비일상적인 것으로 바꿔도 새롭게 보일 수 있습니다.    ○차가운 가을비가 내린다.  →비가 내린다/내 아득한 마음의 들판 한 구석/엇슥엇슥 엇베인 마른 수수대궁 밑으로/차가운 가을비가 내린다  ○네 웃음은 참 아름답다  → 네가 웃는다/잔잔하게 웃는 네 웃음 속/이름 모를 풀꽃들이 하늘거리며 손짓을 한다.    어떻습니까? 배경만 바꾸어도 아주 새롭게 보이지요? 새롭다던지 낡았다는 것은  대상 그 자체가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배경을 바꿀 경우, "어? 비가 마음의 들판에 내리다니,  이게 무슨 소리야?"하고 긴장을 하며 읽으면서 글쓴이의 의도를 헤아려보기 때문에 새롭게 보이는 것입니다.    자아, 시상을 새롭게 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그치고 다음 장에서는  이렇게 고른 시상을 검토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1.시의 제재가 새로워야 할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2.어떤 제재를 선택하고,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다시 생각해 봅시다.  ①대상의 위치 전환  ②주체와 객체의 입장 전환  ③서로 다른 것의 동정화(同定化)와 동일한 것의 이화(異化)  ④작은 것의 확대(擴大)와 큰 것의 축소(縮小)  ⑤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의 이동  3.어떤 제재를 선택하고 연상을 거듭한 다음 중간 단계를 자르고 한 편의 시를 완성해 봅시다.  4.자기가 좋아하는 시 한편을 고르고, 그 시 속에 등장하는 사물들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바꿔봅시다.   
8    초현실주의와 그로테스크를 활용한 시형식 댓글:  조회:1356  추천:0  2019-02-04
    초현실주의와 그로테스크를 활용한 시형식       -박상순     1)박상순     1961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서양화 전공) 졸업.  91년『작가세계』에 「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 외 8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 데뷔.  93년 『6은 나무, 7은 돌고래』, 96년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을 발간.  96년 현대시동인상 수상.    2) 박상순 시의 작법적 특성    ① 박상순의 언어는 초현실과 무의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정체불명의 화자(발화자)와 청자(수화자)을 등장시켜 초현실주의 자동기술법을 활용한다.  우리 시에서 새로운 발성법이다.  그리하여 그의 시는 설명하지 않는다.  시적 모호성과 난해성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다.    ② 이국적이면서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을 환기시키는 초현실적이미지를 구사한다.  상상력의 비약과 이미지 사이의 충돌이 크다.    ③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가 편안하게 읽히는 것은 반복적 병렬과  시각적 배치를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복적 병렬은 이 시의 호흡을 연결시켜주는 기능을 담당한다.  불안하고 불길한 존재-장소-이미지를 끊임없는 반복적으로 왔다갔다하기,  그 끊임없는 미끄러짐이 바로 그의 전략이다.  반복적 병렬이나 적절한 시각적 배치는 즐거움, 슬픔, 분노, 갈망 등의 정서적 표현을  절제하도록 하며, 나아가 시적 긴장을 유발하도록 한다. 
7    영미 모더니즘과 현대시에 나타난 모더니티 댓글:  조회:1520  추천:0  2019-02-04
영미 모더니즘과 현대시에 나타난 모더니티           1. 모더니즘의 시기       * 버니지어 울프: 영국의 에드워드 왕이 사망하고 최초의 후기인상주의 전시회가 런던에서 열렸던 1910년으로 잡는다.   * 애덤스: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인 1910년 12월을 기점으로 했을 때, 그 10년 전에는 모더니즘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10년 후에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 데이빗 퍼킨스: 모더니즘을 1910년부터 1930년까지 영미문단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문학적 움직임 또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로 정의한다.   * 조셉 쉬플리: 모더니즘을 시에 적용시켜 볼 때, 19세기말 영국과 미국에서 뿌리를 내려 20세기의 십 년대와 이십 년대에 꽃을 피운 풍조라고 규정한다.   * 김욱동: 이러한 견해들을 포괄하여 19세기 말엽에 처음 시작되어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전성기를 맞이한 다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로는 차츰 쇠퇴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 이들의 견해 중, 일견 김욱동의 주장이 가장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논란의 소지가 있는 모더니즘의 탄생기와 쇠퇴기를 제외하면 그들 누구의 견해를 보더라도 1910년대와 20년대가 공통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영미 모더니즘을 언급할 때 범위를 너무 좁게 잡았다는 비판이 따를 수 있으나 역시 퍼킨스의 견해를 따르는 것이 가장 위험성이 적다.   * 이렇게 볼 때, 1910년대와 20년대에서 가장 중요하게 기록될 만한 해는 1914년과 1922년이다.   * 1914년은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해이며, 영미 모더니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이미지즘 운동의 기관지 ?이미지스트 시선집? 첫 호가 나온 해이기도 하다.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의 문명이 쌓아올린 모든 재산을 일시에 잿더미로 주저앉혔으며, 그들의 정신세계를 지탱해왔던 모든 가치체계를 황폐화시켰다. 그것은 기존의 가치체계를 일시에 붕괴시키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려는 모더니즘을 위해 더할 수 없이 적합한 환경을 조성했다.   * 그로 인해 꽃을 피우기 시작한 모더니즘은 1922년에 이르러 풍요로운 결실을 맺게 된다. 이 해는 해리 레빈이 ‘기적의 해’라 부를 만큼, 문학사상 유례없이 걸작들을 쏟아냈는데, 영미의 경우만 보더라도 엘리엇의 ?황무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버지지어 울프의 ?제이컵의 방?, D. H. 로런스의 ?아론의 지팡이?, 예이츠의 ?후기 시집?, 유진 오닐의 ?애너 크리스티?, e. e. 커밍즈의 ?거대한 방? 등이 그 해에 출판되었다.       2. 모더니즘의 정의       * 모더니즘은 1) 19세기 말엽부터 시작된 인간과 인간의 삶에 대한 새로운 견해나 이론을 심미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시도이자, 2) 19세기 예술과 문화의 지배적이거나 관습적이었던 것과 관계를 끊고자 했던 예술을 가리킨다.   1) 1959년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한 이래 기독교적 세계관이 거센 도전을 받고 있었고, 베르그송은 본능과 직관을 이성보다 중시했으며 시간의 개념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관념철학을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공격하여 관념론의 중압에서 유물론을 해방시켰으며, 니체는 기독교가 형성시켜 놓은 서구의 절대적 가치 기준과 도덕성을 파괴하고자 했다. 프로이드는 인간의 의식에 짓눌려있던 잠재의식과 무의식을 밝혀내어 예술가들의 관심을 인간의 내면세계로 돌려놓았고, 금기로 여겨지던 인간의 성을 모든 창조적 에너지의 원천으로 개념을 바꾸어 놓았다. 또한 러셀은 언어를 과학적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 기존의 언어관에 혁신을 일으켰다. 이렇듯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이르는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의 삶에 대한 시각의 변화로 인해 1910년경에는 그 이전과 엄청난 차이를 느끼게 되었으며, 이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더욱 가속화되었다. 즉, 모더니즘은 19세기 중반부터 나타난 인간과 세계에 대한 다양하고 급격한 인식의 변화가 세기말 이후 20세기초 예술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2) 모더니즘은 기존 전통이나 인습을 탈피하여 일정한 틀에 갇히기를 거부하는 전복의 미학이자 부정성의 미학임을 뜻한다. 이때 기존 전통이란 일반적으로 19세기 전반기를 풍미했던 낭만주의를 뜻하며, 영미 모더니즘은 낭만주의에서 탈피하여 18세기의 신고전주의를 계승하여 새롭게 변모시키려는 움직임으로 이해되어 왔다. 상징주의를 낭만주의의 두 번째 파장으로 보듯이, 모더니즘을 신고전주의의 두 번째 파장으로 기술해야 한다는 애덤스의 견해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전형적인 영미 모더니스트로 평가되고 있는 파운드와 엘리엇 등이 신고전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모더니즘을 낭만주의의 연장으로 보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특히 스피어스는 ?디오니소스와 도시?에서 모더니즘의 성격을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성이나 합리성을 상징하는 아폴로에 비해 감정이나 감성을 대변하는 디오니소스는 곧 낭만주의를 뜻한다. 낭만주의와 모더니즘은 양자간의 큰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전통이나 관습을 타파하려 한다는 점에서 혁명적, 전복적 요소를 보인다거나, 자아의식과 주관성을 중시하고 개인과 사회가 더욱 다양한 관계를 맺기를 바란다는 점 등에서 일맥상통한다.   양자를 결합해서 보려는 시각도 적지 않다. 브래드베리나 맥팔레인 등은 모더니즘을 미래주의적인 것과 허무주의적인 것, 혁명적인 것과 보수주의적인 것, 자연주의적인 것과 상징주의적인 것, 낭만주의적인 것과 고전주의적인 것이 특이하게 결합된 현상으로 보며, 설턴 같은 이는 모더니즘 작가들은 인습을 공격하는 동시에 또한 전통을 받아들였다고 주장한다. 이 말은 곧 모더니즘이 위에 열거한 양자의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말이 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영미 모더니즘의 대표적 시인을 파운드, 엘리엇 등으로 본다면, 위와 같은 모더니즘을 바라보는 세 가지 입장 중에서 우리는 첫 번째 것을 취하게 된다. 휴 케너가 엘리엇보다도 더 전형적인 모더니스트로 보는 파운드와 그가 주창한 이미지즘, 또 엘리엇과 리쳐즈가 형성시킨 신비평 등이 낭만주의를 부정하고 비교적 신고전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들의 신고전주의적 입장은 일본을 거쳐 한국에 이입되면서 모더니즘의 움직일 수 없는 특성으로 여겨지고, 소위 주지주의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유럽대륙이라기보다 영미 모더니즘이 지닌 특징 중 하나이며, 그것도 이미지즘 이론과 관련한 흄과 파운드의 시학, 엘리엇과 리챠즈의 신비평 이론 등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3. 모더니티의 개념       모더니즘이 어느 특정한 시대에 나타나는 예술 운동이나 경향이라면, 근대성, 현대성 등으로 번역되는 모더니티는 어느 시대에나 나타날 수 있는 상대적 개념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캘리네스큐가 모더니티가 지닌 다섯 가지 얼굴을 모더니즘, 아방가르드, 데카당스, 키취, 포스트모더니즘 등으로 본 것은 시사적이다. 즉 모더니즘은 모더니티를 구성하는 한 부분이며, 모더니티를 드러내는 현상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문학사에 한정시켜 사용할 때, 모더니티는 모더니즘 문학이 보여주는 공통된 특성을 의미할 수 있다.   모더니티라는 용어는 영국에서는 17세기에 처음 사용되었으나 문학이나 예술과 관련하여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일시성, 순간성, 우연성 등을 모더니티의 특성으로 꼽았다. 이와 유사하게 버만도 모더니티를 파편화, 일시성, 혼란스런 변화 등으로 설명한다.    모더니티는 원래 역사적, 철학적 개념이었다. 피핀이 그의 책 ?철학적 문제로서의 모더니즘?에서 밝힌 모더니즘의 특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모더니티는 공통된 언어와 전통에 기초를 둔 단일민족 국가의 성립을 탄생시켰다. 둘째, 모더니티는 인간의 문제에서 이성의 권위를 가장 우위에 두었다. 셋째, 모더니티는 대자연과 인간의 본성을 규명하는 데 무엇보다도 자연과학의 권위에 의존하였다. 넷째, 모더니티는 삶과 자연 현상을 탈신비화시켰다. 다섯째, 모더니티는 모든 개인의 천부적 권리, 그 가운데서 특히 자유와 자기 결정의 표현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였다. 여섯째, 모더니티는 자유 시장경제 제도를 도입하고 그것에 수반되는 임금 노동과 도시화 그리고 생산 수단의 개인 소유를 적극 장려하였다. 일곱째, 모더니티는 인간의 발전 가능성을 굳게 믿으면서 관용, 동정, 사려분별, 자선 등과 같은 기독교적 휴머니즘에 기초한 다양한 덕성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모더니티의 특성은 사회전반에 걸친 변화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개개의 문학 작품에 적용시켜 살펴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다.   유진 런은 범위를 좁혀서 문학에 나타난 모더니즘의 공통적 특성을 네 가지로 요약했다. 1) 미적 자의식, 혹은 자기 반영성, 2) 동시성, 병치, 혹은 몽타주, 3) 패러독스, 모호성, 불확실성, 4) 비인간화, 통합된 개별 주체, 혹은 개성의 붕괴 등이 그것이다.   또한 애덤스는 모더니즘 문학의 특성을 1) 과거에 대한 의도적 추구, 2) 반복적, 주기적인 시간의식, 3) 비인간적인 추상성의 중시, 4) 성의 추구, 5)독재정권에 대한 허약, 6) 재료 및 언어의 영역확대 등으로 정리한다.   이들의 정의 또한 소설 등의 장르를 포함한 모더니즘 문학 전반에 나타나는 모더니티로 시에 국한시켜 살펴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와는 달리 프레이저와 쉬플리는 영미 현대시에 나타난 모더니티 즉, 현대성을 밝혀내고 있어 눈에 뜨인다. 프레이저는 현대시의 현대성, 즉 모더니티로서 과거에 대한 흥미, 시의 복합성, 암시성, 반어성 및 모호성 등을 들고 있고, 쉬플리는 현대시의 구체적 특성을 여덟 가지로 정리한다.   이를 요약해 보면, 1) 메타포의 특별한 사용과 더불어 계획적인 난해성을 추구하고, 2) 애매성이 의미의 혼란이 아닌 의미의 풍요로 이어지기를 기대하며, 복합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지닌 암시를 제공한다. 3) 앞선 시대의 시인들의 시행으로 슬쩍 미끄러져 들어감으로써 그 힘을 강화시키려 하며, 4) 어순을 뒤집고, 연속성을 헝클어놓고, 연결어를 생략하며, 구두점을 찍지 않거나 조작함으로써 정상적인 구문을 깨뜨린다. 5) 낱말을 구성하는 글자들의 위치를 바꾸는 등 낱말의 구조를 쪼개거나 부순다. 6) 행을 아주 길게 쓰거나, 산문체, 자유시 등을 씀으로써 운율을 와해시킨다. 7) 라틴어, 프랑스어, 이태리어, 중국어 등을 사용하거나 전문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언어의 장벽을 깬다. 8) 사적인 세계를 언급함으로써 독자와의 접촉을 단절시킨다는 것 등이다.   프레이저와 쉬플리가 정의한 현대시의 모더니티를 비교해보면 항목들이 거의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프레이저가 과거에 대한 흥미라고 말한 것은 쉬플리의 3)과 일치하고, 시의 복합성, 암시성, 모호성 등은 1), 2)와 일치한다. 언어에 대한 실험적 기법을 의미하는 4), 5), 6)은 의미의 직접적인 접근을 막는 7), 8)과 함께 시가 난해성을 갖게 하는 데 기여한다.   위의 여덟 가지 항목 중 e. e. 커밍즈 등 일부 시인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5)를 제외하면 나머지 항목은 대부분의 모더니즘 시인들의 시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모더니티의 양상이 영미 현대시에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위해서는 엘리엇의 시편들이 유용하다.       4. 엘리엇의 시에 나타난 모더니티       현대시의 모더니티에 관한 쉬플리의 견해는 엘리엇의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도 상당 부분 겹쳐서 나타난다.       현대 문명의 시인들은 난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보인다. 현대 문명은 상당히 포괄적인 다양성과 복잡성을 지닌다. 그리고 이러한 다양성과 복잡성은 세련된 감수성에 작용하여 마땅히 다양하고 복잡한 결과들을 낳아야 한다. 시인은 언어를 자신의 의미에 두드려 맞추기 위해, 필요하다면 짜임새를 어긋나게 해서라도, 점점 더 포괄적이고 암시적이며 간접적으로 되지 않으면 안 된다. (Eliot, Selected Essays 287.)       이 글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우선난해성이다. 그러나 난해성은 현대시가 당연히 갖추어야 할 요소라기보다는 시인들이 현대 문명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결과적인 산물로 이해해야 한다. 시인은 문명의 복잡성을 세련된 감수성으로 느끼고 이를 적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기법을 실험하게 된다. 자신이 느낀 다양하고 포괄적인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언어의 순서나 구조, 즉 짜임새를 파괴하면서까지 기법적인 실험을 감행하는 것이다. 엘리엇은 복잡다단한 현대문명을 표현하기 위한 이러한 언어적 실험을 하는 과정에서 현대시는 점점 더 포괄성, 암시성, 간접성을 갖게 되며 결과적으로 난해성을 지니게 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포괄성은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지적인 것과 정서적인 것, 내용과 형식 등 상호 대립적이거나 이질적인 요소들을 유기적인 전체로 통합시키는 특성을 말한다. 이것은 무릇 시인은 사상을 장미의 향기처럼 느껴야 한다는 엘리엇의 (The Poetic Theory of Unified Sensibility)과 맞닿아 있다. 암시성은 간접성과 같은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상징, 은유, 단편화, 병치, 인유, 아이러니 등 암시적인 방식에 의해 시의 의미가 간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말하며 이것은 또한 엘리엇의 (The Poetic Theory of Impersonality)과 접맥되어 있다. 이 포괄성과 암시성 및 간접성은 결국 현대시가 지닌 모더니즘의 특성 즉, 모더니티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앞장에서 정리한 프레이저 및 쉬플리의 견해를 염두에 두고 엘리엇이 사용한 용어들에 기대어 영미 현대시에 나타난 모더니티의 양상을 살펴보자. 다음의 시구는 엘리엇의 시론이 잘 구현되어 있는 ?황무지? 제5부 ?천둥이 말한 것?(What the Thunder Said)의 부분이다.       만약 물이 있고   반석이 없다면   만약 반석이 있고   그리고 물도   물도   샘   반석 가운데 물웅덩이   물소리만이라도 있다면   매미 우는 소리도   마른 풀잎 살랑이는 소리도 아닌   물소리가 있다면 반석 위   거기선 갈색지빠귀가 솔숲에서 지저귄다   찌릭 쪼록 찌릭 쪼록 쪼록 쪼록 쪼록   그러나 물은 없다       If there were water   And no rock   If there were rock   And also water   A spring   A pool among the rock   If there were the sound of water only   Not the cicada   And dry grass singing   But sound of water over a rock   Where the hermit―thrush sings in the pine trees   Drip drop drip drop drop drop drop   But there is no water       이 시구에서 우리가 두드러지게 느낄 수 있는 것은 포괄성이다. 지적인 것과 정서적인 것, 그리고 내용과 형식이 하나로 통합되어 시적 긴장을 자아내고 있다. 그러한 긴장을 느끼게 하는 객관상관물은 물과 반석이다. 이것은 모세가 히브리 민족을 이끌고 애굽을 벗어날 때 사람들의 갈증을 축여주기 위해 반석에서 샘물을 솟아나게 한 것에 대한 인유이다. 그러나 이 시대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는 없다. 지극한 갈증과도 같은 현대 문명에 대한 절망감을 해소시켜줄 샘물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이 시구의 행 배열을 보면 물 없는 사막에서 갈증에 지쳐 쓰러지기 직전의 상태를 잘 드러내준다. 구두점도 없이 문장을 완결시키지 않고 짧게 짧게 이어지는 행 배열은 목이 말라 말하기도 힘든 상태에서 겨우 내뱉는 물에 대한 갈구를 나타낸다. 14행의 이 짧은행들 속에서도 물에 관한 말이 샘과 물웅덩이를 포함하여 여덟 번이나 나온다. 물의 이미지는 이와 상반되는 바위(반석)의 이미지와 대조되며 더욱 두드러진다. 또한 반복되던 물과 갈증의 이미지는 매미소리와 마른 풀잎이 연상시키는 강렬한 더위에 의해 강화되다가 느닷없이 등장하는 시원한 솔숲에서 지저귀는 갈색지빠귀와 물소리로 해소되는 듯하다. 그러나 오아시스와도 같은 그것은 사막의 신기루와도 같은 환각에 불과하다. 극도의 갈증으로 인한 환각 속에서 이제는 환청까지 겪게 된다. 이 환청을 보여주는 청각이미지는 지빠귀가 지저귀는 소리와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함께 들려준다.   잠시 동안 환각 상태에 빠졌던 화자는 “그러나 물은 없다”는 냉엄하고 쓰라린 현실로 돌아온다. 현실에 대한 이러한 회의적이고 염세적인 시각은 엘리엇이 여지없는 모더니스트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모더니스트들은 상징주의 시인들이 현실 너머에 있는 이데아의 세계를 지향한 것과는 달리, 강렬한 현실 인식을 통해 현실을 객관적인 방식으로 명확하게 보여주려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더니스트 시인들의 시에서는 상징주의 시인들이 보여주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난해성을 느끼게 된다.   엘리엇은 위의 시구에서 이러한 현실 인식을 매우 감각적인 방식을 통해 드러낸다. 즉 현대문명에 대한 절망감, 현대인의 메마른 삶의 인식 등의 추상적이고 지적인 사상을 언어의 기법을 활용한 구체적이고 감각적 방식을 통해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즉 이 시구에서 엘리엇은 내용과 형식, 사상과 정서, 추상성과 구체성 등을 통합하여 포괄적인 의미망을 생산해내고 있는 것이다.   간접성에 관한 것 역시 ?황무지?의 제5부의 다른 부분을 예로 들어보자.       나는 해변에 앉아 있었다   낚시질하며, 등뒤엔 메마른 들판.   최소한 내 땅이라도 정돈해볼까?   런던교가 무너진다, 무너진다, 무너진다.   그리고 그는 정화의 불 속에 자신을 감추었다.   언제 나는 제비처럼 될 것인가―오 제비여 제비여   황폐한 탑 속의 아뀌떼느 왕자.   이 단편들로 나는 내 폐허를 지탱해왔다.   그럼 분부대로 합지요. 히에로니모는 다시 미쳤다.   다타. 다야드밤. 담야타.   샨티 샨티 샨티       I sat upon the shore   Fishing with the arid plain behind me   Shall I at least set my lands in order?   London Bridge is falling down falling down falling down   Poi s'ascose nel foco che gli affina   Quando fiam uti chelidon ― O swallow swallow   Le Prince d'Aquitaine a la tour abolie   These fragments I have shored against my ruins   Why then Ile fit you. Hieronymo's mad againe.   Datta. Dayadhvam. Damyata.   Shantih shantih shantih       이 시구는 ?황무지? 전체의 끝 부분에 해당한다. 이 부분은 말 그대로 단편들(fragments)의 집합이다. 첫 세 행은 어부왕 전설에 대한 인유이며, 4행은 영국 민요의 한 구절이고, 다음 세 행은 출전이 서로 다른 인용문들을 원문 그대로 썼으며, 그 다음은 16세기 영국의 비극작품의 주인공의 대사 및 그 작품의 부제, 고대 인도의 철학서인 우파니샤드의 한 구절 등이 나열되어 있다.   난해성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이 구절은 그 원인을 간접성에 두고 있다. 상호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인유나 인용의 단편들을 설명 없이 병치한다거나 심지어 그 인용문들을 번역하지 않고 외국어 그대로 차용한다. 또한 어부왕 전설은 성배 전설과 함께 ?황무지? 전체의 구조를 엮어주는 틀로 사용된 중요한 상징으로 이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 어렵다. 앞서 지적한 대로 이와 같은 상징, 은유, 단편화, 병치, (과거 전통으로부터의) 인유, 아이러니 등의 암시적인 방식은 의미 전달의 간접성으로 작용해 독자들로 하여금 그 의미가 난해하게 느껴지게 만든다.   영미 모더니즘은 이와 같은 포괄성, 암시성, 간접성 등으로만 특징 지워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외에도 모더니즘의 전개에 초석이 된 이미지즘의 특징은 보다 발전된 형태로 모더니즘의 특징 즉, 현대시의 모더니티를 이루고 있다. 이미지즘의 특징은 이미지 이론과 시어 이론으로 간추릴 수 있다.   T. E. 흄에게서 비롯된 이미지 이론은 19세기 낭만주의 시가 지닌 감정의 상투적 표현과 의미의 추상화로부터 탈피해서 고전주의에 입각한 정확, 정밀, 명확한 표현으로 고담하고 견실한 시를 쓰기 위해 시각적 이미지를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포드 매독스 포드의 영향을 받은 시어 이론의 핵심은 시어가 산문의 전통 위에서 언어의 명료성과 정확성을 획득해야 하며, 일상어와 정확한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지즘 운동의 중심이었던 파운드는 이들의 이론을 토대로 해서 중국의 한시, 일본의 하이쿠 등에서 받은 영향을 융합해 이미지즘 시학을 형성시켰으며, 영미 현대시가 모더니즘으로 변모하게 되는 기틀을 마련했다. 그리하여 영미 시단의 주요 모더니스트로 불리는 파운드, 엘리엇,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즈, 월러스 스티븐즈 등이 모두 이미지즘에서 출발하여, 모더니즘으로 자신들의 시학을 확장시켜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마취된 채 수술대 위에 누운 환자처럼   저녁이 하늘에 펼쳐져 있는 지금   ……   등을 창유리에 비비는 노란 안개,   주둥이를 창유리에 비비는 노란 연기가   저녁의 구석구석에 혀를 넣어 핥다가는,   하수도에 고인 웅덩이 위에 머뭇거리고,   제 등에 굴뚝에서 떨어지는 검댕을 떨어지게 하며,   테라스를 미끄러지듯 지나간 다음, 갑자기 한 번 껑충 뛰었다가   포근한 시월 밤임을 알고는   집을 한 바퀴 빙 둘러 감싸고 웅크린 채 잠이 들었다.       When the evening is spread out against the sky   Like a patient etherized upon a table;   ……   The yellow fog that rubs its back upon the windowpanes,   The yellow smoke that rubs its muzzle on the windowpanes   Licked its tongue into the corners of the evening,   Lingered upon the pools that stand in drains,   Let fall upon its back the soot that falls from chimneys,   Slipped by the terrace, made a sudden leap,   And seeing that it was a soft October night,   Curled once about the house, and fell asleep.       ―"The Love Song of J. Alfred Prufrock"의 일부    
6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줄거리 [퍼온 자료] 댓글:  조회:2234  추천:0  2019-02-04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줄거리 [퍼온 자료]   1. 모방에 관하여  우리의 주제는 작시술(作詩術)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는 예술 일반의 본질 뿐 아니라 그 종류와 기능에 관해, 좋은 시에 요구되는 플룻의 구조에 관해, 시 구성성분의 요소와 본질에 관해, 그리고 같은 탐구과정에서의 다른 예술에 관해 살펴보기로 한다. 희곡은 물론이거니와 서사시와 극시, 그리고 많은 관현악곡들은 전체적으로 볼 때 모방(模倣)의 양식이다. 동시에 이들은 모방매체, 즉 수단의 종류, 대상의 차이, 모방의 방법이라는 세 가지에 의해 구별된다. 모방매체로서의 수단은 전체적으로 리듬, 언어, 화음 등이다. 이는 단독적으로 혹은 복합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이러한 예술에 차이를 가져오는 요소를 모방의 매체, 즉 수단이라 부른다.  모방자가 모방하려는 대상은 인간의 행위인데, 이 행위자는 필연적으로 선인이거나 악인이다. 미덕과 악덕 사이의 경계가 모든 인간을 구분 짓는데, 모방의 대상으로서 인간은 선함에 있어 평균인 이상이거나 혹은 그 이하이거나, 아니면 그와 비슷한 수준이다. 예술은 이러한 차이점을 인정해야 하며, 이러한 차이의 관점으로 표현된 대상에 의해 서로 분리된 예술이 나온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런 차이점은 비극과 희극을 구분 짓는 것이기도 한데, 후자는 오늘날의 평범한 사람보다 더 천한 인물을 만드는 것이라면 전자는 더 훌륭한 인간을 다룬다.  예술의 차이 가운데 또 하나는 각 대상의 모방방법에 있다. 모방할 때 수단과 대상이 같은 종류라면, 시인은 어떤 때는 서술체로 어떤 때는 작중인물이 되어 말할 수 있다. 또는 그런 변화 없이 계속 자신에 머물 수도 있다. 모방자가 모든 것을 실제 행하는 것처럼 극적으로 전체 이야기를 표현할 수도 있다. 이들 예술의 모방에 있어서의 차이점은 결국 그 수단과 대상 및 방법이라는 세 가지 중요한 요소에 기인하는 것이다.    2. 예술(시)의 기원  시의 일반적 기원이 인간 본성의 각 부분인 두 가지 원인에 기인한다는 것은 명확하다. 인간은 세상에서 가장 모방적 창조물이며 모방에 의해 지식을 배우게 된다. 또한 모방에 의해 이루어진 작품에 기쁨을 느낀다. 무엇인가를 배운다는 것은 철학자뿐 아니라 아무리 능력이 모자란 사람이라고 해도 최상의 기쁨을 선사한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모방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화음과 리듬도 역시 그렇다. 시는 각 시인의 성격 차이에 의해 두 종류로 나뉘는데, 찬가와 찬사, 그리고 풍자시가 그것이다. 비극과 희극이 실제로 나타나자 자연히 시적 취향에 따라 일부 시인들은 풍자시인 대신에 희극시인이 되었고, 다른 취향의 사람들은 서사시인 대신에 비극시인이 되었다. 이 새 예술형태가 전의 것보다 더 장엄하고 가치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희․비극은 즉흥적인 것에 기원을 둔다.  희극은 보통 사람 이하의 악인을 모방한다. 모든 결점 때문이 아니라 특이한 결점, 추악함이라 할 수 있는 일종의 우스운 것 때문에 악한 것이다. 우스꽝스러운 것은 다른 사람에게 고통이나 해를 주지 않는 과오 혹은 결함이라 규정할 수 있다. 웃음을 자아내는 가면은 고통을 주지 않는, 추하면서도 왜곡된 것이다. 서사시는 장엄한 체의 운문으로 진지한 주제를 모방한 점에서 비극과 일치하는 면이 있다. 비극에서의 선악의 판단은 서사시에 있어서의 그것과 유사하다. 서사시의 모든 부분은 비극에 포함된 것이지만, 비극의 모든 부분이 서사시에서 발견되지는 않는다.    3. 비극의 정의와 효과  비극은 진지함과 그 자체로서 완전한 일정한 길이의 행동을, 즐거움을 주는 장식적 요소와 어울리는 언어로 모방하는 것이다. 비극은 극적이거나 비설명적 형태로, 연민과 공포를 일으켜 주는 사건들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감정의 정화, 즉 카타르시스를 이룩하게 해준다. ‘기쁨을 주는 장식적 요소의 조화된 언어’라는 것은 언어에 리듬과 화음, 혹은 노래가 부가되어짐을 의미하며, ‘분리된 종류’라는 것은 어떤 작품은 운문으로만 완성되고 어떤 작품은 역으로 노래로만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1) 이야기가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첫째로 장경(場景)이 전체의 몇 부분이어야 한다는 사실과, 둘째로 가락과 조사법이 그들 모방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뒤따르게 된다. 여기서 ‘조사법’(diction)이란 그저 운문의 작법을 의미하며, 가락이란 완전히 이해할 수 있어 더 이상 설명을 요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표현된 주제 역시 행동을 통해 구현되며, 행동은 성격과 사상 양면에서 현저한 특질을 필연적으로 지녀야 하는 행위를 통해 이뤄진다. 어떤 특질을 그들의 행위에 기인한다고 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므로 사물이 자연적 질서를 이룸에는 그 행위의 두 원인이 있으니 성격과 사상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 결과로 그들 삶의 성공과 실패가 결정된다. 현실의 행동이 극에서는 이야기와 구성에 의해 표현된다. 행동의 모방이 바로 플롯이다. 우리가 현재 생각하는 ‘구성’이란 용어의 의미는, 이야기상에서 이루어지는 사건과 행위의 결합이며, 거기에서 성격이라는 것은 어떤 도덕적 특질이 행위자에 기인한다고 우리에게 생각하게 해주는 것이다. 또한 사상이라는 것은 특이한 점을 증명하거나 혹은 보편적 진실을 드러내려할 때 그들이 말하는 모든 언어행위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비극은 그 질을 결정하는 여섯 개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으니, 구성, 성격(인물), 조사법, 사상, 장경, 그리고 멜로디가 그것이다. 이들 중 조사법과 멜로디는 모방의 수단에서, 장경은 모방의 양식에서, 나머지 셋은 모방의 대상에서 나온 것이다.  2) 여러 가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이야기상의 사건을 결합하는 것, 즉 구성이다. 비극은 본질적으로 사람의 모방이 아니라 행동과 삶, 행복과 불행의 모방이다. 모든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행동양식을 취하며 우리 삶의 궁극목적도 어떤 종류의 활동이지 성질은 아니다. 성격이 인간의 성질을 알려주지만, 우리가 행복하고 불행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 행동을 통해 드러난다. 따라서 극에서 그들은 성격을 전해주기 위해 행동하는 게 아니라 행동함으로써 성격을 그 속에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비극의 결과이며 목적인 것은 단편적 이야기와 구성 속에 있는 행동이며, 그 결과는 어디서나 중요한 것이다. 또한 비극은 행동 없이는 불가능하지만 인물의 성격 없이는 가능할 수 있다. 비극에서 흥미를 끄는 가장 강한 요소인, 급전(急轉)과 발견은(發見)은 구성의 일부분이다. 그 증거의 하나로, 시작 초보자들은 이야기의 구성보다 조사법과 성격에 쉽게 능하게 되는데, 거의 모든 초보 극작가에게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가장 본질적이고도 핵심적인 비극의 생명이며 영혼인 것은 구성이고, 성격은 이차적으로 오는 것인즉, 이는 무질서하게 아름다운 색깔만 칠해 놓아, 단순하게 흑백으로 그린 초상화만큼의 기쁨도 주지 못하는 그림에 비유할 수 있다. 비극은 일차적으로 행동의 모방이며, 그것이 행위자를 모방함은 주로 행동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결국 비극의 핵심원리는 구성이고 성격은 두 번째라 할 수 있다. 세 번째로 오는 요소는 사상, 즉 말하려 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 경우에 꼭 맞는 것을 말하는 힘이다. 이것은 비극의 대사에서 나타나며, 정치학과 수사학의 영역에 공통으로 속한다. 극에 있어서의 성격은 행위자의 도덕적 목적을 보여 준다. 한편 사상은 어떤 특별한 점을 밝히거나 덮어주거나, 혹은 보편적 명제를 밝힐 때 인물이 말하는 언사에서 드러난다. 네 번째 것은 조사법이다. 즉 실제 운문이나 산문이 같다고 할 수 있겠는데, 언어로 그들의 사상을 포현하는 것이다. 멜로디는 비극에서 가장 즐거움을 주는 장식적 요소이다. 장경은 흥미를 끄는 것이지만 모든 요소 중 가장 미미한 미적 요소이며, 작시술과 관계가 가장 적다.    4. 비극의 구조  비극에 있어 일차적이고도 가장 중요한 점이라 할 수 있는 단편적 이야기나 사건이 어떻게 결합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살펴본다. 비극은 전체적이면서도 부분적으로 완전하며 또한 일정한 행동의 길이를 가진 행동의 모방이라고 했다. 그런데 전체적인 것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길이 그 자체는 아니다. 전체라는 것은 시작과 중간과 끝을 가지는 것이다. 시작이라는 것은 어떤 것에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가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것이다. 끝이라는 것은 어떤 것에 이어지면서 또한 그것의 필연적이고도 자연스런 결과이어야 하며, 뒤에 아무 것도 따르지 않는 것이다. 중간이라는 것은 어떤 것에 이어지면서 또한 무엇인가를 이어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훌륭한 구성은 아무데서 시작하거나 끝나서는 안 된다. 시작과 끝은 지금 말한 것에 적절하게 어울려야 한다. 아름다운 것은 살아있는 생물체이건 부분으로 이루어진 전체이건 모두가 여러 부분의 배열에 있어 어떤 질서를 필요할 뿐 아니라 일정한 크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아름다움이란 크기와 질서의 문제인 것이다. 부분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전체나 아름다운 생물체가 눈으로 보아 파악할 수 있는 크기여야 하는 것처럼, 이야기나 구성도 적절한 길이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주인공이 개연적 혹은 필연적인 일련의 과정을 거쳐 불행에서 행복으로, 혹은 행복에서 불행으로 전도하기까지의 길이’는 이야기의 길이 제한에 있어 충분한 여유를 주어야 할 것이다.    5. 비극의 특성과 시의 본질 - 문학의 허구성  행동의 모방은 하나의 전체적 행동, 완전한 전체를 표현해야 한다. 그에 부수되는 여러 사건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어 어느 한 사건이라도 위치를 바꾸거나 삭제하면 전체 연결과 배치가 일그러지게 구성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집어넣거나 빼는 것이 현저한 차이를 주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전체에 필요한 부분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기능은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 즉 개연적 혹은 필연적으로 가능성을 가진 사건을 기술하는 것이다. 역사가와 시인의 구별은 산문으로 쓰느냐 운문으로 쓰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가는 일어난 일을 쓰고 시인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쓴다. 그러기에 시는 역사보다 더욱 철학적이고 중요하다. 왜냐하면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말하는데, 시의 서술은 본질적인 좀더 구체적으로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보편적 서술이라 함은 일반적인 인물이 개연적 혹은 필연적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을 서술한다는 의미이다. 시인이 단순히 운문 창조자라기보다는 이야기나 플롯의 창조자이어야 함은 분명하다. 그의 작품에 모방적 요소가 있다 하여도 그는 시인인 것이며, 그가 모방하는 것은 바로 행동인 것이다. 단순한 구성이나 행동에서 가장 나쁜 것은 삽화적인 것이다. 삽화의 상호간에 어떤 개연성이나 필연성이 없을 때 그것을 구성에서 삽화적(揷話的)이라고 부른다. 어쨌든 비극은 완결된 행동의 모방일 뿐 아니라 연민과 공포를 일으켜주는 사건의 모방이다. 그런 사건은 돌발적이면서도 다른 것의 결과로 일어날 때 마음에 대단히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이것은 그 사건이 재발성, 즉 스스로에 의하거나 우연에 의해 일어났을 때보다 훨씬 경탄스런 느낌을 준다. 그러므로 이런 필연의 구성은 다른 어떤 것보다 훌륭한 것이다.    6. 구성의 종류와 요소 - 복합구성과 단순구성, 급전과 발견, 비극의 구성단계  구성은 단순하거나 복잡한데, 그것은 사람의 행동이 자연히 이 두 가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단일한 행동이란 하나의 연속적 전체를 이루고 있는 행동을 말한다. 이때 주인공의 운명변화는 급전이나 발견 없이 일어난다. 복잡한 행동이란 급전과 발견 중 어느 하나 혹은 이들 두 요소를 모두 포함할 때 일어난다. 이것들은 모두 구성 자체의 구조에서 생겨나며, 앞 사건의 필연적 혹은 개연적 결과이어야 한다. 필연적 관련으로 맺어지는 두 사건과 단순한 시간적 병렬의 두 사건 사이에는 대단한 차이가 있다.  급전(Peripety)이란 극내에서 어떤 일이 한 상태로부터 그 반대 상태로 급격히 변화함을 말하는데, 이것은 또한 사건의 개연적 혹은 필연적 결과이다. 발견(Discovery)이란 말의 의미에서도 그렇듯이 행운이나 불운을 숙명으로 가진 인물이 무지의 상태에서 깨달음의 상태로 바뀌게 되고, 그래서 뜨겁게 사랑하거나 적대적으로 증오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급전을 내포하는 발견은 동정심과 공포감을 일으킬 것이다. 구성의 두 부분인 급전과 발견은 이러한 것이다. 세 번째 부분은 파토스(pathos)인데, 우리는 그것을 파격적이고 고통스런 본성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양적인 관점 즉 개별부분으로 구분할 때 비극은 다음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서사(Prologue), 삽화(Episode), 결미(Exode), 합창가요(Choral) 부분이 그것이다.    7. Catharsis - 비극의 목적, 예술적 쾌락  시인은 구성을 짜는데 있어 무엇을 택해야 하며 무엇을 피해야 하는가. 비극의 목적은 어떠한 수단에 의하여 달성될 것인가. 비극의 가장 아름다운 형태를 위하여 구성은 단순함을 피하여 복잡하여야 하며, 모방의 뚜렷한 기능으로 보아 동정심과 공포심을 일으켜 주는 행동을 모방한 것이어야 한다. 완전한 구성은 단일해야 하며 두 가지 일을 함께 다루어서는 안 된다. 주인공의 운명은 비참함에서 행복으로가 아니라, 반대로 행복에서 비참함으로 바뀌어야 하며, 그 반대의 원인은 어떤 결점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인공에 있어서의 어떤 큰 잘못에 의하여 이끌어내져야 한다. 인물은 보통사람 이상으로 훌륭하게 기술되어야 하며 악한 존재로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 따라서 이론적으로 가장 훌륭한 비극은 말한 바처럼 단일한 구성을 가진다.  비극적 연민과 공포는 장경에 의하여 일어날 수도 있고 사건의 구성과 사건에 의하여 일어날 수도 있는데, 후자의 방법이 더 좋으며 훌륭한 시인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사건의 구성은 실제 보지 않고 듣기만 하여도 그 사건에 대한 두려움과 동정심으로 가득 찰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비극적 쾌락이란 연민과 공포로부터 야기되는 기쁨이며 시인은 그것을 모방에 의하여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므로 사건의 원인은 사건 내부에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8. 인물론 - 성격창조론  성격을 이야기함에 있어 주의해야 할 네 가지 점이 있다. 그 가운데 첫째이며 가장 우선적인 것은 선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목적이 선한 것이라면 성격요소도 선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선은, 여러 형태의 인물들에 있어 비록 그가 비열한 인간이거나 전혀 쓸모없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가능한 것이다. 두 번째 주의점은 성격이 인물에 특유하고 적절하게 꾸며져야 한다는 점이다. 셋째는 성격을 전설상에 있었던 것과 유사한 것처럼 꾸미는 것이다. 넷째로 전편을 통하여 성격을 지속적으로 통일적으로 꾸미는, 즉 일관성을 유지하는 일이다. 필연적 혹은 개연적으로 후에까지 일관성 있고 지속적이어야 함은 성격에 있어서나 극의 구성에 있어서나 온당한 일이다. 그것은 어떤 인물이 말하거나 행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의 성격의 필연적 혹은 개연적 결과이기 위함이다. 또한 사건이 연속될 때 어느 사건이든지 그것이 앞 사건의 필연적 혹은 개연적 결과여야 하기 때문이다.    9. 구성의 구조 - 구성론 종합  발견의 종류에 관하여 우리가 주의해야 할 첫 번째 것은 가장 예술적이지 못한 것인데, 시인들이 창의력 부족으로 인해 흔히 사용하는 것으로 기호나 표식에 의한 발견이다. 그런데 기호나 표식의 사용에는 훌륭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이 있다. 증거의 수단으로 표식을 사용하는 것은 그와 유사한 모든 게 그렇듯이 예술적이지 못하다. 다음은 발견이 시인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조작되는 경우인데,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이것은 예술적이지 못하다. 세 번째 종류는 기억에 의한 발견으로, 이미 보았거나 들었던 어떤 것에 의해 주인공이 회상으로부터 깨닫게 되는 것이다. 네 번째 종류는 추론에 의한 발견이다. 그밖에 상대편의 잘못된 추론에 의하여 일어나는 복잡한 발견이 있다. 발견의 가장 훌륭한 형태는 사건 자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구성을 설정하고 그것을 언어로 표현함에 있어 다음과 같은 점에 유념해야 한다. 먼저 실제의 장면을 눈으로 보듯이 설정하여야 한다. 사물을 눈으로 보듯 생생하게 관찰하여 표현함으로써 시인은 적합한 방법을 고안해내게 되고 간과해버리기 쉬운 잘못을 범하지 않게 될 것이다. 또한 가능하면 시인은 작중인물의 몸짓까지 스스로 행동해 보아야 한다. 같은 재능을 갖고 있다면 자기가 그리려는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시인이 가장 확신을 주고 감동을 던져줄 수 있다. 그리고 삽화의 삽입으로 이야기의 길이를 늘이기 전에 시인은 자기의 이야기를 우선 소묘하고 보편적 형태로 축약시켜 나아가야 한다. 예컨대 ‘오디세이’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해외에 있었다. 그는 해신 포세이돈에게 항시 감시를 받았으며 늘 혼자 외로웠다. 그의 집에서도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의 아내에게 구혼하는 자들이 그의 재산을 망쳐버렸고 그의 아들을 죽이려고 획책하였다. 그때 그가 천신만고 끝에 돌아와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적에게 달려든다. 결국 그는 구제되고 적들은 죽는다. 이것이 ‘오디세이’의 요지이고 나머지는 삽화다.  모든 비극은 갈등의 부분과 해소의 부분으로 이루어지는데, 극이 열리기 전의 사건과 극내에서의 사건 중 어떤 것은 갈등을 형성하고 그 나머지는 해소의 부분을 이룬다. 갈등이라 함은 이야기의 시작부터 주인공의 운명이 불행에서 행운으로 또는 행복에서 불행으로 바뀌기 직전까지의 부분을 말하고, 해소는 시점에서부터 끝까지의 운명의 전환이 시작되는 부분을 의미한다. 비극에는 뚜렷이 구분되는 네 가지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복잡한 비극으로 이것은 급전과 발견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둘째는 파토스를 일으켜주는 비극이고, 셋째는 성격적인 비극이다. 네 번째 구성요소는 장경이다. 시인은 앞서 말하는 바를 기억하여야 한다.    10. 사상성과 조사법 - Metaphor  사상성은 ‘수사학’에서 논의할 것이기에 그것을 전제로 한다. 사상성의 연구는 수사학에 더 밀접한 것이다. 극에서 인물의 사상은 그들이 쓰는 말로 인해 영향을 받는 모든 것, 증명하거나 반박하고, 감정을 일으키고, 사물을 과장하거나 과소평가하려는 모든 노력에서 드러난다. 그런데 인물이 동정이나 공포심을 일으키고 중요성이나 개연성에 대한 적절한 효과를 낳기 위해서는, 그들의 심리과정이 실제 언사 및 행동과 확실히 일치하여야 한다. 한 가지 다른 점은 행동에 의한 효과는 일상에 대한 설명 없이 생겨나야 한다는 점이다. 효과는 화자가 구어를 사용하여 생겨나야 하며, 그의 언어로부터 결과된 것이어야 한다. 조사법에 관해서, 이런 제목 아래 탐구되는 주제 중 하나는, 말할 때 언어에 가해지는 어조인 것이다. 즉 명령과 기원, 단순한 진술과 억압, 질문과 대답의 차이를 나타내는 어조의 문제가 그것이다. 어쨌든 그런 문제의 이론은 웅변술이나 웅변전문가에게 속한다. 시인이 이런 것을 알든 모르든 시인으로서의 그의 예술은 그 점에 대하여 심하게 비평받는 일은 없다.  명사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단순한 것 즉 무의미 부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또 하나는 두 가지가 합성된 것인데, 후자의 경우는 의미부분과 무의미부분으로 구성되거나 두 개의 의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합성명사는 또 세 개, 네 개 혹은 그 이상의 부분으로 구성될 수 있는데 확대된 이름의 대부분이 그렇다. 구조가 어떻든 명사는, 사물에 붙이는 일상어이거나, 외래어이거나, 은유이거나, 수식어, 신어이거나, 연장어이거나, 단축어이거나, 변형어이다. 일상어라 함은 한 나라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말을 의미하며 외래어라 함은 다른 나라에서 차용된 말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같은 말이라도 외래어일 수도 있고 일상어일 수도 있음은 명백하지만, 그것이 모든 국민에 대한 언급일 수는 없다. 은유(隱喩)는 한 사물에 다른 사물의 이름을 전이하는 것인데, 그 전환은 유(類)에서 종(種)으로, 혹은 종에서 유로, 혹은 종에서 종으로, 또는 유추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유에서 종으로의 은유의 예는 ‘여기에 나의 배가 서 있다’와 같은 표현이다. 왜냐하면 닻을 내리고 있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사물이 정박해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종에서 유로의 은유의 예는 ‘정말로 율리시즈는 일만 가지 선행을 했다’와 같은 표현이다. ‘일만’이라는 특수한 숫자가 ‘수많은’이라고 쓸 유의 자리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종에서 종으로의 은유의 예는, ‘놋쇠로 생명의 물을 퍼올리며(즉 놋쇠로 만든 칼로 베여 피를 흘리게 하며)’와 ‘불멸의 놋쇠로 베면서’(즉 놋쇠로 만든 두레박으로 물을 푸면서)에서 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 시인은 ‘벤다’는 의미로 ‘퍼올린다’를 사용하여, 두 말이 모두 무엇인가를 ‘갈라낸다’는 의미를 지니게 한다. 유추에 의한 은유는, 예컨대 네 개의 사항이 있을 때, 제2의 사항(B)이 제1의 사항(A)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가 제4의 사항(D)이 제3의 사항(C)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와 같은 때를 말한다. 왜냐하면 시인은 D대신에 B를, B대신에 D를 은유적으로 대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대치된 말의 관계어를 은유에 부가함으로써 은유를 적합하게 하는 수도 있다. 그러기에 잔(B)의 디오니소스(A)에 대한 관계는 방패(D)의 아레스(C)에 대한 관계와 같다. 따라서 잔은 은유적으로 ‘디오니소스의 방패’(A+D)라 표현되고 방패는 ‘아레스의 잔’(C+B)이라고 표현될 것이다. 그런 유추의 관계에 있는 용어들 몇 가지는 자신의 고유한 성격이나 이름을 지니지 못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들은 꼭 같은 방법으로 은유적으로 표현할 것이다. 씨앗을 심는 것을 ‘뿌린다’라고 부르는데, 태양의 불꽃이 쏟아지는 것에는 특별한 이름이 없다. 그 이름없는 동작(B)이 대상인 햇빛(A)에 대하여 갖는 관계는 뿌리는 행위(D)의 씨앗(C)에 대한 관계와 같다. 그러므로 시인은 ‘신이 만든 불꽃을 주위에 뿌리면서’(A+D)라고 표현할 수 있다. 적합한 은유의 또 다른 형태가 있다. 한 사물에 다른 이질적 이름을 부여하면서, 그 새로운 이름과 자연히 관련을 맺고 있는 속성 중의 하나를 새로운 의미를 얻음으로써 부정하는 것이다. 한 예로 앞에서처럼 ‘아레스의 잔’이라 부르지 않고 ‘술이 없는 잔’, 즉 빈잔이라 부르는 것이다. 신어는 사람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인데 시인 자신이 만들어낸 말이다. 변형어란 한 부분은 본래대로 남아 있고 또 한 부분이 시인에 의하여 창작되었을 때를 말한다.  조사(措辭)의 완전성을 기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명석해야 하고 저속하거나 조야하지 않아야 한다. 일상어로 이루어진 조사는 가장 명확하지만, 한편 새로운 표현, 즉 외래어, 은유, 연장어 등 일상대화와는 다른 여러 가지를 사용함으로써 조사는 뚜렷하고 운문적이 된다. 그러나 그러한 말만을 쓰면 전체적으로 보아 수수께끼가 되거나 야만인의 언어가 된다. 수수께끼라는 것은 단어의 불가능한 조합(다시 말하면 은유적 대치물로는 관계가 되지만 사물의 실제 속성과는 관계가 되지 않는)으로 사실을 기술하는 것을 말한다. 외래어, 은유, 수식어 등은 말이 조야하고 평범하게 떨어지지 않도록 해주고, 한편 일상어는 필요한 명확성을 지켜준다. 조사를 가장 명석하고 비범하게 해주는 것은 연장어, 단축어 및 변형어 등이다. 이것들은 일상어와는 다르기 때문에 일반적 용법에 변화를 가져다 줌으로써 창조적인 면모를 가지게 하여 주고, 일반적 용법에서 일상어와 많은 공통점을 지님으로써 그것을 명석하게 하여 준다. 따라서 이런 언어수법을 비난하거나 몇몇이 그를 사용하였다 하여 그 시인들을 조소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러한 시적 허용을 과대하게 사용하면 우스운 결과를 가져오지만, 그것은 이 수법에 의한 것에 국한되지 않고, 적절히 사용한다면 시어의 모든 구성요소에 이 법칙을 적용할 수 있다. 만약 시인이 부적절하고 웃음을 자아내게 사용했다면 은유든 외래어든 다른 어떤 것이든 그 효과는 동일할 것이다. 시적 허용의 적절한 사용은 대단히 상이한 일이다. 상이점을 알기 위하여 시인은 서사시를 택하여, 일상어가 사용되었을 때 그것이 어떻게 읽혀지는가 하는 것을 관찰하여야 한다. 외래어, 은유 및 다른 나머지에 관하여도 같은 방법을 취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인은 우리가 말하는 바가 진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곳에만 일상어를 적응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일상어만의 사용은 그저 평범한데 비해 일상어 대신 한 마디의 외래어를 대치하는 일어의 변화를 가함으로써 시를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    11. 극예술과 시 - 서사시  운문으로 된 행위가 없는 언어를 사용하여 설명하고 모방하는 것이 시라면, 그것은 비극과 여러 공통점을 지니고 있음이 확실하다. 1) 이야기의 구성은 희곡의 구성과 비슷하여 단일한 행위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시작과 중간과 끝을 가짐으로써 그 자체로서 완전한 전체를 이루어, 생물체의 유기적 통일성과 더불어 그 자신의 적절한 즐거움을 낳는 작품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일반 역사에 그와 비슷한 어떤 것이 있으리라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역사는 하나의 행위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한 시대에 여러 사람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다루는 것인데 이 여러 사건들은 서로 연결되지 못한다.  2) 이 외에 서사시는 비극과 동일한 종류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그것은 단순한 것이거나 복잡한 것이어야 하고, 성격적 이야기이거나 파토스적인 이야기여야 한다. 각 부분도 가요와 장경을 제외하고는 비극과 동일하여야 한다. 즉 서사시에서도 비극과 마찬가지로 급전, 발견 및 파토스의 장면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비극과 비교해 볼 때 서사시에는 다른 점이 있다. 구성의 길이에 있어, 그리고 운율에 있어서 그렇다. 행동이 없거나 드러난 성격이나 사상성이 없는 곳에서 오직 요구되는 것은 뛰어난 조사법이다. 반면 성격이나 사상성이 있는 곳에서 과장적으로 수식된 조사법은 오히려 시를 애매하게 하는 수가 있다.    12. 비평에 관하여 - 허구의 진실성  시인은 미술가처럼 모방가이거나 이와 유사한 창작자이기에, 모든 경우에 있어서 다음의 세 가지 양상 중에서 어느 하나로 사물을 표현하여야 한다. 즉 과거에 있었거나 현재 있는 사물, 있다고 혹은 있었다고 말하여지거나 생각되는 사물, 또 있어야 하는 사물 등이다. 이 모든 것을 시인은 단어의 다양한 수식형태처럼 외래어나 은유를 혼합한 언어로 표현한다. 정치술이나 다른 기술에서처럼 작시술에 있어서 정당성의 규준이 동일하지는 않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작시술에서 두 가지 오류, 즉 하나는 그 자체적인 것이고 또 하나는 단지 우연으로 예술과 관련을 가지는 부대적인 것을 범할 가능성이 있다. 만약 시인이 사물을 올바르게 모방하려고 하다가 표현력 부족으로 실패한다면, 그의 작시술 자체가 잘못이다. 그러나, 시인이 모방함에 있어, 기법적인 오류(의술이나 기타 기술에 관한 문제)나 사물의 불가능성을 포함시키는, 어떤 부정확한 방법(예를 들면, 움직이고 있는 말을 그리는데 오른쪽 다리 두 개를 모두 앞으로 놓게 하는 것)으로 사물을 기술하려고 시도하는 경우에, 그의 오류가 작시술의 본질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전제로부터 우리는 여러 문제점에 관해 비평자의 비판을 고찰하고 해결 또는 반박해야 한다.  1) 시인이 행하는 작시술 자체에 관련하여 비평에 대하여 언급한다. 시인이 기술함에 있어 있을 수 없는 불가능사를 그렸다면 그것은 과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러한 과오가 시의 목적을 이룸에 도움이 되거나 작품의 어느 부분의 효과를 훨씬 놀랍게 만든다면,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시의 목적이 그런 것에 있어 기법적인 정확성을 기하려는 노력 없이도 퍽 쉽게 얻어질 수 있었다면, 불가능사를 그린다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왜냐하면 기술은 전혀 과오 없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이상이기 때문이다. 또한 오류가 그런 일에 있어 작시법과 본질적으로 관련된 것인가 혹은 단지 우연에 의해서 부대적으로 관련된 것인가 하고 묻게 될 것이다.  2) 만약 시인이 그려낸 것이 사실에 맞지 않는다고 평을 받는다면, 그것이 이상상을 그린 것이라고 답변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이 그려낸 것이 사실적인 것도 아니고 이상상의 적도 아니라면 그 평가는 세평에 따르는 수밖에 없다. 시에서 말하고 행하여진 것이 도덕적으로 옳은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를 풀기 위하여 우리는 실제의 말과 행동의 내적인 성질뿐 아니라, 그것을 말하고 행하는 인물, 그 상대자, 시간, 방법, 행위, 동기를 고려하여야 한다.  3) 시인이 사용한 용어를 생각해 보면 또 다른 비평들을 대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말하여 불가능사라도 그것이 시에서 필요하거나, 이상형이거나 사람들의 일반적인 견해일 때에는 정당화되어야 한다. 시의 목적상 믿을 수 없는 불가능사는 믿을 수 없는 가능사보다 정당한 것이다. 불가능사는 그것이 일반적 견해에 따른 것임을 보여 주거나, 한 순간에 있어서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음을 주장함으로써 정당화되어야 한다. 하나의 개연성에 기인하여 발생되는 또 다른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언어에서 발견되는 모순을 우리는 논쟁에서 상대자에게 논박을 가하듯 정밀하게 검토하여야 한다. 시인 스스로 말한 것으로 모순을 범한 것이라든지 양식이 있는 사람이 진실이라고 확신한 바의 것을 인정하기 전에, 그가 의미하는 것이 동일한 관계가 동일한 의미로 동일한 사물에 대한 것인지 아닌지를, 즉 모순이 있는지 여부를 알아보아야 한다. 비평가들이 제기하는 문제점은 대략 다섯 가지에 기인한다. 비평에서 말하는 것은, 어떤 것이 불가능하거나, 불합리하거나, 유해한 것이거나, 모순이 있거나, 기법적인 정확성에 어긋나는 것 등이다.    13. 서사시와 비극의 비교론  더 고양된 모방 형식이 비극인가 서사시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만약 덜 비속한 것이 더 고양된 것이며 항상 더 훌륭한 관객을 대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대중을 상대로 이야기하는 예술은 매우 비속한 것임에 틀림없다. 비극은 서사시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중요한 음악과 장경을 함께 가지고 있다. 비극 표현의 사실성은 실제 연기를 할 때뿐 아니라 읽기만 하여도 실제 공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비극의 모방은 결말에 이르기 위해 그리 많은 시간적 거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큰 이점을 가졌다고 하겠는데, 훨씬 집중된 효과는, 시간을 길게 잡아 복잡하게 엮어나가 오히려 실망하게 되는 효과보다 더 많은 즐거움을 줄 수 있다. 그러므로 만약 비극이 이런 점은 물론 다른 점에서도 그 시적 효과에 있어 서사시보다 쉽게 효과를 얻을 수 있으므로 더 고양된 예술 형식이라고 할 것이다. 비극과, 서사시의 일반적인 본질과 종류에 대해서, 구성 성분의 수와 성질에 대해, 성패의 원인에 대해, 비평가의 비판 그에 대한 해답으로서의 해결에 대하여 고찰하였으므로, 이제 이 두 가지 예술에 대하여는 그만 논의하기로 하자.   
5    현대시의 단절의식 / 강영환 댓글:  조회:1031  추천:0  2019-02-04
현대시의 단절의식 / 강영환         反주지에서 찾을 수 있는 현대시에 있어서 의식의 특징을 스피어즈는 그의 저서 에서 현대시가 발생하는 과정에서 야기한 문제점을 '단절'이라는 말로 포괄하였다.       단절은 불연속성을 말하며 시에 있어서 심상주의의 이념적 토대를 제시한 흄의, 이 연속성의 개념의 파괴는 상대적으로 현대성의 개념을 깨닫게 해 준다. 연속과 불연속, 곧 단절의 원리는 주로 19세기 생물학자들과 지질학자들의 진화론에 대한 회의가 동기를 이루고 있다. 인간이 자연과 연속된 존재라는 확신은 다윈이나 마르크스의 경우 자연주의 그리고 신의 소멸이라는 측면으로 드러난다.       1900년 생물학자들은 유전법칙의 연구에 있어서 불연속의 변주와 마주치게 되었고 그들은 멘델을 재발견하게 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 플랑크의 양자이론에서도 에너지, 움직임, 물질의 본질 속에는 근본적인 불연속성이 있음을 드러내었으며, 특히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원리는 그 후 불연속성 개념에 이론적 토대를 만들어 주었다. 중요한 것은 이후 발견된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원리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제 4차원, 곧 시-공 연속체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불연속을 포함하는 새로운 유형의 연속개념인 것이다.       이런 인식은 실재의 본질에 대한 전혀 다른 새로운 전망을 낳게 하였다. 곧 시간과 공간, 에너지와 물질 그 뿐만이 아니라 일체의 인과관계, 관찰자와 대상의 관계도 매우 복잡하고 기이한 내적 관계로 드러남을 의미한다.       스피어즈는 현대문학에 나타나는 기본적 단절을 네 가지로 들고 있다.                   (1) 형이상학적 단절                   유기체의 세계와 무기체의 세계 그리고 윤리적 세계와 종교적 세계 사이에는 절대적 단절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들 사이에는 어떠한 교량도 놓여질 수 없으며, 이 점을 통찰함으로서 우리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사물의 진면목과 해후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단절은 엘리엇의 세 가지 질서 개념인 자연과 인간과 초자연적 세계 상호간의 단절의식, 그리고 신비평가 그룹의 한사람인 테이트의 물질과 정신의 근원적인 단절의식 등으로 현대문학론 속에 수용된다.                   햇빛이 환할수록/우거진 숲 속은       방울꽃 흔적, 마치/밤처럼 어두운 그림자를 달고       빛을 기다린다                   그것이 누구의 숲인지/꽃들은 알지만       가끔씩 한 계절 머무르고/떠나가는       이름 모를 들풀들의 짧은 생에서       우리는 우리의/육십 년 인생을 보람으로 여겨야 한다                   되풀이 될 수 없는/각각의 사연들을 안고       웃음 한 번 제대로 띄워보지 못하고       빛없는 생을 살고 가는/무명의 인생일지라도                   숲 속에 말없이 피어/햇볕 한 번 받아보지 못하고       노래 한 번 불러보지 못하고/말라 바스라져 버린       방울꽃 두포기만큼/찬란한 생을 탐하진 않을거니까                   숲 속에/저 들풀의 환희 속에/사람들의 깨달음이 숨어있다                   먼 길/어둠이 내리기 전에/우리는 숲을 벗어나       서로의 갈 길을 가야 한다/이른 서리가 발길을 적시기 전에       서로의 갈 길을 가야 한다                   독자의 시 중에서                   방울꽃의 세계를 인간의 삶으로 변주하면서 새로운 관계를 설정해 내고 있는 위 작품에서도 는 서로 간의 단절을 대비시켜 시적 분위기를 환기 시키고 있다. 이 시가 앞부분의 성공에 비해 대체로 실패로 보이는 것은 는 부분 이후에서 약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피상적이고 고답적인 분위기로 빠지면서 형식에 치우쳐 상상력을 차단시키고 있는 점이다. 그냥 방울꽃을 상황을 제시해 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그 마음속에 그 의미를 발견하도록 여지를 주는 것이 이 시의 진폭을 크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심미적 단절                   시인의 모습을 평범한 사람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일반적인 생각이 아직도 사람들의 생각속에 깊이 남아 있는 것은 낭만주의가 뿌려놓은 결과라 본다. 그러나 현대적인 의미를 넘어서면 그것은 박물관의 유리관 속에 진열되어 있는 화석이 된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스피어즈는 두 번째 단절로 심미적 단절을 내세우고 있다. 그것은 예술과 인생 사이의 단절을 의미하며 포우와 보들레르 이래 여러 상이한 문맥속에 다양하게 부각되었던 개념이다. 그러나 자연주의, 도덕주의, 속물주의에 저항하는 상징주의, 특히 퇴폐주의는 예술과 인생 사이에 있는 무서운 단절감을 환기한다. 말하자면 예술가로서의 삶과 현실인으로써의 삶 사이에 메꿀 수 없는 단절의 늪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리차즈도 시가 띄는 환영적인 미적 상태를 꼬집고 시를 여러 다른 인간경험의 세계와 접촉 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엘리엇에 의하면 시인은 신비로운 자가 아니라 모든 다른 인간들처럼 범속한 생활을 하는 자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그의, 시인은 그의 개성을 표현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에 의해 강조된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술을 모방의 양식이 아니라 이질적인 세계의 합금, 화학반응의 양식, 곧 형식의 문제에 국한 한다는 그의 이론은 그 자체가 일종의 심미적 단절을 시인하는 것이다. 오든에 의하면 는 것이다. 곧 시는 시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전 시대의 시인들의 삶에서 낭만주의의 모습을 발견해 낼 수 있는 것은 예술과 삶을 동일시하면서 심미적 단절을 가져오지 못한 결과로 보여지는 것이다.                   (3) 수사학적 단절                   심미적 단절과 깊은 관련이 있는 수사학적 단절은 시를 산문과 대조적으로 인식함을 뜻한다.       산문에 비하여 시는 구조적 단절을 나타낸다. 말하자면 시는 산문의 논리와는 다른 일종의 비논리의 지배를 받는다. 생략적인 스타일, 산문적 연결방식의 무시, 어떤 설명도 없는 병치적인 이미지 연결, 비합리적인 순서에 의한 낱말 배열 등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식은 영화의 몽타쥬 기법의 영향과 꿈 및 무의식의 논리를 따르는 초현실주의에 의하여 가장 명료하게 파악된다.                   먹구름 춤       하염없더니       참을 수 없는 정열의 몸짓       하늘 밖으로 곤두박질한다       ……       지금       비는 태양이다.                   독자의 시 일부분                   비를 이나 으로 파악하는 것은 산문적인 논리로서는 접근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시적인 의미로 다가서면 그것은 이면의 논리에 의해 연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4) 시간적 단절                   아인슈타인의 시간과 공간의 상호 확산개념에서 추출되며 그 공개적 형식이 영화이다. 공간적 형식, 동시성에 대한 인식은 말할 것도 없이 20세기 초기 주지주의에서는 매우 중요한 양상으로 드러난다.                   비가 내린다.       그칠 줄 모르고 밤에도 낮에도       쌓였던 눈물을 한꺼번에 내려놓는다       마을에도 산에도 붐비는 거리에도       비가 내린다.                   하늘은 물방울을 가득 담은 호수.       그 속에서 바람은 깃을 달고       날아온다.       유리문에 빗방울이 떨어지고       바람은 전설의 고향 소리를 낸다                   비가 내린다. 쉬지 않고 내린다.       하늘은 언제까지 태양을       숨겨둘 모양이다.       흔들리는 문 소리에 외로움이       덜컹거린다.       우산 없이 이대로 하늘 밑에       있고 싶어라.                   가슴 귀퉁이 젖은 하루의 토막이       빗속에 서있다.                   독자의 시 전문                   시간적 단절은 한마디로 시간적 질서의 파괴이다. 시 속에는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한정 지워 사용하지는 않는 것이다.                   (5) 그 밖의 단절                   이상 네 가지 단절 외에도 다른 범주의 단절이 있을 수 있다. 에를 들면 내부에서의 분열감을 뜻하는 [심리학적 단절] 즉 심리적 분열감 인식으로 엘리엇이 말한 에 포괄되는 의미이다. 현대 시인은 이 분열의 극복, 곧 감수성의 통합을 시도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하였다. 지성과 감성, 이성과 감정의 통합을 목표로 한다.           다음으로 역사적 단절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시간적 단절의 역사적 양상을 의미하며 아무리 우리가 현대를 그럴듯하게 정의하더라도 현대인은 언제나 라는 의미로 수용된다. 여기에서 20세기 예술은 과거의 그것과는 결정적으로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과거와의 단절을 의식적으로 자각하는 것은 최후의 주지주의자들, 곧 입센이나 쇼우, 니체 등에서 두드러진 특성이다. 그리고 이러한 단절의식은 역사상으로는 미래주의, 다다주의, 초현실주의 등에서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스피어즈에 의하면 역사적 단절인식에 대한 두 가지 기본적 반응은 첫째로 미래주의자 혹은 오늘날 티뷔에 의한 자동적 구원에 전폭적 신뢰를 표명하는 맥루헌에게서 보며, 이들은 모두 낙관적 세계관을 표명한다. 또 하나의 반응은 과거와의 단절을 소멸 혹은 전락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파국주의는 현대예술의 중심 테마가 되고 있다. 이를테면 현대를 황무지로 파악한다든가 문명은 파괴되고 인간의 본질은 변화되고, 따라서 상실감만이 지배적 신화가 된다는 견해가 그것들이다. 현대의 가장 혁신적인 행동파 화가 로젠버그는 과거의 예술을 전혀 무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현재는 불모의 시대요, 무의미의 시대요, 기계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는 현대의 미술 비평가인 리드로 하여금 현대회화를 반항의 회화 곧 정신적이고 미적인 가치에 무관심한 야만적인 문화인이 시대문화에 반항하는 한 양식으로 보게하며, 또한 우리가 앞서 지적한 50년대 후기 주지주의로 요약되는 부조리 예술을 낳게 했다.       신이 소멸한 시대에 예술가들은 현재의 무의미성과 원시적인 의미성 사이에 어떤 대비적 주제를 제시한다. 그것은 우리는 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화에의 신념은 아직도 문학예술로 성숙한 표현을 입고 있는 것은 아니다.  
4    영시의 이미지 댓글:  조회:1045  추천:0  2019-02-04
영시의 이미지      이 미 저 리        말이나 글에서 오직 관습적인 이미지만을(우리는 이 장에서 이미지라는 말을 비유라는 의미고    사용한다)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의도하는 바와는 정반대의 효과를 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    떤 사람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얬다'고 우리가 말한다면, 이 때 사용하는 비유가 진부하기 때    문에 이 말은 별로 주의를 끌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가 매우 창백했    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 것이다. 진부한 기존의 이미지는 그 관용구 자체가 어떤 중    요한 의미를 지니도록 의도하는 한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라는 증거가    된다는 점에 거의 예외가 없다. 그것은 세밀하고 개성적인 종류의 경험이 아니라 산만하고 일반    적인 종류의 경험의 표현이며 신선한 통찰력이나 상상력의 어떠한 표식도 지니지 않는다. 그것    은 또한 그것에 기초를 두고 사용된 언어의 효과를 손상시킬 수 있다. 만일 우리가 놀라운 사건    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것은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라든지 이와 유사한 말을 첨가하면    우리는 그 놀람의 효과를 강화하기보다는 약화시키기 쉽다. 많이 사용되어 낡은 이미지는 의미    하는 바가 매우 적어질 수밖에 없다. 역으로 '늑대 목구멍의 안쪽처럼 새까만'이라는 말과 같은    이미지는 나쁜 의미에서 개성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상당히 시선을 끌고 개성적이며 또한    상당히 '독창적'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미지들은 우리가 그 내용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타당성이 증명될 수 없다. 심지어 우리가 그것을 상상하려고 노력한다 하더라도 늑대의 목구    멍이 유별나게 검은 색을 암시하는지, 또 수많은 동물들 중에서 하필이면 왜 늑대가 사용되었는    지를 이해할 수 없다. 이런 이미지들은 작가가 우리의 정신과 감각에 밝혀주고, 더욱 생생하게    하려 한다고 짐작되는 대상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우리의 주의를 돌리게 하는 경향이 있다.    훌륭한 작가는 의미를 강화하고, 명확하게 하고, 풍요롭게 하기 위하여 신선하고 생생한 이미    지를 최대한 사용한다. 성공적인 이미지는 작가가 다루고 있는 대상이나 상황을 그가 올바로 파    악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느끼도록 하는 데 도움을 주고, 그가 파악하고 있는 것을 꼼꼼하고,    생생하고, 강력하게 경제적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런 인상을 주기 위해서는 그것의    내용, 즉 그 이미지를 이루는 재료가 엉뚱하게 환상적이거나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지나치게 멀    리 떨어져서는 안되며, 내용은 우리 자신의 삶의 구조에 어떤 방법으로든 속한다고 우리가 즉각    느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물론 내용과의 친밀함이 이미지 자체를 친밀하고 일반적인 것이    되도록 하지는 않는다. 훌륭한 작가들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재료들을 사용하여 놀라운 이미    지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리고 한 이미지는 그 나름의 직접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    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들어 있는 작품의 다른 부분에 대한 연상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를 포함하    기도 한다. (이는 그 작품이 시이든 극이든 소설이든 관계없다.) 셰익스피어(Shakespeare)의 원    숙한 극에는 이런 이미지가 풍부하다. 그런 극에서는 이미지들이 고립된 상태로 빛을 발하는 별    개의 단위가 아니다. 이미지들이 그 나름대로의 놀라운 매력도 지니고 있지만, 완전히 (여기에    서 '완전히'란 '전체적으로' 또는 '충분히'란 뜻이다) 읽어보면 극의 전체적인 표현의 필수불가    결한 한 부분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서론부에서 제기한 이 주장들을 지금부터 20여개의 이미지들을 간단히 살펴봄으로서 검증하도    록 한다.    앵거스가 맥베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 그는 느끼는가    그의 은밀한 살인들이 그의 양손에 들러붙는 것을,    (Now does he feel    His secret murders sticking on his hands,)        셰익스피어는 여기에서 대단히 효과적인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다. 그는 폭군의 감정을 '양심'이    나 '죄악' 또는 '두려움' 등과 같은 추상적인 단어들로 표현하지 않고 두려움과 운명, 그리고    그 결과로 야기되는 공포의 불가피성을 강력히 암시하는 구체적인 단어들을 사용하여 제시한다.    이 행은 살인자의 숨김(즉 비밀)과 손에서 평범하면서도 끈덕지게 보이고 느껴지는 (즉 들러붙    는) 피를 병치하는 데에 내포된 역설로부터 많은 힘을 이끌어낸다. 우리는 일종의 악몽이라는    두려움을 경험하고 있는 맥베드라는 인물에 매우 가까이 접근한다. 그의 손은 깨끗하게 씻어지    지 않을 것이고 비밀을 틀림없이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그가 숨기고자 한 비밀은 이미 그 반    대, 즉 명백하고 느낄 수 있는 존재로 변했다. 그리하여 '이제 그는 느끼는가'라는 이미지는 육    체적인 감각 즉 야만적인 살인의 섬세하고 민감한 행위자인 손의 감각이라는 육체적 감각으로    이념이나 사상을 제시한다. 더욱이 이 이미지는 이 극의 많은 다른 부분들을 연상시킨다. 맥베    드는 전에 그의 손이 '드넓은 바다를 선홍색으로 물들여 푸른 바다를 붉게 물들일 것'(The    multitudinous seas incarnadine, Making the green one red)을 두려워했고, 맥베드 부인은 '한    방울의 물로 이 붉은 색을 깨끗이 씻는다'(A little water clears us of this red)고 단언했는    데, 이 말은 나중에 '아라비아의 모든 향수로도 이 조그만 손을 향기롭게 할 수 없다'(All the    perfumes of Arabia will not sweeten this little hand)로 변한다. 그러나 우리가 인용한 이    구절에 있는 이미지와 가장 유사한 행은 아마 맥베드 부인이 그녀의 남편을 재촉하는 구절인    '용기를 내어 목의 급소를 찌르시오, 그러면 우리는 절대 실패하지 않을 것이오'(But screw    your courage to the sticking place, And we'll not fail)일 것이다. 여기에서는 활줄과 악기    와 단검의 긴장의 한계(화자는 이것을 위태로운 상태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에 대한 암시가    이것을 복잡하고 강력한 이미지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 우리는 지금 한 이미지가 그 자체의    '국부적인' 가치를 지니면서 다른 중요한 사상, 감정, 태도 등을 회상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작품 전체의 힘과 복합성을 증가시키는 방식에 관심을 갖고 있다. 한 이미지는 앞에서 나온 어    떤 말이나 행동을 확인하거나, 냉소적으로 회상시키거나 또는 어떤 다른 방식으로 미묘하게 수    식할 수 있다. {맥베드}에서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가를 여기에서 상세히 증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려면 구성, 주제, 인물 등의 요소를 고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지들의 이와 같은 조화와 내적 연결은 시인이 상황 전체의 복합성을 파악하고 있으며, 통합    하는 능력, 즉 복잡한 재료를 극적인 전체로 조직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래서 '들러붙는'(sticking)이라는 말처럼 평범한 단어가 진정한 시인의 손에서는    대단히 풍부한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이미지들이 풍부하고 풍성하게 암시적일 것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만일 작가가    의도하는 효과를 적극적으로 축소시키는 요소를 그 이미지가 포함하고 있지 않다면 한 이미지의    주된 목적은 매우 단순할 것이고, 또 간단히 완수될 수 있을 것이다. 마알로우(Marlowe)의 작품    인 {말타의 유태인}(Jew of Malta)에서 바라바스는 다음과 같이 상상한다.        동방의 바위에서    활수있게 부를 모을 수 있고    집에 진주를 조약돌처럼 쌓을 수 있는 부유한 무어인;    (The wealthy Moor that in the Eastern rocks    Without control can pick his riches up    And in his house heap pearls like pebble-stones;)        우리는 손쉽고 무관심하게 이룬 부를 암시하는 이와 같은 직유를 좋아한다. 우리는 진주가 색깔    이나 결에 있어서 조약돌과 동일하기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이 이미지의 주안점은 모아 쌓아 놓    는 것이고 마알로우는 그것을 '간단히' 그리고 적절하게 구사한다. 이처럼 모아서 쌓아 놓는 것    은 '부를 모을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이 발밑에 있는 조약돌에 무관심하듯이 진주에 무관심할    수 있는 사람의 손쉬운 부를 가리킨다. 이 이미지에서는 날카로운 비전이 회화체 어조와 언어로    표현된다는 점에서 특히 효과적이다.    간결하고 암시적인 이미지와 대조되는 것으로, 우리가 그것에 적절히 어울린다고 앞에서 제안    한 이유 이외의 다른 이유 때문에 몇몇 시인들이 탐닉하는 느슨하고 장황한 종류의 이미저리가    있다. 이미저리에 대해서는 어떤 규칙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서 '적절히'라는 말    대신 '가장'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작가들은 때때로 우리가 당연히 본질적인 궤도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너무 멀리 이탈하는 경우가 있다. 작가들은 단순한 은유를 계속하기 위한 사소    한 것들을 발견하느라고 자신들의 본래의 길을 잃는 경우가 있다. 셸리(Shelley)의 '종달새 부'    (Skylark Ode)에 있는 유명한 연속적인 직유들은 새의 생생한 인상을 제시하려는 욕망 이외의    다른 감정에 의하여 고무된다. 그들이 거의 모두 '같은'(like)이라는 말로 시작되는 것으로 보    아 직유인 것이 분명하지만 대부분의 것들이 비유로서는 너무 모호하거나 적절하지 못하다. 그    러나 서정적으로 쇄도하는 언어와 그 언어가 지닌 낭만적인 내용에 흥분하고자 하는 독자들은    이 직유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셸리의 음악적인 운문은 종종 독자들이 그 서정적인 쇄도의 마    력에 굴복하도록 거의 강제하는 듯한 종류의 것임이 분명하다. 여기에 셸리의 것은 아니지만,    산만함에 있어서는 '종달새'의 직유와 유사하고, 언어적 음악에 있어서는 보다 더 '가공'되었지    만 보다 덜 인상적인 시편을 예로 든다. 워즈워드(Wordsworth)는 어떤 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다소곳한 태도를 지닌 수녀;    쾌활한 처녀, 사랑의 궁전에 있는,    그대의 단순함 속에서    모든 유혹이 희롱한다;    루비 왕관을 쓴 여왕;    초라한 옷차림의 굶주린 아이;    이 모든 것이, 그대에게 가장 어울려 보이는,    그대 이름이다.        작은 사이클롭스가, 외눈으로    위협하고 도전하려 보고 있다,    그 생각이 다음에 오고--그리고 이내    그 변덕은 끝난다,    그 괴물은 사라지리라--그리고 보라    황금 볼록 장식이 있는 은 방패를,    스스로 펼쳐서, 전투 중인    대담한 요정을 감싸는!    (A nun demure of lowly port;    Or sprightly maiden, of Love's court,    In thy simplicity the sport    Of all temptations;    A queen in crown of rubies drest;    A starveling in a scanty vest,    Thy appellations.        A little cyclops, with one eye    Staring to threaten and defy,    That thought comes next--and instantly    The freak is over,    The shape will vanish--and behold    A silver shield with boss of gold,    That spreads itself, some faery bold    In fight to cover!)        워즈워드가 여섯 개의 비유를 데이지에 대해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 시행을 처음 읽는 사람    이 알아차릴 것인지가 의심스럽다. 이런 종류의 이미지들은 그들이 밝히려 하는 대상을 오히려    어둡게 한다. 이 비유들 중 어느 하나도 데이지만을 적절히 설명하고 암시할 만큼 세밀하지 못    하고, 이 비유들 모두가 다른 어떤 꽃들에도 때로는 적절하게 또 때로는 적절하지 못하게 적용    될 수 있다. 이 시행들을 쓰면서 공상에 잠긴 시인은 일련의 비유를 지어낼 수 있었다. 이 비유    들은 일반적으로 지나치게 독창적이며 감상적이다. 왜냐하면 오직 공상만이 활동하고 있는 이    공상적인 직유에서는 꽃의 실체가 완전히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꽃이 상상적으로 인    식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여기에서는 워즈워드의 널리 알려진 시편들 중의 한 작품에서 그가    뻐꾸기를 인식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꽃이 어여쁜 환상들을 남작(濫作)할 기    회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이 시편의 이 부분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려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워즈워드가 그와 같은 이미지들을 상상력의 대용물로 우리에게 제공할 때, 우리는 그가    별로 쓸데없는 운문짓기에 열중하고 있다고 느낀다. 시인 자신이 공상의 '변덕'을 말하기도 한    다. 이 시편은 어린이들을 위하여 쓰여진 것같은 분위기를 지니고 있지만, 시인이 이 점을 염두    에 두고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시에는 오직 강렬한 시선을 모으기 위하여 남작된 이미지들이 많이 있다. 우리는 이들을 때로    는 독창적이라고 하기도 하고 때로는 대담하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암시적    이면서도 생생하고 적절하게 제시하는 능력인데, 공상적으로 남작된 이미지는 이러한 능력을 지    니고 있지 않다. 크래쇼(Crashaw)는 '성 메어리 막달렌, 또는 우는 사람'(Saint Mary    Magdalene, or The Weeper)이라는 작품을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만세, 자매 샘이여!    은빛 발달린 시내의 부모!    항상 흐르는 것들!    녹는 수정! 눈덮힌 동산,    항상 쓰지만, 결코 소진되지는 않는구나!    나는 그대의 아름다운 눈을 뜻하오, 사랑스런 막달렌이여!    (Hail, sister springs!    Parents of silver-footed rills!    Ever bubbling things!    Thawing crystal! snowy hills,    Still spending, never spent! I mean    Thy fair eyes, sweet Magdalene!)        영속적인 순결과 '정신적 휴식'에 대한 어떠한 암시가 이 이미지들로부터 이끌어 내어진다 할지    라도, 그것은 너무나도 분명하게 다루어졌기 때문에 인상적이지 않다. 샘과 시내와 언덕은 막달    렌의 눈과는 완전히 분리된 그들 자신의 존재를 너무 명확하게 취한다. 이 이미지들은 상상적    생명력이 결여된 기상(奇想)들이다. 시인은 자신의 주제를 전개하기 위해 필요한 진지함에 보다    는 '항상 쓰지만 결코 소진되지 않는'이라는 역설에 더 관심을 갖는다. 이 시편에 나오는 악명    높은 한 2행연구는 눈을 다음과 같이 비유하고 있다.        걸어다니는 두 목욕통; 울음 우는 두 기구;    가지고 다닐 수 있는 방대한 대양,    (Two walking baths; two weeping motions;    Portable, and compendious oceans,)        이 이미지들은 너무 두드러지기 때문에 우스꽝스럽다. 게다가 각각의 이미지들이 이치에 맞지    않게 과장되었기 때문에 분리 독립된 단위가 되어 그 후에 나오는 이미지들과 마찰을 빚는다.    이는 이들 모두에 공통된 움직이는 물이라는 개념이 우스꽝스러운 불일치를 초래하는 방식으로    다루어졌기 때문이다. 다양한 요소들을 조화시켜 통합된 전체로 만드는 상상력이 여기에서는 전    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하여 여기에는 진실한 느낌을 지니지 않은 '독창적    인' 공상만이 작용한다. 그리고 우리가 대부분의 17세기 시에서 발견하게 되는 진지한 것과 희    롱적인 것을 혼합하는 습관이나 전통을 다소 허용하고자 할 때 조차도 이 시행들에는 매우 쉽게    감지되는 공상이 혼란스럽게 모아져 있다는 것만을 느끼게 된다. (상당히 성공적으로 혼합되어    있는 작품에서는 '진지한' 것과 '희롱적인' 것이 삶에 대한 성숙한 태도에서 하나로 결합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몇몇 현대시의 이미저리도 이와 마찬가지로 강제된 것이다. 다음에 인용한 시행들은 한 '학    파'의 작가들의 전형적인 표본이다.        ...불안정한 인간,    때로는 마천루 슬픔의 짐에 억눌리고,    때로는 앙상한 철탑의 늑골로부터 기쁨을 자아낸다.    (Unstable man,    Now bent under the load of his skyscraper grief,    Now spinning joys from the spare pylon's ribs.)        '마천루'는 광대함 즉 엄청나게 많은 양을 암시하려는 의도로 사용되었는데 슬픔과 관련시키기    에는 매우 부적절하다. 왜냐하면 마천루는 강한 재질의 재료로 만들어진 사물이며, 높이가 높    고, 명확하게 설계되었다는 점에서 슬픔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런 짐을 지고 있    는 사람의 개념은 '비틀거리는' 사람의 개념이 된다. 첫행과 짝을 이루도록 케케묵은 문구를 자    랑스럽게 사용한 둘째 행은 무선통신에 대한 암시를 지니는 것이 분명하다. '자아낸다'라는 말    은 이 자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어떤 사물이나 사람의 늑골에서 나오는 즐거움은 야    릇한 종류의 즐거움일 것이 분명하다. 이 이미저리는 뒤죽박죽 되어 있고 무의미하다. 따라서    이 이미저리는 인상적으로 보이도록 의도되었으나 거짓된 것임이 자명하다.    어떤 현대 시인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자기 주변의 사물들로부터 이미저리를 찾고, 이    미저리의 재료를 발견하려 하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재료를 매우 부조리하게 사용하고 있다. 훌    륭한 이미지는 우리를 놀라게 할 수도 있고, 이해되지 않으면 과장되게 보일 수도 있다. 코울리    지 같은 위대한 비평가조차도 {맥베드}의 '하늘도 또한 어둠의 담요를 통하여 엿보지 않는다'    (Nor heaven peep through the blanket of the dark)라는 행에서 셰익스피어가 실제로 사용한    말은 '담요'(blanket)가 아니라 '공허한 높은 곳'(blank height)일 것이라고 제의했다. 코울리    지는 그 행에서 무언가 강제되고 부적당한 것을 발견하고 '담요'를 없애기를 원했다. 그러나 자    세히 연구해 보면, 그 이미지가 그 문맥 속에서 지극히 적절하고 암시적인 것으로 드러나므로,    부조화가 셰익스피어의 의도의 일부라는 것이 밝혀진다. 어떤 이미지는 매력적이고 흥미 있는    요소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관련되어 있는 주제를 명확하게 밝히는 주된 기능을 수행하    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밀튼(Milton)과 아놀드(Arnold)가 독특하게 사용한 긴 직유    가 그러하다. 그들은 많은 개념을 설명하면서, 십여 행의 감미로운 시행에서 고래와 다양한 지    리적 환경에서의 고래의 방향과 먹이를 먹는 태도에 관하여 말하는데, 흥미를 유발시키기 위하    여 고전적, 성서적 암시를 이용하기도 한다. 나중에 이런 직유들 중의 하나를 인용하겠다.    재미는 있지만 적절하지는 않은 유형의 이미지의 예를 웹스터(Webster)의 '백색 악마'(The    White Devil)에서 인용한다. 여기에서 플라미네오는 무대를 건너가는 스페인 대사에 대하여 다    음과 같이 논평한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주름옷깃에 담아 운반한다. 이는 마치 하인이 깨뜨릴까 봐 두려워하여 괴상하게 뻣뻣이 서서 사이    프러스 햇밴드에 유리잔을 나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소금을 쳐서 양초에 구운 지빠귀의 발톱처럼 보인다.    (He carries his face in 's ruff, as I have seen a serving-man carry glasses in a cypress hatband, monstrous    steady, for fear of breaking; he looks like the claw of a blackbird, first salted, then broiled in a candle.)        이 비유들은 엉뚱하게 생생하며 독특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 첫 비유의 풍자적 어조와 둘째 비    유의 으스스한 내용은 청중에게 흥미와 몸서리를 유발시키려고 계산된 것이다. 그것들을 말하는    화자는 냉소적이고, 조소적이며, 독선적인 예법의 관찰자이다. 그가 어느 장소에 나타나든지 그    에게서는 위트가 기대된다. 그의 직유들은 이미지로서는 그것에 처음 접했을 때 보이는 것만큼    인상적이지 못한 것으로 밝혀질 것이다. 이 이미지들의 특이한 내용은 흥미롭지만 우리는 플라    미네오가 스페인 사람을 묘사하기보다는 자신의 지식과 위트를 과시하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특히 둘째 이미지에서 그러하다. 첫 번째 이미지는 대사의 뻣뻣하게 쳐들은 머리와 엄격한 태도    에 대한 느낌을 전달한다. 그러나 '사이프러스 햇밴드에 유리잔'을 나르는 것은 우리가 전혀 경    험하지 못한 것이다. (웹스터 시대의 사람들이 그것을 다소 경험했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    러므로 그것은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하지 못한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플라미네오가 비교    하는 요점을 계속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어야 한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정말    로 강력한 이미지는 스스로 설명되기 때문이다. 스페인 대사를 조롱하는 것이 웹스터의 주된 관    심사였고 그의 비유가 많이 즐겨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첫 번째 이미지 보다 일상생활의 경험과    동떨어지고 더 낯선 두 번째 비유의 소재는 청중이나 독자에게 약간의 혐오감을 유발시킬 목적    으로 창안된 듯이 보인다. 식용으로 쓰이는 듯한 이상하게 요리된 지빠귀의 발톱은 작가의 목적    을 충분히 달성할 수 있을 만큼 섬뜩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방식으로 요리된 지빠    귀의 발톱의 모양이나 맛을 상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은 비유로 사용될 수 없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웹스터가 스페인 대사를 청중들에게 불길하고 불쾌하게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했다    면 그가 그 목표를, 특히 정서적이지만 생각이 깊지 못한 청중들에게서, 상당히 달성하고 있다    는 것은 분명하다. 이 두 번째 이미지는 대단한 정도의 환상적인 무서움에 더하여 연극 효과에    관한 한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상상적 진실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꽤나 현란하게 독창적이지만 뿌리가 없다.    때때로 소박하기 때문에 훌륭해지는 이미지는 난해한 문제를 포함하고 있는 이미지 보다 우리    가슴에 더 직접적으로 절실하게 와 닿는다. 지빠귀의 발톱이 우리의 환상을 강렬하게 자극할지    는 모르겠지만, 맥베드의 마음과 손은 우리의 오관과 마음에 즉시 떠오른다. 평범한 내용이 작    가의 목적에 적합하게 되려면 상상적으로 다루어져야 함은 물론이다.    셸리(Shelley)는 워즈워드(Wordsworth)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는 한 파인트 들이 항아리만큼 많은    상상력을 갖고 있다...    (He had as much imagination    As a pint-pot...)        여기서 셸리는 평범한 내용을 지닌 이미지를 간결하게 사용했다. 비록 이 이미지의 소재는 우리    가 익히 알고 있는 것이지만, 비유는 독창적이고 놀랍다. 이것은 대단히 정서적인 이미지이다.    다시 말하여 이것이 워즈워드에 대한 셸리의 비우호적인 감정을 표현한 것으로 우리가 느끼고,    셸리가 공격하고 있는 워즈워드의 우둔함을 우리가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비유가 그다지 적    절하지는 않다고 생각된다. '한 파인트 들이 항아리만큼' 이라는 구절은 회화적으로 익살스럽고    놀랍지만 많은 의미를 전달하지는 못한다. 한 파인트 들이 항아리는 다른 무생물들이 지니고 있    는 것과 같은 양의 상상력을 지니고 있다. 만일 시인이 한 파인트 만큼의 상상력을 의도했다 하    더라도 이 비유는 아무 의미도 전달하지 못한다. 단조롭고 무겁고 정적으로 열등한 항아리가 적    합할 것이고 시인이 아마도 이것을 의도했겠지만, 우리는 이 이미지가 정확한 의미보다는 더 많    은 느낌을 포함하고 있다고 느낀다. 셸리의 워즈워드에 대한 혐오감을 전달하는데 있어서 이 이    미지의 효과는 비유의 천박함과 사소함을 단어의 소리와 율동에 결합시키는 데서 온다. 상상력    의 개념과 소리는 크고 광활한데, '한 파인트 들이 항아리'(pint-pot)라는 날카롭고 명확하며    경멸적인 소리로 갑작스럽게 억제될 때 우리는 그 급락에서 셸리가 느꼈을 즐거움과 경멸을 느    낀다. 그것은 셸리의 다소 익살스러운 적대감을 명백하게 말하지 않고 암시하려는 목적에 도움    이 되는 정서적인 이미지로서는 좋지만 그 의미는 상당히 엷어진다. (또한 한 파인트 들이 항아    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따뜻한 느낌과 심지어 영감도 연상시킨다. 우리는 번즈(Burns)와 그의    '대담한 존 밸리콘을 고무시키기!'(Inspiring bold John Barleycorn)라는 작품을 생각하게 된    다.) 이것은 즉각적인 충격을 주지만 충분히 분석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더욱 효과적인 이미지    의 좋은 본보기이다. 이것은 진정 놀라운 잔재주이다. 셸리의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은 아마도    이 이미지를 매우 즐길 것이다. (이 한행 반의 비평이 워즈워드에 대한 셸리의 전체적인 평가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전체적인 평가는 이보다 관대한 경우가 종종 있다.)    정확한 의미를 지니면서 강한 개성적인 느낌의 결과를 보여주는 이미지의 예를 예이츠(Yeats)    의 '탑'(The Tower)의 첫부분에서 인용한다.        이 어리석음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오 마음, 오 고통받는 마음--이 캐리커처,    개꼬리에 매달리듯    내게 매달린 노령으로?    (What shall I do with this absurdity--    O heart, O troubled heart--this caricature,    Decrepit age that has been tied to me    As to a dog's tail?)        전혀 무리 없이 자연스럽게 도입된 듯한 이 단순한 이미지는 작품 전체의 효과를 대단히 증가시    킨다. 비록 '불안정'하지만 조용하며 차분한 처음의 시행들에 이어 씁쓸함과 다소의 혼란을 보    여주는 직유가 나온다. (시인은 그의 질문을 예의바르게 감동적으로 묻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    가 자신의 무력함에 대해 고함치고 있는 그를 볼 때, '부조리'와 '풍자화'에 대한 시인의 애초    의 조용하고 합리적이며 초연한 언급은 갑자기 부조리 그 자체로 변화한다. 그는 자신을 제 꼬    리에 매달린 양철 깡통이나 냄비를 떼어 내려고 화내는 개처럼 노화의 시작에 무력한, 무능하게    분노하고 있는 괴상한 인물로 본다. 그는 자신을 개와 동일한 창조법칙의 지배를 받는 한 동물    에 불과한 것으로 느낄 정도로 왜소하게 된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떠오르고, 떨쳐버릴 수 없    는 무언가에 대해 무익하게 분노하고 있다는 느낌이 이 단순한 이미지에서 경제적으로 강력하게    표출된다. (예이츠는 자연의 법칙에 대한 자신의 항의가 어리석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훌륭한 작가는 이미지들을 느슨하게 사용하지 않는다. 날카롭고 섬세한 지각력과 인식하는 것    을 정확하게 표현하려는 작가의 관심은 그가 적절한 이미지들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 홉킨스    (G. M. Hopkins)의 산문 노트에는 그런 이미지들이 많이 있다. 하나를 예로 들어본다.        다음날 아침 많은 눈이 내렸다. 그 눈이 전나무와 주목을 술로 장식하고, 발끝으로 서고, 그 위에 계속 쌓였다...    (The next morning a heavy fall of snow. It tufted and toed the firs and yews and went on to load them...)        여기에서 관찰이며 동시에 상상인 '발끝으로 서고'라는 단순한 은유는 나무의 발치에서부터 뻗    어나와 부분적으로 드러나 있는 뿌리뿐만 아니라, 이 특별한 나무가 종종 발가락과 발톱처럼 펼    치는 가지를 강조함으로써 눈의 효과를 정확히 묘사한다. (시인은 자신의 눈과 상상적인 정신으    로 그것을 생생하게 본다.) 우리는 롱펠로우(Longfellow)가 다음의 유명한 4행시를 쓸 때 자신    의 주제를 마음으로 상상했는지 아니면 눈으로 보았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위대한 사람의 생애는 모두 우리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도 우리 생애를 숭고하게 해야 하리라고,    그리고, 떠나며, 시간의 모래밭에 발자국을    우리 뒤에 남긴다는 것을.    (Lives of great men all remind us    We may make our lives sublime,    And, departing, leave behind us    Footprints on the sands of time.)        아마도 시 전체에 표현된 정서보다 마지막 두 행의 이미지 때문에 사람들이 이 작품이 실린 시    집을 롱펠로우의 자필 서명을 받아 기념품으로 보관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이    는 그것이 낭만적으로 막연하고 '신비한' 은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매우 좋지 못    한 은유이기도 하다. 우선 모래는 앞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이 없기 때문에 본래 시간을 의미하지    못한다. 롱펠로우는 마음속으로 모래밭의 모래와 모래시계의 흐르는 모래를 혼동하며, 막연하고    부적절하게 발자국을 도입하는 것이 틀림없다. 어느 경우이든지 영속하는 이름을 뒤에 남기는    것을 암시하고 있지만, 모래 위에 새긴 발자국 보다 더 무상한 것은 없다. 또한 착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모든 사람이 그와 같은 발자국을 남긴다. 다시 말하여 발자국들이 '위대한 사람    들의 삶'에 대한 생각에 의해 고무된 사람들을 위해 특권으로 남겨진 것이 아니다. 이 은유는    단지 지극히 엄숙한 인상에 대한 제스처일 뿐으로 감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의미는 없다. 이    은유는 '숭고한', '떠나는', '우리 뒤에 남기다' 같은 손쉽고 정서적으로 호소하는 내용을 지닌    단어들로 이루어져서, 막연한 해안의 신비나 헌신적인 조력자의 분위기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인기가 있다. 좀더 분별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작품을 읽어보고, 마지막 두 행이 점    강법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즉시 알 수 있을 것이다. 첫 두 행에 표현된 정서를 우리가 무엇이    라고 생각하든 이 이미지는 그것을 지탱하는 데 전혀 도움을 주지 않는다. 사실상 우리가 이미    지의 공허함을 인식하게 되면, 정서나 사고에는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될 것이다. 또한    작가의 사고가 흐려진 증거를 발견할 때, 우리는 그의 도덕적 원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될 것    이다.    롱펠로우의 모래에 관한 은유와 비교하여 홉킨스나 마블(Marvell)의 이미지들에 주목해 보는    것은 재미있을 것이다. '도이칠란드호의 파선'(The Wreck of the Deutschland)에서 홉킨스는 다    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살며시 체질된다    모래시계에서-- 벽에 고정되어,    움직임, 흐름으로 파여져서,    모여서 빗질되어 떨어진다....    (I am soft sift    In an hourglass--at the wall    fast, but mined with a motion, a drift,    And it crowds and it combs to the fall....)        이 이미지는 비록 처음에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롱펠로우가 실패한 곳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음    이 밝혀질 것이다. 다시 말하여 이 이미지는 적절하고, 꼼꼼하고, 생생하다. 유리병 속에서 모    래가 가라앉는 과정이 섬세하고 정확하게 관찰되었고, 그 인식이 정신적, 영적 상태를 민감하고    정밀하게, 상상적으로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모래의 움직임은 내적인 연약함, 의심, 그를 잠식    하는 견고함의 결여, 실패와 해체를 향해 서두르는 '표류'의 두려움에 대한 시인의 느낌을 강력    하게 전달한다. 연약함이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 느낌이 이 이미지의 중심을 이루고 있    다. 움직이는 모래를 밟아 본 사람은 누구라도 효과적인 행동의 상실감이라는 놀라운 느낌을 가    졌을 것인데, 여기에 바로 그런 느낌이 다소 있다. 우리는 또한 성서에 나온 모래 위에 세워진    집을 생각할 수도 있다. 율동의 절정을 이루는 넷째 행은 안정된 중심이 없을 때 해체가 얼마나    가차없이 진행되는가를 암시한다. 풍성하게 암시적인 다른 모든 이미지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이미지에서도 말투, 소리, 율동 등이 합쳐져서 하나의 완전한 전체를 구성한다. 우리는 이 이미    지의 의미를 지적으로 파악함과 동시에 감각적, 육체적으로 느낀다.    우리가 롱펠로우의 이미지로부터 회상하게 되는 두 번째 이미지는 마블의 '그의 수줍은 애인    에게'(To his Coy Mistress)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등뒤에서 항상 듣는다    시간의 날개 달린 수레가 가까이 달려오는 소리를;    그리고 저 너머 우리 앞에는 모두    광대한 영원의 사막이 있다.    (But at my back I always hear    Time's winged chariot hurrying near;    And yonder all before us lie    Deserts of vast eternity.)        이것은 또 우리에게 다른 이미지를 상기시킨다. 이것과 헤릭(Herrick)의 '할 수 있을 때 장미꽃    봉오리를 모아라, 옛 시간은 여전히 날아간다'(Gather ye rosebud while ye may, Old Time is    still a-flying)라는 구절을 나란히 놓아 보면 마블의 특징이 즉시 느껴진다. 마블이 우수하다    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논증을 돕기 위하여 이들을 여기에서 비교해 본다. 마블의    이미지가 우수하다는 사실은 여러 면에서 보이는데, 그 중의 하나는 완전히 인식된 이미지에서    보인다. 헤릭은 관습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일반적이고 관습적인 이미지를 제시한다. 반면에 마    블은 특별한 상황에 개인적으로 몰입되어 있다. 그 상황은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인 상황이고,    그 상황이 현재에도 변함없이 계속되기 때문에 그의 몰입은 그의 시행들의 강렬하지만 통제된    정서를 유발한다. 율동과 시간 속에서의 삶의 성급함 사이의 대조는 시인이 구사하는 언어의 특    별한 힘으로 인해 이 정서를 전달하는 비전의 실체가 된다. 이 비전은 불쾌한 요소를 지니고 있    다. 다시 말하여 시인은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항상 들리는, 계속 가까이 다가오는 수레의 생    각에 끊임없이 쫓기고 있으며, 삶과 시간의 법칙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즉 그가 방향을 전환    할 수 있는 전환점이 없다. 그와 모든 사람들 앞에는 영원의 정적과 공공연함과 불모와 음산함    이 있을 뿐이다. 삶의 앞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은 화려한 보상을 가져왔다. 즉 수레에는 '날개가    달려 있다'. 그러나 정적인 영원에는 아무 날개도 달려 있지 않다. 역설적으로 말해서 그 화려    함에 대한 앎은 그가 더욱 엄숙하게 사고하도록 하며, 그의 진지한 사고는 그 광채들이 한층 더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한다. 이미지의 재료에 대한 이와 같은 설명은 시인의 '구체화하는' 능력    과 비교할 때 어색하고 추상적으로 보인다. 마블은 주로 시각적인 독특한 이미지를 사용하여 모    든 인류를 지배하는 시간과 영원의 개념에 정서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그 이미지에서 시각적인    요소는 정서적으로 강렬하고 유동적인 사고와 분리될 수 없다. 우리는 앞에서 주로 촉각의 이미    지인 '그의 손에 들러붙어'(sticking on his hand)라는 구절도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강렬한 충    격을 주고, 암시성을 풍부하게 지닌 것을 살펴본 적이 있다. (주로 이미저리에 관하여 토의하는    자리에서 지적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지만, 마블의 시행에서 '모두'라는 단어의 효과적인 사용은    주목할 만하다. 그것은 우리 앞에 있는 모든 공간이 사막이고, 이 공허한 영원이 모든 것이며,    다른 아무것도 없고, 우리 모두를 위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지 최상의 작가들만이 한 이미지를 상당히 길게 성공적으로 발전시키는 능력을 지니고 있    다. 만일 어떤 이미지가 주제를 생생하게 하고, 밝히고, 풍요롭게 하려면 그것은 상상적 진실과    지적인 통제의 지속적인 압력을 필요로 한다. 작가가 긴장을 풀거나 부주의하면, 이미지가 혼란    스럽거나 무의미하게 되고 심지어는 부조리하게 되어 해체되어 버리기 쉽다. 길게 늘여진 '고전    적인' 직유는 회화적이거나 감미로운 요소들에 의해 적절함이나 강렬함이 희생되는 종류의 이미    지로 이미 예를 든 바 있다. 그러한 이미지들이 한 페이지에 세 개가 있는 아놀드(Arnold)의    '소랍과 러스텀'(Sohrab and Rustum)에서 인용한 다음 구절은 독특하기는 하지만, 그 직유가 본    래 회화적으로 다소 흥미 있는 내용을 지니고 있으나 전혀 적절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 이상의    논평이 필요하지 않다. 여기에서는 '처럼'(as)과 '그렇게'(so)라는 말이 지극히 사소하고 일반    적인 유사점만을 지니고 있는 재료들을 도입한다.        어떤 부잣집 부인이, 겨울 아침에,    검댕 묻은 마비된 손으로 불을 지피는    불쌍한 하녀를 비단 커튼 사이로 보듯이--    별빛이 비치는 겨울 아침, 닭이 울 때,    성에가 유리창에 하얗게 꽃필 때--    저 불쌍한 하녀는 어떻게 사나,    어떤 생각을 할까 궁금히 여기듯이; 그렇게    모든 용감한 추장들을 제쳐놓고,    러스텀을 찾아 멀리서 온,    미지의 대담한 젊은이를 러스텀은 바라보았다....    (As some rich woman, on a winter's morn,    Eyes through her silken curtains the poor drudge    Who with numb blacken'd fingers makes her fire--    At cock-crow, on a starlit winter's morn,    When the frost flowers the whiten'd window-panes--    And wonders how she lives, and what the thoughts    Of that poor drudge may be; so Rustum eyed    The unknown adventurous youth, who from afar    Came seeking Rustum, and defying forth    All the most valiant chiefs....)        비교 대상에 있어서의 차이점들이 두드러지는데, 시인은 그들을 거의 모두 동일하게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비록 아놀드가 자기 시대의 관습을 잘 알고 있기는 했지만, 이 사실이 그가 예    리함과 집중에 반대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좋은 핑계거리는 되지 못한다.    아놀드의 최상의 시편들 중의 하나인 '도우버 해협'(Dover Beach)에는 다음과 같은 시행이 들    어 있다.        신앙의 바다도    예전엔 만조였소, 그리고 지구의 해변 둘레에    눈부신 거들의 주름처럼 접혀서 놓여 있었소.    그러나 지금 나는    밤바람의 숨결에 맞추어,    황량하고 광대한 물가로    그리고 세상의 벌거벗은 자갈 깔린 해변으로 밀려나는,    그 구슬프고, 긴, 물러나는 굉음을 들을 뿐이오.    (The Sea of Faith    Was once, too, at the full, and round earth's shore    Lay like the folds of a bright girdle furl'd.    But now I only hear    Its melancholy, long, withdrawing roar,    Retreating, to the breath    Of the night-wind, down the vast edges drear    And naked shingles of the world.)        여기에서 우리는 '소랍과 러스텀'의 인용문에서와 같이 형식적으로 의도되고 '마련된' 자의식적    인 문학의 남작(濫作)이라는 인상을 받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이미저리도 실제로는 그    보다 더 정밀하고 계발하는 종류의 것은 아니다. 한 때 번영했다가 지금은 시들어 가는 것은 바    다와 올바르게 비교될 수 없다. 시인은 지나치게 우울하여 바다를 이제 흘러 나가기만 하고 되    돌아 흘러 들어오는 흐름은 없는 것으로 인식한다. 셋째 행의 직유는 거대한 '믿음의 바다'라는    개념을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사물에 비유함으로서 그 개념을 축소시키기만 할 뿐 고양시키    지는 않는다. '눈부신 거들의 주름'은 특히 '접혀질' 때, 바다의 넓게 둘러싸는 특성을 암시하    는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한다. 시인은 마음속으로 '눈부신 거들'을 위안을 주고 보호해 주는 외    투의 개념과 혼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차가운 바다는 전혀 위안을 주지 않고 보호    해 주지도 않는다. 이 구절은 시인의 현재의 우울과 대조되어 그 우울이 더욱 음침하게 보이도    록 하는 편리한 상징일 뿐이다. 마지막 5행은 이런 종류의 낭만시가 지니는 인상, 즉 울려 퍼지    는 음악이나 막연히 신비한 그림과 같은 분위기 등을 지닌다. 여기에서는 이런 요소들이 단지    정서적인 목적만을 위하여 사용되고 있다. 다시 말하여 아놀드는 슬픔에 몰입되어 있고 독자들    도 그 슬픔에 몰입되기를 원한다. 그는 우리가 속아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그 장    면을 솔직하게 묘사하며 그가 '신념의 바다'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 그가 실제의 바다    소리와 해안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에 이미지는 사실상 사라졌다. 그 결과 우리는 아놀드의 진    정한 주제였던 신념의 상실을 슬퍼하는 대신에 바다의 묘사를 즐기게 된다. 효과적인 이미지를    창조하고 통제하는 상상력과 지력의 결핍은 빅토리아 시대의 시에 일반적으로 공통된다.    아놀드가 훌륭한 이미저리의 뜻깊은 날카로움과 풍요로움을 낭만적인 회화적, 운율적 호소로    바꿈으로써 많은 독자들을 속이는 경향이 있듯이, 브라우닝(Browning)은 때때로 극적인 활발함,    즉 좀더 자세히 분석해 보면, 혼란된 생각을 은폐하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는 활발한 가락으로    방심하는 독자들에게 감명을 준다. 다음 인용문에서 그는 삶의 투쟁에 대한 느낌과 항상 그에게    서 도망치는 듯이 보이는 이상적인 사랑에 대한 탐색을 표현하고 있다.        내게서 도망가?    안돼--    사랑하는 이여!    내가 나이고, 그대가 그대인 한,    세상이 우리 둘,    사랑하는 나와 싫어하는 그대를 포함하는 한,    내가 도망치는 동안, 그대는 쫓아와야만 한다.    내 삶은 결국 실패인가, 나는 두렵소--    정말이지 그것은 너무나도 운명 같소!    내가 최선을 다해도 아마 나는 성공하지 못할 거요--    그러나 여기에서 내가 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들 어떻소?        그것은 신경을 긴장시켜 유지하는 것,    사람의 눈을 마르게 하고 몰락을 비웃고    좌절되었으나, 다시 시작하려 일어나는 것이오--    추구가 사람의 삶을 취하고, 그것뿐이오.    그대의 가장 먼 경계로부터 단 한 번만,    티끌과 어둠 속에 깊이 빠진 나를 바라보오,    옛 희망이 땅에 떨어지자마자    새 희망이 같은 목표를 향하오,    나는 나를 만드오--    항상    제거되며!    (Escape me?    Never--    Beloved!    While I am I, and you are you,    So long as the world contains us both,    Me the loving and you the loth,    While the one eludes, must the other pursue.    My life is a fault at last, I fear--    It seems too much like a fate indeed!    Though I do my best I shall scarce succeed--    But what if I fail of my purpose here?        It is but to keep the nerves at strain,    To dry one's eyes and laugh at a fall,    And baffled, get up to begin again--    So the chase takes up one's life, that's all.    While, look but once from your farthest bound,    At me so deep in the dust and dark,    No sooner the old hope drops to the ground    Than a new one, straight to the self-same mark,    I shape me--    Ever    Removed!)        여기에서 우리는 둘째 연의 이미저리에 관심을 갖는다. 추구로 해석되는 인생은 이미지를 위한    훌륭한 토대가 될 수 있다. 브라우닝의 시행에서 추구 즉 어려운 여행은 그 자체가 상당히 통속    적인 놀라운 재주가 된다. 그가 사용하는 이미지의 목적은 두 가지이다. 우선 그 이미지는 여행    에서 받게 되는 일반적인 방해를 말하고, 이어서 그의 적극적인 희망의 실패에 대해 말한다. 그    리고 여기에서 다시 그 개념들은 가능성을 지닌다. 그러나 처음 4행은 거의 모두 진부한 문구로    되어 있다. 어려움과 그 어려움을 딛고 다시 일어서는 도덕률을 지닌 이런 종류의 여행은 문학    에서 여러 번 시도되었다. 눈물이 마르는 눈의 이미지와 몰락을 비웃는 이미지가 어른에게 삶의    계속 반복되는 실망감을 암시하는 어떤 일을 하는가? 넘어진 어린아이와 용기를 내라는 말을 듣    는 어린아이를 비교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비교이다. 또한 제 2행과 제 3행은 동일한 일을 묘사    하는 것이 분명한데 그것을 구성하는 부분들이 잘못된 순서로 되어 있다. 이 부정확함은 사소하    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 이미지를 구성한 생각이 느슨하다는 것과 결국 브라우닝이 여행의 단계    가 중요하다는 점을 우리에게 설득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이미지의    작용과 가치에 대한 진실한 관심의 결여는 부분적으로는 느슨한 생각에 기인하고, 부분적으로는    운율계획에 맞추어 시를 쓰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정서의 천박함과 막연함을 드    러낸다. 이 이미지의 둘째 부분에서 시인은 자신의 희망을 화살로 표현한다. 시인이 새로운 희    망의 형성과 해체를 지금과 같이 기계적으로 재빠르게 표현하는 것이 적합한지 그렇지 않은지는    상관하지 않더라도 여기에는 그 이미지를 무력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통속적인 요소가 있다. 예    를 들어 제 6행에서 인상적이고자 의도한 두운을 위하여 시인은 짙은 먼지 속을 열심히 헤쳐 나    가며 그의 화살들을 차례대로 쏘며, 아무런 효과도 없이 그 화살들이 어둠 속에서 땅으로 떨어    지는 것을 보는 우스꽝스러운 인물이 된다. 마지막 2행으로 보아 그는 자신이 표적을 절대로 맞    힐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날카롭고 치명적인 화살로 겨누고 있는 표적은    이상적인 연인이다. 경쾌한 리듬으로 전달되는 비교적 값싼 감정에 압도되는 사람들만이 시편    전체를 좌절과 노력의 적절한 표현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사실은 브라우닝이 불리한 환경에서    자신의 쾌활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러한 환경을 지어냈다. 그는 주로, 현란하고 통속적이며 혼    란스러운 이미저리에 의해 드러내어 진다. (브라우닝이 그런 남작(濫作)을 얼마나 의식하고 있    었는지를 말하기는 어렵다. 비록 이 시편에 주어진 경험이 어떤 개인적인 느낌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지만 상당한 정도의 자기기만이 있는 것도 분명해 보인다. 느낌의 발달과 정교화를 시도    함으로써 이 시편은 뒤죽박죽 엉망이 된다. 다시 말하여 이 시편을 촉발시킨 사실들과 상황이    조잡하게 '시화'(詩化)되었다.)    길게 늘여진 이미저리가 효과적으로 사용된 예를 '황무지'(The Waste Land)에서 인용한다.        여기에는 물이 없고 오직 바위 뿐    바위는 있고 물은 없는 모래밭길    산 속을 굽이굽이 돌아 오르는    물 없는 바위산을 돌아 오르는    물이 있다면 발을 멈춰 목을 축이련만    그 바위 사이에선 멈추지도 생각지도 못한다    땀은 마르고 발은 모래 속에 박힌 채    그 바위틈에 물만 있다면    침도 못 뱉는 썩은 이빨의 죽은 산의 입    여기서는 서지도 눕지도 앉지도 못한다    산 속엔 고요조차 없고    비 없는 메마른 불모의 우뢰소리 들린다    산 속엔 고독조차 없고    붉은 음침한 얼굴들 비웃고 으르렁거린다    금 간 토담집 문간에서    물이 있고    바위가 없다면    바위도 있고    물도 있다면    물    샘물    바위틈에 괸 물    물소리만이라도 있다면    매미 소리가 아닌    마른 풀잎의 노래 소리가 아닌    바위 위로 넘치는 물소리만이라도 있다면    거기에선 봉작새가 소나무 숲에서 노래한다    똑 뚝 똑 뚝 뚝 뚝 뚝    그러나 물은 없다.    (Here is no water but only rock    Rock and no water and the sandy road    The road winding above among the mountains    Which are mountains of rock without water    If there were water we should stop and drink    Amongst the rock one cannot stop or think    Sweat is dry and feet are in the sand    If there were only water amongst the rock    Dead mountain mouth of carious teeth that cannot spit    Here one can neither stand nor lie nor sit    There is not even silence in the mountains    But dry sterile thunder without rain    There is not even solitude in the mountains    But red sullen faces sneer and snarl    From the doors of mudcracked houses    If there were water    And no rock    If there were rock    And also water    And water    A spring    A pool among the rock    If there were the sound of water only    Not the cicada    And dry grass singing    But sound of water over a rock    Where the hermit-thrush sings in the pine trees    Drip drop drip drop drop drop drop    But there is no water.)        엘리엇(Eliot)이 각주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단락이 쓰여진 직접적인 계기는 그리스도가 부활    후에 엠마로 가는 여행이다. 그러나 그것이 또한 시인이 지각한 것으로서의 현대세계인 황무지    를 통한 여행이라는 점에 본질적인 중요성이 있다. 특히 이 구절은 밀접하게 관련된 많은 단순    한 이미지들의 훌륭한 사용을 보여준다. 이미지들 자체는 바위, 물, 모래, 새의 노래 등 정말    단순한 것들이다. 시인은 여기에서 이 중의 어느 하나라도 복잡하게 발전시키려고 시도하지 않    았다. 그는 단순한 소재를 사용하여 메마름, 동경, 피곤함 등의 감정을 구현하는 풍경을 창조했    다. 어떤 독자들은 아마도 우리가 여기에서 다루는 것이 이미저리라기 보다는 상징주의라고 말    하고 싶어할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침도 못 뱉는 썩은 이빨의 죽은 산의 입'을 제외한 나머지    이미지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과 같은 종류의 이미지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 여기    의 이미지들은 명백한 비유로서가 아니라 배경과 정신적 분위기에서 의도되고 구현된 비유로서    존재한다. 이 구절은 하나의 긴 은유로 볼 수 있다. 좀더 철저히 분석해 보면, 이미저리가 리듬    과 분리될 수 없는 이유와 우리가 샘이나 웅덩이 또는 물소리를 갈망할 때 삶을 향한 율동과 번    갈아 오다가 결국에는 또 다시 패배하고 마는 지루한 단조로움을 보이는 리듬의 수준으로 인하    여 이 리듬이 대단히 암시적이라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의 단조로움이 포우의    '갈가마귀'(Raven)에서 예증되는 단조로움과 반대되는, 미묘하게 다양한 율동과 어떻게 어울리    는가 하는 것도 밝혀질 것이다. 지루하지만 강렬하고 통제된 리듬에서 메아리, 반복, 바위와 물    의 교차는 정신적으로 메마르다는 느낌을 전달한다. 물론 여기에는 부싯돌 바위로부터 물이 나    오도록 한 하나님, 전도서에 나오는 메뚜기의 '짐'인 매미 등의 성서적인 연상도 있다. 그리고    이들은 전체의 악몽 같은 환영(幻影)의 부분들이다. 시인에게는 이것이 진실되고 평범하기 때문    에 악몽 같은 것이다. 여기에서 바위는 메마르고 은총과 건강과 믿음의 물이 그 위로 흐를 수    없으며, 모래가 많은 길은 뜨겁고 메마른 불모로 이어진다. 여기는 노력할 때 흘리는 땀도 쓸모    없이 마르는 곳이며, 발들이 굳지 않은 모래 속에 있어, 습기를 머금고 생명을 주는 토양과 접    촉하지 못하는 곳이다. 여기에서는 심지어 침묵과 고독조차도 무익한 고역의 소음과 사람들의    투쟁의 증거에 의하여 방해받는다. '치료의 물'에 대한 갈망은 샘과 웅덩이와 감미로운 향기가    나는 소나무 숲에서 우는 새의 물방울 소리 같은 노래 소리를 매미의 메마른 울음소리, 시들은    풀잎의 노래, 특히 '죽은 산의 입' 등과 대조시키는 데서 강렬하게 느껴진다. 이 마지막 이미지    를 포함하고 있는 시행은 부패와 메마름의 공포와 구원의 결여를 환기시키는데, 그 효과는 그    이미지가 다른 것들 사이에 자리잡는 조용하고 사실적인 방법에서 나온다. 그러나 이미지 자체    는 대단히 무시무시하다. 이 이미지는 또한 물질적인 배경을 인류의 정신적 상태와 거의 동일시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여, 이 이미지는 개개의 소재들이 두드러지게 눈에 뜨이기보다는 누적되    는 효과 때문에 인상적이다. 시인이 표현하는 느낌의 진실성과 일관성으로 인하여 따로따로 분    리된 단순한 이미지들이 함께 모여 정서적, 상상적으로 일관된 전체적인 인상을 창조하게 된다.    이 장을 한 이미지가 적절하게 발전된, 훌륭하고 명확한 예로 끝내고자 한다. {이척보척}    (Measure for Measure)에서 비엔나의 시장 대리인 안젤로는 에스칼루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다.        우리는 법을 새들을 쫓으려고 세우는,    허수아비로 만들지 말아야 해,    관습이 그것을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횃대로 만들 때까지    한 형태로 놓아둡시다.    (We must not make a scarecrow of the law,    Setting it up to fear the birds of prey,    And let it keep one shape, till custom make it    Their perch, and not their terror.)        여기에 사용된 이미지의 소재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단순하고 친숙한 허수아비이다. 그러나    그것은 시인의 손에서 새로운 것으로 변한다. 사고의 의미를 경제적으로, 명확하게 납득시키기    위하여 나이 많은 농촌의 인물이 사용되었다. 만일 법률이 집행되지 않는다면 그 법률이 허수아    비처럼 조롱받을 수 있기에, 안젤로는 법률의 집행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만일 법률이    살아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으면, 즉 법률이 단지 죽은 형체로 인식된다면, 그것    이 쓸모 없는 것은 새들에게 생명이 없는 형체로 인식된 허수아비가 쓸모 없는 것과 같다. 새들    이 땅을 약탈하듯이 범법자는 도시와 나라를 약탈한다. 셰익스피어는 단어의 애매함이 지니는    가치를 항상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려워하다'(fear)라는 말을 엘리자베쓰시대에 사용되던    능동적인 의미인 '놀라게 하다'와 일상적 수동적 의미인 범법자는 법률을 두려워한다는 사실 두    가지 모두를 나타내도록 기술적으로 사용한다. 농부는 새를 두려워하며, 새들을 '놀라게 하여    쫓아버리려고' 허수아비를 세운다. 만일 법률이 모든 사람들이 생명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    형체에 담긴 생명이 없는 형식적인 것이라면, 범법자들은 법률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조롱할    것이며, 심지어 적극적으로 이용하기도 할 것이다. 이 이미지는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다른    이미지들처럼 상상적이고 암시적이지는 않지만 생생하고, 적절하며, 분명하고, 정확하게 사용되    었다. 바로 이런 점이 안젤로 경의 '정확한' 생각의 특징이다. 이 이미지는 또한 이미저리의 효    과에 크게 기여하는 요소, 즉 일상적으로 서로 연관이 없는 사물들의 병치를 분명히 보여준다.    형식적이고 장엄하며 대체로 두려워하는 대상인 법률을 조야하고 괴상하며 일면으로는 사랑받고    일면으로는 경멸받는 허수아비에 연관시키는 것은 이 이미지의 효과를 뚜렷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문맥에서는 이 이미지가 안젤로에게 해당되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안젤로가 따뜻    함과 인간적인 우애가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미천한 허수아비보다 초연하며 우월하다고    느낀다.) 우리는 다른 이미지들에서도 이와 비슷한 연상을 하게 된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을 것    이다. 예를 들어 예이츠의 '노령'(Decrepit age)과 '개꼬리', '황무지'의 풍경에 나오는 '침을    뱉을 수 없는 산의 입' 등이 그런 이미지들이다. 다양한 사물들이나 개념들을 한 개념이나 인식    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훌륭한 이미지의 놀랍고도 충격적인 힘의 원천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와 같이 연결시키는 것은 이질적인 경험을 동화시키는 작가의 능력을 보여주고, 작가가 감각    인식과 정서와 사고를 유기적인 표현으로 융합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3    "세계를 매혹시킨 불멸의 시인들" 중..(샤를 보들레르 /아르튀르 랭보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 / 이승하 지음 (4) by 타샤 댓글:  조회:1479  추천:0  2019-02-04
출처 "세계를 매혹시킨 불멸의 시인들" 중..(샤를 보들레르 /아르튀르 랭보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 / 이승하 지음 (4) by 타샤                                이승하 지음 / 문학사상                   샤를 보들레르 (Charies Baudelaire, 1821~1867)       프랑스 시인, 비평가.         - 1857년에 발간된 이 시집은 전 세계 어느 나라의 어느 누가 낸 시집보다도 유명하다... 150년이 지나도록 생명을 잃지 않고 여전히 전 세계에서 읽혀지고 논의되는 시집도 이다.   하지만 시인 자신은 생애 내내 전혀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살아서는 외설과 신성모독으로 기소당한 인물이었지만 죽어서는 19세기아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보들레르. 가족의 모의로 내려진 금치산자 선고와 엄청난 불행을 가져다준 혼혈 여인 잔느뒤발로 말미암아 시인은 생은 치욕의 연속이었다. 삶의 고통은 그를 아편과 대마초에 탐닉케 했고 이것은 그의 문학에 ‘인공낙원’을 제공했다. 악착같이 돈을 뜯어간 뒤발은 그에게 죽음의 한 원인이 되는 성병까지 주어 고생을 시켰다. 그러나 상징주의 시를 탄생시킨 보들레르의 사후에는 영광만이 남게 된다. P203               내 넋이여, 회상해 보라, 우리가 본 것을   그처럼 따스하고 화창한 여름날 아침에   오솔길 모퉁이 자갈 깔린 자리에 뻗은   끔찍스럽게 썩은 시체를       음탕한 여자처럼 두 다리를 쳐들고   뜨거운 몸은 독기를 뿜어내고   썩은 냄새 진동하는 복통을   태연하고 뻔뻔스레 내벌리고 있었지       태양은 그 썩은 시체 위로 내리쬐고 있었지   마치 알맞게 구우려는 듯이   위대한 자연이 조립해 놓은 모든 것을   갑절로 자연에 되돌려주려는 듯이       하늘은 그 희한한 해골을 바라보고 있었다   피어나는 한 송이 꽃을 보듯이   고약한 냄새 하도 지독해   당신은 하마타면 풀 위에서 기절할 뻔했지       파리 떼가 그 썩은 복통 위에서 윙윙거리고   거기서 검은 구더기 떼 줄지어 기어나와   걸쭉한 액체처럼 흘러내리고 있었지   그 살아 있는 구더기 따라서                                  - 앞 5연(김인환 역)               내 마누라가 죽어서, 난 자유로워졌다!   그러니 취해 떨어지게 술을 마겨도 돼   빈털터리로 집에 돌아오며는   그녀의 고함소리 내 가슴을 찢었지       임금님 못지않게 난 행복해   대기는 맑고, 하늘은 드높고....   내가 마누라에게 반했을 때도   이같은 여름이었지!       나를 미치게 하는 이 끔찍한 갈증   채워주기 위해선 필요하겠지   그녀의 무덤 채울 만큼의 술이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될 것인데       마누라를 우물 깊숙이 던져버리고   그 위에 우물가의 돌멩이를   모조리 밀어 넣기까지 했었지   되도록 잊어버리고 있은 일!                                - 앞 4연(김인환 역)                           아르튀르 랭보 (Jean-Nicolas Arthur Rimbaud, 1854~1891)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 모험가.       17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19세까지만 시를 쓰고도 세계 어느 나라 어느 궁벼관 시골의 도서관에 가도 랭보의 시집이나 랭보에 관한 전기가 꽂혀 있다.... P221       (랭보는 여섯 살 때 부모가 이혼을 하고 어머니와 근근이 살면서 엄격하고 독선적인 어머니로 인해 가출을 거듭하는 반항적인 소년으로 자란다.   열한 살 때 그리스어, 라틴어, 불어 등 천재적 재능을 발휘하고 라틴어 시를 탐독하면서 시 세계에 눈을 뜬다.   16세 때, 조르주 이장바르 교사를 통해 빅토르 위고의 작품과 고답파 시인들의 시집을 빌려 읽으면서 시를 쓸 결심을 굳힌다.)       랭보는 파리에서 어느 날 베를렌이란 이름을 주워듣게 된다. 10년 연상인 베를렌은 이미 그때 파리 문단에서 제법 인정을 받고 있었다. 1871년 8월에 랭보는 베를렌에게 몇 편의 시를 동봉하여 편지를 보낸다. 두 번째 편지를 보내자 “오시라, 고귀한 영혼이여. 보고싶다. 기다린다.”는 내용의 답장이 온다. 9월 10일에 랭보는 결혼한 지 1년 남짓 된 베를렌의 신접살림 집으로 찾아가 역사적인 상봉을 한다. 이후 두 사람 사이에, 또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일은 그야말로 지옥이다.... p223       시골서 상경한 소년이 신혼부부의 침대 한쪽을 차지하곤 그 집안의 가장과 동성애를 한다는 것(남자 역할을 랭보가, 여자 역할을 베를린이), 베를린이 10년이나 연상이면서도 랭보에게 질질 끌려다니며 사랑을 구걸했다는 것, 두 사람이 칼부림을 벌인 적도 있었지만 베를린이 총으로 사랑의 끝장을 보려 했다는 것, 10대 소년이 마취제 하시시를 사용하고 술독에 빠져 산 것 등을 보면 두 사람이 온전한 정신 상태였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두 사람은 1875년에 다시 만나 크게 다투고는 죽을 때까지 만나지 못한다... P233               지금 저는 가능한 최대한 방탕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왜냐구요? 시인이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투시자가 되려고 합니다. 전혀 이해하지 못하실 겁니다. 저도 선생님을 납득시키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것은 모든 감각을 착란시킴으로써 미지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고통이 엄청나더라도 강해져야 하고, 시인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저는 제 자신을 시인으로 인삭했습니다. 그것은 전혀 제 잘못이 아닙니다. (장정애 역)       저는 말합니다. 견자여야 한다. 견자가 되어야 한다고.   ‘시인’은 모든 감각기관에 걸친 광대무변하면서도 이치에 맞는 착란에 의해 견자가 됩니다. 사랑, 괴로움, 광기의 모든 형태, 그는 모든 독소를 스스로 찾아 자기 속에 흡수하여 그 정수만을 보려 합니다. 모든 신앙, 모든 초인적 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무서운 고문, 그것에 의해 시인은 대환자, 대죄인, 위대한 저주받은 사람- 그리고 지고의 ‘학자‘가 되는 것입니다!- 미지에 도달했으므로!(이준오 역) P245                                        -랭보가 이장바르와 폴드므니에게 썼던 편지-           랭보는 1875년 4월,슈투트가르트를 떠나 스위스를 여행한 뒤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밀라노로 가고, 그때부터 16년 동안 온갖 직업을 전전하며 유럽과 아프리카 일대를 떠도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된다. .. 1891년 2월부터 오른쪽 다리의 정맥류로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게 된 랭보는 11월 10일, 전신에 암이 퍼져 임종을 맞는다. P251               기관총이 토해내는 붉은 핏빛의 침이,   종일토록 푸른 하늘을 향하여 파열음을 일으키고 있는 동안,   붉은 색, 녹색으로 장식한 부대들이 잇따라   적의 대포를 맞고 쓰러져가는 모습을 왕은 비웃고 있노라.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광기로 하여,   몇천만의 인간이 피투성이가 된 시산으로 화해버리고 있는데도,   -가혹한 열기 아래서, 여름의 풀섶 아래서, 기쁨으로 죽어간 가엾은 자들이여.   ‘자연’이여! 아! 성스러운 인간들을 창조해냈던 그대여!   어처구니없구나. 신께서 무늬 제단포와 향료와,   황금의 성찬배에 둘러싸여 빙긋거리고 있으시다니요,   찬미가의 가락에 따라 몸을 흔드시면서 낮잠을 주무시고 계시다니요.       게다가 눈을 뜨실 때는 전사자들의 어머니들이,   고뇌로 하여 기진맥진하게 된 속에서도,   손수건에 싸온 연보돈을, 눈물을   흘리면서, 바쳤을 때만이라구요!                                    - 전문(이준오 역)               내 갔지, 터지 주머니에 손 집어넣고   양복저고리는 관념적이 되었어.   시신아, 나는 하늘밑을 가는 너의 충신.   오, 랄랄라. 내 얼마나 멋진 사랑을 꿈꾸었으리.   단벌바지엔 구멍이 났지.   꼬마 몽상가라 길에서 운율을   훑었지 내 주막은 대웅좌에있었어.   하늘의 내 별이 부드럽게 살랑거렸지.   길가에 앉아 나는 들었지.   구월의 멋진 저녁 소리를.   이마엔   이슬방울 떨어졌어, 힘나는 술같이.       환상적인 그림자 속에서 운을 밪추며   가슴 가까이 발을 대고 나도 리라 타듯   내 터진 구두의 구두끈을 잡아당겼지!                                    -
2    내 시의 하이퍼시 구조와 창작기법 /이선 댓글:  조회:1231  추천:0  2019-02-04
내 시의 하이퍼시 구조와 창작기법 이 선(시인)     을 요약하면 다음 11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각각 시를 예로 들어서 역으로 하이퍼시 쓰기 방법론을 유추하여 보고자 한다.             1. 사물시- 객관화             이선의 하이퍼시의 특징은 사물시에서 출발한다. 단일구성보다는 복합구성을 가지고 있다. 필자가 하이퍼시를 쓸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객관화’다. 시적 논리에 맞지 않는 이미지를 사용하지 않는다. 나의 시는 ‘사물시’가 대부분이다.   또한 필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포인트는 외국어로 번역이 되는 문장이다. 세계인이 모두 한국어를 모국어처럼 쓰는 그날까지, 필자는 번역할 수 있는 객관화된 문장을 쓸 것이다. 번역이 가능한 문장은 ‘객관화’가 실현된 문장이다.       그 밤, 성경의 를 읽었지   생선 비린내가 베어 있는 작은 다락방에서   잃어버린 내 청춘, 116페이지 원고를 넘겼지   혁명을 외치는 낡고 더러운 붉은 양탄자 위로   검정 도둑고양이가 먼저 지나갔지   앞집 길고양이와, 내 집 길고양이가   네 팔, 네 다리 서로 껴안고, 한데 엉겨붙어   가파른 언덕을 데굴데굴 굴렀지,     붉은 단풍나무 그림자가 누워있는   내 의식의 흐름을 흔드는, 개울물소리   자갈 밟히는, 소리     냇물 속으로 뛰어든 단풍잎들은   계절을 순환하며,   흰돌을 암갈색으로 물들였지   구름발바닥에서는 풀꽃향기가 났지   똑바로 걸어오던 바람이 뒤돌아섰지     ‘서다’라는 이미지를 잡고   치타가 긴 꼬리를 돌려, 방향을 바꾸는 밤에   ―「서론」 전문     위의 시「서론」의 제목을 주목하여 보자. ‘서론’은 질문적인 제목이다. ‘서론’이라는 제목은 어떤 이야기를 풀어놓아도 되는 확장형 제목이다. ‘결론’이 안 나도 그만인 질문 같은 제목이다. 제목은 독자의 궁금증을 증폭시키며 시에 집중시키는 효과가 있다.   위의 시 1연을 살펴보자. 1연의 중심어는 ‘아가서- 생선 비린내- 다락방- 잃어버린 청춘 116페이지- 혁명- 붉은 양탄자- 검정 도둑고양이’까지 혁명적이고 도발적이다. 전시적 긴장감이 있다. 독자는 반전을 기대하며 다음 연에 집중한다.   2연은 청춘이 ‘의식화’되는 과정을 은유하였다.   3연은 단풍잎이 돌을 의식화하는 과정이다. 연약한 단풍잎도, 자신의 몸을 반복적으로 던짐으로써 단단한 돌을 착색시킬 수 있다. 그러나 ‘구름발바닥에서는 풀꽃향기가 났지’(3연 4행) 부분은 감각적이고 예민한 청춘의 순수와 이상주의를 녹여내었다. ‘똑바로 걸어오던 바람이 뒤돌아섰지’(3연 5행)는 청춘의 불안정과 애증의 관계를 묘사하였다. 표현주의 문학을 지향하는 하이퍼시의 주요 포인트는 ‘감각적 미의식’을 지닌 문장표현이다.   청춘은 혁명을 갈구한다. ‘서론’이라는 제목은 얼핏 객관화된 문장이 아닌, 미래적이고 허구적인 뉘앙스의 제목이다. 그러나 논문에서 언급되는 ‘서론-본론- 결론’ 중 하나인 그 ‘서론’이 맞다. ‘객관화’된 제목이다. 시에서 웅변하거나 설교하지 말라, 표현하라. 필자의 시 쓰기의 근본원리다. 내용은 진지하고 깊게, 그러나 표현은 감각적이고 유연할 것.                 2. 링크- 각 행과 연의 자립성과 독립성         하이퍼시의 구성요소에서 ‘링크’의 기능은 대단히 중요한 기본요소이다. 필자의 하이퍼시 쓰기에서도 ‘링크’는 거의 모든 시에 사용되고 있다. 링크 기능은 ‘제목- 행- 연’을 연결시키는 구도를 갖는다. 그러나 각 연은 독립적이고 자립적이다. 필자의 하이퍼시는 어떤 행을 빼거나 더하여도 내용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필자의 시「북극에서 온 편지」를 살펴보자.     “툰드라의 아침밥상은 눈꽃 천지인 걸요…”   북극여우가 긴 꼬리로 허공을 흔들며, 빗줄기의 허리를 자릅니다     번식기 북극곰의 간식을 만들기 위해서   신은 고요라는 이름으로, 흰눈을 빙하 위에 내려놓으십니다   조용히     내 아버지는 툰드라가 되지 못한, 어둠   겨울을 낳다가, 바다로 침몰한 내 어미의 눈빛은   북극성     나는 얼음조각 유리바다에서 표류 중입니다   바다 거품과 “안녕!” 입맞춤을 하기엔 나는 아직 늙지 않았소   ―내 고향 그린란드,     내 털들이 하늘로 곤두섭니다   얼음판을 놓쳐서 -40℃ 얼음바다로 미끄러졌습니다     습지의 낮은 구릉을 지나, 수컷의 향기를 뽐내며   눈향나무 언덕 향해 달리는, 어린 순록의   맑고 유순한 눈빛을 나도 지닌 적 있는데   (중략)   보름달 저주가 아직 풀리지 않았습니까?   얼음을 녹이는 것은, 내 원죄를 지우는 일     나는 퇴화한 꼬리를 치켜세우고, 어둠을 힘껏 문지릅니다   -흰색이거나 얼룩무늬거나     툰드라의 밤이 녹고 있습니다   순록의 뿔에 찔린, 달웅덩이     눈향나무 향기로   추위를 녹이며, 나의 젖은 몸을 말립니다   길은 추울수록, 달빛 투명하고 향기로와서   ―「북극에서 온 편지」1-6연, 8-11행       위의 시 「북극에서 온 편지」의 화자는 ‘북극곰’이다. 위의 시의 각 ‘행’과 ‘연’은 ‘제목’과 ‘링크’된다. 위에 제시한 시에서 7연이 빠졌지만 시의 전개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각 행과 연은 제목인 북극에서 온 편지와 연결되지만, 각 행과 연은 독립적이며 자립적이다. 하이퍼시에서 링크 기능은 가장 기본적인 주요 요소이다. 컴퓨터의 링크 기능과 같다.     3. 리좀- 중첩 이미지, 낯설게하기       필자의 시「소금꽃을 꺾다」는 하이퍼시의 ‘리좀’ 기능을 적용한 시 쓰기다. 또한 중첩이미지와 단어충돌, 이질적이고 먼 단어의 합성을 통하여 ‘낯설게하기’를 실현하고 있다. 행과 행의 낯설게하기, 연과 연의 낯설게하기, 제목과 내용의 낯설게하기를 통하여 신선한 감각을 주고 있다. 아래 제시한「소금꽃을 꺾다」에서 하이퍼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보자.     모래고양이 발톱과 사막의 낙타 발자국은 푸른색인가요, 신이여   그래, 새끼낙타를 삼켜버린 밤도 푸른색이지   어미낙타 눈동자가 점점 줄무늬하이애나를 닮아가요   괜찮아 곧 나이를 먹을 테니까,   뱀의 푸른 눈이 살아 있어요   그래 파푸아뉴기니로 날아가는 8천 피트 상공에서도 살아 있더구나   모래고양이가 파 놓은 토굴에 숨어   새끼를 낳는 도마뱀 빨간 엉덩이를 보았지?   오늘을 부정하면서, 벌써 내일을 초대한 거니?   이 거리에서 입양에 대하여 말하는 건 금기어예요   그 아이들은 곧 자기의 성이나 이름을 버리게 될 거다   14세 여중생이 화장실에서 아기를 낳았어요   신이여, 날기를 거부한 새가 새벽 공원에는 많아요   밤새 도둑고양이를 피해 잠을 설쳤나보다   그래 삭제할 게 많은 서울거리는 참 부지런하구나   경계경보를 울릴까요, 지금?   땅! 총을 쏘기 전에 선을 넘으면 아웃이라고   ―「소금꽃을 꺾다」 전문     위의 시의 배경은 현재와 과거, 미래가 한 공간 안에서 거미줄처럼 합성되어 있다. 하이퍼시의 ‘리좀 기능’을 장치한 것이다. ‘그물망’처럼 서로 엇갈려 엉기며, 상황극처럼 각각의 공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부조리한 상황을, 젝슨 플록의 페인팅 기법처럼 한 공간에 마구 던져 재구성하고 있다. 필자의 하이퍼시 쓰기는 상투어와 일상적 문장을 거부한다.   위의 시는 제목에서 ‘낯설게하기’를 실현하고 있다. ‘소금’은 잎도 줄기도 없는 몸통만 있는 사물이다. ‘소금’과 ‘꽃’을 합성한 ‘소금꽃’도 꽃만 있지 줄기나 뿌리가 없다. 꽃받침도 없다. ‘소금꽃을 꺾다’라고 행위를 강조한 제목에 주목하여 보자. 제목이 아이러닉하며 역설적이다. 소금꽃은 꺾을 ‘무엇’이 없다. 그 ‘무엇’이라는 현대문명의 부조리한 현실을 상황적으로 드라마틱하게 구성한 작품이다.   위의 시는 ‘신’과 ‘인간’의 ‘질문과 대답’ 형식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 대화는 혼돈스럽고 탁구공을 치듯이, ‘핑’하고 질문하면 ‘퐁’하고 낯선 대답을 한다. 질문과 대답이 모두 엉뚱하며, 시공간을 초월하여 멀리 날아간다.   ‘소금꽃을 꺾는 행위’로 표현되는 부조리한 현재는 다음과 같이 시의 중심어로 표현되고 있다. 시의 중심어는 ‘사막의 낙타- 파푸아뉴기니 상공의 뱀- 모래고양이-도마뱀-화장실에서 아기를 낳은 여중생-도둑고양이와 공원’까지 시간과 공간을 초월적으로 이동한다. 상상력의 ‘시간이동’과 ‘공간이동’이다. 필자는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상상력의 시간이동’이라고 여러 평론에서 명명하였다.           4. 환타지 영상기법           필자의 많은 시에서 ‘환타지 영상기법’을 발견할 수 있다. 「이사도라 덩컨」「까미유 끌로델」「셀룰러 메모리」「빨간 손바닥의자」등의 시에서 보여주는 환타지 영상기법은 극적 긴장감을 주며 드라마틱하고 동적이다. 아래 시 「겨울, 카페테라스에서 바라본TV풍경」을 살펴보자.     “당신의 연애는 언제부터 해빙을 시작한 것일까요?”     그녀의 눈은 웃고 있지만, 울고 있다   나는 그녀 눈길이 머무는 곳마다, 파랑색 벽을 칠한다   그녀 눈빛은, 비의 얼룩 같은 것이어서     네모난 탁자 위에선 레몬차 식어가고     그녀의 툰드라 언덕에, 나는 야생 히아신스 꽃밭 향기를 내려놓는다   두꺼운 스웨터처럼, 내 몸은 그녀의 향기로 체온이 급상승한다   여자의 하늘색 머리카락이 허공을 흔들며, 어둠을 자른다     흰 망사장갑은, 여자의 가늘고 긴 손가락을 조용히 빠져나간다   북극곰 발톱처럼 뾰족한 그녀 손가락이, 움켜 쥔 공허     해빙기, 그녀 심장은 더 이상 얼지 않아서   습지의 낮은 구릉을 지나, 노을빛 구름을 뱉어내는   북극양귀비꽃 언덕을 지향하고 있다     -40°C 빙하기 옷을 벗고   다시 사랑을 시작할까? 예감하는 저녁에     백야의 푸른 들판을 건너가는 순록 떼,   툰드라가 녹고 있다     그녀의 눈꼬리가 내 눈을 어루만진다     “빙하는, 빗방울의 힘을 버틸 수 있을까요?”   ―「겨울, 카페테라스에서 바라본 TV풍경」 전문       위의 시는 몽환적 환타지를 그림처럼 그리고 있다. 겨울 카페테라스에서 바라본 우수에 잠긴 ‘그녀’와 해빙기의 ‘북극 툰드라’의 모습이 오버랩 기법으로 표현되었다. 낯선 ‘그녀’는 시의 환타지다. 시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환타지한 ‘그녀’다.   사랑의 갈등을 겪는 한 여자인 ‘그녀’와 해빙기를 맞아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툰드라의 ‘북극양귀비꽃’의 극한상황을 그녀와 한 공간에 배치하였다.   시의 분위기는 감각적이며 연애적이다. 그러나 내용은 인간과 환경을 다루는 깊이를 갖는다. 나의 시의 매력은 하이퍼시를 무의미한 언어유희로 전락시키지 않고, 의미화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유미주의적 감각으로 시를 쓴다. 감각적 미의식과 상상력의 공간이 크다.인간의 DNA는 남의 연애에 민감하며, 이성에게 호기심이 많다. 카페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인간 군상의 한 장면을 잘라내어 TV화면처럼 보여주기 한 것이다. 그녀와 TV 화면의 툰드라의 한 장면을 오버랩 영상기법으로 그려, 드라마틱한 상상력을 전개한 것이다. 김용오 시인은 「물고기의 레이스 전봇대 위를 날다」에서, 이선 시의 특징을 ‘환타지’라고 표현한 바 있다.               5. 무의미시- 열린 문장         하이퍼시는 열린 문장이다. 각 행과 연은 반드시 연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시의 내용을 한정적이거나 제한하지 않는다. 내용의 해석은 지시적이거나 명령적이지 않다. 문장은 확장적이며 상상력의 공간이 넓다.   무의미 시는 불확정적이며 무제한적 상상력의 세계로 독자를 초대한다. 필자의 아래 시「랭보와 베를렌느, 사이에서」를 살펴보자.       눈썹연필을 깎는데 심이 자꾸 부러집니다   랭보와 베를렌느, 사이에는   푸른 침대와 흰구름, 부러진 연필심이 있습니다   (2연 앞 중략)   사랑에도 면허증이 필요합니까?   파도가 나선형을 그리며 밀려오는 긴 밤입니다   ⊂거나 ∪∩거나     달빛은 어둑어둑 춥습니다   허공을 밀어내는 바람에서 두-둥 빈소리가 납니다     젖은 낙엽 어디쯤에선가   살모사, 풀잎 위로 소리 없이 헤엄치던 밤   바람이 방향을 잃고, 내 속눈썹에 눕던 그 밤   당신은 첫눈처럼 어둠 속에서 빛났습니다     지느러미를 흔들며, 당신이 떠난 뒤   나는 미장원에서 긴 파마머리를 자릅니다   곧 “보라색으로 염색할 걸” 후회합니다     랭보는 베를렌느의 마침표가 됩니다   ―「랭보와 베를렌느, 사이에서」 1-6행     위의 시는 랭보와 베를렌느의 동성애를 다루었다. 랭보와 베를렌느의 부적절한 사랑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지만, 어디에도 그 사랑을 구구절절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하이퍼시는 내용을 중시하는 시 형식이 아니다. 서정시의 지시적이고 명령적인 해석을 거부한다.   필자의 하이퍼시의 문장은 확장적이며 무의미 시에 가깝다. 그러나 김춘수의 무의미시와는 전혀 다르다. 김춘수의 대표적인 무의미 시「처용단장」2부-5는 무의미시라기보다는 의미없는 문장의 나열이다. 김춘수 시에서는 두 개의 ‘이야기’를 번갈아가며 한 행마다 엇갈려삽입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필자의 무의미 하이퍼시는 각각 다른 ‘이미지’의 삽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지 충돌’로 ‘낯설게하기’를 실현하고 있다.   위의 시 1연은 현재 상황제시- 2연은 배경제시/ 물고기의 비유- 3연은 시의 배경 구성요소- 4연 사랑의 대상재연- 5연 이별 후 상황- 6연 제목과 연결시킨 구도를 가지고 있다. 랭보와 베를렌느의 관계를 직접 언급하지 않고, 상황만 암시하고 있다. 하이퍼시는 비유로 극적 요소를 중계하는 ‘상황 시’다.               6. 예언적, 계시적 문장       필자의 시에는 주술적이며 예언적인 문장이 있다. 거시적 우주나 태고의 신비를 나타낼 때 사용된다. 아래 두 편의 시를 살펴보자.     태양이 달의 입술에 엄지발가락을 집어넣는 날,   “지진과 전쟁의 소문이 무성하리라”   (중략)   나는 미네르바 여신의 어깨 위에 올려놓은 올빼미 눈이   머무는 곳마다, 두려움에 떨며 초록 세콰이어 나무를 심었네   ―「세 개의 이미지」 1, 2행 부분     신들이 잠들어 있는 도시, 족자카르타에는   보름달 뜨는 밤에, 북극성을 찾아 산을 넘는 표범이 살고 있다     그믐밤엔, 특히 꿈을 조심하라   꿈 조각 틈새로, 악마의 날갯짓소리 범람하리라     아담의 얼굴은 불의 고리- 환태평양 지진대 불의 왕국   손이 뭉툭한 어머니 지구는, 고막이 터지도록 열병을 앓고 있다   -화산과 전쟁의 흉터자국   ―「기억의 초상(肖像)」1-3행       위의 시 「세 개의 이미지」는 지진과 전쟁의 이야기다. 지구의 종말의 예언서다. 그러나 희망이 있는.   「기억의 초상(肖像)」은 피카디리 극장에서 숨진 기형도에 대한 시다. 동성애자로 오인받으며 요절한 천재시인 추모시다. 반신불수가 된 부끄러운 아버지, 한글도 모르던 야채장수를 하던 어머니, 자신을 엄마처럼 돌보던 둘째 누나의 갑작스런 죽음, 기형도의 입장에서 보면 쓰나미처럼 견디기 힘든 사건의 연속이었다. 가족의 영웅이었던 기형도의 죽음은 가족에게도 충격이었을 것. 기형도의 죽음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기형도와 어머니의 삶을, 지구의 화산과 전쟁의 흉터자국으로 묘사하였다. 족자카르타의 표범으로 기형도의 혁혁한 기상을 예언적 문체로 쓴 시다.                7. 상상력의 확장- 상상력의 공간이동, 시간이동, 순간이동         필자가 최초로 하이퍼시에서 주장하는 기법 중에서 가장 중요한 기법의 하나는 상상력의 확장이다. ‘상상력의 공간이동, 상상력의 시간이동, 상상력의 순간이동’이 이루어지는 하이퍼시 쓰기 기법에는 생동감과 운동감이 있다. 또한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한 공간과 시간에서 ‘순간이동’ 한다. 그 효과는 감각적 미의식과 운동감이다. 문장 표현이 신선하고 젊다.   상상력의 공간이동, 시간이동을 통한 순간이동의 시는 대비효과가 크다. -색상대비, 문명대비, 시적거리가 먼 것끼리 대비. 확장성, 연상작용의 폭이 넓다. 필자의 아래 시를 살펴보자.     내 아버지는 툰드라가 되지 못한, 어둠   겨울을 낳다가, 바다로 침몰한 내 어머니의 눈빛은   북극성   ―「북극에서 온 편지」 3연 1-3행   이질적인 것들이 한 공간에서 조우한다. -툰드라와 북극성은 먼 이질적인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와 어머니와 매치시켜서 가까이 한 공간에 놓고 있다. 상상력이 만들어낸 ‘시간이동’과 ‘공간이동’이 거리를 초월한다.       바람이 꽃씨의 발화점을 외우는 동안   바다는 구름을 잉태하지   늙은 토인여자의 자궁은, 그린파파야 향기   ―「탁상공론 문명일지」 부분   ‘바람과 꽃씨, 바다와 구름, 늙은 토인여자와 그린파파야 향기’는 사실 이질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한 공간에 놓음으로써 친화적 관계를 지닌다. 하이퍼시 쓰기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공간이동’과 ‘시간이동’ 기법이다.       꽃잎 문을 닫는, 저녁입니까?   별빛 부엉이 항문을 닦는, 저녁입니까?     고비사막, 켜켜이 쌓인 주름살커튼을, 펼치는 저녁   두물머리에는, 황사비, 초미세먼지 자욱자욱,   물결을 지우는 데 말입니다     맨드라미 꼬불꼬불, 꽃길에 갇혀   별빛에 몸을 적시며 잠들어도 좋은 저녁인데 말입니다   -쉿,   꽁지 붉은 어미 새,   대문 우편함에, 새끼 일곱 마리를 부화시키고 있습니다   ―「저녁입니까?」 1, 5, 8행   같은 저녁이지만 각각의 저녁은 의미가 다르다. ‘환경파괴’와 ‘생명의 잉태’라는 각각의 주요 메시지를 지닌 ‘저녁’을 대비시켜 보았다. ‘저녁’을 주제로 한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시간이동이 만들어낸 여러 상황들이다.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시간이동은 환타지성과 운동감, 상황의 전이와 반전의 매력을 연출한다.               8. 애매성과 모호성의 원리       애매성과 모호성의 원리는 서정시에서도 사용되지만, 필자의 하이퍼시에서는 자주 쓰인다. 필자의 아래 시를 살펴보자.     레몬 유카리(Eucalyptus citriodora) 향기가   화장대 거울 위로 흘러내린다   (상큼한 유칼립투스 향수)     당신이 ‘망상중독’이라고 말하는-   유칼립투스 꽃을 채취하던, 푸른 달빛을   흰 샴 고양이, 어깨 위에 올려놓는다   (당신의 웃음소리거나, 나의 울음소리거나)   ― 「자서전」 1, 2행   위의 시 1연은 몽상적 애매모호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2연도 환타지처럼 뿌옇다. ‘당신의 웃음소리거나, 나의 울음소리거나’ 부분은 주목하여 보자. 이상의 시처럼 한정하거나 지정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석되어도 좋다는 허용이며 놓음의 미학이다.     0, 또는 Oh~ Henry     교도소에서 탈옥한 바람은 조금 홀쭉하거나 눈매가 어둡습니다   풋사과 꽃, 수정하기 좋은 날 당신 회색눈동자는 출소했습니다만     “O. Henry~"   당신이 잃어버린 미래는 무엇입니까?   감탄사 O든지, 또는 아라비아 숫자 O든지   (중략)   O는 큰 눈을 몇 번 껌벅이더니, 눈을 감아버린다   (실은 탁자 위에 올려놓은, 스마트폰을 꺼버린 거지만)   연일 번성하는 ‘O' 왕국을 지지합니다만,   유행이란 변덕스럽고, 외도가 심한 법인걸요.   ―「O, 또는 Oh~ Henry」 1, 2, 8행   위의 시 2연은 감탄사든지, 아라비아 숫자든지 한정하지 않는다. 8행도 원인이나 인과를 따지지 않는다. 하이퍼시는 자유방임적 문장이다. 애매모호함이 주는 미학이다.                 9. 확장성- 이미지의 확장       필자의 하이퍼시는 이미지 확장성이 크다. 아래 시를 살펴보자.     이사벨라섬 항문을 간질이며, 춘분점이 지나간다   축축하고 비릿한 땅거미를 삼키는   갈라파고스 거북,     용암(Lava)을 삼킨 ‘아술산’ 입술, 석양에 붉다   ―「갈라파고스Galάpagos 섬에서」 4행     “ 내 안의 시가 날 잠재우지 않아”   내 춤의 날개인, 우주의 긴 푸른 스카프에   소리와 빛을 담고, 나는 뜬 눈으로 그의 꿈을 지킨다   ―「이사도라 덩컨」 끝행     나의 젖가슴은 보름이면 살이 오르고   조금 때는 살이 빠진다   해와 달과 별이 내 줄기세포를 키우는가보다   (중략)   하늘은 초록색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나무들 밑둥 잡고 오늘도 땅에다 열심히 글씨를 쓴다   제 생각을 뿌리 채 땅속에다 모두 이식하고 싶은 거다   ― 「셀룰러 메모리」부분       위의 밑줄친 부분을 눈여겨 보라. 시공간으로 이미지가 확장되어 있다. 확장된 이미지는 마음과 눈을 시원하게 한다.                 10. 감각적 미의식       유미주의 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감각적 미의식이다. 예술성의 근본이다. 필자의 문장은 예민하고 감각적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아래 시를 살펴보자.       날지 못하는, 남자의 깃털은 부드럽지   아담의 이마엽 향기를 맡아봤니?   지구에서 사라진 새들은, 여자의 심장에 부리를 모아놓은 걸까?   수다의 색깔은, 늘 친절한 빨간색이지   ―「이브의 예언」 4행   위의 시는 부드럽고 고요하게 미세한 음성으로 여자의 수다와 뒷담화를 꼬집는다. 감각적 미의식에 묻혀 있는 의미의 진실을 찾아내는 것도 독자들이 시를 읽는 재미다.                 11. 연상작용-파장효과     연상작용은 시의 파장효과와 확장효과가 크다. 필자의 아래 시를 살펴보자.       나뭇잎의 떨림을 이식받아   바람 앞에 내 줄기가 떨리듯   내 굴절된 파장이   혹, 누군가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할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당신 심장 한쪽을 떼어내   내 할딱이는 심장에 마저 붙여주고 갔듯이,     지금, 나는 누구의 푸른 눈동자로 응고되어 가는 너를 보는가?   ― 「셀룰러 메모리」 부분   ‘나뭇잎-떨다’라는 문장은 ‘내 굴절된 파장-누군가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다’와 연상작용을 한다. 시의 비유는 연상작용의 좋은 예다.       내 꿈을 도둑맞은 적이 있어   내 과거가 나를 협박하는 이상한 날이었지     그날 내 전생의 남자가 나를 방문하였지   오늘 내가 탄 파랑색 택시는   2년 전, 대학로 연극이 끝나고 자정에 탔던 택시였어   “아직도 배우세요?”   그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내게 아는 척을 했어   八자 콧수염, 방점처럼 찍힌 미간의 사마귀, 그가 분명해   ―「이브의 예언」1연, 2연   필자는 가끔 ‘꿈’을 꾸고 나면, 이 꿈이 과거 언젠가 현실에서 일어났던 사건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또 현실의 극한 상황이 꿈을 꾸는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보일 때가 있다. 예감처럼 꿈은 현실과 연계되어 연상작용을 한다. 위의 시는 그 상황을 이미지로 형상화해 본 작품이다.               위에서 11가지 을 살펴보았다. ‘사물시- 링크- 리좀’은 하이퍼시의 기본구조론이다. 그 구조론에 입각한 필자의 시를 제시하여 역으로 하이퍼시 쓰기 방법론을 유추하여 보았다. ‘상상력의 확장- 무의미시-감각적 미의식- 확장성- 연상작용’은 하이퍼시의 효과적인 시창작 방법론으로 여러 차례 필자의 시에서 증명된 시창작 기법이다.   시에서 ‘감각적 미의식’과 ‘애매성과 모호성의 원리’는 서정시 창작기법에서도 주요한 요소이다. 다만 하이퍼시에서는 초월적이며 현대적 감각으로 더욱 젊은 시를 생산하다는 점이 다르다. 필자의 하이퍼시 창작론을 총체적으로 살펴보았다. 평론가와 독자에게 ‘하이퍼시’가 더욱 주목받고 연구될 것을 기대해 본다. 필자의 하이퍼시 창작도 더욱 풍성하고 독창적으로 발전될 것이라 확신한다. ※  
1    디카시와 하이퍼시와의 관련성 / 문덕수 댓글:  조회:1317  추천:0  2019-02-04
디카시와 하이퍼시와의 관련성   문덕수     [1] ‘디카詩’의 창시자는 누구일까. 신(神)의 유무보다는 디카시의 창시자의 누구냐의 물음엔 한 가지 대답밖에 없으니 더 쉽습니다. 디카시의 창시자라는 말에 “창시자” 그 동격어 “이상옥”이라고 하면 대답하면 되겠습니다만 말하자면 디카시의 창업자는 이상옥입니다.       [2] 디카는 “디지털 카메라‘의 준말입니다. 우니라에도 생산되고 있고, 이제는 스마트폰에도 장착되어 있으므로 아이든 어른이든,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과학기기인 이 디카가 시쓰기의 주체인가, 아니며 단지 보조기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정답은 주체라고도 할 수 있고 보조기구(원고지나 펜같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TV나 컴퓨터가 안방에 들어와 있는 판에 과학기기가 시쓰기에서 제외되어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버스, 지하철, 비행기, 승용차 등 인간은 과학기기의 사용이 없으면 생활이 안되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으므로 디지털 카메라가 시와 결부될 수 있음도 불가피한 시대의 요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에 등 돌려서 현대시를 쓸 수 있겠습니까?       [3] 가만히 들여다보면 디카시는 기호시임을 깨닫게 됩니다. 『디카시마니아 24인사화집』(2012, 도서출판 디카시)에는 이상옥의 디카시 「숙명」(The Fare)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의 시는 망가지고 있는 나무 뿌리 등의 사진 옆 페이지에 “이제 내 몸 부수어 너에게로 간다”(Breaking down mybody now I go to you)로 되어 있습니다. 이 시에서는 “내 몸 부수어” “너” 가 가장 요점이 되는 어구인 것 같습니다. “내 몸 부수어”는 많은 함축(含蓄)을 연상하게 합니다. 사랑의 주체인 “나”, 가장(家長)으로서의 나, 제자들의 스승으로서의 나, 역사(歷史) 속의 한 주체로서의 나, 주인이 아닌 봉사자로서의 나 등이 그러한 연상의 목록입니다. 이렇게 제시해 내놓고 보니 그 나열이 대단함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기호화해 가는 목적적 존재를 “너”라고 했습니다. “너”는 분명히 남(他者)입니다만, 우리의 삶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우수한 “남”으로 둘러싸여 공생하면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의 의지를 내가 마음대로 좌우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실존적 삶의 탄생과 죽음이라는 것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타자의 의지에 의해 사는 존재입니다. 어쨌든 이 “나”는 앞에서 “나”의 경우에 열거한 그러한 나와 대등되는 존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너”의 대응 관계로 수용할 때 이상옥의 디카시는 1차시입니다만, 그 함축과 내포는 다양하고 풍성한 의미세계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디카시가 언어로 기록되건 사진영상으로 촬영되건 그것의 1차적, 기본적으로 사물시와 동질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디카는 하이퍼 시와 첫걸음을 함께 내딛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하이퍼와 디카는 같은 스타트라인에서 같은 신호로 함께 출발합니다. 여기서 사물시와 디카시는 일치합니다.       [4] 그런데, 문제는 제시된 ‘사진’도 기호(記號)이고, 언어로 표현된 디카시 문자도 “기호”라는 공통점이 발견됩니다. 기호라고 하면 프랑스의 소쉬르(1857~1913)와 미국인 퍼스(1839~1914)의 두 사람을 듭니다만 기호의 세계를 더욱 폭넓게 본 사람은 퍼스인 것 같습니다. 퍼스는 언어 뿐만 아니라 “사진”을 포함한 영상이나 도상, 길바닥이나 눈 위의 발자국 같은 것을 모두 기호로 보았습니다. 퍼스는 이 세계는 기호로 충만한 세계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물이 다 기호이지요. 퍼스는 다만 “기호 처리의 프로세스로서 인간”을 이해했습니다. 아마 시인도 기호체계의 한 프로세스를 처리하는 자로 이해하지 않았는가 생각됩니다.   그림이나 사진으로 반사된 빛이 눈의 망막에 도달하는 순간, 일련의 감각이나 인지적(認知的) 기능이 마치 연못의 둑을 끊은 것처럼 흐르는 것— 이것이 경험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눈이 사진의 어떤 부분에 집중하는 것은, 이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어지럽게 이동하는 색이나 윤곽이나 형태를 즉시 감각신호로 변환시켜 후두부에 있는 시각야(視覺野)라고 불리는 뇌의 영역에 보내집니다. 거기서 특징들이 분석되어 그 결과가 대뇌피질(大腦皮質)의 많은 영역을 이동시킵니다. 그러한 활동분야의 하나가 피질의 중앙에 위치하고 근운동(筋運動)의 중추 역할을 맡은 운동야(運動野)입니다. 여기서 눈의 움직임을 제어하고 근육을 움직이는 지령이 나와, 눈은 사진 쪽으로 향하게 됩니다. 눈이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향하게 하는 과정이 몇 백 번 되풀이됩니다. 한 번 얻은 상(像)은 피질의 뉴런 네트워크로 보여지며, 그때까지 저장되어 있는 정보와 연결되고, 사진에 대한 해석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뇌가 행하는 사진(그림 포함) 이해의 프로세스를 인지 과학자 R L. 소쉬르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빛이라는 물리 현상에서 시작하는 ‘그것이 감각 신호로 바뀌는 그 처리를 거친 특징이 추출되어 세계에 대한 여러 가지 사전 지식도 참조하면서 해석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이상옥의 디카시가 망가지고 있는 「숙명」이라는 디키시는 많은 내포가 다양하게 응축된 디카시의 전형인 것 같습니다. 사화집 『너머』(Beyond Over)는 대분분 이와 같은 보편적 레벨에 도달한 디카시를 수록하고 있습니다.       [5] 그런데 이상옥의 「숙명」을 잘 들여다보면, 그 해석은 단지 나무 밑둥이 부서지고 있는 붕괴현상만이 아니라 현상이 형이하(形而下)의 세계와 형이상의 세계(形而上世界)를 연결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이러한 현상의 이해는 디카시의 형이하적 특징과 형이상적 특징을 연결하는 것으로 보여 무척 흥미롭습니다. 나무 밑둥의 붕괴는 풍화작용인지, 세균의 잠식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시간의 먼 지평 속에서 변호마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현상을 발견한 인도인(특히 힌두교도)은 모든 만물은 시간상에서 변화하며 여러 가지 존재의 직접적, 간접적 조건과 원인에 의해 생겨서 변화한다라고 한, 그 위대한 사상체계의 “연기설”(緣起說, Pratitiya-samurāda)을 발견한 것으로 보입니다. 기독교에서 사람은 흙으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중국에서 한(漢)나라를 세운 유비도 사람은 흙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상옥의 디카 사진을 잘 봅시다. 산에서나 길가에서, 나무 밑둥지가 부서져가는 현상을 흔히 발견할 수 있고, 이 현상에서 흙구덩이 속의 인체도 결국 이런 과정을 밟는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인체의 경유, 균이나 박테리아가 흙 속에서 겨드랑이나 허벅지 등을 먼저 먹게 되겠지요. 사물인식은 가정, 사회, 역사, 문화에 대한 지식과 결부되어 나무밑둥이라는 물체의 내면의식세계가 형성됩니다. 사물은 감각성, 시각성, 외부성 등의 욉줙 존재입니다만, 동시에 내면의 영혼적 무의식적 무한성을 가지고 있음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존재(있음 esse)는 있는 것(ens, 개별 사물 존재)의 시간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우리가 사물을 외면이나 내면의 한 측면에서만 보지 않고 외부적 존재로 보고 동시에 내면세계를 본다는 것은, 모든 사물이 지닌 α위상과 β위상의 이중을 본다는 뜻이 되고, 또 이렇게 보아야만 사물 전체를 본다는 것이 됩니다. 이상옥이 있는 것(ens), 즉 「숙명」을 통해서, 우리가 가정→역사의 영역에서 가지고 있는 정보와 연결시킨다는 것은, 사물의 내면성도 동시에 본다는 의미입니다.   이상옥의 「숙명」의 밑둥은 흙 속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꽤 깊이 박힌 듯합니다. 지표에서의 윗부분이 갈라져 부서지고 있으나, 아마 그 뿌리는 여전히 땅속에서 꿈쩍 않고 대지(大地)를 물고 호흡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것은「숙명」이 지닌 형이하적(形而下的) 특질인 것입니다만, 한편 부서짐의 과정을 통하여 껍질이 벗겨지고 나무의 육질이 파삭파삭해지면서 그 영혼이라고 할까 정신이라고 할까 그런 것은 형이상적(形而上的) 세계로 차원이 다른 자리를 옮기는 것으로도 보입니다. 역사 너머에서 역사의 영역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해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즉「숙명」이라는 디카 영상은 형이하와 형이상에서 초월을 동시에 공존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디카시는 이러한 이중 구조를 가지고 있고, 여기서 디카시와 하이퍼시와의 짙은 공통 관련성을 느끼게 됩니다.   “이제 내 몸 부수어 너에게로 간다”라는 일행시에서도 형이하와 더불어 여기서 초월하려고 하는 형이상의 몸짓을 감지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부서진다”(망가지다, 붕괴핟, 변화한다)라는 말의 뉘앙스가 매우 다채롭고 풍부하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6] 마지막으로 두 장르의 통합단계에 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즉 디카 영상과 언어예술의 두 단계를 하나의 세계로 통합해야 하는 단계입니다. 디카시는 디카 영상과 언어시와의 두 존재를 포함하고 있고 두 단계가 통합해서 다르나 같은 의식적 이미지의 세계를 이룩합니다. 통합 단계는 두 장르가 “서로 관계”를 가지고 하나의 세계(시 세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두 장르의 관계는 접근, 영향, 융합 등의 상생(相生) 공발(共發)의 관계입니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완전히 정복하거나 먹어버리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어디까지 상생공존의 발전 관계를 맺고 더 높은 하나의 통합세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여기에도 형이하적 관계와 형이상적 관계가 엄존해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먼저 형이하적 관계부터 보겠습니다. 형이하적 관계는 사물의 감각적, 가시적, 외부적 관계에서 연관을 맺게 됩니다. 그러한 외부적 배치에 의하여 하나의 가시적 이미지(즉 사물존재로서의 이미지, 그러니까 β위상의 관계에서 형성된 이미지)를 이루게 되면, 그러한 가시적인 두 이미지가 융합되어서 서로 보완하여 하나의 더 높은, 더 완성된 이미지의 세계를 이룩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단계는 형이하적 세계, 즉 물질세계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높은 형이상적 단계로 상승해야 합니다. 이 단계에서 디카시라고 하는 통합적 장르가 비로소 “의의”(意義: 의미보다는 높은 의미의 세계로 연결된다는 뜻)의 단계에 이르게 되고, 그 의의주제에 접근한 가장 높은 뜻으로 뭉치게 됩니다. 이렇게 형성된 형이상적 통합의 의의는 첫째 형이상적(신적) 뜻을 이루고, 둘째 그 뜻은 형이하적 세계의 구석구석까지 그 영향을 미치게 하고, 어떤 미세하거나 광대한 움직임에 의해 영향력을 공급하는 에너지 역할도 합니다. 우리의 삶은 방향과 방법을 정립시켜 주기도 합니다. 흔히 ‘섭리’라고도 하고, ‘천명’(天命)이라고도 하는 그런 차원의 뜻입니다. 모든 디카시는 여상과 언어의 두 단계가 통합된 형이하적, 형이상적인 미학적 뜻으로 통합, 형성되어 완료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단계적 통합을 거쳐, 두 장르는 장르적 경계를 허물고 하나의 이미지 세계를 이룩하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을 우리는 하이퍼적이라고 하고, 이 점에서 디카시가 하이퍼시의 또 한번의 강력한 유대와 그 관련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7] 여기서 간단히 결론을 내리고 그칠까 합니다. 디카시가 가진 기호성, 디카시의 이중성(형이하와 형이상) 등을 토대로 디카시와 하이퍼시의 관련성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 밖에 디카시의 사진과 언어는 사진과 언어라는 장르적 경계를 허물면서 디카시의 특성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하이퍼적 패러독스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이퍼시에서는 진실과 허위의 두 세계가 비유의 본의(本義)와 유의(喩義)의 양 항에 관련되어 있고, 그 관련에서 진실과 허위의 두 세계를 역설적으로 사사해 준다는 점이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그런 점에서 디카시나 하이퍼시는 파라독스의 언어로 된 역설의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월간《시문학》 2012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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