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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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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민속] - 한복 댓글:  조회:5312  추천:0  2020-03-10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복   [ 韓服 ] 이미지 크게보기 한복으로 정장을 한 모습. 유형 개념용어 목차 정의 내용 정의 우리나라 고유의 의복. 내용 전통한복이란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사상·관습·행위·형태·기술 등의 양식과 정신이 깃든 한복으로, 우리 고유 의복인 치마·저고리·바지·두루마기에 조끼·마고자가 포함된다. 1600여년간 이어진 고유 한복의 전통성은 세계에서 제일 길며, 그것은 고구려 고분벽화(4∼6세기)와 신라·백제 유물로 확인할 수 있다. 전통의 선을 현대부터 그어보면, 영·정조시대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의 풍속도에 나타난 한복까지 그을 수 있으며, 다시 조선초기·고려·통일신라를 거쳐 고구려 고분벽화의 기본복(유·고·상·포)까지 이어진다. 더 나아가 가시적인 자료는 없으나 고조선까지도 이을 수 있다고 본다. 기본복(基本服)의 원류는 스키타이계이며 북방민족의 복식이다. 고대 한국의 복식문화는 주변국가보다 매우 발달하여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예 중의 하나가 우리의 유(襦)와 고(袴)를 서기전 4세기경에 중국의 조(趙)나라 무령왕(武靈王)이 융복(戎服)으로 채용하였다. 후한대(後漢代)에 고습(袴褶)이라고 불렸으며, 위진(魏晉) 이후 천자(天子), 백관의 융복과 사인(士人)·서민복으로, 당대(唐代)에는 삭망(朔望) 때 조회복(朝會服)으로도 입혀졌다. 일본에서는 한국인이 집단으로 이주할 때 입고 간 우리 옷(유·고·상·포)을 계속 입었으며 원주민에게도 전했음을 하니와(稙輪)로 알 수 있다. 유의 기본형은 전개좌임착수(前開左袵窄袖)에 옷 길이는 둔부정도 길이[短衣]이고, 옷깃·섶·밑단·수구에 흑색 선(襈)이 둘러져 있고, 여밈은 깊지 않은데 선 넓이 내외로 여며진다. 반드시 옷을 겹쳐 입었으며, 유의 안쪽 옷은 둥근 깃과 곧은 깃 2가지 형태가 보인다. 기본형 이외에 무릎 길이 정도의 장유(長襦)와 우임(右衽)을 많이 착용하였다. 소매길이는 상류층은 길고 하류층은 짧다. 통일신라 때의 유는 이색선(異色襈)보다 동색선(同色襈)을 댄 옷을 많이 착용하게 되었다. 상류층은 당(唐)의 착용법인 저고리 위에 치마 차림이었으나, 서민은 치마 위에 저고리를 입는 차림새였다. 고려시대 말기 짧은 저고리가 유행되고 고름이 생겼다. 엉덩이를 덮는 길이의 긴저고리는 계속 서민들이 착용하였고, 조선 중기까지도 계속되면서 옆 트임이 생기고 겉옷화 한다. 조선 숙종조에 팔꿈치 길이까지 짧아지고 영조대에는 가슴을 덮는 45㎝ 정도에서 점차 짧아지기 시작하여 정조대에는 약 26㎝ 정도였으며, 1890∼1900년대는 19㎝까지 짧아 겨드랑이가 보였고, 1920년대에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였다. 1930년대를 전후해서 저고리 길이는 더욱 길어져 옆선이 7∼8㎝ 정도까지 내려갔고 배래선이 오늘날과 비슷한 곡선이 되었다. 1940년대에는 저고리가 배꼽까지 오는 길이였으나, 1950년을 전후해서 차츰 짧아지기 시작하여 1970년대에 오늘날의 저고리 길이 정도로 고정되었다. 삼국시대의 치마는 밑단까지 주름이 잡힌 주름치마와 여러 쪽을 이은 치마, 색동치마가 있었으며, 밑단에 선을 댄 치마도 있었다. 상류층의 치마는 길고 하류층은 짧았는데, 치마 속에 여러 가지 속옷을 입어 A라인이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상류층은 당나라의 치마 형태와 입음새를 따랐다. 현대 치마와 같게 허리부분에만 주름을 잡은 내상(內裳)과 표상(表裳) 2개를, 유 위에 입었으며, 치마 말기가 보이므로 좋은 옷감으로 만들었다. 서민의 입음새는 상 위에 유를 입는 방법이었다. 고려시대에도 이 두가지 입음새가 계속되다가 고려말에는 우리 전통 입음새로 돌아가 현재까지 이른다. 치마길이는 저고리가 길 때는 짧았고 저고리가 짧을 때는 치마가 길었다. 삼국시대 바지의 기본형은 바지통이 좁고 발목에서 대님을 맨 것이었으나, 넓은 바지, 짧은 바지가 있었고, 바지 부리에 이색선이나 동색선을 댄 바지 등이 있었다. 여자도 유와 바지를 입은 모습이 많다. 치마 속에 여러 겹의 바지를 입어 치마를 부풀린 시대는 삼국시대·고려·조선 중기이다. 특히 조선 중기에는 속속곳·바지·단속곳을 입어 항아리형을 만들었다. 유물을 통해 살펴 본 남자의 사폭바지는 임진왜란 전후에 생긴 것이다. 포의 기본형태는 유와 같으나 길이만 긴 것으로, 종아리 아래 길이이다. 유·고와 유·상 위에 입는 예복용이었다. 상류층 남자는 중국풍의 포를 입었으나 서민남자와 여자들은 기본포를 입었다. 통일신라·고려·조선 초기의 서민 남녀는 계속해서 우리 고유 포를 입어 현대에 이르고 있다. 고려말기에 고름이 생겼고, 포의 용어가 두루마기로 되었다. 조선 중기 이후 유교가 강화되면서 여자들의 외출이 금지된 후 여자의 포 착용대신 쓰개로 장의와 쓰개치마가 사용되다가 개화기에 방한복으로 두루마기를 착용하게 되었다. 조끼와 마고자는 개화기 때 생긴 옷으로 현재 우리 전통 한복으로 인식되고 있다. 조끼는 1880년대 이후 남자 양복이 들어오면서 한복에 도입되었다. 한복에는 주머니가 없었기 때문에 주머니가 달린 조끼는 매우 급속히 보급되었다. 마고자는 저고리 위에 덧 입는 옷으로, 1887년(고종 24)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 만주에서 귀국할 때 청나라 옷이었던 마괘(馬褂)를 입고 온 것에서 유래되었다. 모습은 저고리와 비슷하나 깃과 동정이 없다. 참고문헌 『한국복식사연구』(김동욱, 아세아문화사, 1979) 『한국복식사연구』(유희경, 이화여대출판부, 1973) 『조선복식고』(이여성, 백양당, 1947) 관련이미지 6                               이미지 이전   이미지 갤러리 출처: 매듭의 여왕 묶음의 달인 [네이버 지식백과]한복 [韓服]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매듭의 여왕 묶음의 달인 우리 한복, 곱게 바르게     목차 우리가 입고 자랑해야 할 한복 한복 치마저고리의 구조와 변천 좌우가 바뀌면 곤란한 남자 바지 한복 착용 방식의 핵심은 매듭법! 우리가 입고 자랑해야 할 한복 우리의 전통미를 상징하는 한복. 특히 여성 한복은 세계적으로도 그 아름다움을 인정받는다. 직선과 곡선이 어우러져 화려하고도 단아한 자태를 풍기는 치마와 저고리는 우리 고유의 전통 의상이다. 팔을 끼워 넣어 입는 저고리는 상체를 작게 보이게 하고, 허리에 감아 입는 치마는 하체를 풍성하게 보이도록 만들어 균형을 잡아준다. 우리나라 여성의 체위는 물론 어떤 나라 여성들 체형에도 무난하게 어울린다.「대장금」에서 「동이」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사극(史劇)이 외국에서 인기를 끄는 배경엔 분명 한복의 영향도 크게 작용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 한복은 '제대로' 입어야 자태가 살아난다. 고전적인 격식의 의미가 아니라 한복의 멋을 살리는 최소한의 가치와 기준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한복 치마저고리의 구조와 변천 한복을 바르게 곱게 차려입기 위해선 한복의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한복은 서양 의복과는 구조가 많이 달라서 부위별 명칭도 독특하다(그림 참조). 과거에는 일상적으로 부르던 명칭이지만 요즘은 생소하게 들릴 수도 있다. 저고리 가운데 고름과 소매 아랫부분의 배래선은 유행의 흔적을 보인다. 고름의 경우는 원래 의복을 정돈하는 기능이었으나 점차 그 길이가 길어지면서 장식의 비중이 높아졌고, 소매 아랫부분 외곽선인 배래선 또한 아주 둥근 형태를 이루다가 거의 직선 형태로 좁아지는 시절도 있었다. 치마의 변천 또한 예외가 아니다. 조선시대 영조 20년경까지는 긴 저고리와 함께 치마를 허리에 둘렀다. 갈수록 저고리 길이가 짧아지면서 위로 올라가기 시작한 치마는 드디어 가슴에 허리끈을 두르게 되었다. 좌우가 바뀌면 곤란한 남자 바지 남자 바지는 얼핏 앞뒤가 구분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엄연히 앞과 뒤가 구분되어 있다. 바지는 큰 사폭이 오른쪽, 작은 사폭이 왼쪽으로 가도록 입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다. 허리끈을 맬 때도 아무렇게 두르면 바지의 매무새가 살지 못한다. 헐렁한 바지 허리 부분을 앞으로 당겨 왼쪽으로 접되, 왼쪽의 마루폭과 사폭의 시접선이 왼쪽 허벅지 중앙을 지나는 정도가 가장 적합하다. 그런 다음 허리끈을 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의 한복은 완전 예외다. 대량 생산되는 개량 한복은 물론 전문 한복집에서 맞춘 한복 중에도 아예 허리끈을 바지 허리에 부착시켜 놓거나 고무줄을 넣은 경우도 있다. 이런 형태의 한복은 허리끈뿐만 아니라 대님조차 단추나 스냅 처리를 해 편의성을 부여하는데, 아무리 간편해서 좋을지언정 품위와 자태가 떨어진다는 점은 염두에 두자. 한복 착용 방식의 핵심은 매듭법! 한복의 장점은 많다. 우선 입고 벗기가 편하다. 몸을 넉넉하게 감싸주는 풍성함이 체형의 결점도 가려준다. 치마 · 저고리 · 바지 모두가 납작하게 접혀 보관하기에 좋고 공간도 많이 차지하지 않는다. 키 작은 반닫이로 충분하다. 그렇다면 한복의 단점은? 착용 절차가 복잡하고 실용적이지 못하다고 한다. 그래서 평상복 아닌 예복의 개념이 되고 있다. 심지어 한복 착용을 생활화하자는 명분 아래 '개량'이라는 수식어를 단 일부 옷들은 대님은커녕 고름마저 생략되고 있다. 아무리 편의성도 좋지만 고름 없는 옷을 어찌 한복이라 부를 수 있을까···. 문제는 매듭법! 허리끈과 대님, 고름 매는 방법은 한복을 자주 입지 않으면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이 책의 용도가 바로 여기에 있다. 관련이미지 3                               이미지 이전 한복한복으로 정장을 한 모습.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우리 한복, 곱게 바르게 (매듭의 여왕 묶음의 달인)   두산백과 한복   [ 韓服 ] 요약 한민족(韓民族)의 고유한 의복. 이미지 크게보기 한복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한민족 고유의 의복으로서 조선옷이라고도 한다. 직선과 약간의 곡선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우며, 특히 여자 옷은 짧은 저고리와 넉넉한 치마가 어울려 옷차림이 단정하고 아담하다. 예복과 평상복이 나뉘어 있으며 남녀별 성인과 어린이용, 계절별로 나뉜다. 참조항목 복식, 소매, 저고리, 치마 역참조항목 고름, 고쟁이, 단속곳, 대님, 대란치마, 대례복, 돌옷 카테고리 생활 > 의생활 > 한국전통의상 및 장신구 관련이미지 19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한복 이미지 갤러리 출처: doopedia.co.kr [네이버 지식백과]한복 [韓服] (두산백과)   패션전문자료사전 치마 저고리     한국인이 착용하는 전통적인 민족 의상. 치마는 한 장의 천으로 된 스커트 모양의 아래옷을 말한다. 기장은 가슴에서 복사뼈까지이며, 어깨에서 끈으로 여미어 입게 된다. 저고리는 길이가 30cm 정도의 짧은 상의로서, 통소매, 동정, 가슴에 늘어뜨리는 옷고름으로 요약된다. 저고리는 보통 치마보다 엷은색이 사용되며, 이 두 벌의 짝맞춤으로 여성의 의상이 된다. 소재는 비단이 많다. 또한 남성은 치마가 아니라 바지를 착용한다. 관련이미지 치마 저고리(조선시대, 18세기)출처: 패션전문자료사전 (촬영: ) [네이버 지식백과] 치마 저고리(패션전문자료사전, 패션전문자료편찬위원회)   시집가고 장가가고 흰옷과 치마저고리     전통시대에는 농상(農桑)이 가장 기본적인 산업이었다. 지방 수령이 챙겨야 할 일곱 가지 주요 업무 가운데에도 농상이 들어 있다. 농상이란 농사와 양잠이니, 농사는 먹기 위한 것이요 양잠은 입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뽕나무를 키우고 누에를 쳐서 만드는 비단은 보통사람이 범접하기 어려운 옷감이었다. 비단은 지체의 상징이었고 서민은 고래로 삼베옷이나 가죽옷 따위를 입었다. 조선 성종 때 기록을 보면, 북방의 병사들은 추운 날씨에도 삼베옷에 갑옷을 입었다고 하였다. 고려시대에도 평민이 비단옷을 입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종 9년(1131) 5월에 서울과 지방에서 비단 짜고 수놓는 일을 못하게 하고, 10년을 기한으로 평민이 비단 상의와 비단 바지를 입는 것, 도성 안에서 말 타는 것, 노비들이 가죽띠를 띠는 것을 금지하였다. 『고려사』1) 금령 그런데 비단과 삼베의 간극을 메워준 것이 고려 말기인 1363년에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들여온 목화였다. 남방 산물인 목화가 처음 전래되었을 때에 서양에서는 양털을 대신했다고 해서 ‘나무에 열린 양’으로 생각했고, 중국에서는 비단을 대신했다고 해서 ‘나무에 열린 누에고치’로 생각했다. 목화는 국내에 들어오자마자 급속히 퍼져나갔다고 한다. 정천익이 그 집 여종에게 가르쳐서 한 필을 짰다. 이웃 마을에 전하여 서로 배워서 한 고을에 보급되었고, 또 10년이 되지 않아서 전국에 두루 퍼졌다. 태조실록 7년(1398) 6월 13일 10여 개의 씨앗을 심어 하나만 싹을 틔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10년 사이에 전국에 퍼졌을 정도니 목화 도입의 효과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만하다. 그러기에 조선시대에 목화실로 짠 무명이 화폐로도 사용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상하귀천을 막론하고 옷을 만들 때에 따뜻하게 입으려면 명주를 쓰고 시원하게 입으려면 삼베를 쓰지만, 모두 무명만 못합니다. 무명은 너무 사치스럽지도 너무 검소하지도 않고 추위나 더위에도 적당하여, 마치 음식물로 흔히 대하는 차, 밥, 콩, 조와 같습니다. 정조실록 24년(1800) 2월 22일 이렇게 무명이 일반화했으나, 북방인 함경도에는 면화가 재배되지 않았기 때문에 남쪽에서 운송해 가야 했다. 따라서 무명이 귀해 다른 옷감을 이용한 것을 볼 수 있다. 이삼이 아뢰기를 “북쪽 병영에는 목면이 없어서 백성들이 모두 개가죽 옷을 입습니다. 평안도 병영에는 정목(正木, 품질 좋은 무명)이 제법 여유가 있으니, 북쪽 병영의 삼베 10여 동(同)을 매년 평안도 병영으로 보내어 10동의 무명과 바꾸어 군관의 의복과 상품에 쓸 수 있도록 의정부에 정식으로 분부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영조실록 5년(1729) 5월 6일 1동은 50필을 이른다. 북방 군사들은 이처럼 개가죽 옷을 입기도 했지만 종이옷도 입었다. 평안병사 신응주가 강변을 파수하는 군졸들에게 지의(紙衣)와 유의(襦衣)를 나누어주고 급히 아뢰기를, “강변의 읍과 진에서 동상에 걸릴 근심은 파수꾼이 봉수군보다 더 심하고, 군졸이 장수보다 더 심합니다. 봉수대와 파수막을 막론하고 장수에게는 모두 지의를 주고 파수꾼에게는 모두 유의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봉수군의 유의가 부족하여 각 봉수대마다 유의 세 벌과 지의 두 벌을 주어 번갈아 입게 하였습니다. ···”고 하였는데, 연말에 유의 385벌과 지의 400벌을 하사했기 때문이다. 정조실록 20년(1796) 1월 1일 ‘지의’는 솜 대신에 종이를 넣어서 만든 옷이다. ‘유의’는 남자 저고리인 동옷으로 겹옷과 홑옷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것은 솜저고리일 것이다. 조정에서는 군사 의복으로 솜저고리마저 모두 조달하지 못해서 종이를 넣은 옷을 지급하였다. 심지어 과거시험을 치른 뒤에 낙제자 답안지를 변방에 보내서 옷감으로 사용하게 하는 관례도 생겼다. 국가에서 으레 과거시험장의 낙방지로 납의(衲衣, 누비방한복)를 만들어서 북쪽 변방을 지키는 군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때에 비변사가 아뢰기를, “보통 비변사에서 시험관에게 고지하여 북쪽 변방에 보내는 낙방지를 남김없이 모아 실어보내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매번 300장 정도로 책임만 면하고 있으니 아주 온당치 않습니다. 감시(監試, 생원진사과) 초시(初試, 첫시험)의 낙방지를 서울과 지방의 시험관들이 자기가 차지하거나 남에게 주는데, 이는 재물 횡령에 가깝습니다. 그러니 시험장에 들어왔던 사람 수를 보고해서 사사로이 쓰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대로 하라고 지시하였다. 광해군일기 9년(1617) 6월 22일 시험지는 원래 응시자가 지참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종이가 귀하다 보니 낙방지를 돌려주지 않고 관청 용품으로 사용하였고 군사들의 옷감으로도 이용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종이를 빼돌려 사사로이 사용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과거시험을 자주 볼수록 북방의 군사들은 더욱 혜택을 보았을 것이다. 종이는 이처럼 군사의 옷으로만 사용한 것이 아니고, 여러 겹을 겹치기도 하고, 누비기도 하고, 소금물에 담그기도 해서 종이갑옷도 만들었다. 일반인들도 두터운 종이를 마름질하여 옷을 해 입었다. 그런가 하면, 추위에 떠는 죄수에게 짚으로 만든 섬을 지급한 사례도 보인다. 해당 관청에 명령하여, 서울에 번들러 온 군사 가운데 옷이 얇은 자에게 유의를 나누어주게 하고, 여러 곳의 수비 군졸과 옥중 죄인들에게 빈 섬을 나누어주도록 하였다. 이어 경미한 죄수들은 석방하라고 지시했다. 인조실록 10년(1632) 12월 26일 섬의 모습 담요로 만든 아이 옷     겨울 추위에 대비하여 병사와 옥중 죄인에게 공석, 즉 곡식을 담지 않은 빈 섬을 나누어주었다. 지금 쓰는 가마니는 근대에 일본에서 들어온 것이고, 그 이전에 사용한 것이 섬이다. 이것도 역시 짚으로 만들었으니, 이불이나 겉옷 대용으로 사용하였을 것이다. 아니면 구멍을 뚫어서 손과 목만 내놓을 정도로 입었을 것이다. 6.25 때 담요에 구멍을 뚫어서 아이들 옷으로 사용했던 기억과 겹쳐진다. 시대를 거슬러올라가면 더 흥미로운 자료가 있다. 이들은 돼지 기르기를 좋아하여 고기는 먹고 가죽은 옷을 만든다. 겨울에는 돼지기름을 몸에 바르는데, 그 두께가 몇 푼이나 되어 바람과 추위를 막는다. 여름에는 알몸에다 한 자 크기의 베로 앞뒤를 둘러서 형체만 가린다. 『삼국지』2) 읍루 전기 읍루족은 만주 북방에 살던 종족으로 여진족, 말갈족의 먼 조상이 된다. 이들은 여름에 거의 벌거벗고 겨울에는 몸에 돼지기름을 두텁게 발라서 생활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그 후예인 물길족에서는 오줌으로 세수를 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것은 북방 민족 사이에 유행하던 것으로 오줌에 어떤 기운이 숨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 한다. 아마 따스한 물로 세수하려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1890년대에 한반도를 여행한 혼마 규스케도 이를 목격했다. 오줌은 더러운 것으로 알려졌지만 조선 사람은 이것을 더운물, 혹은 물처럼 생각하고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 또한 조선 사람이 불결한 인종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증으로 삼을 만하다. 정말로 소변으로 얼굴을 씻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이것을 두고 이르기를 피부를 윤기있게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혼마 규스케 책3), 116쪽 고대 기록에는 눈에 띄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만주에 살던 부여 사람들이 흰옷을 숭상했다는 대목이다. 국내에 있을 때에는 흰옷을 좋아한다. 흰옷에 큰 소매가 달린 두루마기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 『삼국지』 부여 전기 외국에 나갈 때는 비단옷, 모직옷을 즐겨 입지만 일상적으로 국내 거주시에는 흰색 옷을 좋아했다는 것이다. 당시에 무명도 없었으니 모시처럼 삼베로 흰옷을 만들거나 다른 재료를 사용하였을 터인데, 더러워지기 쉬워 오래 입기 어려운 흰옷을 좋아했다는 것은 여간한 일이 아니다. 신라에서도 관복으로 흰색을 숭상하였다고 한다. 이런 흰옷 전통은 우리가 사는 이 시대까지 끊임없이 내려왔다. 오죽하면 우리 민족을 ‘백의민족’이라 부르겠는가? 몽골에서는 국가별로 색깔을 인식하는데, 하늘색은 몽골이고, 노란색은 중국이고, 흰색은 한국이라고 한다. 조선 말기 서양인의 기행문에 자주 나오는 것이 흰옷 물결이다. 서울은 한 가지 점을 제외하면 내가 본 도시 중에서 가장 음울한 도시이다. 한 가지 예외란 사람들이 입은 흰옷이다. ··· 멀리서 보면 푸르스름한 기운이 감도는 흰 겉옷은 확실히 거리를 환하게 만든다. 퍼시벌 로웰 책4), 183쪽 코레아인들은 일반적으로 여름이나 겨울을 막론하고 옷을 따뜻하게 입는 편이다. 조끼, 외투, 오버코트 등 온통 흰색 일색으로 층층이 껴입는다. ··· 그러나 이 흰옷들도 자세히 보면 더 깨끗한 것도 있고 덜 깨끗한 것도 있어 그 흰 정도가 천차만별이며, ··· 아손 그렙스트 책5), 124쪽 울산 장날의 흰옷 물결(1930년대) 과연 조선 백자와 더불어 흰옷은 조선을 상징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왜병이 흰옷으로 위장해서 명나라 군사를 혼란스럽게 했을 정도다. 다음은 장운익이 선조에게 보고한 내용이다. 방금 직산의 전쟁터에서 돌아온 중국 병사가 “천안과 직산 사이에서 뜻밖에 왜적 선봉이 모두 흰옷을 입고 들판을 덮어 오기에, 중국 병사들이 처음에는 조선인이라 생각하여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적이 먼저 포를 쏘므로 중국 병사들이 일시에 말을 달려나가 서로 죽이며 한참 동안 교전했습니다. ···”고 했습니다. 선조실록 30년(1597) 9월 9일 그런데 조선시대에 이런 복색을 바꾸려는 시도가 있어 이목을 끈다. 선조 39년(1606)에 일본에 파견되는 사신의 흰옷을 벗어버리고 중국식으로 바꾸자는 건의가 있었다. 현종 때에는 흰옷을 입지 못하게 하는 조치를 내렸다. 조정의 관리와 선비들에게 검은옷을 입게 하고 흰옷을 금지시켰다. 동방인은 자고로 흰것을 숭상했으므로, 국법에 흰색을 금하는 법이 있으나 그대로 습속이 되어 바꾸지 못했다. 임금이 이를 바꾸려고 제도를 마련한 것이다. 현종실록 12년(1671) 1월 1일 영조는 오행사상에 따라 흰옷을 푸른옷으로 바꾸도록 조치를 내렸다. 우참찬 이덕수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한 제안자가 ‘우리나라는 동쪽에 있는 나라인데, 동쪽은 시절로 말하면 봄에 해당하고 색으로 말하면 청색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풍속이 흰옷 입기를 좋아하지만 마땅히 흰옷을 금지하고 푸른옷을 숭상하게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고, 전하께서도 이미 그 말에 따라서 이를 시행하도록 한 지 여러 날이 되었습니다.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 우리 동방의 풍속에 흰옷을 숭상한 것은 앞 시대의 역사책에 많이 기록되어 있고, 『수서』와 『송사』 및 명나라 동월의 기록에도 더욱 명백하게 나타납니다. 대체로 풍속이 이루어진 지 수천 년이 되었는데 지금에 와서 고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알 수 없으니, 신은 그만두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마땅히 생각해보겠다”고 하였다. 그 이튿날 지시를 내려 말하기를, “우참찬이 상소한 말을 묵묵히 생각해 보았는데 그의 말은 지나치다고 할 만하다. ··· 우리나라에서 흰옷을 숭상해 왔다는 것은 비록 옛 선비들이 한 말이지만, 숭상한다고 말한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어찌 요즘처럼 심했겠는가? ··· 근래에 인심이 경박해져서 남색을 흰색으로 바꾸는 자가 장차 어지럽게 나타날 것이니, 전국에 깨우쳐 타이르도록 하라”고 하였다. 영조실록 14년(1738) 8월 16일 명나라 사신 동월이 조선에 왔다가 돌아가 『조선부(朝鮮賦)』를 지었다. 영조의 이러한 지시는 제대로 먹혀들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다. 그 다음 정조 때에도 흰옷 문제가 다시 불거졌기 때문이다. 좌의정 김이소 등에게 지시하기를, “창의(氅衣)를 푸른색으로 하자는 것과 소매가 넓은 폐단에 대해 영의정이 초기(草記, 간략히 왕에게 아뢰는 문서)에 첨부하여 보고한 일이 있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대체로 창의 문제는 위에서 지시할 일이 아니라고 본다. 만일 법령으로 정했다가 준수하지 않아 실행 효과를 보지 못한다면 차라리 법령을 만들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고 하니, 김이소 등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지당합니다. 창의도 관리 예복의 하나이면서 집에서 늘 입는 옷이기도 하여, 사람들이 푸른색과 흰색 두 벌을 갖추어서 관청에 갈 때는 푸른색을 입고 집에 있을 때는 흰색을 입습니다. 진실로 그 이유를 찾자면 대개 우리나라 풍속이 흰색을 숭상하기 때문인데, 지금 만약 흰색을 푸른색으로 바꾸면 예법에 부합될 뿐 아니라 번잡함도 덜 수 있을 것입니다. 신들이 당장 오늘부터 솔선하여 푸른 창의를 입겠습니다 ···”고 하였다. 정조실록 17년(1793) 10월 20일 ‘창의’는 조선 후기에 벼슬아치들이 평상적으로 입던 웃옷이었다. 이를 두 가지 색으로 만들어 집과 바깥에서 각각 달리 입음으로써 규정과 전통을 모두 순응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온통 흰옷을 입은 군중이 모여 있는 3 · 1운동 사진을 보면, 흰옷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비친 흰옷은 일본인에게 쓸쓸함과 애상을 연상시켰던 데에 비해 서양인에게는 축제와 쾌활함을 연상시켰다고 한다. 이와 함께 흰옷은 일본에 대한 저항 의지의 상징이기도 했다. 근대화란 이름으로 양복과 양장이 보급되자 이에 반발하여 전통의복의 고수로 대응하였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YWCA를 중심으로 ‘흰옷 염색하기’를 내세우며 생활개선 운동을 벌였다. 전라남도에서 나온 색옷 권장 전단에는 “생활 개선은 우선 물든 옷 입는 것으로부터”라고 하였다. 흰옷은 더러워지기 쉽고 자주 빨래를 해야 하므로 비경제적이니 모두 물들인 옷을 입자고 하였다. 이 사진을 보면 ‘백의퇴산’ ‘색복장려’란 표어가 보인다. 흰옷을 쫓아내고 색깔 있는 옷을 장려하자는 것이다. 이처럼 흰옷은 근대까지도 뿌리깊게 내려와 한국인의 상징물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흰옷 퇴치 운동 흔히 염색이 발달하지 못해서 흰옷을 입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스 서민들도 흰옷을 즐겨 입었는데, 물감이 개발되면서 여러 가지 염색법이 유행하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한반도에서 장기간 흰옷을 고수한 것은 그것만으로 설명이 부족하다. 굳이 색옷을 입으려 했다면 요새 개량 한복처럼 각종 염료를 개발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그 일단을 추정해볼 수 있는 자료다. 삼한의 의복제도는 염색한다는 말을 듣지 못했고, 꽃무늬를 넣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 옛날 풍속에 여자 옷은 흰 모시에 노랑 치마인데, 위로 왕실과 귀족으로부터 아래로 백성의 처첩에 이르기까지 한 모양이어서 구별이 없다 한다. 『고려도경』6) 부인 고려에서도 중국 옷이 들어오기 전까지 모든 여자는 흰 모시옷을 입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염색을 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염색이 발달하지 않았다기보다는 염색을 선호하지 않았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흰옷 전통은 지금 사라졌지만, 그 여파는 아직도 살아 있다. 우리나라 사람은 단순한 색인 원색 계통의 옷을 즐겨 입는다. 흰색이나 색동옷의 색감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일본 사람이 중간색 옷을 즐겨 입는 것과 대비된다. 옷 색깔의 배합에서 일본 사람보다 색감이 떨어진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흰옷과 더불어 뿌리깊은 전통을 보이는 것이 하나 더 있으니 여성의 치마와 저고리가 그것이다. 우리 옷의 역사를 보면, 외래문화가 들어올 때마다 크게 바뀌어왔다. 첫 변화는 신라 진덕여왕 2년(648)에 일어났다. 김춘추가 당나라에 갔다가 옷과 허리띠를 가져와 전통 복장을 당나라 복장으로 변경하였다. 문무왕 4년(664)에는 부인 의복도 바꾸어 복식제도가 중국과 동일하게 되었다고 한다. 치마와 저고리의 전통은 여기서 비롯된 듯하다. 고려 충렬왕 4년(1278)에는 원나라 영향을 받아 개체(開剃) 머리를 하였다. 개체는 머리의 가장자리를 깎고 정수리 부분의 머리만 남겨 길게 땋아 늘어뜨리는 것으로 변발이라고도 한다. 머리 깎는 방식은 약간 다르지만 청나라 사람 머리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그러나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교체되자 옷도 즉시 바뀌었다. 우왕 14년(1388)에는 명나라 사람들이 올 것이라고 해서 개체 머리와 몽골 옷을 금지시키는 명령을 내렸다. 그 뒤 청나라가 들어섰을 때에도 만주족 복장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었던 것은 물론이다. 여성이 남자 옷을 입는 풍습도 등장하였다. 당나라 측천무후가 권력을 잡았을 때에 사회적으로 여성의 지위가 높아지면서 여성이 남복을 입는 풍습이 생겨났다고 한다. 당나라 그림에는 여성이 남자 관복을 입은 모습이 보인다. 이 영향으로 발해 정효공주 무덤 벽화에서도 남장 여성이 등장한다. 공주의 시녀들이 모두 남자의 관복을 입고 서 있는 것이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까지도 이런 풍습이 보인다. 우왕이 서해도로 사냥 갔는데 숙녕옹주와 궁녀들이 모두 남복을 하고 따라갔다. 『고려사』 우왕 12년(1386) 2월 총신들을 각 도에 파견하여 관기로서 얼굴이 예쁘고 기예를 가진 자를 선발하고, 또 성 안의 관비와 무당 가운데 노래와 춤을 잘하는 자를 선발하여 궁중에 등록하게 하였다. 비단옷을 입히고 말총갓을 씌워서 따로 한 대열을 짓게 하였으며, 이것을 남장(男粧)이라 불렀다. 『고려사』 사룡(蛇龍) 원상의 딸에게 남복을 입혀서 임금 수레를 따르게 했다. 태조실록 7년(1398) 2월 29일 그런데 여성 옷은 외래문화의 영향에도 꿈쩍하지 않고 끊임없이 전통을 고수했다. 우리나라 옷은 기본 구조가 상의와 하의로 나누어진 형태다. 이것은 유목민족이나 추운 지방에 많이 보이는 형식으로서, 중국의 원피스 옷과 달랐다. 남자는 바지와 저고리를 입었고 여자는 치마와 저고리를 입었는데, 특히 여성 옷은 고대에 기본형이 만들어진 뒤에 외래 영향과 무관하게 현재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조선 태종이 문신들을 불러서 직접 시험을 치를 때에 낸 문제 가운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왕은 이르노라. ··· 의관 규정은 모두 중국제도를 따르는데 여자 옷만 오히려 옛 풍속을 따르고 있으니, 이것은 과연 다 고칠 수 없는 것인가? 태종실록 7년(1407) 4월 18일 박제가(1750–1805)는 『북학의』에서 이런 여자 옷이 몽골 의복제도라고 지적하면서, “오늘날의 사대부들은 중국이 오랑캐 옷을 입는 것을 수치스러운 일로 간주하면서도 자기 집안에 몽골 복장이 지배하여 금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유구한 전통을 가진 치마와 저고리도 시대에 따라 형태가 달라졌는데, 특히 저고리의 길이가 크게 변하였다. 고구려 벽화에는 저고리가 엉덩이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었고 조선 초기까지도 그런 모습이 유지되었다. 선조 때인 1589년에 그려진 감로탱에 나오는 여인들의 복장만 봐도 그렇다. 그러다가 후기에 들어가면서 점점 길이가 짧아져 나중에는 젖가슴을 내놓을 정도가 되었다. 조선 전기 여인들(일본 약선사 소장 감로탱) 조선 후기 아기 업은 여인(신윤복)     다음은 이익(1681-1763)이 비판한 말이다. 말세가 되어 부인 옷은 소매가 좁고 옷자락이 짧아져 요사한 귀신에게 입히는 것처럼 되었다. 나는 이를 싫어하지만 모두 그런 풍속이 되어버렸으니 어찌 하겠는가? 『성호사설』7) 만물문, 부인복 그런가 하면 이덕무(1741-1793)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일찍이 어른들의 말을 들으니, 옛날에는 여자 옷을 넉넉하게 만들어서 시집올 때 입었던 옷을 죽어서 염할 때에도 쓸 수 있었다고 한다. 산 사람, 죽은 사람, 늙은 사람, 젊은 사람은 신체 크기가 같지 않으니, 그 옷이 작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아서 새옷을 시험삼아 입어 보았더니, 소매에 팔을 넣기가 몹시 어려웠고 한 번 팔을 구부리니 솔기가 터졌다. 심지어 간신히 입고 나서 조금 있으면 팔에 혈기가 통하지 않아 부어올라서 벗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소매를 째고 벗기까지 하니 어찌 그리도 요망스런가. 대개 요즘 유행하는 의복 단장은 모두 창기들의 아양 떠는 자태에서 생긴 것이다. 세상 남자들이 그 요사스러움에 빠져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처와 첩에게 권하여 본받게 하고 서로 전하며 익히게 한 것이다. 오호라, 시와 예를 배우지 못해서 규중 부인들이 기생 복장을 하였구나. 부인들은 빨리 이를 고쳐야 한다. 『청장관전서』8) 부의(婦儀) 이처럼 부인들이 기생의 복장을 모방하면서 좀 더 섹시한 옷으로 변해갔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기생들은 예외적으로 옷사치를 인정받았다. 이들의 화려한 옷차림이 부인들의 선망이 되었고, 남편들도 이를 부추겼던 것 같다. 이리하여 치마는 속바지를 겹겹이 받쳐 입어서 점점 풍성해진 반면에 저고리는 길이가 더욱 짧아지면서 입기도 힘들 정도로 좁아져 상박하후(上薄下厚)의 실루엣을 보이게 되었다. 저고리 길이가 19세기 초에 30센티미터 정도였다가 말엽에 이르면 18센티미터 정도까지 줄어들었다고 한다. 여자 옷의 윤곽선 변천 여자 옷의 윤곽선 변천 16세기 중반 18세기 중반 18세기 후반 19세기경 19세기 후반     [네이버 지식백과] 흰옷과 치마저고리 (시집가고 장가가고 - 가족과 의식주)   두산백과 저고리     요약 양팔과 몸통을 감싸며 여며 입는 한복의 웃옷. 이미지 크게보기 반회장저고리 길·소매·섶·깃·동정·고름이 갖추어져 있으며, 겹과 홑의 2가지가 있다. 옛 문헌에는 유(襦) 또는 위해(尉解)로 표현되어 있는데, 위해는 신라어(新羅語)의 사음대자(寫音對字)일 것이라는 설이 있으며, 조선시대 임진왜란 전에 부른 '우티', 오늘날 전국적으로 사용하는 '우치', '우태','우티' 등의 방언도 이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저고리라는 명칭은 조선 제4대 세종(世宗) 2년(1420) 원경왕후(元敬王后:太宗妃 閔氏)의 선전의(選奠儀)에 '홍단자 저고리[紅緞子 赤古里]'란 말이 처음 나온다. 상고시대 한국 복식의 기본형에서 저고리는 깃을 외로 여미는 좌임(左衽)에 소매가 좁은 통수(筒袖)이고, 길은 둔부선까지 내려오는 긴 것이었으며, 깃·도련·소맷부리에는 선(襈)이 있었고, 요대(腰帶)를 매었다. 이것이 상류사회에서는 중국 복식의 영향을 받아 좌임에서 우임(右衽)으로 변하고, 소매도 넓어져 관수(寬袖)로 바뀌었는데, 고려 이후는 완전히 우임으로바뀌었고, 길이도 다소 짧아지면서 요대 대신 고름으로 여미었으며, 깃에 동정을 달았다. 선은 겨드랑이·깃·끝동에 여운을 남길 뿐이다. 그런데 고려 후기 몽골 복식의 영향을 받으면서부터 소매도 착수화(窄袖化)되고 길이도 아주 짧아졌는데, 이러한 저고리의 단소화(短少化) 경향은 조선시대 말기에 더욱 심했으며, 개화기에도 그대로 지속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개화기 초 기독교 전도부인들 사이에서 서양 여선교사의 양장의 간편함을 보고 이를 본떠 저고리를 길게 하고 치마를 짧게 해서 입기 시작하자, 이를 신여성들이 본받았고, 여학생들의 교복도 이와 같이 하여 오늘날의 저고리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저고리는 만드는 방법에 따라서 봄·가을용에 물겹저고리·박이저고리, 여름용에 적삼·깨끼저고리, 겨울용에 솜저고리·삼겹저고리 등이 있으며, 모양에 따라서 보통저고리·삼회장저고리·반회장저고리·색동저고리·쌍깃저고리·개량저고리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저고리는 뒷길·앞겉길·앞안길·소매·겉섶·안섶·동정·깃·옷고름·안옷고름·끝동·곁마기 등으로 구성되며, 긴고름과 짧은고름 두 가닥으로 앞가슴에서 맺어 왼쪽으로 고를 내어 착용한다. 옷감은 겉감에 견·목면·모직·화학섬유 등을 다양하게 사용하고 안감에는 얇은 견이나 얇은 목면을 사용한다. 빛깔은 종래에는 흰색이나 엷은 색을 주로 썼으나, 오늘날에는 기호에 따라 다양하게 입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저고리 (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저고리     이미지 크게보기 1800년대 누비저고리로 양팔과 몸통을 감싸며 앞을 여며 입는 형태로 된 한복의 웃옷인 가장 기본적인 복식이다.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 소장. 유형 물품 성격 의복, 한복 목차 정의 내용 정의 양팔과 몸통을 감싸며 앞을 여며 입는 형태로 된 한복의 윗옷. 내용 가장 기본적인 복식이다. 언제부터 저고리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문헌에 처음 보이기는 1420년(세종 2) 원경왕후 천전의(遷奠儀)에 나오는 ‘赤古里’ 또는 ‘短赤古里’라는 기록인데, 이는 우리말을 취음한 한자표기인지, 몽고의 영향인지 그 어원을 단정할 수 없다. 고려 이전에 윗옷을 이르는 말로는 신라의 ‘위해(尉解)’가 있다. 위해는 신라말을 한자로 옮긴 것으로, 현재에도 ‘우티’·‘우치’ 등의 방언으로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는 저고리와 같은 뜻으로 ‘곁막음[脥隔音]’ 또는 ‘곁막이[絹莫伊]’가 있고, 궁중용어로는 ‘동의대(胴衣襨)’라는 말도 쓰였다. 저고리의 구성은 길·소매·깃·동정·고름이 기본형제(基本形制)이며, 여자저고리는 경우에 따라 끝동이 달리기도 한다. 저고리의 형태는 시대에 따라 변하여 왔다. 저고리는 감·재봉법·모양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다. 홑[單]·겹·솜·누비저고리는 감·재봉법에 따른 명칭이고, 여자저고리 중 ‘당코저고리’는 깃의 모양에 따른 것이다. 삼회장·반회장·민저고리는 저고리 각 부분에 별색의 감을 쓴 데 따른 명칭이다. 이 중 가장 격식이 높고 화려한 것이 삼회장저고리이다. 삼회장은 깃·끝동·겨드랑이에 길과는 다른 색의 감을 댄 것으로, 단(緞)·견(絹)·주(紬)·사(紗) 등의 고급직물로 색은 자주나 빨강을 즐겨 썼다. 궁중이나 양반층에서는 직금(織金)이나 금박을 사용하여 한층 화려하게 꾸미기도 하였다. 이러한 저고리는 풍만한 치마와 어울려 독특한 곡선미와 색채조화를 자아낸다. 그러나 남자저고리는 계급에 따른 차별이나 장식 등의 변화가 따로 없이 도포나 두루마기의 속에 입어왔다. 우리 민족의 고유복식은 바지저고리를 기본구조로 하는 북방계통이다. 특히 저고리에서는 북방계 옷의 공통된 특징인 곧은깃(直領), 왼쪽으로 여밈(左袵), 좁은소매(窄袖) 등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상고시대 저고리의 실상은 4∼6세기 무렵의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다. 벽화의 저고리는 길이가 허리 아래에 이를 정도로 길며, 허리에 띠를 두르고, 좁은 소맷부리와 도련·깃·섶에 별포(別布)의 선(襈)을 두른 특징적인 모습이다. 또한 길이만 좀더 길어지면 포(袍)가 될 수도 있어, 저고리와 포의 엄격한 구별이 없었던 것 또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삼국이 공통된 것이었다. 그 뒤 중국의 영향을 받아 너른 소매, 오른쪽으로 여밈[右袵]이 혼용되는 혼란의 시기를 거쳐 섶의 처리가 우임으로 통일되었다. 고구려의 벽화를 제외하고 한동안은 저고리의 변천을 실증할 만한 사료가 없다. 통일신라시대 흥덕왕 복식금제(服飾禁制)와 ≪삼국사기≫ 잡지(雜志) 색복(色服) 신라조(新羅條)에 저고리로 생각되는 ‘단의(短衣)’·‘내의(內衣)’ 등이 있다. 또 고려시대에는 저고리에 대한 기록으로 ‘동의(胴衣)’라는 말이 보일 뿐이다. 조선시대에는 저고리와 단저고리의 두 가지가 보이는데, 이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그 중 한 가지 설은 저고리와 단저고리의 구별은 길이의 길고 짧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옆이 터지거나 막힌 형제의 차이에 있는 것이다. 옆이 터지고 긴 저고리가 후대의 당의로 발전하고, 옆이 막히고 짧은 저고리인 단저고리가 현재의 여자저고리로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설은 저고리와 단저고리의 차이를 그 길이에 있다고 보는 것으로, 단저고리는 내복으로 입던 저고리라는 것이다. 조선 초기에는 길이가 짧아져 띠 대신 고름이 생김으로써 오늘날과 비슷한 저고리의 모양이 이루어졌다고 본다. 저고리의 길이는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점차 짧아진다. 지금까지 조사된 저고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530년대와 1560년대의 유물이다. 이것은 이미 띠가 필요 없을 만큼 짧아져 띠 대신 고름이 달려 있고, 각 부의 구성이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후로 여러 점의 유물이 발굴되고 있어 조선시대 저고리의 변천을 자세히 살필 수 있다. 1600년대의 저고리는 길이가 60∼80㎝이고, 1700년대에는 45㎝ 정도, 1800년대에는 35㎝ 정도, 1900년대에는 22㎝ 정도로 짧아졌다. 여자저고리는 줄곧 단소화(短小化)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 경향은 조선시대 중기·후기에 더욱 가속화되어 그 길이가 가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짧아지고, 직배래를 이룬 소매는 벗을 때 소매를 뜯어내야 할 정도까지 이르러 요사(妖邪)하다는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저고리가 짧아짐에 따라 각 부의 형태도 작아졌고, 특히 고름은 가늘고 짧아졌다. 반면, 회장은 겨드랑이에서 소매를 따라 나아가는 등 더욱 강조되었다. 이와 같이 저고리가 짧아진 현상은 엄청나게 큰 머리모양, 풍성한 치마와 어울리기 위한 것으로, 그 당시의 해이하고 화미(華美)하였던 사회풍조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단소화의 경향은 말기에 약간의 반전기미를 보이다가 개화기에 들어 1920년대까지 지속된다. 그 뒤 1930·1940년대에는 저고리의 길이와 각 부가 커지는 장대화(長大化)의 경향이 나타난다. 의생활의 합리화에 대한 시도로서 길어진 저고리와 함께 개량된 짧은 치마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 경향은 광복과 6·25를 지나면서 다시 바뀌어 오늘날에는 다시 짧아지고 있다. 현대의 저고리는 조선 후기에 해당할 만큼 그 길이가 짧으며, 겨드랑이의 회장이 크고, 소매의 곡배래가 극단적으로 강화되며, 깃이 아주 늘어진 특징을 가진다. 이것은 양장이 일상복으로 입혀짐에 따라 한복은 의례복화·특수복화하고, 여기에 현대적 미의식과 민족의식이 강조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저고리는 우리 고유양식의 특성을 면면히 이어 내려온 전승력과 변화·발전을 거듭하는 생명력을 지니고 우리 나라 복식미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참고문헌 『세종실록(世宗實錄)』 『고려도경(高麗圖經)』 『조선여속고(朝鮮女俗考)』 『조선복식고』(이여성, 백양당, 1947) 『한국복식사』(석주선, 보진재, 1971) 『한국복식사연구』(김동욱, 아세아문화사, 1973) 『한국복식사연구』(류희경,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80) 『한국복식사론』(이경자, 일지사, 1983) 「고구려고분벽화의 기원에 대한 연구」(김원룡, 『진단학보』 21, 1960) 관련이미지 26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백색 광목 솜저고리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저고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뮤지엄 저고리     이미지 크게보기   국적 > 시대 한국 > 광복이후(光復以後) 재질 사직(絲織) 크기 화장 63.2 등길이 33.2 용도 · 기능 의 > 의류 > 평상복(平常服) 소장처 원주시립박물관 유물번호 원주시립(원주시립) 001389-000 한복의 여자 웃옷. 길·소매·섶·깃·동정·고름이 갖추어져 있으며, 겹과 홑의 2가지가 있다.옛 문헌에는 유() 또는 위해(尉解)로 표현되어 있는데,위해는 신라어(新羅語)의 사음대자(寫音對字)일 것이라는 설이 있으며, 조선시대 임진왜란 전에 부른 '우티', 오늘날 전국적으로 사용하는 '우치', '우태', '우티' 등의방언도 이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저고리라는 명칭은 조선 제4대 세종(世宗) 2년(1420) 원경왕후(元敬王后:太宗妃 閔氏)의 선전의(選奠儀)에 '홍단자 저고리[紅緞子 赤古里]'란 말이 처음 나온다. 상고시대 한국 복식의 기본형에서 저고리는 깃을 외로 여미는 좌임(左)에 소매가 좁은 통수(筒袖)이고, 길은 둔부선까지 내려오는 긴 것이었으며, 깃·도련·소맷부리에는 선()이 있었고, 요대(腰帶)를 매었다. 이것이 상류사회에서는 중국 복식의영향을 받아 좌임에서 우임(右)으로 변하고, 소매도 넓어져 관수(寬袖)로 바뀌었는데, 고려 이후는 완전히 우임으로바뀌었고, 길이도 다소짧아지면서 요대 대신 고름으로 여미었으며, 깃에 동정을 달았다. 선은 겨드랑이·깃·끝동에 여운을 남길 뿐이다. 그런데 고려 후기 몽골 복식의 영향을 받으면서부터 소매도 착수화(窄袖化)되고 길이도 아주 짧아졌는데, 이러한 경향은 조선시대전기 이후 심해져, 여름 홑저고리의 경우 위로 말려 올라가 치마 허리도 감추지 못하고 유방이 보일 정도로 짧아졌다. 이러한 저고리의 단소화(短少化) 경향은 조선시대 말기에 더욱 심했으며, 개화기에도 그대로 지속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개화기초 기독교 전도부인들 사이에서 서양 여선교사의 양장의 간편함을 보고 이를 본떠 저고리를 길게 하고 치마를 짧게 해서 입기 시작하자, 이를 신여성들이 본받았고, 여학생들의 교복도 이와 같이 하여 오늘날의 저고리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저고리는 만드는 방법에 따라서 봄·가을용에 물겹저고리·박이저고리, 여름용에 적삼·깨끼저고리, 겨울용에 솜저고리·삼겹저고리 등이 있으며, 모양에 따라서 보통저고리·삼회장저고리·반회장저고리·색동저고리·쌍깃저고리·개량저고리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저고리는 뒷길·앞겉길·앞안길·소매·겉섶·안섶·동정·깃·옷고름·안옷고름·끝동·곁마기 등으로 구성되며, 긴고름과 짧은고름 두 가닥으로 앞가슴에서맺어 왼쪽으로 고를 내어 착용한다. 옷감은 겉감에 견·목면·모직·화학섬유 등을 다양하게 사용하고 안감에는 얇은 견이나 얇은 목면을 사용한다. 빛깔은 종래에는 흰색이나 엷은 색을 주로 썼으나, 오늘날에는 기호에 따라 다양하게 입는다. 관련이미지 26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누비저고리1800년대 누비저고리로 양팔과 몸통을 감싸며 앞을 여며 입는 형태로 된 한복의 웃옷인 가장 기본적인 복식이다.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 소장.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저고리 (e뮤지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치마     이미지 크게보기   이칭별칭 군 유형 물품 성격 의복, 한복 목차 정의 내용 정의 저고리와 함께 입는 여자의 하의(下衣). 내용 옛 문헌에는 상(裳) 또는 군(裙)으로 표현되어왔는데,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빈인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의 ≪한중만록 閑中漫錄≫에 ‘문단(文緞)치마’가 있어, 이를 치마라 일컬어왔음을 알게 된다. 또한, ≪훈몽자회≫에서 보면, 호(鋒)를 ‘쵸마호’, 상을 ‘츄마샹’이라 하고 있다. 또 ≪내훈 內訓≫에도 ‘치마’로 나와, 치마는 ‘ㅊ, ㅁ’ 두 음을 가진 말임을 알 수 있다. ㅊ은 차다[佩], ㅁ은 말다[卷]를 나타내어 곧 차고 마는 그 형태를 표현한 것이라 하겠으며, 이와 비슷한 한자 표현은 ≪고려도경 高麗圖經≫에 나오는 선군(旋裙)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치마는 치마[赤亇]로 표음되기도 하였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길이가 길고 잔주름이 치마단까지 잡혀 있으며 또 단에는 선(襈)이 있다. 이때의 저고리는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긴 것이었다. 고려시대에 내려오면 ≪고려도경≫ 부인조(婦人條)에 보이는바, 상하가 다 황상(黃裳)을 입었다. 또 천사조(賤使條)에는 8폭의 선군을 몇 겹 둘러 겨드랑이에 높이 치켜 입었다. 부귀한 집 처첩은 7·8필을 겹쳐 입었다 하였는데, 이는 조선시대의 무지기에서 보듯 치마 아래를 푸하게 하기 위하여 그때에도 이와 비슷한 것이 있지 않았나 생각되나 자세히 알 수 없다. 이때만 하여도 고려 전기이니 만큼 아직도 저고리는 좀 길었을 것이고, 후기 몽고복식의 영향을 받아 저고리 길이가 점차 짧아지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치마 형태에 그다지 큰 변화가 있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평상복으로는 짧은 치마·긴 치마, 예복용으로 스란(膝襴)치마·대란(大襴)치마로 대별할 수 있을 것이다. 짧은 치마는 서민이나 천민이 입었고, 긴 치마는 반인(班人) 계급에서 착용하였는데, 때로는 이 긴 치마를 예식용으로도 사용하였다. 짧은 치마나 긴 치마나 홑 또는 겹이 있었고, 긴 치마에는 출토유물에서 얇게 솜을 둔 것도 볼 수 있다. 스란치마는 스란단을 한 단, 대란치마는 두 단을 치마단에 더한 것으로 겹이었다. 이에는 무지기를 3·5·7층 겹쳐 입어 허리 아래를 푸하게 버티었고, 특히 왕가(王家)에서는 무지기 밑에 대츔치마를 입어 치마 아래도 버티었다. 중기 이후로는 저고리 길이가 짧아질대로 짧아진 때였으니, 여자 한복의 하후상박(下厚上薄)의 특징을 이에서 볼 수 있게 된다. 그 곡선이 더없이 아름다운 가운데 치마는 유동적인 것이어서 그 곡선미를 더욱 두드러지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개화기에 들어서는 여자도 자유로운 외출과 사회활동이 허용됨으로써 짧은 통치마가 생겨났다. 이 통치마는 최활란(崔活蘭)이 1907년 동경 유학에서 귀국할 때 입은 데서 유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통치마나 짧은 치마가 활동하는 여성의 사회복이 되자 짧아져가기만 하던 저고리 길이도 이와 알맞을 정도의 길이가 되었다. 치마 허리끈이 이때에 와서는 어깨허리로 하게 되기도 하였다. 현대에 와서는 피복 재료의 다양성과 함께 복식미의 발전으로 짧은 치마류는 양장으로 대신되고, 오히려 긴 치마는 한복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때마다 환영받는 옷이 되고 있다. 참고문헌 『증보한국복식사연구』(김동욱, 아세아문화사, 1979) 『한국복식사연구』(유희경,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80) 「우리나라여자치마의 시대적고찰」(함옥상, 『과학논집』 1, 계명대학교 생활과학연구소, 1973) 관련이미지 21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반물염색 치마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치마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고교생이 알아야 할 한국사 스페셜 주름치마       고구려의 예술과 문화는 일본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구려의 승려 혜자는 일본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는데, 태자를 가르치는 사이 자연스럽게 고구려의 문화가 일본 사람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역시 승려였던 담징은 일본에 유교의 5경을 전했고 그림을 가르쳤습니다. 또 종이와 먹을 만드는 방법도 알려 주었습니다. 일본 호류사의 금당 벽화는 담징이 그린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연개소문이 도교를 장려하고 불교를 탄압하는 사이, 일본으로 건너간 고구려 승려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을 통해서도 고구려 문화가 전해졌습니다. 일본 다카마쓰 고분벽화를 보면 주름치마를 입은 여인의 모습이 보입니다. 이 그림은 고구려 벽화에서 발견되는 옷차림과 매우 비슷합니다. 고구려의 미술이 일본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겠죠. 고구려 강서 수산리 고분벽화 일본 다카마쓰 고분벽화       [네이버 지식백과] 주름치마가 똑같네 : 일본 전파 (고교생이 알아야 할 한국사 스페셜) =================================================/// 한복 세계화 이끈 한복 디자이너 이리자씨 별세 2020.03.22.  슬퍼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역대 영부인 한복 도맡아 한복의 세계화를 이끈 한복 디자이너 이리자(본명 이은임)씨가 21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85세. 고인은 1975년 국내 최초로 한복 작품 발표회를 개최하며 ‘한복 디자이너’란 명칭을 사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1935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충남대 영문과를 졸업한 뒤 1966년 ‘이리자 한복연구소’를 세웠고 1970년 한국인의 체형을 보완하는 이른바 ‘이리자식 한복패턴’을 개발해 보급했다. 일자로 허리에 주름을 잡는 기존의 ‘항아리형’ 한복 디자인을 밑단이 퍼지는 ‘A-라인형’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미국과 일본, 중국 등 세계 각국에서 100회 넘게 한복 패션쇼를 개최했으며 1974년부터 1977년까지 미스유니버스대회 등 세계 미인대회에서 최우수 민속 의상상을 수상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부터 이순자, 이희호, 권양숙 여사까지 역대 대통령 부인들이 그가 만든 한복을 입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별세 후 입관 때도 고인이 만든 한복 차림으로 영면에 들었다. 한복 발전 등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2년 화관문화훈장과 신사임당상을 받았다. ... /이창수 기자   
2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마스크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165  추천:0  2020-03-10
           [이데일리 김정현 기자] ... ◇공급이 모자라…마스크 대란 확실시  ... 그러나 이는 산술적으로 보면 이미 예고돼 있던 대란입니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마스크는 일평균 1000만장입니다. 5000만 국민들이 마스크를 하루 한 개씩 소비한다고 가정한다면 4000만명은 마스크를 쓰지 못 하는 상황이어서입니다. 사회생활을 하지 않는 경우를 제외한다고 치더라도 마스크는 한참 모자랍니다. 경제활동인구만 2800만명이니까요. ...   ◇코로나19가 만들어낸…한국판 ‘정의란 무엇인가’ 모든 국민들이 마스크가 필요한 상황에서, 이제 관건은 원천적으로 부족한 마스크를 어떻게 공평하게 나눌 것인가의 문제로 바뀌어버렸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19가 한국판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진 셈입니다. 참고할 도서가 있습니다. 한때 한국에서 열풍을 일었던 마이클 샌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입니다. 이 책을 참고하면 마스크 부족이 촉발한 질문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번째 질문은, 마스크 수급을 자본주의 원리에 맡길 거냐는 질문입니다. 공급이 부족한 상황이 됐으니 생산업체들은 마스크 가격을 올리려는 유인을 자연스럽게 가지게 됩니다. 이와 동시에 이를 금지해야 하는지의 문제도 생겨나게 됩니다.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예로 든 것은 지난 2004년 미국 플로리다를 휩쓸고 간 허리케인 ‘찰리’ 때의 사례입니다. 당시 올랜도의 주유소는 평소 2달러이던 얼음주머니를 10달러로, 모텔 방값을 40달러에서 160달러로 올렸습니다. 당시 플로리다에는 가격폭리처벌법이 있었습니다. 허리케인 이후 2000여건의 피해사례가 접수됐고, 일부는 승소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가격폭리를 처벌해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남겼습니다. 자유 경제학자들은 공정가격은 허구이며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되는 가변적인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 가격이 오르면 공급이 더 많아지기 때문에 오히려 위기를 더 빨리 해결할 수 있게 된다고요. 가격폭리를 처벌해야 한다고 본 사람들은 어려운 시기에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르는 행위는 사회 전체의 행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서민들에게 폭리는 심각한 고통이어서, 안전하게 몸을 피하느니 차라리 위험을 감수하는 경우가 생긴다고요. 한국에서도 비슷한 논쟁이 생겼습니다. 마스크 생산업체 ‘이덴트’가 한때 마스크 생산 중단 선언을 한 것이 그 사례입니다. 이덴트는 “조달청에서는 생산원가 50% 정도만 인정해 주겠다는 통보와 일일생산량 10배에 달하는 생산수량 계약을 요구하고 있다”며 “더 이상 손실을 감수하면서 마스크를 생산해야 하는 명분도 의욕도 완전히 상실한 상태”라고 하소연했습니다. 이에 대해 정부가 한발 뒤로 물러섰습니다. 조달청은 이덴트와 계약과정에서 일일생산량 10배를 요구한 것은 계약물량 표기 오류였다면서 계약 협상을 진행중이라고 합니다. ◇부족한 마스크, 누구에게 줄 것인가 두 번째 질문은, 부족한 마스크를 누구에게 줄 것인지입니다. 정부는 의료진과 기저질환이 있는 취약층, 대구·경북 등 감염위험이 높은 지역에 우선 배포하되, 일반 국민들에는 일주일에 두 개씩 구매가 가능하도록 하겠다는 해법을 내놨습니다. 다만 아이가 있는 가정 등 마스크가 좀 더 필요한 국민들을 위해서 자발적 양보도 동시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정부의 이 해법은 롤스의 정의론과 맞닿아 있습니다. 롤스는 개인이 스스로 어떤 사회적 위치를 갖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어떤 정의 원칙을 선택할지 자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나는 빌 게이츠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무일푼일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정의의 몇 가지 원칙이 나오는데요, 그중 하나는 사회적, 경제적 평등과 관련한 원칙입니다. 소득과 부를 똑같이 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사회적·경제적 이익이 사회 구성원 가운데 가장 어려운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이처럼 코로나19가 “정의가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정부는 답하고 있습니다. 판단의 주체는 국민입니다. 국민들은 연일 정부가 내놓은 답을 채점하고 있습니다. ==========================================/// 사회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사회질문사전 정의란 무엇인가요?     분야 법 목차 정의란 공정함 정의를 해석하는 다양한 의견 분배적 정의 교정적 정의 절차적 정의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학년 단원 중학교 1학년 우리의 생활과 법 고등학교 1학년 인권 및 사회 정의와 법 고등학교   「법과 정치」민주 정치와 법 요즘 가수 공개 오디션 프로그램을 참 재미있게 봤어요. 제가 응원한 후보는 다른 건 몰라도 노력 실력만큼은 정말 훌륭했어요. 그런데 그 후보가 일등을 했지 뭐예요! 아빠도 결과를 보시더니 사람들이 그만큼 정의로운 사회를 바라는 거라고 하셨어요. 가수 오디션에서 노래 잘하는 후보가 일등하는 건 당연한데, 정의로운 사회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거죠? 정의란 공정함 정의란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받으면 좀 막연해지지만 생각해보면 정의란 말은 그렇게 낯설지 않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자주 들어보았을 거예요. “정의의 이름으로 너희를 심판하겠다”고 말하는 만화영화 속 대사나 한 손엔 저울, 다른 한 손에는 책을 들고 서 있는 ‘정의의 여신상’도 교과서나 책에서 본 적이 있을 거예요. 헌법 재판소 앞에 서 있는 정의의 여신상이나 악인을 심판하는 만화영화 속 주인공이나 모두 지은 죄에 맞는 공정한 벌을 주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고 있어요. 가난해서, 여자라서, 어려서, 외국인이라서 차별받는 것을 보면 ‘공정하지 않다’는 생각을 합니다. 반대로 어떤 유명 기업인들이 범죄를 저지르고도 죗값을 제대로 치르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으면 과연 우리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인지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정의란 ‘공정함’을 말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저건 참 공정하다’거나 ‘저건 정말 공정하지 않아’라는 말을 할 때가 있잖아요. 이렇게 말할 때 우리는 정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끊임없이 정의나 공정함과 관련된 문제를 겪게 됩니다. 질문한 친구가 재미있게 보았다는 가수 공개 오디션 프로그램의 결과가 왜 정의와 상관이 있는지 생각해볼까요? 가난하고 학벌이 안 좋고 키가 작다고 노래 실력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면 공정하지 않지요. 하지만 세상에는 공정하지 않은 경쟁이 많아요. 시청자들은 참가자의 다른 조건은 보지 않고 노래 실력만을 공정하게 평가해 정의로움을 실현하고 싶었던 거예요. 정의를 해석하는 다양한 의견 앞에서 정의는 공정함을 말한다고 했지요. 사실 많은 유명 철학자들이 ‘정의’란 무엇인지, ‘공정함’이란 무엇인지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를 ‘평균적 정의’와 ‘배분적 정의’로 나누었어요. 어렵게 들리나요? 하지만 별로 어렵지 않답니다. ‘평균적 정의’는 ‘같은 것은 같게’를 말해요. 여기서 정의란 절대적 평균을 말하는데 이를테면 선거권 같은 것입니다. 그 나라 국민이라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인정해줘야 한다는 거예요. 영국이나 프랑스도 100년 전에는 여자와 노동자, 농민에게는 선거권을 주지 않았으니 정의롭지 못했습니다. ‘배분적 정의’란 ‘다른 것은 다르게’를 말해요. ‘각자에게 그의 몫을 주라’는 것으로, 급여나 성적을 줄 때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히 일한 사람이나 더 열심히 공부한 사람에게 그 만큼의 대가를 주라는 것입니다. 롤즈(1921~2002, 미국의 철학자)라는 유명한 철학자도 정의로운 상태가 무엇인지에 관해 말했어요. 롤즈는 정의와 관련해 두 가지 원칙을 주장했는데 하나는 ‘평등의 원칙’으로 모든 사람은 자유와 권리를 평등하게 갖는다는 것이에요. 또 하나는 ‘차등의 원칙’인데 사회 경제적으로 불평등이 존재한다면, 그 사회에서 가장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에게 가장 큰 이익을 줄 때 정의가 실현된다는 원칙이에요. 예를 들어 저소득층에게만 문화비를 지원해주는 문화 바우처가 있다면 그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불평등하다고 느낄 수 있잖아요. 하지만 그 불평등이 그 사회에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라면 불평등해도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 밖에도 정의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여기서는 세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분배적 정의 어떤 것을 분배하거나 나눌 때 어떻게 하는 것이 공정한가와 관련된 ‘정의’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아리스토텔레스나 롤즈 같은 철학자도 이런 분배적 정의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분배하려는 것은 ‘이익이 되는 것’과 ‘부담이 되는 것’으로 나누어볼 수 있어요. 이익이 되는 것은 임금이나 용돈, 성적, 선거권 같은 것이고, 부담이 되는 것은 숙제, 세금, 청소나 집안일 같은 노동, 벌 같은 것입니다. 이것들을 분배할 때에는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원칙을 적용하면 정의로운 분배가 이루어집니다. 어떤 것을 받기 위해 노력한 정도나, 그것을 받을 만한 일을 했다거나, 꼭 그것을 받아야 할 필요가 같은 사람이 있다면 같게 분배하고 다르다면 다르게 나눠주는 것이지요. 장학금을 생각해볼까요? 성적이 좋은 학생에게 주는 성적 장학금은 가장 성적이 높은 학생에게 주는 것이 정의로운 분배입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에게 주는 장학금은 경제 사정이 어려워 장학금이 가장 필요한 학생에게 주면 정의로운 분배입니다. 만약 똑같이 성적이 높은 학생이 여러 명 있거나 똑같이 경제 사정이 어려운 학생이 여러 명 있다면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의 원칙에 따라 같은 사람 모두에게 장학금을 주거나 새로운 기준을 마련해서 분배해야겠지요. 교정적 정의 정의의 여신상은 저울과 법전을 들고 있다. 저울은 법 집행의 형평성을 상징하고, 법전은 법전에 의한 법 적용을 상징한다. 교정적 정의는 만화 주인공이나 정의의 여신과 관련이 있어요. 악인을 심판하겠다는 만화 주인공이나 저울처럼 공정하게 재판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정의의 여신은 모두 교정적 정의를 상징합니다. 교정적 정의란 어떤 잘못이나 피해에 대한 대응이 공정한가와 관련된 정의예요. 그럼 잘못과 피해는 어떤 것인지 살펴볼까요? 예를 들어 수업 시간에 교실에 있지 않고 운동장에 있다가 친구와 싸워서 친구를 다치게 했다고 합시다. 수업 시간에 자리를 이탈한 것과 친구와 싸운 것은 교칙을 위반한 ‘잘못’이고 교칙 위반과 상관없이 친구를 다치게 한 것은 ‘피해’입니다. 교정적 정의는 ‘잘못’에 대해 어떤 처벌을 할지, ‘피해’에 대해 어떤 배상을 할지를 결정하는 문제예요. 이런 문제를 정의롭게 해결하려면 당연히 ‘잘못’은 교칙에 따라 공정하게 처벌해야 하고 ‘피해’는 그에 합당한 배상을 해야겠지요.   절차적 정의 절차적 정의란 어떤 것을 결정하고 판단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모으는 방법이 공정했는지, 결정과 판단의 과정이 공정했는지와 관련한 정의예요. 예를 들어 어떤 재판에서 재판 결과를 바꿀 만한 결정적인 증거를 새롭게 확보했다고 생각해볼까요? 새로운 증거를 확보한 변호사나 검사는 재판에서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하겠지만 만약 그 증거가 법으로 금지된 도청으로 얻어냈거나 불법으로 개인 정보를 빼낸 경우라면 그 증거는 효력이 없습니다. 재판에 필요한 정보를 모으는 과정이 정의롭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학교 중간시험에서 커닝한 학생을 어떻게 처벌할지를 두고 회의를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커닝을 했다고 의심되는 학생한테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기회도 주지 않고 오로지 교사의 의견만으로 처벌을 한다면 이것도 정의롭지 못한 결정이에요. 결정하고 판단하는 과정이 공정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절차적 정의란 이렇게 어떤 것을 결정하거나 판단할 때의 과정이 공정한지를 판단하는 문제입니다.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어떠세요? 이렇게 정의, 즉 공정함을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니 막연하게만 느껴지던 ‘정의’라는 게 사실은 우리 일상에서 끊임없이 만나는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겠지요? 많은 사람이 지금 우리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지요.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를 공정하게 해결할 수 있는 정의로운 사회는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요? 훌륭한 지도자나 정치인이 나타난다고 만들어지는 건 아닐 거예요. 우리 주변의 작은 문제부터 정의롭게 해결해나가면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일상의 문제를 사소하게 생각하지 않고 정의와 관련해 파악해보려는 노력, 그리고 정의롭게 해결하는 노력을 지금부터 해보세요. 우리가 함께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의란 무엇인가요? (사회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사회질문사전, 전국사회교사모임)  
1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세균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2884  추천:0  2020-03-10
    [한겨레21] 의사 이낙원이 보내온 ‘코로나19 일기’ 서울 송파구 ‘드라이브 스루(자동차 이동형)’ 선별진료소에서 의료진이 코로나19 검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코로나19에 ‘방관자’는 없습니다. 모두가 ‘일선’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환자를 상대하는 의사들이 있는 곳은 ‘최일선’입니다. 이낙원씨는 인천 나은병원 호흡기내과 의사이면서 중환자실장입니다. 코로나19 사태로 나은병원에는 선별진료소가 마련됐고, 이낙원씨는 여기서 일주일 두세 번 순환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순환근무를 하지 않을 때는 안심병원으로 지정된 병원에서 호흡기 질환으로 내원한 환자들을 맞고 있습니다. 그가 코로나19 사태 초기부터 써온 소중한 일기를 공개합니다. 일기는 코로나19 사태를 따라가며 연재될 예정입니다. _편집자                               2월1일 마스크     요즘, 마스크를 쓰라는 강한 권고가 있었음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피부가 예민한 나는 마스크를 쓰면 코와 뺨이 가렵다. 근질거리니 벗었다 썼다를 반복하고, 그렇게 얼굴에 손이 가면 차라리 안 쓰느니만 못하다. 그래서 난 진료할 때 거의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이번 겨울엔 유난히 독감 환자가 많았다. 내 손으로 진단한 사람만 100명 가까이 될 것 같다. 마스크를 안 쓰고 독감 환자들을 대면했지만, 다행히 난 독감은커녕 감기도 걸리지 않고 한겨울을 잘 버티고 있다. 지난 11년간 소소한 감기는 여러 번 앓았어도 독감은 딱 두 번 걸렸다. 그러니까 굳이 계산하자면 5.5년에 한 번꼴이다.     내 진료실에 들어왔다 나가는 환자가 하루에도 수십 명인데 난 어떻게 바이러스가 안 옮을 수 있었을까? 그 첫 번째는 모든 이에게 베풀어주시는 ‘중력’이라는 공평한 힘 때문이다. 중력은 크기에 상관없이 공평하게 작용한다. 몸살감기에 걸린 사람을 이부자리로 끌어당기는 그 중력이 바이러스에도 작용한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 인간도 바이러스도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누군가의 코와 입에서 튀어나온 바이러스는 상승의 기회를 찾지 못한 채 추락하고 만다. 책상, 문손잡이, 핸드백, 쓰레기통 속 코를 푼 휴지에 바이러스는 갇혀버리고 만다. 새로운 숙주를 찾아 침투하고 번성하고 싶은 원초적 본성을 지닌 바이러스에 중력은 그야말로 쥐약이다. 숙주 없이 세상에 내팽개쳐진 바이러스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소멸하기 때문이다.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 즉 ‘시간이 지날수록 무질서해진다’는 우주적 규칙은 바이러스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사람이 죽어 흙으로 변하듯, 바이러스는 시간 속에 분해돼 흙으로 돌아간다. 그 시간이 30분에서 길어봐야 수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바이러스에도 구원의 여지가 있을까? 책상 위에 떨어져 임종의 시간을 기다리는 바이러스를 구원해줄 자가 있을까? 벼룩처럼 뛰어오를 줄도 모르고, 나비처럼 날아다닐 줄 모르고, 그저 비말 속에 묻혀 하염없이 추락만 거듭했던 바이러스에 상승의 기회를 줄 자 있을까? 있다. 바로 인간의 손이다. 인간의 손만이 바이러스를 상승시켜 새 생명의 길로 안내할 수 있다. 따듯하고 촉촉하며, 맛있는 유전물질이 있는 생존과 번영의 약속의 땅, 코와 입의 점막으로 안내하는 손.     천성적으로 마스크를 쓸 수 없었던 난, 강박적으로 손에 집착한다. 손을 자주 씻는 건 당연하고 웬만하면 무언가를 만지는 것을 삼간다. 회진할 때 걸음을 조금 늦추면 간호사가 앞서가면서 병실 문을 열어준다. 문손잡이를 잡은 손은 꼭 씻는다. 전철을 탈 때도 어지간하면 손을 사용하지 않는다. 어깨너비로 다리를 벌리고 종아리에 힘을 주면 손잡이를 잡지 않아도 그럭저럭 다닐 수 있다. 어쩔 수 없이 코를 파야 할 때는 세정제로 손을 박박, 특히 해당 부위를 집중적으로 씻어낸 뒤 일 처리를 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확산 때문에 불안도 함께 퍼지고 있다. 뉴스만 보다보면 좀비 영화 속 비극이 현실의 공포가 될 것 같다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정말 불안해하는 분을 많이 봤다. 그러나 지나친 불안에 생활을 위축시킬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이 눈이 충혈되면서 누군가를 물었다는 소식은 들은 적이 없다. (그런 바이러스가 출현한다면 그게 진짜 공포지.) 바이러스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날개 비슷한 것을 얻었다는 소식도 들은 적이 없다. 중력장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먼지 덩어리일 뿐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사람이 밀접한 공간에선 마스크를 쓰고, 바이러스의 가장 강력한 구원자는 바로 ‘나의 손’이라는 것만 잊지 말자.     2월3일 미생물계의 외모지상주의     이른 아침 시간이었다. 학교에 가서 보니 교실 구석에 아이들이 모여서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검고 질퍽해 보이는 물건이 한 귀퉁이에 놓여 있었다. 살아 있는 생물이 죽은 척하는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 벗어놓은 커다란 손모아장갑 같기도 했는데, 냄새가 쾨쾨하고 고약했다. 낯선 물건인지 생물인지 알 수 없는 미지의 물건을 처리하기 위해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아이들은 옆 반에 다니는 지혜로운 복학생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복학생은 그것을 쳐다보며 골몰히 생각했다. 옆에 있던 어떤 학생이 물건이 점점 커지는 것 같다고 말한 후, 복학생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저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커지다가 오늘 밤쯤에는 아홉 개의 꼬리 달린 여우로 자라나 우리 간을 훔쳐 먹을지도 몰라.” 아이들의 불안감은 극에 달했고, ‘힘을 합쳐’ 녀석을 무찌르기로 의견을 모았다. 인근 교실의 청소도구가 총동원됐고, 자는 그 녀석을 향해 공격했다. 빗자루와 마대 걸레로 녀석을 쑤셔댔고, 지혜로운 복학생은 양동이로 물을 길어다 녀석 위에 쏟아부었다. 곧 개똥 냄새는 교실 전체와 복도에 퍼져버렸고, 학교 전체가 똥 냄새로 진동하기에 이르렀다.     ‘패혈증’은 이런 것이다. 몸 안에 침투해 들어온 미생물 자체보다, 미생물에 대한 대처가 과도해서 생기는 것이다. 아이들이 개똥임을 한눈에 알아봤다면 삽으로 살짝 들어올려 가져다버리면 해결될 것이듯이, 몸 안의 미생물을 면역계가 한눈에 알아봤다면 근처의 몇몇 백혈구가 작용해 먹어치우면 된다. 그러나 낯선 것이거나 그로 인해 발생한 불안이 확장된 상태라면 그것을 해치우기 위해 후방의 면역세포에 지원을 요청해야 한다. 백혈구가 모바일 기기를 가지고 있을 리 없다. 면역세포 안에 요청서가 담긴 단백질(사이토카인)을 혈액 내로 분비하면 소식은 금세 온몸으로 퍼진다. 전국에서 지원군이 해당 지역에 모여들고, 전쟁은 확대된다. 전방과 후방의 병사들이 서로에게 보내는 신호가 넘쳐나고, 전방에선 미생물과의 전투에서 나오는 사상자가 늘어난다. 이 모든 것은 혈관을 확장시키고 과하게 진행되면 혈압이 떨어질 수도 있다. 전쟁터는 우리 땅(인간의 몸)이므로 전쟁의 규모가 커질수록 몸의 상처도 커진다. ‘적군 규모’와 함께 아군이 쏟아부은 화력이 더해져 피해는 더욱 커진다.     독감에 걸리면 열이 나고 온몸이 죽도록 아프다. 바이러스는 코와 목구멍에 있는데, 왜 머리가 아프고 팔다리가 쑤시는 걸까. 이러한 전신반응은 두말할 것도 없이 앞에서 말한 몸의 면역계 활동 때문이다. 그럼 어떤 바이러스는 목만 아프고, 어떤 바이러스는 온몸이 아픈 걸까? 면역계 반응을 끌어내는 것은 바이러스의 ‘외모’다. 독감 바이러스는 우리 몸의 면역계가 보기에 얄밉게 생긴 게 분명하다. 한 대만 때려도 될 것을 두세 대 때리고, 그것도 모자라 동료들에게 일러바쳐 일을 크게 만들어버리니 말이다.     지금 문제가 되는 코로나바이러스는 본래 평범한 외모의 감기 바이러스였다. 콧물이 나거나 목이 칼칼한 상태로 2~3일 지나면 몸속에서 소멸하는 것들이었다. 이것이 유전적 변이를 일으켜 외모를 바꿨다. 외모만 바꾼 게 아니라 능력도 업그레이드했다. 목에서 기관지를 타고 내려가 폐부 깊숙이 내려갈 수 있는 침투 능력이 향상됐다. 대체로 면역세포가 알아보고 금세 처리하지만, 면역력이 떨어진 만성 환자나 노약자는 ‘낯선 얼굴’ 때문에 대처가 늦기 마련이다. 때때로 바이러스는 하기도(기관지와 허파를 포함하는 호흡기) 깊숙이 침투해 폐렴을 일으키고, 어떤 이에겐 패혈증을 일으켜 죽음에도 이르게 한다.     안타깝지만 몸의 면역계는 절대 미생물의 내면이나 성품을 보려 하지 않는다. 외모만 본다. 잘 알려졌다시피 독감을 분류하는 H5N1, H1N1 같은 명칭은 면역계가 바이러스를 인식하는 표면 항원의 종류(역시 외모)를 나타낸다. 면역계 외모지상주의는 수억 년간의 진화 과정을 통해 천문학적으로 다양한 외모를 지닌 미생물에 대처하는 방법을 터득해왔다. 그러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출현이 가져온 공포와 불안을 경험했듯, 미생물의 외모 변화 전략도 만만치 않다.     2월10일 바이러스와 불안     퇴근길 선별진료소 앞 직원들을 지나쳐왔다. 한 분이 레벨D 방호복을 입고 있었다. 머리 꼭대기부터 발끝까지 흰색 원피스로 몸을 둘러쌌고, 얼굴은 고글과 마스크로 가렸는데, 생화학전에 참전해도 될 정도였다. 사람들 얼굴엔 하나같이 깊은 피곤이 드리워 있었다. 잔뜩 늘어난 일과에다 예전보다 더욱 민감한 환자들을 응대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전철을 탔다. 대부분의 사람이 마스크를 썼다. 젊은 사람들은 귀마저도 이어폰으로 막고 있으니 어지간한 구멍은 다 막은 셈이다. 한국 사람들의 위생 개념도 대단하거니와, 정부의 정책 홍보가 이렇게 개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마스크도 색상과 디자인이 다양해졌다. 무엇보다 얼굴을 찰떡같이 달라붙어 감싸는 밀착형 디자인이 일품이었다. 몇몇 마스크는 방독면 가스통처럼 일부가 돌출했는데, 기능 못지않게 패션을 중시하는 사람들 심리를 잘 이용한 것 같다. 마스크를 안 한 학생 두 명이 전철 안에서 웃고 떠드는데 몇몇 사람이 불쾌한 눈으로 쳐다보니, 이내 대화가 멈췄다.     이 모든 일이 바이러스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벌어졌다. 바이러스가 눈에 보인다면 얼마나 좋을까? 보이면 보이는 대상만 피해다니면 될 테고, 그럼 훨씬 더 적은 비용과 노력으로 대처가 가능할 텐데 말이다. 대상이 존재할 때의 감정을 두려움이라 하면 대상이 모호해 정의할 수 없을 때의 감정이 ‘불안’이다. 불안이 두려움보다 불편한 것은 대상이 모호하기 때문이고, 그것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는 본능적으로 불필요한 감정을 동원해야 한다. 바로 ‘혐오’다. 왠지 싫고 불편한 이 느낌은 우리를 현재의 여기에서 벗어나게 한다.     과학자들은 ‘혐오’가 생명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가장 오래된 감정이라고 말한다. 노래기를 햇볕에 놓아두면 다리를 움직여 그늘을 찾아가고, 대장균조차 생존을 위협하는 구덩이에서 벗어나려고 섬모를 돌려 움직인다. 그냥 있으면 죽기 때문에 행동해야 하고 그러려면 행동의 동기를 제공해야 한다. 행동의 동기로서 ‘혐오’라는 감정은, 그래서 가장 원초적이고 강력하다.     불안이란 감정이 사회에 팽배할 때 사람들은 ‘대상’을 찾게 된다. 누군가를 또는 무엇을 찾아 혐오하면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이러한 성향은 어쩔 수 없는 우리의 본능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려 할 때 혐오를 부추기는 전략은 늘 매력적인 수단이 된다. 그 나쁜 유혹은 언제나 사회적 스피커를 가진 사람들을 통해 유통되는데, 대개는 저항할 수 없는 사람들이 혐오의 대상이 된다. 역사적으로 유대인들, 유색인종, 성소수자 그리고 아픈 사람들이 그 비난의 자리를 차지했다.     불안에 대한 대처를 혐오가 아닌 다른 감정으로 접근할 수는 없을까? 심리학적으로 보면 긍정적 감정은 고등동물에게서만 볼 수 있다고 한다. 특히 행복과 감사는 인간 안에서도 고차원적 감정에 속한다니, 그래서 이럴 때일수록 더욱 고차원적으로 지내보자고 몇 마디 적어본다.     피부! 바이러스는 절대 피부를 뚫을 수 없다는 점이 얼마나 다행인가. 여러 층의 세포로 구성되고 맨 바깥층 피부 세포는 죽은 채로 몸을 뒤덮고 있다가 스스로 탈락해 자연으로 돌아간다. 이때 함께 떨어져나가는 바이러스와 세균이 하루에도 수십조 개에 이른다.     눈빛! 눈빛으로는 절대 미생물이 침입하지 못하니 얼마나 다행인가. 눈빛으로 누군가를 쏘아보면 싸늘한 감정만 되돌아올 뿐 절대 바이러스가 소멸하지 않는다. 그러니 눈빛으로는 사랑스러운 감정만 전하자.     그리고 중력! 바이러스와 인간은 모두 똑같이 중력장 안에 살아가는 미물이다. 바이러스에 중력을 거스를 날개가 없음을 조물주에게 감사하자. 병의 치료와 예방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많다는 점. 과학자 그룹은 바이러스를 발견한 지 수주 만에 염기서열을 밝히고 진단 방법을 개발했다. 얼마 안 있으면 치료제와 백신이 개발되고, 언론에 나오는 걸 보면 ‘낭만닥터 김사부’ 같은 따듯한 맘과 실력을 겸비한 의사도 많은 것 같다. 글을 쓰는데 드라마가 시작했다고 아내가 부른다. 이만 글 쓰고 TV 보러 가야겠다.     2월13일 레벨D 방호복     물론 내 피부만으로도 바이러스 침투를 막을 수 있겠지만 나는 선별진료소 진료를 위해 레벨D 방호복을 입어야 했다. 바이러스 감염자 가까이에서 진료해야 하는 의료인을 위해 준비된 옷이다. 이 옷은 바이러스뿐 아니라 사람들 불안까지 차단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나 역시 옷을 입는 순간 평온을 느꼈고, 비장함마저 솟아올랐다.     옷을 입는 방법은 비교적 간단하다. 다리부터 집어넣은 뒤 팔을 끼우고 허리에서 목까지 올라오는 지퍼를 올린 다음, 머리덮개를 쓰고 고글을 착용한다. 마지막으로 발싸개를 신고 끈으로 동여맨다. 발싸개만 빼면 아이언맨이 슈트를 입는 순서와 비슷하다. 머지않은 미래에 인공지능(AI)을 갖춘 방호복이 나오리라고 예상된다. 과학기술은 언제나 공상을 현실로 실현해왔지 않나.     안타까운 점은, 이 하얀 옷을 한 번 입고 폐기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옷을 입고 진료실을 나오면서 마스크와 장갑까지 버려야 한다. 정말 아깝다. 이 모든 게 일회용이라니. 새 옷을 한 번 입고 버리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버려진 옷들은 어딘가 폐기돼 땅속에서 썩지 않고 깊은 잠을 자게 될 것이다.     비닐과 플라스틱이 생태계를 위협하는 쓰레기로 전락한 시대다. 청정지역 바닷속에서도 비닐 로프에 걸려 생명이 위태로운 상어나 거북이의 사진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비닐과 플라스틱이 위협적인 이유는 썩지 않아서 지표면과 바다 위를 부유하기 때문이고, 썩지 않는다는 건 어떤 미생물도 이것을 먹어치울 수 없다는 말이다. 바이러스가 위협하는 곳에서 바이러스가 먹지 못하는 옷을 입으니 내 마음이 평온해지는 건 옳은 일이나, 그 누구도 먹지 못하는 이것들 때문에 지구가 생니를 뽑게 되는 건 옳지 않다. 하여간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지구를 위해서라도 빨리 바이러스의 계절이 지나가야 한다.     어떤 생태신학자가 한 말이 떠오른다. 그는 지구 생태계를 걱정하는 측면에서 본다면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게 오히려 잘됐다고 했다. ‘끓는 물 이론’이란 게 있다. 개구리들을 냄비 속에 넣어두고 서서히 물을 데우면 나중에 물이 끓으면서 다 죽고 만다. 그러나 개구리들을 펄펄 끓는 물이 담긴 냄비에 넣으면 개구리들은 뜨거움에 놀라 모두 냄비 밖으로 뛰쳐나온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이런저런 기후변화 정책을 했다지만 냄비는 서서히 데워지고 있다. 트럼프의 여러 가지 반생태적 정책이 ‘끓는 물 효과’를 내서 사람들을 각성시킬 것이다. ‘이대로’는 다 죽게 되니 행동하자는 각성 말이다.     바이러스 변종 하나에 한국은 물론 전세계가 떠들썩했다. 불안해하며 너도나도 대응책을 세워야 한다고 했고, 정부 대응을 비난하기도 했다. 아쉬운 건,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기후변화 이슈에선 너무나 조용했다는 사실이다. 변종 바이러스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고 깊게 인류를 위협하는 여섯 번째 대멸종이 진행되고 있는데 말이다. 변종 바이러스 사건이 일종의 ‘끓는 물’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개구리보다 총명한 인간이 아닌가.     추신. 지구가 더워지면 냉방 슈트를 만들어 입고 다니자는 인간이 있을까봐 한마디 덧붙인다. 오늘 방호복을 입어봤는데 입는 데 5분, 벗는 데 5분 걸린다. 할 만한 일이 아니다.     /이낙원 나은병원 호흡기내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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