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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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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윤동주와 윤석중 댓글:  조회:3764  추천:0  2018-07-18
  시대 현대 출생 1911년 5월 25일 사망 2003년 경력 새싹회 회장 유형 인물 직업, 이름 아동문학가 - 윤석중 대표작 『윤석중동요집』, 『잃어버린 댕기』, 『어깨동무』, 『굴렁쇠』 성별 남 분야 문학/현대문학 본관 파평 요약 1911∼2003. 아동문학가. 목차 개설 생애 활동사항 상훈과 추모 개설 아명 노마, 호 석동(石童). 1911년 5월 25일 서울 중구 수표동 13번지에서 윤덕병과 조덕희의 여덟째로 태어났으나 형제들이 일찍 죽어 독자로 살았다. 1921년교동보통학교에 입학하고 1925년양정고등보통학교 입학했다가, 1929년 광주학생의거가 발발하자 자퇴하였다. 1939년 『조선일보』 장학생으로 뽑혀서 일본 조치(上智)대학 신문학과에 유학하여 1941년 졸업하였다. 박용실과의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 생애 1923년 보통학교에 재학하던 중 심재영, 설정식 등과 소년문예단체 꽃밭사를 결성하고 동인지 『꽃밭』을 발간했으며, 1924년소용수, 이원수, 이성홍, 신고송, 서덕출, 최순애, 이정구, 윤복진, 최경화 등과 글벗사를 만들어 동인지 『굴렁쇠』를 발간하며 일찍부터 소년문예운동을 일으켰다. 그는 1933년 『어린이』 주간, 1934년 『소년주간』 주간, 1945년 『주간 소학생』 주간, 1955년 『조선일보』 편집 고문 등을 거치면서 동요의 창작과 보급에 일생을 바쳐 ‘한국 동요의 아버지’로 불린다. 활동사항 그는 13세의 나이로 『신소년』에 동요 「봄」이 입산되고, 192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극 「올빼미의 눈」이 선외가작으로 뽑힌 다음, 같은 해 『어린이』에 동요 「오뚝이」가 입선되었으며, 1926년 「조선물산장려가」가 당선되면서 천재소년예술가로 불렸다. 그는 작품의 소재를 어린이들의 일상과 자연에서 찾았다. 그의 동요 세계는 4·4조나 7·5조의 형태에 반복과 대구를 사용하던 초기의 정형동요에서 시적 동요로 나아갔고, 낙천주의적 정서를 기반으로 어린이들의 밝고 긍정적인 장면을 포착하여 형상화한 특징을 보였다. 그는 1956년 1월 3일조풍연, 피천득, 어효선, 홍웅선 등과 새싹회를 창립하여 어린이문화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1957년 소파상을 제정하고, 1961년 장한 어머니상 제정했으며, 1964년 마해송의 문학 세계를 기리는 해송문학상을 제정하였다. 1967년 한국문인협회 아동문학분과 위원장을 맡았고, 1969년에는 전국 30여 개 초등학교의 교가를 지어주었다. 그는 1974년 방송용어심의위원장과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고문, 1977년 『새싹문학』과 『한글나라』 주간을 지냈다. 그는 1978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1979년 방송윤리위원장, 1981년부터 1984년까지 초대 방송위원장, 1986년 대한민국 예술원 원로회원, 1997년 마해송문학비건립위원장 등을 역임하는 등, 다방면에 걸쳐 혁혁한 공적을 세우고 2003년 대전 국립현충원 국가사회봉헌자묘역에 안장되었다. 2005년부터 새싹회에서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는 윤석중문학상을 제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주요 작품집으로 동요집 『윤석중동요집』(1932), 『잃어버린 댕기』(1933), 『어깨동무』(1940), 『새벽달』(1943), 『초생달』(1946), 『굴렁쇠』(1948), 『아침까치』(1950), 『윤석중 동요 100곡』(1954), 『노래동산』(1956), 『노래선물』(1957), 『엄마손』(1960), 『윤석중동요집』(1963), 『해바라기 꽃시계』(1966), 『카네이션 엄마꽃』(1967), 『꽃길』(1968), 『윤석중 노래동산』(1971), 『윤석중 동요 525곡집』(1980), 『아기꿈』(1987), 『윤석중전집 (1-30)』(1988), 동요동시집 『여든 살 먹은 아이』(1990), 『그 얼마나 고마우냐』(1994), 『반갑구나 반가워』(1995), 『깊은 산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1999), 동화집 『열손가락 이야기』(1977), 『열두 대문』(1985), 아흔 기념 문집 『내일도 부르는 노래』(2000) 등이 있고, 기간 작품들은 『윤석중전집 (1-30)』에 집성되어 있음. 상훈과 추모 3·1문화상(1961), 문화훈장 국민장(1966), 외솔상(1973), 리몬 막사이사이상(1978), 대한민국 문학상(1982), 세종문화상(1983), 대한민국예술원상(1989), KBS동요대상(1990), 인촌상(1992) ==========================     출생 1911. 5. 25, 서울 사망 2003. 12. 9, 서울 국적 한국 요약 아동문학가. 1924년 지에 동시 으로 등단했으며 이후 전통적 정형률에서 벗어난 새로운 형태의 동시와 동요를 써서 한국의 아동문학 발전에 이바지했다. 방정환 선생의 뒤를 이어 지 주간을 맡았으며, 일생을 동요와 글짓기에 바쳤다. 대표작은 ·· 등이다.   윤석중(尹石重) 아동문학가. 1911년 서울에서 태어나 1930년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일본 조치대학[上智大學] 신문학과를 마쳤다. 1924년 에 동시 과 1925년 에 를 발표해 문단에 나왔으며, 전통적 정형률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형식 및 반복과 대구를 사용해 율동적 표현을 구사하는 동시를 개발하는 데 힘썼다. 1933년 〈어린이〉 주간, 1934년 주간, 1936년 주간을 역임했으며, 이후 편집고문, 고문, 서울시 문화위원, 한국문인협회 아동분과 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중앙대학교·성신여자대학교 등에서 강의했다. 1953년 '새싹회'를 창립해 회장에 취임했다. 1932년에 펴낸 은 한국 최초의 창작동요집이며, 여기에 실린 ·· 등이 알려져 있다. 또한 1933년에 펴낸 동시집 에는 기존의 3·4조나 7·5조의 음수율을 벗어난 동시 여러 편이 실려 있는데, 특히 그는 이 동시집을 통해 글자수를 맞추어 지은 것을 동요라 하고 자유롭게 지은 것을 동시라 하여 동시의 문학적 성격을 규정했다. 동시집으로 (1940)·(1948) 등과 동화집으로 (1966)·(1977) 등이 있다. 1961년 3·1문화상, 1979년 막사이사이상, 1982년 대한민국 문학상, 1989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22년 인촌상 등을 받았다. =======================///   한자 尹石重 영어음역 Yun Seokjung 이칭/별칭 석동(石童),노래 나그네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율목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이해준 [상세정보] [정의] 충청남도 서산이 원적인 근현대 아동문학가. [가계] 본관은 파평. 호는 석동(石童). 아버지는 사회운동가이자 노동운동가인 윤덕병[1885~1950]이고 어머니는 조덕희다. 부인은 박용실이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원적은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율목리다. [활동 사항] 윤석중(尹石重)[1911~2003]은 서울 중구 수표동에서 윤덕병과 조덕희의 여덟째 자녀로 태어났다. 두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형제들도 일찍 죽어 외할머니 밑에서 외롭게 자랐다. 그래서 이름도 돌처럼 무거워 ‘날아가지 말라’는 의미에서 석중(石重)으로 지었다고 한다. 외로운 환경 탓에 일찍 자아에 눈을 떴고, 유년 시절 풀지 못한 수많은 의문이 훗날 어린이를 위한 시를 짓고 문화 운동을 펼치는 자양분이 되었다. 윤석중은 1921년 열 살에 교동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초등 교과서에 실린 일본 노래 「봄이 왔다[春が来た]」에서 모티프를 얻어 우리말로 된 시 「봄」을 썼다. 이 시가 『신소년』에 실려 일찍이 문학적 소질을 인정받았다. 1923년 심재영(沈在英)과 『꽃밭』이라는 등사판 잡지를 창간하였다. 심재영은 소설 「상록수」를 쓴 심훈(沈熏)의 조카이다. 1925년에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그해 『어린이』 잡지에 「오뚝이」가 입선되어 작품이 처음으로 활자화되었다. 같은 해 8월 동인회 기쁨사를 만들어 등사판 잡지 『기쁨』을 1년에 네 차례 출간하고, 『굴렁쇠』라는 회람 잡지도 만들어 동인들끼리 돌려 보았다. 『굴렁쇠』는 두꺼운 표지에 ‘회람 잡지 굴렁쇠’라 쓰고 회원들이 지은 동요와 글동무들에게 알릴 내용을 편지 형식으로 넣어서 편집하였다. 같은 해 11월부터 『어린이』의 부록인 『어린이 세상』을 맡아 꾸렸다. 그 인연으로 ‘개벽사’에 드나들게 되었고, 이때부터 방정환(方定煥) 등과 함께 일을 하였다. 이후 한층 왕성하게 창작 활동을 하였다. 1929년 11월 광주 학생 운동이 일어났다. 윤석중은 여기에 동참하지 못한 것을 자책하여 졸업이 며칠 안 남은 시점에서 5년 동안 다닌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자퇴하고 말았다. 이듬해 짧게 일본 유학을 다녀왔다. 1932년 7월 첫 창작 동요집인 『윤석중 동요집』을 출간하였다. 1933년 35편의 동시를 실은 최초의 동시집 『잃어버린 댕기』를 발간하고, 방정환을 대신하여 『어린이』 잡지의 주간이 되었다. 1935년에 황해도 사리원에 사는 박용실과 혼인을 하였다. 결혼식 주례는 독립운동가이자 훗날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든 여운형(呂運亨)이 섰다. 1936년에는 조선일보사로 옮겨 어린이 잡지 『소년』의 편집을 맡았다. 국내 최초의 그림 잡지 『유년』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1939년 다시 일본으로 가 동경 상지대학 신문학과에서 수학한 후, 벨기에인 고라르 신부를 도와 우리말 잡지 『빛』을 발간하였다. 해방 이듬해 우리나라 최초의 주간지인 『주간 소학생』을 창간하고 「어린이날 노래」를 지었다. 졸업식에서 불리는 「졸업식 노래」도 윤석중의 작품이다. 가사 중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라는 부분은 마음의 꽃다발을 생각하며 쓴 것인데, 이후 졸업식장에 그렇게 많은 꽃다발이 등장할 줄 몰랐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한편 윤석중은 1950년 6·25 전쟁 때 아버지와 새어머니, 이복동생을 모두 잃었다. 또다시 가족을 잃은 아픔을 겪은 그는 이듬해 윤석중 아동연구소를 차리고 두 차례에 걸쳐 어린이를 대상으로 ‘내가 겪은 이번 전쟁’이란 주제의 글을 모아서 책을 펴냈다. 어린이의 글을 통해 전쟁의 아픔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1954년에는 윤석중 아동연구소의 이름을 새싹회로 바꿔 새로 창립하고 합창단과 합주단, 글짓기 교실 등 어린이를 위한 여러 조직을 만들었다. 1957년에는 소파상을 제정하고 『새싹문학』을 창간하였다. 이 책은 2011년 현재 115호까지 발행되었다. 윤석중은 스스로를 ‘노래 나그네’라고 부르며 어린이를 위한 삶을 살다가 2003년 12월 9일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작품과 저술] 윤석중의 작품 활동과 저술, 그리고 관련 활동은 매우 방대하다. 일생동안 1,300여 편의 시를 썼고, 이 가운데 800여 편이 동요로 만들어져 불리었다. 전국 30여 학교의 교가를 짓기도 하였다. 대표작으로 「새신」, 「똑같아요」, 「옹달샘」, 「나란히」, 「기찻길 옆」, 「집 보는 아기」, 「어린이날 노래」, 「졸업식 노래」 등이 있다. [묘소] 묘소는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봉헌자 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78년 동양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언론 문학창작상]을 수상하였다. 윤석중은 수상 소감에서 “어린이는 나의 스승이다. 동심은 국경이 없으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동물이나 목석하고도 자유자재로 정을 나누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마음.”이라는 말로 평생 품어 온 어린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또한 그의 업적을 기리는 윤석중 문학제가 해미읍성과, 서산 호수공원 일원에서 매년 개최되고 있다. ======================윤석중 동시 "넉 점 반" 윤석중 시인이 1940년에 발표한 〈넉 점 반〉이라는 동시가 있습니다. 부잣집에나 시계가 있던 시절에 엄마가 아이에게 가겟집에 가서 시간을 알아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던 모양입니다. 과연 아이는 엄마 심부름을 잘 완수할 수 있을까요? 아기가 아기가 가겟집에 가서 “영감님 영감님 엄마가 시방 몇 시냐구요.” “넉 점 반이다.” “넉 점 반 넉 점 반.” 아기는 오다가 물 먹는 닭 한참 서서 구경하고, “넉 점 반 넉 점 반.” 아기는 오다가 개미 거둥 한참 앉아 구경하고. “넉 점 반 넉 점 반.” 아기는 오다가 잠자리 따라 한참 돌아다니고. “넉 점 반 넉 점 반.” 아기는 오다가 분꽃 따 물고 니나니 나니나 해가 꼴딱 져 돌아왔다. “엄마 시방 넉 점 반이래.” - 윤석중, 〈넉 점 반〉 절로 미소 짓게 하는 예쁜 동시입니다. 가겟집에 가서 시간을 알아오긴 했으나, 곧장 집으로 오지 않고 여기 저기 기웃기웃 닭 구경하고, 개미 구경하고, 잠자리 따라 돌아다니고, 분꽃 물고 놀고, 그러면서도 엄마 심부름은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계속 “넉 점 반, 넉 점 반” 합니다. 그리곤, 해가 꼴딱 져 돌아와서는 당당하게 말하지요. 인용문 엄마, 시방 넉 점 반이래 아이에게 시방은 지금도 시방이고, 아까도 시방입니다. 그러니, 계속 넉 점 반일 수밖에요. 그런데 넉 점 반은 도대체 몇 시일까요? 그리고 아이는 대략 몇 시간 동안 해찰하며 돌아다녔을까요? 넉 점 반은 4시 반이라는 뜻입니다. 옛날에는 시간을 표시하는 표시로 ‘점’을 사용했는데 구체적으로는 괘종시계가 종을 치는 횟수를 뜻했습니다. 아이가 가겟집에 가서 몇 시냐고 물어봤을 때 시간은 4시 반. 잠자리 따라 돌아다니고, 분꽃 따 물고 니나니 나니나 했다는걸 보니까 계절은 여름. 그리고 여름에는 대략 8시가 넘어야 해가 꼴딱 지니까, 네 시간 가량 놀다 돌아왔다는 이야기인데요. 지금 몇 신지 알아오라고 심부름 보낸 아이가 저녁 여덟 시 넘어 돌아와서는 천연덕스럽게 “엄마, 지금 네 시 반이래.” 하는 모습을 보고 엄마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요. 가슴 따뜻한 한 편의 동화 같은 윤석중 시인의 〈넉 점 반〉, 우리에게도 그처럼 지금이 몇 시인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지요.  
4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자화상 댓글:  조회:5188  추천:0  2018-07-18
자화상 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어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속 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서사시인이 있고, 서정시인이 있으며, 그 다음에는 이름뿐인 삼류 시인들이 있다. 서사시인은 장중하고 울림이 큰 문체로 전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시인이고, 서정시인은 자기 자신의 구원을 통해 만인들의 심금을 사로잡는 시인이며, 그리고 이름뿐인 삼류 시인들은 시인이라는 이름으로만 존재하며, 영혼이 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호머와 단테와도 같은 서사시인은 매우 드물고, 보들레르와 랭보와도 같은 서정시인은 매우 많으며----비교적 드물지 않으며----, 이름뿐인 삼류 시인들은 밤하늘의 별들처럼 그 숫자를 헤아릴 수가 없다. 윤동주 시인은 서정시인이며, 자아의 완성을 그 목표로 하고 있다. 자아의 형성사가 세계의 발전사와 그 보조를 맞추고, 따라서 이처럼 피눈물 나는 수행의 모습은 대 서정시인의 그것과도 똑같다. 시인은 순교자이고, 고행자이며, 그의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는 삶은 예술품 그 자체와도 같다. 시는 시인의 예술품이고,예술품은 시인의 얼굴과도 같다. 순교, 혹은 고행의 과정은 애정과 혐오, 혹은 자기 사랑과 자기 학대의 왕복운동과도 같다.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은 국보급 [자화상]이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야 할 최고급의 서정시라고 할 수가 있다.   한 사나이는 이상적인‘나’일 수도 있고, 한 사나이는 현실적인‘나’일 수도 있고, 우물 밖의‘나’는 그‘나’를 비판하고 성찰할 수 있는 심판관으로서의‘나’일 수도 있다. 산모퉁이 외딴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쳐지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다. 가을은 맑고 청아하고, 가을은 아름답고 풍요로운 오곡백과의 계절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우물 속의 한 사나이는 그만큼 초라하고 볼품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고귀하고 위대한 서정시인이라는 월계관을 쓰지 못하고, 이미 자포자기했거나 반쯤은 전의를 상실한 존재에 지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서정시인은 인간 중의 인간이며, 그는 자기 자신의 언어의 소유권을 통해서 전체 인류를 지배하는 문화적 영웅이라고 할 수가 있다. 서정시인의 길은 멀고 험하며, 서정시인의 길은 이미 그 실체가 없거나 불가능한 길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고귀하고 위대한 이상에 비추어 보면, 우물 속의‘나’는 더없이 비천하고 초라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애정과 자기 사랑은 중단없는 전진을 좋아하고, 혐오와 자기 학대는 진퇴양난의 어려움이나 패배와의 관련이 있다.   모든 꿈은 불가능한 꿈이고, 불가능한 꿈은 애정과 혐오, 혹은 자기 사랑과 자기 학대 사이를 왕복운동하게 한다. 따라서“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여워”지는데, 왜냐하면 그 이상은 다만 이상일뿐, 결코 현실화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나 열 번, 백번 다시 생각해 보아도 초라한 사나이는 초라한 사나이일 뿐, 나의 이상적인 존재일 수가 없다.“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라는 시구는 애정과 혐오, 혹은 자기 사랑과 자기 학대의 진수라고 할 수가 있다. 시인도 고행자이고, 순교자도 고행자이다. 고행은 너무나도 인간적인 인간의 모습이며, 이 고행의 언어는 만국의 공통언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 중에는 폭풍을 몰고 오는 말도 있고, 말 중에는 소리가 되지 못한 말도 있다. 폭풍을 몰고 오는 말은 가짜 혁명의 말일 수도 있고, 소리가 되지 못한 말이 진짜 혁명의 말이 될 수도 있다. 혁명은 새로운 언어이며, 혁명은 새로운 세계이다.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의 언어는 조용조용하고 소리가 되지 못한 독백의 언어에 지나지 않지만, 그러나 이처럼 전면적인 반성과 성찰의 언어가 만인들의 심금을 사로잡고 더욱더 넓고 크게, 멀리 멀리 퍼져나간다.   자화상이 자화상을 짓밟고, 자화상이 자화상의 목을 비틀며, 자화상이 자화상의 최종 단계에서 그 아름다운 날개를 펼쳐보인다.   아름답고 멋진 자화상이며, 국보급의 자화상이고,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야 할 최고급의 서정시이다.     ...   =====================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追憶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가 1939년 9월에 쓴 이다. 1939년이라면 그가 23세 때이고, 연희전문 2학년이었던 시절이다.   시 속의 우물은 어디일까. 이 우물이 어디냐를 두고 사람들은 의견을 달리한다. 예전에는 만주 용정 인근의 명동(明東: '동쪽=조선을 밝게 만들자'는 뜻에서 마을사람들이 붙인 동명) 소재 윤동주의 고향집에 있는 '물맛 좋던 수십 길 깊이의 우물'이 바로 속의 우물이라고 믿어왔다. 그런데 연세대 유영 교수가 '명동집의 우물은 수십 길이나 되는 깊은 우물인데 그 안에 대고 소리를 치면 우물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그렇게 깊은 우물에서는 얼굴을 비춰볼 수가 없다'면서 이 쓰인 시기가 동주가 서소문에서 하숙하던 때이고, 그 하숙집 인근에 우물이 있었으니 바로 그 우물이 시 속의 우물이라고 주장한 이래 우물의 소재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해졌다.   그러나 시를 곰곰 읽어보면 윤동주가 우물 안을 들여다보는 때는 낮이 아니라 밤이다. 우물 안에 달이 있으니 응당 밤이다. 그렇다면 그 우물의 깊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차피 달이 떠 있는 우물은 없으니까 말이다. 생각이 이렇게 흐르면, 달만이 아니라 우물 안을 들여다보는 사나이(=나)도 물에 얼굴이 비칠 리가 없다. 칠흑같이 캄캄한 밤에, 그것도 우물 물에 무슨 얼굴이 비치랴. 우물이 고향집의 것이냐, 서소문 하숙집 근처의 것이냐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물은 용정 명동도 서소문도 아닌, 대도시도 농촌마을도 아닌, 심지어 산 아래나 비탈도 아닌, '산모퉁이를 돌아'가야 하는 곳에 있다. 사람들이 모여사는 마을에서는 보이지도 않는 곳이라는 뜻이다. '마을 가'나 '동구(洞口)'도 아닌 '논가'에 있는 우물이니 말이다.  그런 우물에, 사나이는 지금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 안에 있다. '홀로' 찾아갔으니 물론 '홀로' 있다.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쳐져 있고 파아란 바람도 우물 위로 불고 가을도 한창이지만, '어쩐찌' 쓸쓸하다. 그 아름다운 자연도 하나같이 쓸쓸하다. 달, 구름, 하늘, 바람, 가을, 이 모든 것이 말이다. 사나이가 '홀로' '외딴' 곳에서 우물 안을 들여다보는 이 캄캄한 밤 , 그 우물에 비친 것들이 어찌 쓸쓸하지 않으랴.   그 쓸쓸함에 젖어 있는 사나이가 윤동주는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밉다.' 그래서 그를 떠나는데, 조금 지나니 그가  '가엾다.' 가여운 고독자를 그냥 버리고 갈 수는 없어 그의 곁으로 돌아가지만, 그가 여전히 '홀로' 있는 걸 보니 다시 '밉다.' 재차 그를 떠나 가다말고 '생각하니' 이제는 그가 '그립다.' 그도 혼자이고, 나도 혼자이니 어찌 그립지 않을까. 동병상련이다. 예나지금이나 변하지 못하는 채 여전히 '홀로' ('사나이'는 '한' 사나이이다.) 존재하는 사나이를 '홀로' 찾아간 '나'의 마음은 애증(愛憎)으로 뒤범벅이 되는 것이다.   나는 내가 밉다. 낮이 아닌 밤에, 세상이 아닌 우물 속에, 해가 아닌 달과 함께, 강건하고 견고한 모습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광활한 하늘을 이리저리 흐르는 구름이나 파아란 바람처럼, 낙엽이 뚝뚝 떨어지는 가을처럼, '홀로' 갇혀있는 내가 밉다. '어쩐지' 밉다. 그러나 그가 바로 나 스스로이니, 가엾기도 하다. 그래서 스스로를 껴안기도 하지만, 문득 미운 마음은 다시 소용돌이를 친다. 나 자신을 벗어나고 싶다. 스스로를 떠난다. 그러나 나 자신이 그립기도 하다. 밉고, 가엽고, 또 밉고, 그립고, 그렇게 애증으로 뒤범벅된 존재가 바 로 나 자신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추억(追憶)이다. 어쩐지 미운 것이 나 자신이고, 생각해보면 가여운 것이 나 자신이고, 돌이켜보면 미운 것이 나 자신이고, 다시 생각해보면 그리운 것이 나 자신이니, 나는 영원한 추억의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追憶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이 마지막 구절의 여운이 독자를 사로잡는다. 그것이 여운(餘韻)이다. 의 끝 구절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와 마찬가지이다. 피천득의 수필 이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로 끝나는 것도 같은 방식의 끝맺음이다.    이와 같이, 사람의 생애는 하루하루가 나날이 여운을 품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는 행복하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우는 것을 바라보며 추억처럼 잠에 빠져들면서, 내일 하루가 아름다울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는 삶, 그렇게 사는 그가 어찌 행복하지 않으리.   다 쓰고 나니, 추억처럼 윤동주의 생가가 떠오르고, 노트북 앞에 나는 추억처럼 앉아 있다!                         (사진) 만주에 있는 명동교회 건물. 용정 일대에 최초로 건립되었던 교회인 이 명동교회는                       윤동주 생가 바로옆에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다. 현재는 윤동주 생가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명동 일대의 역사(독립운동 등)를 해설하는 역사관으로 쓰이고 있다...             핵심 정리 [이 작품은] 우물을 들여다보는 행위를 통해, 일제 강점기를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성찰하고자 하는 의지를 노래하고 있다.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성격 : 성찰적, 고백적 *제재 : 우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 *주제 : 자아 성찰과 자신에 대한 애증(愛憎) *특징 ① 평이한 구어체를 사용하여 산문적으로 진술함. ② 시상 전개에 따라 화자의 심리가 분명한 변화를 보임. *출전 : “문우”(1941) 작품의 구성 [1연] 우물을 찾아가 자아를 성찰함. [2연] 우물 속의 평화로운 풍경 [3연] 초라한 자아에 대한 부끄러움 [4연] 자아에 대한 연민 [5연] 자아에 대한 미움과 그리움 [6연] 추억 속 자아에 대한 그리움 이해와 감상 이 시는 화자가 우물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을 성찰하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모든 문장을 ‘-ㅂ니다’로 끝내는 평이한 구어체를 사용하여 산문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시에서 우물은 화자 자신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거울과 같은 기능을 하고 있는데, 이 우물에는 화자의 모습만이 아니라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있’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도 담겨 있다. 우물에 비친 ‘사나이’는 우물에 비친 화자 자신이라고 볼 수 있는데, 화자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우물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화자의 이러한 부끄러움은 암담했던 시대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로 볼 수 있다. 화자는 우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미워져 돌아가고, 돌아가다 보니 가여움이 생겨 다시 들여다보고, 또 미워져 돌아가고, 다시 그리워지는 심리적 갈등을 보인다. 이는 우물에 비친 자신의 현재 모습이 만족스럽지 못한 데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마지막 연에서는 2연의 장면을 되풀이하면서 시적 안정감과 균형감을 얻고 있으며, 평화로운 자연의 모습과 함께 순수했던 자신의 과거 모습을 추억하면서 자기혐오에서 비롯된 내적 갈등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작품 연구실 이 시의 화자와 ‘사나이’의 관계는? ‘사나이’는 우물에 비친 화자 자신으로, 때로는 밉지만 때로는 가엾거나 그리워지는 대상이 된다. 여기에서 화자를 ‘사나이’를 바라보는 주체로서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반성적 자아라고 한다면, ‘사나이’는 성찰의 대상으로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현실적 자아라고 볼 수 있다. ‘우물’의 기능   이 시에서 ‘우물’은 자신을 비춰 볼 수 있는 대상으로서 거울과 같은 기능을 한다. 화자는 우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성찰하며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다. 즉, 우물은 화자에게 현실 속의 부끄러운 자기 모습을 확인시켜 줌으로써 자아 성찰에 이르도록 하는 매개체로, 화자는 우물을 통해 내적 갈등을 해소하고 있다. 시대 상황과 연관된 화자의 정서 및 태도 변화   작품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할 때, 일제 강점기라는 부정적 현실 상황에서 화자는 현실과 타협, 안주하려는 자신의 태도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이를 혐오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다 그런 나약한 자신의 모습에 연민의 정서를 느끼고, 다시 미워했다가 순수했던 과거 자신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태도로 나아가고 있다. 이와 같이 자신에 대한 애증을 반복하던 화자는 마지막에서 과거의 순수했던 자신의 모습에 대한 추억을 통해 내적 갈등을 해소하고자 한다. 연민과 미움의 이중 감정 화자가 우물을 통해 달과 구름, 하늘을 반복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자연의 조화로운 질서를 지상에 옮겨 놓고 싶은 욕망의 다른 표현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자신이 소극적인 자세로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자기혐오에 빠진다. 그래서 ‘미워져 돌아가고’,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을 ‘가엾게’ 여기며 되돌아오는, 연민과 미움의 이중적인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성찰의 과정에는 자기에 대한 미움과 연민이 필연적으로 동반되기 마련이다. 이는 부끄러움과 거의 같은 자리에 있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반성과 내면 성찰의 시인 윤동주의 시 세계 전반을 지배하는 반성과 성찰의 목소리는 가장 기초적이며 근원적인 사색의 형식이다. 이는 윤리적인 존재가 되려는 의지를 표방하는 인간에게 존재의 기반이 되기도 한다. 더구나 윤리의 궁극적인 목표가 최고선(最高善)의 실현에 있다고 할 때 윤동주의 반성과 성찰은 나약한 자기 위로나 달램이 아닌 철저한 자기 수양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 소개 - 윤동주(尹東柱, 1917 ~ 1945) 시인. 북간도 출생. 일본 도시샤 대학 영문과에 재학 중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이듬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1941년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19편의 시를 묶은 자선 시집(自選詩集)을 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가 자필로 3부를 남긴 것이 사후에 햇빛을 보게 되어, 1948년에 유고 30편이 실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간행되었다. 주로 1938~1941년에 쓰인 그의 시에는 불안과 고독과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과 용기로 현실을 돌파하려는 강인한 정신이 표출되어 있다. 작품으로 ‘자화상’(1939), ‘또 다른 고향’(1948) 등이 있다. 함께 읽어보기 ‘자화상’, 서정주/자아 성찰의 태도 윤동주의 ‘자화상’과 서정주의 ‘자화상’ 모두 자신의 삶을 성찰하면서 내면을 고백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하지만 윤동주의 ‘자화상’이 ‘부끄러움’과 ‘내적 화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서정주의 ‘자화상’은 ‘치열한 삶의 과정에 대한 회고’와 ‘강인한 삶의 의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   참회록(윤동주)과 자화상(윤동주)의 작품 설명 [‘자아 성찰’을 주제로 한 작품] 윤동주의 ‘자화상’은 우물을 자아 성찰의 매개체로 하여 둘로 양분된 자아가 부정과 긍정을 거듭하다가 화합에 이르는 내용을 그린 작품이다. ‘참회록’과 ‘자화상’은 자아를 비춰 볼 수 있는 대상인 ‘구리거울’과 ‘우물’을 매개로 하여 ‘자아 성찰’이라는 주제 의식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하지만 ‘참회록’의 화자가 과거에서 현재까지의 삶을 반성하고 암울한 현실에 맞서는 미래의 자신의 모습을 전망하고 있는 반면에, ‘자화상’의 화자는 우물을 매개로 순수했던 과거의 모습을 발견하고 자신과의 화해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참회록(윤동주)과 자화상(윤동주)의 핵심 정리   참회록 자화상 갈래 자유시, 서정시 자유시, 서정시 성격 자기 성찰적, 고백적, 상징적 성찰적, 고백적 제재 구리거울, 부끄러운 자기 삶의 참회 우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 주제 자기 성찰을 통한 순결성 추구, 현실 극복 의지 자아 성찰과 자신에 대한 애증(愛憎) 특징 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상을 전개함. ② 구리거울을 매개로 치열한 자기 성찰의 모습을 보여 줌. ① 평이한 구어체를 사용하여 산문적으로 진술함. ② 시상 전개에 따라 화자의 심리가 분명한 변화를 보임. 참회록(윤동주)과 자화상(윤동주)의 이해와 감상 참회록(윤동주) 이 시에는 어려운 시대를 살았던 시인의 삶에 대한 자세가 잘 드러나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는 이 시는 화자가 ‘과거 → 현재 → 미래’로 이어지는 자신의 삶을 차례로 참회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자화상(윤동주) 이 시는 화자가 우물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을 성찰하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모든 문장을 ‘-ㅂ니다’로 끝내는 평이한 구어체를 사용하여 산문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시에서 우물은 화자 자신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거울과 같은 기능을 하고 있는데, 이 우물에는 화자의 모습만이 아니라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있’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도 담겨 있다. 우물에 비친 ‘사나이’는 우물에 비친 화자 자신이라고 볼 수 있는데, 화자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우물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화자의 이러한 부끄러움은 암담했던 시대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로 볼 수 있다. 화자는 우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미워져 돌아가고, 돌아가다 보니 가여움이 생겨 다시 들여다보고, 또 미워져 돌아가고, 다시 그리워지는 심리적 갈등을 보인다. 이는 우물에 비친 자신의 현재 모습이 만족스럽지 못한 데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마지막에서는 앞의 장면을 되풀이하면서 시적 안정감과 균형감을 얻고 있으며, 평화로운 자연의 모습과 함께 순수했던 자신의 과거 모습을 추억하면서 자기혐오에서 비롯된 내적 갈등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   자화상(윤동주)과 자화상(서정주)의 작품 설명 [자아 성찰의 태도] 윤동주의 ‘자화상’과 서정주의 ‘자화상’ 모두 자신의 삶을 성찰하면서 내면을 고백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하지만 윤동주의 ‘자화상’이 ‘부끄러움’과 ‘내적 화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서정주의 ‘자화상’은 ‘치열한 삶의 과정에 대한 회고’와 ‘강인한 삶의 의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자화상(윤동주)과 자화상(서정주)의 핵심 정리   자화상(윤동주) 자화상(서정주) 갈래 자유시, 서정시 자유시, 서정시 성격 성찰적, 고백적 상징적, 회고적, 고백적 제재 우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 자화상 주제 자아 성찰과 자신에 대한 애증(愛憎) 지난 삶에 대한 회고와 성찰 특징 ① 평이한 구어체를 사용하여 산문적으로 진술함. ② 시상 전개에 따라 화자의 심리가 분명한 변화를 보임. ① 삶을 성찰하면서 강한 삶의 의지를 드러냄. ② 고백적 어조와 직접 서술의 형태를 취함. 자화상(윤동주)과 자화상(서정주)의 이해와 감상 자화상(윤동주) 이 시는 화자가 우물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을 성찰하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모든 문장을 ‘-ㅂ니다’로 끝내는 평이한 구어체를 사용하여 산문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시에서 우물은 화자 자신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거울과 같은 기능을 하고 있는데, 이 우물에는 화자의 모습만이 아니라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있’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도 담겨 있다. 우물에 비친 ‘사나이’는 우물에 비친 화자 자신이라고 볼 수 있는데, 화자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우물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화자의 이러한 부끄러움은 암담했던 시대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로 볼 수 있다. 화자는 우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미워져 돌아가고, 돌아가다 보니 가여움이 생겨 다시 들여다보고, 또 미워져 돌아가고, 다시 그리워지는 심리적 갈등을 보인다. 이는 우물에 비친 자신의 현재 모습이 만족스럽지 못한 데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마지막에서는 앞의 장면을 되풀이하면서 시적 안정감과 균형감을 얻고 있으며, 평화로운 자연의 모습과 함께 순수했던 자신의 과거 모습을 추억하면서 자기혐오에서 비롯된 내적 갈등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자화상(서정주) 이 시는 시인이 초기에 쓴 시로 강렬한 생명 의식과 원시적 관능성이 잘 드러나 있다. 제목 ‘자화상’이 보여 주듯 자신의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며 자아의 존재 의미를 탐구해 나가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화자는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종의 아들로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살아 왔음을 토로한다. 그리고 이런 삶을 ‘바람’에 비유한다. 이는 바람처럼 일정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뿌리 뽑힌 삶을 살아왔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화자는 자신이 살아온 삶을 후회하지 않고 극복하려는 의지를 나타낸다. 삶의 시련과 고통은 오히려 화자에게 더욱 굳세게 살아갈 힘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 힘은 찬란히 틔어 오는 아침에 그의 이마에 얹힌 ‘시의 이슬’로 나타난다.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는 ‘시의 이슬’은 삶의 고통을 이겨냄으로써 얻은 정신적 · 예술적 결정체로 볼 수 있다. ==========================///     자화상(自畵像)   ― 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의 시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참 마음이 여린 영혼의 소유자란 생각이다. 이렇게 여리디 여린 심성의 소유자를 우리는 조금은 억센 의미가 담긴 ‘저항시인’이라고 학교에서 가르쳤다. 실제 그의 시에는 어느 곳 한 군데 저항의 자세라든가, 아니면 조국광복을 생각하는 구절이 없다. 오로지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으로서 자아성찰이 돋보일 뿐이다. 그 자아성찰조차도 맑고 깨끗한 영혼으로 다가온다.   산문시처럼 쓴, 6연으로 된 이 시도 마찬가지이다. 화자는 논 가장자리에 있는 우물에 가 그 안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여기서 우물은 거울과 같은 이미지이다. 샘물이란 의미보다는 우물물 표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리라. 즉 객관적 자아성찰이다.   우물 속에는 달, 구름, 하늘, 바람 등이 아주 평온하게 그려져 있다. 이를 배경으로 한 ‘사나이’가 등장한다. 우물 안을 들여다보는 화자가 물에 비친 것으로 이는 곧 성찰된 자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모습은 밉다. 즉 평온한 배경과는 달리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이다.   문득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서고 만다. 이를 ‘자기혐오’라고 어느 평론가가 지적하는데 꼭 그렇게 심하게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가다 생각하니 사나이가 가엽다는 느낌이 든다. 앞에 것이 자기혐오라면 이는 자기연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시 가서 들여다본다. 이어 3연의 반복이 나오는데, 이는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하는, 망설임일 것이다. 돌아섰다가 다시 되돌아가 우물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시 속 화자에게는 미워하는 마음과 그리워하는 마음이 교차한다. 미워하는 대상은 현재의 내 모습이요, 그리워하는 대상은 어쩌면 내가 잘못 봤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과거의 내 모습을 상상한 것이 아닐까. 마지막 연에 나오듯이 추억에 잠기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리라.   마지막 연에서 1, 2 연을 한꺼번에 묶어 반복한다. 그러면서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다고 한다. 결국 이‘추억’은 그리움 혹은 동경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평온한 배경을 뒤로 하고 우물 속에 또 다른 자아, 즉 추억처럼 서 있는 – 과거의 내 모습이 있고, 이를 그리워하는 것이리라.   윤동주는 시 말미에 1939년에 썼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 세상에 빛을 본 것은 해방 이후이다. 1939년 현재의 내 모습을 미워하며 이전의 나, 즉 어린 시절 혹은 유년 시절의 순수했던 소년 시절의 나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시인의 자아성찰을 독자는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그런데 우물 속에 달, 구름, 하늘, 바람이 보인단다. 구름과 하늘이 보이면 낮인 것 같은 데 달이 보인다고? 그럼 낮달? 그렇다면 왜 ‘낮달’이라 하지 않았을까. 우물 안을 들여다 본 경험으로 밤에 뜬 달까지 한꺼번에 표현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윤동주의 시를 폄하하자는 것은 아니다. 시 전편에 흐르는 자아성찰과 자기연민이 아주 슬프게 그려져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        
3    윤동주 동생 윤일주 댓글:  조회:2555  추천:0  2018-07-18
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 동시집 영원한 소년 윤동주와 아우 윤일주의 동시를 만나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 탄생 100주년(2017년도)을 맞아 윤동주와 그의 아우 윤일주의 동시를 한데 엮었다. 윤일주는 형 윤동주가 서울과 일본 유학 시절 부쳐 준 문예지를 읽으며 형과 같은 시인의 길을 걷고자 하는 꿈을 키운다. 그는 형의 시심에 영향을 받는 한편으로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일구었다. 대표작으로 꼽을 만한 「민들레 피리」에는 형을 따르는 아우의 그리운 마음과 형제의 애틋한 우애가 절절하다. 익히 읽혀 온 윤동주의 동시뿐 아니라 그간 널리 알려지지 못한 윤일주의 시 역시 우리 동시의 귀중한 자산으로 새로이 조명할 필요가 있다. 두 형제가 시를 통해 펼쳐 보인 천진한 소년의 마음은 어린이뿐 아니라 시를 아끼는 독자들에게 기꺼이 간직됨직하다.   출처: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 윤동주 윤일주 형제 동시집 '민들레 피리' 본문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시인 윤동주(1917∼1945) 탄생 100주년을 기리며 윤동주와 그의 동생 윤일주(1927∼1985)가 쓴 동시를 묶은 '민들레 피리'(창비)가 출간됐다. 이 책에는 윤동주가 1935년부터 3년여간 쓴 동시 34편과 아우 윤일주가 쓴 동시 31편이 담겼다.   윤동주의 동시는 그가 쓴 주옥같은 시들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꾸밈없는 동심을 깨끗한 서정으로 그린 뛰어난 작품들로 아동문학계에서도 높이 평가받는다. 가족의 가난하고 고된 삶까지도 밝게 끌어안는 낙천적인 동심과 아기자기한 운율이 두드러진다. "누나의 얼굴은/해바라기 얼굴./해가 금방 뜨자/일터에 간다.//해바라기 얼굴은/누나의 얼굴./얼굴이 숙어 들어/입으로 온다." (윤동주 '해바라기 얼굴')   "넣을 것 없어/걱정이던/호주머니는//겨울만 되면/주먹 두 개 갑북갑북." (윤동주 '호주머니') "빨랫줄에 걸어 논/요에다 그린 지도는/지난밤에 내 동생/오줌 싸서 그린 지도//꿈에 가 본 엄마 계신/별나라 지돈가/돈 벌러 간 아빠 계신/만주 땅 지돈가" (윤동주 '오줌싸개 지도') 윤동주는 서울과 일본 유학 시절 만주의 아우들에게 문예지를 부치거나 동화를 권해주며 향수를 달랬다고 한다. 아우 중 특히 윤일주는 건축학 학자·교수가 된 뒤에도 일하는 틈틈이 동시를 썼다. 작고한 뒤인 1987년 유고 동시집이 출간됐지만, 지금은 모두 절판됐다. 그는 가난한 이웃과 보잘것없는 존재를 귀하게 여긴 형 윤동주의 정신을 이으면서 자신만의 시 세계를 이뤘다. 따뜻한 서정성과 순수함을 담은 시들은 형의 시 세계와 맞닿아 있다.   윤동주 윤일주 형제 동시집 '민들레 피리' 본문   "숯불은 따뜻하게/피어오르고//아기는 토끼처럼/잠이 들었네.//아기가 잠든 새에/엄마는 장에 가고//아기가 깰까 봐/함박눈도 가만가만/소리 없이 내리네." (윤일주 '함박눈') "새벽 아닌 대낮에 어디선지/길게 오는 닭 소리 들려옵니다.//울며 울며 팔려 간 우리 집 수탉/어쩐지 그 수탉의 소리 같아요." (윤일주 '대낮') "햇빛 따스한 언니 무덤 옆에/민들레 한 그루 서 있습니다./한 줄기엔 노란 꽃/한 줄기엔 하얀 씨.//꽃은 따 가슴에 꽂고/꽃씨는 입김으로 불어 봅니다./가벼이 가벼이/하늘로 사라지는 꽃씨.//-언니도 말없이 갔었지요.//눈 감고 불어 보는 민들레 피리/언니 얼굴 환하게 떠오릅니다.//날아간 꽃씨는/봄이면 넓은 들에/다시 피겠지.//언니여, 그때엔 우리도 만나겠지요." (윤일주 '민들레 피리') 우리 옛말에서 '언니'는 동성의 손위 형제를 부르는 말로 쓰였다. 윤일주는 이 시에 형 윤동주를 향한 짙은 그리움을 담은 것이다. 이 동시집에는 일러스트레이터 조안빈의 아름다운 그림이 함께 실려 시의 정취를 더한다.   윤동주 윤일주 형제 동시집 '민들레 피리' ==========================/// 선백(仙伯)의 생애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져가라」 이런 전보 한 장을 던져주고 29년간을 詩와 고국만을 그리며 고독을 견디었던 舍兄(사형) 윤동주를 일제는 빼앗아가고 말았으니, 이는 1945년 일제가 망하기 바로 6개월전 일이었습니다.   1910년대, 북간도 明東(명동) -(현주소 : 중국中國 지린성吉林省 옌볜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 룽징시龍井市 명동촌明東村)- 그곳은 새로 이룬 흙냄새가 무럭무럭 나던 곳이요, 조국을 잃고 노기에 찬 지사들이 모이던 곳이요, 학교와 교회가 새로 이루어지고 어른과 아이들에게 한결같이 열과 의욕에 넘친 모든 기상을 용솟음치게 하던 곳이었습니다.   1917년 12월 30일 동주형은 이곳에서 교원의 맏아들로 태어 났습니다. 그의 생가는 할아버지가 손수 벌재하여 지으신 기와집이었습니다. 할아버지의 고향은 함북 회령이요, 어려서 간도에 건너 가시어 손수 황무지를 개척하시고 기독교가 도래하자 그 신자가 되시어 맏손주를 볼즈음에는 장로로 계시였습니다.   동주형의 근실하고 관용함은 할아버지에게서, 내성적이요, 겸허함은 아버지에게서, 온화하고 치밀함은 어머니에게서, 각각 물려받은 성품이라고 생각됩니다. 그의 아명은 海煥(해환)이었고, 그 아래로 누이와 두 동생이 있었습니다.   얌전한 소학생 해환은 아동지 『어린이』의 애독자였고, 그림을 무척 좋아하였다고 합니다. 1921년에 명동소학을 마치고 大拉子(대랍자)라는 곳에서 중국인관립학교에 1년간 수학하였으니, 詩 『별 헤는 밤』의 佩(패), 鏡(경), 玉(옥)이란 묘한 이국소녀의 이름은 이때의 추억에서 얻어진 것이 아닌가 합니다.   1932년 그가 용정 은진중학교(註. 1932 ~ 1935)에 입학하자, 저희 집은 용정에 이사하였습니다. 중학교에서의 그의 취미는 다방면이었습니다. 축구선수이던 그는 어머니의 손을 빌지않고 네임도 혼자 만들어 유니폼에 붙이고 기성복도 손수 재봉틀로 알맞게 고쳐 입었습니다. 낮이면 운동장을 뛰어 다니고 초저녁에는 산책, 밤늦게까지 독서하거나 교내 잡지를 만드느라고 등사 글씨를 쓰거나 하던 일이 기억됩니다. 끝까지 즐기던 이 산책은 이때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운동복이거나 문학서적만 들고 다니는 그의 성적에 뜻밖에도 수학이 으뜸 가는 것에는 다들 놀랐습니다. 특히 기하학을 좋아함은 그의 치밀한 성품에서 였다고 짐작됩니다.   1935년 봄, 3학년을 마칠 즈음, 그는 불현듯 고국에의 유학을 꿈꾸고 겨우 아버지의 승낙을 얻어 평양 숭실중학교(註. 1935 ~ 1936)에 옮기였습니다. 그의 습작집으로 미루어 평양시절 1년에 가장 문학에의 의욕이 고조된 듯 합니다. 이 즈음 백석시집 『사슴』이 출간되었으나 100부 한정판인 이 책을 구할 길이 없어 도서실에서 진종일을 걸려 정자로 베껴내고야 말았습니다. 그것은 소중히 지니고 다닌 모양으로, 지금은 나에게 보관되어 있습니다. 평양 유학도 끝을 맞게 되었으니 숭실학교가 신사참배문제로 폐교케 되었던 까닭입니다. 1936년 다시 용정에 돌아와 광명중학교(註. 1936 ~ 1938) 4학년에 들었습니다. 이때 당시 간도에서 발간되던『카톨릭소년』지에 동주(童舟)라는 닉네임으로 동요 몇편을 발표한 일이 있습니다.   그의 비운은 중학교 졸업반에서부터 비롯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둔 그는 진학할 과목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때 벌써 많은 동요와 詩稿(시고)를 가지고 있던 그에게 문학 이외의 길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외아들인 아버지는 젊어서 문학에 뜻을 두어 북경과 동경에 유학하고 교원까지 지내셨건만, 자기의 생활상의 실패를 아들에게까지 되풀이시키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는 그에게 의사가 되기를 권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굳이 듣지 않고 아버지의 퇴근전부터 산이고 강가이고 헤매다가 밤중에야 자기 방에 돌아오는 날이 계속되었습니다. 한숨이 늘고 가슴을 두드리는 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반년을 두고 아버지와의 대립이 계속되다가 졸업이 닥쳐오자 그는 이기고 말았습니다. 할아버지 권고로 아버지가 양보하신 것입니다. 소학과 은진중학 동창이며 고종사촌이며 또 동갑인 송몽규형과 동행하여 서울로 온것은 1938년 봄이었습니다.   상경하자 두분 다 延專(註. 1938 ~ 1941, 연희전문학교 문과, 現 연세대학교)에 입학하고 그후부터 집에 오기는 1942년까지 매년2회 여름과 겨울 방학 때뿐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시절의 나도 추억도 단편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눈앞에 선한 그 정답던 모습은 사각모에 교복을 입은 형님이 아니라, 베바지, 베적삼에 밀짚모자를 쓰고 황소와 나란히 서있는 형님입니다. 고향에 돌아오면 그날로 양복은 벗어놓고 우리 옷으로 바꾸어 입고는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일을 도왔습니다. 소꼴도 비고 물도 긷고 때로는 할머니와 마주앉어 맷돌도 갈며 과묵하던 그도 유모어를 섞어 가며 서울이야기를 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도 남몰래 쉬는 한숨을 나는 옆에서 가끔 들은 듯합니다. 그것은 사소한 일로 傷(상)함을 입어 끓어오르는 時興(시흥)과 독서시간의 아쉬움에서였을 것입니다.   노여움도 아까움도 미소로서 흘려 보낼 수 있었던 그는, 차마 집안 어른들의 일을 돕지 않고는 마음을 놓지 못하였습니다. 관유함이 그의 의지를 지탱케 못하였을지나 결코 우유부단하지는 않았습니다.   용정은 인구 10만에 가까운 작지 않은 도시였으나, 대학생인 그는 아무 쑥스러움 없이 베옷을 입은 채 거리로 소를 이끌고 다녔습니다. 그럴 때에도 그는 릴케나 발레리의 시집, 또는 지이드의 책을 옆에 끼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으스름때면 의레이 하는 산책에, 동생인 나는 그의 손목을 잡고 같이 거니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가로수가에서 북원백추(北原白秋)의 『고노미찌』를 콧노래로 부르기도 하고 숲속에 앉아 새로 뜨는 별과 먼 강물을 바라보며 손깍지를 낀채 묵묵히 앉았을 때에는 그의 얼굴에 무슨 동경과 감정이 끓어오름을 연소한 나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신작로를 걷다가도 부역하는 시골 아낙네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고 싶어 하고 골목길에서 노는 아이들을 붙잡고 귀여워서 함께 씨름도 하며 한포기의 들꽃도 차마 못 지나치겠다는 듯 따서 가슴에 꽂거나 책짬에 꽂아 놓곤 하였습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註. 1941. 11. 20. 作, 『서시』 中에서)   하는 연약한 것에 대한 애정의 표백은 그의 천품의 기록이었습니다. 방학때 마다 짐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십권의 책으로 한 학기의 독서의 경향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나에게 小川末明(오가와 호노카) 동화집을 주며 퍽 좋다고 하던 일과 수필과 판화지 『백과 흑』7, 8권을 보이며 판화가 좋아 구득하였으며 기회가 있으면 자기도 목판화를 배우겠다고 하던 일이 기억됩니다. 이리하여 집에는 근8백권의 책이 모여졌고 그중에 지금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앙드레 지이드 전집 기간분 전부, 도스토예프스키 연구서적, 발레리 시전집, 불란서 명시집과 키에르케고르의 것 몇 권, 그밖에 原書(원서) 다수입니다. 키에르케고르의 것은 연전 졸업할 즈음 무척 애찬하던 것입니다.   1941년 12월 연전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는 졸업장과 함께 정성스러이 쓴 시고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들고 왔었습니다. 그것은 초판 77부로 출판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소중히 지니고 다녔습니다.   더 공부하고 싶었던 그는 1942년 『참회록』이란 시를 써놓고 도일하여 立敎(릿코)대학에 적을 두었습니다. 그간 마지막으로 집을 떠난 것은 그해 7월 여름방학 때였습니다. 그때에는 병환으로 누워계시는 어머님의 침대에 걸터 앉아 이야기 동무로 며칠을 보내다가 뜻밖에 속히 떠나게 되었습니다. 동북대학에 있던 한 친우의 권유로 그 학교 입학수속 치르러 오라는 전보까닭이었습니다. 놀이터에서 돌아온 나는 그가 떠났음을 알자 눈물이 글썽하였습니다. 늘 정거장에서 맞고 바래던 그와 그렇게 헤여짐이 최후의 작별이 될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떠나면서도 어머님걱정을 뇌이고 또 뇌이드랍니다. 아마 운명시까지 눈앞에 어머님의 모습만 어른거렸을 것입니다. 동북대학(註. 1942, 당초 일본 미야기현 도호쿠東北대학이 아닌 도쿄東京 릿교立教대학 영문과에 입학)에 간줄 안 형에게서 무슨 의도에서였는지 동지사(註. 1942 ~ 1943, 교토京都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로 옮겼다는 전보가 오자 아버지는 좀 노여운 기색이었습니다.   東京(도꾜)와 京都(교또)에서의 그의 고독은 절정에 달했습니다. 태평양에서는 戰火(전화)가 들끓고 존경하던 선배들은 붓을 꺾거나 변절하였고 사랑하던 친구들은 뿔뿔이 헤여졌고 – 하숙방에서 홀로인 듯한 자기를 발견하고 스스로 눈물 짓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六疊房(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쉽게 씌여진 시』의 11절 1942. 6. 3.作)   그러나 홀로 『새로운 아침』을 기다리며 그의 고독만으로 항거하기에는 현실의 물결은 너무 거센 것이었습니다.   1943년 7월 귀향일자를 알리는 전보를 받고 역에 나갔으나 그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매일 같은 마중 끝에 한 열흘 후에 온 것은 우편으로 보내온 차표외, 그 차표로 찾은 약간의 수화물뿐이었습니다. 차표를 사서 짐까지 부쳐놓고 출발직전에 경찰에 잡혔던 것입니다. 교또대학에 있던 몽규형도 함께 잡혔습니다.   압천서(鸭川署)에 미결로 있는 동안 당시 동경에 계시던 당숙 영춘선생이 면회했을 때는 『고오로기』란 형사의 담당으로 일기와 원고를 번역하고 있었으며 매일 산책이 허락된다고 하더랍니다. 곧 나갈 것이니 안심하라고 하던 형사의 말은 결국 거짓이 되고 말았습니다.   동주와 몽규 두 형이 각 2년 언도를 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투옥된 1944년 6월 이래, 한달에 한 장씩만 허락되는 엽서로는 그의 자세한 옥중생활은 알길이 없었으나, 『영화대조 신약성서(英和对照新约聖書)』을 보내라고 하여 보내 드린 일과 『붓끝을 따라온 귀뚜라미 소리에도 벌써 가을을 느낍니다』”라고 한 나의 글월에 『너의 귀뚜라미는 홀로 있는 내 감방에서도 울어준다. 고마운 일이다』라고 답장을 주신 일이 기억됩니다.   매달 초순이면 꼭 오던 엽서 대신 1945년 2월에는 중순이 다 가서야 상기한 전보로 집안사람들의 가슴에 못을 박고 말았습니다.   유해나마 찾으러 갔던 아버지와 당숙은 우선 살아있는 몽규형부터 면회하니 『동주!』 하며 눈물을 쏟고, 매일같이 이름 모를 주사를 맞노라는 그는 피골이 상접하였더랍니다.   『동주선생은 무슨 뜻인지 모르나 큰소리를 웨치고 운명했습니다』 이것은 일본인 간수의 말이었습니다.   아버지가 후쿠오카에 가신 동안에 집에는 한 장의 인쇄물이 배달되었으니 그 내용인즉 『동주 위독하니 보석할 수 있음. 만일 사망시에는 시체는 가져가거나 不然(불연)이면 九州帝大(큐슈제국대학)에 해부용으로 제공함. 속답하시압』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사망전보보다 10일이나 늦게 온 이것을 본 집안사람들의 원통함은 이를 갈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백골 몰래 또 다른 고향에』 가신 나의 형 윤동주는 한줌의 재가 된채 아버지의 품에 안겨 고향땅 간도에 돌아왔습니다. 약 20일후에 몽규형도 같은 절차로 옥사하였으니 그 유해도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동주형의 장례는 3월 초순, 눈보라치는 날이었습니다. 자랑스럽던 풀이 메마른 그의 무덤 위에 지금도 흰 눈이 내리는지-   10년이 흘러간 이제 그의 유고를 上梓(상재)함에 있어 사제로서 부끄러움을 금할 길이 없으며, 시집 앞뒤에 군것이 붙는 것을 퍽 싫어하던 그였음을 생각할 때, 졸문을 주저하였으나 생전에 무명하였던 고인의 사생활을 전할 책임을 홀로 느끼어 감히 붓을 들었습니다. 이로 하여 거짓 없는 고인의 편모나마 전해지면 다행이겠습니다.   1955년 2월 舍第(사제) 一柱(일주) 謹識(근지)   (정음사 1955년 2월 16일 발행 – 2016년 3월 1일 발행) ======================== 교토(京都)에서 우연히 만난 윤동주의 잔영(殘影) 글 |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다음 정류장은 도시샤(同志社) 대학 앞입니다."   교토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이동 중이던 필자는 안내 멘트에 귀가 번쩍 뜨였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도시샤(同志社) 대학은 시인 윤동주(1917-1945)가 다녔던 학교였기 때문이다. 필자가 재차 확인하자 운전사는 ‘내려서 뒤쪽으로 조금 돌아가야 한다’고 친절하게 답변했다.   서정문에서 바라본 도시샤 대학 도시샤 대학에 들어서자 붉은 벽돌에서부터 역사의 숨결이 느껴졌다. 이 대학은 한 청년의 뜻(志)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는 쇄국의 일본을 개방하려는 의지로 미국에 건너가서 ‘일본인 최초의 미국대학 졸업자’가 됐다. 청년의 이름은 니지마 조(新島 襄, 1843-1890). 그가 1875년 도시샤 대학(同志社英學校)을 설립했던 것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 학교가 내걸고 있는 슬로건이다. 때마침 토요일 오후라서 캠퍼스는 고즈넉했다. 갑자기 이방인(異邦人)이 된 필자는 두리번거리다가 어쩔 수 없이 경비원 신세를 졌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윤동주 시비(詩碑)가 어디 쯤 있나요?”   “똑바로 가시다가 우측으로 돌아가세요. 저기 지붕 끝이 뾰족한 건물 앞에 있습니다.”   정지용과 윤동주의 시비 나란히 있어   경비원의 말대로 건물사이로 들어가자 나무아래 정지용(1902-1950)과 윤동주(1917-1945)의 시비가 나란히 있었다. 비(碑)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일본어와 한글로 쓰여 있었다.      정지용 시비 사실을 토대로 한 글이었다. 바로 옆에 서있는 윤동주 시비로 발걸음을 옮겼다. 윤동주에 대한 글도 일본어와 우리말로 쓰여 있었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 윤동주   윤동주 시비의 글   다소 어눌한 한글 표현이지만, 이해하는데 있어서 문제는 없었다. 필자는 혼자서 시비에 새겨진 빛바랜 서시(序詩)를 읽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시비  필자는 읽고 또 읽었다.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시(詩)였기 때문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필자는 ‘주변을 살피고, 뒤를 돌아보면서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교정의 벤치에 앉았다. 오래 전에 필자가 에 썼던 글이  떠올랐다.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와 윤동주   “인간의 얼굴은 하나의 줄기위에 핀 일 순간의 꽃이다./ 바람과 새가 날라다 준 종자처럼/ 여기저기 흩어지고, 피고 지는 존재/ 인간도 식물과 별로 다를 게 없느니….”    일본의 유명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茨木則子, 1926~2006)가 쓴 라는 수필에 담긴 내용이다. 그 책에도 ‘윤동주에 대하여’라는 글이 있다.     누군가가 그린 윤동주의 작은 액자  이바라기(茨木) 시인은 1990년 윤동주의 조카 윤인석 씨를 도쿄에서 만났다고 한다. 시인은 윤인석 씨가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 씨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함께 ‘아우의 인상화(印象畵)’란 시를 소개했다.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살그머니 작은 손을 잡으며/ ‘너는 자라서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슬픈, 진정코 슬픈 대답이다...”   이바라기(茨木) 시인은 “윤인석 씨가 큰 아버님은 돌아가셨지만,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고 말했다며 “자신도 이에 공감한다”고 했다.   윤동주의 시비(詩碑)는 한국산과 교토(京都)산의 돌로 세워졌다. 양국화합의 의미를 두기 위해서다. 그런데도 한일 간의 간극(間隙)은 아직도 좁혀지지 않고 있다.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을 윤동주를 추모하면서 뚜벅뚜벅 도시샤 대학 교문을 나섰다. 등록일 : 2018-05-23
2    우리는 민족혼을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 댓글:  조회:2057  추천:0  2018-07-18
조철호가 만난 사람 - 이임원 연변포석회 회장 (ZOGLO) 2018년7월18일    “중국 동포들은 포석의 ‘낙동강’으로 민족혼 되새겼지요” 중국 연변동포들이 조명희 선생의 민족혼을 일깨우고자 ‘연변포석조명희문학제’를 17년 동안 자체적으로 열고 있다. ‘연변포석조명희문학제’에서 이임원 회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포석抱石조명희趙明熙(1894~1938) 선생은 충북 진천에서 태어났다. 서울과 일본에서 공부했고 러시아로 망명했다. 그 곳에서 문학을 통해 조국의 독립을 꾀했고, 한글로 민족문학의 혼을 일깨우는데 향도역嚮導役을 맡았다. 농민학교와 사범대학에서 후진들을 키워냈고, 조국을 등진 고려인들의 정신적인 지주로 추앙을 받았다. 그래서 고려인들은 포석을 ‘항일 독립영웅 59인’의 한 사람으로 그를 기리고 있다. 소련 스탈린은 소수민족 압살 정책의 일환으로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기 직전, 소수민족 지도자들을 숙청했다. 그 표적 중 한사람이 바로 포석이었고 KGB(소련비밀경찰)는 그를 연행하여 간첩죄로 처형했다. 그의 나이 44세.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였고, 독립운동가였으며, 러시아 땅에 한글문학의 씨를 뿌렸던 한 걸출한 조선 사내는 그렇게 사라졌다. 그리고 조국은 해방을 맞았고, 잃어버렸던 선각자들의 위업을 뒤늦게나마 찾기 시작했다. 포석 조명희- 그가 꿈에서도 그리던 조국 광복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것은 1938년 5월11일. 올 해로 꼭 80년이 됐다. 지난 1988년 해금과 더불어 이름을 찾은 포석은 한국민족민중문학의 선구자로, 최근 들어 ‘국민작가’로 부활했다. 그 사이 그의 탄신 100주년을 앞두고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시켄트엔 ‘조명희기념실’과 ‘조명희거리’가 생겼고, 중국 연변자치주의 수부인 옌지연길시에선 ‘연변포석조명희문학제’가 매년 막을 올렸다. 생전의 포석은 우즈베키스탄이나 연변자치주에 단 한 차례도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었음에도 그곳의 동포들은 매년 그를 깍듯하게 기리고 있다. 지난 해 부터 중국의 사드 보복이 전 방위적으로 행하여지는 가운데 한국과 연변의 포석회는 연변의 문화예술인들과 청소년들에게 격조 있는 무대를 마련하여 포석의 얼을 전했던 행사를 접어야 했다. 그리고 조용하지만 깊이와 의미가 있는 학문적 접근으로 포석을 조명키로 했다. 지난 7월초, 연변포석회는 ‘포석조명희문학학술세미나’를 마련했다. 17년째 연변포석회를 이끌고 있는 이임원(61·시인) 회장이 주도했다. 나는 연변에서 포석의 발자취를 찾는 그를 만나러 연길로 달려갔다. 연길 공항에 마중 나온 이 회장은 반팔 남방셔츠 차림이었다. -연길 날씨는 무더운 듯한데, 한·중 기온은 아직도 냉랭하지요? “아직은 해빙 전입니다.” -충북도를 방문했던 분들 모두 잘 계신가요? “대체적으로 잘들 있지요. 세월이 많이 지나서 이제는 현직에서 물러난 분들이 상당수이지요. 그러나 워낙 많이 갔었기 때문에 현직에 있는 이들이 더 많지요.” -모두 몇 명이나 방문했던가요.? “13년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7명에서 12명 정도가 초청받아 충북방문을 했으니까 연인원 110명 쯤으로 봅니다.” -지금도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나요? “동양일보의 초청자 대상 주문이 문화예술인이나 교육자나 언론인이나 출판인 중 한국을 방문한 적이 없는 사람을 우선으로 하여 거의가 한국방문의 인상이 강하게 남아 있지요. 문명과 문화의 격차에서 오는 괴리감이랄까, 가벼운 공포감 같은 것을 감출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맞는 분들이 성심성의껏 도와 주셨고, ‘순회명사시낭송회’라는 낯선 행사에 참가하면서 이런 고급문화를 배워가야겠다는 욕심도 생겨 불편한 것을 열심히 극복하려한 것이 주효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귀국 후 한국의 시낭송을 따라 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생겼습니다. 지역마다 각계각층의 책임자들이 서슴없이 무대에 올라와 열심히 시낭송을 하는 모습이 한마디로 눈부셨습니다. 더구나 시·군 지역에서 사단장이나 경찰서장들이 멋진 제복을 입고 나와 시를 낭송하는 모습은 중국에서는 상상도 못하는 일이었지요. 귀국하는 사람들마다 ‘한국에 갔더니 장군이나 경찰서장들이 시낭송을 하더라’라며 신기한 듯 이야기들을 했어요.” -그 행사에 잊을 수 없는 분이 청주 서원경교회를 창립하여 담임목사로 계시던 장석연 목사 이셨지요. “그렇지요. 10여 일간의 순회행사가 끝나는 날엔 언제나 2박3일간의 제주도 여행이 기다리고 있었지요. 연변에서 온 우리들로는 익숙하지 않은 행사에 참여하느라 심신이 피곤하였어도 꿈에 그리던 제주도 여행을 한다는 황홀한 꿈에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지요. 그 아름다운 제주도 여행은 정말이지 환상적이었어요.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푸른 바다와 기암괴석과 맛있는 음식들이 생생하게 떠올라요. 장 목사님 부부께서 시종 함께하시며 우리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주시려고 애쓰시던 모습도 선해요.” -그 장 목사님이 은퇴 후 세종시에 가셔서 세종 서원경교회를 세우셨어요. 아직 아주 건강하시고 명 설교도 여전하십니다. -이 회장께선 오랫동안 봉직하던 연변문화예술연구소 소장 직에서 퇴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예. 지난 3월 말까지로 13년간이 소장 직에서 정년퇴임을 했습니다.” -매년 해오는 포석청소년문학상 시상식은 올 해도 잘 되었나요? “여러가지로 여건이 힘들었지만, 매년 십 수 년을 두고 중단 없이 해오는 행사여서 정치적인 기상도가 좋지 않다 해도 매년 때가되면 당연하게 작품공모를 하는 것으로 알아서 학교별로 응모작품들이 들어오곤 하지요. 올 해도 이미 새해가 되면서부터 응모작품들이 들어 왔습니다. 심사를 거쳐 시상식을 마친 것이 6월 24일이었습니다. 마침 이를 알고 동양일보에서도 보도를 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동양일보에서 보도한 것을 알고 계셨나요? “아시듯이 이 곳(연변)에서는 동양일보 독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를 초청해 한국의 문화예술에 눈을 뜨게 해 주신 곳이 동양일보 였고, 또 연길에서 매년 ‘연변포석문학제’를 열도록 후원해 주신 곳도 동양일보여서 우리는 일과처럼 인터넷으로 동양일보를 꼼꼼하게 보고 있지요. 지난 6.13 지방선거도 열심히 보았어요. 우리들이 만났던 시장·군수님들이 어떻게 되는가가 큰 관심들이었습니다. 이시종 지사님이나 김병우 교육감님을 비롯한 낯익은 시장 군수님들이 다시 당선된 것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특히 포석선생의 고향인 진천의 송기섭 군수님은 큰 표 차이로 재선이 되셨더군요. 전에 포석회장을 하셨던 진천의 박양규 의원은 의장이 되셔서 우리가 기뻤습니다.” -왜 연변에서 포석 선생에 대한 관심이 끊이지 않을까요. “잘 알고 계시겠지만 이 곳 연변은 조선족 동포들의 집거集居지역입니다. 해방과 더불어 조선동포들은 자녀들의 학교교육에 남다른 열정을 쏟았지요. 해방 직후부터 중국조선족은 중국의 학교편제인 소학교(5년),중학교(고급중학교 포함-5년),대학(2년과 4년)을 다닙니다. 그중 한국의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고급중학교 교과서 조선어문 제1단원에 포석 조명희 선생의 소설 ‘낙동강’(1927년 발표)이 최서해의 ‘탈출기’와 라도향의 ‘벙어리 삼룡’과 함께 나옵니다. 이 때 우리는 조명희 선생이 어디 출신 인지, 호가 무엇인지는 모르되 이 작품을 통해 민족민중문학에 관해, 소설문학에 관해, 디아스포라 문학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디아스포라 문학’이란 말도 알고 있어요? “근래 들어서 자주 인용되는 말이어서 익혀 두었지요. 사전적 풀이는 ‘디아스포라Diaspora는 본래 살던 땅을 떠나 세계 각지에 산재해 살면서도 정체성과 민족성을 상실하지 않고 살아오는 공동체를 이른다고 알고 있어요. 이국땅을 떠돌던 이들과 그들의 후손이 쓴 문학작품을 디아스포라 문학이라 하더군요.” -그렇다면 포석은 망명의 땅 러시아에서, 이 형과 같은 연변의 시인 작가들은 틀림없는 ‘코리라 디아스포라 문학가’들이라 칭해도 되는 것이군요. “그런 관점에서 볼 때 포석 선생은 대표적인 디아스포라 문학가라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선생이 태어난 1894년은 이 나라 근대문화-개화기가 비롯되는 때이고, 선생이 일본 유학시절부터 러시아로 망명하면서 발표된 모든 문학 작품들은 장르마다 거의 개척 적이거나 선구적인 창작활동을 펼쳐 온 사실이지요. 일본 도쿄에서의 ‘극예술협회’ 참가(1920년)-한국 최초의 희곡 ‘김영일의 사死’(1921)발표-한국 최초의 창작시집 ‘봄 잔디밭 위에’(1924) 발간- 소설 ‘낙동강’ 발표(1927) 등을 보아도 소설 ‘임꺽정’만을 쓴 벽초 홍명희나 시 창작에만 몰입했던 정지용과는 달리 문학의 여러 장르를 뛰어넘으면서 그 분야의 영토에 새로운 길을 낸 선구자임을 알 수 있지요. 그래서 연변 동포들이 포석 선생에 대한 인식이 해방이 되자마자 부터 이제까지 70년이 넘도록 연모의 정을 이어오는 것이라 생각이듭니다.” -이 회장은 신문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나요? “연변대 사범대 조문학과(현재의 한국어과)를 졸업하면서 소학교 교사를 잠시하고는 약관 23세에 연변일보 기자가 됐습니다. 정치 생활부-문화체육부 부장을 거쳐 편집국장을 역임하고 2006년 5월부터 연변문화예술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했습니다.” -연변작가협회 부주석이 된 때는 몇 살 때였는지요. “40세 때였습니다. 작가협회 주석단에 마흔 살짜리가 낀 것이 처음일 것입니다. 2007년까지 9년간을 활동했습니다.” -이 회장은 매년 한국과 평양 방문을 한 차례씩 해 온 것이 10년이 넘지요? “예. 10년 쯤 되나 봐요. 한국방문은 매년 동양일보의 초청에 따라 연변동포방문단의 인솔책임자로, 평양엔 매년 친선예술축전 참가 연변문화예술단 단장으로 다녀오곤 하지요.” -무엇이 크게 다르던가요. “한국은 문명이 앞서고 모든 것이 서구화 되었다면, 조선은 사는 것은 다소 궁핍해도 소박하고 당당해요. 최근 몇 년 간은 주민들이 전에 없던 활기가 보이고 축전 행사에 참가한 외국인들에게 통제지역도 많이 풀어 보여주는 등 변화가 느껴져요. 몇 년 전에는 평양의 한 노 시인이 저녁 식사자리에서 슬며시 옆에 와 앉더니 ‘조선에는 지금도 거지가 그리 많으냐’고 묻더군요. 그저 ‘여러 해 다녔지만 거지는 보지 못 했습니다’라 말하니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군요. 한국의 실상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거지요. 그런데 최근에는 장마당이라는 시장이 활성화되어 전과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돈이 있으면 웬만한 것을 거의 구할 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다가 자본주의 사회현상이 밀어닥치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지요.” -이 회장의 시가 연변 동포학생들의 교과서에 실렸다고 들었는데요. “몇 년 전부터 ‘진달래’ 등 3편이 초급중학교와 고급중학교 조선어문 교과서에 실렸습니다. 서정시의 본보기로 선정된 것 같습니다.” -시집도 여러 권이지요? “첫 시집 ‘사랑, 그리고 바보들의 이야기’(1997)를 낸 이후 3,4년 만에 한 권꼴로 한글시집 3권, 중문시집 1권 등 4권을 발간했습니다.” -해마다 연변포석문학제를 치르면서 가장 보람이 있다면… “아무래도 ‘포석청소년문학상’이겠지요. 올 해로 17년간을 중국 전역에 살고 있는 동포 청소년을 대상으로하다보니 완전히 뿌리를 내린 사업입니다. 중국대륙의 넓은 지역에서 많이 응모해 오지요. 그 중에 우리 민족의 삶의 양태가 다양하게 묻어나고 청소년들이 중국 속의 조선족 동포로써 겪는 많은 일들을 우리말로 정제시키고 정리하여 보내는 과정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풍족하지는 않으나 포석의 고향 충북 진천군에서 지원하는 일부 시상금이 입상한 청소년들에겐 교통비와 상품비로 쓰이고 있어 큰 위로가 되지요. 하얼빈 같은 곳에서 입상자가 시상식에 오려면 오는데 하루, 가는데 하루 열차를 타야합니다. 꼬박 사흘이 걸리지요. 수상자 혼자만 오지 못합니다. 가족이나 지도교사가 동행을 하면 교통비와 숙박비와 식사비가 수월치가 않지요. 이것을 주최 측이 부담하지 못하면 시상식 참석은 엄두를 내지 못하지요. 중국에서의 행사 비용은 한국의 경우를 생각하면 이해가 가지 않겠지요. 그러나 어려움이 있어도 동포 청소년들에게 우리말과 우리 얼의 존엄하고 훌륭함을 깨우치기 위한 노력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마치 포석 선생이 이국(소련)에서 한글과 문학을 통해 조국광복에 이바지하고 민족정신을 고양高揚하던 정신과 맥을 같이 하는 작업이라는 생각에 성의를 다 합니다.” -지난해부터 요즘까지의 한·중 관계의 어려움이 더 계속된다면 과거처럼의 연변포석문학제를 개최하기는 당분간 어려울 것으로 보이는데요. “숙면熟眠의 시기로 봅니다. 포석청소년문학상 공무와 시상식은 지속하되 문학제는 학술적인 접근을 꾀해 포석에 대한 이해와 기개와 예지를 익히는 기간으로 활용한다면 포석문학에 대한 이론적인 무장이 될 것으로 봅니다.” -오랜시간 고맙습니다. 중국의 동포들에게 포석 선생의 선각적인 삶이 또 하나의 에너지 원源으로 전해졌으면 합니다. “한국에서 일부러 찾아 와 주심에 놀라고 감사했습니다. 이런 우정의 감동을 오래 간직하겠습니다.” ■ 동양일보 회장·시인 ■ 이임원李任遠 시인은… * 1958년 중국 길림성 연길시 출생 * 1979년 연변대 사범대 조문학과 졸업 * 1981년 연변일보사 입사 정치생활부 부부장-문화체육부 부장- 편집국 국장 * 1989년 두만강여울소리 시인상 수상 * 1997년 초대 연변정지용시문학상 수상 * 1998년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 2001년 해란강문학상 수상 * 2001년 연변 포석회 회장 * 2003년 윤동주문학상 수상 * 2004년 장백산문학상 수상 * 2006년 연변문화예술연구소 소장 * 2018년 연변문화예술연구소 소장 퇴직 현 연변포석회 회장. 현 연변향토문화연구회 회장 * 시집 ‘사랑, 그리고 바보들의 이야기’(1997) ‘작은 시 한 수로 살아간다는 것은’(2001) ‘바다가 육지로되지 않는 까닭은’(2014) ‘사랑의 꽃’(2015) ///동양일보
1    [동네방네] - "야생멧돼지"들은 더는 "야생멧돼지"가 아니다... 댓글:  조회:3344  추천:0  2018-07-18
태국 동굴소년 "엄마한테 혼날까 겁났다.. 구조대 만난건 기적"(종합) 2018.07.18.  자동요약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코치 "탈출구 찾으려 번갈아 동굴벽 팠다".."절망하지 말고 맞서 싸우자 다짐" "동굴 안 음식 전혀 없어..종유석서 떨어지는 물만 마셔" 담당 의사 "아이들 대체로 건강..동굴 안에서도 강인한 정신력" 기자회견하는 동굴소년들[epa=연합뉴스] (방콕=연합뉴스) 김상훈 특파원 = 태국 치앙라이 탐루엉 동굴에 최장 17일간 갇혔다가 기적적으로 생환한 13명의 유소년 축구팀 선수들과 코치가 18일(이하 현지시간) 처음으로 언론 인터뷰에 응했다. 동굴에서 구조된 뒤 병원 치료를 받아온 이들은 이날 붉은색 멧돼지가 인쇄된 팀 유니폼을 입고 치앙라이 주 정부가 마련한 기자회견장에 등장했다. 자신들을 구조한 태국 네이비실 대원들과 치료를 담당한 의사 등과 함께 회견장에 나온 이들은 축구공을 차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건강을 증명했고, 밝은 얼굴로 각자 이름과 나이를 소개하고 동굴 고립 당시 상황 등을 풀어놓았다. 한 소년은 "동굴에 갇혔을 때 우선 집에 가서 엄마에게 꾸중을 들을까 봐 겁났다"고 말했다. 실종 상태였던 이들을 발견한 영국 잠수전문가와 영어로 대화해 주목을 받았던 아둔 삼온(14)은 "영국에서 온 사람이 우리를 구하러 왔다니 믿을 수가 없었고 놀랐다. 기적 같았다"고 구조대와 첫 만남의 감회를 전했다. 그는 이어 "그날 저녁 우리는 동굴 안의 바위를 긁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며 "그들의 질문에 답하기 전에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소년은 "모두에게 (이 상황에) 맞서 싸우자고 절망하지 말자고 했다"고 말했고 다른 소년은 프로 축구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밝히기도 했다. 동굴에서 아이들을 끝까지 지켜내 영웅이 된 엑까뽄 찬따웡(25) 코치는 "동굴 안에 들어갔을 때 음식은 전혀 없었다"고 말했고 다른 소년은 "종유석에서 떨어지는 물만 마셨다"고 고립 당시 상황을 전했다. 또 엑까뽄 코치는 "알려진 것과 달리 대부분의 아이들은 수영을 할 줄 안다. 다른 아이들보다는 잘한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고 "구조대를 마냥 기다릴 수 없었다. 탈출 방법을 찾아보려 노력했고 번갈아 가며 동굴 벽을 파 구덩이도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감사 인사 전하는 동굴소년들[로이터=연합뉴스] 소년들을 치료해온 의사는 "치료 기간 아이들의 몸무게가 3㎏가량 늘었고 혈액검사 결과도 좋다"며 "아이들이 동굴에 있을 때부터 강인한 정신력을 보였다"고 말했다. 앞서 당국은 실종 상태에서 열흘을 굶었던 아이들의 몸무게가 2㎏가량 줄었다고 밝힌 바 있다. 치앙라이 '무 빠'(야생 멧돼지) 축구클럽 소속 유소년 선수와 코치인 이들은 지난달 23일 팀원의 생일파티를 위해 매사이 지구의 탐루엉 동굴에 들어간 뒤 연락이 끊겼다. "드디어 집에 갑니다" 병원 나서는 동굴소년들[epa=연합뉴스] 동굴 앞에서는 이들이 타고 다니던 자전거와 가방, 축구화 등이 발견됐다. 갑자기 내린 비로 동굴 내 수로의 물이 불어나면서 아이들이 갇혔다고 판단한 당국은 이튿날부터 수색에 나섰다. 아이들은 실종 열흘째인 지난 2일 2명의 영국 전문가들에 의해 동굴 안쪽 깊숙한 에어포켓 공간에서 발견됐다. 태국 당국은 외국 전문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해 미 공군 구조대원 30명을 비롯한 동굴 잠수 및 구조 분야의 세계적인 전문가들을 불러 모았다. 또 당국은 동굴 곳곳에 고인 물을 빼내는 한편 아이들에게 수영과 잠수장비 이용법을 가르친 뒤, 지난 8일부터 10일까지 3일에 걸쳐 이들을 전원 안전하게 구해내 찬사를 받았다. 그동안 병원에서 심신을 치료해온 소년들은 곧바로 퇴원해 일상생활로 돌아가며, 이후 인터뷰는 하지 않기로 했다. 치앙라이 주 정부는 과도한 대중의 관심이 초래할 수 있는 부정적 영향을 고려해 향후 아이들은 물론 가족들도 일절 언론 인터뷰에 응하지 않기로 했다면서, 생환자와 가족의 생활을 방해하는 경우 아동보호법에 따라 기소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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