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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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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추잎같은 엄마의 발소리 타박타박"... 댓글:  조회:2208  추천:0  2017-11-01
기형도 시 모음 시인 기형도 : 입 속의 검은 잎 : 빈집             빈 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엄마 걱정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어두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질투는 나의 힘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바람은 그대 쪽으로     어둠에 가려 나는 더 이상 나뭇가지를 흔들지 못한다. 단 하나의 영혼(靈 魂)을 준비하고 발소리를 죽이며 나는 그대 창문(窓門)으로 다가간다. 가축 들의 순한 눈빛이 만들어내는 희미한 길 위에는 가지를 막 떠나는 긴장한 이파리들이 공중 빈 곳을 찾고 있다. 외롭다. 그대, 내 낮은 기침소리가 그 대 단편(短篇)의 잠속에서 끼어들 때면 창틀에 조그만 램프를 켜다오. 내 그 리움의 거리는 너무 멀고 침묵(沈默)은 언제나 이리저리 나를 끌고 다닌다. 그대는 아주 늦게 창문을 열어야 한다. 불빛은 너무 약해 벌판을 잡을 수 없 고, 갸우뚱 고개 젓는 그대 한숨 속으로 언제든 나는 들어가고 싶었다. 아 아, 그대는 곧 입김을 불어 한 잎의 불을 끄리라. 나는 소리없이 가장 작은 나뭇가지를 꺾는다. 그 나뭇가지 뒤에 몸을 숨기고 나는 내가 끝끝내 갈 수 없는 생(生)의 벽지(僻地)를 조용히 바라본다. 그대, 저 고단한 등피(燈皮)를 다 닦아내는 박명(簿明)의 시간, 흐려지는 어둠 속에서 몇 개의 움직임이 그 치고 지친 바람이 짧은 휴식을 끝마칠 때까지.        봄날은 간다   햇빛은 분가루처럼 흩날리고 쉽사리 키가 변하는 그림자들은 한 장 열풍(熱風)에 말려 둥글게 휘어지는구나 아무 때나 손을 흔드는 미루나무 얕은 그늘 속을 첨벙이며 2시반 시외버스도 떠난 지 오래인데 아까부터 서울집 툇마루에 앉은 여자 외상값처럼 밀려드는 대낮 신작로 위에는 흙먼지, 더러운 비닐들 빈 들판에 꽂혀 있는 저 희미한 연기들은 어느 쓸쓸한 풀잎의 자손들일까 밤마다 숱한 나무젓가락들은 두 쪽으로 갈라지고 사내들은 화투패마냥 모여들어 또 그렇게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간다 여자가 속옷을 헹구는 시냇가엔 하룻밤새 없어져버린 풀꽃들 다시 흘러들어온 것들의 인사(人事) 흐린 알전구 아래 엉망으로 취한 군인은 몇 해 전 누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여자는 자신의 생을 계산하지 못한다. 몇 번인가 아이를 지울 때 그랬듯이 습관적으로 주르르 눈물을 흘릴 뿐 끌어안은 무릎 사이에서 추억은 내용물 없이 떠오르고 소읍(小邑)은 무서우리만치 고요하다, 누구일까 세숫대야 속에 삶은 달걀처럼 잠긴 얼굴은 봄날이 가면 그뿐 숙취(宿醉)는 몇 장 지전(紙錢)속에서 구겨지는데 몇 개의 언덕을 넘어야 저 흙먼지들은 굳은 땅 속으로 하나둘 섞여들는지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다. 여섯 개의 줄이 모두 끊어져 나는 오래 전부터 그 기타를 사용하지 않는다. '한때 나의 슬픔과 격정들을 오선지 위로 데리고 가 부드러운 음자리로 배열해주던' 알 수 없는 일이 있다. 가끔씩 텅 빈 방에 홀로 있을 때 그 기타 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 나는 경악한다. 그러나 나의 감각들은 힘센 기억들을 품고 있다. 기타 소리가 멎으면 더듬더듬 나는 양초를 찾는다. 그렇다.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가끔씩 어둡고 텅 빈 희망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이상한 연주를 들으면서 어떨 때는 내 몸의 전부가 어둠 속에서 가볍게 튕겨지는 때도 있다.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푸른색이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입 속의 검은 잎    택시 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 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 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   택시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그 입 속에 악착 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소리의 뼈   김교수님이 새로운 학설을 발표했다 소리에도 뼈가 있다는 것이다 모두 그 말을 웃어넘겼다, 몇몇 학자들은 잠시 즐거운 시간을 제공한 김교수의 유머에 감사했다 학장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은 일 학기 강의를 개설했다 호기심 많은 학생들이 장난삼이 신청했다 한 학기 내내 그는 모든 수업 시간마다 침묵하는 무서운 고집을 보여주었다 참지 못한 학생들이, 소리의 뼈란 무엇일까 각자 일가견을 피력했다 이군은 그것이 침묵일 거라고 말했다. 박군은 그것을 숨은 의미라 보았다 또 누군가는 그것의 개념은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모든 고정관념에 대한 비판에 접근하기 위하여 채택된 방법론적 비유라는 것이었다 그의 견해는 너무 난해하여 곧 묵살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 다음 학기부터 우리들의 귀는 모든 소리를 훨씬 더 잘 듣게 되었다.       가는 비 온다   간판들이 조금씩 젖는다 나는 어디론가 가기 위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둥글고 넓은 가로수 잎들은 떨어지고 이런 날 동네에서는 한 소년이 죽기도 한다. 저 식물들에게 내가 그러나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언젠가 이곳에 인질극이 있었다 범인은 휴일이라는 노래를 틀고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며 자신의 목을 긴 유리조각으로 그었다 지금은 한 여자가 그 집에 산다 그 여자는 대단히 고집 센 거위를 기른다 가는 비…는 사람들의 바지를 조금 적실 뿐이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의 음성은 이제 누구의 것일까 이 상점은 어쩌다 간판을 바꾸었을까 도무지 쓸데없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고 우산을 쓴 친구들은 나에게 지적한다 이 거리 끝에는 커다란 전당포가 있다, 주인의 얼굴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시간을 빌리러 뒤뚱뒤뚱 그곳에 간다 이를테면 빗방울과 장난을 치는 저 거위는 식탁에 오를 나날 따위엔 관심이 없다 나는 안다, 가는 비…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며 누구도 죽음에게 쉽사리 자수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랴, 하나뿐인 입들을 막아 버리는 가는 비…오는 날, 사람들은 모두 젖은 길을 걸어야 한다       가수는 입을 다무네   걸어가면서도 나는 기억할 수 있네 그때 나의 노래 죄다 비극이었으나 단순한 여자들은 나를 둘러쌌네 행복한 난투극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어리석었던 청춘을, 나는 욕하지 않으리   흰 김이 피어 오르는 골목에 떠밀려 그는 갑자기 가랑비와 인파 속에 뒤섞인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모든 세월이 떠돌이를 법으로 몰아냈으니 너무 많은 거리가 내 마음을 운반했구나 그는 천천히 얇고 검은 입술을 다문다 가랑비는 조금씩 그의 머리카락을 적신다 한마디로 입구 없는 삶이었지만 모든 것을 취소하고 싶었던 시절도 아득했다 나를 괴롭힐 장면이 아직도 남아 있을까 모퉁이에서 그는 외투 깃을 만지작거린다 누군가 나의 고백을 들어주었으면 좋으련만 그가 누구든 엄청난 추억을 나는 지불하리라 그는 걸음을 멈춘다, 어느새 다 젖었다   언제부턴가 내 얼굴은 까닭없이 눈을 찌푸리고 내 마음은 고통에게서 조용히 버림받았으니 여보게, 삶은 떠돌이들을 한 군데 쓸어 담지 않는다, 그는 무슨 영화의 주제가처럼 가족도 없이 흘러온 것이다 그의 입술은 마른 가랑잎, 모든 깨달음은 뒤늦은 것이니 따라가 보면 축축한 등 뒤로 이런 웅얼거림도 들린다   어떠한 날씨도 이 거리를 바꾸지 못하리 검은 외투를 입은 중년 사내 혼자 가랑비와 인파 속을 걷고 있네 너무 먼 거리여서 표정은 알 수 없으나 강조된 것은 사내도 가랑비도 아니었네     그  날   어둑어둑한 여름날 아침 낡은 창문 틈새로 빗방울이 들이친다. 어두운 방 한복판에서 김(金)은 짐을 싸고 있다. 그의 트렁크가 가장 먼저 접수한 것은 김의 넋이다. 창문 밖에는 엿보는 자 없다. 마침내 전날 김은 직장과 헤어졌다. 잠시 동안 김은 무표정하게 침대를 바라본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침대는 말이 없다. 비로소 나는 풀려나간다, 김은 자신에게 속삭인다, 마침내 세상의 중심이 되었다.   나를 끌고 다녔던 몇 개의 길을 나는 영원히 추방한다. 내 생의 주도권은 이제 마음에서 육체로 넘어갔으니 지금부터 나는 길고도 오랜 여행을 떠날 것이다. 내가 지나치는 거리마다 낯선 기쁨과 전율은 가득 차리니 어떠한 권태도 더 이상 내 혀를 지배하면 안 된다.   모든 의심을 짐을 꾸리면서 김은 거둔다. 어둑어둑한 여름 날 아침 창문 밖으로 보이는 젖은 길은 침대처럼 고요하다. 마침내 낭하가 텅텅 울리면서 문이 열린다. 잠시 동안 김은 무표정하게 거리를 바라본다. 김은 천천히 손잡이를 놓는다. 마침내 희망과 걸음이 동시에 떨어진다. 그 순간, 쇠뭉치 같은 트렁크가 김을 쓰러뜨린다. 그곳에서 계집아이 같은 가늘은 울음 소리가 터진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빗방울은 은퇴한 노인의 백발 위로 들이친다.     그 집 앞   그날 마구 비틀거리는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너무도 가까운 거리가 나를 안심시켰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기억이 오면 도망치려네 사내들은 있는 힘 다해 취했네 나의 눈빛 지푸라기처럼 쏟아졌네 어떤 고함 소리도 내 마음 치지 못했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모든 추억은 쉴 곳을 잃었네 나 그 술집에서 흐느꼈네 그날 마구 취한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사내들은 남은 힘 붙들고 비틀거렸네 나 못생긴 입술 가졌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벗어 둔 외투 곁에서 나 흐느꼈네 어떤 조롱도 무거운 마음 일으키지 못했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그토록 좁은 곳에서 나 내 사랑 잃었네       기억할 만한 지나침 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눈은 퍼부었고 거리는 캄캄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물들은 눈을 뒤집어쓰고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로 변해갔다 무슨 관공서였는데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 그 춥고 큰 방에서 서기(書記)는 혼자 울고 있었다! 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중지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 밖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지금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밤은 깊고 텅 빈 사무실 창 밖으로 눈이 퍼붓는다 나는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 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 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늙은 사람   그는 쉽게 들켜 버린다 무슨 딱딱한 덩어리처럼 달아날 수 없는, 공원 등나무 그늘 속에 웅크린   그는 앉아 있다 최소한의 움직임만을 허용하는 자세로 나의 얼굴, 벌어진 어깨, 탄탄한 근육을 조용히 핥는 그의 탐욕스런 눈빛   나는 혐오한다, 그의 짧은 바지와 침이 흘러 내리는 입과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허옇게 센 그의 정신과   내가 아직 한 번도 가본 적 없다는 이유 하나로 나는 그의 세계에 침을 뱉고 그가 이미 추방되어 버린 곳이라는 이유 하나로 나는 나의 세계를 보호하며 단 한 걸음도 그의 틈입을 용서할 수 없다   갑자기 나는 그를 쳐다본다, 같은 순간 그는 간신히 등나무 아래로 시선을 떨어뜨린다 손으로는 쉴새없이 단장을 만지작거리며 여전히 입을 벌린 채 무엇인가 할 말이 있다는 듯이, 그의 육체 속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그 무엇이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대학 시절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왔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 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토리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물 속의 사막   밤 세 시, 길 밖에서 모두 흘러간다 나는 금지된다 장마비 빈 빌딩에 퍼붓는다 물 위를 읽을 수 없는 문장들이 지나가고 나는 더 이상 인기척을 내지 않는다   유리창, 푸른 옥수수잎 흘러 내린다 무정한 옥수수나무… 나는 천천히 발음해 본다 석탄가루를 뒤집어 쓴 흰 개는 그 해 장마통에 집을 버렸다   비닐집, 비에 잠겼던 흙탕마다 잎들은 각오한 듯 무성했지만 의심이 많은 자의 침묵은 아무것도 통과하지 못한다 밤 도시의 환한 빌딩은 차디 차다   장마비, 아버지 얼굴 떠내려 오신다 유리창에 잠시 붙어 입을 벌린다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 우수수 아버지 지워진다, 빗줄기와 몸을 바꾼다   아버지, 비에 묻는다 내 단단한 각오들은 어디로 갔을까? 번들거리는 검은 유리창, 와이셔츠 흰 빛은 터진다 미친 듯이 소리친다, 빌딩 속은 악몽조차 젖지 못한다 물들은 집을 버렸다! 내 눈속에는 물들이 살지 않는다       바람의 집   내 유년 시절 바람이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이면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당신 무릎에 뉘고 무딘 칼끝으로 시퍼런 무우를 깎아주시곤 하였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자정 지나 앞마당에 은빛 금속처럼 서리가 깔릴 때까지 어머니는 마른 손으로 종잇장 같은 내 배를 자꾸만 쓸어 내렸다. 처마 밑 시래기 한줌 부스러짐으로 천천히 등을 돌리던 바람의 한숨. 사위어 가는 호롱불 주위로 방 안 가득 풀풀 수십 장 입김이 날리던 밤, 그 작은 소년과 어머니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숲으로 된 성벽   저녁 노을이 지면 신(神)들의 상점(商店)엔 하나 둘 불이 켜지고 농부들은 작은 당나귀들과 함께 성(城) 안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성벽은 울창한 숲으로 된 것이어서 누구나 사원(寺院)을 통과하는 구름 혹은 조용한 공기들이 되지 않으면 한 걸음도 들어갈 수 없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그 성(城)   어느 골동품 상인(商人)이 그 숲을 찾아와 몇 개 큰 나무들을 잘라내고 들어갔다 그곳에는…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본 것은 쓰러진 나무들뿐, 잠시 후 그는 그 공터를 떠났다   농부들은 아직도 그 평화로운 성(城)에 살고 있다 물론 그 작은 당나귀들 역시       식목제 (植木祭)   어느 날 불현듯 물 묻은 저녁 세상에 낮게 엎드려 물끄러미 팔을 뻗어 너를 가늠할 때 너는 어느 시간의 흙속에 아득히 묻혀 있느냐 축축한 안개 속에서 어둠은 망가진 소리 하나하나 다듬으며 이 땅 위로 무수한 이파리를 길어 올린다 낯선 사람들, 괭이 소리 삽소리 단단히 묻어 두고 떠난 벌판 어디쯤일까 내가 연기처럼 더듬더듬 피어 올랐던 이제는 침묵의 목책 속에 갇힌 먼 땅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 흘러간다 어디로 흘러가느냐, 마음 한 자락 어느 곳 걸어 두는 법 없이 희망을 포기하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리, 흘러간다 어느 곳이든 기척 없이 자리를 바꾸던 늙은 구름의 말을 배우며 나는 없어질 듯 없어질 듯 생(生) 속에 섞여 들었네 이따금 나만을 향해 다가오는 고통이 즐거웠지만 슬픔 또한 정말 경미한 것이었다 한때의 헛된 집착으로도 솟는 맑은 눈물을 다스리며 아, 어느 개인 날 낯선 동네에 작은 꽃들이 피면 축복하며 지나가고 어느 궂은 날은 죽은 꽃 위에 잠시 머물다 흘러갔으므로 나는 일찍이 어느 곳에 나를 묻어 두고 이다지 어지러운 이파리로만 날고 있는가 돌아보면 힘없는 추억들만을 이곳저곳 숨죽여 세워 두었네 흘러간다, 모든 마지막 문들은 벌판을 향해 열리는데 아, 가랑잎 한 장 뒤집히는 소리에도 세상은 저리 쉽게 떠내려간다 보느냐, 마주보이는 시간은 미루나무 무수히 곧게 서 있듯 멀수록 무서운 얼굴들이다, 그러나 희망도 절망도 같은 줄기가 틔우는 작은 이파리일 뿐, 그리하여 나는 살아가리라 어디 있느냐 식목제(植木祭)의 캄캄한 밤이여, 바람 속에 견고한 불의 입상(立像)이 되어 싱싱한 줄기로 솟아오를 거냐, 어느 날이냐 곧 이어 소스라치며 내 유년의 떨리던, 짧은 넋이여         안 개   □  1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  2   이 읍에 처음 와 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군단(軍團)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 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 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성역(聖域)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 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겁탈당하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취객(醉客) 하나가 얼어 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총신(銃身)을 겨눈다. 상처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을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  3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어느 푸른 저녁   □  1   그런 날이면 언제나 이상하기도 하지, 나는 어느새 처음 보는 푸른 저녁을 걷고 있는 것이다, 검고 마른 나무들 아래로 제각기 다른 얼굴들을 한 사람들은 무엇엔가 열중하며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혹은 좁은 낭하를 지나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 서로를 통과해 가는   나는 그것을 예감이라 부른다,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 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숨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그런 때를 조심해야 한다, 진공 속에서 진자는 곧,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조금씩 흔들리는 것은 무방하지 않은가 나는 그것을 본다   모랫더미 위에 몇몇 사내가 앉아 있다, 한 사내가 조심스럽게 얼굴을 쓰다듬어 본다 공기는 푸른 유리병, 그러나 어둠이 내리면 곧 투명해질 것이다, 대기는 그 속에 둥글고 빈 통로를 얼마나 무수히 감추고 있는가! 누군가 천천히 속삭인다, 여보게 우리의 생활이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가 세상은 얼마나 많은 법칙들을 숨기고 있는가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느낌은 구체적으로 언제나 뒤늦게 온다, 아무리 빠른 예감이라도 이미 늦은 것이다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  2   가장 짧은 침묵 속에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결정들을 한꺼번에 내리는 것일까 나는 까닭 없이 갸우뚱해본다 둥글게 무릎을 기운 차가운 나무들, 혹은 곧 유리창을 쏟아버릴 것 같은 검은 건물들 사이를 지나 낮은 소리들을 주고 받으며 사람들은 걸어오는 것이다 몇몇은 딱딱해 보이는 모자를 썼다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 서로를 통과해 가는 나는 그것을 습관이라 부른다, 또다시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 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그러나 안심하라, 감각이여!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느 투명한 저녁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모든 신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여행자    그는 말을 듣지 않는 자신의 육체를 침대 위에 집어 던진다 그의 마음 속에 가득찬, 오래 된 잡동사니들이 일제히 절그럭거린다 이 목소리는 누구의 것인가,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할 것인가 나는 이곳까지 열심히 걸어왔었다, 시무룩한 낯짝을 보인 적도 없다 오오, 나는 알 수 없다, 이곳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내 정체를 눈치챘을까 그는 탄식한다, 그는 완전히 다르게 살고 싶었다, 나에게도 그만한 권리는 있지 않는가 모퉁이에서 마주친 노파, 술집에서 만난 고양이까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중얼거린다, 무엇이 그를 이곳까지 질질 끌고 왔는지, 그는 더 이상 기억도 못한다 그럴 수도 있다, 그는 낡아빠진 구두에 쑤셔박힌, 길쭉하고 가늘은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고 동물처럼 울부짖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         오래된 서적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에서, 텅 빈 희망 속에서 어찌 스스로의 일생을 예언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분주히 몇몇 안 되는 내용을 가지고 서로의 기능을 넘겨보며 서표(書標)를 꽂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너무 쉽게 살았다고 말한다, 좀더 두꺼운 추억이 필요하다는   사실, 완전을 위해서라면 두께가 문제겠는가? 나는 여러 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 왜냐하면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용기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보라   나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 볼 것이가, 하지만 그 경우 그들은 거짓을 논할 자격이 없다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꿈꾸어야 한다, 단 한 줄일 수도 있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위험한 가계(家系) 1969   □  1   그 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 여름 내내 그는 죽만 먹었다. 올해엔 김장을 조금 덜 해도 되겠구나. 어머니는 남폿불 아래에서 수건을 쓰시면서 말했다. 이젠 그 얘긴 그만하세요 어머니. 쌓아 둔 이불에 등을 기댄 채 큰누이가 소리질렀다. 그런데 올해에는 무우들마다 웬 바람이 이렇게 많이 들었을까. 나는 공책을 덮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잠바 하나 사주세요. 스펀지마다 숭숭 구멍이 났어요. 그래도 올 겨울은 넘길 수 있을 게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실 거구. 풍병(風病)에 좋다는 약은 다 써보았잖아요. 마늘을 까던 작은누이가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지만 어머니는 잠자코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수건을 가만히 고쳐매셨다.   □  2   아버지. 그건 우리 닭도 아닌데 왜 그렇게 정성껏 돌보세요. 나는 사료를 한줌 집어 던지면서 가지를 먹어 시퍼래진 입술로 투정을 부렸다. 농장의 목책을 훌쩍 뛰어 넘으며 아버지는 말했다. 네게 모이를 주기 위해서야. 양계장 너머 뜬, 달걀 노른자처럼 노랗게 곪은 달이 아버지의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이리저리 흔들 때마다 나는 아버지의 팔목에 매달려 휘 휘 휘파람을 날렸다. 내일은 펌프 가에 꽃 모종을 하자. 무슨 꽃을 보고 싶으냐. 꽃들은 금방 죽어요 아버지. 너도 올 봄엔 벌써 열 살이다. 어머니가 양푼 가득 칼국수를 퍼 담으시며 말했다. 알아요 나도 이젠 병아리가 아니예요. 어머니. 그런데 웬 칼국수에 이렇게 많이 고춧가루를 치셨을까.    □  3   방죽에서 나는 한참을 기다렸다. 가을 밤의 어둠 속에서 큰누이는 냉이꽃처럼 가늘게 휘청거리며 걸어왔다. 이번 달은 공장에서 야근 수당까지 받았어. 초록색 츄리닝 윗도리를 하나 사고 싶은데. 요새 친구들이 많이 입고 출근해. 나는 오징어가 먹고 싶어. 그건 오래 씹을 수 있고 맛도 좋으니까. 집으로 가는 길은 너무 멀었다. 누이의 도시락 가방 속에서 스푼이 자꾸만 음악 소리를 냈다. 츄리닝이 문제겠니. 내년 봄엔 너도 야간고등학교라도 가야 한다. 어머니. 콩나물에 물은 주셨어요? 콩나물보다 너희들이나 빨리 자라야지. 엎드려서 공부하다가 코를 풀면 언제나 검뎅이가 묻어나왔다. 심지를 좀 잘라내. 타버린 심지는 그을음만 나니까. 작은누이가 중얼거렸다. 아버지 좀 보세요. 어떤 약도 듣지 않았잖아요. 아프시기 전에도 아무것도 해논 일이 없구. 어머니가 누이의 뺨을 쳤다. 약값을 줄일 순 없다. 누이가 깎던 감자가 툭 떨어졌다. 실패하시고 나서 아버지는 3년 동안 낚시질만 하셨어요. 그래도 아버지는 너희들을 건졌어. 이웃 농장에 가서 닭도 키우셨다. 땅도 한 뙈기 장만하셨댔었다. 작은누이가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죽은 맨드라미처럼 빨간 내복이 스웨터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러나 그때 아버지는 채소 씨앗 대신 알약을 뿌리고 계셨던 거예요.   □  4   지나간 날들을 생각해 보면 무엇하겠느냐. 묵은 밭에서 작년에 캐다 만 감자 몇 알 줍는 격이지. 그것도 대개는 썩어 있단다. 아버지는 삽질을 멈추고 채마밭 속에 발목을 묻은 채 짧은 담배를 태셨다. 올해는 무얼 심으시겠어요? 뿌리가 질기고 열매를 먹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심을 작정이다. 하늘에는 벌써 티밥 같은 별들이 떴다. 어머니가 그만 씻으시래요. 다음날 무엇을 보여주려고 나팔꽃들은 저렇게 오므라들어 잠을 잘까. 아버지는 흙속에서 천천히 걸어나오셨다. 봐라. 나는 이렇게 쉽게 뽑혀지는구나. 그러나, 아버지. 더 좋은 땅에 당신을 옮겨 심으시려고.      □  5   선생님. 가정방문은 가지 마세요. 저희 집은 너무 멀어요. 그래도 너는 반장인데. 집에는 아무도 없고요. 아버지 혼자, 낮에는요. 방과 후 긴 방죽을 따라 걸어오면서 나는 몇 번이나 책가방 속의 월말고사 상장을 생각했다. 둑방에는 패랭이꽃이 무수히 피어 있었다. 모두 다 꽃씨들을 갖고 있다니. 작은 씨앗들이 어떻게 큰 꽃이 될까. 나는 풀밭에 꽂혀서 잠을 잤다. 그날 밤 늦게 작은누이가 돌아왔다. 아버진 좀 어떠시니. 누이의 몸에서 석유 냄새가 났다. 글세, 자전거도 타지 않구 책가방을 든 채 백 장을 돌리겠다는 말이냐? 창문을 열자 어둠 속에서 바람에 불려 몇 그루 미루나무가 거대한 빵처럼 부풀어오르는 게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날, 상장을 접어 개천에 종이배로 띄운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  6   그 해 겨울은 눈이 많이 내렸다. 아버지, 여전히 말씀도 못 하시고 굳은 혀. 어느 만큼 눈이 녹아야 흐르실는지. 털실뭉치를 감으며 어머니가 말했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신다. 언제가 봄이에요. 우리가 모두 낫는 날이 봄이에요? 그러나 썰매를 타다보면 빙판 밑으로는 푸른 물이 흐르는 게 보였다. 얼음장 위에서도 종이가 다 탈 때까지 네모반듯한 불들은 꺼지지 않았다. 아주 추운 밤이면 나는 이불 속에서 해바라기 씨앗처럼 동그랗게 잠을 잤다. 어머니 아주 큰 꽃을 보여드릴까요? 열매를 위해서 이파리 몇 개쯤은 스스로 부숴뜨리는 법을 배웠어요. 아버지의 꽃 모종을요. 보세요 어머니. 제일 긴 밤 뒤에 비로소 찾아오는 우리들의 환한 가계(家系)를. 봐요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는 저 동지(冬至)의 불빛 불빛 불빛.         장미빛 인생  문을 열고 사내가 들어온다 모자를 벗자 그의 남루한 외투처럼 희끗희끗한 반백의 머리카락이 드러난다 삐걱이는 나무의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밀어 넣고 그는 건장하고 탐욕스러운 두 손으로 우스꽝스럽게도 작은 컵을 움켜쥔다 단 한번이라도 저 커다란 손으로 그는 그럴 듯한 상대의 목덜미를 쥐어 본 적이 있었을까 사내는 말이 없다, 그는 함부로 자신의 시선을 사용하지 않는 대신 한 곳을 향해 그 어떤 체험들을 착취하고 있다 숱한 사건들의 매듭을 풀기 위해, 얼마나 가혹한 많은 방문객들을 저 시선은 노려보았을까, 여러 차례 거듭되는 의혹과 유혹을 맛본 자들의 그것처럼 그 어떤 육체의 무질서도 단호히 거부하는 어깨 어찌 보면 그 어떤 질투심에 스스로 감격하는 듯한 입술 분명 우두머리를 꿈꾸었을, 머리카락에 가리워진 귀 그러나 누가 감히 저 사내의 책임을 뒤집어쓰랴 사내는 여전히 말이 없다, 비로소 생각났다는 듯이 그는 두툼한 외투 속에서 무엇인가 끄집어낸다 고독의 완강한 저항을 뿌리치며, 어떤 대결도 각오하겠다는 듯이 사내는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얼굴 위를 걸어 다니는 저 표정 삐걱이는 나무의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밀어 넣고 사내는 그것으로 탁자 위를 파내기 시작한다 건장한 덩치를 굽힌 채, 느릿느릿 그러나 허겁지겁, 스스로의 명령에 힘을 넣어가며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       정거장에서의 충고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 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 왔던가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 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들어선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 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 속에 옮겨 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 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죽은 구름   구름으로 가득 찬 더러운 창문 밑에 한 사내가 쓰러져 있다, 마룻바닥 위에 그의 손은 장난감처럼 뒤집혀져 있다 이런 기회가 오기를 기다려 온 것처럼 비닐 백의 입구같이 입을 벌린 저 죽음 감정이 없는 저 몇 가지 음식들도 마지막까지 사내의 혀를 괴롭혔을 것이다 이제는 힘과 털이 빠진 개 한 마리가 접시를 노린다 죽은 사내가 살았을 때, 나는 그를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다 그를 사람들은 미치광이라고 했다, 술과 침이 가득 묻은 저 엎어진 망토를 향해, 백동전을 던진 적도 있다 아무도 모른다, 오직 자신만이 홀로 즐겼을 생각 끝끝내 들키지 않았을 은밀한 성욕과 슬픔 어느 한때 분명 쓸모가 있었을 저 어깨의 근육 그러나 우울하고 추악한 맨발 따위는 동정심 많은 부인들을 위한 선물이었으리 어쨌든 구름들이란 매우 조심스럽게 관찰해야 한다 미치광이, 이젠 빗방울조차 두려워 않을 죽은 사내 자신감을 얻은 늙은 개는 접시를 엎지르고 마루 위엔 사람의 손을 닮은 흉칙한 얼룩이 생기는 동안 두 명의 경관이 들어와 느릿느릿 대화를 나눈다 어느 고장이건 한두 개쯤 이런 빈집이 있더군, 이 따위 미치광이들이 어떻게 알고 찾아와 죽어 갈까 더 이상의 흥미를 갖지 않는 늙은 개도 측은하지만 아무도 모른다, 저 홀로 없어진 구름은 처음부터 창문의 것이 아니었으니     진눈깨비 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에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진눈깨비         집시의 시집   □  1   우리는 너무 어렸다. 그는 그해 가을 우리 마을에 잠시 머물다 떠난 떠돌이 사내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어른들도 그를 그냥 일꾼이라 불렀다.   □  2   그는 우리에게 자신의 손을 가리켜 신(神)의 공장이라고 말했다.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굶주림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무엇엔가 굶주려 있었다. 그는 무엇이든지 만들었다. 그는 마법사였다. 어떤 아이는 실제로 그가 토마토를 가지고 둥근 금을 만드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그가 어디에서 흘러 들어왔는지 어른들도 몰랐다. 우리는 그가 트럭의 고장 고등어의 고장 아니, 포도의 고장에서 왔을 거라고 서로 심하게 다툰 적도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저녁 때마다 그는 농장의 검은 목책에 기대 앉아 이상한 노래들을 불렀다.   모든 풍요의 아버지인 구름 모든 질서의 아버지인 햇빛 숲에서 날 찾으려거든 장화를 벗어 주어요 나는 나무들의 가신(家臣), 짐승들의 다정한 맏형   그의 말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른들은 우리들에게 호통을 쳤다. 그는 우리의 튼튼한 발을 칭찬했다. 어른들은 참된 즐거움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란다. 그들은 세상을 자물통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그러나 세상은 신기한 폭탄, 꿈꾸는 부족(部族)에겐 발견의 도화선. 우리는 그를 믿었다. 어느 날은 비에 젖은 빵, 어떤 날은 작은 홍당무를 먹으며 그는 부드럽게 노래불렀다. 우리는 그때마다 놀라움에 떨며 그를 읽었다.   나는 즐거운 노동자, 항상 조용히 취해 있네 술집에서 나를 만나려거든 신성한 저녁에 오게 가장 더러운 옷을 입은 사내를 찾아주오 사냥해온 별 모든 사물들의 도장(圖章) 모든 정신들의 장식 랄라라, 기쁨들이여! 과오(過誤)들이여! 겸손한 친화력이여!   추수가 끝나고 여름 옷차림 그대로 그는 읍내 쪽으로 흘러 갔다. 어른들은 안심했다. 그러나 우리는 벌써 병정놀이들에 흥미를 잃고 있었다. 코밑에 수염이 돋기 시작한 아이도 있었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한동안 그 사내에 대해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오랜 뒤에 누군가 그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우리는 이미 그의 얼굴조차 기억하기 힘들었다. 상급반에 진학하면서 우리는 혈통과 교육에 대해 배웠다. 오래지 않아   □  3   우리는 완전히 그를 잊었다. 그는 그해 가을 우리 마을에 잠시 머물다 떠난 떠돌이 사내였을 뿐이었다. 어쩌면 그는 우리가 꾸며낸 이야기였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저녁마다 연필을 깎다가 잠드는 버릇을 지금까지 버리지 못했다.     추억에 대한 경멸   손님이 돌아가자 그는 마침내 혼자가 되었다 어슴푸레한 겨울 저녁, 집 밖을 찬 바람이 떠다닌다 유리창의 얼음을 뜯어내다 말고, 사내는 주저앉는다 아아, 오늘은 유쾌한 하루였다, 자신의 나지막한 탄식에 사내는 걷잡을 수 없이 불쾌해진다, 저 성가신 고양이 그는 불을 켜기 위해 방 안을 가로질러야 한다 나무토막 같은 팔을 쳐들면서 사내는, 방이 너무 크다 왜냐하면, 하고 중얼거린다, 나에게도 추억거리는 많다 아무도 내가 살아온 내용에 간섭하면 안 된다 몇 장의 사진을 들여다보던 사내가 한숨을 쉰다 이건 여인숙과 다를 바 없구나, 모자라도 뒤집어쓸까 어쩌다가 이봐, 책임질 밤과 대낮들이 아직 얼마인가 사내는 머리를 끄덕인다, 가스레인지는 차갑게 식어 있다 그렇다, 이런 밤은 저 게으른 사내에게 너무 가혹하다 내가 차라리 늙은이였다면! 그는 사진첩을 내동댕이친다 추억은 이상하게 중단된다, 그의 커다란 슬리퍼가 벗겨진다 손아귀에서 몸부림치는 작은 고양이,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독한 술을 쏟아 붓는, 저 헐떡이는, 사내     포도밭 묘지 1    주인은 떠나 없고 여름이 가기도 전에 황폐해버린 그해 가을, 포도밭 등성이로 저녁마다 한 사내의 그림자가 거대한 조명 속에서 잠깐씩 떠오르다 사라지는 풍경 속에서 내 약시(弱視)의 산책은 비롯되었네. 친구여, 그해 가을 내내 나는 적막과 함께 살았다. 그때 내가 데리고 있던 헛된 믿음들과 그 뒤에서 부르던 작은 충격들을 지금도 나는 기억하고 있네. 나는 그때 왜 그것을 몰랐을까. 희망도 아니었고 죽음도 아니었어야 할 그 어둡고 가벼웠던 종교들을 나는 왜 그토록 무서워 했을까. 목마른 내 발자국마다 검은 포도알들은 목적도 없이 떨어지고 그때마다 고개를 들면 어느 틈엔가 낯선 풀잎의 자손들이 날아와 벌판 가득 흰 연기를 피워올리는 것을 나는 한참이나 바라보곤 했네. 어둠은 언제든지 살아 있는 것들의 그림자만 골라 디디며 포도밭 목책으로 걸어왔고 나는 내 정신의 모두를 폐허로 만들면서 주인을 기다렸다. 그러나 기다림이란 마치 용서와도 같아 언제나 육체를 지치게 하는 법. 하는 수 없이 내 지친 발을 타일러 몇 개의 움직임을 만들다 보면 버릇처럼 이상한 무질서도 만나곤 했지만 친구여, 그때 이미 나에게는 흘릴 눈물이 남이 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내 정든 포도밭에서 어느 하루 한 알 새파란 소스라침으로 떨어져 촛농처럼 누운 밤이면 어둠도, 숨죽인 희망도 내게는 너무나 거추장스러웠네. 기억한다. 그해 가을 주인은 떠나 없고 그리움이 몇 개 그릇처럼 아무렇게나 사용될 때 나는 떨리는 손으로 짧은 촛불들을 태우곤 했다. 그렇게 가을도 가고 몇 잎 남은 추억들마저 천천히 힘을 잃어갈 때 친구여, 나는 그때 수천의 마른 포도 이파리가 떠내려가는 놀라운 공중(空中)을 만났다. 때가 되면 태양도 스스로의 빛을 아껴두듯이 나 또한 내 지친 정신을 가을 속에서 동그랗게 보호하기 시작했으니 나와 죽음은 서로를 지배하는 각자의 꿈이 되었네. 그러나 나는 끝끝내 포도밭을 떠나지 못했다.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나는 모든 것을 바꾸었다. 그리하여 어느 날 기척 없이 새끼줄을 들치고 들어선 한 사내의 두려운 눈빛을 바라보면서 그가 나를 주인이라 부를 때마다 아, 나는 황망히 고개 돌려 캄캄한 눈을 감았네. 여름이 가기도 전에 모든 이파리 땅으로 돌아간 포도밭, 참담했던 그해 가을, 그 빈 기쁨들을 지금 쓴다 친구여.       포도밭 묘지 2 아아, 그때의 빛이여. 빛 주위로 뭉치는 어둠이여. 서편 하늘 가득 실신한 청동의 구름떼여. 목책 안으로 툭툭 떨어져 내리던 무엄한 새들이여. 쓴 물 밖으로 소스라치며 튀어 나오던 미친 꽃들이여. 나는 끝을 알 수 없는 질투심에 휩싸여 너희들을 기다리리. 내 속의 모든 움직임이 그치고 탐욕을 향한 덩굴손에서 방황의 물기가 빠질 때까지.   밤은 그렇게 왔다. 포도압착실 앞 커다란 등받이 의자에 붙어 한 잎 식물의 눈으로 바라보면 어둠은 화염처럼 고요해지고 언제나 내 눈물을 불러내는 저 깊은 공중(空中)들. 기억하느냐, 그 해 가을 그 낯선 저녁 옻나무 그림자 속을 홀연히 스쳐가던 천사의 검은 옷자락과 아아, 더욱 높이 흔들리던 그 머나먼 주인의 임종. 종자(從者)여, 네가 격정을 사로잡지 못하여 죽음을 환난과 비교한다면 침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네가 울리는 낮은 종소리는 어찌 저 놀라운 노을을 설명할 수 있겠느냐. 저 공중의 욕망은 어둠을 지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종교는 아직도 지상에서 헤맨다. 묻지 말라, 이곳에서 너희가 완전히 불행해질 수 없는 이유는 신(神)이 우리에게 괴로워할 권리를 스스로 사들이는 법을 아름다움이라 가르쳤기 때문이다. 밤은 그렇게 왔다. 비로소 너희가 전생애의 쾌락을 슬픔에 걸듯이 믿음은 부재(不在) 속에서 싹트고 다시 그 믿음은 부재의 씨방 속으로 돌아가 영원히 쉴 것이니, 골짜기는 정적에 싸이고 우리가 그 정적을 사모하듯이 어찌 비밀을 숭배하는 무리가 많지 않으랴. 밤은 그렇게 노여움을 가장한 모습으로 찾아와 어두운 실내의 램프불을 돋우고 우리의 후회들로 빚어진 주인의 말씀은 정신의 헛된 식욕처럼 아름답다. 듣느냐, 이 세상 끝간 곳엔 한 자락 바람도 일지 않았더라. 어떠한 슬픔도 그 끝에 이르면 짓궂은 변증의 쾌락으로 치우침을 네가 아느냐. 밤들어 새앙쥐를 물어 뜯는 더러운 달빛 따라 가며 휘파람 부는 작은 풀벌레들의 그 고요한 입술을 보았느냐. 햇빛은 또 다른 고통을 위하여 빛나는 나무의 알을 잉태하느니 종자(從者)여, 그 놀라운 보편을 진실로 네가 믿느냐.         흔해빠진 독서 휴일의 대부분은 죽은 자들에 대한 추억에 바쳐진다 죽은 자들은 모두가 겸손하며, 그 생애는 이해하기 쉽다 나 역시 여태껏 수많은 사람들을 허용했지만 때때로 죽은 자들에게 나를 빌려 주고 싶을 때가 있다 수북한 턱수염이 매력적인 이 두꺼운 책의 저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불행한 생을 보냈다, 위대한 작가들이란 대부분 비슷한 삶을 살다 갔다, 그들이 선택할 삶은 이제 없다 몇 개의 도회지를 방랑하며 청춘을 탕진한 작가는 엎질러진 것이 가난뿐인 거리에서 일자리를 찾는 중이다 그는 분명 그 누구보다 인생의 고통을 잘 이해하게 되겠지만 종잇장만 바스락거릴 뿐, 틀림없이 나에게 관심이 없다 그럴 때마다 내 손가락들은 까닭없이 성급해지는 것이다 휴일이 지나가면 그뿐, 그 누가 나를 빌려 가겠는가 나는 분명 감동적인 충고를 늘어놓을 저 자를 눕혀두고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저녁의 거리로 나간다 휴일의 행인들은 하나같이 곧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다 그러면 종종 묻고 싶어진다, 내 무시무시한 생애는 얼마나 매력적인가, 이 거추장스러운 마음을 망치기 위해 가엾게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흙탕물 주위를 나는 기웃거렸던가! 그러면 그대들은 말한다, 당신 같은 사람은 너무 많이 읽었다고 대부분 쓸모없는 죽은 자들을 당신이 좀 덜어가 달라고          
1    [그것이 알고싶다] - 예전 반도에서도 노벨상 후보?... 댓글:  조회:2640  추천:0  2017-11-01
김양하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매우 낯설다. 남한에서는 이태규를, 북한에서는 리승기를 화학계의 원조로 기리고 있지만, 김양하는 남에서도 북에서도 기억하는 이들이 별로 없다. 가을이 되면 과학담당 기자들은 바빠진다. 노벨상의 계절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매년 10월 스웨덴 왕립한림원이 노벨상 수상자를 발표하면 매체들은 앞다퉈 그들의 업적을 소개하고 ‘왜 한국인 노벨상 수상자는 나오지 않는가’ 같은 토론회를 연다(행여 수상자 가운데 일본인이 있으면 토론회의 분위기는 한층 더 비장해진다). 어떤 이들은 한국에 이처럼 노벨상에 한을 품은 사람들이 많은 것은 고도성장기 개발주의의 잔재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타당한 분석이지만, 노벨상에 대한 집착이 갑자기 생겨난 것은 아니다. 한국인 ‘노벨상 후보’에 대해 한국의 언론들이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강점기에도 하루가 다르게 혁명적 변화를 겪고 있던 해외의 과학계 소식이 보도되었고, 노벨상은 그 변화의 대열에서 어느 나라의 누가 앞서 나가고 있는지 보여주는 지표로 여겨졌다. 일본도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1949년 유카와 히데키가 노벨물리학상을 받기 전까지 몇 명의 후보만 물망에 올랐을 뿐 수상과는 인연이 없었다. 김양하를 노벨상 후보로 꼽은 「동아일보」 기사. ‘비타민 E 결정 발견: 세계 학계에 대충동’이라는 제목에 ‘노벨상 후보 김씨’라는 부제목을 달아 소개했다. / 「동아일보」 1939년 1월 10일자 석간 비타민 E와 ‘킴즈 메소드’ 그런데 1939년 1월 10일자 동아일보는 일본이 그토록 바라던 노벨상을 가져올 후보가 다름아닌 한국인이라는 주장을 폈다. 한국인 과학자와 기술자의 활동을 소개하는 연재기사 중 하나에서 “일본 학계에서 ‘노벨상’의 후보자로 추천한다면 단연 우리의 김씨를 꼽지 않을 수 없다는” 자신감 넘치는 논평을 실은 것이다. 지금까지 확인하기로는 이것이 한국 언론이 한국인을 노벨상 후보로 지칭한 가장 이른 예다. 여기서 김씨는 화학자 김양하(1901∼?)를 가리킨다. 그리고 노벨상까지 거론하며 김양하의 주요 업적으로 소개한 ‘킴즈 메소드’, 즉 ‘김씨 방법’이란 그가 고안한 비타민 E의 결정을 분리하는 공정을 일컫는다. 김양하는 함경남도 출신으로, 함흥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길에 올라 도쿄제국대학 화학과에 진학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1929년 일본 과학계의 핵심 기관 중 하나인 이화학연구소(리켄)의 스즈키 연구실에 연구원으로 취직하였다. 스즈키 우메타로(1874∼1943)는 비타민 연구에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1910년 쌀눈 추출물이 각기병을 치료하는 데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유효성분을 분리하여 ‘오리자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벼의 라틴어 학명 ‘오리자 사티바’에서 따온 이름이다). 오리자닌은 서양의 과학자들이 발견한 다른 미량영양소들과 함께 뒷날 ‘비타민’이라는 갈래로 묶이면서 ‘비타민 B’라는 이름을 얻었다. 즉 스즈키는 오늘날의 비타민 B(티아민)를 세계 최초로 발견한 사람 중 하나였으며, 리켄의 스즈키 연구실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비타민 연구집단 중 하나였다. 김양하는 스즈키 연구실의 일원으로 여러 가지 비타민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바야흐로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한 비타민 E의 정체를 밝히고 그 순수한 결정을 분리해 내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1935년 리켄에서 발행하는 학술지에 쌀눈에서 비타민 E 결정을 추출하는 독창적인 방법을 발표했다. 이것이 일본 학계의 인정을 받았다는 소식이 한반도에도 전해졌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한국계 언론들은 1935년 말부터 김양하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동아일보는 김양하의 연구논문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네 번에 걸쳐 연재하기도 했는데, 일간지에서 전문적인 학술논문을 그대로 싣는 것은 드문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동아일보가 김양하의 연구를 매우 높이 평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비타민 연구는 20세기 초반 노벨상이 쏟아져나온 분야다. 서양에서 각종 비타민을 최초로 발견하고 분리해낸 이들은 대부분 노벨상을 받았다. 더욱이 스즈키 우메타로는 비타민 B에 해당하는 물질을 서양보다 먼저 발견하고도 그 연구 결과가 서양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노벨상 공동 수상에서는 빠졌고, 많은 일본인들이 그것을 아쉽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양하가 비타민 연구에서 중요한 성과를 내자 다시 일본이 비타민 연구로 노벨상에 도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일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양하를 ‘노벨상 후보’로 거명한 동아일보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당시 비타민 연구를 둘러싼 세계 생물학계의 경쟁은 너무도 치열하여 김양하의 연구를 넘어서는 연구들이 속속 발표되었다. 비타민의 가짓수도 점점 늘어나면서 한 종류에 대한 연구로 노벨상을 기대하기도 어렵게 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노벨상을 받지는 못했다고 해도, 한국인 과학자가 세계적으로 경쟁이 치열한 첨단분야에서 전세계의 과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는 소식은 매우 반가운 것이었다. 김양하는 이태규나 리승기 등과 함께 ‘과학조선의 파이오니어’로 이름을 높였다. 한편 그동안의 연구업적을 인정받아 1943년 도쿄제국대학에서 농학박사(농화학 전공) 학위를 받기도 했다. 그의 이름은 왜 이리도 낯선가 그러나 김양하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매우 낯설다. 남한에서는 이태규를, 북한에서는 리승기를 화학계의 원조로 기리고 있지만 김양하는 남에서도 북에서도 기억하는 이들이 별로 없다. 물론 그의 과학 연구가 모자라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김양하는 한국 현대사의 굴곡에 가린 수많은 이름들 가운데 하나다. 그는 리켄을 떠나 한반도로 돌아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생화학을 가르치다가 광복을 맞았다. 한국을 대표하는 과학자였으므로 조선학술원의 서기장과 부산수산전문학교의 교장 등 조국 재건을 위한 여러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미 군정의 고등교육 개편안이 서울에서 이른바 ‘국대안 파동’으로 이어지던 와중에, 부산에서도 국립부산대학교 설치에 반대하는 ‘부산 국대안 파동’이 일어났다. 부산수산전문학교는 통·폐합의 대상 중 하나였으므로 김양하는 부산대학교 설립에 반대하는 입장에 섰고, 학교에서 파면되기에 이르렀다. 조선학술원 활동 또한 결과적으로는 김양하의 입지를 좁히고 말았다. 국대안 파동을 계기로 미 군정과 지식인 사회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조선학술원 원장이었던 백남운을 비롯한 학술원 주도 인사들은 하나둘씩 월북길에 오르고 말았다. 김양하는 여운형과도 교분이 깊었고 김성수의 한국민주당에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렸을 정도로 정치적으로는 유연했지만 결국 북으로 떠났다(월북과 납북 여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리고 있다). 그러나 북에서도 그에 대한 기록은 갑자기 끊기고 만다. 1952년 북한 과학원 창립 기록 등에서 김양하의 이름이 보이지만, 1950년대 후반 숙청의 바람이 불면서 김양하의 이름도 북한의 공식 기록에서 사라졌고, 우리는 그의 생몰연도를 물음표로 끝낼 수밖에 없다. 최초로 노벨상을 기대했던 한국인 과학자는 그렇게 희미한 사진만을 남기고 잊혀 갔다. 역사에 대한 기억 대신 노벨상에 대한 아쉬움이 끈질기게 살아남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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