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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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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백두산 / 조기천 댓글:  조회:2826  추천:0  2018-11-18
  시대 현대 저작자 조기천 창작/발표시기 1947년 성격 시 유형 작품 분야 문학/현대문학 요약 조기천(趙基天)의 장편 서사시. 목차 구성 및 형식 내용 현황 의의와 평가 구성 및 형식 이 시는 1947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머리시’, 제1장∼제7장의 본시, ‘맺음시’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으며, 길이는 전체 1,564행(1989년 ‘실천문학사’판 기준)으로 되어 있다. 내용 이 서사시는 1930년대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항일무장투쟁, 특히 김일성의 보천보전투를 소재로 하고 있는 작품이다. 머리시는 “삼천만이여!/오늘은 나도 말하련다!/‘백호’의 소리 없는 웃음에도/격파 솟아 구름을 삼킨다는/천지의 푸른 물줄기로/이 땅을 파몰아치던 살풍에/마르고 탄 한가슴을 추기고/천 년 이끼 오른 바위를 벼루돌 삼아/곰팽이 어렸던 이 붓끝을/육박의 창끝인 듯 고루며/이 땅의 이름없는 시인도/해방의 오늘 말하련다”로 시작된다. 본시 1장에는 “조선의 빨찌산 김대장”이 등장하는데, “천리허의 대령도 단숨에 넘나드니/축지법을 쓴다고―/북천에 새 별 하나이 솟아/압록의 줄기줄기에/그 유독한 채광을 베푸노니/이 나라에 천명의 장수 났다고/백두산메에서 우러러 떠드는 조선의 빨찌산 김대장!”과 같이 ‘신비화ㆍ영웅화’하고 있다. 2장에서는 ‘박철호’와 ‘꽃분이’가 중심인물이 되어 활동하게 되고, 3장에서는 철호와 꽃분이가 등사기로 ‘선포문’을 찍던 중 일본순사가 출현하나 꽃분이의 기지로 위기를 모면한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4장에서는 유격대원들의 숙영지 생활을 그리고 있는데, 여기서 ‘김대장’은 밤에도 책을 읽는 지도자로 등장하며, 식량부대가 끌고 온 ‘농민의 소’를 놓고 책망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5장에서는 일본수비대의 추격과 철호의 동지였던 ‘영남이’의 죽음을 다룬다. 6장에서는 철호와 꽃분이의 전위대 역할과 김장군의 지휘로 ‘H시’를 공격하는 장면이 그려진다. 특히, ‘H시’가 불길에 싸인 장면에서는 “화광이 춤추는데/밤바다같이 웅실거리는 군중/높이 올라서 칼 짚고 웨치는/절세의 영웅 김일성장군!/동포들이여!/저 불길를 보는냐?/조선은 죽지 않았다!/조선의 정신은 살았다!/조선의 심장도 살았다!/불을 지르라/원쑤의 머리에 불을 지르라!”와 같이 표현하고 있다. 7장은 토벌대의 추격과 유격대의 후퇴, 철호와 석준의 전사를 그리고 있다. 맺음시에서는 독립 조국의 건설이 역사적 소명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는데, “내 세세로 모은 힘 가다듬어/온갖 불의를 즉쳐부시고/내 나라를/민주의 나라를 세우리라!/내 뿌리와 같이 깊으게/내 바위와 같이 튼튼케/내 절정과 같이 높으게/내 천지와 같이 빛나게/세우리라―/자유의 나라!/독립의 나라!/인민의 나라!/백두산은 이렇게 웨친다!/백성은 이렇게 웨친다”는 표현으로 끝맺고 있다. 현황 이 서사시는 1947년 4월 30일북한의 『로동신문』사에서 처음 간행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 재간행되었는데, 1940∼50년대에 출간된 것과 1980년대 이후 출간된 판본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특히, 1980년대 남북한에서 간행된 판본에는 소련과 관계된 내용이 모두 삭제되었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1989년실천문학사에서 간행한 『백두산』의 해설에서 임헌영은 이 작품을 “분단시대 초기의 남북한 이질화가 응고되기 이전에 동질성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의 하나로 주목할 거치가 있는 서사시”라고 평가했다. 한편, 북한에서 간행된 『조선문학개관(2)』에서는 이 서사시가 “현대 서사시의 풍격을 완전히 갖춘 새 시대 서사시 문학의 빛나는 모범”이라고 평가했다.
1    [그것이 알고싶다] - 백두산 댓글:  조회:5779  추천:0  2018-11-18
위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양강도와 중국 지린 성이 접하는 국경 크기 높이 2,750m 대륙 아시아 요약 높이 2,750m로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중국과 국경을 이룬다. 북동에서 남서 방향의 창바이 산맥과 북서에서 남동 방향의 마천령산맥의 교차점에 위치하는 화산이다.  백두산의 중앙부에 천지가 있으며, 그 주변에는 해발고도 2,500m 이상의 회백색 봉우리 16개가 천지를 둘러싸고 있다. 이 가운데 6개 봉우리는 북한에 속하며, 7개는 중국에 속하며, 3개는 국경에 걸쳐 있다. 백두산 중앙부는 넓고 파란 호수 주변에 회백색 산봉우리들이 둥그렇게 둘러 있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백두산에 대해 기록한 최초의 기록에서는 이 산을 불함산으로 불렀으며, 이후 기록에는 단단대령·개마대산·태백산·장백산·백산 등으로 나타난다. '백두산'이라는 명칭이 처음 기록한 문헌은 〈고려사〉다. 목차 자연환경 ┗ 지질과 화산활동 및 지형 ┗ 기후 ┗ 동·식물과 토양 ┗ 물과 자원 한민족과 백두산 조사활동 높이 2,750m로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중국 지린 성 안투 현[安圖縣] 얼다오바이허 진[二道白河鎭]과의 국경을 이룬다. 해방 당시까지 최고봉은 병사봉(2,744m)으로 측량되었으나, 현재는 장군봉으로 이름이 바뀌고 해발고도도 2,750m로 다시 측량되었다. 백두산 ⓒ j125/Pixabay | Public Domain 북동에서 남서 방향의 창바이 산맥[長白山脈]과 북서에서 남동 방향의 마천령산맥의 교차점에 위치하는 화산이다. 화산폭발에 의해서 덮인 부석(경석이라고도 함)이 회백색을 나타내며, 꼭대기는 1년 중 8개월 이상 눈에 덮여서 희게 보이기 때문에 백두산이라 부른다. 중국에서는 창바이 산[長白山]이라고 하며, 만주어로는 '귀러민산예아린'이라고 부르는데 '귀러민'은 길다(長), '산예'는 희다, '아린'은 산을 의미한다. 문헌에 나타난 백두산 최초의 이름은 〈산해경 山海經〉에 불함산(不咸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단단대령(單單大嶺)·개마대산(蓋馬大山)·태백산(太白山)·장백산(長白山)·백산 등으로 불렸다. 한국의 문헌에서 백두산에 관한 기록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 三國遺事〉 기이편에 태백산(太伯山)이란 이름으로 처음 나타나며, 〈고려사〉에도 "압록강 밖의 여진족을 쫓아내어 백두산 바깥쪽에서 살게 했다"하여 '백두산'의 명칭이 문헌상에 처음 기록되었다. 한민족이 백두산을 민족의 성산(聖山)으로 본격적으로 숭상한 것은 고려시대 태조 왕건의 탄생설화부터라고 추정된다. 백두(白頭)라는 이름은 성해응(成海應)의 〈동국명산기 東國名山記〉,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 林下筆記〉 등의 문헌에 의하면 백두산의 산정이 눈이나 백색의 부석으로 4계절 희게 보여서 희다는 뜻의 '백'자를 취하여 이름한 것으로 보인다. 백두산의 범위는 천지 중심의 마그마 활동에 따른 화산암의 분포지로 한정해보면 현재 북한측의 면적은 8,000㎢로 전라북도의 면적(8,052㎢)과 비슷하고 개마고원의 일부가 된다. 그러나 중국측의 백두산 화산암의 분포지까지 합하면 3만㎢에 이른다. 또한 해발고도 1,800m까지는 완만한 경사(8~12°)를 나타내어 방패 모양의 순상화산이나, 1,800~2,500m는 급경사로 종 모양의 화산을 이룬다. 백두산의 중앙부에는 천지가 있으며, 그 주변에는 2중화산의 외륜산에 해당하는 해발고도 2,500m 이상의 봉우리 16개가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데 모두 회백색의 부석으로 덮여 있다. 이 가운데 6개 봉우리는 북한에 속하며(최고봉 2,750m의 장군봉), 7개는 중국에 속하고(최고봉 2,741m의 백암봉), 3개의 봉우리는 국경에 걸쳐 있다. 따라서 천지 수면에서 장군봉 꼭대기까지는 600m의 비고로, 백두산 중앙부는 넓고 파란 호수 주변에 비고 약 500m의 회백색 산봉우리들이 둥그렇게 둘러 있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자연환경 지질과 화산활동 및 지형 백두산지역 지질 단면도 그림1. 백두산지역 지질 단면도 1. 선캄브리아기 화강편마암류 2. 제3기말 현무암대지 3. 제3기말 경사 현무암 고원 4. 제4기 알칼리조면암류 5. 부석 ⓒ 2015, All Rights Reserved.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백두산은 구성암석과 지질구조에 의해서 크게 5부문의 수직구조로 파악된다(그림 1). 백두산의 밑바닥은 선캄브리아기의 화강편마암류이며, 그위에 제3기말의 현무암대지, 제3기말의 경사 현무암고원, 제4기의 알칼리 조면암류, 부석의 순서로 덮여 있다. 백두산의 밑바닥을 이루는 선캄브리아기의 화강편마암류는 평안북도에서 함경북도에 걸치는 평북육괴·함북육괴로 백두산의 지표에서는 극히 일부분의 침식산지를 빼고는 노출되어 있지 않다. 제3기에 들어서 지표로부터 60~70㎞ 깊이의 지하에서 상부 맨틀을 구성하는 암석 가운데 방사능원소들이 붕괴되면서 열점이 만들어졌다. 이의 영향으로 당시의 지표암석인 화강편마암류에 수직방향의 쪼개진 틈(열곡구조)이 만들어졌다. 백두산 형성사 그림2. 백두산 형성사 1. 제3기 열곡구조 형성 2. 제3기말 현무암대지 형성 3. 제3기말∼제4기초 경사 현무암고원 형성 4. 백두산 형성(제4기 화산활동 사이 사이에 5번의 빙하작용 겪음) ⓒ 2015, All Rights Reserved.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해발고도 1,000m까지는 완만한 경사의 현무암대지이다. 이는 제3기말인 310만~1,990만 년 전 6회의 화산분출로 200~400m 두께의 현무암대지가 만들어졌다. 이는 방사능원소들의 붕괴로 만들어진 열점에서의 열에 의해서 암석들이 부분적으로 녹아서 지하 3~5㎞의 마그마 챔버(magma chamber)에 모였다가, 자체 압력이 증가되면서 열곡구조의 약한 틈을 따라서 분출한 현무암이다. 이 현무암은 잘 흐르는 염기성 용암이 굳어진 것으로 천지 주변의 200~300㎞ 범위에 흘러서 3만㎢의 백두산 화산암의 분포지가 되었다. 백두산의 중국 쪽의 사면에서는 해발고도 1,000~1,800m 55㎞의 거리가 경사도 8~12°의 완만한 현무암고원이다. 이는 제3기말에서 제4기초의 제2차 염기성 용암의 분출(약 260만~290만 년 전)로 만들어진 녹회색의 현무암으로 470m 두께로 덮여 있다. 해발고도 1,800m까지, 즉 현무암대지와 경사 현무암고원까지가 순상화산을 이루는데 이는 잘 흐르는 염기성 용암이 여러 번 분출된 까닭이다. 해발고도 1,800~2,500m는 보다 급경사(35~40°)의 종 모양 화산을 나타낸다. 이는 제4기에 21만~61만 년 전, 13만 년 전, 9만~10만 년 전의 3회에 걸쳐 잘 흐르지 않으며 점성이 큰 산성 용암이 분출하여 만들어진 조면암이기 때문이다. 그 두께는 약 650m이다. 백두산 화산재의 분포범위 그림3. 일본 북부에 도달한 백두산 화산재의 분포범위(○표는 확인된 지점, 숫자는 화산재의 두께[cm], tr.는 두께 1cm 이하) ⓒ 2015, All Rights Reserved.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천지 주변의 해발고도 2,500m 이상의 백두산 꼭대기 지표면은 40~60m 두께의 회백색 부석으로 덮여 있다. 이는 가스가 많고 폭발력이 큰 화산에서의 분출 마지막 시기에 나타난 것으로, 공중 분출물이 떨어져 덮인 것이다. 부석은 고온의 마그마가 지상에 분출됨에 따라서 이에 용해되어 있었던 휘발성분과 수증기 등의 가스가 증발되어 바위 부스러기에 구멍이 많이 생기게 된 것으로, 가벼워서 물에 뜬다. 이와 같은 천지 주변의 부석더미는 백두산 화산활동의 최후시기를 나타내며, 천지 형성과정과 그 시기를 나타내는 증거가 된다. 천지는 수면의 해발고도 2,190m, 평균수심 213.3m, 가장 깊은 곳 384m, 남북거리 4.85㎞, 동서거리 3.55㎞, 둘레 14.4㎞, 면적 9.165㎢로 매우 넓고 깊은 호수이다. 일반적으로 마그마의 분출만으로 이루어진 화구는 그 둘레가 2㎞ 이상을 넘지 못한다. 그런데 천지 둘레는 이보다 훨씬 길며 주변의 외륜산에는 화산폭발의 최후시기를 나타내는 부석이 두껍게 덮여 있다. 따라서 천지는 이 부석의 공급원이 되었던 화산폭발과 함께 화구가 함몰하여 이루어진 칼데라에 빗물 등이 모여서 된 칼데라호이다. 천지를 만든 백두산의 화산폭발은 매우 강대하여 화산재가 대류권 상층까지 올려져서 이곳에서 부는 강한 서풍인 제트기류에 의해서 백두산에서 약 1,000㎞ 떨어진 일본의 동북지방 북부에서 홋카이도[北海道] 남부까지 흩어져 있다(그림 3). 이 화산재는 그 성분이 천지 주변의 회백색 부석과 같으며, 가까운 동해 밑바닥에서는 10㎝ 내외의 두께이고 멀리 떨어진 일본 북부에서는 5㎝ 내외로 보다 엷어진다. 일본에서는 이 화산재가 헤이안[平安] 시대 후기의 유물포함층에 존재하여 10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초반에 화산폭발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백두산 정상부에서 부석으로 덮여 있는 탄화된 나무등걸(그림 4의 매몰림대)을 이용한 탄소 동위원소 연대측정값도 1050±70년 B.P.(B.P.는 before present의 약자로 1950년을 기준하여 그 이전의 연대값을 나타냄), 1120±70년 B.P.를 나타낸다. 따라서 천지를 만든 백두산의 대규모 화산폭발은 지금부터 약 1,000년 전인 고려시대 초기에 일어났을 것으로 보여진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597년(선조 30) 8월 26일, 1668년(현종 9) 4월, 1702년(숙종 28) 4월 14일의 3번의 분화가 기록되어 있다. 백두산의 화산활동은 천지 밑 62~67㎞ 깊이의 상부 맨틀 암석 중 방사능 원소들이 붕괴되면서 발생한 열에 의해 암석들이 부분적으로 녹아서, 지하 3~5㎞ 깊이의 마그마 챔버에 모였다가 자체압력이 증가하면서 지각의 약선대를 따라서 분출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제3기말에서 제4기에 걸쳐 여러 번 반복되었는데 지금부터 1,000여 년 전 대규모 화산폭발이 나타나면서 마그마의 저장고였던 마그마 챔버가 함몰되어 천지의 칼데라를 만든 후 화산활동은 차츰 약화되면서 휴화산이 되었다. 그러나 대규모 화산폭발은 지질연대로 보면 오래지 않아서 그 영향으로 천지를 중심으로 반지름 50㎞ 이내에는 소규모의 지진이 자주 나타나고(중국측 자료에 따르면 1973년 4월과 6월에 진도 2.1 및 2.5의 지진이 있었음), 온천이 많다. 백두산의 특색있는 지형으로는 화산지형·빙하지형·주빙하지형 등을 꼽을 수 있다. 화산지형은 주변부의 순상화산과 중앙부의 종상화산이며, 중심부는 칼데라와 외륜산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 번의 화산분출로 이루어진 복성화산임을 알 수 있다. 빙하지형으로는 U자곡과 권곡이 있다. 중국 쪽에서 천지에 이르는 길인 얼다오바이허의 골짜기 가운데 창바이 폭포-빙장 사이의 길이 4㎞, 너비 1㎞의 골짜기가 빙하침식곡인 U자곡이다. 이는 현재 중국의 영토이다. 남포태산(2,433m)의 남쪽 기슭인 포태천 계곡에 빙하퇴적 제방인 빙퇴석(maraine)이 있고, 천지 주변의 칼데라 벽에 빙하침식의 흔적인 권곡과 빙퇴석의 존재가 보고되었다. 이들 빙하지형은 마지막 빙하기(약 1만~7만 년 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어왔으나, 이는 약 1,000년 전 백두산의 화산폭발과 그 함몰에 따른 천지형성과 모순된다. 권곡이 이때의 파괴에서 남은 것이라고 해도 빙퇴석의 존재는 여전히 모순된다. 천지 주변 외륜산 기슭의 빙하지형 문제는 우리나라에서의 마지막 빙하기의 빙하와 천지형성 문제를 푸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백두산은 해발고도 약 2,000m가 수목한계선이 되어 이보다 높은 지대는 짧은 여름철에 풀만 자라는 산악 툰드라 지대에 속해 주빙하지대이다. 천지 주변의 그늘진 골짜기에는 가장 더운 달인 7월에도 눈이 남아 있고, 땅속 0.8~1m 깊이 이하에 영구동토층이 있어 여름에도 녹지 않는다. 주빙하지형으로는 백두산 기상대 근처 동쪽 사면에 표토가 얼고 녹는 것의 반복에 의해 형성된 계단 모양의 솔리플럭션(solifluction), 역시 기상대 부근 2,180m 고도에 작은 무덤 모양으로 표토가 0.3~0.4m 높이로 부풀어 오른 대규모의 유상구조토, 잔설의 재동결과 녹은 물의 침식에 의해서 지면이 둥그렇게 움푹 파인 설식요지, 암석이 얼고 녹는 것의 반복에 의해서 부서지고 무너져내려 바위부스러기 더미를 이룬 애추(talus) 등이 보고되어 있다. 백두산 꼭대기에서는 강한 바람이 부는 때가 많아 바람이 깎은 지형현상으로 풍식구멍·풍식버섯·풍식기둥 등이 암석에 많이 나타나 있다. 기후 천지 주변의 연평균기온은 -7.3℃이며, 1월평균기온 -24.0℃, 7월평균기온은 8.5℃이다. 월평균기온으로 보면 영상의 기온은 6~9월의 4개월간 10℃ 이상으로 오르지 않고, 영하의 월평균기온은 10월에서 다음해 5월까지 8개월간 계속된다(표). 이를 쾨펜의 기후구로 나타내면 한대기후 가운데 툰드라 기후에 속한다. 천지 주변의 백두산 기후는 동결기(10~5월의 8개월간)와 해빙기(6~9월의 4개월간)의 2계절로 나뉜다. 동결기에는 기온이 매우 낮아서 가장 낮은 기온이 -40℃까지 나타나고, 해빙기(이곳의 여름철)에도 월평균기온은 10℃ 이상으로 오르지 못해 땅표면이 녹기만 할 뿐 서늘하여 나무는 자라지 못하고 풀만 자란다. 첫서리는 8월 상순에, 마지막서리는 7월 하순에 내려서 무상기간은 7월말에서 8월초까지 20일간이다. 연강수량은 1,500㎜로 주변의 낮은 지대인 삼지연보다 600㎜ 더 많다. 이는 해발고도가 높아서 응결고도 이상 지역이 넓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개가 자주 발생하여 강수량이 많은 6~9월에 월평균안개일수는 15일이며, 그중 80%가 비와 함께 하여 안개의 평균 계속시간은 6.6시간이다. 7월과 8월에는 비가 많고, 6월과 9월에는 우박으로 내릴 경우가 많다. 눈은 9월 중순에서 다음해 6월 중순까지 9개월간 내리며, 8개월 이상 눈이 쌓여서 1.2~2m 정도의 두께에 이른다. 바람이 매우 강하며, 겨울철에는 북서풍이, 여름철에는 남서풍이 주로 분다. 따라서 백두산의 기후는 기상변화가 매우 심한 고산 툰드라 기후를 나타낸다.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연평균 월평균기온(℃) -24.0 -21.5 -16.6 -7.5 -0.6 3.9 8.5 8.5 1.7 -5.2 -13.8 -21.1 -7.3 풍속(m/s) 15.6 14.5 14.1 12.0 11.3 7.4 7.3 6.8 8.5 10.0 15.5 17.4 11.7 천지주변의 월평균기온과 풍속1)1) 동·식물과 토양 백두산 그림4. 백두산 동쪽사면의 식물분포와 지질추정도 1. 고산대 2. 침엽수림대 3. 침·활엽수림 혼재림대 4. 매몰림대 ⓒ 2015, All Rights Reserved.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 화산재는 그 성분이 천지 주변의 회백색 부석과 같으며, 가까운 동해 밑바닥에서는 10㎝ 내외의 두께이고 멀리 떨어진 일본 북부에서는 5㎝ 내외로 보다 엷어진다. 일본에서는 이 화산재가 헤이안[平安] 시대 후기의 유물포함층에 존재하여 10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초반에 화산폭발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백두산 정상부에서 부석으로 덮여 있는 탄화된 나무등걸(그림 4의 매몰림대)을 이용한 탄소 동위원소 연대측정값도 1050±70년 B.P.(B.P.는 before present의 약자로 1950년을 기준하여 그 이전의 연대값을 나타냄), 1120±70년 B.P.를 나타낸다. 따라서 천지를 만든 백두산의 대규모 화산폭발은 지금부터 약 1,000년 전인 고려시대 초기에 일어났을 것으로 보여진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597년(선조 30) 8월 26일, 1668년(현종 9) 4월, 1702년(숙종 28) 4월 14일의 3번의 분화가 기록되어 있다. 백두산의 화산활동은 천지 밑 62~67㎞ 깊이의 상부 맨틀 암석 중 방사능 원소들이 붕괴되면서 발생한 열에 의해 암석들이 부분적으로 녹아서, 지하 3~5㎞ 깊이의 마그마 챔버에 모였다가 자체압력이 증가하면서 지각의 약선대를 따라서 분출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제3기말에서 제4기에 걸쳐 여러 번 반복되었는데 지금부터 1,000여 년 전 대규모 화산폭발이 나타나면서 마그마의 저장고였던 마그마 챔버가 함몰되어 천지의 칼데라를 만든 후 화산활동은 차츰 약화되면서 휴화산이 되었다. 그러나 대규모 화산폭발은 지질연대로 보면 오래지 않아서 그 영향으로 천지를 중심으로 반지름 50㎞ 이내에는 소규모의 지진이 자주 나타나고(중국측 자료에 따르면 1973년 4월과 6월에 진도 2.1 및 2.5의 지진이 있었음), 온천이 많다. 백두산의 특색있는 지형으로는 화산지형·빙하지형·주빙하지형 등을 꼽을 수 있다. 화산지형은 주변부의 순상화산과 중앙부의 종상화산이며, 중심부는 칼데라와 외륜산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 번의 화산분출로 이루어진 복성화산임을 알 수 있다. 빙하지형으로는 U자곡과 권곡이 있다. 중국 쪽에서 천지에 이르는 길인 얼다오바이허의 골짜기 가운데 창바이 폭포-빙장 사이의 길이 4㎞, 너비 1㎞의 골짜기가 빙하침식곡인 U자곡이다. 이는 현재 중국의 영토이다. 남포태산(2,433m)의 남쪽 기슭인 포태천 계곡에 빙하퇴적 제방인 빙퇴석(maraine)이 있고, 천지 주변의 칼데라 벽에 빙하침식의 흔적인 권곡과 빙퇴석의 존재가 보고되었다. 이들 빙하지형은 마지막 빙하기(약 1만~7만 년 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어왔으나, 이는 약 1,000년 전 백두산의 화산폭발과 그 함몰에 따른 천지형성과 모순된다. 권곡이 이때의 파괴에서 남은 것이라고 해도 빙퇴석의 존재는 여전히 모순된다. 천지 주변 외륜산 기슭의 빙하지형 문제는 우리나라에서의 마지막 빙하기의 빙하와 천지형성 문제를 푸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물과 자원 천지의 총저수량은 20억t으로 그 가운데 70%는 빗물이며, 나머지 30%는 지하수가 솟아 오른 용천수이다. 천지에는 물고기는 없고, 식물성 플랑크톤이 5종, 작은 동물과 곤충류가 4종, 그리고 이끼가 생장한다. 천지의 물은 중국측의 달문으로만 유출되어 창바이 폭포에서 얼다오바이허를 흘러 쑹화 강[松花江]을 이룬다. 압록강과 두만강으로는 지하수로서 유출될 뿐이다. 장군봉(2,750m) 부근의 해발고도 2,000m에 있는 백두폭포는 높이 18m, 너비 0.8m로 1단계에서 7m, 2단계에서 11m의 높이를 나타내는 2단계 폭포이다. 천지의 물이 지하수화해 용천수로 떨어져서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1년 내내 흐른다. 중국의 창바이 폭포-얼다오바이허 계곡에는 수온 37~82℃의 온천이 13개 있고, 북한에서도 천지 남서부에서 수온 73℃의 온천이 발견되었다. 백두산의 최대자원은 적송·잎갈나무·가문비나무·자작나무 등의 삼림으로서, 이들 목재는 철도와 압록강 및 두만강의 뗏목에 의해서 길주·만포·무산의 제재소로 운반된다. 기타 자원으로는 건축용의 골재와 단열재로 이용 가능한 부석, 천연수로 이용되는 천지의 물, 약초와 산나물 등을 들 수 있다. 한민족과 백두산 백두산 천지 백두산 분지에 물이 고인 칼데라 호 ⓒ Bdpmax/wikipedia | CC BY-SA 3.0 한민족에게 백두산은 민족과 국가의 발상지이며, 생명력있는 산으로서 민족의 성산·신산(神山)으로 숭앙되어왔다. 고조선 이래 부여·고구려·발해 등이 백두산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백두산 주변의 숙신족·읍루족·말갈족·여진족·만주족 등도 그들 민족의 성산으로 숭앙하여 역사화·전설화·신격화했다. 풍수지리에서는 지세를 사람의 몸에 비유하여 이해하기도 하는데 백두산을 '기'(氣)가 결집된 머리로, 낭림-태백-소백 산맥을 백두산의 기가 전달되는 등뼈산맥으로서 백두대간(白頭大幹)으로 인식했다. 그밖에 청나라의 번영도 태산(泰山)·장백산(長白山) 지맥설(支脈說)을 통해서 풍수지리상으로 백두산의 정기를 받았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백두산은 한민족뿐만 아니라 북방 이민족의 정신적 구심점과 활동무대가 되어왔으며, 이곳을 중심으로 국경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17세기 중엽 청나라는 백두산을 장백산신(長白山神)에 봉하고 출입·거주를 제한하는 봉금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조선사람들이 두만강을 넘어 이주·개척하자 백두산을 그들의 영토로 귀속시키려고, 1712년 일방적으로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백두산정계비). 그 내용 가운데 토문강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청나라와의 사이에 영토분쟁이 발생했으며, 간도 및 녹둔도의 영유권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1909년 청·일 간에 체결된 간도협약으로 두만강이 국경선으로 결정되었으며, 지금 백두산은 천지까지도 분할되어 천지 북쪽 2/5는 중국측에, 남쪽 3/5은 북한측에 속한다. ==================///   백두산 지도 백두산 지도                   (남파南坡) ⓒ 넥서스 ============/// =======================/// ◈ 장군봉(백두봉, 병사봉, 용왕봉, 일제강점기엔 대정봉):  천지의 동남쪽에 위치한 장군봉은 해발 2,744m로 백두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알려져 있다.  이 봉우리는 빙하가 깎아서 이루어진 것이다.  꼭대기에서 부터 북쪽의 천지쪽으로 뻗은 등성이가 장관인데  맞은편 백운봉 아래 등성이와 흡사하여 험한 봉우리 밑의 험한 봉우리로 알려 졌다.  이것은 천지 안쪽 화산암이 이루어 놓은 지형이다.  끌차(잉크라인 철도)와 도로를 통해 정상에 오를수 있다.  장군봉 오솔길을 더듬어 천지가에 내려갈 수도 있다.  장군봉 꼭대기에는 사철 녹을줄 모르는 눈이 깔려 있고 남쪽은 산세가 가파른데 두봉우리가 마주선 남천문이 있다.  그 아래에는 10여리를 흘러내리는 부류하가 있다. 장군봉은 북한에 위치하고 있어 일반인들은 오를 수 없다 ◈ 백운봉:  천지의 서쪽에 위치한다.  백운봉(해발2,691m)은 중국 동북지방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북으로 지반봉(녹명봉)과 1,260여m 떨어져 있고,  남으로는 옥주봉과 면해 있다.  이 산은 둥근모양을 이룬 높은 산인데 산세가 험준하고 가파르다. 해맑은 날씨에 뭇봉우리들이 각기 웅자를 드러낼 때에도  백운봉만은 종일토록 흰구름이 감돌기 때문에 백운봉이라 이름하였다...거짓말...  백운봉은 천지의 수면에서 497m나 높게 우뚝 솟아 푸른하늘을 찌르는 보검처럼 보이는가 하면  또 하늘을 이고 땅에 거연히 세워진 금빛 종과도 같아 보인다.  꼭대기는 회백색, 담황색, 유백색의 부석들로 되어 푸른하늘 흰구름과 서로 대조를 이룬다.  정상에 오르면 동으로 적봉, 남으로 대연지봉, 소연지봉, 서쪽으로 천아봉, 북쪽으로 내두산등 창망하고  호한한 장백의 뭇 산들을 멀리 바라볼 수 있다.  봉우리로부터 동쪽으로 날카로운 능선이 천지에 뻗어 들어갔고 그 끝쪽에 유명한 옥장천이 있다. ◈ 천문봉:  천지 기상관측소에서 서남쪽으로 400여m 되는곳에 남쪽으로 화개봉과 325m 마주 솟아있고  북으로 철벽봉을 등진 곳에 있다.  천지의 수면에서는 476m, 해발 2,670m의 높이를 가진 이 봉우리는 천지 북쪽켠에서 가장 높은 산마루이다.  1958년 이 봉우리의 북쪽에 백두산천지 기상관측소를 세운때부터 기상소를 상징하여 천문봉이라 이름하였다.  봉우리의 꼭대기가 독수리의 부리같이 되어 천지를 쪼을듯하다고 속칭 수리봉이라고도 부른다.  천문봉 험준한 봉우리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보면 검은 잿빛이던 것이 회백색으로  그다음은 백색, 미황색으로 바뀐다.  부석층에는 군데군데 검거나 푸릇한 암석들이 박혀 있는데 큰것은 몇 톤씩 된다.  봉우리 꼭대기에서 천지로 향한 천상은병풍에는 오색 영롱한 비취 주옥들이 박혀 있다.  천상은병풍 앞에는 수리바위가 있고  동쪽에는 여의주를 희롱하는 외뿔 용이 하늘에 머리를 쳐든 듯한 용각봉이 있다.  천상은병풍과 선녀화장대와 어우러져 천상 절경을 이루고 있고  용의 등과 같은 서북쪽 능선을 타고 천문봉에 오를 수 있다. ◈ 천활봉 :  해발 2,620m인 천활봉은 승사하 동쪽 기슭에 용문봉과 맞서 있다.  두 봉우리 사이가 도끼로 내리팬 듯이 활짝 트였다고 하여 천활봉이라 부른다.  보천석(輔天石)에서 우랑도(牛郞渡)를 거쳐 달문을 지나 팔괘묘 종덕사의 옛터에서 밀려 내려온 퇴석을 밟으며 꼭대기에 오를수 있다.  천활봉뒤에 흑풍구(黑風口)가있고 작은 오솔길이 산을 감돌아 뻗어 있다. ◈ 철벽봉 :  천지의 바로 북쪽에 있는 봉우리로  동으로 천문봉, 서쪽으로 직녀봉 너머 천활봉과 마주하고 있다.  해발 2,560m인 이 봉투리는 바위의 색깔이 검붉다고 철벽봉이라 한다.  꼭대기에는네 노인이 바둑을 두는듯한 형상이며  관경대 같은 경관들이 있다.  여기서 천지를 굽어 보면 호수와 뭇산의 경치가 한 눈에 들어 온다. ◈ 화개봉:  천문봉 동남쪽 350m 되는곳에 남으로 자하봉과 잇닿은 봉우리로 해발 2,640m, 천지의 수면보다 446m 높다.  화개봉과 천문봉 사이의 공간은 예로 부터 바람과 구름이 드나드는 곳이다.  구름이 밀어 천지상공을 덮으면 마치 옛날의 호화스런 화개(화개)와 비슷하다고 하여 화개봉이라고 부른다.  화개봉서쪽에 천지의 기둥과 천지에 떨어져 들어갈 듯 말듯 하는 군함바위가 있다.  이곳 천지가에 여진제단. 자라낚터, 기린가위, 봉황바위 등 명승들이 있다.  이곳에 있는 단 한그루의 소나무를 탐지송 이라고 부르는데  한 세기 동안 자라도 하늘에 치솟는 큰나무로 되지 못하고 풍상고초를 겪으면서 끈질기게 자라  이리구불, 저리구불 기기괴괴한 자태로 천지의 생기를 한결 북돋아 준다. ◈ 자하봉 :  천지 동쪽에 자리잡은 자하봉(해발2,618m)은 서북쪽의 화개봉. 남쪽의 계관애, 고준봉과 서로 마주 서 있다.  낙타등처럼 생긴 두봉우리가 하늘에 치솟아 있고 자줏빛 석벽이 천연의 조화를 자랑한다.  해질녘이면 흰구름이 천지로부터 일어 자줏빛 산봉우리를 감도는 것이 실오리 같이 붉게 물든다고 하여 자하봉이라 이름하였다. ◈ 자암봉 :  이 봉은 자하봉에서 동남쪽으로 약 700m 되는 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해발 2,521m이다.  산체를 구성한 암석이 자색이기에 자암봉이라고 하였다. 자암봉 정상은 완만한데 그곳에 중국과 국경선을 알리는 6호경계비가있다. ◈ 관면봉 :  천지의 바로 남쪽에 와호봉과 500여m 떨어져 있는 관면봉(수면에서 의 높이는 370.8m, 해발2,525m)이 한반도와 중국의 경계봉으로 솟아있다.  장백산 강강지략에 장엄한 기상으로 옹기종기 모여 선 뭇봉우리 들이 마치 면류관 같다고 하여 관면봉이라 이름하였는데  용문봉, 천활봉과 멀리 천지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서 있다.  흰 부석으로 이루어져 사철 흰색을 띠므로 눈인지 바위인지 알아보기 어렵다. 천지를 마주한 쪽에는 사철 눈이 쌓여 녹을줄 모른다. ◈ 와호봉 :  천지의 서남쪽에 위치한 와호봉(천지 기슭으로부터 봉우리 정상까지의 거리는400여m,  해발은 2,566m, 북쪽으로 제운봉과 1,000m 정도 떨어져 있고 남쪽으로 관면봉과 이웃해 있다.  이 봉우리 역시 두나라의 경계봉인데 호수 가까이에 호랑이의 발자국이 많고 5리 남짓한 경사지에 호랑이가 다니는 길이 있다고 하여  와호봉이라 부른다.  무송현지에 의하면 이 봉우리는 엎드린 호랑이 형상이라 하여 와호봉이라 부르는데  산세가 험준하고 기암 괴석이 들쭉 날쭉하여 어쩌다 한번 오르면 정신이 아찔하여 소름이 끼칠 지경이라고 하였다.  봉우리 기슭에는 녹경(鹿經), 백화계(白花溪)등의 명승이 있다. ◈ 제운봉 :  천지의 서남쪽에 위치하여 북으로 현설애와 옥주봉을 상대하여 우뚝 솟은 봉우리가 제운봉(수평 거리는 1,300m,해발2,543m, 천지의 수면에서의 높이는388m)이다.  이 봉우리도 한반도와 중국의 경계봉인데 두 봉우리가 사다리 모양을 이루고 있다.  사슴들이 이 봉우리 앞으로 내려와 천지의 물을 마시기도 한다. 봉우리 남쪽은 금강의 상류이고 제자하의 발원지이다. ◈ 옥주봉(청석봉):  천지 서쪽에 서북으로 백운봉과 1,270m 떨어져 있고 남으로 현실애, 제운봉과 이웃한곳에 위치한 옥주봉은 해발2,664m이다.  꼭대기에 또 오형제처럼 다섯 봉우리가 뭉쳐 선 것이 마치 하늘이 무너지면 버티고 있을듯 한지라  백두의 옥기둥이란 영예를 지니고 있다.  그 다섯 봉우리들은 푸른 암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청석봉이라고도 부른다.  해발 2,500m가 넘는 이 봉우리들은 천지쪽으로 향해 섰는데 깎아지른 듯한 절벽들에 '-'자를 가로 그은듯한 큰 단층이 있다.  옥주봉 동쪽에서 솟는 샘은 금실같이 천지로 흘러 드는데 이것은 금선천이라고 한다. ◈ 지반봉(녹명봉) :  천지의 서북쪽에 백운봉과 이웃한 지반봉(해발2,603m, 천지수면에서 꼭대기까지 409.1m)이 퐁곡으로 용문봉과 마주 서 있다.  옛날에는 꼭대기의 진펄에서 영지가 많이 자랐다고 해서 지반봉이라 부른다.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산정에 네 개의 봉우리가 진펄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 봉우리들의 안쪽은 가파르게 생겨 천지 서북쪽의 장벽으로 되어있다.  봉우리의 뒷면은 완만한 경사지를 이루고 있다.  지반봉 숭턱에는 골짜기와 냇물이 많아 화초가 무성하게 자란다.  여름과 가을에는 녹평 등지에 사슴의 무리가 많다.  9월 중순, 눈이 내린 뒤에는 여기저기서 사슴의 발자국을 볼 수 있다.  산기슭에서 사슴들이 뛰놀며 엇갈아 울 때면 산골짜기에 울리는 메아리가 듣기 좋아 녹명봉이라고도 부른다.  정상에는 화산 활동에 의해 생긴 분화구가 있다.  엄동설한에 다른 산 봉우리들에는 백설이 눈부시지만 여기에는 누런 풀이 깔려 있어 늦가을의 경치를 연상케 한다.  북쪽에는 몇십 명이 들어 앉을만한 동굴이 있다. ◈ 금병봉:  천지의 서쪽, 관일봉과 지반봉 사이, 즉 동쪽의 용문봉으로부터 서쪽으로 관일봉, 지반봉을 지나 남쪽의 백운봉에 이르는 큰 말발굽형 안쪽을 큰키라고 하는데 그 중간에 있는 것이 금병봉(해발2,590m)이다.  꼭대기에는 남북에 각기 봉우리가 하나씩 솟아 있고 그 앞은 천길 벼랑이 깎아 세운듯 하며 뒤쪽도 절벽이어서 비단병풍 같다.  정상에는 비취석이 군데군데 박혀 있어 백두산의 절경은 비취석이 있는 금병봉이다라는 예찬을 받고 있다. ◈ 관일봉:  금병봉과 용문봉 사이에 해발 2,510m 되는 봉우리로 동서로 뻗은 산등성이에 우뚝 솟은 봉우리는 창공을 떠 인듯하다.  이 천연의 전망대에 오르면 해돋이를 구경할 수 있는데 흡사 형산의 망일대(望日臺) 같기도 하고 화산의 조양대(朝陽臺)같기도 하다.  관일봉 뒤쪽 경사지에는 관일봉과 비슷하게 생긴 산마루 셋이 차례로 줄지어 있어  마치 네 자매가 손에 손잡고 선경을 유람하는 형상이다.  이 봉우리에는 식물이 빼곡히 살아 주단을 덮은듯 밟으면 푹신푹신하다.  해발 2,400m가 넘는 둘째 봉우리에는 한치 가량 자란 들쭉이 깔려 있고 드센 바람을 이기며 사는 고산 곤충들이 날아 다닌다. ◈ 용문봉(차일봉):  천지의 서북쪽에 승사하를 사이에 두고 천활봉과 대치되어 천지의 출구를 지키는 듯한 봉우리가 용문봉(해발 2,595m. 천지 수면에서의 높이는 401.7m)인데 북쪽으로 옥벽과 잇닿았고 서쪽으로 관일봉과 접하여 있다.  두 봉우리가 대문처럼 솟았다고 하여 용문이라 부른다.  이 봉우리들의 겉에는 화산이 이따금씩 분출하면서 형성한 용암의 흐름층면을 드러내고 있다.  부스러져 떨어진 바윗돌들이 큰 돌사태를 이루면서 골짜기로 흘러내린 퇴석 위에 약한 고산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봉우리 꼭대기에 올챙이 같이 생긴 바위가있어 신비(神碑)라고 불리운다.  산 허리에 덮혔던 눈은 8월에야 녹는다.  폭포 곁으로 해서 천지에 오르는 관광노선은 이 용문봉 아래에 있다.  용문봉 북쪽에 낙차가 20m인 은류폭포가 있어 옥벽을 사이에 두고 장백폭포와 이웃하여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고 있다. ◈ 낙원봉:  해발 2,603m. 천지 서남쪽, 와호봉 서북쪽 700 m 되는곳에 있으며 한반도와 중국의 국경봉으로 되어 있다.  중국 쪽에서는 고준봉. 한국 쪽에서는 향도봉이라 불리우는 봉우리는 천지의 동남쪽, 장군봉 동북쪽에 있다.  이 봉은 북한 영역이며 해발고도는 2,711m이다.  산정은 뾰족하게 깎은듯한 암석이 기세차게 서쪽을 향하고 있어 백두산 뭇봉우리 가운데 기이한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산체의 모양이 한마리의 매와 같다 하여 고준봉이라고 하였다. ◈ 단결봉:  천지의 동남650m 해발봉에서 서남으로 500m 떨어진 곳에 있다. 해발고도는2,661m이다. ◈ 제비봉:  천지 남쪽700m. 단결봉에서 서남 680m 되는 곳에 자리 하고 있다. 해발고도는2,549m이다. ◈ 해발봉:  천지의 동남800m, 장군봉 서남 1,400m 되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해발고도 2,711m로 백두산에서는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이다. ◈ 비류봉:  천지의 동쪽, 자암봉에서 동남 500m 되는 곳에 있는데 해발 고도는 2,651m다.   추정도    =================================///   시대 조선 저작자 청나라 목극등(穆克登) 창작/발표시기 1712년 성격 고지도 유형 문헌 분야 지리/인문지리 소장/전승 규장각 도서 요약 1712년(숙종 38)에 청나라와 정계비를 세울 때 청나라의 목극등(穆克登)이 소유했던 지도.   백두산 정계비 지도 1712년(숙종 38)에 청나라와 정계비를 세울 때 청나라의 목극등이 소유했던 지도. 32×21cm. 필사본. ⓒ 한국학중앙연구원(김지용) | 한국학중앙연구원 내용 세로 21cm, 가로 32cm. 필사본. 백두산은 조선의 조산(祖山)으로 일찍부터 신성하게 여겨졌고 청나라도 만주 지역에서 건국하였기 때문에 만주를 성역화하고 백두산을 중히 여겼다. 그런데 백두산 산삼 채취를 둘러싸고 양 국민이 마음대로 국경을 넘나드는 범경사가 자주 발생하고 이로 인하여 살인 사건까지 일어나 양국 간에 외교 문제로 비화되자, 두 나라는 국경을 정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청나라는 1712년에 목극등을 파견하여 국경 교섭을 요구해왔다. 조정에서는 접반사 박권(朴權)과 함경감사 이선부(李善溥)를 파견하여 국경 회담에 임하게 되었다. 이 때 목극등이 소지했던 지도를 뒤에 모사하여 우리 나라에 모사본을 주었다. 이 지도 오른 쪽에는 “康熙五十一年我肅宗三十八年壬辰穆胡克登定界時所模(강희51년아숙종38년임진목호극등정 계시소모)”라고 한자로 쓰여있고 박권 정계사가 참여했다고 표기되어 있다. 이 지도에는 목극등 일행이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기 위하여 탐사하였던 지역을 자세히 표기하였다. 이들은 혜산을 출발하여 오시천을 거쳐 서수라덕에 도착하였고, 화덕과 지당을 지나 박봉곶에 도착하여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압록강원을 조사하였고, 백두산 천지에 이르러 이를 조사하고 다시 내려와 분수령상에 정계비를 세웠다. 정계비는 토문강원비(土門江原碑)로 되어 있고 비석도 그려져 있다. 이들은 토문강을 여러모로 조사하였는데, 토문강이 곧 물줄기가 끊어지고 땅속으로 스며들고 있음을 발견하고 그곳을 입지암류(入地暗流)라고 적고 있다. 이들은 제1파가 땅속으로 잦아든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제2파가 시작되고 있음도 조사하였으며, 노은동 산쪽을 거쳐 대흥단수도 조사하고 어윤강(漁潤江)에서 우리측 접반사와 만나 박하천을 지나 무산부(茂山府)에 도착하였다. 지도에는 백두산 천지도 크게 그려져 있으며 천지에서 세 줄기의 강이 시작하고 있음을 표기하고 있는데, 그것은 압록강과 송화강과 토문강이다. 정계비를 세운 뒤 목극등은 이 지도를 필사하여 우리 나라에 주고 갔는데, 그 지도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규장각에는 이 지도 외에 백두산정계비도가 3종이 있는데, 두 지도는 정계비를 설치한 뒤 경계가 불확실한 지역에 돌이나 나무 등으로 경계를 명확하게 표시한 상황을 표기한 지도이다. 또 하나의 다른 지도는 1887년(고종 24)에 이중하(李重夏)가 감계사(勘界使)가 되어 청나라 감계사 덕옥(德玉) 등과 국경지역을 조사한 내용을 표기한 지도이다. 이상의 4종 백두산정계비도는 모두 규장각도서에 있다. →백두산정계비 =====================///   프랑스의 대표적인 지도 제작자 당빌(DAnville)은 를 참고해, 를 만들었다. 이것은 조선을 독립 국가로 인정한 최초의 유럽 지도다. 크기가 40cm×58cm로 김정호의 보다 130여년 앞선 지도다. 당빌과 김정호의 공통점이 있다. 당빌은 프랑스에서 한 발자국 나가지도 않고, 당시로서는 가장 정확한 세계지도를 만들었고, 김정호는 각종 지도와 지리서를 연구해 대동여지도를 만들어냈다. ■ 대량생산이 가능한 대동여지도 조선의 지리학자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1861년)는 크기 6.7m×3.8m로 조선시대 지도학을 완성시킨 성과물이며, 지금의 지도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치밀하고 정확하다. 1985년 보물 제850호로 지정됐고, 2008년에는 대동여지도의 목판이 보물 제1581호로 지정됐다. 대동여지도의 한 면은 가로 80리, 세로 120리로 총 227면으로 구성돼 있다. 대동여지도 전체로 보면 가로 1,520리, 세로 2,630리다. 두 개의 면이 한 판으로 제작돼 가로로는 19판, 세로는 22판으로 배열된다. 대동여지도는 세로 22개로 나뉘어 ‘첩’이라 불리는 책자 형태로 돼 있다. 한 개의 첩은 약 20cm×30cm 으로 휴대하기에도 용이하다. 총 22개의 첩은 표지에 각 첩에 담긴 주요 지역이나 지명을 표기해, 필요한 부분만 들고 다닐 수 있게 했다. 보물 제850-3호 대동여지도(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대동여지도는 오류를 최소화하고, 많은 사람이 이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목판으로 제작됐다. 현재 남아 있는 목판은 총 12장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11장, 숭실대기독교박물관에 1장이 있다. ■ 옛 지도를 근대화한 대동여지도 대동여지도를 비롯한 김정호가 제작한 , 모두 100리를 1척(尺)으로, 10리를 1촌(寸)으로 한 백리척(百里尺) 축척(縮尺, 지도에서의 거리와 지표에서의 실제 거리와의 비율)의 지도다. 하지만 당시의 1촌 1보(步)가 지금의 몇 cm를 나타내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현재는 1리를 약 0.4km로 환산해서 계산하는데, 이것은 구한말 이후에 도입돼 정해진 것이다. 현재의 계산법대로 하면 축척이 1:160,000이다. 하지만 나 의 기록(주척(周尺)을 쓰되 6척은 1보이고 360보는 1리이며 3600보는 10리로 된다)을 토대로 계산하면 1:216,000으로 볼 수 있다. 후자의 계산법이 실제 대동여지도의 축척도와 비슷함을 알 수 있다. 대동여지도에는 주요 도로를 표기하고 10리마다 점을 찍어 지역 간의 거리를 알 수 있게 했다. 도로는 직선으로 표시돼있는데. 곧은 길 점의 간격이 넓었고, 꼬불꼬불하거나 가파른 산악지형은 점 간격을 좁게 표현했다. 지도를 살펴보다 보면 곡선이 한 줄기로 돼 있는 것이 있고, 두 줄기로 돼 있는 것이 있다. 이것은 물길을 표현한 것으로 한 줄기는 배가 다닐 수 없는 길이고 두 줄기로 표시된 것은 배가 다닐 수 있는 길이다. 또한 지도상에서 글씨를 줄이고 기호를 사용해 능, 역, 산성 등을 표기했다. 산은 산줄기로 이어져서 표시했으며, 선의 굵기로 산의 높이를 짐작할 수 있게 했다. 대동여지도는 다양한 표현 방법으로 내용을 간소화 했고, 옛 지도를 근대화 했다. 또한 여행할 때 길의 사정을 쉽게 알 수 있도록 했다. 전통적인 지도 제작법을 따르면서도 확대와 축소를 할 때는 서양의 과학기술을 가미해 정확성을 높이기도 했다. 김정호는 세 개의 지도, 즉 대동여지도, 동여도, 청구도를 제작했다. 청구도는 필사본으로 제작됐고, 동여도는 대동여지도를 목판에 새기기 전에 제작한 선행지도로 현존하는 지도 가운데 가장 자세하다. ■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위해 백두산을 여덟 번 오르다? 김정호는 본인에 대한 글을 남기지 않아 그의 생애는 증언과 기록으로 추측할 뿐이다. 김정호는 1804년 무렵 황해도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한양으로 이사한 후에는 남대문 밖 만리재에 살았다고 전해진다. 19세기 대표 실학자 최한기가 쓴 청구도의 머리말에 보면 김정호는 18세부터 지도와 지지(地誌)에 관심에 많았다고 한다. 또한 조선 말기의 문인 유재건의 에 보면 김정호가 어렸을 때부터 지리학에 관심이 많았고 좋아해, 다양한 자료를 수집했다고 나와 있다. 그래서 김정호는 정확하지 않은 기존 지도들에 크게 실망했을 지도 모른다. 또한 본인이 직접 지도를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을 것이다.   “김정호는 팔도를 세 번이나 돌고, 백두산을 여덟 번이나 올랐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대동여지도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곧 흥선대원군에 전해졌고, 이것을 전달 받은 흥선대원군은 크게 노했다. 괜히 이런 것을 만들면 나라의 비밀이 노출됨을 우려한 것이다.” 조선총독부가 1934년 발행한 에 있는 내용으로 불과 몇 년 전까지 교과서에 실린 내용이다. 하지만 이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김정호의 신분이 명확하게 밝혀지진 않았지만 여러 가지 기록이나 증언으로 봤을 때, 중인 신분으로 추측된다. 당시 중인의 신분으로 팔도를 세 번이나 돌고, 백두산을 여덟 번을 올랐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에는 조선의 지도가 정확하지 않다고 하고 있으나, 사실 당시 지도학은 매우 발달해 있었다. 그래서 김정호는 기존에 있던 지도와 지리서들을 연구해 장점들을 모아 대동여지도를 만들 수 있었다.최한기가 쓴 청구도의 머리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김정호는 어렸을 때부터 모은 지리서와 각종 지도의 장점을 모아 집대성 했을 것이다. ■ 독도가 빠진 대동여지도 아직 나오지는 않았지만 10만원권 화폐 뒷면에 대동여지도를 쓰려고 했던 적이 있다. 여러 가지 문제로 10만원권 화폐의 발행은 무기한 연기됐지만, 그 이유 중 하나가 대동여지도에 독도가 표기돼 있지 않아서였다. 독도를 그리겠다고 하는 의견도 있었으나 기존 대동여지도를 훼손한다는 의견도 있어 쉽지 않아 보인다. 대동여지도 이전에 제작한 청구도에는 독도가 표기돼 있는데, 대동여지도에는 빠져있다. 지도에서의 거리와 실제의 거리 비율에 맞는 곳에 독도를 표기하기가 어려웠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글 : 심우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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