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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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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황혼이 바다가 되여 댓글:  조회:2722  추천:0  2018-11-20
황혼이 바다가 되어                     /윤동주  하루도 검푸른 물결에 흐느적 잠기고 잠기고  저 웬 검은 고기떼가 물든 바다를 날아 횡단할고 낙엽이 된 해초 해초마다 슬프기도 하오.  서창에 걸린 해말간 풍경화 옷고름 너어는 고아의 서름 이제 첫 항해하는 마음을 먹고 방바닥에 나딩구오 딩구오  황혼이 바다가 되어 오늘도 수많은 배가 나와 함께 이 물결에 잠겼을 게요 ========================///     이 시에서 보이는 사물들,ㅡ 검푸른 물결, 검은 고기떼, 해초, 풍경화, 수많은 배 등이 다소 산만한 느낌을 주는데 , 다시 한번 자세히 읽어 보면 황혼이 물들고 어둠이 점점 짙어지는 때의 풍경은 바다로 비유해 표현한 것이다.  낙엽은 검은 고기떼와 해초로 표현되어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바다에 침몰된 배처럼 어둠에 잠기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 이 시가 한결 재미있게  읽혀질 것이다. 그 시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아와 같이 쓸쓸한 설움에 잠기게 된다.  ======================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 구절을 듣는다면 우린 한명의 아름다운 이를 머릿속에 그려낼 수 있다. 바로 시인 윤동주이다.어릴적 우연히 읽었던 윤동주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시인 ‘서시‘는 나에게 꽤나 큰 충격을 주었다. 아름답고 처연한 하지만 어딘가로 나아가려는 젊은이의 진취적인 느낌이 나는 시는 서정적이고도 아름다웠다. 그 시를 읽고 감명을 받아 한참을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아직도 부끄럽지만 생생하다. 동아리 방에서 시집을 받고서 너무나도 설레이는 마음으로 책장을 열었다. 왠지 모르게 그리운 느낌이 났다. 처음 보는 시도 그러나 익숙한 시들도 볼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정말 감명을 받았던 두 시에 대해서 감상을 남기고 싶다. 윤동주의 시는 대부분 유명하지만 편수가 많기에 그에 비해 유명하지 못한 작품 또한 적지않다. 그 중 하나인 ‘황혼이 바다가 되어’ 라는 시는 윤동주의 대표작이라 불리는 서시를 쓰기전 쓰여진 시로서 윤동주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 연희전문의 입학을 준비하던 당시 쓰여졌다. 잔잔하지만 어딘가는 외롭고도 쓸쓸한 느낌을 주는 이 시는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시이다. 이 시는 일과를 마치고 돌아와 침대에 누워 불 꺼진 천장을 바라보며 내일을 걱정 하고 있는 나를 떠올리게 했다. 그때를 황혼과 연결시키기는 힘들지만, 황혼이 바다가 되어 밀려와 잠기듯 나또한 깊은 밤이 바다가 되어 밀려오는 듯 한 기분을 들게 하였다. 바다가 짓눌러 오듯 숨이 막히는 막막함과 무력함을 느낄 때를 떠올리게 했다. 이 밤이 지나면 혹은 황혼이 끝나 밤이 가라앉는다면 내일이 다가 올 것이고 그렇다면 또다시 앞으로 나를 스쳐지나갈 시간에 나를 맞추어야 한다. 가끔씩 그것은 무료하기도 혹은 두렵기도 하다. 아직은 멀게만 느껴지는 대학,진로 혹은 개인적인 걱정거리들은 밤이 되면 바다에 가라앉아 물을 먹고 부풀어 나를 무겁게만 짓눌러 오는 것만 같다. 당장에 해결가능하지 못하는 문제들은 심해와 같은 공포를 주고 그것은 때로는 나를 외롭게 만들기도 한다. 이 시를 읽으며 나는 윤동주 또한 나와 같은 기분을 느끼지 않았을까 하는 재밌는 생각도 했다. 또 하나 이야기 하고 싶은 시가 있다 바로 ‘무서운 시간’ 이다. 이 시는 일제치하라는 배경을 쉽게 알 수 있었던 시이기도 하다. 무서운 시간이란 말 그대로 우리 민족이 보낼 수밖에 없었던 무서운 시간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닐까? 또 이시에서 나를 부르지 말라는 것은 순전히 공포를 느끼기에 그러는 것일까 아니면 부끄러워 그러는 것일까? 나는 시를 읽으며 시에서 나를 부르지 말라는 것이 나의 모습을 보여주기 싫기에 하는 말 같았다. 떳떳하게 서지 못하기에 나를 부르지 말라달라는 애원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자 이 시를 읽으며 슬픈 감정과 동질감을 느꼈다. 소심하고 항상 위축되어 다니던 중학교때의 나 자신이 떠올랐다. 나는 항상 나에게 자신이 없었다. 내가 너무나도 부족하고 모자라기에 떳떳이 다니지 못 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다르듯이 이 시에서 슬픈 감정만을 느끼지는 않았다. 아까와는 다르게 그와 반대로 나를 알아달라고도 하는 것 같았다. 내 숨이 남은 곳을 알려주며 사실은 나는 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고 싶다는 듯 말이다. 나 역시 사실은 주목을 받고 싶지 않아하고 곁에 누가 있는 걸 싫어한다고 했으면서도 사실은 누군가의 시선과 온기를 갈구 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 두 편의 시는 윤동주 시인의 시중 가장 좋아하는 시이다. 비록 유명하지는 않지만 나에게는 많은 느낌과 생각을 주는 시이며 그와 별개로 하지만 동시에 윤동주 시인이 말하고 싶었던 모든 마음들이 담긴 아름다운 시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는 가히 최고라고 평가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고 크게 자부한다. ///김예지                 =======================/// “젊음은 거기 남아 있거라” 詩句처럼… ㅡ‘불멸의 靑春’으로 승화       ▲  일본 교토 우지시 우지강변에 세워진 윤동주 시비. 지난 10월 새로 만들어진 이 시비에는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라고 새겨져 있다.     유성호의 윤동주 100주년, 문학과 역사   ㅡ생애의 마지막 동선을 찾아…  1942년 도쿄로 유학 떠나면서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에 응해   입학뒤 ‘참회록’에 심경 담아   도시샤大·하숙집 터 詩碑 외에   동주가 소풍오던 우지 강변에   ‘새로운 길 · 화해의 碑’ 세워져   1943년에 체포돼 2년형 언도   2년뒤 후쿠오카 형무소서 별세   비극적 삶을 산 청년의 이상이   대체불가능한 ‘섬광의 사건’ 돼  ◇ 삶의 최후 동선을 따라 = 윤동주의 말년은 일본 체류 기간이다. 그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 3월에 일본의 심장 도쿄(東京)로 유학을 떠났다. 성공회 계열의 릿쿄(立敎)대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한 것이다. 원치 않았던 창씨(創氏)였지만,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는 도항증명서 발급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이름을 ‘平沼東柱(히라누마 도오주)’로 고쳤다. ‘평소’라는 새로운 성씨는 파평(坡平) 윤 씨에서 ‘평(平)’을 가져왔고, 그네들의 비조(鼻祖)가 못에 관한 전설을 가지고 있어서 거기서 ‘소(沼)’를 가져와 만들었다. 창씨에 응하면서도 고스란히 ‘윤 씨’의 맥락적 전통을 지킨 그 나름으로 고육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송몽규도 ‘송 씨’의 성을 그런대로 지킨 ‘소오무라(宋村)’로 창씨하였다. 입학이 결정되고 난 직후에 윤동주가 쓴 ‘참회록’은, 이러한 과정에 따르는 부끄럼 자체를 부끄럼의 대상으로 삼은 고백 시편이었다.  그가 도쿄에 머무른 시간은 릿쿄대에 입학하고 첫 여름방학을 맞은 7월 하순까지의 5개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 시절 윤동주는 ‘흰 그림자’를 비롯하여 모두 다섯 편의 작품을 남겼다. 연희전문 동기인 강처중에게 부친 편지에 동봉했던 이 시편들은, 윤동주 최후의 작품들이자 그가 일본 유학 시절 어떠한 마음으로 살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지남(指南)과도 같다. 1942년 4월 14일 창작된 ‘흰 그림자’는 윤동주의 유고를 지상에 남기는 데 큰 공헌을 한 정병욱이 자신의 아호인 ‘백영(白影)’을 취한 작품이기도 하다. ‘흰 그림자’는 황혼을 배경으로 쓰였는데, 황혼은 ‘낮과 밤’ 혹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상징하는 시간으로서 불안한 운명과 함께 행복했던 과거와 부정적 현실 사이에 놓인 자신을 뒤돌아보게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창작일이 밝혀진 최후의 작품인 ‘쉽게 씌어진 시’는 ‘남의 나라’라는 중의법이 타국과 객지라는 이중의 울림을 동반하면서 시인으로서 느끼는 생성과 소멸의 동시적 가능성을 잘 담아낸 명편이다. 모두 도쿄에서의 윤동주가 가졌을 불안과 성찰의 양면적 시간을 잘 보여준다. 그러다가 윤동주는 그해 10월 교토(京都)의 도시샤(同志社)대 영문과로 편입하였다. 1년 가까이 교토에 살면서 새로운 미래를 계획했던 윤동주는, 1943년 7월 14일 여름방학을 맞아 집에 다녀오려고 차표까지 사서 짐까지 부쳐놓고 떠나오려던 때, 교토 시모가모(下鴨) 경찰서에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피체된다. 송몽규와 함께 ‘재(在)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그룹 사건’으로 일경에게 체포된 것이다. 송몽규와 윤동주 그리고 교토3고 학생 고희욱은 서로 어울리면서 조선독립, 민족계몽에 대해 논의했고 특히 “징병제를 이용, 무기를 가지고 군사 지식을 체득, 일본이 패전에 봉착할 즈음 무력 봉기를 일으켜야 된다”라고 주장했다는 것이 체포 사유였다. 이어 윤동주는 1944년 6월 사상불온, 독립운동, 비일본 신민, 온건하지만 서구 사상이 농후한 등의 죄목으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러한 과정이 윤동주 삶의 최후 동선이었던 셈이다.  ▲  일본 교토 도시샤대 인근 윤동주 하숙집 터에 자리 잡은 시비. ◇ 교토의 가을, 우지(宇治)강에 새로 세워진 시비 = 지지난 주에 교토를 찾았다. 교토 여행은 두 번째였다. 이번에는 철저하게 윤동주의 자취를 따라 걸었다. 교토의 가을은 단연 고즈넉하고 잔잔했다. 먼저 도시샤대를 찾았다. 도시샤대 역시 연희전문학교처럼 개신교 계통의 미션스쿨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도시샤대가 그가 그토록 흠모해 마지 않았던 정지용의 모교였다는 사실이다. 도쿄에서 교토로 옮겨오던 날, 윤동주는 아마도 정지용의 시 ‘압천(鴨川)’을 수없이 되뇌고 있었을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교정에는 정지용과 윤동주의 시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시비 앞에는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시가 원문과 일본어 번역문으로 나란히 새겨져 있다. 정지용이 시집 서문에서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구나!”라고 말했던 그 무서운 ‘고독’이 이곳에서 정점으로 달려가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 세워진 윤동주 시비는 윤동주를 사랑하고 흠모하던 일본인들의 정성으로 가능했다. 그에 비해 정지용 시비는 윤동주 시비가 세워진 것을 알게 된 충북 옥천에서 만들어 일본으로 옮겨 세운 것이다. 살아서는 정지용이 윤동주에게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쳤지만, 죽어서는 윤동주가 정지용 시비를 이곳에 파생시켰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다. 그만큼 윤동주는 이미 정지용의 인지도와 영향력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다음으로 간 곳은 도시샤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윤동주의 하숙집 터였다. 거기에는 교토조형예술대 다카하라 교사가 아담하게 지어져 있다. 교토조형예술대의 본 건물과는 조금 떨어진 주택가에 단아하게 위치해 있었다. 그 앞에는 ‘윤동주유혼지비(尹東柱留魂之碑)’라는 글씨가 새겨진 비석과 서시가 양국어로 새겨진 시비가 함께 서 있었다. 거기서 또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송몽규의 하숙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 있었다. 아마도 윤동주와 송몽규는 매일 하숙집에서 각각 교토대와 도시샤대를 걸어서 다녔을 것이다.   그리고 이튿날에는 우지에 위치한 아마가세 구름다리를 찾았다. 윤동주는 도시샤대 재학 시절 급우들과 함께 이곳으로 소풍을 와서 그의 마지막 사진을 남겼다. 특별히 기억할 일은, 지난 10월 28일 시쓰카와(志津川)의 우지강변에 또 하나의 윤동주 시비가 세워졌다는 것이다. 시비에는 그가 연희전문학교 입학 직후에 쓴 ‘새로운 길’과 함께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詩人 尹東柱 記憶と和解の碑)’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졌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걸어갔던 “새로운 길”에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나한테 주어진 길”로 이어지기까지의 길지 않은 시간이 거기 아득하게 흐르고 있었다. 아름다운 교토의 가을이, 막 상류 댐을 열어 급류로 흘러내리던 우지강을, 그날 소풍을 나왔던 도시샤대 학생들의 평화처럼 감싸고 있었다. ◇ 윤동주의 죽음과 후쿠오카 = 후쿠오카는 ‘아시아로 열린 창’이라는 별명답게 항구 도시의 외관을 띠고 있었다. 후쿠오카 형무소 터는 시 중심부에서 북서쪽으로 치우친 사와라(早良)구에 있다. 후지사키(藤崎) 지하철역에서 퍽 가까운 곳에 있었다. 1996년에 새로 지은 형무소 건물도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지금은 형무소 터만 남아 공원 용도로 쓰이고 있었다. 근처에 있는 후쿠오카 구치소는 형무소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어서, 이곳에서 추모 묵념을 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옳지 않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그때는 막 일본 프로야구 저팬시리즈에서 후쿠오카를 연고지로 한 소프트뱅크가 우승하여 후쿠오카 각 백화점이 세일을 하고 있었다. 거기서 만난 니시오카 겐지(西岡健治) 명예교수는 후쿠오카 현립대에서 한국문학을 가르치다가 은퇴한 분으로서, 연세대에서 춘향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한국문학 연구자이다. 그분은 형무소 터와 함께 그가 1994년부터 만들어 운영 중인 ‘윤동주의 시를 읽는 모임’에 대해 소상하게 설명해주었다.  동국대에서 한국문학을 전공한 문학평론가 고노 에이치(鴻農映二)는, 윤동주와 송몽규가 대체 혈액 실험을 위한 실험 대상으로 쓰였다는 취지의 발표를 한 적이 있다. 당시 일본군은 생리식염수를 개발 연구하고 있었는데,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독립운동을 한 죄로 윤동주 등이 그 실험 대상이 된 것이라고 추측된다고 밝힌 것이다. 그때 후쿠오카 앞바다 물을 혈관에 직접 주입했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버티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이다. 2000년대 미국 국립도서관 기밀 해제 문서에서도, 일본 패전 후 전범 재판 문서에서도, 규슈(九州)제국대에서 대체 혈액 실험의 일환으로 후쿠오카 형무소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했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하였다. 이는 저 중국 하얼빈(哈爾濱)에 남겨진 731부대의 악명과 함께, 일본 제국의 마지막 잔혹한 모습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윤동주가 죽자 명동촌 집으로 그 소식을 알리는 전보 통지서가 날아들었다.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지러 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아버지 윤영석이 시신을 넘겨받으러 떠난 며칠 뒤 다시 “동주 위독함, 원한다면 보석할 수 있음, 만약 사망 시에는 시체를 인수할 것, 아니면 규슈제국대 해부용으로 제공할 것임”이라는 내용의 때늦은 우편물이 도착한다. ‘쉽게 씌어진 시’에서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라고 노래한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그렇게 숨을 거두었다. 27년 1개월 남짓 되는 짧은 생이었다. 한 줌 재가 되어 부친의 품에 안겨 돌아와 그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용정 땅에 묻혔다. 유족들은 그의 묘비에 ‘시인윤동주지묘(詩人尹東柱之墓)’라는 표현을 적어 넣었는데, 이 기념비적 순간은 ‘청년 윤동주’를 ‘시인 윤동주’로 태어나게끔 해주었다.  도쿄에서 쓴 작품 가운데 한 편인 ‘사랑스런 추억’에서 윤동주는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라고 씀으로써, 그 말을 예언처럼 만들어버렸다. 그렇게 그는 영원한 청춘으로 남아 우리로 하여금 잃어버린 젊음을 항구적으로 탈환케 하고 있다.   이러한 윤동주만의 특권은, 삶의 비극성을 불멸의 기억으로 바꾸어내는 예술사의 한 장면을 선연하게 만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의 시에 나타난 부끄럼과 성찰의 의지는 후천적으로 노력해 얻은 성정이라기보다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운명 같은 것이어서 더욱 슬프고 아름답다. ‘나한테 주어진 길’과 ‘허락된다면’이라는 표현에서 나타난 감각 역시 그의 천성이 능동적이지 않고 자성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의 시가 비록 연륜을 오래도록 쌓은 원숙함과는 전혀 다른 청년기의 과정적 속성으로 일관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청년의 이상과 실존의 한 장면을 아름답게 보여주는 대체 불가능한 섬광의 사건이 된 셈이다. 그래서 그의 ‘부끄럼’과 ‘성찰’은 윤리적 차원은 물론, 실존적 차원으로까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그 실존의 어둑함을 따라 우리의 기억이 환해지는 가을 여정이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문화일보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교수
2    [겨레자랑] - 8천여명속에 울러퍼진 아리랑... 댓글:  조회:2740  추천:0  2018-11-20
조선족 작곡가 손에서 새롭게 태여난 아리랑 (ZOGLO) 2018년11월19일          '세계6대 청년작곡가' 안승필 첼로협주곡 '아리랑' 북경서        (흑룡강신문=하얼빈)채복숙 기자=저명한 조선족 작곡가 안승필의 첼로 협주곡 '아리랑'이 북경에 울려 퍼졌다.   지난 13일, 관객 8000여 명이 자리를 꽉 채운 북경콘서트홀에서는 안승필 작곡가가 첼로 협주곡 형태로 창작한 '아리랑'이 중국국가교향악단 수석 첼리스트 허옥련의 협연으로 초연됐다.     중국국가교향악단 수석 첼리스트 허옥련   안승필 작곡가는 "원래 16마디로 구성된 아리랑을 276마디로 늘려 첼로 협주곡 형태로 새롭게 작곡했다"며 "아리랑에는 한민족 혼이 담긴 만큼 원곡 의미를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안승필(우) 작곡가가 첼로 협주곡 형태로 창작한 '아리랑'이 중국국가교향악단 수석 첼리스트 허옥련(좌)의 협연으로 초연됐다.   안 작곡가는 현재 프랑스 파리, 독일 베를린 등 유럽 무대에서 현대음악 작곡가로 활동하고 있다.   안승필 작곡가는 1993년 상해음악원 재학시절 아테네 국제 올림피아 작곡 콩쿠르를 시작으로 각종 국제대회에서 교향곡, 실내악, 전자음악 작곡으로 수상한 바 있다. 또 1996년 유네스코 국제음악포럼에서 세계 6대 청년 작곡가로 선정됐다.
1    [고향자랑] - 장백산 아래 연변 놀러 오이소(1) 댓글:  조회:2875  추천:0  2018-11-20
[계렬보도] 장백산 아래에 민족문화의 향기 그윽하네(1) (ZOGLO) 2018년11월16일  머리글: 장백산 아래 두만강변에는 60여년의 력사를 자랑하고 있는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있다. 근로용감한 연변인민들은 바로 이 땅에서 ‘한족은 조선족을 떠날 수 없고 조선족은 한족을 떠날 수 없으며 소수민족은 소수민족을 떠날 수 없다’는 좌우명을 내세우고 중화민족문화권 속의 독특한 조선족문화를 꽃 피우면서 다민족문화 융합의 한페지를 아름답게 수놓아가고 있다. 본지는 계렬보도 로 그 실태를 펼쳐보이고저 한다.                                                                      --편집자 제1편 특색문화 부호에 비낀 창조의 열정 ㅡ, 광동촌에 울려퍼지다 붉은 해 솟았네/천리 변강 비추네/장백산 아래 사과배 열리고/해란강반 벼꽃 피네… 수확의 계절에 기자는 습근평 주석이 몇해전에 다녀갔던 화룡시 동성진 광동촌을 찾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로인들로 무어진 광동촌농민문예공연대가 마을 광장에서 한창 공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한시기 전국인민들이 애창하던 〈붉은 해 변강 비추네〉가 구성진 선률을 타고 마을 상공에 오래도록 울려퍼졌다. 화룡시 동성진 광동촌농민문예공연대의 문예공연 “올해에만 이미 관광객 20여만명을 접대했습니다. 문예공연대가 은을 냈지요.” 광동촌 당지부 서기이며 촌민위원회 주임인 김영숙이 기자에게 하는 말이다. 평균 년령이 70세인 마을의 문예공연대 대원들은 관광객들이 들이닥칠 때면 하루에도 몇번씩이나 공연을 하면서 팽이처럼 바삐 돌아쳐야 했단다. 올해의 공연 차수는 무려 80차에 달했다. “관광객들은 우리의 공연을 보고 오기를 잘했다고 말했지요. 그럴수록 우리의 마음은 즐거웠지요.” 71세에 나는 문예공연대의 ‘맏언니’ 주금숙할머니의 말이다. 다들 찾아오는 외지 관광객들에게 조선족전통문화를 알려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움직였기에 일할수록 힘이 났단다. 광동촌의 문예공연은 인젠 마을사람들의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으로 되였다. ㅡ중국조선족농부절 전승인 오정묵,‘어곡전’에 반하다 ‘어곡전’과 ‘어곡미’는 룡정시 개산툰진 광소촌 하천평 마을의 논과 그 논에서 나는 쌀을 두고 하는 말로서 과거 황제에게 바쳤던 쌀로 유래된다. 중국조선족농부절 전승인 오정묵 올해로 9회째 이어오고 있는 중국조선족농부절 고귀한 ‘혈통’을 갖고 있는 ‘어곡전’과 ‘어곡미’의 위대한 부활을 위해 20년 가까이 혼신을 불태우고 있는 조선족 유지인사가 있으니 그가 바로 조선족농부절 전승인 오정묵(65세)선생이다. 2007년부터 시작하여 오정묵선생은 9회째 두만강반에 자리 잡은 ‘어곡전’에서 중국조선족농부절 행사를 추진해오면서 ‘어곡전’에서 펼치는 ‘농부절’과 ‘풍수제’ 의식을 길림성 문화재 명록에 등재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 사이 그가 중국조선족 농경문화 발굴 사업에 쓴 사비만 해도 600만원에 달한다. ㅡ변경향진에 들어선 국내 첫 이동조립식 공익영화관 지난해 11월에 룡정시 백금향에 세워졌다는 이동조립식 공익영화관이 기자의 눈길을 끌었다. 정부의 문화혜농정책의 지원으로 세워진 이 영화관은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제일 첫 이동조립식 공익영화관일 뿐만 아니라 국내 첫 변경향진 공익영화관이기도 하다. 좌석이 50개인 영화관 내부는 도시의 영화관에 못지 않게 아늑하고 편안한 감을 준다. 매주 두번씩 무료 관람이다. 룡정시 백금향 공익영화관 공익영화관이 들어서면서부터 이곳의 조선족 군중들은 갈 곳이 있게 되였고 볼거리가 있게 되였다. 한어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조선족 군중들을 위해 향정부에서는 우에서 내려보내는 조선말영화외에도 가끔씩 품을 들여 자체번역도 한다. ㅡ백년부락에서 중국조선족 거주문화의 맥락을 찾다 도문시에서 두만강을 거슬러 남쪽으로 20여키로메터 남짓이 올라가느라면 조선족전통마을로 해내외에 이름난 백년부락(백룡촌)을 볼 수 있다. 부락에서 력사가 제일 오랜 가옥은 지금 이곳의 주인 김경남씨가 거처하고 있는 조선족 팔간기와집인데 130년의 세례를 겪었으나 여전히 원 모양 그대로이다. 백년부락에서 펼쳐진 중국조선족전통씨름경기 김경남(66세)은 한국에 나가 번 돈에 형제들의 돈까지 300만원을 들여 백년부락을 만든 전설적인 인물이다. 김경남은 우리가 없어도 나중에 후세들이 자기의 눈으로 조상들이 사용하던 가옥과 물건들을 보고 마음으로 느끼면서 민족의 얼을 간직하도록 하는 게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꿈이라고 거듭 곱씹는다. 백년부락에서는 올해까지 2회째 중국조선족전통씨름경기를 펼쳤는데 우승을 한 힘장사에게는 황소를 상으로 주었다. 중국조선족 거주문화를 보여주는 문화적 징표로 자리 잡은 백년부락은 이미 관광객들이 선호하는 아름다운 풍경지로 떠올랐다. ㅡ‘동방제일촌’ 방천촌 중국 명촌으로 중국대지의 가장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동방제일촌’으로 불리우는 훈춘시 경신진 방천촌은 중조로 3개 나라의 접경지대와 제일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동방제일촌’으로 불리우는 훈춘시 경신진 방천촌 길림성 첫 명촌지 《방천촌지》는 방천의 력사와 인문, 지리, 풍토와 민속 그리고 경제사회건설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방천촌지》는 국가급 중대 문화프로젝트에 선정되여 편찬되였으며 2017년 12월에 북경 인민대회당에서 있은 《중국 명촌지 총서》 발행식에서 중국 명촌지 문화 프로젝트상을 수상했다. 력사적으로 방천촌은 두번 없어지는 아픈 기억을 남겼다. 한번은 1938년에 일본침략자들에 의해 마을이 없어졌고 다른 한번은 1957년의 홍수로 두만강이 범람하면서 마을이 밀려갔다. 1965년 정부에서는 강태원을 방천촌당지부 서기로 임명하고 그를 비롯한 18명 조선족 당원들을 방천으로 이사시켰다. ‘물 마실 때 우물 판 사람 잊지 말라’고 올해 방천촌에서는 마을을 전통문화촌으로 대개조하면서 강태원 로서기를 대표로 한 개척자들을 기리는 취지에서 마을 뒤켠 호수가에 ‘태원각’을 세웠다. 몇세대의 노력을 거쳐 오늘날 방천은 중국조선족특색마을, 길림성8경, 중국 아름다운 레저향촌, 국가 4A급 풍경구로 몰라보게 탈바꿈했다. 방천촌에는 옹군애민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통으로 남아있다. 부대의 지도원은 방천촌당지부 부서기를 겸임하고 조선족 촌민들과 군민의 정을 끈끈히 다져가고 있다. 조국의 변방을 지키는 자제병들을 위해 조선족 촌민들은 명절이면 찰떡에 맛있는 반찬을 장만해 부대를 위문하고 문예공연을 펼치며 매번 신병들이 오면 환영회를 베풀고 로병들이 떠나갈 때는 석별의 정을 함께 나누면서 군민 융합의 아름다운 장을 열어가고 있다. 저명한 시인 하경지는 연변조선족자치주를 돌아보고 “산마다 진달래요, 마을마다 렬사비”라는 유명한 시구를 남겼다. 연변은 지금 마을마다 산업이 흥성하고 전통가옥이 줄지어서고 생태문명환경이 이루어지고 촌관리가 잡혀지고 사람마다 복된 생활을 누리고 있다. 보다 싶이 마을마다 그야말로 조선족전통문화의 요람이다. /길림신문 홍길남 리철수 김성걸 리전 김가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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