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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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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쉼터] - 100년 = 고구마꽃 = 행운 댓글:  조회:2260  추천:0  2018-07-29
100년에 한 번 볼 수 있다는 '고구마꽃' 보셨나요 (ZOGLO) 2018년7월26일  완도군 신지면 한 텃밭에 핀 고구마 꽃. [연합뉴스] '100년에 한 번 볼 수 있다'는 고구마꽃이 최근 전남 완도군 신지면의 한 텃밭에서 활짝 피었다. 중남미가 원산지인 고구마는 아열대 지역에서만 7~8월에 꽃을 피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요즘 이상 고온으로 고구마꽃이 한국에서도 종종 눈에 띄고 있다고 한다.     고구마꽃은 평생 한 번 마주치기 힘들 정도로 귀한 몸이다. 꽃말이 '행운'인 고구마꽃은 1945년 광복 때와 53년 휴전, 70년 남북공동성명발표 직전에도 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꽃은 행운의 징조로 여겨지기도 한다.     [출처: 중앙일보] =================///{고향문단소식}/// 제2회 ‘단군문학상’에 최홍일 최룡관 수상 (ZOGLO) 2018년7월28일    우리 민족이 공인하는 시조의 이름으로 명명한 중국조선족문단 ‘단군문학상’이 7월 28일, 길림성 길림시조선족군중예술관에서 제2회 시상식을 가졌다.   제2회 ‘단군문학상’은 추천작품의 발표년한을 개혁개방이 시작된 1978년 12월부터 2017년 12월까지로 정하고 개혁개방 이후 40년이란 흐름에 걸맞는 작품에 초점을 두었으며 작품의 문학성과 그 무게에 평심기준을 맞추었다. 최종 소설가 최홍일의 작품 《눈물젖은 두만강》, 시인 최룡관의 작품 《최룡관시선》 및 시가 창작 리론서가 각기 소설부분과 시가부분 당선작으로 선정되였다.     시상식에서 김의진 중국조선족기업가협회회장단 상무부회장과 조약걸 길림시조선족기업가협회 회장이 수상자들에게 ‘단군문학상’ 메달과 증서 및 10만원 상금을 수여했다.   리여천 전 장백산잡지사 총편집이 종심보고를 통해 두 작품의 수상원인을 밝혔다. 최홍일의 작품에 대해 그는 “문학자료로 읽은 조상의 이주사를 문학작품으로 엮어내여 조상의 이민에 대한 새로운 문학적 해석을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면서 “이주사를 다룬 그 력사적 가치를 무시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 최룡관의 작품에 대해 그는 “작가의 천부적인 기질과 장시기 다 령역에 걸친 경력과 끊임없는 지적 탐구의 결과물이다”면서 “작품에서 보여주는 기존의 성취에 만족하지 않는 그 자세는 문단의 훌륭한 귀감이다”고 평가했다.   최룡관은 수상소감에서 “연변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와 하이퍼시라는 류파를 형성한 후 비판도 받고 지지도 받으면서 오늘까지 이르렀다”면서 “현대시는 하나의 이미지로 탑을 쌓기이며 하이퍼시는 다양체로 탑을 허무는 것이다. 언어의 결합에는 자유만 있고 그 어떤 구속도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최홍일은 수상소감에서 “매 한편의 작품은 반드시 자기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가보지 못한 령역을 탐색하는 새 기점으로 되여야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신봉철 ‘단군문학상’리사회 리사장은 연설에서 “우리가 ‘단군문학상’을 설립한 목적은 우리 민족 문인들이 시대, 인민, 민족, 력사에 부끄럽지 않는 문학명작을 더 많이 창작하도록 고무격려하기 위한 데 있다”고 밝혔으며 “새 시대 민족문학을 번영 발전시키는 데 정치성, 민족성, 브랜드화 등 세가지를 반드시 견지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외 길림시정부를 대표하여 서영수 길림시민족사무위원회 부주임이 축사를, 조선족문단 원로들을 대표하여 최삼룡 평론가가 축사를 했다.     한편 ‘단군문학상’리사회는 ‘단군문학상’ 사업에 지극한 관심과 배려를 베풀어준 김의진, 박걸, 리충실, 최옥련, 조약걸, 배철훈, 김룡규, 김홍도 등 8명 유공인사들에게 감사패를 증송했다. 동시 단군문학관 건설에 지지한 연변인민출판사, 연변도서관, 길림시조선족군중예술관, 연변천지조선족민속문화연구원 등 4개 유공단위와 서봉학, 김춘선, 고 리태수, 고 안화춘, 홍길남, 리임원, 최룡관, 김련화, 방순애, 채희룡 등 10명 유공인사들에게 감사패를 증송했다. /료녕신문 김창영 기자
4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간판 없는 거리 댓글:  조회:4308  추천:0  2018-07-29
  간판 없는 거리      ​          윤동주         정거장 플랫포옴에 내렸을 때 아무도 없어   ​ 다들 손님들뿐 손님 같은 사람들뿐     집집마다 간판(看板)이 없어 집 찾을 근심이 없어     빨갛게 파랗게 불붙는 문자도 없이     모퉁이마다 자애로운 헌 와사등(瓦斯燈)에 불을 켜놓고,     손목을 잡으면 다들, 어진 사람들 다들, 어진 사람들     봄, 여름, 가을, 겨울 순서로 돌아들고.   ======================   낯선 도시에 도착한 그의 생소함이 담겨 있습니다. 간판이 없는 그곳에 '자애로운 헌 와사등'을 걸자고 한 것은 따뜻한 등불만이 사람을 모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시라는 것이 읽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고 합니다. 제가 생각했을 때 이 시는 독립을 위해 모인 사람들의 비밀스러운 메세지가 아닐까 싶은데요. 나라를 사랑하고, 독립을 원했던 그가 따뜻한 등불을 염원한 것은 아닐까요? =====================       윤동주 간판(看板) 없는 거리       정거장 플랫폼에 내렸을 때 아무도 없어,   다들 손님들뿐, 손님같은 사람들뿐,   집집마다 간판이 없어 집 찾을 근심이 없어   빨갛게 파랗게 불 붙는 문자도 없이   모퉁이마다 자애로운 흰 와사등에 불을 혀놓고,   손목을 잡으면 다들, 어진 사람들 다들, 어진 사람들   봄, 여름, 가을, 겨울, 순서로 돌아들고.     이 시는 다들 어진 사람들이 손님으로 손님같이 자기 집이 없이 살고 있는 일제강점기의 조선의 모습을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시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화자가 저녁에 정거장 플랫폼에 내렸을 때에 주인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손님들뿐이었다. 손님이 아니라면 손님같은 사람들뿐이다. 집집마다 간판이 없다. 장사를 하는 집이 없다. 내리는 사람이 손님이거나 손님같은 사람들이어서 이 거리에 머무는 사람이 없다. 모두 다른 곳으로 떠나간다. 그래서 집 찾을 근심이 없다. 빨갛게 파랗게 불 붙는 문자로 이루어진 간판이 없다. 불은 모퉁이마다 켜진 흰 와사등뿐이다. 손목을 잡으면 다들 어진 사람들인데 집도 없고 살아갈 방도도 없다. 이런 상태로 계절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순서로 돌아가고 있다. 세월이 가고 있다.     이 시를 구절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는 시인이 살았던 일제강점기에 삶의 방편이 없이 아주 가난하게 살고 있는 조선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간판’은 사람들에게 어떤 종류의 장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손님이 찾아오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거리’에 그것도 교통의 요충지인 기차 ‘정거장’이 있는 곳에 ‘간판’이 없다는 것은 비정상적인 것인 것이다. 이는 그 거리에 사는 사람들과 그 거리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몹시 가난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물건을 사거나 서비스를 이용할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가게가 없는 것이다. 어떤 곳이던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팔거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상점이 있는 법인데도 불구하고 기차 ‘정거장’ 앞에 상점이 없다는 것은 이곳에 살거나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반드시 필요한 물건도 살 수 없는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한 상황 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거장 플랫폼에 / 내렸을 때 아무도 없어, // 다들 손님들뿐, / 손님같은 사람들뿐,’는 화자가 기차 ‘정거장 플랫폼에 / 내렸을 때’에 정거장에 내리는 사람 중에는 이 거리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고 ‘다들 손님들뿐’이거나 ‘손님같은 사람들뿐,’이라는 것이다. 이 거리에 있는 집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없고 모두들 다른 곳으로 흩어지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한 것으로 보인다. 화자가 ‘정거장 플랫폼에 / 내렸을 때’는 ‘흰 와사등에 / 불’ 켜 놓은 것으로 볼 때에 어두운 저녁이다. 이러한 시간적인 배경은 시에서는 암울한 상황 또는 절망적인 상황을 의미한다. ‘다들 손님들뿐, / 손님같은 사람들뿐,’을 역사적인 시각으로 보면 나라라는 집을 잃은 우리 민족을 말하면서 일제강점기에 어려운 상황에서 살던 집을 잃고 가난하고 어렵게 사는 사람을 ‘손님들’이라 말하고 살 집은 있어 비교적 경제적으로 덜 어려우나 나라라는 집을 잃은 사람들을 ‘손님같은 사람들’이라고 한 것 같다.   ‘집집마다 간판이 없어 / 집 찾을 근심이 없어’는 상업활동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 거리는 기차가 서는 ‘정거장’이 있는 곳으로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므로 상업이 발달할 수 있는 입지적인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집마다 간판이 없’다는 것은 상업활동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사고 팔 사람들이 없다는 것으로 사고 팔 것이 없을 정도로 가난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집 찾을 근심이 없어’는 부정적인 상황을 긍정적으로 서술한 상황을 비꼬는 풍자적인 표현이다. 여기서의 집은 ‘상점’을 말한다. 상점이 하나도 없으니 필요한 물건을 사거나 서비스를 받기위해 상점을 찾고 말고 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삶의 경제적인 방편을 잃은 조선의 피폐되고 가난한 상황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빨갛게 / 파랗게 / 불 붙는 문자도 없이 // 모퉁이마다 / 자애로운 흰 와사등에 / 불을 혀놓고,’에서 ‘빨갛게 / 파랗게 / 불 붙는 문자’는 ‘간판’에 쓰인 글자를 말한다. 이것이 없다는 것은 ‘간판’이 없다는 것이고 ‘간판’이 없다는 것은 상점이 없다는 것이고 상점이 없다는 것은 경제가 몹시 피폐한 상태라는 것을 말한다. ‘자애로운 흰 와사등’은 ‘와사등’을 의인화하여 쓴 것이고 ‘와사등’은 어둠을 밝혀 지나가는 사람들이 불편함이 없게 하는 것이기에 ‘자애’롭다고 표시한 것이다. ‘불을 혀놓고,’는 와사등을 킨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어둠 속에서 ‘손님들’과 ‘손님같은 사람들’이 길을 편하게 갈 수 있도록 한 사람들로 아래 연에 나오는 ‘어진 사람들’이다. 이들은 ‘모퉁이마다’ 불을 켠 사람들이다. 이 부분을 역사적인 시각으로 보면 일제강정기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나라를 잃고 삶을 살아가는 우리 민족에게 희망을 주며 가야할 길을 희망을 가지고 가게 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손목을 잡으면 / 다들, 어진 사람들 / 다들, 어진 사람들 // 봄, 여름, 가을, 겨울, / 순서로 돌아들고.’에서 ‘다들, 어진 사람들 / 다들, 어진 사람들’이라 하여 ‘어진 사람들’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손님들’과 ‘손님같은 사람들’이라서 집에 들지 못하고 뿔뿔이 어둠 속으로 가지만 알고 보면 ‘다들, 어진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어렵게 살고 있는 우리 민족 구성원이 ‘불을 혀놓’는 사람이나 집이 없어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불 아래를 지나가는 사람이나 ‘다들, 어진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 순서로 돌아들고.’는 이렇게 우리 민족이 나라를 잃고 일제강점기 아래서 손님 또는 손님처럼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세월이 멈추지 않고 반복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전한성     ==============///   윤동주의 시 중에 ‘간판 없는 거리’라는 시가 있다. 낯선 도시를 방문한 시인이 간판 없는 풍경을 바라보며 겪게 되는 생소함을 노래한 시이다. 흥미로운 것은, 윤동주가 알록달록한 간판 대신 ‘자애로운 헌 와사등’을 걸자고 제의했다는 점이다. 그러면 흩어졌던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사람들이 사는 거리라면 모름지기, 사람들의 마음을 불러 모을 수 있는 ‘따뜻한 등불'이 필요하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우리의 거리를 바꾸는 일도 이와 같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지금 윤동주가 제안한 ‘마음의 구심점’을 달아야 할 때인 것 같다. 그래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만들어 갈 거리는, 윤동주가 말한 따뜻한 거리, 사람들이 모여들 수 있는 거리여야 한다. 간판을 바꾸어다는 일은 그 첫 걸음일 것이다. 내 것을 마음대로 치장하고 싶은 마음을 줄이고, 주변 환경과 이웃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작업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간판을 바꾸어 다는 일을 통해, 남과 함께 살아가는 연습을 다시 시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늦었지만 흐뭇한 연습이 아닐 수 없다. ==============///     이 시는 윤동주 선생이 1941년에 쓴 시입니다. 정차장 플렛홈에 내린 나그네에겐 모든 것이 낯 설다. 서로가 손님 같은 낯 선 사람들. 서먹서먹하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서서 모퉁이에 불을 켜고 손을 잡아준다면 모두가 아는 사람이 되고 모두가 마음을 나누는 사람들이 된다. 계절은 순서대로 돌아가는 평화스런 광경이 펼쳐질 것이다. 일제하의 낯설음과 침묵으로 일관해야했던 암울한 시대를 노래한 것입니다.   함께해봐문학 전문가  
3    "바람만이 그 답을 알고 있다네"... 댓글:  조회:1880  추천:0  2018-07-29
  Bob Dylan-Blowing in the wind [가사번역)      How many roads must a man walk down 사람은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봐야  Before they call him a man 진정한 인생을 깨닫게 될까  How many seas must a white dove sail 흰 비둘기는 얼마나 많이 바다 위를 날아봐야  Before she sleeps in the sand 백사장에 편히 쉴 수 있을까  How many times must the cannonballs fly 전쟁의 포화가 얼마나 많이 휩쓸고 나서야  Before they are forever banned 영원한 평화가 찾아오게 될까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g in the wind 친구여, 그건 바람만이 알고 있다네  The answer is blowing in the wind 바람만이 그 답을 알고 있다네  How many years must a mountain exist 산은 얼마나 많은 세월이 지나야  Before it is washed to the sea 씻겨서 바다로 갈까  How many years can some people exist 사람은 얼마나 긴 세월이 흘러야  Before they're allowed to be free 진정한 자유를 얻을까  How many times can a man turn his head 언제까지 고개를 돌리고  And pretend that he just don't see 모르는척할 수 있을까 ?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g in the wind 친구여, 그건 바람만이 있다네 The answer is blowing in the wind 바람만이 그 답을 알고 있다네  How many times must a man look up 얼마나 많이 올려다 보아야  Before he can see the sky 진짜 하늘을 볼 수 있을까  How many ears must one man have 얼마나 많은 귀를 가져야  Before he can hear people cry 타인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How many deaths will it take till he knows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어야  That too many people have died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음을 알게 될까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g in the wind 친구여, 그건 바람만이 알고 있다네  The answer is blowing in the wind 바람만이 그 답을 알고 있다네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g in the wind 친구여, 그건 바람만이 알고 있다네  The answer is blowing in the wind 바람만이 그 답을 알고 있다네   =====================///   밥 딜런(Bob Dylan) 시편(끝) / 서대경. 황유원 옮김      폭풍우 / 밥 딜런      창백한 달이 자신을 뽐내며 떠올랐어 저 서쪽 마을 위로 그녀는 아주 슬픈 얘길 들려줬네 침몰한 큰 배에 대한 이야기를   4월 11일이었지 파도를 헤치며 배는 나아갔어 내일을 향해 항해하며 예고된 황금시대를 향해   밤은 별빛으로 환했지 바다는 깨끗하고 맑았어 어둠을 뚫고 움직이며 약속의 시간은 가까워졌네   빛은 한결같이 비추고 있었지 거품이 이는 바다 위로 미끄러지면서 모든 귀족들과 숙녀들이 그들의 영원한 집으로 향하고 있었네   샹들리에가 흔들렸지 저 위쪽 난간에서 오케스트라는 연주를 하고 있었네 희미해진 사랑의 노래들을   경비원은 누워서 꿈을 꾸고 있었지 무도회장의 댄서들이 빙글빙글 돌고 있을 때 그는 타이타닉이 침몰하는 꿈을 꾸었네 저 아래 저승으로   레오는 자신의 스케치북을 집어 들었어 종종 그리고픈 마음이 들었지 그는 두 눈을 감고 그림을 그렸네 자신의 마음속 풍경을   큐피트가 그의 가슴에 활을 쐈지 그러고는 그걸 뚝 분질러버렸네 그에게서 가장 가까이 있던 여자 그녀에게로 그가 저절로 굴러들어왔다네   그는 크고 소란스러운 소릴 들었어 뭔가 잘못된 것 같았지 마음 깊은 곳에서 영혼이 말했다네 여기서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고   그는 선미 쪽 갑판으로 휘청거리며 걸어갔어 자고 있을 때가 아니었지 선미 쪽 갑판에 물이 벌써 3피트나 차올랐으니   굴뚝 옆으로 기울었네 무거운 발걸음으로 쿵쾅거리기 시작했지 그는 난장판 속으로 걸어들어갔어 하늘이 온통 빙빙돌았네   배가 가라앉고 있었지 우주가 활짝 열렸어 저쪽에서 명단을 부르기 시작했네 천사들은 옆으로 비켜섰지   복도의 불이 어두워졌어 흐릿하고 약하게 깜박거렸지 벌써부터 시체들이 둥둥 떠다녀 바닥이 이중으로 된 선체에서   그러고선 엔진이 폭발했네 추진기가 돌아가질 않고 보일러에 과부하가 걸렸지 뱃머리가 반으로 쪼개졌다네   승객들은 날아다녔지 뒤로, 앞으로, 저멀리, 빠르게 그들은 중얼거리고, 더듬거리고, 뒹굴었다네 또 한번 그럴 때마다 그전보다 더 지쳐갔지   베일은 갈가리 찢겨졌어 열두시와 한시 사이에 어떤 변화도, 어떤 갑작스러운 기적도 이미 일어난 일을 돌이킬 순 없었지   경비원은 누워서 꿈을 꾸고 있었네 45도 기운 채로 그는 타이타닉 침몰하는 꿈을 꾸었네 털썩 무릎을 꿇고 마는 꿈을   웰링턴, 그는 잠들어 있었어 침대가 미끄러지기 시작했지 그의 용감한 가슴이 뛰고 있었어 그는 테이블들을 옆으로 밀쳤다네   박살난 크리스털 조각들이 주변에 여기저기 널려 있었어 그는 자신의 권총 두 개를 전부 다 찼지 그는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그의 부하들과 동료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어 침묵 속에서 그는 기다렸지 개입할 적당한 때와 공간이 생길 때까지   복도는 좁았고 눈앞은 완전히 깜깜했지 그는 온갖 슬픔을 다 보았다네 어디서건 목소리들이 들려왔지   비상벨이 울리고 있었고 차오르는 물을 막아보려고 친구들과 연인들이 매달려 있었지 서로에게 나란히 기대어   어머니들과 딸들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어 얼음처럼 차가운 물속으로 뛰어들었지 사랑과 연민의 기도를 전했네   부자 애스터는 그의 사랑하는 부인에게 키스했어 그는 꿈에도 알지 못했네 이게 인생에서 마지막 여행이 될 줄은   캘빈, 블레이크, 윌슨은 어둠 속에서 도박을 했어 그들 중 누구도 살아남아 배에서 내리진 못할 거야   형제들끼린 서로 들고 일어났어 사사건건 말이지 서로 싸우고 서로를 학살했다네 치명적인 춤을 추며   그들은 구명보트를 내렸어 침몰하는 난파선에서 배신자들이 있었지, 반역자들이 있었어 부러진 등과 부러진 목이 있었네   주교는 자신의 선실을 떠났지 그 모든 가난한 이들을 돕는답시고 자신의 눈을 돌려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어, "가난한 자들을 배불리 먹여주소서."   매음굴을 운영하는 데이비는 밖으로 나와 자신의 여자들을 해고해버렸어 물이 더 깊어지는 모습을 봤지 자신의 세상이 변하고 있는 모습을 봤어   짐 댄디는 웃었어 그는 수영을 배운 적이 없었지 몸에 장애가 있는 소년을 봤다네 그리고 그애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줬지   그는 반짝이는 별빛을 보았네 동쪽에서 흘러나오는 별빛을 죽음은 미친듯이 날뛰었지만 그의 마음은 마침내 평온을 찾았네   그들은 승강구를 막았지 하지만 문은 버티지 못했어 그들은 계단 위에서 익사했다네 황동과 윤이 나는 금으로 된 계단 위에서   레오가 클레오에게 말했네 "나 미쳐가고 있는 것 같아." 하지만 그는 진작에 정신을 잃었지 그 정신이 무엇이었든 간에   그는 출입구를 막아보려 애썼어 모두를 피해 입지 않게 보호하려고 벌어진 상처에서 난 피가 그의 팔 아래로 흘러내렸네   꽃에서 꽃일들이 떨어져내렸지 꽃잎들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길고 끔찍한 시간 동안 마법사의 저주는 계속됐다네   주인은 브랜디를 따르고 있었지 그는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어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지 그의 차례는 맨 마지막이었네   또 다른 많고 많은 사람들이 있었어 이곳에서 영영 무명인 채로 그들은 예전에 바다를 항해해봤거나 집을 떠나본 적이 한 번도 없었어   경비원은 누워서 꿈을 꾸고 있었네 이미 피해는 발생했지 그는 타이타닉이 침몰하는 꿈을 꾸었네 그리고 누군가에게 말하려 했어   선장은 간신히 숨을 쉬며 타륜(舵輪) 앞에서 무릎을 꿇었어 그의 위와 그의 아래로 오만 톤이나 되는 강철이 있었네   그는자신의 나침반을 살펴봤어 그리고 그 앞면을 응시했지 바늘은 아래를 가리키고 있었네 그는 자신이 졌다는 걸 알았어   어두운 빛 속에서 그는 지나간 세월을 떠올렸네 그는 계시록을 읽었지 그리고 자신의 잔을 눈물로 가득 채웠어   사신(死神)의 파업이 끝났을 때 천육백 명이 잠들어버렸네 선한 자, 악한 자, 돈 많은 자, 가난한 자 가장 사랑스러운 자와 가장 훌륭한 자들이   그들은 땅에 내리기만을 기다렸지 그리고 이해해보려고 애썼어 하지만 그런 건 없었네 신이 내린 심판에 대한 이해 말이야   전보로 소식이 전해졌어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줬지 사랑은 그 불길을 잃었고 모든 것들은 그 일생을 마쳐버렸지   경비원은 누워서 꿈을 꾸고 있었네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에 대한 꿈을 그는 타이타닉이 침몰하는 꿈을 꾸었네 시퍼란 바다 아래로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얻은 대답 / 서대경     밥 딜런 시선집 3 는 밥 딜런 일생의 노랫말을 집대성한
2    다시보는 음유시인, 가수 - 밥 딜런 댓글:  조회:5840  추천:0  2018-07-29
  출생 1941. 5. 24, 미국 미네소타 덜루스 국적 미국 요약 밥 딜런, 미국의 가수이자 작곡가, 시인. 1960~70년대 정치적이면서도 시적인 가사와 포크 음악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미국 포크 음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수이자, 대중음악계에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목차 개요 초기 생애 작품활동 ┗ 음악 ┗ 그 외 활동 수상경력 개요 미국의 가수이자 작곡가, 시인, 화가이다. 유대계 미국인으로 본명은 '로버트 앨런 지머맨(Robert Zimmerman)’이다. 밥 딜런이라는 이름은 영국의 시인 '딜런 토머스(Dylan Thomas)'의 이름을 딴 것이다. 1960년대 그의 노래들은 정치적인 주제를 담은 시적인 가사와 간결한 포크 음악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대표적인 저항 음악으로 사랑받았다. 1962년부터 2016년까지 30개 이상의 정규 앨범을 발매했으며 지금까지도 미국 대중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가수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초기 생애 밥 딜런은 미네소타 주의 덜루스와 철광 도시인 히빙 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0살 때부터 시를 썼으며 십 대 시절 음악에 심취하여 밴드를 결성하고 기타를 치면서 로큰롤을 불렀다. 1959년 미네소타 대학에 입학한 뒤에는 포크 음악에 빠져들었으며 자신을 ‘밥 딜런’으로 소개하기 시작했다. 다음 해인 1960년 대학을 중퇴한 그는 자신의 음악적 우상인 포크송 가수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를 만나기 위해 뉴욕으로 떠난다. 1963년 미국 워싱턴 D.C.에서 공연하는 밥 딜런 ⓒ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Wikimedia | Public Domain 작품활동 음악 밥 딜런은 뉴욕 시 그리니치빌리지의 여러 커피하우스에서 우디 거스리의 우울한 발라드풍의 노래와 자작곡들을 부르면서 직업적인 공연을 시작했다. 1962~64년에 잇달아 나온 음반으로 일약 유명해졌고, 그의 두 노래 〈블로윈 인 더 윈드 Blowin' in the Wind〉·〈더 타임스 데이 알 어 체인지인 The Times They Are a-Changin'〉은 흑인 민권운동의 주제가가 되었다. 전통적인 포크 음악에 기반을 두면서 특히 단순한 멜로디를 사용한 딜런의 노래들은 이전의 미국 포크 음악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시적인 예술성과 상상력이 엿보이는 은유적이며 우화적인 노랫말을 담고 있다. 1965년 딜런은 전기 앰프가 없는 어쿠스틱 악기를 쓰며 사회성이 짙은 노래를 부르던 과거의 경향을 탈피해서 전자악기와 로큰롤 리듬을 채택했다. 이 획기적인 변화 이후에 나온 음반들이 〈하이웨이 식스티원 리비지티드 Highway 61 Revisited〉(1965)와 〈블론드 온 블론드 Blonde On Blonde〉(1966)인데, 이 음반들은 자기성찰적이고 애조 띤 가사와 블루스에서 따온 리듬 때문에 딜런을 단번에 록 음악계의 일인자로 인기절정에 오르게 만들었다. 1980년 토론토 공연 모습 ⓒ Jean-Luc Ourlin/Flickr | CC BY-SA 1966년 오토바이 사고를 겪고 은둔생활을 한 딜런은 또 하나의 음악적 변신을 거쳐 유명한 〈내슈빌 스카이라인 Nashville Skyline〉(1969)을 비롯한 음반들을 내놓았는데, 여기에서 컨트리 앤드 웨스턴(country-and-western) 음악 요소를 가미하여 또다시 세인들을 놀라게 했다. 1970~80년대에도 딜런은 연주활동과 영향력 있는 음반을 내놓았는데, 그 중 〈블러드 온 더 트랙스 Blood on the Tracks〉(1975)·〈디자이어 Desire〉(1975)·〈인피덜스 Infidels〉(1983)가 특히 유명하다. 2016년까지 30장 이상의 정규 앨범을 발매했다. 2006년 발매한 〈모던 타임스 Modern Times〉로 빌보드 1위에 올랐으며 2009년 〈투게더 스루 라이프 Together Through Life〉로 영국(UK) 앨범 차트와 빌보드 차트에서 1위에 올랐다. 가장 최근에 나온 앨범은 2016년 발매한 〈폴른 엔젤스 Fallen Angels〉다. 그 외 활동 밥 딜런은 1994년 이후 드로잉과 회화를 담은 6권의 책을 출판하였다. 1970년대 발매한 〈자화상 Self-Portrait〉과 〈행성 파도 Planet Waves〉의 앨범 커버는 그가 직접 그린 것이다. 1994년 작업한 그림을 담은 책을 처음 출판했으며 2007년에는 첫 공개 전시회를 열었다. 그가 작업한 그림 중 일부는 덴마크 국립 미술관을 포함한 몇몇 주요 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다. 2010년에는 자서전 〈Chronicles〉를 출간했으며 한국에서는 〈바람만이 아는 대답〉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1971년에는 시와 소설을 결합한 실험적인 작품인 〈타란툴라 Tarantula〉를 발표하기도 했다. 2010년에는 자서전 〈Chronicles〉를 출간했으며 한국에서는 〈바람만이 아는 대답〉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수상경력 데뷔 후 2016년까지 그래미상을 총 11번 수상했다. 1963년 이후 노미네이트 된 것만 40여 차례다. 1988년에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으며 2000년에는 스웨덴 왕립음악원에서 주관하는 폴라음악상을 받았다. 같은 해 영화 〈원더 보이스〉의 OST인 〈Things Have Changed〉로 아카데미상(주제가상)을 수상했다. 1999년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은 밥 딜런을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에 선정했다. 2008년에는 팝 음악과 미국 문화에 깊은 영향을 준 공로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2016년 음악가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노벨문학상 위원회는 밥 딜런이 ‘위대한 미국 팝 문화의 전통 안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해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 밥 딜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검색하러 가기 밥 딜런  Bob Dylan 2010년의 밥 딜런 기본 정보 본명 Robert Allen Zimmerman 출생 1941년 5월 24일 (77세) 미국 미네소타 주 덜루스 국적 미국 직업 ");"> 싱어송라이터 화가 작가 장르 ");"> 포크 블루스 록 컨트리 가스펠 악기 ");"> 보컬 기타 건반 하모니카 활동 시기 1959–현재[1] 배우자 사라 딜런 (1955년 11월 22일 ~ 1977년 6월 29일) 캐롤린 데니스 (1986년 6월 4일 ~ 1992년 10월) 레이블 ");"> 컬럼비아 어사일럼 관련 활동 ");"> 존 바에즈 더 밴드 조니 캐시 그레이트풀 데드 조지 해리슨 롤링 스톤스 마크 노플러 밴 모리슨 톰 페티 앤 더 하트브레이커스 트래블링 윌버리스 웹사이트 "); padding-right: 13px;">bobdylan.com 밥 딜런(Bob Dylan, /ˈdɪlən/; 본명 로버트 앨런 지머맨(Robert Allen Zimmerman), 1941년 5월 24일)은 미국의 작곡가, 가수, 화가, 작가다. 50년 넘도록 대중음악 및 예술에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은 1960년대 창조된 것으로, 〈Blowin' in the Wind〉, 〈The Times They Are a-Changin'〉 등 곡은 그를 "세대의 목소리"[2]로 칭해지게 했으며, 또한 민권 운동과 반전 운동의 앤섬으로 차용되게 된다. 미국 포크 음악 부흥을 뒤로한 채, 대중음악의 범위를 넓혀 6분 가량의 싱글 〈Like a Rolling Stone〉을 1965년 녹음한다. 딜런의 가사는 넓은 범위를 아우르며 정치, 사회, 철학, 문학의 영향을 받는다. 이들은 현존한 대중음악의 관습에 저항하며 급성장하는 반문화에 호소했다. 초기 리틀 리처드의 공연과 우디 거스리, 로버트 존슨, 행크 윌리엄스의 작곡에 영향을 받은 빌런은 음악 장르를 증폭하고 자기 것으로 활용할 줄 알았다. 그의 음반 활동은 50년 넘게 지속되었으며 포크, 블루스, 컨트리에서 가스펠, 로큰롤과 로커빌리에서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포크 음악까지를 포섭하면서 고전 미국 노래를 탐구했고, 심지어 재즈와 그레이트 아메리칸 송북까지 수용했다. 기타, 건반, 하모니카를 사용한 공연을 했다. 반주는 시시각각 바뀌는 라인업의 음악가가 제공하며 1980년대 말부터 건실히 수행한 순회공연은 네버 엔딩 투어로 불리고 있다. 녹음 아티스트 및 공연자로서 그가 이룩한 업적은 그의 경력 중심에 위치해 있지만, 그의 가장 위대한 공헌으로 평가되는 것은 작곡·작사다. 1994년부터 시작해 일곱 권의 드로잉 및 그림 서적을 발간했고 그의 작업물은 주요 예술 화랑에 전시되고 있다. 음악가로서 딜런은 1억 장 넘게 음반을 팔아 역대 가장 많은 음반을 판 아티스트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다. 일곱 번 그래미상, 한 번 골든 글로브상, 한 번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로큰롤 명예의 전당, 미네소타 음악 명예의 전당, 내슈빌 명예의 전당,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08년 퓰리처상 심사위원들은 딜런에게 "그의 가사 작품의 비범한 시적 힘이 아로새긴 대중음악 및 미국 문화에서의 깊은 영향"을 인정해 특별 표창을 했다. 2012년 5월 대통령 버락 오바마에게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받는다. 2016년 "위대한 미국의 전통 노래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한" 공로로 노벨문학상을 수여받았다.[3] 목차 1생애 1.1유년기 1.21960년대 1.2.1일렉트릭으로의 전환 1.2.2모터사이클 사고와 은둔 1.31970년대 1.41980년대 1.51990년대 1.62000년대 2노벨 문학상 수상 3사생활 3.1연인 관계 3.1.1수즈 로토로 3.1.2존 바에즈 4영향 5음반 목록 6저서 7출연 작품 8각주 9외부 링크 생애[편집] 유년기[편집]   미국 미네소타 주 히빙에 위치한 지머맨 가족의 집 밥 딜런은 1941년 5월 24일 미네소타 주 덜루스에서 중산층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히빙에서 자랐다.[4] 그의 부친은 전기 기술자 일을 하며 가족의 생계를 꾸려 나갔다. 사실 밥 딜런은 로버트 앨런 지머맨이라는 실명 외에 샤브타이 자이셀 벤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유대인이 가지는 종교적인 이름으로서 그의 가정은 당시 그 도시에서는 드문 유대계 가문이었다. 그의 조부는 러시아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미국에 이민 온 인물이었다.[5] 가톨릭 신자가 다수였던 마을에서 유대인은 소수민족으로 왕따를 당했고, 그의 유일한 탈출구는 삼촌 소유의 극장에서 영화 감상을 하는 것이다. 그는 당시 최고의 반항아 제임스 딘을 사모했다.[6] 그러다 음악적 재능을 발견해 피아노를 치고 기타를 들기 시작했다. 1959년 미네소타 대학교에 입학하여, 문학을 전공하지만 1년도 채 되지 않아 자퇴를 결정했다. 우디 거스리, 로버트 존슨, 행크 윌리엄스의 포크, 블루스, 컨트리 음악에 심취하면서 거리에서 자신의 음악을 노래하며 세상과 대화하는 청춘을 선택했다. 평소 동경하던 시인 딜런 토마스의 이름을 차용해 밥 딜런이라는 예명을 붙여 활동했으며, 1961년 미네소타를 떠나 뉴욕으로 거처를 옮겼다.[7] 이름은 웨일스 시인 '딜런 토마스'에서 스스로 개명하였다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서부극 《건스모크》의 등장인물 '마샬 맷 딜런'의 어간에서 차용하였다는 설도 있다.[8] 1960년대[편집]   1943년의 우디 거스리 1961년 대학을 중퇴한 딜런은 그가 숭배한 우디 거스리가 사는 뉴욕시로 가기로 결심했고, 스무 살의 딜런은 뉴욕 그리니치빌리지에 도착했다. 딜런은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한 시간 반 버스를 타고 자신을 음악의 길로 이끈 영웅 우디 거스리를 만나러 갔다. 그러나 우디 거스리는 늙어서 신경퇴보증에 걸려 뉴저지주립병원의 병상에 누워 있었다. 수십 개의 침상이 나란히 놓여 있는 방에서 거스리는 무기력하게 누워 있었다. 무서운 병마에 항복한 우디 거스리의 육체를 보면서 딜런은 기겁했으나 그는 기타를 치며 자신이 좋아한 우디 거스리의 노래를 부르며 죽어가는 노인을 위로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노인에게 친필 서명을 받았다.[6] 처와 아들인 아론 거스리가 딜런의 방문에 매우 기뻐했다고 전해진다.[5] 이후 딜런은 그리니치빌리지의 수많은 클럽과 카페에서 노래를 불렀다. 레퍼토리는 주로 흑인 델타 블루스, 우디 거스리, 레드벨리와 같은 고전 포크 계열의 노래였다. 때때로 자작곡도 한두 곡씩 끼워넣었다. 딜런의 창법은 점점 더 우디 거스리와 닮아갔고, 외양적으로도 그와 흡사한 스타일(덥수룩한 헤어 스타일과, 낡은 플란넬 셔츠, 색이 바랜 블루진)을 추구했으며, 가사가 내포하는 사회의식 또한 견고해져 갔다.[5] 그러다 유명 음반 제작가 존 하몬드의 눈에 띄어 콜롬비아 레코드를 통해 데뷔하게 된다.[6] 데뷔 음반 《Bob Dylan》(1962)은 전혀 팔리지 않은 작품이었지만, 우연히 이 음반을 듣게 된 한 사내가 딜런에게 관심을 표했다. 그는 바로 훗날 록계를 대표하는 거물 매니저로서 일세를 풍미하게 될 앨버트 그로스만이었다.   1963년 11월의 밥 딜런 이후 미대 지망생인 수즈 로토로를 떠나보낸 딜런은 괴로워했다. 제대로 먹지도 못했고 제대로 잠을 자지도 못하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괴로워하면서도 그는 미친 듯 곡을 썼다.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 〈Masters of War〉, 〈Positively 4th street〉, 〈Blowin' in the Wind〉 등이 모두 이때 만들어졌다. 두 번째 음반 《The Freewheelin' Bob Dylan》에 이 곡들이 수록되었다. 음반 재킷에는 눈이 내린 날 그리니치빌리지에서 수즈와 팔짱을 낀 채 걸어오는 사진을 실었다. 자작곡 〈Blowin' in the Wind〉은 피터, 폴 앤 메리가 불러 빌보트 차트 1위에 올라 그는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었다. 《뉴욕타임스》는 그를 프랑스 시인 아르튀르 랭보와 소련 시인 예브게니 옙투셴코와 비교 평가하는 글을 실었다. 이 노래는 베트남전을 반대하는 히피들의 혁명가가 되었다.[6] 음반의 성공을 통해 당시 활발했던 사회적 저항 운동의 상징적인 음악가가 되었으며, 특히 잭 케루악, 앨런 긴즈버그 등 비트닉 작가들의 영향을 받은 그의 시적인 가사는 대중음악에서의 가사의 수준을 끌어 올렸다. 일렉트릭으로의 전환[편집] 자신이 의도치도 않았던 저항 가수로서의 굴레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딜런은 언론과 자주 마찰을 일으키게 되며, 당시 비틀즈를 위시로 한 브리티시 인베이전 밴드들의 일렉트릭 사운드에 자극을 받아 정통 어쿠스틱 포크에서 일렉트릭 사운드로의 전환을 시도한다. 패션 스타일 또한 당시 런던에서 유행하던 모즈룩의 영향을 받게 된다.[9] 1971년 그는 이렇게 술회한 바 있다.[10] “ 그들(비틀즈)은 아무도 하지 않은 것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코드는 정말 도에 지나친 것이었지만 하모니가 그것을 타당하게끔 했다. 그러나 맹세하건데 난 정말 그들에게 빠졌다. 모두들 그들이 어린 10대를 위한 광대이며 곧 사라질 것이라고들 했다. 그러나 내겐 명확했다. 그들이 지속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난 그들이 음악이 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내 머리 속에는 비틀즈가 전부였다. ” 1965년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The Newport Folk Festival)에서 록 밴드 폴 버터필드 블루스 밴드와 키보디스트 알 쿠퍼를 대동하고 일렉트릭 사운드를 선보인 사건은 수많은 대중과 포크 팬들의 야유와 반발을 불러 일으키지만, 딜런은 자신의 음악적 전환을 확고하게 이어갔으며 이를 통해 포크 록이라는 새로운 음악적 영역을 창조하고 발전시켰다. 이 시기의 음반으로는 《Bringing It All Back Home》(1965), 《Highway 61 Revisited》(1965), 《Blonde On Blonde》(1966)가 있다. 1965년 11월 딜런은 25세의 전직 모델 사라 라운즈와 극비리에 혼인식을 치르고 이듬해 1966년 봄 호주와 유럽을 중심으로 투어를 시작한다. 딜런의 연주 여행에 동참하게 된 새로운 백업 밴드의 이름은 더 혹스(더 밴드의 전신). 전후반으로 나뉜 공연 프로그램에서 1부는 딜런 홀로 플레이하는 어쿠스틱 스테이지, 2부는 더 혹스를 대동한 로큰롤 스테이지로 이루어져 있었다.[9] 모터사이클 사고와 은둔[편집] 투어를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온 1966년 7월, 딜런은 자택인 우드스탁 근처의 도로에서 모터사이클을 몰고 가던 중 사고를 당해 기나긴 요양 생활에 들어가게 된다. 이 사고는 당시 언론에 의해 알려진 바와 달리 큰 사고는 아니었지만 그가 뮤직 비즈니스계에서 도피하기 위한 의도로 자의에 의해 부풀려진 부분이 크다고 전해진다. 그는 이후 몇 개 정도의 이벤트에 모습을 드러낸 것을 제외하곤 1974년까지 콘서트 활동을 일체 중단하기에 이른다.[9] 그는 우드스탁에 집을 짓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마치 은둔자와도 같은 나날을 보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시기 그와 마찬가지로 우드스탁에 정착한 더 밴드의 멤버들과의 본격적인 교류가 시작된다. 한때 로니 호킨스라는 블루스 록계의 보컬리스트의 백 밴드(당시는 더 혹스(the Hawks))로서 4년 가까이 투어 활동을 한 더 밴드는 가혹한 조건 속에서 베테랑 투어 밴드로 성장했다. 더 밴드의 멤버들은 빅 핑크라 이름 붙인 임대주택에 모여 살고 있었는데, 그곳 지하에는 그들이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든 스튜디오가 있었다. 어느 날 그곳을 방문한 딜런이 더 밴드의 멤버들과 즉흥적인 세션을 가지게 되었다. 주로 루츠록(Roots Rock) 장르의 음악을 만들었는데, 그때 녹음한 마스터 테이프가 어느샌가 해적판으로 나돌게 되며 그때까지 완전한 무명이었던 더 밴드의 존재가 세간에 알려지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 그들은 1975년 대망의 데뷔 음반 《Music From The Pink》을 발매하게 된다.[9] 더 밴드와의 세션 후, 활동을 재개한 딜런은 1967년 즈음 컨트리의 본고장인 내슈빌에서 새 음반 녹음에 착수한다. 불후의 명작이라 일컬어지는 전작 《Blond On Blond》(1966년) 또한 내슈빌에서 녹음되었다. 당시 많은 젊은 아티스트들이 사이키델릭이라는 새로운 경향에 눈 돌릴 무렵, 굳이 보수적이고 한물간 음악으로 취급받고 있던 컨트리 뮤직을 선택한 것이었다. 서부 개척 시대 무법자의 이름에서 착안한 음반 《John Wesley Harding》은 같은 내슈빌에서 녹음을 했는데, 전작과 달리 성경의 내용을 하나의 테마로서 등장시킨 작품이다.[9] 1970년대[편집]   1974년 시카고에서의 공연 중인 더 밴드와 밥 딜런 그 후 1969년 《Nashville Skyline》(1969년), 《Self Portrait》과 《New Morning》(1970년), 《Bob Dylan's Greatest Hits Vol. II》(1971년)를 연이어 발표한 뿐, 공연 일정도 없이 음반도 발표하지 않는 침묵의 시간이 계속된다. 딜런의 부활은 더 밴드와 함께 시작한 콘서트 투어로부터 시작되었다. 친구이자 비틀즈의 전 멤버인 조지 해리슨이 1971년에 주최한 콘서트 포 방글라데시(Concert For Bangladesh)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같은 시기 발매한 오랜만의 정규 음반 《Planet Waves》가 무려 전미 음반 차트 넘버원에 랭크되어 다시금 예전 활력을 되찾은 딜런은 1975년, 1976년 새 음반 《Blood On The Tracks》, 《Desire》를 각각 발표한다. 이 작품은 당시 이혼 직전 상태에 있던 사라 딜런과의 아내와의 불화와 이혼을 겪으며 태어났다.[9] 이듬해 발표한 음반 《Desire》도 뛰어난 작품이었다. 살인범으로 수감되어 있던 흑인 프로 복서 루빈 허리케인 카터의 석방을 기원하며 만든 노래 《Hurricane》은 딜런에게 있어 오랜만의 히트 싱글이 되었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새로운 라이브 투어 롤링 썬더 리뷰를 시작하게 되었다. 롤링 썬더 리뷰는 콘서트 투어라기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쇼였다. 주역은 물론 딜런이었지만, 로저 맥귄, 존 바에즈, T 본 버넷, 로니 브레이클리, 앨런 긴즈버그, 로버타 플랙, 조니 미첼 등의 쟁쟁한 아티스트가 게스트로 대거 출연했다. 딜런은 훌륭한 라이브 퍼포먼스로 호평을 얻었으며, 투어를 배경으로 한 세미 다큐멘터리를 직접 제작하는 등, 정력적인 활동을 펼쳐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투어는 후반기로 접어들수록 점차 예전의 활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매회 네 시간에 걸친 기나긴 콘서트는 점차 멤버들의 체력과 정신력을 소모시켜 갔으며 멤버들 사이에 코카인이나 각성제 등의 약물 사용이 빈번하게 이루어지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딜런 또한 오랜 친구였던 필 오크스의 자살과 아내 사라와의 이혼 문제로 인해 점차 의욕을 잃어가고 있었다.[9] 1970년대 말부터 밥 딜런은 종교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1979년 작 《Slow Train Coming》은 기독교 원리주의에 심취해 가스펠을 노래하는 밥 딜런의 변화를 기록하고 있는 작업이었다. 음반에 수록된 곡을 통해 그래미 최우수 남성 록 보컬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지만, 뒤이어 발표한 《Saved》 《Shot of Love》와 같은 음반은 음악가보다 전도사로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던 밥 딜런의 초상을 담고 있었다. 사라와의 이혼 소송, 앨버트 그로스맨의 법정 투쟁은 모두 엄청난 변호사 비용을 필요로 하였으며, 그 자금은 로열티 수익만으론 도저히 확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있어 유일한 해결책이란 투어를 돌며 현금을 벌어들이는 것뿐이었다. 그리하여 1978년 그는 대대적인 월드 투어에 나서게 된다.[9] 1980년대[편집]   1980년 4월 18일, 토론토에서의 딜런 월드 투어를 마친 그는 쉴 새 없이 음반 제작에 매진한다. 《Slow Train Coming》(1979년), 《Saved》(1980년), 《Short of love》(1981년), 《Infidels》(1983년), 《Empire Burlesque》(1984년), 그리고 무려 LP 다섯 장짜리의 대작이 된 미발표 곡을 포함한 베스트 음반 《Biograph》(1985년), 《Knock out loaded》(1986년), 《Down in the groove》(1988년), 《Dylan & The Dead》(1989년) 등 차례차례 음반을 발표했다. 개중에 높은 평가를 얻고, 만족할 만한 판매고를 올린 작품은 아이러니하게도 과거의 노래를 집대성한 작품인 《Biograph》와 예전의 동료들과 함께 놀이 감각으로 만든 프로젝트 음반 《Traveling Wilburys Vol. 2》(1988) 정도였다. 1985년, 마이클 잭슨이 주도한 《We Are The World》 프로젝트에 참가한 것이 그가 1980년대에 대중에게 남긴 가장 주목할 만한 활동이었다. 1982년 작곡가 명예의 전당 입성, 1988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 선정 역시도 밥 딜런의 음악적 평가를 완료의 시점에서 평가하는 것이기도 했다.[7] 1988년, 조지 해리슨, 로이 오비슨, 제프 린, 톰 페티와 '트래블링 윌버리스'를 결성하였다. 아이디어 고갈로 고민하던 그는 수많은 용병들에게 도움을 받게 되는데, 데뷔 당시 뉴웨이브계의 밥 딜런이라 불렸던 다이어 스트레이츠의 마크 노플러는 《Slow Train Coming》의 작업에 본격 투입되었고, 톰 페티 앤 더 핫브레이커스가 딜런의 투어 밴드로 참가했으며,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백 밴드 E 스트리트 밴드가 리코딩에 참가, 레게 뮤직계 최고의 리듬 콤비 슬라이 던바 앤 로비 셰익스피어가 리듬 파트에 합류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카를로스 산타나와 함께 투어를 개최, 거기에 그레이트풀 데드가 참가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딜런은 완전히 자신감을 잃고 방황하게 되었다. 1989년 발표된 음반 《Oh Mercy》는 다니엘 라노아를 프로듀서로 기용한 것만으로도 주목할 만한 작품이었지만, 역시 판매고는 신통치 않았다. 1990년에는 당시 주가를 높이던 워즈 형제가 프로듀서로 참가한 음반 《Under the red sky》를 발표하지만 이것 또한 전혀 판매고에 도움을 주지 못한 채, 이후 7년간 음반 작업을 중단하기에 이른다. 딜런은 그런 악재 속에서 네버 엔딩 투어라 명명한 투어를 시작한다. 이것은 두 번째 아내와의 이혼 문제와 음악적인 영감 부족으로 고민하는 그에게 있어 일종의 도피의 장을 마련해 준 것이었다.[9] 1990년대[편집] 1990년대에도 밥 딜런의 위상은 간간이 새로운 음반을 발표하는 원로 가수의 입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1992년 그는 연간 통산 105회 공연을 실시했다. 3일에 한 번꼴로 세계 어딘가에서 노래하고 있던 것이다. 이후에도 그는 연간 100회에 가까운 속도로 투어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1997년 딜런은 《Oh Mercy》 이후 오랜만에 프로듀서 다니엘 라노아와 콤비를 짜고 마이애미의 밤 테리어 스튜디오에서 7년 만에 정규 음반을 녹음하게 된다. 이 음반 《Time out of mind》는 블루스 색채가 짙은 포크 록 스타일의 악곡에 과거의 걸작 《Blood on track》을 더욱 심화시킨 듯한 심오한 노랫말이 담겨 있으며, 거기에 다니엘 라노아의 프로듀스가 창출해낸 독특한 무드가 결합되어 따스하고 예스러우면서도 딜런 특유의 날 선 예리함과 진보적 감각이 조화를 이루는 작품이었다. 이 음반으로 그는 생애 처음으로 그래미상을 수상, 또 한번 록 음악계의 정점에 우뚝 설 수 있었다. 하지만 딜런은 그러한 성공의 기쁨에 도취할 새도 없이 즉시 투어를 재개한다. 음반 타이틀과 동명인 《Time out of mind》라 명명된 투어를 개시하며 1998년 연간 통상 103회에 이르는 공연을 가졌다. 1999년에는 《타임》지가 선정하는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선정되었다. 2000년대[편집] 2000년에 스웨덴의 왕립음악원에서 주관하는 폴라음악상의 주인공이 되었고, 2004년 10월에 출판된 회고록 《바람만이 아는 대답: 밥 딜런 자서전》(Chronicles: Volume One)은 뉴욕 타임스의 논픽션 부문 베스트셀러 목록에 19주간 머물렀다.[11] 2000년에 영화 《원더 보이스》에 나온 그의 노래 "Things Have Changed"와 함께 아카데미 상을 수상하였다. 2008년에는 퓰리처상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2009년 4월 28일 딜런은 그의 33번째 정규 음반 《Together Through Life》을 발매하였다. 이 음반은 빌보드 차트와 '가장 많이 팔린 200개의 음반' 차트에서 모두 1위에 올랐으며, UK음반 차트에서는 발매된 지 1주 만에 1위에 올랐다. 2010년 3월 31일, 데뷔한지 48년 만에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첫 내한 공연을 가졌다. 2016년 10월 13일, 대중 가수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노벨 문학상 수상[편집]     201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발표하는 사라 다니우스 스웨덴 학술원의 사라 다니우스 사무 총장은 수상 발표 직후 한 인터뷰에서, "밥 딜런은 귀를 위한 시를 쓴다"고 표현하였다. "밀턴과 블레이크에서 이어지는 영어권 전통 속에서 위대한 시인이며, 항상 자신을 쇄신하고 새로운 신원을 창조하고 있다. 2천5백 년 전에 써진 호메로스와 사포의 시를 지금까지 읽고 우리가 그것을 즐긴다면 밥 딜런 또한 읽을 수 있고 읽지 않으면 안 된다."고 수상 배경을 밝혔다.[12][13] 사생활[편집] 연인 관계[편집] 수즈 로토로[편집] 클럽과 카페를 전전하며 노래를 부르던 시절 딜런은 열일곱 살의 이탈리아계 수즈 로토로를 만난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수즈 로토로는 미대 지망생이었다. 우연히 딜런의 연주를 보고 그에게 푹 빠진 수즈는 그가 출연하는 날마다 카페에 와 연주를 감상하곤 했다. 스물한 살의 딜런은 아직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귀여운 소녀와 열정적인 연애를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4번가 근처에 원룸을 얻어 동거에 들어갔다. 두 사람은 작은 방에서 유명한 화가와 유명한 록스타를 꿈꾸며 꿈결 같은 시간을 보냈다. 이 아파트에 음악가들이 드나들었다. 피터, 폴 앤 메리, 데이브 반 론크 등이 싸구려 와인을 들고 와 서로 신곡을 보여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딜런은 수즈와 결혼하고 싶어했다. 어느 날 용기를 내어 수즈 어머니를 찾아갔다. 수즈의 어머니 메리는 “너희는 너무 어려서 결혼이 주는 무거운 책임감을 질 수 없어. 게다가 딜런, 네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네.”라며 결혼을 반대했고, 메리는 수즈를 데리고 이탈리아로 긴 여행을 떠났다.[6] 존 바에즈[편집]   1963년 8월 28일 시민권 운동인 '워싱턴 행진'에서의 바에즈와 딜런 1961년 4월,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존 바에즈를 처음 만난 그는 금새 연인이 되어 뉴욕의 한 호텔에서 함께 지냈다. 당시는 딜런이 무명 작곡가에 불과했던 시절, 이미 신비한 미성으로 포크음악의 신예로 떠올랐던 바에즈는 딜런을 자신의 무대에 내세웠고, 딜런은 《바람만이 아는 대답》(Blowing in the wind) 등 자신의 여러 곡을 바에즈가 부르게 했고, 둘은 어느새 민권·반전 운동의 기수가 되었다. 1963년 8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내겐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 이후, 이어진 워싱턴 대행진 뒤 20대 초반이었던 둘은 수많은 시민들 앞에서 《우리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라는 노래를 부르며 공연했다. 1965년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이 시작된 직후 열린 7월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도 딜런과 바에즈는 선배 피트 시거와 함께 반전 공연을 펼쳤다. 1965년 밥 딜런과 존 바에즈는 헤어졌다.[14] 영향[편집] 미국 포크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가수이다. 더 클랜시 브라더스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존 바에즈와 피터, 폴 앤 메리에게 영향을 주었다. 밥 딜런이 지은 곡들 가운데 "Restless Farewell"은 더 클랜시 브라더스가 부른 아일랜드 고전 포크송 파팅 글래스를, "Ramblin' Gamblin' Willie"는 브레넌 온 더 모어를, "Farewell"은 잉글랜드 고전 포크송 리빙 어브 리버풀을, "Pretty Paggy-O"는 메이드 어브 파이프-이-오를 패러디한 곡이다. 밥 딜런이 지은 반전평화 가요인 "Blowing in the Wind"는 존 바에즈나 주디 콜린스(Judy Collins), 킹스턴 트리오(The Kingston Trio), 피터, 폴 앤 메리 등등도 불렀다. 한편 대한민국의 1970년대 통기타 포크 음악은 미국 포크 음악의 영향을 받았다. 이를테면 김민기, 양희은등의 가수들은 모두 통기타를 사용하는데, 미국 포크 음악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호너사의 하모니카 시그네춰가 있는 뮤지션이다. 음반 목록[편집] ");"> 《Bob Dylan》 (1962) 《The Freewheelin' Bob Dylan》 (1963) 《The Times They Are a-Changin'》 (1964) 《Another Side of Bob Dylan》 (1964) 《Bringing It All Back Home》 (1965) 《Highway 61 Revisited》 (1965) 《Blonde on Blonde》 (1966) 《John Wesley Harding》 (1967) 《Nashville Skyline》 (1969) 《Self Portrait》 (1970) 《New Morning》 (1970) 《Pat Garrett & Billy the Kid》 (1973) 《Dylan》 (1973) 《Planet Waves》 (1974) 《Blood on the Tracks》 (1975) 《The Basement Tapes》 (1975) 《Desire》 (1976) 《Street Legal》 (1978) 《Slow Train Coming》 (1979) 《Saved》 (1980) 《Shot of Love》 (1981) 《Infidels》 (1983) 《Empire Burlesque》 (1985) 《Knocked Out Loaded》 (1986) 《Down in the Groove》 (1988) 《Oh Mercy》 (1989) 《Under the Red Sky》 (1990) 《Good as I Been to You》 (1992) 《World Gone Wrong》 (1993) 《Time Out of Mind》 (1997) 《Love and Theft》 (2001) 《Modern Times》 (2006) 《Together Through Life》 (2009) 《Christmas in the Heart》 (2009) 《Tempest》 (2012) 《Shadows in the Night》 (2015) 《Fallen Angels》 (2016) 《Triplicate》 (2017) 저서[편집] ");"> 타란툴라 (1971): 소설 바람만이 아는 대답 (2004): 회고록 출연 작품[편집] ");"> 포크의 여왕, 존 바에즈 각주[편집] 이동↑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Bob Dylan. The Rock and Roll Hall of Fame and Museum 이동↑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Nobel laureate Bob Dylan: uneasy ‘voice of a generation’”. 《inquirer.net》. 2016년 10월 14일. 이동↑ “보관 된 사본” (PDF). 2017년 09월 20일에 보존된 문서 (PDF). 2017년 09월 20일에 확인함. 이동↑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보관 된 사본”. 2017년 09월 20일에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보존된 문서. 2017년 09월 20일에 확인함. ↑ 이동:가 나 다 차승우.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비틀즈마저 야코죽이던 본좌 중의 본좌”. 《YES24》. 2016년 1월 7일에 확인함. ↑ 이동:가 나 다 라 마 한대수 (2016년 10월 24일).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한대수, 밥 딜런을 말하다”. 《주간조선》. ↑ 이동:가 나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20세기 대중음악사를 빛낸, 밥 딜런 - 하종욱의 20세기 클래식”. 《네이버》. 월간 객석. 2014년 11월 1일. 이동↑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Bob Dylan Weighing Dylan Thomas Tribute” (영어). rollingstone.com. 2016년 10월 14일에 확인함. ↑ 이동: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승우.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천재는 구르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YES24》. 2016년 1월 7일에 확인함. 이동↑ 임진모 (1997년 10월).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밥 딜런(Bob Dylan)”. 《이즘》. 이동↑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Bob Dylan Begins ‘Chronicles: Vol 2’” (영어). uncut.uk. 2016년 10월 14일에 확인함. 이동↑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Bob Dylan wins Nobel prize in literature’” (영어). theguardian.com. 2016년 10월 14일에 확인함. 이동↑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Poetry for the ear’: Bob Dylan wins Nobel Prize in literature” (영어). washingtonpost.com. 2016년 10월 14일에 확인함. 이동↑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연인 밥 딜런과 존 바에즈의 서로 다른 길”. 《한겨레》. 2016년 10월 14일.     1960년대에 생겨난 많은 그룹들과 매우 다른 길을 걸은 2명의 음악가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격변의 시기에 팝과 록 음악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들은 바로 밥 딜런과 지미 헨드릭스였다. 밥 딜런의 음악세계는 포크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노래는 상당히 사회 참여적인 저항 가요풍이었다. 그 음악은 상상력이 풍부하여, 반항적이고 실천적인 1960년대 젊은 청소년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딜런은 핵전쟁의 위협과 시민권, 인종주의에 대해, 나아가서는 군산복합체의 파워에 대해서 노래하였다. “사랑과 섹스 말고도 이 세상에는 중요한 다른 것들이 존재한다.”라고 그는 말했다. 젊은 시절의 밥 딜런 ⓒ 시그마프레스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밥 딜런의 저항가요는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노예들은 저항의 노래를 발라드와 자장가로 가장해서 부르곤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저항가요의 전통은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 1912~1967), 피터 시거(Peter Seeger, 1919년생)로 계속 이어졌는데, 그들은 기타 하나 둘러메고 작곡하고 노래하고 반주했다. 거스리와 시거는 미국 전통에서 가장 잘 알려진 몇몇 노래들을 만들었고 노동 조건과 시민권을 향한 투쟁과 평화와 반전 운동을 둘러싼 투쟁에서 선봉에 섰다. 우디 거스리는 〈그랜드 쿨리 댐(Grand Coulee Dam)〉, 〈로벤 제임스(Reuben James)〉, 〈이 땅은 너의 땅(This Land is Your Land)〉의 작곡가였다. 피터 시거는 〈그 많던 꽃들은 어디로(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 〈나에게 해머가 있다면(If I Had a Hammer)〉, [민중가수 리 헤이즈(Lee Hays)와 함께] 〈턴, 턴, 턴(Turn, Turn, Turn)〉을 작곡했다. 인용문 나는 우디 거스리를 들었다. 내가 우디 거스리를 들었을 때, 정말 끝내줬다. 우디는 나의 신이다. 밥 딜런 1960년대에 밥 딜런은 그 집중력과 사회참여로 대중 음악계를 사로잡았다. 그는 새롭고도 심오한 문제들에 대한 답변을 추구하면서 개성 있는 목소리로 한 세대를 노래했다. 특별히 〈마스터스 오브 워(Masters of War)〉나 〈블로잉 인 더 윈드(Blowin’ in the Wind)〉 같이 반전적인 메시지를 담은 저항가요는 고통과 소외로 가득한 1960년대의 분위기를 아주 잘 포착해 냈다. 딜런의 으르렁거리는 듯한 비음 섞인 창법과 거친 기타와 하모니 연주는 음악에 힘과 추진력을 더해 주었다. 초기 흑인 로커들의 음악처럼, 딜런의 음악은 대다수 청중들이 듣기에 너무 생경해서 오히려 피터, 폴 앤 메리[Peter, Paul, and Mary, 〈블로잉 인 더 윈드〉, 〈더 타임즈 데이 아 어 체인징(The Times They Are a-Changing)〉], 조안 바에즈[Joan Baez, 〈돈 씽크 투와이스, 잇츠 올 라이트(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 〈잇츠 올 오버 나우, 베이비 블루(It’s All Over Now, Baby Blue)〉]와 버즈[Byrds, 〈미스터 탬버린 맨(Mr. Tambourine Man)〉]가 커버 버전으로 발표했을 때, 제일 많이 팔렸다. 딜런은 지치지 않는 창조적 정신의 소유자였다. 하나의 스타일이 히트를 치면 그는 곧 다른 새로운 뭔가를 찾아 나섰다. 항상 팬들보다 앞서 나갔다. 그는 록 발라드에서 저항가요로, 전기적 록으로, 컨트리로 나아갔다. 밥 딜런은 초기 시절부터 여러 번 관심사를 바꿔나갔는데, 그때마다 그의 추종자들은 불평했다. 1960년대 그는 크리스마스 축가, 유대식 발라드, 선정적인 록과 발라드를 노래했다. 1960년대 이래 그의 노래들은 너무나도 독창적이어서 분류가 힘들 정도이다. 이 중에서 좋은 예는 화려하면서도 슬프고 씁쓰레한 〈새드 아이드 레이디 오브 더 로랜즈(Sad Eyed Lady of the Lowlands)〉(1966)이다. 다른 예로는 자신의 아내에게 보내는 유언장인 〈사라(Sara)〉(1975)와 강렬한 인상을 주는 〈러브 삭(Love Sock)〉(1997)이다. 밥 딜런은 계속해서 작곡하고 연주하고 저항하고 음반을 발표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마음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실험을 그치지 않는다. 1997년 음반 〈타임 아웃 오브 마인드(Time Out of Mind)〉는 인간의 조건에 대한 성숙한 반성을 담은 것으로 그의 최고의 음반이다. 반면 〈모던 타임즈(Modern Times)〉(2006)에서는 미국 대중 음악의 컨트리적 전통과 주제를 탐구한다. 2010년 〈오피셜 부트렉(Official Bootleg)〉 앨범 시리즈를 발매했는데, 그것은 매우 희귀한 곡들이나 미발표 곡들을 포함하고 있다. ========================   Knockin' On Heaven's Door    Ooh..   /  Ooh..  /  Ooh..   Mama, take this badge off of me. 어머니 저의 이 계급장을 떼어주세요. I can't use it anymore. 저는 더 이상 사용 할 수가 없어요. It's gettin' dark, too dark to see. (세상이) 어두워지고 있는데, 너무 어두워서 볼 수가 없어요. I feel I'm knockin' on Heaven's door. 제가 마치 천국의 문을 두드리는 것 같아요.   Knock, knock, knockin' on Heaven's door. 두드리고, 두드려요, 천국의 문을 두드리고 있어요. Knock, knock, knockin' on Heaven's door. Knock, knock, knockin' on Heaven's door. Knock, knock, knockin' on Heaven's door.   Mama, put my guns in the ground. 어머니 저의 총을 땅에 묻어주세요. I can't shoot them anymore. 저는 더 이상 그 누구도 쏠 수가 없어요. That long black cloud is comin' down. 길고 어두운 구름이 다가오고 있고, I feel I'm knockin' on Heaven's door. 저는 천국의 문을 두드리고 있음을 느끼고 있어요.   Knock, knock, knockin' on Heaven's door. < 반복 > [출처] 1029번. 밥 딜런 (Bob Dylan) / Knockin' On Heaven's Door |작성자 수   [뉴스토마토 권익도기자] 가수이자 음유시인이라 불리는 포크록의 전설 밥 딜런이 2016년도 노벨문학상의 주인공이 됐다. 당초 유력한 후보로 거론됐던 무라카미 하루키 등 정통 문학가들을 제친 예상밖의 결과다. 스웨덴 한림원은 13일 오후 1시(현지시간) 올해의 노벨문학상은 ‘위대한 미국 음악의 전통 내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한’ 밥 딜런(75)이라고 밝혔다. 문학 작가보다 음악가로 더 유명한 인물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로써 밥 딜런은 1993년 소설가 토니 모리슨 수상 이후 24년 만의 미국 출신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됐다. 한림원 관계자인 사라 다니우스는 이날 “딜런의 작품에서 고대 그리스의 서정시인 호머나 사포와의 유사성을 이끌어 낼 수 있다”며 “영어로 작성된 위대한 시”라고 표현했다. 딜런의 본명은 로버트 앨런 지머맨으로 1941년 미국 미네소타 덜루스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0살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딜런은 영국 시인 ‘딜런 토머스’에서 ‘딜런’이라는 이름을 따 예명을 삼을 만큼 시적인 표현을 즐겼다. 1963년 앨범 ‘더 프리휠링 밥 딜런’을 성공시키며 저항가수로 이름을 알렸고 ‘노킹 온 헤븐스 도어’(Knockin' on Heaven's Door), ‘블로잉 인 더 윈드’(Blowin' in the Wind) 등의 곡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딜런은 정치와 사회, 철학, 문학 등 여러 분야를 망라한 깊이 있는 가사와 시를 써왔다. 항상 팬층이 두터워 노벨상의 단골 후보로 거론돼 왔었지만 전통적인 문학 작품들과 형식이 달라 전문가들은 유력한 후보로는 보지 않았었다. 국내에서는 ‘바람만이 아는 대답’(문학세계사)이라는 제목의 자서전이 발간된 바 있다. 뉴욕타임스는 이날 롤링 스톤즈의 전 베이시스트 빌 와이먼이 2013년 뉴욕타임스 오핀니언 란에 쓴 글을 인용하며 딜런의 수상을 축하하기도 했다. 당시 오핀니언란에서 와이먼은 “물론 딜런의 가사와 시들은 기존 문학 작품들의 관례에는 맞지 않지만 서정성이 매우 짙고 그가 저술한 주제들은 세월의 유행을 타지 않는다”며 “세상의 그 어떤 시인보다도 그의 작품들은 영향력이 크다”고 언급한 바 있다. 노벨상 시상식은 창시자 알프레드 노벨의 기일인 12월10일 스웨덴 스톡홀름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다. 상금은 800만 크로나(약 11억원)다. 이번 수상으로 국내에서는 출판 뿐 아니라 음반 시장에서도 파급 효과가 있을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김성광 예스24 문학 담당 MD는 “대중 음악의 가사를 문학의 경지로 끌어올린 전설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출판뿐 아니라 음반 시장에도 영향이 미칠 것으로 예상 된다”며 “저서가 많이 없는 만큼 음악으로 밥 딜런을 이해하고자 하려는 대중이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1    음유시인은 여전히 자신만의 방식과 자신만의 "예술"을 하다 댓글:  조회:2154  추천:0  2018-07-29
27일 두번째 내한공연을 펼친 밥 딜런. 그는 이번 내한공연에서 사진 촬영을 허락하지 않았다. 소니뮤직 제공 밥 딜런은 밥 딜런이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만의 철학과 음악세계를 고집하는 태도는 여전했다.   27일 저녁 서울 방이동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펼친 두번째 내한공연에서 그는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두 시간 동안 노래만 줄창 불렀다. 아니, 불렀다기보다는 툭툭 뱉어냈다. 편곡 또한 원곡을 떠올리기 힘들 정도로 많이 비틀고 꼬았다. 두번째 곡으로 부른 ‘돈트 싱크 트와이스, 잇츠 올 라이트’는 양병집과 김광석이 부른 번안곡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로 국내 관객에게 익숙한 노래인데도 원곡을 바로 떠올리는 이들이 얼마 없었을 정도였다. 8년 전 첫 내한공연 때도 그랬다. 당시 파격적인 무대를 접하고 실망한 관객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밥 딜런은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이번에도 여전히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예술’을 했다.   그게 밥 딜런이다. 그가 1965년 미국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통기타 대신 일렉트릭 기타를 치며 ‘라이크 어 롤링 스톤’을 불렀을 때 관객들은 야유했다. 포크를 배반했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밥 딜런은 신경쓰지 않았다. 결국 그는 포크록이라는 새로운 문을 열어젖힌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 이번 내한공연에서 일렉트릭 기타를 치며 첫 곡 ‘올 얼롱 더 워치타워’를 부르는 순간,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 무대의 그가 겹쳐 보였다.   무대는 소박하면서도 따스했다. 큰 공연장의 필수품처럼 여겨지는 대형 스크린도 없었고 화려한 조명도 없었다. 자줏빛 커튼을 배경으로 백열전구처럼 따스한 느낌을 주는 노란 조명만이 은은하게 무대를 비추었다. 기타를 치며 첫 두 곡을 부른 밥 딜런은 피아노 앞으로 옮겨 앉았다. 그리고는 또 말 없이 노래와 연주를 이어갔다. 음악가로서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음유시인답게 그는 시를 읊조리듯 노래했다. 가사 내용을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왠지 시적인 운율이 느껴지는 듯했다.   밥 딜런이 예전에 공연을 하는 모습. 그는 이번 내한공연에서 사진 촬영을 허락하지 않았다. 소니뮤직 제공 한 시간 반 정도 지났을 무렵,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피아노 앞에만 붙어있던 밥 딜런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무대 가운데로 나왔다. 로커처럼 스탠딩 마이크를 삐딱하게 기울여 잡고선 익숙한 멜로디의 노래를 불렀다. 이브 몽땅이 부른 샹송 ’고엽’의 영어 버전 ‘오텀 리브스’의 선율은 이날 무대에서 가장 명징했다. 관객들은 유독 박수를 크게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이후 세 곡을 더 부르더니 역시 아무 말 없이 무대 뒤로 사라졌다.   어둠 속에서 앙코르를 갈구하는 박수가 터져나왔다. 이에 화답한 건 우아한 바이올린의 선율이었다. 바이올린 전주 뒤로 “하우 매니 로즈~”로 시작하는 노래가 이어졌다. 밥 딜런의 최대 히트곡 ‘블로잉 인 더 윈드’였다. 1963년 처음 발표된 이래 얼마나 많이 불려졌는지는 바람만이 알고 있을 이 노래. 이날 불린 노래는 아름답고 우아한 버전의 또 다른 ‘블로잉 인 더 윈드’였다. 나온 지 반세기도 더 된 노래는 2018년에도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앞서 밥 딜런은 변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실은 늘 변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그를 잘 모른다. 밥 딜런을 따라잡았다고 여기는 그 순간, 그는 또 다시 몇 걸음 더 나아간다. 토드 헤인즈 감독이 밥 딜런을 모티브 삼아 만든 영화 제목처럼 “이봐, 난 거기 없다고” 하고 중얼거릴지도 모를 일이다.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를 77살 거장의 내한공연 막이 내려지는 순간, 그 중얼거림이 환청처럼 들렸다.   /서정민 기자 27일 오후 8시 열린 미국 포크 음악의 대부 밥 딜런(77)의 내한 공연 '밥 딜런 & 히즈 밴드'는 국내 최대 규모 실내 공연장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과는 썩 어울리지 않는 공연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5인조 밴드의 연주와 어우러진 밥 딜런의 목소리가 현장을 찾은 관객의 귀를 즐겁게 할 만한 충분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워치타워(Watchtower)'와 '트와이스(Twice)'로 공연의 포문을 연 밥 딜런은 약 2시간 동안 쉼 없이 20여곡을 부르며 폭염을 뚫고 공연장을 찾은 이들을 자신만의 음악 세계로 초대했다. 관객을 향한 인사말은 없었다. 인사를 음악으로 대신한 밥 딜런은 그저 노래하고 또 노래했다. 편곡은 원곡을 떠올리기 힘들 정도로 자유분방했다. '노래하는 시인'으로 불리는 밥 딜런은 시적인 가사를 특유의 거친 목소리로 읊조리듯 노래하며 묘한 끌림을 느끼게 했다. 경쾌한 멜로디의 곡이 연주될 때 일부 관객은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돋웠다. 하모니카 연주 구간 때마다 곳곳에서 함성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쉼 없이 내달린 밥 딜런은 공연을 끝내고 쿨하게 무대 뒤로 사라졌다. 관객의 뜨거운 박수가 이어지자 다시 등장해 앙코르 무대를 꾸는 그는 대표곡 중 한 곡인 '블로잉 인 더 윈드(Blowin' In the Wind)'로 화답했다. 국내 팬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인 '낙킹 온 헤븐스 도어(Knocking on Heaven's Door)'는 끝내 부르지 않았다. 앙코르 무대까지 끝낸 이후에는 밴드 구성원들과 함께 무대 중앙에 모여 짧게 인사를 한 뒤 무대를 떠났다. 2010년 이후 8년만의 한국 공연을 마친 밥 딜런은 내달 29일 일본 후지 록 페스티벌에 헤드라이너로 출연할 예정이며, 이후 대만, 홍콩, 싱가폴, 호주 등에서 투어를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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