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kim631217sjz 블로그홈 | 로그인
시지기-죽림
<< 3월 2020 >>
1234567
891011121314
15161718192021
22232425262728
293031    

방문자

검색날짜 : 2020/03/07

전체 [ 5 ]

5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온난화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288  추천:0  2020-03-07
온난화로 빙하가 녹으면...  2020.03.07.  슬퍼요  후속기사원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신종 감염병인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인해 전 세계가 감염병의 공포에 휩싸여 있습니다. 같은 시기 과학자들은 또 다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있습니다. 바로 온난화로 인한 문제들 입니다. 네덜란드 사진작가 프랜스 랜팅이 찍은 남극의 펭귄입니다. 온난화로 얼음이 녹아버려 눈 대신 진흙뻘을 뒤집어쓴 채 모여 있는 모습이 충격을 안겼죠. /사진=내셔널지오그래픽 SNS 지난달 16일 내셔널지오그래픽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네덜란드 사진작가 프랜스 랜팅이 찍은 사진들을 공개했습니다. 랜팅은 남극에 서식하는 펭귄들을 찍었는데 사진 속 펭귄들은 하나같이 하얀 눈이 아닌 진흙을 뒤집어쓰고 있었죠. 남극의 기온이 영상 20도까지 올라가면서 눈과 얼음이 녹아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올해 2월 4일과 같은 달 13일 남극 대륙 일부를 촬영한 위성사진입니다. 온난화로 인해 눈과 얼음(흰색 부분)이 녹아 없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죠. /사진=NASA 세계기상기구(WMO)에 따르면 남극은 현재 온난화가 가장 빠르게 진행되는 지역 중 하나입니다. 최근 50년 동안 평균 기온이 약 3도 올랐고, 최근엔 남극 기온이 사상 최고인 영상 20도를 기록했습니다. WMO의 추정에 의하면 남극의 빙하가 전부 녹아 없어질 경우 전 세계 해수면은 약 60m 상승한다고 합니다. 감염병으로 시작해 갑자기 온난화 이야기를 꺼낸다니 다소 뜬금없을 수 있지만, 감염병과 온난화는 밀접하게 연결돼 있죠. 과학자들, 특히 바이러스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이 온난화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온난화로 인해 오랜 시간 빙하·동토 속에서 잠들었던 고대 미생물과 바이러스들이 부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빙하 속 잠든 신종 바이러스가 깨어났다 지난 1월 학술논문 사전공개 사이트인 바이오 아카이브(bioRxiv)에 미·중 공동 연구팀의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소개됐습니다. 굴리야 빙하에서 얻은 샘플을 조사 중인 미·중 공동연구팀. 연구팀은 이 얼음 덩어리 안에서 신종 바이러스 20여 종을 발견했습니다. /사진=오하이오주립대 2015년 연구팀은 1만5000년 전 형성된 티베트 고원(칭장고원)의 굴리야 빙하에 깊이 50m짜리 구멍을 뚫어 얼음 샘플을 채취했습니다. 두 샘플 중 하나는 520년 된 얼음 덩어리였고, 다른 하나는 약 1만5000년 전 형성된 퇴적물을 담고 있었습니다. 분석 결과 샘플 속에는 여러 종의 바이러스가 들어 있었죠. 이 중 4종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이러스, 나머지 28종은 처음 발견된 '신종' 바이러스였습니다. 연구팀은 이번 연구를 통해 빙하 속 동결 보존된 바이러스를 손상 없이 온전히 꺼낼 수 있는 방법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수백 년 혹은 수만 년 전 냉동보관된 바이러스가 다시 부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셈이죠. 연구팀은 고대 바이러스를 통해 오래 전 지구 생태계가 어땠는지를 파악할 수 있고, 미래에 유행할 감염병에 대해서도 연구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얼어붙은 땅인 동토, 혹은 빙하에서 미생물을 발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러시아·프랑스 공동연구팀은 2014년 3만년 된 시베리아 영구동토층에서 거대 바이러스를 발견해 이를 되살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3만년 전, 상상하기도 힘들 만큼 오래전 이야기죠. 비슷한 시기 지구상엔 인류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가 처음 등장했습니다. 이 거대 바이러스는 인류의 조상과 함께 살았을 지도 모르겠네요. 러시아·프랑스 공동연구팀이 2014년 3만년 된 시베리아 영구동토층에서 발견해 부활시킨 피토바이러스. /사진=악스-마르세유대 연구팀은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신이 판도라에게 건넨 항아리를 뜻하는 '피토스(Pithos)'라는 단어에 착안해 이 신종 바이러스를 '피토바이러스(Pithovirus)'로 명명했습니다. 피토바이러스는 1.5㎛(마이크로미터)로 평균 20㎚(나노미터) 크기인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보다 몸집이 훨씬 큽니다. 다행히도(?) 이 신종 바이러스는 아메바만을 감염시켰습니다. 다른 동식물엔 해가 되지 않았죠. 마치 죽은 것처럼 보였던 이런 고대 바이러스들이 부활한 것을 두고 일각에선 '좀비 바이러스'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인적이 드문 극지방에서 발견되는 바이러스가 위험하다고? 미·중 공동연구팀이 신종 바이러스를 무더기로 발견한 굴리야 빙하는 평균 해발고도 4500m의 칭장고원(티베트 고원)에 있습니다. /사진=NASA 미·중 연구팀이 바이러스를 발견한 굴리야 빙하는 칭장고원에 있습니다. 시짱 자치구, 칭하이성, 신장 자치구, 인도 카슈미르 일부에 걸친 이 고원의 평균 해발고도는 4500m입니다. 눈 속을 헤치고 산을 오른 뒤 얼음을 뚫어야 비로소 바이러스를 만날 수 있죠. 러·프 공동연구팀도 시베리아 영구 동토층을 굴착해 바이러스를 확보했습니다. 게다가 이 바이러스는 아메바만 감염시켰죠. 여기서 의문점이 하나 생깁니다. 사람의 왕래도 거의 없는 이런 곳에, 심지어 해롭지도 않은(?) 바이러스가 발견되는데 이게 걱정할 일일까요. 전자현미경으로 관찰한 탄저균. 2016년 러시아에선 75년 전 동토층에 매장한 사람과 동물의 유해에서 나온 탄저균이 지역 감염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2016년 러시아 북부, 서시베리아지역에 위치한 살레하르트시에서 12세 소년이 목숨을 잃고, 10여 명이 감염 증세로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역민들은 이를 '시베리아 역병'으로 부르며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역학조사 결과 75년 전 동토층에 매장한 사람과 동물의 사체에서 나온 탄저균이 그 원인이었습니다. 과학자들은 사망한 소년이 유목민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따뜻한 날씨에 동토층이 녹으며 사체가 드러났고, 이 사체와 밀접 접촉한 순록들이 탄저균을 사람에게 옮겼을 것이라고 추정했죠. 자외선, 산소, 고온인 환경은 바이러스의 생존에 치명적입니다. 반대로 춥고 어둡다면 바이러스 생존에 도움이 되며, 춥고, 어두운 데다 산소까지 없다면 최적입니다. 동토층· 빙하·심해 퇴적층 등이 바이러스 같은 미생물이 오랜 기간 생존하기엔 적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피토바이러스처럼 미생물은 이런 환경에서 수만 년간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대비책을 마련해야 할 시점 북극곰이 유빙 위에서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북극도 온난화의 영향을 크게 받는 중이죠.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온난화의 영향은 앞서 소개한 남극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WMO와 유엔환경계획이 공동으로 설립한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의 보고서에 따르면 유럽, 동아프리카 등의 빙하 약 80%가 21세기 말 소멸될 것이라고 하죠. 북반구의 4분의 1을 덮고 있는 동토층도 같은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지구 온도 상승폭을 산업화 이전 대비 2도 이내로 제한한다 해도 결국 동토층의 40%가 녹아 없어질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북극항로'가 열린다는 말 들어보셨나요. 극지방의 빙하가 녹아 뱃길이 열리면 물류 운송시간이 크게 단축된다는 것입니다. 온난화로 인해 빙하와 동토층이 사라지면 인간의 활동 영역이 넓어지면서 자연스레 발길이 미치지 않던 곳에도 사람의 손길이 닿게 됩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동물들의 이동도 자유로워지죠. '시베리아 역병'의 사례처럼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감염병, 혹은 신종 감염병이 동물을 매개로, 혹은 직접 접촉을 통해 전 세계로 확산할 수 있습니다. 또 빙하나 동토가 녹은 물이 토양을 오염시키거나, 강과 호수 등 식수원에 유입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피토바이러스를 발견한 연구팀의 일원인 장 미셸 클라베리 프랑스 악스-마르세유대 교수는 논문을 통해 "지구 온난화로 인해 영구동토나 빙하가 녹으면 이 속에 들어 있던 원시 미생물들이 다시 부활할 수 있다"며 "우리가 모르는 신종 바이러스의 잠재적 위협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영욱 기자]
4    [민속] - 방아 댓글:  조회:4639  추천:0  2020-03-07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방아     이미지 크게보기 발로 디디어 곡식을 찧는 방아. 한 사람이 딛고 한 사람이 께끼는 것과 두 사람이 딛고 한 사람이 께끼는 두가지 유형이 있다. 경북 예천군 감천면 한천리에 있는 양다리 디딜방아. 유형 물품 성격 농기구 목차 정의 내용 정의 곡물을 쓿어 겉껍질을 벗기거나 빻아서 가루를 내는 데 쓰는 연장. 내용 나무나 돌로 만든 것이 많으나 흙이나 도자기로 만든 것도 있다. 방아는 갈돌에서 비롯되었다. 이를 발전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첫째 갈돌에서 돌확·맷돌·매통·토매·연자매로 발전한 무리와, 둘째 갈돌에서 절구·디딜방아·물방아·물레방아 따위로 나아간 무리로 나눌 수 있다. 앞의 것은 아래짝 위에 놓인 물질을 위짝을 돌려서 으깨듯 부수는 연장이고, 뒤의 것은 공이로 내리쳐서 찧는 연장이다. 인류는 식량생산에 들어가기 이전부터 굳은 나무열매를 갈돌로 가루를 내어 먹었다. 갈돌은 윗부분이 평평한 돌판에 둥근 돌(갈개)을 한 손에 쥐고 으깨듯 문질러 쓰는 연장이었으나, 뒤에는 안장처럼 앞뒤가 들리고 갈개도 방망이모양으로 바뀌어서 국수 밀듯 두 손으로 밀어 쓰게 되었다. 갈돌은 우리 나라의 경우 신석기시대 중기 이후의 유적에서 나오며, 이러한 유적지가 거의 전국적으로 분포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 시기에 널리 보급되었으리라고 짐작된다. 한편, 중국에서는 신석기시대 초기인 앙소문화(仰韶文化) 유적에서 거의 완전한 모양의 갈돌 11점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안장형 갈돌은 전 유럽·북아프리카·서남아시아·몽고·동만주 등 주로 밀 생산지대에 분포하며, 이집트에서는 기원전 2500년에 이것을 사용하는 석상이 발견되었다. 돌확은 오늘날에도 농가에서 보리를 대끼거나 고추 따위의 양념을 빻는 데 많이 쓴다. 갈판은 자연석을 방아확처럼 우묵하게 파거나 평평한 바닥에 전이 달리도록 만들기도 한다. 전라남도지방에는 벽과 바닥을 우툴두툴하게 구운 오지확도 있다. 갈개는 흔히 손 안에 드는 둥근 돌을 쓰나 도제(陶製) 확에는 흙으로 구운 것을 사용한다. 맷돌은 도시국가가 성립되는 등 식량의 대량 소비에 따라 생겨난 연장이다. 이것은 기원전 1000년에서 500년 사이에 오리엔트지방에서 처음 사용되었으며, 한쪽으로는 실크로드를 거쳐 중국(기원전 1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한나라)에, 다른 쪽으로는 그리스와 로마를 거쳐 유럽에 전파되었다. 맷돌이 우리 나라에 언제 들어왔는지에 대해서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1937년 봄 평안남도 대동군 토성리의 낙랑군터에서 화강암으로 만든 맷돌(지름 52㎝, 윗돌 높이 21㎝, 아랫돌 높이 13㎝)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 보아 우리도 1∼2세기경에는 맷돌을 썼을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 맷돌은 다시 일본에 전래되었는데, ≪일본서기≫에는 610년 고구려 승려 담징(曇徵)이 이를 전하였다고 기록되었다. 우리네 맷돌은 위짝과 아래짝의 두께가 서로 비슷한 것과 아래짝이 매우 높고 주둥이가 길게 달리도록 만든 것의 두 종류가 있는데, 뒤의 것은 남부지방에서 많이 쓴다. 앞의 것은 받침 위에 올려 놓거나 함지 또는 맷방석 따위에 앉혀 놓는다. 맷돌의 재료로는 흔히 화강석을 쓰나 벌레가 파먹은 듯한 구멍이 나 있는 청흑석(靑黑石)이나 속돌로 만들며, 속돌제는 매우 가벼워서 이것으로는 풀매를 제작할 뿐이다. 화강석제는 마찰면이 닳아 없어지기 쉬우므로 이따금 쪼아 주어야 하지만 남부지방에서는 맷돌에 홈을 새겨서 쓴다. 이 홈의 형태는 지역에 따라 다르나, 어떠한 경우에도 양쪽의 것이 평행이 되지 않도록 하며, 두 짝의 홈이 만나는 점이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나가도록 한다. 이렇게 해야 곡식이 잘 갈릴 뿐 아니라 갈린 가루가 바깥쪽으로 밀려 나가 떨어지는 것이다. 큰 맷돌에 많은 양의 곡물을 갈 때는 맷손에 맷지게를 연결하고 두세 사람이 노를 젓듯이 돌리며, 경우에 따라 Y자 모양으로 끝이 벌어진 맷손을 잡아맨 맷지게를 천장에서 내린 줄에 걸고 서너 사람이 돌리기도 한다. 맷돌에서 더욱 발전한 것이 연자매이다. 연자매는 맷돌보다 수십 배나 크고 사람 대신 소나 말이 돌리게 되어 능률도 그만큼 높다. 맷돌은 위짝과 아래짝을 마주 포갠 채 돌리나, 연자매는 아래짝 가운데에 박은 기둥을 의지하여 위짝을 세워 돌리는 구조이다. 곳에 따라서는 톱니장치를 한 연자매도 나타났는데, 이것은 톱니의 회전에 따라 아랫돌이 돌아가도록 되어 있다. 이처럼 가축의 힘을 이용한 연자매는 서양의 경우 15세기 무렵에 널리 보급되었다. 한편, 1313년에 간행된 중국의 왕정(王禎)이 쓴 ≪농서 農書≫에는 연자매의 위짝을 두 마리의 나귀가 끄는 그림과 함께 톱니장치를 한 것이 실렸다. 우리 나라 문헌으로는 1527년(중종 22)에 나온 ≪훈몽자회 訓蒙字會≫가 있다. 이 책에는 맷돌을 가리키는 마(磨) 자 외에, 연(碾)·애(磑)·아(砑) 자의 새김이 실려서 당시에 연자매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또한 1690년(숙종 16)에 간행된 ≪역어유해 譯語類解≫에 ‘연자(碾子)’가 실린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적어도 이때는 연자매가 널리 보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소나 말이 귀한 데에서는 연자매를 사람이 돌리기도 하였으며, 특히 현무암으로 만든 제주도의 것은 비교적 가벼워서 사람이 운전하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디딜방아나 물레방아를 쓰지 않았던 만큼 마을마다 연자매를 공동으로 세웠는데, 이에는 대체로 혈연이 중심이 되었으며, 아버지가 쓰던 방아를 아들이 쓰게 마련이었다. 매통은 쌀을 주식으로 삼는 지역의 연장으로, 밀을 상식하는 서양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원리나 공정은 맷돌이나 연자매와 같으나 벼의 껍질을 벗기는 데에만 쓰기 때문에 재료가 나무인 것이 다를 뿐이다. 몸체는 길이 50㎝ 정도의 통나무(지름 40∼60㎝) 두 짝으로 이루어지며, 두 짝이 서로 닿는 마구리에는 요철로 이를 파놓았다. 곡식을 위짝 중앙에 길이로 낸 구멍에 흘려 넣으면서 앞뒤로 돌리면 껍질이 벗겨져 나온다. 위짝은 아래짝 기둥을 의지하여 돌아간다. 매통은 중국 남부의 수도(水稻)지대에서 발명되었으며, 중국에서는 수당(隋唐)시대부터 써왔다. 이에 대한 우리 나라의 기록은 서호수(徐浩修)의 ≪해동농서 海東農書≫에 처음 보이지만, 우리에게서 건너간 것으로 생각되는 매통이 일본에서는 헤이안시대(平安時代)에도 있었다고 하니 사용연대는 훨씬 더 올라갈 것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중국·일본의 매통 사이에는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중국 것은 이[齒]를 매통처럼 세로로 파서 위짝을 회전시켜야 하지만, 우리나 일본 것은 같은 방향으로 나란히 팠기 때문에 반회전시켰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리는 과정을 반복한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한 사람 또는 서너 사람이 돌리지만, 두 나라에서는 반드시 두 사람이 마주보며 돌린다. 한편, 일본 것은 아래짝의 기둥이 위짝 위로 솟아올랐으며, 이를 위짝에 있는 손잡이모양의 가로막대에 꿰어 놓았다. 그리고 위짝에 잡아맨 새끼줄을 두 가닥씩 잡고 앉은 채로 돌리는 것이 보통이다. 이에 비하여 우리 것은 아래짝 기둥은 위짝 밖으로 나오지 않으며 위짝 가운데에 박힌 손잡이를 한쪽씩 쥐고 서서 돌린다. 토매의 기능은 매통과 같으나 형태가 조금 다르다. 이것은 둥우리모양의 그릇에 진흙을 다져 넣은 것으로, 위쪽에 단단한 나무를 박아 이[齒]로 삼는다. 매통보다 매우 능률적이나 무게 때문에 낟알이 깨지는 흠이 있다. 중국에서는 원대(元代)에 생겨났으며, 1766년(영조 42)에 유중림(柳重臨)이 간행한 ≪증보산림경제 增補山林經濟≫에도 보인다. 일본에는 17세기 초에 전래되었다. 절구는 돌이나 나무토막을 우묵하게 판 것으로 벼농사를 많이 짓는 아시아지역에서 널리 사용된다. 유럽에서는 적어도 그리스시대 이전부터 썼으며, 로마시대에 널리 보급되었으나 로마시대 말기부터 중세에 이르는 사이에 수차(水車)가 발달됨에 따라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중국의 경우 ≪역경≫의 계사전(繫辭傳)에 “황제 요·순이 만들다. 나무를 잘라 공이를 만들고 땅에 박은 절구를 쓴다. 절구는 매우 쓸모 있어 만민을 구하다.”라는 내용이 전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절구는 옥수수농사를 짓는 북아메리카의 원주민들도 중요한 연장의 하나로 손꼽았다. 절구는 또 그 형태에 따라 허리 부분이 좁은 잘록절구와 위아래가 밋밋한 통절구의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통절구는 중부지방에서, 잘록절구는 중부 이남지방에서 많이 쓴다. 그러나 제주도의 절구는 이와 달라서 넓고 큰 함지를 닮았으며 가운데에는 돌확을 박았다. 이러한 절구는 여러 사람이 둘러서서 찧는 데 편리하다. 한편, 절구공이에도 차이가 있어서 중부에서는 가운데가 잘록한 것을 쓰나 남부지방에서는 손으로 쥐는 부분만을 가늘게 깎은 것을 사용한다. 일본 절구와 공이에도 이와 같은 차이가 나타나는데, 이는 한국 절구의 전래 사실과 관련이 깊을 것으로 생각된다. 공이도 곧은 공이와 굽은 공이 두 가지가 있다. 굽은 공이에는 나무자루에 직각이 되도록 쇠몽둥이를 박은 것이 많으며, 큰 나무 끝에 돌을 박아 쓰기도 한다. 일본의 경우 굽은 공이는 18세기에 나타났으며, 절구도 통절구로 바뀌었다. 디딜방아는 절구에서 비롯되었다. 절구는 주로 손의 힘을 빌렸으나 디딜방아는 몸무게를 실은 발의 힘을 이용하게 되어 그만큼 능률이 높아졌다. 디딜방아의 역사도 절구 못지않게 오래되었을 것이다. 중국에서는 후한시대의 무덤에서 흙으로 빚은 디딜방아의 모형이 출토되어 적어도 기원전에 디딜방아가 사용되었음을 알려 준다. 우리 나라의 것으로는 황해도 안악에서 발견된 고구려 무덤의 벽화를 들 수 있다. 방앗간에서 한 사람은 방아를 찧고 다른 한 사람은 찧은 곡식을 키에 담아 까부르는 장면이다. 이 무덤에서는 347년이라는 묵서명(墨書名)이 발견되었으므로 고구려에서의 디딜방아 역사는 4세기 이전으로 올라가는 셈이다. 일본에는 7세기 무렵에 들어갔으며 나라시대 노래집인 ≪만엽집 萬葉集≫에도 이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한편, 유럽에서는 중세에 사용되었다. 디딜방아는 우리 나라·중국·일본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인도·카프카스·라오스·버마(지금의 미얀마)·우크라이나·이탈리아, 그리고 폴란드·헝가리·스위스 북부·독일을 비롯한 동부 유럽에서도 쓴다. 그런데 우리네 방아와 중국이나 일본을 비롯한 기타 지역의 방아 사이에는 형태상의 큰 차이가 있다. 우리 방아는 다리가 Y자 모양으로 벌어져서 두 사람이나 그 이상이 서로 마주서서 찧으나(양다리방아라는 말은 여기에서 비롯되었음), 다른 곳의 방아는 곧은 나무로 되어 한 사람이 쓴다(이를 외다리방아라 함). 다시 말하면, 양다리방아는 우리의 발명품이다. 다만, 앞에서 설명한 고구려 벽화의 방아는 외다리방아인데 이는 디딜방아가 중국에서 들어온 초기에 해당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도 우리 나라 남부지방에서는 외다리방아를 더러 쓰기도 한다. 물레방아는 물의 힘을 이용하여 바퀴를 돌리고 이에 따라 공이가 오르내리도록 고안한 방아이다. 물레의 ‘물’은 ‘물[水]’을, ‘레’는 수레·굴레의 ‘레’처럼 ‘바퀴’를 뜻하는 말이다. 물레방아는 물이 떨어지는 힘을 이용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낙차가 없는 데에서는 물이 흘러가는 힘을 빌리기도 하는데, 이를 밀방아라고 부른다. 어느 것이나 바퀴 굴대에 붙은 두 개의 누름대가 바퀴가 돌 때마다 번갈아 가며 방아채를 눌러서 공이가 오르내리게 한다. 근래에는 바퀴를 돌리는 힘만을 물에 의존할 뿐, 내부에는 기계장치를 한 것이 많이 생겨났다. 이 방아는 서아시아지방에서 발명되었으며, 로마에서는 1세기경에 사용하였다. 그리고 중국에는 이와 비슷한 시기에 서역으로부터 들어왔다. 우리 나라 최초의 기록은 ≪세종실록≫ 권148 지리지의 것으로, 지금의 서울 세검정 근처에 물레방아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예로부터 물레방앗간은 잘 곳이 없는 사람들의 유숙처나 남녀의 밀회장소로 이용되었다. 또 민간에서는 이곳에서 해산하면 사내아이를 낳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더 많은 남아가 태어나리라고 여겨 진통이 시작되는 산모를 일부러 업어와 몸을 풀게 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한국의 농기구』(김광언, 문화재관리국, 1969) 『용잡기(舂雜記)』(윤병준, 회상사, 1975) 『한국의 물레방아』(이춘녕·채영암,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6) 『한국농기구고』(김광언,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6) 『농서(農書)』(王禎, 1313) 『농정전서(農政全書)』(徐光啓, 1639) 『臼』(三輪茂雄, 法政大學 出版局, 1978) 『中國農業技術史硏究』(天野元之助, 御茶の水書房, 1979) 관련이미지 9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삼척 신리 소재 너와집 및 민속유물 중 물레방아물의 힘을 이용하여 바퀴를 돌리고 이에 따라 공이가 오르내리도록 고안한 방아. 강원도 삼척군 도계읍 신리.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방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천재학습백과 초등 다양한 문화 방아     방아에는 디딜방아, 연자방아, 물레방아 등이 있어요. 디딜방아는 발로 디디는 방아예요. 두 사람이 Y자 모양의 갈래 끝에 올라서서 찧지요. 시소처럼 생겨서, 갈래의 끝을 발로 밟으면 방앗공이가 올라가고 발을 떼면 방앗공이가 내려가 곡식을 찧게 돼요. 삼국 시대에도 디딜방아를 썼다고 해요.나무 한쪽 끝에 공이를 박고 다른 쪽은 두 갈래로 나누어 발로 디딜 수 있게 했어요. 연자방아는 고정된 커다란 돌판 위에 바퀴처럼 생긴 넓적한 돌을 굴리면서 곡식을 가는 거예요. 바퀴 축에 긴 나무를 꽂아 소나 말에게 걸면 가축이 방아 주위를 빙빙 돌며 돌을 굴린답니다. 물레방아는 물의 힘을 이용해 곡식을 찧는 기구예요. 흘러내리는 물이 물레를 돌리면 공이1)가 위아래로 움직여 곡식을 찧어요. 디딜방아 디딜방아 관련이미지 7                           이미지 이전 디딜방아발로 디디어 곡식을 찧는 방아. 한 사람이 딛고 한 사람이 께끼는 것과 두 사람이 딛고 한 사람이 께끼는 두가지 유형이 있다. 경북 예천군 감천면 한천리에 있는 양다리 디딜방아.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방아 (천재학습백과 초등 다양한 문화)   두산백과 방아     요약 곡물을 절구에 넣고 탈각(脫殼) ·정곡(精穀)하거나 제분하는 데 이용되던 농기구. 이미지 크게보기 연자방아 그 종류는 지레의 원리를 이용하여 발로 디디어 찧는 디딜방아, 물의 힘을 이용하는 물레방아, 그리고 소 ·말 등의 축력(畜力)을 이용하는 연자방아 등이 있다. 이러한 탈각 ·제분 등에 이용된 기구는 석기시대에 석명(石皿)과 석봉(石棒) 한쌍으로 알이 작은 곡식을 탈각하고 제분하는 데 사용하였던 갈돌[磨殼石:碣石]에서부터 맷돌로 발전하였다. 이 때까지 인력(人力)을 유일한 동력으로 쓰던 단계에서 수력을 이용하는 물레방아, 축력을 이용하는 연자방아로 발전하는 단계에 이르러 능률에 큰 진전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들 방아는 거의 자취를 감추고(강원도 道溪에 몇 개의 재래식 물레방아가 보존되어 있음), 발동기와 병행하는 변형된 물레방아 100여개가 전국에서 가동되고 있다는 통계가 있다. 참조항목 농기구, 제분, 방앗간 역참조항목 디딜방아, 물레방아, 물방아, 축력, 남방아 카테고리 경제·경영 > 산업 > 농업 > 농업기계및장비 관련동영상                                 00:00 | 00:15 화질 선택 옵션270p           관련이미지 2                               이미지 이전 돌방아와 돌공이곡물을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는 데 이용되던 농기구. 이미지 갤러리 출처: doopedia.co.kr [네이버 지식백과]방아 (두산백과)   두산백과 물레방아     요약 냇가에 물길을 만들어 물이 떨어지는 힘을 이용하여 곡식을 찧는 방아. 이미지 크게보기 물레방아 물레방아는 큰나무바퀴와 굴대에 공이를 장치하여, 쏟아지는 물이 나무바퀴를 돌리면 굴대에 꿴 넓적한 나무가 방아채의 한 끝을 눌러 번쩍 들어올렸다가 떨어뜨리면 그 끝의 공이가 확 속의 곡식을 찧도록 되어 있다. 방아채와 공이의 동작이 자동으로 되기 때문에 사람이 없어도 찧을 수 있으며, 공이가 양쪽으로 두 개가 물려 있어 엇갈려 찧어지는 것과 한 개만 있는 것 등이 있다. 물방아는 일명 통방아라고도 하는데, 긴 통나무로 된 방앗대 한쪽을 파내어 물받이를 만들고, 반대쪽에는 공이를 달아 가운데를 받친 원시적인 물방아이다. 물받이에 물이 차면 그 무게 때문에 아래로 내려가 반대쪽의 공이가 들리고 물받이가 기울어져 물이 쏟아지면 공이가 아래로 떨어져서 확 속의 곡식을 찧는다. 참조항목 농기구, 방아, 수차 역참조항목 정선 백전리 물레방아, 백운면의 물레방아 카테고리 경제·경영 > 산업 > 농업 > 농업기계및장비 관련이미지 8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물레방아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애산리 아라리촌. 이미지 갤러리 출처: doopedia.co.kr [네이버 지식백과]물레방아 (두산백과) 한국의 농기구 물레방아     디딜방아와 같은 원리지만 밟는 것을 물의 힘을 이용한다. 흐르는 물의 낙차를 이용하여 물레바퀴(水車)를 돌리면 바퀴의 굴대(軸)에 고정된 누름대(발)가 방아채의 다리를 누른다. 이 때 방아공이가 올라가고 누름대가 더 돌아 다리에서 떨어지면 공이가 아래로 처박히면서 방아를 찧는다〈그림 11-7〉〈사진 11-8〉. 〈그림 11-7〉 물레방아의 부분 이름(박호석, 1990)1. 방아채, 2. 굴대, 3. 물레바퀴, 4. 발 〈사진 11-8〉 물레방아 누름대는 굴대를 가로질러 꽂혀있기 때문에 물레바퀴가 한 바퀴 돌면 공이가 두 번 들린다. 물레바퀴는 밖에 설치하고 굴대를 길게 하여 방앗간 안까지 들어오게 했다. 보통은 물레 하나에 방아 한 채를 걸지만 물이 많은 곳에서는 물레바퀴 양쪽으로 걸거나 아니면 굴대를 길게 늘여 한쪽으로 두 채의 방아를 거는데 이때 한쪽방아가 올라오면 다른 방아는 내려오도록 발을 엇갈리게 박았다. 물이 많아 물레가 빨리 돌면 방아찧기도 빠른데, 보통 하루 5∼6가마의 매조미쌀을 쓿을 수 있다. 위에서 떨어지는 물의 무게와 낙차를 이용하여 물레(水車)를 돌리는 상괘식 물레방아가 일반적이었지만 물이 흐르는 힘을 이용하여 물레를 돌리는 하괘식 물레방아도 있었다. 19세기 말이나 20세기초의 사진으로 보이는 〈사진 11-9〉는 개울에 봇도랑을 막아 무넘기(堤)를 약간 높인다음 그곳으로 빠르게 흐르는 물에 물레바퀴의 아랫부분을 잠기게 했다. 〈사진 11-9〉 조선시대의 물레방아(서문당, 1996) 아마도 물의 낙차가 크지 않은 평야지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물레방아는 앞서 물방아와 이름이 혼동되어 쓰이기도 하며, 물레 하나에 방아가 둘인 것을 ‘쌍방아’ 또는 ‘양방아’라고 부른다. 관련항목 절구, 디딜방아, 물방아, 돌확, 맷돌, 매통, 토매, 연자매, 기름틀, 국수틀, 물절구, 안반 관련이미지 9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물레방아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물레방아 (한국의 농기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물레방아     이미지 크게보기   유형 물품 성격 생활용품, 농기구 문화재 지정번호 강원도 시도민속문화재 제6-1호 문화재 지정일 1996년 09월 30일 목차 정의 내용 정의 물의 힘으로 바퀴를 돌려 곡식을 찧는 방아. 내용 물레방아에는 물이 떨어지는 힘을 이용하는 것과 흘러가는 힘을 이용하는 것의 두 가지가 있다. 앞의 것을 충청북도 음성에서는 ‘동채방아’, 뒤의 것을 ‘밀채물레방아’라고 하며, 같은 것을 경상북도 청도에서는 ‘밀방아’로 부른다. 동채방아의 바퀴는 방앗간 밖에 설치하나 밀채물레방아의 바퀴는 집안에 두는 것이 보통이다. 동채물레방아는 물의 낙차가 크면 클수록 힘을 더 얻는다. 일반적으로는 개울 옆에 도랑을 파서 물을 대지만, 이를 위한 보(洑:논에 물을 대기 위해 둑을 쌓고 흐르는 냇물을 가두어 두는 곳)를 따로 마련하는 곳도 있다. 보의 물은 농사철에는 농사에 쓰고 가을과 겨울에는 물레방아에 대므로 매우 효과적이다. 이 방아에는 대부분 방아틀을 한 대 걸지만, 물이 많은 데서는 좌우 양쪽에 두 대를 설치한다. 이 방아를 ‘양방아’(강원도 도계) 또는 ‘쌍방아’(전라남도 구례, 충청북도 음성)라고도 한다. 방아 굴대에 설치된 눌림대가 서로 다른 방향을 취하고 있어서 방아공이가 번갈아 가며 오르내린다. 재래식은 방아가 모두 나무이므로 궁글목 양끝처럼 닳기 쉬운 데는 끌로 파고 질이 단단한 박달나무 조각을 박아 둔다. 또, 마찰열을 낮추기 위해 수로 끝에 대나무로 만든 홈대를 달아 물이 이리로 떨어지도록 한다. 방아는 대체로 소나무로 만드나 공이와 같은 것은 단단한 박달나무를 쓰며 공이 끝에 쇠를 박기도 한다. 돌확은 땅에 묻는다. 바퀴의 물받이를 어떤 곳에서는 반으로 갈라서 물이 더 많이 실리도록 한다. 요즈음에는 동력만을 나무바퀴로 얻고 나머지 부분은 철제로 설비하며, 곳에 따라서는 바퀴 자체도 철제를 쓰기도 한다. 밀채물레바퀴의 구조는 앞의 것과 같으나, 다만 물레의 살과 살을 연결하여 너비 30㎝, 두께 5㎝ 정도의 널판을 가로 대 놓았다. 흐르는 물은 이 널판을 밀고 나가므로 이에 따라 물레가 돌아가는 것이다. 이 쌍방아로는 벼 한 가마를 찧는 데 한 시간이 걸린다. 물레방아는 흔히 마을에서 계를 모아 공동으로 세우며, 계원이 아닌 사람의 방아를 찧을 때는 삯을 받아 모았다가 수리할 때 쓰거나 잔치를 벌이기도 한다. 방아를 걸고 나서는 외다리방아에서처럼 고사를 올린다. 이 때 고사를 지내는 날까지 방앗간 입구의 좌우 양쪽에 붉은 흙 세 무더기를 쌓아 둔다. 이 흙의 붉은 기운이 잡귀를 막아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 방앗간 주위에는 새끼줄을 둘러서 잡인의 출입을 통제한다. 고사 때 올리는 축원의 내용은 외다리방아의 그것과 비슷하다. 고사를 지낸 뒤 주인집의 방아를 제일 먼저 찧는데, 이 때 곡물의 일부를 ‘방아몫’이라 하여 작은 항아리에 넣고 다락이나 시렁에 얹어 둔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햇곡식이 나오면 먼저 곡식을 꺼내고 새 곡식으로 갈아 넣는다. 가을에 안택(安宅)굿을 할 때도 방아몫단지 앞에 떡 한 켜와 정화수를 차려 둔다. 또, 어떤 집에서는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떡고사를 지낸다. 이렇게 해야 방앗간의 도깨비가 만족해서 방아 동티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방앗간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금기를 지켜왔다. ① 방앗간의 비는 생리중인 여자가 깔고 앉으면 나쁘다. ② 임신부가 방아공이를 깔고 앉으면 나쁘다. ③ 방아로 만들어 쓴 나무는 화목(火木)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④ 액막이를 위해서 훔쳐 간 방아를 주인이 나서서 찾으면 해롭다. ⑤ 방아의 머리 쪽에 집안의 방문이나 조상의 무덤이 오도록 해서는 안 된다. ⑥ 방아고사는 반드시 해진 뒤에 지낸다. 한편, 물레방앗간은 매우 넓어서 방아를 찧는 것 외에 인가에서 거절당한 손님이 하룻밤 머물기도 하였고, 경우에 따라서는 마을의 반허락 아래 걸인들이 당분간 유숙하는 일도 있었다. 참고문헌 『한국의 농기구』(김광언, 문화재관리국, 1969) 『한국농기구고』(김광언,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6) 관련이미지 11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물레방아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물레방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의 농기구 디딜방아     절구〈그림 11-1〉와 같은 기능을 가지지만 발로 밟아 움직이고 충격력이 커서 보다 능률적으로 발전된 방아연장이다. 디딜방아는 밟는 다리가 하나인 외다리 방아와 둘인 양다리 방아가 있다. ‘디욤방아’라고도 하는 외다리방아〈사진 11-3〉는 고구려 시대의 안악(安岳) 고분벽화〈제1편 그림 29-1〉 에도 등장할 만큼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고, 특히 고구려 스님 담징(曇徵)이 일본에 전래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 11-3〉 외다리 방아 (출처: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1975)" hastitle="N" height="461" origin_height="2507" origin_src="https://dbscthumb-phinf.pstatic.net/2841_000_1/20140403173834828_VP7R2HICP.jpg/do2_i1-94.jpg?type=m4500_4500_fst_n&wm=Y" origin_width="1500" source="한국의 농기구" src="https://dbscthumb-phinf.pstatic.net/2841_000_1/20140403173834828_VP7R2HICP.jpg/do2_i1-94.jpg?type=w276_fst_n&wm=Y" style="border: 0px; max-width: 690px; vertical-align: top; display: block; margin: 0px auto;" width="276" /> 〈그림 29-1〉 디달방아와 키질황해도 안악 3호분(상), 평남 약수리 벽화고분(하). (출처: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1975) 그러나 조선조에 들어서는 양다리방아〈그림 11-2〉가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이는 『해동농서』에서 ‘외다리방아(單梃碓)는 중국에서 쓴다’고 한 점이나 『임원경제지』에서 디딜방아를 ‘東臼’라고 한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림 11-2〉 디딜방아의 부분 이름(박호석, 1990)1. 공이, 2. 방아채, 3. 쌀개, 4. 볼씨, 5. 다리, 6. 확돌 그렇다고 외다리 방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양다리방아는 가지가 ‘Y’자로 뻗은 길이 3m 남짓한 통나무를 깎아 밑동 쪽에는 공이를 박고 가지부분은 다리(발판)로 했다. 다리가 합쳐져 방아채가 시작되는 곳에서 조금 앞쪽에 채를 가로질러 쌀개(굴대)를 박고 이를 볼씨(받침대)에 얹었다〈그림 11-3〉. 사람이 방아다리를 밟고 오르면 사람의 몸무게로 공이가 위로 들리고, 발을 떼면 아래로 처박히면서 공이 밑의 확 속에 넣은 곡식을 찧는다. 방아를 밟는 사람이 일하기 쉽게 다리 앞에 손잡이를 두거나 천장에 끈을 매 잡도록 했다〈사진 11-4〉. 〈그림 11-3〉 방아(碓)(『해동농서』) 〈사진 11-4〉 디딜방아(양다리) 디딜방아에 쓰는 공이 끝에는 촉을 붙이는데 용도에 따라 촉의 모양이 다르다. 쇠나 돌로 부처님 머리처럼 오톨도톨하게 만든 촉은 왕겨를 벗기는데 쓰고, 돌로 된 밋밋한 촉은 빻는데 쓰며, 촉이 없는 나무공이는 쓿는데 사용했다〈사진 11-5〉. 〈사진 11-5〉 방아촉 그리고 부엌이나 그 가까이 설치하여 양념을 찧는데 쓰는 ‘조작방아’〈그림 11-4〉〈사진 11-6〉는 다리가 없이 틀을 발로 밟고 손으로 당기면 공이가 들리는 특이한 형태의 방아로 크기가 작다. 〈그림 11-4〉 조작방아(‘조작방에 모양’, 「기산풍속화」) 〈사진 11-6〉 조작방아(한국민속촌) 디딜방아는 지방에 따라 ‘딸각방아’ · ‘발방아’ · ‘돈방아’라고도 했다. 그리고 옛날에는 ‘방아’(『사류박해』 · 『방언류석』 · 『물명고』 · 『농가월령가』) · ‘방하’(『사시찬요초』 · 『역어류해』 · 『동문류해』)라 했고, 한문으로는 碓(『사성통해』 · 『훈몽자회』 · 『과농소초』 · 『임원경제지』 · 『사류박해』) · 碙碓(『북학의』) · (『산림경제』 · 『고사신서』 · 『과농소초』)라고 썼다. 디딜방아로 셋이서 하루 2∼3가마의 매조미쌀을 쓿을 수 있었다. 관련항목 절구, 물방아, 물레방아, 돌확, 맷돌, 매통, 토매, 연자매, 기름틀, 국수틀, 물절구, 안반 관련이미지 6                               이미지 이전 디딜방아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디딜방아 (한국의 농기구)   두산백과 디딜방아     요약 발로 밟아서 곡식을 찧거나 빻는 농기구. 이미지 크게보기 디딜방아 이에는 한쪽이 가위다리처럼 벌어져서 두 사람 또는 그 이상의 사람이 마주 서서 찧는 양다리방아와 한쪽이 벌어지지 않고 곧아서 한 사람이 찧는 외다리방아의 두 가지가 있다. 외다리방아의 가장 오랜 증거는 황해도 안악의 옛 고구려 무덤의 그림으로서 이 무덤은 4세기에 만들어졌으므로 이미 4세기 이전부터 이것을 써 왔음이 분명하며, 이 방아는 근래까지 전남의 해안 지방에서 사용되었다. 디딜방아의 분포지역은 중국을 비롯하여 동남아시아 대륙, 인도네시아 등지의 도서 지역, 일본 ·네팔 ·인도 등이지만, 양다리방아는 한국 고유의 발명품으로서 세계 어느 지역에서도 볼 수 없다. 심지어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외다리방아를 나란히 설치하여 쓸지언정 한국처럼 양다리방아를 만들 생각은 하지 못하였다. 양다리방아는 둘 또는 그 이상의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거나 노래를 불러가며 찧는 까닭에 매우 능률적일 뿐만 아니라 노동의 고달픔을 덜 수 있는 장점도 지녔다. 공이로는 나무, 돌을 쓰지만 나무 공이 끝에 겉을 우툴두툴하게 만든 쇠통을 끼우기도 한다. 확으로는 작은 돌절구를 땅에 묻으며 천장에서 늘인 새끼줄을 쥐고 방아를 찧는다. 참조항목 농기구, 방아 역참조항목 방앗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 산업 > 농업 > 농업기계및장비 관련동영상                                 00:00 | 00:15 화질 선택 옵션270p           관련이미지 14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양곡리 디딜방아 이미지 갤러리 출처: doopedia.co.kr [네이버 지식백과]디딜방아 (두산백과)   지식리스트 수정문의 공유 인쇄 글꼴가- 글꼴 작게가+ 글꼴 크게 한국민속신앙사전: 마을신앙 편 디딜방아     저자 이한길(李漢吉) 목차 정의 내용 지역사례 정의 마을의 액을 막기 위해 사용하는 주술적 도구. 내용 디딜방아는 절구에서 나왔다. 흔히 절구는 손방아, 디딜방아는 발방아라고 일컫는다. 디딜방아는 벼농사 지역에서 만들어졌다. 디딜방아는 중국 한나라 초기에 등장하여 우리나라는 4세기 이전에 중국에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세계적으로 디딜방아는 외다리방아이지만 한국에서는 이를 개량하여 두다리방아도 만들었다. 이를 바탕으로 많은 민속이 만들어졌다. 디딜방아를 만들고 나서 흔히 몸체에 ‘경신년 경신월 경신일 경신시 강태공 조작’이라고 쓰기도 한다. 액을 막기 위한 조치인 것이다. 또한 디딜방아는 민요의 주요 재료가 되었다. 디딜방아 민속신앙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조사 내용이 일부 차이를 보인다. 때로는 상충된 내용도 보인다. 하지만 이는 상충이라기보다는 그만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고 지역마다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디딜방아는 주술적으로도 사용되는데 그중 하나가 액막이 의례이다. 천연두, 홍역 같은 돌림병이 돌면 부녀자들을 중심으로 이를 막기 위한 대책이 강구된다. 그 대책 가운데 하나가 다른 마을의 디딜방아를 한밤중에 몰래 훔쳐 와서 제사를 올리는 일이다. 이 주술적 액막이 의례는 대개 1950년대까지는 전국적으로 행하여졌다. 오늘날 이 놀이는 전라도 일원에서 주로 행하여지고 있으며 충청도 지역에서도 전승되고 있다. 우선 부녀자들은 어느 마을에서 디딜방아를 훔쳐 올 것인지를 논의한다. 어느 마을에 크고 좋은 디딜방아가 있는지, 또는 어느 마을의 것을 비교적 쉽게 훔칠 수 있는지 등을 고려한다. 간혹 마을의 여러 일을 단골처럼 보아 주는 무당이 “언제 어느 방위의 마을에서 훔쳐 와야 효험이 있다”고 일러주기도 한다. 다음에는 누가 훔치러 갈 것인지를 결정한다. 대개는 기운이 센 부녀자들을 중심으로 20~30명으로 구성한다. 때로는 남자들이 일부 포함되기도 한다. 디딜방아를 훔치러 떠날 때 부녀자들은 하얀 소복을 갖추어 입고 상여를 준비하기도 하고, 솥뚜껑을 머리에 이고 숨을 죽이며 갔다. 반드시 소복을 입거나 상여를 준비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지역마다 차이가 있다. 디딜방아는 한밤중에 몰래 훔쳐 오는데, 어떤 때는 그 마을 사람들에게 들켜서 싸우거나 미수에 그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돌림병을 막기 위한 ‘뱅이(주술적인 방어의례)’에 쓴다는 것을 누구나 잘 알기 때문에 순순히 내주는 경우도 많았다. 어쨌든 그 마을 어귀를 무사히 빠져 나오면 그곳 사람들도 더 이상 반환을 요구하지 못하였다. 훔친 디딜방아는 상여 위에 놓고, 그 위에 흰 광목천을 덮어서 마치 죽은 시신을 모시듯 한다. 디딜방아를 훔치는 것은 다른 마을의 여자 시체를 가지고 오는 것을 뜻한다. 이때문에 자기 마을로 돌아올 때는 소복을 입은 여인네들이 상여소리와 함께 “아이고! 아이고!” 곡소리를 내거나 또는 “어흥! 어흥!” 하고 호랑이 소리를 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돌림병의 종류에 따라서 “홍역 물리자! 홍역 물리자!” 하면서 돌아오기도 하였다. 전남에서는 축원가를 부르며 돌아오면서 마을의 남성들에게 자신들의 역량을 자랑하기도 하였다. 훔쳐 온 디딜방아는 마을 어귀나 마을 앞의 삼거리에 거꾸로 세워 놓고 금줄을 두르고 제상을 차려 제사를 모신다. 이때 마을 사람들은 풍물을 치며 한바탕 흥겹게 논다. 여기저기에서 아낙네들은 벗은 속곳이나 준비해 온 속곳을 디딜방아의 Y 자형으로 벌어진 곳에 감기도 하고, 금줄 사이사이에 끼우기도 한다. 특히 경도혈이 묻은 속곳을 걸어야 효험이 있다고 한다. 더욱 정성이 지극한 아낙네들은 자신의 속곳을 가지고 온 마을을 다니면서 다른 집의 대문에서 나뭇조각을 조금씩 떼어내기도 하고, 다른 집 흙을 속곳에다 문질러서 디딜방아에 걸기도 한다. 이런 속곳은 매우 효험이 있다고 한다. 그러고는 팥죽을 쑤어서 속곳과 디딜방아에 뿌렸다. 이렇게 하면 돌림병이 마을로 들어오다가도 디딜방아에 걸린 경도혈 묻은 속곳을 보고, “이 마을은 더러워서 못 쓰겠다” 하고 도망간다는 것이다. 디딜방아가 더러우면 돌림병이 물러나고, 깨끗하면 더 덤빈다는 말도 전해 온다. 디딜방아 액막이놀이는 주로 호남의 동부 산간지대에서 행해졌는데, 정월대보름에 당산제가 끝나면 여성들이 인근 마을에 디딜방아를 훔치러 갔다가 성공하여 돌아온 후에는 신명나게 풍물놀이를 하였다. 훔쳐 온 디딜방아는 ‘뱅이’를 끝낸 후에 돌려주기도 하였다. 이때 방아를 잃어버렸던 마을에서는 금방 찾아오면 그 마을의 액도 함께 가져오는 것이라 하여 몇 달 후나 한 해를 지낸 다음에 찾아갔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날로 되찾아간 마을도 있었다. 또한 훔쳐 온 디딜방아는 자칫 잘못하면 부정을 탄다 하여 함부로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세워 둔 자리에서 썩어 없어지게 내버려 두기도 했다. 강원도 삼척시 하장면 한소리의 주민들은 이웃 마을에 돌림병이 들어오면 물레방아의 공이만을 뽑아다가 붉은 흙칠을한 다음 마을 어귀에 거꾸로 박아 두었다. 훔쳐 왔던 디딜방아는 정월이 지나면 돌려주지만, 전남 순천시 낙안읍성에서는 개울에 다리를 놓는 데 사용했다. 이와 같은 액막이 의례는 학자에 따라 액막이놀이, 액막이굿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디딜방아로 액을 막는 민속은 2000년 민속예술로도 탈바꿈하여 운곡대보름액막이굿(전남)이 대통령상을, 부남방앗거리놀이(전북)가 문화관광부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지역사례 디딜방아 액막이 의례와 관련한 사례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화순군의 양촌과 용호에서는 여자들이 훔친 디딜방아를 남자들이 메고 오기도 한다. 디딜방아가 무거워서 여자들이 운반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강진군 덕동마을은 아예 남자들이 직접 디딜방아를 훔쳐 온다. 전승 주체가 여자에서 남자로 변경된 것이다. 디딜방아는 보통 이웃 마을에서 훔쳐 오는데, 거리가 멀수록 효력이 크다고 믿기도 한다. 화순군 용호마을은 담양군에서, 진안군 종평마을은 장수군에서 훔쳐 온다. 디딜방아를 세우는 위치는 마을 어귀인데, 이곳은 장승을 세워 악귀와 역병을 막는 곳으로서, 디딜방아에서 한시적으로 장승과 같은 역할을 기대한다. 디딜방아를 하나같이 거꾸로 세우고 윗부분에 여자의 속곳을 거꾸로 씌우는데, 임실군 관촌면 관촌리는 밀대 모자까지 씌워서 의인화하기도 한다. 속곳은 월경이 묻은 것이 주력이 강하다고 한다. 월경이 묻은 속곳이 없으면 황토를 칠하거나 붉은 물감을 칠하기도 한다. 디딜방아를 거꾸로 세울 때 고사를 지내기도 한다. 경북 상주시 은척면에서는 이웃 마을에 돌림병이 들었다는 소문이 돌면, 여럿이 다른 마을에 몰래 가서 방아를 훔쳐 가지고 “어이어이” 곡소리를 내며 돌아온다. 방아는 마을어귀에 다리가 위로 향하도록 세우고, 장가를 세 번 간 사람의 아내 속곳을 걸어 둔다. 이렇게 하면 돌림병이 더럽게 여겨서 달아난다는 것이다. 충남 아산시 온양에서는 여자들이 나서서 훔쳐 온다. 방아 가랑이에 개의 피를 바르고 주위에 왼새끼를 두른 다음 전나무 가지를 꽂아 둔다. 또 아낙네 단속곳을 방아머리에 씌우면서 “네가 여기에 와 있었구나”하고 읊조린다. 1940년쯤 전북 장수군 천천면 삼고리에서도 열병이 돌자 여자들이 이웃 마을의 디딜방아를 뽑아다가 서낭당 옆에 세웠다. 여자들이 훔친방아를 메고 돌 때 남자들은 절대로 내다보지 않는다. 여자로 꾸민 남자들이 방아를 훔쳐 오는 고장도 있다. 돌림병의 귀신이 여자인지 남자인지를 가리기도 한다. 여성은 디딜방아에 잠방이를 씌워서 세우고, 남성은 여자를 상징하는 짚신이나 수박 또는 호박을 잘라 문전에 달아맨다. 디딜방아는 또 기우제에서도 사용되었다. 이를 ‘디딜방아 매기’라고도 불렀다. 가뭄이 계속되면 마을 부녀자들은 비를 내리게 하기 위해서 물이 흘러나오는 강 상류의 마을에서 방아를 메고 와서 이것을 거꾸로 세워 두고 ‘장례식’을 치른다. 우선 디딜방아를 훔칠 집을 정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훔칠 집으로는 삼대가 함께 살고 있는 집, 삼대가 함께 살던 집, 마을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방아나 또는 개인 방아를 갖고 있는 집을 조건으로 결정하며, 도둑맞는 집은 대개 정해져 있다고 한다. 다음으로 부녀자들 중에서 남장을 한 상주와 선두에서 만가를 부를 사람을 정한다. 부인들은 장례식에서 하듯이 흰 옷에 흰 수건을 두르고 방아를 훔치러 간다. 도둑을 맞는 집 주인은 간섭할 수가 없다. 그냥 내버려 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죽거나 또는 큰 재앙을 만나서 몰락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단 도둑을 맞는 집 주부가 방아 곁에서 장례식을 하듯이 곡을 하면 그 방아의 효험이 사라진다고 한다. 방아를 내오면확(방아에서 움푹 파인 곳)에다 물을 가득 채워 둔다. 훔친 디딜방아를 운반하려면 방아머리 부분에 기름을 짠 천을 씌운 뒤 새끼줄로 디딜방아를 7곳으로 묶고, 그곳에 금줄처럼 한지를 끼운다. 그런 다음 창호지로 싸서 새끼줄로 디딜방아를 묶고 손잡이를 7개 만든다. 또 병에 물을 넣고 솔잎으로 입구를 막아 디딜방아에 매달아 두는데, 그렇게 하면 메고 올 때 물방울이 떨어진다. 운반하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다음과 같다. 오호 방아야 이 방아를 메고 오호 방아야 서둘러 떠나자꾸나 오호 방아야 이 방아를 멨더니 오호 방아야 모래가 떨어졌다네 오호 방아야 남편이 오면 오호 방아야 좋은 일이 있다네 오호 방아야 여자들이 많지만 진심을 담아서 오호 방아야 오도산에서 물을 얻어온다 그런 다음 운반해 온 방아를 세우는데, 세우는 장소는 항상 강 나루터로 정해져 있다. 세울 때는 구멍을 파서 방아의 머리 부분이 땅에 묻히도록 거꾸로 박는다. 그것이 끝나면 참가한 부인들 가운데 월경 중인 사람이 피가 묻은 속곳을 벗어서 디딜방아의 공이에 걸쳐 놓고 비가 오기를 기원한다. 3일 이내에 비가 와서 디딜방아를 돌려주는 경우도 있지만, 3일이 지나도 비가 오지 않으면 디딜방아와 속곳은 비에 떠내려갈 때까지 내버려 둔다. 경남 합천군과 산청군은 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 부녀자들이 이웃 마을의 디딜방아를 훔쳐다가 강이나 모래사장에 거꾸로 세운다. 이것을 방아매기(매기는막이의 사투리)라 한다. 합천군 봉산면에서는 주인 몰래 옮겨온 방아를 앞산 높은 곳에 세우고 돼지를 잡아 고사를 지냈다. 또 방아가 마을 앞을 지날 때 사람들이 방아에 대고 “비가 내리게 해주소서”라고 축원하며 절을 하였다. 이 풍속은 가뭄을 돌림병과 한 가지로 보았다. 그리고 디딜방아의 가랑이를 여성의 음부로 여기는 생각과 관련이 있다. 디딜방아는 액막이와 기우제 외에도 사용되었다. 디딜방아로 병을 고치기도 하였다. 경북 상주에서는 귓병이 생겼을 때 귀지를 후벼서 쌀개에 넣고 찧는다. 쌀개에 낀 귀지가 가루가 되듯이 병도 그렇게 없어진다는 유감주술이다. 또 정월대보름 찰밥을 얻어다가 디딜방앗간에서 먹으면 버짐이 없어진다고 믿었다. 정월대보름 아침에 아이들이 조리를 들고 집집마다 다니며 음식을 거둔 다음 디딜방앗간에서 먹었다. 이렇게 하면 일년 내내 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미노리에서는 못 쓰게 된 방아일지라도 불에 태우거나 버리지 않고 잘 보관한다. 함부로 굴리면 방아귀신이 들러붙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처럼 디딜방아와 관련한 민속은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또 지역마다 차이가 있다. 참고문헌 마을신앙의 사회사, 이필영, 웅진, 1994 기우제와 지역사회, 임장혁, 민속원, 1999 금산의 마을공동체 신앙, 한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1990 남도민속의 이해, 표인주, 전남대학교출판부, 2007 디딜방아액막이굿의 주술성과 오락화현상, 박진태, 비교민속학 31, 비교민속학회, 2006 디딜방아연구, 김광언, 지식산업사, 2001 한국민속제의와 음양오행, 김의숙, 집문당, 1993 관련이미지 14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디딜방아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디딜방아 (한국민속신앙사전: 마을신앙 편)   지식리스트 수정문의 공유 인쇄 글꼴가- 글꼴 작게가+ 글꼴 크게 두산백과 연자방아   [ 硏子─ ] 요약 곡식을 탈곡 또는 제분을 하는 방아. 이미지 크게보기 연자방아 연자매라고도 한다. 발동기가 없던 옛날 한꺼번에 많은 곡식을 찧거나 밀을 빻을 때 마소의 힘을 이용한 방아이다. 둥글고 판판한 돌판 위에 그보다 작고 둥근 돌을 옆으로 세워 얹어, 아래 위가 잘 맞닿도록 하고 마소가 끌고 돌린다. 정미소에 밀려 강원도 산골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으나, 옛날에는 마을마다 하나씩 있어 공동으로 사용하였으며 이곳을 연자방앗간 또는 연자맷간이라 하였다. 참조항목 농기구, 제분, 탈곡 역참조항목 방앗간, 하남시 상사창동 연자마 카테고리 경제·경영 > 산업 > 농업 > 농업기계및장비 관련이미지 46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연자방아곡식을 탈곡 또는 제분을 하는 방아. 이미지 갤러리 출처: doopedia.co.kr [네이버 지식백과]연자방아 [硏子─] (두산백과)   e뮤지엄 연자방아     이미지 크게보기   국적 > 시대 한국 재질 석(石) 크기 지름(지름)+159+높이(높이)+31 용도 · 기능 산업/생업(産業/生業) > 농업(農業) > 도정(搗精) > 연자방아 소장처 목아박물관 유물번호 민(민) 001289-000 곡식을 탈곡 또는 제분을 하는 방아. 연자매라고도 한다. 발동기가 없던 옛날 한꺼번에 많은 곡식을 찧거나 밀을 빻을 때 마소의 힘을 이용한 방아이다. 둥글고 판판한 돌판위에 그보다 작고 둥근 돌을 옆으로 세워 얹어, 아래 위가 잘 맞닿도록 하고 마소가끌고 돌린다. 정미소에 밀려 강원도 산골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으나, 옛날에는 마을마다 하나씩 있어 공동으로 사용하였으며 이곳을 연자방앗간 또는 연자맷간이라 하였다. 관련이미지 2                               이미지 이전 제주 애월 말방아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하가리에 있는 연자매. 중요민속자료 제32호. 보리와 조가 주곡인 제주에서는 연자매가 필수적인 농기구이다.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연자방아 (e뮤지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연자매     이미지 크게보기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하가리에 있는 연자매. 중요민속자료 제32호. 보리와 조가 주곡인 제주에서는 연자매가 필수적인 농기구이다. 유형 물품 성격 생활용품, 농기구/상세정보 〉 용도 제분, 탈곡 목차 정의 내용 정의 둥글고 판판한 돌판 위에 그보다 작고 둥근 돌을 옆으로 세우고, 이를 마소가 끌어 돌림으로써 곡식을 찧는 연장. 내용 ≪북학의≫에는 ‘연마(連磨)’로 적혔으며, 경상북도 경산에서는 ‘돌방아’, 경기도의 백령도에서는 ‘돌방애’ 또는 ‘연자간’이라고 한다. 밑돌은 땅바닥에 괸돌 위에 얹혀 있으며, 안쪽이 우긋하도록 나무로 만든 테를 두르고 돌과 흙으로 그 주위를 덧쌓는다. 밑돌 가운데에는 구멍을 뚫고 이에 고줏대를 박아 윗돌은 이에 의지하여 돌아간다. 한편, 고줏대는 힘을 많이 받아 흔들거리거나 빠져나가는 수가 있으므로 밑돌 아래의 아궁이처럼 뚫린 구멍으로, 역시 굵고 둥근 나무를 넣어 고줏대 밑 구멍에 끼워서 고정시킨다. 윗돌은 안쪽은 낮게 바깥쪽은 조금 높게 깎아서 언제나 안쪽으로만 돌아간다. 또 윗돌 양 가운데를 우긋하게 파고 고줏대와 방틀에 의지하여 양쪽에서 뺑이를 박아서 윗돌은 고줏대에서 함부로 이탈하지 않는다. 이 돌에는 방틀을 씌우고 그 한 끝을 마소에 잡아맨다. 한 사람이 마소 고삐를 잡고 앞에서 몰고, 다른 사람이 그 뒤를 따르며 넉가래로 곡식을 뒤집어주는데 이 사람을 ‘께끼꾼’이라고 한다. 마소를 모는 사람이 따로 없이 한 사람이 하는 경우도 있다. 연자매를 장만하는 데에는 비용이 많이 들어서 일반적으로는 마을에서 공동으로 마련한다. 이것으로는 벼·보리·수수·조 따위를 찧으며, 밀을 가루로 만들기도 한다. 벼 한 가마의 겉곡을 벗기는 데에는 두 시간이 더 걸린다. 먼저 애머리 찧은 것(약 20분이 걸린다.)을 풍구에 넣어 껍질을 날린 뒤에, 다시 넣고 방아를 돌린다. 이와 같은 과정을 네 번 반복해도 알갱이가 현미인 채로 남으며 잘 대껴지지 않는다. 보리를 찧을 때에는 알곡이 부서지지 않고 겉껍질이 잘 벗겨지도록 바가지로 물을 끼얹으며 방아를 돌린다. 한 차례 돌리고 꺼내어 햇볕에 말리고 풍구에 넣어 껍질을 날린다. 다시 넣고 다시 말리고 하는 과정을 세 번 거듭해야 한다. 볕이 약해 얼른 마르지 않으면 여러 날 걸린다. 조는 두 번 거듭해서 찧으며 한가마에 세 시간쯤 걸린다. 밀을 가루로 내는 데에는 한 가마에 한 시간 반쯤 걸린다. 방아질을 하려면 방아는 물론이거니와 소도 있어야 하므로, 주인은 마소와 방아를 함께 빌려 준다. 삯으로는 겉곡 한 섬 찧는 데에 알곡 한 말을 받았으며 이의 하루 사용을 사람의 이틀 품으로 잡기도 한다. 윗돌의 지름은 150㎝, 두께는 50㎝ 내외이다. 아랫돌의 지름은 170㎝쯤 되며, 두께는 윗돌보다 얇다. 매는 해마다 쪼아주어야 일이 쉽다. 이 일을 하는 사람을 ‘매조이꾼’이라고 부른다(전라남도 영광에서는 ‘석쇠아치’라 한다). 아래위 두짝을 쪼는 데에는 4∼5시간 걸린다. 삯으로는 쌀 한 말을 낸다. 연자매 한틀을 제작하는 데에는 한 달 가량 걸린다. 이 방아의 각 부분의 이름과 그 구실은 다음과 같다. ① 고줏대:밑돌 가운데 구멍에 박아놓은 기둥나무. 윗돌은 이를 의지하여 돌아간다. 쇠기둥을 박기도 한다. ② 고줏구멍:밑돌 한가운데에 고줏대를 박기 위하여 뚫어놓은 네모난 구멍. ③ 넉가래:윗돌이 갈고 지나간 곡식을 뒤집는 데에 쓰는 끝이 넓적한 막대기. ④ 방틀:우물 정자(井字) 모양으로 굵은 나무로 짠 틀. 이것을 윗돌에 끼워서 마소가 끌도록 한다. ⑤ 후리채:방틀에 끼우는 단단한 나무. 여기에 끈을 달아 소에 맨다. 이것은 마소가 끌기에 편리하도록 어스러지게 박는다. ⑥ 뺑이:윗돌이 함부로 벗어나 구르지 못하도록 고줏대와 방틀을 의지하여 윗돌 양가운데에 박는 짧은 나무. 괴목이나 박달나무 같은 단단한 재목을 쓴다. ⑦ 테:곡식이 밖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밑돌 주위에 비스듬히 둘러 놓은 나무. 방아를 방앗간에 안치하고 나면 간단한 음식을 방아의 고줏대 앞에 차리고 고사를 지낸다. 촛불을 밝힌 앞에서 주인은 절을 올리고 여주인은 다음과 같이 축원한다. “토지지신(土地之神)님, 목신(木神)님, 지금 ○씨댁 대주(大主) ○○생(生)이 ○○년 해운 ○월○일날 연자방아를 이루었나이다. 이 정성 받으시고 방아가 이 집 가중에 재수를 일으키고 모든 소원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내내 아무 뒤탈 없도록 도와 주소서. 원하옵고 원하옵니다.” 이러한 것은 당시 연자매가 중요한 연장이었음을 시사한다. 참고문헌 『한국농기구고』(김광언,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6) 관련이미지 2                               이미지 이전 연자방아 이미지 갤러리 출처: e뮤지엄 [네이버 지식백과]연자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3    [시공부 101] - 25... 댓글:  조회:2768  추천:0  2020-03-07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시인과 시적 화자는 다르다고요?     분야 현대 시 목차 시인이 작가라면, 시적 화자는 배우 시적 화자는 1인칭과 3인칭으로 존재한다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의 갈래 고등학교 문학 문학 작품의 구성 원리 시에서 말하는 사람을 시적 화자라고 하는데 시인과 시적 화자를 구분하는 이유는 뭔가요? 굳이 그렇게 구분해서 얻는 효과는 무엇인가요? 그리고 소설에서 말하는 서술자와 시적 화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알고 싶어요. 시인이 작가라면, 시적 화자는 배우 시인과 시적 화자는 분명히 다릅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들을 떠올려 보세요. 대개 사랑과 실연의 아픔을 표현한 노래를 많이 부릅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 실제로 사랑에 빠졌거나 실연을 당한 사람이 있나요?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이별의 아픔이 없는 사람도 있고 사랑에 빠져 있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기들이 마치 실제로 그런 상황에 놓인 것처럼 기쁘거나 슬픈 표정을 짓지요. 그러지 않으면 그들의 노래가 우리 마음을 흔들 수 없겠지요. 혹은 무대 매너가 별로라고 인기가 곤두박질칠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노래가 가수의 실제 경험이 아닌 줄 알면서도 가수가 노래에 실감나게 감정을 담아 부를 때 큰 감동을 얻습니다. 물론 노래가 끝나면 가수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일상으로 되돌아옵니다. 시인과 시적 화자의 관계도 비슷합니다.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일 뿐 시 속에서 말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시 속에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노래를 하는 아이돌처럼 시의 상황에 흠뻑 취하고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이지만 시인은 시라는 무대가 아닌 작품 밖에, 즉 삶 속에 머무르는 생활인입니다. 무대 밖에서 노래를 만들고 가사를 쓰는 작곡 · 작사가처럼 말입니다. 물론 가수가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을 노래할 수 있듯이 시인도 자신이 직접 겪은 이야기를 시로 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시인이 자기 이야기만 쓴다고 가정해 보세요.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더 이상 작품을 쓰기가 곤란해질 것입니다. 소재도 떨어지고 자기가 쓴 시 때문에 실제의 삶 속에서 여러 가지 제약도 생길 수 있지요. 시인은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허구적인 대리인을 내세울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를 시적 화자라고 부르며 또 다른 말로는 ‘서정적 자아’라고도 하지요. 시적 화자는 1인칭과 3인칭으로 존재한다 시적 화자는 소설의 서술자처럼 복잡하지 않습니다. 소설의 서술자는 1인칭과 3인칭으로, 다시 1인칭은 주인공 · 관찰자 시점으로 3인칭은 관찰자 ·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복잡하게 구분이 되지만 시적 화자는 이보다 훨씬 단순하게 나뉩니다. 시적 화자는 시 안에 직접 나타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로 나눌 수가 있지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김소월, 「진달래꽃」 중에서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박목월, 「나그네」 중에서 두 편의 시를 보면 시적 화자가 어떻게 다른지 금방 짐작할 수 있습니다. 두 작품모두 시적 화자가 존재합니다. 그런데 첫 번째 작품은 ‘나’가 직접 작품 속에 등장하지만, 두 번째 작품에서는 시적 화자가 직접 드러나지 않습니다. 소설의 3인칭 관찰자처럼 객관적인 상황만 제시하고 있는 것이지요. 시적 화자가 1인칭인 경우, 시인은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섬세하고 미묘한 감정과 정서를 효과적으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에서 이별의 슬픔이 그토록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은 ‘나’라는 화자의 감정이 ‘나’의 입을 통해 섬세하게 전달되었기 때문이지요. 반면 시적 화자가 3인칭인 경우, 독자들은 시적 상황과 대상을 좀 더 사실적이고 현장감 있게 느낄 수 있습니다. 박목월의 「나그네」에서 나그네의 외로운 정서는 시에 나타난 강나루, 밀밭, 구름 등 사실적인 소재들이 제시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처럼 현대 시에서 화자는 작품의 주제를 표현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시인과 시적 화자가 서로 다른 입장을 지닐 수도 있나요? 물론입니다. 시인과 시적 화자는 서로 다른 인격이기 때문에 굳이 입장을 같이할 필요는 없지요. 특히 시인이 자기 반성과 성찰을 한다든가, 자신을 스스로 풍자할 때는 시인과 시적 화자가 지향하는 것이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김광규의 「상행」에서 시인은 물질적인 가치만을 중시하는 시적 화자를 내세워 시적 화자 자체를 풍자하기도 했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시인과 시적 화자는 다르다고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2    [시공부 101] - 24... 댓글:  조회:2852  추천:0  2020-03-07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시어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분야 현대 시 목차 함축적 의미를 지닌 시어 시는 일종의 랩 시는 형상성을 지닌다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의 본질과 속성 고등학교 문학 문학 작품의 구성 원리 시에서 사용하는 말들은 일상적인 말들과 다른 특징이 있는 것 같아요. 시를 아무리 읽어도,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다 알아도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지 못할 때도 많고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될 때도 있잖아요. 왜인가요? 시어에는 뭔가 특별한 게 있는 건가요? 함축적 의미를 지닌 시어 산문은 그냥 줄을 따라 읽으면 의미가 쉽게 파악되는데 시는 집중을 하고 주의를 기울여 읽어도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시에 사용된 언어가 함축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함축은 문자 그대로, 무엇인가를 포함하고 모아 두며 때론 의중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시어는 일상 속에 사용하는 의미만 지닌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의미를 포함하고 모아 두는 것이지요. 따라서 시어를 일상적인 산문처럼 읽다가는 시어가 품고 모아 둔 다양한 의미를 놓칠 수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꽃」 이름을 불러 주었더니 꽃이 되는 현상은 일상적인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시에서 꽃은 단순히 식물로서의 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름을 부르는 행위도 단순히 소리 내어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 뜻하는 것이 아니지요. 일단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상대방을 의미 있게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도 선생님이 ‘야!’ 혹은 ‘너!’라고 부를 때보다 이름을 불러 줄 때가 더 기분이 좋을 것입니다. 그 까닭은 선생님이 ‘나’를 알아봐 준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한 명의 학생, 매년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채워지는 ‘몇 학년 몇 반 몇 번’이 아니라 고유한 ‘나’로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지요. 이처럼 이름을 부르다는 말에는 대상을 인식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꽃은 어떤 의미일까요? 꽃은 대개 식물의 가장 윗부분에서 색깔과 향기를 지닌 채 피어납니다. 따라서 식물을 볼 때 가장 먼저 시선이 가는 것이 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요. 어떤 식물들은 꽃으로 씨앗을 지키기도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꽃은 커다란 가치를 지닌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김춘수의 「꽃」은 내가 먼저 대상을 의미 있게 받아들일 때, 대상이 나에게 가치 있는 것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 시에서 ‘이름을 부른다’는 표현과 ‘꽃’이라는 단어에는 일상적인 의미 이외에 다른 의미들이 포함되고 쌓여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들을 함축적인 의미라고 합니다. 시어는 일상적인 언어와 달리 함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지요. 시는 일종의 랩 시어의 또 다른 특성으로는 음악성을 들 수 있습니다. 음악성은 시어의 배열 속에서 느껴지는 리듬을 가리킵니다. 원래 시는 악기의 리듬에 맞춰 부르는 노래였습니다. 서정시를 뜻하는 영어의 ‘lyric’은 ‘리라(lyra)’라는 악기의 리듬에 맞춰 부르는 노래라는 뜻이었지요. 오늘날에도 작사가의 이름을 쓸 때 ‘lyrics by ◯◯◯’로 표기하기도 하고요. 시는 산문과는 달리 리듬을 지니고 있습니다. 시를 줄글로 쓰지 않고 행과 연을 구분하여 쓰는 것도 모두 리듬과 운율을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어찌 보면 대중음악의 랩과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요.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청산별곡」 중에서 이 시는 고려 가요입니다. 마지막 줄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는 ‘ㄹ’ 소리와 ‘ㅇ’ 소리를 반복해서 독특한 리듬을 보여 줍니다. 리듬을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소리의 반복입니다. ‘ㄹ’과 ‘ㅇ’ 소리가 반복해서 나타나니 그 안에 리듬의식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위의 고려 가요에는 반복되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살어리 살어리랏다”는 ‘살어리 ˅ 살어리 ˅ 랏다’로 세 번 끊어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데 이처럼 세 번 끊어 읽는 말들이 계속 반복되고 있지요. 뒤에 살펴보겠지만 이를 음보율이라고 합니다. ‘보(步)’가 ‘걸음’을 나타내는 글자니까 쉽게 얘기해서 ‘음이 발자국을 찍는 자리’, 즉 끊어 읽는 횟수라고 생각하면 쉬울 거예요. 이처럼 시는 일상적인 말들과 달리 음악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시는 형상성을 지닌다 시어의 특징 중 빠뜨릴 수 없는 것은 형상성입니다. 우리는 시 구절을 읽으면 어느 구절에선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시각적일 때도 있고 촉각적이고 후각적일 때도 있으며 둘 이상의 감각을 동시에 자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마늘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추녀 밑 달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 고향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박용래, 「겨울밤」 이 시의 화자는 고향집에 있지 않습니다. 고향을 그리워해서 잠 이루지 못하는 밤을 보내고 있지요. 그런데 이 사람에게 고향집 마늘밭에 쏟아지는 눈과, 추녀 밑의 달빛이 떠오릅니다. 분명히 현실 속에는 없는 것이지만 독자의 머릿속에도 그것들이 떠오르게 될 것입니다.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에서는 발목에 서늘한 시냇물이 닿은 것 같은 촉각적인 느낌도 얻을 수 있지요. 물론 상상력을 동원한다는 조건을 만족한다면 말이지요. 이처럼 시는 지금 당장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머릿속에 떠올리게 만드는 형상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 이제 정리해 봅시다. 시는 일상어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그 의미와 성격은 실제 쓰이는 표현과 조금 다릅니다. 시어는 함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음악적인 리듬도 갖추고 있고 상상력을 동원해서 읽으면 형상성마저 느낄 수 있습니다. 시어는 일상 언어와 형태는 같을지 몰라도 그 쓰임새는 다른 것입니다. 시는 문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나요? 시는 문법을 따로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기본적인 소통이 되지 않을 정도로 쓰면 안 되겠지요. 시의 분위기라든가 주제의식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문법에 어긋난 것도 허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를 ‘시적 허용’이라고도 부릅니다. 예를 들면 김영랑의 시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에서 “돋쳐 오르는 아침 날빛이 빤질한 / 은결을 도도네”의 경우에서 “도도네”는 ‘돋우네’가 정확한 표현입니다. 또한 “빤질한”은 ‘반질반질’이라는 부사를 활용하여 시인이 만들어 낸 말이지요. 이처럼 시인은 운율을 위해서 문법에 어긋난 표현을 일부러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시어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1    [시공부 101] - 23... 댓글:  조회:2248  추천:0  2020-03-07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한시는 한자로 쓰였는데 왜 국어 시간에 배우나요?     분야 고전 시가 목차 한시는 우리 시가 문학에 속한다 을지문덕도 신사임당도 한시 작가 방랑시인 김삿갓, 풍자적인 시를 짓다 정약용, 백성의 삶을 건강하게 표현하다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의 갈래 고등학교 문학 한국 문학의 갈래와 흐름 한시는 우리 문학 작품에 포함되나요? 그리고 조선 후기에는 방랑시인 김삿갓이 지은 작품도 있고, 실학자 정약용이 지은 한시도 있다는데, 어떤 내용이었나요? 한시는 우리 시가 문학에 속한다 한시는 우리의 시가 문학에 속합니다. 한 민족의 문학은 그 민족에 속한 사람이 그 민족의 사상과 이념, 또는 정서를 그 민족의 언어로 표현해야 합니다. 따라서 한국 문학은 한국인이 한국인의 사상과 정서를 한국어로 표현한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우리나라는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기 전까지 고유의 문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말로 된 노래와 시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한자어로 우리 민족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한 작품도 적지 않았습니다. 한자로 적혀 있다고 해도 그 안에는 한민족이 지닌 고유한 사상이나 감정이 담겨 있습니다. 비록 한자로 쓰여졌지만 한시를 한국 문학으로 인정해야 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만약 한자로 기록된 문헌들을 모두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는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을 스스로 버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을지문덕도 신사임당도 한시 작가 한시가 창작된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입니다. 삼국 시대에 이미 을지문덕이 지은 「여수장우중문시」가 있었고 신라 말기에 최치원이 지은 작품들도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고려 시대에도 한시는 적극적으로 창작되었습니다. 고려는 광종 시절부터 과거를 실시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한문학이 크게 발전했던 것입니다. 정지상, 이제현, 이인로, 이규보, 이색 등 뛰어난 한시를 남긴 이들이 고려 시대에 많았습니다. 조선 시대에도 뛰어난 한시 작가들이 많았습니다. 기생 황진이, 그리고 그와 인연이 있던 서경덕과 임제,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발하며 세상을 떠돌았던 『금오신화』의 작가 김시습,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과 그의 누이 허난설헌, 이율곡의 어머니인 신사임당 등 당대에 내로라하는 명성을 지닌 이들은 모두 한시를 잘 지었습니다. 방랑시인 김삿갓, 풍자적인 시를 짓다 자, 이제 여러분이 질문했던 방랑시인 김삿갓을 알아볼까요? 그의 원래 이름은 김병연입니다. 양반가에서 태어났지만 가문이 몰락하여 숨어 지내다가 사면을 받아 과거에 급제한 인물이지요. 과거에 급제할 당시 김병연은 홍경래의 난에 항복한 김익순을 비판하는 글을 답으로 써냈는데 사실은 그가 비판한 김익순이 김병연의 조부였습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김병연은 벼슬을 버리고 스스로를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생각하고 큰 삿갓을 쓰고 다녔습니다. 그 까닭에 사람들이 그를 두고 김삿갓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김병연은 전국을 방랑하면서 시를 남겼는데 그의 작품 중에는 권력자와 부자를 풍자한 것이 많아 민중시인으로 불립니다. 日出猿生原(일출원생원) 해 뜨자 원숭이가 언덕에 나타나고 猫過鼠盡死(묘과서진사) 고양이 지나가자 쥐가 다 죽네 黃昏蚊檐至(황혼문첨지) 황혼이 되자 모기가 처마에 이르고 夜出蚤碩士(야출조석사) 밤 되자 벼룩이 자리에서 쏘아 대네 김병연, 「원생원(元生員)」 이 시는 김병연의 풍자적인 경향을 바로 알 수 있는 작품입니다. 시의 해석을 보면 등장하는 것들이 사람이 아니라 원숭이와 쥐, 모기, 벼룩과 같은 미물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시의 원문을 보면 ‘원생원’, ‘서진사’, ‘문첨지’, ‘조석사’라는 말이 눈에 띕니다. 이 말에서 각각 ‘원숭이 원(猿)’, ‘쥐 서(鼠)’, ‘모기 문(蚊)’, ‘벼룩 조(蚤)’ 자를 떼어 내 볼까요. 그럼 생원, 진사, 첨지, 석사라는 말이 남습니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말이지요. 특히 생원과 진사는 조선 시대를 다룬 TV드라마나 영화에서 많이 접했을 것입니다. 생원은 생원시에 합격한 사람을, 진사는 진사시에 합격한 사람을 가리키는데 생원시, 진사시는 모두 조선 시대 과거시험이었지요. 그렇다면 첨지와 석사는 무슨 뜻일까요? 첨지는 나이 많은 남자를 가리키는 말, 석사는 벼슬하지 않은 양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는 생원, 진사, 첨지, 석사처럼 마을에서 유세를 떠는 사람들을 각각 원숭이, 쥐, 모기, 벼룩에 비유한 것입니다. 조선 후기에 민중을 핍박하고 못살게 굴던 지방관리와 유지들을 이처럼 풍자한 것입니다. 자, 김삿갓이 어떻게 풍자를 작품 속에서 활용하고 있는지 알겠지요? 정약용, 백성의 삶을 건강하게 표현하다 다산 정약용은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입니다. 또한 거중기를 이용하여 수원 화성을 건설하는 등 실질적인 일들에도 힘을 썼지요.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다양한 저서를 남긴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는 한시도 많이 남겼습니다. 그의 작품은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실사구시 정신을 담고 있는 것이 특징이지요. 新芻濁酒如湩白(신추탁주여동백) 새로 거른 막걸리 젖빛처럼 뿌옇고 大碗麥飯高一尺(대완맥반고일척) 큰 사발에 보리밥, 높기가 한 자로세 飯罷取枷登場立(반파취가등장립) 밥 먹자 도리깨 잡고 마당에 나서니 雙肩漆澤翻日赤(쌍견칠택번일적) 검게 탄 두 어깨 햇빛 받아 번쩍이네 呼邪作聲擧趾齊(호사작성거지제) 옹헤야 소리 내며 발 맞춰 두드리니 須臾麥穗都狼藉(수유맥수도랑자) 삽시간에 보리 낟알 마당에 가득하네 정약용, 「보리타작」 중에서 이 시에는 사대부의 한시에서 보기 어려운 장면이 담겨 있습니다. 바로 농민들의 생활상입니다. 사대부들은 주로 자연을 그리거나 유교적인 이념을 노래했는데 이 작품에는 보리를 타작하는 농민의 건강한 모습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인용에는 누락되어 있지만 이어지는 구절에는 “마음이 몸의 노예 되지 않았네”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농민의 삶이야말로 육체와 정신이 일치하는 생활이라며 그렇지 못한 사대부와 자기 스스로를 성찰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요. 이처럼 정약용은 실사구시 정신을 바탕으로 현실의 건강한 모습을 그려 냈습니다. 정약용은 주로 어떤 작품들을 지었나요? 정약용은 학자이기 이전에 시인이었습니다. 그가 지은 시들은 대부분 삶의 현장을 사실적으로 그린 것들이었지요. 그는 19세기 초 조선의 농촌 사회를 구석구석 섬세하게 살펴보고 당대 사회의 모순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봉건적 신분 제도의 모순, 과거 제도의 폐해 비판 등도 정약용 시의 주제의식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조선시 선언」이라는 글을 통해서 조선 사람이 조선 사람의 정서를 표현하면서 중국 시의 율격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등 주체적인 문화적 태도를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시는 한자로 쓰였는데 왜 국어 시간에 배우나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