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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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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것이 알고싶다] - "기청제(祈晴祭)의 유래?... 댓글:  조회:4551  추천:0  2018-08-19
  시대 고려 성격 제사 유형 의식행사 분야 생활/민속·인류 요약 장마가 연일 계속되어 피해가 예상될 때 나라에서 비가 멎기를 빌던 제사.   내용 ‘영제(禜祭)’라고도 한다. 원래 ‘영(禜)’이란 산천신에게 빌어 수재·한재·여역(厲疫)을 물리치는 제사를 말한다. 고려 때부터 조선시대까지 지속된 농경의례의 하나로 주로 입추(立秋) 뒤까지 장마가 계속되어 흉년이 예상될 때에 날이 개기를 빌던 제사이다. 따라서, 음력 7, 8월에 가장 많이 행해졌고 그 다음이 6월, 그리고 이밖에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에도 비가 그치기를 빌었다. 기청제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권제32 잡지 제1에 나오는 천상제(天上祭)와 사성문제(四城門祭)에서 나타난다. 사성문제는 대정문(大井門)·토산량문(吐山良門)·습비문(習比門)·왕후제문(王后梯門)에서 지냈고, 부정제(部庭祭)는 양부 사천상(梁部四川上), 곧 견수(犬首)·문열림(文熱林)·청연(靑淵)·박수(樸首)에서 지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고려사』 세가(世家) 권제4 1022년(현종 13) 10월조에 “장마로 비가 그치지 않아 날이 개기를 군망(郡望)에 빌었다.”라는 내용을 비롯하여, 정종 1년(1035), 문종 27년(1073)·31년, 숙종 3년(1098)·4년, 예종 1년(1106)·5년·8년, 인종 7년(1129), 공민왕 19년(1370)·20년·21년 등에 그 기록이 보인다. 제의는 기우제와 비슷하게, 천상(川上)·북악(北嶽)·송악(松嶽)·박연(朴淵)·상하신기(上下神祇)·태묘(太廟) 및 제신묘(諸神廟)·묘사(廟社)·팔릉(八陵)·사직(社稷)·군망·산천(山川)·불우(佛宇) 등에서 지냈는데, 이로 보아 그 방법이나 양상이 다양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 『고려사』 지(志) 권제17에는 비가 오랫동안 내리면 국문(國門)에 영제를 지내는데 이때 제사를 지내는 풍사단(風師壇)·우사단(雨師壇)과 같은 큰 규모의 제단들에 대한 언급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태종실록』 1404년(태종 4) 7월조에 “산천단(山川壇) 및 불우·신사(神祠)에 기청했다.”는 기록으로부터 시작하여 사대문에 영제를 지낸 기록이 고려 때보다 빈번하게 나타난다. 특히, 영조와 고종 때 가장 많이 나타난다. 1421년(세종 3) 6월 조에는 “예조에서 아뢰기를 고려 『고금상정례(古今詳定禮)』에 이르되, 장마가 그치지 않으면 서울 성(城)의 여러 문에 영제를 올리는데 각 문마다 3일 동안 매일 한 차례씩 하고, 장마가 그치지 않으면 이에 산천·악진(岳鎭)·해독(海瀆)에 3일 동안 기도한다. 그래도 그치지 않으면 사직과 종묘에 기도하며, 주현(州縣)에서는 성문(城門)에 영제를 지내고 경내(境內)의 산천에 기도한다.”고 하며, “장마가 오랫동안 덮쳐서 벼를 손상시켰으니, 국문과 주군(州郡)의 장마비가 많이 온 곳에 영제를 지낼 것을 진언하여 그대로 시행했다.”는 비교적 구체적인 기록도 전한다. 이로 보아 조선시대에도 고려시대의 예(禮)를 그대로 따랐음을 알 수 있다. 제의 장소 및 형식은 고려시대와 비슷하나 조선시대에는 주로 도성의 4문, 곧 숭례문(崇禮門)·흥인문(興仁門)·돈의문(敦義門)·숙정문(肅靖門)에서 많이 행해졌다. 『춘관지(春官志)』 권1 향사총재(享祀總載) 영제조(禜祭條)에 따르면, “4문에 당하3품관(堂下三品官)을 보내어 연사흘 기청제인 영제를 지내고, 그래도 비가 그치지 않으면 3차에 걸쳐서 다시 4문에서 거듭 행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대전회통(大典會通)』 권3 예전(禮典)에 따르면 “사문영제(四門禜祭)는 문 위에서 설행(設行)하되 개폐(開閉)하지 않을 수 없을 때에는 정원(政院 : 승정원)에서 군명(君命)을 받아 열고 닫는다.”고 하였다. 기우제가 거의 연중행사였고 해에 따라서는 수차 거듭되는 데 비하면, 기청제는 드문 편이기는 하지만 어진 왕도정치(王道政治)를 표방하던 농본국의 중대한 제정(祭政)의 한 부분이었음을 인식할 수 있다. 기청제는 민간에서도 지냈고, 의식은 기우제와 비슷했다고 하나 민간의 전승자료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덤으로 더...   요약 전근대시대 때 장마가 그치고 날씨가 맑아지기를 기원하는 제사.   기청제 ⓒ 연합뉴스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영제라고도 한다. 중농국가에서는 기우제와 함께 중요한 제사였다. 일반적으로 7, 8월 이후 입추까지 장마가 계속되어 흉년이 예상될 때 지냈다. 삼국시대부터 국가에서 기청제를 지낸 기록이 있다. 국가에서 행하는 기청제의 의식은 기우제와 비슷했다. 4대문에서 먼저 지냈는데, 그밖에 절과 송악·박연(朴淵) 등 명산대천, 종묘 등에서도 행했다. 고려의 〈고금상정례 古今詳定禮〉에서는 장마가 그치지 않으면 서울 성문에서 매일 1차례씩 3일 동안 지내고, 지방의 산천·악진에서 3일 동안 제사하며, 그래도 효험이 없으면 사직과 종묘에서 기도하며 주현에서는 성문에서 영제를 지내고, 경내의 산천에서 기도하도록 규정했다. 조선의 경우도 이와 유사했다. 도성의 4문에 당하삼품관을 보내 3일간 영제를 지내고 효험이 없으면 3번 다시 지냈다. 사문영제 동안은 성문을 닫는데 부득이 열어야 할 때는 승정원에서 왕명을 받아 개폐했다. 기청제는 민간에서도 행했는데, 역시 기우제와 유사했다고 한다. =====================///덤으로 더 더...   지금도 큰비가 내리면 재산 손실이 나거나,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는 일이 생깁니다. 천재지변이라지만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조선시대에도 큰비를 뜻하는 '대우(大雨)'라는 낱말이 무려 960번 나오며, 비가 오지 말게 해달라고 하늘에 비손하는 '기청제(祈晴祭)'라는 낱말도 225번이나 보입니다. 우선 큰비가 왔다는 예를 보면 세종 9년(1427년) 큰비가 내려 경북 상주에서 산사태가 나 묻혀 죽은 사람이 7명, 떠내려간 집이 43채이고, 선산·의성·함창·군위에서 떠내려가 죽은 사람이 23명, 산사태 난 곳이 무려 6,779군데나 된다고 나옵니다. 지금도 비가 오면 전쟁터를 방불케 할 만큼 아수라장이 되지만 그때는 더욱 처참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비가 계속해서 내리면 기청제를 지내지요. 특히 벼가 익어갈 무렵 오랫동안 내리는 비는 임금이 크게 걱정할 정도였습니다. 《태종실록》 36권(1418년 8월 7일자)에 "예조에서 아뢰기를, '백곡(百穀)이 결실할 때인 지금 오랫동안 계속해서 비가 내리니, 8일에 기청제를 행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기청제를 하는 동안에는 성 안으로 통하는 물길을 막고, 성 안의 모든 샘물을 덮으며, 물을 쓰면 안 되는 것은 물론 소변을 보아서도 안 되었습니다. 기청제 전날 밤에는 비를 섭섭하게 하는 일체의 행위는 금지되는데 심지어 부부가 각방을 써야 했습니다. 또 이날 음(陰)인 부녀자는 시장 나들이를 일절 금하고, 제사를 지내는 곳에는 양색(陽色)인 붉은 깃발을 휘날리고 제주(祭主)도 붉은 옷차림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양방(陽方)인 남문(南門)을 열고 음방(陰方)인 북문은 닫았습니다. 큰비에 백성이 피해를 볼까 걱정하는 임금의 마음이 느껴지나요? ===================덤으로 더 더 더...   입추   24절기 중에 열세 번째인 입추(立秋)는 음력 7월의 절기에 오기 때문에 양력으로는 8월 7일이나 8일경이며, 태양의 황경이 135도에 위치하는 날로서 입기일이다. 입추는 ‘가을(秋)로 들어서는(入) 절기’임을 의미하는 날이다. 동양력(東洋曆)에서 가을은 ‘입추 날부터 입동 전까지의 3개월’로 규정한다.   아직은 늦더위인 잔서(殘暑)가 진을 뺄 정도로 괴롭히면서 기승을 부리는 까닭에 가을을 실감하기 어려워도 밤이면 선선한 기운이나 바람이 조금씩 일기 시작한다. 무더운 여름 뙤약볕도 아랑 곳 하지 않고 매달려야 했던 고된 농사일에서 한걸음 옆으로 비켜서서 숨을 돌릴 여유가 주어지는 관계로 더욱 소중한 의미를 가지는 한가로운 틈새의 순간이다. 이런 이유에서 ‘7월은 어정 어정거리다가 보면 지나간다.’는 뜻으로 예부터 ‘어정 칠 월’이라는 별칭을 붙였는지도 모른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그 옛날 선조들은 입추 보름 동안을 닷새씩 나누어 3후(候)라고 규정했다. 이 중에서 초후에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중후(차후)에는 이슬이 진하게 내리며, 말후에는 쓰르라미가 운다고 했다.   입추에 즈음해 전해지는 중요한 풍속은 기청제(祈晴祭)를 들 수 있다. 입추 전후의 시기는 벼가 출수(出穗)를 하면서 한편에서는 한창 여물어가는 계절이다. 그런 중요한 시기인데도 불구하고 입추를 자나고도 대책 없이 비가 계속 내린다면 벼가 제대로 여물이 들지 않거나 영글지 못해 그 피해가 막심해질 가능성이 높다. 이 같이 입추를 지난 뒤에도 닷새 이상 비가 연이어지는 경우 예상되는 재앙을 막기 위해 조정이나 마을 공동으로 비를 멎게 해달라는 기청제를 지냈다. 이를 성문제(城門祭) 혹은 천상제(川上祭)라고도 불렀다. 비가 꼭 필요한 시기에 가뭄이 끝없이 지속될 때 정성을 다해 모시던 기우제와 일맥상통하는 풍습이다.   중국의 고문헌인 춘추번로(春秋繁露)에 기청제를 ‘영(榮)’이라고 정의하면서 제를 지내는 방법을 세세히 열거하고 있다. 먼저 성으로 들어오는 모든 물길을 완전히 틀어막는 한편 성 안의 모든 샘물을 덮는 것으로 제를 모실 채비를 한다. 그리고 제를 지내는 동안 성에 사는 모든 사람은 물을 사용하거나 심지어는 생리적인 배설인 소변도 보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금하도록 했다. 결국, 이 기청제를 지내는 동안 비를 떠올리는 어떤 유사한 행위도 일체 용납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심신이 정갈해야 한다는 이유에서 심지어는 남녀 사이의 방사(房事)까지도 금지시켰으며, 제를 지내는 기간에는 부부도 서로 다른 방을 쓰도록 엄하게 규제했다는 기록이다.   농경사회에서 입추 무렵이면 의례적으로 해오던 농사일이나 고유한 습속을 살핀다. 보통 입추를 지나고도 늦더위의 위력은 여전히 대단하지만 보일 듯 말듯 그 기세가 꺾이면서 참깨나 옥수수 같이 일찍 수확한 작물이 자라던 밭에는 가을에 김장에 쓰일 무나 배추 씨앗은 물론이고 구황작물로 재배하던 메밀도 그 무렵에 파종했다. 아울러 벼가 무럭무럭 자라 결실기에 드는 시기이기 때문에 병충해에 대한 대비는 물론이고 논에 물대기와 물빼기 작업에 주의를 기울였다. 일반적으로 이 시기에 비가 잦아 궂은날이 지속되거나 장마가 물러가지 않고 뜸을 들이면 벼의 이삭도열병이, 반대로 높은 고온이 지속되면 멸구 같은 해충이 기승을 부릴 위험이 크기 때문에 야무진 대비가 필요했다.   그 옛날 농사는 하늘에 많이 의존할 밖에 도리가 없는 환경이었다. 전체적으로 수리시설이 턱없이 부족해 우순풍조는 필요충분조건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조상들은 한 해의 풍흉을 점치는데 비와 바람이 많이 동원되었는데 입추에도 예외는 아니다. 예를 들면 입추에 ‘동풍이 불면 풍년이 든다.’라거나 ‘비가 조금 오면 풍년이 든다.’는 식으로 풍흉을 점쳤던 습속은 정겹기도 하다. 그렇지만 절박한 삶의 내면적인 진솔한 욕심을 여과 없이 겉으로 드러낸 것 같아 눈물겹기도 하다.   가난했던 조상들의 삶에서 일 년 중에 가장 어려웠던 시기는 춘궁기로 알려진 보릿고개(麥嶺期)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음력 3월에서 4월에 이르는 기간은 겨울을 나며 식량이 동이나 초근목피로 어렵사리 연명하거나 굶는 날이 많아 부황이 드는 목불인견의 참상이 허다했다. 춘궁은 분명히 어려운 시기였지만 새로 돋아난 나물이나 풋보리 바심을 하더라도 기근을 버텨냈다는 견해도 있다.   춘궁에 비해 가난한 사람들은 음력 7월경이 더욱 궁핍해서 견디기 어려웠다는 얘기이다. 이 시기를 일컬어 ‘칠궁(七窮)’이라고 했으며, ‘7월에 드는 궁핍한 시기’라는 정도의 뜻이 되리라. 칠궁 무렵에는 만만하게 뜯어다 먹거나 꺾어 먹을 나물이나 소채가 거의 없고 풋바심할 보리 같은 곡식도 없어 가난한 사람들은 보릿고개보다 더 고통스러웠다는 지적이다. 일반적으로 보리는 ‘이삭이 팬’ 뒤에 스무날 정도 지나면 풋바심해서 먹을 수 있다. 그에 비해서 벼는 ‘이삭이 팬’ 다음에 최소한 한 달 반 정도가 지나야 풋바심이 가능해 칠궁에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더욱 어려웠다는 견해이다. 이런 시절을 대변하는 뜻이었을까. ‘칠궁은 춘궁보다 무섭다.’라는 말까지 전해진다.   ‘가을의 문턱에 들어서는 절기’인 입추를 맞는 농민의 감회는 특별했을 것이다. 이른 봄부터 끝없는 일에 헤어나지 못하고 고된 농사일에 찌들어 허둥대면서 쇠잔해진 심신을 추스르며 잠시라도 숨을 고를 틈이 마련되었다는 이유에서 이다. 그렇게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가을걷이 채비를 빈틈없이 한다면 마냥 가볍고 흐뭇하며 기껍지 않을까.  
1    [그것이 알고싶다] - "기우제(祈雨祭)"의 유래?... 댓글:  조회:5277  추천:0  2018-08-19
  성격 제사 유형 의식행사 분야 생활/민속·인류 요약 가뭄이 들었을 때 비가 내리기를 비는 제사.   기우제 경남 합천군 대병면 창리 마을의 부녀자들이 밤에 몰래 디딜방아를 훔쳐와 강바닥에 세워놓고, 바가지로 물을 퍼부으면서 비가 내리기를 빌고 있다. 배도식 제공 ⓒ 배도식 | 한국학중앙연구원 내용 예로부터 우리 나라에서는 농업을 기본으로 삼아왔다. 농업에는 물이 필요하며, 그것은 곧 비를 의미하였다. 특히, 벼농사에는 적절한 강우량이 필요하나 우리 나라에서는 장마철에만 집중적으로 비가 내리고 그 전후에는 가뭄이 계속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따라서 수리시설이 부족했던 옛날일수록 기우제는 많을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은 전국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농민의 생사를 좌우하는 것이 농사이고, 그 농사를 좌우하는 것이 바로 비였기 때문에 기우제에는 가능한 모든 방법이 동원되어 왔다. 그러한 비에 대한 관심은 단군신화의 환웅이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내려 왔다는 기록에서부터 보인다. 삼국시대에는 삼국이 각각 시조묘·명산대천 등에 기우제를 올렸던 기록들이 『삼국사기』에 보인다. 그 중에는 왕이 직접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도 있고, 최근까지도 행해졌던 방법처럼 시장을 옮기고, 용을 그려서 비가 내리도록 빌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고려시대에도 기우제에는 국왕 이하 사람들이 근신하고, 천지·산천·종묘·부처·용신에게 제를 지냈다. 비가 내리도록 비는 법회(法會)도 열고, 도교의 태일(太一)에 초제(醮祭)도 올렸다. 그 중 잦았던 것은 무당을 모아 비가 내리도록 비는 취무도우(聚巫禱雨)의 기록이다. 많을 때에는 300명, 긴 날짜로는 6일씩, 흙으로 용을 만들고 비가 내리도록 빌기도 하였다. 『고려사절요』 권4 정종 2년조에 기우제를 행하는 예법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보면 가뭄 때에는 죄수들을 자세히 심리하여 죄 없이 억울하게 형벌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고,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고, 무덤이 파헤쳐져 밖으로 드러난 해골을 묻어 주었다. 그리고 큰 산이나 강·바다는 구름과 비를 일으키는 곳이라고 하여, 그에 대해서 각각 북교(北郊:북쪽 교외. 예전에 창의문 밖의 근교)에서 기도하고, 그 다음에 종묘에 빌었다. 이와 같이 7일마다 한 번씩 빌어도 비가 오지 않으면, 다시 큰 산·강·바다에 처음과 같이 기도하고, 가뭄이 더욱 심해지면 기우초제를 지내는 제단인 기우단에 제사 지낸다. 장터에서 사람들이 더위를 피하여 모자 쓰는 것, 부채질하는 것을 금지하였고, 관마(官馬)를 먹이는 데는 곡식을 쓰지 못하게 하였으며, 도살도 금하였다. 조정에서는 국왕과 백관들이 근신하였다. 국왕은 정전을 피하여 밖에서 정무를 보았으며, 반찬의 가짓수도 줄였다. 이것은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등 천재지변이 있는 것은 국왕이나 조정의 대신들이 덕이 없어 정치를 잘못한 것이라고 생각한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도 기우제는 잦았다.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보면 기우제가 음력으로 4월에서 7월 사이의 연중행사였음을 알 수 있다. 한 예로 태종 재위 18년간, 기우제에 관한 기록이 없는 것은 1403년(태종 3) 한 해뿐이다. 기타 17년 동안은 해마다 2∼3회씩, 16년 한 해 동안에는 9회의 기우제 기록이 보였다. 또, 반대로 이 18년 동안 6회의 기청제(祈晴祭) 기록도 보이는데, 이는 장마철인 6∼7월 사이에 행해졌다. 이렇게 나라에서 지내던 기우제 중에는 국행기우제(國行祈雨祭)의 12제차가 있어서 각 명산·대천·종묘·사직·북교의 용신들에게 지내는 복잡한 절차가 있었다. 12제차는 가뭄의 정도에 따라서 5월에 1차, 6월에 2차를 지내기도 하고, 5월에 5차까지, 6월에 8차까지 하기도 하고, 심하면 4월에 10차까지 하고 5월에 12차까지 다 끝내는 때도 있었다. 이러한 국행기우제에는 대신들을 제관으로 파견하였다. 그 밖의 기우제로 고려시대 이래의 취무도우도 많았고, 승려나 장님들을 절에 모아서 비를 빈 기록들도 있다. 한편 민간이나 지방관청의 기우제도 다양하였다. 1930년대의 유형과 방법들을 간단히 살피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일반적인 절차로서, 동제(洞祭)를 지낼 때와 같은 방식으로 제관들이 선출되고, 소머리·돼지·닭·술·과실·포·식혜 등의 제물을 차리고, 강신(降神)·헌주(獻酒)·독축(讀祝)·음복(飮福) 등의 절차를 지낸다. 그러고 나서 다음과 같은 기우제 나름의 독특한 방법들이 행해진다. (1) 산상분화(山上焚火) 제관들이나 마을사람들이 장작·솔가지·시초(柴草) 등을 산 위에 산더미처럼 쌓고 불을 지른다. 흔히 군(郡)에서 주최하여 수십 개 마을이 밤중에 같이 하므로 대단한 장관을 이루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는 까닭으로는 기원을 천신께 알리기 위해서라든가, 천신이 오르내리는 길을 밝힌다든가, 양기(陽氣)인 불로 음기인 비구름을 부른다는 등의 이유가 전해져 오나, 대개 옛 관습을 따른 것이다. 기압의 변화가 적은 밤중 고기압에 덥혀진 저기압의 충격이 비구름을 형성시킬 수 있으리라는 논의도 있다. (2) 물병 거꾸로 매달기와 물긷기 기우제 기간 중 마을사람들이 각기 자기집 처마 끝에 버들가지나 솔가지로 마개를 한 물병을 거꾸로 매단다. 이것은 낙수가 떨어지는 듯한 유사주술행위(類似呪術行爲)로, 유사한 현상은 유사한 결과를 낳는다는 원초적 심성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또 부인들이 강물을 키[箕]에 퍼서 머리에 이고 온몸을 적신 채 뭍으로 오르내리기를 되풀이한다. 이것도 위와 같은 유사주술행위로 보인다. 또 부인들이 각자 물동이에 강물을 길어 산 위의 기우제장에 가서 절을 하고 쏟아 버리기도 한다. (3) 시장 옮기기 삼국·고려·조선시대에 모두 기록이 있는 오랜 전통이다. 비가 내릴 때까지는 옮긴 장터에서 계속 장을 벌인다. 원시장터에는 무당을 모으거나 흙으로 큰 용을 빚어서 기우제를 계속 지내는 곳도 있었다. 그런데 조선 초기 한양(지금의 서울)의 경우는 원칙으로 시장을 종로에서 남쪽인 남대문이나 지금의 충무로 쪽으로 옮기는 동시에 남대문을 닫고 북문을 열었다. 이는 음기(陰氣)인 시장을 옮기면서 남문의 양기를 막고, 북문의 음기를 들이고 음기인 비구름을 맞으려는 음양설에 근거를 둔 주술적 신앙행위였던 것으로 보인다. (4) 용제(龍祭) 삼국시대부터 전국 각지에서 성행하던 방법이다. 용을 그려 붙이기도 하고, 용을 만들어서 빌기도 하였다. 장소는 기우제장이나 장터이고, 용의 크기도 60㎝에서 20여m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몸뚱이는 통나무에 짚을 감고 흙을 바르고 청색으로 비늘을 그린 다음, 머리 쪽에서는 무당들이 굿을 하고, 몸뚱이 쪽에서는 판수들이 독경을 하고, 꼬리 쪽에서는 중들이 염불을 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비구름을 자유로이 부른다는 용의 영력이 발휘되기를 촉진, 강청하는 것이다. (5) 줄다리기 줄다리기는 연중행사의 하나로 대개 정월대보름에 행해졌다. 그런데 이 줄을 용으로 인식하는 관념이 있었다. 그래서 줄다리기를 쌍룡상쟁(雙龍相爭)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 비구름을 기대하는 것이다. 이긴 편에 강우와 풍년이 약속된다고 믿어, 가물었을 때에 줄다리기를 벌여 쌍방이 결사적으로 줄을 당기는 곳들이 있었다. (6) 부정화(不淨化) 예로부터 오늘날에까지 계속 행해지는 전통적인 방법이다. 이것은 기우제장이나 용신이 있다고 전하는 용소(龍沼)·용연(龍淵) 등에 개를 잡아서 생피를 뿌리거나, 머리를 던져 넣어서 신성성을 더럽히는 것이다. 이 부정을 자취 없이 깨끗이 씻어내기 위하여 용신이 큰 비를 내린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한강이나 박연폭포에 용의 원수인 호랑이 머리를 넣었다는 기록들이 있다. (7) 묘 파기 명산의 명당에 조상을 모시면 자손이 번창한다는 풍수신앙에서 유래한 방법이다. 예로부터 많은 마을들은 명산의 기슭에 자리를 잡고 그 생기를 고루 받으면서, 한 집안의 독점을 막는다는 관념이 있었다. 또 명산에 시체를 묻으면 부정을 씻을 수 없고 비가 안 내린다는 관념도 있었다. 그래서 가뭄이 계속되면 누가 몰래 암장(暗葬)한 것으로 알고, 산을 뒤져서 묘를 파내고 시체가 있으면 이것을 드러내 놓는다. 이것 또한 산신에게 비를 내리고 부정을 씻게 하려는 부정화의 방법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작성된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에서 보면, 이러한 기우제들이 거의 자취를 감추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직 노인들의 체험담을 통해서 묘 파기·부정화·산상분화에 관한 세부 자료를 많이 얻을 수 있다. 특히 전라남도 도서지방과 산간지방에 기우제의 옛 모습이 많이 남아 있는데, 묘 파기는 부인들이 하는 일이었고, 산상분화와 부정화 방법들은 남자들이 면(面)단위 정도로 여러 마을이 동시에 하는 특색을 가지고 있다.  =========================덤으로 더...   요약 비에 의존하는 농업의 특성상 가뭄은 농경사회에서 가장 큰 재앙이었다. 따라서 기우제는 조정으로부터 자연마을에 이르기까지 나라 전체가 지내는 가장 큰 행사였다. 삼국시대에는 명산대천이나 시조묘에서 기우제를 지냈으며, 고려시대에는 불교식 법회인 태일이나 도교식의 초제, 무당을 모아서 지내는 취무도우 등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강우를 빌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식 기우제를 중심으로 각종 주술적 방법까지 동원된 기우풍습이 있었다.  민간에서도 다양한 기우 풍습이 있었다. 정초의 줄다리기는 줄을 용으로 인식하는 쌍룡상쟁의 상징으로서 기우를 비는 풍습이었다. 전라도 지역의 산상분화는 ‘양’인 불을 지핌으로써 ‘음’인 비가 내리기를 기대하는 풍습이었다. 그러나 기우풍습은 현재 관개수리의 발달과 더불어 거의 소멸되었다.   도우라고도 한다. 비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농업의 특성상 한발은 농경사회에서 가장 큰 재앙이었다. 따라서 기우제는 조정으로부터 자연마을에 이르기까지 나라 전체가 지내는 가장 큰 행사였다. 환웅이 풍백·우사·운사를 거느리고 하강했다는 기록은 이미 고조선 사회가 물에 의존하는 본격적인 농경사회로 진입했음을 알려준다. 기우제 기우제단, 세중옛돌박물관,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양지리 ⓒ 2015, All Rights Reserved.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삼국시대에는 명산대천이나 시조묘에서 기우제를 지냈으며, 고려시대에는 불교식 법회인 태일이나 도교식의 초제, 그리고 무당을 모아서 지내는 취무도우 등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강우를 빌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식 기우제를 중심으로 각종 주술적 방법까지 동원된 기우풍습이 있었다. 가뭄이 들면 임금을 비롯한 조정대신들이 모두 근신하였는데, 이는 임금이 천명을 잘못 받들고 정사를 부덕하게 했기 때문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초의 기록인 〈용재총화 慵齊叢話〉에는 거행 장소에 따라 12제차를 소개하고 있는데, 각 명산·대천·종묘·사직·북교의 용신에게 지내는 절차가 있었다. 이는 국행기우제를 설명한 것이었다. 한편 민간에서도 다양한 기우 풍습이 있었는데, 일반적 동제의 절차에 따라 기우제를 지낸 다음 여러 가지 주술적 방법이 동원되었다. 먼저 정초의 줄다리기는 줄을 용으로 인식하는 쌍룡상쟁의 상징으로서 기우를 비는 풍습이었다. 전라도 지역에서는 특히 산상분화가 성했는데, 양(陽)인 불을 지핌으로써 음인 비가 내리기를 기대하는 풍습이었다. 이는 밤에 대개 여러 마을이 함께 지냈기 때문에 대단한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또 조정에서 북묘의 용에게 제사지내는 것과 같이 민간에서는 용제를 지냈다. 용제는 기우제장이나 장터에서 지냈는데, 통나무에 짚을 감고 흙을 바른 다음 비늘 등을 그려 용의 형상을 만들고 제를 지냈다. 용신이 거주한다고 믿는 못에 호랑이의 머리나 개의 생피를 뿌려 더럽힘으로써 용이 비를 내려 그것을 씻어내리기를 기대하는 풍습도 일반적이었다. 또 사립문에 금줄을 치고 처마 끝에 물병을 거꾸로 매달아 비가 내리기를 기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우풍습은 현재 관개수리의 발달과 더불어 거의 소멸되었다. =====================덤으로 더 더... 기우제 때 흐르는 임금의 눈물 《현종실록》 12권, 7년(1666) 9월 3일 기록을 보면 "근래에 가뭄이 극심하고 폭풍이 연이어 불어와 벼가 심하게 손상되어 결실을 기대하기 어려우니, 백성을 생각하노라면 매우 근심스럽고 애가 탄다. 가을이 가까워지고 있지만 상규(常規)에 얽매여서는 안 되겠으니 기우제를 지내도록 하라"고 현종이 명을 내립니다. 예전엔 비가 오랫동안 오지 않아 가뭄이 들면 어느 나라건 기우제를 지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마을전체의 공동행사로 기우제를 지냈지요. 또 피를 뿌려 더럽혀놓으면 그것을 씻으려고 비를 내린다는 생각으로 개를 잡아 그 피를 산봉우리에 뿌려놓기도 했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가뭄이 심할 때 왕이 직접 백관을 거느리고 남교에 나와 기우제를 올렸는데, 일반에서는 시장을 옮기고, 부채질을 하거나 양산을 받는 일을 하지 않았으며, 양반도 관(冠)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정종실록》 1권(1399)에는 임금이 한식(寒食)이라 하여 친히 제릉(齊陵)에 제사하였는데, 제사 지낼 때 눈물을 흘렸으며 이때에 승도(僧徒)를 시켜 재궁(齋宮)을 수리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해가 바야흐로 흉년이니, 우선 이 공사를 정지하도록 하라"는 기록이 보입니다. 이 외에도 《조선왕조실록》에는 무려 1,000여 차례나 흉년기록이 나오는데 기우제를 지냄은 물론이고 신축하던 공사를 중지하고, 온 나라에 금주령을 내렸으며 죄수들을 풀어주었습니다. 특히 임금이 나라를 잘못 다스려 하늘의 벌을 받은 것이라 하여, 임금은 스스로 몸을 정결히 하고 하늘에 제사 지내는 것은 물론 식음을 전폐했습니다. 또 궁궐에서 초가로 거처를 옮겨 임금 스스로 근신하는 모습을 보였지요. 600년 종묘사직을 이끌어온 조선왕조의 최대무기는 가뭄 같은 국가위기에 처했을 때 보이는 임금과 백성의 한마음 정신이 아니었을까요? ==================///덤으로 더 더 더...     세종의 기우제 축문 / 세종 5년(1423년) 7월13일   삼라만상(森羅萬象)은 가뭄에 시달려 고사하기 직전이옵고, 억조창생(億兆蒼生)들이 하늘을 우러러 단비를 갈구하기 어느 덧 반 년이옵니다. 임금된 자가 덕이 없으면 삼재팔난(三災八難)으로 나라를 괴롭힌다 하였으니 혹 이 소자 도(세종의 이름)의 부덕으로 인한 벌책을 내리시옴인저, 여기 염천에 면류관(冕旒冠)·곤룡포(袞龍袍)로 벌을 서옵나니 일체 허물을 도 한 몸에 내리시고 단비를 점지해 주옵소서. ==================///   아래는 세종대왕께서 비가 오지 않을때 하셨던 기우제 축문 이라고 합니다.   "한 개인이라도 실망이 된 일이 있을 때에는 오히려 상제님을 부르게 되거든, 하물며 한 국가에 임금이 되어서 억조의 민중을 통솔하는 자이야 어떠하겠으며, 또 하물며 자식으로서 아비에 대하여 진실로 정의가 있다면 어찌 저의 어질고 어질지 못함을 계교하여 구원해 주기를 청하지 아니할 것이며,   또 더구나 나 한 사람으로 인하여 만물들이 모두 시르죽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면 어찌 상제님의 마음인들 편하게 될 것입니까.   이번의 한재가 사뭇 이처럼 극도에 이르기에 일찍이 산천과 사직(社稷)에까지 기도하고,   또 일찍이 부모와 조상에게도 고하였으나, 끝내 효과가 없어서 근심된 마음이 극도로 답답하여 가슴이 타고 애가 달아,   밥을 대하여도 먹히지 않고 자리에 누웠다가 도로 일어나곤 하여 더욱더욱 안타깝고 송구한 지가 여러날이 되오니,   어찌 속에 있는 대로 쏟아서 상제님께 소상히 고하여 도와주시기를 빌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이에 약소한 제물을 올리면서 어린 회포를 진술하오니, 엎드려 생각하건대 호천 상제께서 나의 쌓인 정성을 살피시고 나의 서정하는 말씀을 굽어보셔서,   잘못된 허물을 용서하시고 애련한 생각을 특히 내리시어, 흐뭇하게 비를 주심으로써 모든 마른 것을 소생시키며 여러가지 곡식도 잘 되게 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들과 억만의 생명으로 날짐승 물고기들 여러 종류에 이르기까지 다 살아 자랄 수 있도록 하여 주시면, 지극한 소원이 여기에 더 할 것이 없겠나이다.   [세종 9년 6월 14일] 임금께서 기우제 축문을 친히 전하다.   그리고 마침내 7일후, 일부 지방에서는 홍수가 날 정도의 비가 내린다... ========================/// 기우제   축문 올립니다.   이가뭄이 누구의 허물이겠습니까? 이른봄 내내 오늘까지 비다운 비가 오지 않음을 누구를 탓하오리까? 그동안 채워졌던 저수지의 물도말라 농자 천하지 대본이란 말이 무색할정도로 고통을 겪고 있나이다. 하늘이시여! 이땅에 넘쳐나던 수많은 생물들이 목말라하고 이땅에 울려퍼지던 숲의 노래가 통곡소리로 들리나이다. 이땅의 농부는 갈라진 땅을 내려다 보며 대성통곡의 눈물로 작물의 갈증을 달래고 있나이다. 용신이시여! 물속에 가만히 골방에 눌러 눌러 계시지만 말고 뜨거운 등살에 쏟아지는 시원한 물줄기를 만들어 보소서 물이 없으면 오곡의 작물이 말라죽어 올가을 용신께 드릴 보상도 메마를 것이옵니다. 물이없으면 용신님도 거처할곳이 없으니 부디 열심히 비를 만들어 이땅의 모든 것들이 소생할수 있도록 하시옵소서. 산신이시여 ! 높고높은 산을 다스리시는 산신들이여 높은데 올랐다 하여 아래만 굽어보지마시고 계곡의 물소리가 비명소리처럼 들리지는 않는지 바람불어 우는 나무들 혹시 목말라 우는 소리가 아닌지를 가리시어 넘나드는 구름을 가두어 비라도 내리게 하소서...   ===============================덤으로 더 더 더 더... 제산기우제(祭山祈雨祭):산신에 기우제를 지내는축문     維  歲次干支某月干支朔某日干支  本土住民 ㅇ ㅇ ㅇ   유  세차간지모월간지삭모일간지  본토주민          齋沐謹告于        재목근고우   主山之神  伏惟 주산지신  복유     名山有 神代天宣仁主地方管我生民惟此   명산유 신대천선인주지방관아생민유차     民生大本於農東作旣力不敢怠용1)方歲大旱民憂孔殷農違晩(旣種而枯當改以穀土皆焦)   민생대본어농동작기력불감태용   방세대한민우공은농위만(기종이고당개이곡토개초)     衆心如焚豈天有偏寔土異彊惟神有掌民切其望(自豈天以下至民切其望二句隨宜用捨)   중생여분기천유편식토이강유신유장민절기망(자기천이하지민절기망이구수의용사)     如魚其학2)如雁其口敖神明攸燭庶加恤慈上告于帝旁及百靈乞賜惠패3)注下몽4)몽(或改滂滂)   여어기학  여안기오  신명유촉서가휼자상고우제방급백령걸사혜패   주하몽몽 -(혹개방방)     비5)優비5)渥비5)灌비5)漑비5)苗勃然비5)有佳穀甘수繼時비5)至大熟謹具酒牲略薦微誠  尙   비우,비악,비관,비개             묘발연비   유가곡감수계시비  지대숙근구주생략천미성  상   饗 향   註1)심방변+庸 註2)삼수변+固 註3)비우밑에+沛 註4)삼수변+蒙 註5)하여금 비=인변+卑   제례상식>역주(譯註) 해설   1) 태세(太歲):제사 지내는 해의 간지(干支) 2) 삭일(朔日):제사 지내는 달의 초하루 일진(日辰) 3) 일진(日辰):제사날의 간지(干支) 4) 모관(某官):남자의 경우 관직이 있는분은 그 관명(官名)을 쓰고 없으면 학생이라고 쓴다 5) 모공(某公):남자의 경우 타인이 호칭할때는 본관(本貫)과 공(公)이라 쓰고 자손이 직접 제사를 지낼때에는 부군(府君)이라 쓰며 년소자-손아래 사람은 이를 쓰지 않는다 6) 모봉(某封):부인의 경우 옛날에는 남편이 관직에 오르면 그분의 처(妻)도 남편의 품게와 동일한 외명부 품계를 쓰며, 벼슬을 하지 않았다면 유인(孺人)이라 쓴다 7) 모씨(某氏):부인의 경우로서 남편에 따른 외명부 호칭을 쓰고 그 밑에 본관과 성씨를 쓴다 8) 제주촌칭(祭主寸稱):제사 지내는 자손의 촌칭인데 초상을 당하면 졸곡전(卒哭前)의 아버지 상(喪)에는 고자(孤子)라 쓰며, 어머니 상에는 애자(哀子), 부모가 모두 돌아가셨을 때에는 고애자(孤哀子)라 쓴다 9) 제위(제위):제사를 받으실 당사자인데 제주와의 촌수에 따라 각각 달리 쓴다 부친:현고(顯考),모친:현비(顯女比),조부:현조고(顯祖考),조모:현조모(顯祖母),라 쓰며 증조.고조고:현고조고(顯高祖考)로 쓰며,남편:현벽(顯벽),처(妻);망실(亡室)이라 쓴다 현(顯)자는 고인을 높이는 말이다 10) 봉사자명(奉祀者名):제사를 지내는 사람의 이름을 쓰되 아우 이하에는 쓰지 않는다 11) 고사자성명(告祀者姓名):산소에서 토지신에게 고사를 지낼 때 타인이 지낼 때는 그 사람의 이름을 쓰고 직접 제주(祭主)가 지낼 때는 제주의 이름만 쓴다 12) 감소고우(敢昭告于):아내의 제사에는 감(敢)자를 빼고 소고우(昭告于)라 하며 아우이하에는 고우(告于)만 쓴다 여기에서 감소고우는 감히 밝혀 아뢰옵나다 하는 말인데 감조곡우 라고도 읽는다 그런데 글자의 어원을 보면 소(昭)는 [평야(評也),소야(昭也),저야(著也)]등의 경우이며 [광야(光也),명야(明也),효야(曉야)]일 경우에는 조라 한다.  그리고 고(告)는 고상왈고=곡(告上曰告)이요 발하왈어(發下曰語)라는 말이 광운(廣韻)에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감소고우로 흔히 읽지만 감조곡우가 정확한 독축(讀祝)이다 13) 애모불녕(哀慕不寧):아내에게는 비도산고(悲悼酸告) 또는 불자승감(不自勝堪)이라 쓰며 형에게는 비통무이(悲痛無已),지정여하(至情如何)라 쓰며 아우에게는 비통외지(悲痛인변+畏至),정하가처(情何可處)라 쓰며 아들에게는 비념상속(悲念相續)심언여훼(心焉如火毁)라 쓴다 *외(인변+畏)는 애야(愛也) 14) 주과용신 건고근고(酒果用伸 虔告謹告);아우 이하에게는 주과용고(酒果用告) 궐유(厥由)라 쓴다 15) 호천망극(昊川罔極):은혜가 하늘과 같이 크고 넓어서 헤아릴 수 없다는 뜻 부모:호천망극, 조부모이상에게는 불승영모(不勝永慕),남편:不勝感愴), 아우 이하에게는 불자승감(不自勝感)이라 쓴다 16) 근이(謹以):아내와 아우 이하에는 자이(玆以)라 쓴다 17) 복유(伏惟):아내와 아우 이하에는 쓰지 않는다 18) 존령(尊靈):아내와 아우 이하에는 유령(惟靈)이라 쓴다 19) 애천(哀薦)-지천(祗薦):아내와 아우 이하에는 진차(陳此), 백숙부(伯叔父)에게는 천차(薦此)라 쓴다 20) 향(饗):높이 받드는 말이니 줄을 바꾸어 한 자 위에 쓴다 역주:년,월,일 본토에 거주하는 주민은 목욕재계하옵고, 삼가 주산의 신령님께 고하옵나이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데 명산의 신께서는 하늘을 대신하여 인(仁)을 베푸시고 우리 지방을 주관하시며 우리 주민을 관장하셨으니 큰 근본은 농사라고 생각합니다. 농사 짓는 것에 힘써 감히 게으르지 않는것이 본분을 다하는 것이니, 바야흐로 큰 가뭄에 민생의 근심이 크게 염려 되옵니다, 농사철이 늦어서 무리의 마음이 타는것 같은데 어찌 하늘이 치우침이 있으며, 이 땅이 다른 강토이겠읍니까, 오직 신께서 관장하심에 백성이 간절히 그 바라는것은 물고기가 목이 말라 물을 기다리는 것과 같고 기러기가 그 우는 것 같습니다. 신명께서 비치는 바, 거의 궁휼하심에 애자(愛慈)를 더할 것이니 위로 상제(上帝)님께 고하시고 곁으로 백령(百靈)에 미쳐서 은혜로운 비를 빌어 주시고 몽몽한 비를 내려 주소서. 하여금 넓고 두텁게 하여 주시고 하여금 씻고 논에 물대게 하여 주소서, 새싹으로 하여금 바로 일어나게 하시고 아름다운 곡식이 있게 하소서. 때에 맞는 단비를 주시어 큰 풍년이 들게 하소서 삼가 술과 고기를 갖추어 간략히 작은 정성을 드리오니 흠향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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