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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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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것이 알고싶다] - 베트남(월남) 통일 댓글:  조회:3573  추천:0  2019-12-02
    베트남과 우리나라 통일의 공통점 1.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로 나누어져 있었다. 2. 남북간의 왕래가 자유롭지 못했다.(독일은 서독과 동독이 왕래가 자유로웠음) 3. 한쪽의 나라는 다른 한쪽의 나라에 비해 잘 살지 못했다.(우리나라를 예로 들면 남한은 잘사는데 북한은 가난해서 다른 나라의 도움을 받았고, 베트남도 북쪽이 경제적으로는 어려웠음)   베트남과 우리나라 통일의 차이점 1. 우리나라는 통일을 하지 못했지만 베트남은 통일을 하였음. 2. 우리나라는 국제적인 위상이나 경제력에서 남쪽이 우월하고 군사력도 밀리지 않고 있지만, 베트남은 북쪽이 남쪽보다 우월해서 공산주의로 통일이 됨.   베트남의 통일에 대한 문제점 1. 무력에 의해 통일이 되었음. 2. 양측의 대화와 타협이 충분하지 않았음.   베트남의 통일로 본 우리의 자세 1. 힘이 있어야 통일을 함. 2. 가능하면 대화와 타협으로 통일을 해야 함. 3. 통일이후의 발전을 위해 미리 계획을 세움(남북간의 화해, 격차 해소 등)   * 참고자료 : 베트남의 역사와 통일과정   베트남의 역사는 약 4천년 정도로 추정되며 그들의 설화에 의하면 랑롱권과 어우꺼를 그들은 자기네 시조로 생각하고 있다. 베트남은 계속적으로 중국왕조의 지배를 받아오다가 10세기 중반에 최초의 베트남 독립왕조를 세우려 했으나 이내 다시 중국 송나라의 지배에 들어간다.   11세기에 200여년을 지배한 리왕조, 13세기에 200여년을 지배한 쩐왕조, 호씨정권, 레왕조, 이후 16세기에 분열과 혼란의 시기를 맞는다.   17,8세기의 베트남 역사에 중대한 사실은 북쪽의 쩐씨와 남쪽의 우옌씨에 의해 베트남이 남과 북으로 갈라져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다. 18세기 말엽에 우옌왕조가 베트남을 재통일하게 되는데 마지막 왕조인 우옌왕조는 성립과정에 참여하게 되었던 프랑스 세력의 침입에 의해 1860년대에 절름발이 상태가 되고 1880년대에는 아르망 조약체결로 완전히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다.   1945년 3월 일본은 프랑스를 무력으로 격퇴하고 80여년의 프랑스의 베트남 통치를 종식시킨다. 8월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하자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즉각 하노이를 장악하고 남부의 사이공까지 통제해 간다. 이것을 공산당은 8월 혁명이라 일컫는다. 9월2일 호치민은 하노이에서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포한다.   그러나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빌미로 16도선의, 북에는 중국의 국민당 군대가, 남에는 영국군이 진주하고 뒤를 이어 프랑스가 자신의 유산임을 주장하면서 베트남에 되돌아오므로 대립과 투쟁은 또다시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를 몰아낸 제 1차 인도차이나 전쟁, 1968년 북베트남군과 남베트남의 민족해방전선의 남베트남 공세로 인한 미국과의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마지막으로 1975년 싸이공이 북베트남에 함락되고 베트남은 공산주의 국가로의 통일을 맞이하게 된다.   * 자료 출처 : 지식인의 답변들 =========================/// 베트남은 전쟁으로 무력통일을 한 그런 나라죠. 좀 설명하자면   베트남은 원래 프랑스의 식민지였어요. 그런데 1941년 일본군이 인도차이나반도로 공격을 해와서 일본과 프랑스가 협약을 맺었는데 그 내용이 일본은 프랑스의 '형식적' 베트남 지배를 인정한다는 것이였거든요. 그 후 일본은 거의 모든 베트남내의 프랑스인들을 가두고 괴뢰정부(허수아비 정권) 를 수립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한건 아시죠? 그러면서 베트남에는 권력의 공백이 생기게 됩니다. 그 때 프랑스 파리에서 '호치민'이 돌아와서 베트민, 즉 베트남 공산주의 독립운동단체를 설립합니다. 베트민군은 일본 항복 후 며칠만에 베트남 북부를 장악하고 1945년 9월 2일 하노이에서 베트남 재통일과 독립을 선언합니다.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인 연합국들은 중국에게 베트남 문제를 떠넘깁니다. 중국군은 자기네들 세력이 뿌리박기 전까지는 프랑스인들을 풀어줄수 없다면서 그들을 계속 억류하고 있었고, 그 사이 베트민군이 점점 남쪽으로 세력을 뻗쳐왔습니다. 프랑스인들은 억류되어 있고, 중국은 실질적으로 통치를 하지 않으니 남부는 권력 공백상태가 되었죠. 그때서야 중국군은 프랑스인들을 풀어주어서 북부는 베트민 공산군, 남부는 프랑스가 장악합니다. 1946년 말에 그 둘 사이에 8년간 전쟁이 계속되었어요. 하지만 그 전쟁은 확실히 베트민군에게 유리했습니다. 유럽에 본국을 둔 프랑스로서는 베트남 재지배의 명분이 떳떳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후에 베트민군이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게되면서 프랑스의 요새 디엔비엔푸가 1954년 5월 함락됩니다. 하지만 베트남은 다시 남북으로 나누어집니다. 북쪽은 호치민이 대통령인 베트남인민공화국이, 남쪽은 괴뢰정권인 베트남공화국이 세워지죠. 프랑스는 패배후 발빠르게 베트남을 떠납니다. 어느새 베트남문제는 미국이 떠안고 있게됩니다. 미국은 반공주의자인 응오딘지엠을 총리로 내세웠지만 독재정치를 펼쳐 신뢰도가 바닥을 기었죠. 반면 북부에서는 토지개혁을 단행해 호치민의 인기가 계속 높아져만 갔습니다. 그러나 응오딘지엠은 정치, 경제 모두 무관심했을 뿐이었죠. 1959년에 북베트남은 민족해방전선, NLF. 흔히들 말하는 베트콩을 만들었습니다. 베트콩은 게릴라전으로 1960년대 초 남베트남의 많은 지역을 장악하고요. 그리고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군사개입을 시작해 통킹만 공습을 합니다. 남부는 혼란에 빠지게 되고, 응오딘지엠은 암살됩니다. 1969년 공산군은 더 강하게 공격해왔고 미국은 서서히 발을 뺄 준비를 합니다. 1973년 1월에는 미국과 베트콩 사이에 파리협정이 조인됩니다. 미군이 철수한다는 조건으로 공산군과 남베트남군도 휴전한다는 내용이었지만 미군이 떠난뒤 4월에 공산군은 총공격을 개시합니다. 1975년 4월 말 공산군이 사이공 대통령궁을 침입함으로써 베트남공화국은 멸망하고, 통일 베트남인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됩니다.   베트남은 통일을 위해 딱히 노력한건 아닙니다. 무력통일을 했으니까요. 또 여러 서방국가들에 의해 상당히 피해를 많이 봤으니까요.   긴글 다 읽으셨다면.. 어느정도 도움이 되셨을거라 믿습니다. 출처가로세로세계사 읽고.. ===========================/// 더욱이 미군이 철수한 시점에서 월맹은 총공세를 폅니다. 1974년 1월부터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과 남베트남 정부 간의 갈등은 다시 무력충돌로 확대되었다. 결국 북베트남은 1975년 대규모 공세를 벌여 그해 4월 30일 남베트남의 수도인 사이공을 점령했고, 남베트남의 대통령이던 즈엉반민의 항복을 받았다. 사이공이 점령된 뒤 남베트남공화국이 수립되었고, 1976년 7월 2일 남북 베트남이 통합해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을 수립하면서 베트남은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베트남전쟁 [Vietnam War] (두산백과)   더욱이 미군이 철수한 시점에서 월맹은 총공세를 폅니다. 자세한건 아래를..   미군 없는 월남은 빈 땅이나 마찬가지였다. 월맹은 앞에서는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뒤에서는 남베트남을 재차 침공할 준비를 했다. 침공 준비를 마치고 1975년 1월 시험삼아 푹룽 성(福隆省)을 공격하여 점령 한 뒤, 1975년 3월 월맹은 남베트남을 대대적으로 침공한다. 미국은 이왕 도와준 놈인데 그냥 손 빼기는 좀 찝찝했는지, 미군은 철수하면서 남베트남에게 많은 수의 무기를 공여했다. 남베트남이 그거 갖고 잘 싸우라는 거였는데... 1974년에 월맹군이 쳐들어 오자 대부분은 제대로 저항도 못해보고 박살나버렸다. 결국, 남베트남군은 대패했고 월맹군은 미군 무기를 노획하여 남베트남군을 역공하는 사태까지 갔다.# 사실 미국이 무기는 줬지만, 이 무기들의 유지를 위한 예산 비용을 주지 않았다. 그 결과 남베트남군은 일상적인 전투에도 지장을 받을 지경이었다. 일례로 미군 철수 전에는 전투 한번에 100발을 쏘던 포대가 단 3발만을 쏠 수 있었다. 특히 유지 보수에 민감한 공군의 타격이 커서 전투기는 많았지만 부품과 기름, 탄약이 없어서 제대로 출격할 수 없었다. 급기야 C-130 수송기에서 폐유 드럼통과 폭탄을 함께 투하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본래 공산주의자로서 군 내에 위장 잠입해 있던 전투기 조종사가[52] 남베트남 대통령궁에 폭탄을 떨구고 월맹에 귀순하기도 했다. 조종사들이 출격을 위해 금전을 요구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래서인지 남베트남이 멸망할 때가 닥치자 태국이나 말레이시아까지 날아가서 태국 및 말레이시아에 망명한 조종사들이 수십명이다.[53] 공군 참모총 장이자 전 부통령 응우옌까오끼의 탈출 명령이 있었다고 한다. 귀중한 조종사와 전투기를 공산주의자에게 넘겨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던가[54].흠좀무. 이때 탈출한 항공기들은 태국이 임시로 보관하다가 미국에 반환하였다.[55] 보병들은 미군을 따라서 싸운 경험이 남아있었는지 공군 지원 없이는 한 발도 못 움직인다는 식으로 행동했다. 1975년 3월 초에야 응우옌반티에우 대통령은 더이상 지탱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전국에 흩어진 군대를 재배치해서 좀 더 버텨보려고 시도했으나 이게 잘못되면서 오히려 패망을 앞당기는 자충수가 된다. 1975년 3월 10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남베트남군의 주요 거점지인 부온마투옷을 점령했고, 이로써 수도 사이공으로 가는 길을 확보한다. 미국 정부는 의회에 9억 7,200만 달러의 남베트남 지원 예산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의회는 더 이상의 예산 지원은 용납되지 않는다고 거부했다. 물론 남베트남군이 무능력했던 면도 있긴 했으나 그 밖에 지휘 체계의 붕괴와 전략, 전술적인 문제도 상당히 컸다. 보급과 병참이 여의치 않았던 데다, 월맹군의 대공세에 남베트남의 대통령 응우옌 반 티에우가 내린 무모한 철수 작전으로 인해 피난민들과 군이 뒤섞이는 대혼란에 빠지면서 일개 야전군이 월맹군의 공격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궤멸되어버렸다. 이 철수 작전의 문제점은 대규모 철수작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령관은 그 자리에 없었고, 사령관 대리는 막 진급해서 별을 단 여단급 지휘관에 불과했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더해 보안을 유지한답시고 철수 작전 자체가 부대장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도 않았다(...) 이 재배치를 틈타서 호치민 루트로 우회해서 진격한 월맹군에 의해 이후 1, 2군단이 통째로 붕괴되고 휴전선인 북위 17도선과 중부 고원지대가 넘어가면서 남베트남은 막장으로 치닫게 된다. 결국 1975년 3월 26일 중부에 고립된 최대의 기지겸 도시인 다낭이 함락되고 남베트남군은 궤멸된다. /위키백과에서  ==========================/// 두산백과 베트남전쟁   [ Vietnam War음성듣기 ] 요약 베트남의 통일 과정에서 미국과 벌인 전쟁 (1960~1975). 이미지 크게보기 미토의 피난민 언제 1960∼1975년 어디서 베트남 누가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과 북베트남 : 남베트남 정부군과 미국 왜 베트남의 통일 1960년에 결성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이 베트남의 완전한 독립과 통일을 위해 북베트남의 지원 아래 남베트남 정부와 이들을 지원한 미국과 벌인 전쟁이다.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프랑스와 벌인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1946〜1954)과 구분해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도 하며, ‘월남전(越南戰)’이라고도 한다. 남베트남 정부가 붕괴된 1975년 4월 30일까지 지속되었다. 초기에는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은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과 남베트남 정부 사이의 내전(內戰)이라는 성격을 띠었으나, 1964년 8월 7일 미국이 통킹 만 사건을 구실로 북베트남을 폭격한 뒤에 전쟁은 북베트남과의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미국과 소련의 냉전 체제 하에서 한국, 타이,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중국 등이 참전한 국제적인 전쟁으로 비화되었으며, 미국이 캄보디아와 라오스 등으로 군사개입의 범위를 넓히면서 전장도 인도차이나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한편 전쟁 중에 미국, 한국군에 의해 미라이 학살, 빈호아 학살, 퐁니 퐁넛 양민 학살 등 베트남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베트남전쟁의 배경   베트남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독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1927년에는 베트남국민당이, 1930년에는 인도차이나공산당이 조직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뒤 일본이 베트남을 점령하자 호찌민[胡志明]을 중심으로 1941년 5월 19일 베트민(Viet Minh, 베트남독립동맹)이 결성되었고, 이들은 일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였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한 뒤에 베트민은 하노이를 점령하고 그해 9월 2일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수립과 독립을 선포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1946년 11월 23일 하이퐁(Haiphong) 항구에 함포 사격을 가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일으켰고, 전쟁은 1954년 5월 7일 프랑스군의 거점인 디엔비엔푸(Dien Bien Phu)가 함락될 때까지 9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리고 그해 7월 제네바에서 휴전협정이 성립되어, 북위 17°선을 경계로 베트남은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제네바협정에서는 1956년 국제감시위원회의 감독 아래 베트남 전역에 걸쳐 자유선거를 실시하도록 규정했으나 1955년 미국의 지원을 받아 남베트남(베트남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은 선거 실시를 거부했다. 그리고 농민들이 베트민의 토지개혁으로 분배받은 농지를 다시 회수하고, 친 가톨릭 정책을 펼쳐 민중의 반발을 샀다. 이에 대한 불만으로 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났는데, 초기에 카오다이(Cao Dai)나 호아하오(Hoa Hao) 등의 종교집단을 중심으로 시작된 봉기에 베트민의 구성원들이 합세하면서 1950년대 중반에는 이른바 ‘베트콩(Viet Cong)’이라고 불리는 게릴라 군사조직으로 발전했다. 지엠 정권은 1958년 반공법을 시행하는 등 대대적인 탄압으로 반발을 억누르려 했으나, 남베트남의 반란 세력은 1960년 12월 20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을 결성해 정부군과 본격적으로 맞섰다. 이들은 민족민주정부의 수립, 토지개혁, 평화통일, 중립외교 등 10개 항을 강령으로 내세웠다.    베트남전쟁의 경과   지엠 정권에 대한 반발이 확대되자 1963년 즈엉반민(Dưong Van Minh) 등은 미국의 방조 아래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응오딘지엠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1964년 응우옌칸(Nguyen Khanh)이 다시 쿠데타를 일으키는 등 남베트남 정권은 잇따른 쿠데타로 크게 불안정해졌다. 이렇듯 남베트남의 상황이 악화되자 미국의 존슨(Lyndon Baines Johnson) 정부는 남베트남에 주둔하는 미군의 숫자를 늘렸다. 그리고 미국의 구축함이 북베트남의 어뢰 공격을 받았다는 이른바 ‘통킹 만 사건’을 구실로 1964년 8월 7일 북베트남에 폭격을 가해 전쟁을 북베트남과의 전면전으로 확대했다. 미국은 그 뒤 1968년까지 북베트남에 약 1백만 톤에 이르는 폭탄을 퍼부었으며, 약 55만 명에 이르는 지상군을 파병했다. 그리고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 등에 파병을 요청해 한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태국, 필리핀 등의 참전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은 1968년 1월 30일 음력 설날을 이용한 구정대공세를 펼쳐 주요 도시들에서 미국과 동맹국들의 주요 시설을 점령했다. 그리고 그 성과를 배경으로 1969년 6월 8일에는 남베트남공화국 임시혁명정부를 수립했다. 미군과 남베트남 정부군은 곧바로 빼앗겼던 도시와 시설들을 탈환했지만, 이 사건은 미국의 여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전쟁의 승리를 낙관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미국에서는 반전 여론이 높아졌고, 결국 존슨 대통령은 재선에 실패하고 군사개입의 중단을 내세운 닉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닉슨은 1969년 ‘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을 새로운 안보·외교 전략으로 내세우며 미군의 철수 계획을 발표하였다. 구정대공세 이후인 1968년 5월부터 미국과 북베트남의 정전 협상이 시작되었으나, 1972년까지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오히려 1970년 이후에는 미국이 캄보디아의 내전에 군사적으로 개입하면서 전장이 캄보디아와 라오스 등 인도차이나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1972년 4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각지에서 대규모 봉기를 일으키자, 미국은 북베트남의 모든 항만에 기뢰를 부설하고, 하노이와 하이퐁에 대규모 폭격을 가하는 등 북베트남에 대한 공세를 더욱 강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2년 여름부터 미국과 북베트남 사이의 정전 협상이 비밀리에 재개되었고, 마침내 1973년 1월 27일 파리에서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파리평화협정은 남북의 휴전과 선거를 통한 통일정부 구성, 60일 안에 모든 미군의 철수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평화협정을 체결한 뒤 미군은 남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했고, 북베트남과 미군 사이에 포로 교환도 이루어졌다. 미국은 남베트남에 대한 원조 규모를 크게 줄였고, 오일쇼크로 촉발된 경제위기를 배경으로 1974년 1월부터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과 남베트남 정부 간의 갈등은 다시 무력충돌로 확대되었다. 결국 북베트남은 1975년 대규모 공세를 벌여 그해 4월 30일 남베트남의 수도인 사이공을 점령했고, 남베트남의 대통령이던 즈엉반민의 항복을 받았다. 사이공이 점령된 뒤 남베트남공화국이 수립되었고, 1976년 7월 2일 남북 베트남이 통합해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을 수립하면서 베트남은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었다.   베트남전쟁과 한국   한편, 한국은 베트남전쟁에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한 국가이다. 한국은 1964년 9월 의료진을 중심으로 한 비전투요원을 파견한 것을 시작으로, 맹호부대와 청룡부대, 백마부대 등 30만 명이 넘는 전투병력을 베트남에 파병했다. 그 과정에서 1만6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많은 참전 군인들이 고엽제 피해 등의 후유증에 시달렸다. 1999년에는 1만6천여 명의 고엽제 피해자들이 고엽제 제조사들인 미국의 다우케미칼과 몬산토 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베트남전쟁 [Vietnam War] (두산백과) ========================================///   재미있는 전쟁 이야기 베트남 전쟁 강대국 미국의 굴욕으로 남다   전쟁 국가 : 미국 vs. 베트남 연도 : 1964~1975년 목차 베트남, 남과 북으로 나뉘어 싸우다 미국, 베트남전에 본격적으로 참가하다 라오스와 캄보디아로 확대된 전쟁 미국, 북베트남의 공격과 반전 여론에 몰리다 북베트남, 미국에 승리하고 베트남을 통일하다 베트남은 1883년부터 프랑스의 식민지였어요.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일본의 지배를 받기도 했지요. 그런데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한 다음 해인 1946년, 프랑스는 다시 베트남을 자기네 식민지로 삼았어요. 베트남은 독립을 위해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지요. 1954년, 프랑스에 승리를 거두고 기뻐하는 베트남 독립군 베트남, 남과 북으로 나뉘어 싸우다 베트남에는 오랫동안 독립 운동을 이끈 호찌민이라는 지도자가 있었어요. 그는 사회주의자로, 베트남 국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고 있었어요. 결국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남군은 1954년에 프랑스를 베트남에서 몰아냈답니다. 그런데 미국을 비롯한 서양의 강대국들은 베트남이 사회주의 국가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베트남을 남과 북으로 갈라놓았지요. 호찌민(1890~1969년) 이에 따라 베트남의 북쪽에는 호찌민이 이끄는 독립 국가가 들어섰고, 남쪽에는 미국이 지원하는 정권이 세워졌어요. 그런데 남베트남의 대통령인 응오딘지엠은 사람들을 탄압하는 독재 정치를 했어요. 그래서 호찌민을 지지하는 남쪽 사람들이 많았어요. 이들은 통일을 위해 베트콩(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만들어 남베트남 정권과 싸웠지요. 호찌민은 이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어요. 미국, 베트남전에 본격적으로 참가하다 미국은 남쪽 정부를 지원했어요.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남베트남 정권을 돕기 위해 군대를 보냈지요.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존슨은 북베트남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어요. 존슨 대통령은 1964년 8월에 미국 전함 두 척이 베트남과 중국 사이에 있는 통킹 만에서 북베트남의 공격을 받았다고 발표했어요. 이것이 바로 '통킹 만 사건'이에요. 사실 이것은 미국이 북베트남과 전쟁을 하기 위해 꾸민 일이었어요. 이로써 본격적인 베트남 전쟁이 시작되었어요. 통킹 만 사건과 미국의 베트남 전쟁 참여를 보도한 신문 라오스와 캄보디아로 확대된 전쟁 미군은 북베트남을 무자비하게 공격했어요. 밀림에 불을 지르고 고엽제(식물의 잎을 말려 죽이는 약품)를 뿌렸지요. 베트콩들이 숨을 곳을 없애고 식량 보급을 막기 위해서였어요. 하지만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어요. 베트콩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정글에 숨어 미군과 맞써 싸웠지요. 그러면서 전쟁은 이웃 나라인 라오스와 캄보디아까지 번지게 되었답니다. 무장한 채 강을 건너는 베트콩들 미국, 북베트남의 공격과 반전 여론에 몰리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치르며 유럽 나라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어요. 그러자 한국, 오스트레일리아, 필리핀, 뉴질랜드 등의 도움을 받아 전쟁을 계속했지요. 미군은 전쟁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어요.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점점 강해졌기 때문이에요. 1968년,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베트남의 음력 설날인 1월 30일에 남베트남의 서른여섯 개 도시를 기습적으로 공격했고, 남베트남의 수도인 사이공까지 빼앗았어요.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서 열린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 이렇게 되자 미국은 전쟁을 계속하기 힘들어졌어요. 상황이 역전되어 베트남에서 점점 힘을 잃고 있었던 데다가, 미국 안에서도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이에요. 북베트남, 미국에 승리하고 베트남을 통일하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던 닉슨은 북베트남과 평화 회담을 하기로 했어요. 그리고 1969년 6월 이후부터 남베트남에서 미국 군대를 조금씩 철수했지요. 결국 1973년 1월, 프랑스 파리에서 미국, 남베트남, 북베트남, 베트콩의 대표가 모여 평화 회담을 열고, 전투를 중단하기로 하는 휴전 협정을 맺었어요. 휴전 협정에 서명하는 미국 국무 장관 하지만 이듬해 12월에 북베트남이 다시 전투를 시작했고, 1975년 4월에 결국 남베트남은 항복했어요. 베트남이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통일되면서 비로소 베트남 전쟁이 끝난 거예요. 베트남 전쟁은 미국이 패배한 최초의 전쟁으로 남았어요. 한편 베트남은 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통일 국가를 건설하여 민족의 자존심을 지켰지요. 흥미진진 전쟁 상식! 베트남 전쟁이 남긴 상처, 고엽제 후유증 베트남 전쟁 때 미군이 뿌린 고엽제를 맞은 많은 사람들은 두통, 피부 질환, 암 등의 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어요. 고엽제에는 몸에 해로운 다이옥신이라는 성분이 들어 있기 때문이에요. 1994년에 베트남 정부는 약 200만 명이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발표했어요. 베트남 전쟁에 참가한 우리나라 군인들 중에도 고엽제 후유증을 앓는 사람들이 많아요. 정부는 법을 만들어 이들의 치료를 지원하고 있답니다. 베트남 밀림에 고엽제를 뿌리는 미군 헬리콥터 관련이미지 19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북베트남의 독립 운동 지도자, 호찌민베트남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프랑스로 건너가 일을 했다. 공산주의자로 활동하다가 베트남에 와서 독립 운동을 펼쳤다. 이미지 갤러리 출처: (CC BY)Lynhdan Nguyen [네이버 지식백과]베트남 전쟁 - 강대국 미국의 굴욕으로 남다 (재미있는 전쟁 이야기, 서울대학교 뿌리깊은 역사나무)   =========================///   처음 세계사 10 - 현대 세계의 냉전과 변화 베트남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둘로 갈라진 나라가 또 있었어요. 바로 베트남이었어요. 베트남은 1883년부터 프랑스의 지배를 받고 있었어요.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고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한 사이에는 일본이 베트남을 지배했지요. 일본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베트남에서 물러났어요. 이때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이 혁명을 일으켰어요. 일본의 꼭두각시였던 왕조를 무너뜨렸지요. 그리고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세웠어요. 북베트남의 독립 운동 지도자, 호찌민베트남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프랑스로 건너가 일을 했다. 공산주의자로 활동하다가 베트남에 와서 독립 운동을 펼쳤다. 그런데 프랑스가 베트남을 지배할 권리를 주장했어요. 결국 1946년 베트남 민주 공화국과 프랑스가 충돌했어요. 이후 8년간 전쟁이 이어졌지요.(인도차이나 전쟁) 베트남의 저항과 세계의 여론에 밀린 프랑스는 1954년 베트남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어요. 이때 제네바 협정1)에 따라 북위 17도를 기준으로 베트남은 남과 북으로 나뉘었지요. 북베트남은 독립 운동 지도자였던 호찌민이 통치했고, 남베트남은 일본과 프랑스의 꼭두각시였던 바오다이가 다스렸어요. 북베트남의 호찌민은 주장했어요. “남과 북 가릴 것 없이 모든 베트남 사람들이 힘을 모아 외국 세력을 몰아내고 남북을 통일합시다.” 호찌민의 주장에 미국이 귀를 쫑긋 세웠어요. “이러다 공산주의자 호찌민이 남베트남을 집어삼키는 거 아냐?”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의 깃발과 군인베트남 공산주의자라는 뜻으로 ‘베트콩’이라고도 부른다. 미국은 한 나라가 공산주의 국가가 되면 이웃 나라들도 공산주의 국가가 되기 쉽다고 생각했어요. 더구나 남베트남의 바오다이는 아주 무능한 통치자여서 미국은 걱정이 더 컸어요. 남북 통일 선거를 하면 북베트남의 호찌민이 이길 것은 불 보듯 뻔했거든요. 그래서 베트남의 분단을 강화하기로 했어요. 미국은 바오다이를 물러나게 하고 응오딘지엠을 새로운 통치자로 내세웠어요. 응오딘지엠은 호찌민이 주장하는 남북 총선거에 반대하고, 군대를 강화했어요. 미국 군사 고문단이 이를 도왔지요. 그리고 남베트남 정부에 맞서는 무리를 공격하기 시작했어요. 1960년에 결성된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이라는 단체였어요. 이들은 ‘베트콩’이라 불리며 게릴라 활동을 했는데, 북베트남의 도움을 받아 날로 강해졌지요. 응오딘지엠은 미국의 도움을 받아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의 반격을 막아 보고자 애썼어요. 남베트남에 계엄령2)을 선포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이 혼란을 틈타 남베트남 군인들이 1963년에 쿠데타를 일으켰어요. 응오딘지엠은 쿠데타 세력에게 목숨을 잃고 말았지요. 쿠데타 성공으로 들어선 군사 정부도 무능하기는 마찬가지였어요. 그러던 1964년 어느 여름날이었어요. “미국의 군함이 북부 베트남의 통킹 만 앞바다를 순찰하던 중 북베트남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이를 통킹 만 사건이라고 불러요. 하지만 정말로 미국 군함이 북베트남의 공격을 받았는지는 지금까지도 확실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당시 미국은 이 사건을 구실로 베트남에서 전쟁을 확대하기로 결심했어요. 베트남 전쟁 참전 미군미국은 때에 따라 징병제나 모병제를 실시했다. 남북 전쟁, 제1차 · 2차 세계 대전, 1948년부터 1973년까지는 징병제를 실시했다. 미국은 복수를 한다면서 항공기를 보내 북베트남의 함정3)과 석유 저장소를 공격했어요. 1965년 2월부터는 폭격기를 보내 북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와 여러 도시들에 폭탄을 퍼부었어요. 뿐만 아니라 직접 군대를 남베트남에 상륙시키기까지 했어요. 하지만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어요. 숨어 있다가 나타나 공격하고 밀림으로 숨어 버리는 게릴라 작전을 펼쳤지요. 그 작전에 미군도 쉽사리 힘을 쓰지 못했어요. 그러자 미국은 더 많은 군대를 베트남에 보냈어요. 1965년에 18만여 명이었던 미군은 1969년에는 48만 명, 최고로 많을 때는 54만 명에 이르렀어요. 뿐만 아니라 미국은 다른 나라의 군대까지 베트남 전쟁에 끌어들였어요. 한국을 비롯해 호주와 필리핀의 군대가 남베트남을 돕기 위해 파견되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을 물리치지 못했어요. 오히려 북베트남군까지 남으로 진격하는 바람에 점점 더 밀리기만 했지요. 다급해진 미국은 본토에서 군대를 더 모아 베트남에 보냈어요. 그래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어요.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은 땅굴을 파고 숨어들거나 밀림 속에 위장하여 움직이면서 미군을 괴롭혔어요. 그러자 미군은 게릴라와 몰래 연락한다며 민간인4)들의 집을 불태웠어요.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을 숨겨 주었다는 핑계로 수많은 주민들을 학살하기도 했지요. 밀림에 숨어든 게릴라를 찾는다며 고엽제를 뿌리기도 했고, 수많은 신무기로 베트남을 마구 공격했어요. 이 때문에 전쟁이 끝난 뒤에도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이 후유증을 앓아야 했어요. 나무를 죽이는 고엽제미군의 무기는 뛰어났으나 밀림을 잘 아는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의 게릴라 작전에는 소용없었다. 결국 밀림을 없애기 위해 고엽제를 뿌렸다. 하지만 이를 맞은 참전 군인들은 전쟁 후에도 후유증에 시달렸다. 미국 본토에서는 전쟁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어요. “우리의 젊은이를 아무런 의미 없는 전쟁에 몰아넣지 말라!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 미국 정부는 전쟁에 돈을 엄청나게 쏟아붓느라 재정 적자가 늘었어요. 미국 정부는 점점 더 궁지에 몰리고 있었지요. 게다가 미국 국내의 분위기가 좋지 않았어요. 결국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닉슨은 미국 군대를 철수하기로 했어요. 1969년부터 미국 군대가 철수하기 시작했어요. 대신에 미국은 남베트남 군대 수를 늘렸어요. 그 때문에 베트남에서는 전쟁이 끝나지 않고 계속되었지요. 결국 1972년 봄, 북베트남 군대는 남베트남으로 계속 진격해 내려오며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어요. 미국과 북베트남은 본격적으로 교섭5)을 진행했어요. 하지만 미국은 협정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미국은 계속 사인을 미루며 수정을 요구했지요. 북베트남은 이를 거부했고요. 닉슨은 북베트남을 압박하기 시작했어요. 12월 18일부터 크리스마스 폭격6)을 실시했지요. 그러자 세계적으로 미국을 비난하는 분위기가 거세졌어요. 미국 의회도 전쟁을 그만 멈추라고 강한 태도를 보였지요. 12월 말 북베트남이 협상에 응하겠다고 하고 나서야 미국은 폭격을 멈추었어요. 1973년 1월 미국과 북베트남은 파리 협정을 맺었지요. 협정에서 휴전하기로 약속했지만 남베트남에서는 여전히 원래 남베트남 정권과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이 계속 싸웠어요. 북베트남까지 나서서 1975년 4월 말 마침내 사이공7)을 점령했어요. 이렇게 해서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패배, 공산주의 혁명 세력의 승리로 돌아갔어요. 전쟁을 치르는 동안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죽었어요. 보트피플(배 위의 사람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생겨났지요. 이들은 북베트남 정부를 반대하며 나라를 떠나 바다 위를 떠돌아야 했어요. 뿐만 아니라 베트남 국토 역시 말할 수 없이 엉망이 되고 말았지요.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 정부와 군은 전쟁에서 패배를 맛보았어요. 또한 본토와 세계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아야 했답니다. 관련이미지 20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1954년, 프랑스에 승리를 거두고 기뻐하는 베트남 독립군 이미지 갤러리 출처: 재미있는 전쟁 이야기 [네이버 지식백과]베트남 전쟁 (처음 세계사 10 - 현대 세계의 냉전과 변화, 초등 역사 교사 모임)   =============================///   Basic 고교생을 위한 세계사 용어사전 호찌민   [ 胡志明 ] 직업 혁명가, 대통령 국적 베트남 베트남의 혁명가이자 대통령. 1911년 가난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선원이 된 그는 1917년 프랑스에서 새로 조직된 프랑스 공산당(PCF)에 입당하였다. 1923년에는 모스크바로 가서 1924년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 참석하고 혁명에 있어서 농민의 중요성에 관해 연설하였다. 1924년부터 1927년까지 코민테른 대표로 중국에서 근무한 뒤 그는 피압박 인민 연맹, 베트남 혁명 청년 연맹의 창설을 지원하였으며, 1930년에는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창당을 지원하였다. 1940년에는 일본이 점령한 인도차이나로 돌아와 저항 군사 조직인 베트민을 조직하였다. 그 뒤 하노이에 정부를 수립하고 대통령이 된 그는 1946년에 남부 베트남을 점령한 프랑스와 싸워 1954년 디엔비엔푸에서 승리함으로써 베트남의 분할을 가져왔다. 대외적으로도 소련 및 중국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다. 1959년 남베트남의 베트콩 게릴라를 지원하여 남베트남 정부를 타도한 그는 같은 해 당 서기직은 사임하였지만 대통령직은 유지하였다. 관련이미지 20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호찌민(1890~1969), 출처: 게티이미지 코리아 이미지 갤러리 [네이버 지식백과]호찌민 [胡志明] (Basic 고교생을 위한 세계사 용어사전)   ==========================///   시사상식사전 호찌민      베트남의 민족운동 지도자로 아시아의 반식민지 운동을 이끌었으며, 구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초대 주석이 되었다.             외국어 표기     胡志明(한자) Ho Chi Minh     출생 - 사망     1890. 5. 19 ~ 1969. 9. 3   호찌민(1890~1969), 출처: 게티이미지 코리아 1890년 베트남 중부 호앙쭈(Hoang Tru)라는 작은 마을에서 출생했으며, 본명은 응웬 닷 탕(Nguyen Tat Thanh)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사망하고 농민 출신인 아버지는 관직에서 면직되면서 경제적으로 빈곤한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다 1911년 바(Ba)라는 가명으로, 프랑스 증기선 아미랄 라투슈 트레빌호의 요리사로 근무하며 3년 이상 여러 국가를 여행하였다. 그는 생전 160여 개가 되는 가명과 필명 등을 사용했다.  1914~1917년까지는 영국 런던 등지에서 밑바닥 인생을 전전했으나, 그 경험은 시야를 넓히고 사고를 성숙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후 1919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프랑스 파리에 정착하였고, 그곳에서 정원사·웨이터·청소부 등으로 일하며 '응우옌 아이 꾸옥'이란 이름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시작한다. 당시 파리에는 각 식민지에서 건너온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었고, 그는 1919년 6월 베르사유 평화회의에 '베트남 인민의 8항목의 요구'를 제출하였다. 이는 중재자들에게는 반응을 얻지 못했으나 많은 베트남 지식인들에게 그의 이름이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1920년 프랑스공산당이 창립되자 여기에 가담하였고, 이듬해인 1921년 공산당의 지원으로 '프랑스식민지인민연맹'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식민지 정책의 해악을 고발하는 기관지 <르 파리아(Le Paria)>(추방자라는 뜻)를 편집·발행하였다.  1924년 모스크바의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 출석하였고 이곳에서 약 2년간 머물며 공산당 혁명사상을 익혔다. 그는 코민테른으로부터 지령을 받고 중국 남부 및 태국으로 파견되는 등 베트남 주변에서 혁명운동을 계속한다. 그리고 1930년 마침내 코민테른에 의하여 권한을 부여받으면서 인도차이나공산당을 창립하게 되는데, 이때에는 '리 투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는 중국을 근거지로 베트남 혁명청년동지회를 결성, 이곳에서 훈련받은 베트남인들을 인도차이나 지하조직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기관지 <청년>을 발행하며 조직을 키워나간다. 그러다 1931년 6월 홍콩에서 영국 경찰에 체포되었고, 1933년 석방된 뒤에는 모스크바로 돌아간다. 이후 1940년부터 중국 쿤밍에서 공산당 조직과 함께 활동하였고, 1941년 베트남 잠입에 성공한다. 당시 인도차이나는 프랑스와 일본의 공동협약 아래 식민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그는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중심으로 월맹(베트남독립동맹)을 결성하여 해방을 위한 총봉기를 목표로 세를 확산시켜 나갔다. 그리고 이때부터 호찌민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된다.  그는 2차 대전에서 일본의 패배를 직감하고 중국과 미국에 전략적으로 접근하여 지원을 받아낸다. 1942년 중국 중경 방문 시에는 스파이로 오인되어 국민당에 체포되기도 하나 이듬해 9월 석방되었고, 중국과 미국에게 월맹이 임시과도정부임을 승인받는다. 미국은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 세력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월맹을 지원하고, 이로써 호찌민은 승리할 기회를 얻게 된다. 태평양 전쟁 종결 후 호찌민을 의장으로 하여 민족해방위원회가 결성되어 총봉기하였으며, 월맹은 베트남 중·북부 지역을 빠르게 장악해 갔다.  1945년 2월 호찌민은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 정부 주석으로 취임하였다. 1954년에는 직접 프랑스에 대한 항전을 지휘하여 독립을 지켜내기도 하지만, 구소련과 중국의 간섭으로 인해 완전한 독립에 이르지는 못했다. 이후 제네바 회담에서 베트남은 17도 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할되었으며, 이내 남북 간 전쟁이 시작되었다(베트남 전쟁). 당시 호찌민은 정계 일선에서는 물러났으나 여전히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는 폭격 위험 아래서는 절대로 협상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였으나, 1969년 심장병으로 급사하였다. 이후 협상의 기회는 줄게 되었고, 베트남 전쟁은 그가 죽은 지 3년이 되어서야 막을 내렸다.     관련이미지 19                                         이미지 갤러리 출처: 인물세계사 [네이버 지식백과]호찌민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 호찌민베트남 혁명의 중심 인물인 호찌민('깨우치는 자'라는 뜻)의 청년 시절 모습이다. 호찌민은 1911년 프랑스에 건너가 식민지 해방 운동을 시작하였다. 1920년 코민테른에 가담하였고, 프랑스 공산당 창립과 함께 당원이 되었다. 1925년에는 '베트남 혁명 청년 동지회'를 결성하여 사회주의 혁명 사상을 전파하였고, 1930년 2월 베트남 공산당을 정식으로 창립하는데 성공하였다. ■ 호찌민, 베트남 민족 운동을 이끌다 1919년 파리 강화 회의가 열리고 있는 베르사유 사무국에 한 베트남 청년이 찾아왔다. 그는 '베트남 인과 프랑스 인을 법적으로 동등하게 대우할 것, 프랑스 의회에 베트남 대표가 참석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할 것' 등 8개 항의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대표단이 청원하였을 때 그랬던 것처럼 이 청년의 청원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청년은 회담장 복도에서 쫓겨났다. 제국주의자들은 절대 자진해서 식민지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얻은 이 청년 호찌민은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소련에 호의를 가지게 되었고, 코민테른에 합류하여 민족 해방 운동을 계속해 나갔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베트남에서는 서양 지식을 보급하고 경제적 근대화와 행정 제도의 개혁을 추진하는 민족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호찌민은 1925년 베트남 청년 혁명 동지회를 결성하였다. 그로부터 2년 후 중국의 국민 혁명에 자극받은 민족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베트남 국민당을 조직하였다. 베트남 국민당은 세력을 급속히 키워 나가면서 프랑스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1930년 이들이 일으킨 전면적인 무장 봉기 시도가 실패하면서 중심 인물들이 대거 체포되어 처형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베트남 국민당은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인도네시아 독립 포스터1928년 국민당을 만들어 반네덜란드 운동을 벌였던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 독립의 아버지로 추앙받으며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어서는 독재 정치를 벌이다가 실각하였다. 1930년에 조직된 호찌민의 베트남 공산당도 프랑스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쇠퇴기에 빠져들었다. 베트남 공산당은 1936년 이후에나 다시 활동에 나설 수 있었다. 베트남 공산당은 독립을 바라는 모든 계층과 연합하는 쪽으로 노선을 바꾸면서 대중 속으로 파고들며 대대적인 독립 전쟁을 준비하였다. 한편 인도네시아에서는 이슬람 연합이 공산당을 결성하여 네덜란드에 맞서 해방 투쟁을 벌여 나가다 해산당하였다. 이후 인도네시아에서는 민족주의자들이 국민당을 만들어 민족 운동을 주도하였다. 인도네시아에서는 특히 이슬람 교가 민족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인도네시아 인들에게 이슬람 교는 자신들을 화교나 네덜란드 인과 구별짓도록 하는 것이자, 민족 정체성을 드러내 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인도네시아의 민족 운동은 이슬람 공동체 운동과 깊은 관련을 맺으면서 전개되었다.   베트남 응헤띤 지역의 농민 봉기베트남 공산당은 농민과 노동자 속으로 들어가 농민 항쟁과 노동자 파업 투쟁을 조직하였다. 위 그림은 1930년 여름, 소비에트가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던 응헤띤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 기록화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시아에 민족 운동이 확산되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전국역사교사모임)    
5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친환경실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2453  추천:0  2019-12-02
커피 잔 텀블러, 오래 안 쓰면 환경에 득 아닌 독  2019.12.02.    화나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앵커] 내후년부터는 카페와 음식점에서 종이컵 사용이 금지된다는 소식, 전해드렸는데요.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고, 텀블러나 머그잔 같은 다회용 컵을 더 많이 써보잔 취지입니다. 그런데 이 다회용 컵도, 잘못하면 환경에 독이 될 수 있다고 하는데요. 이유민 기자가 그 이유를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서울의 한 공원. 커피를 즐기려는 직장인들이 모여듭니다. 대부분 일회용 컵을 들고 있습니다. [김현수·남광호/회사원 : "사무실에서 쓰는 컵은 있고요. 점심 먹고 들고 다니긴 좀 불편해서..."] [김서영/회사원 : "(일회용 컵에도) 돈을 지불한 건데 편하게 쓰는 게 좋은 것 같습니다."] 내후년부터는 음료를 밖에 들고 나가려면 추가로 돈을 내거나, 텀블러나 머그잔 등 다회용 컵을 가지고 와야 합니다. 환경 보호 차원에섭니다. 일회용품 사용 좀 줄이겠다고 사게 되는 이 텀블러. 정말 환경에 도움이 되는 건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국내 한 환경 연구소에 의뢰해, 컵을 만들고 사용하고 폐기하는 모든 과정에서 배출되는 온실가스양을 계산해봤습니다. 텀블러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671그램. 플라스틱 컵의 13배, 종이컵보다는 24배나 더 많았습니다. 당장에는 환경에 더 나쁜 것처럼 보이지만 문제는 시간입니다. 꾸준히 사용한다면, 결과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하루에 커피 한 잔씩을 마신다고 가정할 경우 플라스틱 컵은 2주 만에, 종이컵은 한 달 만에 텀블러를 따라잡습니다. 온실가스 배출량이 역전되는 겁니다. 2년이 지나면 플라스틱 컵을 쓸 때보다 온실가스가 33배가량 줄어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이윤희/기후변화행동연구소 선임연구원 : "1435 텀블러의 온실가스 감축 효과는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기 때문에 오래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이 실험의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환경을 살리는 건 일회성이 아닌 꾸준한 실천이라는 것을 이 실험결과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KBS 뉴스 이유민입니다. /이유민 기자
4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환경보호",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2758  추천:0  2019-12-02
지구온난화로 죽어가는 산호초 살리는 물고기들 2019.12.02.    슬퍼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건강한 산호초 소리 녹음해 들려줘도 '효과' 황폐화한 산호초 [엑시터대학 팀 고든 제공] (서울=연합뉴스) 엄남석 기자 = 산호초는 산소량이 높고 먹이가 풍부해 바다 생물의 4분의 1이 살아가는 생물 다양성의 보고(寶庫)다. 또 1㎡당 1천500~3천700g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며 열대우림에 맞먹는 역할까지 한다.  건강한 지구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존재지만 지구온난화로 수온이 오르고 각종 쓰레기로 바닷물이 오염되면서 곳곳에서 심각한 위협을 받으며 죽어 나가고 있다.  과학자들이 산호초 생태계 보전에 관심을 갖고 다양한 연구 결과를 내놓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 비롯된 것인데, 최근 죽은 산호초를 복원하는 것과 관련된 2건의 연구 결과가 잇따라 발표돼 관심을 끌고 있다.  ◇ 산호초 '의사' 파랑비늘돌돔(parrotfish) 산호에 붙어있는 미생물을 긁어먹는 파랑비늘돌돔 [켄달 클레멘트 제공] 호주 해양과학연구소(AIMS)에 따르면 이 연구소의 브렛 테일러 박사가 이끄는 연구팀은 심각한 '백화현상'을 보이는 산호초 주변의 물고기 개체 수를 분석한 결과를 과학 저널 '글로벌 생물학 변화 (Global change Biology)' 최신호에 발표했다.  백화현상은 산호초가 높은 해수면 온도에 장기간 노출될 때 보이는 스트레스 반응으로, 길게 이어지면 산호가 죽게 된다.  연구팀은 서태평양의 대보초(Great Barrier Reef)와 인도양 차고스 제도에서 백화현상을 보이는 산호초를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그 결과, 백화현상이 나타난 곳에서 대부분의 어종이 급격히 줄어든 것과는 정반대로 파랑비늘돌돔은 개체 수가 2~8배 증가하고 각 개체의 몸집도 백화현상이 없는 산호초에 사는 개체에 비해 20%가량 큰 것을 확인했다.  연구팀은 파랑비늘돌돔이 촘촘하게 난 이빨로 산호에 붙어있는 미생물을 긁어먹는데, 이런 행동이 산호의 회복을 도왔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분석했다.  백화가 진행되면서 산호가 죽어 황폐화한 자리에 미세조류와 남세균이 달라붙게 되는데, 이런 미생물을 먹이로 삼는 파랑비늘돌돔이 늘어 이들을 잡아먹으며 주변을 깨끗이 청소하면 산호가 복원할 기회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연구팀은 산호와 파랑비늘돌돔이 순환고리를 형성해 산호가 죽으면 파랑비늘돌돔이 늘어 복원할 기회를 제공하고, 산호가 회복되면 먹이가 줄면서 파랑비늘돌돔 개체도 줄어들어 서로 균형을 맞추는 것으로 분석했다.  테일러 박사는 약 8천㎞ 떨어진 서태평양과 인도양의 산호초에서 파랑비늘돌돔 개체가 많이 늘어났다는 것은 이런 순환고리가 지역적 현상이 아니라 산호초 생태계의 고유한 일부분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건강한 산호 소리로 산호초 복원 '시동' 죽은 산호초 주변에 건강한 산호초 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설치한 수중 스피커 [엑시터대학 제공 동영상 화면 캡처] 영국 엑시터대학에 따르면 이 대학 해양생물학 교수 스티브 심슨 박사가 이끄는 국제 연구팀은 수중 스피커로 건강한 산호초의 소리를 들려줬더니 어린 물고기들이 황폐화한 산호초로 몰려들었다는 연구 결과를 과학저널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NatureCommunication)' 최신호에 발표했다.  연구팀은 대보초 내 죽은 산호초에서 이런 실험을 진행한 결과, 비슷한 산호초에 비해 두 배에 달하는 물고기가 찾아와 머물렀으며, 생물 종(種)도 50%가량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심슨 박사는 "건강한 산호초 주변에서는 물고기나 딱총새우가 내는 소리가 어우러져 상당히 시끄러우며, 어린 물고기들은 이런 소리를 듣고 서식지를 찾는다"면서 "산호가 죽으면 물고기와 새우가 사라져 귀신이 나올 것처럼 조용해지는데 수중 스피커로 건강한 산호 소리를 들려줌으로써 어린 물고기를 다시 유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논문 제1저자인 엑시터대학의 박사과정 연구원 팀 고든은 "물고기는 산호초가 건강한 생태계로 기능하는 데 중요하다"면서 "이런 방식으로 주변에 물고기 개체를 늘리는 것이 자연적인 산호 복원을 촉발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수중 스피커를 설치하는 연구원 [엑시터대학 제공 동영상 화면 캡처] AIMS의 어류학자 마크 미칸 박사는 "죽은 산호초 주변에 물고기를 모은다고 해서 자동으로 살아나는 것은 물론 아니다"라면서 "그러나 물고기들이 산호초 주변을 깨끗이 하고 산호가 다시 자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줌으로써 산호 복원을 뒷받침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다른 참고 얘기... "백두산도 수증기 폭발 위험".. 천지 물 + 마그마 = 대형 폭발 예측하기 어려운 열수·수증기 화산 폭발이 큰 희생을 불러온 사례는 또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지난 2014년 일어난 일본 온타케산 분화입니다. 일본 나가노(長野)현과 기후(岐阜)현 경계에 있는 온타케산은 2014년 9월 27일 정오쯤 갑자기 분화했습니다. 하지만 이전에 별다른 징후가 없어 일본 기상청은 경계 레벨을 올리지 않았고, 등산객들이 폭발에 휩쓸려 수십 명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벌어졌습니다. 한반도에도 '수증기 폭발' 위험성이 큰 화산이 하나 있습니다. 네, 백두산입니다. 단 이 경우 지하수 때문이 아닌 천지에 담긴 막대한 양의 물이 폭발 원인이 될 수 있다는 분석입니다. 대형 칼데라호인 천지에는 무려 20억 톤 정도의 물이 담겨 있습니다. 문제는 천지 아래쪽에서 마그마가 활동 중이라는 겁니다. 호수에서 5~10km 아래에 서울시 면적의 2배의 마그마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마그마가 점점 위쪽으로 상승하다 천지의 막대한 물과 만나면 대폭발이 일어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 전체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재난이 될 것이라고 하네요. 하지만 남북 분단에 막혀 백두산에 관한 연구는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더구나 북한의 핵실험이 백두산 마그마 층을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까지 제기되는데요. 뉴질랜드의 재난이 한반도에서 되풀이되지 않도록 남북간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해 보입니다. /이재희 기자
3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환경오염",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2885  추천:0  2019-12-02
눈 내린 인도 해변?… 모래사장에 쌓인 흰 거품의 정체 2019.12.02.    슬퍼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1일 오염된 흰 거품 속에서 뛰노는 인도 남부 첸나이 마리나 해변의 어린이들. [AP=연합뉴스] 흰 거품으로 뒤덮인 인도 남부 유명 해변 모습이 공개돼 환경 오염에 경각심을 높이고 있다. 최근 인도 뉴델리 인근 강에서 발생한 흰 거품과 같은 현상으로 거품에는 각종 오염물질이 쌓인 것으로 보인다.  인디언 익스프레스 등 현지 매체와 AFP통신은 2일 인도 남부 타밀나두주 첸나이 인근 유명 휴양지 마리나 해변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 보도했다.  1일 오염된 흰 거품 속에서 뛰노는 인도 남부 첸나이 마리나 해변의 어린이들. [AP=연합뉴스] 사진 속 해변은 폭설이 내린 듯 흰 거품으로 뒤덮였다. 파도가 해변으로 거품을 밀어 올린 바람에 모래사장에는 흰 거품이 솜사탕처럼 두껍게 쌓였다.  타밀나두주 오염관리국은 폐수가 빗물과 만나면서 거품이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폭우로 물이 불어나면서 고농도 인산염이 포함된 하수, 정화되지 않은 오수 등과 뒤섞인 것이다. 이 물이 급류를 이루면서 바다로 흘러 들어가 거품을 만들었다고 오염관리국은 설명했다.  최근 타밀나두에서는 갑자기 쏟아진 비로 17명이 목숨을 잃었다. 폭우가 지나간 지난달 말, 마리나 해변 수 킬로미터가 며칠째 흰 거품으로 뒤덮였다. 거품에서는 악취도 진동하고 있다고 현지 매체는 전했다.  1일 인도 마리나 해변에 쌓인 오염된 흰 거품을 즐기는 인근 주민들. [AP=연합뉴스] 인근 수산업 종사자들은 '해변 거품 사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해변 근처에서 수산물 가게를 운영하는 폰 쿠마란은 "생선도 오염돼 질병을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사람들이 선뜻 생선을 사지 않는다"고 걱정했다.  하지만 인근 주민들은 거품의 위험성을 모른 채 해변을 뛰어다니고 있다. 어린이들은 온몸에 거품을 묻히며 장난을 치고 있고, 거품 속에 누워 사진을 찍는 등의 모습이 언론 카메라에 찍혔다.  해안연구센터 소속 과학자인 프라바카르 미슈라는 AFP통신에 "사람들은 그 위험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면서 "거품으로 들어가는 것은 건강에 절대로 좋지 않다"고 경고했다.  2019년 11월 3일 뉴델리 인근 흰 거품으로 오염된 야무나강에서 힌두교 의식에 따라 물에 몸을 담근 인도 여성. [로이터=연합뉴스] /이민정 기자
2    [별의별] - 100 = 100 = 3 = 량심 댓글:  조회:3086  추천:0  2019-12-02
  길에 흘린 100위안 100장 찾아주는데 3분 걸린 중국 양심 2019.12.02.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전동차 타고 가다 1만 위안 길에 흘린 노인 청소부와 교통 보조원, 행인 등이 모두 나서 100위안짜리 100장 찾아 돌려주는데 3분 소요중국에서 많이 듣는 말 중 하나로 ‘비에관시엔스(別管閑事)’란 말이 있다. 자신과 관계없는 일이라면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길에 쓰러진 사람을 보고도 지나치기 일쑤란 원성을 듣기도 한다.  중국 노인이 전동차 타고 가다 100위안짜리 100장 즉 1만위안을 길에 흘렸는데 행인들이 이를 3분 만에 주워 돌려줘 화제다. [중국 인민망 캡처] 그러나 길에 돈이 떨어졌다면 어떻게 되나. 여기에도 ‘비에관시엔스’가 적용될까. 혹시 앞다퉈 주운 뒤엔 슬그머니 사라지지는 않을까. 지난달 28일 장쑤(江蘇)성 쑤저우(蘇州)에서 100위안(약 1만 7000원)짜리 100장이 길바닥에 떨어지는 일이 발생했다.  이날 오전 11시 15분께 전동차(電動車)를 타고 쑤저우의 펑원(葑門)로를 지나던 루(陸)씨 노인이 실수로 주머니에 있던 100위안짜리 100장 즉 1만 위안을 길바닥에 흘리고 말았다.  중국 장쑤성 쑤저우의 한 노인이 전동차 타고 가다 1만위안을 흘리자 길을 지나던 행인들이 나서 줍고 있다. [중국 인민망 캡처] 처음엔 모르고 그냥 가다가 오토바이를 타고 뒤따르던 이가 알려줘 돌아왔다. 돈은 어떻게 됐나. 바람이 불어 돈이 이리저리 흩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은행 보안(保安)과 청소부, 교통 보조원, 길을 지나던 행인 등이 모두 나서 줍기 시작했다.  길에 흘린 100장의 100위안짜리가 한 장도 빠짐없이 모두 돌아오는데 걸린 시간은 3분이었다. [중국 인민망 캡처] 중국 인민일보(人民日報)는 2일 보도에서 정확히 3분 걸렸다고 했다. 한장도 빠짐없이 주워 주인을 돌려주는 데 걸린 시간이 그렇다. 루씨 노인은 “감사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중국 네티즌은 “바깥은 영하 13도인데 이렇게 따뜻할 수 있나”라며 찬사를 보내고 있다.  /베이징=유상철 특파원
1    [별의별] - "부자 거지" 댓글:  조회:3066  추천:0  2019-12-02
  노숙자 배낭 들추니 2억 돈다발이? '부자' 거지 화제 2019.12.02.    화나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화제의 인물' [서울경제] 노숙하는 거지를 잡고 보니 그의 배낭 안에서 1억 9,450만 루피아(1,630만원)의 지폐 다발이 나와 화제다.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진 일이다. 2일 자카르타포스트와 콤파스에 따르면 지난달 29일 오전 자카르타 간다리아 지역에서 구걸하던 거지 묵리스 묵타르 브사니(65)가 남자카르타 사회복지국의 단속에 적발됐다. 당국이 이 거지를 잡고 보니 그의 배낭 안에서 1,000만 루피아(84만원)씩 묶인 지폐 뭉치 18개 등 총 1억9,450만 루피아가 나왔다. 수도 자카르타의 월 최저임금이 394만여 루피아(32만8,000원)인 점을 고려하면 매우 큰 돈임을 알 수 있다. 지방 최저임금은 자카르타의 절반 이하인 곳도 많다. 그는 처음에는 ‘일해서 번 돈’이라고 주장했지만, 결국 구걸해서 모은 돈임을 인정했다. 묵리스는 구걸로 모은 동전과 소액권 지폐가 50만 루피아(4만2,000원)가 되면 은행에 가서 큰 단위 지폐로 바꿔 배낭에 보관했다고 말했다.  자카르타 조례상 거지가 구걸하는 행위와 거지에게 돈을 주는 행위 모두 금지된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전경 / 로이터연합뉴스 묵리스가 사회복지 당국에 붙잡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2017년에도 8,600만 루피아(720만원) 돈다발을 소지한 채 거리에서 구걸하다 적발됐다. 묵리스는 가족이 있지만 거리에서 노숙 생활을 이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적발 당시 공무원들은 그를 복지센터에 보호하다 “다시는 구걸하지 않겠다”고 약속받은 뒤 모은 돈과 함께 가족에게 인계했다.  당국은 이번에도 가족이 그를 데리러 오면 모은 돈과 함께 인계할 계획이다. 지방 정부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거지에게 돈을 주지 말라고 거듭 당부했다. /강신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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