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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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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지명유래] - 로과(盧菓), 죽림(竹林) 댓글:  조회:3182  추천:0  2018-04-17
... 로과부락 동켠에 자리잡은 조창렬로인의 집은 광복전 로과일대에서 제일 잘사는 지주집이였다고 한다. 팔간 초가에 뜰이 넓고 컸다. 광복 착전에 지었다고 가정해도 벌써 50년도 더 되는 집이였지만 초가로는 금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요즘 세월에 벽돌집들이 많이 앉아서 보기에 궁색스러웠지만 생각을 바꾸어 민속으로 곬을 타면 한결 고풍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인간 팔십이면 쌀벌레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조창렬로인은 년세에 비해 여간 정정하신게 아니였다. 한창 나이엔 쌀마대를 씽씽 메고 다녔을것처럼 느껴지는 장대한 체구다. 허리도 굽지 않았고 살도 별로 빠지지 않아서 60을 갓 넘었다는 아들과 비하면 부자간이라기 보다 형제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함경북도 경성군 주을면 봉파동 태생이우다. 나서 일곱달만에 업혀서 들어왔으니 꼭 85년이 되우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이곳엔 늪천지였다구요. 그래서 이곳 이름이 원래는 늪골이라우.》 1890년부터 1895년사이 청나라 정부는 봉금령을 해제한 뒤를 이어 두만강류역의 지명과 호적을 등록하였다.  《늪골이 어떻게 되여 로과로 변했는지 아십니까?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지우. 옛날 이곳에 산동에서 이사를 온 한 한족선비가 있었는데 고향에 편지를 쓰면서 마을 이름을 비슷한 발음을 골라 루궈(芦果)라고 적었다지 뭡니까. 그후 관리들이 내려와 지명을 등록하면서 그것을 따랐지우. 그 다음부터 늪골이 로과로 되였다우.》 근로한 이주민들은 화전을 일구며 부지런히 일했고 땅 또한 비옥해서 씨만 뿌렸다 하면 대풍이였다. 그때 당시 밭에 심은 조의 이삭은 개꼬리만했고 또한 조이대가 참대처럼 마디지고 굵었다고 해서  죽림(竹林)촌의 이름이 생겨난것이다... ... (서울=연합뉴스) 23일 경남 함양군 상림연꽃단지에서 원앙(천연기념물 제327호) 한 쌍이 봄비를 맞으며 헤엄치고 있다. 2018.4.23 [경남 함양군 제공=연합뉴스]
5    [고향소식] - "죽림이여, 너는 나의 마음속에" 댓글:  조회:5169  추천:0  2018-04-17
[연변일보] |  2017.07.20일    제4회 화룡시 농민문화절 및 죽림촌 예술절 가동 길림성장애인재활중심(길림성춘광병원)의 의사들이 촌민들에게 무료진찰을 해주고 있다. “우리도 이제는 노래하며 즐겁게 살게 되였습니다…” 두만강변의 편벽한 변경마을이자 빈곤촌인 화룡시 숭선진 죽림촌 촌민들이 활기를 띠며 한 말이다. 빈곤해탈 난관공략과 더불어 농민들의 정신문화 수요를 만족시키고 문화소양을 높이며 당과 정부의 배려를 직접 빈곤촌 농민들의 마음속에 전달해주기 위한 제4회 화룡시 농민문화절 및 죽림촌 예술절이 18일(2017년 7월) 성황리에 개최됐다. 하늘도 촌민들의 흥겨운 마음을 대변해주듯이 맑고 푸르게 어우러진 가운데 고운 한복을 떨쳐입은 촌민들이 무대에 올라 자체로 준비한 노래와 춤을 선보이면서 장끼를 한껏 자랑했다. 화룡시 전문극단의 다채로운 종목과 경민(警民)공동건설단위인 연변지대 기동대대 3중대 전사들의 멋진 격투표현은 촌민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촌주둔 사업대의 대원들과 숭선진 기관간부들이 라는 제목의 시를 읊었다. 이 시는 성장애인련합회 선전문화부 부장이자 죽림촌 제1서기인 리덕부가 창작한 것이다. 촌민들은 풍부하고 다채로운 문화향연을 감상하면서 변경지역 군중들에 대한 당과 정부의 따사로움을 절실히 느꼈다. 제4회 길림성 농민문화절의 총체적포치에 따라 화룡시당위 선전부, 시 문화라지오TV방송신문출판국, 시문련, 숭선진 당위와 정부가 주최하고 성과 화룡시 장애인련합회, 죽림촌주둔 사업대, 죽림촌당지부에서 주관한 이번 행사에서는 빈곤해탈 도급단위인 성장애인련합회의 주선으로 빈곤부축 활동들도 활발히 진행됐다.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 길림성장애인재활중심(길림성춘광병원),롱아언어청력재활중심에서는 촌민들에게 무료로 신체검사를 해주고 보조기구와 약품을 증정했다. 이들은 전날에도 죽림촌 사정곡툰과 연변지대 기동대대 3중대를 찾아 무료진찰,약품전달 활동을 가졌다. 오랜만에 귀검사를 했다는 정영숙(72세) 로인은 “귀가 잘 안 들려 여기저기 다니며 치료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해 속을 썩였는데 성급 병원에서 집앞까지 찾아와 까근히 검사해주고 알맞은 보청기까지 무료로 주니 고맙다.”고 전했다. 장춘의과병원에서도 정밀화 재활 빈곤층 부축사업에 나섰다. 이 병원에서는 죽림촌위생소와 의료원격회진 합작협의서를 체결했는데 앞으로 매달 세번씩 원격회진을 하게 된다. 촌민들이 촌을 벗어나지 않고도 훌륭한 의료봉사를 받을 수 있게 조처한 것이다. 맨 첫사람으로 혜택을 본 죽림촌 리수툰의 김주옥씨는 “원격회진을 통해 경추통과 요추통이 생기게 된 원인을 확실히 알게 되고 처방약도 받게 되였다.”면서 “교통이 불편해 병원에 다니기 힘들었는데 영상을 통해 앉은자리에서 전문가들의 진단을 받으니 편리하다.”며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날 화룡시상무국, 시우정국, 화흠상업무역회사에서는 죽림촌에 ‘죽림’특색인터넷망을 개통하여 촌의 전자상거래발전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에 앞서 연변대학출판사에서는 죽림촌과 연변지대 기동대대 3중대에 300권의 도서를 기증했다. 화룡시 문련에서도 서법, 미술 협회 회원들을 동원하여 죽림촌에 서예와 그림을 기증하고 전문촬영가를 초청하여 가족사진을 찍어주는 등 빈곤촌 지원활동에 참여했다. ///연변일보 /글·사진 차순희 기자 ====================================   "온돌공연" 죽림촌 찾다  2018년 2월 19일,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문화라지오텔레비죤방송신문출판국과 화룡시문화라지오텔레비죤방송신문출판국의 책임자들은 '새시대홍색문예청기병'인 화룡시문화관 '온돌공연소분대'를 이끌고 숭선진 죽림촌과 고성리변방검사소에 찾아가 촌민들과 변방전사들에게 다채로운 문화향연을 선사하고 더불어 새해축복을 전했다.   이날 오전, 화룡시문화관의 25명 문예일군으로 구성된 공연팀이 죽림촌의 문체활동실에 도착했을 때 사십여명에 가까운 촌민들은 따뜻한 온돌에 앉아 뜨거운 박수로 맞이했다.   아름다운 선률과 함께 부채춤으로 공연의 막을 연 공연은 무용 , 남성독창 , 녀성독창 등 다채로운 문예종목들로 촌민들에게 명절의 인사를 전했고 촌민들은 흥겨운 노래가락에 맞춰 춤 추고 노래하는 등 명절의 분위기로 들끓었다.   올해 주TV, 시TV의 음력설문예야회에 모두 출연한 소품배우 허광일, 정복화가 열연한 소품 은 촌민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했고 최종철, 로미화, 홍미옥의 조선족 삼로인 소품 는 공연현장 분위기를 고조로 이끌었다.   알아본데 의하면 '화룡시온돌공연소분대'는 61년전부터 화룡현극단의 공연소분대로 활약하면서 농가집에 찾아가 온돌공연을 했다. 지금은 현이 시로 바뀌고 극단이 문화관으로 바뀌였지만 한 시대 또 한시대의 문예일군들은 군중들이 즐기고 사랑하는 온돌식 공연을 전승해왔다. 촌민 주영애는 " 설날에 이렇게 우리 곁에 찾아와줘 고맙다. 따뜻한 온돌에 앉아 멋진 공연을 볼 수 있어 대단히 기쁘다"고 격동스러운 심정을 토로했다.   오후에 '온돌공연소분대'는 또 길림성공안변방총대인 고성리변방검사소에 찾아가     무용 ,남녀듀엣송 , 가야금독주 , 남성독창 등 다채로운 공연들로 국가의 안전을 위해 휴식일 없이 변방을 지키고있는 장병들에게 문예향연을 선사했다.   화룡시문화관의 책임자에 따르면 이번 활동은 2018화룡시 '우리의 중국꿈' 문화를 만가에 전하는 활동의 일환이다. 정월대보름 이후 대중들의 수요에 따라 문화하향공연을 종종 조직할게 되며 군중이 즐겨보는 문예형식으로 당의 따뜻함을 천가만호에 전할것이라 밝혔다.   글 사진 장향월 기자   /편집:리영철 ///연변라지오TV 넷     [출처] "따뜻한 온돌서 문예공연 볼수 있다니..." - 모이자 커뮤니티    
4    [그때와 추억] - 동년이 그립다... 댓글:  조회:4274  추천:0  2018-04-17
동년의 추억이 깃든 오붓한 강변마을    2014-4-17    언덕에서 바라본 고즈넉한 마을. 옆으로는 두만강이 호선형을 이루며 흘러간다. 지난 4일(2014년 4월), 청명절을 맞으며 태여난 곳은 아니지만 동년과 소년 시절을 보냈던 화룡시 로과향 사정곡촌, 아니, 지금은 숭선진 죽림촌의 한개 툰으로 되여버린 사정곡툰을 찾았다. 죽림촌이나 원래의 사정곡촌은  로과향에 속했던 마을이다. 로과향이 화룡-로과도로를 경계로 두동강이 나면서 숭선진에 귀속, 현재 촌에는 죽림 원 마을과 흥남, 사정곡, 리수 등 마을이 아우러져 하나의 촌-죽림촌을 이룬다. 내가 살던 사정곡촌(현 사정곡툰)은 한때 연변을 들썽인 사건의 주역이다. 1963년 12월 27일, 마을소녀 몇몇이 얼어붙은 두만강을 따라 하교길에 올랐다가 마을과 500메터쯤 떨어진 부근에서 두만강에 빠졌는데 그때 렬차에서 뛰여내린 조선청년 김형호와 최상현이 서슴없이 차디찬 강물에 뛰여들어 마지막으로 허우적거리는 한순자소녀를 구해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친선의 노래”가 창작되였고 사건의 주인공이였던 한선자녀성은 이름을 한친선으로 고치기도 했다. 내가 있을 때까지만 해도 사정곡촌은 근 50세대 인가에 아이들도 많았던 곳이였다. 아직도 겨울철 얼어붙은 두만강에서 10여명이서 애돌(쪽발구) , 구루마(썰매)를 타며 한동안 즐기다 학교로 가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다니던 소학교건물은 이제는 볼품없이 허름한 모습을 하고있음에도 여전히 시야를 당겨가며 새록새록 추억을 되새기게 한다. 현지에서 학교를 다닐 때 우리는 지금의 아이들이 상상조차 할수 없는 많은 거창한 일들을 했었던것 같다. 비료를 생산한다고 소똥, 돼지똥을 주었고 페물을 회수한다고 유리, 철, 납, 비닐박막 등 회수 가능한 물건줏기에 얼마나 열성을 보였는지 모른다. 뿐만아니라 한창 공부에 열심해야 했을 나이였음에도 생산대 지원을 나가 모내기, 김매기에 나섰다. 물이 얼마 흐르지 않는 골짜기에 저수지를 앉힌다고 제방뚝 쌓는 일에 동원되고 하천정비일에 참가해 돌을 주어 나르던 일…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처구니없는 일 같기도 했지만 여전히 깊은 추억으로 남을 뜻깊은 일이였음은 분명했다. 당시 마을 자체도 생기와 활력으로 넘쳐났던 고장이였다. 봄이면 웃고 떠들며 벼모내기, 담배모내기를 하는 사람들, 집집마다 온 가족이 혹은 외지의 친척들까지 가담해 잎담배를 겯던 모습들, 황소의 영각소리와 함께 소궁둥이를 치는 농군들, 그런 일군들 사이를 누비며 재롱을 떠는 아이들… 하지만 요즘 보면 내가 살던 고장은 많이 변해있었고 또 변해가고 있었다. 소똥에 얼룩졌던 흙길은 세멘트길로 바뀌였고 허름한 나무울바자는 쇠그물바자로 바뀌였으며 짚으로 되였던 이영은 파랗고 불그스레한 기와로 바뀌였다. 마을은 아름답게 변해가면서도 더불어 또 다른 모습을 보이며 변해가고있었다. 마을에선 뛰여 노는 동심을 볼수 없었고 마을의 기둥처럼 느껴지는 젊은 세대들을 보기 힘들었으며 가족끼리 혹은 겨리끼리 모여앉아 잎담배를 겯던 모습도 볼수 없었다. 마을은 마치도 쇠약해가는 인간처럼 많이 고달프게 보이고 지쳐가고있는듯한 느낌이였다. 한적한 마을은 때때로 일하러 가는 경운기소리 혹은 굴뚝에서 피여오르는 연기가 인적의 존재를 알려줄따름이였다. 선조들이 땀을 흘리며 걸구어온 마을의 땅을 걸구던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타국의 어느 공장건물에서, 식당 주방에서, 어느 가정집에서 혹은 타지방의 어느 한 곳에서 열심히 일하며 부지런히 “신사임당”과 인민페를 챙기고 있다. 고즈넉한 산 땅속에 묻힌채 마을의 달라져가는 모습을 내려다보는 어르신들의 심정은 어떠할가 하는 생각이 갈마들면서 마음이 복잡해났다. ///연변일보 전윤길 기자      
3    "아버지가 그리워질 때면 내 눈가에 숫돌이 보인다"... 댓글:  조회:2427  추천:0  2018-04-17
   + 한 벌의 양복  한 벌의 그가 지나간다  그는 늘 지나가는 사람   늘 죄송한 그가  늘 최소한의 그가   목이 없는 한 벌의 양복이  허공에 꼬치 꿰인 듯  케이블카처럼 정확한 구간을 지키듯  신호등을 지나 빵집을 지나  장미연립을 지나  가끔 양복 속의 목을 꺼내     카악- 가래를 뱉기도 하며  한 벌의 양복으로 지나간다  대주 연립 206호 앞에서 양복이 멈췄다  길게 초인종을 눌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양복이 열쇠를 비틀어 철문 한 짝을 떼어내자  철문 속에 안전하게 보관된 가족들이  TV를 켜놓고 웃고 있었다  가족들이 양복을 향해 엉덩이를 조금 떼더니  이내 TV 속으로 빠져들었다   양복이 조용히 구두를 벗었다  한 벌의 그가 양복을 벗었다  모든 것을 걸어두고 나니  그저 그런 늙은 토르소에 지나지 않았다  한 벌도 아닌 양복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그가  어두운 식탁에서 최대한의 정적을 식사한다  (손순미·시인, 1964-)  + 저녁식사 풍경  어금니 반쯤은 빠지고  남은 이도 흔들리기 때문에  좋아하는 총각김치를 와드득  깨물어 먹지 못하는 아버지  맛있는데 맛있는 건데  허탈하게 말하며, 그 총각무같이  씁쓸한 웃음을  흐흐흐 흐흐흐  며느리는 총각김치를 맛있게 먹다가  잠시 입맛을 잃었고  아버지는 왜 안 먹냐며  자꾸 권했다  맛있어, 먹어봐 먹어  흐흐흐 흐흐흐  우린 간신히 밥숟가락을 들었다 내려놓았다  음식의 氣만 빨아먹는 귀신같이  헛것을 먹고 있는 아버지의 웃음  어느새 그에게도 죽음의 힘이 스몄구나  오싹한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내렸다  아무도 우겨넣은 밥을 넘기지 못했다  (윤의섭·시인, 1968-)  + 아버지와 숫돌  아버지는 날마다  소먹이는 꼴을 베어내는  낫을 숫돌에 가셨다  아버지가 낫을 가실 때는  수도승처럼 보였다  울 아버지는  너무나 진지하고 엄숙하게  얼굴에 땀방울 쏟으시며  정성 다해 힘을 들여 낫을 가시는 것을  어째서 그리도 반복하시는 것일까  가끔은 빼먹어도 되고  며칠은 아니 갈아도 되실 텐데  아버지는 하루도 빠짐없이  낫을 가셔서 푸른 날을 세우셨다  이제  저 멀리 북간도보다도 머나 먼  피안의 세계에서 안식하시는 아버지  그리워 할 적마다  내 눈가에 숫돌이 보인다  숫돌은 스스로 자기 몸을 헐어서  낫의 푸른 날을 살렸고  아버지는 스스로 당신 몸을 갈아서  튼튼한 울타리를 치신 뒤  숫돌에 낫을 매일 가시듯  하루도 빠짐없이 자식들 향해  지금도 사랑스런 웃음 띄어 지켜보신다  (백영호·시인, 1955-)  + 아버지의 안경  무심코 써 본 아버지의 돋보기  그 좋으시던 눈이  점점 나빠지더니  안경을 쓰게 되신 아버지,  렌즈 속으로  아버지의 주름살이 보인다.  아버지는  넓고 잔잔한 바다 같은 눈으로  자식의 얼굴을 바라보신다.  그 좋으시던 눈이 희미해지고  돋보기 안경을 쓰시던 날  얼마나 가슴 찡하셨을까.  돋보기 안경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아버지의 주름살이  자꾸만 자꾸만  파도가 되어 밀려온다.  (이탄·시인, 1940-)  + 아버지들  아버지는 석 달치 사글세가 밀린 지하셋방이다  너희들은 햇볕이 잘 드는 전세집을 얻어 떠나라  아버지는 아침 출근길 보도 위에 누가 버린 낡은 신발 한 짝이다  너희들은 새 구두를 사 신고 언제든지 길을 떠나라  아버지는 페인트칠할 때 쓰던 낡은 때묻은 목장갑이다  몇 번 빨다가 잃어버리면 아예 찾을 생각을 하지 말아라  아버지는 포장마차 우동 그릇 옆에 놓인 빈 소주병이다  너희들은 빈 소주병처럼 술집을 나와 쓰러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아버지는 다시 겨울이 와서 꺼내 입은 외투 속에  언제 넣어두었는지 모르는 동전 몇 닢이다  너희들은 그 동전마저도 가져가 컵라면이라도 사먹어라  아버지는 벽에 걸려 있다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진 고장난 벽시계다  너희들은 인생의 시계를 더 이상 고장내지 말아라  아버지는 동시상영하는 삼류극장의 낡은 의자다  젊은 애인들이 나누어 씹다가 그 의자에 붙여놓은 추잉껌이다  너희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깨끗한 의자가 되어주어라  아버지는 도시 인근 야산의 고사목이다  봄이 오지 않으면 나를 베어 화톳불을 지펴서 몸을 녹여라  아버지는 길바닥에 버려진  붉은 단팥이 터져나온 붕어빵의 눈물이다  너희들은 눈물의 고마움에 대하여 고마워할 줄 알아라  아버지는 지하철을 떠도는 먼지다  이 열차의 종착역이다  너희들은 너희들의 짐을 챙겨 너희들의 집으로 가라  아버지는 이제 약속할 수 없는 약속이다  (정호승·시인, 1950-)  + 아버지의 등  만취한 아버지가  자정 너머 휘적휘적 들어서던 소리  마루바닥에 쿵, 하고  고목 쓰러지던 소리  숨을 죽이다  한참만에 나가보았다  거기 세상을 등지듯 모로 눕힌  아버지의 검은 등짝  아버지는 왜 모든 꿈을 꺼버렸을까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검은 등짝은 말이 없고  삽십 년이나 지난 어느 날  아버지처럼 휘적휘적 귀가한 나 또한  다 큰 자식들에게  내 서러운 등짝을 들키고 말았다  슬며시 홑청이불을 덮어주고 가는  딸년 땜에 일부러 코를 고는데  바로 그 손길로 내가 아버지를 묻고  나 또한 그렇게 묻힐 것이니  아버지가 내게 물려준 서러운 등짝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검은 등짝은 말이 없다  (정철훈·시인, 1959-)  + 아버지의 등  아버지의 등에서는  늘 땀 냄새가 났다  내가 아플 때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지만  아버지는 울지 않고  등에서는 땀 냄새만 났다  나는 이제야 알았다  힘들고 슬픈 일이 있어도  아버지는 속으로 운다는 것을  그 속울음이  아버지 등의 땀인 것을  땀 냄새가 속울음인 것을  (하청호·아동문학가, 경북 영천 출생)  + 아버지의 등을 밀며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 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일러준 대로  다섯 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 번은 입 속에 준비해둔 다섯 살 대신  일곱 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어쩔 줄 모르고 물 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 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 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손택수·시인, 1970-)     
2    언어는 인권이며 "한글 병신체"는 도구 장치, 모독 폭거이다... 댓글:  조회:3019  추천:0  2018-04-17
© News1 프랑스 작가 알퐁스 도데의 명작 ‘마지막 수업’은 ‘모국어를 지켜야 나라를 지킬 수 있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엘레강스하고 시크한 리듬이 비비드한 컬러로 콜레보된 콤비 이번 윈터 시즌 머스트 해브’가 무슨 말인지 나는 도대체 모르겠다. 고급 패션 잡지 등의 광고에 유행하는 소위 ‘보그 병신체’라는데 이는 한글을 쓰는 한국인이 같은 한국인들에게 저지르는 모독이자 언어 폭거다. 담당자들은 한글로 쉽게 써놓으면 싸구려 제품으로 인식해서 그렇다고 할지 모른다. 이 문체에 반응하는 소비자도 책임이 좀 있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아파트 단지 이름을 ‘샹드리안클래식’ 식의 어려운 외국어로 짓는 이유가 ‘시어머니가 찾아오기 어렵게 하려는 것’이란 애교 섞인 해학이 더 이상 해학으로 들리지 않는다. 광고만 그런 것은 아니다. 검사, 판사, 변호사, 의사 등 고소득 전문직종이나 백성 위에 군림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관직의 세계 역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그들만의 언어’가 실존한다. "환자가 어정쩡한 지식으로 뭐라뭐라 하기에 전문용어 몇 개 동원했더니 입을 다물더라"는 말을 아는 의사로부터 들은 게 바로 얼마 전이다. 이는 학자나 종교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텔레비전 토론에 나오거나 신문에 칼럼을 쓰는 교수의 말과 글은 가급적 어려워야 ‘과연 학자’로 자부한다. 나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는 선문답의 뜻을 여태 알지 못한다. 정치인들이 종종 자신을 위장하거나 책임을 은근슬쩍 회피하려 할 때 이런 어려운 말을 동원한다. 지하철이나 관공서마다 ‘에이이디(AED) 자동제세동기(自動除細動機)’가 비치돼 있다. 설명을 듣지 않고는 ‘자동제세동기’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한자를 읽어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그 기계가 뭔지 관심을 기울이고, 위급할 때 가져다 쓸 생각을 할 사람이 있겠는가 말이다. 그냥 ‘심장마비 응급 충격기’라 써놓으면 법에 걸릴까. ...결정문이나 ...연설문이 상대적으로 박수를 받는 것은 대부분 알아듣기 쉬운 말들이라 그렇다. ...얼마든지 쉬운 우리 한글로 폼 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걸 안 할 뿐인 것이다. 그 이유는 이미 말했다. 물론 당사자들은 절대 아니라고들 하겠지만. ...10월 9일 한글날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설계(디자인)됐다는 ‘한글’의 창제를 기념하는 날이지만 우리에게는 달력의 빨간 글자가 그저 반가울 뿐이었다. 몇 년 전 그날을 빨간색으로 되돌리는데 일조했던 사단법인 한글문화연대 이건범 대표가 ‘언어는 인권이다’를 펴낸 이유 중 하나가 거기에 있다. 국민이 이해하지 못하도록 외국어와 전문용어로 어렵게 말을 늘어놓는 것은 듣거나 읽는 국민을 무시하는 행위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지만 주권에 앞서 인권이 먼저다. 언어는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생명, 존엄, 기득권, 군림, 효율, 평등, 공생을 지키거나 방해한다. 어려운 용어의 말과 글이 민주주의와 인권을 침해하는 도구이자 장치인 것이다. 이건범의 ‘쉬운 언어 쓰기’ 주장을 모두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여기에 있다. ///뉴스1 / 최보기
1    마지막 수업 / 알퐁스 도데 댓글:  조회:3754  추천:0  2018-04-17
마 지 막 수 업                                        / 알퐁스 도데   그날 아침, 나는 학교에 굉장히 늦고 말았습니다. 거기다가 아멜 선생님이 말익히기에 대하여 질문에 하겠다고 했는데, 전혀 공부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들을 꾸중을 생각하니 몹시 겁이 났습니다. 문득, 나는 차라리 학교에 결석하고 이리저리 쏘다닐까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날씨는 무척 맑고 따뜻하였습니다.숲에서는 개똥지빠귀 울음소리가 들리고, 제재소 뒤의 리페르 목장에서는 프로이센 병사들이 훈련받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이 모든 것은 말익히기보다 더 내 마음을 끌어 당겼습니다.그러나 나는 그런 마음을 누르고 학교를 향해 뛰어갔습니다.  면사무소 앞을 지나면서 나무틀로 된 게시판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지난 2년 동안 패전이니, 징역이니, 사령부의 명령이니 하는 나쁜 소식을 알리는 소식은 이곳에 붙여졌습니다.  '또 무슨 일이 있었나?'  나는 뛰면서 그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광장을 가로질러 가고 있는데, 직공과 함께 거기 서서 게시판을 들여다보던 대장장이 바시테르 아저씨가 나를 보고 소리쳤습니다.  "얘야, 그렇게 서두를 것 없다. 지금 가도 늦지 않아!"  나는 대장장이 아저씨가 나를 놀리는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숨이 차도록 뛰어서 학교의 작은 마당으로 뛰어들어갔습니다. 보통은 수업이 시작될 즈음 책상 서랍을 여닫는 소리, 귀를 막고 큰 소리로 책을 읽는 소리, 좀 조용히 해! 하고 책상을 두드리는 선생님의 막대기 소리가 한데 뒤섞여 한길까지 들려왔습니다.  나는 이런 소란한 틈을 이용해 슬그머니 내 자리에 들어가 앉을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일요일 아침처럼 조용했습니다. 열려진 창문으로 벌써 제자리에 앉아 있는 친구들과 그  무서운 막대기를 옆구리에 끼고 책상 사이를 왔다갔다하시는 아멜 선생님이 보였습니다.    나는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오르고 가슴은 얼마나 조마조마하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멜 선생님은 나를 보고도 화를 안 내시고 매우 부드러운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프란츠, 어서 네 자리에 가 앉아라. 하마터면 너를 빼고 수업을 시작할 뻔했구나."  나는 재빨리 걸상을 타넘어 내 자리에 앉았습니다. 나는 마음이 가라앉자 비로소 선생님이  장학사가 수업을 둘러 보는 날이나 상장을 줄 때만 입는 초록색 프록 코트에 가는 주름이    잡힌 가슴 장식을 달고, 수놓은 검은 비단의 모자를 쓰고 계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더군다나 교실의 분위기가 평소와는 다르게 엄숙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늘 비어 있던 교실 안쪽 의자에 마을 사람들이 학생처럼 조용히 앉아 있었습니다. 삼각 모자를 손에 든 오제 영감, 옛 면장님, 우편 배달부, 그 밖에도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무언가 슬픈 표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제 영감은 너무 낡아 가장자리가 너덜너덜해진 프랑스어 책을 무릎에 펴고 앉아 있었고, 그 위에는 안경이 올려져 있었지요.  내가 이런 모습에 놀라서 두리번거리며 살피는 동안 아멜 선생님은 교단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러고는 부드럽고도 엄숙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여러분과의 마지막 수업입니다. 알자스와 로렌 지방의 학교에서는 독일어만 가르치라는 명령이 베를린으로부터 내려왔습니다. 내일 새로운 선생님이 오십니다. 오늘로  여러분의 프랑스어 수업은 마지막입니다. 여러분, 열심히 수업을 들어주기 바랍니다."  나는 선생님의 짤막한 말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정신이 없었습니다.  '아아, 죽일 놈들! 면사무소에 붙은 게 바로 이것이었구나. 나의 마지막 프랑스어 수업! 나는 제대로 쓸 줄도 모르는데 이제는 다시 프랑스어를 배울 기회가 없을 것이야!'  나는 전에 수업을 빼먹고 새집을 찾아다니거나, 자르 강가에서 얼음을 지치면서 시간을      헛되이 보낸 것이 후회스러웠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진절머리가 나고 골치가 지끈지끈 아프게 하던 내 책들, 성서가 이제는 헤어지기 싫은 친구로 느껴졌습니다. 그것은 아멜 선생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선생님과 헤어져야 되고 다시는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니 벌을 받던 일이나 막대기로 얻어맞은 일이 모두 잊혀졌습니다.  '가엾은 선생님!'  선생님은 이 마지막 수업을 위하여 정장으로 옷을 입은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이 교실 뒤쪽에 앉아 있는 이유도 비로소 알 것 같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40년 동안이나 우리를 가르치는    일에 열심을 다하신 선생님께 감사하고, 우리에게서 떠나가는 조국에 경의를 표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선생님이 갑자기 내 이름을 불렀습니다. 내가 외울 차례가 되었던 것이었죠. 저 어려운 말익히기를 큰 소리로 분명하게, 하나도 틀리지 않고 외울 수 있다면   이 순간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첫마디부터 막혀버려서 부끄럽고 안타까운 마음에 고개를 들지 못하였습니다.  그 자리에 몸만 흔들며 서 있었습니다. 아멜 선생님은 천천히 말씀하셨습니다.  "프란츠, 나는 너를 야단치지 않겠다. 이미 충분히 벌은 받은 셈이지…….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한단다. 그까짓것 서두를 것 없어. 내일 하면 되니까. 그 결과 지금 보는 대로 이렇게    되는 것이란다. 아! 교육을 언제나 내일로 미루었던 것이 우리 알자스의 큰 불행이었어. 지금 프로이센 사람들이 '뭐라고? 너희들은 프랑스 사람이라고 하면서 프랑스어를 쓰지도 읽지도 못한다 말이야!' 하고 비웃는데도 우리는 할 말이 없어. 하지만, 프란츠야. 우리 모두가 스스로 반성하고 깨달아야 해. 너희들의 부모님은 교육에 그렇게 열성적이지 못했던 거야. 돈    몇 푼을 벌기 위하여 너희들이 밭이나 공장에서 일하기를 원했지. 물론 나 자신도 반성해야 할 것이 있어. 여러분에게 공부를 시키는 대신 우리 집 뜰에 물을 주라고 하였고, 여러분이  은어 낚시를 하고 싶다고 하면 수업을 안 했으니까……."  그리고 아멜 선생님은 프랑스어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프랑스어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분명하며, 표현력이 풍부한 말이라는 것. 그러니까 우리들이 잘 간직하여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 왜냐하면 한 민족이 남의 식민지가 된다고 하더라도 자기 말을 잘 지키면 감옥의 열쇠를 쥐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이니까…….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고나서 선생님은 문법책을 들고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너무도 쉽게 이해가 되어   놀랐습니다. 말씀하시는 하나하나가 무척 쉽게 느껴졌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이처럼 열심히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또 선생님도 차근차근 알아 듣기 쉽게 설명하셨습니다. 그것은 이 가엾은 선생님이 떠나시기 전에,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려는 것 같았습니다.  말익히기가 끝나자, 이번에는 쓰기 시간이었습니다. 아멜 선생님은 모두에게 나누어 줄 글씨본을 특별하게 준비하여 오셨습니다. 거기에는 '프랑스 알자스, 프랑스 알자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우리 책상 위에 매달려, 교실 가득 나부끼는 작은 깃발처럼 보였습니다.  모두들 얼마나 열심인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합니다. 종이 위에 펜 긁히는 소리만 사그락사그락 들릴 뿐입니다. 창문을 통해 풍뎅이가 날아 들어왔는데도 누구 한 사람  거기에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제일 나이 어린 아이들도 정성껏 종이 위에 줄을 긋는데    몰두하였습니다.  학교 지붕 위에는 비둘기 몇 마리가 '구구구구' 울고 있습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제 저 비둘기에게도 독일어로 울라고 할지도 몰라!'  가끔씩 교과서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면 아멜 선생님은 교단 위에서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마치 이 작은 학교를 눈에 담기라도 하듯이 모든 것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40년 동안 선생님은 뜰이 바라보이는 이 교실에 늘 있어 왔습니다. 의자와 책상은 아이들의 엉덩이에 닳아서 반들반들 빛이 나고, 마당의 호두나무는 크게 자랐으며, 직접 심으신 홉은 어느 새 창문을 뒤덮고 지붕까지 뻗어 올랐습니다. 이 모든 것들로부터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요?  2층에서 왔다갔다하며 짐을 꾸리고 있는 여동생의 발소리를 듣는 선생님의 마음은 얼마나   괴로울까요? 선생님은 내일 떠나서 이 마을과 영원히 이별 합니다. 그래도 선생님은 끝까지 수업을 계속할 마음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쓰기 시간 다음에는 역사 시간이었습니다. 그런 다음 꼬마들은 목소리를 맞추어 발음 연습을 했습니다.  교실 뒤에는 오제 영감이 안경을 걸친 채 교과서를 양손에 들고 우리들과 함께 한 자 한 자  더듬거리며 읽고 있었습니다.그 분도 매우 열심히 읽느라 목소리가 감동으로 떨렸습니다.   그리고 읽는 모습이 너무도 우스꽝스러워 우리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습니다. 아! 나는 이 마지막 수업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때, 교회의 큰 시계가 정오를 알렸습니다. 이어서 기도를 알리는 삼종이 울렸습니다. 아침 6시, 정오, 저녁 6시 세 차례에 걸쳐   기도시간을 알리기 위해 울리는 성당의 종소리입니다. 그와 동시에 훈련에서 돌아오는 프로이센 병사들의 나팔 소리가 창문 밑에서 울려 퍼졌습니다.  아멜 선생님은 얼굴이 파래져서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습니다. 지금까지 선생님이 이렇게    크게 보인 적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여러분…… 나는…… 나는……."  그러나 그 무엇이 선생님의 목을 막히게 하여,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선생님은 칠판 쪽으로 돌아서더니, 분필을 집어들고는 온 힘을 다해 되도록 큰 글씨를 썼습니다.  『프랑스 만세!』  그리고 벽에 머리를 기댄 채 움직이지 않고 우리에게 손짓으로 말했습니다.  "이것으로 끝입니다……. 모두 돌아가세요."     ============================덤으로 더...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마지막 수업(프랑스어: La Dernière Classe)은 프랑스의 작가 알퐁스 도데의 단편 소설이다. 알퐁스 도데의 월요이야기(Contes du lundi)에 수록되어 있다. 줄거리[편집] 프랑스 알자스 지방에 살던 소년 프란츠는 공부보다는 뛰어 놀기를 좋아하는 아이이다.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학교에 갔으나 교실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흘렀다. 또한 동네의 어른들 역시 교실에 앉아 있었다. 프랑스어 선생님인 아멜 선생님은 장학사가 학교를 방문할 때나 입던 정장을 입고 교단에 서있었다. 아멜 선생님은 "베를린에서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독일에 귀속된 알자스-로렌 지방의 모든 학교에서는 프랑스어 수업이 아닌 독일어 수업을 하라고 말입니다." 라는 말을 한다. 곧 이 수업이 마지막 수업이라는 것이다. 프란츠는 마음 깊이 자신이 프랑스어를 소홀히 배운 것을 반성한다. 그러나 아멜 선생님은 프란츠에게 "너는 이미 네 마음 속으로 너를 반성하고 있을 것이다. 그걸로 만족하단다."라는 말로 프란츠를 위로한다. 수업이 끝나는 시간인 12시에 저 건너 교회탑에서 시간을 알리는 종이 치고 프로이센 군의 소리가 들리자 아멜 선생님은 말을 잇지 못한다. 이어서 아멜 선생님은 교실 칠판에 Vive La France!(프랑스 만세!)라고 쓰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영향[편집] 알퐁스 도데의 《월요이야기》 수록 글 중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보불전쟁) 이후 빼앗긴 알자스로렌에 남아 있던 프랑스인들의 서러움. ==========================덤으로 더 더... 의 작자 알퐁스 도데는 큰 직물 공장을 경영하는 집 아들로 태어났다. 그런데 공장이 두 차례나 불이 나서 그가 6세 때 파산하고 말았다. 도데는 리옹 중학교의 급비생으로 들어갔으나 집이 가난하여 교과서도 살 수가 없었다. 그래도 열심히 공부하여 학교 성적이 좋았다. 그러나 집안이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도데는 학교를 중도에 퇴학하고, 아버지 친구의 도움으로 시골 중학교의 대리 교사가 되었다. 대리 교사라야 학생들 자습실을 맡은 선생이었다. 17세가 된 어느 날, 기어이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한 귀족집 아들인 학생이 마구 대들자 도데는 정신없이 그 학생을 때려 운동장으로 끌어내어 내동댕이친 것이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교장으로부터 학교를 그만두라는 말을 들었다. 절망한 그는 한밤중에 체육관으로 가 목을 매려 하였다. 마침 그때 철학 교사인 신부의 구원을 받았다. “당신은 문학의 길로 정진하시오." 도데는 신부의 이 말을 새기면서 마침내 일류 문학자가 된 것이다. 알퐁스 도데 ...   ...그의 건강은 가난과 그리고 결국은 그의 목숨을 앗아간 성병에 서서히 침식당하고 있었다. 도데는 1861년에서 1862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을 알제리에서 보냈다. 이 여행에서 얻은 성과 가운데 하나가 〈사자 사냥꾼 샤파탱 Chapatin le tueur de lions〉(1863)으로, 이 소설의 주인공인 사자 사냥꾼은 도데의 미래의 주인공 타르타랭의 첫번째 스케치라고 할 수 있다. 도데가 처음으로 쓴 희곡 〈마지막 우상 La Dernière Idole〉은 1862년에 파리의 오데옹 극장에서 초연되었고 커다란 반향을 얻었다. 〈방앗간 소식 Lettres de mon moulin〉(1869)에서 그는 1862년말 코르시카에서 보낸 겨울을 회상하고 있다. 1863~65년(모르니 공작이 죽을 때까지)에 겪은 풍부한 사회생활은 그가 〈르 나바브 Le Nabab〉(1877)에서 무자비하게 분석한 자료를 그에게 제공해주었다. 1867년 1월에 그는 재능있는 작가인 쥘리아 알라르와 결혼했는데, 그는 그녀를 깊이 사랑했고, 그녀는 그의 이후 작품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들은 레옹과 뤼시앵이라는 두 아들과 에드메라는 딸 하나를 낳았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은 그의 2번째 단편집 〈월요일 이야기 Les Contes du lundi〉(1873)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의 글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전쟁 때 도데는 군에 입대했지만, 1871년 파리 코뮌의 공포정치 때 파리를 탈출했다. 그의 〈타라스콩의 타르타랭이 겪은 놀라운 모험 Les Aventures prodigieuses de Tartarin de Tarascon〉(1872)은 별로 호평을 받지 못했지만, 모험을 좋아하는 이 소설의 주인공은 천진함과 허풍스러움을 풍자한 인물로서 유명하다. 〈아를의 여인 L'Arlésienne〉이라는 희곡도 역시 실패했으나 1885년에 재공연되었을 때는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의 다음 소설인 〈동생 프로몽과 형 리슬레르〉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상을 받고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후 몇 년 동안(적대적인 비평이 전혀 없지는 않았음) 그는 부귀와 명성을 누렸다. 말년에 도데는 성병이 척수까지 번져 심한 고통을 겪었다. 〈고통 La Doulou〉(1931년까지 출판되지 않았음)은 고통을 연구함으로써 완화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그는 감탄할 만한 자제심으로 온갖 종류의 책을 써서 파리의 문단과 음악계를 계속 즐겁게 해주었다. 그는 젊은 작가들(예를 들면 마르셀 프루스트)의 친절한 후원자였다. 1895년에 그는 런던과 베네치아를 방문했다. 그리고 2년 뒤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덤으로 더 더 더...   ...평생을 매독에 시달려 17세 때 걸린 매독이 39세에 척수 매독으로 진행, 극심한 통증에 시달렸다. 통증만이 아니었다. 척수신경 손상으로 다리의 감각 기능이 없어진 탓에 몸의 균형 잡기가 힘들어져 걸핏하면 비틀거렸고 걸을 때는 남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래도 남프랑스의 시인 미스트라르를 비롯하여 플로베르, 졸라, E.공쿠르, 투르게네프 등과 친교를 맺었으며, 아내 쥘리의 내조로 행복한 57년의 생애를 파리에서 보냈다.   당시 매독의 '첨단 치료제'는 수은이었다.[4] 오랫동안 수은 치료를 받았던 도데는 수은중독에도 시달렸다. 통증을 견딜 수 없었던 도데는 모르핀까지 맞았다.주사를 맞을 때마다 구역질로 고생했지만, 모르핀을 맞아야 그나마 통증을 잊고 잠시라도 잠을 잘 수 있었다.   사망하기 얼마 전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인생을 너무 많이 사랑한 나머지 하느님이 내게 벌을 주신 거야." ... ...1867년에 쥴리아 아라드와 결혼했는데 그의 부인도 문학적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1883년 도데는 자신이 아카데미 회원이 될 가능성이 없다고 쓴 기자와 결투를 벌였고 자신의 부인에 대한 안좋은 기사를 쓴 기자와도 결투를 신청할 정도였다고 한다. 말년에는 건강이 악화되어 약을 잘못 쓴 탓에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1897년6월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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