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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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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그것이 알고싶다] - 남극 황제펭귄... 댓글:  조회:3847  추천:0  2018-04-26
미·뉴질랜드 연구진 "황제펭귄 최장 잠수 시간은 32분" 2018.04.26.  자동요약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오클랜드=연합뉴스) 고한성 통신원 = 남극에 사는 황제펭귄의 최장 잠수 시간은 30분이 넘는 것으로 미국과 뉴질랜드 연구진의 공동 조사에서 밝혀졌다. 26일 뉴질랜드 언론에 따르면 양국 연구진은 지난 2013년 남극에서 펭귄 20마리에 꼬리표를 부착해 1년여 동안 위성으로 추적 조사를 벌였다며 이들이 기록한 잠수는 총 9만6천 회 이상으로 잠수 시간은 1분에서 32.2분 사이였다고 밝혔다. 이전에 기록한 펭귄의 최장 잠수 시간은 27.6분이었다. 펭귄의 평균 잠수 깊이는 90m였지만 일부는 450m까지 내려갔다. 남극에서만 발견되는 황제펭귄은 키가 가장 크고 몸무게가 가장 많이 나가는 펭귄으로 키는 122㎝까지 자라고 몸무게는 22㎏에서 45㎏을 오간다. 조사에서는 펭귄들이 1년여 동안 273㎞에서 9천여㎞를 이동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뉴질랜드 국립물대기연구소(NIWA)의 해양 생태학자 킴 거츠 박사는 펭귄들이 어디에서 먹이를 찾느냐에 따라 잠수하는 방식에도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번 조사로 펭귄들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멀리 이동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며 이는 펭귄의 생존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조사 결과는 과학 저널 '마린이콜로지프로그레스시리즈'에도 소개됐다. 황제펭귄 [연합뉴스 자료 사진]
8    [그것이 알고싶다] - 최초의 "동물보호법"은?... 댓글:  조회:4615  추천:0  2018-04-26
[카드뉴스] 세계대전 원흉 히틀러, 최초로 동물보호법 만들었다고? 최진선, 이지연 2018.04.25.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기획 = 최진선 인턴기자 / 그래픽 = 이지연 인턴기자]
7    이탈리아 시인 - 에우제니오 몬탈레 댓글:  조회:4981  추천:0  2018-04-26
  출생 1896. 10. 12, 이탈리아 제노바 사망 1981. 9. 12, 밀라노 국적 이탈리아 요약 이탈리아의 시인·산문작가·편집자·번역가.   1975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1930~40년대에 몬탈레는 신비로움이 넘치는 시를 많이 썼다. 주세페 웅가레티, 살바토레 콰시모도와 더불어 말라르메·랭보·발레리와 같은 프랑스 상징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말의 정서적 암시성과 주관적인 의미를 갖는 상징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전달하고자 했다. 그러나 후기에서는 생각을 좀더 직접적이고 단순한 언어로 표현했다. 많은 문학상을 수상하고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았으며 대부분의 시들이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전쟁 후에는 파시즘에 반대했는데, 그무렵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1922년 문학지 〈프리모 템포 Primo tempo〉의 창간을 도왔으며 1927~28년에는 출판업자 벰포라드를 위해 일했다. 1929~38년 피렌체에 있는 '가비네토 뷰소 도서관' 관장을 맡았으며, 1938~48년 '문학박람회'(La Fiera letteraria)의 시부문 비평가로 활동했고, 1948년 밀라노의 일간지 〈코리에레 델라 세라 Corriere della sera〉의 문학부 편집자로, 후에는 음악부 편집자로 일했다. 첫 시집 〈오징어의 뼈 Ossia di seppia〉(1925)는 전후(戰後)에 만연한 쓰디쓴 비관주의를 그리고 있는데, 그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황폐하고 바위투성이인 리구리아 해안을 상징적으로 활용했다. 이어 〈세관원의 집 외(外) La casa dei doganieri e altre poesie〉(1932)·〈기회 Le occasioni〉(1939)·〈땅의 끝 Finisterre〉(1943)을 썼는데, 이들은 점차 더욱 내향적이며 모호해지고 있다는 평을 받았다. 마르초토상 수상작 〈폭풍우 외(外) La bufera e altro〉(1956)를 필두로, 후기 작품들은 초기에는 없던 능숙한 기교와 인간적인 따스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밖의 시집으로는 〈포화(飽和) Satura〉(1962)·〈조화와 파스텔 Accordi e pastelli〉(1962)·〈범죄자 Il colpevole〉(1966)·〈제니아 Xenia〉(1966) 등이 있는데, 〈제니아〉는 1963년에 죽은 아내를 그리며 쓴 고요하고 회상적인 연시집이다. 1973년에는 〈1971년과 1972년 일지 Diario de '71 e '72〉를 발표했고 1948, 1949, 1957년에 〈시 Poesie〉라는 3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자신이 쓴 시들을 직접 번역했을 뿐 아니라 셰익스피어, T. S. 엘리엇, 제라드 맨리 홉킨스의 시와 허먼 멜빌, 유진 오닐을 비롯한 여러 작가들의 산문도 번역했다. 〈코리에레 델라 세라〉에 실렸던 단편과 스케치들을 모아 〈디나르드의 나비 La farfalla di Dinard〉(1956)라 하여 출판했다. =======================   에우제니오 몬탈레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에우제니오 몬탈레 에우제니오 몬탈레(이탈리아어: Eugenio Montale, 1896년 10월 12일 ~ 1981년 9월 12일)는 주세페 운가레티·콰시모도와 함께 이탈리아의 현대 3대 시인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는 제노바에서 태어나 처음엔 음악가가 되는 수업을 받았으나 22세에 문학 잡지 지의 편집을 시작하면서 문학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현대적 구조, 자유스런 리듬, 그리고 혁신적 언어의 조화와 융합을 위한 운동의 하나인 에르메티즘(Ermetism)의 주역이 되어 파시즘의 언론과 표현에 대한 자유의 제한에 저항했다. 50년이 넘는 저작활동 중에 《기회》(1939년), 《오징어 뼈》(1925년), 《폭풍과 기타》(1956년), 그리고 《71년과 72년의 일기》 등 몇 편을 출판했을 뿐이다. 1975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환상 - 에우제니오 몬탈레 날이 밝아온다. 닳아진 은(銀)같이새하얀 여명, 내 그것을벽에다 걸어두면닫힌 창문에 빛살이 내려앉는다.태양의 일상은 돌아오는데산만한 목소리며 귀에 익은큰 소리는 전해 오지 않는다.왜일까? 난 매혹적인 하루를 생각한다.너무 똑같은 시차로 도는 회전목마에서벗어나고, 오래 전부터 나, 이 무의식적인 마술사를가득 채웠던 힘, 그 힘이 넘치리라.이제 난 얼굴을 내밀어높다란 집과 벌거벋은 길을 마주하리라.카페의 무늬 진 눈 풍경처럼 즐겁고새하얀 눈의 날 내 만나보리니,솜털 가득한 하늘에서 때늦은 광선이 미끄러지고,보이지 않는 빛으로 숲과 언덕을 가득 채우며나에게 들려주리라, 즐거운 귀향의 찬사를.천하의 근본인 알파벳처럼백색 위에 나뭇가지들이 쓴검은 기호를, 나 기꺼이 읽으리.지난 과거 모두가 내 앞에한 점으로 나타나고그 어떤 소리도 이 한적한즐거움을 방해하지 않으리라.삼월의 수탉이공중으로 날거나말뚝 위에 내리리라.     정오 / 에우제니오 몬탈레 길게 늘어진 정오의 영광 나무들은 그림자 드리우지 않고 주위 형상이 과다한 빛으로 점점 더 황갈색 빛을 띤다. 저 높은 곳의 태양,  그리고 메마른 강바닥. 나의 하루는 지나지 않았다. 제일 아름다운 시간은  땅거미 속에 잠긴 희미한 담 저 너머에 있다. 주위엔 건조한 무더위.  낚시꾼 물총새가 살아 있는 유물 위로 선회한다. 은혜의 단비는 황량함 저 너머에 있으니, 더더욱 뿌듯한 기쁨은 기다림 속에 있다.                       서시                                             에우제니오 몬탈레                                             과수원으로 불어오는 바람                     생명의 물결 실어오면 즐거운 일                     죽은 자 하나                     헝클어진 기억을 묻는 곳                     여기는 밭이 아니라 성골 상자라오.                       그대 듣고 있는 윙윙 나래 소리는                     비상이 아니라 영원한 태내(胎內)의 감동.                     이 고적한 변두리 지역이                     시련을 겪으며 변하고 있다오.                       분노는 깎아지른 절벽에서 이리 오고 있다오.                     그대 만일 앞으로 나아간다면                     아마 그댈 구해주는 요정과 만나리라.                     먼 훗날 장난으로도 지워지지 않을                     행위며 이야기가 이뤄지리라.                       우릴 옭아매는 그물에서 뜯어진 올을 찾아                     밖으로 튀어 나가 달아나시라!                     자! 그대 위해 빌었다오, 갈증일랑                     이제 가벼이 풀리고, 앙금은 가시리라…….                             ㅡ 에우제니오 몬탈레 시선(詩選),  한형곤 역,『오징어 뼈』,  (민음사, 2003) 중에서    
6    [동네방네] - 페품팔이 할아버지= "기부왕" 댓글:  조회:4060  추천:0  2018-04-26
페품팔이 할아버지, 알고보니 기부왕 (ZOGLO) 2018년4월26일  허름한 옷을 30년째 입으면서도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100만원을 기부해 온 로인의 사연이 크게 감동을 주고 있다. 중경만보는 24일 중경시 동량구(铜梁区)에 사는 88살 오정복(吴定富) 할아버지의 사연을 소개했다. 할아버지는 지난 24년 동안 매일 10km 이상을 왕복하며 페품을 주워오고 있다. 식사비를 아끼기 위해 페품을 주우러 아무리 먼 곳까지 가더라도 반드시 집에 돌아와 식사를 해결한다. 교통비 1원을 아끼기 위해 뻐스를 타지 않고 반드시 걸어다닌다. 실밥이 뜯겨 나간 낡은 중산복(中山服)을 30년 동안 입어왔다. 이처럼 빈곤해 보이는 할아버지는 사실 가난한 삶을 살지 않을수도 있었다. 과거 소학교 교장이였고 지금까지 매달 4000원의 퇴직년금이 나온다. 여기에 년말 각종 수당 1만 7000여원까지 합치면 일년 수입이 6만 5000원이 넘는다. 로인 혼자 살기에는 크게 부족하지 않은 액수이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이처럼 빈곤하게 살아가는 리유는 다름 아닌 어려운 환경에 처한 학생들을 돕기 위해서이다. 할아버지는 현지의 한 소학교에 매년 3000원씩 6년간 기부해 오고 있고 3명의 대학생에게 1인당 학기별 5000원을 기부해왔다. 또한 문천(汶川) 지진 복구를 위한 기부금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할아버지가 퇴임후 35년간 기부한 퇴직연금과 각종 수당을 합치면 100만원이 넘는다.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날마다 페품을 주으러 다니지만 사람들은 할아버지를 ‘진정한 부자’라고 부른다. 진정한 나눔과 베품의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연변일보넷 편집부 편집/중경만보  
5    [그것이 알고싶다] - 유통 중지되는 "인민페" 알아보기... 댓글:  조회:3077  추천:0  2018-04-26
주의! 5월 1일부터 일부 ‘위안화’ 유통 중지 (ZOGLO) 2018년4월26일  주의: 제4차 위안화 일부 권종별 조만간 유통 중지! 국무원의 승인을 받아 중국인민은행은 2018년 5월 1일부터 제4차 위안화 100위안(元), 50위안, 10위안, 5위안, 2위안, 1위안, 2자오(角: 1자오=0.1위안) 지폐와 1자오 동전(이하 제4차 위안화 일부 권종별)을 시장에서 유통 중지하기로 결정했다. 아직도 상기 위안화를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교환해야 하는지 함께 살펴보자. 제4차 위안화란? 제4차 위안화는 1987년 4월 27일부터 발행된 것으로 총 9종의 액면가격이 있다. 그 가운데 본위 화폐는 1위안, 2위안, 5위안, 10위안, 50위안, 100위안 등 6종의 액면가격이 있고, 보조 화폐는 1자오, 2자오, 5자오 등 3종의 액면가격이 있다. 제4차 위안화 일부 권종별의 구체적인 상황 1. 제4차 위안화 100위안 지폐. 기조색은 짙은 남색, 앞면 도안은 자오쩌둥(毛澤東, 모택동), 저우언라이(周恩來, 주은래), 류사오치(劉少奇, 유소기), 주더(朱德, 주덕) 등 지도자 4명의 부조상이고, 뒷면 도안은 징강산(井岡山) 주봉이다. 2. 제4차 위안화 50위안 지폐. 기조색은 짙은 차색, 앞면 도안은 노동자, 농민, 지식분자의 두상이고, 뒷면 도안은 황허(黃河)강 후커우(壺口)폭포다. 3. 제4차 위안화 10위안 지폐. 기조색은 짙은 남색, 앞면 도안은 한족(漢族), 몽고족(蒙古族)의 인물 두상이고, 뒷면 도안은 주무랑마봉(珠穆朗瑪峰)이다. 5. 제4차 위안화 5위안 지폐. 기조색은 갈색, 앞면 도안은 장족(藏族), 회족(回族) 인물 두상이고, 뒷면 도안은 창장(長江)강 우샤(巫峽, 무협)다. 6. 제4차 위안화 2위안 지폐. 기조색은 녹색, 앞면 도안은 위구르족(維吾爾族), 이족(彝族) 인물 두상이고, 뒷면 도안은 남중국해 남천일주(南天一柱)다. 7. 제4차 위안화 1위안 지폐. 기조색은 진홍색, 앞면 도안은 요족(瑤族), 동족(侗族) 인물 두상이고, 뒷면 도안은 창청(長城: 만리장성)이다. 8. 제4차 위안화 2자오 지폐. 기조색은 남옥색, 앞면 도안은 포의족(布依族), 조선족(朝鮮族) 인물 두상이고, 뒷면 도안은 국장(國徽)이다. 9. 제4차 위안화 1자오 동전. 재질은 알루미늄-마그네슘 합금, 앞면 도안에는 국장, 국명, 중국어 평음(拼音) 국명, 연호가 있고, 뒷면 도안에는 국화와 액면가격이 있다. 어디서 어떻게 교환할까? 제4차 위안화 일부 권종별의 집중 교환기간은 2018년 5월 1일~2019년 4월 30일이다. 이 기간에 은행업 금융기관 영업점에 가서 바꾸면 된다. 집중 교환기간이 끝난 후 제4차 위안화 일부 권종별 소지자는 중국인민은행 지점이 지정한 은행업 금융기관에 가서 바꾸면 된다. 이번 유통 중단 공고 중 제4차 위안화 1자오 지폐와 5자오 지폐는 언급되지 않았다. 제5차 위안화는 1자오와 5자오 지폐를 발행하지 않고, 1자오와 5자오 동전만 새로 발행했다. 따라서 제4차 위안화 1자오와 5자오 지폐는 계속 유통될 것으로 예상된다. 번역: 인민넷 이인숙 ///중국경제망(中國經濟網) 위챗 공식계정/ 중국인민은행 홈페이지, 공인일보(工人日報, ID: grrbwx) 종합
4    [이런저런] - "개영웅" = "경찰견" 댓글:  조회:2319  추천:0  2018-04-26
모든 영웅들이 망토를 입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우리 주변에는 네발과 털이 덥수룩한 영웅도 있다.   지난 21일 미국 언론매체 9news에서 폭우 속 실종된 소녀를 지킨 17살 노령견 맥스를 소개했다. 출처 : 9news 지난 20일 금요일 할머니의 다급한 목소리로 신고 전화가 왔다.오로라라는 세 살 아이가 할머니 집을 홀로 나간 후 실종되었다는 내용의 신고였다. 현지 경찰과 자원봉사자들이 밤새 지역을 수색했지만 오로라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출처 : 9news 출처 : 9news 다음날 21일 아침 오로라의 행방을 찾던 할머니와 수색팀은 산 위에서 희미하게 어린 소녀의 목소리를 들었고, 그들이 산꼭대기에 도착했을 때 개 한 마리가 할머니 곁에 와 오로라가 있는 곳까지 데려다주었다고 전했다.   오로라를 마지막으로 목격했던 장소에서 약 3킬로미터 떨어진 덤불 속이었다. 출처 : 9news 할머니는 " 17살의 노령견이고 청각장애와 시각장애를 갖은 맥스가 춥고 비 오는 밤을 오로라의 곁을 지켜주었다"고 설명했다.    다행히 오로라는 몇 군데 가벼운 찰과상만 있을 뿐 건강에는 큰 이상이 없었다. 성심과 헌신으로 오로라를 지킨 맥스는 경찰견 칭호를 받았다.   
3    "별 볼일 없는 걸림돌 아니라 좋은 리정표 되는 징검돌 되기" 댓글:  조회:4605  추천:0  2018-04-26
조선족사회 민족우환의식 불러일으켜야 (ZOGLO) 2018년4월25일    민족문화 파수군으로 활약하고 있는 채영춘 주당위 선전부 전임 상무부부장 자택에서의 채영춘. 조선족이 중화대가정에서 완강한 생명력을 과시하며 우수한 민족으로 거듭날 수 있은 것은 민족문화전통으로 특징지어지는 민족구심점의 형성에 있다.   하지만 조선족인구대류동에  따른 조선족사회의 해체, 조선족문화성채의 균렬이 가시화되고 있는 현실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오늘날 중국조선족사회는 격변기의 새로운 시대적 높이에서 문화적자각에 의한 정신적 융합이 어느때보다 중요시되는 시점에 놓여있다.   본지는 오래동안 정치인, 언론인, 작가 등 신분으로 조선족문화의 창조자, 전파자, 파수군으로 전전해온 주당위 선전부 전임 상무부부장인 채영춘을 직격 인터뷰해 조선족구성원들이 갖춰야 할 문화자각 등에 대한 그의 소견을 듣고저 한다.-편집자   ▶2010년 정년을 앞둔 시점에서 인터뷰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그때 재직과 퇴직은 단지 인생의 눈금일 뿐이라며 퇴직 후에 별 볼일 없는 걸림돌이 아니라 좋은 리정표가 되는 징검돌이 되겠다고 한 얘기가 생각납니다.어떤 계기나 동인에서 한 말씀이였는지요?   답:퇴직을 앞두고 전 주 부현급 간부 면접시험에서 조선족간부 우리 말 수준을 점검하는 수석시험관을 맡게 되였지요.그날 반수 이상의 조선족간부가 조선말을 전혀 모르거나 외국말을 구사하듯 비지땀을 흘리는 헤프닝을 연출했습니다.충격적이였죠.이날의 면접시험장을 두고 저는 계속 조선족문화 ‘점검관’,‘파수군’으로 돼달라는 무언의 주문으로 받아들이게 되였습니다.   자치주 주체언어인 조선말이 사멸된 자치주라면 더 이상 자치주라 할 수 없습니다.조선어교육, 조선문신문출판방송이 사라진 조선족사회라면 더는 조선족문화구심점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일이 내가 퇴직후 할 일이 많을 것 같다고 직언한 계기와 동인입니다.   ▶ 올해초 《연변일보》에 발표한 칼럼에서 민족사회의 국가충성도와 정치신앙 ‘검증문턱’에 대해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는데 조선족을 여기에 비춰볼 때 어떤 정의를 내릴 수 있을가요?   답:그 어떤 시대를 막론하고 지역과 민족 사회는 국가충성도와 정치신앙에서 무형의 ‘검증문턱’을 거치기 마련입니다.특히 변강에 위치한 소수민족지역은 더욱 그러합니다.   연변의 국가충성도와 조선족의 정치신앙급수는 얼마일가요? ‘영광스런 혁명투쟁사를 자랑하는 로혁명근거지’, ‘산마다 진달래 마을마다 렬사비’ 등 표현은 연변의 국가충성도를 단적으로 시사하는 가장 적합한 신분부호로서 25개 민족자치주 가운데서 단연 돋보이는 지역입니다.소수민족 지역의 가장 민감한 핵심포인트는 민족단결이라 할 때 연변은 국가로부터 5차나 전국 민족단결진보 선진집단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조선족의 정치신앙은 더구나 화려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해방전쟁기간 연변지역의 참군인수 5만1000여명 가운데 조선족이 85%를 차지하며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에서 희생된 연변지역의 1만4700명 렬사가운데 조선족이 97%이상을 차지합니다.모택동 주석이 “공화국의 오성붉은기에는 조선족들의 선혈이 스며있다”고 한 절찬을 유력하게 받쳐주는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연변의 국가충성도와 조선족의 정치신앙을 들먹이는 목적은 우리 조선족후세들이 지난 날 우리 선대들이 피로써 다져온 연변의 빛나는 형상과 조선족의확고한 정치신앙을 잘알고 전승하며 내고향 연변의 당당한 주인이 되라고 일깨워주기 위한데 있습니다.   ▶ 그렇다면 오늘의 시대적 높이에서 어떻게 우리 민족의 력사의식을 다시 정립해야 하는 지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답: 30여년 전 로세대 조선족지도자가 “연변 로혁명근거지 력사유산은 선대들이 후대들에게 남겨준 가장 값진 호신부”라고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그때만 해도 ‘호신부’의 절박함을 깨닫지 못했습니다.공화국의 공신들이 거의 다 저세상으로 떠나고 없는 오늘날 우리 민족의 력사의식은 새로운 시대적 높이에서 확실하게 정립돼야 합니다.   연변의 수많은 혁명력사유적지는 일제강점기 연변이라는 특정된 시공간에서 엮어지고 완성된 가슴 뭉클한 기억의 부호입니다. 조선반도의 일제식민지 통치 36년과 우리 나라의 항일전쟁 14년 세월은 끈끈히 밀착돼있습니다. 이 같은 배경에서 나타난 반일,항일 지사와 사건들 모두 어느 한 나라의 ‘전매특허’로 규제할 수 없는 특수한 성격을 띠였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반일항쟁의 종가-연변이 배출시킨 이 지역 영광과 자랑의 력사단면들이 우리가 아닌 이웃들에 의해 발굴되고 재현되고 흥행된다는 점입니다.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합니다.우리 터전에 숨겨진 비장한 력사에 관심이 없고 쓰러져가는 종가의 울바자를 그냥 방치해둔다면 종가가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거듭 강조하건대 중국조선족력사에서 이주초기 반일항일투쟁사는 우리 나라기 타민족에게서 류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그런데 우리가 이를 종가의 주도적인 관점에서 인식하지 못한다면 궁극적으로 중화민족 일원으로서의 떳떳함이 거세당하고 우리 조상과 후세에 씻을 수 없는 오욕을 남기게 될 것입니다.   우리 민족력사의식정립에서 중국조선족의식,중국과 반도의 변두리의식이 아닌 국가 실크로드 북향개방의 허브의식으로 뿌리내린 글로벌 시대의 애국,애족,애향 의식이 완벽히 정착돼야 우리 민족 력사의식 정립에서 흔들림 없는 종가의 당당함을 지켜나갈 수 있습니다.우리는 남의 땅에 와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개척하고 건설한 이 땅에서 나라의 인정을 받은 중국 소수민족 일원이라는 립지를 확실히 구축해야 합니다.   ▶ 옳바른 력사의식의 정립은 조선족사회 구성원 모두의 문화자각으로 뒤받침되여야 하는 줄 압니다.이 면에서 우리의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어떤 복안을 갖고 계시는지요.   답:우리 민족 력사의식 정립에서 주목해야 할 문제는 조선족 력사교육이 창백하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오래동안 체계적인 민족사 입문서나 필독서가 결여했고 정규화되고 능률적인 교양시스템이나 플랫폼이 없었던 점을 우리는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이같은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이웃 나라와의 대응에서 우리의 주도적인 목소리를 낼 수 없고 우리의 력사의식이 제대로 설자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며 우리는 그냥 이웃 나라의 력사 씨나리오에 맞춰 노래부르는 어리숙함을 되풀이하게 될 것입니다.   조선족의 파란만장한 력사는 중국땅에서 살고 있는 조선족구성원 모두가 잘알아야하는 것은 물론 기타 형제민족들에게도 알려야하는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문화적자각을 지닌 조선족기업계,문학계,미술계,출판계 리더들과 손잡고 두건의 중국조선족력사교육 프로젝트의 출범을 공식화했습니다.하나는 조선족100년 이주력사를 형상화하기 위한 조선족 중대력사제재 미술창작 프로젝트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족청소년을 대상한 중국조선족100년사 필독서 《중국조선족력사를 말한다》출판 프로젝트입니다.이 두건의 문화프로젝트는 단순히 조선족이 아닌 한족과 기타 민족을 념두에 두고 기획했다는 데 의미를 두었습니다.   ▶ 몇년간 많은 글에서 조선족 구성원들의 민족우환의식에 대해 지적했는데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가요?   답:조선족은 과경천입 민족입니다.토착민족과 구별되는 이 호칭에는 가변적 요인이 함유돼있습니다.학계는 조선족의 특징을 이주로 평가하면서 영원히 높은데로 류동하려 하는 민족이라고 정의하지만 다른 일면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움직이려는 가변성을 띤 것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오늘날 해외로무송출과 국내 대도시로의 진출 등 대이동이 글로벌화에 부응하는 조선족들의 관념변화를 이끌어내며 자치주외향성경제의 중요한 엔진으로 되고 있고 개방된 현대적리념에로의 전환을 부추키는 변혁의 긍정적에너지로 볼 수 있지만 수십만 조선족인구의 ‘탈연변’ 영구화 현실은 간과할 수 만은 없는 상황입니다.이 같은 인구류동 추세가 한계에 다다를 때 자치주 성채는 위기를 맞을 것이고 그 존재의미가 소실될 것입니다.   이 상황은 대학입시수험생이 10년 전의 5470명에서 지난해 1512명에 그친데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무릇 조선족이라면 함께 고민하고 함께 풀어나가는 우환의식이 있어야합니다.   로무송출과 농촌공동화이대립통일의 두마리 토끼를 동시에 포획하는 것은 자치주당정앞에 놓인 도전입니다.지 난해부터 본격적으로 가동된 ‘귀향창업 만인계획’프로젝트와  ‘우수대졸생 천인계획’프로젝트는 두마리 토끼를 동시에 겨냥한 자치주 당정의 정치혜안으로 구성된 멋진 대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연변성채의 본질적의미는 조선족집거지역이라는 물리적 수량개념을 떠나 조선족문화메카라는 정신적,사상적 구심점으로 정리된다고 생각합니다.연변성채만 반듯하게 지켜진다면 조선족사회의 미래는 밝을 것이라는 리치이기도 합니다.   연변성채를 지탱하는 힘은 당의 민족정책에 토대한 조선족문화의 건재에서옵니다. 조선족자치조례에 튼튼히 뿌리를 내리고 조선족언어문자를 핵으로 한 조선족사회 정신적융합만이 자치주다운 우리 글로벌 연변의 영원함을 지켜나갈 것입니다.이를 위한 조선족사회 지성인,엘리트들의 솔선수범이 요청되는 시점입니다.   ▶ 정신적,사상적 구심점에 대해 얘기하셨는데요,그렇다면 우리 연변 성채의 정신적,사상적 구심점은 어떤 것들이 있을가요?   답:조선족 문화의 건재는 연변성채를 지탱하는 힘입니다.연변은 예로부터 ‘가무의 고향’ 축구의 고향’이란 미칭을 갖고 있었지요.그중 오늘 축구에 대해서 말해보려고 합니다.연변에서 축구는 민생이요 정치현상으로 단순히 스포츠의 게임시각으로 다뤄서는 안됩니다.   자치주구단이지만 지구촌 중국조선족들의 관심과 응원을 받고 있다는 점은 프로축구 어느 팀과도 구별되는 특이한 현상입니다.연변팀이 중국조선족축구팀으로 불리우는 리유이기도 합니다.   연변팀의 상징아이콘은 장백호랑이, 그 혼은 아리랑이 아닐가 생각합니다.연변팬들이 소리높이 열창하는 아리랑은 우리만의 특수카드로 국내외 시공간을 넘어 연변팀이 출전하는 모든 그라운드에서 연변선수들을 분발시키는 강심제로,전 지구촌 연변축구팬들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메아리로 정착했습니다.   연변축구는 글로벌시대 물리적으로 흩어져있는 조선족을 공동체의식으로 결집시키는 사상적접착제이고 그 무엇으로도 대체 할 수 없는시너지효과 창출효자로서 자치주 당정과 전주 여러민족의 아낌없는 성원이 요청됩니다.   ▶ 정치인과 더불어 언론인,작가,화가,서예가 등 무수한 미칭이 따르고 있습니다.다양한 ‘이름표’가 민족구성원으로서 책임적 자세와 인생목표를 위한 질주에서 비롯된 것인지요?   답:유년시절 화가의 꿈을 시작으로 세상을 관찰하고 재현하는 창조적 흥분에 눈을 뜨면서 거기다 작가였던 선친의 영향으로 문학세계에 대한 호기심도 한몫하여 그런대로 먼 인생행로의 출발을 위한 형상사유능력과 조형예술감각을 키웠지 않았나 생각합니다.그것이 밑거름으로 되여 출판사의 미술편집,문학편집에 입문할 수 있었습니다.대졸생도 아닌 나의 출판사 입사에 결정적 한몫을 한 것은1973년에 출판된 한권의 번역문 단행본 때문입니다.내용번역,장정디자인,삽화제작,표제글 등 ‘전 종목’ 모두를 제가 석권했었지요.   그후 잡지사와 방송국 등 언론기관,신문출판행정기관,대학연단,당선전 기관을 전전하면서 인생초창기에 눈뜨고 키웠던 형상사유능력과 조형예술감각은 줄곧 하나의 저력으로 나를 충동하여 새로운 분야에 입문할 때마다 나를 ‘창조적 긴장상태’에 몰입시켜 그 와중에서 삶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게 했던 것 같습니다.   돌이켜보면 항상 도전하고 그것이 주는 감동과 스릴 속에서 살고 싶은 충동이 나로하여금 ‘여러 우물을 파면서’  화가,작가로서의 자기 완성보다는 화가,작가의 좋은 시중군이나 벗으로서 자기 완성,민족문화의 파수군으로 되기 위한 자기 완성,전반 민족문화를 지켜주고 호소하는 데서 일종의 자기 가치를 실현하도록 부추겼는지 모르겠습니다.향후 계속 나만의 ‘창조적 긴장상태’에 올인할 것입니다.   ▶ 본사 론설위원으로서 《연변일보》 및 애독자들에게 남길 말씀은요?   답:연변일보의 영욕은 조선족 민중의 운명과 직결됩니다.파란만장한 지난70년 세월 조선족 언론의 구심점으로,조선족사회 발전의 견인차로 자리매김해온 《연변일보》입니다.   조선족제1언론지의 새 기원을 열어가야 하는 오늘의 시점에서 ‘연변일보인’의 초심을 잊지 않은 정성과 슬기,근면과 창의력이 당과 정부의 배려,사회 여러 분야의 성원에 힘입어 찬란한 언론의 부흥으로 끈끈하게 이어지리라 확신합니다.   또 시종일관《연변일보》의 발전을 흔들림없이 지켜봐주고 지지와 성원을 아끼지 않는 지구촌 애독자들이 있어《연변일보》는 어려운 여건에서 건강한 행보를 거듭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우리 언론을 눈동자처럼 아껴온 몇세대 애독자들의 사랑과 격려의 마음에 심심한 감사의 마음을 전달합니다. 연변일보 리련화 기자    [채영춘 략력] 연변지부생활잡지사 총편집, 신화사 《반월담》(조선문)잡지 주필, 연변TV방송국 국장, 주신문출판국 국장, 주당위 선전부 상무부부장, 연변대학 겸직 교수로 임직. 성당위 선전부와 성교육청으로부터 ‘고등학교와 신문단위 언론인 상호초빙 천인계획’에 선임, 중국작가협회 제7회 전국대표대회 대표로 당선. 수백편의 수필, 칼럼 발표, 일부는 《조선어문》 교과서에 수록. 에세이집 《래일도 연은 하늘에서 날 것이다》(2001), 《샘이 깊은 물》(2007), 수필집 《세월의 정》(2009, 한문), 에세이집《래일은 오늘에서 모양 짓는다》(2015) 등 출간. 제7회 진달래문예상 영예상, 제8회 진달래문예상 창작상 수상, 2017년 주당위, 주정부로부터 ‘주민족문화 전승발전’특출기여인물로 당선.
2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곡초처리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151  추천:0  2018-04-26
곡초는 생태순환을 거쳐 경작지에로 2018년 04월 16일  작성자: 주청룡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 《오늘의 화제》 시리즈 육성방송   곡초는 생태순환을 거쳐 경작지에로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곡초는 생태순환을 거쳐 경작지에로 돌아가야 한다”란 내용으로 말씀드리려 합니다. 2년전까지만 하여도 봄철에 들어서면서 논과 밭에서 타래쳐 오르는 검은 연기가 온 대지를 휩쓸면서 막대한 대기오염을 조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곡초수거기계가 나와 곡초를 거두어 들이고 있는데 이는 아주 좋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 수거한 곡초가 어디로 가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지금 일부 농민들은 옥수수줄기를 소사료로 하고 있지만 곡초수거기계로 수거한 곡식줄기는 대부분은 재생에너지발전소에 판매되여 연료로 사용되고 있는데 일부 매체에서는 이것을 아주 잘 된걸로 보도 하고 있는데 저의 견해로는 이는 절대적으로 NO. 제창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는 농업의 생태순환에서 엄중한 악순환을 조성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농작물의 줄기를 전부 다 곡초수거기계로 수거하는 것도 아닙니다. 수거하지 못한 곡초는 봄에 나가서 그대로 논과 밭에서 소각하고 있는데 발전소를 가거나 밭에서 그대로 태워버리나 농업의 생태악순환을 조성하는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농업의 생태순환이란 농작물이 토양으로부터 여러가지 영양물질을 흡수하고 태양에네르기로 광합작용을 하면서 생장발육하여 뿌리, 줄기, 잎, 종자, 열매를 맺고 그것들이 다시 여러가지의 경로를 통하여 나중에는 비료로 되여 땅밑으로 들어가서 다시 농작물에 흡수되는 것을 말합니다. 토양은 농작물이 자랄수 있는 여러가지 영양성분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농작물의 씨앗은 토양속에서 발아하여 뿌리가 내리면서부터 토양속의 영양물질들을 흡수하고 광합성작용을 하여 하나의 식물체를 이룹니다. 그런데 토양속의 영양물질들은 제한성을 갖고 있지 무한한 것은 아닙니다. 수십년간 농작물이 자라면서 토양속의 영양물질만 빨아내고 그만한 영양물질을 보충하지 않는다면 토양은 척박하여 더는 농작물의 다수확을 확보하기 힘듭니다. 그 영양물질의 보충이란 바로 동물의 배설물이나 식물의 잎, 줄기 등을 썩혀 농가비료를 하여 밭에 내는것입니다.  곡식줄기를 밭에서 태우면 재밖에 남는 것이 없는데 그 주요한 성분으로는 탄살칼륨(K₂CO₃)입니다. 이렇게 하면 농작물이 수요하는 칼륨원소는 해결할수 있지만 여러해 장기적으로 이런 방식을 취한다면 알칼리성(K₂CO₃가 알칼리성) 토양으로 전화할 뿐만아니라 나머지 성분들은 연기로 되여 하늘로 날아가 대기오염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연기가운데의 이산화류황(SO₂)과 일산화질소(NO)로 하여 산생되는 이산화질소(NO₂)는 유해기체로서 대기를 오염시킬수 있지만 그것이 비료로 되여 땅속으로 들어간다면 농작물이 수요하는 영양원소로 전화하게 됩니다. 이 방면에서 선진적인 생태순환 농법을 하고 있는 이가 있습니다. 그가 바로 왕청현 종산목업(众山牧业)유한회사 리일룡 사장입니다. 그는 대량의 소와 닭을 기르고 20여 쌍의 밭을 다루고 있는데 수거한 옥수수줄기를 매초사료(青贮饲料)로 가공하여 겨울에 소의 주요한 사료로 하며 소가 배설한 분변으로는 대량의 지렁이를 번식시켜 닭사료로 하고 닭똥과 지렁이가 소의 분변에서 영양을 다 섭취한 다음의 잔류물은 유기비료로 다시 밭에 거름으로 내고있습니다. 이렇게 토양 → 농작물 → 가축사료 → 가축분변 → 토양으로의 생태순환을 하게합니다. 이외에도 곡초가 생태순환을 할수 있는 좋은 방법은 늪가스생산설비를 앉히여 곡초를 썰어서 늪까스 생산원료로 하여 다 발효시킨 다음 그것을 비료로하여 다시 밭에 내는것입니다. 이 방면에서는 흑룡강성 녕안시 명성조선족소진에서 시범적으로 “4위1체”생태온실하고 있습니다. “4위1체”생태온실이란 일광온실, 가축가금우리, 변소, 늪가스 이 네개 부분을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경제적이고도 효과적으로 생태농업을 하는 하나의 생산모식입니다. 즉 태양온실의 한쪽에 가축가금우리를 짓고 그 밑에 늪가스생산설비를 앉히고 온실에서 남새, 과일을 생산할수 있고 뿌리, 줄기, 잎 등은 사료로 하거나 늪가스 생산원료를 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늪가스로 밤에 온실안의 온도를 높이거나 주변 주민호에 에네르기를 공급할수 있으며 늪안에서 산생된 발효물질은 작물의 비료로 합니다. “4위1체”생태온실은 토지자원을 기초로하고 태양에네르기를 동력으로, 늪가스를 련결체(纽带)로 종식, 양식을 결합할수 있으며 페물을 보물로 전화시킬수 있는 자연생태순환계통입니다.  이미전에도 일부 농촌에서 늪가스 생산을 한적이 있지만 그렇게 리상적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 주요한 원인은 소규모로 하여 늪가스생산설비를 과학적으로 정밀하게 앉히지 못한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과학기술부문에서 농민들이 농작물줄기를 합리하게 리용할수 있는 방법과 기술지도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만약 이것을 정밀하고 과학적이며 규모적인 설비를 앉힌다면 농촌에서 온돌난방과 주방칸의 에너지 래원도 해결할수 있을 뿐만 아니라 좋은 유기비료도 생산할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까운 곡식줄기를 헛타이 태워버려 대기오염을 조성하는것도 피면하고 그것을 합리하게 리용하여 유기비료도 해결하고 에너지 원천도 해결하여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둘수 있게 됩니다.  지금 정부로부터 농작물줄기를 밭에서 태우지 못하도록 강제조치를 취하고 있는데 농민들로 놓고 보면 정말 딱한 사정입니다. 하지만 상급부문의 지시하에 정부에서는 대기요염으로 인한 조치로 농작물줄기를 밭에서 태우지 못하게 하는 실정입니다. 농민들이 곡초를 처리하지 않으면 한전 파종이나 수전모내기를 하는데 아주 크게 영향과 불편을 주고 있는데 그렇다면 농민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것은 정부와 과학기술부문에서 농민들이 농작물줄기를 합리하게 리용할수 있는 방법과 기술지도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잠시는 생태순환조건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절대로 소각하거나 재생에너지발전소에 가져가지 말고 움푹한 곳에 싸여 놓고 록비(绿肥)를 하는 것이 바람직한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곡식줄거리를 어떻게 종합적으로 리용하든지 나중에는 비료로 되여 다시 땅밑으로 들어가는 것이 가장 리상적인 농업의 생태순환입니다. 오늘은 이만 줄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8년 4월 13일
1    "산노루" 와 "숫자는 시보다도 정직한것이었다"... 댓글:  조회:1995  추천:0  2018-04-26
  + 불혹  백조는  일생에 두 번 다리를 꺾는다  부화할 때와 죽을 때  비로소 무릎을 꺾는다  나는  너무 자주 무릎 꿇지는 않았는가  (이산하·시인, 1960-)  + 마흔                           몸에 난 상처조차 쉽게 아물어주지 않는다  그러니 마음이 겪는 아픔이야 오죽하겠는가  유혹은 많고 녹스는 몸 무겁구나  (이재무·시인, 1958-)  + 마흔 번째 봄  꽃 피기 전 봄산처럼  꽃 핀 봄산처럼  꽃 지는 봄산처럼  꽃 진 봄산처럼  나도 누구 가슴  한 번 울렁여 보았으면  (함민복·시인, 1962-)  + 불혹(不惑), 혹은 부록(附錄)  마흔 살을 불혹이라던가  내게는 그 불혹이 자꾸  부록으로 들린다 어쩌면 나는  마흔 살 너머로 이어진 세월을  본책에 덧붙는 부록 정도로  여기는지 모른다  삶의 목차는 이미 끝났는데  부록처럼 남은 세월이 있어  덤으로 사는 기분이다  봄이 온다  권말부록이든 별책부록이든  부록에서 맞는 첫 봄이다  목련꽃 근처에서 괜히  머뭇대는 바람처럼  마음이 혹할 일 좀  있어야겠다  (강윤후·시인, 1962-)  + 마흔 살  내가 그 동안 이 세상에 한 일이 있다면  소낙비같이 허둥대며 뛰어다닌 일  그리하여 세상의 바짓가랑이에 흙탕물 튀게 한 일  씨발, 세상의 입에서 욕 튀어나오게 한 일  쓰레기 봉투로도 써먹지 못하고  물 한 동이 퍼 담을 수 없는 몸, 그 무게 불린 일  병산서원 만대루 마룻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와이셔츠 단추 다섯 개를 풀자,  곧바로 반성된다  때때로 울컥, 가슴을 치미는 것 때문에  흐르는 강물 위에 돌을 던지던 시절은 갔다  시절은 갔다, 라고 쓸 때  그때가 바야흐로 마흔 살이다  바람이 겨드랑이 털을 가지고 놀게 내버려두고  꾸역꾸역 나한테 명함 건넨 자들의 이름을 모두  삭제하고 싶다  나에게는  나에게는 이제 외로운 일 좀 있어도 좋겠다  (안도현·시인, 1961-)  + 마흔  서른이 될 때는 높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지  이 다음 발걸음부터는 가파른 내리막길을  끝도 없이 추락하듯 내려가는 거라고.  그러나 사십대는 너무도 드넓은 궁륭같은 평야로구나.  한없이 넓어, 가도가도  벽도 내리받이도 보이지 않는,  그러나 곳곳에 투명한 유리벽이 있어,  재수 없으면 쿵쿵 머리방아를 찧는 곳.  그래도 나는 단 한 가지 믿는 것이 있어서  이 마흔에 날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다.  (최승자·시인, 1952-)  + 마흔  먹어도 먹어도 허리가 줄고 시시로  목이 맵니다 마음과 몸이 삐걱대고  번번이 서로를 거역합니다  의연한 척 무연한 척하지만 기실은  매양 갈팡질팡합니다 이따금  관계에 홀려 휘청대기도 합니다  시퍼렇게 날선 작둣날을 타는  어린 무녀의 연분홍 맨발바닥처럼  아찔하기도 하고, 차도를 건너는  민달팽이의 굼뜬 보행처럼  위태롭기도 한, 낙타도 수통도 없이  사막을 건너는, 독사의 축축한 혓바닥  도처에서 널름거리는, 이승의 무간지옥에  다름 아닌, 내딛는 곳마다 허방인, 진창인,  생의 花根이며 火根이기도 한,  (손세실리아·시인, 1963-)  + 마흔을 기다렸다  산허리에 구름이 몰려 있다  알 수 없지만  내가 가고 있으니 구름이 오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빗속에서 바라보는 구름은  고등어처럼 푸릇했으나 파닥거리지는 않는다  추녀에 매달려 울던 빗방울들이  호흡을 가다듬는 저녁 다섯 시  점점 켜지는 불빛들 바라보며 묘하게  마음 편안하다  사랑을 믿지 않는다,는 어느 시인의 말에  방점을 찍는다 그 옆에 사랑은 세숫비누 같아서  닳고 닳아지면 뭉치고 뭉쳐  빨래비누로 쓰는 것이다,라고 적어놓는다  저 구름을 인생이라 치면  죽지 않고 반을 건너왔으니  열길 사람 속으로 흘러들 수 있겠다,고 쓴다  마흔, 잘 오셨다  (함순례·시인, 1966-)  + 마흔 살의 시  숫자는 시보다도 정직한 것이었다  마흔 살이 되니  서른아홉 어제까지만 해도  팽팽하던 하늘의 모가지가  갑자기 명주솜처럼  축 처지는 거라든가  황국화 꽃잎 흩어진  장례식에 가서  검은 사진테 속에  고인 대신 나를 넣어놓고  끝없이 나를 울다 오는 거라든가  심술이 나는 것도 아닌데 심술이 나고  겁이 나는 것도 아닌데 겁이 나고 비겁하게  사랑을 새로 시작하기보다는  잊기를 새로 시작하는 거라든가.  마흔 살이 되니  웬일인가?  이제가지 떠돌던  세상의 회색이란 회색  모두 내게로 와서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  새 옷을 예약하는 거라든가  아, 숫자가 내 기를 시든 풀처럼  팍 꺾어놓는구나.  (문정희·시인, 1947-)  + 사십대  사십대 문턱에 들어서면  기다릴 인연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안다  아니, 와 있는 인연들을 조심스레 접어 두고  보속의* 거울을 닦아야 한다  씨뿌리는 이십대도  가꾸는 삼십대도 아주 빠르게 흘러  거두는 사십대 이랑에 들어서면  가야 할 길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안다  방황하던 시절이나  지루하던 고비도 눈물겹게 그러안고  인생의 지도를 마감해야 한다  쭉정이든 알곡이든  제 몸에서 스스로 추수하는 사십대,  사십대 들녘에 들어서면  땅바닥에 침을 퉤, 뱉어도  그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안다  다시는 매달리지 않는 날이 와도  그것이 슬픔이라는 것을 안다  (고정희·시인, 1948-1991)  *보속(補贖): 죄의 값을 보상함.  + 마흔 살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늦가을 평상에 앉아  바다로 가는 길의 끝에다  지그시 힘을 준다 시린 바람이  옛날 노래가 적힌 악보를 넘기고 있다  바다로 가는 길 따라가던 갈대 마른 꽃들  역광을 받아 한 번 더 피어 있다  눈부시다  소금창고가 있던 곳  오후 세 시의 햇빛이 갯벌 위에  수은처럼 굴러다닌다  북북서진하는 기러기떼를 세어보는데  젖은 눈에서 눈물 떨어진다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  (이문재·시인, 1959-)  + 사십세   집에 가야 할 시간이 훨씬 지난 술집에서  싸움이 났다  노동과 분배와 구조조정과 페미니즘 등을 안주 삼아  말하는 일로 먹고사는 사람들과 즐겁게 술을 마시고 있는데  개새끼들, 놀고 있네  건너편 탁자에서 돌멩이 같은 욕이 날아온 것이다  갑자기 당한 무안에  그렇게 무례하면 되느냐고 우리는 점잖게 따졌다  니들이 뭘 알아, 좋게 말할 때 집어치워  지렛대로 우리를 더욱 들쑤시는 것이었다  내 옆에 동료가 욱 하고 일어나  급기야 주먹이 오갈 판이었다  나는 싸워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단단해 보이는 상대방에게 정중히 사과를 했다  다행히 싸움은 그쳤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굽실거린 것일까  너그러웠던 것일까  노동이며 분배를 맛있는 안주로 삼은 것을 부끄러워한 것일까  나는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싸움이 나려는 순간  사십세라는 사실을 생각했다  (맹문재·시인, 1965-)  + 마흔 살의 동화  먹고 사는 일 걱정되지 않으면  나는 부는 바람 따라 길 떠나겠네  가다가 찔레꽃 향기라도 스며오면  들판이든지 진흙땅이든지  그 자리에 서까래 없는 띠집을 짓겠네  거기에서 어쩌다 아지랑이같은 여자 만나면  그 여자와 푸성귀같은 사랑 나누겠네  푸성귀같은 사랑 익어서  보름이고 한 달이고 같이 잠들면  나는 햇볕 아래 풀씨같은 아이 하나 얻겠네  먹고 사는 일 걱정되지 않으면  나는 내 가진 부질없는 이름, 부질없는 조바심  흔들리는 의자, 아파트 문과 복도마다 사용되는  다섯 개의 열쇠를 버리겠네  발은 수채물에 담겨도 머리는 하늘을 향해  노래하겠네  슬픔이며 외로움이며를 말하지 않는  놀 아래 울음 남기고 죽은 노루는 아름답네  숫노루 만나면 등성이서라도 새끼 배고  젖은 아랫도리 말리지 않고도  푸른 잎 속에 스스로 뼈를 묻는  산노루 되어 나는 살겠네  (이기철·시인,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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