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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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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화가의 사랑엽서 400통... 댓글:  조회:3467  추천:0  2019-12-12
미술   수수께끼 화가 - 구스타프 클림트 미술이야기                   구스타프 클림트 구스타프 클림트 구스타프 클림트는 수수께끼 같은 화가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그림에 대해 한번도 설명한적이 없고, 인터뷰도 하지 않았으며, 사생활은 철저히 숨겨서 수수께끼화가라는 말이 붙은 화가이기도 하다. 그의 그림은 더욱더 매력적으로 느껴졌고, 그가 죽은 뒤 50년뒤 재평가 되면서부터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화가로 손꼽기도 되었다.    어린시절을 알 수 없는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어린시절에 대해서도 자세한것을 알기가 어렵다. 클림트가 자서전을 쓰지도 않고 인터뷰를 하지도 않았으니 어린시절을 짐작할 수 없는 화가는 아마 유일할 듯 하다. 그는 1862년 빈근교의 바움가르텐에서 7남매중 둘째로 태어났고, 그의 아버지는 보헤미아 출신의 귀금속 세공사이자 조각가라고 한다. 그가 나중에 금을 이용하여 모자이크 작업을 할때 아버지의 수공예품에 대한 기억이 크게 도움이 되었으리라 생각이 들만큼, 아버지의 직업과 먼훗날 작품에 연관성이 크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미술작품 클림트의 작품중 가장 유명한 작품인 라는 작품이다. 꽃이 흩뿌려진 작은 초원위에 서 있는 두 여인은 주변과 분리되어 그들을 마치 후광처럼 둘러싸고 있는 금빛 아우라 안에서 서로에게 황홀히 취해 있기도 하다.  '금'에 내재된 마술적 혹은 종교적인 함축성뿐 아니라 절대적인 부와 물질 가치의 상징성을 극대화 하고 있다는점이기 때문에 작품의 내용보다 형태의 물질적인 면을 중요시 여기는 작품이기도 하다. 두 인물 사이의 관계에서 연인의 머리를 잡고 자신에게 향하게 하여 그녀의 볼에 입맞추고 있는 남자의 남성성이 특히 강조되고 있다. 클림트는 입맞춤하고 있는 남녀의 얼굴은 전통적인 사실주의로 처리하였지만, 그들의 의상과 배경에는 타원, 삼각형, 곡선과 소용돌이의 문양과 다양한 색채를 모자이크처럼 배치하여 장식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클림트는 많은 초상화를 주문받아 그렸다고 한다. 하지만 결코 짧은시간에 완성을 하는것이 아닌, 한 작품 당 보통 6개월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고, 초상을 그림에 있어서도 의뢰인의 사실적인 인물묘사에만 치중하지 않고 의상, 행동, 화면의 분위기까지 고려한 신중한 작업을 하였다고 한다. 인물의 입체감과 공간감이 발견되면서 클림트의 초상화의 실력을 날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일반적인 캔버스보다 세로의 비율이 긴 화면을 많이 사용해서 인물을 제외한 배경의 공간을 줄여서 평면성을 두드러지게 하는 효과를 주기도 한다. 아마 클림트의 초상화의 특징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클림트의 사랑 예전 TV 서프라이즈에 클림트에 대한 이야기가 공개된적이 있다. 클림트의 걸작에 관한 비화가 방영이 되면서, 클림트의 숨기고 있던 사랑도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었던 날이다.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는 여러 여자모델들의 누드화를 그려내기도 했다. 그런 그가 그릴 수 없었던 한 여인이 있었으나 바로 연인 에밀리 플뢰게라고 한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에밀리에게 반하고 나서부터 알 수 없는 무기력에 빠지고, 클림트는 에밀리 몰래 다른 여자들을 만나며 영감을 얻기 시작했고, 그의 관능적인 그림은 그때부터 계속해서 탄생했다고 한다.   처음부터 그러진 않았다. 클림트는 에밀리에게 연애 감정을 느끼면서 400통이 넘는 엽서를 보내며 마음을 전하기도 했었지만,  카사노바 화가 클림트가 에밀리 앞에만 서면 쑥맥이 되고 키스도 할 수 없는 남자가 되어버려서 자신 스스로가 바보같이 느껴지게 되었고 그 후로 에밀리 앞에만 서면 자책을 수도 없이 했다고 한다.  누드화를 즐겨 그리던 클림트는 에밀리가 수수하고 청순했기에 누드화를 그릴 수 없었고, 관능적인 누드화를 그리고 싶어서 구상이 되지 않았고, 다른 여자들은 클림트의 누드화를 좋아했고, 다른여자들을 만나서 그림을 그리게 되어버리지만 에밀리에게 들켜버리고 만다. 그렇게 그녀가 떠난 후 그림에만 몰두한 2년안에 탄생한 작품이 바로 라는 작품이다. 남자는 자기 자신을 그렸는데 에밀리가 자신을 떠날 것 같은 모습을 절벽에서 위태롭게 키스를 하는 남녀를 표현한거라고 한다.    위에서 이 그림을 소개할 땐 우주속에 갇혀 있고 황홀한 남녀를 표현한거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클림트의 그림속 비화를 알고 나니 이 그림이 슬퍼지게 보이는건 왜일까 라는 생각이 든다. 절벽끝에 내몰린 여자의 발이 아슬아슬 해보이기만 하고, 알려지지 않은 클림트의 뒷 이야기를 들으니 내심 재미있고 슬프고 안타깝기만 하다.        
3    [세계는 지금] -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 = 23 댓글:  조회:1665  추천:0  2019-12-12
구스타프 클림트 그림 '여인의 초상' 23년만 무사 회수 도난된 미술관 담쟁이벽 사이에서 발견 (서울=뉴스1) 이원준 기자 | 2019-12-11          구스타프 클림트 '여인의 초상' © 뉴스1 이탈리아 피아센자(피아첸차)에서 도난당했던 구스타프 클림트의 유화 '여인의 초상(Portrait of a Lady)'이 무사히 발견됐다. 1997년 2월 22일 전시준비중이던 피아센자의 리치오디 현대미술관서 깜쪽같이 사라진지 거의 23년만이다. 이 작품은 오스트리아 화가 클림트의 초기작(1917년)으로 가치는 6000만유로(약 788억원)를 호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11일 BBC 방송 등에 따르면 그림은 미술관 벽면의 담쟁이 덩굴을 제거하던중 드러났다. 그림은 검은 가방에 담긴채 보호용으로 보이는 철판아래 가려져 있었다. 미술관측은 초기검수를 통해 진품임을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23년동안 숨겨져 있었으나 손상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방송은 전했다.   경찰측은 도난범들이 경찰 수사나 언론의 관심이 줄어들면 찾아가려 같은 장소에 은닉해 놓은 것으로 추정했다. 도난범들은 당시 지붕의 채광창을 통해 미술관에 진입하고 달아난 것으로 보인다. 지붕위에는 이들이 버리고 간 빈액자만 놓여 있었다. 이후 20여년간 도난범이나 그림에 관한 어떤 소식도 나온 바 없다.  미술평론가 비토리오 스가르비는 현지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구스타프 작품 회수는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다"고 환호했다.  ======================/// 도난당한 줄 알았던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이 원래 전시됐던 미술관 벽 틈에서 22년 만에 나타났다. 이탈리아 안사(ANSA)통신은 10일(현지 시간) 피아첸차의 리치 오디 현대미술관에서 1997년 분실됐던 클림트의 ‘여인의 초상’(사진)으로 추정되는 작품이 발견됐다고 전했다.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당일 미술관 정원사가 건물 외벽의 담쟁이덩굴을 정리하던 중 벽에 붙어 있는 금속판을 발견했다. 이를 열어 보니 건물 내벽과 외벽을 잇는 틈이 보였고 거기에 검은색 봉지가 있었다. 정원사는 “처음에는 쓰레기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로라 본판티 미술관 부관장은 “작품 뒷면에 있는 밀랍 봉인이나 도장으로 봐서는 진품 같다”며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 될 듯하다”고 말했다. 진품이라면 그 가치는 6000만 유로(약 793억6920만 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피아첸차 문화자문위원회 관계자는 도둑이 작품을 훔쳤다가 되돌려놨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이 관계자는 라퍼블리카에 “도난 직후 당시 미술관, 정원 모든 곳을 샅샅이 수색했다. 가장 이상한 점은 작품 상태가 아주 좋다는 것이다. 22년간 이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여인의 초상’은 사라지기 약 10개월 전인 1996년에 클림트가 다른 작품 위에 그린 유일한 작품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당시 엑스레이 분석 결과 ‘여인의 초상’은 1912년 도난당한 것으로 추측됐던 클림트의 또 다른 작품인 ‘젊은 여인의 초상’ 위에 그린 그림인 것으로 밝혀졌다. ///동아일보    
2    오스트리아 "수수께끼"같은 화가 - 클림트 댓글:  조회:2589  추천:0  2019-12-12
인물세계사 구스타프 클림트 오스트리아 화가 [ Gustav Klimt ] 출생 - 사망 1862.7.14. ~ 1918.2.6. 1897.4.3 클림트 회장으로 한 빈 분리파가 공식적으로 창설되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수수께끼 같은 화가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그림에 대해 한번도 설명한 적이 없고, 인터뷰도 하지 않았으며, 사생활은 철저히 숨겼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그림이 풍기는 매력이 한층 돋보이게 된 것일까? 사후 50년 후부터 재평가 되기 시작하더니 언제부턴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화가로 손꼽히게 되었다.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겐 자유를", 예술도시 빈에 새바람 불다 세계 미술사에서 ‘분리주의’ 또는 ‘분리파’를 얘기하게 되면 당연히 구스타프 클림트를 떠올리게 된다. 예술사조 중에서 ‘분리파’라는 이름처럼 특이한 것도 없다. 통합이 아닌 분리를 이념으로 세울 수 있다는 말인가? 예술의 경우에는 ‘분리주의’가 있을 수 있다. 19세기 말 클림트를 비롯한 혁신적인 예술가들은 빈 미술가협회의 회원이었으나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중견과 원로들의 작품을 참을 수 없었다. 이들은 빈 미술가협회로부터 분리(독립)를 꿈꾸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권력이란 안정적인 활동을 보장하는 울타리가 되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감과 도전정신이 넘쳤던 클림트는 안주를 거부하고 ‘빈 분리파’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1897년 4월 3일, 클림트를 회장으로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공예가인 콜로먼 모저, 건축가 오토 바그너,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 등이 함께한 빈 분리파는 빈 미술가협회에 공식 통보하고 조촐한 창설식을 올림으로써 세상에 그 존재를 알렸다. 1898년경 빈 분리파의 창시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 서 있는 사람 왼쪽부터 요제프 호프만,카를 몰,클림트,알프레드 롤러,신원 불명,콜로만 모저(왼쪽), 클림트가 만든 제1회 분리주의 포스터. 분리파 예술가를 상징하는 테세우스가 전통 예술가를 상징하는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치고 있다(오른쪽) ‘빈 분리파’가 분리파의 처음은 아니었다. 1892년 독일의 프란츠 폰 슈투크를 중심으로 ‘모나코 분리파’가 창설되었으며, 1893년에는 막스 리베르만을 중심으로 ‘베를린 분리파’가 이미 창설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리파 하면 ‘빈 분리파’가 떠오르는 것은 클림트라는 거장이 있었기 때문이며, 그의 제자 에곤 실레와 오스카 코코슈카가 있었기 때문이다. 1897년 빈 분리파가 결성되면서 클림트의 작품은 혁신적으로 바뀌게 되며, 그의 작품세계는 예술의 도시 빈에서 집중 조명을 받았다. 결국 빈 분리파의 등장은 빈이 음악의 도시에서 예술의 도시로 이미지를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빈 분리파는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라는 표어를 내세워 매너리즘에 빠진 미술가협회에 맞섰다. 그들은 이제 검열에 통과하려고 애쓰지 않았고 오직 진실만을 생각하고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솔직하고 대담하게 그렸다. 빈 분리파는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되는 수공예를 위한 투쟁이기도 했다. 이들은 ‘부자를 위한 예술과 가난한 자를 위한 예술’을 일치시키고자 했고, 감각적인 예술을 추구했다. 아울러 모든 예술 영역의 요소들을 이용하여 종합예술작품을 만들고자 했으며 나아가 자신들의 작품으로 사회를 변혁하려 했다. 바야흐로 유럽 작단의 아틀리에에 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었다. 탄탄한 기본기를 닦은 어린 시절, 청년 시절에는 최고의 역사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자세한 것을 알기 힘들다. 클림트가 자서전을 쓴 적도 없고 인터뷰 한 적도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린 시절을 짐작할 수 있는 기본적인 사항이 그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는 1862년 7월 14일 빈 근교의 바움가르텐에서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보헤미아 출신의 귀금속 세공사이자 조각가였다. 그가 나중에 금을 이용하여 모자이크 작업을 펼칠 때 아버지의 수공예품에 대한 기억이 크게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클림트는 또 오페라 가수인 어머니에게서 음악에 대한 열정을 물려받았다. 천재 베토벤을 기념하는 위대한 작품을 만든 것도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음악에 대한 열정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클림트의 집안은 다복했으나, 1873년 경제위기의 여파로 형편이 어려워지게 된다. 1876년 클림트는 빈 응용미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1883년까지 이 학교에서 모자이크 기법이나 금속을 이용하는 방법, 그리스의 도자기 미술, 이집트와 바빌론의 부조, 슬라브 민속학 등 수세기에 걸친 다양한 장식 기법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고, 이 또한 훗날 다양한 실험을 전개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이 시기에 클림트가 특히 매료된 것은 한스 마카르트로 대표되는 역사화였다. 역사화는 거대한 스케일을 자랑하면서도 섬세한 필치가 보는 이를 압도하는 장르였다. 특히 ‘예술의 연인’이자 ‘빈의 우상’인 한스 마카르트의 그림은 모호하면서도 지극히 매혹적이었다. 빈 대학의 천장화로 사용하기 위해 그린 그림,,중 유일하게 그 밑그림이 남아있는 (1900년)(왼쪽), (1900년)(가운데),(1903년)(오른쪽). 클림트는 한스 마카르트를 능가하는 재능을 갖고 있었다. 1883년 클림트는 남동생 에른스트 클림트와 친구 프란츠 마치와 함께 의뢰 받은 작품을 그렸다. 당시 왕실에서는 각 지역에 새로운 건축물을 건설하거나 수리할 때 실내에 적절한 그림을 그려 넣곤 했다. 세 예술가는 트란실바니아의 펠레스키 왕궁, 헤름스빌라의 침실 등 빈의 저택들을 ‘한스 마카르트의 스타일’로 장식했다. 1886년 클림트는 기념비적인 작품을 착수하게 되는데, 그것은 부르크 극장을 장식하는 작업이었다. 1888년에 완성된 은 등장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세밀한 초상을 섬세하게 그려 넣어 보는 이들을 경탄케 했다. 이 작업으로 인해 황제에게 특별격려상인 황금공로십자훈장을 받았고, 그들의 명성은 빈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892년 동생 에른스트가 죽자 클림트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구가 생기지 않았다. 이 휴지기가 어쩌면 클림트에게 사고의 깊이를 확보하게 한 기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동생의 죽음으로 깊이 파인 가슴을 쓸며 클림트는 인간의 운명과 구원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였다. 1895년 클림트가 다시 붓을 들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상징주의자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그는 상징과 알레고리를 통해 현실을 풍자하고 인간의 운명을 암시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 클림트는 교육부에서 의뢰 받은 빈 대학의 대강당을 장식할 내용을 구상하고 있었다. 오랜 구상 끝에 마치와 클림트는 첫 천장 도안을 제출했다. 마치는 중앙과 신학 부분을 작업하고, 클림트는 철학, 의학, 법학 부분을 맡았다. 나중에 이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 빈의 미술계는 뜨거운 스캔들에 휩싸이게 된다. 빈 분리파의 전성시대, 불후의 걸작 를 역사 속에 각인 시키다 클림트는 개성이 강한 예술가였다. 한스 마카르트의 작품에 매료되어 한동안 역사화를 그렸지만, 그것은 어차피 종합예술로 표현되는 자신의 예술세계로 가는 과정이었다. 빈 미술가협회의 보수적인 태도에 반감을 느낀 클림트는 1896년 요제프 엥겔버트, 카를 몰과 함께 분리파의 기원이 되는 연합회를 처음으로 기획했고, 이듬해에는 빈 분리파를 공식적으로 창설했다. 이제 클림트는 빈 분리파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준비해야 했다. 클림트를 비롯한 분리파 예술가들은 대규모 전시회를 기획하는 한편 모나코 분리파가 만드는 잡지 와 유사한 잡지를 기획했다. 이듬해 빈 분리파는 제1회 분리주의 전시회를 개최했으며 잡지 을 창간했다. 1898년 3월 23일, 한 원예회사 가건물에서 제1회 분리주의 전시회 개회식이 간소하게 열렸다. 개회식에 황제가 참석하여 축하하는 자리에서 분리파 예술가들이 적절한 선을 넘지 않는다면 새로운 예술 활동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클림트는 ‘적절한 선을 넘지 않는다면’이라는 단서가 불편하긴 했다. 포스터를 만드는 과정에서 그 ‘적절한 선’을 넘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 포스터는 젊은 예술가를 상징하는 테세우스가 전통 예술가를 상징하는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치는 장면을 그린 것이었는데, 테세우스의 성기가 노출되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클림트는 그 앞에 나무를 그려 넣어 성기를 가려서 검열에 통과했었다. 제1회 분리주의 전시회는 5만7천여 명의 관람객이 방문하고 218점의 작품을 판매하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면서 끝을 내었다. 이제 클림트의 명성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 해 빈 분리파가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그들만의 공간인 ‘분리파관’이 지어졌다. 건축가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가 전시한 이 건물은 오늘날에도 빈의 문화적 상징물이 되었다. 의 마지막 부분 1902년 제14회 분리주의 전시회는 분리파 역사에서 정점을 이룬다. 이 전시회는 천재 음악가 베토벤에게 헌정되었는데, 이 전시회야말로 클림트가 기획한 종합예술작품을 지향하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요제프 호프만이 전시실 내부 장식을 맡았고, 개막일에는 구스타프 말러가 베토벤 9번 교향곡의 모티프로 편곡한 작품을 직접 지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전시회의 백미는 무엇보다도 클림트가 베토벤의 을 모티프로 그린 벽화 였다. 벌거벗은 여인들의 고통스런 모습으로 시작되는 그림은 온갖 악마의 위협적인 공간을 지나, 마침내 합창하는 여인들 사이에서 두 남녀가 뜨겁게 포옹하고 키스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한 영웅이 무절제한 여인들의 유혹과 악마들의 방해를 물리치고 마침내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구원받는다는 이야기를 담은 이 작품이야말로 클림트가 꿈꾸는 유토피아의 실현, 예술에 대한 끝없는 갈망과 사랑을 노래한 상징주의의 절정이었으며 다양한 기법을 활용한 응용미술의 극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난잡함과 향락과 무절제가 그려진 이 작품에 대해 관람객들은 반감을 일으켰고, 그들의 싸늘한 시선은 빈 분리파의 열정을 얼어붙게 했다. 빈 분리파에서도 분리된 자유인, 고집과 뚝심으로 혼자가 되는 것을 즐기다 클림트에게 또 다른 시련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빈 대학의 천장 도안으로 그린 , , 시리즈 때문이었다. 클림트는 나체의 임신부를 비롯한 벌거벗은 사람들, 혼돈 속에서 무기력하게 떠도는 사람들의 이미지를 통해 병에 들고 죽음을 두려워하고 고뇌에 찬 인간의 불안한 심리와 필연적인 운명과 삶의 부조리를 표현했다. (1907~1908),빈 오스트리아 미술관 소장 1903년 이 완성되자 클림트의 작품들은 대학 건물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판정을 받았다. 클림트는 그 작품들을 새로 건축한 현대미술관에 전시할 것을 제안 받았지만, 본래 그림의 목적과 어긋나는 일이라며 거절하였다. 클림트는 이렇게 나체와 성을 대담하게 표현하면서 대중의 고상한 취향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의 인기는 식어갔고, 빈 분리파 안에서도 지지를 잃었다. 클림트는 1904년 빈 분리파 전시회에 를 출품하는 것을 끝으로 이듬해에는 빈 분리파를 떠나고 만다. 빈 분리파를 떠났다고 해서 분리파 이념까지 버렸다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때부터가 진정한 분리파를 실현한 시기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권력화된 분리파로부터도 분리되는 것이 진정한 분리파의 이념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물론 클림트를 추종하는 몇 명의 예술가와는 계속해서 교류했지만, 이제 클림트를 막을 수 있는 단체는 없어졌다. 이때부터 클림트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활을 누리게 되는데, 대가에게는 그것이 또한 최상의 작업 조건이 되었다. 그는 어차피 단체와는 어울리지 않는 누구보다도 고집 센 사람이었고, 더욱이 어떤 것에도 얽매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제 독창적인 예술세계에 몰두하여 특별한 세계를 구축해나갔다. 그리하여 (1907~1908), (1907~1908) 등 이른바 ‘황금 시기’의 대작과 클림트의 예술세계를 더욱 풍요롭게 해주는 풍경화를 포함한 명작들이 우리 앞에 선보이게 된 것이다. 자유로운 성생활의 이면에 존재한 영원한 소년이 되고 싶은 '피터 팬' 클림트는 평생 혼인하지 않고 많은 여인들과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14명의 여인들이 친자확인소송을 냈다. 많은 모델들과 관계했지만 그는 어쩌면 진정으로 안주할 여인을 찾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혹은 혼인하여 아기를 낳고 생활에 안주하는 것 자체가 스스로에게 부담되는 일이었을까? 클림트의 전기작가들도 그가 영원한 피터 팬이 되고 싶어했다고 짐작한다. 그것은 그가 오히려 사랑에 관한 한 이상주의자였음을 말해준다. 이상적인 사랑은 쉽게 오지 않는 것, 클림트에게는 이상적인 사랑을 나눌 만한 모델은 없었다. 오직 한 사람, 에밀리 플뢰게라는 여인은 클림트의 진정한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 플뢰게는 클림트와 늘 함께한 정신적 반려였지만, 두 사람이 육체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클림트의 명작 의 여주인공이 플뢰게라고 짐작하고 있다. 아터 호수에서 플뢰게와 클림트, 그리고 친구들(좌), 1903년 무렵의 클림트(우) 실로 는 남녀가 열정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장면 같지는 않다. 여성이 수동적인 것을 넘어서 오히려 거부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남자는 입술이 아니라 볼에 키스하고 있다. 입술을 굳게 다문 여성의 표정도 황홀함과는 거리가 멀다. 더욱이 두 사람은 몸을 잘못 놀리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되는 절벽 위에서 키스하고 있다. 결국 는 클림트가 꿈속에서 그려본 이상적인 여인인 플뢰게와의 사랑을 그린 것이 아닐까? 아직도 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작품의 신비함에 이끌리고 더 황홀해하는지도 모른다. 1918년 1월 11일 클림트는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그는 다급하게 “미디를 오라고 해!”라고 소리쳤다. 미디는 에밀리 플뢰게의 애칭이었다. 플뢰게는 급히 달려와 클림트가 저세상으로 갈 때까지 그의 마지막을 지켜주었다. 2월 6일 클림트가 죽은 후 플뢰게는 많은 서신들을 태워 그의 비밀을 없앴다고 한다. 플뢰게는 1952년 세상을 뜰 때까지 구스타프의 추억을 안고 살았다. 클림트의 마지막에는 또 혈육 못지않게 절친했던 에곤 실레가 함께했는데, 실레는 클림트의 마지막 모습을 그림 속에 담았다. 묘하게도 빈 분리파의 주축 멤버였던 오토 바그너, 콜로만 모저, 그리고 에곤 실레도 같은 해에 죽었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속에 숨은 이룰 수 없는 사랑과 자유를 향한 열망 구스타프 클림트는 생전에 이미 유명 작가였지만, 한편으로는 영욕이 교차하는 경험을 거듭했다. 그가 빈번하게 그린 나체와 섹스 장면이 줄곧 문제되었던 것이다. 클림트 사후 약 50년 동안 클림트나 그의 동료이자 제자인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의 작품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 클림트는 무덤에서 벌떡 일어서게 된다. 20세기의 세기말이 19세기의 세기말과 비슷해서일까? 클림트의 작품들이 급부상하더니 클림트는 이제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화가가 되었다. 한때는 외설로 여겨졌던 것이 지금은 참으로 부드러운 낭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실로 그의 작품 앞에 서면 인간의 육체가 발하는 미묘한 숭고함을 느낄 수 있다. 클림트의 전기를 쓴 니나 크랜젤은 이렇게 말한다. “빈이 낳은 유명한 예술가 클림트가 만약 자신의 작품이 현재 얼마나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지 볼 수 있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그는 지금 오스트리아 예술의 간판스타로 이름을 올렸고, 그 당시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었던 작업 방식은 일상 문화의 일부로 자리잡았다.” 그의 그림에 나왔던 모티프들은 다양한 상품으로 둔갑하여, 넥타이, 열쇠고리, 도자기, 게임용 카드, 퍼즐 등으로 다시 나온다. 우리는 다양하게 다가오는 그의 생애와 예술을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즐긴다. 그는 수수께끼를 내는 스핑크스인지도 모른다. 다행히 이 스핑크스는 우리가 답을 맞히지 못하더라도 우리를 죽이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그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고민하고 즐길 뿐이다. 그의 그림을 즐기다가 우리는 문득 그가 향락 속에 빠진 듯한 생활 속에서도 진정한 사랑과 자유를 갈구했음을, 끝내 그것들을 구할 수 없었음을 가슴 아프게 확인하고야 만다. 그러나 그의 작품만은 인간 구원의 황홀경을 참으로 숭고하면서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구스타프 클림트에 열광하는 이유가 아닐까? 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을 직접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주어졌다. 2009년 2월2일부터 5월15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구스타프 클림트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명작 를 구경할 수 없는 것은 아쉽지만, 대작 와 , , 그리고 필자에게 특히 인상 깊었던 풍경화 등 수많은 걸작들을 포함하여 종합예술을 추구했던 클림트의 면모를 유감없이 구경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베토벤의 을 들으며 를 오랫동안 구경했던 추억을 필자는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을 해설한 책은 매우 많으며, 각자 나름대로 훌륭하다. 한국의 필자들이 쓴 몇 권의 책은 클림트의 인기만큼이나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클림트의 생애를 소설화한 책도 있다. 클림트에 관한 여러 책 중에서 필자는 두 권을 소개한다. 다른 책들이 클림트의 생애보다는 예술세계를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되었다면, 다음 두 권의 책은 클림트의 생애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크게보기 구스타프 클림트 에바 디 스테파노 저 김현주 역 예담 2006.06.15. 상세보기 에바 디 스테파노의 는 클림트의 생애를 비교적 자세하게 기술했을 뿐만 아니라, 본문에 언급되는 그림을 거의 수록하고 있기 때문에 클림트의 예술과 생애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데 매우 요긴하다. 가치평가를 많이 하지 않고 사실 위주로 기술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자율적으로 판단하도록 유도한다는 점도 좋다. 크게보기 구스타프 클림트 질 네레 저 최재혁 역 마로니에북스 2005.06.05. 상세보기 니나 크랜젤의 또한 클림트의 생애와 예술을 입체적으로 조명한 책이다. 당시의 시대상황부터 오늘날 빈 분리파가 새롭게 각광받는 것의 의미까지를 재미있으면서도 설득력 있게 기술하였다. 자유분방한 생활 속에서도 이상적인 사랑을 찾아 헤매는 클림트의 진정한 꿈을 잘 보여주는 책이다.     관련이미지 17                                               구스타프 클림트 이미지 갤러리 [네이버 지식백과]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 오스트리아 화가 (인물세계사)   ========================/// 두산백과 구스타프 클림트   [ Gustav Klimt ] 요약 오스트리아의 화가. 아르누보 계열의 장식적인 양식을 선호하며 전통적인 미술에 대항해 ‘빈 분리파’를 결성했다. 관능적인 여성 이미지와 찬란한 황금빛, 화려한 색채를 특징으로 하고 성(性)과 사랑, 죽음에 대한 알레고리로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이미지 크게보기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출생-사망 1862.7.14 ~ 1918.2.6 국적 오스트리아 활동분야 회화 출생지 오스트리아 바움가르텐 주요작품 《유디트 Judith》(1901),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Portraitof Adele Bloch-Bauer》(1907), 《입맞춤 The Kiss》(1907~1908), 《다나에 Danaë》(1907~1908) 구스타프 클림트는 1862년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바움가르텐에서 태어났다. 보헤미아에서 이민 온 그의 아버지는 금세공사이며 판화가였지만 그리 성공하지는 못해 클림트의 어린 시절은 가난하고 우울했다. 14세 때인 1876년 빈 응용미술학교에서 회화와 수공예적인 장식 교육을 받았다. 1883년 졸업 후에는 그의 동생 에른스트(Ernst)와 동료 학생인 프란츠 마치(Franz Matsch)와 함께 공방을 차려 공공건물에 벽화를 그리는 일을 했다. 그는 1880년대 말경 빈에 새로 들어선 국립극장과 미술사박물관에 장식화를 그려 건축 장식미술의 대가로 자리를 굳혔다. 클림트는 1892년 아버지와 동생 에른스트의 죽음으로 정신적인 동요를 겪으며, 인상파와 상징주의 등 다양한 아방가르드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순수와 응용이라는 이분법을 넘어 총체적인 예술을 지향했다. 1897년 당시 보수적인 미술 단체의 일원이었던 클림트는 낡고 판에 박힌 사상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고, 미술과 삶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인간의 내면에 접근하고자 하는 ‘빈 분리파’를 결성하고 초대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에곤 실레(Egon Schiele),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칼 몰(Carl Moll), 오토 바그너(Otto Wagner) 등 당대 오스트리아를 선도한 화가, 디자이너, 건축가들이 빈 분리파에 참여했다. 클림트의 작품은 관능적인 여성 이미지와 찬란한 황금빛, 화려한 색채를 특징으로 한다. 그는 성(性)과 사랑, 죽음에 대한 풍성하고도 수수께끼 같은 알레고리로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극적인 에로티시즘을 강조했다는 이유로 강력한 항의를 받기도 했다. 1900년부터 1903년까지 빈 대학교 대강당의 천장에 차례로 그린 우의적인 장식화 《철학》, 《의학》, 《법학》은 그 외설성으로 인해 빈 대학교 교수들과 정면충돌하는 사태를 빚었다. 이 일로 그는 공공작품을 의뢰받지 않았으며, 기하학적이고 지적인 추상 양식으로 변모해갔다. 클림트는 빈 분리파가 더 이상 본래의 취지에 충실하지 못하고 있음을 목격하고는 이에 낙담하고 1905년 빈 분리파를 탈퇴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이른바 ‘황금시대’를 여는 시발점이 되었다. 클림트는 이탈리아 라벤나의 모자이크와 장식적인 패턴, 금을 사용하여 눈에 띄는 독창적인 양식을 발전시켰다. 이 시기의 그의 작품은 실생활에 거리를 두고 신비로운 것과 정신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어 매우 화려하고 역동적이며, 에로틱한 요소와 강렬한 상징주의 등을 지속시켜 나갔다. 클림트는 1918년 1월 11일 갑작스런 뇌출혈이 있은 후, 같은 해 2월 6일 일련의 합병증으로 병원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56세였다. 주요 작품에는 《유디트 Judith》(1901), 《프리차 리들러의 초상 Portrait of Fritsa Reidler》(1906),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Portrait of Adele Bloch-Bauer》(1907), 《입맞춤 The Kiss》(1907~1908), 《다나에 Danaë》(1907~1908), 《아담과 이브 Adam and Eve》(1917~1918) 등이 있다. 참조항목 상징주의, 아르누보, 키스, 유디트, 다나에, 나무 아래 장미가 있는 풍경, 빈 분리파 역참조항목 코코슈카, 에곤 실레, 프리차 폰 리들러, 아담과 이브 카테고리 지역 > 유럽 > 오스트리아 인물 > 미술 > 기타서양미술 관련이미지 3                               이미지 이전 입맞춤오스트리아의 화가 클림트의 작품. 1907-1908년. 캔버스에 은박, 금박, 유채. 180 x 180cm. 빈미술사미술관 소장. 이미지 갤러리 출처: corel [네이버 지식백과]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두산백과)   ==============================/// 도난당했던 그림 되찾다... 이탈리아의 한 미술관에서 도난당한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이 22년 만에 미술관 벽 속에서 발견돼 화제를 낳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북부 도시 피아첸차의 리치 오디 갤러리 앞 정원에서 한 인부가 건물 외벽을 덮은 담쟁이덩굴을 가지치기하다 우연히 검은 쓰레기봉투에 담긴 그림 한 점을 발견했다고 ANSA 통신이 보도했습니다. 이 그림은 '아르누보의 대가'로 불리는 오스트리아 출신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가 1917년에 그린 젊은 여인의 초상화로 1997년 2월 리치 오디 갤러리에서 도난당했습니다. 갤러리 관계자는 "당시 갤러리 전체를 샅샅이 뒤졌는데도 흔적조차 찾지 못했던 그림이 인적이 드문 벽 속에 고스란히 감춰져 있었다는 게 신기하다"며 "그림 상태가 매우 훌륭하다"고 말했습니다. 이탈리아 미술계에선 이 그림이 1969년 시칠리아의 한 성당에서 홀연히 사라진 카라바조의 그림에 이어 두 번째로 가치 있는 도난 미술품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경찰은 전문가에 감정을 의뢰해 그림의 진품 여부를 확인할 계획입니다.
1    [세계속에서] - 왕과 서민, 서민과 왕... 댓글:  조회:2858  추천:0  2019-12-12
오바마, 베트남 현지 식당서 뜻하지 않게 공짜 밥 먹은 사연 2019.12.12.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지난 2016년 베트남 하노이에서 미국의 스타셰프 앤서니 부르댕과 분짜 저녁식사를 하고 있다. [앤서니 부르댕 트위터 캡처]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부부가 베트남 호치민시에 있는 한 서민식당에서 의도치 않게 공짜 밥을 먹었다.  12일 현지 온라인 매체 VN익스프레스에 따르면 오바마 전 대통령 부부는 지난 11일 오후 호치민시 당떳 거리에 있는 '꾹각'이라는 식당을 찾아 저녁 식사를 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돼지고기 스튜, 스프링롤, 신맛이 나는 수프 등 베트남 전통 음식을 1시간여 동안 즐긴 뒤 카드로 밥값을 내려고 했다.  하지만 이 식당 매니저는 음식값 계산을 정중하게 사양했다. 그는 "오늘 음식에 들어간 재료를 모두 우리 농장에서 길러 돈이 별로 안 들었다"면서 "집에 온 손님처럼 대하고 싶다"고 말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매니저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식당을 떠나기 전 주방장과 기념사진을 찍으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오바마 전 대통령 부부는 이번 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리는 오바마 재단 행사에 참석하기에 앞서 지난 8일부터 베트남을 방문하고 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재임 중이던 2016년 베트남을 공식 방문했을 때 들러 전통음식인 분짜를 먹었던 식탁과 식기 등이 유리 상자 안에 전시 보존되고 있다. [연합뉴스] 오바마 전 대통령은 현직에 있던 2016년 5월 베트남을 공식 방문했을 당시 수도 하노이 하이바쯔엉구의 팜딩호 거리에 있는 식당 '분짜 흐엉 리엔'에서 미국 유명 셰프 앤서니 부르댕과 저녁 식사로 '분짜'를 먹어 화제가 됐다. 분짜는 현지식 소스에 쌀국수와 숯불에 구운 돼지고기를 적셔 먹는 음식이다.  그들은 등받이가 없는 파란색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분짜와 함께 현지 맥주 1병을 곁들인 뒤 6달러(약 7100원)를 지불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의 이같은 서민 행보에 베트남 누리꾼은 열광했고 해당 식당은 관광명소가 됐다.  /김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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