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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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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윤동주 "새로 발굴된" 시 8수 댓글:  조회:1839  추천:0  2018-08-11
새로 발굴된 이 시들은 1934-1939년 즉 18세로부터 25세 사이에 룡정 은진학교와 광명학교, 평양숭실중학교와 연희전문학교 등을 다니며 시인의 꿈을 키우며 썼던 문학습작기의 작품들로 추정됩니다. 많이 읽고 즐거운 시간 되길 바랍니다. 1. 창구멍 바람부는 새벽에 장터가시는 우리압바 뒷자취 보고싶어서 춤을 발려 뚫려논 작은 창구멍 아롱아롱 아츰해 빛어옵니다 눈나리는 저녁에 나무 팔려간 우리압바 오시나 기다리다가 이끝으로 뚫려논 작은 창구멍 살랑살랑 찬바람 날아듭니다 2. 가슴 2 늦은 가을 스트램이 숲에 쌔워 공포에 떨고 우슴웃는 흰달생각이 도망가오 3. 개 이 개 더럽잔니 아-니 이웃집 덜정수개가 오날 어승렁어승렁 우리집으로 오더니 우리 집 바두기의 미구멍에다 코를 대고 씩씩 내를 맛겠지 더러운줄도 모르고 보기숭해서 막차며 욕해 쫓았더니 꼬리를 휘휘 저으며 너희들보다 어떻겠느냐 하는 상으로 뛰여가겠지요 나-참 4. 울적 처음 피워본 담배맛은 아츰까지 목안에서 간질간질 타 어제밤에 하도 울적하기에 가만히 한 대 피워보았더니 5. 야행 정각! 마음에 아픈데 있어 고약을 붙이고 시들은 다리를 끄을고 떠나는 현장 -기적이 들리잖게 운다 사랑스런 녀인이 타박타박 땅을 굴려 쫓기에 하도 무서워 상가교(上架橋)를 기여넘다. -이제로부터 등산철도 이윽고 사색의 포푸라텐넬로 들어간다 시라는 것을 반추하다 마땅히 반추하여야 한다. -저녁연기가 놀로 된 이후 휘파람 부는 해 귀뚤램이의 노래는 마디마디 끊어져 그믐달처럼 호젓하게 슬프다. 늬는 노래배울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나보다 -늬는 다리 가는 쬐꼬만 보헤미언 내사 보리밭동리에 어머니도  누나도 있다 그네는 노래부를줄 몰라 오늘밤도 그윽한 한숨으로 보내리니.... 6. 비ㅅ뒤 《어-얼마나 반가운 비냐》 할아버지의 즐거움 가물듯엇든 곡식 자라는 소리 할아버지 담바 빠는 소리와 같다 비ㅅ뒤의 해ㅅ살은  풀잎에 아름답기도 하다. 7. 어머니 어머니 젖을 빨려 이 마음을 달래여 주시오. 이 밤이 자꾸 설혀 지나이다 이 아이는 턱에 수염자리 잡히도록 무엇을 먹고 살았나이까? 오늘도 한주먹이 입에 그대로 물려있나이다 어머니 부서진 랍인형도 쓰러진지 벌써 오랩니다 철비가 후우주군히 내리는 이 밤을 주먹이나 빨면서 새우릿가? 어머니! 그 어진 손으로 이 울음을 달래여주시오 8. 가로수 가로수, 단촐한 그늘밑에 구두술같은 혀바닥으로 무심히 구두술을 핥는 시름 때는 오정 싸이렌 어데로 갈것이냐? ㅁㅁ그늘은 맴돌고 따라 사나이도 맴돌고     ========================///  윤동주 시 기호학적 고찰 / 김석환 1. 머리말   윤동주 시인이 시를 쓰던 때는 일제의 억압이 극악에 달한 1940년 전후다. 이 시기는 많은 문인들이 일제에 무릎을 꿇거나 절필을 하여 민족 문학이암흑기에 접어든 때다. 그러한 때 시로써 꺼져 가는 민족혼을 지키고 노래하다 순국한 윤동주의 시세계에 대한 고찰은 큰 의의를 갖는다. 본고는 기존 논의의 결과를 참고하되 보완하기 위하여 가능한 전 작품을 대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특히 기존의 논의에서 제외되었던 많은 양의 동시를 연구의 대상에 포함시키고자 한다. 윤동주 시인은 성인이 되어서도 동시를 발표하였다는 사실은 그러한 당위성을 더욱 뒷받침한다. 그리고 기호학적 방법을 원용함으로써 그의 시세계를 객관적이고 종합적으로 연구하고자 한다. 기호 중에서 가장 정밀하다는 언어를 일차적 소재로 하는 시는 일상어의약호를 벗어나 새로운 약호를 사용하기 때문에 시는 기호체계의 일종이다. 따라서 기호학적 접근은 시의 문학성을 밝히는 일이 될 수 있다. 구체적으로 그의 시에 나타난 동심의 원형을 찾고, 그 동심의 구체적 공간인 고향을 상실에 대한 아픔과 그 극복 의지를 어떻게 공간기호로 체계화하여 보여 주는가를 살피고자 한다. 그 이유는 그가 주로 일제의 억압이 극한에 달한 시기에 시를 쓰다 순국했다는 전기적 특성을 고려했기 때문이다.그리고 공간기호체계를 살피는 이유는 일상어가 문학어로 전환되면서 언어의 선조성을 잃고 공간화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시텍스트 전편에 내재된 내용들은 국권 상실이라는 민족사적 현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한편 본 논문의 텍스트는 동시를 비롯하여 그 동안 발굴된 윤동주 시인의시들이 발표 당시의 표기대로 대부분 게재된 『윤동주 시집』(범우사. 1993)으로 하였다.     2. 동심의 상실과 회복   1) 동심과 고향   윤동주 시인은 1917년 이국 땅 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리고 1935년 그가 18세 때에 평양 숭실중학교로 전입학하면서 조국 땅 한반도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1942년 일본 동경 입교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여 일본으로 떠나 살다 그곳에서 옥사를 했으니, 그는 모국 땅에서 불과 7년밖에 못 살았다. 짧은 생애를 주로 이국에서 살 수밖에 없었던 그의 불운은 조국 상실의 결과이며 민족의 아픔을 직접 체험케 하였다. 그리고 그가지키고자 한 동심을 유린하고 동심이 살아 있는 고향을 늘 그리게 하였다. 우선 그의 동시를 중심으로 동심의 원형과 그 동심의 구체적 공간인 고향의 의미를 고찰하기로 한다.   빨래줄에 걸어 논 요에다 그린 지도 지난밤에 내 동생 오줌 싸 그린 지도 꿈에 가본 엄마 계신 별나라 지돈가? 돈 벌러 간 아빠 계신 만주땅 지돈가?            ―「오줌싸개 지도」 전문   위의 시는 1937년 『카톨릭 소년』지에 발표한 동시다. 우선 오줌을 싼 요가 ‘빨래줄’에 걸려 있는 풍경 자체가 해학적이다. 그런데 그러한 해학적 풍경의 이면에는 국권 상실의 아픔이 강하게 배어 있다. 엄마를 잃고 아빠와 멀리 떨어져 있는 아이가 그 부모를 그리는 꿈을 꾸던 상황은 바로 나라를잃고 그 회복을 꿈꾸던 민족의 현실을 암시한다. 그런데 ‘오줌’은 꿈의 결과이자 꿈의 실체이며, 그것의 흔적은 꿈에 그리던 별나라와 만주 땅 지도와 동일시된다. 그리고 요를 걸어 논 ‘빨래줄’은 그것을 중심으로 구축되는 수평적 수직적 공간기호체계의 매개적 공간기호가 된다. 즉 ‘방 안/빨래줄/만주땅’으로 수평적 공간 기호체계와, ‘방 안/빨래줄/별나라’로 수직적 공간기호체계가 구축되면서 ‘빨래줄’에 걸린 요는 꿈의 세계와 현실을 잇는 매개적 기호로서 사다리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공간기호체계가 수직과 수평 양축으로 동시에 구축됨으로써 그 꿈의 간절함을 더욱 강조하며 시인의 지향 의지가 지상과 천상으로 동시에 확산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즉 그가 지상의 민족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천상의 절대적 가치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이 시는 그가 그의 부모때에 떠나온 평양에 와서 아버지의 고향이요, 민족의 삶의 현장인 한반도의 현실을 보면서 쓴 시다. 그런데 그가 태어나 자란 “만주 땅”을 아빠가 돈벌러 간 곳, 즉 유랑의 땅이요 타향으로 인식하고 있다. 다음 시는 만주 땅을 타향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과, 고향 상실의 아픔과 향수를 잘 보여 주고 있다.   헌 짚신짝 끄을고 나 여기 왜 왔노   두만강을 건너서 쓸쓸한 이 땅에 남쪽 하늘 저 밑에 따뜻한 내 고향 내 어머니 계신 곳 그리운 고향집        ―「고향집」 전문   화자는 두만강 건너 남쪽의 고향과 대립되는 북쪽의 타향에 위치하며 고향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두만강을 경계로 대립하는 두 공간 ‘여기(타향)/고향(집)’은 수평적 공간 기호체계를 구축한다. 그리고 ‘쓸쓸한/따뜻한, 어머니의 부재/존재’ 등의 대립은 고향 상실의 아픔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강조한다. 특히 헌 짚신짝이 암시하는 유랑과 고통, ‘왜 왔노’라는 화자 스스로에 대한 반문은 타향에서의 아픔을 더욱 강화한다. 하늘, 고향, 고향집으로 이어지는 공간의 하강과 점층적인 축소는 고향의 내밀성을 강화한다. ‘어머니가 계시는 곳’이라는 진술은 고향의 안식성을더해 주며, 귀향 의지는 곧 귀소본능 및 모성회귀 본능과 동일함을 암시한다. 특히 윤동주의 시에서 고향이나 집은 빈번하게 어머니나 누이 등 여성적 이미지와 유계관계를 맺는다. 그것은 고향이 생명의 탄생 공간으로서 생명을 탄생시키는 여성과 유사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 윤동주의 시에서 고향은 인정으로 어우러져 꿈을 키우는 곳이다.   산골짜기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몽기몽기 웨인연기 대낮에 솟나 감자를 굽는 게지 총각애들이 깜박깜박 검은 눈이 모여 앉아서 입술에 까맣게 숯을 바르고 옛이야기 한 커리에 감자 하나씩. 산골작이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살랑살랑 솟아나네 감자 굽는 내   ―「굴뚝」전문   위 시는 산골 외딴집의 정겨운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시적 공간 ‘산골작이 오막살이’의 폐쇄성과 협소성은 그 공간에 내밀성을 부여한다. 그리고 그 공간이 감자를 굽는 부엌으로 더욱 축소됨으로써 안락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는 더욱 가중된다. 집은 무한하게 열려 있는 우주 안에 인간이 건설해 놓은 유한하고 폐쇄된 공간이며, 그 폐쇄성이 커질수록 안락성은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막살이에서 솟아오르는 연기는 고체가 기체로 변화된 것이다. 유동적인 물질로 변화된 그 연기는 수직적으로 상승하고 수평적으로 확산되면서 감자를 굽는 총각애들의 꿈을 암시한다. 그리고그 연기는 ‘감자 굽는 내’이며 감자는 ‘옛이야기’와 유계관계를 맺음으로써 ‘총각애들’의 추억을 상징한다. 그리고 추억이 감자를 거쳐 냄새(내)로 변화됨으로써 무한한 하늘로 유동할 가능성을 갖는다. ‘총각애들’이 과거를 이야기하고 미래를 향해 꿈을 피워 올리는 오막살이는 바로 윤동주 시인의고향의 원형이자 동심의 상징적 공간이다. 이와 같이 윤동주의 동시들은 주로 평화롭고 안락한 고향을 배경으로 하며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동심을 그리고 있다   (1) 귀뜨라미와 나와 달밝은 밤에 이야기 했다     ―「귀뜨라미와 나와」 5연   (2)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조각을 주으려 숲으로 가자.      ―「반딧불」 1연   (3) 아씨처럼 나린다 보슬보슬 햇비 맞아 주자 다 같이 옥수숫대처럼 크게 닷자 엿자 자라게 햇님이 웃는다 나보고 웃는다      ―「햇비」 1연   시 (1)에서 밤의 어둠 속에 빛을 내는 천체인 달은 밝고 높은 가치의 상징이며, ‘귀뜨라미’는 자연의 신비함을 들려주는 매개물이다. 그런 달빛이 내리는 밤에 ‘귀뜨라미’와 교신을 나눈다는 건 곧 신과 자연, 인간이 공존하고 화합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시 (2)에서 ‘반딧불’은 ‘달조각’과동일시되고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 어둠 속에서 빛을 내는 발광체다. 윤동주 시인은 그 ‘반딧불’을 주으러 숲으로 가자고 반복하고 있는데, 이는 곧밝고 신비한 세계를 지향하는 그의 동심을 강조하여 보여 준다. 시 (3)에서 ‘햇비’는 햇빛과 함께 내리는 비, 또는 햇빛처럼 내리는 비, 비처럼 내리는햇빛 등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서로 대조적인 이미지인 해와 비를 합성한 이 시어는 모호성과 다의성을 갖는데 그 물리적 상반성에도 불구하고 해와 비가 모두 수직 하강성을 공통적으로 갖는다. 그리고 지상에 있는 화자는 옥수숫대처럼 자라 ‘햇비’를 맞음으로써 수직적 대립은 해체되고 하나로융합된다. 이는 곧 높고 밝은 가치의 세계를 지향하여 하나가 되고자 하는 동심을 암시한다. 윤동주 시인은 위에서 보듯 그의 동시에서 수직적으로 밝고 높은 가치의 세계와, 수평적으로는 자연 및 인간과 공존하고 소통하며 사는 동심을 노래한다. 그런데 현실보다 더욱 가치있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지향성은 윤동주의 동시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시정신이다. 또 윤동주 시인의 고향은 바로지고의 가치 세계와 자연 그리고 인간이 화합하고 공존하며 사는 곳이며 동심의 상징적 공간이며 그 원형이다.   2) 어두운 고향   윤동주 시인은 동심의 순수성과 그것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인 고향을 상실할 수밖에 없던 시대의 비극 속에서 그것을 지키고 회복하고자 노력한다. 그것은 곧 시대의 어둠에 매몰되지 않기 위한 것이며 우주적 질서 속에서 참다운 삶을 누리고자 하는 기원이다. 어둠은 윤동주 시의 전체적 분위기를지배하는 핵심적 이미지며 상실된 현실의 현실을 암시하는 기호이다. 그리고 동심이 추구하던 밝은 빛이 없는 상태로서 시야를 가리는 장막이며 장애물이다.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 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또 다른 고향」 전문 위 시에서 화자는 고향에 돌아와 어둠 속에서 눈물지으며 ‘또 다른 고향’으로 가려는 꿈을 그리고 있다. 따라서 ‘또 다른 고향’은 화자가 있는 현실 공간인 고향과 대립되며, 2연에 나타난 우주 및 하늘과 같은 패러다임으로 의미상 등가치다. 따라서 두 공간 기호는 수평적(내/외) 또는 수직적(상/하)공간기호체계를 구축한다. 화자가 있는 고향은 ‘눈물, 우는, 어둠, 풍화작용’ 등이 암시하는 것처럼 부정적 공간이며 그와 대립되는 곳은 ‘아름다운’긍정적 공간이다. 화자가 새로운 고향을 그리는 까닭은 고향에 돌아와 방 안의 어둠을 확인하고, 그 어둠 속에서 하늘로부터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다.어둠은 시야를 가려 우주로 통하는 길을 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다. 그러나 화자는 바람 소리를 들음으로써 방이 우주로 통하고 있음을 감지한다.바람은 하늘과 방의 대립을 해체하고 이어 주는 매개적 기호이며 백골을 풍화작용 시킨다. 그런데 백골은 그것을 관찰하는 나와 대립되는 현실적 자아의 상징이다. 풍화작용 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던 화자는 새로운 방 밖의 세계에 눈뜨고 방 안과 고향의 어둠, 즉 부정적 현실을 감지한다. 화자가 눈물지으며 우는 것은 자신의 기대와 그러한 현실과의 괴리감 때문이다. 울음과 눈물은 바로 자아의 기대가 어긋남으로써 야기되는 감정의부조화를 해소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울던 화자는 이제 어둠 속에서도 잠들지 않은 ‘지조 높은 개’가 짖는 소리를 듣는다. 개는 어두운 현실을 거부하는 자아의 객관적 상관물이거나 자신보다 지조 높은 타인을 상징한다. 그러한 개 짖는 소리를 듣던 화자는 이제 더욱 급박한 어조로 새로운 세계로 ‘가자’고 다짐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자아와 상반된 부정적 현실을 거부하고, 자아를 성찰하며 또 다른 고향을 향하고자 하는 것은 윤동주 시인이 어둠에 매몰당하지 않는 ‘아름다운 혼’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 아름다운 혼은 바로 앞에서 논한 밝고 평화를 사랑하는 동심과 같은 것이다. 그는 동심의 순수성이유린되는 고향의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거부하며 그것을 지키기 위해 ‘또다른 고향’을 지향하는 것이다. 시 「돌아와 보는 방」에서 화자는 방으로 돌아와 불을 끄는데, 그것은 실내와 실외의 차이를 없게 만들어 그 대립을 해체하는 매개적 기호 행위다. 또한 그것은 밝은 대낮과 차이를 만들어 괴로운 일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화자는 이제 어둔 방에서 창 밖을 내다보지만 그곳 역시 어두울 뿐만 아니라 오던 길도 비에 젖어 있다. 결국 낮과 밤, 실내와 실외는 모두 부정적이고 절망적일 뿐이다. 어둠은 시야의 모든 것을 가려 절망에 빠지게 하는장애물이며, 비에 의해 그러한 절망적 상황은 더욱 강조된다. 비는 시야를 더욱 어둡게 만들기 때문이다. 시 「쉽게 쓰여 진 시」에서 역시 창 밖엔 밤비가 내리는데, 그러한 실외를 지켜보는 화자는 자신의 방을 “남의 나라”로 여긴다. 밤비가 내리는 실외와 대조적으로 안락하고 익숙한 공간인 방을그렇게 느끼는 것은 밤비가 암시하는 현실에 대한 절망감이 크기 때문이다. 시 「눈 감고 간다」에서 시적 배경은 어두운 밤이며, 그것은 암울한 시대의 모습을 상징한다. 그리고 밤은 곧 태양이 뜨지 않아 공간이 어두운 시간이며 그 어둠은 태양과 별의 밝음과 대립된다. 화자는 아이들에게 “눈을 감고 가거라”고 명령하는데 그것은 곧 아이들이나 그들이 대신하는 민족에게어둠을 초월하여 태양과 별을 향해 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윤동주 시인의 궁극적 지향의 대상이 지상적인 것보다 밝고 영원한 천상적인것임을 암시해 준다. 시 「거리에서」에서 화자는 앞의 시에서 방 안에 있던 것과는 달리 밤거리를 걷고 있다. 거리를 수식하는 ‘괴롬, 재색빛, 밤’ 등은거리가 대신하는 시대의 아픔과 암울한 상황을 암시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윤동주 시에서 공간적 배경엔 주로 어둠이 있으며 그것은 절망적이고 괴로운 현실을 암시한다. 그리고 시간적 배경은 자연히 밝은 낮보다 빛이 없는 밤이다. 그러한 공간과 시간의 배경 속에서 화자는 어둠에 묻히지 않고 자아를 성찰하고 밝은 세계로 초월을 시도한다. 특히 어두운 방은 바로 어두운 시대 속에 사는 시인 자신의 내면을 상징하는 구체적 공간이다.   3) 자아성찰과 동심의 회복   윤동주 시인의 시에서 현실은 늘 어둠 속에 잠겨 있다. 그러나 시인은 그 어둠에 매몰되거나 잠들지 않고 깨어 자아를 성찰한다. 그리고 어둠에 저항하며 새로운 세계를 기다리고 그곳을 지향한다. 다음에서 윤동주 시인이 어떻게 현실을 극복하고 초월하여 동심을 회복하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곰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쉽게 쓰여진 시」 일부   위의 시에서 ‘밤비’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암울한 현실을 암시하며 시 전체의 분위기를 지배한다. 그러한 밤비가 내리는 밤 화자는 남의 나라처럼 느껴지는 ‘육첩방’에서 부정적인 현실을 감지하고 ‘홀로 침전하는 것’이다. 어둠은 현실의 암울함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주위를 모두 가려 화자의 시선을 자신의 내면으로 돌리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2연에서 ‘시인이란 슬픈 천명’을 자각한 화자는 쉽게 시를 쓰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그 부끄러움은 시는 어둠과 대립하고 거부하는 밝은 정신으로 써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쓰고 있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화자가 방 안에 등불을 밝힘으로써 창을 경계로 내/외공간은 밝음/어둠으로 대립되는데, 그러한 행위는 ‘어둠을 조곰 내몰고’ 그것에 저항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것은바로 시인으로서 천명을 감당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등불은 방 안밖에 밝힐 수 없다는 한계를 느낀 화자는 온 세상이 밝아질 아침을 기다린다. 눈물과 위안이 암시하는 양극적 감정으로 손을 잡는 것은 바로 그 한계성을 인식하고 시인으로서의 역할을 조금이나마 감당하고 있다는 안도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둠 속에서 자신을 성찰하며 부끄러움과 슬픔을 느끼고, 등불을 밝혀 어둠을 내몰고 미래를 기다리는 자세는 윤동주 시인 시에 일관된어둠의 극복 방식이다. 다음에서 윤동주 시인의 자아성찰의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자화상」 6연   (2) 하루의 울분을 씻을 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속으로 흐르는 소리, 이제 사상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 가옵니다       ―「돌아와 보는 밤」 3연   (3)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참회록」 4연   시에서 화자는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 속을 들여다본다. 그런데 우물은 그 물질적 속성 때문에 거울이요, 지상/천상, 현실/비현실, 현재/과거를 잇는 창문 구실을 한다. 화자는 그 우물을 통하여 ‘하늘, 구름, 바람’ 등 천상적 이미지와 추억처럼 어려 있는 사나이를 본다. 특히 우물이 거울과 창문처럼 매개적 기호작용을 할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 산모퉁이 돌아 외딴 곳, 즉 현실 공간의 경계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바로 현실을벗어난 공간에서 이상적인 공간인 하늘과 현실적 자아와 대립되는 이상적 자아의 구체적 형상인 사나이를 보는 것이다. 화자는 앞 연에서 “돌아가다생각하고 도로 가 들여다보는” 행위를 반복하는데, 그렇게 우물 속을 들여다보는 것은 곧 자아를 성찰하는 과정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 사나이를 보며 화자가 미움과 가엾음을 느끼는 까닭은 현실적 자아와 이상적 자아의 상반성 때문이다. 시 (2)에서 화자는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 방으로 돌아와 불을 끄고 어둠 속에 홀로 있다. 그리고 ‘하루의 울분을 씻을 바 없어 눈을’ 감는다. 여기서 창과 어둠은 ‘방/세상’의 경계에 있는 매개적 공간기호로서 두 공간을 차단한다. 그리고 마음의 창인 눈을 감는 행위는 자아/세상을 차단하는 매개적 기호 행위다. 그리하여 화자는 폐쇄된 방 안에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마음속으로 흐르는 소리’, 즉 자아의 실체를 확인하고 그 속에서 익어가는 사상을 발견한다. 시 (3)에서 밤에 거울을 닦는 행위 역시 잃었던 자아를 성찰하는 과정을 형상화하고 있다. 밤은 어둠의 시간이며 그 어둠은세상으로 향하던 화자의 시선을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게 한다. 거울은 ‘현실적 자아/이상적 자아’의 매개적 기호며, 거울을 닦는 것은 거울의 내/외의대립을 해체함으로써 자아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분열된 두 자아를 하나로 화합시키려는 심리를 암시한다. 이상에서 살펴 본 것처럼 윤동주 시인의 시에서 자아를 성찰하는 시간적 배경은 가을이거나, 밤이다. 또한 공간적 배경은 주로 현실을 벗어나고 차단된 곳으로 이상과 현실의 매개적 공간이다. 그러한 시간과 공간은 현실과 차단되어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이상적인 세계를 응시하기에 적당한 배경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아를 성찰하면서 시인은 슬픔이나 부끄러움을 느끼는데, 그 까닭은 현실적 자아와 이상적 자아의 분열을 발견하거나 부정적 현실을 거부하거나 개선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자학에서 비롯된다. 자아성찰을 끝낸 시인은 이제 더 적극적인 자세로 어둠을 극복하고 새로운 이상적인 세계를 향한 초월을 시도한다. 그것은 시 「새벽이 올 때까지」에서 보듯 “이제 새벽이 오면/나팔소리 들려 올”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괴로웠든 사나이 행복한 예수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십자가」 4.5연   위의 시에서 ‘하늘/십자가/(지상)’은 수직적 공간 기호체계를 구축하는데, 이는 기독교의 ‘하나님/예수그리스도/인간’과 서로 대응된다. 따라서 십자가와 예수그리스도는 하늘/지상, 하나님/인간의 매개적 기호로서 양극을 이어 주는 사다리와 같은 구실을 한다. 그런데 윤동주 시인은 십자가를 지고피를 흘려 죽음으로써 어두움으로 말미암아 단절된 하늘과 지상의 관계를 잇겠다고 다짐을 한다. 이는 곧 자신이 예수그리스도처럼 속죄양이 되어암울한 조국의 현실을 극복하고 밝히겠다는 지사적 결의다. 그것은 또한 밝음과 평화를 지향하는 동심을 지키기 위한 저항이다. 윤동주 시인의 시에서 위와 같은 수직적 공간 기호체계는 새로운 세계를 향한 지향성을 암시하는 주된 약호다. 즉 수직축의 ‘상/하는 이상/현실, 밝음/어둠, 긍정/부정’으로 대립된다. 그리고 하방에서 상방을 향한 기호의 수직 상승은 현실에 반발하여 이상 세계를 향하는 그의 시정신을 암시한다. 다음 시들 역시 수직적 공간기호체계를 구축하며 수직 상승성으로 그러한 시정신을 암시하고 있다.   (1)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언덕 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별헤는 밤」 9,10연   (2) 텐트 같은 하늘이 무너져 이 거리를 덮을까 궁금하면서 좀 더 높은 데로 을라가고 싶다     ―「산상」 4연 시 (1)에서 화자는 ‘밤을 새워 우는 벌레’의 울음소리는 자신의 부끄러운 이름이 슬퍼 우는 거라고 여긴다. 벌레는 바로 밤이 상징하는 어둔 현실 속에서 시인으로서 역할과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걸 자책하는 자아의 객관적 상관물이다. 부끄러움과 슬픔은 그런 자아성찰 끝에 느끼는 자책감에서비롯된다. 화자는 자신의 이름이 묻힌 언덕을 무덤과 동일시하며 봄이 오면 그 위에 풀이 무성할 거라는 기대를 갖는다. 그런데 그 이면엔 ‘흙 속(이름)/언덕 위(풀)/하늘(별)’이란 수직적 공간 기호체계가 구축되며 이름은 풀의 씨앗이 되어 수직 성장해 그 수직적 대립은 해체된다. 즉 시인은 별이상징하는 밝은 세계를 향한 동경과 지향성을 수직적으로 성장하는 풀이라는 기호로 보여  준다. 따라 이름을 써서 흙으로 묻는 행위는 가입의례이며부활을 위한 죽음과 같다. 시 (2)에서 거리로부터 ‘높은 데’로 올라가려는 수직 상승의 욕구를 고백하고 있는데, 이는 하늘이 무너진 후의 부정적 현실로부터 벗어나 높은 가치의 세계로 초월하려는 의지를 암시 한다. 외에도 시 「肝간」에서 바닷가 바위 위에 간을 말리어 독수리에게 “와서 뜯어 먹어라”고 명령하는데, 그 배후엔 ‘바다 속(용궁)/바위 위/하늘’로 수직적 공간 기호체계가 구축된다. 그리고 시인은 날개가 있어 수직으로 상승적 운동을 할 수 있는 독수리로 초월 의지를 암시하고 있다. 이상에서 고찰한 것처럼 수직축의 하방으로부터 상방인 하늘로 상승하는 기호로 초월의지를 암시한다. 이는 하방보다 상방에 더욱 가치 있는 세계가존재한다고 여기는 인간의 보편적 인식 때문이다. 그러한 인식은 직립하는 인간의 머리 위에서 아래로 작용하는 중력의 방향과 관계가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또한 윤동주 시에서는 수직적 상승에 의해서만 아니라 수평적 이동으로도 이상세계를 향한 지향성을 보여 준다. 그 지향성은 바로 윤동주 시인의 시정신의 원형을 이루는 동심을 되찾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다. 시 「산골물」에서 “바다로 가자”, 시 「눈을 감고 간다」에서 “가진바 씨앗을/뿌리면서 가자” 등은 바로 그러한 예다. 그리고 기타의 시에서도 수평적 이동을 지시하는 ‘가다’가 빈번하게 등장하며 시인의 동심의 회복을 위한 초월의지를 암시하고 있다.     3. 맺음말   지금까지 윤동주 시인의 동시에 나타난 동심의 원형과 동심의 상징적 공간인 고향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동심과 고향의 상실을 어떻게 그리고 있으며 어떻게 극복하며 새로운 세계로 초월하는가를 고찰하였다. 윤동주 시인은 일찍 고향을 떠나 만주 땅에서 생활하거나 일본에서 유학을 하였다. 즉 짧은 생애의 많은 기간을 이국에서 생활하며 고향을 그리는 여러 편의 동시를 썼다. 그의 동시에서 고향은 여성적 이미지와 유계관계를 맺으면서 평화롭고 안락한 모성적 공간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인정으로 어우러져 꿈을 키우는 공간이다. 즉 밝고 영원한 이상적 세계와 자연 그리고 인간이 화합하며 사는 동심의 구체적이고 상징적 공간이다. 또한 민족이 화합하며 평화롭게 살던 상실 이전의 모국의 모습이다. 그러나 윤동주 시인은 그러한 동심과 고향을 상실하고 그 아픔을 보여 주고 있다. 상실한 고향의 모습은 늘 어두운 밤이 배경으로 되며 밝은 고향의모습과 대립된다. 그러한 어둠은 곧 암울한 시대와 슬픈 내면을 암시한다. 시인은 그러한 어둠에 매몰되지 않기 위하여 저항하며 새로운 고향을 지향한다. 그것은 곧 동심과 고향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며 잃어버린 조국을 찾고 싶은 의지다. 그런데 그 동심과 고향의 회복 과정을 보면, 어둠 속에서자아를 성찰하며 부끄럽고 슬픈 마음을 느낀다. 그리고 그 한 시인으로서 사명을 다하기 위해 어둠과 맞서 등불을 밝히며 밝은 미래의 세계를 지향한다. 그것은 자아의 내면에 흐르는 동심의 순수성을 지키고 상실한 고향과 모국을 되찾기 위한 의지다.(『문예운동』 2017년 겨울호에서 전재)        
4    {자료} - 일본의 윤동주, 일본의 톨스토이 댓글:  조회:2753  추천:0  2018-08-11
일본의 윤동주 일본의 톨스토이 1911년 일본의 조선 침략 비판한 의 도쿠토미 로카… ‘살아가려면 항상 모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반전평화사상             일본 규슈는 성질 급한 봄맞이꾼들이 매견월(梅見月)에 나들이하기 좋은 곳이다. 그렇다고 만개하기 직전의 초롱초롱한 매화 꽃망울 타령이나 벳푸 온천욕만으로 발길을 돌리기에는 역사의 상흔이 너무 쓰린 관광지다. 해마다 2월16일 윤동주 기일이면 후쿠오카 옛 형무소 부근 좁은 니시모모치공원(현 구치소 담장을 끼고 있음)에서는 ‘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대표 마나기 미기코) 회원들이 이 수려한 평화주의자 시인을 추모하는 모임을 연다. 이 모임 창설자 니시오카 겐지 후쿠오카대학 명예교수는 몇 년째 여기에다 윤동주 시비 건립을 위해 뛰고 있으나 당국은 허가를 않고 있다. 윤동주를 추모하는 일본인들 릿쿄대학과 도시샤대학에서도 윤동주 추모 행사는 매년 열리고 있다. 평화를 기리는 시민들이 이토록 열망하는데도 고희를 맞는 일본의 평화헌법 제9조는 휘청거리고, 아베 신조와 박근혜 두 정권은 역사 교과서로 궁합을 맞춰가며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자위대의 한반도 상륙 전초전으로 삼고 있다. 바야흐로 동아시아 대란의 징조다.     소호·로카 형제의 옛집과 로카의 초상. 임헌영, /갈무리 이럴 때 규슈의 구마모토에 꼭 찾아봐야 할 고택이 하나 있다. 도쿠토미 소호·로카 형제가 성장기를 보낸 집이다. 형 소호(1863~1957)는 이광수와 부자지간의 연을 맺은 ‘일본의 괴벨스’로 식민지 조선 ‘언론문화계의 총독’이었고, 동생 로카(1868~1927)는 톨스토이를 숭앙한 기독교 신자로 (不如歸)를 쓴 반침략 평화주의 작가다. 소호가 세운 오에의숙의 터전이기도 한 이 집 정원에는 개오동나무가 우람차다. 그들의 스승이자 도시샤대학 창설자인 니지마 조가 준 기념수의 후예들이다. 공해병으로 악명 높았던 미나마타에서 태어난 이 형제는 구마모토로 이사(1870), 여기서 성장기를 보냈다. 다섯 살 아래인 동생 도쿠토미 로카는 형의 파시즘 선동을 용납할 수 없어서, “경세의 수단으로서 형은 제국주의를 취하고 (…) 나는 인도의 대의를 취했다”는 (1903)을 공개했다. 형과의 변별성을 위해 아예 성을 갈아서 갓머리의 점을 없앤 ‘도미’(冨)로 표기해서 기념관이나 문학관은 그대로 명기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로카가 임종 때 형과 화해했다는 걸 부각시켜 동생의 인격이나 품성, 괴팍한 신앙심, 혹은 형에 대한 열등감이 불화의 원인이라며 동생의 평화주의를 폄하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 사상가이자 문인인 우치무라 간조와 작가이자 사회운동가인 기노시타 나오에 등은 로카의 입장을 적극 지지한다. 제국주의자·평화주의자 형제 로카는 기독교 신앙인으로 도시샤대학 영문과를 다닌 윤동주 시인의 선배인데, 그의 글 중 감동의 절정을 이룬 건 산문 (1911)이다. 1910년 5월, 일본은 조선 침략을 비판하는 등 진보 인사들을 일망타진하려고 ‘대역’ 조작 사건을 꾸며 레닌보다 16년이나 먼저 제국주의론(·1901)을 낸 고토쿠 슈스이 외 26명을 추렸다. 대역죄는 3심제가 아닌 단심으로 사형 선고 일주일 뒤(대법 확정 18시간 만에 처형된 인혁당 사건을 연상) 12명을 처형한 것은 1911년 1월24~25일. 교수대의 밧줄이 미처 식기도 전인 2월1일, 명문 제1고교(구제 1고) 변론부가 주관한 특별강연에 로카가 초청됐다. 그는 국가란 모자처럼 “머리 위에 쓰지만 머리를 지나치게 누르지 않게 해야” 되는데, 머리를 무겁게 하면 모반할 수밖에 없다면서 사자후를 토했다. “모반이란 반역이고 배반이다. 그럼 무엇을 배반하는가? 낡은 상식을 배반하는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생각할 수 없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해야만이 시대는 변하는 것이 아니던가.” “(…) 모반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모반인을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스스로 모반인이 되는 것을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새로운 것은 항상 모반이다.” “제군, 우리는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살아가려면 항상 모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에 대해서, 그리고 주위에 대해서.” 이 강연을 기획한 변론부 학생 가와카미 조타로는 나중에 사회당 위원장이 되는데, 그 감동은 2011년 로카 강연 100주년을 맞아 되살아났다. 서울에서도 이런 통쾌한 명연설을 들을 수는 없을까. 로카 저력의 뿌리는 반전·평화 사상의 톨스토이즘일 것이다. 1906년 예루살렘 순례를 마친 로카는 야스나야폴랴나에서 톨스토이와 함께 5일간 지내면서 평화사상을 체득했다. 1991년 고르바초프가 방일, 국회 연설에서 로카의 톨스토이 방문을 러일 친선의 예로 거론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귀국한 로카는 러일전쟁의 승리에 도취한 일본을 겨냥해 (12월)를 썼다. “그 승리도 사실은 러시아를 무릎 꿇린 것”이 아니라 “그들은 이제부터 본격적인 힘을 발휘하려는 움직임”이라 했다. “그대의 독립이 만약 10여 개 사단의 육군과 수십만 톤의 해군과 어떤 동맹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라면 그대의 독립은 실로 가여운 독립이로다”(, 하라 아키라 지음, 김연옥 옮김, 살림 펴냄, 146쪽, 재인용)라고 로카는 말한다. 남의 나라 자원을 약탈해 얻은 이익까지 매도한 그는 “한발 잘못 디디면 그대가 거둔 전승은 망국으로 가는 시작”이 된다고도 경고했다. 투철한 반전·평화 사상이다.     1967년 10월 도쿠토미 로카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일본 구마모토의 기쿠치공원에 건립된 문학비. 임헌영, /갈무리 로카의 저력, 톨스토이즘 역사학자 하라 아키라는 청일전쟁을 제1차 조선전쟁, 러일전쟁을 제2차 조선전쟁으로 불러야 옳다면서 그 이유를 오로지 조선 침략을 위한 것이었다는 데서 찾는다. 지금 미·일·한 3국 동맹이 제3차 조선전쟁을 초래할 조짐임을 시사해준 대목이다. 소호와 로카 형제의 서로 다른 역사인식은 바로 오늘의 우리에게 전쟁이냐 평화냐 하나를 선택하라고 압박한다. 2월, 규슈에 가면 윤동주 시인이 감방에서 들었을 하카타의 해조음을 꼭 들어보시라. 그의 절규에도 귀 기울여보시라. 그래도 역시나 아베와 박근혜 정권은 로카가 아닌 소호의 손을 잡을 것만 같다. 아, 울적한 병신년 정초다. /임헌영 문학비평가·민족문제연구소 소장
3    윤동주 시를 풀어서 산문으로 쓰다... 댓글:  조회:2334  추천:0  2018-08-11
시를 풀어서 산문으로 쓰기     맑은 가을 하늘엔 많은 별 들이 떠 있습니다. 나는 하나하나 별을 셀 준비를 합니다. 높은 하늘에 있는 많은 별을 셀 수 있을까요? 의문이 들지만 하나하나 셀 준비를 합니다. 하나하나 별을 가슴에 담으며 세어봅니다. 어서어서 세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곧 아침이 올테고, 그러면 별은 태양의 빛 때문에 빛을 잃고 말겁니다. 그러나 내일 밤도 남아있으니까요. 내일 밤에도 별은 뜰 것이니까요. 그리고 아직 남은 인생동안 밤을 많이 볼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도 저는 열심히 별을 셉니다. 별을 세면서... 하나하나 가슴에 담으며 생각합니다. 먼저 별 하나를 셌습니다. 눈을 감으니 지난 추억이 생각납니다. 다음에 별을 하나 더 세봅니다. 내 지난 사랑이 생각납니다. 별을 하나 더 세봅니다. 혼자 있을 수 밖에 없었던 때에 그 쓸쓸함이 생각납니다. 하나 더 세어봅니다. 그 동안 많이 뵙던, 그러나 이제는 뵐 수 없는 선생님들이 생각납니다. 동경하던 선생님이 생각납니다. 별을 하나 더 세어봅니다. 제가 좋아하던 감동적인 시들이 생각납니다. 마지막으로 별을 하너 더 세어봅니다...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어머니,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나는 별 하나마다 아름다운 말을 하나씩 붙여봅니다. 별을 세며 많은 생각이 났습니다. 초등학교 때, 옆에 앉았던 여자아이들과 친했던 남자아이들... 선생님들... 좋아했던 동화책... 이웃사람들의 이름과 생김새, 좋아했던 동물들... 모든게 생각나지만 가장 그립고 그리운 것은... 어머니입니다. 멀리 멀리 북간도에 계신 우리 어머니... 볼 수 없어서 더욱 더 그리운 어머님. 어머님이 너무나 그립고 보고싶고 생각납니다. 별을 세는것도 어쩌면 어머니가 생각나서 일지 모릅니다. 어머니가 불러주시던 제 이름을 땅바닥에 앉아 손가락으로 써봅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제 이름을 불러 주시는 어머니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재빨리 지워버렸습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오고 여름이 지나 다시 가을이 와도, 어머님은 볼 수 없는것일까요. 다시 가을이 될 때까지 이 곳엔 오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어머님을 한번 더 생각하고 저는 발걸음을 돌립니다.     나는 생각했다. 여러 라디오나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사람이 도저히 할려고 해도 할 수가 없는 짓을 하는 사람들을, 그 사람들이 그런 짓을 하고도 하늘을 바라보며 살 수 있는지 생각했다. 나는 다짐했다. 그러지 말아야지. 모든 다른 사람들이 그런 짓을 해도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내가 죽을 때 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정말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아야지. 그런 부도덕적인 행위를 한 사람들은 지나가는 바람에도 부들부들 떨 것이고, 괜히 두려워하며 살 것이니까. 난 당당하게 다녀야지. 생각했음에도...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나는 어쩌면 안 좋은 행동을 많이 했을지도 모른다. 부모님에게도 못되게 굴었을지도 모르고, 학교 친구에게도, 아는 사람에게도, 지나가는 사람에게도... 나 모르는 사이 나는 못된 짓을 많이 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다시 생각했다. 나는 여러사람 에게 해를 입혔을지 모른다... 괜히 매서운 바람이 분다. 마지막 남은 잎새가 흔들린다. 해를 입혔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괜히 괴로워진다. 난 다시 생각했다. 이제는 순결하게 살아야지. 남에게 해 입히지 않고 살아야지. 별을 노래하는 것처럼, 지나간 일은 반성하고 앞으로는 잘 해야지. 지나가버린 것들도 하나하나 사랑해주어야지. 살아있는 것도 죽어버린 것도, 나 자신도 남도, 다 사랑해주어야지. 그리고 나는 그렇게 살면 길이 보이리라 생각했다. 남에게 해를 입히며 산 사람들과는 다른 길이 보이겠지. 그 길을 걸으면 된다. 그 길은 곧 내가 살면서 한 행동의 대가일 것이다. 나는 생각했다. 이제부터라도, 죽을 때 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 것 이라고.     오랜만에 울적한 맘을 담아 산에 올라왔습니다. 산에 올라오니 맑은 공기와 푸른 나무들, 저마다 짹짹거리는 새들이 저를 반겨주는 것 같습니다. 걸으며 산을 올라오니 우물이 있었습니다. 목 좀 축이자는 생각으로 우물에 다가갔습니다. 다가간 우물에는 풍경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밝은 달과 흐르는 구름, 하늘이 비춰지며 물결 따라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남자가 비춰졌습니다. 제 얼굴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제가 생각해도 못마땅한 일을 한 제가 미워 우물 속에 돌을 던져 버렸습니다. 출렁이는 물을 보고 뒤를 돌아섰으나, 어쩐지 우울한 마음이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반성하고 있는 제 얼굴이 제가 생각해도 가여워 보였던 것 같습니다. 다시 뒤를 돌아 우물에 얼굴을 비춰봅니다. 우울한 얼굴은 그대로입니다. 다시 제 얼굴을 보니 오늘 있었던 일이 다시 떠올라 다시 울적해 져, 다시 뒤를 돌아버리고 맙니다. 그러다 다시 얼굴을 비춰보려 우물에 다가갑니다. 우물에 있는 내 얼굴이 너무나 부끄럽고 실망스럽습니다. 우물 속에는 밝은 달과 흐르는 구름, 하늘이 비춰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남자가 비춰졌습니다. 몇 번을 해도 제 얼굴은 실망스럽겠지요. 다시는 오늘같이 실망스러운 짓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후회를 해봅니다. 반성을 해봅니다. 여전히 우물에는 밝은 달과 흐르는 구름, 하늘과 실망스러운 제가 비춰지고 있습니다.    
2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울적 댓글:  조회:2653  추천:0  2018-08-11
울적 / 윤동주 처음 피워본 담배맛은  아침까지 목 안에서 간질 간질 타.  어제 밤에 하도 울적하기에  가만히 한대 피워보았더니.                   1937.6.        울적     처음 피워 본 담배맛은 아침까지 목 안에서 간질간질타. 어젯밤에 하도 울적하기에 가만히 한 대 피워 보았더니.  
1    [그것이 알고싶다] - "가리느냐 안 가리느냐"가 문제면 문제... 댓글:  조회:4201  추천:0  2018-08-11
히잡과 부르카, 니캅까지.. 이슬람 여성 복장 유래와 차이는  2018.08.10.  자동요약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니캅을 입은 여성 [EPA=연합뉴스] (런던=연합뉴스) 박대한 특파원 = 최근 보리스 존슨 영국 전 외무장관이 이슬람 전통 복장인 '부르카(burka)'를 입은 여성을 '은행강도', '우체통'과 같은 단어로 묘사하면서 정치권은 물론 영국 사회에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사실 여성의 얼굴 등을 가리는 이슬람 복장의 근거나 복장별 차이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0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더타임스에 따르면 신체의 어느 부위를 어떤 의복으로 가려야 하는지를 포함한 무슬림(이슬람 교도) 여성의 정숙함에 대한 지침은 수 세기 동안 논란이 돼 왔다. 머리에 쓰는 스카프나 면사포 등은 신앙심을 표현하기 위한 여성들의 자발적인 행동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여성들이 사회에 통합하는 것을 막기 위한 남성들의 억압의 표현인지에 대한 의문 역시 제기된다. 이슬람 경전 코란에는 '히잡(hijab)'에 대한 개념이 나오는데 이는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 머리를 숙이고 정결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묘사돼 있다. 여성과 관련해서는 자신과 관련 없는 이들 사이에 있을 때 아름다움과 장식품을 내보여서는 안 된다고 나와 있다. 아울러 '키마르(khimar·무슬림 여성들이 머리와 상체를 가리는 망토)'로 가슴을 가리도록 했다. 이는 7세기에 이미 여성들이 가슴을 가리기 위해 머리에 두르는 스카프를 일반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더타임스는 설명했다. 이슬람교 예언자 무함마드(마호메트)의 언행록인 하디스(Hadith)에는 여성이 사춘기에 이르면 얼굴과 손만 내보일 수 있다고 나와 있다. 이 같은 언급이 오늘날 여러 이슬람 국가와 종파에서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다. 아랍에미리트 방문 당시 히잡을 쓴 김정숙 여사 [연합뉴스 자료사진] 무슬림 여성의 복장 중 가장 흔하게 이용되는 것이 히잡이다. 히잡이란 단어는 '커튼', '파티션'에서 유래됐는데, 이슬람의 정숙함의 원칙을 가장 일반적으로 설명하는 단어로 이용되고 있다. 히잡은 통상 머리와 목, 어깨와 가슴을 덮는데 얼굴은 드러낸다. 히잡은 직사각형의 긴 천을 머리에 감은 뒤 어깨에 고정해 착용하는 '샤일라 히잡' 등 여러 종류가 있는데 페르시아만 국가에서 일반적이다. 히잡의 일종으로 몸 전체를 가리는 차도르는 이란에서 많이 입는다. 차도르를 입은 이란 여성 [EPA=연합뉴스] '니캅(niqab)'은 머리와 어깨뿐만 아니라 얼굴 역시 가리는 무슬림 여성 의복이다. 다만 틈이나 구멍을 만들어 눈은 가리지 않는다. 더타임스는 영국 내에서 니캅을 입는 여성의 숫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전체 130만명의 무슬림 여성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으리라고 추정했다. 니캅은 여성 의복에 대해 엄격함을 유지하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반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스페인의 한 관광지에서 니캅을 입은 여성이 사진을 찍는 모습 [EPA=연합뉴스] 존슨 전 장관의 발언으로 널리 알려진 부르카는 실제로는 영국 무슬림 여성들 사이에서도 거의 입지 않는 옷이다. 부르카는 니캅에서 더 나가 아예 눈까지 가린 형태다. 다만 그물망을 통해 외부를 바라볼 수 있도록 했다. 아프가니스탄, 시리아 및 이라크에 있는 극단주의 무장세력인 '이슬람국가(IS)' 등에서 여성들에게 부르카를 강요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일부 유럽 국가들은 부르카와 니캅을 비롯해 여성들이 얼굴 전체를 가리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프랑스와 벨기에, 오스트리아, 덴마크가 이미 이를 금지했고, 이집트에서도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네덜란드는 학교나 대중교통, 병원 등에서 얼굴 전체를 가리는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 덴마크에서 복장 규제에 항의하는 무슬림 여성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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