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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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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날짜 : 2018/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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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양비둘기보호",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2417  추천:0  2018-07-08
멸종 위기에 몰린 토종 텃새 '양비둘기'가 지리산 화엄사에서 발견돼, 환경부가 보호대책 마련에 나섰습니다.  임상재 기자가 보도합니다.  전라남도 구례군 지리산 자락에 자리 잡은 화엄사.  연못 주변에서 춤추는 듯 빙글빙글 돌기도 합니다.  멸종위기에 처해 있는 우리나라 텃새 양비둘기입니다.  [장정재/국립공원관리공단 팀장]  "공원 내 개체 수에 대해 조사 모니터링을 올해 3월부터 실시했으며 양비둘기 10마리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980년대까지 어디서든 볼 수 있던 양비둘기가 멸종위기에 처한 것은 외래종 비둘기 때문입니다.  88올림픽, 비둘기 날리는 영상 집비둘기는 1986년 아시안게임과 88 서울 올림픽 등 각종 행사용으로 해외에서 들여왔습니다.  지난 2009년 서울시 조사에 따르면 서울 도심에 살고 있는 집비둘기는 약 3만 5천 마리였는데 현재 개체 수가 얼마나 늘었는지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외래종 집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에서 유해동물로 지정됐고 양비둘기는 멸종위기종이 됐습니다.  MBC뉴스 임상재입니다. 
6    윤동주 시 리해돕기와 "륙첩방(다다미방)" 댓글:  조회:3693  추천:0  2018-07-08
다다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검색하러 가기   다다미가 깔린 방 다다미(일본어: 畳 다타미[*])는 일본에서 사용되는 전통식 바닥재를 말한다. 속에 짚을 5 cm 두께로 넣고 위에 돗자리를 씌워 꿰맨 것으로 직사각형의 형태를 띠고 있다.[1] 다다미의 종횡비는 2:1로 된 장방형과 그 반인 정방형 2종류가 있다. 크기는 3자×6자 (910mm×1820mm)로 된 것이 기본이지만, 방의 크기에 맞추어 주문 생산하는 경우도 있어 크기는 일정치 않다. 일반적인 규격은 교마(京間,본간(本間)), 주쿄마(中京間,삼육간(三六間)), 에도마(江戸間,오팔간(五八間), 단치마(団地間,오육간(五六間)로 된 4종류가 널리 사용된다. 그 밖에도 지역마다 다양한 규격이 존재한다.
5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문화재공동발굴",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4016  추천:0  2018-07-08
북한에서 새로운 고구려 고분벽화 잇따라 발견 "남북 공동연구로 신비의 역사 보존해야" 도재기 선임기자 2018.07.08.  SNS 공유하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경향신문] ㆍ‘고구려 벽화’ 국제학술심포지엄 북한 남포시 용강군에 있는 고구려 벽화고분인 ‘옥도리 벽화무덤’에서는 처음으로 ‘王’(왕) 자와 ‘大’(대) 자가 함께 확인됐다. 사진 속 두 인물 사이에 ‘왕’ 자가 먹으로 쓰여 있다. 정경일 옌볜대 교수·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삼국시대 역사와 생활문화상을 생생하게 담고 있어 ‘삼국시대의 타임캡슐’로 불리는 고구려 고분벽화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그 가치를 인정받는 문화재다. 하지만 북한, 중국에 있다보니 한국 학계는 발굴조사나 최신 연구성과의 공유, 접근성에서 제한받는다. 그런 점에서 지난 6일 국립문화재연구소·한성백제박물관이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연 ‘고구려 고분벽화, 남북의 소중한 세계문화유산’이란 주제의 국제학술심포지엄은 주목을 끌었다. 이날 학술대회에선 국내외 7명의 전문가가 북한·중국의 최근 고분벽화 발굴조사와 내용, 보존문제, 벽화 모사도의 중요성과 활용방안 등의 주제를 발표했다. 특히 북한에서는 새 고구려 고분벽화가 발견되고, 고분에서는 명문이나 문양·유물 등 새로운 연구자료가 발굴된 것으로 나타났다. 일부 고분벽화는 보존을 위해 설치한 유리막에 습기가 차는 등 보존문제가 여전히 심각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따라 공동발굴조사나 연구, 보존활동 등 남북한의 더 적극적이고 활발한 교류 필요성이 강조됐다. 북한 고분벽화 발굴조사에 참여하고 있는 중국의 정경일 교수(옌볜대)는 ‘북한 소재 고구려 고분벽화 최신 발굴성과 및 관리 현황’이란 주제발표에서 “북한에서는 지난해 평양시 보성리·장수원동 벽화무덤을 발굴조사하는 등 2000년 들어 지금까지만 총 13기의 고구려 벽화무덤이 발굴돼 새로운 자료들이 나왔다”고 밝혔다. 정 교수는 “벽화 내용이나 무덤 구조, 유물 등의 새 자료들은 벽화무덤을 둘러싼 기존의 학술적 문제들을 재검토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일부 발굴조사에는 중국 옌볜대, 일본 학자들도 참여했다. ‘王’ ‘大’ 함께 나온 옥도리 벽화 등 새로운 명문이나 문양·유물 발견 ‘옥도리 벽화무덤’에서는 갖가지 생활상과 말을 탄 무사들의 사냥 장면, 춤추고 노래하는 남녀들을 그린 벽화도 발견됐다. 사진은 ‘옥도리 벽화무덤’에 그려진 인물 행렬도. 정 교수는 2010년 발굴된 남포시 용강군의 ‘옥도리 벽화무덤’, 2015~2016년 발굴한 황해북도 봉산군의 ‘천덕리 벽화무덤’을 주목했다. 옥도리 벽화무덤에서는 처음으로 ‘王’(왕)자와 ‘大’(대)자가 함께 확인됐고, 무덤 주인공의 생활상과 기마무사들의 사냥장면, 춤추고 노래하는 남녀들을 그린 벽화도 드러났다. 정 교수는 “ ‘대’, ‘왕’자가 동반으로 나타나고, 4명의 남녀 주인공이 한 좌상에 함께 그려진 벽화 등은 벽화무덤 중 최초로 확인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밝혔다. ‘천덕리 벽화무덤’에서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독특한 기법의 장식무늬가 발견되고, 못 머리에 은판을 씌운 관못 등의 유물도 출토됐다. 정 교수는 “새로운 장식무늬가 무슨 무늬인지 확인할 수 없어 아직 발굴보고서가 작성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평양시 낙랑구역에서 확인된 ‘보성리 벽화무덤’에서는 완전무장한 무사들 등이 그려진 여러 벽화와 금제 방울·은제 못 등 금은 장식품도 출토됐다. 인근의 ‘장수원동 벽화무덤’에선 사신도 등이 확인됐다. 정 교수는 이날 고구려의 말 무덤으로 보이는 ‘신대동 8호 무덤’, 벽화와 3개체의 인골이 나와 3인 합장무덤으로 보이는 ‘동산동 벽화무덤’, 안악3호분처럼 무덤구조가 복잡한 ‘태성리 3호무덤’, 고리자루 칼이 나온 ‘대성동 34호 무덤’, 컴퍼스 같은 기구를 이용해 원을 그린 흔적과 별자리 그림이 확인된 ‘호남리 18호 무덤’, ‘송죽리 벽화무덤’ 등을 소개했다. 정 교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4년 교시에서 민족문화유산과 관련해 남북 간 학술교류를 포함한 대외협력을 강조했다”며 “앞으로 북한 내 고구려 벽화무덤의 공동발굴조사나 보존·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지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기존의 학술적 문제 재검토 요구 관련 정보 DB센터 설립도 절실” 고구려 고분벽화 권위자인 전호태 교수(울산대)는 ‘세계문화유산 고구려 고분벽화의 가치와 의미’라는 기조발표를 통해 “고구려 고분벽화는 문화사·예술사·종교사상사·사회사적으로 풍부한 가치와 의미를 지닌 ‘역사기록’의 큰 덩어리로 현재까지 130여기 발견됐지만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라며 “다양한 분야 연구자들이 팀을 이룬 학제적·융합적 연구, 관련 정보의 데이터베이스센터 설립, 연구자 네트워크 결성 등이 절실하다”고 밝혔다. 박아림 교수(숙명여대)는 ‘고구려 고분벽화 모사도 가치의 재조명’, 박윤희 학예사(국립문화재연구소)는 ‘북한 고구려 고분벽화 모사도의 제작과 활용’이란 주제발표에서 고분벽화 보존을 위한 모사도의 중요성과 다양한 활용방안을 제시했다. 일본 도쿄예술대 미야사코 마사아키 명예교수는 기존 복제품과 달리 첨단 과학기술을 적용해 원본 문화재와 소재·질감까지도 같은 ‘클론 문화재’의 제작과정·활용성을 소개했다. 이 밖에 북한 벽화고분 보존활동에 참여해온 로돌포 루잔 린스포드 유네스코 자문위원, 중국 내 고구려 벽화고분 전문가인 왕즈강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부소장이 고구려 고분벽화의 국제적인 보존노력의 필요성, 중국의 고분벽화 연구상황 등을 소개했다. /도재기 선임기자 
4    윤동주와 정지용, 경향신문 댓글:  조회:2095  추천:0  2018-07-08
#대시인 정지용, 고민에 빠지다 1947년 2월, 정지용은 며칠째 낯선 시 10여편을 눈앞에 펼쳐 놓고 고민에 빠져 있었다. 이미 작품을 가려 뽑는 일이라면 이골이 난 그로서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이미 서른도 되기 전인 1930년에 박용철, 김영랑 등 내로라 하는 시단의 총아들과 함께 '시문학'을 창간, 무수한 시들을 천거하고 평해 온 그였다. 39년 창간된 '문장'지의 시 심사위원으로 나서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등 청록파 3인과 이한직, 박남수 등 쟁쟁한 신인들을 뽑아 올린 공적은 벌써부터 문학사적 기록이 될 정도였다. 그런 그가, 해방 이후 좌우익으로 갈린 문단의 틈새에서 문학적 지향점도 열정도 잃어버렸다고 자학하던 차에 신기하게도 문학작품 선발 때문에 갈등을 겪는 셈이었다. 그는 해방 직전 유명을 달리한 한 젊은이의 시 원고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40대 중반 나이로 당대 최고의 권위를 누리고 있는 시인이었지만, 그보다는 전해에 창간한 경향신문의 주간(현재의 주필)으로서 비명에 죽은 한 시인이 남긴 시편들 중 한 편을 뽑아 이 세상에 처음으로 내세우는 일을 맡은 것이다. 시인으로 등단하는 순간 이미 그 이름 앞에 '故'(고) 자를 붙여야 하는 사람은 1917년 간도 출신으로 서울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했다. 일본 도쿄의 닛교 대학에서 수학하다, 교토의 도시샤 대학 영문과로 편입해 다니던 중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 중 44년 2월 옥사한 그의 이름은 윤동주였다. 정지용은 읽을수록 그의 시가 슬픔과 열정을 불러일으켰고, 생각할수록 그 생애는 뜨겁고 비통했다. 소리를 내어서 시를 읽으면 눈앞에 병든 세상을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참회하는 젊은이의 표정이 살아나는 듯했다. #죽은 시인을 되살리려는 친구들 정지용에게 맨 처음 이런 갈등을 선물한 사람은 윤동주의 연전 동기생으로 46년 10월 경향신문 창간 때부터 조사부 기자로 있은 강처중이었다. "시를 잘 쓰는 동기생이 있었는데 선생님 시를 무척 좋아했어요." 그런 얘기는 정지용으로서는 자주 들어온 편이었다. 게다가 일제에 개죽음을 당한 청년이 한둘도 아니던 터라 그저 가슴만 먹먹할 뿐 별로 호기심이 일지 않았다. 특히 해방 후 좌익 문사들이 문학가동맹을 창립하면서 중앙위원으로 정지용의 이름을 올린 일로부터 좌우익 모두에게 농락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 문학 얘기는 애써 피해오던 차였다. 도쿄에 있을 때 윤동주가 강처중에게 보냈다는 시는 모두 다섯편이었다.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안으로 힘이 꽉 차 있는 듯 보이는 윤동주의 육필을 보고 나서야 정지용의 마음 속에서 알 수 없는 사명감 같은 것이 꿈틀거렸다. "저희들은 동주가 쓴 시를 모아 시집을 내려고 합니다." 유고 시집 발간 뜻을 밝힌 강처중은 며칠 뒤 윤동주의 연전 후배로 서울대에 편입해 다니던 정병욱(서울대 교수 역임)을 데려왔다. 정병욱은 윤동주가 연전 졸업 한 해 전 발간하려 했다는 친필 시집 원고를 정지용에게 펼쳐보였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시집을 내지 못한 동주형은 대신 필사본으로 세 권을 만들어 본인이 한 권, 은사 이양하 교수 한 권, 그리고 제게 한 권을 줬습니다. 그 뒤 동주 형은 감옥에 갇혔고, 저는 학병에 끌려갔지요. 우리가 다 죽어도 이 시집만은 남겨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어머니에게 신신당부해 남겨 두었습니다." 지은이도 죽고, 보관하던 사람도 사선을 넘어서는 우여곡절 끝에 남은 시집 원고에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고, 모두 19편이 들어있었다. 모두 쉽게 보아 넘길 수 없는 것들이었다. 윤동주라는 생면부지의 시인의 시와 생애가 준 감동과, 그 친구들의 적극성이 결국 정지용 입에서 책임 있는 말을 하게 하고 말았다. "시집을 내기 전에 우선 신문에 실어서 세상에 알리도록 하세." 이후 정지용은 윤동주의 돋보이는 시편들을 베껴 쓰고 빌리고 해서 10여편을 가방에 넣고 다녔다. 이제 윤동주의 사후 2주기를 앞두고 있었다. #시인 탄생, 우리의 자랑 정지용은 고심 끝에 윤동주가 42년 6월에 쓴, 유작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쓴 것으로 추측되는 시 한 편을 택했다. 바로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육첩방은 남의 나라"로 시작되는 '쉽게 씌어진 시'였다. '육첩방'은 일본의 다다미 방을 뜻한다. 자기 나라를 빼앗은 침략국에 유학가 있으면서 참다운 삶의 길을 찾으려는 자의 몸부림이 잘 묻어나는 시였다. 아마도 정지용은 특히 시의 마지막을 보았을 것이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어두운 시대를 욕되게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딛고, 이제 새로 태어날 자신과 만나고 있는 역동적인 전환으로 정리된 대목이다. 이 전환은 현실 삶에서 시인의 죽음으로 탈바꿈하고 말았다. 정지용은 그 비극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당시 경향신문은 목·일요일에만 4면, 다른 날은 2면을 발행했다. 정지용은 2월 13일 목요일자 4면에 이 시의 전문을 싣고, 간단한 해설을 달았다. "간도 동촌 출생. (……) 복강(지금의 후쿠오카)형무소에서 복역 중 음학한 주사 한 대를 맞고 원통하고 아까운 나이 29세로 갔다. 일황 항복하던 해 2월26일에 일제 최후 발악기에 '불령선인'이라는 명목으로 꽃과 같은 시인을 암살하고 저이도 망했다. 시인 윤동주의 유골은 용정동 묘지에 묻히고 그의 비통한 시 10여편은 내게 있다. 지면이 있는 대로 연달아 발표하기에 윤군보다도 내가 자랑스럽다-지용." 험악한 세상을 뜻깊게 살려고 몸부림치다 비명에 간 한 젊은 시인을 소개하는 뛰어난 선배 시인의 자랑. 윤동주는 이렇게, 우리에게 슬픔과 분노로 와서 어느덧 그런 자랑을 선사하는 존재로 살아남게 되었다. 〈박덕규/ 소설가·단국대 교수〉 ///경향신문,
3    윤동주가 가장자리에서 정중앙자리에 서다... 댓글:  조회:2110  추천:0  2018-07-08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 한 줄 시를 적어볼까.” (윤동주 ‘쉽게 쓰여진 시’ 中) 이 작품은 윤동주가 일본에 유학 중이던 1942년에 씌어졌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라는 구절에서 그가 처해 있는 상황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익숙하지 않은 일본식의 생활공간인 동시에 다다미 여섯 장의 넓이로 그의 세계를 한정하는 구속, 부자유의 은유이다. 그는 이러한 공간 안에 갇혀 있으면서 시를 쓴다. ‘시인이란 슬픈 천명’이란 시인이 현실을 직접 움직이는 자가 아니라 언어를 다루는 사람이라는 데 대한 괴로움에 연유한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 시는 '부끄러움'의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형상화 하고 있다. 부끄러움은 학문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乖離感), 시를 쓰는 자신과 시 사이의 거리감(距離感) 등에서 오는 것이다. 시적 화자는 소외 의식과 내적 갈등을 일으킨다. 그러나 그는 부끄러워하지만 결코 절망하지는 않는다. 유학길에 오른 윤동주는 1943년 7월 첫 학기를 마치고 귀향길에 오르기 직전 사상범으로 체포당한다. 1944년 '독립운동'의 죄목으로 2년형을 언도받아 큐슈의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된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던( ‘쉽게 쓰여진 시’ 中)윤동주는 그토록 열망하던 광복을 눈앞에 둔 1945년 2월 16일, 29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일본 공영방송 NHK PD 출신인 일본인 다고 기치로(62·多胡吉郞)씨는 30년 넘게 윤동주를 취재해 왔다. 현존하는 윤동주 최후의 사진으로 알려진 사진을 발굴하기도 했다.  그는 “윤동주는 부끄럼을 잘 타는 성격이라 조선에서 찍은 사진에는 늘 가장자리에 있다. 이 사진에선 앞줄 가운데에 있다"며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결심을 한 윤동주를 위해 일본 친구들이 송별회를 해줬고, 친구들이 주인공을 윤동주를 가운데에 서라고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본 교토(京都) 우지(宇治)시의 우지강(宇治川) 아마가세쓰리바시(天ヶ瀨吊り橋)에서 일본인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윤동주 시인의 최후의 사진이 됐다. 우지하시(宇治橋·우지 다리)를 건너기 전, 우지강에 얽힌 가슴 아픈 역사와 마주하니 괜스레 마음이 경건해졌다.  우지하시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로 646년 고구려에서 건너간 도등 스님에 의해 건설됐다고 한다. 전쟁과 홍수, 지진 등으로 수 차례 파괴됐지만 그때마다 다시 지었다. 현재의 다리는 1996년에 지은 것이다.  우지하시 입구에는 무라사키시키부(紫式部)의 조각상과 유메노우키하시(夢浮橋)의 유적지 비석이 있다. 유메노우키하시는 소설 속의 다리로, 실재했던 다리는 아니다.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는 헤이안시대에 무라사키시키부(紫式部)가 지은 장편 연애소설이다. 당시 여자들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무라사키시키부'도 지은이의 이름이 아니다. 여주인공 중 한 명인 '무라사키노우에(紫の上)'의 이름에 궁녀의 직위명인 '시키부'를 붙인, '무라사키라 불리운 궁녀' 의 이름이다.  작품은 왕의 후궁의 아들인 주인공 겐지와 여러 여자들과의 사랑 이야기이다. 전체를 54첩(帖)으로 나누는데 그 중 45첩 하시히메(橋姬)부터 마지막 54첩 유메노우키하시(夢浮橋)까지 10첩(十帖·쥬죠)이 우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강가에서 사랑을 속삭이고, 사랑의 갈등에 몸을 던지는 등 소설 속 장면이 강물과 함께 흘러간다. 시간은 물살과 함께 빠르게 떠내려 가지만 역사는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우리의 가슴을 휘젓는다. /이부용 기자          ▲ 정 재 영  금년(2017년)은 윤동주 시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다. 1917년 12월 30일에 태어나 1945년 2월 16일까지 27년의 짧은 삶을 살았다. 아명은 윤해환(尹海煥)이며 본관은 파평(坡平). 중국 만주 지방 지린 성 연변 용정에서 출생하여 그곳 명동학교에서 수학하였고, 숭실중학교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숭실중학교 때 처음 시를 발표하였고, 1939년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소년(少年) 지에 시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일본 유학 후 교토에 있는 도시샤 대학(同志社大学) 재학하였으며 현재 그의 시비가 그 대학에 있다. 1943년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福岡刑務所)에 투옥, 100여 편의 시를 남기고, 27세의 나이에 옥중에서 요절하였다. 사후에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간되었다. 일제 강점기 후반의 양심적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시(쉽게 씌여진 시)속의 정황을 상상해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중적 구도 특징을 가진다. 밖은 비가 내리고 방안은 부모님의 학비봉투가 있는 외국의 방, 미완의 학생과 원숙한 노교수의 설정, 상실한 동무와 자기 속에 앙금(침전)으로 남음의 존재의식, 살기 어려운 인생인데도 쉽게 씌어진 시에서 오는 자아에 대한 살핌, 등불과 어둠으로 비유한 시대상에 대한 인식, 자기 자신과 악수하는 자아에 대한 존재의미 등, 모두 이중구도다.  육첩방은 다다미 6개로 3평 정도의 크기의 보통 방이다. 여기에 ‘땀내의 사랑’으로 비유한 부모님의 사랑이 방 안은 포근함으로 말하고 있다. 다만 비가 내리는 외국의 방 안 모습에서 시인의 자아 현실을 대신 그리고 있다. 윤동주 시인의 당시 현실이나 현재 우리의 삶도 그리 다르지 않다. 언제나 고독 속에 사랑의 최고형상인 부모의 헌신적인 모습, 동무와 같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아인식이나 실존인식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해주는 것이 아닌가.  보통 시가 쉬운 것은 아니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시인은 시가 쉽게 씌어졌음은 다행이 아닌 부끄러운 일일수도 있다는 고백을 한다. 따스함과 외로움, 한계적 존재의식과 의망에 대한 미래의식 등이 작품 안에 동시적으로 설치해주고 있다. =====================   "경향신문 강처중 기자와 정지용 주필이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윤동주는 있을 수 없다." 한국인의 애송시를 선정할 때면 늘 선두를 다투는 '국민 시인' 윤동주(1917~1945). 그는 59년 전 오늘인 1947년 2월13일자 경향신문에 유고시 '쉽게 씌어진 시'가 게재되면서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당대 최고 시인으로 경향신문 주필이던 정지용은 이날 시인 소개글에서 "시인 윤동주의 유골은 용정동 묘지에 묻히고 그의 비통한 시 10여편은 내게 있다. 지면이 있는 대로 연달아 발표하기에 윤군보다도 내가 자랑스럽다"고 썼다. 경향신문은 같은 해 3월13일자, 7월27일자에 그의 유작 '또 다른 고향'과 '소년'을 실었다. 경향신문, 정지용, 당시 무명의 작고 시인 윤동주를 연결한 데는 경향신문 조사부 기자였던 강처중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강처중은 월북했다는 이유로 우리 역사에서 잊혀졌다. 그의 존재는 윤동주 연구가인 송우혜씨('윤동주 평전'의 저자)에 의해 최근 학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상주 기자  ===============     [핵심 정리]  지은이 : 윤동주(尹東柱, 1917-1945) 시인. 아명(兒名) 해환. 만주 북간도 출생. 일본 유학 항일 민족 운동으로 수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함. 일제 강점기에 식민지의 슬픔과 자아의식을 표현한 저항시인. 유고시집으로 (1948)이 있다. 제목: 쉽게 씌여진 시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주의시(主意詩)  율격 : 내재율(1연과 8연의 반복)  성격 : 회고적. 의지적  어조 : 독백적  심상 : 묘사적 심상(시각적, 청각적)  표현 : 상징어의 사용. 수미쌍관의 구성. 자아 정체를 통한 반성  구성 :    1연   구속과 부자유의 현실    2연   현실을 움직일 수 없는 괴로움 (1-2연. 기)    3,4연 현재의 삶에 대한 회의    5,6연 현재 삶에서의 상실감    7연   반성적 자기 성찰 (3-7연. 서)    8연   현실 재인식    9연   나의 희망적 의지    10연  두 자아의 화합 (8-10연. 결)  제재 : 내면화된 나  주제 : 자기반성과 현실 극복의 의지. 어두운 시대 현실에서의 고뇌와 자아 성찰  출전 : (1948)   ▶ 작품 해설   이 작품은 지은이가 일본에 유학 중이던 1942년 지은 것으로서, 어두운 시대 상황 속에 갇혀 있는 자신의 모습을 내면화된 반성적 독백 속에서 성찰하고 있다. 10연으로 되어 있지만 내용상 세 단락으로 나누어 이해해 보기로 한다.   1,2연에서는 낯설고 부자유스러운 현실 상황과 그 현실을 어떻게 움직일 수 없는 자신의 운명적 괴로움을 말했다. 3연에서 7연까지의 내용은 이와 같은 상황 인식을 출발점으로 하여 자신의 현재를 회의적 시선으로 응시하는 반성적 성찰의 기록이다. 마지막 세 연은 이런 과정을 거쳐 시인이 음울한 상황에 체념하지 않고 미래에 대한 희망적 기다림으로써 오늘의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자기 정위(自己定位)의 노력을 보여 준다.   이 시에 나오는 ‘육첩방은 남의 나라’라는 구절은 표면적으로는 자신이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상황을 나타낸 것 같지만 사실은 식민지 지배국 일본에서 오히려 민족의식(民族意識)을 자각한 시인의 단호한 육성으로 이해된다. 화자는 자신이 언어로 무엇을 이야기할 뿐 행동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시인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만, 종국에는 그 나약함을 극복하고 시대의 어둠과 맞서려는 결의를 표현하고 있다. 특히, 결말 부분에서 갈등과 방황 속에 보내던 두 자아가 눈물과 위안 속에 합일(合一)하는 것을 표현한 부분은 매우 인상적이다.   시인은 조국을 잃어버린 현실과, 그 조국을 집어삼킨 나라에 유학해 공부하면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자신, 그러면서도 쉽게 시를 쓰는 자신에 대하여 깊이 반성하고 있다. 작품 전체로 보아 두 개의 ‘나’가 대립되고 있다. ‘현실 속의 나’와 ‘시를 쓰는 나’가 그것이다. 이 때 ‘현실 속의 나’는 무기력한 자아를 가리킴에 비해 ‘시를 쓰는 나’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고자 하는 역사적 자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나’의 대립은 7연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대립은 8연부터 반전하여 두 개의 자아는 화해와 조화를 이루어 나간다. 8연에서 문득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린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반복이 되는데, 이는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사고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음을 암시한다. 9-10연을 보면 이러한 사고의 전환은 미래에 대한 어떤 다짐을 통해 일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 시는 현재까지의 부끄러운 자아의 모습이 자기 성찰을 통해 역사적 자아로 승화되면서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보여 주는 시라고 볼 수 있다.   현실의 자각을 통한 자기 인식의 비극성   이 작품에서 우선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육첩방은 남의 나라’로 요약되고 있는 현실의 인식 문제이다. 이러한 상황적 인식이 선행되고 있기 때문에 시적 자아는 ‘시인이란 슬픈 천명’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 시에서 시적 자아가 가장 아파하는 순간은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임을 깨닫는 순간이다. 시를 쓰는 일을 통해서만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밖에 없는 시인이 시를 쓰는 것 자체를 ‘부끄러운 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은 결국 외적인 상황과 자기 존재가 함께 요구하는 삶의 총체적인 인식에 통했을 때에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에게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시대의 고통을 자기 내면에 끌어들여 놓고 그것을 고뇌하는 시적 자아의 ‘자기 인식의 비극성’이다.   윤동주와 ‘부끄러움’의 미학   윤동주의 시를 두고 저항시라고 보는 견해와 더불어 최근에는 자아 성찰의 내면적 고백의 시라는 관점이 제기되고 있다. 이 중에서 ‘부끄러움’은 후자의 관점에 따른 것이다. 즉, 윤동주는 일제 강점기 양심 있는 지식인의 고뇌를 ‘부끄러움’의 미학으로 극복하여 식민지 후기의 무질서한 정서에 하나의 질서를 부여한다. 그의 부끄러움의 미학은 자신과 생활에 대한 애정 있는 관찰, 그리고 자신이 지켜야 할 이념에 대한 순결한 신앙과 시의 형식에 대한 집요한 탐구의 결과이다. 그의 부끄러움의 미학은 자신의 욕됨, 미움, 자신에 대한 가엾음과 부끄러움 등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윤동주 시의 부끄러움은 그로 하여금 그가 가야 할 길을 가게 하는 자각의 가장 높은 심적 계기를 이룬다는 점과, 자기 혼자만 행복하게 살 수 없다는 아픈 자각의 표현이라는 점이다.   ==================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출전 : 시집 '하늘과 바라모가 별과 시'(1948) 10연으로 된 이 시는 생활의 성찰과 극복의 의지로 구분할 수 있다. 제1연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단적으로 제시했다. '육첩방'은 일본이라는 낯설고 부자유스러운 공간을 뜻하며, '밤비'는 암담하고 쓸쓸한 당시의 상황과 관련된다. 제2연은 시인으로서의 괴로움을 표명한 것이다. 시인이란 당신의 현실에 직접 대응하지 못하고 다만 언어를 다듬고 있는 천명(天命)을 지닌 사람이라는 데서 괴로움을 느낀다. 제3, 4연은 현실을 외면하고, 낡은 지식이나 얻으러 대학에 다니는 자신의 행활을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늙은 교수의 강의'는 현실과 거리가 먼 낡은 지식으로 해석된다. 제5, 6연은 유년 시절에는 꿈이 많았는데 지금은 그것을 다 잃어버리고 일본에서 무의미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회의가 싹튼다. 제7연은 시를 쓰는 일, 공부를 하는 일 등이 현실 상황과 괴리(乖離)되어 있음을 자각하고 부끄러워한다. 윤동주의 부끄러움은 현재의 암담한 상황에 대처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의미한 삶에 연유한다. 제8연은 제1연을 변형한 것으로 배경의 제시다. 부자유한 상황과 암담한 현실이 자신을 자꾸 압박해 온다. 제9연에서 시적 화자는 이런 상황과 현실에서 체념하지 않고 극복하려는 결의를 보여 준다. 이 어둠을 조금씩 몰아내기 위해 등불을 밝혀야겠다. 그러면 밝은 시대가 올 것이다. '등불'은 광명의 심상으로 새로운 시대를 위한 노력이며 '아침'은 새 시대로 '어둠'과 대립을 이룬다. '최후의 나'는 굳은 의지의 자아로 보인다. 제10연은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는 두 자아가 화합을 하는 장면이다. 여기에 두 '나'가 나오는데 암담한 현실에서 우울하게 살아가는 체념적인 자아와 현실을 반성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자아가 그것이다. '최초의 악수'는 새로운 출발을 위한 분열된 자아의 화해, 일치를 뜻한다. 이 시는 '부끄러움'의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 부끄러움은 학문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 시를 쓰는 자신과 시 사이의 거리감 등에서 오는 것이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소외 의식과 내적 갈등을 일으킨다. 그러나 그는 부끄러워하지만 결코 절망하지는 않는다.          
2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쉽게 씌여진 시 댓글:  조회:4741  추천:0  2018-07-08
      쉽게 씌어진 시 / 윤동주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詩人)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詩)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學費封套)를 받어 대학(大學)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敎授)의 강의(講義)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時代)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最後)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慰安)으로 잡는 최초(最初)의 악수(握手).   요약 일제강점기 말기의 대표적인 시인 윤동주(尹東柱 : 1917 ~ 1945)의 시.   일제강점기에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나서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9살 젊은 나이에 옥사한 윤동주는 일제 말기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는 일제에 의해 억압받는 민족의 현실에 정서적 연원을 두고 쓴 그의 대표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시는 10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1연에서는 암담한 현실을, 2~7연은 무기력한 자신의 삶에 대한 회의와 반성을, 8~10연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담았다. 1연의 육첩방은 6개의 다다미를 깐 방으로 화자가 처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시는 타국에서 느끼는 향수와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함을 표현하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자기 반성을 통해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끝맺음한다. 핵심 정리 [이 작품은] 일제 강점하의 시대 상황에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려고 노력한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자기 성찰을 담고 있다.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성격 : 저항적, 반성적, 미래 지향적 *제재 : 현실 속의 자신의 삶(시가 쉽게 씌어지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 *주제 : 어두운 시대 현실에서 비롯된 고뇌와 자기 성찰 *특징 ① 상징적 시어를 대비하여 시적 의미를 강화함. ② 두 자아의 대립과 화해를 통해 시상을 전개함. *출전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 시어 풀이 *속살거려 : 자질구레한 말로 속닥거려. *육첩방(六疊房) : 다다미(일본식 돗자리) 여섯 장을 깐 일본식의 작은 방. *천명(天命) : 하늘이 내린 피할 수 없는 명령. *침전(沈澱) : 액체 속에 섞인 작은 고체가 밑바닥에 가라앉음. 또는 그 앙금. 작품의 구성 [1연] 구속과 부자유의 현실 [2연] 슬픈 천명의 자각 [3~4연] 현재 삶에 대한 회의 [5~6연] 상실감에 빠진 무기력한 자아 [7연] 무기력한 삶에 대한 부끄러움 [8연] 내면의 각성과 현실의 재인식 [9~10연] 내적 갈등의 해소와 미래에 대한 희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윤동주가 일본에 유학 중이던 1942년에 쓴 작품으로, 어두운 시대 현실에 무기력한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자기반성을 통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 1, 2연은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어둔 밤하늘의 별조차 볼 수 없으며, 이국땅에서 다다미 여섯 장의 넓이에 갇혀 있는 화자의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3~7연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무의미한 유학 생활을 하고 있는 자신의 현재 삶을 우울하고 회의적인 시선으로 인식하는 자기 성찰의 기록이다. 마지막 8~10연은 현실에 대한 재인식과 반성을 통해 이 암울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즉, 어두운 시대를 살아야 하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면서도 절망하거나 체념하지 않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며 자신의 손을 잡는다. 이때 두 사람의 ‘나’는 현실에서 우울한 삶을 살아가는 현실적 자아와 그것을 반성적으로 응시하는 내면적 자아라고 할 수 있다. 두 자아가 ‘악수’를 함으로써 내적 갈등을 해소하고 화해를 하여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작품 연구실 ‘최후의 나’가 의미하는 바는? ‘최후의 나’란 현실적 자아, 즉 잘못된 현실과 타협하면서 우울하고 무기력하게 무의미한 삶을 살아가는 ‘나’와 구별되는 ‘또 다른 나’로, 잘못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는 자기 성찰의 과정을 거쳐 도달한 성숙한 내면적 자아이다. 시어 및 시구의 상징적 의미 *밤비 : 자기 성찰의 계기를 마련하는 어둡고 괴로운 현실 *육첩방 : 억눌리고 암담한 공간. 화자를 구속하는 시대 상황 *등불 : 새 시대를 밝히기 위한 노력. 현실 극복의 의지 *어둠 :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현실 *시대처럼 올 아침 : 희망찬 미래. 새로운 세계. 조국의 광복 시간적 · 공간적 배경을 통해 본 화자의 상황   화자의 태도 변화   이 시의 화자는 식민지 현실이라는 부정적 상황에 안주하며 무기력한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이러한 자신의 태도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자기 성찰을 통해 양심을 지키려는 노력과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 시에 나타난 두 자아 이 시는 두 자아의 대립과 갈등, 화해의 과정이 시상 전개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시의 마지막 연에는 ‘나’가 두 번 나온다. 전자는 내면적 자아로, 화자가 바라는 삶의 모습을 보인다. 후자는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가는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있는 현실적 자아로, 화자가 부끄러워하는 삶의 모습을 보인다. 즉, 두 자아란 잘못된 현실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체념하고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현실적 자아와, 이 잘못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끊임없는 자기 성찰의 과정을 통해 도달한 내면적 자아를 말한다. 이 두 자아는 어두운 시대 현실을 살아가는 화자가 마주칠 수밖에 없는 이상과 현실의 어긋남을 표현하기 위한 시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작가 소개 - 윤동주(尹東柱, 1917 ~ 1945) 시인. 북간도 출생. 일본 도시샤 대학 영문과에 재학 중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이듬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1941년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19편의 시를 묶은 자선 시집(自選詩集)을 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가 자필로 3부를 남긴 것이 사후에 햇빛을 보게 되어, 1948년에 유고 30편이 실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간행되었다. 주로 1938~1941년에 쓰인 그의 시에는 불안과 고독과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과 용기로 현실을 돌파하려는 강인한 정신이 표출되어 있다. 작품으로 ‘자화상’(1939), ‘또 다른 고향’(1948) 등이 있다. 함께 읽어보기 ‘광야’, 이육사/억압된 현실에 대한 저항과 극복 의지 ‘광야’는 우리 민족의 삶의 터전인 광야를 배경으로 하여 일제 강점기의 현실에 대한 극복과 희망의 미래에 대한 확신을 드러낸 작품이다. ‘쉽게 씌어진 시’와 ‘광야’는 당시 억압된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나타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하지만 ‘쉽게 씌어진 시’가 자기반성과 성찰을 통해 현실 극복의 의지를 나타냈다면, ‘광야’는 웅장한 상상력과 강인한 지사적 의지, 남성적 어조를 통해 현실 극복의 의지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교과 연계] (문학) 천재(김윤식), 신사고 (국어) 비상(한철우) 관련문제 01.이 시에 드러난 시적 화자의 정서 변화를 가장 잘 나타낸 것은? 02.이 시의 화자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1. 문학을 통해 스스로의 마음을 정화하며 위로 받으려하고 있다. 2. 내면의 갈등과 고뇌속에서 진실한 삶의 자세를 추구하고 있다. 3. 자신의 현실을 운명으로 수용하며 허무에서 벗어나려하고 있다. 4. 능력의 부족을 절실하게 느껴 갈등하지만 의지로 극복하고 있다. 5. 원치 않았지만 떠날 수밖에 없었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고 있다. =====================  이 시가 쓰여진 때는 1942년. 이때 윤동주는 동경 릿쿄대학 영문과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성전 승리를 외치며 전쟁에 미쳐있을 때였지요. 식민지의 청년으로 식민 통치국의 심장부에서 공부하고 있던 청년 윤동주의 고뇌와 번민이 이 시 에도 고스란합니다.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라는 유약해 보이는 문학청년의 언술은 뜻밖에도 ‘육첩 방(六疊房)은 남의 나라’라는 단호한 자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단호함은 일본식 다다미방인 육첩방에 자신의 몸과 정신을 길들 이지 않겠다는, 스스로를 일깨우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할 겁니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그가 스스로를 성찰할 때 그 성찰이 가닿은 저 아 름다운 결구가 오늘 제 마음에 새롭게 사무칩니다. 그는 자신이 어둠을 ‘모두’ 내몰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조금 내몰고’ 라고 쓰고 있지요. 힘 있는 큰 손을 내민다고 쓰지도 않습니다. ‘작은 손을 내밀어’ 라고 쓰고 있지요. 세계의 광포함에 비하면 자신의 힘이 얼마나 연약한 것인지 그는 알고 있습니다. 연약하지만 ‘조금’이나마 세계의 어둠을 벗겨내고자 안간힘 씁니다. 윤동주의 시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그가 독립투사였기 때문이라기보다, 이처럼 여리고 연약한 개인이 끝끝내 지켜가려고 애쓴 자존의 품격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   산에 언덕에(신동엽)와 쉽게 씌어진 시(윤동주)의 작품 설명 [개인적 체험을 역사적 체험으로 확장]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는 일제 강점 하의 시대 현실에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자 하는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자기 성찰을 형상화하고 있다. 개인적 체험을 역사적 체험으로 확장하여 한 시대의 삶과 의식을 노래한다는 점에서 신동엽의 ‘산에 언덕에’와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쉽게 씌어진 시'는 일제 강점기의 현실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못하면서 시를 쓸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슬픔을 나타내고 있고, ‘산에 언덕에’는 4·19 혁명을 겪으며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며 사람을 사랑하는 따뜻한 인정을 회복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산에 언덕에(신동엽)와 쉽게 씌어진 시(윤동주)의 핵심 정리   산에 언덕에 쉽게 씌어진 시 갈래 자유시, 서정시 자유시, 서정시 성격 추모적, 희망적, 상징적 저항적, 반성적, 미래 지향적 제재 그리운 그의 얼굴 현실 속의 자신의 삶(시가 쉽게 씌어지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 주제 그리운 이가 추구하던 소망의 실현에 대한 염원 어두운 시대 현실에서 비롯된 고뇌와 자기 성찰 특징 ① 유사한 구조의 반복과 대구적 표현을 통해 운율을 형성함. ② ‘-ㄹ지어이’의 반복으로 화자의 소망과 믿음을 강조함. ① 상징적 시어를 대비하여 시적 의미를 강화함. ② 두 자아의 대립과 화해를 통해 시상을 전개함. 산에 언덕에(신동엽)와 쉽게 씌어진 시(윤동주)의 이해와 감상 산에 언덕에(신동엽) 이 시는 불행한 삶을 살다 간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과, ‘그’가 추구하던 소망과 신념은 끊어지지 않고 계승되어 언젠가는 실현되리라는 확신을 표현한 작품이다. 이 시가 쓰인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이 시는 4·19 혁명 때 희생당한 사람들을 추모하는 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시인은 4·19 혁명 때 희생된 많은 ‘그’들의 소망과 신념을 잊지 말고, 사람을 사랑하는 따뜻한 ‘인정(人情)’을 회복하여 자유와 민주주의를 실현하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쉽게 씌어진 시(윤동주) 이 시는 윤동주가 일본에 유학 중이던 1942년에 쓴 작품으로, 어두운 시대 현실에 무기력한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자기반성을 통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 =====================   윤동주-쉽게 씌어진 시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외로음을 자아냄(시간적 배경) 육첩방은 남의 나라. →일본식 다다미 좁은 방(부자유한 현실상황. 공간적 배경)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현실을 직접 움직이는 자가 아니라‘언어를 다루는 사람’이라는데 대한 괴로움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풍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어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간다. →현실적 고민과 거리가 먼 메마른 지식인 - 학문에 대한 회의 생각해 보면 어릴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 현실에 대한 회의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적극성이 결여된 삶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자신의 성실성과 정직성 결여에 대한 반성과 성찰 부끄러운 일이다. →자괴감(도덕적 결백성)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 내면의 각성을 가져오는 매체(어두운 현실 인식에서 느끼는 암울한 심정)   등불①을 밝혀 어둠②을 조곰 내 몰고, →①신념② 부정적 현실 
1    윤동주 시 리해돕기와 "관부련락선" 댓글:  조회:3596  추천:0  2018-07-08
관부(부관)연락선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검색하러 가기  부관연락선 • 부박연락선 항로 거리 부관연락선(부산 ~ 시모노세키) 240km 부박연락선(부산 ~ 하카타) 215km 역명 • 잔교명 시모노세키 역 • 시모노세키 철도 잔교(북위 33° 56′ 58.5″ 동경 130° 55′ 39.5″) 하카타 역 • 하카타 철도 잔교(북위 33° 36′ 36.6″ 동경 130° 24′ 8.7″) 부산역 • 부산 세관 잔교(북위 35° 6′ 13.4″ 동경 129° 2′ 29.1″) 부관연락선(일본어: 関釜連絡線 かんふれんらくせん[*]))은 대한민국의 부산과 일본의 시모노세키(下関)를 왕복하는 국제 여객선이다. 1905년 9월 11일에 최초의 부관연락선인 잇키마루(壹岐丸)가 취항했다. '부관'(釜關)이라는 이름은 부산의 앞글자(釜, 부)와 시모노세키의 뒷글자(關, 관)를 딴 것이다. 연락선이라는 명칭은 협의로는 일제 강점기 및 그 이전의 일본측 노선을 의미하지만, 관습적으로 동 항로를 이어받아 운행하는 현재의 부관 페리도 위와 같이 부르기도 한다. 항로 개요[편집]   부산(釜山)~시모노세키(下關) 간 240km. 역사[편집]   부관연락선의 운행은 1905년에 당시 산요 본선을 운영하던 사철회사 산요철도의 자회사인 산요기선에 의해 개통되었다. 이후 1906년에 산요철도의 국철 합병에 의해서 일본 국철에 인수되었으며, 1945년 2차 대전 말기에 미군 공습의 격화로 운행이 불가능해질 때까지 유지되었다. 해방 이후 국교단절로 인해 정기 운항은 폐지되었으나, 1970년에 해당 항로를 이어받아 부관페리가 개설되어 운항 중이다. 개설 광복 전에는 관부(關釜)연락선이라 불렸다. 1905년 1월 1일부터 열차가 운행되기 시작한 경부선과 같은 해 9월 정기 뱃길을 연 부관연락선이 운행을 시작하였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수탈시스템의 하나로 탄생한 것은 분명하지만 경부선과 관부연락선 개통이 부산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두 교통망은 당시 한국 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킨 중대한 요소였는데, 부산은 유일하게 두 교통망의 기·종착점을 동시에 보유했기 때문이다. 연원 및 변천 '부관'(釜關)이라는 이름은 부산의 앞글자(釜, 부)와 시모노세키의 뒷글자(關, 관)를 딴 것이다. 일본에서는 종종 어순을 바꾼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 또는 관부항로(關釜航路)라고 부른다. 관부연락선은 1905년 9월 일본이 본격적으로 한국을 비롯한 중국의 동북지방·몽고 등지로 진출하기 위하여 만든 국책해운회사였던 산요기선주식회사(山陽氣船株式會社)에 의하여 처음 개설되었다. 이 연락선은 시모노세키와 고베[神戶] 사이의 산요선, 고베와 도쿄[東京] 사이의 도카이도선(東海道線) 등 일본의 철도와 연결되고, 우리나라에서는 경부선·경의선 그리고 만주의 안봉선(安奉線)·남만주철도·시베리아철도 등과 연결되어 광복 전에는 세계일주 여행로의 일부를 이루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그러나 이 연락선은 일본의 한국 침략의 한 수단이기도 하였다. 수많은 한국인들이 징용으로 끌려갔으며 일본인들의 수탈에 농토를 잃고 북해도 탄광으로 가기 위하여 관부연락선에 몸을 맡겨야 하였다. 최초로 취항한 연락선은 이키마루(壹岐丸, 1,680톤)라는 배로 11시간 반이 소요되었다. 그 뒤 3,000톤급의 쇼케이마루(昌慶丸)·도쿠주마루(德壽丸)·쇼토쿠마루(昌德丸) 등이 운항되었다. 1935년부터는 북중국·만주·몽고 등지로의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여객과 화물의 격증에 대비하여 당시로서는 최신예인 7,000톤급의 대형 여객선 공고마루(金剛丸)·고안마루(興安丸) 등을 운항하였으며 시간도 7시간 반으로 단축하였다. 이들 연락선은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징발하고, 전선과 일본 본토를 운항하는 데 투입되었으나, 미군에 의하여 격침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1945년 3월부터 사실상 관부연락선은 두절되었으며, 그 뒤 광복이 된 뒤에도 한일 간의 국교가 정상화될 때까지 연락선이 오가지 못하였다. 광복 후에 일본까지 다니기 시작한 우리나라의 첫 여객선은 아리랑호로 1964년 1월부산항 제2부두를 떠나 처음으로 일본으로 갔다. 1970년 6월 17일부터는 부산과 시모노세키까지 이틀에 한 번씩 오가는 부관페리호가 다니기 시작하였다. 연락선이라는 명칭은 협의로는 일제강점기 및 그 이전의 일본측 노선을 의미하지만, 이 항로를 이어받아 운행하는 현재의 부관페리를 부관연락선이라 부르기도 한다. 현황 현재 운행중인 부관페리호는 1970년부터 부산에서 시모노세키까지 240km를 운행하고 있다. 2009년 현재 부관페리는 부관훼리주식회사에서 운행하고 있으며, 1998년에 도입된 일본 국적의 1만 6187톤 하마유(Hamayuu)호 1척과 2002년에 도입된 한국 국적의 1만 6665톤 성희(Seonghee)호가 각각 1일 1회씩 운항하고 있다. 즉 부산에서 저녁 8시에 출발하면 시모노세키에서는 저녁 7시에 출발한다. ======================   한자 關釜連絡船 영어의미역 Busan-Sinomoseki Ferry|Kanfu Cross-channel Liner Ship 이칭/별칭 부관 연락선,전시 노예선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5가 16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최영호 2 [정의] 1905년부터 1945년까지 부산항과 시모노세키 항 사이를 정기적으로 운항한 여객선. [개설] 러일 전쟁이 종결된 후 경부선 철도가 부산에서 서울까지 연장되자, 이를 계기로 일본의 산요기선주식회사[山陽氣船株式會社]는 일본의 산요선 철도와 한국의 경부선 철도를 연결하기 위한 선박 수송을 계획하고, 정기 여객선 운항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1905년 9월에 부산과 시모노세키[下關]를 잇는 1,680톤 급의 정기 여객선 이키마루[壹岐丸]가 시모노세키 항에서 취항하였다. 이것이 일본과 한반도를 연결하는 첫 번째 정기 연락선이었다. 이후 1945년 일본의 패전 직전에 미군의 공습으로 항로가 차단되면서 정기 여객선으로서의 생명이 중단될 때까지 관부 연락선은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잇는 대표적인 운송 기관의 역할을 하였다. 일본의 패전 직후에는 한때 한반도와 일본에서 귀환자들을 수송하는 선박이 이 항로를 정기적으로 왕복하였다. 일제 강점기 여객 수송과 해방 직후의 귀환자 수송을 합하면 총 3000만 명 이상의 승객이 관부 연락선을 이용하였다. 1965년 한국과 일본의 국교가 수립된 후 부산시와 시모노세키 시 사이에 정기 여객선 재개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그 결과 1970년 1970년 6월 19일에 관부 페리호가 운항을 시작하였고 1983년 4월 27일에는 부관 훼리호가 운항을 시작하였다. [연원 및 변천] 일본 재계를 중심으로 한반도와 일본을 연결하는 정기 항로를 취항시키려는 움직임은 개항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일본의 대표적인 실업가이며 제일국립은행(第一國立銀行) 총감인 시부자와 에이이치[澁澤榮一]는 부산을 방문하여 일본인의 상업 실태를 시찰하였다. 그 후 최초의 일본인 무역 상사인 대창조상회(大倉組商會)를 설립 운영하고 있던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와 공동으로 서명하여 1877년 8월에 정기 항로 개설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이들은 메이지 정부의 대장성(大藏省)에 조선과의 무역을 확장하기 위해 자금 10만 엔을 대부할 것과 매월 2~3회의 정기 항로를 열 것을 건의하였다. 이때 메이지 정부는 규슈[九州] 지방을 중심으로 전개된 세이난 전쟁[西南戰爭]으로 인해 혼란한 정국이 진정된 후에 운항을 허락하겠다고 회답하였다. 1890년대에 들어서 한반도와 일본 사이에 인적 이동과 물동량이 증가함에 따라 정기 항로 개설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1893년에 일본의 민간 회사에 의해 인천과 오사카[大阪] 그리고 모지[門司]를 연결하는 645톤 급의 기소가와마루[木曾川丸]가 취항하였고, 이어서 1902년에는 원산과 4, 원산과 모지를 연결하는 746톤 급의 스미다가와마루[隅田川丸]가 취항하였다. 이 두 선박의 운행이 근대 한일 양국 항로의 효시가 되었으며 부산~시모노세키 사이의 항로에 정기 연락선이 취항하게 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1905년 9월 11일 밤 이키마루[壹岐丸] 선박이 시모노세키 항을 떠나 다음날 아침 부산에 도착하였다. 당시 운항 시간은 11시간 30분이었고 여객 운임은 1등실 12엔, 2등실 7엔, 3등실 3엔 50전이었다. 이키마루 선박은 길이 82미터, 폭 10.9미터, 총 규모는 1,680톤에 달하였다. 여객 정원 317명, 화물 300톤을 적재할 수 있는 규모였다. 영국의 해외 항해 선박을 모방하여 만들어져 선단에서 선미까지 평평한 갑판으로 되어 있었다. 1905년에는 부산항에 이 배를 직접 접안시킬 수 있는 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 초량 앞바다에 정박한 후 소형 선박을 통해 승객과 화물을 부두로 이동시켰다. 그 후 부산항과 시모노세키 항의 접안 시설이 근대화되면서 정기 여객선의 규모와 편수가 계속 늘어갔다. 일제 강점기에 걸쳐 시기에 따라 약간 승객 수가 감소한 경우도 있으나 전반적으로 볼 때 연락선을 통한 인구 이동은 계속 증가되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1943년 10월 미국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아 곤론마루[崑崙丸] 선박이 침몰하는 등 피해가 심해졌다. 1945년 6월 20일 일본 정부는 관부 연락선의 모든 선박을 안전한 항로로 옮길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부산과 시모노세키 사이의 항로는 사실상 중단되었으며 일제 강점 하의 관부 연락선은 종말을 맞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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