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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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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윤동주와 그의 룡정자택 댓글:  조회:3163  추천:0  2018-06-29
. 역사기행 .   윤동주의 또 하나의 거처- 룡정자택을 찾아서     지난 13일 기자는 젊은 지성들의 모임 “중국조선족력사문화동호회” 회원들과 더불어 룡정의"산증인"으로 불리는 저명한 사학자 최근갑 옹(85세)을 모시고 룡정의 여러 명소와 명물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와중에 윤동주의 마지막 길을 바래였던 룡정에서의 자택 옛터를 확인할수 있었다.   태여난 명동에서 소학교를 졸업한뒤 윤동주는 명동에서20리 떨어진  대랍자(大拉子)의 중국인 학교에 편입되여 계속 공부를 했다.소학교6학년의 나이로 말하면 매일 밟아야 하는 20여리라는 등교길은 힘에 부치는 거리였다. 그런 아들의 처경을 안타까이 여기던 윤동주의 부친 윤영석은 자식에게 더 좋은 교육환경을 마련해 주기위해 당시 연변지역 사람들이면 너나가 선망하던 “서울”격인 룡정으로의 이사를 결심했다. 윤동주의 친동생 윤일주씨가 생전에 “나라사랑”이라는 잡지에기고한 추모문 ”윤동주의 생애”라는 글에 따르면”1931년에 윤동주는 명동에서 북쪽으로30여리 떨어진 룡정이라는 소도시에 와서 카나다 선교부가 설립한 은진(恩眞)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것을 계기로 우리는 농토와 집을 소작인에게 맡기고 룡정으로 이사하였다.”고 밝히고있다.   윤동주네 일가가 룡정으로 이주한것은 대변혁이였다.명동에서 일껏 이룬 터전을 버린 것은 당시36세의 나이였던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의 도시로 향한 새로운 열망도 있었지만 주로는 파령 윤씨가문의 장남이였던 윤동주에게 더 좋은 환경을 마련해 주기 위함이였다. 막상 이사를 단행했지만 거주환경은크게 변했다. 윤동주네가 이사온 룡정집은 룡정가 제2구1동36호로서20평방메터 정도의 초가집이였다.명동에서 터밭과 타작마당, 깊은 우물과 작은 과수원까지 달리고 지붕을 얹은 큰 대문이 있어 마을에서 제일 큰 기와집에서 한껏 넉넉하게 살다가20평방메터 정도밖에 안되는 초가집으로 옮겨온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윤동주, 윤일주, 윤광주3형제 거기에다 큰 고모의 아들인 송몽규까지 합류한8명의 식구가20평방메터의 초가집에서 옹색하게 붐벼야하는 환경속에서 윤동주의 은진중학교시절이 시작되였다.   환경은 여의치 못했지만 윤동주는 그에 구애되지 않았다. 윤동주는 명동촌에서 버릇된 바른 신앙과 좋은 성격으로 학업에 열중해 나갔다.지금 남아있는 은진중학교 학생시절의 윤동주에 관한 증언들을 보면 그 모습이 풋풋하고 싱그럽다.       윤동주가 다녔던 은진중학의 30년대의 모습     윤일주교수의 ”윤동주의 생애”에 있는 증언을 보자. “은진중학교때의 그의 취미는 다방면이였다. 축구선수로 뛰기도 하고 밤에는 늦게까지 교내잡지를 꾸리느라고 등사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기성복을 맵시있게 고쳐서 허리를 잘룩하게 한다든가 나팔바지를 만든다든지 하는 일은 어머니의 손을 빌지 않고 혼자서 재봉기에 앉아서 하기도 하였다. 그는 수학도 잘하였다. 특히 기하를 잘하였다…” 윤동주와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 또 숭실중학교 그리고 광명학원 중학부를 같이 다닌 절친한 친구인문익환목사는 “중앙월간”(1976년4월)에 실린”하늘, 바람, 별의 시인 윤동주”라는 글에서 윤동주와 관련된 재미있는 에페소트를떠올리고있다. “동주는 재봉틀질을 참 잘했어요. 그래서 학교 축구선수들의 유니폼에 넘버를 다는것을 모두 동주가 집에 갖고 가서 제손으로 직접 박아왔었지.” 문익환목사는이어 그들의 은진중학교 학창시절의 모습을 이렇게 증언한다. “1932년 봄에 동주, 몽규와 나는 룡정 은진중학교에서 다시 만났다. 은진중학교는 한때 모윤숙(毛允淑)씨가 교편을 잡았던 명신녀학교와 한 언덕우에 자리잡고있었다. 그곳에는 또 카나다 선교부가 경영하는 제창병원이 있고 선교사들 집이4채가 있었다. 이 언덕은 룡정동남쪽에 있는 언덕으로서 우리는 그 언덕을‘영국더기’라고 불렀다. 그 지경은 만주국이 서기까지 치외법권지대여서 일본순경이나 중국관원들이 허락없이 들어갈수 없는 곳이였다.”   여기서 말하는 “영국더기”는 지금 룡정 동남쪽에 위치한 더기로서 당년에 연변의 첫 조계지가 이곳에 설립되여 있었다. 그 더기우에 일떠선 은진중학은 1만평 부지에600평의 본관과150평의 기숙사, 400평의 대강당을 가지고있는 ,명실상부한 룡정 최고의 신식근대교육기관으로 이름이 높았다. 다른 학교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민족교육을 거침없이 실시해 일제가 금지하던 조선말 교육은 물론 영어-성경-국사 등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지식인을 양성하는 수업이 이뤄졌다. 간도 개척기에 민족정신과 독립운동의 산실이 명동촌의 명동학교였다면 일제 강점기에는 룡정의 은진중학이 그 맥을 이였던것이다. “영국더기”와 가까이 상거한 이 자택에서 윤동주는 근8년간이나 지냈다. 집과 불과200메터 상거한 은진중학교에 다니면서 윤동주는 급우들과 함께 학교내 문예지를 발간하여 문예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축구선수로 활약하기도 하였으며 교내 웅변대회에서“땀 한방울”이라는 제목으로1등상을 땨내는 등 영광을 지니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윤동주는  그 청년기를 담금질했다.   현재 오스트랄리아에 거주, 현존하는 윤동주의 유일한 혈육인 녀동생 윤혜원녀사는  2007년 필자의 취재를 접하면서 룡정에서의 나날을 떠올렸다.“절구통우에 귤 궤짝을 올려놓고 웅변련습을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오빠의 손가락에는 늘 등사잉크가 묻어있었다”고 윤녀사는 회상했다. 친지와 친구들의 증언을 따라가며 룡정에서의 윤동주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축구선수인 문학소년,잘 생긴 외모에 옷차림에도 관심이 커손수 재봉질을 해서 옷을 맵시나게 고쳐입는 멋쟁이, 웅변대회에서1등상을 수상한 경력에다가 문학소년치고는 의외로 수학마저 잘하고…   1940년 은진중학 졸업후 윤동주는 서울의 연희전문을 지망해 고종사촌 송몽규와 당시 간도지역에서는 단 두사람으로 합격했다. 1942년 연희전문 을 나와 윤동주는 일본으로 류학, 선후로 도꼬 립교대학 영문과, 도꾜도지샤대학 영문과에서 수학했다. 그러다  이른바“사상범”으로 체포되여 일본 규슈의 후꾸오까형무소에 갇혔고  생체실험으로 추정되는 의문의 주사를 맞고 옥사한다.       룡정의 자택에서 치러진 윤동주 장례식 광경. 상주들중에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영정곁의 오른쪽 첫번째), 아버지 윤영석(그 두번째), 동생 일주(세번째), 어머니 김룡(다섯번째), 여동생 혜원(여섯번째), 막내동생 광주(왼쪽으로 네번째)의 모습이 보인다. 영정 바로 왼편에 선 이가 문익환 목사이다.    윤동주가 비명에 간뒤 근 한달이 지나 아버지에 의해 일본에서 부터 그의 골회가 운송되여 왔다 . 1945년3월6일 눈보라가 몹시 치는 날 집 앞뜰에서 윤동주의 장례가 치러졌다.윤동주의 절친한 친구 문익환의 아버지 문재린 목사가 영결을 집도했다. 장례식에서 연희전문“문우”잡지에 실렸던 윤동주의 시“자화상”과, “새로운 길”이 랑독되였다. 봄이였지만 추위는 가시지 않고  그날 따라  눈보라가 몹시 날려서 동주를 보내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춥게 했다고 한다.   윤동주의 룡정자택에 대한 확인은 력사의 행간에 묻혀졌던 윤동주가 일본 와세다대학의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에 의해 연변에서 처음 알려지던1985년에 이루어졌다.   서대숙 (미국 하와이대학 정치학 석좌교수)     30~40년대 룡정에 거주했던 서대숙 일가는 윤동주의 룡정 자택과 불과100여메터 떨어진 길 하나를 사이두고 있었고 명동학교 설립자인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 선생의 자택과도 역시 길 하나를 사이두고 있었다. 서대숙은 그후 미국콜롬비아대학교 정치학 박사, 연세대학교 석좌교수, 서울대학교 정치학 초빙교수, 일본 게이오대학교 정치학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미국 하와이대학교 정치학 석좌교수를 지내면서 조선문제연구분야에서 세계적인 석학으로 발돋움했다. 그는 명동의 정초인이며 이주민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약연에 대한 위인전기를 집필해 출간하기도 했다. 그의 형인 서화숙(뉴욕 한인교회 장로)이32년 은진중학에서 재학하고있었는데 바로 윤동주와 동기생으로 되고있다.     1985년 이들 일행은 룡정으로 행차, 옛날 기거하고있던 “영국더기”를 찾으면서 룡정에서의 윤동주의 자택을 확인했다.   명동마을의 정초자,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       룡정의 "산 증인"으로 불리는 사학자 최근갑옹이 김약연 목사의 옛집 터를 확인하고있다. 지금은 한 아파트단지의 접수실로 변모해 있다.   최근갑 옹은30년대 김약연목사의 자택(현재 룡정 안민가 “해란의 별(海兰之星)”아파트)부근에서 당시 “벌채조합(伐采组合”의 조합장으로 있는 일본인 오오마가리(大曲)네 집 급사로 종살이를 한적있었다. 이들은 당시 개혁개방으로 국문을 열어젖힌 중국에서 자주 만날수 있었고 조선족력사에 관한 어제의 “산증인”으로 학술계에 많은 의거있는 자료를 제공했다.   1926년독립운동가 최청남의 아들로 태여난 최근갑옹 역시 은진중학교 23기 졸업생이다. 즉 윤동주와 은진중학의12년 후배로 되는것이다. 해방후 맡은바 직무에 충실하면서수차례 길림성정부와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의 표창을 받기도 했던 최근갑옹은1986년룡정시 건설국 국장에서 정년 리직한 뒤 제2의 인생 즉 우리 민족의 력사발자취를 찾고 그것을 발굴, 복원해 후세에 남김과 아울러 력사관광전적지건설에 혼신을 바치고있다.     윤동주의 룡정자택 옛터     최근갑옹이 확인하는 윤동주의 자택 옛터는 지금의 안민가 동산사회구역의 룡정시 기계수리공장의 뜨락으로 변모해 있다. 성이 조씨인 한족 공장장이 경영하는 작은 규모의 공장으로서 주로 지체장애인을 위해 민정국계통에서 차린 기계 부품을 생산하는 공장이였다고 한다. 지금은 그 공장마저 조업을 중단하고 그곳에 주차장이 닦여져 있었다.   시인을 꿈꾸는 문학청년 윤동주를 보듬어 안고 그의 시상을 유발시킨 동생 광주가 뛰여놀았을 곳, 처음으로 “동주”라는 필명으로 연길에서 발행하는 “카톨릭소년”에 동시를 발표했던 곳, 그 유명한 동시 “오줌싸개 지도”를 산출시킨 곳, “초 한대”등 자신의 시작품에 처음으로 이름과 날자를 명기한 곳, 문학에 뜻을 두고 연희전문을 지망하면서도 아버지와 설전을 벌린 유명한 일화를 남긴곳이 바로 이 룡정의 자택에서였다. 연변이 낳은 걸출한 민족시인, 이제는 한국 지어 그를 숨지게 한 “적국” 일본 그리고 아세아를 넘나들며 그의 위상이 재조명되고있지만 그의 생전 거처를 밝히는 표지석 하나조차 없어 보는 우리의 마음을 아릿하게 했다.   김혁 기자   “종합신문” 2010년11월22일   [출처] 윤동주의 또 하나의 거처- 룡정자택을 찾아서|작성자 김 혁 =========================== 룡정지역 항일유적지 순람  ​ ​더기우의 시인의 집   김 혁 ​ ​ 윤동주의 장례식이 치러졌던 룡정자택 옛터. 표지석조차 없다.​ (사진 리련화 기자)       겨레가 애대하는 민족시인, 일제의 서슬푸른 총칼아래에서도 붓자루를 놓지 않고 우리 말, 우리 글을 보듬었던 저항시인 윤동주, 윤동주의 집 하면 누구나 할것없이 우선 명동촌의 시인의 생가를 떠올리게 된다. 연변행차를 하는 외지사람들이면 선참 찾아보는 관광코스의 일번지로 자리매김되여있는 생가. 하지만 룡정 시가지에 또 하나의 윤동주의 거처가 있고 그곳에서 윤동주가 가는 마지막 길을 바랜줄을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고있었다. ​ 태여난 명동에서 소학교를 졸업한뒤 윤동주는 명동에서 20리 떨어진 대랍자(大拉子)의 중국인 학교에 편입되여 계속 공부를 했다. 소학교 6학년의 나이로 말하면 매일 밟아야 하는 20여리라는 등교길은 힘에 부치는 거리였다. 윤동주의 부친 윤영석은 자식에게 더 좋은 교육환경을 마련해주기 위해 당시 연변지역 사람들이면 너나가 선망하던 “서울” 격인 룡정으로의 이사를 결심했다. 윤동주의 친동생 윤일주씨가 생전에 간행물 《나라사랑》 23집에 기고한 추모문 ”윤동주의 생애”에 따르면 “1931년에 윤동주는 명동에서 북쪽으로 30여리 떨어진 룡정이라는 소도시에 와서 카나다 선교부가 설립한 은진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것을 계기로 우리는 농토와 집을 소작인에게 맡기고 룡정으로 이사하였다”고 밝히고있다. “은진중학과 몇분 거리에 있는” 윤동주의 룡정자택 주소는 정안구(靖安區) 제창로(济昌路) 1ㅡ20이였다. 룡정으로 이사오면서 윤동주네 거주환경은 크게 변했다. 명동에서 터밭과 타작마당, 깊은 우물과 작은 과수원까지 달리고 지붕을 얹은 큰 대문이 있어 마을에서 제일 큰 기와집에서 한껏 넉넉하게 살다가 20평방메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 초가집으로 옮겨온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윤동주, 일주, 윤혜원 3남매, 거기에다 큰고모의 아들인 송몽규까지 합류한 8명의 식구가 20평방메터의 초가집에서 옹색하게 붐벼야 하는 환경속에서 윤동주의 룡정생활이 시작되였다. 명동의 생가에 비해 환경은 여의치 못했지만 윤동주는 그에 구애되지 않았다. 윤동주는 명동촌에서 버릇된 바른 신앙과 좋은 성격으로 학업에 열중해나갔다. ​ 동생 윤일주의 증언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은진중학교때의 그의 취미는 다방면이였다. 축구선수로 뛰기도 하고 밤에는 늦게까지 교내잡지를 꾸리느라고 등사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기성복을 맵시있게 고쳐서 허리를 잘룩하게 한다든가 나팔바지를 만든다든지 하는 일은 어머니의 손을 빌지 않고 혼자서 재봉기에 앉아서 하기도 하였다. 그는 수학도 잘하였다. 특히 기하를 잘하였다.” 은진중학교는 한 언덕우에 자리잡고있었다. 이 언덕은 룡정 동남쪽에 있는 언덕으로서 사람들은 그 언덕을 “영국더기” 라고 불렀다… ​ 여기서 더기란 언덕을 가리키는 옛날 방언이다. 룡정 사람들은 이곳에서 서양문화에 눈을 떴다. “영국더기”안에 있던 학교나 교회는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경찰에 쫓기는 학생들의 피난처가 되였고 병원은 부상당한 독립운동가들을 치료해주고 숨겨주는 은신처가 되였다. 그 결과 “영국더기”는 반일운동을 지원한다는 리유로 일본경찰당국으로부터 견제와 탄압을 받았다. 이런 배경에서 “영국더기”는 인걸을 많이 키워냈다. 김약연과 윤동주, 송몽규를 비롯하여 박계주, 리태준, 명희조,  문익환, 리봉춘, 안병무 등등. 력사의 행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걸출한 독립운동가, 문인, 종교인들이 이곳 “영국더기”를 거쳐 나갔다. ​ “영국더기”의 이 자택에서 윤동주는 근 8년간이나 지냈다. 집과 불과 몇백메터 떨어진 은진중학교에 다니면서 윤동주는 급우들과 함께 학교 문예지를 만드는가 하면 축구선수로 활약하기도 하였으며 또 교내 웅변대회에서 “땀 한 방울”이라는 제목으로 1등상을 따내는 등 영광을 지니기도 하였다. 오래동안 오스트랄리아에 거주하다가 타계한 윤동주의 녀동생 윤혜원녀사는 2006년 필자의 취재를 접하면서 윤동주의 룡정에서의 나날을 떠올렸다. “절구통우에 빈 귤 궤짝을 올려놓고 웅변련습을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학교 문예지를 만드는 오빠의 손가락에는 늘 등사잉크가 묻어 있었다”고 윤녀사는 회상했다. 친지와 친구들의 증언을 모아보면 룡정 은진중학에서의 윤동주의 모습이 또렷이 나타난다. “잘생긴 외모에 옷차림에도 관심이 커 손수 재봉질을 해서 옷을 맵시나게 고쳐 입기도 하고 동시인을 지향하는 문학도이면서도 축구선수이기도 하고 웅변대회에서 일등을 수상한 경력에다가 문학 관련 서적만 들고 다니던 그였으나 뜻밖에도 수학을 잘하는데는 친구들이며 집안 식구들이 모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오늘날 신세대들의 용어를 빈다면 그야말로 “꽃미남”, “인기 짱”이였다. ​ 연희전문에 입학한 뒤 윤동주는 방학때마다 룡정으로 돌아오군 했다. 그는 집에 돌아오면 사각모와 교복을 벗어 가지런히 걸어놓고 베바지, 베적삼에 밀짚모자를 쓰고 소를 몰고 나갔으며 집안일을 도왔다. 꼴도 베고 물도 긷고 때로는 할머니와 마주 앉아 매돌도 갈아드렸다. 윤일주씨의 회고에서 보면 윤동주가 “방학때마다 이불짐속에 한아름씩 넣어오는 책은 800권 정도” 되였고 “벽 한쪽을 전부 메웠던 서가”가 있어 그 책들을 꽂았다고 한다. 집의 한쪽벽을 전부 차지한 서가, 그 서가에 꽂혀있는 800여권의 책들, 이것이 바로 윤동주의 룡정자택의 풍경이였다. ​ 윤동주의 유명한 일화인 진학문제를 놓고 아버지와의 “설전”도 바로 이 룡정의 자택에서 치렀다. “물사발이 밖으로 휙 휙 날고 아주 란리가 났었어요.” 하고 윤혜원은 당시를 회상했다. 윤동주는 문과에 가겠다고하는 반면 그의 부친은 의과를 해서 의사가 돼야 한다고 강요한데서 아버지와 윤동주 사이에 처음으로 대립이 생긴것이다. 아버지 윤영석은 젊어서 북경, 일본 도꾜에서 문학쪽의 공부를 한적 있었으나 문학적으로 양명(揚名)해본적은 없었다. 했기에 아들에게만은 그런 전철을 밟지 않게 하려는 의지가 강력했던것이다. 대립이 계속되더니 끝내는 동주가 밥을 굶고 생전 처음으로 집에 안 들어오는 날까지 생기도록 사태가 악화되였다. 윤일주씨에 의하면 집안의 험악한 분위기에 동생들은 어지간히 겁이 들었다고 한다. 밥을 굶으면서까지 문과 지망을 고집하는 손자의 고민을 보다 못한 할아버지 윤하현(尹夏鉉)의 중재와 외삼촌인 규암 김약연 선생의 권면에 힘입어서야 윤동주의 문과 지망의 길이 드디여 열렸다. 1940년 은진중학을 졸업한후 윤동주는 “영국더기”를 내렸다. ​ 룡정촌의 더기를 내려선 윤동주는 서울의 연희전문을 지망해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연희동산”으로 올랐다. 1942년 연희전문을 나와 또 다시 숙명의 동반자 송몽규와 함께 윤동주는 일본으로 류학, 선후로 도꾜 릿교대학 영문과, 도꾜 도지샤대학 영문과에서 수학했다. 그러다 이른바 “사상범”으로 체포되여 일본 규슈의 후쿠오카형무소에 갇혔고 생체실험으로 추정되는 의문의 주사를 맞고 옥사했다. 윤동주가 비명에 간뒤 근 한달이 지나 아버지에 의해 일본에서부터 그의 골회가 제창로에 위치한 윤동주의 집으로 운송되여 왔다. ​ ​ ​  윤동주의 장례식 광경. ​  1945년 3월 6일 눈보라가 몹시 치는 날 집 앞뜰에서 윤동주의 장례가 치러졌다. 윤동주의 절친한 친구 문익환의 부친 문재린 목사가 영결을 집도했다. 장례식에서 연희전문 《문우》잡지에 실렸던 윤동주의 시 “자화상”과 “새로운 길”이 랑독되였다. 윤동주의 장례식광경을 담은 사진이 보존돼 있는데 그 사진속에서 상복을 입고 애통함에 빠진 윤동주의 친지들을 헤아려 볼수 있다.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은 윤동주의 영정 오른쪽에 서있고 아버지 윤영석은 그 두번째, 동생 일주는 세번째, 어머니 김용은 다섯번째, 녀동생 혜원은 여섯번째, 막내동생 광주는 왼쪽으로 네번째에 서있다. 영정 바로 왼편에 선 이는 장례를 집도했던 문재린 목사이다. ​ 사연많은 윤동주의 룡정자택에 대한 확인은 력사의 행간에 묻혀졌던 윤동주가 일본 와세다대학의 오오무라 교수에 의해 연변에서 처음 알려지던 1985년경 그 자택에서 직접 살았던 윤동주의 녀동생 윤혜원에 의해 이뤄졌다. 오스트랄리아에 거주하고 있는 윤혜원과 그의 남편 오형범은 중국에로의 자유로운 출입이 가능해진 1990년 이후, 해마다 윤동주의 고향 연변으로 와서 윤동주묘소를 새롭게 조성하고 중학생잡지사에서 주최하는 “윤동주 문학상”시상식에 참석했다. 윤동주의 매제 오형범은 어제날의 기억을 더듬어 윤동주의 룡정자택에 대한 략도를 그렸다. 비교적 소상하게 그려낸 그 그림에는 당시 “영국더기”의 진풍경이 빠침없이 그려져 있다. 윤동주가 다녔던 은진중학, 그 곁의 명신녀중학, 독립선언서를 찍었던 제창병원 그리고 동산교회와 카나다 선교사들이 거주했던 사택의 위치와 간호사들의 기숙사까지 그려져 있다. 그 략도에 윤동주의 자택이 명확하게 표시되여 있다. ​ 윤동주의 룡정자택에 대해 확인한 또 한분이 있었다. 연변박물관 연구원으로 지냈던 리송덕 옹이였다. 그는 1960년대에 윤동주의 막내동생인 윤광주와 두터운 교분을 맺어 이 자택을 늘 찾았다고 한다. 리송덕 옹이 확인하는 윤동주의 자택 옛터는 “간도일본총령사관”(지금의 룡정시정부청사) 동쪽 담장에서 길 하나를 사이두고 있었다. 룡정시 문화관의 바로 뒤편에 자리한 그곳은 지금의 안민가 동산사회구역의 룡정시 기계수리공장의 뜨락으로 현재 “룡정.윤동주연구회” 사무실이 바로 그 위치에 오픈돼 있다. 60년대부터 이 지역에서 살아왔다는 김정호(76세)씨에 의하면 기계수리공장은 50년대에는 고아원이였다가 “항미원조”전쟁이 일자 의족공장으로 탈바꿈했다가 현재의 기계공장으로 되였다고 한다. 기계수리공장은 지체장애인을 위해 민정국계통에서 차린 기계부품을 생산하는 공장이였으나 현재는 작업을 중단하고 그 곳에 주차장이 생겼다. 주차장 남쪽켠에 지어진 차고 부근이 바로 윤동주의 룡정 집터이다. ​ ​ 윤동주의 장례식을 치르고 가족이  룡정자택 뜨락에서 남긴 합영. ​ 시인을 꿈꾸는 문학청년 윤동주를 보듬어 안고 그의 시상을 유발시킨 동생 광주가 뛰여놀았을 곳, 처음으로 “동주”라는 필명으로 연길에서 발행하는 “카톨릭소년” 에 동시를 발표했던 곳, 그 유명한 동시 ”오줌싸개 지도” 를 산출시킨 곳,  “초 한대”등 자신의 시 작품에 처음으로 이름과 날자를 명기한 곳, 문학에 뜻을 두고 연희전문을 지망하면서도 아버지와 설전을 벌린 유명한 일화를 남긴 곳이 바로 이 룡정의 자택에서였다. 연변이 낳은 걸출한 민족시인, 이제 한국, 지어 그를 숨지게 한 “적국” 일본을 아울러 그의 위상이 재조명되고 있지만 그의 생전 거처를 밝히는 표지석 하나 없어 우리의 마음을 아릿하게 한다. ​ "연변일보" 2015-7-28​ [출처] ​더기 위의 시인의 집|작성자 김 혁  
9    윤동주의 친구 장준하, 문익환 댓글:  조회:1809  추천:0  2018-06-29
                                    영화 ‘1987’의 피날레 장면. 수많은 군중 앞에서 한 야윈 노인이 피를 토하듯 절규한다. “전태일 열사여, 장준하 열사여, (중략), 박종철 열사여… 이한열 열사여!” 1987년 7월 9일 연세대에서 열린 이한열 열사 장례식 도중에 나온 장면이다. 우리 민주화 역사에서 빠지지 않는 결정적 순간이기도 하다. 이 노인이 바로 당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의장이던 문익환(1918~1994) 목사다. 1년여의 옥고를 치르고 전날 출옥한 참이었다.       그는 1970년대 후반~1990년대 민주화 및 통일 세력의 ‘대부’로 통했다. 1976년부터 1994년 1월 18일 타계할 때까지 생의 마지막 17년 중 11년 반을 감옥에서 보냈다. 만주 북간도 용정에서 윤동주(1917~1945), 장준하(1918~1975)와 함께 자란 그가 사회문제에 눈을 뜬 것은 50대 중반이 지나서였다. 1975년 8월 17일 친구 장준하가 의문사한 것이 계기다. 그는 뒤늦게 세상에 눈을 떴다는 의미로 자신의 호도 ‘늦봄’이라 지었다. 1987년 이후 통일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그는 1989년 3월 25일 마침내 ‘대형 사고’를 친다. 정부 승인 없이 평양을 전격 방문, 김일성 주석과 회담 함으로써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은 것이다. 문 목사는 귀국 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다시 투옥된다. 하지만 당시 그가 평양에서 발표한 ‘자주적 평화통일과 관련된 원칙적 문제 9개항’의 핵심 내용은 ‘판문점선언’을 비롯한 모든 남북합의문의 근간이 된다. 자주·평화·민족대단결 3원칙에 기초해 통일문제 해결, 정치·군사 회담을 진전시켜 정치적·군사적 대결상태 해소, 다방면 교류·접촉 실현 등이 주요 내용이다. 어제 열린 남북 고위급회담의 논의 주제도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마침 어제는 ‘늦봄’ 문익환이 탄생한 지 100주년되는 날이었다. 이를 기념해 3일 서울역에서는 ‘평양행 기차표를 다오’ 행사가 열린다. 시민들이 특별열차 편으로 도라산역까지 왕복하며 고인의 큰 뜻을 되새긴다고 한다. 그가 1989년 1월 1일 새벽에 쓴 시 ‘잠꼬대 아닌 잠꼬대’의 한 구절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오늘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 온몸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일이라고 / 휴전선은 없다고 소리 치는 일이라고 / 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 /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 주장하는 일이라고’. ///이승렬 논설위원
8    윤동주의 친구 정병욱 댓글:  조회:3394  추천:0  2018-06-29
  잊지 못할 윤동주                                                             정병욱(1922~1982)       1941년 9월, 우리의 알차고 즐거운 생활에 난데없는 횡액이 닥쳐왔다. 당시에 김송 씨가 요시찰 인물이었던 데다가 집에 묵고 있는 학생들이 연희 전문학교 학생들이었기 때문에, 우리를 감시하는 일제의 눈초리는 날이 갈수록 날카로워졌다. 일본 고등계 형사가 무시로 찾아와 우리 방 서가에 꽃혀 있는 책 이름을 적어 가기도 하고, 고리짝을 뒤져서 편지를 빼앗아 가기도 하면서 우리를 괴롭혔다. 우리는 다시 하숙을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 마침, 졸업반이었던 동주는 생활이 무척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형편이었다. 진학에 대한 고민, 시국에 대한 불안, 가정에 대한 걱정, 이런 가운데 하숙집을 또 옮겨야 하는 일이 겹치면서 동주는 무척 괴로워하는 눈치였다. 이런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그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진 중요한 작품들을 썼다.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서시' 등은 이 무렵에 쓴 시들이다.   동주는 시를 함부로 써서 원고지 위에서 고치는 일이 별로 없었다. 즉, 한편의 시가 이루어지기까지는 몇 주일, 몇 달 동안을 마음속에서 고민하다가, 한번 종이 위에 옮기면 그것으로 완성되는 것이었다. 그의 시집을 보면, 1941년 5월 31일 하루에 '또 태초의 아침', '십자가', '눈 감고 간다' 등 세 편을 썼고, 6월 2일에는 '바람이 불어'를 썼는데, 동주와 같은 과작의 시인이 하루에 세 편의 시를 쏟아 놓고, 이틀 뒤에 또 한 편을 썼다는 사실은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그것은 머릿속에서 완성된 시를 다만 원고지에 옮겨 적은 날이라고 생각할 때에야 비로소 수긍이 가는 일이다. 그는 이처럼 마음속에서 시를 다듬었기 때문에, 한 마디의 시어(詩語) 때문에도 몇 달을 고민하기도 했다.     유명한‘또 다른 고향’에서     어둠 속에서 곱게 풍화 작용(風化作用)하는   백골(白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라는 구절에서 '풍화 작용'이란 말을 놓고, 그것이 시어답지 못하다고 매우 불만스러워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고칠 수 있는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그대로 두었지만, 끝내 만족해하지를 않았다.   그렇다고 자기의 작품을 지나치게 고집하거나 집착하지도 않았다. ‘별 헤는 밤’에서 그는 '따는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 로 첫 원고를 끝내고 나에게 보여 주었다. 나는 그에게 넌지시 "어쩐지 끝이 좀 허한 느낌이 드네요". 하고 느낀 바를 말했었다. 그 후, 현재의 시집 제1부에 해당하는 부분의 원고를 정리하여 '서시'까지 붙여 나에게 한 부를 주면서 "지난번 정 형이 '별 헤는 밤'의 끝 부분이 허하다고 하셨지요. 이렇게 끝에다가 덧붙여 보았습니다." 하면서 마지막 넉 줄을 적어 넣어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이처럼, 나의 하찮은 충고에도 귀를 기울여 수용할 줄 아는 태도란, 시인으로서는 매우 어려운 일임을 생각하면, 동주의 그 너그러운 마음에 다시금 머리가 숙여지고 존경하는 마음이 새삼스레 우러나게 된다.         정병욱. 국문학자(1922~1982).  호는 백영(白影).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내면서 고전문학의 여러 분야를 두루 연구하였으며,  특히 판소리 연구에 업적을 쌓았다. 저서에 ,  등이 있다.           지난 2007년 전라남도는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을 등록문화재 제341호로 등록한다는 통보를 문화재청으로부터 받았다고 밝혔다.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은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에 소재하는데, 1925년에 건립된 가옥으로 백영(白影) 정병욱(鄭炳昱, 1922∼1982)과 그의 가족에 의해 윤동주(尹東柱, 1917∼1945) 시인의 유고가 온전히 보존되었던 곳이다.   윤동주는 1943년 항일운동의 혐의를 받고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2년형을 받고 광복 전인 1945년 2월에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했다. 또한 위의 수필을 쓴 그의 친우 정병욱은 한국 고전문학 연구와 판소리, 한글 연구 등에 매진한 인물로 우리나라 국문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분이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41년에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자 이 원고를 정병욱에게 맡겨 그의 집에서 보관함으로써 어렵게 보존되다가 광복 후 1948년에 간행되어 빛을 보게 되었다.   윤동주의 대표작으로는 , , 등이 있는데, 그의 시력여정(詩歷旅程)은 청년기의 고독감과 정신적 방황 그리고 조국을 잃음으로써 삶의 현장을 박탈당한 동일성의 상실이 그 원천을 이루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위의 사진의 가옥은 고 정병욱 교수가 기거하던 고택이라는 점, 양조장과 주택을 겸용해 온 보기 드문 건축물이라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민족사 중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한글로 작성된 시고가 두 분의 우정과 신뢰로 보존됨으로써 광복 후에 시집으로 간행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건축적ㆍ국문학사적인 의미가 크다. 건물 뿐만 아니라 윤동주와 정병욱 두사람만 알 수 있는 사연을 정병욱 자신이 글로 표현한 점도 이채롭다. 물질적인 유산의 형태는 찾아서 보존하면 되겠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두사람 간의 무형의 우정은 이렇게 글로써 표현되어 후세에 남겨지는 것도 의미있는 일로 보아진다.   ================================== 서시(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민족서정시인 윤동주. 일제 치하의 고통과 독립에의 염원을 주옥같은 시로 풀어낸 이.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담겨진 그의 문학정신은 아름답고 숭고하다. 일제는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윤동주를 감옥에 가두었고 그는 1944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을 거둔다. 청년 윤동주가 남긴 시들은 자칫하면 세상에 나오지 못할 뻔 했다. 1943년 일본 경찰에 붙잡히기 전 친구 정병욱에게 그가 써놓은 원고를 맡기는 데 정병욱은 이 원고를 그의 집 마루 밑바닥에 숨겨놓고 잘 간직했다. 그 장소가 바로 전남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에 있는 ‘정병욱 가옥’이다. 윤동주의 시에 많이 등장하는 ‘하늘’과 ‘바람’과 ‘별’들이, 1945년 광복이 오기까지 2년여 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던 곳이 바로 광양이다. 광양을 통해 어둠속에 갇혀 있던 ‘윤동주시인의 하늘’이 다시 열리고 ‘정지했던 바람’은 다시 생기를 얻어 동서남북으로 향하고 ‘빛을 잃었던 별’들은 다시 반짝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은 윤동주와 광양과의 이런 인연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최근 들어서 한 지역 언론의 보도로 이 같은 사실이 알려졌으며 시는 지난 2007년 7월 이곳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했다. 직접적인 인연은 아니지만 윤동주시인과 광양시 간에 맺어진 인연은 문학사적으로 의미가 크다. 그 인연을 어떻게 가꿔나가느냐는 광양시민들의 몫이다.   정병욱의 어머니가 일제의 감시를 피해 2년여동안 원고를 숨겨두었던 마루밑.                       ■ 일제감시 피해 윤동주 유고 숨겨둔 정병욱 생가   섬진강변에 위치한 진월면 망덕리 길가에는 1925년에 지어진, 가옥 한 채가 자리하고 있다. 정 병욱 가옥으로 알려진 이 집은 과거 양조장이었다. 따라서 도로 쪽 가옥에는 가게가 나 있고 뒤쪽은 살림집으로 돼 있다. 당시 이 집에는 정병욱과 그의 어머니 등이 살고 있었다. 정병욱은 연희전문에 다니던 시절 윤동주와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아주 가까운 친구였다. 윤동주 시인은 연희전문 졸업을 (1941) 즈음해 시집을 출판하고자 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뜻을 접는다. 은사였던 이양하교수는 일제가 시의 내용을 문제 삼을 것을 우려해 출판을 만류했다. 윤동주는 일본유학을 떠나기 전 3부의 원고를 만들어 한권은 자신이 갖고 다른 두 권은 이양하교수와 후배이자 친구인 정병욱에게 각각 건넸다. 이후 정병욱은 학병으로 징용 당하게 되자 광양의 어머니에게 윤동주의 원고를 맡기며 일본헌병에게 들키지 않게끔 잘 간직해줄 것과 자신이 죽을 경우 연희전문학교 교수님들에게 갖다 줄 것을 당부했다. 정병욱의 어머니는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일제의 수색을 피해 이 집 마룻바닥 밑에 원고를 숨기고 보관해 왔다고 한다. 광복 후 학병에서 무사히 돌아온 정병욱은 어머니로부터 2년여 동안 숨겨왔던 유고를 건네받았고 1948년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발간했다. 윤동주 본인과 이양하교수가 지니고 있었던 원고는 모두 사라지고 없어서 정병욱 집안이 아니었더라면 오늘날의 윤동주는 없을 뻔했다. 한편 정병욱은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근무하면서 한국 고전문학 연구와 판소리 연구 등에 큰 발자취를 남겼으며 평소 자신의 가장 큰 보람으로 ‘윤동주의 시를 간직했다가 세상에 알린 일’이라고 밝혀왔다     ========================== 샌드아트 접목해 스토리가 있는 국악 선사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조국의 아픔을 노래하며 민족의 별이 된 시인 윤동주. 어쩌면 그는 유고시집의 제목처럼 바람이 돼 이제는 평온을 얻은 조국 어딘가를 흔적 없이 떠돌아다녔을지도 모른다. 바람이 될 뻔한 그를 빛나는 별로 만들어준 숨은 조력자가 있다. 바로 윤동주의 흰 그림자, 백영(白影) 정병욱 선생이다. 광양시립국악단이 문학의 수호자이며 윤동주라는 별을 지키고 떠난 정병욱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서시…백영으로 피어나다’라는 주제로 제12회 정기연주회(2016년 6월)를 마련했다. 강종화 지휘자는“ 정병욱에 의해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시집이 나왔고,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 ‘서시’를 세상에 알릴 수 있었다.정병욱이 없으면 윤동주도 없었다”고 강조하며“ 광양시민이라면 정병욱 가옥에서 윤동주의 시집이 발견된 것을 적극 알려야 하며,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못해도 우리만큼은 정병욱 선생을 기억해야한다”고 말했다. 강 지휘자는 진월 망덕에 위치한 정병욱 가옥이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까워하며 국악을 통해 정병욱 선생을 재조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은 곧 12번째 정기연주회의 주제가 됐다. 문화적 재산이 빈약한 광양에 정병욱 선생의 존재는 그만큼 귀중한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이번 공연을 계기로 또 다른 광양 고유의 문화가 탄생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 2막은 윤동주의 시를 가사로 만든 노래를 국악으로 편곡해 새로움을 선사한다. 3막은 이번 공연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으로, 샌드아트를 접목시켜 윤동주와 정병욱의 이야기를 모래로 표현하는... 강 지휘자는“ 윤동주라는 별과, 그 별을 마지막까지 지키고 간 백영 정병욱 선생의 삶과 문학을 되살리는 장이 될 것”이라며“ 많은 분들이 공연을 통해 광양시민으로서 자긍심을 기를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광양시민신문 ======================== 지난 27일(2018년 1월), 전남 광양시에서는 윤동주 문학 국제심포지엄이 열렸다. ‘윤동주 문학 왜 광양인가?’라는 주제 아래 경상대 강희근 교수, 일본의 교토여자대학 우에노 준 교수, 그리고 필자가 발표자로 나서 윤동주 문학에 대한 재해석 과정과 결과를 집중적으로 논의했다. 더불어 광양과 윤동주가 결속해 갈 생성적 가치에 대해 하루종일 열띤 논의를 이어 갔다. 윤동주 시의 연원과 특성 그리고 새로운 콘텐츠로의 확장 가능성이 진지하게 모색된 자리였다. 아직까지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할 윤동주와 광양의 연관성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 맥락은 이러하다. 1941년 말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졸업 기념으로 친필 원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3부 작성해 한 부는 자신이 가지고, 한 부는 은사인 이양하 교수께 드리고, 나머지 한 부는 문과 2년 후배 정병욱에게 건넸다. 윤동주가 타계했을 때 자신과 이양하 교수가 가지고 있던 것은 일실됐으나, 정병욱이 보관했던 원고가 해방 후에 세상에 알려지면서 우리는 윤동주라는 보석 같은 존재를 알 수 있었다. 정병욱은 1943년 학병으로 끌려가면서 윤동주 시집 원고를 어머니께 맡기고 떠났는데, 어머니는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마루 널을 뜯어 그 아래에 원고를 보관했던 것이다. 일찍이 정병욱은 이 원고를 어머니가 명주 보자기에 겹겹이 싸서 보관했었다고 기록한 바 있다. 그 후 정병욱의 누이동생 정덕희가 새로운 증언을 하게 되어 사실이 바로잡히게 됐는데, 정병욱이 학병 나가느라 집에 없어서 잘 몰랐을 거라고 하면서 정덕희는 그 원고가 마루 밑에 있었다고 기억해 주었다. 마루 널 아래 땅을 깊이 파서 그 속에 짚을 깐 다음 큰 독을 들여놓고, 그 안에 원고를 넣어 보관했다는 것이다. 깊이 숨겼을 뿐만 아니라 짚으로 건조 상태가 유지되도록 한 것이다. 이 과정은 정덕희 여사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를 ‘윤동주 평전’의 작가 송우혜 선생이 소상하게 기록해 놓은 바 있다. 정병욱은 집에 돌아와 이 원고를 다시 받아들고 뛸 듯이 기뻐했다고 한다. 이 원고는 ?1948년 1월 한 권의 시집으로 빛을 보게 됐는데, 이 원고가 망실됐다면 우리는 최소한 윤동주의 ‘서시’나 ‘별 헤는 밤’, ‘길’, ‘십자가’, ‘또 다른 고향’ 등을 전혀 만나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야말로 우리 문학사에 윤동주라는 빛(光)과 볕(陽)을 한꺼번에 쏘아 준 사건이 광양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정병욱 가옥에 보존됐던 윤동주 유고 원본은 지금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에 전시되고 있다. 원래 정병욱은 경남 남해 출신이고 하동에서 어린 시절을 살았는데, 부친의 사업차 일가가 광양으로 옮겨 가 살게 됐다. 고택이 있는 망덕포구는 옛날분들이 섬진강을 거슬러서 구례나 광양으로 나아가는 길목이었다. 섬진강물이 남해 바다와 합수하는 곳이기도 하다. 1925년 건물인 이 고택의 공식 이름은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이고, 현재 등록문화재 제341호로 지정돼 있다. 이제 이 고택은 두 사람의 우정과 믿음을 문학사의 아름다운 후경(後景)으로 두른 채 맑은 섬진강물처럼 광양 밤바다에 뜬 밝은 별빛처럼 반짝거리고 있다. 매천 황현 선생의 고향이기도 한 광양은 이러한 윤동주·정병욱으로 이어지는 상징 가치에 눈을 뜨고, 한편으로는 정병욱 고택을 명소로 만들면서, 한편으로는 윤동주를 가능하게 했던 이곳의 문화적 브랜드를 차근차근 만들어 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윤동주와 정병욱과 광양의 세 꼭짓점을 잇는 커다란 문화적, 학문적 기념비가 될 것이다.   이제 윤동주와 다섯 살 차이였던 정병욱도 얼마 있으면 탄생 100주년을 맞는다. 자신의 호(號)를 윤동주의 시 ‘흰 그림자’에서 가져와 ‘백영’(白影)이라고 지었을 만큼 윤동주를 사랑했던 정병욱. 윤동주와 그가 맺었던 생전의 인연과 사후에도 지속되는 아름다운 관계를 광양시가 잘 이어 가기를 마음 깊이 소망해 본다. ///서울신문 / 유성호 교수 평론가  
7    윤동주의 친구 강처중 댓글:  조회:2382  추천:0  2018-06-29
목차 브나로드 운동에 뛰어들다 연희전문학교에서 윤동주와 만나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만들다 경향신문 기자에서 좌익인사로 사라지다 시인 에머슨은 ‘친구를 얻는 가장 유익한 방법은 스스로 완전한 친구가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사랑과 정성을 쏟아부어야만 겨우 가능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시인 윤동주에게는 완전한 친구가 한 사람 있었다. 그가 바로 강처중이다. 강처중은 일본의 후쿠오카형무소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마친 재일유학생 윤동주의 시와 삶을 세상에 전파함으로써 영원히 그의 동반자가 되었다. 아울러 친구에 대한 굳은 의리와 아름다운 헌신을 통해 자신의 가슴팍에 새겨진 주홍글씨까지 퇴색시킬 수 있었다. 윤동주의 연희전문학교 문과 동기생이었던 강처중은 타고난 친화력과 리더십으로 윤동주와 함께 학창시절을 꽃피웠고, 재가 되어버린 윤동주의 삶을 복원하는 데 큰 공로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발간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구체적으로 그는 일본 유학을 떠난 윤동주가 서울에 두고 간 〈참회록〉 등 필사본 시집에 들어가지 않은 원고와 그의 장서, 졸업앨범, 앉은뱅이책상 등속까지 죄다 보관했다가 해방 후 서울에 온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에게 전해줌으로써 후세인들이 시인의 생생한 체취를 맡을 수 있게 해 주었다. 게다가 그는 윤동주가 도쿄에서 자신에게 보낸 편지 속에 담겨있던 5편의 시를 공개함으로써 윤동주 시문학의 지평을 넓혀 주었다. 1947년의 소란스런 해방공간에서 강처중은 경향신문 기자로 봉직하면서 무명시인 윤동주의 작품을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한편, 후배 정병욱이 보관하고 있던 윤동주의 자선시집 안에 있던 19편과,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작품 가운데 12편을 추려내 1948년 1월 총 31편의 작품이 담긴 정음사 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을 발간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 그 후 강처중은 이념 대립이 극심하던 1950년대 초반 남로당 요인으로 활동하다가 공안당국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로 인해 강처중은 남쪽에서 기피인물이 되었고 모든 공식문서에서 삭제되었다. 그 영향으로 학계에서도 민족시인 윤동주의 문학에서 그를 제외함으로써 절름발이 논문을 자초했다. 윤동주가 일제의 탄압으로 이역만리 타국에서 옥사했다면 강처중은 그처럼 민족 내부의 갈등으로 희생되었던 비극적인 존재였다. 브나로드 운동에 뛰어들다 강처중은 1916년생으로 함경남도 원산 출신이다. 부유한 한의사 집 맏아들로 태어났지만 성품이 매우 신중하고 과묵했다. 그가 어린 시절 어떤 학교에 다녔는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17세 때인 1932년 동아일보에서 실시한 제2회 브나로드 운동에 참여하여 민중을 계몽하고 한글보급과 문맹타파에 헌신했음은 당대의 동아일보 기사로 확인할 수 있다. 1931년부터 시작된 브나로드운동은 일제시기 광복군으로, 해방 후 반독재민주화투쟁으로 활약했던 14세의 장준하를 비롯하여 수백 명의 청년 학생들의 전폭적인 참여를 이끌어냈고, 당대의 수재였음에 분명한 강처중 역시 솔선수범하여 이 운동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브나로드운동은 애초에 한글보급을 통한 민족의 독립역량 배양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두고 추진되었다. 식민지 조국의 비참한 상황을 직시하고 있던 소년 강처중으로서는 한 줄기 단비 같은 뉴스였다. 당시 강처중은 방학기간인 8월 2일부터 고향에서 가까운 함경도의 고평역에서 100여 명의 농민들에게 한글, 일용계수법, 성경, 지리, 역사, 유희, 창가, 체조, 동화 등을 가르쳤다. 책임대원이었던 그의 보고서에 따르면 강처중 자신은 한글을 가르쳤고, 다른 과정은 여러 동지와 타처에서 피서 온 학생들이 가르쳤다. 그 결과 한글과 일용계수법을 해득한 사람이 20명이었다. 이듬해인 1933년부터 브나로드운동은 학생하기계몽운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때는 도쿄, 간도 등지에서도 참가신청이 이어졌고, 특히 간도의 명신여학교에서는 40명이나 참가하여 주목을 받았다. 강처중은 전년과 마찬가지로 함경북도 덕원군의 책임대원으로서 북성면 문평리에서 남녀 70여명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당시 그의 보고 내용이 동아일보 지면에 실려 있다. ‘이곳에서는 장소와 당국의 허가 관계로 하는 수없이 기독교에서 하는 하기아동성경학교와 연합하여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비용이나 당국 금지를 당하거나 하는 일은 없고, 다만 교회에서 하므로 성경본위로 하여 한글(산술은 하지 않음)을 중요시 아니하는 것이 유감이오나, 책임이 있는 저로서는 최대의 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재미있는 일은 이것이 조직적으로 되어 이곳에 해변으로 인하여 피서 온 고등 대학교 학생 중등보통학교 교사 등을 강사로 하는 훌륭한 학교가 되어 각기 전문하는 학과를 가지고 어린이들에게 수중하여 주고 있습니다.’ 연희전문학교에서 윤동주와 만나다 강처중은 23세 때인 1938년 윤동주와 함께 연희전문학교 문과 본과에 합격했다. 당시 송몽규는 문과 별과에 합격하여 동급생이 되었다. 그때부터 세 사람은 기숙사 핀슨홀의 3층 지붕 밑 방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끈끈한 우정을 쌓았다. 영어에 능통했던 그는 문과 동기들 가운데 1, 2등을 다투면서 ‘영어도사’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한편으로 뒤틀린 심사를 에둘러 표현하는 풍자적인 면도 있었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의 강요로 창씨개명을 강요받자 이름을 신농처중(神農處重)이라고 지어 학적부에 올렸던 것이다. 누군가 너무 심하지 않냐고 타박하자 중국의 삼황오제 중에 한 사람인 신농씨(神農氏)가 본래 강(姜)씨였으니 거리낄 게 무어냐며 되받아쳤다. 문과 학생이었던 강처중은 윤동주나 송몽규처럼 문학에 심취했는데 3학년 때인 194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부문에 지원했다가 낙방했다. 그때 평자는 그의 작품이 너무나 허구적이어서 실감이 없었다고 혹평했고, 특히 글에 설명이 너무 많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리더십으로 매사에 앞장섰던 그는 4학년 때 연전 문과 학생회인 문우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문예부장인 송몽규와 함께 잡지 《문우》를 발간했다. 하지만 편집과정에서 많은 원고가 검열에 걸려 삭제되었고, 잡지는 최종호가 되었으며, 국민총력운동이라는 미명하에 문우회까지 해산의 비운을 겪는다. 후배 장덕순의 회고에 의하면 그 무렵 강처중은 연희동 산기슭을 산책하다가 개울가에서 뱀을 사로잡은 뒤 자신에게 보여주며 “세상의 모든 동물 중에 제일 독한 종자가 바로 뱀이다. 동물은 보통 먹이를 주는 사람에게 길들여지기 마련인데 뱀은 먹이를 받아먹기는 하면서도 전혀 사람을 따르지 않는다. 아무리 잘해주어도 끝내 길들여지지 않는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열정이 압제에 눌리고 패배감만 안겨주는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통탄하는 듯한 느낌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만들다 윤동주의 육필원고 1945년 2월 16일 윤동주가 후쿠오카감옥에서 옥사한 뒤 반년 만인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고 조국이 해방되자 윤동주의 당숙 윤영춘이 조카의 유품을 회수하기 위해 서울에 내려와 그가 한때 묵었던 북아현동 하숙집을 찾다가 실패하고 돌아갔다. 이후 남북이 좌우로 갈리고 38선으로 가로막혀 어수선한 1946년 6월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가 단신으로 월남하여 강처중을 찾아왔다. 그러자 강처중은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윤동주의 원고와 유품을 아낌없이 건네주었다. 당시 그가 전해준 윤동주의 육필 시고는 아래와 같은 세 종류였다. 첫째, 윤동주가 필사본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엮기 전에 쓴 작품 가운데 시집에 넣은 19편의 작품을 제외한 시 작품. 〈팔복〉, 〈위로〉 등. 둘째, 자선시집을 엮은 뒤 새로 쓴 시 작품. 〈참회록〉, 〈간〉 등. 셋째, 일본에서 쓴 시 작품. 〈쉽게 씌어진 시〉, 〈흰 그림자〉, 〈사랑스런 추억〉, 〈흐르는 거리〉, 〈봄〉. 1947년 2월 16일의 윤동주 사망 2주기를 앞두고 강처중은 정병욱과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시작품을 모아 유고시집을 발간하기로 결정했다. 출간시기는 사망 3주기인 1948년 2월 16일 이전으로 잡았다. 그 일은 당시 경향신문 기자로서 언론계와 문화계에 발이 넓은 강처중이 도맡았다. 강처중은 시집 발간에 앞서 윤동주를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하고 1947년 2월부터 경향신문 지면을 통해 윤동주의 작품을 게재했다. 정지용이 퇴사하고 난 뒤인 7월 27일자 지면에 세 번째 실린 〈소년〉에 그는 다음과 같은 소개 글까지 덧붙였다. ‘고 윤동주는 젊은 나이에 일본감옥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난 우리들의 선배입니다.’ 이런 사전작업과 함께 강처중은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받고 있던 정지용에게 유고시집의 서문을 부탁했다. 그 무렵 경향신문사를 퇴직하고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정지용은 강처중이 데려온 윤일주로부터 윤동주와 그의 집안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다음 그 내용을 서문에 자세히 썼다. 그런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1948년 1월 30일 서울 정음사에서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간행되었다. 강처중이 쓴 초판본 시집의 발문에는 친구 윤동주와 송몽규에 대한 그리움이 아래와 같이 애타게 묘사되어 있다. 동주는 별로 말주변도 사귐성도 없었건만 그의 방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동주 있나?” 하고 찾으면 하던 일을 모두 내던지고 빙그레 웃으며 반가이 마주앉아 주는 것이었다. “동주, 좀 걸어보자구.” 이렇게 산책을 청하면 싫다는 적이 없었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산이든 들이든 강가이든 아무런 때 아무 데를 끌어도 선뜻 따라나서는 것이었다. 그는 말이 없이 묵묵히 걸었고 항상 그의 얼굴은 침울하였다. 가끔 그러다가 외마디 비통한 고함을 잘 질렀다. “아.” 하고 나오는 외마디 소리! 그것은 언제나 친구들의 마음에 알지 못할 울분을 주었다. “동주, 돈 좀 있나.” 옹색한 친구들은 곧잘 그의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노리었다. 그는 있고서 안 주는 법이 없었고 없으면 대신 외투든 시계든 내주고야 마음을 놓았다. 그래서 그의 외투나 시계는 친구들의 손을 거쳐 전당포 나들이를 부지런히 하였다. 이런 동주도 친구들에게 굳이 거부하는 일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동주, 자네 시 여기를 좀 고치면 어떤가.” 하는 데 대하여 그는 응하여 주는 때가 없었다. 조용히 열흘이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곰곰이 생각하여서 한 편 시를 탄생시킨다. 그때까지는 누구에게도 그 시를 보이지를 않는다. 이미 보여주는 때는 흠이 없는 하나의 옥이다. 지나치게 그는 겸허, 온순하였건만 자기의 시만은 양보하지를 않았다. 또 하나 그는 한 여성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이 사랑을 그 여성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끝내 고백하지 않았다. 그 여성도 모르는 친구들도 모르는 사람을 회답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는 사랑을 제 홀로 간직한 채 고민도 하면서 희망도 하면서……. 쑥스럽다 할까 어리석다 할까? 그러나 이제 와 고쳐 생각하니 이것은 하나의 여성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을 ‘또 다른 고향’에 대한 꿈이 아니었던가. 어쨌든 친구들에게 이것만은 힘써 감추었다. 그는 간도에서 나고 일본 후쿠오카에서 죽었다. 이역에서 나고 갔건만 무던히 조국을 사랑하고 우리말을 좋아하더니……. 그는 나의 친구기도 하려니와 그의 아잇적 동무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의 죄명으로 2년형을 받아 감옥에 들어간 채 마침내 모진 악형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것은 몽규와 동주가 연전을 마치고 도쿄에 가서 대학생 노릇하던 중도의 일이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나 마지막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운명했지요. 짐작컨대 그 소리가 마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는 듯 느껴지더군요.”  이 말은 동주의 최후를 감시하던 일본인 간수가 그의 시체를 찾으러 후쿠오카에 갔던 그 유족에게 전하여 준 말이다. 그 비통한 외마디 소리! 일본 간수야 그 뜻을 알리만두 저도 그 소리에 느낀 바 있었나 보다. 동주 감옥에서 외마디 소리로서 아주 가버리니 그 나이 스물아홉, 바로 해방되던 해다. 몽규도 그 며칠 뒤 따라 옥사하니 그도 재사였느니라. 그들의 유골은 지금 간도에서 길이 잠들었고 이제 그 친구들의 손을 빌어 동주의 시는 한 책이 되어 길이 세상에 전하여지려 한다. 불러도 대답 없을 동주 몽규건만 헛되나마 다시 부르고 싶은 동주! 몽규! 강처중은 이처럼 친구에 대한 애타는 그리움과 지극한 우정을 모아 윤동주를 무명시인에서 일약 민족시인으로 발돋움시켰지만 대가는 참담했다. 해방공간의 극심했던 좌우대립과 한국전쟁의 여파로 정지용과 함께 강처중은 사회적 금치산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55년 2월 윤동주 서거 10주년 기념 증보판 시집이 정병욱과 윤일주의 손에 의해 출간될 때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이 삭제되기까지 했다. 정지용은 전쟁 당시 월북했다는 이유로, 강처중은 좌익인사라는 이유였다. 1987년 공식적으로 해금되기 전까지 정지용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고, 학계의 논문이나 학술서적에서 반드시 필요한 경우 ‘정○용’, ‘정용’ 등으로 표기했다. 또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는 수차례의 개정판에서 두 사람의 흔적을 지웠다가, 1983년 10월 10일 간행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개정판에서 강처중을 ‘서울의 한 벗’이라고 에둘러 표현하기도 했다. 경향신문 기자에서 좌익인사로 사라지다 경향신문은 1946년 10월 1일 경성의 가톨릭재단에서 창간한 신문으로 최초의 회장은 노기남 주교, 주간은 정지용, 편집국장은 횡보 염상섭이었다. 이때 강처중은 조사주임으로 창간작업에 참여했다. 1947년 1월 15일 정지용이 ‘여적(餘滴)’ 란에 주한미군과 한국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 문제를 실었다가 미군정 당국과 극우 단체로부터 수난을 당했다. 그와 같은 경향신문의 진보적인 성향을 주도했던 강처중은 이후 기자로 활동하면서 골수 사회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1947년 4월 27일자 2면에는 충무공 탄생 402주년을 기념하여 그가 쓴 ‘충무공 이순신’이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여기에서 그는 새로운 시대가 올수록 충무공 이순신은 더욱 빛나는 존재가 된다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인민을 위하고 인민을 사랑하고 인민과 함께 강토를 지킨 때문이다. 인민은 멸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민과 함께 싸우던 위한 인물들은 영원히 민족의 마음속에 사는 것이다. 그런 위대한 인물들은 민족존망의 위기에 나와서 인민과 함께 그 위기를 극복하고 간 분들이다. 때문에 그 민족이 위기에 당면하면 그 인물을 더욱 사모하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 같은 정세에 처하여 이순신을 가일층 사모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냥 영웅 이순신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민중과 함께 동고동우(同苦同憂)하며 투쟁하던 이순신이 그리운 것이다.’ 현재 경향신문 데이터베이스에는 강처중의 흔적이 이순신과 윤동주에 대한 2편의 기사만 남아있다. 이후 그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다가, 한국전쟁 이후 계엄령 치하였던 1953년 9월 21일 손원일 국방부장관이 발표한 ‘정국은 간첩사건’에서 이름을 드러낸다. 정국은은 일제 강점기 일본 마이니치(朝日)신문 기자를 지낸 언론인이었는데 해방 후 연합신문사 주일특파원, 국제신문사 편집국장 들을 지냈으며 동양통신사 및 연합신문사 주필로 재직하던 중 간첩협의로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치안국 고위관리인 홍택희 총경을 비롯하여 언론, 정부, 국회의원까지 연루되어 국회 내에 조사위원회까지 구성되었던 초대형 사건이었다. 정국은은 고등군법회의에 송치되어 단심으로 군사재판을 받은 뒤 그해 12월 2일 사형이 언도받았다. 한데 1954년 1월 23일 총살형 장소로 예정된 홍제원 화장터 근처에 구경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지만 사형집행이 연기되었다. 결국 정국은은 1955년 2월 18일 수색에서 총살되었지만 그가 죽지 않고 미국 극동사령부의 보호 아래 일본에서 이중스파이로 활약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바로 이 사건에서 강처중은 남로당의 젊은 실세로서 크게 부각되었다. 군 당국은 정국은의 모든 간첩 혐의가 남로당의 상부선인 강처중의 지령에 따라 행해졌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한데 작가 송우혜의 조사에 따르면 강처중은 이미 1950년에 남로당 간부였던 김삼룡, 이주하 등과 함께 체포되어 사형 판결을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38선을 돌파한 뒤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하면서 강처중은 감옥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두 달여가 지난 9월 4일 강처중은 갑자기 부인 이강자 여사에게 소련에 가서 공부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가출해 버렸다. 어쩌면 그는 생사의 기로에서 가까스로 살아나왔건만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전쟁의 참상이 이어지자 실망한 나머지 현실도피를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먹이를 주어도 길들여지지 않은 뱀 같은 민족의 비정한 세월을 조소하면서……. 그래서일까. 그 후 남로당과 관련된 어떤 문건이나 서적에서도 그의 존재는 완벽하게 지워졌다. 그의 얼굴이 다시 세상에 드러난 것은 송몽규의 조카인 작가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이었다. 그리고 2016년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에서 그는 해맑은 미소를 띠며 관객들의 앞에 섰다.
6    [이런저런] - 쌍둥이는 쌍둥이다... 댓글:  조회:2246  추천:0  2018-06-29
중국 쌍둥이 자매, 수능 점수까지 동일해 화제 [ 2018년 06월 29일 ]     어렸을 때부터 취미나 취향이 모두 비슷했던 쌍둥이 자매가 중국 대학입시에서도 동일한 점수를 받아 화제가 되고 있다.   중국 허난(河南)성 주마뎬(驻马店)에 살고 있는 쌍둥이 자매는 유치원에서부터 고등학교까지 모두 같은 학교, 같은 반에서 공부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중 한 명인 마치윈이 중국 전통악기 얼후(二胡)를 배우고 싶다고 하자 동생 마치원도 약속한듯 똑같이 얼후를 배우고 싶어했다. 이 둘은 중학교 2학년 때 얼후 전문 자격증 6급을 통과했다.    이들은 매일 아침 같은 시각에 일어나고 같은 시각에 잠이 든다. 얼굴뿐 아니 성격도 비슷해 주변 사람들은 이 둘을 종종 헷갈려 한다. 마치원은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를 머리 속에 떠오를 때 언니는 벌써 흥얼거리고 있다”며 "내가 감기 걸릴 때 언니도 같이 걸린다”고 말하며 스스로도 신기해 했다.    이번 가오카오 성적이 발표된 후 이 쌍둥이 자매들은 자신들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두 명 모두 531점으로 동일한 점수를 받은 것이다. 언니는 어문 110점, 수학 120점, 영어 126점, 문과 종합 평가(文综) 175점을 받았고, 동생은 어문 102점, 수학 116점, 영어 109점, 문과 종합 평가 204점을 받아 둘 다 총점 531점이었다.    쌍둥이 자매들은 오랫동안 꿈꿔 왔던 교사가 되기 위해 사범대학에 원서를 넣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봉황코리아
5    "빨랫줄을 보면 또 어머니 생각이 납니다"... 댓글:  조회:1654  추천:0  2018-06-29
  + 빨래를 하십시오  우울한 날은  빨래를 하십시오  맑은 날이  소리내며 튕겨울리는  노래를 들으면  마음이 밝아진답니다  애인이 그리운 날은  빨래를 하십시오  물 속에 흔들리는  그의 얼굴이  자꾸만 웃을 거예요  기도하기 힘든 날은  빨래를 하십시오  몇 차례 빨래를 헹구어내는  기다림의 순간을 사랑하다 보면  저절로 기도가 된답니다  누구를 용서하기 힘든 날은  빨래를 하십시오  비누가 부서지며 풍기는  향기를 맡으며  마음은 문득 넓어지고  그래서 행복할 거예요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빨래  오늘도 빨래를 한다.  옷에 묻은 나의 체온을  쩔었던 시간들을 흔들어 빤다.  비누 거품 속으로  말없이 사라지는 나의 어제여  물이 되어 일어서는 희디흰 설레임이여  다시 세례 받고  햇빛 속에 널리고 싶은  나의 혼을 꼭 짜서  헹구어 넌다.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빨래  빨래로 널려야지  부끄럼 한 점 없는  나는 빨래로 널려야지  피 얼룩  기름때  숨어살던 눈물  또 서툰 사랑도  이젠 다 떨어버려야지  다시 살아나야지  밝은 햇볕 아래  종횡무진 바람 속에  젖은 몸 다 말리고  하얀 나래 퍼득여야지  한 점 부끄러움 없는  하얀 나래 퍼득여야지  (김혜숙·시인, 1937-)  + 바람 부는 날  빨랫줄을 보면  또 어머니 생각이 납니다.  어릴 적 기저귀가  거기 널려 있습니다.  내 맘속에도 바람이 불고  어머니의 머리칼이 날립니다.  이렇게 바람 부는 날엔  빨랫줄의 빨래집게가 젤입니다.  빨래집게를 보면서  또다시 어머니가 그립습니다  (이정우·시인, 1946-)  + 빨래  초록빛 물통 가득  춤추며 일어나는 비누 거품 속에  살아있는 나의 때(汚)가  울며 사라진다.  나는 참 몰랐었다.  털어도 털어도 먼지 낀 내 마음 속  너무 오래 빨지 않아  곰팡이 피었음을  살아있는 동안은  묵은 죄를 씻어내듯  빨래를 한다.  어둠을 흔들어 헹구어낸다.  물통 속에 출렁이는  하늘자락 끌어올려  빳빳하게 풀 먹이는  나의 손이여.  무지개 빛 거품 속에  때묻은 날들이  웃으며 사라진다.  (작자 미상)  + 빨래  걸려있어야 할 최후의 정당한  까닭으로  여기 선상에 놓인 옷감들처럼  이토록 청명한 빛에  나도 펴고 털어 말려야할까  마지막 남은 허위와 위선의 물기까지  다 빠져나가기를 바라  나를 널어야할까  새하얀 속살같은 그 무지한 영혼만  집게에 남겨지도록  그리고 나부끼도록  온종일 어느 창조의 줄에든 걸려있고 싶다  (윤한영·시인)  + 이분법에 대한 일상의 소견  햇볕에 빨래를 내다 건다  햇살에 걸린 빨래들,  너무 오만하게 지쳐 섰던 영혼이  햇살에 오징어처럼  타 없어질 때까지  일광욕중이다  몸과는 사이가 나쁜 영혼에게  영혼이라는 말에 갇혀 영영 우울한 영혼에게  가을 하늘, 햇살에 걸린 빨래들에 섞이어  제 순수를 잃어버릴까,  잔뜩 겁먹은 영혼에게  개살궂은 사내처럼  간지럼 태우다  깔깔,  영혼도 웃다가 배를 움켜쥐고 자지러진다  웃다가 오줌도 새는 줄 모르고  눈물이 쏙 빠지고  혼이 달아난다  영혼에 영혼의 얼룩이 빠지고  영혼은 비로소 다른 것들과 구별되지 않고  평범해졌다, 깨끗해졌다  햇살 참 좋다,  (조하혜·시인, 1972-)  + 아내의 빨래공식  아내의 빨래공식은 늘 일정하다  물높이 중간에 놓고  세탁 십 분 헹굼 세 번  탈수 삼 분 후에 다시 헹굼 한 번  그러나 간혹 공식이 파기될 때가 있다  남편 잘 둔 친구를 만났다던가  나의 시선이 그녀를 빗나갔다 싶은 날이면  아내의 빨래 법칙엔 밟아빨기가 하나 추가된다  그런 날이면 나는 거실에 앉아  아내가 세탁실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린다  잔소리가 어디서부터 터질 것인지  마음 졸이며 지켜보다가  거실을 정리하다가 하지도 않던 걸레질을 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퇴근하고 온 날에도  아내가 빨래하는 시간만 되면 늘 긴장한다  예정된 공식대로 세탁기가 돌아가면  그제서 오늘의 스포츠 뉴스를 본다  (이기헌·시인, 1958-)  + 빨랫줄에 행복을 널다  일요일 오후  외출한 아내가 전화기로 지령을 내린다  세탁기 멈추었으면 빨래 좀 널어라  마누라 말 잘 듣는 것이 세상 공덕 중에 으뜸이라고 하니  달콤한 잠결에 들리던 규칙적인 회전음이 빨래 소리였구나  빗소리로 들리던 휘파람소리가 헹굼 물 빠짐 소리였구나  둔탁하게 베란다 창을 두드리던 소리가 탈수 소리였구나  뚜껑을 열자  손에 손잡고 씨름하듯이 허리춤을 부여잡은  식구들이 가장자리로 가지런히 잠을 자고 있다  그래, 서로의 등을 두드려서 하얗게 빛을 내었구나  따뜻한 가슴을 풀어서 세제를 녹였구나  가는 목덜미를 씻겨주며 말끔하게 헹구어 내었구나  아내의 좁은 어깨를 펴서 빨래줄 중앙에 편안하게 앉히고  주름진 내 다리통을 반듯하게 펼쳐서 가장자리에 세우고  매일 식구들 체면을 닦아주던 수건의 네 귀를 꼭 맞추어  가을 국화꽃 향기를 묻혀서 널어놓고  소파 깊숙이 몸을 낮추고 올려다보니  내가 아끼고 사랑하여 왔던 모든 것이 빨랫줄에 있다  (허진년·시인)  + 빨래를 널면서  우리 집은 가족이래야  네 명밖에 안 되지만  이틀이 멀다 하고  부지런히 세탁기를 돌려야 할만큼  형형색색의 빨래들이  하루에도 수북히 쌓인다  힘든 일은 세탁기가 다하지만  탈수가 끝난 빨래들을  탁탁 털어 건조대에 널면서  문득 부끄러워진다   나의 속마음을 마지막으로   세탁한 때가 언제였나  (정연복, 1957-)  + 엮은이: 정연복
4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참대곰아, 너도 인젠 두살... 댓글:  조회:2604  추천:0  2018-06-29
우리 2살 됐어요! 쌍둥이 판다 특별한 생일 파티 [ 2018년 06월 28일 ]     26일 중국 중앙정부가 오문특별행정구에 선물한 판다 ‘카이카이(開開)’와 신신‘(心心)’의 쌍둥이 아들인 ‘젠젠(健健)’과 ‘캉캉(康康)’의 2살 생일이 찾아왔다. 마카오특별행정구 민정총서(民政總署) 직원들은 쌍둥이 판다와 어미 판다 ‘신신’을 위해 특별 케이크를 만들어 선물했다. ///신화사/인민망                           14일(현지시간) 중국 쓰촨성 워룽 판다 자연보호구역에서 1살이 채 안 된 새끼 판다들이 월드컵 개막 축하 행사의 일환으로 축구 경기를 펼치고 있다.
3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돌고래 슬픔",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871  추천:0  2018-06-29
[IF 카페] 죽은 암컷 떠나지 못하고 한 시간 동안 맴돌아.. 돌고래도 슬픔 느낄까? 이영완 과학전문기자 2018.06.28.  자동요약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이탈리아의 고래 연구자인 지오반니 베아르지 박사는 지난 2016년 지중해에서 줄무늬 돌고래 한 마리가 죽은 암컷 주변을 한 시간 이상 맴돌며 코로 찌르고 미는 행동을 목격했다〈사진〉. 배에 같이 타고 있던 학생들은 다들 돌고래가 동료를 잃은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고 했다. 과연 돌고래도 슬픔을 느낄까. /이탈리아 돌고래 생물학·보존 연구소 베아르지 박사는 돌고래 생물학·보존연구소의 동료들과 함께 1970년부터 2016년까지 발간된 고래 연구논문 중에 죽은 동료나 새끼 근처를 맴도는 행동을 기록한 78편을 조사했다. 국제학술지 '동물학'에 실린 연구 결과에 따르면 고래류 88종 가운데 20종이 사체 주변을 떠나지 못하는 행동을 보였다. 혹등고래 한 종을 빼고는 모두 돌고래였다. 연구진은 이를 근거로 슬픔을 표현하는 듯한 행동은 뇌 크기, 사회 구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돌고래들은 일반적으로 몸무게에서 뇌가 차지하는 비중이 고래보다 크고 구조도 복잡하다. 사회 구조도 돌고래가 훨씬 발달돼 있다. 하지만 이번에도 돌고래들이 실제로 슬픔을 느끼는지는 입증하지 못했다. 베아르지 박사는 "육상 동물은 오랫동안 관찰을 통해 실제로 슬픔을 표현하는지 확인할 수 있었지만 고래의 경우 단편적인 관찰에 그쳤다"고 말했다. 세계적인 영장류학자인 제인 구달 박사는 탄자니아에서 어린 침팬지가 어미를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음식을 거부하다가 한 달 만에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목격하기도 했다. 개코원숭이가 동료나 새끼를 잃으면 혈중 스트레스 호르몬 농도가 증가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베아르지 박사는 "앞으로 고래류가 동료의 사체 주변을 맴도는 장면을 목격하면 바로 수중 청음기로 고래의 울음소리가 평소와 다른지 확인하고, 숨을 쉴 때 뿜는 물을 채집해 스트레스 호르몬이 증가했는지 알아내야 한다"고 제안했다.
2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동물축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697  추천:0  2018-06-29
동물들 죽음 몰아넣는 '동물축제'.. "이젠 달라져야" 이기림 기자 2018.06.29.  자동요약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28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남동 테이크아웃드로잉에서 '국내 동물 이용 축제 현황'에 대한 분석 및 토론회가 열렸다.© News1 이기림 기자 (서울=뉴스1) 이기림 기자 = 국내 동물축제에서 이용하는 동물을 죽음에 이르게 하거나 상해를 입힐 정도의 스트레스를 주는 활동이 84%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지금과 같은 동물축제 방식에서 벗어나 생태계와 공존할 수 있는 방향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동물의 사육제-동물축제 반대축제'(이하 동축반축) 기획단은 28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남동 테이크아웃드로잉에서 '국내 동물 이용 축제 현황'에 대한 분석 및 토론회를 열었다. 토론회에는 김산하 생명다양성재단 사무국장과 천명선 서울대 수의과대학 교수, 강양구 지식큐레이터, 김한민 시셰퍼드 활동가, 정읍 소싸움경기장 건립을 막은 서은주 수의사 등이 참여했다. 김산하 생명다양성재단 사무국장은 이날 "인간과의 교감을 동물은 찬성한 적이 없고, 반려동물은 물론이고 야생동물, 어류 등도 모르는 존재와의 접촉을 공포수준으로 싫어한다"며 "그런데 (동물축제 다수 프로그램인) 맨손잡기 등은 이처럼 잡는 것뿐만 아니라 얕은 풀장을 만들어서 수십명이 달려들어 잡는 (심각한) 수준"이라고 현재 열리는 동물축제의 문제를 지적했다. 앞서 동축반축 기획단이 천명선 서울대 수의과대학 교수팀에 의뢰해 실시한 국내 동물축제 동물이용실태조사에 따르면 2013~2015년 전국에서 열린 86개 동물축제 프로그램 84%가 맨손잡기, 낚시, 싸움, 경주, 쇼 등 '직접적이고 단순한' 프로그램이었다. 야외서식지나 포획상태를 살피는 등 '간접적이고 복합적인 경우'는 11%, 교육이나 기부, 예술 등 '추상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경우'는 전무했다. 그 결과 많은 동물들이 축제에 이용되면서 '죽거나 죽이는 것에 해당하는 고통'을 받아온 것으로 드러났다. 이같은 동물종류에는 송어, 빙어 등 어류가 60%로 가장 많았고 뒤를 이어 패류·연체동물류, 포유류, 곤충류 순으로 조사됐다. 강양구 지식큐레이터는 "생태축제라고 포장된 동물축제를 갔다 오면 21세기 시민의 교육목표인 공감능력을 향상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현행 동물축제의 방식은 오히려 이 능력을 훼손시킨다"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망가트린 생태계와 어떻게 공존할지 고민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천명선 교수는 동물축제의 주 관람객인 아이들과 그 엄마들을 예로 들며 "이들은 동물을 직접 만져보는 것들을 생태체험이라고 여기고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축제 이후 많은 동물들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려주면 굉장히 불편해한다"며 "(현재 동물축제가) 교육이 될지 나쁜 차원의 일이 될지에 대해서는 판단이 설 것"이라고 말했다. 천 교수는 이어 "현재의 동물축제는 동물을 손으로 잡아먹는 원시인 같은 프로그램들로 구성돼 있다"며 "이렇게 아주 단순한 수준에서 벗어나 조금 더 복합적이고 창조적인 무언가가 이뤄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또한 천 교수는 "인간과 동물의 접점이 많아지면서 몰랐던 병원체가 전염될 확률이 증가하고 있다"며 "동물복지를 위해 우리 욕망을 접고 포기하는 차원이 아니라 우리에게 위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기적으로 생각해도 동물축제에서의 동물 이용을 어떻게 조심해야 하는지 생각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동축반축은 울산 고래축제가 열리는 날인 7월7일 오후 12시 은평구 서울혁신파크의 피아노숲에서 열린다. 동물들을 고통에 빠지게 하는 현재의 동물축제 대신 생태교육과 동물보전 등을 말할 수 있는 축제로, 생명다양성재단, 시셰퍼드 코리아, 아름다운 커피, 라온버스가 주최한다. 국내 동물이용축제의 현황-서울대 수의인문사회학교실(사진 생명다양성재단)© News1 황하 壶口 폭포에 청·탁 반반 경관 나타나 [ 2018년 06월 28일 ]     이는 6월 26일 촬영한 황허(黃河 황하) 후커우(壶口호구) 폭포에 나타난 청·탁 반반 경관이다. 최근, 상류 일부 지역의 큰 강우 영향으로 황허 후커우 폭포에 서쪽은 혼탁한 파도가 용솟음치고 동쪽은 맑은 물결이 출렁이는 특이한 경관이 나타나 많은 관광객의 발길을 끌었다. 신화망
1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한난계 댓글:  조회:3272  추천:0  2018-06-29
한난계(寒暖計)                                                                     윤동주       싸늘한 대리석 기둥에 모가지를 비틀어 맨 한난계, 문득 들여다 볼 수 있는 운명한 오척육촌(五尺六寸)의 허리 가는 수은주, 마음은 유리관보다 맑소이다.     혈관이 단조로워 신경질인 여론동물(與論動物), 가끔 분수(噴水)같은 냉(冷)침을 억지로 삼키기에 정력을 낭비합니다.     령하(零下)로 손가락질 할 수돌네 방처럼 치운 겨울보다 해바라기 만발한 팔월(八月) 교정이 이상(理想) 곱소이다. 피끓을 그날이ㅡ     어제는 막 소낙비가 퍼붓더니 오늘은 좋은 날씨올시다. 동저고리 바람에 언덕으로, 숲으로 하시구려ㅡ 이렇게 가만 가만 혼자서 귓속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나는 또 내가 모르는 사이에ㅡ     나는 아마도 진실한 세기의 계절을 따라 하늘만 보이는 울타리 안을 뛰쳐, 력사 같은 포지션을 지켜야 봅니다.     ============================= 광복절, 윤동주의 시를 읽다 [변방의 사색] 윤동주의 /이계삼 밀성고등학교 교사 2011.08.19 19:05:00                 정기후원               1.  일본에서 태어나 열네 살 때 조선으로 건너온 아버지는 광복절에는 일본에서 돌아온 친구들과 하루 종일 술을 드시며 노셨다. 한 해도 거르지 않으셨다. 불콰해진 얼굴로 일본 노래도 부르고, 때로 목소리 높여 싸우기도 하셨다.  내 할아버지는 해방을 얼마 앞두고 가족들을 먼저 보내고 가산을 정리해서 뒤늦게 나오시다 미군 폭격으로 현해탄에서 돌아가셨다. 그래서 우리는 할아버지 무덤이 없다. 열네 살 나이에 할머니를 도와 졸지에 가장 노릇을 해야 했던 아버지는 서툰 한국말로 구두닦이에 날품팔이에 기약 없는 노동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나뭇짐 가득 쌓인 지게를 받쳐 두고 부산으로 향하는 경부선 철로를 바라보며 눈물바람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다. 광복절 아침에 서가에서 윤동주 시집을 꺼내어든다. 스물여덟 젊은 나이에 광복을 불과 6개월 앞두고 옥사한 윤동주. 그의 대표작인 나 은 한국인들에게'시란 이런 것이다'라고 생각하는데 중요한 계기를 준, 한국어로 형상화된 가장 아름다운 한 정신의 풍경화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꼭 학교 교육의 덕택만은 아닐 것이다. 그의 짧은 생애의 모든 기간이 일제 강점기에 걸쳐 있다는 사실, 그 순결한 넋이 극한에 다다른 제국주의자들의 광기에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마음 아프다. 한 번도 손들어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 중에서 꼭 그렇게 자신이 죽을 것을 예감하고 있는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그가 이런 비애만으로 시를 쓴 것은 당연히 아니다. 이번에 읽어보니, 그가 스무 살 전후로 가톨릭 잡지에 발표했다는 그의 동시가 참 좋다. 어린아이 같은 순정한 마음이 느껴진다. 이것 또한 시인의 마음이다. 가을 지난 마당은 하이얀 종이  참새들이 글씨를 공부하지요 째액째액 입으로 받아 읽으며  두 발로는 글씨를 연습하지요 하루 종일 글씨를 공부하여도  짹자 한 자밖에는 더 못 쓰는 걸 ― 웃음도 나오고 마음이 훈훈해진다. 타작과 탈곡 마당에 쫑쫑대는 참새들을 바라보는 소년 윤동주가 눈에 보이는 것 같다. 비록 엄격한 기독교적 분위기였으나, 이런 엄혹한 시절에도 이런 소년의 마음이 가능했던 것도 그가 북간도 명동촌 한인 자치부락이라는 자유의 공기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가능한 것이었으리라. 하지만 그 무렵 남긴 시에는 이런 것도 있다.  누나의 얼굴은  해바라기 얼굴 해가 금방 뜨자  일터에 간다 해바라기 얼굴은  누나의 얼굴 얼굴이 숙어들어  집으로 온다 ― 나중에 민중가요로도 작곡된 동시다. 그 당대의 노동현실이 인상적으로 음각되어 있다. 깊은 울림이 있다. 산업화와 착취를 바라보는 한 순결한 정신이 그려낸 인상화이다. 소년 시절, 그의 제일의 벗이었던 문익환 목사가 그러하였듯 윤동주가 해방 이후에 살아남았더라면 또한 우리 민족사의 큰 정신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2.  ▲ (윤동주 지음, 민음사 펴냄). ⓒ민음사 1938년경, 윤동주는 연희전문에 입학하면서 처음으로 타향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반자치의 자유를 누리던 북간도에서 이제 식민지 현실의 중심으로 진입한 것이다. 이 시점으로부터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가 1년여 만에 사상범으로 체포되는 시점까지의 4년여 동안 그는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이십여 편의 시들을 남기게 된다.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 이제 내 좁은 방에 돌아와 불을 끄옵니다. 불을 켜두는 것은 너무나 피로롭은 일이옵니다. 그것은 낮의 연장이옵기에― 이제 창을 열어 공기를 바꾸어 들여야 할 텐데 밖을 가만히 내다보아야 방안과 같이 어두워 꼭 세상 같은데 비를 맞고 오던 길이 그대로 비속에 젖어 있사옵니다.  하루의 울분을 씻을 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 속으로 흐르는 소리, 이제 思想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 가옵니다. -   자취하던 대학생 시절, 나는 이 시를 참 좋아했다. 맨 마지막 구절의 둔사(遁辭)같은, '사상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간다'는 구절이 이 탁월한 시를 망쳐버린 것만 같아 그냥 칼로 도려내고만 싶었다. 사상이 능금처럼 익든 말든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내 맘은 그랬다. 나 또한 타향에서 홀로 지내던 때였다. 알 수 없는 우울과 슬픔을 안고 살아가던 때, 어쨌든 내겐 이 시가 내 온몸으로 다가왔다. 피로한 하루어치의 삶에 지쳐 내 방에 들어와 털썩 무너지듯 주저앉을 때에도,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에 울분을 씻을 길이 없을 때에도. 긴 비가 오는 날, 비속으로 젖어가는 세상을 보면서 이렇게 세상이 스르르 잠들어 가라앉아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세상의 죄로부터 피해있을 곳은 없었다. 다만, 땀 흘려 노동하는 삶이라면 나를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았고, 죄짓는 삶일지언정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 윤동주도 그러했으리라.  빨리  봄이 오면 죄를 짓고  눈이 밝어  이브가 해산하는 수고를 다하면  무화과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 ― 중에서 3.  윤동주는 내성의 시인만은 아니었다. 그의 우울과 좌절은 단순한 포즈만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이런 시가 있다.  영하로 손가락질할 수돌네 방처럼 치운 겨울보다  해바라기 만발할 팔월 교정이 이상(理想) 곺소이다. 피끓을 그날이―  어제는 막 소낙비가 퍼붓더니 오늘은 좋은 날세올시다.  동저고리 바람에 언덕으로, 숲으로 하시구려― 이렇게 가만가만 혼자서 귓속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나는 또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는 아마도 진실한 세기의 계절을 따라― 하늘만 보이는 울타리 안을 뛰쳐,  역사 같은 포지션을 지켜야 봅니다. 한난계는 온도계를 말한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진실한 세기의 계절을 따라', 그리고 '하늘만 보이는 울타리 안을 뛰쳐' 나아가 피 끓을 그날에는 목 놓아 외치고 싶었던 것이 그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하긴, 윤동주가 끝내 일제의 감옥에서 살아났더라도 그의 그다음 삶은 또한 어찌 되었을지, 장담할 수 없다. 그가 해방 공간에 숨기어진 흉포한 발톱을 피해 갈 수 있었을 것인지도 장담할 수 없다.  막노동과 날품팔이로 가족들을 먹여 살리던 우리 아버지는 해방 후 조선 땅 밀양에서 살아남고자 우익에 줄을 섰다. 청년단원이 되어 좌익을 소탕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그리고 전쟁이 났다. 그러나 징병은 피해야 했다. 여동생과 어머니를 보살필 사람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징병을 피할 수 있다는 기대만으로 밤을 틈타 부산까지 걸어가 군수공장에 겨우 일자리를 얻었다. 거기서 끔찍한 노역에 시달리다 사고를 겪었고, 작은 장애를 얻었다. 윤동주처럼 죽지는 않았지만, 살아남은 우리 아버지에게는 윤동주가 그리워했던 '역사 같은 포지션'은 없었다. 오직 살아남기 위한 노동, 노동, 빵장수와 날품팔이, 드난살이였을 따름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자주 술을 드시고 회한에 젖어 우셨다. 아버지의 광복과 그 이후의 나날을 생각하면 나도 슬프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   예수의 산상수훈에 대한 날카로운 도발이다. 그러나 그에게 이 독신(瀆神)의 외침은 이 슬픈 역사에 대한 자신의 눈물이며, 방관하는 신에 대한 절절한 항의에 다름 아닐 것이다. 우리 아버지가 먹고살기 위해 이렇게 떠돌 때에도, 죽을 줄 알면서도 역사의 제단에 제 몸을 바친 이들이 있었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목아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흘러나는 피를 어두워져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 중에서 1942년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한 윤동주는 그 해 일본으로 건너가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가을에는 도지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로 전학한다. 수시로 경찰이 하숙방을 뒤지고 끽하면 잡아 가두고, 고문하던 시절이다. 모두가 숨죽였고, 굶주림을 껴안고 살아야 하던 시절이었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여지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는 구체적인 행동의 물증이 없더라도 조선인들을 탄압하는 데에 흔히 사용되었던 '사상불온'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었고, 조국 광복을 불과 6개월여 앞두고 옥사했다. 그는 스스로 십자가를 지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그의 죽음이 또한 그 시대의 십자가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윤동주도, 그리고 우리 아버지도 모두 불행했다. 불행한 시대에 살았던 이들이 치러야 했던 역사의 죗값이었다.  4.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 중에서 어둠을 짖는 개의 울음소리에 쫓기우는 양심. 이 양심은 지금 이 땅에 남아 있는가. 윤동주가 죽고 난 뒤, 66년의 역사란 또한 백골 같은 나날들이었다. 광복절인 오늘도 어디에선가는 성조기와 이승만과 박정희의 초상을 들고 검은색 라이방을 쓴 한 무리의 인간들이 운집해 있을 것이다. 정리해고 당한 노동자들을 위로하고 연대하기 위해 부산까지 내려간 이들을 뒤쫓아가 후려치고 멱살을 쥐던 깡패 같은 인간들, 그들의 완력과 우격다짐들이 진실과 양심을 주장(朱杖)질 했던 66년이었다.  윤동주의 시들은 또한 자기의 안과 밖에 존재하는 어둠과 대결하려 했던 한 순결한 영혼의 기록으로 남았다. 그리하여 그가 그렸던 맑고 깊은 서정은 이 캄캄한 시절에도 별처럼 빛난다. 수십 년의 세월을 격한 지금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시대의 어둠을 슬퍼하는, 그리고 순수를 그리워하는 모든 이들의 시심(詩心) 속에 남을 것이다. 고마운 일이다. 윤동주가 그 숨 막히는 시대에도 홀로 노트에 시를 끼적여 남겨주었다는 사실이. 소년 윤동주, 역사의 격랑에 올라타지 않았더라면, 결국 이 마음으로 살았을 아름다운 소년. 그의 사랑하는 순이, 황홀한 소년의 마음을 생각하며 도무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들의 패악질로 도배된 오늘, 광복절을 넘어간다.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뭇가지 위에 하늘이 펼쳐 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 ―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 ―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은 어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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