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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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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민족에 눈길을 돌리고 민족을 포옹해라" 댓글:  조회:2150  추천:0  2018-10-13
오늘 중국조선족 시인들은 무엇을 써야 하나?                                                                                     /김관웅         우리 중국조선족의 시문학은 90년대에 들어서서 대단한 번영기를 맞이하였다. 우리의 시문학은 그 량이나 질 면에서 모두5, 60년대의 문화혁명 이전시기는 물론이고 70년대말이후로부터 80년대말에 이르기까지의 우리의 시문학에 비해서도 대단한 성취를 이룩하였음은 세인이 공인하는 바이다. 그러나90년대이후의 우리 시문학에는 성과와 함께 문제점들도 적잖은것같다. 요즘 우리 문단에서 평론계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높은데 그중에서도 우리 평론가들이 둘러리평론, 좋다식평론만 하고 비판적고 건설적이 평론은 하지 않는다는데 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문학창작에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를 최고도로 개괄한다면, 아마도《무엇을 쓸것인가》와 《어떻게 쓸것인가》라는 두가지 문제라고 할수 있다. 사실 우리 시단의 문제점 역시 이 기본적인 두가지 문제와 여러 모로 련관되여 있다. 그러나 후자는 숙제로 남기고 오늘은 전자만 말하려고 한다.    문학이 주로 현실에 치중하는가 아니면 리상에 치중하는가 하는 척도로 가늠한다면 문학을 현실재현이나 현실에 대한 주관적감수표현의 사실주의문학과 리상재현이나 리상에 대한 주관적감수를 표현하는 랑만주의문학으로 량대변할수있다. 이런 이분법은 그 어느 나라나 민족의 문학에도 죄다 적용된다.    중국 전통문학에도 사실주의와 랑만주의라는2대전통이 있다. 창작의 각도에서 볼때 공자가 편찬했다는 《시경》이 사실주의의 원천이라면 굴원의 《초사》는 랑만주의의 원천이였다. 그리고 문학리론의 각도에서 볼때 유가들의 문예주장이 사실주의적이라면 도가의 문예주장은 랑만주의적이다. 중국전통시문학이 전성기에 이르렀던 당나라에 와서 사실주의시문학의 대표적시인인 시성(詩聖)두보와 랑만주의시문학의 대표적시인인 시선(詩仙)리백이 쌍벽을 이루었던 것은 하나의 좋은 실례라고 할수 있다.  《시경》의 가장 근본적인 정신은 민본사상에 기초한 사실주의정신이라고 할수 있다. 《시경》의 알맹이인 같은 그 당시 백성들의 노래들은 《배고픈 자는 먹을것을 노래하고, 일하는 자는 먹을것을 노래하고, 일하는 자는 생업을 노래한(飢者歌其食, 勞者歌其事)》 사실주의문학이라고 할수 있다.    확실히 《시경》중의 국풍과 같은 시들은 대부분 그 당시 백성들의 《슬픔과 기쁨에서 감동을 받아 생겨난것이고 그들의 생업이나 시대적사건들로부터 연유된 것이다. (皆感于哀 樂, 緣事爾發)》 이로부터 유가학파의 문론가들은 《시경》의 실례를 들어 문학과 예술은 민생의 질고를 관심하고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보의 삼리(三吏), 삼사(三吏)같은 시편들도 안사지란(安史之亂) 전후의 그 당시 사회의 혼란하고 암흑한 현실을 사실주의적으로 재현하고 그러한 현실에 대한 시인의 주관적 감수를 심각하게 표현한  것으로 하여 청사에 길이 빛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머리는 하늘을 향하고 두발은 땅을 밟고 서있듯이 리상을 추구하는 랑만주의와 자신이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 관심을 돌리는 사실주의는 인류문예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이요, 성향이라고 할수 있다. 특히 사회의 공통된 리상과 가치관이 붕괴된 무명(無名)시기에 있어서 불투명한 사회현실에 대한 인간들의 관심은 자연스레 고조되며 아울러 현실반영과 현실에 대한 사색에 주안점을 둔 사실주의문학은 필연적으로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여 문학예술의 정면에 나타나게 된다.    중국의 주류문단인 한족문단에서 1996년부터 1997년 두해 사이에 일어났던 문학리론과 평론계에서의 《인문정신대토론》과 소설분야에서의 《사실주의충격파》는 이점을 립증하여준다. 그런데 원래부터 대단한 활약상을 보여왔던 시분야에서 이 몇년래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현상이라고 하지 않을수없다. 그러나 시인들이나 시평가들도 무풍지대의 상아탑속에만 숨어 살아온 것은 아니며, 1998년부터는 90년대의 시문학에 대한 자아성찰을 하기 시작했다. 이 면에서 중국의 저명한 시평가 사면(谢冕)의 견해가 가장 주목을 끈다.    《90년대에 있어서의 최대의 완성은 시의 개인화이다. 이는 중국의 시문학발전력사의 전반을 놓고 볼때 근대이래 초부하적인 시의 사회승낙에 대한 커다란 시정이며, 날따라 엄중해져 가던 비시(非詩)적인 이데올로기화과정에 대한 철저한 시정이였다. 》    이는 중국 시문학의 하나의 커다란 진보이요, 하나의 커다란 얻음이라고 할수있다. 그러나 세상만사는 새옹지마라고 한걸음 진보하면 다른 면에서는 한걸음 후퇴하는 법이고 하나를 얻으면 필연적으로 하나를 잃는 법이다. 《시의 개인화는 사회적의의의 시로 허여금 숨막힐듯한 포위속에서 최종적으로 해탈되게는 했지만 아울러 커다란 화근을 내포하고있었다. 이때로부터 시인들은 자기만을 관심하고 자기밖의 모든것에 대해 무관심하고 멀리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아주 많은 부분의 시들은 자신의 자그마한 자아에 대한 끊임없는 에 불과했다. 시인들이 애오라지 자기만 관심하니 대중들도 자연스럽게 시를 멀리하고 심지어는 시를 거절하게 되였던 것이다. 》) 동상서 P. 118 이런 면에서 90년대의 중국의 시문학은 오히려  70년대말~80년대초반의 북도(北島)를 위수로 한 몽롱시보다도 한걸음 후퇴했다고 할수 있다.    개인적인 자아의 각성을 보여줌과 아울러 사회와 시대에 대한 관심과 추구를 표현한 북도류의 몽롱시에 비길때, 90년대이후의 중국의 시는 확실히 현실을 멀리하고 시문학이 마땅히 짊어져야 할 사회적책임을 도피했으며 오늘을 살아가는 대중들의 생존환경과 처지들에 대해 무관심햇던것만은 분명한것 같다. 90년대 중국시문학은 확실히 시의 사회반영, 사회비판 및 민중들의 고통에 대한 대언(代言)기능을 주동적으로 포기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 중국조선족문학은 중국문학이란 이 대계통속에서 변두리적위치에 처해있기에 중국 한족문단이라는 이 주류문단의 영향을 받지않을수없다. 우리의 시문학도 례외일수없다.   90년대이후 우리의 시단은 전례없이 번영했고 시창작의 량이나 질적인 면에서 확실이 이왕에 비해 한 차원 높아졌음은 사실이나 우리 민족의 생존상황을 관심하고 우리 민족의 오늘 날의 시대적정서를 대변하기 위해 애쓴 시편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것 역시 사실이다. 사실 시집들은 상당히 많이 나왔지만 현실감이 넘치는것들은 많지 못하다.   사실 많은 시집들에서는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시대정신의 맥박을 듣기어려우며 광범한 민중들의 희노애락의 시대적정서들을 느끼기 어렵다. 이면에서 소설이나 수필같은 분야보다 뒤떨어졌다고 생각한다. 이런 판단은 아마도 필자만의 개인적인 느낌만은 아닌것 같다. 작년 이른 봄에 발표된 조룡남선생님의 《자탄》같은것은 바로 이 점을 잘 설명해주고있다    《요즘세월/ 시인이 되여 시를 쓰다는것은/ 얼마나 허망하고 어리석은 짓인 가/ 절로도 허구픈 웃음이 난다/ / 어저께 황소에 관한 시를 썼다/ 가슴저린 눈물을 찍어/ 황소울움 같은 시를/ 그런데 어디에 보낸다?/ 간곳마다 천대받는 시시한 시/ / 차라리 황소들에게나 가져다 읽어줄가?/ 그러나 그것도 파악이 없다/ 황소들이 그것을 듣고 과연/ 한줌 풀을 맛본 때보다/ 얼마큼 더 감동할것 인지?…》 (《연변일보)1997. 4. 10)   이 시에서 《황소》는 단순한 황소가 아닌것 같다. 아마도 황소는 백성의 상징적이미지로 해석해도 과분한 견강부회는 아닐것이다. 《황소에 관한 시》는 아마도 백성들에 관한 시로 리해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것 같다. 《황소에 관한 시》는 마땅히 황소들에게 가져다 읽어주어야 할것인데 시인은 《그것도 파악》이 없다고 한다. 그 원인은 황소들에게 있어서는 시가 《한줌 풀을 맛본것》보다 못할것이라고 시인은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판단은 옳기도 하며 틀리기도 하다. 만약 그 시가 《황소》들의 《배고품》이나 《고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라면 《황소》들의 《배고품》이나 채찍아래에서 밭가는《고통》이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억울함을 대언(代言)한 것이라면 아마 《황소》들은 꼭 크게 《감동》을 하여 눈물을 흘릴것이다.   90년대 들어서서 우리 중국조선족시단의 많은 시인들은 《황소》들의 《배고품》이나 《고통》에 대해 별로 큰 관심을 돌리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시가 《간곳마다 천대받는 시시한 시》로 전락하게 된 가장 주된 원인이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우리 시의 현실탈리의 경향은 아래와 같은 몇가지 면에서 보여진다.    첫째, 우리의 시인들은 오늘날 우리 중국조선족의 삶의 현실과는 별로 큰 련관성이 없는 시적주제를 내세우군 한다. 례컨대 요즘 우리의 적지않은 중견 시인들은 이른바 언어의식과 생명의식을 고창하며 이를 발굴하는데 자신들의 모든 정력을 쏟아붓고 있다.    이 역시 시문학의 다원적추구중의 하나의 추구이므로 왈가왈부할수는 없지만, 이런 유미주의적경향과 현실탈리의 경향은 현실을 정시하고 현실의 사회생활에 뛰여들어  현실문제를 다루는 시인들의 자세와 능력의 약화를 초래하고 사회참여의식과 사회비판정신의 상실을 적잖케 초래한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최근 몇년간 우리 시단의 적잖은 시인들은 우리 민족의 신화나 전설 그리고 지나간 력사에서 많은 시적인 소재를 가져오고 있다. 이런 추구는 개인적인 추구로서 누구도 비난할수는 없지만 현실과는 너무 먼 오랜 옛날의 신화나 전설 또는 력사같은것이 주된 창작의 소재원천으로 되고 아울러 이러한 력사적주제가 우리 시문학에 주류를 이루어서는 안되며 인위적으로 그러한 방향에로 유도해서는 더욱 안될줄로 안다…   지나간 력사에로의 침잠이 현실탈리의 하나의 중요한 경향이라면, 우리 중국조선족의 현실적인 삶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시들도 역시 신발을 신고 발바닥을 긁는 격으로 우리의 현실적삶의 개선에 별 도움이 없으며 우리 민중들의 환영을 크게 받지 못한다.   이를테면 조선반도의 민족분단과 우리 배달민족의 생존상화에 대한 깊은 사고를 주제로 내세운 작품이다. 이 작품들 중에는 확실히 모국의 분단문화계렬에서도 수작으로 꼴힐수 있는 작품들도 없지 아니하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우리의 현실적인 삶과 거리가 있는 민족분단같은 문제는 그래도 괜찮케 쓴 시들이 심심찮케 눈에 띄이는데 오늘날 우리 중국조선족의 삶의 상황에 대한 깊이 있는 사고를 동반한 시들은 오히려 새벽의 별같이 눈에 별로 띄이지 않는것은 무엇일가?   이것은 아마도 우리 시인들의 현실참여의식과 민족적사명감이 모자라고 현실을 정시하고 현실을 비판하고 현실을 성찰하는 담력과 용기가 부족한데서 연유된것이 안닐가 오히려 현실감이 넘치고 깊은 현실적인사색이 안받침된 시들이 오히려 함용남 같이 시에 방금 입문한 신인들한테서 나오는것은 기성세대의 시인들이 심사숙고해야 할바라고 생각한다. 례컨대1998년 연변일보의 해란강문학상 수상작품인 함용남의 《콩서리》같은 작품은 우리 시대의 가장 큰 관심사로 되고 있는 분배불공정의 사회문제를 훌륭한 은유를 통해 표현하였다.    둘째, 우리의 시인들은 적잖게 우리 시대 민중들의 가장 보편적인 정서와는 유리된 순 개인적인 정서의 표출에만 열을 올리고 있는것같다. 요즘 홍수처럼 터져나오는 시집들을 읽으면서 느끼는 감수라면 시적인 정서들이 대단히 개인화되여 섬세하게 표현되여 있기는 하지만 사회적공명을 일으키는 시대적인 보편적정서, 특히는 민중들의 정서를 표출한 시집들이 극히 적다는 감을 준다. 물론 이 몇년동안 개인적정서표출은 이전의 문화혁명시기나,   5, 60년대의 한곬으로만 흐르던 도식적이고 허위적인 군체정서의 표출에서 많이 벗어난 점도 긍정해야 하겠지만, 80년대초반의 몽롱시들이 지녔던 정서의 공명수준만큼도 지니지못했다. 시는 소설과 달라서 독자군이 더 작은것만은 사실이나 최근에 들어서서는 더욱 작아진것만은 자타가 시인하는 사실이다.   시를 쓰는 분들이 들으면 노여워 하겠지만 항간에는 언녕부터 《시를 읽는 사람보다 시를 쓰는 사람이 더 많다》는 말이 떠돌았다. 시가 날로 대중성을 잃어가고 날로 개인적성질의취미로 전락하게 된 원인은 아주 많지만 그중에서 아주 중요한 원인은 우리 시들에서 표출된 정서들이 오늘 우리 중국조선족민중들의 가장 보편적인 정서와 유리된것과 무관하지 않을것이다.    최근 우리 중국조선족문학의 원로작가인 김학철선생은 현실분식의 위랑만주의나 글장난이나 하는 형식주의, 유미주의 또는 현실을 도피하는 은둔문학을 매도하면서 우리의 작가나 시인들이 문학창작의 렌즈를 중국조선족의 삶의 현장에 맞출것은 호소한바있다    《……밤낮 웨쳐대던 이 정말로 살기 좋다면 어느 미친년이 을 할것이며 또 어는 미친놈이 을 하려다가 를 당할것인가. 어느 미친년놈이 부모형제를 놓아두고 처자식을 떼여놓고 정든 고향에 등 들을 돌릴것인가. 그리고 무엇때문에 온가족이 몽땅 떠돌뱅이 신세로 돼버릴것인가. ……와 , 과 . 이런것들은 새로 생겨 난그 무슨 때문이 아니다……지금 우리 은 실업, 임금체블 같은 당장 먹고사는 문제이다. 살기가 어렵다고 아우성치는 그 문제. 바로 그 문제다.    우리의 초점은 바로 여기에 맞춰져야한다. 무슨 , , 따위로 떠들썩거려 그 긴박성과 엄중성을 회석시켜서는 아니된다. 》 )김학철《 (《연변문학)1999년 제4기) 지금은 우리가 《시경》의 국풍처럼   《배고픈 자는 먹을것을 노래하고 일하는 자는 생업을 노래하는》 사실주의, 현실참여의 문학을 주로 해야 할시기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소설문학은 지금 바로 그렇게 하고있다. 례컨대 금년도에 들어서면서 최국철의 《당신과 당신의 후예들》(《연변문학》1999. 3기), 김훈의 《또 하나의 나》(《연변문학》  1999. 4기), 리동렬의 《꿈》(《도라지》 1999. 3) 양룡철의 《황금새》(《도라지》1999. 3기) 등 많은 소설들은 이미 김학철옹의 말처럼 초점을 우리 중국조선족의 《살기 어렵다고 아우성치는 그 문제》에 맞추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리농향도(離農向都)의 추세에 따른 조선족농촌사회의 황페화, 농촌교육의 위기, 민족경제의 부진으로 인한 실업문제, 국제결혼과 농촌녀성들의 도시진출로 인한 농촌총각들의 결혼난과 이에따른 조선족인구의 격감추세, 국내의 발달한 지역과 외국에로의 로무송출과 보따리장사 등으로 인한 조선족인구의 대이동 및 그로 인한 민족집거구해체의 위험같은 초미의 사회문제들에 문학이라는 이 카메라의 렌즈를 맞추고 있는것이다 .    필자는 몇년전부터 우리 중국조선족 문학의 주류는 민족적사실주의문학이여야한다고 거듭 강조하여 왔다. 그 개념에 대해 필자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적이 있다    《……우리 문학은 중국조선족의 삶의 상황을 박진감있게 반영하고 생존위기를 여실하게 제시하고 중국조선족의 물질문명과 정신문명 건설에서의 병페들을 용감히 비판하고 그 극복책을 탐구하고 앞날의 진로를 모색하는 그러한 문학으로 되여야할것이다. 일언이페지하면 중국조선족의 삶의 현장에 튼튼히 뿌리를 내리고 민족성, 현실성, 비판성, 건설성과 미래지향성을 그 기본특징으로 하는 사실주의문학을 견지해야 할것이다 . 바로 이러한 민족적 사실주의문학이 우리중국조선족문학의 주선률로 되여야할것이다. 》   재현양식으로서의 소설과 표현양식으로서의 시를 또같이 요구할수 없지만 시도 이 전형기(轉型期)에 처한 오늘날의 중국사회에 있어서 현실을 관심하고 현실을 표현하는 민족적사실주의에로 나아가야함은 의심할바 없다. 이면에서 우리의 시문학은 반드시 궤도조절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 시문학은 창작방법에서 사실주의로 일색화되여서는 안되며 다양한 창작방법의 추구를 권장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성당시기에 랑만주의와 사실주의가 동시에 개화발전하고 두 경향의 대표적시인인 리백과 두보가 두터운 우정을 맺고 키워갔듯이 우리 시단의 여러 창작경향을 가진 시인들이 서로 보완하고 서로 단결하면서 우리의 시문학을 중흥시켰으면 하는 마음이다.    사실 우리처럼 세계주류문화에서도 변두리적위치에 처해 있는 중국, 중국에서도 변두리적위치에 있는 연변이나 장춘, 심양, 할빈 같은 지방도시나 시골에 사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아주 먼 래일의 리상적인 문제는 다른 발전한 나라들이나 지구에서는 바로 오늘날의 현실적문제로 되고 있다. 우리의 관념이나 의식은 흔히는 세계주류문화 및 세계주류의식과 흔히 몇십년 지어는 한세기 가까이 뒤떨어져서 살고있는 실정임을 알고 있어야 한다.   물론 개혁개방이후 이런 형편은 점점 개선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에 발을 튼튼히 붙이고 일사천리로 발전해나아가는 세계의 현실에도 면밀한 주의를 돌려야한다.   세계의 발달한 나라의 사람들과 동보적으로 사고하고 그와 비슷한 의식수준에는 오르지 못하더라도 그것을 알려고 노력하고 그에 따라가려고 노력해야 할것이다. 이렇게 되자면 우리들은 우물안의 개구리가 될것이아니라 세계와 우주를 향한 열린 마음을 지니고 부단한 의식갱신의 노력을 경주해야할것이다.   그래야만이 세계인과 대화하는 개방적인 신심을 지닐수 있으며, 우주를 가슴속에 두는 높은 시상를 가질수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세계적인 수준에서의 현대의식, 당대의식을 지녀야만이 우리의 시들도 세계인과 대화할수있는 자격을 지닐수있다.   례컨대 21세기의 생태학적문화를 지향한 소위 《록색문학》과 《록색문화리론》은 세계의 발달한 나라들에서 전위를 달리고있는 포스트문학의 가장 중심적인 주제로 부상하였다. 《록색문화리론》의 주장에 따르면 차세기 이 지구상에서 살아가게 될 인간들이 직면하게 될 문제는 인간자체 내부의 문제보다도 인간과 자연간의 관계에 대한 문제일것이라는것이다.   지구가 병들면 지구를 유일한 보금자리로 삼고 살아가는 인류의 존속도 위협을 받는다는것이다. 이들은 지구의 상태환경의 파괴로 인한 인류훼멸의 위협을 사전에 방지하려면 절제를 모르고 방향감각을 잃은 과학문명의 근시안적 개발과 발달에 있다고 인정했은며, 아울러 이러한 무절제한 자연정복의 력사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고 인정하였다.   그들은 오늘의 지구적위기의 근원인은 인간중심적 세계관에 있음으로 반드시 이를 버리고 탈인간중심적이고 자연 친화적인 세계관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생태주의자 헨리 데이비드소로우는 생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연을 인류에 맞게 개조시키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류를 자연에 맞게 개조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까지 주장했다.  바로 이러한 생태주의적세계관에 립각하여 미국의 시인스나이더는 인간을 우주의 중심으로  보는 공작의 인간 중심주의 사상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공자여 , 내등에서 내리거라  이제 그러한 잡소리는 역겹다. )  사실 이러한 생태주의적세계관은 대단히 리상적인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현실적으로 마주치고있는 사상이다. 이런 생태주의를 배부른 놈들의 홍타령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빨리 우리의 눈앞에 다가와 있다. 작년만 해도 장강의 수위가 130년전 처음 기록을 시작한이래 최고에 이르렀다.   그동안 중국의 젖줄기와 같은 구실을 해온 장강이 이제는 《중국의 눈물》로 바뀌였다. 이 천재지변은 지구의 온난화 현상과 중국대륙의 사막화 현상에서 비롯되 환경재해인것은 분명하다. 때문에 우리는 《배고픈 현실적인 문제》에도 눈길을 돌려야하겠지만 《래일의 근원적인 전인류적인문제》에도 관심을 돌려야 할것이다. 이러한 우주를 가슴속에 두는 드넓은 흉금과 전위적인 의식을 가져야만 세계인과 대화를 나눌 수있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현대성을 획득할수있는것이다 . 오늘의 시접에서 볼때 이러한 현대의식을 지닌 우리 시인들은 많지 못하다. 우리 시단의 이른바 《전위시》, 《선봉시》들은 대부분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의 겉 핥기로 그 형식 또는 기교의 수용이나 모방에만 급급했지 그 정수의 관념, 사상이나 의식의 수용에는 태만했지 않았나하는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일언이페지하면 우리 시문학은 현실과 민족을 포옹하는 민족적사실주의의 자세와 정신을 강화해 나아가야 할뿐만 아니라 미래를 지향하고 세계와 우주를 가슴에 두는 랑만주의적 자세와 정신도 갖추어야 할것이다. 이래야만 우리 시문학이 중국의 변두리적지위에서 중심적위치에로 이동해 갈수있으며 세계적시단에로 진출할수 있는 가능성과 희망을 가질수있다.    가장 민족적인것이 가장 세계적인것으로 될수있고 가장 현실적인것이 가장 영원성을 가질수있다.  우리 시인들이여, 민족에 눈길을 돌리고 민족을 포옹하라!  우리 시인들이여, 현실에 눈길을 돌리고 현실을 포옹하라!    김관웅 략력:  1951년 연길시 출생. 1982년 연변대학 한어학부 졸업. 연변대학 조선어문학부 석사, 박사과정 마침. 전 연변대학 조문학부 교수, 박사생도사. 주요한 저서로는 《한국고소설사고》 등 10부와 문학창작집 《소설가의 안해》가 있음. 연변문학상, 해란강문학상 등 문학,  문화상 다수 수상. 전 연변대학비교문학연구소 소장 .     
14    {사료} - 중국 조선족 시인 남영전 댓글:  조회:2401  추천:0  2018-10-13
조선족시인 남영전 중국 당대 10대 걸출민족시인으로    2010-09-28                  (흑룡강신문=하얼빈)저명한 조선족시인 남영전이 “중국 당대 걸출 민족시인시가상”의 영예를 받았다.     9월 23일, 청해 귀덕국가지질공원에서 진행된 “천지인연・중국 당대 걸출 민족시인시가상”시상식에서는 국내 조선족, 바이족, 회족, 몽골족, 묘족 시인 10명을 평선해 수상했다.   우리 나라 걸출한 민족시인을 평선하는 활동인 “천지인연・중국 당대 걸출 민족시인시가상”은 61년간의 우리 나라 소수민족 시가창작의 성과를 회고 및 총화하려는데 뜻을 두고 10명의 대표적인 걸출한 민족시인을 평선하여 부동한 민족의 내재적 문화특점과 민족정신, 생명에 대한 인식과 부동한 지역의 환경 및 모어 근원에서 표현되는 창조력 등을 집중 전시하여 우리 나라 소수민족의 시가창작을 추진, 번영하고 집중적으로 전시하려는데 그 목적을 두었다.   “중국 당대 10명 걸출 민족시인”은 중국시가학회 학자, 전문가들로 구성된 평심위원회의 반복적인 토론을 거쳐 우리 나라 소수민족시인 지역분포, 시인의 시창작특점, 년령 등 종합요소를 고려하여 평선한 것이다.   남영전시인의 상패에는 “남영전의 시가언어는 순박하고 자연과 생령에 대한 깊은 리해와 사랑으로 충만돼 있다. 이에 대한 동정과 호소는 시인의 내심으로부터 흘러나온 선량함과 섬세한 심경으로 깊은 감명을 준다. 이에 중국 당대 걸출 민족시인시가상을 수여한다”라고 씌여있다.   이번 평선활동을 위해 작가출판사에서 출판한 “중국 당대10명 민족시인시선”의 서언에서 87세의 중국 로시인이며 중국시학회 부회장이며 인민문학출판사 전임 주필인 도안선생은 “남영전의 토템시는 웅장한 기백을 가지고있는 력사와 현실, 자연과 인세, 민족과 인류를 관통했고 인류의 운명, 력사의 흐름을 련계했다. 그의 시는 조선족만을 쓴것이 아니라 중화민족, 전 인류를 쓴것이다. 또한 원시민족의 토템숭배만이 아닌 당대 인류의 자아 실수와 생존위기를 겨냥한것이다. 이는 중국 당대 철학 핵심인 ‘천인합일(天人合一)’로 돌아가는 시인의 호소이다.”라고 평가했다.   남영전시인외 기타 9명의 걸출민족시인에 평선된 이들로는 이족시인 쟈디마쟈(吉狄马加), 바이족시인 효설(晓雪), 사라족시인 알틴부 이런(阿尔丁夫·翼人), 몽고족 시인 수제(舒洁)와 아얼타이(阿尔泰), 회족시인 무푸(木斧), 장족시인 례메이핑춰(列美平措), 만족녀시인 나예(娜夜), 묘족시인 하소죽(何小竹)이다.   시상식에서 우리 나라 저명한 시인, 작가, 문학평론가인 도안(屠岸), 한작영(韩作荣), 오태창(吴泰昌) 등이 수상자들에게 상을 발급했다. 이날 청해성 문예사업일군들이 수상한 시인들의 작품을 랑송했다.   “인민일보”,“중국문화보”,“중국청년보”, “문예보” 등 중국의 큰 매체에서 이날 시상식을 보도했다.   /길림신문     ◆[혜정 류영희 글씨]남영전시인 시-'봇나무'      **한국 대구 한글서예가 혜정 류영희선생님께서 중국 장춘 남영전선생님께 기증한 서예작품임.   [토템연구]남영전토템시집, 수상, 세미나, 전문가의 연구저서   남영전토템시집, 수상, 세미나, 전문가의 연구저서       출판된 남영전 토템시집 1.《神檀樹》(요령민족출판사,1996년) 2.《圓融》(요령민족출판사,2003년) 3.《南永前世紀詩選》(홍콩은하출판사,2003년) 4.《南永前短詩選》(중 ․ 영문 대조본, 홍콩은하출판사,2004년) 5.《白衣魂》(한글,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2000년) 6.《南永前詩選集》(한 ․ 중 ․ 영문 대조본,한국 전예원출판사,1994년) 7.《天地人》(중한 ․ 한중 2종 문자 대조본,한국고려출판사,1997년)  토템시˙논문 국내외 수상작 1. 토템시묶음《山魂》중국작가협회 "민족문학 우수작품상" 수상(1999년) 2. 토템시《흙(土)》한국 세계인교향시사 "계관시인작품상" 수상(2000년) 3. 토템시집《圓融》중국 길림성정부 최고문예상—제8회 "장백산문예상" 수상(2005 년 1월) 4. 토템시집《圓融》중국 제8회 소수민족 문학창작 “준마상” 수상(2005년 7월) 5. 토템시집《圓融》홍콩국제염황문화연구회 제3회 "龍文化" 금상 수상(2005년 12월 1일) 6. 토템시집《圓融》한국 문예시대사 제1회 "세계문학상" 수상(2005년 12월 8일) 7. 논문《토템문화가 현생인류에 주는 중요한 계시》중국 제6차 "당대소수민족문학연구 우수논문상" 수상(2006년 5월 20일) 8. 논문집《원시토템과 민족문화》 중국 제6차 "당대소수민족문학연구 우수논문상" 수상 (2006년 5월 20일) 9. 평론집《南永前圖騰詩賞析》 중국 제6차 "당대소수민족문학연구 우수성과상" 수상(2006년 5월 20일) 10. 토템시집《圓融》한국문학 "21세기2006문학대상" 수상(2006년 8월30일) 11. 토템시집《圓融》길림성작가협회 제2회 "길림문학상" 1등상 수상(2007년 7월) 12. 논문《토템문화가 현생인류에 주는 중요한 계시》2008중국관리과학대회 "우수논문" 1등상 수상(2008 년 12월) 13. 1994—1997 년 영국 케임브리지국제명인전기센터로부터 20세기성과상메달 ․ 세계 500인 명인메달 ․ 미국 세계명인전기센터 명예메달을, 미국 세계명인전기센터로부터 명예금메달을 수여받음.     남영전토템시 관련 세미나와 서예전 1. 1995년 6월 25일 연변문학예술연구소에서 《남영전토템시연구토론회》를 개최, 평론가 최삼룡 ․ 시인 박화 등 20여인이 토론회에 참석했다.  2. 2003년 6월 22일 중국 中南民族大學에서 5개 대학의 교수 ․ 박사생 ․ 석사생 등 26인이 참석한《남영전토템시와 토템문화의 재구성문제 연구토론회》를 개최, 10여 편 논문이 발표된 이번 회의의 토론분위기는 뜨거웠고 그 반향이 상당히 컸다.  3. 2005년 중국 서부文藝通鑒위원회 ․ 중국 사천대학 문학과인류학연구소 ․ 중국 서남민족대학 예술학원 ․ 사천사범대학 시대예술학원 ․ 성도시서예가협회에서 "2005 ․ 남영전토템시명인서예초대전"을 공동 개최했다. 초대작품은 《美術界》잡지(2005.6)․《星星》詩刊(2005.8)․《西部旅遊․特刊》(2005.6)과《四川僑報》(2005.4.30)등 간행물에 게재됐다.  2005년 10월 珠江문예출판사에서《詩 ․ 書 ․ 畫의 時代적 共振—2005 ․ 남영전토템시명인서예초대전》詩書畫集을 출판했다. 4. 2006년 3월 28일 북경 수도사범대학 중국시가연구센터와 시대문예출판사에서는 북경 수도사범대학 국제문화빌딩에서 "남영전시가창작연구토론회"를 개최, 謝冕 ․ 吳思敬 ․ 朱先樹 등 詩評家 ․ 학자 ․ 전문가 40여인이 참가하여 논문 15편을 발표했다.  5. 2006년 8월 26일 중국조선족발전연구회 ․ 연변작가협회 ․ 연변민들레생태산업연구유한공사에서 "남영전토템시연구토론회"를 개최, 60여인이 회의에 참석했다. 6. 2008년 6월 20일 한국 한림대학 아시아문화연구소와 長春師範學院 文學院의 공동주최로 “남영전토템시국제학술세미나”가 장춘에서 열렸다. 중한 양국 학자 ․ 전문가 40여인이 참석하여 논문 11편을 발표했다. 전문가˙학자들의 전문저서˙논문집 등 1. 《원시토템과 민족문화—조선족시인 남영전과 그의 토템시연구》(鄒建軍 편찬,시대문예출판사,2003년) 2. 《南永前圖騰詩賞析》(栗原小荻 등 저, 시대문예출판사,2004년) 3. 《詩 ․ 書 ․ 畫의 時代적 共振—2005 ․ 남영전토템시명인서예초대전》(西部文藝通鑒委 등 編,洙江文藝出版社,2005년) 4. 《南永前圖騰詩字句印》(신승우 전각,시대문예출판사,2006년) 5. 《南永前圖騰詩研究》(길림성작가협회 문단풍경선 2006년도 專輯) 6. 《南永前圖騰詩探論》(吳思敬 편집,시대문예출판사,2007년 4월) 7. 《南永前圖騰詩論精粹》(馬明奎 편집,시대문예출판사,2007년 6월) 8. 《南永前圖騰詩賞析》(한글,栗原小荻 등 저,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2007년 10월) 9. 《南永前圖騰詩學》(馬明奎 著,시대문예출판사,2007년12월) 10. 《南永前圖騰詩學》(한글,馬明奎 저,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2008년 4월) 11. 《南永前圖騰詩論文集》(2008한중학술세미나,2008년 6월 20일) 절강성 호주사범학원에서 《南永前圖騰詩研究》를 공동 선택 과목으로   2009년 초 浙江省의 湖州師範學院에서는 “남영전토템시연구”를 전교 공동선택 이수과목으로 삼아 정식 개강했다. 師生이 共同으로 강의안, 논문집, 詩書畫集을 編纂하였는데, 이는 전국 여러 대학에서 커다란 영향을 일으켰으며 특이한 풍경을 이루었다.                 [話題]《남영전토템시연구》 절강호주사범학원 선택과목으로            인터넷길림신문 -=> 문화예술  [2009년 3월 10일]   조선족 남영전시인 토템시연구, 중국 대학교과서에 채택   《남영전 토템시연구》 절강호주사범학원 선택과목으로             조선족시인의 시창작과 연구가 대학교 과목에 들어가는 영예     조선족시인의 시 창작과 연구가 고등학교 과목에 들어가는 영예를 안았다. 2009년 3월 5일자 《길림일보》는 일전 절강호주(湖州)사범대학에서 《남영전 토템시연구》를 전교 공동선택과목에 넣고 정식으로 강의를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에 따르면 이 대학 문학원은 토템시전문 연구과정을 개설한 최초의 학원이다. 토템시 연구를 대학의 공동 선택과목에 넣은 것은 대학 전공건설과 학과분야를 넓히는데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바 소수민족의 문학과 문화에 대한 중시로 하여 전국 대학에 영향을 주게 될 것으로 보인다.   보도는 남영전시인의 일련의 창작성과와 수상경력을 소개하고 나서 《20여년래 남영전시인이 토템문화를 연구하고 계렬토템시를 창작, 독특한 시가형식을 창립하였으며 아울러 새로운 시학체계인 토템시학을 형성했다》고 썼다. 이어 보도는 한 전문가의 말을 빌어 《남영전토템시와 그의 시학체계를 연구하는 것은 중화시학전통을 풍부히 하고 시가형식과 시학리론의 발전을 추진하는데 대해 전범적이며 실험적인 의의를 가진다》고 평가했다.   호주사범대학 《남영전토템시연구》 공동선택과목의 강연자는 마명규부교수이다. 마명규는 남영전 토템시 및 그 토템문화를 연구하는 학자중의 한 사람으로서 2007년에 전문저서 《남영전토템시학》을 펴냈다. 마명규의 연구 저서에 대해 북경대학 교수이며 중국신시연구소 소장인 저명한 시평가 사면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마명규선생의 저서는 남영전 토템시학 연구의 최신성과를 집중적이고도 전면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학자의 민감성으로 우리나라 시가창작의 최신동향과 그것이 명시한 계시적 의의를 적시적으로 포착하였다. 그는 남영전 토템시 창작의 사시적성격과 시인의 우주적 시야를 론술하고 제시하였으며 그의 분석은 남영전 토템시 창작리상의 핵심 즉 원융에 직달하고 있다. 이는 중국 여러 민족 나아가 전인류의 동질문화에서의 최고 경지의 선(善)으로서 그는 이 시가의 창작에 철학적 높이를 부여하였다.》   보도에 따르면, 절강성 호주사범대학의 《남영전 토템시연구》 공동 선택과목은 주로 대학 1학년과 2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며 수강생 명액은 100명이다. 개강후 수강생 명액이 찼을 뿐 아니라 리공과학생을 포함한 고학년 방청생까지 가세하여 이 학교의 특이한 풍경을 이루고 있다 한다.   남영전시인은 중국 저명한 조선족시인으로서 길림신문사와 장백산잡지사 사장 겸 총편   남영전시인은 중국 저명한 조선족시인으로서 길림신문사와 장백산잡지사 사장 겸 총편집이다. 그는 또 미국세계문화예술원 영예문학박사이고 길림성고급전문가이다. 그는 1971년 문단에 데뷔한 뒤 시집 《원융》 등 16부의 시집을 출판했고 아울러 45차례 전국 소수민족문학창작상 등   여러 가지 문학상을 수상했다. 1986년이래 그가 창작한 계렬토템시는 갈수록 국내외의 주목을 받았다. 그의 작품에 대한 연구론문이 이미 130여편 신문간행물에 발표됐고 《남영전 토템시탐구》 등 학자연구론문집 11 권이 출판됐다.   한국시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서지월시인이 중국 장춘에서 개최된 남영전 토템세미나에서 이라는 논문을 발표해 화제를 모은 바 있다.  
13    {사료} - 중국 조선족 시인 조룡남 댓글:  조회:2435  추천:0  2018-10-13
조룡남, 그의 인생 그의 문학     2014년10월30일           [중국 조선인 60세이상 작가 계열 취재]   조룡남, 그의 인생 그의 문학       “나에게 있어서 산다는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시를 쓴다는 것은 사는 한가지 방식이다. 사랑하는 한가지 방식이다.”-에서   조룡남의 수많은 시를 통하여 끊임없이 되뇌이는 뜨거움과 련민과 그리움과 때로는 체념과 기쁨 등 사랑의 여러가지 무늬를 느낄수 있었다. 그것은 산전수전 풍상을 다 겪은 분의 가슴속에 여전히 불꽃이 타오르고있기때문이기도 하다. 어찌보면 바로 그런것들이 그를 이 지상에서 버티게 하는 에너지로 작용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의 삶의 어느 한 단락에 억울하게 모자가 씌워져 오래동안 자유스럽지 못했던 그의 리력들이 안타깝고, 말없이 다소곳하게 웃고 있는 그의 얼굴에 청춘시절 휩쓸고 간 거친 바람의 흔적이 보여서 안타깝고... 그래서 그의 깊고 뜨거운 곳에서 눈물이 되어 그의 시 작품에 고스란히 묻어나는게다.          제1부   그가 태여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은 먼 중로국경지대인 훈춘시 춘화향 동흥진촌이다. 동흥진촌은 춘화향의 중심지로서 후에는 춘화 즉 서토문자로 중심이 옮겨졌지만 그때만 해도 촌으로 치고는 꽤나 크고 번성하였다. 한개 촌에 소학교가 둘(학교마다 악대도 있음), 교회도 둘이여서 례배당도 둘, 앞거리에는 층집도 여럿 있고 양행(洋行)들이 즐비하였다. “오늘 동흥진시장에 나타난 물건은 래일이면 울라지보스또크시장에 나타났다”고 한걸 보면 교역도 꽤나 번성하였던 것이다...    그는 1935년 6남매 중 둘째아들로 태여났다. 그의 가족은 서울사람이였는데 한일합병후 인천에서 직접 배를 타고 부산을 거쳐 로씨야 연해주로 건너가서 울라지보스또크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1930년대 연해주 고려인들의 중앙아세아 강제이주를 피해서 고향에 돌아가던도중 중국을 거쳐가다가 훈춘에 눌러앉아 살게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형과 누님들은 다 로씨야 태생이지만 그는 중국태생이다. 그때 동흥진촌에는 그의 집처럼 로씨야 연해주 울라지보스또크 즉 해삼위에서 이사온 가정이 몇집 있었는데 작은 가게 같은걸 챙기고있었다. 마을에서는 이런 집들을 “해삼집”이라고 불렀다. 동흥진촌마을 뒤에는 가마후런산이라고 부르는 큰 산이 솟아있고 마을앞에는 맑디맑은 큰 강이 흐르며 강 건너에는 기름진 전야가 펼쳐진 그야말로 산 좋고 물 맑은 살기 좋고 아름다운 고장이었다.   고향에서 그는 다른 어린이들처럼 평범한 나날들을 보냈다. 좀 특이한게 있었다면 고향산천에 대한 각별한 사랑에서였다고나 할가? 아니면 유년시절의 호기심에서였다고 할가? 아침에 눈만 뜨면 산과 들, 강변에 나가 휘젓고 다니며 놀고 고기잡이, 벌레잡이, 산열매 따기에 온정신이 팔려 시간 가는줄도 몰랐다. 길다란 코물을 쭉쭉 빨아먹으면서 말이다. 그래서 어린시절 그의 별명은 코풀레기였다고 한다. 그는 그때 벌써 어머니나 누나들이 못가본 곳까지 다 가보았다. 대왕구 폭포며 분수령 합수목이며 감시대 웅뎅이 자라늪이며 서토문자와의 경계에 있는 곰골 바위굽팡이며 다 가보고 꿰뚫고있었다. 또 새나 베짱이같은 곤충을 잡아다 둥우리를 만들고 기르기를 좋아하여 밖으로 나다니기만 하였는데 그 시절 날마다 땅거미 질 무렵이면 그의 어머니나 누나들은 마을 안팎을 뒤지며 그를 부르고 찾아다니기가 일쑤였다. 야단도 되게 맞았지만 이튿날이면 또 그 버릇, 그 본새가 반복되군 하였다.   문학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문학창작에 관한 꿈 같은건 있을수가 없었던 시절, 그러나 그는 옛말이나 이야기 듣기, 어머니가 들려주는 구전동요와 옛노래들에는(“둥근 달님 따다 가”, “세장세장 할아버자 마당 쓸다”, “연잎배 떴다” 등) 큰 흥미를 가지고 심취되어있었다. 한겨울 누구네 집에서 , 이나 같은 전책을 읽는다는 소문을 듣기만 하면 어김없이 찾아가 어른들 틈새에 끼여앉아 밤이 새도록 들었다. 이런것들이 후날의 문학창작에 밑거름이 된 것이다. 후날 그때 어머니가 들려주신 구전동요와 옛 노래들을 정리해서 나  등 잡지에 “변봉인 구술, 조룡남 정리” 라고 어머니 이름을 밝혀서 여러수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는 소학교 입학전 누나들 어깨너머로 보고 익혀서 식자를 다 떼고 읽고 쓰기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었으며 어떤 과목은 누나들보다도 먼저 암송하였다. 학교는 그에게 있어서 호기심으로 가득한 그야말로 하나의 새로운 세계였다. 진취심이 강했던 그는 늘 공부에 열중하였고 성적도 좋아 늘쌍 일등을 차지하였다. 공부자체가 흥미로운 것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아주 엄한 분이시라 일등을 못하면 집에 들여놓지를 않았다. 어느 한번 2등을 했다가 며칠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혼났던 일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어린이들보다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때 그한테는 많은 만화책과 유소년독물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교에서 유독 혼자만 내내 잡지와 신문을 주문하여 읽었다는 점이다. 집에서는 어린 그한테 남들보다 지력투자를 좀 한 셈이다. 그 잡지 이름은 월간  이였고 신문 이름은 이였다. 이런 환경, 이런 어머니의 슬하에서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소학교를 마쳤다.   1950년 그는 훈춘중학교에 진학했는데 훈춘중학교가 있는 훈춘현성은 그의 고향 춘화에서 200리나 떨어진 산골마을에 있었다. 큰 종이에 붓글씨로 입학생명단을 써서 벽에 붙이던 그 날을 지금도 잊을수 없다고 그는 되뇌인다. 오늘까지도 기억하고있는 그때 수험번호는 1042번이였다. 입학시험을 잘 쳤는지라 크게 근심은 하지 않았으나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큰 것이였다. 어떤 사람은 입학비률이 8대1일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10대1이라고도 했다. 중학교는 모든것이 크나큰 충격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제일 인상 깊었던 것은 교원들의 진영이였다. 모든 과목 교원들이 다 촌소학교의 교원들과는 비교할수 없이 훌륭했다. 중학교 3년간 크게 영향을 주고 인상이 깊었던 교원들을 들자면 김병종, 김해진, 리광해, 황휘, 허룡운, 장한수 등 선생님들이다. 그이들 중 어떤이는 후날 작가로 연변문단에서 활약하였고 어떤이는 이름난 언어학자로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어떤이는 우파분자로 되여 로동개조를 하기도 했다. 그때 그의 공부성적은 늘 좋아 앞자리를 차지하였으며 어느 한번 시험에서는 평균점수 99점을 맞아 전교적으로 소문난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로교사 리광해선생님은 그를 훈춘중학교 력사 이래 공부를 제일 잘한 학생이라고 말씀하였다. 그리고 그 시기에는 책을 많이 접할수 있었고 독서의 참기쁨을 알게 되였는데 책이 많았던 시절은 아니였지만 서점에 드나들 수 있었고 학교 도서실의 책도 마음껏 빌려볼수 있었다고 한다. 그에게 가장 인상 깊고 큰 영향을 주었던 책은 , , 조기천의 장편서사시 이였다. 그리고 1951년 중학생 대표로 뽑혀 연변제1차 하령영에 참가하였는데 그것은 난생처음 연길에 와서 즐겁고 유쾌한 생활을 경험하게 된 활동이었다. 야유희, 화토불 시랑송모임, 석현제지공장참관, 새벽농장참관, 비행장로동, 문학써클 활동… 그 어느 활동이나 다 재미나고 흥미로와 평생을 두고 그의 기억에 깊이 남는 활동들이였다. 또 하나 추억할 것이 있다면 이 중학시절부터 그의 문학창작활동이 시작되였다는 점이다. 1951년 그는 이란 시를 써서 에 발표했고 뒤이어 이란 시를 써서 같은 잡지에 발표하였으며 ,  등 동시를 써서  잡지에 발표하였다. 그중 는 당선이 되여 첫 창작상을 받기도 하였다.    1952년 여름 학제개혁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반년 앞당겨 중학교를 졸업하고 연변사범학교에 진학하였다. 연변사범학교에 진학하니 그 학교에는 당시 동시창작의 대가셨던 김례삼(필명 민우-대표작  ,  등) 선생님, 해방후 중국조선족 소설문학의 개척자의 한분이신 다재다능하셨던 백호연(필명 목일성-작품 ,  등)선생님께서 교단에 계셨다. 이런 스승들의 각별한 사랑과 배려 하에 그의 문학꿈은 큰 성장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연변사범학교에 입학한 첫날 교정에 신입생들이 모여있는데 김례삼선생님께서 찾아오셔서 “여기 누가 조룡남이냐?” 하고 물으며 찾으시여 “잘 왔다”고 하시며 그를 반갑게 맞아주셨다고 한다. 중학시절 에 발표한 그 몇편의 작품은 원래 당시 편집이셨던 김례삼선생님이 손수 편집한 것이였다. 또 동시 은 원래 2절로 되여 “얼른 쫓아 잡아라/ 불이 깜박 꺼졌네”로 끝났었는데 선생님께서 보시고 “참, 재미있게 썼구나. 그런데 아쉽다. 애들이 반디불을 잡지 못해 얼마나 실망하겠니? 반디불을 잡는 것으로 한절 더 써넣 는것이 어때?” 하고 말씀하시여 “반짝반짝 반디불/ 다시 전등 켰구나/ 살금살금 기여라/ 옳다 하나 잡혔다”라는 3절을 더 만들어 넣은 것이다. 김례삼 선생님께서는 그를 여러번 자신의 집에 초대하였다. 동란의 세월이 끝난 뒤 어느 한번 회의에서 김례삼선생님을 처음 만났는데 그를 꼭 껴안아 주시고 흐느끼는 그의 눈물을 닦아주시며 “너무 슬퍼마라, 살아있으면 됐다. 이제 네가 겪은 고통과 네가 흘린 눈물은 너 혼자만의 소중한 재산이 되였다”고 하시며 그에게 격려와 사랑의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김례삼 선생이 아득했던 지난 날 자신에게 베푼 사랑과 관심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고 회억하였다.   그때 연변사범학교에는 교간으로 라는 작은 간행물이 발간되었는데 백호연선생님께서 주필을 맡으시고 그를 부주필로 임명해주셨다. 그는 편집기술을 백선생님한테서 처음 배웠다고 하였다. 그때 문학써클 책임자로 활동했는데 백선생님께서는 여러번 자신의 원고료를 써클에 기부하여 종이를 사서 문학자료들을 등사하여 나누어 가지도록 하였다. 백선생님은 문학, 음악, 미술, 서예, 육상에 수영까지 여러 분야에 거쳐 재능이 뛰여난 인재였다. 지식도 연박하고 마음씨도 너그러우며 관용으로 남을 포용하는 인격자로서 우리 민족 지식인의 량심이였다고 할수 있었다. 일본 명곡 을 번역해주시던 일이며, “작문이라면 대수로와하지 않던 너에게 이 마지막 작문평을 어떻게 써주어야 하나?” 로 시작된 선생님의 그 마지막 작문평이며 그 눈물겨운 수많은 일들을 어찌 잊을수 있을까! 동란의 세월이 끝난 직후 훈춘에 있었던 그는 인츰 빈손으로라도 술 한병, 과자 한봉지 달랑 들고 화룡으로 쫓겨가계시는 백호연선생님을 찾아가뵈었다. 그날은 일요일이였는데도 백선생님께서는 학교에 나가셔서 학생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고계셨다. 백선생님께서는 그를 꼭 껴안아주시고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또 보기는 보는구나, 참으로 고생이 많았다! …이제 훌훌 다 털어버리고 가배 노력하여 잃어버린 것들을 도루 찾아야지!” 그리고는 그의 손을 꼭 잡고 “나는 너를 믿는다!” 하고 말씀하시며 격려해주셨다. 그는 후에  이란 김례삼스승님께 바치는 시를 써서 에,  라는 백호연스승님께 바치는 시를 써서 에 발표하였다.   연변사범학교시절 바쁜 공부의 여가를 타서 시들을 적지 않게 창작 했지만 아직 습작 단계라 번번히 퇴자를 맞고 신문이나 잡지 지면에 발표된 시들은 많지 못했다. 그중 대표적인 시를 들자면 1954년 11월 7 일 에 발표된 이란 비교적 편폭이 큰 시였다. 이 시는 그때   편집이셨던 김철선생님께서 발표해준 것이였다. 이 시는 당시 교내는 물론 문단과 연변대학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었다. 하지만 동시 창작에서는 큰 진전을 보여서 을 비롯한  ,  , , ,  등 지금까지도 동시대표작으로 불리는 여러 수의 동시들을 창작했다. 후날 이런 동시들에는 다 곡이 붙어 음악교과서에 편입되기도 하였다. 그중 은 한국 작곡가가 다시 작곡하여 KBS에서 방송되였다.   은 반세기도 넘는 60여년전 일인 그가 1953년 연변사범학교 2학년 학생시절에 쓴 작품이다. 그는 연변사범학교 3년간 방학에 딱 한 번 밖에 집에 가지 않았는데 려비때문도 있었겠지만 더욱 중요한건 학교에 남아 독서하기 위해서였다. 아마 그 3년간이 그의 인생에서 책을 가장 많이 읽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때 연변사범학교는 중사반과 예사반으로 나뉘여있었는데  작곡자 김덕균과 그는 중사반으로서 일반 고중과목에 교육학, 심리학 등 과목을 더 전수받았다. 예사반은 다시 음악반, 미술반, 무용반, 체육반으로 나뉘여 예능교사양성이 목표였기때문에 예능수업이 위주였다. 그 영향으로 중사반 학생들도 예능에 열중하는 학생들이 여럿 있었는데 학교 악대출신 김덕균도 음악에 열중하는 사람들 중 한사람으로 그때 벌써 많은 노래를 작곡하였다. 그때는 배고픈 세월이였다. 그 겨울방학 집에 가지 않은 김덕균과 함께 배가 고파서 밤에 세수대야를 가지고 기숙사 김치움에 가만히 들어가서 김치를 퍼담아 훔쳐다가 맨김치를 찢어먹으면서 두 사람은 곡만들기에 집중하였는데 그렇게 하여 생겨난 곡이 바로 이였다. 매워서 입을 하-하- 불고 다시고 하면서 말이다.   2002년, 연변대학 사범분원으로 개칭된 분원청사 교정에 반디불비가 세워지게 되였다. 따지고보면 은 그리 대단할 것도 없는 작품인데 그저 작사자, 작곡자 모두가 당시 사범학교 2학년 재학 중인 17살 학생들이였다는 점이 조금 재밌고 놀라울 뿐이라면서 모교에 깊이깊이 고맙다고 그는 말한다. 지금 사범분원에는 란 문학동아리가 만들어지고 몇년째 활동도 이어지고있다.   1955년, 그는 연변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에는 훈춘시 제2소학에 안배받았고 반년 후 훈춘중학교에 전근되여 조선어문교원으로 일하였다. 당시 연변사범학교 200여명 동창생 중 중학교 교원으로 승진한건 자신 한사람이라 한다. 훈춘중학교 교단에 서있었던 그 1년 반 남짓한 기간 그는 전현 연구교수(观摩敎学)를 2번이나 맡아서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평판이 매우 높았다. 문학창작에서도 , , , , 동시  등 반향이 큰 작품들을 륙속 발표했다. 그리하여 1956년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가 성립시 제1기 회원으로 입회하게 되였고 이어 길림성 청년창작가회의에 연변대표 일원으로 장춘에 가서 회의에 참가하는 영예도 지니게 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렇게 좋은 날은 얼마 길지 못했다...   1957년 전국적으로 반우파투쟁이 일어났다. 그는 ,  등 소위 독초작품을 쓰고 반동언론을 산포했다는 죄장으로 반당 반사회주의 우파분자 모자를 쓰고 추방되여 농촌에 쫓겨가서 로동개조를 해야 했다. 23년간이나 이어졌던 그 시기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어렵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였으며 그의 문학생애에서는 하얀 공백으로 남겨진 시간들이다. 1957년 그는 우파모자를 쓰고 농촌에 쫓겨가 처음에는 훈춘의 여러 곳을 전전하고 후에는 또 왕청의 여러 곳까지 전전하면서 5년간의 로동개조를 해야만 했었다. 농민질도 했고, 석탄캐는 광부질도 했고, 벌목부, 류벌공, 나무군, 운반공, 돼지사양원, 건설공지잡공, 똥푸개까지 못해본 일이 없었다. 그 속에서 일을 잘 하고 개조표현이 좋다는 평판을 받고 또 특별한 공도 세우고 하여 1962년 그는 우파모자를 벗고 다시 공직을 회복하여 교원으로 임직하게 되였다. 하지만 중앙문건에는 “공중 속에서 우파모자를 벗긴다는것을 선포하고 다시는 우파로 보지 않는다”라고 규정하였지만 기실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고 모자를 벗은 후에는 또 “모자 벗은 우파”로 불리며 처처에서 불리익을 당했고 의연히 문학 창작의 권리도 갖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966년 문화대혁명이 발발했는데 단지 우파분자 경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이유로 다시 붙잡혀나가 여러 해를 두고 끌려다니며 온갖 잔혹한 투쟁을 다 받고 로동 개조를 강요당하였다. 고깔모자를 쓰고 소흑판으로 만든 반혁명, 잡귀신 패쪽을 쇠줄끈에 달아 목에 걸고 조리돌림을 당하며 길바닥 살구씨도 주어먹어야 했고 똥묻은 신바닥으로 귀쌈도 얻어맞아야 했으며 책상 걸상을 높이 쌓은 꼭대기에 올라가 락하하는 항공표현도 수없이 반복했어야만 했다...   1979년 4인방이 타도되고 중앙의 지시로 전국적으로 우파분자에 대한 개정이 있었다. 이는 우파분자가 로동개조표현이 좋아 모자를 벗긴다는 개념이 아니고 원래 우파분자가 아닌 생사람을 우파분자로 잘못 판정하여 모자를 씌웠으니 이를 개정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당안에서 모든 우파관련자료는 다 불태워 없애버리고 진정으로 거뜬한 몸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문학창작의 권리도 이때에야 다시 가지게 되었다.  “진실은 아무때고 밝혀지고야 만다”는 진리를 그는 다시 한번 터득하였지만 한가슴 가득한 슬픔과 비애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우파모자를 쓸 때 새파랗던 22살의 청년이 엄혹한 세파에 찌들려 45살의 중늙은이가 되여있었기때문이다. 그동안 동창생이나 같은 년령대의 많은 사람들은 이젠 사회의 중견이 되고 높은 위치에서 중임을 맡고있었는데 자신은 억울하게 죄수로 몰려 로동개조를 하다나니 이제야 겨우 돌아와 인생을 맨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가련한 모습이였기때문이다. 이렇게 그의 인생에는 청춘시절은 없었다고 할수 있다.  20에 40을 졸라붙인 것이 그의 인생 도표인 것이다.    그때 시정회의에 모여온 우파들에게 주최측에서 간촐한 연회를 챙겨주고 술도 부어주며 위로했는데 술 한잔 먹고나면 그동안 억울했던 세월을 생각하며 불만을 토로하고 분통을 터뜨린다 해도 리해해줄만한 일이였는데 많은 사람들은 20여년 세월에 기가 꺾이고 풀이 죽고 겁쟁이가 되여서 술을 부어줄 때마다 “이게 꿈 아니냐는듯” 그저 머리를 쪼아리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련발할뿐이였단다. 그가운데는 “매일 찰떡을 쳐먹었으면 좋겠다”고 하여 우파가 된 사람도 있었고 중국이 조국이냐? 조선이 조국이냐? 하는 물음에 조선일가? 중국일가? 말설이다가 그만 조선이라고 잘못 대답해서 우파가 된 사람도 있었다...   ……   기다리다 눈이 먼 어머니는 세상뜨고   곱분이도 시집간지 석삼년인데    쪽박새 혼이 되여 이제 울며 온    훈춘강의 이 봄은 더욱 슬픈 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인간성을 상실하고 개나 돼지나 늑대로 변하였던 그 암울했던 세월에 그에게는 하나의 신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은 인간으로 남아있을 것이다”라는 믿음이다. 그는 이 말을 어느 한번 맞아죽을지도 모르는 투쟁대회에 끌려나가면서 당시 연길에 있는 누이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 유언처럼 써서 어머님께 드려서 부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가장 큰 힘이 된건 그를 기다리고 계시는 어머니였다. 수많은 절망 속에서도 아들을 하늘처럼 믿고 애타게 기다리고계시는 어머니를 생각하고 다시다시 용기를 내여 버티고 일어서군 하였다.    우파분자 모자를 벗고 나서도 문학창작을 맘껏 할수는 없었다. 모자벗은 우파로 불리며 어느 신문, 어느 잡지도 그의 작품을 실어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1979년 시정을 받은 후에는 진정한 창작의 자유를 가질수 있었지만 일정시간 적응기를 거쳐서야 비로소 제대로 글을 쓸수 있었다. 어두운 지하동굴 속에 갇혀있던 사람을 갑자기 밖에 내놓으면 햇살에 눈이 부셔 사물을 잘 보지 못하고 조롱 속에 갇혀있던 새를 갑자기 밖에 내놓아도 날개쭉지가 굳어져서 처음에는 잘 날지 못하는 것과 같은 도리일 것이다. 그도 같은 처지였다.           제2부   1979년 우파개정이 있은 후 그는 훈춘2중에 돌아와 조선어문교원으로 임직하여 일하였는데 3년간 조선어문과를 가르치며 반급담임을 맡았었다. 그러나 마음 속에는 늘 청년시절 간직하였던 문학창작의 꿈이 그를 괴롭혔다. “문학창작을 하려면 환경을 바꿔야 한다. 어느 잡지사나 출판사같은 단위로 옮겨야 한다.” 이런 생각이 후날 그를 연길로 올라오게 만들었다.   그때 잡지 총편이셨던 김해진선생님은 그의 중학시절 은사이신데 훈춘에서 보내주면  편집부에서 받아주겠노라고 약조했는지라 고심한 끝에 그는 마침내 용기를 내여 교육국 국장을 찾아가 자신을 연길에 보내달라는 요구를 제출하였다. 당시 교육국 김국장은 그의 학생시절 담임교원이였는데 “너는 여기서 열심히 해서 학생들을 대학에나 많이 붙여라”고 하며 요구를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도 끈질기게 찾아다니며 졸라대고 성화부리는 바람에 김국장도 손을 들고 마지막엔 할수 없이 “그럼 연길로 가서 꿈을 한번 펼쳐보거라” 고 하면서 그를 보내주게 되였다.   그의 문학창작은 사실상 연변인민출판사 시절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문학서적을 읽고 작가를 만나고 창작을 담론하고 작품을 평하고 하는 일들이 그에게는 평생 소망했던 더없이 즐겁고 행복한 일들이였다. 그리고 작가협회에서 조직하는 작가들의 모임이나 필회, 창작답사 기타 사회활동에도 참여할 수도 있었다.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문학창작을 시작한 때는 전국적으로  ‘반주임’이란 작품을 시작으로 소위 “상처문학”이 류행하던 시기였다. 초기 그의 문학도 그 범주에 속하는 문학이였다고 할수 있다. 그때 글로 쓸 수 있는 그의 인생경험이란 지난 23년간의 로개생활밖에 없었다. 구체적인 작품을 들자면 , , , ,  등 시들이다.    시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이 물음에 그는 “시는 내 인생의 전부이다”라고 대답하고 싶다고한다. 그는 시를 사랑하였고 시와 함께 웃고 시와 함께 울고 시와 함께 통곡하면서 70여성상을 살아왔다. 기쁘고 즐거웠던 나날에도 슬프고 서러웠던 나날에도 지어 죄수로 추방되여 쫓겨가 고역에 허덕이던 세월에도 시는 언제나 그와 함께 있었다. 그는 시를 배반하지 않았고 시도 그를 버리지 않았다. 훈춘 이도구의 지하탄굴 속에서 짐승처럼 네발걸음으로 벌벌기면서 석탄구르마를 끌 때도, 그는 저 시비리야에 추방되여가 고역 속에 시달리는 12월 당원들을 위하여 뿌쉬낀의 시를 읊었다. “시비리 지심 속 깊이 / 씩씩한 견인성을 간직하라 / 그대들의 숭고한 지향과 슬픈 로역은 / 헛되지 않으리.” 그리고 대황구 동골치기 원시림 속에서 벌목을 하고 류벌을 할 때도 그는 네그라쏘브의 를 소리높이 읊었다. “발목엔 쇠고랑 차고, 피 흐르는 어깨엔 닷줄을 메고 / 강변으로, 강변으로 배를 끌어도 / 나의 아픈 가슴은 끌어내지 못한다 /…오, 볼가여, / 나는 너를 노예의 강, 암흑의 강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또 훈춘 삼가자 국영농장에서 똥수레를 몰고, 돼지먹이 술찌기를 실어나를 때도 그는 눈물을 삼키며 인도영화 “류랑자”에 나오는 를 목놓아 불렀다. “나는 모른다, 비애가 무엇이고 고통이 무엇인지를 / 나는 비애와 고통을 행복으로 노래부르나니 / 나의 노래를 막을자 그 누구더냐? /…오, 운명이여, 나의 운명이여/ 너는 어찌하여 이다지도 참혹하게 나를 희롱하는것이냐? / 도처에 류랑한다, 도처를 류랑한다 / 아바라므 아바라므 …. 이것이 바로 그에게 있어서의 시의 의미이다. 정녕 시가 없었더라면 그는 그 엄혹한 세월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이란 시에서 “나에게 있어서는 산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시를 쓴다는 것은 사는 한가지 방식이다, 사랑하는 한가지 방식이다”라고 썼다. 그는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숭고한 감정, 가장 소중한 품성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삶은 오직 그 사랑을 실천하는 과정인 것이다. 의사가 환자를 진료하는 것도 로동자가 하나의 제품을 생산하는 것도 농민이 한포기 곡식을 다루는 것도 모두 그 사랑을 실천하는 과정이다. 시는 곧 사랑이다. 사랑은 시의 구세주이다. 그래서 그는 라는 시에서 “먼 그날이 와도 나의 심장은 오직 사랑을 위해 끓다가 터질 것이다. 인간에 대한 사랑, 나의 사랑…”이라고 썼다. 이것은 청년시절에 쓴 시인데 지금도 의연히 오직 사랑만이 오염된 이 세상을 구원하고, 타락한 우리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것이라고 믿고있다. 이것이 바로 이 시구에 담겨진 그의 사상이라면 사상이요, 철학이라면 철학일 것이다.   최근년간 북경에 있는 여러 학회와 연구회들에서 해마다 달력을 만들었는데 2011년 중국신문부간연구회에서  달력에는 그의 언론 7조가 10월 달력에 올랐다. 2012년에는 또 중국 중외명인 문화연구회에서  달력을 제작했는데 격언 8조가 10월 달력에 오르기도 하였다. 그리고 2013년에는 중국문화예술협회와 세계다원문화연구회에서 제작한 달력에는 노벨문학상 수상자 막언과 나란히 그의 반디불비 사진과 비암산진달래시비 사진이 실렸다.  2014년에는 북경예도묵향서화원에서 제작한 달력  에는 1월-3월 세개월에 거쳐 그의 작품이 소개되기도 하였다.    최근 중국기실문학연구회, 편위회, 중국당대문학연구회 등에서 대형 문헌들을 륙속 출판했는데 2011년 중국기실문학연구회에서 건당 90주년을 기념하여 라는 대형문집에 그의 략력과 수필 이 수록되고 최우수문예 작품상을 수상하였다. 또 2011년  편위회에서 18 차당대회 헌례 총서로 이란 대형문헌집을 출간했는데 그의 략력과 시  가 수록되고 시사최우수창작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2013년 중국당대문학연구회에서 모택동동지탄신 120주년을 기념하여 이란 대형문집을 출간했는데 이 책에 역시 그의 략력과 시 6수, 격언 10조가 수록되고 일등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또 지난해 모택동탄신 120주년, 항미원조 승리 60주년, “뢰봉동지를 따라 배우자”는 모택동의 제사 50주년을 기념하여 중국기실문학연구회에서 이란 대형문헌집을 출간 했는데 시사집에는 시 ,  , , , , ,  등 7수가 실렸고 풍비송—당대홍색시사 가작상을 수상하였다. 에는 략력과 장편수필 전문이 실리고 금상” 수상하고 영원한 빛발 영예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리고 또 최근 중국작가교류협회에서는 중국작가 그밖에 협회, 중화시사학회 등 여러 협회와 조직의 추천을 받아 2014년도 제1호 문건으로 >의 직함 (국가가 인증하는 직함자 격증서 발급)을 수여한다는것을 공포하기도 하였다.    그가 수상한 성급 이상의 상은 길림성인민정부 장백산문예상(길림성 최고상) 3차, 전 국소수민족문학상 2 차, 전국소수민족문학연구 원예사상 1차, 홍콩 세계문화예술연구중 심과 세계화인교류협회의 국제우수작품상 등이다.    허나 그는 지금껏 창작생활을 해오면서 가장 뿌듯하고 긍지감을 느끼는 때는 어떤 상을 수상할 때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보다도 더욱 반갑고 기쁜건 길거리를 가다가 문득 생전 모르는 사람이 제앞으로 달려와서 그의 손을 잡고 “조룡남선생님이 아니십니까? 잡지에 실린 사진으로 선생님을 알고있습니다. 언젠가 한번 뵙고싶었는데… 촌에 살다보니…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시와 수필을 너무너무 좋아합니다. 선생님의 작품이면 어느 한편 빼놓지 않고 다 읽고있습니다…”하고 인사할 때라고 한다. 여기서 그는 진정으로 글 쓴 보람을 느끼며 자신의 문학은 바로 저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고 저와 같은 인민대중을 위해 존재하는 것라고 되뇌이었다.    그는 최근 3년간 투병중이라 창작은 별로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가끔 작은 글들을 써보느라 하지만 그것조차도 잘 안되어 “풍월의 시절도 지나갔구나!”하고 뿌쉬낀이 그랬듯이 혼자서 탄식하기도 한단다. 이 3년간 그는 새 작품을 창작하기보다 이미 발표된 글들을 모아 작품집으로 묶는 작업에 정력을 모았다. 병으로 쓰러지던 2010년, 시집 를 출간하였고 2011년에는 동시집 (중국판)을 출간하였으며 지난해에는 산문집 을 출간하였다.    2010년 그는 병으로 쓰러진 그는 연변병원에 10차례 입원하였고 8차례 도관수술(介入治疗)을 받았다. 그는 처음 연변병원에 입원했을 때 의사선생에게 “나는 북경이나 상해로 치료하러 가지 않는다. 이 병원에서 치료받고 끝을 보겠다. 화학치료나 방사선치료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지금도 매달 한번씩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고 결과에 따라 입원도 하고 수술도 받고 집에서 그저 약물치료를 한다고 한다.  “이만큼 살지 못한 사람도 많고 많은데 욕심을 버리고 이만큼 산것에 만족하고 감사할줄 알아야 한다. 사람은 한번 태여나서 한번 죽기 마련이다. 이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여. 갈 때는 꽃잎이 스러지듯, 단풍잎이 떨어지듯 그렇게 뒤모습이 곱게 자리내고 가야 한다” 라며 마지막 나날들을 긍정적으로 즐겁게 보내고 있다고 한다...     조룡남시인 략력   -1935년 11월 2일 출생   -1955년 연변사범학교를 졸업, 교원생활   -연변인민출판사 문예편집, 중국작가협회 회원,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력임.   -연변조선족자치주정치협상회의 제7기, 제8기 상무위원   -시집(1989), (1995), (1996, 한국출판), (1999, 한국출판), (2000, 한국출판), (2010), (2011),  (2013)   -10여수 시작품이 중소학교 교과서 과문으로 편입   -연변주정부 우수작가상, 연변주정부 진달래문예상 및 공로상, 연변주당위 주정부 민족문화사업특수공헌인물상, 길림성정부 장백산문예상(3차), 전국소수민족문학상(2차), 향항세계문화예술연구중심 세계우수작품상, 한국 미래문학해외동포문학상, 카나다 민초해외문학상대상 수상   -1998년 9월 연변작가협회 한국방문대표단 단장으로 임명되어 출국 참관교류   -2010년 연변TV방송국에서 “산과 흙의 시인-조룡남”이란 제목으로 55분에 달하는 인물사적영상편 제작, 방송   -시비로는 “반디불비”(연길/2002), “비암산 진달래”시비(룡정/2004)     ///해란강닷컴 /류설화 기자
12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해양쓰레기",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293  추천:0  2018-10-13
밀려드는 해양쓰레기에 건축폐기물로 제주해안 '몸살' 좌승훈 2018.10.13.  자동요약   음성 기사 듣기   번역 설정   공유   글씨크기 조절하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제주도바다환경보전협의회 13일 제주시 애월 큰물도 해안정화활동   [제주=좌승훈 기자] (사)제주도바다환경보전협의회(회장 한광수)는 13일 제주신용보증재단(이사장 오인택)과 한효심휘트니스센터 봉사단, 한국공항공사 제주지역본부 임직원 등 8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주시 애월읍 ‘큰물도’ 바닷가에서 ‘청정 제주바다 지키기’ 해안정화 활동을 펼쳤다. 이날 회원들은 해양쓰레기·생활쓰레기 뿐만 아니라 판넬조각·스티로폼단열재·목재건축자재 등 해안가에 버려진 건축폐기물까지 수거했다.     (사)제주도바다환경협의회는 오는 20일~21일에도 추자도를 방문해 해안정화활동에 나선다. 한편 올해로 창립 18주년을 맞은 제주도바다환경보전협의회는 매주 토요일 제주 해안과 수중 정화활동을 정례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좌승훈 기자
11    룡정.윤동주연구회가 걸어온 길도 벅찼지만 가야 할 길도 멀다 댓글:  조회:2613  추천:0  2018-10-13
룡정.윤동주연구회 성립 5주년 기념좌담회 열려 (ZOGLO) 2018년10월4일 룡정.윤동주연구회 성립 5주년 기념좌담회 열려   9월 27일 룡정.윤동주연구회 성립 5주년 기념좌담회가 룡정.윤동주연구회 사무실에서 펼쳐졌다.   조선족문단의 작가, 대학가의 교수와 연구회 맴버 20여명이 좌담회에 참가했다.    윤동주의 장례식이 치러진 유서깊은 윤동주의 룡정자택 앞뜰에 위치한 연구회 사무실에서 펼쳐진 좌담회에서는 룡정.윤동주연구회가 걸어 온 5년을 회고하면서 다음 5년의 미래상을 그려보았고, 역경을 헤쳐가며 조선족 지역사회의 역사와 문화의 파수꾼으로 거듭 날 것을 서약했다.   총화발언에서 김혁 회장은 "이 5년은 무에서 유에로 이르는 과정이였다. 몰리해와 보수와 기시와 비타협의 척박한 환경에서도 초심을 잃지 않고 지역사회의 우수단체로 꿋꿋이 성장해온 5년이였다"고 회고하면서 금후 민족 시인 윤동주를 기림과 더불어 한락연, 주덕해, 강경애, 안수길, 최서해, 심련수 등 룡정지역에서 활동해 온 민족의 인걸들을 기리는 사업을 더불어 펼쳐가겠다고 그 폭넓은 구상을 밝혔다. 총화발언을 하고 있는 김혁 회장   좌담회에서 연변대학 교수 김호웅, 연변일보 전임 주필 장정일, 저명한 녀류작가 리혜선 등은 "룡정.윤동주연구회는 척박한 불모지에 문화와 정신의 집을 짓고 있다"고 격찬하면서 그 성과에 대해 충분한 긍정과 찬사를 보냈다.    김병민 연변대학 전임총장은 타지에서 보내온 축사에서 "5년동안 윤동주 연구회는 실로 많은 일들을 했습니다. 력사는 기억할 것입니다.   윤동주선생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이세상에서 살아가는 민족문인들이 자기를 확인,승화는 도경으로 될 수 도 있습니다. 우리는 리기영, 조기천, 김소월, 한룡운, 정지용도 잘 알아야 하지만 윤동주같이 순수한 삶을 위해 시혼을 불사른 디아스포라 시인도 잘알아야 합니다.   별은 많고 많아도 나에게 속한 별은 아닐수도 있습니다. 윤동주는 그때도 지금도 앞으로 영원히 우리가 자랑하고 사랑하는 소중한 별이 될수가 있지않을가요?   긴긴밤 별을 지켜 온 룡문회 동인들에게 경의를 드리고 축하를 드림니다."라고 축하와 격려의 메세지를 전했다.    한편 2014년 9월 27일, 윤동주의 민족애와 문학정신을 선양하고 나아가 민족의 문화와 력사의 의미를 환기하고 고양하는데 몸바칠 취지로 조선족의 작가, 학자, 매체일군, 교직원들로 무어져 윤동주 시인의 고향 룡정에서 발족된 사단법인 “룡정•윤동주연구회”(회장 김혁)는 짧은 시간내에 윤동주등 조선족 인걸들을 기리고 조선족의 력사를 조명하는 묵직한 기념행사들을 련이어 펼쳐 사회와 문단의 주목과 충분한 긍정을 받는 단체로 부상하고 있다.   /조글로미디어 김성림 기자
10    "막걸리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댓글:  조회:2701  추천:0  2018-10-13
고문 후유증으로 치아 상한 천상병, 막걸리가 밥이었다 (ZOGLO) 2018년10월6일  황인의 ‘예술가의 한끼’   천상병 시인이 1991년 서울 인사동 한 주점에서 막걸리를 들이키고 있다. 막걸리 한 사발로 끼니를 대신하고 했던 그에겐 밥이 따로 없었다. [중앙포토] 막걸리는 술이지 밥은 아니다. 하나 천상병(1930~93) 시인에게는 막걸리가 밥이었다. 그는 밥 대신 막걸리를 마시는 일이 많았다. 크게 취할 정도로 마시지는 않았다. 술을 마셨는지 안 마셨는지 분간하기가 힘들 정도로 언제고 살짝 취기가 든 듯한 모습이었다.     충치도 심해 뭐든 삼키듯 먹어 부인의 인사동 귀천이 안식처 근처 남원집 국밥은 그에겐 특식 1000원, 2000원 정액제 구걸 유명 그 돈으로 책도 사고 술도 마셔 그의 시처럼 하루 막걸리 한 병 종일 마셔 크게 취하지는 않아 수락산 밑에 살던 천상병은 버스를 타고 서울을 왕래했다. 하루종일 서울의 어딘가를 배회하였는데 말년에는 부인인 목순옥 여사가 운영하는 인사동의 귀천이 쉼터가 됐다. 귀천을 경영하기 전인 80년대 초반, 목 여사는 대학로 학림다방 가까이에 있었던 찻집 까치방의 일을 도와 주고 있었다.     천상병은 자신의 시집 ‘주막에서’를 판매용으로 까치방 카운터에다 비치해 놓았다. 어느 해 겨울 저녁 낡은 외투 차림의 천상병이 찻집으로 들이닥쳐 자신의 시집을 세기 시작했다. 갑자기 부인에게 고함을 쳤다. 어제 두 권이던 시집이 어째 오늘 도로 세 권이 되었냐고. 팔리기는커녕 누군가가 사간 시집을 도로 물렸던 것이다.     마침 찻집을 찾았던 천상병의 마산고 후배인 H가 시인을 알아보고 소동도 잠재울 겸 그를 끌고 근처의 막걸리집으로 모셨다. 당시의 대학로에는 허술한 막걸리집이 많았다. 주모는 천상병을 보자마자 문전박대했다. 돈을 거의 내지 않은 탓이었다. 누항의 주모에게는 초라한 행색만 눈에 들어왔을 뿐, 행색 뒤에 숨은 큰 시인의 모습이 보일 리가 없었을 터.        친구가 사준 맥주 20년 지나도 고마움 표시     생전의 천상병 시인. 그는 막걸리를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했다. [중앙포토] 천상병은 자신의 시집이 도로 세 권으로 된 분함을 막걸리 몇 잔으로 풀었다. 그리고 어린애처럼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천상병은 미술평론가인 이일(1932~97)을 떠올렸다. 두 사람은 함께 활동하던 동년배 시인이었다. 천상병은 서울대 상대, 이일은 서울대 불문학과 학생이었다. 이일이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던 60년대의 어느 날 저녁, 명동에서 우연히 만난 천상병에게 맥주 한 병을 대접했다. 막걸리로 일관하던 젊은 날의 천상병에게 맥주는 황송한 귀물이었던 것. 그 고마움을 천상병은 20년 동안이나 기억하고 있다가 그날 밤 꺼내어놓았다. “H야, 내일 학교에 가거든 이 말을 이일에게 꼭 전해 주라, 그때 이일이가 사준 맥주가 너무 맛있었고 고마웠다고.” 감사함을 아는 다정다감한 천상병이었다.     그런데 그걸로 끝날 천상병이 아니었다. 술집에서 큰길로 나오자 H의 여자친구를 슬쩍 따돌린 다음 H에게 만원을 요구했다. 심상이라는 잡지사에서 받기로 한 원고료로 친구들에게 술을 한잔 사기로 했는데, 원고료는 못 받았고 친구들은 혜화동에서 그의 등장을 마냥 기다리고 있으니 마음이 탄다고 했다. “H, 이건 어디까지나 빌리는 거야. 내일 우리 마누라에게 가면 만원을 분명히 돌려줄 거야” 하며 웃었다. 돈을 받은 천상병은 어둠 속으로 신나게 사라졌다. 굳이 부인을 찾아가 돈을 받아 낼 일이 아니라는 건 H도 이미 알 만한 나이였다.     천상병의 구걸은 유명하다. 천원 아니면 이천원 정액제였다. 그것도 자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만 요구한다. 천상병에게는 현금지급기나 마찬가지인 김인 국수가 어느 날 천원을 못 주겠다고 했다. 자신은 대한민국 바둑의 최고봉인 국수인 만큼 오늘부터 천원이 아니고 이천원으로 올리면 주겠다고 했다. 천상병이 김인을 한참 노려보다가 왈 “어이, 김인이. 까불지 마라. 넌 아직 천원짜리밖에 안돼 !” 둘은 호쾌하게 웃었다. 천상병은 자신이 구차하게 돈을 구걸하는 게 아니라 형편을 봐줘서 받아 주는 것이고 그만큼 호의를 베푸는 것이라고 편하게 생각했다.     어떤 술자리에서는 천원짜리를 몇 장 꺼내어 놓고 세기 시작한다. “만원이 되어야 무슨 전집을 사는데 딱 이천원이 모자라네” 하며 센 돈을 또 센다.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빨리 이천원을 채워 주어야 한다. 천상병의 구걸 퍼포먼스는 언제나 유쾌했다. 모두가 재미있어 했다.     여러 사람들에게 수금한 돈으로 천상병은 책도 사고 막걸리도 마셨다. 인사동에는 막걸리를 마실 데가 많았다. 천상병은 가게 앞에서 마실 때도 있었고 탑골공원 뒤 국밥집, 낙원상가 지하, 남원집을 찾기도 했다.        취기 살짝 오르면 기염 토하며 호언장담     생전의 천상병 시인. 그는 막걸리를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했다. [중앙포토] 귀천은 인사동 큰길의 천일사 부동산 옆 안쪽에 있었다. 골목 비슷한 길인데 들어가자마자 왼편으로 귀천이 있고 그걸로 길은 막힌다. 80년대의 인사동에는 관광객이 별로 없었다. 대신 화가와 문인들이 인사동의 주인이었다. 화가들과 문인들에게 귀천은 사랑방이었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라 귀천에서 소식을 주고받았다. 천상병이 그렇듯 귀천에 오는 단골 중에는 디오게네스풍이 많았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공예문화를 번역한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이 딱 그런 풍모였다. 중광, 이외수 등도 귀천을 찾았다.     80년대 말이 되자 사람들이 먹고 살 만해지면서 비주류 문화인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천상병도 방송을 탔다. 팬들이 급증했다. 팬들이 사인을 받으러 천상병 시인이 쉬고 있는 귀천을 찾아왔다. 대여섯 사람이 앉으면 꽉 찰 정도로 귀천은 좁았다. 귀천의 좁은 공간이 감당치 못할 지경이 되면 천상병 일행은 남원집으로 갔다. 남원집은 인사동 큰길로 나와 한 칸 아래 골목 끄트머리에 있었다. 귀천에서 가까웠다.     천상병은 남원집의 국밥을 좋아했다. 그는 동백림 사건 때의 고문 후유증과 충치로 치아가 부실했다. 뭐든 삼키듯 먹었다. 막걸리가 끼니인 천상병에게 국밥은 특식이었다. 남원집에는 일주일에 두세 번은 갔다. 남원집의 소미선 사장은 천상병을 존경했고 천상병도 남원집에 가면 마음이 편했다. 천상병 혼자서 와도 누군가가 동석이 되어 주어 결국 여러 사람이 상을 함께 하는 형국이 되었다. 계산을 하는 둥 마는 둥해도 좋았다. 몸이 아프고 나서는 일주일에 한 번을 겨우 왔다. 국밥은 국물만 건성 먹고 남원집 할머니가 담근 동동주에 열심이었다.     어디에서고 천상병은 취기가 살짝 오르면 기염을 토했다. 천상병의 말은 알아듣기가 힘들다. 경상도 사투리에다 치아가 부실하여 발음이 샌다. 입가에는 버캐인지 막걸리 찌꺼기인지가 잔뜩 끼어 있다. 그는 속삭임을 몰랐다. 큰소리의 고함뿐이었다. 의미의 전후가 서로 잘 연결되지 않는 화법을 구사했다. 감으로 두드려 잡으며 이어가는 기막힌 대화였다. 그는 호언장담과 자랑하기를 좋아했다. 백만원이나 모았으니 그 돈으로 부인과 여행을 가야겠다거나, 화가를 보면 당신의 그림을 화랑에 소개하여 다 팔아주겠다는 등. 그걸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그 자리가 즐거울 뿐이었다.        마산중 담임 김춘수 주선으로 문예지 추천     천상병은 소확행의 실천자였다. 어디서 구했는지 싸구려 선글라스를 하나 걸치고 나타나면 인사동이 시끄럽다. 아는 사람들을 붙잡고 선글라스 예찬론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선글라스를 끼면 세상이 전혀 달라 보인다는 것. 너무나 멋진 세상이 나타난다는 것. 더불어 선글라스를 낀 자신이 엄청 미남이 되었으니 봐 달라고 애교를 피웠다. 선글라스 같은 소품 하나에도 천상병은 어린애처럼 즐거워했다.     경남 창원 진북 출신의 천상병은 소년시절을 일본에서 보냈다. 해방이 되자 마산중학교(마산중고교)로 편입했다. 당시 마산중학교에는 김춘수, 김남조 등 시인이 많았다. 천상병이 마산중 재학시 그와 동향인 창원 진전 출신의 권환이 잠시 이 학교의 독일어 임시강사를 맡았다. 교토제대 독문과를 나온 권환은 카프를 이끈 거물급 문인이었다.     풍부한 감성의 천재소년 천상병은 이런 환경 속에서 조숙한 시인이 되었다. 마산중 5학년 때인 1949년 담임인 김춘수 시인의 주선으로 시 ‘강물’이 문예지에 추천됐다. 1952년 정식으로 등단했다.     천상병은 서울대 상대를 다닌 엘리트였지만 출세코스를 포기하고 거리의 시인이 되었다. 늦은 나이에 배려심이 깊은 부인을 만나 수락산 밑에서 안정을 얻었다. FM 클래식 음악방송과 브람스 교향곡 4번과 막걸리만 있으면 더 이상 부러울 것도 없는 자족의 삶을 살다 갔다.     ‘나는 술을 좋아하되 / 막걸리와 맥주밖에 못 마신다. // 막걸리는 / 아침에 한 병(한 되) 사면 / 한 홉짜리 적은 잔으로 / 생각날 때만 마시니 / 거의 하루 종일이 간다. (중략) // 막걸리는 술이 아니고 / 밥이나 마찬가지다 / 밥일 뿐만 아니라 / 즐거움을 더해주는 / 하나님의 은총인 것이다.(천상병의 시 ’막걸리‘)    
9    아버지 김철호 "하얀 심장" 쓰다, 아들 김휘 "빨간 심장" 그리다 댓글:  조회:2953  추천:0  2018-10-13
김철호의 시집 《하얀 심장》 출간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10월11일  시인 김철호의 동시집 《하얀 심장》이 일전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간됐다. 민족문자출판물특별보조프로젝트에 선정된 이 동시집은 제1부 나이테, 제2부 술래잡기, 제3부 왜 어른들을 더는 크지 못하게 하는 줄 아니?, 제4부 돌 등 4개 부분으로 나눠 도합 50여수의 동시를 실었다. 중국조선족가 창작그림책 시리즈 동시편으로 출간된 이 동시집은 어린이들의 감성을 더 풍요롭게 해 줄 한편의 시마다에 저자 김철호의 아들인 김휘가 직접 그린 그림이 담겨져있어 시를 더욱 사실감 있게 표현한 게 특징이다. 새 책을 선물받은 아이가 책을 펼쳤더니 핑크색 요정들이 뛰쳐나왔다는 아이들의 상상을 그린 ‘진달래’, 눈 우에 하트를 그려놓고 심장이 두근두근 뛰여서 하늘까지 뛰여오를 것 같은 마음을 그린 ‘하얀 심장’ 등 이 동시집은 자연스레 미소를 불러일으키는 시들로 가득하다. 저자 김철호는 이 시집에 대해 “어른이든 어린이든 누가 읽어도 공감할 보편적인 정서를 익살스러우면서도 형상적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아이들에게 우리가 발을 디디고 있는 자연의 생태와 변화에 귀 기울이고 그 안에 담긴 생명의 소중함을 전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연변일보 신연희 기자
8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인산인해"란 말 인제야 실감한다... 댓글:  조회:3087  추천:0  2018-10-13
인산인해 [ 2018년 10월 07일 ]     10월 1일~7일은 중국의 국경절 연휴다. 5월 첫 주부터 일주일 간 이어지는 노동절과 함께 중국 최대 황금 연휴 기간으로 꼽힌다. 매년 이 기간 중국의 관광 명소는 수 천만 명의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출처: 웨이보] 주요 고속도로의 교통 마비는 물론 기차역, 공항 등도 온통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다. 푸저우 기차역 [출처: 중신망] “자국 관광 수입은 내국인 손에 달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국경절 연휴는 경제적으로도 막대한 수익을 가져온다.  중국여유연구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2018년의 국경절 첫 날, 전국 유명 관광지의 방문객 수는 1억 명을 돌파했다. 발생한 수익만 1030억 위안, 한국 돈으로 16조원이 넘는다. [출처: 이매진 차이나] “관광은 커녕 사람 구경만 실컷 한다”는 반응이 자연스러울 만큼 여기도 사람, 저기도 사람이다. 민족 대이동을 방불케 하는 이 시기, 중국 곳곳의 연휴 풍경을 살펴봤다.   충칭(重慶)  충칭 [출처: 이매진 차이나] 매년 이 기간 3000만 명이 넘는 방문객이 충칭을 찾는다. 시내 관광 명소는 물론 지우거리(九街) 등 도심지 핫 플레이스에는 하루에도 1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밤낮없이 몰린다.   항저우(杭州) 시후 [출처: 이매진 차이나]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호수 시후(西湖)가 자리한 항저우에는 매년 이 기간에 20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오고 간다. 그 중 시후는 하루 최대 80만 명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찾아 인해(人海)를 이룬다.    시후 [출처: 이매진 차이나] 시후 주변은 유료와 무료 입장 지역이 나뉘어져 있다. 무료 구역은 평소 시민들이 자주 찾는 장소로 사람이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연휴 기간 만큼은 유료던 무료던 도처가 사람이다. 아름다운 호수는 커녕 공원에 들어갔다 빠져나오는 데 애를 먹는 경우가 다반사다.   하이난(海南) 하이난 [출처: 이매진 차이나] 중국의 하와이라 불리는 하이난도 예외는 아니다. 매년 18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연휴를 이 곳에서 보낸다. 2일 하이난시 통계에 따르면 하이난의 주요 A급 여행지의 방문객 수는 26만 명을 돌파했다.   청두(成都) 지우자이거우 [출처: 쓰촨일보] 매년 1000만 명에 가까운 인파가 청두 곳곳을 찾는다. 시내에도 볼거리가 많지만 지우자이거우(九寨溝), 황룽(黃龍), 두장옌(都江堰), 칭청산(青城山) 등 유명 관광지와의 거리가 가깝고, 가는데 편하다는 이유도 크다.   베이징(北京) 톈안먼 광장 [출처: 이매진 차이나] 수도 베이징엔 800만 명에 달하는 인파가 몰린다. 특히 구궁(故宮 자금성)은 연휴 기간 평균 방문객 수가 140만 명에 달한다. 수많은 인파로 문화재 훼손을 우려해 2015년부터 8만 명으로 입장 인원 수 제한을 실시하고 있다. 이 기간 왕푸징(王府井), 시단(西單) 등 인근 쇼핑 센터 및 176여 곳의 공원 및 관광 명소에는 하루에도 수십 만 명의 관광객들로 북세통을 이룬다.  창청 [출처: 이매진 차이나] 같은 기간, 인근의 창청(長成)을 찾는 관광객도 수십만 명은 기본이다. “창청 오르지 못한 자는 대장부가 아니다(不到长城非好汉)”는 말을 실천하겠다며 하루에도 10만 명에 가까운 인파가 창청 등정에 나선다. 한걸음 한걸음 서다시피 움직이는 건 기본. 이 기간 만큼은 체력보다 강한 끈기가 필요하다.     상하이(上海) 와이탄 [출처: 이매진 차이나] 중국에서 가장 트렌디한 도시, 상하이는 방문객은 베이징과 비슷한 수준이다. 이 중에서도 와이탄(外灘)은 최고 인기 지역이다. 올해도 연휴 첫날 하루 25만 여 명의 사람들이 이곳을 가득 매웠다. 상하이 쇼핑 메인 스트리트 난징루(南京路), 랜드마크인 동방밍주(東方明珠) 등을 포함한 135여 곳의 명소는 관광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황산(黃山)     10월 2일 황산에는 5만 명 가까운 인파가 몰려 언론에 화제가 됐다. [출처: 웨이보] 올해 여느 관광지 보다 황산은 ‘핫’ 하다. 신징바오(新京報)는 2일 하루에만 5만 명에 가까운 인파가 황산에 몰렸다는 소식과 함께 “300m 가는데 2시간이 걸렸다”는관광객의 인터뷰를 보도해 화제가 됐다.   이 외에도 전국의 주요 관광지는 매년 국경절 기간 수많은 인파로 가득 메워진 풍경을 연출한다. 구이저우 황궈슈(黃果樹) 폭포 [출처: 신화망] 장쑤 대운하 [출처: 신화망] 난징 중산링(南京 中山陵) [출처: 중신망] 샤오린스(少林寺) [출처: 중신망] ///차이나랩 
7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영원히 산이 된 "산사람"들... 댓글:  조회:3367  추천:0  2018-10-13
산이 된 사람들.. 히말라야 역대 사망자만 90여명 김민우 기자 2018.10.13.  자동요약   음성 기사 듣기   번역 설정   공유   글씨크기 조절하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2009년 고미영·2011년 박영석..역대 히말라야 산악사고 히말라야 김창호 대장 등 한국인 5명이 히말라야 원정 등반에 나섰다 사고를 당해 사망했다. 히말라야 등정에 도전했다 사망한 한국인 산악인은 90여명에 이른다. 1971년 5월 김기섭 대원은 마나슬루 7600m 지점에서 제5캠프를 설치하던 도중 돌풍을 만나 40m 절벽아래로 떨어져 사망했다. 이 사고는 한국인 최초의 히말라야 사망 사고로 알려져있다. 1998년 9월28일에는 최승철, 김형진, 신상만 대원이 히말라야 탈레이사가르를 등반하던 중 눈보라를 피하지 못해 사망했다. 우리나라 대표 여성산악인인 고미영 대장은 2009년 7월11일 낭가파르바트(8126m) 정상에서 내려오던 중 눈보라를 만나 목숨을 잃었다. 1993년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에 성공한 박영석 대장도 2011년 히말라야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박 대장이 이끈 원정대는 67일 일정으로 안나푸르나 남벽 등반길에 올랐다. 등정을 시작한 지 한달 후인 10월18일 원정대는 "좌우로 눈사태가 심해 전진 캠프로 가려면 오른쪽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는 마지막 무전을 끝으로 연락이 끊겼다. 이번에 숨진 김창호 대장이 당시 실종된 박 대장, 신동민, 강기석 대원 수색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2012년엔 히말라야 동부 산맥 촐라체에서 고 김형일, 장지명 대원이 등반 중 추락해 숨졌다. 이번에 사고를 당한 김창호 대장을 비롯한 9명으로 구성된 등반대는 히말라야 구르자히말산을 등반하던 중 베이스캠프에서 강풍에 휩쓸려 급경사면 아래로 추락해 사망했다. 이번 등반에 포함된 산악인은 '2018 코리안웨이 구르자히말 원정대' 소속의 김창호 대장, 유영직씨, 이재훈씨, 임일진씨 등 이다. 이들은 지난달 28일부터 다음달 11일까지 총 45일간 원정을 계획했었다. 원정대는 네팔 다울라기리 산의 구르자히말(7193m) 남벽 직등에서 신루트 등정에 나섰다. 그래서 이번 원정의 슬로건도 '코리안 웨이 프로젝트'로 정했다. 김창호 대장은 구르자히말의 새로운 등정 루트를 개척할 계획이었지만 베이스캠프 인근에서 숨진채 돌아오지 못했다. /김민우 기자 ================///   [앵커] 이번 사고가 난 지역은 세계에서 7번째로 높은 산인 네팔 다울라기리 산에 있는 구르자히말입니다. 희생자들은 한국 원정대만의 새로운 등반 루트를 개척하기 위해 등정에 나섰다가 사고를 당했습니다. 이어서 이지윤 기자입니다. [리포트] 원정대가 사고를 당한 장소는 네팔 서부 히말라야 산맥 중 다울라기리 산군에 속한 '구르자히말'이라는 산입니다. 높이는 7,193m로, 산 남쪽에는 3000m가 넘는 거대한 빙벽이 있습니다. 구르자히말은 히말라야를 등반하는 산악인들에게도 특히 험한 곳으로 꼽히지만, 동시에 동경의 대상입니다. 이번 원정대는 이 구르자히말에 새로운 루트를 개척해 등정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네팔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인 포카라에서 출발해 절반 쯤인 해발 3500m 고도까지 올라 베이스캠프를 설치한 뒤, 수직으로 남쪽 암벽 3700m를 등반해 정상에 오르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원정대 이름도 '코리안 웨이'로 지었습니다. 누구도 시도해보지 않은 한국인만의 루트를 개척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원정대는 해발 3500m에 베이스 캠프를 설치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강한 눈폭풍과 산사태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원정대는 결국 코리안 웨이의 꿈을 마지막까지 펼치지 못했습니다. 구르자히말은 앞서 1969년 일본 원정대가 처음 등정했고, 1972년 프랑스 원정대가 새로운 루트로 등정에 성공했습니다. 한국은 프랑스 원정대가 개척한 루트로 1988년 한 차례 등정한 적이 있지만, 이후 30년 동안 아무도 오른 적이 없었습니다. KBS 뉴스 이지윤입니다.  
6    국어학자 - 박창해 댓글:  조회:2950  추천:0  2018-10-13
‘철수와 영희, 바둑이’가 등장하는 초기 국어 교과서를 쓴 원로 국어학자 박창해 전 연세대 교수가 지난 14일(2010년 6월) 오전 8시께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3세.   박 전 교수는 광복 직후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사로 근무하면서 대한민국의 첫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를 집필했다.   그는 한글을 보다 쉽게 배울 수 있도록 서구의 언어학 이론을 도입했다. 즉 ‘가갸거겨’식으로 글자를 중점적으로 배우게 했던 기존의 학습 방식에서 벗어나 ‘바둑아 나하고 놀자’식으로 소리와 글자, 단어, 문장을 동시에 가르치는 방식을 도입했던 것이다.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교과서로 평가되며 우리나라 국어 교과서 집필방식의 근간이 됐다.    교과서 내용도 학생들이 쉽게 학습할 수 있도록 일상적인 내용을 많이 반영하도록 했다. 덕분에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는 철수와 영희는 당시 국민학생 이름의 대표격이 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철수와 영희라는 이름을 갖기도 했다.    고인은 그후 1952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부임해 1959년 이 대학 산하기관으로 한국어학당을 설립했다. 초대 학감(현 어학당 원장)으로서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육의 초석을 다지기도 했다.      1976년 연세대를 떠난 그는 미국 하와이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1988년에 귀국했다. 이후에도 한국어 구조론, 현대 한국어 통어론 연구, 한국어 집중강습 등의 저서를 집필하며 활발한 연구활동을 했다.  1916년 6월18일 만주 지린성 룽징(龍井)에서 태어난 고인은 연희전문학교(연세대 전신) 문과에 입학해 외솔 최현배 선생에게서 국어학을 수학했다.  /신소연 기자           소리ㆍ단어 동시학습법 첫 소개…연대 한국어학당 설립 (서울=연합뉴스) 김태균 기자 = '철수와 바둑이'가 등장하는 초창기 국어 교과서를 집필한 원로 국어학자 박창해 전 연세대 교수가 14일(2010년 6월) 오전 7시42분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3세.  1916년 6월18일 만주 지린성 룽징(龍井)에서 태어난 고인은 연희전문학교(연세대의 전신) 문과에 입학해 외솔 최현배 선생에게서 국어학을 배웠다. 1945년 광복 후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사로 근무하며 서구의 언어학 이론을 도입, '철수와 영희, 바둑이'가 나오는 대한민국의 첫 국민학교 국어 교과서를 집필했다. 이 교과서는 `가갸거겨' 식으로 글자만 학습하던 예전 방식에서 벗어나 '바둑아 바둑아 나하고 놀자' 식으로 소리와 글자, 단어, 문장을 동시에 가르치는 방식을 도입해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교과서로 평가됐다.  1952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부임한 고인은 1959년 이 대학 산하기관으로 한국어학당을 설립, 초대 학감(현 어학당 원장)을 맡아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육의 초석을 다지기도 했다.  1976년 연세대를 떠나 미국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1988년 귀국했으며, 한국어 구조론, 현대 한국어 통어론 연구, 한국어 집중강습(An Intensive Course in Korean) 등을 저서로 남겼다. 유족으로는 의근(전 미주 조선일보 뉴욕지사 사장), 은성(한양대 음대 교수), 은희씨 등 2남1녀가 있다. ==========================/// 국어학자 - 박창해         “학교교육은 가장 중요한 나랏일이다. 바람직한 학교 교육은, ‘교원’과 ‘학생’, 그리고 ‘교육과정’이 서로 밀접하게 관계 맺을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 교육에 기본이 되는 알짬이 교과서이다.   교과서는 학교 교육은 물론, 사회, 문화 주요 매체로 지식과 정보 원천으로도 높은 가치를 지닌다. 우리는 교과서에서 지식과 기능을 얻고, 바르게 사는 길을 깨닫게 되었을 뿐 아니라, 더불어 사는 방법을 알았다.   교과서에는 우리 역사와 문화가 담겨 있고, 한겨레 얼이 서려 있다. 이번에 제정하는 ‘교과서의 날’은 우리나라 정부가 수립된 뒤 문교부가 최초로 발행한 ‘초등 국어1-1’ 교과서 편찬일인 1948년 10월 5일을 기리는 뜻에서 10월 5일로 한다. 10월은 개천절과 한글날이 나란히 하는 ‘문화의 달’이기도 하여 더욱 뜻 깊다.” 2006년 제정된 ‘교과서의 날’ 취지 간략이다.            밝고 씩씩한 철수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를 하며  우리들은 언니 뒤를 따르렵니다.”   누구나 기억하고 있는 초등학교 졸업식에서 부르는 노래다. 지금이야 교과서를 물려받을 일이 없지만, 5, 60대 사람들은 딱히 교과서가 아니더라도 전과나 자습서, 위인전을 물려받아 쓰던 기억이 아슴아슴 피어나리라.       물려받은 책과 몽당연필, 그리고 구겨진 양은 도시락과 보자기 책보, 조개탄 난로가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추억거리. 대한민국 장년이라면 철수와 영이 그리고 바둑이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소중한 추억이리라.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진 뒤 가장 먼저 만들어진 국정교과서는 다름 아닌 ‘국어1-1’이다. 여기에 나오는 철수와 영이 그리고 바둑이는 어릴 적 동무마냥 살가운 이름들이다.   철수가 말한다. “영이야, 이리 와 나하고 놀자.” “영이야 이리 와 바둑이하고 놀자.”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영이가 영희로 바뀌었다. 그때 초등학생들은 철수처럼 착하고, 영희처럼 곱기를 꿈꿨다. 그래서 철수와 영희는 ‘국민 이름’이었다.   반마다 큰 영희, 작은 영희로 부르는 촌극이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1960년대 시골이나 서울변두리 아이들은 거개가 검정 고무신을 신었던 터라 삽화에 나오는 철수와 영희가 신은 운동화가 몹시 부러워했다. 그만큼 교과서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바둑이와 철수’에 나오는 ‘철수’는 마치 일제강점기를 거친 적이 없는 애처럼 밝고 씩씩하다. 이 책을 펴낸 박창해(朴昌海 1916-2010)는 1916년 만주 지린성 룽징(吉林省 龍井)에서 태어났다.   당시 길림성 용정은 민족의식이 강한 기독교 세력이 뿌리를 내려 윤동주, 문익환 같은 이들을 낳은 곳이기도 하다. 넉넉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박창해 말에 따르면 강아지를 동생처럼 키웠으며, 온 식구가 두레반상에 빙 둘러앉아 밥을 먹고, 할아버지 등에 올라타 말 타기를 하고, 아버지와 숨바꼭질도 하며, 동네에서 일본, 러시아, 중국, 동무들과 어울려 놀았단다.   여느 한국인들과는 달리 일제 식민지 아래에서도 식민지 의식이 거의 없이 자랐다고 보아도 지나치지 않았기에 철수와 영이가 그토록 밝을 수 있지 않았을까.  60여 년 전 스토리텔러 박창해 자주의식이 강한 용정에서 태어나 독립정신을 이어받을 수 있었던 박창해는 연세대학교 전신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들어가 외솔 최현배 선생을 만나 드물게 우리 정수인 한글 정신을 몸에 익혀 우리 얼을 품을 수 있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사로 뽑힌 박창해는 우리나라 최초 교과서 집필을 이끌었다. 박창해가 이끌어 펴낸 우리 최초 국어교과서는 ‘가갸거겨’ 따위 자모음 모양과 이름순으로 글씨만 배우던 그때까지 방식을 털어내고 “바둑아, 바둑아 나하고 놀자.”처럼 소리와 글씨, 낱말을 한꺼번에 아울러 가르쳐 놀라운 혁신을 이뤘다.   특히 박창해는 첫 단원에서 끝 단원까지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야기 전개 방식을 펼쳐 교과서를 만들었다. 60여 년 전에 박창해는 이미 스토리텔러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 국어교과서는 문화바로미터로 식민지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은 한국 사회 말과 글 그리고 생각 프레임을 결정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박창해가 펴낸 국어교과서야말로 나라사람을 도타이 보듬는 나라 대한민국을 알리는 문화선포라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그 뒤로 1952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부임한 박창해는 1959년 연세대산하기관으로 한국어학당을 세운 뒤, 초대 학감을 맡아 외국인 한국어교육에 힘을 쏟았다.   환갑이 되던 1976년 연세대를 떠나 미국 하와이 대학에 가서 한국어를 가르치다가 열두 해 만인 1988년 다시 돌아와 일흔이 훌쩍 넘긴 나이에도 , , 를 펴내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2010년 6월 14일 향년 95세를 일기로 흙으로 돌아간 박창해. 너나들이 헐벗고 모든 것이 모자라던 때. 열심히 글을 깨우치고 배워, 어렵고 힘들었던 시기를 헤쳐 나갈 꿈만으로 허기진 배를 달랠 수밖에 없고 변변한 읽을거리조차 없던 그때 그 시절, 교과서는 살아갈 방향을 일러주는 지식과 정보, 정서를 채워주는 보물창고였다.     
5    윤동주와 최현배, 박창해 댓글:  조회:2075  추천:0  2018-10-13
연희전문학교 연희전문 재학 시절 윤동주가 기숙사 생활을 했던 연세대 핀슨홀 전경.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언어의 역사는 얼마나 장구한가. 원시인들은 어떻게 소통했을까. 중세 언어인 라틴어나 한문은 권력의 상징이었다. 근대에 들어 민족어가 탄생하면서 개인은 비로소 단독자로서 자유를 얻는다. 1446년 세종대왕이 한글을 반포한 후, 한글은 조선인에게 존재와 자유를 주었다.   1938년 2월 광명중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4월 9일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한다. 입학하자마자 핀슨홀 3층 ‘천장 낮은 다락방’에서 고종사촌 송몽규, 브나로드 운동을 열심히 했던 강처중과 한방을 쓴다. 사실 그리 기분 좋은 시기만은 아니었다. 1938년 3월 총독부는 ‘일본인과 조선인 공학(共學)의 일원적 통제를 실현’한다면서 조선어를 수의(隨意)과목, 곧 선택과목으로 만들었다. 조선어를 폐지하는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국어(일본어)를 쓰는 학생과 안 쓰는 학생을 구별하여 상벌을 주라는 훈시가 내렸다.  연세대 핀슨홀 건물 앞에 세워진 시비.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조선어로 동시 쓰면 누가 읽겠어, 염려하는 친구 윤석중의 말에 “땅에 묻지”라고 박목월이 경주에서 말했던 해였다. 재일(在日)시인 김시종은 제주도에서 아잇적 조선어로 말했다가 선생님께 뺨을 맞았다. 이듬해 국민학교에 조선어 수업이 숫제 없어 시인 고은은 아잇적 머슴 대길이에게 가갸거겨를 배웠다(고은, ‘머슴 대길이’). 이때부터 일본어 친일시가 활발하게 발표되기 시작했다.   윤동주가 한글로 글을 쓰면 손해라는 사실을 몰랐을까. 윤동주는 좋아하던 최현배 교수의 두툼한 ‘우리말본’(1937년)을 읽었다. 최현배 교수의 금지된 조선어 수업을 수강했고, 입학하고 한 달 후 5월 10일 동주는 검박한 언어로 ‘새로운 길’을 썼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 윤동주, ‘새로운 길’   핀슨홀 내부에는 윤동주 기념관이 마련되어 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교과서에도 실려 있고, 광화문에 현판으로도 걸렸고, 서대문구청에서 연북중학교 뒷면으로 이어진 ‘안산 자락길’ 산책로 왼편에 시비도 있어 친숙한 작품이다. 내를 건너고 숲을 지나 고개를 넘어 마을로 가는 길은 험난한 길일 수 있다. 1연과 5연이 같은 수미상관이다. 2연과 4연은 묘하게 비틀린 대칭을 이룬다. 쉽게 오지 않을 희망을 그는 반복한다.  포기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까닭은 가운데 3연에 나오듯,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기 때문이다. 보이는 ‘곁’이 있기 때문이다. ‘식구로는 굉장한 것이어서 한 지붕 밑에서 팔도 사투리를 죄다 들을 만큼 모아놓은 미끈한 장정들만이 욱실욱실하였다’(‘종시·終始’)는 기숙사 핀슨홀 생활이 즐겁기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최현배, 손진태, 이양하 등 당시 최고의 스승들에게 역사며 우리말을 배울 수 있는 긍지는 얼마나 뿌듯했을까.   원하던 학교에 입학한 달뜬 기대를 표현한 시로 이 시를 읽을 수 있다. 한글로 썼다는 사실도 대단치 않을 수도 있다. 이전에도 한글로만 쓴 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어 사용과 교육이 금지되기 시작한 배경을 생각하면, 조금 고집스러운 오기를 느낄 수 있다. 희망 없는 반복이 지겹더라도, 이 길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걷겠다는 풍성한 반복 의지가 엿보인다.   윤동주는 힘들 때 성찰할 때 산책을 즐겼다. 기타하라 하쿠슈의 동시 ‘이 길(この道)’을 동생들에게 자주 불러줬던 그는 ‘연희 숲을 누비고 서강 들을 꿰뚫는 두어 시간 산책을 즐기고야 돌아오곤 했다’(정병욱 ‘잊지 못할 윤동주’),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서시’)는 구절도 그의 일상이었을 것이다. 그의 길은 어떤 길이었을까. 윤동주를 저항시인이니 민족시인이니 특정 브랜드로 정하는 것은 부분으로 전체를 규정하는 침소봉대를 범할 수 있다. 그의 시에 저항과 민족이라는 요소가 있지만, 그 범주로 윤동주를 한정할 수는 없다. 그의 저항과 실천은 미묘하게 숨어있다. 수수하게만 보이는 ‘새로운 길’에도 저항의 단초가 숨어 있다.  역사를 지키는 투쟁은 기관총에 의해서만이 아니다. 망각에 저항하는 기억이야말로 지루한 투쟁이다. 지옥 같은 세상에서도 살 만한 세상을 꿈꾸는 판타지를 유지하는 것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잔혹한 낙관주의(cruel optimism)다. 대학교 초년생의 한낱 달뜬 마음을 담은 소박한 소품일지 모르나, 여기에는 죽지 않는 저항의 씨앗이 담겨있지 않은가.     ‘새로운 길’을 시발로 금지된 언어로 계속 시를 쓰며 그는 금지된 시대에 균열을 일으켰다. 그에게 ‘새로운 길’을 가자는 의지는 ‘아Q정전’(루쉰)의 정신승리법이 아닌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어졌다. 금지된 언어로 19편의 시를 깁고 다듬어 시집을 내려 했다. 이것이야말로 ‘죽어가는’ 한글을 사랑하는 실천이었고, 망각을 강요하는 권력에 대항하는 저항이었다. ‘새로운 길’을 꿈꾸며 견디려 했던 그는 4학년에 오르면 급기야 ‘모가지를 드리우고 피를 흘리겠다’는 위험한 다짐까지 써 놓는다.    스승 한 명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그 제자들에게서 나타난다. 스승 최현배와 제자 윤동주는 1940년대 지역은 다르지만 함께 감옥에 갇혔고 한글을 잊지 않았다. 최현배의 금지된 조선어 수업에서 함께 배웠던, 윤동주의 2년 선배 박창해는 광복 후 ‘바둑아 바둑아 이리 오너라’로 유명한 ‘바둑이와 철수’를 만들어 국어교과서 독립선언을 완성한다. 최현배는 제자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자신의 큰아들이 대표로 있는 정음사에서 가로쓰기로 낸다. 최현배는 여러 학자와 함께 ‘조선말 큰사전’을 완성시킨다.  무한한 성찰과 저항을 거쳐 조선어는 존재해 왔다. 보이지 않고 하찮아 보이는 저항들이 모여, 거대한 언어의 역사와 단독자의 자유를 지켰던 것이다.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
4    윤동주와 키에르케고르 댓글:  조회:3810  추천:0  2018-10-13
  출생 1813. 5. 5, 코펜하겐 사망 1855. 11. 11, 코펜하겐 국적 덴마크 요약 키에르케고르는 각 개인이 삶의 여러 길 가운데 하나를 완전히 의식적으로 선택하고 그에 따르는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고 믿었는데, 그의 이러한 생각은 모든 실존주의 사상과 저술에서 기초가 되었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를 실존주의의 창시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키에르케고르의 성격은 아버지 미켈 페데르센 키에르케고르에게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철학 단상〉에서 그리스도교가 의미 있는 것이 되려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모습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그리스도교가 자유의지를 전제로 존립하는 것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는 불확실성이 실존적인 인간에게는 최고의 진리임을 주장했다. 목차 접기 개요 초기생애 초기의 철학 저술 헤겔주의에 대한 공격 교회와의 대결 영향 키에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덴마크의 철학자, 신학자, 시인 ⓒ Brian0918 / wikipedia | Public Domain 개요 실존주의 철학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초기생애 키에르케고르의 성격은 아버지 미켈 페데르센 키에르케고르에게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아버지는 서부 유틀란트의 황무지에서 한 가난한 소작인의 조수로 일을 시작했다. 어느날 신이 자신의 고통과 가난에 무관심한 데 절망과 격분을 느껴 언덕 위에 올라가 준열하게 신을 저주했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코펜하겐에서 목재상을 하고 있던 삼촌에게 갔는데, 그때부터 사업이 번창하기 시작하여 죽을 때는 수도 코펜하겐에 5채의 집을 소유한 부자가 되었다. 1838년 아버지가 죽자 키에르케고르는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았으며, 그 덕분에 금전문제에 방해받지 않으면서 저술활동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키에르케고르가 한 사람의 인간이자 작가로서 성장한 데는 재정적 유산보다는 심리적 유산이 훨씬 더 크게 작용했다. 그의 아버지는 정통 루터교를 엄격히 고수했고 형식논증의 논리를 좋아했지만, 아들 중에서 가장 총명한 키에르케고르에게 시킨 엄격한 종교적·지적 훈련은 상상력이 넘치는 것이었다. 키에르케고르는 아버지의 강한 성격과 경건한 모습 이면에 불안하게 놓여 있는 억눌린 우수의 영향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어린 나이에 키에르케고르는 아버지를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죄의식을 알게 되었으며, 뒷날 그 이유가 아버지가 어릴 적에 신에게 퍼부었던 저주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죄를 알고 충격을 받은 그는 방탕한 생활에 빠져들었고 어머니의 죽음과 6명의 형제 자매 중 5명의 죽음이 신의 저주를 증거한다는 확신이 늘 그를 괴롭혔다. 그는 신학을 공부하러 코펜하겐대학교에 갔으나 오히려 철학 쪽에 관심을 가졌다. 1838년 아버지가 죽자 키에르케고르는 정신을 차렸다. 그는 신학 공부를 다시 시작하여 2년 뒤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목표를 바꾼 데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레기네 올센이라는 어린 소녀와 사랑에 빠져 약혼까지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곧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그 어린 소녀와 설명할 수 없는 죄의식과 복잡한 인간정신에 대한 유별난 의식에 짓눌리고 있는 자신 사이에 커다란 틈이 있음을 깨달았다. 결국 그는 파혼했고 베를린으로 가서 6개월을 살았다. 이 사소한 연애사건은 통속소설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에게는 심각한 영향을 미쳤고 그의 몇몇 저작에서 반성과 해설의 자료가 되었다. 초기의 철학 저술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삶의 단상〉(1843)의 방대한 원고를 가방에 넣고 베를린에서 돌아왔다. 키에르케고르의 책은 거의 모두가 익명이나 각 저작에 어울리는 가명으로 출판되었다. 이것은 독자들에게 내놓는 사상을 권위자의 견해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독자들의 판단, 특히 선택을 위해 제시된 다양한 삶의 양식으로 받아들이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실 이것이 책 제목인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의미이다. 즉 이 책은 미적 인생관 또는 윤리적(윤리종교적) 인생관의 대안을 제시한다. 키에르케고르는 각 개인이 삶의 여러 길 가운데 하나를 완전히 의식적으로 선택하고 그에 따르는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고 믿었는데, 그의 이러한 생각은 모든 실존주의 사상과 저술에서 기초가 되었다. 같은 해에 출판된 〈공포와 전율〉·〈반복〉에서는 신앙이란 본질적으로 역설적이라고 결론짓는다. 1844년에는 〈철학 단상〉·〈불안의 개념〉을 발표했다. 그는 〈철학 단상〉에서 그리스도교가 의미 있는 것이 되려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모습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그리스도교가 자유의지를 전제로 존립하는 것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색인:헤겔주의). 그는 자유의지가 없으면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다고 믿었다. 이것은 당시 유행하던 헤겔 철학에 대한 공격이었다. 키에르케고르는 헤겔 철학과의 대결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그 전에 먼저 자유의 철학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심리학 분야로 확장할 필요를 느꼈다(불안). 그 결과가 〈불안의 개념〉이었다. 비상할 정도로 통찰력이 번득이는 이 책은 아마 현존하는 최초의 심층심리학 저술일 것이다. 1845년 키에르케고르는 〈인생행로의 여러 단계〉이라는 새 책을 준비했다. 이 책은 방대하며, 그의 저술 가운데 가장 성숙한 예술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은 제목이 시사하듯이 〈이것이냐 저것이냐〉에 담긴 사상을 반복하는 면도 있지만 사실상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것은 종교적 단계 혹은 종교적 영역은 미적 단계만이 아니라 윤리적 단계와도 구분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색인:미학). 사실 이러한 발전은 인간 윤리가 삶의 방식으로는 부적합하다는 점을 보여주려 한 이전의 모든 저술들에 구현되어 있는 생각들의 논리적 결과였다. 따라서 〈이것이냐 저것이냐〉에는 미적 영역과 윤리적 영역 둘만 있었던 데 반해 〈인생행로의 단계〉에는 종교적 영역을 포함해 세 영역이 있다. 인생과 인간성 전체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의 견해는 점차 음울한 쪽으로 나아갔다. 그의 심리적 분위기가 이렇게 바뀐 것은 불쾌한 경험을 많이 한 탓이었다. 레기네 올센은 결혼을 해버렸으며, 그리하여 속세를 벗어나 그녀와 일종의 신성결혼을 맺은 상태에서 오로지 신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 때만 기다리던 낭만적 환상은 깨어지고 말았다. 사실상 이 환상은 〈공포와 전율〉·〈반복〉의 2책에 깔려 있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환상을 버렸다는 것은 〈인생 행로의 단계들〉의 제1부인 〈성찬〉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성찬〉은 플라톤의 〈향연〉을 본떠 사랑·에로스·성·여자 등의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여성 일반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가차없는 경멸을 담고 있다. 헤겔주의에 대한 공격 키에르케고르는 그밖의 몇 가지 점에 대해서도 실망했다. 그는 자신의 저술들에 담긴 취지를 제대로 보지 못하거나, 심지어 제대로 보면서도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려고 애쓴 문학비평가들과 언쟁을 벌였다. 이 언쟁에서 승리한 것으로 판명나기는 했지만 그의 마음은 깊은 상처를 받았고 인간에 대한 심한 혐오감으로 가득 찼다. 이 쓰라림은 그 후에 쓴 대부분의 저술들에서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러나 언쟁 직후에 쓴 조금 색다른 책인 〈철학 단상에 대한 결론적·비학문적 후기, 모방적·감상적·변증법적 구성, 실존적인 기고〉(1846)는 인상적인 제목과 함께 "요한네스 클리마쿠스가 짓고 S.키에르케고르가 출판함"이라는 글귀를 달고 있다. 키에르케고르의 가장 중요한 철학 저서가 한 책의 후기 형태이며 그 책의 분량의 1/5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가 지닌 아니러니의 전형이다. 철학적 단편(Philosophical Fragments)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적 단편 원고 ⓒ Lhademmor / wikipedia | Public Domain 그리고 그 저서를 '실존적인 기고'라고 칭함으로써 독자에게 자신의 철학적 견해를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즉 그의 목표는 당대 유럽을 휩쓴 지배적 철학인 헤겔 철학에 보복을 가하는 일이었다. 키에르케고르는 실존하는 것 전체를 체계화하려는 헤겔의 시도를 공격하면서, 실존은 불완전하고 끊임없이 발전하기 때문에 체계로 구성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나아가 그는 논리에 운동성을 도입하려는 헤겔의 시도에서 논리적인 오류가 발생하는 것에 주목하고, 범주들을 뒤섞는 데서 혼란이 일어났다고 폭로했다. 헤겔은 자신이 객관적 인식론을 만들었다고 생각했지만, 키에르케고르는 주관성이 진리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키에르케고르의 정의를 인용하면, "헌신성이라는 가장 정열적인 정신은 객관적으로 불확실하며, 이 불확실성이 실존적인 인간에게는 진리, 그것도 최고의 진리이다." 현대 실존주의의 초석이 된 이 교설은 헤겔이 자신의 철학을 가리켜 일컬었던 '체계'를 손상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철학 체계를 근거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체계를 구축하는 자는 실존을 지성으로써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절대로 깨닫지 못할 것이다. 헤겔은 실존과 사유를 동일시함으로써 신앙의 여지를 하나도 남겨 놓지 않았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는 체계 속의 한 단락에 지나지 않는 것, 즉 일반자의 예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이것은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그리스도교의 수모였다. 키에르케고르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도가 되도록 설교해야 한다는 소명감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동시대인들에게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모습이 무엇인지를 이해시키려는 의무감만큼은 확실히 느꼈다. 나아가 그는 신이 자신에게 특별한 임무를 지정해주었기에 글쓰는 일마저도 완전히 그만두어야 한다고 느끼기까지 했다. 교회와의 대결 그러나 키에르케고르의 은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글쓰는 일을 그만둘 수 없었으며, 이번에는 사상을 구체적으로 다듬기 시작하는 일이 '소명'이 되었다. 그는 동시대인들에게 그리스도교의 참모습을 알리는 임무와 세속사회에서 안락을 추구하는 등 한마디로 성직자가 그리스도의 종 대신에 시민의 노예가 됨으로써 종교를 배반한 덴마크 국교회의 수치스런 상황을 폭로하는 임무를 신에게 명령받았다고 생각했다(→ 색인:덴마크 복음주의 루터교 민족교회). 키에르케고르의 종교적 사고는 더욱더 엄격한 방법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당시의 저술들, 특히 〈탐구 정신에 관한 교훈적 담론〉(1847)·〈사랑의 작품〉(1847)·〈그리스도교 담론〉(1848)·〈죽음에 이르는 병〉(1849)·〈그리스도교 훈련〉(1850) 등에서 그리스도교를 다른 어떤 저술보다 더 완고하고 비타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그리스도교 훈련〉은 덴마크 교회의 지도부에 대한 공격을 가장한 것이기ㄱ도 했다. 1855년 무렵 그는 신에게서 국교와 성직자들을 가차없이 공격하도록 권위를 부여받았음을 확신하고는 즉시 많은 양의 소책자·팜플렛과 〈순간〉이라는 잡지를 발간하는 일에 착수했다. 이 잡지는 그중 10권이 키에르케고르 혼자만의 기고로 만들어졌다. 이렇게 과도하게 진행된 국교회 비판운동으로 그의 건강은 몹시 쇠약해졌다. 운동을 시작한 지 거의 2년이 지날 무렵 그는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 1개월 후 죽었다. 그무렵에는 재산도 탕진한 상태였다. 졸도하기 전 〈순간〉 제10호를 인쇄소로 보내면서 남은 유산을 다 써버렸다. 그는 소유하고 있던 몇 안 되는 귀중품을 그가 사랑한 여자이자 당시 관리와 결혼하여 덴마크령 서인도제도에서 살고 있던 레기네 올센 앞으로 남겨 두었다. 영향 키에르케고르 저작의 정점을 이룬 국교회에 대한 치열한 공격은 관리하기가 무척 힘든 유산이었다. 이 책은 국교회를 변화시키지는 못했으나, 많은 성직자들 개개인이 국교회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수정하거나 심지어 인연을 끊게 만들었다. 키에르케고르 저작의 철학적·예술적 진가는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인정되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1877년 키에르케고르에 관한 최초의 저서를 출판하여 그의 사상과 삶에 대한 탁월한 분석을 제공한 덴마크의 문학비평가 게오르 브란데스(1842~1927)의 공이 컸다. 브란데스는 공공연한 무신론자이자 그리스도교 증오자였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키에르케고르를 교회에 반항한 인물로 다루었다.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은 종교에 특별히 헌신적인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사상의 그리스도교적 교설에 찬동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호소력을 갖고 있었다. 예를 들어 키에르케고르 저작집 초판의 편집자 3명 가운데 한 사람은 확고한 그리스도교도였고 다른 두 사람은 무신론자, 그것도 한 사람은 그리스도교회에 대한 공공연한 적대자였다. 독일에서는 키에르케고르에 대한 관심이 널리 퍼져 제1차 세계대전 전에 그의 모든 작품이 번역되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이 광범위하게 알려진 것은 제1·2차세계대전이 진행된 기간이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프로이트주의 정신분석학자들이 기여했는데, 이들은 대개 '죽음에 이르는 병' 등 키에르케고르가 다룬 것과 똑같은 현상을 취급했다. 스위스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카를 바르트의 신학도 카를 야스퍼스와 마르틴 하이데거의 철학 사상과 유대인 종교사상가 마르틴 부버와 같이 실존주의 사상을 고양하는 데 공헌했다. 키에르케고르의 저작에 대한 결정적인 이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나타났는데, 이 과정에서 '불안'·'고통' 등의 상태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 이루어졌다. 이제 키에르케고르에 대한 관심은 영국과 프랑스뿐만 아니라 미국과 일본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인 것이 되었다. 고독하게 죽은 뒤 약 1세기가 지나서야 비로소 그의 시대가 도래한 셈이다.
3    일본시의 해설을 공부하기 댓글:  조회:2648  추천:0  2018-10-13
시의 정수를 품은 다채로운 일본시                                                              /한성례     일본의 현대자유시는 1882년『신체시초新体詩抄』부터 첫 발을 내디딘다. 이는 그 이전의 전통시가인 구체시旧体詩와는 다른 형태를 서구의 포에트리Poetry에서 이식해온 것을 말한다. 신체시 시대에는 주로 서사시나 극시였다. 이후로 낭만시, 구어자유시, 이상주의시, 자연주의시, 상징시, 민중시, 예술파의 시, 프로레타리아시, 전위시, 모더니즘시, 저항시 등의 다양한 실험과 경향을 거쳐 근대시가 완성되었고, 이것이 현대시로 이어진다. 일본 현대자유시의 위치   패전 후 일본시단은 ‘아레치파’와 ‘렛토파’로 나뉜다. 1947년에 창간한 시 잡지 『아레치荒地』를 중심으로 모인 모더니즘 시인들은 문명이나 사회비판을 시에 도입하기로 한다. 주로 영국시인 엘리엇이나 오든, 파운드 등의 영향을 받은 시인들이었다. 일본어 '아레치'는 '황무지'를 뜻하며 엘리엇의 시집명에서 따온 말이다. 이들은 일본제국주의가 전쟁 중에 행한 전체주의를 외면하고 시 창작을 핑계 삼아 도피했던 점을 처절하게 참회하고 반성하였다. 그런 연유로 개인주의적인 입장을 관철했고, 시의 표현은 암유를 중시했다. 그로 인해 시가 몹시 난해해졌다. 현재의 모더니즘은 훨씬 더 난해해졌다. 이는 현대시가 일반대중에게서 멀어진 한 요인이기도 했다. 『렛토(列島)』는 전후 사회파를 대표하는 시 문학지였다. 사회파 시인들은 전쟁 중에 프롤레타리아 시가 정치에 종속해서 예술적으로 빈곤했음을 반성하였고, 예술과 정치 혁명을 동시에 추구했다. 이들은 프랑스의 저항시 쉬르리얼리즘을 중시했다. 1960년대의 미국안보반대운동까지는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이 활발했으며 리얼리즘의 시 작품도 많았으나 이 운동이 패배한 후에는 모더니즘 시가 우위를 점했다. 현재 일본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전후세대 시인들은 대부분 모더니즘적이거나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성향이 강하다. 두 그룹 모두 언어를 중시했다. 인생, 자연, 감정 등이 아니고, 언어 그 자체의 자율성을 중시하여 언어기호로서 새로운 표현방식을 추구했다. 무엇을 표현할까 보다는 ‘어떻게 표현할까’였다. 1970년대 이후에는 서구에서 유행하던 포스트모더니즘이 일본에도 들어온다. 이는 모더니즘적 완성보다는 해체를 중요시했고, 이질적인 요소를 배제하지 않고 경계를 허물며 접합시켰다. 하지만 전통적인 문맥이나 통상적인 논리를 부정하고 해체를 목적으로 삼았으므로 한층 난해해졌다. 이처럼 해체시나 반시의 힘이 강해지면서 일반적인 독자가 감소했다. 이러한 현대시의 빈자리를 전통 시 하이쿠(俳句), 단카(短歌), 와카(和歌)가 차지했다. 하이쿠 인구는 천만 명에 달할 정도이며 하이쿠 동인이나 모임은 일본 전국에 수도 없이 많다. 하이쿠는 이미 세계로 뻗어나가 여러 나라에서 하이쿠를 쓰고 읽고 즐긴다. 해외의 하이쿠 인기는 유럽인들에게 가장 높다. 의외로 아시아에서는 별 관심을 갖지 않는데, 그 중에서도 현대시가 강한 한국에서는 유독 인기가 없다. 1987년에 출간한 타와라 마치俵万智(1962~)의 하이쿠집 『사라다 기념일』은 280만부가 팔릴 정도로 대베스트셀러였다.   신서정新敍情의 사회시   난해한 시가 주류를 이루는 일본시단에서 독자적인 시 창작의 길을 걸어온 시인들도 적지 않다. 이들은 일상생활에서 소재를 취해 인생, 자연, 감성 등을알기 쉬운 언어로 표현했다. 독자도 많았고 시집이 출간되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1990년대 이후 화제에 올랐던 주요 시집은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子(1926~2006) 『기대지 않고』, 이시가키 린石垣りん(1920~2004) 『표찰 따위』, 타니카와 슌타로谷川俊太郎(1931년~)『세상모르는 사람』등이 있다. 이들 중 이바라기 노리코는 50세가 넘어 독학으로 한국어를 공부하여, 다수의 한국시를 번역하여 일본에 알렸다. 주로 신서정의 사회시를 써서 많은 사랑을 받은 여성시인이다. 대표작 한 편을 살펴보자.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거리는 와르르 무너져 황당한 곳에서 푸른 하늘이 보이기도 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주위사람들이 수도 없이 죽었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 없는 섬에서 나는 멋 부릴 기회를 놓쳐버렸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아무도 내게 멋진 선물을 해주지 않았다 남자들은 거수경례하는 예절밖에 모르고 아름다운 눈길만을 남겨둔 채 다들 떠나갔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 머리는 텅 비어 있었고 내 마음은 차가워서 손발만이 밤색으로 빛났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 나라는 전쟁에 졌다 그런 바보 같은 짓을 왜 했단 말인가 블라우스 소매를 걷어 올리고 비굴한 거리를 활보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라디오에서는 재즈가 흘렀다 금연을 깨고 담배를 다시 피었을 때처럼 어질어질하게 나는 이국의 달콤한 음악을 탐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몹시도 행복하지 못했다 나는 몹시도 엉터리였다 나는 몹시도 외로웠다 그래서 나는 다짐했다 어찌 됐든 오래오래 살기로 늙어서 아주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프랑스의 루오 할아버지처럼 말이지     후쿠이福井의 시인들 노리타케 가즈오則武三雄(1909~1990)는 돗토리鳥取 현에서 태어났으며 패전 전에는 조선에서, 패전 후에는 후쿠이 현에서 활동한 시인이다. 그는 19세가 되던 1928년에 조선에 건너와 약 17년간을 살았다. 조선총독의 촉탁으로서 평안북도 경찰부에 근무하면서 압록강을 배경으로 쓴 시를 많이 남겼다. 패전 후에는 후쿠이 현에 피난 가 있던 스승 미요시 다쓰지三好達治(1900~1964)를 방문했다가 그의 권유에 의해 이 지방에 자리를 잡고 지방주의를 제창하며 후쿠이 현에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오카자키 준岡崎純(1930~), 가와카미 아스오川上明日夫(1940~), 아라카와 요지荒川洋治(1949~) 등 현재 일본시단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는 시인들이다. 노리타케는 살아있을 동안에는 일본시단을 대표할 만한 큰 시인은 아니었으나 현재 일본을 대표하는 후진들의 시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후쿠이 현은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시문학상인 ‘H씨 상’ 수상 시인을 다수 배출한 지역으로도 유명한데 주로 그의 제자들이다. 노리타케는 조선에 살 때 조선시인 백석과 절친했다. 백석은 당시 노리타케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써주었다.   나 취했노라 - 노리타케 가즈오에게 - 나 취했노라 나 오래된 스코틀랜드산 술에 취했노라 나 슬픔에 취했노라 나 행복해진다는 생각에 또한 불행해진다는 생각에 취했노라 나 이 밤 공허하고 허무한 인생에 취했노라 패전 후 일본에 돌아간 노리타케는 1978년 69세에 출간한 『파葱』라는 시집 제목을 백석을 생각하며 지었다. 백석이 파를 든 모습을 본 것은 조선과 만주의 국경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서였다고 한다. 백석이 만주에서 산 십여 알의 파를 한 손에 들고 다리를 건너 조선으로 돌아오는 모습이었다. 노리타케가 조선 시절의 백석을 추억하며 쓴 시이다.       파       파를 들고 있던 백석 백白이라는 성에 석石이라는 이름의 시인. 53세가 되어 나도 파를 한 번 들어본다. 뛰어난 시인 백석. 무명이었던 나. 아득하게 20 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친구 백석이여. 살아 있는가? 부디 살아 있기를. 백이라는 성, 석은 이름인 조선의 시인. 노리타케가 길러낸 제자 중에 현재 일본에서 가장 대표적인 시인이며, 시단 뿐 아니라 문화평론가, 방송인 등 문화전반에 걸쳐 활동하는 아라카와 요지 시인이 있다. 그는 ‘H씨상’을 와세다早稲田대학 재학 중에 최연소로서 수상하여 크게 관심을 모았다. 시를 한 편 소개하겠다.       달빛 남자가 늘어났다 달빛이 쏟아지고 부랑자 곁에 눕는다 늘어났다 감은 머리카락처럼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었다 그 사람을 오롯이 원하기만 하면 된다 헤쳐 나가는 중에 점차 혼자가 되어 그녀는 수없이 그 머리카락으로 내 머리를 휘감고 나를 안정시켜 주었으나 머리카락의 틈새로 스스로는 들어가지 못했다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녀와의 첫 성교는 실패로 끝났다 달빛은 어디를 비추고 있을까 시간의 머리를 눌러 줘 그녀는 눈 안으로 올랐다 가끔 멈춰 서서 나를 응시하면서 남자가 늘어났다 그녀는 도모미라는 사람과 결혼을 전제로 완벽한 성교를 하고 있다 완벽한 성교다 둘은 가구처럼 딱 맞게 제 자리에 들어간다 바람 방향에서 그 기록이 돌아와 내 눈 앞을 통과하고 세상의 한구석으로 흘러간다 결혼을 전제로 한 두 남녀의 슬픈 감상도 없이 몸을 묶어놓은 장면이 너무 무거워서 바람을 타다니 그것은 오늘도 관을 통해 한구석으로 흘러간다 길가에는 달빛을 주워 든 부랑자가 반짝이는 벤치 위에 누워 젊은 그들이 벗어놓은 구두를 응시하고 기록을 응시하지만 다가가지는 않는다. 모든 것을 응시하려고만 한다 감기에 걸린 듯한 홀쭉한 몸으로 머리를 누르고 올라가는 그녀를 남자들은 시야를 넓혀 더욱 깊이 응시한다 다시 포착했을까 노리타케의 제자 중 또 한 사람 가와카미 아스오는 아름답고도 깊이 있는 시를 쓰며 많은 노랫말을 쓴 시인으로서도 유명하다 그의 시를 한 편 감상해보자.       토끼풀 어이, 영혼, 하고 불렀다 예, 하고 어둠속에서 귀신이 얼굴을 내밀었다 불러 본 보람이 있었다 좋은 얼굴이었다 이 세상 물가에 오래 살았던 것 같다 뿔도 보였다 호의적인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돌고 도는 계절의 외로움을 가만히 바람에 풀어헤치고 램프를 켜고 그런 식으로 조용히 마음의 남포등과 마주해본 적이 있었던가 영혼과 아아, 영혼이여,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옷깃을 단정히 하고 돌보지 말기를 나를, 내 몸을 희미한 바람의 흔들림에 슬퍼하지 말기를, 거기에 비친 가슴속 불길의 너울 한가운데쯤 지금 건너편 물가에서 눈물지으며 조용히 손 흔드는 나를 더 이상 망연하게 부르지 말아주기를 나락의 끝, 토끼풀이 베개 맡에 피어 있는 곳이었다       현재 일본시단의 중심에 선 전후세대 젊은 시인들 현재 일본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 중인 전후세대 여성 시인으로서는 이토 히로미伊藤比呂美(1955년생), 히라타 토시코平田俊子(1955년생), 고이케 마사요小池昌代(1959생), 하치카이 미미蜂飼耳(1974년생), 후즈키 유미文月悠光(1991년생) 등이며, 새로운 시 세계를 탐색해 나가는 시인들이 대부분이다. 그 중 소설가로서도 활동하며 시집이 가장 많이 팔리는 시인이기도 한 고이케 마사요의 시를 한 편 감상하겠다. 또 1991년생으로서 고등학생이었던 2008년에 ‘겐다이시데쵸現代詩手帖상’을 수상하였고, 첫 시집 『적절한 세계의 적절하지 못한 나』로 ‘나카하라츄야中原中也상’과 ‘마루야마유타카丸山豊상’을 수상하며 혜성처럼 등장한 후즈키 유미의 시도 한 편 감상하겠다.       누─, 아프리카의 소리 고이케 마사요 왜 그때 누─가 화제에 올랐을까 결혼해서 탄자니아로 간다는 가나코 씨가 그때 문득 말을 꺼냈던 것이다 누─라는 야생동물을 아시나요? 누─ 얼굴이 못생기고, 새까맣고, 이름처럼 멋대가리 없는 목소리로 울부짖고, 무리를 지어 사반나를 이동하며, 먼 곳에서 내리는 비 냄새를 맡을 줄 안다는, 소인지 산양인지 분간이 안 가는, 산양처럼 수염이 나 있고, 어깨 부근에 낙타 같은 혹이 있는, 이를 테면 어느 동물 측에도 끼지 못하는, 왜 그때 누─가 화제가 되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지만 가나코 씨는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그러니까 누─는 신에게 벌을 받은 거야, 라고 말했다 모두들 잠자코 멀리 아프리카에서 시공을 넘어 다가온 누─의 침묵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자 몸 깊숙이에서 뿔이 달리고 검은 털이 수북한 동물이 태어나 누─ 하고 칠흑 같은 소리를 냈다 누─가 무슨 짓을 했을까 뭔가를 했다 뭘 했을까 그 뭔가를 가나코 씨는 그때 말했던 것 같기도 하고 말하지 않은 듯도 하다 떠오르지 않는다 가나코 씨는 탄자니아로 떠나 버려서 누─가 무슨 짓을 해서 못생긴 동물이 되었는지는 탄자니아에 가서 물어봐야 한다 탄자니아는 아프리카 중앙의 동부에 있다 그래, 여기야 지도 위에 그때 누군가 와인을 떨어뜨려서 빨간 와인은 지도 속 보이지 않는 나라를 얼룩자국으로 뒤덮었다 사람과 헤어진다는 게 요즘에는 내 팔이 잘려 나가는 듯 슬픕니다 제발 가지 마, 그런 곳에 가나코 씨는 내게 오른팔이었는지도 모른다 서로 별나게 무슨 일을 하지도 않았지만 요즘은 사람들이 나를 이루는 발이기도 하고 손이기도 하고 팔이나 눈이기도 해서 잘려나간 후에야 비로소 알아차립니다 오른팔은 금방 자라날 리가 없으니 나는 없는 팔을 문지르면서 안녕이라고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크게 떼를 지어 이동하는 누─는 한 마리 한 마리 분간하기는 어렵지만 자, 여기 내가 있잖아요 상하로 혹을 흔들면서 걸어가는 나, 누─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무슨 짓인가를 했다 비 냄새가 맡아지는 아프리카의 비 그 비는 죄의 냄새가 난다               낙화수落花水 후즈키 유미 투명한 빨대를 통해 미술실에 울리는 “푸우, 푸우” 하는 내 호흡소리. 말을 걸어도 대답이 없다면 이렇게 숨으로 불러 보자. 도화지 위의 붉은 색 물은 희미하게 몸을 떨고 엉뚱한 방향으로 내달리기 시작한다. 드디어 내 호흡의 끝을 만져버린 것처럼 슈우, 하고 멈춘다. 새끼손가락 손톱만큼도 안 되는 수채화 물감은 물에 풀어져 옅고 짙은 다채로운 붉은 색으로 황혼을 팔레트에 그려낸다. 그 한 조각을 붓으로 따내어 도화지에 떨어뜨리고 새하얀 살이 붉은색을 다 받아들일 때까지 잠깐 얼굴을 편다. 빨대를 움직여서 제 멋대로 흐르는 수맥에 다시 숨을 불어넣어 본다. 내 푸른 셔츠에 붉은 색 물감이 튀어 동그랗게 번진다. (물들인다는 의미를 찾아내지 못하는 몸. “너에게 색 따위는 어울리지 않아” 지적하는 교실 문을 향해 “나도 알아!”라고 소리치며 부수고 불태워버릴 만한 다홍색을 찾았다. 낡은 팔레트를 확인하듯이 몇 번이고 열어 보지만 거기에는 나밖에 없다. 그것은 빗속에서 적막하게 옷을 벗는 소년인 쪽빛) 색깔에 빼앗긴 내 숨결이 도화지 위에서 되살아난다. 물이 되어 뻗어 간다. 이 수맥이 닿는 곳이 누군가의 건조한 왼쪽 가슴이라면 나 또한 찾을 게 있다. 찾기 위한 입구가 눈꺼풀 안에서 보이기 시작한다. “물이 되고 싶어!” 바람에 섞여 구름을 향해 뛰어오르는 나. 흰 구름의 정상에서 손을 짚고 비밀스럽게 주저앉는다. 어느 땐가 붓에 채여 거리를 향해 툭 떨어진다면 바람에 부풀어 오른 스커트처럼 나는 활짝 피워서 보여주리라. 현재 일본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전후세대 남성 시인으로서는 노무라 키와오野村喜和夫(1951년생), 키도 슈리城戸朱理(1959년생), 다카가이 히로야高貝弘也(1961년생), 와고 료이치和合亮一(1968년생), 오가사와라 조루이小笠原鳥類(1977년생) 등이며, 모더니즘, 쉬르리얼리즘 계열의 시가 중심을 이룬다. 그들 중에서 다카가이 히로야와 오가사와라 조루이의 시를 한 편씩 감상하겠다.               인연이라는 씨앗의 노래 다카가이 히로야 인연의 기댈 곳 없음이여 부드러운 표적으로 울고 있다 그 무른 귀 울음을──   돌아라 메아리    돌아라 메아리 바람을 자르고 산을 넘어  치고 돌아와 둘러싸라 급류를 타고 내려와 바다를 건너 다시 돌아와서 둘러싸라     한탄은   평온함을 위해   슬픔은     온화함을 위해 검은 열매를  납작해진 그  하늘, 팽이를 돌려라  어려서 더듬거리다  태어날 기회를 놓쳤다 회전하면서       (나는 그림을 그렸을 뿐이다 / 배에 원격조정 시한폭탄을 장치했던 게 아니다)   오가사와라 조루이 (해안일까 그곳은, 환한 콘크리트가 새로운 요리콘크리트 우유·생선대구) 하늘에서 내려오는 건 ‘보리새우’처럼 흩어지는 깃털, 깃털폭발과 같은 안녕하세요, 그물고기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당신은 접배주인 인거죠착제인가요? 부드러운 검물고기은고양이 사전에 침입한 것 같군요, (당신이 배 주인인거죠? 내가 다 그릴 때까지 배를 쓰지 못해서 난처한 모양이다) “배가 가라앉는다!” “그러므로 바다가 뜬다” 새로운 바다의 반향反響거리를, 미안합니다.(나는 나쁜 아이다). 잡생각을 하면서 판자 위에 얹은 푸른 종이를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 낮에 물렸다고 생각하지만, 바물고기의 내장다가까이에서 자무엇입니까?라면 기내려 오는본적인 색은 흰색이 아니라 청대롱 같이색이 됩니다. (내려오는 새의 내장과 같은 그 작은 대롱이 뭐죠?) “실은 배 소유자인 최신형 까치 투명透明과 부서진 조개껍데기 위에서 나는 나쁜 말물고기 무리가을한게 아니었다” 바다의 거품은 심안녕히 주무셨나요?각한장소다, 아니 그렇지 않은데도 어떤 물건처럼 보이고(그렇다는 것도 또 하심각한 장소로서의 바다 거품나의거짓말이고)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고래의 새로운 종류가. 고래의 목소리와 고래의 빛과의 시간차를 천둥이라 불렀고…… 언어는 순간의 축이 아니라서 비·광선총 기타 등등. 아아, 새가 폭발했던 아주 오래 전 기법이군 “이 또한 늦어지는 전화와 같으니 새의 녹아아 물고기는내장은 적당량의 해수를 부어 콘크리트 구멍에 흘려 넣어 버려” 이야기를 그런 식으로 대강 끝내고 먼 곳을 통과하려는 몇 명의 주방장에게(낮의·더구나 계단) 안녕하세요. 더욱 이상하게 만드는 “것에 의해 입체화 한 폭레스트란발계획을 다시 만들고,” 감사합니다. 그것의 중심에서 적당한 거리까지 확물고기들산되는것으로 만들어 가렵니다. 청색종이를 안녕히 가세요. 육지에서 버튼을 누른다       외국인에게도 일본의 문학상 수여 일본은 이전부터 자국의 문학상을 외국인에게도 수여해왔다. 주로 일본 영주권을 가진 문인이었으나 최근에는 일본국적도 아니고 일본어가 모국어이지 않은 문인들에게도 상을 수여한다. 2008년에는 중국 국적의 양이楊逸가 유학생으로서 소설문학상에서 가장 권위 있는 ‘아쿠타가와芥川상’(제139회)을 수상했다. 시문학상에서도 2010년에 중국인 티엔위안田原이 ‘H씨상’을 수상했다. 티엔위안의 ‘H씨상’ 수상시집에 실린 시를 한 편 감상하겠다.       무 덤 지저귀던 몇 마리 새가 주위의 적막을 깨고 무덤 위로 내려앉는다 청량한 바람이 한차례 눈에 보이지 않는 나무빗처럼 무덤 위 마른풀을 쓸어넘긴다 죽은 자는 실려와 묻히고 슬픔과 기억은 그때부터 여기에 정착한다 산자는 찾아와 묘비 앞에서 손을 모으고 발자국을 남긴 채 떠나간다 사막은 낙타의 무덤 바다는 어부의 무덤 지구는 문명의 무덤 무덤은 죽음의 또 다른 형태 아름다운 유방처럼 대지의 가슴에 봉긋이 솟아오른다 무덤도 성장한다, 그 자리에 솟은 채로 홍수가 밀려들어도 폭풍우에 모래 먼지가 뒤덮어도 무덤은 지평선에 자라난 귀다 누구의 발소리인지를 금방 알아차린다               일본이라는 국경을 뛰어 넘은 시인들 시단이나 문단의 인기나 관심과는 별개로, 대중과 직접 호흡하며 대중 속에 뛰어들어 삶과 시가 하나인 시인도 있다. 일본이라는 국경을 뛰어 넘어 지구를 방랑하여 얻은 혜안으로서 우주적이고 근원적인 세계를 시를 쓴 나나오 사카키(1923~2008)가 있다. 손과 머리로 쓴 시가 아니고 발과 가슴으로 쓴 시이며 지성이나 교양을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생의 궤적으로서 쓴 시를 말한다. 세계적인 시낭송가이자 반핵과 반전을 외치고 평화와 환경을 노래하는 시인으로서 나나오 사카키는 전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미국 시인 게리 스나이드 와 친교했던 시인으로서도 유명하다. 미래로 발신하는 듯한 나나오 사카키의 시를 두 편 맛보겠다.       헤노헤노모헤노* 쓸모없는 말 할 시간 있으면 책을 읽어라 책 읽을 시간 있으면 걸어라 산을 바다를 사막을 걸어 다닐 시간 있으면 노래하고 춤춰라 춤출 시간 있으면 입 다물고 앉아 있어라 경사스러운 헤노헤노모헤노 독자 여러분 * 헤노헤노모헤노 : 일본 문자 히라가나의 헤へ, 노の, 모も로 그린 사람의 얼굴. 여기서는 수많은 일반인을 가리킨다. 침대에 들어가기 전에 중얼거렸다 7분 지나면 너는 잠들었다 7시간 지나면 너는 눈을 뜬다 7일 지나면 너는 일에 질린다 7년 지나면 너는 친구를 잊는다 70년 지나면 너는 아무 데도 없다 700년 지나면 너를 아무도 모른다 7만 년 지나면 인류는 어디에도 없다 7억 년 지나면 은하계가 위험하다 7억 광년 지나면         누군가가             네 침대에서 자고 있다 이처럼 일본의 현대시는 다양한 모습으로서 다채롭게 빛난다. 대중적이지 않을지라도 시의 정수를 품은 빼어난 시가 있는가하면 전지구적이며 우주적인 영혼을 노래하는 시도 있다.                       한성례 1986년 『시와 의식』 등단 시집 : 『실험실의 미인』, 일본어 시집 『감색치마폭의 하늘은』, 『빛의 드라마』 외 번역서 :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 외 허난설헌 문학상, 일본 시토소조詩と創造상 현 : 세종대 정책과학대학원 국제지역학과 겸임교수
2    일본 시인 - 미요시 다쓰지 댓글:  조회:2476  추천:0  2018-10-13
  출생 1900. 8. 23, 일본 오사카[大阪] 사망 1964. 4. 5, 도쿄[東京] 국적 일본 요약 일본의 시인.   일본의 시적 전통과 현대시의 통합이라는 과제를 의욕적으로 수행한 쇼와 시대[昭和時代]의 대표적 시인이다. 육군사관학교 중퇴(1921) 후, 제3고등학교를 거쳐 1928년 도쿄대학 불문과를 졸업했다. 〈아오조라 靑空〉·〈시이노키 椎の木〉·〈아 亞〉 등의 잡지에 시작을 발표하여 주목을 받았고, 1930년 제1시집 〈측량선 測量船〉을 발표하여 획기적인 쇼와[昭和] 신시(新詩)라는 평가를 얻었다. 프랑스의 시인 프랑수아 자크의 4행시의 발상에서 영향받아 〈남총집 南窓集〉(1932)·〈한화집 閒花集〉(1934)·〈산과집 山果集〉(1935) 등을 간행했으며, 호리 다쓰오[堀辰雄] 등과 잡지 〈시키 四季〉를 창간하여 시키파(派)의 주류를 형성했다. 이윽고 시집 〈초천리 艸千里〉(1939)·〈일점종 一點鍾〉(1941) 등에서 영탄적 문어조의 시풍(詩風)을 강하게 보였으며, 〈낙타 등에 올라타고 駱駝の瘤にまたがって〉(1952)에서는 만년의 고전적 풍격과 완성도를 보이는 경지에 올라섰다. 존경하는 스승을 논한 〈하기와라 사쿠타로 萩原朔太郞〉(1963)도 높이 평가받았다. 1953년 일본예술원상을 수상했다. ==================///   미요시 다쓰지 시(詩)에 나타난 '까마귀' 이미지의 의미 고찰 오석윤       목 차 서론 본론 제1장. 존재의 비극 제2장. 존재의 차별 결론           서론 이 논문은 일본의 근․현대시인을 대표하는 한 사람인 미요시 다쓰지(三好達治, 1900-1964, 이하 다쓰지라 함)의 시에 나타난 ‘까마귀’ 이미지에 주목하여, 그 의미의 변주 양상을 살피는 것이 목적이다. 다쓰지는 생애에 750편이 넘는 많은 시를 남겼다. 우리가 주지하는 것처럼, 그의 작품 하나하나는 뚜렷한 우열 없이 고른 시적 성숙도를 보여 준다. 이러한 점은 그가 일본의 근․현대시인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자리 매김 되어 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가 시인으로서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있는 이미지는 주지시인과 함께 일본 고유의 전통미를 노래하는 서정시인으로서의 이미지다. 시인의 이 양자 공유 이미지가 본고에서 논하고자 하는 그의 까마귀 관련 시를 둘러싼 의미 변주와는 어떤 연관성을 맺고 있는 지도 관심거리다. 그의 첫 시집인 『측량선(測量船)』(1930)과『남창집(南窗集)』(1932)에 수록된 「까마귀(鴉)」의 이미지를 연구한 사례는 있으나, 초기 시와 후기 시에 나타난 ‘까마귀’ 이미지를 동시에 살피며 비교 분석한 논문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본고가 그의 시에 나타난 '까마귀'이미지를 시어 중심으로 분석하는데 일조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 연구는 다쓰지 시 연구자들에게 까마귀 이미지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이나 조류 중심의 이미지를 통해 본 시 연구에도 향후 관심을 환기시킬 수 있다는 효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나아가 동물 혹은 조류나 사물에 의탁하여 시를 쓴 일본 근․현대시인들의 시적 특성 연구에도 본고가 일정부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본고에서는 그의 시에 나타난 시어를 중심으로 작품을 면밀히 분석할 것이지만, '까마귀' 관련 시들의 이미지에 담긴 이면을 살피는 과정에서 그 이미지가 상당부분 시인의 삶과도 연관성을 맺고 있다는 점을 밝힐 것이다. 이는 그가 생전에 자신의 시작(詩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텍스트에 나타난 시어(詩語)와 이미지를 중심으로 시 분석을 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시어와 시인의 삶을 소통관계로 놓고 기존 연구자들의 전기적 접근 방식에서 규명했던 성과도 활용하겠다는 의미다. 이러한 연구의 성격과 의의를 바탕으로, 본고는 다음과 같은 점에 주안점을 두고 시를 분석하고자 한다. 첫째, 시의 화자가 까마귀가 되어 있는 시와 피 관찰자로서의 까마귀 이미지는 어떤 것인가. 둘째, 그러한 까마귀 이미지가 존재의 비극과 존재의 차별화를 어떻게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가. 이 두 가지를 주된 분석의 틀로 삼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까마귀 시에 나타난 이미지 연구를 위해 분석 대상이 되는 작품을 초기 시집인 『측량선』의 「까마귀」와 「정원(庭)」 『남창집』의 「까마귀(鴉)」 그리고 후기 시집인 『낙타의 혹에 올라타고(駱駝の瘤にまたがって)』(1952)의 「까마귀(鴉)」 등 모두 4편으로 택하였다. 다쓰지의 시(詩)에서 ‘까마귀’가 등장하는 것은 모두 7편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 중 ‘까마귀’를 제목으로 하는 시는 『측량선』에 1편, 『남창집』에 1편, 『황사(霾)』에 1편, 『낙타의 혹에 올라타고』에 1편으로 모두 4편이다. 그밖에 시어로 까마귀가 등장하는 것은 『측량선』의 「정원」, 『일점종』의 「한아한 오전(閒雅な午前)」 『낙타의 혹에 올라타고』의 「늦여름(晩夏)」이다. 이들 중 앞에서 거론한 4편의 시에 한정해서 본고를 꾸리고, 나머지 3편을 분석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은 시에서 까마귀가 차지하는 비중의 정도가 시의 중심 이미지에서 파악했을 때 커다란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즉, 단순히 ‘까마귀’라는 조류 이상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 않으며, 또 하나는 본고의 분석의 큰 틀인 ‘존재의 비극’ 과 ‘존재의 차별화’라는 두 가지 관점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본론 제1장. 존재의 비극 다쓰지 시의 대표성을 갖는 여러 작품 중에서 『측량선』의 「까마귀」는 극명하게 존재의 비극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꼽을 만하다.     바람이 세찬 흐린 하늘에 태양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날의, 인기척 없는 한 줄기 길 위에 나는 끝없는 들판을 헤매고 있었다. 바람은 사방 지평에서 나를 부르고, 내 소매를 잡고 옷깃을 에워싸며, 그리고 또 그 거친 외침의 소리는 어딘 가로 사라져 버린다. 그 때 나는 문득 마른 풀 위에 버려진 어떤 검은 윗옷 하나를 보았다. 나는 또 어디에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멈춰라!//나는 멈춰 서서 주위에 소리가 난 곳을 찾았다. 나는 공포를 느꼈다.//---너의 옷을 벗어라! //공포 속에 나는 수치와 작은 분노를 느끼면서, 어쩔 수 없이 그 명령의 말에 따랐다. 그러자 그 목소리는 더욱 싸늘하게,//---발가벗어라! 그 옷을 주워 입어라!//하고, 이제는 저항하기 어려운 위엄을 띠고, 풀 사이에서 나에게 명령했다. 나는 비참한 모습으로 윗옷을 입고서 바람 속에 내버려져 있었다. 내 마음은 패배 준비를 했다.//---날아라!//그러나 왠지 기이한 뜻밖의 말이리라. 나는 자신의 손발을 돌아보았다. 손은 긴 날개가 되어 양 겨드랑이에 접고, 비늘을 나란히 세운 발은 세 발가락으로 돌을 딛고 있었다. 내 마음은 또 복종 준비를 했다.//---날아라!//나는 재촉되어 땅을 박찼다. 내 마음은 갑자기 노여움에 가득 차, 날카로운 비애로 일관된 채, 단지 이 굴욕의 땅을 뒤로, 정처 없이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감정이 감정에 채찍질하고 의지가 의지에 채찍질하면서-. 나는 오랜 시간을 날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지금, 저 비참한 패배로부터는 멀리 날아가, 날개에는 피로를 느끼고, 내 패배의 축복이 될 희망찬 하늘을 꿈꾸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아! 또 그 때 내 귀 가까이 들린 것은, 저 집요한 명령의 소리가 아니었던가.//---울어라!//오오, 지금이야말로 나는 울리라. //---울어라!/---좋아 나는 울겠어.//그리고 울면서 나는 날고 있었다. 날면서 나는 울고 있었다. //---아아, 아아, 아아, 아아/---아아, 아아, 아아, 아아//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 바람에 가을이 나뭇잎을 뿌리듯이 나는 말(言)을 뿌리고 있었다. 차가운 것이 자꾸만 뺨을 흘러내리고 있었다.   「까마귀」 전문     인용 작품은 『측량선』에 수록된 「까마귀(鴉)」 전문이다. 시에서는 화자가 가냘픈 희망을 꿈꾸고는 있지만 전체적인 이미지는 어둡다. 산문시의 양이 말해 주듯이 인생을 압축한 것 같다. 그러한 압축 감은 읽는 이에게 긴장으로 다가오면서 이 시의 우수성에 기여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시 전체에서 존재의 비극이 그려지고 있다. 그 존재의 비극의 바탕에는 살아온 삶에 대한 짙은 회한(悔恨)이 서려 있음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무엇보다도 이미 까마귀가 되어서 자신이 살아온 삶을 연속적으로 늘어놓는 듯한 화자의 표현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1연에서는 까마귀가 살고 있는 공간의 환경이 제시된다. ‘세찬 바람’ ‘흐린 하늘’ ‘어디에 있는 지도 모르는 태양’ ‘사람의 기운이 없는 외길’은 참담한 환경을 제시하기 위한 화자의 의도다. 이 환상(幻想)에 존재하는 여러 악조건을 끼고 까마귀는 메마른 풀이 있는 들판에 살고 있다. 까마귀의 상징은 까마귀의 외형이 검은 것에 착안한 ‘검은 윗옷 하나’로 나타나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러한 물리적 환경에 덧붙여지고 있는 것은 그런 화자를 부르는 사람의 소리다. 그래서일까. 시 곳곳에서 나타나는 ‘수치’ ‘작은 분노’ ‘패배 준비’ ‘복종 준비’ ‘노여움’ ‘비애’ ‘비참한 패배‘ ‘피로’ ‘집요한 명령의 소리’ 등은 시의 분위기에 적지 않은 역할을 담당한다. 분명히 슬픈 기억을 드러내는 시어다. “나는 자신의 손발을 뒤돌아보았다. 손은 긴 날개가 되어 양 겨드랑이에 접고, 비늘을 나란히 세운 발은 세 발가락으로 돌을 딛고 있었다.”는 까마귀가 된 화자의 구체적인 몸의 형상이다. “내 마음은 또 복종 준비를 했다”와 “집요한 명령의 소리”는 슬픈 기억을 가진 까마귀가 이미 명령에 익숙해져 있음을 강조하는 대목으로 파악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어느새 지금, 저 비참한 패배로부터는 멀리 날아가, 날개에는 피로를 느끼고, 내 패배의 축복이 될 희망찬 하늘을 꿈꾸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아! 또 그 때 내 귀 가까이 들린 것은, 저 집요한 명령의 소리가 아니었던가(11연).” 는 고통스러운 환경으로부터 탈출하려는 강한 의지의 함의가 있으나, 쉽게 굴욕의 땅을 벗어나지 못하는 화자의 안타까움도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그리하여 “울면서 나는 날고 있었다. 날면서 나는 울고 있었다.”에 이르러서는 존재의 비극이 증폭되는 효과를 가져온다. 간직하고 있던 슬픔에 대한 생각이 울음으로 구체성을 띠는 것은, “아아, 아아, 아아, 아아/ 아아, 아아, 아아, 아아”이다. ‘아아‘의 반복이 깊은 울음의 상징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이 간다. 그것은 다음 연에서 이어지는 “차가운 것이 자꾸만 뺨을 흘러내리고 있었다.”에서 차가운 것이 눈물을 나타낸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석에 기대어 보면 의문으로 다가오는 것은, 이 시의 심리적 모티브다. 분명 화자를 둘러싼 외부적인 환경이 화자를 정신적으로 압박하고 있다. 그러한 압박에 대해서 강한 폐쇄감을 느끼는 화자다. 여기에서 화자를 작자 자신으로 환원해서 본다면, 시에서 표현되는 까마귀는 시인 미요시 다쓰지라고 파악하는 과정은 그리 어렵지 않게 도달된다. 이 시의 심리적 모티브와 관련하여, 과연 이 시에 등장하는 암울한 시어들과 이미지들을 시인 다쓰지가 겪어온 청년 시절의 삶과 연관성을 부여해도 괜찮은가의 문제다. 이 시에 대한 기존 연구자들이나 동시대 시인들의 평석은 그러한 연관성을 대체적으로 긍정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음의 세 가지를 통해 그러한 연관성을 제기한다. 첫째는, 일본의 파시즘化에 대한 불안을 예감하는 젊은이의 의식을 그리고 있다는 견해다. 이 시가 발표된 연도가 1929년이라는 시기를 감안하면, 당시 일본의 정치상황에서 파시즘의 압력은 시인 다쓰지에게 좋지 못한 예감으로 작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시인 개인의 문제를 떠나 좀 더 넓은 시각에서 일본의 앞날을 걱정하는 사고가 담겨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둘째는, 어린 시절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진학한 오사카육군유년학교(大阪陸軍幼年學校)와 육군사관학교 입학 등 군국주의적인 군대의 명령에 따라서 살아야 했던 약 7년 간에 걸친 군인 교육으로 인한 다쓰지의 젊은 날의 방황을 그리고 있다는 의견이다. 이것은 온전히 시인 개인의 삶과 연관시켜 파악한 견해다. 셋째는, 시 「까마귀」를 통해서 젊은 시절 이모의 지배 하에 놓였던 그의 굴욕의 슬픔을 엿볼 수 있다는 의견이다. 이것도 극단적인 생활을 연상시키는 시인의 회고에 바탕을 둔 해석이다. 이 세 가지 중 그 어느 의견을 취하더라도, 공통된 것은 암울한 과거의 기억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상황에 대해 낙관적인 추측을 허용하고 있지 않다는 의견에 접근할 수 있다. 이처럼 시는 어두운 과거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시로서의 우수성은 상황설정에 대해 펼쳐지는 치밀한 구성 능력과 시의 마지막 부분까지 이어지는 시적 긴장이다. 다음에 인용하는 시 또한 이 작품과 관련한 시인의 심리적 모티브를 찾는데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태양은 아직 창고에 가려져, 서리(霜)가 놓은 정원은 보랏빛으로 널찍하고도 차가운 그림자의 바닥에 있었다. 그 날 아침 내가 주운 것은 얼어죽은 한 마리 까마귀였다. 딱딱한 날개를 방추형(紡錘形)으로 접고서, 회색 빛 눈꺼풀을 감고 있었다. 그것을 던져 보니, 말라 버린 잔디에 떨어져 어이없는 소리를 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조용히 피를 흘리고 있었다./날이 맑아지는 하늘 어딘가 에서, 또 까마귀 우는소리가 들렸다.   「정원」 전문     역시 『측량선』에 수록된 「정원」이다. 이 시에서의 까마귀 이미지는 앞의 시 「까마귀」이미지와 유사성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존재의 비극이 그려지며 차가운 이미지로 다가온다. 그것은 얼어죽은 까마귀가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 시도 앞의 시 까마귀처럼 전반부에서 까마귀가 놓여진 환경의 설정으로 시작된다. 도입부는 차가운 이미지를 전해 주고는 있으나 기교가 돋보인다. 태양이 뜨지 않았다는 사실을 ‘창고에 가려져’라는 기교로 풀어낸다. 그와 함께 계절을 나타내는 시어 ‘서리(霜)’를 정원에 내려앉은 주체로 묘사함으로써 시적 자질을 발휘한다. 태양 빛이 비치지 않는 곳의 서리는 차가운 이미지를 환기시킨다. 거기에 화자의 행위로 묘사되고 있는 이미 죽어버린 까마귀를 줍는 행위와 까마귀를 내던지는 행위에 주목해 보자. 화자가 주운 까마귀는 날개를 방추형으로 접은 채 죽어 있다. 방추형은 물렛가락처럼 생긴 모양으로 원기둥꼴의 양끝이 뾰족한 모양을 연상케 한다. 그런 까마귀를 집어 던지고 피가 흐르는 모습을 보는 화자는 앞의 시 「까마귀」와 마찬가지로 존재의 비극이 그 극한에 달해 있는 느낌이다. 날이 맑아지는 하늘에서 또 까마귀 소리를 듣는 화자가 까마귀 울음소리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일 지를 상상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겠지만, 다가올 미래에 대한 불안은 쉽게 가시지 않고 있다는 유추는 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앞의 시와 공통적 주제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가 앞의 시 「까마귀」와의 차이점을 보이는 것은, 화자와 까마귀를 분리해서 등장시켰다는 점이다. 물론 화자나 까마귀는 그 이미지 면에서 상호 분리의 개념이 아니라, 동일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그것은 시 전체에서 느껴지는 존재의 비극이 그 중심 축에 있기 때문이다. 관찰자로서의 이미지와 피관찰자로서의 이미지를 다쓰지 자신의 모습이 중첩된 것으로 파악한다면, 이 시의 심리적 모티브도 시인 자신의 암울하고 고통스런 청춘의 기억이 될 것이다. 이처럼 이 시를 앞의 시 「까마귀」와 유사한 이미지로 파악하게 될 때, 앞에서 제기했던 시의 심리적 모티브는 군국주의적인 군대의 명령에 따라서 살아야 했던 짧지 않은 기간의 군인 교육과 그로 인해 받게 된 엄청난 심리적 고충과 슬픔이며, 또한 그러한 시절의 다쓰지의 방황이다. 시인의 자전적인 모습이 까마귀에 투영된 것은 두 작품이 갖는 공통점이다. 「까마귀」와 「정원」에는 까마귀를 통해 존재의 비애감이 자전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또 한 편의 「까마귀」를 제목으로 하는 시에는 시인의 자전적 모습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보자.     조용한 마을길에 대나무 홈통이 가로로 걸쳐 있다/거기에 한 마리 까마귀가 앉아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볕 속에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바라보고 내가 그 아래를 지나갈 때/어떤 미묘한 균형 위에 날개를 움츠리고 천평칭(天平秤)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까마귀」 전문     인용 시는 잡지 『문과(文科)』(1932년 3월호)에 「주전자(湯沸かし)」 「조용한 밤(靜夜)」과 함께 발표된 작품 「까마귀(鴉)」의 전문이다. 다쓰지의 개인 시집으로 보면 『남창집』에 실려 있다. 시에 나타난 까마귀 이미지는 한가로운 마을 풍경을 바탕으로 한 평화로움과 불안함이 혼재해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하나 후반부로 갈수록 불안한 심리 상태가 지배적이다. 시에 그려진 심상을 풀어헤쳐 보면, 화자는 시골길을 가다가 보게 된 풍경에서 까마귀의 존재를 포착했을 것이다. 그 까마귀는 전체 4행에서 마지막 행을 제외한 1행과 2행, 3행에서는 특별한 불안함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조용한 마을의 평화로움에 일조하는 구체적인 조류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시의 공간적 배경은 조용한 마을길이다. 까마귀란 존재를 드러내고 싶은 장소에는 가로로 걸쳐져 있는 대나무 홈통이 있다. 물론 시에 제공된 환경에는 대나무 홈통을 중심으로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볕”도 있다. 당연히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바라보는” 주체는 ‘까마귀’다. 이 3행까지의 까마귀를 둘러싼 환경은 그렇게 불안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평화로운 경치가 제공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첫 행의 “대나무 홈통”에 무엇이 들어 있는 지에 대한 구체적인 서술이 없다 하더라도 까마귀의 착지 장소 혹은 휴식 공간으로서는 그리 불안정하게 파악되지 않는다. 만일, 대나무 홈통에 물이나 까마귀의 먹이가 될 만한 것이 들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 본다면 그것은 까마귀에게는 목을 축일 수 있고, 약간의 허기를 달랠 수 있는 따뜻한 공간으로 설정하고 싶어했을 거라는 배려의 흔적도 느껴진다. 그러나 마지막 행에서는 까마귀가 대나무 홈통에서 천평칭처럼 흔들리는 존재로 묘사된다. 천평칭(天平秤)은 가운데에 세운 줏대의 가로장 양끝에 저울판이 달려있는 저울의 한 종류다. 이 저울이 미묘한 균형을 보이며 흔들린다는 것은 3행까지의 조용한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조금씩 무너지는 듯한 느낌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역시 까마귀에 대한 불안한 시각으로 연결된다. 그렇게 볼 때, 읽는 이에게 까마귀가 언제 한 쪽으로 치우칠지 모르는 불안한 긴장을 제공하는 것이 사실이다. 역시 이 작품도 화자와 까마귀를 동시에 등장시키고 있으나, 피 관찰자인 까마귀는 관찰자인 화자에 의해서 보다 근거리에서 관찰된다. 불안한 긴장이란 화자가 원거리 혹은 조금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고 있을 때의 까마귀보다 좀 더 자세히 봤을 때의 이미지라고 보아도 그리 틀리지 않는다. 이 시를 “시인의 지성과 감성의 훌륭한 평형 감각의 구상화(具象化)”라는 관점에서의 시각은 나름대로 좋은 해석이다. 그러나 첫 행의 인기척이 없는 조용한 마을길은 마지막 행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안정된 균형을 무너뜨리는 분위기에 동조하는 이미지로 그 모습이 바뀐 듯하다. 미묘한 균형은 까마귀가 날개를 움츠리면서 그 불안감이 더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불안한 까마귀 역시 시인 다쓰지의 모습과는 상당부분 거리를 좁힌 듯한 인상을 준다. 이 까마귀에는 시인 다쓰지의 심경이 투영된 듯한 것으로 그 이미지가 접근되어 있다. 이 시를 그렇게 보는 것은 앞에서의 분석처럼 시어에 나타나는 이미지 때문이며, 또 하나는 『남창집』에 수록된 시가 모두 시인 다쓰지의 병상에서의 작품이라는 2차 텍스트의 기록을 근거로 하기 때문이다. 물론 1차 텍스트를 벗어나 2차 자료에 의존하여 시를 재단하는 방법이 시 분석에 있어서 반드시 좋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시집에 실린 시가 모두 사행시라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하더라도, 이 시를 썼을 때의 시인의 건강이 좋지 않았다는 것은 시의 세계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가정은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진다. 무엇보다도 다쓰지가 생전에 자신의 시작(詩作)에 대해서 얼마간의 자료를 남겼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보면 그것은 분명 무게중심의 한 축이 된다. 이 시는 『측량선』의 앞의 두 편의 ‘까마귀‘ 등장 시만큼은 존재의 비극 혹은 존재의 비애의 정도가 떨어진다. 하지만, 생에 대한 불안감은 역시 앞의 두 작품의 이미지와 유사성을 가진다. 『남창집』에 수록된 시 「까마귀」는 건강이 좋지 않아 요양생활을 해야 했던 천평칭 같이 흔들리는 다쓰지의 내재적 심리상태가 형상화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다쓰지의 초기 시집인 『측량선』과 『남창집』에 나타난 까마귀의 이미지는 존재의 비극 혹은 자신의 생에 대한 불안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경향의 작품은 다쓰지로 하여금 주지시인의 이미지 형성에 적잖은 기여를 한다고 할 수 있다.     제2장. 존재의 차별화     앞에서 인용한 두 편의 「까마귀」와 ‘까마귀’가 시어로 등장하는 「정원」등 3편의 시를 살펴보았다. 시를 통해 확인한 다쓰지의 존재에 대한 사색은 그리 밝지 못하고, 비극이나 불안정한 색채를 띄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후 다쓰지는 자신의 후기 시집이라고 할 수 있는 『낙타의 혹에 올라타고』에 또 한 편의 「까마귀」를 제목으로 하는 시를 수록한다. 20년이라는 시간차가 존재에 대한 사유를 어떻게 변이 시키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먼 지방의 선착장에서 나는 5년이나 살아 왔다/나는 언제나 외톨이로 쓸쓸한 창에 멍하니 기대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아아 그 오랜 동안 나는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까마귀 까마귀 까마귀 저 음침한 음울한 패거리들/오늘도 생각나는 것은 놈들에 관한 것들이다/저 걸신들린 놈들이 자나깨나 아주 외진 하늘에 흐트려져/고깃배가 뜬 바다 위까지 저 놈들이 바다를 마구 휘저었다/아침놀에도 저녁놀에도/모처럼 그림물감으로 곱게 칠한/그 근처 온갖 풍경을 엉망진창으로 하고/저 녀석들은 불난 집의 도둑처럼 이리저리 소란을 피웠다/참 얼마나 포악스럽고 천박한 놈들이냐/이른 아침의 동틀 녘부터/놈들은 부지런히 먼 곳까지 나갔다/그렇게 거기 그 모래사장에서 왠지 어수선하게 썩은 머리 같은 것을/볼이 미어지게 입에 넣기도 하고 주워 담기도 하고/하품을 하거나 싸움을 하는 거야/그리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도 하고/그렇게 도시의 어린애들이 해 질 무렵 자전거를 밟듯이/녀석들은 불안하게 날개를 퍼덕이며/뒤에서 뒤에서 뒤에서 바다를 건너 돌아온 것이다/그렇지만 어떻게 될까?/앞으로 5백 만년이나 분명 녀석들은 멸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그런 쓰라린 생각에서/나는 언제나 혼자서 결국 몹시도 우울해지고 만 것이다/게다가 오늘은 도쿄 긴자(銀座)의 네거리에서/다른 사람도 아닌 나는 또 저 녀석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어쩌면 쓸쓸한 회고 일 것이다/웃어 주라!/여기에서는 멋진 핸드백이 왠지 저 녀석들 흉내를 내고/이 해질 무렵의 조금 흐릿해진 바다 위를 불안하게 날개를 퍼덕이기 때문일 것이다. 「까마귀」 전문     작품이 실린 시집 『낙타의 혹에 올라타고』는 그 구성면에서 크게 3부로 구성된다. 3부중의 하나인 「수광미망(水光微茫)」에서 인용 시를 찾을 수 있다. 「수광미망」은 다쓰지가 패전 후의 도쿄로 돌아와서 쓴 작품 23편을 담고 있다. 이들 작품들은 전후의 모습에 대한 화자의 분노와 풍자를 그 특징으로 한다. 이 시도 그러한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시의 이미지를 파악하기 위해, 먼저 이 시에서 해(年)를 표시하는 숫자로 나와 있는 “5년”과 “5백만 년”에 주목해 보자. 앞의 5년은 화자가 시의 공간적 배경에서 살아온 세월을 가리킨다. 5년 동안 화자는 까마귀로 비유되는 사람들의 생활을 보며 살아왔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뒤의 “5백만 년”은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아야 할 무리들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로 나타낸 숫자다. 5년과 5백년이라는 극단의 대립에서도 알 수 있듯이, 화자는 이 두 개의 숫자를 통해 부정적인 인간들에 대한 혐오를 강하게 드러냈다. “모처럼 그림물감으로 곱게 칠한”을 화자의 생활에 대한 비유라고 파악하고 보면, 그와 대립되는 존재의 행동양식은 바로 “그 근처 온갖 풍경을 엉망진창으로 하고/ 불난 집의 도둑처럼 이리저리 소란을 피우는” 존재로 묘사된다. “거기 그 모래사장에서 왠지 어수선하게 썩은 머리 같은 것을/ 볼이 미어지게 입에 넣기도 하고 주워 담기도 하고/ 하품을 하거나 싸움을 하는 거야”에 이르러서는 까마귀의 행동양식과 까마귀가 살고 있는 공간 묘사가 보다 구체성을 띤다. 까마귀들에 대한 정의는 “까마귀 까마귀 까마귀(4행)”라는 반복의 효과를 통해서도 확실해진다. “음울한 패거리” “걸신들린 놈들”“포악스럽고 천박한 놈들”과 같은 극단적인 표현도 동일한 시각이다. 경멸의 정도를 말해준다. 그런 까마귀의 존재에 대해서 1행에서 3행까지는 화자의 생활을 암시하는 것이다. “먼 나라의 선착장에서 나는 5년이나 살아 왔다/ 언제나 외톨이로 /아아 그 오랜 동안 나는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의 화자는 독백의 형태로 까마귀와 차별된 존재라는 것을 전제한다. 이 독백은 화자 자신과 시인의 감정적 거리가 현저하게 줄어들어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발견되는 특징은 시적 화자의 비판 대상인 까마귀가 비록 의인화되었지만 부정적인 세태에 대한 통렬한 비판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까마귀는 “불난 집의 도둑처럼 이리저리 소란을 피”(11행)우는, 패전 후 사회의 혼란에 편승한 사기꾼과 모리배들을 비유한다. 이것은 다쓰지의 시가 사회의 비판과 풍자라는 성향을 마련한 결과로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이는 대상에 담긴 의미의 이중성에 착안한 세태 비판이다. 그럼, 까마귀가 날개 치는 소리를 “도시의 어린애들이 해 질 무렵 자전거를 밟”(19행)는 소리로 비유한 것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상식에 기대어 보면 해질 무렵까지 자전거를 타면서 놀던 어린애들은 더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가는 길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그러한 불안한 심리 상태를, 까마귀의 날개 치는 소리로 비유했다. 시인의 기교와 동시에 까마귀의 심리상태가 생생하게 전해져 온다. 그러한 기교는 시의 후반부에서 또 한번 나타난다. 일본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로 자리 잡은 도쿄 긴자(銀座). 그곳의 네 거리에서 발견한 핸드백을 통해 화자는 까마귀의 색깔을 떠올리고 까마귀의 행동을 떠올린다. 핸드백이 까마귀 흉내를 낸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핸드백이라는 대상을 통해 패전 후 날로 변해 가는 현대 사회의 모습을 통렬하게 고발한다. 대상에 담긴 의미의 이중성이 새삼 확인되는 셈이다. 즉, 까마귀 본래의 이미지는 드러내지 않고, 묘사 속에 본 뜻을 내포하는 의미의 이중성이다. 알레고리의 수법이 농후한 시다. 이 시가 수작으로 평가받게 되는 이유도 알레고리와 풍자, 해학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가 이 속에 담겨 있는, 시작 수법의 우수성이 한 몫 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시집 『낙타의 혹에 올라타고』의 「까마귀」에는 화자와 대립되는 개념의 존재로 ‘까마귀’를 설정하고, 그 까마귀를 혼란한 사회 현실을 틈타 부정한 방법으로 이익을 취하는 무리들로 규정하고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화자는 이러한 까마귀들과 같이 살 수 밖에 없는 사회 현실을 고발하는 입장을 그려냈다. 이 작품도 다쓰지로 하여금 주지시인으로서의 이미지 형성에 무게를 실어준다.     결론 이상으로 미요시 다쓰지의 작품에서 「까마귀」 관련 시 4편에 나타난 ‘까마귀’ 이미지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 이들 시에 나타난 까마귀 이미지는 크게 ‘존재의 비극’과 ‘존재의 차별’이라는 이분법으로 정리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먼저 본론 1장에서 다루었던 3편의 까마귀 관련 작품인 「까마귀」 「정원」 「까마귀」에 나타난 이미지는 다쓰지가 청년시절 겪어야 했던 암울한 기억과 병으로 인한 생에 대한 불안정한 모습이 까마귀를 통해 형상화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측량선』의 「까마귀」는 사람에 비겨 사람과 같이 행동하는 것으로 의인화했다는 큰 특징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까마귀 자체가 곧 시인 자신의 이미지 화였다. 또한 「정원」에 나타난 까마귀도, 시인이 살아온 삶을 돌이켜 볼 때, 분명 자신에게 닥쳐온 존재의 비극 혹은 존재의 비애는 참으로 커다란 것이었다. 그런 슬픔의 정도가 좀 떨어지기는 하지만, 생에 대한 불안감은『남창집』의 까마귀도 동일한 선상에 자리 잡고 있었다. 조류에 자신의 심경을 의탁해서 표현했던 것이다. 그것은 싸늘한 공기를 동반한 존재의 비극이었다. 앞으로 펼쳐질 자신의 생에 대한 불안이 지배적인 양상을 보이기는 했지만, 시어의 전개과정에서 나타난 긴장의 효과와 기교는 이들 시가 왜 우수한 것인지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본론 2장에서 다루었던 후기에 쓰여진 『낙타의 혹에 올라타고』에서의 「까마귀」는, 시인 자신의 이미지와는 정반대의 행동양식을 보이는, 패전 후의 사회 혼란과 무질서에 편승해 갖가지 나쁜 일을 저지르는 불건전한 무리로서의 까마귀를 표현했다. 그것은 존재의 차별이었다. 따라서 이들 4편의 작품에 나타난 까마귀는 존재의 비극과 존재의 차별이라는 상이한 함의를 나타내고 있었다. 즉, 초기 시에 나타난 까마귀는 자신의 모습이었고, 후기 시에 나타난 까마귀는 자신과는 전혀 다른 대립 개념으로서의 까마귀를 그 이미지로 이끌어냈다. 따라서 이들 시편에 나타난 까마귀 이미지는 결과적으로 시인 다쓰지가 갖고 있는 주지시인과 서정시인이라는 양자 공유의 이미지에서 보면 주지시인으로의 이미지 형성과 연관성을 맺는 쪽으로 작용했다. 그것은 곧『측량선』(주지시+서정시) 『남창집』(주지시) 『낙타의 혹에 올라타고』(주지시)등의 세 시집의 성격과도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다쓰지의 시 쓰기가 자신과 같이 동물과 조류 등에 의탁해서 시를 쓴 동년배 시인이나 후배 시인들에게 어느 정도의 영향을 주었는지는 앞으로 시간을 갖고 연구자들의 연구를 살펴볼 일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 그가 프랑스 상징시의 영향을 받아 냉철한 이성을 바탕으로, 자신의 심정을 조류를 차용해 표현하며 서정시인의 이미지 외에 주지시인의 이미지 형성을 고착화했다는 것은 근대 일본의 시문학사에서 보면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해야 할 요소다.         ■參考文獻 金埈五 『詩論』 三知院, 1982(2002 第4版). 오석윤 「三好達治의 『낙타의 혹에 올라타고』 論」『日語日文學硏究』第46輯, 韓國日語日文學會, 2003. 安西均 編 『日本の詩 三好達治』ほるぷ 出版, 1975. 安藤靖彦 編 「三好達治․立原道造」『鑑賞日本現代文學 19』 角川書店, 1982. 伊藤信吉 外 4人 『現代の抒情 現代詩篇Ⅳ』「現代詩鑑賞講座」第10卷, 角川書店, 1969. 大塚久子 「達治 詩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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從ってこれらの4篇の作品に現れた鴉は存在の悲劇と存在の差別という二つの意味を持つ鳥類であった。 一方,これらの詩に現れた鴉のイメージは結果的に詩人達治が持っている主知詩人と抒情詩人という兩者共有のイメージから見たら主知詩人としてのイメージの形成と關連性を結んだ方に働いたと言える. この時期に彼がフランス象徵詩の影響をうけて冷徹な理性をもとにして,自分の心を鳥類を借りて表して主知詩人としてのイメージにも大きく寄与をしたというのは日本の詩文學史で明らかに記憶すべき一つの試みで實驗と評価しなければならない。  
1    윤동주와 당숙 윤영선 댓글:  조회:2034  추천:0  2018-10-13
[월간중앙] 서정의 시학은 치열한 저항의 사상을 품고 있었다. 그의 ‘독립운동’ 사실을 심각하게 의심했던 한때의 흐름은 무지와 오류의 소산이었다. 독립운동가 윤동주의 초상은 일제의 취조문서, 판결문 안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남아 있다. 일본 유학 첫해인 1942년 여름방학에 귀향한 윤동주(뒷줄 오른쪽). 왼쪽이 윤동주 조부의 육촌 동생인 윤길현이다. 앞줄 가운데가 송몽규, 왼쪽이 윤동주의 당숙 윤영춘의 동생인 윤영선이다. 오른쪽은 윤영선의 조카사위인 김추형 한 사람을 이해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 통로가 있다. 한 시대를 이해하는 방식 역시 그러하다. 여기 일제 강점기에 일본 사법당국이 한 조선 청년에게 선고한 판결문이 있다. 시인 윤동주(尹東柱)는 일본 교토(京都)에 있는 도오시샤대학(同志社大學)에 유학 중이던 1943년 7월 14일에 ‘조선독립운동’의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1944년 3월 31일에 교토지방재판소에서 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1945년 2월 16일에 옥사했다. 1970년대 중반 한국 문단에 돌연 이상한 열풍이 불었다. 국민시인으로 정립된 윤동주의 위상을 깎아내리고 그의 ‘독립운동’ 사실을 심각하게 의심하는 조류가 갑자기 일어나더니 즉각 대세가 된 것이다. 그즈음 한 문학잡지에서 ‘윤동주 특집’을 마련했는데, 거기 글을 쓴 당대의 내로라하는 논객 10명 중 무려 8명이 그쪽이었다. “윤동주는 평생 공부만 한 학생이었는데, 언제 독립운동을 했다는 건가!” “재판에서 불과 ‘징역 2년형’을 받았다는데, 그가 진짜 독립운동을 했다면 그 정도로 끝났을 건가?” 이렇게 전개된 그들의 논지를 보면서 필자는 탄식을 금치 못했다. 독립운동사를 깊이 공부했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 동안 독립운동사 관계 재판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그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고, 또 우리 집안 어른인 송몽규(宋夢奎) 선생의 행적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고종사촌형(윤동주보다 3개월 먼저 태어남)이자 평생의 동료였고, 또 같이 유학하고 있던 교토에서 같은 사건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재판 받고 함께 후쿠오카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나란히 옥사한 분이다. 그래서 독립운동가로서의 윤동주를 알려면, 반드시 송몽규를 먼저 알아야 한다. 송몽규의 과거 경력을 알지 못하면 윤동주의 독립운동 사실을 의심하는 게 당연할 정도로 송몽규와 윤동주는 서로 매우 밀접하게 얽힌 삶을 살았다. 윤동주와 송몽규의 운명적 만남 1944년 3월과 4월 각각 징역 2년형을 선고받은 윤동주와 송몽규에 대한 일제 법원의 판결문. 송몽규는 1917년에 9월에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명동학교 교사이던 부친 송창희 선생이 윤동주의 고모와 결혼하고 처가살이를 하고 있을 때여서, 그와 윤동주는 한 집에서 석 달 간격으로 태어났다. 그는 18세였던 1935년 초에 용정에 있는 4년제 미션계 중등교육기관인 은진중학교를 중퇴하고, 중국 남경에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소속 한인군관학교에 제2기생으로 입학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 군관학교는 항일무력투쟁을 치를 한국 독립군 장교들을 양성하기 위한 것으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 최초로 공식 설립된 임정 직할 군관학교였다.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요청에 의해 중국 장개석 정부가 전적인 지원을 했는데, 체제상 중국정부가 운영하는 낙양군관학교의 ‘한인반(韓人班)’이라는 형식으로 1934년 2월에 개교했다. 그러나 한인군관학교의 존재를 알게 된 일본정부의 강력한 항의로 개교한 지 1년 8개월여 만에 문을 닫았다. 당시 한인군관학교에 관한 정보가 모두 일본 정보당국에 노출된 까닭에 폐교 이후 중국 각지로 흩어진 학생들이 속속 일경에 체포되어 조선으로 압송되어 혹독한 신문을 받으면서 무참한 고통을 겪었다. 송몽규도 1936년 4월 10일에 중국 제남에서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었다. 당시 일제 공안당국은 중국에서 체포한 학생들을 모두 조선의 본적지 경찰서로 압송하여 가둬 놓고 취조했기 때문에, 북간도 명동촌 출생인 송몽규도 그해 6월 27일에 부친의 본적지인 조선의 웅기경찰서로 압송되었다. 그는 그해 8월에 청진 검사국으로 송치되어 신문 받다가 9월에 웅기경찰서로 다시 보내져서 9월 14일에 석방되었다. 중국에서 일경에 체포된 이후 만 5개월여 동안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서 일제 공안당국에 의해서 갖은 고통을 겪은 것이다. 그가 그 시기에 겪었던 참혹한 고통을 알려주는 증언이 있다. 같은 집에서 살았던 윤동주의 누이동생 윤혜원 권사님의이야기다. “몽규 오빠는 경찰서에서 풀려나 집에 돌아온 후로는 가슴이 자꾸 안으로 구부러든다면서 항상 어깨를 반듯이 하여 가슴을 펴느라 신경을 썼지요. 그래서 가슴 펴는 데 도움이 되도록 잘 때 베개를 베지 않고 잤어요.” 당시 송몽규가 재판을 거쳐 감옥에 가지 않고 석방된 데는 이유가 있다. 당시 북간도는 만주국 영토에 속했다. 따라서 법 논리상 만주국 국민인 송몽규가 중국에 가서 군관학교를 다닌 것을 일본국 법률로 처벌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석방된 이후 그는 즉각 일본 공안당국의 ‘요시찰인(要視察人)’ 명부에 올랐고, 늘 철저하게 감시당했다. 그 시대에 ‘요시찰인’이라 하면 “말만 들어도 우는 애가 울음을 그친다”고 일컬어질 정도로 악명 높았던 고등계 형사들의 밀착 감시 대상이었다. 1938년 봄, 윤동주와 송몽규는 연희전문학교(이하 ‘연전’)의 입학시험을 치르러 서울에 올라갔다. 그해 2월에 윤동주와 송몽규는 용정에서 각기 5년제와 4년제 중학교를 졸업했다. 이들이 이때 나란히 중학교를 졸업한 데에는 사연이 있다. 송몽규는 1935년 초에 중국에 가서 임시정부 군관학교에서 공부하다가 학교가 폐교된 뒤 1936년 4월에 제남에서 일경에 체포되었고, 조선으로 끌려가서 갖은 고초를 겪다가 그 해 9월에 석방되어 북간도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이 직접 겪은 한인군관학교사건을 통해 조선인이 독자적인 무력항쟁으로 일본을 이겨서 독립을 쟁취하려는 계획은 성공 가능성이 너무도 희박함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그는 방향을 바꿔서 대일항쟁의 수단과 방법을 문화 쪽에서 찾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했다. 송몽규는 본래 문화 쪽의 기질과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은진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8세 때, 본국 서울에서 발간되던 의 1935년도 신춘문예의 ‘콩트’ 부문에 응모하여 당선했을 정도였다. 당시는 신문사 수도 적었고 신춘문예 제도의 권위가 대단했던 때라서 당선은 매우 큰 명예였다. 그런데도 그는 당선의 영광을 초개처럼 던지고 그해 초에 중국으로 가서 임정 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일본 공안당국의 감시망 속으로 이준익 감독과 배우 강하늘, 박정민이 만나 윤동주의 삶을 그린 영화 가 올해 개봉됐다. 윤동주로 분한 강하늘이 섬세한 감성의 시인 역을 맡아 열연했다. 이제 문화투쟁으로 방향을 바꾼 그는 자신이 진학해야 할 상급학교로 서울의 ‘연전 문과’를 선택했다. 두뇌가 매우 뛰어났던 그는 4년제 출신이 치르는 특별입학시험을 통해서 연전 문과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그러면 2년에 걸친 학업 공백을 1년 줄일 수 있게 된다. 윤동주 역시 1938년 2월에 ‘중학교 졸업생’이 되어 그해 4월 두 사람은 나란히 연희전문에 입학했다. 연전 4년의 재학기간 동안, 윤동주와 송몽규는 매우 알차고 만족스러운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들이 연전을 졸업한 날은 1941년 12월 27일, 졸업식 석상에서 송몽규는 우등상을 탔다. 본래 학제로는 1942년 3월에 졸업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러나 일본이 감행한 선전포고 없는 진주만 기습으로 미일전쟁(태평양전쟁)이 발발한 뒤라서 ‘전시 학제 단축’이라는 명목으로 졸업 시기가 3개월 당겨졌다. 조선 천지를 뒤흔든 조선총독부의 ‘창씨개명령’이 1940년 2월부터 실시되고 있었지만, 윤동주와 송몽규는 연전을 졸업할 때까지 그에 응하지 않았다. 당시 두 사람은 일본에 유학하여 공부를 더하기로 계획하고 있었다. 일본 유학을 위해서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은 ‘창씨개명’ 신고였다. 그들이 연전에 가서 창씨개명계를 계출한 결과, 이름이 ‘히라누마 도오쥬우(平沼東柱)와 소무라무게이(宋村夢奎)로 바뀌었다. 그 무렵 윤동주는 창씨개명계를 연전에 계출하는 데 따른 격심한 고통과 고뇌를 아프게 담은 저 유명한 시 ‘참회록’(1942. 1. 24)을 썼다. 그들이 이미 졸업한 연전에 창씨개명계를 계출한 이유는,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지 않으면 일본에 건너가는 허가장에 해당하는 ‘도항증명서’ 등의 서류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총독부의 압박과 압력을 못 이긴 각 가문에서 창씨개명을 하여 일본식 이름을 당국에 신고한 결과, 공문서 상에서 해당 가문에 속한 사람들 전체의 공식 이름이 바뀌었다. 따라서 연전에도 창씨개명계를 계출하여 일본식 이름으로 일치시키지 않으면, 호적등본 등의 공문서와 연전 서류상의 이름이 서로 다르게 되어 상급학교 진학이 불가능했다. 윤동주와 송몽규가 목표로 삼은 대학은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이었다. 극심한 학벌 차별 사회였던 당대의 일본에서 ‘제국대학’은 최고의 권위였고, 특히 현재 수도인 도쿄에 있는 도쿄제대(東京帝大)와 과거의 수도였던 교토에 있는 교토제대는 제국대학 중의 제국대학으로서 그 명성이 하늘을 찔렀다. 일본의 수재들도 그 두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7, 8년에 걸친 재수까지 불사하는 게 다반사였다. 그들은 출신교가 비정규 코스에 해당한 ‘전문학교’라서 정규 코스 출신자들의 입시에 앞서 먼저 시행되는 특별입학시험 대상인 ‘선과(選科)’ 지망생으로 입시를 치렀다. 출신교가 비정규 코스일 경우, 연전에서는 ‘별과’라는 칭호로 구분했는데, 일본의 대학들에서는 ‘선과’라는 칭호를 써서 구분했다. 현재 일부 연구자들이 그 시대에 일본의 대학들에서 사용된 ‘선과’라는 칭호는 요즘의 ‘청강생’과 같은 의미로 쓰인 것이라고 추정하는데, 전혀 사실과 다르다. 응시 결과 송몽규는 문학부 사학과 합격, 윤동주는 불합격이었다. 그 역시 일본 유학생 출신으로 그 시대의 일본 대학 입시제도를 잘 알고 있던 문익환 목사는 “당시 연전 출신인 송몽규가 경도제대 입시에 합격한 것은 하늘의 별 따기를 한 것”이라고 술회했다. 교토제대 입시에서 실패한 윤동주는 도쿄로 가서 성공회 계열의 기독교 대학인 릿쿄대학(入敎大學) 입시에 응시하여 영문학과에 합격했다. 출신교가 비정규 코스인 ‘연희전문학교’였기 때문에 본과보다 합격이 더 어렵고 힘든 ‘선과’ 지망생으로 응시하여 합격한 것이다. 그들이 합격한 대학에 입학한 날은 송몽규가 1942년 4월 1일이고 윤동주는 1942년 4월 2일이었다. 그러나 윤동주의 릿쿄대학 시절은 한 학기로 끝났다. 2학기에는 교토에 있는 기독교 대학인 도오시샤대학(同志社大學) 문학부로 전학했기 때문이다. 송몽규가 있는 교토로 간 윤동주, 그것은 요시찰인으로서 늘 감시되고 있던 송몽규에 대한 일본 공안당국의 감시망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 것과 같은 일이었다. “징병제를 민족 무력 양성에 활용하자” 이 시기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 실시를 눈앞에 두고 있던 매우 특수한 비상시였기 때문이다. 일본정부는 1937년 7월에 시작한 중일전쟁과 1941년 12월에 시작한 미일전쟁으로 장기전을 치르면서 날이 갈수록 전쟁 수행에 힘이 부쳤다. 군수물자가 너무도 부족했고, 무엇보다도 전투원 부족 현상이 매우 심각했다. 그간 일본의 전체 가정에서 병사들을 뽑아 보낸 결과 가족 중에서 해외의 전쟁터에서 죽은 전사자나 다친 부상자가 없는 집이 없을 만큼 인적 피해가 막심했다. 일본정부는 전투원 절대 부족 현상을 식민지의 조선인을 징병하여 해결하려는 정책을 세웠다. 그간 식민지 출신들은 믿을 수가 없어서 병사로 뽑지 않았는데, 이젠 워낙 다급해서 그런 문제점조차 꺼릴 상황이 아니었다. 일본정부는 1942년 5월부터 ‘조선인 징병제’ 실시 추진에 관한 정책 방향과 규정들을 단계적으로 발표하며 선전하다가, 1943년 3월에 드디어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를 1943년 8월 10일부터 시행한다”고 공표했다. 당시 친일파를 제외한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그 정책을 두고 “조선인들을 자기들 전쟁의 총알받이로 내세우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매우 분노했다. 그러나 송몽규는 전혀 달랐다. 대일무력항쟁에 투신하려고 임정 군관학교에 가서 군사훈련을 받았으나 여건 미비로 중도에 실패한 경력이 있는 그는 ‘조선인 징병제 실시’를 매우 반기고 찬양했다. “조선인은 종래 무기를 알지 못했지만 징병제도의 실시로 새로운 무기를 갖춘 군사지식을 체득하게 되면 장래 대동아전쟁에서 일본이 패전에 봉착하게 될 때 민족적 무력 봉기를 결행하여 조선 독립을 실현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제도는 조선 독립을 실현하는 데 일대 위력이 될 것이다”라는 논리에서였다. 송몽규는 적극적으로 그런 논리를 주변에 퍼뜨렸다. 보다 많은 조선인들이 자신과 같은 관점에서 그 제도를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대응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윤동주는 그에 적극 찬동했다. 송몽규의 그런 행위는 당연히 그를 밀착 감시하고 있던 특고경찰의 감시망에 걸려들었다. 당시 일본 공안당국이 조선인 징병제 실시를 앞두고 가장 우려했던 것이 바로 조선인들이 그런 식의 대응을 하려고 들 위험성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그것은 너무도 위험하고 너무도 불온한 대응이었다. 그래서 그런 소신을 가진 자들을 사회로부터 강제 격리시키기로 결정했다. 1943년 7월 10일. 교토에서 드디어 사건이 터졌다. 조선인 징병제 실시 날짜가 공표된 1943년 3월로부터 불과 4개월이 지난 그때, 조선인 징병제 실시가 시작되는 날인 1943년 8월 10일을 불과 1개월을 앞둔 그때, 일본 특고경찰은 송몽규를 체포했다. 7월 14일에는 윤동주를 비롯한 다른 관련자들도 체포되었다. 윤동주·송몽규, 독방에서 복역하다 차례로 옥사 숭실중학교 시절의 윤동주(뒷줄 오른쪽). 가운데 안경 쓴 이가 윤 시인의 동창생 문익환 목사다. 송몽규와 윤동주는 9개월에 가까운 기간 동안 구속된 상태로 특고경찰의 취조와 검사의 신문을 받은 끝에 교토지방재판소에서 각기 따로 재판을 받았다. 윤동주에게는 1944년 3월 31일에 ‘징역 2년형(미결구류일수 120일 산입)’이 선고되었고, 송몽규에게는 1944년 4월 13일에 미결구류일수 산입이 전혀 없는 ‘징역 2년형’이 선고되었다. 따라서 그들의 출옥 예상일은 ‘윤동주 1945년 11월 30일, 송몽규 1946년 4월 12일’이었다. 그들의 출옥 예상일을 전해들은 북간도 고향에서는 ‘윤동주 징역 2년 형, 송몽규 징역 2년6개월 형’을 선고 받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들은 후쿠오카 감옥으로 이송되어 독방에서 복역하다가 차례로 옥사했다.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송몽규는 1945년 3월 7일에 운명했다. 우리 국민의 의식 속에는 일제 강점기의 사법체계에 대한 오해가 있다. 일제 사법당국이 조선독립운동에 관한 사건이라 하면 덮어놓고 엄청난 중형을 가했으리라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한때 ‘윤동주 시인이 관련으로 을 받았다’는 사실을 두고 “형량을 보니 별것 아니었겠군!”하는 반응이 큰 공감을 얻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시대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막상 일제 재판정에서 선고된 형량은 우리의 통념을 깨는 경우가 많다. 특히 사상범죄의 선고 형량이 예상 외로 가볍다. 그러나 사상 범죄라 해도 일제 공안당국이 사건을 만들어 신문을 거쳐 투옥하는 과정에서 잔혹한 고문으로 불구자가 되거나 사망자가 나오는 일이 흔했다.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독립운동사 관계 판결문들을 모아 놓은 을 읽어보면 놀라게 된다. 재판정에서 당당하게 처신한 독립운동가들이 있었던 반면, 그보다 더 많은 판결문의 주인공들이 재판정에서 자신의 독립운동 사실을 부인하거나 후회하면서 선처를 바라고 있었다. 너무도 힘들었던 그 시대의 고통과 역경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윤동주에 선고된 판결문은 어떠한가. 윤동주와 관련된 일제의 공문서는 두 가지다. 하나는 특고경찰(특고)이 그를 체포하여 취조한 결과를 정리한 ‘취조문서’이고, 다른 하나는 그를 재판한 교토지방재판소의 ‘판결문’이다. 특고의 취조문서는 이 사건을 ‘재경도(在京都)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사건’이라고 명명했는데, 사건 개요 설명이 “중심인물인 송몽규는…”이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읽어보면 실로 눈과 마음이 모두 시원할 정도다. 그 악명 드높았던 특고의 신문을 받으면서도 송몽규나 윤동주 모두 의연하고 당당하기 그지없다. 특고를 상대로 자신들이 갖고 있던 조선 독립에 대한 열망과 대책과 소신을 가감 없이 쏟아놓았다. 취조문서와 판결문에 등장하는 이 사건 관련자는 모두 7명이다. 그들 중에서 1943년 12월에 교토 검사국으로 송국된 사람은 송몽규, 윤동주, 고희욱, 3명이었다. 그러나 특고의 수사관행으로 보아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특고에 잡혀가서 크게 고생한 뒤 석방되었을 것이다. 윤동주에게 선고된 판결문을 상세히 살펴보자. 1. 윤동주가 조선 독립을 원한 까닭 “…(윤동주는) 일찍이 치열한 민족의식을 품고 있었는데 …우리(일본)의 조선 통치의 방침을 보고 조선 고유의 민족문화를 절멸(絶滅)하고 조선민족의 멸망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여긴 결과, 이에 조선민족을 해방하고 그 번영을 초래하기 위해서는 조선을 제국(일본제국)통치권의 지배로부터 이탈시켜 독립국가를 건설할 수밖에 없으며…” 2. 조선 독립을 위한 방법론 “조선민족의 현재 실력 또는 과거의 독립운동 실패의 자취를 반성하고 당면 조선인의 실력과 민족성을 향상하여 독립운동의 소지(素地)를 배양하도록 일반 대중의 문화 앙양 및 민족의식의 유발에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 3. 현재 일본 상황에 대한 인식 “대동아전쟁의 발발에 직면하자 과학력이 열세한 일본의 패전(敗戰)을 몽상(夢想)하고 그 기회를 타서 조선독립의 야망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고 망신(妄信)하여 더욱더 그 결의를 굳히고” 4. 조선인 징병제 실시에 관한 생각 “조선에 있어서의 징병제도에 관하여 민족적 입장에서 상호 비판을 가하고 그 제도는 오히려 조선독립 실현을 위해 일대 위력을 가할 것이라고 논단(論斷)하고” “조선인은 종래 무기를 알지 못했지만 징병제도의 실시에 의하여 새로 무기를 갖고 군사지식을 체득함에 이르게 되어 장래 대동아전쟁에 있어서 일본이 패전에 봉착할 때, 반드시 우수한 지도자를 얻어 민족적 무력 봉기를 결행하여 독립 실현을 가능케 하도록 민족적 입장에서 그 제도를 찬양하고…독립 실현에 공헌하도록 각자 실력 양성에 전념할 필요가 있음을 서로 강조하고” 5. 내선일체(內鮮一體) 정책에 관한 인식 “조선 내 학교에서 조선어 과목이 폐지됨을 논난하고 조선어 연구를 권장한 뒤에, 소위 내선일체 정책을 비방하고 조선문화의 유지, 조선민족의 발전을 위해서는 독립이 필수인 까닭을 강조하고” 6. 일본과 조선 사이의 차별 압박 지적 “조선의 교육기관 학교 졸업생의 취직 상황 등의 문제를 포착하고 내선(內鮮) 간에 차별과 압박이 있다고 지적한 뒤 조선민족의 행복을 초래하기 위해서는 독립이 급한 일이라는 뜻을 역설하고” 7. 미일전쟁(=대동아전쟁, 태평양전쟁)에 대한 대응자세 “대동아전쟁은 항상 조선독립 달성의 문제와 관련해서 고찰함을 요하며, 이 호기(好機)를 잃으면 가까운 장래에 조선이 독립할 가능성을 상실하고 마침내 조선민족은 일본에 동화되고 말 것이므로 조선민족인 자는 그 번영을 열망하기 위하여 어디까지나 일본의 패전을 기해야 하며” 8. 조선독립의 당위성에 대하여 “조선총독부의 조선어학회에 대한 검거를 논란한 뒤, 문화의 멸망은 필경 민족을 궤멸시키는 것임을 역설하고 예의 조선문화의 앙양에 힘써야 한다고 지시하고”, “조선의 고전예술의 탁월함을 지적한 뒤에 문화적으로 침체해 있는 조선의 현상을 타파하고 그 고유문화를 발양시키기 위해서는 조선독립을 실현할 수밖에 없는 까닭을 역설하고”, “동인(장성언)의 민족의식 강화를 돕고자 자신이 소장한 을 대여하고 조선사를 연구하도록 종용하고” 판결문에 드러난 윤동주의 모습과 자세는 너무도 당당하고 의연하여 눈이 부실 지경이다. 판결문에는 “판시 사실은 피고인의 당 공정(公廷=재판정)에 있어서의 판시와 같은 취지의 공술(供述)에 의하여 이를 인정한다”라고 기재되어 있어, 그가 재판정에서 판사들을 상대로도 위와 같은 발언을 했음을 명확하게 입증하고 있다. 그의 동료 송몽규의 경우 역시 윤동주와 똑같았음이 그에 대한 판결문으로 증명된다. 취조 시 발언과 재판정에서 발언 일치 윤동주가 가졌던 미일전쟁에 관한 의식과 대응자세를 당대 조선사회의 유명한 지도층 인사였던 J박사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너무도 크게 대비된다. 그들이 재판 받은 날은 공교롭게도 불과 하루 차이였는데, J박사는 지인에게 미일해전에서 일본이 군함을 많이 잃은 것 같다고 말한 것이 문제가 된 사건에서 “자신은 이미 황국신민화, …유언비어 운운”하면서 그런 사실을 아예 부인했다. 반면, 윤동주는 일본의 특고경찰과 검사와 판사들 앞에서 “조선독립을 위해서는 대동아전쟁(미일전쟁)에서 일본이 패전해야 한다”고 당당하게 주장했던 것이다. 윤동주의 문학이 일제 강점기의 어두운 한국문학사를 환하게 빛내고 있는 존재이듯, 독립운동가로서의 그의 존재는 참혹했던 일제 강점기 말의 한국독립운동사를 밝고 환하게 빛내고 있다. 송우혜 - 1947년 12월 5일 서울 출생. 서울대 간호학과 중퇴, 한국신학대 신학과를 졸업했다. 1980년 신춘문예에 ‘성 야곱의 싸움’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등단 이후 꾸준히 역사소설에 관심을 기울였다. 소설집으로 (1985)을 비롯, 인간의 삶과 돈의 문제를 다룬 (1990), 병자호란 당시 사대부가문 여인의 삶을 그린 (1996) 등이 있다. 필생의 작업으로 완성한 은 최고의 역작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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