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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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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동네방네] - 성공의 열매는 달디달다... 댓글:  조회:3483  추천:0  2018-07-02
뉴질랜드 40대, 62일 만에 호주→뉴질랜드 카약 단독횡단 2018.07.02.  자동요약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오클랜드=연합뉴스) 고한성 통신원 = 뉴질랜드의 40대 남자가 혼자 카약을 타고 노를 저어 62일 만에 호주와 뉴질랜드 사이 태즈먼 해를 건너는 데 성공했다. 뉴질랜드 언론들은 2일 스콧 도널드슨(48)이 호주에서 뉴질랜드까지 사상 처음으로 카약 단독 항해에 성공했다며 그는 카약을 타고 2천200km의 바닷길을 혼자 건넌 것이라고 소개했다. 이날 밤 8시 40분(현지시간)쯤 뉴플리머스 나모투 해변에 도착한 도널드슨은 무척 지치고 헝클어진 모습으로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카약에서 내린 뒤 부인 사라와 아들 잭(8), 그리고 수백 명의 주민으로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지난달 29일 도널드슨의 항해 모습 [출처: 스터프] 도널드슨은 지난 5월 2일 호주 뉴사우스웨일스 주 북부 콥스 항을 떠나 하루에 최고 20시간까지 노를 저으며 바다를 건넜다. 천식 환자인 그는 호주-뉴질랜드 카약 횡단 도전이 이번이 두 번째로 62일 동안 파고 6m의 파도가 세탁기처럼 소용돌이치는 태즈먼 해에서 혼자 쉬지 않고 노를 젓는 무서운 집념으로 새 역사를 쓰는 데 성공했다. 그는 항해 도중 상어와 폭풍을 만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만난 상어는 몸길이가 2.5m쯤 돼 보였는데 카약의 키를 물어뜯으려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2주일 뒤에는 번개를 동반한 폭풍을 만났다며 카약과 노가 모두 아주 뛰어난 전기 전도체인 탄소섬유로 만들어져 있다는 게 그때는 무척 걱정됐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그러나 위성 전화 덕분에 부인과는 계속 연락을 취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카약을 타는 동료들은 도널드슨의 태즈먼 해 카약 단독 횡단은 대단한 것이라며 모두 찬사를 쏟아냈다. 도널드슨(왼쪽), 아들과 부인 [출처: 스터프] 한 동료는 그가 이룩한 카약 단독 항해는 에베레스트 산을 오른 것보다 더 큰 것이라며 에베레스트 산을 처음 등정한 에드먼드 힐러리 경은 지원하는 팀이 있었으나 도널드슨은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다 해냈다고 말했다. 얼마 전 첫 딸을 낳아 출산 휴가 중인 재신더 아던 뉴질랜드 총리도 트위터를 통해 도널드슨의 카약 단독 항해는 정말 놀라운 것이라며 축하했다. 도널드슨은 자신과 아들이 앓고 있는 천식 연구 기금 모금을 위해 지난 2014년에도 태즈먼 해 카약 횡단에 도전했다가 뉴질랜드 해안을 불과 80km 정도 남겨 놓고 엄청난 폭풍으로 키가 고장 나자 도전을 중단했었다. 단독 항해가 아닌 태즈먼 해 카약 횡단은 지난 1977년 뉴질랜드인 콜린 퀸시 등 지금까지 여러 명이 성공했다.
6    윤동주를 알린 일본 시인 - 이바라기 노리코 댓글:  조회:2494  추천:0  2018-07-02
日에 윤동주 알린 이바라기 노리코, 전쟁 후 삶 노래하다  지승연 기자 2018.01.04  기사공유하기 프린트 메일보내기 글씨키우기     도시샤대학 시절의 윤동주(앞쪽 왼쪽에서 두 번째). 그의 마지막 사진으로 추정된다(1942~43년경) ⓒ천지일보(뉴스천지)DB 시집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출간   日 국정교과서에 실린 윤동주 다룬 저자 에세이 약 4만 6000명의 고등학생 윤동주 대해 알게 돼 [천지일보=지승연 기자] “윤동주는 일본 검찰의 손에 살해당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 통한의 감정을 갖지 않고서는 이 시인을 만날 수 없다.” 일본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1926~2006)가 자신의 에세이집 ‘한글로의 여행’에 윤동주 시인에 대해 기록한 부분 중 일부다. 이바라기 노리코는 1945년 무렵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당시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했을 때다. 10여년간 시인으로 활동한 그는 1956년 남편과 사별한 후부터 한글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한글 공부를 하면서 느낀 생각들을 한 데 묶어 에세이집 ‘한글로의 여행(1986)’을 출간했다. 에세이집에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시인 윤동주’라는 글이 실려 있다. 이 글에는 ‘서시’ ‘쉽게 쓰여진 시’ ‘돌아와 보는 밤’ ‘아우의 인상화’ 등 윤동주의 시 4편이 소개됐고, 저자의 해설도 달렸다. 이바라기 노리코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시인 윤동주’는 치큐마쇼보 출판사 편집국장 눈에 띄게 됐고, 이후 일본 고등학교 현대문 국정교과서에 11페이지에 걸쳐 실리게 됐다. 글이 실린 국정교과서는 146개 일본 고등학교에서 사용하고 있으며, 약 4만 6000명의 고등학생이 이바라기 노리코의 글을 통해 윤동주에 대해서 배우고 있다. 이바라기 노리코 (출처: 스타북스 공식 블로그) 이렇듯 일본 사회에 한국인 시인 윤동주를 알리는데 일조한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를 모은 책 ‘내가 가장 예뻤을 때’가 출간됐다.   시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내가 가장 예뻤을 때’는 그가 32살에 쓴 작품으로, 패전 직후인 20대 초기를 회상하며 썼다. 그는 “내가 가장 예뻤을 때 / 주위의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 나는 아주 불행했다” 등의 표현을 쓰며 전쟁의 참혹함을 알리는가 하면, 뒤늦게라도 청춘을 즐기고 싶다는 역설적 표현을 써 역경을 이겨내는 긍정적인 마음을 담아냈다. 또한 사상·학문·권위 등에 지나치게 기대는 것을 야합(野合)이라고 말하며, 자기 자신을 믿고 떳떳하게 살아가라는 메시지의 시 ‘기대지 말고’도 발표했다. 책에는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기대지 말고’를 비롯한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 35편이 수록됐다. 책 끝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저자의 후기를 대신하는 글들이 실렸다. 책은 일본 고등학교 현대문 국정교과서에 실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시인 윤동주’ 전문을 소개한다. 또 한국 식민지 통치에 대한 저자만의 시각이 담긴 시 ‘장 폴 사르트르에게’ ‘총독부에 다녀오다’ 등도 볼 수 있다.     /이바라기 노리코 지음 / 스타북스 펴냄     ///천지일보  =================   이바라기 노리코(茨木 노리코; 1926-2006)   그녀를 당대 최고의 일본 시인이라고 한다(양동국 2012, 현대문학 5월호).   그녀는 나이 오십대 후반부터 한글을 배웠으며, 윤동주를 읽었고, 그 윤동주의 인생과 시를 해설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산문이 츄쿠마서점 발행의 일본의 고등학교 국어 현대문학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그녀가 현대 한국 시인들, 강은교, 황동규, 김지하 등 열명의 한국현대시인의 시작품 62편을 일본어로 번역한 한국현대시선(1990)은 일본최고의 번역상인 요미우리 문학상(연구번역부분)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바라기 노리코(茨木 노리코; 1926-2006)의 시(詩), 세 편을 현대문학(2012년 5월호) 잡지에서 베낀다. ==================================================================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       바삭 바삭 말라가는 마음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마라 스스로 물 주는 것을 게을리하고선   나날이 까다로워져 가는 것을 친구 탓으로 돌리지 마라 유연함을 잃은 것은 어느 쪽인가   초조해져 오는 것을 근친 탓으로 돌리지 마라 무엇이든 서툴렀던 것은 나 자신이 아니었던가   초심(初心)이 사라져 가는 것을 생활 탓으로 돌리지 마라 애당초 유약한 결심에 지나지 않았던가   잘못된 일체를 시대 탓으로 돌리지 마라 가까스로 빛을 발하는 존엄(尊嚴)의 포기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 자신이 지켜라 바보 같으니라고             시집 에서 =========================================================== 제비 마음에 쏙 드는 시다. 제비 천주교를 좋아하는 이유중의 하나는 내탓이오 하면서 자기 가슴을 치는 것이 제비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정말 일본의 여류시인이 한국의 제비를 위하여 이 시를 쓴 것 같다. 그만큼 이 시가 보편성이 큰 울림으로 여러 사람의 가슴을 축축하게 했을 것 같다. ============================================================                이웃 나라 말의 숲       숲의 깊이 가면 갈 수록 뻗은 가지 엇갈려 교차하며 저 깊숙이 외국어의 숲은 울창하기만 하다 한낮 여전히 어두운 샛길 혼자 터벅터벅 구리(栗)는 밤 가제(風)는 바람 오바케는 도깨비 헤비(蛇) 뱀 히미츠(秘密) 비밀 기노코(耳) 버섯 무서워 고와이   첫머리 언저리에선 신명나게 떠들어대었다 뭐든지 신기해 명석한 표음문자와 맑디맑은 울림에 히노 히카리 햇빛 우사기 토끼 데타라메 엉터리 아이(愛) 사랑 기라이 싫어요 다비비토(旅人) 나그네   세계 지도 위 이웃 나라 조선국에 검디 검도록 먹칠해가면서 이 가을바람 듣네 타쿠보쿠의 명치 43년의 노래 일본어가 예전에 내차버렸던 이웃나라 말 한글 지우려해도 결코 지워 없애지 못한 한글 용서하십시오 유루시테쿠다사이 땀 뚝뚝 흘리며 이번에는 이쪽이 배울 차례이지요 어떠한 나라의 언어에도 끝내 굴복하지 않았던 굳센 알타이어족 하나의 정수에 조금이나마 가까이 가고싶어 모든 노력을 기울여 그 아름다운 언어의 숲으로 들어가고 있지요   왜놈의 말예(末裔)인 나는 긴장을 놓고 잇으면 순식간에 한(恨)이 담긴 말에 잡아먹힐 듯한 그런 호랑이가 확실히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옛날 옛적 오랜 옛날을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우스꽝스러움도 역시 한글만의 즐거움   어딘가 멀리서 재잘거리며 떠드는 소리 노래 시침 딱 떼고 엉뚱한 소리를 해댄다 속담의 보고이며 해학의 숲이기도 하고   대사전을 베개삼아 선잠을 청하면 "자네 들어 오는 것이 너무 늦었어"라고 윤동주(尹東柱)가 다정하게 나무란다 정말 늦었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 너무 늦었다고 생각지 않기로 했지요 젊은 시인 윤동주 1945년 2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 그것이 당신들에겐 광복절 우리들에겐 항복절인 8월15일을 거슬러 올라가면 겨우 반년 전이었을 줄이야 아직 교복을 입은 채 순결만을 동경하는 듯한 당신의 눈동자가 눈부시게 빛난다   ----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이렇게 노래하고 감연히 한국어로 시를 썼던 당신의 젊음이 눈부시고 그리고 애처롭습니다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달빛처럼 맑은 시 몇 편인가를 더듬거리는 발음으로 읽어보지만 당신은 조금도 웃어주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앞으로 어디까지 더 갈 수 있을는지요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다 가다가 쓰러져 병들어도 싸리 핀 들녘    ----------------- "깊숙한 오솔길"의 소라(曾良)의 노래, 시집 에서 ============================================================================================= 제비 지난 삼월 말 윤동주가 옥사했던 바로 그 후쿠오카에 다녀갔다. 아들의 갑작스른 죽음에 놀란 윤동주의 아버지가 허급지급 만주 용정에서 그곳 후쿠오카에 기차로 배로 다가 와서 화장한 아들의 뼛가루의 반을 후쿠오카 앞 바다에 배를 타고 나가 바로 현해탄에다 뿌리고 나머지 반은 가지고 용정에 가서 무덤을 만들어 그 속에 넣었다고 한다. 윤동주의 그 대학생 사진을 보고 일본의 이 여류시인도 그 순수한 모습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제비도 윤동주를 정말 좋아한다. 한국어를 배우는 일본인들을 보면 참 기분이 좋다. 일본어를 한국인들만 열심히 배우는 것은 지난 100여년의 짧은 역사속에서일 뿐이리라. ===============================================================================================                 기대지 말고   더 이상 야합하는 사상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더 이상 야합하는 종교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더 이상 야합하는 학문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더 이상 어떠한 권위에도 기대고 싶지 않다 오래 살면서 마음 속 깊이 배운 건 이 정도 내 눈 귀 내 두 다리로만 선들 무슨 불편이 있으랴 기댄다고 한다면 그저 의자 등받이뿐      ---------- 시집 에서 =============================================================================== 제비도 공감한다. 100 % 공감한다. 제비도 그 분처럼, 이 시를 쓴 분처럼  늙어간다.  제비 여태 너무나 기댈려고 했다. 사상에, 종교에, 학문에, 권위에 제비 기댈려고만 했다. 그러나 이젠 기대면 안된다는 것을 안다. 제비 정신이 번쩍 든다. ================================================================================         칠석(七夕)   이바라기 노리코 성혜경 번역       이슥한 밤 저 멀리 상수리 숲 언저리에 작은 등불이 가물거린다 아다치가하라(安達が原)의 오두막처럼 매혹적이다 무사시노(武蔵野)라는 이름이 남아있는 수풀 무성한 길 이곳에 오면 아직도 만날 수 있는 수많은 별들   은하수에는 잔물결이 일고 강기슭엔 견우성과 직녀성이 오늘 밤도 깊이 숨죽이고 있다 “당신들! 내 뒤를 따라온 거야?” 갑자기 풀숲에서 불쑥 튀어나온 붉은 구릿빛 알몸뚱이가 위협한다 훅하고 풍기는 소주 냄새 나는 흠칫 방어태세를 취한다 방어태세를 취하는 건 얼마나 나쁜 버릇인가 “오늘 밤은 칠석이잖소 별을 보러왔지요” 남편의 목소리가 너무도 태평하게 어둠 속을 흐른다 “치일석? 칠석… 아아 그랬군 난 또, 내 뒤를 쫓아왔나 싶어서… 이거… 실례했습니다”   그는 마법사 ‘키요의 집’ 사람이었다 몇 명의 가족이 살고 있을까 다 쓰러져가는 집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언제나 수수께끼 같아서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귀여운 소년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새 그 아이도 중학생이 되어 나타났다 개조차 낯선 이의 접근을 막으며 맹렬히 짖어대고 무더운 한여름 밤 축시(丑時)가 되면 으레 펼쳐지는 조선말의 화려한 싸움 벼랑 끝 홀로 덩그러니 서 있는 그 집 근처까지 오고 말았다   오늘 저녁 내리는 비는 견우성이 바삐 배 저어 건너올 때 노에 이는 물보라인가   기원전부터 생겨나 서서히 모양을 갖춰 온 한민족(漢民族)의 아름다운 옛이야기 일찍이 만요 사람들(万葉人)이 사랑했던 소재들도 기원을 따지면 저 멀리 고구려, 백제를 거쳐 전해져 온 것이 아니었던가 문자며 직물이며 철이며 가죽이며 도자기며 말 사육이며 그림이며 종이며 양조기술이며 바느질하는 사람이며 대장장이며 학자며 노예까지 얼마나 많은 것들이 전해져 왔던가 옛 은사(恩師)의 후예들이건만 이곳에서 저곳에서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경원시 되고 여름 밤 바람 쐬러 나온 사람조차 미행인가하고 두려워하네   칠석이라는 말 한 마디에 갑자기 온순히 등을 보이며 되돌아가는 잠방이 차림의 아저씨 내 마음은 까닭 모를 슬픔으로 가득하다 차가운 은하를 올려다 볼 때마다 이제부턴 틀림없이 나를 휘감으며 놓아주지 않겠지 온몸에서 풍기던 강한 소주 냄새가 훅 하고 - 『진혼가』(1965)       * 월간 태백에 "이바라기 노리코의 삶과 문학"을 연재하고 있는 성혜경 교수께서 번역한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 「칠석」을 띄웁니다. 왜냐구요?   이 시는 일본인이면서 재일한국인의 차별, 일본의 침략전쟁 등을 평생 비판했던 이바라기 노리코의 대표작 중 하나이지요. 동아시아의 칠석 신화를 모티프로 하면서, 재일한국인의 문제를 그린 시인데요....   "오늘 저녁 내리는 비는 견우성이 바삐 배 저어 건너올 때 노에 이는 물보라인가"   이 문장을 보면, 일본의 칠석 신화가 우리와는 조금 다르지요. 우리는 오작교라 하여 견우와 직녀가 다리를 통해 서로 일년에 한 번 해후하는데, 일본에서는 배를 저어서 은하를 건너와 견우와 직녀와 만나는 것이니... 노를 지을 때 생기는 물보라가 비 되어 내리기도 하고, 은하를 반짝거리게 하기도 하는 것이니 한 하늘을 바라보면서 만들어내는 같으면서 다른 이야기지요... 그러게 일본과 우리는 가깝고 먼 사이이기도 하겠구요...     월간 태백/달아실출판사   "내가 가장 예뻤을 때/나는 아주 불행했고/나는 아주 얼빠졌었고/나는 무척 쓸쓸했다//때문에 결심했다 될수록이면 오래 살기로/나이 들어서 굉장히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불란서의 루오 할아버지같이 그렇게…."(`내가 가장 예뻤을 때`)  전후 일본 문단을 대표하는 여성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1926~2006)의 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인의 상실감을 노래한 이 작품은 세계적으로도 높은 명성을 얻었다. 우리나라에서도 2년 전 소설가 공선옥 씨 작품 제목으로까지 차용됐을 정도다.  하지만 한 가지 더 특이한 점은 그녀가 생전 대표적인 `지한파(知韓派)`였다는 사실이다.   한글을 직접 배우고 한국 문학 번역에도 힘쓴 노리코는 `한국현대시선`(1990년)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 명시들을 번역ㆍ소개해 요미우리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장 폴 사르트르에게`와 `칠석` 등 한국을 소재로 쓴 시들도 상당히 많다. `이바라기 노리코의 한글로의 여행`(박선영 옮김, 뜨인돌 펴냄)은 시인이 `한글`을 소재로 아사히신문에 연재했던 칼럼을 모은 책이다. 일본에선 1986년 출간된 이후 꾸준히 판매되고 있는 스테디셀러. 이바라기 자신이 한국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느꼈던 한글의 매력, 한국인과 한국 문화에 관한 생각을 맛깔스럽게 풀어냈다.  쉰 살에 남편과 사별한 뒤 자기 치유 방법으로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다는 시인은 "한국어에 대한 관심은 사실 열다섯 시절부터 있었다"고 고백한다. 김소운의 `조선민요선`을 읽은 후 그 속에 실린 단어들의 소박함과 기지에 끌렸다는 것. 그는 `딸기코` `치맛바람` `바람둥이` 같은 단어를 예로 들며 "한국어엔 신선한 상상력과 재기가 넘친다"고 주장한다. 한국어에 대한 관심이 전문적인 수준까지 올라가 일본 사투리와 한국어의 연관 관계를 찾기 위해 고서를 뒤적거렸다는 얘기도 나온다.  언어 자체에 탐닉하던 그의 욕심은 갈수록 심해져 한국 문화 전반으로 보폭을 넓혀 들어간다. 우리 눈에는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일상 풍경도 그의 눈엔 하나의 문화적 기호로 포착된다.    자기 그릇이 아닌 스테인리스 식기가 유행하는 한국 식당에선 외세 침략에 시달렸던 한반도 역사를 읽고, 할머니들이 모여 앉은 농촌 풍경에서 경어체 사용에 대한 배경을 읽어내는 식이다.  한글날(10월 9일)을 맞아서 쓴 글도 인상적이다. 그는 "한국인들을 볼 때마다 굳고 맑은 결정처럼 단단하고 굳센 사람들이라고 느낄 때가 많은데, 모국어를 향한 마음이 그 중심적인 핵을 이루고 있는 듯하다"고 말한다. 이른바 `한국 사람`이라는 우리가 일본의 한 시인보다도 한글을 사랑하는 마음이 적은 것 아닌가 하는 반성이 들게 하는 대목이다.  [손동우 기자] ============================ 중고등학교 시절엔 시 동아리 활동도 하고 나름 문학소녀였는데, 시를 읽지 않은 지 한참 되었다. 30대를 지나던 어느 땐가부터 시도 소설도 내게서 멀어져갔다. 감성은 무뎌지고 마음에는 먼지가 폴폴 날리기 일쑤였다. 현실생활이 팍팍하고 고된 탓 아니었을까 싶은데, 아니란다. 스스로 물주기를 게을리해놓고 파삭파삭 말라가는 마음을 남 탓하지 말라 한다. 자기 감수성 정도는 스스로 지키란다. 한국인보다 한글을 더 사랑한 것으로 유명한 일본의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의 일침이다. 가슴이 뜨끔하다.  시인은 서먹해진 사이 친구 탓하지 말고, 짜증나는 것 가족 탓하지 말고, 초심을 잃어가는 것 세월 탓하지 말고, 안 좋은 것 전부 시대 탓하지 말라고 한다. 자기 감수성 정도도 스스로 못 지키면 바보라고 은근한 조롱도 덧붙인다.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 '네 감수성 정도는'에서 시인은 남 탓, 시대 탓, 세상 탓하는 어리석은 태도에 대해 이렇게 일갈한다. 일본 시인으로는 드물게 저항과 반전의 문학인으로 알려져 있는 이바라기 노리코의 사화집(앤솔러지) 가 2017년 12월 출간되었다. 표지 사진" class="photo_boder" src="http://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18/0124/IE002275937_STD.jpg" style="border: 1px solid rgb(153, 153, 153); text-align: center; max-width: 600px;" /> ▲   표지 사진 ⓒ 스타북스   에는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집 6권에서 발췌한 35편의 시와 일본 교과서에 실린 수필 '하늘과 바람과 별의 시' 그리고 '월간시'에 실린 이바라기 노리코의 한글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함께 실려 있다. 윤동주 시인을 좋아하여 쓴 수필 '하늘과 바람과 별의 시'는 일본 고등학교 현대문 국정교과서에 실렸다. 이 글에서 시인은 윤동주는 분명히 일본 검찰의 손에 살해당했으며 이런 배경을 알지 못하면 이 시인에게 다가갈 수 없다고 힘주어 말한다. 윤동주의 사인은 일본인 스스로 반드시 그 전모를 밝혀야 한다고 말하는 강단 있는 시인이었다. 가장 예뻤을 때 너무나 불행한 삶의 아이러니 인생에서 가장 예쁜 시기는 언제일까? 시인은 스무 살 무렵을 가장 예뻤던 때라고 회상한다. 이바라기 노리코가 32살 때 20대 초기를 생각하며 쓴 시 '내가 가장 예뻤을 때'는 일본 국정 교과서에도 실린 시인의 대표작이다.  그런데 인생에서 가장 예뻤던 그 시절 시인은 행복했을까? 불행히도 아니란다. 가장 예뻤을 때 아주 불행했노라고, 너무도 쓸쓸했노라고 시인은 고백한다. 거리는 '꽈르릉' 하고 무너지고, 주위의 사람들은 죽었고 그래서 가장 예뻤던 그 시절에 멋 부릴 기회도 잃어버렸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 예뻤던 시절에 남자들은 거수경례밖에 몰랐고 순수한 눈짓만을 남기고 다들 떠나버렸다고 시인은 토로한다. 1926년생인 이바라기 노리코가 한창 예뻤을 스무 살,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졌고 패망했다. 이바라기 노리코는 시에서 일본의 군국주의에 대해 통렬히 비판한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 나라는 전쟁에서 졌다 이런 엉터리없는 일이 있느냐고 블라우스의 소매를 걷어 올리고 비굴한 거리를 쏘다녔다 - 내가 가장 예뻤을 때 中 (본문 56쪽) 일본인으로서는 차마 내뱉기 힘든 말이었겠지만 시인은 일본이 일으킨 전쟁을 '엉터리없는 일'로 간주했다. 국가가 벌인 그 엉터리없는 일 때문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했고, 젊은 청춘들이 희생되었고, 평범한 소시민들은 소중한 일상을 잃어버렸다. 그런데 국가가 저지르는 엉터리없는 일이 어디 일본에만 있었을까? 공선옥은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에서 영감을 얻어 똑같은 제목으로 소설을 쓴다. 공선옥의 소설 는 학살의 기억이 채 가시지 않은 1980년대 초반 광주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왜 아무렇지 않지? 아무렇지 않은 것이 나는 너무 이상해.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닐까? 혹시 말이야, 우리나라 사람들이 먹는 물에 뭐든지 빨리 잊어먹게 하는 약이 섞여 있는 게 아닐까? 아니면 누군가 공기 중에 누가 죽었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고 살아가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약품을 살포한 것은 아닐까? 나는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밥 먹고 웃고 결혼하고 사랑하고 애 낳고 그러는 게 이상해. 우리 식군 내가 이상하다지만 말야." - 공선옥의  中 76쪽 공선옥은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잘 가라는 인사도 없이, 잘 있으라는 위로의 말 한마디 없이 우리는 그 시절과 이별했다. 나는 그것이 너무도 아쉽고 서운하고 서러웠다. 아쉽고 서운하고 서러운 그 마음이 사실은 이 글을 쓰게 했는지 모른다."    생에 대한 환희와 설렘으로 가득 찰, 인생에서 가장 예쁘고 빛나던 청춘의 시절이 슬프고 아프고 서럽게 기억되어야 하는 안타까운 이야기들이 일본과 한국에서 같은 제목의 시와 소설로 승화된 것이다.  이바라기 노리코는 일본 전후 여성 시인으로는 가장 폭넓은 사회의식과 비평정신을 지닌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녀의 시는 날카로우면서도 서정적이고 아름답다. 그리고 생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져 있다.  소녀시절엔 어른이 된다는 것이 닳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살면서 깊이 깨달은 것이 어른이 되어서도 갈팡질팡해도 된다는 '되새김'이란 시의 구절은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늘 갈팡질팡하는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맑고 청아한 모습의 사진에 반해 윤동주의 시를 읽게 되었노라 수줍게 고백하는 이바라기 노리코. 세상과 작별하는 모습마저도 따뜻하고 아름다웠던 그녀의 시를 읽으며 지나간 시간, 누가 뭐래도 풋풋하고 아름다웠던 나의 스무 살, 내가 가장 예뻤던 그 시절을 떠올려본다. ///오마이뉴스(이숙경 시민기자), ==========================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다음 정류장은 도시샤(同志社) 대학 앞입니다."   교토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이동 중이던 필자는 안내 멘트에 귀가 번쩍 뜨였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도시샤(同志社) 대학은 시인 윤동주(1917-1945)가 다녔던 학교였기 때문이다. 필자가 재차 확인하자 운전사는 ‘내려서 뒤쪽으로 조금 돌아가야 한다’고 친절하게 답변했다.   서정문에서 바라본 도시샤 대학 도시샤 대학에 들어서자 붉은 벽돌에서부터 역사의 숨결이 느껴졌다. 이 대학은 한 청년의 뜻(志)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는 쇄국의 일본을 개방하려는 의지로 미국에 건너가서 ‘일본인 최초의 미국대학 졸업자’가 됐다. 청년의 이름은 니지마 조(新島 襄, 1843-1890). 그가 1875년 도시샤 대학(同志社英學校)을 설립했던 것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 학교가 내걸고 있는 슬로건이다. 때마침 토요일 오후라서 캠퍼스는 고즈넉했다. 갑자기 이방인(異邦人)이 된 필자는 두리번거리다가 어쩔 수 없이 경비원 신세를 졌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윤동주 시비(詩碑)가 어디 쯤 있나요?”   “똑바로 가시다가 우측으로 돌아가세요. 저기 지붕 끝이 뾰족한 건물 앞에 있습니다.”   정지용과 윤동주의 시비 나란히 있어   경비원의 말대로 건물사이로 들어가자 나무아래 정지용(1902-1950)과 윤동주(1917-1945)의 시비가 나란히 있었다. 비(碑)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일본어와 한글로 쓰여 있었다.      정지용 시비 사실을 토대로 한 글이었다. 바로 옆에 서있는 윤동주 시비로 발걸음을 옮겼다. 윤동주에 대한 글도 일본어와 우리말로 쓰여 있었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 윤동주   윤동주 시비의 글   다소 어눌한 한글 표현이지만, 이해하는데 있어서 문제는 없었다. 필자는 혼자서 시비에 새겨진 빛바랜 서시(序詩)를 읽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시비  필자는 읽고 또 읽었다.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시(詩)였기 때문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필자는 ‘주변을 살피고, 뒤를 돌아보면서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교정의 벤치에 앉았다. 오래 전에 필자가 에 썼던 글이  떠올랐다.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와 윤동주   “인간의 얼굴은 하나의 줄기위에 핀 일 순간의 꽃이다./ 바람과 새가 날라다 준 종자처럼/ 여기저기 흩어지고, 피고 지는 존재/ 인간도 식물과 별로 다를 게 없느니….”    일본의 유명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茨木則子, 1926~2006)가 쓴 라는 수필에 담긴 내용이다. 그 책에도 ‘윤동주에 대하여’라는 글이 있다.     누군가가 그린 윤동주의 작은 액자  이바라기(茨木) 시인은 1990년 윤동주의 조카 윤인석 씨를 도쿄에서 만났다고 한다. 시인은 윤인석 씨가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 씨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함께 ‘아우의 인상화(印象畵)’란 시를 소개했다.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살그머니 작은 손을 잡으며/ ‘너는 자라서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슬픈, 진정코 슬픈 대답이다...”   이바라기(茨木) 시인은 “윤인석 씨가 큰 아버님은 돌아가셨지만,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고 말했다며 “자신도 이에 공감한다”고 했다.   윤동주의 시비(詩碑)는 한국산과 교토(京都)산의 돌로 세워졌다. 양국화합의 의미를 두기 위해서다. 그런데도 한일 간의 간극(間隙)은 아직도 좁혀지지 않고 있다.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을 윤동주를 추모하면서 뚜벅뚜벅 도시샤 대학 교문을 나섰다.
5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돌아와 보는 밤 댓글:  조회:2537  추천:0  2018-07-02
  돌아와 보는 밤 ​  윤동주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 이제 내 좁은방에 돌아와 불을 끄옵니다. 불을 켜두는 것은 너무나 피로롭은 일입니다. 그것은 낮의 연장이옵기에 -   이제 창을 열어 공기를 바꾸어 들어야 할텐데 가만히 밖을 내다보아야 방안과 같이 어두워 꼭 세상같은데 비를 맞고 오던길이 그대로 비속에 젖어 있사옵니다.   하루의 울분을 씻을 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속으로 들려오는 소리, 이제 사상이 능금처럼 익어가옵니다. ​ ​ ​   동족의 비애를 가슴에 안았던 식민지 청년의 순결한 희망 윤동주​ ​ ​ 윤동주는 독립투쟁의 일선에서 장렬하게 산화한 투사도 아니었고, 당대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시인도 아니었다. 그러나 인간을 떠나서 도를 닦는다는 것은 한낱 오락에 불과하고, 공부나 시도 생활이 되어야 한다며, 자신의 시와 삶을 일치시키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그의 시 정신은 어느 투사 못지 않게 치열한 바가 있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는 의 구절처럼, 그는 모진 풍파 속에서도 독립한 나라를 희망하는 마음으로 죽음의 나락에 빠진 민족을 사랑했고, 자신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며 한 몸을 민족의 제단에 제물로 바쳤다.​     ======================   소설가 송우혜가 전하는 '마음의 별로 남은 민족시인'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 27년여의 짧은 삶. 그러나 울림은 컸다. 뭉클한 여운이 100년(2017년도)이라는 시간 속에 길게 이어지고 있다. 민족시인 윤동주. 살아생전에 별을 헤던 그는 세상을 떠나 마음의 별로 남았다. '윤동주 평전'의 저자인 소설가 송우혜(70) 씨가 그의 삶과 시 이야기를 들려준다. 윤동주 시비 앞에 선 송우혜 소설가 [사진/전수영 기자]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 7월 18일 한낮. 연세대 신촌캠퍼스에 있는 윤동주기념관 주변의 숲이 매미 소리로 요란했다. 기념관은 윤동주 시인이 대학 1학년 때 생활하고 사색하고 고뇌하며 시 쓰기를 했던 기숙사였다. 바로 앞뜰에는 시인의 삶과 예술혼을 기리는 시비가 단아하게 서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너무나 잘 알려진 '서시(序詩)'다. 소설가이자 사학자인 송우혜 씨는 시비에서 기념관 쪽을 바라보며 사뭇 감회어린 표정을 지었다. '서시'는 '참회록'과 더불어 가장 애송하는 시라고 했다. "석조건물인 저 옛 기숙사의 지붕밑방에서 시인은 운명적 절친 송몽규, 강처중과 함께 연희전문학교 생활을 시작하며 꿈을 키웠어요. 거목들이 우람하게 서 있는 이 숲을 걷노라면 나도 모르게 울컥해지곤 해요. 수십 년 전에 시인이 걸었던 그 길을 오늘날 내가 이렇게 걷는구나 싶어서입니다."   대표작 '서시'를 비롯해 주옥같은 시를 다수 남겼던 민족시인 윤동주(1917~1945). 민족 최대의 경축일인 광복절을 앞두고 시인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는 감회가 새롭다. 송 씨는 "올해가 윤동주 시인 탄생 100주년이라는 게 도무지 실감 나지 않는다"면서 "남기신 시와 함께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계신 듯하다"며 소회를 밝혔다. 윤동주 시인은 27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200여 편의 시와 산문으로 깊은 울림을 남겼다. 송 씨는 "'명예롭게 유지될 수 없는 평화는 이미 평화가 아니다'는 말이 있다. 대한제국이 일본제국에 멸망한 때가 그랬다"며 "어두운 재앙의 시기에 신은 우리에게 한 시인을 보냈다"고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그의 역저 '윤동주 평전'(서정시학)은 시인의 삶과 예술을 집대성한 것으로 현대사의 한 줄기를 새롭게 재정리해 또 다른 울림을 안겨준다. ◇ 우연한 만남이 낳은 '윤동주 평전' 송 씨와 윤동주의 '만남'은 어찌 보면 우연이었다. 운명적 인연이랄까. 아버지의 삼종형인 송몽규(1917~1945)의 자료를 수집하던 중 그와 친구 사이인 윤동주에 새삼 주목하게 된 것이다. 1970년대 중반 한국 문단에서는 이른바 '윤동주 폄훼 현상'이 강하게 일고 있었다. "'평생 공부만 했던 윤동주가 무슨 독립운동을 했겠느냐. 그의 시 또한 저항시가 아니다. 일본 유학생으로서 일제의 과잉단속에 걸쳐 불우하게 옥사한 것'이라는 등의 주장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지요. 역사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이들이 자의적 해석으로 시인에 대한 평가를 오도한 것입니다." 평전이 출간되기까지 내적 우여곡절도 거쳐야 했다. 윤동주에 대한 오류를 바로잡고자 시사잡지에 글을 발표하자 한 출판사의 주간이 제대로 된 '윤동주 평전'을 하나 써달라고 간곡히 주문했다. 하지만 송 씨는 일언지하에 거절해버렸다.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평전을 집필한다는 건 무리다 싶어서였다. 당시 그는 장편소설을 구상 중이기도 했다. "어느 날이었어요. 낮잠에 깜박 빠져들었는데 윤동주의 친구이자 인척인 문익환(1918~1994) 목사님의 모친(김신묵)이 금방 돌아가실 것처럼 자리에 누워 계시는 꿈을 꿨어요. 순간 나는 쇠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지요. 소설은 언제라도 쓸 수 있지만 저분이 돌아가시면 북간도 이야기 역시 영영 사라진다는 생각이 퍼뜩 들더라구요." 송 씨는 곧바로 증언자들을 찾아다니고 사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때가 1984년 무렵. 당시 90세였던 문 목사의 모친은 북간도의 역사와 윤동주 시인의 삶을 돌이켜주는 최대의 증언자가 됐고, 시인의 누이동생 윤혜원과 남동생 윤일주도 큰 도움을 줬다. 모두 560여 쪽 분량의 '윤동주 평전'은 집필 4년 만인 1988년에 처음 출간됐다. 그리고 1998년 제1차 개정판에 이어 2004년 2차 개정판, 2014년 3차 개정판이 차례로 나왔다. "평전을 쓰는 동안 역사적 진실을 제대로 밝히는 걸 목표로 정진했지요. 그 결과 '윤동주'라는 시인을 좀 더 정확하게 세상에 드러날 수 있어 큰 보람을 느낍니다. 내년이면 어느덧 출간 30주년이 되네요." 이와 함께 에피소드 하나를 들려준다. 윤동주 평전을 쓰겠노라고 오랫동안 벼르고 있던 문익환 목사가 송 씨의 평전을 읽고서는 "윤동주 평전은 송우혜가 쓴 것으로 충분하다. 정말 잘 썼다. 나는 안 쓰겠다"며 대견해 하더란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9년 2월 전화를 걸어와 "내가 곧 북간도에 가려는데 평전 두 권만 다오. 그 책을 가지고 가야겠다"고 부탁했다. 그런데 문 목사가 평전을 들고 그해 3월 25일 도착한 곳은 중국 북간도가 아닌 북한의 평양이었다. 순안공항에 내린 그가 도착 일성으로 남북한 온 겨레 앞에 바쳐 낭송한 게 시인의 '서시'. 송 씨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전율 같은 것이 내 마음을 후려쳤다"며 당시의 심경을 털어놨다. ◇ 비운의 짧은 삶, 깊은 울림의 시 세계가 1차 대전의 아수라장에 빠져 있던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의 명동 학교촌에 있는 기와집에서는 준수하고 건강한 사내아이가 태어나 첫울음을 터뜨렸다. 결혼 8년 만에 아이를 얻은 부모로서는 경사 중의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아이가 바로 훗날의 민족시인 윤동주다. 특기할 사실은 윤동주가 태어나기 석 달 앞서 동갑내기 고종사촌이자 평생 운명을 함께한 송몽규가 탄생했다는 점. 윤동주의 할아버지 댁에서 잇달아 태어난 두 아기는 대부분의 학창시절을 같이 보낸 뒤 함께 일본 유학을 떠났고, 동일한 죄목으로 체포돼 복역하다가 같은 해에 옥사한 운명적 동반자였다. "다섯 살 되던 해에 송몽규가 새로 장만한 부모의 집으로 이사할 때까지 두 아이는 한 지붕 밑에서 살았는데 일생을 두고 참으로 특이한 관계였지요. 윤동주 연구에서 송몽규란 인물을 빠뜨릴 수 없는 이유입니다." 명동소학교 시절의 윤동주는 성품이 무척 온순하고 재주 있는 아이였다. 송 씨는 "윤동주에게 명동은 맑고 풍요롭고 평화로운 유년기 체험으로 가득한 곳이었다"면서 "하지만 횡행하는 마르크시즘에 환멸을 느낀 민족주의자들은 하나둘 이곳을 떠났고 윤동주 집안도 1931년 용정으로 이사했다"고 들려준다. 윤동주의 민족주의 성향의 내면에는 이 같은 명동마을의 시대상이 있다는 것. 용정의 은진중학교 생활도 시대적 격랑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1935년 송몽규가 독립운동에 투신해 중국으로 잠입했고, 윤동주는 생애 처음으로 집을 떠나 평양 숭실중학교로 전학을 갔다. 이때의 송몽규 독립운동 경력이 훗날 윤동주의 체포와 옥사에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한다. 윤동주가 인간이 지닌 불완전성을 체감하고 이를 '부끄럼의 미학'으로 승화시킨 계기는 바로 숭실중학교 시절이었다. 감수성이 한창 예민할 시기인 이때 윤동주는 모든 불완전한 존재들이 자신의 불완전함을 슬퍼하는 참회의 방식이 바로 '부끄럼'임을 깨달은 것. '서시'는 이 같은 부끄럼 미학의 결정판으로, 수치 앞의 정직함과 성실함은 신의 완전성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축복이었다. 신사참배의 격랑 속에 문익환과 함께 숭실중을 자퇴하고 용정으로 돌아온 윤동주는 광명학원 중학부에 편입해 두 해 동안 다수의 작품을 발표한다. 이중 매우 감칠 맛 나는 작품으로 송 씨가 꼽은 게 동시 '무얼 먹고 사나'. '바닷가 사람/ 물고기 잡아 먹고 살고// 산골엣 사람/ 감자 구워 먹고 살고//별나라 사람/ 무얼 먹고 사나'   윤동주 시인의 연희전문 졸업 앨범 사진   ◇ 유순하나 지조 높은 '외유내강' 시인 1938년 광명학원을 졸업한 윤동주는 송몽규와 나란히 자신의 가장 풍요롭고 자유로웠던 시기인 연희전문학교 시절을 활짝 열게 된다. 민족의식이 시편을 통해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것도 이때였다. 그는 '슬픈 족속'이라는 시에서 '흰 수건을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라며 식민치하의 우리 민족을 의인화해냈다. '한민족'은 곧 '슬픈 족속'이라는 것이다. 송 씨는 "외유내강형이던 시인이 대인관계에서는 매우 유순하고 다정했지만 지조는 누구보다 굳고 강했다"고 들려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요 힘에 겨운 아들이며 따뜻한 오라버니요 형이었고 성실한 학생이자 다정한 동료였고 자상한 선배였던 그의 외형을 벗겨놓고 보면 광야에서 수도하는 고행승처럼 엄격하게 노력하는 시인이요, 동족의 고난 앞에서 신과 그 약속에 대해 감연히 반발한 당당한 반항가였다는 것이다. 연희전문 시절이 낳은 명시 중 하나가 바로 '별 헤는 밤'. 맑은 별빛 충만한 가을의 서정을 청신하게 묘사한 이 시에는 시인의 고운 심성과 기품이 오롯이 드러나 있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중략)…//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연전 졸업 후 윤동주는 송몽규와 일본에 유학해 대학과정을 밟는다. 당시 가장 큰 장애는 '창씨개명'. 창씨개명이 되지 않으면 일본으로 가는 데 필요한 '도항증명서'부터 뗄 수 없었다. 고민을 거듭하던 그는 연전 졸업 직후 북간도로 귀향했다가 서울로 돌아와 학교에 창씨개명계를 제출한다. 그의 새 이름은 히라누마 도오쥬우(平沼東柱). '참회록'은 창씨개명의 뼈아픔을 통회하는 일종의 저항시였다. 일제에 망한 '대한민국'이란 왕조의 후예로서, 바로 자신의 '얼굴'이 그 '왕조의 유물'임을 절감하면서 '이다지도 욕됨'을 절절하게 참회했다. 송 씨는 "그것은 동시에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을 기약하는 자기 다짐을 동반한 참회이기도 했다"고 말한다.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골이 남어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가//…(중략)…밤마다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어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거러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속에 나타나온다' ◇ '동 섣달의 꽃. 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 일본으로 건너간 지 1년여 뒤인 1943년 7월 여름방학을 맞아 북간도로 귀성하려던 윤동주는 '교토에 있는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에 연루돼 전격 체포·수감된다. 요시찰 인물 송몽규는 이보다 나흘 앞서 사상범으로 체포됐다. 이듬해 기소돼 징역형을 선고받은 윤동주와 송몽규는 후쿠오카형무소에 수감됐다가 해방을 몇 달 앞둔 1945년 2월 16일과 3월 7일 각각 비극적으로 옥사하고 만다. "윤동주가 민족시인의 영예를 누리게 된 데는 연전 시절에 종로구 누상동에서 같이 하숙했던 후배 정병욱과, 기숙사에서 함께 지냈던 강처중이 있었습니다. 윤동주와 정병욱은 다섯 살 차이의 선후배였지만 흉금을 털어놓고 지낼 만큼 긴밀한 사이였죠. 윤동주에게서 필사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받은 정병욱은 이를 보관했다가 해방 후 월남한 유족들에게 전함으로써 시인을 세상에 알리는 데 크게 공헌했지요. 해방 후 경향신문 기자를 지낸 강처중도 일본 유학을 떠나는 윤동주가 서울에 두고 간 '참회록' 등의 원고를 보관했다가 동생 윤일주에게 전했구요. 현존하는 윤동주 유품 중에서 중학교 때의 시와 동시, 습작을 빼고는 모두 강처중에 의해 세상에 남아 있어요." 윤동주가 평생을 두고 가장 좋아했던 시인은 정지용(1902~1950)이었다. 그가 관념적이고 어려운 시가 아닌, 쉬운 말로 진솔한 감정을 표출하게 된 데는 정지용의 영향이 컸다. 정지용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사슬에서 풀려난 뒤인 1947년에 '동 섣달의 꽃. 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라며 윤동주를 극찬한다. 송 씨는 "평전이 나오기 전까진 송몽규의 사망 시기와 무덤 소재지에 대해 중대한 착오들이 있었는데 책의 내용을 토대로 무덤을 찾아내고 사망 날짜도 바로잡혀 큰 보람을 느꼈다"면서 "이와 함께 '좌익 인사'였다는 이유로 유족조차 쉬쉬하던 강처중의 행적과 사상을 개정판에서 새롭게 정리할 수 있어 뿌듯했다"고 말했다. 1968년 서울대 의대 간호학과에 입학했다가 중퇴한 뒤 1978년 한국신학대학에 편입해 신학을 공부한 송 씨는 다시 이화여대 사학과에서 한국사를 전공해 석사학위를 받은 뒤 박사학위 과정을 수료했다. 1980년 문단에 오른 송 씨는 장편소설 '저울과 칼' '하얀 새' 등을 발표했고 '스페인춤을 추는 남자' 등의 소설집과 '서투른 자가 쏘는 활이 무섭다'라는 산문집도 펴냈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7년 8월호에 실린 글 =====================     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문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1938.5.10.         소년에서 청년으로의 길     시인 윤동주는 서른을 목전에 두었던 1945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는 늘 청년으로 기억되 는데, 그 이유는 그가 비교적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기에 그의 시편들 또한 청년기에 써내려간 것들이기 때문 이다. 따라서 그의 시 쓰기는 스물아홉, 아니 스물여섯에 머물러 있다. 우리는 이후에 펼쳐졌을 그의 시세계를 짐작만 해볼 따름이다. 그렇다고 그가 남긴 시편들이 ‘시’라 불릴 수 있는 미적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외려 그가 ‘하늘과 바람과 별’을 노래하며 선취한 ‘부끄럼’의 미학은 우리 시사(詩史)에서 드물고 도 높다란 영역에 위치한다.    윤동주의 시편들에 등장하는 ‘부끄럼’은 자기 반성적 행위로 도출되는데, 그의 시편 「새로운 길」에서도 그 자취를 찾을 수 있다. 이 시편은 그가 연희전문에 입학하고 한 달이 지난 1938년 5월 10일에 쓰인 시편으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에 실린 19편 가운데 창작 시기가 가장 앞설 뿐만 아니라 그의 장례식에서 낭독되기 도 하였다. 시인 윤동주의 시작과 마지막을 함께한 셈이다. 대칭 구조(A→B→C→B’→A)로 짜여 있는 이 시편에 서 시적 화자는 ‘숲’과 ‘마을’을 목적지로 삼아 갈 것이라 말한다. 그 여정, ‘나의 길 새로운 길’에서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로 변주되는데, 시적 화자는 설령 그곳에 가닿지 못할지라도 ‘오늘도…… 내일도……’ 끊임없 이 ‘언제나’ 나아갈 것을 마음먹는다. 이 가운데 시적 화자의 어조는 단호하며 지극히 다짐조이다.    이와 같은 다짐은 반성의 긍정적 표현으로 과거를 돌이킨 이후에야 나오게 된다. 즉 반성의 행위가 선행되어 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적 화자의 ‘새로운 길’에 대한 다짐은 과거에는 가지 않았던 길로 향하겠다는 자기 의지의 표현이다. 헌데 이 길은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새로운’ 것인가. 그것 은 문들레와 까치와 아가씨와 바람을 바라보는 시적 화자의 마음 문제이다. 시적 화자는 자기 인식을 통해 매 번 걷던 길을 새롭게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제 갔던 그 길도 시적 화자에겐 오늘과 내일에는 새로운 길로 변할 수 있다.    그 ‘새로운 길’이 윤동주에겐 ‘시’의 길, ‘시’에 대한 다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시편에는 순수한 열망이 가 득하며, 현실 인식이 부재한다. 이 때문인지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에 수록된 다른 시편에 비해 덜 여문 느 낌을 주기도 한다. 여기에는 갓 대학생이 되었던 윤동주의 신분 변화의 문제가 한 몫 하겠다. 소년에서 청년으 로 거듭나던 시기였던 까닭이다. 또한 그는 과거 동시창작에 매진했었고, 사실상 이 시편이 성인으로서의 현대 시 시작(詩作)의 출발점이었다. 이 사실들은 이 시편에 붙여진 ‘소년시’라는 명칭을 떠올리게도 한다.    이 시편을 시작으로 시인 윤동주는 「十字架」, 「自像畵」 등 자기 성찰과 반성의 극점을 수놓은 시편들을 탈고하게 된다. 그를 두고 정지용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초판본)의 서문에서 ‘또 다시 다른 길로 구연 (舊然) 매진(邁進)할 것’이라 했듯이 말이다.     곽예근  한양대학교 박사과정 수료.               병원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 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 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 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 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아 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1940.12.               윤동주 시인의 시세계 그리고 나와 타자의 이중주. 우선 한국근대문학사에서 윤동주는 시대적 요구에 따른 문학적 응전을 보여준 시인으로 위치 지어져 있다. 나아가 윤동주 시인의 시세계는 예언적 지성의 발현형식의 하나이며, 이는 인문 사회학적 정신과 궁극적으로 통하는 문학적 성과이다.    우리는 문제작에 대해 정의할 때 ‘problem’ 또는 ‘question’이라는 단어를 호출하게 된다. 그의 시편들 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질문들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문제작이다. 나아가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 반 드시 대면해야할 진실에 대해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답하는 방식을 제안한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야 그 규명의 중심 대상으로「병원」이라는 시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3연으로 구성된 이 시는 이러한 의미에서의 타자성과 관련한 발견과 감응 그리고 환기의 과정을 시적으로 구현한다. 병원과 환 자는 곧 세계와 존재의 은유이며, 여자와 의사는 타자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그렇기 때문 에 이 시는 윤동주 시인의 문제작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병원은 병들어 있는 줄도 모르는 기성세대로 이루어진 사회, 그러니까 진짜 환 자들로 가득한 공간이다. 병원은 세계와 유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기호체인 것이다. 우리에게는 젊은이의 병을 부정하는 ‘늙은 의사’가 아니라, 그 병에 귀 기울일 줄 아는 ‘무지한 스승’이 필요하다. 또한 ‘젊은 여자’는 미적 거리 유지를 통해, 나와 타자의 외밀성을 획득하는 대상이다. 이처럼 시인은 과거에도 오늘날에 도 ‘타자들의 귀환’을 간절히 요청하는 방식으로 시적 자의식을 구현한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윤동주의 현재성을 획득하고 그가 문학적으로 기원했고, 명령했던 “아 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사랑스런 추억」)라는 문장에 응답해야 한다. 우리는 이제 해방을 원하 는 자가 목소리를 내는 방식으로 시인에게 화답해야 할 것이다. 이는, 윤동주 문학이 선취한 미학적 타자성을 전유하는 방식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문제이기도하다.     이은규  200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다정한 호칭』이 있다.                    돌아와 보는 밤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 이제 내 좁은 방에 돌아와 불을 끄옵니   다. 불을 켜두는것은 너무나 피로롭은 일이옵니다. 그것은 낮의 연장   (延長)이옵기에―        이제 창을 열어 공기를 바꾸어 들여야할텐데 밖을 가만이 내다 보   아야 방안과 같이 어두어 꼭 세상같은데 비를 맞고 오든 길이 그대로   비속에 젖어 있사 옵니다.         하로의 울분을 씻을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속으로 흐르   는 소리, 이제, 사상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 가옵니다                                                                          -1941. 6.          어둠속에서 익어가는 이 시대의 청춘을 ‘돌아보다’        필자는 우리나라의 시인 중 가장 먼저 ‘윤동주’를 알았다. 그만큼 윤동주는 우리에게 친숙한 작가이다. 우리 는 그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부끄러움의 감정을 탁월한 서정성으로 아름답게 승화해냈던 시인 윤동주,그 이름을 들으면 우리의 머릿속에는 한 장의 흑백 사진이 떠오른다. 학사모를 쓰고 한편으로는 앳된, 또 한편으로 는 의젓한 모습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한 청년의 모습이다.    1945년, 29세의 나이에 사망하기 전까지 그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입교대학 문학부 영 문과에서 수학하며 사회와 현실에 대해 많은 고민을 거듭했던, 누구보다 성숙하고 정직한 청년이었다. 우리는 작품을 통해 ‘청년 윤동주’와 만난다. 그에게도 청춘의 시절이 있었다. 쏜살 같이 흐르는 세월처럼, 무의미하게 지나가는 기차를 바라보며 그는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어 있거라”고 외쳤다. 이쯤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 긴다. 과연 청춘은 여전히 아름답고 눈부신가.    돌이켜보자면, 윤동주의 청춘은 무채색에 가까웠다. 그 또한 한 여성을 사랑해본 일이 있었고, 함께 글을 쓰 는 동지들과 끈끈한 우정을 나눠본 일이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너무도 피로하게 만들었다. 암울한 현실 속에서 그는 청춘의 푸른 생기를 잃어버렸다. 일제의 탄압과 억압 속에서 하루를 끝마치고 좁은 방으로 돌아오 는 일, 그것만이 지독한 세상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시대의 횡포에도 그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세상 너머에 있는 좁은 방에서 숨을 쉬고, 생각하고, 시를 썼다. 한줄기 빛조차 없는 어둠속에 서 홀로 침잠하는 일, 이것이 그가 시대와 투쟁하는 방법, 청춘을 살아내는 방법이었다. 고요한 방안에서 그의 세계는 천천히 익어갔다.    이 시대 청년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점점 획일화되어 가는 세상 속에서 좁은 곳으로, 더 어두운 곳으로 숨으 려고만 하질 않는가.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르듯, 광활한 세상은 청년들의 병을 알지 못한다. ‘무얼 어 디다 잃었는지 몰라’ 너도나도 어린아이처럼 서성거리고 있을 뿐이다. 이 시대 청년들에게 ‘새로운 길’은 과연 존재하는가.    현대의 청년들은 찬란한 청춘의 색을 스스로 지워내고 있다. 청춘의 부스러기들은 짙은 어둠속에 잠겨 사소 하게 빛나고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 청년 윤동주는 이야기하고 있다. 깜깜한 밤에도 열매가 익고, 꽃이 피듯 청 춘의 고뇌와 아픔이 곧 뜨거운 등불이 될 것을 말이다. 우리는 투쟁의 역사를 통해 이룩된 현대 사회를 살아가 고 있다. 때로는 저항하고, 때로는 좌절하며 치열한 삶을 살다 간 한 시인의 모습 속에서, 방황하는 청춘들의 또 다른 모습을 이제는 찾을 때이다.     정애진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한양대학교 박사과정 재학 중.               太初(태초)의 아츰       봄날 아츰도 아니고   여름, 가을, 겨울,   그런날 아츰도 아닌 아츰에     빨―간 꽃이 피어났네,   햇빛이 푸른데,     그 前(전)날 밤에   그 前(전)날 밤에   모든 것이 마련되었네,     사랑은 뱀과 함께   毒(독)은 어린 꽃과 함께                                                                                                -1941         신앙의 출발점   이 시편은 명확한 창작 일자가 없다...  =====================================      돌아와 보는 밤                         윤 동 주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 이제 내 좁은 방에 돌아와 불을 끄옵니다   그것은 낮의 연장이옵기에 이제 창을 열어 공기를 바꾸어 들여야 할 텐데 밖을 가만히 내다보아야 방안과 같이 어두워 꼭 세상 같은데 비를 맞고 모든 길이 그대로 비속에 젖어 있사옵니다   하루의 울분을 씻을 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속으로 흐르는 소리 이제 사상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 가옵니다.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 이제 내 좁은 방에 돌아와 불을 끄옵니다. 불을 켜 두는 것은 너무나 피로롭은 일이옵니다. 그것은 낮의 연장이옵기에―       이제 창을 열어 공기를 바꾸어 들여야 할 텐데 밖을 가만히 내다보아야 방 안과 같이 어두워 꼭 세상같은데 비를 맞고 오던 길이 그대로 비속에 젖어 있사옵니다.       하루의 울분을 씻을 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속으로 흐르는 소리, 이제 사상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 가옵니다.       1941년 6월       [어둠속에 저절로 익어가는 능금 같은 사상을]          산문시 형태로 씌어진 이 작품은 세 개의 자연단락으로 《세상》과 《내 좁은 방》 그리고 《불을 끄는 것》과 《불을 켜두는 것》과의 대립구조를 구성하였고 이 대립구조 속에서 비록 피동적이고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비속에 젖어 있》는 어두운 세상과 한번 맞서서 싸워보려고 시도하는 시인의 대결자세를 그리고 있다.          첫 단락에서는 불을 끄는 것과 불을 켜 두는 것의 상반되는 변증관계를 제시하고 있다. 내가 《내 좁은 방에 돌아와》서 곧바로 취하는 행동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불을 끄》는 행동이다. 그것은 불이 켜져 있어 환한 상태는 《낮의 연장》이고 여기서 낮은 《내 좁은 방》 그 외부에 존재하는 《세상》이라는 곳과 하나의 연장선상에 있는 곳이며 이 세상이라는 곳에는 《너무나 피로롭은 일》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작품은 서두에서 이렇게 이 피곤한 세상을 부정하려면 반드시 방안의 불부터 먼저 꺼야한다고 그 시적주인공이 진행하는 행동의 리유를 밝히고 있다.          둘째 단락에서는 《창》을 매개체로 하여 방안과 방 밖을 련결지어 주고 있다. 이 단락에서는 하루 동안 닫혀있던 방안의 혼탁한 공기나(《창을 열어 공기를 바꾸어 들여야 할 텐데》) 방밖의 어둡고 비에 젖은 세상이나 결국은 마찬가지로 하나 같이 어지러운 상태이기 때문에(《그대로 비속에 젖어 있사옵니다》) 방안이나 방밖이나, 창을 열어보나 닫아보나 별 다를 것이 없는 동일한 상태임을 제시하면서 어디에 던져버릴 수도 없고 어떻게 지워버릴 수도 없는 하루 동안의 울분만이 가득 쌓여있는 시적 주인공이 처하고 있는 현재 상황을 진일보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고 나서 시인은 다음의 세 번째 단락에서 이 《씻을 바 없는 울분》을 극복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어둡고 비에 젖은 이 세상과의 대결에서 싸우고 이겨나가는 방법은 바로 그와 상대되는 모든 것들과 대립되는 상황을 만들어 내고 정반대되는 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그것은 즉 낮이 아닌 밤에, 《세상》이 아닌 《내 좁은 방》에 돌아와 불을 끄고 어둠속에 몸을 숨기는 것이며 한걸음 더 나아가서 《가만히 눈을 감》아버리기까지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방에 돌아와 불을 끄고 눈도 감아버린 철저한 어둠의 상태 즉 절대암흑의 절대고독의 상태 속에 깊이 빠져 들어가야만 비로소 그대는 자기 자신의 《마음속으로 흐르는 소리》를 듣게 될 수 있을 것이고 비로소 현실을 부정하고 현실을 초월하는 《사상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 가》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 절망의 시대일수록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하여 준다.          시인이 세상에서 《돌아와 보는 밤》은 이렇게 《어둠이 짙어 갈수록 새벽이 가까워 온다.》는 부정의 부정으로써 새로운 긍정을 이루어내는 밤이며 어지럽고 어두운 세상과 맞서 싸우고 이겨나갈 힘을 키우는 깊고 캄캄한 밤이다. 그리고 이 시가 씌어진 시점이 우리민족사에서 가장 어둡고 처절하던 1941년 9월이었다는 것을 명기할 때 우리는 시인의 《능금처럼 익어》가는 사상에 저절로 옷깃이 여며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중국.석화——
4    [동네방네] - 윤동주 유고시집 초판본 경매에 나오다 댓글:  조회:2537  추천:0  2018-07-02
서울옥션블루, 제27회 블루나우경매 개최 유치환의 시집./제공=서울옥션 서울옥션블루가 제27회 블루나우경매를 통해 한국 근현대문학 주요 작가들의 작품집 600여 권을 선보인다.  이번 경매에는 1948년 1월 30일 정음사에서 출간된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이 추정가 1500만~5000만 원에 나온다. ‘서시’를 포함한 31편의 시와 정지용의 서문, 경향신문 기자 강처중의 발문이 포함돼 있다. 윤동주 친동생 일주가 형과 각별했던 문익환 목사에게 증정했음을 추정하게 하는 글이 시집 첫 장에 적혀 있다.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제공=서울옥션 서정주의 첫 시집인 ‘화사집’도 추정가 1000만~3000만 원에 새 주인을 기다린다. 1941년 2월 10일 출판사 남만서고를 통해 나온 책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 작가들이 표지를 꾸민 작품집도 경매에 대거 나왔다. 추상화가 김환기가 표지를 꾸민 황순원 소설집 ‘카인의 후예’(1934년 출간)와 중앙문화협회 ‘해방기념시집’도 각각 추정가 170만~400만 원, 30만~60만 원에 출품됐다. 천경자가 표지를 장식한 이희승 시집 ‘박꽃’, 이대원이 표지를 맡은 김동석 시집 ‘길’ 등의 경매 추정가는 30만~60만 원이다.  민중미술 대표작가 오윤의 아버지인 오영수 소설집 ‘명암’도 이번 출품작 중 하나다. ‘명암’이 포함된 ‘석류 외 16권’ 추정가는 100만~300만 원이다.  ... /전혜원 기자 
3    [동네방네] - "詩碑문제"와 "是非문제" 댓글:  조회:2090  추천:0  2018-07-02
상동 '시와 꽃이 있는 거리' 친일시인 서정주 시비 논란 ㅡ역사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철거 해야   2018년 05월 28일 (월)  양주승 기자    부천타임즈:양주승 대표기자     ▲ 상동 시와 꽃이 있는 거리에 설치된 친일반민족시인 서정주 시비 ⓒ부천타임즈 양주승 기자 부천시 원미구 상동 상도중학교 뒤 보행자도로인 '시와 꽃이 있는 거리'에  조성된  친일반민족 어용시인 미당 서정주의 와 시비를 친일청산,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서정주는  1942년 다츠시로 시즈오(達城靜雄)로  창씨개명 한 이후  일본군 종군기자로 사병의 군복을 입고 취재를 다니면서  일제의 식민지정책에 동조해야한다는 글을 통해 일제에 협력했다. 서정주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13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있다. '시와 꽃이 있는 거리'는 지난 2008년부터 상동 주민자치위원회가 부천시 문화사업과 연계해 조성된데 이어  2013~2015년 주민참여예산 사업으로 혈세 1억원 이상이 투입되어 조성된 거리이다. 이곳에는 서정주의 '국화옆에서', '동천'을 비롯하여 한용운(나룻배와 시인), 윤동주(서시), 변영로(님이시여/눈),김춘수(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정지용(유리창1), 도종환(흔들리며 피는 꽃),박목월(산이 날 에워싸고),  정완영(봄이오는 소리), 문상석(그만뒀다),유안진(멀리있기),정호승(수선화에게), 김광섭(저녁에),김영랑(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천상병(귀천) 등의 시비가 설치되어 있다. 6.13 제7회 전국지방선거에 출마하는 정재현 후보는 "철거해야 합니다. 아니면 친일사실을 밝혀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시지부장을 역임했던 임성환 도의원 후보를 비롯하여 박찬희‧김성용 시의원 후보도 철거를 주장했다. 마선거구(상2·3동)에 출마하는 박찬희 후보는 "시를 포함한 글이라는 건 사람의 생각을 표현하는 통로이고, 특히 시는 함축적이고 정제된 언어로 독자와의 공감을 이뤄낼 때 그 의미가 가장 잘 전달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친일반민족 시인이 아무리 현란한 언어를 구사한다고 해도 읽는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공감을 이루지 못하고, 그시에서 친일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면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차선거구(원종1·2동, 오정동, 신흥동)에 출마하는 권유경 후보는 "서정주 시인의 친일행동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문학적으로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작품이 친일과 연관된 내용이라면 그 작품은 그 속에 담긴 의미만으로도 작품성을 잃었다고 보여집니다. 하지만 친일행동 전에 순수 문학인으로서 활동했던 작품의 작품성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권 후보는 "다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작가나 작품에 대한 설명이 첨부되는 건 어떨까합니다. 예술과 인성의 연관성을 어디까지 구분하고 평가해야하는지를 고민하게 해 주는 질문이었습니다. 앞으로도 문화도시 부천의 시민으로서 선택의 순간이 많을텐데, 그때를 위해서라도 신중하게 고민할 필요성을 느끼게 됐습니다.....어느 선까지 인성과 작품의 연관성을 인정해야할지...하지만 친일행적에 대해서 용납할 수 없음은 확실합니다."라고 밝혔다. 한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미당 서정주의 친일행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서정주 시인은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친일문학을 발표했는데, 주로 시·소설·잡문·평론 등을 통해 일제에 협력했다. 『매일신보』(1942)에 다츠시로 시즈오(達城靜雄)라는 창씨개명한 이름으로 「시의 시야기-주로 국민시가에 대하여」를 발표, 친일문학지 『국민문학』, 『국민시가』의 편집에 참여하면서 수필 「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1943), 「인보(隣保)의 정신」(1943), 「스무 살 된 벗에게」(1943), 일본어 시 「항공일에」(1943), 단편소설 『최제부의 군속 지망』(1943), 시 「헌시(獻詩)」(1943), 「오장 마쓰이 송가」(1944) 등 11편을 발표했다. 대부분의 내용은 태평양전쟁을 성전(聖戰)으로 미화하면서 학병지원 권유, 징병의 필요성과 의미를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일제의 식민정책에 동조해야 한다는 입장을 주장하는 글을 썼다. 서정주의 친일작품은 특히 1943년에 많이 발표되는데, 그 배경에는 같은 해에 최재서와 함께 일본군 종군기자로 사병의 군복을 입고 취재를 다녔다.     ===================================/// 詩碑에 是非한다면  정인서 광주 서구문화원장   2018.10.25  기사공유하기 프린트 메일보내기 글씨키우기   詩碑를 마주할 때면 그 앞에 서서 詩를 읽곤 한다. 돌에 생채기를 내며 촘촘히 새겨진 시어의 낱말 하나하나를 들여다본다. 시집에서 읽던 시와는 새삼 다른 풍취를 느낀다. 시는 감성의 언어로 우리를 자극한다. 복잡하고 힘든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겐 시는 마음의 고향과 같은 치유효과가 있다. 사실 시 한 편을 음미하며 차분히 읽을 시간조차 없는 우리의 모습이 어떨까 싶다. 지난주 라디오에서 들었던 우리네 큰 병 중의 하나가 ‘자연결핍증’이라고 했다. 산과 강, 들판이 있는 곳에서 하루를 만끽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자연은 우울증을 치료하고 인간의 본래 감성을 자아내게 하는 공간이라고 한다. 시도 그와 비슷한 ‘감성결핍증’을 치유하는 특효약이라 생각한다. 좋은 시를 읽다보면 마음속에 닫혀 있는 우울증이나 화병, 남을 비난하거나 욕하는 나쁜 감정들을 누그러뜨리게 될 것이다. 인간의 원시성을 회복한다고나 할까. 여러 곳에서 ‘감성회복과 치유의 詩 읽기’ 강좌가 개설되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올봄 오사카와 교토를 배낭여행한 적이 있다. 지난 1991년 무렵 한 번 이곳을 들린 적 있으니 27년만의 여행이다. 그 때는 논문 때문에 자료를 구하러 간 데다 당시엔 이런 시비가 없었다. 이번에는 좀 달랐다. 어디를 가든 그 지역의 문화공간을 찾아보고 우리와 다른 점이 무엇인가를 눈여겨본다. 문화도시 광주를 좀 더 살찌우고 싶은 욕심이라고 하겠다. 주요 관심사는 문화콘테츠를 어떻게 활용하는가이다. 그런 생각으로 여행 중에 교토의 동지사대학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윤동주와 정지용의 시비가 있다는 것을 들었다. 대학은 붉은 벽돌로 된 나지막하고 오래된 건물이 많아 인상적이었다. 그런 건물이 있는 한 복판에 윤동주와 정지용은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무척 반가웠다. 한글과 일본어로 새겨진 詩碑를 보면서 왠지 가슴이 뭉클했다. 그들을 한 번도 본적이 없지만 시인의 이름만으로 그들과 한 공간에 있다고 여겨졌다. 윤동주의 ‘서시’, 학창시절 교과서에서나 읽었던 그 시를 다시 읽어본다. 참으로 애달프다. 정지용의 ‘압천’, 사실 ‘향수’는 읽은 적 있지만 이 시는 처음 접해본다. ‘압천’은 정지용이 교토 시절에 쓴 시 가운데 대표작이다. 정지용 시비는 고향인 충북 옥천의 화강암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두 사람의 시비는 교토대학에서 세웠다. 윤동주는 1995년에, 정지용은 2005년이다. 두 사람이 교토대학 출신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한국인의 시비를 일본의 대학에서 세운 것 자체가 경이로울 정도이다. 광주에 詩碑는 몇 개나 있을까. 한 번 조사를 해봤다. 모두 42개이다. 이들 詩碑는 너릿재 詩碑공원에 21개로 가장 많고 다음이 광주공원과 사직공원, 그리고 중외공원 등에 있다. 일부는 시 외곽 곳곳에 있다. 1970년 광주공원에 ‘영랑 용아 시비’가 처음 건립된 이래로 48년 동안 42개가 세워진 셈이다. 그 과정에 일부 詩碑 작품의 수준 문제도 거론되는 가운데 선정 원칙이나 시대적인 고려 없이 조선시대부터 근•현대 시인까지 다양하게 망라되어 있다. 광주와의 연계성이 높지 않은 시인도 상당수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들 詩碑를 찾아 자료를 정리하는 과정에 발견한 것이 우선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에 있다는 점이었다. 이왕 세울 것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있고 기억하며 읽을 수 있는 공간이 더 좋다는 것이다. 그리고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있다. 광주시가 이런 詩碑 관리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대부분의 시비가 광주시나 일선 구청이 관리하고 있는 공원지역에 건립되어 있다. 그렇다면 민간단체가 세웠다고 할지라도 허가를 받아 건립한 것일 게다. 그런데도 광주에 詩碑가 몇 개 있는지조차 파악이 안되어 있고 관리도 허술하여 기단부 훼손이 심한 비석도 있다. 글씨가 보이지 않는 곳도 있다. ‘문화도시 광주’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난해 서구청에서 풍암호수공원에 목판으로 만든 시화 35점이 설치되어 이곳을 찾은 하루 3천여명 시민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또 눈여겨보면 알 일이지만 5개 구 가운데 서구 관내 200여 버스정류장마다 시화가 붙여져 있어 문화도시 체면을 조금이나마 세워주고 있다. 광주시는 다른 일선 구청과 협력하여 기존의 詩碑 관리를 이참에 팔 걷어붙이고 해야 할 일이다. 서구처럼 목판 시화를 설치하거나 정류장 시화를 부착하여 언제나 시와 그림을 읽고 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길 바란다. 감성의 도시 광주이길 바란다. ///시민의소리 
2    윤동주와 "백석시집" - "사슴" 댓글:  조회:2127  추천:0  2018-07-02
2018.06.28    사람들은 인생의 특정 시기에 필요한 '물건'을 갈망한다. 손에 쥘 수 없는 것을 향한 갈망이 타오를 때 "그것을 갖는다면 소원이 없겠어!"라고 말하지만, 소유 욕망이 이뤄질 때 만족감은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리베카 솔닛은 이 갈망을 '소망하는 삶을 시작하기 위해 영원히 연기된 예비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윤동주(1917~1945)는 만주 화룡현 명동촌에서 명동학교 교원인 윤영석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명동소학교를 거쳐 용정의 은진중학교에 입학한 동주는 1935년 기독교계인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옮겼다. 시에 빠진 동주는 백석이 서울의 조광인쇄주식회사에서 첫 시집 '사슴'을 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문단 스타였던 백석이 조선일보 출판부에서 일하며 틈틈이 쓴 초기작 33편을 담은 100부 한정판 시집이다. 동주는 몸이 달았으나 끝내 귀한 시집을 손에 넣지는 못했다. 청년 동주는 도서관에서 빌린 백석 시집을 밤새워 베꼈다. 가즈랑집, 깽제미, 물구지우림, 둥글레우림, 광살구, 모랭이, 노나리꾼, 청밀, 냅일눈, 곱새담, 앙궁, 고뿔, 갑피기, 게사니, 울파주, 나주볕, 땃불, 밭최뚝, 양지귀 같은, 지금은 알아듣기 어려운 북방 사투리로 가득한 이 필사 시집을 동주가 언제까지 갖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동주는 서울의 연희전문 문과에 들어가서 기숙사에서 지냈다. 나중에 기숙사를 나와 후배 정병욱과 누상동 마루터기 하숙집, 누상동 9번지 소설가 김송의 집, 북아현동 하숙집 등지를 떠돌았다. 동주는 일본 유학 허가를 받으려고 히라누마 도주(平沼東柱)로 창씨개명을 하는 굴욕을 견뎌야만 했다. 도시샤대학 재학 중 여름방학을 맞아 귀향 준비를 하다가 하숙집에서 체포되었다. 1943년 7월 14일 시모가모(下鴨)경찰서로 끌려갔다가 재판에서 2년형을 선고받았다. 1945년 2월 16일 동주는 해방을 여섯 달가량 남기고 후쿠오카 감옥에서 사망했다. /조선일보 // 장석주 시인 평론가.    
1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십자가 댓글:  조회:5286  추천:0  2018-07-02
십자가                                                윤동주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   목차 핵심 정리 시어 풀이 작품의 구성 이해와 감상 작품 연구실 ┗ 작품 속 시어 사전 ┗ 중심 소재 ‘십자가’ ┗ ‘십자가’에 나타난 속죄양 의식 ┗ 이육사와 윤동주의 시에 나타나는 세계 인식 작가 소개 - 윤동주(尹東柱, 1917 ~ 1945) 핵심 정리 [이 작품은] 암울한 시대를 무기력하게 사는 자신의 삶에 대한 방황과 고뇌를 자기 희생의 숭고한 의지로 극복하는 시적 화자의 모습을 십자가로 형상화하여 보여 주고 있다. *갈래:자유시, 서정시 *성격:상징적, 고백적, 성찰적, 기독교적, 의지적 *제재:십자가 *주제:조국 광복을 위한 자기 희생의 의지 *어조:담담하면서도 결의에 찬 고백적 어조 *특징 ① 역설적 표현 사용 ② 비유와 상징을 통한 주제의 형상화 ③ 시적 화자의 태도 변화가 나타남. *출전:“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 시어 풀이 *첨탑(尖塔):지붕 꼭대기가 뾰족한 탑, 또는 그런 탑이 있는 건물 *모가지:‘목’의 속된 말 작품의 구성 [1연] 시적 상황의 제시 [2연] 삶의 목표와 현실과의 거리감 [3연] 절망적 현실 속에서의 방황과 갈등 [4연] 자기 희생의 삶에 대한 소망 [5연] 자기 희생의 의지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암울한 시대 상황 속의 시적 화자가 겪는 방황과 고뇌를 자기 희생의 숭고한 의지로 극복하고자 하는 자기 추구의 과정이 과장됨 없이 나타나 있다. 1연에서 시적 화자는 자기가 추구하던 삶이 한계 상황에 부딪혔음을 고백하고 있다. 2연에서는 시적 화자가 추구하는 삶의 목표와 현실과의 거리감을 나타내고 있다. 설의법을 통해 시적 화자가 인식한 현실 상황에 대한 독자의 동의를 구함으로써 시적 화자와 독자와의 공감의 폭을 넓히고 있다. 3연에서는 절망적 현실 상황 속에서 화자가 겪고 있는 방황과 고뇌를 자조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4연에서 시적 화자는 죽음을 통해 인류를 구원할 수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숭고한 자기 희생처럼 자기도 그런 삶을 선택하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게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기도를 올리는 예수의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이 구절은, 역설적 표현을 통해 괴로움과 행복을 동시에 지닌 예수와 자신을 대비시켜 암울한 시대를 넘어서는 초월적 삶의 의지를 보여준다. 5연은 주제연으로, 시적 화자는 어두운 현실을 자기 희생을 통해 구원하고자 하는, 치열한 자기 추구의 자세를 ‘꽃’으로 형상화 함으로써, 또 다른 경지의 ‘비극적 황홀’을 우리에게 경험하게 한다. ‘조용히 흘리겠습니다’는 표현에는 자신이 처한 비극적 상황을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게, 그러나 결코 물러서는 일이 없이 잘못된 현실과 맞서 자기가 추구하는 진정한 삶을 지켜 내려는 시적 화자의 내면적 의지가 진솔하게 나타나 있다. 이 시의 바탕에는 기독교적 수난 의식(受難意識)과 속죄양 의식(贖罪羊意識)이 깔려 있다. 그러나 잘못된 현실에 맞선 시인 자신의 시대적 양심이 그보다 앞서는 근본적인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 연구실 작품 속 시어 사전   중심 소재 ‘십자가’ 이 시에서 ‘십자가’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십자가’는 1연과 4연에 두 번 쓰이는데, 1연에 쓰인 ‘십자가’는 관습적 의미인 기독교의 상징물로, 시적 화자가 도달하기 어렵다고 절실히 느끼면서도 동경하는 종교적 · 도덕적 삶의 지표를 상징한다. 4연의 ‘십자가’는 현실과 이상의 초월적 경계로, 시적 화자의 자기 희생과 구원을 상징하는 창조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시적 화자는 자신이 처한 현실이 자기 희생이 요구되는 암울한 시대 상황임을 인식하고, 십자가를 통해 일제에 대한 저항과 그것을 위한 자기 희생의 감수를 결의하는 것이다. 이것은 ‘십자가’가 시적 화자를 소극적 자아에서 자기 희생을 감수하는 적극적 자아로 거듭 태어나게 하는 ‘매개체’로서의 기능을 지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십자가’에 나타난 속죄양 의식 이 시의 핵심은 수난 의식과 속죄양 의식에 놓여 있다. 그것은 기독교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보다 직접적인 동기가 되는 것은 무기력한 자신에 대한 자책감과 현실적인 괴로움에 연원한다. 현실에서는 그 모든 인류의 짐을 지고 괴로웠던 예수 그리스도, 그러나 모든 인류의 죄와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희생됐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행복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양 의식은 윤동주의 그것과 통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윤동주의 생애와 시에 있어서 그의 유년부터 가족적 신앙인 기독교 정신은 그 정신적 기조를 형성해 왔던 것이다. 따라서, 윤동주의 저항 의식에있어서도 그리스도적 수난 의식과 속죄양 의식이 그 핵심으로 작용하고 있다.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 모가지를 드리우고 /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 조용히 흘리겠습니다.’라는 구절 속에는 수난에 대한 인고의 정신과 속죄양 의식으로서의 저항 정신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는 것이다. - 김재홍, ‘한국 현대 시인 연구’ 이육사와 윤동주의 시에 나타나는 세계 인식 육사의 신념과 그 신념에 따른 지사의 정신은 기존 질서의 회복이라는 성격을 띤다. 그에게 있어 조국의 상실은 개인적 비극이기 이전에 이미 삶의 전제 조건으로서의 질서의 상실이었다. 그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외재적인 유교적 규범이기에 그 규범의 테두리 내에서 그 행위는 결정된다. 그래서 그의 행위는 흔들림이 없는 강한 선비의 기개를 보여 준다. 이와는 달리 동주의 도덕성은 내면적 갈등을 통한 양심의 실천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개인적 차원에서 세계를 이해하였으며 자신이 인식한 세계관으로 스스로의 행위를 규제했다. 모든 행위의 기준이 자신의 내면적 양심이기 때문에 동주의 행위는 철저한 자기 추구 이후에라야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 결국, 육사는 외적으로 주어진 정신적 틀 속에서 일제 시대를 이해하였으며, 동주는 개인적 삶을 조건짓는 비극적 힘으로 일제 시대를 이해하였다. 그래서 육사는 끊임없는 자기 암시를 통해 자신의 정신적 틀을 확인하여야만 하였고, 동주는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완전한 자아를 추구해야만 하였다. - 이남호, ‘육사의 신념과 동주의 갈등’ 작가 소개 - 윤동주(尹東柱, 1917 ~ 1945) 시인. 북간도 출생. 일본 도시샤 대학 영문과에 재학 중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이듬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1941년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19편의 시를 묶은 자선 시집(自選詩集)을 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가 자필로 3부를 남긴 것이 사후에 햇빛을 보게 되어, 1948년에 유고 30편이 실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간행되었다. 주로 1938~1941년에 쓰인 그의 시에는 불안과 고독과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과 용기로 현실을 돌파하려는 강인한 정신이 표출되어 있다. 작품으로 ‘자화상’(1939), ‘또 다른 고향’(1948) 등이 있다. 관련문제 01.이 시의 내용을 영상물로 만든다고 할 때, 연출자의 상상에 의해 새로 추가된 내용은? 1. 저녁 노을이 지는 교회당의 모습이 원경(L. S)으로 나타나는 배경 화면을 만들어 보자. 2. 시적 화자의 내적 갈등을 드러내기 위해 종소리를 효과음(E.)으로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3. 십자가가 놓여 있는 위치를 부각시키기 위해 카메라를 아래에서 위로 천천히 이동(FAN.)시키자. 4. 예수 그리스도와 시적 화자의 모습을 이중 노출(D. E.)시키면서 두 인물의 심리를 드러내 보자. 5. 시적 화자가 죽는 장면은 배경 화면을 용암(F. O.)으로 처리하여 사실성을 높이는 것이 좋겠군. 정답 및 해설 02.이 시에서 시적 화자가 추구하고 있는 삶의 목표와 현실의 거리감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시어는? 1. 햇빛 2. 십자가 3. 첨탑 4. 종소리 5. 꽃 ==============================     집필 의도 및 감상         윤동주의 시에는 두 가지 사상이 기둥으로 자리잡고 있다. 하나는 민족주의 사상이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 사상이다 . 이것은 윤동주의 가정 환경과 성장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특히 윤동주의 외할아버지 김약연(金若然) 목사는 민족 학교 ‘용정학교’를 세운 교육자였고, 그 학교에서 민족 교육을 하여 후에 많은 독립 투사를 길러 내었다. 윤동주의 나 등에서 볼 수 있는 ‘소명(召命) 의식’이나 ‘자기 희생 정신’은 이와 같은 민족주의 사상과 기독교 사상의 영향의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시 에서 윤동주의 뚜렷한 인생의 방향과 목표를 찾아볼 수 있다. 그가 연희전문학교를 마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간 것도 개인적 출세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어두운 시대에 민족을 구출할 수 있는 방법을 공부하려고 간 것이다. 에 나타난 ‘속죄양(贖罪羊)’ 의식이야말로 자기 한 몸을 희생해서라도 민족을 구출해 보겠다는 자기의 신념을 표출한 것이다. 윤동주의 작품 중 자기의 뜻을 분명히 나타낸 것은 시 라 하겠다.         기본 이해 항목         주제 : 이상 세계 실현을 위한 자기 희생 의지.   성격 : 상징적, 의지적, 저항적, 종교적(기독교).   어조 : 신념의 의지적 어조.   사상 : 민족 정신과 기독교 정신   단락 구성 :   제1연 ― 이상 목표의 제시와 소명 의식.   제2연 ― 이상 실현의 어려움.   제3연 ― 무능력한 자아의 모습   제4연 ― 자기 희생의 필요성.   제5연 ― 구원을 위한 자기 희생의 결의와 의지.   창작 연월일 : 1941년 5월 31일   출전 : 유고 시집 (1948.)         시어 및 구절 풀이         십자가(十字家) ― 1) 제1연의 ‘십자가’는 동경하는 종교적 이상의 목표를 상징한다. 2) 제2연의 ‘십자가’   는 자기 희생이라는 속죄양(贖罪羊) 의식을 나타낸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 기독교의 ‘선택론’에 의하면 자아의 의지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   택한다는 것이다. 햇빛이 시적 자아를 쫓아왔으므로 이 구절은 절대자가 시적 자아에게 이상 목표   를 제시하고 명령하는 소명(召命) 의식이 나타나 있다 하겠다.   쫓아오던 ~ 걸리었습니다 ― 교회 첨탑에 걸려 있는 태양을 보고 시적 자아는 자기에게 주어진 희망과   목표가 무엇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동기를 부여하고 있다.   첨탑(尖塔)이 ~ 올라갈 수 있을까요 ― 나약한 인간으로서 이상 실현에 도달하기 어렵다는 자신감(自信   感)의 상실을 토로하고 있다.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 ‘종 소리’의 종교적 의미는 복음과 구원을 상징한다. 또는 목표달성의 기   쁨을 알리는 상징으로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종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현재 아무런 희망의   조짐이나 구원이 보이지 않는 암담한 현실 속에 시적 자아가 놓여 있다는 것을 뜻한다.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하고 게으른 자아의 방황하는 모습을 보   여 주고 있다.   괴로웠던 사나이 ― 1) 암울한 시대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살아온 시적 자아의 자책이 표현되었다.   2) 다음 해의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와 동격이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 ―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두 가지   특성을 함께 갖추고 있다. ‘괴로웠던 사나이’가 십자가에 못 박혀 괴로움을 당하다 죽은 인성(人性)   예수라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는 온 인류를 원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화목제(和睦祭)로 희생된 신   성(神性) 예수를 뜻한다구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역설법의 표현이 된다. ‘화목제’는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 동물을 희생으로 바침으로 진노(震怒)를 벗어나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목을   얻으려고 행하던 제사를 말한다.   처럼 ― 독립된 행으로 처리하여 시적 자아에게 ‘십자가’의 의미는 예수의 경우와는 다를 수 있음을 암시   하고 있다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 예수의 희생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희생이었지만, 시적 자아의 자기 희생의   결의는 일체 치하 암흑기에 민족을 구출하고 구원하겠다는 자기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모가지를 드리우고 ― 자기 목숨을 바치겠다는 뜻이다.   꽃처럼 피어나는 피 ― 자기 희생을 의미하여, ‘꽃처럼’이란 표현을 통해 죽음이라는 끔찍한 느낌을 순화   시켜 미화하구 있다.   어두워 가는 하늘 밑 ― 시적 자아가 놓은 현실 상황의 부정적 성격을 암시한다.   모가지를 ~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 민족 구원을 위해 자기 한 몸을 희생하겠다는 의지가 표명되어 있   다. 이 모든 결심이 기독교의 속죄양(贖罪羊) 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       [쫓아오는 해빛과 꽃처럼 피어나는 피와 십자가와]          시인의 생가를 찾아 룡정 명동촌에 이르면 우리는 마을 어귀에서 커다란 목조건물 한 채와 먼저 만나게 된다. 현재 《윤동주시인사적전시관》이란 간판을 달고 조용히 서있는 이 건물은 백 여 년 전 지어진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데 원래는 이 마을의 교회당으로 지어진 건물이라고 한다. 이 건물에서 다시 언덕 아래로 한 백여 메타쯤 내려가면 오래된 우물이 하나 있고 그 옆에 널따란 텃밭을 낀 아담한 조선식농가가 하나 있는데 이 집이 바로 시인이 태어난 생가이다. 시인은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이렇게 자기 집 바로 옆에 있는 교회당 마당에서 뛰놀며 햇빛에 기울어지는 십자가의 그림자를 쫓으며 자라났을 것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시인의 집안은 친가 편, 외가 편 모두 독실한 기독교신자였기 때문이다.          시인의 집안은 증조부 윤재옥(尹在玉) 때인 1886년 조선 함경북도 종성에서 두만강을 건너와 당시 화룡현 개산툰 자동촌으로 이주하였다. 조부 윤하현(尹夏鉉) 때인 1900년에 다시 이곳 명동으로 이사하였고 이 마을에서 1910년경, 조부가 기독교 장로교에 입교하였다. 그리고 또 이 마을에서 부친 윤영석(尹永錫)이 기독교인이며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인 규암 김약연(圭巖 金躍淵)의 누이 김룡(金龍)과 결혼하였고 두 분 사이에서 장자로 태어난 시인은 출생하자 곧 유아세례를 받았다.          가족적 신앙인 기독교정신은 시인의 정신적 기조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작품의 첫 부분에 그려지고 있는 풍경 즉 교회당지붕꼭대기에 높이 세워진 십자가와 십자가에 비스듬히 비치는 저녁 무렵의 햇빛은 시인이 어린 시절부터 눈 익게 바라보던 그림이었고 이것은 시인에게서 중요한 원체험(原體驗)으로 형성되었던 것이다. 시인의 종교적인 높이에 대한 경외로움은 첨탑으로 상징되고 그 성스러움과 신비로움은 가슴을 울리는 종소리에 담겨 있다. 해가 기울어 교회당의 십자가와 첨탑은 어둠속에 각일각 지워질 것 같은데 종소리는 어디론가 사라져 들려오지 않는다. 나아가야 할 곳을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하며 무심한 듯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이》던 시적 화자는 다시 피같이 불타는 듯 붉게 물들어가는 저녁노을속의 십자가에 눈길을 얻는다. 그리고 거기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린다.         여기서 작품의 제 4련 3행 《처럼》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시사한다. 접미사 《처럼》은 그 자체로 독립된 의미를 가지는 실사(實詞)가 아닌 허사(虛詞)인데 시인은 이 허사를 하나의 단어 하나로 독립시켜 시의 한 행으로 처리하였다. 시에서 행은 의미맥락의 최저기본단위가 되면서 동시에 운률과 구조의 단위를 이룬다. 시인이 실사가 아닌 허사를 이와 같이 한 행으로 처리한 것은 그 허사 《처럼》이 전반작품에서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강조되는 의미의 하나는 인류의 원죄를 한 몸에 지고 십자가에 못 박힌 수난자 예수와 현재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이》는 자기가 결코 동격일수 없다는 조심스러운 생각이며 또 다른 하나의 의미는 가정하여 정말 그와 같은 십자가가 자기에게 허락된다면 예수의 희생과는 내용이나 동기, 목적 등이 완전히 동일하지 않더라도 시대가 요구하는 희생을 추호도 주저치 않고 달갑게 감내할 것이라는 의지를 표명하는 것이다.          시인이 이 시를 쓴 시점이 우리민족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시기였으며 우리겨레가 하나의 민족으로 살아남는 최저한의 여건인 말과 글을 쓸 자유조차도 박탈당한 시점이었다는 것을 되새겨 볼 때 이와 같은 의미가 더욱 돋보인다. 당시 시대적 극한상황 속에서 하나의 진정한 민족시인에게 있어서 자기민족의 말과 글로 시 한수 짓고 남기는 일도 자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몸부림이었으며 민족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희생을 감내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작품은 십자가에 걸린 햇빛에서 시상을 얻어 그 십자가에서 죽어간 수난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그려내었고 드리운 모가지, 꽃처럼 피어나는 피와 어두워가는 하늘, 저녁의 붉은 노을빛이미지의 절묘한 대비를 통하여 수난에 대한 인고정신과 속죄양의식으로서의 저항정신을 선명하게 드러내 탁월한 시적 완성을 이뤘다.                                                                   ——중국.석화—— ====================          이 詩가 쓰여진 것은 1941년 5월 31일이다. 그러니까, 윤동주가 사망(1945년)하기 4년 전에 쓴 것.      그의 걸음을 쫓아오던 햇빛이, 걸음을 멈추고 올려다 본 첨탑 꼭대기에 걸렸다. 아득히 멀다.      올려다 보기조차 높은 첨탑에 감히 올라갈 엄두도 나지 않고,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이 부분에서, 시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첨탑 꼭대기에 걸린 십자가, 그리고 시인을 쫓아오던      햇빛이 걸려 있고, 종소리는 들려오지 않으니... 시인에게 있어서 첨탑 꼭대기의 십자가는,      '저렇게도 높은데/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라는 탄식이 먼저 나온다. 자신이 올라가기에는      ('올라간다'라고 표현했지만, 그것은 다음 연(聯)의 '괴로웠던 사나이/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겠다) 너무 높아서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 경지이다.        詩人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나약함을 탄식하는 휘파람을, 연약한 입술로 소리를 내며, 높이      솟아 있어서 올라가기에는 '저렇게도' 높은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 뿐이다. 그리고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내가 그 자리에 서 있는 시인의 입장이라면 마음이 어떠했을까? 시기적으로,      암울한 일제 강점기이고, 뭔가 해야할 것 같은데, 너무도 연약하고 부족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고, 그저 속에 있는 답답함을 휘파람으로 불어낼 뿐이고, 어떠한 '임무'처럼 느껴지는      할 일에 대해 그 주위에서 서성일 뿐이다. 종소리는 '살아 움직이는 메세지', '암울한 배경에      들려오는 희망' 같은 것으로 표현하고 싶지 않았을까. 사방을 둘러보아도 이 암울한 일제 억압을      뚫고 나갈 어떤 희망의 종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것 같았을 것이다.        1연에서, '쫓아오던 햇빛'은 무얼 표현하고 싶었을까를 생각해본다.      '햇빛'은 신에 속한 신성한 것이다. 그리고, 밝음이고 정의이며, 강렬한 힘이다.      밝게 빛나는 '정의'나 '소명' 같은 것이 시인을 쫓아다녔는지도 모른다. 윤동주는, 프로필에서도      썼지만,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고, 독실한 크리스찬이었다. 그의 중심을 밝게 비추고 있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고, 그것이 기준이기 때문에, 눈앞에 펼쳐진 일제 강점기의 억압과 불평등이      자신에게 뭔가 해야 한다고 햇빛처럼 그를 쫓아다니는 듯하지 않았을까. 그런 심리적인 고통속에서      첨탑 꼭대기에 걸린 십자가를 보았을 때, '괴로웠던 사나이(육체를 입고 있는 신의 아들 예수가, 몸에      가해지는 온갖 아픔들, 채찍질, 십자가에 못박힘,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 마리아를 아들로써 마주      대해야 하는 고통 등등)/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인류를 구원하는 길을 온전히 완성한)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자신도 그런 일을 해야 한다면 하는 마음과 비장한 각오도 엿보이는 듯하다)...        모가지를 드리우고(기꺼운 마음으로 순종하듯이)/꽃처럼 피어나는 피를(나름대로 생각해 보건대, 이는,      '피를 흘려 죽음으로 그 죽음이 헛되지 않아, 귀하고 값진 결과로 숭고하게 꽃처럼 피어난다는 것이리라)/      어두워 가는 하늘밑에(하늘이 어두운 것은 얼마나 암울한가, 희망이 없이 점점 어두워지는 일제의 현실과      자신의 처한 환경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조용히 흘리겠습니다(너무도 아름답고 눈물이 난다. 만약,      자신에게 그러한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자신은 그것을 기꺼이 행할 것이고, 그것을 아무도 몰라준다 해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겠다는 뜻으로 다가온다. 신을 향해 염원하며 자신의 마음가짐을 고백하는      숭고한 기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일제 강점기의 고통스러운 시대 환경을 견뎌야 했던 아름다운 청년, 윤동주...      신앙으로 염원하며 기도하듯이 쓴 이 詩를 대하는 우리의 눈시울을 붉게 하고, 겸허하게 한다.           ==============================   윤동주는 총칼을 들고 독립 항쟁의 일선에서 싸우지는 않았지만 나라없는 시대의 지식인으로서 또 시인으로서 치열한 고민과 부끄러움을 피처럼 토한 시를 남겼습니다. 상기한 시도 그 중 하나라 생각합니다.   어느날 시인은 길을 가다가 문득 첨탑 위에 세워진 교회의 십자가를 쳐다 봅니다. 무심코 따라 오던 해가 십자가와 일치되어 나를 비춥니다. 나는 결코 올라갈 수 없는 저 아득한 높이의 십자가에 올라갈 수 있는 해의 경지가 부럽기도 하고 그럴 수 없는 내 처지가 안타깝기도 합니다. 종소리는 희망의 소리입니다. 지금은 그 종소리마저 돌려오지 않는 암담한 상황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릴없는 휘파람이나 불며 내 스스로를 달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을 떠 올립니다. 세상의 모든 죄를 뒤집어 쓰고 모진 백성들의 저주 속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가야 했던 예수야 말로 인간적으로 가장 괴로운 사나이임에 이설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어 거룩한 죽음을 맞이했으니 이는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나에게도 예수님에게 주어진 십자가처럼 그러한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골고다의 언덕에서 고개를 드리우고 죽어간 예수님처럼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시에서 '처럼'을 굳이 독립시켜 한 행으로 잡은 시인의 심경을 헤아렸으면 합니다. 이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영원히 허락되지 않을 십자가이지만 그래도 만약 그 십자가처럼 주어질 수만 있다면 하는 생각들이 생략되었다고 봅니다. 시가 쓰여질 당시인 1941년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이 '어두워가는 하늘'은 일제 말기의 암담한 조국의 현실을 드러낸 것이라고 짐작할 수도 있습니다. '꽃처럼 피어나는 피'는 나를 위해서 흘리는 피가 아니라 나라 잃은 시대의 모든 겨레를 위해 흘리는 피여서 꽃처럼 피어나는 것입니다. 저는 시인 윤동주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누구보다 더 정확히 인지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시처럼 그는 스물 아홉의 꽃같은 생애를 조국의 하늘에 영원히 비치고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하지만 그의 시는 아직도 우리 겨레의 가슴깊이 남아 꽃처럼 피어나고 있습니다. ==============================   이 시는 윤동주의 종교관과 역사관, 인생관이 잘 나타난 작품이다.  제1연에서 나의 희망 또는 목표는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려 있다고 진술하고 있다.  '햇빛'은 이상이나 희망의 이미지다. '십자가'는 시적 화자의 종교관이나 역사관 또는 인생관과 관련된 목표를 뜻한다.  제2연에는 삶의 목표와 시적 화자의 거리감, 단절 의식이 엿보인다. 약한 인간으로서의 고뇌와 갈등이 내포되어 있다.  제3연에서 화자는 첨탑에 올라갈 수 없기 때문에 혼자서 서성거리며 방황한다. 시인의 고독한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신념과 행동의 괴리감(乖離感)에서 고민하는 모습도 보인다.  제4연은 예수 그리스도는 현실에서는 인류의 모든 짐을 지고 괴로워했으나 십자가에 못박혀 희생되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행복하였다고 여긴다. 그래서 예수처럼 자기 희생을 위한 십자가가 허락되기를 바란다.  제5연에는 순절 정신(殉節精神)이 나타나 있다. 자신도 당시의 어두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처럼 순절(殉節)하겠다는 것이다. '어두워 가는 하늘 밑'은 암담해지는 당시의 상황을 상징한 것이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는 희생을 통한 구원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시에는 수난 의식(受難意識)과 속죄양 의식(贖罪羊意識)이 깔려 있다. 그것은 기독교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러나 더 직접적인 동기가 되는 것은 일제 치하의 어두운 시대에 무기력하게 사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책과 현실적 괴로움에 근거한다. 그 자책과 괴로움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순절(殉節)을 생각한 것이다. 그것은 민족을 위해서 스스로 희생하겠다는 소명 의식(召命意識)으로 파악해도 좋을 것이다.  윤동주는 29세의 젊은 나이에 일본에서 옥사했다. 시 정신과 행동이 일치된 좋은 본보기다. ============================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고문 (숙명여대 석좌교수) 하이데거의 생각이 옳다면, 시인은 신과 인간 사이에 있는 존재다. 2월 16일은 신과 인간 사이에 있었던 시인, 아니 지금도 분명히 거기에 있을 시인 윤동주의 73주기(周忌)(2018년)이다. 윤 시인이 깊은 성찰과 저항의 시어(詩語)들을 피 토하듯 쏟아낸 시절은 조국이 일제의 식민통치에 몸서리치던 암흑시대였다. 정신과 육신을 송두리째 죄어오는 군국주의의 촉수(觸手)는 식민지의 젊은 시인에게 저항할 수밖에 없는 실존의 멍에였을 것이다.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바람이 불어’ 중) 그는 사랑도 거부했고 괴로움도 부정했으며, 심지어 슬픔에까지도 처연하게 저항했다. 일본제국주의의 광기가 자유혼을 짓누르던 지옥 같은 시대를 어찌 슬퍼하지 않았겠는가. 다만, 시대를 슬퍼하기에는 그의 고뇌가 너무도 깊고 무거웠을 게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별 헤는 밤’ 중) 시인이 별 하나 하나에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을, 그리고 동경과 시와 어머니를 새겨 넣은 하늘은 하냥 멀기만 한 슬픈 허공이었고, 그 하늘 아래의 시인은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라는 자의식(自意識)으로 번민의 밤을 지새워야 했을 것이다.(‘무서운 시간’ 중)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들을 사랑”했던(‘서시’ 중) 윤동주의 시들은 저항의식은 물론 성찰의 깊이에서도 남달리 빼어났다. 민족의 수난기에 고뇌의 영혼으로 빚어낸 값진 결실이었지만, 그 결실에는 가혹한 희생이 따랐다.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던 시인은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처럼(‘참회록’ 중) 스물여덟 해의 짧은 삶을 군국주의 폭력에 저항하는 자유의 제단에 바친다. 윤동주의 성찰은 철학자의 시선보다 치열했고, 그의 저항은 독립투사의 가슴보다 뜨거웠으며, 그의 참회는 종교인의 영혼보다 경건했다.  군국주의만이 저항의 대상은 아니다. 선군(先軍)의 세습독재는 물론이고 정치·경제·문화·종교의 권력들도 원리주의적 독단(獨斷)에 빠져있는 한 그 폭력의 실체를 감추지 못한다. 성장과 풍요의 욕망으로 인간성의 다양한 가치들을 억누르는 물신(物神)의 우상, 특정 이념에 중독된 외눈박이 권력의 독선과 오만, 사람과 자연의 생태적 본성을 거스르는 과학기술의 무절제한 질주, 양심과 영혼의 자유를 폐쇄적 교리(敎理)의 사슬에 얽어매는 종교적 근본주의 따위도 마땅히 거부해야 할 저항의 대상임에 틀림없다. 윤 시인이 제국주의 폭력에 순교자처럼 저항했듯이.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았던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스물다섯 살 창창한 나이에 쓴 첫 시(序詩)의 첫 구절을 어찌 ‘죽는 날’로 시작할 수 있단 말인가!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면서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붉은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십자가’ 중) 구원의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어두운 하늘 밑, 갈급한 자유혼은 예언이라도 하듯 십자가 앞에서 죽음을 불러낸다. “종점(終点)이 시점(始点)이 된다. 다시 시점이 종점이 된다.”고 읊었듯이(‘종시’ 중) 희생의 마지막 자리이자 부활의 새 자리인 십자가를 그리워하던 시인은 불과 6개월 뒤면 울려 퍼질 광복의 종소리를 듣지 못한 채 일제의 감옥 안에서 마지막 숨을 거둔다. 괴로웠던 사나이, 그제야 비로소 행복해졌을까, 예수 그리스도처럼? 73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시인은 순수한 영혼의 고뇌를 안고 다시금 우리에게 다가온다. 서슬 퍼런 이념의 도그마가 자유의 터전을 유린하는 곳에, 민족의 깃발 아래 온 민족이 고통받는 자리에, 시인은 또 다른 성찰과 저항의 핏줄기를 뿜어내며 다가오고 있다.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붉은 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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