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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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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윤동주와 친구 강처중 "발문" 댓글:  조회:3391  추천:0  2019-01-20
목차 브나로드 운동에 뛰어들다 연희전문학교에서 윤동주와 만나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만들다 경향신문 기자에서 좌익인사로 사라지다 시인 에머슨은 ‘친구를 얻는 가장 유익한 방법은 스스로 완전한 친구가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사랑과 정성을 쏟아부어야만 겨우 가능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시인 윤동주에게는 완전한 친구가 한 사람 있었다. 그가 바로 강처중이다. 강처중은 일본의 후쿠오카형무소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마친 재일유학생 윤동주의 시와 삶을 세상에 전파함으로써 영원히 그의 동반자가 되었다. 아울러 친구에 대한 굳은 의리와 아름다운 헌신을 통해 자신의 가슴팍에 새겨진 주홍글씨까지 퇴색시킬 수 있었다. 윤동주의 연희전문학교 문과 동기생이었던 강처중은 타고난 친화력과 리더십으로 윤동주와 함께 학창시절을 꽃피웠고, 재가 되어버린 윤동주의 삶을 복원하는 데 큰 공로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발간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구체적으로 그는 일본 유학을 떠난 윤동주가 서울에 두고 간 〈참회록〉 등 필사본 시집에 들어가지 않은 원고와 그의 장서, 졸업앨범, 앉은뱅이책상 등속까지 죄다 보관했다가 해방 후 서울에 온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에게 전해줌으로써 후세인들이 시인의 생생한 체취를 맡을 수 있게 해 주었다. 게다가 그는 윤동주가 도쿄에서 자신에게 보낸 편지 속에 담겨있던 5편의 시를 공개함으로써 윤동주 시문학의 지평을 넓혀 주었다. 1947년의 소란스런 해방공간에서 강처중은 경향신문 기자로 봉직하면서 무명시인 윤동주의 작품을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한편, 후배 정병욱이 보관하고 있던 윤동주의 자선시집 안에 있던 19편과,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작품 가운데 12편을 추려내 1948년 1월 총 31편의 작품이 담긴 정음사 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을 발간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 ⓒ 연합뉴스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 후 강처중은 이념 대립이 극심하던 1950년대 초반 남로당 요인으로 활동하다가 공안당국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로 인해 강처중은 남쪽에서 기피인물이 되었고 모든 공식문서에서 삭제되었다. 그 영향으로 학계에서도 민족시인 윤동주의 문학에서 그를 제외함으로써 절름발이 논문을 자초했다. 윤동주가 일제의 탄압으로 이역만리 타국에서 옥사했다면 강처중은 그처럼 민족 내부의 갈등으로 희생되었던 비극적인 존재였다. 브나로드 운동에 뛰어들다 강처중은 1916년생으로 함경남도 원산 출신이다. 부유한 한의사 집 맏아들로 태어났지만 성품이 매우 신중하고 과묵했다. 그가 어린 시절 어떤 학교에 다녔는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17세 때인 1932년 동아일보에서 실시한 제2회 브나로드 운동에 참여하여 민중을 계몽하고 한글보급과 문맹타파에 헌신했음은 당대의 동아일보 기사로 확인할 수 있다. 1931년부터 시작된 브나로드운동은 일제시기 광복군으로, 해방 후 반독재민주화투쟁으로 활약했던 14세의 장준하를 비롯하여 수백 명의 청년 학생들의 전폭적인 참여를 이끌어냈고, 당대의 수재였음에 분명한 강처중 역시 솔선수범하여 이 운동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브나로드운동은 애초에 한글보급을 통한 민족의 독립역량 배양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두고 추진되었다. 식민지 조국의 비참한 상황을 직시하고 있던 소년 강처중으로서는 한 줄기 단비 같은 뉴스였다. 당시 강처중은 방학기간인 8월 2일부터 고향에서 가까운 함경도의 고평역에서 100여 명의 농민들에게 한글, 일용계수법, 성경, 지리, 역사, 유희, 창가, 체조, 동화 등을 가르쳤다. 책임대원이었던 그의 보고서에 따르면 강처중 자신은 한글을 가르쳤고, 다른 과정은 여러 동지와 타처에서 피서 온 학생들이 가르쳤다. 그 결과 한글과 일용계수법을 해득한 사람이 20명이었다. 이듬해인 1933년부터 브나로드운동은 학생하기계몽운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때는 도쿄, 간도 등지에서도 참가신청이 이어졌고, 특히 간도의 명신여학교에서는 40명이나 참가하여 주목을 받았다. 강처중은 전년과 마찬가지로 함경북도 덕원군의 책임대원으로서 북성면 문평리에서 남녀 70여명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당시 그의 보고 내용이 동아일보 지면에 실려 있다. ‘이곳에서는 장소와 당국의 허가 관계로 하는 수없이 기독교에서 하는 하기아동성경학교와 연합하여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비용이나 당국 금지를 당하거나 하는 일은 없고, 다만 교회에서 하므로 성경본위로 하여 한글(산술은 하지 않음)을 중요시 아니하는 것이 유감이오나, 책임이 있는 저로서는 최대의 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재미있는 일은 이것이 조직적으로 되어 이곳에 해변으로 인하여 피서 온 고등 대학교 학생 중등보통학교 교사 등을 강사로 하는 훌륭한 학교가 되어 각기 전문하는 학과를 가지고 어린이들에게 수중하여 주고 있습니다.’ 연희전문학교에서 윤동주와 만나다 강처중은 23세 때인 1938년 윤동주와 함께 연희전문학교 문과 본과에 합격했다. 당시 송몽규는 문과 별과에 합격하여 동급생이 되었다. 그때부터 세 사람은 기숙사 핀슨홀의 3층 지붕 밑 방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끈끈한 우정을 쌓았다. 영어에 능통했던 그는 문과 동기들 가운데 1, 2등을 다투면서 ‘영어도사’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한편으로 뒤틀린 심사를 에둘러 표현하는 풍자적인 면도 있었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의 강요로 창씨개명을 강요받자 이름을 신농처중(神農處重)이라고 지어 학적부에 올렸던 것이다. 누군가 너무 심하지 않냐고 타박하자 중국의 삼황오제 중에 한 사람인 신농씨(神農氏)가 본래 강(姜)씨였으니 거리낄 게 무어냐며 되받아쳤다. 문과 학생이었던 강처중은 윤동주나 송몽규처럼 문학에 심취했는데 3학년 때인 194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부문에 지원했다가 낙방했다. 그때 평자는 그의 작품이 너무나 허구적이어서 실감이 없었다고 혹평했고, 특히 글에 설명이 너무 많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리더십으로 매사에 앞장섰던 그는 4학년 때 연전 문과 학생회인 문우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문예부장인 송몽규와 함께 잡지 《문우》를 발간했다. 하지만 편집과정에서 많은 원고가 검열에 걸려 삭제되었고, 잡지는 최종호가 되었으며, 국민총력운동이라는 미명하에 문우회까지 해산의 비운을 겪는다. 후배 장덕순의 회고에 의하면 그 무렵 강처중은 연희동 산기슭을 산책하다가 개울가에서 뱀을 사로잡은 뒤 자신에게 보여주며 “세상의 모든 동물 중에 제일 독한 종자가 바로 뱀이다. 동물은 보통 먹이를 주는 사람에게 길들여지기 마련인데 뱀은 먹이를 받아먹기는 하면서도 전혀 사람을 따르지 않는다. 아무리 잘해주어도 끝내 길들여지지 않는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열정이 압제에 눌리고 패배감만 안겨주는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통탄하는 듯한 느낌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만들다 윤동주의 육필원고 ⓒ 연합뉴스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1945년 2월 16일 윤동주가 후쿠오카감옥에서 옥사한 뒤 반년 만인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고 조국이 해방되자 윤동주의 당숙 윤영춘이 조카의 유품을 회수하기 위해 서울에 내려와 그가 한때 묵었던 북아현동 하숙집을 찾다가 실패하고 돌아갔다. 이후 남북이 좌우로 갈리고 38선으로 가로막혀 어수선한 1946년 6월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가 단신으로 월남하여 강처중을 찾아왔다. 그러자 강처중은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윤동주의 원고와 유품을 아낌없이 건네주었다. 당시 그가 전해준 윤동주의 육필 시고는 아래와 같은 세 종류였다. 첫째, 윤동주가 필사본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엮기 전에 쓴 작품 가운데 시집에 넣은 19편의 작품을 제외한 시 작품. 〈팔복〉, 〈위로〉 등. 둘째, 자선시집을 엮은 뒤 새로 쓴 시 작품. 〈참회록〉, 〈간〉 등. 셋째, 일본에서 쓴 시 작품. 〈쉽게 씌어진 시〉, 〈흰 그림자〉, 〈사랑스런 추억〉, 〈흐르는 거리〉, 〈봄〉. 1947년 2월 16일의 윤동주 사망 2주기를 앞두고 강처중은 정병욱과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시작품을 모아 유고시집을 발간하기로 결정했다. 출간시기는 사망 3주기인 1948년 2월 16일 이전으로 잡았다. 그 일은 당시 경향신문 기자로서 언론계와 문화계에 발이 넓은 강처중이 도맡았다. 강처중은 시집 발간에 앞서 윤동주를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하고 1947년 2월부터 경향신문 지면을 통해 윤동주의 작품을 게재했다. 정지용이 퇴사하고 난 뒤인 7월 27일자 지면에 세 번째 실린 〈소년〉에 그는 다음과 같은 소개 글까지 덧붙였다. ‘고 윤동주는 젊은 나이에 일본감옥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난 우리들의 선배입니다.’ 이런 사전작업과 함께 강처중은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받고 있던 정지용에게 유고시집의 서문을 부탁했다. 그 무렵 경향신문사를 퇴직하고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정지용은 강처중이 데려온 윤일주로부터 윤동주와 그의 집안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다음 그 내용을 서문에 자세히 썼다. 그런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1948년 1월 30일 서울 정음사에서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간행되었다. 강처중이 쓴 초판본 시집의 발문에는 친구 윤동주와 송몽규에 대한 그리움이 아래와 같이 애타게 묘사되어 있다. 동주는 별로 말주변도 사귐성도 없었건만 그의 방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동주 있나?” 하고 찾으면 하던 일을 모두 내던지고 빙그레 웃으며 반가이 마주앉아 주는 것이었다. “동주, 좀 걸어보자구.” 이렇게 산책을 청하면 싫다는 적이 없었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산이든 들이든 강가이든 아무런 때 아무 데를 끌어도 선뜻 따라나서는 것이었다. 그는 말이 없이 묵묵히 걸었고 항상 그의 얼굴은 침울하였다. 가끔 그러다가 외마디 비통한 고함을 잘 질렀다. “아.” 하고 나오는 외마디 소리! 그것은 언제나 친구들의 마음에 알지 못할 울분을 주었다. “동주, 돈 좀 있나.” 옹색한 친구들은 곧잘 그의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노리었다. 그는 있고서 안 주는 법이 없었고 없으면 대신 외투든 시계든 내주고야 마음을 놓았다. 그래서 그의 외투나 시계는 친구들의 손을 거쳐 전당포 나들이를 부지런히 하였다. 이런 동주도 친구들에게 굳이 거부하는 일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동주, 자네 시 여기를 좀 고치면 어떤가.” 하는 데 대하여 그는 응하여 주는 때가 없었다. 조용히 열흘이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곰곰이 생각하여서 한 편 시를 탄생시킨다. 그때까지는 누구에게도 그 시를 보이지를 않는다. 이미 보여주는 때는 흠이 없는 하나의 옥이다. 지나치게 그는 겸허, 온순하였건만 자기의 시만은 양보하지를 않았다. 또 하나 그는 한 여성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이 사랑을 그 여성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끝내 고백하지 않았다. 그 여성도 모르는 친구들도 모르는 사람을 회답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는 사랑을 제 홀로 간직한 채 고민도 하면서 희망도 하면서……. 쑥스럽다 할까 어리석다 할까? 그러나 이제 와 고쳐 생각하니 이것은 하나의 여성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을 ‘또 다른 고향’에 대한 꿈이 아니었던가. 어쨌든 친구들에게 이것만은 힘써 감추었다. 그는 간도에서 나고 일본 후쿠오카에서 죽었다. 이역에서 나고 갔건만 무던히 조국을 사랑하고 우리말을 좋아하더니……. 그는 나의 친구기도 하려니와 그의 아잇적 동무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의 죄명으로 2년형을 받아 감옥에 들어간 채 마침내 모진 악형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것은 몽규와 동주가 연전을 마치고 도쿄에 가서 대학생 노릇하던 중도의 일이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나 마지막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운명했지요. 짐작컨대 그 소리가 마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는 듯 느껴지더군요.”  이 말은 동주의 최후를 감시하던 일본인 간수가 그의 시체를 찾으러 후쿠오카에 갔던 그 유족에게 전하여 준 말이다. 그 비통한 외마디 소리! 일본 간수야 그 뜻을 알리만두 저도 그 소리에 느낀 바 있었나 보다. 동주 감옥에서 외마디 소리로서 아주 가버리니 그 나이 스물아홉, 바로 해방되던 해다. 몽규도 그 며칠 뒤 따라 옥사하니 그도 재사였느니라. 그들의 유골은 지금 간도에서 길이 잠들었고 이제 그 친구들의 손을 빌어 동주의 시는 한 책이 되어 길이 세상에 전하여지려 한다. 불러도 대답 없을 동주 몽규건만 헛되나마 다시 부르고 싶은 동주! 몽규! 강처중은 이처럼 친구에 대한 애타는 그리움과 지극한 우정을 모아 윤동주를 무명시인에서 일약 민족시인으로 발돋움시켰지만 대가는 참담했다. 해방공간의 극심했던 좌우대립과 한국전쟁의 여파로 정지용과 함께 강처중은 사회적 금치산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55년 2월 윤동주 서거 10주년 기념 증보판 시집이 정병욱과 윤일주의 손에 의해 출간될 때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이 삭제되기까지 했다. 정지용은 전쟁 당시 월북했다는 이유로, 강처중은 좌익인사라는 이유였다. 1987년 공식적으로 해금되기 전까지 정지용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고, 학계의 논문이나 학술서적에서 반드시 필요한 경우 ‘정○용’, ‘정용’ 등으로 표기했다. 또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는 수차례의 개정판에서 두 사람의 흔적을 지웠다가, 1983년 10월 10일 간행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개정판에서 강처중을 ‘서울의 한 벗’이라고 에둘러 표현하기도 했다. 경향신문 기자에서 좌익인사로 사라지다 경향신문은 1946년 10월 1일 경성의 가톨릭재단에서 창간한 신문으로 최초의 회장은 노기남 주교, 주간은 정지용, 편집국장은 횡보 염상섭이었다. 이때 강처중은 조사주임으로 창간작업에 참여했다. 1947년 1월 15일 정지용이 ‘여적(餘滴)’ 란에 주한미군과 한국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 문제를 실었다가 미군정 당국과 극우 단체로부터 수난을 당했다. 그와 같은 경향신문의 진보적인 성향을 주도했던 강처중은 이후 기자로 활동하면서 골수 사회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1947년 4월 27일자 2면에는 충무공 탄생 402주년을 기념하여 그가 쓴 ‘충무공 이순신’이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여기에서 그는 새로운 시대가 올수록 충무공 이순신은 더욱 빛나는 존재가 된다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인민을 위하고 인민을 사랑하고 인민과 함께 강토를 지킨 때문이다. 인민은 멸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민과 함께 싸우던 위한 인물들은 영원히 민족의 마음속에 사는 것이다. 그런 위대한 인물들은 민족존망의 위기에 나와서 인민과 함께 그 위기를 극복하고 간 분들이다. 때문에 그 민족이 위기에 당면하면 그 인물을 더욱 사모하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 같은 정세에 처하여 이순신을 가일층 사모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냥 영웅 이순신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민중과 함께 동고동우(同苦同憂)하며 투쟁하던 이순신이 그리운 것이다.’ 현재 경향신문 데이터베이스에는 강처중의 흔적이 이순신과 윤동주에 대한 2편의 기사만 남아있다. 이후 그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다가, 한국전쟁 이후 계엄령 치하였던 1953년 9월 21일 손원일 국방부장관이 발표한 ‘정국은 간첩사건’에서 이름을 드러낸다. 정국은은 일제 강점기 일본 마이니치(朝日)신문 기자를 지낸 언론인이었는데 해방 후 연합신문사 주일특파원, 국제신문사 편집국장 들을 지냈으며 동양통신사 및 연합신문사 주필로 재직하던 중 간첩협의로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치안국 고위관리인 홍택희 총경을 비롯하여 언론, 정부, 국회의원까지 연루되어 국회 내에 조사위원회까지 구성되었던 초대형 사건이었다. 정국은은 고등군법회의에 송치되어 단심으로 군사재판을 받은 뒤 그해 12월 2일 사형이 언도받았다. 한데 1954년 1월 23일 총살형 장소로 예정된 홍제원 화장터 근처에 구경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지만 사형집행이 연기되었다. 결국 정국은은 1955년 2월 18일 수색에서 총살되었지만 그가 죽지 않고 미국 극동사령부의 보호 아래 일본에서 이중스파이로 활약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바로 이 사건에서 강처중은 남로당의 젊은 실세로서 크게 부각되었다. 군 당국은 정국은의 모든 간첩 혐의가 남로당의 상부선인 강처중의 지령에 따라 행해졌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한데 작가 송우혜의 조사에 따르면 강처중은 이미 1950년에 남로당 간부였던 김삼룡, 이주하 등과 함께 체포되어 사형 판결을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38선을 돌파한 뒤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하면서 강처중은 감옥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두 달여가 지난 9월 4일 강처중은 갑자기 부인 이강자 여사에게 소련에 가서 공부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가출해 버렸다. 어쩌면 그는 생사의 기로에서 가까스로 살아나왔건만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전쟁의 참상이 이어지자 실망한 나머지 현실도피를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먹이를 주어도 길들여지지 않은 뱀 같은 민족의 비정한 세월을 조소하면서……. 그래서일까. 그 후 남로당과 관련된 어떤 문건이나 서적에서도 그의 존재는 완벽하게 지워졌다. 그의 얼굴이 다시 세상에 드러난 것은 송몽규의 조카인 작가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이었다. 그리고 2016년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에서 그는 해맑은 미소를 띠며 관객들의 앞에 섰다. =================///          
5    윤동주와 정지용 댓글:  조회:2963  추천:0  2019-01-20
▲  1941년 윤동주가 원고지에 정서해 간직했던 첫 번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발간되지는 않았다.   ▲  1948년 정음사에서 처음 발간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동주 자필 원고에 이어 두 번째다.   ▲  1955년 정음사에서 재간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전체적으론 세 번째 판본이다.   ▲  영화 ‘동주’에서 윤동주(왼쪽)와 정지용(오른쪽)이 만나는 장면. 그러나 둘이 생전에 만났다는 문헌적 증거는 없다. 다만 정지용과 윤동주는 일본 도시샤대 영문과 선후배였으며 해방 후에 정지용은 윤동주의 동기인 강처중을 통해 윤동주의 유고를 접했고, 시집 초판에 서문을 썼다.           유성호의 윤동주 100주년, 문학과 역사  -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세 권의 시집 ◇ 정지용과 윤동주와 ‘카톨릭소년’ 윤동주는 북간도에서 ‘카톨릭소년’에 동시를 몇 편 발표하였다. 시를 써두기만 하고 발표를 거의 안 했던 그로서는 이 잡지가 중요한 발표 지면이었던 셈이다. 이 잡지는 가톨릭이라는 종교의 힘에 의해 일제강점기에 서울과 만주에서 발행되었는데, 이는 당시 만주 옌지(延吉)에 가톨릭 교구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교토(京都)의 도시샤(同志社)대 영문과에 다니던 정지용은 1928년 7월 교토의 가와라마치(河原町) 성당에서 천주교 입교 의식으로 세례를 받았다. 영세명은 프란치스코였고, 중국식 표기인 방지거(方濟各)를 쓰기도 하였다. 그리고 1929년 휘문고보 영어교사로 돌아온 정지용은 천주교 종현(鍾峴) 성당 청년회 총무를 맡았다. 1933년에는 천주교 전국 5개 교구(옌지교구 포함) 연합으로 창간한 월간 ‘카톨릭청년’의 문예란 편집을 맡게 되었다. 편집위원은 윤형중 신부를 비롯하여 장면, 장발, 정지용으로 구성되었고, 주간은 이동구였다. 필진은 이병기, 정지용, 이상, 신석정, 이태준, 김기림, 김억, 조운, 유치환, 김동리, 박태원, 김소운, 이효상 등이었다.  정지용은 카톨릭청년 문예란에 이병기의 ‘조선어강좌’를 연재하였다. 당시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이상(李箱)의 시편을 처음 싣기도 했다. 처음에 그림과 숫자로만 시를 썼던 이상은, 이 지면에 이르러 처음으로 ‘꽃나무’ ‘이런 시(詩)’ 등 의젓한 한글 시편을 발표하였다. 비록 일제의 탄압으로 청년회가 해체되기는 했지만, 정지용의 신앙은 더욱 고양되어 1937년 성프란치스코회 재속(在俗) 회원으로 입회하기도 하였다. 이후 정지용은 서울 백동(혜화동) 성당에서 장면, 장발, 유홍렬, 한창우 등과 착의식에 참석하였는데, 한창우는 나중에 경향신문 사장이 되는 인물이다. 정지용은 일제 말기에 부천 소사로 이사하여 천주교 공소 신자로 신앙생활에 열중하였다.  바로 그 무렵 윤동주는 가톨릭 만주 옌지교구에서 발행하는 카톨릭소년의 애독자이자 투고자로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이렇게 가톨릭이라는 종교의 매체들에 의해 연결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정지용은 해방 후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초판(정음사, 1948년) 서(序)에서 윤동주의 신앙시 ‘십자가’를 정성스레 인용할 정도로, 두 사람은 신앙이라는 공통항으로 연결되기도 하였다. 천주교회에서 운영하던 경향신문 주간도 물러나고, 이화여대 교수도 사퇴한 후 녹번동 한 초가에 은둔하다가 정지용은 홀연히 북으로 떠나갔다.  ◇‘정지용시집’과 정음사와 윤동주  정지용과 윤동주는 도시샤대 영문과 선후배였지만 생전에 만난 적은 없다. 영화 ‘동주’에서는 윤동주가 정지용을 찾아갔을 때 정지용이 일본 유학을 권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윤동주가 정지용을 만났다는 문헌적 증거는 없다. 다만 해방 후에 정지용은 윤동주의 동기인 강처중을 통해 윤동주의 유고를 접하게 되었고, 시집 초판에 감동적인 서문을 씀으로써 도시샤대 선후배로서의 인연을 완성한다. 그리고 정지용의 월북 후 만들어진 윤동주 시집 재판은 ‘정지용시집’(시문학사, 1935년)의 배열을 그대로 따랐다. 북으로 간 강처중이 아니라, 시인의 아우인 윤일주와 후배인 정병욱의 편집 결과였다. 박용철에 의해 만들어진 정지용시집은 모두 5부로 구성되었는데, 1부 최근작, 2부 초기 시편, 3부 동요·동시, 4부 신앙시, 5부 산문시였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재판(정음사, 1955년 2월 16일) 역시 1부 자필시고, 2부 도쿄(東京) 시편, 3부 연대가 기입되지 않은 작품군(群), 4부 동요, 5부 산문으로 배열했다. 윤일주와 정병욱이 이 시집을 편집했을 때 정지용시집을 깊이 참고했으리라.  이 시집을 출간한 정음사(正音社)는 1928년에 국어학자인 외솔 최현배가 창설하여,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한글을 지키는 출판 활동을 벌여온 출판사이다. 정음사에서는 외솔의 ‘우리말본’을 비롯하여 1930년대에도 꾸준하게 한글 관련 책을 출간하였다. 바로 그 출판사에서, 일본 후쿠오카(福岡) 감옥에서 ‘사상불온, 독립운동’ 죄목으로 싸늘하게 옥사한 비극적 청년 시인의 유고시집이 출간된 것이다. 정음사 사장 최영해는 최현배의 아들로서, 양정고보와 연희전문 문과를 나왔고, 조선일보 출판부에 들어가 ‘소년’ 편집을 하기도 했고, ‘삼사문학’ 동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해방 후 경향신문 부사장을 역임하였고, 정음사 사장을 지내면서 윤동주 유고시집을 출간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정지용과 강처중, 최영해, 한창우 등이 결속하여 윤동주의 유고 시편을 발표하고 시집을 발행하는 동선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가톨릭-연희전문-경향신문-정음사’의 동선과 그대로 겹치는 형상을 하고 있다.  윤동주는 정지용시집을 소장하게 된 날짜를 1936년 3월 19일로 시집 내지에 감격적으로 기록하였다. 정지용 시는 윤동주뿐만 아니라 당대의 여러 후배 예컨대 신석정, 이상, 임화, 청록파 등에게 매우 보편적으로 감염된 어떤 수원(水源)이자 정전(正典) 역할을 했다. 마치 근대 초기에 시인들이 모두 김억의 번역 스타일을 따라 하자 춘원 이광수가 “전부 ‘오뇌의 무도’화(化) 하였다”고 말한 현상이 1930년대에 정지용 모방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특별히 윤동주에게는 정지용 영향의 흔적이 상대적으로 뚜렷하게 나타난다. 말하자면 정지용시집은 윤동주 습작 시절의 교과서였던 셈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의 맥락  그런데 이 재판 시집은 사실 세 번째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이다. 두루 알려져 있듯이 첫 번째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는 윤동주가 연희전문 졸업반 때 자신의 시편 가운데 18편을 정선하고, 마지막에 1941년 11월 20일 날짜로 시집의 서시를 써서, 모두 19편으로 만들어 원고지에 정서해 묶은 것이다. 비록 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가 발간되지는 않았지만, 1941년 11∼12월에 완성된 윤동주 자선 친필 시고가 온전한 제목으로서의 첫 번째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인 셈이다. 윤동주가 정병욱에게 준 이 원본 시고가 남아, 훗날 일반에게 공개되어 친필 전집의 자양이 된 것이다. 이어 1947년 2월 13일 경향신문에 정지용의 소개 글과 함께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詩’가 최초로 발표되었고, 1948년 1월에는 유고 31편을 모아 정지용 서문과 강처중 발문과 유영의 추도시를 붙여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초판을 간행하였다. 말하자면 이것이 두 번째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이다. 이 시집 표지는 파란색으로 더 유명하지만, 초간본 겉표지는 사실 갈색이었다. 정음사 대표 최영해의 장남인 최동식(전 고려대 화학과 교수)은 “윤동주의 3주기 추도식에 초간본을 헌정하려 했으나 제작이 늦어져 동대문시장에서 구한 벽지를 마분지에 입혀 표지를 꾸민 뒤 10권을 급하게 제본해 가져갔다”라고 증언한 바 있는데, 즉 벽지로 표지를 제본한 ‘갈색’ 시집 10권이 세상의 빛을 처음 본 윤동주의 최초 시집이었던 셈이다. 이후 한 달 정도 지난 1948년 3월에 초판본 1000부가 파란색 표지로 출간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잠깐, 이 시집 제목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가 아니어야 했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19편만 그 제목으로 출간하려 했던 윤동주의 뜻을 존중한다면, 시집 전체 제목은 ‘윤동주시집’ 정도로 하고 1부 19편을 원래 시집 제목으로, 그리고 나머지 12편을 다른 소제목을 달아 펴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냥 밋밋하게 윤동주시집으로 했다면 대중들의 호응은 훨씬 덜했을 것이니, 윤동주 시집 제목은 역시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의 운명을 타고난 셈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 세 번째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이후 1948년 12월 누이 윤혜원이 윤동주의 습작 노트를 가지고 북간도에서 서울로 이주하였다. 1953년 7월 15일 정병욱이 ‘연희춘추’에 ‘고 윤동주 형의 추억’을 썼고, 1953년 9월에는 윤동주에 대한 최초 비평 ‘윤동주의 정신적 소묘’가 고석규에 의해 쓰였다. 1955년 2월에는 시인의 10주기를 기려 시 89편과 산문 4편을 엮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재판을 정음사에서 펴냈는데, 이때 초판본에 실렸던 정지용 서문과 강처중 발문은 제외되었다. 편집은 정병욱과 윤일주가 하고 표지화는 김환기가 담당했다. 이것이 세 번째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이다. 앞에서 말한 정지용시집 편제를 따른 바로 그 시집이다. 그리고 1967년 2월에는 백철, 박두진, 문익환, 장덕순의 글을 책 말미에 추가 수록하고 판형을 바꾸어 새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정음사에서 간행하였다. 대중 보급판이 완료된 셈이다. 이러한 텍스트의 역사 안으로 제국과 식민, 기억과 망각, 해방과 분단과 전쟁의 흔적이 흘러간다. 그 점에서 모든 텍스트는 역사적 산물이다. 우리가 텍스트의 맥락과 구성까지 면밀히 들여다보아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습작과 완성작, 진정한 윤동주 정전을 위하여  윤동주는 명동소학교에 들어간 이후 죽을 때까지 학생 신분으로만 있었다. 학교도 여럿 다녔다. 그는 자신을 ‘시인’이라고 여기지 않았고, ‘학생’이라는 아이덴티티를 견지하면서, 선행 명편들을 읽고 또 읽으면서, 그 가운데 핵심이 되는 표현이나 사유에서 자신의 시적 좌표를 정성스레 찾아갔다. 마치 서양화 그리는 학생이 데생 연습을 반복하면서 어떤 상(像)을 그려가듯이, 윤동주는 선배들의 빛나는 성과에 힘입어 자신의 시상(詩想)에 구체적인 형태를 부여해간 것이다. 그 대상은 정지용, 김광섭, 이상, 백석, 이용악 등에 두루 걸쳐 있다. 특별히 정지용의 압도적 영향 아래 여러 편의 습작들을 써두었다.  그러나 윤동주는 자신이 마지막 정리한 친필 시고에서 정지용 모작들을 모두 뺌으로써, 그것들이 학생 시절 습작이었음을 스스로 증명하였다. 그러니까 윤동주가 남긴 노트의 습작들을 인용하면서 그가 엄선한 작품들과 등가적으로 처리하는 일은 적절치 않다. 심지어 그것을 예로 들어 윤동주 시의 결함이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은 전혀 온당하지 않다. 다만 우리는 윤동주가 최종적으로 갈무리한 19편을 일단 윤동주 정선(精選)이라고 보아야 하고, 그 나머지는 섬세하게 실증적 위상을 따져 윤동주의 ‘습작’과 ‘완성작’을 구분해야 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그가 오랜 습작기를 거쳐 진정한 ‘시인’에 이르게 된 과정을 온전하게 경험하게 될 것이다.(문화일보 )  /유성호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교수 
4    윤동주, 시 한수가 씌여지기까지... 댓글:  조회:2699  추천:0  2019-01-20
2017-07-11    【서울=뉴시스】 소년 윤동주   【서울=뉴시스】 신동립 기자 = 시인 윤동주(1917~1945)가 쓴 글 124편을 모두 담은 ‘윤동주 전 시집’이 나왔다. 윤동주의 작품 전체를 한 권에 수록한 첫 책이다.   소실되지 않은 윤동주의 시와 수필뿐 아니라 윤동주를 위해 쓰여진 서문, 후기, 발문도 빠뜨리지 않았다.    ‘윤동주 전 시집’ 제1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은 1948년 초판본 전문이다. 2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55’는 1948년 본의 시를 제외한 나머지 작품을 소개했다. 3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79’는 1948년 본과 1955년 본에 없는 시들로 이뤄졌다. 4부 ‘나중에 발굴된 시’는 기존의 윤동주 시집에서 볼 수 없는 작품 8편이다. 1~3부 시들은 당시 발간된 본문 순서대로, 4부는 언제 지었는지 알 수 없는 경우를 빼고는 창작연도에 따라 실었다.  9인의 윤동주 추모문은 자체로 하나의 문학작품이라는 평이다. 1부에서는 1948년 나온 원본 그대로 정지용의 서문, 유영의 추도 시, 강처중의 발문을 읽을 수 있다. 북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사라진 정지용과 강처중의 글을 현대어로 정리해 넣었다. 2부에는 정병욱의 후기와 윤일주의 ‘선백(先伯)의 생애’, 3부에는 백철·박두진·문익환·장덕순의 후기가 들어있다. 윤동주 연보는 4부 뒤에 게재했다.   【서울=뉴시스】 윤동주(뒷줄 오른쪽) 은진중학에서 숭실중학으로 편입했을 무렵이다. 초판본의 서문과 발문 등은 1955년 이후 인쇄본에는 누락됐다. 시인 정지용은 6·25동란 때 납북됐고, 경향신문 기자 강처중은 소련에 가서 공부하겠다는 말을 가족에게 남기고 1950년 9월4일 가출한 뒤 행방이 묘연해졌다. 당시 강처중은 남로당 지하당원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와중에 전쟁이 터졌고, 서울로 침략한 인민군이 형무소를 개방하자 집에서 두 달 남짓 요양하다가 떠났다. 정지용은 1950년 9월께 동두천 부근에서 폭격에 희생됐다.    정지용은 ‘서(序)’에 “아직 무릎을 꿇을 만한 기력이 남았기에 나는 이 붓을 들어 시인 윤동주의 유고(遺稿)에 분향하노라”고 적었다. 그리고 애도했다. “노자(老子) 오천언(五千言)에 ‘허기심 실기복 약기지 강기골(虛基心 實基腹 弱基志 强基骨)’이라는 구(句)가 있다. 청년 윤동주는 의지가 약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정시에 우수한 것이겠고, 그러나 뼈가 강하였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일적(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구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 일제시대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앝을 것뿐이나,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강처중은 “그는 한 여성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이 사랑을 그 여성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끝내 고백하지 안했다. 그 여성도 모르는 친구들도 모르는 사랑을 회답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는 사랑을 제 홀로 간직한 채 고민도 하면서 희망도 하면서-쑥스럽다 할까 어리석다 할까? 그러나 이제 와 고쳐 생각하니 이것은 하나의 여성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을 ‘또 다른 고향’에 대한 꿈이 아니었던가. 어쨌던 친구들에게 이것만은 힘써 감추었다”고 발문에 남겼다.  【서울=뉴시스】 윤동주 전 시집 윤동주의 친구인 문익환은 ‘동주 형의 추억’을 전했다. “나는 동주 형이 시인이 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가 시를 쓴다고 야단스레 설치는 것을 본 일이 없다. 그는 사상이 능금처럼 익기를 기다려서 부끄러워하면서 아무것도 아닌 양 쉽게 시를 썼다. 그렇게 자연스레 시를 쓰는 듯이 보였기 때문에 나는 그가 취미로 시를 쓴다고만 생각했었다. 한데 그는 몇 수의 시를 남기려 세상에 왔던 것이다. 그의 가장 동주다운 멋은 역시 그의 시에 나타나 있다고 나는 믿게 되었다. 그는 사상이 무르익기 전에 시를 생각하지 않았고, 시가 성숙하기 전에 붓을 들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시 한 수가 씌어지기까지 그는 남모르는 땀을 흘리기도 했으련만, 그가 시를 쓰는 것은 그렇게도 쉽게 보였던 것이다.” 264쪽,   =========================================/// 덤으로 더... ... ‘동(冬)섣달 꽃 같은 청년시인, 연심을 품었다’에서는 시인과 관련해 거의 알려진 바 없는 여성 관계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저자는 자료와 정황을 토대로 생전에 세 명의 여성과 연을 맺었다고 설명했다. 시인의 절친한 후배였던 국문학자 장덕순의 말을 빌려와 ‘해란강변(별칭: 연애공원)을 함께 거닐었던 추억 속의 여자’가 시인의 시에서 ‘순(順)’ ‘순(이)’로 표현하는 여성일 수도 있다고 추정했다... ///경남일보
3    {자료} - 윤동주 시의 무궁무진한 힘과 그 가치... 댓글:  조회:2819  추천:0  2019-01-20
윤동주와 그의 시에 대한 분석심리학적 해석 오광욱(용정, 윤동주연구회 회원,연변대학 문학박사)   1. 들어가는 말   민족시인 윤동주(1917.12-1945.2)에 대한 연구는 1948년 그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간행된 후 많은 연구자들에의하여 지금까지 활발하고 다각적인 시각에서 다루어져 왔다. 윤동주는 당시 일제의 식민통치가 극심하고 문필활동이 자유스럽지못한 상황에서 125편의 시, 동시, 산문 등을 남겼는데 지금까지 시인에 관한 각종 연구논문, 저서 등은 220여 편에 달하고 있다. 윤동주에 대한 연구를 간단히 살펴보면 크게 전기적 사실에 대한 연구, 문학사적위치에 관한 연구, 정신사적 측면에서의 연구, 비교문학적연구, 원전확정에 관한 연구, 형식적 측면에서의 연구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중 정신사적 측면에서의 연구는 다시 크게 주체성, 저항성, 종교성 등에 대한 연구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처럼 시인과 그의 작품에 대한 연구는 다각적인 시각과 심도 있는 차원에서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윤동주의 시를 조명한 논문은 손꼽을 정도로 가련한 상황이다. 심리적 모티브에서 일어나게 된 인간의 활동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신활동의 결과인 문학작품도 역시 심리학의 대상이 될 수 있듯이 시인의 작품도 심리학적인 관점을 충분히 적용할 수 있는 대상이다. 그리고 또한 윤동주의 시가 오늘날까지 작가와 다른 시대, 사회에 살고 작가와 전혀 다른 경험을 지니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까지 사랑받는 것도 시대와 사회를 초월한 우리들이 모두 공감하는 어떤 보편적인 제시를 심리적으로 우리들에게 안겨주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하여 본고에서는 윤동주와 그의 대표적인 시 작품들을 칼·융(Carl Gustav Jung,1875-1961)의 분석심리학으로 해석해보려 한다. 윤동주에 대한 이러한 심리학적 접근은 한 작품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하는 하나의 방법론을 제시해줄 수 있을 뿐더러 시인의 정신세계를 진일보 파헤쳐 작품의 심층적 의미와 지니고 있는 가치를 더욱 분명히 할 수 있을 뿐더러 현시대 심리적인 고통을 받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도움을 줄 수 있는 의미 있는 작업이라 생각된다.     2. 자아의 성숙   칼·융의 분석심리학에 의하면 의식의 중심에는 자아(自我)가 존재하고 무의식의 중심에는 자기(自己)가 존재하는바 의식 속의 자아가 무의식의 내용물을 부단히 파헤치고 깨달아나가 자기와 포옹할 때 자기성장, 즉 자기실현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의식의 중심에 위치한 자아는 두 가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데 하나는 바깥세계와 관계를 맺고 이에 적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의식의내면세계를 살펴 이와 관계를 맺고 이에 적응하는 기능이다. 의식의 중심으로서 의식을 통제하고 견고히 하는 것이 자아이지만 동시에 무의식의 내용을 의식에 받아들여 이를 동화시키거나 그 뜻을 인식하는 것도 자아의 몫이다. 그만큼 성숙된 자아는 자기실현의필수적인 전제조건으로 되는 것이다. 윤동주는 기독교가정에서 태어나 종교적인 가정교육을 받으면서 자랐다. 소학시절 윤동주는 서울에서 발행되던 아동지 《어린이》와 《아이생활》 등 잡지를 정기적으로 구독하였고 5학년 때에는 송몽규 등과 함께 《새 명동》이라는 등사판 잡지를 만들 정도로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우등생인 것으로 전해진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어린 시절 윤동주는 이미 자아가 의식의 중심을 통치하고 자아의식이 어느 정도 성숙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윤동주의 성품에 대하여 동생 윤일주는 “동주형의 근실하고 관유함은 할아버지에게서, 내성적이요 겸허함은 아버지에게서, 온화하고 치밀함은 어머니에게서 각각 물려받은 성품”이라고 말하였다. 윤동주와유년시절을 같이 보낸 문익환도 회고담에서 윤동주를 “내면적이고 말수 적은 사람이지만 그를 건방지다고 보지 않았고 모두들 그런동주와 사귀고 싶어했다”고 말하였다. 그 외에 장덕순도 윤동주를 “外美内美한 인간이며 그의 시가 아름답듯이 그의 인간도 아름답고 그의 용모가 端正优美하듯이 지극히 아름답다”고 하였다. 상기 진술에서처럼 윤동주가 “근실하고 관유하고 겸허하고 온화하고치밀하고 내성적이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졌다는 것은 심리학적으로 볼 때 역시 자아가 의식세계를 지배하고 자아의식이 어느 정도 성숙되었음을 의미하며 “건방지지 않았다”는 것은 어린 윤동주에게 있어서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가 이미 분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시인의 이런 성숙된 자아의식은 그의 초기작품인 《초 한대》, 《거리에서》등 작품에서도 아주 잘 나타나고있다.   초 한대- 내 방에 품긴 향내를 맛는다.   光明의 祭坛이 무너지기전 나는 깨끗한 祭物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같은 그의 몸. 그의 生命인 心志까지 白玉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려 버린다.   그리고도 책상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촛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하듯이 暗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나의 방에 품긴 祭物의 伟大한 香내를 맛보노라.   -1934년 12월 24일, 《초 한대》전문   시인은 초 한 대를 깨끗한 제물, 염소의 갈비뼈로 비유하면서 자기희생정신을 노래하고 있으며 생명인 심지까지 불태우면서 어둠을밝힌 한 대의 초와 인류에게 구원을 가져다준 예수를 동일화함으로써 아름답고 사랑이 넘치는 마음으로 살려는 시인의 성숙된 자아의식을 잘 표현하고 있다. 1935년 9월 1일, 윤동주는 집안 어른들을 설득하여 평양숭실중학교 3학년에 편입되어 수학하지만 이듬해 봄, 신사참배 거부문제로학교가 폐교당해 다시 용정광명중학교로 전학해 중학교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무렵 그는 소년잡지에 글도 게재했고 많은 양의 책을 읽었으며 문학에 상당히 심취해 있었다. 자아의 성숙과 함께 시인은 차츰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세계에 눈길을 돌리게 된다.   달밤의 거리 狂风이 휘날리는 北国의 거리 都市의 真珠 电灯밑을 헤염치는 조그만 人鱼 나, 달과 전등에 비쳐 한몸에 둘셋의 그림자,   커졌다 작아졌다. 괴롬의 거리 灰色빛 밤거리를 걷고 있는 이 마음 旋风이 일고 있네   -〈거리에서〉중에서   1935년 북간도에서의 일제의 탄압과 통치가 극심해진 시기에 씌여진 이 작품에서 어린 윤동주의 자아가 느끼는 북간도의 거리는 광풍이 휘날리고, 괴로움이 넘쳐나고, 회색빛에 잠긴 쓸쓸하고 암울한 거리다. 현실세계는 결코 자아가 느끼고 있던 아름답고 평화로운 세계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1936년 봄에 씌여진 작품 《닭》에서도 “한间 鸡舍 그넘어 苍空이 깃들어, 自由의 乡土를 잊은닭들이, 시들은 生活을 주잘대고, 生产의 苦劳를 부르짖었다.”고 씀으로써 시인은 자유와 고향을 잃어버리고 피폐한 생활난에 허덕이는 우리 민족을 닭에 비유하면서 슬픈 현실의식을 잘 나타냈다. 《초 한대》등 작품에서 보여 지는 것이 종교적인 환경 속에서 일상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자아의식의 성숙이라고 할 때 《거리에서》, 《닭》등 작품에서 보여 지는 것은 실존적인 차원에서의 좀 더 성숙된 자아의 현실적인 의식이라 할 수 있다. 1938년 2월 17일, 광명중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부친이 원하는 의과를 포기하고 대신 연희전희학교 문과에 송몽규와 함께 입학한다. 여기서 윤동주가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고집대로 좋아하는 문과를 택함은 심리학적으로 볼 때 자아가 완전히 의식의중심을 굳게 통제하고 자아의식이 상당히 성숙되었음을 의미하는바 이제는 힘 세고 성숙된 자아가 무의식의 여러 내용물들을 서서히 맞이할 준비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무의식의 의식화, 즉 자기실현을 시작하였다.     3. 무의식의 의식화   분석심리학에 의하면 무의식은 거대한 창조적 힘을 지니고 있고 사람은 생명본연의 성질에 따라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모든 정신적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기를 원하기에 자아가 자기를 향해 가는 것, 즉 자기실현을 하는 것은 자아가 무의식을 적극적으로 의식화함으로써 가능하며 무의식을 보는 작업은 힘들고 고민과 고통이 동반될 뿐더러 인간의 삶에서 절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과제라고주장한다. 이제 시인 윤동주가 어떻게 자신의 무의식을 의식화하는가를 작품을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발에 터부한 것을 다 빼어 바리고 黃昏이 湖水우로 걸어 오듯이 나도 삽분삽분 걸어 보리이까?   내사 이 湖水가로 부르는 이 없이 불리워 온것은 참말 异迹이외다.   오늘 따라 恋情, 自惚, 猜忌, 이것들이 자꼬 金메달처럼 만져지는구려   하나, 내 모든 것을 余念없이 물결에 씻어 보내려니 당신은 湖面으로 나를 불러 내소서.   -1938년 6월 15일, 《이적》전문   작품 《이적》에서 황혼이 내려앉은 어느 날 시인은‘부르는 이’ 없는 ‘소리’를 따라 기이하게도 호수가로 와 연정, 자홀, 시기 등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우선, 시간적으로 볼 때 황혼이다. 황혼은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대략 중간쯤 되는 시간 때다. 낮은 의식세계요 밤은 무의식세계를 상징할 때 황혼은 의식세계와 무의식세계가 만날 수 있는 경계선인 것이다. 바로 이 경계선에서시인은 무의식 세계로 진입하였던 것이다. 다음, 시인이 다가간 곳은 호수이다. 심리학적으로 호수는 그 깊이, 내용물 등을 가늠하기어려운 존재인 것만큼 미지의 세계, 즉 무의식세계를 상징하며 의식세계와 무의식세계와의 대면을 상징한다. 셋째로 호수라는 무의식세계를 마주하고 시인이 느껴지는 연정(恋情), 자홀(自惚), 시기(猜忌) 등은 무의식의 여러 가지 내용물로서 시인의 자아는 바로무의식을 의식화하였음을 상징한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우물을 홀로 찾어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追忆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1939년 9월, 《자화상》전문   상기《자화상》에서 ‘우물’은 자기를 들여다보는 심층적공간이다. 즉 분열된 자기를 엄중하게 들여다보고 내면적 고통과 맞대면하는 공간이며 자기성찰의 공간이다. 무의식의 의식화, 즉 자기실현을 위해서는 우선 “나는 인간답게 살고 있는가”와 같은 아주 근원적이고 기본적인 질문을 바탕으로 하는 자기성찰이 필요하다. 하여 시인은 자기성찰을 하는 바 현재의 자신을 미워하고 자기성장과정에서 내면적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자신이 가엽게 생각되고 ‘있어야 할 자신’ 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있어야 할 자신’이바로 ‘自己’이며 자기실현은 ‘있는 나’인 자아가 ‘있어야 할 나’인 자기를 찾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은 바로 무의식세계를 인식하고 자기성장 즉 자기실현을 요구한 것이다. 자기실현을 의식의 중심인 자아가 의식과 무의식을 합친 전체정신의 중심인 자기를 찾아가 포옹하는 과정이라고 칼·융은 말한다. 윤동주의 대부분 시는 진정한 자기를 찾아가려는 자아의 자기실현과정으로 볼 수 있으며 시인은 바로 작품을 통하여 무의식을 의식하고 자기실현에 도달하려는 확고한 신념과 그 욕구를 아주 잘 표현하였다. 《무서운 时间》(1941.2.7) 에서 “거 나를 부르는것이누구요”, 《또 太初의 아침》(1941.5.31)에서 “하얗게 눈이 덮이였고 电信柱가 잉잉 울어 하나님 말씀이 들려온다. 무슨 启示일까”에서 모두 ‘소리’가 등장한다. 이 ‘소리’를 심리학적으로 볼 때, 무의식의 ‘부름’이고 나를 일깨우는 각성의 소리이며 평화로운 존재의 상태를 뒤흔들어 고통스런 번민을 시작하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는 소리인 것이다. 윤동주가 자기실현을 위하여 이미무의식의 의식화를 시작하였음을 시사하는 바다. 그리고《또 다른 故乡》(1941.9) 에서 “가자 가자 쫓기는 사람처럼 가자 白骨 몰래아름다운 또 다른 故乡에 가자.”와 《序诗》(1941.11.20)에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라고 한 것처럼 시인의 확신에 가득한 “가자”라는 결심은 심리학적으로 볼 때 바로 자기실현을 향한확고한 의지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칼·융의 분석심리학에 의하면 무의식의 의식화과정에는 수없이 많은 내적인 고민과 갈등이 동반된다. 시인의 《바람이 불어》(1941.6.2) 에서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理由가 없다”, 그리고 또한 《序诗》(1941.11.20)에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라고 한 것처럼 바람으로 인해 시인은 괴로움을 깨닫고 있으며 심리학적으로 그것은 바로 자신 내부의 문제에서 비롯된 괴로움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시인이 처한 시대와 현실상황을 잠시 떠나 심리학적으로 볼 때 윤동주한테 고민과 갈등이 생겨나게 되는 것은 바로 성숙한 자아가 거대한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과정에서 감수해야 하는 심리적 고민과 고통인 것이다.     4. 그림자의 인식과 통합   칼·융의 분석심리학에서 그림자는 의식에 가장 가까운데 있는 무의식의 내용이며 무의식의 의식화과정에서 제일 처음 만나는 심리적 내용이다. 그림자는 자아의 어두운 면, 자아로부터 배척되고 버림받아 무의식에 억압된 자아의식의 여러 가지 성격 측면이다. 쉽게 말하면 그림자는 “나”가 싫어하는 “또 다른 나”, 앞으로 “나”가 받아들이기를 기다리고 있는 나의 어두운 “형제”다. 그래서그림자는 자아와 비슷하면서도 자아가 가장 싫어하는 부정적이고, 열등한 측면과 자아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도덕한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처럼 그림자는 우리가 직면하기를 꺼려하는 모든 열등요소고 아직 자아가 접수하지 않은 요소들이지만 사람의 인격을 구성하는 요소들이기에 언제나 의식에 동화되려 하며 우리가 그림자를 거부하면 거부할수록 그림자는 더 짙어지고 심하면 자아의식을 덮쳐 지배하고 자신뿐만 아니라 남까지도 해칠 수 있는 거대한 파괴적인 힘이 작동된다. 하여 칼·융은 “사람들이 그림자를인식하지 못할 때 그것은 본능의 냉혹하고 위험한 양상을 지니게 된다”고 주장한다. 무의식에 잠재한 그림자는 단지 햇빛을 보지 못하여 나쁜 것처럼 보일 뿐 의식화로서 그림자는 발전될 뿐더러 자기실현의 좋은 에너지, 좋은 밑거름으로 될 수 있다. 하여 자아의 버림으로 무의식에 억압된 그림자를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살려서 자신의 것으로 통합하여야만 정신적으로 더 성숙되고 더 인간적인 사람으로 되어가는 것이다. 이제 윤동주가 어떻게 자아의 그림자를 인식하고 통합하여 자기실현을 향한 힘겨운 여정을 시도하였는지를 살펴보자. 1941년 9월,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시절에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또 다른 고향》을 쓴다. 이 시는 윤동주가 최초의 시 《초한대》(1934년)에서 마지막 시 《쉽게 씌여진 시》(1942년)에 이르는 자기 찾기 과정의 중심에 있는 시로서 윤동주가 자기 내면의그림자를 인식하고 통합하면서 전체정신의 중심에 이르고자 하는 열망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故乡에 돌아온 날 밤에 내 白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둔 房은 宇宙로 通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서 곱게 风化作用하는 白骨을 들여다보며 눈물 짓는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白骨이 우는것이냐 아름다운 魂이 우는 것이냐   志操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白骨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故乡에 가자.   -1941년 9월, 《또 다른 故乡》전문   이 시에서 화자는 ‘어두운 방’에 처해있고 ‘어두운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서는 바람이 불어온다. 이런 방에서 시적 자아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고 또 다른 고향에 가기를 갈망한다. 심리학적으로 해석할 때 우선 어두운 방은 무의식세계를 상징하고 불어오는 바람은 자아에 흡수되기를 바라는 무의식의 내용물이다. 때문에 시적자아는 ‘바람’이라는 무의식의 공격에 괴로움을 느끼고있다. 다음 어둠을 짖는 ‘지조높은 개’는 시적자아의 내면을 각성시키고 깨닫게 만드는 영혼의 목소리다. 셋째로 이 시에서 시적 자아는 ‘나’와 ‘백골’과 ‘아름다운 혼’으로 분열되고 있는데 특히 ‘백골’과 ‘아름다운 혼’은 대립의 관계에 처해있다. 또‘백골’이라는 시어가 4회 등장하는 바 이는 무게중심이 ‘아름다운 혼’ 보다 ‘백골’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 시에 나타나는 ‘백골’은 자아의 버림으로 무의식에 잠재한 그림자며 ‘아름다운 혼’은 전체정신의 중심인 자기로, ‘나’는 무의식의 내용을 의식에받아들여 이를 동화시키거나 그 뜻을 인식하려는 성숙된 자아다. 여기서 시인은 분명 ‘백골’이라는 그림자를 인식하고 있으며 그그림자를 통합하고 ‘아름다운 고향’으로 상징되는 자기, 즉 자기실현에 도달하기를 지향하는 것이다. 자신의 무의식세계의 그림자를 인식하고 통합하여 전체정신의 중심인 자기로 다가가려는 힘겨운 노력과 도전은 고국에서의 마지막작품 《忏悔录》(1942.1.24) 에서도 잘 표현되고 있다.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어보자. 그러면 어느陨石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우선 여기에서 밤은 무의식세계를 상징하고 거울은 《자화상》의 우물처럼 자기성찰의 상징적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거울을 통하여 자아를 응시하고 무의식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다. 다음운석 밑으로 들어가는 것은 위험한 행동인 것만큼 자기실현의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음을 상징하고 슬픈 사람의 뒤 모양은 바로시인 자아의 버림으로 무의식에 잠재한 어두운 그림자를 상징한다. 이런 자신의 그림자를 통하여 자아를 응시함은 시인이 자신의 그림자를 인식하고 살려서 보기 좋게 통합하는 걸 상징한다. 칼·융은 진정한 자신과 대면하기 위해서는 무의식세계의 자신의 그림자를 억압하거나 거부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왜냐 하면 이러한 그림자를 받아들이는 자기의 주동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만이 자신이 싫어하는 “어두운 형제”인 그림자를통합하여 그 속의 창조적인 힘이 의식세계를 지배하게 함으로써 심리학적인 의미의 성장, 즉 자기실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여칼·융은 그림자를 통합하는 것은 평생 동안 해나가야 할 작업이라고 잘라 말한다. 1942년 1월 29일, 윤동주는 창씨개명을 한 후 일본으로 건너간다. 일본은 윤동주에게 뿐만 아니라 그 시대 일제의 식민통치 속에서서럽고 힘겨운 삶을 영위하는 모든 조선민족에게 있어서 분명히 모두가 싫어하는 그림자다. 이러한 그림자를 직면하여 윤동주가 도일(渡日)함은 심리학적으로 볼 때 자신이 싫어하는, 힘이 강한 그림자를 인식하고 통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윤동주의 일본에서의 작품을 보기로 하자.   黃昏이 짙어지는 길모금에서 하로종일 시들은 귀를 가만이 기울이면 땅검의 옮겨지는 발자취소리,   발자취소리를 들을수 있도록 나는 총명했든가요.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것을 깨달은 다음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든 수많은 나를 하나, 둘 제고장으로 돌려 보내면 거리 모통이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흰 그림자들 연연히 사랑하든 흰 그림자들,   내 모든것을 돌려 보낸 뒤 허전히 뒷골목을 돌아 黃昏처럼 물드는 내방으로 돌아오면   信念이 깊은 으젓한 羊처럼 하로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   -1942년 4월 14일, 《흰 그림자》전문 우선 시간적으로 보면 황혼이다. 황혼은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의식세계와 무의식세계가 만날 수 있는 경계선이며 이 경계선에서 시인은 무의식세계로 진입하였던 것이다. 다음 발자취소리는 무의식의 ‘부름’이고 나를 일깨우는 각성의 소리다. 셋째로 시적자아를괴롭게 만들었던 수많은 ‘나’와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는 자아의 어두운 ‘형제’인 그림자이며 수많은 ‘나’를 제고장으로 돌려보내고 또한 ‘흰 그림자’를 연연히 사랑함은 자아가 그림자를 인식하고 통합하였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자신이 오래도록 들여 보았던 어두운 내면의 그림자를 통합한 후 시적자아는 그제야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 즉 깨달음을 얻은 양이요, 자기실현을 이룬 인간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자신의 무의식세계의 그림자를 통합하고 자기실현을 향한 자아의 절실한 갈망과 힘겨운 도전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며 완성도가 높은 절창인 《쉽게 씌어진 诗》에서도 잘 표현되고 있다.   ……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时代처럼 올 아츰을 기다리는 最后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慰安으로 잡는 最初의 握手. -1942년 6월 3일, 《쉽게 씌여진 诗》중에서   이 시에서 윤동주는 자신의 무의식세계의 그림자인 ‘어둠’을 통합하고 자기실현을 이룬 ‘最后의 나’ 가 되기를 희망하고 ‘最后의나’를 전체중심인 자기로 상징한다고 할 때 시인은 바로 자아와 자기가 포옹하고 악수하는 성숙되고 지혜로운 모습, 즉 자기실현에도달한 자신을 심리적으로 갈망하는 것이다.     5. 나오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윤동주의 생애와 그의 작품을 중심으로, 특히는 작품을 완성한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윤동주의 내면의 정신세계를살펴보았다. 기독교적인 가정환경에서 태어난 윤동주는 어린 시절부터 문학에 남다른 애착을 가졌고 자아가 의식의 중심을 굳게 통치하고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가 분화되었을 뿐더러 자아의식이 어느 정도 성숙되었다. 그리고 자아의 성숙과 함께 시인은 차츰 자신이 처해있는참혹한 현실에 눈길을 돌리게 되며 자기실현을 서서히 시작하였다. 자기실현을 함에 있어서 시인의 자아는 무의식의 부름을 듣게 되고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과정에서 내적인 고민과 갈등을 겪게 되며 이러한 것을 자신의 《서시》등 작품을 통해 아주 잘 표현하였다. 그리고 《또 다른 고향》, 《참회록》 등 작품에서 시인은 자신의 ‘어두운 형제’인 그림자를 인식하고 통합하여 자기실현을 지향하며 도일의 심층적인 의미와 도일후 작품인 《흰 그림자》, 《쉽게 씌여진 시》 등 작품에서도 자신의 그림자를 진일보 통합하는 모습과 자기실현을 향한 갈망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은 전체정신인 자기에 도달하기 위한 시인의 절실한 욕망이며 자신한테 주어진과제이기 때문이다. 분석심리학에서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누구에게나 자기실현, 즉 전체정신을 실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무의식에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모든 사람이 자기실현을 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자기실현은 사실 엄숙한 것도 심각한 것도 아니다. 바로개인의 ‘평범한 행복’을 구현하는 과정이며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으나 아직 실현하지 못한 삶을 가능한 한 많이 실현하는 것이다. 특히 삶의 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 자기실현은 행복 그 자체거나 행복한 삶의 중요한 조건이자 자질이다. 윤동주의 대부분 작품들은 전체중심인 자기를 찾아가려는 자아의 자기실현을 표현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때문에 종교, 시대와 사회를 떠나 현재까지 우리 모두가 시인의 작품에서 공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시인은 보편적인 인간심성이며 인간의 원초적 조건인 자기실현을 작품 속에 구현하였고 또한 독자들한테 심리적으로 진정한 행복을 위해 자신의 잠재적 가능성을 실현하는 과정, 즉 자기실현을 적극 요구한 것이다. 바로 우리 모든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잠재한 자기실현의 욕구를 작품 속에 표현한 것이 윤동주의 많은 대표적인 시가 우리 후세한테 전해주는 심리적인 제시이고 수많은 독자들이 공감하고 또한 오늘날까지도 꾸준히 사랑받는 이유이며 진정 윤동주의 시가 지니고 있는 무궁무진한 힘과 크나큰 가치인 것이다.     오광욱 프로필: 문학박사, 연변작가협회 회원, 《두렵게 노크하다》(공저), 《최서해 소설의 인간형과 대사회적 대응양상》, 《윤동주 향토애의 심성과 그의 시세계》, 《리색 한시연구》,《김혁의〈마마꽃, 응달에 피다〉에 대한 분석심리학적고찰》 등 논문이 있음. 현재 연변대학 재직 중.
2    연세대의 건물들은 기억하고 있다... 댓글:  조회:3573  추천:0  2019-01-20
      언더우드관. 스팀스관 아펜젤러관. 언더우드 동상.   스팀스관 / 사적 제275호 / 일제강점기 1920년. 스팀스관은 1920년에 준공된 옛 연희전문학교(현재 연세대학교)의 건물로 사적 제275호이다.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거주하던 찰스 스팀슨의 기부금으로 캠퍼스에 세워진 최초의 석조건물이다. 아펜젤러관 / 사적 제277호 배재학당 설립자인 아펜젤러를 기념하기 위해 미국 매사추세스 피츠필드시의 기부를 받아 1921년에 착공해 1924년에 완공했다. 석조 3층의 단아한 고딕풍 건물로 언더우드관과 함께 연세대에 두 번째로 세워졌다. 언더우드관을 중심으로 스팀슨관과 아펜젤라관이 앞으로 들어서 "ㄷ"자 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당시 이 건물은 이학관으로 자연과학계의 강의동으로 쓰였으나 지금은 사회복지대학원에서 사용하고 있다. 언더우드관 / 사적 제276호 / 완공년도 1924년. 이 건물은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에서 1924년 완공된 연면적 2,700m2의 근대식 4층 건물이다. 연희전문학교 설립자인 고 원두우(元杜尤, H. G. Underwood)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서 언더우드 관이라 하였다. 설립자의 장남 원한경 교수가 초석을 놓았고, 공사 감독은 스팀슨관과 아펜젤러관을 감독한 화학교수 밀러가 맡았다. 당시 문학관이라 불리었으며 본래는 강의동으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대학본부로 쓰이고 있다.  이 건물은 중앙 현관문이 튜더(Tudor)풍의 아치로 되어 있는 준고딕양식의 웅장한 석조 건물이며, 스팀스관과 아펜젤러관이 건물 양쪽으로 인접하여 건물군이 "ㄷ"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건물의 중앙부에는 1개 층의 탑옥(塔屋)이 솟아 있다.        언더우드관.   최현배 선생 동상.       윤동주 기념관(핀슨 홀).   핀슨 홀과 윤동주. 연희전문학교 창립 초기에 공이 큰 미국 남감리교 총무 핀슨박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핀슨홀로 명명된 이건물은 1922년에 학생기숙사로 준공되었다. 1936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한 윤동주(1917~1945)는 이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사색하고 고뇌하며 시 쓰기에 전념하였다.   기념관 입구, 기념관은 2층에 있다. 윤동주 생가 기와. 윤동주 시인의 생가 지붕 수막새 기와에는 특이한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 집안의 깊은 신앙심과 애국심을 나타내는 태극문양과 무궁화 그리고 십자가. 이런 문양을 보며 조국에 대한 사랑을 키워왔던 시인은 연희전문에 입학하여 또 다른 고향집을 보게 된다. 연희전문학교에는 건물마다  정면 꼭대기와 출입문 그리고 돌계단에 조차 태극이 새겨져 있고, 정원 곳곳에 무궁화가 만발하였으며, 뒷면 벽 꼭대기에 새겨있는 열두송이 무궁화를 본 윤동주 시인은 고향을 발견한 듯 남다른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 연희는 민족적 정서를 살리기에 가장 알맞은 배움터로, 만주에서 볼 수 없는 무궁화가 캠퍼스에 만발하여 있고, 도처에 우리 국기 태극문양이 새겨져 있으며 일본말을 쓰지 않아도 되고, 우리 말로 가르치는 조선문학도 있다(고향에 돌아간 윤동주의 연희전문 소개말 중, 장덕순의 증언) 명동촌 막새기와 윤동주 시인이 태어난 명동촌의 사람들은 모두 집의 지붕 막새기와에 무궁화, 십자가, 태극문양 등을 새겨 넣을 만큼 애국심과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이었다. 100여년이 지나 우여곡절 끝에 우리 앞에 그 편린을 드러낸 그들의 용광로같은 조국애가 우리 가슴에 뜨거운 북을 울린다.  -김재흥선생(김약연 목사의 증손) 기증-   참회록 / 육필 원고와 해석.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滿)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래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1941년 말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일본에 유학하여 대학과정을 밟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때 일본에 유학하고자 하려면 필수적인 것이 창씨개명이었다. 창씨개명 압박에 못이겨 숭실학교를 자퇴까지 했던 윤동주이지만, 결국 일본유학 수속을 위하여 성씨를 라 바꾸게 된다. 윤동주는 1942년 1월 졸업증명서 등 도일 수속을 위하여 연희전문에 창씨계를 제출하는데, 창씨계를 제출하기 5일 전인 1월 24일의 시작품은 고국에서 쓴 마지막 작품이 된다. 참회록은 일제가 강요하는 창씨개명에 굴복한 자신에 대한 참회로, 시에서 나오는 만 24년 1개월은 1917년 12월생으로  1942년 1월에 만 24년 1개월이 된 자신을 지칭하는 것이다. 당시에 유학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창씨개명이었지만 그로 인해 상당한 괴로움을  표현했다. 그의 괴로움과 번민은 시 본문 뿐 아니라 원고 여백에 쓰여진 낙서들에서도 잘 드러난다.         공상(空想) 내 마음의 탑(塔) 나는 말없이 이 탑을 쌓고 있다. 명예(名譽)와 허영(虛榮)의 천공(天空)에다, 무너질 줄도 모르고, 한 층 두 층 높이 쌓는다.   무한(無限)한 나의 공상. 그것은 내 마음의 바다, 나는 두 팔을 펼처서, 나의 바다에서 자유로이 헤엄친다. 황금(黃金), 지욕(知慾)의 수평선(水平線)을 향하여.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 1955년 증보판 / 표지그림, 김환기. 윤동주가 세상을 떠난 지 3년째 되던 해인 1948년. 그의 유고 31편을 모아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으로 유고 시집 를 출간하였다.(정음사) 1955년에는 윤동주의 서거 10주년을 기념하여 유고를 보충한 증보판이 출간되었다. 아우의 인상화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애띤 손을 잡으며 '늬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은 진정코 설은 대답이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 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1948-   용재 백낙준 박사상 여기 모신 이 어른은 1957년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 의과대학을 통합하여 연세대학교로 다시 세운 초대총장 백낙준 박사이시다. 교육과 학문 민족봉사와 자유정신의 구현에 뜻을 두시고 일생동안 연세와 민족을붙들고 키운 연세의 정신적 지주시며 민족교육의 스승이시며 겨레의 지도자시고 하나님의 종이시다. 일찌기 연세를 국학연구의 발상지로 민족교육의 터전으로 진리 자유의 전당으로 힘써 이끄시며 연세는 연세인의 연세요 한민족의 연세요 세계의 연세임을 밝히시고 연세에 맡기어진 하늘의 사명을 일깨워 주시다 그러기에 용재 선생에게 있어서 연세는 사랑이요 생명이시니 여기 연세인과 함께 영원히 계시다. 
1    바다에 뛰여들는 양떼가 되지말기... 댓글:  조회:2796  추천:0  2019-01-20
  윤동주 시  해석을 논박함     1. 문제제기의 이유 윤동주 시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을 들라면 일 것이다. 그 다음에 이 되리라 본다. 특히 는 이른바 그의 3대 명시라고 말할 수 있기에 한국명시선이나 학교 교과서 등등에 거의 빠짐없이 나오고 있는 단골 메뉴이다. 그런 만큼 이런 시를 과연 어떻게 해석해 왔고, 해석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는 감상이나 문학교육의 차원에서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혹여 잘못된 해석이 있다면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근래에 필자는 인터넷 ‘지식정보’ 창에 들어가 이것저것 점검해 보다 우연히 윤동주 시 해설 몇 가지를 보게 되었는데 곧바로 해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당황스런 마음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해설용 명시선과 일부의 윤동주론을 다시 점검해 보았다. 하나같이 잘못된 해석이 판에 박은 듯 재생산되고 있다. 그 문제의 해석 부분이 바로 ‘괴로왔든 사나이’(원본 그대로)와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를 동일인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동일인이 아닌 것이 마치 동일인인 양 앞질러 널리 유통되고 있다면, 적어도 이 시를 보는 나의 견지에서는 그것은 마치 불환지폐가 태환지폐를 대신하는 형국이고 또 가짜 불량상품이 정상품을 압도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으니 이에 문제제기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2. 문제 부분의 두 관점 지금까지 발표된 윤동주에 관한 연구나 평론은 너무나 많다. 한용운, 이상화, 이육사와 더불어 단연 수위급에 속한다. 웬만한 일선 평론가치고 또 웬만한 현대시 담당 교수치고, 그를 언급해 보거나 논해 보지 않았던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다. 그에 관한 본격적인 접근은 1950년대의 고석규를 필두로 하여, 1660년대에 이상비, 최홍규, 이유식, 김열규., 김종길, 김상선 등에 의해 시도되었고, 이어 1970년대에는 김현자, 이건청, 정현종, 백승철, 김인환,김윤식, 김흥규, 박진환, 홍기삼, 김용직, 정한모, 오세영, 김우종, 임헌영, 김우창, 신동욱 등에 의해 가히 봇물을 만난 듯 쏟아져 나와 더러는 재해석이나 보충 ․ 보완되기도 했다. 그 다음, 1980년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발표된 논문이나 평론은 크게 보아 1960년대나 1970년대의 그 연장선상의 반복이거나 그 짜깁기라 보아 무방하다. 그런데 내가 이 글을 꼭 써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직접적인 충동은 나 자신이 윤동주 연구사나 비평사의 그 초창기에 윤동주론을 써 보았고 또 그 글에서 문제의 란 시를 다루어 보았기 때문이다. 1963년도 『현대문학』지 10월호에 발표된 이란 제목의 평론에서이다. 그 당시 발표되는 평론으로서는 제법 긴 편에 속했는데 200자 원고지로 약 80-90매 분량이었고, 또 윤동주론으로서는 최초의 긴 글이었다. 이 글에서 나는 윤동주 시의 여러 특징을 통해 이것이 바로 이 계통의 최초의 접근이 되겠구나 생각하며 그의 내면세계를 살펴보았는데, 이 중 ‘아웃사이더의 자세’란 항에서 바로 문제가 되고 있는 란 시를 그 예증 중의 하나로 인용해 가며 설명해 보았다. 거기서 나는 4연 1행과 2행 즉 ‘괴로왔든 사나이’와 ‘행복한 예수 ․ 그리스도’가 동일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서 ‘괴로왔든 사나이’를 윤동주 자신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이나 해석은 그 후 상당기간 공감대가 형성되어 유효성을 얻었고, 지금도 일부에서는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의 발단은 1970년대의 몇몇 평론에서 새로운 관점 같은 다른 해석이 나오자 그만 그 시와 관련 있는 일부의 어떤 글, 어떤 해설에서 마치 전염병처럼 받아들여졌고, 지금도 받아들이고 있다. 그 필자들이 대부분 유력한 대학의 교수인지라 특히 시험과 연관 있는 문학교육현장에서는 그 전파력이 불을 보는 듯 했다. ‘괴로왔든 사나이’와 ‘행복한 예수 ․ 그리스도’를 동일인으로 보아 소가 웃을 일이지만 심지어 그 수사적 기법까지 논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괴로왔든 사나이’였지만 인류의 죄와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희생되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행복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결정적인 큰 오류이다.   3. 동일인이 아닌 이유 먼저 2004년도 연세대학교 출판부에서 나온《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원본대조 윤동주 전집)에 수록되어 있는 원본을 소개해 두는 것이 순서일 상 싶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敎會堂교회당 꼭대기 十字架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尖塔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가요.   種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휫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든 사나이, 幸福행복한 예수 ․ 그리스도 처럼 十字架십자가가 許諾허락된다면   목아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여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이 시는 너무나 많이 알려져 있기에 구태여 구차스런 해설은 필요치 않을 것이다. 대신 이 글의 진행을 위해 주제와 구성법만은 간단히 언급해 두기로 하겠다. 주제는 민족고난을 짊어져 보고자 하는 자기희생의 다짐이고, 구성면을 보면 1연과 2연은 교회당 꼭대기에 첨탑 위에 걸려 있는 ‘햇빛’(민족광복)에 대한 동경, 3연은 현실(주어진 상황)에 뛰어들지 못하고 배회만 하고 있는 망설임, 4연은 예수를 모델로 해 생각해 본 희생양 실천(행동) 에 대한 부러움, 5연은 민족구원을 위한 자기희생의 결의 표백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바로 4연 해석이다. 동일인이 아니라 ‘괴로왔든 사나이’인 시인 자신과 ‘행복한 예수’가 대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동일인이란 해석의 문제 발단은 아마도 ‘괴로왔든 사나이’란 표현이 과거형으로 되어 있기에 역시 과거의 인물인 예수와 동일시해 버린 데서 연유되었으리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만약 그것이 ‘괴로운 사나이’라고 현재형으로 되었거나 또 아니면 이에다가 ‘행복한’까지 ‘행복했던’으로 되었다면, 시인 자신과 예수는 별개의 인물이란 점이 명명백백해져 이런 문제의 불씨는 아예 없었으리라 쉽게 가상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가 동일인이 아니라는 반증을 하나하나 들어보기로 하겠다. 첫째, 민족광복의 상징일 수도 있는 ‘햇빛’이 교회당 첨탑 위 십자가에 걸리어 있는데,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감히 행동할 수 없고 또 그러다 보니 아웃사이더로서 상황 밖에서 무위롭게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 보니 행동의 양심과 자기의 나약함 사이에서 강한 갈등이 생겨 마음이 무척 괴롭고 괴로웠다. 3연 끝행 즉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에 쉼표(,)가 찍혀 있다는 사실에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원래 쉼표란 생각이나 사고의 진행을 잠시 휴지시켜 주며 시간경과를 암시도 하는 만큼 노상 현재의 상황에 뛰어들지 못하고 서성거리고만 있다 보니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하겠다. 그러자 문득 예수 ․ 그리스도가 떠오르자 용감하게도 행동실천을 못하는 불행한 자기를 ‘괴로왔든 사나이’라고 낮추면서 반대로 직접 행동으로 희생양이 된 예수를 ‘행복한’ 사람으로 보며, 자기에게도 허락만 된다면 기꺼이 그 길을 택해 보겠다는 다짐을 해 보고 있는 것이다. 둘째, 윤동주는 자기 자신을 객체화 내지 객관화 시켜 ‘나’라는 표현 대신 ‘젊은이’ 이나 아니면 ‘사나이’로 바꾸어 표현하는 관습이 더러 있다는 사실이다. 1937년도 작인 의 끝연에서 자기 심정을 “아- 이 젊은이는/피라미드처럼 슬프구나”라고 하고 있으며 또 산문 (작품연도 없음)를 보면 “이 육중한 기류 가운데 자조하는 한 젊은이가 있다. 그를 나라고 불러두자.”라고 객체화 시키고 있다. 그리고 1938년도 작인  끝연에서는 ‘젊은이’ 대신 자기를 ‘사나이’로 지칭하고 있으며, 또 동년 작으로 되어 있는 산문 에는 ‘서러운 사나이’로 보기도 했고, 1939년도 작인에서는 익히 알다시피 ‘사나이’란 표현이 무려 7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이뿐이 아니다. 1940년도 작인 에서도 역시 자기를 ‘젊은 사나이’ ‘이 사나이’로 객체화 시켰다. 따라서 ‘젊은이’나 ‘사나이’란 자기 객체화의 이런 습관은 역시 1941년도 작인 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고 확언할 수 있다. 말하자면 개연성의 논리다. 셋째, 윤동주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 출신으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리고 자기 삶에 늘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던 그 겸손성을 미루어 보아 예수는 그에겐 가히 초월적, 신적 존재로 느껴졌으리라 본다. 더욱이나 그 흔한 이름으로서 ‘예수’가 아니라 ‘예수 ․ 그리스도’란 극존칭을 쓰고 있는 그 심상적 정황으로 보아 25실의 새파란 젊은 청년시인으로서 감히 불경스럽게도 예수를 ‘괴로왔든 사나이’라고 표현할 리는 없다. 넷째, 인용한 원본을 보면 과로왔든 사나이‘에 쉼표(,)가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수많은 이본(異本)이 나오면서 어느 사이에 쉼표가 그만 없어진 경우가 많다. 대체로 동일인을 나타내는 동격일 경우라면 쉼표를 찍지 않는 것이 관례다. 쉼표가 있다는 것은 곧 다음 행의 ‘행복한 예수 ․ 그리스도’와 구별의 간격을 두고 보자는 휴지(休止)의 의도라 할 수 있다. 그래서 4연과 5연을 자연스러운 문맥 흐름에 따라 일반 산문으로 풀어 써 본다면 두 가지 문장이 가능해진다. “괴로왔든 사나이인 나에게도 행복한 예수 ․ 그리스도’에게서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 ․ ․ (중략) ․ ․ ․조용히 흘리겠습니다”가 그 하나이다. 다른 하나는 ‘괴로왔든 사나이’가 주어가 되어 ‘흘리겠습니다’로 끝나는 형태다.이를 시로 압축시키려다 보니 ‘〜에게도’이나 ‘〜는’이란 조사 대신 곧 바로 쉼표 처리를 해 버린 것이다.그러니 동일인이 될 수 없다는 논리다. 또 한 가지 더 달리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1939년도 작인 이란 시에서 동격을 표시하기 위해“사랑하는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라며 줄표(-)를 썼던 점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런 문장 부호 넣기 관행으로 미루어 볼 때 ‘괴로왔든 사나이’와 ‘행복한 예수 ․ 그리스도’를 동일인으로 보았다면, 아예 쉼표가 없거나 아니면 줄표라도 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쉼표가 나보란 듯이 버티고 있으니 이를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다섯째, 다소 견강부회란 느낌은 있지만 산문문장의 논리로 보아 예수를 한때 ‘괴로왔든 사나이’로 보고 또 그렇게 표현했다면, 바로 뒤에 나오는 수식어 ‘행복한’도 당연히 ‘행복했던’이 되어야 이치에 맞다. 그렇지 않으면 별개 인물의 설정이라고 추리해 볼 수도 있다. 여섯째, ‘괴로웠든 사나이’와 ‘행복한 예수 ․ 그리스도’를 동일 인물로 본다면, 이 시에서는 이른바 시적 자아가 과연 누구인지 불분명해진다. 물론 이 시의 화자는 시인 자신이 화자로서 작품의 이면에 숨어 말하고 있는 ‘함축적 자아’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마치 나르시스처럼 자기 존재성이나 정체성을 두고 늘 깊이 생각하고 있는 시인의 자기애적인 자성적인 체질성을 보아 그의 시 곳곳에 나오는 시적자아인 ‘나’를 대신해 보는 객체로서 ‘사나이’를 폐기처분할 리가 없다. 일곱째. ‘문체는 인간이다’라는 말이 있듯 윤동주의 성격이나 또 그의 시집에 나타나 있는 수사상의 취향으로 보아 ‘괴로왔든 사나이’를 금세 대칭해서 ‘행복한’ 사람으로 바꾸는 전화적 역설을 구사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더욱이나 여러 작품에서 자기를 ‘괴로워’하거나 ‘괴로운 사람’으로 보지 않았던가. (1935)에서는 걷고 있는 거리가 ‘괴롬의 거리’로 비춰졌고, (1939)에서는 자기를 스스로 ‘괴로운 사람아 괴로운 사람아’라고 탄식적으로 영탄해 보고 있으며, 를 5월에 쓰고, 바로 6개월 후인 같은 해 11월에 쓴 너무나도 유명한 에서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그 다음해의 (1942)에서는 ‘괴로운 수 많은 나’임을 자가진단도 하고 있다. 그러니 가 쓰여진 시기, 그 이전과 이후 작품에 나타난 ‘괴롭다’는 말의 사용 빈도수를 참고해 보아 에서 자기를 ‘괴로왔든 사나이’로 표현해 본 것은 시인의 표현 관행으로 보아 너무나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하겠다. 여덟째, 이 시를 쓸 당시 시인은 이런 논란이 있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겠지만, 미리 예상이라도 했다면 4연의 첫 행에 나오는 ‘괴로왔든 사나이’를 3연 끝에다 배치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동일인이 아니라는 점은 명명백배하다. 그런데 짐작컨대 같은 연인 4연에다 ‘괴로왔든 사나이’와 ‘행복한 예수’를 나란히 배치해 본 시인의 의도는 대비의 효과를 예각화 시켜 보자는 의도이다. 동시에 의미단위의 문맥 흐름으로 보아 4연과 5연이 한 문장임인 만큼 ‘괴로왔든 사나이’가 주체(주어)가 되어 이번 행위의 전체를 지배시키려 한 의도였다고 짐작이 된다. 만약, ‘괴로왔든 사나이’를 3연에다 배치했다면 화자인 주체자가 문맥적 행위의 현장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우려의 배려가 있었지 않았나 싶다.   4.맺는 말을 남기며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물론 성경 해석상의 오류가 아니고 번역상의 오류이긴 하지만, 마태복음 19장 24절과 마가복음 10장 25절에 나오는 그 유명한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 가는 것보다 쉽다”라는 말이 문득 떠 올랐다. 일반화 된 통용비유가 연구가들에 의해 결국 오류 번역 부분이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성경사본 중 아랍어 사본을 보면 ‘밧줄’ 즉 gamta로 나와 있는데 번역 과정에서 이를 그만 ‘낙타’ 즉 gamla로 잘못 보았고, 또 가장 오래된 헬라어(희랍어) 고사본을 보더라도 ‘밧줄’ 즉 kamilos로 되어 있는데 실수로 ‘낙타’ 즉 kamelos로 보았다는 것이다. 아랍어 철자에서는 ‘t’를 ‘l’로 잘못 본 셈이고, 헬라어 철자에서‘i’를 ‘e’로 잘못 보아 ‘밧줄’이 그만 ‘낙타’로 둔갑되어 사람들의 입에 항상 오르내렸다는 것이다. 연상작용에 의한 언어의 친화성의 결합원리로 보아 ‘바늘귀’에 ‘낙타’가 연상되기보다는 실보다는 수백 배나 굵은 ‘밧줄’이 나온다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러운 일이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없진 않았다. 결국 나의 바람도 성경의 오류가 이처럼 바로 잡히듯이, 노파심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이글로 인해 잘못된 해석이 하루 속히 바로 잡혀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불란서 속담에 ‘빠뉘르쥬의 양洋 떼'란 말이 있다. 영문 모르고 무조건 남의 뒤를 따르는 사람을 말한다. 이 속담이 나오게 된 배경이 아주 재미있어 덤으로라도 소개해 볼 만하다. 16세기 불란서 작가 라블레(라브레르)의 작품《빵따그뤼엘르》제 3권의 한 대목에서 유래된 말이다. 빠뉘르쥬라는 이름의 건달이 거인 빵따그뤼엘르라는 사람의 부하가 되어 항해하던 중, 하도 심심해서 장난을 친다. 동승한 양洋 상인을 좀 골려 보자는 속셈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흥정의 열띤 설왕설래가 있은 다음, 그래 어디 맛 좀 보라는 식의 계략을 하나 생각해 내어 그 중 제일 크고 힘이 센 양 두 마리를 엄청난 값을 쳐주고 산다. 일부러 품에 안아본 그 양이 놀라 시끄럽게 울어대니 다른 양들도 따라 울며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그러자 빠뉘르쥬는 이때다 싶어 그만 그 양을 바다 속으로 던져 넣었다. 웬걸 그 뒤를 따르는 양떼가 하나같이 바다로 풍덩풍덩 뛰어 들어갔다. 깜짝 놀란 주인은 혼비백산하여 발만 동동 구르다가 결국 마지막 남은 양 한 마리를 부둥켜안은 채 그만 바다로 떨어지고 만다. 이 우화 같은 대목에서 유래된 속담이 곧 바로‘빠뉘르쥬의 양떼’인 것이다. 여기서 내가 일부러 이 속담을 인유해 보는 의도는 벌써 짐작은 되었겠지만 의 잘못된 해석이 앞으로 잘못으로 판명이 되고, 판명이 나더라도 노상 잘못된 해석을 계속 정설로 받아들일까 보아 내 나름의 노파심에서 그 타산지석의 교훈도 겸해 소개해 보는 것이다.   ※본문 중 논박 여덟 번째는 발표 이후에 보충해 본 것임. 『월간문학』(2009년 4월호)     윤동쥬*尹東柱)북간도 동명촌 출생(1917년 12월 30일~1945년 2월 16일) 아명은 해환 海煥 연세 전문학과 문과 졸업, 1939년 연희 전문 2학년 재학중에 『소년』지에 작품 발표하며 등단 일본 릿쿄대학 도시시 대학 수학 1943년 여름방학 대 귀국 직전 독립운동가로 체포되어  2년형을 언도 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복역 중 옥사, 일제의 관헌에게 고문 당한 뒤 사마한 것을 추정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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