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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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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낭만적 영혼과 꿈 / 알베르 베겡 저 이상해 옮김 문학동네 댓글:  조회:1724  추천:0  2019-06-30
낭만적 영혼과 꿈 알베르 베겡 저 이상해 옮김 문학동네   독일낭만주의와 프랑스 시에관한 시론       서문       꿈의 개화 현상   밤의 꿈들, 표면에 너무 근접해서 조그만 충격에도 표면으로 드러날 것같은, 낮에도 줄곧 나를 따라다니는 더욱 신비로운 꿈들, 거기에는 여러가지 기호들을 통해 자신의 영속성과 풍성함을 나타내는 또하나의 현실이 있다.     내가 소홀히 한 것, 망각속으로 사라져버린 것들이 어느날, 뜻하지 않게, 땅속에 묻힌 씨앗이 꽃이나 나무로 자라듯이,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자양으로 성장하여 변용된 모습으로 거기서 다시 솟아오른다.     그것은 나 자신보다 훨씬 더 먼곳에서, 조상 대대로 이어져오는 무의식적인 기억 속에, 또는 개체로서의 내 존재의 영역과는 다른 어떤 영역에서 오는 것만 같다.         상상력의 세계   상상을 통해 표출되는 이미지들은 바로 나의 내부에 있는 꿈을 자극하고 표면에 떠오르게 하여,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에 투사하는 능력을 갖고있다. 또는 사물들이 나의 외부에 존재하기를 멈추고   마술적인 그들의 진정한 이름으로 부름받고 마침내 잠에서 깨어나, 나와 새로운 관계를 맺기위해 생동한다고도 말 할 수있다.     사상이나 예술작품은 실제로 우리자신의 가장 비밀스러운 부분에 관계한다. 외관상의 개체속에서 벗어나 진정한 우리 자신에게로 향해진 그부분에 이르면 우리에겐 단 하나의 근심밖에 남지 않는다.     징조와 신호들에 우리자신을 열고, 그럼으로써 한순간 완전히 생소하게 응시된 인간조건이, 그것이 가지는 위험과 전반적인 불안, 아름다움과 실망스런 한계들과 함께 불러일으키는 혼미함을 깨닫는 것이 바로 그 근심이다.           꿈 신화의 황금시대의 유적인 우리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가기   성인이 된 인간은 사물들, 종이 조각들, 예전에 친숙했던 풍경들과 같은 마술적 잔해의 힘을 빌어, 자신 속 어딘엔가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위해 끓어오를 순간을 숨죽여 기다리고 있는 모든 것을 일깨우려한다.     우리의 자애심 자체가 우리에게 깊이 감추려드는 가장 독특한 우리 존재에 대한 인식은, 거울이나 사진이 제공해 줄 수 있는 죽어버린 우리의 초상에서 우리의 얼굴 혹은 어깨에 대한 미지의 이미지를 찾아내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이러한 조화 혹은 특수한 법칙을 포착하려면, 시간에 대한 관조를 통해 시간에서 벗어나거나, 귀를 귀울여 모든 것 가운데서 우리의 운명인 이 멜로디를 식별해 내는 방법밖에는 없다.     역사가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 인류가 행하는 , 각 개인의 멜로디가 귀결되는 인류 자신의 멜로디에 대한 탐구이기때문이다.     꿈이란 말은 한편에서는 미학적이거나 특이한 형이상학적 성격을 띠는 밤의 꿈을 지칭하고, 또한편에서는 관념의 세계보다는 감성으로 채워진 , 안락처를 찾아 나선 정신을 이끄는 변함없는 이미지들의 세계를 뜻한다.     또 달리는 시인과 신화적 상상력이 한결같이 그들의 부를 길어오는, 먼 과거에서 대대로 이어져오는 무의식적 기억이라는 보물창고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때로는 유령들이 살고있는 위험한 장소이기도하고, 또 때로는 천국을 향해 열려있는 휘황찬란한 현관이기도 하다. 신 자신이 꿈을 통해 우리에게 엄숙한 경고를 전하기도 하고, 대지에 밖혀있는 우리의 뿌리가 꿈에 의해 자연의 풍요로운 품으로 뛰어 들기도 한다.     예술의 리듬에 영감을 불어넣는 몽환적 삶의 리듬은 별들의 영원한 운행과도, 원죄를 짓기 전에 우리 영혼이 가지고 있었던 원초적인 박동과도 일치한다.     낭만주의자들은 무의식적 이미지들 속에서, 그것이 비록 병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영혼을 미지의 영역으로 이끄는 길을 찾으려 한다.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병적 이미지를 정화시켜 지상의 삶에 유용한 것으로 만들려는 치료의 목적이 아니라, 시공 속에서 우리를 우리 너머로 연장시켜 현재의 우리존재를 무한한 운명의 선 위에 찍힌 한점으로 만드는 모든것의 비밀을 거기에서 찾아내기 위한 것이다.   제1장 낮에서 밤으로   낭만주의자들은 꿈이나 또다른 주관적인 상태들을 통해 자신 속에 침잠함으로써 우리의 의식보다 '더 우리자신인' 우리의 부분을 만나게 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유일한 앎은 내적 심연으로의 침잠을 통한 앎, 개별적인 우리의 리듬과 전 우주적 리듬의 일치를 통한 앎,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 아닌 어떤 실재에 대한 유추적인 앎이다.     1. 켜진 촛불 우리의 무의식적 기억과 향수는 우리가 육체화되어 생리적으로 개인이 되는 탄생의 신비에 앞서는 어떤 존재의 무엇인가가 우리 속에 계속 남아 있다는 증거이다.     2. 지상의 미로 이중적 충동- 광활한 공간에 대한 갈망과 칩거생활에 대한 욕망, 감옥처럼 느껴지는 한계 밖으로의 도피와 그 울타리 안으로 되돌아 오게 만드는 현기증- 모리츠는 일찌감치 자신의 내부에서 그것을 발견한다. 그 충동은 그의 내적 삶의 원초적이고 심원한 리듬, 그존재의 풍부함과 비극성을 형성한다.     팽창에서 자기 내부로의 귀환, 신비주의적 내적일치에서 행동의지의 고갈로 이행되는 동일한 리듬이 각운을 이룬다.     내적 숙명의 자각   모리츠는 인간이 다른 능력을 가지게 될 미래에 대한 '마술적'이고 낭만적 생각에 이끌리기도 하지만, 개인의 저주로 여기는 신비적 염세주의의 유혹을 받기도 한다. 신비학자들 그리고 이어 낭만적 사상가들은 원초적 통일성이 죄로 인해 깨어졌다는 것을 인정한다.     자연에서 발효되어 요동치는 모든 생명과 모든 사랑을 자신 속으로 들여마신다고 믿을 정도로 그 생각을 밀고 나갈 수만 있다면, 자신을 동시에 꽃이자 초목이자 새이자 노래이고 신선함이자 유연함이며 쾌락이자 평온으로 느낄수만 있다면! 수축에 '활짝 피어남'이 대응한다. 최상의 순간은 낭만주의자들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모리츠에게도 무한속에서 자아가 완전히 망실되는 순간이 아니라, 팽창과 한정이 실재감 속에서 서로 만나게 되는 순간이다.     우리 존재의 팽창과 수축의 감정은 한순간 안으로 집약되며, 거기서 유래되는 혼합한 느낌에서 바로 그와같은 순간에 우리를 사로잡는 이상한 종류의 우울이 탄생된다.     그의 정신적 진화의 본질적인 문제는 두 세계, 그에게 상처를 입히는 실제 세계와 그가 안식처로 삼으려 했던 꿈의 '이상적인' 세계의 분열이었다. 거친 현실에 의해 손상을 입은 자아가 활짝 피어날 수잇는 자의적 세계를 창조하는 것, 그것은 낭만적 영혼의 첫 움직임이다.     이러한 믿음을 획득한 영혼이 삶으로 되돌아와 새로운 빛으로 그 삶을 변모시키고, 무덤너머에 있는 고등한 삶의 '여기와 지금'을 살아야 할 필요성을 인정하는 움직임 말이다. 꿈은 그에게 사람들이 은신처로 삼으려하는 하나의 다른 세계이다. 그것은 가시적 현실에 아직 마술적인 색깔들을 퍼뜨리지는 않는다.     그는 꿈이 의식적인 삶에 의해 망각된 기억의 수문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그 기억들을 거대한 전체속의 혼돈이었던 이전의 삶과 연관시키고, 기억의 고리를 끝까지 거슬러 올라갈 능력을 가진 사람은 개별적인 존재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어렴풋이 예감한다.   제2장 꿈, 자연 그리고 복귀     한개인이나 한 세기의 우주는 우리 정신의 이미지에 속하는 것이다.   다시말해 그것의 통일성은 자신의 통일성을 믿는 자에게만 존재한다.   '영혼'이라는 낱말에 그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전체적인 가치를 부여해 줄 수 있는 중심의 개념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통일성은 무한대로 분열한다.     합리주의자들의 오만은 가장 명백하지만 가장 깊이가 없는 우리의 능력에 집착하는데 있고, 신비주의자들과 시인들의 오만은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이르면, 자신이 자신을 한없이 초월하는 어떤 신비한 실재와 유사할 것이라는 확신에서 비롯된다.     이 오만은 결국 최고의 겸손이다. 그것은 인간조건의 불안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끊임없이 우리자신의 신비에 놀라움을 나타내며, 피조물은 알 수없는 운명에 따른다는 사실을 간파하여 그운명이 자신의 존재에 관해 우리에게 보내는 모든 신호들을 포착 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는다.     18세기 리히텐베르크와 모리츠, 하만과 헤르더, 젊은 괴테와 장 파울, 게다가 장 자크와 디드로까지, 그리고 경건주의자들과 신비론자들... 그들의 사고와 정서에 있어서도 그들 자신의 전 존재를 몰입시키는 일에만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앞선 경험적 시대와 뒤이어 오는 과학적 시대에 반하여 그들은 어떤 감정적 충격에 의해 강화되는 직관만을 믿는다. ......거대한 반항과 신비적 겸허함이 언제나처럼 어깨를 나란히 한다.     낭만주의가 모든 위험과 난파를 무릎쓰고, 또한 모든 운을 걸고 그 모험을 감행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보편적 통일성, 세계의 영혼, 절대적 수와 같은 대신화들을 부활시키고 보물창고와 수호신인 밤- 우리가 지고한 실재와 성스러운 대화를 나누는 성소인 무의식- 모든 광경이 변모하고, 모든 이미지가 상징과 신비적 언어가 되는 꿈과 같은 대신화들을 창조해낼 것이다.   3. 르네상스의 재발견   자신에 대한 앎만이, 이 지옥으로의 탐방만이 우리에게 신으로 이르는 길을 열어준다 - 하만   19세기초 자연철학자: 사변가,실험가,신비론자,최면술사, 연금술사   비이성주의의 태동- 독일 르레상스의 신플라톤 학파: 낭만적 물리학자: 케플러/파라겔수스/쿠자/아글파/브루노/ 등에게서 우주는 영혼을 지닌 살아있는 존재로 인식     본질적인 하나의 정체성이 전체의 발현에 불과한 모든 개별자들을 연결시킨다. 보편적 친화의 관계가 삶의 모든 발현들을 지배하고, 르네상스의 모든 사상가들이 왜 마술을 믿었는지 설명해준다. 그의 울림들이 단계적으로 만물전체로 퍼져나간다. 그래서 마술적 작용은 머나먼 곳에 있는 사물이나 존재들에게까지 아주 자연스럽게 도달한다.     자연과 인간사이에 존재하는 본질적인 유사는 각각의 운명이 별들과 성좌들의 흐름에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 사고할 수 있고 의식이 있는 피조물이라는 긍지, 우주가 스스로를 비추어 보고 자신을 알게되는 거울이라는 긍지 덕분에 인간은 만물의 중심에서도 특별한 자리를 점한다. 또한 거꾸로 인간은 자신의 중심에서 만물의 전체를 되찾는다. 안다는 것, 그것은 내부를 탐방하는 일이다.     신비의 길은 내부로 향한다. 영원이 그의 세계들 과거와 미래와 함께 있는 곳은 우리의 내부이지 그외의 어느 곳도 아니다.     자연을 창조한 신은 자신의 이미지를 본떠 인간을 만들었다. 바로 거기에 인간적 운명의 모든 비밀이 있다.창조주와 인간의 주요한 유사점은 둘다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갑자기 만물이 완전히 새롭게, 그들의 완전한 의미를 갖춘채 바로 거기에 있다. 그것들은 특별한 순간에만 우리에게 이러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시인은 바로 이순간들을 포착한다.     내부의 인간은 하나이다. 그의 모든 열정은 보이지 않는 관계들에 의해 연결되어 있고 한결같이 단 하나의 불꽃에 의해 생기를 얻는다.     헤르더의 생기론적 개념   합리주의에 반대하여 내적 감각의 직관, 혹은 모든 존재와 그가 속한 유기체 전체 사이의 교감 뿐만 아니라, 자연은 살아있기때문에 그것을 포착하기위해서는 이성만으로는 불충분한 것이다.     생물학적 생성의 법칙   모든 존재들의 진화와 정련의 대신비이고 증오와 사랑, 매혹 변모의 심연이다. 신은 자연과 역사라는 평행적인 두진화 속에서 우리에게 드러나는 영원히 생성중인 하니의 힘으로 이해된다. 그 두 움직임 속에서, 끊임없는 투쟁은 앞선 형태들 보다는 항상 더 우월한 형태들의 탄생과 변모를 야기 시킨다.     전체 사이의 교감   만물이 가지고 있는 유사성에 따른 리듬적 의미 - 인간의 본성과 신의 본성 사이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과 자연의 진화 사이에도 존재한다.     우주와 인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우주 자체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예술작품의 법칙은 바로 영원을 포착하되 그러나 순간 속에서 포착하고, 무한을 인식하되 그러나 대상 속에서 인식하는 것이다.     괴테는 사물을 통해 그들이 상징하는 것을 생각하기를 거부했고, 인간의 행위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행위는 최상의 비전으로 사물들 자체를 파악하는 것이라 주장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포착된 각 순간 속에서, 파악된 각 사물안에서 그가 도달하는 것은 영원이라고, 영구불변하는 본질이 아니라 살아 있는 , 생기에 찬 하나의 실재인 영원 자체라고 확신 하고 있다.     경험주의자들에 대한 신비주의자 낭만주의자들의 반발: 자연의 상징적 가치 그리고 감각적인 세계를 초월하는 실재하는 세계의 우의성. 그것은 즉각적인 우주의 기계적인 힘이 아니라 초월적인 동시에 내재적인 실재들에 대해 발휘되는 권능이다.     자연에 대해 진실인 것은 인간 존재에 대해서도 진실이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 둘 사이에는 단순한 유사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동일성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 유기체의 구조와 우주의 구조 사이에 무한히 많은 유사성이 설정된다.     4. 우주적 통일     고로 자연은 다양한 요소들로 분해될 수 있는 하나의 기계장치가 아니라 생기에 찬 하나의 유기체이다. 거기서 중요한 것은 동물적 삶과의 단순한 비교가 아니라, 외적 현상들의 다양성에서 하나의 기본적인 통일성을 찾고자 하는 욕구에 따랐던 모든 이에게 공통된 본질적 직관이다. 자연을 시간 속에서 바라볼때, 그것은 모든 개별적인 존재가 태어나고 죽으며, 총체에의 복종을 통해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무한한 순환으로 보인다.     공간 속에서의 자연은 모든 현상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 현상들 각각은 전체적인 삶을 반영하고 재생산 할 뿐이다.     오직 전체(절대)만이 살아 있다. 각 개인은 전체에 얼마나 가까이에 있느냐에 비례해서만, 다시 말해 엑스터시가 그를 그자신의 개체성에서 분리 시키는 한에 있어서만 살아있다: 바아더     그러므로 생명만이 유일한 실재이고 영원한 움직임은 신적인 것과 동일시된다. 하지만 이러한 영원한 생명의 유동은 방향이 있으며 맹목적인 힘과는 구별된다.     "각자의 종에서 완벽한 모든 것은 자신의 종을 넘어 다른 무엇, 비교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 괴테     생성 과정은 일정한 방향을 따라 진행되고, 개별적인 생명들의 진보는 생명 전체가 최초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믿게 해준다.     신비주의자들의 출발점   원초적으로 주어진 것은 신적인 통일성이고, 자신들은 그로부터 추방당했다고 느끼며, 신비한 결합을 통해 그것으로 되돌아 가고자 열망한다, 또한 낭만적 사상가들은 우주의 생성과정 자체를 상실된 통일성으로 돌아가는 도정으로 설명하려함.     분리된 존재는 악이다. 모든 개별적 존재는 전체의 불완전한 반영일 뿐이며, 자연이 그 전체성을 통해서만 실현할 수 있는 생명의 절대적 관념을 표현하고자하는 미완성의 시도일 뿐이다.     모든 것 속에는 개별화와 분리의 근원과 상실되었지만 미래에 되찾을 통일성의 씨앗이 함께 비밀스럽게 살고 있다. 하지만 오직 통일성 만이 실재하기 때문에 복귀를 향한 삶은 불가피한 것이다.     생명을 구성하는 모든 쌍들의 성향들 사이에서 하나의 방대한 유사체계가 세워진다. 낮과 밤의 리듬에 여러가지 층위의 성의 대립, 중력과 빛, 힘, 물질등의 원리들이 상응한다. 하지만 하나의 거대한 힘이 모든 존재를 서로 서로 그리고 전체와 연결시키며 전 우주적 생명을 관통한다. 자기에 대한 발견들에 영향을 받아 이힘은 친화력이라 명명한다.     우주-동물이라는 신플라톤 학파적인 인식과 더불어, 개별적인 영혼들을 통해 발현되거나,한 양상을 드러내는 , 모든 사물의 정신적 근원이고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보편적 영혼의 개념이 다시 태어난다. 이 영혼은 정신적 실재와 우주가 발현하는 근원이다. 관념들의 초월적 차원과 자연의 차원사이에는 더이상 심연은 없고 공통된 관계만 있을 뿐이다.자연은 인간 정신 속에서 의식적인 것이되는 , 그리고 창조의 측면에서 볼때는 분리될 수없는 통일성인 이 영혼의 어떤 무의식적인 행위와 동일시된다.     신이 모든 것안에 있다면, 그는 동시에 결코 우주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생명원리, 그의 중심, 그의 영혼으로서 우주안에 현존해 있는 진정하고 유일한 존재라고 그들은 말한다.     인간은 '모든 순간에 살아있고 그 내부에 있는 그 무엇도 결코 우주에서 고립되거나 분리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하나이고 모든 것은 하나의 내부에서 살아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인간은 자신 속에서 자연의 전체성을 반영하고 거기서 신을 발견한다. 분리된 각각 의 존재를 유기체 전체의 상징으로 만드는 유추에 우리의 정신을 우주의 완전한 상징으로 삼는 유추가 응답한다.     자연의 신비는 인간의 형태속에 전체적으로 표현되어있다. 인간은 지구의 멀고 먼 과거의 심연 속에서 만들졌다. 인간은 지구의 전 운명 그리고 무한한 우주의 운명을 자기자신의 운명처럼 그내부에 지니고 있다- 우주의 전역사가 우리 각자 속에 잠들어 있다. (슈터펜스)     인간은 자신의 내부로 내려가, 사랑과 언어, 시 그리고 무의식의 모든 이미지 속에서 그에게 아직 그의 기원들을 기억나게 할 수있는 다양한 모든 잔해들을 찾아야 한다. 그는 영혼 깊은 곳에서 신과의 유사점에 대한 감명을 모호하게라도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을 자연 속에서 재발견 해야만 한다. 잠들어 있는 이 씨앗들을 취해 경작해야만 한다.     신비한 현존을 드러내주는 꿈의 씨앗들   5. 삶, 그 밤의 양상들     인간 -소우주는 내적 감각 혹은 보편적 감각이라 명명된 단 하나의 인식방법을 갖춘 완벽한 유기체로 존재하기 시작한다. 신비신학의 교리에 따르면, 이 감각은 유추를 통해 우주를 알고 있다. 인간이 조화로운 자연과 유사하기때문에 그자신이 그대로 반영되는 현실에 도달하기위해서는 자기자신의 관조 속에 침잠하기만 하면 되었다.     현상태에 이르기까지 이감각은 지위지고 조각나기는 햇지만 우리 내부에 살아 남아 있다. 진정한 앎에 이르고자 한다면 그감각까지 내려가야한다. 그감각은 자연을 지배하는 역동적인 힘 -자기작용 같은 것-과 유사한데, 최면, 몽유, 시적 고양의 모든 상태들, 다시말해 엑스터시라 불릴 수 있는 자연의 리듬 자체에 자신을 유기하는 상태들 속에서 나타난다.     엑스터시 ekstase 우리를 평상적인 상태 밖으로 데리고 가서 일시적으로 다른 존재로 복원시켜 놓는다.     랭보: 시인은 본질적으로 견자다. 시는 예언이며 과거, 미래, 전체성에 대한 엑스터시 상태의 비전이다.     프시케: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로 생명원리, 영혼을 나타냄. 심리학적으로는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인 모든 정신현상의 총체를 가리킴.     영혼: 우리 마음 속의 현존, 우리를 한없이 초월하는 무엇인가의 신성하고 강력한 현존이다. - 마음 속에 현존하는 신     깨어있음과 잠의 교대는 우리가 우주적 생명에 속해있고 리듬의 유사가 보편적 관계라는 가장 뚜렷한 표현이다.     온갖종류의 '대지의 영향'에 의해 물리적 우주에 뿌리를 박고있는 우리는 모두 포로들이다. 하지만 이 포로들에게 는 그들을 묶고있는 사슬자체가 미래의 자유와 조화의 약속이다.     잠은 대지의 산물이며 깨어있음은 태양의 산물이다.     영혼은 잠에 빠져 있을때, 자연이라는 전체적인 유기체와, 그리고 동시에 바로 자신의 육체적인 생명과 보다 밀접한 공생관계를 이룬다. 인간은 주기적으로 두뇌가 지배하는 활동에서 벗어나 대지의 영향을 받던 최초의 상태로 되돌아간다.     고로 꿈은 생리학적 성장의 모든 무의식적 과정이 모호하게나마 예감되는 희미한 의식상태로, 전 우주에 생기를 불러넣는 생명의 유기적 존재로서의 행위와 가장 즉각적으로 접촉하게 되는 순간으로 인식된다.     꿈   꿈을 통해 우주적 실재에 참여 꿈은 아직 인간이 자연의 말씀이었던 황금시대에 인간이 처해있던 최초의 상태였고, 신화적 시간에 대한 이 무의식적 생각은 자연의 완전한 계시다. 꿈을 통해 우리는 신호들에 귀 기울이고, 우리 존재의 밤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유적들을 재발견해야만 한다.   6. 꿈의 형이상학     마음과 관능은 둘다 존재의 중심을 지칭하는데, '진정한 실재 속에서'사느냐 아니면 무의 변경에 있는 감각적인 현상의 세계즉 maya에 사느냐에 따라 다를 뿐이다.     인간은 자신의 마음 속에서 신을 지각하고 자신의 관능 속에서 우주를 지각한다.     트록슬러: 인간의 물질적인 본성은 우주 안에 스스로를 드러낸 신의 발현인 반면에, 그의 정신적 본성은 신에게로 회귀하려는 성향     최초의 통일성이 우주와 인간이라는 자연의 창조 속으로 전개되었다면, 자연의 모든 진화는 최초의 상태에 다시 도달하려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이 회귀성향의 최고의 표현은 본질적인 갈망들로 목말라하는 인간의 영혼이다.     깨어있음은 삶의 밝은 면이고 잠은 어두운 면이다. 하나는 신 속의 삶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 속의 삶이다. 이 교대의 삶은 죽음에 의해 해방되고 불멸에 이르러우주의 삶 속에서 새로이 자리잡을 때까지 계속된다.     꿈, 그것은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모든 실재의 중심 자체이다. 원초적이고 영원한 인간 내부의 심원이며 '생명의 행위 그자체'이다.     정신이 물질 속으로 내려오면, 상상력은 신에게서 나오는 모든 생성에 동반되는, 그리고 앎이라고 불리우는 그 꿈을 꾼다. 하지만 거꾸로 물질이 정신을 향해 상승하면, 앎은 자신의 '심연' 혹은 그의 완성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엑스터시라는 이름을 가진 상상력의 두번째 꿈이다.   그러므로 밤의 꿈은 영원한 꿈과 '유사한 것' 이상이다. 즉 그것은 영원한 꿈의 잔존물이고 우리 마음속, 우리내부 깊은 곳의, 최초의 통일성의 실제적 현존이다. 그것은 '깊이를 알수없고 탄생전과 죽음 후에나 그의 완전한 실재성을 가지게 되는 원초적 상태에 대한 암시'이다. 하지만 바로 이 순간 부터 이심연들은 우리 모든 삶의 근원이 된다.   7. 꿈의 상징 체계     1814년 슈베르트 : 발간 바아더 를 통해 신비주의적 사상에 입문     사랑의 법칙은 아무리 미세한 것이라 하더라도 자연적인 모든 과정을 지배한다. 금속은 공기와 결합하려는 욕망에 의해 녹슨다. 빛은 생명이 없는 존재들간에 이루어지는 사랑의 형태이고 소리는 동성의 사물들 사이의 우정이다.     우주적 순간들에서 사물들은 자기를 통해 보다 발달된 종류의 존재 속으로 통합시켜주는 활발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성질을 얻게 된다.     왜냐하면 생명은 어디에서나 하나이고 동일하기 때문이다. 식물과 동물의 삶은 자연의 대주기, 즉 연 일 시를 주재하는 동일한 리듬에 따라 조직된다.     '생명은 서로 대립하거나 조화를 이루는 보편적인 거대한 힘들과의 일치에 다름아니다.' 식물들에 있어서 '죽음의 순간이기도 한 개화의 순간은 동물적 존재에 대한 예감이다.' 이처럼 단계에서 단계로 모든 자연적 생성은 존재의 사다리 꼭대기에 있는 인간을 지향한다.     시적 리듬은 그자체로서 마법적 주문의 역할을 하고, 일깨어진 어떤 조화, 우리와 우리가 속하는 우주 사이에서 복원된 보다 심원한 어떤 교감을 나타내는 행복감을 발생시킨다. 노래는 낮의 기능들을 '잠들게 함'으로써 무의식적인 삶의 내적인 탄생을 촉진 시킨다.     운명은 어떤 신성에 의해 계산된 길을 따라 우리의 삶을 이끄는 숙명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한 생애를 구성하는 모든 순간들 사이의 미묘한 관계이다.     현 세계는 반대되는 두 힘에 의해 지배된다. 하나는 개별화를 지향하고, 다른 하나는 자석처럼 작용하여 모든 사물들 사이의 유대와 모든 사물과 신 사이의 유대를 창조한다. 인간의 영혼은 사랑을 통해 화해하게 되는 이 두경향의 포로이다.   8 무의식의 신화       프리드리히의 위대한 풍경화; '그는 풍경의 비극을 발견했다' -다비르당제르.   자신의 내적비극 , '황혼은 그의 기본요소였다' -카루스     인간의 본성을 찢어놓는 화해할수없는 이중성들에서 오는 번민에 사로잡혀 있는 그는 자신의 신앙심과 예술관이 동시에 표현되는 통일성의 획득을 통해 거기에서 벗어나고자 애썼다.     자연을 앞두고 있는 인간의 감정들을 표현하는 것.   화가가 우주적 유기체의 생명에 대해 가지고 있는 앎.   이 두야망을 밀접하게 일치시켜야 했고 만물 속에 있는 신의 존재를 짐작하게 해주기위해 그토록 생생한 인상을 우리의 인상을 결합시켜야 한다.     이상적인 풍경은 만물의 배면에 있는 무한을 우리에게드러내는 영혼의 주관적 상태들과 유한한 세계를 향해 있고 형태에 주의를 기울이는 객관적 비전을 동시에 일깨워준다.   카루스의     전 자연은 외부로부터가 아니라 내부로 부터, "영원한 법칙들에 따라, 끊임없이 변모하는 우주를 전체적으로 창조하는 영원한 생성, 모든 삶의 근원"에 의해 생기를 얻는다.   "이생명의 원동력이 우주의 변화 뿐만 아니라 아주 미세한 유기적 성장 속에서도 표출된다."   전체와 부분 사이에는 카루스가 리듬의 일치라는 이미지를 통해 표현한 유사의 관계가 존재한다. 천체들의 삶을 특징짓는 주기들의 광대한 리듬이 '신적인' 항구성을 가지고, "우리 자신의 내적 삶의 극도로 작은 입자들의 존재 속에도 반영된다."     유기체의 각 부분은 그의 내적 구조에 있어서 전체적 유기체와 흡사하다. 모든 부분들은 서로 동일하고, "생체의 각부분의 성장은 아주 단순한 하나의 동일한 원초적 형태의 극히 다양한 증식에 의해 결정된다." 이 형태는 바로 완벽한 원형, "전체라는 관념을 표현하고, 그결과로 일종의 자율을 누리는 " 세포이다.     하지만 생명의 무한한 흐름은 방향이 없는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무궁한 상승, 극에 도달하는 완벽은 끊임없이 태어나는 형태들에 그 의미를 부여한다.     그는 물리학과 우주발생론의 중심에 가치의 개념 재도입.   식물에서 동물 , 인간에 이르기까지 생명이 새로운 형태를 창조함에 따라, 이 존재들과 이에 생기를 불어 넣는 신과의 관계는 밀접.   " 자신의 종에서 완벽한 모든 것은 그 종을 초월하여 다른 , 비교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되어야 한다."는 괴테의 생물학적인 원칙, 카루스의 사상에도 낯설지 않은 개별적 진보를 통한 분화와 향상의 원칙인 것만은 아니다.   신적인 것은 모든 것 속에 존재하지만, 신은 동시에 세계의 중심이고 영혼, 혹은 생명과 그부분들의 원동력이다.   무의식     의식적인 정신적 삶에 대한 앎의 열쇠는 무의식이라는 영역속에 있다.     관념, 영혼은 모든 피조물에 형태와 생명을 부여하는 제1원인이다. 하지만 개인의 전 형성과정은 그 개인 자신의 의식에서 벗어난다. 유기적 진전과정, 성장, 생리적 형성은 무의식이라는 생기에 찬 거대한 실재속에 속한다.     "무의식은 우리가 자연이라는 이름으로 객관적으로 알고 있는 것을 지칭하는 주관적 표현이다."     그로므로 무의식은 그의 심원한 본질 속에서는 비개인적인 실재, 영원하고 끊임없는 생성, '신의 창조적 활동' 같은 것이다.     유기체적 통일   의식 속에서 기억과 예견이라고 부르게 될 시간들의 상관관계의 깊은 이유.     무의식은 의식의 본질적인 형태들에 대한 예시를 자신 속에 지니고 있다.   식물의 씨앗과 동물의 태아는 미래에 있을 성장들을 모조리 그안에 내포하고 있다.   카루스는 이러한 유기적 무의식의 예견에 프로메테우스의 원리라는 이름 부여.     다른 한편으로 유전은 과거가 현재의 진화 속에서 살아남아 활동하고 효율적으로 작용한다는 사실 증명 이것이 기억의 무의식적인 형태 , 에피메테우스적 원리이다.     그러므로 삶을 이루는 모든 순간들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이러한 유기적 기억은 그 내용물이 개인적 삶의 틀을 넘어서 존재의 근원들 자체에 이르는 일종의 무의지적 기억이다.         개인적인 삶은 '인류'라는 유기체의, 더나아가서 우주적 유기체의 한 부분이다.   인류의 영혼 그리고 세계 영혼의 모든 움직임은 필연적으로 각각의 개별적 영혼을 거쳐 지나가야만 하고 무의식적으로 그것의 형상을 만들어야한다.     따라서 절대적 무의식은 우리 모든 삶에 있어서 극히 중요. 그것은 우리 모두의 본능적 삶과 내부에 있는 , 개별적 진화와 개인적 독창성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닌, 우리 종 전체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지휘한다.( 카알 융 과 일치)     본능의 형태로 각자의 삶 속에 잔존해 있는 무의식적 과정의 에피메테우스적 원리는 인간의 전 역사를 통한 경험을 영속화 시킨다. 유리환 정화들 속에서 투여된 개인들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피조물 자격으로 우리가 우주와 관게를 맺는 모든 순간에 있어서, 우리는 무의식이라는 이 보물에서 방어수단과 삶의 창조적 근거를 빌어온다.     시적 창조와 사고의 일례, 직관- 가장 심원한 창조력은 개인의 의식적인 삶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 속에 조상 대대로 경험을 통해 축적해온 것을 간직하고있는 무의식의 집단적 저장소안에 있기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의식은 그 과정의 절대적 필연, 어떠한 학습도 필요로 하지 않은 즉각성, 우주적 생명 그리고 과거와 미래와의 법촉으로 특징지어진다.     감정은 무의식적 삶에 섞어들고 그 모든 특성을 함께하는 '의식적 영혼의 어떤 특수한 색조'이다.       감정을 통해, 영혼은 모든 영혼들의 공통된 통일성과 관계하고 있는 심원한 영역에 가 닿는다.   감정중 최고의 형태인 사랑은 "분리된 존재로 부터의 최초의 해방이고 전체로 되돌아가는 첫걸음이다."   꿈의 귀환적 상상력     꿈을 통한 이미지의 순환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귀환은 서로 다른 두가지 양상   혈액의 순환과 유사한 첫번째 순환은 어떤 특수한 이미지나 감정을 망각속에 잠기게 하고, 이 이미지와 감정은 의식적인 삶 속에 새로이 작용하기 위해 변화하고 풍성해져 망각에서 다시 솟아오른다. 그사이 그것들은 발아되기 이전의 식물의 씨앗의 삶과 비교되는 잠재적 삶을 산다.     하지만 이런 분리된 이미지들과의 순환과는 별도로 보다 본질적인 또다른 리듬이 의식전체를 주기적으로 무의식의 밤 속에 잠기게 한다.   이 리듬은 "관념이라는 영원한 존재의 대 주기들, 우리의 삶과 죽음이라고 부르는 주기들을 재현"할 뿐이다. 꿈으로의 귀환은 식물적 삶 혹은 "아직 이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유아의 무의식적 삶"과 유사한 하나의 의식없는 잠이었던 태초의 상태로의 귀환이다.     "영혼이 의식적인 동시에 무의식적인 이중의 삶을 끊임없이 영위하고" 이 양극사이를 영원히 오갈수있도록 잠은 그에 앞선 깨어있음을 통합한다.   그래서 카루스에 따르면 "표면적인 비존재 속의 존재의 연속성"이야말로 심리적 삶의 가장 큰 신비들 중 하나이다.     잠은 외부세계에 대한 감각과 의식의 부분적인 퇴거에 의해 유발된다. 이처럼 식물적인 삶 속에 침잠함으로써 '영혼의 자연적인 부분들'은 새로운 활력을 취하고, 동시에 '자연 전체와의 보다 활발한 관계'가 무의식 속에 생겨난다.     일단 나라는 경계들이 무너지면, 존재는 모든 생명의 근원인 위대한 무의식과 보다 즉각적인 방법으로 소통하게되고, 한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전달된 기억들의 불분명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경험은 의식의 세계에 우주에 대한 모호하고 심원한 인식을 가져다 준다.     그에게 있어 의식적 영역은 여전히 자율성을 지닌 이물질처럼 잠속에서 잔존하는 것이 아니다.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내밀한 결합이 이루어지고 그 결합에서 꿈이 생겨난다.     유기체의 어떤 내적 불균형들은 실제로 어떤 특별한 감정들을 발생시키고, 이감정은 다시 어떤 내적 이미지, 어떤 시적 상징을 일깨워 그로써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자연 속에서 발현된 신적인 관념인 영혼은 스스로는 시간과 공간을 알지 못한다.   영혼이 자연에서 퇴거함에 따라, 발현된 세계에 대한 의식이 흐려짐에 따라 영혼은 "생각들의 연속, 즉 식간과 그것들의 병렬, 즉 공간이 사라지고, 그자리에 이제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는 모든 존재의 통일성이 들어서는 것"을 보게된다.     전체 유기체의 의식적 부분이 인격 개성 그리고 자유가 생겨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유기체의 무의식적 부분은 그 유기체를 일반적 생명과 밀접하게 연관시키는 것, 요컨데 그를 보편화 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무의식이기때문에 우주의 모든 움직임에 의해 관통되고 그것에 참여한다. 더 나아가서 가가운 것과 먼것, 그리고 공간에 속하는 모든 것 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 그리고 시간에 석하는 모든 것도 그안에서 서로 만나고 섞인다.     "영혼의 건강한 성숙에 적합한 우리의 습관적 한계"속에서 우리는 과거와 미래가 실제로 모든 현순간에 존재하고, 멀리 떨어져 공간들이 서로 수없이 많은 방식으로 영향을 끼치는 보편적인 생명의 얼마되지 않는 부분이외에는 우리의 감각으로 지각할 수 없다.   하지만 '정상적'인 우리 상태의 어떤 변모에 힘입어 우리는 보편적인 생명의 다른 양상들 , "우리로 하여금 멀고 먼 곳들 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와도 접촉을 가지게 할 수 있는 양상들"을 지각할 수 있는 능력을 예외적으로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무의식 속에 깊이 침잠해 있기때문에 영혼이 바로 무의식에 고유한 특성인, 만물을 연결하는 그물망 속에, 공간적인 모든 것과 시간적인 모든 것의 상호침투에 속에 더 깊이 침잠하게 되는 " 예외적인 상태들 속에 신비롭거나 불가사의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ㅜ여기서 유기적 참여와 의식적 참여를 구분해야한다.   예감과 통찰력       예감   우주적 감각의 조건인 우리의 무의식적인 삶은 자신의 자율성을 유기함으로써 보편적 생명의 순환 속으로 삼켜진다.   그리고 그때그것은 인체의 변모와 동일하게 보편적 생명의 변모들에 영향을 받는다.   우리는 이처럼 인류 혹은 자연의 생명의 순환 속에 침잠하여, 일반인은 전혀 느낄 수 없는 ,   멀리 발생한 혹은 미래에 발생할 어떤 사건들이나 다른 작용들에 영향을 받아 이상한 불안에 빠지는 사람들을 보게된다.   이러한 예외적인 사실의 설명할 수 없는 지각은 그들의 정신상태를 완전히 변모해 놓는다.   바로 이것이 흔히들 예감이라 칭하는 것이다.     통찰력   다른 한편으로 우주와 인류의 모든 생명과 가지는 이 관계가 인간의 의식적인 영혼 속에 드러나 새로운 종류의 민감한 지각의 형태를 취한다. 그때 그빛이 항상 우리 각자를 관통하고 있지만, 우리가 평상시에는 지각하지 못하는 보편적 생명의 양상들이 의식에 도달하는 것은 더이상 모호한 감정들로서가 아니라 분명하게 한정된 생각들로나타나는데 이것을 통찰력이라 부른다.     무의식을 통해 옛시대의 인류, 우리시대의 인류 그리고 우리 종의 미래적 운명들도 매순간 우리를 변모시킨다.   그리고 꿈의 이미지들 속에서 모호하게나마 의식에 도달하는 것이 바로 이 변모들이다.     카알 융은 이러한 낭만적 철학자 카루스의 직관을 이어간다.   '무의식 본래의 언어'인 이미지들에 말할때, 카루스는 슈베르트의 직계상속인이다. 하지만 슈베르트의 천재성이 최초의 직관 속에 있었다면, 카루스의 힘은 이러한 각각의 통찰력을 정신적이고 자연적인 삶에대한 전체적 비전에 연결시켜주는 일관된 구성에 있다.   명상   신의 의식에 그의 전능함을 되돌려주는 이 명상은 "사랑의 힘과 깊이로 심연을 메우고 극복하기위해" 열심인 우리의 노력이 도달할 수있는 최고의 진보이다.하지만 일단 이 정상에 도달하게되면 정신은 인간적인 삶 그자체로 되돌아 올수있다. 정신은 자신의 엑스터시로 인해 아름답게 변모된 인간의 삶을 발견하게 된다. 가장 고귀한 종교적, 시적 영감들을 통해 얻게 되는 것이 이 변모이다.     이 각성된 영혼은 눈먼 유기적 생명의 심연 뿐만 아니라 신의 생명의 무한 속에서 '제2의 눈'을 담고 있을정도의 능력을 갖추고 있을 것이다.     우리안에 불멸하는 것은 관념, 영혼, 우리의 생성의 법칙이지 생성 중에 획득된 모든 특성들이 아니다. 개인적인 삶에서 진보는 연속되는 모든 경험들, 감정들,사상들,관념이 신에게로 회귀하는 데에 소용이 되게하는데 있다. 유기적인 무의식은 생성의 모든 단계를 결합시키고, 그것들과 일치되며, 영원히 변함으로서 그 경계가 이동하는 과거와 미래로 나뉠 수밖에 없는 반면, 정신은 현재를 포착하기에, 다시말해 그본질에 있어 영구불변하는 관념 그자체를 응시하기에 이른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 속에 그것의 발현을 통해서만 관념을 알 수 있다.     < 우리 영혼의 관념은 지고의 존재의 이중적 빛의 방사를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존재속에 함축하고 있다. 이 발현 중 하나는 무의식적으로 창조하는 신적인 원동력으로 우리 외양의 끊임없는 변모를 결정한다. 다른 하나는 지속되는 하나의 내적 현재 속에 영원히 존재하는 정신으로, 우리의 자유로운 반쪽이고, 다른 반쪽의 꽃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신과 맺고있는 이중적 관계가 설명된다. 만물에 속하는 우주적 존재들로서 우리는 무의식에 의해 신의 실재속에 뛰어든다   9. 순수 심리학에서 형이상학으로     낭만주의 사상가들의 첫번째 공리는 오직 전체만이 존재를 절대적으로 부여받았다고 단언하는 것이다.     분리된 존재는 악이다. 하지만 다양한 방법으로 잃어버린 통일성에 이르는 길을 되찾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이의 매개체는 무의식이다.     무의식은 - 그 설명이 의식 속에서 찾아질 개인적 영역으로 귀착하지 않고   - 우리의 에너지가 솟아오르는 근원이 있는 초-개인적인 실재이고,   우리가 보편적 유기체와 접촉을 가지는 지점이다.     꿈과 다양한 열광들, 언어에서 인칭의 변화와 같은 사고들과 시적인 번득임들, 광기의 창조들과 유아기의 상상력들, 이모두가 태초에 자연의 생명과 함께한 협화음의 소중한 유물인 동시에, 결국에는 우리를 태초의 조화의 품으로 되돌려줄 근원들이다.     독일 낭만주의 시인들은 사상가들에 앞서 제각기 독특하지만 모두 밤의 가장자리에 이르는 다양한 길을 따라 무의식의 모습들을 포착하고자 시도했다.   이러한 무의식의 양상들을 일깨우는 도구인 그들의 예술을 그들 자신의 개인적인 운명과 동일시했다는 바로 그 이유때문에 그들은 영웅적인 정열을 가지고 그일에 달려 들었다.     정신속에 내재해 있는 집단적 무의식(신화) , 즉 우주적 통일성과 개인적 이미지 (직관) 즉 보이지 않는 세계의 상징적 발현이 낭만주의의 근원적 미학이다.   이는 창조적 상상력의 원천인바 무의식과 의식의 조화로 나타난다.   이는 자연과 영혼의 합일에 이른다.   10 성운과 혜성     낭만주의의 핵심적소재(근원) - 창조적 상상력의 원천 - 꿈의 미학   1) 집단적 무의식 (신화)   2) 개인적 이미지(직관)     우리의 상상력은 세계를 형성시킨 거대한 창조력의 알 수 없는 하나의 응답이다.   그의 활동이 우리에게 아주 생생한 행복감을 부여해 주는 것은 '정신이 창조한 이미지들이 바로 정신이고 삶'이기 때문이다.     휠더린   그가 전력을 다해 지향하는 소유는 낭만주의가 획득하고자 할 그 마술적 권능이 아니다.그가 얻고자 하는 것은 질적으로 다른 관조적이고 미학적인 소유이다.   세계를 소유한다는 것은 만물이 갑자기 완벽하고 은혜로운 조화의 관계속에서 드러나 보일정도로 순수한 관조와 아름다운 비전을 되 찾는데 있다.      
2    활과 리라 / 옥타비오 파스 댓글:  조회:2027  추천:0  2019-06-30
활과 리라   옥타비오 파스 Octavio Paz Lozano     옥타비오 파스 로사노(Octavio Paz Lozano, 1914년 3월 31일 ~ 1998년 4월 19일)는 멕시코의 시인, 작가, 비평가 겸 외교관이다.   멕시코 시티 출신인 그는 진보적인 문화인이었던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인해 문학에 관심이 높았으며 19세 때에 자신의 첫 시집인 《야생의 달 (Luna Silvestre)》을 발표했다. 그는 1937년에 내전이 한창이던 스페인에서 열린 반(反) 파시스트 작가 회의에 참가했으며 1938년에 멕시코로 귀국, 멕시코의 신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는 1944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으며 1945년에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갔다.   그는 1946년에 외교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시집 《가석방 상태의 자유 (Libertad bajo palabra)》 (1949년 작)와 《독수리인가? 태양인가? (¿Águila o sol?)》 (1951년 작), 《격렬한 계절 (La estación violenta)》 (1956년 작), 《일장석 (Piedra de sol)》 (1957년 작), 《도롱뇽 (Salamandra)》 (1962년 작)을 비롯, 수필집 《고독의 미궁 (El laberinto de la soledad)》 (1950년 작)과 《활과 리라 (El arco y la lira)》 (1956년 작), 《느릅나무에 열린 배 (Las peras del olmo)》(1957년 작) 등을 발표했다.   그는 1962년에 인도 주재 멕시코 대사로 임명되었지만 1968년에 멕시코 정부가 급진파 학생들이 일으킨 시위를 무력으로 탄압한 것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사퇴했다. 이후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와 텍사스 대학교, 하버드 대학교 등에서 교수로 근무하면서 문학 활동을 전개했으며 시집 《하양 (Blanco)》 (1968년 작)과 《동쪽 비탈길 (Ladera este)》 (1969년 작), 《공기의 아들들 (Hijos del aire)》(1981년 작)을 비롯, 수필집 《결합과 분리 (Conjunciones y disyunciones)》 (1970년 작), 《원숭이 문법학자 (El mono gramático)》 (1974년 작) 등을 발표했다.   그는 1981년에 세르반테스 상을 수상했으며 1990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 시집 《가석방 상태의 자유 (Libertad bajo palabra)》 (1949년 작) 《독수리인가? 태양인가? (¿Águila o sol?)》 (1951년 작) 《격렬한 계절 (La estación violenta)》 (1956년 작) 《일장석 (Piedra de sol)》 (1957년 작) 《도롱뇽 (Salamandra)》 (1962년 작) 《하양 (Blanco)》 (1968년 작) 《동쪽 비탈길 (Ladera este)》 (1969년 작) 《공기의 아들들 (Hijos del aire)》(1981년 작) 수필집 《고독의 미궁 (El laberinto de la soledad)》 (1950년 작) 《활과 리라 (El arco y la lira)》 (1956년 작) 《느릅나무에 열린 배 (Las peras del olmo)》(1957년 작) 《결합과 분리 (Conjunciones y disyunciones)》 (1970년 작) 《원숭이 문법학자 (El mono gramático)》 (1974년 작)             서론     시와 시편     시는 앎이고 구원이며 힘이고 포기이다.   시의 기능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며 시적행위는 본래 혁명적인 것이지만   정신의 수련으로서 내면적 해방의 방법이기도 하다.   시는 이 세계를 들어내면서 다른 세계를 창조한다.   시인의 선택받은 자들의 빵이자 저주받은 양식이다.   시는 격리시키면서 결합시킨다.   시는 여행에의 초대이자 귀항이다.   시는 들숨과 날숨이며 근육 운동이다.   시는 공을 향한 기원이며 무의 대화이다.   시의 양식은 권태와 고뇌와 절망이다.   시는 기도이며 탄원이고 현현이며 현존이다.   시는 악마를 쫓는 주문이고 맹세이며 마법이다.   시는 무의식의 승화이자 보상이고 응집이다.     시 속에서 모든 객관적 갈등들이 해소되고   인간은 마침내 일시적으로 스쳐가는 것에 이상의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을 얻게 된다.     시는 경험이며 느낌이고 감정이며 직관이고 방향성이 없는 사유이다.   시는 우연의 소산이자 계산된 결과물이다.   시는 규칙에 복종하며 동시에 다른 규칙들을 창조한다.   시는 광기이며 황홀경이고 로고스이다.   시는 어린시절로 돌아가는 것이며 성교이고 낙원과 지옥 그리고 연옥에 대한 향수이다.     시는 아날로지다.   시편은 세상의 음악이 울리는 소라고둥이고   시편의 운율과 각운은 전체적인 조화의 상응이자 울림이다.     천의 얼굴로 나타나지만 결국 시편은   빔 – 인간의 모든 작위의 헛된 위대함에 대한 아름다운 증거-을 숨기고 있는 가면일 뿐이다.     우리는 살아있고 고통받는 어떤 것에 대한 표현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시가 우연의 응축으로 주어질 때나 혹은 시인의 창조적 의지와는   다른 힘과 여건의 결정체로 주어질 때 우리는 시적인 것과 만나게 된다.   시인이 시적 흐름을 유도하거나 변형시킬 때 현저히 다른 어떤 것 즉,   작품의 출현을 보게되는 것이다.   시적인 것이 무정형 상태의 시라면 시편은 창조물 즉, 일어선 시이다.   시는 단지 시편이라는 형식을 통해 자신을 완전히 드러낸다.     시편은 시를 품고 있고 시를 유도하며 시를 방출하는 언어적 유기체이다.   형식과 본질은 동일하다.     부분이 곧 총체이다.   각각의 시문은 유일하며 환원 및 반복 불가능한 것이다.     하나 하나의 시편은 창조의 순간에 소멸하는 기술에 의해서   창조되는 유일한 대상이다.     스타일은 모든 창조적 의도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모든 예술가는 역사적인 공통의 스타일을 뛰어 넘으려 한다.   시인은 그 시대의 공통된 자산, 그 시대의 스타일을 이용하고 적용하고 모방하지만   그러한 모든 자료들을 변화시켜 독창적인 작품을 만든다.     시인은 스타일을 갖지 않는다.   그때 생긴 이미지는 공동재산, 즉 미래의 역사가와 문헌학자의 전리품이 된다.   이런 저런 비슷한 돌들이 사용되어 예술적 스타일이라고 불리는 건축물이 세워지는 것이다.     문학적 언어, 스타일은 일상 언어보다 더 정확하고 혁신적이다.   그러나 그는 언어를 뛰어 넘는다.   더 적절히 말하면 반복불가능한 시적 행위,   즉 이미지, 색깔, 리듬, 비전등을 시편으로 용해시킨다.     시편이 가지는 유일하고 반복 불가능한 성격은   그림이나 조각, 소나타나 춤, 기념탑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그림과 송가, 교향악과 비극을 구별짓는 차이점을 뛰어넘어   그 모두가 동일한 우주를 선회하도록 하는 창조적 요소가 있다.     조형예술과 조음예술은 이러한 ‘의미하지 않음’에서 출발하지만   양가적 유기체인 시편은 의미를 품은 존재인 말에서 출발한다.       우주의 주기를 나타내는 개념으로서의 한 쌍의 음과 양은   철학이고 종교이며, 춤이고 음악이며, 의미로 충만한 주기적 운동이다.   또한 이것은 비유적 언어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인간의 행동을 특징짓기 위하여   조화 주기성, 혹은 대조법과 같은 표현을 내포한다.     모든 작품은 의미화작용에 닻을 내린다.   인간의 손에 닿음으로서 성질이 바뀌고 작품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지향성에 물들게 되어 어딘가를 향하게 된다. 인간의 세계는 의미의 세계인 것이다.   애매성 모순 광기 혹은 분규따위는 허용하지만 의미의 결핍은 용납하지 않는다.     활동범위와 직업이 무엇이든, 예술가이든 수공업자이든,   인간은 원료, 즉 색깔, 돌, 금속, 말을 변형시킨다.   변형이란 원료들이 맹목적인 자연의 세계를 포기하고 작품의 세계,   다시 말하면 의미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조각을 새기고 계단을 만들기 위해 인간이 사용한 재료인 돌에 일어난 변화는 무엇인가?   조각에 쓰인 돌과 계단을 만드는데 쓰인 돌이 동일하며   이것이 모두 동일한 의미체계를 이루고 있다하더라도 변형의 속성은 다르다.   산문작가와 시인의 손에 놓인 언어의 운명이 그러한 차이점이 뜻하는 바를 보여준다.   산문작가가 되기보다 시인이 되는 것이 더 쉽다.   산문에서 언어는 많은 의미의 가능태들을 희생시키고 그 중의 단 하나와 동일화를 시도한다.   빵은 빵이고 포도주는 포도주일 뿐이다.   이러한 작용이 바로 분석적 특성이며 이것의 실현에는 반드시 폭력이 수반되는 법인데   왜냐하면 말은 다수의 잠재태의 기의(significado)들을 포함할뿐 아니라   다수의 방향성과 의미들의 가능태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시인은 결코 단어의 다의성을 거역하지 않는다.   산문과 일상언어가 강요한 구속으로 불구가 되었던 언어는 시 속에서 원초의 상태를 회복한다.   본성의 회복은 총체적이어서 의미론적 가치 뿐만 아니라 음악적이고 조형적인 가치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렇게 자유를 찾은 말은 농익은 과일처럼 혹은 하늘에서 폭발하기 직전의 불꽃처럼 자신의 내부,   즉 모든 의미들과 암시들을 드러낸다.   시인은 말을 자유롭게 풀어주고 산문작가는 말을 구속한다.   이런 현상은 형식, 소리, 색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돌은 조각으로 변형될 때 광휘를 얻게 되며 계단으로 만들어질 때 빛을 잃게 된다.   색깔은 그림 속에서 광채를 내고 몸의 운동은 춤을 출 때 빛난다.   시적 기능은 기술적 조작과 정 반대이다.   시적기능에 힘 입어 재료가 본성을 회복하게 됨으로서 색깔은 더욱 색깔다워지고   소리는 충만한 소리가 된다.   시적 창조에는 재료나 기구에 대한 구속을 찾아 볼 수 없으며   오히려 그것들에 자유를 부여한다.   말, 소리, 색깔 그리고 그 박의 재료들은 시의 궤도에 진입하자마자 변화를 겪는다.   여전히 의미작용과 의사소통이 도구이면서 ‘다른 사물’로 변한다.   기술의 영역과는 반대로 진행되는 변화는 원래의 본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로 들어간다.   ‘다른 사물‘이 된다는 것은 실상 ’원래의 사물‘이 되는 것이며   원래의 사물이란 태초부터 실재적인 그런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조각이 된 돌, 그림의 빨강, 시편의 말은 순수하고 단순한 돌이나 색, 말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고 뛰어넘는 어떤 것을 구현한다.   그것들은 일차적인 가치, 원래의 무게를 잃지 않은 채, 피안에 닿는 다리가 되며   일상의 단순한 언어로는 말 할 수 없는 기의들의 또 다른 세계로 열리는 문이 된다.   다의적인 존재, 즉 시적인 말은 온전히 있음-리듬, 색깔, 기의-이며 동시에 다른사물, 즉 이미지이다.   이미지는 듣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에게 이미지의 성좌를 유발시키는   이상한 힘으로서 모든 예술을 시적으로 만든다.   시는 의미와 의미의 전달이면서 언어를 넘어서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언어를 넘어서는 어떤 것은 언어를 통해서만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림은 회화적 언어 이상의 어떤 것일 때 시가 된다.   그때의 작품은 기술적 성과를 넘어서는 어떤 것, 즉 이미지이며 반복불가능한 시이다.   위대한 화가는 위대한 시인으로   그가 사용하는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사람이다.   결국, 수공예업자가 자신의 도구라고 할 수 있는 돌, 소리, 색깔, 말을 이용하는 것과 달리   예술가는 그 재료들의 고유한 본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그것들에게 봉사한다.   언어의 봉사자는 그언어가 무엇이든간에 언어를 초월한다.   이런 역설적이고도 모순적인 기능이 이미지를 생산한다.   예술가는 이미지의 창조자, 즉 시인이다.   이미지가 됨으로서 말은 말이면서 동시에 언어,   즉 역사의 의미화 작용으로 주어진 체계를 뛰어 넘는다.   시편은 말이고 역사이며 역사를 초월한다.     모든 독자들은 시편에서 무언가를 찾는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이미 자신의 내부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의 만남이다.   우리들의 열정과 일상의 간만(干滿)에 모든 것이 화해하는 순간이 있다.   적대적인 것들은 사라지지는 않지만 한 순간 융합한다.   그것은 판단중지하는 것이며 이순간 시간은 멈춘다.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러한 화해는   ‘아난다(ananda) 혹은 하나 속에 노니는 쾌락이다.   틀림없이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그런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언젠가 찰라의 순간에 이와 비슷한 것을 어렴풋이 느낀다.   우리는 모두 어린이였다. 우리는 모두 사랑을 해 보았다.   사랑은 인간에게 열려있는 일치와 참여의 상태이다.   사랑의 행동에 의해 의식은 부서지기 전에 장애물을 넘어 충만한 상태로 일어서는 파도와 같다.   이러한 충만한 일어섬 속에서   위를 향해 일어서는 힘과 중력등 모든 힘은 미묘한 균형 상태에 도달한다.   동중정(動中靜).   사랑하는 사람의 육체를 통하여 한 순간 충만한 생명을 엿보는 것처럼   시편을 통하여 찰나적으로 멈추어 있는 시의 번갯불을 본다.   그 순간은 모든 순간을 포함한다.   흐름을 멈추지 않고 시간은 정지하며 자기 자신으로 가득찬다.     자력을 띤 사물.   그 덕분에 우리는 시적 경험에 참여할 수 있다.   시편은 개인의 성질이나 기질 그리고 성향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는 가능성이다.   그래서 시편은 가능성일 뿐이다.   모든 시편이 갖는 공통점은 참여이며 이것없이는 결코 시가 될 수 없다.   독자가 진실로 시편을 소생시킬 때마다 그는 시적이라고 일컬는 상태에 참여 한다.   그러한 경험은 이런저런 형태를 취할 수 있지만 언제나 자기자신을 뛰어넘는 것이며   시간의 벽들을 부수고 다른 ‘나’가 되는 것이다. (他者性의 발현)     시편은 이미지를 소생시키고 직선적 시간개념을 부정하고 시간을 역전시킨다.   시편은 중재 역할을 한다. 그 덕분에 시간의 시조인 태초의 시간이 순간 속에 육화된다.   직선적 시간은 순수한 현재로 변화하는데,   순수한 현재란 쉬지 않고 자신을 새롭게 창조하며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좋은 시 한편을 읽었을 때 느끼는 감정,   높은 파도처럼 분출하여 직선적 시간이 쌓아놓은 둑을 붕괴시키는 그 충만했던 감정은   독자들의 삶을 통해 여전히 생생하게 간직된다.   시편은 순수한 시간에 도달하는 통로이며   실존의 생명수에의 잠항이다.   시는 끊임없이 창조하는 리듬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아니다   제 1부     시 편 el poema     언 어       언어를 대하는 인간의 맨 처음 태도는 기호와 표상된 대상이 동일하다는 신뢰였다.   말을 한다는 것은 말하는 대상을 재창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되면서 사람들은 사물과 이름 사이에 깊은 골짜기가 생겼음을 알아챘다.   대상과 기호가 동일하다는 믿음이 사라지자마자 언어에 대한 학문들은 그들의 자율성을 획득했다.   인간의 역사는 말과 사유 사이의 관계로 환원될 수 있다.   모든 철학의 모호성은 철학이 언어에 치명적으로 예속되어있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철학자들은 말이란 실재를 포착하기에는 너무 조악한 도구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말없이 인간은 포착되지 않는다.   인간은 말로 된 존재이다.     또한 말도 인간처럼 태어나고 죽기 때문에 말을 이용하는 모든 철학은 역사에 예속될 수 밖에 없다.   하이데카의 말처럼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언어없이 사유는 존재할 수 없으며 앎의 대상 역시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이 미지의 실재에 부딪혔을 때 제일 먼저 하는 것은 그것에 이름을 붙이는 일,   즉, 세례하는 것이다.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것은 우리가 모르는 것이다.   모든 배움은 사물의 진정한 이름을 배우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고   우리에게 지혜의 문을 열어주는 중요한 열쇠가 되는 말의 계시로 끝난다.   혹은 무지의 고백인 침묵으로 끝나기도 한다.   그리고 침묵조차도 무언가를 말하는데,   침묵은 무가 아니라 여전히 기호들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말은 의미화 작용이다.   말은 표상적 작용으로서의 기호이며 상징이기도 하다.   의미화 작용은 지시적이고 감정적이며 표상적이다.   언어의 본질은 다른 것을 통하여 경험의 한 요소를 표상하는 것,   즉 기호 혹은 상징과 의미되거나 상징된 사물 사이의 양극 관계인 것이며 그러한 관계에 대한 의식이다.   언어와 신화들은 실재에 대한 광범위한 은유들이다.     언어의 본질은 상징적인 것인데   은유는 실제의 한가지 요소를 다른 것으로 표상하기 때문이다.   말 하나하나와 혹은 구와 절은 하나의 은유이며 동시에 마법적인 도구이다.   즉, 말이란 다른 사물로 변화하기 쉽고 또 건드리는 것을 변용시키는 어떤 것으로,   예컨대 태양이라는 말이 빵이라는 말을 건드리면 빵은 별로 변한다.   그리고 태양자신은 빛을 내는 음식이 된다.     말은 상징을 발산하는 상징이다.   인간은 말 덕분에 인간을 다른 존재로 만들어 주고   자연의 세계에서 분리시켜주는 원초적 은유 덕분에 인간이 될 수 있다.   인간은 언어를 창조할 때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존재이다.   언어를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은유가 된다.       이미지와 운율을 띤 언어적 형상의 계속적 산출은 일상어의 상징적 특성, 시적 성격을 증거한다.   언어는 자발적으로 은유로 구체화 되려는 경향이 있다.   매일 말들은 서로 충돌하여 금속성의 불꽃을 튀기거나 혹은 파랗게 빛을 내는 짝들이 된다.   말들로 수놓아진 하늘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천체들이 생겨난다.   차가운 비늘 위로 채 마르지 않은 물기와 침묵을 떨구는 말들과 구들이   언어의 수면위로 날마다 솟아오른다.     시는 언어를 초월하려는 시도다.   시는 일어서는 언어다.   시는 원초적 언어로 돌아가려는 시도이다.   즉, 말하는 것이 곧 창조하는 것이었던 시간으로의 복귀이다.   혹은 사물과 이름이 동일하던 때로 돌아가는 것이다.   미래에 총체적 시의 실현이 이루어 진다면   그것은 원초적 시간으로 돌아가는 것을 가정할 때만 가능할 것이다.         말과 대상 사이의 거리-말이 지시하는 것의 은유로 변화할 때,   어쩔 수 없이 말에 강요되는 거리-는 다른 현상의 결과이다.   즉,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을 획득하자마자   자연 세계에서 분리되었고 자신의 내부에서 타자가 되었다.   말이 지시하는 실재와 말이 동일하지 않은 것은 인간과 사물 사이에   그리고 더욱 심층적으로는 인간과 인간의 존재 사이에,   자신의 의식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말은 가교이며 이 다리를 통하여 인간은 자신을 외부 세계와 분리시키는   거리를 없애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러한 거리는 인간 본성의 일부를 구성한다.   거리를 소멸시키기 위하여 인간은 인간됨을 포기하고 자연 세계로 돌아가거나   인간됨의 한계를 초월하여야 한다.     모든 역사 속에 잠재되어 있는 양자의 시도는   근대인에 이르러 더욱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이런 연유로 현대시는 양극사이를 운동하는데,   한 쪽 극은 마법적 가치에 대한 철저한 긍정이며 다른 한 쪽은 혁명적 소명이다.   이러한 양극으로의 운동은 인간 자신의 조건에 대한 인간의 반역이다.   역사적 실존이 의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역사적 실존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혁명적 시도는 소외된 의식의 회복으로 나타나며 동시에 역사적 세계와 자연의 세계에 대한   진정한 의식을 갖는 것이다.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법칙에 매몰되지 않고,   의식은 실존을 결정해 나가게 된다.   그리고 그때 인류는 두 번째의 결정적 도약을 이룰 것이다.       언어는 시이며 모든 말은 비밀스런 발화점이 건드리자 마자 폭발할   준비를 하고 있는 은유의 전하를 숨기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말이 갖는 창조적 힘은 그것을 발화하는 사람에게 있다.       무심의 언저리-텅빈 충만   정신은 불가분의 총체이다.   만일 정신과 육체 사이에 경계선을 그을 수 없다면 ,   의지가 끝나고 순수한 수동성이 시작하는 곳을 분별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모든 정신작용은 총체적 방법으로 표현된다.   각각의 기능에는 다른 모든 기능들도 함께 있는 것이다.   절대적인 수용의 상태로 침잠해 있다는 것이 욕구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십자가 성 요한의 증언 “없음을 욕망하며” 는 여기서 무한한 심리학적 가치를 획득한다.   즉, 욕망의 힘에 의하여 없음 상태가 능동적이 되는 것이다.   열반 nirvana 도 이와 똑같이 능동적 수동성의 조화를 요구하고 정중동의 조화를 요구한다.   수동적 상태들- 내면적 빔의 경험으로부터 그와 반대되는 존재의 충만의 경험에 이르기 까지-은   객체와 주체 사이의 이원성을 깨기 위한 결연한 의지의 행사를 요구한다.     완벽한 요가 수행자는 적당한 자세로 앉아 움직이지 않고   “무심하게 자신의 코끝을 바라보면서”   망아의 상태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으로 자신을 제어한다.   무심의 언저리를 건드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는 알고 있다.   무심의 경험은 방심자, 은둔자, 그리고 심약자까지도 인간의 원형으로 제시하는   서구적 문명의 지배적 경향에 반대된다.   무심한 사람은 근대세계를 부정한다.   그는 전체를 얻기위해 자신의 전체를 건다.   지적인 면에서, 그의 결단은 생의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자하는 욕망 때문에   자살을 하는 사람의 결단과 다르지 않다.   무심한 사람은 이성과 소극적 안일함의 다른 편에는 무엇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무심이란 이 세상의 반대편에 대한 매혹이다.   의지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방향을 바꿀 뿐이다.   즉, 의지는 분석적 힘에 봉사하는 대신에, 분석적 힘이 자신의 목표를 위하여   정신적 에너지를 억압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침묵의 음악” 혹은 노자의 “텅빈 충만”이란 말을 상기해보자.   수동적 상태는 침묵과 빔의 경험일 뿐 아니라 능동적이고 충만한 순간의 경험이기도 하다.   즉, 존재의 핵심으로부터 이미지가 샘 솟는 것이다.   “나의 가슴은 한밤중에 꽃을 피운다”라고 아즈텍인의 시는 말한다.   자발적 마비는 정신의 다른 부분을 상승시킨다.   한 영역의 수동성은 다른 영역의 능동성을 야기시키며   분석적이고 담론적이며 혹은 추론적인 경향에 맞서 상상력의 승리를 가능케 한다.         시적 창조는 언어에 대한 위반으로 시작한다.   이러한 작용의 첫 번째 행동은 말들을 지탱하고 있는 뿌리를 뒤흔드는 일이다.   시인은 일상적인 일들, 그리고 그것들과 맺고 있는 연관 관계에서   말을 뿌리채 뽑아내어 일상적 언어의 획일적인 세계와 결별시킨다.   이때 단어들은 이제 막 태어난 것처럼 생생한 것이다.   두 번째 행위는 말을 원초적 상태로 복귀시키는 것이다.   이때 시는 소통의 대상으로 변한다.   시에는 두 개의 적대적인 힘이 존재한다.   하나는 언어로부터 말을 뿌리채 뽑아내는 상승 혹은 적출의 힘이며   또다른 하나는 말을 다시 언어로 복귀시키려는 중력의 힘이다.       이데올로기들과 관념 그리고 여론이라 부르는 것들이   의식의 가장 바깥 표피층을 구성하는 반면에,   시는 존재의 가장 심층에 거주한다.   시는 공동체의 생생한 언어, 신화, 꿈 그리고 열정들,   다시말해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성향들로부터 자양분을 공급 받는다.   시는 민중의 토대를 세우는데,   왜냐하면 시인은 언어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시원의 샘물을 마시기 때문이다.   사회는 시에서 자신의 존재의 토대, 즉 자신의 맨 처음의 말과 마주친다.   반면에 진정한 시인은 밑에서 위로, 공동체의 언어에서 시의 언어로 움직인다.   작품은 곧바로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가 합일의 대상이 된다.       시의 모호성   모든 창조는 모호성을 야기한다.   시적 즐거움은 창조의 어려움과 유사한 어떤 어려움을 이겨내야만 주어지는 것이다.   참여는 재창조를 암시한다.   독자는 시인의 몸짓과 경험을 재창조한다.   시인은 그의 말을 발견할 때, 그 말이 이미 자기 자신 속에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그도 이미 그 말 속에 있엇다.   그것은 처음부터 자신과 같이 있었으며 실제로 그에게 속하는 말과   책과 거리에서 배운 다른 말 사이에서 머뭇거리며 주저한다는 뜻이다.   시인의 말은 시인의 존재 자체와 혼동된다.   시인이 그의 말이다.   창조의 순간에, 우리 자신의 가장 비밀스런 부분이 의식에 떠오른다.   창조는 우리의 존재와 떼어 놓을 수 없는 어떤 말에 빛을 비추는 것이다.   다른 말이 아니라 꼭 그말인 것이다.   시는 필연적이며 교체할 수 없는 말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이미 만들어진 작품을 고치는 일은 매우 어렵다.   어떠한 수정이든 재창조이다.   즉 우리의 내면을 향하여 우리가 걸어온 과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암시한다.   단어 하나에 상처를 입히면 시 전체가 상처를 입는다.   쉼표 하나를 고치면 건물 전체가 위태로워진다.   시는 교체 불가능한 요소들로 이루어진 살아잇는 총체이다.   따라서, 진정한 번역은 재창조에 다름 아니다.         계시   어디선가 발레리는   “시는 감정적 외침이 발전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발전과 감정적 외침 사이에 모순적 긴장이 존재한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말은 그러한 긴장이 곧 시라는 사실이다.   발전의 주체는 감정적 외침이 시사하는 총체적이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그러한 실재 앞에서 자기 자신을 창조해 가는 언어이다.   시는 감정적 외침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듣는 귀이다.   고통 혹은 열락의 외침은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혹은 우리를 즐겁게 하는 대상을 가리킨다.   그것을 가리키지만 그것을 숨긴다.   즉 저기에 있다라고 말하지 무엇 혹은 누구라고 말하지 않는다.   감정적 외침이 가리키는 실재는 결코 이름 붙여질 수 없다.   그것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상태로   이제 막 나타나거나 혹은 이제 막 영우너히 사라지려는 순간처럼 저기에 있다.   금방이라도 무언가 닥쳐올 것같은 급박함,   발전한다는 것은 질문이나 대답이 아니라 소집을 의미한다.   말하는 입이며 듣는 귀인 시는 감정적 외침이 지시만 하고   이름 붙이지는 못하는 것을 계시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게시이지 설명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이 설명이라면, 실재는 계시되지 않고 해명될 뿐이며 언어는 단지 이해될 뿐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불구가 될 것이다.   감정적 외침인 경우에, 말은 ‘빔’을 향하여 던져진 외침이다.   거기에는 대화자가 부재한다.       우리가 언어를 이용할 때마다, 우리는 언어를 훼손 시킨다.   그러나 시인들은 말들을 이용하지 않는다.   그는 말에게 봉사하는 자이다.   말에 봉사함으로서 말에게 말의 충만한 본성을 되돌려주고   말의 자신의 존재를 회복하게 한다.   시 덕분에 언어는 원래의 상태를 회복한다.   먼저 일반적으로 사유에 의해 손상된 조형적이고 음성적인 가치를 회복하게 되며,   이어서 정감적인 가치를, 마지막으로는 의미를 나타내는 가치를 회복한다.   언어를 순화하는 것은 시인의 과제이며, 이것은 언어에게   원래의 본성을 되돌려주는 것을 뜻한다.   1부 시편     리듬   단어들은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인 존재들처럼 행동한다.   단어들은 언제나 ‘이것 그리고 이것과 다른 것’을 말하고 동시에   ‘저것 그리고 저것 너머의 것’을 말한다.   그러나 사유는 단어 다스리기를 단념하지 않는다.   사유는 부득이 단어들을 사용하면서 끊임없이 단어들을   자신의 법칙으로 환원시키기를 단념하지 않는다.   언어에 대한 신뢰, 즉 사물과 이름은 동일한 것이라는 믿음은   인간의 자발적이고 원초적인 행위이다.   단어가 가지는 힘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가장 오래된 신앙들에 대한 회상이다.   즉, 자연엔 영이 깃들여 있고, 각각의 사물은 스스로의 생명을 갖는다.   객관적 세계의 닮은 꼴 언어에서도 역시 영이 깃들여 있다.   언어도 우주처럼 부름과 응답의 세계이다.   밀물과 썰물, 합일과 분리, 들숨과 날숨의 세계인 것이다.   어떤 단어들은 서로 끌어당기고, 어떤 단어들은 서로 밀치면서,   모든 단어들은 서로 상응한다.   일상어는 별과 식물을 다스리는 것과 비슷한 리듬에 따라 움직이는   살아있는 존재들의 집합이다.   가능한데까지 자동 기술법을 실천해 보았던 모든 이들은   스스로의 자발성에 맡겨진 언어들의 기이하고도 당혹스러운 상호 연관 관계를 알고 있다.   불러드림 evocation과 불러모음 convocation.   브르통은 ‘단어들도 사랑한다.’고 말한다.   시인은 이미지들의 강에 휩쓸려서 우리는 순수한 실존의 끄트머리를 건드리고   우리의 존재가 세계의 존재와 최종적으로 합일하는 통일된 상태를 예감한다.   조수에 대항하지 못한 채 의식은 요동한다.   그리고 갑자기 모든 것은 최종적인 이미지에 닻을 내린다.   벽이 우리의 행로를 가로막고 우리는 침묵으로 돌아간다.   이와 반대의 상태들-의식의 지나친 긴장, 언어에 대한 날카로운 감정,   이해력들이 부딪혀 불꽃 튀기는 대화들, 내면적 성찰이 무한으로 증대되는   투명한 화랑들-역시 하늘로부터 떨어져 내리는 느닺없는 구의 출현을 돕는다.   그것은 불멸의 정진 뒤에 주어지는 보상같은 것이다. 이성의 저항 뒤에 열리는   통로를 지나 우리는 조화로운 지대를 밟는다. 거기서 모든 것은 용이해 지고,   모든 것은 말없는 대립이며 기다렸던 암시가 된다.   우리들은 개념들이 운을 맞추는 것을 느낀다.   그때 우리는 사유와 구도 역시 리듬, 부름, 울림이라는 것을 알아챈다.   사유한다는 것은 적절한 음률을 타는 것이며, 번쩍이는 물결이 우리를 건드리자 마자   몸을 떨게 된다. 노여움, 열광, 분노, 그리고 우리를 우리 밖으로 팽개치는 모든 감정은   똑같이 우리를 해방시키는 힘을 갖는다.   전기 같은 힘을 가진 예기치 않은 구가 솟아오른다.   “시선이 불꽃을 튀겼다.”   “입으로 번개와 불꽃을 토했다.”........   저주받은 불순한 단어들이 난폭한 별처럼 폭발한다.   우주적 질서를 뒤흔드는 저주와 폭언.   사실 그러한 구들을 발설한 것은 우리가 아니었고, ‘자신 밖에’ 있었던 ‘타자’였다.   사랑의 대화들도 동일한 특징을 보여준다.   사랑하는 연인들은 종종 ‘말을 잃어버린다.’   모든 것-휴지와 감탄사, 웃음과 침묵-은 동시에 발생한다.   대화는 합의 이상의 어떤 것, 즉 화음이다.   연인들 자신은 보이지 않은 입이 발음한 두 개의 조화로운 각운이다.   말은 처음에 말을 부르지 않아도 다가와서 서로 결합한다.   이러한 결합과 이후의 결별은 순수한 우연의 소산이 아니다.   즉, 어떤 질서가 말들 사이의 친밀성과 거부감을 다스린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모든 언어 현상의 밑바탕에는 리듬이 존재한다.   단어들은 어떤 리듬의 원리에 따라 서로 모이고 흩어진다.   만일 언어라는 것이 비밀스런 리듬에 의해 지배되는 구가 끊임없이 변전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리듬의 재생산은 우리에게 말을 다스리는 힘을 줄 것이다.   언어의 역동성은 시인으로 하여금 말 사이에 존재하는 끌어당김과 밀침의 힘을   사용하게 함으로써 언어의 우주를 창조하도록 이끈다.   시인은 아날로지에 의거하여 창조한다.   시인이 모델로 삼는 것은 모든 언어를 움직이는 리듬이다.   리듬은 자석이다. 리듬을 재생산할 때-박자, 각운,변주,유사어   그리고 다른 방법을 통하여 - 시인은 말들을 불러 모은다.   불모의 상태에 뒤이어 언어의 풍요로운 상태가 이어진다.   내면의 수문이 열리자 구들은 샘물처럼 혹은 분수처럼 솟아오른다.   시인과 마법사   시적 작용은 주문(呪文), 주술 그리고 다른 마법의 방법들과 다르지 않다.   시인의 행위는 마법사의 행위와 매우 유사하다.   시인과 마법사는 아날로지의 원리를 이용한다.   양자는 실질적이고 즉각적인 목적을 위해 행동한다.   그들은 언어가 무엇인지 혹은 그 본질이 무엇인지 묻지 않으며,   목적 그 자체를 위하여 그것들을 이용할 뿐이다.   철학자, 기술자, 현자와 달리 마법사와 시인은 자싱의 힘을 스스로에게서 추출한다.   모든 마법적 작용은 정화를 위한 고통스런 노력을 통하여 얻어지는   내면적 힘을 필요로 한다.   마법적 힘의 원천은 이중적이다.   즉, 마법을 위한 공식과 그 밖의 방법들, 그리고 마법사의 정신적인 힘,   곧 자신의 리듬과 우주의 리듬을 조화시켜주는 정신적 조율이 필요하다.   시인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시인의 언어는 자신 안에 있으며 오직 그에게만 드러난다.   시적 계시는 내면적 탐색을 포함한다.   내적 성찰 혹은 분석과 전혀 다른 탐색이다.   탐색이라기보다는 이미지의 출현에 적절한 수동성을 야기시킬 수 있는 정신적 활동이다.   빈번히 마법사는 번역자와 비교된다.   마법사의 모습이 여전히 우리에게 매력적인 이유는   그가 신을 부정하고 인간의 의지를 긍정한 최초의 인간이었다는 사실에서 연유한다.   다른 모든 반역은 최초의 이러한 반역에서 출발한다.   주술사의 모습에는 과학자와 철학자의 모습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비극적 긴장이 존재한다.   마법사에게서 신은 가정이 아니며, 신자의 경우처럼 달래고 사랑해야할 실재도 아니다.   그것은 유혹이거나 정복하거나 비웃어야 하는 힘이다.   마법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항하여 인간의 힘을 긍정하는   위태롭고 신성모독적인 기도(企圖)이다.   신들에게 대항하는 마법사는 인간의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있다.   그를 위대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고독이며   사회성의 결여로 언제나 종국적으로 불모를 초래하는 것도 이 고독이다.   고독은 한편으로 그의 비극적 결단의 증거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긍심의 증거이다.   결과적으로   자신을 뛰어넘지 못하는 , 다시 말해, 인간을 위한 선물로 변모되지 못하는 모든 마법은   자신을 삼켜버리며 끝내는 창조자까지 삼켜버린다.   마법사는 인간을 수단으로, 힘으로, 잠재된 에너지의 핵심으로 본다.   마법사의 반역은 고독한데,   그것은 마법적 행위의 핵심이 힘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법사에 대항하여 프로메테우스가 떠오르는데,   그는 서구적 상상력이 창조한 최고의 인물이다.   그는 마법사나, 철학자나, 현자가 아니라 영웅이며 불을 훔친 자이고 박애주의자이다.   프로메테우스적 반역은 인간이라는 종의 반역이다.   바위에 묶인 영웅의 고독에는 암시적으로 인간 세계로의 귀환이 내재되어 있다.   반면 마법사의 고독은 사회로 귀환하지 않는 고독이다.   마법, 즉 힘에 의한 힘의 탐색은 자신을 파멸시킴으로서 끝을 맺기 때문에   마법사의 반역은 불임이다. 근대사회의 드라마도 이와 다르지 않다.   마법사의 이중성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한편으로, 인간은 우주와 생생하게 관계 맺으려 하는 것으로, 일종의 보편적인 교감이다.   다른 한편으로, 마법의 실현이 암시하는 것은 힘의 탐색 바로 그것이다.   마법은 ‘무엇을 위하여’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마법사가 우주적 힘과의 의사소통과-인간이 우주적 힘과 하나가 될 때를 제외하고-   인간과 의사불통 사이에서 찢겨진 인물인 이유도 이 때문이다.   마법은 생명-우주 전체를 가로지르는 동일한 흐름-의 친교 관계는 긍정하지만   인간사이의 친교는 부정한다.   시인은 마법사가 아니지만 언어를 ‘생명의 사회’-카시러가 조화로운 우주의 마법적 비전을   정의한 것처럼-로 보는 시인의 개념은 마법의 개념에 접근한다.   시편은 주술도 아니고 주문도 아니지만, 안수기도의 방법으로   시인은 어넝의 비밀스런 힘들을 일깨운다.   시인은 리듬을 통하여 언어를 유혹한다.   하나의 이미지는 또 다른 이미지를 유발한다.   시는 리듬 위에 세워진 언어적 질서, 즉 구들의 집합이다.   리듬은 측량이 아니며 우리 밖에 있는 어떤 것도 아니다.   리듬에 우리를 부어넣고 ‘어떤 것’을 향하여 우리를 발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리듬은 의미이며 무엇이가를 말한다.   시의 단어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그러한 단어들이 의지하고 있는   리듬이 이미 말하고 있다.   그러한 단어들은 줄기에서 꽃이 피는 것처럼 리듬에서 솟아난다.   리듬과 시 언어의 관계는 춤과 음악적 리듬 사이의 관계와 다르지 않다.   모든 춤은 리듬이며 모든 리듬은 춤이다.   리듬에는 이미 춤이 있고 춤에는 이미 리듬이 있다.   제의와 신화적 이야기는 리듬과 의미를 분리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리듬은 어떤 힘들을 매혹시켜 사로잡고,   다른 힘들을 쫒아내는 즉각적인 목표를 갖는 마법적 방법이다.   또한 리듬은 기념하기 위한 것 혹은 좀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신화를 재생산 하기 위한 것이다., 우주적 운율의 닮은꼴로서   말 그대로 인간이 원했던 것- 기우, 풍요로운 사냥, 혹은 적의 죽음-을   마들어 낼 수 있는 창조적 힘이다.   춤은 이미 씨앗 상태의 표상을 품고 있다.   리듬은 측량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비전이다.   리듬은 인간의 모든 창조의 뿌리이다.   신화와 제의의 이중적 현실은 그들을 품고 있는 리듬에 의지한다.   그리고 각각의 문명은 원초적 리듬의 발전으로 환원될 수 있다.   그대 중국인들은 우주를 두 리듬의 혼합으로 보았다.   ‘한번은 음이고, 한번은 양인 것을 도라고 한다.’   그라네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음과 양은 서양적 의미의 관념이 아니다.   또한 단순한 소리나 표시도 아니다.   우주의 구체적인 표상을 품는 기장이며 이미지이다.   실재들의 창조적 역동성을 갖는 음과 양은 서로 바뀌고, 서로 바뀌면서 총체를 낳는다.   그러한 총체 속에는 아무것도 말소되거나 추상화 되지 않는다.   각각의 모습이 특수성을 잃지 않고 생생하게 존재한다.   음은 겨울이며 여성들의 게절이고 집이며 그늘이다.   그것의 상징은 문門 이며 어둠 속에서 성숙하는 것, 숨어 있고 닫힌 것이다.   양은 빛이며 농사일이고 사냥이며 낚시이고 대기이며 남성들의 시간이고   열려 있음이다.   더위와 추위, 빛과 어둠,   “충만한 시간과 결핍의 시간, 남성적 시간과 여성적 시간-용의 모습과 뱀의 모습-   그러한 것이 생명이다.“   우주는 상호 대립하며 교류하고 보완하는 리듬의 양가적 체계이다.   리듬은 식물의 성장과 제국의 팽창, 수확의 증대와 제도의 확장을 다스린다.   리듬은 우주의 생생한 이미지이며 우주의 법칙이 현시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한번은 음이고 한번은 양인 것이 도이다.   우주를 리듬의 모임, 흩어짐, 그리고 다시 모임으로 느낀 것은 중국인 만이 아니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우주론적 개념들은   원초적 리듬에 대한 직관에서 싹튼 것이다.   리듬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 결정적 사실- 유한한 존재, 죽을 운명의 존재,   그리고 언제나 ‘어떤 것’을 향하여, ‘다른 것’ 즉 죽음,신, 사랑하는 사람,   우리와 닮은 사람을 향하여 던져진 존재-에 대한 가장 오래되고 지속적이며 단순한 표명이라는 사실이다.   모든 리듬은 하나의 태도이며 의미이고 세계에 대한 사이하고 독특한 하나의 이미지이다.   각각의 리듬은 세계에 대한 구체적 비전이다.   이미지이고 의미-삶에 대한 인간의 자발적 태도-인 리듬은 우리 밖에 잇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표현하는 우리 자신이다.   운율은 구체적인 시간성, 즉 반복될 수 없는 인간의 생명이다.   단테는 항성들과 영혼들을 움직이는 리듬을 사랑이라고 인식했다.   노자와 장자는 상보적 대립물로 된 다른 리듬을 듣는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리듬을 투쟁으로 여겼다.   리듬은 철학이 아니라 철학이 의지하고 있는 세계의 이미지이다.   우주적 리듬과 신화     어떤 사회나 두 개의 달력이 존재한다.   하나는 일상의 삶과 세속적 행위들을 다스린다.   다른 하나는 신성한 시간, 제의 그리고 축제를 다스린다.   세속적 날짜와 달리 신성한 날짜는 측량단위가 아니라 정해진 장소에   현현하는 초자연적 힘을 싣고 있는 생생한 실재이다.     모든 문화는 ‘시간의 종말’에 대하여 공포를 느껴왔다.   ‘출입(등장과 퇴장)의 제의’가 존재하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고대 멕시코인들에게는 불의 제의는 새로운 시간의 도래를 유발시키기 위한 목적을 가진다.   별의 언덕에 모닥불이 피워지자마자 그때까지 어둠 속에 잠겨있던 멕시코 시 전체가 반짝였다.   이 순간 다시 한 번 신화가 현현했다.   공허한 연속성이 아니라 생명의 창조적 시간이 재생하는 것이다.   삶은 적어도 그 순간이 다 소모할 때까지는 지속될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시간의 재생은 숙명적인 것이 아니다.   성배grial의 신화처럼 사라져 버리지 않으려고, 사멸하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   낡은 시간의 완고함을 이야기하는 신화들이 있다.   이러한 신화들에게는 불모가 지배한다.   평원은 고갈되고 여자들은 아이들을 낳지 못한다.   ‘나감(퇴장)의 제의’는 낡은 시간으로 하여금 젊은 후계자에게 평원을 내놓도록 강요한다.   이러한 신화는 거의 언제나 젊은 영웅의 구세주적 개입에 근거한다.   신화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이 서로 얽히는 매듭이다.   신화는 과거이며 과거는 또한 미래이다.   신화들이 발생하는 시간적 영역은 인간의 모든 행동이 끝나고 수정 불가능한 과거가 아니라   언제나 현실화 될 수 있는 가능성들을 품고 있는 과거이다.   신화는 원형적 시간에서 진행된다.   원형적 시간이란 신화가 다시 재현될 수 있는 시간을 의미한다.   신성한 달력이 리듬을 갖는 이유는 그것이 원형적이기 때문이다.   신화는 현재에 실현될 준비가 되어있는 미래적 과거이다.   시간의 일상적 개념에서 시간은 미래를 지향하는 현재이지만 숙명적으로 과거에 닻을 내린다.   신화적 질서는 용어들을 전도시킨다.   과거는 현재에 닻을 내리는 미래가 된다.   현재 속에서 총체적인 현존 속에 과거와 미래의 모든 시간을 껴안고 있는 원초적 시간에   도달 할 수 있는 문들이 있지만, 세속적 달력은 그 문을 닫아버린다.   그러나 신화는 인간의 삶을 자신의 총체 속에 포괄한다.   리듬을 통하여 원형적 과거를,   다시 말해 현재에 현현할 준비가 되어있는 잠재적 미래인 과거를 현실화 한다.   우리가 ‘좋았던 시간’은 다른 모든 시간들처럼 흐름 속에 죽어간다.   반대로 신화적 시간은 죽지 않고 반복되어 현현한다.   시간에 대한 다른 표상들로부터 시화적 시간을 구별짓는 것은 원형적 특성이다.   언제나 오늘이 될 수 있는 과거로서의 신화는 언제나 반복하여 현현할 준비가 되어있는   부동하는 실재이다.     리듬의 반복에 의해 신화는 되돌아온다.   이 주제에 대한 고전적 연구에서 위베르와 모스는 신성한 달력의 불연속적 성격을 보여주며   리듬의 마법에서 이러한 불연속성의 기원을 발견한다.   “시간의 신화적 표상은 본질적으로 리듬같은 것이다.   종교와 마법에서 달력의 역할은 시간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리듬화시키는 것이다.“   좀더 엄밀히 말하면 ‘원초적 시간’을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리듬의 반복은 원초적 시간의 초대이며 소환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원초적 시간을 재창조하는 것이다.   모든 신화들이 시는 아니지만 모든 시는 신화이다.   신화에서처럼, 시에서도 일상적 시간은 변화를 겪는다.   내용이 없는 동질적 연속성의 시간이 리듬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비극, 서사시, 노래 등의 시는 반복하여 순간을 재창조하는데,   그 순간은 원형적 사건 혹은 그 사건들의 집합이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다.’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시인에게 지나간 것은 다시 돌아올 것, 다시 현현할 무엇이다.   과거에 그랬던 것이나 지금 그러한 것이 아니라 지금 되고 있는,   지금 생성되고 있는 시간이다. 재생되는, 재현되는 과거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간은 두 가지 방법으로 재현된다.   첫째는 시적 창조의 순간에, 그리고 둘째는 독자가 그 순간을 새로히 소환하여   시인의 이미지를 소생시켜 재창조 할 때이다.   시편은 어떤 입술이 리듬이 깃들인 구들을 반복하자마자 현실화되는 원형적 시간들이다.       “시인의 일은 일어난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났으면 하고 바랐던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시가 다스리는 영토는 ‘제발....했으면’이다.   시인은 ‘욕망하는 자이다.’   결과적으로 시는 욕망이다.   그러나 그 욕망은 가능한 것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며,   사실인 듯한 것으로 표현되는 것도 아니다.   이미지는 ‘그럴듯한 불가능’이 아니다.   즉 불가능한 것에 대한 욕망이 아니다.   시는 실재에 대한 배고픔이다.   욕망은, 최고의 욕망인 사랑의 충동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끊임없이 거리를 지워버리려 한다.   이미지는 욕망이 인간과 실재 사이에 걸쳐놓은 다리이다.   제발 ‘...같은, 제발 ....했으면’을 지워버리고 말하는 다른 은유-   즉, 이것은 저것이다.-가 있다.   욕망이 행동을 취하는 곳은 바로 여기이다.   비교하거나 유사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환원 불가능해 보이는 사물들의 최종적인 동일성을 드러내고   더 나아가 유발시킨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진실되게 보이는 것은 바로 시가 재창조 된다는 의미에서   모방적 창조일 때이다.   자신의 경험을 재창조할 때는 서정시인 조차도 미래에 다가올 과거를 소환한다.   시인은-어린아이, 원시인들, 그리고 요컨대 가장 깊숙하고 자연적인 자신의 본능을 붙잡아 매었던   고삐를 자유롭게 풀어 놓았을 때의 모든 인간들처럼 – 직업적 모방자라고 확신해도 역설은 아니다.   그러한 모방은 독창적 창조이다.   시간의 근원에 있고 모든 인간의 밑바닥에 있는 어떤 것,   시간 그 자체와 혼동되고 우리 자신과 혼동되는   그리고 우리 모두의 것이면서 동시에 유일하고 독특한 어떤 것을   불러내고 부활시키고 그리고 재창조하는 것이다.     시적리듬은 미래이며 현재인 그러한 과거, 즉 우리자신을 현재화actualization하는 것이다.   시구는 살아있는 구체적인 시간이다.   그것은 리듬이며 근원적 시간이고 영원히 재창조되는 것이다.   운문과 산문   리듬은 언어를 구성하는 가장 오래되고 항존하는 요소일 뿐 아니라   일상어보다 앞서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언어는 리듬의 소산이라고 말 할수 있다.   혹은 적어도 모든 리듬은 언어를 암시하거나 예시한다.   그렇다면 산문과 시를 구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리듬은 모든 언어적 형태에서 자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   그것이 가장 충만되게 나타나는 것은 시이다.   언어는 리듬이 되려고하는 본래의 경향을 갖는다.   마치 신비스런 중력의 법칙에 따르려고 하는 것처럼,   말들은 자발적으로 시로 돌아간다.   또한 사유가 언어인 한에 있어서, 사유도 동일한 매혹을 경험한다.   사유를 이리저리 방황하도록 내버려두면 결국 리듬으로 돌아간다.   이성은 교감으로 변화되며, 삼단논법은 아날로지로 변환되고   이성적인 행진은 이미지의 흐름으로 변화된다.   그러나 산문작가는 일관성과 개념적 명료성을 추구한다.   그래서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이미지로 명시하고자 하는 운율의   숙명적인 흐름에 저항하는 것이다.   시는 모든 시대에 속한다.   반면 산문은 특정사회의 고유한 표현 형태라 말할 수 있다.   시는 진보나 진화를 무시하며, 시의 기원과 종말은 언어의 기원이나 종말과 혼동된다.   원래 비판과 분석의 도구인 산문은 점진적인 성숙을 요구하는 것이며   일상어를 길들이고자 하는 일련의 기나긴 노력 뒤에 생겨나는 것이다.   시가 닫혀진 질서처럼 보이는 반면에 산문은 열리고 직선적인   건축물의 모습이 되려고 한다.   발레리는 산문을 행진에, 시를 춤에 비유하였다.   산문이 상징하는 기하학적인 형상은 선이다.   이와 반대로 시는 원형 혹은 구형으로 주어진다.   자기 자신에게 닫혀 있는 어떤 것, 즉 자족적인 우주로,   그안에서 종말은 되돌아 오고, 반복되고 재창조 된다.   그리고 이러한 끊임없는 반복과 재창조가 다름아닌 리듬이며,   밀려갔다 밀려오고, 드러누웠다가 다시 일어나는 조수(潮水)이다.   산문의 작위적 성격은 산문작가가 언어의 흐름에 몸을 맡길 때마다 증명된다.   시인, 혹은 음악가의 방법처럼 언어의 흐름으로 돌아가 스스로를 언어에 내재하는   끌어당김과 밀어냄의 힘에 이끌리도록 내버려 두자마자,   산문작가는 합리적 인 사유의 법칙을 위반하고   시의 울림과 교감의 분위기에 진입한다.   많은 현대 소설에서 바로 이런일이 일어나고 있다.   무라사키 부인이 쓴 는 끊임없이 산문과 리듬 사이에서,   개념과 이미지 사이에서 흔들리는 소설의 모호성을 가장 멀리 밀고나갔던   프루스트를 연상시킨다.   모든 언어적 리듬은 자신 안에 이미 이미지를 포함하고 있으며 실제적으로,   혹은 잠재적으로 완전한 시구를 구성한다.   운율은 리듬에서 생겨나서 리듬으로 돌아간다.   처음에는 양자 간의 경계는 희미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운율은 고정된 형태로 결정화 된다.   광휘의 순간이지만 동시에 마비의 순간이기도 하다.   언어의 간만(干滿)의 흐름에서 고립되면 시행은 소리나는 음격으로 변하고 만다.   언어는 산문과 시, 리듬과 담론사이에서 흔들린다.   리듬에 따르는 작시와 아날로지적 사유는 동전의 양면이다.   리듬 덕분에 우리는 이러한 우주적 상응을 인식한다.   다시말해 그러한 상응이 다름아닌 리듬의 나타남이다.   보들레르는 “자연에서처럼 정신 세계에서도 모든 것은 의미를 가지며,   상호적이고 상응적이다.....모든 것은 상형문자이다....그리고 시인은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사람, 즉 번역자에 다름아니다“라고 말한다.   리듬으로 돌아가는 것은 실재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포함한다.   즉, 역으로 아날로지의 원리를 택하는 것은 리듬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고정된 운율의 작위성에 대항하여 강세 위주의 시작(詩作)이 가지는 힘을   긍정할 때, 낭만주의의 시인은 개념에 대한 이미지의 승리,   논리적 사유에 대한 아날로지의 승리를 선언하는 것이다.   엘리엇의 는 혁명적 시로 평가받았다.   그것의 주제는 단순히 냉혹한 근대 세계의 묘사가 아니라,   로마의 기독교적 질서에서 모범을 찾고 있는 보편적 질서에 대한 향수이다.   엘리엇은 근대 사회의 현실과 기독교적 질서를 대립시켰다.   그는 기독교적 질서를 다시 수용하고 변화시켜서 이교도들의 오래된 풍요의 제식에   개인적인 구원의 의미를 부여한다.   기독교적 가치의 세계, 그것의 중심은 천국과 지상과 지옥 사이의 보편적 아날로지   혹은 상응인데, 이러한 세게가 사라진 뒤에 인간에 남은 것은 사유와 이미지의   우발적이고 우연적인 연상뿐이다.   근대세계는 의미를 상실하였고 그러한 방향성의 부재를 보여주는 가장 적나라한 증언은   우주적이고 정신적인 리듬이 아니라, 우연에 의해서 지배되는,   관념들이 일으키는 연상의 자동성이다.   의 반대편에 이 있으며 바로 앞의 선례는 이다.  
1    심상운 시모음 댓글:  조회:855  추천:0  2019-06-30
심상운 시모음   헤드라이트       초여름 감자밭 고랑에 앉아 포실 포실한 흙 속으로 맨손을 쑤욱 밀어 넣으면 화들짝 놀라는 흙덩이들. 내 난폭한 손가락에 부르르 떠는 축축한 흙의 속살. 나는 탯줄을 끊어내고 뭉클뭉클한 어둠이 묻어있는 감자알을 환한 햇살 속으로 들어낸다. 그때 아 아 아 외마디 소리를 내며 내 손가락에 신생의 비릿한 피 냄새를 묻히고 미꾸라지처럼 재빠르게 흙 속으로 파고드는 어둠. 흙 속에 숨어있는 어둠의 몸뚱이에는 빛이 탄생하기 이전 우주의 피가 묻어있을 거라고? 그럼 붉은 피는 어둠 속에 서 나오기를 거부하는 우주의 꽃빛 파일(file)! 몇 장의 헌혈 증서를 남기고 떠나간 20대의 그녀는 하얀 침대에 누워 누군가의 혈관 속으로 흐르는 자신의 장밋빛 시간을 상상했을까? 아니면 비 오는 밤, 검정고양이가 청색 사파이어 눈을 번득이며 잡동사니로 가득한 헛간을 빠져나와 번개 속을 뛰어가고 있는 TV화면을 보고 있었을까? 나는 불빛이 번쩍하는 순간 번개 속을 통과한 검정고양이를 찾아 승용차의 헤드라이트를 켜고 강변도로를 달린다. 비가 그치고 가로수를 껴안고 있던 어둠들이 깜짝깜짝 놀라면서 몸을 피하는 게 희뜩희뜩 보이는 밤이다.               모형 전시실 또는 깨진 유리창       6월의 태양이 눈부신 한낮 국립박물관 모형 전시실에서는 신석기시대 근육질 젊은 사내의 돌칼 가는 소리가 난다. 사내는 숫돌에 칼을 갈다 가끔씩 고개를 들고 사냥할 때 쓰던 돌화살촉을 움켜쥐고 유리 상자를 깨고 뛰쳐나오려는 듯 허연 수은등 불빛을 노려보고 있다.     12월이 되면 카메라를 메고 세찬 눈보라로 뒤덮인 겨울날 뻘겋게 이글거리던 드럼통 석탄 난로 곁에 둘러서서 외지外地로 떠나려고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방금 검은 탄 속에서 나온 듯 이빨이 유난히 하얗게 빛나는 젊은 광부들의 뿌연 입김이 깨진 유리창에 묻어 있는 30년 전의 K역을 찾아서 눈길을 떠나는 그녀.     낮 12시 20분, 나는 그녀의 모형 작업실 벽에 걸려있는 컬러사진 검붉은 고철古鐵들의 무더기 사이로 돋아난 풀잎의 푸른 혈관 위에 앉아 있던 벌 한 마리가 잉잉 잉잉 방안을 돌며 유리창에 몇 번 몸을 부딪칠 듯하다가 열린 유리창 밖 환한 빛 속으로 날아가는 것을 본다.               뱀과 그녀       그녀의 그림 속 뱀들은 금 간 아스팔트 위에 무리지어 똬릴 틀고 있다. 풀밭을 떠나온 뱀들이 화물차가 100km 이상 달리는 검고 뜨거운 바닥에서 서로 엉겨 바들바들 고무락거린다. 햇빛이 그들의 허리에서 번쩍인다.     화랑畵廊에서 돌아 온 날 밤 침대 위에서 허리를 잔뜩 웅크린 나는 키가 30cm로 줄어들고 팔과 다리가 없어졌다. 새벽에 눈을 뜨니 내 옷걸이가 커다란 몸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미명의 어둠 속에서 옷걸이는 “넌 누구니”하고 묻는다. 내가 누구냐고? 하룻밤 사이에 내가 뱀이 되었다고?     아침 햇빛이 소리치듯 창문으로 환하게 쏟아져 들어온다. 햇빛의 뼈가 나를 일으킨다. 내 몸이 점점 커진다. 팔과 다리도 다시 생긴다. 거울에 반사된 빛이 사방으로 뻗어가고 있다. 빛A 빛B 빛C........빛A에는 구름의 살 향기가 묻어 있고 빛B에는 자동차의 경적이 묻어 있고 빛C에는 전화벨소리가 묻어있다.     그녀는 뱀들과 함께 빛의 향기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한다. 창 밖 허공엔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뱀들이 혀를 날름거리며 반짝이고 있다.       오전 10시 30분의 그래픽       기원전 7세기 그리스 신전神殿의 원형을 복원한 화려한 채색 조각상 그래픽이 TV 모니터 속에서 가볍게 빙빙 돌고 있는 오전 10시 30분     횡단보도를 건너온 30대 여인의 손에 들려있는 구겨진 풍경화風景畵에서 청계산 숲속 산새 몇 마리 나와 삐삐삐 쪼로롱 삐삐삐 쪼로롱 허공에 반짝이는 초록 물방울 뿌리며 빌딩 사이를 지나 푸른 하늘로 날아간다     K화백이 지난 밤 하얀 화선지 위에 내려놓은 검은 묵향墨香의 산 속에서는 걸망을 멘 한 사내가 나와 사방을 둘러보다 징검다리를 건너 빨간 노을이 물든 여진女眞의 마을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나는 이른 봄 햇살의 눈부신 바늘들이 촘촘히 박혀 있는 저수지 수초水草 속에서 발가숭이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나오는 그림을 그리다가 채소장수의 확성기 소리에 창밖을 본다         빛 또는     검은 옷을 입은 빛이   무표정한 아파트 유리창에 매미처럼 붙어서   부르르 부르르 떨기 시작하는 시간     성난 개들이 어둠 속 4차선 도로를 횡단하며   번쩍이는 빛을 향해 컹컹 짖어대고     한여름 바닷가 뜨거운 모래밭에선   배구를 하고 있는 맨발의 30대 비키니   여자들의 번들거리는 붉은 살     흰옷을 입은 장발의 50대 남자가   푸른빛이 흐르는 무대 위에서   하늘을 향해 한껏 팔을 벌리고 있다     노랑나비       비오는 날 번쩍이는 빛을 향해   어두운 헛간을 뛰어나간 고양이의 눈빛 같은     노랑나비 하나   내 숲의 어둠 속을 떠다니며 반짝인다     李箱은 에서   “찢어진壁紙에죽어가는나비를 본다. 그것은靈界에絡繹   되는秘密한通風口“라고 했다     그는 오늘도 영계의 컴컴한 숲속에서   죽은 나비와 춤을 추고 있을까?     정리해고 된 40대의 사내가   중고 트럭 조수석에 아내를 태우고   휘파람 불며 강변도로를 달리고 있다.       노랑나비 한 마리   푸른 강물을 배경으로 날고 있다.         블랙홀(black hole)           빛조차 빠져나갈 수 없는 검은 구멍이 되어 소멸하는 거대한 별에는 정지된 시간들이 검은 옷을 입고 모여 있는 ‘사건의 지평선’이 있다고요? 그들은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화석化石 속의 물고기처럼 박혀 있을 거라고요?     아산병원 영안실에 있는 그녀의 시신屍身도 자세히 관찰하면 연료가 모두 소모된 마지막 순간에 자체의 중력으로 인해 스스로 붕괴되어 생성하는 죽은 별들의 검은 구멍과 다르지 않다고요?     오늘 밤 당신은 35000피드 상공의 비행기가 컴컴한 허공 벽에 얼어붙어 있는 것을 상상해 보세요. 우주의 얼음덩이 속에서도 뜨거운 입맞춤을 하는 남녀의 그림자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초여름 풍경                 뱀 굴에서 미끈미끈한 몸뚱일 좌우로 흔들며 뱀 한 마리 뱀 두 마리 뱀 세 마리 뱀 네 마리 나온다. 가늘고 긴 혀 날름거리며 나온다. 엊저녁 기억들은 푸른 가지 사이에 허연 비닐봉지같이 걸어놓고 햇빛 속으로 스르르르 스르르르 미끄러지며 나온다.     발가숭이 햇빛들은 분수噴水에서 물장구치며 깔깔거리고 아이스크림처럼 햇빛을 빨아먹는 가로수 잎사귀들 사이로 풍선 하나 풍선 둘 풍선 셋 풍선 넷 둥둥 떠오른다. 찢어진 풍선들은 보이지 않고 새 풍선들이 떠오른다.     초여름 풀 향기 풍기며 19살의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이 청계천 물속에서 나온다. 눈이 큰 헵번, 입이 큰 헵번이 눈웃음치며 나온다. 휴대폰을 들고 시청 앞 광장 잔디 위에 앉아 있는 목이 긴 헵번은 빨간 손수건을 가슴에 달고 있다.     가슴에 철퇴를 맞고 허물어진 50년 전 건물들의 폐자재 더미 속에서 나온 유리창의 파편 조각들이 반짝인다. 덤프트럭에 실린 우그러진 창틀을 향해 반짝인다. 원주민들의 구멍 난 양말짝, 찌그러진 양재기, 찢어진 홑이불에 묻어있는 얼룩을 보며 반짝인다.                   한여름의 검은 자전거와 파란 비닐봉지와 빨간 모자       파란 지붕의 자전거 보관대에 쓰러져 있는 검은 자전거의 바퀴살이 햇빛에 번쩍이고 있다. 오전 10시 46분, 우체부의 빨간 오토바이가 서 있는 가로수 밑으로 아이들이 아이스크림을 빨며 지나가고 점점 뜨거워지는 8월의 태양. (검은 자전거의 주인은 나타나지 않고) 자전거 보관대의 파란 플라스틱 지붕은 자신의 가슴을 다 드러낸 채 번쩍이고 있다.     그 파란 플라스틱 지붕은 왜 하루 종일 번쩍이고만 있을까요? 지금 을지로 상공을 날아가는 반투명의 파란 비닐봉지는 몸무게가 0으로 줄어든 나의 모습이에요. 나는 시청 앞 광장을 지나 바람에 출렁이며 청계천 다리 위를 가고 있어요. 나처럼 가끔 허공을 떠다니고 싶으면 눈을 감고 공중으로 떠오르는 0의 감각에 집중해 보세요. 그리고 몸의 무게를 계속 줄여 보세요. 그러면서 저기저기 빌딩 창문 위 하늘로 둥둥 떠가는 자신을 느껴 보세요. 검은 자전거의 주인이 노랑 풍선이 되어 햇빛에 반짝이며 여의도 쪽 상공을 날아가고 있는 게 보일 거예요.     아, 아, 여보세요. 8월의 풀밭에서는 빨간 모자를 쓴 발가숭이 아이들이 모여서 노란 나팔을 불기도 하고 파란 페인트 통을 굴리며 뱀과 놀고 있다고요? 그 맨살의 아이들이 사람들의 잠속 연못에 들어와서 물장구칠 때가 있다고요? 그 시간에 꿈의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으면 빨간 꽃잎 요리가 아이스크림처럼 달디 달다고요? 그것이 한여름 낮잠의 신비한 맛이라고요?                     가방 또는 붉은 바닷물       나는 나의 가방 속으로 들어가고   그는 그의 가방 속으로 들어가서   불을 켠다     내 가방은 빨간 토마토들이 제각기 불을 반짝이는   도시의 상공을 떠다니고   그의 가방은 하와이 푸른 해변 위로 둥둥 떠간다     나는 가방 속에서 방울토마토를 깨물며   젊은 가방들이 터뜨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20대의 백남준이 도끼를 휘두르고   부서지는 피아노가 비명을 지른다     피아노의 비명 속에서 튀어나온 붉은 바닷물이   허공에서 지렁이처럼 꿈틀거린다     순간 내 가방도 꿈틀대며 다른 허공으로 치솟는다         붕어빵이 구워져 나올 때       중계동 은행사거리 40대 사내의 붕어빵틀에서   뜨겁고 말랑말랑한 붕어빵이 구워져 나올 때     전자상가 TV 화면에는 시리아 반정부군의 자살폭탄으로   반쯤 부서진 건물에서 들것에 실려 나오는 사상자들     나는 제주산 노란 감귤 한 봉지를 사들고 행인들이 붐비는   4차선 도로를 건너가고     내 옆을 깔깔거리며 지나가는 10대 여자 아이들     아파트 화단 젖은 흙속에서 10cm 가량의 검붉은   지렁이 한 마리가 꿈틀거리고 있다     통화       아 아, 여보세요. 40대의 사내가 한강대교 아치 위에 올라가서 집 나간 아내를 찾아달라며   자살소동을 벌이고 있는 걸 봤다구요. 그 사내는 금방이라도 뛰어내릴 듯 뛰어내릴 듯 아슬아슬한 곡예를 하고 있었다구요. 3월의 하늘에선 확성기를 든 경찰과 구경꾼들에게 주는 선물인양 하얀 눈송이를 흩뿌렸다구요.     말수가 적은 40대의 회사원 K씨는 1년에 한두 번 손에 날카로운 못을 들고 자신이 사는   아파트 주차장 고급 승용차들의 차체에 굵은 금을 긋고 다닌다구요.     망치를 들고 깨진 유리창 조각들을 더 잘게 부수고 있는 인부들의 얼굴이 점점 환해지고   있어요. 그들은 망치질에 신명을 풀어내는 듯 리듬을 타고 있어요. 작은 알갱이로 돌아간 유리들도 햇빛에 반짝이고 있어요.     아 아, 여보세요. 조주 선사가 신발을 벗어서 머리에 이고 한강대교를 걸어가고 있다구요?     * 조주 선사(778-897):『육조단경』에 나오는 중국의 선승. 선가(禪家)에서는 조주고불(趙州古佛) 또는 조주라 부른다. 불교의 근본원리를 묻는 질문에 “뜰 앞의 잣나무니라.”라는 말을 했다.       자살폭탄 또는 푸른 울음       자신의 부풀어 오른 봉오리를 만지며 은밀한 욕망 속으로 잠입하는 영화 속의 그녀. 밤마다 폭탄을 준비하는 그녀의 몸은 800만 화소의 선명한 영상 속에서 움직인다.     날카로운 과도果刀로 사과를 도막내어 빨갛게 익은 사과의 중심에 박혀서 스스로 소리 없는 폭발을 꿈꾸고 있던 까만 씨앗 몇 개를 들여다본다. 그들도 촉촉한 살의 유혹 속에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고 있던 걸까?         TV 뉴스 자막이 사라지자, 한여름 밤 안동 지레 마을 산 개구리들이 어둠 속에서 일제히 쏟아내는 푸른 울음소리가 달빛 속을 벗어나서 무한허공으로 출렁거리며 퍼져나가고 있다.           사각형과 삼각형과 원         사각형 스크린 속으로 들어가면 수없이 많은 각종 스크린이 보인다. 아침 7시. 사각 침대 위에서 기지갤 켜며 일어난 삼각형이 사각문을 열고 나오고, 원이 통통통통 튀면서 그 뒤를 따라온다 삼각형은 원의 손을 잡고 파랗게 출렁이는 바닷가로 뛰어간다 사각형의 바다 위에서 삼각형의 돛배가 하얀 물보랄 날리며 신나게 달린다     몇몇 삼각형이 무어라고 소리치며 사각형의 오래된 집의 창문과 벽을 부수고 있다 사이렌을 울리며 사각형의 경찰차들이 몰려오고, 100여 명의 삼각형과 원이 둘러서서 응원을 한다 그들은 손뼉을 치며 응원가를 부르다가 가슴팍 속주머니에서 노랑 풍선을 꺼내서 하늘로 날린다. 그 풍선들은 허공에서 서로 손을 잡고 얼굴을 비비고 입맞춤을 한다 입맞춤을 할 때마다 풍선의 입 속에서 또 노랑 풍선들이 나와서 파란 하늘을 가득 채운다 대도시의 봄 하늘에 유채꽃이 만발한다     밤 12시 20분. 아이슬란드의 거대한 육각형 빙산 벽이 철썩철썩 무너져 내려 새파란 육각수의 바다 속으로 떨어진다 수천만 톤의 새 육각수가 바다를 넘어 사각형의 도시건축물都市建築物들을 우르릉우르릉 흔들며 밀려오고 있는 밤이다           물고기 그림         겨울 저녁, 물고기는 투명한 유리 공간 속에 혼자 떠 있다. 느릿느릿 지느러미를 움직이며. 그는 원주에서 기차를 타고 k읍으로 간다고 했다. 흰 눈이 검은 돌멩이 위로 나비처럼 날고 있다. 유리 밖으로 뛰쳐나갈 듯 위로 솟아오르던 물고기가 밑바닥으로 가라앉는다. 그는 공중에서 부서져 내리는 하얀 소리들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함박눈이 내리는 그의 설경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보이지 않고 그의 걸걸한 목소리만 떠돌고 있다. 유월 아침에 나는 겨울 물고기 그림을 지우고 초여름 숲 속의 새를 넣었다. 그때 설경 속으로 떠나간 그가 나온다. 오전 10시 30분 나는 푸른 공기 속을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 있다.           오토바이가 달린다       푸른 오토바이가 달린다   푸른 소리를 사방에 뿌리며   무너진 건물 속에서 나온 피 흘리는 시신들이   흰 천에 덮여 있는   바그다드 한복판을 달린다     빨간 오토바이가 달린다   엉덩이에서 하얀 물보라를 뿜어내며   여름 바다 위를 달린다   해변의 아이들이 손을 흔들며 뛰어 온다     하얀 오토바이가 달린다 산맥을 넘어   붉은 토마토 즙을 온 몸뚱이에 바른   벌거숭이 사내들이   떼를 지어 뛰어가는 도시 위를 달린다     노란 오토바이가 달린다 혼자서 신나게   비가 갠 들판을 달린다     “어이, 저거 봐, 오토바이가 무지개 허리 위로 올라가고 있어.”   시골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소리치고 있다                   파란 의자     아침 10시, 그녀는 파란 의자에 앉는다     앉아 있는 그녀를 하얀 구름이 휩싸고   빨간 버스가 그녀와 구름을 싣고 달린다     (TV 속에서는 굶주린 하이에나 두 마리가 뚝뚝   뻘건 피 떨어지는 누우새끼의 허벅지를   입에 물고 아프리카 초원을 달리고 있다 )     그녀는 구름이 만든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고   무거운 가방을 든 검은 외투의 사내에게 손을 흔든다   사내도 그녀를 보고 웃으며 손짓한다     버스 안은 침묵들이 움직이고 있는 빈 악보 속 같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음표들이 투명한 물방울로   둥둥 떠다니고 있다     그녀는 그 방울들을 손가락 끝으로 톡톡 터뜨린다   그럴 때마다 방울 속에서 나온 노란 알몸의 소리들이   쪼로롱거리며 버스 안에서 뛰어놀다가   바람에 실려서 도시의 하늘로 줄지어 날아간다     도시를 빠져나온 빨간 버스는   돌고래들이 솟구치는 태평양 바다 위를 달린다   출렁이는 바닷물이 그녀를 덮친다   그때 그녀의 가슴 속에서 뛰쳐나온 물고기 한 마리가   은빛 지느러미를 퍼들거리며 튀어오른다     순간 그녀의 눈 앞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2001년 9월 11일 아침, 뉴욕 무역센타 쌍둥이 빌딩   눈부신 유리창 속으로 날아 들어가 굉음을 내며   폭발하는 은빛 비행기     (그 은빛 비행기에는 검은 외투를 벗어버린   알몸의 사내가 타고 있었다고?)     아침 11시, 빨간 버스는 아마존 숲 위를 날아가고   그녀의 파란 의자는 더 반짝이기 시작한다       환각제 복용       커피를 마시던 사람들이 떠난 뒤에도 그들이 자리에 두고 간 가슴선이나 허리선이나 다리의 선이 보인다. 20대 아가씨들이 벗어놓고 간 볼록한 가슴 선에선 노란 봄꽃냄새가 물씬 풍긴다. 종업원들이 그 선들을 모아 쓰레기통에 버려도 빛 밝은 오전엔 구석에 숨어있던 둥근 선들이 제각기 반짝이는 물방울이 되어 유리창 밖 허공으로 둥둥 떠다니는 게 선명하다.     2월 중순 달리는 승용차 유리창에 윙윙 휘날리며 떼 지어 달라붙는 선들. 브러쉬는 백색 환각제 같은 무수한 선들을 계속 지우지만 도로 옆 막 피어나는 하얀 꽃송이들 속으로 자주 끌려들어가는 바퀴. 차는 발긋발긋한 딸기를 가득 안고 맨살 그대로 누워있는 비닐하우스의 둥근 허리선이 보이는 시골 눈길 뿌연 안개 속에서 미끄러진다.     그때 라디오에선 미국 인기 가수의 죽음에 대해 심층보도하며 죽음의 원인이 환각제의 과다 복용이라고 한다. 봄눈 오는 날 오후 3시 20분. 죽은 가수의 뜨겁고 경쾌한 목소리가 전라북도 부안 고랑 진 눈밭에 선홍빛 물방울을 뿌리고 있다.                       파란색 기차           파란색 기차, 파란색 기차는 긴 꼬리를 달고 하늘을 날아가는 기차. 여름밤엔 노란 불을 켜고 여우, 뱀, 방패, 전갈, 화살, 직녀, 도마뱀, 헤라클레스, 돌고래, 백조, 견우의 나라를 지나 반인반마半人半馬의 키론이 사는 은하수의 남쪽 궁수자리로 가는 기차. 젊은 화가들은 일곱 살 아이들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서 파란색 기차를 타고 별나라 여행을 한다. 기차 옆에서는 우주의 고래들이 허연 거품을 뿜어내며 신나게 솟구치고, 기차의 창을 열고 고래 떼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와와 소리치는 아이들. 펄떡펄떡 솟구치는 고래 옆으로 우주 로켓이 유유히 지나가는 한낮, 초록 별 연못가에서는 느릿느릿 기어가는 무지갯빛 달팽이와 폴짝폴짝 뛰는 왕눈이 개구리가 식탁에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 파란색 기차, 파란색 기차. 나는 먼 은하수로 날아가는 긴 꼬리 기차 대신 아이들과 놀이동산에서 파란색 기차를 탄다. 파란색 기차는 딸랑딸랑 방울소리를 내며 파란 나라로 들어간다. 한여름 어느 바닷가 물개들의 도시. 건물의 지붕 위로 날렵하게 날아오르는 검은 물개들의 쇼. 물개들의 등에서 찬란하게 반짝이는 5월의 햇빛이 내 뇌 속을 파랗게 휘감는 일요일이다.           사각형 스크린       비 그친 아침, 나는 닫힌 창문을 연다. 스르륵 열린 사각형의 스크린 속에서는 오토바이를 타고 경쾌하게 달리는 구름 A, 구름 B,구름 C. 이어서 펼쳐지는 파란 여름바다의 영상. 여름바다, 여름바다, 여름바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출렁인다 동해 화진포에는 빨간 사과 빛 안개. 나는 그곳에 푸른 비늘 덩이로 살아 움직이는 집을 지어 놓았다 그 집은 환상의 집. 나는 아이들에게 우리들의 시간 밖에서 일하는 푸른 혼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별빛이 찬란한 밤바다 모래 위를 걷는다 사각형 스크린은 무한 공간. 그 속에 가득한 여름바다, 여름바다 여름바다는 나뭇잎에서도 출렁이고 땅강아지 집에서도 출렁이고 아스팔트 속에서도 출렁이고 노래방에서도 출렁인다 젊은이들은 동해의 고래를 잡으러 가자며 매일 밤 어깨동무를 하고 여름바다로 떠난다. 그들에게 바다는 황홀한 전율의 출렁임. 햇빛 번쩍이는 검푸른 등을 보이며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사각형 속 스크린도 부르르 부르르 온 몸을 떤다. 스크린은 사각형을 확 밀어버리고 수영복차림으로 뛰어나가려는 거 같다 그때 사각형 스크린 밖에서 사람 A가 열무, 가지, 오이, 호박을 트럭에 싣고 와서 스피커로 “무공해 싱싱한 채소를 싸게 팝니다”라고 소리친다. 캄차카 바다 돌고래들이 펄떡펄떡 솟구치고 있는 장면이 TV 화면에 가득한 아침이다             미완성의 시   -그림 감상하기     그의 방 우측 벽에 걸려 있는 첫 번째 그림- 검은 철제 의자 위에 사람 대신 활활 불타는 붉은 꽃 한 다발이 앉아있고, 그 밑에 “죽은 뱀의 영혼은 발가숭이로 꿈틀거리며 꽃밭의 환한 햇빛 속으로 들어갔을까?”라는 글이 붙어있다. 나는 그 글 밑에 “영하 10도의 겨울 밤 시멘트 도로 바닥에 귤 장수가 떨어뜨리고 간 노란 색종이 같은 귤의 꿈을 보았느냐? 고 쓴다 그는 그 밑에 “시인들은 밤마다 죽은 언어가 새로 태어나는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고?”라고 또 쓴다     세 번째, 발가숭이 노인들이 노란 해바라기 밭으로 뛰어가는 그림을 지나 다섯 번째, 식탁 옆 젊은 여자의 풍만한 궁둥이 그림 곁으로 가는 순간, 벽에 걸려 있는 네 번째 그림- 뒤척이는 태평양의 퍼런 몸뚱이에서 물이 흘러내린다. 그는 그 물을 수조水曹 속 물고기들에게 매일 부어준다고 한다       그때 그의 두 번째 그림 속에서 나온 파랑 공, 초록 공, 노랑 공, 빨강 공, 하양 공이 거실을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점점 부풀어 식탁이 되고 놀이터가 되고, 침대가 되고, 의자가 되고, 남자 여자 어른 아이들과 들판을 통통통통 신나게 튀어가고, 마을 언덕에 봄빛이 눈부신 한낮 하늘을 나는 마차가 되어 지붕 위를 둥둥 떠간다. 나는 찬란한 햇빛 속에서 공이 터지는 환상에 전율한다     그림 또는 링크           산 너머에서 산 너머로 오가면서 어디론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가 나타나는 것은 구름? 그 구름들은 수분덩이. 사람보다 더 많은 수분을 안고서도 유유하다 한 목동이 언덕 풀밭에 앉아 풀피릴 불고 있다 메에 메에 우는 양들은 공기가 희박한 고산지대의 경사진 돌밭 길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그들 머리 위에는 새파란 하늘과 흰 구름이 있다 19세기 그림이 21세기의 나를 유유하게 휘감는다 나는 어디로 가야 그 구름과 양을 만날 수 있나? 지하철 4호선 분실물 센터에는 양털실로 짠 모자가 있다. 그 모자는 울지 않는다 그 모자의 DNA에는 고산지대의 기억이 들어있지 않을까? 나는 양털의 기억 속 좁은 경로를 따라가다가 길을 잃는다. 양털 속에는 하얗게 말라버린 양의 숨소리만 묻어있다 나는 햇빛이 환한 내 의식의 방으로 들어가서 양이 걸어갔음직한 북한산 향로봉 계곡 바위 길을 링크한다. 순간 양은 지워지고 5월의 하얀 아카시아 꽃향기가 물씬물씬 솟아나며 쌔애롱찍 쌔애롱찍 능선의 산새들 소리가 귀를 울리는 사이사이로 "순수한 떨림은 기호를 넘어서는 곳에 있다"는 누군가의 말소리가 새어나온다 나는 그 소리에 취해 일행들과 더 깊은 산속 숲길로 들어가는 상상을 하다가, 깜박하는 사이에 하루 종일 녹취한 북한산 계곡 물소리와 어른 손바닥보다 큰 떡갈나무 잎사귀들의 푸른 숨소리가 출렁이는 등산 가방을 지하철 4호선 전동차 바닥에 놓고 내렸다     * DNA: 디옥시리보핵산(Deoxyribonucleic acid)의 약자. 모든 살아 있는 세포에서 볼 수 있고 유전형질을 전달하는 복잡 한 유기 화학적 분자구조           우주의 시간         그 미술관 대형 바다 그림 속에는 10년 전에 교통사고로 죽은 그녀의 가족들이 푸른 살 번득이며 파도치고 있다 남편과 아이들이 그녀의 손을 잡고 눈을 반짝이며 춤을 추고 있다     밤 11시20분, 사이언스 TV에선 은하계 넘어 어느 별에 납치되었던 지구의 사람들이 눈부신 빛에 휩싸여 귀환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4,400명의 귀환인 들은 우주의 0의 시간 속에서 살다왔다고 한다       3월에 내리는 함박눈은 서로 다른 집에 살면서 애태우다가 떠나간 이들이 만나서 산과 들과 바다에 눈부신 알몸으로 쏟아져 내리는 장면을 하얗게 풀어서 보여주고 있다 눈의 입자 속에서는 눈물을 안고 살아온 1000년도 우주의 0의 시간이 되어 반짝이고 있다       공과 아이           파란 옷을 입은 아이가 꿈속에서 가지고 나온듯한 빨간 공을 길바닥에 굴리며 놀고 있다. 공은 반짝이며 굴러가고 아이는 공을 쫒아 소리 지르며 뛰어간다 거리의 유리창들이 놀란 눈으로 내려다보는 아침 9시, 공을 따라 신나게 뛰어가는 아이. 공은 주택가를 빠져나와 통통통통 공장 굴뚝을 오르기도 하고, 통통통통 푸른 가로수 가지 위로 올라가 나무 위에서 건너뛰기를 하다가 초록 들길을 달리는 버스 지붕 위에 내려 앉아 잠시 멈춰 있다 아이도 버스지붕 위에서 흰 구름을 보며 쉬고 있다       긴 사다리를 허공에 설치하고 구름 위로 올라가는 TV 속 사내가 당신을 유혹한다고요? 그래서 당신도 파란 옷의 아이처럼 빌딩과 빌딩을 휙휙 건너뛰고 싶을 때가 있다고요? 오늘도 꿈속에서 본 빨간 공을 찾아서 뛰어다니다가 빌딩 옥상 구석에 누워서 10월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고요? 그 아이의 집은 해초들이 나부끼는 바다 속인 거 같다고요? 아이의 몸에선 바닷물 냄새가 난다고요? 빨간 공은 수평선의 해 같다고요?       버스 지붕 위에서 쉬고 있던 아이가 빨간 공과 함께 노랗게 불타는 한낮의 해바라기 밭으로 뛰어간다. 그 뒤를 밀짚모자를 쓴 이중섭이 화판을 메고 걸어가고 있다       30대 여인 또는 구렁이       한 청년이 풀밭에서 통조림 캔을 딴다. 검푸른 살의 꽁치 한 마리가 책처럼 잘 요약되어   삭아 있다. 이집트 미이라의 여인이 관棺 속에서 꿈틀거리며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고대신전古代神殿의 조각상에서 나온 30대 여인이 혼자 중얼거린다. “가면을 쓴 사내가 칼을 들고 말했어” “신神은 인간의 피를 좋아 한다고” “나는 그와 잔 적이 있어” 그녀의 그림자 뒤에서 붉은 노을이 TV 화면 가득 이글거린다     작은 새들이 찌르르 쫑쫑 찌르르 쫑쫑 경쾌한 소리로 날고 있는 5월의 물푸레나무 숲에서 어젯밤 드라마 속 여인이 자신의 검은 머리 위로 물을 쏟아 붓고 있다 그녀의 허리가 푸른 잎 사이에서 구렁이처럼 햇빛에 번득인다           은백색 미확인 비행물체         순식간에 내 눈의 자동 셔터가 찍은 한 컷의 동영상. 2008년 5월 25일 정오 일행들과 북한산 사모바위 틈에 뿌리 뻗어 만개한 라일락 꽃 짙푸른 향기에 취해 있을 때, 햇빛 환한 비봉碑峰 쪽으로 휘익 날아가던 은백색 깃털들. 야아, 소리 지를 틈도 주지 않고 반짝이는 빛을 던지며 10분의 1초의 속도로 내 시야를 벗어나는 은빛 부챗살. 그 반짝이는 부챗살은 화창한 초여름 날 산이 사람들에게 보내는 경쾌한 UFO? 그럼 지금 산의 가장 깊은 곳에서는 무성하게 돋아난 녹색 이파리들이 노랑 하양 보라 꽃들과 어우러져 한창 신명나는 판을 벌이고 있는 중! 12월 아침 아이들과 식탁에서 죽은 닭의 살점을 포크로 찍어 먹으며, 빈센트 반 고흐의 ‘프로방스의 시골길 야경’ 사이프러스와 찬란한 별밤 길 그림을 보고 있을 때, 소리 없이 도시 전체를 점령해버린 은백색의 젊은 눈들. 질주하는 차바퀴에 깔린 눈들의 몸에서 나온 맑은 피는 도로에 줄줄 흐르고, 아이들은 포크를 던지고 와아, 환성을 지르며 공터로 뛰어나가고, 도시는 하루 종일 은백색의 축제. 너는 지금 사람들의 무의식無意識 속 공간을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환한 불꽃들을 팡팡 터뜨리는 UFO의 고향을 찾아 네팔로 가고 있는 중이라고? 해발 5000미터가 넘는 백색고산지대白色高山地帶. 그곳은 어떤 것이든 그 자체만으로 존재하기 어려운 지점. UFO의 탄생지는 그곳 새파란 공기층 속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UFO:미확인 비행물체       이미지 여행             너는 이미지가 형성되기 이전의 공간 속으로 들어간다고? 거기에는 빛도 어둠도 아닌 것들이 웅숭그리고 있을 것 같지만 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다만 무엇이 휘익 휘감는 느낌만 든다고? 너는 그림자여서, 그 느낌은 빛이 발산하는 백색의 전율이라고?     어디서 둥둥둥둥 소리가 들려오고 막이 오르면, 무대 뒤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 너는 거기서 또 다른 이미지를 형성하는 원소가 된다고? 그곳에는 시간을 지워버리는 안개의 덩어리들이 솟구쳐 오르고, 너는 투명한 물방울 같은 것으로 둥둥 떠올라서 어디든지 갈 수 있다고?     너는 아침 햇빛이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이는 나일 강을 내려다보다가 히말라야 하얀 눈 산 위를 지나간다고? 너는 도시의 전동차 안을 떠돌기도 하고, 유람선을 타고 가면서 사람들의 말소리를 듣기도 한다고? 나는 너와 통화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앙코르와트 사원 숲 푸른 공기 속을 둥둥 떠간다. 그때 사원의 짙은 그늘과 무한 질량의 환한 햇살 사이를 넘나들며 UFO처럼 번쩍이다 사라지는 것들이 보인다       맨살에 링크하기     한 청년이 공원 풀밭에서 통조림 캔을 툭하고 딴다 그 속에 꽁치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다. 유통기한이 찍힌 주검이 눈부신 5월의 햇살 속에서 검푸른 살을 드러낸다 눈감고 있던 맨살이 꿈틀거린다     물에 젖은 살에서 하얀 거품을 일으키는 비누의 살을 만진다. 비누는 아무에게나 포동포동한 맨살의 향기를 풍기며 몸뚱일 비틀다가도 가끔 미끄러져 나와 세면대 바닥에서 통통거린다     누가 푸른 바다를 유리병 속에 넣고 어항이라고 했을까? 열대어 두 마리 맨살 번득이며 유유히 지느러미를 흔들고 있는 오전 11시 20분 한 쌍의 남녀가 산호초 화려한 바다 속을 보며 어깨를 감싸고 있다     ( )   * ( ) 안은 당신의 상상이 들어가는 공간입니다. 링크해서 펼쳐보세요. 그러면 당신의 마음이 반짝이며 나타날 것입니다.           아스팔트 위의 맨살 여자       아스팔트 위에서 30대의 여자가 전라의 몸을 둥글게 말고 머리를 허벅지 사이에 넣고 앉아있다. 둥근 여자의 몸은 매끈한 살덩이 바퀴가 되어 아스팔트 도로를 굴러갈 것 같다     (화가는 왜 여자를 달팽이같이 둥글게 말아서 아스팔트 도로 위에 놓은 것일까?)     (여자는 화가에게 태어나기 이전의 시공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한 것일까?)     나는 상상 속에서 그녀를 굴려 본다 그녀는 공기가 팽팽한 고무공같이 가볍게 구른다 그녀는 통통 튀기도 한다 구름이 그녀를 태워 하늘로 오르고 싶어 한다 그녀는 검은 아스팔트 도로에서 파란 바다로 굴러가며 깔깔거린다 그때 100km로 달려오던 육중한 화물차가 삐익 소리를 내며 간신히 그녀를 비켜간다 핏발선 운전기사의 목소리가 휙 스친다     지금 내 눈 앞에는 파란 바다가 보이는 아스팔트 도로에서 도로에게 반항이라도 하는 듯 맨살로 앉아있는 30대의 여자가 있다. 그녀의 숨소리가 너무 뜨겁다           우아우아 아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검푸른 파도 펄떡이는 돌고래   (산의 어깨 위로 솟구치는 검붉은 불길)     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다시마 미역 멍게 해삼 조개   (풀과 나무들의 울부짖음 불길 속의 주택들)     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파란 바다 빨간 구름 허연 맥주 거품   (47인치 모니터에서 풀썩풀썩 뿜어져 나와 중계동 은행사거리 상공을 떠도는 LA의 검은 연기 검은 연기)     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파도소리 기타소리 사각사각 사과 먹는 소리   (거대한 공동묘지 상공 떼 지어 떠도는 검은 비닐봉지 위에서 반짝이는 하얀 눈 하얀 눈)     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뜨거운 모래밭 달빛 속 엉덩이   (당신은 죽은 30대 여인의 목에서 반짝이던 나비날개 모양의 보석을 보았다고요?)   (그녀는 나비가 되어서 봄 나라로 날아갔을 거라고요?)     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모닥불 하얀 잿더미 빈 맥주병   (당신은 사람들이 모두 복제품 같다고요?)   (검푸른 파도 속으로 풍덩 뛰어 들어가 혁명을 꿈꾸는 체 게바라의 가슴을 껴안고 싶다고요?)       꿈틀꿈틀 아침 바다 붉은 핏덩이 핏덩이 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노란 색을 주조로 한 세 개의 그림       구파발에서 의정부 쪽으로 뻗은 큰 도로 옆엔 봄바람에 흔들리는 개나리꽃 울타리가 석재상 마당 한쪽과 세상에 나오기 이전의 돌부처 돌마리아 돌사자 돌여인 돌사슴의 머리와 가슴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다 나는 그 석물들과 손잡고 노는 상상을 하며 노란 개나리꽃 울타리를 툭툭 치고 흔들었다 그때 그 소리 때문일까? 돌부처와 돌마리아가 손을 잡고 초등학교 1학년 학예회처럼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 둘레를 돌사자 돌사슴 돌여인이 빙글빙글 돌고 있다 그들이 뛸 때마다 개나리 울타리에서 노란 빛이 뿜어져 나와 그늘진 석재상 마당이 환해지곤 한다     목만 있는 늘씬한 젊은 여인이 노란 원피스를 걸치고 서 있는 대형 마트 의류 코너. 그 건너편 쪽에는 목만 있는 청년이 청바지에 노란 티셔츠를 입고 포즈를 취하고 앉아있다                   강남 터미널 대형 TV에서 갑자기 콸콸콸콸 흙탕물 쏟아져 내리는 소리가 나고, 홍수가 휩쓸고 간 마을에서 떠내려 온 가재도구들이 큰 물살에 둥둥 떠가다가 나무그루에 걸려있는 게 보인다 주민들은 무너진 집 지붕 위에 올라가 무어라 소리치며 손을 흔들고 멀리서 털털털털 헬리콥터 소리가 나고 노란 조끼를 입은 구조대원들이 여기저기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구경을 하던 청년 셋이 TV 속으로 풍덩풍덩 뛰어 들어간다 그때마다 모니터에서 튀어나온 흙탕물이 내 몸에 확확 끼얹힌다 내 옷에서는 노란 개나리꽃 향기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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