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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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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또 태초의 아침 댓글:  조회:2647  추천:0  2018-07-25
《 태초의 아침 》                    윤동주 봄날 아침도 아니고  여름, 가을, 겨울, 그런날 아침도 아닌 아침에 빨~간 꽃이 피어났네, 햇빛이 푸른데, 그 전날 밤에 그 전날 밤에 모든 것이 마련되었네, 사랑은 뱀과 함께  독은 어린 꽃과 함께.  《 또 태초의 아침 》                             윤동주 하얗게 눈이 덮이었고 전신주가 잉잉 울어 하나님 말씀이 들려온다. 무슨 계시일까. 빨리  봄이 오면 죄를 짓고 눈이 밝어 이브가 해산하는 수고를 다하면 무화과 잎사귀로 부끄런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 < 1941년 5월 31일 >   나라가 독립되는 그날, 태초의 아침을 얼마나 기다렸을까요? 기독교적 요소가 숨어있지만, 근본적으로 그가 원했던 것은 나라의 해방이었을 겁니다. 이브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사과를 먹어 벌을 받은 이야기는 알고 계시죠?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부끄럽게 사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아마도, 일제 강점기에 살면서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그의 안타까운 마음이 부끄러움으로 그려진 것은 아닐까요? ===================== 또 태초의 아침 - 윤동주     하얗게 눈이 덮이었고 전신주가 잉잉울어 하나님 말씀이 들려온다   무슨 게시일까?   빨리 봄이 오면 죄를 짖고 눈이 밝아   이브가 해산하는 수고를 다하면   무화가 잎사귀로 브끄런 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 겠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전 존재를 기울여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이 다음에는 더욱 많은 이웃들을 사랑할 수 있다. 다음 순간은 지금 이 순간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지 시절이 달로 있는 것이 아니다.     - 봄 여름 가을 겨울 중에서       윤동주의 시에 대하여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序詩] 전문 * 윤동주(1917~1945) 시인의 [序詩]는 우리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읽고 암송하고 있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라는 시구는 윤동주 시인의 티없이 맑은 천성天性이 사실 그대로 잘 드러나고 있는 시구라고 할 수가 있다. 도덕은 아름다움의 결정체이고, 우리는 이 도덕의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미화하고 성화시키게 된다.       산모통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 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 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 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 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 [自畵像] 전문 * 나는 사랑의 대상이면서도 미움의 대상이 된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긍지를 가질 때 나는 사랑의 대상이 되고,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긍지를 갖지 못할 때 나는 미움의 대상이 된다. 사랑의 대상은 그리움의 대상이 되고, 미움의 대상은 경멸의 대상이 된다. 우리는 누구나 다같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도 미워하고 있는 것이다. 이 애증이 겹치는 존재가 윤동주 시인의 [自畵像]이며, 그것은 우리 인간들의 불완전함의 극적인 표상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 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빨리 봄이 오면 죄를 짓고 눈이 밝어     이브가 해산하는 수고를 다하면     무화과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 ----윤동주, [또 태초의 아침] 부분 *“나는 신성모독을 범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낙천주의자로서의 나의 존재론이고, “세계는 나의 범죄의 표상이다, 고로 행복하다”는 낙천주의자로서의 나의 행복론이다. 모든 창조자는 신성모독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되고, 우리는 그 신성모독자의 삶을 행복하게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코페르니쿠스의 신성모독, 부처와 예수의 신성모독, 니체와 쇼펜하우어의 신성모독, 보들레르와 랭보의 신성모독 등은 이 범죄의 생산성과 그 아름다움을 가장 역동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한국시문학사상 어느 누가 “빨리/ 봄이 오면/ 죄를 짓고/ 눈이/ 밝어// 이브가 해산하는 수고를 다하면// 무화과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라고 노래한 적이 있었던가? 윤동주 시인은 한국적인 정한의 세계를 벗어나서, 대쪽같은 장인 정신과 성자의 영웅주의를 육화시킨 시인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어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윤동주, [십자가] 부분 *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위대한 것은 ‘사상’인데, 왜냐하면 사상은 이 세상의 삶에 대한 욕망마저도 헌신짝처럼 버리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상은 그것이 만인평등이든, 내세의 천국이든지간에, 그 주체자에게 분명한 목적을 제시해 주고, 그 목표를 위해서는 마치, 자살특공대처럼 순교를 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것은 순교자의 삶이라고 할 수가 있다. 예수의 순교, 부처의 순교, 이순신의 순교, 윤동주의 순교 등----. 당신은, 당신은, 과연 당신만의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는 용기가 있는가?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 보면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오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다른 고향에 가자. ----윤동주, [또다른 고향] 부분 *우리 인간들의 고향은 영원한 이상적인 천국이며, 언제, 어느 때나 되돌아가 영원히 살고 싶은 지상낙원이라고 할 수가 있다. 하지만, 그러나 고향은 마음 속의 고향일 뿐, 우리 인간들이 되돌아가 영원히 살아야 할 지상낙원이 될 수가 없다. 고향은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고, 또한 고향은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영원히 존재한다. 고향은 환영이며, 신기루이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다른 고향에 가자.”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때 책상을 같이 했든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소녀異國小女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쓰 짬, 라이넬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北間島에 계십니다. ---윤동주, [별 헤는 밤] 부분 *밤 하늘의 별을 바라보면 누구나 저절로 시인이 된다. 왜냐하면 밤 하늘을 바라보면서, 자기 자신을 속이고, 타인들을 속이고 싶은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정직해진다. 솔직해진다. 이 정직함과 솔직함이 시를 쓰게 한다. 시는 언어의 아름다움이다. 그 아름다움이 밤 하늘의 별이 된다.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년 일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든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든가 ----윤동주, [참회록] 부분 * 부끄러움은 떳떳하지 못함이다. 부끄러움은 남 앞에서 얼굴을 들지 못하게 하지만, 그러나 그 부끄러움을 반성할 때, 그 떳떳하지 못함은 맑고 깨끗하게 씻겨진다. 참회는 씻어냄이며, 자기 정화운동이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 [또 태초의 아침], [십자가], [또다른 고향], [별 헤는 밤], [간 肝] 등은 이 참회가 피워낸 명시에 해당된다.       푸로메디어쓰 불쌍한 프로메디어쓰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디어쓰 ----윤동주, [간肝] 부분 * 프로메테우스는 우리 인간들을 창조한 그리스 신화 속의 신이었고, 우리 인간들에게 사유의 능력과 함께, 올림프스의 불을 가져다가 준 신이었다. 그 결과, 그는 카우카소스(코카서스)의 바위산에 묶여서 제우스의 신조神鳥인 독수리에게 하염없이 간을 쪼아먹혀야만 하는 천형의 형벌의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프로메테우스는 문명과 문화의 수호신이었고, 윤동주 시인은 불을 숭배하는 배화교도拜火敎徒였다.                    
4    [동네방네] - 농민공의 자식 최경도 북경대학으로... 댓글:  조회:2767  추천:0  2018-07-25
농민공의 자식 최경도 북경대학 입학통지서 받다 (ZOGLO) 2018년7월25일  운남성 시골의 한 농민공가정의 자식이 며칠전에 북경대학 입학통지서를 받은 것이 요즘 인기뉴스로 뜨고 있다.  운남성 곡정시 《곡정일보》에서 본시 회택현 자해진 오리패촌 록음당마을 40대 중반의 최무영,허수란부부의 아들 최경도가 22일에 북경대학 입학통지서를 받아든 소식을 전하면서 네티즌들의 마음을 달구었다.    사진은 어머니와 함께 공지에서 일하고 있는 최경도(왼쪽). 최경도는 대학입시를 마치고 줄곧 부모와 함께 건축공지에서 삯일을 했다. 22일, 그날에도 정구당저수지마을의 한 개인저택 건축공지서 콘크리트반죽일을 하다가 우정국택배원으로부터 전화로 경도가 있는 위치를 확인받고 30분후면 그의〈북경대학입학통지서〉를 송달해간다는 기쁜 소식을 전달받았다. 최경도의 부모는 최경도가 중학교에 올라갈 때까지 다 외지에 나가 벌이를 했고 경도가 자해에서 중학교를 다니게 되자 그의 아버지만 집으로 돌아왔고 집 가까이 건축공지들을 다니며 일을 계속했다. 어린 녀동생을 데리고 곤명에서 벌이를 하고 있던 경도의 어머니도 며칠전에 딸애가 방학을 하게 되자 집으로 돌아와 공지일을 하고 있었다. 경도와 그의 어머니가 반죽을 밀차에 실어 간이 기중기로 2층에 올리는 장면.     푸른색 우정배달차가 공지로 들어오고 있다.           배달원이 건네는 필을 받아 〈북경대학 입학통지서〉배달확인서에 싸인하고 있는 최경도.                         배달원이〈입학통지서〉와 축하의 꽃묶음을 드렸다.   ‘입학통지서'를 보고 또 보는 경도네 식구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였다.   경도의 아버지는 1자 무식‘까막눈’이다. 하지만 통지서의 내용에 대해 알고퍼 남보다 서두른다. 전업은 북경대학 신문 및 미디어학원이고 8월 30일까지 그 통지서를 휴대하고 등교하라는 내용과 림건화 북경대학 총장의 싸인자까지 읽어주는 소리를 듣고나서 경도의 아버지는 흐뭇해하며“아들아, 정말 장하다 !”고 경도를 치하했다. 순간 온집식구는 행복속에 잠겼다.   그날로 경도가 다니던 회택현 인왕고급중학교에서 여러 선생님들이 최경도네 집을 찾아왔다. 그들은 최경도의 가정형편을 료해한후 최경도와 그의 부모에게 조학대출방법과 절차를 알려주었고 경도더러 입학준비를 잘 하도록 당부했다.   ///신화넷  편역 ///길림신문 김영자기자 ======================      
3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극한 모성애",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979  추천:0  2018-07-25
새끼가 76마리? 어느 비오리 엄마의 '극한 육아' 2018.07.25.  자동요약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애니멀피플]  미국 미네소타 호수서 조류 사진가 촬영 남의 알 받은 데다 이웃 새끼 입양한 듯 [한겨레] 미국 미네소타주 베미지 호에서 지난달 촬영된 비오리 새끼의 기다란 행렬. 어미의 등에 올라간 것부터 한 프레임에 미처 담지 못한 새끼까지 50마리가 넘는다. 이후 그 수는 더 불어났다. 브렌트 시제크 제공. “새끼를 몇 마리 입양한 비오리 같네요” 지난달 23일 미국인 아마추어 조류 사진가인 브렌트 시제크는 미네소타주 베미지 호수에서 촬영한 사진을 사회관계망 서비스인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그저 ‘몇 마리’가 아니었다. 어미 비오리 뒤에는 50마리 이상의 새끼 오리가 긴 줄을 이루어 헤엄치고 있었다. “멋진 사진”이라는 댓글과 함께 “엄마가 너무 힘들겠다”는 반응이 달렸다. 이야기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지난 17일 그는 인스타그램에 그 비오리 가족의 최근 사진을 올렸다. 새끼는 더 불어나 적어도 76마리나 됐다. 그는 “이제는 유명해진 비오리를 다시 찾았는데 입양한 새끼가 적어도 76마리였다. 이 사진이 전달하는 이야기가 좋다”라고 적었다. 17일 적어도 76마리로 불어난 비오리. 위험 분산을 위한 남의 알과 함께 어미를 잃은 이웃의 새끼를 입양한 것으로 보인다. 브렌트 시제크 제공. 비오리 어미는 어떻게 이렇게 많은 새끼를 가지게 됐을까. 비오리는 유라시아와 북아메리카에 널리 분포하며, 나무구멍에 둥지를 틀고 8∼12개의 알을 낳는다. 많아야 17개 정도의 알을 낳을 뿐이다. 미국의 조류보호단체 오듀본협회의 켄 카우프만 필드 에디터는 이 단체의 온라인 뉴스에서 “비오리가 종종 다른 오리의 둥지에 알을 낳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말했다. 둥지가 라쿤 등 포식자의 습격을 받아 새끼를 모조리 잃는 사태에 대한 일종의 ‘보험’으로 어미 비오리는 다른 비오리 둥지에 몇 개씩 자기 알을 낳아 놓곤 한다는 것이다. 그는 많은 알을 부화시킨 데다 어미를 잃은 다른 비오리의 새끼들까지 떠안다 보니 이렇게 식구가 불어났을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비오리 부부. 벵트 니만,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아마추어 조류 사진가인 윤순영 한국조류보호협회 이사장은 “비오리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동강에서만 번식하지만 이렇게 많은 새끼를 데리고 있는 것은 못 봤다”며 “흰뺨검둥오리나 원앙이 많은 새끼를 키우는 대표적인 새이지만 기껏해야 15마리 정도”라고 말했다. /조홍섭 기자 
2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새벽이 올 때까지 댓글:  조회:3214  추천:0  2018-07-25
새벽이 올때까지                      윤동주 / 시인 다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검은 옷을 입히시오.  다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흰 옷을 입히시오.  그리고 한 침대(寢臺)에  가즈런히 잠을 재우시오.  다들 울거들랑  젖을 먹이시오.  이제 새벽이 오면  나팔소리 들려올 게외다.                   1941년 5월 오늘은 윤동주 시인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수록되어 있는 시  한 편을  읽어 봅니다. 「새벽이 올때까지」라는 시입니다. 이 시에는 죽어가는 사람과 살아가는 사람이  동시에 등장합니다. 그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나 고통 혹은 괴로움, 살아가는 데에 고통이나 괴로움 등으로 죽거나  살거나 모두가 괴롭고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죽어도 살아도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한 가닥의 희망으로 이제까지의 고통은  지나가고 새로운 날이 시작됨을 노래한  시라고 합니다. 즉, 새벽이 오고 나팔소리가 들려 옴으로서 새로운 날이 시작되고 또한 조국 광복이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     윤동주 새벽이 올 때까지   다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검은 옷을 입히시오.   다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흰 옷을 입히시오.   그리고 한 침실(寢室)에 가지런히 잠을 재우시오   다들 울거들랑 젖을 먹이시오   이제 새벽이 오면 나팔소리 들려 올 게외다.     이 시는 일제강점기에 절망 속에 사는 민중들을 보살피면 광복이 왔다는 소리가 들릴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시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새벽이 올 때까지 다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검은 옷을 입히고 다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흰 옷을 입히고 한 침실(寢室)에 가지런히 잠을 재우고 이들이 다들 울거들랑 젖을 먹여라. 이제 새벽이 오면 이를 알리는 나팔소리 들려 올 것이다.       이 시를 구절별로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는 상징으로 쓰였다. ‘새벽’은 일제강점기를 상징하는 ‘밤’이 사라지는 때로 광복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시는 광복이 올 때까지 해야할 행동을 알리는 시이다. 어조는 ‘-시오’라는 강한 의지를 담은 명령조의 행동을 지시하는 어조이다. ‘다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 검은 옷을 입히시오. // 다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 흰 옷을 입히시오. / 그리고 한 침실(寢室)에 / 가지런히 잠을 재우시오’에서 1연과 2연은 대구를 이루고 있다. 이 구절에서 ‘죽어가는 사람들’과 ‘살아가는 사람들’, ‘검은 옷’과 ‘흰 옷’이 대구를 이룬다. 그런데 왜 이렇게 색깔이 다른 옷을 입히는 지 명확하게 알 수가 없다. ‘검은 옷’의 ‘검은 색’은 ‘절망, 불길함, 암울함’을 의미하므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절망’을 가지고 살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고 ‘흰 옷’의 ‘흰색’은 ‘희망, 순결, 순수’를 의미하는 색이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희망’을 가지고 살고 있음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 외에도 다른 뜻이 더 있는 것 같다. 구지 ‘죽어가는 사람들’과 ‘살아가는 사람들’을 색으로 구별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필자는 화자(시인)이 이러한 구분을 하여 일제강점기 아래에 ‘낮과 밤’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이들을 ‘한 침실(寢室)에 / 가지런히 잠을 재우’는 데에 근거한다. 이들이 ‘한 침실(寢室)에’ 있다는 것은 생활터전이 같다는 것을 말한다. 같은 생활터전에서의 ‘흰 새’과 ‘검은 색’이 질서 있게 ‘가지런히’ 있다는 것은 낮과 밤의 반복으로 생각된다. 이 시의 전체적인 시간은 ‘새벽이 올 때까지’라는 제목으로 보면 ‘밤’이다. ‘밤’은 일제강점기를 의미한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아래 사는 희망을 잃고 또는 갖고 사는 사람들의 시간의 흐름인 낮과 밤을 ‘흰 옷’과 ‘검은 옷’으로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잠을 재우시오’는 일제강점기인 밤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이다. ‘죽어가는 사람’이나 ‘살아가는 사람’이나 절망적인 시간을 보내는 방법은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휴식 중에서도 ‘밤’에는 ‘잠을’ 자는 것이 제일 적합한 휴식이다.   ‘다들 울거들랑 / 젖을 먹이시오’에서 ‘-시-’는 화자의 명령을 듣는 청자가 화자보다 나이가 많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임을 알려준다. 이 구절을 바탕으로 볼 때에 청자는 ‘젖을 먹’일 수 있는 여자 어른이다. 청자는 ‘젖을 먹’일 수 있는 실제의 여자 어른이 아니다. 왜냐하면 ‘젖을 먹이’는 대상이 ‘죽어가는 사람들’과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젖먹이’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젖을 먹’인다는 것은 실제로 ‘젖을 먹이’는 것이 아니고 이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행위인 것이다. 청자는 일제강점기 아래서 살고 있는 민중들에게 휴식을 주고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고귀한 대상인 것이다. 이들에게 휴식과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이는 매우 추상적이므로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가 없다.   ‘이제 새벽이 오면 / 나팔소리 들려 올 게외다.’는 ‘새벽’이 오면 승리의 나팔소리가 들릴 것이라는 말이다. 앞 구절의 ‘다들 울거들랑 / 젖을 먹이시오’는 ‘젖을 먹이’라는 행동지침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새벽이 왔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윤동주 다른 시인 에서 ‘우리 집에는 / 닭도 없단다. / 다만 / 아기가 젖 달라 울어서 / 새벽이 된다.’에 근거한다. ‘젖 달라’ 우는 것은 ‘새벽’이 왔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인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막연하게 ‘새벽이 오면’이 아니라 ‘다들울거들랑’으로 새벽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실제로 ‘새벽’이 오면 ‘이제’ 승리를 알리는 ‘나팔소리’가 들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는 새벽을 알리는 소리이면서 승리를 알리는 소리이다. 일제에 승리하여 일제강점을 물리치고 광복이 되었음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들릴 것이라고 자신의 추측을 청자에게 알려주고 있다.///전한성        
1    윤동주 시집 원 제목 "병원"이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댓글:  조회:3136  추천:0  2018-07-25
다고 기치로 전 NHK PD가 발굴한 윤동주의 진실    [헤럴드경제=이윤미 기자] 2017년은 윤동주 탄생 100주년이었다. 그의 시와 삶이 많은 조명을 받으며 많은 이들이 시혼을 그렸다. 윤동주가 생의 마지막을 보낸 일본에서도 추모행사가 이어졌다.  1995년 KBS와 공동으로 NHK 스페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윤동주, 일본 통치하의 청춘과 죽음’이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했던 전 NHK 베테랑 PD 다고 기치로씨도 윤동주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30년째 윤동주의 삶을 쫒고 있다. 그는 특히 윤동주의 유일한 시집이자 유고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시집 제목이 애초 ‘병원’이었던 사실에 주목했다. 아픔과 고통, 소멸이란 죽음의 이미지가 어떻게 생명을 노래하는 것으로 바뀐 걸까? 윤동주는 애초 연희전문학교 졸업을 계기로 열여덟편의 시를 엮어 출판을 바라며 시집을 준비했다. 입학 직후인 1938년 5월10일의 ‘새로운 길’이란 시부터 마지막 작품 ‘별 헤는 밤’까지 재학 4년동안 쓴 것들이다. 윤동주는 세 부를 만들어 한 부는 스승 이양하 선생에게, 다른 한 부는 친구인 정병욱에게 주었다. 또 자신을 위해 작성한 나머지 한 부는 후에 교토에서 윤동주가 체포됐을 때 경찰에 압수돼 돌아오지 않았다.   윤동주가 ‘병원’이란 시집을 완성한 것은 1941년 11월5일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서시’로 알려진 새로운 권두시를 쓴다. 이 시가 완성된 게 11월20일이다. 이 시에 ‘하늘’‘바람’‘별’이 상징적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병원’이었던 시집이 11월20일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란 제목의 시집으로 새롭게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윤동주는 서시와 함께 마지막 시 ‘별 헤는 밤’에 4행을 추가했다. 우리가 잘 아는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란 시구다. 그렇게 바뀌기까지 그 기간은 대략 2주다.    기치로씨는 11월5일부터 20일까지 윤동주의 가슴 속에서 매우 집약적으로 변화의 드라마가 전개됐다고 말한다. 그는 스승인 이양하에게 보여준 시집이 “잘 썼네만, 이 내용으로는 출판은 어렵겠네”란 말을 듣고 좌절하면서 죽음과 영원으로의 시상과 사상으로 심화· 성장했다고 분석한다.   기독교적 사상과 신앙이 그런 심화와 비약을 재촉했다. 일본의 폭압적 지배와 제국주의적 팽창이 미국과의 개전을 앞두고 가혹해지는 시기에 시집 출판이 좌절됨으로써 번민이 더 깊어지면서 오히려 그 괴로움을 뛰어넘어 영혼을 성숙·정화시켰다는 것이다. 이로써 윤동주는 생전에 한 권의 시집조차 세상에 내놓지 못했지만 진정한 시인, 불멸의 시인이 됐다는 것이다.  기치로 씨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태어나기까지 약 2주간의 시간을 기적이라고 본다. “혼자만의 고독한 정신의 영위속에서 사상이 익게 하고 역전적인 발상을 통해 빛 가운데 시어를 빚어낸 윤동주의 집약적인 성장”은 기적이라는 말 외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기치로 씨는 자신이 새롭게 발굴해낸 결과물을 정리해 ‘생명의 시인 윤동주’(한울)를 펴냈다.이 책에는 그가 발굴한 윤동주가 체포되기 한, 두 달 전 1943년 초여름 교토의 도시샤대학 학우들과 우지강으로 소풍가서 찍은 생전 마지막 사진도 실려있다. =============== 시인 에머슨은 ‘친구를 얻는 가장 유익한 방법은 스스로 완전한 친구가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사랑과 정성을 쏟아부어야만 겨우 가능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시인 윤동주에게는 완전한 친구가 한 사람 있었다. 그가 바로 강처중이다. 강처중은 일본의 후쿠오카형무소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마친 재일유학생 윤동주의 시와 삶을 세상에 전파함으로써 영원히 그의 동반자가 되었다. 아울러 친구에 대한 굳은 의리와 아름다운 헌신을 통해 자신의 가슴팍에 새겨진 주홍글씨까지 퇴색시킬 수 있었다. 윤동주의 연희전문학교 문과 동기생이었던 강처중은 타고난 친화력과 리더십으로 윤동주와 함께 학창시절을 꽃피웠고, 재가 되어버린 윤동주의 삶을 복원하는 데 큰 공로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발간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구체적으로 그는 일본 유학을 떠난 윤동주가 서울에 두고 간 〈참회록〉 등 필사본 시집에 들어가지 않은 원고와 그의 장서, 졸업앨범, 앉은뱅이책상 등속까지 죄다 보관했다가 해방 후 서울에 온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에게 전해줌으로써 후세인들이 시인의 생생한 체취를 맡을 수 있게 해 주었다. 게다가 그는 윤동주가 도쿄에서 자신에게 보낸 편지 속에 담겨있던 5편의 시를 공개함으로써 윤동주 시문학의 지평을 넓혀 주었다. 1947년의 소란스런 해방공간에서 강처중은 경향신문 기자로 봉직하면서 무명시인 윤동주의 작품을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한편, 후배 정병욱이 보관하고 있던 윤동주의 자선시집 안에 있던 19편과,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작품 가운데 12편을 추려내 1948년 1월 총 31편의 작품이 담긴 정음사 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을 발간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 그 후 강처중은 이념 대립이 극심하던 1950년대 초반 남로당 요인으로 활동하다가 공안당국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로 인해 강처중은 남쪽에서 기피인물이 되었고 모든 공식문서에서 삭제되었다. 그 영향으로 학계에서도 민족시인 윤동주의 문학에서 그를 제외함으로써 절름발이 논문을 자초했다. 윤동주가 일제의 탄압으로 이역만리 타국에서 옥사했다면 강처중은 그처럼 민족 내부의 갈등으로 희생되었던 비극적인 존재였다. 브나로드 운동에 뛰어들다 강처중은 1916년생으로 함경남도 원산 출신이다. 부유한 한의사 집 맏아들로 태어났지만 성품이 매우 신중하고 과묵했다. 그가 어린 시절 어떤 학교에 다녔는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17세 때인 1932년 동아일보에서 실시한 제2회 브나로드 운동에 참여하여 민중을 계몽하고 한글보급과 문맹타파에 헌신했음은 당대의 동아일보 기사로 확인할 수 있다. 1931년부터 시작된 브나로드운동은 일제시기 광복군으로, 해방 후 반독재민주화투쟁으로 활약했던 14세의 장준하를 비롯하여 수백 명의 청년 학생들의 전폭적인 참여를 이끌어냈고, 당대의 수재였음에 분명한 강처중 역시 솔선수범하여 이 운동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브나로드운동은 애초에 한글보급을 통한 민족의 독립역량 배양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두고 추진되었다. 식민지 조국의 비참한 상황을 직시하고 있던 소년 강처중으로서는 한 줄기 단비 같은 뉴스였다. 당시 강처중은 방학기간인 8월 2일부터 고향에서 가까운 함경도의 고평역에서 100여 명의 농민들에게 한글, 일용계수법, 성경, 지리, 역사, 유희, 창가, 체조, 동화 등을 가르쳤다. 책임대원이었던 그의 보고서에 따르면 강처중 자신은 한글을 가르쳤고, 다른 과정은 여러 동지와 타처에서 피서 온 학생들이 가르쳤다. 그 결과 한글과 일용계수법을 해득한 사람이 20명이었다. 이듬해인 1933년부터 브나로드운동은 학생하기계몽운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때는 도쿄, 간도 등지에서도 참가신청이 이어졌고, 특히 간도의 명신여학교에서는 40명이나 참가하여 주목을 받았다. 강처중은 전년과 마찬가지로 함경북도 덕원군의 책임대원으로서 북성면 문평리에서 남녀 70여명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당시 그의 보고 내용이 동아일보 지면에 실려 있다. ‘이곳에서는 장소와 당국의 허가 관계로 하는 수없이 기독교에서 하는 하기아동성경학교와 연합하여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비용이나 당국 금지를 당하거나 하는 일은 없고, 다만 교회에서 하므로 성경본위로 하여 한글(산술은 하지 않음)을 중요시 아니하는 것이 유감이오나, 책임이 있는 저로서는 최대의 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재미있는 일은 이것이 조직적으로 되어 이곳에 해변으로 인하여 피서 온 고등 대학교 학생 중등보통학교 교사 등을 강사로 하는 훌륭한 학교가 되어 각기 전문하는 학과를 가지고 어린이들에게 수중하여 주고 있습니다.’ 연희전문학교에서 윤동주와 만나다 강처중은 23세 때인 1938년 윤동주와 함께 연희전문학교 문과 본과에 합격했다. 당시 송몽규는 문과 별과에 합격하여 동급생이 되었다. 그때부터 세 사람은 기숙사 핀슨홀의 3층 지붕 밑 방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끈끈한 우정을 쌓았다. 영어에 능통했던 그는 문과 동기들 가운데 1, 2등을 다투면서 ‘영어도사’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한편으로 뒤틀린 심사를 에둘러 표현하는 풍자적인 면도 있었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의 강요로 창씨개명을 강요받자 이름을 신농처중(神農處重)이라고 지어 학적부에 올렸던 것이다. 누군가 너무 심하지 않냐고 타박하자 중국의 삼황오제 중에 한 사람인 신농씨(神農氏)가 본래 강(姜)씨였으니 거리낄 게 무어냐며 되받아쳤다. 문과 학생이었던 강처중은 윤동주나 송몽규처럼 문학에 심취했는데 3학년 때인 194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부문에 지원했다가 낙방했다. 그때 평자는 그의 작품이 너무나 허구적이어서 실감이 없었다고 혹평했고, 특히 글에 설명이 너무 많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리더십으로 매사에 앞장섰던 그는 4학년 때 연전 문과 학생회인 문우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문예부장인 송몽규와 함께 잡지 《문우》를 발간했다. 하지만 편집과정에서 많은 원고가 검열에 걸려 삭제되었고, 잡지는 최종호가 되었으며, 국민총력운동이라는 미명하에 문우회까지 해산의 비운을 겪는다. 후배 장덕순의 회고에 의하면 그 무렵 강처중은 연희동 산기슭을 산책하다가 개울가에서 뱀을 사로잡은 뒤 자신에게 보여주며 “세상의 모든 동물 중에 제일 독한 종자가 바로 뱀이다. 동물은 보통 먹이를 주는 사람에게 길들여지기 마련인데 뱀은 먹이를 받아먹기는 하면서도 전혀 사람을 따르지 않는다. 아무리 잘해주어도 끝내 길들여지지 않는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열정이 압제에 눌리고 패배감만 안겨주는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통탄하는 듯한 느낌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만들다 윤동주의 육필원고 1945년 2월 16일 윤동주가 후쿠오카감옥에서 옥사한 뒤 반년 만인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고 조국이 해방되자 윤동주의 당숙 윤영춘이 조카의 유품을 회수하기 위해 서울에 내려와 그가 한때 묵었던 북아현동 하숙집을 찾다가 실패하고 돌아갔다. 이후 남북이 좌우로 갈리고 38선으로 가로막혀 어수선한 1946년 6월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가 단신으로 월남하여 강처중을 찾아왔다. 그러자 강처중은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윤동주의 원고와 유품을 아낌없이 건네주었다. 당시 그가 전해준 윤동주의 육필 시고는 아래와 같은 세 종류였다. 첫째, 윤동주가 필사본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엮기 전에 쓴 작품 가운데 시집에 넣은 19편의 작품을 제외한 시 작품. 〈팔복〉, 〈위로〉 등. 둘째, 자선시집을 엮은 뒤 새로 쓴 시 작품. 〈참회록〉, 〈간〉 등. 셋째, 일본에서 쓴 시 작품. 〈쉽게 씌어진 시〉, 〈흰 그림자〉, 〈사랑스런 추억〉, 〈흐르는 거리〉, 〈봄〉. 1947년 2월 16일의 윤동주 사망 2주기를 앞두고 강처중은 정병욱과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시작품을 모아 유고시집을 발간하기로 결정했다. 출간시기는 사망 3주기인 1948년 2월 16일 이전으로 잡았다. 그 일은 당시 경향신문 기자로서 언론계와 문화계에 발이 넓은 강처중이 도맡았다. 강처중은 시집 발간에 앞서 윤동주를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하고 1947년 2월부터 경향신문 지면을 통해 윤동주의 작품을 게재했다. 정지용이 퇴사하고 난 뒤인 7월 27일자 지면에 세 번째 실린 〈소년〉에 그는 다음과 같은 소개 글까지 덧붙였다. ‘고 윤동주는 젊은 나이에 일본감옥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난 우리들의 선배입니다.’ 이런 사전작업과 함께 강처중은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받고 있던 정지용에게 유고시집의 서문을 부탁했다. 그 무렵 경향신문사를 퇴직하고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정지용은 강처중이 데려온 윤일주로부터 윤동주와 그의 집안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다음 그 내용을 서문에 자세히 썼다. 그런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1948년 1월 30일 서울 정음사에서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간행되었다. 강처중이 쓴 초판본 시집의 발문에는 친구 윤동주와 송몽규에 대한 그리움이 아래와 같이 애타게 묘사되어 있다. 동주는 별로 말주변도 사귐성도 없었건만 그의 방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동주 있나?” 하고 찾으면 하던 일을 모두 내던지고 빙그레 웃으며 반가이 마주앉아 주는 것이었다. “동주, 좀 걸어보자구.” 이렇게 산책을 청하면 싫다는 적이 없었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산이든 들이든 강가이든 아무런 때 아무 데를 끌어도 선뜻 따라나서는 것이었다. 그는 말이 없이 묵묵히 걸었고 항상 그의 얼굴은 침울하였다. 가끔 그러다가 외마디 비통한 고함을 잘 질렀다. “아.” 하고 나오는 외마디 소리! 그것은 언제나 친구들의 마음에 알지 못할 울분을 주었다. “동주, 돈 좀 있나.” 옹색한 친구들은 곧잘 그의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노리었다. 그는 있고서 안 주는 법이 없었고 없으면 대신 외투든 시계든 내주고야 마음을 놓았다. 그래서 그의 외투나 시계는 친구들의 손을 거쳐 전당포 나들이를 부지런히 하였다. 이런 동주도 친구들에게 굳이 거부하는 일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동주, 자네 시 여기를 좀 고치면 어떤가.” 하는 데 대하여 그는 응하여 주는 때가 없었다. 조용히 열흘이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곰곰이 생각하여서 한 편 시를 탄생시킨다. 그때까지는 누구에게도 그 시를 보이지를 않는다. 이미 보여주는 때는 흠이 없는 하나의 옥이다. 지나치게 그는 겸허, 온순하였건만 자기의 시만은 양보하지를 않았다. 또 하나 그는 한 여성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이 사랑을 그 여성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끝내 고백하지 않았다. 그 여성도 모르는 친구들도 모르는 사람을 회답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는 사랑을 제 홀로 간직한 채 고민도 하면서 희망도 하면서……. 쑥스럽다 할까 어리석다 할까? 그러나 이제 와 고쳐 생각하니 이것은 하나의 여성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을 ‘또 다른 고향’에 대한 꿈이 아니었던가. 어쨌든 친구들에게 이것만은 힘써 감추었다. 그는 간도에서 나고 일본 후쿠오카에서 죽었다. 이역에서 나고 갔건만 무던히 조국을 사랑하고 우리말을 좋아하더니……. 그는 나의 친구기도 하려니와 그의 아잇적 동무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의 죄명으로 2년형을 받아 감옥에 들어간 채 마침내 모진 악형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것은 몽규와 동주가 연전을 마치고 도쿄에 가서 대학생 노릇하던 중도의 일이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나 마지막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운명했지요. 짐작컨대 그 소리가 마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는 듯 느껴지더군요.”  이 말은 동주의 최후를 감시하던 일본인 간수가 그의 시체를 찾으러 후쿠오카에 갔던 그 유족에게 전하여 준 말이다. 그 비통한 외마디 소리! 일본 간수야 그 뜻을 알리만두 저도 그 소리에 느낀 바 있었나 보다. 동주 감옥에서 외마디 소리로서 아주 가버리니 그 나이 스물아홉, 바로 해방되던 해다. 몽규도 그 며칠 뒤 따라 옥사하니 그도 재사였느니라. 그들의 유골은 지금 간도에서 길이 잠들었고 이제 그 친구들의 손을 빌어 동주의 시는 한 책이 되어 길이 세상에 전하여지려 한다. 불러도 대답 없을 동주 몽규건만 헛되나마 다시 부르고 싶은 동주! 몽규! 강처중은 이처럼 친구에 대한 애타는 그리움과 지극한 우정을 모아 윤동주를 무명시인에서 일약 민족시인으로 발돋움시켰지만 대가는 참담했다. 해방공간의 극심했던 좌우대립과 한국전쟁의 여파로 정지용과 함께 강처중은 사회적 금치산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55년 2월 윤동주 서거 10주년 기념 증보판 시집이 정병욱과 윤일주의 손에 의해 출간될 때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이 삭제되기까지 했다. 정지용은 전쟁 당시 월북했다는 이유로, 강처중은 좌익인사라는 이유였다. 1987년 공식적으로 해금되기 전까지 정지용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고, 학계의 논문이나 학술서적에서 반드시 필요한 경우 ‘정○용’, ‘정용’ 등으로 표기했다. 또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는 수차례의 개정판에서 두 사람의 흔적을 지웠다가, 1983년 10월 10일 간행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개정판에서 강처중을 ‘서울의 한 벗’이라고 에둘러 표현하기도 했다. 경향신문 기자에서 좌익인사로 사라지다 경향신문은 1946년 10월 1일 경성의 가톨릭재단에서 창간한 신문으로 최초의 회장은 노기남 주교, 주간은 정지용, 편집국장은 횡보 염상섭이었다. 이때 강처중은 조사주임으로 창간작업에 참여했다. 1947년 1월 15일 정지용이 ‘여적(餘滴)’ 란에 주한미군과 한국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 문제를 실었다가 미군정 당국과 극우 단체로부터 수난을 당했다. 그와 같은 경향신문의 진보적인 성향을 주도했던 강처중은 이후 기자로 활동하면서 골수 사회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1947년 4월 27일자 2면에는 충무공 탄생 402주년을 기념하여 그가 쓴 ‘충무공 이순신’이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여기에서 그는 새로운 시대가 올수록 충무공 이순신은 더욱 빛나는 존재가 된다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인민을 위하고 인민을 사랑하고 인민과 함께 강토를 지킨 때문이다. 인민은 멸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민과 함께 싸우던 위한 인물들은 영원히 민족의 마음속에 사는 것이다. 그런 위대한 인물들은 민족존망의 위기에 나와서 인민과 함께 그 위기를 극복하고 간 분들이다. 때문에 그 민족이 위기에 당면하면 그 인물을 더욱 사모하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 같은 정세에 처하여 이순신을 가일층 사모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냥 영웅 이순신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민중과 함께 동고동우(同苦同憂)하며 투쟁하던 이순신이 그리운 것이다.’ 현재 경향신문 데이터베이스에는 강처중의 흔적이 이순신과 윤동주에 대한 2편의 기사만 남아있다. 이후 그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다가, 한국전쟁 이후 계엄령 치하였던 1953년 9월 21일 손원일 국방부장관이 발표한 ‘정국은 간첩사건’에서 이름을 드러낸다. 정국은은 일제 강점기 일본 마이니치(朝日)신문 기자를 지낸 언론인이었는데 해방 후 연합신문사 주일특파원, 국제신문사 편집국장 들을 지냈으며 동양통신사 및 연합신문사 주필로 재직하던 중 간첩협의로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치안국 고위관리인 홍택희 총경을 비롯하여 언론, 정부, 국회의원까지 연루되어 국회 내에 조사위원회까지 구성되었던 초대형 사건이었다. 정국은은 고등군법회의에 송치되어 단심으로 군사재판을 받은 뒤 그해 12월 2일 사형이 언도받았다. 한데 1954년 1월 23일 총살형 장소로 예정된 홍제원 화장터 근처에 구경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지만 사형집행이 연기되었다. 결국 정국은은 1955년 2월 18일 수색에서 총살되었지만 그가 죽지 않고 미국 극동사령부의 보호 아래 일본에서 이중스파이로 활약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바로 이 사건에서 강처중은 남로당의 젊은 실세로서 크게 부각되었다. 군 당국은 정국은의 모든 간첩 혐의가 남로당의 상부선인 강처중의 지령에 따라 행해졌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한데 작가 송우혜의 조사에 따르면 강처중은 이미 1950년에 남로당 간부였던 김삼룡, 이주하 등과 함께 체포되어 사형 판결을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38선을 돌파한 뒤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하면서 강처중은 감옥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두 달여가 지난 9월 4일 강처중은 갑자기 부인 이강자 여사에게 소련에 가서 공부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가출해 버렸다. 어쩌면 그는 생사의 기로에서 가까스로 살아나왔건만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전쟁의 참상이 이어지자 실망한 나머지 현실도피를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먹이를 주어도 길들여지지 않은 뱀 같은 민족의 비정한 세월을 조소하면서……. 그래서일까. 그 후 남로당과 관련된 어떤 문건이나 서적에서도 그의 존재는 완벽하게 지워졌다. 그의 얼굴이 다시 세상에 드러난 것은 송몽규의 조카인 작가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이었다. 그리고 2016년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에서 그는 해맑은 미소를 띠며 관객들의 앞에 섰다. =======================     윤동주 시인이 옥중에서 작고(1945년)한 후 시인의 가족과 친구들은 고인의 작품을 모아  출판사 '정음사'에서 라는 제목으로 간행함(1948년)     유고시집의 서문은 윤동주가 가장 존경했던 '정지용' 시인이 작성하였고 발문은 윤동주와 송몽규의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동료였던 강처중이 작성하였어.     ▲ 정지용 시인의 서문       강처중은 해방 후 경향신문의 기자로 활동하였고, 윤동주의 시집 출판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함 고인과 크게 인연이 깊었던 것도 아닌 정지용 시인의 서문을 실을 수 있었던 것 역시 당시 경향신문의 주필이었던 정지용 시인과 강처중 기자의 인연 덕이 크다고 함     영화 에도 강처중이 등장함   이 분!       다음은 강처중의 글인데 마음이 너무 아파. 꼮!꼭 읽어봐! 몽규와 동주 두 친구를 한번에 잃게 된 강처중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어     강처중의 「발문」    동주는 별로 말주변도 사귐성도 없었건만 그의 방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아모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동주 있나” 하고 찾으면 하던 일을 모두 내던지고 빙그레 웃으며 반가히 마조앉아주는 것이었다.  “동주 좀 걸어보자구” 이렇게 산책을 청하면 싫다는 적이 없었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산이든 들이든 강까이든 아모런 때 아모데를 끌어도 선듯 따라 나서는 것이었다. 그는 말이 없이 묵묵히 걸었고, 항상 그의 얼굴은 침울하였다. 가끔 그러다가 외마디 비통한 고함을 잘 질렀다.  “아-” 하고 나오는 외마디 소리! 그것은 언제나 친구들의 마음에 알지 못할 울분을 주었다.  “동주 돈 좀 있나” 옹색한 친구들은 곳잘 그의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노리었다. 그는 있고서 안 주는 법이 없었고 없으면 대신 외투든 시계든 내주고야 마음을 놓았다. 그래서 그의 외투나 시계는 친구들의 손을 거쳐서 전당포 나드리를 부즈런히 하였다.  이런 동주도 친구들에게 굳이 거부하는 일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동주 자네 시 여기를 좀 고치면 어떤가” 하는데 대하여 그는 응하여 주는 때가 없었다. 조용히 열흘이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곰곰이 생각하여서 한 편 시를 탄생시킨다. 그때까지는 누구에게도 그 시를 보이지를 않는다. 이미 보여주는 때는 흠이 없는 하나의 옥이다. 지나치게 그는 겸허온순하였건만, 자기의 시만은 양보하지를 안했다.  또 하나 그는 한 여성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이 사랑을 그 여성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끝내 고백하지 안했다. 그 여성도 모르고 친구들도 모르는 사랑을 회답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는 사랑을 제 홀로 간직한 채 고민도 하면서 희망도 하면서…… 쑥스럽다 할까 어리석다 할까? 그러나 이제와 고쳐 생각하니 이것은 하나의 여성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을 ‘또 다른 고향’에 대한 꿈이 아니었던가. 어쨌던 친구들에게 이것만은 힘써 감추었다.  그는 간도에서 나고 일본 복강에서 죽었다. 이역(異域)에서 나고 갔건만 무던이 조국을 사랑하고 우리말을 좋아 하더니 - 그는 나의 친구도 하려니와 그의 아잇적동무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의 죄명으로 2년형을 받아 감옥에 들어간 채 마침내 모진 악형에 쓸어지고 말았다. 그것은 몽규와 동주가 연전을 마치고 경도에 가서 대학생 노릇하던 중도의 일이었다.  “무슨 듯인지 모르나 마지막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운명했지요. 짐작컨대 그 소리가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는 듯 느껴지더군요.”  이 말은 동주의 최후를 감시하던 일본인 간수가 그의 시체를 찾으러 복강 갔던 그 유족에게 전하여준 말이다. 그 비통한 외마디 소리! 일본 간수야 그 뜻을 알리만두 저도 그 소리에 느낀 바 있었나 보다. 동주 감옥에서 외마디 소리로서 아조 가버리니 그 나이 스물아홉, 바로 해방되던 해다. 몽규도 그 며칠 뒤 따라 옥사(獄死)하니 그도 재사(才士)였느니라. 그들의 유골은 지금 간도에서 길이 잠들었고 이제 그 친구들의 손을 빌어 동주의 시는 한 책이 되어 길이 세상에 전하여지려 한다.  불러도 대답 없을 동주 몽규었만 헛되나마 다시 부르고 싶은 동주! 몽규!                                                                                                                                                 - 강처중     영화를 보고, 또 글을 읽고 나서 강처중이라는 인물이 넘나 궁금했어. 그런데 경향신문 기자로 활동했다는 사실 외에 구체적인 기록이 없더라고.. 그러다가 1998년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를 발견했는데, 왜 그런지 알게됐어       "(...) 강처중은 50년대 좌익활동 혐의로 총살당한 인물."     "(...) 강처중은 윤동주가 직접 묶었던 필사본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포함되지 않은 대표작들을 보관해 유족에게 전했고 48년 초간본 출판의 산파역을 했지만 그간 좌익이라는 이유로 시집에서는 '윤동주가 동경에서 편지를 보냈던 서울의 한 벗' 정도로 익명화 되고 말았다. 42년 일본유학 길에 오르며 윤동주가 강처중에게 맡긴 시는 '참회록' '팔복' '간' '위로' 등. 또 유학시절 윤동주의 시작으로 유일하게 남아있는 '쉽게 쓰여진 시' 등 다섯편의 작품은 모두 강처중에게 보낸 편지 속에 수록된 것이다.   강처중은 48년 윤동주의 연전후배 고 정병욱 교수가 보관했던 필사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실린 19편과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시고들에서 추린 시 31편으로 정음사에서 초간본을 발간하며 생전에 윤동주가 존경했던 정지용에게서 서문을 받아냈고 직접 발문을 썼다. 그러나 전쟁 와중에 정지용이 납북되고 강처중마저 좌익으로 총살당해 이들의 글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증간본 이후 아예 삭제돼 버렸다. (...)"     .....   강처중은 경향신문의 창간 멤버로, 기자로 활동하다가 50년대에 좌익활동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되었다 알려져있으나 사실 여부와 구체적인 시기와 방법 등은 밝혀지지 않음..   이러한 정치적 이념적 배경 속에서 유고시집 발간의 주역 강처중은 그간 역사 속에서 잊혀지고 말았어..   윤동주의 연전 후배 '정병욱'과 동생 '윤일주' 역시 강처중의 공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음.     " 한편, 정지용에게 윤동주를 알리고, 연전 동창생들과 후배 정병욱, 그리고 윤동주의 아우 윤일주를 독려하면서 유고시집 발간을 주도한 인물이 강처중이다. 정병욱과 윤일주는 윤동주를 세상에 알린 두 사람의 공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윤동주 서거 10주기를 맞아 누이 혜원이 가지고 온 윤동주의 다른 시 원고를 보충해 새롭게 선보이는 증보판 시집에서 두 사람의 글을 삭제하고 함께 입을 다물기로 묵계하고 있었다. 대시인 정지용은 이때, 6·25때 남침한 북한군을 따라 북으로 가 행방불명된 시인이었다. 강처중은, 그때껏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좌익 활동을 배후에서 지휘한 인물로 지목되어 사형 언도를 받은 인물이었다. 윤동주에게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두 인물은 이렇듯 한국 역사에서 지워져 갔다. " (경향신문)       ▲ 강처중의 연희전문학교 졸업사진             윤동주를 세상에 알린 장본인 강처중. 강처중이 없었다면 윤동주 시인의 작품 대부분은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을 거야 그럼에도 그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아 일케 글을 쪘음..   영화 동주에서 강처중이 참 매력적인 인물로 나와서 아마 나를 포함한 많은 여시들이 한번쯤 '강처중'을 초록창에 검색해보지 않았을까 싶운데 그러한 점에서 영화 는 잊혀진 인물들과 그들의 공적을 재발견한 고마운 영화라고 말하고 싶음!! 참 귀한 인물을 알게되어서 마음이 벅참 ☺       ++수정   방금 윤동주 평전을 찾아봤는데 강처중 선생님에 대한 정보가 더 자세히 적혀있어서 추가함     윤일주(현 성균관대 교수, 윤동주 동생)는 이 출간될 당시 강처중에 대해 기술하지 말아달 것을 요청했다고 함.  단순히 그가 좌익인사로 알려져있었기 때문이었음.   이후 개정판에서 강처중이 좌익으로 체포되어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 라고 기술하였고 이를 본 강처중의 가족(부인,자녀)이 나타났음 가족들이 증언하길 "사형수로 수감되어 처형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맞지만 총살형으로 처형된 것은 사실이 아니다" "6.25가 발발한 지 사흘 만에 서울에 입성한 인민군이 형무소를 개방했을 때 형무소에서 나왔고 두달 남짓 집에서 요양하다가 9월 4일에 소련에 가서 공부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월북했다"는 것..     처형을 당했다고 알려져있으나, 가족들의 주장에 따르면 처형 직전에 형무소에서 나와 월북하였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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