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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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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작 쟁명] - 프랑스 작가 알퐁스 도데 "마지막 수업" 댓글:  조회:3909  추천:0  2019-02-15
  세계문학사 작은사전 마지막 수업     구분 문학작품 프랑스 저자 알퐁스 도데 '한 알자스 어린이의 이야기'라는 부제(副題)가 붙은 작품으로 프로이센에 의해 프랑스 어를 마지막으로 공부하는 날 아침에 지각한 어린이 '나'를 통하여 표현한 1인칭 소설이다. 그날 아침 나는 학교에 몹시 늦었다. 그래서 야단을 맞을까 봐 퍽 겁이 났다. 더구나 알멜 선생은 분사(分詞)에 관해서 물어 보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나는 전혀 깜깜했다. 그래서 나는 수업을 까먹고 들판으로 달아날 생각도 했다. 그지없이 따스하고 청명한 날씨였다. 목장에서는 프로이센 병사들의 훈련받는 소리가 들려 왔다. 확실히 나는 분사의 규칙보다는 그러한 것에 더욱 매혹되어 있었다. 읍사무소를 지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게시판 앞에 모여 있었다. 2년 전부터 나쁜 소식, 패전, 징발 명령, 포고령 등을 바로 저 게시판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아이들이 떠드는 틈을 타서 조용히 자리에 앉을 생각이었으나 일요일 아침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아멜 선생님은 호통을 치기는커녕 "귀여운 프랑즈, 빨리 네 자리로 가거라"하고 조용히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정장을 하시고 계셨으며, 오젤 노인 등 마을 사람들이 같이 와 앉아 있었다. 모두가 슬퍼 보였다. 엄숙한 음성으로 "여러분, 이것은 내가 여러분에게 가르치는 마지막 수업입니다. 알자스와 로렌의 초등학교는 독일어만을 가르치라는 명령이 베를린에서 왔습니다. (···) 오늘은 여러분의 마지막 프랑스 어 수업입니다. 열심히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몇 마디 말씀은 나를 한없이 당황하게 했다. 나는 프랑스 어를 영원히 못 배우고 마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내가 수업을 빼먹고 놀러 다니던 일이 무척 뉘우쳐졌다. 가엾은 분! 내 차례가 와서 분사법을 외우지 못했을 때 나는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몇 마디 더 말씀하시고 글쓰기를 시작했다. 아멜 선생님은 '알자스', '프랑스', '알자스', '프랑스' 이렇게 커다란 종이에 써오셨다. 아이들은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40년 동안 한결같이 프랑스 말을 가르침으로써 조국에 봉사해 왔는데 이것이 마지막이다. 감정이 복받쳤다. 이윽고 선생님께서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가능한 크게 "프랑스 만세!"라고 썼다. 그러고는 벽에 기대어 서서 말없이 손짓을 했다. "이제 끝났어······ 다들 돌아가도록······." [네이버 지식백과] 마지막 수업 ============================{쟁명}     1945년 8월15일 서울의 어느 보통학교 국어 교실를 무대로 삼은 한 일본인의 단편소설 끝장면이다. 히로히토 천황의 무조건적인 항복 선언을 방금 전해 들은 일본인 선생님은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하다가 조선인 학생들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일본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언어임을 잊어서는 아니됩니다. 국민이 설혹 노예의 처지에 빠지더라도 국어만은 잘 지키고 있으면 스스로의 손에 감옥의 열쇠를 쥐고 있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때 창 밖에서 호각소리가 울려왔다. 일본인 선생님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여러분, 여러분. 나는..."하고 뭐라고 말하려 했으나 선생님은 끝내 말끝을 맺지 못했다. 그리고 칠판으로 돌아서 분필로 "일본 만세"라고 큼지막한 글을 썼다. 이것은 19세기 후반에 활약한 프랑스 작가 알퐁스 도데(1840-1897)의 단편소설 의 마지막 장면을 1945년 한국 상황으로 패러디화해 본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패러디가 아니다. 이 묘사하는 시대적 배경, 즉 1871년 보불전쟁으로 패한 프랑스가 독일계 주민이 다수인 알자스-로렌 지방을 프로이센에 넘겨주고는 퇴각해야 했던 배경과 연합국에 패한 일본이 조선에서 물러나야 했던 상황은 일란성 쌍둥이처럼 닮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단편소설이 패전 뒤 어떻게 일본에서는 물론이고 한국에서까지 중·고교 국어교과서에 실릴 수 있었을까? 이 소설이 실리는 것이 식민지시대 향수를 잊을 수 없는 일본에서는 가능할지 몰라도 한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도데의 이 해방 직후 1989년 무렵까지 중·고교 국어교과서에 버젓이 실렸던 것이다. 그 후 이 소설이 갖는 영향력은 아직도 남아 있다. 비록 이 소설이 교과서에서 사라졌다고는 해도 도데라는 이름까지 잊혀졌다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동화라든가, 세계명작 같은 형태로 지금도 국내에서 '도데 신화'는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일본의 경우 1936년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을 통해 번역소개된 이 작품은 1939년에 국어(일본어) 교과서에 채택됐으며, 패전 이후에도 우리처럼 한동안 국어교과서에서 확고부동한 자리를 차지하다가 1970년대 초반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재미 있는 것은 이 교과서에서 도태되기까지 한일 두 나라가 전혀 판이한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일본에서는 도데와 이 추악한 프랑스 내셔널리즘을 대표하는 작가와 작품임이 역사학계의 집요한 추적으로 드러나는 바람에 교과서에서 축출된 데 비해 한국에서는 "너무 오랫동안 실려 신선미가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이 작품이 교과서에서 탈락하고 난 지금까지도 국내에서 도데는 여전히 사랑받는 작품, 사랑하는 작가로 통용되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전세계적으로 프랑스 작가로서 2류, 3류 축에도 들지 못하고 일본에서마저 배척을 당하고 있는 도데가 한국에서만은 새천년을 맞이한 지 2년이 되는 지금까지 '식지 않은 열풍'을 지속하고 있는 힘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의 작품은 흔히 서정성이 짙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부 프랑스 프로방스 출신인 그는 국내에서는 말고도 이라는 단편작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런 표면적인 서정성과 함께 은 식민지 경험과 결부돼 도데가 말하는 '잃어버린 프랑스어'와 '잃어버린 알자스-로렌'이 각각 '일본에게 잃어버린 조선말'과 '일본에게 잃어버린 조선 강토'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착각하도록 만들었다. 그러한 증거가 23년만에 다시 빛을 본 소설가 고 이병주의 (원제는 「허망과 진실」)에 나오는 그의 이 작품에 대한 감상문에서 포착된다. 이 글에 따르면 이병주는 일제 식민강점 치하인 열두 살 때 일본인 교장 부인에게 선물로 받은 소년소녀 동화집 같은 책에서 을 처음 접했다고 하면서 "그 작품은 내게 있어서 심각한 충격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이병주의 설명은 이렇다. "어린아이에게도 나름대로의 의식은 있다. 열두 살 소년인 나는 그 소설에서 받은 충격으로 그때까지 전혀 해보지도 않은 생각에 차례차례로 말려 들었다. 첫째 생각한 것은 알자스와 로렌이 어쩌면 우리나라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는 곳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도 알자스와 로렌처럼 슬픈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뒤따랐다." 한마디로 을 통해 조선은 일본식민지로 있을 수 없으며 우리 언어를 살려야 한다는 민족의식을 일깨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인 대다수는 지금까지도 을 프랑스의 민족의식, 나아가 조선의 민족의식을 일깨운 명작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이 작품은 프랑스의 추악한 내셔널리즘을 가장 극명하게 표출한 작품이라는 이유로 일본에서 이미 30년 전에 추방됐다. 이 작품이 배경으로 삼는 알자스는 14세기 이래 프랑스령이었으나 그 주민 대부분은 독일계로 언어 또한 독일어를 사용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에는 이 지역에 대한 프랑스의 언어 통제 정책은 더욱 강화돼 학교에서는 프랑스어를 강제로 가르쳤다. 그러다가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한 다음 알자스는 프로이센에게 넘어갔다. 이로써 이 지방 주민들은 일상 언어, 곧 독일어를 되찾게 됐다. 은 이런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면서 알자스는 독일 땅일 수 없으며 세계 언어 중에 오직 프랑스어가 가장 아름다운 언어임을 강변했던 것이다. 실제 도데는 국내에는 '서정작가'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극렬한 왕당파였으며 그의 아버지 또한 우익 왕당파의 수괴였다. 도데가 더욱 악랄한 것은 보불전쟁 당시 알자스 주민 대부분이 프랑스어를 모르는 독일계였음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그의 소설 은 프랑스어를 모르는 알자스 주민들을 대상으로 프랑스어 교사가 마지막 수업을 진행하는 장면을 설정하면서 "프랑스 만세"라는 말로 끝맺음을 하고 있다. 이 작품의 등장인물 프랑스 교사는 비유컨대 일제의 패망으로 식민지 조선땅에서 할 수 없이 물러나면서 조선인 학생들에게 "일본 만세"라는 큼지막한 글을 남긴 일본인 국어교사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도 어찌된 셈인지 한국에서 은 외세에 저항하는 민족의식을 가장 극적으로 '대리표출'한 작품으로 통하고 있다. 이는 '적대적 문화변용'의 전형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일본 제국주의 논리를 고스란히 답습한 희극적인 현상인 것이다.   ========================/// 알퐁스 도데 ''마지막 수업'' 서정성 짙은 사실주의 알퐁스 도데의 단편소설을 읽으면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어디선가 잔잔한 선율이 들려오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짧은 얘기로 마음을 안온하게 감싸면서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건 놀라운 솜씨가 아닐 수 없다. 자극적이면서 폭력적이거나,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판을 치는 세상이라 알퐁스 도데의 소설이 더욱 가슴 깊이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알퐁스 도데의 소설이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있는 것은 순수하고 낭만적인 분위기 뒤에 강력할 사실주의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퐁스 도데는 1840년 남프랑스 님에서 태어났다. 리옹의 고등중학교에 들어갔으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공부를 중단하고 중학교 조교사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열일곱 살에 파리로 가서 신문 기자로 일하며 문학에 전념하게 된다. 그 시절 도데는 당대 사실주의의 정점에 올랐던 귀스타브 플로베르, 에드몽 드 공쿠르, 에밀 졸라 등의 문인들과 우정을 나눴다. 다양한 경험과 사실주의 분위기 속에서 도데는 특유의 시적 서정성과 감수성을 곁들여 19세기 말 프랑스 소시민들의 삶을 날카롭게 그렸다. 알퐁스 도데의 여러 단편소설 가운데서 ‘마지막 수업’과 ‘별’이 가장 유명하다. ‘별’은 한때 교과서에 수록됐는데 ‘국민단편’이라고 불릴 정도로 사랑받는 작품이다. 국내 서점가에 나온 ‘별’의 판본이 70종이 넘는다고 하니 열기가 충분히 전달되는 듯하다. ‘별’의 주인공 양치기는 몇 주일씩이나 아무도 만나지 못한 채 개와 양떼와 함께 목장에서 외롭게 지낸다. 2주일마다 농장 머슴이나 늙은 아주머니가 보름치 양식을 실어다 줄 때가 가장 즐거운 날이다. 양치기는 외로운 시간을 별을 보면서, 스테파네트 아가씨를 생각하며 견딘다. 그러던 어느 날 양식을 싣고 오는 노새 방울 소리에 반갑게 달려 나간 양치기의 눈앞에 스테파네트 아가씨가 등장했다. 양식을 갖다 주던 꼬마 머슴은 앓아눕고 아주머니는 휴가를 얻어 아들네 집에 갔기 때문이다. 늘 그리워하던 아가씨를 만난 양치기의 가슴이 얼마나 쿵쾅거렸을까. 꿈 같은 시간을 보내고 아가씨를 배웅했는데 낮에 온 비로 인해 불어난 강물에 빠진 그녀가 다시 돌아왔다. 그날 밤 목장에 묵게 된 아가씨에게 양치기는 별 이야기를 들려주며 행복에 빠진다.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고 깨끗하게 해준, 양치기와 아가씨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는 앞으로도 영원할 것이다. 언제나 마지막 수업처럼 ‘마지막 수업’은 많은 교훈을 남기는 소설이다. 특히 일제 강점기 때 우리의 선조들이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더욱 가슴을 울린다. 지각도 잘하고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는 프란츠는 오늘도 수업에 늦고 말았다. 야단맞을 각오를 하고 교실에 들어서는데 멋지게 차려입은 선생님이 상냥하게 맞아주고, 뒤쪽에는 마을 어른들이 죽 앉아 있다. 마지막 프랑스어 수업이었던 것이다.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에 항복하면서 알자스 로렌 지방의 일부가 독일에 병합돼 더 이상 프랑스어 수업을 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프랑스어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프란츠는 그제야 수업을 빼먹고 놀러 다닌 걸 후회한다. 선생님은 지각한 프란츠에게 “화를 내지는 않겠다. 너는 충분히 벌을 받은 셈이니까. ‘아, 시간은 아직 많아. 내일 공부하지 뭐.’ 그러나 결과는 이렇단다. 교육을 언제나 다음날로 미룬 것이 우리 알자스의 불행이다”라고 말한다. 마지막 날 프란츠는 아멜 선생님이 나눠준 특별한 글씨본으로 열심히 공부한다. 뒤쪽에 앉은 오제 할아버지가 프랑스어 교본을 들고 아이들과 함께 더듬더듬 읽을 때 프란츠는 웃음이 나올 뻔하지만 울음이 나와 참는다. 우리의 선조들도 한글을 배우지 못하고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꿔야 하는 수난을 겪었다. 광복이 된 후 어른들은 자녀 교육에 최선을 다했고, 우리나라가 지금처럼 발전하게 됐다.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어쩔 수 없이 비장함을 동반한다. 마지막 수업에 임하는 아멜 선생님과 프란츠처럼 매사에 열심을 다한다면 우리들은 분명 인생에서 원하는 열매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근미 < 소설가 >  ======================/// 1871년 5월, 이제는 독일 제국이 된 프러시아와의 전쟁에 패배한 프랑스는 독일과의 접경 지역인 알자스와 로렌을 독일에 할양해야만 했고, 그때까지 프랑스의 영토로 프랑스어를 배우던 사람들은 프랑스어 대신 독일어를 배워야 했다. 주인공인 소년 프란츠는 어느 날 아멜 선생님의 수업에서 오늘이 마지막 프랑스어 수업이라는 소식을 듣게 되는데…   그날 아침 나는 학교에 몹시 늦었다. 그래서 야단을 맞을까 봐 퍽 겁이 났다. 숨을 헐떡이며 겨우 교실에 도착한 나는 아이들이 떠드는 틈을 타서 조용히 자리에 앉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교실은 마치 일요일 아침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아멜 선생님은 호통을 치기는커녕 "프란츠, 어서 네 자리로 가거라" 하고 조용히 말씀하셨다. 재빨리 책상에 앉은 나는 그제야 선생님이 장학사가 오는 날이나 시상식이 있는 날에만 입는 정장을 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평소에는 비어 있던 교실 뒤편 의자에 삼각모를 쓴 오젤 할아버지와 전임 면장님을 비롯한 마을 어른들이 같이 와 앉아 있었다는 것이었다. 어른들은 모두가 슬퍼 보였다. 내가 이 모든 광경에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동안 아멜 선생님이 교단에 올라와 엄숙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여러분, 이것은 내가 여러분에게 가르치는 마지막 수업입니다. 알자스와 로렌의 모든 초등학교는 독일어만을 가르치라는 명령이 베를린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여러분의 마지막 프랑스어 수업입니다. 열심히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몇 마디 말씀은 나를 한없이 당황하게 했다. 이제는 프랑스어를 영원히 못 배우고 마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내가 수업을 빼먹고 놀러 다니던 일이 너무나 후회스러웠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읽기 지루하고 들고 다니기 거추장스럽기만 했던 문법책과 이야기 성경책이 이제는 헤어지기 싫은 오랜 친구처럼 느껴졌다.   선생님의 정장도 마지막 수업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입고 오신 것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왜 마을 어른들이 교실 뒤에 앉아 계시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분들은 좀 더 학교에 자주 찾아오지 못한 것을 후회하시는 것 같았고, 또한 사십 년 동안 충실히 봉사하신 선생님에 대한 감사와 사라진 조국에 대한 의무감의 표시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런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내가 외울 차례가 돌아왔고,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부르셨는데도 분사법을 제대로 외우지 못한 것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부끄럽고 서글픈 마음에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서있는 내게 선생님은 야단을 치시는 대신 이렇게 말씀하셨다. "프란츠, 너를 야단치지 않으마. 넌 충분히 벌을 받고 있으니까 말이야. 사람들은 매일 이렇게 생각하지. '시간은 많아. 내일 배우면 돼.' 그래서 결국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너도 보고 있잖니. 그래! 교육을 늘 내일로 미루려 한 것이 우리 알자스 사람들의 커다란 불행이었어. 이제 프러시아 사람들이 우리에게 '거 보시오, 당신들은 프랑스인이라면서 프랑스어를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잖소!' 이렇게 비웃은들 뭐라고 하겠니. 하지만 프란츠, 이건 너의 잘못만은 아니란다. 우리 모두 너와 마찬가지로 자기 잘못을 반성해야 해." 그리고 나서 아멜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프랑스어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하셨다. 선생님은 프랑스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정확하며, 가장 확실한 언어라고 하셨다. 또한 우리가 프랑스어를 잘 간직해야 하며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어떤 민족이 노예가 되더라도 자신들의 언어만 잘 간직한다면 감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도 하셨다.   아멜 선생님은 새로운 교본을 준비해 오셨는데 거기에는 커다란 종이에 '알자스', '프랑스', '알자스', '프랑스' 이렇게 쓰여 있었다. 아이들은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이따금 책에서 눈을 들어 볼 때마다, 아멜 선생님이 교단에서 꼼짝 않고 자기 주변의 물건들을 응시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었다. 마치 이 조그만 학교에 있는 모든 것들을 눈에 담으려는 듯 말이다. 선생님은 40년 동안이나 한결같이 이 교실에서 프랑스 말을 가르침으로써 조국에 봉사해 왔는데 이제 내일이면 선생님과 선생님의 누이 동생은 짐을 싸서 이 교실과 이 지방을 영원히 떠나야 하는 것이다. 선생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실까?   갑자기 교회 시계가 정오를 알렸고, 그와 동시에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프러시아 군인들의 나팔 소리가 우리 교실 창문 바로 아래서 들려왔다. 아멜 선생님께서는 매우 창백한 얼굴로 교단에서 일어서셨다. 선생님의 키가 그렇게 커보였던 적은 처음이었다.   "여러분," 선생님이 말문을 여셨다. "여러분…저는, 저는…" 목이 메시는지 선생님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셨다. 선생님은 칠판을 향해 돌아서더니 분필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서, 자신이 쓸 수 있는 가장 커다란 글씨로 이렇게 쓰셨다. "프랑스 만세(Vive la France)!" 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벽에 머리를 기댄 채 한참을 아무 말없이 계시다가 손짓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다 끝났다······ 다들 돌아가거라······."   ▲ 19세기 후반의 알자스-로렌 지방 지도. 프랑스와 독일(프러시아)의 접경지인 알자스와 로렌은 수 없이 많은 국경 분쟁에 휘말려 국적이 여러 번 바뀌는 비운을 겪었다. 알퐁스 도데의 단편소설 '마지막 수업'은 1871년에 프랑스가 프러시아와의 전쟁에 패배해 이 두 곳을 독일에 할양할 당시의 알자스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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