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jingli 블로그홈 | 로그인
강려
<< 6월 2019 >>
      1
2345678
9101112131415
16171819202122
23242526272829
30      

방문자

검색날짜 : 2019/06/17

전체 [ 7 ]

7    [2018년 6월호] 문덕수의 장시『우체부』론: 공존의 미학, 그 시적 통찰 / 이덕주 댓글:  조회:1235  추천:0  2019-06-17
공존의 미학, 그 시적 통찰 이덕주 1.  『우체부』의 시적 의미 문덕수의 『우체부』(시문학사, 2009)는 본문만 500행에 가깝다. 서문인 「무좀」(머리말)을 제외하고 1부 조셉룰랭 포함 6부로 구성된 장편시집이다. 근래에 보기 드문 장시이며 체험에 기초하면서도 종교와 철학, 역사를 아우르며 초월적 은유로 인간의 특성과 본질을 탐구하는 장엄한 시세계를 보여준다.  문덕수의 『우체부』는 그의 필생의 역작으로 자신의 총체적 정신세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문덕수’라는 시인 자신이다. 그 때문에 『우체부』에 대한 문학적 평가를 어떤 한정된 이론으로 섣부르게 분석하는 작업은 유보되어야 한다. 문덕수가 시집의 제목을 ‘우체부’라고 명기한 의도를 시에 대한 유형분석 이전에 우선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문덕수는 생이 도달하는 최종목표지점을 엄정하게 응시하며 자신을 의식의 흐름 속에 의탁한 채 초탈의 자신과 대면하며 『우체부』를 써내려갔다고 보아진다. 서서히 소멸해 가는 자신의 본연에 대한 냉엄한 숙고와 통찰을 거쳐 자신의 시적 언어로 내면의 어둠을 조명했을 것이다. 이처럼 그는 대립적 요인들을 용해시키며 자신의 모든 이상과 사상을 『우체부』에 녹여낸다. 이것은 자신과 세계에 대한 경계를 지우고 시적 무아행을 통해 분별없는 세계를 지향하는 일이다.  ‘우체부’에 대한 정밀한 탐구는 문덕수의 『우체부』를 이해하는 토대이다. 그는 「우체부」 소제목에서 “다시 태어나 우체부 되고 싶네”라고 언술한다. 그 의미 역시 지금까지 자신의 생에서 ‘우체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또한 남은 생에 지금껏 못 다한 ‘우체부’에 대한 소임을 지속하겠다는 의지의 발현이다.  이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문덕수는 자신의 삶과 연계해서 『우체부』의 6부로 나누어진 시 행간마다 ‘우체부’를 다양하게 형상화하며 유효하게 배치한다. 독자가 여러 각도에서 ‘우체부’를 조감할 수 있도록 상상을 지원한다. 언제고 ‘우체부’와 연결하여 시대를 초월하고 세상과 다양하게 관계하도록 안배하려 한다.  2. 『우체부』의 이해방식 문덕수의 『우체부』를 이해하기 위해서 몇 가지 이해방식을 도입하려 한다. 첫째, 문덕수 시가 지닌 선입견 없이 『우체부』 시편을 이해해야 한다. 시집의 행간마다 지닌 포괄적 의미를 객관적, 주지적으로 파악하며 의식의 흐름에 맡겨두고 시인이 갖는 본류의 의식세계에 몰입해야 한다. 어떤 예단 또는 특정한 방법론으로 그의 시를 분석해서는 안 된다. 그가 설정해 놓은 시의 세계에 자유롭게 정신의 본령을 맡겨 놓으며 그가 선도하는대로 연대감을 갖고 동감의식에 젖어들어야 한다.  그만큼 그의 시가 던지는 메시지가 진폭이 크고 확산적이기 때문이다.     둘째, 문덕수 시인의 인생역정을 통한 즉 그가 생을 통찰하고 인식하는 바탕을 형성한 그의 정신세계를 살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그는 1950년 8월 한국전쟁 발발로 군에 입대, 1951년 4월 육군종합학교 수료, 육군소위로 임관, 조사단에 배속되어 1953년 6월 철의 삼각지대에서 중상(좌측대퇴부 골절, 이마에 파편조각이 박히고 눈썹이 찢김)으로 후송, 야전병원-수도육군병원(서울)-제1육군병원(대구, 경북대의과대)으로 후송 가료 중 2년여 만에 불편한 몸으로 제대(육군중위)를 하였다. 이러한 전쟁에서 비롯된 상흔이 장시 『우체부』의 모티브 중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체부』의 시적 진실이라는 세계를 이해하는 데 시인의 과거 편력에 대한 정보파악도 그의 시세계를 이해하는 한 방법이 될 것이다.  셋째, 『우체부』를 관통하는 ‘우체부’가 지닌 의미를 주시해야 한다. ‘우체부’는 메신저 역할을 수행한다. 편지와 엽서, 소포 등 우편물을 가방에 넣고 의뢰인의 주문대로 수취인에게 일정한 시간에 정확하게 내용물을 전해주어야 한다. 문덕수의 수많은 화자들은 『우체부』에서 메신저의 내용물을 정신적 세계의 전달과 고양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인간존재의 질문을 대신하는 ‘우체부’의 우편물의 내용을 다양하게 변주시킨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우편차량과 오토바이 등 운송수단의 발달로 택배 등 배송수단이 다양해지고 있다. 공적인 업무수행이므로 그들의 복장은 통일되어 제도권 안에 스스로를 예속시킨다. 그들은 전달자로서 자신이 전해주어야 할 내용물을 결코 보아서는 안 된다. 그들의 의무이자 사명이다. 때로는 목숨까지 담보로 해야 한다. ‘우체부’가 지닌 책무는 처음 ‘우체부’ 역할을 시작할 때부터 이미 의식에 그렇게 규정을 준수하도록 각인된 것이다. 문덕수가 설정한 ‘우체부’의 사명감을 인지하면 『우체부』를 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우체부』는 한 인간의 정신세계를 올연히 보여주는 작품으로 내용과 형식면에서 어떤 방법론만으로 제한해서는 안 된다. 『우체부』는 스스로 한정된 문학적 수사와 방법론을 부정한다. 『우체부』는 독립된 세계를 구현하며 특정한 시의 이해 독법을 수용하지 않는다. 『우체부』는 문덕수를 대체하며 존재하기 때문에 다양한 장르를 종합적으로 볼 수 있는 트인 시야를 갖기를 원한다. 이것이 『우체부』를 근접해서 이해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문덕수는 『현대문학의모색』(수학사,1969), 『한국현대시론』(선명문화사,1976), 『현대시의해석과 감상』(이우출판사,1982), 『현실과 휴머니즘문학』(성문각, 1986)과 시리즈로 『한국모더니즘시연구』(1981), 『문학개론』(1981), 『문학일반의이해』(1992), 『오늘의 시작법』(1994), 『시론』(1992~2002), 『모더니즘을 넘어서』(2003), 『니힐리즘을 넘어서』(2003) 등 수많은 시 이론서를 발간한 시인이다. 이와 병행해서 195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이래 『황홀』(세계문화사, 1956)을 시작으로 최근의 『우체부』까지 수많은 시집을 출간한 시인이다. 이처럼 그는 시 이론을 겸비한 시인이다. 『우체부』를 단편적 또는 부분적으로 분석하면 안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즉 문덕수의 『우체부』는 어떤 특별한 문학이론만을 한정적으로 적용시킬 수는 없다.  다섯째, 문덕수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수많은 시적 테크놀러지를 자신의 시 속에 능숙하게 풀어낸다. 그동안 자신이 출간한 수많은 시문학이론연구총서를 참조하면서 은유와 상징 등 일반 수사기법을 뛰어넘는 초월은유가 더 응용되고 있음을 주시하여야 한다. 또한 이러한 기법에 더하여 그가 고안한 수사기법을 적용하면 좀 더 폭넓게 『우체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그가 수용한 테드 넬슨(1965년)이 고안한 문서 연결의 방법인 하이퍼 텍스트도 그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다. 문덕수는 경험하지 않은 과거와 경험했던 과거가 한 공간에서 교직이 되게 한다. 즉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의식과 무의식이 병치되고 합일을 이루게 한다. 이 점은 그의 시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평자가 제시하는 다섯 가지 방식만으로 『우체부』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우체부』는 문덕수의 의식 속에 체화된 역사와 사회에 대한 총체적 지각이 적재되어 시의 내면을 형상화하여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 다층의 내면세계는 문덕수 자신의 생래적 체험과 독서 등 지적 욕구로 습득된 지식과 성찰, 통찰을 통한 미학적 심화과정이 병존한다. 또한 논리적 사고를 뛰어넘는 자기 신뢰와 자기 확신을 토대로 수렴적 창의성을 한껏 발휘하는 작시(作詩)의 과정을 『우체부』라는 실체로 보여준다.   3.  『우체부』의 진행 1부. 조셉 룰랭  한 생의 시작으로 한 시인의 운명이 개시되고 있음을 시적 장면으로 보여준다. “노끈 한 줄 날아와 네 어깨에 걸리고/ 고무줄처럼 늘어져도 나긋나긋 끊이지 않는/ 우체부 ‘가방’하나 달랑 달렸네”라는 문면을 통해 ‘우체부’가 될 수밖에 없는 한 시인의 운명을 ‘가방’에 의해 예정한다. 그곳은 금와를 만난 유화(柳花), 그 신화 속에서의 ‘알’과 ‘사문(沙門)의 바랑’처럼 ‘우체부’의 소명의식이 출발하는 지점이다. 반 고흐의‘우체부 조셉룰랭’ 그 이상적인 외형은 임진란과 시인이 겪은 전쟁의 상흔과 시대는 다르지만 지향하는 방향이 일치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와 같은 문덕수의 의도에 의해 전면에 배치된 빈센트 반 고흐가 남겨놓은 초상화 「우체부 룰랭씨」(1888년작)에 주목해야 한다. 이 작품은 더부룩하게 반 이상 얼굴을 덮은 수염과 목덜미를 덮은 모습으로 당시의 ‘우체부’의 규정된 복장을 하고 있다. 어깨를 벌리고 한쪽 팔을 책상에 올려놓은 채 정면을 주시하고 있는 단정하고 늠름한 자세가 직업에 대한 자긍심마저 감득하게 한다. “‘포스트(postes)’ 모표가 또렷한/ 앞 차양 짤막한 캡을 썼”다고 하듯 통일된 모자와 복장이 주는 엄숙함은 반 고흐의 작품 「우체부 룰랭씨」가 ‘우체부’의 상징물인 모자와 복장을 갖추지 않았다고 상상해보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반 고흐의 작품, 「우체부 룰랭씨」에 대한 정밀한 분석은 『우체부』의 이해방식에서 강조했듯이 문덕수의 『우체부』를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을 드러낸다. ‘우체부’의 역할처럼 1부. 조셉 룰랭에서 9.96초의 빠른 속도를 내는 것도 두 다리, “186kg이 일순 두 팔에서 가슴과 허리로” 받치는 힘이 장미란(張美蘭)의 ‘두 발’에서 비롯되었음에 주목해야 한다. ‘우체부’의 사명감을 일깨우며 그 사명감을 지지하고 올바로 완수하기 위해서는 신체의 강건함이 최우선을 강조한다. 문덕수가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자신의 의지를 굳게 해준 것도 체력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음을 시사한다.     보라, 보리수 밑의 앉은이 두 발을 무릎에서 꺾고 접어 결가(結跏)하였네 오른발을 왼발의 넓적다리 위에 얹어 바위처럼 꾹 누르고 아래로 내린 두 손가락 끝으로 두 세계 잡아 이으셨네  포탄이 날아올 땐 인지(人指)를 펴어 밑을 가리키고 전란과 굶주림 속의 모든 염원과 기도를 도맡아 손바닥을 위로 하고 다섯 손가락 다 펴니 두 발의 결과부좌가 받드네           어버이 부축한 외나무다리 길도            5백킬로 상공의 무중력 궤도도           묵직한 가방을 어깨에 매고 뛸 우체부도            두 다리네 ‘우체부’ 역할수행은 두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하는 데서 비롯된다. ‘두 발의 결과부좌가’ 있음으로 깨달음의 상징인 ‘보리수 밑의 앉은’ 부처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두 발의 결과부좌가 받’듦으로 “아래로 내린 두 손가락 끝으로 두 세계 잡아 이으셨”다고 화자는 언설한다. ‘두 다리’는 세상과 연결하며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이다. ‘두 다리’는 세상을 딛고 떠받치는 지지대를 상징하는 힘이다.  ‘두 다리’가 없으면 존재의 이동은 불가능하다. 살아 있음을 존재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두 다리’의 동작이 선행되어야 한다. 지금 이 순간부터 시인의 장시 「우체부」를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우체부’가 되어야 한다. “묵직한 가방을 어깨에 매고 뛸 우체부도/ 두 다리”임을 강조하며 화자는 지금 여기에서 독자들에게 ‘우체부’가 되어 자신이 설정할 수많은 ‘우체부’와 각자의 ‘두 다리’로 동행하기를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2부. 격군들 임진란 당시 배의 노를 젓는 격군(格軍)의 임무는 무엇일까? 전쟁이 진행되는 도중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발진 명령을 복창으로 전군에 하달될 때 복창하면서 자신에게 할당된 노를 힘껏 저어야 한다. 자신의 역할을 완수할 때 배가 앞으로 나갈 수 있다. 격군이 있어야 배는 움직인다. 격군이 있어야 배는 앞으로 나아간다. 당시, 그들 격군이 있어야 사부(射夫)도 화살을 쏠 수 있고 해전을 치를 수 있다. 격군이 자기 역할을 다해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 확대해석하면 격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전쟁의 승리가 좌우되며 나아가 한 나라의 운명이 좌우되고 결정된다.  흘러내리는 MI 총대를 메고 전장에서 행진을 이끄는 구령에 따라 움직이지만 총대가 또 흘러내린다.           아이고매 죽여줍소 아이고매 죽여줍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유고메 죽여줍쇼 데이고메 죽여줍소로도 들렸지  옴마니밧메훔으로도 들렸지           그 소모품 육군소위 지금 더욱 궁금하네            예카스민 사마예 예카스멘 사마예 힘이 부쳐서 화자는 “아이고매 죽여줍소”를 반복하며 저절로 외친다. 문면을 통해 격군의 임무수행이 힘들고 한국전쟁에 임하던 화자가 된 “그 소모품 육군소위 지금 더욱 궁금하”다고 회상한다. ‘우체부’의 임무수행이 그만큼 힘든 여정임을 언어유희와 함께 언어가 주는 감각적 형상화로 여과 없이 보여준다. “예카스민 사마예”가 “영원을 중시하는 인도인의 시간관념의 일단을 암시”하듯 격군과 육군소위의 임무가 시간을 초월하여 동일한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상징한다.   지금 ‘우체부’의 임무수행을 하는 ‘육군소위’는 자신에게 닥친 고행을 감수하고 있다. 회피할 수도 없다. 힘에 겨워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절대자를 부르고 있다. 지금 이 시간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목청껏 자신의 절대자를 외치며 절대자에게 의탁하는 일이다. 헤드라이트를 끈 군용차들의 앞차를 따라가고 그곳에 진흙이 튕겨지고 도로는 진창이다. 네 우체부 가방도 진흙투성이네 병사들은 군복 위로 둘러쓴 판초에 머리만 내어놓고 덜커덩 덜커덕 흔들리는 자세를 가누면서 전방을 보고 두 눈을 부릅뜨고 가네 화자는 ‘진흙투성이’가 된 ‘우체부’의 가방을 그 절박한 순간에도 꼭 움켜쥐고 놓지 않는다. 진흙투성이 속에서 “덜커덩 덜커덕 흔들리는 자세를 가누면서” 임무수행중이다. 전쟁의 한가운데, 생은 계속되고 생이 연결되기 때문에 ‘우체부’의 임무가 병존하고 있음을 표상한다.   가느다란 쇠소리의 저 철모는 안전할까  풀과 잎사귀와 나뭇가지로 위장했네  한 손에는 소총을 들고 어깨는 기관총을 메고 가슴에는 수류탄이 달렸네 구릉이나 언덕을 돌처럼 굴러서 오르내리고 비오듯 쏟아지는 포화 속 고지를 오르며 진격하는 보병이라는  이름의 저들은 누구일까 임란 때 사부 격군의 아들들일까 허리에 권총을 찬 소대장도  어깨는 한 자루 카빈 등에는 포탄 1발 한 병사는 포신(砲身)을 들고  또 한 병사는 포가(砲架)를 메고 또 다른 병사는 포반(砲盤)을 짊어지고 헐떡거리는 저들은 누구일까 발사의 반동으로 후진하는 포신에 부딪쳐 마냥 스스로 닦고 아끼던 105미리 야포 밑에  제 몸 영원히 눕고 싶네 화자는 고지를 오르며 진격하는 보병이 되는 일은 “임란 때 사부 격군의 아들들”이기에 그 또한 가능한 일이었음을 시적 정황으로 보여준다. 시대를 초월해 “임란 때 사부 격군의 아들들”인 보병들은 ‘격군’이 그랬듯 시공이 다른 장소에 위치하면서 “헐떡거리는 저들”이 되어 임무를 계속한다. 마찬가지로 ‘105미리 야포’와 함께하는 병사들도 공동운명체가 되어 각자의 역할에 충실해야만 한다. 때로는 너무 힘들어서 자기 몸같이 아끼는 “105미리 야포 밑에/ 제 몸 영원히 눕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우체부’의 임무수행은 멈출 수 없이 계속된다.  중단 없이 맡은 역할에 충실하고 지속되어야 한다. 임진란과 한국전은 한국내의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그대로 연결되는 장면이다. 시대를 초월하고 공간을 초월한다. 화자는 고난의 연속이지만 전쟁이라는 정황을 운명으로 수용하려 한다. 일상적 언어를 뛰어 넘어 ‘우체부’의 생생한 의미가 상존하고 있음을 전란의 장면을 형상화하며 현장감 있게 보여준다. 3부. 불의 기호  인간의 속내는 알 수 없는 것. 오로지 붓다만이 인간의 욕망, 그 근원을 보았다고 전제하며 화자는 언술한다. “네 보석 눈에서 타오르는 불기둥을 보”듯이, “차디찬 샘 같은 눈 속에 들어앉은 시뻘건 불가마를 보”듯이” 그것은 우리가 보는 ‘눈’에 의해 결정이 된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자는 인간의 내면을 볼 수 있다. “눈 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가 숙명적으로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고 해도 ‘라이오스 왕’은 끝내 죽음의 길을 선택한다. 화자는 ‘오이디프스’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는 것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본다. 그들은 왜 그러한 숙명의 살육을 피할 수 없었을까? 화자는 독자에게 그 근본이유를 숙고하기를 주문한다.    조카 단종을 죽음에 이르게 한 수양이 보았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단종의 눈에 비친 ‘불의 칼’. 사도세자의 눈에 어린 ‘불의 왕관’, 그에 대비되는 욕망의 불꽃은 제어할 수 없다고 시적 화자는 비유를 계속한다. 이어서 “청령포에는 강물 위로 화염”, “욕망의 불꽃” 등 “저 불의 막대기 불의 칼 불의 포탄 불의 핵......” 처럼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음을 강조한다. 하지만 “굴뚝새는 깊은 숲속에 둥지 트나 가지 한 개”밖에 점유하지 못한다며 인간의 욕망도 한계가 있음을 드러낸다.     그래도 ‘가방’을 멘 ‘우체부’의 임무는 계속된다. 원통리, 평촌에도 가고 개(犬)고개도 넘는다. 포탄이 날아와도 ‘우체부’의 소명은 멈출 수 없다. 삶과 죽음의 연속선상에서 살아남는 자의 임무는 계속된다. 죽음에는 남과 북의 구별이 없음과 죽은 자는 이미 존재하지 않음으로 살아남은 자의 몫이 더 크다는 사실을 화자는 연속해서 강조하려 한다. 죽음 앞에서도 각자에게 주어진 ‘우체부’의 임무를 순명처럼 받들고 수행해야만 하는 것이다. 병사들은 뭣인가를 중얼거리며 죽어갔네  으으이 윽, 말하기 전의 시니피앙 말이 끝난 뒤의 소리를 내지르며 죽어갔네  한숨 중얼거림 신음 절규 호곡           어머니 불효자 용서하세요           어머니 만수무강하세요           어머니 ‘뻑’하고 죽습니다.  불룩거리는 네 가방 속은 무슨 소리지  더그럭 덜그럭 쟁그랑 딱 딱 왁자그르 와글북적 미미발휼(浘浘浡潏) 우체부 조셉 룰랭의 금단추 벗는 소리 겉보리 찐쌀 된장 미역이 한데 섞이는 소리 논두렁에서 참 함지를 이고 가는 처녀의 속치마 소리 요강에 조용히 앉아 잠이 든 여인 요조숙녀 죽치고 마주앉아 고스톱하는 친구 죽마고우 施發勞馬 始發奴無色旗  캥캥 캥 대굴대굴 팽이처럼 돌면서 찍 찍 찍 찌르르 윙윙윙 울면서 몰려오는 두개골들 발끝에서 어깨까지 차도르(chador)를 둘러쓴 주검들 피에타의 숨소리 피에타의 맥박 소리 깨어지는 사금파리가 아니라  불발탄과 파편들이 뼈다귀를 녹이는 소리네 편지와 엽서는 모두 불탔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현실이 극도로 심각하지만 화자는 그 이면에 유희적 펀(pun)의 요소를 중시한다. “어머니 만수무강하세요/ 어머니 ‘뻑’하고 죽습니다.”와 같이 의도적 장면의 병치로 삶과 죽음이 순간순간 교차되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려 한다. “요강에 조용히 앉아 잠이 든 여인 요조숙녀” 등 해학적인 면을 간과하지 않으면서 역설적으로 전쟁이라는 국면을 더욱 긴장하게 한다.   전쟁의 상흔은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결과를 보여준다. “윙윙윙 울면서 몰려오는 두개골들” 사이로 “발끝에서 어깨까지 차도르(chador)를 둘러쓴 주검들”이 널려 있다. 화자는 예수를 무릎에 안고 “피에타의 숨소리 피에타의 맥박 소리”를 상상하며 흐느끼는 성모마리아를 떠올린다. 그만큼 전쟁은 주검이 난무한다.  “불발탄과 파편들이 뼈다귀를 녹이는 소리” 뿐인 전쟁, ‘우체부‘가 소중하게 간직하던 “편지와 엽서는 모두 불탔”음을 알게 된다. 죽음을 무릅쓰고 소중하게 가방에 간직하고 다니던 우편물마저 이미 소실되었다.  전해 줄 내용물이 없다. 불 속에서 모든 것이 불탔다. 전쟁은 그만큼 참혹하다.  화자는 외적인 파괴의 전쟁은 그 과정에서 인간의 정신적 세계까지 피폐하게 하고 철저히 분쇄시켜 버렸음을 보여주려 한다.   ‘우체부’가 수취인에게 전달해야 할 편지와 엽서를 간직하지 못하고 있다. “불발탄과 파편들이 뼈다귀를 녹이는 소리”를 듣는 극한 상황으로 치달을 때 편지와 엽서까지 불탔다는 결과는 그만큼 참혹한 정황을 드러낸다. 소중히 간직한 영혼의 메신저, 한 번도 보지 못했으나 그 내용물의 소중함만은 인식하고 내용물을 보듬어 안으면서 견디어 온 ‘우체부’의 삶이다. 화자는 지키고 전해주어야 할 대상을 상실했으니 무엇으로 자신의 임무를 다시 확인할 것인가? 화자는 질문을 반복한다. 과연 자신의 내면을 북돋고 추스르는 근원적인 지향이 가능할 것인가? 화자는 자신에게 질문을 반복한다.  4부. DMZ ‘3부 불의 기호’에서 전제하듯이 DMZ는 서로의 필요조건에 의해서 설정된다. 6.25전쟁의 전운은 계속되고 화자가 감내하는 ‘우체부’의 역할은 일시적으로 흐트러진다. 야윈 엉덩이에서 춤추듯 덜렁거리는 가방 속에서  장총(長銃)은 막대기처럼 두 동강으로 부러지네  압록강 임진강 철교도 한갓 장난감이네  남쪽의 일요일 새벽을 놀라게 한 소련제 T34의 캐터필러도  종이네 납작 구겨지네 목에 걸려 되넘어간 유언은 많으나 그 사람 안 보이고  받을 사람 다 어디로 갔는지 문덕수의 화자는 시인의 안목으로 “압록강 임진강 철교도 한갓 장난감이”라며 전쟁의 피해는 인간의 힘을 무력하게 하는 정황에 대한 안타까운 심경을 묘파한다. 특히 “목에 걸려 되넘어간 유언은 많으나 그 사람 안보이고/ 받을 사람 다 어디로 갔는지” 하는 문면은 영혼의 전령자인 ‘우체부’로서 자긍심과 소명마저 흔들리게 한다. 전쟁의 상흔은 그만큼 인간들에게 죽음에 대한 공포와 고통을 수반하게 한다.   총을 겨누어 맞선 중간을 긋고 남북으로 2킬로씩 물러나게 하네 ...(   ).... 또 어디서 무장한 헬멧이 돌돌 말아온 쇠그물 다발을 세워서 돌리며  서에서 동에까지 144마일을 빈틈없이 펴네 이러히 땅과 나라는 두 동강 나고   ...(   )....  다람쥐 멧돼지 산토끼 오가며 놀고  푸른 숲속 백로의 햐얀 몸빛 유난히 눈부시지만  철조망 안의 DMZ네 DMZ는 부정할 수 없는 적대국가와의 경계지역이다. “서에서 동에까지 144마일을 빈틈없이 펴네/ 이러히 땅과 나라는 두 동강 나고” 38선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남북으로 갈린 상황에서 남북을 자유롭게 왕래하는 것은 “다람쥐 멧돼지 산토끼”와 “푸른 숲속 백로”들이다. 사람은 왕래할 수가 없다. 남북을 왕래하던 ‘우체부’의 역할이 정지될 수밖에 없다. 공(空)이 한 시대의 밑바닥을 다 읽은 듯  탕 치고 튕기네 풍선처럼 점점 부풀다간 탁구공만해지면서 저쪽으로 굴러 가네 축구선수들 발끝에 붙어 맨체스터 밀라노까지 갔다 오네 한 군데 가만히 머물지 못하지  배트에 맞아 지구를 한 번 돌면 궤도가 되지 네가 맨 그 우체부 가방의 불룩한 무(無)의 브랜드 인도인이 맨 먼저 발견한 ‘제로’지  지층의 깊은 벽을 뚫으면 그 틈에서 발원지의 먼 맑은 물소리 오줌발처럼 새어나오고 아이들처럼 응석부리고 흥얼대면서 곤히 잠자는 이 깨우네           공이 공(空)으로 굴러가네 ‘우체부’는 자신의 자정능력을 신뢰한다. “풍선처럼 점점 부풀다간 탁구공만해지면서 저쪽으로 굴러 가”듯 확장을 거듭한다. “축구선수들 발끝에 붙어 맨체스터 밀라노까지 갔다 오”기도 한다. 공(空)이기 때문에 어디든 갈 수 있다. “배트에 맞아 지구를 한 번 돌면 궤도가 되”듯 그 힘은 무한하다. ‘궤도가 되’는 상황은 그대로 고착된 상황을 대변하기도 한다. 공(空)의 유연성이다.     네가 맨 우체부 가방의 볼록한 무(無)의 브랜드  인도인이 맨 먼저 발견한 ‘제로’지 “네가 맨 우체부 가방의 볼록한 무(無)의 브랜드”는 없으면서 있는 존재를 상징한다. ‘무(無)의 브랜드’는 “인도인이 맨 먼저 발견한 ‘제로’”이다. 모든 것은 ‘제로’가 되어야 새로 시작할 수 있다. 정지된 장소는 새로운 출발점이다. 그곳, 무화(無化)가 이루어진 곳에서 지층의 벽을 뚫고 새로운 길이 시작된다. “그 틈에서 발원지의 먼 맑은 물소리” 들리는 정화의 힘으로 회생하기 시작한다. “공이 공(空)으로 굴러가”지만 공(空)이기 때문에 그 힘은 무한 확장된다. 시공을 넘나드는 힘으로 공(空)의 영역은 경계가 없다.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DMZ이기 때문에 자정능력이 지닌 그 특별한 힘으로 갖게 되는 화해의 몸짓을 보여준다. 바람 개스 굶주림 절망 포화(砲火) 핵버섯구름도  안으로 짓이겨 빻아서 가루로 다져 굴러가네’ 존재하는 존재자의 흐름도 이와 마찬가지다. 앞 문면의 ‘사막’도 ‘바다’도 “거두어 말아 굴러 가”듯 “핵버섯구름도” “가루로 다져 굴러 가”듯이 화자는 세상의 존재자는 모두 다시 화해가 되고 하나가 되며 시간의 운행에 따른 자연의 이치를 수용하려 한다. 지진의 무너뜨린 암석을 들어올리고  깨어진 벽돌의 틈을 비집고 빛살처럼 스며들어 숨길을 빠끔빠끔 틔웠지만  수마트라 아체에서도 쓰촨에서도            그래도 공은 바닥을 치고 솟네           네 키를 넘고 북한산을 넘네           2천 7백미터 백두산 밝은 물을 한 번 돌고           예수께서 맨발로 걸어오신 갈릴리호수 위를 굴러           8천 848미터 에베레스트 정상           룸비니에서 본 싯다르타의 시선이 상기 머무는 저 바위에도 세상은 DMZ 속에 머물고 있다. 대지진을 일으키는 “수마트라 아체에서도 쓰촨에서도” 지구는 “그래도 공은 바닥을 치고 솟”는다고 하듯이 공존할 수 있는 화해의 여력은 아직 남아 있다. “2천 7백미터 백두산 밝은 물을 한 번 돌고” 그 힘은 “예수께서 맨발로 걸어온 갈릴리호수 위를 굴러/ 8천 848미터 에베레스트 정상/ 룸비니에서 본 싯다르타의 시선이 상기 머무는 저 바위에도” 그 힘을 드러낸다. 그것은 다시 시작해야하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의 굴레다.  예수와 싯다르타, 그들을 구분하는 것조차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들은 지금 서로 다름이 아니다. 부르는 이름이 예수와 싯다르타라는 차이가 있을 뿐, 공(空)의 영역에서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분별의 의미를 구태여 따질 필요마저 없는 것이다. 근원적으로 불이(不二)와 불이(不異)의 존재이다.    공은 스스로를 지우네  굴러가면서 제 온갖 몸짓을 지우네 날아가면서 날아간 길을 지우네 폭발과 살육 속에서도  숨쉬며 지우네 지우는 방식까지 지우네 사무실의 안팎과 도시의 미로에 가득차 넘실거리는 것 만지거나 볼 수는 없으나 나무와 꽃을 가꾸듯이 기르고 있는 300층을 300층으로 꼿꼿이 세우고 있는 것 213360 네 군번까지 지우네  피구슬 번호의 한 자 한자  전선(電線)에 한 줄로 나란히 앉은 꽃새로 폴폴 날리네 변화는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3부 “불의 기호”에서 ‘우체부’ 역할이 정지되었으나 회생이 된 공(空)이 지금까지 시도했던 모든 방식을 부정하면서 다시 긍정의 눈으로 대상을 보며 화해의 몸짓을 보낸다. 그곳에 대상을 향한 지우고 지워서 끝내 “지우는 방식까지 지우”는 무화(無化)된 공(空)이 있다. 모든 것은 공(空)이 되어 다시 시작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화자는 “300층을 300층으로 꿋꿋이 세우고 있는 것”과 같은 자존과 함께 화자가  직접 몸으로 겪은 전쟁인 “213360 네 군번까지 지우”며 몸의 기억까지 지우겠다는 다짐을 한다. 이어서 역설적으로 “전선(電線)에 한 줄로 나란히 앉은 꽃새로 폴폴 날리네”라고 언술하며 새로운 평화, 화해의 몸짓을 상징하듯 ‘한 줄로 나란히’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다. DMZ의 이면을 확대해서 보여주며 새로운 희망을 예시하는 방향전환을 하고 있는 것이다.  5부. 모데라토  전쟁에서의 상흔을 딛고 새롭게 살고 있는 삶에서 몸에 각인된 전쟁의 기억은 자신의 몸이 존재하는 한 지속될 수밖에 없음을 다시 한 번 설파한다.  과거의 공자님, 예수님, 부처님의 생존당시의 삶이 인간의식에 내재되어 영원한 흐름이 지속되고 있다. 그들의 생에 견준다면 문덕수 자신을 포함한 현세를 살고 있는 자는 “흙탕물 속에서 아직 칠삭둥이로 물장구”친다고 전제하면서 삶의 완성이 머나먼 길임을 인식시키려 한다.  자신을 대체할 수 있다고 신뢰를 보내는 “고물 헬리콥터의 유리조각”을 다듬어 만든 ‘인장(印章)’이 하찮아도 자신에게는 중요한 징표이다. 인장에 대한 기억이 그렇듯이 육신이 갖는 기억이 의식 속에서 자신을 서둘러 현실로 옮겨와 ‘나이만큼 몽글’해지고 모호해졌다는 실토를 하고 있는 것이다. 넓적다리 뚫리고 허벅지뼈 두 동강으로 부러지고  눈썹을 가로질러 긁고 이마 앞머리 모두 찢어진 온 몸  피의 파편을 둘러썼네 죽음의 그물 둘러썼네 그때 너를 번쩍 들어 어깨에 맨 이는? ...(   )....           아직은 숨이 붙어 있어, 얼른 서둘러 “허벅지뼈 두 동강으로 부러지고” “이마 앞머리 모두 찢어진 온 몸”이 된 “죽음의 그물 둘러” 쓴 총탄 속에서 아직도 살아 있음을 의식하며 “아직은 숨이 붙어 있어. 얼른 서둘러” 각인된 그 소리는 누구의 외침일까? “너를 번쩍 들어 어깨에 맨 이는?” 누구일까? 오랜 시간이 경과한 지금 무의식 속에서도 자신의 몸을 소생시켜야 한다는 생에 대한 강한 의지를 전달하는 화자자신이 자신에게 던지는 외침이고 물음일 것이다. 포탄이 텐트를 물고 날아갈 듯이 펄럭이는 야전막사에서 수술의 칼을 잡은 이는 누구일까 깁스 붕대 속의 미라에게 계속 맥박이 살아 발딱발딱 뛰도록 신비의 바늘을 지른 손은 누구일가 포격에 쫓기면서 경복궁 옆의 수도육군병원까지 실어나른 이는 누구일까 신(神)을 보지 못했다고 함부로 입 열지 말라 이 세상에는 모르는 일이 너무 많네 도저히 생환할 수 없는 여건인데 긍정적 상황이 연결되어 화자는 삶을 지속한다. 한 치라도 어긋나면 생환할 수 없는데 기묘하게 삶의 방향으로 전환을 거듭하며 죽음을 벗어난다.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화자인 문덕수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을 회고하면서 실체적 고변이니 자신만큼은 그 상황을 부정할 수 없다.  자신을 살리기 위한 신의 기막힌 안배에 대해 부정할 수 없다. “신(神)을 보지 못했다고 함부로 입 열지 말라”는 설정은 이 세상은 모르는 일이 너무 많다는 자각과 함께 처절한 삶의 국면에서 그 당시 화자 자신이 다시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긍정하지 않을 수 없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한밤의 대구(大邱) 제1육군병원이네, 들것은 다시 트럭으로 옮겨지고  ...(   )... 만발한 한겨울의 꽃이네 그때 네 인장은 저 별이 간직하고 있었을까 세상에는 모르는 일이 너무 많네 대구 ‘제1육군병원의 후송’ 병원은 그 당시 전방의 전선에서 몰려온 부상병이 널려 있었을 것이다. 그런 부상병으로 채운 광장의 참혹한 광경을 “만발한 한겨울의 꽃밭”이라고 화자는 자조와 안도의 시선으로 본다. 그 상황을 “그때 네 인장은 저 별이 간직하고 있었을까/ 세상에는 모르는 일이 너무 많네”라고 화자가 자신의 심경을 묘파하면서도 생의 존재에 대해 적극적인 긍정의 시각으로 보려 한다. 즉 ‘우체부’인 화자가 인식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 불가항력적 힘이 화자를 위해 존재하고 있음을 수긍하려 한다.  끊어지는 숨소리 헐떡거림 끙끙거림 울부짖음 아아 아야야 윽윽 음음 응응 비명의 격류  다리 잘린 이 눈 잃은 이 부러진 척추 잘린 발목 부여잡은 이 팔 없는 어깻죽지 노호 탄식 통곡 읍소 절규......  탑 속에 유폐된 탄식도 들은 제우스, 이곳엔 없네  죽은 자는 고지에서 여기 오지도 못했네 가을 들판을 덮은 온갖 풀벌레 울음의 잔치 지옥은 아니지 아니지 아니지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바지에서 동그란 것이 툭 떨어져 제 홀로 굴러가네 끝없이            에카스만 사마예 에카스민 사마예 “죽은 자는 고지에서 여기 오지도 못했네” 지금 이곳은 그대로 살아남은 자만이 공유할 수 있는 시공을 뛰어넘는 자리이다. “바지에서 동그란 것이 툭 떨어져 제 홀로 굴러가네 끝없이”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결론은 ‘에카스민 사마예 에카스민 사마예’라고 외치듯 운명은 끝내 알 수 없다. 아직 지옥은 아니다. ‘우체부’의 운명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래도 임계점에 이르러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부르짖는다. 인간임을 부정하지 못한다. 한계를 절감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한계이며 화자의 숙명이다. “바지에서 동그란 것이 툭 떨어져 제 홀로 굴러가네 끝없이” 어디까지 저 ‘동그란 것’은 굴러갈 수 있을까? 저 작은 ‘동그란 것’은 결국 ‘제 홀로 굴러’갈 수밖에 없다. 알 수 없는 운명을 향해, ‘우체부’의 사명은 아직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6부. 지금 여기  지금 이 순간까지 죄 없이 살아온 자는 아무도 없음을 예수가 몸으로 보여주는데 세상의 모든 유언은 눈(雪)에 쓰듯 다 녹아버린다. 물 건너 이민 간 누나의 발자국은 하늘이 지우네  어둔 병실 구석에서 콜록거리다가 종적을 감춘 아버지  모깃불 피운 마당에 멍석을 깔고 밤하늘의 손주 별을 찾던 백발의 머리 든 채로 화석이 된 할머니 아들 만나려고 강 가의 나룻배 기다리는 동안 넋을 잃고 홀연히 실종된 어머니 네 가방, 해산한 어머니의 뱃가죽처럼 쭈그러들고 집히는 편지도 없고 받을 이도 없네 세상과의 인연은 처음 시작했던 곳으로 돌아가면서 정리된다. “이민 간 누나”와 “종적을 감춘 아버지” 그리고 “화석이 된 할머니”와 “홀연히 실종된 어머니” 등 자신을 존재하게 했던 인연은 끊어지고 혼자 남아있는 화자다. 그 때문인가? 자신에게 부여되었던 ‘우체부’의 임무는 완수하지 못하고 텅 빈 가방이 되었다. ‘네 가방, 해산한 어머니의 뱃가죽처럼 쭈그러들고/ 집히는 편지도 없고 받을 이도 없네’. 절절하게 화자의 심경을 고변한다. 그 곳은 화자가 전제하듯이 바로 ‘지금 여기’인 것이다. 아버지 로봇과 아들 로봇 울돌목의 일자진 뒤에 배치한 가병(假兵)들이네  ...(   )... 전사한 할아버지 애비 손자의 두개골들이  고지(高地)를 왕릉처럼 덮네 공처럼 여기저기 굴러다니네  어깨에 멘 황갈색 가방에 부딪쳐 튀어나가 저 쪽 불탄 나무 그루터기에 걸려서 멎네  ...(   )... 지렁이로 몸을 비틀며 꾸물꾸물 산비탈을 기어오르고  원숭이로 변해 날쌔게 떡갈나뭇가지로 뛰어올라가 숨네 지금 문덕수의 화자는 전라남도 신안과 진도(珍島)사이 폭 300미터 물살이 거칠게 흐르는 울돌목을 바라보고 있다.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이 갖는 역사적 의미와 이순신 장군이 남은 전선 12척으로 왜적을 격퇴하는 그 모든 것의 배치가 이순신 장군만의 힘이 아닌 것이라고 단정 지으면서 잠시 『우체부』의 결론을 내리는 부분에서 화자의 시선은 파도 넘실대는 울돌목을 명징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전사들은 “전사한 할아버지 애비 손자의 두개골들이/ 고지(高地)를 왕릉처럼 덮”고 있다고 기억하듯이 모두 죽었다. 지금 이 자리에 없다. 로봇 전사들이 “가병(假兵)들이” 되어 대리로 전쟁을 한다. 영혼이 없는 로봇이 대신해 주는 싸움이다. 로봇병사, 복제병사들이 상황에 따라 “지렁이로 몸을 비틀”고 “원숭이로 변”하듯 온갖 형상으로 변화하며 싸움에 임한다.  탱크를 장난감처럼 뒤집어 던지는 로봇의 팔들  가을의 붉은 속치마를 두른 680고지 673고지 749고지 펀치볼을 두른 칼날의 능선바위도 오르내리네  지금 네 빈 가방에는 무엇이 울고 있느냐 파편이냐 보석이냐 두개골이냐 더그럭 덜그럭           메멘토 모리 메멘토 모리  미래의 전쟁, ‘우체부’는 어떻게 존재방식을 바꾸어야 하는가. 화자의 상상 속 그 미래에도 ‘우체부’는 존재해야 한다. “펀치볼을 두른 칼날의 능선바위도 오르내리”며 ‘우체부’의 역할수행은 계속되어야 한다. 어쩌면 화자는 미래의 ‘로봇’의 힘을 차용하고 발휘해 ‘우체부’의 임무를 완수하기를 소망했었을 것이다. 화자는 ‘우체부’의 가방이 비어 있음을 확인한다. “파편이냐 보석이냐 두개골이냐” 묻고 있지만 이미 비어 있는 가방이다. “더그럭 덜그럭” 소리만 요란할 뿐이다. ‘우체부’는 공허하다. 전달해 줄 내용물에 의미를 부여했는데 그 의미마저 퇴색되고 있다. 그렇다고 죽을 수는 없다.  화자는 공감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 이대흠의 시, 「아름다운 위반」은 승객과 버스기사와의 어긋나면서도 정겨운 대화에서 “이러히 그들은 연애하네”라는 서로의 교집합을 확장시킨다. 서정우의 시, 「소 닭보듯」은 소와 닭의 관계가 무심해 보이지만 서로 관심을 보이는 모습을 “이러히 소와 닭은 연애하네”라고 표현한다. 김원일 소설, 「용초도의 동백꽃」 인용 부분도 인연에 대해 서로 연관성이 있으니 무관하다고 할 수 없으며 그 또한 공감대의 확장인 공존으로 본다. PC TV 냉장고 에어콘 로봇 해골 하나님 손때 묻어 반질반질하네 ...(   )...           휴대폰 좀 빌려줘 하나님과 통화하고 싶네            이러히 모두 연애하고 싶네 화자는 “PC TV 냉장고 에어콘 로봇 해골/ 하나님 손때 묻어 반질반질하네”라며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이 서로 관계되고 있음을 주시한다. ‘하나님 손때’라는 의미는 우리가 쓰고 있지만 우리 안에 바로 하나님의 힘이 우리의 손을 빌려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고 있다는 의미를 함의한다. 언제든지 환치되는 관계다. 화자의 내면은 “이러히 모두 연애하고 싶네”라는 일체 대상을 포용하는 원융무애(圓融無碍)한 경지로 시적 대상을 형상화 한다고 할 수 있다.  뭍과 섬 하나로 붙은 견내량(見乃梁) 울돌목(鳴粱) 동과 서 이어 백성 지킨 그 물길 더욱 푸르네 한 뿌리에서 뿜는 압록 한강 영산 낙동 멀리 태평양 대서양 감쌌네 제 타원형 궤도를 잡아 도는 이 초록별 알구슬 이브의 손 들어 올리니 온 몸 떨려 두렵네 화자는 세계 사이의 팽팽한 줄을 잇고 있듯이 육지와 섬이 붙은 ‘견내량(見乃梁) 울돌목(鳴粱)’을 보며 남북은 갈려 있어도 “동과 서 이어” 압록강에서부터 대한민국 전체를 관통하는 물줄기가 태평양, 대서양 감쌌“다고 그 화합된 장면을 보여주려 한다. “압록 한강 영산 낙동강” 그 모든 원류는 ‘한 뿌리’인 대한민국의 땅에서 나왔으며 그 힘으로 지구를 감싸 안았음을 거듭 강조한다. 내면적으로 남과 북의 갈림을 봉합하고 화합해야 통합된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칼 세이건은 우주에서 보면 지구는 하나의 작은 푸른 점이라고 했다. 화자는 지구를 “제 타원형 궤도를 잡아 도는 이 초록별 알구슬”로 표현하며 생명이 있는 유기체로 본다. 우주에 존재하는 절대적 힘에 의해 지구가 생겼고 인류를 탄생시켰다고 여긴다.   처음 세상과 소통이 시작된 아담과 이브가 공존했던 에덴동산에서 “이브의 손을 다시 들어 올리니 온 몸 떨려 두렵”다고 고해하듯 심경을 토로한다. 화자는 모든 존재들이 스스로 본성과 영성을 지니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 때문에 자신의 깨달음이 두렵기만 하다. 뒤늦게 세상의 공존하는 그 이유와 본질을 알게 되는 과정을, 깨달음에 대한 경애를 화자는 자신을 향해 두려움으로 표명한다.   잠시 『우체부』의 머리말인 무좀에서 그 결론에 대해 “다만 그 ‘진실’에 반치라도 다가서고 싶은 내 언어. 헉헉거리네” 하며 스스로 절감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드러내는 실토의 언어를 놓쳐서는 안 된다.  오죽하면 처음부터 제대로 된 ‘우체부’ 역할을 하고 싶다는 그 염원으로 시의 맥을 이어가고 있을까. “온 몸 떨려 두렵네”라는 화자의 마지막 언술이 동감을 불러일으키는 그 이유를 다시 한 번 궁구하게 하는 것이다. 4.  운명적 존재, ‘우체부’ 문덕수의 시집 『우체부』를 살펴보면서 문덕수의 ‘우체부’는 문덕수의 ‘우체부’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운명의 흐름을 주시하며 자신이 쌓아온 경험과 직관력에 의하여 자신의 생을 투시하고 본질을 통찰하려 한 『우체부』를 어떤 단편적인 담론으로도 규정할 수 없다. 통합적 관점으로 시를 대하는 그의 시편을 특정한 관점의 방법론으로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 또한 용이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평자는 『우체부』 시집의 면면을 해독하듯이 총체적인 분석을 하려 했다. 그 이유는 문덕수가 『우체부』를 왜 이렇게 쓸 수밖에 없었던가 하는 당위성을 찾기 위해서였음을 밝히며 『우체부』가 지닌 몇 가지 특성을 평자 나름의 관점에서 살펴본다. 첫째, 문덕수는 세상과의 소통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인식하며 궤도 수정을 할 수 없는 능력의 부족함을 절감한다. 하지만 자신이 기묘하게 수많은 우연과 행운을 거쳐 운명적으로 생을 이어왔듯이 아주 특별한 ‘존재자’임을 긍정하려 한다. 그 때문에 운명을 주재하는 절대자가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한 자존감으로 의식의 흐름 즉 시적 진실을 분석하고 재해석하며 자신이 ‘우체부’의 소임을 충실히 하지 못한 연유를 ‘우체부’의 언어로 전해주려 한다.  그와 함께 자신의 존재의미를 ‘우체부’를 통해 탐구하려 한다. 반 고흐가 남겨놓은 초상화 「우체부 룰랭씨」를 시집 전면에 배치하며 ‘우체부’의 존재에 대해 궁구하게 한 것도 여러 각도에서 인간의 모습을 조명해보려는 의도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연속적으로 격군, 사부, 보병, 육군소위 등 역할분담에 따라 ‘우체부’를 변주하게 한 것도 이런 연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세상의 흐름을 연결해주는 그 내면의 메신저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문덕수의 『우체부』는 모든 시적 대상의 교감으로 동감하고 공명(共鳴)할 수 있는 합일을 추동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경계를 지워나간다. 의미와 관념이 짓는 경계를 없애려 한다. 상생과 공존을 향한 공감의식을 생성하려 한다. 상반과 이질을 벗어 화합되고,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로 병존시키려 한다.   문덕수는 시적 대상에 대해 합일을 이루는 방편을 현장감 있게 수용하려 한다. 자신의 지나간 생에 대해 분별지가 작용했음을 수긍하며 그 과오를 교정하여 공존과 화합을 추동하려 한다. 이러한 내면의 변화는 시적 대상들에 대해 다름과 다양한 개별적 특성을 인정하며 공존의 시적 미학을 적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 1945~)은 자신의 저서 『공감의 시대』(믿음사, 2010)에서 “공감의 확장은 갈수록 복잡해지는 사회적 교류와 인프라를 가능하게 하는 접착제이다. 공감이 없는 사회생활이나 사회적 조직은 상상할 수도 없다.”고  공감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한다. 이처럼 공감을 연결하고 확장하는 방식을 문덕수는 주시했다고 보아진다. 누구든 소통과 교류의 메신저인 ‘우체부’가 될 수 있으며 인간 사이의 간극을 좁히고 관계형성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녔다고 본 것이다.  셋째, 『우체부』는 시의 행간마다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문장과 언어가 병치되고 난무한다. 의식과 무의식의 공간이 혼합되고 문학적 수사기법이 뒤섞이면서도 기묘하게 균형을 이룬다.  문덕수는 앞의 ‘『우체부』의 이해방식’에서 예시하였듯이 수많은 시 이론서와 시집을 발간한 시인이다. 자신이 주창한 시 이론을 자신의 시에 응용하고 적용시키려 노력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가 1992년 로 발간한 『시론』의 ‘머리글’에서 “해외의 이론과 동양의 고전적 이론을 토대로 시론이나 시학의 새로운 이론 창출과 그 체계화에 전념”할 것을 당부하고 스스로 실천해 왔듯이 『우체부』는 문덕수가 그 오랜 기간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탐구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정착시키려 한 시집이다.   그 때문인지 『우체부』는 상반되고 이질적인 언어가 맺는 관계가 ‘우체부’라는 운명적 존재 앞에서 연관되고 서로 혼용되어 질서를 이룬다. 이러한 고도의 문학적 수사는 통합적 시론을 숙지하고 그 기법을 다양하게 문면에 적용시킬 때 가능한 수사라고 할 수 있다.  넷째,  문덕수의 『우체부』는 그의 총체적인 사유와 통찰이 내장된 시편을 담고 있다. 진솔한 자기고백과 증언이며 자기만의 본원을 향해가는 지향의 원리를 확인하게 하는 특별한 기록물이다. 문덕수가 세상과 공존해온 나름의 조용한 존재방식이다. 이 특별한 시편은 그만이 갖고 있는 천성의 능력 즉 수렴적 창의력이 있기에 가능했을 것이라고 추정해본다.   문덕수의 『우체부』는 인간의 욕망을 통찰하면서 생이 갈 수 있는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 비로소 인간존재의 비밀의 덮개를 벗겨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소멸해가는 존재의 나약함을 인지하면서 운명적 존재를 지속하기 위한 그 역할에 의미를 부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복합적 요인이 적용되고 자신의 특성을 살리는 문덕수의 『우체부』는 그만의 개성적인 시가 된다. 물론 앞에 제시한 네 가지 방식만으로 그의 시를 규정할 수는 없다. 그만큼 그의 『우체부』는 단편적으로 측량할 수 없는 깊이와 넓이를 지닌다.  195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이래 시력 50년 이상의 문덕수가 견내량, 울돌목 앞바다의 넘실대는 파도 끝에 눈길을 두며 마음의 지향을 어디에 두고 있었을까? 그는 오랜 기간 자아의식의 심화를 통해 자신을 개혁하고 자신을 초월하려 했다. 인간본성의 존재와 신비를 확인하고 새로운 의미의 인간영역을 확장하려 했다. 그리고 그는  어머니의 양수에서부터 시작하여 태평양 대서양을 돌아 시공을 초월하여 또 다른 신성의 ‘지금 여기’에 당도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자신이 없으면 자신이 생각하는 세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여기’에 오기까지 문덕수는 수없는 ‘지금 여기’를 연결해왔다. 문덕수는 어머니의 상징 그 이상인 이브의 손을 들어 줄 수밖에 없는 ‘지금 여기’의 엄정함에 못내 자신의 한계를 절감했을 것이다. 그 축소된 심사로 그는 과거와 미래가 현재로 응집된 ‘지금 여기’를 지켜내려 한다. 죽음을 가까이 두고서 깨달음의 지혜를 조금이라도 획득했다면 그 또한 다행으로 여겨야 할 뿐이다.   비로소 ‘무좀(머리말)’에 대한 이해를 넓힌다. 문덕수는 신의 영역에 근접할 수 없는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절감하며 자신의 언어로 반치라도 ‘진실’에  다가가고 싶어 한다. 인간존재의 신비를 확인하고 새로운 의미의 인간영역을 확장하려 한다. 경계를 지우며 경계를 세운다.  문덕수는 ‘지금 여기’에서 자신과 함께 우리 모두가 경계 없는 ‘우체부’가 되어 자신이 다하지 못한 진정한 전령사 역할을 수행하기를 간절히 소망할 것이다. 앞으로 인간과 세계에 대한 질문과 그 나름의 해답을 각자 궁구하게 하는 『우체부』가 독자와 함께 널리 읽힐 것이다. 인간 본성과 인간적 탐구의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우체부』가 보여주는 시적 진실이 많은 공감을 일으키길 예견한다.
6    [2017년 4월호] 나의 시쓰기: 자작 하이퍼시에 대한 해설 / 심상운 댓글:  조회:808  추천:0  2019-06-17
자작 하이퍼시에 대한 해설 마네킹 또는 아침 햇빛 오전 8시 30분 백화점 지하창고에서  점원들의 들것에 실려 나오는  가슴이 깨진 20대의 남녀 마네킹 새 두 마리 지하의 어둠 속에서 날아올라  아침 햇빛 눈부신   빌딩 사이로 날아간다 햇빛 속에서 반짝이며  출렁이기 시작하는 나뭇가지들 > 바이칼 호수 마을에서 둥 둥 둥 둥   푸른 하늘로 울려 퍼지는 북소리 운길산 수종사 나한전에서는 환한 빛을 향해  맨머리의 나한들이 웃고 있다 시작 노트 이 세상 존재들의 보이지 않는  수평적 네트워크(network) 이미지 현대는 원본이 없는 이미지가 실재가 되어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는 시대라고 한다. 프랑스의 사회철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그의 저서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에서 원본 없는 이미지가 새로운 실재로 둔갑한다는 이론을 내세우면서 이를 시뮬라크르(simulacra,模寫)라고 했다. 그리고 ‘모사된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한다.’는 시뮬라시옹(Simulation)의 이론을 만들어내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현대사회에서 시뮬라크르는 실재가 아닌 것이 더 실재 같이 행세를 하는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의 세계로 이동한다는 개념을 내세우고 있다.  현대사회의 현상에서 원형상실이라는 부메랑과 함께 진실추구의 관점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하이퍼리얼리티는 언론 매체들의 보도행태에서 크게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지만, 예술의 세계에서는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허물고 작업공간을 무한히 확장시키는 긍정적인 작용을 하고 있다. 21세기 한국 현대시의 현장에서 새로운 시로 등장한 하이퍼시는 가상현실의 시뮬라크르를 바탕으로 논리적이고 인과적인 비유와 관념의 서술에서 벗어나 시 속에 아무런 설명도 넣지 않고 오로지 디지털적인 가상현실의 독립된 이미지와 이미지들의 연결과 결합을 통해서 현실의 문제와 철학적인 사유, 시인의 내면세계를 드러내려고 한다. 그래서 하이퍼시는 이미지들의 연결과 결합이 ‘다선구조의 이미지 망(網)’을 형성한다. 그 이미지의 망은 이미지 자체가 실재가 된다는 장보드리아르의 이론을 반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이미지들의 차이를 위계적인 차이가 아닌 동일한 존재성을 바탕으로 한 차이로 인정하는 존재의 일의성(一意性)을 바탕에 깔고 있다. 이 존재의 일의성은 『천개의 고원』으로 알려진 질 들뢰즈(GillesDeleuze)의 리좀(Rhizome) 이론의 원천이 되는 이론으로서 모든 존재는 하나로 모아진다는 이론이다. 하이퍼시가 현실과 연결되는 상상을 넘어서 현실의 끈이 사라진 공상의 세계로 나아가는 문을 여는 것도 수평적이고 자유로운 이미지들의 관계(리좀)에서 에너지를 얻는다.  「마네킹 또는 아침 햇빛」을 형성하는 5개의 연은 독립적인 이미지들의 집합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1연에서 백화점 지하창고에서 점원들의 들것에 실려 나오는 가슴이 깨진 20대 남녀 마네킹, 2연의 지하의 어둠 속에서 날아오르는 새의 이미지, 3연의 아침 햇빛 속에서 출렁이는 나뭇가지들, 4연의 바이칼 호수 마을에서 울려 퍼지는 북소리, 5연의 운길산 수종사 나한전의 이미지 등이 수직적인 논리의 틀에서 벗어난 수평적인 리좀의 형태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미지들의 내면으로 흐르는 시인의 의식(意識)이 수정(水晶)을 꿰는 실이 되어 시적공간을 형성하는 작용을 하고 있다. 가슴이 깨진 남녀 마네킹의 존재를 일반 생명체의 존재와 동일하게 인식하고 그들이 지하창고에서 들것에 실려 나올 때, 지하의 어둠 속에서 날아올라 햇빛이 빛나는 빌딩 사이로 날아가는 새 두 마리를 그들의 영혼으로 암시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나뭇가지들도 햇빛 속에서 출렁이고, 바이칼 호수의 마을에서는 죽음의 세계를 통과한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축복하는 북소리가 울리고, 운길산 수종사 나한전에서 맨머리의 나한(羅漢)들이 햇빛을 향해 웃고 있는 모습의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가상현실의 시적공간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나한은 산스크리트어의 아라한(arhan)을 줄여서 음역한 말로 불교에서는 불제자로서 번뇌(煩惱)와 생사(生死)의 굴레에서 벗어나서 이 세상 존재들의 모습과 그들의 관계를 환히 볼 수 있는 깨달은 존재들을 의미한다. 그런 높은 정신적 경지에 있는 나한들과 백화점의 마네킹이 가상의 존재로서 같은 조상(彫像)이라는 것도 시의 의미에 부가적 작용을 할 것 같다. 4연에서 바이칼 호수의 마을을 등장시킨 것도 단순히 시의 공간을 확대하기 위함만이 아니다. 그곳에는 오랜 옛날부터 알타이 원시종교의 샤먼(shaman)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연에서 오전 8시 30분이라고 시간을 밝힌 것은 아날로그와 다른 디지털의 감각과 특성(정밀성)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 보다 더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것은 이 시를 높은 차원에서 조감(鳥瞰)하는 것이다. 그러면 독립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이 시의 이미지들이 존재의 일의성을 바탕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과 이 지상의 존재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수평적인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독자들도 어렵지 않게 인식하게 될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인식이 그들에게 이 세상 존재들에 대한 형이상적(形而上的) 사유와 상상의 문을 여는 계기를 만들어주게 될 것 같다. 그래서 실재가 아니면서도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세계를 영화로 구현한 제임스 카메론(James Cameron) 감독의 영화 에서 구체적인 영상으로 흥미롭게 시현(示顯)된 판도라(Pandora) 행성의 생태계 모습이 이 시에 들어 있는 중심사유 -‘존재들의 수평적 네트워크’-와 하나의 끈으로 묶여질 수 있다는 것이 예사롭지 않게 여겨진다. 영화 의 무대가 되는 판도라(Pandora) 행성의 지표면에서는 뿌리들이 서로 얽히고설켜 네트워크를 형성한 수많은 식물들과 그로 인해 인간 뇌의 신경망(neuranetwolrk)보다 더 촘촘하게 서로를 연결하는 판도라의 밀도 높은 생태환경이 위계 없이 서로의 차이들이 무수히 얽혀 있는 생태계의 숭고한 영역으로 인식되고 있다. 판도라 행성의 나비(Na’vi)족들은 자신들의 큐(cue)를 생태계의 신경망에 연결하여 판도라에 살았던 수많은 영혼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판도라의 가상세계가 가장 이상적인 생명체들의 세계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가상 이미지로 이루어진 하이퍼리얼리티의 세계는 현실과 완벽하게 단절된 가공의 판타지(fantasy)의 세계이지만, ‘생명의 원형’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진실추구의 아이러니(irony)적 공간이 되어서 그 생태계의 현장은 관객들에게 판도라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은 감동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5연으로 구성된 짧은 시 「마네킹 또는 아침 햇빛」이 내포하고 있는 존재세계의 형이상적인 이해를 위해 영역이 다른, 영화 「아바타」의 한 부분을 인용(引用)하여 연결하는 것은 무리한 점이 없지 않다. 그러나 하이퍼시의 바탕에 질 들뢰즈의 리좀 이론이 깔려 있다는 관점에서 생각할 때, 이 리좀의 이론을 ‘판도라 행성의 생태계 네트워크 이미지’로 구현한 영화 「아바타」와 하이퍼시 「마네킹 또는 아침 햇빛」에서 시도한 ‘이 세상 존재들의 보이지 않는 수평적 네트워크 이미지’는 서로 합치되고 호응할 수 있는 요소가 있다고 생각된다.
5    문덕수 시인의 연작시 --선에 관한 소묘」에 대한 소고 댓글:  조회:1513  추천:0  2019-06-17
문덕수 시인의 연작시  --선에 관한 소묘」에 대한 소고   김석환 1. 머리말  문덕수(1928-) 시인은 등단 이후 『황홀』을 비롯한 17여 권의 시집과 『한국모더니즘시 연구』 등 문학 연구서를 발간하고 수많은 평론을 발표하며 한국 시단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월간 시 전문지 『시문학』을 1971년 창간한 후 현재까지 한 호도 거르지 않고 발간하며 한국시단의 흐름을 주도하였다. 오랜 동안 대학 강단을 지키며 지속적으로 시에 관한 이론을 탐구하고 이를 창작을 통해 실험하고 실천하였다. 초기에는 ‘내면세계’를 탐구하는 시를 선보이기도 하였고 현실의식이 강한 시를 발표하기도 하며 다양한 시세계를 보여 주었다. 본고는 문 시인이 초기에 발표한 「선에 관한 소묘」 연작시(1963-1965) 5편에 대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이 시편들은 실험의식이 강하여 평자들이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는데 이후에 창작한 문 시인의 시적 원형이 잠재되어 있다고 본다.  기존의 평자들은 「선에 관한 소묘」 연작시 5편은 인간의 무의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해석이 어려운 ‘무의미시’라는 평을 주로 해왔다. 특히 시를 해석하여 의미를 유추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이 시편들이 기존의 시보다 상상의 비약이 커서 논리의 일탈이 심하다는 특징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현실에 실제로 있는 어떤 대상을 그리기보다 무의식을 그리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문 시인 자신도 자신은 무의식의 세계, 즉 ‘내면세계’로 시선을 옮겨 그 구조를 반영하려 했다는 것을 이 시편들을 쓰고 난 후 『사상계』에 발표한 시론 「내면세계의 미학」에서 언급하고 있다.   시가 외면세계에 의존하고 있는 이상, 외면세계의 구조가 그대로 시에 반영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외면세계의 속박을 끊고 내면세계로 옮기면 외면세계의 합리적 구조를 벗어나게 되고, 따라서 비합리적인 내면세계의 구조를 반영하게 된다. 이러한 문 시인의 주장이나 기존의 논의는 무의식이 어떻게 시적으로 형상화되었는가를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시도의 타당성을 뒷받침 해 준다. 본고는 문 시인이 그의 시를 통하여 어떻게 내면세계의 무의식적 욕망을 보여주고 있는가를 살피고자 한다. 카오스적인 무의식적 욕망을 이미지의 자율적인 연상에 의해 표현하려 시도한 시편들에서 구조적 특징을 논리적으로 서술하거나 일정한 주제를 찾는 것은 무모한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시인이 선택하여 배열한 이미지의 연쇄가 어떻게 무의식적 욕망을 드러내고 있는가를 고찰하는 일은 흥미로운 시도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라깡은 인간의 정신 층위에서 무의식의 존재를 처음 밝힌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도움을 받아서 무의식과 언어 구조와의 관계를 밝혔다. 프로이트는 생리학적 관점에서 무의식적 층위에 잠재된 ‘리비도’가 인간의 행동과 의식을 조정하고 지배한다고 하였다. 그에 비해서 라깡은 오히려 “언어활동은 무의식의 조건”이며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하였다. 즉 인간이 말을 사용하기 때문에 무의식적 욕망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의식은 자신의 본 생각을 부정하는 법칙을 지니고 있어서 언어 기호의 기표인 문자나 소리는 주체가 그것을 통하여 드러내려는 기의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하나의 기의는 기표들의 연쇄구조에서 겨우 나타나거나 한 개의 기표가 여러 개의 기의로 분열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기의와 분리된 채 “떠도는 기표”는 주체도 의식하지 못한 채 작용한다. 따라서 주체가 선택하여 사용한 기표가 오히려 주체의 욕망을 억압하며 그 실재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늘 새로운 기표를 필요로 하며 그것을 온전히 드러내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2. 선, 그 무의식적 욕망의 기표 5편의 연작시는 모두 ‘선’에 대한 무의식적인 자유연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를 선택하여 배열하고 있다. 배열되는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간극이 커서 읽는 이를 당혹스럽게 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 사이에 어떤 관계를 찾기 힘들다. 이미지 사이의 차이 또는 유사성으로 관계의 망을 구축하여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데 그러한 특징은 자연히 이미지가 내포한 의미나 시 텍스트 전체가 보여주고자 하는 주제의 파악을 어렵게 한다. 그러나 그것을 찾아 독해를 하는 것도 읽는 이의 역할이며 몫일 것이다.  선이  한 가닥 달아난다. 실뱀처럼,  또 한 가닥 선이  뒤좇는다, 어둠 속에서 빗살처럼 쏟아져 나오는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선이  꽃잎을  문다. 뱀처럼, 또 한 가닥의 선이 뒤좇아 문다. 어둠 속에서 불꽃처럼 피어나오는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꽃이 찢어진다 떨어진다   거미줄처럼 짜인  무변(無邊)의 망사(網紗), 찬란한 꽃 망사 위에  동그만 우주가  달걀처럼  고요히 내려앉다. - 「선에 관한 소묘.1 」 전문. (1963.7. 『시단』 2집) 이 시의 전반부에는 ‘선’, 후반부에는 ‘꽃’의 움직임과 상태를 묘사를 하며 대칭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 ‘선’은 만물의 형태를 기하학적으로 환원한 추상어로서 그것의 기초요 근원이다. 그 선은 ‘실뱀, 빗살, 뱀, 불꽃’ 등에 차례로 비유되고 변주되는데 그것들은 인간의 욕망을 상징하는 원형적 이미지들이다. 그런데 ‘욕망’은 타자의 욕망에 대하여 응답으로서 발생하며 그것이 형성되는 주체적인 공간이 환상이다. 환상에서 만들어진 그 욕망의 이미지들은 달아나고, 뒤쫓고, 쏟아져 나와 꽃을 무는 등 역동성을 갖고 있다. 그런데 주체의 욕망을 상징하는 뱀이 다가가 무는 꽃은 그것이 추구하는 ‘대상a’ 이다. 그렇게 선의 비유적 이미지들이 역동적이고 지속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성 자체인 ‘절대적 대상’에 다가가 주체의 ‘결여’를 메우고 상실한 기원으로 돌아가려는 노력이다. 그리고 ‘대상a’인 ‘꽃’은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전체적 또는 절대적 대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주체는 순간마다 그것이라 믿고 물지만 ‘부분 대상’에 불과하다. 그래서 주체의 환상 속에서 ‘또 하나의’ 꽃이 반복적으로 피었다 떨어지고 마침내 사라지고 만다. 그렇게 주체의 욕망이 결코 뛰어넘기 불가능한 절대적 대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거미줄을 짜듯 욕망의 기표를 선택하고 결합하여 끝없는 망사(網絲), 즉 관계의 망을 구축하는 일이다. 그것은 곧 시간과 공간적 좌표와 ‘달걀처럼’ 완전한 생명력을 가진 예술적 텍스트를 창조하는 작업이다.       한편 전반부에 나타난 욕망을 상징하는 선의 비유적 이미지들의 움직임과 후반부에 나타나는 꽃의 피고 지는 상태는 동시성을 갖는다. ‘대상a’인 꽃은 주체의 욕망을 발생시키는 원인이기 때문에 순차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동시적으로 관계하기 때문이다. 문 시인은 이렇게 ‘절대적 대상’을 향해 끝없이 발동되는 무의식적 욕망의 역동적인 흐름을 가시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은 곧 문 시인에게 있어서 시라는 언어적 텍스트를 창조하는 치열한 작업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영원히 날아가는 의문의  화살일까. 한 가닥의  선의 허리에 또 하나의 선이 와서 걸린다 불꽃을 품고 얽히는  난무(亂舞),  불사(不死)의 짐승일까.      과일처럼 주렁주렁 열렸던  언어는 삭아서 멀어지고, 일체가 불타버리고 남은    오직 하나 신비한 매듭. - 「선에 관한 소묘. 2」 전문. (1963.7. 『시단』 2집) 시인은 ‘선’이 ‘영원히 날아가는 화살’이라고 명명하며 의문을 갖는다. 그것은 형상이 있는 모든 만상을 추상화함으로써 일체의 개념이 제거된 기표일 뿐이다. 그 ‘허리에/ 또 하나의 선’이 걸리어 관계를 맺으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만상을 창조한다. 만상을 생성하는 기초요 근원인 ‘선’은 ‘불꽃을 품고’ 얽혀 ‘난무’가 되는데 시인은 그것을 ‘불사의 짐승’일 것이냐 묻는다. 주체의 욕망을 품은 선은 서로 관계를 맺으며 논리와 질서를 일탈하여 예술의 한 장르인 난무가 된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을 비유한 ‘불사의 짐승’은 욕망을 표현하는 예술이 일상적 논리를 초월하는 특성을 암시한다. 그것은 과일과 같은 언어에서 고정된 기의를 제거한 채 ‘텅빈 기표’만 남아 일상적 언어로부터 멀어지며 절대적 대상에 가까이 다가가는 ‘신비한 매듭’, 즉 예술적 텍스트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대상에 대한 의식적인 인식의 내용을 표현하는 게 아니라 개별적인 욕망이 이입된 언어를 독자적 어법으로 결합하여 구축한 시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은빛 실날을 뽑으며 그물을 짜는  한 올의 바람, 이윽고  환상처럼 걸리는 조롱(鳥籠), 천사의 손도 얼씬 못하는 조롱.  그 속에 지구는 무한의 구석을 울리는 쓸쓸한 새. 금빛 구름을 뿜으며 그물을 짜는  한 가닥의 지푸라기, 이윽고  허무의 가지 끝에 걸리는 초롱. 신의 눈도 얼씬 못하는  초롱. 그 속에  우주는 영겁의 모서리를 밝히는  호젓한 불꽃. - 「선에 관한 소묘. 3」 전문. (1964.7. 『시단』 5집) ‘은빛 실날’을 뽑아 그물을 짜서 끝내는 ‘조롱’을 짓는 바람은 무의식적 공간인 환상에서 솟아나는 욕망의 상징이다. 그 욕망이 구축한 무한한 우주의 상징인 ‘조롱’ 속에서 지구는 그 ‘구석 끝을 울리는 쓸쓸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시인의 우주적 환상은 새가 된 지구가 ‘한 가닥의 지푸라기’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런 지구가 지푸라기를 엮어 그물을 짜면 ‘조롱’은 불을 밝히는 ‘초롱’이 된다. 그것이 걸리는 ‘허무의 가지 끝’은 곧 언어가 지배하는 상징계인 현실의 극단 또는 그 가장자리 너머의 ‘틈’ 또는 ‘빈자리’를 일컫는다. 조롱이 변주된 ‘초롱’을 걸리게 하는 근원적 힘인 욕망은 곧 그 ‘빈자리’ 또는 ‘결여’ 자체이거나 그곳에서 솟구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초롱은’ 주체가 독자적으로 구축한 하나의 ‘우주’이기 때문에 만물을 창조한 ‘신의 눈도 얼씬 못하는’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18세기의 내장 속을  기생하는, 한 마리  세균(細菌). 그것은  벽(壁) 뒤로  폭동과 군중을 거느린 하나의 점(點).  그것은 침묵의 축축한 밑바닥을  핥는  파편. 그것은 실패한 지도의 꿈.  아니  지구를 둥근 3각형으로  변조하려다  들킨  미충(微虫).   - 「선에 관한 소묘. 4」 전문. (1964.12. 『시단』 6집) ‘선’은 ‘세균, 점, 파편, 지도의 꿈, 미충’ 등의 기표로 변주되면서 그 내포적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그 기표들을 수식하는 구절은 논리를 일탈한 진술로써 그것에 묶여 있는 일상적인 의미를 제거해 준다. 따라서 ‘선’을 통해서 시인이 드러내고자 하는 기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선이 거느리고 있는 다양한 이미지들은 물론 그것을 한정하고 수식하는 구절을 연쇄적으로 고찰해야 할 것이다. ‘선’은 제도와 규율을 중시하던 시대인 18세기엔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불온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그것은 법과 질서가 지배하는 ‘사회’와의 관계를 차단하는 ’벽 뒤’에 감금된 채 억압을 당하다 폭동을 일으키는 군중들이 품고 있는 광기로 취급되기도 했다.  또한 언어의 세계인 상징계의 빈자리에서 솟아오르기를 기다리는 ‘결여’ 자체이다. 그것은 현실의 도상인 지도는 그 실재를 보여주는 데 늘 실패할 수밖에 없는데 그 기표와 기의 또는 지시체 사이에 벌어진 틈을 메우려는 시도이다. 지구는 둥글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삼각형’으로 새롭고 낯설게 변조하여 상상의 세계를 구축하려는  시도이다. 한 가닥  선이 여윈 내 손목을 묶어 보고, 몇 번이고 내 모가지를 묶어 금빛으로  졸라 보고, 벽 못에서  풀려 내려온 노끈이  누나의 모가지를 졸라 죽였다. 그 때의 눈알 그리곤 퀴퀴한 냄새가 풍기는 창녀의 치마끈이 되었던 한 가닥  선이, 경부선(京釜線) 레일로 시장댁(市長宅) 뜨락의 살의(殺意)의 나뭇가지로  십년 전의 누나 얼굴로 돌아갈 수 없는  한 가닥  선이, 지중해 연안(沿岸)을 구석구석 더듬은,  내 누나 같은  낫세르 중령(中領)의 눈동자 속에  지중해의 윤곽으로 들어앉아 쉬고 있었다. - 「선에 관한 소묘. 5」 전문. (1965.3 『사상계』.) ‘내 손목’이나 ‘모가지’를 묶고 졸라 보는 ‘선’은 벽의 못에 걸려 있다가 풀려나 누나의 모가지를 졸라 죽이기도 했다. 그리고 언제라도 풀어질 수 있는 ‘창녀의 치마끈’이 되어 그녀를 타락하게도 했다. 그 선은 주체의 욕망을 억압하고 파괴하는 타자의 폭력적 욕망의 상징일 것이다. 또한 그것은 ‘경부선 레일’과 ‘시장댁’에 있는 ‘살의의 나뭇가지’ 그리고 ‘십년 전의 누나 얼굴’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고 한다. 시인은 그렇게 ‘선’과 관련된 나와 누나 그리고 여러 이질적인 사물들을 상상하며 연쇄적으로 제시한다. 그 선은 자신을 버리고 떠난 ‘낫세르 중령’을 찾느라 ‘지중해 연안’을 그리다 죽었을 ‘내 누나’ 같은 그의 눈동자 속에 ‘지중해의 윤곽으로 들어앉아’ 있다. 이처럼 선은 다양한 존재자들과 관련을 맺는데 그 범위가 마침내 ‘낫세르 중령의 눈동자와 지중해 연안 등 이국적 공간까지 확장된다. 그렇게 선은 논리와 예측을 벗어나며 다양한 대상들과 관련을 맺음으로써 독자에게 누나와 관련된 사건에 대한 유추와 의미의 해석을 난감하게 한다. 그 모호성과 난해성은 오히려 선의 의미를 다양하게 해석할 가능성을 열어 준다. 특히 누나가 지중해 연안을 더듬다 낫세르 중령의 눈동자 속에 지중해 연안으로 들어앉아 있다는 진술은 두 사람 사이의 비극적 관계를 짐작하게 한다.     3.맺음말 시인은 ‘선’을 다양하고 낯선 이미지에 비유하고 역동적 움직임으로 어떻게 대상에 다가가는지를 암시한다, 연쇄적으로 배열된 기표들을 종합하여 ‘선’이 내포하는 의미를 유추해 보면 그것은 언어와 질서가 지배하는 현실 또는 상징계의 빈자리인 무의식적 공간에서 그 결여를 채우기 위해 솟는 ‘욕망’이다. 그리고 문 시인은 그 ‘선’을 비유하는 기표들이 얽히어 관계를 맺으며 예술적 텍스트를 이루는 과정을 시로써 보여 준다. 특히 시인은 인간의 내면세계에 시선을 기울이고 무의식적 욕망을 보여 주기 위해 논리적 서술을 벗어난 낯선 이미지 또는 기표들을 제시하고 있다. 무의식은 문자 그대로 논리성을 바탕으로 하는 의식이 없는 카오스적인 층위이기 때문에 일상적 어법을 일탈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시의 해독을 어렵게 만드는 요소이지만 독자의 상상을 무한히 자극하고 시가 암시하는 의미의 자장을 확대하는 효과를 낳는다. 그것은 곧 문 시인의 시가 ‘비대상의 시’ 또는 ‘무의미의 시’로 불리게 하는 요인이며 시인이 창조한 독특한 미학일 것이다.   그러한 경향은 문 시인이 주장한 ‘내면세계’를 반영하려는 시에서 당연히 나타나는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이상에서 논한 시편들은 ‘비대상’이라기보다는 ‘내면세계’, 즉 무의식적 욕망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그리고 ‘무의미’라는 말은 논리적이고 외연적 의미를 도출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를 대할 경우 기표들이 어떻게 무의식적 욕망을 보여 주는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즉 그 ‘무의식적 욕망’이 곧 이 시편들이 암시하는 의미가 될 것이다. 어떠한 시든지 시인은 논리적 서술을 벗어나 낯선 어법으로 새로운 시텍스트를 구축한다면 시에는 시인의 개별적이고 특수한 욕망이 내재되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위의 시편들에서 나타나는 이질적 이미지들의 비약적 연결로 독자의 정서를 자극하며 새로운 의미를 보여 주는 미학은 시 쓰기의 모델이 될 것이다. 문 시인이 이 시편들을 통해 내면세계의 형상화를 위한 시도가 이후 문 시인의 시에서 어떻게 변화를 거치며 유지되었는가에 대한 고찰은 남은 과제이다.  
4    이미지, 상상, 비유 / 신 진(시인, 동아대 명예교수) 댓글:  조회:1386  추천:0  2019-06-17
이미지, 상상, 비유    신 진(시인, 동아대 명예교수)    1. 이미지와 상상 인간의 모든 행위는 이미지 즉, 감각적 인상을 가진다. 행동거지는 물론 말 한 마디, 기호 하나, 이미지를 갖지 않는 것이 없다. 시라고 하는 창의적 언어 텍스트는 이미지들의 향연장이라 할 수 있다. 통용되는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차이 나는 세계는 이미지를 통해서 접근의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시에 있어 이미지란 전달하고자 하는 특정의 관념과 정서를 구체화하고, 정밀하고 아름답게 표현하기 위한 인간적 속성이라 할 것이다. 넓게 보면, 고대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가 만물의 근원(아르케)으로 든 ‘물’도 이미지이고 엠페도클레스의 4원소 물, 불, 바람, 땅,그리고 동양의 오행,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 등도 원소 이미지들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원소 이미지들은 저마다의 체계, 질서, 관념을 내재하고 있다. 시 쓰기뿐 아니라 읽기 행위도 이미지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미지(image)란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 근육감각, 운동감각 등 감각으로 감지된 현상이 마음에 되살아난 것으로, 시에서는 단독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이미지들의 결합 상태 즉, 이미저리(imagery)로 체계화된다. 이미지가 심리적인 지각 작용이라면 이미저리는 이미지들이 연계되어 문맥화한 상태. 우리가 흔히 심상(心象), 이미지라는 말로 대체해 쓰는말은 대개 이를 두고 일컫는 말이다. 이는 상상(imagination)의 산물이고 상상이란 이미지들을 받아들이고 결합하여 생산하는 정신 능력이다. 논리적으로 논증해낼 수는 없는 심층과 표층 이미지들의 연계, 이미지와 이미지의 결합은 상상에 의해 이루어진다. 인간의 상상은 그렇게 무궁무진하다. 시 속의 모든 현상과 사물은 규정 가능한 ‘미규정의 체계’ 내에 있기 때문에 상상은 이 미규정적 존재들을 탐색하고 체계화 하는 능력이 된다. 도덕적 감수성과 함께 인간에게 주어진 풍요로운 감정의 폭과 풍부한 미적 감수성은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선순환으로 새로운 미적 전망을 획득하고 미적 지평을 넓혀가는 선순환을 거듭하는 미적 존재(Homo estheticus)로 격상시키는 것이다.   물방울이 생겼다 터지며 빗줄기 수대로 꽃이 핀다 호수에 내리면 봉평 메밀꽃 둠벙이면 달래꽃 그러다 골목길 접어들면 저마다 초롱꽃 세상이 온통 꽃으로 변하는 봄이면 내리는 비마저도 개화하네 동그랑 동그랑 서운암 연못에 크고 작은 포물선이 퍼지며 무엇이든 피어 꽃이 되어 보라 하네 스님 옷자락에 난을 치는 비 내 검은 우산에서도 하얗게 핀다 - 조성범, 「개화」 전문   ‘봄비의 개화’가 시의 전경(前景)이자, 주도 이미지라 할 수 있다. 비는 비에서 나아가 수대로 꽃이 되어 피어나는데, 호수에 닿으면 봉평 메밀꽃이 되고 물 둠벙에서는 달래꽃, 골목길 처마에서는 초롱꽃, 스님 옷자락에서는 난을 치고 검은 우산 위에서 하얗게 핀다. 각별한 이미지의 세계요 각별한 순간의 상상력이다. 이미지들로 하여 시적 주체는 모든 빗줄기, 낱낱의 빗방울에 생명을 불어넣고, 그 새로운 존재들에 명명을 한다. 이렇게 문맥화 하는 상상의 힘, 그 내면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은  즉, 봄의 개화와 봄비와 서운암으로 표상되는, 만상에 대한 생명의식이요 자비심이요 불교적 상상력이라 할 수 있다. 이미지 자체를 추적하는 심미의 시도 있다.   버들강아지에도 강아지풀에도 강아지는 없다. 어차피 강아지도 강아지는 아니다. 한없이 떠도는 시니피앙, 외진 대야미역으로 가는 굽은 길 두 길 높이의 시멘트 담장 어깨에서 이삭을 여럿 단 강아지풀 몇 포기가 실바람에 꼬리를 흔들며 가을볕에 이삭을 말리고 있다. 흙손으로 꼼꼼히 바름질해 놓은 시멘트 담장의 저 높은 데를 어떻게 뚫고 솟아올랐을까. 엉덩이 깔고 담장 밑을 샅샅이 뽑아대는 ‘희망 근로자’들의 매서운 손길을 피해 하늘 곁으로 올라가 싹을 틔운 강아지풀, 시(詩)의 속눈썹이 길어지는 볕 좋은 가을날 강아지는 어디서 꿈꾸는가. - 조명제, 「하늘 강아지 풀」 전문   강아지를 감각적으로 전경화 하고 있긴 하나 정확한 문맥파악은 힘든 시이다. 제 4행의 란 말을 참조하면 강아지풀이라는 기의(시니피에, signifié)란 필연도 고정 관념도 아닌, 떠돌기만 할 뿐인 것이다. 강아지풀에 강아지가 없는 거와 같다. 시의 긴 속눈썹이란 까끄라기가 긴 강아지풀처럼 감각만 남는 시니피앙, 내용은 떠돌기만 할 뿐인 미학적 차원을 겨냥한 시라 할 수 있다. 시가 수록된 특정 연도의 시선집 해설에 의하면 ‘강아지’의 일상적 의미를 제거하고 강아지풀을 희망 근로자에 비유, 새 의미를 부여한다고 하고 있다. 근로자들의 고통과 꿈이 강아지풀에 이입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일반의 개념적 의미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지 않을까? 이나, 의 동기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로 일하는 ‘희망 근로자’들은 자신들의 일을 야무지게 해냈을 뿐인, 담장 높은 데 자리 잡고 있는 강아지풀의 후경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 시는 랑그적 의미를 거부하고 가을날 강아지풀의 이미지와 강아지, 외진 대야미역 가는 굽은 길, 높은 담장과 시의 속눈썹 등의 이미지를 연동하여, 무의식적 고독과 추억과 다정(多情)의 이미지를 감각적으로 개진하고 있다 할 것이다. 희망근로자에 대한 독자 사회의 관심을 고려한다면 시선집의 해설도 가능하다 할 수는 있겠지만. 이미지는 참신하면서도 나름의 질서에 충실할 때 핵심 계기를 정확히 구현할 수 있고, 걸맞는 독자의 반응을 얻게도 된다. 독자는 새로운 시공, 새로운 의미를 체험할 수 있고, 또 다른 미지(未知)의 세계를 연상적으로 꿈꿀 수 있다. 산문적인 현실 분석 언어로는 다다를 수 없는 차이 나는 세계를 체험하게 된다. 우리는 이미지를 통해 새로운 체험을 수용하고 재구성하며 살아간다. 이미지를 통해서 독자는 자신의 체험과 연계하여 반응하게 되고,이러한 반응들은 시의 이미지 체계를 부단하게 새롭게 요구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상상이란 지금 여기와는 다른 시공을 예측하는 인간의 본성적 에너지이며, 인류문명의 원천적인 동력이라 할 수 있다. 시 쓰기는 왕성한 창조적 상상 발산의 행위이다. 언어를 매개로 하다 보니 실제 언행보다 미적으로 사회적으로 더 적극적일 수 있고 리듬과 이미지라는 물리적 자극을 통해 선동의 효과를 높일 수도 있다. 상상에도 여러 형태가 있다. 선행 경험이 재현되는 데 불과한 심리 활동을 흔히 기억이라고 하거니와, 이 기억을 마음에 떠올리는 경우, ‘재생적 상상’이라고 한다. 하지만 상상은 이미 경험한 것들을 재구성하여 새로운 상황에 부합하는 맥락으로 재구성된다. 이를 ‘연합적 상상’이라 한다. 특정의 대상, 관념, 혹은 정서에 이미지들을 연계시켜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다. 연합적 상상에 다른 선험적 경험들이 덧붙여져, 실재하지 않는 새로운 경지에 이른다면 이때는 ‘창조적 상상’, 또는 ‘생산적 상상’이라는 말을 쓸 수 있다. 하지만 ‘창조’라거나, ‘생산’의 기준이 시시때때 다른 것이고 보면 시는 일단 이미지의 연합에 의한 상상행위라 보아 무방하다 할 것이다. 경험에 의하지 않는 이미지, 예컨대 ‘하늘의 사자(使者)로서의 천마(天馬)’나 ‘코끼리를 이고 가는 나비’ 따위의 이미지들, 이런 가공의 이미지를 이끌어내는 능력을 따로 공상, 환상이라 부르기도 한다. 공상(空想)은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로서는 현실성이 떨어지는 경우이고 환상(幻想)은 일어날 수도 없고 일어난 적도 없는비현실적 이미지들이다. 그러나 이들 역시 수많은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차이 나는 시공으로 가고자 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상상행위의 하나라 할 것이다.   저녁 시간은 넉넉한 거니? 끊임없이 붉은 원숭이처럼 다가오는 사과의 사과. 너에게 말을 거는 존재는 이불을 뒤집어쓰면 보이는 거인의 홍채. 그 속에 빛나는 설국. 고요 속에 빛나는 태양. 누군가의 손이 이불을 벗기고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고 베이비 베이비 나의 베이비 이불 밑은 뜨거웠어. 손길이 닿을 때마다 움츠려드는 꽃잎들. 저녁 식탁의 불빛에 은은히 비치는 백자꽃병은 깨어지기 쉬워. 거인의 입안에 들어간 엄마의 반지처럼 굴러다니는 포도알 한 방울의 눈물로 가득 채워지는 꽃병 속의 물. 옴비사르카다비카 옴비사르카다비카 비의 겨드랑이여! 주문을 외는 마녀는 어김없이 죽음의 비를 부르고 녹물은 흘러내려 녹물은 흘러내려 분홍빛 패랭이 접시의 찢어진 가로의 시간을 항문부터 물들인다. 저 년 시간은 넉넉한 거니? - 송진, 「분홍 패랭이꽃 접시에 담긴 호박고구마 3분의 2의 알몸, 반쯤 짓이겨진 딸기 그리고 스물 네 개의 포도알」 전문   제목부터 남다르다. 「분홍 패랭이꽃 접시에 담긴 호박고구마 3분의 2의 알몸, 반쯤 짓이겨진 딸기 그리고 스물 네 개의 포도알」이라,마치 말 안 되는 이미지들의 유희 같다. 그래도 뭔가 맥락이 집힐 듯한 걸 보면 극히 비밀스런 체험의 전의식적 이미지들이 환상처럼 나열된 것이 아닌가 싶다. 수록된 시집의 해설에 의하면, 이 시에서는 스토리텔링보다 언어적 수사가 빛난다고 하고  같은 이미지들이 성폭행사건이라는 현실의미를 환상으로 인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이미지로써 무의식의 어두운 심연과 의식의 태양 지평 사이에 통로를 뚫으려고 노력한 시라? 그렇게도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시의 중심 계기(Leitmotif)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첫부분 와 화자가 주목하는 ‘너’라는 2인칭,그리고 끝부분의 의 언어 구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한다. 사과의 사과, 이불을 뒤집어 쓸 때만 보이는 홍채, 그외 퇴폐적 관능의 이미지들에서 불륜의 성애(性愛)에 대한 화자의 관음적(觀淫的) 폭로라는 독특한 맥락을 볼 수 있지 않은가 한다. 그러니까 짐승 같은 육교(肉交)에 빠진 ‘저 년’과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남성에 대한 관망적 폭로가 상상의 동인(動因)이 되고 있는 셈이다. 특정의 경험이 의식 혹은 의식·무의식 속에서 변형되거나 현실의 특정 계기에 의해 재구성될 때, 시 쓰기는 시작된다. 용광로 속에서 헤엄치는 고래를 상상할 수도 있고, 사다리를 놓아 구름 산의 팝콘을 먹는 수도사를 그릴 수도 있다. 말이 안 되더라도 시인은 상상을 따르며 따를 뿐 아니라 가공하기도 한다. 이미지를 이리저리 흩어놓기도 하고 이것저것 중첩시키기도 한다. 현재의 일반 의미나 문법도 고집할 것이 못된다. 새로운 상상의 결과인 시는 새로운 의미, 새로운 문법의 새로운 질서 속에 탄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와중에도 일관되게 겨누는 초점이 없어서는 안 된다.   한낮에도 뻘 속 같은 지하방 창문 사이로 간신히 들어오던 햇빛도 꺾여 게 구멍만 한 빛을 방바닥에 떨어뜨린다 그 따스함 속으로 몸을 구겨 넣는데 빛은 내 몸을 밀어내기만 하는데   - 목포 뻘 낙지가 왔어요 펄펄 살아 있는 세발낙지요-   조용한 골목 안으로 낙지 장수 아저씨 세발낙지 풀어 놓는다 귀가 근질근질하다 빨판의 힘만으로 벽을 당기고, 밀며 경계를 넘어오는 낙지들 몸속 구석구석 꼬물대며 기어 다닌다 캄캄한 마음의 뿌리 헤집으며 줏대 없는 내 뼈들을 먹어치운다 살아남기 위해 천지사방으로 휘어질 수 있는 다리를 얻기 위해 그들은 뼈를 버리고 먹물을 얻었다 척척 들러붙어 느리게 움직이는 빨판 속으로 게 구멍 같던 햇빛마저 빨려들어 가고 바닥으로 가라앉은 나를 지우며 창을 넘어간다 밖은 그들이 게워놓은 먹물로 벌써 어두웠다 - 채수옥, 「낙지」 전문   ‘지하방, 게 구멍만 한 빛, 몸을 구겨넣다, 밀어내기만 하다, 냉기 피하기, 꼬물대는 낙지, 줏대 없는 삶’ 등등 어두운 이미지들이 연합하는 참담함, 그리고 낙지의 생명력, 빨판의 힘, 먹어치우는 힘, 거역할 수 없는 먹물 등의 이미지들이 참담한 비극을 먹물 같은 구제불능의 상태로 몰아넣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 모순의 언어들 이면의 맥락은 정연하다. 비극에 비극이 덧쌓이는 먹물 같은 밤 막다른 골목의 이미지는 ‘바닥으로 가라앉는 나를 지우며’ 일어나는, 의외의 의지마저 읽게 한다. 이런 육화된 이미지는 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아무 때나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의식과 무의식, 자아와 타자 사이에 쌓이고 쌓인 이미지들이 시인의 열망과 열린 의식에 의해 두엄과도 같이 쌓이고 삭힌 상상력, 이미지는 잘 삭은 두엄에서 나올 수도 있고, 덜 삭아 거북한 냄새가 나는 퇴비에서 나올 수도 있다. 두엄을 토양으로 채소를 키우는 농부처럼 잘 삭은 잘 삭힌 상상력을 가진 시인은 실한 과일의 결실을 맺게 된다 할 것이다. 덧붙여, 상상이란 삶으로부터 일어나며 상상은 다시 삶으로 돌아가 받아들여진다. 그것은 시인과 독자, 우리네 삶이 언제나 현재보다는 높은 단계에 이르고자 하는, 인간의 영원한 또 하나의 실재를 향한 과정 속에 있기 때문이다. 시의 이미지란 그것이 시 속에서 어떻게 이미지로서 기능하느냐에 따라 방향과 수준이 가늠된다. 시에서의 상상력이란 이미지와 특정 경험의 남다른 조화에 다름 아니라 하겠다.   2. 이미지와 비유의 종류 이미지의 종류도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나누어진다. 감각의 종류에 따라,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 이미지로 나누는가 하면, 언어적 성질에 따라 고착 이미지와 자유 이미지, 묘사적 이미지와 비유적 이미지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P. 휘일라이트는 신호나 기호와 같이, 누구에게나 동일한 지시성을 갖는 언어를 고정상징이라 하고, 그 의미를 완전하게 규정할 수는 없고 의미의 초점과 문맥에 탄력성이 있는, 변이를 허용하는 언어는 긴장상징이라 구별했는데, 그렇게 보면 ‘고정 이미지’, ‘긴장 이미지’란 말도 성립된다. 개성이 강한 현대시인이라면 응당 긴장 이미지를 즐겨 쓸 것이다. 하지만, 대체로는 상상력의 유형에 따라 지각적 이미지, 비유적 이미지, 상징적 이미지 등 셋으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다. 지각적 이미지란 감각기관을 통해서 성립되는 이미지. 그것은 명암, 색채, 동작 등으로 나누어지고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열도심상, 냉각심상, 감촉심상) 그리고 기관감각, 근육감각 이미지로 세분되기도 한다. 기관 감각 이미지란 고동과 맥박, 호흡, 소화 따위의 감각을, 근육감각 이미지란 근육의 긴장과 이완 등에 의한 감각 이미지이다. 비유적 이미지는 유추의 원리에 의해 성립된다. 두 가지의 다른 사물이나 사실의 비교를 통한 유추이다. 리차즈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 둘 중 하나를 주지(主旨, tenor) 또는 원관념, 다른 하나를 매재(媒材, vehicle) 혹은 보조관념이라고 한다. 비유란 주지와 매재, 이 둘의 상호작용에 의해 성립되는 이미지들인 셈이다. 실제로 이미지란 모두가 비유적 기능을 한다. 별 의미 없는 듯한 지각적 이미지도 감각을 앞세워 어떤 특정의 의미나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고 시에서의 특정 분위기란 시적 의미에 다름 아닌 것이어서 모든 이미지는 따로 주지를 갖는 비유라 할 밖에 없는 것이다. 상징적 이미지란 특정 시인의 작품에서, 혹은 문학 전통이나 시대적 경향 속에서 주도적으로 나타나거나 반복해서 나타나는, 함축적 의미를 갖는 이미지 또는 양식(pattern)을 말한다. 이 역시 주지는 잠재되고 매재만 표면에 나서는 비유의 원리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비유에 의하지 않는 이미지가 시 속에 쓰일 수는 없는 셈이다. 시에 쓰인 이미지는 모두가 주지(主旨)를 갖는 비유의 기능을 하게 돼있는 것이다. 일견 별 의미가 없어 보이는 지각적 이미지 위주의 시 한 편을 들어보자.   끝물고추 같은 고추잠자리 한 마리 어쩌다 거미줄에 걸려 바둥거린다 아하, 허공에도 그물이 있구나 하느님 부처님 한꺼번에 불러보지만 속수무책, 맨손이었을 것이다. 거미가 몹시 배가 고픈 날에는 새벽달이 먼저 발자국소리를 죽인다 아침 이슬마저 조심조심 풀잎에 앉는다 어쩌다 잘못 앉은 이슬 몇 방울 눈 밝은 산새가 반짝 물고 날아간다 - 한경동, 「풍경·3」 전문   짧은 시이지만 시각, 운동감각, 청각, 기관감각 등 지각 이미지로 가득하다. 이들 감각적 이미지는 미적 표현에 그치는 시일까? 그렇지는 않다. 거미줄로 상징되는 예측불가의 삶의 함정들, 새벽달이며 이슬이 며 조심스레 걷고 앉는 불안과 공포, 산새의 먹이활동으로 상징되는 약육강식의 먹이사슬 등 이미지들 모두가 주지를 머금은 비유라 보아야 하는 것이다. 모든 이미지는 이렇게 특정 의미를 거느리거나 특정 문맥을 형성에 기여한다. 특정 맥락은 시의 생명이요, 이미지는 그 맥락을 이루는 필수요소이다. 이미지란 차이 나는 시공을 구체화 하는 물질이며 독자의 감각에 전해지는 1차적 지각 내용이 된다. 불연속적이고 의미 파괴적인 이미지를 내세우는 시도 적지 않으나 그 역시 필연에 대한 우연, 통합에 대한 해체의 의미를 구축하고자 한다. 모든 이미지는 비유적인 언어라는 말로도 대체할 수 있는 말인 것이다. 이미지가 신선감을 주는 이유는 서정의 주관성, 특수성에 있다. 시인의 특수한 주관이 배어 있으므로 새롭고 특수한 것이다. 비유는 특수한 사물, 정황, 사실 등을 표준적 격식에서 벗어나 보다 구체적이고 일반적인 사물, 정황, 사상, 사실 등에 견주어 특수한 의미를 나타낸다. 프라이(N. Frye)가 비유의 동기를 “인간의 마음과 외부 세계를 결합하고 마침내는 동일화하고 싶어 하는 욕구에서 비롯되었다”고 밝힌 데에서도 알 수 있듯 비유는 전달의 불완전성을 해소하고 특수 정황을 보다 적확하게 일반화하고자 하는 언어전략이다. 독자는 개개의 이미지와 상호 연계된 이미지 군(群)을 조명함으로써 그 맥락과 미를 읽게 된다. 두루 알다시피 비유에는 특정 의미 즉, 주지(主旨, tenor)와 그를 바꾸어 표현하는 매재(媒材, vehicle)가 있어야 한다. 관념(주지)을 직접 진술하지 않고 다른 이미지로 대체하는 것은 구체적인 정황, 의미(주지)의 특수성을 적확히 드러내고자 하는 동시에 예술적 효과를 거두는 언어적 노력이라 할 수 있다. 가령, 일반적인 산문에서는 ‘어두운 밤에 홀로 슬퍼했다’는 정도의 진술에 그칠 문장도 여러 특수한 정황들을 가리키는 비유적으로 표현될수 있다.   “밤의 장막이 목을 졸랐다.” “어둠의 어깨가 무너졌다.” “침몰하는 어둠의 시위(示威)” “얼음장 같은 밤이 가슴을 찌르고 갔다.” “밤의 어둠이 모래벽처럼 흘러내려 내 숨길을 막고 있다.” “아니, 어둠이 너무 눈부셔서 나는 웃고 있었어.” 등등 …   수많은 비유 언어가 동원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비유의 기능이자 언어의 새로운 용도이다. 비유도 매우 다양하게 분류된다. M. H. 에이브럼즈는 비유를 크게 두 종류로 나눈다. 단어의 축자적 (逐字的) 의미에 뚜렷한 의미의 변화를 가져오는 ‘의미의 비유’와 단어를 잘 배열함으로써 특별한 효과를 가져오는 ‘말의 비유’가 그것이다. 의미의 비유로는 직유·은유·상징·환유·제유·활유·풍유·인유·성유 등을 들 수 있고, 말의 비유로는 도치·과장·대조·열거·반복·영탄·반어·역설·모순 어법 등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의미의 비유이든 말의 비유이든 모든 수사적 장치는 특정의 의미를 대신하거나 암시하거나 최소한 왜곡하거나 특수화 하는 비유의 기능을 한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있다. 쉬클로프스키(Victor Sklovskij)는 비유의 기능을 설명하면서 ‘산문적 비유’와 ‘시적 비유’ 둘로 나누었다. 정보 전달이 위주가 되는 산문적 비유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이해하기 쉬운 것으로 바꾸는 반면에, 시적 비유는 독자의 습관적 반응을 차단하고 낯설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시적 비유는 낯설게 하기를 통해 독자의 원활한 독서를 고의적으로 방해하기 위한 장치라 본 것이다. 여러 유형론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는 보통 유사성에 입각한 ‘은유’ (의인, 직유 등 포함)와, 인접성에 입각한 ‘환유’(제유 포함), 둘로 나누는 것이 통설이 되고 있다. 야콥슨이 비유를 이루는 주지와 매재의 관계를 근본적인 언어활동과 관련하여 관찰한 결과 대표적 유형으로 은유와 환유 둘을 들고 이 둘은 모든 언어 생성의 두 축이기도 하다고 논한 것이 대표적이다. 유사성을 기준으로 주지와 매재가 선택되는 은유와, 인접성을 기준으로 주지와 매재가 결합되는 환유가 언어의 시적 기능의 대표적인 양식이자 비유의 두 축(軸)이라 파악한 것이다. 은유는 통상적인 차원에서는 연관성이 없던 언어들에서 기능적 상황적으로 어떤 유사성을 연상하여 선택하는 활동이라면, 환유는 공간적으로, 논리적으로 인접하는 매재에 주지를 대입한다.   부슬비가 내렸다 실직한 경자 아버지를 불러내 한 잔 해야겠다 담배 한 갑도 사서 같이 피우며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IMF 주범들을 입에 넣지 않겠다 희미한 불빛 아래 철원 분지 떠도는 염소 이야기나 하며 - 안수환, 「실직」 전문   IMF의 주범들을 입에 담고 있느니 실직한 경자 아버지(IMF 당시 흔한 실직 근로자를 대신하는 예시적 환유)나 불러내 술이나 마셔대는 것이 속 편한 일이다. 시비를 따져보아야 자본과 권력이 판을 치는 세상, 위로를 줄 수도 위로를 받을 수도 없다. 철원 분지 풀밭을 떠도는 염소(은유) 이야기나 하면서 자연 또는 자유와 평화의 시공을 꿈꾸기나 해보자고 한다. 실직한 경자 아버지, 한 잔, 담배 한 갑, IMF 등의 매재들이 실직사태와 술 마시기, 담배, 경제 위기 등의 주지에 논리적으로 인접하는 환유라 한다면, 부슬비, 철원 분지, 염소 등 매재들은 특정의 고즈넉한 분위기와 평화, 자연 등의 주지를 연상케 하는 은유라 할 것이다. 은유란 한 사물을 다른 사물의 관점에서 말하고 환유는 한 개체를 그 개체와 관련 있는 다른 개체로 말하는 방법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 시쓰기나 읽기에 있어서는 다른 사물을 연상하여 표현하는 것이나 다른 사물과 결합시켜 지칭하는 것이나 크게 다르지는 않다. 모두가 얼마간 연상적이며 얼마간 인접한 관계에 있는 것이냐다. 위 시의 대표적인 환유인 ‘술 한 잔’만 해도, 반드시 ‘술 마시기’만을 뜻하는 환유(제유)가 아니라, ‘카타르시스’나 ‘정 나누기’를 연상케 하는 은유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비유를 대표하는 비유로는 은유와 환유 둘을 드는 것이 일반화 되긴 했지만, 모든 비유를 ‘은유’의 원리에 포함하는 경우도 있고, 환유나 제유 중 하나를 내세우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이들은 고대 수사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특정 개념을 그에 가까운 매재로 전이하여 언어적인 동일화에 이르고 그로써 청중과의 동일화를 이루고자 하는 즉, 동일성의 원리에 입각한 유추임이 분명하다할 것이다.
3    새로운 시론 : 예술 융복합을 활용한 시 창작 사례 / 김철교 댓글:  조회:1280  추천:0  2019-06-17
예술 융·복합을 활용한 시 창작 사례 김철교 1. 열린 예술 아서 단토가 『예술의 종말 이후』(이성훈·김광우 역, 미술문화, 2012, 13쪽)에서 “우리는 예술이라고 하는 핵심적인 개념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거의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다는 것과, 한때 예술에게 본질적으로 보였던 속성들이 아예 없더라도 어떤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미술의 개념은 바자리(Giorgio Vasari, 1511-1574)가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을 쓴 르네상스 때에 비로소 일반적으로 인식되어 미술사가 시작된 것으로 보며, 바자리 이후 1964년까지의 서양미술사를 하나의 르네상스 패러다임에 비유했는데, 이 전형이 1964년 워홀의 가 등장하면서 종료되었다는 것이다. 1965년부터를 ‘서양미술사 이후’의 시기로 인식하면서, 예술가는 이제 모든 형식과 도그마로부터 자유로워졌고 예술가의 유일한 역할은 ‘예술 자체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화장실의 낙서도 시집(詩集)으로 들어오면 시가 될 수 있고, 거리에 버려진 찌그러진 깡통도 전시장에 전시되면 예술이 될 수 있다. 물론 거기에는 예술의 본질과 교신하는 예술 철학이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 예술은 열려 있어야 한다. 작품을 통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 수만큼 다양한 질문과 해답을 읽을 수 있다. 생산자인 예술가의 의도와 소비자인 수용자(관객/독자)의 이해가 일치하지 않는 것이 예술이다. 수용자 사이에도 일치할 수가 없다. 무의식의 역동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다양한 질문과 다양한 해답이 가능하기 때문에 예술의 존재가 더 우리 삶에 귀중한지도 모른다. 삶의 본질과 행복에 대한 물음은 끊임없이 있어왔다. 그 해답은 모두가 다르기 때문에 ‘정답’은 없다. 모든 물음과 모든 해답이 다 옳다고도 할 수 있고 그르다고도 할 수 있다. 오직 사람마다 각기 다르다는 것을 수긍할 수밖에 없다.(김철교, 『예술 융복합시대의 시문학』, 시와시학, 2018, 7쪽) 최근 예술은 미술이라는 장르를 앞세워, 활발한 융·복합을 통해 각자의 품을 넓히면서 영역을 계속 확장하여 왔다. 파리의 퐁피두 현대미술관, 니스의 근현대미술관은 물론, 우리나라 현대미술 전시장에 가면 회화, 조각, 사진, 음악, 영상, 스토리텔링 등을 비롯하여, 오만가지 혐오스런 오브제까지 어울려 다양한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필자는, 문학은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이웃 장르를 넘겨다보며, 미술과 음악을 문자로 은유해 내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에서, 시문학의 좌표를 그려보고자 『예술 융·복합시대의 시문학』을 2018년 12월에 출간한 바 있다. 이에 앞서, 관련된 실험시들을 2018년 8월에 시집 『무제2018』에 묶었다. 본고에서는 이 시집의 제5부 「이미지의 반란」에 수록된 열여섯 편을 해설하면서, 각종 미술 및 음악 이론과 기법을 어떻게 시 창작에 활용할 수 있는 가를 탐구하고자 한다. 이들 시는 마치 추상화 그림 앞에 서 있을 때처럼 나름대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도록 의도된 시이기 때문에, 그 의미를 파악하려고 노력한다면 쉽게 다가 설 수 없다. 마치 이우환(1936~)의 점·선·면 관련 작품들 앞에서 현상 저 너머의 세계를 유추한다든지, 호완 미로(1893~1983)의 동화 같은 추상화를 보면서 즐거운 상상에 빠진다든지, 마크 로스코(1903~1970)의 추상화 앞에서 가부좌하고 명상에 빠진다든지 하는 것처럼, 독자들이 어떤 분명한 메시지나 의도를 캐려 하지 말고 오직 무한한 상상의 날개를 펼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김춘수의 무의미시가 오직 리듬만을 추구했다면, 『무제2018』 제5부 「이미지의 반란」에 실린 시들은 음악과 미술이 한판 거나하게 어우러졌으면 하는 바램을 담았다. 앞으로 이어질 몇 편의 글에서는, 단지 비평가의 견지에서 시인(생산자)의 이미지를 소개함으로써, 독자들의 수용(소비자)을 돕기 위한 것이다. 예술 비평가의 역할은 흔히 예술가의 이미지를 번역 혹은 해설하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번역의 우열, 번역의 정오(正誤)는 없다. 단지 비평가의 눈으로 ‘이렇게 볼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독자는 비평가에게 동의할 필요도 없다. 다만, ‘저렇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구나’하는 정도면 되는 것이다. 원본도 번역본도 ‘실재’는 아니다. 원본도 실재가 아니다? 그렇다. 시인이 쓴 시(원본)도 결국 현상 혹은 인식 저 너머에 있는 그 무엇에 대한 시인의 손짓(열망)일 뿐이니까. 시인의 작품도, 그에 대한 평설도 나름대로 충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좋은 시뮬라크르들이다. 일반적으로 시뮬라크르는 원본의 성격을 부여받지 못한 복사물을 지칭하지만, 필자는 시뮬라크르에 원본의 그림자는 남아 있다고 본다(김철교,『예술 융·복합시대의 시문학』, 21-24쪽) 2. 읽기 「그림으로 쓴 시」는 호안 미로가 그린 「시(Poesia)」라는 그림을 보고 쓴 시다. 호안 미로는 나름대로 떠오르는 詩의 이미지를 그림으로 그렸다. 시인은 이 그림을 보고 문자로 시를 그렸다. 우리는 추상화나 절대음악을 들을 때에 나름대로 이미지를 떠올리며 감상을 한다. 비록 문자로 된 메시지가 없어도 나름대로 이야기를 만들어 수용을 하는 것이다. 추상예술은 예술가에게나 수용자(관객/독자)에게 무한한 자유를 준다. 호안 미로는 물론이요, 시인도, 호안 미로의 그림을 본 관람객도, 시인의 시를 읽는 독자도, 모두 머리에 떠올리는 이미지가 각기 다를 것이다. 호동그랗게 검은 눈 검은 눈 소녀 잠 기지개 아주 큰 기지개 물구나무 하늘 바다 손자국 손금 영혼길 길 큰길 작은길 크레센도 쿵쾅쿵쾅쿵 돛 닻 갈매기 부두 어시장 선혈 해변 장미 말벌  쾅 데크레센도 라르고 묘지 흰나비 흰국화 비너스의 하얀 젓가슴 피아니시모 피아니시모 피아니시모   - 「그림으로 쓴 시-호안 미로 」 호안 미로는 바르셀로나에서 출생하여, 1907년 바르셀로나의 미술학교에 입학하고, 1912년 이후 갈리 아카데미에서 공부하였다. 1925년에 초현실주의 제1회전에 출품하였는데, “그의 초현실주의는 아주 밝은 시정과 단순화되고 순수화된 형태와 색채의 조화에 의한 율동적인 구성에 의하여, 조형성(造形性)의 긴밀감을 준다. 별·여자·새 등을 거의 상형문자와 같이 환상화(幻想化)하여, 그것들을 조화시킨 화면은 건강하고 명쾌한 유머마저 풍긴다.”는 평을 받고 있다. 호안 미로의 그림 「시(Poesia)」를 보고 있노라면, 시인에게는 해변가에서 커다란 검은 눈의 소녀가 큰 기지개를 켜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녀는 이내 물구나무를 선다. 하늘과 바다가 뒤집혀 보인다. 땅 바닥에는 손자국이 선명하다. 손금에는 사람의 굴곡진 한평생 가는 길이 나타나 있다. 젊은 시절에는 겁 없이 세상에 도전을 하게 된다. 세상을 거꾸로 보고 싶은 것이다. 음악이 점점 높아지는 가운데 소녀는 물구나무를 선 채, 부두와 배와 갈매기를 뒤로 하고 어시장으로 들어간다. 시장에는 싱싱한 고기들이 팔딱팔딱 선혈을 흘리고 있다. 어시장만큼 생과 사가 분주한 곳이 어데 있으랴. 사람들은 세상에 대한 거친 도전에서 때때로 피도 흘리게 된다. 다시 밖으로 나오면 가까이 해변에 장미꽃밭이 보이고, 아름다운 말벌이 꽃에 앉았다 날았다 하며 점점 커지는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쾅하면서 크게 한번 울리고 음악이 점차 잦아들자 소녀는 물구나무서기에서 벌떡 일어난다. 저 멀리 해변가의 묘지로 눈을 돌리자 하얀 국화에 흰나비가 날갯짓을 하고 있다. 소녀는 흐트러진 옷매무새 사이로 하얀 젖가슴을 드러내고 이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가 음악과 함께 점점 사라진다. 한 소녀가 이 세상으로 건너와 격렬하게 살다가 퇴장해야 하는, 인간 삶의 한 노정이 파노라마처럼 상상 속에서 펼쳐지고 있다. 특히 명사만을 사용함으로써 속도감을 높이려는 장치를 하였다. 「그림으로 쓴 시」는 데페이즈망 기법과 표현주의 기법을 사용하되, 특히 색채 이미지와 음악 기호를 차용하였다. 호안 미로의 「시」라는 그림을 보고 있으면 색깔과 음향의 이미지들이 생생하게 떠오르는데, 그때 마음속에 격하게 일어났다가 스러지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쓴 시가 「그림으로 쓴 시」이다. 전혀 엉뚱한 이미지들이지만 합쳐지면 통일적인 이미지가 형성되도록 유념하였다. 데페이즈망기법이란 사물을 상식적인 관계를 벗어나 엉뚱한 관계에 두는 것을 말한다. 초현실주의자의 선구자인 시인 로트레아몽(Comte de Lautreamont, 1846-70)의 ‘재봉틀과 박쥐 우산이 해부대 위에서 뜻하지 않게 만나듯이 아름다운’이라는 표현에서 그 전형을 볼 수 있다(『세계미술용어사전』, 월간미술, 2010). 표현주의 기법은 예술의 진정한 목적이 감정과 감각의 직접적인 표현에 있음을 나타낸다. 구성(구도)의 균형과 아름다움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은, 감정을 더욱 강력하게 전달하기 위해 무시 혹은 왜곡된다. 여기에서 소녀, 배, 어시장, 선혈, 해변, 말벌, 장미, 국화, 젖가슴 등은 엉뚱한 이미지들의 집합이지만 소녀의 격정적인 삶이라는 통일적 이미지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강약, 고저 등 음악에 사용되는 용어들을 활용함으로써 음악적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미술적 이미지들과 함께 조화를 이루며 한편의 영상을 마음속에 떠올리게 인도한다.
2    [2017년 6월호] 새로운 시론: 예술의 융·복합과 고정된 틀로부터의 자유 / 김철교 댓글:  조회:1214  추천:0  2019-06-17
예술의 융·복합과 고정된 틀로부터의 자유 - 시와 미술을 중심으로  김철교 [[이 글은 한국연구재단 등재지인 『한국시학연구』 49호(2017. 2. 28)에 실린 논문으로, 이미 에서 요약 발표한 바 있다.]] I. 들어가는 말 현대예술은, 특히 세계 2차 대전 이후 과학기술이 깊숙이 스며들어, 앞으로의 방향을 종잡을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시간의 테스트’를 거쳐 어떤 것은 클래식으로 자리를 잡고, 어떤 것은 한때의 유행으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 키이란(Matthew Kieran)은 『예술과 그 가치(Revealing Art)』에서 좋은 예술작품이란, 삶에 대한 통찰력과 이해, 세계를 보는 방식을 풍부하게 해주는, 다소 불편하고 낯설지만 마음에 와 맺히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반면 나쁜 작품은 경험의 확장이라는 문제의식이 없고, 단선적인 주장을 반복하는 작품들이다. 모든 예술이 21세기에 들어와 더욱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은 바로 ‘다소 불편하고 낯설지만 마음에 와 맺히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아이디어를 짜 내는 예술가들의 다양한 시도 때문이기도 하다. 끝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예술에만 그치는 현상은 아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보다 낳은 편리성의 발견, 새로운 아름다움의 추구, 다양한 사상의 부침 등 전반적인 가치관의 변화 양상이 바로 역사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럽 각지에서 혁신적인 미술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르네상스 이래 전개되어 온 전통적인 미(美)의 개념을 초월하여, 사실적이고 표피적인 것보다는 본질적인 것을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 현대 예술과 예술론의 변화에 가장 중요한 특성 중의 하나는 무엇보다 예술 장르들 간의 경계 붕괴 내지는 융·복합에 있다. 특히 21세기에 들어와서는 모든 예술에 과학기술이 접목되면서 경계허물기 혹은 상호협력과 보완이 가속화되고 있다.  화가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는 베토벤을 위대한 예술가의 표본으로 보았으며,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에서 영감을 얻어 「베토벤 프리즈(Beethoven Frieze」를 그렸다. 베토벤은 실러(Friedrich von Schiller, 1759-1805)의 시 「환희의 송가(An die Freude, 1786)」에서 영감을 얻어 「합창 교향곡」을 작곡한 것이다. 오스트리아 미술관의 대형 벽화 「베토벤 프리즈」는 시와 음악, 조형을 통합한 총체적인 예술을 창조하고자 했던 클림트의 열망을 구현한 작품이다. 문학과 음악, 특히 시와 음악은 시 자체가 운율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어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엘리엇은 음악연구가 시에 기여한다고 주장하였는데 그의 「네 개의 사중주」는 바로 베토벤의 「사중주」라는 표제가 붙은 음악과 연결되어 있다. 소설에 있어서도 헉슬리는 「연애대위법」에서 대위법이라는 음악적 기법을 사용하였다. 대위법이란 음악에서 2개 이상의 선율들을 결합하는 기법을 말하듯이, 문학에서는 서로 다른 감정이나 주제를 병치시키는 기법이다. “모든 예술이 서로 가까워지도록 한 장소에 모으고, 한 예술에서 다른 예술로 옮겨가는 변화를 추구해야만 한다. 잭슨 폴록과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에게서 마침내 주제와 의미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회화만이 아니라 문학도 주제를 벗어던지고, ‘단어가 논리에서 해방될’ 경우에만 비로소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주장은 예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모든 학문과 예술이 융 복합을 모색하고 있는 요즘, 미술 분야에서는 활발하게 음악, 영상, 사진, 회화, 조각, 스토리텔링 등이 함께 협력하여 등장함으로써,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음악-미술-문학에서 각각의 이론과 방법론들이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음으로써 상호의 영역을 풍부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김춘수의 ‘무의미시’이론은 미술과 음악에서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고 본인이 밝히고 있다. 또한 그가 주장하는 ‘서술적 이미지’는 미술의 ‘미니멀리즘’과 비견되며, 무의미시이론을 적용하여 쓴 시들은 피카소의 ‘분석적 큐비즘’의 영향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이처럼 시문학 분야에서도 새로운 이론과 기법의 개발을 위해서 이웃 예술이론과 방법론을 차용하는 것도 예술 융 복합의 긍정적인 효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의 융 복합문제와 고정된 틀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과제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본고에서는 음향예술인 음악을 제외하고, 언어예술의 하나인 시와 형상예술에 속하는 회화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한다. 특히, 예술 융 복합의 시대에 시문학과 미술의 상호관계를 살펴보면서 앞으로의 발전방향에 대한 시사점을 찾고자 한다. II. 시와 미술에 있어서의 이미지 1. 시와 미술의 상호관련성 문학과 미술의 상호관련은 내용(주제), 형식, 수용 등 여러 방면에서 조명해 볼 수 있다. 첫째, 작품의 제재나 주제 측면이다. 그리스-로마 신화나 성서는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두 예술의 공통된 소재를 제공한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들의 불후의 명화는 후세의 많은 시인들에게 시를 쓰는 동기가 된다. 작가들은 인접 예술의 작품에서 얼마든지 창작의 영감을 얻을 수 있다. 상상력이란 모든 예술에 공통된 창조의 원류이기 때문이다. 둘째, 표현방식과 매체사용에서의 관계이다. 모방(미메시스)의 개념으로 환원하는 시학원리는 고대 이후 두 예술의 공통성을 설명하는 기초가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 25장에서 시인과 화가를 함께 모방하는 작가로 소개한 이후 두 예술가는 매우 가까운 사이에 있는 것으로 인정되어 왔다. 호라티우스 『시학』에서도 ‘시는 그림과도 같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구체적 매체사용의 이질성은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셋째, 예술작품의 해석과 수용의 문제이다. 미술, 음악 그리고 문학은 추구하는 목표, 기능, 영향이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예술작품의 수용자(독자 및 관객 등)들은 모든 예술작품이 제공하고 있는 이미지들에 대한 해석과 수용이 제각각일 수밖에 없으나, 예술이라는 큰 틀에 함께 묶일 수 있는 것이다. 시와 그림과의 관계에서, 송나라 소식(蘇軾, 1037-1101)은 당나라 왕유(王維, 701-761)의 시와 회화를 칭찬하면서 ‘왕유의 시 속에 그림이 있고, 왕유의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고 하였다. 북송(960-1127) 화가 곽희의 『임천고치(林泉高致)』에 “시는 무형의 그림이고 그림은 유형의 시이다”라는 말이 있다. 남송(1127-1279)시대의 오룡한(吳龍翰)은 ‘그려내기 어려운 정경을 그려낼 때에는 시로써 보완하며, 읊조리기 어려운 시를 읊을 때는 그림으로써 보완한다.(畵難畵之景, 以詩湊成; 吟難吟之詩, 以畵補足)’라고 하여 시와 회화의 결합 가능성뿐만 아니라 그 필요성까지도 언급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중국의 시와 그림에 대한 입장을 받아들여, 고려에서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시화일치는 사대부 문인들의 삼절의 추구와 맞물려 장려되었다. 이인로(1152-1220)는 “시와 그림이 묘한 곳에서 서로 도와주는 것이 한결같다 하여 옛 사람이 그림을 소리없는 시라 이르고, 시를 운율이 있는 그림이라 일렀다”고 하였다. 사대부 문인화가로 시를 잘 짓고 그림에 뛰어난 인물은 강희안(1419-1464)이다. 동생 강희맹은 시화일치의 경지를 가장 이상적으로 구현한 인물로 왕유를 거론하면서, 그의 형 강희안을 왕유와 비견하고 있다. 이러한 시화일치는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까지 활동한 백악그룹, 18세기 후반에 활동한 연암그룹, 그리고 19세기 당대 최대의 삼절로 이름 높았던 추사 김정희(1786-1856) 등으로 그 흐름을 이어왔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문학, 음악, 무용처럼 뮤즈 여신의 보호를 받는 뮤즈 예술과 회화나 조각처럼 기술, 즉 손재주를 필요로 하는 미술을 구분하였다. 미술이 문학과 음악의 버금가는 위치로 올라서게 된 것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이르러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레오나르도(Leonardo da Vinci, 1452-1519)는 회화가 시와 수사학보다 우월하다고까지 주장하였다. 르네상스 시대 시인이자 문학이론가인 시드니(Philip Sidney, 1554-86)는 「시의 옹호: Apology for a Poetry」에서 ‘시는 말하는 그림’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은 ‘그림과 같은 시’를 이상적으로 대표한 화가로 여겨졌다.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그림으로 그려진 시’라고 칭찬했는데, 이는 글(성경)에서보다 더 많은 것을 읽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776년 레싱(G.E. Lessing, 1729-81)에 따르면, 문학은 시간의 영속을 특징으로 하고, 회화나 조각 등의 미술은 공간에 의존하기 때문에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회화의 대상은 형, 색채, 선 등의 ‘공간적 병존’으로 파악되지만, 문학은 ‘시간적 순서’, 즉 ‘행위’의 진행으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또한 레싱은 회화우위 가치관을 반박하면서, 창조적 상상력은 회화와 시 모두에 해당하지만, 화가보다는 시인의 환상적 재능에 더 높은 무한성을 부여하고 있다. 괴테(J.W. von Goethe, 1749-1832) 역시 『시와 진실, 1833』에서 레싱의 견해에 동의하고 있다. 미술가는 미에 의해서만 만족되는 외형의 의미를 위해 작업하나, 언어예술가는 추(醜)와도 함께 하는 상상력으로 작업하기 때문에 더 광범위하고 중요하다는 것이다. 괴테도 문학과 미술은 “매체조건, 대상, 예술법칙과 영향형식에 있어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말한다. 한편, 낭만주의 예술론에 있어서 예술의 통합은 ‘공감각’ 개념을 통해 설명된다. 서로 다른 감각의 연상과 교환 작용인 ‘공감각’은 예술이 함께 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한다. 낭만주의 예술의 공감각적 표현기법은 바그너(R. Wagner, 1813-1883)의 ‘총체예술작품(Gesammtkunstwerk)’의 이념으로 발전한다. ‘총체예술작품’은 바그너가 1849년 「미래의 예술작품」이라는 자신의 글에서 사용한 말로서, 음악, 춤, 시, 시각예술, 무대기술을 종합한 개념이다. 슐레겔(A.W. Schlegel, 1767-1845)은 낭만주의자들의 기관지 『아테네움 Athen um, 1798』에서 시, 음악, 회화의 내면의 친밀성을 주장한다. 이처럼 낭만주의에서 추구된 예술의 통합화 경향은 19세기 말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초현실주의와 상징주의 운동 등으로 계승된다. 상징주의 시인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1821-67)의 「교감(Correspondances)」과 랭보(A. Rimbaud)의 「모음들(Voyelles)」은 공감각을 잘 활용한 작품이다. 2. 시와 회화의 결합 방식 시와 회화의 결합방식에는 (1) 시에 의거해서 그림을 그리는 방법, (2) 그림을 제재나 대상으로 하여 시를 짓는 방법, (3) 그림과 문자가 한 화면에 공존하며 상호보완하는 문자도(文字圖), 구체시, 문인화 등이 있다. 시에 의거해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은 적지 않았다. 글을 얼마나 그림으로 잘 표현할 수 있는가를 연구했던 라파엘전파(Pre-Raphaelites)의 말레이(J.E. Millais)는 테니슨의 시 「마리아나(Mariana, 1830)」를 그림(Mariana, 1851, Oil on Mahogani, 59.7×49.5, Tate Gallery, London)으로 그렸으며,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오필리아를 그림(Ophelia, 1851-52, 76.2×112.8Cm, Oil on canvas, Tate Gallery, London)으로 그렸다. 이중섭도 백석의 시에서 많은 영감을 얻어 그림을 그렸다. 갤러리 서림에서는 1987년부터 매년 우리나라 유명한 시인들의 작품을 한국중견화가들이 그림으로 그려서 전시하고 있다. 그림을 대상으로 시를 짓는(이를 형상시라고 한다) 방법은, 시인이 그림을 감상하고 시적 감흥을 얻어 시를 쓰는 것이다. 아킬레스의 방패무늬 제작과정을 서술한 호머의 『일리아드』(18번째노래)가 형상문학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조각가 로뎅의 비서였던 릴케는, 화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한 경험을 살려,『형상시집』과 『신시집』을 통해 조형예술의 소재들을 시에 활용하였다. 여기에 실린 소네트「고대 아폴로의 토르소」는 조각작품인 ‘밀레의 토르소’를 보고 지은 시로, “독자는 시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시인의 형상적 관조의 배후에 깃든 심오한 내면의 정신세계와 만나게 된다.” 우리나라도 이중섭, 샤갈, 고흐, 뭉크, 피카소, 김정희 등의 작품 및 작가의 삶을 주제로 쓴 형상시가 적지 않다. 특히, 『시집 이중섭』(문학과비평사, 1987)은 화가 이중섭의 삶과 그림을 주제로, 시인들이 쓴 시와 ‘시인의 말’, ‘해설’ 등을 묶어 한권으로 엮은 것이다.  문자도(文字圖)는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義廉恥) 등 유교덕목을 중국의 옛 이야기들과 연관시켜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글자 속에는 잉어, 죽순, 할미새, 용, 파랑새, 거북이, 복숭아꽃, 봉황, 충절비 등 글씨의미와 관련된 그림들이 글자마다 포함되어 있다. 글씨의 의미를 그림이 보완해줌으로써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해낸다. 구체시의 사례는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비롯하여, 고대 중국이나 인도의 전통회화 및 서예에서도 찾을 수 있다. 특히 말라르메 「주사위던지기(Un Coup de Des, 1897)」, 아폴리네르 「칼리그람(Xalligrammes, 1913-6)」 등의 시에서는 종이 위에 자유로이 시행을 배열, 알파벳을 사용한 그림과 같은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말라르메나 아폴리네르의 작품은 시각적, 언어적 표현이 하나로 합쳐지는 이중예술품이라 하겠다. 문인화에서는 시와 그림이 함께 존재한다. 시와 회화는 창작방법만 다를 뿐 작가 정신의 반영물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고 보는 시각이다. 똑같은 그림이 그려졌어도 각기 다른 시를 써 넣으면 느낌이 달라질 수 있다. 또 그림 안에 시를 쓰는 경우, 시를 쓰는 위치는 화면 구성에 영향을 주며, 시를 쓴 형식, 공간의 크고 작음, 글씨체도 영향을 미친다. 조선 초기부터 중국 문인화의 시화일치사상(詩畵一致思想)이 유입되어, 우리나라 사대부들에게 문인화의 기법적(技法的) 토대를 제공해 주었고, 외적인 기교보다 내적인 사상이나 철학 등을 중시하는 우리나라 문인화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문인화에서는 시의 의미와 글씨의 미적 이미지 그리고 그림의 이미지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글씨도 그림의 하나로 볼 수 있으며, 그림의 주제는 시의 주제와 일맥상통하고 있다. 3. 시와 미술의 이미지 시와 미술이 같은 울타리에 존재한다는 것을 이미지의 개념을 통해서 설명할 수 있다. 마음 속에 그리는 그림을 뜻하는 이미지는, 엘리엇의 ‘객관적 상관물’이 의미하는 것처럼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을 구체화하여, 내용을 보다 잘 인식하도록 함으로써 독자의 정서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모든 예술은 이미지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는데, 이미지의 어원을 보면, 거울에 비친 상이라는 뜻의 모상(模像: eidolon)이다. 플라톤은 현상계가 진리의 세계(이데아)를 모방한 모상이라고 보았다. 이는 에이콘(eikon)과 판타스마(phantasma)로 나눌 수 있다. 에이콘은 원본(이데아)을 곧바로 묘사한 것으로 유사관계(resemblance)를 말하며, 실재와 닮은꼴로 실재를 적절하게 표현한 것으로 간주된다. 판타스마는 복사물을 다시 복사한 것, 즉 시뮬라크르(simulacre) 관계를 말하며, 실재를 부적절하게 표현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들뢰즈는 시뮬라크르가 단순한 복제의 복제물이 아닌 독립성과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예술의 미학적 담론에는 이미지(image)와 상상력(imagination)이 핵심으로 등장한다. 드브레(R. Debray, 1940-)의 견해에 의하면 이미지는 마술(magic)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마술이란 무의식적인 꿈과 마찬가지로, ‘비가시적인 것의 가시화’의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술에 있어서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드러냄이다. 마술과 마찬가지로 이미지는 가시적인 것의 배후에 들어 있는 비가시적인 것의 기호이며, 인류의 집단적인 기억이 머물고 저장된 장소인 것이다. ‘인류의 집단적인 기억’이란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이 말하는 집단무의식을 지칭한다고 여겨지지만, 개인무의식까지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 이래 서구 예술론을 지배해 온 ‘실재의 재현으로서의 예술’이라는 ‘모방론’의 관점에서든 그에 대한 반발로서 등장한 18세기의 낭만주의적 ‘감정의 표현으로서의 예술’이라는 ‘표현론’의 관점에서든, 예술은 이미지를 매개체로 한 의미작용이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특히, 이미지에 대한 공통의 인식을 통해 서구 예술사에서 문학과 미술이 가장 근접한 정신 활동으로 인정된 것은 초현실주의와 상징주의 운동을 통해서라고 할 수 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예술이 공통적으로 무의식적인 정신 활동에 기반을 둔 이미지의 생산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예술작품은 대상을 보고 그리되 대상과는 무관한 창조된 가상객체(virtual object)요 창조된 이미지이다. 가상(假象)이란 주관적으로는 실제 있는 것처럼 보이나 객관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거짓현상을 말한다. 수용자(독자 및 관객)들마다 다른 이미지로 받아들이며 또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도 있을 수 있다. “비평가도 해석을 내리는 데 고심하여, 의문스러운 곳은 그 의미를 부연하는 것이 고작인 난해함도 하나의 시적 요소다. 때로는 독자에게 그 중 한 행의 의미조차 분명히 알 수 없는 정도여서, 그것은 명암화법적인 회화 속 형식의 윤곽선이 뚜렷하지 않은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예술이 창조한 이미지라는 것의 추상적인 이유 중의 하나는 예술가가 창조한 이미지와 수용자가 받아들이는 이미지가 다르다는 것이다. 수용자가 받아들이는 이미지는 ‘또 다른 창조’라 할 수 있다. 예술가가 창조한 이미지를, 수용자는 나름대로 자신의 경험과 무의식을 참조하여, 자신의 이미지로 변환하여 수용하는 것이다. 이미지는 예술가와 수용자 사이의 의사소통수단이 된다. 4. 이미지 해석의 다양성 이미지의 생산 못지않게 해석도 중요하다. 특히 예술의 가치 평가는 수용자들의 해석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 미술, 음악의 공통분모로서의 언어는 ‘의미하는 언어’가 아니라 제2언어라고 할 수 있는 ‘해석’이다. 예술 혹은 예술가는 나무에 있어서 큰 줄기와 같다. 예술가는 정치 사회 역사 문화 등 제반 환경 그리고 자신의 무의식과 지정의(知情意)에 뿌리를 내리고, 거기서 모든 자양분을 흡수하여 큰 줄기를 통과해 잎, 꽃, 열매라는 작품을 생산한다. 예술가는 자기를 포함하여 자기를 둘러싼 모든 역사적, 현재적 환경에 대한 예술가 자신의 해석을 작품에 투영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산된 예술작품을 소비하는 수용자들은, 생산자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모든 주어진 역사적, 현재적 환경을 참조하여 독자적인 해석을 통해 수용한다. 이처럼 예술작품의 생산과 소비 사이에는 해석이라는 단계가 존재한다. 그 생산과 소비를 매개하면서, 수용자들이 해석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는 것은 바로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이미지는 세계 인구의 수만큼이나 많은 해석의 가능성과 다중의 의미를 지닐 수 있기 때문에, 어떤 해석도 권위있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이 이미지의 특성이다. 개개 언어나 문장, 그림의 색조나 명암 등이 생산하는 개별 이미지뿐만 아니라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이미지(작품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도 중요하다. 예술가와 수용자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 심리적 역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독자반응이론에서 ‘독자가 텍스트를 구성한다’고 주장하는 시각과 일치한다. 생산자(예술가)가 생산한 제품(예술작품)의 이미지를, 수용자는 나름대로의 해석을 거쳐 자신의 이미지로 치환한 후 수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가의 이미지 수용자의 해석 수용자 이미지로 치환 수용자의 수용 단계를 연결하는 고리가 형성된다. 그렇다면 수용자는 어떻게 예술적 이미지를 해석할까? 이를 롤랑 바르트의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이라는 개념을 원용하여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롤랑 바르트에 의하면 스투디움(studium)이란 우리가 지식과 교양에 따라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영역으로, 양식화될 수 있고 전형적인 정보로 되돌려질 수 있는 부분이다. 감상자는 이와 같은 평균적 정보로 환원될 수 있는 영역을 인지하고 이를 감상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그림과 사진의 경우, 작품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작품이 구성하는 시각상의 어느 영역에서 갑자기 감상자의 눈을 찔러오는 부분도 있다. 롤랑 바르트는 바로 이것을 푼크툼(punctum)이라고 지칭했다. 어원상으로 이 푼크툼은 평균적 교양과 상식으로 이해되는 스투디움의 영역을 깨뜨리며 마치 화살처럼 감상자를 찌르는 어떤 것이라고 설명될 수 있다. 감상자의 시선이 작품에 오래 머물게 되는 것은 바로 그 푼크툼 때문이다. 좋은 시들은 인식의 스투디움을 깨뜨리며 인지 충격을 안겨주는 푼크툼들을 품고 있기 마련이다. 소위 사물을 새롭게 보게 하고 기존의 인식을 뒤흔드는 효과 역시 시적 푼크툼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지의 두 가지 층위, 곧 정보적 층위와 상징적 층위에서 읽혀지는 두 의미는 이 이미지를 제작한 예술가에 의해 계획되고 의도된 것이다. 이러한 의도와는 달리 바르트가 제3의 의미라 부른 이미지의 세 번째 층위는 그만큼 자명하지도 않고 포착하기도 어렵다. 묘사는 불가능하고 헤아리기만 가능하며 지적(知的) 인식이 아닌 사적(私的)인 파악을 통해서만 포착된다. 언어로 환원될 수 없는 것, 그리하여 언어가 어찌할 수 없는 이미지의 요소를 푼크툼이라고 한다. 이러한 제3의 의미는 주로 수용자에 의해 형성되기 마련이다. “주제를 간추리고자 시를 읽는 것은 지나치게 비경제적 행동이다. 시에는 리듬과 이미지 그리고 비유와 상징 등, 그림의 경우 회화적 중심에 비견될 만한 다채로운 요소들이 있다. 시를 읽으면서 이런 요소들을 놓치고 테마적 중심에만 현혹되는 것은 시인이 애써 여러 요소를 활용해 구성해 놓은 텍스트를 다시 평범한 전언으로 풀어 놓는 것과 같다.” 그림도 주제 못지않게 색과 선과 면의 어울림 등 기법에도 주목해야 하는 것처럼, 시에서도 각종 언어적 장치(리듬, 이미지, 비유 등)들이 유기적 통일성을 가지고 있는지 등에 주목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은 더 나아가 수용자들은 그 작품이 가지고 있는 제3의 의미, 즉 푼크툼까지 천착해야 한다. 물론 생산자인 예술가도 푼크툼까지 헤아려 작품을 제작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된다. 랭보가 말하는 투시자(voyant)가 되어야 한다. 무한한 시간과 공간을 꿰뚫어 볼 수 있고, 모든 인습적 제약과 통제를 무너뜨려 영원한 목소리를 내는 도구로서의 예언자가 투시자인 것이다. 예술가나 수용자 모두 라깡이 말하는, 현상이라는 커튼 뒤에 있는 실재(the real)까지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도록 부단히 예술작품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읽고 보고 사색해야 한다. III. 나오는 말 예술의 생산과 수용 그리고 이를 중개하는 이미지에 초점을 맞추면, 그림과 시는 단지 표피적인 표현매체만 다를 뿐이지 동일한 것이다. 특히 초현실주의 등 추상예술에 있어서는 표피적인 것마저 구분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추상에 의해 다른 영역에 속해 있던 문학과 미술, 나아가 음악은 하나의 차원으로 총괄된다. 예술적 언어가 생산하는 추상은 생산자가 똑같은 이미지를 생산해서 내놓아도 수용자가 푼크툼 영역까지 확장하여 풍성하게 해석할 수 있도록 돕는다. 피카소는 시인이자 화가이며, 칸딘스키와 클레는 미술과 음악이 통합될 수 있음을 보였다. 바그너는 음악, 시, 미술의 통합을 시도하였다. 이들에 의하면 예술, 특히 미술과 음악과 시는 보이지 않은 것을 보이게 한다는 의미에서 동일한 뿌리를 가지고 있다. 이미지의 도움을 받아 그림에서 시를 읽고 음악을 들으며, 시에서 그림을 보고 음악을 듣는다. 음악을 들으며 상상력의 지원을 받아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쓴다. “호안 미로는 회화와 시 사이에 경계를 두지 않으며, 그의 그림의 총합은 새로운 종류의 언어를 구성하는 시각적인 글이라고 할 수 있다.” 호안 미로가 그린 그림 「시」(1968, 캔버스에 유채, 목탄, 259.5×173.5 Cm)는 ‘그림으로 시를 쓴 것’이다. 이 그림에서 수용자들은 나름대로 시의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 한국 시단에서 ‘독해가 불가능한 시’의 경우보다는 오히려 호안 미로의 「시」라는 그림이 훨씬 수용자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시(詩)가 아닐까? ‘시는 반드시 언어로만 창작해야 하는가?’, ‘시가 언어의 장벽을 무너뜨릴 수는 없는가?’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매체의 이합집산은 20세기 후반부터 다양한 형태로 진전되고 있다. 특히 지난 수십 년간 컴퓨터를 위시한 신매체의 등장은 말, 형상, 음의 융 복합을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오늘날 다매체 예술에서는 장르나 형식의 독자성은 이미 찾아보기 힘들다. 다원적이고 총체적인 텍스트에서는 읽기, 보기, 듣기 등 개별 지각방식이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다. 이러한 융 복합을 통해 예술적 효과가 극대화되고 있는 것이다.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과 SBS문화재단이 공동주최하는 수상 작품을 보면 이러한 예술 장르의 통합적 경향이 잘 반영되어 있다. 수상자인 믹스라이스(조지은, 양철모)는 “급격한 도시화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이식되는 식물들의 ‘이주’ 과정과,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강제 ‘이주’된 아시아 근대 이주민들의 이야기를 추적”하고 있는데, 특히 에서 음악, 사진, 벽화, 영상, 그리고 스토리텔링이 어우러져 주제를 부각시키는데 통합적 효과를 연출하고 있다. 다만, 스토리텔링에 있어서 단순한 사실의 소개에 머물고 있어 아쉬움이 남았고, 시적 형상화 작업이 좀 더 이루어졌으면 전체적인 예술적 효과가 증대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현대예술의 다양화, 융·복합화가 진전됨에 따라, 앞으로 시와 음악과 미술 등이 서로 경계를 허무는 작품들이 많이 창작되고, 이러한 예술의 융·복합을 연구하는 통합학회 내지는 예술단체가 구성되어, 예술 특히 시문학의 품을 더 넓히는 방안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예술을 아우를 수 있는 ‘시극의 활성화’가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시극의 경우, 단순히 대화와 지문을 시로 표현하는 것에 그치지 아니하고, 무대 및 의상 디자인 등 미술영역과, 음악과 무용 등 다양한 예술분야를 충분히 활용함으로써 관객에게 좋은 작품으로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예술의 융·복합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시 쓰기와 관련하여, 호안 미로가 ‘그림으로 시를 썼다’고 말한 바와 같이, ‘시를 문자언어로만 창작해야 한다.’는 고정된 틀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고민도 필요해 보인다. ‘시는 문자로 써야만 한다.’고 고집하더라도 다른 매체(영상, 음악, 미술 등) 등과의 융 복합을 통해 더 수용자에게 다가갈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아서 단토의 다음과 같은 주장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예술이라고 하는 핵심적인 개념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거의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다는 것과, 한때 예술에게 본질적으로 보였던 속성들이 아예 없더라도 어떤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1    대상과 집합적 결합 - 나의 시쓰기의 한 방법 / 문덕수 댓글:  조회:1223  추천:0  2019-06-17
대상과 집합적 결합  - 나의 시쓰기의 한 방법 문덕수 대상·1 시에 있어서 ‘대상’이란 무엇일까? 얼른 대답할 수가 없다. 많은 시인들(필자도 당연히 포함됨)이 대상(對象)의 개념을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혼동해서 쓰거나 미숙한 상태에서 쓰고 있지 않는가도 생각된다. ‘사물, 제재, 세계, 주제’ 등의 개념과 비슷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그런 실례일 것이다. 나는 한때 현대시에 있어서 “대상에서의 해방”을 주장한 바 있다. 최근까지도 전위시의 문제와 관련해서 ‘무대상’의 이슈가 논의되고 있거니와, 이미지의 미적 주권을 강조하면서 시가 외부 세계에 있는 대상에서의 달갑지 않은 구속이나 주종관계를 단절해야 한다는 요지의 논문인 「내면세계의 미학」 (『사상계』 통권 151호, 1966. 3)을 1960년대에 발표했다. 이 무렵, 나는 시의 ‘대상’은 언어적 표상(表象)의 바깥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내면세계의 미학」의 발표 몇 개월 뒤에, 김춘수도 무의미시문제와 관련하여 대상 문제를 언급한 논문 「대상·무의미·자유」 (『시문학』 1966. 11, 『김춘수전집2 시론』 1999, p.376에 수록)을 발표했다. “대상이 있다는 것은 대상으로부터 구속을 받고 있다는 것이 된다” (동 전집, p.377)라는 대목은, “대상에서의 해방” (『모더니즘을 넘어서』 2003, p.406)이라는 나의 주장의 연장선에 놓이는 발언으로 간주된다. 김춘수는 또 같은 논문에서 “같은 서술적 이미지라고 하더라도 사생적(寫生的) 소박성이 유지되고 있을 때는 대상과의 거리를 또한 유지하고 있는 것이 되지만, 그것을 잃었을 때는 이미지와 대상은 거리가 없어진다”고도 말하여, ‘대상’이 시 텍스트 바깥에 있다는 점을 기정사실로 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춘수는 그 뒤 또 「대상의 붕괴」 (『김춘수전집2 시론』 1999, pp.395 ~402)라는 논문도 발표했다. 여기서는 자기의 다음과 같은 시를 소개하면서 작품에서의 대상 파괴의 시도를 설명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밤에 보는 오갈피나무, 오갈피나무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은 새가 되었다고 한다. 발바닥만 젖어 있었다고 한다. - 김춘수, 「눈물」 전문 대상의 파괴를 통해서(?) 관념이 파괴되어 무의미를 생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통일된 이미지나 의도를 찾아내기 힘든다는 말도 덧붙이고 있다. “우선 제2행까지와 제4행까지로 이미지는 두 갈래로 갈라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게 납득이 안 될 것이다. ‘남자와 여자’와 ‘오갈피나무’가 무슨 상관일까? 이것은 하나의 트릭이다” (동상 전집, p.397)-이렇게 그는 말하고 있다. 이 시는 작자의 말대로 ‘트릭’으로 쓴 것이다. ‘트릭’(trick)이란 책략, 계략, 속임수라는 뜻이다. 작자는 대상과 관념을 파괴하기 위하여 ‘트릭’이라는 의식적인 시쓰기의 방법(이것도 지적 방법이다)을 고안한 것이다. 그러면 작가의 의도대로 대상도 관념도 파괴되어, 이 시에는 그것이 없어지는가? 그렇지 않다. 분석해 보자. 작자는 “남자와 여자”나 “오갈피나무” 사이의 관계는 얼른 납득이 안되는데, 고의로 납득이 안되도록 트릭을 썼다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와 “오갈피나무”의 관계뿐만 아니라, 제5행의 “맨발로 바다를 밟고간 사람” (작자는 예수를 염두에 두고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과의 관계에 대한 이해도 쉽게 되지 않는데, 이 부분도 작자가 고의로 쓴 트릭 때문이다. 이 세 주어를 동일화(同一化)하기 어렵도록 작자는 지적 숙고 끝에 이러한 트릭(나쁘게 말하면 꼼수, 속임수, 좋게 말하면 수수께끼를 만들었다)을 쓴 것이다. 그렇기는 하나 ‘남자와 여자, 오갈피나무, 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은 이 시의 ‘대상’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이 세 사물 사이의 관계를 통일하는 ‘동일성’을 찾기는 어렵다. 이러한 트릭은 명사관계(名辭關係)뿐만 아니라 술어관계(述語關係)에서도 보인다. 이 시의 술어는 모두 ‘물’과 같은 성질에 젖는다는 서술로 통일되어 있다. 남자와 여자는 아랫도리가 젖어 있고, 오갈피나무도 아랫도리가 젖어 있고, 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은 발바닥이 젖어 있다. 이러한 수성(水性)을 나타내기 위하여 제목을 「눈물」이라고 붙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젖어 있다”는 개개의 술어를 어떤 동일성의 관념으로 통합시키는 기능은 매우 약한 것 같다. 아니 그런 의미 기능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이러한 단절을 위한 지적 장치도 작자의 고의적인 트릭이고, 심지어 제목을 「눈물」로 정한 것은 한술 더 뜬 트릭으로 보인다. 그런데, 가령 “젖어 있다”는 술정(述定)을 연결하는 어떤 통일점을 찾을 수 있다면 그 통일점이 갖는 어떤 동일성도 정립할 수 있지 않을까. “남자와 여자”나 “밤에 보는 오갈피나무”의 경우에는 모두 “아랫도리”라는 통일점을 갖고 있고, “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의 경우에는 “발바닥”이 젖는 부위를 갖고 있다. 물과 같은 성질의 수액(水液)에 젖는 부분은 아랫도리이건 발바닥이건 겉으로 잘 보이지 않게 숨겨져 있거나 가리워져 있는 하위부이다. 이런 하위부는 인체(남자와 여자), 식물(오갈피나무), 초월자(예수) 모두가 다 가지고 있고, 따라서 작자가 이러한 대상들의 동일성적 통합을 일부러 파괴하려고 트릭을 썼다고 할지라도 ‘대상’은 존재하며, 다만 그 대상들이 동일성적 통일점을 정립하지 못한 채 분산된 형태를 드러내어 미규정 상태로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김춘수의 이러한 ‘트릭’이 공인을 받을 수 있는 의식적 방법인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여기서 논의를 접어두자. 첫째 시쓰기에서 어떤 진실을 암시하거나 나타내기 위해서는 이러한 ‘트릭’의 사용이 필연적일까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의혹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둘째, 대상을 파괴하고 관념에서 벗어나겠다는 의도와는 달리, 독자에게는 “대상과 관념”을 찾게 하려는 사고(思考)를 더욱 강요하여 부과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것은 그의 시쓰기의 의도에 대한 역설적 반동이라고 할 수 있다. 대상·2 김춘수는 시 「눈물」 「하늘수박」 등, 트릭을 사용한 작품을, 대상 파괴를 시도한 작품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전히 대상은 시 텍스트 안에서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대상은 시 텍스트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김춘수나 다른 시인들이 갖는 관념과 대상의 혼용도 지양해야 하고, 대상은 일률적으로 작품의 외부 또는 표상의 바깥에만 있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상식화된 도그마를 버려야 함을 강조하고 싶다. 이 점은 새로운 시쓰기의 키 포인트가 될 수 있다. 자기 앞에 놓여 있는 ‘탁자’를 볼 때 바로 앞 부분은 잘 보이지만 탁자의 저쪽 모서리는 잘 보이지 않는다. 정면에서 탁자를 볼 때와 이동해서 왼쪽에서 볼 때와는 달리 보인다. 또 두 사람 이상이 볼 때는 사람에 따라 달리 보인다. 보는 사람, 보는 위치, 조명의 유무 등 여러 가지 조건에 따라 달리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작품 외부에 있는 대상과 작품 내부의 대상은 전연 같은 존재가 아닐 뿐 아니라, 우리가 흔히 ‘대상’이라고 할 때는 작품 외부에 있는 객관적 사물만 가리키기 쉽다. 객관이나 객체도 인식에 대응하여 독립된 것이라면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문제는 작품과 작품 바깥, 표상과 표상의 외부, 주관과 객관-이런 흑백 이분법적 대립으로만 대상개념의 파악이 가능하느냐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게 된다. 여기서 작품도 언어적 표상이라는 관점에서 ‘표상’(表象, represen tation)이라는 용어로 통일해서, 이 문제를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우리가 ‘대상’이라고 할 때, 표상(‘표상력’이라고 해도 괜찮음)의 한계 밖에 있는 대상의 의미로 사용된다. 다시 말하면 지각이나 사고 즉 인식에 대응하는 사물 자체로서의 대상을 의미한다. 표상의 한계 외부에 있는 이러한 물 자체는 현전화(現前化)할 수 없는 것으로 본다. 즉 물 자체는 규정불가능, 인식 불가능의 것이다. 우리는 인식이 절대로 안 되는 물 자체를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의 ‘대상’이 표상활동의 산물인 시작품과 어떻게 관련되고 구별되는지 숙고해야 한다. 그런데, 앞에서 예시한 바와 같이, ‘탁자’라는 물 자체의 인식은 불가능하지만, 작품의 표상 속에서 탁자가 나타나 있다. 나타나 있는 그 표상도 탁자이긴 하나 표상 바깥에 있는 물자체로서의 탁자와는 다른 것이다. 하지만, 표상된 현상으로서의 ‘탁자’(정확하게는 ‘탁자’라는 이미지)를 통해서 실물로써 존재하는 탁자와의 어떤 관련성을 이해한다. 여기서 우리는 표상의 내부라는 영역 한계를 확정해도 그 내부에는 역시 표상의 대상이 있음을 알게 된다. 표상 내부에 존재하는 이 대상은, 시인의 인식과는 대응하면서 선험적으로 이미 부여된 것이 아니라 어떤 문제나 과제를 가지고 부여된, 그러나 규정불가능이 아니라 단지 미규정 상태에 있는 것이다. 표상의 대상인 ‘탁자’나 ‘남자와 여자’ 같은 대상이 시에 등장하는 보기를 앞에서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대상의 본질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 즉 원리적 탐구는 철학의 영역에 속하는, 즉 시와는 관계 없는 것처럼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시의 중립성이나 객관성 문제, 그리고 시의 구성 방법 문제(‘물리적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 등)도 바로 이러한 대상의 본질론이 깊이 관련되어 있다. 표상의 대상에 대하여 현상학에서 ‘대상X’라는 개념으로 말하기도 한다. 앞에 든 ‘남자와 여자, 오갈피, 예’ 등은 대상X라고 할 수 없을까. ‘남자와 여자’와 ‘오갈피나무’는 사물로서 실재 가능성이 있는 존재이고, ‘예수’는 담화(談話)의 세계에서만 존재하므로, ‘대상X’라고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젖어 있다”와 “맨발로 바다를 밟은”의 술어들을 관계지워 연결하는 통일점이 없기 때문에 ‘대상X’라고 한 것이다. 즉 ‘X’란 아직도 규정하지 못한 술어관계의 통일점이다. ‘대상X’란 ‘어떤 것’ 또는 ‘어떤 것의 일반’이라는 말 외에 달리 그 본질을 규정하기 어려움을 말한다. ‘대상X’를 ‘무’, 또는 ‘공허’라고 할 수 없을까. ‘무와 공허’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상반된 복수의 언설이 경합하여 논의될 수 있는 토픽의 ‘담론공간’이라는 뜻이다. 30년대 한국 모더니즘 시에서도 시의 중립성 내지 객관성이 흔히 지적되곤 하는데, 그 문제가 그런 지적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 그 특징의 원인이 추구되어야 할 것이다. 중립성이나 객관성 논의도 ‘대상X’에 귀착된다. 회의주의나 허무주의가 모더니즘을 받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도 이유가 될지 모르지만, ‘대상론’에서 찾는 것이 더 설득력 있는 일이 아닐까. 김춘수의 ‘트릭’도 이 ‘대상X’에 귀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들의 기차는 느으릿 느으릿 유월소 걸어가듯 걸어간다 우리들의 기차는 노오란 배추꽃 비닐밭 새로 헐레벌떡어리며 지나간다 - 정지용, 「슬픈 기차」에서 이런 시에 일제식민지시대라는 역사 의식을 둘러씌우거나 어떤 이데올로기로 포장하면, 사실 공소한 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비난까지 포함한 논의 지점으로서 이 시는 담론공간으로 열려 있다. 그리고 이러한 중립성·객관성은 ‘공허’나 ‘무’라고 하는 대상의식에서만 열려지지 않을까 생각된다. 대상론은 시의 구성방법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반적으로 시간과 공간의 동일성, 감각이나 관념의 유사성 등에서 대상의 결합 원리를 찾고 있지만, 1, 2, 3, 4와 같은 기수개념(基數槪念)에 의거해서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수나 번호(사무실 번호, 아파트 번호, 주민등록번호, 차량번호, 군번, 기타 등등)는 개별성이나 개개의 구체적 내용규정과는 관계없는, 또는 그런 것을 사상(捨象)해 버린 높은 추상성과 초월성을 갖고 있다. ‘대상X’라는 것은 기수화(基數化)할 수 있는 요소(단위)가 아닌가 생각되고, 기수에 의한 결합이라는 것은 시의 구성방법을 무한히 확장·확대할 수 있는 혁명적 열림이 된다고 생각한다. 집합적 결합 지금까지의 한국시는 처음부터 단일성·동일성의 원리에만 의존해서 구성되어 왔다. 현재의 시도 대부분 그렇다. 꽃이면 꽃, 베고니아면 베고니아, 빌딩이면 빌딩-이런 식으로 대상, 주제, 내용, 정서, 기타 등등 모두 단일의 동일성 원리에 의거하여 발상되고 구성되어 왔고, 효과면에서도 단일성을 강조하는 것 같다. 이러한 폐쇄적 단순성의 경향은 단시(短詩)의 구조가 지향하는 것으로부터의 영향인 것 같다. 어쨌든 이러한 추세가 계속되면 한국 서정시의 허약성과 왜소성은 떨쳐버릴 수가 없을 것이다. 모든 대상이 그 성질이나 내용의 어떠한 규정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이 모두 사상(捨象)되어 숫자나 번호처럼 추상하고 초월할 수 있다면 거기에는 지금가지 볼 수 없었던 미지의 ‘구성의 틀’이 잠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대상의 중립성과 더불어 이러한 초월적 추상성은 제재의 다변화, 내용의 다양화, 구조의 복합화로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대상의 내용도 여러 가지 이질성, 대립성, 모순의 공존적 연결을 보일 것이다. 즉, 결합되는 개개의 대상이 가지는 성질, 종류, 범주, 형태 등에는 제한이 없다. 추상이건 구체이건, 또 물리적이건 심리적이건, 사실이건 공상이건, 그러한 성질이나 종류와는 관계없이 결합될 수 있다. “소나무, 백당나무, 칠엽수” 등은 모두 나무의 종류로서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다. ‘지구, 화성, 태양, 달’ 등은 천체의 종류로 결합되어 있다. 이러한 결합은 동일성이나 유사성의 원리에 의거하고 있으므로 여기서 말하는 집합적 결합의 전부라고 할 수 없다. ‘마르크스, 서울, 지옥, 관음보살, 의사’ 등의 결합 관계는 동일성이나 유사성의 원리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감정, 이데올로기, 의식, 무의식 등의 성질이 추가되면 초월적 기수의 집합개념에 더욱 더 다가서는 예가 될 것이다. 나는 1960년대에 무의식의 세계, 즉 내면세계의 시를 강조한 바 있고,(「선에 관한 소묘」의 연작시 등, 이 방면에 관한 시를 꽤 많이 썼다.) 그 뒤 내면세계에서 사회로 나와 현실과 문명을 비판하는 시를 썼으며, 다시 내면세계와 외면세계의 철폐를 주장했다. 이러한 과정은 나의 시력(詩歷)의 연대적 변화를 그대로 나타내지만, 결국 이러한 꽤 오래된 나의 시적 탐사여행도 결국 이 기수적 종합(基數的 綜合)에 이르는 방법을 목표로 한 나름대로의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하철에 막 핀 장미 한 송이 사뿟 들어와 앉다 빨간 매니큐어, 이탈리아제 검은 악어백에서 제라늄 꽃지갑을 열더니 녹색 잎사귀 두 장을 끄집어 내다가는 판도라의 상자인 양 지레 닫아버리다 지상으로 올라와 더욱 살센 지하철 유리창엔 비바람에 우수수 젖은 가로수 잎이 한 장 달라붙어 파르르 떨더니 그 몸부림 뚝 떨어지다 여리고로 가는 길가 뽕나무에 올라가 예수를 기다리던 삭개오가 이것을 보다 - 「삭개오가 보다」 전문 최근에 쓴 시이지만, 나는 이 작품에 대해서는 불만이다. 여인이 지갑에서 지폐를 끄집어내는 것, 비에 젖은 가로수 잎사귀가 지하철 유리에 붙었다가는 떨어지는 것, 뽕나무에 올라가서 지나갈 예수를 기다리는 삭개오(『누가』 19장 1절~10절) 등의 세 장면의 결합이지만, 주제의 차원에서는 동일성의 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담화의 세계와 현실적 현장의 결합, 과거의 폭력적 현재화(과거와 현재의 동시적 결합) 등의 방법은 그런대로 괜찮으나, 동일성의 원리를 파괴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시속 80킬로의 지하철 선반에 알록달록 배낭 네 개, 눕고 기대고 포개져 흐너지지 않다 뭔가 오순도순 속소리로 속삭이다 선반 밑에는 서른을 갓 넘은 아빠엄마 사이에 낀 맏딸은 씨걱거리며 살세게 달리는 깜깜한 터널이 무서운 듯 여신 고개를 돌려 힐끗거리다 둘째는 머슴애, 엄마의 오른손을 꼭 잡고 휘둥그레 세상을 익히는 눈치다 천원 한 장에 두 켤레라고 꼬두기면서 목이 쉬어버린 요술장갑장수가 그 앞을 막 지나가다 아뿔사, 그때 나는 약을 먹고 가라는 아내의 말을 깜박 잊어버리다 이 시에는 지하철을 탄 젊은 부부의 일가족 모습, 요술장갑장수의 행상, 아내의 말을 잊고 나온 화자(나) 등 세 장면이 결합되어 있다. 지하철 안이라는 공간의 동일성이 여전히 전제되어 있어 이 점이 불만이다. 시간적으로는 현재와 과거(회상)가 동시적으로 공존하고 있다. 비록 지하철 안이라는 공간적 동일성에도 불구하고, 대상이 가지는 술어 상호간을 연결하는 통일점은 찾아내기는 어렵게 되어 있고, 이 점이 바로 집합적 결합(集合的 結合)을 전향적으로 열어놓고 있다. 대상의 초월적 추상성과 기수화를 바탕으로 한 복합적, 종합적 결합은 여러 가지 개념의 명명이 가능하나 E. 훗설의 용어를 빌려 ‘집합적 결합’ (kollektive Verbindung)이라는 용어로 부르고자 한다. (문덕수 지음 『현실과 초월』에서 발췌)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