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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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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윤동주와 정병욱 가옥 댓글:  조회:2290  추천:0  2018-07-24
  1. 섬진강 하구의 망덕포구에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유고가 보존되었던 가옥이 있다니 뜻밖이네요. 제가 알기로 윤동주 시인의 고향은 북간도 아닌가요?   - 예, 북간도 맞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 만주 길림성 용정시에서 가까운 명동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곳에서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문익환 목사와 함께 용정의 은진중학교를 다니다가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전학을 갔습니다. 그때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의한 항의로 자퇴를 하고 다시 용정으로 돌아가서 광명중학교를 졸업했구요. 그리고 1938년에 서울의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습니다. 즉 윤동주는 38학번입니다.   2. 그러면 윤동주 시인과 광양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데, 어떻게 윤동주 시인의 원고가 광양 망덕포구에서 발견된건가요?   - 윤동주 시인이 연희전문 3학년 때 기숙사에서 만난 후배 정병욱과의 인연 때문입니다. 정병욱의 부모님께서 살고 계신 곳이 바로 광양의 망덕포구였습니다.   3. 윤동주와 정병욱, 두 사람의 만남에 관해 조금 더 자세히 들어보고 싶군요?   - 졍병욱이 쓴 윤동주에 관한 회상문 '잊지 못할 윤동주의 일들'에서, 1940년 연희전문 1학년 때 그가 윤동주와 선 후배로 만나게 되었을 무렵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습니다. "내가 동주를 알게 된 것은 연희전문학교 기숙사에서였다. 그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서 나의 두 학년 위인 상급생이었고, 나이는 다섯 살이나 위였다. 그는 나를 아우처럼 귀여워해 주었고, 나는 그를 형으로 따랐다. 신입생인 나는 모든 대학생활을 동주로 말미암아 다져갔고, 시골뜨기 때가 동주로 말미암아 차차 벗겨져 나갔었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기숙사 생활을 통해 착실하게 자져졌던 두 사람의 사귐은 윤동주가 4학년, 정병욱이 2학년으로 진급했던 1941년에 들어서면서 기숙사를 떠나 같은 방에서 하숙 생활을 하면서 더욱 깊어졌습니다.   5. 정병욱이 평생 해낸 일 가운데 가장 보람 있고 자랑스런 일이 '윤동주의 시집 간행'이었다니, 대단하네요, 윤동주는 그 시집에 담긴 시를 언제 썼나요?   - 윤동주는 연희전문 졸업을 앞두고 시집 간행을 기획했습니다. 자기의 시작품 19편을 골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을 붙이고 세 부를 직접 필사했는데요. 그 중 한 부는 자신이 가졌고, 한 부는 이양하 지도교수님께, 그리고 나머지 한 부는 후배 정병욱에게 줬습니다. 이 시집에 실린 19편의 작품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수록된 시가 '별 헤는 밤'으로 1941년 11월5일로 적혀 있고, 시집을 여는 '서시'를 쓴 것이 11월 20일로 되어 있습니다. 그는 자선 시집을 만들어 졸업 기념으로 출판하려고 계획했던 것입니다.   6. 윤동주는 계획대로 졸업기념 작품을 출판했나요?   - 출판하지 못했습니다. 윤동주의 시를 받아 본 이양하 교수는 그에게 출판 보류를 권했습니다. '십자가', '슬픈 족속', '또 다른 고향' 같은 작품들이 포함돼 있는 그의 시집은 일본 관헌의 검열에 통과되기도 어려울뿐더러, 윤동주의 신변까지 위험할 수 있으니 때를 기다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양하 교수의 권고에 따라 그 시집의 출판은 보류되었습니다.   7.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어떤 활동을 했나요?   - 1942년, 윤동주는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동경 릿쿄 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그해 가을 경도 도시샤 대학 영문과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1943년 7월에 독립 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2년 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 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광복을 불과 반년 앞둔 1945년 2월 16일 28세의 젊은 나이로 감옥 안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8. 안타까운 얘기네요, 그러면 국내에 있던 윤동주 후배 정병욱은 어떻게 됐습니까?   - 정병욱은 윤동주가 체포되었을 때로부터 반년 뒤인 1944년 1월 일제의 학도병으로 끌려갔습니다. 그전에 정병욱은 선배 윤동주로부터 받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원고를 광양 망덕포구에 계신 집으로 가져가 어머니께 잘 간수해 주실 것을 당부드렸습니다. 그러면서 그 자신과 윤동주가 살아 돌아오지 못하고 조선이 독립하면 그 원고를 연희전문학교로 보내 세상에 널리 알려달라는 비장한 부탁도 했습니다.   9. 일제 학병으로 끌려갔던 정병욱은 어떻게 됐습니까?   - 다행히 일제 패망 후 정병욱은 살아 돌아왔습니다. 정병욱의 어머니께서는 마루청 밑에 장독을 묻고 그 속에 명주 보자기로 겹겹이 싸서 간직해 두었던 윤동주의 원고를 꺼내주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윤동주의 원고가 얼마나 위험하게 취급되었는지를 단적으로 알려주는 생생한 증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0. 윤동주 원고는 언제 시집으로 출판됐나요?   - 정병욱은 1948년 정음사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판함으로써 윤동주의 시가 비로소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됐습니다. 윤동주가 직접 제작한 세 부의 시집 중, 윤동주 본인 보관본은 일제에 체포 투옥되는 과정에서 사라지고, 이양하 교수님께 드린 것도, 찾을 길이 없었는데, 다행히 후배 정병욱에게 준 시집이 극적으로 출판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1.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망덕의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이 비로소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원고가 보관되었던 집이라는 말씀이죠?   - 맞습니다.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이 바로 진월면 망적리에 소재한 정병욱의 부모님이 살고 계시던 자택이었습니다. 후에 그 집은 정병욱의 부친 정남석 님의 외종동생 소유로 넘어갔고 현재는 그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습니다.   12. 이러한 사실들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언제인가요? 그 과정이 궁금합니다.   - 정병욱 교수가 1976년에 작성하였던 회상문에서 그 유고 보존에 대한 전말을 소개하였지만, 그 보관 장소에 대한 관심은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 가옥 소유자의 딸이 재학 중이던 광양제철고 교지편집부에서 취재를 하여 망덕리 23번지가 윤동주 유고 보존 가옥이라는 이야기를 2005년 '한빛' 교지에 실었습니다.   13. 광양제철고 교지를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니, 재미있네요. 그 이후 문화재로 지정되는 과정도 궁금하군요.   - 망덕에서의 윤동주 유고 보존 사실은 광양 지역신문의 보도로 더욱 널리 알려졌습니다. 또한 그 보도를 접한 광양 시청이 망덕의 유고 보존 가옥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하는 일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했구요. 마침내 광양시의 이성웅 시장님이 직접 찾아가면서 윤동주 유고 보존 가옥의 근대문화유산 등록 작업은 탄력이 붙었습니다. 그 결과 2007년, 망덕포구의 옛 정병욱 가옥은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이라는 이름으로 등록문화재, 즉 근대문화유산 제341호로 지정됐습니다.   14. 윤동주 시인을 기념하는 행사도 광양 망덕에서 열리고 있나요?   - 예, 지난 2008년 여름에는 윤동주 시인의 고향인 만주의 조선족 학생들이 이곳을 방문했습니다. 중국 동북3성에서 조선족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윤동주 문학상'에 입상한 고등학생 20여 명이 광양 망덕포구의 '윤동주 유고 보존 졍병욱 가옥'을 직접 방문해, 이곳에서 즉석 연극대회까지 펼치는 장면을 보고 가슴 찡한 민족애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광양의 한 지역신문사에서도 '시인 윤동주와 광양의 만남'을 주제로 2008년 이후 매년 '윤동주 백일장 사생대회'를 열고 있습니다.   흔히 '역사는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라고 얘기를 하는데, 우리 민족의 자랑스런 윤동주 시인의 시와 그 유고가 보존되었던 가옥이 이렇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니, 신기하고 재미있군요.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광양제철중 이은철 선생이었습니다. ========================/// 시인 윤동주(1917~1945)가 쓴 글 124편을 모두 담은 ‘윤동주 전 시집’이 나왔다. 윤동주의 작품 전체를 한 권에 수록한 첫 책이다. 소실되지 않은 윤동주의 시와 수필뿐 아니라 윤동주를 위해 쓰여진 서문, 후기, 발문도 빠뜨리지 않았다.  ‘윤동주 전 시집’ 제1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은 1948년 초판본 전문이다. 2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55’는 1948년 본의 시를 제외한 나머지 작품을 소개했다. 3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79’는 1948년 본과 1955년 본에 없는 시들로 이뤄졌다. 4부 ‘나중에 발굴된 시’는 기존의 윤동주 시집에서 볼 수 없는 작품 8편이다. 1~3부 시들은 당시 발간된 본문 순서대로, 4부는 언제 지었는지 알 수 없는 경우를 빼고는 창작연도에 따라 실었다. 9인의 윤동주 추모문은 자체로 하나의 문학작품이라는 평이다. 1부에서는 1948년 나온 원본 그대로 정지용의 서문, 유영의 추도 시, 강처중의 발문을 읽을 수 있다. 북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사라진 정지용과 강처중의 글을 현대어로 정리해 넣었다. 2부에는 정병욱의 후기와 윤일주의 ‘선백(先伯)의 생애’, 3부에는 백철·박두진·문익환·장덕순의 후기가 들어있다. 윤동주 연보는 4부 뒤에 게재했다. 초판본의 서문과 발문 등은 1955년 이후 인쇄본에는 누락됐다. 시인 정지용은 6·25동란 때 납북됐고, 경향신문 기자 강처중은 소련에 가서 공부하겠다는 말을 가족에게 남기고 1950년 9월4일 가출한 뒤 행방이 묘연해졌다. 당시 강처중은 남로당 지하당원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와중에 전쟁이 터졌고, 서울로 침략한 인민군이 형무소를 개방하자 집에서 두 달 남짓 요양하다가 떠났다. 정지용은 1950년 9월께 동두천 부근에서 폭격에 희생됐다.  정지용은 ‘서(序)’에 “아직 무릎을 꿇을 만한 기력이 남았기에 나는 이 붓을 들어 시인 윤동주의 유고(遺稿)에 분향하노라”고 적었다. 그리고 애도했다. “노자(老子) 오천언(五千言)에 ‘허기심 실기복 약기지 강기골(虛基心 實基腹 弱基志 强基骨)’이라는 구(句)가 있다. 청년 윤동주는 의지가 약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정시에 우수한 것이겠고, 그러나 뼈가 강하였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일적(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구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 일제시대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앝을 것뿐이나,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강처중은 “그는 한 여성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이 사랑을 그 여성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끝내 고백하지 안했다. 그 여성도 모르는 친구들도 모르는 사랑을 회답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는 사랑을 제 홀로 간직한 채 고민도 하면서 희망도 하면서-쑥스럽다 할까 어리석다 할까? 그러나 이제 와 고쳐 생각하니 이것은 하나의 여성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을 ‘또 다른 고향’에 대한 꿈이 아니었던가. 어쨌던 친구들에게 이것만은 힘써 감추었다”고 발문에 남겼다. 윤동주의 친구인 문익환은 ‘동주 형의 추억’을 전했다. “나는 동주 형이 시인이 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가 시를 쓴다고 야단스레 설치는 것을 본 일이 없다. 그는 사상이 능금처럼 익기를 기다려서 부끄러워하면서 아무것도 아닌 양 쉽게 시를 썼다. 그렇게 자연스레 시를 쓰는 듯이 보였기 때문에 나는 그가 취미로 시를 쓴다고만 생각했었다. 한데 그는 몇 수의 시를 남기려 세상에 왔던 것이다. 그의 가장 동주다운 멋은 역시 그의 시에 나타나 있다고 나는 믿게 되었다. 그는 사상이 무르익기 전에 시를 생각하지 않았고, 시가 성숙하기 전에 붓을 들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시 한 수가 씌어지기까지 그는 남모르는 땀을 흘리기도 했으련만, 그가 시를 쓰는 것은 그렇게도 쉽게 보였던 것이다.” 
5    "붓끝을 따라온 귀뚜라미는 홀로의 감방에서도 울어준다"... 댓글:  조회:2674  추천:0  2018-07-24
  별을 노래한 시인..윤동주 탄생 100주년, 돌아보는 그의 삶       (2018년 12월) 내일(30일)은 윤동주 탄생 100주년입니다. 1917년 12월 30일 태어난 윤동주 시인은 '서시', '쉽게 씌어진 시', '별 헤는 밤' 등 주옥같은 시를 남기고 29살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일본의 차디찬 형무소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부끄럼 없는 삶을 살고자 했던 윤동주 시인, 오늘 리포트+에서는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삶을 되돌아봤습니다. ■ '동주야 해처럼 빛나라', 어린 시절부터 시를 썼던 윤동주 윤동주 시인의 아명(兒名)은 '해환'이었습니다. '해처럼 빛나라'는 뜻으로 그의 아버지가 지어준 어린 시절 이름입니다. 윤동주의 동생 일주에게는 '달환', 갓난아기 때 세상을 떠난 막내에게는 '별환'이라는 아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1925년 4월 4일 윤동주는 명동 소학교에 입학했고 5학년 때에는 같은 반 친구들과 함께 이라는 잡지를 만들었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소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부터 문학적인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그의 당숙으로 시인이자 영문학자였던 故 윤영춘 씨는 "명동 소학교에 다닐 때부터 동주는 빠짐없이 동시를 발표했다"며 "그는 어렸을 때부터 문학적 소질을 여실히 나타냈다"고 윤동주 시인을 기억했습니다. ■ 자기반성을 멈추지 않았던 그, '시가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 윤동주는 22살이던 1938년 광명중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재학 중에 조선일보 학생란에 산문 '달을 쏘다', 시 '유언' 등을 발표했습니다. 1941년에는 졸업 기념으로 자선 시집 를 출간하려 했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자신이 존경하던 이양하 교수와 친한 후배였던 정병욱에게 시집을 먼저 전달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일제의 검열을 통과하기 어려울 거라는 이 교수의 권고에 윤동주는 시집 출판을 단념하게 됩니다. 이 시집에 담긴 시들은 세상에 알려지지 못할 뻔 했으나 후배 정병욱의 보관본으로 빛을 보게 됩니다. 1942년 윤동주는 고종사촌이자 평생의 벗이었던 송몽규와 함께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동경 릿쿄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송몽규는 교토 제국대학 서양사학과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윤동주는 등 5편의 시를 친구에게 보내기도 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유학 생활을 하면서 느꼈을 윤동주의 고뇌는 당시 쓴 시에도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유학 첫해 여름 방학이 되자 윤동주는 고향에 돌아와 보름간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는 윤동주 시인의 살아생전 마지막 귀향이었고 친구에게 보낸 시 역시 우리에게 알려진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됐습니다. ■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랐던 29년의 짧은 생애… 1943년 7월 10일 송몽규가 먼저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됐고 4일 뒤 귀향길에 오르기 위해 차표를 사고 짐까지 부쳐 둔 윤동주도 같은 혐의로 검거됐습니다. 당시 일본 경찰이 윤동주 시인의 책과 작품, 일기 모두 압수해 지금까지도 행방이 묘연합니다. 1944년 윤동주는 징역 2년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됐는데 매달 일어로 쓴 엽서 한 장씩만 고향에 보낼 수 있었습니다. 1945년 2월 윤동주의 엽서는 도착하지 않았고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지러 오라'는 전보가 고향 집에 배달됐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29살이었고 해방 6개월을 앞둔 시점이었습니다. 시신을 인수하기 위해 일본으로 간 윤동주의 아버지와 당숙은 송몽규로부터 "매일같이 이름 모를 주사를 맞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됩니다. 공식적인 문서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윤동주 시인도 일본의 끔찍한 생체실험 대상이었다고 그의 가족들은 입을 모읍니다. 윤동주 시인의 육촌 동생인 가수 윤형주 씨는 SBS 주영진의 뉴스브리핑과의 인터뷰에서 "후쿠오카 형무소에 한국 학생들이 많이 구금돼 있었는데 당시 바닷물 증류수를 영양제라고 속이고 매일 한 대씩 그들에게 주사했다"며 "이런 일들이 종전 직전에 일본에서 벌어진 사건"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성찰로 마지막까지 일본에 저항했던 윤동주 시인의 숭고한 정신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직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남아 있습니다. (기획·구성: 송욱, 장아람 / 디자인: 정혜연)  
4    윤동주와 이양하 댓글:  조회:2447  추천:0  2018-07-24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시인 윤동주. 올해는 윤동주 탄생 100주년입니다. 1917년 12월 만주 간동성 명동촌에서 태어나 1945년 2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9세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최근 시인의 삶을 엮은 사진집 (윤동주100년 포럼)이 나왔습니다. 생가부터 학창시절, 육필원고, 장례식 모습을 담았습니다. 윤동주. 연희전문 입학 후 찍은 사진/윤동주100년 포럼 제공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당시 중화민국 동북부(만주)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할아버지 윤재옥은 1886년 함경북도 종성에서 북간도로 이주했다. 윤동주 생가 사진 중 가장 오래된 사진/윤동주100년 포럼 제공 윤동주와 같은 집에서 태어나 명동중학교, 은진중학교, 연희전문 등을 함께 다닌 ‘청년 문사’ 송몽규. 윤동주의 장례식이 고향에서 치러진 것은 1945년 3월 6일. 하루 뒤 송몽규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했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에는 이종사촌으로 나오는데, 사실은 고종사촌이다. 송몽규/윤동주100년 포럼 제공 윤동주는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 숭실중학교, 광명중학교를 거쳐 1938년 4월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다. 송몽규, 문익환목사가 그의 은진중학교 동기이며, 강원룡 목사가 은진중학교 5년 후배다. 당시 은진중학교 건물/윤동주100년 포럼 제공 아버지 윤영석은 윤동주가 의사가 되길 바랐다. 이 어려운 시대에 의학을 공부해야 무난하게 살아갈 수 있지, 사상적인 운동에 가담해서는 안된다는 이유였다. 그의 조부와 외숙부가 아버지를 설득해 윤동주는 연희전문 문과로 진학할 수 있었다. 연희 숲에서. 서 있는 사람 중 왼쪽 두번째가 윤동주/윤동주100년 포럼 제공 윤동주 친구 강처중은 1945년 자신이 다니던 에 ‘쉽게 씌어진 시’를 게재하며, 윤동주의 존재를 국민에게 알렸다. 1941년 12월 윤동주는 연희전문 졸업을 앞두고 시 19편을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의 자필 시고집 3부 만들었다. 한부는 자신이 갖고, 한부는 후배 정병욱에게, 다른 한부는 영문과 이양하 교수에게 줬다. 이양하 교수는 윤동주의 신변을 염려해 시집 출간을 보류하라고 권했고, 윤동주는 이를 받아들였다. 윤동주는 생전에 시집을 한권도 가지지 못한 시인이다. 1945년 경향신문에 게재된 ‘쉽게 씌어진 시’/윤동주100년 포럼 제공 윤동주는 1942년 4월 일본 릿교대에 입학했다. 입학하자마자 ‘학부 단발령’이 발령됐다. 이후 한 학기 만에 도시샤대학으로 편입했다. 도시샤대학은 윤동주가 시적 스승으로 삼고 있던 정지용 시인이 다닌 학교다. 공초 오상순 시인의 모교이기도 하다. 릿교대 재학시 여름방학 때 고향에 와서 찍은 사진. 뒷줄 오른쪽 삭발한 윤동주, 앞줄 가운데가 송몽규/윤동주100년 포럼 제공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한다. 윤동주의 당숙 윤영춘은 시모가모 경찰서에 갇혀 있던 윤동주가 일본 형사 앞에서 자신이 쓴 한국어 시와 산문을 일어로 번역하고 있었다고 했다. 윤동주는 바닷물을 인체에 주입하는 생체실험의 대상이었고, 이름도 알 수 없는 주사를 맞고 사망했다. 당시 후쿠오카 형무소 정문/윤동주100년 포럼 제공 1945년 3월 6일 윤동주의 용정 고향집 마당에서 장례식이 치러졌다. 장례식 집례는 친구 문익환의 아버지 문재린 목사가 맡았다. 장례식 때는 연희전문 에 실렸던 ‘우물 속의 자화상’ ‘새로운 길’ 등 윤동주의 시 두편이 낭독됐다. 윤동주 장례식/윤동주100년 포럼 제공 윤동주의 육필 원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위), ‘쉽게 씌어진 시’(아래) 육필 원고/윤동주100년 포럼 제공 ‘참회록’ 육필원고/윤동주100년 포럼 제공 ///곽희양 기자
3    사람이 1년에 800만번 숨을 쉬는데... 댓글:  조회:2476  추천:0  2018-07-24
  100년을 거슬러 온 윤동주의 숨결     “ 사람이 1년에 800만 번 숨을 쉬고, 이 숨을 다 합치면 2억 리터가 됩니다.  이순신 장군이 생애 53년 간 내쉰 숨이 지구 대류권에 흩어져서 지난 400년간 균일하게 분포해 있다고 가정하면, 이순신 장군의 입에 한 번이라도 들어갔던 숨을 현재의 우리도 들이마실 수 있습니다.   ”   지난(2017년) 6월 2일 방송된 tvN ‘알면 쓸데없는 신기한 잡학사전(알쓸신잡)’에서 물리학자 정재승이 주장한 내용이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통영으로 수학여행을 왔다가, 이순신 장군의 숨결을 느껴보라는 선생님의 말에 실제로 그 숨결을 계산해 봤다고 한다. 다양한 과학적, 수학적 이론을 동원해 내린 결론이다.   이순신 장군은 지금으로부터 472년 전에 태어난 사람이다. 그렇다면 불과 100년 전에 태어나 28년 간 살았던 윤동주 시인의 경우는 어떨까. 이순신 장군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면, 그보다 훨씬 가까운 시기를 살아간 윤동주 시인의 숨결은 더 많이, 더 자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 시인 윤동주의 숨결을 느끼는 시간   “ 윤동주 시인은 책을 읽거나, 글을 쓰다가도 자주 산책을 즐겼습니다. 그의 숨결을, 그가 사랑했던 연희전문학교 교정에서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   지난(2017년) 6월 23일 오전 10시,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 40여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윤동주 시인이 대학시절 시에 대한 열정을 안고 거닐던 산책길을 따라 걷기 위해서다. 이는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시인 윤동주의 삶과 작품을 기리기 위해 서울시교육청 서대문도서관이 마련한 ‘윤동주, 읽다 쓰다 걷다’ 행사의 일환이다.          △‘윤동주 산책길 따라 걷기’ 행사의 코스는 ‘연희 연전숲길2’ 코스였다. ‘연세대 정문-윤동주 시비-핀슨관- 청송대-외솔관-최현배 흉상-언더우드가 기념관-연세대 서문-연희 문학 창작촌’으로 구성되어 있다. ⓒ 강민혜     정문에서 출발, 연세대 교정을 걷기 시작한지 5분 만에 참가자들이 만난 것은 윤동주 시비였다.    윤동주는 의대 진학을 원하는 아버지에게 맞서 단식과 가출까지 감행하며 연희전문학교(연세대의 전신) 문과에 입학했다.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것도 그 때부터다. 그는 학교를 졸업하던 1941년에 시집 를 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연세대 내 세워진 윤동주 시비는 1968년에 윤동주를 아끼는 학생·친지·동문·동학들이 정성을 모아 세운 것이다. 참가자들은 잠시 동안 시비 앞에서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시비 앞쪽에는 윤동주의 육필 원고 글씨체를 그대로 옮긴 시 한 수가, 뒤쪽에는 윤동주의 생애가 새겨져 있다. ⓒ 강민혜     시비 뒤쪽으로는 윤동주 기념관인 핀슨관이 보였다. 연희전문 재학 시절 윤동주는 핀슨관 3층 다락방에서 기숙사 생활을 했다. 윤동주의 고종사촌인 송몽규와 친구인 강처중이 “동주 너는 책을 읽고 시를 쓰는 것을 좋아하니, 경치 좋은 방을 써야한다.”며 3층 방을 내줬다고 한다. 지금은 3층이 아닌 2층에 작은 기념관이 조성되어 있다. 윤동주가 사용했던 책상, 가방, 연필, 펜, 읽었던 책(시집, 철학서), 쓰고 다니던 모자 등이 전시되어 있다.       △기념관을 둘러보는 참가자들. ⓒ 강민혜     △윤동주가 생전에 사용했던 물건들. ⓒ 강민혜     참가자들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힐 즈음, 청량한 숲 내음이 가득한 청송대(聽松臺)에 도착했다. 청송대는 ‘소나무 소리를 듣는다’는 뜻이다. 윤동주 시인의 스승이었던 이양하 교수는 수필 에서 “우리 연희전문학교 일대를 덮은 신록은 어제보다도 한층 더 깨끗하고 신선하고 생기 있는 듯하다”며 청송대의 생명력을 칭송했다. 그래서일까. 제자인 윤동주도 산책을 위해 청송대를 자주 찾았다고 한다. 참가자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소나무 소리를 들으며 윤동주의 숨결을 함께 느껴보았다.   | 걷기를 예찬한 철학자들   “ 무엇보다 걷고자 하는 열망을 잃지 않길 바란다. 날마다 나는 나 자신을 행복 속으로 바래다주고, 모든 아픔에서 걸어 나온다. 나는 나 자신을 최고의 생각 속으로 데려다 준다. 그리고 나는 사람이 걸어 나오지 못할 정도로 괴로운 생각을 알지 못 한다.   ”  -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     “ 앉아서 지내는 삶은 성령을 거스르는 진정한 죄악이다. 걷기를 통해 나오는 생각만이 어떤 가치를 지닌다.   ”  - 독일 철학자 니체     키에르케고르는 사랑하는 여인을 잃은 슬픔에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았지만, 걷는 행위를 통해 위로받았다. 평생 우울증을 알았던 니체도 걸으면서 마음의 병을 다스렸다. 또 제네바의 철학자인 루소는 파리 외각 전원을 걷는 시간을“하루 중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유일한 시간”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이처럼 많은 철학자들이 걷기를 통해 사색을 즐기고, 정신적 치유와 위안을 얻었다.   윤동주는 어땠을까. 그도 걷기를 즐겼다. 안소영의 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동주의 산책은 유명했다. 산보라기엔 꽤 먼 길이었고, 족히 두어 시간 걸릴 때도 많아 원족(遠足, 소풍)이라 할만 했다.” 이처럼 윤동주는 혼자, 또는 친구들과 함께 연희전문 교정을 자주 산책했다.      “ 언더우드 동상을 가로질러 노천극장 뒤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맞은편에 이화여전 건물이 보이고 쉬어갈 만한 언덕이 나왔다. 달맞이하기도 좋고, 밤바람 쐬며 나무의자에 앉아 이야기나누기도 좋았다.   ”    이 대목이 바로 ‘동주산책길 발굴기획’의 시작이었다. 이번 ‘윤동주 산책길 따라 걷기’ 행사의 주축이 된 ‘동주산책길 발굴기획단’은 윤동주의 산책길을 개발하고 알리자는 취지로 지난해 결성된 모임이다. 현재 회원은 11명이며, 절반 이상이 서대문도서관에서 10년 넘게 활동한 독서동아리 출신이다. 동주산책길 발굴기획단의 조미환 대표는 “안소영의 를 통해 윤동주가 하루도 산책을 거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의 산책길이 바로 내가 사는 동네임을 깨달았다”며 “윤동주와 그의 시에 조금 더 공감하기 위해 그 길을 우리도 걸어보자는 취지로 동주산책길을 발굴하기 시작했다”고 털어놨다. 또 이번 행사 기획에 대해선 “우리가 찾은 길을 서울 시민에게 알려주고, 윤동주 시인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함께 가져보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윤동주 산책길을 따라 걷다보면 숲의 청량함과 마주하게 된다. ⓒ 강민혜     산책이란 본래 천천히 걷는 일이다. 그런데 현대인들에게 걷기란 목적지를 정해 놓고 그곳을 향해 가는 일이 되었다. 그래서 가는 동안에는 효율을 따질 수밖에 없다. 가장 쉽고, 가장 빠르게 가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윤동주에게 걷기란 시를 완성해 나가는 일이었다. 피부 위를 스치는 바람을 느끼고, 평소에 못 보던 푸른 나뭇잎과 맑은 하늘을 보면서, 윤동주는 생각을 정리하고 세상에 대한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조 대표는 “사람들이 윤동주와 같은 마음으로 ‘산책’을 즐겼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내비쳤다.   조 대표는 또 “좀 더 나아가서는 윤동주의 시에 담긴 참뜻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윤동주는 북간도에서 태어나, 연희전문학교 문과에서 4년 간 공부했고, 일본으로가 후쿠오카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윤동주를 시인이라고만 알고 있을 뿐, 독립운동가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때문에 윤동주의 작품 중 알려진 것들은 서정적인 시들이 대다수다. 윤동주가 시에 담고자 했던 항일의 원뜻이 굉장히 많이 가려져 있는 것이다.      “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윤동주가 걸었던 산책길을 따라 걸으며, 우리말도 쓰지 못하는 일제강점기 치하의 그 암울한 현실 속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고 고민했던 윤동주와 공감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윤동주의 시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     △윤동주와 송몽규의 연희전문 학적부와 성적표. 윤동주와 송몽규의 이름에 빨간 펜으로 두 줄이 그어져 창씨 개명된 성이 기재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강민혜     ‘동주산책길 발굴기획단’이 그동안 고증을 통해 찾아낸 완성된 산책길은 총 3개. 지금도 꾸준히 발굴 중이다. 서대문도서관은 "산책길을 거닐며 윤동주의 숨결을 느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걷기 행사는 지난 5월 27일에 1차, 이날에 2차가 열렸고, 3차는 오는 7월 8일에 열린다.    이 밖에도 ‘윤동주, 읽다 쓰다 걷다’ 중 ‘윤동주 읽다’에서는 의 저자 안소영 작가, 의 저자 송우혜 작가, 류양선 교수, 김응교 작가 등이 윤동주와 관련된 책을 시민들과 함께 읽는 시간을 가졌다. ‘윤동주 쓰다’에서는 오는 7월 5일, 유지희 시인이 시민들과 함께 윤동주의 시를 읽어보고 느낀 점을 시로 적는 시간을 가진다. 서대문도서관은 "이번 사업을 통해 지역주민들이 문학작품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통해 역사의식을 고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글. 강민혜 기자    
2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무서운 시간 댓글:  조회:2961  추천:0  2018-07-24
윤동주    무서운 시간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이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나를 부르지 마오.                        1941.2.7.       「이적」에서 윤동주는 “내 모든 것을 여념 없이 / 물결에 씻어 보내려니 / 당신은 호면으로 나를 불러내소서.”라고 썼었다. 자기를 무겁게 잡아당기는 “여념”들을 모두 물결에 씻어 버려 가볍게 될 터이니 “당신”은 자기를 베드로가 갈릴리 호수 위를 걷듯 물위로 걸어갈 수 있게 불러 달라는 것이다. 즉 그는 어떤 부름을 기다렸던 것이다. 기독교인은 하느님이 어떤 일을 하라고 자기를 부르신다고 믿는다. 사람이 평생 성심성의로 할 일, 즉 평생 직업을 기독교에서는 “소명(召命)”이라고 하는데, 이는 “부름 받은 사명”이란 말이다. 우리는 이 개념에서 기독교적 냄새를 없애고 “천직(天職)”이라고 옮겨서 쓰기도 한다. 서양말로는 “콜링(calling)” 또는 “베루프(Beruf)”이니 우리말로는 그냥 “부름”이라 옮겨도 좋겠다.   「이적」을 쓸 때만 해도 윤동주는 머나먼 만주에서 “경성”의 연희 전문 문과 1학년생이 되어 있어서 장래에 대한 큰 희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즉 그는 어떤 “부름”에 응답할 기분이었다. 그런데 1941년 2월 7일, 3학년 마지막 무렵 방학 중에 만주 용정 본가에 돌아온 그가 자신이 절망의 늪에 빠져 있음을 통렬히 느끼면서 지은 「무서운 시간」에서 그 어떤 “부름”에 응답하기를 거부한다.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그는 어떤 부름을 들은 모양이다. 그러나 그는 그 부름에 응하기를 거부한다. 그냥 얌전히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퉁명스럽게 힐문하는 투로 거부하는 것이다.   어떤 부름일까? 우선 당시에 조선 청년에게 “독립 운동”을 권유하던 은밀한 부름이라고 해석해 보자. 이는 특히 만주 출신 청년들이 뿌리치기 어려운 당위적 부름이었지만 그것은 한편으로는 현실적으로 죽음의 길도 됨을 거의 누구나 의식했을 것이다. 민족의 앞날을 내다보고 공부에 정진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되었지만 당위의 명분은 언제나 강압적이었다. 그의 고종 사촌으로 연희 전문 동창인 송몽규는 바로 그런 부름에 응답하여 독립군 모병에 응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런 부름에 그는 강하게 거부한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처럼 강력한 부정으로 이끄는가? 이 시를 자세히 읽어 보자. (그러나 3년 뒤 그는 끝내 그런 부름에 응한 것으로 일본 법정의 판결이 나서 옥사하였다.) 그때 윤동주와 같이 일본 교토에 유학 중이던 송몽규도 같이 체포되어 비슷한 시기에 옥사했다. 일본 관헌은 특히 송몽규를 요시찰 인물로 지목하고 그를 늘 미행하였는데, 송몽규는 사촌이요 연희 전문 동창이며, 교토대의 이웃 대학인 도시샤대에 다니는 윤동주의 하숙방(“육첩방은 남의 나라”)에 자주 와서 독립 운동 얘기를 했고 하숙집 주인은 이를 관헌에 밀고했다고 한다. 송우혜 지음, 『윤동주 평전』 개정판. 세계사(1998) 참조.)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아직도 호흡이 남아 있는 자기를 구태여 불러 가지 말라는 것 같다. 그러지 않아도 곧 멈출 “호흡”을 미리 불러 가지 말라는 것이다. “가랑잎”은 보통 가을에 말라서 떨어지는 잎, 즉 낙엽을 뜻하는데 왜 윤동주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이라고, 이른 봄철을 말하고 있는가? 그가 낱말을 잘못 쓰고 있는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여, 아니다. 우리는 “가랑잎”의 정확한 뜻을 더 잘 알아볼 필요가 있다.   김우창은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을 “여기에서는 그것이 그늘이기 때문에 오히려 가랑잎까지도 푸르러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환상 효과에 불과하다”고 해석한다. 물론 틀린 해석이다. “가랑잎”을 그냥 낙엽이라고 해석하고 들어가면 그렇게 좀 억지를 부려야 한다.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곳에서」, 이선영 편, 『윤동주 시론집』, 바른글방, 1989, 102쪽) 큰 사전에 보면 “가랑잎”은 “갈”이라고도 하며 “갈”은 다시 “떡갈나무”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가랑잎”은 “떡갈나무 잎”이라는 말도 되겠다. 우리 산야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떡갈나무는 그 넓은 잎이 가을에 바짝 말라도 안 떨어지며 한겨울에도 바람에 부딪쳐 서걱서걱 스산한 소리를 내면서 그대로 붙어 있다가 이른 봄에 새잎이 나오면서 떨어진다. 윤동주가 이 시를 지은 때는 2월이니 늦겨울, 그러니까 떡갈나무의 마른 이파리들이 떨어지면서 파란 새잎이 돋아날 새봄을 내다볼 수 있는 때이겠다. 한참 뒤에 그가 「별 헤는 밤」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누렇게 마른 떡갈나무 잎을 떨구고 그 자리에 파란 새잎이 돋아 나올 것이다. 그러기 전까지는 마른 가랑잎은 나무에 붙어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이 그의 호흡도 극도로 위축되긴 했어도 채 끊어지지 않고 있으니 스스로 미리 끊지는 않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종교적 의미의 재생이나 부활의 소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을 앞으로 곧 피어날 새잎에 비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떨어질 묵은 가랑잎에 비한다. 새잎은 밝고 넓은 하늘 향하여 손짓하듯 활짝 피지만 ---푸른 떡갈나무 잎은 활짝 편 손바닥처럼 생겼다--- 그는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 나를 부르는 것이오?   다시 말하면 묵은 가랑잎 같은 나를 부르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늘”이 그에게 절대적 기준이 됨을 그의 「서시」에서 읽는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이라는 그의 염원은 우리 모두의 귀에 쟁쟁하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는 하늘이 거부되고 오로지 절망의 어두운 좁은 공간(“그늘”)만이 주어져 있다. 여기에 그의 시에 자주 나오는 밀폐된 공간으로서의 “방”의 이미지가 간접적으로 나타난다. 방은 하늘의 정반대의 공간이다. 방은 구속이요, 하늘은 자유다.   그는 자유를 “마음껏 손을 뻗어 표할 수 있는 공간”으로 표현하고 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손을 들어 표하는 것은 회의 같은 데서 찬성 또는 반대 의사를 표하는, 매우 일상적인 행위다. 그러나 손을 들어 의사를 표할 수 있는 당연한 기본적인 자유가 당시의 그에게는 거부되어 있었다. 또한 그는 하늘을 마음대로 손을 뻗어 뜻을 말할 수 있는 자유와 해방의 공간으로 심상화하고 있었다. 몸뿐 아니라 정신의, 영혼의 손을 마음대로 뻗어 생각을 나타낼 수 있는 자유는 이른바 자유세계에 사는 사람에게도 저절로 주어지는 특권은 아니다. “하늘”이 아니라면 그를 불러갈 만한 어떤 공간도 없다는 것이다.   일이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일이 마치고”는 “일을 마치고”의 잘못인 듯하지만 대사전에 보면 “마치다”는 “끝이 나다”라는 뜻의 자동사도 된다. 거의 모든 윤동주 시집들의 원천으로 되어 있는 1955년 정음사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자필 원고와는 다르게 “일을 마치고”로 되어 있다. 그래서 항간에 그렇게 알려져서 유포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는 좀 낯설지만 윤동주에게는 자연스러운 용법이었던 것 같다. 무슨 일을 마친다는 말인가? 긴긴 겨울 동안 억지로 나무에 붙어 있는 가랑잎처럼 그냥 오래 참고 견디는 것이 그의 무의미한 “일”이라고 여겼던 것일까? 가랑잎은 새잎이 돋아나면 “서럽지도 않”게 저절로 떨어진다. 가랑잎은 자연의 순리대로 그냥 “서럽지도 않게” 떨어지고 만다. 「병원」에도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라는 구절이 나온다. 인간은 오랫동안 자연과 사람은 서로 교감하여 사람이 슬퍼하면 자연도 슬퍼한다고 느꼈었다. 그러나 오늘날 자연은 자연이고 사람은 사람이지 둘 사이에는 아무런 교감이 없다고 믿는데 이것이 사람의, 특히 시인의 슬픔이기도 하다. 윤동주는 자연과의 교감을 믿을 수 없음을 못내 아쉬워하는 듯하다. 이 구절에서 윤동주는 그냥 가랑잎처럼 떨어져 버릴 존재이니 무거운 사명 운운하지 말라는 절망의 소리를 부르짖는 것 같다.   그런 가랑잎처럼 그냥 있어도 죽을 목숨인데 구태여 나를 불러내어 괴롭고 무서운 죽음의 길로 몰아가지 말라는 절규인 듯하다. 절망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위대한 명분을 가진 소명이라도 무의미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 부름이 반드시 독립 운동에 참여하라는 부름이라고 한정할 수가 없다고 느끼게 된다. 아마도 그것과 뒤섞여서 종교적 의미의 소명, 구체적으로 기독교적 이상을 향한 결단에 대한 요청일 수도 있다. 그것은 절망하고 있는 그에게는 괴롭고 버겁기만 한 소명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나를 부르지 마오.’ 하고 잘라 말한다. 이렇게 부르는 소리가 있는 순간은 “무서운 시간”이며 이 무서운 부름에 무섭게 잘라서 거절해야 하는 것이 윤동주의 무서운 운명이다.   이 시는 절망의 늪에서 아프게 외치는 윤동주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가랑잎”이 손바닥 같은 싱싱한 떡갈나무 잎을 뜻하는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그와 정반대로 앙상한 겨울 가지에 붙어 있는 바싹 마른 잎을 뜻한다는 사실을, 기막히면서도 무섭게 이용하여 이처럼 무서운 시를 만든 것이다. ============================/// 이 시는 화자를 부르는 죽음의 소리가 들리는 시간은 무서운 시간이므로 일을 마치고 서러움없이 죽을 때까지 죽음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시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누가 나를 하늘로 오라고 부르는 소리가 있어 무서운 시간(時間)이다. 아직 호흡이 남아 있는데 나를 부르는 소리가 있어 무섭다.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이 있는 봄날에, 죽음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있다. 나는 살면서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하고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었고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다고 나를 부르는가? 일을 끝마치고 내 죽는 날에는 서러움도 없을 것이고 가랑잎이 떨어지는 가을일 것이니 죽음이여 나를 부르지 마라. 너가 나를 부르니 무섭다. 이 시를 구절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은 제목으로 화자가 현재 무서워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 원인은 나를 부르는 소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 소리는 죽음이 부르는 소리이다. 화자는 해야할 일을 마쳐야하는데 일을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죽음이 부르니 화자에게는 ‘무서운 시간’인 것이다.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는 호흡이 남아 있고 이파리 푸르른 봄의 나무 그늘에 있는 화자를 부르는 존재가 있다는 말이다.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는 계절이 봄이라는 것을 말하면서 화자가 아직 죽음을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은 5연의 ‘가랑잎이 떨어질’과 대응되어 화자가 삶의 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일이 마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랑잎’은 화자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삶의 의지와 소명을 가진 화자를 누군가 부르고 있다. 화자를 부르는 존재는 누구일까? 이 존재는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라고 화자가 말하는 것으로 볼 때에 아직 살아있는 화자가 거부하는 대상이다. 화자를 부르는 ‘누구’는 화자의 호흡이 남아있지 않을 때에 화자를 불러야 정상인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4연에서 화자가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 나를 부르는 것이오.’라고 하는 것으로 볼 때에 ‘누구’는 ‘하늘’에 화자를 데려가는 존재이면서 화자가 호흡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 즉 죽은 상태에서 화자를 부르는 존재이다. 이러한 존재는 ‘저승사자’ 또는 ‘죽음’을 의인화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 나를 부르는 것이오.’는 화자가 세상을 절망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어 보지 못했다는 것으로 그이유는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기 때문이다. ‘하늘’은 시에서는 ‘꿈, 희망, 이상’을 의미하므로 화자는 살면서 한번도 ‘희망’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절망 속에서 살았다는 것이다. 화자를 부르는 존재가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화자를 부르는 것이 아니다. ‘하늘이 있어’ 화자를 부른다면 긍정적인 존재일 것인데 화자는 마지막 연에서 ‘나를 부르지 마오.’고 부르는 것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누구’가 부르는 시간을 ‘무서운 시간’이라고 하는 것을 볼 때에 화자를 부르는 ‘누구’는 부정적인 존재이면서 화자에게 ‘한 몸 둘 하늘’을 주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일이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 나를 부르지 마오.’는 화자가 절망적인 상황에서 화자에게 주어진 ‘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을 맞이 하고 싶고 그렇게 된다면 ‘서럽지도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일이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은 화자가 ‘일’을 끝마치고 즉 화자에게 주어진 길을 다 간 후에 ‘내 죽는 날’은 지금은 아니다. 그리고 어느 날인지 모르지만 ‘아침’인 것만은 분명하다. ‘아침’은 시에서 희망이 이루어진 때를 의미한다.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에서 ‘가랑잎’이 화자의 삶을 의미하므로 ‘떨어질 텐데’는 죽을 것이라는 의미이고 ‘서럽지도 않’다는 것은 자연의 일부인 ‘가랑잎’이 화자의 죽음에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화자가 ‘일’을 ‘마치고’ 죽기 때문에 죽는 것이 서럽지 않다는 의미이다. 아직 화자는 일이 마‘쳐진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죽음’을 무서워하는 것이고 ‘죽음’이 화자를 부르는 시간이 ‘무서운 시간’이 되는 것이다. ‘……’는 아직 ‘일이 마’치지 않은 상태에서 오려고 하는 '누구'인 죽음이 주는 ‘무서운 시간’에 대한 온갖 감정이 생략된 것이다. ’나를 부르지 마오.’는 화자가 ‘일이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이 올 때까지는 죽을 수 없다는 화자의 각오가 담긴 말이다.20130710수후1159전한성 참고 “가랑잎”은 보통 가을에 말라서 떨어지는 잎, 즉 낙엽을 뜻하는데 왜 윤동주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이라고, 이른 봄철을 말하고 있는가? 그가 낱말을 잘못 쓰고 있는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여, 아니다. 우리는 “가랑잎”의 정확한 뜻을 더 잘 알아볼 필요가 있다. 김우창은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을 “여기에서는 그것이 그늘이기 때문에 오히려 가랑잎까지도 푸르러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환상 효과에 불과하다”고 해석한다. 물론 틀린 해석이다. “가랑잎”을 그냥 낙엽이라고 해석하고 들어가면 그렇게 좀 억지를 부려야 한다.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곳에서」, 이선영 편, 『윤동주 시론집』, 바른글방, 1989, 102쪽) 큰 사전에 보면 “가랑잎”은 “갈”이라고도 하며 “갈”은 다시 “떡갈나무”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가랑잎”은 “떡갈나무 잎”이라는 말도 되겠다. 우리 산야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떡갈나무는 그 넓은 잎이 가을에 바짝 말라도 안 떨어지며 한겨울에도 바람에 부딪쳐 서걱서걱 스산한 소리를 내면서 그대로 붙어 있다가 이른 봄에 새잎이 나오면서 떨어진다. 윤동주가 이 시를 지은 때는 2월이니 늦겨울, 그러니까 떡갈나무의 마른 이파리들이 떨어지면서 파란 새잎이 돋아날 새봄을 내다볼 수 있는 때이겠다. 한참 뒤에 그가 「별 헤는 밤」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누렇게 마른 떡갈나무 잎을 떨구고 그 자리에 파란 새잎이 돋아 나올 것이다. 그러기 전까지는 마른 가랑잎은 나무에 붙어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이 그의 호흡도 극도로 위축되긴 했어도 채 끊어지지 않고 있으니 스스로 미리 끊지는 않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종교적 의미의 재생이나 부활의 소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을 앞으로 곧 피어날 새잎에 비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떨어질 묵은 가랑잎에 비한다. 새잎은 밝고 넓은 하늘 향하여 손짓하듯 활짝 피지만 ---푸른 떡갈나무 잎은 활짝 편 손바닥처럼 생겼다--- 그는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 나를 부르는 것이오? 다시 말하면 묵은 가랑잎 같은 나를 부르지 말라는 것이다. “일이 마치고”는 “일을 마치고”의 잘못인 듯하지만 대사전에 보면 “마치다”는 “끝이 나다”라는 뜻의 자동사도 된다. 거의 모든 윤동주 시집들의 원천으로 되어 있는 1955년 정음사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자필 원고와는 다르게 “일을 마치고”로 되어 있다. 그래서 항간에 그렇게 알려져서 유포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는 좀 낯설지만 윤동주에게는 자연스러운 용법이었던 것 같다. 무슨 일을 마친다는 말인가? 긴긴 겨울 동안 억지로 나무에 붙어 있는 가랑잎처럼 그냥 오래 참고 견디는 것이 그의 무의미한 “일”이라고 여겼던 것일까? 가랑잎은 새잎이 돋아나면 “서럽지도 않”게 저절로 떨어진다. 가랑잎은 자연의 순리대로 그냥 “서럽지도 않게” 떨어지고 만다. 「병원」에도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라는 구절이 나온다. 인간은 오랫동안 자연과 사람은 서로 교감하여 사람이 슬퍼하면 자연도 슬퍼한다고 느꼈었다. 그러나 오늘날 자연은 자연이고 사람은 사람이지 둘 사이에는 아무런 교감이 없다고 믿는데 이것이 사람의, 특히 시인의 슬픔이기도 하다. 윤동주는 자연과의 교감을 믿을 수 없음을 못내 아쉬워하는 듯하다. 이 구절에서 윤동주는 그냥 가랑잎처럼 떨어져 버릴 존재이니 무거운 사명 운운하지 말라는 절망의 소리를 부르짖는 것 같다. 그런 가랑잎처럼 그냥 있어도 죽을 목숨인데 구태여 나를 불러내어 괴롭고 무서운 죽음의 길로 몰아가지 말라는 절규인 듯하다. 절망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위대한 명분을 가진 소명이라도 무의미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 부름이 반드시 독립 운동에 참여하라는 부름이라고 한정할 수가 없다고 느끼게 된다. 아마도 그것과 뒤섞여서 종교적 의미의 소명, 구체적으로 기독교적 이상을 향한 결단에 대한 요청일 수도 있다. 그것은 절망하고 있는 그에게는 괴롭고 버겁기만 한 소명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나를 부르지 마오.’ 하고 잘라 말한다. 이렇게 부르는 소리가 있는 순간은 “무서운 시간”이며 이 무서운 부름에 무섭게 잘라서 거절해야 하는 것이 윤동주의 무서운 운명이다. 이상섭∙연세대학교 명예 교수, 평론가  
1    화룡적 "허씨네 3형제"작가 창작품 그림책으로 재탄생하다... 댓글:  조회:3188  추천:0  2018-07-24
           허씨 3형제의 중국 조선족 작가 창작 그림책 시리즈 출간     중국조선족 작가 창작 그림책 시리즈인 허봉남의 《칠동이의 변신술》, 허두남의 《뽐내던 날치》, 허충남의 《우주인의 만능옷》 등 허씨 3형제의 작품들이 일전 연변인민출판사에 의해 출간됐다. 허봉남 저, 신순칠 그림의 《칠동이의 변신술》은 , , 등 3편의 동화로 꾸며졌고 허두남 저, 김휘 그림의 《뽐내던 날치》는 , , 등 16편의 우화로 묶어냈다. 허충남 저, 신순칠 그림의 《우주인의 만능옷》은 , , , 등 4편의 동화로 꾸며졌다. 세 작품 모두 민족문자 출판물 특별보조 프로젝트로 출간됐다. /연변일보 신연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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