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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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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자작시 해설 2 <물고기그림>/심상운 댓글:  조회:1137  추천:0  2019-12-19
자작시 해설 2 물고기 그림 / 심상운 겨울 저녁, 물고기는 투명한 유리 공간 속에 혼자 떠 있다. 느릿느릿 지느러미를 움직이며. 그는 원주에서 기차를 타고 k읍으로 간다고 했다. 흰 눈이 검은 돌멩이 위로 나비처럼 날고 있다. 유리 밖으로 뛰쳐나갈 듯 위로 솟아오르던 물고기가 밑바닥으로 가라앉는다. 그는 공중에서 부서져 내리는 하얀 소리들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함박눈이 내리는 그의 설경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보이지 않고 그의 걸걸한 목소리만 떠돌고 있다. 유월 아침에 나는 겨울 물고기 그림을 지우고 초여름 숲 속의 새를 넣었다. 그때 설경 속으로 떠나간 그가 나온다. 오전 10시 30분, 나는 푸른 공기 속을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있다. 하이퍼 시의 심리적 장면 변화의 기법을 보여주는 시 겨울저녁 투명한 유리 공간 속에 있는 물고기와 원주에서 기차를 타고 k읍으로 가는 그와 그의 설경 속으로 들어가는 나는 이 시의 캐릭터다. 그들은 문맥 상 어떤 필연적인 관계가 없이 독자적인 행동을 한다. 그러나 ‘내’가 그의 설경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과 ‘내’가 겨울 물고기 그림을 지우고 초여름 숲의 새를 넣었을 때, 그가 설경 속을 나오는 장면은 물고기와 그와 내가 서로 어떤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면 그 관계는 어떤 관계일까. 분명한 것은 그 관계가 현실적인 인과관계는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관계는 나의 심리적 현상이 만들어내는 관계 즉 마음의 관계(마음속의 이미지)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내 마음을 직관하면서 심리의 내면에 떠오르는 영상 이미지를 포착하여 한 편의 시에 담은 것이다. 그래서 집합적 결합으로 이루어진 ‘변화의 기법’은 인간의 내면의식을 포착하여 표현하는데도 하이퍼 시의 기법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시는 가상세계를 표현한다는 것과 독자들은 시인이 보여주는 세계를 보면서 나름대로 추리하고 상상하는데 만족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미지는 어떤 객관적 대상을 가질 필요가 없고, 또 반드시 개념으로 요약할 수 있는 주제를 가질 필요도 없다고 본다. 엄격한 의미에서 ‘순수 이미지’란 객관적 대상도 없고, 개념으로 바꾸어 놓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지는 이미지 그것만으로서 충분하고, 그 밖에 이미지가 지시하는 객관적 대상을 찾는 다든지, 이미지가 내포하는 철학적·인생론적 관념을 찾으려 한다는 것은 오히려 이미지를 불순케 하는 심리적 과욕이라고 생각한다. 이미지는 이미지 그 자체가 하나의 실재이다.”(문덕수 「내면세계의 미학」)라는 말에 동감한다.그리고 그 말은 “오랫동안 철학이 이미지의 세계를 하나의 비실재로 바라보고 개념적 사유를 통해 이미지의 환각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면 프랑스의 철학자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는 이미지의 세계를 또 하나의 현실로 바라보고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우리 영혼의 능력에 주목한다. 이미지는 인간의 영혼이 세계와 교감하는 순간에 탄생하며 아름다움 역시 그 순간에 빛을 발한다. 시가 포착하는 지점 역시 그 순간이며 그 순간을 향유하는 것은 행복을 실현하는 일이기도 하다.”(김융희 「바슐라르의 이미지의 시학」)는 말과 이음동의(異音同義)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시의 중심 포인트는 물고기 그림을 지우고 초여름 숲 속의 새를 넣는 행위와 그 행위에 의해서 설경으로 떠나간 그가 나오는 장면이다. 이것은 하이퍼 시의 장면 변화의 기법을 시에다가 끌어들인 것으로 그 기법이 시인의 내면적 심리현상을 표현하는데도 효과적인 기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독자들은 논리적인 인과의 법칙에서 잠시 벗어나 시인이 보여주는 장면(이미지)을 보고 자기 나름대로 의미를 추리해보고 느껴보는 것으로 만족하면 된다.  
7    [스크랩] 윤유점 정기만 평론/ 한국문학신문 이인선의 힐링 문학산책 7 댓글:  조회:1103  추천:0  2019-12-19
마그리트의 우산을 들고 찾은, 가을 강에서 만난 싯달타의 나비 이인선(시인, 평론가)   그 동안 문단의 원로시인들 위주로 평론을 연재하였다. 코스모스가 성큼 계절의 대문을 열고 들어선 가을날엔 이름과 나이를 잊고 싶다. 푸른 하늘을 머리에 이고, 뭉개구름 따라, 들국화 따라 걷고 싶다. 산들바람에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하염없이 강가를 서성이며 생각에 잠기고 싶다. 다음 소개하는 정기만과 윤유점의 시 2편은 우리들 지친 영혼을 위로해 주는 힐링 시다. 머리를 맑게 씻어주는 서정적 그리움의 세계를 만나보자. 정기만의 「싯달타와 나비」는 이미지 확장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거리가 먼 낱말들의 이미지 합성과 충돌로 상상력의 비약을 한다. 돌출된 이미지 연출을 실현하기 위하여 낯선 이미지를 결합하여 시적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아래 시는 정기만의 「싯달타와 나비」 전문이다. 내가 누구냐고 묻는 것이냐?/ 나는 은둔한 꽃의 날개에서 온 잃어버린 왕국/ 갈가마귀 검은색 옷을 입은 암울한 상처// 협곡 사이로 선회하며 끼륵끼륵 여운을 끌고/ 백사처럼 휘는 물거울에 비친 내 모습// 사납게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달음질하는 흰 토끼, 하얀 등을 네가 본 것이냐?// 잊혀진 나라를 덮은 혼돈의 자아/ 마침내 껍질을 벗고/ 비린내 나는 선창을 배회하는 나비// 얼어붙은 이 계절이 끝나는 즈음/ 허물에 싸여 속살거리는 은빛 유혹/ 깨뜨리고 눈부시게 푸르른, 하늘/ 색깔을 벗은 싯달타의 나비// ― 정기만, 「싯달타와 나비」전문 위의 시는 시적 거리가 먼 것끼리 결합하여 이미지 충돌을 하고 있다. 싯달타와 나비의 낯선 대비는 김기림의 「바다와 나비」를 연상시킨다. 위의 시는 대조법을 사용하여 정서를 환기시키고 있다. 그러나 정기만의 시는 김기림의 시와 차별화된다. 김기림의 시에서 ‘나비’의 역할보다 정기만의 시에서 보여주는 ‘나비’는 깨달음의 층위가 더 높다. 김기림의 나비는 거대 바다와 왜소한 나비를 대비시켜 감각적 미의식을 주는 표현주의를 강조한 유미주의 시다. 그러나 정기만의 나비는 ‘싯달타의 나비’로 표현주의에 의미화를 삽입하였다. 정기만의 ‘나비’는 ‘싯달타의 나비’로 깨달음의 여러 입자와 깨달음의 껍질이라는, 해탈의 외연과 내연을 내포하고 있다. ‘은둔한 꽃의 날개’와 ‘잃어버린 왕국’은 등가의 가치를 가지는 종속절로 감각적 미의식을 지닌 문장으로 서로 매치시켰다. 다음 시행 ‘협곡 사이로 선회하며 끼륵끼륵 여운을 끌고’ 의 종속절로, ‘백사처럼 휘는 물거울에 비친 내 모습’으로 치환되는 문맥은 청각 이미지와 시각 이미지가 예리하게 맞물리며 공감각적 이미지의 극치를 보여준다. 오랜 사유 후에 혼돈의 자아는 은둔의 왕국에 입성한다. 은 흰색을 주조로 한 그림이다. 흰색은 순수와 정결의 상징이다. ‘흰 눈, 흰 토끼, 하얀 등’ 흰색이 세 번 반복된다. 수도자는 몇 겹의 번뇌의 강을 건너야 선의 황홀한 하얀 경지에 도달하는 것일까? ‘푸른 하늘’과 ‘나비’는 ‘선창의 비린내’와 ‘은빛 유혹’을 밀어내고 마침내 무념무상 깨달음의 경지로 해탈한다. ‘색깔을 벗’고 ‘싯달타의 나비’가 된다. 억압을 벗어던진 싯달타의 나비는 몸이 가볍다. 팔랑팔랑 가벼운 날갯짓을 하며 눈부신 푸른 하늘로 날아간다. 색깔을 벗는다는 것은 탈피다. 새로운 세계로의 탈출이며 창조행위다. 자유와 예지의 영역이다. 색은 사바세계의 거짓의 옷이다. 진리가 아닌 허욕이다. 싯달타의 나비는 순수의 결정이다. 위의 시는 싯달타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고행의 과정을 원초적 생명력과 환희를 그리며 상상력을 극대화시켜 감각을 채색하였다. 위의 시가 상상력의 비약적 확장을 하면서도, 문장의 객관화를 유지하는 이유는, 선시의 예언서 같은 신비함을 사물시의 객관화로 극복했기 때문이다. 또한 상상력은 비약적이지만 시어에 사용한 사물은 지극히 현재적인 사물이다. 그러나 비약적인 상상력은 장치를 받쳐주지 않으면 문장이 날아가고 안정감을 상실한다. 시는 시적 논리에 맞는 상상력을 펼치는 것이 요구된다. 그러나 시에 상상력이 가미되지 않으면 운동감이 없고 딱딱한 시가 된다. 표현주의의 감각적 미의식을 외면한 시는 답답하다. 정기만의 ‘싯달타의 나비’는 이미지들이 비상과 곡예를 펼친다. 아래 시는 윤유점의 「마그리트의 우산」 전문이다. 윤유점의 「마그리트의 우산」은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의 그림의 패러디 시 작품이다. 그림을 패러디한 시는 객관화된 상상력을 획득한 이미지를 선명하게 그려내기가 쉽다. 그 이유는 시를 쓰기 전에, 그림의 영상이 뇌에 선명한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학은 미술의 시녀라는 말이 있다. 그림은 시보다 늘 앞장서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개척한다. 그 한 예로 샤갈의 그림은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샤갈은 이미지의 덩어리들을 그림에 뭉쳐놓고 있다. 샤갈 그림의 둥둥 하늘을 날아다니는 여자는 시각적 전위예술 작품이다. 윤유점의 시는 이미지를 객관화하여 감각적으로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다.     겨울비는 한 방울의 눈물이다 한 잔의 물이 된 거리의 풍경으로 나는 흐려지는 우산을 편다 빗물에 뜬 내 발자국은 원점으로 일그러진다 수직으로 떨어진 비는 어느새 동심원을 그린다 얼굴에 부딪히는 빗방울이 늘 사선으로 떨어지면 가로수 사이로 희미한 빛들이 흔들린다 나는 출렁대는 내 흔적을 밟지 않는다 발걸음을 멈추는 동안 그림자는 빗물 속에서 서럽게 부유한다 우산을 쓴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울음을 삼키며 나는 증발하고 하염없이 비에 젖는 나를 본다 우산 속은 절대공간이지만 수많은 우산들이 틈에서 내 소실점을 찾지 못한다 쓸쓸한 뒷모습을 남기며 휘발된 나는 기억을 지우며 빗물에 젖은 모호한 익명을 그리워한다 뒤돌아보아도 내가 걸어온 길은 그 어디에도 없다 빗물은 결코 빗물만은 아니다 ― 윤유점, 「마그리트의 우산」 전문   위의 시는 무채색 그림이다. 단문과 복문의 흔적이 빗물에 씻긴 발자국처럼 교차적으로 반복되며 무늬를 그린다. 겨울은 흐린 이미지의 빗방울 그림을 그린다. 눈물과 빗물과 발자국은 공통된 이미지가 있다. 지난 계절의 흔적을 지우고, 퇴락한 마음의 서정을 따라 흐른다. 조건절과 종속절로 이루어진 겨울비 그 쓸쓸함이‘내 발자국에 원점으로 일그러진다.’ 는 문장을 주목하여 보자. 윤유점의 시는 우울한 기분을 노래하지만, 시의 분위기는 신발이 밟는 빗물소리처럼 찰방찰방 경쾌하다. 빗물에 지워지는 발자국은 그 존재를 증명하려 하여도 부유하는 물방울로 흘러갈 뿐이다. 존재를 흘려보낸 우산은 그 울음을 붙잡고 놓지 않으려 한다. 현대적 감각이 물씬물씬 나는 윤유점의 시를 들고, 햇빛을 등지고 어둠 속으로 숨은 르네 마그리트의 초현실주의 그림을 만난다. 드디어 우산 밖의 새와 우산 안의 새와 격렬하게 조우한다. 접혀진 우산을 펴고 날렵한 그림을 허공에 그려 본다. 무채색 그림 시에 하늘색 공감을 채색한다. 윤유점의 문장은 독자도 캔버스를 펼쳐 놓고 수채화를 그리고 싶은 창작의욕을 갖게 만드는 흡인력이 있는 작품이다.  
6    한국문학신문- 이인선의 힐링 문학산책/ 뜸들일 때의 밥 냄새처럼- 김선진 댓글:  조회:1388  추천:0  2019-12-19
뜸들일 때의 밥 냄새처럼 김선진   잠을 잃은 밤, 강물이 되어 흐른다 아주 긴 강이 밤을 가로질러 누워 있다 바람도 없는 강기슭에 서서 자꾸만 머리속이 쓸려 감을 알아차린다 나를 건드려 주는 바람 한 점 없이도 밤은 충분히 내게 혼자임을 일깨운다 잠을 잃은 채 긴 긴 강기슭을 내려갔다 거슬러 오르는 물살 빠른 가슴을 아는가, 그대는 이런 밤이면 새벽에 이르는 길도 아주 먼 곳에 있다 아무도 건너지 않는 강나루 이편에서 저편 강나루의 어둠을 지켜본다 자꾸만 밥물이 끓은 후 뜸들일 때의 밥 냄새처럼 편안한 아침이 기다려진다 아예 잠을 잃은 밤의 강물이 되감기 필름같이 빨리 흘러가 주었으면 세찬 강바람에 강물이 죄다 쓸려 가 강이었다는 흔적조차 날아 가버렸으면 좋겠다 오늘 밤도 잠을 잃은 밤은 강물이 되려고 꿈틀대며 몸부림친다.   일상과 일탈을 꿈꾸는, 시적욕망의 불안한 반란 이인선(시인, 평론가)   김선진의 「뜸들일 때의 밥 냄새처럼」은 제목이 압권이다. 시의 내용에서 보이는 불안과 불면과 동떨어진 제목이다. ‘낯설게하기 기법’을 실현한 반전 매력이 있는 제목이다. 위의 시는 ‘일상과 일탈을 꿈꾸는, 시적욕망의 불안한 반란‘을 표출시킨 작품이다. 시적 화자의 무의식에 잠재하고 있는 불안과 욕망이 불면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예술로의 승화를 기다리는 시적화자의 무의식의 발로다. 시는 불안한 밤을 연모하고, 밤은 불안에서 시를 잉태한다. 시인에게 불면의 밤이 없다면 시의 강물은 말라버릴 것이다. 역발상을 하면 반전이 있다. 잠 못 드는 시인이여, 시를 깨우기 위하여 불안과 불면의 고통 속으로 직진하라. 불면의 밤은 시의 강물을 도도하게 흐르게 한다. 시는 불안과 불면의 강에 돛단배 한척 띄우고 싶어한다. 욕망은 에너지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잉여에너지가 남아있으면 그것을 소모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다. 잉여에너지는 ‘심심하다’라는 형용사를 초대한다. 심심해서 일탈과 반란을 도모한다. 무모한 자는 파멸과 파괴로 자신을 몰아넣는다. 그러나 이성과 분별력 있는 사람은 파괴와 재난을 거부한다. 생각의 일탈과 반란에만 머문다. 불안과 불면은 내적 갈등의 표출이다. 감정이 장기간 억압되면 정신병을 앓거나 분노 유발을 하게 된다. 억압과 분노가 계속되면 ‘묻지마 살인’과 10대의 ‘이유없는 반항’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그러나 시인의 일탈은 시창작으로 실현된다. 연애시는 감정의 일탈의 대표적인 경우다. 상상력의 비약은 하이퍼시를 생산하기도 한다. 프로이드는 시인을 사회적 부적응자로 분류하였다. 그 부적응을 고뇌하는 과정을 통하여 ‘승화’시킨 것이 시 창작품이라고 말하였다. 또한 사회적 부적응자인 독자가 시인의 그 시를 읽고 공감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불안감을 폭력성으로 소모하지 않고, 방향을 틀어서 생산적인 방향으로 작품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지성은 ‘편안한 아침’을 기다리고, 감성은 ‘나를 건드려 주는 바람 한 점’을 원한다. ‘이편’에서 지켜보는 ‘저편’의 강 건너 어둠은, 발아하지 않은 시적 긴장감이다. 시적 화자는 ‘뜸들일 때의 밥 냄새처럼’ 일상적이고 안정된 주부로서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불안증과 불면증은 갱년기의 호르몬의 불균형이나 노년기의 호르몬 감소로 생기는 경우가 많다. 예민한 시인은 자신의 감정적으로 더 크게 인지한다. ‘오늘 밤도 잠을 잃은 밤은/ 강물이 되려고 꿈틀대며 몸부림’ 치는 상황이 반복된다. 소모적이고 병리적인 반복적 패턴은 병을 유발시킨다. ‘되감기 필름같이 빨리 흘러가 주었으면’하고 바라는 시적화자의 바람은 ‘세찬 강바람에 강물이 죄다 쓸려 가/ 강이었다는 흔적조차 날아 가버렸으면 좋겠다’고 반란한다. 시적 화자가 왜 자신의 존재의 근원까지 소진시켜서 ‘무’이고 싶어할까? 상담심리 기법으로 심리적 이유를 분석하여 보자. ‘무’이고 싶어하는 심리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현재의 갈등상황을 견딜 수 없어서 회피하는 행위다. 현재에 만족하는 사람은 드물다. 절대적인 성공을 이룬 사람도 자녀와 가정의 부조화로 후회하는 경우를 본다. 위의 시의 시적화자도 현재가 만족스럽지 않다. 무로 돌아간다는 것은 현재의 부정이다. 둘째, 새로 다시 시작하여 더 좋은 결과를 도출하고 싶어 한다. 현재를 부정하는 것은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서 새로이 무언가 다시 시작하고 싶은 소망과 결부된다. 후회는 ‘출발점’이며 인생의 새로운 ‘터닝 포인트’다. 사실 새롭게 시작하지 못할 나이는 없다. 10년, 20년, 30년 더 살면 된다. 인생 60, 70, 80에서 더 산만큼 빼기하면 된다. 그러면 시작하는 출발점이 앞당겨진다. 젊은 나이로 새 포지션에서 다시 출발하는 것이다 ‘강물이 되려고 꿈틀대며 몸부림치는 것’은 생각을 버리고 행위를 도모하는 것이다.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은 시적 화자의 내면에 현존하는 꿈이다. 꿈틀대는 욕망의 분화구다. 터질 듯 불타오르는 열정으로 완성된 시가 탄생할 것이다. 천재는 ‘계속, 계속 노력하는 자’라는 말을 며칠 전 TV 예능 프로그램 자막에서 읽었다. 금방 싫증내고 탐구하지 않는다면 결과물도 평범하다. 시도 열정적으로 학문처럼 그 기법과 표현을 탐구하여야 한다. 노력은 역동적인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역사를 바꾼 예술작품은 지독한 에너자이저들이 만든 업적이라고 한다. 에너지가 없으면 흥미와 동기유발이 안 된다. 초기단계에서 포기하기 때문이다. ‘물살 빠른 가슴’이 되어 ‘새벽에 이르는 길도 아주 먼 곳’을 향하여 ‘혼자’ 가는 것이 예술가의 길이라고 시인의 무의식은 예견하고 있다. 예술가의 번뇌와 불안, 불면은 창작의 동기며 과정이다. 불안과 욕망은 시소의 양쪽 끝에 앉은 대치적 상황이다. 일상적 평안을 원하면서도 일탈을 꿈꾸는 것은 예술의 속성이다. 시인이 불면증에 시달리는 것은 생산과 창조를 위한 신경의 줄타기 과정이다. 시는 안일한 일상을 거부한다. 일상을 탈피하여 일탈을 꿈꾼다. 새벽은 불면의 밤과 맞닿아 있다. ‘아주 긴 강이 밤을 가로질러 누워 있다’면 그 강물에 몸을 섞어보길 권고한다. 김선진의 시는 고통 없이 예술은 잉태되지 않는다는 명제를 일깨워준다. ‘불안과 불면’을 시창작의 필수조건으로 인정하고 역발상으로 접근하여 보았다. 김선진의 시는 새로운 시각으로 시를 바라보고, 시창작 기법을 논의하는 분기점을 제기하고 있다. 시의 물살에 맨몸을 맡기고 둥둥 떠내려가 보라. 절망의 꼭짓점에서 시의 꽃이 필 것이다. ♧
5    [스크랩] 가영심 시 평론/ 백리향 차향으로 빚은, 정서해소와 심리치료의 시- 이인선 / 한국문학신문 이인선의 힐링문학 산책 4 댓글:  조회:1317  추천:0  2019-12-19
聞香에 들다 가영심     삶에 절망하면서도 꿈꾸는 자 꽃의자처럼 앉아있다 그윽한 향기에 마음을 입맞춤하듯 깊은 혼을 길어올린다   가득 어리는 향기로운 생각들이 알알이 투명언어로 퍼져간다 그 영롱한 눈부심으로 주위를 환하게 밝히고 새 세상을 열어준다   백리향 잎사귀를 손끝으로 비비면 분홍 입술끝에 묻어나는 진한 향기   언젠가 가야산 백리향 꽃밭에서 따온 잎사귀로 향을 띠우면 나를 따라와서 내 안에 오래도록 남아 머물던 그 향기. 백리향 차향으로 빚은, 정서해소와 심리치료의 시(詩) 이인선(시인, 평론가) 허브라는 이름은 몸에 유익한 치료효과를 주는 식물에만 붙여지는 이름이다. 백리향 차는 허브로 분류되는 치료효과가 좋은 차다. 좋은 시는 차향처럼 은근하고 향기로우며 정서해소와 심리치료 효과가 있다. 차를 마시는 행위는 일상에 지친 소시민의 삶에 여유와 향기를 초대한다. 가영심의 시 「聞香에 들다」의 1-4연의 시행들은 차를 마시는 과정을 통하여 얻게 되는 정서해소와 심리치료 효과를 그리고 있다. 백리향의 약효를 모르더라도 ‘분홍 입술끝에 묻어나는 진한 향기’(3연 2행)로 시작하는 아침은 상쾌하다. 또한 ‘분홍 향기’로 마감하는 저녁은 열심히 일한 하루의 피로와 노고를 위로받는 치유효과가 있다. 차를 마시는 행위는 작은 사치다.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다. 일에 쫓기고 마감날짜와 전쟁을 하는 삶은 여유와 향기가 없다. 긴장이 연속되는 생활은 스트레스를 받고 암의 공격에 쉽게 무너진다. 인사동에 가서 비싼 도자기 찻잔을 구입하고, 향기로운 차를 사는 이유가 무엇인지 분석하여 보자. 인사동에 간다는 사실은 바쁨과 현대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의 실천이다. 현재를 버리고 옛스러움과 예스러움을 찾는 마음이다. 엥겔지수를 논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자존감과 품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수입의 5% 정도는 문화비 지출항목에서 지출하는 센스가 필요하다. 특히 속도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는 현대인들은 그 정보를 벗어나서 고요한 침묵에 침잠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 자연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정서적 일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가끔 듣지 않고, 보지 않고, 사람을 만나지 않고 대치와 억압에서 벗어나서 여유가 필요한 것이다. 차향을 사랑하는 것은 급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달성하는 순간 멈춤이다. 시인은 ‘삶에 절망하면서도 꿈꾸는 자’(1연 1행)다. 시인은 어느 시대에나 현재의 경제력과 인지도에 관계없이 자신의 등급을 최고로 설정한다. 그것은 예술가의 자존심이다. 더구나 시인은 시대를 표상하는 샤프한 지성이다. 위의 시를 읽으면 서울 도심의 인사동이 아닌 일상을 벗어나 더 먼 곳으로 여유를 찾아 떠나고 싶어진다. ‘언젠가 가야산 백리향 꽃밭에서/ 따온 잎사귀로 향을 띠‘(4연 1-2행)우고 ’꽃의자처럼 앉아있다‘(1연 2행)는 가영심 시인의 여유가 부럽다. 위의 시는 먼 곳의 향기로운 백리향 분홍 꽃밭의 가야산 기억을 오늘에 재현한다. 시인은 꽃의자가 되어, 자신이 앉았던 꽃의자에 또 누군가 외롭고 슬픈 영혼을 초대하여 앉힌다. 백리향 꽃향기는 밟거나 흔들어 줄 때 멀리 멀리 퍼진다. 고독과 슬픔은 누군가 상처받은 마음을 정신차리라고 흔들어주어야 치유된다. 백리향 차는 우리 몸에 여러 가지 약리작용을 한다. 위의 가영심 시와 백리향 차의 같은 점은 무엇인지 비교분석하여 보자. 첫째, 백리향은 향수의 재료다. 향기가 백리를 간다고 하여 백리향이다. 천리향 만리향도 있다. 백리향은 꽃향을 흔들어 주어야 더 멀리 간다. 시도 이와 같다. 인간의 정서를 흔들어 주어야 시향이 멀리까지 간다. 둘째, 백리향 차는 살균효과가 있다. 차갑게 마셔도 뜨겁게 마셔도 된다. 시도 같다. 독자의 마음을 뜨겁게 감동시키거나 차갑게 이성적으로 만들어 흥분을 가라앉혀 준다. 셋째, 백리향 차는 기관지를 확장하여 호흡을 고르게 해준다. 호흡을 정리하고 마음을 가라앉혀 준다. 시는 분노와 화를 가라앉혀 주고 화병을 치료해 준다. 넷째, 백리향 차는 젊음을 회복해 준다. 소화불량에 좋다. 음식을 먹고 잘 소화시켜야 젊은이다. 젋은이는 과식을 하여도 금방 소화를 시킨다. 그러나 노인은 잘 체하고 소화를 못 시켜서 복부팽만감이 있거나 변비에 시달린다. 다섯째, 백리향 차는 감염을 치료한다. 비타민 A, C가 풍부하여 면역력을 길러준다. 모든 병은 면역력이 약해서 감염된다. 차를 마시는 것처럼 시를 읽고 쓰는 행위는 정신과 정서의 면역력을 길러준다. 여섯째, 백리향 차는 혈행 개선과 고혈압에 좋다. 차를 마시는 행위는 몸 안의 노폐물을 잘 배출시켜 준다. 시를 읽는 행위는 뇌 안의 노폐물을 배출하여 정신을 정화시켜 준다. 일곱째, 백리향은 입냄새를 제거해 준다. 시를 읽으면 입과 뇌의 구린내를 제거해 준다. 나쁜 말을 하거나 옮기고 싶은 마음이 억제된다. 왜냐하면 콤플렉스와 억압이 해소되어 정서적으로 여유를 찾기 때문이다. 여덟째, 기분이 좋아진다. 억압이 완화되고 에너지가 충전된다. 차를 마시거나 시를 읽으면 하루가 행복하다. 시를 쓰면 일주일이 행복하다. 매일 시를 읽으면 일 년이 행복하다. 시는 백리를 향기를 퍼 나르는 백리향보다 향기가 진하다. 가득 어리는 향기로운 생각들이/ 알알이 투명언어로 퍼져간다/ 그 영롱한 눈부심으로 주위를 환하게 밝히고/ 새 세상을 열어준다(3연 1-4행) 좋은 시는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맑고 투명한 향기가 인터넷으로 온 세계로 배달된다. 위의 가영심의 향기로운 시는 백리향처럼 사람들의 어두운 마음을 환히 밝혀 주는 행복 바이러스로 정서치유 효과가 크다. ♧
4    [스크랩] 김인숙 시 평론/ 이선/ 한국문학신문 이인선의 힐링문학 산책 3 댓글:  조회:1218  추천:0  2019-12-19
흔들의자     김인숙       아무 생각 없이 흔들리고 싶을 때가 있다   오래전 보았던 편백나무 숲속 그 아련한 술렁임처럼 고래의 허밍을 들었다 낯선 곳으로의 여행 그리고 젖은 바이올린의 고요한 선율을 귓속에 담고   곁을 내어주고 싶을 때가 있다 진동에 몸을 맡긴 채 소식 없는 소식을 기다리며 가끔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오는 버스에 손을 흔들었다 흔들리는 나뭇잎이 너무 많아서 금세 파동 속에 묻혀버렸지만   탄력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가 나의 손을 잡아주었다 곁이란 그런 것, 흔들리고 싶을 때 맘껏 흔들릴 수 있도록 몸속에 풍향계를 심어주는 것   안락하고 편안한 양수(羊水)의 출렁임 속에 만삭인 여자가 앉아 있다   흔들림 속에서 찾는 자유와 일탈이 주는 정서치유 효과             이인선(시인, 평론가)  ‘흔들리다’와 ‘흔든다’ 사이에 끼인 자유와 억압을 더듬어본다. 온몸으로 전해오는 차가움과 가벼움을 체감해 본다.   흔들리지 않는 나무가 꽃을 피울 수 있을까?   흔들리지 않는 당신이 그녀를 품을 수 있을까?   사랑의 출발은 흔들림에서 시작된다.   아무 생각없이 사랑이 불현듯이 우연처럼 찾아들고 당신은 열병을 앓는다. 그러나 위의 시 1연처럼 ‘아무 생각 없이 흔들리고 싶은 때가 있다. 당신도 그녀도.   인간들은 그것에 ‘일탈을 꿈꾸다’라는 제목을 붙인다. 일탈은 죄가 아니다. 그것은 법적 구속을 받을 정도로 남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자해를 할 정도의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 ‘흔들리다’라는 행위는 정서에 자유를 선물한다.   흔들리며 나무가 태양광선을 흡수하여 엽록소를 만들 듯이, 무수히 많은 서정시의 숲을 돌아다니다가 필자는 김인숙의 「흔들의자」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필자도 때로 흔들리고 싶어 하는 것이다. 분석이라는 평론의 틀에서 벗어나서 온몸으로 숲의 흔들림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단어 분석, 문장 분석, 작가 분석, 시대 분석, 이미지 분석의 건조하고 낡은 구조를 벗어나서 새로운 산소를 호흡하고, 일탈의 기쁨을 맛보는 시간을 갖고 싶은 거다. 필자는 일을 하면서 즐기고 싶은 두 가지 욕심과 본능이 늘 꿈틀댄다.  드라마와 노래, 미술작업, 무용, 시, 소설, 수필은 흔들리고 싶은 본능에 충실한 예술행위다. 그녀가 끊임없이 당신을 옥죄고 흔들 듯이, 또 당신이 그녀를 끊임없이 옥죄고 흔들 듯이 인간은 누군가에게 기대어 풀고 싶어 한다.   그런데 예술행위는 주체가 인간이라는 대상을 향하여 흔들지 않고, 객체인 무생물을 대상으로 흔들어댄다. 사물과 사건, 무생물을 생물로 치환하여 객관적으로 조금씩 조금씩 흔든다. 파격미가 심하여 전위예술로 치닫기도 하지만 인간들은 자신의 자유를 침해당할 정도로 극심하게 정서가 왜곡되도록 흔드는 예술을 싫어한다.   김인숙은 어떤 일탈을 꿈꾸는가?   또한 일탈을 어떻게 실행하였는지 그 과정을 더듬어 보자.  2연의 중심어는 이다.  일상에 위해를 가하지 않는 고요한 일탈이다. 여유로운 자유라고 이름 하여도 좋다. ‘내가 나에게 주는 작은 사치’다.    그러나 3연은 조금 더 진폭이 크다. 상상력의 공간이 넓고 깊어진다.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오는 버스에 손을 흔들었다’라는 문장에 집중하여 보자. 죽은 남편, 애인, 또는 어머니가 대상일 수 있다. 그 대상들은 다시 만날 수 없기에 절실히 그립다. 김인숙의 흔들리는 문장에서는 외로움과 그리움이 묻어난다.   흔들리지 않고 꼿꼿한 나무들은 강풍에 부러질 것이다. 자신의 영역과 역할을 지켜내기 위하여 나무들은 나뭇잎을 흔든다. 바람에 몸을 모두 맡기고 흔들린다. 그대도 나도. 당신도 나도 흔들리고 흔든다.   흔들림의 강도가 강하여 쓰나미가 되어 다른 사람을 불행의 늪으로 내몰기도 한다. 소설적 구도다. 자신이 시궁창에 쳐박혀 부러지기도 한다. 시적 구조다. 소설가는 가해자가 되어 적극적인 행위의 주체가 되어 혁명가를 꿈꾼다. 그러나 시인은 수동적인 피해자가 되어 소극적 방어를 하며 아파한다.  김인숙의 위의 시를 ‘흔들림 속에서 찾는 자유와 일탈이 주는 정서치유 효과’라고 명명하여 보자.  행위예술은 흔들림에서 찾는 자유와 일탈이다. 행위 예술가가 왜곡이 심할수록 전위예술을 한다. 그것은 유년기의 상처가 아직도 치유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부모가 유전으로 물려준 상처를 시인들은 시를 쓰면서 스스로 자가 정서치료를 한다.  외로워서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시를 쓴다. 그러나 딱히 대상이 있는 그리움은 아니다. 필자도 죽은 시인, 소설 속의 죽은 주인공 남자 때문에 밤잠을 설치며 애통해 한 적이 많다. 예술은 참으로 건강하고 안전한 일탈이다.  무한대의 자유가 보장된 예술은 극심한 사회적 폐악을 저지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억압이 계속되어 긴장이 계속되면, 반대급부적으로 적의감이 쌓여서 파괴본능과 폭력성이 증폭된다. 청소년들에게 시를 읽게 하면 긴장이 풀린다.  시에서 사랑을 빼어버리면, 긴장미가 없는 드라마처럼 지루하다.  4연은 드디어 일탈의 대상을 찾는다. 흔들리는 자아를 잡아줄 멘토를 만난 것이다. 그것은 정서적인 대상인 예술일 수도 있다. 또는 육체적인 대상인 애인일 수도 있다.  ‘몸속에 풍향계를 심어주는 것’은 그 대상이 불타는 육체적 사랑일 수도 있고, 정신에 안정을 가져다주는 플라토닉 러브일 수도 있다.   5연은 드디어 대지의 어머니가 되어 생산을 시작한다. 일탈은 예술을 만들고, 예술은 인간의 긴장감을 풀어주어 생산성을 높여준다. 자유가 주는 광활한 상상력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의 끝은 자유다. 구속받지 않는 자유다.  그 자유가 예술이다.  ‘안락하고 편안한 양수(羊水)의 출렁임 속에/ 만삭인 여자가 앉아 있다’라는 문장의 주체인 여자는 어머니다. 어머니는 생산의 주체다. 예술로 승화된 생산력이다. 예술행위는 이처럼 생산을 지향한다. 작은 일탈과 자유는 큰 범죄를 예방한다.   김인숙의 시는 점층적 구도를 가지고, 점점 일탈의 종류와 범위가 확대된다. 필자가 심심한 서정시 평론을 거부하는 이유다. 생각할 거리, 쓸 거리, 탐닉하고 즐길 거리를 주는 시는 좋은 시다. 평자와 독자를 지루하게 몸을 비틀게 하는 시는 좋은 시가 아니다.   필자가 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평론을 쓰면서 시를 선정하는 기준은 독자를 힐링시켜 주는 시다. 문학사에 남을 위대한 작품이나 어려운 작품보다 쉽고 정이 가는 느낌 있는 시를 선정하고자 한다. 시의 참맛을 느끼도록 자연스럽게 독자를 유도해 주고자 한다. 오늘 김인숙의 시를 읽으며 1단계에서 5단계까지 힐링을 업그레이드하기 바란다. 이인선 평론가 약력   필명 이선. 월간『시문학』등단. 신춘문예 평론 등단. 한국문학비평가협회 부회장, 한국문화예술공연협회 회장, 양천문화원, 광진문화원, 성동구민대학 시창작반 지도교수. 양평 시와 도자기 힐링캠프 대표. 완도전국시낭송대회 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 문학분야 유공 표창장, 한국현대시작품상, 푸른시학상 수상. 한국문학비평학회 문학비평상 수상. 평론 엔지오신문 2년 연재 100편, 한국문학신문 연재, 웹진시인광장, 가온문학, 시문학, 한국인문학 등 150여 편 발표. 시집: 이선 첫 퍼포먼스 시집『빨간 손바닥의자』, 이선 두 번째 시집 『갈라파고스Galápagos 섬에서』
3    한국문학신문 연재- 이인선의 힐링 문학산책 2호/ 이인선 평론가 댓글:  조회:1080  추천:0  2019-12-19
앵무새 죽이기 채수영   흰색을 색이라 말하는 것은 슬프다. 세상을 받아들이려는 마음, 푸르게 젖을 수 있는 여백조차 지워야 하는 물감, 구부러진 세상에 곧은 길을 가는 사람의 그림자는 길고 고독의 함량이 더해진 슬픔 앞에 당당이라는 리듬이 얼마나 아픈가는 누구나 외면하는 색 단맛을 익히는 고통보다 성찬을 생각하는 화려함의 행방은 열정없어 무미한데도 거긴 붐비는 길, 땀을 심어 길을 개척하는 용기와 아름다운 앵무새는 항상 먼저 죽어야 했다. 하얗게 살아야 하기 때문에…… 무지갯빛 스펙트럼 효과를 발현하는, 흰색의 상징성 이인선 무지개는 빛의 스펙트럼이 빚어내는 신기루 같은, 곧 사라지는 꿈의 판타지다. 큰길 건너, 아파트 건너, 먼 산 위에 걸려있는 무지개 구름마을을 찾아 떠나지만 무지개는 만질 수가 없다. 꿈의 완성체로 무지개가 상징성을 갖는 것은, 동경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무지개는 물방울이 모여서 태양광선이 반사 굴절되어 나타나는 반원들의 집합이다.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는 7가지 색깔이 조금씩 겹쳐진다. 그러나 각각의 색깔은 스펙트럼 효과를 나타내며 빛낸다. 채수영의 시 「앵무새 죽이기」를 ‘무지갯빛 스펙트럼 효과를 발현하는, 흰색의 상징성’으로 해석한 이유는 흰색이 갖는 상징성 때문이다. 흰색이 흰색이기를 고집하면 흰색은 다른 색으로부터 고립된다. 그러나 독창적인 예술은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기주장과 독립성을 필요충분조건으로 한다. 『좀머씨 이야기』를 쓴 파트리크 쥐스킨트(Patrick Sϋskind)는 세상과 단절하고, 수년 동안 숨어 지내면서 자전적 소설을 집필하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문명으로부터 도피하여 자연의 원시적 삶을 살면서, 그의 예술세계는 독특함과 창조성을 획득하였다. 위의 시는 11-12행 ‘앵무새는 항상 먼저 죽어야 했다./ 하얗게 살아야 하기 때문에……’라는 구절이 주제다. 하얗게 살아남은 예술을 위하여, 시인은 1-10행의 아픈 통점을 거쳐야 했다. 위의 시 1행 ‘흰색을 색이라 말하는 것은 슬프다.’ 라는 명제를 분석하는 일은 채수영 시의 흰색의 상징성을 분석하는 기본 틀이다. 흰색을 흰색이라고 말하기 겁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반반 양념통닭처럼, 빨강색과 파랑색이 분명하게 반반으로 나누어진 태극기처럼 우리는 좌파, 우파라는 2분법적 사고로 분류당하고 있다. 반반의 경계선에서 좌충우돌하며 집단적 불신은 개인의 존재적 불안감을 야기시키고 있다. 흰색의 삶을 사는 사람은 무향무취의 삶을 산다. 흰색을 주장하며 하얗게 살았기 때문에, 앵무새는 항상 먼저 죽어야 했다. 흰색의 이미지를 분석하여 보자. 흰색은 ‘순결하고 깨끗함’을 상징한다. ‘연약하고 고상하며 슬픈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백의민족이라 표현되는 집단 이미지도, 역설적으로 저항을 인내하는 순종의 착한 이미지를 대변한다. 백색 이미지는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목련의 백색 이미지는 화사하고 찬란하며 고귀하다. 예부터 조상들은 흰색을 청백리의 상징으로 존귀하게 여겼다. 그러면 위의 시 1-10행에서 흰색을 지키기 위해서, 시적화자인 시인이 지불한 대가가 무엇인지 분석하여 보자. 흰색을 유지하는 것은 안과 밖, 경계를 긴장하며 지키는 수고가 따른다. 흰 색 옷을 입고 외출했을 때를 생각해 보면 상상이 된다. 흰색의 청결한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하여 매사에 조심한다. 혹 음식을 먹다가 김칫국물이라도 튀면, 흰색 옷에 붉은 얼룩이 진다. 얼룩은 순수하지 않다. 흰색은 얼룩을 거부한다. 순백의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서, 시인은 백색의 본질을 지키는 청렴결백 이미지에 자신을 가둔다. 흰색은 흰색을 고집한다. 흰색은 흰색에게는 절대 선이다. 흰 옷에 튄 김치국물 같은 얼룩은 경계선 안의 영역에 속한 자아의 책임이기도 하지만, 경계선 밖에서 파생된 타자의 침략이 원인이 되기도 하다. 본질과 원인의 구조적 모순 속에서 흰색인 자아는 슬프다. ‘구부러진 세상에서 곧은 길을 가’려니 시적화자는 고독하다. 흰색을 고집하며 사는 일은 외로운 ‘개척자’의 길이다. ‘당당이라는/ 리듬이 얼마나 아픈가는 누구나 외면하는 색’(5-6행)으로 살아 본 사람만이 안다. 당당하게 의협심이라고 우기곤 하지만, 가끔 도발하는 눈빛을 만나면 확신이 의심이 되며 풀이 죽기도 한다. ‘단맛을 익히는 고통보다 성찬을/ 생각하는 화려함의 행방은/ 열정없어 무미한데도 거긴 붐비는 길,’(7-9행)이다. 늘 구부러진 세상(3행)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시끌벅적 재미있게 산다. 이상주의를 버리고 현재에 자족한다. ‘땀을/ 심어 길을 개척하는 용기’(9-10행)로 흰색은 산다. ‘세상을/ 받아들이려는 마음, 푸르게 젖을 수 있는 여백조차/ 지워야 하는 물감’(1-3행)이다. 홀로 고독한 도전과 실험을 하는 흰색은 빛의 삼원색. 밝고 큰 파장을 지향한다. 역경과 억압에 구속당하기도 하지만 당당한 자부심으로 산다. 궁극에는 흰색 무지갯빛 스펙트럼이 펼쳐는 황홀한 절정이 기다리고 있다. 무지개는 손에 확실히 잡히지는 않지만, 분명히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실존하는 대상이다. 그 무지개 마을에 당도하기 위하여 몇 개의 무지개 씨앗을 시인들은 기르고 있다. 그것은 땀과 용기있는 개척자 정신이다. 시를 쓰는 일은 구도의 길이다. 참 시인이 되는 길은, 매일 매일 걷는 ‘좀머 씨’처럼 흐트러짐 없이 쉬지 않고 정진하는 일이다. 놀고 마시고 춤추는 자, 세상의 환심을 사기 위해 시간을 낭비하는 자 누구인가? 무지갯빛 스펙트럼 효과를 발현하기 위해, 시인은 에너지를 과잉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언어의 창조자로서 정신을 고양시키는 일에 힘써야 진정성 있는 개척자다. 흰색이 무지갯빛 스펙트럼 효과를 발현하기까지, 어쩌면 시인은 영원이라는 시간을 저당잡힐 지도 모른다. 위의 채수영의 시를 읽으면 시의 도를 깨치기 위하여, 세상을 등진 은둔자의 고독이 절절하게 묻어난다. 그것은 형벌 같은 아름다운 고행이다. 앵무새가 붉은색, 초록색, 노랑색 털을 부리로 모두 뽑아버리고, 흰색 털만 키우는 잔혹한 아픔이 묻어난다. 흰색은 무념무상의 색이지만, 시인이 지향하는 영원한 이상주의다. 채수영은 상흔을 들추며 고백록처럼 시를 적어나간다. 탈색된 잠재력의 무의식이 표출된, 표백된 그림 같은 시다. 순수라는 그물로 짠 천사의 흰 날개도 휴식을 필요로 한다. 하늘에서 추락하거나, 나무 위에, 달의 옆구리에 비상착륙하는 천사의 흰 날개를 인간은 본 적이 없다. 주름살 없는 순백의 맑고 투명한 아기피부, 인간의 죄를 다 용서하듯 푸른 눈은 예지를 관통한다. 원망이나 불평은 신의 영역이 아니다. 채수영의 시는 비상하는 흰색 날개다. 인간과 신의 경계에서, 흰색 스펙트럼 무지개를 관리하는 시인의 시창작 과업은 고단한 희락이다. ♧
2    평론 연재: 이인선의 힐링 문학산책 1 인연설 / 문덕수 댓글:  조회:1051  추천:0  2019-12-19
평론 연재: 이인선의 힐링 문학산책 1   인연설 / 문덕수   어느 연둣빛 초봄의 오후 나는 꽃나무 밑에서 자고 있었다. 그랬더니 꽃잎 하나가 내려 와서는 내 왼 몸을 안아보고서는 가고, 또 한 잎이 내려와서는 입술이며 이마를 한없이 부비고 문지르고, 또 한 잎이 내려와서는 손톱 끝의 먼지를 닦아내고, 그리하여 어느덧 한세상을 저물어 그 꽃나무는 시들어 죽고, 나는 한 마리 나비가 되어 그 꽃이 가신 길을 찾아 홀로 아지랑이 속의 들길을 꿈인 듯 날아가고 있었다.   ‘장자와 나비’의 비유를 재해석한 선시(禪詩)의 상상력과 환타지 이인선(시인, 평론가)     문덕수의 「인연설」은‘장자와 나비’의 비유를 재해석한 선시(禪詩)의 상상력과 환타지로 집약된 인생에 대한 해석적 시각의 시다. 선시의 특징과 상상력의 확장이 주는, 꿈속 같이 아름다운 환타지한 이미지의 정원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꽃나무 밑에서 잠깐 낮잠을 자는 동안 꽃잎이 어루만져주는 세계는 인간이 꿈꾸는 파라다이스다. 여러분도 잠깐 눈을 감고 오수에 잠겨보기를 권유한다. 왜냐하면 위의 시는 아름다운 꿈속 여행이기 때문이다. 위의 시「인연설 」은 장자와 나비 내편 제2편의 이야기의 모티브를 주제로 시를 구상한 것이 아닐까 유추해본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녔다. 스스로 즐겁게 느끼면서도 자기가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갑자기 꿈에서 깨어나니 자신은 엄연한 장주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던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되었던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는 이야기는 『장자』에 나오는 유명한 일화다. 장자와 나비는 무의식과 의식의 세계를 넘나든다. 현대의 무의식 철학개념을 장자는 BC 300여 년 경 이미 마스터 하여 풍자시로 지었다. 그러나 문덕수의「인연설」은 장자의 나비를 뛰어넘는 완성도 있는 작품이다. 철학과 유미주의를 만족시킨 작품이다. 위의 시는 14행으로 씌어진 서화처럼 짧고 아름다운 시다. 지하철역에 게재하기 좋은 내용이다. 지친 시민들에게 주는 위로의 문학이다. 또한 시낭송가들이 낭송하면 대중이 좋아할 감각적인 시다. 위의 시는 두 부분으로 내용이 나뉜다. 시의 상반부 1-10행‘어느 연둣빛 초봄의 오후/ 나는 꽃나무 밑에서 자고 있었다./ 그랬더니 꽃잎 하나가 내려 와서는/ 내 왼 몸을 안아보고서는 가고,/ 또 한 잎이 내려와서는/ 입술이며 이마를 한없이 부비고 문지르고,/ 또 한 잎이 내려와서는/ 손톱 끝의 먼지를 닦아내고,/ 그리하여 어느덧 한세상을 저물어/ 그 꽃나무는 시들어 죽고,’ 는 아름다운 서정시다. 그러나 9-10행 ‘그리하여 어느덧 한세상을 저물어/ 그 꽃나무는 시들어 죽고,’ 의 내용과 이어지는 11-14행 하반부는 선시 형태를 하고 있다. 위의 시의 선시적 요소는‘그리하여 어느덧 한세상을 저물어/ 그 꽃나무는 시들어 죽고,(9-10행)/ 나는 한 마리 나비가 되어/ 그 꽃이 가신 길을 찾아 홀로/ 아지랑이 속의 들길을 꿈인 듯/ 날아가고 있었다’ (11-14행) 부분이다. 장자의 나비처럼, 시적 화자인 나는 한 마리 나비가 되어, 꿈속인 듯 꽃이 가신 길을 찾아 홀로 아지랑이 속을 날아간다. 비현실적 환타지가 몽상적이다. 시를 시적이게 만드는 모든 장치를 숨겨 놓은 압권의 문장이다. 인생 일장춘몽이라는 대중가요의 가사도 장자의 시가 원본이지 않을까 필자는 유추해 본다. 필자는 위의 시를 라고 명명하여 본다. 시에 사건과 스토리가 있다. 1-2행은 영화의 전개 부분에 해당한다.‘어느 연둣빛 초봄의 오후/ 나는 꽃나무 밑에서 자고 있었다.’ 부분을 주목하여 보자. 나다니얼 호오손(Nathaniel Hawthorne)의 데이비드라는 소설이 상상된다. 여행을 떠난 미소년이 샘물가에서 낮잠이 든다. 자식이 없는 부자 부부가 지나간다. 깨어나면 아들을 삼고 전 재산을 주겠다고 하나 소년이 깊이 잠들어 있으므로 깨우지 않는다. 그 다음 도둑이 지나간다. 잠이 깨면 돈을 빼앗고 죽이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너무 곤히 잠들어 있으므로 소년을 깨우지 않는다. 그 다음 아름다운 처녀가 지나간다. 만약 그 미소년이 잠에서 깨어나면 결혼하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너무 곤히 잠들어 있으므로 깨우지 않는다. 잠에서 깨어난 소년은 자기에게 닥칠세 가지 위기를 모른 채 여행을 계속한다. 위의 시 3-6행 ‘그랬더니 꽃잎 하나가 내려 와서는/ 내 왼 몸을 안아보고서는 가고,/ 또 한 잎이 내려와서는/ 입술이며 이마를 한없이 부비고 문지르고, / 또 한 잎이 내려와서는/ 손톱 끝의 먼지를 닦아내고,’부분을 주목하여 보자. 나다니얼 호오손의 소설보다 잠자는 동안에 펼쳐지는 자유로운 꽃잎의 희롱이 생의 단면처럼 아름답다. 허허로움이 선시적 형태미를 지니고 있다. 객체를 만져주는 대상이 꽃잎이다. 꽃잎이라는 사물은 생의 주인공으로 부각하여 으스대던 부정어를 여과시켜 준다. 전쟁, 불화, 시기, 질투, 불평등이 사라진 세계다. 위의 시 9-10행 ‘그리하여 어느덧 한세상을 저물어/ 그 꽃나무는 시들어 죽고,’ 부분은 드라마의 대단원에 해당한다. 11-14행은 위의 시의 주제부다. ‘나는 한 마리 나비가 되어/ 그 꽃이 가신 길을 찾아 홀로/ 아지랑이 속의 들길을 꿈인 듯 / 날아가고 있었다.’ 부분은 영화처럼 긴 여운을 남긴다. 필자는 이 부분을 소설의 부분으로 분류한다. 문덕수는 마지막 완결부를 환타지로 처리하고 있다. 나비는 애벌레가 그렇게도 꿈꾸던 이상향의 세계다. 인생은 슬프지도 외롭지도 않고, 꽃나무 밑에서 잠깐 잠들었다가 나비가 되어 긴 여행을 다시 떠나는 아름다운 여정으로 생을 미화하고 있다. 천상병과 문덕수 시의 관점 차이는 무엇일까? 천상병은 인생을 잠깐 소풍 온 것으로 보았다. 소풍의 시간은 하루의 개념이다. 문덕수의 인생관은 잠깐 낮잠을 잔다고 표현하고 있다. 1-2시간, 혹은 20-30분의 짧은 시간의 개념이다. 인간의 희로애락이 잠깐 눈 깜짝할 새 지나간다고 본 것이다. 위의 시의 시적 매력은 다음 구절이 압권이다. ‘꽃잎 하나가 내려와서 왼 몸을 안아보고 가고, 또 꽃잎 하나가 내려와서 입술, 이마를 부비고 문지르고, 한 잎이 내려와서 손끝 먼지를 닦아’낸다는 발상에 주목하여 보자. 시적 화자가 주인처럼 편안히 누워서 낮잠을 잘 때, 꽃잎은 마치 겸허한 젊은 남국 여인처럼 주인의 몸을 안아주고, 입술과 이마를 부비고, 손톱의 먼지를 닦아낸다. 꽃잎은 시적 화자의 세속의 때를 닦아주는 정화와 순수다. 또한 위로와 애무다. 고단하고 지친 인생의 새로운 에너지원이다. 지고지순의 선이다. 꽃잎은 신의 부드러운 손길 같다. ‘나는 한 마리 나비가 되어/ 그 꽃이 가신 길을 찾아 홀로/ 아지랑이 속의 들길을 꿈인 듯 날아가고 있었다.’는 대단원이지만 미완이다. 현대 유행하는 영화처럼 끝이 아닌 미완성으로 독자에게 상상력의 공간을 부여하고 있다. 쇼팽의 미완성 교향곡처럼,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처럼 영혼을 빗소리처럼 두드리는 여운이 길다. 필자도 이 시를 여러 번 읽다보니 시에 흠뻑 빠져든다. 애송하고 싶어진다. ‘한 마리 나비가 되어 그 꽃이 가신 길을 찾아 홀로/ 아지랑이 속의 들길을 꿈인 듯 날아가고’ 싶어진다. 좋은 시가 주는 매혹적인 힘이다. 그 꿈길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일 수도 있다. 또 내가 사랑한 보들레르의 시, 박남수의 시, 까미유 끌로델의 조각작품, 프리다 칼로의 그림일 수도 있다. 또한 이사도라 덩컨의 춤, 광기어린 또스또예프키를 만나기 위한 꿈길이다. 시가 독자로부터 사랑을 받는 요소는 무엇일까? 필자는 아름다운 상상력이 이끄는 감각적 미의식의 공간이라고 본다. 시를 향유하는 것은 산만하고 복잡한 현실을 떠난 여유다. 계산과 욕심 버리고 잠깐 쉬는 휴지다. 미완의 공백이다. 인생은 생로병사, 희로애락 슬픔과 실패 좌절의 연속이다. 그러나 그 모든 슬픔은 꿈과 같은 찰라의 순간이다. 문덕수 시는 독자를 흠뻑 적시는 위로의 문학이다. 경건한 아름다움이다. 꽃비로 정화된 독자는 새 힘을 얻어 또다시 노동 현장으로 향할 힘을 얻는다. ♧  
1    하이퍼시의 탈구조 / 이인선(시인, 평론가) 댓글:  조회:1017  추천:0  2019-12-19
하이퍼시의 탈구조     이인선(시인, 평론가)     하이퍼시는 기존의 서정시와 현대시의 구조를 변형하여 새로운 시 형태와 구조로 창작된다. 아래 제시한 시는 하이퍼시의 구조변형을 실현한 시다. 각각 시의 구조를 살펴보고 하이퍼시 시창작 기법의 차별화된 방법을 논의하여 보자. 하이퍼시는 현대시의 서정과 회화적 이미지를 굴절하거나 단절, 삭제하여 새로운 감각적 자극을 시도한다. 비약적 상상력은 SF 공상영화처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재현된다.   1. 하이퍼시의 추상화 기법   아래 시는 심상운의 「사각형과 삼각형과 원」 전문이다. 심상운의 시는 하이퍼시의 여러 구성요소를 지니고 있다. 심상운의 시는 사건이 네트워크로 구성되며 시간의 공간이동과 시간이동을 한다. 심상운의 시에서 보여주는 서사는 단일구조를 배제하고 다선구조를 보여준다. 사각형 스크린 속으로 들어가면 수없이 많은 각종 스크린이 보인다. 아침 7 시. 사각 침대 위에서 기지갤 켜며 일어난 삼각형이 사각문을 열고 나오고, 원이 통통통통 튀면서 그 뒤를 따라온다 삼각형은 원의 손을 잡고 파랗게 출렁이는 바닷가로 뛰어간다 사각형의 바다 위에서 삼각형의 돛배가 하얀 물보랄 날리며 신나게 달린다. 몇몇 삼각형이 무어라고 소리치며 사각형의 오래된 집의 창문과 벽을 부수고 있다 사이렌을 울리며 사각형의 경찰차들이 몰려오고, 100 여 명의 삼각형과 원이 둘러서서 응원을 한다 그들은 손뼉을 치며 응원가를 부르다가 가슴팍 속주머니에서 노랑 풍선을 꺼내서 하늘로 날린다. 그 풍선들은 허공에서 서로 손을 잡고 얼굴을 비비고 입맞춤을 한다 입맞춤을 할 때마다 풍선의 입 속에서 또 노랑 풍선들이 나와서 파란 하늘을 가득 채운다 대도시의 봄 하늘에 유채꽃이 만발한다. 밤 12 시 20 분. 아이슬란드의 거대한 육각형 빙산 벽이 철썩철썩 무너져 내려 새파란 육각수의 바다 속으로 떨어진다 수천만 톤의 새 육각수가 바다를 넘어 사각형의 도시건축물 都市建築物 들을 우르릉우르릉 흔들며 밀려오고 있는 밤이다.  ― 심상운 , 「사각형과 삼각형과 원」 전문   위의 시는 제목부터 도형을 활용하고 있다. 3차원, 4차원의 기하학 그림 같다. 하이퍼시는 분리와 삭제가 가능한 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사각형이나 삼각형, 또는 원의 어떤 개체 한 개를 빼도 시의 형태를 잃지 않고 사각형의 틀을 유지한다. 위의 시는 ‘네모, 세모, 동그라미’라는 도형언어를 사용하여 낯설게하기를 실현하고 있다. 네모는 확장되어 와 결합과 분리를 한다. 사각형은 창문과 벽으로 대별되는 현대사회의 소외문제와 사각형 경찰차로 대별되는 대형사건을 링크한다. 은 도형들의 무형질의 데몬스트레이션 (Demonstration)이다. 노랑풍선은 사고로 죽은 ‘세월호’ 학생들을 암시한다. 심상운은 교사출신이라 학생들을 보는 마음이 더 애틋할 것이다. 풍선들은 서로 입을 맞추고 얼굴을 부빈다. 무의식에 내재된 불만을 폭로하는 도형들의 무언극이다. 노란풍선들의 물결은 대도시 봄 하늘에 유채꽃이 만발한 판타지를 그린다. 아이슬란드의 육각형 빙산과 육각수 바다가 사각형의 도시건축물을 파괴하는 장면은 심각한 인류의 재앙을 암시한다. 스릴러 영화를 보는 것 같은 현장감이 있다. 극대화된 상상력이 의미확장을 한다. 2. 하이퍼시의 자동기술기법   자동기술기법 시창작 기법은 임의성과 우연성을 통한 다양한 의미확장과 탈개념을 추구한다. 무의식의 의식화는 ‘낯설게하기’를 실현하며 정서를 환기시킨다. 아래 시는 박서영의 「홀수의 방」 1연이다. 자동기술기법 문장기법의 의식의 흐름을 좇는 탈구조의 시다.   잊겠다는 말 너머는 환하다. 그 말은 화물열차를 타고 왔고 꽃나무도 한 그루 따라왔다. 꿈이었나봐. 흩어지는 기억들. 슬픈 단어들은 흩어진 방을 가진다. 너는. 나를 . 그녀를. 누군가를. 사랑은 없고 사랑의 소재만 남은 방에서 너는 긴 팔을 뻗어 현관문에 걸린 전단지를 만진다. 잊겠다는 말은 벼랑 끝에 매달린 손. 이미 그곳에 있었지만 도대체 그곳은 어디인가. 떠나면서 허공에 던져놓은 너의 단어들. 흩어져 있는 너의 단어들이 흰 배를 드러내놓고 날아가는 걸 본다.   위의 시에서는 앞의 문장을 뒤의 문장이 이어받는다. 받은 문장은 파생적으로 갈라지며 다음 문장과 이미지 분산을 하며 연결된다. 으로 이미지 파생을 하며 같은 낱말과 이미지가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새로운 단어조합을 하며 의미가 확산된다.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꿈이었나봐’라는 독백체 문장을 삽입하여 상황을 꿈으로 설정해 버린다. 위의 시는 의식의 흐름기법을 사용한 자동기술기법의 시다. ‘잊겠다는 말’은 무의식에서 튀어나온 의식의 소리다. 일반적으로 사랑의 행위는 빨리 끝난다. 그러나 이별 후의 감정의 잔재는 길게 남는다. 자아를 냉정하게 분철한 연애 이별 시다. 애인과 이별을 한 순간부터 사랑의 감정은 시작된다. 한쪽은 연애를 끝냈지만, 다른 한 쪽은 연애기억을 삭제하지 못하고 대상을 그리워한다. 다음 문장은 로 확장된다. 그 다음 문장은 으로 자유연상법을 사용하였다. 그 다음 문장 ‘그곳은 어디인가 ?’라는 물음은 로 연상작용을 하며 명사와 동사로 단어가 이동하여 연결된다. 연상작용으로 무의식의 흐름기법이 상황을 바꾸면서 장면전환이 된다. 의식의 흐름 기법은 시에서 문장을 세련되게 한다. 고백적 장면전환과 상황제시를 하며 초현실주의 시작품을 만들어낸다. 자동기술기법은 무의식의 흐름 기법을 실현하는 하이퍼시 시 창작 기법이다.   3. 하이퍼시의 통합구조     하이퍼시는 통합구조를 지니고 있다. 기존의 시 개념을 거부하고 새로운 시 형태를 구축한다. 시의 탈 영토화를 실현한다. 아래 시는 필자의 졸시 필명 이선으로 발표한 시다. 아래 「이혼 견적서 」 전문을 읽고 하이퍼시 방법론을 논의하여 보자. S# 3   상담 대기실에서 , 나는 행복지수 검사 결과를 기다리며 대기 중이다   시간과 욕망의 간극 사이, 퇴락한 문장의 절취선에서 쾌속냉동과 쾌락냉동의 빙하점에서, 부부의 비극과 응징은 시작되었다ㅡ 무대 전등이 꺼지고, 감독의 Q 사인. 그녀의 구겨진 실크블라우스, 3번째 단추가 풀어진다. “감독님! 여배우의 왼쪽 볼에 마릴린 먼로 섹시점을 찍을까요?”   그래요, 순수와 열정 따위, 자극과 감각 따위는… 잊었어요. 자정의 감정분기점을 지나 05:38 지하철이 개통되면 세상은 곧 문명한 이성을 회복할 테니까   침실문 밖에서 서성대는 그. 침실문 안에서 망설이는 나. “여전히 대치 중”이라는 말로 치환되는 21 세기 결혼공화국   “본능과 애욕의 나침반 좌표축을 흔드는 당신은 누구세요?” ― 어제는 내 행복의 시작점이었던, 당신. 오늘은 또 내 스트레스의 꼭지점인, 당신   구겨진 실크블라우스가 펴지고, 그녀의 3 번째 단추가 잠겨진다   (슬로우 모션으로 ). F.O(Fade Out)   ― 이선 , 「이혼 견적서 」 전문   위의 시는 시나리오 용어 ‘S# 3– 감독의 Q 사인- (슬로우 모션으로 ). F.O(Fade Out)’를 차용하고 있다. 시의 각 연들은 대사와 장면전환 등 시나리오 요소를 삽입한 탈 구조를 실현한다. 필자의 하이퍼시는 난해시로 단정하면 안 된다. 하이퍼시는 상황시다. 내용을 해석하려고 하지 말고 절대상황을 이해하여야 한다. 단어의 뜻을 해석하여 스토리를 연결하려고 하면 안 된다. 필자의 졸시 「이혼 견적서」는 권태와 매너리즘에 빠진 21 세기형 부부의 위기인 매너리즘에 초점을 맞추었다. 인생은 연극이다. 감독의 Q 사인에 따라 부부는 일생 동안 드라마를 찍는다고 해석하였다. 신혼 때의 짜릿한 성생활도 권태기에는 서로 데면데면해진다. 파국을 맞아서 이혼 직전 상담심리치료를 받는 부부가 요즘 늘고 있다. 행복지수도 낮다. 성격차이라는 말은 성, 기호, 생활패턴에서 부부 쌍방이 불통함을 의미한다. 위의 시는 시나리오 형식의 추리극을 형식을 차용하였다. 추리영화처럼 장면전환이 될 때마다 또 다른 위기가 펼쳐진다. 읽지 못한 영화자막처럼 틈새가 주는 미학적 요소가 숨어 있다. 하이퍼시는 ‘보여주기’만하는 시다. 위의 시는 시나리오 기법의 시에 영상시의 색채감과 운동감을 합한 통합성을 보여 준다. 탈구조를 하여 시의 형태를 변형하고 있다. 위에서 인용한 3편의 하이퍼시의 형태는 탈 구조를 실현하고 있다. 기존의 서정시의 형태를  변형하여 비약적 상상력을 통한 가상현실세계를 추구한다. 또한 미술, 무용, 연극, 영화의 여러 요소를 시에 차용하여 새로운 시 형태를 모색하고 있다. 직접적, 고백적 문체로 독자에게 강렬하게 말걸기를 시도한다. 하이퍼시는 적극적인 방식으로 독자에게 다가가고, 21세기 현대의 젊은 의식을 지닌 독자와 소통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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