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과 리라
옥타비오 파스
Octavio Paz Lozano
옥타비오 파스 로사노(Octavio Paz Lozano, 1914년 3월 31일 ~ 1998년 4월 19일)는 멕시코의 시인, 작가, 비평가 겸 외교관이다.
멕시코 시티 출신인 그는 진보적인 문화인이었던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인해 문학에 관심이 높았으며 19세 때에 자신의 첫 시집인 《야생의 달 (Luna Silvestre)》을 발표했다. 그는 1937년에 내전이 한창이던 스페인에서 열린 반(反) 파시스트 작가 회의에 참가했으며 1938년에 멕시코로 귀국, 멕시코의 신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는 1944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으며 1945년에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갔다.
그는 1946년에 외교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시집 《가석방 상태의 자유 (Libertad bajo palabra)》 (1949년 작)와 《독수리인가? 태양인가? (¿Águila o sol?)》 (1951년 작), 《격렬한 계절 (La estación violenta)》 (1956년 작), 《일장석 (Piedra de sol)》 (1957년 작), 《도롱뇽 (Salamandra)》 (1962년 작)을 비롯, 수필집 《고독의 미궁 (El laberinto de la soledad)》 (1950년 작)과 《활과 리라 (El arco y la lira)》 (1956년 작), 《느릅나무에 열린 배 (Las peras del olmo)》(1957년 작) 등을 발표했다.
그는 1962년에 인도 주재 멕시코 대사로 임명되었지만 1968년에 멕시코 정부가 급진파 학생들이 일으킨 시위를 무력으로 탄압한 것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사퇴했다. 이후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와 텍사스 대학교, 하버드 대학교 등에서 교수로 근무하면서 문학 활동을 전개했으며 시집 《하양 (Blanco)》 (1968년 작)과 《동쪽 비탈길 (Ladera este)》 (1969년 작), 《공기의 아들들 (Hijos del aire)》(1981년 작)을 비롯, 수필집 《결합과 분리 (Conjunciones y disyunciones)》 (1970년 작), 《원숭이 문법학자 (El mono gramático)》 (1974년 작) 등을 발표했다.
그는 1981년에 세르반테스 상을 수상했으며 1990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
시집
《가석방 상태의 자유 (Libertad bajo palabra)》 (1949년 작)
《독수리인가? 태양인가? (¿Águila o sol?)》 (1951년 작)
《격렬한 계절 (La estación violenta)》 (1956년 작)
《일장석 (Piedra de sol)》 (1957년 작)
《도롱뇽 (Salamandra)》 (1962년 작)
《하양 (Blanco)》 (1968년 작)
《동쪽 비탈길 (Ladera este)》 (1969년 작)
《공기의 아들들 (Hijos del aire)》(1981년 작)
수필집
《고독의 미궁 (El laberinto de la soledad)》 (1950년 작)
《활과 리라 (El arco y la lira)》 (1956년 작)
《느릅나무에 열린 배 (Las peras del olmo)》(1957년 작)
《결합과 분리 (Conjunciones y disyunciones)》 (1970년 작)
《원숭이 문법학자 (El mono gramático)》 (1974년 작)
서론
시와 시편
시는 앎이고 구원이며 힘이고 포기이다.
시의 기능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며 시적행위는 본래 혁명적인 것이지만
정신의 수련으로서 내면적 해방의 방법이기도 하다.
시는 이 세계를 들어내면서 다른 세계를 창조한다.
시인의 선택받은 자들의 빵이자 저주받은 양식이다.
시는 격리시키면서 결합시킨다.
시는 여행에의 초대이자 귀항이다.
시는 들숨과 날숨이며 근육 운동이다.
시는 공을 향한 기원이며 무의 대화이다.
시의 양식은 권태와 고뇌와 절망이다.
시는 기도이며 탄원이고 현현이며 현존이다.
시는 악마를 쫓는 주문이고 맹세이며 마법이다.
시는 무의식의 승화이자 보상이고 응집이다.
시 속에서 모든 객관적 갈등들이 해소되고
인간은 마침내 일시적으로 스쳐가는 것에 이상의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을 얻게 된다.
시는 경험이며 느낌이고 감정이며 직관이고 방향성이 없는 사유이다.
시는 우연의 소산이자 계산된 결과물이다.
시는 규칙에 복종하며 동시에 다른 규칙들을 창조한다.
시는 광기이며 황홀경이고 로고스이다.
시는 어린시절로 돌아가는 것이며 성교이고 낙원과 지옥 그리고 연옥에 대한 향수이다.
시는 아날로지다.
시편은 세상의 음악이 울리는 소라고둥이고
시편의 운율과 각운은 전체적인 조화의 상응이자 울림이다.
천의 얼굴로 나타나지만 결국 시편은
빔 – 인간의 모든 작위의 헛된 위대함에 대한 아름다운 증거-을 숨기고 있는 가면일 뿐이다.
우리는 살아있고 고통받는 어떤 것에 대한 표현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시가 우연의 응축으로 주어질 때나 혹은 시인의 창조적 의지와는
다른 힘과 여건의 결정체로 주어질 때 우리는 시적인 것과 만나게 된다.
시인이 시적 흐름을 유도하거나 변형시킬 때 현저히 다른 어떤 것 즉,
작품의 출현을 보게되는 것이다.
시적인 것이 무정형 상태의 시라면 시편은 창조물 즉, 일어선 시이다.
시는 단지 시편이라는 형식을 통해 자신을 완전히 드러낸다.
시편은 시를 품고 있고 시를 유도하며 시를 방출하는 언어적 유기체이다.
형식과 본질은 동일하다.
부분이 곧 총체이다.
각각의 시문은 유일하며 환원 및 반복 불가능한 것이다.
하나 하나의 시편은 창조의 순간에 소멸하는 기술에 의해서
창조되는 유일한 대상이다.
스타일은 모든 창조적 의도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모든 예술가는 역사적인 공통의 스타일을 뛰어 넘으려 한다.
시인은 그 시대의 공통된 자산, 그 시대의 스타일을 이용하고 적용하고 모방하지만
그러한 모든 자료들을 변화시켜 독창적인 작품을 만든다.
시인은 스타일을 갖지 않는다.
그때 생긴 이미지는 공동재산, 즉 미래의 역사가와 문헌학자의 전리품이 된다.
이런 저런 비슷한 돌들이 사용되어 예술적 스타일이라고 불리는 건축물이 세워지는 것이다.
문학적 언어, 스타일은 일상 언어보다 더 정확하고 혁신적이다.
그러나 그는 언어를 뛰어 넘는다.
더 적절히 말하면 반복불가능한 시적 행위,
즉 이미지, 색깔, 리듬, 비전등을 시편으로 용해시킨다.
시편이 가지는 유일하고 반복 불가능한 성격은
그림이나 조각, 소나타나 춤, 기념탑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그림과 송가, 교향악과 비극을 구별짓는 차이점을 뛰어넘어
그 모두가 동일한 우주를 선회하도록 하는 창조적 요소가 있다.
조형예술과 조음예술은 이러한 ‘의미하지 않음’에서 출발하지만
양가적 유기체인 시편은 의미를 품은 존재인 말에서 출발한다.
우주의 주기를 나타내는 개념으로서의 한 쌍의 음과 양은
철학이고 종교이며, 춤이고 음악이며, 의미로 충만한 주기적 운동이다.
또한 이것은 비유적 언어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인간의 행동을 특징짓기 위하여
조화 주기성, 혹은 대조법과 같은 표현을 내포한다.
모든 작품은 의미화작용에 닻을 내린다.
인간의 손에 닿음으로서 성질이 바뀌고 작품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지향성에 물들게 되어 어딘가를 향하게 된다. 인간의 세계는 의미의 세계인 것이다.
애매성 모순 광기 혹은 분규따위는 허용하지만 의미의 결핍은 용납하지 않는다.
활동범위와 직업이 무엇이든, 예술가이든 수공업자이든,
인간은 원료, 즉 색깔, 돌, 금속, 말을 변형시킨다.
변형이란 원료들이 맹목적인 자연의 세계를 포기하고 작품의 세계,
다시 말하면 의미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조각을 새기고 계단을 만들기 위해 인간이 사용한 재료인 돌에 일어난 변화는 무엇인가?
조각에 쓰인 돌과 계단을 만드는데 쓰인 돌이 동일하며
이것이 모두 동일한 의미체계를 이루고 있다하더라도 변형의 속성은 다르다.
산문작가와 시인의 손에 놓인 언어의 운명이 그러한 차이점이 뜻하는 바를 보여준다.
산문작가가 되기보다 시인이 되는 것이 더 쉽다.
산문에서 언어는 많은 의미의 가능태들을 희생시키고 그 중의 단 하나와 동일화를 시도한다.
빵은 빵이고 포도주는 포도주일 뿐이다.
이러한 작용이 바로 분석적 특성이며 이것의 실현에는 반드시 폭력이 수반되는 법인데
왜냐하면 말은 다수의 잠재태의 기의(significado)들을 포함할뿐 아니라
다수의 방향성과 의미들의 가능태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시인은 결코 단어의 다의성을 거역하지 않는다.
산문과 일상언어가 강요한 구속으로 불구가 되었던 언어는 시 속에서 원초의 상태를 회복한다.
본성의 회복은 총체적이어서 의미론적 가치 뿐만 아니라 음악적이고 조형적인 가치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렇게 자유를 찾은 말은 농익은 과일처럼 혹은 하늘에서 폭발하기 직전의 불꽃처럼 자신의 내부,
즉 모든 의미들과 암시들을 드러낸다.
시인은 말을 자유롭게 풀어주고 산문작가는 말을 구속한다.
이런 현상은 형식, 소리, 색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돌은 조각으로 변형될 때 광휘를 얻게 되며 계단으로 만들어질 때 빛을 잃게 된다.
색깔은 그림 속에서 광채를 내고 몸의 운동은 춤을 출 때 빛난다.
시적 기능은 기술적 조작과 정 반대이다.
시적기능에 힘 입어 재료가 본성을 회복하게 됨으로서 색깔은 더욱 색깔다워지고
소리는 충만한 소리가 된다.
시적 창조에는 재료나 기구에 대한 구속을 찾아 볼 수 없으며
오히려 그것들에 자유를 부여한다.
말, 소리, 색깔 그리고 그 박의 재료들은 시의 궤도에 진입하자마자 변화를 겪는다.
여전히 의미작용과 의사소통이 도구이면서 ‘다른 사물’로 변한다.
기술의 영역과는 반대로 진행되는 변화는 원래의 본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로 들어간다.
‘다른 사물‘이 된다는 것은 실상 ’원래의 사물‘이 되는 것이며
원래의 사물이란 태초부터 실재적인 그런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조각이 된 돌, 그림의 빨강, 시편의 말은 순수하고 단순한 돌이나 색, 말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고 뛰어넘는 어떤 것을 구현한다.
그것들은 일차적인 가치, 원래의 무게를 잃지 않은 채, 피안에 닿는 다리가 되며
일상의 단순한 언어로는 말 할 수 없는 기의들의 또 다른 세계로 열리는 문이 된다.
다의적인 존재, 즉 시적인 말은 온전히 있음-리듬, 색깔, 기의-이며 동시에 다른사물, 즉 이미지이다.
이미지는 듣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에게 이미지의 성좌를 유발시키는
이상한 힘으로서 모든 예술을 시적으로 만든다.
시는 의미와 의미의 전달이면서 언어를 넘어서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언어를 넘어서는 어떤 것은 언어를 통해서만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림은 회화적 언어 이상의 어떤 것일 때 시가 된다.
그때의 작품은 기술적 성과를 넘어서는 어떤 것, 즉 이미지이며 반복불가능한 시이다.
위대한 화가는 위대한 시인으로
그가 사용하는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사람이다.
결국, 수공예업자가 자신의 도구라고 할 수 있는 돌, 소리, 색깔, 말을 이용하는 것과 달리
예술가는 그 재료들의 고유한 본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그것들에게 봉사한다.
언어의 봉사자는 그언어가 무엇이든간에 언어를 초월한다.
이런 역설적이고도 모순적인 기능이 이미지를 생산한다.
예술가는 이미지의 창조자, 즉 시인이다.
이미지가 됨으로서 말은 말이면서 동시에 언어,
즉 역사의 의미화 작용으로 주어진 체계를 뛰어 넘는다.
시편은 말이고 역사이며 역사를 초월한다.
모든 독자들은 시편에서 무언가를 찾는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이미 자신의 내부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의 만남이다.
우리들의 열정과 일상의 간만(干滿)에 모든 것이 화해하는 순간이 있다.
적대적인 것들은 사라지지는 않지만 한 순간 융합한다.
그것은 판단중지하는 것이며 이순간 시간은 멈춘다.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러한 화해는
‘아난다(ananda) 혹은 하나 속에 노니는 쾌락이다.
틀림없이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그런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언젠가 찰라의 순간에 이와 비슷한 것을 어렴풋이 느낀다.
우리는 모두 어린이였다. 우리는 모두 사랑을 해 보았다.
사랑은 인간에게 열려있는 일치와 참여의 상태이다.
사랑의 행동에 의해 의식은 부서지기 전에 장애물을 넘어 충만한 상태로 일어서는 파도와 같다.
이러한 충만한 일어섬 속에서
위를 향해 일어서는 힘과 중력등 모든 힘은 미묘한 균형 상태에 도달한다.
동중정(動中靜).
사랑하는 사람의 육체를 통하여 한 순간 충만한 생명을 엿보는 것처럼
시편을 통하여 찰나적으로 멈추어 있는 시의 번갯불을 본다.
그 순간은 모든 순간을 포함한다.
흐름을 멈추지 않고 시간은 정지하며 자기 자신으로 가득찬다.
자력을 띤 사물.
그 덕분에 우리는 시적 경험에 참여할 수 있다.
시편은 개인의 성질이나 기질 그리고 성향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는 가능성이다.
그래서 시편은 가능성일 뿐이다.
모든 시편이 갖는 공통점은 참여이며 이것없이는 결코 시가 될 수 없다.
독자가 진실로 시편을 소생시킬 때마다 그는 시적이라고 일컬는 상태에 참여 한다.
그러한 경험은 이런저런 형태를 취할 수 있지만 언제나 자기자신을 뛰어넘는 것이며
시간의 벽들을 부수고 다른 ‘나’가 되는 것이다. (他者性의 발현)
시편은 이미지를 소생시키고 직선적 시간개념을 부정하고 시간을 역전시킨다.
시편은 중재 역할을 한다. 그 덕분에 시간의 시조인 태초의 시간이 순간 속에 육화된다.
직선적 시간은 순수한 현재로 변화하는데,
순수한 현재란 쉬지 않고 자신을 새롭게 창조하며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좋은 시 한편을 읽었을 때 느끼는 감정,
높은 파도처럼 분출하여 직선적 시간이 쌓아놓은 둑을 붕괴시키는 그 충만했던 감정은
독자들의 삶을 통해 여전히 생생하게 간직된다.
시편은 순수한 시간에 도달하는 통로이며
실존의 생명수에의 잠항이다.
시는 끊임없이 창조하는 리듬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아니다
제 1부
시 편 el poema
언 어
언어를 대하는 인간의 맨 처음 태도는 기호와 표상된 대상이 동일하다는 신뢰였다.
말을 한다는 것은 말하는 대상을 재창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되면서 사람들은 사물과 이름 사이에 깊은 골짜기가 생겼음을 알아챘다.
대상과 기호가 동일하다는 믿음이 사라지자마자 언어에 대한 학문들은 그들의 자율성을 획득했다.
인간의 역사는 말과 사유 사이의 관계로 환원될 수 있다.
모든 철학의 모호성은 철학이 언어에 치명적으로 예속되어있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철학자들은 말이란 실재를 포착하기에는 너무 조악한 도구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말없이 인간은 포착되지 않는다.
인간은 말로 된 존재이다.
또한 말도 인간처럼 태어나고 죽기 때문에 말을 이용하는 모든 철학은 역사에 예속될 수 밖에 없다.
하이데카의 말처럼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언어없이 사유는 존재할 수 없으며 앎의 대상 역시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이 미지의 실재에 부딪혔을 때 제일 먼저 하는 것은 그것에 이름을 붙이는 일,
즉, 세례하는 것이다.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것은 우리가 모르는 것이다.
모든 배움은 사물의 진정한 이름을 배우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고
우리에게 지혜의 문을 열어주는 중요한 열쇠가 되는 말의 계시로 끝난다.
혹은 무지의 고백인 침묵으로 끝나기도 한다.
그리고 침묵조차도 무언가를 말하는데,
침묵은 무가 아니라 여전히 기호들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말은 의미화 작용이다.
말은 표상적 작용으로서의 기호이며 상징이기도 하다.
의미화 작용은 지시적이고 감정적이며 표상적이다.
언어의 본질은 다른 것을 통하여 경험의 한 요소를 표상하는 것,
즉 기호 혹은 상징과 의미되거나 상징된 사물 사이의 양극 관계인 것이며 그러한 관계에 대한 의식이다.
언어와 신화들은 실재에 대한 광범위한 은유들이다.
언어의 본질은 상징적인 것인데
은유는 실제의 한가지 요소를 다른 것으로 표상하기 때문이다.
말 하나하나와 혹은 구와 절은 하나의 은유이며 동시에 마법적인 도구이다.
즉, 말이란 다른 사물로 변화하기 쉽고 또 건드리는 것을 변용시키는 어떤 것으로,
예컨대 태양이라는 말이 빵이라는 말을 건드리면 빵은 별로 변한다.
그리고 태양자신은 빛을 내는 음식이 된다.
말은 상징을 발산하는 상징이다.
인간은 말 덕분에 인간을 다른 존재로 만들어 주고
자연의 세계에서 분리시켜주는 원초적 은유 덕분에 인간이 될 수 있다.
인간은 언어를 창조할 때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존재이다.
언어를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은유가 된다.
이미지와 운율을 띤 언어적 형상의 계속적 산출은 일상어의 상징적 특성, 시적 성격을 증거한다.
언어는 자발적으로 은유로 구체화 되려는 경향이 있다.
매일 말들은 서로 충돌하여 금속성의 불꽃을 튀기거나 혹은 파랗게 빛을 내는 짝들이 된다.
말들로 수놓아진 하늘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천체들이 생겨난다.
차가운 비늘 위로 채 마르지 않은 물기와 침묵을 떨구는 말들과 구들이
언어의 수면위로 날마다 솟아오른다.
시는 언어를 초월하려는 시도다.
시는 일어서는 언어다.
시는 원초적 언어로 돌아가려는 시도이다.
즉, 말하는 것이 곧 창조하는 것이었던 시간으로의 복귀이다.
혹은 사물과 이름이 동일하던 때로 돌아가는 것이다.
미래에 총체적 시의 실현이 이루어 진다면
그것은 원초적 시간으로 돌아가는 것을 가정할 때만 가능할 것이다.
말과 대상 사이의 거리-말이 지시하는 것의 은유로 변화할 때,
어쩔 수 없이 말에 강요되는 거리-는 다른 현상의 결과이다.
즉,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을 획득하자마자
자연 세계에서 분리되었고 자신의 내부에서 타자가 되었다.
말이 지시하는 실재와 말이 동일하지 않은 것은 인간과 사물 사이에
그리고 더욱 심층적으로는 인간과 인간의 존재 사이에,
자신의 의식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말은 가교이며 이 다리를 통하여 인간은 자신을 외부 세계와 분리시키는
거리를 없애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러한 거리는 인간 본성의 일부를 구성한다.
거리를 소멸시키기 위하여 인간은 인간됨을 포기하고 자연 세계로 돌아가거나
인간됨의 한계를 초월하여야 한다.
모든 역사 속에 잠재되어 있는 양자의 시도는
근대인에 이르러 더욱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이런 연유로 현대시는 양극사이를 운동하는데,
한 쪽 극은 마법적 가치에 대한 철저한 긍정이며 다른 한 쪽은 혁명적 소명이다.
이러한 양극으로의 운동은 인간 자신의 조건에 대한 인간의 반역이다.
역사적 실존이 의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역사적 실존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혁명적 시도는 소외된 의식의 회복으로 나타나며 동시에 역사적 세계와 자연의 세계에 대한
진정한 의식을 갖는 것이다.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법칙에 매몰되지 않고,
의식은 실존을 결정해 나가게 된다.
그리고 그때 인류는 두 번째의 결정적 도약을 이룰 것이다.
언어는 시이며 모든 말은 비밀스런 발화점이 건드리자 마자 폭발할
준비를 하고 있는 은유의 전하를 숨기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말이 갖는 창조적 힘은 그것을 발화하는 사람에게 있다.
무심의 언저리-텅빈 충만
정신은 불가분의 총체이다.
만일 정신과 육체 사이에 경계선을 그을 수 없다면 ,
의지가 끝나고 순수한 수동성이 시작하는 곳을 분별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모든 정신작용은 총체적 방법으로 표현된다.
각각의 기능에는 다른 모든 기능들도 함께 있는 것이다.
절대적인 수용의 상태로 침잠해 있다는 것이 욕구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십자가 성 요한의 증언 “없음을 욕망하며” 는 여기서 무한한 심리학적 가치를 획득한다.
즉, 욕망의 힘에 의하여 없음 상태가 능동적이 되는 것이다.
열반 nirvana 도 이와 똑같이 능동적 수동성의 조화를 요구하고 정중동의 조화를 요구한다.
수동적 상태들- 내면적 빔의 경험으로부터 그와 반대되는 존재의 충만의 경험에 이르기 까지-은
객체와 주체 사이의 이원성을 깨기 위한 결연한 의지의 행사를 요구한다.
완벽한 요가 수행자는 적당한 자세로 앉아 움직이지 않고
“무심하게 자신의 코끝을 바라보면서”
망아의 상태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으로 자신을 제어한다.
무심의 언저리를 건드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는 알고 있다.
무심의 경험은 방심자, 은둔자, 그리고 심약자까지도 인간의 원형으로 제시하는
서구적 문명의 지배적 경향에 반대된다.
무심한 사람은 근대세계를 부정한다.
그는 전체를 얻기위해 자신의 전체를 건다.
지적인 면에서, 그의 결단은 생의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자하는 욕망 때문에
자살을 하는 사람의 결단과 다르지 않다.
무심한 사람은 이성과 소극적 안일함의 다른 편에는 무엇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무심이란 이 세상의 반대편에 대한 매혹이다.
의지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방향을 바꿀 뿐이다.
즉, 의지는 분석적 힘에 봉사하는 대신에, 분석적 힘이 자신의 목표를 위하여
정신적 에너지를 억압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침묵의 음악” 혹은 노자의 “텅빈 충만”이란 말을 상기해보자.
수동적 상태는 침묵과 빔의 경험일 뿐 아니라 능동적이고 충만한 순간의 경험이기도 하다.
즉, 존재의 핵심으로부터 이미지가 샘 솟는 것이다.
“나의 가슴은 한밤중에 꽃을 피운다”라고 아즈텍인의 시는 말한다.
자발적 마비는 정신의 다른 부분을 상승시킨다.
한 영역의 수동성은 다른 영역의 능동성을 야기시키며
분석적이고 담론적이며 혹은 추론적인 경향에 맞서 상상력의 승리를 가능케 한다.
시적 창조는 언어에 대한 위반으로 시작한다.
이러한 작용의 첫 번째 행동은 말들을 지탱하고 있는 뿌리를 뒤흔드는 일이다.
시인은 일상적인 일들, 그리고 그것들과 맺고 있는 연관 관계에서
말을 뿌리채 뽑아내어 일상적 언어의 획일적인 세계와 결별시킨다.
이때 단어들은 이제 막 태어난 것처럼 생생한 것이다.
두 번째 행위는 말을 원초적 상태로 복귀시키는 것이다.
이때 시는 소통의 대상으로 변한다.
시에는 두 개의 적대적인 힘이 존재한다.
하나는 언어로부터 말을 뿌리채 뽑아내는 상승 혹은 적출의 힘이며
또다른 하나는 말을 다시 언어로 복귀시키려는 중력의 힘이다.
이데올로기들과 관념 그리고 여론이라 부르는 것들이
의식의 가장 바깥 표피층을 구성하는 반면에,
시는 존재의 가장 심층에 거주한다.
시는 공동체의 생생한 언어, 신화, 꿈 그리고 열정들,
다시말해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성향들로부터 자양분을 공급 받는다.
시는 민중의 토대를 세우는데,
왜냐하면 시인은 언어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시원의 샘물을 마시기 때문이다.
사회는 시에서 자신의 존재의 토대, 즉 자신의 맨 처음의 말과 마주친다.
반면에 진정한 시인은 밑에서 위로, 공동체의 언어에서 시의 언어로 움직인다.
작품은 곧바로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가 합일의 대상이 된다.
시의 모호성
모든 창조는 모호성을 야기한다.
시적 즐거움은 창조의 어려움과 유사한 어떤 어려움을 이겨내야만 주어지는 것이다.
참여는 재창조를 암시한다.
독자는 시인의 몸짓과 경험을 재창조한다.
시인은 그의 말을 발견할 때, 그 말이 이미 자기 자신 속에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그도 이미 그 말 속에 있엇다.
그것은 처음부터 자신과 같이 있었으며 실제로 그에게 속하는 말과
책과 거리에서 배운 다른 말 사이에서 머뭇거리며 주저한다는 뜻이다.
시인의 말은 시인의 존재 자체와 혼동된다.
시인이 그의 말이다.
창조의 순간에, 우리 자신의 가장 비밀스런 부분이 의식에 떠오른다.
창조는 우리의 존재와 떼어 놓을 수 없는 어떤 말에 빛을 비추는 것이다.
다른 말이 아니라 꼭 그말인 것이다.
시는 필연적이며 교체할 수 없는 말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이미 만들어진 작품을 고치는 일은 매우 어렵다.
어떠한 수정이든 재창조이다.
즉 우리의 내면을 향하여 우리가 걸어온 과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암시한다.
단어 하나에 상처를 입히면 시 전체가 상처를 입는다.
쉼표 하나를 고치면 건물 전체가 위태로워진다.
시는 교체 불가능한 요소들로 이루어진 살아잇는 총체이다.
따라서, 진정한 번역은 재창조에 다름 아니다.
계시
어디선가 발레리는
“시는 감정적 외침이 발전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발전과 감정적 외침 사이에 모순적 긴장이 존재한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말은 그러한 긴장이 곧 시라는 사실이다.
발전의 주체는 감정적 외침이 시사하는 총체적이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그러한 실재 앞에서 자기 자신을 창조해 가는 언어이다.
시는 감정적 외침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듣는 귀이다.
고통 혹은 열락의 외침은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혹은 우리를 즐겁게 하는 대상을 가리킨다.
그것을 가리키지만 그것을 숨긴다.
즉 저기에 있다라고 말하지 무엇 혹은 누구라고 말하지 않는다.
감정적 외침이 가리키는 실재는 결코 이름 붙여질 수 없다.
그것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상태로
이제 막 나타나거나 혹은 이제 막 영우너히 사라지려는 순간처럼 저기에 있다.
금방이라도 무언가 닥쳐올 것같은 급박함,
발전한다는 것은 질문이나 대답이 아니라 소집을 의미한다.
말하는 입이며 듣는 귀인 시는 감정적 외침이 지시만 하고
이름 붙이지는 못하는 것을 계시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게시이지 설명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이 설명이라면, 실재는 계시되지 않고 해명될 뿐이며 언어는 단지 이해될 뿐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불구가 될 것이다.
감정적 외침인 경우에, 말은 ‘빔’을 향하여 던져진 외침이다.
거기에는 대화자가 부재한다.
우리가 언어를 이용할 때마다, 우리는 언어를 훼손 시킨다.
그러나 시인들은 말들을 이용하지 않는다.
그는 말에게 봉사하는 자이다.
말에 봉사함으로서 말에게 말의 충만한 본성을 되돌려주고
말의 자신의 존재를 회복하게 한다.
시 덕분에 언어는 원래의 상태를 회복한다.
먼저 일반적으로 사유에 의해 손상된 조형적이고 음성적인 가치를 회복하게 되며,
이어서 정감적인 가치를, 마지막으로는 의미를 나타내는 가치를 회복한다.
언어를 순화하는 것은 시인의 과제이며, 이것은 언어에게
원래의 본성을 되돌려주는 것을 뜻한다.
1부 시편
리듬
단어들은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인 존재들처럼 행동한다.
단어들은 언제나 ‘이것 그리고 이것과 다른 것’을 말하고 동시에
‘저것 그리고 저것 너머의 것’을 말한다.
그러나 사유는 단어 다스리기를 단념하지 않는다.
사유는 부득이 단어들을 사용하면서 끊임없이 단어들을
자신의 법칙으로 환원시키기를 단념하지 않는다.
언어에 대한 신뢰, 즉 사물과 이름은 동일한 것이라는 믿음은
인간의 자발적이고 원초적인 행위이다.
단어가 가지는 힘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가장 오래된 신앙들에 대한 회상이다.
즉, 자연엔 영이 깃들여 있고, 각각의 사물은 스스로의 생명을 갖는다.
객관적 세계의 닮은 꼴 언어에서도 역시 영이 깃들여 있다.
언어도 우주처럼 부름과 응답의 세계이다.
밀물과 썰물, 합일과 분리, 들숨과 날숨의 세계인 것이다.
어떤 단어들은 서로 끌어당기고, 어떤 단어들은 서로 밀치면서,
모든 단어들은 서로 상응한다.
일상어는 별과 식물을 다스리는 것과 비슷한 리듬에 따라 움직이는
살아있는 존재들의 집합이다.
가능한데까지 자동 기술법을 실천해 보았던 모든 이들은
스스로의 자발성에 맡겨진 언어들의 기이하고도 당혹스러운 상호 연관 관계를 알고 있다.
불러드림 evocation과 불러모음 convocation.
브르통은 ‘단어들도 사랑한다.’고 말한다.
시인은 이미지들의 강에 휩쓸려서 우리는 순수한 실존의 끄트머리를 건드리고
우리의 존재가 세계의 존재와 최종적으로 합일하는 통일된 상태를 예감한다.
조수에 대항하지 못한 채 의식은 요동한다.
그리고 갑자기 모든 것은 최종적인 이미지에 닻을 내린다.
벽이 우리의 행로를 가로막고 우리는 침묵으로 돌아간다.
이와 반대의 상태들-의식의 지나친 긴장, 언어에 대한 날카로운 감정,
이해력들이 부딪혀 불꽃 튀기는 대화들, 내면적 성찰이 무한으로 증대되는
투명한 화랑들-역시 하늘로부터 떨어져 내리는 느닺없는 구의 출현을 돕는다.
그것은 불멸의 정진 뒤에 주어지는 보상같은 것이다. 이성의 저항 뒤에 열리는
통로를 지나 우리는 조화로운 지대를 밟는다. 거기서 모든 것은 용이해 지고,
모든 것은 말없는 대립이며 기다렸던 암시가 된다.
우리들은 개념들이 운을 맞추는 것을 느낀다.
그때 우리는 사유와 구도 역시 리듬, 부름, 울림이라는 것을 알아챈다.
사유한다는 것은 적절한 음률을 타는 것이며, 번쩍이는 물결이 우리를 건드리자 마자
몸을 떨게 된다. 노여움, 열광, 분노, 그리고 우리를 우리 밖으로 팽개치는 모든 감정은
똑같이 우리를 해방시키는 힘을 갖는다.
전기 같은 힘을 가진 예기치 않은 구가 솟아오른다.
“시선이 불꽃을 튀겼다.”
“입으로 번개와 불꽃을 토했다.”........
저주받은 불순한 단어들이 난폭한 별처럼 폭발한다.
우주적 질서를 뒤흔드는 저주와 폭언.
사실 그러한 구들을 발설한 것은 우리가 아니었고, ‘자신 밖에’ 있었던 ‘타자’였다.
사랑의 대화들도 동일한 특징을 보여준다.
사랑하는 연인들은 종종 ‘말을 잃어버린다.’
모든 것-휴지와 감탄사, 웃음과 침묵-은 동시에 발생한다.
대화는 합의 이상의 어떤 것, 즉 화음이다.
연인들 자신은 보이지 않은 입이 발음한 두 개의 조화로운 각운이다.
말은 처음에 말을 부르지 않아도 다가와서 서로 결합한다.
이러한 결합과 이후의 결별은 순수한 우연의 소산이 아니다.
즉, 어떤 질서가 말들 사이의 친밀성과 거부감을 다스린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모든 언어 현상의 밑바탕에는 리듬이 존재한다.
단어들은 어떤 리듬의 원리에 따라 서로 모이고 흩어진다.
만일 언어라는 것이 비밀스런 리듬에 의해 지배되는 구가 끊임없이 변전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리듬의 재생산은 우리에게 말을 다스리는 힘을 줄 것이다.
언어의 역동성은 시인으로 하여금 말 사이에 존재하는 끌어당김과 밀침의 힘을
사용하게 함으로써 언어의 우주를 창조하도록 이끈다.
시인은 아날로지에 의거하여 창조한다.
시인이 모델로 삼는 것은 모든 언어를 움직이는 리듬이다.
리듬은 자석이다. 리듬을 재생산할 때-박자, 각운,변주,유사어
그리고 다른 방법을 통하여 - 시인은 말들을 불러 모은다.
불모의 상태에 뒤이어 언어의 풍요로운 상태가 이어진다.
내면의 수문이 열리자 구들은 샘물처럼 혹은 분수처럼 솟아오른다.
시인과 마법사
시적 작용은 주문(呪文), 주술 그리고 다른 마법의 방법들과 다르지 않다.
시인의 행위는 마법사의 행위와 매우 유사하다.
시인과 마법사는 아날로지의 원리를 이용한다.
양자는 실질적이고 즉각적인 목적을 위해 행동한다.
그들은 언어가 무엇인지 혹은 그 본질이 무엇인지 묻지 않으며,
목적 그 자체를 위하여 그것들을 이용할 뿐이다.
철학자, 기술자, 현자와 달리 마법사와 시인은 자싱의 힘을 스스로에게서 추출한다.
모든 마법적 작용은 정화를 위한 고통스런 노력을 통하여 얻어지는
내면적 힘을 필요로 한다.
마법적 힘의 원천은 이중적이다.
즉, 마법을 위한 공식과 그 밖의 방법들, 그리고 마법사의 정신적인 힘,
곧 자신의 리듬과 우주의 리듬을 조화시켜주는 정신적 조율이 필요하다.
시인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시인의 언어는 자신 안에 있으며 오직 그에게만 드러난다.
시적 계시는 내면적 탐색을 포함한다.
내적 성찰 혹은 분석과 전혀 다른 탐색이다.
탐색이라기보다는 이미지의 출현에 적절한 수동성을 야기시킬 수 있는 정신적 활동이다.
빈번히 마법사는 번역자와 비교된다.
마법사의 모습이 여전히 우리에게 매력적인 이유는
그가 신을 부정하고 인간의 의지를 긍정한 최초의 인간이었다는 사실에서 연유한다.
다른 모든 반역은 최초의 이러한 반역에서 출발한다.
주술사의 모습에는 과학자와 철학자의 모습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비극적 긴장이 존재한다.
마법사에게서 신은 가정이 아니며, 신자의 경우처럼 달래고 사랑해야할 실재도 아니다.
그것은 유혹이거나 정복하거나 비웃어야 하는 힘이다.
마법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항하여 인간의 힘을 긍정하는
위태롭고 신성모독적인 기도(企圖)이다.
신들에게 대항하는 마법사는 인간의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있다.
그를 위대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고독이며
사회성의 결여로 언제나 종국적으로 불모를 초래하는 것도 이 고독이다.
고독은 한편으로 그의 비극적 결단의 증거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긍심의 증거이다.
결과적으로
자신을 뛰어넘지 못하는 , 다시 말해, 인간을 위한 선물로 변모되지 못하는 모든 마법은
자신을 삼켜버리며 끝내는 창조자까지 삼켜버린다.
마법사는 인간을 수단으로, 힘으로, 잠재된 에너지의 핵심으로 본다.
마법사의 반역은 고독한데,
그것은 마법적 행위의 핵심이 힘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법사에 대항하여 프로메테우스가 떠오르는데,
그는 서구적 상상력이 창조한 최고의 인물이다.
그는 마법사나, 철학자나, 현자가 아니라 영웅이며 불을 훔친 자이고 박애주의자이다.
프로메테우스적 반역은 인간이라는 종의 반역이다.
바위에 묶인 영웅의 고독에는 암시적으로 인간 세계로의 귀환이 내재되어 있다.
반면 마법사의 고독은 사회로 귀환하지 않는 고독이다.
마법, 즉 힘에 의한 힘의 탐색은 자신을 파멸시킴으로서 끝을 맺기 때문에
마법사의 반역은 불임이다. 근대사회의 드라마도 이와 다르지 않다.
마법사의 이중성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한편으로, 인간은 우주와 생생하게 관계 맺으려 하는 것으로, 일종의 보편적인 교감이다.
다른 한편으로, 마법의 실현이 암시하는 것은 힘의 탐색 바로 그것이다.
마법은 ‘무엇을 위하여’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마법사가 우주적 힘과의 의사소통과-인간이 우주적 힘과 하나가 될 때를 제외하고-
인간과 의사불통 사이에서 찢겨진 인물인 이유도 이 때문이다.
마법은 생명-우주 전체를 가로지르는 동일한 흐름-의 친교 관계는 긍정하지만
인간사이의 친교는 부정한다.
시인은 마법사가 아니지만 언어를 ‘생명의 사회’-카시러가 조화로운 우주의 마법적 비전을
정의한 것처럼-로 보는 시인의 개념은 마법의 개념에 접근한다.
시편은 주술도 아니고 주문도 아니지만, 안수기도의 방법으로
시인은 어넝의 비밀스런 힘들을 일깨운다.
시인은 리듬을 통하여 언어를 유혹한다.
하나의 이미지는 또 다른 이미지를 유발한다.
시는 리듬 위에 세워진 언어적 질서, 즉 구들의 집합이다.
리듬은 측량이 아니며 우리 밖에 있는 어떤 것도 아니다.
리듬에 우리를 부어넣고 ‘어떤 것’을 향하여 우리를 발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리듬은 의미이며 무엇이가를 말한다.
시의 단어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그러한 단어들이 의지하고 있는
리듬이 이미 말하고 있다.
그러한 단어들은 줄기에서 꽃이 피는 것처럼 리듬에서 솟아난다.
리듬과 시 언어의 관계는 춤과 음악적 리듬 사이의 관계와 다르지 않다.
모든 춤은 리듬이며 모든 리듬은 춤이다.
리듬에는 이미 춤이 있고 춤에는 이미 리듬이 있다.
제의와 신화적 이야기는 리듬과 의미를 분리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리듬은 어떤 힘들을 매혹시켜 사로잡고,
다른 힘들을 쫒아내는 즉각적인 목표를 갖는 마법적 방법이다.
또한 리듬은 기념하기 위한 것 혹은 좀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신화를 재생산 하기 위한 것이다., 우주적 운율의 닮은꼴로서
말 그대로 인간이 원했던 것- 기우, 풍요로운 사냥, 혹은 적의 죽음-을
마들어 낼 수 있는 창조적 힘이다.
춤은 이미 씨앗 상태의 표상을 품고 있다.
리듬은 측량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비전이다.
리듬은 인간의 모든 창조의 뿌리이다.
신화와 제의의 이중적 현실은 그들을 품고 있는 리듬에 의지한다.
그리고 각각의 문명은 원초적 리듬의 발전으로 환원될 수 있다.
그대 중국인들은 우주를 두 리듬의 혼합으로 보았다.
‘한번은 음이고, 한번은 양인 것을 도라고 한다.’
그라네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음과 양은 서양적 의미의 관념이 아니다.
또한 단순한 소리나 표시도 아니다.
우주의 구체적인 표상을 품는 기장이며 이미지이다.
실재들의 창조적 역동성을 갖는 음과 양은 서로 바뀌고, 서로 바뀌면서 총체를 낳는다.
그러한 총체 속에는 아무것도 말소되거나 추상화 되지 않는다.
각각의 모습이 특수성을 잃지 않고 생생하게 존재한다.
음은 겨울이며 여성들의 게절이고 집이며 그늘이다.
그것의 상징은 문門 이며 어둠 속에서 성숙하는 것, 숨어 있고 닫힌 것이다.
양은 빛이며 농사일이고 사냥이며 낚시이고 대기이며 남성들의 시간이고
열려 있음이다.
더위와 추위, 빛과 어둠,
“충만한 시간과 결핍의 시간, 남성적 시간과 여성적 시간-용의 모습과 뱀의 모습-
그러한 것이 생명이다.“
우주는 상호 대립하며 교류하고 보완하는 리듬의 양가적 체계이다.
리듬은 식물의 성장과 제국의 팽창, 수확의 증대와 제도의 확장을 다스린다.
리듬은 우주의 생생한 이미지이며 우주의 법칙이 현시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한번은 음이고 한번은 양인 것이 도이다.
우주를 리듬의 모임, 흩어짐, 그리고 다시 모임으로 느낀 것은 중국인 만이 아니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우주론적 개념들은
원초적 리듬에 대한 직관에서 싹튼 것이다.
리듬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 결정적 사실- 유한한 존재, 죽을 운명의 존재,
그리고 언제나 ‘어떤 것’을 향하여, ‘다른 것’ 즉 죽음,신, 사랑하는 사람,
우리와 닮은 사람을 향하여 던져진 존재-에 대한 가장 오래되고 지속적이며 단순한 표명이라는 사실이다.
모든 리듬은 하나의 태도이며 의미이고 세계에 대한 사이하고 독특한 하나의 이미지이다.
각각의 리듬은 세계에 대한 구체적 비전이다.
이미지이고 의미-삶에 대한 인간의 자발적 태도-인 리듬은 우리 밖에 잇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표현하는 우리 자신이다.
운율은 구체적인 시간성, 즉 반복될 수 없는 인간의 생명이다.
단테는 항성들과 영혼들을 움직이는 리듬을 사랑이라고 인식했다.
노자와 장자는 상보적 대립물로 된 다른 리듬을 듣는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리듬을 투쟁으로 여겼다.
리듬은 철학이 아니라 철학이 의지하고 있는 세계의 이미지이다.
우주적 리듬과 신화
어떤 사회나 두 개의 달력이 존재한다.
하나는 일상의 삶과 세속적 행위들을 다스린다.
다른 하나는 신성한 시간, 제의 그리고 축제를 다스린다.
세속적 날짜와 달리 신성한 날짜는 측량단위가 아니라 정해진 장소에
현현하는 초자연적 힘을 싣고 있는 생생한 실재이다.
모든 문화는 ‘시간의 종말’에 대하여 공포를 느껴왔다.
‘출입(등장과 퇴장)의 제의’가 존재하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고대 멕시코인들에게는 불의 제의는 새로운 시간의 도래를 유발시키기 위한 목적을 가진다.
별의 언덕에 모닥불이 피워지자마자 그때까지 어둠 속에 잠겨있던 멕시코 시 전체가 반짝였다.
이 순간 다시 한 번 신화가 현현했다.
공허한 연속성이 아니라 생명의 창조적 시간이 재생하는 것이다.
삶은 적어도 그 순간이 다 소모할 때까지는 지속될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시간의 재생은 숙명적인 것이 아니다.
성배grial의 신화처럼 사라져 버리지 않으려고, 사멸하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
낡은 시간의 완고함을 이야기하는 신화들이 있다.
이러한 신화들에게는 불모가 지배한다.
평원은 고갈되고 여자들은 아이들을 낳지 못한다.
‘나감(퇴장)의 제의’는 낡은 시간으로 하여금 젊은 후계자에게 평원을 내놓도록 강요한다.
이러한 신화는 거의 언제나 젊은 영웅의 구세주적 개입에 근거한다.
신화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이 서로 얽히는 매듭이다.
신화는 과거이며 과거는 또한 미래이다.
신화들이 발생하는 시간적 영역은 인간의 모든 행동이 끝나고 수정 불가능한 과거가 아니라
언제나 현실화 될 수 있는 가능성들을 품고 있는 과거이다.
신화는 원형적 시간에서 진행된다.
원형적 시간이란 신화가 다시 재현될 수 있는 시간을 의미한다.
신성한 달력이 리듬을 갖는 이유는 그것이 원형적이기 때문이다.
신화는 현재에 실현될 준비가 되어있는 미래적 과거이다.
시간의 일상적 개념에서 시간은 미래를 지향하는 현재이지만 숙명적으로 과거에 닻을 내린다.
신화적 질서는 용어들을 전도시킨다.
과거는 현재에 닻을 내리는 미래가 된다.
현재 속에서 총체적인 현존 속에 과거와 미래의 모든 시간을 껴안고 있는 원초적 시간에
도달 할 수 있는 문들이 있지만, 세속적 달력은 그 문을 닫아버린다.
그러나 신화는 인간의 삶을 자신의 총체 속에 포괄한다.
리듬을 통하여 원형적 과거를,
다시 말해 현재에 현현할 준비가 되어있는 잠재적 미래인 과거를 현실화 한다.
우리가 ‘좋았던 시간’은 다른 모든 시간들처럼 흐름 속에 죽어간다.
반대로 신화적 시간은 죽지 않고 반복되어 현현한다.
시간에 대한 다른 표상들로부터 시화적 시간을 구별짓는 것은 원형적 특성이다.
언제나 오늘이 될 수 있는 과거로서의 신화는 언제나 반복하여 현현할 준비가 되어있는
부동하는 실재이다.
리듬의 반복에 의해 신화는 되돌아온다.
이 주제에 대한 고전적 연구에서 위베르와 모스는 신성한 달력의 불연속적 성격을 보여주며
리듬의 마법에서 이러한 불연속성의 기원을 발견한다.
“시간의 신화적 표상은 본질적으로 리듬같은 것이다.
종교와 마법에서 달력의 역할은 시간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리듬화시키는 것이다.“
좀더 엄밀히 말하면 ‘원초적 시간’을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리듬의 반복은 원초적 시간의 초대이며 소환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원초적 시간을 재창조하는 것이다.
모든 신화들이 시는 아니지만 모든 시는 신화이다.
신화에서처럼, 시에서도 일상적 시간은 변화를 겪는다.
내용이 없는 동질적 연속성의 시간이 리듬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비극, 서사시, 노래 등의 시는 반복하여 순간을 재창조하는데,
그 순간은 원형적 사건 혹은 그 사건들의 집합이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다.’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시인에게 지나간 것은 다시 돌아올 것, 다시 현현할 무엇이다.
과거에 그랬던 것이나 지금 그러한 것이 아니라 지금 되고 있는,
지금 생성되고 있는 시간이다. 재생되는, 재현되는 과거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간은 두 가지 방법으로 재현된다.
첫째는 시적 창조의 순간에, 그리고 둘째는 독자가 그 순간을 새로히 소환하여
시인의 이미지를 소생시켜 재창조 할 때이다.
시편은 어떤 입술이 리듬이 깃들인 구들을 반복하자마자 현실화되는 원형적 시간들이다.
“시인의 일은 일어난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났으면 하고 바랐던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시가 다스리는 영토는 ‘제발....했으면’이다.
시인은 ‘욕망하는 자이다.’
결과적으로 시는 욕망이다.
그러나 그 욕망은 가능한 것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며,
사실인 듯한 것으로 표현되는 것도 아니다.
이미지는 ‘그럴듯한 불가능’이 아니다.
즉 불가능한 것에 대한 욕망이 아니다.
시는 실재에 대한 배고픔이다.
욕망은, 최고의 욕망인 사랑의 충동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끊임없이 거리를 지워버리려 한다.
이미지는 욕망이 인간과 실재 사이에 걸쳐놓은 다리이다.
제발 ‘...같은, 제발 ....했으면’을 지워버리고 말하는 다른 은유-
즉, 이것은 저것이다.-가 있다.
욕망이 행동을 취하는 곳은 바로 여기이다.
비교하거나 유사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환원 불가능해 보이는 사물들의 최종적인 동일성을 드러내고
더 나아가 유발시킨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진실되게 보이는 것은 바로 시가 재창조 된다는 의미에서
모방적 창조일 때이다.
자신의 경험을 재창조할 때는 서정시인 조차도 미래에 다가올 과거를 소환한다.
시인은-어린아이, 원시인들, 그리고 요컨대 가장 깊숙하고 자연적인 자신의 본능을 붙잡아 매었던
고삐를 자유롭게 풀어 놓았을 때의 모든 인간들처럼 – 직업적 모방자라고 확신해도 역설은 아니다.
그러한 모방은 독창적 창조이다.
시간의 근원에 있고 모든 인간의 밑바닥에 있는 어떤 것,
시간 그 자체와 혼동되고 우리 자신과 혼동되는
그리고 우리 모두의 것이면서 동시에 유일하고 독특한 어떤 것을
불러내고 부활시키고 그리고 재창조하는 것이다.
시적리듬은 미래이며 현재인 그러한 과거, 즉 우리자신을 현재화actualization하는 것이다.
시구는 살아있는 구체적인 시간이다.
그것은 리듬이며 근원적 시간이고 영원히 재창조되는 것이다.
운문과 산문
리듬은 언어를 구성하는 가장 오래되고 항존하는 요소일 뿐 아니라
일상어보다 앞서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언어는 리듬의 소산이라고 말 할수 있다.
혹은 적어도 모든 리듬은 언어를 암시하거나 예시한다.
그렇다면 산문과 시를 구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리듬은 모든 언어적 형태에서 자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
그것이 가장 충만되게 나타나는 것은 시이다.
언어는 리듬이 되려고하는 본래의 경향을 갖는다.
마치 신비스런 중력의 법칙에 따르려고 하는 것처럼,
말들은 자발적으로 시로 돌아간다.
또한 사유가 언어인 한에 있어서, 사유도 동일한 매혹을 경험한다.
사유를 이리저리 방황하도록 내버려두면 결국 리듬으로 돌아간다.
이성은 교감으로 변화되며, 삼단논법은 아날로지로 변환되고
이성적인 행진은 이미지의 흐름으로 변화된다.
그러나 산문작가는 일관성과 개념적 명료성을 추구한다.
그래서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이미지로 명시하고자 하는 운율의
숙명적인 흐름에 저항하는 것이다.
시는 모든 시대에 속한다.
반면 산문은 특정사회의 고유한 표현 형태라 말할 수 있다.
시는 진보나 진화를 무시하며, 시의 기원과 종말은 언어의 기원이나 종말과 혼동된다.
원래 비판과 분석의 도구인 산문은 점진적인 성숙을 요구하는 것이며
일상어를 길들이고자 하는 일련의 기나긴 노력 뒤에 생겨나는 것이다.
시가 닫혀진 질서처럼 보이는 반면에 산문은 열리고 직선적인
건축물의 모습이 되려고 한다.
발레리는 산문을 행진에, 시를 춤에 비유하였다.
산문이 상징하는 기하학적인 형상은 선이다.
이와 반대로 시는 원형 혹은 구형으로 주어진다.
자기 자신에게 닫혀 있는 어떤 것, 즉 자족적인 우주로,
그안에서 종말은 되돌아 오고, 반복되고 재창조 된다.
그리고 이러한 끊임없는 반복과 재창조가 다름아닌 리듬이며,
밀려갔다 밀려오고, 드러누웠다가 다시 일어나는 조수(潮水)이다.
산문의 작위적 성격은 산문작가가 언어의 흐름에 몸을 맡길 때마다 증명된다.
시인, 혹은 음악가의 방법처럼 언어의 흐름으로 돌아가 스스로를 언어에 내재하는
끌어당김과 밀어냄의 힘에 이끌리도록 내버려 두자마자,
산문작가는 합리적 인 사유의 법칙을 위반하고
시의 울림과 교감의 분위기에 진입한다.
많은 현대 소설에서 바로 이런일이 일어나고 있다.
무라사키 부인이 쓴 는 끊임없이 산문과 리듬 사이에서,
개념과 이미지 사이에서 흔들리는 소설의 모호성을 가장 멀리 밀고나갔던
프루스트를 연상시킨다.
모든 언어적 리듬은 자신 안에 이미 이미지를 포함하고 있으며 실제적으로,
혹은 잠재적으로 완전한 시구를 구성한다.
운율은 리듬에서 생겨나서 리듬으로 돌아간다.
처음에는 양자 간의 경계는 희미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운율은 고정된 형태로 결정화 된다.
광휘의 순간이지만 동시에 마비의 순간이기도 하다.
언어의 간만(干滿)의 흐름에서 고립되면 시행은 소리나는 음격으로 변하고 만다.
언어는 산문과 시, 리듬과 담론사이에서 흔들린다.
리듬에 따르는 작시와 아날로지적 사유는 동전의 양면이다.
리듬 덕분에 우리는 이러한 우주적 상응을 인식한다.
다시말해 그러한 상응이 다름아닌 리듬의 나타남이다.
보들레르는 “자연에서처럼 정신 세계에서도 모든 것은 의미를 가지며,
상호적이고 상응적이다.....모든 것은 상형문자이다....그리고 시인은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사람, 즉 번역자에 다름아니다“라고 말한다.
리듬으로 돌아가는 것은 실재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포함한다.
즉, 역으로 아날로지의 원리를 택하는 것은 리듬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고정된 운율의 작위성에 대항하여 강세 위주의 시작(詩作)이 가지는 힘을
긍정할 때, 낭만주의의 시인은 개념에 대한 이미지의 승리,
논리적 사유에 대한 아날로지의 승리를 선언하는 것이다.
엘리엇의 는 혁명적 시로 평가받았다.
그것의 주제는 단순히 냉혹한 근대 세계의 묘사가 아니라,
로마의 기독교적 질서에서 모범을 찾고 있는 보편적 질서에 대한 향수이다.
엘리엇은 근대 사회의 현실과 기독교적 질서를 대립시켰다.
그는 기독교적 질서를 다시 수용하고 변화시켜서 이교도들의 오래된 풍요의 제식에
개인적인 구원의 의미를 부여한다.
기독교적 가치의 세계, 그것의 중심은 천국과 지상과 지옥 사이의 보편적 아날로지
혹은 상응인데, 이러한 세게가 사라진 뒤에 인간에 남은 것은 사유와 이미지의
우발적이고 우연적인 연상뿐이다.
근대세계는 의미를 상실하였고 그러한 방향성의 부재를 보여주는 가장 적나라한 증언은
우주적이고 정신적인 리듬이 아니라, 우연에 의해서 지배되는,
관념들이 일으키는 연상의 자동성이다.
의 반대편에 이 있으며 바로 앞의 선례는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