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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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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네방네] - "평양랭면"이 "통일랭면", "평화랭면" 되기만을... 댓글:  조회:5357  추천:0  2018-06-03
'평양냉면·막국수'       관광상품으로 개발 김윤미 2018.06.03.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뉴스데스크] ◀ 앵커 ▶ 지난 남북정상회담 만찬 메뉴로 평양냉면이 전 세계에 소개됐었죠. 이후 우리나라 면 요리에 대한 외국인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관광상품으로도 개발되고 있다고 합니다. 김윤미 기자가 보도합니다. ◀ 리포트 ▶ 보기만 해도 시원한 평양냉면. 역시 먹는 것보다 찍는 게 먼저입니다. 낯선 맛이지만 얼굴에는 미소가 번집니다. [크리스타 건더슨/미국 뉴욕 거주] "차가우면서 신선한 느낌이고요. 식초 맛이 강하고 겨자의 풍미가 좋네요." [마이크 번스/미국 뉴욕 거주] "차가운 국수(냉면)을 먹은 건 처음인데 매우 맛있네요." 한국 면요리에 대한 외국인들의 관심. [아만다/유튜버(WaegukinKorea)] "북한의 지도자가 냉면을 가지고 왔죠. 그 일 때문에 냉면이 약간 유행이 됐어요." 냉면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조쉬/유튜버(영국남자)] "와, 정말 놀라운 맛이야." 특히 일본인 관광객들의 문의가 많아지자 한국관광공사는 한국의 면 요리를 소개하는 책자까지 만들었습니다. 강원도 막국수와 제주도 고기국수 등 지역별 면요리의 특징을 알려주고,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의 차이 라면을 활용한 조리법도 담았습니다. [이학주/한국관광공사 일본팀장] "면류를 좋아하는 일본 분들의 어떤 식문화에 착안해서 많은 일본인들이 한국을 찾고 지방을 방문해 맛있는 면요리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한반도에 평화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지난 4월 외국인 관광객 수도 작년보다 24%나 증가했습니다. 관광업계는 면 요리를 테마로 관광 상품을 준비 중입니다. [이재성/서울관광재단 대표이사] "그 나라의 고유한 음식을 체험해 보기를 원하는 게 하나의 트렌드입니다. 그래서 잘 활성화되면 다시 또 재방문율을 높이는 데 기여 할 수 있어서…" 평양냉면으로 시작된 한국 면요리에 대한 열풍, 이제 문화상품이 됐습니다. MBC뉴스 김윤미입니다. 김윤미 기자  ==================     분류 면류   평양냉면 한국을 대표하는 가장 특징적인 국수는 냉면이 아닌가 싶다.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국수이기 때문인데 우리처럼 일부러 국수를 차갑게 만들어 먹는 민족도 드문 것 같다. 물론 일본에도 차갑게 먹는 메밀국수인 냉소바가 있지만 우리 냉면처럼 그렇게 차갑지는 않다. 여름철 중국 음식점 메뉴로 등장하는 중국식 냉면은 한국인의 입맛에 맞도록 현지화한 것이다. 원래 중국의 차가운 국수인 량몐은 사실 차가운 것이 아니라 뜨겁지 않을 뿐이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국수를 차갑게 만들어 먹었을까? 냉면의 기원을 찾기란 쉽지 않다. 먼저 문자 그대로 차가운 국수라는 뜻의 냉면(冷麪)이 문헌에 보이는 시기는 조선시대 중반이다. 17세기 초반, 인조 때 활동한 문인 장유의 《계곡집》에 처음으로 냉면이라는 단어가 보인다. 냉면을 먹으며 쓴 시인데, 자줏빛 육수의 냉면을 먹으면서 독특한 맛[異味]이라고 표현해놓았다. 글자 뜻 그대로 보면 평소에 먹지 못했던 색다른 맛이라는 의미겠는데, 시 한 편을 놓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독특하다는 표현, 그리고 냉면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했다는 사실에서 조선 중반까지만 해도 냉면이 그다지 널리 보급되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이전에도 차가운 국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냉도(冷淘)라는 음식이 있었는데 고려 말기의 목은 이색은 냉도를 먹으니 시원하다는 내용의 시를 읊은 적이 있고,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긍익도 고려의 환관들이 유두절이면 더위를 피해서 머리를 감으며 냉도를 먹었는데 그 맛이 수단(水團)과 비슷하다고 말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냉도는 중국에서 먹는 차가운 밀가루 국수 내지는 찬 수제비 종류였으니 여름철 시원하게 먹을 수는 있지만 메밀로 만든 우리 냉면과는 차이가 많다. 그렇다면 지금과 같은 냉면은 언제 만들어진 음식일까? 조선시대 문헌에서 냉면이라는 음식이 본격적으로 보이는 것은 18세기 이후다. 다산 정약용은 면발이 긴 냉면에다 김치인 숭저(菘菹)를 곁들여 먹는다고 했다. 정약용과 같은 시대를 산 실학자 유득공 역시 평양을 여행하면서 가을이면 평양의 냉면 값이 오른다고 했다. 이때면 벌써 겨울철에 접어들 무렵이라 수요가 공급을 초과해서 냉면 값이 오를 정도로 평양 사람들은 냉면을 많이 먹었음을 알 수 있다. 평양냉면은 냉면이 널리 보급되며 바로 유명세를 탄 모양이다. 《동국세시기》에도 겨울철 계절 음식으로는 메밀국수에 무와 배추김치를 넣고 돼지고기를 얹은 냉면을 먹는다고 소개했는데 그중에서도 관서(關西) 지방의 국수가 제일 맛있다고 했으니 바로 평양냉면을 가리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다산 정약용과 유득공보다 두 세대 뒤의 인물인 실학자 이규경은 평양의 명물로 감홍로와 냉면, 그리고 비빔밥을 꼽았는데 감홍로는 계피와 생강을 꿀에 버무려 소주를 붓고 밀봉해 담그는 술이다. 40도가 넘는 독주로 감홍로 중에서는 평양에서 담근 것이 유명했다. 평양에서는 고기 안주에 감홍로를 마신 후 취하면 냉면을 먹으며 속을 풀었기에 선주후면(先酒後麵)이라는 말이 생겼다. 시원한 동치미 국물을 베이스로 해 만든 육수에 메밀국수를 말아 먹는 평양냉면은 감칠맛과 구수한 맛이 일품이다. 평양냉면의 특징은 꿩고기나 양지머리를 삶아 기름기를 걷어낸 후 잘 익은 동치미 국물을 같은 양으로 섞어 시원하고 감칠맛이 도는 냉면 국물에 있다. 요즘 우리가 먹는 평양냉면은 현대인의 식성에 맞도록, 또 서울 사람들의 입맛에 맞도록 바뀌어 전통 평양냉면의 맛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 본래의 맛을 기억하는 연세 드신 평양 출신 인사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다. 다행히 서울에도 전통 평양냉면 집이 몇 집 남아 있다. 현대인의 입맛에는 밍밍하기 짝이 없는 전통 평양냉면이지만 평양 출신들에게는 중독성이 꽤 강했던 모양이다. 평양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서도 고향에서 먹은 냉면 맛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한다고 한다. 예전 한국인이 외국에 나가면 김치를 가장 그리워했던 것처럼 평양 사람들도 타향에서 살 때면 문뜩문뜩 떠오른 것이 겨울에 먹는 평양냉면 맛이라고 하니까, 냉면의 맛이 그리운 것인지 고향을 그리는 향수가 짙은 것인지 그 선후를 알 수 없다 하겠다. ========================   성격 향토음식 유형 물품 용도 계절식 분야 생활/식생활 요약 평양 지방의 향토음식.   내용 메밀가루로 만든 국수를 찬 냉면 국물에 말아먹는다. 평양은 서북부의 문화·경제의 중심지로 들이 넓어 밭곡식이 많이 나며 황해에 면하여서 어물도 많고 과일도 풍성하여 먹는 것을 즐기는 고장이다. 음식은 양념을 적게 하여 짜지도 않고 맵지도 않은 담백미(淡白味)를 즐긴다. 이러한 풍토에서 형성된 것이 바로 평양냉면이다. 만드는 법은 먼저 사골뼈를 푹 끓이다가 사태살을 넣고 삶아내어 건진다. 육수는 뼈를 골라내고 차게 식혀서 기름을 걷어내고, 고기는 편육으로 썰어놓는다. 육수와 동치미 국물을 반반 정도로 섞어 소금·묽은장·식초로 간을 맞추어 냉면 국물을 만든다. 메밀가루와 녹말을 섞어서 익반죽하여 국수틀에 넣고 눌러서 국수를 뺀 다음 끓는 물에 삶아 건져서 사리를 만든다. 배도 얇게 썰고 동치미무도 길쭉하고 얇게 썬다. 겨울에는 통배추 김치줄기도 길쭉하게 썬다. 큰 대접에 사리를 담고 편육·김치·삶은 달걀·배 등을 얹고 찬 육수를 붓는다. 식성에 따라 식초·설탕·겨자 등을 넣어서 먹는다. 냉면의 맛을 좌우하는 것은 동치미 국물이다. 큰 독을 땅에 묻고 배추에 비하여 무를 많이 넣으며, 양념은 고추를 많이 쓰지 않는다. 국물은 심심하게 하고 넉넉히 부으며, 젓국은 조기젓이나 새우젓을 조금 쓰기도 하고 안쓰기도 한다. 국물이 익으면 얼음같이 차고 시원하여 냉면 국물에 적합하다. 예전에는 꿩을 삶은 국물을 이용하였으나 지금은 꿩이 귀하여 쇠고기와 사골을 쓰고 있다. -20℃ 내외의 강추위 속에서 뜨거운 온돌방에 앉아 몸을 녹여가며 이가 시린 찬냉면을 먹는 것은 이냉치냉의 묘미가 있다. ≪동국세시기≫에서도 냉면을 겨울철 시식으로 꼽으며 서북의 것이 최고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평양 지방에서 즐기던 냉면은 6·25사변 이후 월남민에 의하여 전국에 퍼지게 되어 사계절 즐겨 먹는 음식이 되었다. ==============   평양냉면 평양냉면 ▶ 평양냉면 : 쫄깃한 면발과 시원하고 깔끔한 국물 맛 덕분에 남녀노소 모두에게 사랑받고 있어요. ====================== 술과 즐기는 평양냉면은 또 다른 별미  -막걸리와 마시면 감칠맛이 한층 깊어져  -맥주와 함께하면 청량감 가득 완벽 궁합  [헤럴드경제=최원혁 기자] 평양냉면의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평양냉면 맛집은 30분 이상 줄을 서야 맛볼 수 있고 HMR(가정간편식)으로 판매되는 평양냉면까지 인기가 꾸준히 오르고 있다. 평양냉면 애호가들 사이에 흔히 쓰는 말이 ‘선주후면(先酒後麵)’이다. 선주후면은 평양에서 유래한 말로 말 그대로 ‘술 한잔 먹고 나서 냉면을 먹어야 제대로 먹는 것’이란 뜻이 담겨있다. 냉면 한그릇이 부족하다 싶으면 미리 수육 한 접시를 추가해 여기에 술 한 두잔을 비우고 난 뒤 먹는 평양냉면은 또 다른 별미가 된다. 그럼 평양냉면과 어울리는 주류에 대해 살펴보자.    냉면 애호가들 사이에 흔히 쓰는 말이 ‘선주후면(先酒後麵)’이다. 선주후면은 평양에서 유래한 말로 말 그대로 ‘술 한잔 먹고 나서 냉면을 먹어야 제대로 먹는 것’이란 뜻이 담겨있다. 사진은 서울의 평양냉면집.   3일 업계에 따르면 평양냉면은 메밀가루로 만들어 면이 거칠고 굵으며 특유의 향과 독특한 식감을 가진다. 시원한 동치미 국물에 꿩, 닭, 소고기 등을 우린 육수를 황금비율로 섞어 메밀면에 말아 먹는 것이 일반적이다. 조미료 맛이 익숙한 이들에게는 자칫 밍밍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한두 번 맛보면 개운하고 담백한 맛에 반하게 된다. 여기에 막걸리를 더하면 평양냉면의 묘한 감칠맛을 한층 더 깊게 느낄 수 있다. ‘지평 생 쌀 막걸리’는 지평의 맑은 지하수와 국내산 원료를 전통 방식으로 주조해 다른 막걸리에 비해 진하면서도 탁하지 않아 목넘김이 일품이다. 또 알코올 도수를 기존 막걸리 대비 1% 낮은 5%로 맞추어 술이 약한 사람도 숙취가 적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평양냉면의 슴슴한 맛에 매료되어 ‘평뽕(평양냉면의 중독성을 빗댄 표현)’, ‘평부심(평양냉면 자부심)’ 등 각종 신조어가 생겨나고 있다. ‘무미(無味)’의 대명사 격인 음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평양냉면을 시큼한 페어해게 브루어리(Verhaeghe Brewery)사의 ‘듀체스 드 부르고뉴(Duchesse de Bourgogne)’ 사워 에일 맥주와 즐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사워 에일은 일반 맥주와 달리 효모나 젖산균 등을 넣어 오크통에서 긴 시간 숙성 기간을 거친다. 와인처럼 신맛과 떫은맛이 나면서도 청량감이 살아 있는 게 특징이다. 블랙체리, 자두, 건포도 등 베리류의 새콤한 과실 향을 품은 산미는 입맛을 돋게 해 평양냉면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게 한다. 이밖에도 남북정상회담에서 건배주로 쓰인 문배술 또한 평양냉면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문배주양조원에서 제조하는 문배주는 문배(토종 돌배의 일종) 향이 난다고 하여 문배주란 이름이 붙었으나 실제로 배는 들어가지 않는다. 조와 수수 등 잡곡만을 이용해 만든다. 발효, 증류시킨 후 6개월에서 1년의 숙성과정을 거치며 잡곡의 담백하면서도 구수한 향이 은은하게 입안에 베여 평양냉면뿐 아니라 수육, 만두 등과도 잘 어울린다. 초창기엔 알코올 도수 40도만 출시했지만 23, 25도 제품도 출시하고 있다.  ======================   '3대 냉면'을 아십니까  평양냉면, 가게마다 육수비법 달라  함흥냉면, 전쟁 피난길 따라 발전  진주냉면, 화재로 맥 끊겼다 부활 한국을 대표하는 3대 냉면. 왼쪽부터 평양냉면, 함흥냉면, 진주냉면. [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한국인의 냉면 사랑은 유별나다. 최근에는 ‘평뽕’(평양냉면의 중독성을 빗댄 표현)‘이니, ’평부심‘(평양냉면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 등 각종 신조어가 생겼을 정도다. 그만큼 냉면은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오랜 세월 한반도에서 사랑받아왔다. 대표적인 냉면광(狂)으로는 구한말 고종과 순종, 백범 김구 등을 꼽는다. 한국전쟁은 냉면을 전국구 스타로 만들었다. 이북 피란민이 향수를 달래는 음식에서 일반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더 나아가 중독 현상까지 일으키면서 어느듯 한국인 대다수가 사랑하는 음식으로 자리잡았다. 기호나 지역에 따라 냉면을 즐기는 방법도 다양하다. 대표적인 것이 평양냉면과 함흥냉면, 진주냉면이다. 앞의 둘은 이북 출신이고, 진주냉면은 유일한 남한 출신이다. 이를 두고 호사가들은 3대 냉면으로 부른다.   ◇담백함과 심심함 사이 ‘평양냉면’    평양냉면은 평안도 지방을 대표하는 음식이다. 추운 겨울, 따뜻한 온돌 아래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동치미 국물’에 국수를 말아 먹던 데서 유래했다. 맵지 않고 담백한 맛이 자랑이다. 평양냉면은 조선 중기 이후 널리 서민에 보급됐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은 평양의 명물로 감흥로와 냉면, 그리고 비빔밥을 꼽았다. 감흥로는 계피와 생강을 꿀에 버무려 조수를 붓고 밀봉해 담그는 술이다. 40도가 넘는 독주로 평양에서 담근 것이 유명했다. 평양에서는 고기안주로 감흥로를 마신 후 취하면 냉면을 먹고 속을 풀었다고 해서 ‘선주후면(先酒後麵)’이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였다. 지금도 술자리가 끝날 때 마지막으로 국수를 먹는 경우가 있는데, 평양에서 냉면이 해장국 역할을 한 풍속에서 비롯한 것이다. 평양냉면의 면은 전분이 아니라 메밀로 뽑았다. 그래서 면이 거칠고 굵다. 여기에 끊기도 별로 없다. 그래서 밀가루나 전분을 섞어 뜨거운 물에 익반죽해서 치대야 한다. 메밀과 밀가루 혹은 전분과의 비율, 반죽하는 기술에 따라 면의 끈기와 질감이 달라진다.   면도 면이지만, 육수가 가장 중요하다. 육수 맛이 면의 맛까지도 좌우해서다. 육수는 꿩 삶은 국물을 으뜸으로 친다. 사골을 우린 육수나 동치미 국물로 꿩 육수를 대신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소나 돼지, 닭 육수를 사용한다. 이름난 평양냉면집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육수비법 한가지씩은 가지고 있을 정도다. 여기에 고명은 삶은 고기와 달걀지단, 배, 시파, 실고추 등 다양하게 쓴다. 겨자와 식초도 빠질수 없는 감초다. 겨자는 국물에, 식초는 면에 뿌려 먹는다.   서울 장안엔 ‘평양냉면 4대 천왕’이 있다. 을지로4가의 우래옥, 을지로3가의 을지면옥, 충무로의 필동면옥, 장충동의 평양면옥이다. 을지면옥과 필동면옥은 한 집안 사이다. 4대 천왕은 거의 한동네에 모여 있다. 동대문시장 일대 상인 중에 실향민이 많았던 것과 관계가 있다. 닭무침으로 이름난 남대문시장의 부원면옥도 비슷하다.   지난해 여름 서울 마포구의 한 냉면집을 찾은 시민들의 모습(사진=이데일리 DB).   분류 면류   함흥냉면 우리나라 냉면을 대표하는 고장은 평양과 함흥이다. 예전에는 황해도 해주냉면과 경상도 진주냉면도 유명했다지만 지금은 거의 명맥만 잇는 수준이고, 평양과 함흥 두 곳의 냉면이 전국 냉면 시장을 평정했다.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은 확연히 다르다. 평양으로 상징되는 관서 지방과 함흥으로 대표되는 관동 지방의 특색이 모조리 반영된 만큼 뚜렷이 구분된다. 일반적으로 물냉면은 평양냉면, 비빔냉면은 함흥냉면으로 알고 있지만 그것이 본질적인 차이는 아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평양냉면을 비벼서 먹기도 하고 함흥냉면을 물냉면으로 먹기도 한다. 하지만 평양냉면은 비벼 먹기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고, 반대로 함흥냉면은 비벼 먹어야 제맛을 느낄 수 있다.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을 구분하는 본질적 차이는 국수를 만드는 면의 재료다. 원칙대로 만들자면 평양냉면은 메밀로 면발을 뽑는 반면 함흥냉면은 메밀이 아닌 감자 전분으로 국수를 뽑는다. 지금은 평양냉면에도 메밀에 전분을 섞고, 함흥냉면 역시 감자 전분이 아닌 고구마 전분으로 만든다고 하니 원초적인 평양, 함흥냉면에 비해 진화했다. 평양냉면은 순메밀로 만들기 때문에 구수하고 담백하며 툭툭 끊어지면서도 쫄깃한 맛이 특징이다. 반면 감자녹말로 만든 함흥냉면은 쇠심줄보다 질기면서 오들오들한 맛이 매력이다. 차가운 국수인 냉면은 원래 겨울철에 먹었기 때문에 늦가을에 추수하는 메밀로 국수를 뽑아야 제격이다. 실제로 함흥냉면을 제외한 다른 지역의 냉면들, 이를테면 해주냉면이나 진주냉면도 모두 메밀국수로 만들었다. 그런데 유독 함경도에서만 감자녹말로 국수를 뽑은 까닭에 독특한 맛의 함흥냉면이 발달했다. 이유는 함경도에서는 메밀을 대량으로 재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함경도 출신 어른들의 회고에 따르면 함경도는 지형이 험한 탓에 메밀조차 재배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메밀이 부족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풍부한 감자를 갈아서 녹말로 만든 후에 국수를 뽑았는데,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감자를 재배한 지역 역시 함경도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라는 책에서 1824년과 1825년인 순조 갑신년과 을유년 사이에 만주의 심마니들이 두만강을 넘어 함경도 땅에 감자를 심었다고 적었다. 남미가 원산지인 감자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최초의 기록이다. 그리고 함경도 회령군 수성천에 사는 사람들은 감자를 심어 양식으로 삼는다고 했다. 감자가 함경도를 통해서 우리나라에 전해진 까닭에 함경도 음식 중에서는 감자로 만든 음식이 유독 많다. 함흥냉면 역시 그중 하나다. 함흥냉면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냉면은 아닌 것이다. 본고장인 함경도에서도 냉면 대신, 녹말국수 또는 농마국수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북한에서는 농마국수라고 하지 함흥냉면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 함흥냉면이라는 이름이 생겨난 것은 해방 이후,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서 평양냉면이 크게 유행을 했기 때문이다. 평안도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만들어 파는 평양냉면이 인기를 끌자 함경도 출신들도 농마국수라는 향토색 짙은 이름 대신 함흥냉면이라는 이름으로 국수를 팔았다. 심심한 맛의 평양 물냉면과 혀가 얼얼할 정도로 맵게 양념을 한 비빔냉면인 함흥냉면이 동시에 인기를 얻었다. 함흥냉면의 또 다른 특징은 냉면에 회를 얹는 것이다. 냉면에 홍어회나 가자미식해, 또는 명태식해를 얹어 비벼 먹는 것인데 사실 회냉면의 역사는 생각보다 길지 않다. 함경도 어르신들의 기억에 따르면 회냉면이 함경도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10년 전후라고 한다. 비교적 역사가 짧은 편인데 따지고 보면 함흥냉면 자체도 그다지 역사가 오래된 음식이 아닐 수 있다. 감자가 우리나라에 최초로 전해진 시기를 1824년으로 보지만 종자 개량을 통해 널리 보급된 것은 1900년 전후다. 따라서 감자녹말로 국수를 만들던 함흥냉면 역시 20세기에 들어서며 발달한 음식일 것으로 짐작된다. 18세기에 이미 명성을 떨친 평양냉면에 비하면 많이 늦은 편이지만 1세기 만에 전 국민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 ◇함흥에는 없는 ‘함흥냉면’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의 차이를 아는가. 많은 사람들은 둘의 차이를 육수에 말아먹는 것을 평양냉면, 양념에 비벼 먹는 것을 함흥냉면으로 알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틀렸다. 이런 식의 구분은 분단 이후 남쪽에서 만들어진 개념이다. 사실 둘의 근본적인 차이는 면을 만드는 재료에 있다. 평양식은 메밀가루로 면을 만들고, 함흥냉면은 감자 전분으로 면을 만든다.  함흥냉면의 유래를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다. 함흥냉면은 일제강점기 때 함경도 사람들이 즐기던 농마국수에서 유래했다. 농마는 녹말의 북한 사투리다. 녹말의 재료는 감자로, 함경도를 대표하는 식재료였다. 함경도는 감자를 재배하기에 생육환경이 적합했고, 크기나 품질도 매우 좋았다. 일제는 이런 함경도의 이점을 살려 개마고원 근처에 대규모 감자농장을 조성했고, 여기서 생산한 감자를 흥남, 함흥, 원산을 통해 일본으로 가져갔다. 당시 함경도 사람들도 감자를 값싸게 구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함흥냉면은 매우 극적인 변화를 겪는다. 냉면 등 북한 음식의 전파 경로를 따지면 실향민들의 피란길이 보인다. 함경도 사람들은 1·4후퇴 때 흥남 부두를 떠나 부산에 도착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고향으로 어서 돌아갈 생각에 속초에 모여들었다. 그러나 고향길은 막혔고, 생계를 위해 속초에서 흔하던 명태 등 해산물이나 건어물을 서울에서 팔려고 중부시장 근처의 오장동에 모였다. 중부시장은 우리나라 최대의 건어물 시장으로, 억척스러운 함경도 상인들이 탄탄한 상권을 형성한 곳이다. 이곳에서 함경도 고향을 떠난 실향민들은 함흥냉면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고향의 중독성 강한 매운맛과 새콤한 회무침의 맛을 잊기 어려워 고향 사람들끼리 즐기다가 상업화에 성공했다. 피란민이 많이 살았던 서울 중구 오장동이 함흥냉면의 ‘성지’로 꼽히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1953년 이곳에 자리 잡은 ‘흥남집’이 대표 식당이다. 고구마 전분에 매운 홍어회 또는 간자미회를 쓴다. 비빔냉면은 매운 양념을 비벼서 내오나, 회냉면은 면에 양념하지 않고 매운 양념과 참기름, 설탕 등을 취향대로 더해 먹는다.  =================     분류 주식류 > 국수 및 수제비류 > 국수 성격 가열하여 익히는 음식 > 물을 이용한 음식 > 끓이는 음식 목차 접기 식재료 부재료 조리방법 참고사항 진주냉면 식재료 메밀국수(생면) 600g, 무김치 150g, 쇠고기(또는 돼지고기) 150g, 달걀 50g(1개), 배 120g(1/3개), 실고추 , 잣 약간, 식용유 적량, 해물육수 1.2L(6컵) 부재료 간장 1/2큰술, 대파 10g(1/4뿌리), 마늘 5g(1쪽), 참기름, 설탕, 깨소금, 후춧가루 약간 전분 1작은술, 물 1/2큰술 마른 명태머리, 건새우, 건홍합, 물 적량 진주냉면 재료 조리방법 1. 냄비에 해물육수 재료를 넣고 끓여 육수를 내서 식혀 놓는다. 2. 소고기는 납작하게 저며 양념한 다음 달걀물을 묻혀 가열한 팬에 싯용유를 두르고 지진 다음 1cm 너빌 썬다. 3. 무김치는 물기를 꼭 짜고, 배는 껍질을 벗겨 각각 0.5cm 두께로 채 썬다. 4. 달걀물에 전분액을 섞어 얇게 지단을 부쳐 곱게 채 썬다(5×0.2×0.2cm). 5. 실고추는 3~4cm 길이로 썬다. 6. 메밀국수는 끓는 물에 삶아 찬물에 여러 번 헹궈 낸 후 사리를 지어 그릇에 담는다. 7. 6에 준비한 쇠고기, 무김치, 배, 달걀지단, 실고추, 잣을 올리고 해물육수를 붓는다. 진주냉면 만드는법 1 진주냉면 만드는법 2 진주냉면 만드는법 3 진주냉면 만드는법 4 참고사항 진주냉면은 지리산 주위 산간지역에서 메밀이 수확되었으므로 이 지역에서 메밀국수를 즐겨 먹은 것에서 유래되었다. 냉면이라면 북한의 평양냉면, 남쪽의 진주냉면이 알려져 있다. ========== ◇평양냉면과 견주다 ‘진주냉면’  “랭면 가운데서 제일로 일러주는 것이 평양랭면과 진주랭면이었다.” 1994년 발간한 ‘조선의 민속전통’이란 북한과학백과사전 일부 내용이다. 메밀가루로 면을 만드는 것도 평양냉면과 비슷하다. 진주냉면의 특징은 육수와 고명에 있다. 남해와 바싹 닿는 진주의 냉면은 마른 명태머리, 건새우, 건홍합 등의 해물을 육수에 더했다. 그 위에 잘게 자른 쇠고기전을 필두로 실고추, 계란 지단과 오이 등을 고명으로 올린다. 원래는 전복과 해삼까지 더해지는 음식이었으나 서민음식으로 사랑받으면서 고명도 소박해졌단다. 또 벌겋게 달군 무쇠 막대를 끓는 육수에 반복해서 담가 비린 맛을 제거한 후 15일간 저온숙성 시켜 깊은 맛을 낸다. 이 중에서 육전이 진주냉면만의 특징이다. 달걀옷을 입혀 부친 육전의 짭조름하고 고소한 맛이 시원한 해물육수와 어우러져 오묘한 조화를 이룬다. 비빔냉면에서는 매운맛을 중화시켜 고소한 맛을 불러내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따로 육전을 한 접시 주문해 같이 먹으면 진주냉면 맛을 두 배로 즐길 수 있다.      진주냉면의 유래는 이렇다. 1800년 말, 진주목에서 나온 숙수(조리사) 한명이 옥봉동 개울가에서 만들어 팔던 것이 시초라고 한다. 진주냉면은 권번가에서, 야식으로 즐겨 먹던 고급요리였다. 권번가는 일제강점기 때 기생을 관장하는 조합이 권번이다. 이 권번이 진주에 있었다. 당시 옥봉동은 기생이 많이 살던 지역이었다. 기생들은 야심한 밤에 냉면집을 찾아 냉면을 밤참으로 먹었다고 한다.   1960년대 중반까지 옥봉동을 중심으로 냉면집은 성행했다. 한집에 배달부만 서너 명씩 있었다고 전해질 정도다. 하지만 1966년, 진주시내 중앙공설시장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하며 냉면 가게도 모두 불타 진주냉면의 맥이 끊어졌다. 그러다 199*년 식생활문화연구가 김영복 씨에 의해 진주냉면은 되살아났다. 김 씨는 북한에서 발행한 ‘조선의 민속전통’에서 ‘냉면 중 제일로 여기는 것은 평양냉면과 진주냉면’이라는 기록을 발견하고 진주냉면을 찾아 나섰다. 김영복 씨는 과거 진주냉면 가게에서 일했던 사람들을 찾아 각자 진주냉면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 후 공통점을 정리해 사라진 진주냉면을 재현해 냈다. 현재 이 재현한 진주냉면을 맛볼 수 있는 곳 중 한 곳이 ‘하연옥’이다.  ===========================         ==================   냉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검색하러 가기  다른 뜻에 대해서는 냉면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냉면 · 랭면 (冷麵) 물냉면 (위) 비빔냉면 (아래) 다른 이름 랭면, 찬국수 (문화어) 종류 찬국수 원산지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역이나 주  평양직할시  평안남도  평안북도  함경남도  함경북도  경상남도  옌볜 관련 나라별 요리  모리오카 냉면 주 재료 오이, 배, 달걀, 메밀, 쇠고기 변형 밀면, 쫄면 비슷한 음식 냉국수, 잔치국수, 막국수 등 냉면(冷麵, 문화어: 랭면, Naengmyeon 또는 raengmyŏn)은 한반도 고유의 찬국수 요리 중 하나로 삶은 국수를 찬 육수에 넣고 양념과 고명을 얹은 요리이다. 냉면은 칡, 메밀, 감자, 고구마 등의 다양한 가루를 이용하여 만든 면(麵)과 썬 오이 등의 생채소와 배 한 조각, 그리고 고기와 삶은 달걀로 이루어진 음식이다. 목차  [숨기기]  1역사 2종류 2.1모양 2.1.1물냉면 2.1.2비빔냉면 2.2지역 2.2.1평양랭면 2.2.2함흥랭면 2.2.3진주냉면 2.2.4연길냉면 2.3퓨전요리 2.3.1모리오카 냉면 2.3.2중국냉면 3식습관 4인스턴트 냉면 5같이 보기 6각주 7외부 링크 역사[편집] 냉면의 기원은 고려시대 중기의 평양에서 유래한다. 1973년 북한에서 간행된 요리 서적에 의하면, 평양냉면은 현재 평양의 대동강구역 의암동 지역에서 처음 나왔다고 하며, 메밀 수제비 반죽을 국수로 뽑은 것이 시초라 한다. 고려 중기의 냉면을 기록한 고문헌에는 '찬 곡수(穀水)에 면을 말아 먹는다'는 취지의 기술이 있다. 현재 남아있는 고려~조선시대 문헌에서는 17세기(1600년대) 초 조선 인조 때 활동한 문인인 장유(張維)의 에 냉면(冷麵)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다. 1849년에 쓰인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겨울철 제철음식으로 메밀국수에 무김치, 배추김치를 넣고 그 위에 돼지고기를 얹어 먹는 냉면이 있다."고 하였으며, 1896년에 연세대에 의해 쓰인 《규곤요람》은 냉면에 대해 "싱거운 무 김치국에다 화청(和淸)해서 국수를 말고 돼지고기를 잘 삶아 넣고 배, 밤과 복숭아를 얇게 저며 넣고 잣을 떨어 나니라."라고 기록 되었다. 또한 1800년대말의 《시의전서》 냉면 편에는 "청신한 나박 김치나 좋은 동치미국물에 말아 화청하고 위에는 양지머리, 배와 배추통김치를 다져서 얹고 고춧가루와 잣을 얹어 먹는다."라고 기록되어는데 고기장국을 차게 식혀 국수를 말아 먹는 장국냉면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1] 특히 고종 황제는 냉면을 좋아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덕수궁 대한문 밖의 국숫집에서 배달하여 편육과 배, 잣을 얹어 먹었다고 한다.[2] 종류[편집] 모양[편집] 냉면은 육수에 따라 물냉면과 비빔냉면으로 분류된다. 물냉면[편집] 물냉면은 보통 위의 재료가 차가운 육수(보통 소고기 육수)에 담겨 나오는 형태이다. 물냉면은 육수 제조법이나, 들어가는 고기나 야채의 종류에 따라 그 종류가 세분화되기도 한다. 비빔냉면[편집] 비빔냉면은 고추장과 기타 재료로 만들어진 빨갛고 매운 양념에 비벼먹는 형태이다. 함경도 계통의 비빔냉면으로는 면을 감자 등으로 만든 함흥냉면, 회를 넣어 매콤하거나 시원하게 만든 회냉면 등이 있으며, 물냉면에 열무를 추가한 열무냉면 등의 변형도 있다. 또한 재료에 따라서, 감자/고구마분을 이용한 냉면, 칡냉면, 또는 메밀 냉면 등으로 분류하기도 하며, 메밀국수도 면을 차게 먹지만 전통적인 비빔 냉면의 범주에 넣지는 않는다. 지역[편집] 평양랭면[편집] 평양랭면(표준어: 평양냉면)은 평양직할시에서 유래 또는 발전된 냉면으로 알려져 있다. 메밀을 주 재료로 만들기 때문에 잘 끊어질 수밖에 없고, 거친 편이다. 그래서 비빔면에는 잘 어울리지 않아 주로 물냉면이 많다. 한편 대한민국에서는 메밀이 건강음식이라는 인식이 있어, 위치나 기후, 재료를 따지지 않고 전국적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메밀을 사용한 비빔냉면도 많이 먹을 수 있다. "); zoom: 1;"> 평양랭면 함흥랭면[편집] 함흥랭면(표준어: 함흥냉면)은 함경남도 함흥시 일대에서 유래한 냉면이다. 함흥 일대에서는 감자의 녹말을 사용한 국수 요리가 발달해, 생선회와 고추장 양념으로 이루어진 회국수라는 이름의 냉면과 물냉면인 농마국수가 있었다. 원래 관북 지방에서 냉면이라는 말이 잘 쓰이지 않아 국수로 불린 것일 뿐, 이 음식들도 엄연히 냉면의 일종이다. 한국 전쟁 이후 함흥의 회국수가 대한민국에 들어와 함흥냉면이라는 이름으로 팔리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의 함흥냉면은 보통 국수 재료로 고구마의 녹말을 사용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내려온 실향민이 만든 유명 함흥냉면 전문점들에서는 원래 함흥에서 먹던 형태의 회국수를 '회냉면'이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에서 현지화된 '함흥냉면'과 구별해서 팔고 있다.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현재는 함흥시 신흥관에서는 회냉면을 팔지 않으나 평양시에 명태회냉면을 파는 식당이 존재한다. 함흥시의 유명 식당인 신흥관에서는 지역에서 먹는 함흥식 물냉면을 맛볼 수 있다. 진주냉면[편집] 진주냉면(문화어: 진주랭면)은 대한민국 경상남도 진주에서 유래 또는 발전된 냉면이다. 조선의 권번가에서 야참으로 즐겨먹던 음식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3] 1960년대 이후로 사라졌다가 1994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발행된 《조선의 민속전통》 식생활풍습 부분에 “랭면 중 제일로 여기는 것은 평양랭면과 진주랭면이다”라는 기록이 남북간 교류가 시작된 이후 대한민국에 전해져서 2000년대 재탄생한 음식이다.[4] 진주냉면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쇠고기육수에 멸치와 바지락, 마른 홍합, 마른 명태, 문어, 표고버섯 등으로 해물 육수를 만들어 뜨겁게 달군 무쇠를 육수에 반복해서 담가 육수의 비린 맛을 제거한 후 보름 정도 숙성시킨 것을 섞었으나 현재는 이 방법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 또, 평양과 함흥의 냉면은 무를 얄게 썰어 절인 것을 고명으로 얹는 데 반해, 진주냉면은 잘 익은 배추김치를 다져 넣고 쇠고기육전과 지단 등 여러가지 고명이 얹어져 모양새가 매우 화려하다는 데에도 차이점이 있다.[5] 2000년대 들어 경상남도 진주시는 지방관광산업 육성을 위해 향토음식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진주냉면을 집중적으로 홍보하기 시작한다, 진주시에서 개최한 '참진주 참음식 페스티벌'에서 진주 고유의 음식으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60년대 이후로 명맥이 끊긴 점과 맛의 깊이, 특히 면의 수준이 낮은 점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다. 현재는 체인점이 많이 등장해 진주 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맛볼 수 있다. [3] 연길냉면[편집] { 주; 필자 = 죽림 편집} 연길냉면 "중국 10대 국수"로 평선               연길시 진달래냉면이 절강성 항주에서 막을 내린 제2회(2013년 8월) 중국식당문화절 및 제1회 중국국수문화절에서 "중국 10대 국수"로 선정됐다.   이번에 선정된 "중국 10대 국수"가운데는 민간에서 중국 5대 국수로 여기는 무한열간면, 북경자장면, 산서칼국수, 란주라면, 사천딴딴면 등 5가지 국수외에도 길림연길냉면, 하남소기회면,항주편 천면,곤산오조면,진강과개면 등 다섯가지 국수가 이름에 올랐다.   연변조선족냉면 제3대 계승자인 김련선이 "진달래 냉면부"를 대표해 시합에 참가했다. 김련선이 만든 연길냉면은 전문가들의 일치한 인정을 받았으며 진달래냉면부는 "중국10대국수점"으로 평의 받았다. 조선족냉면 제2대 계승자인 최기옥은 연길냉면은 녹색건강식품으로서 현대 생활절주에 부합되며 중국10대 국수로 될 자격이 매우 당당하다고 했다.   냉면은 조선족전통음식으로 메밀로 만들어야 국수가 쫄깃쫄깃하다. 또한 육수의 맛이 냉면의 맛을 결정한다. 육수를 만드는 과정에 물이 관건인바 진달래냉면부에서는 20여만을 들여 대형정수설비를 인입해 육수 맛을 보장했다. /종합   연길랭면   연길시 진달래랭면이 절강성 항주에서 막을 내린 제2회(2013년 8월) 중국식당문화절 및 제1회 중국국수문화절에서 "중국 10대 국수"로 선정됐다. 이번에 선정된 "중국 10대 국수"가운데는 민간에서 중국 5대 국수로 여기는 무한열간면, 북경자장면, 산서칼국수, 란주라면, 사천딴딴면 등 5가지 국수외에도 길림 연길랭면, 하남소기회면,항주편천면,곤산오조면,진강과개면 등 다섯가지 국수가 이름에 올랐다. 연변조선족랭면 제3대 계승자인 김련선이 "진달래 랭면부"를 대표해 시합에 참가했다. 김련선이 만든 연길랭면은 전문가들의 일치한 인정을 받았으며 진달래 랭면부는 "중국10대국수점"으로 평의 받았다. 조선족랭면 제2대 계승자인 최기옥은 연길랭면은 록색건강식품으로서 현대 생활절주에 부합되며 중국10대 국수로 될 자격이 매우 당당하다고 했다. 랭면은 조선족전통음식으로 메밀로 만들어야 국수가 쫄깃쫄깃하다. 또한 육수의 맛이 랭면의 맛을 결정한다. 육수를 만드는 과정에 물이 관건인바 진달래랭면부에서는 20여만을 들여 대형정수설비를 인입해 육수 맛을 보장했다. ============={ 주; 필자 죽림 편집}   【서울=서울뉴스통신】류재복 기자 = “연길냉면”이 재차 “중국 10대 브랜드국수”에 선정됐다. 중국요리협회, 중앙TV방송 (7채널)의 주최로 10월 4일(2016년) 섬서성 함양시에서 진행된 “중국 10대 브랜드국수”초청 맛겨룸 및 중화면식문화 포럼에서 “연길냉면”이 “중국 10대 브랜드국수”에 선정됐다.  이는 “연길냉면”이 2013년에 있은 제2회 중국음식업 문화절 및 제1회 중국국수 문화절에 이어 재차 “중국 10대 브랜드국수”에 든것으로 주목된다.  =============={필자 죽림 편집} 연길랭면이 9월초 섬서성 함양에서 펼쳐진 중화면식문화포럼에서 중국 10대 브랜드면료리로 선정됐다. 복무대로(금성복무청사유한회사, 대표 김련희)연길랭면은 연길을 대표하여 길림성 나아가 동북3성을 대표에 이번 맛겨룸에 출전했다. 함양시정부, CCTV, 중국료리협회의 공동주최로 펼쳐진 이번 행사를 위해 각 업체에서는 8월 27일부터 9월 5일까지 10일간 면료리를 전시했다. 또한 이번 행사는 10대 면료리를 만방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10대 브랜드면료리로는 함양 biangbiang면, 산서刀削面、사천担担面、하남烩面、연길冷面、란주牛肉面、산동炝锅面、무한热干面、광동云吞面、북경炸酱面이다. 복무대로 연길랭면을 맛본 시민들은 "맛이 시원하다. 거뿐하다. 매콤새콤달콤하다. 감칠맛이난다"며 엄지를 내밀었다. 매일 준비한 국수량이 모자랄정도로 고인기를 누렸다는 복무대로 연길랭면. 금성복무청사유한회사 김련희대표는 “뭔가 해냈다는 자부심으로 마음이 벅찬다. 이번 행사를 계기로 한가지 음식이 지역경제발전을 이끌어낼수 있다는것을 알게 되였으며 연변을 전국에 알리고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여 뿌듯하다.”고 말했다. 복무대로에서는 이번 행사를 위해 국수기계, 식자재 등을 모두 항공편을 리용해 운송했다. 거리가 멀고 운숭이 불편해 맛겨룸에 참석할가말가 고민도 없지 않았다는 김련희대표,정말 참가하기 잘했다고 그는 말한다. 연길에는 맛좋은 랭면옥이 참 많다. 그중에서도 연길 복무대로 랭면이 연길랭면을 대표할수 있는것은 60년의 력사를 자랑하는 연길랭면의 원조이기때문이며 지금까지 전통랭면의 맛을 살리면서 현대인의 입맛에 맛게 새로운 메뉴를 개발하여 시민의 입맛을 사로잡는 백년기업을 꿈꾸는 기업이기때문이다.  /조글로미디어 문야       ================ 《연길랭면 만드는 일, 행복하고 보람차요 》  편집/기자: [ 안상근 강동춘 ]  [ 길림신문 ] [ 2013-05-23  ]  연길랭면 찾는 사람들을 위해 랭면점 차린 원 연길랭면 주방세프 주옥금 오랜 세월 사람들의 입맛을 달래주며 연변음식의 브랜드로 소문높던 연길랭면이 연길복무청사(服务大楼)의 파가이주와 함께 력사속으로 자취를 감추어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하고있다. 요즘들어 연길시 곳곳에서 다시금 부활하는 연길복무청사 연길랭면점들의 신장개업과 함께 원 연길복무청사 원로랭면세프 주옥금(60세)씨도 연길시목재공사부근에 옥금랭면부를 신장개업하고 사라져가던 연길랭면맛의 부활에 팔 걷고나섰다. 21일, 개업한지 아직 두달도 채 안된 옥금랭면부의 주옥금사장을 만났다. 주옥금사장은 34세때 연길복무청사에 들어가 다년간 연길복무청사 랭면주방일을 맡아하면서 탄탄하게 랭면기술을 익힌 실력자이다. 복무청사에서 퇴직한후에도 연길창명랭면집의 랭면주방장으로 재취직하면서 줄곧 랭면에서 일손을 놓지 않다가 지난해 8월, 60세가 되여서야 랭면을 손에서 놓고 나앉았다. 주옥금씨가 자기로 랭면집을 꾸리게 된것은 본인도 미처 생각못했던 전혀 뜻밖의 일이다. 창명랭면집에서 일손을 놓고 나올 때까지만 해도 주옥금씨는 이젠 자식들도 모두 성장했고 나이도 나이인지라 편안히 쉬면서 여생을 즐기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난해 연길복무청사가 파가이주로 허물어지면서 복무청사의 연길랭면맛을 그리워하면서 찾는 사람들이 많은것을 보게 되자 가만히 앉아있을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길랭면 제작기술을 장악하고있는 기술자로서 사람들이 연길랭면을 찾을 때 모른척하고있는다는것이 마음에 걸려 내려가지 않았던것이다. 《허물어진 복무청사자리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픕니다. 복무청사에서 근무했던 일원으로서 내가 가지고있는 힘만큼 복무대로의 국수맛을 살려보고싶었습니다. 》 결국 주옥금녀사는 이젠 살만하니 집에서 편히 쉬면서 여생을 즐기라는 자녀들과 남편의 반대도 무릅쓰고 지난 3월 30일 옥금랭면집을 오픈했다. 《저는 제가 만든 랭면을 자시는 사람들이 맛있다고 하니 랭면을 만듭니다. 사람들이 찾는 랭면을 만들어 내놓는것은 즐겁고도 행복한 일입니다…》 주옥금녀사의 허심탄회한 속심말이다. 그는 《손님들이 랭면을 드시면서 이 국수 연길랭면맛이 맞네! 하고 긍정해줄 때가 가장 즐겁다》고 말했다. 그만큼 주옥금씨는 다년간의 경험과 실천에서 더듬어낸 독특한 비법의 랭면기술에 강한 자부심과 신심을 가지고있다. 연길랭면이 유명한 원인은 영양과 음식맛의 조합이다 랭면점을 신장개업한후 얼마 안되는 어느날 할머니 여러분이 랭면드시러 들어왔는데 신장개업한 랭면집이라 국수맛이 어떨지 먹을가 말가 망설이고있었다. 주옥금씨는 할머니들에게 《먼저 드셔보고 입맛에 맞지 않으면 그냥 드셔도 좋습니다》하고 랭면을 정성껏 만들어 대접했는데 할머니들의 입맛을 정복한것은 물론 할머니들을 단골손님이 되게 했다. 지금까지 옥금랭면부는 개업한지 채 두달이 안되지만 맛객들이 입소문으로 소문이 나 매일 찾아드는 손님들로 분주하다. 연길복무청사의 연길랭면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것은 누구나 잘 알고있는 일이다. 다년간 연길복무청사에서 근무해왔고 근 30년간이나 연길랭면을 만들어온 랭면기술 보유자인 주옥금씨는 연길랭면의 인기는 단순히 하루아침에 얻어진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연길랭면의 영양과 음식맛은 물론 가장 중요한 인기비결이겠지만 그러한 영양과 음식맛을 내기 위해서는 가장 좋은 식재료와 조리기술이 밑받침되여야 하기때문이다. 《좋은 식재료를 써야 좋은 음식맛이 나옵니다.》 연길복무청사 근무시절부터 깊이 인식하고있던 음식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일가견이다. 음식은 성실하게 만들어야 하며 손님을 속이지 말아야 성공할수 있다는것이다. 아침이면 시장에 나가 가장 좋은 식재료들을 아낌없이 사들여 온갖 정성으로 맛을 내고 다년간 끊임없이 노력하고 련마해 쌓아온 풍부한 조리경험이 어우러져 비로소 누구나 엄지손가락을 내미는 연길랭면으로 거듭나는것이였다. 《큰 욕심은 없습니다. 연길랭면은 연변의 브랜드가 아닙니까? 늙어서 더는 움직일수 없을 때까지 연길랭면을 만들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대접하고싶고 죽기전에 내가 가지고있는 랭면기술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수해서 우리 연길랭면을 더욱 널리 알리고싶은 생각입니다. 》주옥금사장의 소박하지만 마음에 와닿는 속심의 말이였다. ===================== 퓨전요리[편집] 모리오카 냉면[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모리오카 냉면입니다. 모리오카 냉면은 재일 한국인 1세 양용철이 1954년 일본 모리오카 시에서 개발한 함흥식 물냉면을 모태로 한 변형된 냉면의 일종이다. 양용철이 모리오카 냉면을 파는 식당인 《식도원》을 연 이후, 《삼천리》, 《명월관》 등 여러 재일 한국인들이 냉면집 운영을 시작하였고,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어 도쿄에까지 인기 있는 음식이 되었다.[6] 모리오카 냉면1   모리오카냉면2   도쿄의 모리오카 냉면 중국냉면[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중국냉면입니다. 한국식 중화요리이다. 식습관[편집]   평양 시의 옥류관 현대에는 냉면 면이 길고 잘 넘어가지 않아 그대로 먹기 힘들기 때문에, 가위로 면을 적당한 길이로 자르는 풍습이 생겼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한반도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 긴 면발은 긴 수명을 상징하기 때문에 예전에는 면을 함부로 자르지 않았다. 중국에서도 자르지 않고 냉면을 먹으며, 보통 냉면집에서도 자르기 전에 자를지 여부를 꼭 물어본다.[7] 인스턴트 냉면[편집] 청수냉면, 농심 둥지냉면, 농심 태풍냉면 등이 있다. 같이 보기[편집] 한국 요리 막국수 잔치국수 쫄면 밀면 각주[편집] 이동↑ 이동 ↑ 이동:가 나 이동↑ 이동↑ 이동↑ 문주영 기자 (2008년 8월 21일).경향신문. 이동↑ 태국 국립 씨나카린위롯 대학교 객원교수 (2008년 12월 19일). 경남연합일보. =============================     1958년에 오픈한 복무청사 58년 력사 자랑  고객과 친지들을 반갑게 맞이하고있는 김련희사장(우1) 한동안 떠돌던 연길 服务大楼 연길랭면(사장 김련희)이 드디여 제자리를 찾았다. 9월 20일 새로 오픈한 레저종합청사 ‘백리성’ 6층에 服务大楼 연길랭면부가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추억을 더듬으며 옛맛을 느낄수있게 되였다. 이는 연길랭면의 력사를 새롭게 엮어가는 계기가 된다. “1958년에 일떠선 복무청사 연길랭면은 58년의 력사를 자랑하고있습니다. 랭면의 력사를 반세기 넘게 써내려올수 있었던것은 고향의 맛, 민족의 맛을 잃지 않았기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연길복무청사유한회사 김련희사장은 복무청사 연길랭면이 드디여 제자리를 찾았다며 감개무량해했다. 연길복무청사(服务大楼)를 두고 사람들은 연길복무대로(服务大楼)라 부른다. 연길복무청사의 전신은 1958년에 일떠선 연길식당(延吉饭店)이다. 연변자치주의 초대주장 주덕해가 1966년 3월에 직접 설계에 나섰고 연길시중심에 재건토록 했다,그후 세월이 많이 흐르면서 ‘연길랭면부’는 ‘연길복무청사로 개명했고... 연길복무청사에서는 랭면의 맛을 살리기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여러가지 육류와 중약재를 넣어 우려낸 탕으로 육수를 만들었고 여러가지 고명을 얹어 연변인민들이 즐겨먹은 랭면을 개발했던것이다. 복무청사는 일 평균 랭면 2000~3000여그릇을 판매했었다. 이렇게 인기가 짱이던 랭면부가 2012년 6월 2일, 연길시백화청사의 확장건설로 하여 청사가 철거범위에 들면서 력사속으로 사라졌다. “허물어진 복무청사자리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어떻게든 복무청사 연길랭면의 명맥을 이어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2013년 5월 복무청사연길랭면이 환생했다. 연변대학 맞은편에 복무청사 연길랭면부가 일떠서면서 계절이 따로없이 많은 고객들을 맞고있다. 수십년간 복무청사에 근무하던 직원들도 중우호텔에 랭면부를 오픈하고 연길랭면의 원맛을 살리기에 노력해왔다. 이런 와중에 2015년 9월 20일 드리여 복무청사 연길랭면이 ‘백리성’ 오픈과 함께 드디어 제자리를 찾게 되였다. 백리성에 턱하니 자리를 잡은 복무청사 연길랭면, 개업식에는 랭면의 제맛을 느끼보려고 찾아온 고객들로 붐볐다. 특히 이날 늙은 량주가 두손을 꼭 잡고 복무청사 연길랭면부를 찾았다. 더 늙기전에 복무청사의 연길랭면 한그릇이라도 더 맛을 보기위해서란다. “바로 이맛이야~ “ 늙은 량주는 콩국수 한그릇과 랭면 한그릇을 주문하고 두가지 랭면을 맛보면서 엄지를 내밀었다. 오픈식 날 선보인 메뉴들로는 전통의 맛을 잃지 않은 연길랭면과 전통과 현대가 아우러진 남새랭면, 짜장면외에도 젊은이들이 즐겨먹는 즉석음식도 있었다.  김련희사장은 “백리성은 음식, 쇼핑, 헬스, 오락 등을 일체화한 종합청사인것만큼 젊은이들도 즐겨먹을수 있는 메뉴를 추가했습니다."며 "복무대로 연길랭면의 명맥을 세기를 넘어 대대손손 이어갈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전통을 살리면서 새록새록 메뉴개발에 최선을 다할것"이라고 말했다. 연길랭면의 력사를 새롭게 엮어가는 복청청사, 아니 복무대로가 시민들과 외지 손님들이 즐겨찾는 민속식당으로,모두의 입이 즐거운 곳으로 또다시 급부상할것으로 전망된다. ///조글로미디어 문인숙기자   《연길랭면》의 국가표준제정 시급하다 편집/기자: [ 김태국 ]  길림신문 ] [ 2014-08-01] 무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연변의 랭면집들은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있다. 연변사람이면 조선족이든 한족이든 막론하고 여름이면가장 먼저 꼽는것이 랭면일것이다. 그만큼 연변사람들의 랭면사랑은 대단하다. 예로부터 우리 조선민족은 추운 겨울 따뜻한 온돌방에서 이가 시리도록 찬 동치미국에 랭면을 말아 먹었다고 한다. 그 습관이 세세대대 이어져 오면서 랭면은 겨울뿐아니라 4계절 가장 즐겨 찾아먹는 음식으로 되였다. 연변에 살고있는 한족을 비롯한 타민족들도 그 영향을 받아 연길랭면을 즐겨 찾는 형편이다. 연변지역의 랭면은 《연길랭면》으로 불리우면서 지역의 대표음식으로 발돋움했다. 연변에 오는 관광객들은 연변에 오면 꼭 한번 먹어보는 음식으로 연길랭면을 꼽는다. 연변뿐만아니라 북경, 상해, 청도 등 내지에서도 연길랭면이라는 간판을 쉽게 찾아볼수 있고 서울 등 해외에도 연길랭면집이 있다. 이는 연길랭면이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난해 《연길랭면》은 《중국10대 유명 면음식》이라는 영예를 따냈고 올해에는 길림성에서 유일하게 신화넷에서 추천한 《중국미식지도》에 편입되였다. 이런 《국자호》미명은 연길랭면의 브랜드가치가 날따라 높아지고있음을 시사한다. 연변조선족전통음식협회 김순옥회장은 《연길랭면》의 국가표준제정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국가표준을 제정하면 《연길랭면》이 건전한 산업화체계로 발전할수 있으며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고 민족음식문화를 고양하는데 매우 리롭다는것이다. 국가표준이 제정되면 면을 만드는 표준화공장이 늘어날것이고 육수를 만드는 표준화공장이 생겨날것이며 그에 따른 표준화포장공장도 늘어 날것이다. 따라서 민족전통음식문화의 보호발전은 강유력한 탄력을 얻게 될것이며 우리 지역경제와 취업률 제고에 커다란 기여를 하게 된다. 우리는 민족적인 가치야말로 우리지역의 경쟁력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있다. 우리의 오랜 력사속에서 형성된 깊이 있는 문화유산은 남들이 갖지 못한 우리만의 경쟁력이고 우리지역 미래의 희망이 될수 있는 우리민족 고유의 다양한 문화를 상품화할수 있는 유력한 바탕으로 된다. 관련부문에서 우리민족과 우리지역의 대표음식인 《연길랭면》의 국가표준을 제정하는데 하루빨리 나서야 할것이다. /연길인민방송국 아리랑방송 류련   연변동포사회의 자랑이 된 중국 유일의 냉면 계승자 연길 진달래냉면 최기옥 사장     2000년 전국노력모범으로 당선되어 유일하게 한복을 입고 천안문에 오른 최기옥 사장     90년 한국방문으로 기업가 꿈 가졌던 최기옥씨 20년만에 연변조선족이 자랑하는 굴지의 기업가로 성공 총면적 7,000㎡ 규모에 300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진달래냉면 세계로 향하는 유명한 음식브랜드로 자리매김      연변은 '춤과 노래 그리고 축구의 고향'이다. 또 '진달래 고향'이기다 .연변조선족전통음식이라면 김치, 개고기(보신탕), 냉면을 꼽을수 있는데 으뜸냉면으로 당연히 진달래냉면을 꼽을수 있다.  연길시 서시장 근처에 자리 잡은 진달래냉면집(연길진달래민족음식유한회사)은 면적 3,500㎡ 6층 건물로 1층부터 5층까지 진달래냉면, 중식, 한식, 미국 샌프란시스코우육면 등 음식업을 경영하고 있다. 종업원도 100명이 된다.   연길에는 연변대학 맞은편 350㎡ 아리랑미식거리 1,400㎡ 되는 분점이 있고 도문, 훈춘, 돈화 등 연변과 장춘(500㎡), 상해(800㎡), 북경 등 중국 대도시에도 분점이 있다. 총 자산 1억위안에 연간 영업액 2,000만위안에 달하는 연길진달래민족음식유한회사는 창사 20여년 이래 중국요리협회, 국가공상행정관리국 등에서 인정한 전국백성만점신용시범점, 전국신용기업, 전국질량관리활동우수기업, 중화음식명점, 전국녹색음식기업, 전국쌍애쌍평선진기업, 전국노동관계조합기업, 중화정통상가, 중화유명음식점 등 100여개 우수기업상장을 받았다.  '진달래냉면'은 길림성저명상표이며 2006년에 길림성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다. 세계브랜드화를 추진 중인 "진달래냉면"은 미국, 일본, 북한, 한국(2012년)까지 상표등록을 마친 상태다.         최기옥 사장의 가족, 2005년 중앙CCTV에 반영된 20부작 드라마 배경이 된 조선족가정이 되었다.     2006년 진달래냉면이 길림성무형문화재로 지정돼    연변조선족동포들의 자랑이며 민족의 굴지기업으로 일떠 세운 최기옥(60세)사장은 생각밖으로 아주 평범한 한 여성이였다. 옷차림도 소박하고 금품장식품도 하지 않았다. 근면성실한 최씨가 경영하는 현재의 연길진달래민족음식책임유한회사 전신은 1950년대 이 자리에 세워진 연길시제1민족식당이다. 당시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경영했었는데 그후 이씨 아들이 가업을 이어 받아 경영했다. 하지만 파산위기에 처하게 되였다.  1990년 대한민국을 처음 방문한 최씨는 한국의 기업문화와 서비스문화에 큰 깨달음을 안고 귀국해 기업가가 되겠다고 작심했다. 당시 음식공사 당위서기로 재직중이던 최씨는 조직부 상업구당위서기 제안도 마다하고 이 식당을 도맡아 하게 되었다.  그때는 면적이 680㎡,  10여명의 종업원 정도였다. 집조도 없었고 파산에 직면한 빚 뿐이였다. 당시 식당의 주 메뉴는 불고기가 위주였지만 최씨는 주메뉴를 냉면으로 바꾸었다. 냉면은 조선민족이 즐겨 먹는 전통음식이다.   최씨는 다년간의 연구와 개발을 거쳐 굵은 메밀면발에 소고기를 우려서 진하고 시원한 육수 맛을 냈다. 진달래 또한 봄에 제일 처음 피는 꽃이며 우리민족을 대표하는 꽃이기도 해서 식당이름도 진달래식당으로 지었다. 그렇게 탄생한 진달래냉면은 대박을 터뜨려 빚도 갚고 집조도 내왔고 건물도 샀다.    지금의 총면적 7,000㎡ 규모에 300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대기업으로 성장했고, 세계로 향하는 유명한 음식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2000년 연변 최초 음식업의 유일한 전국노력모범 당선  2005년 CCTV 20부작 드라마 '진달래' 배경인물 돼   ◇사업가로 성공한 이후 최 사장의 눈부신 활약들    최기옥 사장은 1994년 연변부녀대표로 한국 방문시 전 김영삼대통령을 접견하기도 하고,  2000년 전국노력모범으로 당선되었다. 연변지역에서 유일하게 음식업으로 당선된 전국노력모범이며 민족단결모범이며 3.8붉은기수였다. 당시 유일하게 한복을 입고 천안문에 올라 민족의 자긍심을 느꼈다고 최기옥 사장은 말한다.   지난 50년동안 전국노력모범중 800명이 북대하 여행을 떠날 때 전국인대 부주임이며 공회주석인 왕조궈(王兆国)의 접견을 받았다. 전국민족단결모범인 최씨는 2005년 제4차 중국민족단결진보표창대회에 참석했으며 중국공산당 길림성당대표 정협위원, 주인대 대표, 3기 시위 위원이기도 하다. 또 전국부련회, 전국우수기업가, 전국우수일터스타이며 길림성음식협회 부회장, 연변음식협회 회장, 주여성기업가협회 회장, 주공상련부회장이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봉화수이며 전국정치사상구락부 이사인 최 사장은 전 온쟈보(温家宝)총리와 함께 남아프리카에도 동행했다.   2010년 아세안유럽정상회담시 유일하게 한복을 입고 참여해 당시 전 이명박대통령 대변인도 만나뵙기도 했고, 2010상해엑스포 '연변의 날' 개막식 테프도 끊었다. 2011년 전 외교부부장인 이조싱(李肇星)도 만나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2005년 중앙CCTV에서 최씨를 주인공으로 제작방영한 20부 드라마 "진달래"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조선족주인공으로 한 드라마이며 처음으로 중국조선족가정을 다룬 드라마다. 중국의 유명 탤런트 위후이(于慧)가 주인공을 맡았다.   중국 유일한 냉면 계승자인 최씨는 "진달래냉면이 유명해지자  중국 청도, 한국 서울 등에서 진달래냉면 간판을 내걸고 분점도 원조도 아니면서 원조인 것처럼 선전하며 행세하고 있다"며 우려를 표했다.   ◇앞으로 어떤 일을?    최기옥 사장은 아들 고봉렬 이사에게 회사를 맡기고 현재 북한과 무역하고 있는 무역회사와 전국 분점 그리고 서시장 근처에 있는 대형창고만 관리하고 5월말쯤부터 주농업은행과 손잡고 소액담보신용대출업무를 진행할 예정이다.  사회에 반환할 줄도 아는 최씨는 정리실업자 100여명을 배치하고 희망공정, 곤난 어머니,곤난 학생, 홍수방지사업, 적십자회, 자선총회 등 사회공익사업에 물건과 돈을 100여만위안을 기부한 아름다운 천사이기도 하다.                                                                                                                                                      [연/정해운 기자 @동포세계신문(友好网報) 제293호 2013년 5월 25일 발행                                           ======================= [카드뉴스 팡팡] ‘평화냉면’이 된 ‘평양냉면 이야기’   # (평화를 상징하는 음식) #단짠단짠 입맛에겐 멀고도 멀지만 요즘 ‘평양냉면’이 핫하죠?   4·27 남북 정상의 공식 만찬메뉴로 등장하며 화제에 오른 평양냉면.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기 전인데도‘남북 정상회담 호재’ 바람을 타고 인기 급상승중입니다. 이 ‘평양냉면’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우선 평양냉면이란 이름 그대로 평양 지방의 향토음식이죠. 메밀가루로 만든 국수를 찬 냉면 국물에 말아 먹습니다. 앙념을 적게 넣어 담백한 맛이 특징입니다.   고기 육수(닭, 돼지, 소)를 단독으로 쓰거나 동치미 국물을 넣어 먹기도 하는데요. 원래 평양에서는 겨울철에 즐기는 음식입니다.   평양에서는 1910년 대 이미 전문적인 평양냉면 식당들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1920년대에는 평양 시내에 수십 곳이 생겨났죠.이 ‘평양의 별미‘ 가 서울에서 자리잡은 것도 1920년대입니다. 당시 낙원동 ’부벽루‘, 광교의 ’백양루‘ 등이 유명했습니다. 1930년대는 서울에서 배달음식으로 평양냉면이 인기였죠.   평양냉면이 일반 시민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한국전쟁 이후입니다.전쟁 후 북한 실향민들이 동대문과 을지로 일대에 터전을 잡으며 그들이 해 먹던 음식을 팔게 되며 알려졌죠.당시 북한 출신 냉면 기술자들을 영입한 일부 식당들은 ‘평양냉면 강자’로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서울에서도 흔히 ‘평양냉면 4대천왕’ 등 평양냉면 맛집 리스트 등이 있는데요.평양에서 평양냉면이 유명한 식당은 옥류관입니다. 평양의 4대 냉면집 (고려호텔식당, 옥류관, 민족식당, 청류관) 중 하나입니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에는 옥류관의 전문 요리사들까지 초빙돼 왔다고 하죠.   평양냉면 하면 맛과 먹는 방법에 대해서도 여러 이야기들이 오갑니다.첫 시식 경험담은 ‘밍밍하기만’, ‘수돗물 맛’ 심지어는 ‘걸레 빤 맛’ 이라는 표현도 종종 등장합니다.먹는 법에 대해서도 ‘면에 식초를 쳐야한다’, ‘면을 가위로 자르면 평양냉면 먹을 줄 모르는 것’ 등등이죠.   실향민의 그리움을 담은 음식이기도 하지만 젊은 층에게는 음미해야 하는 맛, 비밀스러운 맛으로 색다르게 다가가기도 합니다. 어쨌든 평양냉면은 미식가의 음식임에 틀림없습니다.“평양냉면은 양념이 강하지 않기 때문에 시식을 하면서 감각을 집중하게 된다. 감각을 깨우기 위한 음식으로 평양냉면만한 음식이 없다. 그래서 미식가의 음식이다”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   평화냉면으로 거듭나고 있는 평양냉면진짜 북한 옥류관에서 평양냉면을 맛 볼 수 있는 날은 언제쯤일까요?  
2    동시창작 다양화를 두고 / 김만석 댓글:  조회:2156  추천:0  2018-06-03
동시창작 다양화의 방도                             / 김만석     2016년부터 우리 동시단에서는 이른바 동시 다양화운동이 일어났다 그것은 동시 단일화 현상에 맞서 일어난 운동이였다   다시 말하면 당시 동년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깜찍하고 재미나며 엉뚱한 이미지동시만을 동시라고 하는 그런 풍조에 맞서 일어난 운동이였다   당시 필자는 이번 운동이 이미지 동시를 반대하는 것인가고 운동 발기자한테 물어본 적이 있다 이미지는 지금 동시에서 창출되지 않는것이 거의 없는 상황기 때문이였다   알아 본 결과 그번 운동은 이미지 동시만 동시라고하는 그런 동시단일화 견해를 반대하여 일어난 것이지 절대 이미지 동시를 반대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였다   력사가 증명하다 싶이 그번 운동은 출발점이 옳았고 또한 일정한 성과를 이룩한 것만은 사실로 되고있다   하지만 오늘 와서 다시 생각하여 볼 바가 있는 바 그번 동시 다양화 목적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래 다양화, 그 자체가 그번 운동의 목적이였는가?   필자가 보건대 그번 운동의 목적은 동시다양화를 통하여 우리의 동시의 질적 제고를 위한데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필자는 아래에 동시 다양화의 방도를 제기하면서 동시 수준 제고를 위하여 몇가지 의견을 드리고자 한다           1,대상의 다양화에 따르는 동시 다양화       동시는 어른들이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여 그들의 사상감정을 노래하는 서정시이다 여기서 동시의 작자는 어른들이고 동시의 대상은 아이들이라는 것이 밝혀 지고있다   그런데 독자 대상문제가 특수하게 제기되고 있다 아이들이라고 하면 대체로 유년기, 동년기, 소년기 아이들이 망라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나이에 따르는 지식수준,인식수준,분석능력,판단능력에서 완전히 다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하기에 유년을 대상으로 하는 동시를 유년시,동년을 대상으로 하는 동시를 동년시,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동시를 소년시라고 부르게 된다 그리고 이 3가지를 통털어 동시라고 하게 된다   조선 동시를 보면 유년시와 동년시가 위주로 되고 소년시는 아동문학에서 별로 취급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 중국 조선족동시를 보면 동년시가 위주로 되고 유년시,특히는 소년시가 박약한 상황이다   한국 동시는 유년시,동년시,소년시 전부가 일정한 중시를 받고있는 상황이다 그리하여 유년시의 대표로 문삼석,동년시 대표로 김종상,소년시 대표로 신현득과 선용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들 모두가 자기의 애호에 따라 동시를 창작하여 풍만한 성과를 올리면서 한국 동시를 다양화 하고 한국동시수준을 제고하는데 있어서 일정한 공헌들을 하고있다   우리 중국조선족 동시창작에서는 대체로 동년시를 위주로 하면서 동시 단일화 경향이 엄중하게 존재하고 있다 이 점은 동시 다양화에서 마땅히 중시를 일으켜야 할 바라고 생각한다 하여 동년시는 계속 창작하고 유년시 창작에서 노력하여야 하고 특히는 소년시 창작에서 일대 전변을 가져 와야 한다       2,형식의 다양화에 따르는 동시 다양화       동시에는 정형동시,자유동시,산문동시가 망라된다   중국 조선족 동시를 따져 보면 1980년대초 까지 정형동시가 판을 쳤댔다 다시 말하면 7.5조 1행에 4행 1련의 격식을 갖추었었다   하여 한국 리재철교수는 우리 중국조선족동시를라고 하면서 아이들의 감정정서가 어쩌면그렇게 격식화될 수 있는가고 질타한 적이 있다   그러다가 1980년대 후반기부터 한석윤이 7.5조의 각을 뜰던 데로부터 시작하여 점차 자유동시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우리 동시는 자유동시 시대에 진입하게 되였다 자유률을 지향하면서부터 우리 동시는 자유분방한 아이들의 감정정서를 마음대로 토로 할수가 있었다   그렇다고 하여 정형동시를 무턱대고 비난하거나 무시하여서는 아니 된다 정형동시도 능히 성공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 문삼석의 동시 는 그의 좋은 실례로 된다   이 동시는 전형적인 7.5조로 된 정형동시이다 이런 정형률을 취하면서도 두루미처럼 고결한 아버지의 형상을 우리 눈앞에 보는듯이 성공적으로 그려낸 것이다   동시에는 산문동시도 있다 그런데 우리 동시단에서 이런 산문동시를 찾아 보기 힘든 것이 유감으로 되고있다   이렇게 동시는 동시형식으로부터 착수하여 다양화할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할것이다           3,종류의 다양화에 따르는 동시다양화       동시에는 서정동시,서사동시,서경동시,철리동시,의인화동시,이미지 동시 등이 망라된다   서정동시는 동시의 대표성적인 종류이다 서정동시는 아이들의 감정정서를 노래한 동시로서 지난날 우상화시대와 계급투쟁 시기에는 구호식 동시로 된 적이 있었다 그때 독자들은 아무런 사상준비도 없는데 작자부터 제 먼저 흥분되여 ,감탄사를 련발하는 병태적인 수법을 취하였었다   그러나 개혁개방이래 그런 좌적인 영향에서 벗어나 고향과 조국,산천과 자연을 노래하는 동시들이 나타나 아이들의 감정정서를 노래하게 되였다   서사동시는 다른 말로 화적동시라고 한다 이런 동시는 이야기성이 있기에 아이들의 흥취를 불러 일으킬 수가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 어린 독자들과 접근하기 좋은 우점을 가지고 있다   서경동시는 자연환경을 보고 거기서 느낀 점을 노래하는 동시이다 일명 회화적 동시라고 하기도 하다 이런 동시는 아름다운 화폭을 아이들에게 안겨 주어 미적 향수를 직접 느끼게 하는 우점을 가지고 있다   철리동시는 아이들의 사색을 불러 일으키며 일정한 철학적 도리를 안받침해 주는 동시이다 하기에 사색적인 철리동시라고도 한다 이것은 아이들에게 사유능력을 제고시키고 철학적 관점을 형성시키는데 유리한 우점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동시인 윤석중의 동시 은 많은 사색을 불러 일으키는 유년 철리동시이다   이 동시는 그 또래 아이들이 아빠는 왜서 가지 않고 아가는 왜 자지 않는가를 곰곰히 생각케 한 그런 사색적인 철리동시이다   우리의 동시는 1980년대 후반기까지 작자의 시적주장을 표출화 하면서 정치를 위하여 복무하는 그런 구호식,전투식 동시들로 일관되여 왔다 그러다가 개혁개방의 심화에 따라 우리의 동시는 시적 주장을 표출화 하는 것을 반대하고 시적주제를 시적형상에 무르녹여 노래하는 감각적 이미지동시 시대에 들어서게 되였다   이렇게 되여 우리 동시는 상술한 여러가지 형태를 취하면서 자기의 특징을 살려 나왔다   아무리 동시가 이미지 동시 시대에 들어섰다고 하지만 우리는 기타 동시도 홀시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것이다   김철호의 동시 은 우리 동시에서 창작된 회화적동시의 대표작이라고도 할수가 있다 이 동시는 극히 짧은 동시 언어로 청각적으로 그리고 시각적으로 도라지꽃을 우리의 눈앞에 보는듯이 그려주었다   김성문의 동시 은 서사동시이다   동시인은 등산하러 가면서 본 다람쥐,토끼,수리개를 형상적으로 재현하면서 등산 가는 이야기를 쓰고 있다 그러다가 등산길은 동화나라 가는 길이라는 엉뚱한 시적인 결론을 내리여 독자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있다   김수복의 동시는 철리동시의 하나이다 여기서 시인은 자랑할 줄 모르는 황소의 착한 성미를 아이들 정도에 맞게 노래하고 있다   이미지 동시에서 보면 한석윤의 을 들수가 있다 이것은 우리동시단에서 처음으로 창작된 이미지 동시의 대표작으로 된다   이렇게 우리의 동시는 력사적으로 다양화 되면서 창작되여 내려왔다 하여 동시의 다양화를 위하여서는 앞으로도 이미지동시 한 종류의 동시만 쓰지 말고 여러 종류의 동시를 함께 써야 할것이다       4,표현수법에 따르는 동시다양화   동시표현수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여기서는 주로 비유법,의인화수법,이미지수법 등 표현수법만 연구하기로 한다       첫째, 비유법       비유에는 직유,은유,환유가 있다   직유는 대상을 다른 사물에 등 보조적수단을 리용하여 비겨 이르는 방법을 말한다 우리의 동시는 1980년대 중반까지 이런 직유를 많이 리용하여 왔었다   은유는 그 어떤 보조수단을 쓰지 않고 직접 한 사물을 다른 사물에 비겨 이르는 방법이다 즉 원관념을 보조관념으로 표현하는 방법이다 이런 은유는 1980년대 후반기부터 우리 동시창작에 활발히 운용되여 우리 동시는 새로운 차원에 오르게 되였다   은유에는 단순은유와 병치은유가 따로 있다 우리의 동시인들은 지금 한창 병치은유도 시도해보는 과정에 있다   일찍 김성문은 병치은유를 동시창작에 도입하여 보았다 그의 동시 가 그 례로 된다   작자는 여기서 종달새를 화살,민들레 돌멩이로 은유처리를 하여 보았다 물론 성공하였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의도만은 리해할만한 것이다   환유는 의미가 전의되는 방법의 한가지이다 이를테면 는 원래 태양을 일컬으는 말이였는데 후에는 한해 두해라고 하면서 의 개념을 가지게 된것이다 그리고 은 워낙 사물을 보는 인체기관으로 사용되던것이 같은 데서는 의 개념을 가지게 된것이다       둘째,의인화       의인화는 객관 사물이거나 동식물에 인격을 부여하여 아이들과 동격상태를 형성하여 주어 보다 친근감을 불러 일으켜 다정감을 자아내는 우점을 가지고 있다   의인화 동시 창작에서 성과를 올린 동시인은 문삼석이다 그이 동시 은 아주 재미난다
1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동물연구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724  추천:0  2018-06-03
[특파원리포트] 한국 수달, 日 대마도에 상륙했나?..              3마리 서식 유력 나신하 2018.06.01.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최상위 포식자 수달…생태계 균형의 상징 밀렵이나 서식지 파괴 등 인간의 탐욕으로 개체수가 급감하면서 멸종위기로 내몰리는 동물이 늘고 있다. 수달이 대표적이다. 몸통 길이 65∼110cm, 몸무게 5∼14kg에 불과하지만, 사실 하천이나 저수지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이자 핵심종에 속한다. 핵심종은 단위 면적당 개체수가 많지는 않지만 특정 생태계의 균형을 유지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동물이다. 핵심종이 존재한다는 것은 해당 생태계가 건강하다는 징표다. 핵심종이 사라진다는 것은 생태계의 건강성에 적신호가 켜졌다는 증거이다. 사진출처 : 연합뉴스 수달이 서식한다는 것은 수달의 주된 먹이인 어류를 비롯해 조류, 포유류, 양서류, 파충류들이 서식하는 환경이 갖춰졌다는 증거이다. 그래서 수달은 하천 생태계의 균형성과 건강성을 보여주는 지표이다. 서식이 확인되지 않았던 지역에서 수달의 흔적이라도 발견되면 학계와 환경단체 등이 흥분하는 이유이다. 환경 파괴를 감수하더라도 자연을 개발해 돈을 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기업이나 지자체 입장에서 개발 예정지역의 수달 발견은 일종의 재앙이 될 수도 있다. 지역 개발업자들과 지역 환경운동가들이 수달 서식 여부를 놓고 갈등을 빚는 이유이다. 국립공원관리공단에 따르면, 수달은 설악산, 치악산, 월악산, 속리산 등 산악 지역과 태안해안, 변산반도, 한려수도 등에 폭넓게 서식하고 있다. 분포 지역은 넓어도 개체가 워낙 적기 때문에 멸종위기종 1급, 천연기념물 330호로 지정해 엄격하게 보호하고 있다. 새로운 수달 서식지가 발견될 때마다 환경부와 국립공원관리공단 등 유관 기관, 그리고 환경 보호단체에는 비상이 걸린다. 자칫 밀렵에 희생되거나 극성스러운 관심 탓에 서식지가 파괴되지 않도록 구체적 장소를 비밀에 해줄 것을 신신당부한다. 5월30일은 ‘세계 수달의 날’ 수달은 국제적인 보호종이다. 세계 곳곳에서 서식하고 있지만, 모피를 노린 밀렵과 서식지 파괴로 멸종위기에 몰려 있다. IUCN(국제자연보존연맹)의 Red List(적색목록)에서 취약종으로 지정돼 있고, CITES(멸종위기 야생동·식물의 국제거래에 관한 협약) 부속서에서 1급으로 분류돼 있다. ‘CITES 1급’은 상용목적의 국제거래가 전면 금지된 생물종이다. 수달은 반려동물로 인기가 높지만, 상업적 거래는 원칙적으로 불법이다.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5월30일은 세계 수달의 날이다. 영국의 NPO(비영리 기구)가 5월 마지막 주 수요일을 ‘세계 수달의 날’로 지정해 국제적인 관심과 보호를 호소하고 있다. 일본에서도 동물원에서 수달의 날 기념행사를 여는 등 각별한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혼슈중서부 기후 현 가카미가하라 시의 수족관에서는 수달의 날을 맞아, 수달의 생태와 특징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이벤트를 6월 10일까지 열고 있다. 수족관에서 볼 수 있는 수달은 ‘일본수달’은 아니라 ‘작은발톱수달’이다. 수달 중에서 가장 작은 종류로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에 주로 서식한다. 일본수달은 1979년 이후 야생에서 자취를 감췄다. 서식 흔적도 없었다. 사실상 멸종된 것으로 알려졌다. 녹지가 많은 일본이지만, 수달이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환경이 된 셈이다. 日 대마도에 나타난 수달…38년 만의 경사 2017년 2월 일본 나가사키 현 대마도에서 자동촬영 카메라에 수달의 움직임이 포착됐다. 38년만의 발견에 생태학계가 술렁였다. 정부차원에서 섬 전체에 대한 조사가 실시됐다. 분변을 채취해 분석했더니 수달 DNA가 나왔다. 7월과 10월에도 수달의 이동 모습이 촬영됐다. 7월 16일 새벽 3시쯤 류큐대학 동물생태학 연구실의 카메라에 포착된 수달은 무인카메라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최근 일본 환경성은 현지 조사를 실시한 결과, 대마도에 서식하는 수달은 암컷과 수컷을 포함해 3마리일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최초의 분변 DNA 분석 결과, 한국 등에 서식하는 수컷 수달 1마리가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후 다른 배설물의 DNA를 분석한 결과, 암수컷 2마리가 더 살고 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새롭게 생존 가능성이 제기된 2마리의 경우 유전자 형태가 유사해 부모나 형제 등 혈연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대마도 수달은 한국에서 갔을까? 수십 년의 경사이지만, 일본 정부는 아직 조심스럽다. 일본에서 발견됐다고 일본 수달은 아니니까. 일본 환경성은 대마도 수달이 한국 수달일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대마도에는 수족관이 없다. 눈에 띄지 않았을 뿐 이미 서식 중이었거나 외부에서 건너왔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대마도는 우리나라 쪽에 더 가깝다. 직선거리로 50km정도에 불과하다. 게다가 대마도 쪽으로 해류가 흐르고 있다. 한반도 살고 있던 수달이 표류하거나 헤엄쳐 건너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환경성도 한국 수달일 가능성을 주목하고 유전자에 대한 정밀 비교 분석 작업을 서두르고 있다. 만약 한반도 수달이 대마도로 건너간 것이라면, 우리 수달이 일본 지역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이자 핵심종으로서 생태계의 균형과 건강성을 지킨다는 측면에서 평가할 수 있다. 물론 일본 입장에서는 조금 실망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지만. /나신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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