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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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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이런저런] - 불상과 벌집 댓글:  조회:2579  추천:0  2018-11-13
20m 높이 석가모니상 미간에 웬 벌집? [ 2018년 11월 07일 ]     높이 20m 석가모니상의 미간에서 대형 벌집이 포착됐다. 봉황망(凤凰网)은 지난 4일 중국 저장성 항저우시 쑹청 관광지구(宋城景区) 부처산에 있는 20m 석가모니상 미간에 대형 벌집이 자리잡은 모습을 공개했다. 네티즌들은 "벌집이 생긴 위치가 특이하다”, "황금색 점 같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봉황코리아          
8    [민족자랑] - 조선말로 경극 부른 60대 연길 할머니... 댓글:  조회:3012  추천:0  2018-11-13
CCTV도 놀랐다! 조선말로 경극 부른 60대 연길할머니 (ZOGLO) 2018년11월9일  CCTV무대에서 조선말로 경극을 부르고 있는 리은화 중국의 3대 전통연극으로 불리우는 경극은 연극, 노래, 무용, 음악 등 모든 예술적인 요소가 총 집합된 종합예술로 중국의 오페라라고도 불리운다. “중국문화의 꽃”으로 명성이 높은 경극은 중국의 전통과 력사가 고스란히 배인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다. 10월 28일 저녁 4시 20분, 중앙텔레비죤방송국의 희곡채널인 11채널 쾌락희원연창회(快乐戏院演唱会) 프로그램에서 아름다운 조선족민족복장을 차려입고 조선말로 경극(京剧)을 부르는 조선족할머니가 나타나 주목받았다. 이날 그는 경극 《대당귀비》(大唐贵妃) 편단(片段)의 “리화송”(梨花颂)을 불렀는데 매파(梅派)에 부합되는 특징 있는 목소리와 예술적인 정서는 물론, 한족이 아닌 타민족이 타민족언어로 경극의 그 어렵다는 각가지 표현기법들을 완벽하게 소화해냈다는 데서 더욱 큰 인정과 박수갈채를 받아안았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누굴가? 거듭되는 수소문 끝에 찾은 그는 바로 연길시 진학가 문회사회구역에 살고 있는 리은화(65세) 로인이였다. 평범한 연길시 조선족 주민인 그가 어찌하여 높은 수준의 경극표현을 할 수 있게 되였고 또 중앙텔레비죤방송국의 화려한 무대에까지 오를 수 있게 된 것일가? 길림성"로년인 좋은 목소리" 평선활동에서 열창중인 리은화 11월 6일 오후, 기자가 만나본 리은화 로인은 전형적인 조선족 현모량처형의 자애로운 느낌을 주는 60대 로인이였다. 비록 환갑나이를 훨씬 넘겼지만 젊은 시절부터 노래부르기를 유독 좋아했고 또 가수가 꿈이였던 까닭에 지금껏 그 꿈을 내려놓지 못하고 노래로 즐거운 여생을 살고 있다고 했다. 젊었을 때는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은방울 굴리는듯” 했다는 리은화 로인은 지식청년으로 하향했던 연길현 석정공사 용신대대에서 홍등기, 룡강송 등 혁명적 본보기극을 통해 처음으로 경극을 접촉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목소리가 좋은 데다가 노래도 잘해 현문공단의 학습반에도 참가했고 그 기회에 문공단에 남을 번했던 기회까지 있었지만 결국 남에게 밀려 가수의 꿈이 좌절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고 한다. 젊은 시절 예술학교에 가려던 꿈도 이런저런 원인으로 성사되지 못하다 보니 자연히 전업가수의 꿈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전업가수가 되는 꿈과 길은 모두 깨여졌지만 민간가수로 장끼를 보여줄 무대는 남아있었다. 개산툰종이공장에서 사업하는 기간 그는 단위의 노래경연은 물론 진과 현에서 조직하는 각종 노래경연에서 항상 등수에 들군 했다. 그동안 자식들을 키우랴, 살림을 하랴 제대로 된 노래공부도 못했고 바쁜 일상에 경황이 없었지만 노래에 대한 열망의 끈만은 그냥 놓치지 않았다. 2003년도에 아들의 공부뒤바라지 때문에 개산툰에서 연길에 이사온 후에도 리은화 로인은 노래에 대한 열망으로 연변음악가협회에서 조직한 “백일홍”합창단에 들어가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경극복장을 입고 경극을 공연하는 리은화 그러던 2008년 3.8절날 텔레비죤에서 연변주경극협회의 공연종목이 소개되는 것을 보고 경극을 해보고 싶은 충동을 진하게 받았다. 1970년대 하향지식청년으로 농촌에 내려갔을 때 경극으로 된 본보기극을 연출했던 옛 추억이 살아났다. 리은화 로인은 경극이 본인의 목소리에 맞고 곡이 고급적이며 아무나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닌 높은 차원의 노래기법이 필요하며 또 사람의 자신감을 높여주기에 배우고 싶었다고 했다. 그 길로 그는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연변경극협회를 찾아갔고 연변의 경극예인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허심하게 경극을 배웠다. 리은화 로인은 경극은 많은 노래를 모두 배운다기 보다는 어느 한가지 노래라도 표현기법을 모두 정확하게 장악하고 부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경극 귀비취주(贵妃醉酒)만 4년 넘게 배웠다.결국 그는 지금까지 4년 넘게 경극을 배웠지만 제대로 표현할 수 있게 배우고 장악한 경극은 겨우 4개 밖에 안된다고 말했다. 집에서도 끊임없이 련습을 반복했고 어려운 한 부분을 넘어야 다른 부분을 계속해서 련습하기를 거듭했다. 어느 한번 리은화 로인은 영어로 된 경극을 본 적이 있었다. 영어로 되는데 조선말로는 왜 안되겠는가? 그 때 그는 한어로 된 경극을 조선어로 불러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우수한 경극표현예술 문화를 조선어와 결부시킨다는 것도 매우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되였다. 그러나 말이 쉽지 경극은 부를 때 음조를 다 맞추기가 매우 힘든 표현방식인데 거기에 번역가사 내용까지 틀리지 않게 담아야 하니 세심한 연구와 부단한 노력이 필요했다. 전국경극표우만리행 표창회연에서 리은화 2014년 3월 1일과 4일에 중앙텔레비죤방송국에서 조직한 일명경인(一鸣惊人) 주간, 월간 시합에서 리은화 로인이 조선족민족복장을 떨쳐입고 무대에 등장하자 장내는 삽시에 들끓기 시작했다. 장내의 평심원과 배우들은 물론, 허다한 관중들까지도 지금까지 경극을 부르는 조선족가수는 난생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그 무대에서 리은화는 고전경극 소삼기해(苏三起解)를 조선말로 불러 많은 사람들을 놀래웠고 1등의 영예를 받아안았다. 경극을 조선어로 노래하는 데 대해 리은화 로인은 조선족으로서 누구에 못지 않게 노래를 잘할 수 있다는 신심, 특히 조선족 민족복장을 입고 나서면 항상 조선족으로서 중국무대에 서서 경극을 부르는 일이 무한한 긍지와 자호감으로 느껴진다고 말했다. 저명한 무대예술 평심가인 하운유는 전국경극표우만리행 표창회연에서 리은화가 조선말로 부른 경극을 보고난 후 매우 놀라와하면서 “자기 민족언어로 교묘하게 번역하여 어색하지 않게 경극을 잘 표현한 점이 대단하고 매우 놀랍다”면서 높이 평가했다. 리은화 로인은 중국 55개 소수민족 가운데서 유일하게 자기 민족 언어로 경극을 번역하여 부른 첫 사람으로 중국조선족민간문화예술인의 멋진 풍채를 전국에 널리 자랑한 사람으로 된다. 연변인민방송국 요청가수로 진행한 방송음악회 장면 그동안 리은화로인은 중앙텔레비죤방송에만 3번 출연해 모습을 보였고 길림성로년인 좋은 목소리 최우수인기상도 받아안았다. 소재지인 진학가 문화사회구역에서 경극 독창음악회도 가졌고 연변인민방송 석양홍 종목의 요청가수로 1시간 분량의 방송음악회도 펼쳐 노래가 전파를 탔다. “몸은 비록 늙었어도 마음만은 늙을 수 없다”고 말하는 리은화 로인은 “노래로 살아가는 황혼의 삶이 항상 즐겁다”고 말한다. 이제 남은 여생에 좀 제대로 된 개인음악회를 열어보고 싶은 것이 리은화 로인의 마지막 남은 소망이다. “늙었지만 이대로 물러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요…” 리은화 할머니의 진심을 담은 솔직한 고백이였다. /길림신문 안상근 기자
7    [회음벽 회초리] - 조선어, 말보다 "말행동"이 더 앞장서야... 댓글:  조회:3058  추천:0  2018-11-13
조선어, 어떤 진통 겪고 있으며 나갈 길은 어디에? (ZOGLO) 2018년11월12일 “일대일로” 배경아래 중국조선어학회의 조선어에 대한 연구와 전망 “일대일로”배경아래 중국조선어 연구와 전망을 주제로 한 중국조선어학회 제9차 회원대회 및 제20차 학술대회가 11월9일부터 11일까지 사흘간 연길시에서 소집되였다. 동북3성조선어문협의령도소조에서 주관하고 중국조선어학회에서 주최한 이번 대회는 중국의 사회 대환경속에서 소수민족언어로서의 조선어라는 이 존재가 “어떻게 사용되고 있고 어떻게 교육하고 있으며 어떤 진통을 겪고 있는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겠는가?”하는 화두로 펼쳐졌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온 조선어문사업자들과 학자들이 회의에 참석해 열띤 론문발표와 학술토론의 시간을 가지였다. 개막사를 하고있는 중국조선어학회 제8기리사회 리사장 김영수 중국조선어학회 제8기리사회 리사장인 김영수는 개막사에서 “이번 대회는 ‘일대일로’의 수요에 따라 중국조선어의 현황을 조명하고 미래를 지향하는 주제를 내걸고 개최되였다”면서 이번 회의가 중국에서의 조선어문 교육, 조선어 규범화, 표준화에서 제기되는 일련의 학술문제들을 심도깊게 론의하고 당의 민족어문정책을 정확히 시달하며 중국에서의 조선어의 바른 사용과 건전한 발전 및 연구를 추진하는 중요한 회의, 조선어의 정확한 사용, 발전, 교육 등에 방향과 방법들을 모색하는 의의가 있는 학술교류의 장이 될 것을 기대했다. 축사를 하고있는 연변대학 림철호부교장 연변대학 림철호부교장은 축사에서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중국에서의 우리의 조선어는 그 위상이 이전보다 떨어졌고 교육, 보급, 사용 등에 적지 않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고 지적, 일례로 “조선족들 사이에서도 본 민족 언어문자를 경시하고 규범을 지키지 않는 문제들이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림철호부교장은 이번 학술회의를 통하여 언어사용과 교육, 연구 등에서의 연구성과들을 교류하고 문제점들을 진지하게 토론한다면 앞으로의 우리의 언어문자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며 본 학술대회에서 우수한 론문과 성과들이 교류되고 중국조선어의 발전에 리로운 좋은 건의들이 많이 나올 것을 희망했다. 축사를 하고있는 중국한국(조선)어교육연구학회 회장 강보유 중국한국(조선)어교육연구학회 회장인 강보유는 축사에서 2001년도에 설립된 중국한국(조선)어교육연구학회는 중국조선어학회에서 많은 리론과 방법들을 배웠다면서 두 학회는 매우 친밀한 형제학회라고 강조, 두 학회사이 상호교류와 정보공유를 통해 중국조선어/한국어교육연구의 발전을 이끌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조선어학회 제9차 회원대회에서는 중국조선어학회의 사명과 의무를 조직적으로 보장하는 중대한 과제로 제8기리사회 사업을 총화하고 제9기리사회를 새롭게 구성하였다. 새로 구성된 중국조선어학회 제9기 리사회의 리사장은 연변대학의 김광수교수가 당선되여 중임을 맡았다. 새로 구성된 중국조선어학회 제9기 리사회 임원들 이어 진행된 중국조선어학회 제20차학술대회는 상해복단대학 강보유교수, 길림성조선어학회 리대동 회장, 중국조선어문잡지사 김계화사장의 기조연설로부터 시작해 사회 및 고등교육분과, 기초교육분과 등 3개 분과로 나누어 도합 58편의 가치있는 학술론문들이 교류되였다. 11일 오전에 있은 중국조선어학회제9차회원대회 및 제20차학술대회 페막식 총화보고에서 중국조선어학회 제9기 리사회 김광수리사장은 “학술대회는 주로 조선어규범화의 필요성, 조선족교육이 직면한 문제를 필두로 시작되여 조선어 사용환경과 조선어교육환경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였다”고 총화했다. 총화보고를 하고있는 중국조선어학회 제9기 리사회 김광수리사장 김광수리사장은 “이번 대회에서 교류된 학술론문들을 종합해보면 조선어교육에서 정상적인 교사충원의 어려움과 교사수준의 하락, 도시화에 따른 학생확보의 어려움, 로무송출에 따른 가정교육의 빈약, 교수용어의 한어화 새로운 학교운영방밥의 모색 등으로 인한 고충을 진달할수 있었다”고 지적, “당면 조선족학교 학생수가 대폭 줄어드는 상황이지만 미래지향적으로 조선족학교 교육을 여러가지 방법을 모색하여 앞길을 열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조선어학회제9차회원대회 및 제20차학술대회 참가자 일동 한편 1981년도에 설립된 중국조선족어학회는 설립초기부터 동북3성 조선어문사업협의지도소조의 지도와 배려하에 전국 방방곡곡에 있는 조선어보급 및 교육에 뜻을 둔 회원들을 조직하여 지금까지 9기의 리사회를 무어가지고 중국에서의 조선어문 교육과 조선어의 바른 사용 및 발전을 위해 정기적인 학술대회를 진행해왔다. 또한 조선어교육과 연구, 전산화, 표준화, 규범화를 위하여 적지 않은 성과들을 이룩함으로써 국내뿐만아니라 국제적으로도 그 영향력을 과시해왔다. /글 안상근 기자 /사진 김성걸 기자
6    [민족자랑] - 조선족 영화감독 장률 영화에 미치다... 댓글:  조회:3549  추천:0  2018-11-13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 감독 장률을 만나다 (ZOGLO) 2018년11월13일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 감독 장률을 만나다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의 감독 장률은 일상에서 영화를 길어 올린다.   장률이라는 이름이 마치 현악기 같다고 생각했다. ‘장’이라는 음절의 팽팽함과 ‘률’이라는 음절의 울림이 공존하는, 손으로 튕기거나 활로 켜서 소리낸 듯한 느낌의 이름. 그리고 는 장률이라는 이름 안에서 낯설게 느껴지는 불협화음과 장률이라는 이름 안에서 익숙한 협화음의 앙상블처럼 다가오는 작품이다. 유연한 변주와 신명한 반전 속에서 생경한 인상과 평안한 흐름이 느껴진다. 확실한 건 가 장률의 지난 세계로부터 가장 멀리 떠나온 작품이면서도 여전히 그 세계들로부터 동떨어지지 않은 세계라는 사실일 것이다. 베이징에서 촬영한 장편 데뷔작 이후로 장률 감독은 연변과 중국 대륙에서 영화를 찍어왔다. 은 중국의 변방 도시에서, 는 몽골에서, 은 중국의 충칭에서 그리고 의 이란성쌍둥이 같은 작품인 는 한국의 익산에서 촬영했지만 다시 연변으로 나아가 을 찍었다. 그 뒤로 4년간의 공백 끝에 한국의 이주노동자들에게 주목한 다큐멘터리 을 발표한 뒤 , , 을 차례로 발표해왔다. 대륙에서 시작된 영화적 여정이 한국으로 이어졌다. 퍼석하게 부서질 것만 같았던 영화의 질감 또한 보다 유려하고 선명하게 변모했다. 는 장률이라는 감독의 세계관의 변화를 대변하는 최전선에 놓인 작품이면서도 세상의 이면과 구석에 주목하는 창작자의 중력을 체감하게 만드는 최신작이다. 유연한 웃음을 내보이면서도 단호한 태도로 자신의 일상성과 영화적 세계관의 관계성을 되짚는 장률과의 대화를 통해 그의 영화가 그와 닮았다고 느꼈다. 영화가 감독의 예술이라는 말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이하 )는 원래 군산이 아니라 목포에서 촬영할 예정이었다고 들었다. 만약 그렇게 됐다면 제목부터 다른 영화가 됐을 거 같은데, 주요 촬영지로 염두에 두고 있었던 목포의 민박집을 촬영지로 사용할 수 없게 되면서 목포 촬영을 포기하고 대안으로 군산을 선택하게 됐다. 처음 목포 촬영을 구상했을 때, 많은 준비가 된 상황은 아니었다. 마음에 드는 민박집이 목포에 있었던 것 정도라 장소를 옮기는 것 자체에 어려움은 없었다. 딱히 고집해야 할 조건도 없었고, 알다시피 워낙 규모가 작은 영화이기도 하니까 그냥 흘러가는 대로 그렇게 됐는데 결과적으론 잘된 거 같다. 목포보다도 군산에 일제시대 건물들이 더 많이 남아있기도 하고, 그래서 영화와 잘 어울리는 거 같다. 아마 목포에서 찍었다면 과는 질감 자체가 완전히 다른 영화가 나왔을 거다. 기본적으로 일제강점기 시절의 흔적이 남아있는 건물이 잔존한 도시가 필요했던 것 같기도 하지만 목포에서 봐 둔 민박집에서 촬영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촬영지를 옮겨야 할 정도였다면 민박집의 구조나 형태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졌던 것 같기도 하다. 만약 군산에서도 원하는 집을 찾지 못했다면 이 영화의 제작 자체가 성사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까? 물론이다. 세트를 만들어서 찍을 수 있는 영화도 아니니까 결국 그런 장소를 못 찾았다면 이 영화 자체를 찍을 수 없었을 거다. 다행히도 결국 군산에서 찾아냈는데 목포에 비해 군산이라는 도시에서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인상을 느꼈다. 그래서 남녀 감정을 그리는 게 맞지 않겠나 싶어 졌고. 실제로 요즘 연애하는 친구들이 군산을 많이 찾는 도시라고도 하더라. 서울 사람들도 많이 가고. 은 장률 감독이 지금까지 연출한 작품 가운데 가장 세속적인 남녀 관계를 그리는 작품 같다. “남자들이 왜 이 세상에 온 줄 아세요? 여자들에게 상처 주러 온 거 같아요”라는 대사는 이전의 작품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대사였다. 심지어 치정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신도 등장하고. 동시에 남녀의 이야기로만 국한시키기엔 그 주변부의 인물들과 풍경의 의미를 읽고 싶게 만드는 점에서는 장률 감독의 인장이 느껴지는 것도 같고. 남녀 관계를 그린 영화라는 것이 너무 드러나 보이는 영화를 찍으면 관객들이 그 관계에만 집중하게 된다. 그런데 막상 실제 일상에서는 그 관계에만 집중하며 살지 않는다. 물론 어떤 연령대까지는 일상에서 남녀관계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클 거다. 하지만 주변의 많은 부분들이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칠 테니까, 거기에만 집중하며 살 수는 없지. 그래서 영화에서는 그런 일상의 풍경들 속에서 자리한 남녀관계를 자연스럽게 드러내 보이고 싶었다. 내 입장에서는 그런 부분들에 더 눈길이 가기도 했고. 송현(문소리)과 윤영(박해일)이 군산에 도착해 표지판의 지도를 보는 모습에서 영화가 시작되는데 대략 1시간 10여분 가량의 러닝타임이 흐른 뒤 그것이 이 영화의 서사가 시작되는 지점이 아님을 알게 된다. 심지어 그제야 영화의 타이틀이 떠오르기도 하고. 서사를 분절해 재구성한 의도가 궁금하다. < 군산>은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나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윤영이 선배의 아내였던 송현을 조금 좋아하는 감정도 있는 거 같고, 결국 그렇게 만나서 군산까지 가게 된 셈이다. 그런데 사람의 관계라는 게 중간쯤 가봐야 알게 되는 거 같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이 사람과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다들 시작과 결말을 중시하지만 시작과 결말은 중간이 어떻게 되느냐에 달린 것이다. 무엇보다도 꼭 시작이 어디여야만 한다는 법도 없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 이런 정서라면 이게 맞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따른 결과 같다.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나서 군산에 가게 되는 과정이 극의 후반부에 등장하고 영화의 시작점에서 영화가 끝나게 되니까 끝없이 반복되고 재생되는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를 우리 삶이라 비유한다면 영화의 순서란 결국 기억의 순서인 거 같다. 개개인마다 기억의 순서는 다르지 않나. 저마다 무엇에 초점을 맞추고 있느냐에 따라 각자의 기억은 달라질 수 있는 거고. 영화가 군산에서 시작해서 마지막에 다시 군산으로 오는데 주인공 두 사람이 그 순간을 추억할 때에는 그 순서가 맞지 않을까 싶었다. 지금 사귀고 있든, 사귀고 있지 않든. 물론 내가 보기엔 갈라섰을 거 같지만.(웃음) 의 윤영이 처음 보는 인물이나 지역에 대한 기시감을 느끼는 것 또한 불명확한 기억의 착시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기억의 순서라는 게 저마다 다르다고 했는데 영화 속의 인물들이 경험하는 기시감 또한 기억의 불명확함에 대한 관념이 투영된 것일까? 젊은 시절에는 그런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어디서 본 것 같다는 말. 그런데 어느 연령대부터 그런 느낌을 받게 된다. 송현과 윤영은 대략 40대 전후의 나이 대에 있는 인물인데 그 나이부터는 그런 감이 오는 것 같다. 어디서 본 거 같다는 느낌. 그게 어느 연령대부터 오는 거 같다. 그런데 정말 어디서 본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되면 정말 그 이후에 비슷한 사람을 만났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런 경험을 하다 보면 묘한 느낌을 받기도 하고. 과거와 미래를 연결해주는 무언가가 있는 거 같다고 할까? 물론 특별한 종교가 있는 건 아니다, (웃음) 어쨌든 모든 게 다 내 일상에서 비롯된 것이란 거지. 나이가 들수록 그런 경향이 점점 심해진다. 지금이야 30대가 젊은 축에 속하지만 옛날에는 30대도 중년이라고 했다고 하지 않나. 그런 변화도 다 일상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들이다. 평소에 사람이나 장소에 대한 기시감을 자주 느끼는 편인가? 점점 더해진다. 자꾸 어디서 본 것 같다. 물론 윤영처럼 여자한테 그러는 건 아니지만.(웃음) 얼마 전 부산국제영화제에 내려갔다가 숙소 옆 카페에서 앉아있는데 창 밖에 지나가는 사람이 분명 아는 사람 같더라. 그런데 누군지 도통 생각이 안 나는 거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는데 서로 웃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카페에 앉아있는 나한테 오더니 악수를 청하면서 물어보는 거다. 혹시 아는 사람 닮았냐고, 그런데 아마 아닐 거라고.(웃음) 그런 일이 생기는 거지. 현실이 더 영화 같다. 사실 영화에서 아름답게 그리는 사랑도 진짜 현실의 일상처럼 찍어보면 되게 낯설어 보일 거다. 그런 면에서 오히려 영화가 일상을 피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그런 쪽을 선호하는 편이 아니라서 일상에서 찾은 느낌을 영화에 확실히 반영하는 쪽이고.   에서 전투기 비행소음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군산에 미군기지가 있다는 걸 촬영지로 선택하기 전에 알고 있었나? 몰랐다. 5~6분에 비행기가 한 대씩 지나가는데 그때마다 ‘컷’했다가 찍고, 그래서 영화 찍는 내내 너무 짜증이 났다.(웃음)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과거에 참혹한 역사가 있던 땅이라지만 지금은 연애하는 남녀가 찾는 도시가 됐고, 하늘에서는 끊임없이 미군 전투기의 소음이 내려온다. 그래서 저 소리도 이 공간의 일상이구나, 피할 수가 없구나, 이런 깨달음을 얻었다. 사랑하는 남녀가 길을 거닐면서도 전투기 소음이 지나가는 게 군산에서는 일상인 거다.(웃음) 을 찍으면서 발견하게 된 군산의 일상성인 셈인데. 피할 수 없었지.(웃음) 적산가옥을 비롯해 일제강점기 시절을 환기시키는 풍경 위로는 미군 전투기가 날아다닌다. 그리고 연변 출신으로 추정되는 여성이 갑자기 등장하기도 하고. 은 여러 면에서 한반도의 역사성을 보여주는 요소들이 지층처럼 공존하는 영화처럼 보인다. 일상을 반영한다고 만들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동북아 역사와 밀접한 현실이 있더라. 생각해보면 요즘은 한국 어디를 가도 조선족 출신 사람들이 있다. 말투도 잘 못 알아듣고, 생활방식도 다르지만 그들에게도 나름의 일상이 있을 거다. 윤영이 이미자의 ‘님 떠난 군산항’을 부른다. 아무래도 군산과 관련된 노래를 쓰고 싶었던 모양인데, 이 노래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일단 군산과 관련된 노래 중 그 노래가 제일 유명하다.(웃음) 게다가 이미자를 좋아하기도 하고. 그리고 군산이라는 도시가 윤영이의 어머니 고향이기도 하니까 옛날 노래를 부르면 자연스럽게 옛날을 생각하게 될 거라 생각해서 선택했다. 만약 목포에서 촬영했다면 ‘목포의 눈물’을 불렀을까? 그랬겠지.(웃음) 전작에서도 노래하거나 누군가에게 노래를 시키는 장면이 종종 등장하곤 했다. 심지어 에서는 할아버지끼리 술 마시다가 노래를 시키는 장면도 나오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옛날 노래들이 등장하게 된다. 일상 속에서 어떤 감정을 갖고 노래하는 모습을 보면 남다른 느낌을 받는다. 감동이 온다고 할까. 만 놓고 보면 오래된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는 어머니의 고향을 찾은 윤영이가 노래를 한다는데 요즘 젊은 친구들이 하는 노래를 한다면 영화와 어울리지 않은 거니까 당연한 거지. 그리고 내가 말하는 노래는 스태프들이 다들 모른다. 이젠 나나 아는 노래들인 거지. 반대로 내 주변에는 요즘 노래하는 사람이 없다. 모를 수밖에 없고. ‘님 떠난 군산항’은 영화 속에서 들려지는 노래라기 보단 영화의 정서를 대변하기 위해 초대한 생경한 캐릭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기쁘든, 슬프든, 노래하는 순간 어떤 감정이 작동된다고 느껴지는 건 좋다. 사실 유일하게 에서만 썼지, 내 영화에는 음악이 거의 없다. 그런데 음악이란 것이 어떤 공간을 찾았을 때 들려지는 것을 듣게 되는 경우가 많지 않나. 카페에서는 카페에 어울리는 음악을 틀고, 노래방에서는 노래방이니까 부르고, 듣고. 극의 상황에 어울리는 음악을 듣게 되는 영화처럼 우리가 일상에서 음악을 들으면서 사는 건 아니니까. 결국 내 영화에서 등장하는 노래란 일상의 리듬을 만드는 요소라고 생각하는데 어쩌면 결국 내 취향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이 노래의 유명함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 관객들에게 ‘님 떠난 군산항’은 생경하게 들릴 거 같다. 낯설어서 그만큼 신선하게 들릴 수도 있고. 그렇다면 너무 좋겠다. 옛날 노래라고 다 없어지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 아름다운 게 왜 없어져야 하나 싶고. 너무 빨리 변하고 사라지는 게 너무 싫다. 정신없이 시대 흐름을 좇아가는 건 많은 문제를 발생시키기 마련이다. 감정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그래서 아름다운 것을 남기고 어떻게 연결시켜야 할지, 요즘은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 는 지금껏 연출한 작품들 가운데 가장 긴 제목이다. 제목이 떠오르는 타이틀 시퀀스에서 ‘영아(咏鹅)’라는 한자어가 함께 등장되기도 하는데 이는 당나라 시대의 시인 낙빈왕이 쓴 시의 제목이라고 알려져 있고, 부제인 ‘거위를 노래하다’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들었다. ‘군산’보다는 ‘영아’가 이라는 영화의 시작점이 아니었을까 궁금했다. 보통은 촬영을 다 마치고 나서 제목을 생각하는 편인데 ‘거위를 노래하다’라는 제목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그런데 영화는 극장에 걸려야 하는 거니까 관객 입장에서 매력적으로 느껴져야 하고, 투자사나 배급사에서도 의견을 제시한다. 그런데 군산을 제목에 넣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다. 군산이라는 공간을 잘 담아내기도 했고, 지명을 제목에 넣은 전작들도 많으니까. 그리고 ‘군산’이라 제목을 붙이는 게 딱히 사기 치는 일도 아닌 거 같고.(웃음) 그래서 수락하고 대신 ‘거위를 노래하다’라는 부제를 달았다. 첫 장편 데뷔작인 에서는 제목처럼 당나라 시가 여럿 등장하기도 하는데, ‘거위를 노래하다’를 의미하는 ‘영아’라는 당시 제목이 등장하는 것도 우연은 아닌 것 같다. 심지어 윤영이 중국집에서 춤을 추면서 낙빈왕의 ‘영아’를 읊기도 하고. 당나라 시를 좋아한다.(웃음) 간결하기도 하고, 암송하기도 좋다. 몇 번만 외우면 기억이 난다. ‘영아’는 낙빈왕이 일곱 살에 쓴 시인데 중국에서는 서너 살만 돼도 알게 되는 시다. 에서 윤영의 집이 연희동이라 화교가 많고, 화교 학교도 있고, 심지어 윤영은 2년 동안 화교 학교를 다녔다고도 하니 이 시를 무조건 알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시는 한번 외우면 평생 기억할 수밖에 없다. 시라는 건 운율이고, 리듬이라 그걸 기억하는 사람의 감정에 끊임없이 작용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고. 그리고 내가 술을 자주 먹는 편인데 술 먹고 저 시를 춤추면서 외우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웃음) 결국 이라는 영화를 구체화시키기 전부터 그 장면을 생각했던 셈이다. 군산은 윤영의 어머니 고향이다. 윤영은 태어나서 처음 어머니의 고향에 왔다고 말한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 보면 군산의 민박집주인(정진영)도 사별한 아내의 고향인 군산에서 사는 재일교포라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민박집주인의 딸 주은(박소담)의 어머니 고향이기도 한 셈이고. 결국 군산이 직접적인 고향인 사람은 없지만 결국 누군가의 고향인 셈이다. 그리고 다들 그런 사연이 있어서 그곳으로 오게 된 셈이고. 그리고 새로운 공간에 가게 되면 말과 행동이 달라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모습들이 내 눈에는 재미있게 보였다. 어쩌면 내가 하도 떠돌아다니는 인생을 살아서 그런가 싶기도 하지만. 관객은 영화를 보면서 민박집주인의 아내가 끔찍한 사고로 죽음을 맞이했다는 걸 알게 된다. 동시에 윤영도 자신의 어머니가 극단적인 자살을 선택했음을 암시하는 행동과 말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군산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어머니들의 고향인 셈인데.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했던 건 아닌데, 찍어 놓고 보니까 그렇게 됐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속 군산이 어머니의 죽음으로부터 소환된 이들이 찾게 된 망자의 도시처럼 보이기도 한다. 덕분에 고향이 모든 이들에게 생의 시작점이 되는 곳이지만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 환기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사실 지난 작품들 속에서도 죽음은 늘 중요한 모티프가 되거나 끊임없이 등장해 환기되는 것이었다. 일상에서 중요한 부분이지 않나. 어떤 나이가 되면 나와 깊은 관계에 놓여있던 사람들이 하나씩 떠나가는 걸을 경험 한다. 떠나는 사람이 훨씬 많아진다. 그게 일상이 된다. 죽음이 계속 내 삶과 같이 가는 거다.   에서는 과거의 만행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일본인이 등장한다. 역시 일본과의 역사적 관계를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감독 장률의 연출 경력 안에서 일본에 대한 관념을 반영한 두 번째 영화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모든 작품에서 조선족이나 중국과 연관된 인물이나 어떤 요소가 등장하는데 이는 일본과 연결되는 흐름은 동북아시아의 근대 역사와 무관한 일이 아닌 거 같다. 1995년에 처음으로 경주를 찾았을 때 그때에도 경주를 찾는 일본 사람이 있었다. 군산에는 여전히 일제시대 건물이 많아서 거기에 살았던 일본인들의 후손이 지금도 많이 찾아온다고 하더라. 할아버지 집을 찾아오는 거지. 결국 일상에서 과거를 마주할 수밖에 없는 공간인 거다. 그런데 요즘에는 어딜 가나 중국인이나 조선족들이 있다. 그들이 우리 주변에 적지 않게 자리하는데도 여전히 어색하게 느껴지는 면이 있다. 게다가 내가 그쪽 출신이다 보니 내 눈에는 그런 게 더 잘 들어온다. 에서 송현이 “여기 너무 좋다. 진짜 일본 같아. 나 일본 진짜 좋아하는데”라고 말하니까 윤영이 “윤동주 시인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나? 윤동주 시인이 일본 형무소에서 죽었잖아”라고 대꾸한다. 일본을 향한 경외심과 적개심이 공존하는 한국인들의 태도가 그대로 반영된 느낌이랄까. 어쩌면 한국에 들어와 제3자로서 관찰하게 된 관념들을 반영한 결과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원래 촬영지로 생각했던 목포부터 시작해서 군산에 가서도 계속 일본과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아직도 진행 중인 역사일지도 모르고, 그 지역에 가면 결국 그 시대의 정서가 여전하고. 그 지역의 노인들은 여전히 그 시절의 참혹한 역사를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러면서도 일제시대 때 만든 수도꼭지나 하수도나 여전히 쓸 만하게 잘 만들어졌다고 감탄하기도 하고. 그런 개념이 서로 충돌하니까 따로 가둬 두고 말한다. 그런데 어차피 함께 살아가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역사 문제도 해결해야 하는 거다. 그리고 여전히 서로 싸우기도 하지만 결국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탄탄한 삶의 기반을 만들려면 일상을 잊어서도 안될 거 같고, 결국 지금의 일본인들과의 소통도 너무 중요하다. 어쩌면 내가 워낙 비주류로 살아온 인생이라 그런 것들이 더 많이 보이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의 윤영은 10년 전에 시를 썼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영화에서 등장하는 ‘영아’라는 시를 쓴 낙빈왕은 이 시를 일곱 살 때 쓴 천재였다고 하고, 윤영이 흠모하는 시인 윤동주는 짧은 생을 살았지만 주옥같은 시를 남기고 떠난 시인이었다. 이 영화가 직간접적으로 떠올리게 만드는 시인들의 비범함과 윤영의 범상함의 대비가 느껴진다. 시인에 대해 좀 더 폭넓게 말하고 싶었다. 시를 쓰는 사람만이 시인이 아니고, 시의 정서를 갖고 있는 사람도 시인이라고. 사실 시 쓰는 사람 중에서도 정서는 다 잊고 시만 쓰는 사람도 있다. 한편으로는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이었다는 낙빈왕에게 서울의 한 중국집에서 자기 시를 읊는 미친놈이 있다고 알려주면 제일 기뻐하지 않을까 싶었다. 시인 입장에서는 저 사람과 소통이 됐구나,라고 느낄 거 같아서. 그런 면에서 윤영은 아직 시의 리듬을 버리지 않은 사람이다. 10년 전에 시를 썼다고 하지만 아직 윤영에게 시인의 삶은 진행 중인 거다. 그러니 어느 날 유명한 시인이 될지도 모를 일이고. 누구나 살면서 백수의 시기를 살 때가 있는 법이니까. 에서 윤영이 집에서 일하는 조선족 가정부가 윤동주의 집안사람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고 굉장히 감격하는 장면이 나온다. 에서 주인공인 최현(박해일)이 찻집의 주인인 공윤희(신민아)가 공자의 78대 후손임을 알고 감격하는 장면과 유사한 인상이다. 두 작품에서 감격하는 인물을 박해일이 연기했다는 공통점도 있고. 공윤희는 원래 지인의 이름이다. 인사동에서 종종 술 먹는 사이인데 실제로 공자의 78대 후손이다. 그런데 어감이 여자 이름 같아서 한번 빌리자고 부탁했다. 그리고 윤동주의 고향이 내 고향과 멀지 않다. 지금도 거기 가면 윤동주 시인의 친척들이 많다. 대부분 농부로 사는데 요즘은 한국에서 버는 돈이 더 쏠쏠하니까 이리 와서 일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니까 윤동주의 친척들이 와서 일하고 있는 셈인데 그걸 알면 대단해 보일 수 있지만 사실상 대부분의 사람들 눈에는 그저 연변에서 온 조선족일 뿐이지. 윤동주도 후쿠오카에 가지 않고 계속 연변에서 살았다면 혹시 모를 일 아닌가. 지금처럼 위대한 시인처럼 여겨질지. 그저 연변의 조선족에 불과할 수도 있고. 실제로 에서 “윤동주가 연변 출신이잖아. 근데 그쪽에서 계속 살았으면 어떻게 됐을까?”라고 송현이 물으니까 윤영이 담담하게 “어, 뭐, 조선족이지, 뭐”라고 답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조선족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만드는 장면이기도 한데, 지금까지 연출한 대부분의 작품 속에서 조선족 출신 인물들이 거듭 등장하는 것도 그런 고정관념에 묶여 있는 존재들의 일상을 환기시키려는 노력이 아니었을까? 그저 일상에서 보이는 파편적인 풍경을 굳이 치울 필요가 없으니까 일정한 영화적 리듬을 생각하며 반영한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가끔 그런 사람들을 만난다. 평소에는 그런 생각을 못했다고 말하는 사람들.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주류 계층의 사람들을 관념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저 사람들 불쌍하다, 저 사람들 중에 범죄자들이 많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어디서든 비주류는 다 그런 취급을 받는다. 그 사람들의 일상을 보는 게 아니다. 특정한 관념이나 사건을 통해 개개인을 판단해버리는 거지. 그런 게 좀 안타깝다. 연변 태생이라는 출신 성분 때문에 그런 선입견의 대상이 된다고 느낀 적도 있을 거 같다. 자주 당한다.(웃음) 출신지역을 얘기하면 대부분 나를 가르치려고 하더라. 그래서 예전에는 짜증 날 때가 많았는데 요즘은 그냥 귀여워 보인다. 에서 백현진이 연기하는 교수도 처음에는 짜증 나게 굴지만 나중에는 좀 불쌍해 보이지 않나. 노래방에서 쪼그려 자기도 하고. 다들 불쌍한 사람들이다. 자존심이 있고, 그래서 서로 상처를 주지만 결국 그 사람만의 외로움이 있다. 많이 당해보니까 그런 게 보여서 귀엽더라.(웃음) 물론 개중에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와 이라는 영화가 박해일이라는 배우를 이용해 반복적인 농담을 던진다고 생각했다. 박해일의 캐릭터는 두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변태’라는 단어로 규정되기도 하고, ‘잘 생겼다’는 말을 듣는다. 감독이 배우와의 사적인 관계로부터 얻은 인상을 캐릭터에 짓궂게 반영한 결과처럼 보인다. 스타에게는 스타만의 생활이 있다.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이 알아보는 입장이니 삶이 불편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니까. 그런데 이 친구는 스타의 생활과 정말 무관한 일상을 사는 것 같다. 동네 아저씨 같다고 하면 팬들이 싫어할지 모르겠는데 정서적으로 그렇다. 모자를 눌러쓰고 버스를 타고 다니고, 비싼 데를 찾아다니는 편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진지하다. 그런데 사람이 진지하면 변태처럼 보일 수 있거든.(웃음) 하지만 결국 오해는 풀리기 마련이다. 게다가 잘 생겼다는 말을 늘 듣는다. 허름한 식당에 앉아있어도 다들 박해일을 알아보고는 그렇게 말한다. 어쩌면 그런 모습을 보며 느낀 질투가 투영된 것일지도 모르겠다.(웃음) 송현의 지인인 치과의사 지영(이미숙)이 박해일의 충치를 치료하면서 눈에 선과 악이 같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는데, 박해일이라는 배우를 논할 때 항상 언급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와 아무리 친해도 배우는 배우다. 그런데 가끔 혼동이 될 때가 있다. 그 친구가 선악을 다 연기할 수 있는 배우라는, 묘한 특징이 있지 않나. 그만큼 신비롭게 느껴지는 사람이라는 거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사람. 그런 면에서 윤영이라는 사람도 영화 속의 캐릭터들에게 그렇게 보이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전작들에서 순희나 창호라는 이름을 자주 써왔다. 에서도 조선족 가정부 이름이 순희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배우의 본명을 캐릭터 이름으로 자주 쓰곤 한다. 에서는 윤진서와 엄태웅의 이름을 그대로 캐릭터의 이름으로 썼고, 에서도 한예리와 세 감독이 맡은 캐릭터의 이름이 그랬다. 그런데 박해일은 와 에서 한 번도 자기 이름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다음에 한 번 써야겠다.(웃음) 사실 너무 게을러서 그렇다. 이름을 지을 줄 모르니까 쓰던 이름이나 익숙한 이름을 쓴다. 아니면 그냥 배우나 스태프들 이름을 갖다 붙이거나. 윤영은 어릴 때 엄마가 자신을 영아라고 불렀다고 말하는데, 어쩌면 윤영이라는 이름이 ‘영아’라는 단어를 활용하기 위해 마련된 이름 아니었을까? 내가 아는 영화과 교수의 이름이 윤영인데 항상 그 교수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여자 교수인 줄 알고 온다고 들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생각나는 이름도 없어서 그 이름 좀 빌리겠다고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영아’라는 해석도 가능한 이름이었다. 계기는 완전히 다르지만 결과적으로는 캐릭터와 어울리는 느낌이기도 하고. 첫 장편 연출작이었던 와 비교하면 은 전혀 다른 감독의 영화처럼 보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까지는 황량하고 황폐한 정서의 영화를 만들어온 것 같은데 부터는 영화에 여유가 생긴 인상이다. 위트와 리듬감을 비롯해 사색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고 할까. 내 삶이 변해서 그런 거 같다. 삶이 변하니까 정서도 변하고, 그런 변화를 따라온 거 같다. 무엇보다도 카메라를 어떤 공간에 두고 있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변한다. 카메라를 추운 겨울의 두만강에 두고 있으면 처럼 황량하고 추운 영화가 나올 수밖에 없다. 초기작들은 그런 공간이 주는 질감에 충실한 작품들이었다. 같은 경우에도 과거 폭발사고가 있었던 역 주변 동네는 황폐한 느낌이 있다. 에서도 황량한 폐가가 등장하는 건 그런 공간에 주목하는 내 습성 때문일 거다. 다만 예전보다는 시선이 좀 더 따뜻해진 것 같다. 그리고 인물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거 같고. 아무래도 세월이 작용한 결과일 거다. 점점 늙어가니까, 날카로움도 무뎌지는 거 같다. 영화적 공간성과 감독의 일상성이 변화하면서 창작적 세계관 또한 변화한 셈이다. 사람은 절대적으로 공간의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세월을 보낸 공간에 쌓이는 정서가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나이가 들어서 부드러운 품성을 지니게 된 할아버지도 젊은 시절에는 지랄 같은 성격이었을지 모를 일이다. 어쩌면 결국 세월과 깊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에서 윤영이 꿈을 꾸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일종의 예지몽 같기도 한데, 전작인 은 제목부터 꿈이라는 단어와 연관성을 지닌 작품이고, 에서도 최현이 찻집에 앉아서 꿈을 꾸는 듯한 경험을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언제부턴가 영화 속에서 꿈이라는 요소가 특별한 장치 노릇을 하는 것 같다. 생각해보면 젊었을 때에는 꿈과 현실을 잘 구분한 것 같다. 어젯밤에 꾼 꿈과 오늘 아침의 행동이 잘 구분된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잘 구분이 안 되는 것 같다. 내 현실이 꿈같기도 하고, 그런 느낌을 많이 받게 된다. 그런 생각이 반영된 게 아닌가 싶은데. 에서 언급되는 죽음은 모두 다 과거형이다. 지금까지의 연출작 가운데 현재 시제에서의 죽음이 등장하지 않는 첫 작품인 것 같다. 대신 주인공들이 한 번씩 살아있는 사람을 마음으로 죽이는 순간들이 등장한다. 송현은 전남편을 마음속으로 죽였다고 하고, 윤영 역시 아버지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한다. 덕분에 위트가 발생하기도 하는데, 죽음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전작들과의 차이가 느껴지는 작품 같다. 사실 그런 생각까지 해보진 않았는데 살다 보면 누군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지 않나. 심지어 아버지, 어머니를 두고도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고. 그냥 일상의 정서를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 들어와서 만든 와 그리고 까지, 그 이전의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좀 더 부드러운 꿈 혹은 초현실적인 상상처럼 느껴지는 장면들이 보이는 것 같다. 이미지적으로도 보다 유려해진 느낌이고. 감독으로서 예전과 다른 것을 보고 싶어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다른 걸 보고 싶기보단 삶이 여기까지 흘러온 덕분인 거 같다. 서울에서 6년을 살고 있으니까. 어쩌면 나이가 들어가는 것 때문일 수도 있고, 공간의 질감이 바뀌었기 때문일 수도 있는 거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시간의 흔적이 남아있는 공간을 가게 된다는 건 어쩔 수 없는 관성 같다. 그게 더 잘 보이는 입장이니까. 2001년에 발표한 단편영화 가 첫 연출작이다. 이 작품이 베니스영화제에 초청됐고, 그 이후로 영화감독의 삶이 이어져 여기까지 왔다. 원래 중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소설을 썼다고 들었는데 영화감독으로서의 삶이 적성에 맞았던 걸까? 내 감정을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런 호기심이 생기니까 영화를 계속 찍게 되더라. 사실 처음에 찍고 싶었던 영화가 이었다. 를 찍기 전부터. 그러다가 결국 을 찍게 됐고, 만들고 싶었던 걸 만들었으니 그만두자고 생각했다. 어차피 감독이 꿈이었던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연세대에서 영화과 교수를 맡아 달라고 제안하길래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까 해보자 싶었다. 언제나 한국이 궁금하기도 했고. 내게 있어서는 할아버지의 나라니까. 그런데 영화과에 있다 보니 학생들이 항상 묻는다. 영화는 언제 찍냐고. 그런데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찾아와서 영화 연출을 제안하길래 결국 을 찍게 된 거다. 그러다가 를 찍고, 그렇게 다시 시작됐다. 이후로 4년 만에 발표한 은 외국인 노동자들에 관한 다큐멘터리였다. 다큐멘터리 연출을 생각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디지털 삼인삼색’의 일환으로 연출을 제안하길래 다큐멘터리를 찍어도 되냐고 물어봤다. 원한다면 그렇게 하라고 하더라. 사실 내가 다큐를 꽤 좋아한다. 하지만 직접 찍겠다는 생각까진 못했다. 다큐는 정말 좋은 사람들만 찍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사람과 직접 부딪혀야 하니까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만 할 수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좋아하다 보니까 자연스레 궁금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한번 찍어볼까 했는데 너무 힘들었다. 내가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도 아니었고.(웃음) 실제로 촬영을 하려면 노동자뿐만 아니라 공장의 사장에게도 허락을 맡아야 한다. 그래서 어려웠다. 허락을 받고 찍었음에도 나중에 노동자가 불합리한 처우를 받았다는 말을 듣기도 했고. 그래서 원칙적으로 제대로 허락을 받지 못하면 찍지 않았다. 그런 동의를 구하는 게 만만치 않았다. 처음에는 연변과 중국 일대에서 영화를 촬영하다가 한국을 무대로 영화를 찍게 됐고, 아직 공개되지 않은 차기작은 일본에서 촬영했다. 연변이라는 출신지로부터 점점 남하하고 있는 셈인데 언젠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영화를 찍을 날이 올까? 예측하긴 어렵다. 워낙 계획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처럼 찍었으니까. 그냥 느끼는 대로 찍고, 안되면 말아야지. 연변이라는 출신지에 대한 특별한 애착을 느끼고 있진 않은가? 태어나고 성장한 지역에 대한 경험과 정서가 내 몸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겠지만 그 정도다. 끊임없이 그런 의미를 되새기며 사는 거 같진 않다.   이미 라는 차기작 촬영을 마쳤다고 들었다. 후쿠오카는 에서 재일교포인 민박집주인이 군산으로 넘어오기 전에 살았던 곳이기도 하고, 윤동주가 사망한 형무소가 있는 곳이라고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도시이기도 하다. < 군산> 촬영을 마친 뒤 시간적 여유가 생겨서 갑작스럽게 진행했다. 10회 차 정도의 작은 규모로 찍은 영화고, 지금은 후반 작업 중이다. 후쿠오카를 처음 간 게 한 10년 전이고 그 뒤로도 종종 갔는데 한 10년 정도 다녀보니까 이젠 그 지역의 공간들이 눈에 제법 들어온다. 내 동네 같다. 그래서 어떤 특별한 의미를 두고 찍은 건 아니다. 일본에서 나한테 가장 익숙하게 느껴지는 도시이고, 재일교포들도 많이 살고, 한국과 가깝기도 하고. 의 민박집주인이 후쿠오카에서 온 사람이라고 설정한 것도 그래서고. 어떤 지역이나 공간에서 세월을 보내며 특별한 느낌을 받게 되면 거기서 영화를 찍게 되는 것 같다. 에서 윤동주 문학관이 등장하는데 처음 을 구상할 때부터 계획된 촬영지였을까? 맞다. 실은 내가 자주 다니는 공간이다. 윤동주를 생각해서 가기보단 공간이 너무 좋아서. 그쪽에 있는 언덕이 실제로 윤동주 시인이 산책하던 길이었다고 한다. 한눈에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이는데 이런 풍경을 보니까 큰 시인이 된 걸까 싶기도 했다. 윤동주의 시처럼 영화 역시 감독의 일상적인 시선이 반영된 결과물일 수밖에 없을 거다. 장률이라는 감독이 만드는 영화가 끝내 반영하고자 하는 풍경이란 게 있을까? 관객의 입장에서 보는 건 역시 관객의 몫인 것처럼 나는 그저 창작자로서 그저 공간의 질감에 어울리는 자신만의 리듬을 만들어내는 데에만 충실하면 되는 것 같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없는 것 같다. 워낙 계획 없이 떠돌아다니듯이 영화를 찍었으니까 앞으로도 그냥 느끼는 대로 찍는 수밖에 없을 거다. 그러다가 안되면 말아야지. 결국 그 역시 내 일상일 테니까. /에디터 민 용준   /사진 장성용   /허스트중앙 ==========================/// '윤동주도 그저 조선족' 재중동포 장률 감독의 한 마디 (ZOGLO) 2018년11월12일  ▲영화 의 한 장면ⓒ 필앤플랜   장률 감독의 앞선 영화 에 호감이 있는 관객이거나, 대사를 통한 스토리 위주로 끌고 가는 영화에 그다지 열광하지 않는 관객이라면, 를 추천한다. 가 경주에서 우연히 조우하게 된 두 남녀의 이야기였다면, 는 군산의 네 인물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군산에 우연 혹은 필연적으로 내려간 두 남녀 윤영(박해일 분)과 송현(문소리 분)이 민박집에 묵게 되고, 그 곳의 주인장(정진영 분)과 자폐를 가진 딸(박소담 분)이 이들과 교감하는 이야기. 이 과정에서 서로의 아픔 혹은 치부가 드러나고, 다들 우연하게, 낯설게, 친절하지 않게 상대를 토닥인다. 아픔, 고통이란 본디 대리할 수 없는 것이기에 타인이 건네는 당장의 위로는 언제나 적절하지 못할 수 있다. 어느 날 애정이나 배려의 발로였음이 우연히 깨달아질지언정 말이다.   윤영이 자신의 집 조선족 도우미와 '윤동주'와의 관계적 우연성에 감격하는 장면은 그가 시인이기 때문일까? "윤동주가 후쿠오카 감옥에서 죽지 않았다면, 그 역시 용정 출신 조선족이었을 뿐이라는" 재중동포 장률 감독의 말은, 우리가 조선족을 어떻게 대하고 있나를 돌아보게 한다. 이주민(난민)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입장의 동일함'을 전제한 관계로서가 아닌, 거시적 '인권' 담론에 머물러 있다는 장 감독의 뼈아픈 지적이고, 이를 송현의 이중적인 행태로 드러낸다.   시공간이 교차하는 영화 '군산'   ▲영화 의 한 장면ⓒ 필앤플랜   '장소'를 가장 중요한 모티브로 생각한다는 장 감독의 '군산'은 현재, 과거, 미래가 교차하는 곳일까? 의 네 인물들도 군산을 기점으로 일본, 중국(만주), 한국을 시대적, 공간적으로 공유하고, 현재와 과거, 그리고 오늘이 될 미래를 넘나드는 듯하다. 주인장과 딸이 일본에서의 아픔을 안고 군산에 머물고, 알고 보니 이유가 있었던 윤영이 군산을 찾게 되고, 오고서야 군산을 발견하는 송현의 시공간의 교차가 '우연'을 통해 펼쳐진다.   엔 빛나는 미덕이 있다. 쿡 하며 터지는 의외의 유머를 배치해 자칫 지루할 수 있을 관객에게 웃음을 준다. 그리고 깜짝 놀랄 배우들의 카메오 출연이 있다. 이 정도 배우가 등장하면 영화가 다른 국면으로 전환될 거라 생각하겠지만, 조용히 조연으로 마무리된다. 또한 부수적으로 소비되지 않는 여성 캐릭터들은 영화의 빼놓을 수 없는 미덕이다.   에서 내 소득은 뭐니뭐니해도 배우 문숙(군산 음식점 사장)의 발견이다. 문숙은 에서도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역을 맡아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다. 대낮에, 술을 오랜 친구 보듯 대할 줄 아는 이는, 인생을 좀 아는 사람이다. 이 여인은 아린 상처를 목울음으로 토해내는 송현에게 고독과 고통을 다루는 태도를 전수한다. "허리를 펴. 숨을 깊게 들이 마시고 이렇게 말이다.   군산은 시부모님이 한동안 거주하셨던 도시여서, 내겐 '시댁'의 다른 이름이었다. 시부모님 생전에는 명절 때마다 교통체증으로 고생하며 오갔던 터라, 찬찬히 들여다 볼 기회가 없었다. '군산'은 영화가 찾아 보여준 아름다운 도시이기도 하지만, 일제가 조선의 곡물을 수탈해 빼돌린 큰 항구였고, 그런 이유로 일본식 가옥이 많았고, 미군 기지촌과 위안부 집창촌이 큰 규모로 있었던 슬픈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가 군산을 낭만으로만 소비하지 않고, 아픈 역사 또한 공존하는 장소로 기억됐으면 좋겠다. 감독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제 시댁이 아닌 거위를 찾아, 군산을 다시 가봐야 할까 보다. ///윤일희/오마이뉴스  
5    [민족자랑] - "길림신문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취재 보도하다 댓글:  조회:2730  추천:0  2018-11-13
김룡 기자, 잊을 수 없는 남아공 취재길 (ZOGLO) 2018년11월7일    잊을 수 없는 남아공 취재길 김룡 길림신문사 스포츠 수석기자 다년간 길림신문사의 스포츠 수석기자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동분서주해온 것 같다. 중국축구 슈퍼리그, 갑급리그, 을급리그 등 국내 프로축구와 같은 대형 체육행사 취재는 물론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인천아시아경기대회, 박지성자선축구대회, 전국동계올림픽, 길림성소수민족전통체육경기대회 등 굵직굵직한 국내외 스포츠대회 취재도 겁없이 도전하고 뛰여다니면서 생생한 스포츠뉴스들을 독자들에게 전해주려고 애써왔다. 일년중 거의 서너달은 밖에서 보내기가 일쑤였고 객지에서의 외로움 같은 건 밥 먹듯했다. 그중에서도 지금까지 뇌리에 깊이 각인돼있는 것은 바로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취재길이다. 스포츠 기자로서 특히는 축구팬으로서 가장 큰 행복이 월드컵 현장을 가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사실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은 그래서 기억에 남은 건 절대로 아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취재에 우리 나라에 할당된 공식기자 인원수는 60명, 나는 유일한 소수민족신문기자로 취재권을 따냈다. 전세계 우리 글 독자 축구팬들에게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의 생생한 뉴스를 전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해났다. 2010년 6월 7일 아침에 연길을 떠난 나는 북경에서 8일 오후 항공편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향발했다. 내가 탄 비행기는 9일 오후 1시(현지시간으로 아침 7시) 좌우에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 도착했다. 언어는 물론 음식습관이 전혀 다르고 6시간의 시차에다가 남북 위도차로 오는 피곤함은 그런대로 극복할 수 있었지만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이 혼자라는 점이였다. 당지의 불안한 치안상황 때문에 남아프리카공화국주재 중국대사관에서는 홀로 다니지 말고 택시를 함부로 타지 말라고 귀띔했다. 요하네스버그에서 우선 언어소통 때문에 진땀을 빼야 했다. 월드컵 같은 큰 행사에 외국인들을 도와주는 지원자가 많아야 하는데 중국어나 조선말 통역을 하는 지원자는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각국 문자로 된 상세한 안내게시판도 없어 벙어리처럼 손시늉으로 겨우 의사소통을 해야 했다. 같은 항공편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도착한 중국의 기타 큰 매체의 기자들은 팀을 무었고 또 그곳의 화교들이 마중을 나왔기에 인차 공항을 빠져나갔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나는 홀로 공항에 남게 되였다. 그곳 치안상황이 좋지 않다는 말을 사전에 많이 들었던 관계로 감히 공항 밖으로 나갈수 없었고 또 FIFA(국제축구련맹)에 호텔신청도 하지 않은 상태라 부득불 중국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3시간가량 공항에서 기다리다가 드디여 중국대사관의 도움을 받아 대사관 직원이 알선해준 호텔에 짐을 풀었다. 나를 안내해준 대사관 직원은 이곳 치안상황이 말이 아니니 절대 홀로 다니지 말고 될수록 택시를 타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였다. 그날 오후 나는 FIFA에 기자증을 발급받으러 갔다가 남방에서 온 중국기자들을 만났다. 기자증 하나에 4명이 취재팀을 무어 왔지만 그들의 사정도 나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하루 전에 도착한 그들은 거리에 나갔다가 벌써 사진기를 빼앗기고 돈지갑을 털린 상황이였다. 정상적인 취재를 할 것 같지 못하다면서 거친 말로 FIFA와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준비위원회를 비난했다. 치안상황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했다. 그런 치안환경에서 나 역시 10일 저녁 대형 공연을 취재하려고 호텔을 나섰다가 어이없이 봉변을 당했다. 앞에서 걸어오던 흑인괴한 2명이 우호적인 손짓을 하며 웃음띤 얼굴로 다가서는 것이였다. 멈칫하는 사이 뒤에 세 사람이 나타나 두 팔을 꽉 붙잡는데 뭉툭하고 딱딱한 것이 허리에 들어오는 것이였다. 돌아보니 흑인괴한 3명이 내 몸에 붙어 서있었고 검은 총부리가 오른쪽 허리께로 보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꼼짝 못하고 돈지갑에 있던 1500딸라를 강탈당하고 말았다. 억울했지만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그때 나는 돈을 잃었다는 아쉬움보다는 렬악한 치안상황으로 취재를 제대로 완수 못할 것 같은 안타까움에 더 괴로웠다. 두려움을 느끼지 않은 것도 아니였다. 그렇다고 밖에 나가 돌아다니지 않고 숙소에만 박혀있을 수도 없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온 나의 신분은 기자이고 목적은 취재인데 두렵다고 집구석에 박혀서 전전긍긍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취재에 대한 의지가 분명해지자 나쁜 치안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지혜와 배짱도 생겼다. 가급적이면 사람들이 적은 곳이거나 혼자서 다니는 것을 삼가하고 몸에는 귀중품이나 많은 돈을 지니지 않았으며 당당해지려고 노력했다. 언어가 통하지 않고 인신안전이 수시로 위협받는 등 수많은 압력과 도전이 앞을 가로막았지만 취재를 위한 나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있는 기간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소조별리그 14껨과 16강전 2껨 도합 16껨의 경기를 취재했다. 취재한 기사와 수백장의 사진들은 길림신문 사상 처음으로 기자가 월드컵 현장에서 직접 보내온 생생한 보도기사들로 길림신문의 높은 보도경쟁력을 보여주었다. 그때의 그 어렵고 힘들었던 취재길이 어언 8년 전의 일이 되였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일수록 더욱 기억에 오래 남아있게 되는 법인 것 같다. 내 기자생애에서 인신위협을 느낄 만큼 두렵고 힘들었던 취재길이였지만 고생한 만큼 보람도 컸던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경기 취재였기에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제공:지부생활  
4    "통일의 풍산개", "통일의 송이", "통일의 귤",통일아 어서 오라 댓글:  조회:2996  추천:0  2018-11-13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초 청와대 관저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선물한 풍산개 곰이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청와대 제공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남북관계의 일이 이와 같기만 바랍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12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선물한 풍산개 ‘곰이’가 9일 새끼 6마리를 낳았다는 소식을 직접 트위터로 전하며 이같이 적었다.  김 위원장은 9월 27일 문 대통령에게 풍산개 암수 한 쌍을 선물로 보냈다. 풍산개 두 마리는 검역 절차를 마치고 청와대 관저에서 문 대통령이 키우던 풍산개인 ‘마루’와 함께 살고 있다. 이 중 암컷 곰이가 새끼를 낳았다는 것. 문 대통령은 “(새끼는) 암수 3마리씩. 모두 흰색. 다 건강해 보인다”며 “개는 임신기간이 두 달 정도이기 때문에 ‘곰이’는 새끼를 밴 채 우리에게 온 것이 분명하다”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청와대도 ‘곰이’에 대한 사진촬영을 금지하는 등 특별 관리에 들어갔다. 청와대 관계자는 “강아지들이 너무 어리고 어미개도 초산이라, 강아지와 어미개의 건강을 염려해 (문 대통령이) 지금은 사진을 찍지 말자고 하셨다”고 설명했다.  문 대통령이 풍산개 ‘곰이’의 출산을 직접 트위터에 올리며 댓글에 남북관계에 대한 기대를 표명한 것을 두고 연내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을 우회적으로 요청한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청와대는 9월 평양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 위원장이 선물로 보낸 자연산 송이에 대한 답례로 11일 제주산 귤 200t을 평양에 보냈다.   문병기 기자  =======================///           안티 트럼프 대표 방송사답게 트럼프를 놀리듯이 "네가 김정은이랑 알콩달콩 한다는데 선물은 아직 못받았지롱" 하면서 평양에서 문재인 대통령한테 우정의 상징으로  귀한 한국산 사냥개 풍산개를 보냈다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이 동물 애호가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유기견인 토리를 "퍼스트 독"으로 입양한 사연을 사진까지 넣어서 보도합니다.               내친 김에 마루와 찡찡이까지 소개             네티즌이 그려준 문프와 쑤기 여사님이 키우는 애완동물 그림까지 기사에 넣으면서 문프의 동물 사랑을 강조 또 강조. ==========================               모처럼 양산집을 찾은 정숙씨 제일 보고 싶어했던 외손주가 할머니를 맞는다. 이제 막 두돌 지난 외손주.   동네 이웃이 손주 친구하라면 준 강아지 쯔쯔는 한달 된 스피츠다.   외손주와 쯔쯔의 재롱에 정숙씨, 한참 웃었다.     ***고양이 찡찡이     안겨있으면서도 한손으로는 밀어내는 찡찡이 ㅋㅋ      삐진 찡찡이      -문재인 후보님이 유일하게 인터넷 쇼핑으로 사는 물건이 고양이 사료라고 함 ㅋㅋㅋ 충실한 집사인듯ㅋㅋㅋ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문재인 고양이 찡찡이, 쥐 사냥에 능해"   5년전의 일입니다. 참여정부가 끝나고 문재인 후보가 고향 양산 시골집에 내려와 있을 때였습니다.  저와 문후보는 내외간에 잘 아는 사이인지라 집사람과 함께 양산 집에 놀러갔지요. 그 집은 자그마한 단독주택입니다. 마당도 좀 있지요.근데 집 마루에 죽은 쥐가 있는 겁니다. 요즘 아무리 농촌이라 해도 마루에 죽은 쥐가 있는 건 참 보기 드문 일입니다. 사실 좀 놀랬습니다. 이 집에 쥐가 그렇게 많은가 싶기도 하고, 왜 이걸 안 치웠나 싶기도 하고 희한한 일이다 했습니다. 근데 부인 김정숙 여사가 나오더니 황급히 쥐를 치웁디다. 제가 물어봤습니다. "집에 쥐가 많습니까, 쥐약이라도 놓은 겁니까"그랬더니 김여사 말씀이 그 집 고양이가 문후보 보여주려고 매일 쥐를 잡아와서는 마루에 놓아둔다는 겁니다. 문후보 집 고양이 이름이 찡찡이입니다. 그 녀석은 유기묘, 그러니까 유기견처럼 버려진 고양이에요. 찡찡이는 문후보가 데려와서 키우고 있었는데, 얼마나 녀석을 사랑해줬으면 주인님에게 칭찬받으려고 열심히 쥐를 잡아오는 거였습니다. 김여사님은 그런 찡찡이 마음을 아니까, 문후보가 집에 와서 죽은 쥐를 보고 찡찡이를 불러 칭찬을 해줄 때까지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두고 있었습니다. 부창부수, 그 지아비에 그 아내다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풍산개 마루              **마루와 찡찡이는 유기견, 유기묘 라고함 ㅠㅠ      
3    [동네방네] - 땔감으로 쓰던 나무가 억대 나무라니... 댓글:  조회:3221  추천:0  2018-11-13
[여기는 중국] 땔감으로 쓰던 나무, 알고보니 억대 최고급 목재 2018.11.13.  자동요약   음성 기사 듣기   번역 설정   공유   글씨크기 조절하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서울신문 나우뉴스] 중국의 한 공원에서 죽은 나무 2그루가 우리 돈으로 23억3300만 원에 팔려 관심이 쏠리고 있다. 11일 중국 파즈완바오 등 현지언론 보도에 따르면, 지난해 6월 하이난성 하이커우시 인민공원에서 벌채된 죽은 나무 2그루가 1428만2000위안(23억3300만 원)에 낙찰됐다. 이는 현지에서 고급 가구나 악기, 조각품 제작에 쓰이는 최고급 목재였기 때문. 하이난 황화리(黃花梨)로 불리는 이들 나무의 희소성을 몰랐던 인근 주민들 중 한 여성은 “벌채하기 전에도 땅에 떨어져 있던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 종종 땔감으로 써 버렸다”고 밝히며 큰돈을 놓쳐 아쉬움을 드러냈다. 공원 측은 이미 오래전에 죽어버린 두 나무를 지난해 6월 벌채한 뒤 총 91개의 통나무로 분리해 창고에 보관해 왔고 1년이 지난 11월 2일 온라인 경매를 통해 일괄 판매하기 시작했다. 입찰 개시 가격은 515만2000위안(약 8억4100만 원)이었지만, 나무의 희소성을 아는 사람들이 몰려 그 가격은 3배에 달하는 1428만2000위안에 최종 낙찰된 것이었다. 하이난 황화리는 하이난성이 원산지이긴 하지만, 그 대안으로 광둥성 일대에도 심어지기 시작했다.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돼 워싱턴조약에 따라 국제적 상거래는 금지돼 있다. 중국에서도 국가 2급 중점보호야생식물로 지정돼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강향단(학명 Dalbergia odorifera T. Chen.)으로 불리며 주로 약재로 쓰인다. 하이난 황화리의 가격 급등은 비교적 최근 일로, 한 여성은 “예전에 남편이 가구 만드는 일을 했는데 하이난 황화리도 자주 사용했다. 뿌리 부분이나 끝부분은 사용하지 않았고 이웃 주민이 땔감으로 쓴다고 해서 그냥 준 적도 있다”면서 “지금처럼 이렇게 비싸질 줄은 아무도 몰랐으니까”라고 회상했다. 현재 하이커우시 인민공원에는 하이난 황화리가 12그루 남아 있는데 공원 측은 불법으로 이들 나무를 베어가는 행위를 막기 위해 이들 나무 주위에 철제 구조물이 세우고 24시간 체제로 감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윤태희 기자
2    [민족의 자랑] - "아리랑고개 넘어가고, 넘어오고..." 댓글:  조회:3860  추천:0  2018-11-13
35년전 이탈리아 '홍 자매' 아리랑 발굴, 문경아리랑제 성과 이재훈 2018.11.13.  음성 기사 듣기   번역 설정   공유   글씨크기 조절하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서울=뉴시스】조수정 기자 = 홍이경, 홍이진(오른쪽) 자매가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에스타워에서 최초 아리랑 국제경연 수상 'COREA- ARIRANG' 수록 음반 문경시 기증식에 앞서 인사말 하고 있다. 홍이경 이진 자매는 각각 6살, 4살이던 1983년 제26회 이탈리아 제끼노 도로(Zecchino doro) 어린이가요제에서 'COREA- ARIRANG'-본조아리랑으로 2등상을 수상했다. 이날 자매가 문경시에 기증한 음반은 디아스포라 아리랑 제11회 문경새재아리랑제에 특별 전시된다. 2018.11.13.  【서울=뉴시스】 이재훈 기자 = "35년 만에 연락을 주셔서 깜짝 놀랐죠." 홍이경(42)·이진(39) 자매는 1983년 이탈리아 제26회 '제키노 도로 동요제'에 참가해 '아리랑'을 불렀다. '순금의 금화'라는 뜻의 이 동요제는 현지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어린이 음악경연대회다. 1959년 1회를 열었다. 이탈리아 자국민뿐 아니라 다른나라에서도 참가신청을 받는 국제대회다. 국내에서 번안곡 '검은 고양이 네로'로 유명한 '검은 고양이를 갖고 싶었어'(Volevo Un Gatto Nero)가 1968년 이 대회 참가곡이기도 했다. 이런 대회에서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함께 한 편곡으로 부른 홍 자매의 아리랑은 2등상을 받았다. 홍이진씨는 "국제어린이가요제로 전통이 깊다"면서 "전문성이 있는 대회로 '검은 고양이 네로' 외에도 유명한 노래들이 많다"고 전했다.  홍 자매, 제26회 제키노 도로 동요제 수상 당시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는 홍 자매의 '아리랑'이 이탈리아 음악경연대회에서 상을 받은 것에 대해 "지금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아리랑'의 최초 국제경연대회 수상"이라면서 "우리가 몰랐던 세계 속의 아리랑이 존재했다는 것인데, 각 지역 아리랑의 세계화 작업에 참고할 만한 사례"라고 특기했다. 홍 자매의 아버지는 이탈리아에서 유학을 하고 터전을 꾸렸다. 현지에서 태어난 홍 자매가 대회에 참가했을 때 나이는 각각 일곱 살과 네 살이다. 홍이진씨는 "관객들이 많았고 상당히 즐거웠던 기억이 흐릿하게 난다"고 했다. "재미있게 노래를 했고 반응이 좋았던 기억이 난다"며 웃었다. 언니 홍이경씨의 기억은 조금 더 또렷하다. "노래를 한다는 자체는 즐거웠지만 관객들이 많아 떨었던 기억이 난다."  【서울=뉴시스】조수정 기자 = 홍이진(오른쪽), 홍이경(왼쪽) 자매가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에스타워에서 최초 아리랑 국제경연 수상 'COREA- ARIRANG' 수록 음반을 문경시에 기증하는 서명을 한 뒤 기증서와 음반을 들고 기념촬영 하고 있다. 홍이진 이경 자매는 각각 4살, 6살이던 1983년 제26회 이탈리아 제끼노 도로(Zecchino doro) 어린이가요제에서 'COREA- ARIRANG'-본조아리랑으로 2등상을 수상했다. 이날 기증한 음반은 디아스포라 아리랑 제11회 문경새재아리랑제에 특별 전시된다. 2018.11.13.  홍 자매는 2006년 귀국, 한국에서 살고 있다. 홍이경씨는 한국 국적, 홍이진씨는 이탈리아 국적이다. 홍이경씨는 이탈리아 정부기관인 무역소에서 근무 중이다. 홍이진씨는 이탈리아 대표로 정부초청 장학금을 받아 한국에서 공부를 했고, 연세대 복지국가연구센터의 연구교수다. 홍 자매가 부른 '아리랑'이 실린 제26회 제키노도로동요제 기념음반은 문경문화원과 한겨레아리랑연합회가 '디아스포라 아리랑, 제11회 문경새재아리랑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발견했다. 1986년 KBS 라디오 특집방송 '아리랑 아리리요' 준비 당시 KBS 사장이 이탈리아에서 카세트 테이프를 받아 방송했는데 이후 분실됐다. 연합회 측이 이번 아리랑제를 준비하면서 이 음반의 존재를 확인했고, '아리랑'을 부른 홍 자매에게 연락이 닿았다.  【서울=뉴시스】조수정 기자 = 홍이진(오른쪽), 홍이경(왼쪽) 자매 최초 아리랑 국제경연 수상 'COREA- ARIRANG' 수록 음반 기증식이 열린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에스타워에서 고윤환 문경시장이 자매에게 기증서와 음반을 전달받은 뒤 기념촬영 하고 있다. 홍이진 이경 자매는 각각 4살, 6살이던 1983년 제26회 이탈리아 제끼노 도로(Zecchino doro) 어린이가요제에서 'COREA- ARIRANG'-본조아리랑으로 2등상을 수상했다. 이날 기증한 음반은 디아스포라 아리랑 제11회 문경새재아리랑제에 특별 전시된다. 2018.11.13.  이탈리아에 있는 홍 자매의 부모에게 LP 등을 전달 받아 12월 10, 11일 경북 문경문화예술회관에서 펼쳐지는 '디아스포라 아리랑, 제11회 문경새재아리랑제'에 특별 전시한다. 고윤환 문경시장은 "문경은 현재 아리랑 전승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뜻깊게 활용하겠다. 35년 전 이탈리아 어린이들에게 아리랑의 아름다움을 전한 자매의 공로에 시민들을 대신해 감사한다"고 밝혔다. 홍이진씨는 "'아리랑'은 남북 간 모두에게 의미가 있는 노래이다 보니, 여전히 크게 와닿는다"면서 "이번 전시가 역사를 공유하고 기억하는 의미가 돼 뜻 깊다"고 했다. 홍이경씨는 "한겨레아리랑연합회 같은 좋은 일을 하는 단체가 있는 것 알게 돼 기쁘다"면서 "한국 전통을 세계에 잘 알리고 이어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서울=뉴시스】조수정 기자 = 홍이진(오른쪽), 홍이경(왼쪽) 자매 최초 아리랑 국제경연 수상 'COREA- ARIRANG' 수록 음반 기증식이 열린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에스타워에서 고윤환 문경시장에 기증서를 전달하고 있다. 홍이진 이경 자매는 각각 4살, 6살이던 1983년 제26회 이탈리아 제끼노 도로(Zecchino doro) 어린이가요제에서 'COREA- ARIRANG'-본조아리랑으로 2등상을 수상했다. 이날 기증한 음반은 디아스포라 아리랑 제11회 문경새재아리랑제에 특별 전시된다. 2018.11.13.  기미양 아리랑학회 연구이사는 "홍 자매의 아리랑은 1980년대 초 예술의 나라 이탈리아에 아리랑을 알렸다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면서 "지금 들어도 작품성이 뛰어난 음원"이라고 평했다. 한편 '디아스포라 아리랑, 제11회 문경새재아리랑제'는 세계 속 아리랑의 위상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리라는 기대를 모으고 있다. '1세대가 넘어간 아리랑고개, 3세대가 넘어 온다'를 주제로 해외 동포들이 부른 다양한 아리랑을 들을 수 있다.  
1    력사와 세월과 력사과 시간과 그리고 세월이 약,ㅡ 그리고 ... 댓글:  조회:3462  추천:0  2018-11-13
/독립운동 현장 中 만주를 가다 / 내년 3·1운동, 임정수립 100년    중국 지린성 룽징시에 중국 정부가 복원한 윤동주 시인 생가. 1920년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 부대는 봉오동 골짜기로 일본군을 유인해 급습했다. 봉오동에 매복한 독립군 900명은 일본군 제19사단 월강추격대대 1200명과 싸웠고 157명을 사살했다. 아군 전사자는 4명에 그쳤다. `청산리 대첩`과 함께 독립군 최대 전과로 기록되는 `봉오동 전투`다.   봉오동 전투는 한국 독립군이 처음으로 일본 정규군과 싸워 이긴 전투다. 한민족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사건이지만 흔적은 현재 중국에 남아 있다. 봉오동 전투 전적지는 중국 투먼(圖們)시에 있다. 함경북도 온성이 보이는 곳으로 천혜의 매복지지만 현재는 저수지로 이용되고 있다. 저수지 이름은 `봉오저수지’. 봉오골이 물 아래로 잠기는 동안 `봉오`라는 문구는 저수지 이름으로만 남았다. 중국은 1982년 농업 용수를 확보하려고 펑우(風梧)댐을 건설했다. 한민족평화나눔재단(이사장 소강석 목사)과 함께 최근 찾은 봉오동 전투의 흔적은 전적비가 유일했다. 이 전적비는 중국 정부가 조성했다. 2013년 투먼시는 전적지 입구 왼편에 비석을 세웠는데, `봉오골(동)전투기념비`라는 한글 문구와 한자를 병기했다. 또한 중국은 전적비 가운데 윗부분에 혁명 열사를 상징하는 붉은 별을 함께 새겼다. 기념비 문구 또한 봉오동 전투를 중국 역사로 편입하려는 의도를 그대로 드러냈다. 중국이 봉오동 전투를 비문에서 소개한 문구는 다음과 같다. `봉오골(동) 전투는 중국 조선족 반일무장이 여러 민족 인민들의 지지하에 처음으로 일본 침략군에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둔 규모가 비교적 큰 전투로서 력사적으로 봉오골(동) 대첩이라고 부른다.`  중국 지린성 투먼시의 봉오동 전투 전적지에 기념비 두 개가 서 있다. 1993년 세운 기념비 뒤로 중국 정부가 2013년 새로 건립한 기념비가 위치한다. 중국은 전적지 곳곳에 전사자를 추념해 세운 비석에 어김없이 붉은 별을 새겨 기념했다. 새로운 전적비를 세우기 전 봉오동 전투를 기념하는 비석은 1993년 세운 작은 기념비뿐이었다. 현재 이 비석은 새롭게 세운 전적비 왼쪽 100m 지점에 있다. 흙에 파묻혀 글씨조차 또렷하지 않은 이 비석은 중국이 그동안 봉오동 전투를 어떻게 봤는지 알린다. 뒤늦게 중국 역사로 편입하려 2013년 새롭게 기념비를 세운 저의가 무엇인지 짐작할 만하다. 반면 한국은 물론 북한이 봉오동 전투를 기념한 흔적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간간이 봉오동 전투 전적지를 찾는 관광객이 태극기를 흔들 때만 한민족 역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홍범도 장군(1868~1943)을 기억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그의 독립 투쟁이 경계선에 놓인 까닭이 크다. 홍범도 장군은 러시아 공산당원이었고 카자흐스탄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국은 이념 때문에 오래도록 홍범도 장군을 기억하지 않았고, 북한은 그를 중국 역사로 편입하려는 시도에 저항하지 않았다. 남북한이 모두 외면하고 방치하면서 홍범도 장군은 중국의 혁명 열사로 둔갑하고 있다.  중국의 집요한 역사 편입 시도는 비단 항일 무장 투쟁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윤동주 시인(1917~1945)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민족 시인이지만, 그조차도 중국은 조선족 민족 시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중국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 주도 옌지(延吉)에서 자동차를 타고 30분을 이동하면 윤동주 고향 룽징시(龍井市) 명동촌(明東村)이 나온다. 전체 가구 수가 20~30가구에 불과한 작은 농촌 마을이지만, 이곳은 윤동주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윤동주가 언급하는 고향 간도는 바로 이 지역을 말한다. 중국은 한동안 방치되던 명동촌에 윤동주 생가를 복원했고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명동학교 또한 복원했다. 송길연 전 명동촌장(63)은 "명동학교는 일본군이 세 차례 불을 질러 사라졌던 곳"이라며 "옛날 사진을 토대로 네 번째로 복원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명동학교는 윤동주와 사촌 송몽규뿐만 아니라 김창걸, 라운규와 같은 예술인을 다수 배출한 학교다. 철저히 민족 정신을 교육했고 1929년 폐교할 때까지 졸업생 610명을 배출했다. 송 전 촌장은 "명동학교 졸업생 99%는 독립운동에 투신했다"면서 "역사는 흘러가지만 알아야 할 것은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찾은 명동학교는 옛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다. 다만 다소 위화감이 느껴졌다. 명동학교 마당에 펄럭이는 중국 국기 오성홍기는 명동촌이 중국 땅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명동학교가 배출한 인물들을 중국은 조선족으로 규정하고 있다. 명동학교 왼편에 위치한 윤동주 생가 또한 마찬가지다. 윤동주 생가 입구에 세운 안내판에는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생가`라고 표기돼 있었다. 윤동주 생가 곳곳에 한글과 한자를 병기한 시비를 배치했는데, 마치 한글조차도 중국 문자 가운데 하나로 보는 듯했다. 중국 정부가 투자해 명동촌 옛모습을 복원했지만, 한민족 역사로 복원한 것은 아니었다. 마치 한글 설명을 곳곳에 세운 것은 한국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안내판 같았다.중국이 한국 역사를 자국 역사로 편입하는 과정은 꾸준하고 집요하게 계속되고 있다. 2002년 중국 정부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추진하면서 만주 지역에 위치한 동북3성 역사와 연구를 편입하기 시작했다.                                                                                                                                                                                                            고구려와 발해 역사 또한 중국사 일부로 규정한 것도 이때부터다. 한국은 강력히 저항했지만 중국 영토 안에 있는 유적지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언젠가 시간이 흘러 홍범도 장군과 윤동주 시인이 중국인이 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어쩌면 1910년 일본에 주권을 빼앗긴 경술국치보다 더 큰 시련이 목전에 닥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투먼·룽징 = 김규식 기자]ⓒ 매일경제 //////////////////////////////////////////////////////////////////=== 내년 3·1운동 100주년…항일투쟁 자취를 찾아서... '간도대통령' 김약연 선생 유학자였으나 기독교 수용해 교육·독립운동의 토대 삼아 학교 옛터엔 기념관·기념비 뿐 중국으로 포장된 '윤동주 생가' 평생 한글로만 詩를 썼는데  '중국 조선족 시인' 표지석 관광테마공원처럼 꾸며 씁쓸 중국 룽징의 명동학교 옛터 기념관에서 전 명동촌 서기 송길연 씨가 책상 앞에 앉은 윤동주 시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서울에서 시작된 3·1만세운동의 불길은 시차를 두고 전국 각지는 물론 국외로도 번졌다. 두만강 건너 북간도 룽징(龍井·중국 지린성)의 드넓은 들판인 서전대야(瑞甸大野)에서 만세 소리가 울려 퍼진 건 1919년 3월13일. ‘조선독립선언서 발표 축하회’에 모여든 3만여 명이 들판을 가득 메웠다. 독립선언서 낭독이 끝나자 “대한독립 만세!” 소리가 천지를 울렸다.   행사가 끝난 후 룽징의 일본영사관으로 향하던 만세 시위대 중 17명이 일본 무장경찰 발포로 순국하고 30여 명이 다쳤다. 이에 분노한 동포들은 그해 5월 말까지 만주 전역에서 50차례 이상 만세 시위를 벌였다. 또한 무장 투쟁론이 확산하면서 이듬해 봉오동 및 청산리전투의 대승으로 이어졌다. 이 같은 북간도 독립운동의 중심은 명동촌과 명동학교였다. 옌지(延吉)에서 룽징을 지나 북·중 접경 지역인 두만강변 싼허(三合) 방향으로 20㎞쯤 가다 보면 명동촌이 있다. ‘명동’ ‘윤동주 생가’라고 크게 새긴 표지석을 지나 마을로 내려가다 맨 처음 만나는 게 윤동주 시인의 생가다. 높다란 담장을 두르고 ‘중국 조선족 시인 윤동주 생가’라고 한글과 한자로 새겨 놓은 모양이 왠지 낯설다. 평생 한글로만 시를 쓴 윤동주가 ‘중국 시인’이라니…. 김약연 선생 흉상 오랜 세월 허름한 시골에 불과했던 명동촌은 깔끔하게 단장한 관광지로 변모했다. 윤동주 생가 구역에 들어서자 크고 작은 시비들이 즐비하다. 윤동주의 반신상을 부조하고 ‘서시(序詩)’를 한글과 한자로 새겨 놓은 시비는 사람 키보다 크다. 조경도 공원처럼 깔끔하게 정비해 놓았다. 시비를 지나 생가로 가는 길목 오른편에 허름한 비각(碑閣)이 눈에 띈다. 비석에 한자로 새겨진 글자는 ‘김약연 목사 기념비’. 비석 윗부분이 깨져 ‘金’자는 온전치 않다. 비석 가장자리도 상처 투성이다. 1944년 세워진 기념비는 중국 공산화와 문화혁명을 거치며 마을 앞 개울의 징검다리로 사용되고, 밭에 묻히는 등 수난을 겪다가 1980년대에 와서야 복원됐다고 한다. 특이한 건 비석을 받치고 있는 책 모양의 조형물. 성경이다. ‘간도 대통령’으로 불린 김약연 선생(1868~1942)은 1899년 함경북도 종성·회령에서 김하규, 문병규, 남종구 등 다른 유학자 네 명과 함께 두만강을 넘어와 명동촌을 일궜다. 이듬해엔 윤하현이 가솔을 이끌고 합류했다. 김약연은 윤동주의 외숙, 문병규는 문익환 목사의 조부, 윤하현은 윤동주의 조부다. 다섯 집안의 일가 160여 명은 불과 5~6년 만에 약 20㎢의 토지를 개간했고 10여 개 마을이 잇따라 형성됐다. 서울시, '3·1운동 무대' 삼일대로 역사 거리로 조성   이상설이 북간도에 세운 첫 학교인 서전서숙이 그가 헤이그 특사로 떠난 뒤 문을 닫자 김약연은 1908년 명동학교를 열었다. 특히 신민회 회원인 정재면을 통해 받아들인 기독교 신앙은 명동촌과 명동학교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신앙과 삶, 교육, 독립운동이 한몸으로 움직였던 것. 김약연은 명동교회를 세웠고, 1929년에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명동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훗날 사회주의자가 된 이동휘도 전도사로 활약했다.   1929년 인민학교로 넘어가기 전까지 명동학교는 12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윤동주와 송몽규, 나운규와 문익환 목사가 이 학교 출신이다. 명동촌에서 서기를 지낸 송길연 씨(63)는 “명동학교 졸업생의 99%는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3·13만세운동에 앞장선 것도 명동학교 학생들”이라고 설명했다. 평일이라 그런지 윤동주 생가는 찾는 이가 별로 없이 고즈넉하다. 10칸짜리 기와집인데 부엌과 아궁이가 실내에 있는 구조다. 어린 윤동주와 송몽규, 문익환이 여기서 크고 어울렸겠구나 싶어 감회가 새롭다. 윤동주 생가에서 명동학교로 가는 길목에는 송몽규의 옛집도 깔끔하게 단장돼 있다. 하지만 커다란 철문이 굳게 잠겨 있어 들어갈 수 없었다. 명동학교 옛터에는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명동학교의 역사와 김약연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의 생애와 사진, 친필 원고, 주요 사건과 관련 사진, 당시 공부했던 교과서 등을 전시해 놓았다. 교실 하나에는 한복 차림으로 공부하고 있는 윤동주 모습을 재현해 당시 분위기를 짐작하게 한다.   지금의 명동촌은 말끔하게 단장돼 있지만 느낌이 씁쓸하다. ‘중국조선족 교육 제1촌(村)’이라는 명동학교 입구의 현판이 말해주듯 모든 것이 ‘중국’이라는 외피로 덮여 있어서다. 기념관 바로 옆에 김약연 흉상이 서 있다. 짧은 머리에 팔(八)자 수염을 기른 선생의 꼿꼿한 모습을 대하니 그의 유언이 떠오른다. “나의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 룽징=서화동 문화선임기자 =======================/// [연해주·동북 3성 항일 유적지 한민족순례] 지워져 가는 역사의 현장들 러시아 크라스키노에서 중국 옌볜조선족자치주 훈춘시로 가려면 러시아, 중국 세관을 차례로 거쳐야 한다. 수백여m를 사이에 두고 두 곳은 극명히 비교된다. 낡고 허름한 러시아 세관에 비해 중국 세관은 최신 지문 인식 기계를 도입했고, 규모 역시 수십 배나 된다. 비포장도로도 중국으로 들어서면 매끈한 아스팔트로 바뀐다. 달라진 중국의 모습을 새삼 느낀다. ▲ 중국 옌볜조선족자치주 왕칭현 봉오동전투 전적지의 흙바닥에 1993년 제작한 낡은 기념비가 방치된 채 놓여 있다. 오른편 너머로 2013년 새로 세운 기념비(원 안)가 보인다. 새 기념비에는 중국을 상징하는 붉은 별 문양과 함께 ‘중국 조선족 반일무장이 여러 민족 인민들의 지지하에 승리를 거뒀다’는 내용의 문구가 포함됐다. 지난 24일 훈춘시에서 하루를 보내고 투먼시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1시간 정도 더 가면 왕칭현 봉오동이다. ‘봉오저수지’라는 한글과 한자를 함께 적은 간판을 지나 10여분을 더 걸어가니 매끈한 화강암으로 만든 ‘봉오동 기념비´가 나온다. 2013년 투먼시 인민정부가 세운 것으로, 글씨 윗부분에 중국을 상징하는 붉은 별 문양이 붙었다. 그 뒤로 100m 정도 떨어진 흙바닥에 1993년 만든 낡은 기념비가 적벽돌 주춧돌을 그대로 드러낸 채 방치돼 있다. ▲ 김성호 명예교수 두 기념비는 문구가 조금 다르다. 새 기념비는 봉오동전투에 관해 “중국 조선족 반일무장이 여러 민족 인민들의 지지하에 처음으로 일본 침략군과 맞서 싸워 중대한 승리를 거둔 규모가 비교적 큰 전투”라는 부분을 추가했다. 두 개의 기념비에서 중국의 역사관을 어렴풋이 느낄수 있다. 기념비 왼편 계단을 올라 비탈길을 10분 정도 더 가면 봉오동 전적지를 볼 수 있다. 1970년대 후반에 댐을 만들며 많은 지역이 수몰됐지만, 그나마 저수지 너머로 당시 전투지가 남아 있다. 1919년 3·1 만세운동 이후 연해주를 비롯해 간도와 만주에서 수많은 독립군 부대가 일어났다. 이들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나들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일본 정규군과 싸워 최초로 승리한 전투가 바로 봉오동 전투다. ‘나는 홍범도´로 불리는 의병장 홍범도가 이끄는 부대와 난무의 대한국민회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가 연합한 ‘대한북로독군부’가 산에서 매복하다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추격한 야스가와 지로 소좌가 이끄는 일본군 19사단의 ‘월강 추격대대’를 격파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군 전사 157명, 중상 200여명 독립군 전사 4명, 부상 2명이라고 발표했다. 다만 이 숫자에 관해서는 의견이 여전히 갈린다. 버스를 타고 80㎞를 달려 옌지시로 향했다. 한 식당에서 옌볜에서 가장 유명한 역사학자로 꼽히는 김성호(67·전 조선력사연구소장) 옌볜대 명예교수를 만났다. 그는 1980년대 평양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에서 근현대사를, 1990년대는 인하대에서 조선근현대사를 공부해 박사 학위를 받은 독특한 이력이 있다. 그에게 봉오동전투 일본군 사상자 수가 왜 불명확한지 묻자 “하나의 역사를 두고 조선, 미국, 중국, 일본이 다 다르게 말했다. 자기 나라에 맞게 부풀리거나 줄이는 사례가 당시에는 흔했다”는 답이 돌아온다. 그는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전투’에 관해서도 “당시 독립신문이 일본군 2000명이 죽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장소에 직접 가 봤나. 2000명이 누울 자리 있던가”라고 되물었다. 그러면서 “과거와 달리 지금도 정권이 앞장서서 그런 식으로 주장하면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남북이 갈라진 지금 역사 인식을 통해 분단 사관을 극복해야 한다”며 “안중근 의사, 일본군 위안부, 항일투쟁 등 남북 역사학계가 함께할 수 있는 주제부터 다뤄야 한다”고 충고했다. ▲ 룽징시 명동학교에 있는 윤동주 생가. ▲ 명동학교 교실 내에 윤동주 실물 인형을 두어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했다. 옌지시에서 룽징시를 향해 1시간 정도 더 달리면 명동학교가 나온다. 명동학교는 ‘간도 대통령’으로 불린 민족운동가 김약연이 세운 학교다. 그는 1908년 간도 명동으로 이주해 한인 집단 촌락을 건설하고, 명동학교를 세워 인재를 길렀다. 윤동주를 비롯해 문익환, 나운규, 송몽규 등이 이곳에서 공부했다. 1929년까지 모두 1200여명의 졸업생이 나왔다.   졸업생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는 윤동주다. ‘명동’, ‘윤동주 생가’라고 쓰인 큰 안내돌을 돌아 마을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윤동주 생가와 마주한다. 1932년 윤동주가 용정 은진학교에 진학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팔려 허물어졌던 것을 1994년 복원했다. 윤동주는 명동소학교, 은진중학교를 거쳐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편입해 공부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자퇴해 1941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했다. 이후 일본 도쿄 릿쿄대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교토 도시샤대 문학부로 전학했다.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까지 했지만, 항일독립운동으로 1943년 일본 경찰에 체포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체실험을 당하다 옥사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게 살기를 바랐던 민족시인의 향취를 이곳에서 느끼긴 어려웠다. 명동촌은 봉오동 전적지와 마찬가지로 ‘연변조선족자치주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돼 관리 중이다. 집 인근에 윤동주의 시가 적힌 금색 조형물이 군데군데 박혀 있었다. 이곳에서 200여m 정도 떨어진 명동학교는 너무 번듯하게 새로 지어놔 어색하기까지 했다. 명동학교에 들어가니 교실에 윤동주 인형을 만들어 사진 촬영용으로 쓰고 있었다. 준수한 얼굴의 인형을 바라보며 실소가 났다. 명동학교의 옛 모습은 간데없고 인공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값싼 관광지를 찾은 느낌만 들었다. 현지 가이드가 ‘중국은 돈 되는 것이라면 뭐든 한다’며 농담을 건넸지만 웃을 수가 없었다. ▲ 가곡 ‘선구자’의 배경이 됐던 룽징시 비암산 일송정 역시 관광지로 탈바꿈했다. 명동학교를 나와 가곡 ‘선구자’의 배경이 된 룽징시 비암산의 일송정으로 향한다. 버스를 타고 산 정상까지 오르며 조잡한 관광물을 계속 마주쳐야 했다. 일송정 역시 울긋불긋한 정자로 탈바꿈한 지 오래다. 독립운동가들이 바라보며 울분을 달래고 마음을 다잡았던 해란강이 시야에 들어온다. 흔적만 남은 러시아의 항일독립운동 유적지, 중국풍으로 바뀐 중국의 항일독립운동 유적지를 돌아보니 가슴이 답답해진다. 해를 등지고 산에서 내려오며 ‘우리는 그동안 무얼 했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글 투먼·룽징(중국) 김기중 기자 ///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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