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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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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동네방네] - 조선족 민속 무형문화재 얼쑤ㅡ 절쑤ㅡ... 댓글:  조회:2701  추천:0  2018-10-24
조선족민속결, 한 귀향농민이 이루어낸 무형문화재 (ZOGLO) 2018년9월18일       2011년 통계를 보면 중국에는 국가급 무형문화재 1,219건 성급 무형문화재 7,109건이 선정되여 무려 8,328건에 달하는 무형문화재가 전해지고있는것으로 알려졌다. 그중 중국의 전통 매듭공예인 중국결(中国结)은 유구한 력사를 자랑하면서 중국 전역에서 장시기 전해져 온 민간공예이다. 그런데 실을 주요 재료로하는 이 수공예가 요즘 연변조선족민속과 접목되면서 새로운 무형문화재인 “조선족 민속결”을 탄생시키는 “기적”을 창조하여 사람들의 각광을 받고있다. 이 새로운 무형문화재인 “조선족민속결”을 탄생시킨 주인공이 바로 가난한 귀향 농민 박경훈(朴京勋)씨이다.   룡정시 민속박물관에서 민속결을 창작하는 박경훈씨   1, “백락”과 “천리마”   진달래광장의 야시장 난전에서 귀엽고 깜찍한 민속 소품들을 팔고있던 박경훈씨를 발견한 사람은 룡정시 로간부국의 라송화(罗松花) 국장이였다. 천리마를 알아본 백락처럼 그는 박경훈씨의 재능을 “부활” 시키는데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다.   어느날 아들을 데리고 연길 진달래광장 야시장에 나갔던 라국장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문화 소품들에 매료되였다.   조선족이 좋아하는 빨간 “고추”요, “옥수수”가 있었고 조선족 로동도구인 “소보치”가 있었으며 조선족의 “북”이나 “새장구”도 있었다. 귀엽고 깜찍하게 만들어진 알록달록 크고작은 모형은 그처럼 정답고 사랑스러웠던것이다.         중국결의 기술로 새로 짠 조선족 민속공예품들   “이거 얼마합니까? 한국거 맞지요?”   “아,아임다. 내손으로 직접 만든검다!”   “정말임까?! 곱기두 해라~”   라국장은 거친 사나이의 투박한 손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저런 남자의 큰 손에서 어찌 이 같이 정교한 물건이 만들어질수있단 말인가?!    [음향: “15년도 8월 연길에 집이 있으니 진달래광장 예스에 나왔다가 내가 파는 물건을 보고 저 ‘소보치’ 샀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룡정에 와서 사람들에게 기술을 배워줄수없는가?’했습니다. 저도 그가 연길 사람인줄 알았는데 후에 알아보니 룡정 로간부국 국장이였습니다.”]   한달뒤, 연길 시내에서 자연공예품에 수요되는 재료를 구할수없자 박경훈씨는 고향인 룡정시 신화촌으로 돌아왔다. 옥수수 껍질도 얻고 버들도 얻어 특색있는 자연공예품을 만들어 볼 생각에서였다.   박경훈씨는 룡정에 왔던김에 “기회가 되면 로간부국으로 찾아오라”던 라국장이 생각나서 찾아가 보았다.   다시 만난 둘은 모두 룡정사람인것을 알고 더 반가워했다.    [음향: “찾아가니 ‘원래 룡정사람이였는가?’해서 룡정사람이라고했습니다. 그러니 ‘더 가까워졌네’라고 합데다......”]   이듬해인 2016년 라송화 국장은 룡정시문화보도출판국 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라국장은 곧 박경훈씨를 불러 그를 문체국에 받아둘 계획을 이야기했다.    [음향 “승진하여 나를 찾아 나의 정황을 물어보던게 ‘크게 해결하지 못하겠지만 일상 생활을 할수있게 하겠다’고했습니다.”]   라국장은 문체국의 항목으로 박경훈씨의 재능을 잘 발휘시키기로 마음 먹었던 것이다. 그는 우선 박경훈씨를 공익 일터인 문체국에 배치하기로 마음먹고 인사국에 전화를 했다.    [음향 “내 앞에서 련계하면서 ‘안된다’고하자 ‘이 사람은 기술항목인데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기술을 잃어버린다. 정책도 적당히 써야한다’고 했습니다. 그후 시위에 저의 자료를 올려보내구 비준을 받아 16년 7월부터 여기 문체국 민속박물관에 출근하게 되였습니다.”]   박경훈씨가 나이 조건이 부합되지 않는다고 인사국 국장이 답복하지 않으니 라송화 국장은 이는 룡정시의 중요한 기술항목이고 또 박경훈씨도 더 없는 기술인재이기에 꼭 유치해야한다고 주장하였던것이다. 그리고 관련 자료와 보고를 시당위원회에 올려보내 비준을 받고 드디어 그에게 일자리를 해결해주었던것이다. 그리하여 박경훈씨는 일반 농민으로부터 로임을 받는 공직 일군이 되였다. 농민으로부터 그것도 가난한 시골 농민으로부터 도시 문체국의 일군으로 되기까지 그야말로 “기적”과 같은 일이였다.   박경훈씨는 모든 정력을 몰부어 열심히 신제품 개발에 힘쓸 각오를 다지며 부지런히 일했다.   그는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았다. “나에게도 이런 날이 있다니!” 부득이 살길을 찾아 고향을 떠났다가 입에 풀칠이나 할 각오로 덤벼들었던 중국 전통매듭 강습! 중국결 강습반에 다니던 그 어려웠던 나날들을 생각하니 지금도 마음이 울컥해났다.   2, 타향살이   2005년 오랜 병으로 고생하던 박경훈씨는 허리까지 다쳐 집에서 그냥 몸조리를 하고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누님의 전화를 받았다. 글쎄 누님의 아들이 료녕성 반금시에서 차사고를 당해 다리를 다쳤다는것이였다. 그리고 “다친” 다리는 괜찮은데 와서 기타 관련문제들을 처리해 달라는것이다.   누님은 자기는 녀자니 어찌 할지 모르겠다면서 이웃집에 가서 겨우 돈 6백원을 꾸어 동생의 손에 쥐여주면서 어찌하나 아들을 데려와 달라고 신신 당부했다.   “설마 차 사고일까?”하면서도 누님이 하도 당황해하면서 부탁하니 박경훈씨는 그냥 대답하고말았다.    [음향 “누님의 아들이 료녕성 판금에서 곤경을 치렀는데 다 알겠지만 다단계 판매에 걸려 들었던것입니다. 갈때도 다단계라는걸 예산하면서 갔습니다. 조카를 만나 자초지종 들어보니 다단계 맞았습니다. ‘다 걷어치우고 가자, 네만 만원 미쪗으면 됐다, 우린 가자’했지만 조카는 안 오겠다고했습니다.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욕하고 때려서 될 일도 아니였습니다.”]   산설고 물선 타향에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고집스러운 조카를 버려두고 혼자 돌아올수도 없는 일이였다. 박경훈씨는 그냥 기다리고있었다. 굶어죽을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였다.   낯선 타향에서 돈도 힘도 없는 그로서는 다른 별 방법이 없었던것이였다. 남은것은 악뿐이였다!   얼마후 다단계업자들이 회원수가 많은 사평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였다. 조카도 따라 가야한다고 알리자 박경훈씨도 할수없이 사평으로 따라 가게 되였다. 그는 사평에서 가장 싼 세집 하나를 맡고 언제면 조카를 설득해 고향에 갈것인가만 궁리하고있었다.    [음향 “세를 맡고 사는데 석탄을 사고, 감자 사고하니 돈이 떨어지니까 일거리를 찾느라 광고를 보게 되였는데 거기에 학습반한다는 광고가있었습니다. 기술을 배울뿐만 아니라 기술을 배우는 동안 만든 물건들도 다 구매한다고했습니다. 그래 ‘남자도 할수있는가?’ 해서 할수있다는 답을 듣고 찾아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박경훈씨는 일자리라도 하나 찾아볼 생각으로 우연히 중국결 학습반을 한다는 광고를 보게 되였다. 기술을 배워줄뿐만 아니라 학습반에서 만든 제품을 통일적으로 모두 구매한다고했다.   기술도 배우고 물건도 만들어 팔고하면 생계는 유지할것 같았다.   박경훈씨는 사평의 6선 뻐스를 타고 광고를 따라 가보았다.   작은 방 벽에는 온통 중국의 전통매듭이 가득 걸려있었다. 너무 아름차서 그는 도저히 배울 엄두를 못내고 돌아섰다.   돌아와서 세집에 누웠는데 이런저런 생각이 갈마들었다.   ‘연변의 수공예는 다 한족들의 공예인데 이 기술을 배워 우리 조선족의 민속과 결부시켜 보면 어떨까?’하는데 생각이 미치게 되였다.   닷새후 박경훈씨는 다시 그곳을 찾아가 중국매듭 공예를 배우자고했다.   학비 5백원을 냈다.   한족 공예선생은 류복거(刘福巨)라는 50대 사내였다. 그는 반색을 하면서 자기에게서 재간을 배우고있는 사람은 일년에 2백명도 넘다고했다. 그런데 박경훈씨처럼 신중하게 결정 내린 사람은 없다면서 꼭 성공할거라 믿는다고 힘을 실어주었다.   학습반의 사람들은 하루이틀 견지하다 그만 두는 사람이 허다했다. 하지만 박경훈씨만은 이를 악물고 견지하였다. 그는 사평의 영웅광장을 지나 왕복 13킬로메터 거리를 두달반이나 매일 다녔다.   학비를 내고나니 남은 돈은 몇십원밖에 안되였다. 아껴 먹고 아껴 쓰면서 심지어 뻐스비도 아껴 그 먼 거리를 도보로 다닐때도 있었다. 그래도 얼마 안가서 돈이 바닥이 났다.   돈이 뚝 떨어지고나니 쌀도 살수없었다. 그냥 겨울나이로 사두었던 감자 한자루뿐이였다! 옷도 올때 입었던 춘추내복뿐이고 솜옷은 하나도 없었다!   박경훈씨는 감자로 끼니를 떼우면서 그냥 쓰러지지 않을정도로 하루하루 비텨 나갔다.   매듭공예를 배워주던 류복거 선생은 자기 보다도 몇살 우인 박경훈씨가 솜옷이 없어 추위에 떠는것을 보고 안쓰러워 자기의 적삼을 내 주기도했다.   두달반후 양력설이 되자 박경훈씨는 고향에 년로한 어머니도 계시니 가야한다면서 돈 50원을 꾸어가지고 설쇠러 연변에 왔다.    [음향 “설을 쇠구 다른집에서도 기술을 배워보려고 2006년 다른집에서 더 배웠습니다. 두번째 집에서 배울때는 농업 대출을 받아가지고 학비를 해결했습니다.”]   연변에서 설을 쇠고나니 기술을 더 배울 생각이 굴뚝 같았다. 자기의 기술이 어느 정도라는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박경훈씨였다. 그는 기술을 조금만 더 익힌다면 조선족 민속과 결부시키려던 자신의 꿈을 실현할수있다고 믿었던것이다. 그래 한번 제대로 해 볼 생각으로 농업대출까지 맡아서 다시 사평으로 떠났다.   다시 사평에 온 박경훈씨는 기차역부근의 최하층 려관에 들면서 만두 몇개씩 사서 때마다 만두 하나씩 먹으며 지냈다. 드디어 그는 견본만 있으면 모든걸 다 만들어낼수있는 훌륭한 재능을 익혀냈다. 그리고 모든 중국결 작품들을 사진찍어서 간직해 두었다. 머리속에 훌륭한 견본이 많아야 좋은 작품을 만들수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그는 자기가 생각하는 독특한 물건을 만들어내고싶었던것이다.   이 정도면 될거라고 생각한 박경훈씨는 강습 과정을 수료하고나서 곧 귀향하기로 했다. 그는 오는 길에 심양에 들려 재료로 쓸 색실도 도매로 가득 사가지고왔다.   3. 끝나지 않은 타향살이   재간을 익혔으나 그의 재간을 알아줄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었다. 그는 먼저 몇가지 소품을 만들어 가지고 집 근처에서 팔아보려고했으나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다.    [음향 “룡정 3중 부근에서 물건을 팔았는데 룡정에서 근본 팔지 못하게 하여 연길에 갔습니다.”]   할수없이 그는 중심도시인 연길로 가 보기로했다. 거기에는 전국 각지 관광객들이 많으니 알아줄 사람이 혹시 있으랴 싶어서였다.   그의 타향살이는 계속 되였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는 하남의 옥수국수를 눌러 한국에 수출하는 집에서 한달간 일하면서 지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7년 1월부터는 연길시 하남에서 내몽골의 림지를 대리 판매하는 마음씨 좋은 녀성 신경리에게서 2년 동안 잔심부름을 하면서 지냈다.    [음향 “물건을 팔때도 그렇고 그분이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공공뻐스 비용 다 그 녀자가 냈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일은 쉽게 하면서 그래도 지낼수있었습니다.”]   그냥 마음씨 좋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쉽게 지낼수는 없었다. 그는 자립해야했고 고생스럽게 익혀두었던 재능을 발휘할 기회가 있어야했다.    [음향 “나는 신경리에게 ‘가난구제는 나라에서도 못하는데 신경리가 이렇게 도와주는건 고맙지만 장구지책이 아닙니다. 저도 나가서 뻐덕이겠습니다!”라고했습니다]   박경훈씨는 다시 연길시 철남에 세를 맡고 조금씩 시간을 내서 중국결을 기초로 머리속에 계속 생각해두었던 조선족 특색의 “옥수수”며 “고추”를 만들어 조금씩 내다 팔면서 지냈다.   여름에는 그래도 아껴먹고 아껴 쓰면서 지낼수있었는데 겨울이 문제였다. 필수품인 쌀을 사고 전기세를 내고나면 석탄 살 돈이 없었다. 고민고민하다가 석탄을 사지 않기로했다. 그런 환경속에서 박경훈씨는 물건을 들고 다니며 팔며 지냈다.   4. 다시 귀인을 만나다   어느날 박경훈씨는 모아산에 가서 물건을 팔아 볼 생각으로 모아산 유원지를 찾아 갔다.   연길시 시민들이 많이 선호하는 모아산 유원지는 늘 등산객들로 붐볐다. 박경훈씨는 관리원들의 눈을 피해가며 물건을 팔아야했다. 그러던중 거기서 연변건설국에서 일하는 김진우(金振宇) 주임을 만나게 되였다.   모아산 공원 관리원들의 눈을 피해가며 관광객들에게 소품을 팔고있는 박경훈씨를 본 김진우 주임은 우선 그의 뛰여난 손재간이 마음에 들었고 또 그의 가긍한 처지가 마음이 아팠다.   김진우 주임은 호주머니를 털어 돈 4백원을 내놓으면서 소품들을 자기가 다 사겠다고했다. 그리고 이 물건들을 가져다 자기 방식대로 선전해 보겠다고했다.   남달리 조선족 민속에 관심을 보인 김주임은 조선족 민속과 관련해 이야기를 꺼냈는데 민속과 관련해 둘의 견해가 비슷하였다. 박경훈씨도 2004년부터 조선족민속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많은 책을 읽었고 또 중국결에 조선족 특색을 부여한다는 생각을 계속해왔기 때문에 오랫만에 지기를 만난 기분이였다. 둘은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었고 김진우 주임은 평범한 농민인 박경훈씨가 이런 생각을 가졌다는데 탄복했던것이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서 신세를 질수없다고 거부하던 박경훈씨는 드디어 김진우 주임의 호의를 받아들였고 김주임은 그의 물건을 모두 사 가지고갔다.   그해 9월의 어느 비오는 날이였다. 박경훈씨는 자기가 정성들여 만든 물건 32개를 들고 뻐스를 탔다. 하남에 가지고 가 팔려했는데 글쎄 그날따라 뻐스에서 두개가 팔렸다.    [음향 “’물고기’가 두개 팔렸다. 10원씩했는데 공공뻐스에서 팔렸다. 재수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다.”]   박경훈씨가 하남에서 물건을 진렬해놓고 한쪽에서 열심히 실로 매듭을 짜고있는데 전화가 왔다.   김진우 주임이였다. 그는 다른 인사는 한마디도 없이 그냥 전화번호 하나를 알려주며 련락해 보라고했다. 전화번호를 적을수없어 억지로 기억했다가 련락을 하자 한 녀성이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자치주 관광국이라면서 견본이 있으면 가지고 오라고했다.   박경훈씨는 대뜸 자치주 관광국으로 달려갔다.   3층 비서실에 가서 전선옥(全先花)라는 녀성 사업일군을 만났다. 그는 견본을 보더니 물건이 너무 정교하게 잘 만들어졌다고 치하하면서 곧바로 4층의 국장실에 올라가 보고하였다.   자치주 관광국 주성문(朱成文) 국장은 김진우 주임에게서 소개를 다 들었다면서 견본으로 가져 온 깜찍한 물건들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조선족 가운데도 중국매듭을 한족 못찌 않게 짜는 사람이 나타나 정말 반갑다”고 말했다. 특히 소품 “소보치”를 만지작 거리며 조선족 특색이 물씬 풍겨난다고 치하하였다.   주성문 국장은, 유감스럽지만 이 소품들은 어디까지나 반성품이라면서 대량 생산이 따라 가야하고 포장이 따라가야한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그는, 연변에서는 아무래도 민족특색을 살려야한다면서 자연공예쪽으로 생각해는것이 어떠냐고 권유했다.    [음향 “돈을 안들이고 머리를 쓰면 재료를 가지고 만들수있지 않는가했습니다. 그래서 소보치를 만들어 보고 쪽지게를 만들고 또 조선족 “항아리”라든지 “물동이” 같은걸 만들어보았습니다. 민속 공예쪽으로 생각하니 다른 길이 열리는듯했습니다. 물론 물건들은 이전것보다 잘 팔리지 않았지만 물건 그 자체가 예술이고 문화재로 되는것이였습니다. 그래서 잘 팔리지는 않지만 민속과 접목하기에 더 힘썼습니다.”]   자치주 관광국 비서실의 전선화는 박경훈씨의 소상품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음향 “민족특색이 있는 기념품이라면 연변에서 한국 상품도 찾아볼수있고 또 조선상품도 볼수있습니다.다만 아쉽게도 연변것은 없었습니다. 박선생님은 바로 이 공백을 메워준것입니다. 중국매듭은 표지적인 기술입니다. 그렇다면 이걸 가지고 어떻게 우리 연변특색이 있는걸 만들수있는가 생각했던것입니다. ‘옥수수’도 만들고 ‘조롱박’도 만들고 ‘항아리’도 만들고 조선족 똬리도 만들고 우리 민속이 살아나게 되였습니다.박선생님은 우리 무형문화재를 탄생시킨것입니다.”   전선화는, 2009년부터 새 지도자가 오면서 관광국에서는 관광상품 개발에 힘을 기울렸다고 소개했다.   관광상품이라고하면 한국의 것도 있고 조선의 것도 있지만 연변의 것은 없었다. 연변의 민족특색이 있는 관광상품을 개발해야하는데 이것이 공백이라는것이였다. 바로 이 시기에 박경훈씨의 작품이 자치주 관광국의 눈에 들었던것이다.   경제개발의 선봉격인 관광개발이 본격화되자 연변에도 여러가지 축제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이런 축제가 있으면 박경훈씨는 관광상품 매장을 차리고 알록달록한 민속제품들을 전시하는 한편 또 직접 현장에서 수공으로 물건을 짜면서 많은 관객들의 인기를 끌었다. 사람들은 호기심에 차서 그를 바라보았고 그의 손재간에 놀랐으며 정교하게 만들어지는 물건들에 매료되군 하였다.   현장의 분위기를 더 고조시키기 위해 관광국에서는 수공예 표현을 할수있는 무대를 만들어주기까지 하였다. 박경훈씨는 현장에서 자신의 손재주를 한껏 발휘하면서 “새장구”요, “바게쯔”요, “북”이요, “소보치”, “고추”, “옥수수”, “락화생” 등 정교한 소품들을 만들어냈다. 관광객들은 기꺼운 심정으로 그의 재능을 관람했을뿐만 아니라 자기가 마음에 드는 소품들을 선정해 기념으로 사가군 하였다.   중국 전통매듭과 조선족 특색이 잘 결부된 박경훈씨의 수공예품은 점차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며 민간 수공예 무형문화재로 자리를 굳혀가게 되였다.   박경훈씨는 그동안 선후하여 2009년에 두만강아리랑 “빙설축제”행사에서 “최우수 매듭 수공예인” 칭호를 수여받았고 2013년 중국관광상품대회에서 그의 조선족 로동도구중 하나인 “소보치(簸箕)”가 출품작으로 선정되기도했다. 그리고 2017년 길림성관광상품전시, 제1회 연변조선족문화관광축제 관광상품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하기도했다.  
4    "두만강여울소리"는 어제도 오늘도 도도히 흐르고지고 댓글:  조회:2799  추천:0  2018-10-24
30회 '두만강여울소리'시탐구회 연길서 (ZOGLO) 2018년10월22일  늦가을의 풍요로움이 한가득 향기풍기는 지난 10월 20일, 제30회 "두만강여울소리"시탐구회가 연길시 몽도미민속리조트에서 성황리에 펼쳐졌다. 길림시, 할빈시, 목단강시 및 연변 각 현시의 시인, 평론가, 기자 들 50여명이 모여 시와 시단의 발전에 대해 연구, 토의했다. 먼저 시인들은 치렬한 문학정신으로 시단을 이끌어오는데 마멸할 수 없는 공헌을 하다가 근년에 우리 곁을 떠난 고 조룡남, 김파, 리상각 시인(초상화)을 그리며 숙연한 마음으로 묵도했다.        다음 연변작가협회 부주석이며 시가창작위원회 주임인 김영건 시인이 개막사를 했다. 김영건 주임은 개막사에서 장장 30회나 걸쳐 소집된 “두만강여울소리”탐구회의 발자취를 하나하나 렬거하면서 우리 시단의 발전사를 회고했다.           다음 연변작가협회 정봉숙 상무부주석은 축사에서 시가창작위원회가 다년래 거둔 성과를 충분히 긍정하면서 앞으로도 계속 정진할 것을 부탁했고 잡지사 전경업 사장이 페막사를 올렸다.       회의는 시종 열렬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였는데 최룡관, 김룡운님이 기조발언을 하였고 편집진 발언에 김성우, 전경업, 김창희, 한영남이 시창작과 “두만강여울소리”의 가치에 대해 피력하였으며 김동진, 전병칠, 김영능, 박춘월, 심예란, 리순옥, 김영춘, 박장길, 윤청남 등 40여명이 자유발언을 하였다.           시인들은 사회적 여러가지 여건으로 전반 조선족문단이 창작시점으로 볼 때 시집출간이 대폭 늘어나고 창작의 다원화와 모더니즘시, 포스터모더니즘시, 디지텔시에 이르기까지 활발한 시적 완성도를 보이고 있으며 왕년의 시창작에 비해 크게 제고된 것을 감안하면서 기타 쟝르의 창작보다 그래도 시단이 앞서가고 있다고 표했다.      장장 30회를 주름잡아온 “두만강여울소리”는 그 기간 연변작가협회를 중심으로 해서 연변8개현시의 당정지도자들의 많은 중시와 지지, 성원을 이끌어냈고 문련, 민족사무위원회, 고등학교들과 기업인들의 많은 알찬 도움을 받아 시종 거창한 흐름을 보였음을 시인들은 명기할 것이다. 그리고 혁혁한 문학적 공헌을 하시고 이미 작고한 리욱, 김성휘, 정몽호, 박화, 김문회, 허룡구, 문창남, 김호근, 황장석, 김동호, 허흥식, 리삼월, 한춘, 조룡남, 김파, 리상각 등 시인들의 시혼을 알뜰히 추억하고 기념해야 할줄로 안다.           의심할바없이 “두만강여울소리”는 중국조선족시문학의 발전과 번영을 위해 마멸할 수 없는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는 평이다.       중국조선족문단 뿐만아니라 전국문단, 지어 해외에서까지도 굉장이 인기가 있는 “두만강여울소리”는 10주년때 두만강변에 “여울소리시비”를 세웠고 20주년때는 그간 “여울소리”에서 상을 탄 시편들로 시집 “두만강은 흐른다”를 출판했고 이번 30주년을 맞으면서는 “중국조선족시화선집”, “우수시선집” 2000-2009사이의 10년간의 시선집 등 많은 시집을 출판했다.              이번 회의에서는 참가시인들의 탐구시작품 50편을 두고 투표와 심사위원들 공평한 심사를 거쳐 최종 6명 시인이 수상, 박춘월의 “들국화”, 심예란 “눈물의 온도”, 김선희 “석빙화”, 심명주 “새벽을 날다”가 우수상을, 김미란의 “봄안에 봄”, 신향란 “겨울나무”가 신인상을 수상했다.       이날 시인들은 자기들의 대축제를 아끼고 사랑했으며 서로서로 숨결을 교류했고 시랑송, 노래와 춤까지 곁들면서 새로 다가올 시단의 래일을 맘껏 꿈꿔봤다.  글 금산/사진 창희, 호범
3    [이런저런] - 싸구려, 싸구려... "슈퍼 돼지" 싸구려... 댓글:  조회:2672  추천:0  2018-10-24
단동에 무게 450kg 길이 2.2m ‘슈퍼 돼지’ 등장 [ 2018년 10월 22일 ]     몸무게가 450kg에 달하는 슈퍼 돼지가 왕훙으로 떠올라 화제를 모으고 있다. 19일 봉황망(凤凰网)에 따르면 중국 랴오닝성 단둥시(丹东市 단동)에 체중 450kg, 몸길이 2m 25, 허리둘레 1m 75에 달하는 슈퍼 돼지가 등장했다. 83세 고령의 한 마을 주민은 "평생 동안 이렇게 큰 돼지는 본 적이 없다”며 "연말이 되면 몸무게가 500kg이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슈퍼 돼지를 키우는 장(张)씨는 본래 큰 돈을 받고 돼지를 팔려고 했지만 관심을 갖는 사람이 없어 고민이 많은 것으로 전해졌다. /봉황코리아         
2    [이런저건] - 운남 송이버섯왕 댓글:  조회:2705  추천:0  2018-10-24
운남 송이버섯왕... 무게가 무려 900그람 [ 2018년 10월 23일 ]     일전 운남성 목수화야생균교역시장에 900그람에 달하는 송이버섯이 나와 화제가 됐다. 이 송이버섯은 운남성 대리 위산에서 채집되였는데 일반송이버섯보다 3~4배이상 크며 야생송이버섯판매상인 주재림이 5000여원을 주고 구입한것이다./중신넷 /길림신문 번역                        
1    [쉼터] - 자작(봇나무)나무숲에 묻히고지고... 댓글:  조회:3165  추천:0  2018-10-24
강원도 인제 원대리 방태산에서ㅡ 가을 단풍 옷을 입은 원대리 자작나무 숲. 최근 산림청에서 10월 추천 국유림 명품 숲으로 선정된 숲이다 이 자작나무 숲엔 5500여 본의 나무가 심겨 있으며 이들 나무의 평균 가슴높이지름(사람의 가슴높이에서 측정한 입목의 지름)은 14㎝, 평균 나무 높이는 10m다.©News1 자작나무 숲길을 거니는 여행객들© News1 하얀 나무 위로 노랗게 물드는 잎들이 인상적이다© New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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