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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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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윤동주는 시를 들고 일제와 싸웠다... 댓글:  조회:2973  추천:0  2019-01-22
윤동주는 시를 들고 일제와 싸웠다 [중앙일보] 2017.04.05    기자 손민호 기자 SNS 공유 및 댓글 SNS 클릭 수   창작가무극 '윤동주, 달을 쏘다.'의 무대. 거대한 달이 떠 있다. 손민호 기자  2017년은 시인 윤동주(1917∼45)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다. 올 봄 윤동주를 기리는 문화예술 행사가 잇따르는 까닭이다. 윤동주의 삶과 문학을 담은 공연도 여럿 있었는데, 눈길을 끌었던 한 편을 소개한다. 서울예술단 창작가무극 ‘윤동주, 달을 쏘다.’이다. 3월 21일∼4월 2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 오른 작품은 전 객석 매진 기록을 세우고 화려한 막을 내렸다. 서울예술단의 레퍼토리 가무극 ‘윤동주, 달을 쏘다.’를 중심으로 윤동주의 짧았던 생애를 돌아본다.     창작가무극 '윤동주, 달을 쏘다.'로 재구성한 윤동주의 삶과 시 만주 용정에서의 중학교 시절 일본어 낙제 점수 받아 창씨개명에 고뇌하던 시절 '자화상' '서시' 등 대표작 남겨 가무극의 하이라이트는 토해내고 절규하는 '별 헤는 밤'  창작가무극은 서울예술단이 주도하는 한국형 뮤지컬의 형식  # 윤동주 vs 히라누마 도주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만주 명동촌에서 태어났고, 1945년 2월 16일 일본 규슈(九州)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숨졌다. 윤동주의 국적은 한 번도 조선인 적이 없었다. 조선이 망한 뒤 일제가 점령 중이던 만주에서 태어났고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 일본 열도에서 죽었다. 현재 중국 정부는 윤동주를 ‘중국 조선족 시인’이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윤동주는 평생 조선어로 시를 썼다. 중국 연변에 있는 룽징마을. 만주벌판을 가로지르는 해란강을 끼고 있다. 손민호 기자  윤동주의 고향이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에도 등장하는 룽징(龍井)이다. 일송정 푸른 소나무가 자라고 해란강이 광활한 평야를 가로지르는 고장이다. 중국 지린(吉林)성 옌볜(延邊) 조선족자치주에 속한다.     룽징에 가면 윤동주가 스무 살에 편입해 2년간 다녔던 광명중학교가 있다. 이름은 중학교이지만 지금의 고등학교다. 이 학교 본관 건물 앞에 윤동주의 대표작 ‘서시’를 새겨놓은 시비가 서 있다. 광명중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서울의 연희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학교)에 입학했다. 광명중학교에서 윤동주의 성적은 의외로 평범했다. 특히 일본어 실력은 낙제 수준이었다. 제일 잘 받은 점수가 62점이었고, 40점을 받은 적도 있었다.   윤동주가 2년간 다녔던 명동중학교. 본관 건물 앞에 윤동주 시비가 서 있다. 손민호 기자 명동중학교에 전시 중인 윤동주의 학적부. 윤동주는 특히 일본어에 약했다. 4학년 때는 40점을 받기도 했다. 손민호 기자  윤동주도 창씨개명을 했다. 히라누마 도주(平沼東住). 그의 일본 이름이다. 일본에 유학을 가려면 어쩔 수 없었다. 윤동주는 1942년 4월 도쿄(東京) 립교(立敎)대학에 입학했고, 일본으로 떠나기 전 착잡한 심정을 여러 편의 시에 남겼다. 조선어로 시를 쓰는 일본 이름의 시인. 이 부끄러운 현실이 그의 또 다른 대표작 ‘참회록’을 낳았다.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보고 윤동주는 ‘욕되다’고 썼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참회록’ 1연, 1942년 1월 24일.    #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윤동주, 달을 쏘다.’에는 모두 9편의 윤동주 시가 등장한다. 8편이 전편 인용되고 1편이 부분 인용된다. 노래에 쓰인 시는 없다. 작곡을 담당한 오상준은 “윤동주의 시 안에 음악적 선율이 내포돼 있다는 생각에 시는 독백과 낭독으로 표현하고 음악은 시의 감성과 비슷한 결로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오상준 작곡의 설명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윤동주의 시는 굳이 멜로디를 얹지 않아도 음악성을 띤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윤동주의 시를 스스럼없이 암송하는 까닭이다.   '윤동주, 달을 쏘다.'의 오프닝 장면. 윤동주가 시 '팔복'을 천천히 읊으며 감정을 고조시킨다. [사진 서울예술단]  윤동주 시에 내재한 음율 덕분에 ‘윤동주, 달을 쏘다.’의 인상적인 첫 장면이 탄생할 수 있었다. 배우는 오로지 시를 읊었으나, 관객은 아름다운 노래를 듣는 것 같은 감상에 빠졌다. 무대를 보자. 깜깜한 무대 왼쪽 구석에 윤동주가 쪼그리고 앉아 무언가를 끼적거린다. 처음에는 나지막이 한 행을 읊는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시행을 반복할 때마다 감정이 상승하고, 마침내 윤동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관객을 마주 본다. 배우가 시를 읊을 때마다 무대 중앙 스크린에선 시어가 한 자 한 자 새겨진다. 1940년에 쓴 ‘팔복(八福)’이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가 모두 여덟 번 되풀이된다. 시어는 같지만 행마다 감정이 다르다. 처음엔 서글프다가 나중엔 복받친다. 올해 공연에서 처음 윤동주 역할을 맡은 배우 온주완은 오프닝 장면이 가장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온주완 배우의 대본을 보면 치밀했던 고민이 뚝뚝 묻어난다. 윤동주 역을 맡은 온주완 배우의 실제 대본. '팔복'의 한 행 한 행마다 다른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빼곡히 메모를 했다. [사진 서울예술단]  이 처연한 구절은 성경에서 따왔다. 마태복음 5장 예수가 축복을 내리는 장면에 등장한다. 예수는 마음이 가난한 자, 슬퍼하는 자, 온유한 자 등 여덟 부류의 사람이 축복을 받는다고 말했다. 예수가 내리는 축복 중에서 두 번째가 슬퍼하는 자의 축복이다. 슬픔이 곧 축복이라는 예수의 말씀을 시인은 꾸역꾸역 받아 적었다. 그리고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라고 갈무리했다.     영원히 슬프겠으니 영원한 복을 달라는 자학적인 바람이었다. 여기에 윤동주 시의 미학이 있다. 윤동주의 시는 염결한 기독교주의에서 기인한다. 할아버지 대부터 윤동주 집안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도 윤동주의 짧은 생애를 다뤘다. 그 영화로 많은 사람이 윤동주의 동갑내기 고종사촌 송몽규의 존재를 알게 됐다. 영화를 보면 윤동주가 송몽규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장면이 나온다. 사실이다. 송몽규는 윤동주보다 공부도 잘했고 먼저 등단했다. 무엇보다 만주에서 독립군 활동을 했다. ‘윤동주, 달을 쏘다.’에도 둘 사이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슬쩍 끼워져 있다.   '윤동주, 달을 쏘다.'의 한 장면. 윤동주의 연희전문학교 급우들이다. 사진 맨 오른쪽부터 윤동주, 강처중, 정병욱, 송몽규. [사진 서울예술단]  하나만 더. 윤동주는 만주 명동소학교에 다닐 때부터 송몽규을 비롯한 급우들과 문학에 심취했다. 그 시절 윤동주와 함께 아동잡지를 구독하고 연극활동을 했던 급우 중 한 명이 고(故) 문익환(1918∼94) 목사다. 문 목사는 돌아가기 전까지 수차례 만주를 드나들며 윤동주 추모사업을 벌였다.      #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윤동주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초판본  윤동주는 단 한 권의 시집을 남겼다. 1948년 1월 30일 정음사에서 발간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다. 그가 죽은 뒤 시집이 나왔으므로 그는 제 이름이 적힌 시집을 본 적이 없다. ‘윤동주, 달을 쏘다.’에서는 일본으로 떠나기 직전 윤동주가 함께 하숙했던 연희전문학교 2년 후배 정병욱에게 시 19편을 담은 원고를 건네는 것으로 그려졌다.     윤동주는 원래 연희전문학교 졸업 기념으로 시집을 출간할 작정이었다. 하나 사정이 생겨 포기하고 정병욱에게 원고를 넘겼다. 정병욱이 건네받은 시편은 19편이었지만 다른 유고를 더 모아 모두 31편으로 시집을 묶었다. 서문은 생전의 윤동주가 존경했던 시인 정지용(1902∼50)이 썼다. 정지용과 윤동주는 도시샤 대학 동문이다. 정지용이 쓴 서문에서 일부를 인용한다.    무시무시한 독방에서 죽었구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 일제시대에 날뛰던 부역 문사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뱉을 것뿐이나,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윤동주가 애초에 생각했던 시집 제목은 ‘병원’이었다. 윤동주는 제가 쓴 시로 병든 세상을 치유할 수 있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1941년 11월 20일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쓰면서 윤동주는 이 시의 제목을 시집의 제목으로 삼았다. 시집에 제목을 넘긴 시는 대신 ‘서시(序詩)’가 됐다.   윤동주가 남긴 '서시' 원고. 글씨도 시처럼 반듯하다. 손민호 기자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가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쓴 무렵은 일제의 창씨개명 강요가 극에 달했을 때였다. 연희전문학교 졸업을 한 달쯤 앞둔 시점이었고 그는 유학을 고민하고 있었다. 역시 시는 고뇌의 산물인가 보다. 이즈음 윤동주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비롯해 ‘십자가’ ‘별 헤는 밤’ ‘참회록’ 등 주요 작품 대부분을 생산했다.      # 달을 쏘다 '윤동주, 달을 쏘다.'의 한 장면. 일제의 조선어 말살정책에 학생들이 반발하고 있다. [사진 서울예술단]  윤동주는 1943년 7월 14일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그리고 1944년 3월 31일 교토 지방재판소 제2형사부는 윤동주에게 징역 2년형을 선고했다. 판결문이 적시한 죄명은 치안유지법 위반이다. 주요 혐의는 다음과 같다.    유년 시절부터 민족적 학교 교육을 받아 사상적 문학서 등을 탐독하고 치열한 민족의식을 품고 있었던 바, 우리의 조선 통치 방침을 조선 고유의 민족문화를 절멸시키고 조선 민족의 멸망을 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결과, 독립운동의 소지를 배양할 수 있도록 일반 대중의 문화 앙양 및 민족의식 유발에 힘써야 한다고 결의하기에 이르렀으며 … 문학은 어디까지나 민족의 행복 추구의 견지에 입각해야 한다는 뜻으로 민족적 문학관을 강조하는 등 민족의식의 유발에 부심함.    그러니까 윤동주는 일본에 유학을 가서도 조선어로 조선의 정서를 담은 시를 쓰다 처벌된 것이었다. 윤동주의 독립운동 이력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의 주장처럼 윤동주는 만주 벌판에서 총칼 들고 싸우지 않았다. 그러나 윤동주는 그가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무기를 들고 일제에 맞섰다. 윤동주의 무기는 ‘시’였다.    가을이 원망스럽고 달이 미워진다. 더듬어 돌을 찾아 달을 향하여 죽어라고 팔매질을 하였다. 통쾌! 달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그러나 놀랐던 물결이 잦아들 때 오래잖아 달은 도로 살아난 것이 아니냐. 문득 하늘을 쳐다보니 얄미운 달은 머리 위에서 빈정대는 것을…. 나는 꼿꼿한 나뭇가지를 끊어 띠를 째서 줄을 메워 훌륭한 활을 만들었다. 그리고 좀 탄탄한 갈대로 화살을 삼아 무사의 마음을 먹고 달을 쏘다. -산문 ‘달을 쏘다(1938. 10)’에서 부분 인용    시인은 무사의 마음을 먹고 갈대로 화살을 삼아 달을 쐈다. 부질없는 짓이고 어처구니없는 행동이다. 하나 정지용이 윤동주의 시집 머리에 쓴 것처럼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가무극의 제목이 이 산문에서 발췌됐고, 2시간 30분 공연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노래로 활용됐다.  '윤동주, 달을 쏘다.'의 하이라이트 장면. 병든 윤동주가 '별 헤는 밤'을 절규하며 읊는다. [사진 서울예술단]  가무극의 하이라이트는 병든 윤동주가 ‘별 헤는 밤’을 부르짖는 장면이다. 하나 이 장면은 차마 글로 옮기지 못하겠다. 윤동주가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를 한 음절 한 음절 토해낼 때, CJ토월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 767명 가운데 절반이 훌쩍거렸고 나머지 절반이 펑펑 울었다.    이 마지막 20분을 위해 2시간을 기다렸다는 평이 쏟아졌을 만큼 ‘별 헤는 밤’의 장면은 강렬했다. 윤동주의 잔잔한 시어가 이렇게 폭발력이 있을 줄 몰랐다. ‘별 헤는 밤’ 장면이 있어서 ‘윤동주, 달을 쏘다.’는 윤동주를 빌린 작품이 아니라 윤동주와 어울린 작품이 될 수 있었다. '윤동주, 달을 쏘다.'의 장면. 후쿠오카 감옥에서 만난 윤동주와 송몽규가 껴안고 울고 있다. [사진 서울예술단]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감옥에서 죽었다. 그와 함께 수감돼 있었던 송몽규도 윤동주가 간 지 23일 뒤인 3월 10일 죽었다. 생전의 송몽규는 면회 온 친척에게 “매일 이름 모를 주사를 맞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윤동주가 생체실험으로 희생됐다고 주장하는 유일한 근거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에는 윤동주가 일본 유학 시절에 쓴 5편이 포함돼 있다. 조선의 친지에게 우편으로 부친 시다. 윤동주는 일본에서도 부지런히 시를 썼다고 전해지지만, 이 5편 말고 추가로 발견된 작품은 없다. 아직도 어느 깊은 책장 구석에 윤동주가 눈물로 쓴 노래가 숨어 있을지 모른다. 윤동주의 유학시절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쉽게 쓰여진 시’ 일부를 옮긴다. 윤동주의 말마따나 그래, 사는 것은 늘 부끄러운 것이다.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서울예술단의 창작가무극은 집단 안무가 강하다. '윤동주, 달을 쏘다.'에서도 집단 안무가 두드러졌다. [사진 서울예술단]  ◇창작가무극=‘윤동주, 달을 쏘다.’는 창작 뮤지컬이다. 그러나 창작가무극이라고 부른다. 서울예술단 작품이기 때문이다.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북한 평양예술단이 서울에서 공연을 했다. 평양예술단의 총체극에 자극을 받은 정부는 대형 종합예술단체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1986년 ‘88서울예술단’을 창단했다. 91년 지금의 이름이 됐고, 현재 문체부 산하 재단법인이다.   서울예술단은 출범 취지에 맞게 한국적 음악과 춤, 한국적 소재를 활용한 한국형 가무극 창작에 집중했다. 그 대표작이 ‘윤동주, 달을 쏘다.’다. 2012년 초연, 2013년 재연, 2016년 3연에 이어 올 봄 4연을 성공리에 마쳤다. 서울예술단의 대표 레퍼토리라 할 수 있다. 가무는 한국적이지 않지만 소재가 한국적이다. 네 차례 공연 모두 윤동주 역을 소화한 박영수 배우가 이 작품으로 스타가 됐다.    서울예술단 작품의 특징이 있다. 총체극에서 출발한 전통을 이어받아 집단 안무가 강하다. ‘윤동주, 달을 쏘다.’에서도 공연팀의 연기가 눈에 띄었다. 무대 뒤편에서도 제 역할을 소화했고, 안무가 일사불란하고 동선이 컸다. 하지만 일본 욱일기를 흔드는 장면에선 과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7    서시(윤동주)를 리해하기...3 댓글:  조회:2530  추천:0  2019-01-22
윤동주 시인의 ‘’서시’’ 해석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하늘을 우러러 죽어도 죄 짓지 않겠습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저는 마음이 여려서 작은 죄도 짓지 못합니다.    많은 민초들이 어둠-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에 나는 괴로워합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별은 외로운 빛, 모든 죽어가는 것은 시대의 어둠! 어둠은 죄, 빛은 정의이다. 밤 시대에는 빛이 어둠을 돕고 죽어가고(공멸), 낮 시대에는 어둠이 빛을 돕고 살아간다(공생). 음(어둠)과 양(빛)은 짝이자 적으로서, 작용반작용 원리로써 서로 싸우며, 돕거나 해친다. 저와 당신들은 빛과 어둠으로 묶인 공동운명체이니, 저를 위해서라도 당신네들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저는 이제 어둠을 짖는 개 짓을 그만 둘 것이니, 이제 저의 길을 막지 마세요.   저는 인류 미래와 하늘의 정의를 위해 나아갈 것입니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나는 외롭지만 빛나는 별이고, 어둠-바람은 곧 지나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계절을 지나가는 변화와 희망의 바람을 느끼고 생각한다.    나는 오늘 밤에도 어둠 바람에 죄 없이 스침 당하고 있다. --스치운다;; ‘스치다’의 피동태 ;;터치 당하고 있다 ;;감시 위협 차단 고립 당하고 있다. --형제와 이웃과 친구들과 수 많은 동족이 죄다! 어둠의 감시자가 되어, 늘 시인의 눈에 스치고, 감시함을 비추고,적반하장, 미친-자라고 음해한다.   / ** 이 시 해석은, 윤동주 님의 시 “또 다른 고향”을 바탕으로 한다. 그 시가 아니면 이 시의 해석은 어려워진다. 그리고, **파블로-피카소의 “게르니카”는 윤동주 시인이 당한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강국의 약소국에 대한 선악과 술수로서 수 천년 동안 반복된 술수이다. ** 윤동주 님의 시는, 시어들이 가지는 상징성 및 이중적 의미를 이용해서, 겉은 능금처럼 아름답고, 속에 본질을 숨기는 기법으로써, 참으로, 바이블의 그것보다 더 세련되다. ** 그 시대에 모든 이들이 어둠 속에 덮이었을 때, 그 님은 홀로 빛으로 남아, 탄압을 견디시었다. 그 님의 시는, 사람의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 ** 일본에서는 윤동주 시인의 시를 연구 토론하는 단체가 여럿 있지만, 한국에는 꺼꾸로, 엉터리 해석이 주류이고, 옳은 해석 글은 돈에 팔리고 차단되고, 그것을 연구하는 사람을 은밀히 교묘하게 탄압한다. 어둠의 역사의 정보가 차단되면 그것은 그 역사를 반복함을 뜻한다. 윤동주 시인은 예수님처럼 동족에게 탄압 받고, 사회적으로 죄 없이 죽은 백골 되시어, 창씨개명 하시고 일본으로 유학 가셨으니, 그 님은 국적과 민족을 초월한 객관적인 입장이시다. 그런 고로, 그 님은 “민족시인”이 아니고 “하늘시인” 이시다. “하늘바람별-시인” 이시다.   ** 어둠의 역사는 덮임으로써 재개되고, 엄청난 다수의 힘으로써 그 어둠을 덮으니 다 덮인다. 지금 한국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죄다, 스스로 눈 코 귀 입 막고, 떼 자살 중. 죄 짓고 덮는 입장이 되면, 어둠의 노예가 되어, 선인을 감시 음해 차단하는 것이 다 죽을 죄 라는 것을 모른다. 이성과 인성을 잃은 마귀가 된다. ** 신이란, 작용과 반작용으로 되어 있고, 왼손과 오른손으로 되어 있다. 죄 준 자가 벌한다. 신은 어둠 속의 머리카락을 다 헤신다. 그리고, 집단은 공동운명체.   2014-03-26 오영석(청천)
6    서시(윤동주)를 리해하기...2 댓글:  조회:3069  추천:0  2019-01-22
핵심 정리 [이 작품은] 적절한 상징과 시각적 심상을 활용하여 일제 강점기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도덕적 순결성에 대한 고뇌와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성격 : 성찰적, 고백적, 의지적, 상징적 *제재 : 별 *주제 : 순수한 삶에 대한 간절한 소망과 의지 *특징 ① 시간의 이동에 따라 시상을 전개함. ② 이미지를 대립시켜 시적 상황을 제시함. *출전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 작품의 구성 [1 ~ 4행] 부끄러움 없는 삶에 대한 소망(과거) [5 ~ 8행] 미래의 삶에 대한 결의(미래) [9행] 어두운 현실에 대한 자각(현재)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윤동주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두에 붙여진 작품으로, ‘서시(序詩)’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시집 전체의 내용을 안내해 주는 역할을 한다. 2연 9행으로 이루어진 이 시는 시간의 이동(과거 - 미래 - 현재)에 따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부분(1~4행)은 순결한 도덕적 삶을 살고자 했던 화자의 의지와 고뇌를 과거의 시점에서 말하고 있다. 화자는 지금까지 윤리적 판단의 절대적 기준이 되는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죽는 날까지’ 세속적 삶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어떤 ‘부끄럼’도 없는 삶을 살기를 기원했다. 그래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아주 작은 흔들림에도 괴로워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며 결백한 삶을 살고자 노력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두 번째 부분(5 ~ 8행)에서는 살아 있는 존재에 대한 한없는 연민과 사랑을 나타내면서 미래의 삶에 대한 화자의 결의를 다짐하고 있다. 화자는 밤하늘에 빛나는 맑고 밝은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삶의 고통에 부대끼는 모든 생명들을 사랑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길’, 즉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향해 꿋꿋하게 걸어가야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마지막 부분(9행)은 어두운 밤하늘과 별, 그리고 바람 간의 관계를 통해서 화자가 처한 상황을 보여 주면서 도덕적 순결성에 대한 화자의 의지를 시적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따라서 이 시는 현실의 어둠과 괴로움 속에서 자기의 양심을 외롭게 지키며 맑고 아름다운 삶을 살고자 했던 한 젊은 지식인의 모습을 간결한 언어와 상징어들을 통해 보여 준 작품이다. ⓒ (주)천재교육 | BY-NC-ND 작품 연구실 ‘별, 바람, 밤’의 의미 관계는? 이 시에 나오는 시어 ‘별’, ‘바람’, ‘밤’은 각각의 상징적인 의미를 통해 작품의 의미망을 형성하고 있다. 즉, 어둔 ‘밤’ 하늘에서도 빛을 잃지 않으며, 시련의 ‘바람’ 앞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별’을 통해, 어떤 시련과 어둠의 현실에서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양심의 결백함을 지켜 내려는 화자의 의지를 시적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시어의 상징적 의미 *하늘 : 윤리적 판단의 절대적 기준 *별 : 화자가 추구하는 희망, 이상적 삶의 세계. ‘바람’과 대립되는 이미지 *바람 : 3행의 ‘바람’ - 화자의 내면적 갈등 또는 양심의 가책/9행의 ‘바람’ - 화자가 처한 어두운 현실, 일제 강점하의 시대 상황 *길 : 화자가 걸어가야 할 숙명, 운명 *밤 : 화자가 처한 어두운 현실. 일제 강점하의 시대 상황 이 시에 나타난 화자의 태도 화자는 암울한 시대 상황에서도 양심을 지키며 현실에 타협하지 않는 삶, 즉 부끄러움이 없는 순결한 삶을 추구하고 있다. 즉, 나라를 일제에 빼앗긴 현실에 괴로워하면서도 ‘별’과 같이 이상적인 삶, 도덕적으로 순결한 삶을 살기를 소망하며 민족을 위해 고난과 시련의 삶을 피하지 않고 꿋꿋하게 헤쳐 나갈 것을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화자는 일제 강점기의 어두운 시대에 도덕적 순결성과 양심을 지켜 나가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화자의 태도 ⓒ (주)천재교육 | BY-NC-ND 작가 소개 - 윤동주(尹東柱, 1917 ~ 1945) 시인. 북간도 출생. 일본 도시샤 대학 영문과에 재학 중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이듬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1941년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19편의 시를 묶은 자선 시집(自選詩集)을 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가 자필로 3부를 남긴 것이 사후에 햇빛을 보게 되어, 1948년에 유고 30편이 실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간행되었다. 주로 1938~1941년에 쓰인 그의 시에는 불안과 고독과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과 용기로 현실을 돌파하려는 강인한 정신이 표출되어 있다. 작품으로 ‘자화상’(1939), ‘또 다른 고향’(1948) 등이 있다. 윤동주의 시 세계 윤동주는 일제 강점기 지식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정신적 고통을 섬세한 서정과 투명한 시심으로 노래한 시인이다. 그의 시의 특성은 고요한 내면세계에 대한 응시를 순결한 정신성과 준열한 삶의 결의로 발전시킨 데 있다. 그의 시가 추구한 핵심적 문제는 현실적 존재의 슬픔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비록 소극적이고 자책적이며, 어떤 경우 자기 분열의 상태까지 이르기도 하지만, 윤동주의 시는 여기서 끝나지 않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그가 생애를 마감할 무렵인 일본 유학 시절의 시는 비로소 윤동주의 저항 시인으로서의 평가를 가능하게 해 준다. 그의 시는 근본적으로 그의 생애의 흐름과 일치하며 발전한다. 즉, 개인적 자아 성찰에서 역사와 민족의 현실에 대한 성찰로 인식이 확대되는 것이다. 민족의 해방을 기다리며 자신의 부끄러움 없는 삶을 위해 죽을 때까지 시대적 양심을 잃지 않은 시인으로서, 그의 시는 일제 강점기의 종말에 대한 희생적 예언으로서 자리 잡고 있다.
5    서시(윤동주)를 리해하기...1 댓글:  조회:2396  추천:0  2019-01-22
시대 근대 저작자 윤동주 창작/발표시기 1941년 11월 20일 성격 시 유형 작품 분야 문학/현대문학 요약 윤동주(尹東柱)가 지은 시.   내용 윤동주(尹東柱)가 지은 시. 1941년 11월 20일에 창작되었고 그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1948)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는 윤동주의 생애와 시의 전모를 단적으로 암시해주는 상징적인 작품이다. 왜냐하면, 이 시는 윤동주의 좌우명격 시인 동시에 절명시에 해당하며, 또한 ‘하늘’과 ‘바람’과 ‘별’의 세 가지 천체적 심상(心像)이 서로 조응되어 윤동주 서정의 한 극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서시>는 내용적인 면에서 세 연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연은 ‘하늘-부끄럼’, 둘째 연은 ‘바람-괴로움’, 셋째 연은 ‘별-사랑’을 중심으로 각각 짜여져 있다. 첫째 연에서는 하늘의 이미지가 표상하듯이 천상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순결 의지가 드러난다. 바라는 것, 이념적인 것과 실존적인 것, 한계적인 것 사이의 갈등과 부조화 속에서 오는 부끄러움의 정조가 두드러진다. 둘째 연에는 대지적 질서 속에서의 삶의 고뇌와 함께 섬세한 감수성의 울림이 드러난다. 셋째 연에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서의 ‘진실한 마음, 착한 마음, 아름다운 마음’을 바탕으로 한 운명애의 정신이 핵심을 이룬다. 특히,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라는 구절은 운명애에 대한 확고하면서도 신념에 찬 결의를 다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운명애의 결의와 다짐은 험난한 현실에서 도피하지 않고 운명과 맞서서 절망을 극복하려는 자기 구원과 사랑에 있어 최선의 방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절망의 환경일수록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자기자신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윤동주가 택한 자기 구원의 방법은 운명에 대한 긍정과 따뜻한 사랑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운명애의 길은 관념적으로 도출된 것이 아니라 진솔한 자아 성찰과 통렬한 참회의 과정을 겪으면서, 변증법적 자기 극복과 초월의 노력에 의해 마침내 획득되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참된 생명력을 지니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운명 감수의 태도가 아니라 그 극복과 초월에 목표를 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시인 이 작품은, 시집의 전체적인 내용을 개략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시이며, 존재론적 고뇌를 투명한 서정으로 이끌어 올림으로써 광복 후 혼란한 시대에 방황하는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따뜻한 위안과 아름다운 감동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라 할 수 있다.
4    "서시" 일본어 번역본에 오류가 있다??? 댓글:  조회:3790  추천:1  2019-01-22
윤동주 ‘서시’ 일본어 번역본 오류있다 재일동포 서경식교수 지적 이부키 1984년 번역때 정반대 해석 진실 훼손뒤 일본어역 정본으로 사용             » 윤동주 서시       ‘죽어가는 것들→살아있는 것들’로 왜곡일본에 저항, 의도적으로 은폐   윤동주 서시는 현재 일본 고교 국어교과서인 에 실린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의 에세이 ‘윤동주’에 전문 번역본이 인용돼 있다. 또한 윤동주가 다닌 도시샤대 구내에 1995년 세워진 그의 시비에도 이 번역본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이 번역본에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구절을 ‘모든 살아 있는 것을 사랑해야지’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거의 정반대의 의미를 지닌 구절로 바꿔버린 것이 논란의 초점이 됐다. 윤동주 연구가 이부키 고가 서시를 그렇게 번역해 84년에 출간했으며, 그 번역본은 지금 거의 일본어역 정본처럼 자리잡고 있다.   성공회대 연구교수로 있는 일본 도쿄경제대학의 재일동포 2세 서경식 교수는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 논란에는 억압자와 피억압자, 머조리티(다수자/주류)와 마이너리티(소수자/비주류) 간의 왜곡되고 불평등한 ‘식민주의적 권력관계’가 짙게 반영돼 있다고 지적했다. 서 교수는 17일 한일민족문제학회 주최로 숙명여대에서 열릴 강연회에서 발표할 ‘디아스포라와 언어-재일조선인의 입장에서’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를 자세히 다룬다.   일본의 대표적인 조선문학연구자 오무라 마스오 와세다대 교수는 일찍이 서시의 번역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윤동주가 서시를 쓴 당시 일본 군국주의 때문에 많은 조선인들이 죽어갔고, 조선인의 말과 민족 옷, 생활풍습, 이름 등 민족문화의 모든 것이 ‘죽어가는’ 시대였다. 이렇게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외친 그는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들을 당연히 심히 증오했을 것이다. 이부키의 번역은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들도 꼭같이 사랑한다는 꼴이 돼버리지 않을까?” 그러자 이부키는 자신의 2002년판 책에 이에 대한 반박문을 실었다. 그는 “모든 죽어가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이기에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며 “모든 죽어가는 것, 모든 살아가는 것 모두 다 동의이어(同義異語)”라고 주장했고, 아울러 “(윤동주의) 실존응시적 사랑의 표출에는 군국주의 일본인에 대한 미움 같은 것은 상관없다”는 주장도 펼쳤다. 서경식 교수는 이부키가 번역하기 전에 이미 김소운, 김학현 등의 번역본이 출간됐고 김학현은 문제의 구절을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했다고 밝혔다. 게다가 이부키는 자신의 번역시집에 붙인 문헌목록에 김학현의 책을 실어 그런 번역이 이미 나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해,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해당 구절을 굳이 그렇게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서 교수는 “일본의 많은 독자들은 일본이 식민지배를 통해 조선민족에게 가한 죄악에 대해 무지하며, 게다가 그런 사실을 제대로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윤동주의 시를 읽을 때도 그것을 되도록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고발로서가 아니라 일반적인 ‘실존적인 사랑의 표출’로 읽으려는 경향을 지닌다”고 비판했다.   /한승동 선임기자    윤동주 일본어 번역본 오류있다 ’를 읽고 의도된 오류와 의도하지 않은 양보   가해자의 얼굴이 낯선 것은 그들이 언제나 자기가 저지른 악행에 대한 일체의 반성이나 자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사람’과 ‘살아있는 사람’의 의미 차이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것을 의도적으로 구겨놓은 일본인 문인의 숨겨진 의도가 너무 천해 보여…   지난 17일치 에서 ‘윤동주 일본어 번역본 오류 있다’라는 기사를 읽었다. 연세대 윤동주 기념사업회 일을 6년간 보아오면서 윤동주에 대한 여러 해석을 눈여겨보곤 하였다. 윤동주 시들을 항일 의도로 읽지 않고 빼어난 서정시로 읽으면 그가 더 보편적인 시인으로 자리잡지 않겠느냐 하는 논자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모든 작가나 시인은 그가 태어난 시대에 포위된 관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가해자 집단이 설치는 시대에 피해자였던 작가 의식을 어떻게 그 시대감각으로부터 벗어난 것으로 해석할 수가 있는가? 나는 그 의도가 옳지 않다고 읽는 쪽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구절이 ‘모든 살아있는 것을 사랑해야지’로 바뀐 내역, 그야말로 숨겨진 두 차원의 슬픈 이야기를 윤동주 장조카 윤인석 교수로부터 전해 들었다. 이 착한 가족사는 내 마음을 슬픔에 젖게 한다. 일본인이 윤동주 시를 번역할 당시 그의 친동생인 윤일주 선생은 일본에 있었고 일본인 이부키 고는 자주 윤일주 선생을 찾아와 번역한 시들을 보여주면서 자문을 청하곤 하여, 이 시 ‘서시’에 대한 번역도 고민, 고민 끝에 그대로 용인한 모양새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 봐라 바로 그 시인의 아우가 용인한 번역이니 틀림이 없지 않으냐? 이 번역에 왜 시비냐?’ 정도의 느긋한 배포가 이 번역자에게는 있다고 내겐 읽혔다. 내가 이 사실 이야기를 놓고 슬퍼하는 이유는 이렇다.   모든 가해자는 그가 행한 가해 사실을 숨기거나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어 한다. ‘거 뭐 대단일 일이라고 자꾸 과거를 들추느냐? 앞으로 올 미래만이 더욱 중요하지 않으냐?’ 따위의 추악한 궤변이 우리 주변에는 횡행한다. 시인 이상이 ‘하루치씩만 잔뜩 산다’고 썼을 때 이 하루란 언제인가? 어제와 오늘, 담날, 모레, 이 시간개념은 따지고 보면 편의상 붙인 날짜일 뿐이다. 윤동주가 ‘내일은 없다’라는 시에서 썼듯 누구나 내일, 내일 하지만 실은 내일이란 없고 언제나 오늘만 있다. 이 오늘은 또한 놀랍게도 순식간에 어제, 그제, 과거로 바뀐다. 감추려는 가해자의 악행과 기억에서 영원히 지우지 않으려는 피해자의 선량한 다짐(경우에 따라 복수의 칼날을 갈 수도 있겠지!)은 인간 존재가 쥐고 있는 양날의 칼이자 슬픔이고 설움이다.   가해자의 얼굴이 낯선 것은 그들이 언제나 자기가 저지른 악행에 대한 일체의 반성이나 자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이번 학기 말에 나는 중견작가 정찬의 두 작품 ‘슬픔의 노래’와 ‘완전한 영혼’ 그리고 이것을 에서 각색 방영한 ‘팩션 드라마-오월의 두 초상’ 강의로 끝을 마쳤다. 5·18 광주, 군부 독재자들이 탱크로 밀고 들어가 민간인들을 살해한 이 사건 당시, 한 피해자 장인하와 가해자인 계엄군 출신 박운형의 삶을 놓고 작가는 피를 흘리듯 정신의 기운을 모아 마무리짓고 있었다.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가 슬픔의 강물로 흐른다는 이 소설적 가설은 가해자가 그 스스로 가해자였다는 자의식이 전제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가해자들은 결코 그런 자의식을 갖거나 그것을 슬픔으로 품어 안지 않는다. 그게 악의 본질이니까. ‘죽어가는 사람’과 ‘살아있는 사람’의 의미 차이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랑 또한 그 너비와 폭은 아예 다르다. 그것을 의도적으로 구겨놓은 일본인 문인의 숨겨진 의도가 너무 천해 보여 한마디 적어 둔다. 악당은 언제나 악당일 뿐이고 천박한 것이다.   ///정현기/문학평론가·연세대 교수       ========================================/// 서시 /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1. 伊吹郷(이부키 고우) 번역ㅡ  1984년 윤동주의 시집을 번역 출간.  일본 현대문 교과서에 실려 있는 번역.  序詩  死ぬ日まで空を仰ぎ  一点の恥辱《はじ》なきことを、  葉あいにそよぐ風にも  わたしは心痛んだ。  星をうたう心で  生きとし生けるものをいとおしまねば  そしてわたしに与えられた道を  歩みゆかねば。  今宵も星が風に吹きさらされる。  2. 曹紗玉 번역ㅡ  『明洞のキリスト  韓国キリスト者三十九人詩集』에 실린 번역.  序詩  死ぬ日まで天を仰ぎ  一点の恥なきことを、  葉群れにそよぐ風にも  私は心を痛めた。  星を歌う心で  すべての死に行くものを愛さねば  そして私に与えられた道を  歩んでいかねば。     今宵も星が風にこすられる。  3. 上野潤 번역ㅡ  * 1998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번역 출간.  역자가 서울에서 유학했고, 번역 당시 윤동주의 대학 동기인 柳玲교수 및 여러 한국인들에게 시어에 대해 물어보고 번역 했다고 함.  序詩  息絶える日まで天《そら》を仰ぎ  一点の恥の無きことを、  木の葉にそよぐ風にも  私は心痛めた。  星を詠う心で  全ての死に行くものを愛さねば  そして私に与えられた道を  歩み行かねばならない。  今夜も星が風に擦れている。                           1941.11.20.  4. 上野都 (우에노 미야코) 번역ㅡ  * 최근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번역 출판.  序詩  召される日まで天を仰ぎ  いかなる恥もなさぬことを、  一葉(ひとは)に立つ風にも  わたしは心を痛めた  星をうたう心で  すべての滅びゆくものを慈(いつく)しまねば  そしてわたしに与えられた道を  歩いてゆかねばならない。  今夜も風が星にかすれて光る。  # 문제 삼는 부분은  하늘 -> 空  부끄럼 -> 恥辱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生きとし生けるものをいとおしまねば  보면 알겠지만 다른 번역에서는  空 대신 天을, 恥辱 대신 恥로 쓰고 있어.  그런데 生きとし生けるものをいとおしまねば 이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당장 네이버 일본어 사전에서 生きとし生けるもの를 검색하면 '살아 있는 온갖 것'이라고 나와.  모든 죽어가는 것들은 결국 살아있다는 의미이고,(살아있어야 죽을 수 있으니)  그렇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들이라고 의역한거 같은데,  이건 솔직히 시어를 훼손한거라고 보거든.  참고 기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53375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41145.html  http://www.eonet.ne.jp/~koreanya/02shi1/shiron1-YoonDongJyunoJyoshi.htm "  チャン・ウニョン 선생님이 번역한 윤동주의 서시를 읽고, 처음으로 이 시의 진실된 반짝임을 알았다.  이것이라면 납득할 수 있다.  어지간히 나쁜 번역으로 읽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진 이 시가 진부하다고 느껴진걸까? 하고 생각해서 다른 번역을 찾아보았다.  문제는 6행이었다.  チャン・ウニョン의 번역에는 'すべての死にゆくものを愛さねば' 라고 한 부분이  伊吹郷의 번역에는 '生きとしいけるものをいとおしまねば' 라고,  마치, 장래 일본에서 수감되어 옥사한 자신의 운명과,  일본의 조선지배로 살해당한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조선에게서 모든것을 빼앗았다는 의미마저도, 아주 훌륭하게 은폐하고 있다.  이런식으로 단어를 써서, 자기들의 시꺼먼 죄를 거대한 생명의 일부 속으로 녹여 섞고있다.  茨木のり子는 伊吹郷의 번역을 절찬하고 있지만, 이건 사기가 아닌가?  본래의 시는 한글을 좀 알고있다면 누구라도 예외없이 평범하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의 죄를 얼버무리려는 일에, 시와 관련된 사람들, 그것도 조선에 마음을 주고 있다과 여겨지는 사람들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은 날이었다.  "     이 사람의 반응이 결코 주류는 아닐거야.  그럼에도 일본인이라도 이 번역은 아니다, 라고 진실은 안다면 저렇게 말 하는 걸 보면,  정말 이부키 고우의 번역은 심한 문제라고 생각해.  그게 교과서에서 학생들이 배우는거라면 더더욱.  4번 역자의 번역은 독특해.  2, 3번 역자는 모두 6행을 全ての死に行くものを愛さねば라고 번역했는데  이 사람은 すべての滅びゆくものを慈しまねば라고 번역했거든.  그 뉘앙스 차이...  http://m.jabo.co.kr/a.html?uid=35665§ion=sc4   ========================================///     윤동주 서시의 일본 시비詩碑 - 오역으로 윤동주를 두 번 죽여서야   이 해 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11.20.     윤동주가 ‘정병욱 형 앞에, 윤동주 정呈’이라고 써서, 18편의 시를 담은 시고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만든 후, 그 머릿부분에 갖다 놓은 무제無題의 시가 오늘날 우리들이 애송하고 있는 이른바 윤동주의 서시이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중국 길림성 용정 교외의 명동에서 출생, 연희전문을 졸업한 후, 1942년 일본에 도항, 도시샤대학 문학부에서 수학했다. 재학 중이던 1943년 7월 14일 우리 모국어로 시를 썼다는 이유만으로 고종사촌 송몽규(당시 교토대학 재학생)와 함께 사상범으로 교토 시모가모 경찰서에 체포 구금되었다. 재판 결과, 두 사람 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2년 징역형이 선고되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 중 생체실험 주사를 맞고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옥사했다. 그의 나이 27세였다. 이처럼 생전에 시집 한 권 내지 못하고 죽은 그의 유고집은 친구 정병욱 님의 정성으로 마루 밑에 숨겨져 보관되다가 해방 후 동생 윤일주에게 전해져서 1948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출간되어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의 선배요 사장이라 할 수 있는 정지용은 윤동주 시집의 서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아직 무릎을 꿇을 만한 기력이 남았기에 나는 이 붓을 들어 시인 윤동주의 유고에 분향하노라. 겨우 30여 편 되는 유시 이외에 윤동주와 그의 시인됨에 관한 아무 목증目證한 바 재료를 나는 갖지 않았다. …내가 시인 윤동주를 몰랐기로소니 윤동주의 시가 바로 ‘시’고 보면, 그만 아니냐. …청년 윤동주는 의지가 약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정시에 우수한 것이겠고 그러나 뼈가 강하였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일적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고나! 29세(우리 나이 - 필자 註)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 일제시대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앝을 것뿐이나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윤동주가 수학했던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에는 그의 시비가 서 있다. 시비는 1995년 2월 16일 동 대학 코리아 클럽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또 최근엔 그가 살던 아파트가 있던 자리(현 교토조형예술대학)에도 시비가 세워졌다고 한다. 그의 서시는 우리들에게 널리 사랑받고 있지만 그의 목숨을 앗아간 일본 땅에도 시비가 세워지다니 참 뜻깊은 일이다. 그러나 일본어로 번역된 비문을 읽어보면 여기엔 치명적인 오역이 있어 이래서야 윤동주를 두 번 죽이는 게 아닌가 하는 분노마저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먼저 그 시비에 새겨진 서시 옆에 이부키 고(伊吹鄕) 씨가 번역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序詩   死ぬ日まで空を仰ぎ 一点の恥辱(ハジ)なきことを、 葉あいにそよぐ風にも わたしは心痛んだ。 星をうたう心で 生きとし生けるものをいとおしまねば そしてわたしにあたえられた道を 歩みゆかねば。   今宵も星が風に吹きさらされる。                 (伊吹郷)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을 살펴보면, 먼저 첫 연의 ‘죽는 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에서 ‘하늘’을 ‘空ソラ’로 번역한 것은 잘못이다. 윤동주는 경건한 기독교 신자로서 그리스도의 박애정신과 민족 사랑이 그 정신세계의 뿌리였기에 그의 하늘은 공허한 하늘(空ソラ)이 아니라 신앙으로서의 하늘 혹은 천지신명을 뜻하는 하늘(天テン)이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일본의 기독교회가 공통적으로 쓰고 있는 주기도문의 하늘도 '덴(天)'이며, 영어의 경우에도 '스카이(Sky)'가 아닌 '헤븐(Heaven)'이 되어야 옳다. 우리 한글에서는 '하늘'에다 '님'을 붙여 '하늘님' 혹은 '하느님'으로 자연스럽게 사용해 왔다. 다음 두 번째 오역은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하고 다짐한 것을 ‘한 점 치욕(恥辱)이 없기를’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앞으로 어떤 박해나 고난을 당하더라도 자기의 신앙과 민족의 양심 앞에서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다짐한 것인데 ‘한 점 치욕이 없기를’하고 번역했으니 이 또한 그의 시 정신을 올바르게 전하지 못했다. 부끄러울 恥 자만 써도 될 것을 굳이 욕 당하는 일 없게 해달라고 비는 듯한 욕辱 자를 덧붙여서 의미를 왜곡시킬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세 번째는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의 구절을 ‘모든 살아 있는 것을 사랑해야지(生きとし生けるものをいとおしまねば)’로 번역하여 작자의 시 정신을 근본적으로 훼손시켜 놓았다. '죽어가는 것'이 '살아있는 것'과 어떻게 의미가 같을 수 있겠는가. 암울한 일제의 압제 아래서 사람만이 아니라 민족의 언어도 풍속도 문화도 죽어가는 시대에 이렇게 죽음으로 내몰리는 것까지 사랑하겠다는 시인의 결연한 의지를 ‘모든 살아있는 것을 사랑해야지’로 번역한 것은 이부키 씨가 아무리 이어동의異語同義라고 우긴다 할지라도 치명적 오역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잘못을 바로잡기 위하여 이미 1995년, 구라타 마사히코, 한석희 씨 등, 일본 기독교 문인들이 뜻을 모아 『天と風と星と詩』라는 시집을 새롭게 펴내어 이부키 씨의 시집 『空と風と星と詩』를 반박하여 다음과 같이 발표한 바 있다. 序詩死ぬ日まで天を仰ぎ一点の恥もないことを葉群れにそよぐ風にも私は心を痛めた。星をうたう心ですべての死んでいくものを愛さねばそして私にあたえられた道を歩んでいかねば。今宵も星が風にこすられる。(일본 기독교 출판국日本キリスト敎出版局)   저명한 윤동주 연구자인 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 전 와세다대 교수(문학평론가)도''서시'의 일본어역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 일본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는 '서시'의 일본어 번역에 일부 오류가 있다고 지적하고, 이부키 고(伊吹鄕) 씨가 번역한 '서시'에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부분을 '모든 살아있는 것을 사랑해야지'로 번역한 것은 원래의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이해할 수 없는 번역이라고 지적하고 있다.(‘서시’ 2007. 가을호)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윤동주 시인이 하숙했던 연고지(교토조형예술대학)에 세워진 새 시비에 여전히 이부키 씨의 번역문이 버젓이 새겨져 있다니, 비록 그가 일본에서 처음 윤동주 시집을 완역한 공功의 부분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이는 일본의 역사 왜곡과 맥을 같이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을 도저히 떨쳐 버릴 수가 없다.   =========================/// @@ 원래 윤동주의 서시 그 대목은 맹자의 군자삼락에서 따온 것입니다.  거기에 "仰不愧於天, 埠俯작於人"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게 바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고 구부려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다"는 내용입니다. 윤동주가 이 구절의 내용을 평소에 좋아하여 서시에 변형하여 담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어로 번역한다면 원문 그대로 마땅히 하늘은 天이라 해야 맞습니다. 그걸 空으로 변역했다면 그 사람은 맹자도 안 읽어본 무식장이 아니면 일부러 誤譯을 한 것일 것입니다. 아마도 홍이표 기자의 말대로 일부러 誤譯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번역깨나 한다는 일본인이 맹자도 안 읽었을 리는 없을 테니까요. =============================/// 윤동주 연구자 김응교 교수 ㅡ"'역사성' 지우고 '착한 사람'으로 박제화" 영화 '동주' 스틸컷(사진=영화사 루스이소니도스 제공) 올해로 탄생 100주년(2017년)을 맞은 시인 윤동주(1917~1945)의 작품이 일본에서 왜곡 번역됨에 따라, 그가 '역사성'을 잃은 채 단순히 '착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는 비판이 나온다. 오는 12일부터 9월 19일까지 서울 은평역사한옥박물관에서 열리는 '세계가 취(醉)한 우리문학' 기획특별전 프로그램 가운데, 시인 정지용(1902~1950)과 윤동주의 번역문학을 전시하는 자리가 마련된다.  전 세계 42개 언어로 번역된 한국문학을 소개하는 이번 전시를 총괄하는 기획위원단 측은 "정지용과 윤동주는 일제강점기의 어려운 시기에도 우리말의 육체와 정신을 세계적 수준까지 고양시킨 작가"라며 설명을 이어갔다.  "전시에서는 윤동주 시의 일어 번역을 둘러싸고 제국주의적 관점을 고수한 이부키 고(伊吹郷)와 이를 극복하고자 했던 오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의 번역을 소개하고 이들 번역가의 시선을 곱씹어보는 자리를 마련한다."  기획위원장을 맡고 있는, 윤동주 연구자인 숙명여대 김응교 교수는 10일 CBS노컷뉴스에 "이부키 고는 윤동주의 시에 적힌 '하늘'(天)을 '빌 공'(空)으로 번역했다"며 "이러한 번역으로 인해 윤동주가 지닌 역사성이 지워졌다"고 지적했다.    "윤동주의 '하늘'은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맹자'에 나오는 하늘의 의미다. 윤동주의 '하늘'이 나오는 '서시' 문장을 주의해 봐야 한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이라는 문장은 '맹자'에 나오는 '앙불괴어천'(仰不愧於天)을 번역한 문장이다. 이 문장을 보았을 때 '天'으로 번역돼야만 의미를 지닌다.” '맹자' '주역' '추구' 등을 윤동주는 시에 풀어 인용했는데, 이 책들에서 '하늘'은 공(空)이 아니라, 천(天)으로 쓰여 있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둘째 자아성찰의 대상으로 하늘을 생각할 수 있다. '자화상'의 '우물'이나, '참회록'의 '거울'처럼, 하늘은 자신을 반성하는 매체가 되기도 한다. 셋째, 기독교의 하나님을 상징할 수도 있다,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할 때 '하늘'도 '텐'(天)으로 번역한다. 그런데 하늘을 '空'으로 번역하면 아무 것도 없는 것이 된다. 이부키 고의 얘기로는 '일본 사람들을 이해시키기 위한 번역'으로 그렇게 했다고 한다."  김 교수는 "더욱이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子)라는 영향력 있는 인기 작가는 이부키 고의 번역본을 보고 감화를 받아 윤동주 관련 수필을 썼는데, 그것이 일본 교과서에 실려 있다"며 "그 글에 '서시' 등 윤동주의 시가 몇 편 인용돼 있다. 이로 인해 일본에서는 윤동주의 '역사성'보다는 단순히 '착한 사람'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고 전했다.  결국 인류애를 저버린, 참혹했던 제국주의 시대에 살며 꿈을 접어야 했던 한 청년 지식인의 현실적이고 치열한 고뇌가 지워진 자리에는, 관념에 기댄 낭만적인 모호성만 남게 됐다는 지적이다. "윤동주가 생각했던 하늘은 관념이 아니라, '맹자의 하늘' '자아성찰의 하늘' '기독교의 하늘'로 뚜렷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을 '빌 공'으로 번역하면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가 '모든 살아있는 것을 사랑해야지'로 영화 '동주' 스틸컷(사진=영화사 루스이소니도스 제공) 이부키 고의 번역을 비판하는 움직임은 일본에서도 있어 왔다.  김 교수는 "더욱이 이부키 고는 윤동주의 '서시' 가운데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를 '모든 살아있는 것을 사랑해야지'(生きとし生けるもの)로 번역했다"며 "일본에서도 이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 윤동주 연구를 위해 가장 실증적인 연구를 해 온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는 이러한 번역에 대해 '결국 당시 살아있는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시가 됐다'는 비판을 제기했다"고 말했다. 앞서 재일동포 2세인 서경식 도쿄경제대학 교수는 이러한 논란에 대해 지난 2006년 한겨레신문 기고를 통해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내 생각에 여기에는 단지 번역어의 적절성 수준을 넘는 심각한 문제가 내포돼 있다. 오오무라는 윤동주의 '저항'정신을 강조하고, 이부키는 보편적인 '실존응시의 사랑'을 보려 한다. 이것은 윤동주의 생애나 작품에 관한 해석의 어긋남(차이)에 그치지 않고 식민지 지배라는 현실 그 자체에 대한 감성의 어긋남이 존재한다는 걸 시사하고 있다. 원문을 그대로 읽으면 굳이 '살아있는 모든 것' 따위로 거드름 피는 번역어를 고를 이유를 찾기 어렵지만 일본에서는 이부키 고 번역이 정역본으로 보급돼 있다. 일본의 많은 독자들은 (결코 모든 독자는 아니지만) 일본이 식민지 지배를 통해 조선민족에게 해를 가한 사실을 자세히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꺼림칙한 과거를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윤동주의 시도 가능한 한 일본을 향한 고발로서가 아니라 매우 일반적인 '실존적 사랑의 표백(표출)'으로 읽고 싶어 하는 것이다."  김 교수는 "'서시'의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가 가리키는 대상은 주변의 '가난한 이웃들'로 뚜렷하다"며 "윤동주의 '오줌싸개 지도' 속 부모가 없는 아이들, '병원'의 환자, '해바라기 얼굴'의 여공, 산문 '종시'에서 복선 철도 노동자에 대한 묘사 등이 그 증거"라고 강조했다. "윤동주의 작품에서는 동시대를 산 노동자들의 모습도 세 차례 등장한다. 윤동주는 그렇게 현실적인 고민을 했다. 그의 '하늘'이 '경천애인' '민심'으로 읽히는 이유다. 이부키 고의 번역에 숨어 있는 문제를 비판한 서경식·오오무라 마스오 교수와 같이 저 역시 여러 차례 이 문제를 지적해 왔지만, 일본의 윤동주 시 번역 논란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도시샤 대학에 있는 윤동주 시비에도 이부키 고의 번역이 새겨져 있다. 이후 새로운 일본어 번역 시집이 5종 나왔지만, 이부키 고 번역의 영향력은 여전히 크다."
3    서시(윤동주)와 서시 영어 번역본 댓글:  조회:4760  추천:0  2019-01-22
                                                  서시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 11. 20. Prologue (서시 / 윤동주)    May I look up into the heavens until the day I die  Without a bit of shame  From even the wind rustling the leaves  I have suffered  With the singing heart of the stars  I shall love all that is to die  And the road given me  I shall walk Tonight also, the stars are touched by the wind [출처] 윤동주의 서시 영문 번역시|작성자 봉팔 [출처] 윤동주의 서시 영문 번역시|작성
2    [매일(끝)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서시 댓글:  조회:3111  추천:0  2019-01-22
                                               서시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 11. 20.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율격 : 내재율      성격 : 성찰적. 고백적. 의지적, 참여적, 반성적      어조 : 엄숙하고 정결한 분위기, 절대 순결을 윤리적 지표로 하는 청년의 양심 고백적 목소리, 고백적 어조와 의지적 어조      심상 : 별과 바람의 시각적 심상      구성 : 시간의 이동에 따른 전개 (과거 - 미래 - 현재)     1연 - 1-4행 과거 1연 - 5-8행 미래 2연 - 9행 현재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부끄러움 없는 삶에 대한 소망 미래의 삶에 대한 결의와 의지 현실 인식과 시적 화자의 의지 1연 1-2행 부끄럼이 없는 삶에 대한 간절한 바람 3-4행 현실 상황 속에서의 고뇌 5-8행 사랑의 실천과 진실한 삶의 다짐 2연 - 시련과 고뇌의 현실 확인    제재 : 별(이상의 세계와 순수한 양심)      주제 : 부끄러움이 없는 순결한 삶에의 소망, 부끄러움 없는 삶에 대한 간절한 소망      특징 :   ① 대조적 심상의 부각(별과 바람) ② 서술과 묘사에 의한 표현 ③ 자연적 소재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함    표현법 : 자기 응시의 독백적 형식, 죽음과 삶의 대립적 구조, 고통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함      의의 : 서시(序詩)’라는 제목 그대로 윤동주의 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첫머리에 수록된 작품이다. ‘'과거 - 미래 - 현재'의 순서로 시상이 전개되면서,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현실 극복 의지를 간결하면서도 평이한 시어로 형상화하고 있다. 특히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로 표현된 순수한 삶에 대한 소망이 커다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출전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   내용 연구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시이다. 그래서 이 시에는 '하늘', '바람', '별'과 시인의 삶의 길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가 담겨 있다. 삶의 절대적 기준인 '하늘'에서 어떠한 외부의 고난과 시련에도 빛을 잃지 않고 반짝이는 '별'은 당시 우리 민족이 처한 암울한 현실인 '바람', '밤'과 대비를 이루면서 시적 화자의 '시'를 향한 삶의 방향을 안내하고 있는 것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삶의 지향점 / 완전무결한 대상, 시적 화자가 양심을 비추어 보는 거울로 절대적 윤리의 표상이고 동양적인 의미의 천도(天道)를 뜻함]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죽는 날까지 ~ 부끄럼이 없기를 : 고난의 현실 속에서 세속적 삶에 타협하지 않으며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살겠다는 시적 화자의 태도로 인유(다른 예를 끌어다 비유함)적 표현한 것으로 맹자의 진심장 君子三樂(군자삼락) 중 仰不愧於天(앙불괴어천)과 관련이 깊다. 잎새에 이는 바람[바람에 흔들리는 잎새는 작은 고뇌와 갈등에 흔들리는 화자의 내면 세계를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3행에서의 '바람'은 화자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이므로, '화자의 내면적 갈등'을 의미한다. / 현실적 시련과 고난을 주는 대상으로 '별'과 대립적 이미지로 '나'의 소망을 방해]에도 나는 괴로워했다.[시인의 시적 안목이 가장 섬세한 곳에까지 미치고 있는 3 ~ 4행임] 잎새에 ~ 괴로워했다 : 순결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고자 했던 시적 화자의 의지와 고뇌와 연민이 드러나 있는 부분으로 그의 괴로움은 자신이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서 생겨난다. 부끄러움이란 잘못을 저질러서만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 일을 하지 못 하였을 경우에도 올 수 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자신을 돌이켜 보면서 결백한 삶을 추구하는 젊은이에게 있어서 그의 양심의 뜨거움에 비례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사소한 것에서조차 괴로움을 느낀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잎새'는 '바람' 앞에서 끊임없이 실존의 위협을 받고 있는 작고 연약한 존재를 상징한다. 별[화자가 추구하는 순수, 이상적 가치이거나, 화자가 걸어갈 길을 제시해 주는 도덕적 목표 등. 순결한 삶, 광명, 소망의 대상, 순수하고 도덕적인 양심]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별을 노래하는 마음 : 시적 화자가 지향하는 도덕적 순결성을 추구하는 삶의 자세] 모든 죽어 가는 것[일제 강점하의 우리 민족 / '죽어 가는 것'은 '잎새'와 유사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삶의 고통에 부대끼는 모든 존재를 뜻함 / 살아있는 것의 역설적 표현 / 연약한 존재]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역사와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지식인의 시적 화자가 해야 할 일 혹은 역할'을 의미함 / 민족을 위한 삶의 길, 인생의 과정, 역사적으로 부과된 사명, 짊어지고 가야할 십자가, 순명(順命)의 태도]을 걸어가야겠다.[의지의 표현 - 소명(사람이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는 일. '부름'으로 순화.) 의식] ~ 겠다. : 확신과 의도를 나타내는 종결어미(시적 자아의 의지)  오늘 밤[어둡고 암울한 현실, 일제 강점기의 암담한 현실]에도 별['별'은 어두운 밤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으며, 시련의 바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외로운 양심을 상징]이 바람['별'과 대조되는 '바람'은 화자가 추구하는 참삶이나 지켜 오고 있는 양심을 흔들리게 하는 '현실적 시련'을 의미]에 스치운다.['나'의 현재적 상태임]       시적 화자의 태도 :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있고, 도덕적으로 순결한 삶을 지향하고 있으며, 자신이 처한 현실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순교자적 자세로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려 한다.         이 시가 감동을 주는 주된 이유는 ? : 순교자적 삶에의 기원과 각오         3행과 9행에 '바람'이라는 시어의 차이점에 대해서 말해 보자    지도 방법 : 이 활동은 똑같은 시어라 하더라도 문맥에 의해 얼마든지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점을 학생들 스스로 파악하도록 하기 위한 활동이다. 다소 어려움이 뒤따르는 활동이므로 가급적 모둠별로 나누어 집단 사고를 통해 의미의 차이를 구별해 보도록 지도한다. 특히 문맥적 상황을 최대한 고려하여 섬세한 의미 차이를 발견해 보도록 유도한다. 여기서 ‘바람’은 상징적 표현이므로 그 의미의 차이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게 마련이다. 따라서 특정한 해석을 정답으로 강요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중요한 것은 그 의미를 명확히 밝히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시어라 하더라도 문맥에 따라 의미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보는 것에 있다.  : 1, 2행에서 화자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소망했는데, 3, 4행에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 괴로워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람에 흔들리는 잎새는 작은 고뇌와 갈등에 흔들리는 화자의 내면 세계를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3행에서의 '바람'은 화자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이므로, '화자의 내면적 갈등'을 의미한다. 9행에서의 '바람'은 현실 상황과 관련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별'과 대조되는 '바람'은 화자가 추구하는 참삶이나 지켜 오고 있는 양심을 흔들리게 하는 '현실적 시련'을 의미한다.(출처 : 김윤식 외 4인 공저 '문학교과서')    이해와 감상    1945년 해방 직후 두 권의 유고 시집이 눈길을 끌었는데 그 하나가 (1946)이요, 또 하나가 바로 윤동주의 (1948)였다. 윤동주의 이 시집은 그의 가족과 친구들이 스물 여덟의 젊은 나이로 일본 감옥에서 옥사한 고인을 추모하기 위하여 유고작을 모아 세상에 내 놓게 된 것이다. 이 시집에 수록된 첫 작품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서시"이다. 이 시에는 '1941년 11윌 20일'이란 창작 일자가 남아 있는데 이 때는 윤동주가 연희 전문의 졸업을 앞두고 진로에 고민하던 때로서 그의 나이 스물 넷이었다.  서시란 '책의 서문 대신 쓴 시'라는 뜻으로, 그의 유고 시집에 수록된 작품 전체의 내용을 개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를 분석함으로써 '부끄러움과 자아 성찰의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윤동주의 시 세계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서시"는 2연 9행으로 된 짧은 작품이다. 그러나 비록 짧지만 우리는 양심과 사랑을 추구하여 마침내 도덕적 순결의 자기 수행을 다짐하는 시인의 고뇌와 만날 수 있다.  시상의 전개상 1연은 1행-4행 / 5행-6행 / 7행-8행 등의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과거 시제로 쓰여진 첫 4행은 식민지인으로서의 시인의 고뇌를 절절이 느낄 수 있으며, 조선인을 말살시키기 위해 급기야 창씨개명과 신사 참배를 강요했던 일제 말기에 조국과 민족, 무엇보다도 자신의 양심 앞에서 부끄러운 변절이나 타락을 하지 않으려는 도덕적 순결 의식이 나타나 있다. 1,2행의 표현은 의 '군자 삼락(君子三樂)' 가운데 하나로 '우러러 하늘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고, 굽어보아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다(仰不愧於天 俯不作於人)'의 인용이다. 바로 이런 군자의 마음으로 시인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한 점'의 잘못조차 허용하지 않고, 부끄럼 없는 삶을 위해 고뇌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3행의 '잎새에 이는 바람'은 2행의 '한 점 부끄럼'을 비유하고 있는 시구로 '부끄럼'이란 추상적인 관념을 시각화시켜 감각적으로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시인의 도덕적인 순결과 양심의 추구는 5,6행의 다짐과 7,8행의 강한 결의로 이어진다. 5,6행은 현재 시제로 쓰여진 점으로 보아 시인이 처한 현재에 대한 다짐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별'의 심상을 생각해 보기로 한다. '별'은 순수, 영원, 희망, 빛, 불변의 가치, 지고지순(至高至純)의 진리 등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별을 노래하는 마음'이란 '도덕적인 순결의 가치를 추구하는 마음' 또는 '불변의 가치를 예찬하는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죽어 가는 모든 것' 즉 '소멸되고 사그라지는 생명'들을 밝히는 사랑의 등불이 될 것을 다짐하고 있다. 맹목적이고 헌신적인 아가페 사랑을 말이다.  그의 "십자가"란 시를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괴로웠던 사나이 /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 나에게도 십자가가 / 허락된다면 / 꽃처럼 피어나는 피로 /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이 시는 예수가 너무나도 인류를 사랑하여 스스로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듯이 시인도 이 조국과 민족을 사랑한 나머지 기꺼이 어두운 시대의 속죄양이 되어 시대를 밝히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의 그 지고지순한 사랑이 바로 "서시"의 '모든 죽어 가는 것'에 대한 사랑과 일치한다. 이처럼 시인이 추구하는 사랑은 죽음을 각오하고 죽음을 사랑하는 종교적 사랑인 셈이다.  사랑의 다짐이 미래에의 결의로 나타난 시행이 7,8행이다. 도덕적인 양심과 아가페적인 사랑을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으로 알고 결의를 다지고 있다. 자기 수행의 길을 주어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시인의 엄숙하고 경건한 자세가 사뭇 진지하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1연이 시인 자신의 양심, 사랑, 수행의 다짐이었다면, 1행으로 된 2연은 주체가 '나'가 아니라, '별'이 되고 있다. 여기서 '별'은 '순수 소망 양심의 세계', '이상적 삶'을 가리킨다고 앞에서 이미 지적하였다.   '오늘 밤'은 시인이 어둠의 역사로 규정한 식민지 현실을 암시한다. 캄캄한 이 어둠의 세계를 빛으로 밝혀 주는 동시에 시인이 지향하던 순수와 불멸의 세계인 '별'이 '바람'이라는 시련에 놓여 있음을 객관적으로 제시해 주고 있다. 그리고 그런 시련은 그젯밤도, 어젯밤도, 오늘밤에도 계속되어 왔다. 이러한 시련의 제시는 그저 단순한 제시만은 아니다. 오히려 바람이 사납게 불고, 밤이 더욱 캄캄해질수록 시인의 별은 더욱 빛을 발할 것이라는 냉혹한 현실에 대한 다짐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이해와 감상1   이 '서시(序詩)'는 2연의 시이나 다음과 같이 의미를 4단락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연 1행-2행은 결백하고자 하는 진실의 선언이며, 3행-4행은 욕된 삶을 살아야 하는 인간적 고뇌, 5-8행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찾아 떠나고 싶은 갈구, 2연은 아픈 자기 성찰로 발전한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던', 부끄럼 없는 삶을 살기 위한 결백한 양심의 선언이 이 '서시'의 주제로 부각된다. 특히 9행은 암담한 상황을 상징적. 서정적. 극적으로 형상화했다.  특히 '서시'에서 '별'과 '부끄럼'과 '죽음'이 주요 모티브가 된다. 별의 이미지는 몇 가지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첫째로, 별처럼 멀리 있는 육신의 고향, 북간도의 이국 정서와 단풍잎 같은 동심적 정서가 결합되어 별로 나타난다. 이런 자연 묘사의 수법을 통해 과거의 자아를 회상하는 매개체로서의 별이다. 둘째로, 신념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별로 나타난다. 이 때 별은 '순수한 마음'을 뜻하고, 또한 영혼의 깊숙한 곳에 위치한 아름다운 혼의 표상으로 제시된다.  부끄러움의 미학은 자기 혼자만 행복하게 살 수 없다는 아픈 자각의 표현이다. 이와 같은 여성 이미지인 부끄러움은 조국에 대한 역사적 민족적 사명을 다하지 못한 송구스러움, 죄책감, 기독교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도덕적 순결성에 대한 욕됨 등으로 또한 심화되기도 한다.  이해와 감상2   이 작품은 해방 후 간행된 윤동주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첫머리에 놓여, 참답고 올곧은 삶을 지향했던 시인의 정신을 대변해 주는 명시(名詩)이다. ‘과거(1~4행) - 미래(5~8행) - 현재(9행)’의 시간 순서를 축으로 하여 자기 양심 앞에 추호도 부끄럽지 않게 살려는 화자의 내적인 번민과 간절한 소망을 잘 형상화하고 있다.  처음 4행에서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이라고 하여 초월적 세계와 도덕적 순결성을 지향하는 화자의 삶의 지표를 제시하고, 막상 현실 속에 부대끼며 그렇게 살지 못했던 자신을 반성함으로써 부끄러움 없는 삶에 대한 소망을 표현하고 있다. 다음 4행에서는 운명에 대한 인식과 투철한 역사 의식에서 비롯된 소명 의식을 표현함으로써 미래의 삶에 대한 다짐과 각오를 보여 준다. 마지막 행에서는 이와 같은 결의를 어둠과 바람 속에서도 결코 꺼지거나 흐려질 수 없는 외로운 양심을 의미하는 ‘별’의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 작품은 식민지 상황에 처해 있는 젊은 지식인의 고뇌와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표백(表白)한 시다. 그래서 더욱 진솔(眞率)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고백적인 시가 감상에 흐르거나 관념에 빠지기 쉬운데, 이 시는 적절한 상징과 시각적 심상을 활용하여 서정시로 승화시키고 있다.  이해와 감상3  이 시는 해방 후 간행된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모두(冒頭)에 놓여 참삶을 추구, 지향하는 윤동주의 모든 것을 대표하는 명시(名詩)이다. 윤동주는 식민지라는 암담한 현실 속에서 지성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정신적 고뇌와 아픔을 섬세한 서정과 투명한 시심(詩心)으로 노래한 시인이다. 그는 고요한 내면의 세계를 응시하려는 순결한 정신의 소유자요, 자신이 걸어야 할 삶의 길에 순응하고자 했던 인간이다. 그를 일제 말기라는 문학적 공백기에 민족적 의지와 양심을 지켜주던 대표적 시인으로 평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시가 시대적 상황의 투시와 양심에서 배태된 '부끄러움'의 인식 때문이다.  이 작품의 구조는 2연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시간의 변화에 따라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1연은 둘로, 즉 1∼4행과 5∼7행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단락은 과거 시제로 지금까지 화자가 살아온 생활의 고백이고, 둘째 단락은 미래 시제로 미래의 삶에 대한 화자의 신념의 표명이다. 셋째 단락인 2연은 현재 시제로 현재의 시적 상황의 제시이다. 결국 이 시는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이며, 지금 현재는 어떠하다는 구조에 따라 시상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의 배경은 별과 밤 하늘이다. 별이 빛나는 그 밤 하늘 아래 시적 화자인 '나'가 존재하고 있다. '밤'은 암울한 시대 상황이며 자아의 실존적 암흑 의식을 표상하고 있으며, '별'은 외로운 양심의 표상이자 구원(救援)의 지표로 희망과 이상 세계를 상징하고 있다. 이런 배경 속에서 화자는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 없기를' 희원(希願)하며, 도덕적 결백성과 순결성 때문에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고 있다. '별'과 대조가 되는 '바람'은 화자가 추구하는 참삶과, 지켜 오고 있는 양심을 흔들리게 하는 현실적 시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는 우주 섭리(攝理)에 따라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에 충실하는 한편, '별을 노래하는 마음(이상 세계를 지향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죽어가는 모든 것과 조국과 민족의 고난을 포근히 감싸 안고자 했던 시인의 지극한 휴머니즘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마지막의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라는 시행은 그가 처한 암담한 현실 상황을 대변하는 동시에, 바람에 부대낄수록 더욱 밝은 빛을 발하는 별과 같이 자신의 이상도 빛날 것임을 암시하고 있어, 아직 채 완성되지 못한 24세 때(1941.11.20) 쓴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투철한 현실 인식과 뛰어난 자기 인식으로 드러나는 그의 인간적 성숙도를 짐작하게 해 준다. 그러므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28세의 젊은 나이로 후쿠오카 어두운 감옥에서 숨을 거둔 그가 하늘과 양심 앞에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자 했던 번민과 의지의 결실인 이 시는, 우리 모두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귀중한 교훈을 주는 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이해와 감상4  윤동주(尹東柱)가 지은 시. 1941년 11월 20일에 창작되었고 그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1948)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는 윤동주의 생애와 시의 전모를 단적으로 암시해주는 상징적인 작품이다.  왜냐하면, 이 시는 윤동주의 좌우명격 시인 동시에 절명시에 해당하며, 또한 ‘하늘’과 ‘바람’과 ‘별’의 세 가지 천체적 심상(心像)이 서로 조응되어 윤동주 서정의 한 극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서시〉는 내용적인 면에서 세 연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연은 ‘하늘-부끄럼’, 둘째 연은 ‘바람-괴로움’, 셋째 연은 ‘별-사랑’을 중심으로 각각 짜여져 있다.   첫째 연에서는 하늘의 이미지가 표상하듯이 천상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순결 의지가 드러난다. 바라는 것, 이념적인 것과 실존적인 것, 한계적인 것 사이의 갈등과 부조화 속에서 오는 부끄러움의 정조가 두드러진다.  둘째 연에는 대지적 질서 속에서의 삶의 고뇌와 함께 섬세한 감수성의 울림이 드러난다. 셋째 연에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서의 ‘진실한 마음, 착한 마음, 아름다운 마음’을 바탕으로 한 운명애의 정신이 핵심을 이룬다.  특히,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라는 구절은 운명애에 대한 확고하면서도 신념에 찬 결의를 다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운명애의 결의와 다짐은 험난한 현실에서 도피하지 않고 운명과 맞서서 절망을 극복하려는 자기 구원과 사랑에 있어 최선의 방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절망의 환경일수록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자기자신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윤동주가 택한 자기 구원의 방법은 운명에 대한 긍정과 따뜻한 사랑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운명애의 길은 관념적으로 도출된 것이 아니라 진솔한 자아 성찰과 통렬한 참회의 과정을 겪으면서, 변증법적 자기 극복과 초월의 노력에 의해 마침내 획득되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참된 생명력을 지니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운명 감수의 태도가 아니라 그 극복과 초월에 목표를 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시인 이 작품은, 시집의 전체적인 내용을 개략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시이며, 존재론적 고뇌를 투명한 서정으로 이끌어 올림으로써 광복 후 혼란한 시대에 방황하는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따뜻한 위안과 아름다운 감동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正音社, 1948), 韓國現代詩人硏究(金載弘, 一志社, 1986), 尹東柱論(金烈圭, 國語國文學 27, 1964), 윤동주론(金興圭, 창작과 비평 33, 1974), 윤동주의 문학사적 위치(吳世榮, 現代文學 244, 1975), 윤동주특집(나라사랑 23, 1976), 윤동주시와 시론의 반성(홍정선 외, 현대시 1, 1984).(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    [동네방네] - 가야금아, 영원히 울려라... 댓글:  조회:2999  추천:0  2019-01-22
룡정시 지신진, 가야금으로 ‘국가급 명함장’ 얻다 (ZOGLO) 2019년1월21일  가야금으로 유명한 룡정시 지신진은 ‘중국민간문화예술의 고향’으로 명명되였다 18일, 길림성인민정부 소식판공실에 따르면 가야금으로 유명한 룡정시 지신진을 포함한 길림성내 4개 진이 새로 ‘국가급 명함장’을 얻었다. 바로 국가 문화와 관광부로부터 ‘중국민간문화예술의 고향’으로 명명된 것이다. 료원시 동풍현의 유명한 농민화 작품  ‘중국민간문화예술의 고향’으로 명명된 4개 진들로는 농민화(农民画)로 유명한 료원시 동풍현 남톤기진(南屯基镇), 인삼으로 유명한 백산시 무송현 무송진(抚松镇), 마두금(马头琴)으로 유명한 송원시 전고르로스몽골족자치현 차간호진(查干湖镇)와 가야금으로 유명한 연변조선족자치주 룡정시 지신진이다. 국가 문화와 관광부에서는 각 지의 추천, 신청을 받은 후에 전문가들의 평심과 평심명명 지도소조의 심의를 거치고나서 2018-2020년도 ‘중국민간문화예술의 고향’ 명단을 발표했는데 길림성의 상술한 4개 진이 선정되였다. /길림신문 유경봉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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