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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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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950년대 시인의 <시와 시인의 말>1/정한모(鄭漢模) 댓글:  조회:1535  추천:0  2019-12-14
1950년대 시인의  1/정한모(鄭漢模)       멸입(滅入)                                        한 개의 돌 속에 하루가 소리 없이 저물어 가듯이 그렇게 옮기어 가는 정연(整然)한 움직임 속에서   소조(蕭條)한 시야(視野)에 들어오는 미루나무의 나상(裸像) 모여드는 원경(遠景)을 흔들어 줄 바람도 없이   이루어 온 맑은 빛깔과 보람과 모두 다 가라앉은 줄기를 더듬어 올라가면   끝 가지 아슬히 사라져 하늘이 된다.   별리(別離)       지금은 차라리 아름다울 수 있는 그것은   현악기(絃樂器) 혹은 목관악기(木管樂器)의 고음(高音) 그 가늘한 도레모로로 내 가슴에 금을 그으면서 사라져 간 몇 개의 이별(離別)들   녹아드는 빙과(氷菓)의 맛처럼 슬픔은 그런대로 자릿한 미각(味覺)이기도 하였으나   흔들리는 바다의 그 푸른 바탕에 떠서 하늘하늘 하얀 꽃이파리는 지고 우리들의 이별(離別)은 끝났다.   끝이 난다는 것은 홀가분한 휴식(休息) 아니면 고요한 기도(祈禱)와도 같은 것   뜨거웠던 입술 속에서 떠오르는 달무리 그렇게 번지어가는 추억(追憶)   창의 불빛 휘파람소리 숨소리 이슬 젖은 소롯길   빗소리 바람소리 하얀 눈길   가슴 조이는 통고(痛苦)마저도 불붙는 생명일 수 있었던   그것은 떨어뜨린 눈물로 지워진 흐릿한 글씨 또는 남은 향기   이제는 거리(距離)에서 아물아물 바람에 스치우는 네 것도 내 것도 아닌 별과 같은 것이 되고 말았다.   난해難解와 전달傳達                                                                                            정한모(鄭漢模)                                                                        는 말을 듣는다. 지당한 말들이다. 사실 현대시는 난해하다. 말라르메의 상징시 이래 T. S. 엘리어트 의 철저한 주지적 경향에 이르기까지 서구에서도 이미 허다한 논란을 거듭하여 왔다. 이와 같이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 오면서도 시인을 있게 하고 더욱 더 시가 절실하게 요구되면서 현대시가 발전해 왔다는 것은 현대시의 난해성이란 어쩔 수 없는 필연성을 띠고 있다는 것을 실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시의 난해성은 긍정(肯定)되어야 할 것이다. 극도로 압축된 문학형식 속에서 현대 지성의 다양성과 그 논리를 처리하려고 하면 작품은 당연히 난해해질 수 밖에 없다. 현대시가 노래하는 시로부터 읽고 생각하는 시로 그 매력의 중심을 이행해 온 것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으나, 현대시는 그 대부분이 읽는 시이지 애송(愛誦)할 수 있는 시가 아니다. 노래하는 시에서는 반복이 생명이며 언어의 형식이나 음률적(音律的) 요소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반복되기 쉬운 형태로 존재한다. 그러나 생각하는 시인 현대시는 그 기억의 성질이 전연 다른 것이다. 노래하는 시의 경우엔 그 기억이 언어의 음에 더 많이 의존하지만 읽는 시는 이미지 혹은 의미로서 마음에 남는 성질의 것이다. 이리하여 노래하는 시로서의 전달성은 잃었지마는 그 대신 읽는 시로서의 전달성을 갖게 되었다. 즉 생각하고 느끼고 보고 지각하는 기능을 현대시는 갖추게 된 것이다. 따라서 시의 기능과 효용은 그 폭을 넓혔고 또 그 전달성에 있어서도 단순했던 과거의 시보다 복잡해졌으므로 자연 난해해진 것만은 사실이다. 시는 언어에 의한 표현활동의 최고의 형식이다. 시인들은 이것을 믿고 있으므로 여러 각도에서 끊임없이 언어에 대한 시도를 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경험이 새로우면 따라서 언어표현도 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표현을 달리하고자 하는 시인의 의욕은 생활을 새롭게 하고자하는 지향(指向)과 근본적으로 결부되고 있다. 시인들이 그 표현에서 특이한 형식, 리듬, 신기(新奇)한 이미지, 또는 의미가 풍부한 메타포(metaphor)에 의하여 혹은 리듬을 뒤바꾸거나 이미지나 의미를 고의로 축소 내지 확대하거나 탈락, 단절시키거나 하여 그것 때문에 대단히 난해한 표현이 되는 경우가 생긴다. 시인의 기술의 미숙이나 경험의 부족에서 생긴 혼란 때문에 난해해진 것까지 포함시킨다는 말은 아니지만 현대시의 난해성은 이런 필연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시의 난해성은 시에서 의미를 제거(除去)하는 데서부터 비롯하였다. 시에서 의미를 제거하는 데에도 본질적으로 뜻이 다른 두 계열이 있었다. 저 몽롱한 음악적 정서에 젖고자한 상징시(象徵詩)나 그 뒤 순수시 같은 것은 오직 심미적(審美的)인 목적을 위하여 의미를 버렸고, 같은 심미적 목적을 위함이면서도 몽롱한 음악의 경지를 지양(止揚)하여 명쾌한 시각적 심상을 찾는 초현실주의의 이후 모든 포멀리즘(formaism)은 회화적(繪畵的)인 세계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시에서는 음악을 듣거나 시화(詩畵)를 감상(鑑賞)하듯 다만 순수히 감각하기만 하면 되었다. 이 감각하는 것이 바로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시는 이런 심미적 목적만이 아니라 보다 더 시인의 개체적 현실의식과 내적체험을 새로운 언어의 구성으로써 표현하고자 하는 주체적 리얼리즘(realism)을 기초로 삼게 되었다. 이러한 시가 난해한 경향으로 기울어지는 것은 필연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가 보편성을 가진 가치의식이 아니고 다만 현대적 자아 속에서도 사적(私的)이며 개인적인 현실의식과 내적세계를 표현하고자 할 때 그 속에는 남에게 이해될 수 없는 많은 것이 불가피하게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현대의 시인들이 전달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알기 쉬운 시라 하더라도 그것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며 또한 아무리 난해한 시라 할지라도 완전히 불가해(不可解)한 시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시는 그 구성에서부터 긴장과 갈등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잘못 꾸며진 경우엔 그것은 산란한 단편(斷片)들의 어지러운 모습이거나 참으로 무엇인지 전연 짐작할 길 없는 그야말로 난해한 시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짤 째어진 시라면 미묘한 색채(色彩)의 새로운 조화(調和), 또는 불협화음의 아름다운 화음(和音)의 매력을 지니게 된다. 좋은 시는 반드시 아름답게 이해될 것이며 충분히 전달될 것이다. 난해성과 전달이 현대시에서 결정적인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해답처럼 T. S. 엘리어트는 “진정한 시는 이해되기 전에 전달할 수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발레리는 “시는 천 명의 독자에게 한 번만 읽혀지는 것과 한 명의 독자에게 천 번 읽히는 작품이 있는 것”이라고 했는데 아무리 난해한 시라고 할지라도 단 한 명의 독자에게 천 번이 아니라 열 번만이라도 읽히는 작품이라면 훌륭히 전달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발레리의 이 말은 시의 고고성(孤高性)을 더 강조한 듯하나 T. S. 엘리어트의 이 말은 현대시의 난해성의 본질을 정확하게 구명(究明)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현대시의 난해성을 시인(是認)한다. 더욱이 감상능력이 그 감상의 대상 내용인 시적미(詩的美)의 조직의 변화를 미처 따르지 못하고 있을 때 그 난해성은 더욱 완고(頑固)할 것이다. ‘시의 빈곤(貧困)’이란 말이 어느 시대에도 잘 씌어진 말 같지만 오늘날 역시 ‘시의 빈곤’이란 말은 자주 논의되고 있다. 현대라는 시대와 현대의 인간성이 그 원인이 되고 있다면 현대만큼 절실하게 시가 필요한 때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또 ‘현대의 버스’를 미처 타지 못한 지참(遲參)한 인간이 자기의 낡은 시의 개념과 그에 따르는 낡은 시의 방법과 기술로 쓰거나 이해하려고 하는 것과 같은 과거의 세계를 현대에서 찾고 있는 사람들로 인하여 ‘시의 빈곤’을 재래(齎來)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희극(喜劇)은 시의 빈곤의 원인이 자기의 낡아빠진 머리에 있다는 것을 언제나 잊고 있다는 점에 있다. 대체로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만의 매력을 불변의 규준(規準)으로 삼고 모든 사리(事理)를 단정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청각이나 시각 같은 감관(感官)의 세계에서도 또한 논리를 이해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시대의 진화와 변화를 쉽사리 인정하려들지 않는다. 시의 경우에도 낡은 감상능력을 한도로 하여 언제까지나 이것에 의거하여 오늘 날의 현대시를 비판하려고 한다. 이러한 독자에겐 현대시는 다만 차단된 벽일 수밖에 없으며 더욱 불가해한 것이 되고 만다. 여기서 다시 현대시의 난해성을 시인하며 강조하고자 한다. 그러나 현대시의 난해성이 불가피한 경향이란 사실에 현혹되어 난해한 시만이 가장 새로운 시인 듯 착각하고 일부러 불가해한 시를 써가지고 자랑으로 삼고 있는 시를 쓰는 사람이 있다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이러한 시를 쓰는 사람이 오늘날 없지 않아 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는 말이 시인에게 조금도 자랑이 될 수 없다. 현대시에서 난해한 시는 있을 수 있으나 전달되지 않는 불가해한 시는 있을 수 없다. 빈약한 육체와도 같은 보잘 것 없는 사고(思考)를 감추기 위하여 불투명한 의미를 가진 의상(衣裳)으로 애매하게 감싸가지고 난해성이란 추세를 이용하여 현대시 속에 한 몫 끼어보려는 사이비(似而非) 현대시는 적발되어야 할 것이다. 아무리 난해성이 현대시의 운명에 가까운 것이라 할지라도 그 난해성에 편승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현대시인의 시의 기술이 이러한 난해성을 얼마나 가능한 한도에서 막아내는데 있지 않을까 한다. 오늘날 시인들의 노력은 이 현대의 다양성(多樣性)과 착잡(錯雜)한 논리를 어떻게 정돈하고 질서를 세워 나가느냐 어떻게 논리적 이미지를 조형(造形)하여 현대시로서의 발랄한 생명을 지니게 하느냐 하는 방향에 경주되어야 할 것이다. 난해성을 일종의 스타일처럼 착각한다든지 심한 경우 난해성을 도리어 과시하는 넌센스는 현대시의 본질적 특성에 대한 통찰과 그 진정한 아름다움으로 정화(淨化)되어야 할 것이다.   *출처:『韓國戰後問題詩集』(1961년 신구문화사) *한자는 한글로 표기하고, 중요한 한자는 괄호에 넣어 표기하였으며 영어단어는 괄호속에 영문자를 넣었음.
6    상징적 이미지 - 홍문표 댓글:  조회:1221  추천:0  2019-12-14
상징의 의미 1. 홍문표 ​ 상징(symbol)이란 원래 짜 맞추다, 비교하다 등의 어원을 갖고 있으며 명사형은 표시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두 사람이 만나 헤어질 때 약속의 징표로 동전 따위를 둘로 나누었다가 후일에 만나 이를 맞추어 보는 절차가 있다. 우리의 설화 중 고구려의 시조 주몽과 그의 아들 유리와의 부러진 칼에 대한 이야기도 그러한 예가 된다. 주몽이 부여국에서 왕자들의 시기로 먼저 떠나면서 어린 아들 유리와 칼을 잘라 서로 징표로 삼고 후일을 약속한다. ​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고 왕이 된 뒤 유리는 갖은 고난 끝에 주몽을 만나게 되는데 부러진 칼을 맞추어 보고는 부자의 관계를 확인하게 된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칼이란 두 사람의 약속, 두 사람의 관계를 표시하는 기호(mark)나 징표(token) 또는 부호(sign)의 역할을 하는 것이고 그러면서도 부러진 칼은 어느 하나만으로는 온전하지 못하고 반드시 둘이 결합해야만 온전할 수 있다. 따라서 상징이란 어떤 진술이나 이미지가 어느 한 쪽, 특히 나타난 반쪽으로 의미가 없고 나타나지 않은 타면과의 결합을 통하여 완성되는 표현 방식임을 알 수 있다. ​ 특히 흥미 있는 일은 상징(象徵)이란 한자어의 풀이를 주역에서는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을 상(在天成象)이라 하고 땅에서 이루어진 것을 형(在地成形)이라 하였는데 그렇다면 상징이란 하늘의 징조, 하늘이라는 형이상학적 본질이나 근본적인 원리를 표상하는 것이라는 뜻이 된다. 따라서 상징은 지상적인 것이 아니라 천상적인 것, 즉 불가시적인 관념의 세계를 가시적인 사물, 감각적인 이미지로 드러내는 것이 상징의 근본적인 속성임을 알 수 있다. ​ 홍문표시학이론총서22 「시창작 원리」(창조문학사, 교보e북)에서   그래서 이러한 상징화의 기능은 오직 인간만이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지만 좀 더 깊게 해석을 한다면 신만이 가질 수 있는 능력임을 알아야 한다. 사실 신들은 자기의 모습을 분명히 드러내지 않는다.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으로서는 그의 무궁한 능력과 섭리를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신은 언제나 징조나 조짐을 통하여 그의 모습과 의지가 계시(啓示)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신이 계시하고 있는 계시물, 즉 상징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신을 파악하기 마련이다. 일찍이 플라톤은 궁극적인 본질의 세계를 이데아(Idea)라 하였고 표면의 세계를 현상이라 하여 본질의 그림자로 취급하였다. 말하자면 우리가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물질의 세계, 지상의 세계, 관념의 세계와 사물의 세계라는 이원론적 세계관에서 상징이란 바로 이러한 두 세계를 연결시켜 주는 징검다리가 된다. 신이나 본질이나 관념의 형이상 세계가 형이하의 세계로 다가오는 방식이 바로 상징이 된다는 말이다. ​ 자연은 하나의 사원, 그 살아 있는 기둥들 때로 혼돈한 말을 새어 보내니 사람은 친밀한 눈길로 그를 지켜보는 상징의 숲을 가로질러 안으로 들어간다. 暗夜처럼, 광명처럼 광활하며 컴컴하고도 심오한 통합統合속에 머얼리서 혼합되는 긴 메아리인 양 香과 色과 음(音)이 서로 화답한다. 어린이 살결처럼 신선한 향기, 木笛처럼 은은한 향기, 草原처럼 푸른 향기 있고, - 그 밖에도 썩은 냄새, 풍성하고 기승한 냄새들 정신과 감각의 앙양을 노래하는 용연향, 사향, 안식향, 훈향처럼 무한한 것들의 확산력을 지닌 향기도 있다. - 보를레르「만상조웅」 ​ 상징주의의 대표적인 시인 보를레르의 시집「악의 꽃」중에 나오는 작품으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세계란 바로 신의 상징이며 그러기에 인간이란 신의 상징인 숲을 거니는 존재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자연은 하나의 사원’이라고 할 대 그 사원의 주체는 바로 신일 것이다. 따라서 신은 자연이라는 우주적 사원에 계시는 존재가 되며 달리 말하자면 자연이란 신의 상징물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자연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감각적인 교류를 한다는 것이 둘째 연이겠고 셋째 연에서는 후각적인 이미지를 통하여 보다 신비로운 신의 상징들이 감각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 홍문표시학이론총서22 「시창작 원리」(창조문학사, 교보e북)에서     문예사조에서는 상징주의를 사실주의 다음에 등장한 것으로, 낭만주의의 연장으로 본다. 그러나 상징주의 근원은 이 세상의 사물을 관념의 희미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 플라톤 사상에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낭만주의는 일반적으로 플라톤 사상과 관계가 깊지만 감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사실들에 쾌감을 느꼈다는 점에서 도덕이나 철학을 강조한 플라톤 사상에 위배 된다. 한편 상징주의자들은 감각과 정서와 상상을 중요하게 여기는 낭만주의자들임에 틀림없었으나 감각의 대상이 되는 실제의 사물을 그대로 즐기려 하지 않고 그것이 희미하게 암시한다고 생각되는 또 다른 세계를 나타내고자 한 것이 특징이다. 현실적인 사물들이 암시하는 영원히 아름다운 세계는 아무나 볼 수 없고 단지 섬세한 감각과 영감이 부여된 사람만이 직관할 수 있는 신비로운 세계라는 것이다. ​ 후기 낭만주의자들은 단지 감각적인 세계에 대하여는 흥미를 잃었고 루소 등이 가르친 인간성의 아름다움, 그에 기초한 발전 사상, 낙관주의를 깊이 의심하게 되었고 더욱이 당시 새로운 실증주의에 자극 받아 생긴 사실주의에 반감을 느껴 그들 스스로를 퇴폐파(decadanist)라고 자칭할 만큼 다소 절망적, 비관적, 조소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보를레르는 전원이 아닌 현대 도시에 사는 현대인이 향유할 수 있는 신비의 세계를 암시하려고 하였다. 그 세계를 암시함에 있어 그는 세상의 사물과 정신적 세계의 상호 대응관계를 말하고 모든 사물은 다 정신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그는 일상적 자아를 비꼬는 태도를 보이고 의미를 배제하면서까지 음악성을 강조한 포우와 무한한 신비의 화음을 만든 음악가 바그너의 예술에 경탄을 보냈다. 그리하여 시의 음악성과 암시성을 통하여 완전한 아름다움을 추구하였다. 한편 말라르메는 시의 음악성을 극단화하기 위하여 말의 외연적 의미나 문법마저 파괴하는 작업을 하였다. ​ 상징주의는 20세기에 들어와 주지주의의 대표적인 시인인 엘리어트로 이어지고 독일의 표현주의나 프랑스의 초현실에도 접맥이 되고 있다. 우리의 시사에 상징주의가 등장한 것은 1920년대 소위 퇴폐적인 낭만주의였으며 특히 황석우의 시와 시론을 많이 지적하기도 한다. 또한 한용운이나, 이육사, 윤동주 등에서도 상징적 시법을 발견할 수 있다. ​ 어느 날 내 영혼의 낮잠터 되는 사막의 수풀 그늘로서 파란 털의 고양이가 내 고적한 마음을 바라다보면서 - 이 애, 너의 온갖 오뇌, 운명을 나의 끓는 삶 같은 애(愛)에 살짝 삶아 주마. 만일에 네 마음이 우리들의 세계의 태양이 되기만 하면 기독(基督)이 되기만 하면. - 황석우「벽모(碧毛)의 묘(猫)」 ​ 이 시가 발표될 당시만 해도 난해시니 몽롱체 시니 하면서 논쟁을 벌였던 상징적 수법의 시다. 난삽한 한자어를 많이 사용하여 더욱 관념적이라는 인상을 주는데 이 시에서 나와 고양이는 모두가 자아의 두 얼굴, 즉 선과 악, 순수와 비순수, 기독과 악마라는 양극적 의식의 상징일 수가 있다. ​ 하략- 홍문표시학이론총서22 「시창작 원리」(창조문학사, 교보e북)에서   상징이 무엇인가를 대신하고 어떤 가치 개념을 표상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능력을 가진 것은 오직 인간뿐이며 그런 점에서 인간은 상징력을 지닌 독특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인간이 동물과 달리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것도 상징력이 있기 때문이며 이것은 상상력의 최고 형식일 수가 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를 보더라도 그것은 일정한 의미를 지닌 음성 기호로서 음성 기호란 의미의 상징물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상징을 통하여 사고하는 존재라는 말이 된다. 이 세상에 우주 만물이나 우주 조화가 신의 상징, 조물주의 상징이라면 그러한 만물이나 우주의 신비와 인간의 의식까지를 언어로 표현하는 행위는 바로 인간의 상징이 되는 셈이다. ​ 카시러는 상징성이야말로 인간만이 지니는 특성이라 하였다. 동물들은 본능적이고 반복적인 행동으로 살지만 인간은 그 위에 상징 체계를 더하여 보다 높은 차원의 삶을 영위한다. 그 구체적인 실제가 언어, 신화, 예술, 역사, 과학이다. 인간은 어떤 사물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다른 어떤 체계 속에 사고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사물을 추상화하고 다른 어떤 체계를 연상하여 결합시키려는 노력이 바로 상징 능력이며 동시에 생과 시간의 지각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우선 공간, 즉 환경의 지각은 모든 생물들의 공통된 속성이다. 그들은 모두 공간과 자신을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산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들처럼 유기적 공간을 형성하면서도 또 다른 세계를 전망한다. 카시러는 이러한 공간의 지각을 상징의 공간, 즉 추상적 공간이라고 한다. 기하학적 공간이나 예술가가 창조하는 미적 공간이 바로 그런 것이다. ​ 홍문표시학이론총서22 「시창작 원리」(창조문학사, 교보e북)에서   그런데 그 자체로서 다른 것을 대표하는 사물 일체를 상징이라고 할 때 여기서 대신함의 논리는 기호(sign)의 경우나 은유(metaphor)의 경우나 알레고리의 경우도 같은 논리가 되기 때문에 이들의 한계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과학에서는 물은 H₂O라는 기호로 사용하고 독약이 있는 약품의 표지에는 해골을 그려 놓는다. 그래서 카시러는 신호는 물리적인 존재 세계의 일부요 상징은 의미 세계의 일부라고 하였는데 가로등의 빨간 표시나 교통안내 표지판은 비록 의미의 세계이지만 상징이라 하지 않고 기호라고 한다. ​ 그렇다면 기호는 확정적인 것이지만 상징은 암시적인 것이다. ‘고양이’란 말이 있을 때 이는 고양이라는 동물을 대신하는 음성 기호를 생각할 수도 있고 그 눈은 신비롭고 어떤 매력을 지닌 존재로 생각할 수 있는데 전자는 기호적 사고요, 후자는 상징적 사고라 할 수 있다. 기호는 그 지시 내용이 정확하고 직선적이다. 거기에는 상상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상징은 무엇인가를 지시하는 이중성을 지닌다. 그러나 최근 기호론이 발달하면서 상징은 기호의 일부라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모든 언어는 의미를 상징하는 기호라는 것이다. ​ 홍문표시학이론총서22 「시창작 원리」(창조문학사, 교보e북)에서   상징과 은유, 즉 상징과 비유에 있어서도 다같이 사물의 의미나 정신을 대신한다는 점은 일치하지만 몇 가지 구별되는 점이 있다. 첫째로 상징은 관념만을 사물 이미지로 표현하지만 은유는 사물을 다른 사물 이미지로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뿐만 아니라 상징의 경우는 본의는 생략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비유는 본의와 유의를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 (1) 그의 머리는 최상의 순금이며 그의 머리는 텁수룩하고 까마귀처럼 검구나. (2) 그들이 포도원지기로 삼았구나 나는 내 포도원을 지키지 못하였구나. ​ 구약성서 ‘아가서’에 나오는 구절들인데 (1)의 인용에서는 ‘머리는 순금’이라든지 ‘머리는 까마귀처럼’이란 문장으로 사물과 비유적인 이미지가 공존하는 은유와 직유의 방식이지만 (2)의 문장에 나타난 ‘포도원’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드러내지 않았다. 즉 포도원은 보조적 이미지일 뿐 원관념이 없다. 그러나 ‘포도원’은 서구적 관례로는 처녀성을 뜻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처녀성의 상실이란 의미를 대신하는 상징적 수법이라 할 수 있다. ​ 둘째로 은유에 유사성이나 비교와 대조의 관계로 대각선이 그어지는 것이지만 상징은 그러한 연결선이 없거나 회피한다. 따라서 은유보다 더욱 상상력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 그런데 여기서 다시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웰렉과 워렌이「문학의 이론」에서도 지적하였듯이 상징은 반복적이라는 사실이다. 은유가 일시적이고 일회적인 것이라면 상징은 은유가 여러 차례 되풀이되고 관례화 되어 원관념이 생략되는 상징어만을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상징이 역사성과 사회성을 갖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휠라이트도 일반적으로 상징이란 우리의 지각 경험 가운데 비교적 지속적이며 반복적인 요소를 말하며 지각 경험 자체만으로 전달되지 않거나 충분히 전달될 수 없는 더욱 평범한 어떤 한 의미 혹은 일련의 의미를 뜻한다고 하였다. 예를 들어 존 던의 설교집에 나오는 은유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라는 구절을 훼밍웨이가 소설의 제목으로 하면서 당초에는 은유였던 것이 상징으로 된 경우가 그것이다. ​ 홍문표시학이론총서22 「시창작 원리」(창조문학사, 교보e북)에서   알레고리(allegory)란 다른 것(allos)과 말하다(agoreuein)의 의미가 합쳐진 용어에서 볼 수 있듯이 어떤 문제에다 다른 사건의 예를 들어 빗대어서 말하는 비유법이다. 따라서 본래의 뜻을 숨긴다는 점에서 상징과 유사하다. 그러나 세부적으로는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 첫째로 수사적 측면에서 알레고리는 주로 의인화와 문답법의 기법을 나타내고 있다. 의인화가 나타나게 되는 원인은 글을 쓸 때 작가가 개념보다는 술어에 구속되어 글을 쓰기 때문이며 또한 언어란 사람에 의해 지배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는 작가가 개념에 관계된 명사보다는 사고, 행위, 감정과 관계된 술어에 의존하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의인화가 나타나며, 또한 사람에 지배된 언어는 본질적으로 인격성을 띠게 되어 의인화가 나타나게 됨을 의미한다. 이솝의 우화(fable)나 우리의 고전 중 별주부전이나 장끼전 등도 그렇다. 한편 문답법은 사건이나 사리를 추상적인 데에서 구체적으로 명백하게 서술하기 위하여 문답의 형식을 취하는 수사법이다. 이는 지식이 낮은 사람에게 교리나 이론을 전달하는 방법으로서 기독교에서 특히 예수와 그 제자들, 불교의 화두, 소크라테스의 문답법 등을 대표적 예로 들 수 있다. 알레고리는 교훈적 입장을 가지므로 문답법의 형식이 두드러진다. 그리고 의인화와 함께 의동물화(擬動物化)도 일반적으로 우세하게 나타난다. ​ 둘째로 알레고리를 의미론적 측면에서 볼 때 현세성과 교훈성을 특질로 갖는다. 알레고리의 현세성은 이원론적 세계인식에서 비롯된다. 세계를 이원론적으로 파악하는 입장은 현실과 이상을 명백히 구분하는 태도로서, 현실적 인식에 근거되어 있다. 반면 상징은 일원론적 입장이며 현실과 이상을 통합한 실체는 현세성 보다는 신비성을 특질로 갖는다. 따라서 알레고리의 현세성은 분리적인 명백성을 갖게 되고, 상징의 신비성은 다의적이고 통합론적인 모호성을 갖게 된다. 그리고 알레고리의 명백한 현실인식은 우리들이 마땅히 지켜야할 도덕, 진리 등의 추상개념을 교훈적으로 지시한다. 왜냐하면 모든 교훈이란 현세의 행위를 그 적용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 테이트는 시를 양분하여 의지의 시와 상상력의 시로 나눠 전자를 알레고리 시와 동일시하였다. 또한 유럽 문학에 나타난 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의 것을 순수한 알레고리라 하였고 과학이 발달한 현대에는 낭만적 아이러니의 알레고리가 필요하게 된다고 하였다. ​ 아버지가 말했다. 보아라 이 그림을 썰매가 나는 듯이 쫓고 있는 것을 마부는 죽어라고 토나카이에 채찍을 하고 나그네는 짐 뒤에서 돌아보며 쉴새없이 총을 겨누고 있는 것을 시방 총구에서 샛빨간 불이 번뜩이는 것을. 아들이 말했다. 한 마리 맞았어요. 아아 또 한 마리 달겨 들었는데 그것도 피투성이로 나뒹굴어졌어요. 밤이군요. 끝없는 광야(曠野)가 눈에 덮혀 있네요. 그런데 나그네는 잡히지 않았을까? 썰매는 어디까지 달려가는 것일까? 아버지가 말했다. 이렇게 밤이 샐 때까지 어제의 뉘우침을 하나하나 사살(射殺)하고 시간처럼 내일로 달리는거야 이윽고 해가 솟는 길 저편에 빛나는 미래와 거리가 나타나는 거야 보아라 언덕 위의 하늘이 벌써 희부옇게 밝아오고 있지 않니. - 마루야마 카오루「미래에」 ​ 인용한 시는 아버지와 아들이 그림책을 보면서 대화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어두운 밤, 눈 쌓인 광야에서 이리떼와 썰매를 탄 마부와의 싸움이 전반부에 서술되고 마지막에는 인생에게 있어서도 어제의 뉘우침과 싸우면서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는 내일을 향해 간다는 교훈을 암시하고 있는 알레고리다. ​ 하략- 홍문표시학이론총서22 「시창작 원리」(창조문학사, 교보e북)에서   상징의 유형은 크게 제도적 상징과 개인적 상징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제도적 상징 또는 인습적 상징을 보다 역사적으로 소급하면 원형상징에 이른다. 우선 문자나 기호같은 것은 어느 개인에 의하여 정해진 것이 아니라 한 집단의 문화적 약속이나 오랜 인습으로 형성된 것이다. 아라비아 숫자는 어떤 수량을, 한글 자모는 각각 어떤 소리를 대표한다. 화학에 있어서 분자식이나 기하학의 도표나 도형 등도 다 어떤 관념, 생각, 형상 등을 대표한다. 이러한 종류의 상징은 기호라고 해도 된다. 국기, 상표, 학교나 단체의 뺏지, 십자가 같은 종교의 표지 등은 일반적 기호와는 구별하여 제도적 상징이라고 부른다. 집단 공유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제도적 집단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에게 제도적 상징은 큰 의미가 있으나 그 집단에 소속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거의 무의미하다. 이러한 제도적 상징을 프롬은 인습적 상징(conventional symbol)이라 했다. ​ 그런데 인습적 상징이란 상징과 상징되는 대상 사이에 어떤 내재적 연관성도 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책상’이란 말과 이 말이 지시하는 ‘대상으로서의 책상’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도 없다. 오직 인습적으로 우리는 그 상징을 수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습적 상징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상징은 그 상징과 감정 사이에 내재적 연관 관계를 갖는다. 즉 ‘십자가’는 기독교의 인습적 상징이지만 십자가의 특수 내용은 예수의 죽음을 의미하고 또한 정신과 육체의 상호 관련성까지를 의미한다. 곧 단순한 인습을 초월하여 대상과 상징 사이에 연결 관계가 놓이게 된다. ​ 하나님, 시험에 들게 하옵소서 조그마한 미끼라도 저는 물겠나이다 날파리나 날빛 하나 놓치지 않고 이것저것 덥석덥석 물겠나이다. (그리하여 저 스스로 죄를 사하겠나이다) - 황인숙「기도」에서 ​ 인용한 시에서 가장 대표적인 시어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물론 종교적 상징이겠지만 넓게는 문화적 상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종교적 상징이든 문화적 상징이든 그것은 개인적인 표시의 대상이 아니라 집단적이고 관습적이고 그래서 제도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 홍문표시학이론총서22 「시창작 원리」(창조문학사, 교보e북)에서   한편 상징은 인습이나 제도에 의해서 굳어진 문화적 상징도 있지만 시인이 창조하는 상징은 인습적인 관계와 무관한 전혀 개인의 상상력을 통하여 상징을 시도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상징을 문화적 상징, 우연적 상징, 긴장의 상징이라고도 말한다. 휠라이트는 개인적 상징의 특성은 긴장성에 있음을 강조한다. 사실 시에서 십자가나 비둘기 등의 이미지를 사용한다면 관습적으로 이미 그 의미를 알아차린다. 이것은 대단히 반복적이고 자동적인 인식이다. 따라서 이러한 이미지는 이미 그 의미가 고정적이어서 정서나 의미의 낯설음을 경험하기 어렵다. 따라서 시의 창조적 어법은 상징의 낯설음을 강조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표면적인 일상성에서의 문제이지 개인적인 상징도 엄격히 말하면 잠재의식이나 무의식적 원형과의 관련성을 배제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없는 海岸線을 한 사나이가 이리로 오고 있었다. 한쪽 손에 죽은 바다를 들고 있었다. - 김춘수「처용단장 제1부」 ​ 인용한 시는 제목을 보아 처용을 소재로 한 시다. 용왕의 아들인 처용이 달밤에 밖에서 놀다가 집에 들어와 보니 아내가 역신과 동침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처용의 단장은 여기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용한 시를 보면 한 사나이가 ‘죽은 바다’를 들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죽은 바다란 무엇일까. 우리는 상징의 특징을 다의성, 신비성으로 말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도 죽은 바다의 본의는 난해한 신비감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징은 김춘수의 전혀 개인적인 상상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다. 이러한 상징을 개인적 상징이라고 한다. 따라서 개인적 상징의 특징은 암시성, 다의성, 입체성, 문맥성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 홍문표시학이론총서22 「시창작 원리」(창조문학사, 교보e북)에서   상징적 이미지의 한 유형으로 원형적 상징을 들 수 있다. 원형(原型)이란 원래 근본적인 틀이라든지 어떤 제품의 기본 구조라고 말할 수 있다. 신발을 만들 때는 신발의 기본 틀에 맞추고 버선을 만들 때는 버선의 본에 맞춰 천을 재단하는 것이다. 이처럼 같은 모양의 물건을 만드는 데는 기본적인 틀이 필요하다. 이러한 틀에 의해서 계속 동일한 물건은 생산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물건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생각도 이러한 기본 틀에 의해서 사고 작용을 할 수 있다는 추리가 가능하다. 인습적 상징이나 제도적 상징의 개념과도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 비둘기가 평화를 상징한다든지 무궁화가 한국을 상징한다는 해석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비둘기와 평화, 무궁화와 한국이라는 사고의 도식은 지역적 역사적 사회적 조건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결정된 제한된 약속에 속하는 것이지만 원형(archetype)상징은 그러한 특수한 상황에서의 약속이 아니라 자연 속에 존재하면서 그들이 오랜 세월 자연과의 교섭 가운데 무의식 적으로 체득된 사고유형을 말한다. 예를 들어 인간과 물의 관계를 보면 물은 모든 생물들의 필수적 요소다. 세척의 기능도 있고, 성장의 기능도 있고, 재생의 기능도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물이라는 이미지에서 본능적으로 창조의 힘이나 정화의 기능, 풍요와 성장의 의미를 연상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인식은 어느 일부의 인간만의 사고가 아니라 인간이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보편적인 것이다. 이처럼 자연과의 오랜 교섭 속에 무의식적으로 체득된 자연에 대한 보편적 의미를 원형적 상징, 또는 보편적 상징이라고 한다. ​ 그런데 이러한 보편적 상징이 되고 있는 대표적인 물질이 서양에서는 물, 불, 공기, 흙이다. 우주가 이 네 가지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는 4원소설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기본적인 물질을 물(水), 불(火), 흙(土), 금속(金), 나무(木)라 하고 이를 오행(五行)이라 하였으며 이들의 상승 작용에 의하여 만물은 생성하고 소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는 음(陰)과 양(陽)의 기(氣)에 의해서 더욱 복합적으로 작용하는데 이는 우주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리나 심리나 운명까지도 작용하는 것으로 설명되어지고 있다. ​ 하략- 홍문표시학이론총서22 「시창작 원리」(창조문학사, 교보e북)에서   시인 예이츠(Yeats)는 4원소설을 자기의 시에 적용하고 있는데 물은 이슬, 파도, 피, 공기는 바람, 불은 별, 불꽃, 대지는 숲으로 확대하여 이미지를 사용하였고 이들은 다음과 같은 경로로 시적 상상력을 자극한다고 하였다. ​ 1. 대지의 두려움→밤 그리고 잠과 연관→어두움의 내포 때문에 惡意 →사탄→사탄의 위치→北 2. 물→눈물, 슬픔, 상실, 죽음→西(해가 지는 곳) 3. 불→정열의 불꽃→사랑의 상징→南(열 때문에) 4. 공기→공기, 떠오르는 해→희망→東 ​ 이 점은 바슐라르의 경우도 유사한데 바슐라르가 설명하는 이들 4원소의 상징적 의미는 물은 죽음과 상실을, 대지는 의지와 휴식을, 불은 정열을, 공기는 움직임과 초월을 표상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 늙은 사람이란 정말 보잘 것 없는 것, 막대기에 걸친 누더기 옷가지일 뿐이다. 육체의 옷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을 영혼이 손뼉치며 노래하지 않고, 소리 높이 노래하지 않는다면 또한 영혼의 장엄한 기념비를 배우지 않는다면 노래를 배울 곳은 아무 데도 없다. 그래서 나는 바다를 건너 이 곳 聖市의 「비잔티움」에 왔다. - 예이츠「비잔티움 항해」에서 ​ 인용한 시에서 시인은 노인이 영혼의 세계의 가치를 모르고 육체적인 쇠퇴만 슬퍼한다면 그것은 한낱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육체란 영혼을 감싸는 보잘 것 없는 누더기와 같은 것, 오히려 그러한 육체를 벗어 던지는 영혼만이 참된 기쁨과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인데 문제는 마지막에서 바다를 건너 성시 비잔티움으로 왔다는 말에서 그의 상상력의 뿌리를 확인하게 된다. 그는 앞서 지적했듯이 바다는 물의 변형이고 물은 눈물, 슬픔, 상실, 죽음의 상징이다. 따라서 바다를 건너는 것은 그러한 절망의 극복이며 비잔티움은 영원히 성화가 타는 신성한 세계, 사랑과 희망이 있는 이상적인 세계, 바로 불과 대지의 원형에 대한 상징이 되는 셈이다. ​ 홍문표시학이론총서22 「시창작 원리」(창조문학사, 교보e북)에서   인류학자 프레이저는 세계 각 민족의 신화와 종교제식을 비교 연구한 결과 신화 및 의식의 근본적인 양식이 공통된 것을 발견하였다. 심리학자 융은 우리 조상들이 수만 년 동안 살아오면서 반복하여 겪은 원천적인 경험들이 인간 정신의 구조적 요소로 고착되어 집단적 또는 민족적 무의식을 통하여 유전된다고 하였으며 그것이 신화, 종교, 꿈, 환상, 상징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따라서 시인들이 시를 쓰면서 이미지를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게 되는데 이를 분석해 보면 결국 원형적 의미로 환원될 수 있다는 이론이기도 하다. 원형상징에 대한 휠라이트, 궤린, 프로이드, 융, 프라이 등의 해석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⓵ 휠라이트와 궤린의 원형상징 휠라이트와 궤린은 공간적인 상하 우리와 밀접한 피, 빛, 물, 말, 원, 바다, 강물, 태양 등의 원형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상- 성위, 탁월함, 왕권, 지배, 소망, 선, 하늘, 아버지 하- 하강, 심연, 지옥, 무질서, 공허, 대지, 어머니 피- 선과 악, 긍정, 불길, 힘, 금기, 죽음, 처녀성, 탄생, 형벌, 맹세, 전쟁, 재생 빛- 정신, 영혼, 지적, 공간, 불, 공포, 상승, 원, 하늘 물- 정화, 생명, 순수, 속죄, 창조, 신비, 탄생, 죽음, 부활 말- 충동, 이성, 윤리, 정상성 원- 태양, 완전, 진리, 운명의 장난, 윤회, 남녀 결합 바다- 생의 어머니, 죽음과 재생, 영원성, 무의식 강물- 죽음과 재생, 세례, 시간의 영원, 생의 순환, 신의 화신 태양- 힘, 자연의 이치, 의식, 부성의 원리, 시간과 생의 추의 아침해- 탄생, 창조, 각성 저녁해- 죽음 검정- 혼돈, 신비, 미지, 죽음, 무의식, 사악, 우울 빨간- 피, 희생, 격렬, 무질서 초록- 성장, 감동, 희망 훌륭한 어머니- 인자함 땅의 어머니- 탄생, 포근함, 보호, 비옥함, 성장, 풍요 공포의 어머니- 무녀, 여자, 마법사, 마녀, 두려움, 죽음 공주, 숙녀- 영혼의 동반자, 정신적인 완성의 화신 배- 소우주, 항해 정원- 낙원, 천진무구, 순결미, 풍요 사막- 황폐, 죽음, 니힐리즘, 절망 ​ (1) 무서운 것이 내게는 없다 누구에게 감시 받을 생각도 없이 나는 나에게 황홀을 느낄 뿐이다 나는 하늘을 찌를 때까지 자랄려고 한다 무성한 가지와 그늘을 펼려고 한다 - 김윤성「나무」에서 ​ (2) 바다 위에서 눈은 부드럽게 죽는다. 죽음을 덮으려 눈은 내리지만 눈은 다시 부드럽게 죽는다. 부드럽게 감겨 있는 눈시울의 바다. 얼굴 위에 쌓인 눈의 무게는 보지 못하지만 그의 內面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 허만하「데스마스크」 ​ (1)의 시는 나무의 성장하는 속성을 통하여 인간의 상승 지향적 욕망을 보여 주고 있다. 나무는 늘 수직으로 상승한다. 이는 무한히 상승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원형적 상징으로 충분한 이미지가 될 수 있다. 성장이나 발전을 소망하는 인간의 꿈은 하늘로 뻗어가는 나무들을 통하여 상징적으로 표현된다. ​ (2)의 시는 물의 원형 이미지를 보여 주고 있다. 물은 문학 작품에 반복해서 많이 나타나는 원형적 상징의 하나다. 이 물은 창조의 신비, 탄생, 죽음, 소생, 정화와 속죄, 풍요와 성장의 상징이며, 융에 의하면 무의식이 가장 일반적 상징이다. 여기에 바다와 강이 포함된다. 바다는 모든 생의 어머니, 영혼의 신비와 무한성, 죽음과 재생, 무궁과 영원, 무의식 등을 상징한다. 우리는 이 작품에서 바다에 눈이 내려 소멸되는 장면의 연속을 통해 허무, 비애, 공포와 같은 죽음에 대한 일상적 반응은 전혀 유발되지 않고 오히려 죽음의 아름다움과 성스러움, 그리고 영혼의 신비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 ⓶ 프로이드의 성적 상징 프로이드는 그의 정신분석학을 통하여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성적 욕망이라고 보고 특히 남성과 여성의 욕망이 다음과 같은 이미지로 표현된다고 하였다. ​ 남성- 지팡이, 양산, 막대기, 나무, 모자, 칼, 총, 수도꼭지, 연필, 넥타이, 뱀, 열쇠, 산, 하늘 등 여성- 구멍, 웅덩이, 동굴, 항아리, 병, 트렁크, 상자, 방, 호주머니, 배, 종이, 책, 테이블, 달팽이, 조개, 교회, 사원, 숲, 사과, 복숭아, 구두, 마당, 셔츠, 물, 바다 등 ⓷ 융의 집단적 원형상징 융에 의하면 인류의 조상들이 계속 반복되는 생활 속에서 체득된 반복되는 의식의 유형을 원형이라 하였고, 이러한 원형은 개인뿐만 아니라 집단, 즉 민족의 전통에 계승되어 문학, 신화, 종교 등에 반영된다고 하였다. ​ 하략- 홍문표시학이론총서22 「시창작 원리」(창조문학사, 교보e북)에서  
5    강소이 시집 해설 댓글:  조회:1129  추천:0  2019-12-14
강소이 시집 해설 현실에 대한 치열한 의식과 가상공간이 융합된 이미지의 세계                                                     심 상 운(시인, 문학평론가) 1. 들어가는 글 21세기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것은 빅 데이터,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로봇, 무인자동차, 5g 스마트폰 등이 만들어내는 경이로운 현실과의 새로운 마주침이다. 여기서 마주침이라는 것은 사유를 유발시키는 특별한 경험을 의미한다. 강소이 시인의 세 번 째 시집 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가까운 미래에 구현될 4차 산업혁명의 놀라운 현실을 떠올리는 것은 그의 시편들이 일반적인 서정성에서 탈피하여 펼치는 가상공간의 이미지가 현실과의 관계에서 치열하고 경이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시편을 읽는 독자들은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에서 "현실 문제를 반영하고 비판하며 문제의식을 제기함이 시인의 사명이기도 하다"는 은사님의 가르침이 내 뇌리에 늘 명징하게 박혀 있어서 물질문명 시대에 생명존중과 초월의식, 죽음, 전쟁에 유린된 생명, 현실 세상의 세태와 비판을 형상화했다. 또한 해녀, 광부, 임란 때 도공들의 애환, 소외된 이들에 대한 연민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역사의 현장을 탐색하는 여행자가 되어 과거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현실의 문제에서는 무엇보다도 생명존중을 내세우며 적극 대응을 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그는 그런 자신의 시작행위를 ”여행지에서는 풍경과 사유와 그곳에 얽힌 이야기들이 오버랩(over lap)되기 때문에 여행지를 하이퍼시로 쓰는 건 재미있는 정신적 기쁨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주제의식을 시로 형상화하기 위해서 ”은유, 직유, 이미지, 관념의 사물화, 아이러니(Irony), 패러독스(Paradox), 공감각적 심상, 객관적 상관물, 이미지의 폭력적 결합, 낯설게 하기 등의 표현 기교들“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강소이 시인이 자신의 시에 대한 확고한 의식과 기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그가 여행지에서의 견문과 사유를 하이퍼시로 엮어내는 데서 정신적인 기쁨을 느낀 다는 것은 관념적인 의미의 세계에서 탈출하여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하이퍼시에 대한 그의 몰입이 어느 정도인가를 가늠하게 한다. 이 시집의 시편들의 주류가 하이퍼시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강소이 시인의 개성이 창출한 현대적인 감수성과 21세기의 시인정신이 형상화한 신선한 시의 공간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해설의 관점을 ‘현실에 대한 치열한 의식과 가상공간이 융합된 이미지의 세계’라는 데 두고 시편들의 면면을 나름대로 조명해 보고자 한다. 2 시편 들여다보기 가. 현대문명에 대응하는 생명의식의 시편들 십여년 전 중앙일보를 읽다가 다음과 같은 인터뷰기사를 보고 스크랩을 하였다. SBS 자연다큐 전문 PD 윤동혁씨가 한 말이다. 생명의 소중함을 추적하면 좋은 프로가 저절로 나온다면서, “결국 모든 것은 생명에 대한 경외로 모아져요.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만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가가 핵심이죠. 관심을 기울이고 집요하게 추적하면 좋은 프로가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현대시에도 해당됨은 물론이다. 이 시집의 첫 시「6차선 도로」는 그런 면에서 독자들에게 충격과 함께 높은 정신의 경지를 느끼게 하는 시로 읽힌다. 러쉬아워(rush hour)의 6차선 도로에서 차바퀴에 깔려서 검붉은 내장을 토하고 쥐포처럼 뭉개져버린 고양이를 보는 시인의 시선이 예사롭지가 않기 때문이다. 시인은 카메라 기자 같이 그 끔찍한 현장의 장면을 생생하게 찍어서 보여주며 보도(reporting)하고 있다. 그리고 차바퀴에 깔려 죽은 고양이를 ‘ 거대한 한 마리 하늘님’으로 드러내고 있다. 현대시에서 ‘보여주기(showing)’는 과학적인 관찰을 통해서 사물성의 세계에 접근하여 시를 관념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방법이다. 추상적인 개념에서 벗어나서 구체적인 장면을 보여주는 표현의 중심에는 대상을 실제의 상태로 인식하고자 하는 사실주의의 객관적 시각과 디지털적 감성(영상성, 현재성, 정밀성)이 들어있다. 휴머니즘(humanism)을 내세우는 현대인들은 인간이외의 생명체에 대해서 차별의식을 가지고 생명체의 동일성을 인정하지 않는데, 시인은 이 시에서 사실적인 현장의 감각과 함께 오히려 죽은 고양이를 ‘거대한 한 마리 하늘님’으로 표출하여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드러냄으로써 독자들에게 깨우침의 큰 울림을 주고 있는 것이다. 출근길이면 산탄散彈처럼/쏟아져 나오는 6차선 도로/검은 등 흰 배 고양이가/도로에 검붉은 내장을 토했다/단말마斷末魔 /아직 놓지 못한 발끝 파르르 떨린다//퇴근길 달리는 6차선 도로/진회색 비둘기 몸통 으깨져/쥐포처럼 빨간 피로 뭉개져있다//먹이를 찾아 도로에 나섰을까/떠나간 짝을 찾아 잠시/6차선 도로에 날아 앉았을까//문명의 톱날 바퀴 밑에/깔린/거대한 한 마리 하늘님//-「6차선 도로」전문 「高苑을 가르는 경적소리」에서도 문명을 상징하는 화물트럭의 바퀴에 깔린 생명체(검붉은 창자)를 시인의 눈은 카메라의 렌즈가 되어 생생하게 찍어서 보여주고 있다. 티베트 고원은 현대인들이 마지막까지 지켜야할 정신적(종교, 철학) 시원(始原)의 고향이다. 그러나 문명의 바퀴는 그 시원의 공간마저 침범해 피로 물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 현장을 시인은 살아있는 이미지로 드러내고 있다. 검붉은 창자 도로 위에 터져있다/아직 놓지 못한 숨결/파르르 떠는 발/질주하는 헤드라이트 바닥/찢긴 너의 너덜거리는 살/시뻘건 프린트 자국/밟고 간 바퀴도 미안해하지 않았다/울리지 않은 요란한 경적소리//20톤 화물트럭에 깔린 햇살 한 조각에서/파드득 /두레박 길어 날아올랐다//( 티베트 고원 꼭대기 찰진 바람을 가르는 경적소리 ...... ) //-「高苑을 가르는 경적소리」전문 「별 무리 지는 강물」에서는 젊은 여인들의 낙태에 대해 시인이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있다. 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자궁 속에서 태아(胎兒)로 생을 마감하는 인간 생명체에 대한 시인의 연민과 문제의식은 생명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경시하는 현대인들의 문명(의술)과 연결되어 있다. 시인은 그것을 “신의 자리가 여자의 자궁에서 메스로 도려졌다”라고 날카롭게 지적하여 독자들의 가슴에 울림을 주고 있는 것이다. 십자 틀에 묶인 창백한 여자의 손과 발. 신의 자리가 여자의 자궁에서 메스로 도려졌다. 잉태를 꿈꾼 적 없는 밤의 동굴을 지나 자목련 벽에 콩나물 대가리가 위란강을 건너 딸깍 앉았던 곳. 그 문은 철문보다 단단해서 한 달에 한번만 문을 연다는데, 손발 묶인 그녀의 문으로 쏟아져 내렸던 스륵스륵 기계소리 덩이 피. 그런 날이면 하늘의 신들은 눈을 감았다. 뒷골목 허름한 이층집에서 그렇게 별들은 하나씩 떨어졌다. 감나무 가려진 감잎 쓰린 맛을 탓하지 마라. 태씨 아주머니는 감잎으로 별을 하나씩 감싸서 마을버스에 태워 보냈다. 별 무리 지는 강물 위로//--「별 무리 지는 강물」전문 *위란강 : 수정막과 난표면과의 사이 이 외에도 동백꽃의 모가지가 떨어져 내리는 안타까움을 하이퍼시의 구성으로 드러낸「찰라-여수에서」, 해안에서 자살한 시신들이 새벽마다 떠온다는 인천 무의도 명사길의 시신들에게 “무에 그리 서러워 무의도까지 버린 발로 떠왔느냐고 이제는 편히 가라”고. 위무의 마음을 전하는「무의도, 감은 눈에게」등이 생명존중의 시편들로 인상에 남는다. 나. 현실과 상상이 융합된 하이퍼시의 시편들   21세기에 한국현대시의 현장에서 태어난 하이퍼시는 서로 다른 이미지의 단편을 결합하여 하나의 큰 이미지를 구성하는 영화의 몽타주(montage) 기법을 바탕으로 기승전결로 연결되는 기존시(旣存詩)의 아날로그(analog)적인 구성의 시와 대조되는 이미지의 망(網)을 형성하는 디지털(digital)적인 새로운 시형식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것은 기존의 단선구조(單線構造)의 시형식을 해체하는데서 출발한다. 그래서 이미지와 이미지의 충돌과 결합을 기본으로 하는 다선구조(多線構造)의 하이퍼시는 기존시들의 설득적 구조에서 벗어나서 ‘이미지의 보여주기(showing)’를 통해서 독자와 소통하고자 한다. 따라서 하이퍼시의 시론은 현대철학에서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해체주의와 질 들뤼즈(Gilles, Deleuze)의 리좀(Rhizome) 이론을 바탕에 깔고 있는 현대적인 시론으로 부상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하이퍼시는 21세기 최첨단의 사유와 철학이 만들어낸 시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시집의 제목이 된「새를 낳는 사람들」에서도 시의 구성에서 서술형식의 기존 시와는 다른 이미지들의 결합이 빚어내는 입체적인 시의 공간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환상과 현실이 교직(交織)된 심리적 현실의 보여주기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시에서 “그녀는 천상에서/물고기 비늘 반짝이는 시간을/한 국자 떠서/끝나버린 영화 스크린을 클릭하고 싶었을지도 몰라”로 시작되는 #1은 심리적인 내면의 환상의 세계로, “기억의 방에 26 년 숨겨둔 여인을 태우고/코스모스 길을 달리는 50대 사내”가 등장하는 #2는 현실의 의식세계로 인식되고 있다. 그리고 #1의 “경주박물관 유리 상자 안에 찰랑이는 금관/자궁 안에 태胎모양, 옥빛 관옥/유리 기억들”은 “가시 구슬을 두고 간 그녀/한 톨의 마음”이 안고 있는 이승의 삶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사물 이미지로 표출한 시적 몽타주로 이해된다. 그리고 “버림받았던 기억의 뼈들이/들꽃으로 하얀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는 구절에서 50대의 사내와 천상의 그녀가 이승에서 풀지 못한 심리적 갈등의 앙금이 이 시의 내적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는 것으로 감지된다. 그것은 시에서도 등장인물들의 심리적 갈등이 서사구조의 시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시를 이렇게 이해할 때, 이 시와 기존의 서술형식의 시가 얼마나 다른 차원에 위치하고 있는가를 알게 된다. 그것은 사물인터넷의 4차 산업혁명시대와 그 이전의 시대를 비교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된다.   #1/그녀는 천상에서/물고기 비늘 반짝이는 시간을/한 국자 떠서/끝나버린 영화 스크린을 클릭하고 싶었을지도 몰라/가시 구슬을 두고 간 그녀/한 톨의 마음//경주박물관 유리 상자 안에 찰랑이는 금관/자궁 안에 태胎모양, 옥빛 관옥 /유리 기억들//영사기는 더 이상 돌지 않았다//#2/기억의 방에 26 년 숨겨둔 여인을 태우고/코스모스 길을 달리는 50대 사내/돌아온 꽃잎이/“아앙 아아앙......”/십 수 년 전 무지갯빛 사진 스크린을/애교 띤 콧소리로 더듬어도/버림받았던 기억의 뼈들이/들꽃으로 하얀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푸른 달무리에 깨물렸던 한 톨 구슬/새를 낳는 사람들//--「새를 낳는 사람들」전문 「스마트폰의 하루」에서도 (F.I), (F.O) 등 영화의 기법을 넣어서 스마트 폰에서 순간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장면들이 이미지들의 연상과 결합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새로운 감각의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정신적으로 경험하게 한다. 그래서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스마트 폰의 화면 속에서 들려오는 강아지소리, 새소리, 임진왜란 때의 조총소리, 금당벽화를 그려내던 담징의 손끝에 앉았던 나비 등으로 이어지는 불연속적인 단편(斷片)의 이미지들은 모사(模寫)된 가상의 이미지이지만 그 가상이 실재같이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이는 원본 없는 이미지가 새로운 실재로 둔갑한다는 프랑스의 사회철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이론과 연결된다. 그는『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에서 이미지는 실재의 반영→실재의 왜곡→이미지 자체로의 독립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 시에서 시의 주제가 무엇인가를 논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 된다. 독자들은 시인이 우발적으로 만들어내는 이미지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터넷이 만들어내는 현대문명의 현상을 나름대로 즐기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F.I)//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까만 네모 화면에서/졸라대는 애인처럼/ㄷㄹㄷㄹㄷㄹ 강아지 소리/ㅋㅌㅋㅌㅋㅌ 날개 없는 새소리/임진왜란 때 거북선에 날아오던/ㅁㅁㅁㅋㅋㅋ/ㅋㅌㅋㅌㅋㅌ/내 귓바퀴에 쏘아대는 조총소리/ㅅㅅㅅㅅㅅ허공에 날개 짓을 한다//(O.L)//금당벽화를 그려내던 담징의 마지막 손 끝에/앉았던 나비의 날개마저 포르르 떨린다/책장 넘기는 소리에 너 울리는 줄 몰랐으니/하얀 꽃잎 하나 떨어진다//고구려 벽화에서 살며시 날아 나온 나비 한 마리/내 손바닥 까만 네모 상자 안으로/화살처럼 들어와 박힌다//(F.O)//송골송골 담징의 이마에 맺혔던 까만 밤/화룡정점의 순간에도/눈을 껌벅이는 불면의 아우성//--「스마트폰의 하루」전문 「이즈하라항의 달빛」은 기행시로서 하이퍼적인 구성을 보이고 있으면서도 주제의식을 내포하고 있다. 덕혜옹주, 최익현 등 대마도와 관련된 역사적 인물이 시인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에는 그런 역사의식과 함께 쓰시마 사내와 연관되는 성적인 이미지가 들어 있다. 그래서 그 두 개의 이미지가 하이퍼적인 구조 속에서 시의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된다. 그리고 그것이 기행시로서 시의 맛을 풍기고 독자와 소통하는 시적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즈하라항에 보슬비 내린다/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밤이면/성큼성큼 박수소리처럼/노를 저어오던 쓰시마 사내들//이즈하라항에 검은 가오리날개 매 한 마리/날아간다/바다를 유리창 가득 담은/회전초밥집에서 뜨거운 대마도 한잔을 붓는다//덕혜옹주도 낙선재로 돌아가고/최익현도 잠든 밤/검은 파도 소리에/목이 아프도록 시린/ 대마도 하루 빌린 내방엔 밤새/불을 끄지 못했다//수밀도 무성한 숲에/창호지를 찢고 쳐들어오는 쓰시마 팔뚝 달빛/찔레꽃 하얀 내 가랑이도 아팠다// ---「이즈하라항의 달빛」전문 * 이즈하라항: 일본 대마도 남단에 있는 항구 이름 「하얀 지평 너머」는 세 가지의 형태로 응집되어 있는 죽음의 정서가 서사적 모듈(module)을 형성하면서 울림을 준다. 중동건설 현장에서 죽은 아들의 배냇저고리를 가슴에 품고 우는 늙은 어머니, 중동의 어느 도시에서 일어난 폭탄테러로 울부짖는 히잡 여인들의 실성한 모습, 어느 장례식장의 시계소리에서 시신들에게 보내는 시인의 시선이 그것이다. 끝 부분의 “하얀 나비들이 포르르 폴 포르르 상화고택을 나선 6월 달구벌 팔공산 한낮.”이라는 이미지가 엉뚱한 듯하지만 '하얀 나비‘와 죽음을 연결하면 현실과 초월이라는 두 세계의 결합이 보인다. 1.옥양목 보자기에 싸인 배냇저고리, 하얀 기억을 꺼낸다/낡은 옷장 서랍에서 아기작거리듯 배냇저고리,/귀밑머리 하얀 그녀는 보자기 풀어 흰빛 먼지를 쓰다듬는다/중동으로 떠난 아들, 그녀는 흰옷 갈아입고 열린 서랍 배냇저고리 품고 울다 웃는다//2.6 ‧ 25 동란, 폭탄에 으깨진 건물더미, 철근덩이, 찢진 유리 파편들/길바닥에서 언덕배기 카키색 천막 아래/피 절은 천에 덮여 씌운 시신들./하얀 천 들춰보며 울부짖는 여자들 울음소리/“ 아이고, 이것이, 아이고, 우리 복덩이, 복뎅이는 여기에 없어야재 ”/실성한 어미들의 꺼억꺼억 오열, 시신이 널브러진 언덕빼기가/목화구름처럼 아침 화면을 가득 덮었다//3.장례식장 시계소리가 달랑거리는 동안 시신들의 소원은 무엇이었을까./검버섯마저 하얗게 눈부신 순간을 나는 본다/알코올 솜으로 삭신을 닦아내는 손놀림이 바쁘다 /살아생전 소원까지 닦아내며 염殮하는걸까//하얀 나비들이 포르르 폴 포르르 상화고택을 나선 6월 달구벌 팔공산 한낮.// ------「하얀 지평 너머」전문 * 상화고택 : 대구시 계산동에 위치한 이상화 시인(1901~1943)의 옛집. 이 외에도 도쿄여행기-황거, 하비야공원, 도쿄역 등의 이미지를 하이퍼(hyper) 적의 구성으로 조합한「도쿄일기」, 신라여인들의 마음을 위로하던 전죽소리, 비닐이 묻힌 땅에서도 죽음을 뚫고 나오는 파릇파릇한 생명의 소리, 월정사 길에서 듣는 산 속의 물소리 등 소리가 만들어 내는 의미를 세 가지의 감각적 이미지로 드러내고 있는 「만파식적-소리가 만드는 세상」, 세월호의 비극적 상황을 하이퍼적 상상으로 엮은「바다에 촛불을 켜주세요」등 다수의 시편들이 현실과 상상이 융합된 하이퍼시로 기존의 시와는 다른 시적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다, 서정과 서사가 조화를 이룬 시편들 노자(老子)는『도덕경(道德經)』에서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라고 했다. 도가 도라는 관념에 잡혀있으면 있으면 순수한 도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은 시에도 해당된다. 시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좋은 시를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생명의식의 시편들과 현실과 상상이 융합된 하이퍼시들과 함께 서정과 서사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시편들이 주목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시에서 서정성은 기계속의 윤활유 같은 작용을 하기 때문에 서사(敍事) 속의 서정성(抒情性)은 매우 중요하게 여겨진다. 「돌담을 넘어 오는 달랑게」에는 조선왕조 시대에 영화로웠던 운현궁의 퇴락한 가을 정경이 한 폭의 풍경화로 그려져 있다. 시의 제목 ‘돌담을 넘어 오는 달랑게’라는 비유와 “운현궁 마당에/찰깍대는 외국인들의 셔터소리”의 서사가 시대적인 풍자성을 엿보게 하지만 “집주인은 햇빛 잘 드는 방에서/한 낮잠 잘 주무시고 계신걸까”라는 현실 초월의 서정적 여유로움이 이 시의 탄력성을 만들어내고 있어서 주목된다. 이것이 서사 속 서정의 역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구겨진 갈햇살이 운현궁 툇마루를 쪼고 있다//가슴이 이랑처럼 패인 여자의 가슴팍에/쏟아지는 햇살은 갯벌 달랑게 걸음이다//해바라기가 졸다간 햇살바라기,/퇴락한 왕조의 으깨진 갈색 노을빛에/꾸벅이는 행랑채//운현궁 마당에/찰칵대는 외국인들의 셔터소리/막아도막아도 넘쳐나는 논두렁처럼//집주인은 햇빛 잘 드는 방에서 한 낮잠 잘 주무시고 계신걸까//주인 없는 툇마루에 걸린 놀/돌담을 넘어 오는 갈잎//-「돌담을 넘어 오는 달랑게」전문 「사북역」에서도 서사와 서정의 조화로움이 시의 맛과 멋을 느끼게 한다. 시인은 폐광을 보고 싶어 했지만 사북역에 내려 역사(驛舍)에 핀 들꽃만 가슴에 담는다. 그리고 “검은 가루 이야기에 묻은/노을 이야기”를 이미지로 보여주고 있다. 그 노을은 사자의 혀보다 붉은 노을이다. 그래서 그 들꽃과 붉은 노을에는 어두운 현실 속에서 이글거리던 광부들의 분노와 희망의 마음이 들어있는 것으로 인식된다. 그것이 이 시에서 서사와 서정이 만들어 내는 시적 울림의 공간이 되고 있다. 사북역에 내려 막차가 올 때까지/기찻길 서너 시간, 역사驛舍에 들꽃들만 가슴에 담는다/폐광이라도 보고 싶다고 편지해 놓고//사자 혀보다 붉은 노을 기차에 가득 싣고/청량리역에 붉게 내려본 적 있는가//낮은 땅, /석탄가루 소주와 돼지고기로 씻어낸 검은 가루 이야기에 묻은/노을 이야기//-「사북역」전문 「유카리나무」에는 시인이 호주 시드니 파크의 유카리나무를 보고 느낀 시적 감성이 “Y字, Y에서 Y ....../Y에서 또 포크처럼 Y ....../Y자가 끝말잇기를 하며 뻗어있다”라는 개성적인 언어에 담겨 있다. 일종의 언어유희 같지만 “파란 하늘에 회백색 Y자마다 바람 스치자/술 취한 화가는 온통 연초록 물감을 쏟았다”고 술 취한 화가를 등장시켜 서정적 풍광을 연출하고 있으며, 나무의 푸른 정액과 여자를 연결하여 성적인 감각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끌어당기고 있다. 호주 시드니 올림픽 파크/분홍 플라스틱 포크 하나/잔디에 비스듬히 꽂혀있다/백 미터, 키 재기하는 유카리나무들/회백색 수피樹皮는 무우의 맨살처럼/Y字, Y에서 Y ....../Y에서 또 포크처럼 Y ....../Y자가 끝말잇기를 하며 뻗어있다//파란 하늘에 회백색 Y자마다 바람 스치자/술 취한 화가는 온통 연초록 물감을 쏟았다//연두 빛 유카리나뭇잎 단추들 닥지닥지/나무 위에선 오물오물/검은 귀 흰 몸 코알라가 유카리나무의 푸른/정액을 씹고 있다/지나가던 여자가 분홍 포크로 나뭇잎을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그녀의 입안에 푸른 물 고였다/칼로 잘라낸 돼지고지 한 조각/유카리나무 밑에 떨어져 있는/빛 밝은 한나절//-「유카리나무」전문 이외에도 이승과 저승이 한 매듭이라는 것을 드러낸 「통영점묘-매물도」, 감자탕 골목풍경을 사유의 언어와 결합한 「감자」, 화가 이중섭에 대한 연민과 사유가 담긴 「그의 草家」등 다수의 시편들이 주목되었다. 3. 나가는 글 이제까지 강소이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새를 낳는 사람들』에 실려 있는 66편의 시편들의 전체를 조감(鳥瞰)하면서 관심이 가는 시편들을 선택해서 가. 현대문명에 대응하는 생명의식의 시편들, 나. 현실과 상상이 융합된 하이퍼시의 시편들, 다. 서정과 서사가 조화를 이룬 시편들이라는 세 가지의 관점에서 감상의 시선으로 해설을 했다. 66편의 시편들 중에서 집중 조명된 시편들은 10편에 불과해서 더 좋은 시편들이 외면당한 것이 아닌가라는 우려의 마음이 든다. 그러나 선택된 시편들이 이 시집의 중심에 서 있는 시편들이라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21세기의 중심은 ‘빅 데이터,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로봇, 무인자동차, 5g 스마트폰’ 등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문명의 구조가 지배하는 시대환경이다. 그래서 그런 시대의 환경에 대응하여 한국현대시의 현장에서 탄생된 ‘하이퍼시’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와 몰입을 보여주고 있는 강소이 시인의 시편들은 주목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중심의 문명(culture)이 만들어낸 가치판단 속에서 소외된 생명체들에 대한 애정과 연민과 문제의식을 비롯하여 인간정신의 원적지 훼손에 대한 지적(指摘)이 담긴 시편들이 먼저 선정된 것은 그 시편들에는 시의 형식적인 면보다 더 중요한 ‘시의 영원성’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정과 서사의 결합이 만들어내는 시적 감성의 탄력성과 함께 시의 맛과 멋을 내포하고 있는 일련의 시편들이 가슴에 다가오는 것은 현대시의 새로운 감각과 기법도 중요하지만 시의 근원은 서정성과 서사성의 조화로움에 있기 때문이다. 강소이 시인의 시편에서는 현대시의 이런 중심점이 빛을 내고 있다. 그것은 이 시집의 시편들이 시적 균형(均衡)을 아름답게 이루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강소이 시인의 시에 대한 애정과 정진이 얼마나 치열하였나를 가늠하게 한다. 그래서 21세기에 등단한 시인으로서 현대시의 기반을 튼튼하게 다진 강소이 시인의 사유와 감각이 빚어낼 시편들의 새로운 변모와 발전이 기대되는 것이다. 이것으로 시집의 해설을 줄인다.
4    최성철 시집 해설 댓글:  조회:1168  추천:0  2019-12-14
최성철 시집 해설 도시인의 고독한 내면의식을 담은 모더니즘의 언어                                                                 심 상 운(시인, 문학평론가) 1. 들어가는 글 최성철 시인은 1975년 월간『시문학』으로 등단한 중견시인이다. 그는 20대의 대학생 시절에 등단하여 1976년 3월에 발간된『시문학』출신들의 첫 사화집『환한 대낮』에도 참여한 바 있다. 그는 등단 후 개인사 때문에 적극적인 활동을 유보해 왔지만 2002년에 시집 『간이역에 머무는 아픔』을 발간하고, 본격적인 시작활동의 결과물로『도시의 북쪽』을 상재하고 있다. 이 시집의 서문「찬란한 자줏빛」은 그의 시세계로 들어가는 안내문의 역할을 한다. 이 짧은 산문은 그가 왜 도시를 자기 시의 중심에 두고 있는지. 그가 지향하는 이상향이 어디에 있는지를 암시한다. 그리고 시집의 제목 『도시의 북쪽』이 상징하는 그의 정신의 고향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그는 이 글에서 ‘도시의 시’를 쓰게 된 이유를 “도시와 도시 안에 사는 사람들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면서 “아무 말 없이 각자 자기 표정을 가지고 총총히 제 갈 길로 사라지는 작은 도시인들의 모습도 좋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그런 도시인을 “행복한 난쟁이”라고 한다. 이런 그의 낭만적인 감성의 시선은 그의 시가 도시를 시의 대상으로 하면서도 도시인들의 환경문제나 생존문제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도시인 또는 자신의 고독한 존재의 모습을 그리는데 초점이 모아져 있음을 알게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의 시는 외부적인 현실보다 개인적인 내면의 세계에 더 가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시가 독자들에게 어떤 관념의 메시지를 전하는데 관심을 두지 않고, 낭만적 감성의 빛깔로 채색된 자신의 내면세계를 서술만이 아닌 모더니즘의 언어 이미지(가상현실, 사물 이미지의 집합)로 형상화하여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한다. 이런 그의 시에 대해서 시를 도구로 사회개혁을 주장하는 이상주의자들은 그들의 편향된 시론으로, 시를 종교적인 입장에서 인식하고자하는 이들은 그 나름의 시각으로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외부의 유혹에 끌려가지 않고 시를 순수한 감성의 언어표출이라는 입장에서 자기 시의 영역을 30여년 지켜온 그의 순수한 시관(詩觀)은 존중받아야 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순수시관은 시를 어떤 관념에도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이고 예술적인 존재로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의 시집 『도시의 북쪽』에 담긴 87편의 시를 읽으면서 그가 왜 도시를 자기 시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가를 다시 생각해보았다. 그것은 그가 정신적으로 단단한 성벽처럼 의지하고 있는 ‘고독’의 근원을 찾아내는 작업이기도 했다. 그는 한적한 시골보다 각종 소음과 사람들로 분비는 도시에서 더 절실하게 고독한 존재의 모습과 대면하게 되고, 그 내면의 실체를 고향처럼 인식하면서 물을 만난 물고기같이 그 속으로 침잠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 글의 제목을 ‘도시인의 고독한 내면의식을 담은 모더니즘의 언어’라고 붙여 본 것이다. 2. 시편 들여다보기 가. 내면의식의 표출과 이미지의 환상적 결합 이 시집의 구성은 4부 (Ⅰ. 오십 너머 마신 술 Ⅱ. 가을을 지나 겨울 속으로 Ⅲ. 담장에 그린 그림 Ⅳ. 내 마음의 놀이터)로 분류되어 있다. 그 분류의 방법은 시의 형식이 아닌 내용에 의한 분류다. 먼저 「사람들은 금요일마다 술을 마신다」를 읽어 보자. 무너지는 서류더미 속에서 오후 내내/인생의 로드맵을 만들고, 또 파쇄기에 넣는다/어느덧 석양은 안개처럼 번지고/전동차는 여전히 소음 속으로 떠나고/어둠은 언제나 뒤척이다가 나타난다/멀리서 사람들이 돌아온다/어둠을 헤치며 흔들흔들 온다/불빛 희미한 사거리/휘청거리는 신호등이 길을 가로막는다/시계는 매번 정각을 맞추려고 숨을 죽이고/일단의 사람들이 폭탄처럼 몰려서서는/무의미한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펄럭이는 자동차 불빛 앞에 /몇몇 남은 사람들은/손에 쥔 가방을 구겨버리며 술을 꺼내 마신다/쓱쓱 지우고 싶은 하루/그 금요일마다 사람들은 제 가슴을 열고/몰래 숨겨 놓은 술을 꺼내 마신다//-「사람들은 금요일마다 술을 마신다」전문 이 시 속에는 도시 직장인들의 삶의 현장이 영화 속의 장면들처럼 연결되어 있다. 서술보다는 묘사가 만들어 내는 이미지가 독자들의 시선을 당긴다. 그 중심 이미지는 “어둠은 언제나 뒤척이다가 나타난다” “휘청거리는 신호등이 길을 가로막는다/시계는 매번 정각을 맞추려고 숨을 죽이고” 등 명사+동사 또는 동사+명사 형태의 동적 이미지다. 다방면에서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이 동적 이미지들은 집합적 결합을 통해서 퇴근 시간의 도시 분위기를 연출한다. 시의 화자도 그 속에서 움직이는 존재이지만 그의 눈은 카메라의 렌즈가 되어서 객관적인 위치에서 그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 금요일마다 제 가슴을 열고 몰래 숨겨 놓은 술을 꺼내 마시는 사람들은 자신만의 밀실로 들어가고자 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곳에서 재탄생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 밀실은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무의식의 공간이다. 그 공간은 태아를 보호하는 어머니의 자궁 속 같은 원초적인 생명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불안과 초조, 정신적 스트레스에 지친 도시인들은 술을 마시고, 그 공간 속으로 잠수하려고 하는 것이다.「새벽의 빛」은 그 속에서 새롭게 탄생하고자 하는 시인(화자)의 무의식 속 자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새벽마다 나를 깨우는 이 누구인가/창문을 두드리는 이 누구인가/얼음장 밑을 흐르는 물소리/안개꽃처럼 번져오면/땅에서 시작된 어둠은 /다시 땅으로 사라지고/하늘이 열리고 빛이 내려온다//적막하여 외롭게 서 있는 지평선/드리워진 휘장을 서서히 걷으며/바람도 움직이지 않고/구름도 그 흐름을 멈춘 이 새벽에/저기서 다가오는 이 누구인가/눈부신 손을 내미는 이 누구인가//-「새벽의 빛」전문 “새벽마다 나를 깨우는 이 누구인가” 는 이 시의 화두다. 새벽마다 눈부신 손을 내미는 그 존재는 시인의 무의식 속의 모성(어머니)라고 추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그 존재를 인식하는 자아의 존재다. S. 프로이트를 구조주의적으로 재해석해서 무의식의 존재를 발견한 자크 라캉(Jacques-Marie-Émile Lacan, 1901년 ~ 1981년)은 무의식 속의 자아는 한 개체 안에서 그를 이끌고 통제하는 타자(他者)라고 한다. 따라서 그 타자는 본래적 자아의 은유나 환유라고도 말할 수 있다. 「비 온 뒤」에는 그 본래적 자아가 하얗게 발가벗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산을 접고 양지로 나오는 사람들/모두 눅눅했던 제 그림자를 벗고/환하게 피어나는 햇살을 만나러 간다/하늘은 이제 파랗게/나뭇잎에 걸린 물방울을 타고/지상으로 내려온다//그래서 세상은 하늘에서 온 도시/잔잔한 연못 속으로 지하철이 달리고/새소리, 바람소리 직조한 옷을 입으면/사람들은 차가운 분수에 못이 박힌 발을 씻고/마음속에 퇴적한 어둠을 털어낸다/다 보인다, 비 온 뒤에는/건널목을 지나가는 사람들/하얗게 발가벗은 모습이/무지개 틈새로 환히 다 보인다//-「비 온 뒤」전문 비 온 뒤 먼지가 다 빗물에 씻긴 세상은 “하늘에서 온 도시/잔잔한 연못 속으로 지하철이 달리”는 동화 속의 나라를 상상하게 한다. 그래서 “건널목을 지나가는 사람들/하얗게 발가벗은 모습이/무지개 틈새로 환히 다 보인다”는 새로운 시각의 세계를 열어준다. 이런 시각의 열림이 이 시에서는 관념에서 벗어난 선명한 사물인식의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다.「2009년 겨울 독감」에는 시인의 내면의식의 환상적 이미지(가상현실)가 서사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이미지 속에는 어머니의 모습이 영화의 화면처럼 나타난다. 등산용 지팡이로 땅을 딛으며/어머니가 나타나셨다/어깨에 비스듬히 손가방을 둘러메고/어머니가 나타나셨다/오른쪽 눈 실명, 왼쪽 눈 백내장/주변을 자꾸 둘러보며, 한 손을 저으며/행길을 건너오셨다/오늘따라 시청 앞 횡단보도가 매우 넓었다/나도 얼른 길을 건너 우리는 한복판에서 만났다/괜찮다, 괜찮아/어머니는 항상 그렇게 말씀하시고/그래 감기는 좀 어떠냐/또 그렇게 말씀하셨다/괜찮어, 이제/나는 어머니 앞에서 기침을 할 수 없었다/어머니를 한쪽 품에 안고 길을 건너오면서/어깨뼈가 닭뼈처럼 손가락에 잡혀/너무나 면구스러웠다/찬 바람이 콧속에 스며들었으나/기침을 할 수 없었다/통장과 카드를 전해드리고/나는 택시를 잡으려고 했다/어머니는 또 평상시처럼 한 손을 저었다//-「2009년 겨울 독감」1연 겨울 날 시청 앞 횡단보도에서 만난 어머니. 오른쪽 눈 실명, 왼쪽 눈 백내장이지만 “괜찮다, 괜찮아” 하시는 어머니. “통장과 카드를 전해드리고” 택시를 잡으려 했지만 평상시처럼 손을 젓는 어머니의 모습 속에는 시인의 절실한 그리움이 투영되어 있다. 어머니는 시인의 정신적 안식처로 인식된다. 나. 도시인의 고독한 서정과 낭만적 피안의식(彼岸意識)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의 시편의 중심은 도시인의 고독한 서정이다. 연작시 「지하철․1」은 그의 그런 모습을 새벽에 출근하는 회사원의 모습으로 담담하게 객관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새벽의 징검다리를 건너/발목이 시리게 푸른 공기를 마시며/나는 출근길을 나선다/밤새 잠을 설친 새들은 새까만 머리를 서로 비비다가/졸린 눈으로 제 부리를 제 가슴에 파묻고/길게 늘어진 전깃줄을 바람이 두어 번 흔들고 간다/붉은 보도를 가로막고 선 지하철역 입구/하얀 불빛에 가지런한 계단을 내려서면/알 수 없는 그리움이 가슴에 밀려온다/아직은 다 깨어나지 못한 공간을 침묵만이 가득 메우고/희미한 전등불빛이 그 침묵더미를 조심스럽게 썰어간다/아무도 없다, 주변에는/항상 그렇게 살아왔다/바람 부는 날이나 비 오는 날이나/언제나 혼자였던 사람들/혼자라는 것에 이제 익숙해져서/외로울수록 편안해지는 것은 더 이상 이상한 일이 아니다/빛나는 어둠이 수북이 쌓인 철로를 보며/나는 잠시 가방을 내려놓는다/이제 조금만 있으면 이 철로를 우우 구르며/바람과 같이 전동차가 나타날 것이다-「지하철․1」전문 심경토로가 들어있지만 사실적인 이미지가 더 가슴에 닿는다. 새벽에 출근하는 자신의 모습을 밤잠을 설친 새들의 모습과 병치시킨 앞부분의 정경은 도시인들의 삶이 얼마나 각박하고 피곤한 것인가를 사물의 이미지로 전한다. 그리고 끝부분 “빛나는 어둠이 수북이 쌓인 철로를 보며/나는 잠시 가방을 내려놓는다/이제 조금만 있으면 이 철로를 우우 구르며/바람과 같이 전동차가 나타날 것이다”에서는 도시인들의 삶은 사회의 구조가 만들어내는 삶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순응하는 화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화자의 ‘빛나는 어둠’이라는 역설이 도시인의 고독한 삶을 표현하는 언어로서 신선한 감각과 함께 내면적 슬픔을 남긴다. 그러나 고독감이 내면적 슬픔이라고 하여도 시인은 고독을 배척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고독의 각질 속에 들어가서 자신만의 낭만적 우주감각을 느끼고자 한다.「항아리 斷想」은 그의 그런 내면세계를 순수한 모더니즘의 이미지로 드러내고 있다. 밤은 깊고 깊은 항아리/가도 가도 끝이 없는 우주가 /그 안에 천천히 내려온다/오늘 밤 별들은 /항아리 가득 부어진 물에 풀어져/한 그림 속 조용한 빛을 이룬다/그 안에선 모두가 정지해 있다/바람이 분다 해도/흔들리는 것은 오로지 바람일 뿐/무슨 상관이 있을 수 없다,/ 서로 간에/편안한 항아리 속/단단히 여문 침묵만이 제 그림자를 안고 서 있다//부동의 항아리 속/별빛들이 하나 둘 일어서기 시작한다/별빛들이 일어설 때마다/그 빈자리를 어둠이 메워간다/나뭇잎들이 떨어져 은은히 쌓이듯이/어둠은 제 몸을 쌓아 빛의 자리를 천천히 메우며/저 깊은 바닥에서부터 견고한 안식을 다져나간다/빛의 흔적은 모두 지워지기 시작한다/물어보라, 무슨 미련들이 아직 남아 있는 건지/다 가지고 가거나, 다 놓고 가거나//이제부터는 이 단단한 공간에/모든 것은 오로지 태초의 제 모습으로만 존재할 뿐이다/내 숨소리가 천천히 내 눈을 덮는다//-「항아리 斷想」전문 이 시에서 밤, 항아리, 별, 빛, 바람 등의 언어들은 실제적인 의미에서 벗어나서 시인의 고독한 세계를 치장하는 기표(signifier 記票)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 시의 공간은 실제의 현실적인 공간이 아닌 시인의 상상이 꾸며낸 가상공간이 된다. 그는 그 항아리의 단단한 공간 속에서 그에게 정신적인 “견고한 안식”의 자리를 다지게 하는 고독의 실체를 만난다. 그리고 그는 그 속에서 “태초의 제 모습”으로 존재하는 자아를 발견한다. 따라서 이 ‘항아리의 공간’은 선사(禪師)들이 본래적인 자아를 탐색하는 선(禪)의 공간과 통한다. 이 가상공간의 본질적인 풍경은「도시의 북쪽」에서 낭만적인 동영상의 그림으로 그려진다.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단풍은 아름다웠다/차를 한참 달려서 이제는/크고 작은 나무들로 가득 찬 숲길/하얀 빛 한 줄기 나무 틈을 밀며/힘겹게 들어오고 있었다/피치 파인이라고 부르는 리기다소나무들은/떼를 지어 하늘을 막고 서서/바람이 불 때마다 탬버린 소리를 냈다/그중에는 키다리 더글러스소나무도 있는 것 같았다/갑자기 주변이 환해지면서/나를 에워싼 나뭇잎들은 모두 황금빛 왕관을 쓰고/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나에게 달려왔다/눈이 부셔서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햇살들은 바람을 타고 내려와/뽀얀 분홍빛에서 찬란한 자줏빛으로/다시 뽀얀 분홍빛으로 변하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길을 달리며 나는 그런 색깔로 물들어 갔다//손을 흔들고 서 있었다/수십 년 전에 헤어진 동네 꼬마친구가/길옆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나는 황급히 차를 세웠으나//그 아이는 온 데 간 데 없었다/아아, 이름이 뭐였더라,/그곳에는 한 무더기 코스모스만이 흐드러지고 있었다//-「도시의 북쪽」1,2,3연 승용차를 타고 여행을 하는 내용으로 구성된, 이 시의 세부를 형성하는 사건들은 부분적으로는 사실적 체험이다. 그러나 그 사건들이 이 시에서는 시인의 상상, 감성, 정서, 무의식 등에 의해 재구성된 사건이라는 점에서 가상현실(假想現實) 속의 사건이 된다. 가상현실 속에는 물리적 가능성의 사건만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판타지(fantasy)의 영상도 들어갈 수 있다. 시인은 차를 타고 도시의 북쪽으로 달려간다. 도시의 북쪽에는 아름다운 단풍이 있고, 크고 작은 나무들로 가득 찬 숲길엔 하얀 빛 한 줄기 나무 틈을 밀며 들어오고 있다. 그리고 바람이 불 때마다 탬버린 소리가 난다. 그는 그런 세계의 풍경을 “나뭇잎들은 모두 황금빛 왕관을 쓰고/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나에게 달려왔다/눈이 부셔서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라고, 또 길을 달리면 “수십 년 전에 헤어진 동네 꼬마친구가/길옆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라고 동화적인 낭만의 그림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인용된 시만으로도 ‘도시의 북쪽’이 시인(화자)의 정신공간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시의 화자가 왜 도시의 북쪽으로 여행을 떠나는지를 알게 한다. 그곳은 시인이 언젠가 어머니로부터 또는 우주의 어둠으로부터 떠나온, 그래서 시인의 무의식의 심층에 자리 잡고 있는 피안(彼岸)을 상징하는 이상향의 도시라고 유추되기 때문이다. 이 시의 끝부분, 돌아오는 차 안 그의 옆 좌석에 앉아 있는 “찬란한 자줏빛 외투를 입은 어둠 하나” 는 시인이 갈구하는 이상향의 분위기와 빛깔을 암시하고 있다. 그날 밤 나는 밤새도록 돌아갈 곳을 찾지 못했다//차의 머리를 돌렸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칠흑 같은 침묵을 헤치고 돌아오는 차 안 내 옆 좌석에는/찬란한 자줏빛 외투를 입은 어둠 하나가 /나를 외롭게 지키고 있었다/나는 그의 외투에 파묻혀/그 찬란한 자줏빛으로 물들고 싶었다//-「도시의 북쪽」끝부분 다. 시람 사는 풍경의 시편들과 사물성의 감각 이제까지 이 시집의 시편들 중에서 낭만적인 시선으로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고 본래적인 자아를 회복하는 내용의 시편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다음은 시인의 시선이 외부로 돌려진 시편들이 그려내는 풍경을 본다. 그 외부의 시선 속에는 나와 남(타자)의 두 모습이 들어 있다. 그 둘은 시간과 공간의 틀(frame) 속에서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존재들이지만 서로 일정한 거리에서 각자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는 독자적인 사고와 행동을 하고 있다. 그것이 시인의 고독감이 그려내는 도시의 풍경이다. 먼저 연작시 「사람 사는 풍경․1」을 읽어보자. 수서로 가는 전동차가 막 떠났다/먼지 섞인 바람이 가슴 가득 밀려오고/나는 낡은 나무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는다/잠시 갈라졌던 공간이 다시 이어지면/건너편 플랫폼에 서 있던 한 여자가/우연히 나를 쳐다보다가 시선이 마주치고/누구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서로 모르는 사람일 뿐/태연스러운 서성임만이/그 여자와 나를 말없이 오갈 뿐/다시 적막감이 이곳을 휘감고 나면/침묵만 한가득 내려쌓이고/잠시 후 전동차가 이 침묵을 깨며 달려와/우리의 공간을 갈라놓으면/우리는 이미 떠나버린 사람들/어느 역, 어느 시간에 다시 만나도/우리는 여전히 모르는 사람들일 뿐/저 건너편 낯선 공간에 서 있는/희미한 그림자들일 뿐-「사람 사는 풍경․1」전문 수서로 가는 전동차역에서 우연히 만난 ‘한 여자와 나’는 영원히 모르는 사람으로 끝나고 있다.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매개도 없다. 시인은 그 여자와 나의 소통에 대한 어떤 상상도 시 속에 넣지 않는다. 그래서 “잠시 후 전동차가 이 침묵을 깨며 달려와/우리의 공간을 갈라놓으면/우리는 이미 떠나버린 사람들/어느 역, 어느 시간에 다시 만나도/우리는 여전히 모르는 사람들일 뿐”이라고 한다. 이런 태도는 인연(因緣)을 시의 근원으로 삼는 서정주(徐廷柱) 시인의 시와는 정반대에 위치한 시라고 판단하게 한다. 그것은 이 시가 이성적인 모더니즘의 과학적 태도에 가깝기 때문이다.「사람 사는 풍경․3」에서도 그런 시인의 자세는 변하지 않는다. 농협 양재동 마트에는/언제나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늦은 밤에도 상품 진열대 사이로/손수레를 밀고 당기며/어린 새댁은 이미 잠을 설쳤고/어쩌다 낯익은 얼굴을 만나는 즐거움도 있다/밤새도록 밀양에서 올라온 단감은/진열대 위에서 졸고/어제 따온 사과는/종이상자 속에서 익어간다/계산대 앞에 줄 이은 사람들이/각자의 표정으로 순서를 기다리고/지불을 마친 사람들은/하나 둘씩 빠져 나가는데/내 앞 손수레 안에는/한 아이가 잠들어 있다//-「사람 사는 풍경․3」전문 시인의 눈은 농협 양재동 마트의 풍경을 카메라의 렌즈처럼 객관적으로 촬영하고 있다. 그래서 진열대의 단감, 종이 상자 속의 사과, 계산대에 줄지은 사람들, 손수레 안에 잠든 아이들은 각자의 표정으로 존재할 뿐이다. 이런 냉정한 시선은 그의 시편들이 대상에 대해 어떤 간섭(판단, 주장)도 배제된 영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관념에 시달려온 독자들에게 신선한 감각으로 다가온다. 그 감각은 독자들의 정신을 맑은 물로 씻어주는 사물성의 감각이다. 그래서 이 시 속에 들어 있는 시인의 빈 마음과 섬세한 감각, 그리고 날카로운 관찰은 사물시의 가능성을 확인하게 한다.「사람 사는 풍경․5」는 위에 인용한 시편들에 비해서 동적이고 활력이 넘치는 밝은 풍경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시에서도 시인(화자)은 철저하게 관찰자 또는 방관자의 입장에서 풍경을 촬영하여 보여주고 있다. 큰 수족관 앞에서/롤러스케이트를 신고 선 계집아이 둘이/수족관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한참 보다가 갑자기 한 아이가/허리를 잡고 깔깔깔 웃었다/웃음소리에 놀란 듯 지나가던 여자가/수족관 안을 잠시 들여다보다가/가던 길을 다시 가고 있다/나는 걸음을 멈추고 수족관으로 다가갔다/계집아이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수족관 안에는 커다란 열대어들만 오가고 있다//-「사람 사는 풍경․5」전문 3. 나가는 글 이제까지 최성철 시인의 시집 『도시의 북쪽』에 담겨 있는 87편의 시편들을 읽어보고 나름대로 해설을 하였다. 이 해설은 이 시집의 전체 시를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인용된 시편들은 해설자의 의식 또는 무의식에 의해서 선택된 일부일 뿐이다. 그래서 해설자의 편협한 시선에 의한 해설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름대로 중심의 줄기는 놓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최성철 시인만의 독특한 색채의 내면세계, 고독한 자아의 눈으로 대상을 응시하는 냉정한 자세, 자신의 관념을 순수한 사물 이미지로 표출하고 뒤에 침묵의 여백을 남기는 기법 등을 접하게 된 것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이런 그의 세계는 새로운 창조적인 세계와는 대칭적인 위치에 있으면서 독자들과 호흡을 함께하고 그들의 사유를 자유롭게 하는 시의 공간을 열어준다. 필자는 그의 시가 앞으로 더 단단히 자기의 세계를 구축해서 한국현대시의 현장에서 김현승(金顯承) 시인의 ‘절대의 고독’에 비견될 수 있는 ‘도시인의 고독’의 세계를 확고하게 형성할 것을 기대하면서 글을 줄인다.
3    허순행 시집해설 댓글:  조회:992  추천:0  2019-12-14
허순행 시집해설   내면세계가 펼쳐놓은 감각적 기표의 별무리                                                                        심상운 (시인 문학평론가)   1. 들어가는 말   허순행 시인의 첫 시집『꽃잎만 붉다』에 담긴 60편의 시를 읽으면서 그의 시속에서 무수히 탄생하고 움직이는 무의식(無意識) 속 환상(幻想)의 이미지들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미지들은 이미지로서 감지될 뿐 어떤 의미를 붙여 해석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것은 허순행 시인의 시편들 중 하이퍼시(hyperpoetry)의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시편들을 비롯해서 다수의 시편들의 이미지가 기의(signified)보다는 현실적 사실에서 이탈하여 행위하고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무의식의 세계 속의 기표(signifiant)로 인식되었고, 그 기표의 이미지 덩이들이 시의 속살을 뜨겁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의 궁극을‘언어의 예술’이라고 할 때 그의 시가 차지할 자리는 더 확실해진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필자는 그의 시를 열고 감상하는 시론(詩論)의 근거와 키(key)를 문덕수 시인의 시론「내면세계의 미학」(1966년 사상계)과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비평가 롤랑 바르트(Roland Gérard Barthes,1915년~1980년)의『S/Z』(1970)에서 찾아보았다. 문덕수 시인은「내면세계의 미학」에서 “외면 세계의 속박을 끊고 내면세계로 옮기면, 외면세계의 합리적 구조를 벗어나게 되고, 따라서 비합리적인 내면세계의 구조를 반영하게 된다. 이와 같은 구조의 차이를 의식의 측면에서 본다면 ‘의식의 구조’ 와 ‘무의식의 구조’로 구분될 것이다. 외면세계의 대상에 의존했던 지금까지의 우리 시는 말하자면 의식의 구조의 산물이었지, 무의식의 구조의 산물은 아니었다. 물론 내면세계의 시라 할지라도 무의식과 의식, 꿈과 현실의 통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무의식이라는 광활한 영역이 의식의 기초 세계가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 구조의 아나키즘(anarchism)적 성격을 일단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했다. 이 내면세계에 관한 시론은 무의식의 영역을 1960년대 한국현대시(韓國現代詩)의 새로운 영역으로 도입(導入)하고자 한 매우 혁신적(革新的)이고 개방된 시론으로 인식되고 평가되고 있다. 1960년대의 구조주의(構造主義)에서 탈피한 롤랑 바르트는『S/Z』(1970)에서 이음, 노드, 네트워크, 다중 경로 등의 개념을 사용하여 이미지들의 덩어리들(그의 말로는 lexia)로 구성된 이상적인 텍스트(text,글, 책)에 대해“이 이상적인 텍스트에서는 네트워크는 다양하고 상호작용적이며, 그들 중의 어떤 것도 다른 나머지를 초월할 수 없다. 이 텍스트는 기표들의 거대한 별무리이지 기의들의 구조가 아니다.”라고 했다. 그의 말에서‘기표들의 별무리’라는 말은 현대시는 기의(의미)에 구속되지 않아도 가능하다는 무의미시(無意味詩) 또는 기호시(記號詩)의 탄생을 선언(宣言)한 것으로도 해석된다. 그의 선언 속에는 시에서 ‘진리나 실재’에 대해 기존 관념을 위압적으로 강요하는 전통언어에 대한 반발이 들어있으며, 텍스트는 독자들을 고정된 의미의 소비자(消費者)에서 생산자(生産者)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들어있다. 그래서 위의 두 전위적(前衛的) 시론은 허순행의 시편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기본적인 바탕으로 인식되었다. 이와 함께 허순행의 시를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감지하게 하는 것은 그의 감성이 뜨겁게 흐르는 서사(敍事)와 감각적 표현이다. 그가 즐겨 활용하는 활유(活喩 personification)와 무의식 속에서 분출하는 성적(性的) 이미지의 환유(換喩)는 그의 시를 관념에서 벗어나게 하는 사물성의 에너지가 되어 독자들에게 시적 긴장감, 감각적 충격, 상상의 공간을 열어주는 활력소의 역할을 하고 있다. 시집 해설의 표제를‘내면세계가 펼쳐놓은 감각적 기표의 별무리’라고 명명(命名)한 근거도 거기에 있다.   2. 시편 들여다보기   가. 환상적이고 감각적인 순수 이미지의 시   허순행 시에서는 환상적이고 서사적인 이미지, 성적감각(性的感覺)의 이미지와 그것의 바탕이 되는 생명의식(生命意識)이 사물처럼 만져진다. 그러나 그의 시에는 외부적인 가치관(價値觀)이나 교훈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관념이 아닌 실제의 감각과 무의식의 흐름에 시의 원적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시편에서 순수한 이미지는「귀뚜라미가 울고」라는 시로 알려진 미국의 여류시인 에밀리 디킨슨 (Emily Dickinson, 1830년 - 1886년)의 회화적인 선명한 이미지를 연상하게 한다. 그의 시에서 신선함과 놀라움을 주는 것은 시어의 감각적 결합이다. 그의 시에서 무생물을 동물의 움직임으로 표현하는 활유는 표현의 생동감, 정서의 상승, 시적 긴장감에 큰 효과를 내고 있다.   이 시집의 첫 시「보름달」에서는 그의 생동하는 감각적 표현을 통한‘무의식 속의 나의 발견’을 감지하게 된다. 1연의“밤이/제 살에 묻은 달빛 뜯어내고/언덕 아래 숨었어요”에서는 밤의 활유가 일으키는 신선한 동물적 상상을 느끼게 된다. 2연의 말과 거울과 애(아이)의 이미지는 자크 라캉(Jacques Lacan 프랑스 철학자 정신분석학자)의 상상계⟶상징계의 구조로 해석의 실마리를 잡아보게 된다. “말이 입술에 닿자 그 애는 거울 뒤를 살피기 시작했어요/제 얼굴과 나누던 입맞춤도 사라졌어요”는 거울(상상)의 세계에서 언어(상징)의 세계로 이동하는 아이의 성장단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래서 3연의 “그러나 죽어서 거울 앞으로 왔어요/뼈마디 앙상한 거울이 그 여자를 들여다봐요”는 어릴 적 상상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의 표현으로 유추되고, 4연의 “벌거벗고 누워도/아랫도리가 춥지 않은 밤이예요”라는 어린 시절의 나로 돌아가는 행복한 의식을 감지하게 된다. 이 시에서 아이는 화자(시인)의 내면(무의식) 속의 아이로 인식된다.   밤이/제 살에 묻은 달빛 뜯어내고/언덕 아래 숨었어요//말이 입술에 닿자 그 애는 거울 뒤를 살피기 시작했어요/제 얼굴과 나누던 입맞춤도 사라졌어요/온갖 물상을 꺼내 손가락에 옮기고 제왕처럼 호령하던 졸병들 내다버렸어요/퍼즐 속에서 꺼낸 말이 그 애를 끌고 다녀요/조각 하나하나를 끼워 맞춰 입술 단정히 하고 높은 시렁 위에 올려놓은 말들이 그 애를 거느리기 시작했어요/종자처럼 말의 시중을 들었어요/어여쁜 그 애는//그러나 죽어서 거울 앞으로 왔어요/뼈마디 앙상한 거울이 그 여자를 들여다봐요/평생을 끌고 다녔던 그림자 받아들고 강물이 강물을 건너가요/보름달이 따라와서 발자국마다 하얗게 피를 쏟아요//벌거벗고 누워도 /아랫도리가 춥지 않은 밤이예요//-「보름달」전문   「꽃샘바람」은 이른 봄날 쌀쌀한 꽃샘바람을 여자로 비유해서 신선하고 놀라운 상상으로 독자들을 자극하면서 생명감이 출렁이는 소설적(小說的) 서사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언덕으로 올라간 여자는 치맛자락을 붙잡고 늘어지는 주정꾼을 만나자 사내를 번쩍 들어 품에 안고는 숲속으로 들어갔다 (중략)여자의 얼굴이 눈물로 번들거렸다 밤새도록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판을 적셨다”의 역동, 환상, 성적 이미지는 읽을수록 맛을 낸다. 호흡이 길고 사건이 중첩되는 장편 서사시의 가능성을 예지(豫知)하게 한다.   여자가 왔다// 머리는 갈기처럼 풀어졌고 메마른 얼굴에 버짐이 허옇게 피어있다 마을로 들어선 여자는 아이들이 노는 양지쪽에 끼어 앉아 공기놀이를 했다 아이들이 까르르까르르 웃었고 이제 막 얼굴을 내민 꽃다지가 마른 숨을 토해냈다// 해가 설핏하게 기울자 여자는 갑자기 아이의 머리칼을 휘어잡고 흔들었다 놀라서 울어대는 아이의 목도리를 잡아채 멀리 던지고는 개울물 속으로 첨벙첨벙 걸어 들어갔다 앙상한 맨발에 핏물이 돌았고 깔깔깔 웃어대는 귓볼이 붉었다 개울물에 비친 그 여자의 속살도 붉었다// (중략)다음 날, 산수유나무에서 그 여자의 혼백이 노랗게 피어났다//-「꽃샘바람」처음과 끝부분   「열사흘 달」도 생명의식을 바탕으로 한 무의식 속의 성적 이미지 속에 여자애들과 사내애들을 등장시켜 짧은 서사구조로 갈무리하면서 시적 감각을 뿜어내고 있다. “여자애들이 먼저 속옷을 벗는다 달빛은 그 애들의 맨몸을 뚫고 들어가 달덩이 하나 만들고 은색 실타래를 풀어 허기진 가슴을 채운다”. 이 시에서 독자들은 관념에서 해방되어서 시인이 만들어 놓은 열사흘 달밤의 서사적 환상의 공간 속에 들어가서 놀고 느끼면 된다. 예술의 끝이 천진한 놀이라고 할 때 이 시의 자리는 확실해진다.   은사시나무 잎새들이 허연 정액을 쏟아낸다// 이런 밤,/ 여자애들이 먼저 속옷을 벗는다 달빛은 그 애들의 맨몸을 뚫고 들어가 달덩이 하나 만들고 은색 실타래를 풀어 허기진 가슴을 채운다 하얗게 날선 어둠이 젖어들기 시작하면 골목에선 웃자란 신음이 번지고 쓰레기더미 속에선 버려진 울음이 아기로 태어나기도 한다 사내애들은 휘파람을 불고 여자애들은 깔깔거리고 어둠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달빛이 더 높게 제 몸을 걸러내고 있다/ 소금밭보다도 더 낮게 몸을 웅크린 밤 나뭇가지에 걸린 바람이 귀를 털어내고 음모처럼 드리워진 어둠이 어둠을 껴안은 채 어둠 속으로 든다// 중천을 지나 서쪽 보리암 마당을 지나던 달이 땅바닥에 누운 제 몸에 입술을 대 본다 얕게 오르내리는 숨소리가 둥글다//-「열사흘 달」전문   「꽃잎만 붉다」에서는 4월의 이미지를 종아리에서 기어나 온 뱀 한 마리, 돌단풍의 붉은 혓바닥, 남자애의 허벅지를 적시는 붉은 물 등 시인의 내면적 생명의식이 무의식의 욕망으로 드러내는 기표의 무리들과 만나게 된다. 그 기표의 무리들은 외부세계의 어떤 것과도 연결되지 않는 시인 자신의 내부의식이며, 의미로 환원되기 어려운 감성의 환유(metonymy) 로 인식된다. 그러나 그 의식은 인간의 숨은 욕망의 노출(露出)이라는 면에서 객관성과 보편성을 획득하게 된다.   길이 하루 종일 나를 끌고 다니다가 나무의자에 내려놓았을 때, 종아리에서 뱀 한 마리가 기어 나왔다 돌단풍이 붉은 혓바닥을 내밀어 목덜미를 애무하고 벚꽃은 흔들리며 흔들리며 땅 위에 눕고 己巳年에 태어난 나의 욕망은 제 다리에서 생겨난 돌단풍에 취해 잠이 들었는데, 등 뒤에 바짝 붙어 몸을 비벼대는 남자애의 아랫도리 사이로 붉은 물이 쏟아져서 허벅지를 적셔도 좋을 일// 낮잠을 깬 4월,/ 나무 그늘 아래로 천천히 멀어지는/ 낙타 발자국 소리를 들은 듯한데/ 도랑물 따라 떠내려가는/ 꽃잎만 붉다//-「꽃잎만 붉다」전문   이외에도 「그네」「장마」「사랑은」「빈집」에서 보여주는 선명한 사물성의 감각적 이미지의 시들은 허순행 시인을 서사적이며 역동적인 이미지즘(imagism)의 시인으로 평가하게 하는 근거가 될 것 같다.   나. 하이퍼(hyper) 구조의 시   기승전결(起承轉結)의 인과적(因果的)인 시의 구조가 배제되고 이미지의 비순차(非順次)와 다선구조(多線構造)의 형태를 기본으로 하는 하이퍼 구조의 시편들은 독자들의 생각을 상상의 네트워크(network)로 퍼져나가게 함으로써 새로운 연결구조의 맛에 젖어들게 한다. 그러나 저자(著者)에 의해 정해진 순서와 기의에 익숙해진 독자들은 이미지만으로 끝나는 하이퍼 시의 구조에서 당황하기도 한다. 허순행의 시에서 다선구조는 내면세계의 연상공간(聯想空間)으로 퍼져나간다. 그것은 그의 무의식의 네트워크가 만들어내는 가상현실(假想現實)의 세계이기도 하다.   「동백꽃」에서는 1연의 붉은 노을, 2연의 사내를 더듬는 형수, 3연의 동굴이 바다를 건너가는 이미지, 4연의 머리칼에서 흘러내리는 기억, 5연의 바람을 등에 지고 혼자 걸어가는 사막의 이미지, 5연의 흔적을 지우는 어둠, 6연의 여자의 몸에서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 등의 단절적(斷絶的)인 이미지가 다선구조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하이펴 시에서는 연을 단위라고도 한다) 이 다선구조는 시를 의미에서 벗어나서 감각과 감성으로 읽게 하고 상상하게 한다. 그래서 동굴, 사막, 어둠 등이 의미하는 것은 독자의 유추와 상상과 시적 분위기에 맡기게 된다. 2연의“형수가 어둠 속에서 사내를 더듬어요/빗줄기가 쏟아지는데/치마 속에서 빨갛게 눈뜨는 비린내”의 성적인 감흥(感興)은 빨갛게 피는 동백꽃에 대한 감각적 상상의 이미지를 통해 뿜어내는 시인의 내면의식의 발현(發現)으로 인식된다.   가지마다 붉은 노을 매달았어요//형수가 어둠 속에서 사내를 더듬어요/빗줄기가 쏟아지는데/치마 속에서 빨갛게 눈뜨는 비린내//숨어있던 동굴이 어둠을 밀어내고/씻지도 않은 몸으로 바다를 건너가요//젖은 머리칼에서/허기진 기억들 흘러내려요//사막이 바람을 등에 지고 혼자 걸어가요/그림자도 없이 어둠은 흔적을 지워요//여자 몸에서/젖은 핏방울 뚝뚝 떨어져요//-「동백꽃」전문   「소나기」에서도 하이퍼 시의 다선구조가 선명하다. 1연의 문을 두드리는 밤비 소리, 2연의 말안장에 앉아 채찍을 흔드는 사내, 3연의 울타리를 넘어가는 유월의 장미꽃, 4연의 사내의 꿈과 고시원의 1인용 침대는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을 통해서 시 속에 극적 효과를 연출하고 있다. 그 효과는 인과적 연결에서는 드러낼 수 없는 시의 감각과 의미를 함축한다. 이 시에서 사막횡단의 꿈을 가진 사내와 유월의 장미꽃, 말안장에 앉아 세차게 채찍을 흔드는 사내와 그의 뒷그림자에 매달려 하루를 사는 여자, 밤마다 낙타를 끌고 사막으로 가는 사내와 1인용 침대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의미의 유추(類推)는 독자의 몫이 되어 독자가 의미의 생산자(生産者)가 되는 것이다. 주제의 다양성은 다선구조의 시가 안고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   문 두드리는 소리에 밤이 놀라 깬다/쏴하고 쏟아지는 비/시원한 바람 한 줄기 흐르고 베란다 문 열려 있어/순식간에 방안 젖어든다//말안장에 앉아 세차게 채찍을 흔드는 사내/빗줄기를 뚫고 서쪽으로 사라진 다음/여자들은 그의 뒷그림자에 매달려 하루를 산다/산을 넘어가는 저녁이 여자들 눈 속 들여다보다가/마음 적막해져서 어둠 속으로 드는데//유월이 장미꽃을 피워 울타리를 넘어 간다/햇살은 나무 그늘 아래 숨었다가 스커트가 짧은 허벅지에 붙어/스마트폰을 따라가고/엉덩이에서 튀어나온 말이 옷을 벗은 채 그 뒤를 따라 간다/그 애들의 시한은 200일/여름이 가기도 전에 기념잔치를 끝낸 사진이 울지도 않고 돌아서 간다//사막횡단이 꿈인 사내는/밤마다 낙타를 끌고 사막으로 간다/책상 위로 수북이 쌓이는 모래바람/1인용 침대가 고시원에 누워서 너덜너덜 늙어간다//-「소나기」전문   「석류」에도 하이퍼(hyper)시의 다선구조의 기법이 보인다. 1연의 한강다리에서 벌어지는 사내의 아랫도리 퍼포먼스(performance), 2연의 세헤라자데의 혀에서 돋아나는 붉은 꼬리, 3연의 간통 혐의의 여자 자하라의 검붉은 피, 4연의 한 낮의 태양의 흔적이 남은 석류의 붉은 속살 등의 이미지가 불연속적(不連續的)인 관계로 이어지면서 시인의 무의식(無意識)의 흐름을 엿보게 한다. 석류의 붉은 빛에서 연상되는 다채로운 성적(性的) 이미지가 그것이다. 그래서 이 시는 통일된 의미보다는 각 연에서 보여주고 있는 개별적인 가상현실의 이미지 속에 숨어 있는 의미가 흥미를 끈다. 그리고 이미지들의 집합에서 발생하는 시의 총체적 효과에 관심을 갖게 한다.   보름달은 황갈색으로 변했고 *세헤라자데의 말이 징검다리를 건너고 있다 때때로 혀에선 붉은 꼬리가 돋아나기도 한다 바람소리를 엿들은 왕들은 눈먼 소문을 찌르고 사막 한가운데 버려진 별빛이 일곱 번이나 죽고도 살아난 바람을 나무에 매단다 동굴 속으로 들어간 낮달이 환하게 눈을 뜨고 천 년 밖으로 도망갔던 발자국들이 검은 눈물을 훔쳐 달아나는데/밤새도록 모래바람이 불던 여자의 입술에서 쿵쿵 뛰는 심장소리가 들린다//*자하라가 건넨 테이프에서 늑대들이 기어나왔다 충혈된 음모가 말 속에서 똬리를 틀었다 컴컴하고 빠르게 자라난 혀끝에서 거짓말은 돌덩어리처럼 단단해지고 단단해진 거짓말에서 검붉은 피가 쏟아졌다 사내들은 사방에 눈알을 매달아놓고 돌아갔다 눈처럼 하얀 여자가 저녁노을을 끌어다가 제 주검을 덮었지만//-「석류」2,3연 *세헤라자데 :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실처럼 이야기를 풀어가는 여자, 아내에게 배신당한 왕에게 천일 동안 이야기를 들려준다.*자하라 : 간통 혐의를 씌워 아내를 돌로 쳐 죽이는 남자들을 고발한 영화 (더 스토닝)에 나오는 여자주인공   「살모사 또는 말(言)에 대한」에서도 하이퍼 시의 구조가 인식된다. 1연의 그 애의 거미줄에 걸린 말, 2연의 살모사를 묻던 10살 아이가 말의 포식자가 된 것, 3연의 사전 속의 살모사 4연의 바람 든 무를 버리려다가 보름달을 버렸다는 엉뚱한 생각 등이 각각 하이퍼 시의단위(unit)를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인과적 논리의 시와 비교할 때, 이 시는 입체적인 시의 공간을 형성한 극적인 영상의 시로 읽히게 된다. 그 공간 속에는 엄마, 아이, 살모사, 보름달, 거미줄 등의 생동하는 이미지가 있다. 이 시에서 말에 대한 시인의 사유는 이미지 속에 암시(暗示)되어 있다.   내 말이 그 애의 거미줄에 걸렸다 끈끈하다/넘어가는 저녁노을이 목덜미에서 뜨겁다// “살모사를 알아? 엄마 ”/10살이 되던 조그만 입으로 종알거린 말이 목구멍에 걸려 넘어가지 않던 이후로 그 애는 포식자가 되었다 길고 차가운 포박 팽팽하다 밧줄은 두껍고 내 몸은 터질 듯하다 부풀어 오르는 말// 사전 속에는 굵은 뱀 한 마리가 또아리를 틀고 앉아 있다/ 살모사 (살무사) : 몸빛은 엷은 회색이고 몸통의 측면에 암회색 얼룩무늬가 있으며 몸길이는 70㎝쯤 까치 살무사, 남도살무사, 독사, 殺母蛇 깔깔거리며 웃는 그 애의 입 속에서 속살이 꽉 찬 독사 한 마리가 기어 나온다 시린 바람이 내 몸을 휘감는다// 바람 든 무를 버리려다가 문득 중천에 걸린 보름달을 버렸다//-「살모사 또는 말(言)에 대한」전문   이 밖에도「우두커니 앉아 있는 날들은 」에서 보여주는 시간을 매개로 하여 나열하는 이미지의 다선구조, 아들과 아빠의 갈등과 화해를 희곡적(戱曲的)인 대화로 구성한 「내 몸을 떠난 별이 천년을 건너와서 네 발등에 닿는 다면」, 연의 순서를 바꾸어도 시가 구성되고 긴장감을 주는 「보이스피칭」등이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것으로 생각된다.   다. 서사적 구조와 가족의 이미지   허순행의 시에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서사적 구조 속에 들어 있는 가족의 이미지다. 그의 시에서 강렬한 시적 생명력을 제공하고 있는 딸의 이미지, 갈등을 조성하면서도 끈끈한 연민의 끈으로 서로를 묶고 있는 아빠(남편)와 아들과 엄마의 이미지는 우주공간속의 암흑의 물질(dark matter)같이 그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기억 속에서 전쟁은」은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의 기억이 서사의 구조 속에 생생한 이미지로 담겨있다. 그 기억은 유년시절의 기억으로 엄마를 애타게 기다리는 아이의 이미지로 남아 60이 넘은 나이에도 꿈속에서 바락바락 소리 지르고 진땀을 흘리게 한다. 이 시속에는 얼굴이 까만 병사를 흠모하는 사촌언니, 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 머리칼을 자른 딸애가 등장하여 입체적(立體的)인 서사의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아이들이 차올린 허공으로 새 한 마리 날아가요 날개를 반짝이며 전투기가 나타날 때마다 우리는 이불 속으로 숨어야 했어요 -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 이불 속은 가마솥처럼 뜨거웠어요 땀으로 범벅이 된 어둠 속에서 소리에 어두운 귀가 소리를 먼저 들어요//개들이 어슬렁거려요 주둥이에 핏물을 묻힌 채 시궁창을 뒤지기도 해요 사촌언니는 다락으로 숨어들어 얼굴이 까만 병사들을 흠모했어요 벼슬이 붉은 수탉이 뒤뚱거리며 허공을 쪼았어요 연두색 저고리에 엄마가 남기고 간 눈물 자국을 아이는 오래 오래 만져보았어요//-「기억 속에서 전쟁은」2,3연   「서쪽에서 달이 뜬 까닭은」에는 제삿날 죽은 남편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1연의 죽어서도 질투심이 남아서 탕국을 아내의 발등에 쏟아버리고 가는 남편과 그 남편을 연민하는 아내의 마음, 2연의 시인의 무의식 속에 등장하는 피부가 검은 사내애와 붉은 뱃속에서 우는 아이의 이미지, 3연의 울고 있니? 하고 묻는 죽은 남편과 검은 달덩이의 이미지, 4연의 비명을 지르는 아내와 떠오르는 달의 이미지가 무의식의 단절적 구조 속에 하나의 서사를 이루고 있다.   죽어서 학생이 된 그는/죽어서도 질투할 힘이 남아 있어/김이 오르는 탕국을 아내의 발등에 쏟아버리고/갔다는데/마음까지 멈춘 그가 흰 달덩이 하나를/서쪽으로 끌고 갈 수 있었을까//그 애의 책상은 15쪽에 머물러 있다 글자들은 목소리를 숨겼고 피부가 검은 사내애들은 암막 커튼을 쳤다 운동장을 저벅저벅 걸었던 그 애들도 커튼 안으로 들면 옷을 벗었다 숫자는 넘어가지 않았다 수억 년 전에 사라진 꼬리뼈가 날을 세우고 아랫도리를 벗은 아이들이 코 밑에서 가랑이를 벌리고/붉은 뱃속에서 아이가 숨죽여 울고//울고 있니?/학생이 된 그가 누군가에게 묻고 사라지는 밤/창문이 열리고 검은 달덩이 하나가 문 밖으로 던져졌을 때/모든 집들이 등뼈가 휘도록 제 몸을 껴안았다/신음이 빠르게 연골을 빠져나가 그의 등짝을 때렸다//아내가 놀라 비명을 질렀고/아이는 면사포처럼 하얀 제 몸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그리고 달이 떠올랐다//-「서쪽에서 달이 뜬 까닭은」전문   허순행의 시에서 딸의 이미지는 왕성한 생명력과 연결된다.「딸애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서 시인은 그 생명력을 “아주 간혹은 붉은 혓바닥을 가진 뱀이 그 애의 말 속에서 꿈틀거리기도 했다 거미가 식탁 위를 빠르게 기어 다녔다 장미가 내 얼굴에 실뿌리를 내리고 해를 끌고 다니던 어둠이 현관문을 두드렸다 바람이 컹컹 짖었다”라는 감각적 사물 이미지로 만들어서 독자들이 실제같이 느끼고 감지하게 한다.   딸애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 지구가 공전하는 소리도 들렸다 깊은 어둠 속에서 소리는 소리에 흡수되고 그런 밤에는 그 애의 푸른 이마에서 용암이 솟구쳤다 새빨간 핏물이 흘러넘쳐 바위덩어리를 태웠다 돌들이 숯덩이처럼 투명해졌다/ 아주 간혹은 붉은 혓바닥을 가진 뱀이 그 애의 말 속에서 꿈틀거리기도 했다 거미가 식탁 위를 빠르게 기어 다녔다 장미가 내 얼굴에 실뿌리를 내리고 해를 끌고 다니던 어둠이 현관문을 두드렸다 바람이 컹컹 짖었다//-「딸애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2연   이와 함께 사망 1주기에 딸과 아내 곁으로 온 남편 혼령의 독백을 환청으로 듣고 벽에 걸린 남편의 사진을 보면서 그림자로 보이는 혼령에게 말을 하는 아내의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 같이 그려진「1週忌, 사진」이 가족애(家族愛)를 담은 서사적 구성의 시로 감동을 주고 있다.   아내와 함께 달빛이 하얗게 누워 있네 맞은 편 방에서 딸애도 얕게 코를 골고 있네 어둠은 물에 젖은 무명옷처럼 축축하네 비에 젖어 돌아오면 딸애는 늘 어지러운 꿈에 시달렸네 밤새도록 그 애의 이마에 물수건을 갈아주며 아내는 어둠 속을 헤매고 다녔네/ 얼굴 가만히 만져보네 그녀가 몸을 뒤척이네 당신은 긴장하고 그녀가 잠에서 빠져나와 화장실로 가네 개울물 소리가 들리고 그녀는 검은 물속을 걸어나와 어둠으로 앉아 있네 어둠 속에서 그녀 어둠 더 깊어지고 당신은 그림자도 없이 방안을 서성거리네/-「1週忌, 사진」1연 앞부분   3. 나가는 말   허순행 시인의 첫 시집『꽃잎만 붉다』의 시편들을 읽고 나서 필자는 외부의 가치관이나 공리적 교훈성에 전혀 물들지 않은 그의 무의식 속에서 빛의 굴절에 작용하는 우주의 암흑물질처럼 현실과 환상의 교직(交織)에 작용을 하는 이미지들에 대해 어떻게 접근하고 해석해야 할지 막연했다. 그래서 무의식의 자유로운 연상 작용의 시적활용을 말한 문덕수 시인의「내면세계의 미학」과‘이상적 텍스트의 언어들은 기의에 구속되지 않는 기표들의 별무리’라는 롤랑바르트의 탈구조주의 이론에 대입하여 문제를 풀어보았다. 이런 접근이 허순행의 시를 이해하는 바른 길라잡이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단언할 수는 없지만 매우 유용한 방법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이와 함께 허순행의 시를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감지하게 하는 것이 그의 장기(長技)라고 평가할 수 있는 서사적 구성과 이미지의 감각적 표현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의 서사능력(敍事能力)은 환상적이고 감각적인 이미지와 어울려서 장편의 판타지 시를 생산해낼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이 시집의 시편들은 환상적이고 감각적인 순수 이미지의 단선구조의 시와 하이퍼의 다선구조의 시가 섞여있다. 그 시편들의 내부에는 그의 시에서 강렬한 시적 생명력을 제공하고 있는 무의식 속의 가족애가 들어있다. 그의 의식은 외부세계보다 자신을 중심으로 한 내부세계에 더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대성으로 인해 21세기에 빛을 받는 동양의 노장철학(老莊哲學)과 연결되는 끈이 되기도 한다. 인용된 시편들은 의도적으로 선택된 시편들이다. 더 좋은 시편들이 선택되지 못하였음을 부기하면서, 허순행 시인의 시적 성취를 기대한다.  
2    김순호 시집 해설 댓글:  조회:1028  추천:0  2019-12-14
김순호 시집 해설   내면의식의 오랜 뜨거움이 피워낸 진솔한 독백의 언어                                                                     심상운(시인 문학평론가)   1. 들어가는 글   김순호 시인의 첫 시집『보셔요 꽃동산에 봄이 왔어요 』에 실려 있는 66편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그 시편들의 진솔한 독백獨白의 힘에 자신도 모르게 끌려들어갔다. 극적장면劇的場面을 보여주는 서사敍事와 상상想像, 군더더기 없이 단순하고 선명한 인상을 남기는 단편적 이미지, 끝 연의 의미의 함축, 등은 개성적이고 세련된 미적 감각을 느끼게 했다. 또 일정한 규격에 얽매이지 않고 펼쳐내는 독백의 언어 속에 들어있는 여성적인 사랑과 열정의 정서는 자기응시와 생명의식과 현실인식의 밑바탕이 되어 단편적 이미지들을 뜨거운 감동과 깨달음의 언어로 다가오게 했다. 그리고 그의 시에 들어 있는 독특한 성적 감각의 언어는 잘 숙성된 술과 같이 독자들에게 시적 감흥을 안겨주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것은 그의 시의 감각과 사유가 관념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공간을 안고 있어서 독백의 언어가 객관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이런 그의 시편들은 경험을 밑거름으로 한 시적 에너지의 발산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이는 이 시집의 시편들의 이미지가 시인의 무의식無意識 속에서 오랜 세월 잠재되었다가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오듯 자연스럽게 언어로 태어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래서 김순호의 시를 읽으면서 ‘시는 경험과 무의식의 산물’이라고 한 R.M.릴케의 산문집『말테의 수기手記』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되었다. “나이 어려서 시詩를 쓴다는 것처럼 무의미한 것은 없다. 시는 언제까지나 끈기 있게 기다리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은 일생을 두고, 그것도 될 수만 있으면 칠십 년, 혹은 팔십 년을 두고 벌처럼 꿀과 의미意味를 모아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최후에 가서 서너 줄의 훌륭한 시가 씌어질 것이다. ” R.M.릴케의 이 말은 너무 과장되어 반박을 당할 여지도 있지만 ‘진정한 의미의 시의 창작’은 시인의 일생에 걸친 일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창작의 교훈으로 영원히 남는 말이다. 이런 생각을 근거로 해서 필자는 해설의 제목을 ‘내면의식의 오랜 뜨거움이 피워낸 진솔한 독백의 언어’라고 붙이고, ‘사랑과 열정의 언어’ ‘생명의식과 자연’ ‘자기응시의 이미지’ ‘현실인식 속의 시간 이미지’를 소제목으로 해서 시의 내용과 함께 김순호의 시를 매끄럽게 하고 피부에 닿게 하는 언어의 절제와 감각, 시적 구성에 대해서도 찬찬히 살펴보았다.   2. 시편 들여다보기   가. 사랑과 열정의 언어   20세기의 모더니즘은 현대시에 ‘정서의 절제’와 ‘주지적主知的 인식認識’이라는 시의 방법을 도입하여 현대시를 19세기 낭만주의의 ‘감정의 유로流露’(워즈워드)에서 탈출하게 했다. 그러나 모더니즘이 현대시에서 대상에 대한 낭만적浪漫的 인식까지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지하철 전광판에/그 남자의 집이 있는 동(洞) 이름이 써 있으면/난 하염없이 그 글씨들을 쳐다본다./그 남자는 지금 무엇을 할까/내가 사는 동(洞) 이름을 보면 그 남자도 나를 생각할까/반가움인지 쓸쓸함인지 모를 뒤엉킴 들이/혈관을 타고 발끝까지 퍼져간다.//그 남자의 집/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한 그 남자의 집은/꿀벌들이 꿀을 나르며/수없이 드나드는 벌집 같기도 하고/빨간 모자를 쓴 성냥개비들이 꼿꼿이 서있는/성냥곽을 포개 놓은 것 같기도 한 아파트/멀리서 바라보다 뜨거운 눈에 어른거려/하나, 둘, 층수만 세어보다 돌아서는 집/언제나 풍경으로만 서있는 그 남자의 집//그 남자/달밤엔 달빛이 창을 뚫고 들어와/마음을 송두리째 훔쳐간다고/비 오는 날엔 옥상에 올라/우산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전화선에 태우고/내게로 내게로 달려오는/그 남자/창밖엔 지천으로 봄이 왔다간다고/울울창창 까맣게 여름이 퍼져간다고/애틋한 가을이 그만 가고 있다고/무릎 끓은 겨울이 긴긴 밤 울고 있다고/소리로 소리로 소리로/풍경을 그려주는 그 남자//그 남자가 사는 집/막막한 열정에 우는 내 영혼이 연기처럼 스며들어가 서성이는 집/내 영혼이 사는 집 //-「그 남자의 집」전문   이 시집의 첫 시「그 남자의 집」은 시인의 낭만적인 꿈이 일상적인 형이하形而下의 언어를 넘어서서 ‘내 영혼이 사는 집’에 도달하는 형이상적形而上的 상승의 과정을 보여주면서 반복의 언어 속에서 솟아나는 정서의 뜨거운 열기를 감지하게 한다. 그리고 사실적 이미지에 섬세한 언어로 녹아든 여성女性의 풋풋한 감성이 농익은 시의 맛을 한껏 맛보게 한다. “그 남자의 집/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한 그 남자의 집은/꿀벌들이 꿀을 나르며/수없이 드나드는 벌집” 같기도 하다는 상상의 언어는 독자들에게 사랑의 감미로운 감각을 피부로 느끼게 한다. 그것은 관념이전의 사물적인 언어의 이미지가 주는 사랑의 원초적 감각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는 읽으면 읽을수록 감미로운 맛을 더 느끼게 되고 사랑의 진실에 동감하게 된다. 이런 순수한 정서의 전달이 주는 감동은 김순호 시인의 가식假飾이 없는 의식이 허공 같이 자유로운 시적 공간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꽃을 품고 싶어  안달이 난 남자가/매화꽃 두런거리는 광양 매화마을로 떠났다//'꽃바람 없는 건 남자도 아니지'//그 남잔 스마트폰으로/꽃불 번지는  매화마을을 /소방사가 물을 뿌리듯 구석구석/찍고 또 찍어 보내왔다//지금/매화꽃 고것들은/송곳 같은 꽃술은 감추고/언뜻언뜻 별 같은 심장을 흔들어대며/눈 시리게 활짝 웃고 있겠지//'앙큼한  고것들'//그러다 어느 순간/치명적인 향기를 내뿜어/봄마다 그 남자/꽃병이 들어 허둥지둥 달려오게 만들 거야//-  「매화꽃 고것들은」전문   「매화꽃 고것들은」에서도 감각적인 사랑의 언어가 생동한다. 남자와 매화꽃이 육감적인 사랑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이 시는 시인의 언어감각이 얼마나 예민하고 세련되어 있는지를 느끼게 한다. ‘꽃바람’ ‘꽃불‘ ’꽃술’ ‘꽃병이 들어’ 등의 언어가 단순한 암시에 머물지 않고 시 속에서 걸림이 없는 낭만의 공간을 독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그 언어들은 독자들에게 맛깔스럽고 풍요로운 시의 맛을 맘껏 즐기게 하는 시적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혹한을 견뎌낸 송곳 같은 순결/꺾고 싶은  도발적인 자태/너를 보고 떨리지 않을 바람이 어디 있으리//다가가면/사르르 벗어버릴 것 같은/투명한 옷자락/실핏줄 비치는 살내음의 유혹/네 앞에서 미치지 않을 가슴 어디 있으리//도도히 온몸을 불사르며/스러지는 교태의 몸짓/그 장엄한 뒷모습/서럽지 않을 영혼이 어디 있으리//아 바람을  타고 싶다/너와 나/태풍에 실려/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순정한  바람//-「꽃1」전문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주방에선/분수처럼 불기둥이 솟는다/푸른 바다 푸른 산 푸른 들이/후라이팬 속에서 오그라들고 있다//그 죽음을 난 먹는다//이제 알겠다/최후의 그날/내손을 잡아줄 이는/사랑했던 사람도/미워했던 사람도 아닌/용암처럼  성난 저 불덩이라는 걸//-「불덩이」전문    「꽃1」도 “다가가면/사르르 벗어버릴 것 같은/투명한 옷자락/실핏줄 비치는 살내음의 유혹” 등 성적 감각의 이미지가 꽃을 육감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런 성적감각의 언어와 상상은 김순호 시인의 독특한 개성으로 파악된다. 이런 개성이 애정이나 탐애貪愛에 머물지 않고 더 활달한 어법- 어떤 것에도 구속 받지 않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깊고 넓은 자연의 생명력을 담을 때, 전통적인 감성이나 관념의 좁은 울타리를 과감히 부숴버리는 ‘생명의 시’를 탄생시킬 것 같다.「불덩이」는 그런 면에서 주목된다. 탐애에서 생명력으로 넘어가는 가교架橋의 역할을 하는 시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그 단서가 이 시의 끝 연 “최후의 그날/내손을 잡아줄 이는/사랑했던 사람도/미워했던 사람도 아닌/용암처럼 성난 저 불덩이라는 걸 ”에서 발견된다. 이외에도 「애인 하나 있으면 좋겠다」,「열병」등이 뜨거운 인상을 남긴다.   나. 생명의식과 자연   그리스 신화에서 손에 닿는 모든 것을 황금으로 변하게 해달라는 소원을 이룬 마이더스 왕이 금덩어리가 된 사랑하는 딸을 안고 비로소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는 이야기는 탐욕을 경계하는 교훈으로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생명이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따라서 이 신화는 돈을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현대 자본주의를 각성시키는 경종이 되기도 한다. 현대철학에서 인간중심주의humanism의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가 비판의 대상이 되고, 공생인간共生人間이라는 호머심비우스Homo symbious가 거론되고 있는 것도 21세기 인류생존의 활로가 인간이 쌓아놓은 자본資本에 있지 않고 ‘자연과 인간의 공존‘에 있다는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할 때, 현대시에서 ’생명의식과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시가 얼마나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하는지 알게 된다. 그것은 20세기 말 독일의 시단에서 태풍을 일으킨 ’생태시生態詩 운동‘이 증명하고 있다. 생태+시로 형성된 생태시는 모든 생명체에 대한 평등한 존중과 보존을 기반으로 한 지구의 생태환경의 보존이라는 선명한 메시지를 담은 시운동으로 세계의 시단에 큰 반향과 영향을 주고 있다. 그것은 생태시의 언어가 인간양심의 소리이며 인간의 생존을 위한 외침이기 때문이다.   싱가폴에선 킹크랩을 먹어야한다고/부둣가 노천식당에 사람들이 구불구불  쇠사슬같이  늘어서있다/자릴잡고 앉아 /빨갛게 삶아져 사람들의 입으로 쓸려 내려가는/킹크랩들의 최후를 본다 //사람들이/가위로 자르고 꼬챙이로 살점을  파내는 형을 집행하고 있을때 /그들의 벌거벗은 살육장에선/긴 다리로 허공을 할키며  질러대는  비명이 천장에 몰려 웅웅운다//부딪혀 꺾이는 소리/수증기 뿜는 소리/포연인 듯 넘실대는 비린 안개가 꽉찬다//싱가폴에선 킹크랩을 먹어야 한다고/먹이사슬의 맨 꼭대기 인간들이 줄지어 몰려온다/그들의 목숨도 줄줄이 끌려온다//싱가폴 부두가 붉디붉다//-「킹크랩」전문   * 킹크랩* 대게와 같은 갑각류* 킹크랩은 대게에 비해 몸통도 더 크고 껍질에 가시가 있으며 색도 대게보다 붉다.   「킹크랩」은 그런 관점에서 주목되는 시이다. 시인은 관념이 아닌 현실 속에서 킹크랩을 먹는 인간들의 행위를 사물적 언어로 생생하게 현장감을 느끼게 표현하여 먹이사슬의 맨 위에 있는 인간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잔혹한지를 생태적인 입장에서 관찰하여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이/가위로 자르고 꼬챙이로 살점을 파내는 형을 집행하고 있을 때/그들의 벌거벗은 살육장에선/긴 다리로 허공을 할키며 질러대는 비명이 천장에 몰려 웅웅운다”라고. 그리고 “싱가폴 부두가 붉디붉다”라는 구절로 킹크랩의 죽음을 애도하는 비감한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종로 5가에/반라半裸의 여자그림 광고판이 빙글빙글 돌아간다/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붙드는  쇼 윈도우/네온사인 불빛이 여자들을 난자 한다 //맞은편  바다횟집/물고기들이 납작하게 엎드린 체/오고가는 사람들을 무심히 쳐다본다/그러다 뜰 체가 다가오면/피할곳 없는 수족관 벽에 온몸을 부딪치고 부딪치다/거품은 가라앉히고  진한 비린 향을 고요로 남긴다//-「종로5가에 」전문   「종로5가에 」에서도 시인의 눈은 화려한 쇼윈도우에만 머물지 않고, 뜰 체를 피하려고 이리저리 부딪치던 물고기들의 모습이 사라진 바다횟집의 작은 수족관을 스케치하고 있다. 그것은 어느 날 서울 종로 5가의 단순한 소묘素描이지만 화려한 쇼윈도우의 대칭적 구성이 바다횟집의 수족관이란 점에서 주목된다. 그 장면은 인간과 물고기의 현실을 단편적 이미지로 보여주면서 독자들에게 생명체의 공존의 문제를 화두話頭로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백주에 혁명이 일어났다//하늘은 흰 천을 풀어/순식간에 세상을 덮어버리고/땅에 있는 모든 것은 그 안에 엎드려 항복 한다/백기를 흔들며 빠져나간 바람이/그들의 편이 되어 미친 회오리를 일으킨다//하늘은 드르륵 드르륵/거대한 빙산을  갈아 뿌리며  아래로 내려오고/눈을 찌르고 입을 막고 목을 조이며 휘날리는 눈보라/그것은 세상을 뒤엎는 혁명//나는 종종걸음으로 다지듯이 눈을 밟아나간다/뽀득 뽀득 소리 지르며 납작하게 죽어가는 눈의 무리들/땅은 높아지고 덩달아 나도 높게 들어 올려 진다 /밟아도 밟아도 끈질기게 낙하하는 살아있는 눈덩이들//백주에 혁명이 일어났다//-「폭설」전문   「폭설」은 폭설暴雪을 통해 세상을 개혁하는 혁명의 이미지를 보여주면서 자연이라는 거대한 생명체가 인간에게 어떤 존재인가를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하늘은 흰 천을 풀어/순식간에 세상을 덮어버리고/땅에 있는 모든 것은 그 안에 엎드려 항복한다” “밟아도 밟아도 끈질기게 낙하하는 살아있는 눈덩이들”이란 구절들을 생동하는 의미로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문명이 인간의 위대성을 나타낸다고 하지만 무심하고 거대한 자연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왜소한 존재인가를 생각하게 하고, 자연을 구성하는 생명체들을 평등한 눈으로 성찰하게 한다.     집을 나오니/이게 웬일인가/몽실몽실 솜사탕을 문 벚꽃들이/안개처럼 새절역 거리를 삼키고 있다//내가/사관생도들이/칼을 높이 들어 도열해 만든 터널 속을/수줍은 신부가 되어 걸어 들어가고 있는 것인가/내가/목숨을 걸고 불속을 뛰어들어 걷고 있는 것인가/아니면  내가죽어/꽃상여를 타고 떠나는 것인가//아니다/그것은 햇살을 찢어발기는 태평소 소리/열두 발 상모를 돌려대는 서러운 남사당패의 한마당 같은/꽃들의 살풀이춤/꽃들의 이별이다//-「벚꽃 날리던 날」전문   「벚꽃 날리던 날」은 봄의 벚꽃이 인간에게 선물하는 ‘생명의 환희’를 포착하여 형상화하고 있다. 사관생도들이 도열한 터널 속을 걸어 들어가는 신부, 목숨을 걸고 뛰어든 불꽃 속, 꽃상여 등의 이미지가 시인의 화려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끝 연에서는 시인의 마음과 꽃의 마음이 한 덩이가 되어 춤을 추고 있다. “열두 발 상모를 돌려대는 서러운 남사당패의 한마당 같은/꽃들의 살풀이춤”의 장면은 시의 현실은 비현실의 꿈같은 것이지만 그 꿈이 진정한 의미의 현실이라는 것을 전달하고 있다. 그것은 시의 현실은 가장 본질적인 생명과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다. 자기응시의 이미지    자기응시는 자기도취나 자기탐애, 자기중심적인 나르시시즘(Narcissism)과 크게 다르다. 자기응시는 주관에서 탈피한 객관적 시각에 의한 자기존재의 발견이기 때문이다. 불교佛敎의 선禪은 자기응시를 통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실존적實存的 자기의 존재를 깨닫는 수행법이다. 20세기 한국불교를 대표한 성철成徹스님은 법문집『자기를 바로 봅시다』에서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합니다. 설사 허공이 무너지고 땅이 없어져도 항상 자기는 변함이 없습니다. 유형, 무형할 것 없이 우주의 삼라만상이 모두 자기입니다.”라고 자기존재의 원형原形을 깨닫게 하였다. 김순호 시인의 자기응시는 이런 철학적 사유와는 사뭇 다른 차원에서 ‘인간의 욕망’을 드러내고 있지만 그 무구無垢한 마음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거리에서/쇼 윈도우를 스치며 언뜻 본 내 모습/아직은 괜찮다 싶다//백화점 화장실 거울은 젊은 여자들이 다 차지하고 붙어있다/그 젊음에 주눅이 들어/나는 내 모습을 보면서도 도둑처럼 쓰윽  훔쳐보며 나온다//그러다 아무도 없을 땐/나도 그녀들처럼 거울로 기어 들어갈 듯 붙어 서서 훑어보는데/씨앗 주머니를 매단듯 늘어진 눈이 그렁그렁 웃으며 답한다/다음 이마를 슬적 들춰서/생선가시처럼 뻗대고  서있는 하얀 머리카락을/검은머리 속으로 꼭꼭 숨바꼭질 시키고/콤팩트를 쇼 윈도우 꺼내 거뭇하게 얼룩진 잡티를 공격한다/두드리면 두드릴수록 /배춧잎을 기어간 벌레의 안간힘처럼 퍼져가는 주름들//샤워를 하고/온 몸을 거울에 비춰본다/촉촉한 물기 때문일까/오. 괜찮다 /나는 한발 뒤로 물러나/도도하게 턱을 위로 치켜들고 서있다//-「쇼 윈도우와 거울」전문   「쇼윈도우와 거울」은 중년여성이 자기의 육체적 젊음을 젊은이들과 비교하고, 자신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장면을 솔직담백하게 가벼운 터치로 그리고 있다. 언제나 젊고 싶은 욕망으로 거울 속의 자기를 바라보는 마음은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이면서 여성에게는 강한 자극을 주는 욕망이다. 이 시는 자신의 존재성을 ‘이성적 의식’(데카르트)이 아닌 ‘무의식의 욕망’(프로이트, 라캉)으로 드러내고 있어서 더 시적 미감을 풍긴다.   뜨겁게 포옹한다/그리고 화들짝 놀라서 깬다/웬 에로틱한 개꿈!//두 남녀를/바라다보고 있는 게 나인지/안겨있는 여자가 나인지 분간키 어렵다/이왕이면 안겨있는 여자이고 싶은데/바라다본 것도 같으니/꿈에서도 나는 아니다//아침 겸 점심을 먹고/잠시 누웠다 잠이 들었는데/사춘기 소녀처럼 야릇한 춘몽이라니/평생 딱 맞추는 꿈 한번 꿔보지 못했는데/심지어는  태몽조차도//송골송골/얼굴에 맺혀있는 땀을 닦으며/방금  꿈에 보았던/실루엣 같은 영상을 떠 올린다//-「개꿈」전문   「개꿈」에서도 무의식 속의 자기와 만나는 시인의 욕망이 적나라赤裸裸하다. 이런 성적인 욕망의 표출은 이성 쪽에서는 감추고 숨기려고 하지만 그럴수록 인간의 이성은 위선의 가면을 쓰게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꿈속에서도 안겨있는 여자이고 싶다는 시인의 개방적이고 솔직한 욕망의 표출은 외설적 표현으로 문제가 되었지만 '사랑의 원초적인 의미의 회복‘ 이라는 평가를 받은 D. H. 로렌스의『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떠올리게 한다. 이 외에도 젊은 연인들이 길에서 키스하는 장면을 포착하여 “축복받은 그들이 보란 듯이 키스하고 있다”면서 나도 저렇게 키스를 하고 싶다는 솔직한 욕망을 드러낸 「그들이 우리였으면」이 싱싱한 야생의 감성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라. 현실인식 속의 시간 이미지   시는 비현실의 꿈을 현실로 인식하게 하는 정신적 에너지를 발휘하는 언어예술이지만 현실 속에서 사는 시인은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 현실은 시간과 공간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떠나온 공간은 돌아갈 수 있지만 떠나온 시간 속으로 다시 돌아 갈 수 없다. 이것이 현실의 조건이다. 이것을 공간의 가역성과 시간의 불가역성이라고 한다. 김순호 시인은 불가역적인 시간을 시속에 담아내고 있다.       북촌 정독도서관엔/낡은 시간의 부스러기들이 굴러다닌다/공지사항과 문학 강연 광고는/옛날 영화 포스터 같이 나를 붙들고/어둑한 복도의  CCTV 카메라는 죄도 없이 무서운데/와본 적도 없는 오래된 복도를 걸으며/아득한 유년의 풍경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천천히 다가오는 그림자/50 년 전 시립병원에서 죽어간 한 소녀가 웃으며 걸어온다/그림자처럼  복도를 느리게 걸어 다니던 아이/ 어느날 해맑게 웃으며 외출하듯 떠나간 아이/그때도 이렇게 햇살이 너울너울  유리창을 기웃거렸지// 그 애의 침대가 비워지고 /병실가득 뿌려지던 크레졸 냄새가 순간 퍼져온다/와락 달려와 안기는 날카로운 냉기/잊었던 시간들이 때 묻은 벽을 뚫고 있다//무심히 내다본 조각난 유리창 밖/까까머리 소년들이 버리고 간 추억이 먼지를 일으키며 몰려다닌다/떠나는 것은 다 붙들고 싶다 /흙먼지 날리는 쎈 바람도 찢어진 낙엽도// -「 떠나는 것은 다 붙들고 싶다 」전문          「떠나는 것은 다 붙들고 싶다」는 제목 그대로 시간 속에서 떠나는 것들을 붙잡고 싶어 하는 연민의 정이 물수건같이 촉촉한 느낌을 준다. 시인은 정독도서관 내부의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이미지에 50년 전에 죽은 한 아이의 영상을 넣어서 현재와 과거를 하나로 결합하는 입체적인 이미지를 연출하여 시적 효과를 높이고 있다. 이런 시의 구성을 하이퍼적 구성이라고도 한다. 이런 시간의 영상적 기법은 「저 여인 은 누구인가」에서도 시적 공간의 입체성을 만들어내고 있다.       터널속을 달리는 지하철/거울처럼 까만 차창에  박혀있는 한 여인이/손잡이를 잡고  바라본다/저 여인은 누군가/낯설다//눈을 깜박인다/물처럼 맑은 한 계집아이가 천진하게 웃는다/또 눈을 깜박인다/짙푸른 청춘이 터질듯 풋풋하게 웃는다/다시 눈을 깜박인다/이번엔 절정의 중년이 우아하게 웃는다//흔들리는 지하철/까만 차창 속에 박혀있는/한 늙은 여인이 쳐다본다/손잡이를 바꿔 잡자/차창 속 늙은 여인도 바꿔잡는다/까맣게 말라버린 마른 꽃처럼/만지면 바스라질것 같은 모습/저 여인은 누군인가/낯설다//-「저 여인은 누구인가 」전문     터널 속을 달리는 지하철을 배경으로 그 속에서 순간순간 변하는 여인의 모습이 영화의 장면변화 같다. 그것은 한 여인의 일생을 단편적으로 압축해서 보여주는 디지털적인 영상감각의 기법으로 비현실을 현실화하여 시적현실을 창조한다. 현실의 냉혹성을 보여주는「보셔요 꽃동산에 봄이 왔어요」는 서사적 구성을 현재⟶ 과거⟶현재로 해서 입체감을 살리고 있다. 그리고 시나리오의 기법으로 서사를 영화의 장면같이 보여주고 있다.   (전략)//'보셔요 꽃동산에 봄이 왔어요'//어려서 엄마에게 배워 간직한 유품같은 노래하나/구전동요인지 이후론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그러나 지금도 완벽하게 부를수있는 노래/오늘도 웅얼거리는 그녀의 목젖이 떨리며/살갗을 파고드는 냉기처럼 그날이 밀려온다//(중략)//외딴 초가의 문간방/갑자기 들이닥친 사내/방문은 국방색 담요로 급히 가려지고/깡마른 몸에 푸르스름한 빛의 남루한 옷차림/신발도 벗지 못한 채 산적처럼 수염이 덥수룩한 지아비와/깔끔하게 핀으로 고정된 신여성풍 까미 머리의 지어미가 마주보고 앉아있다/아이는 밥그릇 위로 빙 돌려 올려놓은/물에 씻은 김치를 밥에 얹어 먹으며 힐끔 거린다//(중략)//-「보셔요 꽃동산에 봄이 왔어요」부분      이 시에는 1950년 한국전쟁(6.25)로 인해 부모와 헤어진 시인의 아픈 기억이 하얀 서리꽃같이 피어있다. 필자는 이 시를 거듭 읽으면서 그 아픔의 사연을 냉정하게 객관화시켜 영화의 화면처럼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밝은 이미지로 끝맺음한 시인의 마음을 꽃동산의 빛으로 느꼈다.   3. 나가는 글   필자는 김순호 시인의 첫 시집『보셔요 꽃동산에 봄이 왔어요 』의 66편의 시편들을 나름대로의 시각으로 읽고 이해하고 해설의 제목을 ‘내면의식의 오랜 뜨거움이 피워낸 진솔한 독백의 언어’라고 붙이고, ‘사랑과 열정의 언어’ ‘생명의식과 자연’ ‘자기응시의 이미지’ ‘현실인식 속의 시간 이미지’를 소제목으로 시를 분류하여 해설했다. 앞의 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김순호 시인의 진솔한 독백의 언어는 독자들의 가슴에 공감의 울림을 주기에 충분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극적장면劇的場面을 보여주는 서사敍事와 상상想像, 군더더기 없이 단순하고 선명한 인상을 남기는 단편적 이미지 등은 오랜 수련의 결과라는 것을 알게 했다. 특히 그의 시에 들어 있는 독특한 성적 감각의 언어는 잘 숙성된 술과 같고 시적 감흥과 싱싱한 생명력을 뿜어내는 항아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김순호의 시가 또 어떤 놀라움을 줄지는 예측할 수 없어도 그의 무의식無意識 속에 오래 잠재되었다가 나오는 매력적인 시의 이미지들이 더 완숙한 경지에 이르리라 여겨진다.  
1    김이원의 시집 해설 댓글:  조회:1052  추천:0  2019-12-14
김이원의 시집 해설   내면의식 속 ‘나’의 진실을 탐구하는 뜨거운 감각의 언어                                                                                                                            심 상 운 (시인 문학평론가)         1. 들어가는 글   김이원의 시집『말에 대하여』의 시편들은 위선의 가면을 벗어버린 자신의 내면의식을 벌거숭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서 그 감각이 매우 강렬하게 다가온다. 벌거숭이 의식의 언어 속에는 성적욕망과 몽상과 좌절, 그리고 희망이 돌출하면서 시와 진실 또는 실상(實相)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그는 시편을 통해 인생의 진실은 무엇인가? 시는 인생의 진실에 도달할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있는가? 하는 화두(話頭)를 던지고 있다. 따라서 그의 시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집요하게 붙어 있는 화두는 ‘내 존재의 탐구’다. 그의 시에서 ‘나’는 ‘육체의 나와 정신의 나’, ‘욕망의 나’와 욕망 속에서 탈출하여 ‘욕망 속의 나를 바라보는 나’로 구분된다. 욕망 속의 나는 무의식(無意識)의 나이고, 그런 나를 바라보는 나는 의식(意識)의 나라고 할 때, 그 ‘분열된 나에 대한 탐구’를 객관적인 시각으로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그의 시편들을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Lacan, Jacques 1901~1981)의 무의식(unconsciousness) 이론에 대입해보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 같다.   자크 라캉은 S. 프로이트를 구조주의적으로 재해석해서 무의식이 언어적으로 구조화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개인의 말이 특히 정신과 의사와 환자 사이의 관계에서 동시에 두 수준에서 작용한다고 본다. 개인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의식하면서 말하지만, 동시에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전혀 다른 것을 무의식적으로 얘기한다고 한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주체는 '코기토'(cogito:생각하는 나)에 의해 구성된다. 이때 의식적·반성적 주체가 자아라면 다른 하나는 누구인가? 라캉은 이 다른 하나를 무의식이라고 본다. 그는 무의식이 언어처럼 은유와 환유의 체계로 구조화해 있다고 본다. 이 무의식은 한 개체 안에서 그를 이끄는 타자(他者)이다. 이 타자는 자아에 앞서서 얘기하며 자아의 욕망을 통제한다. 개인들은 자신이 행위하고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 구조가 말하게 하고, 행위하게 하고 욕망을 갖게 하는 것이다.”(-브리테니카 백과사전에서 부분발췌)    이런 관점에서 김이원의 시편들을 이해하고자 할 때, 그의 시편에서 언어의 무의식적 구조가 중시된다. 그리고 기표(signifiant)보다 그 기표의 내면에 잠겨있는 의미를 더 중시하게 된다. 표면의 언어는 무의식이 은유와 환유로 변형된 언어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에 의하면 인간의 의식 속에는 욕구(need)와 요구(demand)가 들어 있다. 욕구는 사물들을 향하지만 요구는 사람들을 향한다. 그는 욕망과 욕구 사이에 ‘충동(pulsion)’을 넣는다. 충동은 욕구와 유사하지만 ‘성애적(性愛的) 모양’ 을 띤다는 점에서 욕구와는 다르게 해석된다. 성애적 충동은 예술적 에너지의 원천이 되기도 하는데, 작가에 따라서 작품의 내면에 잠재되기도 하고 표면으로 솟구치기도 한다. 김이원의 시에서 시의 표면으로 솟구치고 노골적인 이미지를 드러내어 시적 긴장감과 자극적 감각을 유발하는 성애적 표현도 인생의 진실에 도달하려는 그의 무의식의 환유로 해석된다. 그리고 그의 시편에서 발랄하고 자유롭게 분출하는 낭만주의적 언어 표현의 내면에도 성적 에너지’가 강렬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그의 시편들의 언어는 매우 자유분방하고 저돌적이고 야생적(野生的) 생명력을 분출하는 언어가 된다. 이는 어떤 유파(類派)에도 소속되지 않는 그의 선천적 언어감각의 분출이기도 하지만 그의 시편을 형성하는 무의식의 구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그의 언어감각은 전통적 서정시들의 통념화(通念化)된 언어구조를 쳐부수는 에너지를 발휘한다. 그리고 논리적 이미지, 압축과 생략의 모더니즘적 기법은 그의 시편들의 메시지가 암시적으로 함축되어 있음을 인식하게 한다. 그래서 필자는 해설의 제목을 라고 붙였다.   2. 시편 들어다보기   가. 길 잃은 욕망의 여행기   「어느 해 이 세상의 겨울이었네」에서는 삶의 겨울을 느끼고 죽음을 의식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성찰하는 시인(시적자아)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주먹만한 눈덩이가 도시 전체를 덮고 있을 때/나는 자신의 안녕을 한없이 괴로워했었네”라고 독백한다. 그리고 “이미 마음의 눈(目)을 다쳐/보이지 않아/몸의 눈(目)마저 캄캄해”졌다고 한다. 그래서 이 시의 시적자아는 자신의 눈 먼 육체와 정신을 “길 잃은 욕망”이라고 한다.   1 어느 해, 이 세상의 겨울 이였네/그때 나는 이미 스스로 계획한 인생을 다 살아 버렸고/그 나머지 인생을 살고 있었네//주먹만한 눈덩이가 도시 전체를 덮고 있을 때/나는 자신의 안녕을 한없이 괴로워 했었네//나의 안녕은 수치스러운 것/죽어간 인생들에게 어떠한 안부도 건네지 못했으므로// 2 마음은 우연, 말도 우연 /마음의 눈도 우연, 몸의 눈도 우연/그 겨울 눈꽃 천지의 세상도 우연//우연이 우연을 만날 때 /자연이 우리에게 가르친 것은 욕망,//하지만 나/이미 마음의 눈(目)을 다쳐/보이지 않아/몸의 눈(目)마져 캄캄해//(길 잃은 욕망은 더 이상 욕망이 아니죠/불길한 미래의 추억들은 어떠한 인생도/차용하질 못하거든요 )// --「어느 해 이 세상의 겨울이었네」1-2 연   「오오, 내 인생이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에서 시적자아는 “가면과 가발을 눌러쓰고 척추 뼈를 짓누르며/ 전대미문의 쾌락을 요구하는 사내들!”과의 정사장면을 그려내면서 육체적 욕구의 허망함을 토로한다. 이는 길 잃은 욕망의 처절한 몸부림의 환유로 인식된다.   오늘도 면책 특권을 누리는 자칭 천재들의 원반던지기 시합/한창 어지러운데//나는 믿었지/내 정신의, 꽃의, 향기를 /놀라운 가속도의 그 휘발성을//가면과 가발을 눌러쓰고 척추 뼈를 짓누르며/전대미문의 쾌락을 요구하는 사내들!/(흥! 바람은 바람의 상승무드를 타고 바람과 함께 잘도 사라지더라)//나는 흥정했지/하룻밤의 숏 타임 정사를!//어지럽고 습기 찬 계곡사이를/꿀벌의 날개로 붕붕 날으며//밤하늘 히닥닥 요란한 신선놀음에 썩어 가는 건/내 나날의 힘없는 도끼자루들!//오오 내 인생이 단 한번이라도 행복해 질 수만 있다면//---「오오, 내 인생이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전문   이런 충족할 수 없는 욕망은 「시를 써야 한다」에서 정신적 또는 예술적 욕망으로 전환한다. 그러나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 시를 써야 한다면서도 시를 쓰는 것이 자신의 욕망을 충족 시켜줄 것이라는 확신을 갖지 못한다. “시를 써야한다/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고상틱한 시?”라고. 그래서 그에게 시란 “무당벌레, 집게벌레, 그것들의 화려한 등껍질”로 비유될 뿐이다. 이는 ‘기의(signifié)는 떠 있는 기표 밑에서 계속 ‘미끄러진다.’는 자크 라캉의 언어관과 상통한다. 그것은 진실에 닿지 못하는 언어의 한계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시를 써야 한다/살아남기 위해서//라이프 이스 숏, 아트 이스 롱/책들은 친절하다/책들은 X 세대다/X 세대의, X 세대에 의한, X 세대를 위한,//책들은 가르쳐 준다/시대정신에 늦고/문학사조에 어두운 /무식한 예술가에게 나름의 세계관을 가르쳐 준다/그것은 시의 합법적 처세술이다, 테크닉이다//난 바퀴벌레가 아니다/그러니 바퀴벌레 따위와 놀지 않는다/굳어버린 빵 속에서 숨쉬는/바퀴벌레의 속사정쯤으로/내 인생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시를 써야한다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고상틱한 시?//너는 알겠지/내가 밤새워 공부한 세계관/그 세계관이 그려낸 무당벌레, 집게벌레, 그것들의 화려한 등껍질 그래 너는 알겠지/.................알겠지!/..................알아?//손과 손이 인도하는 피아노 건반과/음표사이엔, 그러나 그러나 /그딴 세계관 따위는 존재치 않는다는 것쯤을?--「시를 써야 한다」전문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무의식 속의 욕망은 모체이탈(母體離脫)의 원초적인 결핍에 대한 충족욕망이다. 이 욕망은 ‘떠나온 곳(잃어버린 곳)을 향한 강렬한 그리움’이라는 점에서 인간 삶의 정신적 동력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예술적 혼(魂)으로 승화된다. 그러나 그 욕망은 허상(虛像)에 집착하는 번뇌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명령 불복종의 죄 값을 치르는 날이 오리라」에서 “불량 지도를 들고서/천국의 여행을 꿈꾸었던 나”라는 구절은 허상에 대한 집착을 상징적으로 표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여행을 꿈꾸는 천국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자크 라캉이 말한 유아시절의 나르시즘(상상계) 속에 있을까? 아니면 언어의 세계인 상징계에 있을까? 또 아니면 인간의 언어로는 도달하기 어려운 실재계에 있을까? 불교 경전『금강경』에서 붓다는 제자들에게 형상으로 여래를 찾으려는 것은 잘못된 것이므로 여래를 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김이원의 시편들은『화엄경』입법계품의 선재동자의 구도기(求道記) 같이 ‘육체와 정신’을 편력하는 체험적 사유(思惟)를 통해서 천국에 대한 갈망과 허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그의 일부 시편들은 인생의 어둠 속을 헤매는 ‘길 잃은 욕망’의 여행기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명령 불복종의 죄 값을 치르는 날이 오리라/태양을 마주보고 랄랄라 서 있는 자들//당신의 여행은 즐거웠냐고/성급하게 물어 오지만/잘못 그려진 불량 지도를 들고서/천국의 여행을 꿈꾸었던 나여/그럼요/천국은 여자 혼자서 여행하기엔 무척이나 위험한 곳이랍니다/그러니 내 붉은 입술이 흘리는 어떤 말도 당신은 믿지 마세요/그러니/길 떠나온 길 위에서 떠나갈 길 따윌 묻는 어리석음을 다시 한번 범하지 마세요//-「명령 불복종의 죄 값을 치르는 날이 오리라」1부   이런 자신의 존재 탐구 여정은「그날 밤 나는 벌레처럼 웅얼거리며 파닥거렸다」에서는 절정에 이른 정신적 생존의 문제를 보여준다. 이 시의 나(시적자아)는 아무도 다른 누구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현대사회의 냉엄한 현실 속에서 죽음에 처한 처절한 운명의 한 여자로 등장하여 거대한 조직 속에서 소외된 존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 없었어//죽음이 제 스스로의 의미로 가득 차/제 목을 조를 때//나는 알지/세계는 다음날,/조간신문에 난 기사화된 죽음을 즐긴다는 사실을”의 구절이 비인간적이고 몰개성적인 현대사회에서 소외된 존재의 단면을 매우 인상적인 장면으로 부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소외된 존재상황을 파닥거리는 벌레에 비유한 야성적인 언어 감각이 독자들에게 충격을 가한다.   그날 밤 나는 벌레처럼 웅얼거리며 파닥거렸다/파닥거린 죄?/세상은 너무 어두웠고 너무 너무 어두워/닫혀진 창문사이로 나는 소리 질렀지/질러지지 않는 끓는 쇳소리 넘쳐 흘렀어/캑캑 꺽꺽//여보세요!/여보시죠!/여어기 좀 봐 주시죠!/아무도 나에게 관심 없었어//죽음이 제 스스로의 의미로 가득 차/제 목을 조를 때//나는 알지/세계는 다음날,/조간신문에 난 기사화된 죽음을 즐긴다는 사실을//아무렴 알지 난/4월과 5월 사이/불법의 공포와 금지된 발광사이에/한 여자 숨 막혀 길바닥에 누운 날/대다수의 시민들은 시청율 60% 이상/TV 심야 영화를 즐겼다는 사실을//아무도 다른 그 누구에게 관심 없었어/모두들 스스로의 율법 속에서/생의 찬가를 높이 높이 불렀어//--「그날 밤 나는 벌레처럼 웅얼거리며 파닥거렸다」전문   「나의 단말마적 발작과 세기말적 발광사이에」도 제목부터 충격적이다. 그리고 “번개속 생각들은 천둥에게 괜한 날벼락을 때렸다/아픈 줄도 모르고 피뢰침위에 제 몸뚱이를 눕혔다” 등의 언어들이 보여주는 가상현실 속의 나의 모습도 전율적이다. 이런 전율과 자극의 언어들이 만들어내는 언어의 퍼포먼스(performance)는 생의 허무와 미궁에 대한 존재론적 도전으로 인식된다. 그것은 “찾지 못했다/앞서가는 저기 저 검은 구름위의 검은 옷 입은 한 사내/뛰어가 잡지 못했다”라는 구절의 이미지에서 유추된다.   나의 단말마적 발작과 세기말적 발광사이에/입버릇처럼 중얼거린 허무에 대해/그 정교한 치 떨림에 대해/기술한/그 어떤 말도 찾지 못했다//미궁은 불꽃 속을 날으고/번개속 생각들은 천둥에게 괜한 날벼락을 때렸다/아픈 줄도 모르고 피뢰침위에 제 몸뚱이를 눕혔다//찾지 못했다/앞서가는 저기 저 검은 구름위의 검은 옷 입은 한 사내/뛰어가 잡지 못했다//무한창공의 무한불꽃이 번쩍이는/창세기의 무한질주 굉음 사이로//그렇게 부질 없었다 //-「나의 단말마적 발작과 세기말적 발광사이에」전문   나. 형이상적 인식-바다의 발견   이런 처절한 정신적 존재상황의 과정을 거친 시인의 갈망은「바다에 갔다」에서 ‘말이 없는 바다’라는 공간을 획득한다. 그는 바다에서 무심(無心)의 의미에 접근하고 “어떤 위안들은/소리 내어 발음되어지지 않은/무형태속에 숨겨져 있는 것”을 깨닫는다. 이 시에서 바다는 기억 속에 존재하는 변함없는 옛 바다이다. 그 바다는 무심하게 그를 받아들임으로써 모체와 같은 역할을 한다. 진실은 말의 허상 속에 있지 않고 아무 형태가 없는 침묵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침묵은 위안이 되고 말의 허상을 벗겨내는 공간이 된다. 이 공간은 ‘존재회복’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바다에 갔다/내가 아는 몇 개의 바다가 있었지만../오직 그 바다만이 나에게 감동을 주었기 때문에/나는 그 바다로 갔다//내가 좀 피곤해 있었기 때문일까//바다는 말이 없었다/모래 한 알의 흐트러짐 조차도 여전한 예전 그 바다/그 모습 그대로였기에/나는 그 무심함에 좀 슬퍼졌다//그 무심함 속에서/어떤 쓸쓸함 들은 전혀 공유되지 못함을/그리고 오로지 자신만의 것으로 남는다는 것을/나는 조금 이해해야 했다//그리고 생각해 보았다/어떤 무심함이란/가장 최선의 사랑방식일지도 모른다고//어떤 위안들은/소리 내어 발음되어지지 않은/무형태속에 숨겨져 있는 것이라고//-「바다에 갔다」 전문   이런 ‘바다’의 이미지가 그의 시에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가? 제목 자체가 쉽게 이해되지 않는 사유의 옷을 입고 있는 시,「한때, 나는 세상이 이미지들의 단백질 합성체 같은 것 인줄 알았다」는 독백의 언어로 시적자아의 사유의 과정을 보여준다. 그 사유는 제목이 의미하는 것같이 세상을 보는 눈의 변화이다. 물질적 형상에서 벗어난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인식이다. 그래서 이 시에서는 선불교(禪佛敎)의 수도승 같은 시인의 모습이 감지된다. 그것은 이 시의 “태양의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제 몸을 비틀기 전에/나는 방문을 안으로 잠갔다/사생결단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라는 구절에서 드러난다. 시인이 사생결단(死生決斷)의 치열한 구도(求道)의 시간을 통해 얻은 것이 바다의 이미지이다. 그는 “바다로 배를 띄워야한다/내 헛되고 헛된 희망이 다시 자해의 심한 욕구를 느끼기 전에”라고 한다. 이 바다는 삶과 죽음이 하나로 합쳐진 본질적인 세계로 유추된다. 그것을 깨달은 시적자아는 오도송(悟道頌) 같이 확신에 찬 말을 한다. 그리고 외친다. “안개, 자욱한, 어디선가/오오 누군가의 낮은 휘파람 휘파람 소리/오오”라고.「바다에 갔다」에서는 바다가 위안의 장소라는 의미였지만 이 시에서는 바다의 이미지가 “성분미정의 합성체”라는 통합의 세계로 확장된다. 그래서 바다는 이 시에서 헛된 희망을 주는 허상의 공간에서 벗어난 해방공간의 이미지로 부각된다.   한때, 나는 세상이 이미지들의 단백질 합성체 같은 것인 줄 알았다/길고 검은 역사를 지닌 자궁의 생성 법칙에 따라 만들어진/오해였다, 그건, 내, 특유의//태양의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제 몸을 비틀기 전에/나는 방문을 안으로 잠갔다/사생결단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어깨 너머로 도끼를 번쩍 휘둘렀다/핏물 고인 채 부릅 뜬 눈동자의 물고기들/사방으로 흩어지며 죽음을 노래하였다//바다로 배를 띄워야한다/내 헛되고 헛된 희망이 다시 자해의 심한/욕구를 느끼기 전에//사람들은 말하겠지/얘야 아서라 참아라//태양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단다/태양이 뜨고 지는 걸 막을 수는 없단다//오해였다, 세상은, 질컥이는 오해의 푸른 바닷물/염도32%의 짜디짠 성분미정의 합성체였다//지구가 태양을 돌리든/태양이 지구를 돌리든 어차피/내 이미지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였다/근심과 희망의 태양은/내 왼쪽 어깨에서/떠서 내 오른쪽 어깨로 지거든//그러니/이 막막의 망망 바다위에서 내 돗단배, 너무나, 외로워 다시 살고픈 욕망과 다시 죽고픈 욕망이/만 오천 번 쯤 휘돌며 솟구치는데//안개, 자욱한, 어디선가/오오 누군가의 낮은 휘파람 휘파람 소리 /오오//-「한때, 나는 세상이 이미지들의 단백질 합성체 같은 것 인줄 알았다」전문   다. 주관적 시각에서 객관적 시각으로   객관화된 시각은 대상을 관조(觀照)하는 바탕이 된다. 그래서 시도 ‘체험의 시’에서 ‘관조의 시’로 바뀐다.「어디서 바람은 불어오는 것일까」는 주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각변화의 언어를 강렬하게 드러낸다. 이 시에서 ‘나’가 ‘그’로 바뀌는 것도 주관에서 객관으로 전환되는 인식의 변화를 표출한다. 그러나 초점이 맞지 않은 영상물을 보는 듯한 복잡한 인상은 의식의 미분화상태를 나타낸다. 그것은 ‘심야택시의 경련성에 비유된 그의 모습, 어디에서 불어오는지 알 수 없는 바람, 사람들이 벽을 만들고 집을 지어서 사랑을 나누는 모습, 그를 당황하게 하는 인류에 대한 생각, 목적지 없는 열차표 같은 감정의 무책임성, 무용의 동작에 상처를 받는 사람들, 누군가의 사실들은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기억 속에 그 사실대로 기억되지 못한다는 사실 등’으로 표출 되는데, 이는 시인의 무의식 속에서 돌출하는 무질서한 이미지와 사유 때문이다. 이런 시의 구조는 어디에도 초점이 없는 다시점(多視點)의 시를 탄생시키는 원천이 된다는 점에서 ‘실험적인 텍스트’로 인식된다.   심야 택시들은 모두 어떤 경련성들을 지니고 있다/발작과도 같은 어떤 힘들을 지닌 채 /제 흔적들을 두려워하듯 /달려가고 있다는 점에서/그것들은 어딘가의 그의 모습들과 아주 흡사하다//어디에서 바람은 불어오는 것일까/이런 바람들 때문일까/주변의 사람들이 벽을 만들고 집을 짓고/사랑을 나누는 모습들을 보게 될 때/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어떤 힘들은 이 거대한 인류구성에 참신한 활력이 되기도 한다/이런 생각들은 그를 당황케 한다, 해서 그는 당황한다/어떻던 그는 그 당황함 들에게 보여 주었던/잠시의 존경심들을 접어 두기로 작정한다//감정이란 원래가 그토록 무책임한 것이다/그는 목적지 없는 열차표를 읽어 본다//그 사소한 무용한 동작에 마음을 다치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떠나야 할 곳이 없기에 머물러야 할 어떤 곳도 없다는 사실/누군가의 사실들은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기억 속에/그 사실대로 기억되지 못한다는 사실//대체로 이런 방식의 인생에는 어떤 희망도 살아남지 못한다/너무 많은 것을 잃고 살아 왔기에 더 이상 잃어야 할/어떤 것도 남아 있지 못한 사람들//그 무표정한 얼굴들이 무엇인가를 안타까워하고 있다면/이것은 명백히 하나의 허위일 것이다//그는 비웃는다 최근의 가장 위태했던 그의 집착을/그는 떠나려 한다 떠날 곳이 없기에/어떤 선택의 망설임도 없는 그/그는 그를 증오한다//-「어디서 바람은 불어오는 것일까」전문   「사랑에 취한 눈 먼 짐승이여」에서 보여주는 교훈적인 어조는 ‘깨달은 자’의 객관화된 발언으로 이해된다. ‘-이여’라는 감탄형 종결어미의 사용이 그것을 증명한다. 끝 구절 “아우성치는 사랑이란 이름의/저 조심성 없는 갈가마귀 떼들을“은 객관화된 이미지로 과거 자신의 모습도 투영(投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랑에 취한 눈 먼 짐승이여/집이 있어도 돌아가 누울 곳 없는/이방의 마음들이여//한 때 그대의 앞 발이 정처없이 할퀴었을/기억의 앙가슴팍이여/눈을 떠라/비극이 난무했던 순정의 시대는 갔다//반복은 얼마나 지루할 것이며/증오란 얼마나 허무할 것인가/네가 마련한/식탁의 음식들만큼/네 위장은 부풀어 오르는 법//너는 충분히 배부르다/지금까지 먹어 온 상처의 검은 고깃덩어리만으로도//그러므로 거부하라/다시 죽음의 힘을 빌려 달라고/다시 죽음의 장미 향기를 맡게 해달라고//아우성치는 사랑이란 이름의/저 조심성 없는 갈가마귀 떼들을//-「사랑에 취한 눈 먼 짐승이여」전문   「지상의 나날」은 열탕 같은 주관에서 벗어난 관조의 세계를 보여준다. 이 시에서 관조는 객관적 상상을 만들어내고 질서가 잡힌 인식의 공간을 열어 준다. 시인은 과거회상의 상상적 이미지를 통해서 자기 존재의 정신적 성장과정을 형상화 하고 있다.「어디서 바람은 불어오는 것일까」와 대조되는 선명한 이미지는 내면의식 속 ‘나’의 진실을 탐구하는 깊은 사유와 함께 시적미감을 높이고 있다.   지상엔 바람이 심하게 불었고/나는 땅속에 있었다/무풍지대의 평화와 안락을 즐겼다//태양은 따스하게 내려 쪼이고/사람들은 한가로웠다/아무도 땅위의 말 따위에 근심하지 않았다//꿈속에 가끔씩 장송곡이 울려 퍼졌다/누군가의 음울한 휘파람소리도 따라 들렸다/내 파리한 목덜미 뒤로/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느다란 비명이/새어나왔다//나는 눈을 떴다/참을 수 없었다//서서히 지상으로 기어 올랐다/동그랗게 모은 나의 눈과 귀사이로/바람이 휙휙 무리져 지나쳐 갔다/간혹 번개처럼 스치는 묘비명을 읽었다//나는 기다렸다//다시 폭풍의 눈 속으로 들어 갈/지상의 무시무시한 칼의 나날//-「지상의 나날」전문   「오늘 밤은 오늘 하루보다 분명 더 길고 길 것이므로」,「지친 자들은 더 이상 말을 나누지 않는다」,「나는 처녀야」 등의 시편도 성애적인 이미지의 객관화를 통해 자신의 존재탐구의 세계를 펼치고 있다.   3. 나가는 글   필자는 김이원의 시편들을 나름대로 읽으면서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는 언어감각을 경이로운 마음으로 감상했다. 그리고 그의 독특한 성애적 이미지를 무의식 속 욕망의 환유라는 관점에서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이론에 대입해서 그 비밀을 풀어 보고자 했다. 그래서 그의 시세계의 변화과정을 가. 길 잃은 욕망의 여행기, 나. 형이상학적 인식-바다의 이미지, 다. 주관적 시각에서 객관적 시각으로 분류하여 살펴보았다. (이 분류는 임의적인 것으로 필자의 시력이 미치지 못하는 또 다른 부분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의 시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집요하게 붙어있는 화두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탐구’이다. 그는 이 탐구를 위해서 자신의 무의식 속으로 들어가 환유의 언어로 내면적 욕망의 실체를 과감하게 드러내고, 사생결단의 구도의 과정을 거쳐 존재의 해방을 의미하는 바다의 이미지를 발견한다. 그것은 자크 라캉이 말한 ‘기의의 심연(深淵)’을 뛰어 넘어 실상에 도달하려는 언어의 치열한 몸부림이 얻은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시편들은 정신적인 면에서 불교경전『화엄경』입법계품의 선재동자의 구도기(求道記)를 연상시킨다. 따라서 상투적인 언어에서 벗어나 시 속에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투영하여 집요한 내면탐구의 세계를 보여주는 시인으로서 김이원의 존재는 한국 현대시의 현장에서 특이한 개성의 시인으로 평가될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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