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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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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윤동주와 강처중 "발문" 댓글:  조회:2197  추천:0  2018-08-09
跋  文     東柱는 별로 말주변도 사귐성도 없었건만 그의 房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東柱 있나” 하고 찾으면 하던 일을 모두 내던지고 빙그레 웃으며 반가이 마주앉아 주는 것이었다. “東柱 좀 걸어 보자구” 이렇게 散策을 請하면 싫다는 적이 없었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散이든 들이든 江가이든 아무런 때 아무데를 끌어도 선뜻 따라 나서는 것이었다. 그는 말이 없이 黙黙히 걸었고 항상 그의 얼굴은 沈鬱하였다. 가끔 그러다가 외마디 悲痛한 高喊을 잘 질렀다. “아—” 하고 나오는 외마디 소리! 그것은 언제나 친구들의 마음에 알지 못할 鬱憤을 주었다. “東柱 돈 좀 있나” 옹색한 친구들은 곧잘 그의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노리었다. 그는 있고서 안 주는 법이 없었고 없으면 대신 外套든 時計든 내 주고야 마음을 놓았다. 그래서 그의 外套나 時計는 친구들의 손을 거쳐 典當鋪 나들이를 부지런히 하였다. 이런 東柱도 친구들에게 굳이 拒否하는 일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東柱 자네 詩 여기를 좀 고치면 어떤가” 하는 데 대하여 그는 應하여 주는 때가 없었다. 조용히 열흘이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곰곰이 생각하여서 한 편 詩를 誕生시킨다. 그때까지는 누구에게도 그 詩를 보이지를 않는다. 이미 보여주는 때는 흠이 없는 하나의 玉이다. 지나치게 그는 謙虛 溫順하였건만, 自己의 詩만은 讓步하지를 않았다. 또 하나 그는 한 女性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이 사랑을 그 女性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끝내 告白하지 않았다. 그 女性도 모르는 친구들도 모르는 사랑을 回答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는 사랑을 제 홀로 간직한 채 苦憫도 하면서 希望도 하면서 — 쑥스럽다 할까 어리석다 할까? 그러나 이제 와 고쳐 생각하니 이것은 하나의 女性에 對한 사랑이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을 “또 다른 故鄕”에 대한 꿈이 아니었던가. 어쨌든 친구들에게 이것만은 힘써 감추었다. 그는 間島에서 나고 日本 福岡에서 죽었다. 異域에서 나고 갔건만 무던히 祖國을 사랑하고 우리말을 좋아하더니 — 그는 나의 친구기도 하려니와 그의 아잇적 동무 宋夢奎와 함께 “獨立運動”의 罪名으로 二年刑을 받아 監獄에 들어간 채 마침내 모진 惡刑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것은 夢奎와 東柱가 延專을 마치고 京都에 가서 大學生 노릇하던 中途의 일이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나 마지막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殞命했지요. 짐작컨대 그 소리가 마치 朝鮮獨立萬歲를 부르는 듯 느껴지더군요” 이 말은 東柱의 最後를 監視하던 日本人 看守가 그의 屍體를 찾으러 福岡 갔던 그 遺族에게 傳하여 준 말이다. 그 悲痛한 외마디 소리! 日本 看守야 그 뜻을 알리만두 저도 그 소리에 느낀 바 있었나 보다. 東柱 監獄에서 외마디 소리로서 아주 가버리니 그 나이 스물 아홉, 바로 解放되던 해다. 夢奎도 그 며칠 뒤 따라 獄死하니 그도 才士였느니라. 그들의 遺骨은 지금 間島에서 길이 잠들었고 이제 그 친구들의 손을 빌어 東柱의 詩는 한 책이 되어 길이 세상에 傳하여지려 한다. 불러도 대답 없을 東柱 夢奎건만 헛되나마 다시 부르고 싶은 東柱! 夢奎!                                                                       (강 처 중)          ========================/// 동주는 별로 말주변도 사귐성도 없었건만 그의 방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아모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동주 있나” 하고 찾으면 하던 모두 내 던지고 빙그레 웃으며 반가히 마조 앉아 주는 것이었다.   “동주 좀 걸어 보자구” 이렇게 산책을 청하면 싫다는 적이 없었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산이든 들이든 강까이든 아모런때 아모데를 끌어도 선듯 따라 나서는 것이었다. 그는 말이 없이 묵묵히 걸었고 항상 그의 얼굴은 침묵하였다. 가금 그러다가 외마디 비통한 고함을 잘 질렀다.   “아-” 하고 나오는 외마디소리! 그것은 언제나 친구들의 마음에 알지 못할 울분을 주었다.   “동주 돈 좀 있나” 옹색한 친구들은 곳잘 그의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노리었다. 그는 있고서 안 주는 법이 없었고 없으면 대신 외투든 시계든 내 주고야 마음을 놓았다. 그래서 그의 외투나 시계는 친구들의 손을 거쳐 전당포 나드리를 부즈런이 하였다.   이런 동주도 친구들에게 굳이 거부하는 일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동주 자네 시(詩) 여기를 좀 고치면 어떤가?” 하는데 대하여 그는 응하여 주는 때가 없었다. 조용히 열흘이고 한달이고 두달이고 곰곰이 생각하여서 한편 시(詩)를 탄생시킨다.   그때까지는 누구에게도 그 시(詩)를 보이지를 않는다. 이미 보여 주는 때는 흠이 없는 하나의 옥이다. 지나치게 그는 겸허 온순하였지만, 자기의 시(詩)만은 양보하지를 안했다.   또 하나 그는 한 여성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이 사랑을 그 여성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끝내 고백하지 안했다. 그 여성도 모르는, 친구들도 모르는 사랑을 회답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는 사랑을 제 홀로 간직한 채 고민도 하면서 희망도 하면서 – 쑥스럽다 할까 어리석다 할까? 그러나 이제 와 고쳐 생각하니 이것은 하나의 여성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을 “또 다른 고향”에 대한 꿈이 아니었던가. 어쨌든 친구들에게 이것만은 힘써 감추었다.   그는 간도에서 나고 일본 복강(후쿠오카)에서 죽었다. 이역에서 나고 갔건만 무던이 조국을 사랑하고 우리말을 좋아 하더니 – 그는 나의 친구이기도 하려니와 그의 아잇적동무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의 죄명으로 2년형을 받아 감옥에 들어간 채 마침내 모진 악형에 쓸어지고 말았다. 그것은 몽규와 동주가 연전(연희전문)을 마치고 경도(쿄오토)에 가서 대학생 노릇하던 중도의 일이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나 마지막 외마디소리를 지그고 운명했지요. 짐작컨대 그 소리가 마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는 듯 느껴지드군요.”   이 말은 동주의 최후를 감시하던 일본인 간수가 그의 시체를 찾으러 복강(후쿠오카) 갔던 그 유족에게 전하여준 말이다. 그 비통한 외마디소리! 일본간수야 그 뜻을 알리만두 저도 그 소리에 느낀바 있었나 보다. 동주 감옥에서 외마디소리로서 아조 가 버리니 그 나이 스물아홉, 바로 해방되던 해다. 몽규도 그 며칠 뒤 따라 옥사하니 그도 재사였느니라. 그들의 유골은 지금 간도에서 길이 잠들었고 이제 그 친구들의 손을 빌어 동주의 시는 한 책이 되어 길이 세상에 전하여 지려한다.   불러도 대답 없을 동주 몽규었만 헛되나마 부르고 싶은 동주! 몽규! (1948년 1월 30일 발행)   ===========================   바람과 구름과 별과 시                           강 처중 (당시 경향신문 기자)   동주(東柱)는 별로 발주변도 사귐성도 없었지만 그의 방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아모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동주있나" 하고 찾으면하던 일을 모두 내던지고 빙그레 웃으며 반가히 마조 앉아주는 것이 었다. "동주있나 좀 걸어보자구"이렇게 산책을 청하면 싫다는 적이 없었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산이든 들이든 강까이든 아모데를 끌어도 선듯 따라 나서는  것이었다. 그는 말없이 묵묵히 걸었고 항상 그의 얼굴은 침을 하였다. 가끔 그러다가 외마디 소리! 그것은 언제나 친구들의 마음을 알지 못할 울분을 주었다. "동주 돈 좀있나" 옹색한 친구들은 곳잘 그의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노렸다. 그는 있고서 안주는 법이 없었고 없으면 대신 외투든 시계든 내 주고야 마음을 놓였다. 그래서 그의 외투나 시계는 친구들의 손을 거쳐서 전당포에 나들이를 부지런이 하였다. 이런 동주도 친구들에게 굳이 거부하는 일이 두가지 있었다. 하나는 "동주 자네 시 여기를 좀 고치면 어떤가" 하는데 대하여 그는 응하여 주는 때가 없었다. 조용히 열흘이고 한달이고 두달이고 곰곰이 생각하여서 한 편의 시를 탄생시킨다. 그때까지는 누구에게도 그 시를 보이지 않는다. 이미 보여 주었을 때는 흠이 없는 하나의 옥이다. 지나치게 그는 겸허온순하였지만 자기의 시만은 양보하지 안했다. 또 하나 그는 한 여성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이 사랑을 그 여성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끝내 고백하지 안했다. 그 여성도 모르고 츤구들도 모르는 사랑을 회답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을 사랑을 제 홀로 간직한 체 고민도 하면서 희망도 하면서 ...., 쑥스럽다 할까? 어리석다 할까? 그러나 이제와 고쳐 생각하니 이것은 하나의 여성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루어 지지 않을 '또 다른 고향'에 대한 꿈이 아니었던가. 어쨌던 친구들에게 이것만은 힘써 감추었다. 그는 간도에서 나고 일본 복강에서 죽었다. 이역에서 나고 갔건만 무던히 조국을 사랑하고 우리말을 좋아 하더니ㅡ 그는 나의 친구이기도 하려니와 그의 아잇적 동무 송 몽규(宋夢奎)와 함께 '독립운동'의 죄명으로 2년형을 받아 감옥으로 들어간체 마침내 모진 악형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것은 몽규와 동주가 연전(延專)을 마치고 경도에 가서 대학생 노릇하던 중도의 일이다. "무슨 뜻인지 모르나 마지막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운명했지요. 짐작컨데 그 소리가 마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 듯 느껴지더군요." 이 말은 동주의 최후를 감시하던 일본인 간수가 그의 시체를 찾으러 갔던 그 유족에게 전하여 준 말이다. 그 비통한 외마디 소리! 일본 간수야 그 뜻을 알리만두 저도 소리에 느낀 바 있었나 보다. 동주 감옥에서 외마디 소리로서 아조 가버리니 그 나이 스물아홉 바로 해방되던 해다. 몽규도 그 며칠 뒤 따라 옥사하니 그도 재사(才士)였느니라. 그들의 유골은 지금 간도에서 길이 잠들었고 이제 그 친구들의 손을 빌어 동주의 시는 한 책이 되어 길이 세상에 전하여 지려 한다. 불러도 대답이 없을 동주(東柱) 몽규(夢奎)었만 헛되나마 다시 부르고 싶은 동주(東柱) 몽규(夢奎)!                                                                          (강 처중)   ///윤동주 평전 (송우혜) ========================   윤동주 시인이 옥중에서 작고(1945년)한 후 시인의 가족과 친구들은 고인의 작품을 모아  출판사 '정음사'에서 라는 제목으로 간행함(1948년)     유고시집의 서문은 윤동주가 가장 존경했던 '정지용' 시인이 작성하였고 발문은 윤동주와 송몽규의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동료였던 강처중이 작성하였어.     ▲ 정지용 시인의 서문       강처중은 해방 후 경향신문의 기자로 활동하였고, 윤동주의 시집 출판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함 고인과 크게 인연이 깊었던 것도 아닌 정지용 시인의 서문을 실을 수 있었던 것 역시 당시 경향신문의 주필이었던 정지용 시인과 강처중 기자의 인연 덕이 크다고 함     영화 에도 강처중이 등장함   이 분!       다음은 강처중의 글인데 마음이 너무 아파. 꼮!꼭 읽어봐! 몽규와 동주 두 친구를 한번에 잃게 된 강처중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어     강처중의 「발문」    동주는 별로 말주변도 사귐성도 없었건만 그의 방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아모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동주 있나” 하고 찾으면 하던 일을 모두 내던지고 빙그레 웃으며 반가히 마조앉아주는 것이었다.  “동주 좀 걸어보자구” 이렇게 산책을 청하면 싫다는 적이 없었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산이든 들이든 강까이든 아모런 때 아모데를 끌어도 선듯 따라 나서는 것이었다. 그는 말이 없이 묵묵히 걸었고, 항상 그의 얼굴은 침울하였다. 가끔 그러다가 외마디 비통한 고함을 잘 질렀다.  “아-” 하고 나오는 외마디 소리! 그것은 언제나 친구들의 마음에 알지 못할 울분을 주었다.  “동주 돈 좀 있나” 옹색한 친구들은 곳잘 그의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노리었다. 그는 있고서 안 주는 법이 없었고 없으면 대신 외투든 시계든 내주고야 마음을 놓았다. 그래서 그의 외투나 시계는 친구들의 손을 거쳐서 전당포 나드리를 부즈런히 하였다.  이런 동주도 친구들에게 굳이 거부하는 일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동주 자네 시 여기를 좀 고치면 어떤가” 하는데 대하여 그는 응하여 주는 때가 없었다. 조용히 열흘이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곰곰이 생각하여서 한 편 시를 탄생시킨다. 그때까지는 누구에게도 그 시를 보이지를 않는다. 이미 보여주는 때는 흠이 없는 하나의 옥이다. 지나치게 그는 겸허온순하였건만, 자기의 시만은 양보하지를 안했다.  또 하나 그는 한 여성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이 사랑을 그 여성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끝내 고백하지 안했다. 그 여성도 모르고 친구들도 모르는 사랑을 회답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는 사랑을 제 홀로 간직한 채 고민도 하면서 희망도 하면서…… 쑥스럽다 할까 어리석다 할까? 그러나 이제와 고쳐 생각하니 이것은 하나의 여성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을 ‘또 다른 고향’에 대한 꿈이 아니었던가. 어쨌던 친구들에게 이것만은 힘써 감추었다.  그는 간도에서 나고 일본 복강에서 죽었다. 이역(異域)에서 나고 갔건만 무던이 조국을 사랑하고 우리말을 좋아 하더니 - 그는 나의 친구도 하려니와 그의 아잇적동무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의 죄명으로 2년형을 받아 감옥에 들어간 채 마침내 모진 악형에 쓸어지고 말았다. 그것은 몽규와 동주가 연전을 마치고 경도에 가서 대학생 노릇하던 중도의 일이었다.  “무슨 듯인지 모르나 마지막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운명했지요. 짐작컨대 그 소리가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는 듯 느껴지더군요.”  이 말은 동주의 최후를 감시하던 일본인 간수가 그의 시체를 찾으러 복강 갔던 그 유족에게 전하여준 말이다. 그 비통한 외마디 소리! 일본 간수야 그 뜻을 알리만두 저도 그 소리에 느낀 바 있었나 보다. 동주 감옥에서 외마디 소리로서 아조 가버리니 그 나이 스물아홉, 바로 해방되던 해다. 몽규도 그 며칠 뒤 따라 옥사(獄死)하니 그도 재사(才士)였느니라. 그들의 유골은 지금 간도에서 길이 잠들었고 이제 그 친구들의 손을 빌어 동주의 시는 한 책이 되어 길이 세상에 전하여지려 한다.  불러도 대답 없을 동주 몽규었만 헛되나마 다시 부르고 싶은 동주! 몽규!                                                                                                                                                 - 강처중     영화를 보고, 또 글을 읽고 나서 강처중이라는 인물이 넘나 궁금했어. 그런데 경향신문 기자로 활동했다는 사실 외에 구체적인 기록이 없더라고.. 그러다가 1998년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를 발견했는데, 왜 그런지 알게됐어       "(...) 강처중은 50년대 좌익활동 혐의로 총살당한 인물."     "(...) 강처중은 윤동주가 직접 묶었던 필사본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포함되지 않은 대표작들을 보관해 유족에게 전했고 48년 초간본 출판의 산파역을 했지만 그간 좌익이라는 이유로 시집에서는 '윤동주가 동경에서 편지를 보냈던 서울의 한 벗' 정도로 익명화 되고 말았다. 42년 일본유학 길에 오르며 윤동주가 강처중에게 맡긴 시는 '참회록' '팔복' '간' '위로' 등. 또 유학시절 윤동주의 시작으로 유일하게 남아있는 '쉽게 쓰여진 시' 등 다섯편의 작품은 모두 강처중에게 보낸 편지 속에 수록된 것이다.   강처중은 48년 윤동주의 연전후배 고 정병욱 교수가 보관했던 필사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실린 19편과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시고들에서 추린 시 31편으로 정음사에서 초간본을 발간하며 생전에 윤동주가 존경했던 정지용에게서 서문을 받아냈고 직접 발문을 썼다. 그러나 전쟁 와중에 정지용이 납북되고 강처중마저 좌익으로 총살당해 이들의 글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증간본 이후 아예 삭제돼 버렸다. (...)"     .....   강처중은 경향신문의 창간 멤버로, 기자로 활동하다가 50년대에 좌익활동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되었다 알려져있으나 사실 여부와 구체적인 시기와 방법 등은 밝혀지지 않음..   이러한 정치적 이념적 배경 속에서 유고시집 발간의 주역 강처중은 그간 역사 속에서 잊혀지고 말았어..   윤동주의 연전 후배 '정병욱'과 동생 '윤일주' 역시 강처중의 공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음.     " 한편, 정지용에게 윤동주를 알리고, 연전 동창생들과 후배 정병욱, 그리고 윤동주의 아우 윤일주를 독려하면서 유고시집 발간을 주도한 인물이 강처중이다. 정병욱과 윤일주는 윤동주를 세상에 알린 두 사람의 공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윤동주 서거 10주기를 맞아 누이 혜원이 가지고 온 윤동주의 다른 시 원고를 보충해 새롭게 선보이는 증보판 시집에서 두 사람의 글을 삭제하고 함께 입을 다물기로 묵계하고 있었다. 대시인 정지용은 이때, 6·25때 남침한 북한군을 따라 북으로 가 행방불명된 시인이었다. 강처중은, 그때껏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좌익 활동을 배후에서 지휘한 인물로 지목되어 사형 언도를 받은 인물이었다. 윤동주에게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두 인물은 이렇듯 한국 역사에서 지워져 갔다.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602131741141&code=960205, 경향신문)       ▲ 강처중의 연희전문학교 졸업사진             윤동주를 세상에 알린 장본인 강처중. 강처중이 없었다면 윤동주 시인의 작품 대부분은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을 거야 그럼에도 그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아 일케 글을 쪘음..   영화 동주에서 강처중이 참 매력적인 인물로 나와서 아마 나를 포함한 많은 여시들이 한번쯤 '강처중'을 초록창에 검색해보지 않았을까 싶운데 그러한 점에서 영화 는 잊혀진 인물들과 그들의 공적을 재발견한 고마운 영화라고 말하고 싶음!! 참 귀한 인물을 알게되어서 마음이 벅참 ☺       ++수정   방금 윤동주 평전을 찾아봤는데 강처중 선생님에 대한 정보가 더 자세히 적혀있어서 추가함     윤일주(현 성균관대 교수, 윤동주 동생)는 이 출간될 당시 강처중에 대해 기술하지 말아달 것을 요청했다고 함.  단순히 그가 좌익인사로 알려져있었기 때문이었음.   이후 개정판에서 강처중이 좌익으로 체포되어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 라고 기술하였고 이를 본 강처중의 가족(부인,자녀)이 나타났음 가족들이 증언하길 "사형수로 수감되어 처형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맞지만 총살형으로 처형된 것은 사실이 아니다" "6.25가 발발한 지 사흘 만에 서울에 입성한 인민군이 형무소를 개방했을 때 형무소에서 나왔고 두달 남짓 집에서 요양하다가 9월 4일에 소련에 가서 공부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월북했다"는 것..     처형을 당했다고 알려져있으나, 가족들의 주장에 따르면 처형 직전에 형무소에서 나와 월북하였다고 함
6    윤동주와 정지용 "서문" 댓글:  조회:2339  추천:0  2018-08-09
  序—랄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이고 精誠껏 몇 마디 써야만 할 義務를 가졌건만 붓을 잡기가 죽기보담 싫은 날, 나는 천의를 뒤집어쓰고 차라리 病 아닌 呻吟을 하고 있다.   무엇이라고 써야 하나?   才操도 蕩盡하고 勇氣도 傷失하고 8.15 以後에 나는 不當하게도 늙어 간다.           누가 있어서 “너는 一片의 精誠까지도 잃었느냐?” 叱咤한다면 少許 抗論이 없이 앉음을 고쳐 무릎을 꿇으리라.   아직 무릎을 꿇을 만한 氣力이 남았기에 나는 이 붓을 들어 詩人 尹東柱의 遺稿에 焚香하노라.           겨우 30餘篇 되는 遺詩 以外에 尹東柱와 그의 詩人됨에 關한 아무 目證한 바 材料를 나는 갖지 않았다.   “虎死留皮”하는 말이 있겠다. 범이 죽어 가죽이 남았다면 그의 虎紋을 鑑定하여 “壽男”이라고 하랴? “福童”이라고 하랴? 범이란 범이 모조리 이름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詩人 尹東柱를 몰랐기로서니 尹東柱의 詩가 바로 “詩”고 보면 그만 아니냐?   虎皮는 마침내 虎皮에 지나지 못하고 말을 것이나, 그의 “詩”로써 그이 “詩人”됨을 알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다.           ……………………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病을 모른다. 나한테는 病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試鍊, 이 지나친 疲勞, 나는 성내서는 안된다.       ------그의 遺詩 “病院”의 一節.           그의 다음 동생 一柱君과 나의 問答 —   “형님이 살았으면 몇 살인고?”   “서른 한 살입니다.”   “죽기는 스물 아홉예요—”   “間島에는 언제 가셨던고?”   “할아버지 때요.”   “지나시기는 어떠했던고?”   “할아버지가 開拓하여 小地主 程度였습니다.”   “아버지는 무얼 하시노?”   “장사도 하시고 會社에도 다니시고 했지요.”           “아아, 間島에 詩와 鄕愁와 같은 것이 醱酵하기 비롯한다면 尹東柱와 같은 世代에서부텀이었구나!” 나는 感傷하였다.           …………   봄이 오면   罪를 짓고   눈이    밝아       이브가 解産하는 수고를 다하면       無花果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       ------ “또 太初의 아침”의 일절.           다시 一柱君과 나와의 問答 —   “延專을 마치고 同志寺에 가기는 몇 살이었던고?”   “스물 여섯 적입니다.”   “무슨 戀愛 같은 것이나 있었나?”   “하도 말이 없어서 모릅니다.”   “술은?”   “먹는 것 못 보았습니다.”   “담배는?”   “집에 와서는 어른들 때문에 피우는 것 못 보았습니다.”   “吝嗇하진 않았나?”   “누가 달라면 冊이나 샤쓰나 거저 줍디다.”   “工夫는?”   “冊을 보다가도 집에서나 남이 願하면 時間까지도 아끼지 않습디다.”   “心術은?”   “順하디 順하였습니다.”   “몸은?”   “中學 때 蹴球選手였습니다.”   “主策은?”   “남이 하자는 대로 하다가도 함부로 속을 주지는 않습디다.”           ………………   코카사쓰 山中에서 도망해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肝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지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肝”의 一節.           老子 五千言에   “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强其骨”이라는 句가 있다.   靑年 尹東柱는 意志가 弱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抒情詩에 優秀한 것이겠고, 그러나 뼈가 强하였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孤獨 속에서 죽었구나! 29歲가 되도록 詩도 發表하여 본 적도 없이!   日帝時代에 날뛰던 附日文士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앝을 것 뿐이나. 無名 尹東柱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限이 없는 詩를 남기지 않았나?   詩와 詩人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   幸福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十字架가 許諾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十字架”의 一節.           日帝 憲兵은 冬섣달에도 꽃과 같은, 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鯉魚와 같은 朝鮮 靑年詩人을 죽이고 제나라를 亡치었다.       뼈가 强한 罪로 죽은 尹東柱의 白骨은 이제 故土 間島에 누워 있다.           故鄕에 돌아온 날 밤에   내 白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房은 宇宙로 通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風化作用하는   白骨을 들여다보며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白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魂이 우는 것이냐       志操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白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故鄕에 가자.       -------“또 다른 故鄕”           만일 尹東柱가 이제 살아 있다고 하면 그의 詩가 어떻게 進展하겠느냐는 問題 —       그의 親友 金三不氏의 追悼辭와 같이 틀림없이   아무렴! 또 다시 다른 길로 奮然 邁進할 것이다.                                1947年 12月 28日                                              지    용     //////////////////////////////////////////////////////////=== 서(序)―랄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이고 정성(精誠)것 몇 마디 써야만할 의무(義務)를 가졌건만 붓을 잡기가 죽기보담 싫은 날, 나는 천의를 뒤집어 쓰고 차라리 병(病)아닌 신음(呻吟)을 하고 있다.  무엇이라고 써야 하나?  재조(才操)도 탕진(蕩盡)하고 용기(勇氣)도 상실(傷失)하고 8․15 이후(以後)에 나는 부당(不當)하게도 늙어간다.  누가 있어서 “너는 일편(一片)의 정성까지도 잃었느냐?” 질타(叱咤)한다면 소허(少許) 항론(抗論)이 없이 앉음을 고쳐 무릎을 꿇으리라.  아직 무릎을 꿇을 만한 기력(氣力)이 남었기에 나는 이 붓을 들어 시인(詩人) 윤동주(尹東柱)의 유고(遺稿)에 분향(焚香)하노라.  겨우 30여편 되는 유시(遺詩)이외에 윤동주의 그의 시인됨에 관한 목증(目證)한바 재료(材料)를 나는 갖지 않았다.  ‘호사유피(虎死留皮)’라는 말이 있겠다. 범이 죽어 가죽이 남았다면 그의 호피(虎皮)를 감정(勘定)하여 "수남(壽男)"이라고 하랴? "복동(福童)"이라고 하랴? 범이란 범이 모조리 이름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시인 윤동주를 몰랐기로소니 윤동주의 시가 바로 "시"고 보면 그만 아니냐?  호피는 마침내 호피에 지나지 못하고 말을것이나, 그의 "시"로 써 그의 "시인"됨을 알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다.  ...........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病을 모른다. 나한테는 病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試鍊, 이 지나친 疲勞,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그의 유시 "病院"의 一節  그의 다음 동생 일주(一柱) 군과 나의 문답──  “형님이 살었으면 몇 살인고?”  “설흔 한살 입니다.”  “죽기는 스물 아홉에요──”  “간도(間島)에는 언제 가셨던고?”  “할아버지 때요.”  “지나시기는 어떠했던고?”  “할아버지가 개척(開拓)하여 소지주(小地主)정도였읍니다.”  “아버지는 무얼 하시노?”  “장사도 하시고 회사에도 다니시고 했지요.”   “아아, 간도에 시(詩)와 애수(哀愁)와 같은것이 발효(醱酵)하기 비롯한다면 윤동주와 같은 세대에서 부텀이었고나!” 나는 감상(感傷)하였다.  ..........  봄이 오면  罪를 짓고  눈이  밝어  이브가 解産하는 수고를 다하면  無花果 잎사귀로 부끄런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  - "또 太初의 아침"의 一節     다시 일주 군과 나와의 문답──  “연전(延專)을 마치고 동지사(同志社)에 가기는 몇 살이었던고?”  “스물 여섯 적입니다.”  “무슨 연애(戀愛) 같은 것이나 있었나?”  “하도 말이 없어서 모릅니다.”  “술은?”  “먹는 것 못 보았읍니다.”  “담배는?”  “집에 와서는 어른들 때문에 피우는 것 못 보았읍니다.”  “인색하진 않었나?”  “누가 달라면 책이나 샤쓰나 거져 줍데다.”  “공부는?”  “책을 보다가도 집에서나 남이 원하면 시간까지도 아끼지 않읍데다.”  “심술(心術)은?”  “순(順)하디 순하였습니다.”  “몸은?”  “중학 때 축구선수였습니다.”  “주책(主策)은?”  “남이 하자는 대로 하다가도 함부로 속을 주지는 않읍데다.”         ...............  코카사스 山中에서 도망해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肝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지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 "肝"의 一節        노자(老子) 오천언(五天言)에,  "허기심(虛基心) 실기복(實基腹) 약기지(弱其志) 강기골(强其骨)"이라는 구가 있다.  청년 윤동주는 의지(意地)가 약(弱)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정시(抒情詩)에 우수(優秀)한 것이겠고, 그러나 뼈가 강(强)하였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일적(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고독(孤獨)에서 죽었고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發表)하여 본 적도 없이!  일제시대(日帝時代)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앝을 것 뿐이나, 무명(無名)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  幸福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十字架가 許諾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十字架"의 一節  일제헌병은 동(冬)섣달에도 꽃과 같은, 어름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와 같은 조선 청년시인을 죽이고 제나라를 망(亡)치었다.  뼈가 강한 죄로 죽은 윤동주의 백골은 이제 고토(故土) 간도에 누워 있다.        故鄕에 돌아온 날 밤에  내 白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둔 房은 宇宙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風化作用하는  白骨을 들여다 보며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白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魂이 우는 것이냐  志操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白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故鄕에 가자.  - "또 다른 고향"  만일 윤동주가 이제 살아 있다고 하면 그의 시가 어떻게 진전(進展)하겠느냐는 문제(問題)─  그의 친우 金三不氏의 추도사와 같이 틀림없이  아무렴! 또 다시 다른 길로 매진(奮然) 분연(邁進)할 것이다.  - 1947년 12월 28일 지 용  ─────       내가 무엇이고 정성( 精誠)것 몇마디 써야만할 의무(義務)를 가졌건만 붓을 잡기가 죽기보담 싫은 날,나는 천의를 뒤집어 쓰고 차라리 병(病)아니 신음(呻吟)을 하고 있다.      무엇이라고 써야 하나?      재조(才操)도 탕진(蕩盡)하고 용기(勇氣)도 상실(傷失)하고 8.15 이후(以後)에 나는 부당(不當)하게도 늙어 간다.      누가 있어서 "너는 일편(一片)의 정성(精誠)까지도 잃었느냐?" 질타(叱咤)한다면 소허(少許) 항론(抗論)이 없이 앉음을 고쳐 무릎을 끓으리라.      아직 무릎을 끓을만한 기력(氣力)이 남었기에 나는 이 붓을 들어 시인윤동주(詩人尹東柱)의 유고(遺稿)에 분향(焚香)하노라.      겨우 30여편(餘編)되는 유시이외(遺詩以外)에 윤동주(尹東柱)의 그의 시인(詩人)됨에 관(關)한 아무 목증(目證)한바 촌료(村料)를 나는 갖지 않았다.      "호사유피(虎死留皮)"라는 말이 있겠다.범이 죽어 가죽이 남았다면 그의 호문(虎紋)을 감정(鑑定)하여 "수남(壽男)이라고 하랴? 복동(福童)"이라고 하랴?범이란 범이 모조리 이름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시인(詩人)윤동주(尹東柱)를 몰랐기로소니 윤동주(尹東柱)의 시(詩)가 바로 "시(詩)"고 보면 그만 아니냐?      호피(호피)는 마침내 호피(虎皮)에 지나지 못하고 말을것이나.그의 "시(詩)"로써 그의 "시인(詩人)"됨을 알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어왔다.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病)을 모른다.나한테는 병(病)이없다고 한다.이 지나친 시련(試鍊),이 지나친 피로(疲勞),나는 성내서는 안된다.        -그의 유시(遺詩) "병원(病院)"의 일절(一節).               그의 다음 동생 일주군(一柱君)과 나의 문답(問答)--        "형님이 살었으면 몇살인고?"        "설흔 한살 입니다"        "죽기는 스물 아홉해요-"간도(間島)에는 언제 가셨던고?"        "할아버지 때요"        "지나시기는 어떤했던고?"        "할아버지가 개척(開拓)하여 소지주정도(小地主程度)였읍니다"        "아버지는 무얼 하시노?"        "장사도 하시고 회사(會社)에도 다니시고 했지요"              "아아,간도(間島)에 시(詩)와 애수(哀愁)와 같은것이 발효(醱酵)하기 비롯한다면 윤동주(尹東柱)와 같은 세대(世代)에서 부텀이었고나!"나는 감상(感傷)하였다.              .......................        봄이 오면        죄(罪)를 짓고        눈이        밝어              이브가 해산(解産)하는 수고를 다하면              무화과(無花果) 잎사귀로 부끄런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        --"또 태초(太初)의 아침"의 일절(一節).              다시 일주군(一柱君)과 나와의 문답(問答)--        "연전(延專)을 마추고 동지사(同志社)에 가기는 몇살이었던고?"        "스물 여섯 적입니다."        "무슨 연애(戀愛)같은 것이나 있었나?"        "하도 말이 없어서 모릅니다"        "술은?"        "먹는것 못 보았읍니다"        "담배는?"        "집에 와서는 어른들 때문에 피우는 것 못 보았읍니다"        "인색(吝嗇)하진 않었나?"        "누가 달라면 책(冊)이나 싸스나 거저 줍데다"        "공부(工夫)는?"        "책(冊)을 보다가도 집에서나 남이 원(願)하면 시간(時間)까지도 아끼지 않읍데다"        "심술(心術)은?"        "순(順)하디 순(順)하였읍니다"        "몸은?"        "중학(中學)때 축구선수(蹴球選手)였읍니다"        "주책(主策)은?"        "남이 하자는대로 하다가도 함부로 속을 주지는 않읍데다"              .............................        코카사쓰 산중(山中)에서 도앙해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肝)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는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먹어라,시름 없이              너는 살지고        나는 여위어야지,그러나        .............................."간(肝)의 일절(一節)             노자(老子)오천언(五千言)에       "허기심 실기복 약기지 강기골(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强其骨)"이라는 구(句)가 있다       청년(靑年) 윤동주(尹東柱)는 의지(意志)가 약(弱)하였을 것이다.그렇기에 서정시(抒情詩)에 우수(優秀)한 것이겠고,그러나 뼈가 강(强)하였던것이리라,그렇기에 일적(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고독(孤獨)에서 죽었고나!29세(歲)가 되도록 시(詩)도 발표(發表)하여 본적도 없이!       일제시대(日帝時代)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앝을 것 뿐이나,무명(無名)윤동주(尹東柱)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限)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詩)와 (詩人)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        행복(幸福)한 예수.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十字架)가 허락(許諾)된다면              목아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어가는 하늘 밑에        조용이 흘리겠읍니다.-"십자가(十字架)의 일절(一節).             일제헌병(日帝憲兵)은 동(冬)섣달에도 꽃과 같은,어름 아래 다시 한마리 이어(鯉魚)와 같은 조선(朝鮮)청년시인(靑年詩人)을 죽이고 제나라를 망(亡)치었다.              뼈가 강(强)한 죄(罪)로 죽은 윤동주(尹東柱)의 백골(白骨)은 이제 고토(故土)간도(間島)에 누워 있다.              고향(故鄕)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둔 방(房)은 우주(宇宙)로 통(通)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속에 곱게 퐁화작용(風化作用)하는        백골(白骨)을 드려다 보며        눈물 짓는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白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魂)이 우는 것이냐              지조(志操)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짓는다.              어둠을 짓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白骨)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故鄕)에 가자- "또 다른 고향(故鄕)"             만일 윤동주(尹東柱)가 이제 살어 있다고 하면 그의 시(詩)가 어떻게 진전(進展)하겠느냐는(問題)--       그의 친우(親友) 김삼불씨(金三不氏)의 추도사(追悼辭)와 같이 틀림없이       아무렴! 또 다시 다른 길로 구연(舊然) 매진(邁進)할 것이다.                          1947年12月28日                                                                                                                                                                                                                   지 용 ================================== - /김묘순 세계문인협회 부이사장 지용과 윤동주의 만남은 운명이었다. 1902년 5월 15일 충북 옥천과 1917년 12월 30일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난 이들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끊임없이 문학의 세계로 침잠(沈潛)하고 있었다.  송우혜 소설가는 「윤동주 평론」에서 “중학 시절의 그의 서가에 꽂혔던 책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정지용 시집」”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윤동주는 1935년 10월에 발간한「정지용 시집」을 1936년 3월 평양에서 구입해 정독하며 문학수업에 정진했다. 이숭원(서울여대) 교수는 정지용시가 윤동주에 미친 영향」에서 “윤동주의 습작기에 써 놓은 상당히 많은 작품에 정지용 시의 영향이 남아 있다. 윤동주는 습작기에 정지용의 시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확인했다. 이것은 정지용의 시가 시인이 되고 싶었던 청년문사에게 가장 모범적인 길잡이 역할을 했음을 반증한다”며 “윤동주 외에도 다수의 시인 지망생이 그런 시도를 했을 것이나 그러한 학습의 과정을 기록으로 남긴 사람은 윤동주뿐으로 청년 문사 윤동주의 순정을 드러내는 사례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라사행 목사는 1939년 윤동주가 연희전문 기숙사를 나와 하숙을 하고 있을 때, 북아현동 1의 64호였던 정지용의 기와집을 윤동주와 함께 방문하곤 했다. 그들은 정지용과 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라 목사는 기억한다. 1948년 1월에 출간된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초간본에 정지용은 서문(序文)을 쓴다. 강처중의 부탁으로 서문을 쓰게돼 정지용과 윤동주의 인연은 계속됐다. 1923년~1929년 정지용은 일본 동지사대학에서 공부를 하며 「압천」, 「카페프란스」 등의 작품을 썼고, 그를 좋아했던 천상의 시인 윤동주는 1942년 동경 입교대학에서 동지사대학 영문과로 전입학하게 된다. 이들의 운명은 만나서 같은 공간에 머물러 오래 도란거리지는 못했지만 사뭇 ‘문학이라는 같은 원형질’을 가슴에 지니고 살았던 것이다. 윤동주 연구논문이나 ‘동주’라는 영화에 그를 민족주의자로 그리고 있다. 이는 정지용의 도덕주의자적 면모의 영향관계를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이들의 영향 관계는 필수 불가결했던 것이리라. 정지용의 후기 산문은 시론(時論)형식이라 할 수 있다. 중기 산문에서 보여주던 인간과 자연에의 관심에서 거리를 둔 변주곡을 울린 셈이다. 그의 시론(時論)은 주로 시대적, 사회적 상황을 바탕으로 사회의식과 비판정신이 주로 드러나는 중수필적 요소를 비교적 잘 갖추고 내면적 자아의 혼란스러움을 그려놓고 있었다. 순박하고 소박한 자아의 세계관의 소유자 정지용은 좌우익의 이데올로 기가 확실히 정립되지 못한 시대의 혼란스러움을 시론(時論) 형식으로 표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후기 시론(時論) 작품으로 「여적」, 「오무백무」, 「민주주의와 민주주의 싸움」, 「쌀」,「플라나간신부를 맞이하며」, 「동경대진재 여화」등이 있다.  이러한 작품을 통하여 정지용은 그의 후기 산문에서 순박한 도덕주의자로 표명되며 솔직한 모럴리스트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정지용의 후기 시론(時論)에 나타난 도덕주의자적 면모는 윤동주의 지식인의 끊임없는 고뇌를 자아성찰적 자세로 애잔하게 그려놓았던 그의 시에 영향을 끼쳤다. 세상에 닮고 싶은 사람이 꼭 한 명이라도 있다면 참 행복한 사람이리라. 윤동주는 정지용을 바라보며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가지 않았을까? ‘연변지용제’를 놓고 갑론을박이 심한 모양이다. 옥천군의 또는 대한민국의 정지용 시를 추진(推進)할 구심점이 약해서인가? 시를 쓰는 것에 대한 내외부의 불편함에서 오는 고뇌인가? 참담한 민족현실에 절규하던, 한국인이 가장 좋아한다는 정지용과 윤동주. 이들을 놓고 혼란을 빚는 것은 마치 중요한 일을 버리고 바쁜 일부터 해나가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목숨만큼이나 소중했던 그들 삶의 깊은 흔적과 도덕주의자와 민족주의자가 흘렸던 눈물의 방향을 지키자. 무게중심이 기울지 않는 굳센 노 하나쯤 흔들리지 않고 저어가는 우리가 되자. ///옥천향수신문 
5    윤동주와 마광수 댓글:  조회:2124  추천:0  2018-08-09
  서문 / 마광수 정지용의 서문이 붙은 윤동주의 유고시집 가 처음 간행된 것은 1948년이다.그러나 해방이 가져다준 감격의 소용돌이속에서 오 랫동안 잊혀져 왔던 윤동주를 문학적으로 재평가하고,그에게 정당한 위치를 찾아주려는 노력이 활발하게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 였다. 윤동주의 생애는 지극히 짧은 것이었다.그는 1917년 12월30일 북간도 용정 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의 맏아들로 태어났다.그의 집안은 학문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고 애국정신이 강했으며 경제적으로도 넉넉한 편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할아버지는 함경북도 회령에서 간도로 이주하여 개척사업과 교육사업에 공헌한 지도적 인사였고,아버지 또한 학교 교원으로 일했다고 돼 있어 지사적 기개가 넘친 집안임을 짐작케 한다.그리고 조부와 부친이 똑같 이 그곳 교회에서 장로직을 맡은 것으로 보아 윤동주의 성장배경에는 가정적 으로 기독교적 분위기가 상당히 강했던 것 같다. 아동잡지 `어린이'의 애독자였던 그의 어릴 적 이름은 해환이었다.1931년 명 동 소학교를 마치고 중국인 관립학교에서 공부하다가 1935년 평양 숭실중학 교에 전입했다.그러나 숭실중학교가 신사참배문제로 문을 닫고 일본 사람 손 에 접수되자 용정으로 돌아와 광명중학교에 전입하였다. 그즈음부터 동시를 많이 써서 `카톨릭 소년'지에 `빗자루'(36년) `병아리'(36년) 등을 `동주'란 이름으로 발표했다. 1938년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여 1941년 11월에 졸업한다. 이때 스스로 추려 뽑은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자비출판하려 했으나 일본경찰의 단속을 걱정한 스승 이양하의 만류로 단념하고 후일 1942년초 `평 소동주'란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했으며 동년 4월 일본 동경의 입교대학 영문과 에 입학했으나 가을에 경도의 동지사대학 영문과로 전학하였다. 1943년 여름방학에 귀국하려던 그는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사상범으로 체포 되어 고문섞인 취조를 받았다.결국 그는 1945년 2월16일 28세의 나이로운명하 고 만다. 그는 한.일합방이후에 태어나서 민족광복을 맞이하기 직전에 죽었다.그가 시를 썼던 시대(1936년~1943년)는 모든 사람들이 시를 외면했던 때였다.중.일전쟁과 대동아전쟁의 소용돌이속에서 그가 즐겨 바라보던 하늘에서는 공습경보가 울리 고 있었고 거리에는 군가가 흘러넘쳤다. 그의 시 곳곳에 나타나는 `부끄러움'의 이미지,그리고 이나 같은 작품에서 보이는 소외의식에 넘친 절망적인 몸부림은,이러한 시대상황속에서 창백하고 무기력한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자기자신을 한탄하는 윤동주의 처절 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에 자연을 소재로 한 상징적 어구들이 자주 보이는 것도 그 당시 문학인 들에게 만연했던 현실도피,자연귀의의 사조와 아주 무관하진 않다. 그러므로 윤동주는 저항시인이아니라 순수한 휴머니스트로 보아야 한다는게 나의 생각이 다. 그의 시 어느 곳에도 저항의 기백은 나타나 있지 않다. 그가 옥사한 것은 어찌 보면 군사독재시절 이한렬군이나 박종철군의 죽음과 견주어질 만한것으로서 시 대를 잘못 태어난 양심적 지식인의 억울한 비명횡사라고 보는 편이맞을 것이다. 그는 깊은 애정과 폭넓은 이해로 인간을 긍정하면서도 실제로는 회의와 혐오로 자신을 부정한, 어찌 보면 결백증에 가까운 휴머니스트였다.그는 변변한 연애 한번 못해보고 낭만적인 폭음 또한 멀리했던,당시로 보면 `시인답지 않은 시인' 이었다. 기독교 가정에 기독교 학교로만 일관한 그의 환경이 그를 청교도적 죄의식으로 이끌어갔을 것이라고 생각된다.남에 대한 애정이 곧 자기자신에대한 자괴감과 부정의식으로 변모하는 그의 인생관이 그의 시 곳곳에 나타나 있다. 같은 작품이 그 보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윤동주를 투쟁적 이미지의 저항시인으로 보지 않고 회의적 휴머니스트 로 본다고 해서 그의 시의 가치가 깎여지는 것은 아니다.무엇보다도 그는 스스 로에 진짜로 `솔직한'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시의 가치가 정치적 사회적 상황과 함께 생각될 수는 없다.시는 시인의 자기 통찰과 자기연민,그리고 본능적 욕구의 대리배설로 이루어질 때 한결 진솔한 감동을 준다.그런 점에서 볼 때 윤동주의 저항은 끊임없는 자기 내면 또는 본능적 자의식과의 투쟁이었다.이러한 `투쟁'이야말로 진정한 `저항'이 되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스스로의 시인기질에 따른 시인으로서의 역할을 잘 자각하고 있었던 그는 시 가 정치나 이데올로기에 참여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그는 자신의 욕 구와 비애를 시창작을 통해서 극복하려고 했으며 철저한 자기분석을 통해서 자아의 변증법적 발전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가 목표했던 저항의 대상은 외부로부터의 물리적 압박이나 조국의 현실이 아니라 바로 자기자신이었다. 등의 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그의 내적 투쟁의 기록을 역력히 읽을 수가 있다. 특히 그의 시에 나타나는 자학적이며 자기부정적인 이미지의 대표적 보기를 들면 이 점이 분명해진다.앞서 말했듯 `부끄러움'이란 시어가 나오는 작품이 10편이나 되는데,이는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시인들이 표피적 정서나 표피 적 이데올로기(또는 사상)만을 좇는 경향과 비교해 보면 가히 파격적이리만큼 독특한 문학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는 무언가를 `부르짖거나' `가르치거나' `과장적으로 흐느끼는' 대신 스스로를 `발가벗기고' 있는 것이다.물론 윤동주의 `발가벗기'는 다분 히 실존적 현학의 냄새나 종교적 형이상성의 냄새를 풍기는 발가벗기이다.그 래서 좀더 자신의 심층아래로 내려가 본능적 욕구를 발가벗기는 데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은 아쉬움을 느끼게 한다. 그렇지만 그는 `퓨리터니즘'이라는 옷을 태어날 때부터 두텁게 입을 수밖에 없었고 또 그 당시 지식인들의 정신적 정황이 본능보다는 관념에 치우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윤동주는 `발가벗기'정도만 가지고서도 우 리 문학사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고 본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의 문학은 이광수류의 계몽적 시혜주의에서 한 발자욱 도 못벗어나고 있기 때문이다.윤동주 시의 또 다른 장점은 그가 어느 계파나 유행에 연연하지 않고 스스로의 독자적 시세계를 구축해 나갔다는 사실이다. 1930년대라면 대부분의 시들이 정지용류의 감각적 서정주의나 카프식의 정치 적 이데올로기시,둘중 하나일 때였다. 또 자연을 노래한다고 해도 전원주의적 회고주의가 고작이었고 윤동주처럼 자연을 내적 갈등의 상징으로 응용한 시인은 없었다.남들이 모더니즘이니 초 현실주의니 하고 외국의 유행사조에 민감해 있을 때 그는 다만 일기를 써나 가는 형식으로 경향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의 심경을 담담히 고백해 나갔던 것이다. 나는 문학은 문학일 뿐 그것이 문학이상의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여기서 말하는 `엄청난 힘'이란 문학이 혁명가나 사제의 역할까지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문학은 문학 나름대로의 `힘'을 어찌됐든 가지고 있다. 그 힘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요,정신중에서도 이성에 속하 는 것이 아니라 감성이나 감각 또는 본능에 속하는 것이다.그러므로 문학은 정치나 이데올로기처럼 단기간에 효력을 나타낼 수는 없다.문학의 효력은 서 서히 나타나 인간의 의식자체를 변모시킨다. 여기서 말하는 `의식'이란 이성과 감성,본능과 도덕이 합쳐서 이룩되는, 보 다 통체적인 직각(直覺)의 양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윤동주는 옥사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절대로 `총각귀신'이 되고 싶지 않았 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이상하게도 `투사'보다는 `유약하지만 솔직한 사람' 을 한 시대의 상징적 희생물로 만드는 일이 많다.윤동주는 바로 그러한 역사 의 희생물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일제말 암흑기, 우리 문학 의 공백을 밤하늘의 별빛처럼 찬연히 채워주었다. (마광수 저 [철학과현실사 발행] 중에서)             
4    "윤동주 이름에 먹칠 하지 말기를..." 댓글:  조회:3173  추천:0  2018-08-09
윤형주 횡령 혐의에 누리꾼 “윤동주 이름 먹칠” VS “오해 있을 것”   이정인 기자 2018-07-31  /사진=연합뉴스   가수 윤형주가 회삿돈 10억여 원을 횡령한 혐의로 검찰에 송치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주목을 받고 있다.  30일 KBS에 따르면 윤형주는 경기도 안성시에 물류단지를 조성하겠다며 시행사를 인수해 투자금을 모은 뒤 법인 자금 11억 원을 개인적으로 사용한 혐의를 받고 있다. 윤형주는 시행사를 인수해 투자금을 모은 뒤 법인 자금 11억 원으로 서울 서초구에 있는 고급 빌라를 구매하고 실내 장식 비용으로 사용한 혐의를 받고 있다. 또 경찰은 법인 자금 30억 원 가량을 개인 명의 계좌로 옮긴 정황도 수사하고 있다.  윤형주는 쎄시봉의 원년 멤버로 1970년대 포크계를 주름잡은 대표 가수이자 광고음악 1400여 곡을 쓴 광고음악의 대부다. 또 그는 시인 윤동주의 육촌 동생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의 횡령 혐의 소식이 전해지자 누리꾼들은 “윤동주 이름에 먹칠한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 지켜보자”, “오해가 있을 것 같다” 등 다양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편 윤형주 측은 혐의에 대해 “회사에 빌려준 차입금이 있어 회삿돈을 썼을 뿐 횡령은 아니다”라고 부인했다.  /이정인기자 =========================/// 윤형주 / 사진=스포츠투데이 DB 원본보기   [스포츠투데이 이소연 기자] 횡령 혐의로 기소된 가수 윤형주가 화제다.   윤형주는 1947년생으로 연세대학교 의예과와 경희대 의학과를 중퇴했다. 그는 1960년~1970년대 송창식, 조영남, 김세환과 같이 포크송 그룹 쎄시봉으로 활동해 인기를 끌었다.    특히 그는 1400여개의 CM송을 작곡해 그 분야에서 이름을 날렸다. 그는 윤동주의 6촌 동생이기도 하다. 과거 윤형주는 윤동주의 시에 곡을 붙여 노래를 만들려고 했으나 아버지 윤영춘 교수가 반대해 실현되지 못 했다.  한편 13일 윤형주는 회삿돈으로 부동산을 사는 등 10억여 원을 횡령한 혐의로 검찰에 송치됐다. ///이소연 기자 =========================/// 뉴스웍스=이동헌기자] '쎄시봉' 멤버 가수 윤형주가 회삿돈 42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검찰에 넘겨진 가운데 신동욱 공화당 총재가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지난 31일 신동욱 총재는 자신의 트위터에 "'쎄시봉' 멤버 윤형주 "40억원 횡령 혐의로 기소", 쎄시봉이 쎄시뽕 된 꼴이고 이 세상 믿을X 아무도 없는 꼴이다. 돈 앞에 무릎 꿇은 꼴이고 돈 앞에 공인정신 팔아먹은 꼴이다"라며 "위선자의 탐심 꼴이고 통기타가 돈기타 꼴이다. 윤동주 이름에 먹칠한 꼴이고 제2의 조영남 꼴이다. 겉 희고 속 검은 꼴"이라고 말했다.   한편, 서울 수서경찰서는 최근 윤형주를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횡령·배임)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윤형주는 2010 년 형과 함께 운영한 복합물류단지 시행사의 자금 11억원으로 서울 서초구 소재 빌라를 사고, 31억여원을 100여 차례에 걸쳐 개인 명의 계좌로 옮겨 사용한 혐의를 받고 있다.
3    윤동주와 녀성 댓글:  조회:3092  추천:0  2018-08-09
윤동주시인의 시에는  아시지만, 여성이  등장하는 시가 세 편 있다.  윤동주 시  세 편에 나오는  여성은  모두    혹은 라는  이름이 나오는 시로서  그로서는 좀 특이한  이 사랑시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것은  ,  , 등 세 편이다.   順아  너는  내  전殿에  언제  들어왔던 것이냐? 내사  언제  네  전殿에  들어갔던 것이냐?   우리들의  전당은 고풍한  풍섭이  어린 사랑의  전당   순아  암사슴처럼  水晶  눈을  감아라. 난  사자처럼  엉클린  머리를  고르련다.   우리들의  사랑은  한낱  벙어리였다.   聖스런  촛대에  熱한  불이  거지기 前 順아  너는  앞문으로  내달려라.   어둠과  바람이  우리  창에  부닥치기  前 나는  영원한  사랑을  안은  채 뒷문으로  멀리 사라지련다.   이제 네게는  삼림  속의  아늑한  호수가  있고, 내게는  준험한  산맥이  있다.  ㅡ  전문. 1938. 6. 19.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놓고  나뭇가지  위에  하늘이  펼쳐  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섭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씻어  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바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 ㅡ 아름다운  順伊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 ㅡ 아름다운  順伊의 얼굴이  어린다.   ㅡ 전문.  1939.        順伊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  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내려,  슬픈  것처럼  창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위에  덮인다.   방  안을  돌아다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과  천장이  하얗다.  방  안에까지  눈이 내리는  것일까. 정말  너는  잃어버린  역사처럼  훌훌히  가는  것이냐,  떠나기 전에  일러둘  말이  있던  것을  편지를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  밑,  너는  내  마음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조그만  발자국을  눈이  자고  내려  덮여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국 자리마다  곷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국을  찾아  나서면  일년  열두  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내리리라. ㅡ전문.  1941. 3. 12.       순이라는 이름을 두고 가슴 앓이 하는  모습이  선연하다. 이 부끄러움 많은 사나이는 사랑의 상처만  잔뜩  받은 모습이  선연하다. 세 편의  시마다 그렇다. 평전에 의하면  윤동주는  연희전문  다닐 때   이화여전  같은 졸업반  여학생을 흠모한 듯하고  그 결과의 시가  과  이고,  동경 유학시에  박춘혜라는  여성과  연정이 있었는데  이 여자는  여름 방학  중에  다른 남자와  약혼해   버린다.  그 상처로  쓰여진 듯한 시가  인 듯....    ===================================/// 인물연구 .   윤동주를 위한 29개의 키워드 7 /김혁   순이 - 윤동주가 사랑한 녀인(?)   서울예술단 창작 뮤지컬 "윤동주 달을 쏘다"중에 나오는 순이의 형상     윤동주의 시 가운데 남녀의 사랑을 다룬 시 몇수가 있다.      “사랑의 전당”(1938), “소년”(1939), “눈 오는 지도”(1941)등 세수의 시이다.  그런데 이루어지지 않는 아픈 사랑을 노래한 시, 그렇기에 더욱 애절하고 시리고 아름다운 이 시 세 편에는 한결같이 “순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이쯤 되면 윤동주의 애독자들은 “순이”가 누구인가 궁금해 질것이다. 혹여 실제 인물이 아닐가 하는… 이를 두고 "윤동주 연구자들은 한번쯤 연구해볼만한 사안"이라고 말한다.   순이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나려, 슬픈 것처럼 창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위에 덮힌다.  (중략)   정말 너는 잃어버린 역사처럼 홀홀이 가는것이냐, 떠나기전에 일러둘 말이 있던 것을 편지를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밑, 너는 내 마음속에만 남아 있는것이냐, 네 쪼고만 발자욱을 눈이 자꾸 나려 덮혀 따라갈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욱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욱을 찾아 나서면 일년 열두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나리리라.                                                                                                                                                 - 눈 오는 지도(地圖     순아 너는 내 전(殿)에 언제 들어왔던 것이냐?  내사 언제 네 전에 들어갔던 것이냐? (중략)     순아 암사슴처럼 수정눈을 나려감어라. 난 사자처럼 엉크린 머리를 고루련다. 우리들은 사랑은 한낱 벙어리였다. 성스런 초대에 열한 불이 꺼지기 전   순아 너는 앞문으로 내달려라. (하략) - “사랑의 전당”   … 강물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은 어린다. - “소년”   수줍음의 대명사인, 그야말로 바른생활의 사나이 윤동주의 녀성관계는 과연 어떠했을가? 연희전문 시절 윤동주의 절친한 후배였던 정병욱씨의 회고에서 한 녀인과 윤동주의 일화가 나온다. 윤동주가 연희전문을 졸업할 무렵, 서울 신촌에서 북아현동으로 하숙을 옮겼는데, 그곳에는 윤동주 아버지의 친구인 지사(志士) 한 분이 있었다. 윤동주는 그분을 매우 존경했고 가끔 그 분 댁을 찾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의 딸이 이화여전 문과의 같은 졸업반이엿고 교회와 바이블 클래스에도 윤동주와 같이 다녔다고한다. 매일 같은 기차역에서 기차를 기다렸고 같은 차로 통학했으니“그 녀자에 대한 감정이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는것만은 피부로 느낄수 있었다.”고 정병욱은 회고했다.  그러나 정병욱씨의 이 회고는 그저 추측의 범주에 머물수밖에 없는것 같다. 이화여전 문과 졸업반이였던 이 녀학생과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으며 그가“눈 오는 지도”나 “사랑의 전당”의 “순이”인지 아닌지 전혀 알 길이 없는것이다. 윤동주의 녀동생 윤혜원의 증언에서도 한 녀인이 나온다. 일본 류학중에 만난 박춘애 (혹은 박춘혜)라는 이름의 녀학생의 사진을 가져와서 할아버지께 보여드린 적이 있었고 할아버지께서 좋다고 하셨다고한다. 목사의 딸이고 성악을 전공하는중이라고했다.  윤혜원의 남편 오형범은 윤동주의 사후에 박춘애를 만난 적이 있었다고한다. 연변에서 서울로 가던중에 청진에서 잠시 머문적이 있는데 거기서 성가대원으로 활동하는 박춘애를 만났다고한다. 그런데 알아보니 “윤동주가 마음속으로만 좋아했을 뿐이고 프러포즈도 못했다고 하더라”는것이였다.”   사실 윤동주가 순이라는 이름을 맨 처음 접한것은 아마 명동학교 졸업시기가 아니였나고 생각된다.  1931년 3월20일 명동학교에서는 졸업식을 치르면서 학교교지도 만들고 서울에서 아동잡지를 주문해 보며 문학에 심취되였던 윤동주와 송몽규, 김정우등 졸업생 14명에게 김동환의 서사시 “국경(國境)의 밤”을 한권씩 선물했다.     이 서사시에서 순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재가승(在家僧)의 딸인 순이는 마을의 선비청년과 래일을 기약한다. 허나 순이는 재가승의 정칙대로 재가승에게 출가를 해야만 하는 비극적인 운명을 지닌다. 이러한 숙명적인 비련의 현실 앞에서 청년은 고통과 번민을 안고 마을을 떠나게 된다.  두만강지역 서민들의 생활상으로부터 민족의 설음과 슬픈 사랑을 보여준 서사시이다. 한글 최초의 장편서사시는 문학에 심취된 윤동주에게 영향을 끼쳤을것이고 서사시에 나오는 비정한 현실의 주인공 순이에게서 윤동주는 처음으로 하나의 녀인상을 읽었을는지 모른다.    막연히 “순이”라는 이름에 호기심이 동해 추적해 보지만 결국 윤동주의 “한낱 벙어리같은” 피지 못한 사랑이 참으로 안타까웁게 한다.   미남형에 천부적으로 여린 감성과 다감한 성격에 서울에서 공부를 하고있는 윤동주라 이성의 눈길을 끌기에는 족했다. 하지만 우리들의 바램과는 달리 앞서 읽은 “사랑의 전당”에서는 “우리들은 사랑은 한낱 벙어리였다.”고 나오며 윤동주의 다른 한 시 “바람이 불어”에서는 "단 한 녀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는 구절이 나온다. 윤동주의 사랑시는 그저 그리움의 대상에 대한 읊조림과 그로 인한 상흔으로만 남았다.  순이하면 어쩐지 순진하고 순정 많은, 새까만 눈동자를 가진 녀인상을 떠올리게 된다. 고향의 이웃 녀동생의 이름 같은 첫사랑 그녀자의 이름같은, 그 이름- 순이다.  하지만 여기서 “순이”는 특정한 어느 녀인의 이름이기보다 그가 아름다움의 표상으로 설정한 하나의 보통명사인지도 모른다. 윤동주가 다녔던 연희전문(지금의 연세대)에서 “윤동주 연구”로 박사학위를 따냈던 마광수교수는 윤동주는 “’순이’라는 심상을 통해서 모든 우리 민족의 녀성, 또는 그가 마음속에 그리고있는 리상적인 ‘님’, 모든 이웃과 동포를 함축적으로 상징하려했던것 같다”고 폭 넓은 해석을 가하고 있다.   사랑에 눈 뜰 나이에 윤동주는 자신의 앞길과 문학, 그리고 시대적인 상황의 흉흉함에 휩싸이게 된다. 풋풋하고 신선한 사랑의 분위기에 쌓일만큼 동주를 안온한 분위기로 이끌기에는 모든 상황이 너무 절박했다. 일제의 철쇄에 수족이 동여 자유롭지못한 시대적인 상황에서 캄캄한 민족의 현실을 눈으로 직접 목도하면서 윤동주는 자신의 리상 실현이 쉽지 않음을 알고 고민한다. 이런 마당에 태평한 시절처럼 아름다운 사랑을 할수 없음을 알고 더욱 락심해 한다. 그래서 그런지 윤동주의 사랑시들은 모두가 슬픔의 색갈로 점철되여 있다.  민족시인의 길을 걸었던 윤동주는 개인의 안일만을 위한 에로스적인 사랑을 할수 없게 된다. 이것은 그후에 민족을 위한 우환의식을 그 기저에 수납한 더 지고한 사랑으로 확산되여 그의 시편들에 나타난다.    그러고보면 윤동주의 사랑은 한낱 남녀의 치정이 아닌 종교적인 사랑, 범민족적인 사랑의 차원의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봐야 무방할것이다.   "문화시대" 2012년 4월호     [출처] 순이- 윤동주가 사랑한 녀인(?) |작성자 김 혁  
2    윤동주와 "머리" 댓글:  조회:2089  추천:0  2018-08-09
윤동주, 신사머리 왜 삭발했을까        시인 윤동주(尹東柱·1917∼1945)는 왜 머리를 삭발했을까.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마친 윤동주의 졸업사진을 보면, 그는 당시 ‘신사머리’라고 불렸던 머리모양을 하고 있다. 그런데 1942년 7월, 일본 릿교(立敎)대학에서 첫 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한 윤동주는 머리를 빡빡 깎은 모습이다.  최근 한 일본 여성이 그 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윤동주의 릿교대 시절에 대한 자료를 찾아내면서 그의 삭발이유가 처음으로 밝혀졌다. 지난달 31일 서울 장충동 한국현대문학관에서 열렸던 ‘윤동주의 시를 읽는다·2002년 한일 독자교류의 모임’에 참석했던 ‘윤동주의 고향을 찾는 모임(동경)’의 회원인 야나기하라 테츠코(楊原泰子)씨.  윤동주의 시에 깊이 매료돼 있던 그는 1988년 소설가 송우혜씨가 펴낸 ‘윤동주 평전’(세계사)의 일본어판(1991)에서 릿교대학을 다니던 무렵, 윤동주의 머리 모양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봤다. 같은 대학 출신이었던 그는 1942년 릿교대학신문을 샅샅이 뒤졌고 4월초 발행된 신문에서 ‘4월 중순, 학생 단발령 실시’라는 기사를 발견했다. 윤동주는 전시상황에서 학교측이 내린 단발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머리를 깎아야 했던 것. 테츠코씨는 당시의 자료를 정리한 ‘윤동주의 릿교대학 시대’라는 글을 ‘한일 독자교류 모임’에서 만난 송우혜씨에게 건네줬다. 이 자료에 따르면, 1942년 대동아전쟁으로 전시체제 아래 있었던 릿교대학에는 군사 훈련을 위해 육군 대좌(지금의 대령)가 부임해 학생들을 혹독하게 훈련시키는 한편 일본의 신도(神道)를 강요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윤동주는 이를 견디다 못해 도시샤(同志社)대학으로 학교를 옮긴 것은 아니었을까.  윤동주가 릿교대학이 있던 동경에 머물렀던 시간은 4개월 정도로 길지 않았다. 한 학기를 보내고 바로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로 옮겼기 때문. 그러나 ‘시인 윤동주’에게 있어 동경은 큰 의미를 지닌 곳이다.  송우혜씨는 “옥사할 때까지 만 3년간 일본에서 살았던 윤동주가 일본땅에서 쓴 시 중에 현재 남아있는 작품은 불과 다섯 편 뿐인데, 윤동주는 이 시를 모두 동경에서 썼다”고 밝혔다. 또 “윤동주의 시는 그의 생활과 직결돼 일기와도 같다. 당시 그가 처했던 상황에 대한  정보는 윤동주의 시를 연구하기 위한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말했다.  일본의 도쿄 후쿠오카 교토에서는 윤동주 관련 모임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으며 매년 윤동주의 기일에 함께 모여 헌화식을 갖기도 한다. ‘한일 독자교류의 모임’에 참석했던 아이자와 가끄(愛澤革)씨는 “일본사람에게는 윤동주의 시를 읽는 일이 매우 복합적인 마음을 불러 일으킨다. 맑은 운율로 의연하게 일어서 다가오는 시를 모국어로 쓰고 죽은 한국의 젊은 시인, 그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이 시인의 삶을 27년으로 끝나게 한 일본의 과거를 되새기게 하는 일”이라고 털어 놓았다. 1997년부터 일본 후쿠오카의 ‘윤동주의 시를 읽는 모임’, 동경의 ‘윤동주의 고향을 찾는 모임’ 등을 후원하고 있는 동서문화사 전숙희 대표는 “윤동주야말로 모든 면에서 한국인을 비롯한 전세계인이 사랑할만한 시인”이라며 “일본인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또 끊임없이 윤동주를 연구하고 있는지 모른다. 오히려 우리가 부끄럽다”고 말했다.                                                                                                ⊙ 동아일보[2002/9/12]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  
1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밤 댓글:  조회:3054  추천:0  2018-08-09
밤    /윤동주            외양간 당나귀 아앙 앙 외마디 울음 울고,   당나귀 소리에 으-아 아 애기 소스라쳐 깨고   등잔에 불을 다오.   아버지는 당나귀에게 짚을 한 키 담아주고,   어머니는 애기에게 젖을 한 모금 먹이고,   밤은 다시 고요히 잠드오.              ------------------------------        * 목연 생각 : 일제 강점기 때 태어나셔서 해방 공간의 여명에 불우하게 세상을 떠난 윤동주 시인의 작품입니다.   시골 농가의 어느 날 밤풍경이 떠오르네요.. 당나귀가 배가 고팠나 보지요. 아니면 팔려가 새끼가 보고 싶어서 울음을 울었는 지도 모르고요. 그 소리에 아기도 함께 깨어나서 울고요.   아버지는 불을 밝히고 외양깐에 가서 나귀를 달래고 엄마는 애기에 젖을 먹이며 달래고 있습니다.   당나귀는 집안의 현재 재산이고, 아기는 집안의 미래 희망입니다.   정겨우면서도 왠지 안쓰러움이 느껴져서 가슴이 뭉클합니다. 이 아이가 자라서 지금의 우리 부모님과 할아버지 세대가 되셨습니다. 이 시속의 아버지와 어머니 마음으로 집안을 보살피며 우리를 키우고 계시고요.   우리도 자라면 그렇게 우리 아이들을 키울 테고, 그 때도 밤은 다시 고요히 잠들겠지요.   그러면서 때로는 어두운 세상을 만나면 윤동주 시인같이 채 피지 못하고 슬프게 시들 수도 있을 것이고요.             * 윤동주(1902~1934)  : 시인. 만주 북간도 명동에서 태어남.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일본 도시샤(同志社) 대학 영문과 재학 중   항일 운동을 했다는 혐으로 체포되어 1945년 2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함.   그의 시는 식민지 치하의 괴로운 시대를 살아아가면서   양심에 출실하고자 끊임없이 번민하는 젊은이의   순결한 내면을 투명하게 보여 줌.   유고시집 ===================================///   출생 1917년 사망 1945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시인 시를 쓰는 것은 어찌 보면 시대의 어둠 속에 작은 ‘등불’ 하나를 밝혀 거는 일이다. 창씨 개명과 국어 사용 금지, 강제 공출과 징병제 등으로 식민지 피지배의 ‘어둠’이 깊어갈 무렵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1) 시인이 있었다. 나아갈 길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어둠 속에서 언젠가 홀연히 닥칠 ‘아침’을 기다리던 그가 바로 윤동주(尹東柱, 1917~1945)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2) 의 어둠 속에서 끝내 ‘아침’을 맞지 못하고 삶을 마감한다. 맑은 영혼으로 자아를 응시한 시인 윤동주 ⓒ 시공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윤동주는 불같이 행동하는 실천적인 인간형이 아니라 고요히 자아를 응시하는 내면적인 인간형에 속한 사람이다. 밤하늘의 별을 헤며 패 · 경 · 옥과 같은 예전에 알던 이국 소녀들, 비둘기 · 강아지 · 토끼 · 노새 · 노루와 같은 순한 동물들, 그리고 프랑시스 잠 ·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같은 시인들의 이름을 불러보던 다정 다감한 젊은이.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3) 던 시인 윤동주. 그는 사람들이 호구지책과 안락한 생활, 사유 재산에 집착할 때 고요한 내면에 병균처럼 파고든 시대의 어둠을 조용히 응시하며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 시가 이렇게 씌어지는 것”4) 조차 몹시 부끄러워한다. 순결한 영혼의 소유자이던 그는 해방을 불과 여섯 달 앞둔 1945년 2월 16일, 차디찬 이국의 감옥에서 숨을 거둔다. 윤동주의 육필 원고 ⓒ 시공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만주 간도의 명동촌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독립 운동가이자 교육가로 이름이 높던 김약연의 누이 김용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난다. 명동은 조선인들이 모여 살던 전형적인 농촌으로, 1899년 바로 윤동주의 외숙부인 김약연 등에 의해 개척된 마을이다. 이 마을은 기독교와 교육, 독립 운동의 중심지로 문화 운동이 활발하게 일던 곳이다. 윤동주의 할아버지는 기독교 장로였고, 아버지는 명동학원 교사를 지낸다. 윤동주는 명동촌의 큰 기와집에서 자란다. 마당에는 자두나무들이 있고, 대문을 나서면 텃밭과 타작마당, 북쪽 울 밖에는 서른 그루쯤 되는 살구나무와 자두나무가 있는 과원, 동쪽 쪽대문 밖에는 깊은 우물이 있는 풍경을 그는 나중까지 잊지 않는다. 쪽대문 밖의 우물은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보면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5) 가 비치던 바로 그 우물이다. 그 사나이는 오똑하고 곧은 콧날, 부리부리한 눈방울, 한 일자로 굳게 다문 입술, 투명한 살결, 단정한 매무새를 한 미남 청년의 모습이었으리라. 귀족적인 풍모에 깔끔하면서도 맵시있는 멋쟁이였던 윤동주는 조용하고 사색적인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일찍이 소학교 시절에 문학과 만난다. 소학교 4학년 때부터 그는 나중에 일본 유학과 죽음까지 함께 하는 송몽규와 『어린이』 · 『아이생활』 같은 소년 잡지를 구독하고 연극 활동을 하면서 문학적 소양을 닦는다. 5학년 때는 송몽규와 함께 월간 잡지 『새명동』을 직접 등사판으로 펴내기도 한다. 이 등사판 잡지에 윤동주는 제가 쓴 동시와 동요 등을 싣는다. 당시 윤동주를 비롯한 학생들의 문학에 대한 열기는 대단했는데, 김동환의 시집 『국경의 밤』을 졸업 선물로 주었다는 데서도 이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윤동주는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명동촌에서 20여 리 떨어진 중국인 마을에 있는 소학교에 편입한다. 이 곳의 학교에 1년쯤 다닌 추억은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함께 시 「별 헤는 밤」을 낳는다. 다음해인 1932년 윤동주는 고향 명동을 떠나 용정에 있는 기독교계 학교 은진중학교에 입학한다. 용정 은진중학교 시절에 윤동주는 폭넓은 활동을 한다. 교내 잡지를 발간하느라 밤새 원고지와 씨름하는가 하면 축구와 농구, 웅변에도 소질을 보인다. 은진중학교 때의 그의 취미는 다방면이었다. 축구 선수로 뛰기도 하고 밤 늦게까지 교내 잡지를 내느라고 등사 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기성복을 맵시있게 고쳐서 허리를 잘룩하게 한다든지 나팔바지를 만든다든지 하는 일을 어머니 손을 빌지 않고 혼자서 재봉틀로 하기도 하였다. 2학년 때이던가, 교내 웅변 대회에서 「땀 한 방울」이란 제목으로 1등 한 일이 있어서 상으로 탄 예수 사진의 액자가 우리 집에 늘 걸려 있었다. 절구통 위에 귤 궤짝을 올려놓고 웅변 연습을 하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윤일주, 「윤동주의 생애」, 『나라사랑』 23집(외솔회, 1976) 당시 간도 지방 학생들 사이에서는 고국으로 유학하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은진중학교에 다니던 윤동주도 부모를 설득해 1935년 9월에 평양 숭실중학교로 전학한다. 전학한 해에 그는 숭실중학 YMCA 문예부에서 발간한 『숭실활천』에 시 「공상」을 발표하고 여러 시집을 탐독한다. 1936년 1월에는 1백 부 한정판으로 출판된 백석의 시집 『사슴』을 미처 구하지 못해 학교 도서실에서 하루 내내 시집 전체를 베껴 쓰기도 한다. 1936년 신사 참배 거부로 숭실중학이 폐교를 당하자 용정으로 돌아온 그는 광명학원 중학부에 편입해 2년 동안 중학 과정을 더 밟는다. 윤동주가 다니던 용정의 은진중학교 나중에 대성중학교로 이름이 바뀐다. ⓒ 시공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고종 사촌인 송몽규와 함께 서울의 연희전문(연세대학교의 전신)에 입학한 것은 스물두 살 때인 1937년의 일이다. 송몽규는 『동아일보』 신춘 문예에 콩트 「숟가락」으로 당선된 바 있는 문인으로, 당시에는 꽤 알려진 이름이었다. 진학을 앞두고 윤동주는 문학 공부를 하길 원하지만 아버지 윤영석이 의학을 전공하라고 해서 한동안 갈등을 겪는다. 졸업반인 5학년 2학기부터 다음해인 1938년 초까지 몇 달 동안 부자 사이의 갈등은 심각한 양상으로 발전한다. 윤동주가 식음마저 전폐하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자 할아버지 윤하현과 외숙부 김약연이 나서 아버지를 설득, 마침내 윤동주의 문과반 진학이 이루어진다. 일본 유학 시절의 윤동주(뒷줄 오른쪽)와 송몽규(앞줄 가운데) ⓒ 시공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최현배의 조선어 시간을 비롯해 손진태의 역사 시간, 이양하의 영문학 강의 등을 통해 윤동주는 연희전문 시절 민족 의식과 우리말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문학에 대한 꿈을 키우게 된다. 강의가 없으면 주로 산책과 독서로 시간을 보내던 그는 정지용 · 김영랑 · 백석 · 이상 · 서정주 등의 시를 열심히 읽고, 외국 문인으로는 도스토예프스키 · 앙드레 지드 · 발레리 · 보들레르 · 라이너 마리아 릴케 · 프랑시스 잠 · 장 콕토 등에 빠져든다. 책을 읽다가 답답해지면 황량한 서강 들판과 인적 없는 창내벌(지금의 창천동)을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혼자 걸으며 시를 구상한다. 윤동주를 알던 이들은 그가 선천적으로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고 기억한다. 연희전문 4학년 때 기숙사에서 나온 윤동주와 함께 누상동 김송의 집에서 하숙 생활을 한 연희전문 2년 후배 정병욱의 회고에서도 이것을 알 수 있다. 그 무렵 우리 일과는 대충 다음과 같았어. 아침 식사 전에는 누상동 뒷산인 인왕산 중턱까지 산책을 했어. 세수는 골짜기 아무 데서나 하고. 방으로 돌아와 청소를 하고 조반을 마친 다음에는 학교로 나갔지. 하학 후에는 소공동 한국은행 앞까지 전차를 타고 나가 충무로 일대의 책방들을 순례했어. 지성당, 일한서방, 마루젠(丸善), 군서당과 같은 신간 서점과 구서점들을 돌고 나서 음악 다방에 들러 차를 마시며 새로 산 책들을 펴보곤 했지. 가끔은 극장에 들러 영화를 보기도 하고. 다시 명동에서 도보로 을지로를 거쳐 청계천을 건너 관훈동 헌 책방을 순례하고 돌아오면 이미 어둑해져 거리에 전기불이 환하게 밝혀졌지. 정병욱, 「잊지 못할 윤동주의 일들」, 『나라사랑』 23집(외솔회, 1976) 1941년 일제의 혹독한 식량 정책으로 기숙사에서 나오게 된 윤동주는 넉 달쯤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 생활을 한다. 일제의 요시찰 대상으로 감시를 받고 있던 김송의 집에서 윤동주는 「무서운 시간」 · 「태초의 아침」 · 「십자가」 · 「또다른 고향」 같은 작품을 완성한다. 1941년 연희전문 졸업을 앞두고 윤동주는 그 동안 쓴 시 19편을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자필 시고집(詩稿集) 세 부를 만든다. 그는 세 부 가운데 한 부는 자신이 갖고, 한 부는 연희전문의 영문과 교수인 이양하에게, 나머지 한 부는 후배 정병욱에게 준다. 「별 헤는 밤」을 완성한 다음 동주는 자선 시집을 만들어 졸업 기념으로 출판하기를 계획했었다. 「서시」까지 붙여서 친필로 쓴 원고를 손수 제본을 한 다음 그 한 부를 내게다 주면서 시집의 제목이 길어진 이유를 「서시」를 보이면서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처음에는(「서시」가 완성되기 전) 시집 이름을 「병원」으로 붙일까 했다면서 표지에 연필로 ‘병원’이라고 써넣어 주었다. 그 이유는 지금 세상은 온통 환자투성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리고 병원이란 앓는 사람을 고치는 곳이기 때문에 혹시 앓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겠느냐고 겸손하게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정병욱, 「잊지 못할 윤동주의 일들」, 『나라사랑』 23집(외솔회, 1976) 그의 시고를 읽어본 이양하는 출판을 보류하도록 권한다. 「십자가」 · 「슬픈 족속」 · 「또다른 고향」 등 몇 편의 시가 일제의 검열을 통과하기 어려울 것이며, 일본 유학을 앞두고 있는 윤동주의 신변에도 적지 않은 위험이 따를 것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이양하의 권유를 받아들여 당시에는 출판을 하지 않지만, 졸업 직후 용정으로 돌아와서도 아버지와 출판 문제를 의논하는 등 시집 출판에 미련을 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에는 돈 문제가 걸려서 출판 계획을 접게 된다. 결국 윤동주 생전에 시집 출판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뒤 윤동주와 이양하가 갖고 있던 시고는 행방을 알 길이 없게 된다. 나머지 정병욱에게 준 시고만 그의 어머니가 명주 보자기에 싸서 마루 밑 깊숙한 곳의 항아리에 감춰둔 덕분에 해방 뒤인 1948년 1월 30일, 드디어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빛을 보게 된다. 〈서시〉를 비롯한 19편의 시가 실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동주의 육필 시고집을 그가 죽고 나서 해방 뒤에야 비로소 책으로 출간한 것이다. 1948년에 나온 판본(왼쪽)과 1955년에 나온 판본 ⓒ 시공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윽고 윤동주는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의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에 입학한다. 1943년 7월, 여름 방학을 앞두고 그는 집에 전보를 치는 등 귀향 준비를 서두른다. 그러나 귀향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다. 윤동주가 사상범으로 특고 경찰에게 검거된 것이다. 교토제국대학에 다니던 송몽규도 함께 잡혀 들어가는데, 이들의 죄명은 ‘치안 유지법’ 위반. 말하자면 독립 운동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실제로 일본에서 독립 운동을 했다는 분명한 증거는 없다. 다만 송몽규는 한때 중국의 난징 쪽에서 독립 운동 단체에 가입해 활동한 적이 있고, 윤동주는 도시샤대학의 일본인 교수와 민족 문제로 말다툼을 벌인 적이 있긴 하다. 얼마 뒤 윤동주는 2년형, 송몽규는 2년 6개월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형무소에 수감된다. 1945년 간도 명동촌의 집으로 윤동주의 사망 소식을 알리는 전보 통지서가 날아든다.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지러 오라.” 아버지 윤영석이 당숙 윤영춘과 함께 시신을 넘겨받으러 일본으로 떠난 며칠 뒤 다시 “동주 위독함, 원한다면 보석할 수 있음, 만약 사망시에는 시체를 인수할 것, 아니면 규슈제국대학 해부용으로 제공할 것임.”이라는 내용의 때 늦은 우편물이 도착한다. 간도의 소학교 동창생들과 함께 한 윤동주(앞줄 왼쪽) ⓒ 시공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 얼마 전, 후쿠오카형무소에 들어간 윤영석은 푸른 죄수복을 입은 조선인 청년 50여 명이 주사를 맞기 위해 시약실 앞에 줄을 서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윤영석은 그 속에서 피골이 상접한 송몽규를 발견한다. “저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되었고, 동주도 그 모양으로······.” 일제는 태평양전쟁 말엽에 살아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세균 실험을 했는데, 윤동주도 바로 그 실험에 이용되어 죽지 않았나 싶다. 말을 맺지 못하고 흐느끼던 송몽규도 그로부터 23일 뒤 윤동주의 뒤를 따른다. 방부 처리를 해놓아 윤동주의 주검은 말끔한 편이었고, 장례는 3월 어느 눈보라치던 날에 용정 동산에서 치러진다. “시인이란 슬픈 천명”을 안고 산 시인 윤동주. 그의 시 세계를 지배하는 정서는 부끄러움과 죄 의식이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식민지 피지배 현실이라는 테두리와 내면 세계 사이에서 그는 심각한 자기 혐오와 수치심에 빠져 괴로워한다. 그의 시에 중요한 심상으로 등장하는 ‘우물’과 ‘거울’은 바로 개체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와 종족과 역사라는 큰 틀에 비추어 스스로를 바라보는 자기 응시와 자기 성찰의 매개적 상징물이다.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 이다지도 욕될까. 「참회록」 일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 끊임없이 윤리적인 자기 완성을 꿈꾸며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한 점의 욕됨조차 용납하지 않으려 하던 청년 시인은 이렇게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 슬픈 사람”처럼 떠나고 만다. 선언(宣言) 노동자(勞動者) 농민(農民) 제군(諸君)! 진보적(進步的) 지식 계급(知識階級) 제군(諸君)! 아세아(亞細亞) 십억만(十億萬)의 착취(搾取) 압박(壓迫) 침략자(侵略者)로서 군림(君臨)해 오든 일본 제국주의(日本帝國主義)의 최후(最後)의 심판(審判)의 날은 왓다. 36년간(三十六年間) 전세계(全世界)에 가혹(苛酷)하기 그 예(例)가 없엇든 제국주의(帝國主義) 일본(日本)의 강제적(强制的) 지배(支配)와 노예적(奴隸的) 압정(壓政)에 신음(呻吟)하든 우리 조선 민중(朝鮮民衆)도 드듸어 자유(自由)와 해방(解放)의 날은 왓다. 그러나 제군(諸君)! 오늘 우리는 이 환희(歡喜)의 날을 마지하면서 다시 우리 민족(民族)의 절대 다수(絶對多數)인 노동자(勞動者) 농민(農民)의 완전(完全)한 해방(解放)을 목표(目標)로 한 과감(果敢)한 투쟁(鬪爭)이 남어 잇다는 것을 알어야 한다. 1935년(一九三五年) 일본 제국주의(日本帝國主義)의 야만적(野蠻的)인 강압(强壓)으로 조선(朝鮮)프로레타리아예술동맹(藝術同盟)이 해산(解散)되자 혹(或)은 지하(地下)로 혹은 비협조적(非協調的) 태도(態度)로 우리들의 문학 활동(文學活動)은 일시(一時) 정돈(停頓)되고 오직 일부(一部) 개종(改宗)한 반동 분자(反動分子)만이 뿌르죠아 문학자(文學者)와 보조(步調)를 일치(一致)하여 왓다. 이리하야 과거(過去) 십년간(十年間) 조선(朝鮮) 프로레타리아 문학(文學)은 자연(自然) 침체(沈滯)의 비경(悲境)에 잇엇든 것이다. 그러나 8월 15일(八月十五日)을 계기(契機)로 일본 제국주의(日本帝國主義)의 살인적(殺人的)인 무거운 철쇄(鐵鎖)는 끈어젓다. 이에 조선(朝鮮)프로레타리아문학동맹(文學同盟)은 다시 결성(結成)되엇다. 우리는 일체(一切) 반동 문학 운동(反動文學運動)과의 투쟁(鬪爭)을 전개(展開)하며 비민주주의(非民主主義) 개량주의(改良主義) 봉건주의(封建主義) 국수주의(國粹主義) 예술 지상주의(藝術至上主義) 문학(文學)을 배격(排擊)하는 동시(同時)에 프로레타리아 예술(藝術) 확립(確立)에 매진(邁進)하려 한다. 강령(綱領) 1. 우리는 프로레타리아 문학(文學) 건설(建設)을 기(期)함 1. 우리는 파씨즘 문학(文學) 뿌르죠아 문학(文學) 사회 개량주의(社會改良主義) 문학(文學) 등(等) 일체(一切) 반동적(反動的) 문학(文學)을 배격(排擊)함 1. 우리는 국제(國際) 프로레타리아 문학 운동(文學運動)의 촉진(促進)을 기(期)함 1945년 9월 17일(一九四五年九月十七日) 조선(朝鮮)프로레타리아문학동맹(文學同盟) 중앙 집행 위원장(中央執行委員長) 이기영(李箕永) 서기장(書記長) 윤기정(尹基鼎) 중앙 집행 위원(中央執行委員) 이기영(李箕永), 한설야(韓雪野), 조중곤(趙重滾), 박승극(朴勝極), 권환(權煥), 김두용(金斗鎔), 이북명(李北鳴), 한효(韓曉), 박아지(朴芽枝), 홍구(洪九), 박세영(朴世永), 이동규(李東珪), 박석정(朴石丁), 송완순(宋完淳), 엄흥섭(嚴興燮), 안동수(安東洙), 조벽암(趙碧岩), 윤곤강(尹崑崗), 송영(宋影), 신고송(申鼓頌), 이주홍(李周洪), 정청산(鄭靑山), 김승구(金承久), 박팔양(朴八陽), 윤기정(尹基鼎) 외부 위원(外部委員) 소설(小說) = 이기영(李箕永), 한설야(韓雪野), 엄흥섭(嚴興燮), 이동규(李東珪), 안동수(安東洙), 홍구(洪九) 시(詩) = 권환(權煥), 윤곤강(尹崑崗), 박세영(朴世永), 박아지(朴芽枝), 조벽암(趙碧岩) 희곡(戱曲), 씨나리오 = 송영(宋影), 김승구(金承久), 신고송(申鼓頌), 박영호(朴英鎬) 아동 문학(兒童文學) = 송완순(宋完淳), 이주홍(李周洪), 정청산(鄭靑山) 외국 문학(外國文學) = 이홍종(李洪鐘), 권환(權煥), 김장환(金章煥), 이기영(李箕榮) 평론(評論), 수필(隨筆) = 김두용(金斗鎔), 윤기정(尹基鼎), 한효(韓曉), 박석정(朴石丁), 박승극(朴勝極) 동맹원(同盟員) 김태준(金台俊), 김두용(金斗鎔), 김오성(金午星), 김창술(金昌述), 김해강(金海剛), 김태진(金兌鎭), 김승구(金承久), 김장환(金章煥), 김람인(金嵐人), 김병호(金炳昊), 김우철(金友哲), 김단미(金丹美), 김성봉(金性奉), 김대균(金大均), 구직회(具直會), 권환(權煥), 박승극(朴勝極), 박세영(朴世永), 박아지(朴芽枝), 박석정(朴石丁), 박노춘(朴魯春), 박팔양(朴八陽), 박태양(朴太陽), 박완식(朴完植), 박영준(朴榮濬), 박영호(朴英鎬), 서인식(徐寅植), 손풍산(孫楓山), 송영(宋影), 송완순(宋完淳), 신고송(申鼓頌), 안동수(安東洙), 안함광(安含光), 안용만(安龍灣), 엄흥섭(嚴興燮), 윤기정(尹基鼎), 윤곤강(尹崑崗), 윤세중(尹世重), 이기영(李箕永), 이동규(李東珪), 이주홍(李周洪), 이북명(李北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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