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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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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낯설기용법= 신선함 "회복창조"하는것, 새로운 시세계 구축... 댓글:  조회:2983  추천:0  2017-11-15
낯설게 하기의 효용성                                            최균선     이 시대는 양식화된 창신을 고창하는 시대이다. 그 창신성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 타나고있는것이 현대시다. 현대시에서 낯설게 하기란 까다롭게 리해할것도 없이 진부 하지않고 비반복적인 생신한 표현수법이라 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것이다. 말하자면 직유를 은유로, 묘사를 상징으로, 재현을 이미지로…그러나 후세대들에게 낯설게 하기를 선양하는것은 현실생활, 인간의 심령을 리드하는데 어떤 의미가 있을가?     다시점(多視点)에서,현상학적립장에서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감수한것을 기초로 대상을 주체의 사상과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고 이미지로 구성하는 사물시(事物诗)가 지리멸렬하여 이제 시인들의 단순한 감정표출로는 독자들을 감동시키지 못한다고 인 정하여 낯설게 하는 방법의 시쓰기가 나오게 된것이란다.     그것이 바로 모순어법, 낯설게 하기 또는 시적애매성이라는것으로서 현대시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이라 한다. 그동안 획일화, 관습화, 전통, 일상적언어로서는 신선함, 아름다움, 창의성 등을 발견할수 없다면서 극단에로 치달은것이다.“계속 아름다운것 은 우리들을 질리게 한다.”는 말인가? 조금 낯선 시를 보자.     가는 비여 가는 비여/가는 저 사내 뒤에 비여/미루나무 무심한 등치에도/가는 비여/스물도 전에 너는 이미 늙었고/바다는 아직 먼 곳에 있다/여윈 등지고 가는 비 가는 겨울 비/잡지도 못한다. 시들어 가는 비 ”     김사인이라는 시인의 “비” 전문이다. 낯선듯 싶으면서도 찬찬히 생각해보면 결코 생판 낯선것도 아니고 조금 애매모호한것 즉 몽롱미를 현시하고있을뿐이다. 겨울비속을 걸어가는 수척한 사내의 쓸쓸함,안쓰러움의 정서를 표현하고있는 시로서 “가다”의 “가는”에는 가는(行), 가는(細),가는(離別), 가는(야위여가다,) 즉 중의(重意)적으로 중첩되고 시상전개가 함축되고 절제된 언어표현이 시도되고있다.     그리고 “비”라는 주도어를 반복함으로서 “비" 그것도 ”겨울비“에 대한 정서를 시각적으로 미끄럽게 구사하고 있는데 이 시의 사상전개법은 “비 ”, “가는”의 호응관 계로서 가버리는 혹은 리별한 사내의 등뒤에서 내리는 비(리별, 사랑)를 느낄수 있게 했다. 의도적 낯설게 하기의 전형이라지만 전통시의 가독성도 구비하고있는것이다.     모순된 어법으로 낯설게 하기가 난해시로 되게 하는것은 표현의 기법일세 사유, 정감의 모순성은 리해불능이 된다. 현실속에는 애매모호한 현상들이 많지만 그것을 보는 시인의 시각은 애매모호할수 없으며 더구나 사유활동이 어릴벙벙할수는 없다. 이 시점에서 무작정 애매모호성이 현대의식의 한 형태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한국의 어떤 시인은 통속적인 시를 일반적으로 비전문적이고 대체로 저속하며 일반대중에게 쉽게 통하는 시라고 단정하던데 기실 상아탑속에 자아도취로서 아무도 알아들을수 없는 말을 혼자 중얼거리는 사람을 현실에서는 이상한 눈길로 보며 응 대하지 않는다. 문학의 “통속성”을 고상한 예술성이 결여된 즉 작가와 독자 모두에게 부정적인 존재로 여겨진다는 제기법은 너무 무단적이다. 작품의 다양성과 진실한 정신을 저애하는 존재로, “고상”한 독자에게는 비도덕적이고 질낮은 작품의 특징으로 여겨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사이비도 아닌 얼토당토이다.     또한 통속적인 문학작품은 보편적으로 지적,정서적수준이 낮은 대중이 선호하는 감정 혹은 정서를 졸렬하게 반영한 렬악한 작품이라고 평가해야 한다는 설법은 얼 마나 황당무계한가. 대중은 무지몽매하다는 말이 아닌가? 선택된 사회정영들만을 위 해 시쓰기를 한다면 선경에서 신선들과만 산다는 말과 같다. 어떤 시를 써내든 시인은 우주인이 아니며 적어도 진공상태에서 사는 특종생명이 아니지 않는가?     그들은 가로사대, 통속성을 즐기는 대중은 예술적심미가치에 주목하지만 예술가들과 같은 심미안을 지니지 못한 사람들이며, 지적훈련을 받지못한 사람들이며, 그래서 대중은 세련된 교양이 결핍한 존재라고 할수 있으며, 그래서 예술이 알기쉬운 소재나 자극적인 소재로 형상화되였을 때에만 흥미를 느끼는“무리”라고 말을 하는 시인은 구름우에서“구름사탕”을 먹는 신선인가? 엉터리도 아닌 허황 그 자체이다.     문학장르중 대중들과 거리가 가장 먼 장르는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시라고 할 때, 문학의 꽃이자 문학의 원형인 시가 왜 “대중”들의 시야밖으로 밀려난것일가? 여러가지 리유가 있겠지만 어렵기때문이라고만 간주한다면 대중 전체가 석두라는 말이 된다. 전문인 시인들조차 읽기가 어렵고 터득이 막연하다고 할 정도라면 그것이 숭고함이고 자랑인가? 어지간한 지적,정서적훈련으로는 현대시를 리해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데 “현대시독해학원”이라도 꾸려야 하지 않겠는가?     낯설게 하기=모르게 하기가 아니다. 낯설게 하기는 로씨야형식주의자들에게도 우리의 지각이나 인식의 틀을 깨고 사물의 모습을 낯설게 하여 사물에 본래의 모습을 찾아주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낯설게 하기란 그런 점에서 형식을 난해하게 하고 지각에 소요되는 시간을 연장시킴으로써 표현대상이 예술적임을 의식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양식으로서 궁극적으로 독자의 기대지평을 무너뜨려 새로운 양식을 태동시키는것이지 금성철벽밖에 방치하는게 아니다. 독자가 아예 모르게 하기위해 쓰는 시는 그 목적성부터 희망사항인“공명성”이 없어 글러먹었다는 얘기가 된다.     낯설게 하기는 시문학의 예술적장치에 한정적으로 사용되기보다는 오히려 문학이나 예술일반의 기법에 관련되여있는 용어로 보는편이 더 옳다. 일상화되여있는 우리의 지각은 보통 자동적이며 습관화된 틀속에 갇혀있다. 특히 일상적언어의 세계는 애초의 신선함을 잃은 상태이고 자연히 일탈된 언어의 세계인 문학언어와는 본질적으로 다를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시에 깜깜한“무지자”들과 도전하는식으로 나와서는 안된다. 물이 없이는 준치라도 곧 죽는다, 복합적독자군은 망망대해가 아닌가?       낯설게 하기는 그 작품자체의 구조와 조직만으로 따질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 리가 겪는 경험의 법칙이나 상식을 뒤엎는 일탈된 표현에도 진실성은 내포하고 있어야 하며 독자가 감동하고 시적진실을 깨닫게 하는것이 시의 목적이여야 한다. 낯설 게 하기는 일상적인 언어의 틀을 깨고 새롭게 표현하는 기법일뿐으로서 그 무슨 천국의 언어인양 신비화할것까지는 없다. 장막안에서 북치고 장구치고 해도 무슨 무당굿인지 전혀알수 없다면 그게 제멋에 겨운 헛푸닥거리가 아니겠는가?     1) 깃발이 펄럭인다. (사실적진술>)        깃발이 전진을 부르며 절규한다.     2) 사람이 술을 먹는다.        사람이 술잔속에 익사한다.     상술한 두가지 표현에서 후자의 기법에도 선택된 상상력이 필요없다. 이런 낯설게 하기라면 소통불능이 아니고 사회효응도 바람직할것이다. 하다면 정말 인문학적인 지식이 없이는 현대시를 짓기는커녕 리해하고 감상할수도 없어야 할가. 백명의 독자 에게 읽히는 작품보다 선발된 한명의 독자에게 백번을 읽히는 작품만이 예술이며 진정 우리가 지향해야하는 문학일가. 우문과 함께 소통의 가능성을 꿈꾸며 자신을 당 당하게 내세우는 시인이 오히려 사랑받는 시인이 될것은 의심할바 없다               애인에게 버림받고 돌아온 밤에               아내를 부둥켜안고 엉엉 운다               아내는 속 깊은 보호자답게               모든 걸 다 안다는 듯 등 두들기며               내 울음을 다 들어주고               세상에 좋은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               세월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따뜻한 위로를 잊지 않는다               나는 더 용기를 내서 울고               아내는 술상까지 봐주며 내게               응원의 술잔을 건넨다               이 모처럼 화목한 풍경에               잔뜩 고무된 어린것들조차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노래와 율동을 아끼지 않고               나는 애인에게 버림받은 것이 다시 서러워               밤늦도록 울음에 겨워 술잔을 높이 드는 것이다               다시 새로운 연애에 희망을 갖자고               술병을 세우며 굳게 다짐해보는 것이다.        ‘삼류 트로트 통속 연애시인’ 이라고 부르는 류근시인의 시이다. 이 시는 지극히 통속적인 소재인“외도”를 통해 웃지 못할 가족애를 그리고있다. 보편적으로 통속적인 시는 거짓위안과 환상을 제공하여 현실을 도피하게 만든다고 비판을 받는다. 아주 틀린말은 아니다. 우리는 억압적인 상황에 직면했을 때 자유로워지길 원하며 상상적 해결을 꿈꾸기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의 시적화자는 대책없는 랑만 즉 련애를 꿈꾸 고있지만 직면하거나 직시하고 있는것은 가족이다. 이것은 현대인의 감정정서이다. 무엇을 나무릴게 있는가? 그래서 외도가 외설처럼 느껴지지 않으며 이른바 시의 격을 떨어뜨렸더라도 오히려 자연스럽게 시적정취를 선물하고있지 않는가?     어떤 고명한 이들의 견해대로 저급예술과 고급예술의 이분법을 항거하는 의미에서, 스스로 저급예술이라는 전통시를 쓰는 사람은 절필해야 하는가? 전통시를 쓰면 시를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던데 어처구니가 없는게 아니라 한심할뿐이다. 어떤 시인의 선언이 독자에게 감동을 선물하겠다는 용기와 오히려 통속적인것으로 인 위적인 난해성을 지향하는 문학을 전복하고싶은 역설의 정신이 분발할듯싶다.     밀란 쿤데라가 “극소수의 귀족이 향유하던 예술은 숭고하다. 그 예술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향유될 때 더욱 숭고해진다”고 말했다. 어쨌든 예술의 본질은 소통에 있으며 그 소통의 폭은 넓어져야 한다는 의미일것이다. 소통은 필연적으로 대상을 필요로 한다. 어떠한 예술작품도 그 존재자체만으로 어떠한 의미도 지닐수 없다. 작품과 독자가 만났을 때 비로소 예술은 온전한 의미를 지닐수 있게 된다. 이것은 식은 죽이 마시기 좋으면서 원맛은 잃지 않고있다는 말처럼 절대 진실이다. 아닌가?                                                         파도                                                      최 병 수        바다는 목에 걸린 세월을/울컥울컥/모래사장에 토해낸다/벌거벗고 누워있는 수줍 은 모래톱/전력질주 짝짓기 시도하지만/대양(大洋)의 기세로도 오르지 못하고 /가시 걸린 세월만 내 뱉는다 (중략)     강자의 론리를 파도에 빗대어 쓴 시다. “‘파도’라는 사물의 속성을 이미지로 형 상화함으로써 시적자아의 형이상학적의식을 잘 그려주고있다” 그러나 “현대시의 핵심인 ‘낯설게 하기’가 완벽하면서도,시적진실의 리얼리이티가 있는 시이다. 이런 시는 시전문이 아닌 사람이라도 외면하지 않을것이다. ‘파도’ 는 바다를 배경으로 강자의 론리를 파도, 모래사장 등에 투영해 약자에 대해 노래했으며 약자와 강자의 론리가 세상을 지배하는 현실에 가슴아픈것을 파도에 빗대고 시적대상을 향해 강렬한 심상을 표출하고 있는것이다. 이런 경우, 직설적인 시가 개탄하며 절로 물러갈것이다.     시나 산문이나 문학이나 비문학이나 언어조합이지만 그중에서도 시가 시로 되는 리유는 일상적인 의미를 벗어나 함축적이고 내포적인 2차적인 의미의 확대를 꾀하는 언어조합이기때문이라는것은 기성리론이다. 그런데 로씨야에서 일련의 학자들은 언어의 근본적인 형식인 운률과 구조를 연구하면서 문학의 문학스러움이나 시가 시다운 근본적특징이 바로 언어의 특이한 용법에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들은 문학의 내용 즉 리념성을 강조하던 시기에 문학성을 언어형식에서 찾고자 했기때문에 형식주의라고 했지만 대표적리론가인 야꼽슨, 쉬끌로브쓰끼 등의 기본립 장은 문학성의 발견에 있었으며 그 해결책은 전통적인 대답이나 림시변통적인 방식이 아니라 근본적인 문학성의 본질과 소재에 대한 해명이여야 한다는 립장이였다.     이들은 현대시학에서 금과옥조로 여기고있는 이미지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였다. 시의 경우에 있어 비유, 리듬, 독특한 구문, 어려운 낱말등은 그러한 정신의 절약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정신노력을 더욱 강요할뿐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시어의 변별성, 즉 시를 시답게 하는 근본적인 어법은 일매지게 낯설게 만들기만인가? 전경화로 설명할수는 없는것인가? 낯익음과 낯설음은 아무래도 변증관계를 벗어나지 못할것이다. 시의 문학성은 시어의 낯설음의 구조에 있다고 하더라도 친숙한 의미의 이미지가 아니라 생소한 충격을 주는 이미지, 뭔가 새롭게 생각하고 느끼도록 활력을 주는 언어의 창조가 바로 낯설음이며 산문과 구별되는 시어의 정수가 된다는것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시어나 산문적인 언어들은 바로 낯선언어가 아니라 눈에 익은 언어이고 낯익음의 이미지였고 낯익음의 형식이었다는 말이된다. 사실 고전주의나 랑만주의에서 시에 대한 인식이나 시어의 기능은 효과적인 전달이나 경제적인 표현이라는 목적에서 설명되고 있는것이다. 실용주의시대에 현대시도 실용적이야 할텐데…     포프는 시의 재치는 늘 생각하면서도 그처럼 잘 표현할수 없는것, 즉 어려운것을 적절히 표현하는것이라 하였고 워즈워즈는 낯선 세계를 인간에게 친숙하도록 만드는 기능이라고 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친숙한 통념에 반작용하는 낯설은 현실을 제시 하는것으로서 여러번 곱씹어 더 생각하도록 지각을 연장시키는 효과가 있지만 너무 심하게 “낯설어버리면” 상상력의 “부재자”나 언어표현에 보수적인 많은 사람들이 남의 사돈이야 가건말건 지나칠 가능성이 다분하다는것을 제시한것이다.     시적대상을 습관적인 표상에서 굴절시키고 언어표현에서도 일상의 문맥을 본질 적으로 다른 개념들로 대체함으로써 시인은 대상들의 감각적인 결(结)을 고양된 상태에서 인식하도록 해야만 하는것이다. 따라서 시어는 낯선용법을 창조하여 지각의 신선함을“회복”시키는것이지 불소통속에 매장시키는것이 아니다. 깊이 숨김으로써 그것이 현대시의 시적발견이 되고 해방된 새로운 시세계의 구축이 될수는 없다.     쏘쉬르의 근원주의 언어관은 말하는 화자의 관념이나 아이디어에 의미가 있고 그 의미를 전달하는 기능으로서 존재하는것을 말한다. 그러나 구조주의가 말하는 언어는 요소들간의 체계적인 관계들속에서 의미가 만들어진다는것이 핵심이다. 쏘쉬르는 인지체계내에 존재하는 언어적의미와 밖에 존재하는 언어적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전혀 의미불통의 시가 시로서 존재할 리유가 나변에 있는가? 물론 확답을 기대할수 없는 우문이므로 혼자의 우답으로 남겨두자. 그래서 장문(长文)이지만 아쉬운 대로 결말이 없는 횡설수설이 되여도…                                               2013년 10월 30일 [출처] 낯설게 하기의 효용성-최균선 - 모이자 커뮤니티  
18    "자화상"에서 "낯설게하기" 찾아보기... 댓글:  조회:2151  추천:0  2017-11-15
낯설게 하기와 우리 서정시 / 서채화 - 네 시인의 동명의 시《자화상》을 중심으로 1  로씨야 형식주의의 주요용어인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란 말을 처음 제시한 사람은 로씨야의 쉬클로프스키라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로씨야 형식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문학과 다른 학문(즉 사회학, 철학, 심리학, 력사 등) 사이를 구분해주는 특징이 무엇인가 연구하던 중 그 차이는 문학과 다른 학문들이 언어를 다루는 방식에서 찾아야 된다는 것을 발견해내게 된다. 즉 문학을 문학답게 하고 다른 학문 령역과 문학연구 령역을 변별시켜주는 특징을 문학성이라고 할 때 그 문학성은 문학이 사용하는 언어적 특질(말하는 방식)과 관련되며 그것은 바로 낯설게 하기에 의해 특징지어진다고 했다.  낯설게 하기는 축자적으로는 “이상하게 만들기(make strange)”를 의미한다. 쉬클로프스키에 따르면 문학은 일상언어와 습관적인 지각양식을 교란한다. 문학의 목적은 재현의 관습적 코드들로 인해 지각이 무디어지게 놓아두는 것이라기보다는 “대상을 친숙하지 않게 만들고, 형태를 난해하게 만들고, 지각 과정을 더욱 곤란하고 길어지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술/문학/시에서의 이상화(異常化; estrangement)는 리듬, 음성학, 통사법, 플롯 같은 형식상의 기제 즉 “예술적 기법”에 의해 생겨난다. 쉬클로프스키는 낯설게 하기의 한 례로 스토리의 내용을 “이상하게 만들기” 위해 말(馬)의 시점으로 구사한 레브 똘스또이의 「콜스토메르」를 들고 있다.     그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일상적인 보행과 발레를 비교한다. 걸음을 걸으면서 자신의 걸음걸이의 의미를 하나하나 생각하고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지만 일상적인 걸음걸이를 낯설게 만들고 구조화한 발레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여기서 시는 “발성기관의 춤”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낯설게 하기”를 통해 발레는 걸음 하나하나에 주의를 집중시키고 그 의미를 생각게 한다. 그러나 일상적인 보행은 그렇지 못하다. 문학의 언어 역시 일상언어와 다른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독자들의 일상적인 지각을 막고 언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 생생한 지각과 의미에 접하게 한다.     문학 텍스트의 내용과 형식은 서로 분리될 수 없고 형식의 새로움은 지금까지 기계적으로 지각되었던 바로 그 내용의 새로움, 내용의 생생한 전달, 즉 핍진성을 목표로 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문학이 일상언어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일상언어로는 경험할 수 없는 충격적인 것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함이다. 우리의 언어와 우리가 접하는 삼라만상의 인상과 그에 대한 판단이 이미 낡고 관습화되어 있어서 모든 것은 추상화되어 있고 평판화되어 있는데 문학은 여기에서 전혀 새로운 충격과 인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고 한다.     쉬클로프스키는 이를 위하여 낯설게 해야 하며 “해”라고 부르던 사물을 새로운 이름으로 불러서 전혀 낯선 사물로 새로이 깨닫게 해야 하며 새로운 의미를 발견해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제언을 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순수하게 자신의 경험으로 발견할 것.  -비일상적 시각을 동원할 것.  -현미경적 시각으로 관찰할 것.  -인습적인 인과관계에서 벗어나 역전적인 발견을 할 것.  -낯선 대상과 병치함으로써 낯선 인상을 줄 것.  “낯설게 하기”란 이 말은 비록 로씨야에서 나오긴 했지만, 우리 문학에서도 전혀 찾아볼수 없는것은 아니다.《자화상》이란 제목의 시는 여러 시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데, 내면적 자아의 모습을 그린 것일 터이므로 시인의 정서, 사상을 리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자료이다. 필자는 모두《자화상》을 주제로 한 윤동주, 서정주, 박정웅, 남철심의 시를 통하여 우리 서정시에서 표현된 “낯설게 하기”에 대하여 다루어보도록 하겠다.  2 시의 목적은 사물들이 알려진 그대로가 아니라 지각되는 그대로 그 감각을 부여하는 것이다. 시의 여러가지 기교는 사물을 낯설게 하고, 형태를 어렵게 하고 지각을 어렵게 하고 지각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을 증대시킨다. 지각의 과정이야말로 그 자체로 하나의 심미적 목적이며, 따라서 되도록 연장시켜야 하는 것이다. 시란 한 대상이 시적임(시성)을 의식적으로 경험하기 위한 한 방법이다.      “낯설게 하기”는 시에서 시어와 일상언어의 대립에 의해 나타난다. 시에서는 일상언어가 갖지 않거나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리듬, 비유, 역설 등 규칙을 사용하여 일상언어와 다른 결합규칙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우선 윤동주(만주)의《자화상》을 보기로 하자.  자 화 상              산 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  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또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1939년 9월  이  시는 일제 말기라는 암울한 시대 상황에서 적극적인 의미의 무장 독립 투쟁에 가담하지 못하고 국내에 남아 있는 자신을 끝없이 반성하고 부끄러워하는 성찰의 과정에서 쓰여진 고독과 내면 성찰의 시이다. 1939년에 쓰여진 이 시에는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면서 느끼는 젊은 시인의 자기 련민과 미움이 나타나 있다. 화자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 그 안을 가만히 들여다 보는 것은 자신을 들여다 보고 성찰하는 행위이다.  화자가 들여다보는 우물속은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는 곳으로 얼핏 보면 매우 행복하고 평화롭게 보인다. 하지만 그 안에서  “한 사나이” 즉,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려는 화자에게는 현실 속에서 보이지 않던 자신의 미운 모습이 보인다. 그래서 그는 돌아간다. 가다 생각하니 그 미운 사나이가  “가엾어” 돌아오게 되고 다시  “미워져”돌아가다가  “그리워”져 다시 돌아오게 된다. 화자는 자신에게 미움을 느끼고 그 미움은 련민으로, 련민은 그리움으로 변하는데 이런 변화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반성하고 내면을 응시하는 가운데 일어난 감정이다. 우물 속은  “달”과  “구름”과  “하늘”과  “바람”과  “가을”이 있는 또 다른 세계이고 그 안에는 “추억”이라는 또 다른 시간의 흐름이 화자의 진정한 성찰과 인간적 고뇌 속에 존재 하고 있다.      높은 것일수록 깊은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우물물은 동시에 밝은 것을 어둠에 의해서 보여주는 의미론적 역설도 함께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우물속에 비친 하늘은 밤하늘이며, 그 계절 역시 가을로 되어있다.  태양이 있는 대낮의 봄하늘과는 상반된다. 시내물은 주야가 따로없이 쉬임없이 흘러가지만 그런 류동적인 물을 한 곳에 가두어 고이도록 한 것이 바로 우물물이다. 그것처럼 윤동주의 우물속에 비치는 달, 구름, 바람 역시도 그 의미의 공통적인 요소는 다같이 물처럼 흐르는 것이지만 한 공간안에 유페되어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이 시는 분명 《자화상》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으면서도 우물속에 비친 그의 모습을  “나”가 아니라  “한 사나이”라고 낯설게 부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영상(映像)을 하나의 실체로 생각하고 있는 것까지 같다. 윤동주는 마치 그  “사나이”가 우물속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파아란 바람”이라고 촉각적이미지를 시각적이미지로 전이시켜 통각적이미지로 표현한것 역시  “낯설게 하기”로 볼 수 있다. 일상적인 표현으로 하면  “바람”은  “파아란 색”을 띨 수가 없다.     또한 이 시는  “나르시시즘”1)을 바탕으로 한 자기성찰을 쓴것인데  “거울”과 같은 의미로 통하는 “우물” 속의 자신의 모습을 보고 불쌍한 자신에 대한 련민에 빠지게 된다. 시에서 반영된  “나르시시즘”  이 경향도  “낯설게 하기”로 볼 수 있지 않은가 싶다.  다음은 서정주(한국)가 쓴 《자화상》이다.  자 화 상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숫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1939년      미당 서정주의 시가 지닌 가장 큰 의의는 우리 시에서 시어사용의 폭을 넓히고 상상력의 령역을 확대하여 시의 새로운 경지를 열어보였다는 데 있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 “대추꽃이 한 주 서있다” “틔워오는 아침” “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 등 시어들은 일상언어와는 다른 결합구조를 가지고 있으면서 우리들에게 상상의 공간을 마련해준다. 또한 "애비는 종이었다"는 첫 행은 실제의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이 시가 당시의 독자들에게 준 감동의 힘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당시의 독자들은 일제 강점하에서 자신들의 처지를 련상시키며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아침 이마 위에 얹힌 몇 방울 피섞인 이슬” 은 괴로움의 삶 속에서 창조된 열매란 뜻으로 고뇌의 승화를 뜻하고 있다. 구속받고 멸시받으며 현실을 어렵게 사는 화자를 “죄인”, “천치”, “수캐”에 비유하면서 이런 은유로 투영된 언술이 아무래도 시의 멋을 더해주고있는것 같다.  같은 제목으로 쓴 박정웅(연길)의《자화상》을 보도록 하자.                                    자 화 상                         그림자처럼                무시당하고 짓밟히는 사람                그림자처럼                수상하고 불길한 사람                그림자가 길어                외롭고 지쳐보이는 사람                마침내 자신이                그림자로 되여가는 사람                                                        2001년       이 시에서는 일상언어에서는 불가능한 것들을 강제로 결합시키고 새로운 문법 질서를 확립함으로써 시의 언어를 낯설게 하고 직접적인 의미를 넘어선 시적인 의미로 전환시킨다. 시인은 그림자와 “무시당하다” “짓밟히다” “수상하다” “불길하다” “외롭다” “지쳐보이다”를 강제로 결합시킴으로써(그것도 “그림자처럼”이라고 비유) 그림자를 일상적인 의미가 아닌 다른 의미로 전환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림자와 이런 표현들사이에는 거의 류사성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작자의 의도를 우리가 보아낼수 없는것은 아니다. 이런 낯설은 표현들은 우리들의 상상을 거쳐 낯익은 모습-힘없고 외롭고 지친 자신(시인)의 모습으로 전환된다. 또한 마지막련에서의 아예 사람이 그림자로 되어간다는 표현은 그 어떤 역전적인 발견일수도 있는것이다.     마지막으로 남철심의《우리들의 자화상》을 보기로 하자.                            우리들의 자화상                                             남철심(도문)         찬물을 많이 마셔         도리여 뜨거운 가슴         물옆에 살아         물농사 지으며         하얗게 마음을 헹구는 사람         물 같은 술에         풀어보는 한(恨)과         술 같은 물에         적셔보는 원(怨)         찬물을 많이 마셔         오히려 뜨거운 눈물                                                                                 2001년         이 시는 첫련부터 역설로 시작된다. 찬물을 많이 마셨으면 응당차가와야 할 가슴을 도리여 뜨겁다고 표현한다. 이와 조응되는 마지막련에서도 “찬물을 많이 마셔 오히려 뜨거운 눈물”이라고 표현되고 있다. 눈물은 원래 뜨거운 것이나, 시인의 의도로 보면 찬물을 많이 마셨으면 눈물도 의례히 차가와 할 터인데 오히려 뜨겁기 때문에, “차가운것”과 “뜨거운 것”의 대조 그것 역시 역설로 보아야 하겠다. 사실 일상에서 그 누구도 찬물을 많이 마시는것과 가슴이나 눈물이 뜨거운것을 련계시키지 않는다. 하지만 시인은 이런 역설적인 표현들로 “낯설게 하기”를 성공적으로 사용하였다. 그는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직설적인 표현이 아닌, 일상적인 지각을 막고 시인의 경험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다음 리듬적으로 볼 때, 이 시는 고정적인 틀에서 벗어나 2행, 3행, 4행, 2행의 파격적인 구조를 갖추었다. 하지만 필자의 좁은 생각으로는 시의 3련에서 “풀어보는 한과”에서의 “과”자는 사족으로,  없었으면 오히려 운률조성에 더 맞지 않을가 싶다.  3  세계의 사물들에 익숙하게 길들여진 존재가 바로 “우리”이다. 이러한 상투적 일상에 감염된 우리의 의식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는 것이 시가 지닌 사명감이기도 하다. 달리 말해 낯익은 것들을 낯설게 바라보는 시선이 시가 지닌 역할이다. 일상을 전복하기, 전도된 일상을 형상화하기가 시인의 숙제이다. 규격화되고 도식화된 세계를 휘저어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한 고통이 시인의 숙명이다. 이와 같은 숙제를 성공적으로 하기 위하여 필요한 요소들에는 세계와 자아에 대한 애정, 섬세하고 차분한 관찰, 낯설게 바라보는 시선, 일상에 대한 치열한 반칙의식, 평범을 거부하는 비범한 수사학 등이 있다. 시란 결국 권태로운 일상을 초월하여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도록 자극하는 촉매제이므로 윤동주, 서정주, 박정웅, 남철심의  《자화상》은 일상을 거부하는 비범한 의식과 표현이 우리의 각질화된 상상력을 물렁물렁하게 연성화시켜주는 작품들이였다.       낯설게 하기는 문학언어를 일상언어와 구별시킬 뿐만 아니라 문학 내부의 력학(力學)을 가리키기도 한다. 한 지배적인 문학형식이 지나치게 자주 사용되어 당연하게 여겨지고 일상언어처럼 취급되면 종전에 종속적인 위치에 있었던 형식이 전경화되어 그 문학적 상황을 낯설게 만들고 문학 발전과 변화를 야기하게 된다. 즉 문학에서는 하나의  “낯설게 하기”가 보편화, 표준화되면 새로운  “낯설게 하기”를 창조해야 한다.  참고서(문):  1.「문학비평방법론」             김호웅    연변대학출판사    2000년  2.「아이러니와 역설」            이건주  (문학가산책)  3.「낯설게 하기와 의미론적 연관」김송배  (문학가산책)  4..「낯설게 하기의 시학」        양병호 
17    낯설게하기란 기존의 코트를 해체, 파괴하는 용감한 행동이다 댓글:  조회:2062  추천:0  2017-11-15
열린시론/“낯설게 하기” 글쓴이 최갑표(어울림교회 목사, 전북대학교 고고문화인류학 강사)    [2014년2월호]     물리적인 시간을 똑같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 시간에 특별하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성찰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할 때에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는 의미도 깊어진다. 갑오년인 올해에도 설날을 맞이했다. 설날은 음력 새해의 첫 시작이다. 묵은해를 정리하여 떨쳐버리고 새로운 계획과 다짐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는 첫날이다.‘설날’은 순수 우리말로써 그 말의 뜻에 대한 해석이‘서럽다’에서 연유했다는 것과 나이를 댈 때 사용하는‘살’에서 비롯되었다는 등등 구구절절 하다.‘설익다’에서 유래했다고 하기도 하고, 겨울이라서 눈을 볼 수 있어서‘설(雪)날’이라고 불렸다는 이야기도 있다.‘선다’라는 말에서 연유한 것으로‘새해 새날이 시작되는 날’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선날’이 연음화 되어 ‘설날’로 변했다는 것이다. 또는‘삼가다’,‘사리다’또는‘조심하여 가만히 있다’라는 뜻의 옛말인‘섧다’에서 그 어원을 찾기도 한다. 완전히 새로운 시간의 질서에 통합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언행을 삼가하고 조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설날에 대한 그 많은 해석 중에 나는‘낯설다’는 말에서 나왔다는 해석에 가장 공감한다. ‘설다’‘낯설다’의‘설’이라는 어근에서 나왔다는 것이다.‘새해에 대한 낯설음’과 ‘아직 익숙하지 않은 날’이란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해석이다.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 혹은‘거리두기’(distanciation)란 용어가 있다.‘익숙해져 있는 사물을 낯설게 하면 그 사물의 본질이 보인다’는 것으로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처음 사용한 문학용어이다. 우리의 지각이 보통은 습관화된 틀 속에 갇혀있어 일상적인 삶과 사물은 본래의 의미를 잃고 퇴색하여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낯설게 하기’는 이러한 인식의 틀을 깨고 낯설게 하여 사물의 본래의 모습을 찾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는 뜻의 개념이다. 우리가 낯설음을 잃고 익숙해지면 대하기가 쉽고 편하다. 그러나 점점 편해지고 익숙해지면 그냥 모든 것에 순응하고 더 이상 세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으며 불의한 현실에도 저항하지 않는다. 꿈을 잃어버린 채 체념과 절망에 길들여진다. 그렇게 되면 삶의 어떤 모험도 감행하지 않는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편한 것만 받아들이는 동안 침묵과 방조를 통해 거대한 사회 구조의 폭력에 동조할 수도 있다. 자신이 경험한 세계를 전부로 알고, 그것을 재고의 여지없이 보편적인 기준으로 삼으려고 할 때 무리가 발생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과 정보와 경험이 세계의 모든 현상을 해명해줄 수 있다는 믿음은 극단주의를 낳고, 그 극단주의는 충돌과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불행하게도 오늘 한국은 그런 극단의 논리들이 횡행하고 있다. 한편의 시각에서 다른 한편을 일방적으로 규정해버린 데서 불행한 역사가 만들어진 것이다.  파타 모르가나(Fata Morgana)현상이라는 것이 있다. 일종의 북극권에서 발생하는 신기루 현상인데, 특정 기상 조건이 발생하면 빛의 반사로 인해 멀리 떨어진 다른 지역이 반사되어 하늘에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본다거나 숨이 가빠지는 것을‘파타 모르가나(Fata Morgana)현상’을 겪는다고 한다. 지금 부정선거로 등장한 불의한 권력의 정치 조건이 만드는 현상은 보이지 않아도 될 것들은 너무나 잘 보이고 잘 보여야 할 것은 전혀 보이지 않는 세상이 되어 국민들이 숨을 쉬기가 너무 어렵다. 정치적 억압은 한시도 쉬지 않고 있으며 국민들을 길들이고 체제 순응을 강요하고 있다. 국민들이 서로의 관계에 대한 인식을 왜곡하고 상호멸시와 반감을 품게 한다. 권력과 자본에 의해 국민의 삶이 위협 받는 세상, 국민을 그만두고 싶다는 표현들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설날을 맞이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낯설게 해보는 것이다. 모든 것을 새롭게 보라는 외침이기도 하다. 세상과 나를 둘러싼 모든 관계들을 새롭게 보는 것이다. 그것은 거짓을 찾는 일이고, 그로부터 사실이라고 버릇처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들을 새롭게 밝히고, 그 길에서 착각하게끔 만든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맞닥뜨린 여러 가지 낯선 사건들은 이해할 수 있고 예상할 수 있는 사건도 있지만 인간의 이해와 계획을 벗어나기도 한다. 우리는 낮과 밤의 교차, 계절의 순환, 꽃의 피고 짐, 달의 차고 기움 등과 같이 우리가 아는 것과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 우주 창조, 신, 죽음과 같이 낯설고 모르는 것들을 안고 함께 살아가고 있다. 우리의 삶은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이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새로운 세계를 향해 떠나는 두렵고 설레는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여행의 진정한 의미는‘일상과 낯설게 하기’이다. 두렵지만 설레는 여행, 때로는 당혹스럽지만 즐거운 여행이 될 수 있는 까닭은, 낯선 곳에서 낯선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익숙하게 잘 아는 사실을 접하고, 늘 반복되는 삶을 사는 가운데서도 분명히 삶의 묘미를 맛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낯설고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는 기쁨,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새롭게 누리는 기쁨은 우리의 삶을 더욱 매력적이고 풍요롭게 한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든 낯선 이들을 찾아, 낯선 곳으로 떠나며 우주와 자연과 사람에 대한 통찰이 깊어질수록 나날이 살아서 숨 쉰다는 것이 기적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낯설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과 우리가 겪은 경험의 세계로는 결코 이해되지 않는 상황을 맞게 되는 데서 오는 두려움과 당혹감이 있지만 동시에 그 낯선 상황을 경험하고 알아 가는 큰 즐거움이 있다. 영화가 재미있는 까닭은 현실과 다른 낯선 맥락을 끌고 들어오기 때문이고, 축제가 즐거운 이유는 낡은 일상을 낯설게 하기 때문이다. 익숙해져 있는 것을 낯설게 하면 그 본질이 보인다. 낯설게 하기는 기존의 코드를 해체하는 것이다.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비판하고 그 너머의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다. 낡은 관념의 틀을 깨고 전혀 새로운 세계를 창출해 내는 것이다. 그것은 기존의 질서가 갖고 있던 낡은 형식을 파기하고 새로운 시대를 예견하는 인간 해방적 삶의 태도이다. 습관적이고 일상적인 것을 낯설게 하고 끊임없는 의문을 제기하여 우리의 삶에 진정한 반전과 새로움과 황홀감이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  
16    러시아 문예학자 - 시클로프스키 = "낯설게하기" 댓글:  조회:4138  추천:0  2017-11-15
요약 "낯설게 하기"는 예술기법의 하나로 러시아의 문학자이자 형식주의자인 빅토르 시클로프스키가 개념화했다. 그는 사람들이 매일 마주치는 일상적이고 친숙한 것보다 새롭고 낯선 대상으로부터 미학적 가치를 느낀다는 사실에 착안했다. ‘낯설게 하기’라는 개념을 받아들인 브레히트는 예술이 심미주의로 흐르거나 이데올로기를 위한 도구로 전락하지 않고 실천적인 가치를 창조하는 이론으로 정착시키는 데 기여했다.   일상적이고 익숙한 사물이나 관념을 낯설게 하여 전혀 새롭게 느끼도록 하는 예술기법의 하나. 빅토르 시클로프스키(Viktor B. Shklovsky)가 제안한 이 기법은 러시아 문예사조의 하나인 형식주의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고, 독일의 연극 연출가이자 시인인 베르톨트 브레히트(B. Brecht)에 이르러 중요한 결실을 맺게 되었다. 빅토르 시클로프스키 러시아 형식주의자 빅토르 시클로프스키(victor shklovsky) 1935년 러시아에서 메이란팡(梅蘭芳)의 중국 경극을 관람한 브레히트는 이를 통해 기존의 서양 연극이 가진 관습을 전복시키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다. 이른바 서사극이라 부르는 이 경극이 브레히트에게는 매우 낯설게 보였다. 이 연극의 요체는 관객이 연극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극의 현실에 거리를 두도록 하는 것이었다. 브레히트는 종종, 배우들로 하여금 연극이 끝난 뒤 관객을 향해 이렇게 말하도록 했다. “여러분, 하지만 현실에서는 절대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 거리 두기의 목적은 관객이 몰입을 통해 지배 이데올로기 속으로 자연스럽게 빠져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브레히트의 ‘낯설게 하기‘는 분명하고 명백한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놀라움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연극적인 시도였다. 러시아의 형식주의자들이 ‘낯설게 하기’를 언어, 특히 시어(詩語)의 효과로 받아들인 데 반해 초현실주의자들은 이것을 사물의 효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초현실주의자들은 사람들이 사물을 낯설게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특별한 오브제를 사용했다. 이들은 무의식 속에 습관화된 이데올로기나 매일 보는 일상적인 대상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경이로움을 느끼도록 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대표적인 예로 마르셸 뒤샹의 를 들 수 있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변기를 화려하고 우아한 미술관에 전시함으로써 변기는 전혀 낯설고 새로운 대상이 된다. 이때 변기는 변기의 용도를 넘어, 변기 그 자체로서 독립적인 대상물로 인지하도록 하여 보는 이의 이목을 환기시키고 신선한 충격을 준다. 시클로프스키=낯설게 하기       러시아의 문예학자 빅토르 보리소비치 시클로프스키Victor Borisovich Shklovsky(1893-1984)가 예술창작 이론으로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용어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는 일상적으로 접하는 익숙한 상황도 어린 아이가 세상을 보듯 낯설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낯설게 하기는 익숙한 세계를 낯선 시각으로 보면서 다시 구성하는 것입니다. 익숙한 이야기 구조는 수용자들에게 스토리를 쉽게 이해하고 친근함을 느끼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보편적인 이야기의 틀을 빌려올 수는 있지만 이것이 단순히 반복되기만 한다면 지루함을 줄 뿐입니다. 흥미나 긴장감이라는 반응을 유발시키기 위해서는 낯설게 하기 기법이 요구됩니다. 시클로프스키는 모든 기교성artfulness은 낯설게 하기의 기법이라고 했으며, 예술이란 그 기교성을 경험하는 방식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문학을 문학답게 하는 문학성은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과 관련된다고 생각했고 이때 낯설게 하기의 방식에 의해 문학적 특성이 드러난다고 했다.  낯설게 하기는 시와 소설 등 그 장르적 특징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시에서는 일상 언어가 갖지 않거나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리듬, 비유, 역설 등의 규칙을 사용하여 일상 언어와 다른 결합 규칙을 드러내고, 소설에서는 사건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플롯을 통해 낯설게 하고 주의를 환기시킨다.       ====================덤으로 더 공부하기...   1. ‘낯설게 하기’와 분행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에 의하면 리듬과 律格은 엄격히 구별된다. 율격은 이미 정해져 있는 기계적 형식이다. 이는 韻과 더불어 리듬을 형성하기 위한 부수적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리듬은 傳統律格을 파괴하여 소리와 의미에 충격을 주는 形成的 원리다. 이는 시의 다른 요소들과 관련해서 한 편마다의 시가 언제나 새롭게 형성되는 것이다. 리듬은 언제나 動的이다. 전통율격이나 표준 언어는 圖式化 되어 있어 낯익은 것이지만 이런 自動化를 파괴한 시는 신선한 충격을 준다. 낯설게 하기란 바로 예술의 본질이다. 리듬이란 이런 낯설게 하기의 산물이다.   山에는 꽃 피네 / 꽃이 피네 / 갈 봄 여름없이 / 꽃이 피네 // 산에 / 산에 / 피는 꽃은 /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 산에서 우는 작은 새요 / 꽃이 좋아 / 산에서 / 사노라네 // 산에는 꽃이 지네 / 꽃이 지네 / 갈 봄 여름없이 / 꽃이 지네 // - 김소월 -     이 작품은 3음보(3.3.4조의 음수율)의 전통율격에 의해 시어들이 조직화돼 있다. 그러나 소월은 3음보를 한 행으로, 때론 2행, 3행으로 배열하여 변화를 준다. 이런 변화가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형식주의 관점에서 보면 는 반복성과 대치성의 구조다. 4개 연의 끝이 모두 감탄형 종결어미 ‘~네’로 통일된 유사성을 띠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연은 의미론적으로, 行갈이에서 대칭구조를 이룬다. 미시적으로 1연의 생성과 4연의 소멸이 의미론상 대칭되고, 2연의 고독과 3연의 화합이 대칭된다. 거시적으론 1연과 4연의 외재연과 2연과 3연의 내재연이 대칭을 이룬다. 곧 외재연의 행갈이에 있어 3음보가 2행으로 分行되고, 의미론상 시공의 확산을 보인 반면, 내재연은 3음보가 1행으로 배열되거나 3행으로 배열돼 있으며 시공의 축소를 보인다. 산유화는 3음보의 등가체계로써 행을 분할하는 것을 파괴한 낯설게 하기의 기법이 구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반복과 대립이 얽혀 있는 규칙성을 보이는 것이다. 分行과 分聯은 근본적으로 일상 언어를 파괴하는 낯설게 하기의 기교다. 같은 구문을 분행했을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 사이엔 의미의 차이가 발생하고 이는 운문과 산문의 차이가 되는 것이다.   낯설게 하기는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현대 자유시는 과거 자유시에 대해서 낯설게 하기의 산물이 되었으나 자유시에 익숙해진 오늘 날엔 더 이상 충격이 되지 않는다. 자유시가 자동화, 인습화 되고 있는 것이다.   2. 자유시와 산문시  정형시는 시의 정통성을 지키는데 있다. 이런 정형성을 파괴하고 이탈하는 형태가 자유시와 산문시다.   자유시는 유기적 형식이라는 낭만주의 관점에서 유래한다. 주어진 형식의 틀에 내용이 담겨지는 것이 아니라 내용에 맞는 형식이 자연스럽게 형성된다는 것이다. 낭만주의 관점에서 형식은 아직 불확실하고 미규정적이다. 시람 삶의 과정과 상응해야 하고 의미(관념)가 경험의 과정 가운데 있기를 원한 낭만주의 詩觀에서 - 내용이 형식인 정형시처럼 - 일정한 형식이 미리 주어 있지 않았다. 자유시의 자유란 - 운율, 행, 연의 규칙성에서 자유인 것이다.   산문시는 자유시를 지향하는 운동의 한 부분이다. 우리의 경우 육당의 , 춘원의 등 개화기 신체시에서 그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산문시가 자유시 운동의 일환으로 일어났다고 다 같이 전통 정형성을 파괴했다는 점에서 자유시와 산문시를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산문으로 씌어 진 이런 시는 일종의 잡종이다. 산문시는 짧고 압축됐다는 점에서 ‘詩的 散文’과 다르고, 행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자유시와 다르고, 보통보다 명백한 운율과 소리효과, 이미저리, 표현의 밀도를 갖춘 점에서 짤막한 산문의 토막과 다르다. 중간 운과 율격적 연속을 지닐 수도 있다. 자유시는 행(연)이 구성단위가 되지만 행 구분이 없는 산문시는 단락이 구성단위가 된다. 율격적 요소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 율격적 연속을 갖추어야 한다.   자유시나 산문시나 정형성에서 이탈한다는 점에서 비정통적이지만 엄격한 언어의 선택, 비유적 상징적 언어사용, 극적 수단과 표현의 밀도 등을 갖춘 점에서 시의 정통성에 닿아 있는 것이다.   3. 리듬의 현대적 의의   파운드(E Pound)는 시를 음악시, 회화시, 논리시로 구분했다. 음악시(melopoeia)는 음아적 성질을 통하여 직접적 호소력를 지니는 시고, 회화시(phanopoeia)는 시각적 이미지를 중시한 시고, 논리시(logopoeia)는 말의 이미지적 용법으로 이루어지는 아이러니컬한 특성을 지닌다.   현대시의 미학적 중심은 음악적 차원에서 시각적 차원으로, 지적이며 논리적 차원으로 변모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시에서 정서를환기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인의 하나는 시의 음악적 성격이다. 현대시가 이를 외면한다는 것은 감수성의 분리가 아니라 정서의 상실을 의미한다. 정서의 상실은 시를 소외 시키는 원인이 된다. 결국 한 편의 시는 리듬, 이미지, 의미의 3요소의 유기적 결합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15    시는 낯설음의 미학이다... 댓글:  조회:2407  추천:0  2017-11-15
시와 낯설게 하기 김동수(시인, 백제예술대학 교수) 1. 직관과 감동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란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러시아의 형식주의자쉬글로브스키(shklovsky)이다. 이는 낯익은(familiar) 기존의 습관을 파괴(de)하여 경험의 세계를 새롭게 인식케 하는데 있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일상 언어는 이미 익숙하고 진부하여 독자의 주의를 끌지 못한다. 그만큼 낯익고 낡은 언어라는 뜻이다. 그래서 시인들은 일상 언어로는 경험할 수 없는 낯선 언어, 곧 표현 형식을 다양하고 새롭게 시도하여 보다 신비롭고 새로운 감각을 일깨우고자 노력한다. 일상 언어는 내용 전달이 목적이지만, 문학 특히 시는 보다 짧은 시간에 감동을 불러 일으켜야 하는 간결ㆍ압축된 표현 형식이다. 그러므로 찰나의 움직임을 영원화하고 무한의 고요함을 찰나의 움직임으로 표현, 그러면서도 장황하게 서술하는 전체가 아니라 특수한 구성으로 압축된 전체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이처럼 독특한 언어 구성을 통해 시인들은, 단순한 듯하면서도 비약되고 평범한 듯하면서도 비범한 언어 형식으로, 사물을 새롭게 보면서 그 속에서 우주적 생명과 순일(純一)한 감동을 만나게 된다. 봄이 온통 벚나무 가지에 붙어 있다. 멀리서 보면 솜사탕을 꽂아 놓은 듯 가까이서 보면 팝콘을 튀겨 놓은 듯 봄이 온통 벚나무 가지에 다닥다닥 붙어 있다. -작자 미상 위의 시에서도 ‘봄이 온통/ 벚나무 가지에 붙어 있다.’고 낯선 표현을 하고 있다. 이는 현실 세계(actuality)에서 이루어지는 객관적 사실(fact)의 세계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주관적 해석과 느낌에 충실한 표현이다. 느낌, 그것은 어떤 대상을 총괄적으로 이해하는 지름길로서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는 정서적 바탕이 된다. 인간의 삶이란 객관적 사실보다는 그 사실을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이고 있느냐 하는 주관적 자세에 보다 큰 영향을 받게 된다. ‘봄(꽃)이 꽃나무 가지에 붙어(피어) 있다.’는 낯선 표현 또한 이러한 시인의 느낌에 충실한 표현이 아닌가 한다. 당신에게서 구겨진 물들이 걸어 나온다. -조연호, 「사라진 그녀들」 부분 난해한 듯한 이 싯구 또한 ‘당신이 얼굴을 찡그리며 울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시인은 이를 슬쩍 ‘구겨진 물(고통으로 일그러진 눈물)’ 그리고 ‘물들이 걸어 나왔다(눈물이 흘러 내렸다).’로 시적 변용(deformation)을 하면서 새로운 감동을 주고 있다. 이처럼 ‘낯설게 하기’란 갈 수 없는 길을 가고, 가능하지 않는 일들을 꿈꾼다. 그래서 그 길은 언제나 우리에게 낯설고 새로운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오솔길이 되기도 한다. 뻐꾸기가 울었다, 낭산을 도르르 말아 올린다. 경운기 끌고 탈,탈,탈 노랑나비 한 마리 오고 있다 노랑나비를 타고 온 낭산 하늘이 잠시 파르르 떤다. 무논에 콸콸콸 어린 봄이 재충전 되고 있다 왜가리 한 마리 진흙 묻은 자전거 타고 둑길로 오고 있다 뻐꾸기가 울었다, 둑길의 애기똥풀이 아장아장 봄나들이 간다, 낭산이 도르르 풀리고 있다 -김성춘, 「5월, 들」 전문 주객일체, 물아일체의 경지가 드러나 있다. 노랑나비가 경운기를 끌고 오기도 하고 농부가 노랑나비가 되어 탈탈탈 날아오르기도 한다. 이는 사람과 나비의 경계가 사라진 장자(莊子)의 물화계(物化界)와 다름이 아니다. 뻐꾸기가 커튼을 ‘도르르 말아 올리’자 한 폭의 그림처럼 낭산의 봄 풍경이 다가온다. 메말라 있던 무논에 간밤에 비가 내려 모처럼 ‘콸콸콸 어린 봄(물)’들이 재충전되면서 그 에너지가 퍼져 하늘도 ‘잠시 파르르 떤다.’ 저 둑길에선 흰 옷을 입은 키가 껑충하고 깡마른 그러면서도 허리가 굽은 늙은 농부, 그가 왜가리인지, 왜가리가 농부인지, ‘진흙 묻은 자전거를 타고 둑길로 오고’, ‘낭산이 도르르 풀리’면서 봄기운이 온 들녘으로 퍼져간다. ‘애기똥풀이 아장아장 봄나들이 가고’ 있다는 변주(變奏) 또한 물아일체를 배경으로 한 의인적 상상력이다. 이처럼 한 편의 시가 온통 은유와 의인법으로 낯설게 엮어져 신선한 감각과 충격으로 다가온다. 초여름 밤 무논에서 개구리들이 목청껏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소리로 엮은 새끼줄이 팽팽하다 갑자기 왼쪽 논 개구리들의 환호성 소리 폭죽을 터뜨린다 방금 오른 쪽 논의 개구리 소리줄이 왼쪽으로 기울었나 보다 -강명수, 「줄다리기」 전문 여름 밤 양 쪽 무논에서 울어대는 ‘개구리들의 울음 소리’를 시인은 ‘줄다리기’로 받아들이고 있고 있다. 이는 시적 변용(deformation)이요 또한 은유적 치환이다. ‘개구리 울음 소리’를 개구리 울음 소리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어떤 선입견도 없이 백지의 상태로 방임한 상태에서 만나게 되는 현상학적 환원이다. 그것은 경험적ㆍ객관적ㆍ과학적 인식의 세계가 아니라 판단 중지를 통한 선험적 태도로의 전회(轉回)에서만이 만나게 되는 순수, 곧 직관에 의한 순일(純一)한 감동의 세계가 아닌가 한다. 결국 시적 언어란 이처럼 순수 직관으로의 전회, 그리하여 기존의 언어와 관습적 인식에서 벗어나 사물을 얼마나 새롭게 인식하고 디자인(de+sign)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시인을 새로운 언어의 창조자요 디자이너(language designer)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2. 연기론(緣起論)적 인식과 상상력 시에서 흔히 보게 되는 반전(反轉)과 기상(奇想), 역설(逆說), 의인(擬人) 등, 곧 낯설게 하기의 배경에는 불교의 연기론적 인식이 그 기저에 깔려 있다고 본다. 예컨대, 구름이 비가 되고, 비가 내려 식물의 뿌리와 줄기에 스며들어 꽃이 된다. 그것이 열매가 되고 또 맛있는 과일로 익어가는 끊임없는 변전(變轉), 그것은 동일성(identity)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면 그리 놀라운 기상(奇想)도 반전도 역설도 아닌 순차적 변화 과정의 다른 이름들일 뿐이다. 하나의 동일선상에서 인연(因緣)에 따라 그때 그때 풀이 되고 나무가 되고 열매가 되어 형상(옷)을 달리하고 있을 뿐, 그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정체성(identity)에는 변함이 없다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구름이 과일’이 되고, ‘고통이 영광(No pain, no crown)이 되며, ‘침묵이 변해 말씀(Speech is the change of silence)’으로 변해가는 이러한 일련의 연속적 과정, 그러고 보면 현대시에서 ‘낯설게 하기’란 시적 변용은 결국 연기론의 변화 과정의 한 단계에 다름 아니라 하겠다. 이별은 새벽 3시다. - 박민규,「이별」 부분 ‘이별은 슬프다’. 혹은 ‘이별은 쓸쓸하다’가 아니고 ‘이별이 새벽 3시’라니, 참으로 낯설고 돌발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이를 좀더 그 속뜻을 짜분하게 음미해 보면 참으로 기가 막힌 은유가 아닐 수 없다. 박민규는 대학 1학년이다. 아마 사랑하는 여자 친구와 어느 날 갑자기 원치 않은 이별로 잠을 이루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 학생의 심리적 추이 과정을 헤아려 보면 ‘이별의 상처와 충격 - 잠을 이루지 못하고 - 날이 새도록 뒤척이며 괴로워 함 - 뒤척이며 괴로워하다 보니 어느새 새벽 3시가 됨- 새벽 3시처럼 앞이 캄캄하고, 아무도 없고, 나를 봐 주는 이 하나 없는 - 어둡고 적막한 마음’ 이었으리라. 이 같은 심리적 변모 과정의 흐름을 압축하고 줄이다 보니 ‘이별은 = 새벽 3시’라는 낯설고 신비로운 하나의 은유가 탄생하게 된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 「국화 옆에서」전문 이 시 또한 불교의 연기론(緣起論) 혹은 인연설(因緣設)에 기초하여 한 송이의 국화가 피기가지의 인과 과정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불교에서는 어떤 일이 발생한다고 할 때, 그것이 단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강한 힘을 부여하는 직접적인 인(因)과, 거기에 간접적인 힘을 보태는 연(緣)과의 상호 결합의 결과로 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는 국화 자체의 힘은 인(因)이 되고, 소쩍새 울음(봄), 천둥(여름), 무서리(가을) 등은 연(緣)이 되어 하나의 국화라는 결과물이 탄생되기에 이른다. 이들은 모두 국화의 개화에 참여하는 전 우주의 협동 과정을 상징하는 대유물(代喩物)이다. 이러한 우주적 협동 과정의 연기(緣起)를 통해 비로소 ‘국화 =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이라는 창조적 상징의 은유가 탄생되기에 이른다. 사나이 가는 곳 어디나 다 고향인데 (男兒到處是故鄕) 그 누가 오래토록 객수에 젖어 있나 (幾人長在客愁中) 한 번 큰 소리로 온천지를 뒤흔드니 (一聲喝破三千界) 눈 속에 핀 복사꽃도 흐드러져 날리네 (雪裏桃花片片飛) -한용운, 「오도송 悟道頌」 만해가 오세암에서 겨울 좌선할 때, 무슨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문득 깨치게 되었다는 오도송이다. ‘객지’가 ‘고향’이고, ‘눈 속’에서 ‘복사꽃’이 핀다. 이 또한 분명 기상(conceit)이고 역설이며 낯설고 이질적인 결합의 은유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우주적 질서와 선의(禪意)의 입장에서 보면 인생 자체가 하숙생이요, 나그네에 지나지 않는다. 봄에 피는 꽃도 실은 겨울의 눈 속에서 이미 배아(胚芽)되어 개화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라는 불교 연기론의 순환적 과정에서 깨치게 된 통찰의 세계라 하겠다. -전략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 이육사, 「절정」부분, '문장',1940 육사는 일제의 혹독한 탄압과 감시에 쫓겨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는’ 북방고원으로 내몰리게 된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서 조국 독립의 꿈을 꾼다. ‘강철 같은 무지개’, 그것은 차갑고 완강한 식민지 현실이며 동시에 그런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조국 독립의 꿈’을 꾸는 그의 확고한 의지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겨울이란 시련은 오히려 그의 이상을 실현해가는 토대가 되고 씨앗이 되기에 ‘겨울 = 무지개’라는 은유적 추론이 가능케 된다. 강철처럼 차가운 겨울, 하지만 그 겨울을 잘 참고 견디면 머지않아 봄의 무지개가 됨을 그는 우리에게 역설적으로 일깨워 주고 있는 것이다. =============== 김(동수)[이하 같음] 교수는 먼저 "예술의 최대 적은 매너리즘"이라고 단언하면서, "예술가는 끊임 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해야 하고 이 안에서 '낯설게 하기'가 나온다"고 말했다. 이어 '낯설게 하기'란 말은 곧 낯익은 기존의 습관을 파괴하여 새로운 경험의 세계를 새롭게 인식케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평범한 현상이라도 일상적 언어로 표현하지 않고, 표현방식과 형식을 달리하면 '낯선 것'이 나오고, '낯선 것'은 곧 '새로운 것'으로 생명을 가진 문학이 된다는 뜻이다. 김 교수는 "일상 언어는 내용 전달이 목적이기 때문에 전달 형식, 매개 수단이 그리 중요하지 않지만 문학 그중에서도 특히 시는 그 전달 매체인 언어가 곧 생명이기 때문에 형식이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또 "사람은 같은 사람인데 옷과 머리모양이 달라지면 다른 사람으로 보인다"며 "글 역시 은유법, 직유법 등 그 표현에 따라 내용까지도 다르게 느껴진다"고 주장했다. 형식의 새로움이 내용의 새로움, 곧 감동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당신에게서 구겨진 물들이 걸어 나온다'는 시구절을 소개하면서 "일상적 표현으로 한다면 '당신이 얼굴을 찡그리며 울었다'는 내용이 된다"며 "일상적 표현을 탈피하기 위해 은유적으로 변화를 시킨 '시적 변용(deformation)'을 이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시적 변용'과 '낯설게 하기'란 갈 수 없는 길을 가고, 가능하지 않을 일들을 꿈꾸는 언제나 우리에게 낯설고 새로운 전인미답의 오솔길이 된다고 표현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강의를 듣는 이들에게 디자이너가 될 것을 주문했다. 이에 대해 "결국 시적 언어란 기존의 언어 전달 방식에서 벗어나 얼마나 사물을 새롭게 인식하고 새롭게 언어를 디자인하여 전달하느냐에 달려 있다"며 "이런 의미에서 시인을 언어 디자이너(language designer)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김 교수는 강의에 앞서 "바쁜 일상 속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 어렵다"며 "전에는 '이 시가 좋다' 또는 '나쁘다' 평가를 했지만 이제는 시를 쓰는 그 마음만으로도 고맙다"고 말해, 문학적 여유를 즐길 수 없는 세태에 대한 씁쓸함을 표했다. 그러면서 "원문협이 문학으로써 메마른 사회에 단비와 같은 역할을 하기를 바란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14    시인은 무대(시)뒤에 숨어버린 감독이여야... 댓글:  조회:2200  추천:1  2017-11-15
민속촌에서 어르신들이 초가지붕에 이엉을 얹고있다... 예전에 고향에서 할아버지, 아버지도 이엉을 얹던 모습이 지금 이 시각 그리워남은 또,ㅡ  시와 이미지(Visual Image)  시는 개념으로 생각하고 시각적 이미지로 느낀다. 러시아의 형식주의자 쉬클로프스키(V.Chklovski)도 ‘예술의 목적은 대상의 감각을 인식이 아니라 이미지로 부여하는 것이다.’고 했다. 시는 이처럼 관념 혹은 감정의 진술이 아니라 어떤 사상(事象)을 그림을 그리듯 이미지로써 상황묘사(描寫)하는 노력에서부터 시작된다. 마치 화가가 되기 위해 데상(dessin)에서부터 미술 공부를 시작하듯 묘사(描寫)는 습작기에 반드시 거쳐야할 소중한 시창작의 바탕이 된다.  그러기에 시인은 감독처럼 무대(시) 뒤에 숨어버리고 대신 시인이 제시한 객관적 상관물을 통한 이미지 제시로써 독자를 울려야 한다. 배우가 먼저 웃는 코미디가 없듯 시 속에서 독자보다 시가 먼저 울어야 되겠는가? “시가 스스로 울음으로써 독자를 먼저 울리려고 하는 시가 있다. 그런 경우 우리는 그러한 치기(稚氣)를 웃을 수밖에 없다.”는 김기림의 지적은 이런 의미에서 새겨볼 만하다.  * 객관적 상관물(objective correlative)  T.S 엘리어트가 주장한 시작(詩作)의 한 방법. 표현하고자 하는 어떤 정서나 사상을 그대로 나타낼 수 없으므로 그것을 대신 나타내주는(그것과 닮아 있는) 어떤 객관적 사물, 정황, 혹은 일련의 사건들을 선택하여 그것들을 유기적으로 결합해 놓음으로써 독자의 정서를 자극하는 표현기교.  1. 시는 이미지에 의한 정서적 환기다.  시인이 ‘외롭다’거나 ‘불안하다’는 심정을 전달하고자 할 때, 이를 직접적으로 ‘외롭다, 불안하다.’ 라고 진술하거나 토로할 것이 아니라 ‘외로움’과 ‘불안’의 정서를 자아낼 수 있는 상황을 구체적으로 그려(제시하여)줌으로써 ‘외로움’과 ‘불안’의 정서가 효과적으로 유발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는  *이 아니라 →   o. 그 여자는 예쁘다. → 그 여자는 모란꽃처럼 탐스럽다.  추상적 설명 구체적 감각(Visual 이미지)  o. 그는 성질이 냉정하다 → 그는 성질이 칼날이다.  추상적 설명 그림(Visual 이미지)  o. 나는 지금 나는 지금  몹시 불안하다. → 무너지는 절벽 위에 서 있다.  추상적 설명 구체적 상황(Visual 이미지)  o. 나는 외롭다. → 널따란 백사장에  추상적 설명 소라  오늘도 혼자랍니다. (구체적 상황제시)  2. 대상(對象)은 이미지로 인식한다.  -추상이나 개념보다 이미지가 앞선다.-  우리가 ‘어머니의 사랑’이란 단어를 떠올릴 때, 우리의 머리 속에 먼저 떠오른 것은 과거 경험 속에서 몸소 체험했던 그 어떤 구체적 영상 이미지가 클로즈업 되면서 비로소 ‘어머니의 사랑’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예1) ‘어머니는 고맙고 사랑스런 분이다 ’  - 추상적 관념적 시어로서 구체적 체험의 재현이 없으므로 별다른 감동이 없다.  예2) ‘겨울날 학교에서 친구와 돌아오는 길에 길가에서 생선을 팔고 계시는 어머니’  - 구체적이고도 감각적인 영상 이미지가 재현됨으로써 우리를 위해 온갖 수모와 희생을 감수하시는 어머니상을 느끼게 된다.  예3)  들녘이 서 있다.  밤새 한숨도 못 잔 얼굴로  부시시  그러다 못해  앙상하게 말라버린  날카로운 촉수로  굳어버린 우리의 겨울은  보이지 않은 우리의 겨울은  차가운 들녘 위에  영하의 긴 침묵으로  꼿꼿이들 서 있다.  -김동수의 「겨울나기」, 1986년  자신이 처한 현실적 불행 상황을 ‘겨울’의 다양한 감각적 이미지로 형상화(形象化) 하여 독자들에게 그의 불행한 처지를 호소력 있게 전달해주고 있다.  겨울’이라고 하는 일반적 추상 의미가 흐릿한 관념의 틀 속에 가려(갇혀) 있지 않고 그가 맞고 있는 겨울이 보다 구체적이고도 생생한 현장감(Presence)으로 드러나 있다. ‘밤새 한잠도 못 잔 부시시한 얼굴’이거나, ‘앙상하게 말라버린 날카로운 촉수’, ‘영하의 긴 침묵’, 그러면서도 ‘꼿꼿이 서 있는’ 그러나 ‘보이지 않는 우리의 겨울’등 의인적 시각 이미지가 부정과 실의의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눈 감지 않는 오기와 집념으로 생동감 있게 살아 있다.  이처럼 관념, 개념, 사상 등도 정서와 더불어 시의 주요 내용이긴 하나 이것들이 감각적. 구체적으로 형상(이미지)화되지 못하면 예술적 감동이 죽거나 감소되고 만다.  예4)  무릎 앞의 소유는  모두 껴안고도  외로움의 뿌리는 깊어  사람이 부르면  날짐승처럼 운다.  어느 가슴을 치고 왔기에  사람이 부르면  하늘에 들리고도 남아  내 발목을 휘감고야  그 울음 그치나  -최문자의 「산울림」에서  자칫 관념적이고 상투적 인식에 그치기 쉬운 산울림(메아리)에 대한 개인적 인식의 정도가 남달리 개성적이고 치열하다. 활유법에 의한 역동적 표현, 그러면서도 이를 응축된 정서적 시어로 탄력 있게 이미지화 하여 외롭고 허망한 산울림의 내면적 속성을 호소력 있게 전달하고 있다.  3. 관념의 형상(이미지)화  추상적 관념을 소재로 하는 시에 있어서 관념어(사랑, 그리움, 슬픔 ....,)을 그대로 설명하거나 진술하는 것이 아니고, 한 폭의 그림을 보듯, 혹은 현장감 있게 구체적 이미지를 통해서 실감나게 표현(시각화, 청각화 등)하고 있는 것이 관념의 형상(이미지)화이다.  그러나 형상화는 단순히 겉모양을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안고 있는 본질적 특징이나 상징적 사건을 중심으로 시대적 풍경화를 포착하였을 때 시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 곽재구의 「沙坪驛에서」중에서  행상(行商)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막막하고 고달프게 살아가고 있는 변방인(서민)들의 고달픈 일상과 그 표정들을 ‘막차’, ‘간이역’, ‘밤새 퍼붓는 눈’, ‘톱밥 난로’, ‘대합실에서 졸고 있는 사람들’, ‘기침에 쿨럭이는 사람들’,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 등의 객관적 상관물(客觀的相關物)에 의해 꼼꼼하게 그려주고 있다.  출렁일수록 바다는  頑强한 팔뚝 안에 갇혀버린다. ---------절망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이미지화  안개와 무덤, 그런 것 속으로  우리는 조금씩 자취를 감추어 가고 --------존재의 소멸  溺死할 수 없는 꿈을 부등켜 안고  사내들은 떠나간다.  밤에도 늘 깨어 있는 바다 ----------- 포기할 수 없는 꿈  소주와 불빛 속에 우리는 소멸해 가고 --------- 존재의 소멸  물안개를 퍼내는  화물선의 눈은 붉게 취해 버린다. ------- 포기할 수 없는 꿈에 대한 안타까움  떠나는 자여 눈물로 세상은 새로워진다 ---극적전환(형이상학적 깨달음)  젖은 장갑과 건포도뿐인 세상은 ------을씨년스럽고 건조한 현실상황  누구도 램프를 밝힐 순 없다  바닷가 기슭으로 파도의 푸른 욕망은 돋아나고 -- 꿈에 대한 새로운 의지  밀물에 묻혀 헤매는  게의 다리는 어둠을 썰어낸다 ----------- 현실극복을 위한 행동개시  어둠은 갈래갈래 찢긴 채  다시 바다에 깔린다.  떠나는 자여  눈물로 세상은 새로와지는가 --‘눈물’을 통한 새로운 세계의 확신  우리는 모든 모래의 꿈을  베고 누웠다  世界는 가장 황량한 바다 -------- 그러나 아직 삭막한 현실상황 재인식  - 윤석산, 「바닷속의 램프」에서  절망적 상황에 갇혀버린 자신의 우울한 심사를 ‘출렁일수록 바다는/완강한 팔뚝 안에 갇혀버린다 ’거나 ‘어둠은 갈래갈래 찢긴 채/ 다시 바다에 깔린다.’ 혹은 ‘모래의 꿈을/ 베고 누워 있다.’등의 구체적 형상의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가 한 편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시인의 자기 고백이 아니라 시인이 제시한 시적 정서에 젖어들고 싶어함이다. 이는 한 편의 시가 시인의 주관적 감정의 발로이지만 그가 제시하고자한 그 주관적 감정을 향수하기 위해선 독자가 공유할 수 있도록 객관정서로의 제시 장치, 곧 객관적 상관물(objective correlative) 을 통한 주관적 감정의 객관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4. 좋은 이미지란?  1. 신선하고 독창적이다.  2. 차원이 높고 깊이가 있다.  3. 주제와 조화를 이루며 이미지들 간에 상호 유기적 상관성이 있다.  4. 이미지가 체험과 관련되어 구체적이고도 감각적이다.  6. 강한 정감을 불러일으키는 환기성(喚起性)이 있다.  5. 이미지 창조의 방법  1.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볼 때 새로운 진실이 발견된다.(deformation)  2. 시는 실제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시인의 철학적 인식에 의해 선택된 주관적 감정이다.  3. 이미지가 시의 정서를 표현하는데 기여하지 않다면 과감하게 그것을 버려야 한다.  4. 불필요한 낱말이나 형용사는 가급적 쓰지 말 것. 그것들이 추상과 구체를 뒤섞으면서 이미지를 둔화시키기 때문이다.  5. 진정한 이미지는 부분적인 한 行, 한 句보다도 ‘시 전체의 그림’ 속에서 그 가치가 발휘되는 것이다  6. 이미지의 종류  1) 시각적 이미지  [대상을 - 시각적 이미지로]  o. 구름은 보랏빛 색지(色紙) 위에  마구 칠한 한 다발의 장미(薔薇) - (김광균의 )  * 구름 = 보랏빛 색지/ 한 다발의 장미  o. 초록 치마를 입고  빠알간 리본 하나로 서 있는 少女 -(박항식의 )  * 코스모스 = 빨간 리본의 소녀  [청각을 - 시각적 이미지로]  o.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 (김광균의)  * 종소리 = 흩어지는 분수  o. 꽃처럼 붉은 울음 -(서정주의 )  * 울음 =붉은 꽃  [관념을 - 시각적 이미지로]  o. 인생은 풀잎에 맺힌 이슬 (인생 = 이슬)  o. 그리움이란  내가 그대에게  그대가 나에게  서로 등을 기대고 울고 있는 것이다.  * 그리움= 등을 기대고 울고 있는 모습  o. 내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가도 그림자 지는 곳 - (김광섭의 )  * 마음 =고요한 물결  o. 내 마음은 촛불이요  그대 저 문을 닫아주오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최후의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라. - (김동명의 )  * 마음 =흔들리는 촛불  2) 청각적 이미지  [사물을 - 청각적 이미지로]  o. 워워, 꼬끼오, 짹짹, 졸졸, 돌돌  o. 윙윙, 쏴아아 쏴아-, 주륵 주륵  [상황을 - 청각(공감각)적 이미지로]  o.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정지용의 )  *차가운 밤바람 소리 = 말 달리는 소리  o. 우우 몰려 왔다  포말(泡沫)지는  하얀 새떼들의 울음 -(김동수의 )  *물거품 사그라지는 소리 = 새떼들의 울음  [시각을 - 청각적 이미지로]  o. 피릿소리가 아니라  아주 큰 심포니일거야 -(박항식의 )  * 눈 = 심포니  o. 발랑 발랑 발랑 발랑  조랑 조랑 조랑 조랑 - (박항식의 )  * 포풀러 = 발랑 발랑  [관념을 - 청각적 이미지로]  o. 산이 재채기를 한다. - (박항식의   * 청명 = 재채기  *청명: 춘분과 곡우 사이에 있는 24절기의 하나(양력 4월 5. 6일 경)로 봄이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됨.  o. 어쩌다 바람이라도 와 흔들면  울타리는  슬픈 소리로 울었다. -(김춘수의 )  * 부재= 슬픈 소리의 울움  ===================================================================     ―정재학(1974∼ ) 바다에 가라앉은 기타, 갈치 한 마리 현에 다가가 은빛 비늘을 벗겨내며 연주를 시작한다 소리 없는 꿈…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지만 부끄러워져 당분간 손톱을 많이 키우기로 마음먹는다  백 개의 손톱을 기르고 날카롭게 다듬어 아무 연장도 필요 없게 할 것이다 분산(奔散)된 필름들을 손끝으로 찍어 모아 겹겹의 기억들 사이에서 맹독성 도마뱀들이 헤엄쳐 나오도록 할 것이다 달의 발바닥이 보일 때까지 바다의 땅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나도 나의 사정거리 안에 있다 네가 고양이처럼 예쁜 얼굴을 하고 딸꾹질을 하고 있는 동안 나는 보라색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생선이 되어 너의 입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아무 미동도 없이, 고요하게 어른이 되고 싶었다       화자에게 삶은 음악의 형상으로 전해지고 그 연주가 삶의 형식이다. 화자 자신이기도 하고 화자가 생을 표현하는 도구, 가령 시이기도 한 기타. 그 기타 바다에 가라앉아 버렸단다. 아연실색 망연자실이련만 ‘현에 다가가’는 화자다. 한 마리 갈치가 되어서라도 기타를 버리지 않고 전신으로 ‘은빛 비늘을 벗겨내며 연주를 시작한’단다. 하지만 역시 ‘소리 없는 꿈’,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망가진 악기, 망가진 삶. 무엇이 화자를 이런 악몽에 처하게 했을까. ‘네가 고양이처럼 예쁜 얼굴을 하고 딸꾹질을 하고 있는 동안’, 이 구절의 ‘너’는 예쁘고 앙큼한 어떤 여인이거나 그 여인으로 의인화한 이 사회다. 딸꾹질하는 그녀는 만취한 걸까, 격렬하게 울고 있는 걸까. 어쩌면 그녀는 대화할 의사가 없음을 딸꾹질로 교묘히 숨기고, 혹은 드러내는 것인지 모른다. 아무튼 그녀가 딸꾹질을 해대는 ‘동안’ 화자는 ‘보라색을 뚝뚝 흘리고 있었’단다. ‘보라색’은 세상이든 자기 자신이든 가리지 않고 파헤치고, 가차 없이 채찍질하고 담금질하겠노라 맹세하는 둘째 연에 붙으면 피 같은 선율이 되고, ‘생선이 되어 너의 입속에 들어가고 싶었다/아무 미동도 없이,/고요하게’에 붙으면 나약한 눈물이 되리라. 영국의 작곡가이며 색소폰 연주자 존 서먼의 곡목에서 딴 제목이다. ‘어른이 되고 싶었다’…. 4월 16일, 오늘의 궂은 날씨만큼이나 마음이 안 좋다. 이만 줄여야겠다.
13    시인은 조탁능력이 있는 연금술자가 되여야... 댓글:  조회:2012  추천:0  2017-11-15
■ 시인이 싸워서 이겨야 할 것들 환경에 적응하며 살다보면 '콩은 밭에서 나고, 고기는 물에서 난다'라는 공식 비슷한 것이 우리의 뇌에 입력된다. 이런 관습이 모여서 덩어리를 이루는데 바로 고정관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는 이미 굳어진 예전의 생각에서 조금씩 이탈하는 가운데 발전을 지속 하여온 역사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옛사람들은 예전의 생각을 씻어내어 새로운 생각을 부른다는 뜻의 '탁거구견 이래신의(濯去舊見 以來新意)'해야 발전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 말은 지금도 유효하고, 특히 시를 쓸 때는 너무나도 필요한 생각인 것이다.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점점 파도의 속삭임에 익숙해지면 그 소리에 감동하지 않는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우리들이 말하는 내용이 이미 알고 있는 친숙한 것일 때는 그 말에 사람들은 귀 기울이지 않는다. "낯익은 사람끼리는 서로 바라보지만(look) 서로를 주의 깊게 쳐다보지(see)않는다" 이 말은 유명한 형식주의자이면서 시의 문학성(文學性/literariness)을 낯선 이미지의 구조로 보는 그 유명한 '낯설게 만들기'의 주창자인 러시아의 쉬클로프스키(V. Shklovski)의 시론이다. 그는 '언어의 친숙화는 가장 비시적(非詩的)인 것'으로 규정하였다. 나는 그동안 기회있을 때마다 우리의 고정관념을 탈피한 낯선 언어로 시를 쓰자고 강조한바 있다, 반면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거나 누구에게나 친숙한 것들은 시를 맹물로 만드는 주범이라고 지루하리만치 강조하여 왔다. 그러나 우리 시사모에 올라오는 글들을 보면 아직도 이 기초적인 시작법을 이해하거나 익히지 못한 것인지 그리움타령, 사랑타령, 꽃타령, ~하노라 등의 고어체나 교조적, 지시적, 확정적인 옛 시인들의 시풍을 흉내내는 글이 많다. 시인이 대항해서 투쟁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친숙함과 일상의 고정관념을 이기는 일이다. 상투적 표현과 습관적 문맥에 치명적 일격(致命的 一擊/coup degree)을 가해서 심미안(審美眼/아름다움을 살필 수 있는 안목)으로 새로운 결(texture)을 만드는 작업이 '시짓기'인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도 중요하여 다른 말로 다시 강조한다. 시짓기의 목적은 사물들이 알려진 그대로가 아니라 새로운 감각을 부여하는 것이고, 우리의 행동, 개념, 물체 등이 지닌 특성을 그것과 다르거나 상관없는 말로 바꾸어서 간접적이며 은유적으로 나타내어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시 짓기의 가장 기초적 작법인데 영어로 메타포(metaphor)라고 한다. 위와 같은 언어의 용법은 무카로프스키(J. Mukarovsky)에 의해 체계화된 전경화(前景化/foregrounding)로 설명되기도 한다. 전경화란 탈선(脫線/deviation) 즉 규칙과 인습에 대한 위반이라는 개념으로 해석된다. 즉 일상적인 언어들은 배경화(背景化/back grounding)하고 낯선 시어들을 전면에 제시(전경화)하는 작법이다. 이것은 언어의 조탁능력(彫琢能力)이기도 하다. 언어가 잘 조립되어야 시(詩)가 완성되는 것임은 두 말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언어 조탁시 참고할 네 가지 1, 감동이 있어야 하고, 2, 말의 품격이 있어야 하며, 3, 시대를 읽을 줄 알아야 하며, 4, 시인의 진술이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는 쓴 커피와 같다. 쓴 커피를 처음 마셔본 사람들은 '이런 것을 왜 마시지?'라는 의구심이 들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커피를 마시다 보면 커피의 맛을 알게 되고, 더 좋은 향이 나는 커피를 찾게 되는 것이다. 시도 그렇다. 시의 깊은 맛을 모르는 사람은 언어를 새롭게 하거나, 언어의 조탁에 필요한 요소들을 무시한다. 그들은 달고 목으로 넘기기 좋은 시를 선호한다. 그런 시가 좋은 시라고 가르치는 사람들도 의외로 많다. 물론 그런 시 중에 좋은 시도 있다. 그러나 현대시가 추구하는 시작법과 조탁능력을 기르지 않으면 깊이있는 시를 쓰기가 쉽지않다. 그런 사람들에게 시의 가벼움을 지적하면 오히려 대들기도 한다. 이것은 마치 언어의 정화능력이 없는 어린아이들이 비속어로 대화하는 것을 나무라는 어른에게 대드는 것과 같다. 자기들끼리 잘 통하고 재미있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항변한다. 이런 사람들은 불량식품 같은 시를 쓸 가능성이 많다. 또한 언어의 조탁능력이 있는 시인이 아무리 좋은 시를 썼다고 할지라도 삶이 엉터리인 사람, 인격이 피폐한 사람은 시 만드는 기술자(글쟁이)이지 시인이 될 순 없다. 그 시는 공허한 것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우리나라 시의 정부(政府)라고 일컬음을 받는 서정주 시인이 잠깐의 엇길 행각으로 인해 그의 시를 공허하게 보는 사람이 많은데 하물며 삶이 제대로 받혀주지 못하는 사람이 쓴 글이랴. -이어산,
12    "은유는 폭력적 언어, 환유는 저항적 언어" 댓글:  조회:2883  추천:0  2017-11-15
비유란 무엇인가 수사학인가 철학인가 수사학과 비유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문화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는 원시인과 문명인의 언어체계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말한다. 원시인들은 유추적이고 은유적으로 생각하는 반면, 문명인들은 논리적으로 생각한다. 비유는 어떤 구실을 하는가 -인간의 정신은 한 사실에서 다른 사실로 갑자기 비약하는 데에서 적지 않은 기쁨과 즐거움을 느낀다 -비유는 관념을 생생하게 그리고 힘있게 만드는 구실을 한다. -비유는 어떤 진술을 전보문처럼 압축하거나 응축하여 짧게 표현하는 기능을 맡기도 한다. -비유는 이질적인 것에서 유사성을 찾아내어 무질서와 혼돈에 질서와 통일성을 부여해준다. -비유는 이 세계를 바라보는 습관적 방법을 깨뜨려 새롭게 보도록 해주기도 한다. (낯설게 하기, 소격효과, 전경화) -비유는 기존의 말에 새로운 의미를 덧붙이거나(언어 생성) 그 의미를 좀더 뚜렷하게 드러낸다. -비유는 인습적인 생각을 더욱 굳건히 다지기도 한다. 한 사회의 지배 집단의 이데올로기에 복무한다. -비유는 진실을 드러내기는 커녕 오히려 그것을 감추거나 숨겨버리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비유와 세계관 -비유에 대한 두 가지 태도 : 1) 단순히 글이나 말을 아름답고 화려하게 꾸미는 장식으로 보려는 태도 2) 진리를 좀더 뚜렷하게 그리고 논리적으로 전달하는 도구로 보려는 태도. -최근에 이르러서 비유를 아예 이 세계를 인식하는데 꼭 필요한 도구로 보려는 태도가 널러 퍼져 있다. (인식론적 관점) ※ 폴 드 만 “개념의 인식론적 함축을 깨닫게 되지마자 개념은 곧 비유가 되며 비유는 곧 개념이 된다.” -비유는 인생관이나 세계관과 맞닿아 있다. 어떤 진술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인생관이나 세계관을 드러내는 역동적인 구실을 맡는다. -비유는 궁극적으로 인식론과 맞닿아 있다. 실재를 그저 묘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서 실재를 깨닫게 하고 그것을 변화시키는 구실을 맡는다. 비유는 세계를 비추는 거울(의미의 생성)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유리창(의미의 해석: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은유란 무엇인가 언어학자는 은유를 어떻게 보는가 -통사론 노엄 촘스키 '통사규칙론' : 은유는'선택제약(한 어휘 항목이 다른 어휘 항목과 결합하는 방식을 규정하는 규칙)을 어긴 것 ex)'색깔 없는 푸른 관념'' -화용론 폴 그라이스 '대화 격률 이론' : 은유는 협조의 원리 가운데 '질의 격률'을 어긴 것 -그러나 최근 화용론의 적합성 이론에서는 축어적 해석과 은유적 해석을 이분법적으로 보지 않는다. “은유를 비롯한 수사적 표현은 순전히 일반적 차원의 언어 용법을 창조적으로 활용한 것… 은유란 언어적 의사 소통에서 사용하는 아주 일반적인 몇몇 능력과 절차의 자연스런 결과일 따름이다.”   은유를 어떻게 이론화할 수 있는가 1) 치환 이론 2) 상호작용 이론(화학 작용) : 이미 존재해 있는 유사성을 공식화하기보다는 오히려 유사성을 창조, 삶의 실재를 구성 3) 개념 이론 : 은유를 개념적 관점에서 살핌. 개념 체계는 본질적으로 은유적 성격을 지닌다. 터너 “은유가 단순한 언어 문제라기 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모든 사고와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 근본적인 인지방식이며 수사학의 역할을 바로 인지과학의 역할에 지나치 않는다.” 4) 맥락 이론 : “은유가 일어나는 맥락과 그 은유를 사용하는 장본인이 누구인지 모르고서는 그 은유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하게 말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은유란 개별적인 낱말이나 구 또는 문장의 차원을 뛰어넘어 를 구성하는 필수요소이다. 은유는 맥락에 따라 그 의미를 결정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은유를 가능하게 하는 맥락을 결정짓기도 한다.   은유는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는가 -은유는 본질적으로 한 대상이나 개념을 다른 대상이나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경험하는 비유법이다. -은유에서 의미의 전이는 어디까지나 서로 다른 두 개념 영역 또는 의미 영역 안에서 일어난다. (서로 다른 두 층위) -축어적 관념과 비유적 관념 사이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은유의 힘은 훨씬 더 강하다.   은유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1) 명사 은유 2) 형용사 은유 3) 부사 은유 4) 동사 은유   은유에는 어떤 갈래가 있는가 -은유는 축어적 관념과 비유적 관념이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느냐 묵시적으로 드러나 있느냐에 따른 흔히 네 형식으로 나눈다.   직유와 은유 사이 -직유는 은유보다는 오히려 환유에 더 가깝다고 볼 수도 있다.       환유란 무엇인가 환유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 몇몇 인지학자들은 은유보다 환유에 훨씬 더 큰 무게를 싣는다. 인간의 언어, 사고, 태도 그리고 행위의 구조를 밝히는데 환유가 은유보다 더 걸맞기 때문이다. 일상 언어 생활에서 은유보다 환유가 더 많이 그리고 자주 쓰인다. 인지학자들은 환유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인지모델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은유인가 환유인가 -움베르트 에코는 심층적 면에서 보면 은유와 환유가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모든 은유는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부호 체계를 구성하고 부분적이건 전체적이건 모든 의미장의 구조가 기초하는 일련의 환유적 연관성을 만난다.” -은유의 상호 작용 이론도 이 두 비유의 연관성을 전제. 축어적 관념과 비유적 관념 사이에 상호 작용이 일어난다는 것은 이미 이 둘이 환유적 관계를 맺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환유는 어디까지나 같은 의미 영역이나 개념 영역에서 일어난다. -은유가 한 사물을 다른 사물의 관점에서 말하는 방법이라면, 환유는 한 개체를 그 개체와 관련있는 다른 개체로써 말하는 방법이다. 은유의 기능이 주로 사물이나 개념을 이해하는 데 있다면, 환유는 사물이나 개념을 지칭하는 데 그 기능이 있다. ... 이해를 돕는 은유와는 달리 환유는 일치적으로 지시적 기능을 갖는다. -만약 환유에서 한 관념이 자신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다른 관념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간다면, 그 개념은 환유로서의 자격을 버리고 은유로 바뀐다.   환유는 어떤 특성을 지니는가 -은유는 유사성에 의존한다면 환유는 인접성에 의존한다. -은유와 환유는 인식 작용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 만큼 인간의 사고와 태도 그리고 행동에 큰 영향을 끼친다. 특히 환유는 사물과 사물 사이의 관계를 통하여 그 사물을 개념화하도록 해준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환유는 다분히 비인간적인 태도를 드러낸다. -환유는 물리적이고 인과적인 관계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환유로 쓰이는 대상은 인간의 구체적인 경험과 아주 깊이 연관되어 있다. ... 흔히 추상적 느낌이 드는 은유와는 달리 환유는 훨씬 더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언어학자는 환유를 어떻게 보는가 -환유 모델이야말로 '이상화된 인지 모델'. 풍부한 개념 체계에서는 추론하거나 판단을 내리기 위하여 범주의 한 구성 요소나 하위 범주로 범주 전체를 나타낼 수 있는 수많은 환유 모델이 존재한다. ※ 활성역-윤곽, 생략된 변형   환유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환유란 한 사물이나 개념을 그것의 속성을 가지고 있거나 그것과 연관되어 있는 다른 사물이나 개념의 이름으로 부르는 수사법을 말한다. ... 이러한 현상을 인접성. 1) 장소로써 기관, 2) 장소로써 사건, 3) 부분으로써 전체(제유), 4) 제조자로써 제품, 5) 제품으로써 사용자, 6) 통제자로써 피통제자, 7) 기관으로써 책임자   환유에는 어떤 갈래가 있는가 -명사로 되어 있는 환유가 가장 많다   환유와 제유 사이 -제유란 부분으로써 전체를 나타내거나(확대지칭 원리) 이와는 반대로 전체로써 부분을 나타내는(축소지칭 원리) 비유법이다. -제유에는 인간의 신체와 관련한 것이 의외로 많다.       은유의 정치학, 환유의 정치학 은유와 환유의 가능성 은유와 환유의 특성 은유- 환유 계열- 통합 내적 유사성- 외적 인접성 선택- 결합 치환- 맥락 인접성 장애- 유사성 장애 연극- 영화 몽타주- 클로즈업 꿈의 상징- 꿈의 응축과 치환 초현실주의- 큐비즘 운문- 산문 서정시- 서정시 낭만주의- 고전주의 상징주의- 리얼리즘 모더니즘- 포스트 모더니즘 가부장 담론- 페미니즘 담론   은유와 환유의 정치학 은유와 환유의 역사 철학적 입장 은유- 환유 보편성, 일반성- 특수성, 개별성 동일성- 차별성 유추, 유사성- 연상, 인접성 심층적 논리- 구체적 역사적 사건과 상황 외부 실재와 유리- 외부 실재와 연관 언어적, 개념적- 실재를 지칭 본질을 지향- 우발적, 우연적 필연성- 우연성 총체성- 파편성   은유와 가부장 담론 -은유와 환유의 두 축은 언어 행동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행동에 걸쳐 두루 나타난다. -한 문학 텍스트를 어떠한 비유에 초첨을 맞주어 읽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크게 달라진다. 다시 말해서 은유적으로 읽으면 의미의 보편성에 주목하게 되는 반면, 환유적으로 읽으면 보편성보다는 개별성과 특수성에 주목하게 된다는 것이다. (※ 바바는 제국주의나 식민주의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포스트식민주의 문학 텍스트를 읽을 때에는 은유적으로보다는 환유적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은유가 폭력의 언어인 것처럼 환유는 저항의 언어이다.    
11    [시문학소사전] - "구조주의"란?... 댓글:  조회:3240  추천:0  2017-11-15
구조주의   레비-스트로스 Claude Levi-Strauss 1908년 11월 28일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태어났다. 파리대학교의 소르본느 대학에서 법학과 철학을 공부하였다. 1935년부터 1939년까지 브라질의 상파울로대학에 사회학교수로 가 있는 동안 인류학에 관심을 갖게 되고, 아마존상류의 원주민들을 연구하였다. 1941년부터는 미국으로 망명하여 뉴욕의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에서 1945년까지 강의하였다. 이 때 로만 야콥슨을 만나 구조언어학의 영향을 받게 된다. 1948년 파리대학에서 친족의 기본구조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50년 방글라데시와 버마 인도를 방문하고, 그 때까지의 인류학적 현지조사를 포괄적으로 회고 정리한 것을 1955년 [슬픈 열매]로 발표한다. 1958년 [구조인류학], 1962년 [오늘의 토테미즘], [야성적 사고]등의 저서를 내어놓게 된다. 여기서 그는 인간의 원시사고를 연구하고는 원시인이 뒤떨어졌다고 보는 것이 잘못된 생각이라고 주장했다. 현대의 문명인의 업적을 훨씬 능가하는 발명과 행동을 소유하고 있다고 보았다. 원시인의 신화는 자기들의 지식 정보를 정리하고 보관하는 기제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사상은 원시인의 개념적 사고 구조에 있어서 현대인과 다른 류의 것으로 공리적이고 이론적이며 복합적이고 과학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원시심성과 현대심성간에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언어학을 사회과학에 있어서 가장 정밀과학으로 보고 있다. 그의 사상의 출발은 마르크시즘과 프로이트, 그리고 지질학이라고 밝힌 바와 같이, 현대사상의 핵심을 신화연구를 통해서 인간사고의 무의식의 구조를 밝히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동양사상의 기초는 구조주의적이라고도 하였다.1971년 [신화학 서설]을 지었다. -역사를 움직인 100권의 철학책 p.207~  * 이론(Theory): 그리스어 Theoria에서 나옴.  바라보다, 관찰하다,사색하다 라는 의미. 또한 극장 관객 (Spectator)이 되다. 라틴어 specere에서 나옴. 검사하다, 바라보다, 투기 (Speculation
10    글쓸 때 시집을 한쪽켠에 놓고 글써라... 댓글:  조회:2732  추천:0  2017-11-15
  ▲  고종석의 글쓰기 강좌       고종석의 한국어 글쓰기 강좌 1권, 2권 읽기... "좋은 글은 명료합니다. 그리고 아름답습니다. 명료하고 아름다운 글이 좋은 글입니다." 저자는 명료하고 아름다운 글의 대표적 사례로 김현 선생의 '말들의 풍경을 시작하며'라는 글을 추천합니다. 저자는 자신이 진행하는 한국어 글쓰기 강좌에서 김현 선생의 글을 독자들과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단순히 좋은 글을 읽은 소감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말들의 풍경을 시작하며'를 마치 해부학 실습을 하듯이 한 문장 한 문장씩 끊어서 내용과 형식을 자세히 파악하고 명료함과 아름다움의 사례를 살펴봅니다.  섬세한 글을 쓰고 싶으면 '시'를 읽어라 ...글쓰기 팁 중 하나는 '시를 읽어라'와 '사전을 곁에 두고 활용하라'입니다. 간단히 요약하면 먼저 '시를 읽어라'는 섬세한 글을 쓰려면 시를 읽는 것이 좋다는 겁니다.  "시인들은 소설가나 에세이스트 같은 산문가들보다 말을 고르는 데 굉장히 신중하거든요. 물론 어떤 시인은 어떤 산문가보다 언어감각이 더 못할 수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시인이 산문가보다 언어감각이 한결 예민하고 심세합니다." - 본문 중에서 시를 읽다보면 말의 리듬감이 몸에 배고 산문을 쓸 때도 리듬감 있는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를 읽을 때는 리듬감이 몸에 배일 수 있도록 소리내서 읽는 것이 좋고, 자기가 쓴 글도 소리내어 읽어보는 게 좋다고 합니다. 또 좋은 글을 쓰기 위한 중요한 원칙 하나는 '사전 활용'이라고 강조합니다. 늘 잡문이나 쓰는 저는 한 번도 사전을 곁에 둬야 한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습니다. 가끔 컴퓨터로 국어 사전을 찾아보거나 맞춤법을 확인하기는 하지만 사전을 곁에 두고 확인해야 한다는 철저함이 몸에 배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글을 쓸 때는 항상 사전을 옆에 비치하세요. 조금이라도 불확실한 것은 반드시 확인한다. 확인이 되지 않으면 쓰지 않는다. 이런 원칙을 세우고 지키십시오. 틀린 말을 쓰느니 아예 안 쓰는게 좋아요." - 본문 중에서 여기서 사전이란 그냥 국어사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의어사전, 반의어사전, 연관어사전 같은 것을 갖추는 것이 좋다는 겁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말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머릿속에 다 담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사전을 곁에 두고 활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표현의 자유가 특권이 되어서는 안 된다 2권에서도 실전 강의를 위한 예제 텍스트는 저자의 전작인 입니다. 에 포함된 여러 글을 인용하면서 때로는 새로 다듬기도 하고, 고쳐쓰기도 하며 마치 강독 하듯이 긴 설명을 덧붙이기도 합니다.  그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내용 중 하나는 저자가 '표현의 자유'에 대하여 언급한 부분입니다. 저자는 강정구 교수와 사르트르를 예로 들면서 '표현의 자유'가 선별적으로 적용된 사례라고 평가합니다.  악법을 폐지하기 위해서는 악법을 계속 어겨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그 악법이 유명한 사람이나 지식인들에게는 특별히 관대하게 적용되는 일이 많기 때문에 오히려 법치주의가 흔들리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표현의 자유를 넓혀야죠. 거의 무한대로 넓혀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표현의 자유를 넓혀야 합니다. 자유가 특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 본문 중에서 예컨대 그것이 관례든 법이든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악법을 어기는 것보다 악법을 고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2권에서 눈여겨 봐야 할 주제 중 하나는 '구별짓기와 차이 지우기'입니다. 소비생활에 '과시효과'(잘난 체하기)가 있는 것처럼 글쓰기에도 그런 특성이 배어 난다는 것입니다.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도 비슷한 개념이라는 겁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보다 낮은 계급의 사람들과 취향을 구별지으려고 애씁니다. 그리고 반대로, 낮은 계급의 사람들은 그 차이를 지우기 위해 무리를 해서라도 상류층의 취향을 따르려고 합니다." - 본문 중에서 대중적인 운동인 축구에 비하면 골프는 구별짓기에 해당되는 운동이고, 맥주에 비하면 와인이 구별짓기에 해당되는 술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언어에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표준어와 대략 일치하는 서울, 경기 지방언어를 익히는 모습이 그와 비슷하다는 것이지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프랑스, 일본어에서도 그와 같은 특징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네요. 그런데 특이한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이른바 표준어뿐만 아니라 방언도 주류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영남방언 즉 경상도 사투리라는 겁니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한 사회의 최상류층과 최하류층은 자기가 태어나서 배운 언어를 어지간해서는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영남방언이 해당된다는 것이지요.  이런 구별짓기의 욕망이 잘 드러나는 사례로는 기자, 의사, 변호사 혹은 전문직 종사자들이 사용하는 전문용어들이라고 합니다. 그 사회에서 힘을 가진 세력들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짓기 위해 사용하는 언어라는 것이지요. 과거 학생운동 활동가들에게도 이런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지요.  구별짓기 글쓰기 사례 - 전혜린, 양주동, 피천득 말뿐만 아니라 글에서도 이런 구별짓기와 차이 지우기가 많이 있다고 합니다. 저자는 구별짓기의 나쁜 예로 '작가 전혜린'을, 독보적인 구별짓기 문체 사례로 '양주동'을, 천박한 글쓰기의 사례로 '피천득'을 들었습니다. 이 책을 읽어면서 처음 깨닫게 된 내용도 있었는데 바로 '으르렁말과 가르랑말'에 관한 것입니다. 새뮤얼 이치예 하야카와라는 미국 언어학자가 쓴 책에 나오는 선전언어를 분류하는 기준인데요. 가치중립적인 말이 아니라 감정이 많이 들어간 말인데 부정적인 감정이 섞인 말이면 으르렁말이고, 긍정적인 방향이면 가르랑말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예컨대 저자는 신앙인, 교인, 예수쟁이라는 말 가운데 신앙인은 가르랑말에 가깝고, 예수쟁이는 으르렁말에 가깝다는 겁니다. 중매인과 뚜쟁이, 스파이나 정보요원 같은 단어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물론 가장 대표적인 으르렁말은 '욕'이고 전형적인 가르랑말은 연인들의 '밀어'라고 합니다.  이 시대에 가장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사례들에 속하는 노빠, 안빠, 박빠 같은 말이나 종북, 좌빨, 수꼴 같은 말들은 으르렁말의 대표적인 사례라는 것입니다. 광고 카피와 추도사 등에 널리 사용되는 사례를 소개하는데, 브루투스와 안토니우스의 추도사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전략적 글쓰기를 위해서는 으르렁말과 가르랑말을 적절히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긍정적인 방향이든 부정적인 방향이든 사람의 감정이나 마음을 움직이는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는 두 가지 표현방식을 적절히 구사하는 게 효과적이라는 겁니다.  으르렁말과 가르랑말도 생소하였지만, 저의 경우 로마자표기법과 외래어 표기법에 대한 공부도 처음이었습니다. 저자는 영어가 언어 세계의 최강자가 되고, 로마자가 문자 세계의 최강자가 된 까닭을 말해줍니다.  으르렁말과 가르랑말 활용하기 그리고 한국어의 로마문자 표기 방식이 매큔-라이샤워식, 문화부식, 예일식이 있다는 사실로 나아갑니다. 세 가지 표기법의 특성에 대하여 꽤 복잡한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결론은 '정부의 표준안'을 따르자는 것입니다.  글쓰기 이론 강의에서는 심리형용사의 인칭 제약, 한국어의 재귀 표현, 띄어쓰기에 관해 이야기 합니다. 약간 어려운 이야기들도 있지만 거칠게 요약하자면 모두 매끄럽고 자연스러운 표현을 강조합니다.  띄어쓰기에 대해서는 "각 단어는 띄어 쓰되 조사는 붙여 쓴다", "조사는 앞단어에 붙여 쓰고 어간과 어미도 붙여 쓴다"와 같은 아주 기본적인 원칙만 지킨다면 언어 직관에 따라 써도 된다는 겁니다.  글쓰기 이론 강의를 하나만 더 소개하면 '은유와 환유'에 대한 설명입니다. 글쓰기는 결국 논리학과 수사학으로 이루어지는데 수사학은 은유와 환유가 핵심이라는 것이지요. "제가 오늘 수사학에 대해 얘기하면서 주제를 은유와 환유로 한정지은 것은, 수사학의 요체가 비유이고 비유의 요체가 은유와 환유이기 때문입니다." - 본문 중에서 은유와 환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러시아 출신 언어학자 야콥슨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더군요. 야콥슨 이론의 요지는 "은유는 본관념과 보조관념의 유사성에 기초하고, 환유는 본관념과 보조관념의 인접성에 기초한다"라고 합니다.  언어학자의 연구를 요약한 설명은 좀 어렵지만 책에 소개하고 있는 사례를 보면 낯설지 않습니다. 예컨대 '내 마음은 호수' 같은 표현이 은유이고, '요람에서 무덤까지'와 같은 말들이 환유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널리 사용되는 환유적인 표현에 대하여 상세하게 소개하면서 좋은 글쓰기를 위해서는 숙어를 많이 알수록 유리하다고 강조합니다.  첫 문장을 잘 쓰기 위한 고종석의 전략 이 밖에도 외국인의 이름을 표기할 때 역사 인물과 현대인을 다르게 표기해야 하는 까닭, 지명과 나라이름 등을 표기할 때 엔도님과 엑소님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사례들을 설명하는데, 널리 알려지지 않은 외국인의 인명과 외국의 지명을 쓸 일이 흔치 않아 자세히 기억해두지는 않았습니다.  훗날 그런 일이 생기면 을 다시 찾아 읽게 되겠지요. 1권에 이어 저자가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은 바로 '첫문장'입니다. 저자는 1권에서도 글쓰기에서 첫문장과 끝문장의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한 바 있지요. 저자는 청탁을 받아 글을 쓸 때 첫문장을 시작했던 경험들을 들려줍니다. 첫째 옛날 경험 돌아 보기, 둘째 시사적 사건, 친구와의 대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주제와 관련된 거리 모으기, 셋째 해당 주제와 관련된 에피소드로 시작하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어사전을 펼쳐놓고 주제와 관련된 연관개념 찾아보기로 시작하기입니다.  어떤 주제나 소재에 관해 쓰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막상 글을 쓰려고 앉았는데, 첫 문장부터 막힌 기억이 있다면 저자의 경험담을 기억해 두었다 참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행갈이를 하여 문단을 나누라거나 분량이 제한된 글쓰기를 연습해보라는 조언도 새겨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간결하고 아름다운 글을 쓰기 위해서는 분량을 제한하는 연습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이 밖에도 글쓰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요? 글의 주제는 어떻게 잡나요? 창의성과 독창성은 어떻게 기르나요? 글감은 어떻게 찾나요? 같은 글쓰기 강좌 수강생들과 주고 받은 즉문즉답도 정리되어 있습니다.  특히 그는 글감을 어떻게 찾느냐는 질문에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매순간 순간이 모두 글감이라고 말하면서 조금만 생각을 하면서 삶을 한 번 돌아보라고 충고합니다.  생각을 정리하고 싶으면 글을 쓰라   흔히 사람들은 생각이 정리되어야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저자는 생각이 정리된 후에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쓰면서 생각이 정리되었던 경험이 훨씬 많았다고 강조 합니다.  저자 고종석은 인터넷이라는 도구가 '글쓰기의 민주화'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합니다. 인터넷 덕분에 기자, 작가, 저자 같은 계급장이 없어도 글을 쓸 수 있고 사람들에게 읽히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글을 쓰는 사람들은 삶은 글을 쓰지 않는 사람들에 비하여 그 자체로 훨씬 아름다고 풍요로울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글을 안 쓰는 사람보다는 글을 쓰는 사람이 더 좋은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물론 글을 안 쓰더라도 뭐, 몹쓸 삶은 아니죠. 그래도 글쓰기가 전제하는 책읽기나 생각하기 같은 것들이 영혼을 고양시키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 본문 중에서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글쓰기가 타고 나는 재주가 아니라 연습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자가 1권부터 강조했듯이 꾸준히 연습하면 누구나 나아진다는 것이지요. 타고난 재주보다 꾸준한 노력과 연습으로 충분히 좋아질 수 있다는 저자의 이야기에 여러분도 희망을 걸어보시기 바랍니다. /// 오마이뉴스 ======================덤으로 더... 통영 출신의 김춘수(金春洙: 1922 - 2004) 시인이 ‘귀향(歸鄕)’이란 시에서 윤이상(尹伊桑; 1917 - 1995) 작곡가와 전혁림(全爀林: 1916 – 2000) 화가를 말한 부분을 읽는다.  ..그날  뇌조(雷鳥)는 뇌조의 몸짓으로 멀리멀리 사라져 가더라고 했다. 그건 구(球)도 원통(圓筒)도 원추(圓錐)도 아니더라고 했다. 그건 빛이며 빛이 아닐까 전혁림은 그날 그런 생각을 해봤을까, 오랜만에 와보니 윤이상은 또다시 촛대마냥 말라 있다... 학교에서는 '뇌조는 빛'이라는 구절은 은유(隱喩)로, '촛대마냥'은 직유(直喩)로 설명했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다.  시를 그렇게 문법으로 분석하며 읽는 것은 재미를 반감시키기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직유도 하나의 은유“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직유도 하나의 은유라는 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사학(修辭學)’에서 한 말이다.  은유를 설명하는 많은 책들 가운데 눈에 띄는 책이 내게는 철학자 김형효 교수의 책(‘마음 혁명’)이다.  저자는 ”백합화 같은 소녀는...했다”라는 문장을 예로 들며 은유법은 백합화 즉 현장에는 없는 숨은 단어로 소녀를 설명하는 수사법이라는 말을 한다.  이에 비해 “술 마시자“는 말을 ”술 한 잔 하자”로 표현하는 것에 쓰인 환유법(換喩法)은 술과 술잔의 상호 인접성에 근거를 둔 수사법이다.  은유가 현장에는 없는 것을 끌어들이는 수사법이라면, 환유는 술을 현장에 함께 있는(인접해 있는) 술잔으로 표현하는 수사법 즉 장소를 바꾸는(치환하는: 換) 수사법이다.  수사학은 세상을 인간 중심으로 더 잘 이해하려는 소유욕의 일종이라 말하는 저자에 의하면 은유는 정신적 소유를, 환유는 물질적 소유를 의미한다.  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글이 최현식 교수의 ‘감응의 시학’에 나온다.  저자에 의하면 은유(적 언어체계)는 오로지 주체의 관점에서 대상을 동일화하는 데 반해 환유(적 언어체계)는 한 개체와 다른 개체의 인접 관계 즉 연관성에 주의한다.  저자는 서정(抒情)을 모든 것을 자기화하는 권력적인 것으로 정의한다.  김형효 교수가 말한 소유를 이해할 글로 “서정은 이미 말해지거나 의도된 욕망을 넘어서는 감각의 운동”이며 “실재계를 끊임없이 배반하며 차이와 위반을 생성하는 감응 행위”라는 문장을 들 수 있다.(‘감응의 시학’ 15 페이지)  진리, 구조, 가치 등 우리가 사용하는 학문적 용어들까지도 은유라는 말을 한 사람은 니체이고, 두 관념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유지될 때라야 은유는 의미를 지닌다는 말을 한 사람은 김애령(철학자)이다.(‘여성, 타자의 은유’ 75 페이지)  은유 없이는 그 어떤 글쓰기 작업도 불가능하며 극단적으로 말할 경우 모든 글이 은유적인 글인지도 모른다.(최문규 지음 '문학이론과 현실인식' 35 페이지) 읽는 것이 인생(Lesen ist leben)이라는 독일어가 있다. 쓰기가 인생이라는 말도 가능할 것이다. 읽기나 쓰기가 인생에서 절대적이라는 말이 아니다.  읽기(쓰기)는 닮은 듯 다르게 이전 것을 반복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인생과 닮았다는 의미이다.  모든 사람은 섬(고립된 존재)이지만 어느 누구도 섬이 아니다. 즉 전적으로 고립되어 있지 않다.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 타인과 연결되어 있고 그 관계 안에서만 의미 있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김애령 지음 '여성, 타자의 은유' 5, 6 페이지)  전적으로 고립되지 않은 것을 닮은 것으로, 고립된 것을 다른 것으로 볼 여지가 있을까? 아니 그렇게 보고 싶다. [출처] 은유와 환유, 닮은 듯 다르게|작성자 치자꽃근처
9    [시문학소사전] - "은유"란?... "환유"란?... 댓글:  조회:5986  추천:0  2017-11-15
  비유법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다른 대상에 비유하여 표현하는 수사법으로 직유법, 은유법, 의인법, 의성법, 의태법, 풍유법, 제유법, 환유법, 중의법 따위가 있습니다.   은유법은 사물의 상태나 움직임을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수사법입니다. 예로는 '내 마음은 호수요.' 따위가 있습니다.   환유법은 어떤 사물을, 그것의 속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다른 낱말을 빌려서 표현하는 수사법으로, 숙녀를 '하이힐'로, 우리 민족을 '흰옷'으로 표현하는 것 등입니다.   ========================= /////////////////////////////////// ========================= 은유와 환유의 "개념쌍"은 고전적이지 않다. 전통적으로 은유는 직유와 대조적인 한 쌍으로 취급되었고, 환유는 제유와 짝을 이루곤 했다. 그런데 ‘언어학적 전회’ 이후로는 은유와 환유가 "개념쌍"이 되어 새로운 용법으로 쓰이고 있다. 이 둘은 단순히 수사학의 여러 단위 중의 하나가 아니라 언어의 본질적인 속성을 반영하고 있는 핵심적인 맞짝 개념이기 때문이다. 고전적인 용법에 따르면, 은유와 직유는 두 대상(비유 대상과 비유의 매체) 사이의 유사성에 입각해서 작동한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직유는 ‘처럼’이나 ‘같이’를 동반하여 직접적으로 비유하는 것을 뜻하고(내 마음은 호수처럼 잔잔하다), 은유는 간접적인 경우를 말한다(내 마음은 호수다). 한편, 환유와 제유는 부분으로 전체를 대표하는 비유법이다. 부분과 전체의 관계와 결합 양상의 차이에 따라 제유와 환유가 구분된다. 예를 들어, 사각모로 대학생을 비유할 때는 환유이고(그가 드디어 사각모를 썼다), 소주로 술을 대신할 때는 제유다(어제 소주 한잔 하셨나요). 환유는 하나로 이어져 있는 전체와 부분의 관계에서 발생하고(사각모는 대학생의 일부이다), 제유는 집합과 거기에 속하는 낱낱의 원소의 관계에서 생겨난다(소주는 술이라는 집합의 원소이다). 최근에 자주 쓰이는 은유/환유의 개념쌍은 이와 같은 고전적 쓰임과는 조금 다르다. 은유는 구심력을 지닌 중심화된 사유, 체계 지향적인 힘을 일컫고, 환유는 그와 반대로 원심력을 지닌 탈중심화된 사유, 탈체계적인 힘을 지칭한다. 이런 용법은 소쉬르와 야콥슨(R. Jakobson, 1896~1982) 같은 언어학자들의 언어의 근본적 원리에 대한 통찰에 기반하고 있다. 야콥슨에 의하면, 우리가 쓰는 말은 선택(selection)과 결합(combination)이라는 두 축에 의해 만들어진다. 우리에게 내장되어 있는 어휘 사전에서 단어를 끄집어내는 것이 선택 기능이고, 선택된 단어를 배열하는 것이 결합 기능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말을 한다는 것은 머릿속에서 단어를 고르고 조리에 맞게 그 단어들을 늘어놓는 무의식적인 과정인 셈이다. 야콥슨의 이런 설명은 언어에 대한 소쉬르의 통찰에 기반하고 있거니와, 야콥슨은 이런 원리를, 실어증이 지니고 있는 두 유형을 통해 구체적으로 입증했다. 다양한 양태의 실어증은 크게 두 가지의 유형적인 극단성을 보여준다. 하나는 단어들을 이어서 나열하기는 하지만 정작 정확한 단어를 짚어내지 못하는 증상으로, 이를테면 책상이라는 단어를 지칭하지 못한 채 의자나 연필 같은 그 주변의 단어를 맴도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다른 하나는 단어를 정확하게 짚어내기는 하지만 그 단어들을 문맥과 어순에 맞게 배열하지 못하는 증상으로, 어순이 뒤틀려 문장이 엉망이 되어버리는 경우이다. 전자는 언어의 선택 기능에 장애가 생긴 것으로서 유사성 장애(similarity disorder)라 불렸고, 후자는 언어의 결합 기능에 이상이 생긴 것으로서 인접성 장애(contiguity disorder)라 지칭되었다. 유사성 장애는 자기 뜻을 나타내는 단어를 정확하게 짚어내지 못해 뜻과 말 사이에서 형성되어야 할 유사성의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것이고, 인접성 장애는 선택된 단어들이 규칙에 따라 배열되지 않아서 단어와 단어가 지녀야 할 인접성의 사슬 관계에 이상이 초래된 경우이다. 은유와 환유는 언어가 지닌 이와 같은 두 축의 특성과 직결되어 있다. 은유(이때 은유는 직유를 포함한다)는 선택 기능과 유사성의 원리(이는 뜻과 말 사이에 유사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유사성의 궁극적인 형태는 동일성이다)를 축으로 하여 작동되고, 환유(이때 환유는 제유를 포함한다)는 결합 기능과 인접성의 원리(이는 인접한 단어들이 규칙에 맞게 배열되어야 한다는 뜻이다)를 축으로 이루어진다. 유사성을 동력으로 하는 은유적인 힘은 의미의 중심을 향해 나아간다. 여기에서는 어떤 단어가 의미의 핵심을 포착해내는지가 문제가 된다. 환유는 인접성의 원리에 따라 끝없는 연쇄를 만들며 이어진다. 여기에서 의미는 징검다리를 건너듯 단어에서 단어로 이어진다. 예를 들자면,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하는 방식으로. 그래서 마침내는 원숭이가 그와는 아무 상관없는 백두산이나 태극기로까지 이어진다. 이것이 흔히 사슬로 비유되는 환유의 원리다. 사물의 핵심을 지향하는 서정시에서는 은유적 표현이, 디테일의 풍부함을 추구하는 산문 예술에서는 환유적 표현이 지배적이다. 낭만주의와 상징주의에서는 은유가 압도적이고, 사실주의에서는 환유가 주도적이다. 초현실주의 미술은 은유적 태도가 우세하고, 피카소의 입체파는 명백한 환유 지향성을 지니고 있다. 은유는 하나의 대상을 향해 집중하는 힘이고 환유는 자유롭게 유동하는 충동이다. 시에서는 대상이나 정서를 정확하고 간결하게 포착하는 것이 중요하다. 얼마나 깊은 핵심에 도달하는지가 여기에서는 관건이다. 이와 반대로 소설에서는 대상의 특성을 풍부하게 잡아내는 일이 중요하다. 단도직입적으로 결론에 도달해버리면 이야기도 끝나버린다. ‘서사적 우회’라는 말이 있듯이 이야기 문학에서 중요한 것은 결말이 아니라 그 결말에 이르는 길이 단락에서 단락으로 이어지며 풍부하게 만들어지는 흐름이다. 이런 식의 대조는 사고 일반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다. 은유는 중심을 향해 박두해들어가는 것이고, 반대로 환유는 정해진 중심이나 지향점 없이 자유롭게 유동하는 상상력의 형식이 된다. 해체주의나 탈구조주의는 이념적 양극성이 사라지면서 등장한 사유 형태이다. 여기에는 정해진 중심이 있기 어렵고, 이런 세계에서는 환유적 상상력이 좀더 우세한 사유의 형식이 된다.   ======================================= ///////////////////////////////////////////////////////////////////////////////// ======================================= 은유와 환유는 그것이 쓰이는 역사적 맥락과 깊은 관계를 맺는다. 한 시대에는 환유로 취급받던 것이 다른 시대에는 은유로 취급당한다. 이를테면 이라는 표현은 요즘 은유로 쓰인다. 라는 말은 원래 설사를 한다는 뜻으로 환유적 표현이었으나 요즘에는 은유적 표현으로 쓰인다.  은유와 환유는 특정한 시대와 관련을 맺기도 한다. 역사 철학자 지암비스타 비코는 에서 은유를 비롯한 환유, 제유를 단순히 비유의 차원을 넘어 언어사와 문화사를 재는 잣대로 삼았다. 신의 시대에는 어느 비유보다 환유가 지배적으로 쓰였고, 영웅의 시대에는 제유가 압도적이어서 이 무렵 인간은 곤잘 주피터 신의 아들로 자처했다. 그런가 하면 인간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어떤 비유보다도 은유가 가장 널리 쓰였다.  이탈리아 기호학자 에코는 심층적인 면에서 은유와 환유가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은유적 메커니즘과 환유적 메커니즘은 서로 상호작용을 하게 마련이다.  축어적 관념과 비유적 관념 사이에 상호작용이 일어난다는 것은 이미 이 둘이 환유적 관계를 맺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실제로 어떤 비유는 은유로 봐야 할지, 환유로 봐야 할 지 경계선이 모호하고 애매하여 분류하기가 쉽지 않다. 한 이론가는 아예 라는 용어로 부른다. 메타프토노미란 바로 메타포(은유)와 미토노미(환유)를 합하여 만들어낸 합성어다.    은유가 한 사물의 다른 사물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라면, 환유는 한 개체를 그 개체와 관련 있는 다른 개체로써 말하는 방법이다. 은유의 기능이 주로 사물이나 개념을 이해하는 데 있다면 환유는 사물이나 개념을 지칭하는데 그 기능이 있다. 은유가 이해를 위한 장치라면 환유는 지칭을 위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너가쪼아♡ |   추천추 추천자 목록 답변 비유는 어떤 사물의 가치를 그 자체에 고정시키지 않고 다른 것에서 유추한다. 미국 철학자 어번(W.M.Urban)은 언어와 현실에서 언어의 가동성을 강조했다. 사물과 언어관계는 거리가 있으므로 부단히 움직인다고 본 것이다. 이는 언어의 추상성과 언어 의미 사이에 무한한 가능성을 뜻한다. 한편에서 비유는 진리를 전달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인식도 있었으나, 18c 말엽부터는 비유는 필수적이며 세계를 인식하는데 꼭 필요한 도구로 보고 있는 태도가 강하다. 비유는 인생관이나 세계관과 맞닿아 있어 인간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형식이 되는 것이다.   1 은유는 매개어의 개입 없이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결합되어 의미의 轉移와 새로운 의미를 환기시키는 비유법이다. 은유를 이해하려면 유사성을 파악해야 하지만 동일성과는 별 관계가 없다. 예를 들어 아리스텔레스는 '인생의 황혼'으로 노년을 표현했다. 수학적 비례로 치환시시켜 a/b=c/d 따라서 ad=bc이나 노년의 인생에 대한 관계가 황혼이 하루에 대한 관계와 정확히 같지는 않다. 유사성은 바로 흡사한 것이기 때문에 이같은 관계가 성립한다. 은유는 일종의 수수께끼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뜻을 유추하기 힘들다.은유의 장르라 할 만한 시를 두고 새뮤얼 코울리지가 고 얘기한 것은 바로 이같은 맥락이다. 윌리엄 엠슨은 은유가 가능한 것은 애매성 때문이라고도 했다. 은유는 우리를 당혹하게 하지는 않지만 이제껏 보지 못한 유사함을 밝혀 우리를 일깨워주고 매료시킨다.   환유는 원관념을 연상되는 다른 말로 바꾸어 한 부분으로 전체를 나타낸다. '그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라든가 '십자가와 초승달' 등이 그 예이다. 환유는 상징의 발생에 주요한 역할을 한다. 깃발이나 십자가, 베일 같은 상징은 실재를 환기시키는데 상징과 실재가 모두 같은 문화에 있기 때문이다. 문화가 변하면 상징이 사라지는 것처럼 환유는 확고한 문화적인 관습에서 설득력이 생긴다. 환유는 최근에 들어와 주목받기 시작했다. 환유의 어원인 미토노미아는 '이름을 바꾼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일상 생활 언어에서 은유보다 환유가 더 많이 쓰이고 언어학자들은 환유쪽에 더 관심을 갖는 경향이 있다. 20C 미국의 야콥슨은 은유와 환유의 성격을 밝혀내는 데에 크게 이바지한 학자이다. 그것을 실제 비평에 적용해 문학의 스타일도 은유나 환유 쪽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고 밝혀냈다. 18C에서 19C 낭만주의 예술에서는 은유적 성격이 강하고 19C 중엽부터의 리얼리즘 예술에서는 환유적 성격이 강하며 세기말의 문예 사조라 할 상징주의에서는 은유적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또한 문학 장르에 있어 시는 은유적이고 소설은 환유적이며 연극은 은유적이고 영화는 환유적이라 주장한다. 이탈리아 기호학자 움베르트 에코는 이 둘의 관계가 깊이 연관성을 띠며 상호작용을 하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어떤 비유는 은유로 보아야 할지 환유로 보아야 할지 그 경계선이 굉장히 애매하고 모호하다. 메타프토노미라 하며 은유, 환유 동시 성격으로 규정하기도 한다.좋은 예로 밀양 아리랑이 있다.                             정든 임 오시는데 인사를 못해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벙긋   이 경우 입을 벙긋거리는 행위로 웃는 행위를 나타낸 것은 '환유'이나 이것이 행복하다는 마음을 나타내니 '은유'가 되는 것이다. 은유는 한 사물을 다른 사물의 관점에서 말하는 방법이고 환유는 한 개체를 그 개체와 관련 있는 다른 개체로써 말하는 방법이다. 은유는 개념 이해의 방법으로 많이 쓰며 환유는 지칭하는데 많이 쓴다. 은유와 환유는 그 역사적 맥락과 연관되는데 한 시대의 환유가 다른 시대 은유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서양에서 이 예전에는 환유였으나 현재는 은유이다. 사람이 죽은 뒤에는 얼굴 빛이 희게 변하기 때문에 결과로써 원인을 나타내는 환유였으나 추상적 관념인 죽음을 의인화하여 그 얼굴 색깔이 희다고 하는 은유로 현재 쓰는 것이다. 제라르 주네트·새뮤얼 레빈·존 설 같은 이론가들은 환유를 은유의 하위 갈래로 여기기도 하지만 이 둘의 형식에는 차이가 있다. 은유가 유사성에 의존한다면 환유는 인접성에 기초한다. 환유는 은유와 비교하여 인간의 경험적 토대가 크다. 흔히 은유는 추상적인 느낌이 강하고 환유는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느낌이 강하다. 영국 이론가 호미 K.바바는 최근 은유와 환유를 포스트식민주의 문학 이론에 적용했다. 은유적으로 읽으면 의미의 보편성에 주목하게 되고 환유로 읽으면 보편성보다는 개별성이나 특수성에 주목한다는 것이다. 바바에 따르면 피식민지 주민을 문학 작품 속에 재현하는 것은 를 재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은유화하면 등가의 원칙을 끌어들이고 이 원칙은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추상적 명제로 환원할 위험이 있다고 염려한다. 이는 다시 말해 제국주의나 식민주의의 담론에서 은유가 많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은유를 폭력의 언어, 환유를 저항의 언어로 볼 수도 있다. 전통적인 제도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것은 환유의 수사적 장치가 적당하고, 영원불변하고 본질적인 것과 연관되는 은유는 기존의 폭력적 성격의 것들을 표현하는데 적절한 것이다. 은유는 모든 현상을 하나로 뭉뚱그려 동일성에 무게를 싣고 환유는 인간을 모든 구체적 현상 속으로 낱낱이 파헤쳐놓는다. 김욱동 교수는 그 예를 문정희의 시 「작은 부엌노래」와 정현종의 시 「부엌을 기리는 노래」로 설명한다. 문정희의 시는 남성 가부장 질서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보이며 환유가 지배적인데 정현종의 시는 남성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은유가 많이 쓰이고 있다. ====================덤으로 더...     “깊은 슬픔을 밑에 깔고 어머니가 누리는 잔잔한 평화 속에서 죽은 삼촌과 내가 뒤섞이는 이 인접성, 나는 그것을 어머니의 환유라고 부른다. 어머니는 어느 날 아버지 대신 나를 부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순수하고 완벽해서 아버지가 되는 것이 아니다. 환유는 결여된 은유다.”   황현산 선생의 `잘 표현된 불행`에서 `어머니의 환유` 일부분을 인용했다. 환유를 일컬어 결여된 은유라고 표현한 저 독창적 말씀에 매료되어 내 식의 해설을 쓰고 싶어졌다. 자세하게 분류하자면 여러 가지로 뻗겠지만 일반적으로 환유라 하면 표현하는 대상을 그것과 가까운 다른 말로 바꿔 말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앞치마가 환유가 되면 주부를 뜻하고, 월스트리트가 환유로 읽히면 영향력 있는 금융세력이 되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선생의 저 말을 나는 은유로 소진되고 남은 것들이 모여 환유가 된다, 라고 이해하고 싶은 것이다. 여기서 은유는 낭만이나 환희나 쾌락 같은 것이 아닐까. 이를테면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오오, 라는 식의 낭만적 은유가 지나고 난 뒤의 파편 같은 현실이 환유가 된다. 저 인용문에서 결여된 은유는 어머니의 환유가 되는데 그것은 곧 자식인 작가 자신이다. 물론 그 원천은 작가의 아버지가 된다. 일반적 희생의 이미지인 모성에게 지아비의 결여는 세상의 결여이고 그것은 곧 당신의 결여가 된다. 그 결여의 기도는 자식을 향한다. 즉 어머니의 환유는 결국 아버지 모습을 한 자식에 대한 기대치라 할 수 있다. 그런 어머니가 자식 입장에서는 정신적인 우주가 될 수밖에 없고 그것은 제 결여를 다독이기 위한 텃밭으로 기능한다.   언어학자인 로만 야콥슨에 의하면 은유는 유사성에 의존하고, 환유는 인접성에 의존한다고 했다. 유사성을 표현하는 언어는 어쩐지 낭만적이고, 인접성을 표현하는 언어는 왠지 사실적이다. 낭만적 자족이 은유라면 결핍의 우주야말로 환유가 된다. 그러니까 환유의 발자국은 몽상의 구름에 가닿는 게 아니라 사실의 들판에 맞닿아 있다. 환유가 살아있는 실체적 진실이 되는 순간이다.  /김살로메(소설가) ///경북매일  
8    시작은 "은유와 환유"라는 두 녀자를 사귀러 가는것이다... 댓글:  조회:2844  추천:0  2017-11-15
경기 안산의 누에섬 저녁 일몰 풍경.  가을 끝자락의 하늘의 표정도 가을이다. ///사진가 -김성일-(필자 주; 같이 감상하는 나눔의 공유도 봉사이며 비움의 행동입니다...) ■ "나의 두 여자, 은유와 환유"/ 이빈섬  우린 늘 언어와 문자에 골몰하면서도 그걸 쉽게 경멸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말 잘하는 놈을 보면 밸이 틀린다. 뭔가 번지르르한 말결 속에 교묘히 허수를 숨기고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시나 수필을 쓰면서도 은유와 환유가 풍겨내는 지분냄새같은 것을 지독하게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기름끼 다 빼고 정말 언어의 견결한 골조만 남은 시, 수필을 쓰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런 것이 가능할까? 문학에서 은유와 환유가 들어올린 공간을 모두 제거해버리는 일이? 물론 그건 번답과 화려가 본질을 가리고 진의를 에두른 적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다이어트의 희원임을 모르진 않는다. 그러나 그건 은유와 환유가 좀더 평상어에 가까운 방식으로 슬림해지는 것이지, 그것들에 대한 무차별의 삼제가 될 수는 없다.  문학의 심연은 어쨌든 문자가 들어올린 그 여지의 활기와 비의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교환을 위한 통상의 문자들만을 줄세워 문학을 할 수는 없다. 그건 문학의 순정성의 증표가 아니라, 문학을 압살하고 경멸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평상어의 눈으로 시와 산문을 재단하려는 모든 기도를 나는 반대한다. 복잡한 문장, 섬세한 뉘앙스에 대한 가차없는 경멸. 여기엔 정말 심각한 무지와 오해가 있지 않나 싶다. 우선 우리나라 국어교육과 언어사회학의 죄악이다. 논리를 즐길 줄 아는 교육을 받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논리가 돼야 수사학이 된다. 무슨 뜻인지 파악하는 눈과 귀가 없는데 어떻게 그게 즐거울 수가 있으랴? 또 많은 달변가들과 문자쟁이들이 사람을 현혹시키고 본질을 어지럽히는데 그 재능을 써오기도 하였다. 그러니 지레짐작 말 잘하는 놈은 의심부터 하고 볼 일인 사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마음이 중요하지, 그것을 표현하는 재능은 별 거 아니다. 기본적인 말만 할 줄 알면 되는 게 아닌가. 이런 통념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먹혀들어가면서 그것과 대립되는 능력인 화술과 언어재능과 시적감각들이 세상살이에 별로 소용없는 물건으로 치부되게 되었으리라. 그러나 과연 그게 옳은 생각인가. 누군가에게서 몇 마디 날카로운 지적을 받으면 그것을 논리적으로 풀기 전에 얼굴부터 벌개져서 입이 꽉 닫히는 일. 아주 치열한 논리적 공방을 바라보면 그 풍경에서 시정잡배의 멱살잡이 만을 떠올리며 그걸 뜯어말려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일. 몇번씩 뒤틀어 표현한 복잡하고 섬세한 문장들에 대해서 아예 손사래부터 치며 왜 해골을 복잡하게 하느냐고 화내는 일. 이런 언어습관이 유통되는 사회에서 시가 존재하기란, 혹은 문학이 당위를 인정받는 일이란 얼마나 간고한 일인가. 문학이란, 혹은 시란, 평상어로부터의 고의적인 일탈이다. 좋게 말해서 일탈이지 솔직히 말하면 멀쩡한 언어판을 뒤흔들어 개판으로 만들어놓는 일이라 할 수 있다. 화폐와 같이 정직한 교환가치를 인정받는 평상어는, 인간의 언어욕망 모두를 채워주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그러니 허전한 뭔가를 채우기 위해 인간은 시, 혹은 문학을 기웃거린다. 평상어들이 득세하여 문학적 언어들을 핍박하고 경멸하는 사회. 이것이 우리 사회의 인문적 지형도다. 인문학의 위기, 인문주의의 위기라는 표현 또한 실용이라는 담론에 경도되어 오래된 인류의 낙원을 스스로 폐기처분하고 있는 이 시대의 경박에 대한 경고다. 은유란 뜻밖에도 발이 넓다. 어쩌면 문학 전부가 은유란 그릇 안으로 들어와 앉아도 자리가 남을 정도다. 은유에 대한 성찰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찾아올라가야 할 만큼 묵은 내력을 지닌다. 인류는 일찌감치 언어의 별세계를 찾아냈다. 저 그리스 아저씨의 을 잠시 훔쳐보자. "은유란 유에서 종으로, 또는 종에서 유로, 또는 종에서 종으로, 또는 유추의 관계에 의해서, 어떤 사물이 다른 사물에 속하는 이름을 전이시켜 적용하는 것이다." 유니 종이니 하는 말 때문에 지레 따분해질 필요는 없다. 일본사람과 게다신발을 생각하면 된다. 이때 게다는 종이며 일본사람은 유이다. 일본사람을 그냥 게다짝이라고 멸칭하기도 하고, 그것을 신은 모양새를 데려와 쪽발이라고 욕질하기도 한다. 이것도 고전적인 의미에서 일종의 은유이다.(실은 환유이지만.) 앵두같은 입술이라 할 때 앵두와 입술은 붉음이란 특징을 매개로 한 유추의 관계다.(이건 은유 중에서도 직유라고 불린다.)그러니 은유가 가능한 경우를 아저씨 나름대로 정리한 것이다. 여기서 귀담아 두면 좋을 것은, 어떤 사물이 다른 사물에 속하는 이름을 전이시켜 적용한다는 표현이다. 무엇과 무엇을 연결시켜 어떤 효과를 자아내는 행위. 이같은 은유론은 많은 학자들의 성찰을 거쳐서 체계적으로 다듬어져 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지금까지도 고민하고 있는 문제를 적시하고 있다. 은유는 너무 평범하고 진부해서도 안되며 지나치게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가 되어서도 안된다. 은유가 평범하고 진부한 표현이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 까닭은 언어의 은유적 사용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즉 개똥이는 개똥이가 아니라 말똥이라고 말하는데서 생겨나는 즐거움, 즉 우회해서 말하는데서 생겨나는 수사적 즐거움-을 보장받기 위해서이다. 또 수수께끼가 되는 걸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자칫 은유를 통한 언어의 우회적 움직임이 그 출발점을 잊어버리고 길을 잃게될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이 아저씨가 은유를 너무 멀리서 이끌어내서는 안된다고 여러번 강조하고 있는 까닭은 은유의 유추적 즐거움이 언어의 수사적 기능, 말하자면 담론을 통해 타인을 설득시키는 것에 종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서 살피자면 은유는 낱말과 낱말 사이의 거리이다. 유사성의 거리라고 할까. 너무 가까우면 재미없고 너무 멀면 딴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다. 그 알맞은 거리의 긴장과 탄력이, 좋은 은유를 만들어낸다. 쓰다보니 문자 사이의 건조함이 목구멍을 칼칼하게 한다. 은유에 관한 날렵한 성찰들을 살핌으로써 물기를 뿌려보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말은 나를 사로잡았다. "은유는 아마도 인간의 가장 다산적인 잠재력일 것이다. 그것의 효력은 마술에 접해있고, 그것은 신이 인간을 만들었을 때 그의 피조물의 몸 속에다 깜박 잊어버리고 놓아둔 창조의 도구처럼 보인다." 요컨대 은유는 인간이 지닌 조물주의 능력, 즉 창조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수술가위를 몸 속에 놔둔 채 꿰매는 멍청한 외과의사로 신을 조롱한 죄가 가볍지 않아 보이지만 은유에 대한 예찬을 이 정도로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리쾨르의 얘기도 들을 만하다. "은유는 낱말 차원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에서 발생한다. 즉 술부에서 발생한다. 의미혁신은 주부와 술부가 이어지면서 낱말이 사전적 의미를 어느 정도 이탈하면서 발생한다. 은유는 어떤 말을 통해서 다른 말을 하려고 하는 말이다. 한번 꼬여서 간접으로 무엇을 겨냥한다. 여기서 언어혁신이 일어난다. 언어에 들어있는 뜻이 아니라 언어가 새로 만들어내는 뜻이다. 말이 새로운 뜻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은유는 이라 할 만하다."  라캉도 거든다. 그는 프로이드를 데려오면서 인간의 무의식의 지형은 은유와 환유의 기법이 차용되어 있다고 말한다. 꿈 속에 등장하는 많은 것들은 비슷하거나 근접한 무엇들의 변용이 아니던가. 크리스테바는 말한다. 텍스트에서 첫 출발하는 주체는, 에고의 가장자리에서 기호계의 검은 물결이 흘러넘치는 절벽 위에 대롱대롱 매달린채 그것에 교란받는 주체이다,라고. 데리다는 은유를 이렇게 말한다. "이성중심주의를 희석시키는, 아버지의 집으로부터 떠나가는 한없는 이방의 여행이다." 제 생각이 없으면 이렇게 글에 귀신들이 들끓는다. 남의 생각에 의지하여 앵무새같은 개념들을 늘어놓는 일이 자신의 새로운 생각을 매만지는 일보다 훨씬 쉽기 때문이리라. 그런 비난들이 더 커지기 전에 내 얘기들을 좀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은유의 서양말인 메타포 (metaphor)는 그 말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메타페레인이란 그리스어를 만나게 된다. 메타는 "위로" 혹은 "너머로"라는 뜻이고 페레인은 "옮기다" 혹은 "나르다"의 뜻이다. 은유란 말이 처음 쓰일 때의 생각은 "한 말에서 다른 말로 그 뜻을 실어 옮기는 것"이었을 것이다.  어느 영화에서 어떤 소년이 말한다. 인생은 구두와 같다고.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묻는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처음엔 맞지 않지만 조금씩 발을 맞춰가듯 맞춰가는 게 인생이 아니냐고, 소년은 짐짓 묵직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아버지는 되묻는다. 그래? 그럼 인생은 장갑과도 같은 것이군. 그것도 맞춰야 하잖아? 아냐 인생은 모자와도 같은 것이야. 아니 내복과 같은 게 아닐까? 아버지의 조크는 소년의 은유가 지닌 약점을 정확하게 포착한 것인지도 모른다. 은유가 생동감을 얻기 위해서는 두 사물의 유사성이 참신하고도 설득력있는 것이어야 한다. 물론 소년은 그의 은유를 충분하게 잘 설명하지 못했는지 모른다. 인생은 구두와 같다. 참신한 비유가 아닌가? 이런 비유를 만났을 때, 우린 인생과 구두가 지닌 유사점에 대해서 고민하고 성찰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은유의 힘은, 구두라는 매개개념을 데려와, 인생이란 의미를 좀더 풍요롭게 파악해가는데 있다.  개미같은 허리라고 하면 우린 아예 개미를 떠올리지 않고도 가는 허리를 생각하게 된다. 그 은유가 오랜, 잦은 사용으로 진부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우초밥같이 생긴 여자라고 말한다면 우린 한참 고민하게 된다. 도대체 어떻게 생겼단 말인가? 쉽게 답이 안나온다. 이 수수께끼가 의미의 미로에서 너무 오래 헤매면 그건 일단 성공적인 비유라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새우초밥 여자가 들어있는 문장의 맥락에서 그가 가슴에 겨자빛 반점을 지닌, 불그죽죽한 새우무늬의 숄을 걸치기 좋아하는 여자라면 그건 설득력있는 은유일 수 있다. 이렇게 문맥 속에서 살아움직이는 두 개념 간의 피돌기가 자아내는 효과, 이것이 은유의 힘이 아닐까 싶다. 새우초밥같은 여자라고 말했을 때, 그 여자는 새우초밥에서 건너오긴 했지만 새우초밥을 넘어서있는 뉘앙스이다.  내가 아까 불러온 귀신들의 말로부터 받았던 인상들을 종합하자면, 은유란 것이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더 본질적인 무엇이라는 놀라움이다. 수사학은 출발과 끝이 은유에 싸인 하나의 거대한 봉지사탕인지 모른다. 문학이란 은유 욕망들의 다채로운 결과물이기도 하다. 통상적인 언어에서 빠져나온, 바람난 언어들의 춤이다. 시는 평상적 언어에서 새나가는 뉘앙스들을 수배하러 나선 또다른 언어들의 그물망이다. 언어를 올라탄 언어, 문자와 문자의 교미, 낯익어서 이미 긴장이 풀려버린 언어들의 나사를 풀어 낯선 다른 언어를 끼워넣음으로써 새롭게 하는 작업들. 은유란 일렬로 선 낱말들을 교란시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본능적인 유희가 아닐까 싶다. 신은 인간에게 의사소통을 위해 언어를 선물했을 테지만, 인간은 그것을 즐기는데에 쓰기 시작했다. 이 유희의 한 지류가 문학이며 레토릭이며 또, 은유행위다. 두루뭉수리하게 통상 언어의 일탈 모두를 은유라고 부르던 아리스토텔레스식 분류법이 은유와 환유라는 보다 섬세한 일별법으로 진화하게 된 것은 언어학자 야콥슨의 공로다. 야콥슨에 이르면서 은유와 환유는 치열한 대립쌍으로 거듭나게 된다.물론 그 전에도 은유와 환유는 구별지어지는 개념이었다. 라틴수사학의 한 경전인 1세기경의 이란 책에서는 환유를 " 그 자신의 이름에 의해 지칭되지 않은 어떤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표현을 근접한 요소로부터 빌어오는 문채(文彩)"로 설명하고 있다. 환유를 뜻하는 미토니미(metonymy)는 그리스어 미토니미아를 어원으로 가지는 말이다. 그 뜻은 이름을 바꾼다는 뜻이다. 그래서 혹자는 환유를 아예 전의(轉義)라고 부르기도 한다. 야콥슨은 은유가 유사성에 기댄다면 환유는 인접성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한다. 은유가 초현실주의나 낭만주의 상징주의와 손을 잡는다면 환유는 고전주의나 리얼리즘과 관계를 맺는다고도 말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나는 요즘 황지우를 읽고 있다, 고 말할 때, 나는 황지우의 시를 읽고 있다는 뜻이다. 라는 인물의 한 부분인 그의 시작품을 가리키는데에 황지우 모두를 데려와버린다. 반대도 가능하다. 한쪽 팔이 없는 사람을 외팔이라고 부른다. 돌아온 외팔이란 영화도 있지 않았던가. 외팔이란 팔이 없다는 특징 만으로 어떤 사람을 특칭한다. 환유와 제유라는 분류로 더 섬세하게 구분도 하지만 이 모두를 환유라 하자. 환유는 언어를 사용하는 효용성과 크게 관련지어져 있다. 군대시절 고참이 어디에 사느냐고 물었을 때, 신병인 나는 서울에 산다고 말했다가 혼쭐이 났다. 서울이 모두 네 집이냐며 기합을 주는 것이었다. 이런 썰렁한 유머는 군대에서 하나의 관습을 이루는 것들인데, 여기에도 환유에 대한 나름의 성찰이 숨어있다. 우린 서울에 산다고 말하지, 서울시 중구 순화동 7번지 우리집에 산다고 말하지 않는다. 서울이라는 대표지명으로 구체적인 지명을 환유하는 것이다.  한 글벗은 한때 환유법을 능란하게 활용하는 문장들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어떤 모임의 후기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거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독특한 호칭으로 불러 문장의 윤기를 낸 것이었다. 예를 들면 그의 낭군이 된 글빛하늘이라면 그중의 한 낱말인 으로 표현하고, 산돌이 아이디를 가진 사람은 으로 표현하고는, 산이 빛의 손을 흔들어대고 있었다,는 식의 문장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악수 장면이 새로운 기의를 발하면서 놀라운 참신함을 자아내고 있었다. 은유는 비슷한 성질을 이용한 낱말의 연결인 반면, 환유는 어떤 사물과 인접한 무엇을 데려와 그 사물을 대치하는 기법이다. 김동인의 붉은 산은 황량하지만 버릴 수 없는 이 나라에 대한 감동적인 대치물이다. 블루칼라는 노동자들이 입는 옷으로 그 노동자 집단 전체를 의미한다. 어떤 말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그것과 근접한 무엇으로 표현하여 어떤 쾌감을 얻는 언어행위이다.  은유는 유추과정을 통해 유사성을 찾아내지만, 환유는 특정한 맥락에서 생겨나는 연상을 기초로 잇는다. 비약적 마술적인 것으로 지적되는 은유와는 달리, 환유는 오랜 시간을 두고 생겨난 연관관계나 관습에 따른 연상에 기댄다. 지극한 효녀를 심청이라 부르는 것, 말을 듣지 않고 반대로만 하는 사람을 맹꽁이라 부르는 것, 제격에 맞지 않는 행동을 강요받는 경우를 억지춘향이라 부르는 것 등은 바로 이런 예라 할 만하다. 은유는 시적인 표현에서 많이 등장하고 환유는 산문적인 문장에서 많이 등장하는 것은 은유의 초현실주의적 생리와 환유의 리얼리스틱한 생리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은유가 가부장 담론의 특성이라면 환유는 페미니스트 담론의 특성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여성은 아이를 자기 몸 안에 아홉달 동안 담고 있고 낳은 후에도 곁에 두고 기르기에 모자관계는 환유적이며 부자관계는 은유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라캉의 말이다.  은유는 남자의 문자현상을 특징짓는 기법이라면 환유는 여성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여성적인 글쓰기는 만져지는 무엇을 비롯한 근접한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이 강한 특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 환유적 욕망이 승한 특징을 보이기 쉽다는 지적을 하기도 한다. 너무 도식적인 분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일면 공감되는 부분도 없지 않다. 은유란 무엇인가를 보다 생생하고 풍성하게 이해시키기 위한 방식이라면 환유는 한 개체를 그 개체와 관련된 다른 개체로써 말하는 방법이다. 은유는 다른 말을 데려와 함께 서있지만 환유는 다른 말을 데려온 뒤 자신은 숨어버린다. 그 숨어있음의 쾌감이 환유의 특징이며, 은유는 두개의 말이 나란히 서서 비교됨으로써 합성되고 증폭되는 쾌감이 특징이다.  환유는 또한 보다 현대적인 서술방식으로 평가받고 있기도 하다. 은유는 지난 시대의 낭만주의와 결부된 낡았지만 아직도 튼튼하게 살아남은 기법이다. 최근의 비평가들은 당대 시인들과 작가들의 환유성을 찾아내고 그것의 얼개를 파악하는 일에 주력하고 있는 형편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황지우의 많은 참신함은 그의 환유에 힘입고 있다.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있을 거다)는 진술에서 뚱뚱한 가죽부대는 내 몸의 구조와 형질을 경멸적인 사물적 특징으로 치환하고 있는 표현이다. "사춘기 때 수음 직후의 그/죽어버리고 싶은 죄의식처럼,/그 똥덩어리에 뚝뚝 떨어지던 죄처럼,"(수은등 아래 벚꽃)이라 했을 때 똥덩어리에 뚝뚝 떨어지는 건 "죄"가 아니라 다른 무엇이었지만 거기 느닷없이 "죄"라는 추상어를 데려옴으로써 삶의 심각한 본질을 환기시킨다. 그것은 다시 벚꽃의 만개와 겹치면서 아름다움과 죄악을 현란하게 교직한다. 그의 환유는 이 시의 중심시축이다. 은유와 환유는 시나 문학의 주민등록증같은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들이 시나 문학을 몹쓸 존재로 인식하게 하는 딱지이기도 하다. 마구 뒤섞어놓은 은유들의 실끄트머리를 찾아내어 상상력으로 끊어진 다른 지점과 조심스럽게 이어야 하는, 비유 해독의 고단함은 난해라는 두건을 뒤집어쓴 작품들에서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돌리게 한 원흉이기도 했다. 뿐만인가. 꼭 집어 그냥 말하면 좋을 얘기를 굳이 에둘러 말해버리는 저 환유의 내숭과 음흉함은 문자속 전부를 내숭과 음흉으로 인식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은 문학의 즐거움은 바로 그 묻힌 의미들을 발굴하는 쾌감이며, 낯선 의미들이 충돌하여 피흘리는데서 돋아나는 생기이며, 매복한 개념들이 낮은 포복으로 언어의 습지를 기어가는 장면을 영화처럼 감상하는 재미이기도 하다. 은유와 환유는 글쓰기라는 욕망의 가장 핵심이기도 하지만, 글을 읽는 독자들이 행간 속에서 즐길 수 있고 교감할 수 있는 쾌감의 지평이다.  문학은 이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두 여자, 내 딸들에게 붙여주어도 좋았을 이름, 은유와 환유라는 두 여자와 사귀러가는 은밀한 아지트가 아닐까 싶다./빈섬. (Binsom Lee/ 시인, 작가, 스토리텔러)    
7    시는 "광기적 드라마"이다... 댓글:  조회:2015  추천:0  2017-11-15
중국 강소성 계동앞바다에서 혹등고래 사체가 해안으로 들어올려지고 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이 혹등고래는 사흘 동안 세 번이나 해안에 좌초되었다. / 2017년 11월 15일, 중국 계동에서 은유와 환유   김재성  (산에 '산불조심'이라고 쓴 플랜카드)  숲의 나무와 나무 사이에 사각의 끈으로 연결한 흰 바탕에 붉은색으로 '산불 조심' 이라고 고딕체로 쓰여 있다. 괸심이 끌리는 기표를 한참 동안 의식한다.  '산불조심'이라는 문장은 수평적인 구성이고 '산'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우리는 나무, 잎, 골짜기, 숲, 바위, 짐승, 흙 등을 동시에 연상하거나 기억하게 된다. 또한 '산불' 하면 산에 불이 나서 불꽃이 휘여져 올라오는 모습이나 헬리곱터가 산불을 진화하는 모습,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며 진화하거나, 산짐승들이 불을 피하기 위해 몰려다니는 아프리카의 장면과 활활 타며 번지고 있는 불길에서 타고 있는 나무를 촬영하는 카메라 등을 연상한다. 그리고 '조심'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삶에 있어서의 인간관계와 기계 혹은 대상관계에 있어서도 다 양하게 생각하게 한다. 징검다리를 조심스럽게 건너가야 하고 위험물건도 조심스럽게 취급해야 하며 자기 자신과 또는 타인과의 대화와 행위에 있어서도 항상 배려와 거리를 조심스럽게 판단해야만 한다.  따라서 '산불조심'하면 이렇게 많은 생각을 유도하게 하는 신념인 기표의 효과들이다.  로만 야콥슨은 전자를 환유로 후자를 은유라 부르면서, 언어가 구성되는 기본 원칙이라 했다. 이 두 가지의 언어구성법칙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은 심각한 실어증에 걸린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 밝 혔다. 부언하면 사실주의, 자연주의, 큐비즘에서는 환유가 은유보다 더 많이 사용되고, 반면에 낭만주 의 초사실주의, 다다이즘에서는 은유가 더 많이 기용되고 있음을 문학 텍스트를 통해 증명했다. 야콥슨은 실어증 환자에게 결핍된 것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과정에서 은유와 환유의 두 축 중 어느 한 가지가 빠지면 말을 못한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은유와 환유를 분류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것이고 추상적인 것이지 실지로 삼박하게 분류되지 않는다. 야콥슨과 비트겐슈타인같은 사람들도 시어와 보통어 은유와 환유와의 차 이를 논하는 지점에서는 뒤걸음질을 칠 만큼 어려운 문제다. 그리고 신비평가들도 모두 시어와 보통어와의 구별에 궁구했지만, 뒤돌아보면 허사였다. 모법답안을 작성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은유와 환유와의 차이성을 온갖 현란한 말로 가르고 분류하려 하지만, 눈 감고 가슴의 소리를 듣는다면 이것이 얼마나 헛된 작업인가를 알 수 있 을 것이다.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지시켰듯이, 시어(은유)란 보통어(환유)없이는 불가능하다. 환유는 예전에는 모두 은유였고 오래 사용되어 닳으면 환유가 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했고, 라캉은 기표를 무시하는 행위는 인간의 운명을 무시하는 것 이라고 경고 했다. 기의와 기표는 단절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했지만, 또다른 한편으로는, 환유에서 만들어지는 은유와 라랑그를 우선시 함으로써, 기표가 기의를 가진다는 것을 유도한다. 이는 의식과 무의식이 만난다는 것을 뜻한다. 이미 야콥슨이 해명했듯이 은유는 무의식의 언어, 환유는 의식의 언어로 생각한다.  라캉에 따르면 나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연상은 무한대로 뻗쳐 확장된다. 영국 참나무, 플라타너스, 구약이 제시하고 있는 상징적인 나무, 황페해진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의 그림자, 나뭇가지의 분열된 것을 보고 분열 그 자체, 농신(Saturn)의 나무, 달의 여신 다이아나의 나무, 벼락에 맞아 죽은 나무에 걸려 있는 수정 등등 … 우리의 연상은 끝임없이 펼쳐지는데, 이는 마치 불에 태운 거북 등이 예측불허한 우리의 운명을 밝혀주었듯이, 기표는 불현 듯 환유의 차원에서 서서히 느리게 진행하는 존재의 축으로부터 명명할 수 없는 암흙을  '언어의 빛'으로 솟아오르게 한다. 기표의 흐름과 이것이 일으키는 연상의 포물선은 거의 광적이지만, '영원성의 한 순간을 거의 눈에 띄지 않는 광택의 소나기'로 가져온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기의가 없던 기표가 기의를 갖게 되는 순간이다.  글을 쓰는데 필요한 도구인 펜이 존재한다는 남근임을 나타내지만, '희작이 될 때까지'라는 말을 분 명히 웃음, 익살, 농담, 재치를 시사한다. 프로이트가 밝혔듯이 우리의 무의식이 표출되는 순간 이것 이 쥬이상스이다.  여성주의자들은 예전에는 남근을 상징하는 펜으로 글을 썼지만, 요즈음은 개인용 컴퓨터의 자판으로 글을 쓴다. 이것은 마치 여성 몸 전체를 애무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요즈음 글쓰기는 여성적이라며 위의 라캉 주장에 반격한다.  기표는 타자임과 동시에 결핍이며, 증오이며, 무지이며, 사랑이며, 말의 장소인 동시에 타자의 담화 이다. 또한 최초의 기표는 무의식을 뜻하고 이원적 기표는 언어로 대표적 표상화를 뜻한다. 첫 번째 단일한 기표는 영상을 뜻하며, 대기표는 무의식의 주체를, 보편적인 기표는 상징적 논리를, 비환원적인 기표는 무의미를, 그러나 동시에 기표는 무의식의 폐쇄를 뜻한다. 그러나 좀더 집요하게 라캉 어휘의 미끄러짐을 추적하노라면, 우리는 결국 이 타자는 이성임을 알게된다.  '광기여, 당신은 현인들의 난공불락의 공포로 가득찬 숨겨진 곳을 장식했던 애매모호한 칭찬의 대상 이 아니다. 만약 현자가 바로 거기에서 머무를 집을 찾았다면, 이는 끝임없이 터널을 뚫고 있는 가장 훌륭한 대리인, 그가 충성을 다해 섬기는 이성, 바로 로고스 이외에는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자들이 섬기는 이것은 '이성이 전개하는 사업' 즉 '변증법'으로 '광기의 드라마'이지만, 진리를 접근하고 있다. 이 타자의 말은 주체를 통해 언어 밖 혹은 언어를 초월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체를 초월해서 말로부터 온다. 이는 '완전한 말' 바로 기독교 하나님 말씀에 버금가는 말이다.  라캉의 심리분석 임상으로 본다면, 분석자는 피분석자의 이야기에 동의 고무하는 대신, 차단시키거나 아니면 벙어리나 죽은 사람처럼 침묵을 지켜야 한다고 한다. 이유는 일상적으로 우리가 하고 있는 말은 타자의 소리이기에, 분석자 그리고 피분석자 둘의 이야기도 타자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 두 개의 타자의 목소리(의식의 언어)가 서로 합쳐져 동의를 하게 되면, 피분석자의 의식은 무의식으로부터 이중으로 소외 분열된다는 것이다.  라캉은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가 결코 떨어진 것이 아니라, 순환적이며 비대칭적이라 한다. 그리하여 주체는 기표 즉 환유와 은유가 꾸미는 알리바이이며, 단순히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기표 혹은 타자의 메카니즘에 불과하다. 더욱이 주체는 언어에 의해 진행되는 의미화의 구성 인이 누구인지 모른다. 시인의 주체는 시인이 아니라 그가 쓴 시(詩)가 된다.  (데리다의 정신분석학 해체 + 주관적 해석)   
6    시는 은유와 환유의 몸부림이다... 댓글:  조회:3038  추천:0  2017-11-15
    상하이(上海, 상해) 충밍(崇明)에서ㅡ      은유와 환유       은유와 환유는 그것이 쓰이는 역사적 맥락과 깊은 관계를 맺는다. 한 시대에는 환유로 취급받던 것이 다른 시대에는 은유로 취급당한다. 이를테면 이라는 표현은 요즘 은유로 쓰인다. 라는 말은 원래 설사를 한다는 뜻으로 환유적 표현이었으나 요즘에는 은유적 표현으로 쓰인다.    은유와 환유는 특정한 시대와 관련을 맺기도 한다. 역사 철학자 지암비스타 비코는 에서 은유를 비롯한 환유, 제유를 단순히 비유의 차원을 넘어 언어사와 문화사를 재는 잣대로 삼았다. 신의 시대에는 어느 비유보다 환유가 지배적으로 쓰였고, 영웅의 시대에는 제유가 압도적이어서 이 무렵 인간은 곤잘 주피터 신의 아들로 자처했다. 그런가 하면 인간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어떤 비유보다도 은유가 가장 널리 쓰였다.     이탈리아 기호학자 에코는 심층적인 면에서 은유와 환유가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은유적 메커니즘과 환유적 메커니즘은 서로 상호작용을 하게 마련이다.       축어적 관념과 비유적 관념 사이에 상호작용이 일어난다는 것은 이미 이 둘이 환유적 관계를 맺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실제로 어떤 비유는 은유로 봐야 할지, 환유로 봐야 할 지 경계선이 모호하고 애매하여 분류하기가 쉽지 않다. 한 이론가는 아예 라는 용어로 부른다. 메타프토노미란 바로 메타포(은유)와 미토노미(환유)를 합하여 만들어낸 합성어다.     은유가 한 사물의 다른 사물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라면, 환유는 한 개체를 그 개체와 관련 있는 다른 개체로써 말하는 방법이다. 은유의 기능이 주로 사물이나 개념을 이해하는 데 있다면 환유는 사물이나 개념을 지칭하는데 그 기능이 있다. 은유가 이해를 위한 장치라면 환유는 지칭을 위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비유는 어떤 사물의 가치를 그 자체에 고정시키지 않고 다른 것에서 유추한다. 미국 철학자 어번(W.M.Urban)은 언어와 현실에서 언어의 가동성을 강조했다. 사물과 언어관계는 거리가 있으므로 부단히 움직인다고 본 것이다. 이는 언어의 추상성과 언어 의미 사이에 무한한 가능성을 뜻한다. 한편에서 비유는 진리를 전달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인식도 있었으나, 18c 말엽부터는 비유는 필수적이며 세계를 인식하는데 꼭 필요한 도구로 보고 있는 태도가 강하다. 비유는 인생관이나 세계관과 맞닿아 있어 인간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형식이 되는 것이다.       은유는 매개어의 개입 없이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결합되어 의미의 轉移와 새로운 의미를 환기시키는 비유법이다. 은유를 이해하려면 유사성을 파악해야 하지만 동일성과는 별 관계가 없다. 예를 들어 아리스텔레스는 '인생의 황혼'으로 노년을 표현했다. 수학적 비례로 치환시시켜 a/b=c/d 따라서 ad=bc이나 노년의 인생에 대한 관계가 황혼이 하루에 대한 관계와 정확히 같지는 않다. 유사성은 바로 흡사한 것이기 때문에 이같은 관계가 성립한다. 은유는 일종의 수수께끼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뜻을 유추하기 힘들다. 은유의 장르라 할 만한 시를 두고 새뮤얼 코울리지가 고 얘기한 것은 바로 이같은 맥락이다. 윌리엄 엠슨은 은유가 가능한 것은 애매성 때문이라고도 했다. 은유는 우리를 당혹하게 하지는 않지만 이제껏 보지 못한 유사함을 밝혀 우리를 일깨워주고 매료시킨다.       환유는 원관념을 연상되는 다른 말로 바꾸어 한 부분으로 전체를 나타낸다. '그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라든가 '십자가와 초승달' 등이 그 예이다. 환유는 상징의 발생에 주요한 역할을 한다. 깃발이나 십자가, 베일 같은 상징은 실재를 환기시키는데 상징과 실재가 모두 같은 문화에 있기 때문이다. 문화가 변하면 상징이 사라지는 것처럼 환유는 확고한 문화적인 관습에서 설득력이 생긴다. 환유는 최근에 들어와 주목받기 시작했다. 환유의 어원인 미토노미아는 '이름을 바꾼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일상 생활 언어에서 은유보다 환유가 더 많이 쓰이고 언어학자들은 환유쪽에 더 관심을 갖는 경향이 있다.           20C 미국의 야콥슨은 은유와 환유의 성격을 밝혀내는 데에 크게 이바지한 학자이다. 그것을 실제 비평에 적용해 문학의 스타일도 은유나 환유 쪽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고 밝혀냈다. 18C에서 19C 낭만주의 예술에서는 은유적 성격이 강하고 19C 중엽부터의 리얼리즘 예술에서는 환유적 성격이 강하며 세기말의 문예 사조라 할 상징주의에서는 은유적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또한 문학 장르에 있어 시는 은유적이고 소설은 환유적이며 연극은 은유적이고 영화는 환유적이라 주장한다.       이탈리아 기호학자 움베르트 에코는 이 둘의 관계가 깊이 연관성을 띠며 상호작용을 하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어떤 비유는 은유로 보아야 할지 환유로 보아야 할지 그 경계선이 굉장히 애매하고 모호하다. 메타프토노미라 하며 은유, 환유 동시 성격으로 규정하기도 한다.좋은 예로 밀양 아리랑이 있다.       정든 임 오시는데 인사를 못해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벙긋     이 경우 입을 벙긋거리는 행위로 웃는 행위를 나타낸 것은 '환유'이나 이것이 행복하다는 마음을 나타내니 '은유'가 되는 것이다. 은유는 한 사물을 다른 사물의 관점에서 말하는 방법이고 환유는 한 개체를 그 개체와 관련 있는 다른 개체로써 말하는 방법이다. 은유는 개념 이해의 방법으로 많이 쓰며 환유는 지칭하는데 많이 쓴다. 은유와 환유는 그 역사적 맥락과 연관되는데 한 시대의 환유가 다른 시대 은유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서양에서 이 예전에는 환유였으나 현재는 은유이다. 사람이 죽은 뒤에는 얼굴 빛이 희게 변하기 때문에 결과로써 원인을 나타내는 환유였으나 추상적 관념인 죽음을 의인화하여 그 얼굴 색깔이 희다고 하는 은유로 현재 쓰는 것이다.       제라르 주네트·새뮤얼 레빈·존 설 같은 이론가들은 환유를 은유의 하위 갈래로 여기기도 하지만 이 둘의 형식에는 차이가 있다. 은유가 유사성에 의존한다면 환유는 인접성에 기초한다. 환유는 은유와 비교하여 인간의 경험적 토대가 크다. 흔히 은유는 추상적인 느낌이 강하고 환유는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느낌이 강하다. 영국 이론가 호미 K.바바는 최근 은유와 환유를 포스트식민주의 문학 이론에 적용했다. 은유적으로 읽으면 의미의 보편성에 주목하게 되고 환유로 읽으면 보편성보다는 개별성이나 특수성에 주목한다는 것이다. 바바에 따르면 피식민지 주민을 문학 작품 속에 재현하는 것은 를 재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은유화하면 등가의 원칙을 끌어들이고 이 원칙은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추상적 명제로 환원할 위험이 있다고 염려한다. 이는 다시 말해 제국주의나 식민주의의 담론에서 은유가 많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은유를 폭력의 언어, 환유를 저항의 언어로 볼 수도 있다. 전통적인 제도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것은 환유의 수사적 장치가 적당하고, 영원불변하고 본질적인 것과 연관되는 은유는 기존의 폭력적 성격의 것들을 표현하는데 적절한 것이다. 은유는 모든 현상을 하나로 뭉뚱그려 동일성에 무게를 싣고 환유는 인간을 모든 구체적 현상 속으로 낱낱이 파헤쳐놓는다. 김욱동 교수는 그 예를 문정희의 시 「작은 부엌노래」와 정현종의 시 「부엌을 기리는 노래」로 설명한다. 문정희의 시는 남성 가부장 질서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보이며 환유가 지배적인데, 정현종의 시는 남성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은유가 많이 쓰이고 있다. *      
5    [그것이 알고싶다] - 화가 반 고흐와 "해바라기그림"?... 댓글:  조회:1418  추천:0  2017-11-15
반 고흐는 얼마나 많은 해바라기를 그렸을가 (ZOGLO) 2017년11월15일 반 고흐는 화란의 화가로 현대 인상파 예술의 대표라고 할 수 있다. 는 반 고흐의 대표작으로 그는 일생에 얼마나 많은 해바라기를 그렸을가. 통계에 따르면 여섯점 정도라고 한다. 먼저 고흐는 네점의 를 그렸는데 그림 속의 해바라기의 수는 각기 다르다. 그중 한 그림에는 해바라기가 세송이밖에 안되고 다른 그림에는 다섯송이 그리고 나머지 두 작품에는 각기 열두송이와 열네송이의 해바라기가 그려져있다.   그중 열네송이의 해바라기가 있는 그림은 1888년에 그려진 것으로 이 그림이 바로 경매에서 3950만딸라에 팔린 그 이다. 프랑스 미술계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은 또 다른 유명한 인상파 화가인 고갱은 고흐와 매우 친했다. 그래서 그가 고흐에게 그림을 달라고 부탁하자 고흐는 선뜻 열두송이의 해바라기가 그려진 그림과 열네송이의 해바라기가 그려진 그림을 고갱에게 선물했다. 이 그림을 받은 고갱은 뛸 듯이 기뻐했다. 고갱이 기뻐하는 모습을 본 고흐는 또 두점의 를 그려 고갱에게 선사했다. 이렇게 해서 고흐의 여섯점이 모두 완성된 것이다.   이 수자는 고흐가 서신에서 이야기한 여섯점의 와 일치하다. 고흐가 세상을 떠난 지 11년 후인 1901년 프랑스 빠리의 한 전시회에서 고흐의 이름이 적힌 라는 작품이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이 작품을 소유한 사람은 고흐와 동시대를 살았던 프랑스 삼류화가였으나 작품의 진위를 의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87년 한 경매에서 일본의 야스다 화재해상보험회사가 고흐의 를 당시 세계 최고가인 3950만딸라에 사들여 미술계가 들썩했다. 야스다 화재해상보험회사가 사들인 그림의 소유자는 본래 체스터 베티 일가였다.   그렇지만 영국인 노르만은 자세한 연구를 통해 10년 후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소식을 발표했다. 일본 야스다 화재해상보험회사에 팔린 고흐의 작품은 삼류화가가 그린 위작으로 고흐의 작품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 삼류화가는 아무도 자기의 능력을 인정해주지 않자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보고 싶어 유명화가들의 명화를 모방하는 데 빠졌는데 그 정교함은 그림 전문가들도 구별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재미있는 점은 각종 매스컴에서 노르만의 주장을 인용해 작품이 위작이라는 점에 관해 시끄럽게 떠들었지만 정작 그림의 주인인 일본 야스다 화재해상보험회사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야스다 화재해상보험회사 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도 노르만의 주장이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르만의 주장이 론리적이지 않은 리유는 다음과 같다.   대략 세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는데 첫번째는 고흐가 과연 몇점의 를 그렸는지 알만한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 비록 고흐는 편지에서 ‘6’이라는 수자를 거론하기는 했지만 그 편지를 쓴 후에도 그림을 더 그린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일본 야스다 화재해상보험회사가 사들인 가 과연 삼류화가가 위조한 것인지를 증명할 만한 근거도 없으며 있다고 해도 이는 단지 추측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세번째는 고흐의 작품을 위조한 삼류화가와 체스터 베티 일가는 무슨 관계였을가 하는 점이다. 1901년 그가 빠리에서 전시한 그림이 일본 야스다 화재해상보험회사가 경매에서 사들인 그림과 같은 그림이였을가.   이는 후세 사람들이 풀어야 할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종합/연변일보
4    [타산지석] - 우리 연변문단도 인터넷문학을 부흥시켜야... 댓글:  조회:2603  추천:0  2017-11-15
제2회 인터넷문학 비엔날레 베일을 벗다 (ZOGLO) 2017년11월15일    5일, 제2회 인터넷문학 비엔날레 시상식이 녕파에서 있었다. 이번 비엔날레는 최근 2년동안 보물처럼 쏟아져 나온 인터넷문학작품들 중 83편을 추천, 근 반년동안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최종 《남아행》 등 25편의 정품작이 수상의 영예를 거머쥐였다. 작품들 중 대부분은 현실주의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다.     금상은 호주에서 체류하고 있는 작가 주도(작품《남아행》)에게 돌아갔다.   제2회 인터넷문학 비엔날레는 절강성작가협회와 녕파시문련 그리고 자계시당위 선전부에서 손잡고 주최하고 절강성 인터넷작가협회, 녕파시 인터넷작가협회, 자계시 인터넷작가협회에서 손잡고 주관했다. 옹근 1년의 심사작업을 거쳐 최종 금상 1명, 은상 3명, 동상 6명, 우수상 15명을 선정했다.   중국작가협회 부주석 리경택은 “인터넷문학 비엔날레는 비록 2회밖에 치러지지 않았지만 상대적으로 박약하고 지어 공백인 인터넷문학평가체계에 매우 유리한 의거를 제공했다. 중국의 문학상은 실로 많고 그에 반해 인터넷문학상은 너무나 적다. 특히 권위적이고 공신력이 있으며 호소력 짙은 문학상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현실에서 인터넷문학쌍년상은 그 의의가 매우 크다.”고 밝혔다.   한때 비주류로 회화화되던 인터넷 문학이 이제 인류 문학사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확보해 나가고 있다. 특히 우리 나라는 창작과 독서 열기에 있어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인터넷문학의 천국이 됐다. 수많은 작품이 생산되고 있고 쟝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채로운 창작 시도로 대중의 상상력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중국에서 인터넷 문학을 리용하는 네티즌은 전체 리용자 7억 3100만명 가운데 45.6%인 3억 330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모바일을 통한 리용자는 3억 400만명이였다. 수백 곳에 달하는 인터넷 문학 사이트는 2억자의 작품이 매일 갱신되고 일 평균 조회수도 15억 회가 넘는다.   주최측에 따르면 올해 수상작품들은 인터넷문학의 정품화에 더욱 깊은 중시를 돌렸는 바 판타지뿐만아니라 현실소재작품들의 수도 급증했다. 례를 들면 《재료제국》, 《부흥의 길》 등이다. 이런 작품들은 국가기업의 개혁과 대중창업 등 현실적인 사회문제를 깊이있게 파고 들었다. 《남아행》, 《강호 30년》, 《유비》, 《데릴사위》 등 작품들은 력사, 무협 류 상고소재소설 역시 눈에 띄게 늘어났다.   80, 90 세대들의 주요 진지였던 인터넷소설은 이번 비엔날레로 인해 바뀜을 시도했다. 금상을 받은 주도는 1973년 생으로 올해 44살이다. 그의 소설 《남아행》은 력사가공소설로 원나라 말 농민봉기를 배경으로 주원장, 류백온 등 인물 형상들을 그려냈다. 그의 력사소설은 시종일관 왕성한 창조력을 보여왔다. 그는 유물력사관과 엄숙한 창작태도를 지녔고 명랑한 필치로 민족의 영예를 작품에 녹여냈다. 작가는 줄곧 인터넷 력사소설을 써왔고 《남아행》 외 《지남록》, 《란세굉도》, 《수란》 등 소설들로 독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최근년간 인터넷문학은 빠르게 발전해 왔다.   주최측에 따르면 제1회 인터넷문학 비엔날레가 주최되고 지금까지 3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 시간동안 인터넷문학독자군체는 3억명을 돌파했고 인터넷문학시장의 기차니는 100억을 훌쩍 뛰여넘었다.   또한 오는 12월 항주에서 전국의 인터넷문학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제1회 중국인터넷문학주가 열리게 된다.  연변일보 종합  
3    [고향문단소식] - 훈춘벌에 "고문학작가상" 서다... 댓글:  조회:2939  추천:0  2017-11-15
'훈춘의 아들'... 작가 고문자학자 락빈기 조각상 제막 (ZOGLO) 2017년11월27일   현대 저명한 작가 락빈기 선생의 조각상. /장명   (흑룡강신문=하얼빈)허문호 특파원, 황상 = 올해는 중국 현대 저명한 작가, 고문자학자 락빈기(骆宾基) 탄생 100주 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 15일 훈춘시는 룡원공원에서 락빈기 조각상 제막식을 진행하여 락빈기 선생의 일생을 기념하고 기리면서 고향 사람들의 락빈기 선생에 대한 경모와 존경을 표했다.   이날 훈춘시당위 상무위원, 선전부장, 통전부장 류림파는 축사에서 “ 락빈기 선생의 조각상을 세운 것은 훈춘인민들의 락빈기 선생에 대한 경모를 표하는 것이다. 이는 훈춘인민 정신세계의 한개 불후의 기념비 와 영광으로 남을 것이다. 락빈기의 일련의 작품은 어린 시절의 기억, 청소년 시절의 진실한 감정 특히 지역풍정, 민속특색, 다문화 융합 등 내용이 포함되여 있어 락빈기 선생의 내심적이고 격앙된 감정을 실감케 하고 있다. 짙은 지역풍정과 인물형상, 정신풍모도 우리들에게 전쟁시 대의 력사적 축소판과 문화적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우리에게 풍 부한 정신세계를 보여준 동시에 고향문화의 전승과 발전을 이끌었으며 우리 훈춘인민들의 자랑”이라고 했다.   류림파는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서 락빈기 선생의 빛나는 창작성과를 기념하고 기리는 것은 그의 조국에 대한 초지일관한 충성과 열애, 그의 고향과 인민에 대한 깊은 감정, 시대 변화중의 예술창조활력의 탐구정 신을 따라배워야 한다. 우리는 훈춘사람들의 특유한 감은과 책임, 격정 과 꿈으로 락빈기 선생의 사업을 계승하여 앞길을 개척하며 전면적인 초요사회 건설에서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락빈기 아들인 장서태(张书泰)는 제막식에서 “부친은 훈춘에서 태여났고 고향 땅에서 자랐으며 이 곳에서 문학을 접촉하고 좋아했다. 고향의 일초일목, 민간의 이야기 등은 모두 부친의 머리 속에 깊은 인상을 남 겼고 훈춘을 떠나 혁명문학의 길을 걸은 후에도 줄곧 고향을 그리워했 다. 훈춘시당위, 시정부가 부친의 탄생 100주년 조각상을 세운 것은 부 친에 대한 문학지위를 긍정한 것이며 더욱이는 고향인민들의 부친에 대한 숭경과 금할수 없는 정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고향이기도 한 훈춘은 우리가 함께 모든 힘을 모아 발전시켜야 한다”고 했다.   이어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정봉숙, 훈춘시당위 상무위원, 선전부장, 통전부장 류림파, 시정부 부시장 성송금, 연변대학 중국현대 및 근대문학학과 주임, 박사생 지도교수 온조해, 락빈기 아들 장서태, 딸 장소신이 함께 락빈기 선생의 조각상을 제막했다.   제막식후 류림파와 장서태, 장소신은 함게 훈춘시제1소학교를 찾아 교사관(校史馆), 도서실을 참관했고 사생들에게 락빈기 장편소설 “유년”을 증송했다.   락빈기(骆宾基)의 본명은 장박군(张璞君)으로, 1917년 길림성 훈춘현에서 출생했으며 1994년 북경에서 작고했다. 항일전쟁 초기에 문단에 오른 락빈기는 생활이 어려워 도처를 떠돌면서 우여곡절을 경험해야 했고 시 대의 변환과 인생의 좌절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굳센 의지와 적 자지심으로 줄곧 자신의 신앙을 견지했고 인간성의 최저선을 지켜왔다. 락빈기의 일생은 훈춘이라는 이 고향땅에 뿌리를 박고 예술창작과 금문 (金文)연구에 한평생을 바쳤다. 그의 저작으로는 장편소설 《국경선에서(边陲线上)》, 《유년(幼年)》 등이 120여편 문학작품과 《금문신고(金文新考)》 등 약 100만자의 금문연구문헌이 있다. 작가 락빈기 조각상 훈춘에 세워져    2017-11-15    15일, 락빈기 조각상 제막식이 훈춘에서 있었다. 올해는 중국의 저명한 작가이며 고문학가, 중국 상고 사회사 연구자인 락빈기 선생 탄생 100돐이 되는 해이다. 이에 락빈기 선생의 일생을 기념하고 기리기 위해 훈춘시 룡원공원에 락빈기 선생의 조각상을 세웠다. 락빈기의 본명은 장박군, 1917년 훈춘에서 태여났고 1994년 운명을 달리했다. 1938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 중화전국문예계항적(抗敌)협회 계림분회 리사, 동북문화협회 상무리사 겸 비서장과 《전기》, 《문학보》, 《동북문화》의 주필을 지낸 바 있다. 건국 후 락빈기는 산동성문련 부주석, 산동성문화교육위원회 위원, 중국작가협회 북경분회 부주석, 중국문련 제4기 위원, 중국작가협회 제 3기와 4기 리사를 맡았다. 20세기 30년대 중기에 문단에 뛰여들었고 40년대에 정점을 찍었다. 락빈기 선생은 대량의 문학작품을 창작했는데 창작내용 대부분이 훈춘서사, 이민서사, 항전서사 등 3가지 방면이다. ///연변일보 상항파 기자
2    [그것이 알고싶다]-"최초의 한글 띄여쓰기"?/한글본 지리서?... 댓글:  조회:4753  추천:0  2017-11-15
[SBS funE 연예뉴스팀] 최초의 한글 띄어쓰기, 영국 목사가 처음 시작? ...한글날을 맞아 '최초의 한글 띄어쓰기'에 대해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최초의 한글 띄어쓰기는 1877년 영국 목사 존 로스(John Ross)가 편 '조선어 첫걸음'(Corean Primer)이 그 첫 번째 사례로 알려졌다. 국립 국어원에서 제공한 자료를 보면 한글 문장이 먼저 나오고 그 아래 발음과 해당하는 영어 단어를 차례대로 대응시켜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영어식으로 자연스레 띄어쓰기를 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후 1896년 서재필, 주시경, 미국인 선교사 허버트 등이 만든 '독립신문'이 간행물로는 최초로 띄어쓰기를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 1933년 조선어학회가 만든 '한글맞춤법통일안'이 나오면서 띄어쓰기는 보편화됐다고 알려졌다. 최초의 한글 띄어쓰기 소식에 네티즌들은 "최초의 한글 띄어쓰기, 조선어 첫걸음이었구나, "최초의 한글 띄어쓰기, 영국 목사가 처음 시작?", "최초의 한글 띄어쓰기, 너무 놀라워" 등의 반응을 보였다. (최초의 한글 띄어쓰기, 사진=국립 국어원) ▶ SBS 방송  ==================== 덤으로 더... 시대 근대 저작자 호머 헐버트(Hulbert, H.B.) 창작/발표시기 1889년 성격 세계지리서 유형 문헌 분야 종교·철학/천주교 요약 사민필지(士民必知).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Hulbert, H.B.)가 지은 세계지리서.   사민필지(한글본)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가 지은 세계지리서. 1889년에 한글본으로 초판이 나왔고, 1895년에 학부에서 백남규, 이명상 등에게 명하여 한문본 ≪사민필지≫를 간행했다. 규장각도서. 내용 호머 헐버트는 1886년(고종 23) 조선의 초청으로 육영공원(育英公院) 교사로 취임해 세계의 지리지식과 문화를 소개하는 내용의 교과서 격인 『사민필지』를 저술했다. 1889년 한글본으로 초판이 나왔고, 1895년 학부(學部)에서 백남규(白南奎)·이명상(李明翔) 등이 왕명으로 한문본 『사민필지』를 간행했다. 한편, 1906년에는 아처(Archer)의 도움으로 『Geographical Gazetteer of the World』라는 이름의 Hulbert’s Education Series No. Ⅱ 수정판이 출간되었다. 초판한글본은 17행×28자 161면이며, 10장의 지도가 수록되었다. 한문본은 10행×20자 71장(張)으로 되어 있으며, 지도는 실려 있지 않다. 한글본 목차는 제1장 지구, 제2장 유럽주, 제3장 아시아주, 제4장 아메리카주, 제5장 아프리카주로 되어 있고, 총론에서는 태양계와 그 현상, 지구의 모습, 기후·인력·일월식, 그 밖의 지구상의 현상, 대륙과 해양, 인종 등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각 주의 총론은 각 주의 위치·지형·면적·기후·인구·인종을 적고, 이어 각 주별로 주요 국가의 위치·방향·기후·산물·국체·인구·씨족·수도·산업·군사·학업·종교·나라나무 등에 관해 기술하고 있다. 기술상의 특징은 한국을 기준으로 한 점인데, 예를 들면 “일본: 일기는 대한보다 좀 덥고 습기가 많으며…….” 와 같은 내용이 그것이고, 각국의 수출입액은 한국의 화폐단위인 ‘원’으로 표시했다. 비록, 외국인의 손에 의해서 저술된 것이지만, 한국 최초의 세계지리교과서로, 아직 세계정세에 대해 백지상태이던 한국에 세계지리 지식을 꾸밈없이 심어주어 세계에 눈을 돌리게하고, 근대화의 문을 열어 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한글 전용인 이 책은 1890년대 국어 연구의 자료가 된다. 표기법에서 한글만으로 쓰면서도, ‘글ㅅ자, 언문ㅅ법’ 등 사이시옷이 사용되고, 된소리 표기에 전통적인 된시옷과 함께 ‘ㄲ, ㅆ’ 등이 ‘니, 똑똑이’ 등과 같이 사용된 점이 주목된다. 외국, 특히 유럽의 국명이 영어식 발음에 따라 ‘유로바·노웨국·쉬덴국·덴막국·네데란스국’ 등으로 적히고, 바른쪽에 가로줄을 친 점도 특이하다. 참고로 한문본에서는 위 지명이 ‘구라파(歐羅巴)·나위(那威)·서전(瑞典)·정말(丁抹)·하란(荷蘭)’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덤으로 더 더...   891년에 간행되었다. 지구와 천문·기상 등 자연현상에 대한 설명과 지구총론·인종총론 및 유럽 총론 등의 개론을 붙였다. 본문에서는 유럽·아시아·아메리카·아프리카 등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생소한 지역에 대한 다양한 인문지리적 내용을 서술했으며, 국가의 위치와 면적·지형·기후·자원·인구·인종·주요산업·정치체제·법률·교육체제·부세체제·교통수단·종교 등 다양한 내용을 간명하게 기술했다. 본문 가운데 러시아에 대한 기술이 가장 앞에 실려 있는데 그중에는 "러시아가 오로지 영토를 개척하는 것을 도모하여 수백 년 간 유럽과 아시아를 잠식해왔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러시아를 가장 먼저 소개하고 그 팽창주의를 서술한 것은 당시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세력 각축에 시달리던 조선의 입장에서 음미해볼 대목이다. 1895년에는 의정부 주사였던 백남규(白南奎)와 이명상(李明翔)이 번역하고, 의정부 편사국의 주사였던 김택영(金澤榮)의 서문을 받아 한문본으로도 출간되었다. 김택영은 이 책의 저술 동기를 '문명이 날로 쇠잔해가고 허위를 숭상하는 아시아를 각성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또 이 번역본에서는 서양의 여러 나라를 서술하면서 〈영환지략〉과 〈만국사략〉의 일부 내용을 취하여 서술했다. 이 책은 당시 외국의 정세에 어두웠던 지식인들이 세계 각국의 동향을 개략적이나마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덤으로 또 더...   사민필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사민필지 서문 사민필지는 육영공원의 교사였던 호머 헐버트가 집필한 최초의 한글 교과서로 조선이 나아가야 할 국제간의 교류를 위해 조선인에게 필요한 기본적인 지식을 갖추기 위해 만들어졌다. 1891년초에 발간된 것으로 추정되며, 초판으로 2천부를 찍기로 예정했다고 한다.   목차   [숨기기]  1구성 2반응 3금지 4참고서적 5외부 링크   구성[편집] 161쪽으로 되어 있는 사민필지는 태양계와 지구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하여 대륙과 각 나라를 소개하였다. 각 나라에 대한 설명은 지리, 자연 상태, 정부 형태, 풍습, 종교, 산업, 교육, 군사력 등을 포함하였다. 1895년에는 한자로 번역된 한역판도 나왔으며,1906년과 1909년에는 2판과 3판이 각각 출판되었는데, 2판에는 영국과 미국의 현재 이름이 비로소 사용되었다. 이전에는 엥길리국, 합중국이라고 이름했었다. 반응[편집] 사민필지는 육영공원 등 교육기관에서 교재로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상류층에게 인기있는 책이 되었다. 하와이로 이민을 떠난 한국인들이 이민 결심을 하게 되는 주요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금지[편집] 1909년 일본은 사민필지가 국민의 사상 교육 과정에 너무 자극적이라며 출판과 판매를 금지하였다. 참고서적[편집] 김재완, 사민필지에 대한 소고, 문화역사지리 13권 2호, 한국문화역사지리학회, 2001, 205~207쪽 =========================덤으로 역시 더... ○ 교육용 세계 지리지: 『사민필지』 헐버트의 편찬 의도 『사민필지』는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H.B. Hulbert, 1863~1949)가 지은 세계지리서이다. 헐버트는 1886년(고종 23)에 우리 나라의 초청으로 육영공원(育英公院)의 교사로 취임하여, 1889년 세계의 지리지식과 문화를 소개하기 위해 한글본으로 『사민필지』를 저술하였다. 서문에는 그가 『사민필지』를 편찬한 의도가 잘 드러나 있다.     텬하형셰가녜와지금이크게갓지아니하야전에는각국이각각본디방을직희고본국풍쇽만따라더니 지금은그러치아니하여텬하만국이언약을서로맷고사람과믈건과풍쇽이서로통하기를맛치한집안과가하니이는지금텬하형셰의곳치지못할일이라이곳치지못할일이잇슨즉각국이젼과갓치본국글사자와사적만공부함으로는텬하각국풍긔를엇지말며아지못하면서로교접하난사이에맛당치못함과인졍을통함에거리낌이잇슬거시오거리낌이잇스면졍의가서로도탑지못할지니그런즉불가불이젼에공부하던학업외에또각국일홈과디방과폭원과산쳔과소산과국졍과국셰와국재와군사와풍쇽과학업과도학의엇더함을알아야할거시니이런고로태셔각국은남녀를무론하고칠팔셰되면몬져텬하각국디도와풍쇽을가라친후에다른공부를시작하니텬하의산쳔슈륙과각국풍쇽졍치를모라난사름이별로업난지라죠션도불가불이와갓치한연후에야외국교졉에거리낌이업슬거시오.     이처럼 서문에서 『사민필지』의 저술 의도를 밝히고 있는데, 지금의 세계정세가 예전과 달라 국가간의 교류가 한 집안과 같이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각국이 이전과 같은 본국 글자와 사적만으로는 국제교류에서 마땅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가불 이전에 공부하던 국어와 역사 외에 세계지리의 공부가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학생들에게 세계에 대한 지리지식과 더불어 종교, 경제, 군사 등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고 학생들에게 세계를 보는 시각을 길러주기 위해 이 책을 집필한 것이다. 한글본 『사민필지』 『사민필지』의 초간본에는 간행연기가 없는데, 책의 내용을 토대로 볼 때 대략 1889년에 집필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여러 차례의 개정 간행이 이루어졌다. 1895년에는 학부에서 백남규(白南奎)와 이명상(李明翔)이 공동으로 번역하고 의정부편사국(議政府編史局) 주사(主事) 김택영(金澤榮)이 찬하고 서문을 쓴 한문본 『사민필지(士民必知)』가 간행되었다. 한글본 『사민필지』는 1906년 감리교 출판사(Methodist Publishing House)에서 출판되었는데, 영문 제목은 “GEOGRAPHICAL GAZETTEER OF THE WORLD”로 되어 있다. 제3판은 1909년 재판본 그대로 헐버트에 의해 간행되었다. 헐버트가 언어학, 역사학 등의 분야에서 전문적 식견을 지니고 있었지만 대학에서 지리학을 전공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단독으로 『사민필지』를 저술한 것은 아니고 주변의 한국인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헐버트의 회고록에서 『사민필지』는 미국 휘태커(Whittaker) 연감, 혹은 정치가(Statesman) 연감의 축소판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어느 세계지리 교과서를 모범으로 삼아 세계 각국의 통계를 첨가하여 편찬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륙의 순서 초판본의 수록 내용은 서문에 이어 지구과학적 내용을 수록한 「따덩이」, 이어서 각 대륙별로 국가를 소개하고 있다. 수록 대륙의 순서는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순으로 되어 있다. 유럽이 아시아보다 먼저 기술된 것이 특징적이다. 이는 근대 서구문명의 발상지인 유럽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사민필지』에는 지리지를 보완하는 8장의 지도가 실려 있다. 태양계를 중심으로 한 천체도, 지구동서반구도, 유로바디도, 아시아디도, 북아메리까디도, 남아메리까디도, 아프리가디도, 오스드렐랴태평양디도 등의 순서로 되어 있다.     세계지도와 대륙별 지도 세계지도의 경우 경선과 위선이 등간격의 곡선으로 그려진 정거방위도법을 사용하였다. 대륙별 지도에는 지도의 제목이 표기되어 있고, 동서남북의 방위표시, 삼천리에 해당하는 축척 등이 그려져 있다. 지도의 내용은 대륙에 속해 있는 주요 국가와 수도, 주요 도시가 표시된 정도로 비교적 소략하다. 산맥은 산봉우리를 서로 연결하여 그린 전통적인 방식을 따르고 있다. 연안 해역은 가로선을 조밀하게 그려 표현하였다.   『사민필지』의 「아시아디도」 대륙별 국가별 기술 『사민필지』의 내용을 보면, 총론에서는 태양계와 그 현상, 지구와 그 현상, 인력, 일․월식, 가상 현상, 지진, 조석, 유성, 화산 등 지구과학 전반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어 각 대륙별로 내용이 구성되어 있는데, 해당 대륙의 총론을 앞에 수록하고 뒤에 각국의 지지를 기술했다. 대륙별 총론에서는 폭원(위치와 크기), 디경(사방 경계), 디방(면적), 디형(지형), 일긔(기후), 사람의 수효(인구), 시족(인종) 등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가별로 서술된 항목에는 나라별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폭원, 디경, 디방, 지형, 일긔, 소산(산물), 국톄(국체), 사람의 수효, 시족, 도셩(수도) 및 도회, 백성의 사업(생업), 사람의 품수(계급), 외국통상(무역), 장사사무(상업), 국재(재정), 군사(육군), 군함, 학업(학교), 종교, 나라 소무(국가의 역할), 도로 및 철도, 엇은따(식민지), 특이사항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을 기준으로 내용 기술 내용 기술의 특징으로는 당시 조선을 기준으로 각국을 비교하여 서술한 점을 들 수 있다. 프랑스의 기후를 설명하면서, “일긔는고르나대한보다좀더우며”라고 하고, 일본의 기후를 기술하는 부분에서도, “일긔를의론컨대죠션보다좀더웁고습긔가만흐며”라고 하여 우리나라와 비교하여 서술하고 있다. 각국의 기술은 각 항목별로 서술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어서, 전통적인 백과사전식 기술에서 탈피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항목에서는 자신의 독특한 시각이 반영되어 있기도 한데, 맨 마지막 항목인 ‘이나라헤이샹함’에서 독특한 풍습이나 민족성, 기이한 동물, 자연적 특색 등을 자신의 시각으로 기술하고 있다. 스페인 『사민필지』의 내용 가운데 이전의 지리서와 다른 내용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스페인에 대한 내용이다. 스페인은 유로바의 ‘이스바니아국’이란 명칭으로 소개되었는데, 다른 이름으로 ‘려송국이라’고 하고 있다. 려송국은 지금의 필리핀 루손 섬을 가리키는 곳으로 중국의 문헌에는 ‘여송(呂宋)’으로 표기되어 있다. 『명사』에서도 “중국의 남해 가운데 있어서 장주(漳州)와 매우 가깝다”라고 하여 위치상으로 지금의 루손 섬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불랑기(佛郞機)가 이곳을 점령해서 그 이름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에 실제는 불랑기라고 했다. 알레니의 『직방외기』에서도 “중국 광저우의 동남쪽에 여송이 있다”라고 기술했다. 지금의 필리핀의 루손 섬에 해당하는 지역을 여송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루손 섬을 여송으로 부르던 것이 스페인을 부르는 다른 명칭으로 사용된 것에 대해서는 『영환지략』에서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즉, 스페인이 마닐라가 있는 루손 섬을 식민지로 삼으면서 본국인 서반아(西班牙, 스페인)을 대여송(大呂宋)이라 하고 루손 섬을 소여송(小呂宋)이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주석에서는 “보통 객이 주인의 이름을 계승하는데[客襲主名] 도리어 주인이 객의 이름을 차용한[主借客名] 연유는 모르겠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처음에 식민지의 나라 이름으로 부르던 것을 점차 본국의 이름으로 불렀던 데서 기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위원의 『해국도지』에서는 항목을 아예 ‘대여송국’으로 제시하고 별칭으로 사편국(斯扁國), 서반아(西班亞), 시반아(是班亞), 이서파니아(以西把尼亞) 등을 나열했다. 이를 통해 볼 때 『사민필지』에는 당시 국명 표기에서도 호칭의 변화 양상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역사적 의의 세계 지리지로서 『사민필지』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는데, 첫째 당시의 시대적 요청에 부응한 개화 정신과 애국 계몽적 성격이 강조되어 있다. 둘째로 일부 내용의 기술에서 기독교적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 셋째로 유럽적인 시각, 특히 영미 중심의 시각으로 기술되어 있다. 당시 식민지 확보 경쟁을 하던 열강들의 시각이 책 속에 반영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이후에 발간되는 지리교과서의 체계와 내용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표 . 『사민필지』에 수록된 대륙별 소속 국가 대륙명 국가 또는 지역 유로바(유럽) 아라사국, 노웨쉬덴국, 덴막국, 덕국, 네데란스국, 벨지암국, 옝길리국, 블란시국, 이스바나아국, 포츄칼국, 쉿스란드국, 이다리아국, 오스드로헝게리국, 터키국, 루마니아국, 셔비아국, 만트뉘그로국, 끄리스국 아시아 아시아아라사, 청국, 죠션국, 일본국, 안남국, 사ㅣ암국, 범아국,인도따, 별루기스단국, 압간니스단국, 아라비아, 베시아국, 아시아터키 아메리까 가나다, 합즁국, 알나스가, 그린란드, 멕스고국, 센드랄아메리까, 남북아메리까사이에여러셤, 골롬비아국, 베네쉬일나국, 기아나, 브레실국, 엑궤도국, 베루국, 칠니국, 쁠니비아국, 아젠듼합즁국, 유루궤국, 바라궤국 아프리가 이즙드국, 빠브리, 아프리가셔편, 아프가남편, 아프리가동편, 마다가스가국 오스드렐랴 태평양모든셤, 슈마드라셤, 본이오셤, 셀늬비스셤, 누귄늬셤, 누실란드셤, 여러젹은셤 필자: 오상학(제주대학교 사회교육과 교수) /////////////////////////////////////////////////////////////// ==================================== /////////////////////////////////////////////////////////////// 사민필지(최초 한글 지리교과서) 서문 (옛 글자를 현대 글로 번역)   천하 형세가 옛날과 지금이 크게 같지 아니하여 전에는 각국이 각각 본지방을 지키고 본국 풍속만 따르더니 지금은 그러하지 아니하여 천하만국이 언약을 서로 믿고 사람과 물건과 풍속이 서로 통하기를 마치 한집안과 같으니 이는 지금 천하 형세의 고치지 못할 일이라.   이 고치지 못할 일이 있는 즉 각국이 전과 같이 본국 글자와 사적만 공부함으로는 천하각국 풍습을 어찌알며 알지 못하면 서로 교접하는 사이에 마땅치 못하고 인정을 통함에 거리낌이 있을 것이오.  거리낌이 있으면 정의가 서로 두텁지 못할지니 그런 즉 불가불 이전에 공부하던 학업 외에 각국 이름, 지방, 폭원, 산천, 산야, 국경, 국세, 재화, 군사, 풍속, 학업과 도학이 어떠한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런고로 대저 각국은 남녀를 막론하고 칠, 팔세가 되면 천하 각국 지도와 풍속을 가르친 후에 다른 공부를 시작하니 천하의 산천, 수륙과 각국 풍속, 정치를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는지라 조선도 불가불 이와 갖게한 연후에야 외국 교접에 거리낌이 없을 것이요. 또 생각건대 중국글자로는 모든 사람이 빨리 알며 널리 볼 수가 없고 조선언문은 본국 글일뿐더러 선비와 백성과 남녀가 널리 보고 알기 쉬우니.    슬프다. 조선언문이 중국글자에 비하여 크게 요긴하건마는 사람들이 요긴한 줄도 알지 아니하고 오히려 업수이 여기니 어찌 아깝지 아니하리오. 이러므로 한 외국인이 조선말과 언문법에 익숙치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잊어버리고 특별히 언문으로서 천하각국 지도와 목견한 풍기를 대강 기록한다.  땅덩이와 풍우박뢰의 어떠함을 먼저 차례로 각국을 말씀하니 자세히 보시면 각국 일을 대충은 알 것이요.  또 외국교접에 적이 긴요하게 될 듯하니 말씀의 잘못됨과 언문의 서투른 것은 용서하시고 이야기만 보시기를 그윽히 바라옵나이다.    조선 육영공원 교사 헐버트 씀 ============================== ///////////////////////////////////////////////////// ==============================   세계에서 가장 먼저 한글로만 쓴 교과서 헐버트가 쓴 ‘민필지’의 의미와 가치     한말글문화협회 대표 이대로     1. 들머리     나는 호머 헐버트 박사에 대해서 학교에서 배운 일도 없고 또 사회에서 들은 일이 없다. 그런데 지금부터 7년 전 쯤 오리 전택부 선생님을 모시고 한글날 국경일 제정운동을 하면서 그 분이 주신 책과 말씀을 통해서 헐버트란 이름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 헐버트 추모식에 와서 헙브트기념사업회 김동진 회장을 만나 민필지 사본과 헤이그 밀사 사건에 관련된 일본 기밀문서 자료집 등 관련 문서를 소개 받고 좀 더 자세하게 헐버트를 알게 되었다. 특히 민필지 서문을 읽으면서 우리가 이 분을 너무 몰랐고 또 무관심했으며 은혜를 모르고 있었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 게 많고, 해야 할 일을 안 하고 있는 게 너무 많다. 헐버트를 알리고 빛내고 그 정신과 업적을 이어가는 일도 그 가운데 아주 중대한 일이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한국인들도 마찬가지로 헐버트에 대해서 모를 것 같아서 이 분을 온 국민에게 알리고 이 분이 한 일을 이어받고 빛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김동진 헐버트기념사업회 회장이 헐버트 박사를 알리고 빛내는 일을 함께 하자는 말에 고마움과 함께 찬동했고 이 일에 앞장서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오늘 이 학술토론회를 열게 되었다. 이 학술대회를 열 수 있게 도와준 문화체육관광부 여러분과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분들께 머리 숙여 고마운 인사를 드린다.     호머 헐버트는 미국인으로서 1886년(조선 고종 23년) 우리나라에서 처음 세운 서양식 학교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의 외국어 선생으로 온 사람이다. 그 때 나이 26살의 젊은이였다. 외국어 교사로 와서 1891년까지 교사로 일하는 동안 한국을 아주 좋아하고 사랑하게 되었고 한국이 잘 될 길을 알려주고 또 스스로 열려고 애썼다. 스스로 한글로 교과서도 만들고 한국 역사책도 쓰고, 외국 침략으로부터 한국을 지키려고 애썼다.     김동진 회장은 헐버트가 한글을 배우고 알게 되면서 한국을 더 좋아하게 되었고, 한국인보다도 한글과 한국을 더 사랑하게 된 거 같다고 말했다. 한국인이 영어 로마자보다도 더 잘난 글자를 만든 민족이라는 것을 알고 난 뒤에도 한국인을 무시할 외국인이 없을 것이다. 외국에 유학을 갔던 이들이 중국인과 일본인만 대단하게 생각하다가 한글이 세계 으뜸 글자란 것을 알려주면 우리를 무시하지 않더라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그만큼 한글은 우리의 자긍심이고 자존심이고 보물이고 힘이다.     헐버트는 1905년 고종의 밀사로 미국 대통령에게 가서 을사늑약이 일본이 강제로 맺은 거짓 조약으로서 고종이 서명하지 않은 조약임을 밝히려고 했으나 실패했으며, 1907년 네덜란드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보내도록 건의하고 헤이그에 우리 밀사와 함께 가서 한국의 국권회복운동을 한 독립운동가로만 더 알려졌다. 한국인보다도 한글을 사랑하고 한글을 널리 빛낸 한글학자와 한글운동가인데 이 사실을 모르거나 이 일을 대단하게 보지 않고 있다. 나는 헐버트가 한글을 빛낸 일은 독립운동을 한 것보다도 오히려 더 대단한 업적이라고 본다. 그 때 독립운동은 여러 사람이 많이 했지만 한글을 빛내고 세계에 알린 일은 그가 가장 먼저 했기 때문이다     .그는 참된 교육자였고, 이기주의자가 아니고 온 인류를 사랑하는 박애주의자였고, 한글이 얼마나 우수한 지를 바로 안 천재였으며 한국인보다 한글과 한국을 더 사랑하고 세계에 빛낸 사람이다. 교육으로 우리 국민을 똑똑하게 해서 힘센 나라를 만들려고 했다. 그래서 외국 침략을 막으려고 했으나 안 되니 독립운동까지 했다. 한글을 사랑하고 한글로 우리 조선인을 눈 뜨게 하고 똑똑하게 만들려고 했다. 사민필지에 그 정신과 인물됨이 그대로 나타나있다. 참으로 고맙고 훌륭한 사람이다. 그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뒤에도 언젠가 한국이 독립을 할 것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그건 한글을 가진 우수한 민족임을 알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오늘 나는 그가 한글을 살리고 빛내는 데 이바지한 일은 간단하게 소개하고 그가 쓴 182쪽의 사민필지의 의미와 가치를 중심으로 말하려고 한다.     2. 헐버트가 한글을 빛내는 데 이바지 한 일     가. 스스로 한글을 배우고 한글을 사랑했다.     헐버트는 학생들을 잘 가르치려면 스스로 먼저 한글을 터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글을 배우려고 제 돈으로 한글 선생을 모셔서 공부했는데 선생을 세 번이나 바꾸었다고 한다. 두 번째 선생은 아버지를 부친이라고 가르쳤다. 그 말은 집에서 대화할 때 잘 사용하지 않는 것을 알고 세 번째 선생을 모셨는데 그는 마음에 들었다고 하는 데 누구인지 알려지진 않았다. 여기서 그가 어려운 한자말보다 쉬운 말을 써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실천한 머리 좋은 사람임을 알 수 있다.     헐버트는 육영공원에서 학생들에게 외국어뿐만 아니라 서방세계, 우주 들을 가르치면서 교재용 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1889년 3년 만에 한글을 깨우치고 세계 지리, 천체, 각국의 정부형태와 인구, 교육과 군사력, 풍습, 산업 들을 한글로 써 교과서로 사용했다. 그리고 그 책 이름도 선비와 백성이 모두 알아야 할 책이라는 뜻으로 민필지(士民必知)라고 지었다. 그리고 이 책을 학생들 교재로 쓰는 데 그치지 않고 일반인들도 읽으라고 1891년에 초판을 냈는데 2000부를 찍었고 1906년에 2판, 1909년에 3판을 내고 1905년에 한문으로도 냈다고 한다. 이 일은 한글 발전 역사뿐 아니라 우리 민족 역사에 길이 빛날 매우 큰일이고 세계 문화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할 아름다운 일이다.     나. 세계 최초로 한글이 세계 으뜸 글자임을 외국에 알리다.     그는 가장 먼저 영문으로 한글의 우수함을 써서 외국인들에게 알린 사람이다. 1892년 우리 나라에서 처음 나온 영문 월간지 ‘한국소식(The Korean Repository)’에 ‘한글(The Korean Alphabet)’ 이란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세종임금의 훌륭함을 말하고 “세종이 어려운 한자를 배우기 힘들어 하는 백성을 생각해서 배우고 쓰기 쉬운 우리 글자를 만든 것은 인류 역사에 대단히 큰 업적이다.”라고 창제 정신을 위대하게 평가했다.     그는 이어서 한글소식 3월호에도 한국어 기원과 계통을 설명하면서 한글이 훌륭함을 했다. 1898년 한국소식 2월호엔 이두라는 제목으로 한문, 이두, 한글의 문자 구조를 비교 설명하면서 한글이 얼마나 좋은 글자인지 알려주었다. 그리고 1906년까지 한글소식에 여러 차례 이어서 한글에 관한 글을 기고했다.     또 1903년 한국논문이란 논문집에 훈민정음(Hun-min Chong-eum)이란 논문을 실었다. 그리고 한글과 한국 문화에 관한 글을 영문으로 여러 번 기고해서 한글과 한국을 외국에 알리는데 이바지했다. 특히 1903년 한국논문에 기고한 영문 논문을 미국이 스미스소니언협회에 보내 연례보고서의 학술 논문 난에 넣게 했다. 이 보고서는 미국 대통령과 의회와 세계 학자들에게 보내는 보고서라고 하니 외국 논문지에 가장 먼저 한글을 알린 논문이 될 것이다.     다. 주시경과 헐버트와 독립신문     주시경은 세종이 만든 한글을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마음대로 쓸 수 있도록 갈고 닦은 학자요 선구자요 선각자다. 그는 “나라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나니.”라면서 한글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한글사랑 모임까지 만든 한글운동가로서 오늘날 우리가 우러러 받드는 분이다. 그런데 주시경이 헐버트의 제자요 함께 한글을 빛내는 일을 했다.     헐버트가 1889년에 한글로 민필지란 교과서를 만들었고, 1902년에 한글이란 논문도 썼는데 그 헐버트가 교사로 있는 배재학당에 1894년에 들어갔으니 그의 가르침과 영향을 받았을 것이 틀림없다. 주시경은 서재필을 도와 독립신문 창간과 일을 도왔으며, 헐버트가 관리하는 삼문출판사에서 일하기도 했다니 헐버트와 인연이 깊다.     그리고 헐버트는 최초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 창간과 발행에도 많이 이바지하고 힘을 썼을 것으로 짐작된다. 독립신문을 처음 만든 서재필과 주시경이 헐버트를 잘 알고 있으며 독립신문을 헐버트가 관리하는 삼문출판사(한글,한문,영문)에서 인쇄했기 때문이다. 서재필이 미국에서 와 바로 독립신문을 창간할 수 있었던 것도 헐버트와 삼문출판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본다.       라. 고종황제가 설립한 국문연구소를 만들게 하다.     1907년 주시경이 고종께 “연산군 이래 정부가 우리글을 돌보지 않은 것은 잘못이니 세종 때의 정음청과 같은 연구기관을 두어 국어와 국문을 부흥시키자.”고 주장하고 건의해서 고종이 윤허했다. 그런데 헐버트도 민필지를 만든 뒤 줄곧 한글 사용을 주장하면서 한글 보급청을 만들자고 정부에 건의했다.     헐버트의 제자인 오성근의 일기에 1902년 3월 헐버트, 김가진, 지석영, 주시경 들이 국문학교 설립을 추진했으나 재정형편이 어려워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쓰고 있고, 또 1906년에 자신과 주시경이 한글 보급 기관 구성에 대해 논의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주시경, 오성근이 한 일은 그의 스승인 헐버트의 영향과 가르침에서 나온 일이라고 본다. 그리고 헐버트는 고종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러니 대한제국에서 한글을 쓰고 발전시키는 데 헐버트가 큰 몫을 했음이 틀림없다.     마. 헐버트는 대단한 한글학자요 한글운동가다.     헐버트는 한글을 배운 지 4일 만에 한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1주일이 안 되어 조선인들이 이 좋은 제 글자보다 중국 한자를 더 좋아하고 섬기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회고록에 썼다고 한다. 그리고 로마자보다도 더 훌륭한 소리글자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오늘날 대학원까지 다니고 박사가 된 한국 학자도 한글이 얼마나 훌륭한 글자이며, 살려 쓸 때 힘센 나라가 된다는 걸 모르는 이가 많은 데 외국인이 120년 전에 그걸 알고 한글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는 앞에서 밝히 한글에 관한 논문 말고도 한글과 한국말에 관한 더 많은 논문을 썼다. 그리고 한글의 얼마나 우수한 글자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한글운동에 앞장을 섰다. 그는 “세계 어느 문자도 소리를 적는데 한글보다 더 낫은 글자는 없다. 한글은 현재 쓰는 세계 문자가운데 가장 훌륭한 문자 가운데 하나임에 틀림없다.”라고 밝혔다. 그는 외국인이지만 그 어느 한국인보다 똑똑한 한글학자였고, 한글운동가였다.     바. 한글 띄어쓰기를 가르친 사람이다.     독립신문이 한글을 쓸 때 처음으로 띄어 쓰고 점을 찍었는데 이 또한 헐버트 때문으로 안다. 독립신문이 1896년 4월에 창간했는데 헐버트가 공동편집인으로 있는 한국소식에 1896년 1월호에 띄어쓰기에 관한 글을 실었었다고 한다. 민필지는 띄어쓰기는 하지 않았다. 한국인들이 쓰는 한문이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기에 한국인을 배려하다보니 미쳐 그것을 깨닫지 못했던 거로 보인다. 그러나 서양 영어는 띄어쓰기를 하고 글 끝에 점을 찍는 것을 헐버트는 잘 알고 있고, 서양 책을 본 한국인들도 알고 있어서 독립신문에 그걸 적용했을 거로 보인다. 한글과 똑 같은 소리글자인 영문을 배우고 익힌 헐버트는 한글을 빛내는 데 보이게 보이지 않게 많이 이바지한 사람이다.     민필지 서문 사진과 풀이         천하형세가 옛날과 지금이 크게 같지 아니하여 전에는 각국이 각각 본국만을 지키고 본국 풍속만 따르더니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천하만국이 언약을 서로 믿고 사람과 물건과 풍속이 서로 통하기를 마치 한 집안과 같으니 이는 지금 천하 형세의 고치지 못할 일이라, 이 고치지 못할 일이 있은 즉 각국이 전과 같이 본국 글자와 사적만 공부함으로는 천하 각국 풍습을 어찌 알며 알지 못하면 서로 교접하는 사이에 마땅치 못하고 인정을 통함에 거리낌이 있을 것이오, 거리낌이 있으면 정리가 서로 두텁지 못할지니 그런 즉 불가불 이전에 공부하던 학업 외에 각국 이름, 지방, 폭원, 산천, 산야, 국경, 국세, 재화, 군사, 풍속, 학업과 도학이 어떠한가를 알아야 할 것이오. 이런 고로 대저 각국은 남녀를 막론하고 칠, 팔세가 되면 먼저 천하 각국 지도와 풍속을 가르치고 나서 다른 공부를 시작하니 산천, 수륙과 각국 풍속, 정치를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는지라 조선도 불가불 이와 같게 한 연후에야 외국 교접에 거리낌이 없을 것이요. 또 생각건대 중국 글자로는 모든 사람이 빨리 알며 널리 볼 수가 없고 조선 언문은 본국 글일뿐더러 선비와 백성과 남녀가 널리 보고 알기 쉬우니 슬프다! 조선 언문이 중국 글자에 비하여 크게 요긴하건만 사람들이 요긴한 줄도 알지 아니하고 업신여기니 어찌 아깝지 아니하리오. 이러므로 한 외국인이 조선말과 어문법에 익치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잊어버리고 특별히 언문으로 천하 각국 지도와 목견한 풍기를 대강 기록할 새 먼저 땅덩이와 폭우박뢰의 어떠함과 차례로 각국을 말씀하니 자세히 보시면 각국일을 대충은 알 것이요 또 외국 교접에 적이 긴요하게 될 듯하니 말씀의 잘못됨과 언문의 서투른 것은 용서하시고 이야기만 자세히 보시기를 그윽이 바라옵나이다.     조선육영공원 교사 헐버트       3. 사민필지의 의미와 가치     민필지는 서문으로 시작해서 우주, 지구, 5대륙별로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나라마다 지리, 산업, 정세, 교육과 군사력, 종교와 각 나라의 특징들을 썼다. 서문에 우리가 귀담아 듣고 반성해야 할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 민필지 서문은 세종임금이 쓴 훈민정음 어제를 떠오르게 한다.     아시아에서 조선과 일본, 중국에 대해서 좀 자세하고 적고 유럽 여러 나라가 발전한 모습을 강조했다. 유럽과 아메리카는 재물이 많고 종교와 학업에 귀천이 없고 정치는 국민의 뜻을 존중하고 소경과 귀먹어리와 앉은뱅이도 모두 공부하도록 하고 잘 돌보며 노비나 인신매매를 금지하고 평등하게 산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일본이 서구 문명을 받아들여서 많이 발전했고, 조선은 제 글자보도 중국 글자를 중요시하고 종교 자유가 없다고 가르친다. 조선은 중국과 일본에 비해 호랑이가 있고 대마도도 조선 땅이라고 적고 있는 게 눈에 뜨인다. 그 가치와 의미를 살펴보자.     가. 세계에서 가장 처음 한글로만 쓴 교과서다. 이것은 대단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 우리 조선인은 한글이 태어나고 500년이 지나도록 그 글자의 주인이면서 한글로 공문서와 교과서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외국인이 한글로만 교과서를 처음으로 썼다는 것은 한글 발전 역사에 대단히 큰일이고 잘한 일이다. 그 이전에 조선인들이 한글로만 편지를 쓰거나 개인이 글을 쓴 일이 있다. 이 일은 기독교인들이 그 당시 기독교 성경이나 교리 보급하는 글을 한글로만 쓴 일과 함께 아주 중대하게 봐야 한다. 더욱이 아직도 교과서는 한글로만 써서는 안된다는 얼빠진 이들이 판치는 데 110년 전에 한글로만 교과서를 만들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나. 헐버트는 한글이 얼마나 빼어난 글자인지 보여준 사람이고, 사민필지는 그걸 증명한 책이다. 헐버트는 한국인을 제대로 잘 가르치려면 한국말을 배워야 하고 한글을 잘 배우고 잘 하려면 한글을 알아야 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한글을 배운지 3일 만에 한글을 알았다고 한다. 그리고 3년 만에 한글로만 교과서를 만들었다. 참으로 놀랍도록 대단한 일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쓴 정인지는 슬기로운 이는 하루에 이 글자를 깨우치고 어리석은 이라도 열흘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그걸 외국인인 헐버트가 보여주었고 민필지가 증명했다.     다. 교육 내용에서 있어서 세계정세와 지리를 알아야 함을 가르쳐준 책이다. 헐버트가 이 책을 처음 써가지고 외무대신에게 보여주니 누구나 알고 배워야 할 좋은 책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이름도 ‘세계 지리’라고 하지 않고, 선비나 일반 백성이나 모두 누구든지 꼭 알아야 할 지식이라는 뜻을 가진 민필지 (士民必知)로 한 거 같다. 그는 민필지 머릿글에서 “각국은 남녀 막론하고 칠판세가 되면 다른 나라의 풍속과 정세와 지리를 먼저 가르치니 조선도 그리하고 다른 나라와 외교도 하고 해야 한다.”고 썼다. 이 나라를 제대로 이끌고 강대국에 나라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정치인과 관리가 세계정세와 지리를 아는 것이 근본인데 그건 외면하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했겠는가.   라. 한자나 한자말만 읽고 알면 공부 끝이요 학자인줄 아는 관리와 지도층을 일깨우려는 책이다. 그는 조선의 관리와 선비가 중국문화와 말글이 모두요 그것만 읽고 알면 되는 줄 알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꾸짖었다. 한국의 관리와 지배층에게 한글이 얼마나 훌륭함을 가르쳐주려고 스스로 열심히 한국말을 배우고 쉬운 글로 일부러 책을 썼다. 그래서 이 책은 학생들 교과서로 만들었지만 일반인들도 보라고 인쇄 출판까지 했다. 그는 이 책 머릿글에서 “중국 글자로는 모든 이가 빨리 알 수가 없고, 널리 모두 알려면 조선 글로 써야 쉬운데 슬프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마. 한글로만 쓴 게 아니라 쉬운 우리말로 책을 써도 되는 것을 보여주었다. 책 글 내용을 보면 입말이고 쉬운 말이다. 그런데 책 이름은 한자말이다. 왜 그랬을까 한문만 섬기는 이들을 생각해서 그들의 눈길을 끌려고 한 거로 보인다. “我是學生”은 중국말이다. 그런데 그 당시 한문이 이런 중국말투다. 영어로 “I am a student.”처럼 중국 글을 풀이하면“나는 이다 학생”이 된다. 우리말로는 “나는 학생이다.”가 된다. 그런데 이런 중국글로 공부를 하면 제대로 되겠는가! 이런 잘못을 헐버트가 쉬운 우리 말투로 교과서를 만들어서 알려주었다.     바. 조선인이 쉬운 제 말글로 가르치면 힘센 나라가 될 것임을 알려주었다. 그는 민필지 머릿글에서 “조선 언문이 중국 글자에 견주어 크게 요긴하것마는 조선인들이 귀한 줄 모르고 오히려 업수이 여기니 어찌 아깝지 아니리오. 이러므로 외국인인 자기가 한국말과 한글을 잘 알지 못하지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특별히 언문으로 교과서를 만든다. 이를 익히면 외국과 교섭하는 데 긴요하게 쓸 것이다.”라고 말했다. 백성들이 한문을 몰라 글을 배우고 쓰기 힘들어 배우고 쓰기 쉬운 우리 글자를 만드니 잘 쓰라고 하신 세종임금 말씀과 똑 같다.     사. 조선인이이 가까이 하고 쉽게 이해하도록 배려했다. 거리 표시도 ‘4km’ 라고 영문으로 쓰지 않고 ‘십리’ 라고 한국인이 익숙한 단위로 썼다. 오 대륙은 다섯 땅덩이, 사막은 모래밧, ‘수입’은 “사들이는 것”, ‘수출’은 “내다 파는것”이라고 썼다. 지도도 그려 넣고 각 나라의 수도는 파란색으로 표하고 국경선은 빨간색으로 칠하기도 했다. 쪽 수 표시도 “1, 2, 3”으로 쓰지 않고 “일, 이, 삼”이란 한글로 썼다.     아. 한글 표기 연구에 도움이 될 책이다. 된소리가 나는 말, ‘또’는 ‘ㅅ도’라고 하고, ‘떨어진’은 ‘ㅅ더러진’으로 썼다. 첫소리에 ‘ㅅㄷ’처럼 겹자음을 썼다. ‘땅’은 ‘ㅅ다’라고 했다. 그래서 ‘땅덩이’는 ‘ㅅ다덩이’로 되었다. 된소리가 나는 말에서 사이시옷을 많이 썼다. ‘수법’은 ‘수ㅅ법’으로 ‘숫자’는 ‘수ㅅ자’로, ‘사탕’은 ‘사ㅅ당’으로 ‘문법’은 ‘문ㅅ법’으로 썼다. 그런데 첫소리에 ㄲ 이 없다. ‘가까우면’은 ‘갓가오면’으로 오늘날 쓰지 않는 말, 쓰지 않는 아래아(ㆍ)를 쓰는 말도 연구 자료가 될 가치가 있다. “, , ,, ” 같은 쌍 받침은 보이지 않는다. ‘많고’는 ‘만코’로, ‘없고’는 ‘업고’로, ‘있으면’은 ‘잇스면’으로, ‘밖’에는 ‘밧게’로 썼다. ㅊ ㄷ ㅍ ㅌ ㅎ받침도 없다. ‘빛’은 ‘빗’으로, ‘받아’는 ‘바다’로 ‘같고’는 ‘ㅅ고’로 ‘받고’는 ‘밧고’로 적고 있다.     자. 토박이말을 많이 살려 쓴 책이다. ‘해협’을 ‘물ㅅ목’이라고 했다. “지브랄타해협 - 지브랄타 물목. 카리브해 - 카리브못.” ‘호수‘를 ’못‘이라고 하고, ’십(十)은 ‘열’이라고 하고 ‘지구’는 ‘다덩이’이라고 하고, 지구가 모든 물건을 끌어당긴다는 말을 “드리는”이라고 했다. “지구가 해를 공전하다”는 “지구가 해를 에워돌다.”로 썼다. ‘미국’은 ‘합중국’, 영국은 ‘엥길리국’, 러시아는 ‘아라사국’이라고 했다. ‘대마도’도 조선 땅이라고 하고 한 게 남다르게 보인다. 그 때 대마도와 간도는 우리땅이라는 게 일반 인식이었던 거로 보인다. 외국인이 제멋대로 쓴 것이 아니고 보고 들은 대로 바르게 쓴 것이기 때문이다. 헐버트는 이 책에서 일본을 서양 문물을 빨리 받아들여서 많이 발전한 나라로 좋게 쓰고 있어 더욱 믿음이 간다.       차. 참된 교육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고 있다. 제 글자가 얼마나 훌륭하고 소중한지 모르는 조선인들을 안타깝게 여기고 그 쓰라고 가르쳐주었다. 서문은 세종임금이 쓰신 세종어제와 닮았다. 한글이 얼마나 좋은 글자인지 알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썼다. 한글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자나 영어 교육을 보았다. 그래서 남의 글 교육보다 세계 물정과 유럽이나 미국 들 선진국 사회 모습을 알려주어 우리가 무엇을 배워야 하는 지 알려주고 있다.       차. 오늘날 지리책보다 더 알기 쉽게 설명했다. 구름, 월식, 비, 바람, 번개, 천둥, 지진, 이슬, 우박 들 자연 현상을 설명한 내용이 오늘날 우리가 배우는 지리책보다도 더 쉽다. “구름은 물과 땅에서 항상 습기가 나는데, 이 김이 지극히 가벼워 사람이 숨 쉬는 기운보다 더 가벼워 눈에 보이지 아니하고, 공중으로 올라갈수록 차가우니 땅에서 나온 김이 올라가 차가운 데를 당하면 김이 엉겨서 형체가 뵈는 지라, 이게 구름이다. 또 더운 때는 땅에서 김이 많이 더 많이 나고 많이 나면 김에 습기도 많으니 그런고로 여름의 김은 습기가 많으며 또 구름도 많다. 비는 엉긴 김이 구름인즉 떠다니다가 매우 차가운 데를 만나면 물이 되나니 큰 산속은 더 차가운지라 그런고로 구름이 큰산을 지나면 물이 되고, 물은 기운보다 무거우니 무거운 것은 나리는지라 이때 나리는 게 비니라.” 라고 설명했다. 참으로 알기 쉽게 가르치고 있다. 나는 학교에서 이렇게 자세하고 쉽게 배운 일이 없다.       타. 조선인들을 남다르게 사랑하고 생각한 책이다. 될 수 있으면 조선인들이 쉽게 읽고 깨우치게 하려고 도량형 단위도 조선식으로 바꾸었다. 지도까지 그려 넣었고, 그 나라의 수도와 큰 도시도 표시했는데 수도는 파란색으로 모두 표했다. 거리를 나타내는 ‘km’를 ‘리’로 바꾸고, 높이도 ‘척’으로 곡식의 무게를 나타내는 ‘kg’을 ‘석’으로 표시했다. 각 나라의 수도를 나타내는 표시는 파란 색으로 표시했다. 오늘날 한국의 많은 지식인들이 일반 국민을 생각지 않고 외국어를 마구 섞어 쓰는 일이 많은데 이 분에게 독자와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배워야 겠다.     파. 유럽과 미국을 아시아나 다른 대륙보다 좋게 쓴 것은 우리를 깨우치려는 뜻이다. 사민필지에서 유럽 각 나라를 “ 군사가 바르며 재물이 많고, 산업을 귀하게 여기며 학업에 정밀하고 한가지 종교를 강요하지 않고, 정치에서 백성들의 뜻을 따르고 모든 이에 평등하게 교육을 받을 수 있고 노약자나 불쌍한 사람을 거두어 주고 병원이 많아 치4를 잘하고 상하귀천이 없고 첩을 두지 않고, 노복을 거느리지 않는다.” 라는 등 칭찬을 많이 하는 데 우리가 개선하고 알아야 할 일을 강조한 거로 보인다.   하. 대마도가 우리 땅임을 밝혔다. 1886년 미국인 헐버트가 우리나라 최초 신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 교사로 와서 3년만인 1889년에 만든 민필지란 책 76 쪽 조선국 편을 보면 “동해에 울릉도와 대마도가 있다.”고 되어있습니다. 외국인이 헐버트까지도 대마도가 우리땅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육영공원은 관리와 양반 자녀가 다니던 고종이 만든 관립학교 였으며 이완용도 이 학교를 다녔다고 하니 이 책으로 공부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헐버트는 배재학당 교사도 했는데 거기서 이승만과 주시경도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 책 지도에도 남해까지 동해라고 되어있는 데 헐버트는 그렇게 안 것으로 보입니다.    사민필지.hwp           마무리   그는 한글이 영어를 적는 로마자처럼 음성언어이게 한글은 단어가 조합되는 대로 읽으면 되고 영어처럼 발음기호가 필요 없어 매우 우수한 문자임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조선의 관리와 양반들이 한글을 우습게 여기고 한문만 좋아하는 것을 개탄하고 언젠가 한국인들이 한자보다 한글을 좋아하고 쓰게 될 것이라 내다보았다. 그리고 한자는 유럽에서 라틴어와 같은 처지가 될 것으로 예견했다. 그리고 한국은 한글로 빨리 발전하게 될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한글을 좋아하게 되고, 한국과 한국인까지 좋아하게 되었단다.     한글의 주인인 우리보다도 먼저 한글만으로 처음 교과서를 만든 것과 한글이 우수한 글자임을 세계에 알린 것은 우리 역사 뿐 아니라 세계 역사에도 길이 빛날 큰 사건이다. 그런데 왜 이 사실이 알려지지 않고 빛을 보지 못했을까? 정치인과 학자도 한글의 우수함과 가치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고, 그러니 우리 한글을 우습게 보는 국민이 많아 한글이 제 대접을 못받고 있다.     특히 일본 지배를 받으면서 일본식 한자혼용에 길든 일제 지식인들이 학자와 언론인으로서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으며 이들은 한자혼용을 주장하는 모임까지 만들어 한글이 잘 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 이들은 한글만 쓰는 시험지나 논문은 낙제점을 주더니 이제 영어 숭배자로 돌아서서 한글로 학술 논문은 0점 처리를 한다고 한다. 100년이 지난 오늘날도 이런 무리들이 판치니 슬프고 한심한 한국인들이다. 이 일은 겨레의 큰 슬픔이고 부끄러움이다. 이제라도 헐버트가 한 일들을 온 국민에게 알려주고 정부가 나서서 그 뜻을 이어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일본은 이 민필지가 조선인에게 자주의식을 심어주고, 똑똑하게 만들어 자신들 식민지배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까봐 1909년에 이미 이 책을 판매 금지했다고 한다. 사민필지는 우리나라 근대 교육사에 우리 말글로 교과서를 만들어 큰 가르침을 주었다. 이제라도 중국 한자로부터 해방되자. 또 다시 외국 말글의 식민지, 노예가 되지 말자. 그 길은 헐버트 정신과 한 일을 이어서 더욱 빛낼 때 될 있이다. 한국인보다 한글을 더 사랑한 파란 눈을 가진 외국인 헐버트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그는 은인이었고 스승이었고 천재였다. 참으로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한 친구였다. 한글이 태어나고 560년이 지난 지금도 한글로만 교과서를 만들면 안 된다고 떠드는 얼빠진 학자와 정치인과 공무원이 판치는 세상이니 한심하고 답답하다. 그동안 이 귀중한 책을 거들떠보지 않은 것은 한자 숭배자들이 판치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제라도 정신을 차리고 어떻게 하면 한글만으로 말글살이를 더 쉽게 할 수 있도록 말 다듬기, 쉬운 말 찾아서 쓰기, 새 말 만들기 들도 열심히 하자. 정부는 이제라도 한글을 빛낸 공로를 인정해 훈장이라도 추서하고 마땅한 곳에 동상이라도 세워서 이분의 정신과 업적을 기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먼저 한글로 만든 독립신문과 함께 교과서를 최초로 한글로만 만든, 이런 중대한 일을 외국인이 먼저 했다는 일은 대단한 일이고 우리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이제라도 더욱 힘써야 한다. 육영공원 학생 중에는 이완용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완용을 고종을 폐위하는 데 앞장 선 일본의 앞잡이 ”라고 비난하며, 미국 독립 전쟁 때 독립군을 배반하고 영국 제국 편을 든 미국인 아놀드 장군과 같은 자라고 했다. 이완용이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는데 헐버트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헐버트는 중국 한자는 배우고 쓰기 힘든 복잡한 글자라면서 중국 정부에 3만자를 38자 알파베트를 만들어 쓸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헐버트기념사업회 김동진 회장은  "한글은 우리 민족을 세계 으뜸 국가로 만들 원동력이라고 평했다. 영어나 한자조기교육에 엄청난 시간과 돈과 힘을 낭비하지 말고 우리 한글을 빛내는 일에 힘쓰자. 교육자들은 헐버트 교육정신을 눈여겨 보라. 헐버트는 중국에도 문자개혁을 충고 했다." 고 밝혔다.     참고 자료   사민필지 영인본 - 2006 헐버트기념사업회 냄 “파란 눈의 한국 혼 헐버트”2010 김동진 지음 : 참 좋은 친구 독립신문 사본 기독교청년회운동사 1978. 정음사 전택부 우리 말글 독립운동의 발자취 2008 이대로 지음 지식산업사         ///출처 :한말글문화협회    글쓴이 : 나라임자 =====================================   『사민필지』는 한글로 된 세계지리교과서이다. 이 책은 호머 베잘렐 힐버트(1863~1949)가 편찬 간행한 것으로 당시 조선인의 세계지리인식에 크게 기여하였을 뿐 아니라 순전히 한글로 저술된 까닭에 더 많은 조선인들이 새로운 지식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와 한글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였다.     『사민필지』는 네 번에 걸쳐서 간행되었는데, 본 신청본은 최초로 힐버트가 간행한 초간본으로서 실제 교육현장에서 교육용으로 사용된 것이다. 또한 당시 근대식 정장 제본이 아닌 노끈으로 묶은 4침의 책이며 삽입이 어려운 지도를 조선에서 목판으로 제작하여 인쇄하였다는 점에서 국가 등록문화재로 등록하여 보존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 최초의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       ▲ 최초의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   ==============================     사민필지(士民必知) 한문본  ​헐버트 저, 백남규 이명상 한문 번역, 의정부 학부(學部) 간행, 71장, 1895년    
1    "나는 사원보다 한반도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 댓글:  조회:4163  추천:0  2017-11-15
호머 헐버트 국보 경천사십층석탑을 지켜낸 한글학자Homer B. Hulbert     출생 1863년 01월 26일 사망 1949년 08월 05일   웨스트민스터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 1907년 일본 궁내부대신인 다나카는 황태자 순종 결혼식에 축하사절로 참석했다가 개성에 있는 경천사십층석탑을 일본군 85명을 보내 뜯어서 일본으로 가져가버렸습니다. 이를 안 한국의 문명화와 국권수호를 위해 온몸을 불사른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1) 박사는 즉시 현장을 답사한 뒤 《재팬 크로니클》과 《뉴욕포스트》에 기고하고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고 있는 헤이그에서도 이 사실을 폭로했지요. 이런 헐버트의 노력으로 국보 86호 경천사석탑을 되돌려 받을 수 있었습니다. 육영공원 재직 당시 교사 헐버트(맨 왼쪽)와 학생들 헐버트는 《사민필지》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교과서를 펴내면서 한글애용을 적극 주장한 한글학자기도 했지요. "나는 웨스트민스터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고 평소 소원한 대로 그는 서울 양화진에 묻혔습니다.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는 해마다 8월 5일 양화진묘지에서 헐버트 박사 추모식을 열고 있는데 2009년 8월 5일은 60주기를 맞이하는 해였습니다. 헐버트 박사는 1886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 교사로 한국에 온 이래 《독립신문》 창간에 이바지했고 1907년 고종 황제에게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파견을 건의하기도 했습니다. 이 일로 1910년 이 땅에서 추방되었지만,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3·1운동을 지지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온몸을 바쳤지요. 할아버지의 60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헐버트 박사의 손자인 브루스 헐버트 씨 부부는 "열 살 때까지 할아버지가 살아계셨다. 할아버지는 한국의 아리랑과 전래동화를 손자 손녀들에게 매일 들려주셨는데, 일본 이야기가 나오면 매우 격해지셨다"고 전했습니다. 이국땅에서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하다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잠든 푸른 눈의 한국인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한국사랑에 대한 작은 보답일 것입니다. =======================   호머 헐버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호머 헐버트   출생 1863년 1월 26일  미국 버몬트 주 뉴헤이븐 사망 1949년 8월 5일 (86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청량리 위생병원 사인 노환 국적  미국 학력 다트머스 대학교 직업 감리교 선교사, 교육자, 항일운동가 종교 감리교 배우자 메이 헐버트 자녀 3남 2녀 웹사이트 헐버트 박사 기념사업회) 호머 베잘렐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년 1월 26일 ~ 1949년 8월 5일)는 미국의 감리교회 선교사이자, 육영공원에 교사로 근무하여 영어를 가르쳤던 교육인으로 한국의 항일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그의 한국어 이름은 헐벗 또는 흘법(訖法), 할보(轄甫)였다. 그는 고종 황제의 최측근 보필 역할 및 자문 역할을 하여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의 외교 및 대화 창구 역할을 해왔다. 고종 황제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은 외국인이었고, 한국의 분리독립운동을 지지하고 지원하였으며, 1907년 헤이그 비밀밀사에 적극 지원하여 밀사활동을 하였다. 1919년 3.1운동을 지지했다. 그는 영어뿐만 아니라 한국어도 매우 유창하게 하였으며,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대한제국 시대에 언론인으로 활동했던 어니스트 배델(영국 출신)과 더불어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 1위로 꼽히기도 했다. [출처 필요]   목차   [숨기기]  1생애 1.1초년기 1.2육영공원에서의 교직생활 1.3선교사로 재입국 1.4한국독립운동 지원 1.5말년 2사후 3저서 4상훈 5같이 보기 6각주 7참고 자료 8   생애[편집] 초년기[편집] 헐버트는 1863년 1월 26일 미국 버몬트 주 뉴헤이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미들베리대학의 총장이었던 칼빈 헐버트 목사였으며 어머니는 다트머스 대학의 창립자 엘리저 윌록의 외증손녀인 매리 우드워드다. 1884년, 다트머스 대학을 졸업하고, 그 해에 유니언 신학교에 들어가서 2년간 수학하였다. 육영공원에서의 교직생활[편집] 1886년(조선 고종 23년)에 길모어, 벙커등과 함께 조선에서 육영공원에 교사를 파견해달라는 요청으로 조선에 들어와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院)에서 교사직으로 영어를 가르쳤다. 그는 자비로 한글 개인교사를 고용하여 한글을 배워 3년만에 한글로 책을 저술할 정도의 실력을 갖게 되었다. 그는 육영공원에서 근무하면서 제중원 학당에서도 학생을 가르쳤는데, 1888년 3월경부터 하루 2시간씩 제중원 학당에서 교육을 담당하였다. 1888년 9월 미국에 일시귀국하여 메이 한나와 결혼하여 함께 조선으로 돌아왔다.   육영공원의 교사였던 호머 헐버트가 집필한 최초의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 1891년 최초의 순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저술해 육영공원 교재로 사용하였다. 육영공원에서 교직으로 근무했을때 헐버트는 외국 서적의 번역 작업과 외국에 대한 한국 홍보 활동을 벌여 많은 서적과 기사를 번역, 저술했다. 1896년에는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아리랑을 처음으로 채보하였다. 그러던 중, 조선 정부에서 재정상의 이유로 육영공원을 축소 운영하게되자, 헐버트는 1891년에 교사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헐버트는 1891년 여름 당나귀를 타고 아펜젤러, 모펫과 함께 평양을 방문하여 평양 근교의 석탄 광산의 실태를 파악하였다. 아펜젤러와 모펫은 선교 정보를 얻기 위하여 동행하였다. 선교사로 재입국[편집] 1893년에 헐버트는 미국 감리교회의 선교사 자격으로 다시 조선에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는 감리교 출판부인 삼문출판사의 책임을 맡았으며, 배재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한성부에 오기 전 미국의 한 출판사에서 출판에 대한 교육을 받고 왔으며 신시내티에서 신식 인쇄기를 들여왔다. 삼문출판사는 그가 부임한 지 1년이 안 되어 전도지와 종교 서적 1백만여 면을 인쇄하여 경영을 자급자족할 수준에 이르렀다. 1895년 2년간 휴간했던 영문 월간지 '한국소식'을 다시 발행하였고, 최초의 영문 소설 한국어 번역판인 '텬로력뎡'(천로역정)을 출판하였다. 그해 8월에 한글 로마자 표기법을 고안하였다.[1] 10월 8일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났는데, 당시 그는 언더우드 그리고 에비슨과 함께 고종의 침전에서 불침번을 섰다고 한다. 1897년 5월 조선정부와 고용계약을 맺고 학생수 50명이 되는 한성사범학교의 책임자가 되었으며, 관립영어학교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쳤다. 1900년부터 1905년 고종의 특사로 미국에 방문하기 전까지 현 경기고등학교의 전신 관립중학교의 교사로 재직하였으며 일본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다양한 사회활동을 전개하였다. 1901년부터 영문 월간지 'Korea Review'를 발행하였다. 헐버트 부인도 이화학당에서 음악을 가르쳤으며 외국인 자녀들을 자신의 집에서 가르쳤다. 그녀는 또한 제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하기도 하였다. 그는 현 동대문교회인 볼드윈 교회를 맡아 담임목회를 하였다. 이때 외국 서적의 번역 작업과 외국에 대한 한국 홍보 활동을 벌여 많은 서적과 기사를 번역, 저술했다. 한국의 역사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1908년에는 관립중학교의 제자 오성근과 함께 '대한역사'라는 한글 역사 교과서를 출판하였다. 이 책은 상,하권으로 기획되었으나 하권은 출간하지 못하고 상권만을 발행하였다. 이마저도 1909년 일제의 검열에 의하여 금서조치되어 일본 경찰에 의하여 출판사에 있던 책이 모두 몰수되어 불태워졌다. 한국독립운동 지원[편집] 1890년대 중엽에 조선은 일본제국으로부터 위협을 겪게 되는데, 헐버트는 일제의 이러한 침탈행위를 목격하면서 조선의 국내 및 국제 정치,외교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조선의 자주권회복 운동에 헌신하기 시작한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헐버트는 고종을 호위하고, 최측근 보필 역할 및 자문 역할을 하여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의 외교 및 대화 창구 역할을 해왔다. 헐버트는 고종의 신뢰를 가장 많이 받은 외국인이었다. 헐버트는 1903년부터 타임스의 객원 특파원을 지냈으며, 1904년에는 AP 통신의 객원 특파원을 지냈다. 그는 러일전쟁을 깊이 있게 취재하여 송고하였다. 1905년,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늑약 사건이 있은 후에 헐버트는 을사늑약의 불법성과 무효성을 국제사회에 알리려 했으며,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주장하고자 하였다. 또한 을사늑약의 무효성을 알리기 위해 고종 황제로부터 친서를 받아 1905년 미국 대통령에게 밀서를 전달하고자 하였으나 실현되지는 못했으며, 미국을 비롯한 열강국가들에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헤이그 특사인 이준, 이상설, 이위종. 헐버트 박사는 이들을 네덜란드 헤이그로 파견하는 데 크게 일조했다. 1907년 고종의 밀서를 받아, 비밀리에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장에 비밀 특사 3명들을 파견하는 데 크게 일조하기도 했다.(헤이그 특사 파견을 위해 통감부의 감시속을 피해 사전 작업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로 인해 헐버트는 제4의 특사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일본 제국의 방해로 헤이그 특사들은 회의장에 입장조차 못했으며, 결국 실패로 끝나자 이것이 일본제국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를 빌미로 일본제국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헐버트를 대한제국에서 추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헐버트는 미국에서 서재필, 이승만 등의 미주 독립운동가들에게 적극 지원하여 활동에 힘을 보탰으며, 한국의 분리독립을 위해 미국 각지를 돌면서 일본제국의 침략행위를 비난하였고, 한국의 분리독립성을 호소하였다. 1907년 7월 헤이그 평화 클럽에서 일본의 부당성을 질타한 후 미국으로 돌아갔다. 1908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스프링필드에 정착하여, 스프링필드 훼이스 회중교회에서 목사로 안수받았다. 그는 미국 전역과 전 세계에 각종 회의와 강좌에서 일본 제국의 침략에 규탄하였고 한국의 분리독립에 관한 글을 썼으며, 1918년에는 파리 강화회의를 위한 '독립청원서'를 여운홍과 함께 작성하였다. 그는 1919년 3·1운동 후에는 이를 지지하는 글을 서재필이 주관하는 잡지에 발표하였고, 미국상원 외교위원회에 일본의 잔학상을 고발하였다. 1942년에는 워싱턴 D.C에서 열린 한국자유대회에 참석하였다. 1944년 그는 '한국문제연구회'에서 간행하는 '한국의 소리'라는 책자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이 을사조약 직후 고종황제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아 동양의 역사가 바뀌었고, 미국이 친일 정책을 썼기 때문에 태평양 전쟁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말년[편집]   양화진 헐버트의 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패전국인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반도는 독립되었고, 19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된 이듬해인 1949년 42년 만에 방한하였다. 방한 이후 1주일 후에 헐버트는 병사하여 8월 11일에 최초의 외국인 사회장으로 영결식을 거행하였고 오늘날 양화진(楊花津)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그의 첫째 아들 쉘던은 2살 때 사망하여 이미 양화진에 묻혀 있었다. 헐버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민국으로 떠나며 언론에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다만 아쉬웠던 것은 그에게는 두가지 소원이 있었는데 이것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첫번째는 통일된 한국을 보는 것이고 두번째는 고종의 내탕금을 찾는 것이었다. 사후[편집] 1950년 3월 1일에 대한민국 정부에서 외국인 최초로 건국공로훈장 태극장(독립장)을 추서했다. 전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지냈던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과 함께 조선 말기 '조선을 구하기 위해 활동한 대표적인 서양인'으로 손꼽히며,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 1위로 꼽히기도 했다. 그의 저서〈The Passing of Korea(대한제국 멸망사)〉는 그리피스의 〈Hermit Kingdom(은자의 나라 조선)〉과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Corea and her neighbors(한국과 그 이웃나라들)〉과 함께 조선 말기 3대 외국인 기록으로 꼽힌다. 2014년 10월 9일에 한글 보전과 보급에 헌신한 공로로 대한민국정부에서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2] 저서[편집] 그는 교육자이자 언론인이기도 하였다. 한글로 된 교과서 외에도 영문으로 된 '한국의 역사'와 '대한제국멸망사(The Passing of Korea)' 등 편찬하여 미국 대중들이 한국을 이해하고 도울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그는 한국어와 한글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인도의 드라비다어와 한국어를 비교한 논문을 내기도 하였다.[3] 상훈[편집]195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 2014년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 같이 보기[편집]언더우드 육영공원 사민필지 대한제국 고종 서재필 헤이그 밀사 사건 띄어쓰기 - 한글에 띄어쓰기 도입 각주[편집] 이동↑ 공병설 기자 (2010년 10월 3일). 연합뉴스. 2010년 11월 8일에 확인함. 이동↑ 김중배 기자 (2014년 10월 8일). “한글날 맞아 故호머 헐버트에 금관문화훈장 등 포상”. 연합뉴스. 이동↑ 그의 외할아버지 헨리 우드워드는 인도 선교사였으며 그의 어머니 매리 우드워드는 인도에서 태어났다.참고 자료-《파란눈의 한국혼 헐버트》, 김동진 지음, 참좋은친구, 2010년 =======================   헐버트 박사는 1886년 7월 4일 육영공원의 영어교사로 조선에 첫발을 디뎠다. 조선의 관리들에게 영어와 선진문물을 가르치고자 고종황제의 지시로 초청된 미국인 교사 3인 중에 하나였다. 미국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3년에 버몬트에서 태어난 헐버트는 다트머스 대학을 졸업하고 유니언 신학교를 다니다가 24세에 조선의 엘리뜨 관리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입국한 것이다.   입국 4년차에 사민필지(최초의 한글교과서/ 세계사회지리총서)를 집필, 출간해서 가르쳤는데 당시에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듬해 1891년 미국으로 귀환했다가 1893년 10월, 감리교 선교사로 내한해서 삼문출판사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 이후 조선에 대한 그의 봉사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1897년 한성사범학교 교장을 시작으로 1900년 관립중학교(현 경기고등학교) 교관이 되었다. 1903년에는 YMCA 창립총회 의장으로 기여했고, 1905년에는 영문으로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를 상하권으로 출간했다.   1905년 10월 고종의 밀사로 미국을 방문해서 씨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고종의 친서전달을 시도하였으나 면담을 거절당했다. 조선이 타국의 침략을 받을 때 성실하게 돕는다는 ‘조미수호조약의 내용’을 촉구하는 것이었는데, 고종황제는 미국의 도움으로 일본의 을사늑약 강박을 저지하고자 한 것이다.   1904년 8월 22일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었는데 이것은 조약이 아니고 각서(Memorandum)이었다. 이것을 일본정부가 영어로 번역할 때, Agreement라고 제목을 바꿔서 외교조약으로 가장하고 번역본을 미국과 영국에게 보냈다. 원래 각서는 외교조약이 아니므로 당사자 사이에만 효력을 미치는데 이것을 일본정부가 외교적 사기행각을 벌인 것이다.   그러나 이 사기극의 영향으로 1905년 6월 미국은 일본과 가쓰라-테프트 밀약을 맺어, 미국이 필리핀을 점령하는 대신 일본의 조선 침략을 양해하는 비밀협약을 맺는다. 그러니 10월에 도착한 고종의 밀사를 미국대통령이 면담을 거절한 것이다.   “2차 한일협약(을사늑약)이 강제된 뒤에 대한제국 정부는 미국정부에 대해 이것은 강제된 것으로 대한제국 황제가 승인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통지했다. 그때 미국정부의 답변은 ‘무슨 소리냐? 작년 8월 22일자 협약에서 대한제국은 일본에게 외교권을 이미 넘긴 것으로 되어 있었다.’고 답변했다.” 각서를 외교조약(agreement)로 바꿔치기한 일본정부의 사기극이 성공한 것이다.   1904년 2월부터 1910년 8월까지 대한제국의 국권을 일본이 탈취하는 5개의 조약들은 모두 정식조약이어야 하는데 마지막 병합조약을 제외하고는 모두 약식을 취했다. 결국 4개 조약은 비준이 없는 상태로 되어 있다. 일본정부도 최종의 병합조약 때는 모든 것을 제대로 갖추려고 했으나 이에 대한 대한제국 황제의 비준서에 해당하는 것은 없다. 이러한 모든 결함들은 곧 대한제국 정부가 저항한 흔적으로 남겨진 것이다. 따라서 일제 35년은 병합이 아니고 명백히 ‘일본의 강제점령’인 것이다.   1906년 6월에 헐버트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3인과 함께 고종의 특사로 임명되어 평화회의에서 ‘1905년 11월의 조약은 무효’라고 선언하려고 했다. 일본은 고종황제가 그곳에 대표를 보낸 것 자체가 1905년 조약 위반이라고 하여 1907년 7월 22일자로 고종황제의 강제퇴위를 강행한다. 황제와 황태자가 응하지 않으니까 두 사람을 대역하는 환관 둘을 세워 양위식을 치렀다.   이틀 뒤인 7월 24일 3차 한일협약으로 대한제국 정부의 내정에 대한 감독권을 통감부가 확보한다. 이토 히로부미 통감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황제의 권한 위임 없이 약식조약으로 체결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인 7월 30일에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이 있게 된다. 군대해산에 관한 조칙도 순종황제와 전혀 무관한 상태에서 나온 것으로 밝혀졌다. 순종황제는 고종황제가 11월 15일 종묘에 퇴위를 고한 사흘 뒤 11월18일에 종묘에 가서 황제위에 오르겠다는 신고를 한 후에 집무를 시작한다.   고종황제의 퇴위와 더불어 헐버트는 1907년 7월 미국으로 쫓겨나고 스프링필드에 정착한다. 1909년 8월 일시 방한하여 헐버트는 비밀리에 태황제(고종)으로부터 상하이 덕화(독일)은행에 예금한 예치금 관련서류를 받고 내탕금 인출을 위한 전권을 수임한다. 상하이 독일은행으로 달려가 고종황제의 위임장을 내놓고 예금인출을 요구했으나, 이미 인출되어 내어줄 것이 없다고 거절당했다.   1908년 4월22일 독일공사 크루거와 덕화(독일)은행은 고종황제가 가지고 있던 예치금 증서는 받지 않은 채 일본이 날조한 서류만으로 예치금 52만6천 마르크를 2차례에 걸쳐 지급했다. 궁내부대신 이윤용(이완용의 형)을 수취인으로 한 다이이찌은행 서울지점 수표를 크루거 독일공사가 통감부로 전달하고 통감부 나베시마 외무총장이 영수증을 써 주었다. 독일공사와 독일은행이 예금주인 고종황제 몰래 거금을 통감부에 내준 것이었다. 고종황제는 독일공사 입회하에 상하이 덕화은행에 비밀예금한 독립운동자금을 도둑맞은 것이다.   1919년 삼일운동 직후, 헐버트는 미국 상원 외교관계위원회에 일본의 잔학상을 고발하는 진술서(Statement)를 제출한다. 그리고 미국 주요 언론에 ‘일본 강점의 부당성과 대한의 독립’을 선전하는 기고 활동을 계속한다.   1906년 런던에서 출간한 영문판 ‘대한제국멸망사’ 서문에 대한제국과 한국민들에 대한 그의 생각이 나타난다.    비방이 그 극에 이르고 정의가 사라지고 있는 이때에 /나의 지극한 존경의 표시와 흔들리지 않는 충성의 맹세로서/  대한제국의 황제 폐하에게...그리고/ 지금은 자신의 역사가 그 종말을 고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지만 / 장차 이 민족의 정기가 어둠에서 깨어나면 / 잠이란 죽음의 가상이기는 하나 / 죽음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될 / 한민족에게... 이책을 바칩니다. / 호머 헐버트.   을사늑약이 대한제국을 목 조르던 시기에 헐버트는 장차 ‘한민족이 광복을 쟁취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정부수립 1주년 기념식에 독립유공자이며 귀빈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1949년 7월 29일 인천항에 도착한 헐버트 박사는 86세의 노구로 긴 여행의 여독을 이기지 못하고 8월 5일 청량리 위생병원에서 별세한다.    미국을 떠날 때,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담담히 말했다. “나는 일찍부터 (한국에 가기를) 소원해왔소.”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합니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황제의 밀사 호머 헐버트, 그는 지금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에 고이 잠들어 있다.     ============================ 호머 헐버트’ 우리가 광복절에 기억해야 할 이름        다수의 외국인 독립유공자가 잠들어 있는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 중앙 로비로 들어가면 우뚝 솟은 10층 석탑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1907년, 다나카 미쓰아키가 황태자 순종 결혼식 축하사절로 왔다가 개성에 있던 경천사십층석탑을 무단으로 가져간다. 이를 알게 된 미국인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는 즉시 현장을 확인하고 관련 사실을 언론에 기고한다. 이후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고 있는 네덜란드 헤이그까지 가서 이 사실을 폭로한다. 호머 헐버트의 이러한 노력으로 1918년 경천사십층석탑(국보 86호)을 되돌려 받을 수 있었다. 대한민국을 사랑한 이방인, 호머 헐버트 1863년 미국 버몬트에서 출생한 그는 1886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국립학교인 육영공원에 파견되었다. 이후 YMCA를 창설하는 과정에서도 주요한 역할을 하여 초대 회장을 역임하는 등 청년 계몽운동에 앞장선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1905년 대한제국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한일협상 조약)을 체결하자, 호머 헐버트는 고종 밀서를 가지고 워싱턴으로 날아가 일제 만행을 알리며 대한제국을 도울 것을 호소한다. 또한, 일제 침략의 부당함을 세계인에게 알리고자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등 밀사 3인 파견을 후원하고, 창간에도 기여한다. 그는 독립을 위한 노력을 평가받아 1950년 건국훈장 독립장 수상하기도 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경천사십층석탑, 호머 헐버트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 노력으로 일본에 무단반출됐던 탑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그는 20여 년 동안 우리나라에 살면서 대한제국과 관련한 다양한 기록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현장에서 지켜본 대한제국 멸망과정을 서술한 책에는 당시 시대 상황이 잘 기술되어 있다. 서양인이 기술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특유의 정(情) 문화를 잘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면 아무 집에나 들어가 밥과 잠자리를 청하면 거절하는 법이 없으니, 어떻게 숙박업이 발전할 수 있겠느냐”하며 한국인의 인정까지 꿰뚫어 보았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잘 알았던 독립운동가 또한 그는 한국인보다 한글을 더 사랑한 한글 학자였다. 일찍이 한글 우수성을 깨달은 그는 한글 띄어쓰기를 고안했고, 한글 교육을 통해 대한제국을 강성하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 인물이다. “중국인들은 세계 어떤 문자보다도 간단하고 음운을 폭넓게 표기할 수 있는 한글을 채택해야 한다고 나는 감히 주장해왔다.” 그의 저서에 나오는 한글 우수성과 관련한 대목이다.   가온길 주시경 공원에 서 있는 호머 헐버트 부조와 한글 조형물   세종문화회관 뒤쪽의 ‘가온길 주시경공원’에는 그의 공적이 새겨진 ‘호머 헐버트’의 부조가 서 있다. 이러한 공로로 호머 헐버트는 2014년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미국으로 돌아가서도 대한제국의 독립을 간절히 염원하던 호머 헐버트는 해방된 후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다시 우리나라를 찾았지만 안타깝게도 일주일만인 1949년 8월 5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Westminster Abbey.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대로 그는 합정동의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서 영면에 들었다.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헌신한 파란 눈의 독립운동가 호머 헐버트에게 지금 우리가 보답할 수 있는 길은 ‘잊지 않고 그를 기억함’이 아닐까? 지금도 국립중앙박물관, 주시경공원,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는 그의 흔적이 또렷하다. 며칠 후면 제72주년 광복절이다. 태극기를 내걸고 기념식을 하는 것도 좋지만, 그간 알지 못했던 외국인 독립운동가 한 사람을 새롭게 알게 된다면, 올해 광복절 의미가 더욱 남다를 것이다.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서 영면하고 있는 호머 헐버트 묘역과 기념비   ■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 안내 ○ 위치 : 마포구 양화진길 46, 지하철 2·6호선 합정역 7번 출구, 버스 602·604·706·1000·3000 등 다수 ○ 개원 : 월~토요일 오전 10시 ~ 오후 5시 (일요일은 묘원 안식일)   조선의 개화기 때 수많은 서양인들이 조선으로 들어왔습니다. 개중에는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세계를 탐사하려는 목적을 지닌 사람도 있었고, 어떻게든 조선을 이용해 한몫 크게 잡아보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당연히 두 속성이 결합된 사람도 있었고요.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조선을 위해 최선을 다해 일한 서양인도 분명 존재했습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호머 베잘렐 헐버트가 대표적인 인물이지요.  헐버트는 미국의 선교사로 조선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의 영어교사로 입국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밑에서 공부했던 대부분의 학생들은 영어에 대단한 열정을 보이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물론 열심히 배운 학생도 있었지요. 대표적인 인물이 당대 최고의 영어능력자였던 이완용.....  그는 자비로 과외선생을 따로 구할 정도로 한글 공부에도 열심이었습니다. 3년 정도 공부한 뒤에는 직접 라는 한글 교과서를 저술해 육영공원의 교재로 사용할 정도로 능숙하게 우리말을 사용했지요. 는 우주 및 세계의 다양한 모습을 담은 책으로 학생들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인기가 있던 서적이었습니다. 현재의 세계지리 교과서 정도로 볼 수 있겠네요.  사실 헐버트는 한글 발전에 상당한 공이 있는 인물입니다. 우리말에서 지금까지 자연스럽게 사용되는 띄어쓰기와 점찍기는 그의 건의로 시행된 것이지요. 이전까지 우리말에서는 띄어쓰기가 존재하지 않았거든요. 물론 문법 공부하는 사람 입장에서 죽을 맛이기는 합니다만....  주시경이 한글을 연구한 국문연구소도 그의 건의로 만들어진 것이지요.  육영공원이 재정상의 문제로 축소되어 퇴직한 헐버트는 조선에 도움이 될 만한 여러 업적을 남겼습니다. 다양한 근대식 학교에서 강사로 일하고 미국으로부터 인쇄기를 들여왔으며 외국에 대한 조선 홍보 활동을 벌였지요.  고종의 신임을 받은 헐버트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외교적 자문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을사조약 이후에는 이 사건의 불법성과 무효성을 국제사회에 알리려고 노력했지요.  특히 유명한 것은 헤이그 특사와 관련된 일이겠습니다. 그는 일제의 영향력이 덜 미치는 외국인이라는 특성을 최대한 이용하여 헤이그 특사 파견을 위한 사전작업을 담당했지요. 그래서 그를 이준,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제 4의 특사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잘 알다시피 헤이그 특사들은 목표를 이루지 못했고 헐버트는 일제에 의해 추방당합니다.  이후로도 헐버트는 우리의 독립을 위해 힘썼습니다. 미국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미국 전역의 각종 회의에 참여하여 일제의 침략행위를 규탄했고 한국의 독립에 대한 글을 기고하였지요. 이승만과 같은 미국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를 지원한 경력도 있습니다.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가 생기고 1년 뒤인 1949년, 정부는 광복절을 맞아 헐버트를 국빈으로 초대합니다. 당시 헐버트는 기관지염으로 병약한 상태였으나 기필코 한국으로 가겠다고 말하지요. 출국하면서 언론에 한 말이 명언입니다.  " 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는 것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영미권에서 대단한 업적을 남긴 위인들만 안치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아이작 뉴턴이나 찰스 다윈, 제프리 초서 같은 세계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이 이곳에 묻혀있지요. 그가 얼마나 한국을 사랑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그가 한국에 온 또 하나의 이유는 고종이 남긴 비자금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헐버트가 일제에 의해 추방당할 때 고종은 ‘상하이 독일은행’에 맡겨놓은 비자금을 찾아 독립운동에 투자할 것을 부탁했지요. 하지만 헐버트가 은행을 방문했던 시점에는 이미 일제가 이 돈을 다 빼간 상태였습니다. 이제 독립을 했으니 고종의 마지막 명령을 지킬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한 것이지요.  하지만 헐버트는 입국한지 일주일이 된 8월 5일에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합니다. 그가 정부에 넘겨준 비자금 관련 서류는 현재까지 국립정부문서보관소에 보관되어 있지요.  헐버트는 어니스트 베델, 프랭크 스코필드와 같은 인물과 함께 조선을 구하기 위해 활동한 대표적인 서양인으로 꼽힙니다. 예전에는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 1위로 뽑히기도 했지요. 정부는 1950년에 그의 독립운동 활동 공로로 ‘건국공로훈장’을, 2014년에 한글 보급 공로를 인정하여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습니다.  현재 그의 무덤은 서울 합정역 근처의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이곳에는 그의 유언과도 같은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는 것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 라는 글귀가 묘지명으로 새겨져 있지요.  ///출처 - 5분 한국사 이야기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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