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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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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쉼터] - 그대들은 룡정을 아는가... 댓글:  조회:3392  추천:0  2018-06-13
[용정의 명산과 명인-제1편] 고목 기슭의 옛 샘터를 찾은 그 도사 (ZOGLO) 2018년6월12일  베이징 김호림 특별기고 용정 지신진 성동촌 염지밭골의 옛 가옥, 최서해가 한때 이 마을에서 살았다고 한다. (흑룡강신문=하얼빈)오랑캐령을 넘으면 솟을 바위 하나가 북쪽에서 엎어질듯 달려온다. 대립자(大砬子), 중국말 발음 그대로 달라자라고 불리는 벼랑바위이다. 두만강을 건넌 이민들은 이때부터 간도 땅을 발로 밟게 된다.   바야흐로 수레의 자국을 따라 꽃향기처럼 피어나는 흙의 이야기는 이렇게 글에서 시작된다. 오랑캐령을 올라서니 서북으로 쏠려오는 봄 세찬 바람이 어떻게 뺨을 갈기는지.   용정 지신진 성동촌 염지밭골의 옛 가옥, 최서해가 한때 이 마을에서 살았다고 한다.     "에그 춥구나! 여기는 아직도 겨울이구나."   하고 어머니는 수레 위에서 이불을 뒤집어썼다.   "무얼요, 이 바람을 많이 마셔야 성공이 올 것입니다." 나는 가장 씩씩하게 말했다. 이처럼 기쁘고 활기로웠다.   작가 최서해(崔曙海, 1901~1932)가 소설 '탈출기(脫出記)'에 서술한 장면이다. 이때의 간도는 곧 하늘 아래에 살아있는 산수화를 그릴 듯 했다. 정작 '탈출기'의 세 식구는 1920년대 간도에 이주한 후 금세 오랑캐령의 강추위처럼 힘들고 달라자의 벼랑바위처럼 힘든 세파에 시달린다. 그들은 촌 거리에 셋방을 얻어 살았다. 온돌장이(구들을 고치는 사람)로 일했다. 어머니는 나무를 줍고 아내는 삯방아를 찧었다. 나중에 주인공은 대구 장사로 콩을 바꿨고 콩 열 말로 두부 장사를 시작한다. 학대사가 사진으로 찍혔던가, 고목에 돼지얼굴이 나타난다.   품팔이, 나무장수, 두부장수… 실은 저자 최서해의 힘든 생활고의 한 장면이었다. 삶 자체가 소설이던 작가였고, 소설은 '체험의 작품화'의 소산이었다. 최서해는 오랑캐령을 넘은 후 곧바로 염지밭골에 행장을 풀었다. 염지밭골은 오랑캐령의 일부인 오봉산(五峰山) 기슭에 위치한다. 마을 이름을 만든 야생 염지는 한때 이르는 곳마다 무더기로 자라고 있었다고 한다. 염지는 함경도 방언인데 부추라는 뜻이다. 훗날 염지밭골은 중국글로 지명을 적으면서 구전동(韭田洞)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구전동의 최서해는 나중에 조선족 작가의 회억에 나타난다고 우리 일행을 안내한 남명철(南明哲)이 알려주었다. 남명철은 구전동이 소속한 오랑캐령 기슭의 지신진(智新鎭) 토박이다. 그보다 남명철은 문학인으로 고향에 등장한 작가 최서해에게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었다.   실제 "(최서해는) 생활난으로 1920년대 간도의 달라즈(자)에 와서 생활을 하였다… 자서전 같은 '탈출기'의 주인공처럼 어머니와 아내는 매일과 같이 두부를 앗아 연명하였다"고 채택룡(蔡澤龍, 1913~1998)은 그의 문집에 소상히 기록한다. 채택룡은 오랑캐령 바로 저쪽의 함경북도 회령에서 출생, 1938년 용정에 이주하여 조선족 아동문학의 창시자로 거듭난 문학인이다.   "예전에는 구전동에 안내판이 있었다고 들었는데요, 그때 이 안내판에 ' '탈출기'의 저자 최서해의 고향'이라고 밝혔다고 합니다."   이 안내판은 몇 해 전에 어디론가 '탈출'을 했다고 한다. 왜서 안내판이 잃어졌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안내판이 서있던 옛 마을은 더구나 30여 년 전에 벌써 '탈출'을 하고 있었다. 염지밭골의 구전동은 또 성동촌(城東村) 1대(隊, 촌민소조)로 개명하였다. 성동촌은 화룡현(和龍縣) 현성의 바로 동쪽 마을이라는 의미이다. 명동의 윤동주 생가   화룡현 현성은 선통(宣統) 원년(1909) 달라자에 설치, 성안에 관청이 개설되었고 또 점포, 수공업장 등이 개설되었다. 달라자는 이민들이 북간도 내지로 들어오는 교통요지였다. 아흔아홉 굽이의 오랑캐령을 넘어서면 강기슭의 길을 따라 달라자에 이르게 된다.   현성의 관청 아문(衙門)은 지신촌 1대에 있었다. 아직도 옛집 한두 채가 달라자에 잔존하고 있었다. 남명철은 옛 지명처럼 멀어지는 기억을 더듬어 땅위에 널어놓았다.   "그때 최서해는 두부를 앗은 후 달라자에 와서 판 것 같다고 하는데요."   소설의 옛 이야기가 다시 아문을 비집고 나오고 있었다. 두부요, 두부를 사요! 백옥 같은 그 두부를 남명철의 선인(先人)도 언제인가 밥상에 올리지 않았을까.   남명철의 가족은 증조부 때 바로 오봉산 기슭에 이주하고 있었다. 최서해가 살았던 염지밭골에서 불과 몇 리 정도 떨어진 동네이다. 현성의 남쪽에 위치한다고 해서 훗날 지신진 성남촌(城南村) 6대라고 불렸다고 한다.   마을은 동치(同治, 1861~1875) 말년에 생겼다. 이름을 장풍동(長豊洞)이라고 했다.   "길 장(長), 풍작 풍(豊)을 쓰지 않아요? 해마다 풍작을 갈망해서 생긴 이름이라고 하던데요."   마을의 어른들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라고 남명철이 밝힌다. 그래서인지 애초부터 곡식이 잘 자라고 있었다. 마을을 개척할 때 콩의 꼬투리는 고랑을 메우고 있었다. 땅이 기름져서 콩과 풀이 한데 어울려 허리를 치고 있었다고 한다. 복구한 송몽규의 생가, 명동의 윤동주 생가 근처에 있다.   장풍동은 오봉산에 들어서는 노루목이다. "예전에 동네 노인들은 산으로 들어가려면 먼저 제사를 꼭 올려야 한다고 하시던데요."   옛 기억은 장풍동의 조밥과 옥수수떡, 산나물처럼 남명철의 동년을 갖가지로 뒤범벅하고 있었다. 옛날 오봉산 기슭에는 암자가 있었고 또 샘터가 있었다. 암자의 목탁소리는 샘에서 흘러나오는 물처럼 그칠 새 없었다.   옛 샘터는 장풍동의 북쪽에 있던 남석동(南夕洞)에도 있었다. 남석은 평안도 방언으로 양지쪽이라는 의미이다. 옛 샘터는 세 고목의 기슭에 있다고 해서 삼고목(三古木) 샘터라고 불리고 있었다. 옛날 오랑캐령을 내린 길손들은 고목의 그늘 아래에 잠깐 다리쉼을 하면서 갈한 목을 달랬다고 한다.   "동네 노인들이 말씀하시는데요, 조선 시대의 유명한 무학(無學)대사도 이 샘터를 다녀갔다고 합니다."   남명철이 전하는 남석동의 전설이었다.   전설에 등장하는 무학대사는 조선왕조의 건국공신인 국사(國師)로 5백년 도읍지 한양으로 천도를 주장한 풍수지리학의 대가이다. 그는 도참(圖讖) 비기(秘記)를 공부하고 백두대간을 숙지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백두대간의 지맥인 천불지산에 무학대사의 발자국이 나타나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웬 일인지 샘물은 오래 전부터 옛 길손처럼 종적을 감추고 있었다. 느릅나무가 장승처럼 여전히 샘터를 지키고 있었다. 느릅나무는 다른 고목과 달리 가지가 제멋대로 엉키고 구불구불 자라고 있었다. 특이한 수상(樹相)이었다. 동네의 신주(神主)라고 누구도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한다고 한다. 검색엔진 바이두에 나오는 천불지산.   기인(奇人)은 이상(異相)을 현시(顯示)한다. 무학대사는 특이한 골상(骨相)을 지니고 태어났다. 너무도 못생겼다고 해서 아버지는 탯줄을 끊기 바삐 멀리 내다버렸다. 학들이 날아와서 아기를 감싸 안고 보호하자 그제야 기이하게 생각하고 도로 데려다 키웠다고 한다. 정말로 얼굴 생김새가 못생겼나 본다. 무학대사가 훗날 왕으로 등극한 이성계(李成桂)와 지리산(智異山)에서 주고받은 농담이 있다.   "대사(大師), 오늘 대사의 얼굴은 돼지 같이 보입니다."   "전하(殿下)의 용안(龍顔)은 제 눈에는 부처님 같아 보입니다."   "한번 웃자고 그랬는데 과인(寡人)을 부처님 같다니요?"   "부처 눈에는 부처님,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지요."   우연이라면 기막힌 우연이 아닐 수 없다. 샘물터의 느릅나무 밑둥에는 뒤죽박죽의 돼지 얼굴 모양이 나타난다. 또 이 돼지를 우롱하듯 느릅나무의 왼쪽에는 웬 원숭이가 그네를 타고 있었다.   정말이지 무학대사와 이성계의 야담이 고목에 이상(異相)으로 현시하고 있을까…   실제 무속인(巫俗人)의 눈에는 달라자가 단지 산의 바위가 아니다. 하늘에서 새처럼 땅에 날아 내린 별이다. 와중에 천상의 문을 열어 글을 받은 도사를 문창성(文昌星)이라고 부른다. 글의 도사는 신통력이 통하여 글이 뛰어나다. 그 별의 도사를 하늘의 부처님이 일부러 점지하여 달라자에 내려 보냈던가. 최서해와 같은 글의 별, 도사는 달라자에 군체를 이루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길표식으로 되어 있는 명동 윤동주 생가 표지석.   시인 윤동주(尹東柱, 1917~1945)의 글이다. 윤동주는 증조부 때 함경북도 종성에서 두만강을 건너 개산툰(開山屯) 일대로 이주, 1900년 조부 때 달라자의 명동촌으로 이사를 했다. 윤동주가 남긴 100여 편의 시는 오늘도 진실한 자기성찰을 바탕으로, 순수하고 참다운 인간의 본성을 그림으로써 해맑은 영혼의 징표로 되고 있다.   윤동주는 오랑캐령의 기슭에 솟은 시단의 별이요, 별의 시인이었다. 그의 생가는 현재 명동 나아가 용정의 명소로 되고 있다. 학계의 일각에서는 윤동주를 일제시기 민족 독립의식을 고취한 '애국적 시인'으로 평가하고 있다.   일찍 문학인으로 명동에 소문을 놓은 명인은 윤동주의 고종사촌인 송몽규(宋夢奎, 1917~1945)이다. 송몽규는 벌써 중학교 3학년 때인 1934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주변을 놀라게 했다.   뚜렷한 민족의식으로 독립을 갈망했던 송몽규는 윤동주를 반일독립의 길로 이끈 키잡이였지만, 명동 나아가 연변에 새별처럼 떠오른 동주의 명성에 그늘이 가려 있으며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윤동주의 생가에서 바로 길 건너 쪽에 있는 송몽규의 생가는 아직도 명동 참관자들의 방문코스에 잘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송몽규는 윤동주와 한 고향 한집에서 태어났고 함께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였으며 함께 용정 은진(恩眞)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때 민족주의자의 영향을 받아 중퇴하고 중앙군관학교 낙양(洛陽)분교 한인반을 다녔다. 이 한인반은 한국임시정부가 반일독립전쟁에 필요한 군사간부를 양성하고 있었다. 송몽규는 그의 뛰어난 문학재능을 발휘하여 군관학교에서 잡지를 꾸렸으며 이에 따라 별칭 '청년문사'로 불렸다. 1943년, 윤동주와 함께 당국에 체포될 때 송몽규의 죄목은 '조선인학생 민족주의집단사건'의 주모자였다.   달라자의 방문록에 실종된 인물은 하나 또 있다. 조선의 초기 영화인 나운규(羅雲奎, 1902~1937)는 바로 명동이 배출한 인물이다. 나운규의 대표작 '아리랑'(1926)은 민족정신을 고향하고 또 흥행에 성공한 좋은 작품이다. 이 영화를 감독하고 출연한 후 나운규는 인기가 최고조에 달했으며, 조선 영화계는 그의 영향력에 의해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선바위와 륙도하   남명철이 말하는 작가는 명동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북쪽의 장재(長財) 마을에도 글의 별이 떠오르고 있었다.   "소설 '두만강'의 저자 이기영이 바로 장재의 동쪽 골짜기에서 살았다고 전하는데요."   이기영(李箕永.1896∼1984)은 1930년대를 대표하는 소설가이다. 대하소설 '두만강'은 조선 역사소설의 시발점으로 평가되는 대작이다. 이 소설은 작가 자신이 살아온 시대를 총괄, 1930년대의 조선인들의 생활상이나 사건이 대부분이다. 그 시기의 식민지 수탈구조 그리고 무지와 몽매 속에서 허덕이던 농촌 현실을 고스란히 싣고 있다.   암울한 그 시대를 소설에 담은 작가는 장재에 또 하나 있다. 향토문학의 별로 불리는 김창걸(金昌杰, 1911~1991)이다. 김창걸은 1936년 처녀작을 내놓은 후 1943년까지 '암야(暗夜)' 등 31편의 소설을 발표했다. 향토색채가 풍부하고 식민지 통치하의 암흑한 현실을 반영한 그의 작품은 학계의 높은 평가를 받는다.   천불지산 기슭에 무더기로 나타난 글의 도사들은 달라자의 오색의 세계를 글로 옮기고 있었다. 남명철도 그의 세계를 선대의 도사들을 따라 글로 그리고 싶었다. 그래서 얼마 전 달라자에서 보고 듣고 깨달은 이야기를 수필집 '버들 화분'으로 엮어냈다고 한다.
3    "비가 온다야 개미야 대문 걸어 잠궈라"... 댓글:  조회:2174  추천:0  2018-06-13
  + 비 오는 날  둥지 없는 작은 새들은 이런 날  어떻게 지낼까?  나비들은, 잠자리, 풍뎅이, 쇠똥구리들은  이런 날 어떻게 지낼까?  맨드라미, 나팔꽃, 채송화...... 그리고  이름 모를 풀꽃들은 어떻게 지낼까?  그칠 줄 모르고 이렇게 하염없이 비가  오는 날에는  죽도록 사랑하다가 문득 헤어진 사람들은  어떻게 지낼까?  (양성우·시인, 1943-)  + 빗방울은 둥글다  만약에  빗방울이  세모나 네모여 봐  새싹이랑  풀잎이  얼마나 아프겠니?  (손동연·아동문학가, 1955-)  + 빗방울의 더하기  톡톡톡  잎새에 더해  초록빛 키우고  톡톡톡  꽃잎에 더해  꽃잎 웃음 키우고  톡톡톡  냇물에 더해  물소리 키운다  톡톡톡  더하면서   남은 키우고  톡톡톡  더하면서   제 모습은 뺀다.  (박소명·아동문학가)  + 비 오는 날  낡은 구두는  젖은 발이 안쓰럽습니다  젖은 발은  새는 구두가 안쓰럽습니다.  (유희윤·아동문학가)  + 비야 비야  비야 비야  그만 그쳐라  우리 아버지  구두가 샌다  울 집  지붕이 샌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런 건 견딜 수 있단다  비야 비야  부탁이다, 제발 그쳐라  네가 가꾼 산을  네가 뭉개다니  네가 가꾼 벼 포기  네가 쓸어 내다니  그쳐라 그쳐라  상추씨 도닥이던  착한 비야.  (유희윤·아동문학가)  + 봄비 그친 뒤  비 갠 날 아침에  가장 빨리 달리는 건 산안개다.  산안개가 하얗게 달려가서  산을 씻어내면  비 갠 날 아침에  가장 잘 생긴 건  저 푸른 봄 산이다.  (남호섭·아동문학가, 1962-)  + 풀밭에서  여우비  그친 뒤  풀밭에 갔더니  빛들은  풀잎으로  알몸을 가리고  젖은 몸을 말리고 있었다.  부끄러운 아기 얼굴로  배시시 웃고 있었다.  (박유석·아동문학가)  + 가랑비 오는 날  가랑비가 촉촉이 내렸어요.  꽃들 머리를 어루만지며  우리 머리를 어루만지며  하느님이 오늘만큼은 우리를  꽃으로 여기셨나 봐요.  꽃같이 여기셨나 봐요.  모처럼 오늘은  나도 한 송이 꽃이 아니었을까?  (박두순·아동문학가)  + 가랑비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들려 오는 머언 피리 소리  닫혔던 들판의  초록 대문이 천천히 열린다.  바위 틈에서  자갈밭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풀이며 나무들의  목마름도 풀리고,  소나무, 오리나무, 싸리나무, 느릅나무의  바짝 말랐던 입술에 노래가 흐른다.  (박두순·아동문학가)   + 보슬비  보슬보슬 보슬비가  잔잔한 호수처럼 내리고 있네요.  한사코 울어대던 뻐꾸기도  그 자장가를 들으며 졸고 있는가 봐요.  편지를 서너 줄 쓰다 말고  저기 관악산 숲 속을 바라봅니다.  고향으로 돌아간 그 아이의  큼직한 눈동자가 아롱거려요.  그 아이도 지금쯤 창문을 열고  무엇을 생각하며 울고 있을까.  소식이나 알려주듯 교회당 종소리가  고요하게 마음속에 울려옵니다.  보슬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나 혼자 집을 보는 한때입니다.  (장수철·아동문학가, 1916-1993)   + 빗방울         어, 어  나뭇잎에 떨어졌네!  그럼  또르르  구슬 되어 굴러가지  어, 어  전깃줄에 걸렸네!  그럼  어디 한번  매달려 볼까?  대롱대롱대롱  아이고  힘 빠졌다  톡―.  (권오삼·극작가, 1943-)  + 우산 파는 아줌마  주룩 주룩  큰 비가 내리는 날  버스 터미널 앞에  쪼그리고 앉아  우산을 파는 아줌마.  새 우산이 아까운지  얇은 비닐 우비 하나 걸치고  옴츠린 채 덜덜 떨며  오는 비 다 맞고 있어요.  쏴아아 쏴아아아?  빗줄기는 더 세지는데  팔릴 줄 모르고 쌓여 있는 우산들.  아줌마 입술이 점점 파래져요.  나도 모르게 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어요.  돈이 있다면  그 우산들을 몽땅 사드리고 싶어요.  빨리 집에 들어가시게요.  가던 길 멈추고  제가 든 우산을  씌워드리고 싶어요.  새 우산이 다 팔릴 때까지요.  날마다 엄마한테  깍쟁이 소리 듣던 제가  오늘만은요.  (오지연·아동문학가, 제주도 출생)  + 비 맞은 아빠  아침에 엄마가  하늘 쳐다보시며  ―비 올 것 같으니  우산 갖고 가세요.  아빠도 엄마처럼  하늘 쳐다보시고  ―뭐 괜찮을 거요!  저녁 때 비 맞고  돌아오신 아빠는  ―허어 그것 참…  엄마가 아빠의 가방을  받으시면서  ―제 말 들으셨으면  비 안 맞았지요.  오늘은 아빠에게  엄마가 이겼습니다.  (박홍근·아동문학가, 1919-2006)  + 소나기  한 손에 지팡이  한 손에 보따리  꼬부랑 할머니가 언덕길 오를 때  오줌 마려운 먹구름이 할머니를 보았대.  쉬다 오르다  쉬다 오르다  땅만 보고 쉬엄쉬엄 올라가는  할머니를 따라가며  묵직한 배에 힘을 꽉 주고  검은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오줌은 나올락 말락  마침내 언덕 위  작은 대문이 닫히는 걸 보자마자  온몸에 힘을 뺀 먹구름은  솨솨 시원하게 오줌을 누었대.  (김정신·아동문학가)  + 빗방울  구름이 끼더니 빗방울이  후두둑 후두둑 떨어지네.  연못 속에 연꽃들  우산 없이 어쩌나.  구름이 끼더니 빗방울이  후두둑 후두둑 떨어지네.  지붕 위에 흰 박들  비옷 없어 어쩌나.  (윤석중·아동문학가, 1911-2003)  + 비 온다     개미야 개미야  얼른 얼른 집에 가서  대문 걸어 잠궈라  지렁이야 지렁이야  얼른 얼른 나와서  대문 활짝 열어라.  (박혜선·아동문학가, 1969-)          세르비아의 한 리발사가 축구팬의 뒤통수에 그가 가장 숭배하는 아르헨띠나의 축구명선수 메시의 얼굴모양으로 깎아주다... ===================       미국의 옐로스톤국립공원에서 흥분된 들소...
2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호랑이 방류, 전격 촉구한다!!!" 댓글:  조회:4077  추천:0  2018-06-13
'호랑이와 셀카' 뒤에 숨겨진                          잔인한 동물 학대 2018.06.11.  자동요약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태국 관광지에서는 맹수와 함께 사진을 찍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태국 푸껫의 호랑이 동물원 '타이거 킹덤'에서 관광객들은 맹수와 사진을 찍으며 즐거운 미소를 짓는다. 가족 단위로 온 부부는 새끼 호랑이의 등에 어린아이를 업히며 웃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하지만 호랑이는 맹수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유순한 모습으로 가만히 서 있을 뿐이다. 타이거 킹덤은 중국과 인도에서 오는 패키지여행객의 호응에 힘입어 번성하는 유명 관광지이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맹수와 함께 대담한 사진을 찍어 SNS에 올려 자랑한다. 호랑이와 사진을 찍으려면 1인당 900밧(약 3만 원)을 내야 하며, 새끼호랑이와는 2,500밧(약 8만 원), 자이언트 호랑이와의 촬영에는 2,000밧(약 6만 원)이 필요하다. 호랑이 왕국은 태국 패키지여행을 계획하는 중국 관광객이 반드시 들를 정도로 인기 많은 명소이다. 하지만 지난달 타이거 킹덤을 방문한 이탈리아 관광객은 "호랑이는 감옥에 갇혀 있었다"며 "절대 인생에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풍경"이라고 밝혔다. 맹수인 호랑이가 본성을 잃고 유순해지기까지 어떠한 학대를 견뎠을지 굳이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광객은 "사진을 찍거나 대기할 때 호랑이들은 쇠사슬에 발이 묶인 채 매를 든 조련사의 곁에서 공포에 질려 있다."고 비판했다. 최근 전 세계에서 4만 명이 넘는 사람들은 태국의 유명 관광 코스인 '코끼리 타기'와 '호랑이와 사진 찍기'를 금지해달라는 청원에 서명했다. 이들은 수천 마리의 야생 동물들이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한 데 유감을 표했다. 세계 동물 보호국(World Animal Protection) 역시 태국에 800마리의 '관광용 호랑이'가 존재한다며 태어나자마자 어미에게서 분리돼 일생을 고통받다 죽는 호랑이들을 구해달라고 밝혔다. 보호국은 "호랑이 관광의 인기로 2010년부터 6년 만에 포획된 호랑이의 수가 200마리 가까이 늘어났다"고 발표했다. ///YTN PLUS 정윤주 기자
1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바다고래 방류, 전격 촉구한다!!!"... 댓글:  조회:3889  추천:0  2018-06-13
"예뻐져라".. 벨루가에 립스틱 칠한 황당한 조련사  2018.06.12.  자동요약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서울신문 TV] 벨루가의 입술에 립스틱을 칠하고 있는 조련사. 중국에서 한 조련사가 벨루가(흰고래, Beluga whale)의 입에 립스틱을 바른 사실이 알려져 비판이 일고 있다. 최근 중국 유명 비디오 공유사이트 더우인(Dou Yin, 抖音)에는 신원을 알 수 없는 조련사가 벨루가의 입술에 립스틱을 칠하는 영상이 게재됐다. 이 영상은 중국 랴오닝성의 해안도시인 다롄에 위치한 아쿠아리움 ‘선 아시아 오션월드’( the Sun Asia Ocean World)에서 촬영됐다. 영상 속 조련사는 벨루가를 물 밖으로 나오라고 지시한 후 립스틱으로 입술을 빨갛게 칠했다. 이어 그는 벨루가를 껴안고 볼에 뽀뽀를 강요하며 물속에서 빙글빙글 몸을 돌렸다. 해당 게시물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예쁘다’는 글이 함께 쓰여 있어 비난은 더욱 거세졌다. 영상이 공개된 후 동물 권리 단체인 ‘PETA’는 성명서를 내고 벨루가를 학대한 조련사와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수족관 측을 맹비난했다. 사람이 사용하는 립스틱을 포유류에게 사용하게 되면 세균감염의 위험성이 있고 수족관 수질을 악화시켜 동물 건강에 해롭기 때문. 논란이 커지자 수족관 측은 공식 성명을 통해 “‘선 아시아 오션월드’를 사랑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사과했다. 이어 “해당 영상은 2017년에 촬영된 것이며, 영상 속 조련사는 지난달 회사를 그만둔 상태”라고 해명했다. 한편 귀여운 외모와 사교적인 성격으로 유명한 벨루가는 현재 국제적인 멸종위기 종에 올라있다. /사진·영상=Hot News/유튜브 /김민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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