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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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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해란강은 유유히 흘러흘러 륙십리 평강벌 흥건히 적시고... 댓글:  조회:1955  추천:0  2018-10-12
4    청년문사 송몽규 다시 알아보기 댓글:  조회:3007  추천:0  2018-10-12
목차 접기 시인 윤동주의 평생의 동반자 독립운동의 길을 걷다 역동적인 《문우》 시절 소오우라 무게이가 되어 현해탄을 건너다 치안유지법의 마수에 걸리다 조선 독립의 미래를 엿보다 원수의 땅에 아들의 뼛가루 한 점 남기지 않겠다 윤동주와 친구들 앞줄 중앙 송몽규, 뒷줄 오른쪽 윤동주 시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가족이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면 친구는 내가 선택한 가족이다.’라고 말했다. 언제나 나를 믿어주는 가족과 친구는 지난한 인생살이에 기쁨과 위안을 주는 존재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시인 윤동주에게는 가족이자 친구로서 평생을 동행했던 한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송몽규이다. 고종사촌 사이였던 송몽규와 윤동주는 석 달 간격으로 한 집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같이 보냈고 나란히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했다. 이어서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에서 유학 생활하던 도중 독립운동 혐의로 함께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해방을 불과 몇 달 앞두고 수감되었던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한 달 간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윤동주는 오늘날 민족시인으로서 널리 추앙받고 있지만 그와 함께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발휘했고 뚜렷한 민족의식으로 조국의 독립을 갈망했던 송몽규는 그 동안 까맣게 잊혀져 있다가 2016년 개봉된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를 계기로 그 삶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시인 윤동주의 평생의 동반자 송몽규(宋夢奎)는 1917년 9월 28일 지금의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내에 있는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은진, 아명은 한범(韓範)이다. 아버지는 교육자였던 송창의, 어머니는 윤동주의 큰고모 윤신영이다. 그의 가족은 본래 충청도에 살았는데 구한말 간도 지역에 대한 청나라의 봉금정책이 풀리자 할아버지 송시억이 가솔을 이끌고 연해주로 가다가 길목에 있던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읍 웅상동에 눌러앉아 터전을 잡았다. 연변 명동촌 송몽규의 집 그의 집안은 전래 초기였던 기독교와 신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등 몹시 진취적인 가풍을 지니고 있었다. 송시억은 웅상동에 북일학교를 세웠으며, 송창의의 육촌동생 송창빈은 홍범도 부대 소속의 독립군으로 활약하다 1920년에 전사했고, 송창근은 미국에 유학하여 1931년 한국인 최초로 미국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와 목사로 활동했다. 이런 개방적인 분위기 속에서 송창의는 서울에서 신교육을 받고 주시경 선생으로부터 한글강습을 받았다. 1916년 그는 주시경의 《우리말본》의 서문을 쓴 박태환을 따라 명동촌에 가서 민족운동가이자 교육자인 김약연의 집에 머물렀다. 그때 김약연의 딸이자 윤동주의 어머니였던 김용 여사의 눈에 들어 윤신영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그때부터 송창의는 처가에 살면서 명동학교 조선어 교사로 봉직했고, 일제에 의해 명동중학교가 폐교되자 명동소학교에서 조선어를 가르쳤다. 1917년 9월 송몽규가 태어나고 석 달이 지난 12월 30일 윤신영의 동생 윤영석이 맏아들 윤동주를 얻었다. 그리하여 윤동주와 송몽규의 평생에 걸친 인연이 시작되었다. 송몽규는 8세 때인 1925년 4월 4일 윤동주, 문익환, 윤영선, 김정우 등과 함께 명동소학교에 입학했다. 4학년 때부터 송몽규는 경성에서 간행하던 《어린이》, 《아이생활》을 구독하며 문학의 꿈을 키웠다. 5학년 때는 윤동주와 함께 등사판으로 《새명동》이란 잡지를 만들기도 했다. 그는 성품이 엄하고 코가 커서 명동학교 생도들은 송호랑이, 콧대 등의 별명으로 불렀다.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그는 윤동주, 김정우와 함께 인근 대랍자(大拉子)에 있는 중국인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 동안 다니다 1932년 4월 은진중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두뇌가 명석했을 뿐만 아니라 성격이 활발하고 리더십이 뛰어나서 늘 앞장서서 친구들을 이끌었다. 나이보다 조숙했던 그는 윤동주와 함께 수많은 책을 섭렵하면서 창작 활동에 열중했다. 그 와중에 ‘문해(文海)’라는 호를 지어 사용했고, ‘문해장서(文海藏書)’라고 새긴 도장을 마련하여 자신의 책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 은진중학 3학년 때인 1934년 12월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 콩트 부문에 ‘술가락’이 송한범이란 필명으로 당선되어 뭇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독립운동의 길을 걷다 은진중학교 재학 시절 송몽규는 교사로 봉직하던 애국지사 명희조 선생의 독립의식에 크게 감화되었다. 도쿄제국대학 사학과 출신이었던 명희조 선생은 그 무렵 춘원 이광수의 계몽문학이 제시하는 사이비 이상주의에 도취된 제자들에게 서릿발 같은 기상으로 역사를 보는 바른 시각과 대의를 일깨워주었다. 재기발랄했던 송몽규는 명희조 선생의 강의를 통해 일제의 폭압과 조국의 비참한 현실을 직시하고 비감에 젖었다. 그리하여 19세 때인 1935년 3월, 명희조 선생으로부터 남경에 있는 낙양군관학교에서 2기생을 모집한다는 말을 듣자 은진중학교 4학년에 진급하지 않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혈혈단신 남경에 다다른 송몽규는 은진중학교 1년 선배인 라사행을 만나 백범 김구가 국민당 장제스 정부의 지원으로 운영하던 낙양군관학교 한인반에 2기생으로 입학했다. 그때부터 송몽규는 30여 명의 생도들과 함께 남경의 동관두 32호에 있는 민가에서 합숙하면서 군사훈련과 중국어 등을 공부했다. 교관은 엄항섭과 안중근 의사의 막내동생으로 독일 베를린대학 출신의 안공근이었다. 김구는 종종 찾아와 이들의 교육상황을 점검했다. 생도들은 중국정부로부터 식비 9원, 용돈 3원, 도합 12원을 지급받아 비교적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2개월여 뒤 생도들은 강소성 의흥현 용지산에 있는 불교사찰 용지사로 이동하여 10월 초까지 훈련을 받았다. 그때는 엄항섭이 총책임자였고, 김구의 장남으로 낙양군관학교 1기생이었던 김인이 교관으로 나섰다. 고된 훈련의 와중에도 송몽규는 생도들에게 원고를 받아 등사판으로 《신민(新民)》이란 잡지를 만들기도 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일제의 감시망이 촘촘하게 깔려있었으므로 그는 다른 생도들처럼 왕위지, 송한범, 고문해라는 세 가지 가명으로 활동했다. 송몽규는 정열적으로 훈련에 임했지만 현실과 이상은 달랐다. 함께 피땀 흘리며 훈련하던 생도들이 독립운동의 방법적 문제 때문에 점차 김구파, 김원봉파, 이청천파 등 세 갈래로 나뉘어 대립하는 등 분열상이 드러났던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공산당과 내전을 벌이고 있던 국민당 정부의 처지가 어려워지면서 낙양군관학교에 대한 지원이 끊어졌다. 그 때문에 1935년 10월 초 낙양군관학교 생도들은 해산하여 각자의 길을 걸어가야 했다. 송몽규는 용지산에서 내려온 뒤 산동성 성도인 제남(?南)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지도자 이웅의 휘하에 들어갔다가 1936년 4월 10일 제남 주재 일본영사관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6월 27일 본적지인 함북 웅기경찰서로 압송되어 취조를 받았고, 8월 29일 청진 검사국으로 송치되어 16일 동안 구금되었다. 하지만 혐의가 중하지 않았던지 9월 14일 웅기경찰서로 복귀한 뒤 거주제한의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그렇지만 송몽규는 경찰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북간도의 집으로 돌아가 그 동안 피폐해진 심신을 달랬다. 이듬해인 1937년 4월 그는 은진중학교로 복학하려 했지만 학교당국에서는 문제학생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복학을 불허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용정에 있는 윤동주 집에 기숙하면서 대성중학교 4학년으로 편입했다. 그때부터 와신상담, 실력을 키워 독립운동의 대열에 동참하기로 마음을 다잡은 송몽규는 문학 활동 및 학업에 열중했다. 역동적인 《문우》 시절 1938년 초봄, 송몽규는 윤동주와 함께 서울에 가서 연희전문학교 문과 입학시험을 치렀다. 결과는 동반 합격이었다. 입학과 동시에 기숙사에 입주한 그는 윤동주, 원산 출신의 수재 강처중과 함께 3층 꼭대기에 있는 방을 함께 썼다. 윤동주의 산문 〈달을 쏘다〉에는 그들이 머물던 기숙사 창문으로 내려다본 가을날 달밤의 풍경이 그림처럼 묘사되어 있다. ‘가을 하늘은 역시 맑고 우거진 송림은 한 폭의 묵화다. 달빛은 솔가지에 솔가지에 쏟아져 바람인 양 솨- 소리가 날 듯하다.’ 엄혹한 일제 치하였지만 연전은 기독교계 학교였으므로 송몽규는 자유롭게 창작활동을 영위할 수 있었다. 중학 시절 이미 문단에 데뷔한 바 있던 송몽규는 9월 12일 조선일보에 〈밤(夜)〉이란 시를 발표했다. 이 시에는 참담한 시대 상황 속에서도 결코 무릎 꿇지 않겠다는 그의 의지가 드러나고 있다. 고요히 침전된 어둠  만지울 듯 무거웁고  밤은 바다보다도 깊구나.  홀로 밤 헤아리는 이 맘은  험한 산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도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리 별을 쳐다보며 휘파람 분다. 1941년 4학년이 된 송몽규는 학생회 문예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잡지 《문우》의 편집을 맡았다. 당시 회장은 기숙사 동기였던 강처중이었다. 그해 6월 발행한 《문우》에 ‘꿈별’이란 필명으로 〈하늘과 더불어〉란 시를 게재했다. 윤동주는 여기에 〈새로운 길〉, 〈우물속의 自像畵(자상화)〉를 발표했다. 《문우》는 창씨개명, 조선어 사용 금지, 언론사 폐간 등 당시의  폭압적인 상황에 따라 본문이 일본어로 제한되었지만 시(詩)는 언어표현의 특성상 조선어 표기가 용인되었다. 하지만 편집과정에서 많은 원고가 검열에 걸려 삭제되었고, 일제의 강요로 문우회가 해산의 비운을 맞게 되었다. 그처럼 부산한 시기에 《문우》가 최후의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뒤편에 실려 있는 발행 후기에는 폐간 인사 및 발간 과정의 고충을 설명하는 송몽규의 목소리가 담겨있다. ‘이 잡지를 받은 사람들은 내용의 빈약함, 편집의 형편없음에 얼굴을 찌푸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고 경험이 없는 학생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과, 동분서주하며 모은 원고의 대부분을 게재할 수 없었던 점을 양해 받고 싶다. 국민총력운동에 통합하여 학원의 신 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문우회는 해산하게 된다. 그렇기에 교우회의 발행으로써는 이것이 최후의 잡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잡지 발행 사업은 연맹으로 계승되어 더욱 더 좋은 잡지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새로운 것에 합류하는 것을 기뻐하며 그것에 힘쓸 것을 맹세하며 이번 마지막 호를 보낸다.’ 소오우라 무게이가 되어 현해탄을 건너다 여름방학을 맞아 윤동주와 함께 용정 집에 들른 송몽규는 집안 어른들의 고답적 의식 때문에 고통을 겪었다. 그들은 졸업을 앞둔 두 사람이 하루 빨리 사회에 나가 번듯한 직장을 잡고 가족들을 위해 살아가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고단한 삶에 부대끼고 있던 그들에게 식민지 조선의 암울한 현실은 먼 나라 이야기였다. 송몽규는 내심 반발했지만 곁에 있던 윤동주의 만류로 끓어오르는 울화통을 식혔다. 1941년 12월 27일 연희전문학교 졸업식이 거행되었다. 태평양전쟁의 개전으로 인해 이듬해 3월에 거행되어야 할 일정이 앞당겨진 것이다. 연전의 명예교장이었던 원한경 박사와 원일한 교수는 진주만 공습이 벌어진 12월 8일 하오에 체포되어 폐교가 된 감리교 신학대학에 연금되었고, 친일파인 윤치호가 교장으로 부임하여 의식을 주관했다. 졸업생은 문과 21명, 상과 50명, 이과 18명이었는데 송몽규는 졸업성적이 전체 2등이었으므로 우등상을 탔다. 한데 윤치호 교장이 부상으로 준 보따리를 펼쳐보니 일본 군국주의를 정당화하는 책자 일색이었다. 분개한 송몽규는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성을 내며 책을 땅바닥에 집어던져버렸다. 그처럼 반일의식에 투철한 송몽규였지만 졸업 후 일본 유학을 떠나는 과정에서 창씨개명이라는 난관을 만나 초지를 꺾는 아픔을 겪는다.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면 자칫 전선으로 끌려가 개죽음을 당할 수도 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집안의 설득을 받아들여 소오우라 무게이(宋村夢奎)가 되었다. 그때 윤동주 역시 히라누마 도오쥬우(平沼東柱)가 된다. 당시 두 사람은 도항증명서를 받기 위해 직접 연희전문학교의 졸업생 명부에 수록된 이름을 새로 바꾼 일본식 이름으로 고쳐야 했다. 윤동주는 이때의 부끄러운 심정을 〈참회록〉이라는 시로 남겼다. 그렇게 치욕을 감내하면서 일본으로 건너간 송몽규는 교토제국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하여 서양사학과에 들어갔고, 함께 응시했다가 낙방한 윤동주는 도쿄에 있는 릿교(立敎)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진학했다. 치안유지법의 마수에 걸리다 교토에 도착한 송몽규는 명문으로 알려진 제3고등학교 재학생 고희욱과 함께 하숙을 시작했다. 그해 여름방학에 윤동주는 고향 용정으로 갔지만 그는 따로 조선과 만주 일대를 두루 살펴보고 돌아왔다. 여름방학이 끝난 뒤 윤동주가 릿교대학을 나와 교토의 사립 기독교계 학교인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학과로 전학했다.그렇게 해서 송몽규는 윤동주와 또 다시 한 공간에서 살게 되었던 것이다. 일면 그것은 윤동주가 낙양군관학교 이래 요시찰인물이었던 송몽규의 우산 속으로 걸어 들어간 셈이었다. 그때부터 송몽규는 고희욱, 윤동주, 백인준 등과 자주 만나 조선의 앞날에 대하여 토론했다. 일본경찰은 오래 전부터 요시찰 인물로 지목된 송몽규의 하숙집을 수시로 감시하면서 그와 고희욱, 윤동주와 나눈 대화내용을 엿들었고, 그들이 민족의 현실과 독립에 대하여 비분강개하는 사실에 대하여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해 7월 10일, 일본경찰은 송몽규와 고희욱을 급거 체포하여 시모가모(下鴨)경찰서에 구금했다. 이어서 7월14일 하숙집에서 귀향을 준비하던 윤동주까지 체포했다. 1941년 5월 15일 실시된 개정 치안유지법은 한층 엄격해지면서 ‘준비행위’를 했다고 판단되면 검거가 가능했다. 사실상 누구라도 범죄자로 만들 수 있었다. 이들에 대한 갑작스런 조치는 그해 7월 24일로 예정된 조선총독 고이소 구니아키의 간도 시찰을 염두에 둔 예비검속이라는 풍문이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송몽규는 면회 온 가족들에게 곧 석방될 것이라고 안심시켰지만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경찰과 검찰의 지루한 심문이 이어지면서 구금 기간이 길어지는가 싶더니 이듬해인 1944년 1월 19일 고희욱은 기소유예의 처분을 받고 풀려났지만 2월 22일 윤동주와 송몽규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정식 기소되었던 것이다. 조선 독립의 미래를 엿보다 1977년 10월, 일제 내무성 경보국 보안과에서 발행한 극비문서 〈특고월보(特高月報)〉 1943년 12월분에 실린 송몽규와 윤동주의 심문기록 〈재경 조선인 학생민족주의 그룹사건 책동 개요〉가 입수되면서 알려지지 않았던 두 사람의 혐의의 대강이 밝혀졌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79년 1월 일제 사법성 형사국 발행의 극비문서인 〈사상월보(思想月報)〉 제109호 1944년 4~6월분에 실린 송몽규에 대한 판결문과 관련자 처분결과 일람표가 입수되면서 두 사람의 형량이 알려졌고, 두 사람의 체포 혐의가 ‘독립운동’이었음이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1982년 8월에는 교토지방재판소의 판결문 사본을 통해 송몽규와 윤동주의 체포와 재판에 관련된 전모가 완전히 밝혀졌다. 이 판결문에 씌어있는 송몽규의 혐의 내용을 살펴보면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그 시기에 당시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재일유학생들이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첫째, 송몽규는 고희욱에게 이전의 조선독립운동은 외래사상에 편승한 것이라 확고한 이론 없이 감정적 폭동이라 실패한 것이라 하며, 우리는 학구적, 이론적으로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면서 독립의식을 앙양했다. 둘째, 송몽규는 윤동주에게 최근 조선에서 총독부의 압박으로 소학생, 중등학생이 일본어를 사용함으로써 조선어와 조선문이 멸망해가고 있으며, 만주국에서는 조선인들이 식량배급에 차별대우를 받고 있고, 최근의 징병제도는 훗날 조선독립을 실현할 때 일면 위력을 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셋째, 송몽규는 하숙집에서 윤동준, 백인준에게 징병제도를 비판하면서 앞으로 징병제도 때문에 조선인이 무기를 갖고 군사지식까지 얻으면 장차 일본이 패전할 무렵 우수한 지도자를 앞세워 무력봉기를 결행하여 독립을 실행할 수 있으며, 독립 초기에는 군 출신의 인사를 내세워 강력한 독재를 취해야 하고, 그 시기가 올 때까지 함께 실력을 양성하자며 독립 의식의 강화를 꾀했다. 넷째, 송몽규는 고희욱에게 태평양전쟁은 강화조약으로 종결될 가능성이 큰데, 그 과정에서 버마, 필리핀이 독립국으로 참가할 것이니, 우리도 그때 조선독립 여론을 환기하고 세계 각국의 동정을 얻어 단숨에 바라는 바 목적을 이룩해야 한다며 민족의식을 유발했다. 다섯째, 송몽규는 6월경 윤동주에게 찬드라보스를 지도자로 하는 인도 독립운동에 대하여 논의하면서 아직 일본의 세력이 강대하므로 우리도 그런 지도자를 얻기는 힘들지만 민족의식은 왕성하므로 훗날 일본이 피폐하여 호기가 도래하면 위대한 인물이 출현할 테니 그를 도와 궐기하자며 서로 격려했다. 원수의 땅에 아들의 뼛가루 한 점 남기지 않겠다 1944년 4월 13일, 교토지방재판소에서는 송몽규에게 징역 2년을 선고했다. 윤동주는 이보다 앞선 3월 13일에 역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두 사람은 교토에서 멀리 떨어진 규슈의 북서쪽에 있는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어 고달픈 수형생활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1년여가 흐른 1945년 2월 16일 윤동주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고, 그해 3월 6일 문익환 목사의 부친이었던 용정중앙장로교회 문재린 목사의 집례로 장례식이 치러졌다. 한데 그 다음날인 3월 7일에 송몽규마저 만27세의 창창한 나이로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윤동주의 시신을 수습하러 간 친척들과 면회한 자리에서 자신이 투옥 이후 매일 밤 의문의 주사를 맞았다는 증언을 남김으로써 일제로부터 생체실험을 당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신빙성을 얻고 있다. 당시 조카에 이어 아들의 부음까지 들은 어머니 윤신영은 주먹으로 가슴에 푸른 멍이 들 정도로 두드리며 통곡했다. 하지만 아버지 송창의의 처신은 더욱 비장했다.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송창의는 후쿠오카 화장터에서 아들의 시신을 화장한 다음 타고 남은 뼈를 빻는 자리에서 뼛가루가 주위에 튀자 주변의 흙을 모조리 쓸어 담으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왜 몽규의 뼛가루 한 점이라도 원수의 땅에 남기겠느냐.” 송몽규의 시신은 명동의 장재촌 뒷산에 안장되었다. 1945년 5월 20일 언 땅이 녹자 아버지는 애달픈 심정으로 그의 무덤 앞에 ‘청년문사송몽규지묘(靑年文士宋夢奎之墓)’라는 비석을 세워 주었다. 훗날 유족들은 송몽규가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했다고 주장했지만 정부와 학계 공히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재일유학생에 대한 일제 탄압의 일환으로 검거되었다가 억울하게 희생당했다는 것이 당시의 중론이었다. 하지만 유족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마침내 송몽규와 윤동주의 죽음에 관련된 진실이 빛을 볼 수 있었다. 송몽규의 삶은 일면 친구이자 동반자였던 윤동주의 순수한 문학에 가려진 측면도 있다. 하지만 그의 문학과 독립에 대한 열정은 해맑은 윤동주의 시어와 함께 민족의 아름다운 역사로 길이 남을 것이다.
3    윤동주가 떠난지 한세기가 지났음에도... 댓글:  조회:2065  추천:0  2018-10-12
1945년 2월 16일, 윤동주(尹東柱)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외마디 비명을 높이 지르고 운명한 지 7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내년 12월 30일이면 그가 지린성 명동촌(明洞村)에서 태어난 지 꼭 100년이 된다. 그러나 시인이 떠난 지 한 세기가 지났음에도 그를 추모하는 열기는 식을 줄 모른다.      윤동주의 〈서시〉는 한국인들이 가장 애송하는 시로 꼽히고, 저예산 영화 〈동주〉는 적은 상영관에도 불구하고 100만 관객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은 대형서점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4월 7일 서울역 인근 카페에서 윤동주의 장조카인 윤인석(尹仁石·60) 성균관대 건축학과 교수를 만났다. 윤 교수는 아버지 윤일주 교수의 뒤를 이어 성균관대에서 2대째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문화재청의 근대문화재분과 위원장인 윤 교수는 근대문화재의 문화재 심의가 늘어나면서 수원에서 서울로 자주 온다고 했다.      “시인 집안에서 건축학과 교수가 웬 말이냐”고 하자 “19세의 나이로 단신 월남한 아버지가 시로 생계를 이을 수 있었겠느냐”며 “결국 아버지도 생존을 위해 건축학과(서울대)에 들어갔던 것”이라고 했다.         유족의 책무    2005년 2월 16일 윤동주 시인 서거 60주기를 추념하는 행사가 연세대에서 열렸다. 맨 오른쪽이 윤인석 교수, 그 옆이 정창영 당시 연세대 총장. 사진=조선일보   — 영화 〈동주〉를 보니 엔딩 크레디트에 교수님 이름이 제일 먼저 나오더군요?      “육필원고 파일을 제공했을 뿐입니다. 이준익(李濬益) 감독이 저예산으로 여러 시도를 하며 시사회를 7회나 여는 것을 보고 감탄했습니다. 유족 입장에선 시인의 명예만 먹칠하지 않는다면 어느 정도 픽션이 가미되더라도 관계없다고 생각해요. 《윤동주 평전》을 썼던 송우혜(宋友惠) 선생이 시나리오 작가가 일본어 시집을 낸다고 설정하자 펄펄 뛰는 바람에 시를 영국에서 보내 영역시집으로 내는 것으로 수정했습니다.”      윤 교수는 “영화를 본 사람들이 윤동주와의 관계를 물을 때, ‘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라고 윤동주(강하늘)가 말하자, 누워 있던 아우 중에 ‘사람이 되지’라고 한 아이(윤일주)가 나의 아버지라고 말한다”라며 웃었다.      1917년 12월 윤동주는 지린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부친 윤영석(尹永錫·1895~1962)과 모친 김용(金龍·1891~1948) 사이의 3남 1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 아래로 누이동생 윤혜원(尹惠媛·1924~2011), 남동생 윤일주(尹一柱·1927~1985), 윤광주(尹光柱·1933~1962)가 있다.      윤동주 시인 3형제는 모두 시인이었다. 윤동주는 이역만리에서 요절했고, 윤일주 시인은 동주 형이 못내 안타까워 시작(詩作) 활동에만 전념했다. 형과 열 살 터울인 윤일주 교수는 1955년 《문학예술》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지만 시집 출간을 끝내 하지 않다가 아들 윤인석 교수가 부친 사후 1987년 동시집 《민들레 피리》(정음사)만 출간했다.      윤 교수는 “아버지가 김정(金正) 숭의여전 교수에게 삽화까지 부탁하는 등 시집을 완성해 놓으셨으나, ‘윤동주 동생’이란 부담으로 원고를 쥐고 계시다 돌아가셨다”고 했다. 막내 윤광주가 시인이란 사실을 알린 사람은 그의 매형 오형범(吳瀅範·1922~2015)씨다. 윤광주가 사망한 지 40년 만에 옌지에서 《옌볜일보》와 문학지 《천지》 등에 실린 그의 시 24편을 발굴한 것이다. 윤광주는 해방정국에서 월남하지 못하고 중국 공산치하에서 시인으로 활동하다 31세에 요절했다. 윤 교수는 3형제의 시를 한데 모아 시집을 출간할 계획을 갖고 있다.      2011년 12월 10일 윤동주의 여동생 윤혜원 여사가 호주 시드니에서 88세로 세상을 떠나면서 윤동주의 형제는 모두 저세상으로 갔다. 1948년 결혼한 윤혜원・오형범 부부는 그해 12월 월남하면서 룽징 고향집의 윤동주 육필원고와 노트 3권, 스크랩철, 사진 등 윤동주의 초기와 중기 작품 대부분을 위험을 무릅쓰고 갖고 나왔다.      1948년 1월 정음사에서 발간한 윤동주의 첫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31편만 실렸으나, 1955년 중판에서는 그 숫자가 3배나 늘어 93편이 됐다. 1976년 3판에서는 116편으로 크게 늘었다. 이 증보판과 1999년 《윤동주 자필시고 전집(사진판)》이 나온 것은 모두 윤혜원・오형범 부부 덕분이다.      윤혜원 여사는 생전에 “아버지가 갖고 나가라던 오빠의 대학노트 3권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몰랐다”고 했다. 윤 여사는 “남편 오형범 장로에게 절하고 싶다”고 했다. 이 부부는 2003년 윤동주와 고종사촌 송몽규(宋夢奎·1917~1945)의 묘를 보수하고, 윤동주 문학상을 후원하는 등 윤동주 추모사업에 생을 바쳤다.      윤인석 교수는 “고모와 고모부는 젊은 나이에 순절한 오빠의 고결한 이미지에 흠이 될까 자신들이 노출되지 않도록 애썼다”며 “그분들이 서울에서 부산으로, 필리핀과 호주로 계속 옮겨 산 것도 결국 그런 뜻을 실천한 것”이라고 했다.         연전 후배 정병욱, 동주 아우에게 누이동생 소개    윤인석 교수가 연세대에 기증한 윤동주 시인의 육필원고와 관련 자료들. 미공개 시 8편을 포함, 윤동주의 체취가 담긴 모든 육필원고가 공개됐다. 오른쪽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1948년 1월 정음사에서 간행한 첫 유고시집이고, 그 옆 큰 사이즈의 시집이 1955년판 증보판이다. 사진=조선일보   — 사람들이 교수님을 통해 윤동주의 모습을 연상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고모가 생전에 ‘4형제 중 제일 못난 것 둘이 넘어왔다’고 농담을 가끔 하시면서 사회적으로 활동을 활발히 하면 큰아버지의 이미지에 누(陋)가 될 것 같다고 했어요. 저도 사진 찍히는 걸 꺼리는 것을 보니 고모와 똑같은 콤플렉스가 생겼나 봅니다.”      큰아버지 세대가 모두 작고한 지금, 윤인석 교수는 유족대표 역할을 맡고 있다. 윤 교수는 “최근 큰아버지에 대한 문학 세계와 생애 연구가 다각도로 이뤄지고 있어, 유족들이 오히려 연구자분들에게 배우는 실정”이라고 했다.      — 윤동주의 시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은 정병욱(鄭炳昱·1922~1982) 전 서울대 교수의 헌신적 노력으로 알려졌지요?      “그분은 큰아버지가 다녔던 연희전문학교 문과의 두 해 후배입니다. 학교 기숙사에서 만나 문학에 대한 관심을 공유하며 교류했어요. 기숙사를 퇴사한 후에도 두 분은 하숙을 같이 구하고 졸업할 때까지 늘 함께 생활하셨다고 합니다.”      윤동주는 연희전문 졸업 기념으로 19편의 작품을 모아 시집 발간을 계획하였으나 일제강점기 상황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필로 3권을 묶어, 은사 이양하(李敭河) 선생, 룸메이트 정병욱에게 한 권씩 증정하고 한 권은 자신이 가졌다. 이양하 선생에게 증정한 것과 자신이 가졌던 것의 행방은 알 길이 없으나, 정병욱에게 증정한 것이 온전히 보관되어 오늘날 윤동주 시집의 근간이 되었다. 윤인석 교수의 말이다.      “정병욱 선생은 1943년 학병으로 끌려나가면서 윤동주 육필 자선 시집을 자신의 고향집(전남 광양군 진월면 망덕리: 부친의 사업차 경남 하동에서 일가가 옮겨와 생활함) 어머니에게 맡기고 떠났습니다. 어머니는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마루 널을 뜯어 그 아래에 원고를 넣은 항아리를 묻고 지푸라기로 건조상태가 유지되도록 보관했습니다. 광복 후 귀국한 정병욱 선생은 이 원고를 다시 받아들고 뛸 듯이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 후 1947년 2월 16일 서울 소공동 ‘플라워 회관’에서 윤동주와 한 달 후 같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 송몽규, 두 사람을 기리는 추도회가 열렸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유고시집을 간행하자는 데 뜻을 모으고, 유고 31편을 추려 이듬해 1월 정음사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간했다.      그 후, 일반에게 조금씩 윤동주의 시가 알려지기 시작할 때 정병욱 선생은 대학입시에서 국어과목 문제 중 일부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중에서 출제함으로써 대중에 윤동주의 시를 알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1970년대에는 이 시가 드디어 중·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까지 실렸다.      — 그 후 윤동주와 정병욱은 사돈지간이 됐다지요?      “1955년 2월 증보판을 간행한 후 정병욱 선생은 외동누이(정덕희 여사)와 시인의 동생(윤일주 교수)이 혼인하도록 다리를 놓았습니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직후 부부를 불러 자신이 간직하던 자선시집을 아버지께 되돌려주셨지요. 이로 인해 큰아버지가 도일 전 ‘정병욱 형에게’라고 증정사를 쓴 자선시집 원본이 유족 품으로 돌아오게 됐습니다. 제 형제들은 이 동생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고, 저는 정병욱 선생을 큰외삼촌이라 부릅니다.”         강처중, 일본유학 시절의 詩 보관      정병욱 선생이 시집 출판 준비에 한창일 때, 윤동주의 자선시집에 실렸던 19편 외에 초판 시집에 같이 실린 12편의 시 원고를 가지고 있었던 강처중(姜處重)이라는 인물이 나타난다. 강처중은 낱장의 종이에 윤동주가 도일 전에 쓴 것으로 보이는 〈팔복〉 〈위로〉 〈병원〉 〈못 자는 밤〉 〈돌아와 보는 밤〉 〈간〉 〈참회록〉과 동경의 릿쿄대학 용지에 쓴 〈흰 그림자〉 〈흐르는 거리〉 〈사랑스런 추억〉 〈쉽게 쓰여진 시〉 〈봄〉이라는 작품을 윤일주 교수에게 전달했다.      함경도 원산의 한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강처중은 연희전문학교 문과학생회인 ‘문우회’ 회장을 지냈고, 해방 후 《경향신문》 기자로 일했다. 그는 1947년 2월 13일자 신문에 윤동주의 〈쉽게 쓰여진 시〉를 정지용(鄭芝溶)의 작가 소개와 함께 게재함으로써 윤동주를 세상에 알렸다.      윤인석 교수는 “강처중 선생은 큰아버지의 도일 후 관련 물건들을 빠짐없이 챙겨두셨던 분”이라며 “큰아버지가 보셨던 40여 권의 책과 앉은뱅이 책상, 연희전문학교 졸업앨범 같은 것을 갖고 계시다가 1946년 월남한 아버지에게 돌려주셨다”고 했다.      — 1948년에 출판된 시집에는 강처중이 발문을, 정지용은 서문을 썼습니다. 그런데 1955년 증보판에는 이분들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까닭은 뭡니까.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정지용은 월북하고 강처중도 《경향신문》 기자로 좌익 활동하다 처형당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아버지와 정병욱 선생은 1955년의 증보판 시집에서 이분들의 글을 고민 끝에 삭제하셨던 것 같습니다. 남북의 이념대립 속에서 생겨난 슬픈 현실이었습니다.”         여동생 윤혜원 부부의 노력    여동생 윤혜원이 오형범과 결혼 직후인 1948년 윤동주 묘소를 찾은 모습. 왼쪽부터 윤동주의 매제 오형범, 막냇동생 윤광주, 여동생 윤혜원, 당숙 윤영춘의 동생 윤영선, 6촌동생 윤갑주.   — 중국 룽징 본가에 있는 윤동주 시인의 유품과 유고는 가져왔습니까.      “1946년 19세의 나이로 단신 월남한 아버지는 이후 형님의 유품과 유고 수습에 몰두했습니다. 아버지는 시집 발간을 위해 고향에 남아 있는 원고 노트를 인편으로 가지고 나올 것을 계획하였습니다. 마침 갓 결혼한 고모(윤혜원)에게 이 소식이 전해졌고, 고모 내외는 기독교 탄압도 피할 겸 월남하기로 하고 봇짐 속에 원고와 사진첩을 숨겨 1947년 12월 룽징을 떠났습니다. 북한 청진과 원산에서 1년간 월남할 기회를 엿보다 1948년 12월 말에 경기도 연천을 통과해 서울로 왔습니다.”      윤혜원 내외는 북한 공안원의 단속을 피하려고 부피가 작은 원고 노트만 봇짐 속에 챙겨 넣고 부피가 큰 사진첩은 룽징으로 되돌아가는 이웃 사람에게 맡겼다고 한다. 그런데 기차가 두만강을 도강하기 직전 남양 근처 산중에서 공안원의 승객 짐 검사가 벌어졌다. 놀란 이웃 사람은 화장실로 몸을 피했고, 안타깝게도 앨범을 창밖으로 내던지고 말았다. 윤동주의 사진이 유독 적은 것은 앨범의 유실 때문이다.      — 윤동주의 장례는 1945년 3월 6일 룽징 중앙장로교회 문재린(文在麟) 목사의 주관으로 치러집니다. 문재린 목사는 문익환(文益煥) 목사의 부친이지요?      “큰아버지와 문익환 목사는 어릴 적 친구로서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 동창입니다. 문익환 목사는 평소 큰아버지의 편모(片貌)에 관한 말씀을 많이 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장덕순(張德順) 선생, 김정우 선생, 강원룡(姜元龍) 목사도 큰아버지와 동창이시고요. 유영(柳玲) 선생은 큰아버지의 연희전문 시절에 대해 생생하게 들려주셨습니다. 동경 생활은 당시에 동경에서 유학하던 큰아버지의 당숙 윤영춘(尹永春) 선생께서 추억을 기록해 놓으신 것이 있고요.”      윤인석 교수는 “윤영춘 선생은 큰아버지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할아버지와 함께 현해탄을 건너 후쿠오카로 달려가, 시신을 수습하고 화장해 고향으로 모시고 왔다”며 “영화 〈동주〉 말미에 등장하는 것처럼, 생존해 있던 송몽규 아저씨를 만나 감옥 안에서 이름 모를 약물주사를 매일 맞고 있다는 증언을 듣고, 전쟁의 와중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자들에게 생체실험이 있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고 전했다.         평전 출간 노력      윤동주의 생전 모습, 작품에 관한 기록, 재판에 관한 언급은 대체적으로 유고시집 1955년판 부록에 기록된 것과 최현배(崔鉉培)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정음사 내에 설치해 운영하던 ‘외솔회’의 계간지 《나라사랑》 1976년 6월호에 실린 글들이 있다. 재판에 관련된 자료들은 1977년·1979년·1980년에 발견됐고 그 내용이 《문학사상》 1982년 10월호에 번역 게재됐다.      — 시집 발간과 더불어 윤동주 평전 작업도 진행했나요?      “아버지는 자료와 기록이 오랜 기간에 걸쳐 여러 군데 흩어져 있어 이들을 한데 묶고, 생전의 모습은 보충해 전기를 내실 생각을 하고 계셨습니다. 1970년대 말 《이상평전》을 엮어 내셨던 고은(高銀) 선생과 자료를 놓고 상의하시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본 적이 있거든요.”      — 그런데 전기 작업은 왜 고은 선생께서 맡지 않으셨나요?      “아버지께서 직접 집필하시는 것으로 생각을 바꾸셨어요. 사랑하는 형님의 일생을 다루는 일을 타인에게 맡기느니 당신 손수 챙겨서 생생하게 전하고 싶으셨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1980년대에 들어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하시면서 이 일을 문장력이 있다고 생각되는 둘째아들(윤인하)에게 맡길까도 생각하셨습니다.”      윤인석 교수는 “이러던 차에 송몽규 아저씨의 조카인 작가 송우혜 선생이 평전 집필 의향을 밝혀오셨고 아버지는 여러 가지 자료들을 넘기시고 증언을 하셨다”고 했다.      — 윤일주 교수는 1985년 11월 28일에 돌아가셨고 송우혜 선생의 《윤동주 평전》은 1988년 10월에 나왔네요?      “생생하게 증언해 줄 분들 대부분이 세상을 뜬 가운데 이 책마저 없었다면 큰아버지에 대해 종합적으로 알아볼 자료를 찾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송우혜 선생은 간도 역사를 깊게 연구하던 역사학자이자 소설가여서 조각처럼 흩어진 것들을 한데 묶어 방대한 작업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 국회도서관 직원, 우지고 쓰요시    연희전문 시절의 윤동주와 정병욱(오른쪽). 두 사람의 인연 덕에 오늘날 윤동주의 육필원고들이 살아남아 ‘사진판 전집’ 출간으로 햇빛을 보게 됐다.   일본의 윤동주 재판 관련 기록 발굴은 우연한 기회에 시작됐다. 1970년대 후반, 윤동주를 알고 있던 일본인이 서울 출장길에 윤일주 교수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윤일주 교수는 종로 YMCA 호텔에서 그 일본인을 만났다. 우지고 쓰요시(宇治鄕毅)라는 일본 국회 도서관 직원으로, 국립중앙도서관과 교류차 출장 중이었다.      공무를 마친 후, 국립중앙도서관 정병완(鄭炳浣) 열람과장에게 “시인 윤동주에 대해 알고 싶다”는 개인적인 부탁을 했고, 정병완 선생(정병욱 선생의 동생)은 “내 매제가 시인의 동생이니 만나보라”고 주선했다. 우지고 선생은 당시에 한국어를 배우면서 윤동주 시를 알게 됐고, 일제강점기에 고초를 겪다가 옥사한 것, 시인이 자신의 모교인 도시샤 대학 학생이었다는 것이 동기가 되어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호텔 방에서 우지고 선생을 만난 윤일주 교수는 ‘원수의 땅’ 일본에서 그의 시를 알고 찾아온 일본인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윤일주 교수는 우지고 선생에게 일본에 있을 법한 윤동주의 유고, 유품, 관련 자료들을 찾아봐 줄 것을 부탁했다. 우지고는 자료 전문가답게 윤동주와 송몽규 관련 자료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윤인석 교수의 말이다.      “그분이 틈나는 대로 관련 자료들을 수소문해 《특고월보》(내무성 경보국 보안과 발행), 《사상월보》(사법성 형사국 발행) 같은 비밀문서에 수록되어 있던 큰아버지와 송몽규 아저씨 관련 재판기록을 보내주면서 사건 전모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죄목 또한 ‘독립운동’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죠(윤동주는 건국훈장 ‘독립장’ 서훈). 요즘처럼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했던 시대에 국내에서 이러한 자료를 구해 볼 수 있었다는 것은 우지고 선생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묘소 찾기 작업에 나선 오무라 교수      — 1990년 한중수교가 이뤄지기 전까지 룽징의 윤동주 묘소는 방치된 겁니까.      “사실상 그렇지요. 아버지는 고향 떠나오신 후 매일 밤 고향집 뒷동산에서 뛰노는 꿈을 꾸셨다고 해요. 형님의 산소가 어떻게 되어 있을까 궁금해하셨습니다. 1984년 한 해 동안 연구차 일본 동경에 머물면서 와세다대 오무라 마쓰오(大村益夫) 교수가 중국의 옌볜 대학에서 1년간 체재할 계획이란 이야기를 듣습니다. 아버지는 간단한 약도를 그려주면서 큰아버지의 묘소를 찾아봐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이분은 옌볜 지역의 한국문학에 관심이 있어 한국어 공부를 하셨던 분입니다.”      1985년 4월 중국의 옌볜 대학에 간 오무라 교수는 중국 내의 조선족 문학연구를 시작하면서 현지인들에게 위치를 설명하며 묘소를 찾아줄 것을 부탁했다. 당시만 해도 묘소가 있는 룽징은 외국인들에게 개방된 곳이 아니었고 날씨까지 추워 추위가 누그러들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윤인석 교수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의 무덤을 찾아달라 하니, 찾으러 나선 분들도 처음엔 뜨악했던 것 같다”며 “지성으로 부탁하는 뜻을 알아차린 분들이 몇 주를 고생해 드디어 1985년 5월 14일에 온전하게 버티고 서 있는 묘비석을 발견했다”고 했다. 윤 교수는 당시 묘비석이 쓰러져 있었다는 설에 대해 “우거진 풀만 제거했을 뿐 비석은 온전히 서 있었고 오무라 선생은 그 앞에서 간단한 과일과 술로 제사를 지내고 묘지 단장을 같이 했다”고 했다.      — 윤동주 시집의 해외 번역 작업도 활발합니까.      “이부키 고(伊吹鄕) 선생의 일역 시집 《天と風と星と詩》(1984년)를 비롯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중국어로 번역됐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수필가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子) 선생이 큰아버지의 시를 설명하는 글 속에 이부키 고 선생의 번역시 일부를 인용해 일본 고등학교 현대문 교과서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 교토의 도시샤(同志社) 대학 시비도 명소가 됐습니다.      “도시샤 대학 측이 캠퍼스 내에 시비를 건립할 수 있게 해줘 남북한 학생들이 결성한 ‘코리아 클럽’에서 작은 시비를 건립하는 행사를 가졌습니다. 고베 한신 대지진 후의 어려움 속에서도 박희균 선생, 박세용 선생, 이우경 선생, 한석희 선생 등 시비 건립 사연을 듣고 아낌없이 지원을 해줘 기적이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이 밖에도 큰아버지의 묘를 찾는 것을 일본인(오무라 교수)에게 선수를 빼앗겨서 애석하다고 말씀하신 흥남철수의 영웅 고 현봉학(玄鳳學) 선생 등 많은 분께서 큰아버지의 작품세계와 유업을 기리는 일에 헌신하셨습니다.”         고오로기 형사, “기억할 수 없다”    일본 유학 첫해인 1942년 8월 4일 잠시 귀향한 윤동주(뒷줄 오른쪽). 앞줄 왼쪽부터 윤영선(윤동주의 당숙 윤영춘의 동생), 송몽규(윤동주의 사촌), 김추형(윤영선의 조카사위), 뒷줄 왼쪽이 윤길현(윤동주 조부의 육촌 동생). 윤동주의 삭발한 모습은 일본이 그해 4월 ‘학부 단발령’을 내린 결과다.   — 윤동주의 작품세계와 유업을 기리는 사업도 중요합니다만, 70년 전 이름 모를 주사로 생때같은 젊은이가 뼛가루가 돼 고향땅을 밟았다는 점에서 정부가 신원(伸冤) 차원에서 의혹규명에 나서야 하는 것 아닐까요.      “이름 모를 주사는 아직 문서로 증명되지 못했습니다. 피골이 상접한 송몽규가 면회를 간 윤영춘 당숙에게 ‘저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되었고 동주도 이 모양으로…’라는 말로 미뤄 예방접종이 아니라 당시 규슈제대에서 전시에 필요한 ‘혈장대용 생리식염수’를 죄수들에게 주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인간에 대한 생체실험이지요.”      — 영화 〈동주〉에는 시종일관 윤동주를 취조하는 형사 고오로기 사다오(興梠定)의 취조장면이 나옵니다. 당숙 윤영춘이 교토의 시모가모(下鴨) 경찰서로 달려가니 취조실에서 윤동주가 형사 앞에 앉아 조선말 시와 산문을 일본어로 번역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원고 뭉치는 부피가 상당했다고 했는데, 고오로기 형사가 취조를 마치고 일건 서류와 함께 검찰청으로 넘겼을 것으로 추정합니다만.      “약간 다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큰아버지는 유학 떠날 때 정병욱 선생에게 맡겼던 것과 같은 원고를 갖고 다녔던 것은 아닐까요? 강처중 선생에게 보낸 시를 필사해 놓았다거나 추가로 쓴 것이 있다면 발굴해 볼 만하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교토 시모가모 경찰서는 조사 자료 전부를 후쿠오카 형무소로 보냈을 겁니다. 후쿠오카 형무소는 제가 1988년 유학시절 현장에 가보니 형무소는 벌써 다른 곳으로 이전했고, 그 자리에 있던 구치소는 홀랑 불타버렸어요. 큰아버지를 화장했던 자리도 바다를 매립해 아파트들이 들어섰습니다.”      김수복(金秀福·62) 단국대 문창과 교수는 그의 책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평민사)에서 고오로기 형사를 만났던 유일한 인물 김찬정(金贊汀)씨를 소개하고 있다. 김찬정씨는 1982년 7월 교토의 시모가모 경찰서에서 〈경도부경찰부직원록(京都府警察部職員錄)〉을 통해 경찰부 특고과 내선계 순사부장 고오로기 사다오(당시 86세)란 이름을 확인한다. 그는 전화번호부 책을 통해 고오로기 형사의 자택 전화번호를 확인하고 가메오카시(龜岡市) 자택으로 찾아갔다. 당시 상황을 인용한다.      〈낡은 경도 이조역(二條驛)에서 복지산선(福知山線)을 타고 오후 1시경 구강시에 도착했다. 도로에 면한 잡화점이 고오로기 사다오 순사부장의 집이었다. 큰소리로 부르니 도데라(실내복)를 입은 노인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 고오로기 씨입니까.      “그렇습니다만.”      — 실은 고오로기 씨가 경찰에 계셨을 때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방문했습니다(한순간 노인의 빛 잃은 눈이 동요하는 듯했다).      “아, 옛날 일은 모두 잊어버려서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 그렇습니까(과자꾸러미를 선물로 내밀었다).      “싫소, 싫소, 갖고 돌아가시오.”      — 시모가모 경찰서에서 취조한 학생 중에 조선인 학생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 나… 생각할 수 없소.”      — 압수한 서류나 증거물은 패전 때 모두 태워버렸습니까.      “내가 구강경찰서에 있을 때 종전이 돼, 부(府)의 특고과에서 관계서류는 전부 태워버리라는 지시를 받았소. 구강경찰서 특고관계 서류는 내 스스로 처분해 버렸소. 그 뒤에 서류는 태우지 말라는 통고가 왔지만 이미 다 태워버렸기 때문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소.”      — 조선 학생으로부터 압수한 시나 산문을 번역시킨 듯한 기억은 없습니까.      “생각할 수 없소.”      고오로기는 조선인 학생 이야기만 나오면 “알지 못한다” “기억할 수 없다”고 했다. 답변을 끝내고 빨리 안으로 들어가려는 고오로기 씨의 등 뒤로 “실례했습니다”라는 인사를 하고 나왔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소”라는 언어의 공허함이 분노가 되어 중얼중얼 토해지고 있었다. 윤동주의 유고를 찾아내 한국 근대문학사에 찬연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려는 장대한 시도는 멋지게 헛일로 끝났다.〉         서울역의 윤동주 시(詩) 점자블록    2008년 서울 중구 초동교회 인근에서 만난 윤혜원 여사와 오형범씨 부부. 사진 왼쪽부터 윤인석 교수, 윤혜원 여사의 막내딸 오인경씨, 윤동주 관련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다고 기치로 전 NHK 프로듀서, 기자, 오형범 장로, 윤혜원 여사. 윤혜원 여사는 기자의 “윤동주 시인이 시를 쓰지 않았다면 무엇이 됐을 것 같으냐”는 질문에 “늘 무슨 생각에 골똘한 사람이었으니, 교사나 목사가 됐을지 모른다”고 했다.   수원행 전철을 타려는 윤인석 교수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역으로 향하던 그가 기자를 서울역 옛 청사 옆 골목으로 이끌었다. 롯데아울렛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자, 서울역 신청사 사이 골목이 눈 아래 드러났다. 하얀 보도블록과 검은 보도블록으로 장식된 보도를 가리키며 윤 교수가 “윤동주의 시가 점자로 새겨져 있다”고 했다.      윤 교수는 “한화가 당시 갤러리아 콩코스 서울역점(현 롯데아울렛)을 개발하면서 윤동주의 여행 관련 시로 시각장애인용 모자이크 점자블록을 설치하겠다는 아이디어를 내 내게 사용 승낙을 받은 적이 있다”며 “지금은 입구에 안내표지도 없고, 점자 보도블록도 군데군데 깨져나갔지만 새겨진 시는 아마도 〈사랑스런 추억〉 등 3편의 시일 것 같다”고 했다.      〈봄이 오던 아침, 서울 어느 쪼그만 정거장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나는 플랫폼에 간신히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담배를 피웠다/ 내 그림자는 담배 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 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 나래 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았다/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 주어/ 봄은 다 가고 -동경(東京)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까운 언덕에서 서성거릴 게다.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2    청년문사 송몽규 알아보기 댓글:  조회:2823  추천:0  2018-10-12
        1. 소개    그들은 한 집에서 석 달 간격으로 태어나서 대부분의 학창시절을 같이 보냈고, 거의 평생을 동반자로서 살아갔다. 그들은 같이 일본에 유학했고, 같은 도시에서 같은 사건, 같은 죄목으로 얽혀서 체포되고 재판을 받았으며, 같은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19일 간격을 두고 나란히 옥사했다. 두 사람은 참으로 평생을 두고 생과 사를 함께 나누었다. 그래서 윤동주 연구에서 송몽규란 인물은 도저히 빠뜨릴 수 없는 존재로 크게 자리 잡고 있다."-《윤동주 평전》 宋夢奎. 독립운동가. 윤동주의 사촌이며, 독립운동가이자 문인으로 활동했다. 윤동주의 고종사촌 형으로서 어린 시절 같이 자라고, 학업과 유학을 함께 했으며, 윤동주와 함께 잡혀가 똑같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했다. 아명은 송한범(宋韓範). 문호는 문해(문학의 바다). 필명으로 몽규(夢奎)를 우리말로 풀어쓴 "꿈별" 등이 있다. 이 본명은 그의 어머니가 꿈에서 큰 별을 보았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가명으로는 '고문해(高文海)'가 있다. 아명은 '한범'으로 어린 시절 송몽규를 알던 사람에게는 '한범이'로 불리는 일이 많다. 1917년 9월 28일 생이며, 1945년 3월 7일 해방을 몇달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본적지는 함경북도 경흥(慶興)이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출생지는 만주 간도성(間島省) 연길현(延吉縣) 지신촌(智新村) 명동둔(明東屯). 지금의 중국 조선족 자치구이다. 성격이 부끄럼 많고 조용한 윤동주와는 대조적으로, 소년 시절부터 활동적이고 리더쉽이 강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윤동주와 거의 모든 생애를 함께 한 형제 같은 인물. 다만 윤동주와는 달리 그리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윤동주 평전에 회고한 문익환 목사에 따르면 그 당시 어려서부터 성적을 보면 송몽규, 윤동주, 윤영선, 문익환 자신이 항상 선두 그룹이었는데, 그 중에서 운영선은 나중에 의사가 되었다고 한다. 문익환은 자신은 윤동주가 자신보다 한 발 앞선다는 것에 열등감을 느꼈고, 윤동주는 또 자신보다 송몽규가 한 발 앞선다는 것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동주는 몽규를 보고 "대기는 만성이다"라고 벼르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뒤집어보면 현재는 내가 뒤진다는걸 인정한다는 의미였을 것이라고.   편집 2. 생애      편집 2.1. 출생    송몽규의 아버지는 북간도 명동학교 조선어 교사이던 송창희(宋昌羲, 1891~1971)이다. 송몽규의 할아버지 송시억(宋始億)은 5세 때 충청도에서 연해주로 가다가 함경북도 경기군 웅기읍 우상동에 머물러 가문을 일으켰으며, 송창희는 서울에 유학을 다녀왔다. 송씨 문중은 북일학교(北一)라는 교육기관을 세웠는데, 송몽규의 삼촌 손창빈은 홍범도 부대에서 독립군으로 싸우다 1920년 전사, 송창근은 일본-미국으로 유학하여 1931년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송몽규의 어머니는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尹夏鉉, 1875-1947)의 딸로서, 윤동주의 아버지인 윤영석(永錫, 1895-1962)의 큰 누이동생인 윤신영(信永,1897-?)으로 그녀는 윤동주의 고모가 된다. 송창희는 25세 때 명동에 왔는데, 체격과 인물이 뛰어나서 윤동주의 어머니가 큰 시누이의 신랑감으로 소개하였고,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 장로가 자기 큰 딸과 선을 보게 하여 결혼시켰다고 한다. 송창희는 윤장로의 집에서 처가살이를 하며 명동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여, 조선어와 양잠을 가르쳤다. 송몽규는 1917년 파평 윤씨 가문에서 친정집에 와있던 윤하현 장로의 큰딸 신영에게 9월 28일 태어났다. 이후 12월 30일 이 집안의 외아들 영식의 가족에서 아들이 태어나서, 석 달을 차이 두고 윤동주와 함께 태어나, 다섯 살이 될때까지 한 집에서 자랐다. 윤창식이 따로 집을 구하고 처가살이를 했기 때문이다. 송몽규의 동생으로는 여동생 한복(1923년생), 남동생 우규(1931년생)가 있다.   편집 2.2. 학업    “윤동주는 문학에 특별한 재주가 있었고, 송몽규는 연설을 잘했으며, 정치적 리더십이 두드러져 장래 희망을 일찌감치 독립군으로 정해놓고 있었다.”-문익환 평전 1925년, 8살 나이로 같은 마을의 또래였던 윤동주, 문익환, 김정우 등과 함께 명동소학교에 입학, 교장이자 외숙부 김약연 선생에게 사사 받았으며, 문학에 뜻을 두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활발하고 리더쉽이 강한 인물로, 학생들을 모아서 연극 등을 공연하는데 주도했고, 5학년 때는 윤동주와 함께 《새 명동》이라는 등사판으로 찍은 문예지를 내기도 했다. 이 때, 윤동주와 함께 서울에서 수입해온 아동지 《어린이》,《아이생활》을 구독하여 읽고 친구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윤동주와는 정 반대의 성격이었다. 김신목 할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명동소학교가 '교회학교'에서 '인민학교'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송몽규가 큰 일을 했다고 한다. 1929년 봄, 그 아버지 송창희 선생은 교회학교를 인민학교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송몽규 역시 고작 12살 나이에 송창희 선생의 주장에 따라서 연설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워낙 다부진 성격이라 어린 나이였음에도 어른들 앞에서 당당하게 연설을 했다고 한다. 1931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으며, 윤동주와 함께 화룡현립 제1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 동안 한족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20여리의 등교길을 매일 함께 다녔다고 한다. 룡정으로 이사하면서 1932년 4월에 은진(恩眞) 중학교에 입학했으며 송몽규는 윤동주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된다. 1934년 12월, 중학교 3학년으로 18세 나이로 꽁트 《숟가락》을 써서 서울의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등단한다. 아명인 송한범으로 실렸다. 윤동주보다 이른 나이였으며 윤동주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고 한다. 1934년부터 문해(文海)라는 호를 썻다. 글(文)의 바다(海)라는 뜻으로 송몽규가 문학에 품고 있었던 큰 뜻을 짐작케 한다. 송몽규는 문해장서(文海藏書)라고 크게 새긴 사각도장을 마련하여, 자신의 책을 정리하고 분류하는데 사용했는데, 윤동주의 유품 가운데 이 도장이 찍힌게 몇 권 있다고 한다.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에서 한학을 가르치던 명희조 선생은 민족주의자였는데, 송몽규는 이때부터 민족의식을 강하게 가졌다고 한다.   편집 2.3. 독립군 투신    돌연 송몽규는 은진중학교를 중퇴하고, 가출하여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남경으로 떠나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낙양군관학교) 한인반에 입학하였다. 한인반으로서는 2기생. 임시정부의 김구가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계기로 하여 장개석에게 지원을 받아서 운영할 수 있게 되었던 학교로서, 100여명의 조선인 학생이 군사 교육을 받는 곳이었다. 당시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장개석은 이를 극비에 부쳤기 때문에 송몽규는 '왕위지'라는 중국식 가명으로 교육을 받았다. 은진중학교에서 한학을 가르치던 명희조(明羲朝) 선생[1]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1914년 평안남도 개천에서 출생한 라사행(羅士行) 같은 시기에 송몽규와 함께 은진 중학교 선배를 통해서 점조직으로 연결하여 임시정부를 찾아갔다고 한다. 이 때 잡지를 만들었는데 김구가 《신민(新民)》이라고 지어줬다고 한다. 1년간 교육을 받다가 중국의 재정지원 중단으로 반이 해체되자 학교를 떠났다. 1935년 11월에는 중국의 제남지구(濟南地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이웅의 일파에 투신하여 활동하였는데, 1936년 3월, 산동성 성도 제남(濟南)에서 일본 영사관 경찰부에 체포되었다. 이 이래로 일제 경찰의 블랙 리스트에 오르게 된다. 송몽규는 강제귀국 조치를 당하고, 1936년 6월에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살인 등의 혐의로 본적지 함북 웅기경찰서(雄基警察署)에 구금되었으며, 고문과 취조를 받다가 8월 말 무렵 석방되었다. 이 떄부터 경찰의 요시찰인물이 된다. 이후 송몽규가 일본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 『특고월보』에서는 송몽규가 1936년 3월에 아버지와 큰아버지의 권유로 자수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오류가 있다. 1936년 특고경찰이 작성한 '선인군관학교사건 관계자 검거 일람표'에 따르면 송몽규가 체포된 시간과 장소는 '1936년 4월 10일, 제남'으로서, 북간도 대랍자에서 일경에 자수했다고 기록된 '1936년 3월'과는 다르다. 『사상월보』에 실린 판결문에는 송몽규가 1936년 4월 부터 본적지 옹기경찰서에 유치되어 취조를 받았다고 적시되어 있다. 이는 선인군관학교사건 관계자 검거 일람표에 명시된 체포 시기, 정황과 일치한다. 송옹규는 송몽규가 일경에 잡혀서 본적지로 압송되는 현장을 우연하게 목격하였다. 이 역시 자수설이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한다. 만일 송몽규가 집안 어른들 권유에 따라서 자수를 해서 압송되었다면 본가에서 연락이 가서 압송 때부터 뒷바라지를 시작했을 것인데, 정작 옹기 본가 사람들은 송몽규의 압송 현장을 우연히 보고서야 체포되었다는걸 알게 되었고, 무슨 사건으로 체포된건지 전혀 몰라서 집안 어른들이 알아보려고 애썼다고 한다. 편집 2.4. 학업 재개    1937년 4월, 용정대성중학에 입학하여 학업을 재개했다고도 하고, 다시 만주로 건너가서 간도에 있던 국민고등학교(國民高等學校)를 졸업했다고도 한다. 조선족 신문에서는 전자, 국가보훈처 국립유공자 보훈록에서는 후자로 쓰고 있다. 본인은 은진중학교로 돌아갈 생각이었으나 요시찰인 딱지가 붙어서 어쩔 수 없이 다른 학교에 갈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1938년 4월에 서울로 가서 연희전문학교에 윤동주와 나란히 합격하였다. 경제적으로 유망한 학교에 들어가길 바라는 가족들의 기대와는 달리 연희전문 문과에 들어갔다. 하지만 당시 연희전문은 들어가기 어려운 학교였기 때문에 사촌 간이 나란히 합격했다는 것은 크나큰 경사였다.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 1938년의 8월에 송몽규는 시 《밤》을 적어서 조선일보에 발표하였다. 또한 연희전문에서는 1932년에 창간된 문과학생회 문학동아리들의 잡지 《문우(文友)》를 이어받아 문예부장으로서 활동했다. 문우의 마지막 호인 1941년 판에서 필명 '꿈별'로 '《하늘과 더불어》'[2]를 발표했다. 윤동주는 이 때 「새로운 길」、 「우물속의 自像畵(자상화)」를 문우에서 함께 발표하였다. 편집인은 일본유학을 함께 하게 된 강처중(姜處重). 『원고에다 광고에다 검열에다 교정에다… 도저히 2-3명으로는 어림도 없음을 느꼈다.(중략) 이 잡지를 받은 사람들은 내용의 빈약함, 편집의 형편없음에 얼굴을 찌푸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고 경험이 없는 학생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과, 동분서주하며 모은 원고의 대부분을 게재할 수 없었던 점을 양해 받고 싶다. 국민총력운동에 통합하여 학원의 신 체재를 확립하기 위하여 문우회는 해산하게 된다. 그렇기에 교우회의 발행으로써는 이것이 최후의 잡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잡지 발행 사업은 연맹으로 계승되어 더욱 더 좋은 잡지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새로운 것에 합류하는 것을 기뻐하며 그것에 힘쓸 것을 맹세하며 이번 마지막 호를 보낸다(후략)』 『原稿やら、広告やら、検閲やら、校正やら・・・・・・とても、二三人の手に依るべきでないことをつくづく感じた。(中略)この雑誌を受け取る人々は、内容の貧弱、編集のまづさなどのために顔をしかめるだらう。然し、これは若い、経験のない学生達の手によって出来上ったものであると云ふことと、東奔西走して、かき集めた原稿の大部分が載せられなかったことを諒解してもらひたい。国民総力運動に統合して、学園の新体制を確立せんがために、文友会は解散するやうになる。そして国民総力学校連盟は徹底的に活動しなければならないやうになる。そこで、交友会の発行としては、これが最後の雑誌になるわけである。然し雑誌発行の事業は連盟に継承されて、もっといい雑誌が出るだらうと思ふ。我々は新しきものへの合流を喜び且つそれへの尽力を誓ひながらこの最後の号を送る(後略)』(원문) 출처 송몽규는 자신들이 참가하게 된 문우 마지막 호에서 안타까운 심경이 가득한 후기를 남겼다. 대학에서 송몽규는 일제의 민족동화정책이 한국어를 폐지하고 일본어를 쓰게 하여 고유의 문화와 민족 정신을 말살하는데 있다고 보았고, 민족문화를 지키고 향상시키는데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1939년 2월 부터 동급생 윤동주, 백인준(白仁俊), 강처중(姜處重) 등과 함께 기숙사에서 모임을 가지고 동인잡지 간행, 문학작품 품평회를 열어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활동을 벌였다. 1942년 12월 27일 연희전문에서 2등으로 졸업하였고, 1942년 봄에 윤동주와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된다. 유학을 떠나면서 도항증명서를 얻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하게 된다. 윤동주는 후에 이 때의 감정을 '참회록'이라는 시로 드러내었다. 소무라 무게이(송촌몽규, 宋村夢奎); 1942.2.12 히라누마 도쥬(평소동주, 平沼東柱); 1942.1.29 교토제국대학 사학과 서양사학 전공에 합격했으며, 윤동주는 릿쿄대학에 들어갔다가 1942년 도시샤대학에 입학하여 송몽규와 재회했다. 42년 10월 부터 43년 7월 까지, 도지샤 대학의 윤동주와 제3고등학교 학생 고희욱(高熙旭) 등과 함께 교토 시내에서 자주 모임을 가졌고,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이 기회를 노려서 민족의 독립을 기획하는 한편, 민족정신을 부흥시킬 수 있는 학문적 연구를 하는 활동을 했다.    편집 2.5. 체포와 사망    1943년 7월 10일, "재경도(在京都) 조선인학생 민족주의그룹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윤동주는 7월 14일 체포되었다. 특별고등경찰에 체포되어, 시모가모 경찰서의 유치장에 감금되었다. 1944년 봄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았으며, 1944년 4월 13일에 윤동주와 함께 징역 2년 형을 받았다. 판결문에 따르면 송몽규는 일본의 민족말살정책을 비판하였으며, 일본이 머지 않아 패전할 것이므로 그 시기에 맞춰서 대세를 몰아 조선 독립을 이끌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고 한다. 형이 확정되어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윤동주와 함께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2월 16일 윤동주는 절명했으며, 3월 7일 송몽규 역시 사망하여 순국했다. 윤동주와 송몽규의 의문사에는 생체실험 의혹이 강하게 재기되고 있다. 송몽규의 시신은 명동 장재촌 뒷산에 묻혔으며, 윤동주의 비문을 지었던 윤동주 아버지의 친구 김석관이 《청년문사 송몽규 지묘》라는 비문을 썻다.   편집 3. 사후    송몽규와 인척지간으로 송몽규의 조카가 되는 송우혜는 《윤동주 평전》을 집필하면서 송몽규의 일생도 함께 정리하였다. 그 동안 무덤의 위치가 잘못 알려져 있어서 찾을 수 없었으나, 윤동주 평전을 집필하면서 수록된 증언 덕분에 올바른 묘지를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1990년 4월에 송몽규의 묘는 윤동주가 묻혀 있는 용정으로 이전하여 윤동주의 묘에서 10미터 정도 떨어진 가까운 곳에 함께 묻히게 되었다. 사후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편집 4. 송몽규 전집    송몽규의 작품은 거의 남지 않았는데, 동아일보 공모에 입선된 꽁트 《숟가락》, 연희전문에 문우에 발표한 《하늘과 더불어》, 조선일보 1938년 9월 20일자에 실린 《밤》이 남아 있다. 따라서 이 문단이 곧 송몽규 전집(…)이다. - 술가락 - 우리부부는 인제는 굶을 도리밖에 없엇다. 잡힐 것은 다 잡혀먹고 더잡힐 것조차 없엇다. 「아- 여보! 어디좀 나가 봐요!」 안해는 굶엇것마는 그래도 여자가 특유(特有)한 뾰루퉁한 소리로 고함을 지른다. 「………」 나는 다만 말없이 앉어 잇엇다. 안해는 말없이 앉아 눈만 껌벅이며 한숨만 쉬는 나를 이윽히 바라보더니 말할 나위도 없다는 듯이 얼골을 돌리고 또 눈물을 짜내기 시작한다. 나는 아닌게 아니라 가슴이 아펏다. 그러나 별 수 없었다. 둘 사이에는 다시 침묵이 흘럿다. 「아 여보 조흔수가 생겻소!」 얼마동안 말없이 앉아 잇다가 나는 문득 먼저 침묵을 때트렷다. 「뭐요? 조흔수? 무슨 조흔수란 말에 귀가 띠엿는지 나를 돌아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아니 저 우리 결혼할 때… 그 은술가락말이유」 「아니 여보 그래 그것마저 잡혀먹자는 말이요!」 내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안해는 다시 표독스운 소리로 말하며 또 다시 나를 흘겨본다. 사실 그 술가락을 잡히기도 어려웟다. 우리가 결혼할 때 저- 먼 외국 가잇는 내 안해[3]의 아버지로부터 선물로 온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 술가락과 함께 써보냇던 글을 나는 생각하여보앗다. 「너히들의 결혼을 축하한다. 머리가 히도록 잘 지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는 이 술가락을 선물로 보낸다. 이것을 보내는 뜻은 너히가 가정을 이룬뒤에 이술로 쌀죽이라도 떠먹으며 굶지말라는 것이다. 만일 이술에 쌀죽도 띠우지 안흐면 내가 이것을 보내는 뜻은 어글어 지고 만다.」 대개 이러한 뜻이엇다. 그러나 지금 쌀죽도 먹지 못하고 이 술가락마저 잡혀야만할 나의 신세를 생각할 때 하염없는 눈물이 흐를 뿐이다마는 굶은 나는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없이 「여보 어찌 하겟소 할 수 잇소」 나는 다시 무거운 입을 열고 힘없는 말로 안해를 다시 달래보앗다. 안해의 빰으로 눈물이 굴러 떨어지고 잇다. 「굶으면 굶엇지 그것은 못해요.」 안해는 목메인 소리로 말한다. 「아니 그래 어찌겟소. 곧 찾아내오면 그만이 아니오!」 나는 다시 안해의 동정을 살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없이 풀이 죽어 앉어잇다. 이에 힘을 얻은 나는 다시 「여보 갖다 잡히기오 발리 찾어내오면 되지 안겟소」 라고 말하엿다. 「글세 맘대로 해요」 안해는 할 수 없다는 듯이 힘없이 말하나 뺨으로 눈물이 더욱더 흘러내려오고잇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전재산인 술가락을 잡히기에는 뼈가 아팟다. 그것이 운수저라 해서보다도 우리의 결혼을 심축하면서 멀리 ××로 망명한 안해의 아버지가 남긴 오직 한 예물이엇기 때문이다. 「자 이건 자네 것 이건 자네 안해 것-세상없어도 이것을 없애서 안되네」 이러케 쓰엿던 그 편지의 말이 오히려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런 숟가락이건만 내것만은 잡힌지가 벌서 여러달이다. 술치 뒤에에는 축(祝)지를 좀 크게 쓰고 그 아래는 나와 안해의 이름과 결혼 이라고 해서(楷書)로 똑똑히 쓰여잇다. 나는 그것을 잡혀 쌀, 나무, 고기, 반찬거리를 사들고 집에 돌아왓다. 안해는 말없이 쌀음 받어 밥을 짓기 시작한다. 밥은 가마에서 소리를 내며 끓고잇다. 구수한 밥내음새가 코를 찌른다. 그럴때마다 나는 위가 꿈틀거림을 느끼며 춤을 삼켯다. 밥은 다되엇다. 김이 뭉게뭉게 떠오르는 밥을 가운데노코 우리 두 부부는 맞우 앉엇다. 밥을 막먹으려던 안해는 나를 똑바로 쏘아본다. 「자, 먹읍시다.」 미안해서 이러케 권해도 안해는 못들은체 하고는 나를 쏘아본다. 급기야 두 줄기 눈물이 천천이 안해의 볼을 흘러 나리엇다. 웨 저러고 잇을고? 생각하던 나는 「앗!」하고 외면하엿다. 밥 먹는데 무엇보다도 필요한 안해의 술가락이 없음을 그때서야 깨달앗던 까닭이다.  - 하늘과 더불어 - 하늘- 얽히여 나와 함께 슬픈 쪼각하늘 그래도 네게서 온 하늘을 알 수 있어 알 수 있어... 푸름이 깃들고 太陽이 지나고 구름이 흐르고 달이 엿보고 너하고만은 너하고만은 아득히 사라진 얘기를 되풀고싶다 오오- 하늘아- 모-든것이 흘러 흘러 갔단다. 꿈보다도 허전히 흘러갔단다. 괴로운 思念들만 뿌려 주고 미련도 없이 고요히 고요히... 이 가슴엔 意欲의 殘滓만 쓰디쓴 追憶의 反추만 남아 그 언덕을 나는 되씹으며 운단다. 그러나 戀人이 없어 孤獨스럽지 않아도 故鄕을 잃어 향수(鄕愁)스럽지 않아도 인제는 오직- 하늘속의 내맘을 잠그고 싶고 내맘속의 하늘을 간직하고 싶어 미풍(微風)이 웃는 아침을 기원(祈願)하련다. 그 아침에 너와 더불어 노래 부르기를 가만히 祈願하련다. - 밤 - 고요히 침전(沈澱)된 어둠 만지울듯 무거웁고 밤은 바다보다 깊구나 홀로 헤아리는 이 맘은 험한 산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리 별을 쳐다 쉬파람 분다   편집 5. 대중문화    윤동주의 「이런 날」(1936. 6. 10)에서 언급되는 '형'이란 송몽규를 뜻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사이 좋은正門의 두돌긔둥끝에서 五色旗와 太陽旗가 춤을추는날, 금(線)을 은地域의 아이들이즐거워하다, 아이들에게 하로의乾燥한學課로 해ㅅ말간 倦怠가 깃들고 ‘矛盾’ 두자를 理解치 하도록 머리가 單純하였구나, 이런 날에는 잃어버린 頑固하던 兄을, 부르고 싶다. -1936년 6월 10일 ― 윤동주 이런 날 윤동주를 주제로한 59편의 시를 엮어 '윤동주의 빛'이라는 시집을 낸 이탄 시인이 해당 시집 내에 송몽규라는 시를 적어놓은 것이 있다. 송몽규 이 탄 항상 윤동주의 뒤에는 송몽규가 있었다 윤동주의 앞에는 송몽규가 있었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그림자가 되어 있었다 무슨 일을 하든 윤동주의 조용한 얼굴에는 송몽규가 있었다 송몽규는 독립군에 들어가 있을 때도 그의 그림자는 남겨놓고 떠났다 학교는 그럭저럭 윤동주와 맞먹었어도 생각하는 것, 그것을 옮기는 것은 송몽규였다 실천자, 그는 혼자 돌아다니는 윤동주를 나무라지 않았다 윤동주가 시를 쓰는 일이 얼마나 보람된 일인가를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고종사촌의 아들 송몽규도 일본에 와 있었다 송몽규의 그림자는 넓고 넓었다 그는 그 안에서 쓰러진 벼농사를 일으켜 세우고 물을 대주는 일도 해야 했다 신작로에 말없이 백힌 돌 하나 그 돌 하나만이라도 뽑아서 뾰족하게 만들어야 했다 아세아에서 누가 일본의 힘을 누를 것인가 아세아에서 누가 일본에게 덤벼들 것인가 벌은 날아다니는 곤충 개미는 애써 먹을 양식을 마련하는 곤충 이 두 곤충의 삶을 비교하여 벌은 벌대로 개미는 개미대로 살아야 할 것을 요구했다 이 요구, 만해의 부릅뜬 언어, 조선독립의 이유서 벌은 일본이고 개미는 조선일지라도 각기 살아가야 한다 벌이 어떻게 개미를 도울 수 있단 말인가 송몽규의 생각도 이러했으리라 벌은 하루 종일 꿀을 모아야 하지만 저 허리가 잘록한 개미, 기어다니는 개미는 개미대로 즐거워야 한다 송몽규의 온몸은 이런 생각으로 차 있었다 이런 투로 그의 그림자는 그림자로 가득했다 윤동주의 뒤 윤동주의 앞 항상 그림자 안에서 지냈다 윤동주는 그림자만 보아도 뜻을 알았다 그 뜻에 다치거나 그 뜻에 흠집이 생기거나 그 뜻에 동티가 나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림자에 더 첨가할 수는 없어도 최소한 그림자를 잘 보관시키도록 해야 했다 마당에 서 있는 사철나무 껌껌해도 볼 수 있는 사철나무 항상 빛을 잃지 않은 사철나무의 뜻을 새삼 나무만큼 알았다 저 하늘에는 여전히 별이 떠 있다 사철나무나 저 별들은 변하지 않는 두 사람의 우정 하나가 동적이면 하나는 정적이다 윤동주는 조용한 성품이지만 마음속 깊은 곳은 두 사람이 같았다 하나는 그림자, 하나는 그림자에 싸인 사람   [1] 도쿄제국대학 사학과 동양사학 출신으로서, 민족주의자였다. [2] 목차에서는 "하늘과 더브러"로 되어 있다. [3] 아내      
1    학생 윤동주와 유명 시인 정지용 댓글:  조회:2215  추천:0  2018-10-12
[세종포스트 한지혜 기자] 해방 후 윤동주 유고 시집의 서문을 쓴 사람은 바로 정지용 시인이다. 청년 윤동주는 그를 동경했고, 죽어서는 그의 찬사를 받았다. 윤동주 시인의 삶과 문학세계를 다룬 시민 아카데미 3회차 강의가 8월 30일 오전 10시 30분 세종포스트빌딩 5층 청암아트홀에서 열렸다.   강연 주제는 ‘윤동주와 정지용’이다. 강연자는 이숭원 서울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이 교수는 서울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정지용 시인을 다룬 논문으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며 시와시학상, 김달진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6개의 상을 수상했다. 충남대, 한림대를 거쳐 서울여대까지 37년째 대학 강단에 서고 있다. 이 교수는 “윤동주 시인의 습작기 작품을 보면 정지용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며 “실제 윤동주 시인의 창작 노트를 통해서도 정 시인에 대한 동경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쉽게 씌여진 시’는 정지용 시인이 경향일보 주필로 재직할 때 세상에 공개된 작품”이라고 말했다. 잘 나가던 유명 시인과 학생 윤동주 시인 정지용의 모습. 윤동주 시인은 발간 이듬해인 1936년 3월 시집을 소장했다. 유품으로 남은 시집에는 정독한 것으로 보이는 메모 등이 그대로 기록돼있다. 정지용 시인은 1902년 충북 옥천에서 태어났다. 1917년 출생한 윤동주 시인과는 15년 차이다. 둘은 일본 교토 도시샤대학에서 유학했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정 시인은 22살이었던 1923년부터 1929년까지 수학했다. 윤 시인은 도쿄의 릿쿄대에 입학해 한 학기가 지난 1942년 10월 도시샤대 영어영문학과로 편입했다. 지금도 도시샤대학교에는 정지용 시인과 윤동주 시인의 시비가 나란히 서 있다. 1935년 시문학사에서 출간된 정지용 시집은 한국 문단계의 큰 주목을 큰 받았다. 하지만 곧 일본이 태평양전쟁에 뛰어들면서 전시체제에 접어들었고, 조선 신문·잡지도 차례대로 폐간됐다. 정 시인은 1941년 두 번째 시집 을 출간했지만 좌익 문학인으로 찍혀 경향신문 주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경기도 녹번리에서 은거하던 정 시인은 한국전쟁 이후 1950년 9월 행방불명됐다. 한동안 월북 문인으로 규정돼 작품조차 공개되지 못했다. 이 교수는 “당대 한국 최고의 시인이 사망 원인과 시점도 모른 채 사라지게 된 것은 민족사의 비극”이라고 평했다. 유품으로 남은 윤동주 시인의 장서에도 정지용 시집이 포함돼있다. 책에는 1936년 3월 19일 ‘동주소장’이라는 글귀가 친필로 쓰여있다. 윤 시인이 평양 숭실중학교에 재학하던 시절이다. 이 교수는 “윤동주 시인은 시집 발간 이듬해가 돼서야 정 시인의 책을 샀다”며 “경제 사정도 넉넉지 못했을 것이고, 당시 숭실중학교는 신사참배에 반대한 학생들이 동맹휴업과 동맹자퇴를 하던 시기였다. 3월 말 자퇴 직전 시집을 구입해 읽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유품이었던 정지용 시집을 보관한 이는 바로 윤동주 시인의 벗 강처중이다. 시집에는 밑줄, 단어 해석 등 윤 시인의 메모가 그대로 기록돼있는데, 그가 얼마나 시집을 정독했는지 알 수 있다. 당대 최고 시인과 윤동주의 만남   윤동주 시인의 유품 목록 중 하나인 정지용 시인의 시집. 종이에 친필로 날짜와 동주소장이라는 글귀가 써있다. 윤동주의 은진중학교 1년 선배인 라사행 목사의 증언을 통해 생전 윤동주 시인과 정지용 시인의 만남이 알려졌다. 1939년 윤동주는 북아현동에서 하숙을 했는데, 라사행 목사는 그와 함께 정지용 시인의 자택을 방문했다고 증언했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에도 비슷한 장면이 등장한다. 다만 영화에서는 만남의 시점과 동행인 등 약간의 픽션이 가미돼있다. 이 교수는 “윤동주 평전을 쓴 송우혜 소설가가 라사행 목사의 증언을 기록한 바에 따르면 정지용 자택을 생전 윤동주가 방문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며 “당시 정 시인의 집은 문인들의 사랑방으로 통했다”고 했다. 해방 후 정지용 시인은 윤동주 유고 시집  서문을 썼다. 1947년 12월 28일자 글이다. 당시 정 시인은 경향신문 주필, 윤 시인의 친구 강처중은 기자로 재직했다. 서문에는 윤 시인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를 향한 찬사가 함께 드러나있다. “청년 윤동주는 의지가 약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정시에 우수한 것이겠고, 그러나 뼈가 강하였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일적(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구나! 일제 강점기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앝을 것뿐이나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정지용 시인이 쓴 서문) 습작기 작품에서 보이는 정지용의 영향     윤동주 시인은 1941년 연희전문 졸업을 앞두고 19편의 시를 묶어  3권을 제작했다. 한 권은 자기가 소장하고, 한 권은 연희전문 스승 이양하 선생, 마지막 한 권은 후배 정병욱에게 선물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윤동주 시인의 시는 습작기인 1938년까지, 본격적인 자각을 갖고 쓴 1939년부터의 시로 나뉜다. 습작기 작품에는 정지용 시인의 영향, 본격적인 창작기 작품들은 독자적 사유에 바탕을 둔 성숙한 표현을 구사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 교수는 “습작 시절 정지용 시인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긴 하지만 두 시인의 시상이나 주제는 확연하게 다르다”며 “정 시인이 감각적인 언어 표현에 중점을 뒀다면 윤 시인은 내적 고뇌를 표현한 작품이 다수”라고 설명했다. 습작기 정 시인의 영향이 나타난 작품은 ‘모란봉에서’, ‘산림’, ‘압천’, ‘비로봉’, ‘사랑의 전당’ 등이다. 주로 시어나 표현적인 면에서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윤 시인은 1년이 넘는 절필기를 두 어 번 거친 뒤 1939년부터 자기만의 글쓰기에 집중했다. 첫 시집에 냈던 19편의 시가 그 때 나온 작품들이다. 이 교수는 “윤동주 시인은 노트에 습작하면서 정지용 시인의 영향을 받은 것을 그대로 기록했다”며 “당시 젊은 시인들이 정 시인을 답습하는 경향을 많이 보였는데, 윤 시인은 그만큼 순정하고 정직한 시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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