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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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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詩여 침을 뱉고 또 뱉어라"... 댓글:  조회:3642  추천:0  2018-07-01
프린트글자확대글자축소   #자유의 시인이자 사상가   ‘풀은 바람보다 더 빨리 눕지만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 웃는다’   어두운 시대 자유 향한 열망   #죽은 지 50년 지나도 깊은 울림   뛰어난 문학성ㆍ모더니즘 바탕   추상성 벗은 구체적 자유주의   오늘날까지 계속 새로움 안겨   #자유의 미래는   정치적 자유는 확장됐지만   경제적으론 부자유에 갇혀   경제 민주주의에 미래 달려 1961년 막내 여동생 졸업식에서 시인 김수영과 가족들. 왼쪽부터 김 시인의 부인 김현경, 모친, 동생 김수명, 김수영 본인, 동생 김수환. 한국일보 자료사진       개인적인 이야기로 이 글을 시작하고 싶다. 20대 중반 독일로 유학을 갔다. 독일어에 서툴렀던 나는 처음에 말하고 쓰는 데 적잖이 고생했다.학교에서 이국어로 생활한 다음 밤늦게 기숙사로 돌아와 모국어로 쓴 글을 읽었을 때의 기쁨이란! 그때 나는 모국어가 의사소통 수단 이상이라는 걸 깨달았다. 모국어는,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나라는 존재가 거하는 집이었다. 예를 들어, “거칠기 짝이 없는 우리 집안의 / 한없이 순하고 아득한 바람과 물결- / 이것이 사랑이냐 /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냐”라는 시인 김수영(1921~1968)의 ‘나의 가족’을 읽었을 때 나는 경탄했다. 다소 눈물겹기도 했다. 더없이 순하고 아득한 바람 같은 것이 가족이며, 아무리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임을 나는 추상적 논리에 앞서 온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시인은 사상가일 수 있을까. 사상이 가치ㆍ이념ㆍ세계관을 포괄하는 개념이라면, 시인은 개인과 사회에 대한 번득이는 감성은 물론 깊이 있는 사유를 전달하는 사상가다. 지난 20세기 R. 타고르, T. S. 엘리어트, 파블로 네루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그리고 메어리 올리버는 내겐 위대한 시인이자 탁월한 사상가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한용운, 백석, 윤동주, 그리고 김수영과 신동엽이 그런 존재라고 생각해 왔다. 김수영은 자유의 시인이자 사상가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말한다. “김수영의 시적 주제는 자유다. (...)그는 자유를 시적ㆍ정치적 이상으로 생각하고, 그것의 실현을 불가능케 하는 여건들에 대해 노래한다. 그의 시가 노래한다고 쓰는 것은 옳지 않다. 그는 절규한다.” 누구는 김수영이 설움의 시인 혹은 사랑의 시인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맞다. 설움ㆍ사랑ㆍ참여ㆍ소시민ㆍ현대성은 김수영 세계관을 구성하는 키워드들이다. 그럼에도 자유는 김수영에게 이 모두를 포괄하는 마음의 문이자 세계의 창이었다.   김수영의 ‘김수영 전집’   이 짧은 글에서 김수영 시 세계의 전모를 살펴보기는 어렵다.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자유의 사상가로서의 김수영이다. 1968년 마흔여덟 나이로 돌연 세상을 떠난 그가 남긴 작품들은 ‘김수영 전집’ 2권(제1권 시, 제2권 산문)으로 정리돼 있다. 1981년 여동생 김수명이 편집한 초판이 나왔고, 올해 문학평론가 이영준이 편집한 3판이 출간됐다. 김수영은 자유주의자다. 스스로 밝히듯 그는 우파나 좌파가 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의 분방한 상상력과 예민한 자의식은 부국강병을 중시하는 우파와 사회혁명을 강조하는 좌파와 어울리기 어려웠다. 광복 직후 그가 발표한 시는 체질적으로 자유주의자일 수밖에 없는 그의 내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대상과의 거리를 유지한 채 그는 “사물과 사물의 생리와 / 사물의 수량과 한도와 / 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을” 바로 보려고 열망한다(‘공자의 생활난’, 1945). 김수영의 시집과 산문집들. 맨 위 '시여 침을 뱉어라'(1975년 초판본)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달나라의 장난' '달의 행로를 바꿀지라도' '퓨리턴의 초상' '시여 침을 뱉어라'(1977년 3판). 민음사 제공   주목할 것은 김수영의 자유주의가 개인적 영역에 머문 게 아니라 사회적 차원의 성찰로 서서히 진화했다는 점이다. 첫 번째 계기는 서구와 우리 사이에 놓인 거리의 자각이었다. “1950년 7월 이후에 (...) / 이 나라의 비좁은 산맥 위에 자태”를 보인 “헬리콥터여 너는 설운 동물이다 / -자유 / -비애”(‘헬리콥터’, 1955)라고 그는 노래한다. 헬리콥터로 상징되는 서구 문명의 ‘자유’에 열광하지만, 그 자유의 다른 이름은 ‘비애’다. 서구적 이상과 한국적 현실 간의 거리에서 그가 자각한 것은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 버린 설움”(‘거미’, 1954)이다. 이 설움과 비애의 자유주의는 4월 혁명이라는 두 번째 계기를 맞이했다. “자유를 위해서 /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 사람이면 알지 (…) 어째서 자유에는 /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 혁명은 / 왜 고독한 것인가를”(‘푸른 하늘을’, 1960)이라고 노래함으로써 그의 자유주의는 현실의 목소리를 얻는다. 자유를 향한 힘찬 그의 목소리는 5ㆍ16 쿠데타도 막을 수 없었다. ‘풍자만 할 수도 없고 해탈만 할 수도 없는’(‘누이야 장하고나!’, 1961) 현실의 심장에 그는 화살을 겨눈다. 그 가운데 빛나는 화살의 하나가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1965)였다. “한번 정정당당하게 / 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서 /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라는 그의 독백은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를 향한 중단 없는 성찰을 증거한다. 김수영의 현실적 자유주의의 절정은 ‘풀’(1968)이었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더 빨리 울’지만 풀은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나고 먼저 웃는다’. 풀은 개인 또는 민중일 수 있고, 너인 동시에 나일 수 있다. 바람의 구속을 거부하고 풀의 자유를 노래한, 표현의 자유와 이를 위한 정치적 자유를 옹호한, 우리 현대사에서 관념적 자유주의를 현실적 자유주의로 하강시킨 김수영은 1968년 안타깝게도 교통사고로 이승을 하직했다.   현대성에 대한 질문   김수영이 세상을 떠난 지 50년이 됐는데도 그의 작품이 시간의 풍화를 견뎌 내고 계속해 읽히는 이유는 뭘까. 가장 큰 까닭은 그의 문학성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앞서 인용한 작품들 외에도 ‘폭포’(1956), ‘후란넬 저고리’(1963), ‘거대한 뿌리’(1964), ‘현대식 교량’(1964), ‘사랑의 변주곡’(1967), ‘의자가 많아서 걸린다’(1968) 등은 우리 현대시를 대표하는 절창들이다. 작품의 완성도에 더해 김수영이 우리 현대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게 두 번째 까닭이다. 김수영의 시 세계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선 전집 제2권에 실린 그의 산문들을 함께 읽어보는 게 좋다. 김수영의 시와 산문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한국 현대성에 대한 탐구와 그 비판이다. 시인 김수영의 작품은 문학성 뿐 아니라 우리나라 현대성을 캐묻기에 뛰어나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사회과학의 관점에서 현대성이란 제도적 차원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문화적 차원의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로 이뤄져 있다. 김수영의 시들은 자본주의가 가져온 속물적 현상을 비판하고, 민주주의에 반하는 일체의 권위주의를 거부한다. 또한 개인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인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며, 추상적 자유주의를 넘어선 구체적 자유주의를 요청한다. 김수영의 시들이 오늘날까지 새로움을 안겨 주는 것은 현대성의 비가역성과 지구적 보편성을 일찍이 꿰뚫어 보고, 이를 예술로 형상화했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이 그의 무기였다면, 현대성이 지향하는 자유주의는 그의 목표였다. “창조를 위하여 / 방향은 현대-”(‘네이팜 탄’, 1954)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 진정한 현대를 향해 때론 힘겹게, 때론 힘차게 걸어갔던 이 선구적 자유주의자를 우리사회는 아주 오랫동안 기억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유의 현재와 미래   자유주의는 민주주의와 함께 근대 서구를 이끌어 온 정치ㆍ사회적 이념이다. 자유주의는 무엇보다 개인의 자유를 중시한다.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은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주장함으로써 현대 자유주의의 기초를 세웠다. 정치사상가 이사야 벌린은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를 구분하기도 했다. 김수영 전집. 민음사 제공   오늘날 지구적 차원에서 자유의 현재를 바라보는 시선은 이중적이다. 한편에서 정보사회의 진전으로 표현의 자유를 위시해 정치ㆍ문화적 자유는 크게 확장했다. 우리사회의 경우 권위주의 정부가 자유를 제한했지만 자유를 향한 열망을 막을 순 없었다. 김수영이 노래하듯 자유는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기 때문일 터다. 다른 한편 경제ㆍ사회적 자유는 소비의 자유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누구나 시장에서 상품과 상징을 소비할 수 있는 자유의 시대가 만개했지만, 이 자유는 개인이 갖고 있는 화폐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요컨대, 정치적으론 자유로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경제적으론 부자유하다는 게 오늘날 자유가 처한 상황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자유란 자기의 삶, 다시 말해 자신의 사유와 생활을 스스로 지배하는 것을 말한다. 사유의 자유와 생활의 자유가 동시에 확장되기 위해선 정치 민주주의와 함께 경제 민주주의가 증진돼야 한다. 특히 인간다운 삶의 자유를 위한 경제 민주주의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자유의 미래는 바로 이 경제 민주주의의 성패에 달려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1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비애 댓글:  조회:4158  추천:0  2018-07-01
비애(悲哀)                             윤동주 / 시인 호젓한 세기의 달을 따라 알 듯 모를 듯한 데로 거닐고저! 아닌 밤중에 튀기듯이  잠자리를 뛰쳐 끝없는 광야를 홀로 거니는  사람의 심사는 외로우려니 아--- 이 젊은이는 피라미드처럼 슬프구나 오늘은 일제강점기 절망적인 시대에도  제 빛을 잃지 않고 고결한 삶을 살며 순수한 시를 썼던 윤동주님을 그리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수록되어  있는 `비애(悲哀)'라는 시를 읽어 봅니다. 윤동주 시인은 누구보다도 우리민족을  사랑했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시를 쓰신 분이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려고한  윤동주님의 시는 지금까지도 큰 울림을  주는 것 같습니다.             다시 동주를 만났다. 활자가 아닌 다른 형태로 동주를 만난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그동안 활자를 통해 동주는 자주 만났다. 늘 만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지만 활자 속의 동주는 피상적이었다. 부끄러움을 이야기 하고, 부정의 현실 속에서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가는 것 같은 자신의 모습에 고뇌하는 젊은 지식인 동주는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 느끼기엔 무언가 부족했다. 그러다 동주를 간접적이나마 만나고 그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는 건 분명 기쁨이었다. 생각해보면 첫 번째 만남은 설렘 자체였다. 동주가 태어나고 뛰어 놀며 공부하고 기도했던 북간도 명동촌의 동주 생가를 방문했을 때 그의 시 '별 헤는 밤'이나 '십자가'란 시가 왜 태어난 지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직접 보고 느꼈던 경험은 미지의 여인을 상상하며 다가가는 첫 미팅의 그 설렘 같은 것이라 할까?  함께 간 사람들이 왁자지껄 이야기할 때 어둠 속에서 하나 둘 피어나는 명동촌의 별들을 보면서 고향을 떠난 동주가 먼 타국에서 '별 하나에 추억과 /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를 되뇌며 얼마나 쓸쓸한 그리움에 몸서리 쳤는가를 바로 느낄 수 있었다. 5년여가 흐른 지금도 그때 그가 다니던 학교와 그가 살던 곳, 예배를 드리던 예배당의 뾰족한 첨탑을 바라본 기억은 뚜렷한데 아쉽게도 그곳에서 그의 흔적을 담아왔던 것들은 조그만 실수로 모두 사라져버렸다. 두 번째 만남은 영화 '동주'였다. 영화 속의 동주는 순박하고 때 묻지 않은 청년이었다. 영화에서 더 반가웠던 것은 동주를 만난 것도 좋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기억 저편에 있던 사촌이면서 친구인 송몽규를 만난 것이었다. 조국의 현실에 맞서 싸우자는 몽규와 사색과 시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던 동주. 활자로 보았던 두 사람의 관계를 영화라는 매체를 보는 맛은 새로웠다. 그러나 화면 속의 동주를 보면서 뭔가 모를 조금의 갈증을 느꼈다. 그러던 차에 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기획했던 음악극 '윤동주'를 만났다. 윤동주와의 세 번째 만남이었다. 안내 표지 이번 공연은 전주시립합창단, 전주시립극단, 전주시립교향악단의 협연으로 이루어졌다" class="photo_boder" src="http://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17/1231/IE002265538_STD.jpeg" style="border: 1px solid rgb(153, 153, 153); text-align: center; max-width: 600px; width: 600px;" /> ▲ 음악극 안내 표지 이번 공연은 전주시립합창단, 전주시립극단, 전주시립교향악단의 협연으로 이루어졌다 ⓒ 김현   음악극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윤동주'는 일단 형식부터 새로웠다. 극은 윤동주의 시에 곡을 붙여 노래와 극, 여기에 교향악단의 연주가 하나된 형태였다. 한 편의 뮤지컬 냄새도 나고 오페라의 냄새도 물씬 풍긴 무대는 동주의 시에 대한 애착과 기독교적인 삶, 그리고 고난과 고뇌 등이 때론 웅장하면서도 잔잔한 파도처럼 펼쳐졌다.    막은 죽음을 알리는 서곡이라는 부제가 붙은 윤동주의 시 로 문을 열었다.  호젓한 세기의 길을 따라 알 듯 모를 듯한 데로 거닐고저! 아닌 밤중에 튀기듯이 잠자리를 뛰쳐 끝없는 광야를 홀로 거니는 사람의 심사 외로우려니 아~ 이 젊은이는 피라미트처럼 슬프구나 ▲  동주가 일본 형사에게 고문을 받는 모습. ⓒ 김현   동주의 생가에서 현실감을 느끼고, 영화에서 그의 삶을 바라보았는데 세 번째 만남은 또 다른 색다름이었다. 무대와 나의 거리는 3미터. 그 가까운 곳에서 시작부터 단란한 유년의 동주가 아니라 출구 없는 현실에서 고뇌 가득한 사나이가 광야를 외로이 거니는 동주를 보았다. 관현악단의 쓸쓸함이 베인 연주 속에 합창단 또한 읊조리 듯 피라미드처럼 슬픈 표정을 하고 광야를 홀로 거니는 사람의 외로운 심사를 선율에 맞춰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 음악극의 곡을 맡기도 한 이용주의 시 이 흘러나왔다.  새벽에 꿈속에서 아들의 눈물을 보았다 아들의 몸은 싸늘해 보였다 하지만 눈물을 닦아주고 물을 먹여 준 것 말고는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  후쿠오카 감옥에서 알 수 없는 주사를 수차례 맞고 사망한 윤동주의 유골함을 가지고 온 아버지 윤영식과 가족들이 오열하는 모습이 합창과 함께 애절하게 울려퍼지는 모습 ⓒ 김현   고향을 떠나 서울 연희전문학교 시절 그리고 일본의 유학과 독립운동 혐의로 친구 송몽규와 함께 체포된 동주는 온갖 고문과 이름을 알 수 없는 주사를 맞고 차디찬 후쿠오카 감옥에서 광복을 몇 달 앞두고 생을 마감한 동주는 우리 곁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늘 시를 통해서만 만났던 동주를 이제 영화로 음악극이라는 형식으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시와 삶 그리고 죽음이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기를 소망했던 한 청년의 순결한 이상이 그립고 아파서가 아닐까.  ▲  윤동주의 유골함을 들고 합창하는 모습 ⓒ 김현   그런데 그 그리움과 아픔이 관객들만의 몫은 아니었다. 이번 공연한 참가한 전주시립합창단 수석 단원으로 있는 김영지씨는 윤동주의 공연을 하면서 느꼈던 감정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뭉클했어요. 처음 악보를 받고 동주를 하면서 저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하게 피어올랐어요. 물안개처럼 이라 할까. 처음엔 윤동주를 몰랐어요. 그런데 이번 극을 하면서 윤동주의 삶과 시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된 것 같아요." 그러면서 이번 공연의 특별했던 점을 성악을 전공한 합창단의 노래와 연극을 전공한 이들의 몸울림 그리고 오캐스트라의 협연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들었다. 어찌 보면 전혀 다른 형태의 것들이 만나 멋진 하모니를 이뤄 서로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줬다.  "연극을 하는 분들이 노래를 많이 살려준 것 같아요. 노래로만 전달할 수 없는 감정들을 몸의 표정을 통해 잘 전달되게 한 것 같아요." ▲  공연이 끝나고 무대인사 하는 모습 ⓒ 김현   윤동주. 평생을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기를 소망하고 그렇게 살고자 노력했던 청년. 그가 간 지 100년이 되었지만 그는 앞으로 200년 300년 후에도 세상이 혼탁하고 어지러울수록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 살아 우이 곁에 있을 것이다.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소망하고 살아가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오마이뉴스(김현 시민기자)         윤동주와 우리 시대     우상렬     윤동주(1917~1945)는 이미 국내외에 많이 알려졌다. 그의 목숨을 앗아간 ‘적국’인 일본에서조차 그를 많이 기리고 있다. 그가 다니던 동지사대학교 캠퍼스에는 버젓이 그의 기념비까지 서있디. 이제 곧 그의 탄생 백주년이 다가오고 있다. 국내외에서 많은 기념활동이 있을 걸로 사료된다. 오늘 우리의 이 모임도 윤동주를 기리는 한 활동이 되겠다. 윤동주는 우리가 아무리 기리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가 윤동주를 기리는 이유를 묻고 싶다. 어쩌면 이것은 명지고문(明知故问)-뻔한 이유를 묻는듯하여 내 스스로의 무지를 드러내는 듯하다. 그러나 가장 잘 안다고 하는 곳에 잘 모르는 부분이 깃들어 있는 법이다. 적어도 딱 찍어 말하라 하면 말문이 막힐 때가 있다.   본고는 제 나름대로 ‘잘 모르는 부분’, ‘딱 찍어 말하’기 힘든 부분에 대해 소견을 피력해볼가 한다.   우리가 윤동주를 기리는 이유, 많고도 많겠지. 일언난진(一言难尽)-단마디 명창으로 말하기 벅찬 줄로 안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윤동주를 기리는 이유를 다음과 같은 주요 키워드 흐름으로 짚어볼가 한다. 즉 인도주의→참회의식→인간양심. 이 세 키워드흐름은 윤동주시의 정수를 이해하는 관건이 되겠다. 따라서 본고는 일단, 이 흐름을 타고 윤동주시를 살펴보도록 하고 다음, 윤동주시의 오늘날 시대적 의의를 조명해보도록 하겠다.   주지하다시피 윤동주는 일제식민지시대에 살다 간 시인이다. 이런 식민지시대에 있어서 조선사람은 ‘슬픈 族屬’들에 다름 아니다.     흰 고무신이 거츤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여기서 분명 민족적인 상징코드인 ‘흰 고무신’, ‘흰 저고리 치마’, ‘흰 띠’로 조선사람을 상징하고 ‘거츤 발’, ‘슬픈 몸집’, ‘가는 허리’로 식민지참상을 어필하고 있다.     이런 식민지시대에 꿈은 깨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윤동주의 ‘꿈은 깨어지고’가 탄생한다.     노래 하든 종달이   도망쳐 날아나고     지난날 봄타령하든   금잔디밭은 아니다.     塔은 무너졌다,   붉은 마음의 塔이-     손톱으로 새긴 大理石塔이-   하로저녁 暴風에 餘地없이도,     여기서 극명하게 ‘노래 하든 종달’, ‘봄타령’, ‘붉은 마음의 塔’, ‘손톱으로 새긴 大理石塔’으로 꿈을 나타냈다면 ‘도망쳐 날아나고’, ‘금잔디밭은 아니다’, ‘塔은 무너졌다’로 그 깨어짐을 나타낸다. 그것은 실로 자연의 아름다운 ‘꿈’이든, 인간의  알심들인 붉게 타는 꿈이든 ‘하로저녁 暴風’ 즉 하루아침에 들이닥친 식민지통치에 ‘餘地없이’ 깨어지고 만다.    이에 식민지통치는 실로 ‘무서운 時間’으로 안겨온다.     한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아무런 발언권도 없고 아무런 소유권도 없는 처지. 그러니 자연적으로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는가고 한탄하게 된다.   윤동주는 ‘흰 그림자들/연연히 사랑하던 흰 그림자들’(‘흰 그림자’)이 당하는 이런 식민지현실을 좌시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돌아와 보는 밤’과 ‘못자는 밤’을 보자.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 이제 내 좁은 방에 돌아와 불을 끄옵니다. 불을 켜두는 것은 너무나 괴롭은 일이옵니다. 그것은 낮의 연장이옵기에-’(‘돌아와 보는 밤’)처럼 ‘낮’으로 상징되는 식민지현실을 부정하고 있다. 그렇다하여 밤에 편안히 잠이 드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못자는 밤’에 부대낀다.     하나, 둘, 셋, 넷   …….   밤은   많기도 하다.     -전문-         식민지 ‘밤은/많기도 하다.’ 그래 ‘못 자는 밤’도 그만큼 많기도 하리라.     윤동주는 이런 식민지현실이 안쓰러웠다. 그래서 ‘오오 荒廢의 숙밭,/눈물과 목메임이여!’(‘꿈은 깨어지고’)가 터져나온다. 그래서 더 없는 ‘비애’를 느꼈으리라.     아- 이 젊은이는   피라마처럼 슬프구나   -비애-     오래 마음 깊은속에   괴로와하던 수많은 나를   -흰 그림자-     여윈 나무그림자를 밟으며   北邙山을 向한 발걸음은 무거웁고   孤獨을 伴侶한 마음은 슬프기도 하다     -달밤-       손바닥만한 나의 정원이   마음같이 흐린 호소되기 일쑤다     -소낙비-       이상 보다시피 윤동주시에는 슬픔, 괴로움, 고독, 흐림 등 서러움의 한이 많이 서려있다. 이것은 그의 동요동시를 주로 쓴 사회의식이 희박하다고 평가받는 초기시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산협의 오후’를 보자.     내 노래는 오히려   서러운 산울림     골짜기 길에   떨어진 그림자는   너무나 슬프구나     -전문-     1937.9     역시 ‘서러움’과 ‘슬픔’이 묻어난다. 바로 이런 안쓰러움에 기인하는 ‘비애’로부터 윤동주는 ‘시인이란 슬픈 천명이’(‘쉽게 씌어진 시’)다고 외웠을 것이다.   윤동주는 이런 안쓰러운 비애에만 안주한 것이 아니다. 그는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것을 깨닫’(‘흰 그림자’)는다. ‘괴롬의 거리/灰色빛 밤거리를/걷고 있는 이 마음/旋風이 일고 있네.’(‘거리에서’) 그의 마음은 ‘旋風이 일고 있’다. 평온할 수가 없다. 바로 이 시점에서 ‘자화상’이 생겨난 줄로 안다.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밉기도 하고 가엽기도 한 ‘자화상’. 이런 자화상이 부끄럽다. 이제 부끄러움은 도를 더 해 간다. ‘별혜는 밤’, ‘쉽게 씌여진 시’, ‘길’을 보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별혜는 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쉽게 씌여진 시’-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길-       여기서 ‘부끄러운 이름’과 ‘쉽게 씌여진’ ‘부끄러운’ 시가아렷이 등장한다. 그리고 푸른 하늘을 보기가 부끄럽다. 그럼 왜서 부끄러우냐? 식민지지식인으로서 어쩔수 없이 무력하게 사는 것이 부끄럽고 남은 피를 흘린단데 나는 편안히 사는 것이 부끄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시란 삶의 처절한 역경속에서 아픔을 딛고 생겨나야 하는데 안온한 생활속에서 음풍명월하는듯하여 부끄럽다. 바로 여기서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윤동주의 ‘부끄러움’의 미학이 탄생한다.    다시 ‘쉽게 씌어진 시’를 보자.     생각해 보면 어릴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암담한 식민지현실에서 ‘어릴 때 동무를/하나, 둘 죄다 잃어버린’ 마당에 외국에서 부모들 부쳐주는 학비로 편안히 강의나 들으며 ‘쉽게 씌어지는’ 시나 쓰는 자기가 회의스럽고 한없이 부끄럽다는 것이다. 어쩌면 무사히 편안하게 살아있다는 자체가 굉장히 욕되고 죄스럽다. 그래서 이런 부끄러움은 곧 바로 자아반성의 참회의식으로 이어진다. ‘참회록’을 보자.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년 일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그는 ‘어느 왕조의 유물’에서 ‘이다지도 욕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그것은 역사의 퇴물 같은 도태물에 다름 아니다. 이때까지 ‘무슨 기쁨을 바라/살아온’ 자체가 죄스럽다. 그래 ‘즐거운 날’에 ‘참회록을 쓸’ 일이다. ‘젊은 나이’에 고백한 사사로운 사랑까지도 후회하면서.   윤동주의 이런 참회의식은 일단 신성한 자아희생정신으로 나아간다.     괴로웠던 사나이,   幸福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十字架가 許諾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참회의 부대낌속에서 시적 자아는 ‘괴로웠던 사나이’가 된다. 그래서 ‘幸福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공감을 나타낸다. 그래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피를 흘리고 싶다. 이 세상을 구하려는 장엄한 뜻을 품고. 그러나 ‘조용히 흘리’고 싶다. 자기 현시적이기보다는 내심으로부터 울어러 나오는 진정성이 이렇게 시킨다. 그래서 그 피는 ‘꽃처럼 피어나’는 아름다운 것이 된다. 여기서 윤동주는 기독교신자로서 예수와 십자가로 표상되는 희생과 구원이라는 기독교원형모티프를 빌어 민족의 구원을 위한 자기의 최고의 희생을 언약하고 있는 것이다.   윤동주의 참회의식은 인간적 양심의 올곧은 추구로 나아간다. ‘참회록’의 마지막 두 연을 좀 보자.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여기서 첫 연은 바로 혼신을 다 한 자아성찰과 수양의 경지를 말한다. 두 번째 연은 그 결과 홀로인 쓸쓸한 슬픈 모습이나마 험악한 현실을 타개해 나가려는 비장함을 나타내고 있다. 노신의 산문시 ‘지나가는 나그네(过客)’의 이미지와 비슷한데가 있다.    ‘또 다른 故鄕’을 보자.     故鄕에 돌아온 날 밤에   내 白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약)   志操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게다.   가자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白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故鄕에 가자.     여기서 시적 자아가 돌아온 고향에는 죽음의 ‘白骨’과 ‘어둠’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志操 높은 개’가 있다.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시적 자아는 이 개가 ‘나를 쫓는 것일게다’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그런 ‘白骨’과 ‘어둠’에 매몰되지 말고 새로운 추구를 하라는 메시지에 다름 아니다. 그래 시적 자아는 ‘가자가자/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고 다짐한다. 그것은 ‘아름다운 또 다른 故鄕에 가’기 위함이다.   보다시피 윤동주에게는 분명 인간의 양심에 기초한 미래지향적인 확고한 추구가 엿보인다.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처럼   하루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   -‘흰 그림자’-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우에 파란 잔디가 피여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거외다.   -별 혜는 밤-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최의 악수     -쉽게 씌어진 시-       풀 한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것은 다만   잃은것을 찾는 까닭이다     -길-       위의 시구들에서 이런 점들을 충분히 볼 수 있겠지만 그래도 ‘새로운 길’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 마을로           -새로운 길-       이 시의 시안(诗眼)은 ‘새로운 길’. 이 ‘새로운 길’이야 말로 인간의 양심에 의한 정도(正道). 그리고 그것은 희망의 길. 그런만큼 그것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쉼없이 갈지어다. 그것은 액자소설 같은 구조속에 호응하며 그 분위기가 무르녹는다.   이상 우리는 윤동주의 시적 흐름을 인도주의→참회의식→인간양심이라는 키포인트에 기초하여 살펴보았다. 사실 뭐니뭐니 해도 그의 ‘서시’는 이런 시적 흐름의 집대성시가 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전문-       보다시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고 안쓰러워하는 여린 심성이니 인간에 대해서 더 말해서 무엇하랴. 결국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로 더 없이 넓은 인도주의정신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것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점 부끄럼이 없’는 자아반성적이고 양심적 삶을 추구하는 의지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걸어가야겠다’는 것은 민족의 대의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정신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서시’는 윤동주가 후기 사회의식이 돋보이는 시창작에로의 전환점을 시사해주고 그의 전반 시의 대표작이 되기에 손색이 없다.   그럼 아래에 인도주의→참회의식→인간양심으로 개괄되는 윤동주정신의 생성원인에 대해 잠간 살펴보도록 하자. 나는 1차적으로 윤동주의 천성적으로 온순하고 부드럽고 정직하고 다정다감했던 성품 즉 착한 인간성에서 그 원인을 찾아본다. 그리고 2차적으로 그의 기독교적인 신앙심에서 찾는다. 그의 집안은 장로인 할아버지 윤하현 대로부터 아버지 윤영석 대에 이르기까지 독실한 기독교집안이었는데 윤동주 자신도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다. 그는 중학교도 기독교계통의 은진중학교, 숭실중학교에 다녔다. 이로부터 윤동주는 천성적인 성품도 성품이겠지만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진정한 종교적 심성 즉 사랑과 반성의 마음을 키웠을 것이다.   그럼 이제 남는 문제는 우리 시대에 윤동주정신의 의의와 가치에 대한 진맥이 되겠다.   현재 우리 시대는 현대라는 타이틀속에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개성주의가 팽배하다. 상대를 타자화하고 모두들 자아중심적이고 자기가 잘 났다고 하는 시대다. 콧대가 높은 시대. 개인이든, 민족이든, 국가든. 그리고 욕망시대. 물욕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명예욕, 권력욕, 지배욕 등 각종 정신적 욕구가 통판친다. 그런만큼 타인에 대한 겸허한 자세나 배려심이 고갈되어 간다. 바로 이런 시점에서 윤동주의 그 인도주의와 사랑주의가 더 없이 귀중한 감로수가 되겠다. 약자, 풀뿌리인생들에 대한 인간적 배려와 헌신적 사랑이 어느때보다도 필요한 시기다.   우리 시대는 참회가 필요한 시대. 역사문제 하나만 놓고 보아도 그렇다. 일본의 조선식민통치나 제2차세계대전 범죄만 놓고 보아도 그렇다. 일본은 도저히 참회나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최근 들어 전쟁 당사자로서 침략전쟁과 군사력 포기를 영원히 약속했던 평화헌법 9조 정신을 근본적으로 훼손시키고 집단적 자위권 행사와 무력행사가 가능하다고 헌법 해석을 변경한다든가,  조어도나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거나 위안부 존재사실을 부인하는 등 극우주의의 철면피나 군국주의를 부활하려는 새로운 패권주의는 심상치 않다. 과거사를 반성하고 겸허한 자세로 살아가야 할 일본임을 생각할 때 실로 적반하장도 유분수다. 여기에 일본 극우세력을 등에 없고 해묵은 ‘식민지사관’을 표방하는 ‘김문학현상’으로 대변되는 새친일파들의 진면모는 어불성설의 ‘황당파’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이면에는 진정한 참회의식에 기초한 인간의 양심이 결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제2차세계대전 범죄자로서 독일이 성실하게 자기네들의 유태인살해를 비롯한 전쟁범죄에 대해 참회뿐만 아니라 배상을 통한 일련의 행동으로 주변국이나 해당 관련국들로부터 새로운 신임을 얻었다. 이것이 게르만민족과 야마도민족의 차이. 게르만민족은 적어도 천주교, 기독교적인 참회의식이 하나의 전통으로 정립되어 있다. 바로 이런 참회의식이 윤동주의 참회의식와도 통하는 바다. 야마도민족은 1차적으로 이런 참회의식이 없다. 한치보기의 천박한 신도(神道)정신만 있을 뿐이다. 야마도민족이 저 멀리 게르만민족에서 배우기 힘들면 가까운 윤동주에게서 이 참회의식을 배울지어!   인간은 성인이 아닌 이상 누가 잘 못을 안 저지르겠는가. 문제는 윤동주식 참회의식의 유무다. 참회의식에 기초하고 인간의 양심에 의해 올곧이 살 때 우리 사는 세상이 한결 사람 사는 맛이 날 것이다.   한마디로 윤동주정신은 우리 시대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드는데 기본 지주가 될 것이다.     [끝]   2014.12.25     텍스트     전광하 박용일 편저:윤동주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诗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2     참고문헌   마광수, 尹東柱硏究, 정음사 1984.   송우혜, 윤동주평전, 열음사 1988.   권영민 엮음, 윤동주연구, 문학사상사 1995.   우상렬, 윤동주와 심연수 시 비교연구, 서시 2005. 여름호 ========================== 시인 윤동주(1917∼1945)에게는 열 살 터울 동생이 있었다. 1985년 작고한 동생 윤일주는 서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꾸준히 동시와 시를 썼다. 이 책의 제목은 윤일주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 출간된 유고 동시집의 제목과 같다.   윤동주 시인이 평양 숭실중 재학 때부터 연희전문학교 1학년 때까지 쓴 동시들과 윤일주의 동시를 묶어 따스한 느낌의 삽화와 함께 실었다. 마음을 에는 처절한 비애가 가득한 윤동주의 시 작품과 달리 그의 동시에는 형제들과 즐겁게 살던 어린 시절의 행복함이 오롯이 배어 있다. “그믐밤 반딧불은/ 부서진 달 조각//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 조각을 주우러/ 숲으로 가자.” ㅡ윤일주 (반딧불)  //손택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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