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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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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노벨문학상과 시인] - "촉망되는, 촉망받은" 외교관 시인 댓글:  조회:3085  추천:0  2017-11-02
요르기오스 세페리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요르기오스 세페리스 요르기오스 세페리스(그리스어: Γιώργος Σεφέρης, 1900년 3월 13일[1] ~ 1971년 9월 20일)는 20세기 그리스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다. 그리스의 외교관으로도 활동했으며, 1957년부터 1962년까지 영국 대사를 역임했다. 그리스령였던 소아시아의 스미르나[2]에서 출생하였다. 아테네와 파리 대학을 졸업하고 게오르기우스 2세의 기사 대장이 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 세계 여러 곳으로 돌아다니며 망명 생활을 하였다. 그는 원래의 성씨인 “세페리아데스”를 변현한 “세페리스”라는 필명으로 활약하여, 1960년에 윌리엄 포일 상을 받았다. 1963년, 헬레니즘 문화 세계에 대한 깊은 사랑에서 우러나온 그의 뛰어난 서정적 작품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작품으로 《분기점》, 《신화사》, 《항해 일지》, 《개똥지빠귀》와 시집 《시선집》 등이 있다. 각주[편집] 이동↑ 당시 오스만 제국의 달력인 율리우스력으로는 2월 29일이다. 이동↑ 지금은 터키령인 이즈미르이다.   출생 1900. 3. 13, 아나톨리아 스미르나 사망 1971. 9. 20, 아테네 국적 그리스 요약 요르기오스 세페리스 그리스 시인·수필가·외교관. (영). George Seferis. Yeoryios Stilianou Sepheriades라고도 씀. 필명은 Giorgios(Yiorgos), Seferis.   196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파리에서 법학을 공부한 뒤 그리스 외교관이 되어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런던과 알바니아에서 일했으며, 대전중에는 망명해 그리스 자유정부와 함께 일했다. 전쟁 뒤 레바논·시리아·요르단·이라크에서 근무했고 영국 주재 그리스 대사를 지냈다(1957~62). 첫 시집 〈전환점 I strofí〉(1931)이 출간되자 즉시 '장래가 촉망되는 시인'으로 칭송받았고, 이어 〈물통 I stérna〉(1932), 〈신화의 역사 Mithistórima〉(1935), 〈항해일지 I Imerolóyion katastrómatos I〉(1940), 〈연습장 Tetrádhio yimnasmáton〉(1940), 〈시 Poiímata〉(1940), 〈항해일지 Ⅱ〉(1945), 장시 〈지빠귀 Kíkhli〉(1947), 〈시 1924~46〉(1950)·〈항해일지 Ⅲ〉(1955) 등을 펴냈다. 그의 시선집은 널리 번역되었으며, 가장 훌륭한 영문판은 에드먼드 킬리와 필립 셰라드가 펴낸 〈조지 세페리스 : 시선집 1924~1955 George Seferis : Collected Poems 1924~1955〉(1969)이다. 세페리아데스는 시를 그리스어로 번역하기도 하고 수필도 썼는데, 주요수필작품으로 〈도키메스 Dhokimés〉(1944)·〈에로토크리토스 Erotókritos〉(1946)가 있다. 1947년에는 아테네 아카데미로부터 명예시인으로 추대되었다. 그리스 현대문학에 상징주의를 소개한 '30년대 세대' 시인 중 가장 뛰어난 그리스 시인으로, 세련된 서정성과 신선한 어법은 그리스 시단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으며 그의 작품에는 그리스인뿐만 아니라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비극적 곤경에 대한 감정의 깊이가 잘 나타나 있다.
5    [노벨문학상과 시인] - 고향을 "서사적인 힘"으로 노래한 시인 댓글:  조회:3066  추천:0  2017-11-02
  출생 1892. 10. 10, 보스니아 트라브니크 근처 돌라츠 사망 1975. 3. 13, 베오그라드 국적 세르보크로아티아 요약 이보 안드리치 세르보크로아티아 시인 .소설가·단편작가.   1961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자그레브·크라쿠프·빈·그라츠 등지에서 공부했으며 일찍부터 산문작가와 시인으로서 잠재력을 인정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민족주의 정치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오스트리아-헝가리 당국에 의해 억류당한 기간에 쓴 명상적인 서정 산문 〈엑스 폰토 Ex Ponto〉(1918)로 명성을 얻었고 1920년부터 단편집을 계속 출판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유고슬라비아 외무부에 들어간 그는 업무차 로마·부쿠레슈티·마드리드·제네바·베를린을 돌아다녔지만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주제와 심리학적인 연구 대상이 된 곳은 다양한 민족들이 모여 사는 그의 고향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쓴 3편의 장편소설 중 〈트라브니치크 연대기 Travnička hronika〉(1945)·〈드리나 강의 다리 Na Drini ćuprija〉(1945)는 보스니아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안드리치의 작품은 그의 결정론적 철학과 동정심을 보여주며, 매우 아름답고 정결한 언어를 사용해 객관적이며 침착한 어조로 씌어졌다. 노벨상 위원회는 〈드리나 강의 다리〉에서 나타난 그의 '서사적인 힘'을 특히 높이 평가했다. ================================ 이보 안드리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보 안드리치 이보 안드리치(Ivo Andrić, 1892년 10월 10일 ~ 1975년 3월 13일)은 보스니아의 문학가이다. 생애[편집] 보스니아의 작은 마을 트라브니크에서 크로아티아인 아버지 안툰과 어머니 카타리나 사이에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에서 '이반'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태어난 그는 '이보'라는 이름으로 줄여서 불리기도 했다. 그가 두 살이 채 되기도 전에 아버지는 세상을 떴고 생계가 어려웠던 어머니는 어린 이반을 비셰그라드의 고모에게 맡긴다. 고모 밑에서 자란 안드리치는 엄격한 교육과 자상한 보살핌을 받았으나 왠지 모를 불안과 고독으로 어려서부터 힘겨워했다. 안드리치는 당시 보스니아 최고의 명문 고등학교인 벨리카 김나지야에 진학하면서 사라예보에서 지내게 된다. 이때 이웃에 살고 있던 예브게니야를 만나게 되고 그녀가 죽기 전까지 서신을 주고받으며 정서적 안정을 찾았다. 사라예보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는 혁명단체에 들어갔다. 이 단체의 조직원들은 남슬라브의 독립지원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보스니아를 해방시키기 위해 투쟁했다.(‘청년 보스니아 운동’)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그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 때문에 오스트리아에 위치한 수용소에 있기도 했다. 세계대전 이후 형성된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왕국에서 그는 민간 공무원으로 경력을 쌓았다. 처음에는 종교 내각으로, 다음에는 외교관이 되었다. 자신이 크로아티아 혈통임에도 불구하고, 크로아티아 분리주의자에게 부정적으로 대했다. 그는 유고슬라비아가 히틀러에게 점령당한 1941년까지 독일의 대사였다. 전쟁기간동안 그는 점령당한 베오그라드에서 살았고, 정치적 행동과 참여를 하지 않았다. 바로 이 시간에 그는 그의 가장 유명한 소설들을 썼다. 그것은 1945년에 출판되었다. 전쟁 후 그는 공산당에서 기념적인 직위를 갖게 되었고, 특히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최고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1968년 아내의 죽음 후에 점차적으로 정치에서 멀어졌다. 이보 안드리치는 외교관으로 크게 성공했다. 1920년에 그는 바티칸 대사관에서 일했고, 그 후에는 부크레슈티, 트리에스트, 그라츠 영사관에서 일했다. 1927년에는 마르세이유, 파리, 마드리드 영사관에서 일했다. 1930년부터 1933년, 그는 제네바에 위치한 국제연맹 유고슬라비아왕국 대표위원단으로 활동했고 베를린에서는 유고슬라비아정부 특명대사로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후 아보 안드리치는 간부와의 의견불일치로 퇴직하였고 베오그라드로 돌아왔다. 바로 이 시기에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게 된 운명과도 같은 작품들을 썼다. 1954년에 이보 안드리치는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에 입당했고 유고슬라비아 작가연맹 위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그 해에 그는 세르보크로아티아 문어 통일에 관한 노비사드 조약에 처음으로 서명하였다. 1961년 이보 안드리치는 노벨문학상을 받았고, 1975년 베오그라드에서 사망했다. 작품세계[편집] 19세가 되던 1911년 이보 안드리치는 사라예보의 월간 문학지 에 그의 처녀시를 발표했고, 26세가 되던 1918년에는 산문시집 ≪흑해로부터≫를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하게 된다. 2년 뒤인 1920년 ≪불안≫이라는 두 번째 시집을 내기는 했지만 더 이상 시는 쓰지 않았다. 같은 해 단편 을 발표했다. 안드리치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으며 노벨 문학상을 받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소설 는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접경에 위치한 작은 도시 비셰그라드와 이 도시를 가로질러 흐르고 있는 드리나 강 위에 놓인 다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400여 년의 인간사를 다루고 있다. 4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수많은 주인공들은 지나가고 없지만 비셰그라드와 드리나 강 위의 다리만은 한 제국의 흥망성쇠를 목도하며 존재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같은 해 와 를 발표한다. 그 외에도 중편 , , , , ,
4    [그것이 알고싶다] - 성화봉 불 강풍 폭설에도?... 댓글:  조회:3390  추천:0  2017-11-02
성화봉, 강풍 폭설에도 꺼지지 않는 이유? (ZOGLO) 2017년11월2일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성화 불꽃이 담긴 두 개의 안전램프가 31일(한국시간) 성화 인수단이 탑승한 전용기 이코노미석에 놓여 있다. 안전램프를 이코노미석에 놓을지 아니면 비즈니스석에 놓을지 논의가 있었지만 평창올림픽조직위원회는 ‘모두를 빛나게 하는 불꽃’이라는 성화봉송 주제에 맞게 특별대우를 하지 않기로 했다. 평창올림픽조직위 제공 ‘평창의 불꽃을 지켜라.’  1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한국에 도착한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성화는 ‘귀빈’ 대접을 받는다. 지난 24일(한국시간) 그리스 고대 도시 올림피아에서 채화된 성화는 그리스에서 505명에 의해 2129㎞를 이동한 뒤 31일 아테네의 파나티나이코 경기장에서 평창 대표단에 넘겨졌다.  한국으로 향하는 전세기에서부터 성화는 특별 경호를 받았다. 전세기 안에서 성화 불꽃은 강화유리로 제작된 2개의 안전램프에 옮겨졌다. 안전램프에 300㎖의 파라핀 오일을 채우면 최대 52시간 동안 불꽃을 유지할 수 있다. 높이 483㎜, 지름 140㎜, 무게 2.87㎏의 안전램프는 투명한 항공 케이스 안에 보관돼 이코노미석에 자리했다. 케이스는 4자리 중 가운데 2자리를 차지했는데, 흔들림을 방지하기 위해 안전벨트가 채워졌다. 3인 1조로 구성된 성화 인수단은 비행 내내 30분씩 돌아가며 불꽃을 감시했다. 이런 운송 방식은 비행기로 인천에서 제주, 제주에서 부산으로 이동할 때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성화가 이날부터 2018㎞를 달리는 대장정에 돌입하자 ‘혹시 성화가 봉송 도중 꺼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실제로 역대 올림픽 성화봉송 과정에서 각종 사고로 성화가 꺼지는 사태가 종종 발생했다. 2008 베이징 하계올림픽 성화봉송 때엔 몰려든 인파 때문에 성화를 일부러 끄는 상황이 벌어졌다. 2013년 10월엔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궁 내에서 2014 소치 동계올림픽 성화봉송 행사 도중 강풍이 불어 성화가 꺼지자 연방경호국 요원이 라이터로 불을 붙이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장면은 고스란히 TV로 생중계됐다. 미국 스포츠 전문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SI)에 따르면 2014 소치동계올림픽 때 성화가 봉송 도중 꺼진 횟수가 44회에 달했다. 평창올림픽조직위원회는 성화가 꺼지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은 역시 성화봉이다. 성화봉은 겨울철 강풍과 폭설 등 날씨를 고려해 극한 환경에서도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제작됐다. 성화 주자 곁에는 항상 성화봉 전문가가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면서 성화봉의 상태를 주시한다. 성화가 꺼지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봉송 대열의 뒤에는 미니버스가 예비용 불꽃 램프를 싣고 함께 이동한다. 성화봉송 주자는 7500명이지만 조직위는 고장 등에 대비해 8540개의 성화봉을 준비했다. ///국민일보 =============== 조회:1499 ]     2인용 RX1E-A형,-선양항공·우주비행대학(瀋陽航空航天大學)...
3    [그것이 알고싶다] - 일본 녀고생들은 윤동주를 어떻게 볼가?... 댓글:  조회:1853  추천:0  2017-11-02
일본 녀고생들 마음속의 윤동주 (ZOGLO) 2017년11월2일  10월 31일 일본 키치죠녀자고등학교(吉祥女子高等学校)의 교론(教論)이며 국어교원인 하기와라 시게루(萩原 茂)선생의 강연을 듣게 되였다. 일본의 대표적인 녀시인 이바라기 노리코(茨城のり子)씨가 1986년에「한글려행」(ハングルへの旅)이라는 책에서 수상록 형식으로 윤동주에 대한 글을 썼다. 당시 치쿠마서점(筑摩書房) 현대문교과서 편집부가 윤동주시인을 널리 알릴 필요성을 느끼고 1990년 고중용 교과서에 이바라기 노리코씨의 글을 교재로 싣게 되였다. 그 때 교과서검정을 통과하기 위한 편집부의 노력은 대단한 것이였다고 전해진다. 강연에서 480페지나 되는 국어교과서의 많은 작품을 두고 교원들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것이 키치죠녀자고등학교의 교학방침이라는것도 처음 들었다. 이날 강연을 통해 2016년 5월, 윤동주의 시 , , , 를 선택하여 6시간에 걸쳐 수업에 도입한 하기와라선생의 교수경과를 들었고 마지막에 3명 녀고중학생들의 감상발표를 듣게 되였다. 녀고생들의 감상발표는 생각보다 너무 인상적이여서 여기에 옮겨보기로 한다. *력사학과에서 배우기보다 국어학과에서 시를 통하여 직접적인 감정이나 상처를 느끼게 되였다. 너무 아름다운 시를 쓰는 시인 윤동주가 오늘에 시를 쓸 수 있었으면 어떤 시가 태여 났을가… 너무 아깝다는 느낌이 든다. 강연회에서 감상발표를 하고 있는 일본 녀고생들 에서 “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사람이 되지” 이 시구를 읽으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윤동주는 동생 윤일주와 열살차이라고 들었다. 시를 쓴 시기에 열살도 채 안되였을 동생이 어떤 사람으로 되려 했을가. 사람, 나라도 이름도 가진 그런 사람이 되겠다는 슬픈 아이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나라와 나라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차별을 없앨 수는 없을가?! *독일과 유태인의 력사를 돌이켜보면서 생각했다. 윤동주가 유태인으로 태여나고 일본이 독일이였다면 오늘 어떻게 됐을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윤동주시인을 알고 우리 기억 속에 담는 일이다. *를 읽고 윤동주의 처지를 생각해보았다. 언어를 빼앗긴 력사를 시라는 형식을 통해 자기 언어로 남긴 윤동주는 대단하다. 만일 내가 그런 차별을 받으며 그 자리에 있었다면 절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윤동주는 조선인으로서 시인으로서의 사명감을 지니고 시라는 형식으로 시대에 저항했다. 윤동주의 분노의 상대가 우리 나라라는 데 대해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서글픈 마음이다. *의 “시가 이렇게 쉽게 씌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는 시구가 충격적이였다. 어두운 감정을 표현하고 나서 더욱 어두워졌을 윤동주의 감정세계와 식민지하의 조선인의 분개와 절망감이 무력함으로 표현되였을 것이다. 윤동주에게 있어서 시는 단지 시가 아니라 저항의 무기였을 것이다. 이날, 하기와라선생의 말도 인상적이였다. 학생들과의 만남이 우연인 것처럼 교재와의 만남도 우연이다. 모든 작품을 다 취급할 수 없는 현실하에서 37년간의 교학인생중 처음으로 윤동주의 작품을 취급하게 되였다. 학생들의 감상문은 하나하나 모두가 자기의 감정을 표달한 것으로서 가슴을 울리는 것이 많았다. 학생들의 감상을 들으면서 윤동주를 취급한 것이 너무 잘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교육의 힘이 어디까지인 줄은 확인할 수 없지만, 또 하나의 교재가 학생들한테 어느 정도 영향을 줄지는 모르지만 민감한 문제인 이 교재를 학생들 앞에 정면적으로 부딪치도록 시도한 것은 한 교원으로서 영광스러운 과정이였다. 한시간이 좀 넘는 강연을 들으려고 신칸센을 타고 온 사람도 있었다. 윤동주의 시를 사랑하는 유명한 영화배우도 있었다. 좁은 공간에 모인 30여명의 일본인들을 보면서 문뜩 이런 생각을 하게 되였다. 고중 2학년, 10년이 지나면 세상을 짊어지고 갈 일본의 후세대들… 너무 장하고 이쁘다. 그리고 윤동주의 젊음과 순결의 시혼은 오래오래 이곳에 자리잡고 있으리라. /길림신문 리홍매 일본특파원
2    [쉼터] - 세상은 넓디넓고 세상은 불공평하다... 댓글:  조회:1132  추천:0  2017-11-02
                        사과의 고향이라 불릴만큼 인기 높은 섬서 례천현(礼泉)에서ㅡ       료녕성 단동 압록강에서ㅡ =====================덤으로 더...(필자 주; 쟁명?...)  중국조선족음악연구의 새로운 도약을 위하여                              /남희철     연변동북아예술연구회 김성희 회장을 비롯한 여러 회원들이 본 세미나를 조직해준데 대해 충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리고 바쁜 와중에도 론문을 써주신 여러 교수님께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드린다. 아울러 학술세미나에 참석해주신 여러 래빈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나는 이번 모임이 나의 음악연구 35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덕담의 자리가 아니라 중국조선족음악연구의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 조선족의 력사상한선을 “100여년”으로 보는 전통의 학설과 “360여년”으로 보는 새로운 견해가 팽배하게 맞서고 있었다. “100여년 설”은 19세기중엽이후 특히 1860년~1870년 사이에 혹심한 자연재해로 조선북부의 가난한 농민들이 중국경내에 범월잠입(犯越潛入)하던 때를 이주시기의 상한선으로 본다. 반면에 “360여년 설”은 항금원명(抗金援明)이 실패한 1620년에 조선군대 수천명이 중국에 억류된 때를 이주시기의 상한선으로 보고 있다.    결과적으로 그번 론쟁은 “항금원명”에 동원되여 온 사람들의 후손이 료녕성과 하북성에 살고 있다는 것과 후손들의 일부가 호적을 조선족으로 정정했다는 것을 근거로 “360여년 설”이 승리하게 된다. 불변의 사실이 웅변을 이긴 것이다.   약10년 전, 화룡시에서 “진달래축제”를 만들기 위한 “전문가”들의 의견수렴이 있었다. 그 번 회의에서 내가 “진달래는 자치주주화이기에 화룡시에서 진달래축제를 하는 것은 적절치 못한 것 같다. 화룡시에서 축제를 만들자면 화룡시 만의 무엇을 브랜드로 육성해야할 것이다. 화룡시에는 발해의 ‘정효공주묘‘가 있다. 이것은 남이 가져가지 못할 문화유산이다. 이것을 리용해서 정효공주미인선발대회, 정효공주행차 등을 만드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고 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발해”의 “발”자도 꺼내지 못하는 판국이라 나의 건의를 받아들이기 만무했다.  지난해 나는 ⟪도라지음악의 력사상한선과 변천과정연구⟫라는 글을 써서 국내에 투고한 적이 있다. 출판부문의 이야기로는 “‘고구려’자만 들어가면 상급의 허가가 있어야하기에 조만해서 출판하지 않는다”며 거절하는 것이였다. 하는 수없이 이글은 『한국음악사학보』에 발표하게 되었다.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의 령토가 현재의 중국에 일부분 또는 전체가 속해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것을 현재 중국의 역사에 포함시키는 것이 당연지사일 것이고, 이들 고대 지역(또는 나라)들에 우리민족의 선인들이 산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을 중국조선족의 력사범주에 포함시키는 것 또한 당연지사일 것이다.   중국조선족은 과경민족으로 조상들이 살다간 옛 고향에 다시 돌아와서 살게 된 것이다. 그들의 선인들은 현재 중국에 속해있는 일부분 또는 전체의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에서 살다가 후기신라와 후삼국을 거쳐 고려인으로 되였으며, 1619년에 다시 중국에 와서 오늘날의 중국조선족으로 살고 있다. 때문에 중국조선족의 력사는 고대사와 근대(현대)사로 구분됨이 마땅할 것이고, 중국 땅에 속한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에 대한 연구 역시 조선족의 참여가 바람직하며, 이들 지역(또는 나라)의 력사·문화도 조선족이 -다른 민족과 함께- 이어받아야 할 것이다.    내가 『조선민족전통음악사』를 강의하면서 ‘력사공유’란 말을 늘 사용해왔다. 고구려는 조선민족의 선인과 다른 민족의 선인이 혼재한 지역(또는 국가)이고, 고구려의 멸망이 당·라 련합작전에 의한 것이며, 고구려가 패망한 후 령토·인구·문화는 2분되여 당나라와 신라가 각각 차지하게 되었다. 때문에 고구려라는 지역(또는 나라)의 력사를 오늘의 조선사(또는 한국사)에서 거론될 뿐만 아니라 중국사에서도 거론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하물며 중국조선족의 선인이 현재의 중국 땅에 살았고 중국조선족 또한 중국국민으로 당당하게 살고 있는 데야 뭘 더 말하겠는가?    중국조선족의 음악사만보더라도 고대에로 시야를 넓힌다면 조선음악사(또는 한국음악사)에서 연구되어온 고조선·고구려·발해음악뿐만 아니라 중국내지로 전파된 고구려·발해음악, 일본에로 전파된 고구려·발해음악이 새롭게 안겨올 것이다.    아시다시피 조선음악사(또는 한국음악사)에서 악곡을 기록한 문헌은 중세조선의 세종대왕 때인 1447년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때문에 기원전37년~668년의 고구려악곡과 698년~926년의 발해악곡을 기록한 문헌은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 1171년에 일본의 후지와라 노 모로나가(藤原師長)가 편찬한 『인지요록』에 적어도 17수에 달하는 고구려악곡과 발해악곡이 있다. 이 《인지요록》에 대해서는 일본의 음악학자 하야시겐조(林謙三), 영국의 음악학자 엘 픽컨(LㆍPicken), 중국의 음악학자 엽동(葉棟)·김건민(金建民)의 연구 성과가 있다. 우리가 만약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음악을 전면적으로 조사한다면 관련 문헌이 어디 이뿐이겠는가.    지난 세기 80년대에 사학계에서 중국조선족의 력사상한선을 100여년으로 보는 것과 360여년으로 보는 것이 첨예하게 대립되었듯이 21세기 10년대에 400년 설과 수천 년 설이 격돌해야할 필요성이 있어 보이고 특히 중국조선족음악사학계에서도 이와 같은 논의가 충분히 진행되어야한다고 본다.  이번 학술세미나가 진정으로 중국조선족음악연구의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2017.10.10 =================== 개구리 증후군 김인섭 오랜간만에 친구들과 마주앉아 말보따리를 풀어 제끼고 즐거운 한 시각을 보낼 수 있었다.   그 와중에 한 친구가 자기 집 아이는 조선족 소학교를 다니는데 초중부턴 타민족 학교에 전학시켜 벼슬 공부를 시킨다며 ‘난쟁이 키 자랑’하듯 으스댔다.조선어는 소학교만 나와도 글 보고 소통하는 데 넉넉하다는  리유를 들먹들먹한다.중국인데 한어를 잘하면 족하고 민족어는 떠듬거려도 지장이 없고 한국에 가서도 밥벌이엔 부족이 없다며 주어섬겼다.그까짓 조선어라며 비죽거리는 모습에 기분이 말째지며 ‘삶겨지는 개구리’를 련상하였다.   지나간 19세기 말, 서방 과학자들의 실험 결과이다.개구리를 뜨거운 물에 넣으면 순간에 뛰쳐나오지만 그의 최적온도인 15℃에 맞추고 서서히 가온하니 느긋이 잠겼다가 뜨거움을 느낄 때는 신경이 마비되여 도약력을 잃고 죽으러 가더라는 것이다.그들은 이 현상을 ‘개구리 증후군’으로 작명하였고 그후 점진적인 변화에 무감각하다 위기가 오면 ‘쪽도 못 쓰고’ 령락하는 현상을 설명하는 비유어로 리용되었다.이를 연원(渊源)으로 변화에 둔감한 무신경이면 ‘변화무지 증후군’, 현실에 안주한 무사태평이면 ‘비전(希望)상실 증후군’이란 신조어가 파생되기도 하였다.   지난 세기 90년대 초,개혁개방이 급물살을 탈 때 조선족은 자기의 문화 특히는 이중언어에 힘입어 궁핍에서 신속히 해탈하고 민족사회 재건의 경제 및 사회적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그래도 그 당시는 그 조선어 수준에다 힘만 있다면 밥벌이는 넉넉했고 상당한 적금도 이룰 수 있었다.다름이 아닌 민족문화가 불시에 괴력을 발휘하여 조선족을 중국의 민족 속에서 선두주자 자리에 밀어올린 것이다.이 사실은 문화 저력의 거대성을 립증하였다.이것은 또 그 차원의 문화가 그 력사에 적응되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 세상이 달라지고 있다.지난해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한국의 바둑 9단 이세돌과 미국 구글그룹이 개발한 인공지능프로그램(人工智能程序)인 알파고의 바둑 대결에서 이세돌의 참패는 인류에게 새 시대의 도래를 선언하였다.인간은 사상혁명을 앞세우고 미래 수요에 높낮이를 맞추는 고민을 해야한다는 계시이기도 하다.지능사회가 돌격해 오는 때 미래 인재의 핵심적 력량은 인간만이 가진 인본주의 정신과 광활한 정보력으로 타인과 심각한 교류를 진행하며 자신의 활동 공간을 넓혀가는 것이라고 한다.여기의 핵심은 더 고차원적인 이중언어 혹은 다중언어 능력이다.그 친구의 뜻대로 간다면 그 때의 그 아이는 마주해야 할 경쟁에서 사대육신(四大肉身)의 어느 쪽에 기능불구나 부자유가 발생할 것이 틀림없다. 우리나라도 지능화 발전의 전략 경보를 울리며 새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그런데 친구의 말처럼 자식을 가르친다면 변천을 따르기 커녕 되려 역행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상승하는 온도를 느끼지 못한 것일가.오늘의 지식이 10년 간격을 두고 상당 부분이 무용물이 되는데 말이다.주입식 교육과 세간의 무사주의(无事主义)에 푹 젖은 ‘온수 속의 개구리’가 아닌가 싱거운 걱정이 앞선다.   기성세대는 후대에게 사유재산을 만들어 주기가 급급해도 더 큰 가치는 미래의 청사진을 그리는 것이다.옛날 어느 현자가 아들에게 고기를 주지 않고 그물짜기를 가르쳐 부자로 키웠다는 이야기는 명기할 귀감이다.포식한 배를 어루쓸며 매일매일을 까먹듯 하지말고 간혹 머리를 돌려 주변의 변화를 살피는 게 시대적 삶이겠다.갑자기 뭔가 느껴지는 때면 길몽(吉梦)도 대몽(大梦)도 죄다 탁발승 나무아미타불이 되고 만다.   내 친구가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은 뛰어도 늦다는 ‘토끼와 거북이 경주’의 교훈을 살리고 ‘삶겨진 개구리’가 되지 말기를 바란다.고부가치 자본인 민족문화에 눈을 돌리고 아이의 이중언어를 완벽한 원어민 수준에 인상하는 층계를 만들어 전승시켜야 한다.그리고 민족문화와 이중언어가 지능사회를 살아가는 활주로라는 귓띔을 귓등으로라도 들어줬으면 좋겠다. ///연변일보 2017-10-25   ============================== 덤으로 더...     보물지도              /하지연     시방까지 살아오면서 남자헌테 한 번도 펜지 한나 받아 본적이 없었는디 오늘 첨으로 남자헌테 펜지 한나 받았당께 그것도 막내 사우헌테 말이여 오늘이 내 생일인디 생일상도 걸판지게 차려주고 펜지꺼지 주더라고 오래 상게 별 것을 다 받아보구 너무 기분이 좋더라고 머라고 썼냐허면 딸 낳아주셔서 고맙고 앞으로 어무이 잘모실텡게 자석처럼 생각 혀고 맘 편하게 같이 살아요 그렇게 썼더라고 우리 사우 생긴 것도 잘생겼지만 맘이 비단결이랑께 넘들은 사우 어려워 어떻게 사냐고 허지만 자석보다 더 정이가고 편하당께라 그 펜지 넘 몰래 얼매나 읽었는지 몰러 하도 펴고 접고 혀서 접힌 곳이 헤질 정도랑께 어디가든 자랑 많이 헌당게 우리 사우가 생일날 펜지 줬다고 그럼 그런 사우도 다 있는가벼잉 칭찬이 자자혀불 구만이라 오늘도 꺼내 읽고 곱게 접어 조만치 속에 넣면서 사우 감사혀 속으로 한 마디 헌당께라
1    시지기는 시지기인가 시지기이지 그리고 또 시지기이지... 댓글:  조회:1283  추천:0  2017-11-02
                                                                                                                                                                                                                                                                                                                                                                                                                                                                                                                                                                                                                                                                                                                                                                                                                                                                                                                                             평창올림픽 성화 불씨... 2017년 11월 23일 제7회 중국 청도 이육사문학제가 청도 대원국제학교에서 개최됐다.(안동시) 해란강문학상에 김승종, 김일량, 정희경 CJ문학상에 김경애 2013년 연변일보 CJ문학상, 해란강문학상, CJ문학상, 시상식이 24일 연길시백산호텔에서 있었다. 연변일보에서 주최하고 한국CJ그룹 중국본사의 후원으로 21회째 열리게 된 2013년 연변일보 해란강문학상과 CJ문학상은 2013년 한해동안 연변일보에 실린 문학작품가운데서 엄격한 심사를 거쳐 최종 4편(수)의 작품을 수상작으로 선정하였다. 김승종의 담시 "개구쟁이들에게 보내는 편지", 김일량의 영물시 "느릅나무"(외2수), 정희경의 수필 "한번쯤은 사랑했었다"를 "해란강문학상" 수상작으로, 김경애의 "무대우의 거대 초불"을 "CJ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하였다. 연변대학 김호웅교수의 수상작 심사평을 옮긴다. 김승종의 "개구쟁이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소꿉놀이와 숨박꼭질 대신에 진종일 컴퓨터 게임에 빠져있고 , 보리떡 대신에 이름 모를 인스텐트 식품만 먹고있는 요즘 "개구쟁이공화국"의 아이들을 근심하면서 여전히 말이며 양떼며 락타들과 함께 뛰놀고 있는내몽골초원의 아이들을 동경하고 있다고 평하고 있다. 시적화자-"텁석부리 아저씨"의 인정미와 진정성을 통해 현실비판을 완곡적으로 시도한다. 김승종의 시는 다년간의 시적 실험을 거쳐 난해하고 난삽한 시를 지양하고 구수하고 친근한 담시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평했다. 김일량은 조선족 시단의 대표적인 농민시인으로서 주옥같은 영물시들을 선보이고 있다. 그의 시 "느릅나무"를 보면 시인의 철학과 인생관을 느릅나무라는 객관적상관물에 대상화하는 재치가 범상치 않다. 느릅나무는 연변시골에서 쉽게 볼수 있는 나무다. 하지만 "이름처럼 성품이 느릿한 나무"요, 거친 바람을 머금었다가 그것을 순화시켜 "하늘의 소리"로 승화시키는 나무이며 휘여질지언정 부러지지 않는 나무요, 높은 곳과 화려함을 탐내지 않고 자기 식대로 살아가는 "고집쟁이 나무"란다.시골에 파묻혀 아름다운 시편들을 펴내고 있는 시인 자신의 자화상이요, 굽은 나무 선산을 지킨다고 바람세찬 연변땅을 지켜 끈질기게 살아가는 우리 초민백성의 모습이 아닐수 없다. 정희경의 수필 "한번쯤은 사랑했다"는 연변대학 조문학부 학부생의 수필이다. 이 작품은 은행나무 락엽과의 대화를 통해 나젊은 녀대생의 여린 감수성과 깊은 깨달음을 생동하게 펼쳐보았다. 자아중심적이고 리기적인 생활을 해오던 작자는 어느날 자신의 발에 밟히는 은행나무 락엽들을 두고 깊은 사색의 우물을 길어올린다. 은행나무 락엽들을 두고 깊은 사색의 우물을 길어올린다. 은행나무 락엽들은 벌레들이 갉아먹고 땡볕과 비바람에 이기지 못해 볼품없는 모습으로 길에 떨어지지만 한때는 푸르싱싱하게 그늘이 되어 한번쯤은 남을 사랑했다고 자부하는것 같았다. 참으로 젊은 감수성과 상상력이 빚어낸 동화적인 수필이라 하겠다. "교정의 종소리"와 같은 아름다운 노래들을 작곡해 연변인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중년 녀성작곡가 김경애씨는 "무대우의 거대 초불"로 심사위원들의 각별한 주목을 받게 되였다. 이 수필은 청력을 상실한 후 지었다는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환희의 송가"를 련상케 한다. 작자는 하나의 미약한 존재가 집단속에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무궁무진한 힘과 숭고한 세계를 만들어낼수 있다는 철리를 터득하게 된다. 이 작품은 서사수필로서 생활적계기를 통해 작자의 인식변화과정을 자연스럽게 펼쳐보였고 하나의 목표를 위한 인간들의 만남과 화합이 얼마나 소중한것인가를 설교를 아니라 생동하는 인물과 장면으로 보여주었다. 연변작가협회 창작련락부 우광훈 부장은 축사에서 "문학잡지도 아닌 신문에서 이렇게 야심찬 문학농사를 짓고 연변문단의 작가들과 기자들간의 화합의 장, 문학교류 실천의 장을 마련하다는 자체에 큰 문학적인 비약과 력동성이 내재되여 있다. 연변일보 해란강문학상과 씨제이문학상은 연변문단의 최장수 문학상으로서 몇십년래 연변지역은 물론 중국전역에 분포한 우리 민족 구성원들의 문학발전을 주도해온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리고 기성작가들의 문학터전이고 문학신인들을 양성하는 주요 활동진지로 언녕부터 각광을 받았고 큰 성과를 올렸다. 이런 성과는 해란강문학상,씨제이문학상을 이끌어오는 연변일보사 조선문판 여러기자와 연변일보 문화부의 노력이다"라고 말했다.  이날 시상식에는 연변일보사 책임자들을 비롯한 연변지역의 언론계, 문화단체에서 온 100여명 문인,언론인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조글로미디어 김성화기자 [출처] 김승종 등 제21회 연변일보 해란강문학상 수상 - 모이자 뉴스(2014.1.24.)   ===========================///  2014년 1월 24일,연변일보사에서 주최하고 한국CJ그룹 중국본사가 후원한 제21회 “해란강문학상,CJ문학상 시상식”이 연변내의 문인,언론인 1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연길시 백산호텔에서 있었다.   이번에 김승종의 담시 “개구쟁이들에게 보내는 편지”,김일량의 영물시 “느릅나무”(외 2수)정희경의 수필 “한번쯤은 사랑했다”가 “해란강문학상”수상작으로 선정되었고 김경애의 “무대우의 거대 초불”이 CJ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왼쪽 두번째로 부터 정희경 김승종 김일량 수상자.   김호웅 연변대학 교수는 심사평에서 “김승종의 시는 다년간의 시적 실험을 거쳐 난해하고 난삽한 시를 지양하고 구수하고 친근한 담시의 형시의 형식을 취했다”고 했고 김일량은 대표적인 농민시인으로서 산천초목을 비롯한 우주의 삼라만상을 소재로 주옥같은 영물시들을 선보였다”고 했으며 정희경은 연변대학 학부생으로서 은행나무 낙엽과의 대화를 통해 나젊은 여대생의 여린 감수성과 깊은 깨달음을 수필로 생동하게 펼쳐보였다”고 했으며 “김경애의 작품은 서사수필로서 생활적 계기를 통해 작자의 인식변화과정을 자연스럽게 펼쳐보였다”고 했다.     우광훈 연변작가협회 창장연락부 부장은 축사에서 “연변일보 해란강문학상과 CJ문학상은 연변문단의 최장수 문학상으로서 몇십년래 연변지역은 물론 중국전역의 조선족 문인들에게 문학터전은 물론, 문학신인들을 양성하는 주요 활동진지로 각광을 받았다”고 했다.   김경애 수상자(가운데)   김천 연변일보사 부사장은 축사에서 “1986년부터 해란강문학상을 설치했고 1993년부터는 CJ그룹 중국본사의 후원이 있었기에 21회까지 이 두 문학상을 지속적으로 펼치게 되었다”고 했다.     /출처 : 흑룡강신문 [출처] 연변일보 “해란강문학상,CJ문학상 시상식” - 모이자 커뮤니티     ======================///   안동 예미정 중국동포 직원 김승종씨 '정지용 문학상' 수상   (대구ㆍ경북=뉴스1) 피재윤 기자 | 2016-08-30    김승종씨 © News1 경북 안동종가음식체험관 예미정에 근무하는 중국 조선족 동포 김승종씨(53)가 제20회 정지용문학상을 수상한다. 충북 옥천문화원은 '우물 일곱 개였던 마을,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라는 김씨의 시를 수상작으로 선정했다고 30일 밝혔다. 김씨의 작품은 고향의 어머니와 친구들이 작품 속에서 시(詩)적 화자(話者)로 등장하면서 통속적인 언어의 맛과 어울려 하나의 형이상학적인 풍경을 이룬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씨는 연변대 사범대학 출신으로 용정과 연변 일원에서 교사와 농촌상업은행원으로 근무하다 2010년 한국으로 들어와 안동 예미정에서 근무하고 있다. 현재 시문학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고향인 중국 화룡시 화룡작가협회에서 주석을 지냈으며 연변작가협회 인터넷문학상과 연변일보 해란강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정지용문학상은 옥천문화원이 중국 연변작가협회와 함께 조선족 교포 문학인들의 창작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매년 최우수작을 선정해 시상하고 있다. 김씨는 "이육사 시인의 고향인 한국 안동 땅에서 고향 연변과 어머니를 그리며 시를 지을 수 있었다는 자체에 감사한다“며 ”고향에 돌아가면 다시 한국에서 우정을 나눈 친구들을 그리며 시를 써 볼 생각이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그는 6년 전 중국 연변에서 열린 이육사문학제를 통해 안동과 인연을 맺었다. 시상식은 오는 9월2일 중국 연변대 예술학원에서 열릴 예정이다.  =======================/// 등록 2016-08-23 16:25:24  |  수정 2016-12-28 17:32:51   【옥천=뉴시스】이성기 기자 = 충북 옥천문화원은 중국 연변작가협회와 함께 주관하는 20회 연변 지용문학상에 김승종(53) 씨의 시 '우물 일곱개였던 마을,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를 선정했다고 23일 밝혔다.    김씨의 작품은 "고향 어머니와 친구들이 작품 속 시적 화자로 등장하면서 통속적인 언어의 맛과 어울려 하나의 풍경을 이룬다"는 심사위원의 평을 받았다.   옥천문화원은 연변 지용문학상을 받은 김씨의 시집 1000권을 무료로 출간해 줄 계획이다.   연변사범학원 출신인 김 씨는 교사와 농촌상업은행원으로 근무했고 중국 화룡작가협회 주석을 지냈으며, 현재는 자유기고가로 활동하고 있다.  연변작가협회 인터넷 문학상, 연변일보 해란강 문학상 등을 수상하는 등 수상경력도 화려하다.   시상식은 9월 2일 연변대학 예술학원에서 열리는 20회 연변 지용제및 음악제에서 열릴 예정이다.   올해 연변 지용제 및 음악제에서는 중국 동포들에게 정지용 시인의 문학사적 업적을 알리기 위해 연변지용문학상 시상식과 지용백일장 시상, 시낭송·노래·무용·합창 공연과 향수옥천 작품 전시 등을 다채롭게 준비한다.   옥천문화원은 옥천 출신 정지용(1902~1950) 시인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중국 연변작가협회와 함께 그 해에 발표한 중국 동포 작가의 작품 중 우수작을 선정해 옌볜 지용문학상을 시상하고 있다.      김승종 씨, 우물 일곱 개 있던 고향 풍경 담아…옌볜서 교직 근무 중 한국에 와 안동의 한식당에서 일하는 중국 조선족 동포가 식당 숙소에서 고향을 그리며 쓴 시가 정지용문학상을 받았다. 충북 옥천문화원은 최근 "'제20회 옌볜(延邊) 정지용문학상'에 김승종(53'중국'사진) 씨의 시 '우물 일곱 개였던 마을,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를 선정했다"고 밝혔다. 심사를 맡은 최국철 옌볜 정지용문학상 운영위원회장은 "고향의 어머니와 친구들이 작품 속 시적 화자로 등장하면서 통속적인 언어의 맛과 어울려 하나의 형이상학적인 풍경을 이룬다"고 평했다. 시상식은 다음 달 2일 옌볜대학 예술학원에서 옥천문화원 주관으로 개최되는 제20회 옌볜 지용제에서 열린다. 상을 받은 김 씨는 "이육사 시인의 고향인 안동 땅에서 고향 옌볜과 어머니를 그리며 시를 지을 수 있었다는 것 자체에 감사한다"면서 "고향에 돌아가면 다시 한국에서 우정을 나눈 친구들을 그리며 시를 써 볼 생각"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안동종가음식체험관 예미정에서 건물 관리 일을 하는 김 씨는 중국에서는 이미 등단한 '프로' 시인이다. 그는 고향인 중국 허룽(和龍)시 허룽작가협회에서 주석을 지냈으며, 옌볜작가협회 인터넷문학상과 연변일보 해란강문학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김 씨는 옌볜대 사범대학 출신으로 륭징(龍井)과 옌볜 일원에서 교사와 농촌상업은행원으로 근무하다 지난 2010년 한국으로 와 예미정에서 식당 건물 관리 업무를 맡고 있다. 옌볜 정지용문학상은 옥천문화원이 옥천 출신인 정지용(1902~1950) 시인의 문학 얼을 기리는 동시에 동포문학인 발굴과 민족문화 우수성을 알리고자 옌볜작가협회와 손잡고 선정하는 상이다. 매년 그 해 발표된 중국 동포 작품 중 가장 돋보이는 작품을 골라 시상한다. 수상작에 대해서는 고료와 함께 시집 1천 권을 무료로 출판해 준다. ///매일신문 /홍준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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