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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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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통일",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5071  추천:0  2018-04-05
반갑습니다 동포 여러분 형제 여러분  이렇게 만나니 반갑습니다  얼싸 안고 좋아 웃음이요  절싸 안고 좋아 눈물이지  어어허 어허허 허허 닐리리야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동포 여러분 형제 여러분  정다운 그 손목 잡아 봅시다  조국위한 마음 뜨거우니  통일잔치 날도 멀지 않네  어어허 어허허 허허 닐리리야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동포 여러분 형제 여러분  이렇게 만나니 반갑습니다  얼싸 안고 좋아 웃음이요  내조국이 좋아 기쁨일세  어어허 어허허 허허 닐리리야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                                            다시 만납시다                                                                     작사 : 리정술                                                                   작곡 : 황진영                                                                   노래 : 리경숙, 김은실, 백정숙, 한정숙                                                      백두에서 한라로                                                              우린 하나의 겨레                                                    헤어져서 얼마냐                                                              눈물 또한 얼마였던가                                                                                                                  잘 있으라 다시 만나요                                                    잘 가시라 다시 만나요                                                    목메어 소리칩니다                                                    안녕히 다시 만나요                                                      부모형제 애타게                                                    서로 찾고 부르며                                                    통일아 오너라.                                                    불러 또한 몇 해였던가                                                                                                                  잘 있으라 다시 만나요                                                    잘 가시라 다시 만나요                                                    목메어 소리칩니다                                                    안녕히 다시 만나요                                                        꿈과 같이 만났다                                                    우리 헤어져가도                                                    해와 별이 찬란한                                                    통일의 날 다시 만나자                                                                                                                  잘 있으라 다시 만나요                                                    잘 가시라 다시 만나요                                                    목메어 소리칩니다                                                    안녕히 다시 만나요                                                      잘 있으라 다시 만나요                                                              잘 가시라 다시 만나요                                                    목메어 소리칩니다                                                    안녕히 다시 만나요       =================== 우리의 소원은 통일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나라 살리는 통일 이 겨레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나라 살리는 통일 이 겨레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나라 살리는 통일 이 겨레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   그룹 소녀시대 멤버인 남측 가수이며 배우인 서현이 북측 방송원 최효성과 3일 북한 평양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열린 남북예술인의 연합무대 '우리는 하나' 사전 연습을 진행하고 있다. 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덤으로 "참고 자료" 더...   우리의 소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우리의 소원〉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전인 1947년에 서울에서 발표된 노래이다. 어린이가 주로 부르는 동요의 특성상 대한민국에서 가사를 따라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도 자주 불리던 것이 전해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이 노래의 제목을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부른다. 일제 강점기에 여러 문예 분야에서 활동했던 안석주가 가사를 썼고, 안석주의 아들인 당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의 재학생이던 작곡가 안병원이 곡을 붙였다. 목차  [숨기기]  1역사 1.1개사 1.2북으로 확산 1.3남북 교류와 노래비 2각주 3참고자료 역사[편집] 이 노래는 한국방송의 삼일절 특집 라디오 드라마의 주제곡으로 발표된 곡이었다. 노래가 발표된 1947년 3월 1일은 미·소 군정기였고 좌우익 세력 사이의 충돌이 극심했다. 개사[편집] 이 노래는 처음 발표 당시에는 '우리의 소원은 독립 / 꿈에도 소원은 독립'이라는 가사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남북의 분단이 현실화되면서, 교과서에 노래가 실릴 때에는 '우리의 소원은 독립'을 '우리의 소원은 통일'로 가사를 바꾸었다. 당시 정부 성립을 앞두고 분단을 경계하며 통일 정부를 수립하자는 열망이 '독립'에서 '통일'로 가사를 고치는데 투영되었다. '독립'에서 '통일'로 가사를 고친 이 노래의 본래 가사는 '이 목숨 바쳐서 통일 / 통일이여 오라'였으나,[1] 이후 '이 정성 다해서 통일 / 통일을 이루자'라고 개사되었다.[2] 북으로 확산[편집] 본래 대한민국에서만 불리던 이 노래는 1989년 임수경이 평양축전에 가기 전에 이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꽤 알려져 있었고,[3] 1990년대부터는 남북에서 모두 좋아하고 함께 부르는 노래가 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노래의 앞 부분을 '이 목숨 바쳐서 통일 / 통일을 이루자'라고 부르며, 대한민국에서 마지막 가사를 원곡대로 '통일이여 오라'라고 부르는 것과 달리 이 부분도 '통일을 이루자'라고 개사해 부르고 있다. 남북 교류와 노래비[편집] 2000년 남북 정상 회담 당시 남과 북의 정상이었던 김대중과 김정일이 6·15 남북 공동선언에 서명한 후 수행원들과 손을 잡고 함께 불러 정치적 상징성까지 커졌다. 2000년 5월에 서울에서 열린 평양어린이예술단 공연에서도 예술단이 마지막 순서에 이 노래를 불렀고, 이후 남북 간 음악 교류에서는 거의 필수적으로 공연의 마지막 부분에 연주하는 노래가 되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평소에 이 노래를 즐겨 불러 2009년 8월 23일에 열린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 영결식에서 조가(弔歌) 중 하나로 연주되었다. 경기도 이천시의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내 잔디광장에는 작곡자 안병원이 직접 쓴 악보와 가사를 새긴 노래비가 건립되어 있다.[4] 각주[편집] 이동↑ 우리의 소원 작곡가 안병원 씨 동아일보, 1982.7.21. 원문 : "이 목숨 바쳐서 통일/통일이여 오라…" 이동↑ 동요 '우리의 소원'의 슬픈 현대사 매일경제, 2004.6.13. 이동↑ 북 기자가 본 '그때 임수경' 한겨레신문, 1990.12.15. 원문 : "너무나도 귀에 익은 선율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었다." 이동↑ '우리의 소원' 노래비 제막 2006.5.10. 참고자료[편집] 방학진 (2005년 12월 15일).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작사한 안석주 - 식민지 지식인의 나약함이여”. 우리힘. 2008년 3월 5일에 확인함. 분류:  대한민국의 노래 1947년 노래 ///////////////////////////////   시대 현대 저작자 안석주(安碩柱), 안병원(安丙元) 창작/발표시기 1947년 성격 동요 유형 작품 분야 예술·체육/현대음악 요약 안석주(安碩柱) 작사, 안병원(安丙元) 작곡의 동요.   내용 1947년 서울중앙방송국 어린이시간에 발표된 곡이다. 오늘날 통일을 염원하는 민족적 애창곡으로 널리 불리고 있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꿈에도 소원은 통일/이 정성 다해서 통일/통일을 이루자/이 겨레 살리는 통일/이 나라 찾는데 통일/통일이여 어서오라 통일이여 오라. 8분의 6박자, 내림마장조의 서정적인 가락이다. 노랫말에서 표출되는 간절한 소망과 겨레의 의지가 이 노래를 박력있고 힘찬 노래로 불리게 한다. 작사자는 작곡가의 아버지로서, 부자 합작의 3·1절특집 어린이오페레타 「우리의 소원」의 몇 곡 중에서 이 곡만이 오늘날까지 애창되고 있다. ////////////////////////////// 6/8박자 내림마장조에 못갖춘 마디로 되어 있다. 1947년 서울 중앙방송국에서 3·1절 특집 어린이 프로그램을 마련하기 위해 봉선화동요회에 작품을 의뢰하자 이 동요회를 지도하던 안병원이 아버지에게 원고를 부탁하고 자신이 작곡하여 〈우리의 소원〉이라는 노래극을 만들었는데, 그 노래극에 나오는 합창곡이 현재 알려진 〈우리의 소원〉이다. 1948년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 교과서에 실으면서 '우리의 소원은 독립' 대신 '우리의 소원은 통일'로 바꾸었다. ==================       우리의소원 / 우리의 소원은 통일 ///[어린이동요 + 악보]                     [피아노 악보] 동요 - 우리의 소원은 통일 (안석주 작사/안병원 작곡)                     동요 - 우리의 소원은 통일 (안석주 작사/안병원 작곡)   ========================                                           백두와 한라는 내 조국 ​                                                                                                    작사 : 황진영                                                                                                    작곡 : 황진영                                                                                                                                                                                                                                                           (개   사)                                          (원 가사)                                           해솟는 백두산은 내 조국입니다                해솟는 백두산은 내 조국입니다                                          한라산도 독도도 내 조국입니다                제주도 한라산도 내 조국입니다                                       백두에 철쭉화 한라에 흰 제비꽃               백두와 한라가 서로 손을 잡으면                                       곱슬머리 어여쁘게 단장한 이 산천도          삼천리가 하나 되는 통일이어라                                       모두 다 소중한 내 조국입니다                  아 ~ 통일 통일 통일이여라                                                  고난으로 점철된 이 민족의 길에                                                  통일의 꿈 염원으로 맞잡은 손이                                                  그리도 오랜 세월 기다려온 내 조국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부둥켜안고                                                   눈물을 글썽이며 하나 된 지금                                                  해솟는 백두산은 내 조국입니다                                                  한라산도 독도도 영원한 내 조국입니다    
11    그대들은 "J에게" 장미꽃을 드렸는가... 댓글:  조회:4752  추천:0  2018-04-05
​ ​        3일 오후 평양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열린 남북합동공연에서 ‘J에게'를 남측 이선희와 북측 김옥주가 열창하고 있다. (사진=사진공동취재단) ... 첫 합연은 가수 이선희와 북한 삼지연관현악단 김옥주가 장식했다. 두 사람은 이선희의 대표곡 ‘J에게’를 한 소절씩 주고받으며 함께 불렀다. 김옥주는 이미 지난 2월 삼지연관현악단 강릉 공연에서 이 노래를 부른 적이 있다. 두 사람이 손을 맞잡은 채 노래하는 모습에 관객석에서는 박수가 터져나왔다... ==== ...이선희와 김옥주는 'J에게'를 함께 열창했다. 김옥주는 은하수관현악단의 모란봉중창조 가수였으며 민요에서 러시아 팝 음악까지 다채로운 가창력을 보여주는 중견 가수이자 실질적인 '보컬 리더'라고 평가를 받는다.  김옥주는 2017년 모란봉악단의 원산·함흥·신의주·강계·안주·남포·사리원 지방공연에서 '륙군소좌'의 계급장을 달고 공연에 참여했으며 최근 삼지연관현악단 공연에도 참여해 내한했다. 노래를 마친 이선희는 "옥주씨 처음 만났는데 목소리를 듣고 감동했다"며 "(관객들의) 눈빛이나 모습에서 따뜻한 배려가 느껴져서 감사한 마음으로 불렀다"고 말했다. 이들은 마지막 공연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전날인 지난 2일 오후 5시부터 11시까지 함께 연습한 것으로 알려졌다. 창법이 서로 다른 이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 이해하려고 대화하면서 이번 공연을 준비했다... ================= (평양=뉴스1) 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송영(왼쪽)과 백지영이 3일 평양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열린 남북합동공연 리허설에서 공연하고 있다. 2018.4.3/뉴스1 © News1 ...'제2의 리설주'라고 불리는 송영이 3일 평양시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1만2000석이 꽉 찬 가운데 성황리에 마친 남북 합동 공연에서 우리 가수 알리, 정인 그리고 북측 가수 김옥주와 함께 '얼굴'을 열창했다. 이들의 사중창이 돋보인 남북합동 공연은 3일 평양시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성황리에 마쳤다. 북측은 우리 가수들과 호흡을 맞출 가수로 송영과 김옥주를 선택했다. 폭넓고 호소력 짙은 가창력이 돋보이는 송영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부인인 리설주의 과거 은하수관현악단 시절을 연상하게 하는 저음의 카리스마를 무대에서 가끔 선보여 중국 등에서 인기가 높다. 리설주의 목소리는 중저음을 기본으로 고음에서 저음까지 폭이 넓어 큰 인기를 끌었다. 송영은 리씨의 대를 이어 북측에서 큰 사랑을 받고 있는 가수다. 이들은 마지막 공연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전날인 지난 2일 오후 5시부터 11시까지 함께 연습한 것으로 알려졌다. 창법이 서로 다른 남북의 가수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 이해하려고 대화하면서 이번 공연을 준비했다. 남북 예술단은 1만2000석 규모의 류경정주영체육관에 가득 찬 북한 관객들 앞에서 짧은 연습임에도 최선을 다해 호흡을 맞춰 남북 화합의 정수를 보여줬다...  
10    그대들은 "푸른 버드나무"를 불러봤는가... 댓글:  조회:5428  추천:0  2018-04-05
    ​평양 공연의 북한 노래 '푸른 버드나무'   평창 동계 올림픽을 계기로 남북이 대화하는 분위기가 급속하게 조성되어, 북한 예술단이 남한을 방문하여 감동적인 공연을 펼친 바 있다. 이번에는 남한 예술단이 북한을 방문하여, ’봄이 온다‘ 공연을 멋지게 성공적으로 마쳤다. TV를 통해 비쳐주는 공연 장면들을 보니 너무나 감동적이고 가슴이 뜨거워진다. 정말로 남북의 삼천리 강산에 봄이 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아마 북한에 공연을 간 가수들도 평생에 잊지 못할 감격적인 순간들을 맛보았을 것이다. 공연을 관람한 북한의 청중들도 크게 감동하면서, 남북이 이렇게 가까운 사이구나 하는 느낌을 진하게 받았을 것이다. 남한의 예술단 윤상 단장은 인터뷰에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는데, 참가한 가수들이나 남북의 동포들이 모두 그런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 이번 공연을 보도하는 장면들을 보면서 남북의 모든 가수들이 노래를 잘 불렀지만, 특히 가수 서현이 불렀다는 ’푸른 버드나무‘라는 북한 노래를 처음 들었는데 매우 인상적이었다.     나무야 시내가의 푸른 버드나무야 너 어이 그 머리를 들 줄 모르느냐 뭇나무 날 보라고 머리를 곧추들 적에 너는야 다소곳이 고개만 수그리네 라--- 라--- 푸른 버드나무야   바람결 스치여도 스적이는 나무야 어쩌면 네 아지 그리도 부드러워 하지만 모진 바람 네 손목 비틀 적에 한번도 네 마음 꺽지를 못하였네 라--- 라--- 푸른 버드나무야   오늘도 정다웁게 설레이는 나무야 어쩐지 우리 마음 네가 다 닮았구나 키워준 고마움을 누구보다 네 알아 그 뿌리 깊이 내린 이 땅에 절을 하네 라--- 라--- 내 조국의 나무야   푸른 버드나무는 북한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기곡이고, 북한 동포들이 가장 좋아하고 즐겨 부르는 노래라고 한다. 설명에 따르면 평양의 대동강변에 버드나무가 많이 우거져 있어, 김일성 주석이 지시하여 평양을 상징하는 노래로 만들었는데 김정일이 가장 애창했던 노래라고도 한다. 평양의 별칭이 류경(柳京)인데 바로 버드나무가 많아서 붙여졌고, 예술단 공연을 한 곳이 류경 정주영 체육관(柳京 鄭周永 體育館)이기도 하여 의미가 깊다. 노래를 부른 가수 김광숙은 북한의 최고 인기 가수로 알려졌는데, 애석하게도 올해 1월 14일에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녀가 돌아가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직접 노래 부르는 모습과 목소리를 접할 수 있었을지도 모를텐데 참으로 아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유튜브를 통해 김광숙이 부르는 푸른 버드나무 노래를 들으니, 느낌이 매우 좋아 심금을 울린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가수 서현이 부르는 모습은 조금만 비쳐주어 어떻게 불렀는지 궁금하기도 한데, 선곡(選曲)을 아주 잘 했다는 생각도 든다. 북한 청중들도 자신들이 좋아하는 이 노래를 남한의 어리고 고운 여가수가 부르니, 모두 손을 올리고 따라하면서 크게 환호를 했다고 하는데, 정말 기분도 좋고 깊은 공감을 느꼈을 것이다. 노래의 가사를 음미하는 맛도 매우 좋은데, 버드나무의 늘어진 모습을 의미깊게 해석하면서 정다운 친구처럼 칭찬을 하고 있다. 버드나무가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 같지만, 그 부드러움 속에 감추어진 단단한 마음을 이 땅에 굳게 뿌리내리고 있음을 서정적으로 잘 노래하고 있다.     또 부드럽고 맑게 울려 나오는 푸른 버드나무 노래를 들으면, 곧바로 유년기의 그리운 추억을 떠올리며 가슴을 젖어들게 만든다. 초등학교 운동장에 가지가 길게 늘어진 버드나무들은 유년기의 추억을 함께 한 그리움이 가득 담긴 나무이기도 하다. 봄의 싱싱함을 알리듯 싹터 나오는 신록의 새순, 버들가지 물이 오르면 꺾어서 버들피리 만들어 불던 일, 여름에 무성하게 자란 나무의 그늘에서 동무들과 앉아 놀던 일, 또 높은 나무에서 진하게 울려 나오던 매미들의 울음 소리, 매미를 잡으러 굵은 나무 줄기를 올라가던 일 등등 버드나무와 함께 한 옛일들이 너무나 그립기만 한 것이다. 맑게 울리는 푸른 버드나무의 노래 가락에 젖어들면, 묘하게 유년의 그리움과 인생의 회한과 통일의 소망 같은 여러 상념들이 뒤섞여 일어나는 것이다.     북한의 김정은 주석이 이번에 평양에서 봄이 온다 공연을 했으니, 다음에는 ’가을이 왔다‘는 공연을 서울에서 하자고 제안하였다고 한다. 보도에 나온 그 말대로 실제로 그렇게 되어, 남북의 동포들이 정서적으로 하나가 되는 감동적인 순간들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 남북의 가수들이 함께 부르는 노래를 따라 평화와 통일의 바람이 계속 삼천리 강산을 휘젖게 되면, 오래 묵었던 냉전의 골도 자연스레 옅어져 갈 것이다. 일찌기 신동엽 시인이 말한 ‘미움의 쇠붙이‘를 손쉽게 녹일 수 있는 것이, 바로 남북의 동포가 어깨를 함께 하며 같이 부르는 노래 가락일 것이다. 버드나무와 함께 자란 인생은 남북의 동포가 서로 다를 바가 없을테니, 이 좋은 푸른 버드나무 노래를 같이 즐겨 부르면서 정서적 통일부터 먼저 이루어나가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유튜브를 통해 맑게 울려나오는 김광숙의 푸른 버드나무 노래를 거듭 듣고 있노라니, 마음은 어느새 훨훨 날아가 새봄의 버드나무 새순이 움터나오는 평양 대동강변을 거닐게 된다.   *북한 가수 김광숙 연합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가수 김광숙은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예술적 기량을 과시해 1986년에는 모란봉악단을 이은 보천보전자악단에 입단하였다. 20대 초반인 1988년에 공훈배우 칭호를 받았으며, 1992년에는 북한 예술인의 최고 명예인 인민배우 칭호를 수상했다. 보천보전자악단 가수들의 맏언니 격이었던 김광숙은 맑고 은구슬 같은 목청의 고음 가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대표곡으로는 '생이란 무엇인가', '새별', '비둘기야 높이 날아라', '축복하노라' 등이 꼽힌다. 김광숙은 러시아 가요 '백만 송이 장미'와 샹송곡 'L'amour Est Bleu(사랑은 푸른빛)' 등을 부르기도 했다. 평양 출신 탈북민의 말에 따르면 국외에서는 보천보전자악단 가수 중 전혜영 등이 더 유명하지만, 북한 주민들 속에서는 김광숙이 최고 인기가수였다고 한다. 동영상 푸른 버드나무 (Blue Willow)   [출처] 평양 공연의 북한 노래 '푸른 버드나무'|작성자 적선인 =====================       소녀시대 서현./사진=텐아시아DB      (북한 가수 김광숙 노래)     나무야 시내가의 푸른 버드나무야 너 어이 그 머리를 들줄 모르느냐 뭇나무 날 보라고 머리를 곧추 들적에 너는야 다소곳이 고개만 수그리네 라--- 라---  푸른 버드나무야 바람결 스치여도 스적이는 나무야 어쩌면 네 아지 그리도 부드러워 하지만 모진 바람 네 손목 비틀적에 한번도 네 마음 꺽지를 못하였네 라--- 라---  푸른 버드나무야 오늘도 정다웁게 설레이는 나무야 어쩐지 우리 마음 네가 다 닮았구나 키워준 고마움을 누구보다 네 알아 그 뿌리 깊이 내린 이 땅에 절을 하네 라--- 라---  내 조국의 나무야 =============================       ...우리 예술단이 평양 공연에서 부를 노래의 윤곽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공연의 사회까지 맡은 소녀시대 서현(왼쪽 사진)은 북한의 인기곡 ‘푸른 버드나무’를 부르고, 유일한 걸그룹 레드벨벳은 히트곡 ‘빨간 맛’을 선보인다.  27일 우리 예술단의 방북이 나흘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선곡은 서현의 ‘푸른 버드나무’다. ‘푸른 버드나무’는 북한 김일성 주석이 생전에 지침을 내려 만든 노래로 알려져 있다. 평양은 특히 버드나무가 많아서 과거 류경(柳京)으로 불릴 정도였는데 이에 대한 아름다움을 표현한 곡이다. ‘나무야 시냇가의 푸른 나무야, 너 왜 그 머리를 들 줄 모르느냐”라는 가사에서 보이듯 정치색은 느껴지지 않는 서정적 노래다.   이 곡이 더욱 유명해진 것은 북한 최고의 가수로 인정받는 김광숙(오른쪽)의 대표곡이기 때문이다. 김광숙은 1992년 북한 예술인 최고의 명예인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 북한 경음악단인 보천보전자악단의 맏언니 격으로 ‘맑고 은구슬 같은 목청의 고음 가수’라는 평가를 얻었다. 대표곡으로 ‘생이란 무엇인가’, 러시아 가요 ‘백만 송이 장미’ 등이 있다. 하지만 김광숙은 지난 2018년 1월 14일 54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당시 김정은 위원장은 직접 조화를 보내 애도했다고 알려져 있다. 생전의 모습을 보면 화려하지만 수수하고 단아한 모습이 서현을 연상시킨다...  ======================= ...평양은 특히 ‘버드나무’가 많아 과거 ‘버들 유’(柳)를 써서 ‘류경’(柳京)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만큼 평양 시민에 친숙한 곡일 수 밖에 없다.     다른 북한 노래에 비해 정치색도 덜하다. ‘나무야 시냇가의 푸른 나무야, 너 왜 그 머리를 들 줄 모르느냐’라는 가사에서 보듯 서정성이 강조된 노래다.     이 노래가 북한 최고 인기가수로 인정받는 김광숙의 대표곡이라는 점도 작용됐을 것으로 보인다.     김광숙은 1992년 북한 예술인 최고의 명예인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 모란봉악단의 전신인 ‘보천보전자악단’의 맏언니 격으로 ‘맑고 은구슬 같은 목청의 고음 가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9    우리 너도나도 "뒤늦은 후회" 하지 맙시다... 댓글:  조회:3141  추천:0  2018-04-05
〈뒤늦은 후회〉는 대한민국의 남매듀엣 현이와 덕이의 두번째 정규 음반 《너나 좋아해 나너 좋아해》의 B면 2번 트랙으로 발표된 곡이다. 작사는 장현이, 작곡은 장덕이 하였다.   현이와 덕이의 노래 음반 너나 좋아해 나너 좋아해 발매일 1985년 6월 30일 포맷 LP 장르 팝 길이 03:31 레이블 서라벌레코드 작사가 장현   작곡가 장덕     -------------------- 장현(1956년 2월 21일 ~ 1990년 8월 16일)은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가수 장덕의 오빠이며, 1980년대 현이와 덕이를 결성하여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90년 2월 4일 동생 장덕은 불면증과 우울증으로 인한 약물 과다복용으로 숨졌으며, 같은 해 8월 장현도 설암으로 건강이 악화되자 사망하였다.   1955년생으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실제로는 1956년 2월 21일생이다. 아버지는 첼리스트였고 어머니는 화가였다. 1961년 동생 장덕이 태어났고 이후 동생과 함께 미8군부대에서 먼저 데뷔한 후 1976년 현이와 덕이라는 이름으로 한국가요계에 데뷔하였다. 장현은 1976년 등 영화에도 출현하였으며, 1978년에는 MBC 서울국제가요제에서 입상하였다. ( 가수 : 장현 / 작사,작곡 : 장덕)   1980년대 말 장현은 설암 말기로 인해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다. 이에 동생 장덕은 오빠 장현의 병간호에 들어가 연예인 활동을 잠정 중단한다. 그와중에 평소에 앓아 오던 불면증과 정신병과 우울증이 겹치면서 약물을 과다복용을 하게 되는데, 결국 1990년 2월 4일 서울특별시 마포구 염리동 자택에서 28세로 사망하였고, 장현 또한 "혀의 일부분을 자른다면 회생 가능성이 있다."라는 진단을 거부하여 결국 병이 악화되어 같은 해 8월 16일 세상을 떠났다     --------------------------- 천재음악소녀 장덕-현이와 덕이               현이와 덕이 /- 뒤늦은 후회 (2002년)   창밖에 내리는  빗물소리에  마음이 외로워~져요  지금 내 곁에는  아~무~도 아무도  없으니까요  거리에 스치는  바람소리에  슬픔이 밀려~와요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아서  살며시 눈감았지요  계절은 소리없이 가구요  사랑도 떠나갔어요~ ~  외로운 나에겐  아무 것도  남은게 없~구~요  순간에 잊혀져갈  사랑이라면  생각하지 않겠어요  이렇게 살아온  나에게도 잘못이  있으니까요    창밖에 내리는  빗물소리에  마음이 외로워~져요  지금 내 곁에는  아~무~도 아무도  없으니까요  거리에 스치는  바람소리에  슬픔이 밀려~와요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아서 살며시  눈감았지요  계절은 소리없이 가구요  사랑도 떠나갔어요~ ~  외로운 나에겐  아무 것도  남은게 없~구~요  순간에 잊혀져갈  사랑이라면  생각하지 않겠어요  이렇게 살아온  나에게도 잘못이  있으니까요 ===================== 현이와 덕이 1975년 미8군부대에서 데뷔한 장현(1956~1990)과 장덕(1961~1990) 남매가 이듬해인 1976년 결성한 그룹의 이름으로 장덕은 작사,작곡 능력이 뛰어나 싱어송라이터로 오랜기간 활동 했습니다.  (1977년 진미령이 부른 을 직접 작사, 작곡 하여 제1회 《MBC 서울국제가요제》에서 최연소 작사/작곡가로 입상) 활발히 연예활동을 하던 도중 1989년 장덕 솔로 정규6집 발표 후 장현이 설암판정을 받게 되자 모든 활동을 잠시 중단, 동생 장현은 어릴때부터 앓아 오던 불면증과 우울증으로 수면제와 기관지 확장제를 과다복용 하게 되어 1990년 2월 4일 자신의 자택에서 사망 같은 해 8월 장현 역시 설암으로 투병중 사망하였습니다. 1990년 같은해 하늘나라로 가게 된 남매는 2018년 북측에서 열린 '봄이온다' 공연중  최진희가 부른 `뒤늦은 후회` 덕에 재조명 받게 되었습니다.  ========================       사진=연합뉴스 평양 공연에서 가수 최진희(61)가 부른 ‘뒤늦은 후회’가 화제다. 이 노래는 북한 김정일 전 위원장이 평소 즐겨 불렀던 노래로 전해졌다. 뒤늦은 후회는 남매 듀오 현이와 덕이(장현, 장덕)가 부른 노래다. 현이와덕이가 1985년 발매한 2집 ‘너나 좋아해 나너 좋아해’에 수록된 노래다. 오빠 장현이 작사하고, 여동생 장덕이 작곡해 함께 부른 서정적인 멜로디의 곡이다.  1975년 데뷔한 장현과 장덕은 1976년 현이와덕이를 결성했고 이후 각자 솔로 활동을 하다가 1985년 재결합해 ‘너나 좋아해 나너 좋아해’ 등을 히트시켰다.  장덕은 1962년생으로 중학생 때인 1977년 가수 진미령이 제1회 MBC 서울국제가요제에서 부른 ‘소녀와 가로등’을 작곡했다. 최연소 여성 싱어송라이터로 ‘천재소녀’로 불리기도 했다. 장덕은 1990년 2월 수면제로 인한 약물 과다복용, 장현은 같은 해 8월 설암으로 인생을 마감해 팬들에 큰 충격을 안겼다. ///국제신문 /김영록 기자 ===================== [SBS funE | 김지혜 기자] 북한 측이 직접 요청했다는 '뒤늦은 후회' 무대는 어땠을까. '명품 보이스' 최진희가 만든 감동의 5분이었다.  5일 SBS에서 방송된 2018 남북평화 협력 기원 평양공연 '봄이온다' 무대에 오른 최진희는 자신의 대표곡'사랑의 미로'로 공연을 시작했다.  노래를 마친 최진희는 "그동안 정말 많이 오고싶었다. 정말 제 평생에 소중한 기억이 된 공연이다. 이번에는 느낌이 또 다르다. 남과북, 북과 남에서 제 노래를 많이 사랑해주시는데 감정과 정서가 이어지는 하나의 민족이라 그런 것 같다"라고 소감을 전했다. 이어 북한 측이 요청한 노래 '뒤늦은 후회'를 불렀다. 현이와덕이가 1985년 발매한 2집 ‘너나 좋아해 나너 좋아해’에 수록된 노래다. 오빠 장현이 작사하고, 여동생 장덕이 작곡해 함께 부른 서정적인 멜로디의 곡이다. 북한 김정일 전 위원장이 평소 즐겨 불렀던 노래로 알려졌다.  최진희는 이 노래를 특유의 깊이 있고 애절한 목소리로 소화하며 북한 주민들의 박수 갈채를 받았다.    
8    그대들은 아버지 어머니 "18번" 아시는가요... 댓글:  조회:4367  추천:0  2018-04-05
라구요 / 강산에   두만강 푸른물에 노젖는  뱃사공을 볼수는 없었지만  그 노래만은 너무 잘 아는건  내 아버지 레파토리 그 중에  18번 이기 때문에 18번 이기 때문에  고향생각 나실때면  소주가 필요하다 하시고 눈물로 지새우시던  내 아버지 이렇게 얘기했죠  죽기 전에 꼭 한번만이라도  가봤으면 좋겠구나 라구요 눈보라 휘 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 가보지는 못했지만  그 노래만은 너무 잘 아는건  내 어머니 레파토리 그 중에 18번 이기때문에 18번이기 때문에  남은 인생 남았으면  얼마나 남았겠니 하시고 눈물로 지새우시던  내 어머니 이렇게 얘기했죠  죽기전에 꼭 한번만이라도  가봤으면 좋겠구나 라구요   강산에 ‘라구요’… “평양 공연에서 눈물 바다 이룬, 그 노래”      |            노래하는 강산에와 이를 듣는 북한 관객 모습.사진공동취재단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젓는 뱃사공을 불 수는 없었지만” 실향민인 부모님의 이야기를 가사로 담은 노래, 가수 강산에의 ‘…라구요’에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이 노래는 실향민인 부모님의 이야기를 가사로 담은 노래로, 지난 2일 평양 공연을 찾은 관객들을 눈물 짓게 만들었다. ‘죽기전에 꼭 한번만이라도 가봤으면 좋겠다’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살아생전 북한땅을 밟지 못했던, 그 땅을 아들 강산에가 밟았다. 강산에는 이날 공연을 마치고 “많은 분들이 따뜻하게 해주셔서 내내 누르고 있었는데 한번 터지면 잘 안 멈추더라”며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이어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라고 인사했다. 강산에의 아버지는 함경남도 북청 출신으로, 피란통에 처자식과 뿔뿔이 흩어져 거제에 둥지를 틀어 어머니와 가정을 꾸렸고 강산에와 그의 누나를 낳았다.   △강산에 /‘…라구요’  두만강 푸른물에 노젓는  뱃사공을 볼수는 없었지만 그 노래만은 너무 잘 아는건  내 아버지 레파토리  그 중에 십팔번이기 때문에  십팔번이기 때문에  고향 생각나실때면  소주가 필요하다 하시고  눈물로 지새우시던 내아버지  이렇게 얘기했죠 죽기전에 꼭 한번만이라도 가봤으면 좋겠구나 라구요- 눈보라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 가보지는 못했지만 그 노래만은 너무 잘 아는건  내 어머니 레파토리  그 중에 십팔번이기 때문에  십팔번이기 때문에  남은 인생남았으면 얼마나 남았겠니 하시고  눈물로 지새우시던 내어머니  이렇게 얘기했죠 죽기전에 꼭 한번만이라도 가봤으면 좋겠구나 라구요-   국제신문   ==================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라구요’ 노래 직후였습니다. ‘라구요’는 제가 데뷔하기도 전에 어머니에게 선물로 드렸던 노래에요.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지난 1·3일 북한 평양에서 열린 남북 예술단의 공연 무대에 선 가수 강산에씨(55·사진)가 귀국 후인 4일 경향신문과의 서면 인터뷰를 통해 공연 소감을 전했다. 이번 공연은 실향민 부모를 둔 강씨에게는 말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의미있는 자리였다. 강씨의 부모는 분단 전 함경도에서 살다가 한국 전쟁 때 남쪽으로 내려왔다. 두 사람은 분단 후에 경남 거제도에서 가정을 꾸리고 강씨와 누나를 낳았다.  내내 고향을 그리워하던 강씨의 부모는 북한 땅을 다시 한 번 밟아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강씨의 데뷔곡이자 대표곡인 ‘라구요’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그의 부모의 심정을 담은 노래다. ‘두만강 푸른물에 노젓는/ 뱃사공을 볼수는 없었지만/ 그 노래만은 너무 잘 아는건/ 내 아버지 레파토리 그 중에 십팔번이기 때문에’ ‘눈물로 지새우시던 내어머니/ 이렇게 얘기했죠 죽기전에/ 꼭 한번만이라도 가봤으면/ 좋겠구나 라구요-’라는 가사다.    강씨는 “평양 공연 출연소식이 발표됐을 때부터 만감이 교차했다”며 “자식입장에서 부모님 대신 고향에 가는 것이 감격스러웠다”고 말했다. 이어 “생각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저의 방북사실에) 연대감을 가지고 있더라”라며 “그들의 응원과 축하의 문자 메시지를 받으면서 진심으로 감격했다”고 말했다.  “북한에 처음 도착하고 나서도 실감이 잘 안 났었는데 리허설 준비과정부터 실감이 나면서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고 했다. 생전에 강씨의 어머니는 북한에 두고온 친오빠들의 자신을 얼마나 예뻐해줬는지를 강씨에게 자주 이야기하면서 고향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3일 평양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열린 남북 합동 공연 무대에서 강씨가 부른 첫 곡은 ‘라구요’였다. 노래를 부르던 강씨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이를 보는 북한 관객들도 눈물을 따라 훔쳤다. 두 손 깍지를 꼭 낀 채로 집중하는 모습도 보였다.  강씨는 ‘라구요’를 마친 후 관객들에게 “처음 뵙겠습니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저는 이 자리가 굉장히 감격스럽습니다. 돌아가신 저희 어머니, 아버지 생각나고요. 방금 들려드린 노래가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만들었던 노래였는데 데뷔곡이었습니다”라며 인사를 했다. 멘트 도중 강씨는 눈물이 흘러 말을 잇지 못했다. 강씨의 눈물에 관객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내며 공감하고, 응원했다.   지난 3일 오후 평양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열린 남북 예술단 합동공연 무대에서 강산에씨가 자신의 대표곡인 ‘라구요’를 부르고 있다. 사진/평양사진공동취재단 강씨는 “내내 (감정) 컨트롤을 나름 잘 했는데, 마지막 공연에서 북받쳐 오르더라”며 “그 노래 자체가 중간에 감정이 깊어지는 노래이기는 하지만 잘 참고 넘어갔는데, 노래 다 끝나고 멘트 하는데 어머니 생각이 정말로 많이 났다”고 말했다. “‘라구요’끝낸 후 말을 못 잇고 있으니 관객들이 박수로 크게 응원해줬다”며 “그 상태에서 ‘넌 할 수 있어’를 불렀는데 더 힘이 났고 완전히 노래에 몰입할 수 있었다”고 했다. 공연이 끝난 후 만찬자리에서 남북 공연 관계자들이 강씨 주위로 많이 모여들어서 술을 권하면서 ‘라구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북한에 있는 동안 강씨는 주로 숙소에만 있어서 평양의 모습은 많이 관찰하지 못했다고 한다. 오며 가며 본 북한 사람들의 인상은 “특별히 다르다는 느낌이 아니라 (남과 북의 모습이) 다 같았다”는 것이다. 강씨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민간 차원의 교류가 앞으로 더 다양해지고 계속되기를 희망한다”며 “기회가 된다면 북한이나 남한에서 또 함께 공연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 경향신문 & 경향닷컴, / 이혜인 기자
7    [그것이 알고싶다] - "원앙 부부금실"의 유래?... 댓글:  조회:3232  추천:0  2018-04-05
원앙은 정말 부부금실이 좋을까? (ZOGLO) 2018년2월28일 일부다처로 사는 원앙, 배우자 선택은 암컷이 한다 새끼 때 1:1 암수 비율, 커갈수록 암컷이 많아진다 원앙은 일부다처로 가족을 이룬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불과 50여 년 전만 해도 신랑 신부가 한복 입고 신부집 마당에서 혼례를 올렸다. 이 전통혼례의 첫 의식으로 신랑이 나무로 깎은 기러기를 신부집에 전달했다. 왜 기러기일까?  예전엔 신부의 혼수품에 빠지지 않는 것이 원앙금침(鴛鴦衾枕)이다. 원앙금침이란 신혼부부가 베는 배게와 이불에 원앙을 수놓은 것을 말한다. 이는 신랑 신부가 원앙처럼 사이좋게 좋게 살라는 바람이 담겨있다. 원앙은 옛 그림에 비교적 자주 등장한다. 고려청자 연적에도 원앙이 연꽃을 입에 물고 있다. 부부의 화목과 자손의 번영을 기원하는 의미다. 원앙은 부부 금실의 상징이 된 지 오래됐다.  아이러니하게 원앙은 일부다처로 산다. 원앙 수컷 한 마리가 암컷 여럿과 함께 사는 자체만 보면, 신혼부부에게 모범이 되는 사례는 아니다. 원앙의 이런 생활을 보고 사람들은 수컷이 암컷을 여럿 거느렸다고 말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배우자 선택권은 암컷에게 있다. 암컷이 수컷을 선택한다. 선택받은 수컷이 그 암컷 주위에 찰싹 달라붙어 다른 수컷이 얼씬거리지 못하게 막느라 졸졸 따라다녀 다정하게 보인다. 이렇게 다정한 모습을 본 옛사람들이 부부 금실의 상징으로 만들었던 것 같다.  원앙은 부부금실을 상징한다. 가정의 장식품으로 사용되는 원앙 목각(왼쪽).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원앙 암컷은 어떤 수컷을 좋아할까? 한마디로 깃털이 화려하고 선명한 수컷을 좋아한다. 암컷의 깃털 색깔은 볼품없다. 반면에 수컷은 화려하고 우아하다. 원앙은 애초에 암컷이나 수컷의 털 색깔이 비슷했을 것이다. 화려한 수컷은 암컷에게 선택받아 대를 이었으나, 화려하지 않은 수컷은 선택받지 못하고 총각으로 늙어 죽어 그 유전자는 사라졌을 것이다. 대가 거듭될수록 점점 더 화려한 수컷만 남아 지금처럼 암, 수의 깃털 색깔이 완전히 달라졌다.  동물 눈의 망막에 있는 원뿔 모양의 세포는 색깔과 세밀한 부분까지 감지하는 역할을 한다. 새의 원뿔세포는 사람보다 열 배나 많다니, 얼마나 민감할지 짐작이 된다. 새는 독특하게 자외선 파장을 감지하는 능력도 있다. 이런 특징으로 맹금류가 하늘 높이 날다 생쥐를 발견해 사냥하기도 하고, 먼 곳에서 눈으로 봐서 나무 열매가 익었는지 안 익었는지 알아챈다. 이처럼 새의 의사소통에 소리뿐만 아니라 시각적 신호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까치 수컷의 깃털 광택과 건강상태, 번식 성공도의 상관관계를 밝힌 재미있는 국내 연구가 있다. 이 박사학위 연구에서 까치 수컷의 깃털 광택이 건강상태나 번식 성공 정도를 평가하는 신호로 작용한다고 밝혔다. 즉, 수컷 깃털이 건강상태를 가늠하는 지표로 작용하며 깃털 광택이 좋은 개체가 일등 신랑감이다. 암컷이 수컷의 깃털만 봐도 신랑감으로 맞이할 만한 놈인지 아닌지 안다는 말이다.  유사한 사례로 예전에 할머니들은 마당에 노는 수탉의 볏만 보고도 건강한지 아닌지 알았다. 수탉 머리에 있는 톱니 모양의 붉은 살 조각인 볏이 선홍빛을 띠면 건강한 놈, 거무스름한 색이면 건강하지 못한 놈이다. 암탉은 사람보다 더 정확히 구분해냈을 것이다. 까치처럼 원앙 암컷도 수컷의 깃털 광택만 봐도 쓸 만한 놈인지 아닌지 구분해 낼 수 있다. 그래서 원앙 암컷이 화려한 수컷을 좋아한다.  성 선택과 일부다처제 원앙무리 전체로 보면 새끼가 알에서 막 깨어날 땐 암, 수의 비율이 1:1에 가깝다. 하지만 성장하는 과정에 수컷이 천적에게 잡아먹혀 다 큰 어미의 경우엔 암컷이 수컷보다 훨씬 많다. 화려한 수컷이 쉽게 눈에 띄니 변을 당할 가능성이 크다. 암, 수의 숫자가 맞지 않아 일부일처로 살래야 살 수 없다. 암컷이 신랑감으로 점찍어 놨던 총각에게 고백하기도 전에, 이놈이 이미 다른 암컷과 짝을 맺었어도 남편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어떤 암컷이든지 수컷 한 마리를 독차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인기 많은 수컷은 여러 마리의 암컷과 가족을 이루고, 볼품없는 수컷은 고작 두어 마리 암컷만 곁에 있다.  선택받은 수컷일지라도 암컷 챙기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암컷이 다른 수컷에게 반해 딴 맘 먹고 떠날까 봐 번식기 내내 전전긍긍한다. 암컷이 등 돌릴 가능성을 아예 없애려고 암컷 주위에 다가오는 수컷이 눈에 띄기만 하면 내쫓는다. 번식기 때 암컷 지키랴 수컷 쫓아내랴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쁘다. 옛날 사람들 눈에 이런 모습이 찰떡궁합처럼 사이좋게 보였을까? 아마도 다른 수컷이 암컷을 해칠까 봐 지켜주고 다정하게 지내는 것으로 보여 금실 좋은 대명사로 여겼을 듯싶다.  번식기가 끝나면 아무리 사이가 좋은 관계였을지라도 본체만체 남남으로 산다. 한술 더 떠 자기랑 짝을 이뤘던 암컷이 다른 수컷과 어울려 지내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 이미 자기 유전자를 공유한 후손이 태어났으니 생물학적 본능은 이뤘고, 번식기가 아니니 암컷이 알을 낳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아서 그렇다. 그러다 다시 번식기가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친한 사이로 되돌아온다.  태안반도에서 기러기떼가 날고 있다. 박미향 기자 mh@hani.co.kr모든 조류가 원앙처럼 다 그럴까? 아니다. 바닷가 주위에 터를 잡고 사는 조류들은 대부분 일부일처로 산다. 전통혼례식이 나무로 깎은 기러기를 들고 입장하면서 시작되는 이유가 있다. 기러기는 평생 부부관계를 유지하면서 장수하는 조류 중 하나다. 서로 다른 가풍에서 살던 남남이 신랑 신부로 만나 기러기처럼 평생 함께 행복하게 살기 바라는 의미가 담긴 것으로 본다. 조류들은 자식 기르는 환경이 열악하고 살기 어려워 일부일처로 사는 편이다. 하지만 인간은 특이하게 살기 어려운 시기에 이혼율이 높다. 주위를 둘러봐도 그렇고 통계 자료를 보면 경제가 휘청거렸던 1998년 구제금융 (IMF) 때 그랬다. 기러기라고 살면서 힘든 시기 없이 순탄하게 살 리 만무하고, 속 끓인 적 없었겠냐만은 극단적인 이혼만은 안 한다. 개중에 이혼한 놈들도 있겠으나 대체로 한 번 맺은 부부관계를 평생 이어가는 편이다. 살면서 어려운 시기가 닥치면 기러기의 삶을 들여다보면 좋겠다.  봄에 달라지는 깃털 봄이 되기 전부터 오색딱따구리 머리에 난 빨간색 깃털, 노랑턱멧새의 뺨에 난 노란색 깃털, 원앙과 공작 수컷의 깃털이 반질반질 윤기가 돌고 화려해지기 시작한다. 달라지는 이 깃털은 수컷이 암컷에게 자기를 알리는 광고다. 자기 유전자가 뛰어나니 자기와 결혼을 하면 똑똑한 자식을 낳을 수 있다는 꼬드김이다. 봄이 가까워지는 요즘 수컷 새들이 화려하게 변신 중이다. 이런 모습을 동물원에 가면 여러 종에서 확인할 수 있다. 멸종위기종인 원앙의 봄맞이도 보고 기러기의 삶을 엿보는 시간도 가질 겸 이번 주말엔 동물원에 가 보면 어떨까?  ///노정래 전 서울동물원 원장  
6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멸종위기종 "천국" = 특급 보호 "천국" 댓글:  조회:2864  추천:0  2018-04-05
60년 넘게 인적 끊긴 DMZ, 멸종위기종의 천국이 됐다 (ZOGLO) 2018년2월17일  면적은 한반도 면적의 1.6%에 불과 발견되는 생물종은 전체의 20% 차지 전쟁의 결과물로 탄생한 DMZ가 멸종위기종의 안식처로 주목받고 있다. 사진은 DMZ에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 멸종위기 1급 수달. [중앙포토] 60년 넘게 사람의 흔적이 끊긴 DMZ(비무장지대)가 한국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멸종위기 동·식물이 서식하는 최후의 안식처로 자리 잡고 있다. 전쟁의 결과물인 DMZ의 생태학적 가치가 점점 주목받고 있는 이유다.  환경부와 국립생태원이 1974년 이후 40여 년 동안 DMZ에서 진행된 생태조사 결과를 모아 최근 발간한 ‘DMZ 일원의 생물다양성 종합보고서’에 따르면, DMZ 일대에는 총 4873종의 야생 동·식물이 서식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조사 지역인 DMZ 일원의 면적은 1557㎢로 전체 국토 면적의 1.6%에 불과하지만, 이곳에 전체 한반도 생물종(2만 4325종)의 20%가량이 살고 있는 셈이다.  특히, 멸종위기 야생생물 I급 16종과 ll급 75종 등 총 91종의 멸종위기 동·식물이 DMZ 일대에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현재 한반도에 서식하는 멸종위기 야생생물은 총 267종인데, 그중 34%가 DMZ에 집중될 정도로 멸종위기종의 천국이 됐다는 뜻이다.  특히, 두루미와 사향노루 등은 DMZ 일대에서만 사는 것으로 확인됐다. 연구진은 “군사시설 보호와 안전상의 이유로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면서 야생 동식물에 안정적인 서식공간을 제공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DMZ에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 주요 멸종위기종을 소개한다.  두루미·재두루미 멸종위기종 1급 두루미. [사진 국립생태원] 멸종위기종 2급 재두루미. [사진 국립생태원] 두루미는 천연기념물 제202호이자 멸종위기종 l급인 희귀 겨울 철새로, 현재 전 세계에 2800~3300여 마리만이 생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 서식하는 조류 중에 가장 키가 큰 새이기도 하다. 주로 러시아나 중국 북부 지역에서 살면서 번식하고, 겨울에는 추위를 피해 남쪽으로 내려와 DMZ 일대에서 겨울을 보낸다. 특히, 철원 평야는 세계 최대의 두루미 월동지역으로 손꼽히고 있다.  같은 두루미과인 재두루미도 멸종위기종 ll급이자 천연기념물 제203호로 지정된 겨울 철새다. 두루미보다 몸집이 작고, 눈 주위가 붉은 것이 특징이다.  흰꼬리수리 멸종위기종 1급 흰꼬리수리. [뉴시스] 흰꼬리수리는 멸종위기 l급이면서 천연기념물 제243호로 지정된 겨울 철새다. 몸길이는 69~92㎝이며, 날개를 펴면 길이가 2m에 이른다. 꼬리가 흰색인 게 특징인데 주로 작은 동물이나 어류, 양서류 등을 먹는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9000~1만 1000쌍 정도만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렁이 멸종위기종 2급 구렁이. [사진 국립생태원] 멸종위기 ll급인 구렁이는 국내에 서식하는 뱀류 중에서 가장 큰 종이다. 몸통 전체에 가로 줄무늬가 있으며, 몸통 색에 따라 먹구렁이와 황구렁이로 구분하기도 한다. 주로 20개 미만의 알을 낳으며, 부화 기간은 한 달 반에서 두 달 정도 걸린다. 마을 인근이나 산림 지역, 물가에 살면서 소형 설치류, 조류, 새알 등을 먹고 생활한다. 최근 무분별한 밀렵과 서식지 파괴로 인해 개체 수가 급격히 줄고 있다.  물장군 멸종위기종 2급 물장군. [사진 국립생태원] 물장군은 애기뿔소똥구리, 왕은점표범나비와 함께 DMZ 일대에서 발견된 3종의 멸종위기 곤충 중의 하나다. 몸길이는 50~60㎜ 정도이며 황갈색 또는 갈색을 띤다. 과거에는 연못·논·웅덩이·농수로 등 습지의 어느 곳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곤충이었지만, 개체 수가 급격히 줄어들어 현재는 민통선 지역 등에만 주로 살고 있다. 도시화로 인한 서식처 파괴, 농약의 과다사용으로 인한 수질오염, 농지개량사업 등이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돌상어 멸종위기종 2급 돌상어. [사진 국립생태원] 멸종위기 ll급인 돌상어는 서해로 흐르는 한강·임진강·금강 등에 분포하는 한국의 고유종이다. 물이 깨끗하고 유속이 빠르며 수역의 바닥에 자갈이 깔린 곳에 서식하면서 주로 수서곤충을 먹고 산다. 자갈 바닥에 잘 숨고, 돌에서 돌로 자주 옮겨 다닌다. 하지만, 최근 하천 공사, 댐 건설 등 토목공사로 인해 여울 지역이 사라지면서 서식지가 많이 감소했다.  가는돌고기 멸종위기종 2급 가는돌고기. [사진 국립생태원] 가는돌고기는 주로 하천 상류의 물이 맑은 곳으로 자갈이 있는 여울부의 바닥에 숨어서 산다. 현재 멸종위기 야생생물 ll급으로 지정돼 있다. 역시 수질오염에 따른 생태계의 변화로 서식지가 계속 감소하는 추세다.  ///중앙일보    
5    [별의별] - "염소 열리는 나무" = "열매 따먹는 염소" 댓글:  조회:4969  추천:0  2018-04-05
염소가 열리는 나무인가...             열매 먹으러 나무에 오른 염소 홍인기 2018.04.05.  자동요약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4일(현지시간) 모로코 남서부 지역의 마을에서 염소들이 아르간 나무에 올라 열매를 따먹고 있다. AP 연합뉴스 마치 염소가 나무에 주렁주렁 열린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사실은 모로코 남서부 지역의 마을에 염소들이 아르간나무 열매를 따먹기 위해 나무 위에 올라간 모습을 사진에 담은 것이다. 목동들은 염소들이 나무를 이동할 때마다 따라다니며, 염소들이 열매를 먹은 후 단단한 씨앗을 뱉어내면 그 씨앗을 줍는다. 아르간나무 열매는 올리브 열매와 비슷하게 생겼으며 열매의 씨앗에는 요리할 때나 화장품 만들 때 사용되는 오일을 추출할 수 있다. 홍인기 기자 모로코 남서부 지역의 마을에서 염소들이 아르간나무에 올라 열매를 따먹고 있다. AP 연합뉴스
4    윤동주가 숭배했던 시인 백석 댓글:  조회:4903  추천:0  2018-04-05
  백석(白石) 작가 탄생 1912년 7월 1일 (음력 5월 17일) 사망 1996년 1월 출신지 일본제국령 조선 평안북도 정주군 최종학력 아오야마가쿠인대학 영어사범과 학사       1. 개요[편집] 2. 생애[편집] 1912년 7월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부친 백시박(白時璞)과 모친 이봉우(李鳳宇)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2.1. 오산학교 시절[편집] 1924년 그는 오산소학교를 졸업하고 오산(五山)고보[4][5]로 진학한다. 어릴 적 장난꾸러기 같던 시절과는 달리 백석은 독서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게 된다. 오산학교 재학생들의 문학에 대한 열정에 영감을 받아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이라는 잡지 에 소월의 습작 를 지면에 싣게된다. 흥미로운 것은 소월이 백석으로 하여금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도록 간접적인 영향이 되었지만, 백석이 선배의 방식을 그대로 담습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소월은 민요의 4/4조 운율을 시에 적극적으로 사용했지만 백석은 이 보다는 오히려 시의 서사적 구성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6] 이에 백석도 예외는 아니었고 백석은 학과 수업뿐만 아니라 문학 수업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동기의 회고에 따르면 백석은 학과 공부에만 치중하는 학생들을 속된 학생들로 보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백석은 학과 성적도 상위권에 속했다.[7]  독립운동가 조만식도 당시 오산고보에 재직 중이었는데[8] 백석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내가 아는 백석은 성적이 반에서 3등 정도였으며 문학에 비범한 재주가 있었다. 특히 암기력이 뛰어나고 영어를 잘했다. 회화도 썩 잘해 선생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백석은 용모도 준수했지만 나이가 어린 편이었다.(나이가 어렸지만 용모도 출중하고 재주가 비범했다) 백석은 부친을 닮아 성격이 차분했고 친구가 거의 없었다. (후략) 백석의 성적 정도면 평양의전에 진학해 의사가 될 수 있었지만, 백석은 교사가 되려고 했다. 하지만 집이 가난하여 한동안은 기회를 얻기 위해 집에서 지내야 했다. 그러던 중 방응모 응?! 의 지원을 받아 사범대학 대신 이갑섭, 문동표, 정근양 등과 함께 당시 일본에서 가장 학비가 비싸다는 아오야마가쿠인의 전문부 영어사범과에 진학한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백석과 의원이 말하는 아무개씨가 바로 방응모로, 백석 본인이 시에서 아버지같이 섬기는 분이라고 대답한다.">[9] 2.2. 아오야마 가쿠인 졸업 이후[편집] 조선일보 출판부에서 근무하였으며, 1935년 조선일보에서 시 '정주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1936년 시집 《사슴》을 간행하여 문단에 데뷔하였다. 당시 《사슴》의 가격이 2원이었는데, 다른 시집과 비교하였을 때 2배가량 더 비싼 가격이었다고. 그때 쌀 가마 가격이 13원, 고급 양복이 30-40원이었으니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경성문화인쇄사에서 100부 한정판으로 찍어내어, 나중에는 구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시인 신경림 씨의 경우 우연히 헌책방에서 《사슴》을 구하게 되었을 때 매일 품에 안고 다니면서 줄줄 욀 정도로(!) 몇 번이고 읽고 다녔고 [10] 윤동주의 경우 아무리 찾아봐도 시집을 구할 수 없어서 학교 도서관에서 노트에 시를 베껴적고 다녔다고. 고향이었던 평북지역 방언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2.3. 여생[편집] 8.15 광복 후에는 고향에 머물렀다. 북한에서는 주로 아동문학에 천착하였으나, 1958년 무렵 '부르조아적 잔재'로 비판받고 삼수군[11] 의 협동농장 축산반으로 쫒겨났으며, 1962년 이후로는 아예 북한 문단에서 사라졌다. 그 후 1996년[12] 타계하기까지의 반평생에 대해서는 남한에서는 알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다. 1996년이라면 하필 고난의 행군 때라 노령에 제대로 된 영양공급을 받지 못하여 사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13] 기사 북한에서 쓴 글을 보면 북한 공산당(정확한 명칭은 조선노동당)을 찬양하는 시를 쓴 것이 많다.에 수록되어 있다.">[14] 그런데 별로 충격일 것도 없는게, 북한 정권 아래에서 쓸 수 있는 글이 뭐가 있겠는가. 정권 단위로 압박하면 개인이 그걸 견뎌내는 건 거의 불가능하니 말이다. 다만 그의 사상까지 정권에 굴복했다고 함부로 말하는 건 우리 소견은 아니다. 참고로, 그런 체제 찬양시들을 읽어보면 이게 문장은 백석 시인이 맞긴 맞는데, 백석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퀼리티가 낮다. 서정성을 나타내려 고심한 흔적이 보이는 시에서도 결국은 당이 어떻고 하는 구절을 집어넣어버렸다. 역시 강요로 작품을 뽑아낼 수는 없는 듯. 링크 아동문학 평론에서는 '사상'만이 아니라 문학성 자체에 대해서도 중점을 두자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하였는데 정황상 바로 그 직후에 정권 산하 문인단에서 숙청[15]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3. 문학[편집] 《통영(統營)》 《고향》 《북방(北方)에서》 《적막강산》 등 대표작은 토속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들이다. 지방적·민속적인 것에 집중하여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는 데 성공한 시인으로, 서북방언을 시에 넣기도 하고 서사를 시에 넣은 이야기시은 서사시다.">[16]를 구사하기도 하였다. 또 그의 시에는 먹을 것들이 많이 등장하기로 유명한데, 백석의 시에 나오는 음식을 연구한 식품영양학과 논문이 있을 정도이다. 백석의 시 를 읽고 나서 국수가 땡겨서 동치미에 국수 말아먹었다는 사람도 있다(...). 그의 문학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음식' '고향'으로 설명할 수 있다. 백석의 시에서 그려지는 고향은 물질적으로 풍요롭진 않지만 안식과 평화로움의 정신적 가치가 있는 일종의 신화적 공간이며 공동체적 유대가 남아 있는 공간이다. 하지만 그 고향은 현실적 조건 하에서는 이미 훼손되어 남아 있지 않는 과거의 공간이다. 그의 시가 과거지향적인 것은 이러한 이유이다. 고향의 풍물, 세시 풍속, 생활 도구, 전통예절을 잡다하게 나열하면서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이는 것은 훼손된 고향의 회복을 원하는 간절한 의지이며, 이것은 나아가 민족 공동체의 회복을 소망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여우난 곬족이다. 4. 대표작[편집]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여우난 곬족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흰 바람벽이 있어 고독 여승 수라 고향 국수 모닥불 팔원 개구리네 한솥밥 : 한국전쟁 이후 아동문학에 천착하면서 쓴 동화시 중 하나. 초등학교 2학년 국어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5. 여담[편집] 당시 백석이 살던 동네는 집성촌이었는데 백인제 다름아닌 의사양반(...), 백낙준과 친척이었다.[17] 당시 말 한 필이 5원 이었는데 백석의 시집 사슴이 2원 정도였다고 한다. 1936년 1월 100부 한정 판매를 하였는데 시인 윤동주는 이 책을 구하지 못해 학교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이 시집을 베껴 썼고, 그 필사본을 항상 가지고 다녔다 한다.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와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 을 살펴보면 윤동주가 백석을 얼마나 좋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18]. 그리고 흰 당나귀는 백석과 윤동주 모두 좋아하는 이미지인데 프랑시스 잠이 좋아하는 이미지라 한다. 두 작품을 한 번 비교해보자.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 던지고  때글은 낡은 무명 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 하는 듯이 나를 울력 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 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 하듯이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季節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來日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靑春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追憶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憧憬동경과  별 하나에 詩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小學校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佩패, 鏡경, 玉옥 이런 異國少女>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詩人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北間島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별 헤는 밤 - 윤동주   통영을 아주 좋아했던 시인. 통영에 사랑하는 여인인 란이 살았기 때문이다. [19] (상략) 내가 들은 마산 객주집의 어린 딸은 난(蘭)이라는 이 같고 난이라는 이는 명정골[20]에 산다든데 명정골은 산을 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 같은 물이 솟는 명정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하략) 통영(統營) - 백석 독일어, 영어, 러시아어에 능통하였던 어학의 천재라고 한다. 월북 이후 번역국에서 일하면서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니콜라이 고골 ,레프 톨스토이, 안톤 체호프 등 다양한 러시아 문학을 번역하여 북한에 소개했다.   여성관계를 찾아보자면 대표작 중의 하나인 가 거론된다. 이 시에서 나타샤가 누구인가에 대해 이견이 많은 편이다. 일단 '나타샤'는 톨스토이의 작품[21]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중 하나이다. 문제는 그 나타샤로 누구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 싶었냐는 것. 또는 '나타샤'가 일반적인 러시아의 여성들을 일컬는 이름-우리나라의 '영희' '주희' 등과 같이-이므로 특정 여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백석의 연애 상대로 김진세(백석의 제자)의 누이, 란(蘭), 자야(子夜)라고 불렸던 기생 출신 김진향 씨가 있다. 본명이 김영한으로 진향은 기명(기생의 호칭). 자야 여사가 호기심에 함흥 시내 번화가로 나들이 갔다가 일본인이 경영하는 히라다 백화점 책방에서 문예춘추, 여원, 자야오가라는 책을 사가지고 와서 백석 시인에게 보였는데 그때 지어준 이름으로 자야는 백석 시인과 김진향 여사 사이에만 통하는 애칭이 되었다. 여담으로 자야는 광복 후에 대원각이라는 큰 요정을 운영했는데, 말년에 법정 스님에게 요정 전체를 시주해서 지금은 길상사라는 절로 바뀌어 있다. 생전에 '1000억 원이란 돈도 그 사람의 시 한줄만 못하다', (언제 백석에 대한 생각이 많이 나느냐는 질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어디 있나.'라고 할 정도로 백석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시인 안도현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그가 좋아하는 마음을 담아 쓴 책이 바로 백석 평전이다.   배우 신성록이 백석을 닮았다. 해당 사진은 별에서 온 그대의 이재경. 더 많은 사진 트와이스 다현도 백석을 닮은 것 같기도 박효신도 좀 닮은듯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으면 다음 사이트들을 참조할 것.사이트1사이트2 사진자료는 여기에서 참조할 것.   2011년 근대서지학회에서 발간하는 근대서지 2호에 백석의 미발표 번역시 167편이 발표되었다. 백석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분은 찾아보자.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와 네이버 인물 소개에 나온 그의 사진을 보면 정말 잘 생겼다. 저런 머리를 하고도 잘생기다니 역시 헤완얼 키도 큰 편이라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게다가 이 분은 근 100년전 사람인데 지금 기준에서도 잘 생긴 편에 속한다! 키도 185cm으로 현재 기준으로도 상당한 장신. 황순원, 윤동주와 함께 현대문학 3대 얼짱이라 카더라           [1] 뒤에 보면 영어가 필기체로 작성되어 있는데, 1990년대까지만 해도 영어 교사들은 필기체로 수업을 했다고 한다. 심지어 중학교에서 ABC를 처음 배우던 시절에도 필기체 연습부터 했다고 한다. 그 이유를 잘 아는 사람은 추가바람. 지금은 중학교 영어시간에 잠깐 배우는 것 말고는 필기체 자체가 교실에서는 잘 사용되지 않는다.[2] 본명이 백기행(白夔行)으로 알려져 있지만, 자야 여사와 함께 지내던 청진동으로 시골에서 부쳐 오던 편지의 겉봉에 백기연(白基衍)이라 씌여 있었다(내사랑 백석 P. 113~114).[3] 아래 생애에 나오지만 엄밀히 말하면 월북이 아니다.[4] 이전 편집 버젼의 오산중학이라는 명칭은 오산고보가 이름을 새롭게 바꾸고 난 뒤의 명칭이다. 백석 재학 당시 교명은 ‘오산고보’였다.[5] 참고로 화가 이중섭은 백석의 후배이다. 물론 1929년에 입학했기 때문에 서로 알았을 리 없었겠지만.[6] 김소월 시인이 백석의 선배였다. 백석보다 6년 앞서 오산고보에서 재학했던 김소월을 김억이 교사로 지도했었는데, 1939년 소월에 대한 기사를 쓰기 위해 백석이 김억을 직접 찾아가 그의 습작노트를 받아왔다고. 나중에 백석은 이라는 잡지 에 소월의 습작 를 지면에 싣게된다. 흥미로운 것은 소월이 백석으로 하여금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도록 간접적인 영향이 되었지만, 백석이 선배의 방식을 그대로 담습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소월은 민요의 4/4조 운율을 시에 적극적으로 사용했지만 백석은 이 보다는 오히려 시의 서사적 구성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7] 독립운동가가 설립한 학교 답게 일본어교육에 신경쓰지 않아 일본어 성적은 낮았다고 한다. 이로써 체조에는 소질이 없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를 제외하면 15과목 모두 우(75점~100점)을 받았다고 한다. 다만, 평균성적이 아닌 ‘우, 양, 가’로 등수를 매기다 보니 평균점수가 높았음에도 전교 등수가 낮아 선생님들이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오산학교의 인원이 50명 내외였는데 이 중 10등 안에 들면 중상위권이었기 때문.[8] 1915년 백석의 입학 당시 교사로 재직하다가 교장을 맡게 되었다[9] 방응모는 평북 정주 사람으로 백석과 동향이다. 백석의 부친은 한때 조선일보 사진부에서 일했다고 하는데 동향 사람인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와 친구사이였다고 한다. 방응모와 백석의 밀접한 관계는 시 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백석과 의원이 말하는 아무개씨가 바로 방응모로, 백석 본인이 시에서 아버지같이 섬기는 분이라고 대답한다.[10] 안타깝게도 나중에 박정희 정권 치하 집이 압수수색 당했을 때 책 40권을 압수당했는데 그 중에 《사슴》이 있었다고 한다..[11] 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삼수갑산은 김소월의 시에서 등장하는 것처럼 무척 외진 곳이다.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도 알 수 있다. 중죄인의 유배지로도 유명했기 때문. 실제로도 산으로 둘러싸여 무척 험한 곳으로 유명하다.[12] 1963년 사망설이 있었으나 최근 연구를 통하여 1996년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13] 참고로 그와 청산학원(일본 유학) 당시 동기였던 아시히 시로는 아직도 생존해 있다. 지못미.[14] 남한에서 구할 수 있었던 글들이 에 수록되어 있다.[15] 꼭 죽이는 것만은 아니고 1970년대 이후 사상문제로 협동농장으로 보내지는 것도 포함한다. 장성택 읽어보면 알기 쉬울지도. 물론 그는 말년에 정말 죽음으로 숙청당했지만.[16] 당대에 이야기시를 구사한 시인으로는 임화 , 이용악 , 백석이 있었다. 단편서사시라고 하기도 한다. 김동환 의 은 서사시다.[17] 항렬로는 백석에게 백인제가 조카 뻘, 백낙준이 손자 뻘이다.[18] 어떤 의미에서는 표절 아닌가 싶을 지경인데, 윤동주의 시들 중 상당수는 습작시이고 윤동주는 자신의 시를 시집으로 발표한 적이 없다.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윤동주가 죽은 다음에 전에 써놓았던 시들을 긁어모아서 출판한 것이라서 습작들도 모조리 섞여 있다.[19] 그러나 란은 1937년 4월 7일에 백석과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신현중과 결혼하게 된다.[20] 현 통영시 명정동[21] 백야-가 아니라 전쟁과 평화라고 함 ======================== 덤으로 더...   백석의 '사슴'   백석의 '사슴'   1936년 시인 백석 자신이 펴낸 시집이다. 총 33편의 시를 4부로 나누어 수록하였다. 1부 ‘얼럭소 새끼의 영각’에는 《고야(古夜)》 《가즈랑 집》 《여우난 곬 족(族)》 《모닥불》 등 6편이 있고, 2부 ‘돌덜구의 물’에는 《성외(城外)》 《초동일(初冬日)》 《주막》 등 9편이 있다. 3부 ‘노루’에는 《쓸쓸한 길》 《머루밤》 《노루》 등 9편이 있고, 4부 ‘국수당 너머’에는 《절간의 소 이야기》 《오금덩이라는 곳》 《통영(統營)》 등 9편이 각각 수록되어 있다. 이미 말의 타락현상이 극심하게 일어나 인간의식의 붕괴 및 파탄으로 점차 확대되고 있을 때 민족의 주체적 자아를 살려내고 보존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는 시집이다. 시인의 고향인 평안북도 방언을 그대로 사용하여 향토적·민속적 세계를 구축하고 있으며, 고향의 지명이나 이웃의 이름 등 구체적인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고향 마을의 역사와 그들의 순박하면서도 어두운 삶의 현장을 보여준다. 일제강점기에 모국어를 지키려는 투철한 그의 의지를 볼 수 있다. 일방적인 서구시의 도입과 추종으로 특징지어지던 시기에 지나친 서구 지향을 거부하면서 민족에 대한 주체적인 각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1920년대 민요시와 비견되는 시사적(詩史的) 의의를 지니고 있다.    최고의 시집 “산턱 원두막은 비었나 불빛이 외롭다/ 헌겊심지에 아즈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반딧불이 난다 파란 魂들 같다…/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 한국현대시 100년사에서 우리 시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시집 백석(白石.1912~1995)의 ‘사슴’(1936)에 수록된 시 ‘정주성’의 일부다. 일본 유학 후 그는 고향 정주(定州)와 가까운 함흥 영생고보 교사로 재직했다. 그런 까닭에 그의 첫시집 ‘사슴’도 향토적 서정이 강하다. 계간 ‘시인세계’가 현재 활동중인 원로.중진에서 젊은 시인 156명에게 설문조사를 한 결과, 현대시 100년사 최고의 시집으로 ‘사슴’을 꼽았다. 이어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 정지용의 ‘정지용 시집’, 이성복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서정주의 ‘화사집’ 순으로 추천됐다. 이른바 ‘현대시 100년사 5권의 시집’이다. ▲다시 백석으로. 부모의 강권으로 세 번이나 결혼한 그에게는 여자가 있었다. 22세의 기생 자야(子夜). 생활고로 조선의 권번으로 들어가 예인의 길을 걸었던 신여성. 백석과의 만남으로 이룰 수 없는 사랑은 시작되고, 세월이 한참 흐른 다음 1995년에 와서야 전기형식의 ‘내사랑 백석’을 출간해 사랑 얘기를 전했다. 본명은 김영한. 지난 15일 부처님 오신날, 김수환 추기경이 음악회에 참석해 화제가 됐던 서울 성북동 길상사를 법정스님에게 아무 조건없이 시주했던 사람이 그녀다. 길상사는 최고급 요정의 하나인 대원각 자리에 김여사가 7천여 평의 대지와 건물 40여 동의 부동산을 내놓아 세워진 사찰. 길상사측은 이날 자선음악회 수익금을 천주교가 운영하는 입양시설에 기부해 종교의 벽을 넘어선 사랑과 화합을 연출했다. 백석은 이날 최고의 시집으로 선정되는 영예와 함께 길상사에서 자야와의 비련의 사랑을 확인했을 것이다.       '사슴'은 백석 자신에 의한 유일한 시집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큽니다.  '사슴' 속의 시 33편은 1936년 1월 이후 백석의 창작 활동에 지대한 영향과 관련성을 가집니다.  이는 백석의 마지막 시로 평가받는 '남신의주 유동 박씨봉방'과 일종의 수미쌍관 구조를가지지만, 그 자체로도 순환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순환 구조는 하나의 주제로 여러 가지 리듬과 멜로디를 들려주는 변주곡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 주제를 하나 정하라면 '여우난곬족(族)' 내지 '바다'가 될 것입니다.      
3    "모든것 구름처럼 사라진다"... 댓글:  조회:1864  추천:0  2018-04-05
  + 아내에게  이 세상 모래알처럼 많은 사람들 중에  만난 우리 둘  당신과 내가 사랑하여  부부의 인연을 맺은 지도 오래  처음에는 우리의 만남  아름다운 우연이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우리의 만남  하늘이 맺어 준 필연이라고 느낍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  구름처럼 덧없이 사라진다고 해도  오직 당신의 존재 하나  내 곁을 떠나지 않기를!  당신을 사랑하는 이 마음  영원히 변함없기를!  + 팔베개  우리가 만난 지  꿈결처럼 세월은 흘러  까맣던 우리 머리에  흰 서리 눈꽃으로 내리는데  이제 나는 네 영혼의  팔베개가 되고 싶다  너의 영혼이 고단할 때면  언제든 편안하게 다가와  베고 누워도 좋은  팔베개  네가 슬프거나  네가 외로울 때에도  말없이 찾아와  폭 안겨도 마냥 좋은   팔베개  + 안개꽃 당신  햇살 밝은 베란다 창가에 앉아  당신을 생각합니다  한겨울 추위에 얼어붙은  온 누리의 구석구석  은은한 생명의 빛을 선사하는  저 눈부신 불덩이  언제였던가  가끔은 외로움으로 그늘졌던  나의 고독한 청춘에  당신의 존재가 햇살처럼 와 닿은 그때  안개꽃 같이 말없이 화사한  당신의 모습을 살며시 훔치며  나의 심장은 한순간 멎는 듯했지  그렇게 우리는 만나  마음과 마음을 잇대어  행복한 사랑의 불꽃을 피웠네   장밋빛 불타는 사랑의 계절은 지나  어느새 우리의 사랑살이에도  세월의 그림자가 꽤 길게 드리웠지만   오!  첫사랑 그 시절의  우리의 티없이 순수했던 사랑만은  영원히 변함없으리  + 손깍지  세상 살아가는 일이  그리 만만하지는 않아  이따금 근심을 품고  잠 못 이루는 날에도  슬그머니 당신의 손을  내 가슴으로 끌어당겨  당신의 손가락 마디 사이로  나의 손가락 마디를 끼어  동그랗게  손깍지 하나 만들어지면  참 신기하기도 하지!  내 맘속 세상 근심은  눈 녹듯 사라지고  파도처럼 밀려오는  아늑한 평화  + 참 고마운 당신  당신과 함께 살아온  스물 몇 해  세월의 그림자  길게 드리운  우리의 지난 결혼생활  가만히 뒤돌아보니  당신은 말없이  늘 나의 잔잔한 배경이었네  인생의 중천(中天)을 훌쩍 넘고서도  아직도 사랑을 잘 모르는  나와 함께 살아오느라  어쩌면 남몰래 눈물지었을 당신  그런 당신이 곁에 있어  지금까지 나는  밤하늘의 총총 별들처럼  수많은 행복을 누렸지  그 행복으로 이제는  내가 당신의 배경이 되어 주리  참 고마운 당신!  + 사랑의 꿈  죽음 너머까지의 영원한  사랑을 꿈꾸지는 않으리  우리 둘의 심장이  뛰는 그 날까지만  너는 내 가슴속 한 묶음  소박한 들꽃이면 좋으리  나는 네 가슴속 한줄기  밝은 햇살이면 좋으리  서로의 마음이  가끔은 모나고 어긋나서  짜증을 부리고 한바탕  사랑싸움을 해도 좋으리  그저 햇살 그리운 들꽃  들꽃 그리운 햇살이면 좋으리  + 소중한 당신  짧은 목숨살이의  어느 모퉁이에서  어쩌면 우리 둘은 만나  이렇게 하나가 되었을까  쉼 없이 흐르는  세월의 파도 속에  너와 나의 영영  이별의 시각도 다가오고 있겠지  언젠가는 나의 곁에서  아스라이 멀어질  파르르 한 장 꽃잎 같은  여린 목숨  그래서 더없이  소중한 당신이여  + 꽃잎  문득 아내가  참 예뻐 보일 때가 있다  친구랑 술잔을 기울이다  늦은 귀가의 밤  남편이 돌아온 줄도 모르고  이불도 내동댕이치고  이따금 코도 골며  세상 모르고 자는  아내의 모습을 바라보며  미안한 마음이 든다  아내가 이렇게  고단한 삶을 사는 것은  나 때문인 것을  한때는 꽃잎처럼 곱던  얼굴에 잔주름이 피었어도   예나 지금이나  내 눈에 아내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꽃이다  + 반달  내 생이  그믐달인 듯 야위어  쓸쓸함이 여울지는 날에도  나의 반쪽,   나의 영원한 사랑  반달 같은 당신 있어  허투루 눈물짓지 않으리  + 파랑새  행복의 파랑새는  저 멀리 살지 않고  보일 듯 말 듯  나의 곁을 빙빙 맴돌고 있음을  한순간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이 세상에서 나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제일 긴 사람  이 세상에서 나에게  밥상을 가장 많이 차려준 사람  이 세상에서 나의 안팎을  누구보다 세밀히 알고 있는 사람  내 삶의 환한 기쁨과 보람  몰래 감추고픈 슬픔과 고독의  모양과 숨결까지도 감지하는 사람  그리고 나 때문에  종종 가슴 멍드는 사람  하루의 고단한 날개를 접고  지금 내 품안에 단잠 둥지를 틀었네  작은 파랑새여  아내여  + 아내의 발  어젯밤 과음으로  목이 말라  새벽녘 잠 깨어 불을 켜니  연분홍 형광 불빛 아래  홑이불 사이로  삐죽 나온 아내의 발  내 큼지막한 손으로  한 뺨 조금 더 될까  상현달 같은  새끼발가락 발톱  반달 모습의  엄지발가락 발톱  앙증맞은 그 발로  우리 가족의 행복을 위해  밤낮으로 열심히 뛰어다니느라  아내는 얼마나 고단했을까  군데군데 제법 굳은살이 박힌  235밀리 작은 발  그 총총 걸음마다  행운과 복이 깃들이기를....  + 영원  검은머리 파뿌리 되도록  우리의 사랑  영원히 변치 말자  약속했을 때  그것은 그저  아득한 맹세라고 생각했는데  당신과 스물 몇 해  살과 살 맞대고 살면서  이제는 알 것 같다.  사람은 저마다  고독한 섬이라서  나는 아무래도 너일 수 없고  너는 나일 수 없어도  고단한 인생살이에  서로에게로 비스듬히 기울어  섬과 섬 사이의 틈이  차츰차츰 좁아지다 보면  그 아득한 사랑의 맹세는  지금 이 순간의 일이라는 것  + 사랑의 추억  목련꽃 그늘 아래  당신의 순한 눈빛은  참으로 고왔어라  장미꽃 덤불 속  당신의 해맑은 미소는  눈부시게 아름다웠어라  호젓한 가을의 벤치  살포시 당신과의 포옹은  몹시도 행복했어라  추운 겨울 밤  당신의 꽁꽁 언 손을 녹이며  내 마음은 따스했어라  이제 당신의 눈가에  세월의 이랑처럼  잔주름이 피어났어도  나 그런 당신의 모습이  더욱 예쁘게만 보이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2    "벗들의 우정은 들꽃이다"... 댓글:  조회:1856  추천:0  2018-04-05
      + 우정  연인들의 사랑이  장미꽃이라면  벗들의 우정은  들꽃 같은 것  장미꽃은 눈부시지만  어느새 검게 퇴색하여도  들꽃은 볼품없어도  그 향기 은은하다  사랑의 맹세는  아스라이 물거품 되어도  우정의 언약은  길이길이 변함없는 것  사랑이 떠나  슬픔이 밀물 지는 때에도  우정은 남아  말없이 생명을 보듬는다  + 벗의 노래  홀로는 이슬 하나의  무게도 견디지 못할 것 같은  작고 여린 꽃잎들이  층층이 포개어지고  동그랗게 모여  이슬도, 바람도 너끈히 이긴다  하나의 우산 속에  다정히 밀착된  두 사람이  주룩주룩 소낙비를 뚫고  명랑하게 걸으며  사랑의 풍경을 짓는다  가파르게 깊은 계곡과  굽이굽이 능선이 만나서  산의 너른 품 이루어  벌레들과 새들과 짐승들  앉은뱅이 풀들과 우람한 나무들  그 모두의 안식처가 된다  나 홀로는 많이 외로웠을 생(生)  함께여서 행복한   참 고마운 그대여,  나의 소중한 길벗이여  + 벗에게  누구에게나  외롭고 쓸쓸한  삶의 뒤안길이 있다  어느새  반 백년의 세월이 스친  나의 인생살이에도  이제 와 뒤돌아보니  외로움의 그늘 한줄기  길게 드리워 있었네  생각처럼 쉽지 않아  고단함이 쌓이는 삶 속에  가끔은 남몰래  안으로 눈물 삭였지  하지만 벗 하나 있어  기둥처럼 든든한  그런 벗 하나 맘속에 있어  나 지금껏 살아왔네  나 기쁘게 살아가리  + 집  한세상 살면서  나도 남들처럼  어엿하게 집 한 칸  가져 보았으면 좋겠네  그 집 대문에  큼지막한 글자로  내 이름 석 자도  벼슬처럼 새겼으면 좋겠네  내가 살아서  여나문 명의 벗들  나 지상을 떠난 다음에도  문득 추억에 이끌려  두엇 친구  불시에 들러도 좋은  그저 허름한  사랑의 집 하나  마음에 지었으면  참 좋겠네  + 벗에게  밤을 지새워  술잔을 주고받으며  우리 첫 만남의  순간을 거슬러 올라갔어도  인연의 실타래는  영영 수수께끼로 남았네  삼십 오 년은 되었을까  시간의 틈을 훌훌 넘어  흐르는 세월도 잊고  나이도 까맣게 잊고  이렇게 함께  봄 산의 꽃길을 오르며  연둣빛 새싹으로  되살아오는     저 옛날  너와 나의 마음속에 살았을  동심(童心)  + 벗에게  연세대학교 정문을 나와  굴다리 몇 걸음 지나  첫째 골목 왼편 모퉁이  정다운 부뚜막이 있는  작은 선술집에서  통성명을 하고  걸쭉한 막걸리에 흠뻑 취하며  우리가 벗의 인연을 맺은 지  만 삼십 삼 년  빛나던 청춘의 날은 가고  어느새 우리의 인생살이  중턱을 훌쩍 넘어  내리막을 달리고 있네  얼굴도 성격도 꿈도 달랐지만  우린 벗이라는 생각만으로도  서로에게 든든한 생의 기둥이었지  그 동안 다들 사는 게 바빠  긴 세월 우리의 만남은  가뭄에 콩 나듯 했지만  서로의 맘속 깊은 곳  옹달샘에서  우정은 가뭄 들지 않았다  참 고마운 벗이여  우리의 아름다운 우정이여  + 벗의 이름에 부치는 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따끈한 오뎅 국물 사이에 놓고  벗과 다정히 마주앉아  소주잔이라도 기울이는 날엔  고까짓 한겨울 추위쯤이야  거뜬히 이기고도 남지  바람처럼 구름처럼 세월은 흘러  그 친구도 쉰 살을 훌쩍 넘었지만  동화 속 어린 왕자를 닮아  호수처럼 맑은 눈빛 영롱하네   정(情)이야 안으로 감추었어도  세월 가면 모두들 알게 되지  그 친구가 얼마나  마음속 깊이 따뜻한 사람인 줄  호탕함이  보이지 않는 마음의 크기를 이른다면  몸집은 좀 작아도  마음 씀씀이는 하늘같은  그 친구는  진짜 사내대장부다     + 벗에게  우리가 벗의 인연을 맺은 지  벌써 삼십 년이 훌쩍 넘었다  그 오랜 세월 동안에도  너는 참 한결같았지  들꽃처럼 순한 눈빛  산같이 흔들림 없는 삶  그런 너의 모습  이따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세상 살아갈  새 힘을 얻곤 했지  이제 저만치  우리 목숨의 끝도 보이는데  남은 세월에는  우리의 참된 우정   더욱 알뜰히 가꾸어 가자  한세월 같이 가는  고마운 벗이여     
1    "세상의 열매들은 모두 둥글둥글 하다"... 댓글:  조회:2029  추천:0  2018-04-05
  + 열매  세상의 열매들은 왜 모두  둥글어야 하는가.  가시나무도 향기로운 그의 탱자만은 둥글다.  땅으로 땅으로 파고드는 뿌리는  날카롭지만  하늘로 하늘로 뻗어가는 가지는  뾰족하지만  스스로 익어 떨어질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  덥썩  한 입에 물어 깨무는  탐스런 한 알의 능금  먹는 자의 이빨은 예리하지만  먹히는 능금은 부드럽다.  그대는 아는가.  모든 생성하는 존재는 둥글다는 것을  스스로 먹힐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오세영·시인, 1942-)  + 마음씨  모나지 않은  꽃씨 같아야 한데요.  너와 나 사이  따스함 묻어나면  연한 새싹 돋아나는  마음씨.  흙이  봉숭아 꽃씨 속에서  봄을 찾아내듯  마음씨 속에서  찾아내는 동그라미.  가슴 깊이 묻어 두면  더 좋데요.  (오순택·아동문학가, 전남 고흥 출생)  + 대추 한 알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장석주·시인, 1954-)  + 동그라미  웅덩이로 뛰어드는 빗방울은  동그라미를 그리다가 동그라미가 된다  동그라미가 되어 동그라미 안에 갇히고  동그라미가 되어 동그라미 안을 가둔다  안데 갇히고 안을 가두는 발 빠른 동그라미가 된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속 빈 동그라미가 되고 속 없는 동그라미가 된다  웅덩이로 뛰어드는 빗방울은  그릴 수 있는 가장 큰 반경의 동그라미가 되고  그러나 가장 크지 않는 동그라미가 된다  시작선도 끝선도 없이 그려지는 동그라미,  동그라미 안에 동그라미가 잽싸게 들어가면  동그라미 밖의 동그라미는 나울나울 동그라미가 되고  동그라미 안의 동그라미도 나울, 동그라미가 된다  웅덩이로 뛰어드는 빗방울은  웅덩이의 엉덩이에 둥글납작 엎드려 퍼지는 동그라미,  고인 빗물이 되어 사라진 수많은 동그라미 위에  동그라미 동그라미 동그라미를 키운다  웅덩이로 뛰어드는 빗방울은  있는 힘껏 빨리, 있는 힘껏 멀리, 있는 힘껏 힘차게  동그라미를 그려 제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 웅덩이가 된다  (박성우·시인, 1971-)  + 동그라미  어머니는 말을 둥글게 하는 버릇이 있다  오느냐 가느냐라는 말이 어머니의 입을 거치면 옹가 강가가 되고 자느냐 사느냐라는 말은 장가 상가가 된다 나무의 잎도 그저 푸른 것만은 아니어서 밤낭구 잎은 푸르딩딩해지고 밭에서 일하는 사람을 보면 일항가 댕가 하기에 장가 가는가라는 말은 장가 강가가 되고 애기 낳는가라는 말은 아 낭가가 된다  강가 낭가 당가 랑가 망가가 수시로 사용되는 어머니의 말에는  한사코 ㅇ이 다른 것들을 떠받들고 있다  남한테 해코지 한 번 안 하고 살았다는 어머니  일생을 흙 속에서 산,  무장 허리가 굽어져 한쪽만 뚫린 동그라미 꼴이 된 몸으로  어머니는 아직도 당신이 가진 것을 퍼주신다  머리가 땅에 닿아 둥글어질 때까지  C자의 열린 구멍에서는 살리는 것들이 쏟아질 것이다  우리들의 받침인 어머니  어머니는 한사코  오손도순 살어라이 당부를 한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둥글게 하는 버릇이 있다  (이대흠·시인, 1968-)  +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  모난 밥상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두레판이 그립다.  고향 하늘에 떠오르는 한가위 보름달처럼  달이 뜨면 피어나는 달맞이꽃처럼  어머니의 두레판은 어머니가 피우시는 사랑의 꽃밭.  내 꽃밭에 앉는 사람 누군들 귀하지 않겠느냐,  식구들 모이는 날이면 어머니가 펼치시던 두레판.  둥글게 둥글게 제비새끼처럼 앉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밥숟가락 높이 들고  골고루 나눠주시는 고기반찬 착하게 받아먹고 싶다.  세상의 밥상은 이전투구의 아수라장  한 끼 밥을 차지하기 위해  혹은 그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이미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짐승으로 변해버렸다.  밥상에서 밀리면 벼랑으로 밀리는 정글의 법칙 속에서  나는 오랫동안 하이에나처럼 떠돌았다.  짐승처럼 섞은 고기를 먹기도 하고, 내가 살기 위해  남의 밥상을 엎어버렸을 때도 있었다.  이제는 돌아가 어머니의 둥근 두레판에 앉고 싶다.  어머니에게 두레는 모두를 귀히 여기는 사랑  귀히 여기는 것이 진정한 나눔이라 가르치는  어머니의 두레판에 지지배배 즐거운 제비새끼로 앉아  어머니의 사랑 두레먹고 싶다.  (정일근·시인, 1958-)  + 동글동글  세상의 모든 씨앗들은  동글동글하다  그 작은 동그라미가 움터  파란 잎새들이 돋고  세상의 어느 모퉁이를 밝히는  방실방실 꽃들이 피어난다.  세월의 강물에 깎이고 깎인  조약돌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가 손 같은 동그란 조약돌 하나  가만히 만지작거리면  이 세상에 부러울 것 없고  평화의 파도가 밀려온다.   흐르는 세월의 강물 따라  이 마음도 날로 동그랗기를....  (정연복, 1957-)  + 동그랗게  꽃잎에 구르는  이슬처럼  동그랗게 살고 싶다  세월은 가고  사랑도 가고  사랑의 추억 하나 달랑 남는  가난한 생명  어느새  나의 목숨도 많이 야위어  반달을 지나  하현달로 접어들었지만  마음만큼은 영영  동그란 보름달이고 싶다  세상살이야 모질고 각박해도  마음마저 그래서는 안 되는 것  동그랗게 동그랗게  서로 안아주며 살아야 하는 것  나 죽어  사람들의 기억 속에  동그라미 같이  순하고 아름다웠던 사람으로  남고 싶다  (정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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