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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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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백호야, 너와 나와 놀아보쟈... 댓글:  조회:4008  추천:0  2017-11-20
                   [인민망 한국어판 11월 20일] 2017년 11월 8일, 장쑤(江蘇, 강소)성 롄윈강(連雲港, 연운항)시 하이저우(海州)구 신푸(新浦)공원의 새끼 백호 4마리와 어미 백호 ‘멍멍(萌萌)’이 따뜻한 햇살을 만끽하고 있다. 2017년 8월 어미 백호 ‘멍멍’은 새끼 백호 4마리를 낳았다. ‘멍멍’은 작년 쌍둥이 출산에 이어 올해 두 번째 출산을 했다. 올해로 11살이 된 아빠 백호 ‘러러(樂樂)’와 9살이 된 어미 ‘멍멍’은 벵갈호랑이에 속하며 털이 흰색인 변종이라고 한다. 이 백호 가족은 희귀종으로 세계 1급 보호 동물로 지정되어 있고 전 세계적으로 200여 마리밖에 없다고 한다. (번역: 은진호) ///출처: 인민망(人民網) ============================               [인민망 한국어판 11월 20일] 위 사진은 11월 14일 장시(江西, 강서) 남부에 위치한 딩난(定南)현 리스(歷市)진 처부(車步)촌 팡우파이(方屋排, 방옥패)의 ‘호형(虎形: 호랑이 모형) 웨이우(圍屋, 위옥)’를 항공 촬영한 모습이다. 해당 웨이우는 1786년 건설되었으며 올해로 약 2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해당 건축물의 앞쪽 넓이는 40m이고 길이는 33m에 달하며 동남쪽을 향하고 있다. 뒤쪽에는 호랑이 모양의 산이 있으며, 건축물의 전반적인 모양은 호랑이가 앉아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닮았다. 또한, 대문은 호랑이의 머리를 닮아 ‘호형 웨이우’라고 불리고 있다. 호형 웨이우는 산에 앉아 있는 호랑이의 모형을 하고 있는 웨이우로 전체적인 모형은 호량이의 몸통을 닮았고, 뒤쪽의 망루는 호랑이의 발톱, 대문은 호랑이의 얼굴, 문은 호랑이의 입, 왼쪽과 오른쪽 양쪽 창문은 호랑이의 두 눈, 문액(門額)은 호랑이의 코, 회소문조(灰塑門罩)는 호랑이의 귀를 닮았다. 이런 요소 하나하나에는 용맹한 ‘호랑이 문화’가 잘 드러나 있다. =====================   포양(鄱陽)호 근처에 위치한 완녠(萬年)현은 중국에서 유명한 민물 진주 생산지로 40년 정도의 진주 양식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인민망 한국어판 11월 20일] 11월 14일, 장시(江西, 강서)성 완녠(萬年)현 후윈(湖雲)향 후윈촌의 한 진주 양식장 직원들이 조개껍데기에서 진주를 채취하고 있다. 포양(鄱陽)호 근처에 위치한 장시성 완녠현은 중국에서 유명한 민물진주 생산지로 40년 정도의 진주 양식 역사를 가지고 있다. ================================== "난 슈퍼돈이야..." 료녕농업박물관 1800근짜리 猪 선보여 [ 2017년 11월 27일 07시 54분 ]     11월 25일,심양(沈阳)  료녕성농업박물관에는 1800근짜리 돼지표본을 구경하러 온 관광객들로 북적이였다. 이 슈퍼돼지는 료녕성 와방점의 서씨 농민이 5년동안 애지중지 키운 돼지이다. 돼지의 무게는 1800근, 몸 길이 2.5메터, 몸 둘레는 2.23메터로 중국에서 가장 큰 슈퍼돈이다. 16명의 로동자들이 죽은 돼지를 1층에서 3층으로 옮겨놓는데 40분이란 시간이 소요됐다고 한다. ///봉황넷 
7    [쟁명] - 하이퍼시와 "다수"와 "소수" 그리고... 댓글:  조회:2128  추천:0  2017-11-20
하이퍼시 10대촉구 5.하이퍼시는 다수가 아니라 소수를 촉구 2017년 11월 20일 작성자: 최룡관                            세계에는 백여개의 나라가 있으므로 미국도, 중국도, 러시야도 소수이다. 채소시장에 가면 배추도 소수이고, 토마토도 소수이고, 무우도 가지도 고추도 소수이다. 우주엔 별들이 무성한데 태양계도 소수이고 지구도 소수이다. 예술로 말하면 작가도 화가도 음악가도 시인도 죄다 소수이다. 각분야의 소수파들이 모이면 전체가 되고 어떠한 하나가 될수 있겠다. 문학에서 특히 시에서 소수파가 되려면 언어에서 특색이 있어야 하며, 작가자신의 개성적인 언어가 따로 있어야 한다. 언어를 이렇게 중시하는것은 작품은 결국은 언어이기 때문이며, 작가가 무의식에 기대여 언어로 글을 쓰기때문이라겠다. 작가가 자기 언어를 수립하지 못하면 개성이 없어지고 풍격이 돋으라지지 못하게 된다.  언어의 소수파가 되는 방법을 이렇게 말한 석학이 있다. 을 야기시켜 는것이다. 시가 독자의 력사적심리와 문화적 심리, 그리고 취미, 가치관, 기억 등과  충돌이 발생한다는것이다. 시인이 새롭게 떠올리는 참신하고 당돌한 이미지들은 독자의 상상력을 초월하므로 독자는 시의 따돌림을 당하게 된다. 그런 시야 말로 시의 향락을 누리게 하는 시라고 한다. 그것은 시속에 독자가 알수 없거나 알기 어려운 비밀이 잠재해 있기때문이다. 비밀은 열쇠로 열어보아야 한다. 열쇠는 단 하나 시를 흔상해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열쇠는 독자의 흔상수준과 정비례한다.  시를 쓴다음 시인들은 자신의 쓴 시가 독자들에게 결락감을 안겨줄수 있는 향락의 텍스트가 될수있겠는가를  심사숙고해 볼일이 아니겠는가!  소수파가 되는 시는 향락텍스트라고 해야 할것같다. 향락텍스트는 쾌락텍스트보다 더 우아하고 심도가 더 깊고 추동력이 더 강하고 공간과 시간을  더 확대하고 예술성이 더 깊은것이라고 할수 있을것 같다. 그래서 류협은 지인은 천년에 한번 통한다고 하였을것이고, 밀턴은  을 쓰고 백년후에야 알아 볼것이라고 하였고, 단테는 을 쓴다음 밀턴처럼 100 년후에야 알아볼것이 라고 하였으리라. 진짜  과  은 100년후부터 알아보았다고 한다.                                                                                                                                                                                                                                    우리 겨례문단에서 근대시와 현대시에서 제일 먼저 소수파가 된 시인은 최남선이였다. 그는 라는 자유시 를 처음으로 발표한 시인이였다. 이 시로하여 시조만 있던 우리 겨례문단에서 서정시의 길이 열리게 되였다. 두번째는 정지용 이라고 할수 있다.  바람소리를 말들이 달리는것으로 표현하거 나 밀물과 썰물을 보고 도마뱀떼가 재재 발렀다고 한것은  류례 없던 언어혁명이였다고 할수 있다. 그후 리상, 조향을 거쳐 하 이퍼시를 주장하는 문덕수와 심상운 등 시인들은 모두가 소수 파라고 할수 있을것 같다. 신세훈시인은  라는것을 발견하여 소수파로 되였다. 문학은 이런 소수파들에 의하여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고 앞물결이 뒤물결을 당기며 도도히 흘러왔고 흘러가고 있는것이다. 소수파라는 언어는 문학을 놓고 고민할줄 알고 새로운 길을 개척할줄 아는 작가에게 해당하는 칭호라고 생각된다.  아무나 다 소수파가 되는것은 아니다.  이것은 문학발전의 일반적인 기률이다. 소수파는 홀로서기이다. 고독하고 외롭게 묵묵히 자기의 길만 간다. 소수파는 새롭게 나오는것으로써 한획을 긋게 된다. 그 획이 점차 자라서 새로운 전통을 만든다는것은 간과 할수 없는 일이다.  일시적으로 환호를 받는다고 하여 정말 좋은 작품인것은 아니다. 그래서 중국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머얜은 베스트셀러에는 명작이 없다고 하였다.  중국조선족시인들에게서 정말 좋은 작품을 뽑아내자면 극 소수뿐이다. 어떤 시인들은 수십년을 시를 썼지만 한수도 골라낼것이 없다. 참으로 애달픈 일이지만 별수 없다. 시인들은 우선 상을 받을 작품을 쓰느라고 애를 쓸것이 아니라 소수파가 되는 작품을 쓰기 위하여 분투하여야 한다. 상안에 상이 없고 상밖에 상이 있는 경우가 너무 빈발하는 상주소를 고칠 때도 되였다고 생각하게 된다. 작가는 글로 말하는 사람이다. 글로 말한다는 말은 작품으로 말한다는 말이겠다. 새로운 창의가  없는 작품은 발표되는 시간이자 죽는 시간이다. 장송곡을 울리는 작품에 흥취를 가질것이 아니라 금방 태여난 아기의 울음소리를 울리는 작품에 모를 박아야 한다. 그러자면 공부하는 길밖에 없다. 아는것은 공부할 필요가 없다. 자기가 모르는 새것을 배우고 배우고 또 배우는자만이 마지막에 웃는 소수파로 될것이다.  =============================       중국 동남연해 동부전구 육군 모 해안 경계 여단{필자 주: 사진감상}...  
6    [쉼터] - 장래의 건축가들의 솜씨자랑 화이팅!... 댓글:  조회:2945  추천:0  2017-11-20
‘미니 고궁’ 6명 학생들이 나무로 만들었대요 [ 2017년 11월 20일 ]           최근 다롄(大連, 대련)민족대학 제4회 민족건축모형제작대회가 해당 대학교 캠퍼스에서 개최됐다. 총 204명의 학생들이 6인 1조로 조를 나눠 이번 대회에 참가했다. 출전 작품에는 11개 민족, 30여 개의 민족적 특색이 담긴 건축물 등이 포함됐고 규모는 웅장했으며 종류도 다양했다.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72만㎡에 달하는 고궁(故宮, 자금성)을 1.8㎡ 크기의 나무판에 옮긴 작품이었다. 해당 작품은 1:1,000 비율로 고궁을 옮긴 모형으로 웅장하기도 했으며 태화전(太和殿), 오문(午門), 성벽, 해자, 기왓장 하나하나까지 세세하게 표현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학생들은 해당 작품을 만들 때 먼저 컴퓨터로 디자인을 한 후 3D 모형을 만들었고 레이저 커터기를 사용해 목재를 잘라 부품 하나하나를 세세하게 조각했다고 한다. 현재 해당 모형은 70% 정도 완성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10일 후 열리는 이번 대회 결승까지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학생들은 최선을 다해 노력을 하고 있다. ///인민망                                 2016년 9월 25일, ‘톈옌’으로 불리는 국가 중대한 과학기술 인프라인 500m 구경 곡면 전파망원경(FAST)이 구이저우(貴州) 핑탕(平塘)에서 준공 및 사용에 투입되었다. 이것은 FAST 프로젝트의 전경이다(2016년 9월 7일 촬영).
5    [쟁명] - 중국 연변, 조선, 한국 "조선말통일안"은 언제?... 댓글:  조회:2978  추천:0  2017-11-20
Hyatt는 '하야트'라고 쓰는 게 맞습니다. 하얏트라고 사이시옷을 넣어서 쓰면 안 됩니다. 외래어에는 사이시옷을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피잣집이 아니라 피자집이 맞는 겁니다. 맘에 들지 않으셔도 맞춤법 규정이 그렇습니다. 외래어에는 사이시옷을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얼마 전에 FTA 협상한 호텔은 사이시옷이 들어간 '하얏트호텔'이 맞습니다.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요? 맞춤법으로 보면 '하야트'가 맞지만, 맞춤법이 바뀌기 전부터 '하얏트'를 상호로 쓰고 있으면, 지금 맞춤법과 다르더라도 그것을 인정해 줍니다. 그래서 Hyatt는 '하야트'가 맞지만, 한 호텔에서 '하얏트호텔'이라고 고유명사로 쓰면 그것도 맞습니다. 오뚝이도 맞춤법에 따르면 오뚝이가 맞지만, 오뚜기식품은 그대로 오뚜기식품이 맞습니다. '안성마춤 배'도 안성맞춤이 맞지만, 한국 안성시에서 안성마춤으로 상표등록하여 쓰고 있으니, '안성마춤 배'가 맞습니다. 이걸 재밌다고 해야 할지, 가슴이 아프다고 해야 할지...... ===================== {필자 주}:ㅡ 한국에서는 웃에서 라렬한것처럼 쓴다하는데, 이러한 을 중국 연변에서와 조선에서는 어떻게 쓰고 있는지?... 하루 빨리 "8천만 조선말 통일안"으로 "통일"을 가져와야!!!... 우리 글쟁이들은 늘 "세집(三家)어문사정"혼돈속에서 뒤죽박죽 살고지고...    
4    [화단소사전] - "추상화"란?... 댓글:  조회:2093  추천:0  2017-11-20
추상이란 점, 선, 면, 색채 등의 조형요소만으로 이루어지는 그림이라는 뜻입니다. 이 정의의 뒤에는 식별할 수 있는 요소(Recognizable factor)가 그림의 유일, 절대적인 지침이자 방향이었던 20세기 이전의 구상회화가 버티고 있습니다. 또한 구상회화의 영향력은 20세기의 2/4분기까지 절대적인 세력이었읍니다. 추상을 지향하는 화가들까지도 '이것은 추상이되 구상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변명을 그림에 심을 수 밖에 없었던 시기입니다.  1차대전 이후, 실존적 인간의 절망적 상황과 양자역학 등의 영향으로 앵포르멜과 같은 본격적인 탈화면 경향의 추상이 시도됩니다. 그리고 2차대전 이후, 화면의 주변에 맴돌던 앵포르멜의 화면을 다시 화면으로 정착시킨 것이 추상표현주의라고 평가됩니다. 아래는 "미술이야기"에서 발췌했습니다. 추상의 개념 양자역학은 추상화의 산실이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소리가 허구라는 것을 일깨워준 것이 양자역학이다. 그렇다면 양자역학은 인간이 인간을 그린다는 것이 허구라는 이야기가 될까. 그래서 인간이 개입되지 않거나 인간과 무관한 조형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다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다. 데이비드 호크니는 인간과 분위기를 함께 그린다. 그리고선 실체에서 분위기를 빼거나 분위기에서 실체를 제거한다. 호크니는 풀장에 다이빙의 순간을 그린다. 그러나 사람은 간곳 없고 물튀는 장면이 그려진다. 그리고 그것은 경직되고 개념화된 화면이 된다.  또 앙드레 드렝은 풍경 속의 인물을 하나의 색점으로 표상한다. 인체라는 실체에 쏟아지는 시선을 분산하기 위해 배경과 똑같은 점으로 그려낸다.  그것이 추상화였다. 추상화에서 인체가 빠지면 안되는 이유는 뒤샹의 작품에서도 극명하게 보여진다. 뒤샹이라면 이제 이 글을 읽는 사람은 머리칼을 쥐어뜯는 흉내부터 내는 것이 좋다. 그만큼 골치아픈 화가이다. 평론가들도 자료만 모아두고 미술사의 평가를 기다릴 정도이다. 라는 제목의 작품이 있다. 직역해서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라고 많이 소개되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신부도 노총각들도 없다. 그들이 쓰리라고 생각되는 도구와 분위기를 통해 단지 인간의 냄새가 암시될 따름이다.    추상화의 태동과 모네 모네는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 중에서 인상파를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화가로 평가된다. 그 중요성은 1940년대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의 후광 아래 더욱 강조되었다. 색채의 영역에서 팔레트를 더욱 밝게 사용했다. 우중충하고 침울한 톤 대신 밝고 맑은 안료가 등장했다. 인상주의의 무한한 색채표현의 가능성이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모네는 캔버스를 여럿 펼쳐놓고 시간마다 다른 캔버스에 루앙 성당과 건초더미를 그렸다. 그려진 것은 자연에서 얻은 순간적인 느낌이 아니라 가변적인 인상을 일관성 있는 빛으로 파악하려 했던 새로운 시각과 자율성이었다. 그거야 추상화 아닌가? 그렇게 묻겠지? 아니면 그렇게 물어주기 바란다. 사실 그것이 추상화의 태동이었다. 모네는 만년에 지베르니의 정원에서 수련을 그렸다. 히로시게의 판화집 에 그려진 다리를 본따 일본풍으로 꾸몄다. 에서 이미 회화의 자율성은 암시되어 있었다. 수련에서 그 자율성은 극대화하여 추상으로 향하게 된다. 모네에게 추상이란 그림이 자신의 세계를 주장하고 형성하여 가는 자율성을 의미한다. 수련을 그릴 당시 모네는 거의 실명상태였다. 그때 그려진 그림이 화가의 의지에 따라 그려졌겠는가. 그림이 요구하는 질서가 아니겠는가. 그렇게 추상회화는 태동하고 있었다.     추상화의 성장과 마티스 마티스에게 표현은 인물이나 대상 및 에워싼 공간 비례등의 장식적 구성이다. 그 과정에서 음악의 상태가 십분 고려된다. 하모니, 멜로디, 리듬을 살리고 나머지는 모두 제거한다. 이 제거는 본질환원의 과정을 연상케한다. 잘 계산되고 논리적으로 추론가능한 화면은 현상학적 접근방식으로 극대화한다. 그 결과로 탄생하는 것이 추상화면이다. 현상학이란 본질이 아니라고 판단되는 언어나 사상 사유 등을 괄호 안에 가두어 나감으로써 현상에서 환원된 선험적인 본질을 찾아나간다.     뜨거운 추상-칸딘스키 칸딘스키는 추상화를 실증적으로 체계세운 화가로 평가된다. 인간사회의 공통적인 심적 정서적 바탕을 추상화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칸딘스키는 법률가 지망생이었다. 45세가 지나 겨우 추상화풍을 정립했다.  칸딘스키의 작품을 보면 이게 무슨 그림이야 라는 말이 나오지? 도대체 뭘 그렸는지 알아볼 수가 있어야지.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는데 하고 불평하지 말기 바란다. 이 그림은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이다. 먼저 즉흥곡이라고 악보같은 제목이 붙어 있지? 미술과 연관은 노젓기라는 제목에 있다.  화면에는 배를 암시하는 빨간 아치형의 선이 있다. 그러고보면 노젓는 사람은 그리다만 것처럼 웅크리고 있다. 이제 알겠지? 이 그림은 석양에 노젓는 사람처럼 어느 부분만이 강조되어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도 추상화같다면 그것은 미적분 함수를 닮았기 때문이다. 최초의 대수함수는 이다. 한번 미분하여 이 가 그려졌다. 그리고 또 한번 미분하면 뭐가 나올까. 노젓기를 다시 거꾸로 놓고 석양에 보자. 어떻게 보일까? 그것이 두 번째 미분의 결과로 나올 추상화이다. 칸딘스키는 그렇게 대상성에서 비롯하는 추상화를 다졌다. 조형요소에 의한 추상이 대중에게 이해되기에는 아직 시간이 일렀던 것이다. 표현적 추상의 사상은 19세기 말까지 소급된다. 칸딘스키는 1911년에 의식적으로 추상작품을 창조했다. 풍경화나 인물화 또는 정물화 등의 일상적인 주제를 벗어나 음악의 상태로 접근했던 것이다. 그리고 색채가 있었다. 칸딘스키는 회고록에서 태초에 색채가 있었다라고 할만큼 색채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추상형태들에 상징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강도를 부여하기 위한 직접적인 수단이 색채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차가운 추상-몬드리안 몬드리안은 1908년에 로 성공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아수파적인 색채에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큐비즘의 형체분할에도 영향을 받았다. 이어 줄곧 대상의 분해와 재해석에 매달린다. 밀물은 수직선으로 표현했다. 썰물은 수직선이다. 자연에서 연상되는 색채를 도식화했다. 노랑은 태양광선의 찬란한 움직임이다. 파란색은 공간의 무한확장이다. 빨강은 노랑과 파랑을 통합하는 중간색이다. 그것을 그래픽 디자인처럼 그렸다. 그가 주장한 신조형주의는 단순화에 역점을 두었다. 다양한 현상을 기호화함으로써 순수한 리얼리티를 발견하고자 했다. 그렇다고 그 작업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물감과 대상 뿐 아니라 자신과의 악전고투로 얻어지는 결과였다.   추상, 구상에서 벗어나다 루치오 폰타나는 화면을 찢어 세계를 인간에게 직시하도록 했다. 포트리에는 화면을 밟을 수 있는 바닥에 깔았다. 일그러지고 갈라진 석고의 화면은 추함의 미학을 낳는다. 장 뒤뷔페는 가공되지 않은 예술이라는 뜻의 라르 브뤼를 하나의 이즘으로 제시한다. 나뭇잎이나 흙을 석고에 이개어 캔버스에 바르기도 한다. 클레처럼 아동화를 소재로 선택한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전후의 불쾌감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교황의 젊쟎은 초상화를 절규하고 찢어발긴 듯한 그림을 그린다. 알베르토 부리와 안토니오 타피에스는 어둡고 바위같은 릴리프와 찢어지고 불태운 천을 배치한다.  앙포르멜은 산발적인 유럽 작가들의 구심점이었다. 앙포르멜은 1952년 미셀 타피에가 사용한 말이다. 자발적인 테크닉을 위해 구상적이고 기하적인 그림을 거부한다는 뜻이다. 볼스, 포트리에, 아르퉁, 술라쥬, 마티외 등이 활약했다.   점, 선, 면, 색채-추상의 정립 폴록 신화의 제작자는 페기 구겐하임이다. 1942년, 먼저 자신이 운영하는 금세기화랑에 초현실주의자들의 전시를 연다. 당시 미국에 망명해왔던  마타, 달리, 마송 및 남편인 에른스트 등의 전시에 폴록을 끼워넣는다. 그러자 평론가 알프레드 바는 추상표현주의라는 애매한 이름을 붙여준다. 또 다른 평론가 해롤드 로젠버그는 액션 페인팅이라 불렀다. 한스 호프만과 아쉴 고르키의 그림에서 착안했다. 구멍 뚫린 깡통에서 페인트를 흘리고 다니는 폴록의 그림과 큼지막한 붓으로 휘저어 그리는 드 쿠닝의 그림에서 행위를 강조했다. 그러나 유럽의 앙포르멜과 연관지을 속셈이었다.   20세기 미술에서 추상을 조망하면 몇 개의 징검다리가 눈에 들어옵니다. 이 징검다리를 건느면서 다른 징검돌들을 보시면 더 쉽게 강을 건널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징검다리의 큰 돌 옆에는 작은 돌들이 큰돌이 기울어지지 않도록 받혀줍니다.  때로는 작은 돌들이 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토마토해 ==============덤으로 더...   추상표현주의 미술의 선구자인 잭슨 폴락, 20세기 문화의 아이콘이 되다 추상표현주의 미술의 선구자인 잭슨 폴락은 살아생전에 유럽의 현대 미술 화가들과 동등하게 인정받았던 최초의 미국 화가들 가운데 한 명입니다. 와이오밍 주 코디에서 태어나 애리조나와 캘리포니아에서 성장한 그는 1928년 로스앤젤레스의 메뉴얼 미술고등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했습니다.   당시 폴락의 작품들은 전형적인 미국 서부 풍경에 기초한 작업과 구상 회화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그는 서부에 위치한 자신의 고향을 여행하고 그곳의 풍경을 보면서 작품의 영감을 얻었습니다.   폴락의 미술이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룬 것은 멕시코의 벽화가인 의 작업실에서였습니다. 여기서 그는 페인트를 붓고 떨어뜨리는 것이 예술적 기법일 수도 있으며, 그림 표면에 에나멜 페인트와 래커, 모래를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이 당시 폴락은 알코올 중독, 우울증과 싸우는 중이었습니다. 1937년에는 정신병원에 넉 달간 입원해 심리치료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 후 그의 작품들은 추상적인 형태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스페인의 현대 화가인 파블로 피카소와 후안 미로의 작품들에서 따온 모티프들과 시케이로스로부터 배운 기법들을 통합하여 자신의 그림에 이용하였습니다.   폴락은 1945년 여성화가 리 크래스너와 결혼해 롱아일랜드의 이스트햄프턴에 정착했습니다. 그는 헛간을 개조해 작업실로 꾸미고 이전에는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작업을 시도했습니다 우선 그는 커다란 캔버스를 바닥에 펼쳐놓고 사방을 돌며, 캔버스 위로 물감을 흘리고, 끼얹고, 튀기고, 쏟아 부으면서 몸 전체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것은 떨어뜨린 물감의 흔적이 층위를 쌓아가면서 화면의 밀도를 높여감과 동시에 작가의 다이내믹한 제작행위를 직접 캔버스에 기록하는 것이었으므로 ‘액션 페인팅’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폴락은 미국 미술계의 첫 번째 슈퍼스타로 주목을 받았으며, 특히 1947년부터 1952년까지의 작품은 미술계에 대변혁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1948년 뉴욕의 금세기 미술관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가졌고, 1950년에는 빌럼 데 쿠닝, 아실 고키와 함께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에 참여하는 등 예술적인 열정을 불태웠으나, 알코올 중독과 창조성의 한계에 가로막힌 그는 육체와 정신의 쇠락으로 방황하다 1956년 만취상태에서 과속으로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교통사고로 숨을 거뒀다고 전해집니다.   폴락은 평소 커다란 크기의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넓은 공간에 캔버스를 놓고 사방에서 작업했습니다. 그는 막대기나 팔레트나이프를 이용해 캔버스 위해 페인트를 붓거나 떨어뜨리기(드리핑)를 시작했습니다. 예전에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모래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본 적이 있던 폴락은 그들의 방법을 착안해 작업에 이용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왼손에는 페인트 통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팔레트나이프 등을 이용해 재빨리 페인트를 튀기며 캔버스를 가로지르는 것이었습니다. 폴락이 말하길, 그림은 그림만의 독자적인 운명을 갖지만, 최종 작품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예술적인 의지에 좌우된다고 말했습니다.   폴락은 1947년부터 1951년까지 미술계를 놀라게 할 회화들을 제작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폴락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저 혼란스러운 작품을 만들 뿐이라고 비평하기도 했지만 클레멘트 그린버그와 같은 저명한 비평가들은 “현대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화가”라며 폴락의 재능을 칭송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팝 아트 같은 뒤이어 등장하는 미국의 미술 운동들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습니다. 폴락은 비로소 20세기 문화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20세기 추상회화를 대표하는 화가 잭슨 폴락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는 천재적이면서도 알코올에 중독되어 기벽을 일삼던 폴락과 그의 아내 크레이즈너의 이야기를 주된 소재로 삼았습니다. 폴락에게 그녀와의 사랑은 그의 인생 전반에 걸쳐 예술적 진폭을 더욱 크고 넓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그의 작품들을 보면 조금은 특별한 느낌이 있습니다. 이 영화는 저에게 왜 예술가는 평범한 삶을 살 수 없을까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던져준 영화이기도 합니다. 1912년 미국 와이오밍주에서 태어난 폴락은 아들 5형제 중 막내였는데 화가가 꿈이었던 어머니 덕에 일찍부터 미술에 눈뜰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공황 시절에는 공공사업진흥국(WPA) 연방미술사업계획에서 화가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초창기만 해도 폴락의 작품은 우리가 알고 있는 폴락의 작품들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풍경화나 구상화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폴락의 작품은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 멕시코의 벽화가인 를 만나면서 한 단계 도약합니다. 캔버스에 유화 채색이라는 고전적인 방법 대신 다양한 기법들에 눈을 뜨게 된것입니다. 운좋게도 그는 당대 미술계의 유명한 후원자 페기 구겐하임을 만나 1943년에 개인전을 열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그는 이후 이젤에 고정된 캔버스를 버리고 바닥에 캔버스를 펼쳐놓고서 캔버스 위로 물감을 뿌리고, 쏟으면서 몸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게 바로 액션 페인팅, 드리핑(dripping)이라는 기법입니다. 드리핑이란 붓이나 주걱 등의 도구를 사용하여 칠하거나 바르는 것이 아니라, 그림물감을 캔버스 위에 흘리거나 붓든지 또는 튀겨서 제작하는 회화기법을 말합니다. 폴락은 이 드리핑 기법으로 안료를 직접 캔버스에다 흘림으로써 얻어지는 우연적인 표현 효과를 성취하였습니다. 폴락의 드리핑 기법은 다다이스트들의 오토마티슴(회화나 시에서 무의식적으로 작품을 창작하는 기법)과 흡사한 점이 많으나 그 궁극적인 목표가 회화의 새로운 형식적 요소의 개발이라는 점과 정신 보다는 육체의 적극적 활용이라는 점에서 다릅니다. 드리핑 기법은 잭슨 폴락, 하면 떠오르는 그의 전형적인 작품 양식이기도 합니다. 층층이 다른 물감을 사용하면서 그 물감들이 우연하게 번지고 퍼지며 만들어내는 흐름과 윤곽은 회화를 미지의 카오스 상태로 밀어넣어 그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느낌을 주는 회화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그린버그를 필두로한 미국 비평계는 폴락의 드리핑 행위를 보고 다분히 미국적인 행위라고 말했습니다. 즉, 미국인들의 개척정신과 남자다움등으로 상징화된 폴락의 예술 행위 뒷면에는 백인우월주의의 폭력성도 같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새로운 사조를 이끌어낸 폴락은 미술계의 인기스타였습니다. 추상표현미술주의의 선구자였고,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화가였습니다. 미술계에 긍정적인 큰 반향을 일으키고 여러 번의 개인전을 열고 비엔날레에도 참여했던 폴락이었지만 알코올의 마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창조의 고뇌로 고통받는 약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1956년 음주운전 교통사고로 짧은 생을 마감했으니 그가 좀 더 오래 살아남았다면 현대 미술계가 어떤 진전을 겪었을지 또 모를 일입니다. 지난 2006년 폴락의 작품 한 점이 1억 4천만 달러에 판매되었다고 합니다. 생전에는 가장 위대한 미국의 화가였고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몸값 높은 화가이기도 한 잭슨 폴락, 어지럽고 난해하기만한 그 물감의 폭풍 속에서 잭슨 폴락의 액션페인팅을, 그 몸짓을 읽어보는 건 어떨까요? ///가치디자인그룹 SY Kim    
3    4대 불운이 겹친 화가,- "안녕, 내가 사랑했던 모든것들이여"... 댓글:  조회:3887  추천:0  2017-11-20
      아실 고르키(1905—1948)   아르메니아 출신이다. 본명은 보스다니그 마누그 아도이안Vosdanig Manoog Adoian인데 그는 아실 고르키란 예명을 사용했다. 아실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 아킬레스Achilles에서 유래된 말이고 고르키는 러시아말로 ‘냉혹한 사람 the bitter one‘이란 뜻이다. 고르키란 이름을 러시아 작가 막심 고르키Maxim Gorky에서 따왔다.   고르키는 1904년 아르메니아Armenia의 벤 호수Lake Ven 근처에서 네 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고 아버지는 상인이며 목수였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어머니는 고르키와 여동생을 데리고 러시아인이 거주하던 에레반Erevan으로 이주했는데 어머니는 러시아에서 사망했고 고르키는 여동생을 데리고 난민 틈에 끼여 1920년 아버지를 찾아 미국으로 왔다. 아버지는 미국 동부 로드 아일랜드주의 수도 프로비던스Providence에 거주하고 있었다. 고르키는 프로비던스와 보스턴에 있는 미술학교에서 수학했고 21살 때인 1925년 뉴욕으로 와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그만두고 나중에 교사로 부임했다.   1925년에 뉴욕으로 이주하여 미술 공부를 하였다. 초기에는 피카소의 영향으로 입체파 경향의 그림을 그렸으나, 호안 미로의 영향을 받았다. 1930년대에 ‘연방예술프로젝트’에 참여하여 공공 건물의 대형 벽화를 추상 양식으로 그렸다.      1940년대에 브르통(프랑스 초현실주의 화가이고 이론가로서 1941년에 뉴욕으로 왔다)을 만나서 그의 영향으로 초현실주의 작품을 제작하였다. 그의 작품은 호안 미로의 작품과 유사한 ‘생물 형태적 형상’을 보여주는 추상 형식을 만듬으로 자신의 양식을 정립하였다. ‘소치의 정원(1941)이 그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21세기 시각예술의 p222에)  1941년에 재혼 후에 버지니아 풍경 속에서 서정적인 추상 소묘의 연작을 발표하였다.    1946년에 화실에 불이 나서 대부분의 작품이 소실되었다. 그 해에 암이 발생하였고, 교통사고로 목을 다쳐 고통스러워 하다가 1948년에 자살하였다.  초기에는 여러 화가들의 작품을 혼합 모방하는 작업을 하였으나, 미로와 칸딘스키의 영향과 초현실주의의 영향으로 자신의 양식을 확립하였다. 최후의 초현실주의 화가이자, 최초의 추상표현주의 화가라는 명칭을 얻었다. 추상표현주의에서 아실 고르키Arshile Gorky가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다. 고르키는 폴록에게 직접 영향을 주었으며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폴록과 함께 그로부터 수학한 필립 페이비어는 “고르키가 우리를 직접 가르치지 않았어도 우리는 그에게 영향을 받았다”면서 “그는 잭슨을 감동시켰다”고 술회했다.   고르키로부터 수학한 휘트니 대로우는 “고르키는 학문적으로는 전혀 아는 게 없었다. 그에게 모든 것은 지성의 문제가 아니라 감성의 문제였다”고 회고했다. 고르키는 자신의 강의실에 헝가리아인 바이올린 연주자를 데리고 와 학생들이 그림 그리는 동안 연주하게 했는데 학생들로 하여금 감성을 작품에 이입시키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 중 한 사람으로 나중에 클리포드 스틸과 더불어 컬러-필드 회화를 창조한 마크 로드코가 그로부터 수학했는데 로드코의 말에 의하면 고르키는 엄격한 교사였다. 가르치지 않을 때는 그는 유머가 풍부한 사람이었다. 다.     고르키는 처음 폴 세잔으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나중에는 입체주의에 매료되어 거의 피카소와 같은 방법으로 그렸으며, 그의 별명은 ‘워싱톤 스퀘어의 피카소’였다. 초현실주의에 관심이 생긴 후로는 이브 탕기, 앙드레 마송, 로베르토 마타, 호앙 미로의 그림을 연구했다. 고르키는 동갑내기 드 쿠닝과 가까운 사이였는데 드 쿠닝은 고르키를 가리켜서 자신이 미국에서 만난 재능있는 몇 화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1930년대 경제공황의 참담한 시기를 살면서 고르키는 식량보다는 붓과 물감을 사가지고 집으로 갔다가 아내로부터 호된 비난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는 인정받은 예술가였으며 휘트니 뮤지엄은 1937년 그의 그림 한 점을 구입했고 이듬해 개인전을 열어주었다.   고르키는 1941년에 재혼했으며 미국으로 피신한 유럽의 초현실주의 예술가들과 교통했는데 1945년 줄리앙 레비 화랑에서 열린 그의 전시회 카탈로그를 초현실주의의 교황 앙드레 브르통이 썼다.고르키는 1944년에 제작한 도 이때 소개했다.브르통은 “고르키가 자연을 은화식물처럼 여긴다”고 적었다. 그는 초현실주의를 바탕으로 추상표현주의를 추구한 화가였다고 말할 수 있으며 달리 말한다면 초현실주의와 추상표현주의를 연결하는 가교의 역할을 한 화가였다고도 할 수 있다. 고르키는 마타와 아주 가까운 사이였는데 마타는 동성연애자였다.    칠레 사람 마타의 본명은 로베르토 세바스찬 마타 에차우렌Roberto Sebastian Matta Echaurren(b. 1911)이었는데 사람들이 부르기 편하게 마타라고 했다. 마타는 유럽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가 파리에 안주했고 르 코르뷔지에와 함께 건축을 수학한 후 1937년에 초현실주의 운동에 가담했다. 브르통은 마타의 그림 한 점을 사주면서 “자네는 초현실주의 화가이네”라고 했다. 마타는 그때 자신은 초현실주의에 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고 자신이 찾고자 한 것은 “작은 거북이가 사막 한가운데서 알로부터 깨어 나와 바다를 향해 조금씩 기어가는 것이었다”고 했다. 마타는 1939년에 뉴욕으로 왔고 젊었기 때문에 영어를 잘해 이내 미국 예술가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미국 예술가들은 마타의 아파트에 모여 자동주의 드로잉을 배웠는데 예를 들면 불, 물, 대지, 공기를 주제로 무심한 상태에서 드로잉하는 것이었다. 로버트 머더웰과 폴록도 그의 아파트에서 드로잉을 배웠다.    고르키의 아내는 고르키와 마타 두 사람의 사이를 질투했다. 1946년 1월 화재가 나서 고르키의 그림 27점과 노트, 드로잉들이 사라졌고, 이튿날 암이란 진단으로 수술을 받았으며, 1948년 6월 26일에는 교통사고로 목이 부러졌고, 병원에서 퇴원할 무렵 아내는 마타와의 동성애 관계를 참을 수 없어 별거를 요구했다. 고르키는 우울증으로 괴로워하다가 절망감을 이기지 못하고 1948년 7월 21일 코네티컷 주의 자신의 화실에서 자살했다.   그는 자살하기 한 해 전에 을 그렸는데 피빛 붉은색과 어두운 색을 주로 사용했다. 그의 작품 을 보면 자신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상징들을 사용해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중앙에서 왼쪽을 향한 것은 치과 의자를 의인화한 것이며 의인화한 기계 중앙에 발기한 자지처럼 생긴 것은 털이 달린 원시인들의 숭배물처럼 보인다. 동물의 내장과도 같은 그가 사용한 유기적 형태들은 아르프, 미로, 혹은 마티스의 것들과는 달랐는데 고르키는 식물에서 주로 형태들을 가져왔다. 브르통은 “고르키만이 자연을 직접 대하면서 평생 자신의 주제로 삼았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가 마흔네 살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뉴욕 추상표현주의의 큰 손실이었다.      ==================== 오늘 소개할 자화상 작품은  아쉴 고르키 자화상 / Arshile Gorky Self-Portrait Untitled (Self-Portrait) Arshile Gorky · 1928-1929 나는 미술을 통해 나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인식, 바로 나의 세계관과 소통한다 - 아쉴 고르키 - Self-Portrait Arshile Gorky · 1937   Portrait of Myself and My Imaginary Wife Arshile Gorky 자신의 자화상과 상상 속 아내라니..  Arshile Gorky · 1926 - 1936 Arshile Gorky · 1928 년 The Artist with His Mother / Arshile Gorky · 1926 - 1936 표현주의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인 아실고르키의" 예술가와 그의 어머니"는 아르메니아 학살의 생존자이다. 왼쪽 사진은 1912년 전 어린 시절의 유일한 사진이라고 합니다.  안녕,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이여... 아쉴 고르키는 작업실 화재, 암 수술, 교통사고, 아내의 사망, 불운이 겹쳐 이겨내지 못하고, 끝내 44세의 나이로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위 사진은 Arshile Gorky in December 1936 아쉴 고르키 / Arshile Gorky  미국 화가. 미국으로 이민 온 미술가로, 대외적으로 인정받은 추상표현주의 화가이다.  초기에는 입체주의와 초현실주의 기법으로 풍경화와 초상화를 그렸다. 어린 시절 겪었던 비극과 고난을 작품의 주요 주제로 삼았다. [1904년 추정 8월 15일 ~ 1948년 7월 21일] 대표작은《The Liver is the Cock's Comb 간장(肝藏)은 수탉의 벼슬》(1944, Albright–Knox Art Gallery, Buffalo, New York) 등이 있다. 자료 :  theartstory, 위키백과, 구글이미지, 네이버지식백과, 위키아트, [출처] 아쉴 고르키 자화상 작성자 history   ======================== 지난 수세기동안 파리는 프랑스는 물론 유럽 문화의 중심지였다. 20세기에 들어 미술에서는 야수파, 입체파, 초현실주의, 파리 학파 등 수 많은 새로운 기법이 활발하게 시도되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피카소는 잠적했고 마티스는 프랑스 남부로 내려갔다. 파리를 점령한 나치스 독일정권은 모든 추상미술을 퇴폐한 예술로 간주해서 수많은 작품들을 파괴하거나 약탈했다. 따라서 프랑스의 미술계는 심한 침체상태에 빠졌다. 프랑스 미술의 몰락과는 별개로 이차대전 무렵부터 미국 뉴욕에는 일단의 미술가들이 각 지역에서 모여 추상화를 시도했다. 그들의 공통점은 추상미술을 한다는 점과 술을 무지하게 마셨다는 점뿐이었다. 그들의 추상화에는 어떤 경향이나 주류라고 말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 평론가들은 그들을 “추상표현주의”(Abstractive Expressionism)라고 칭했다. 잭슨 폴락, 빌렘 드 쿠닝, 마크 로스코, 로버트 머더웰, 바넷 뉴먼, 프란츠 클라인, 아돌프 고틀리브, 클리퍼드 스틸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이 유럽 화단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해도 대서양을 건너 교류가 전혀 없던 것은 아니다. 초현실주의 미술의 창시자라고 볼 수 있는 앙드레 브레통(Andre Breton)은 미술이론이나 기법에서 프로이드 정신분석학의 영향을 크게 받아 “무의식” “상징” “억압” “꿈의 해석” 같은 이론을 도입했다. 그러나 이미 알려진 대로 정신분석학이 나치스에 의해 불건전한 학문으로 간주되어 억압해 버리자 일시적으로 그는 미국으로 망명해 자신의 이론을 미국 미술계에 소개했다.  아쉴 고르키(Ashile Gorky, 1904-1948)는 아르메니아 출신이었는데 아버지는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하던 터키 군에 징집되었다. 군 복무를 피해 가족을 데리고 고향을 떠났다. 가족이 강제추방을 당하는 과정에서 어머니는 굶어 죽었다. 이렇게 아실 고르키는 불우한 소년생활을 하면서도 주로 독학을 통해 화가로 등장했다. 그의 본명은 아르메니아 이름으로 아도얀 이었지만 1931년 결혼한 이후 고르키란 이름을 사용했다. 당시 소련에서는 작가 막심 고르키가 크게 영향을 떨치고 있었다. 이 화가와 막심 고르키는 민족도 혈연도 다르고 전혀 관련이 없는 사이었지만 화가는 이 작가와 사촌관계라고 떠벌리고 다녔다. 초기에 그는 세잔느와 피사로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나 차차 초현실주의 화풍을 받아들였다. 1913년 미국으로 이주해 와서 현지에 머무르면서 이곳의 추상 화가들과 어울렸다. 자신의 그림을 그들에게 소개하면서 자연히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일원이 되었다. 유럽에서 체득한 미술기법이 남은 영향인지 그의 그림은 추상화를 표방하면서도 여러 군데에서 구상화의 체취를 느끼게 한다. 마치 미로나 탕기의 그림을 연상시키듯 인체 부분과 흡사한 사물들을 초현실적인 방법으로 화폭에 즐겨 그렸다.  그가 교류한 화가들 중 드 쿠닝은 “나는 많은 화가들을 만났다. 그러나 고르키는 단연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는 사물의 정수리를 내려찍는데 탁월했다. 나는 그와 급속히 가까워져서 친한 사이가 되었다.” 고 칭찬했다. 1940년대 고르키는 자기의 새로운 그림들을 브레통에게 보여주었다. 브레통은 깊게 감명을 받았다. 특히 “간은 닭의 볏이다”란 작품을 보고는 미국 땅에서 창작된 최고의 작품이라고 칭찬하면서 고르키를 초현실주의자로 불렀다. (처음으로 초현실주의를 제창했으니까 그가 남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였던 것이다.) 그의 말년은 비참했다. 1946년 스튜디오에 불이 일어나 아끼던 작품 27편이 소실되었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고 했던가. 불행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직장암 수술을 받고도 고통과 고난 속에서도 화필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1947년에 아버지가 사망하고 다음해 교통사고로 인해 목뼈가 부러져 더 이상 화필을 들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아내는 동료 화가와 바람이 나서 아이들까지 데리고 그를 떠났다. 결국 그는 1948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정유석 (정신과 전문의) / 중앙일보     ===================== (미술문화) 중에서    자살한 아실 고키  아실 고키와 스튜어트 데이비스가 아트 스튜던츠 리그의 새 교사로 부임했다. 고키는 마흔네 살의 나이에 스스로 세상을 버렸지만 그가 뉴욕파 예술가들에게 준 영향은 적지 않았고, 폴록은 그로부터 미학적 도움을 직접 받았다. 고키는 1904년에 아메니아(Armenia)의 벤 호수(Lake Ven) 근처에서 네 형제들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고, 아버지는 상인이며 목수였다. 일차대전이 일어나자 어머니는 고키와 그의 여동생을 데리고 러시아 사람들이 거주하던 에레반(Erevan)으로 이주했으며, 어머니는 러시아에서 사망했고, 고키와 여동생은 난민들 틈에 끼여 아버지를 찾아 미국으로 향한 배에 승선했는데 아버지는 그때 미국 동부 로드 아일랜드의 수도 프로비던스(Providence)에 거주하고 있었다.    고키는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프로비던스와 보스톤(Boston)에 있는 미술학교에 입학했으며, 스물한 살 때인 1925년 뉴욕으로 와서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 입학했다가 이듬해에 그만두었지만, 나중에는 교사로 재직했다.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 가운데 중요한 예술가이며, 클리포드 스틸과 더불어 컬러필드(Color-Field) 회화를 창조한 마크 로드코가 그에게 수학한 적이 있었는데 로드코는 고키가 아주 엄격한 교사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가르치지 않을 때에는 유머가 많은 사람이었는데 로드코의 개인전람회가 열렸을 때 고키는 화랑으로 와서 그림들을 아주 진지하게 들여다보다가는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오더니 제자 한 사람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면서 “이 부분을 조금 엷게 해라”고 말해 다같이 웃었다고 회상했다.    고키는 처음에 세잔느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나중에는 입체주의 회화방법에 매료되어 거의 피카소와 같은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별명은 ‘워싱턴 스퀘어의 피카소’였다. 그리니치 빌리지 중앙에 있는 워싱턴 스퀘어(Washington Square)는 뉴욕 대학교(New York University)의 정원과도 같은 곳으로서 지금도 대학생들뿐 아니라 무명예술가들이 한가롭게 스케치를 하거나 행위예술가들이 이벤트를 벌이는 정감있는 장소이다. 그는 초현실주의에 관심이 생기자 프랑스의 이브 탕기와 앙드레 마송, 칠레의 로베르토 마타, 그리고 피카소와 같은 나라 스페인의 호앙 미로의 그림들을 연구했다. 1930년대 중반에 그는 친구 예술가들을 화실로 초대한 후 “우리가 직면해야 할 것은 우리가 파산선고를 받았다는 점일세”라고 말했는데 그의 말은 피카소가 회화의 모든 가능성들을 실험했다는 의미였다. 이때는 예술가들이 피카소에 의해서 “회화는 죽었다”는 말을 예사로 할 때였다.    폴록과 다른 학생들은 고키와 데이비스가 학교식당에서 미술에 관해 나누는 대화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 폴록은 벤턴의 소개로 학교식당 탁자를 청소하는 일을 했으므로 고키가 식당에서 미인들과 잘 어울리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었다. 주요 추상표현주의 예술가 중 한 사람인 고키는 육 척 장신에 검은 머리칼을 앞이마에 떨어뜨린 매력적인 모습이었고, 수염을 길렀으며, 숙고하는 듯한 커다란 눈망울의 소유자였다. 학교식당에 자주 와서 미인들에게 그의 특유의 우수에 찬 음성으로 “나의 화실로 와서 애인이 되어준다면 너에게 나의 모든 것을 주겠다”며 유혹하곤 했다. 미술학교에 재학했던 필립 페이비어는 “고키가 우리를 직접 가르치지는 않았어도 우리는 그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그는 잭슨을 감동시켰다”고 술회했다. 1930년 여름부터 재학중이었던 휘트니 대로우(Whitney Darrow)는 “고키는 학문적으로는 전혀 아는 게 없었다. 그에게는 모든 것들이 지성의 문제가 아니라 감성의 문제였다”고 회고했다.    1934년 고키의 첫 개인전이 필라델피아의 멜론(Mellon) 화랑에서 열렸으며, 이 시기에 그는 드 쿠닝과 우정이 두터웠는데 드 쿠닝은 고키를 가리켜 미국에서 만난 재능있는 몇몇 예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고 그를 칭찬했다. 1930년대 경제공황의 참담한 시기를 살면서 그는 식량보다는 붓과 물감을 사가지고 집으로 갔다가 아내로부터 호된 비난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인정받는 예술가였고, 1937년에 휘트니 뮤지엄은 그의 그림 한 점을 구입했으며 이듬해에는 그의 개인전을 열어주기도 했다.    그는 1941년에 재혼했으며, 미국으로 피신했던 유럽의 초현실주의 예술가들과 교통했는데 1945년에 줄리앙 레비(Julien Levy) 화랑에서 열렸던 그의 전람회 카탈로그를 앙드레 브르통이 쓰기도 했다. 브르통은 “고키가 자연을 은화식물처럼 여긴다”고 기술하였다.    고키는 마타와 아주 가까운 사이였는데 마타는 동성연애자였고, 고키의 아내는 고키와 마타 두 사람 사이를 질투했다. 1946년 1월에 화재가 나서 고키의 그림 스물일곱 점과 노트, 드로잉들이 분실되었고, 다음달에는 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다. 1948년 6월 26일 교통사고를 당하여 목이 부러졌으며, 그가 병원에서 퇴원할 무렵 아내는 그와 마타와의 동성애 관계를 참을 수 없어 별거를 요구했다. 고키는 우울증으로 번민하며 지내다 절망감을 이기지 못하고 1948년 7월 21일 코네티컷 주에 있는 화실에서 자살하여 세상을 버렸다. 브르통은 “고키만이 자연을 직접 대하면서 평생 그의 주제로 삼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가 마흔네 살로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은 뉴욕 추상표현주의의 큰 손실이었다.    
2    남의것을 빌어 어떻게 나의것으로 만들고 남과 달라야 산다... 댓글:  조회:3391  추천:0  2017-11-20
  폴 잭슨 폴록(Paul Jackson Pollock  1912년 1월 28일 ~ 1956년 8월 11일) 은 미국의 화가로, 추상 표현주의 운동의 기수였다. 그의 부인은 추상화가 리 크라스너이다. 와이오밍 주에서 태어나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에서 공부하였다. 1930년대부터 표현주의에서 추상화로 방향을 바꾸었다. 1947년 마루바닥에 편 화포 위에 공업용 페인트를 떨어뜨리는 기법을 개발하여 하루 아침에 이름을 떨쳤다. 이것은 작가의 제작 행위를 직접 화폭에 기록하는 것이라 하여 '액션 페인팅'이라 불렀다. 대표작으로 〈가을의 리듬〉 등이 있다. 그의 생애를 다룬 영화로《폴록》이 있으며, 그의 생일인 2009년 1월 28일 구글의 로고가 그의 작품과 비슷한 그림으로 바뀐 바 있다.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   1904년 4월 24일 네덜란드 로테르담 ~ 1997년 3월 19일 미국 뉴욕 이스트햄프턴. 네델란드 태생의 미국화가. 1904년 로테르담출생.    1926년에 미국에 정착하여 당시에 미국에 이민온 죤 그래함이나 아쉴 고르키 등과 친분을 맺고, 1935~36년에는 벽화 화가로서 연방 미술 프로젝트에 참가한다.  소년시절에는 미술장식회사 견습공으로 들어가 일하면서 미술아카데미 야학에 다녔다.   로테르담 미술학교에서 공부한 후 장식미술가로 활동하던 그가 불법으로 미국땅을 밟은 때는 스물두 살이던 1926년 이었다.   뉴욕의 건축사장에서 페인트공으로 일하던 그는 1930년대 스듀어스 데이비스, 아쉴 고르키과 같은 뉴욕의 아방가르드 작가들과 친해지면서 전업작가의 길을 결정한다.  불법이민 노동자였던 윌렘 쿠닝(Willem de Kooning)은 이름에 드(de)를 덧붙여 작가 윌렘 드 쿠닝 (Willem de Kooning)으로 변신 하게 된다.   2차대전 직후에 부상한 유럽과 미국의 추상미술이 기존원칙의 거부와 전통적 구성방법과의 단절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면, 드 쿠닝의 회화 또한 전통의 파괴 작업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남의 것을 빌어 어떻게 나의 것으로 만들어 가야하며, 또 나의 길은 남과 얼마나 달라야 하는가.   이를 위해 모방이 있고 파괴가 있으며 재구성이 있고 재창조가 있듯이  드 쿠닝의 초기 20여년에 가까운 작가 생활은 이러한 과정의 연속으로 점철되어 왔다.   1938년의에서 55년 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나타나는 일관성 있는 진보과정은 구상에서 추상으로 변화하는 치밀한 파괴작업으로 50년대 말 탄생하는 드 쿠닝의 최고의 추상 작품들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증명해 주고 있다.   드 쿠닝은 1940년까지는 인물화가이자 초상화가였다.  그리고 어떠한 특별한 환경속에 놓인 그의 인물 습작들은 자코메티의 그림과 유사성이 있다.     그가 추상화를 처음 그리기 시작했을 때 추상의 형태들은 고르키를 통해 드러난 피카소를 연상하게 했다.   실제로 그의 작품을 보면 드 쿠닝의 작업이 바로 20세기 미술의 혁명이라고 불리우는 입체주의 미술의 바탕에서, 특히 피카소의 영향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드 쿠닝이 자신의 작품에서 피카소의 흔적을 지우기 까진 장장 15년에 가까운 세월을 필요로 했다.  전통회화에서 시작한 30년대 후반의 초기 작품은 사실적 구성회화로서 앵그르의 회화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볼륨과 콘트라스가 뚜렸하다.   이 시기의 작품의 대부분을 작가가 스스로 파괴시킨 탓에 그 흔적을 뚜렷이 찾아보기가 힘들지만, 간과해도 무관하다 할 수 있다.   40년대 중반까지 입체주의에 바탕을 두고 마티스적 색채를 빌어쓴 인물회화가 주를 이루는데,  피카소의 20년대 작품에서 보이는 생물형태학적인 무정형으로 인체의 윤곽을 설정하고 그 위에 마티스적인 색채를 반복 칠함으로 조금씩 3차원의 공간을 2차원화 시켜가는 용해작업의 시작이다. 드 쿠닝의 작품의 핵을 이루는 주제는 여인과 풍경으로, 특히 시리즈는 작품의 진보과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열쇠를 지니고 있다.   이 시리즈는 드 쿠닝이 미술평론가였던 엘렌느 프라이드와 결혼한 1940년에 시작되었으며 최초의 시리즈 작품은 (1940)이었다. 이어 (1944), (1944), 등을 거쳐 2년 동안의 작업으로 완성됨  (1954∼55)에 이르기까지, 여인을 둘러싼 그의 작품은 구상에서 추상으로의 변화과정을 면밀히 보여 주고 있다.      시리즈    드 쿠닝의 여인은 뒤틀린 몸매의 흉란 얼굴을 한 드라마틱한 인물이며 복잡한 구성 속에 서서히 흔적을 감추어 버리는 미움받는 여인이다.   이 여인을 지우고 또 지우면서 여인의 몸이 얼굴로 확대되고 그 입술이 풍경으로 되면서, 추상으로 변신되어 간다.   이러한 관점에서 드 쿠닝의 작품은 그 하나하나가 다음에 이어지는 작업을 위해 거쳐가는 미완성의 작품이라 여겨지기도 한다.   그의 가장 성공적인 작품은 1950년경에 제작된 검은색 바탕의 하얀색의 드로잉이 조화를 이룬 작품들이다.   또한 1950년까지 그는 칸딘스키, 고르키, 피카소 또는 그보다 앞선 어느 누구와도 다른 추상표현주의의 개성적인 측면을 전개했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양식, 새롭고 격렬한 표현양식을 예언하는 자들의 한 사람으로 등장했다.   동시에 인물에 대한 그의 향수는 그로 하여금 유명한 '여인화 연작'을 착수하게 했다.   이러한 작품들은 힘이 넘치고 때로는 거부감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성의 상징이나 풍요의 여신으로서, 그리고 에드바르트 뭉크의 관례에서 피를 빨고 있는 흡혈귀등으로서의 여인을 최면에 걸듯 환기시킨다.   위협적인 모습에서 부터 단순한 풍자만화, 온화한 에로티시즘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1950년대는 (1952∼53)이나 (1953)에서 보이듯 피카소적인 인물처리가 남아 있으면서도, 반복되는 터치작업으로 여인의 얼굴을 용해시키는 추상작업을 통해 붓처리가 난폭하면서도 강한힘이 서린 자신의 회화를 찾아가는 시기이다.   이러한 과정은 (1954∼55)과 (1955)에서 모방과 그 영향의 탈을 벗는 피카소와 고르키의 망령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드 쿠닝 작업의 획기적인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이어지는 50년대 후반은 드 쿠닝의 황금시대라고 일컬을 수 있겠는데,  빨강과 노란색조가 주를 이루는 가운데 붓작업이 뛰어난 추상회화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60년대에는 장미색과 분홍색을 섞어 두껍게 칠한 우스꽝스러운 여인들이 재등장함으로써 다시 구상으로 뒷걸음질 한다는 의혹을 불러 일으킨다.   드 쿠닝의 작품에 대해서 평론가들의 따가운 시각이 비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부터이다.   (1971)에 이르러야 드 쿠닝은 여인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해방된 50년대 후반의 추상에서 보다 더 세부적으로 파고든 자신만의 작업을 만들어 내었다. 또한 그의 작업은 실체를 용해하면서 드러나는 변화의 회화이며, 그 과정의 복잡성으로 인해 귀결되는 미완성의 회화라는 의미를 지닌다.   드 쿠닝은 하나의 작품을 제작하기까지 수십번에 걸친 덧칠과 수정작업을 고의적으로 해왔다.   완성도에 대한 커다란 집념을 지닌 그의 작품이 그에게 언제나 미완성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작업 자체가 드 쿠닝에게 있어 하나의 인간드라마 연출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즉 모든것을 수용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간다는 것은 그만큼 힘든 작업이기 때문이다.   또한 드 쿠닝의 작품을 세밀하게 관찰해 보면 놀라운 것은 작품이 마치 멀리있는 이미지를 가까이 끌어들이는 '클로즈업'과 같은 과정으로 이루어져 왔다는 것이다. 초기 구상작품에서 추상으로 발전한 해체작업과 이에따라 부분을 확대해 보다 세밀히 비춰내는 작업은 그의 조형예술가로서의 탁월한 재능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거장 " '창작'은 '모방'에서 시작된다고 하지만, 드 쿠닝처럼 이 문구가 잘 적용되는 작가는 드물지 않을 것이다.   그의 작품은 그 스스로가 타인에게서 비롯된 회화라고 할 정도로 모방과 모방을 거듭한 끝에 찾고자 했다.   그 때문인지 드 쿠닝의 작품을 처음 대할때 낯설지 않고 비교적 친숙한 이미지가 느껴졌다.   그가 영향을 받은 화가들이 많은 만큼 그의 그림을 보면 작품 하나에서도 마치 몇가지 작품을 보듯 복합적인 면이 느껴진다.   하지만, 드 쿠닝의 작품 뿐 만아니라 그보다 더 유명한 그에게 영향을 준 작가들의 작품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더 많이 있다.   그러기에 드 쿠닝의 작품이 모방으로 이루어졌다고 비난할 수 도 없고,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 비교해 자신있게 지적하고 평할 수가 없다.   단지 그의 작품을 단순히 하나의 작품으로만 생각하고 그 작품을 감상할 뿐 이다.   그의 작품에서는 흔히 말하듯 정말 강렬한 색채와 거친 붓작업, 화면을 가르는 힘찬선이 두드러짐을 느낄 수 있다.  또한 그속에 담겨진 인물의 모습이 흉물스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다시볼 땐 전혀 다르게 화면의 구성에 눈길이 가기도 한다. 그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남을 의식 하기보다는 자신의 독자적인 세계를 이뤄내고자 수많은 모방의 작업을 거듭하고 완성을 찾아 불태운 그의 집념이 그를 추상표현주의의 거장으로 이루어 놓지 않았나 생각된다.   프란츠 클라인(1910-1962)은 미국 펜실베니아주의 윌크스-바에서 출생하였다. 1931~1935년에 보스턴대학을 다녔고, 그 후 1936~1938년에는 런던의 Heatherley 예술학교를 다녔다. 1939년에 런던에서 돌아와 뉴욕에 정착하였으며,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도시풍경과 그가 자란 지역의 광산촌의 풍경들을 그렸다. 1943년 클라인은 콘라드 마르카-렐리의 작업실에서 윌렘 드 쿠닝을 만났고, 또한 그 후에 잭슨 폴락을 만났다.  그의 그림에서의 추상적 스타일에는 분명히 이들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또한 클라인의 일본예술에 대한 관심도 이 당시에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영향 탓일까? 194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그의 성숙한 추상적 스타일은 빠르게 마르는 백색과 흑색 에나멜의 과감한 붓질이 특징적이다. 그의 첫 단독 전시회가 1950년 뉴욕의 에간 갤러리에서 열렸다. 그 후 그는 추상표현주의 운동에 있어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클라인은 주로 흑백그림으로 유명하지만 1950년대 중반부터 말년까지 색채그림도 광범위하게 그렸다. 클라인은 1960년에 유럽에서 1달간을 지냈는데, 이때 주로 이탈리아를 여행하였다.  그가 사망하기 전 10년간 여러 세계 전시회에 참가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1956년과 1960년에 열린 베니스 비엔날레, 1957년에 열린 상 파울루 비엔날레 등이다. 클라인은 1962년 5월 13일 뉴욕에서 사망하였으며, 같은 해 워싱턴주 현대미술관에서 그의 추모전이 열렸다.///지식넷 ===============   윌렘 드 쿠닝의‘인터체인지’.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화가인 잭슨 폴락과 네덜란드 태생의 추상표현주의 미국 화가 윌렘 드 쿠닝의 추상화 각 1점이 5억달러에 팔려 미술품 프라이빗세일(컬렉터를 개인적으로 만나 진행하는 판매) 가격으로는 최고가를 기록했다. 23일(2016년 2월), 블룸버그통신과 영국 일간 더타임스 등은 세계 최대 헤지펀드인 시타델의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인 켄 그리핀이 프라이빗세일을 통해 작년 가을 폴락의 ‘넘버 17A’를 2억달러, 쿠닝의 ‘인터체인지’를 3억달러에 각각 사들였다고 전했다. 그리핀이 사들인 이들 미술품 두 점은 미국 대중문화계의 ‘큰 손’인 데이빗 게펜이 소유했던 작품들이다.   지금까지 경매가 아닌 개인간 미술품 거래에서 최고가를 기록한 작품은 폴 고갱이 타히티에서 활동할 때 그린 ‘언제 결혼하니’다. 이 작품은 지난해 가을 카타르 왕가가 소유한 미술관에 쿠닝의 작품과 같은 3억달러에 팔렸다. 한편 미술품 경매 최고 기록은 피카소의 유화 ‘알제의 여인들’로 지난해 5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는 1억7,936만5,000달러에 팔렸다. /한국일보 문화 ======================= 2위는 빌렘 드 쿠닝 ‘인터체인지’  슈퍼리치들 간 미술품 손바뀜 한눈에   [헤럴드경제=이한빛 기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예수 초상화가 미술품 경매사상 최고가에 낙찰됐다.   지난 15일(현지시간2017년 11월), 세계적 경매회사인 크리스티는 뉴욕 2017 가을 경매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살바도르 문디(Salvador mundiㆍ구세주)’가 4억5000만달러(한화 약 4935억원)에 낙찰됐다고 밝혔다. 기존 미술품경매작품 최고가였던 파블로 피카소의 ‘알제의 여인들’(1억7936만달러ㆍ약1975억원)의 두 배가 넘는 가격이며, 작품의 소장자였던 러시아 부호이자 AS모나코의 구단주인 드미트리 리볼로블레프가 제시한 가격(1억 달러)도 네 배이상 넘겼다. 이로 인해 세계미술품 고가 랭킹도 재구성됐다. 헤럴드경제가 ‘세계에서 가장 비싼그림 5선’을 정리해 봤다. 경매는 물론 개인거래를 포함, 시장에서 거래됐던 작품만을 대상으로 했다.       지난 15일 세계적 경매회사인 크리스티는 뉴욕 2017 가을 경매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살바도르 문디(Salvador mundiㆍ구세주)’가 4억5000만달러(한화 약 4935억원)에 낙찰, 최고가미술품기록을 경신했다. [사진=AP연합]   ▶ 1위 : 레오나르도 다빈치 ‘살바도르 문디’= ‘남자 모나리자’로도 불리는 ‘살바도르 문디’는 ‘세상을 구원하는 자’라는 뜻이다. 즉 ‘구세주’인 예수의 초상화인 셈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모나리자’를 그렸던 1500년경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푸른색 로브를 입고 오른손으로는 축복을 왼손에는 투명 구를 들고있는 이 작품은 목판에 유화로 그려졌다.   작품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건 지난 2011년부터다. 이전까지는 다빈치의 작품이 아니라 그를 추종하는 제자가 그렸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심지어 1958년 소더비 경매에서 불과 45파운드(6만6000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당시 작품은 예수의 얼굴과 머리부분이 심하게 덧칠해져 있었다. 2005년 미국아트딜러협회는 이 작품이 다빈치의 것이라는 확신으로 1만달러(약 1100만원)에 사들였고, 이후 6년간의 복원과정을 거쳐 2011년 세상에 내놓는다. 복원을 거친 작품은 다빈치 특유의 스푸마토 기법이 명확했고, 다수의 평론가들로부터 진품으로 인정받았다. 이후 2011년 영국 내셔널갤러리에서 다빈치 작품으로 처음 전시됐으며, 2013년 드미트리 리볼로블레프가 1억2750만 달러에 구입했다.   ▶ 2위 : 빌렘 드 쿠닝 ‘인터체인지’ = 역대 두번째로 비싼 작품은 네델란드 출신 작가인 빌렘 드 쿠닝(1904~1997)의 1955년작 ‘인터체인지(Interchange)’다. 지난 2015년 9월 헤지펀드사 시타델의 창립자인 켄 그리핀이 데이비드 게펜 재단으로부터 3억달러(약 3300억원)에 구매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그리핀은 잭슨폴록의 1949년 작품도 구매하는 조건으로 5억 달러(5500억원)를 지불해 크게 이슈가 됐다. 인터체인지는 드 쿠닝의 추상표현주의가 잘 표현된 작품으로 지난 2015년 시카고 아트인스티튜트에 전시되기도 했다.   ▶3위 : 폴 세잔 ‘카드놀이하는 사람들’= 3위는 폴 세잔(1839~1906)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이다. 이 작품은 지난 2011년 4월 카타르 왕가의 셰이카 알 마야사 공주가 2억5000만 달러(약 2750억원)에 그리스 선박왕 조지 엠비리코스로부터 구매했다. 1892년~1983년에 제작한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은 여러 명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을 그린 연작 다섯 작품 중 하나로, 완숙기인 50대에 그린 작품이다. 셰이카 알 마야사 공주가 이 그림을 구매하면서 세계 미술계 큰 손으로 떠올랐다. 블룸버그 보도에 따르면 공주가 연간 미술품구매에 쓰는 비용은 약 10억달러(1조1000억원)에 달한다.      ▶4위 : 폴 고갱 ‘언제 결혼 하니’ = 4위 역시 카타르 왕가가 소유하고 있는 작품이다. 셰이카 알 마야사 공주는 지난 2014년 9월 폴 고갱(1848~1903)의 ‘언제 결혼하니’를 스위스 개인 소장자인 루돌프 슈테린으로부터 3억달러(3300억원)에 구매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예술전문매체인 아트넷뉴스는 지난 7월 영국 슈테린이 카타르 왕가에 실제 넘긴 가격은 2억1000만달러(2300억원)이라고 보도했다. 슈테린을 대리한 유명 미술 중개인 시몽 드 퓌리와 카타르 왕가 미술품 구매대리인 기 베넷이 3년여의 협상끝에 도달한 가격이라는 것이다. 실제 거래가가 2억1000달러라고 할지라도 세계에서 가장 비싼 미술작품 4위에는 변함이 없다.   ▶5위 : 마크 로스코 ‘넘버6(바이올렛, 그린 앤 레드)’= 5위는 추상주의 화가 마크 로스코의 작품이다. 2014년 8월 프랑스 와인제조업체를 이끄는 크리스티앙 무엑스가 마크 로스코의 1951년작 ‘넘버6(바이올렛, 그린 앤 레드)’ 프라이빗 딜러인 이브 부비에를 통해 1억8600만달러(2000억원)에 판매했다. 작품 구매자는 미술품사상 최고가로 낙찰된 ‘살바도르 문디’의 전 소유주인 드미트리 리볼로블레프다. 최고가 작품을 놓고 벌어지는 슈퍼리치들 사이 손바뀜이 흥미롭다.  ================ ... 일본 사이타마 현의 인터체인지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인터체인지   고속도로 인터체인지는 이리저리 복잡하게 돌도록 만들어져 있다. 간단한 평면 대신 이렇게 입체적으로 만들어야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걸까? 고속도로상의 신호대기는 교통흐름을 방해할 뿐 아니라 위험한데, 입체적으로 설계하면 신호대기 없이도 자동차가 뒤얽히지 않고 좌우회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교차하는 2개의 고속도로에서 차들은 동서남북, 4개 방향으로 달리므로 모두 좌회전이 가능해야 하는데, 고속도로 2개가 직각으로 교차한다면 좌회전을 하기 위해서 신호대기를 거쳐 90도 왼쪽으로 꺾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90도 우회전을 세 번 하면 신호대기 없이도 90도 좌회전을 한 번 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반대편 차량의 흐름 위 또는 아래를 지나 90도 왼쪽으로 진행할 수 있도록 인터체인지를 입체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고속도로 인터체인지 =========================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예수 초상화 ‘살바토르 문디(구세주)’가 지난 15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 나와 사상 최고가격인 4억5,000만달러(약 5,000억원)에 낙찰됐다. 신원을 드러내지 않은 매입자는 전화 응찰로 그림을 낙찰받았다. /AFP=연합뉴스     그림 한 점의 경매 시작가가 1억 달러. 약 1,100억원이었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과학자인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가 그린 예수의 초상화 ‘살바토르 문디(Salvator Mundi·구세주)’를 손에 넣기 위해 5명의 응찰자가 45번이나 경합했다. 3억5,000만 달러에 이르자 전화 응찰자가 단숨에 5,000만 달러를 높여 “4억 달러”를 불렀다. 꼭 사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었다. 결국 세상에 16점만 남아있는 것으로 확인된 다빈치의 작품 가운데 유일하게 개인이 소장한 이 희귀작은 그의 소유가 됐다. 다빈치가 말년에 프랑스 왕 루이 12세를 위해 그린 이 그림은 17세기 영국 왕 찰스 1세, 18세기에는 노르망디공에게로 옮겨갔고 덧칠과 훼손으로 인해 1958년 영국 소더비 경매에서는 작자미상의 작품으로 단돈 60달로도 안되는 값에 팔렸다. 이후 주목받지 못하던 이 그림에 의문을 품은 그림 딜러들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2005년 약 1,000만원에 낙찰받아 연구 및 복원작업을 진행했고 다빈치의 작품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2011년에는 영국 내셔널갤러리에서 공개전시를 했고 상당수 르네상스 미술사 전문가들이 ‘진품’ 의견에 힘을 실어줬다. 이후 러시아의 컬렉터이자 축구팀 AS모나코 구단주인 드미트리 리볼로블레프가 2013년 1억2,750만달러에 이 그림을 구입했고 이번에 시작가 1억달러에 다시 내놓았다.  수수료를 포함한 이 작품의 낙찰가는 4억5,000만 달러로 한화 약 5,000억원에 달한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예술경영지원센터가 매년 발표하는 한국 미술시장 전체 규모인 약 4,000억원 보다도 더 큰 액수다.  ◇글로벌 아트마켓과 달리 흔들리는 한국 미술시장=다빈치의 ‘구세주’는 미술시장의 역사를 새로 썼다. 지금까지 경매에서 최고가로 거래된 작품은 지난 2015년 약 1억7,940만달러(약1,980억원)에 낙찰된 파블로 피카소의 ‘알제의 여인들’이었다. 비공개 시장인 개인거래로 팔린 빌렘 드쿠닝의 ‘인터체인지’도 3억 달러였다.   세기의 거래가 이뤄진 글로벌 아트마켓은 지금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지난 주 빈센트 반고흐의 ‘들판의 농부’가 906억원에 낙찰됐고 앤디 워홀의 ‘60개의 최후의 만찬’은 670억원, 싸이 톰블리의 ‘무제’는 510억원에 팔렸다. 13~17일 단 닷새간 크리스티의 뉴욕 경매에서만 인상주의 이후 현대미술까지 1조5,600억원 어치 이상이 팔렸다. 블룸버그는 11월 경매주간의 뉴욕시장 거래액이 전년 대비 45% 이상 증가했다고 분석했고, 파이낸셜타임스는 인상파 회화가 10년 만에 최고 낙찰총액을 기록하며 글로벌 미술시장이 호황세라고 보도했다. 반면 한국 미술시장은 2013년부터 달아오른 ‘단색화’ 열풍이 사그라들면서 위축되는 모양새다. 박서보·정상화·하종현·권영우·이우환 등 ‘단색화’ 작가들의 활약으로 지난 2015년 약 1,120억원의 최대 매출을 기록했던 국제갤러리는 지난해 410억원대로 매출이 급감했다. 양대 미술경매사인 서울옥션(063170)과 케이옥션의 11월 현재 올해 낙찰 총액은 각각 622억원, 595억원 정도로 특히 서울옥션이 전년 수준을 크게 밑돌고 있다.    지난 15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의 크리스티 경매에서 약 510억원에 낙찰된 싸이 톰블리 ‘무제’ /사진출처=크리스티  ◇내우외환…그래도 안전자산 희망적=‘단색화’ 거래가 주춤거리는 것은 일종의 안정기를 모색하는 시장 다지기로 분석된다. 미술시장은 작품 가격이 급등한 후, 형성된 가격대가 적합한지를 살피는 시장의 검증시기를 거치는 선례를 보여왔다. 낙서같은 그림으로 유명한 미국의 추상화가 사이 톰블리의 경우 2011년 타계 이후 작품값이 폭등하다가 총 거래액 감소 등 안정기를 거치며 시장에서의 가격검증을 거쳐 다시 상승세를 탔다. 현재 그의 작품은 값이 떨어지지 않는 ‘안전자산’이 됐다. 하지만 경매 총액의 부진 등에는 국내 소비심리의 위축과 더불어 사드 배치로 인한 한한령 분위기로 중국 큰손이 떠난 것과 한반도 안보위기가 악재로 작용했다. 남북관계 악화 등이 외신을 통해 자주 보도되자 외국인 컬렉터들이 불안감을 느껴 한국 미술품을 구매하는 데 더욱 신중해졌다. 한한령의 조짐이 보이자 민첩하게 홍콩경매를 전격 취소하고 국내에 집중한 케이옥션의 낙찰총액은 감소하지 않은 반면 홍콩경매를 지속한 서울옥션은 낙찰총액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서울옥션 측은 아시아 시장을 장기적으로 내다보고 홍콩 현지에 ‘상설전시장’을 여는 등 적극적 행보를 이어갈 것이라는 방침이다. 서울옥션은 오는 26일 홍콩 완차이 그랜드하얏트호텔에서 개최할 올해의 마지막 홍콩경매에 약 240억원 규모의 작품을 내놓는다. 마르크 샤갈, 쿠사마 야요이, 무라카미 다카시, 탐 웨슬만 등 해외작가의 수작을 확보해 경쟁력을 더했다. 서울옥션과 케이옥션은 다음 달 국내 마지막 메이저 경매를 1회씩 남기고 있다.  디트로이트컨설팅은 최근 내놓은 ‘미술과 금융 보고서’에서 경제불확실성의 증가가 미술품 수집에 대한 수요를 더 키울 것이라 전망했다. 2001년 ‘9·11사태’ 직후 뉴욕의 11월 경매가 사상 최고의 매출을 기록한 것도 미술품을 안전자산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최정표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미술시장은 부동산이나 금융시장과 무관하게 고유한 사이클로 움직이며 특히 한국 미술시장은 아주 왜소한 시장”이라며 “단색화가 추진력을 다시 얻거나 대체작이 등장하고, 미술시장에 대한 신뢰가 더해진다면 상승요인이 될 수 있을 것이며 글로벌 호황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 ”이라고 말했다. ///서울경제 조상인기자   
1    "새로운 미국 회화의 선구자" 화가 - 윌렘 드 쿠닝 댓글:  조회:3593  추천:0  2017-11-20
    미국의 화가.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에서 태어났다. ‘액션 페인팅’이라고 하는 일종의추상 표현주의 양식의 대표자이다. 12세 때건축 장식가에게, 뒤에 조형 아카데미에서공부하였으며, 1926년 미국으로 건너가 장 식과 삽화 그리는 일을 하였고, 대공황 중에는연방 미술 계획에 참여하였다. 1930년대에입체파식의 작품이 인정되어, 그 뒤로는 추상 표현주의 경향으로 기울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인체를 자유로운 선과 선명한 색채로 대담하게 표현한 ‘여인’의 연 작으로 주목을 받았다. 베네치아·상파울루 등의국제전에서도 호평을 받아, 뉴욕파의 중심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2006년 가장 비싸게 팔린 그림 TOP 5에 속하는(2712만 달러)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 ''무제 XXV''      Willem de Kooning  1904~1997        Willen de Kooning은 네덜란드 태생의 미국화가로 추상표현주의의 핵심인물로 활동했다. 그의 그림에서 사용된 과격하면서도 파괴적인 붓놀림은 과장된 공포감을 효과적으로 전달, ‘새로운 미국회화의 선구자’로 당대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1950년대 초에는 1940년대와 달리 여성의 모습을 주로 그렸으며, 형태가 더욱 평면적이며 일그러진 모습을 띄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분홍색, 황토색, 파란색 등 윌렘 드 쿠닝 특유의 색채가 등장했다. 1950년부터 1952년까지 공격적이고 격정적인 형상을 한 ‘여인’ 연작을 그렸는데, 이 대형 그림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다. 두껍게 물감을 짓이겨 채색하는 과격한 터치로 격렬하고 공격적인 작업을 펼쳤으나, 후기로 접어들면서 호전적인 성격에서 벗어나 넉넉하고 느긋하며 간결한 화풍을 보여주었다. 대표작으로는 ‘회화’, ‘여인’ 연작 등이 있다.                              Willem de Kooning, Woman V (1952-53)                    Woman VI, 1953 Oil on Canvas 36 x 46 ¼ in. Gift of G. David Thompson (55.24.4) The Carnegie Museum of Art, Pittsburgh                      Willem de Kooning, Woman 3 (1953)         (Willem de Kooning, Door to the Rive(1960)     Willem De Kooning의 작품명이기도 한, Door the the river(going through the door to the river)는 그리스 신화에서 착안한 제목이다. 여기서 River는 저승을 일곱 바퀴 돌아 흐르는 삼도천(Styx)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는데, 망자가 이 강을 건너서 죽은 자들의 세계인 하데스(Hades)에 이른다고 한다. 따라서 이 곡의 제목은 죽음으로 이르는 과정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고,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Willem De Kooning의 말년의 심정을 묘사한 내용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Two trees on Mary Street . . . Amen!"   Willem de Kooning 1975 Oil on canvas 203.8 x 177.8cm Purchased 1985 with the assistance of the Queensland Art Gallery Foundation © Willem de Kooning 1975. Licensed by Viscopy, Sydney, 2007                                                                                                                                                                                                                                                                                                                                                                                                                                           윌렘 드 쿠닝(Will de Kooning) 작가연구                                                 1. 입체파의 모방에서 추상 표현주의의 완성   잭슨폴록과 함께 미국추상표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윌렘 드 쿠닝(Will de Kooning)은 1904년 네델란드 로테르담에서 태어났다.  소년시절에는 미술장식회사 견습공으로 들어가 일하면서 미술아카데미 야학에 다녔다.  로테르담 미술학교에서 공부한 후 장식미술가로 활동하던 그가 불법으로 미국땅을 밟은 때는 스물두 살이던 1926년 이었다.  뉴욕의 건축사장에서 페인트공으로 일하던 그는 1930년대 스듀어스 데이비스, 아쉴 고르키과 같은 뉴욕의 아방가르드 작가들과 친해지면서 전업작가의 길을 결정한다.  불법이민 노동자였던 윌렘 쿠닝(Willem de Kooning)은 이름에 드(de)를 덧붙여 작가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으로 변신 하게된다.    2차대전 직후에 부상한 유럽과 미국의 추상미술이 기존원칙의 거부와 전통적 구성방법과의 단절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면, 드 쿠닝의 회화 또한 전통의 파괴 작업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남의 것을 빌어 어떻게 나의 것으로 만들어 가야하며, 또 나의 길은 남과 얼마나 달라야 하는가.  이를 위해 모방이 있고 파괴가 있으며 재구성이 있고 재창조가 있듯이  드 쿠닝의 초기 20여년에 가까운 작가 생활은 이러한 과정의 연속으로 점철되어 왔다.  1938년의에서 55년 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나타나는 일관성 있는 진보과정은 구상에서 추상으로 변화하는 치밀한 파괴작업으로 50년대 말 탄생하는 드 쿠닝의 최고의 추상 작품들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증명해 주고 있다.   드 쿠닝은 1940년까지는 인물화가이자 초상화가였다.  그리고 어떠한 특별한 환경속에 놓인 그의 인물 습작들은 자코메티의 그림과 유사성이 있다.    그가 추상화를 처음 그리기 시작했을 때 추상의 형태들은 고르키를 통해 드러난 피카소를 연상하게 했다.  실제로 그의 작품을 보면 드 쿠닝의 작업이 바로 20세기 미술의 혁명이라고 불리우는 입체주의 미술의 바탕에서, 특히 피카소의 영향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드 쿠닝이 자신의 작품에서 피카소의 흔적을 지우기 까진 장장 15년에 가가운 세월을 필요로 했다.   전통회화에서 시작한 30년대 후반의 초기 작품은 사실적 구성회화로서 앵그르의 회화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볼륨과 콘트라스가 뚜렸하다.  이 시기의 작품의 대부분을 작가가 스스로 파괴시킨 탓에 그 흔적을 뚜렷이 찾아보기가 힘들지만, 간과해도 무관하다 할 수 있다.  40년대 중반까지 입체주의에 바탕을 두고 마티스적 색채를 빌어쓴 인물회화가 주를 이루는데, 피카소의 20년대 작품에서 보이는 생물형태학적인 무정형으로 인체의 윤곽을 설정하고 그 위에 마티스적인 색채를 반복 칠함으로 조금씩 3차원의 공간을 2차원화 시켜가는 용해작업의 시작이다.   드 쿠닝의 작품의 핵을 이루는 주제는 여인과 풍경으로, 특히 시리즈는 작품의 진보과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열쇠를 지니고 있다.  이 시리즈는 드 쿠닝이 미술평론가 였던 엘렌느 프라이드와 결혼한 1940년에 시작되었으며 최초의 시리즈 작품은 (1940)이었다.   이어 (1944), (1944), 등을 거쳐 2년 동안의 작업으로 완성됭 (1954∼55)에 이르기까지, 여인을 둘러싼 그의 작품은 구상에서 추상으로의 변화과정을 면밀히 보여 주고 있다.                                           2. 시리즈     드 쿠닝의 여인은 뒤틀린 몸매의 흉란 얼굴을 한 드라마틱한 인물이며 복잡한 구성 속에 서서히 흔적을 감추어 버리는 미움받는 여인이다.  이 여인을 지우고 또 지우면서 여인의 몸이 얼굴로 확대되고 그 입술이 풍경으로 되면서, 추상으로 변신되어 간다.  이러한 관점에서 드 쿠닝의 작품은 그 하나하나가 다음에 이어지는 작업을 위해 거쳐가는 미완성의 작품이라 여겨지기도 한다.  그의 가장 성공적인 작품은 1950년경에 제작된 검은색 바탕의 하얀색의 드로잉이 조화를 이룬 작품들이다.  또한 1950년까지 그는 칸딘스키, 고르키, 피카소 또는 그보다 앞선 어느 누구와도 다른 추상표현주의의 개성적인 측면을 전개했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양식, 새롭고 격렬한 표현양식을 예언하는 자들의 한 사람으로 등장했다.  동시에 인물에 대한 그의 향수는 그로 하여금 유명한 '여인화 연작'을 착수하게 했다.  이러한 작품들은 힘이 넘치고 때로는 거부감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성의 상징이나 풍요의 여신으로서, 그리고 에드바르트 뭉크의 관례에서 피를 빨고 있는 흡혈귀등으로서의 여인을 최면에 걸듯 환기시킨다.  위협적인 모습에서 부터 단순한 풍자만화, 온화한 에로티시즘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1950년대는 (1952∼53)이나 (1953)에서 보이듯 피카소적인 인물처리가 남아 있으면서도, 반복되는 터치작업으로 여인의 얼굴을 용해시키는 추상작업을 통해 붓처리가 난폭하면서도 강한힘이 서린 자신의 회화를 찾아가는 시기이다.  이러한 과정은 (1954∼55)과 (1955)에서 모방과 그 영향의 탈을 벗는 피카소와 고르키의 망령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드 쿠닝 작업의 획기적인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이어지는 50년대 후반은 드 쿠닝의 황금시대라고 일컬을 수 있겠는데, 빨강과 노란색조가 주를 이루는 가운데 붓작업이 뛰어난 추상회화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60년대에는 장미색과 분홍색을 섞어 두껍게 칠한 우스꽝스러운 여인들이 재등장함으로써 다시 구상으로 뒷걸음질 한다는 의혹을 불러 일으킨다.  드 쿠닝의 작품에 대해서 평론가들의 따가운 시각이 비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부터이다.  (1971)에 이르러야 드 쿠닝은 여인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해방된 50년대 후반의 추상에서 보다 더 세부적으로 파고든 자신만의 작업을 만들어 내었다.   또한 그의 작업은 실체를 용해하면서 드러나는 변화의 회화이며, 그 과정의 복잡성으로 인해 귀결되는 미완성의 회화라는 의미를 지닌다.  드 쿠닝은 하나의 작품을 제작하기까지 수십번에 걸친 덧칠과 수정작업을 고의적으로 해왔다.  완성도에 대한 커다란 집념을 지닌 그의 작품이 그에게 언제나 미완성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작업 자체가 드 쿠닝에게 있어 하나의 인간드라마 연출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즉 모든것을 수용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간다는 것은 그만큼 힘든 작업이기 때문이다.  또한 드 쿠닝의 작품을 세밀하게 관찰해 보면 놀라운 것은 작품이 마치 멀리있는 이미지를 가까이 끌어들이는 '클로즈 업'과 같은 과정으로 이루어져 왔다는 것이다.   초기 구상작품에서 추상으로 발전한 해체작업과 이에따라 부분을 확대해 보다 세밀히 비춰내는 작업은 그의 조형예술가로서의 탁월한 재능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3.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거장     '창작'은 '모방'에서 시작된다고 하지만, 드 쿠닝처럼 이 문구가 잘 적용되는 작가는 드물지 않을 것이다.  그의 작품은 그 스스로가 타인에게서 비롯된 회화라고 할 정도로 모방과 모방을 거듭한 끝에 찾고자 했다.  그 때문인지 드 쿠닝의 작품을 처음 대할때 낯설지 않고 비교적 친숙한 이미지가 느껴졌다.  그가 영향을 받은 화가들이 많은 만큼 그의 그림을 보면 작품 하나에서도 마치 몇가지 작품을 보듯 복합적인 면이 느껴진다.  하지만, 드 쿠닝의 작품 뿐 만아니라 그보다 더 유명한 그에게 영향을 준 작가들의 작품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더 많이 있다.  그러기에 드 쿠닝의 작품이 모방으로 이루어 졌다고 비난할 수 도 없고,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 비교해 자신있게 지적하고 평할 수가 없다.  단지 그의 작품을 단순히 하나의 작품으로만 생각하고 그 작품을 감상할 뿐 이다.  그의 작품에서는 흔히 말하듯 정말 강렬한 색채와 거친 붓작업, 화면을 가르는 힘찬선이 두드러짐을 느낄 수 있다.  또한 그속에 담겨진 인물의 모습이 흉물스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다시볼 땐 전혀 다르게 화면의 구성에 눈길이 가기도 한다.    그의 작품을 많이 접하진 못했지만, 남을 의식 하기보다는 자신의 독자적인 세계를 이뤄내고자 수많은 모방의 작업을 거듭하고 완성을 찾아 불태운 그의 집념이 그를 추상표현주의의 거장으로 이루어 놓지 않았나 생각한다.                                                             Willem de Kooning                                                   1904 Born Rotterdam, Holland  1916 Enrolled, Rotterdam Academy of Fine Arts & Letters Rotterdam, Holland  1926 Immigrated to the United States  1934 Joined the Artist's Union  1935 Joined mural division, W.P.A. Federal Art Project  1962 Became United States Citizen  1964 Awarded Presidential Medal of Freedom From Lyndon B. Johnson, Washington, DC  1975 Awarded Gold Medal American Academy of Arts and Letters, New York, NY  1982 Elected member of the Akademie der K?ste Berlin, Germany  1985 Awarded National Medal of Arts From U.S. President Ronald Reagan, Washington, DC  1997 Died .     Woman with a Green and Beige Background, 1966. Oil on paper mounted on masonite. 28 1/2 x 22 3/4 in. (72.4 x 57.8 cm). Grey Art Gallery, New York University Art Collection.                                                        Untitled XII, 1975. Oil on canvas. 79 3/4 x 69 3/4 in. Private Collection of Paul G. Allen.                                                                                                                                                                                                   Willem de Kooning  Woman VI, 1953   Oil on Canvas                                                 36 x 46 ¼ in.Gift of G. David Thompson (55.24.4)                                                   The Carnegie Museum of Art, Pittsburgh                                                                                                                                                                                        조각 "Standing Figure" en "Seated Woman" , Rotterdam                "예술에서는 어떤 아이디어든지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한 예술가가 덜덜 떨 생각을 한다면, 갑자기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떨기 시작할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떨면 엘 그레코가 떨고, 곧 모든 인상주의자들도 떨기 시작한다." - 윌렘 데 쿠닝                                  출처 :아름다운 그림여행   글쓴이 : 순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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