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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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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가슴 1, 2, 3 댓글:  조회:2448  추천:0  2018-07-11
      가슴 1                      윤동주   소리없는 북 답답하면 주먹으로 뚜드려 보오. 그래 봐도 후―― 가―는 한숨보다 못하오.    --------------------------         가슴 2   늦은 가을 쓰르래미 숲에 싸여 공포에 떨고, 웃음 웃는 흰 달 생각이 도망가오.   ---------------------------       가슴 3   불꺼진 화독을 안고 도는 겨울밤은 깊었다. 재만 남은 가슴이 문풍지 소리에 떤다.     ===================      가슴                    윤동주     불꺼진 화독을 안고 도는 겨울 밤은 깊었다.   재만 남은 가슴이 문풍지 소리에 떤다.              1936년 7월 24일     지금 사람들은 [화독]의 존재를 이해 못한다. 창호지 문짝 사이로 황소바람이 들어오는 겨울 밤의 으슬한 추위를 모른다. 꺼져 가는 화독의 온기를 가랑이 사이에 놓고 마지막 온기를 느끼는 밤을.     내가 태어나기 3년 전인 1936년은  윤동주 시인이 19세이다. 숭실학교 신사참배 문제로 관청에 접수되어 다시 용정으로 돌아와 광명중학교로 전학 하였다     19세 7월24일 밤 이 [가슴]을 지었다. 조숙하다고 할까. 나라를 잃은 이 청년의 가슴엔 재만 남은 싸늘한 가슴이다. 독립은 요원하다. 희망이 없다. 춥기만 하다. 집을 쫓겨난 사람이 겨울 밤 한데서 웅크리고 있어 보아라 마치 불끼 없는 재만 남은 가슴 얼마나 추울까     옛날 초가집 창호지문은 아귀가 딱 밀착되지 않아 창호지를 여유있게 붙여 바람을 막고자 한 것이 오히려 부르르 떠는 문풍지 소리에 더욱 마음은 춥다. 윗목에 마시려고 한 사발 떠 논 물대접엔 물이 꽁꽁 언다.     이 때는 왜 이리 가난하고, 물자도 없고 땔 나무도 없고 먹어야 할 음식도 없다. 요즘 사람들은 이해 못한다. 나라를 빼앗긴 사람들에게는 가난하기때문에 더욱 애국자가 된 모양이다. 지금은  모든 것이 너무 많다. 그런데 나라 사랑하는 마음은 점점 희박해진다.  자유가 너무 많아 자유가 그립지 않은가보다.                                                       /운산 최의상  
1    윤동주와 숭실학교 댓글:  조회:3246  추천:0  2018-07-11
시대 근대 위치 평양, 및 서울특별시 중구 신당동 설립 1897년 성격 근대교육기관, 중-고등교육기관, 미션학교 유형 단체 설립자 베어드(Baird, W.M.) 분야 교육/교육 요약 1897년 평양에 설립되었던 중·고등교육기관.   숭실학당(1921년) 1897년 평양에 설립되었던 중고등교육기관.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베어드가 평양에 설립한 미션계의 교육기관이다. 연원 및 변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베어드(Baird,W.M.)가 평양에 설립한 미션계의 교육기관이다. 같은 해에 선교부(宣敎部)의 지방학교 설치에 관한 정책이 결정되자, 선교부가 설치되어 있는 전국 주요 도시마다 남녀 중학교가 설립되어 나갔다. 그리하여 이들 학교는 청소년 교육에 대한 책임을 거의 전담하였다. 바로 이 해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베어드가 부산에서 평양으로 이동해 온 후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중등교육을 실시하고자 숭실학교를 창설하여 스스로 교장이 되었다. 그때 한국인 교사로는 한학자(漢學者) 박자중(朴子重)이 있었으며, 학생은 13명이었다. 처음 가르치던 학과는 성경·한문·수학·음악·체조였다. 그러나 그 뒤 도덕·사민필지(士民必知)·만국통감(萬國統監)·지세략해(地勢略解)·천문(天文)·논리(論理)·생리(生理) 등도 가르쳤다. 그러다가 점차 선교부는 고등교육(高等敎育)의 필요성도 느끼게 되었다. 베어드에 의하여 1897년에 설립된 숭실학교만 하더라도 처음에는 13명의 학생을 모집하여 중학교로 시작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중등학교만으로는 학생들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보다 높은 교육기관이 요청됨을 피할 수 없었다. 이 때(1901년) 벌써 숭실학교는 미국인 선교사 소안론(蘇安論)이 본국에서 별세한 부친의 유산을 상속받게 되어, 이 기금을 가지고 평양시 신양리(新陽里) 39번지에 광대한 교지를 매수하여 2층의 교사를 신축함으로써 발전의 기반을 닦았다. 그리하여 1905년에는 숭실중학교 재학생이 160명이나 되었고, 이미 3회에 걸쳐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학생수가 증가했다는 것은 전문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입증하고 있었다. 1906년, 마침내 북장로교 선교부지의 결정에 의하여 대학부(大學部)를 개설하고, 12명의 학생을 입학케 하였다. 이 숭실학교 대학부는 사실상 중학교 과정에 2년 과정을 더 늘려 전문학교 설립을 향해 일보전진한 조처였다. 동시에 이 대학부는 장로교·감리교 양교파(兩敎派)의 연합사업으로 출발하였다. 이 대학부 과정의 시작은 또한 중등학교 학생수의 증가를 의미하였다. 1906년에 중학교에 등록한 학생수는 1905년의 160명에 비해 255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여기에 특기할 일은 숭실의 기지(基地)가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당시 토마스 목사가 평양에서 순교할 무렵, 토마스 목사를 환영하러 나갔던 신자 지달해(池達海)와 그의 사촌 동생 지달수(池達洙)의 순교한 시체가 매장되었던 곳이라는 점이다. 순교자의 뜨거운 피가 묻힌 곳에, 그로부터 30년 후 숭실의 큰 열매가 맺은 것이다. 이후 숭실학교 대학부는 1908년에 제1회 졸업생 2명을 배출하였고, 1910년에는 재학생이 54명이었으며, 졸업생 수는 모두 7명이었다. 이러는 동안 기독교 대학의 위치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다. 어떤 이는 중심지 서울을 지지하였고, 또 어떤 이는 기독교 분위기가 농후한 평양이 더 좋다고 하였다. 이 논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1910년에는 이화학당(梨花學堂)에 대학부가 설립되어 여성들을 위한 고등교육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숭실학교는 일제하에서 고등보통학교(高等普通學校)로의 승격문제 및 신사참배 강요 등에 따른 민족의 수난과 함께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가 제정 공포한 사립학교규칙 제1조·제2조·제3조는 형식상으로는 사립학교의 설치 및 폐지를 말하는 조항 같지만, 내용상으로는 사립중학교를 고등보통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고자 한 조항이다. 즉, 일본 강점자들은 1911년과 1915년의 사립학교규칙에서 문제가 되어 온 사립중학교를 고등보통학교로 승격시킨다는 명분 아래 새로 인가를 받아야 한다는 방침을 강화하였다. 이는 총독부가 사립학교를 그들의 교육방침대로 운영하기 위한 정책의 하나였다. 그리하여 총독부는 그때까지의 민간인 혹은 기독교계 중학교에 대하여 교명을 고등보통학교로 고치라고 강요하는 한편, 전문학교 등의 상급학교 입학 자격자를 고등보통학교 졸업생으로 규정하였다. 이때 우리 나라 사학(私學)에서는 승격, 비승격을 주장하며 두 가지 의견이 대립하였다. 총독부가 하는 일이 속이 들여다보이는 일이니, 그 굴레를 받아 쓸 까닭이 없다는 것이 비승격을 주장하는 이들의 의견이었다. 그러나 승격론자들의 의견은 고등보통학교로 승격하지 않는 학교는 무자격 학교로 만들어 학생들의 취직과 진학에 따른 자격을 인정하지 않으니 학교에 학생들이 모이지 않을 것이며, 이는 곧 학교를 폐교한다는 의미하니, 이 때문에 승격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학들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특히 기독교계 학교에서는 선교의 근본 목적을 위해 성경 과목과 기도회를 정규 과정표에 넣으려고 고등보통학교로 교명을 변경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따라서 고등보통학교로 바꾸지 않은 사학은 모두 총독부에 의해 이른바 잡종(雜種) 중등학교 혹은 각종 학교(各種學校)로 전락하고 말았다. 당시 장로교측에서 고등보통학교로 교명을 변경하는 데 응하지 않은 이유는 조선교육령과 사립학교규칙 자체가 일반 학교와 같이 성경 과목을 빼고 기독교 정신을 말살하는 동시에 배일정신을 억압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평양 숭실학교의 모페트(Moffett,S.A.) 교장은 총독부가 계속해서 고보(高普)로 고치라고 강요했지만 절대 거부하였다. 따라서 총독부의 박해는 더욱 심해졌다. 그러자 한번은 이 문제를 토의하는 회의에서 모페트는 “우리 좀더 하나님께 의지하고 기다려 봅시다. 아직도 기한은 몇 해 남았으니 그대로 계속하면서 총독부에게 우리들로서는 성경을 가르치지 못하고 하나님을 반대하는 학교는 유지해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솔직히 말합시다.”라고 말하였다. 또 모페트 교장은 숭실학교 학생들과 교직원들에게 격려하기를 “할 수 있기는 있는 것인데는 낙심하지 말 것이오.”라고 하였다. 이는 고보로 고치지 않고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모페트 교장이 이처럼 폐교를 각오하고 반대하자, 총독부는 드디어 손을 들고 이른바 지정학교(指定學校)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이때 장로교측 학교들은 일대 수난기를 맞았다. 그 당시 교도의 자제들도 감리교계의 고등보통학교와 관공립학교로 입학하는 학생이 많았으므로 장로교측에는 중등학교 수가 줄어들었고, 중등 정도로 유지해 오던 학교들도 잡종학교로 그 명맥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런 잡종중등학교 졸업생은 전문학교에 본과생(本科生)으로 입학할 자격이 없었고, 오직 별과성(別科性)이라는 차별대우를 받게 되었다. 이런 차별대우는 조선교육령 제27조에 “전문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자는 연령 16세 이상으로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자, 또는 이와 동등 이상의 학력을 가진 자로 한다.”고 규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신성학교(信聖學校)에서는 선교사 배척, 경신학교(儆新學校)와 숭실학교에서는 한국인 무자격 교사 배척 같은 일도 일어났다. 이것은 총독부 학무국이 소위 지정·인가라는 잡종학교 명목으로 특히 장로교 계통의 사학에 압박을 가한 결과로서, 상급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총독부가 인정하는 학교로 승격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다고 이들 학교의 학생들이 친일이나 일본식 교육을 결코 찬동한 것은 아니었다. 이에 장로교파의 함흥 영생여학교(永生女學校)는 1929년에 여자고등보통학교로, 영생학교는 1931년에 고등보통학교로 승격하였다. 그러나 숭실학교는 끝까지 버티었다. 한편, 대학부는 일제의 전문학교규칙(專門學校規則)에 의해 1925년에 재단법인 설립 인가를 얻어 전문학교로 출발했지만 날로 심해지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인하여 1937년 10월 숭실전문학교를 비롯한 그 나머지 북장로계(北長老系) 남녀 중학교 10개 학교와 남장로파 중학교 2개 학교, 초등학교 8개 학교는 총독부에 학교 폐교원을 제출하였다. 이 때 평양의 숭전·숭중·숭의여중 등 3숭(三崇) 폐교에 직면하게 되자, 이를 몹시 애석하게 생각하여 사회적으로 구명운동이 일어났다. 누구보다도 안타깝게 살려 보려고 애쓴 이들은 이 학교 교우회(校友會)와 학교 관련자들이었다. 이들은 모교를 존속시켜 달라고 선교 당국에 대표를 파견해서 간절히 호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교 당국은 존속 경영을 단념하고 숭실전문학교 이사 고한규(高漢奎) 장로를 청하여 자신들은 존속 경영할 의사가 없으니, 고장노가 맡아서 한국 형제들이 경영할 수 있게 하라고 하였다. 고장로는 동지(同志) 오윤선(吳胤善), 조만식(曺晩植), 김동원(金東元) 등과 상의하고 후계자를 물색케 하였다. 제1차로 조선일보사 사장 방응모(方應模)가 숭전(崇專)·숭중(崇中)을 합동 경영하고자 하였으나, 숭중 교장 정두현(鄭斗鉉)과 재단측 이춘섭(李春燮)이 숭실중학만 분리 경영할 것을 고집하므로 성사되지 못하였다. 제2차로 평양 기림리(箕林里)에 거주하는 한인보(韓仁輔)가 숭전만 분리 경영한다고 하여 도(道) 주최로 이(李)·한(韓) 양씨의 찬하회(攢賀會)까지 하였으나, 결국은 수포로 돌아갔다. 제3차는 1937년 가을에 서울 대동광업주식회사(大同鑛業株式會社) 사장 이종만(李鍾萬)이 1백20만 원의 재단으로 숭전만을 인계하기로 승낙하였으므로, 교수회 대표 문과 과장 우호익(禹浩翊), 이사회 대표 고한규(高漢奎), 교우회 대표 김취성(金聚成) 등 3인이 상경하여 이종만과 만나 악수한 채 환희의 눈물을 금치 못하였다. 그리고 모(某) 요정에 서울 각계 유지들을 초대하여 피로연까지 베풀어 가며 환담을 나누었다. 이 소식을 들은 총독부 당국은 숭전 인계를 거부하고 대동공전(大同工專)으로 출발하게 하였다. 그러자 숭전은 구명운동을 단념하고, 폭악한 일제 탄압하에 40여 년의 역사를 남긴 채 1938년 3월 31일 자매교 숭의여중(崇義女中)과 함께 3숭은 폐교의 고배를 마시게 되었다. 이는 총독부가 어떠한 이유를 붙여서라도 3숭을 계속하지 못하게 하려는 악정임에 틀림없었다. 이로써 숭실전문학교, 숭실중학교, 그리고 같은 계열의 숭의여학교 등 이른바 3숭의 학원들이 자진 폐교하고 문을 닫고 말았다. 이로써 평양에서 사학의 명문이요 많은 선각자를 길러냈으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던 숭실학교가 민족의 설움 안은 채 교육활동을 끝냈다. 이 학교는 서북지방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 신문화 섭취의 선각자적인 지도자를 많이 길러냈다. 그 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숭실 관계자들은 전부 남하하여 서울에서 모교를 재건하게 되었다. 숭실 중·고등학교는 박하성(朴夏成)이 희사한 재단으로 1953년 5월 문교부의 인가를 얻어 개교하였으나, 실은 1948년 9월에 신당동에서 학교의 문을 열었고, 숭실대학 역시 박하성이 기증한 재단으로 1954년 4월에 문교부의 인가를 얻어 개교하였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의해 자진 폐교했던 숭실이 17년 만에 다시 부활된 것이다. ====================     시대 현대 위치 서울특별시 은평구 신사2동 300-88 설립 1897년 10월 성격 중등교육기관 유형 단체 설립자 배위량(裵緯良, W. M. Baird) 분야 교육/교육 요약 서울특별시 은평구 신사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 목차 접기 연원 및 변천 기능과 역할 현황 숭실고등학교 서울시 은평구 신사동에 있는 사립고등학교. 1897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배위량이 평양 신양리 자신의 집에서 학당을 개설한 것이 그 시초이다. 연원 및 변천 1897년 10월 선교 활동을 하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배위량(裵緯良, W. M. Baird)이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중등교육을 실시하기 위해서 평안남도 평양 신양리 자신의 집에서 학당으로 문을 열었다. 입학 연령에 제한을 두지 않아 16세에서 36세까지의 학생 13명으로 출발하였으며, 이듬해에는 60명이 지원하여 18명을 선발하였다. 1900년 수업연한을 5년으로 하고 초등교육을 마친 사람을 입학 대상으로 하였다. 초기에는 성경·한문·산수·역사·음악 등을 가르쳤으나 1900년경부터 조선어·음악·수학·위생학·미술·체조·식물학·성경·천로역경·지리 등으로 교과목을 늘려 가르쳤다. 1901년소안론(蘇安論) 선교사의 기부금으로 한식 기와로 된 2층 교사를 신축하면서 교명을 숭실학당(崇實學堂)으로 명명하였고, 1904년 제1회 졸업생 3명을 배출하였다. 그 뒤 교육열의 고조로 고등교육의 필요성이 부각됨에 따라 1906년 9월 대학부를 설치하고, 중학부는 숭실중학교, 대학부는 숭실대학이라 명하였다. 1928년 성경 과목과 종교의식을 폐지하면 고등보통학교로 인가한다는 조선총독부의 회유에 굴하지 않고 계속 기독교 교육을 실시하다 진학 및 취직에 제한을 받게 되는 지정학교(指定學校)로 격하되었다. 1930년대 중반 이후부터 계속된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다가 1938년 3월평양의 숭실전문학교·숭의고등여학교와 함께 자진해서 폐교함에 따라, 33회 1,257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뒤 개교 41년 만에 문을 닫게 되었다. 광복과 함께 졸업생을 중심으로 학교의 재건을 추진하여 1948년 9월서울시 성동구 신당동에서 학생 52명, 교원 7명의 숭실중학교로 재개교하였다. 1953년서울 중구 회현동에 있던 성도교회로 교사를 이전하였다가, 이듬해 4월 3학급의 숭실고등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아 서울 용산구 용산동으로 이전하였다. 1975년서울시 은평구 신사동 현재의 위치에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으며, 1982년 도서관을 개관하고, 1999년 백주년 기념관을 준공하였다. 2002년 5층 규모의 정보센터를 개관하고, 2005년 2월 사이버스쿨을 개강하였다. 기능과 역할 개화기에 설립되어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지방의 근대 중등교육에 큰 몫을 담당하였고, ‘진실 숭상’을 의미하는 교명 ‘숭실’의 정신대로 을사조약 체결되자 반대시위를 벌였다. 일제강점기에는 105인사건, 3·1운동, 광주학생운동, 신사참배 거부 등 항일운동과 구국운동에 앞장서 105인사건에서는 졸업생인 차이석·변인서·곽태종·김두화·길진형·윤원삼·안세환 등이 검거되어 대거 실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현황 2010년 현재 42학급에 총 1,500여 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고, 교직원은 95명이 재직하고 있다. 교훈은 ‘참과 사랑에 사는 사명인’이다. 건학이념인 민족정신과 기독교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진리탐구·봉사정신·자유구현’의 실천에 힘쓰고 있으며, 신앙과 영적 수월성, 인간교육의 수월성, 지적 수월성을 지향하고 있다. 현재 선교부·미술반·서예반·합창부 등의 동아리를 중심으로 계발활동이 이루어지고 있고, 운동부는 1911년에 창단된 축구부가 있다. 1997년 개교 10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고, 1997년, 1999년, 2001년 학교평가 우수학교에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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