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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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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윤동주와 백석과 릴케 댓글:  조회:3279  추천:0  2018-10-26
릴케(Rainer Maria Rilke) 오스트리아의 시인이자 작가이다. ⓒ Mnmazur/wikipedia | Public Domain 우리나라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고, 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시집은 무엇일까요? 지난 2012년 한 문학잡지에서 시인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1위는 백석의 시집 《사슴》이었습니다. 백석은 스물다섯 살이던 1936년 1월에 시집 《사슴》을 100부 한정판으로 발간했습니다. 워낙 적은 부수라 당시에도 희귀본이었는데, 신경림 시인은 대학시절 청계천의 고서점에서 백석의 이 시집을 발견했을 때 느낀 환희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아직도 《사슴》을 처음 읽던 흥분을 잊지 못하고 있다. 실린 시는 40편이 못되었지만 그 감동은 열 권의 장편소설을 읽은 것보다도 더 컸다는 느낌이다. 나는 읽고 또 읽었다. 저녁밥도 반 사발밖에 먹지 못했으며 밤도 꼬박 새웠다. 그 뒤 《사슴》을 가방에 넣고 다니며 틈나는 대로 꺼내 읽고는 했으니, 실상 그것은 내가 시를 공부하는 데 교과서가 되었던 셈이다.” 그런가 하면 끝내 백석의 시집을 구하지 못해 손수 필사본을 만들어 밑줄까지 그어가며 탐독했고 ‘그림 같다’, ‘걸작이다’ 등의 메모를 남긴 대학생이 있었습니다. 바로 윤동주입니다. 백석과 윤동주, 이름만으로도 벅찬,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들이지요. 그런데 우연의 일치일까요. 백석과 윤동주의 시에는 공통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을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 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중에서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짬, 라이넬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 윤동주, 〈별 헤는 밤〉 중에서 제가 가지고 있는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1982년도 출판본입니다. 그리고 1,800원이었네요. 인터넷에서 검색해도 될 일이지만 굳이 이 옛날 옛적의 시집을 찾아 꺼내든 까닭은 인터넷에 나오는 앞서의 구절이 어쩐지 원본과 다른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리고 역시나, 달랐습니다. 어느 부분이냐 하면, ‘프랑시스 짬’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입니다. 이 부분을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로 바꾸었더군요. 누군가는 그냥 ‘이름’일 뿐이잖아, 할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획 하나도 손대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설령 그것이 오타라고 할지라도 말이지요. 백석과 윤동주가 불렀던 이름 그대로 불러보고 싶고, 백석과 윤동주가 썼던 대로 읽고 싶어서입니다. 흥미롭게도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경우에는 두 시인 모두 ‘라이넬 마리아 릴케’라고 불렀으나 프랑시스 잠에 대해서는 각각 다르게 불렀습니다. 백석은 ‘쨈’으로, 윤동주는 ‘잼’으로 말이지요. 백석과 윤동주는 일본어로 번역된 릴케와 쨈, 혹은 잼의 시집을 곶감 빼먹듯 두고두고 아껴 읽으며 시를 향한 꿈과 사랑을 키웠을 것입니다. 백석과 윤동주에게 서울은 타향이었습니다. 백석은 평안북도 정주, 윤동주는 만주 간도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지요. 먼 북쪽에 고향을 둔 둘은 1930년대에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기도 했지만 교류를 나눴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윤동주보다 다섯 살 위인 백석은 이미 유명한 시인이었고, 윤동주는 백석의 열렬한 팬이었습니다. 그러나 백석이 1940년에 만주로 떠나면서 인연이 이어질 기회는 영영 사라졌습니다. 그 후 두 사람의 운명이 일제의 식민통치와 남북분단의 비극 속에서 어떻게 희생됐는지는 잘 알려진 대로입니다. 이 시대에 남은 독자로서 두 시인의 시에 프랑시스 잠과 마리아 라이너 릴케가 똑같이 등장하는 구절을 읽으며 이처럼 닮은 취향을 가진 둘이 만났더라면 서로 얼마나 좋아했을까, 하루가 멀다 하고 무릎을 맞대고 마주 앉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꽃과 당나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을 텐데, 하는 슬픔을 느낄 뿐입니다. 백석이 프랑시스 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북한의 시인’으로 억류됐던 영향이 크겠지요. 대신 윤동주가 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북간도 친구였던 문익환 목사의 회고 덕분입니다. 문익환 목사는 윤동주가 연희전문대학 시절에 잠의 시집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읽었노라 하면서 시집의 이름까지 정확하게 기억해냈는데 바로, 《밤의 노래》입니다. 이 시집은 나중에 《새벽의 삼종에서 저녁의 삼종까지》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됐는데 서문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나는 지금 장난꾸러기들의 조롱을 받으며 고개를 숙이는, 무거운 짐을 진 당나귀처럼 길을 가고 있습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당신이 원하시는 곳으로 나는 가겠나이다. 삼종(三鐘)의 종소리가 웁니다. - 프랑시스 잠, 《새벽의 삼종에서 저녁의 삼종까지》서문 중에서 백석이 나타샤와 함께 그토록 사랑한 ‘흰 당나귀’가 어떤 당나귀인지 투명하게 그려지지요. 프랑시스 잠의 삶이 그런 당나귀와 같았습니다. 그는 19세기 말에서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이어진 ‘벨 에포크(belle époque)’의 시인입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웠고 일상은 화려했으며 미술과 음악, 문학이 활짝 피어나 훗날의 사람들은 그 시절을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불렀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공허하고 불안했습니다. 그러나 잠은 이 모든 것에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파리의 풍요로움과 화려함으로부터는 물론, 공허와 불안으로부터도 등을 돌려 평생 피레네 산맥 근처에 은거하며 단순하고 현실적인 삶, 자연과 종교에 뿌리를 둔 시를 썼습니다. 그 덕에 잠의 시는 군더더기 없이 정갈하며 다정합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서양의 시를 읽을 때면 쉬이 느끼는 난해함 없이 친숙하게 다가옵니다. 일상으로부터 소재를 끌어온 덕입니다. 특히 〈식당〉이라는 시는 그냥 우리 시라고 해도 믿길 정도로 친숙해서 윤동주가 왜 ‘짬’의 시는 구수해서 좋다고 했는지 알 수 있는데요. 어느 늦은 오후, 석양이 비쳐드는 방 안에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고즈넉하게 앉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세월의 태엽을 뒤로 돌려봅니다. 새삼 오랜 세월 내 곁에 말없이 있어준 사물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우리 집 식당에는 윤이 날 듯 말 듯한 장롱이 하나 있는데, 그건 우리 대고모들의 목소리도 들었고, 우리 할아버지의 목소리도 들었고 우리 아버지의 목소리도 들은 것이다 그들의 추억을 언제나 간직하고 있는 장롱 그게 암 말도 안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그건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까 거기엔 또 나무로 된 뻐꾸기시계도 하나 있는데, 왜 그런지 소리가 나지 않는다 난 그것에 그 까닭을 물으려 하지 않는다 아마 부서져버린 거겠지 태엽 속의 그 소리도 그냥 우리 돌아가신 어르신네들의 목소리처럼 또 거기엔 밀랍 냄새와 잼 냄새, 고기 냄새와 빵 냄새 그리고 다 익은 배 냄새가 나는 오래된 찬장도 하나 있는데, 그건 우리한테 아무것도 훔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충직한 하인이다 우리 집에 많은 남자들이, 여자들이 왔지만, 아무도 이 조그만 영혼들이 있음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 나는 빙그레 웃는 것이다 방문객이 우리 집에 들어오며, 거기에 살고 있는 것이 나 혼자인 듯 이렇게 말할 때에는 — 안녕하신지요, 잠 씨? - 프랑시스 잠, 〈식당〉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떠오른 것은 어머니 방에 있는 30여 년 된 장롱처럼 오래된 사물이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어느 날 잃어버린,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고 잃어버린 물건과 기억이었습니다. 가졌을 때는 이렇게 쉽게 잃어버릴 줄, 잊어버릴 줄 몰랐던 것들 말입니다. 그와 같은 사물, 그와 같은 기억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을까요. 잠은 놓치지 않았습니다. 이런 프랑시스 잠을, 백석과 윤동주가 좋아한 또 다른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도 좋아했습니다. 릴케의 유일한 장편 소설 《말테의 수기》에는 덴마크 귀족 출신의 젊은 무명 시인 말테가 파리의 국립도서관에서 한 행복한 시인의 생활을 접하고 그 시인처럼 글을 써봐야겠다고 다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행복한 시인이 프랑시스 잠이었습니다. 그러나 말테의 생활은 파리라는 화려한 도시에서 불안과 소외로 비참하기만 했지요. 이런 말테를, 아니, 릴케를 일으켜 세운 또 한 명의 예술가가 있었습니다. 바로 오귀스트 로댕입니다. 둘의 인연은 1902년, 릴케가 출판사의 의뢰를 받아 로댕의 평전을 쓰면서 시작됐습니다. 1905년부터 이듬해까지는 로댕의 비서로 일했지요. 로댕은 릴케에게 사물과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데 있어 ‘바라보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워줬는데, 그것은 시각적인 관찰뿐 아니라 미학적 성찰까지 아우른 것이었습니다. 릴케가 《말테의 수기》에 쓴 구절이 있습니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때가 오기까지 기다려야 하고 한평생, 되도록이면 오랫동안, 의미(意味)와 감미(甘味)를 모아야 한다. 그러면 아주 마지막에 열 줄의 성공한 시행을 쓸 수 있을 거다. 시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감정이 아니라 경험이기 때문이다. - 릴케, 《말테의 수기》 중에서 릴케의 문학론이자 예술가의 기본 자세라고 할 수 있을 이런 깨우침은 로댕으로부터 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보다 전에 로댕에 대해 이런 글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돈의 필요에 쫓겨 하찮은 일이라도 해야 했던 시절에도 로댕은 자신을 잃은 법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체험한 일이 언제까지나 계획만으로 머무는 적은 없었으며, 낮에 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그날 밤 안에 곧장 실행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은 끊임없이 실현되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언제까지나 꿈만 꾸거나 계획과 기분에 젖어 멈추어 있지 말고 항상 모든 것을 무리하게라도 ‘물(物)’로 이입하는 일이다. 로댕이 그렇게 했듯이.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로댕론》 중에서 로댕과 릴케가 천재이기 전에 얼마나 대단한 노력가였는지 깨닫게 해주는 글이지요. 로댕은 릴케가 예술가로서 힘든 순간에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으냐고 조언을 구했을 때도 끊임없이 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철인 로댕이라 해도 한 순간도 멈추지 않는 삶이 힘들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로댕이 릴케를 만났을 때가 60대, 릴케에게 매일 해준 말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힘내라고!”였습니다. ‘힘내라고!’ 밤에 헤어질 때, 아주 좋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에도 아무 관련 없이, 로댕은 곧잘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겁니다. 젊었을 때, 얼마나 이 말이 매일처럼 필요한 것인가를. 두 사람의 그 장면을 상상할 때마다 가슴이 뭉클합니다. 젊은 시절에 로댕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러나 곁에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 같아서입니다. 그래서 젊은 날의 자신에게 필요했던 것을 젊은 시인 릴케에게 주었을 것입니다. “힘내라고!”는 격려의 말이지요. 그리고 그 기운이 릴케에게로, 또 릴케에서 백석과 윤동주에게로 전해졌을 것입니다. 로댕의 묵직하고 따뜻한 두 손이 어깨를 쓰다듬는 것 같은 이 말을 당신에게도 전합니다. “힘내라고!”
5    윤동주 동시 읽기 모음 댓글:  조회:2850  추천:0  2018-10-26
  윤동주 동시 읽기         주: 작시 연도와 발표 연도가 다를 수 있음. 발표연도보다 작시연도를 중시하였음. 연도 추정은 제목에 ✻표를 넣었음. 35편 이 외에도 동시 장르에 넣을 수 있는 작품은 다수 있으며 더 연구해야 할 것임.         내일은 없다.    내일 내일 하기에 물었더니     밤을 자고 동틀 때 내일이라고  새날을 찾던 나는 잠을 자고 돌보니 그때는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더라  무리여! 동무여! 내일은 없나니 ......  -詩 등과 함께 발표         조개껍질    아롱다롱 조개껍데기 울 언니 바닷가에서 주어 온 조개껍데기    여긴여긴 북쪽나라요 조개는 귀여운 선물 장난감 조개껍데기    데굴데굴 굴리며 놀다 짝 잃은 조개껍데기 한짝을 그리워하네    아롱아롱 조개껍데기 나처럼 그리워하네 물소리 바다 물소리.    -동시라는 이름으로 발표         기왓장 내외✻    비오는 날 저녁에 기왓장 내외 잃어버린 외아들 생각나선지 꼬부라진 잔등을 어루만지며 쭈룩쭈룩 구슬피 울음 웁니다.    대궐 지붕 위에서 기왓장 내외 아름답든 옛날이 그리워선지 주름잡힌 얼굴을 어루만지며 물끄러미 하늘만 쳐다봅니다.      병아리    뾰뾰뾰  엄마 젖 좀 주 병아리 소리.    꺽꺽꺽  오냐 좀 기다려 엄마닭 소리.    좀 있다가 병아리들은.  엄마 품속으로 다 들어 갔지요.            고향집    헌 짚신짝 끄을고 나 여기 왜 왔노 두만강을 건너서 쓸쓸한 이 땅에    남쪽 하늘 저 밑에 따뜻한 내 고향 내 어머니 계신 곳 그리운 고향집      비행기    머리에 프로펠러가 연자간 풍체보다 더---- 빨리 돈다.    따에서 오를 때보다 하늘에 높이 떠서는 빠르지 못하다 숨결이 찬 모앙이야.    비행기는--  새처럼 나래를 펄럭거리지 못한다. 그리고 늘-- 소리를 지른다. 숨이 찬가봐.     겨울      처마 밑에 시래기 다래미 바삭바삭  추워요.     길바닥에  말똥 동그램이 달랑달랑  얼어요.       개✻    눈 위에서 개가  꽃을 그리며 뛰오.      눈     눈이 샛하얗게 와서 눈이 새물새물 하오.     눈2    지난밤에  눈이 소오복이 왔네 지붕이랑  길이랑 밭이랑 추워한다고  덮어주는 이불인가봐 그러기에  추운 겨울에만 나리지       오줌싸개지도    빨래줄에 걸어 논 요에다 그린 지도 지난 밤에 내 동생 오줌 싸 그린 지도 꿈에 가본 엄마 계신 별나라 지돈가? 돈 벌러 간 아빠 계신 만주땅 지돈가?          호주머니    넣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만 되면 주먹 두 개 갑북갑북.   사과✻    붉은 사과 한 개를 아버지 어머니 누나 나 셋이서 껍질 채로 송치까지 다아 나눠 먹었소.     닭✻      ---닭은 나래가 커도 왜 날잖나요 ---아마 두엄 파기에 홀 잊었나봐.   참새     가을 지난 마당은 하이얀 종이 참새드링 글씨를 공부하지요.    째액째액 입으로 받아읽으며 두 발로는 글씨를 연습하지요.    하로 종일 글씨를 공부하여도 짹자 한 자밖에는 더 못 쓰는걸.      무얼 먹고 사나    바닷가 사람 물고기 잡어먹고 살고    산골엣 사람 감자 구어먹고 살고    별나라 사람 무얼 먹고 사나.        햇비     아씨처럼 나린다 보슬보슬 햇비 맞아 주자 다 같이 옥수숫대처럼 크게 닷자 엿자 자라게 햇님이 웃는다 나 보고 웃는다.    하늘다리 놓였다 알롱알롱 무지개 노래하자 즐겁게 동무들아 이리 오나 다 같이 춤을 추자 햇님이 웃는다 즐거워 웃는다      버선본     어머니  누나 쓰다 버린 습자지는 두었다가 뭣에 쓰나요?    그런 줄 몰랐드니 습자지에다 내 버선 놓고 가위로 오려 버선본 만드는걸.    어머니  내가 쓰다 버린 몽당연필은 두었다가 뭣에 쓰나요?    그런 줄 몰랐드니 천 우에다 버선본 놓고 침 발러 점을 찍곤 내 버선 만드는걸.       편지✻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왔읍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봄    우리 애기는 아래발치에서 코올코올    고양이는  부뚜막에서 가릉가릉    애기 바람이 나뭇가지에서 소올소올    아저씨 햇님이 하늘 한가운데서 째앵째앵.     굴뚝      산골작이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몽기몽기 웨인연기 대낮에 솟나    감자를 굽는 게지 총각애들이 깜박깜박 검은 눈이 모여 앉아서 입술에 꺼멓게 숯을 바르고 옛이야기 한 커리에 감자 하나씩.    산골작이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살랑살랑 솟아나네 감자 굽는 내.     빗 자 루     요오리 조리 베면 저고리 되고 이이렇게 베면 큰 총되지. 누나하고 나하고 가위로 종이 쏠았더니 어머니가 빗자루 들고 누나하나 나하나 엉덩이를 때렸소 방바닥이 어지럽다고ㅡ 아아니 아니 고놈의 빗자루가 방바닥 쓸기 싫으니 그랬지 그랬어 괘씸하여 벽장속에 감췄드니 이튿날 아침 빗자루가 없다고 어머니가 야단이지요         할아버지     왜떡이 씁은 데도 자꼬 달라고 하오.     만돌이                  만돌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전보대 있는 데서 돌짜기 다섯 개를 주웠읍니다.    전보대를 겨누고 돌 첫개를 뿌렸읍니다. ---딱---  두개째 뿌렸읍니다. ---아뿔사---  세 개째 뿌렸읍니다. ---딱---  네 개째 뿌렸읍니다. ---아뿔사---  다섯 개째 뿌렸읍니다. ---딱---     다섯 개에 세 개...... 그만하면 되었다. 내일 시험 다섯 문제에 세 문제만 하면-- 손꼽아 구구를 하여봐도 허양 육십 점이다. 볼 거 있나 공차러 가자.    그 이튿날? 만돌이는 꼼짝 못하고 선생님한테 흰 종이를 바쳤을까요 그렇잖으면 정말 육십 점을 받았을까요          거짓부리    똑 똑 똑 문 좀 열어주세요 하루밤 자고 갑시다. 밤은 깊고 날은 추운데 거 누굴까? 문 열어주고 보니 검둥이의 꼬리가 거짓부리한걸.     꼬기요 꼬기요 달걀 낳았다. 간난아 어서 집어 가거라 간난이 뛰어가 보니 달걀은 무슨 달걀 고놈의 암탉이 대낮에 새빨간 거짓부리한걸.      반딧불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조각 주으려 숲으로 가자.    그믐밤 반딧불은 부서진 달조각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조각을 주으려 숲으로 가자.      둘 다    바다도 푸르고 하늘도 푸르고    바다도 끝없고 하늘도 끝없고    바다에 돌 던지고 하늘에 침 뱉고    바다는 벙글 하늘은 잠잠.     나무    나무가 춤을 추면 바람이 불고 나무가 잠잠하면 바람도 자오         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아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시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 지에 시로 발표     해바라기 얼굴    누나의 얼굴은 해바라기 얼굴 해가 금방 뜨자 일터에 간다.    해바라기 얼굴은 누나의 얼굴 얼굴이 숙어들어 집으로 온다.   귀뜨라미와 나와    귀뜨라미와 나와 잔디밭에서 이야기했다.    귀뜰귀뜰  귀뜰귀뜰     아무에게도 아르켜주지 말고 우리 둘만 알자고 약속했다.    귀뜰귀뜰  귀뜰귀뜰     귀뜨라미와 나와 달밝은 밤에 이야기했다.   애기의 새벽    우리 집에는 닭도 없단다. 다만  애기가 젖달라 울어서 새벽이 된다.    우리 집에는 시계도 없단다. 다만  애기가 젖달라 보채어 새벽이 된다.   햇빛.바람    손가락에 침 발러 쏘옥 쏙 쏙 장에 가는 엄마 내다보려 문풍지를  쏘옥 쏙 쏙    아침에 햇빛이 반짝    손가락에 침발러 쏘옥 쏙 쏙 장에 가신 엄마 돌아오나 문풍지를  쏘옥 쏙 쏙    저녁에 바람이 솔솔.     산울림     까치가 울어서 산울림  아무도 못 들은 산울림     까치가 들었다. 산울림  저 혼자 들었다. 산울림  -지에 발표          못자는 밤✻     하나, 둘, 셋, 넷 …………………… 밤은 많기도 하다.       출처 :윤동주선양회
4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봄(1) 댓글:  조회:2615  추천:0  2018-10-26
  봄(1)   /윤동주   우리 애기는 아래 발치에서 코올코올, 고양이는  부뚜막에서 가릉가릉, 애기 바람이 나무가지에서 소올소올, 아저씨 해님이 하늘 한가운데서 째앵째앵. 1936.10. =========================/// 윤동주 - 여러분은 윤동주 시인을 알고 있나요?  민족 시인이라 부르는 까닭  윤동주 시인의 시들을 다 읽고 나니까 마음이 맑고 깨끗하고 아름다워지는 것 같지 않나요? 그건 시 속에 담겨 있는 시인의 마음이 고스란히 우리 마음으로 옮겨 오기 때문일 거예요.  윤동주 시인은 일제 치하의 어둡고 어려운 시절을 살면서도 맑고 깨끗한 마음을 담은 시들을 많이 남겼어요. 윤동주 시인을 가리켜 '민족 시인'이라 부르는 까닭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물론, 독립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혀 지내다가 끝내 우리 나라가 광복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스물아홉 살의 짧은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보다는 일제의 가혹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민족혼을 담은 시들을 많이 남겼다는 사실이 더 큰 의미를 지닙니다.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러 편의 시들이 우리 민족의 사랑을 받으며 널리 읽히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마음을 시 속에 그토록이나 잘 담아 놓았으니 그렇겠지요.  더욱이 우리 어린이들이 즐거이 읽을 수 있는 동시까지 많이 남겼으니 온 국민이 함께 애송하는 시를 쓴 '국민 시인'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  한줄기 해란강이 흐르는 땅  「고향 집」이라는 시를 보면 이런 구절이 있지요.  헌 짚신짝 끄을고  나 여기 왜 왔노  두만강을 건너서  쓸쓸한 이 땅에  시에 나타난 것처럼 윤동주 시인이 태어나 자란 곳은 두만강 북쪽에 있는 옛 만주 땅입니다. 지금은 흔히 연변이라 부르는데 그 때는 북간도라고 했지요.  1800년대 말부터 농사를 짓기에 더 비옥한 땅을 찾아 만주로 떠난 우리 민족의 대이동이 있었지요. 원래 함경 북도에 살았던 시인의 증조할아버지도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로 이사를 해서 그 곳에 자리를 잡았던 거래요.  이사를 해서 더 잘 먹고 살게 되었지만 조국을 떠난 사람들은 그래도 '남쪽 하늘 저 밑'에 있는 고향이 늘 그리웠을 거예요. 그러니 증조할아버지 때 떠나온 고향인데도 윤동주 시인조차 그 곳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시로 나타냈던 것이지요.  고향을 떠나 살면서도 우리 민족은 고유한 전통을 지키며 강인하게 살았대요. 다른 나라 땅에 가서 살고 있지만 여전히 한민족임을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슬픈 족속」이라는 시를 읽으면 그 때 그 곳에 살았던 우리 민족의 모습이 지금도 우리 눈에 생생히 보이는 것처럼 느껴져요.  버려진 땅을 기름진 땅으로 일구어 내며 우리 민족은 후손들을 가르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대요. 윤동주 시인이 다닌 명동 소학교도 후손들에게 민족혼을 심어 주기 위해 우리 민족 스스로 세운 학교였지요.  우리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을 때에도 그에 굴하지 않고 줄기차게 무장 독립 투쟁을 벌였던 곳이 바로 북간도입니다. 김좌진 장군과 홍범도 장군이 이끌던 독립군에 아낌없이 몸을 던진 독립 투사들을 길러 낸 곳, 가곡 「선구자」에 나오는 '일송정 푸른솔'이 서 있고 '한줄기 해란강'이 흐르는 땅, 그 곳이 바로 윤동주 시인이 가슴 속에 민족혼을 키우며 자란 곳이지요.  ......................................................................................................................................  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시인 윤동주는 어린 시절에 마음이 아주 여리고 순했대요. 그래서 누가 조금만 꾸짖으면 금방 눈에 눈물이 핑 도는 울보였다네요! 어쩌다 선생님이 무얼 물어 보았는데 대답이 막히면 그 때도 금방 눈물이 핑 돌았다고 해요. 그렇게 여린 감성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그처럼 맑고 아름다운 동시를 쓸 수 있었을 거예요.  어린 윤동주가 태어나 소학교 시절까지 자란 명동촌이라는 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마을이었습니다. 사시사철 아름다운 자연이 펼쳐지는 곳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 경치가 더욱 아름다웠대요. 그래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동시들 중에서도 겨울과 눈을 노래한 것이 많은가 봐요.  윤동주의 집은 가랑나무가 우거진 야트막한 산 기슭에 있는 교회당 옆집이었대요. 집 뒤와 옆에는 작은 과수원이 둘러 있고 뒷문으로 나가면 수십 길도 더 되는 깊은 우물이 있었는데, 이 우물이 「자화상」이라는 시를 쓴 동기가 되었지요. 윤동주는 친구와 같이 과수원 울타리의 뽕나무에서 오디를 따 먹고, 물을 길어 입을 닦고, 그 우물 속을 들여다보고 소리치며 우물 속에 울리는 소리를 듣곤 했대요.  윤동주의 가족은 대가족이었습니다. '떡이 쓴데도/자꾸 달다고'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쓰다 버린 습자지'로 '버선본 만드는' 어머니와 한밤에 깨어나 '당나귀에게/짚을 한 키 담아 주'는 아버지, 그리고 '가위로 종이 쏠'다가 어머니한테 빗자루로 '볼기짝을' 얻어맞는 동생들까지 가족이 참 많았지요. 그래서 나중에 정겨운 가족들의 이야기가 담긴 동시들을 많이 썼지요.  「편지」라는 동시를 보면 누나가 나오지요. 하지만 윤동주는 그 누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위로 누나가 하나 있었는데 윤동주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하늘 나라로 가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그 누나에 대한 그리움을 '흰 봉투에/눈을 한 줌 넣'어 편지로 부치겠다는 말로 표현한 것이지요.  윤동주는 동생들을 무척이나 사랑하여 아주 다정다감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나중에 대학에 들어가 서울에 가 있을 때에도 동생들에게 책을 사 보내기도 하고, 방학에 집에 돌아오면 동생의 손을 잡고 산책길에 나서곤 했지요. 그 때 실제로 동생과 함께 나눈 이야기를 시로 쓴 것이 바로 「아우의 인상화」랍니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앳된 손을 잡으며  “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운 진정코 설운 대답이다.  이처럼 윤동주의 시들에는 시인 자신이 어린 시절에 겪은 일과 그 후에 자라면서 겪은 일들이 생생하게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의 삶과 시를 함께 살펴보는 일이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동주는 중학교에 들어가 축구 선수로 뛰기도 하고 밤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등사판 교내잡지를 만들기도 했지요. 특히 재봉질 솜씨가 뛰어나 학교 축구부원들의 유니폼에 등번호 다는 것을 모두 집으로 가져와 직접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인 열여덟 살에 윤동주는 최초의 시 작품 3편을 노트에 기록하기 시작했지요. 그 중 하나가 「내일은 없다」라는 시랍니다. 그 후 여러 선배 시인들의 시를 열심히 읽으면서 더 많은 시들을 썼습니다. 특히 「정지용 시집」의 영향을 크게 받아 그 이듬해부터는 동시도 함께 쓰기 시작했는데, 윤동주 시인의 첫 동시는 바로 「조개껍데기」이지요.  그 후 연희 전문 학교(지금의 연세 대학교)에 입학한 해까지 많은 동시를 써서 북간도 연길에서 발간되던 『카톨릭 소년』에 「병아리」, 「오줌싸개 지도」, 「거짓부리」 등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전혀 동시를 쓰지 않게 됩니다. 맑고 밝은 동시를 계속 쓸 수 없었던 까닭은 아마도 일제 치하의 우리 현실이 더욱 힘들어졌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동시라는 순수한 그릇에 어려운 현실을 치열하게 담아 내기엔 어려운 점이 많았을 테니까요.  그 대신 동시 이외의 시들을 열심히 써서 연희 전문 학교를 졸업할 즈음엔 첫 시집을 묶어 내려고 마음먹게 됩니다. 졸업 기념으로 19편의 시를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을 붙이려고 했지요. 그러나 거기에 실린 「슬픈 족속」과 같은 시들이 일본 경찰의 검열을 통과할 수 없다고 여겨져 시집을 내는 일을 포기하게 되었지요. 그 당시에는 일제의 탄압이 더욱 가혹해져서 우리의 민족 의식이 짙게 담긴 글들을 섣불리 내보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윤동주 시인 자신이 직접 베껴 쓴 시집을 3부만 만들어, 스승 한 분과 가장 절친한 친구에게 각각 1부씩 나눠 주고, 나머지 1부는 자신이 갖고 말았지요.  ......................................................................................................................................  눈 감고 가거라  전쟁을 일으킨 나라들 때문에 세계 정세가 점점 어지러워지면서 우리 민족에 대한 일본의 탄압은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우리의 성을 일본식으로 바꾸라는 창씨개명령을 선포하고, 우리의 신문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강제로 폐간시키고, 학교에서 조선어 교육을 전면 금지시켰습니다. 우리의 이름과 말을 빼앗아 민족 의식을 말살하려는 음모였지요.  시인 윤동주는 성을 바꾸지 않고 있다가 일본에 유학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본식으로 바꾸게 됩니다. 윤동주라는 이름이 어이없게도 '히라누마 도오쥬우'로 바뀐 것이지요. 그 때 시인은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이다지도 욕될까'라는 구절이 있는 시 「참회록」을 써서 그 아픔과 욕됨을 표현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시인 윤동주는 끝끝내 민족 의식을 버리지 않고 줄곧 치열하게 시를 쓰고 공부를 했지요. 「눈 감고 간다」라는 시에서 시인은 세상의 현실이 캄캄한 밤과 같으니 차라리 눈 감고 건너가라고 말합니다.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밤이 어두웠는데  눈 감고 가거라.  가진 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  발부리에 돌이 채이거든  감았던 눈을 와짝 떠라.  별과 태양을 사랑하는 아이들이니 언젠가 희망과 꿈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들어 있는 시입니다. 그러니 눈 감고 가면서도 씨앗을 꼭 뿌려야 하고, 돌부리에 걸리기라도 하면 다시 눈을 뜨라는 말이지요. 이것은 캄캄한 밤중과도 같은 세상을 살던 그 시절의 어린이들에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윤동주 시인 자신에게 한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침내 세계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우리 민족마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합니다. 젊은이들을 징용으로 끌고 가고 학생들마저 학병으로 몰고 갑니다. 그리고 시인 윤동주도 일본에서 독립 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됩니다.  그 시절은 우리 민족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독립을 추구한다는 것 자체가 죄가 되던 시절이었지요. 아주 어렸을 적부터 형제처럼 지내던 고종 사촌 송몽규와 윤동주가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해 모의했다는 이유로 죄를 뒤집어썼던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민족 의식이 담긴 시를 우리말로 썼다는 것도 죄가 될 수밖에 없었지요.  시인 윤동주는 징역 2년형을 받고 옥살이를 하면서 끔찍한 생체실험을 당했다는 강한 의혹을 남긴 채 1945년 2월 16일, 해방을 6개월 앞두고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고 노래한 시인은 그처럼 안타깝게 스러져 갔지만 시인이 남긴 맑고 아름다운 시들은 이제 우리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우리 민족의 마음과 마음을 징검다리 삼아 영원히 남아 있겠지요. 우리 어린이 여러분의 마음도 그 마음들 중의 하나 입니다.  그 후, 윤동주 시인의 유골은 북간도 용정동산의 중앙 교회 묘지에 묻혔습니다. 시인의 무덤 앞에는 가족들이 '시인윤동주지묘(詩人尹東柱之墓)'라고 한자로 씌어진 비석을 세웠지요. 시인이 남긴 유고들은 친구들과 가족이 잘 보관하고 있다가 한데 모아 1948년에 정음사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시집을 처음 펴내어 세상의 빛을 보았습니다. 그 후, 더 많은 유고들이 보태어져 여러 권의 시집이 출간되었고, 마침내 1999년에는 시인 자신이 직접 쓴 원고들을 사진으로 찍어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민음사)이 나와서 시인의 흔적을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지요.  시인의 일생과 작품 세계를 꼼꼼히 적은 책으로는 송우혜 선생님이 지은 『윤동주 평전』(세계사, 1998, 개정판)이 있습니다.  어린이 여러분이 좀더 나이가 들면 앞에 적은 책들을 꼭 한번 읽어 보세요. 이 동시집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에서 볼 수 없었던 다른 모습들을 더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지금 당장 읽을 수 있는 책으로는 손연자 선생님이 지은 동화집 『마사코의 질문』 (푸른책들, 1999)이 있습니다. 그 책에 실린 '잎새에 이는 바람'이라는 동화가 바로 윤동주 시인에 대한 이야기지요.  시인의 모교인 연세 대학교 교정에 가면 '서시'가 새겨져 있는 윤동주 시비가 있습니다. 그리고 시비가 있는 자리에서 보면 저만치에 윤동주 시인이 머물던 기숙사의 다락방이 보입니다. 꼭 한번 가 보세요.  ......................................................................................................................................  (▶ 이 동시들과 글은 윤동주 동시집『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푸른책들, 1999)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3    [사색의 여울] - 돕는다는것은 마음이며 행동이다... 댓글:  조회:2988  추천:0  2018-10-26
우리는 왜 문학인들을 도와야 하는가? 2018년 10월 25일   작성자: 황유복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사색 우리가 희망하는 미래는 경제발전, 환경보전, 사회통합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지속가능 발전이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은 그것들이 만들어졌을 때의 사고로는 해결될 수 없다.”는 아인슈타인의 말 대로 그동안 경제발전에 짐이 된다고 간주되였던 환경문제와 사회문제가 뼈아픈 실천적 경험을 거쳐 이제는 동시에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는 어려운 과제로 부상되고 있다. 지속가능 발전을 추진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아이디어 즉 창의성이다. 인간의 창의성은 많은 철학가들이 말했듯이 문화예술에 대한 체험에서 나온다. 따라서 지속가능 발전이라는 미래를 실현하는 첫 단추는 이처럼 문화와 발전의 련결로 채워진다. 그래서 우리 나라는 유네스코(联合国科教文组织)의 지원으로 2013년 항주에서 ‘문화와 발전 세계전문가 회의’를 개최했다. 미국 코넬대학 존슨경영대학원에서는 앞으로 비즈니스 리더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요구될 덕목중 하나로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을 꼽았다. 공감능력을 갖춘 리더가 각광받고 성공하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뜻이다. 이렇듯 공감과 소통 능력은 이제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으로 되고 있다. 창의성이나 사회적 공감능력은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학습할 수 있다. 카나다 인지심리학자 키스 오틀리는 문학작품이란 인간 마음의 소프트웨어에서 작동하는 시뮬레이션(simulation)―모의실험이라는 독특한 리론을 제시했다. 즉 문학작품에서 이야기는 사회생활을 위한 ‘비행 시뮬레이션 장치’이고 비행기 조종사들이 비행 모의실험을 통해 비행기술을 습득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창의능력과 사회적 공감능력을 학습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문학작품을 더 많이 읽는 대학생일수록 사회적 능력이 더 뛰여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오늘의 조선족은 중국의 넓은 지역과 세계 각국으로 흩어지고 있다. 흩어져버린 조선족사회가 하나로 계속 살아남으려면 조선족문화의 공유가 우선조건으로 된다. 우리 세대는 문제없지만 청소년들에 의한 민족 언어의 상실은 문화공유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조선족사회의 이러한 ‘불편한 진실’에서 우리는 조선족작가들의 작품활동이 민족문학발전 뿐만 아닌 우리 민족문화의 발전과 나아가서 민족의 지속가능 발전에 핵심적 이슈로 등장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 대신 조선족문학은 문학의 보편적인 가치 뿐만 아닌 우리 민족문화의 발전과 나아가서 민족의 지속가능발전에 키워드로 작용해야 한다. 즉 우리 문학에는 살아 숨 쉬는 인간의 이야기가 있어야 하고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흥미와 감동이 있어야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사회를 향해 전달하고 알려주는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 어떤 경향과 표현의 방법을 선택했던 문학작품은 궁극적으로 우리 삶의 희망과 꿈의 이야기를 써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문학의 보편적 가치와 함께 민족문화를 수호하는 구심점으로 부각될 수 있다. 오늘날 돈을 향한 온갖 욕망이 란무하는 시대에 조선족문학인들은 여전히 전혀 돈이 되지 않는 문학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사실 소수민족문학으로서의 조선족문학은 처음부터 가난과 이미 동의어였다. 하물며 문학이 위축될 대로 위축되여있는 지금, 그들이 문학을 계속 고집하는 리유는 무엇일가? 민족문화의 진흥이라는 간절한 꿈, 그러한 꿈을 차마 접어버릴 수 없어 그들은 오늘도 아무런 경제적 수입도 되지 않는 문학작품을 쓰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족문화예술인들은 오늘의 ‘가장 사랑스런’ 사람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들은 우리가 계속 조선족일 수 있게 하는 우리의 민족문화를 수호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민족 경제인들은 그들의 작품활동을 도와주어야 한다. 그러한 도움은 어느 문화예술인 개인에 대한 도움이라기보다 우리 민족문화발전을 돕는 일이라고 평가된다. 중국조선민족사학회 산하의 조선민족발전위원회는 성립 당시 해마다 연변작가협회가 추천하는 작가들의 작품집 두권씩 출판해주기로 했다. 지난해까지 조선민족발전위원회 문학총서가 10권이 출판되였다. 21세기 지식경제시대의 인류사회가 갖고 있는 핵심적 성격은 사회발전의 원동력이 에너지, 철강, 자본 등 물질적 자원으로부터 지식, 교육, 연구개발 등 문화적 자원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21세기를 ‘문화의 세기’라고 한다. 이제 문화는 세계 각국, 각 민족의 ‘상대적인 경쟁력’을 결정한다. 다시 말한다면 문화가 강한 자가 이기게 된다. 어떻게 보면 과거의 인류력사는 인간이 지닌 창의성의 구현이라고 할 수 있다. 물질문명의 변화에 의해 사회구조와 생활양식이 바뀌였고 정신문화의 풍요로 인류는 보람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이러한 변화의 저변에는 인류의 부단한 창의적 노력이 깔려있다.                                                                                 길림신문/ 황유복(중앙민족대학 교수)    
2    [고향자랑] - 북경에 "아리랑" 울러퍼진다... 댓글:  조회:2766  추천:0  2018-10-26
베이징에 '아리랑'이 울러퍼진다 (ZOGLO) 2018년10월25일          안승필 작곡가, 선조들이 물려준 유산의 코드 풀기 위해 애썼다   (흑룡강신문=하얼빈) 채복숙 기자 = 아리랑은 한민족의 가장 대표적인 민요로서,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시대와 지역, 그리고 이념을 뛰어넘어 민족문화의 상징 중 하나로 되었다. 기쁨과 슬픔, 고난과 희망, 미래에 대한 열망을 담은 아리랑은 우리 민족을 하나로 묶는 가락이다.   바로 이러한 '아리랑'이 중국국가교향악단(중국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의 위촉으로, 안승필 작곡가의 손을 거쳐 첼로협주곡으로 변신했다.   2014년 1월 17일 프랑스 로렌 국립 교향악단 (Orchestre National de Lorraine)의 연주회에서.     헤이룽장성 옌서우(延寿) 현 출신의 저명한 조선족 작곡가 안승필(49)의 첼로 협주곡 '아리랑'이 오는 11월 13일 베이징콘서트홀에서 초연될 예정이다.   안승필 작곡가는 파리와 베를린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상하이음악대학 및 프랑스라디오방송국에 재직 중이다. 상하이음대 전자음악센터 예술감독, 독일 학술교류센터(DAAD) 상임작곡가 등을 역임했다.   2007년 프랑스 국영 방송 INA- GRM 소리 연구원에서 작업 중.     "지난해 국가교향악단의 위촉을 받고 고민이 많았습니다." 한민족을 대표하는 민요로서의 아리랑의 지속적인 노출과 광범위한 사용에 의한 익숙함은 작곡가에게는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새로운 탐구를 좋아하는 작곡가에게는 속박이 될 수도 있지만 또 다른 창작의 시작이 될 수도 있었다.   현대 작곡가이지만 아리랑이 변형되거나 왜곡되기를 원하지 않았던 안 작곡가인 만큼 딜레마는 더 컸다. 작곡가로서 그동안 연마했던 기술을 최대한 활용하면서도 '안승필'의 색깔이 전면에 두드러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내 삶의 경험들을 회상하며 그동안의 작곡가로서의 노력을 동원하여 선조들이 물려준 유산의 코드를 풀기 위해 애썼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아리랑은 현대에서 고전으로 가는 시도이기도 했고, 서양에서 동양으로 가는 다리이기도 했습니다. 이전의 내 창작세계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고 이전의 나를 지우고 또 다른 나를 찾아가는 모험이기도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2017년 5월 1일 서울 더하우스 페스티발 '안승필의 초상'연주회에서.     안승필 작곡가는 동양인으로서 현대음악 특히 전자음악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선두주자로 인정받고 있는데, 인류가 경험해 보지 못한 음향을 찾아내 조탁한 뒤 여기에 깊은 사색과 성찰을 담아내는 능력이 특별히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안승필 작곡가는 어려서 아코디언(手风琴)을 통해 음악을 접하게 되었으며, 1984년 수백 명의 경쟁자들 속에서 차석으로 상하이음대에 입학, 유명한 작곡가 양리칭(杨立青)과 자오샤오성(赵晓生)을 스승으로 모셨다. 상하이음대 재학 기간 그의 천부적 재능은 충분히 발굴되었으며 작품이 '제14회 상하이의 봄' 신작 창작상을 받기도 했다.   2014년 3월 '제 1회 안익태 국제 음악제'에서 던우 더블협주곡 연주전 리허설에서 피아니스트 프로드로모스(Prodromos)와 예술의 전당에서.     1991년 안승필 작곡가는 상하이음대를 졸업하고 모교에 남아 교직을 맡는 한편 본격적인 창작을 시작했다. 그는 작품 '명오(瞑悟)'가 아테네국제올림피아작곡콩쿨에서 은상을 수상하면서부터 점차 세계 음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96년, 프랑스어도 구사할 줄 모르던 그는 역시 차석으로 당시 세계 각지 명문대에서 온 음악엘리트들을 물리치고 프랑스국립음악대학에 입학해 세계적인 작곡가 제라르 그리제를 스승으로 모셨다. 그리고 1998년에는 작곡 부문 수석으로 졸업해 세계 음악계의 차세대 주자로 주목받게 됐다.   2017년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 페스티발의 감독 Michel Lethiec 와 함께.     졸업 후 안승필 작곡가는 프랑스라디오방송국에서 음악편집으로 일했으며, 2002년에는 한일월드컵조직위원회의 요청으로 개막식 주제곡을 창작하기도 했다.   안승필 작곡가는 1993년 아테네국제올림피아콩쿠르 수상을 시작으로 각종 국제대회에서 다수의 교향곡, 실내악 및 전자음악 작품으로 상을 받았다. 1996년에는 유네스코의 국제음악포럼에서 세계 6대 청년 작곡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영국 등 20여개 나라와 지역에서 공연 혹은 발표됐다. 그의 교향음악 "결(树之脉)"은 2010년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의해 상하이 엑스포 개막 연주회에 초연되기도 했다.   2017년 필하모닉 라디오 프랑스 관현악단(Philharmonic Orchestra Radio France) 단장과 함께.     2012년에는 베릴린에서 독일정부 DAAD의 주최로 '안승필 초상' 연주회가 열리면서 이 시대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하기도 했다. '초상'이란 현존하는 음악계의 거장에게 헌정하는 특별 연주회를 말한다. 해당 거장이 음악계에 끼친 영향과 공로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첼로협주곡 '아리랑'의 작곡에 관하여 안승필 작곡가는 한민족의 일원으로서, 작곡가로서 "나의 아리랑"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자신이 추구하던 음악세계와는 전혀 다른 장르이지만 지금까지 그 어떤 작품보다도 더 큰 애정과 열정을 가지고 작품에 임하였고 창작하는 내내 무척 행복한 시간이 되었다면서 작품을 듣는 사람들에게도 이 마음이 전달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작곡가로서 '아리랑'의 무한한 가능성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1    [동네방네] - 기부는 쉽지 않다... 오로지 기부는 행동이다... 댓글:  조회:2668  추천:0  2018-10-26
손수레 몰아 400억 쾌척 노부부, 30년 넘은 셔츠차림(종합) 윤다정 기자  2018.10.25.  음성 기사 듣기   번역 설정   공유   글씨크기 조절하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실향민 남편·식모살이 아내, 안쓰고 불려서 고대 기부 개인 기부 역대 최고.."인재 발굴해 나라에 기여하길" 김영석씨(91)와 양영애씨(83·여) 내외가 25일 서울 성북구 고려대학교 본관에서 열린 기부식에서 평생 과일 장사를 하며 모은 전 재산 400억원을 기부한 뒤 김재호 학교법인고려중앙학원 이사장, 염재호 총장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18.10.25/뉴스1 © News1 허경 기자 (서울=뉴스1) 윤다정 기자 = "기부도 내 형편에 맞게 할 수 있다면 기쁜 일이에요. 좋은 인재를 발굴해서 나라에 기여할 수 있게 하면 그게 좋은 일이지요." 희게 센 머리를 곱게 빗어넘기고 지팡이를 짚은 양영애씨(83·여)의 나이를 무색하게 할 만큼 목소리에 힘이 넘쳤다. 양씨가 차려입은 붉은 체크무늬 셔츠는 30년 넘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해진 데 없이 단정하고 깨끗했다. 25일 서울 성북구 고려대학교 본관을 찾은 양씨와 김영석씨(91) 부부가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에 기부한 부동산은 시가 200억원 규모 서울 청량리 소재 토지 5필지와 건물 4동. 현재 시가로 따지면 200억원 규모에 이른다. 이뿐만이 아니다. 양씨 부부는 이후 시가 200억원 상당의 토지 6필지와 건물 4동을 추가로 기부할 예정이다. 평생 과일 장사를 하며 모은 전 재산 400억원을 "인재 발굴에 써 달라"며 고려대학교에 기부하기로 한 것이다. 이번 기부 금액은 지난 2007년 익명을 요구한 60대 여성이 시가 400억원 상당의 부동산을 기부한 이후 고려대학교 기부금 가운데 역대 최고 액수다. ◇"'청량리~서대문' 전차 비용도 아까웠죠" 양씨는 경북 상주에서 6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형제자매 중 가장 머리가 좋았지만 초등학교 문턱도 제대로 밟아 보지 못했다. 대신 "쟤는 공부 안 해도 얘들(형제들)보다 잘 살 것"이라는 아버지의 심부름을 돕는 등 일찍부터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양씨는 23살에 김씨와 중매를 통해 만나 결혼했다. 김씨는 강원 평강군 남면에서 태어나 15살에 부모를 여의고 17살에 월남한 실향민이다. "돈을 벌어 오겠다"며 고향에 2명의 형제를 두고 떠나 왔지만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양씨는 식모살이, 식당 일 등 궂은일을 하며 생계를 꾸리다 1960년대 초 종로5가에서 김씨와 함께 손수레로 과일을 떼어다 팔기 시작했다. 매일 자정쯤 종로 5가 시장통에 도착해 납품 트럭으로부터 과일을 샀다. 좋은 과일을 고르기 위해 같은 트럭에서 과일을 사들이는 다른 상인들보다 4시간은 일찍 움직였다. 청량리부터 서대문까지 다니는 전차 요금을 아끼기 위해 1시간 거리를 매일 걷기도 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라 파출소 순경에게 붙잡히는 일도 다반사였다. 또 과일 장사가 끝나면 늦은 밤까지 식당 일을 하는 대신 밥을 얻어먹고, 번 돈은 모두 은행에 저금하고, 옷이나 신발도 얻어쓰는 등 검소하게 생활했다. 양씨는 "산꼭대기에서 월세 생활을 15년 했다 그런데 분수에 맞게 살아야지, 허세를 떨면 안 되지 않나"라며 "이것도 30년 된 옷"이라고 자신이 입은 셔츠를 가리켜 보였다. 이같은 성실한 노력이 빛을 발해, 이들이 파는 과일의 질이 좋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퍼지기 시작했다. 몇 년 후에는 시장 상인들의 도움을 얻어 가게도 낼 수 있었다. 개점 후 3~4시간만 지나면 과일이 전부 팔려 나갈 정도로 장사도 잘 됐다. 이렇게 모은 돈을 종잣돈으로 대출을 얻은 부부는 1976년 처음으로 청량리에 상가 건물을 매입했고, 과일장사를 계속해 빚을 갚아 나가며 주변 건물들을 하나 둘씩 사들였다. 그러면서도 입주 업체들이 오랫동안 장사를 할 수 있도록 임대료는 가급적 올리지 않고 저렴하게 유지했다. 김영석씨(91)와 양영애씨(83·여) 내외가 25일 서울 성북구 고려대학교 본관에서 열린 기부식에서 평생 과일 장사를 하며 모은 전 재산 400억원을 기부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18.10.25/뉴스1 © News1 허경 기자 ◇"인재 발굴해 나라 이끌 수 있기를" 노부부의 당부 알뜰하고 소중하게 모은 전 재산을 통 크게 기부하게 된 배경에 대해 부부는 "오래전 두 아들이 미국에 이민을 가 자리를 잡고 살고 있기 때문에 재산을 물려주기보다는 좋은 곳에 쓰고 싶었다"고 말했다. 기부처를 고민하던 양씨는 가깝게 지내던 부동산 주인의 "어머니, 우리 동네가 잘 살아야지. 고려대 가서 (기부)하세요"라는 권유로 고려대학교의 문을 두드렸다. 양씨는 "기부를 하기 전에는 이렇게 기부가 좋은 것인지 몰랐다. 무식해서 남들이 기부하면 그런가보다 했다"며 "열심히 벌어서 형편이 되면 내가 쓰고 남은 돈은 절대로 자식에게 주면 안 된다. 막 쓰고 인생을 망친다"고 강조했다. "국민학교를 졸업 안 했어도, 썩은 과일장사라도 사람이 머리를 써야 한다"며 배움의 중요성을 수차례 강조한 양씨는 "우리 나라의 인재를 많이 발굴해 나라를 이끌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이날 오후 5시부터 서울 성북구 고려대학교 본관 인촌챔버에서 열린 기부식에는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김재호 이사장, 염재호 고려대 총장, 유병현 고려대 대외협력처장 등이 참석해 양씨 부부에게 기부증서와 감사패를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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