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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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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해비(햇비) 댓글:  조회:2767  추천:0  2018-10-25
아씨처럼 나린다 보슬보슬 햇비 맞아주자 다같이        옥수숫대처럼 크게        닷자엿자 자라게        해님이 웃는다        나보고 웃는다.   하늘다리 놓였다 알롤달롱 무지개 노래하자 즐겁게       동무들아 이리 오나       다같이 춤울 추자       해님이 웃는다       즐거워 웃는다. 해비 / 윤동주 1936.9.9. ///////////////////////////////////////////////   윤동주 시로 / 김석환 1. 머리말   윤동주 시인이 시를 쓰던 때는 일제의 억압이 극악에 달한 1940년 전후다. 이 시기는 많은 문인들이 일제에 무릎을 꿇거나 절필을 하여 민족 문학이암흑기에 접어든 때다. 그러한 때 시로써 꺼져 가는 민족혼을 지키고 노래하다 순국한 윤동주의 시세계에 대한 고찰은 큰 의의를 갖는다. 본고는 기존 논의의 결과를 참고하되 보완하기 위하여 가능한 전 작품을 대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특히 기존의 논의에서 제외되었던 많은 양의 동시를 연구의 대상에 포함시키고자 한다. 윤동주 시인은 성인이 되어서도 동시를 발표하였다는 사실은 그러한 당위성을 더욱 뒷받침한다. 그리고 기호학적 방법을 원용함으로써 그의 시세계를 객관적이고 종합적으로 연구하고자 한다. 기호 중에서 가장 정밀하다는 언어를 일차적 소재로 하는 시는 일상어의약호를 벗어나 새로운 약호를 사용하기 때문에 시는 기호체계의 일종이다. 따라서 기호학적 접근은 시의 문학성을 밝히는 일이 될 수 있다. 구체적으로 그의 시에 나타난 동심의 원형을 찾고, 그 동심의 구체적 공간인 고향을 상실에 대한 아픔과 그 극복 의지를 어떻게 공간기호로 체계화하여 보여 주는가를 살피고자 한다. 그 이유는 그가 주로 일제의 억압이 극한에 달한 시기에 시를 쓰다 순국했다는 전기적 특성을 고려했기 때문이다.그리고 공간기호체계를 살피는 이유는 일상어가 문학어로 전환되면서 언어의 선조성을 잃고 공간화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시텍스트 전편에 내재된 내용들은 국권 상실이라는 민족사적 현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한편 본 논문의 텍스트는 동시를 비롯하여 그 동안 발굴된 윤동주 시인의시들이 발표 당시의 표기대로 대부분 게재된 『윤동주 시집』(범우사. 1993)으로 하였다.     2. 동심의 상실과 회복   1) 동심과 고향   윤동주 시인은 1917년 이국 땅 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리고 1935년 그가 18세 때에 평양 숭실중학교로 전입학하면서 조국 땅 한반도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1942년 일본 동경 입교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여 일본으로 떠나 살다 그곳에서 옥사를 했으니, 그는 모국 땅에서 불과 7년밖에 못 살았다. 짧은 생애를 주로 이국에서 살 수밖에 없었던 그의 불운은 조국 상실의 결과이며 민족의 아픔을 직접 체험케 하였다. 그리고 그가지키고자 한 동심을 유린하고 동심이 살아 있는 고향을 늘 그리게 하였다. 우선 그의 동시를 중심으로 동심의 원형과 그 동심의 구체적 공간인 고향의 의미를 고찰하기로 한다.   빨래줄에 걸어 논 요에다 그린 지도 지난밤에 내 동생 오줌 싸 그린 지도 꿈에 가본 엄마 계신 별나라 지돈가? 돈 벌러 간 아빠 계신 만주땅 지돈가?            ―「오줌싸개 지도」 전문   위의 시는 1937년 『카톨릭 소년』지에 발표한 동시다. 우선 오줌을 싼 요가 ‘빨래줄’에 걸려 있는 풍경 자체가 해학적이다. 그런데 그러한 해학적 풍경의 이면에는 국권 상실의 아픔이 강하게 배어 있다. 엄마를 잃고 아빠와 멀리 떨어져 있는 아이가 그 부모를 그리는 꿈을 꾸던 상황은 바로 나라를잃고 그 회복을 꿈꾸던 민족의 현실을 암시한다. 그런데 ‘오줌’은 꿈의 결과이자 꿈의 실체이며, 그것의 흔적은 꿈에 그리던 별나라와 만주 땅 지도와 동일시된다. 그리고 요를 걸어 논 ‘빨래줄’은 그것을 중심으로 구축되는 수평적 수직적 공간기호체계의 매개적 공간기호가 된다. 즉 ‘방 안/빨래줄/만주땅’으로 수평적 공간 기호체계와, ‘방 안/빨래줄/별나라’로 수직적 공간기호체계가 구축되면서 ‘빨래줄’에 걸린 요는 꿈의 세계와 현실을 잇는 매개적 기호로서 사다리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공간기호체계가 수직과 수평 양축으로 동시에 구축됨으로써 그 꿈의 간절함을 더욱 강조하며 시인의 지향 의지가 지상과 천상으로 동시에 확산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즉 그가 지상의 민족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천상의 절대적 가치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이 시는 그가 그의 부모때에 떠나온 평양에 와서 아버지의 고향이요, 민족의 삶의 현장인 한반도의 현실을 보면서 쓴 시다. 그런데 그가 태어나 자란 “만주 땅”을 아빠가 돈벌러 간 곳, 즉 유랑의 땅이요 타향으로 인식하고 있다. 다음 시는 만주 땅을 타향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과, 고향 상실의 아픔과 향수를 잘 보여 주고 있다.   헌 짚신짝 끄을고 나 여기 왜 왔노   두만강을 건너서 쓸쓸한 이 땅에 남쪽 하늘 저 밑에 따뜻한 내 고향 내 어머니 계신 곳 그리운 고향집        ―「고향집」 전문   화자는 두만강 건너 남쪽의 고향과 대립되는 북쪽의 타향에 위치하며 고향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두만강을 경계로 대립하는 두 공간 ‘여기(타향)/고향(집)’은 수평적 공간 기호체계를 구축한다. 그리고 ‘쓸쓸한/따뜻한, 어머니의 부재/존재’ 등의 대립은 고향 상실의 아픔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강조한다. 특히 헌 짚신짝이 암시하는 유랑과 고통, ‘왜 왔노’라는 화자 스스로에 대한 반문은 타향에서의 아픔을 더욱 강화한다. 하늘, 고향, 고향집으로 이어지는 공간의 하강과 점층적인 축소는 고향의 내밀성을 강화한다. ‘어머니가 계시는 곳’이라는 진술은 고향의 안식성을더해 주며, 귀향 의지는 곧 귀소본능 및 모성회귀 본능과 동일함을 암시한다. 특히 윤동주의 시에서 고향이나 집은 빈번하게 어머니나 누이 등 여성적 이미지와 유계관계를 맺는다. 그것은 고향이 생명의 탄생 공간으로서 생명을 탄생시키는 여성과 유사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 윤동주의 시에서 고향은 인정으로 어우러져 꿈을 키우는 곳이다.   산골짜기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몽기몽기 웨인연기 대낮에 솟나 감자를 굽는 게지 총각애들이 깜박깜박 검은 눈이 모여 앉아서 입술에 까맣게 숯을 바르고 옛이야기 한 커리에 감자 하나씩. 산골작이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살랑살랑 솟아나네 감자 굽는 내   ―「굴뚝」전문   위 시는 산골 외딴집의 정겨운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시적 공간 ‘산골작이 오막살이’의 폐쇄성과 협소성은 그 공간에 내밀성을 부여한다. 그리고 그 공간이 감자를 굽는 부엌으로 더욱 축소됨으로써 안락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는 더욱 가중된다. 집은 무한하게 열려 있는 우주 안에 인간이 건설해 놓은 유한하고 폐쇄된 공간이며, 그 폐쇄성이 커질수록 안락성은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막살이에서 솟아오르는 연기는 고체가 기체로 변화된 것이다. 유동적인 물질로 변화된 그 연기는 수직적으로 상승하고 수평적으로 확산되면서 감자를 굽는 총각애들의 꿈을 암시한다. 그리고그 연기는 ‘감자 굽는 내’이며 감자는 ‘옛이야기’와 유계관계를 맺음으로써 ‘총각애들’의 추억을 상징한다. 그리고 추억이 감자를 거쳐 냄새(내)로 변화됨으로써 무한한 하늘로 유동할 가능성을 갖는다. ‘총각애들’이 과거를 이야기하고 미래를 향해 꿈을 피워 올리는 오막살이는 바로 윤동주 시인의고향의 원형이자 동심의 상징적 공간이다. 이와 같이 윤동주의 동시들은 주로 평화롭고 안락한 고향을 배경으로 하며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동심을 그리고 있다   (1) 귀뜨라미와 나와 달밝은 밤에 이야기 했다     ―「귀뜨라미와 나와」 5연   (2)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조각을 주으려 숲으로 가자.      ―「반딧불」 1연   (3) 아씨처럼 나린다 보슬보슬 햇비 맞아 주자 다 같이 옥수숫대처럼 크게 닷자 엿자 자라게 햇님이 웃는다 나보고 웃는다      ―「햇비」 1연   시 (1)에서 밤의 어둠 속에 빛을 내는 천체인 달은 밝고 높은 가치의 상징이며, ‘귀뜨라미’는 자연의 신비함을 들려주는 매개물이다. 그런 달빛이 내리는 밤에 ‘귀뜨라미’와 교신을 나눈다는 건 곧 신과 자연, 인간이 공존하고 화합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시 (2)에서 ‘반딧불’은 ‘달조각’과동일시되고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 어둠 속에서 빛을 내는 발광체다. 윤동주 시인은 그 ‘반딧불’을 주으러 숲으로 가자고 반복하고 있는데, 이는 곧밝고 신비한 세계를 지향하는 그의 동심을 강조하여 보여 준다. 시 (3)에서 ‘햇비’는 햇빛과 함께 내리는 비, 또는 햇빛처럼 내리는 비, 비처럼 내리는햇빛 등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서로 대조적인 이미지인 해와 비를 합성한 이 시어는 모호성과 다의성을 갖는데 그 물리적 상반성에도 불구하고 해와 비가 모두 수직 하강성을 공통적으로 갖는다. 그리고 지상에 있는 화자는 옥수숫대처럼 자라 ‘햇비’를 맞음으로써 수직적 대립은 해체되고 하나로융합된다. 이는 곧 높고 밝은 가치의 세계를 지향하여 하나가 되고자 하는 동심을 암시한다. 윤동주 시인은 위에서 보듯 그의 동시에서 수직적으로 밝고 높은 가치의 세계와, 수평적으로는 자연 및 인간과 공존하고 소통하며 사는 동심을 노래한다. 그런데 현실보다 더욱 가치있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지향성은 윤동주의 동시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시정신이다. 또 윤동주 시인의 고향은 바로지고의 가치 세계와 자연 그리고 인간이 화합하고 공존하며 사는 곳이며 동심의 상징적 공간이며 그 원형이다.   2) 어두운 고향   윤동주 시인은 동심의 순수성과 그것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인 고향을 상실할 수밖에 없던 시대의 비극 속에서 그것을 지키고 회복하고자 노력한다. 그것은 곧 시대의 어둠에 매몰되지 않기 위한 것이며 우주적 질서 속에서 참다운 삶을 누리고자 하는 기원이다. 어둠은 윤동주 시의 전체적 분위기를지배하는 핵심적 이미지며 상실된 현실의 현실을 암시하는 기호이다. 그리고 동심이 추구하던 밝은 빛이 없는 상태로서 시야를 가리는 장막이며 장애물이다.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 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또 다른 고향」 전문 위 시에서 화자는 고향에 돌아와 어둠 속에서 눈물지으며 ‘또 다른 고향’으로 가려는 꿈을 그리고 있다. 따라서 ‘또 다른 고향’은 화자가 있는 현실 공간인 고향과 대립되며, 2연에 나타난 우주 및 하늘과 같은 패러다임으로 의미상 등가치다. 따라서 두 공간 기호는 수평적(내/외) 또는 수직적(상/하)공간기호체계를 구축한다. 화자가 있는 고향은 ‘눈물, 우는, 어둠, 풍화작용’ 등이 암시하는 것처럼 부정적 공간이며 그와 대립되는 곳은 ‘아름다운’긍정적 공간이다. 화자가 새로운 고향을 그리는 까닭은 고향에 돌아와 방 안의 어둠을 확인하고, 그 어둠 속에서 하늘로부터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다.어둠은 시야를 가려 우주로 통하는 길을 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다. 그러나 화자는 바람 소리를 들음으로써 방이 우주로 통하고 있음을 감지한다.바람은 하늘과 방의 대립을 해체하고 이어 주는 매개적 기호이며 백골을 풍화작용 시킨다. 그런데 백골은 그것을 관찰하는 나와 대립되는 현실적 자아의 상징이다. 풍화작용 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던 화자는 새로운 방 밖의 세계에 눈뜨고 방 안과 고향의 어둠, 즉 부정적 현실을 감지한다. 화자가 눈물지으며 우는 것은 자신의 기대와 그러한 현실과의 괴리감 때문이다. 울음과 눈물은 바로 자아의 기대가 어긋남으로써 야기되는 감정의부조화를 해소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울던 화자는 이제 어둠 속에서도 잠들지 않은 ‘지조 높은 개’가 짖는 소리를 듣는다. 개는 어두운 현실을 거부하는 자아의 객관적 상관물이거나 자신보다 지조 높은 타인을 상징한다. 그러한 개 짖는 소리를 듣던 화자는 이제 더욱 급박한 어조로 새로운 세계로 ‘가자’고 다짐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자아와 상반된 부정적 현실을 거부하고, 자아를 성찰하며 또 다른 고향을 향하고자 하는 것은 윤동주 시인이 어둠에 매몰당하지 않는 ‘아름다운 혼’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 아름다운 혼은 바로 앞에서 논한 밝고 평화를 사랑하는 동심과 같은 것이다. 그는 동심의 순수성이유린되는 고향의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거부하며 그것을 지키기 위해 ‘또다른 고향’을 지향하는 것이다. 시 「돌아와 보는 방」에서 화자는 방으로 돌아와 불을 끄는데, 그것은 실내와 실외의 차이를 없게 만들어 그 대립을 해체하는 매개적 기호 행위다. 또한 그것은 밝은 대낮과 차이를 만들어 괴로운 일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화자는 이제 어둔 방에서 창 밖을 내다보지만 그곳 역시 어두울 뿐만 아니라 오던 길도 비에 젖어 있다. 결국 낮과 밤, 실내와 실외는 모두 부정적이고 절망적일 뿐이다. 어둠은 시야의 모든 것을 가려 절망에 빠지게 하는장애물이며, 비에 의해 그러한 절망적 상황은 더욱 강조된다. 비는 시야를 더욱 어둡게 만들기 때문이다. 시 「쉽게 쓰여 진 시」에서 역시 창 밖엔 밤비가 내리는데, 그러한 실외를 지켜보는 화자는 자신의 방을 “남의 나라”로 여긴다. 밤비가 내리는 실외와 대조적으로 안락하고 익숙한 공간인 방을그렇게 느끼는 것은 밤비가 암시하는 현실에 대한 절망감이 크기 때문이다. 시 「눈 감고 간다」에서 시적 배경은 어두운 밤이며, 그것은 암울한 시대의 모습을 상징한다. 그리고 밤은 곧 태양이 뜨지 않아 공간이 어두운 시간이며 그 어둠은 태양과 별의 밝음과 대립된다. 화자는 아이들에게 “눈을 감고 가거라”고 명령하는데 그것은 곧 아이들이나 그들이 대신하는 민족에게어둠을 초월하여 태양과 별을 향해 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윤동주 시인의 궁극적 지향의 대상이 지상적인 것보다 밝고 영원한 천상적인것임을 암시해 준다. 시 「거리에서」에서 화자는 앞의 시에서 방 안에 있던 것과는 달리 밤거리를 걷고 있다. 거리를 수식하는 ‘괴롬, 재색빛, 밤’ 등은거리가 대신하는 시대의 아픔과 암울한 상황을 암시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윤동주 시에서 공간적 배경엔 주로 어둠이 있으며 그것은 절망적이고 괴로운 현실을 암시한다. 그리고 시간적 배경은 자연히 밝은 낮보다 빛이 없는 밤이다. 그러한 공간과 시간의 배경 속에서 화자는 어둠에 묻히지 않고 자아를 성찰하고 밝은 세계로 초월을 시도한다. 특히 어두운 방은 바로 어두운 시대 속에 사는 시인 자신의 내면을 상징하는 구체적 공간이다.   3) 자아성찰과 동심의 회복   윤동주 시인의 시에서 현실은 늘 어둠 속에 잠겨 있다. 그러나 시인은 그 어둠에 매몰되거나 잠들지 않고 깨어 자아를 성찰한다. 그리고 어둠에 저항하며 새로운 세계를 기다리고 그곳을 지향한다. 다음에서 윤동주 시인이 어떻게 현실을 극복하고 초월하여 동심을 회복하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곰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쉽게 쓰여진 시」 일부   위의 시에서 ‘밤비’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암울한 현실을 암시하며 시 전체의 분위기를 지배한다. 그러한 밤비가 내리는 밤 화자는 남의 나라처럼 느껴지는 ‘육첩방’에서 부정적인 현실을 감지하고 ‘홀로 침전하는 것’이다. 어둠은 현실의 암울함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주위를 모두 가려 화자의 시선을 자신의 내면으로 돌리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2연에서 ‘시인이란 슬픈 천명’을 자각한 화자는 쉽게 시를 쓰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그 부끄러움은 시는 어둠과 대립하고 거부하는 밝은 정신으로 써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쓰고 있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화자가 방 안에 등불을 밝힘으로써 창을 경계로 내/외공간은 밝음/어둠으로 대립되는데, 그러한 행위는 ‘어둠을 조곰 내몰고’ 그것에 저항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것은바로 시인으로서 천명을 감당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등불은 방 안밖에 밝힐 수 없다는 한계를 느낀 화자는 온 세상이 밝아질 아침을 기다린다. 눈물과 위안이 암시하는 양극적 감정으로 손을 잡는 것은 바로 그 한계성을 인식하고 시인으로서의 역할을 조금이나마 감당하고 있다는 안도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둠 속에서 자신을 성찰하며 부끄러움과 슬픔을 느끼고, 등불을 밝혀 어둠을 내몰고 미래를 기다리는 자세는 윤동주 시인 시에 일관된어둠의 극복 방식이다. 다음에서 윤동주 시인의 자아성찰의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자화상」 6연   (2) 하루의 울분을 씻을 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속으로 흐르는 소리, 이제 사상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 가옵니다       ―「돌아와 보는 밤」 3연   (3)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참회록」 4연   시에서 화자는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 속을 들여다본다. 그런데 우물은 그 물질적 속성 때문에 거울이요, 지상/천상, 현실/비현실, 현재/과거를 잇는 창문 구실을 한다. 화자는 그 우물을 통하여 ‘하늘, 구름, 바람’ 등 천상적 이미지와 추억처럼 어려 있는 사나이를 본다. 특히 우물이 거울과 창문처럼 매개적 기호작용을 할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 산모퉁이 돌아 외딴 곳, 즉 현실 공간의 경계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바로 현실을벗어난 공간에서 이상적인 공간인 하늘과 현실적 자아와 대립되는 이상적 자아의 구체적 형상인 사나이를 보는 것이다. 화자는 앞 연에서 “돌아가다생각하고 도로 가 들여다보는” 행위를 반복하는데, 그렇게 우물 속을 들여다보는 것은 곧 자아를 성찰하는 과정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 사나이를 보며 화자가 미움과 가엾음을 느끼는 까닭은 현실적 자아와 이상적 자아의 상반성 때문이다. 시 (2)에서 화자는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 방으로 돌아와 불을 끄고 어둠 속에 홀로 있다. 그리고 ‘하루의 울분을 씻을 바 없어 눈을’ 감는다. 여기서 창과 어둠은 ‘방/세상’의 경계에 있는 매개적 공간기호로서 두 공간을 차단한다. 그리고 마음의 창인 눈을 감는 행위는 자아/세상을 차단하는 매개적 기호 행위다. 그리하여 화자는 폐쇄된 방 안에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마음속으로 흐르는 소리’, 즉 자아의 실체를 확인하고 그 속에서 익어가는 사상을 발견한다. 시 (3)에서 밤에 거울을 닦는 행위 역시 잃었던 자아를 성찰하는 과정을 형상화하고 있다. 밤은 어둠의 시간이며 그 어둠은세상으로 향하던 화자의 시선을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게 한다. 거울은 ‘현실적 자아/이상적 자아’의 매개적 기호며, 거울을 닦는 것은 거울의 내/외의대립을 해체함으로써 자아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분열된 두 자아를 하나로 화합시키려는 심리를 암시한다. 이상에서 살펴 본 것처럼 윤동주 시인의 시에서 자아를 성찰하는 시간적 배경은 가을이거나, 밤이다. 또한 공간적 배경은 주로 현실을 벗어나고 차단된 곳으로 이상과 현실의 매개적 공간이다. 그러한 시간과 공간은 현실과 차단되어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이상적인 세계를 응시하기에 적당한 배경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아를 성찰하면서 시인은 슬픔이나 부끄러움을 느끼는데, 그 까닭은 현실적 자아와 이상적 자아의 분열을 발견하거나 부정적 현실을 거부하거나 개선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자학에서 비롯된다. 자아성찰을 끝낸 시인은 이제 더 적극적인 자세로 어둠을 극복하고 새로운 이상적인 세계를 향한 초월을 시도한다. 그것은 시 「새벽이 올 때까지」에서 보듯 “이제 새벽이 오면/나팔소리 들려 올”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괴로웠든 사나이 행복한 예수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십자가」 4.5연   위의 시에서 ‘하늘/십자가/(지상)’은 수직적 공간 기호체계를 구축하는데, 이는 기독교의 ‘하나님/예수그리스도/인간’과 서로 대응된다. 따라서 십자가와 예수그리스도는 하늘/지상, 하나님/인간의 매개적 기호로서 양극을 이어 주는 사다리와 같은 구실을 한다. 그런데 윤동주 시인은 십자가를 지고피를 흘려 죽음으로써 어두움으로 말미암아 단절된 하늘과 지상의 관계를 잇겠다고 다짐을 한다. 이는 곧 자신이 예수그리스도처럼 속죄양이 되어암울한 조국의 현실을 극복하고 밝히겠다는 지사적 결의다. 그것은 또한 밝음과 평화를 지향하는 동심을 지키기 위한 저항이다. 윤동주 시인의 시에서 위와 같은 수직적 공간 기호체계는 새로운 세계를 향한 지향성을 암시하는 주된 약호다. 즉 수직축의 ‘상/하는 이상/현실, 밝음/어둠, 긍정/부정’으로 대립된다. 그리고 하방에서 상방을 향한 기호의 수직 상승은 현실에 반발하여 이상 세계를 향하는 그의 시정신을 암시한다. 다음 시들 역시 수직적 공간기호체계를 구축하며 수직 상승성으로 그러한 시정신을 암시하고 있다.   (1)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언덕 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별헤는 밤」 9,10연   (2) 텐트 같은 하늘이 무너져 이 거리를 덮을까 궁금하면서 좀 더 높은 데로 을라가고 싶다     ―「산상」 4연 시 (1)에서 화자는 ‘밤을 새워 우는 벌레’의 울음소리는 자신의 부끄러운 이름이 슬퍼 우는 거라고 여긴다. 벌레는 바로 밤이 상징하는 어둔 현실 속에서 시인으로서 역할과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걸 자책하는 자아의 객관적 상관물이다. 부끄러움과 슬픔은 그런 자아성찰 끝에 느끼는 자책감에서비롯된다. 화자는 자신의 이름이 묻힌 언덕을 무덤과 동일시하며 봄이 오면 그 위에 풀이 무성할 거라는 기대를 갖는다. 그런데 그 이면엔 ‘흙 속(이름)/언덕 위(풀)/하늘(별)’이란 수직적 공간 기호체계가 구축되며 이름은 풀의 씨앗이 되어 수직 성장해 그 수직적 대립은 해체된다. 즉 시인은 별이상징하는 밝은 세계를 향한 동경과 지향성을 수직적으로 성장하는 풀이라는 기호로 보여  준다. 따라 이름을 써서 흙으로 묻는 행위는 가입의례이며부활을 위한 죽음과 같다. 시 (2)에서 거리로부터 ‘높은 데’로 올라가려는 수직 상승의 욕구를 고백하고 있는데, 이는 하늘이 무너진 후의 부정적 현실로부터 벗어나 높은 가치의 세계로 초월하려는 의지를 암시 한다. 외에도 시 「肝간」에서 바닷가 바위 위에 간을 말리어 독수리에게 “와서 뜯어 먹어라”고 명령하는데, 그 배후엔 ‘바다 속(용궁)/바위 위/하늘’로 수직적 공간 기호체계가 구축된다. 그리고 시인은 날개가 있어 수직으로 상승적 운동을 할 수 있는 독수리로 초월 의지를 암시하고 있다. 이상에서 고찰한 것처럼 수직축의 하방으로부터 상방인 하늘로 상승하는 기호로 초월의지를 암시한다. 이는 하방보다 상방에 더욱 가치 있는 세계가존재한다고 여기는 인간의 보편적 인식 때문이다. 그러한 인식은 직립하는 인간의 머리 위에서 아래로 작용하는 중력의 방향과 관계가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또한 윤동주 시에서는 수직적 상승에 의해서만 아니라 수평적 이동으로도 이상세계를 향한 지향성을 보여 준다. 그 지향성은 바로 윤동주 시인의 시정신의 원형을 이루는 동심을 되찾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다. 시 「산골물」에서 “바다로 가자”, 시 「눈을 감고 간다」에서 “가진바 씨앗을/뿌리면서 가자” 등은 바로 그러한 예다. 그리고 기타의 시에서도 수평적 이동을 지시하는 ‘가다’가 빈번하게 등장하며 시인의 동심의 회복을 위한 초월의지를 암시하고 있다.     3. 맺음말   지금까지 윤동주 시인의 동시에 나타난 동심의 원형과 동심의 상징적 공간인 고향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동심과 고향의 상실을 어떻게 그리고 있으며 어떻게 극복하며 새로운 세계로 초월하는가를 고찰하였다. 윤동주 시인은 일찍 고향을 떠나 만주 땅에서 생활하거나 일본에서 유학을 하였다. 즉 짧은 생애의 많은 기간을 이국에서 생활하며 고향을 그리는 여러 편의 동시를 썼다. 그의 동시에서 고향은 여성적 이미지와 유계관계를 맺으면서 평화롭고 안락한 모성적 공간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인정으로 어우러져 꿈을 키우는 공간이다. 즉 밝고 영원한 이상적 세계와 자연 그리고 인간이 화합하며 사는 동심의 구체적이고 상징적 공간이다. 또한 민족이 화합하며 평화롭게 살던 상실 이전의 모국의 모습이다. 그러나 윤동주 시인은 그러한 동심과 고향을 상실하고 그 아픔을 보여 주고 있다. 상실한 고향의 모습은 늘 어두운 밤이 배경으로 되며 밝은 고향의모습과 대립된다. 그러한 어둠은 곧 암울한 시대와 슬픈 내면을 암시한다. 시인은 그러한 어둠에 매몰되지 않기 위하여 저항하며 새로운 고향을 지향한다. 그것은 곧 동심과 고향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며 잃어버린 조국을 찾고 싶은 의지다. 그런데 그 동심과 고향의 회복 과정을 보면, 어둠 속에서자아를 성찰하며 부끄럽고 슬픈 마음을 느낀다. 그리고 그 한 시인으로서 사명을 다하기 위해 어둠과 맞서 등불을 밝히며 밝은 미래의 세계를 지향한다. 그것은 자아의 내면에 흐르는 동심의 순수성을 지키고 상실한 고향과 모국을 되찾기 위한 의지다.(『문예운동』 2017년 겨울호에서 전재)      ///김석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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