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http://www.zoglo.net/blog/kokuryeo 블로그홈 | 로그인

카테고리

※ 댓글

  • 등록된 코멘트가 없습니다
<< 9월 2021 >>
   1234
567891011
12131415161718
19202122232425
2627282930  

방문자

검색날짜 : 2021/09/10

전체 [ 6 ]

6    발해국의 종말과 국가회복을 위한 발해유민들의 투쟁 댓글:  조회:1147  추천:0  2021-09-10
발해국의 종말과 국가회복을 위한 발해유민들의 투쟁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조선인민은 예로부터 싸우다가 죽을지언정 원쑤앞에 굴할줄 모르는 용감하고 슬기로운 인민이다.》 조선인민의 강의한 애국심은 거란침략자들을 반대하는 발해인민들의 투쟁과정에서도 높이 발현되였다.    거란의 침입을 반대한 발해인민들의 투쟁 발해는 근 200년간 강대한 나라로 존속하여왔으나 9세기 말~10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급속히 약화되였다. 이 시기 발해의 중앙 및 지방의 봉건세력들은 인민들의 토지를 대대적으로 략탈하고 착취와 억압을 전례없이 강화하였다. 한편 통치배들속에서는 상무의 기풍이 점차 없어지고 나약한 풍조가 휩쓸었으며 더 많은 재부와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한 싸움만 계속 벌리였다. 발해귀족들 내부에 극히 나약한 풍조가 휩쓸었는데 당나라의 과거시험에 합격되는것을 《영예》로까지 생각하는 형편이였다. 그리하여 나라의 국력은 걷잡을수 없이 약화되게 되였다.       거란은 원래 서료하상류일대에 살고있던 유목종족이였다. 10세기 초에 급격히 강대한 세력으로 자라난 거란은 916년에 거란국가를 선포하였다. 이때 황제 야률아보기가 발해에 대한 침략의 마수를 뻗치였다. 발해는 거란의 침입에 대처하여 924년 5월에 거란이 차지하였던 료주(심양 서쪽)를 쳐서 큰 타격을 주었으나 그 성과를 공고히 하지 못하였다.       ㅡ 925~926년전쟁 이미 10세기 초부터 발해에 대한 침략을 꿈꾸어오던 거란침략자들은 925년 12월 말부터 거란왕 야률아보기가 직접 수만명의 침략군을 거느리고 대규모적인 무력침공을 감행하였다. 야률아보기가 거느린 거란침략군은 발해 서쪽의 주요성이였던 부여성을 포위하였다. 부여성의 군인들은 력량상 대비가 안되는 적과 용감히 싸웠으나 926년 1월 초에 성을 강점당하고말았다. 부여성을 강점한 적들은 동쪽으로 계속 밀려들었다. 적장 안단이 거느린 거란군의 선봉 1만명(기병)은 발해수도 서쪽가까이까지 침공하여왔다. 이때 발해의 대신 로상이 수도방위군을 이끌고나가 싸웠으나 우세한 적들을 물리치지 못하였다.       발해의 수도 상경룡천부의 홀한성은 거란침략자들의 포위에 들었다. 성안에 있던 전체 군민들은 거란침략군의 공격을 여러차례 물리치고 무리죽음을 주었다. 그러나 국왕 대인선을 비롯한 봉건통치배들은 싸우는 발해군민들을 배반하고 인민들의 전투행동을 중지시키는 반역행위를 저질렀다. 인민들의 투쟁은 비록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발해군민들의 불굴의 투지와 용감성, 애국심을 다시금 시위하였다.       ㅡ 각지 인민들의 항전 거란침략자들은 인민들의 반항심을 무마시키려고 교활하게 책동하였다. 적들은 동단국을 조작하고 거란왕의 아들 야률배를 왕으로 임명하였으며 실권없는 벼슬자리에 투항한 일부 발해귀족들을 끼워넣었다. 이것은 인민들의 큰 분격을 자아냈다.       인민들은 도처에서 들고일어나 거란침략자들과 반역자들을 반대하여 투쟁하였다. 926년 3월 장령부, 안변부, 막힐부, 정리부의 군민들이 결사적으로 싸웠다. 그러나 그들의 투쟁은 통일적지휘밑에 전개되지 못하였기때문에 각개격파당하였다.       결국 발해는 926년에 자기의 존재를 마치였다. 925~926년전쟁과정은 봉건통치배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침략자들을 물리치지 못하였으나 광범한 인민들의 높은 애국심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발해말기의 력사는 아무리 강대한 나라라도 자만도취하고 안일해져 국력을 강화하는 사업을 게을리하면 망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국토회복을 위한 발해유민들의 투쟁 발해는 비록 존재를 마쳤으나 그 유민들은 거란에 의하여 나라가 무너진 다음에도 굴함없이 국토회복을 위해 줄기차게 싸웠다. 이 투쟁은 여러 지역에서 여러가지 형태로 오래동안 줄기차게 벌어졌다. 발해유민들은 발해의 옛 땅에 정안국과 오사성발해국을 비롯한 소독립국들을 세우고 강점자들을 반대하여 투쟁하였다. 정안국(定安國)은 오씨가 부여부의 동쪽 혼돈강(송화강), 압록강의 중상류일대에 세운 발해유민들의 소국이였으며 독자적인 년호까지 사용하였다.       정안국은 안으로 국력을 강화하는 한편 거란의 침략에 반거란동맹으로 대처하기 위한 대외활동을 적극 벌리였다. 970년에 제2대왕 오렬만화, 981년에 제3대왕 오현명은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여 반거란동맹을 무을것을 제기하였으나 송나라의 나약한 태도로 하여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정안국은 부단히 침입하는 거란침략군을 물리쳤고 때로는 적강점지역을 공격하여 타격을 주기도 하였다.       정안국은 동족의 나라 고려와도 련합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정안국이 언제까지 존재하였는지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기록에 의하더라도 할빈지방에서 80~90년간은 거란에 항거하면서 국권을 지켜왔다. 오사성발해국은 부여부를 중심으로 오씨가 세운 소국이였다. 수십만의 발해사람들이 동족의 나라인 고려로 이주하여 고려사람들과 함께 거란침략자들을 반대하여 투쟁하였다. 발해유민들의 투쟁은 특히 료동지방에서 치렬하게 벌어졌다.       오사성발해국도 송나라와 반거란동맹을 맺기 위한 대외활동을 벌리였다. 그러나 어부지리를 얻으려는 송나라의 태도로 하여 오사성발해국은 단독으로 싸우지 않으면 안되였다. 995년 오사성발해국의 군민들은 오소경(오소도)의 지휘밑에 거란의 침략대군을 격퇴하였다. 그후에도 오사성발해국의 인민들은 끊임없이 달려드는 거란침략자들과 용감히 싸워 물리쳤다.       《료사》의 기록에 의하면 1114년경에 녀진족이 거란을 공격할 때 오사성발해국이 참가한것으로 되여있다. 이것은 12세기 초경까지도 오사성발해국이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해왔다는것을 보여준다.   국토회복을 위한 발해유민들의 투쟁은 끊임없이 계속되였다. 1029년 8월 초 동경도(거란관할하의 도, 직할현 9개, 소속 주, 부, 군, 성 87개)의 전체 발해유민들은 대연림의 지휘밑에 거란강점자들의 통치를 반대하는 폭동을 일으키였다. 대연림은 당시 발해군상은(동경도관하 발해군의 사령관격)이였다. 폭동군은 거란의 동경류수 부마도위 소효선과 그의 처 남양공주 최팔을 동경성(료양성)안에 잡아가두고 거란관리들을 처단하였으며 새로 발해유민들의 국가인 《흥료국》을 세웠다. 당시 대연림이 흥료국왕으로 되고 년호를 《천경》으로 정하였다. 흥료국은 료동지방의 전체 인민들을 반거란투쟁에로 일떠세우는 동시에 한인, 녀진인들이 이 투쟁을 적극 지지성원해나가도록 하였다. 또한 보주성의 장군 하행미로 하여금 투쟁에 합세하도록 련락을 보냈으나 배신당하였다. 흥료국의 군민들은 한결같이 거란침략군과 싸웠지만 대오안에 나타난 투항분자들에 의하여 실패하게 되였다.   발해유민들은 1116년 1월 동경료양부를 중심으로 거란침략자들을 반대하는 투쟁을 벌렸다. 1116년 고영창은 《대발해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되였으며 년호를 《륭기》라고 제정하였다. 대발해국은 산하 각 주들에 부대들을 파견하여 광범한 발해유민들을 집결하는 한편 거란인관리들을 처단하였다. 대발해국의 급속한 장성에 위협을 느낀 거란통치배들은 남부재상 장림에게 대병력을 주어 공격하도록 하였다. 대발해국의 군민들은 장림의 거란군과 30여차례의 격전을 벌려 큰 타격을 주었으며 항전 4~5개월동안 중첩되는 애로와 난관을 극복하면서 투쟁성과를 확대해나갔다. 그러나 대발해국의 국토회복을 위한 투쟁은 금(녀진)나라의 배신행위로 하여 5월에 실패하고말았다. 발해유민들은 침략자들을 반대하는 투쟁을 끊임없이 벌리였으나 통일성을 보장하지 못하였으며 간교한 적들의 책동으로 최후승리를 이룩하지 못하였다. 그후에도 발해유민들의 국권회복을 위한 투쟁은 근 200년간 계속되였다. 발해유민들의 완강한 투쟁은 비록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으나 조선인민의 높은 애국심과 강한 투지를 다시한번 뚜렷이 시위하였다.
5    《해동성국》을 군사적으로 담보한 발해군대 댓글:  조회:1087  추천:0  2021-09-10
《해동성국》을 군사적으로 담보한 발해군대 고구려멸망후 대중상과 대조영휘하의 고구려군사들을 골간으로 하여 진국의 성립과 발해건국과정을 거쳐 발전강화된 발해군대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해동성국》의 토대를 닦아놓았으며 국력의 발전을 군사적으로 담보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어떠한 국가를 물론하고 자주독립국가는 반드시 자기의 군대를 가지고있는것입니다.》 발해는 건국초기부터 봉건지배계급의 리익을 옹호하고 봉건제도를 유지강화하며 나라의 안전을 지키는 자기의 군대를 가지고있었다. 고구려재건투쟁을 벌리던 고구려유민들의 항전부대들을 모체로 하여 편성된 발해의 군대는 건국초기부터 봉건지배계급의 계급적리익을 옹호하는 수단으로 복무하였으며 발해의 높은 대외적지위와 강한 국력에 어울리게 방대한 규모에서 유지강화되였다.    발해군대의 병력수 발해 건국직전 대조영휘하의 군사는 40만이였다. 실학자 홍석주는 《발해세가》에서 우리 나라에서 전해오던 사료들뿐아니라 《오대회요》를 비롯한 중국측 기록들도 널리 참고하여 발해 초기 군사가 40만이라고 하였다. 발해가 건국과정에 료동지역을 비롯한 중국 동북지방의 적지 않은 지역과 우리 나라 북부의 넓은 령토를 차지할수 있었던것은 바로 40만의 대병력으로 위세를 떨쳤기때문이였다. 발해건국을 전후하여 대조영의 휘하에 모여든 40만의 대군은 모두 정규군인이 아니라 고구려회복이라는 공동의 목적을 지향하여나섰던 고구려유민들과 일부 말갈인들이였다. 건국이후 발해봉건정부는 고구려이래의 군대편성원칙과 조성된 정세에 맞게 군사제도를 새롭게 편성하고 군대를 질, 량적으로 강화하여나갔다.       《책부원귀》나 《구당서》 등 력사기록들에서는 발해의 병력수에 대하여 승병 수만이라고 밝히고있다. 그러나 이 수자는 발해의 병력수전체를 가리킨것이 아니라 금군의 수로 보이며 상비군전체를 가리킨 수자라고는 볼수 없다. 그것은 당나라에서 《안사의 란》이 일어났을 때 평로류후사 서귀도가 발해에 요청한 기병만 하여도 4만이나 되였으며 당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와 패배감에 물젖어 흑수말갈을 징벌할데 대한 무왕의 명령을 거부한 대문예가 발해의 군사력을 심히 과소평가하면서도 군대수를 10만이라고 하였기때문이다. 그러나 대문예의 말대로 군대수를 단순히 10만으로 볼수도 없다.       《료사》 병위지 상에는 발해의 군대수가 수십만이라고 기록되여있는데 이것이 발해의 총병력수를 가리킨 비교적 정확한 수자라고 볼수 있다.    발해군대의 군종 발해의 군대는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이루어져있었다. 발해의 중앙군은 8위와 금군이였다. 발해의 중앙군에는 좌맹분위, 우맹분위, 좌웅위, 우웅위, 좌비위, 우비위, 남좌우위, 북좌우위의 8개 위가 있었다. 8위에는 각각 대장군과 장군이 한명씩 배치되여있었으며 그 밑에 도장, 소장 등 여러 무관직이 있었다. 8위에는 부병의 한개 단위를 이루던 절충부가 소속되여있었다. 중앙군에 소속된 부병은 수도와 그 부근의 수비를 맡아보았으며 동시에 전국에 배치되여있던 8위소속의 절충부들에 가서 복역하면서 지방군과 결합된 중견력량으로 되여있었다. 발해의 중앙군에는 또한 금군이 있었다. 금군은 궁성수비를 위주로 하면서 직접 군주를 호위하는 시위군이였다. 발해의 지방군은 건국초기부터 중앙군과 함께 발해군사력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있었다. 고구려멸망후 각지에서 반침략투쟁을 벌리던 여러 항전세력들은 발해건국을 위한 투쟁에 합세하여나섰으며 그후에는 지방군으로 편성되였다. 발해봉건정부는 초기부터 지방군을 거느린 지방장관들에게 중앙의 관직을 겸임시킴으로써 그들의 지위를 높여주고 봉건정부에 더 잘 복무하도록 하면서 지방군강화에 특별한 관심을 돌리였다. 지방군은 지방행정단위인 부, 주, 현을 단위로 하여 편성, 배치되여있었다. 지방행정단위의 장관인 도독(절도사), 자사, 현승은 민사행정뿐아니라 군사지휘권도 틀어쥐고 지방군을 통솔하였다. 그리고 특별히 중요한 부들에는 도독이 아니라 절도사들이 파견되여 그 지역의 군사를 거느리고있었으며 후국과 속령들에 배치된 군대는 지방군의 구성부분으로 후국왕이나 번장들의 통솔하에 있었다. 지방군의 편성은 중앙군과 달리 병농칠치의 원칙에서 조직된 고구려인평민들이 기본을 이루고있었으며 말갈족출신의 군사들도 들어있었다. 이처럼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구성된 발해의 군대는 봉건왕권을 보호하고 지배계급의 계급적지배와 리익을 군사적으로 옹호하고 담보하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220여년간 나라의 안전을 지켜냈다.    발해군대의 병종 발해군대의 병종구성을 놓고보면 강력한 지상군과 수군으로 이루어져있었다. 발해의 지상군은 기본전투력량으로서 외래침략자들을 물리치는 싸움들에서 용맹을 떨쳤다. 발해에서는 기병을 위주로 한 지상군의 위력이 대단히 강하였다. 755년 당나라에서 안사의 란이 일어났을 때 평로류후사 서귀도는 발해에 기병 4만을 보내여 도와줄것을 요청한 일이 있었다.       서귀도가 발해에 요청한 기병 4만은 결코 적은 수자가 아니였다. 서귀도가 그렇게 많은 수의 기병을 요청할수 있은것은 발해의 기병력이 량적으로 또 질적으로 상당히 높은 수준에 있다고 보았기때문이며 설사 이만한 수의 기병을 동원시킨다고 하여도 국가방위를 위한 전반적무력균형에서는 큰 공백이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하였기때문이였다. 다시말하면 그들은 군사력 특히 기병이 강한 발해로서는 이만한 수의 기병을 얼마든지 동원시킬수 있다고 보았던것이다.         이것은 당시 고구려후국관내였던 오늘의 평안남도 녕원군에 발해성과 말을 사육하던 양마성이 있는것을 놓고서도 잘 알수 있다. 양마성에서는 말굴레와 말안장, 금속제활촉들이 많이 발굴되였는데 이것은 발해에서 말사육이 그 어떤 개별적인 지역에 국한된 사업이 아니라 나라의 군사력을 강화하는 중요한 일로서 전국의 여러 곳에서 활발히 진행되였으며 사육된 말들은 발해의 강력한 기병력을 끊임없이 보충하고 강화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발해는 강력한 수군도 가지고있었다. 발해가 수군을 가지게 된것은 나라의 지리적위치와 관련된다. 발해는 령역의 적지 않은 부분이 해안을 끼고있었는데 동쪽에는 조선동해, 서남쪽에는 조선서해가 있었다. 발해는 건국초기부터 당나라와 군사적으로 견제하는 립장에 있었기때문에 당나라와의 대립이 격화되고 그것이 언제 전쟁으로 번져질지 모르는 조건에서 수군력량을 강화하였다. 발해에서는 수군의 중요한 전투력인 함선을 건조할수 있는 배무이기술이 상당히 높은 수준에 있었다.       발해에서는 각이한 크기의 배를 건조하였는데 큰 배는 물동량을 고려하지 않고 한척에 100여명이 탈수 있었고 중형배는 40~70여명, 작은 배는 10여명가량 탈수 있었다. 발해사신들이 모진 풍랑을 무릅쓰고 일본에 자주 왕래할수 있었던것은 두려움을 모르는 발해사람들의 진취성과 함께 견고한 배가 마련되여있었기때문이였다.       일본측문헌기록들에 의하여 발해사신들이 타고 갔던 배를 상상해볼수 있는데 그중에는 키, 돛대, 노, 닻, 끌어당기는 바 등 여러가지 설비를 갖춘 조종인원이 28명이나 되는 큰 배도 있었다. 수군은 바로 이러한 배에 여러가지 무기를 설치하고 바다를 믿음직하게 지켰다. 대형배와 중형배는 기본전투함선의 역할을 하였고 소형배는 해안을 감시하고 해적행위를 하는 배들을 추적, 단속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처럼 발해군대는 기병위주의 강력한 지상군과 발전된 전투함선으로 장비된 수군으로 이루어져있었다. 이와 같이 발해는 건국이후 수십만의 군사를 상비군으로 가지고있었기때문에 령토확장도 성과적으로 진행할수 있었고 이웃 나라와의 군사적대결과 외교분쟁에서도 우세를 차지할수 있었던 동방의 강국이였다.
4    새롭게 정비강화된 정치제도 댓글:  조회:826  추천:0  2021-09-10
새롭게 정비강화된 정치제도 발해는 건국후 국력을 계속 강화하는 정책을 실시하여 수십년동안에 벌써 그 령토가 남쪽은 대동강과 덕원(원산북쪽)에서 신라와 접하고 료하일대와 부여의 땅인 송화강류역, 흑룡강이남의 말갈족거주지역까지 포괄하게 되였다. 발해는 국력이 강화됨에 따라 대외적지위를 공고히 한 결과 《해동성국》(동방의 강성한 나라)으로 불리우며 위력을 널리 떨치였다. 발해는 강화된 나라의 국력에 어울리게 정치제도를 새롭게 정비강화하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는 7세기말부터 10세기초까지 200여년간 존재하였으며 정치, 경제, 문화가 크게 발전하여 〈해동성국〉으로 이름을 떨치였습니다.》    발해국의 최고권력자의 지위 봉건시대의 국가는 군주의 권력기구인것만큼 최고권력자의 지위는 국가의 지위를 규정짓는 중요한 징표의 하나이다. 발해의 지위와 성격을 규정짓는데서 제일 처음으로 론의되는것이 바로 발해대왕의 지위에 관한 문제이다. 발해봉건국가의 국가주권은 지주, 관료 등 봉건통치계급에게 속하였고 국가우에 있는 국왕은 최고의 권력자이며 최대의 착취자였다.  국왕은 대씨가문에서 원칙상 맏아들이 대대로 물려받았고 자식이 없을 경우에는 형제 또는 가까운 왕족에 의해 계승되였다.       발해에서는 왕을 《가독부》 또는 《성왕》, 《대왕》, 《황상》, 《기하》라고 불렀고 왕의 명령은 《교》 또는 《조》로, 왕의 아버지는 《로왕》, 어머니는 《태비》, 처는 《귀비》, 맏아들은 《부왕》, 그 아래의 자식들은 《왕자》라고 불렀다. 그리고 독자적인 년호를 만들어 사용하였으며 왕위는 세습되였다.       오늘까지 전해지는 많은 발해관계사료들은 발해대왕이 천자의 지위에 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그 가운데서도 독자적인 년호의 제정과 대왕, 황상, 성왕의 호칭, 3사3공제도의 존재 등은 국왕의 천자적지위와 발해가 천자국의 틀에 맞는 정치체제를 갖추고있던 대왕국이였다는것을 명백히 보여주고있다.   ㅡ 독자적인 시호, 년호의 제정 발해에서는 군주가 즉위하거나 그 어떤 상서로운 사변 또는 재난 등이 있을 때에는 년호가 새롭게 제정실시되군 하였다. 일반적으로 봉건사회에서 년호는 황제국가들에서만 독자적으로 제정실시될수 있으며 제후국이나 속국들에서는 자체로 제정할수 없고 다만 황제국의 년호를 그대로 사용하게 되여있었다. 그러므로 군주가 독자적인 년호를 제정하였는가 그렇게 하지 못하였는가 하는것은 최고통치자가 어떤 지위를 차지하고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징표의 하나라고 말할수 있다. 발해에서는 대조영으로부터 마지막 군주 대인선 집권시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독자적인 년호들이 제정실시되였다. 오늘까지 전해지는 《협계태씨족보》, 《신당서》 발해전, 《정혜공주묘지병서》와 《정효공주묘지병서》와 같은 력사자료들과 금석문들에는 발해존립기간 제정실시된 각종 년호들이 기록되여있다.     력사기록들에 남아 전해지는 발해의 시호와 년호들은 발해가 존립 전기간 다른 나라의 년호를 쓴것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년호를 제정하여 실시하였다는것, 그 최고통치자가 천자의 지위에 있었다는것을 보여주는 명백한 근거로 된다. ㅡ 발해군주에 대한 호칭 대왕, 황상, 성왕 발해에는 천자적지위에 있던 군주에 대한 여러가지 호칭이 있었다. 성왕이라는 호칭과 여러 금석문들에 남아있는 대왕, 황상이라는 호칭은 발해군주의 천자적지위를 명백히 증명하여준다. 현존하는 사료들에서 발해군주를 대왕으로 표현한것은 《정혜공주묘지병서》와 《정효공주묘지병서》, 《일본후기》의 기록이다. 《정혜공주묘지병서》와 《정효공주묘지병서》는 발해인들이 직접 남긴 금석문이며 대행대왕이라는 표현도 발해국왕의 국서에 올라있는 문구였다고 볼 때 대왕이라는 표현은 발해봉건사회에서 널리 사용되던 왕에 대한 호칭의 하나였다는것을 잘 알수 있다. 발해때의 대왕이라는 호칭은 고구려시기의 최고군주에 대한 칭호를 그대로 이어받은것이였다. 발해군주도 고구려의 최고주권자와 마찬가지로 제후세력들의 우에 있는 한급 높은 대왕으로서 천자급의 틀을 갖추고 행세하였다. 발해의 최고통치자는 천자급의 대왕이였기때문에 대왕이라는 호칭외에 황상, 성왕이라고도 불리웠으며 군주의 딸도 공주라고 하였다. 발해에서는 국왕의 신성불가침을 절대화하기 위하여 고구려시기의 성왕이라는 칭호를 그대로 왕에 대한 호칭으로 사용하였다. 특히 771년 문왕이 일본왕에게 보내는 국서에서 발해왕실이 천손 즉 천제의 자손이라고 하였다는것은 발해지배계급이 고구려시조 동명성왕때부터 시작된 천손사상으로 왕족혈통을 신성시하고 절대화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대왕, 황상, 성왕 등으로 불리우던 발해군주는 전체 지배계급, 피지배계급우에 군림하고있던 최고통치자, 전제군주로서 발해의 통치체제는 천자국의 틀거리에 맞게 편성되여있었다.      발해의 중앙통치기구의 기본을 이룬 3성 6부 발해국가의 중앙정부기구에는 많은 관청들이 있었으나 기본을 이룬것은 3성 6부였다.       3성은 정당성, 선조성, 중대성이며 그 장관들인 대내상, 좌상, 우상을 3재상이라고 하였다. 6부는 충부, 인부, 의부, 지부, ​례부, 신부 등이였다.       발해국가의 행정은 기본적으로 이 3성 6부에 의하여 집행되였으며 봉건국왕의 《권위》를 보장하고 중앙집권적봉건통치를 강화하기 위한 실제적 집행단위였다. 발해에서 3성 6부제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기구는 대체로 8세기 후반기에 와서 기본적으로 고정되였다. 6부의 각 장관은 경이라고 하였는데 이들은 정당성의 관리인 좌, 우사정의 아래에서 그의 지시를 받았다. 경의 아래에는 소경과 여러명의 랑중, 원외랑들이 있었다. 발해에는 3성6부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정치에 참가하는 《3사3공제도》도 있었다.       3사는 태사, 태부, 태보였는데 국왕은 이들을 신하로 대하지 않고 스승으로 대우하였다. 3공은 태위, 사도, 사공으로서 국왕을 도와 나라의 정치를 하며 어느 부서나 다 통관할수 있었다.       발해에는 3성 6부 아래에 많은 행정관청들이 있었다. 그러한 관청들로서는 중정대, 전중시, 종속시, 문적원, 태상시, 사빈시, 대농시, 사장시, 사선시, 주자감, 항백국, 화간원 등이 있었다. 이 기관들은 봉건관료기구의 내부조직과 관련된 임무를 수행하는것으로 되여있지만 실제적으로 인민들을 수탈하고 반항자들을 탄압하기 위한 폭압기구였다. 발해에서 이러한 기관들은 봉건귀족들 특히 왕실의 사치한 생활을 보장하는데 복무하였다.    발해의 지방통치제도 발해의 지방행정기구도 다른 봉건국가와 마찬가지로 중앙정부의 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지방통치기구였다. 발해의 지방통치의 기본단위는 부, 주, 현이였고 그 아래에 일부 부곡과 촌 등이 있었으며 변방지역들에는 자치적성격을 띤 후국과 속령들이 있었다. 발해의 지방통치기구는 8세기 중엽에 5경 15부 62주로 정비되여있었고 각 주 밑에는 여러개의 현들이 있었다. 그리고 중요한 5개부에 경(京)을 두었다. 상경룡천부는 발해의 수도(녕안현 발해진)였으며 중경현덕부는 화룡, 남경남해부는 북청, 서경압록부는 집안, 동경룡원부는 부거에 위치하고있었다. 부의 장관을 도독, 주의 장관을 자사, 현의 장관을 현승이라고 하였는데 이들은 관할지역의 민사행정뿐아니라 재판권, 군사권까지도 그러쥐고 인민들을 가혹하게 억압착취하던 왕권의 대리자들이였다. 이처럼 발해의 중앙과 지방의 각급 관료들은 주로 고구려귀족들로 임명되였는데 그들은 그 지방의 군사권까지 모두 쥐고있은 권력자들이였다.
3    건국초기 발해국의 주요정책들 댓글:  조회:1016  추천:0  2021-09-10
건국초기 발해국의 주요정책들 발해는 동방의 강국으로 위력을 떨치던 《해동성국》이였다. 발해가 초기부터 정치군사적위력을 강화하고 나라의 대외적지위를 높이면서 《해동성국》의 위용을 떨칠수 있게 된것은 건국직후 실시된 주요정책들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정치에서 기본은 정책을 규정하고 집행하는것입니다.》 정치는 계급 또는 사회공동의 리익에 맞게 사람들의 활동을 통일적으로 조직하고 지휘하는 사회적기능으로서 여기에서 기본은 정책을 규정하고 집행하는것이다.       일반적으로 계급사회에서 정치를 한다는것은 일정한 계급이 자기의 요구와 리해관계에 맞게 정책을 작성하고 정치조직, 정치제도에 의거하여 그것을 집행해나가는 과정을 말한다. 정권을 쥔 계급이 어떤 정책을 작성하고 실시하는가 하는것은 그들의 계급적요구와 리해관계에 따르는것으로서 국가의 운영과 발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 발해국에서 중무정책의 실시 발해는 건국초기 봉건국가의 안전을 지키고 국력을 강화하기 위한 중무정책을 실시하였다. 발해가 건국직후 실시한 중무정책은 무관을 중시하고 무예를 인재등용의 기본징표로 삼던 고구려의 상무적인 정치방식을 그대로 계승한것으로써 이 시기 정세발전의 요구에 맞게 봉건국가의 안전을 지키고 국력을 강화할수 있게 한 긍정적인 정책이였다. 발해가 중무정책을 실시한 시기는 건국직후부터 8세기 전반기경까지였다. 발해 초기의 대외관계에서 문관보다 무관의 역할이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일본으로 간 발해의 첫 사신단은 조선동해를 건너 일본 동북부의 에조족(오늘의 아이누족의 조상)거주지역에 도착하였는데 24명가운데서 고인의이하 16명이 죽고 두령 고재덕 등 8명만이 겨우 살아남아 이데와에 도착하였다. 이 사신단의 사두는 무관인 녕원장군 랑장 고인의였으며 그밖에 우장군 과의도위 덕주와 별장 사항 등이 사신단성원으로 되여있었다.       그후 발해국은 759년까지 5차례에 걸쳐 사신단을 일본에 파견하였는데 일본에 파견된 사신단의 사두, 사사 등 주요인물들은 모두 무관직을 가진 사람들이였다.     일본뿐아니라 당나라에 파견된 사신들도 대부분 무관벼슬을 가진 관리들이였다.       발해는 당나라에도 많은 사신들을 파견하였다. 당나라사신 장행급과 최혼이 705년, 713년에 각각 발해를 방문한 후 두 나라사이의 관계가 어느정도 완화되면서 발해사신들의 당나라왕래가 빈번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8세기 중엽까지 여러가지 사명을 띤 발해사신들의 당나라왕래는 빈번하였지만 그들의 관직명을 정확히 전하는 사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이 시기 당나라에 파견된 발해사신들가운데서 당나라의 명예벼슬을 받은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무관의 벼슬이였다.       일반적으로 대외정책은 대내정책의 연장으로서 매개 나라의 대외관계에는 그 나라가 실시하고있는 대내정책이 그대로 반영된다. 해당 나라들의 대외관계는 사신들의 호상 래왕을 통하여 맺어지며 발전한다. 사신들은 봉건국가의 권력을 틀어쥐고 정치를 주도하는 정치세력을 대표하는 국가의 공식적인 인물들인것만큼 사신단성원들이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여있는가 하는것을 통하여 국가권력을 틀어쥔 정치세력에 대하여 알수 있다. 사신단성원들이 대부분 무관들로 구성되여있다는것은 당시 발해에서 무관들이 국가정치의 주역을 담당하고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결국 발해에서 군사를 중시하는 중무정책이 국가의 기본정책으로 되여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발해에서 중무정책은 8세기 50년대경까지 실시되였다. 그러면 발해가 건국 초기부터 중무정책을 실시한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것이다.       그 목적은 갓 창건된 봉건국가의 안전을 지키고 국력발전의 담보를 마련하기 위해서였으며 옛 고구려의 령토를 완전히 되찾고 강력한 봉건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고구려의 장수출신인 대조영이 발해건국을 위한 오랜 기간의 항전을 통하여 단련된 고구려군사들에 의거하여 국가정사를 운영하는것이 건국초기의 복잡한 정세하에서 권력지반을 공고히 하고 나라를 다스리는데서도 매우 유리하기때문이였다.       이처럼 건국후 8세기 전반기경까지 실시된 중무정책에 의하여 발해는 나라의 자주권과 안정을 지키고 강한 국력을 마련할수 있었다. 발해가 《해동성국》으로 출현할수 있었던 토대는 모두 중무정책에 의하여 마련되고 공고화되였으며 바로 여기에 발해정치사에서 중무정책의 실시가 가지는 의의가 있다.   중무정책에서 중문정책에로의 전환 중무정책에 의하여 발해의 국력이 강화되고 대외적지위가 높아진 8세기 후반기에 이르러 발해정치에서는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는 제3대왕 대흠무(문왕)집권시기(737년~793년)이다.       제2대왕(대무예)의 둘째 아들이였던 대흠무는 737년에 왕위에 올라 집권초기에 고왕(대조영)과 무왕(대무예)시기의 정책들을 계승하여 그것을 완수하는데 기본힘을 돌렸다. 특히 문왕은 무왕통치시기의 령토확장정책을 완수하는데 큰 힘을 넣었다.       문왕집권초기에 추진된 령토확장의 결과 8세기 40년대에 북부의 여러 말갈족들이 종속되고 그 지역들에 지방행정단위들을 설치할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였다. 그리하여 발해건국직후부터 기본힘을 돌려온 발해변방의 여러 말갈족들에 대한 정복과 포섭이 기본적으로 일단락지어지고 나라의 령토는 훨씬 넓어지게 되였다. 당시 대외정세도 발해에 유리하게 변하고있었다.       732~733년 발해의 반침략전쟁이후에 발해에 대한 적대시정책의 실패와 저들에게 불리하게 변화된 대외적환경을 인정한 이웃나라들은 관계정상화를 지향하였으며 《안사의 란》을 전후하여 국내정세가 복잡하게 번져지자 발해와의 관계를 더욱 밀접히 하여 정치, 군사적인 도움을 받으려고 노력하였다. 당시 발해주변 나라들가운데는 발해에 대하여 정치, 군사적으로 위험을 조성하는 종족이나 나라가 없었으며 이것은 발해의 발전에 있어서 유리한 대외적환경으로 되였다.       발해는 중무정책에 의하여 유리하게 조성된 대내외적환경과 조건에 맞게 국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8세기 50년대 말부터 정치방향을 변화시키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발해에서 실시된 기본정책은 종전의 중무정책과는 다른 중문정책이였다. 문왕통치시기의 정치를 중문이라고 하는것은 고왕과 무왕시기와 같이 주로 군사력에 의거하여 대내외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한것이 아니라 국가통치체제를 정비강화하고 그에 의거하여 경제, 문화발전에 힘을 넣으면서 정사를 운영하였기때문이다. 대흠무통치시기의 정치의 특징은 문왕이라는 왕의 시호에 명백히 나타나있다. 이런 의미에서 문왕통치중기이후 구체적으로 8세기 후반기를 발해정치에서 중문정책이 실시된 시기로 규정할수 있는것이다. 이처럼 발해에서 변화된 조건에 맞게 중무정책이 중문정책으로 이행되면서 중앙집권적봉건통치체제가 더욱 확대발전되였으며 국력도 더욱 강화되였다.
2    《해동성국》 발해의 건국 댓글:  조회:978  추천:0  2021-09-10
《해동성국》 발해의 건국 고구려유민들은 신라통치배들이 또다시 적들과 결탁한 다음에도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하여 계속 줄기차게 싸웠다. 침략자들을 반대하는 고구려유민들의 투쟁은 676년이후 여러가지 어렵고 복잡한 정황이 조성되였으나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으며 오히려 압록강이북지역을 중심으로 더욱 고조되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는 7세기말부터 10세기초까지 200여년간 존재하였으며 정치, 경제, 문화가 크게 발전하여 〈해동성국〉으로 이름을 떨치였습니다.》     △ 대중상과 대조영에 의한 진국의 성립 고구려유민들의 줄기찬 투쟁과정에 점차 고구려를 계승한 새 나라를 세울수 있는 기초가 마련되여나갔으며 새로운 소국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압록강류역과 그 부근일대의 고구려유민들에 의해 태백산(백두산)일대에서 《진국》이라는 고구려유민들의 소국이 출현하였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의 자료에 근거해보면 진국은 678년경에 처음으로 나타났으며 684년경에 자기 존재를 더욱 뚜렷이 하였다고 볼수 있다. 진국왕(진국공)은 대조영의 아버지 대(걸걸)중상이였다. 668년 9월 고구려왕조가 멸망한후에 침략자들은 전국 각지에 자기 군대를 파견하여 그곳을 강점하고 새로 저들의 지배체계를 세워보려고 획책하였다.       고구려멸망 당시 국가장부에 등록된 호구는 5부, 176개의 성에 69만여호였는데 침략자들은 그때 저들이 정복한 나라들에 대하여 실시한 상투적수법에 따라 초기에 계획하였던 9개의 《도독부》(도에 해당함), 42개의 《주》(군에 해당함), 100개의 《현》(작은 군에 해당함)가운데서 불과 도독부 4개와 주 10개밖에 설치하지 못하였다. 평양성에는 《안동도호부》라는것을 설치하고 설인귀를 그 장관(《안동도호》)으로 임명하여 2만의 군대를 가지고 통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각 지방의 《도옥》, 《자사》, 《현령》 등의 자리에는 저들에게 투항한 반역자들을 앉히고 거기에 저들의 관리들을 끼워서 그들을 통제하려고 하였다.       고구려지역에 대한 침략자들의 강점책동은 고구려유민들을 강점자들을 몰아내기 위한 투쟁에로 적극 떨쳐나서게 하였다. 이러한 형편에서 강점자들은 저희들의 관리들을 통하여 실시하고있던 직접적통치방식을 철회하고 투항한 이전 고구려의 왕족들과 관리들을 통한 간접통치방식으로 그 방법을 변화시키게 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가 멸망한지 9년만인 677년에 강점자들에게 끌려가있던 고구려의 마지막왕인 고보장이 다시 료동지역에 나타나게 되였다.       《삼국사기》 권22 고구려본기 보장왕조에는 《의봉2년(667년-인용자) 정축년 봄 2월에 투항한 왕을 료동주도독으로 삼고 조선왕으로 책봉하였다. 료동에 돌아가서 남은 사람들을 안착시키도록 하였다. …왕이 료동에 이르러 반역을 꾀하면서 몰래 말갈과 내통하였다.》라고 기록되여있다.       강점자들은 보장왕을 조선국왕으로 임명하여 옛 고구려지역에 파견하면서도 그가 고구려유민들과 손을 잡고 저희들을 반대하여 나설것이 두려워 료동성에 있었던 《안동도호부》를 신성(료하서쪽 신민현부근, 후의 료빈탑으로 인정되고있음)으로 옮겨가 있게 하고 연남생을 《도호》로 임명하여 보장왕의 행동을 감시통제하게 하였다. 이것은 고구려를 속령화하고 투항한 고구려의 관리들을 내세워 간접적으로 통치하는 방법으로 넘어갔다는것을 의미한다. 한편 옛 고구려지역에서는 고구려유민들이 고국회복투쟁을 줄기차게 벌리고있었다. 여기에서 주도적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대중상과 대조영이였다. 대중상과 대조영은 말갈인 추장 걸사비우가 지휘하는 말갈인부대와 련합하여 수개월간 영주의 동쪽과 동남쪽의 여러 성들을 탈환하여 고국땅에서 강점자들을 소멸하고 9월에는 료서 고성에 옮겨와있던 《안동도호부》를 공격하여 이에 큰 타격을 주었다. 료동지역까지 세력범위를 확대하면서 고국회복투쟁을 벌리고있던 대중상과 대조영은 료동지역에 돌아온 보장왕을 리용하려고 그와 련계를 맺게 되였다. 빼앗긴 왕권을 회복하려는 의도를 가지고있던 보장왕도 대중상 등에게 의거하였다.       《협계태씨족보》 발해국왕세략사 태조 진국왕조에는 보장왕이 《료동에 이르러 중상(태조 진국왕 즉 대조영을 가리킴-인용자)과 서로 통하여 모반하려고 하였다.》고 씌여져있다. 즉 《삼국사기》에 기록된 보장왕이 내통한 《말갈》이란 바로 대중상과 대조영이 거느린 고구려유민세력을 비속화하여 가리킨 말이라는것을 알수 있다.       그러나 680년대에 들어서면서 고구려유민들의 고국회복투쟁에서는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그것은 고구려재건투쟁에서 중심적역할을 놀던 이전 고씨왕족들이 더이상 고국회복투쟁에 관여할수 없게 된것이였다. 677년에 료동지역에 온 이후 고구려유민들의 투쟁을 지지하고 그에 의거하여 왕권회복을 실현해보려던 보장왕은 그 내막이 탈로나 681년 강점자들에 의하여 다시 공주로 끌려갔다. 공주로 끌려간 보장왕은 그 다음해 682년에 그곳에서 죽었다. 더우기 683년에는 고구려의 고씨왕족이 세웠던 고구려국까지 사라짐으로써 옛 고구려령토에는 고구려왕족이 관여하는 고국회복투쟁이 완전히 없어지게 되였으며 이것은 항전세력들에게 새로운 조건을 조성해주었다. 이렇게 되자 대중상과 대조영은 이를 계기로 왕족을 내세우려던 종전의 방법을 바꾸어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나설것을 결심하게 되였다.       이에 대하여 《제왕운기》 하권 동국군왕개국년대병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여있다. 《고구려의 옛 장수 대조영이 태백산 남쪽성에 의거하여 주나라 측천무후 원년 갑신(684년)에 나라를 세우고 이어 발해라고 이름을 삼았다.》       《제왕운기》의 기록과 제반사실들로 미루어보아 684년에 대중상과 대조영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유민들이 발해대왕국의 전신국가로서 봉건소국 진국을 수립하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대중상과 대조영을 중심으로한 정치세력들이 봉건소국 진국을 세움으로써 고구려재건투쟁에서 자기의 지위를 더욱 높일수 있게 되였다. 684년이후 진국은 국력을 강화하면서 고구려를 재건하기 위한 투쟁을 더욱 적극적으로 벌려나갔으며 이로하여 압록강류역이북지역에서 침략자들은 더는 배겨낼수 없게 되였다.   ❖ 력사이야기: 대중상과 진국​   △ 침략자들을 반대한 고구려유민들의 투쟁, 발해의 건국 침략자들을 반대하는 고구려유민들의 투쟁은 영주지방에서 힘차게 벌어졌다. 영주지방의 고구려유민들은 696년에 고구려의 옛 장수인 대조영의 지휘밑에 말갈인, 거란인들과 합세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군은 침략자들의 아성인 영주성을 들이쳐 도독을 처단하고 이 일대의 강점세력을 격파한 다음 고구려땅을 향해 동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대조영이 거느린 고구려유민군사들이 동쪽으로 진격한 목적은 옛 고구려땅에서 침략자들을 완전히 몰아내고 그땅에 고구려사람들의 나라를 세우자는데 있었다.       침략자들은 영주지방에서 일어난 거란인들의 폭동을 진압한 다음 많은 무력을 동원하여 고구려유민군사들을 추격하여왔다. 그리하여 698년에 천문령 (료녕성 창무서쪽의 령)에서 치렬한 전투가 벌어지게 되였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유민군사들은 강점군을 완전히 섬멸하여버렸다. 이 반격이 얼마나 드세찼는가 하는것은 적장 리해고가 겨우 목숨만 건져가지고 혼자서 도망친 사실만으로도 잘 알수 있다.         천문령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침략자들은 다시는 고구려유민군사들을 추격하지 못하였다. 천문령전투에서 결정적승리를 이룩한 대조영은 계속 동쪽으로 진격하여 동모산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이전 고구려령역안의 광범한 인민들을 집결하고 적의 침입에 대처하여 방어를 한층 강화하였다.   이처럼 침략자들과의 투쟁과정에 대조영을 중심으로 한 새 봉건세력집단이 형성강화되였는데 이들은 이미 이룩한 군사적승리와 정치적력량관계에 기초하여 698년에 소국인 진국을 확대발전시켜 발해국의 창건을 세상에 선포하였다. 발해국의 1대왕은 대조영이였고 초기수도는 동모산이였다.   ❖ 력사인물: 대조영   발해가 성립됨으로써 고구려의 옛땅을 차지하려던 침략자들의 기도는 완전히 파탄되게 되였으며 그후 거듭되는 외적들의 침입을 물리치고 민족의 자주권을 지켜나갈수 있는 담보가 마련되게 되였다. 세 나라 인민들 특히 고구려유민들의 완강하고도 줄기찬 투쟁에 의하여 침략자들이 우리 강토에서 종국적으로 쫓겨나고 발해가 성립됨으로써 신라통치배들의 외세의존정책에 의하여 빚어졌던 엄중한 민족적위기는 완전히 극복되고 우리 조국 력사상에는 이전의 세 나라를 대신하여 발해와 후기신라 두 나라가 존재하게 되였다.
1    7세기 당나라침략군을 몰아낸 세나라인민들의 투쟁 댓글:  조회:984  추천:0  2021-09-10
 7세기 당나라침략군을 몰아낸 세나라인민들의 투쟁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만일 삼국시기에 고구려, 신라, 백제 세 나라가 단합하여 외적을 물리쳤더라면 우리 조국은 더욱 발전하였을것입니다.》 삼국시기 고구려는 외적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한 투쟁을 끊임없이 벌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통치배들은 고구려와 단합하여 외적을 물리칠 대신 내부싸움을 자주 벌려놓음으로써 우리 나라의 전반적발전을 저애하였다.    7세기 중엽 당나라와 신라통치배들의 결탁 신라통치배들은 남의 힘을 빌어서라도 고구려의 삼국통일정책을 가로막고 저들의 지배권을 넓히려는 야망밑에 당나라와 결탁(야합)하는 반역의 길로 나갔다. 신라통치배들의 이러한 기도는 7세기 40년대이후 더욱 로골화되였다. 640년대 전반기 신라통치배들은 당나라에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신라통치배들은 643년(선덕녀왕 12년) 9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여 두 나라 군대가 《련합》하여 백제, 고구려를 공격할것을 요청하였으며 645년 당나라의 고구려침공때에는 그를 도와 3만명의 군대를 동원하는 죄악을 저질렀다.       640년대 후반기이후 신라는 당나라와 결탁하는 매국적인 행위를 감행하였다. 648년(진덕녀왕 2년) 신라 김춘추[金春秋(603-661년) -후의 태종무렬왕]가 당나라를 방문하여 범죄적결탁을 밀약한것은 그 중요한 계기로 되였다. 고구려침략에서 련속 패배를 당한 당나라는 이 무렵 종래와는 달리 신라와 본격적인 야합을 기도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김춘추가 당나라를 방문하였다.       당나라를 방문한 김춘추는 당나라와 매국적인 흥정판을 벌려놓고 두 나라 군대가 《련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린 다음 대동강이남의 땅은 신라가 차지하고 대동강이북의 광활한 고구려령토는 당나라가 차지한다는 내용의 비밀협약을 맺었다. 그런데 당시 당나라의 야심에는 또 다른것이 있었다. 그것은 신라와 결탁하여 고구려, 백제를 무너뜨린 다음 신라마저 정복하자는것이였다.       당나라는 신라통치배들과 밀약을 하였으나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돌이킬수 없는 참패를 당한 까닭에 대규모적인 침략전쟁에 선뜻 뛰여들수 없었다. 그리하여 밀약후에도 10여년동안이나 기회를 엿보며 침략전쟁준비를 하였다. 한편 신라통치배들은 당나라군을 하루빨리 끌어들일 기도밑에 관료의복제도를 당나라식으로 고치는가 하면 당나라의 년호를 쓰는 등 사대주의적인 조치를 취하였으며 659년에 또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원정군을 보내줄것을 요청하였다. 이처럼 신라통치배들은 백제,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신라마저 먹으려는 당나라와 결탁하고 당나라군대를 끌어들임으로써 우리 민족사에 씻을수 없는 엄중한 죄악적후과를 남기였다.    라당련합군의 침공을 반대한 백제, 고구려인민들의 투쟁 당나라침략자들은 7세기 60년대에 이르러 신라의 청병을 구실로 대규모적인 무력침공에 들어섰다. 당시 당나라침략자들은 먼저 라당련합으로 백제를 무너뜨린 다음 그길로 신라를 정복하고 제일 강대한 고구려를 공격하여 먹어보자는것이였다. 만일 신라를 당장 정복할수 없는 경우 련합을 유지하여 고구려를 먼저 정복하고 다음에 신라를 먹을것을 계획하고있었다. 당나라와 신라는 660년에 먼저 백제를 대규모적인 무력으로 침공하였다. 660년 6월 소정방이 거느린 13만명의 당나라침략군은 1 900여척의 배로 덕물고를 거쳐 금강하구로 기여들었고 김유신이 거느린 5만명의 신라군은 동쪽으로부터 공격을 개시하였다.       당시 백제의 형편은 국력이 심히 약화되고 혼란이 조성되여 불안정한 상태였다. 그것은 의자왕과 봉건통치배들속에서 부화방탕한 생활이 계속되고 간신이 성행하여 충신들이 모해를 당하고있었기때문이였다. 이렇게 안일해이되여있던 백제의 의자왕과 봉건통치배들은 대응책을 시급히 세울 대신 당나라를 먼저 막아야 한다거니, 신라를 먼저 막아야 한다거니 하면서 시간을 보내였으며 이 사이에 라당련합군은 백제의 국내깊이까지 기여들수 있었다.       660년 7월 신라군은 별로 저항을 받음이 없이 천년의 요새 탄현을 넘어 황산벌(충청남도 론산군 련산동쪽 5리지점)로 밀려들었으며 당나라침략군은 금강을 거슬러올랐다. 이리하여 라당련합군은 백제의 수도 사비성으로 물밀듯이 쓸어들었다. 백제의 인민들과 군인들은 때늦게나마 결사적으로 싸웠다. 계백장군이 거느린 5 000명의 백제군사들은 황산벌에서 5만명의 신라군을 맞받아 용감히 싸웠다. 황산벌전투에서 그들은 4차례나 신라군의 공격을 물리치고 적들의 사비성공격을 지연시켰다.    혁명일화: 계백은 애국적인물​     한편 백제군은 금강을 거슬러오는 당나라침략군 13만명이 소정방의 지휘밑에 기여들자 2차례의 완강한 방어전을 벌리여 큰 타격을 주었다. 적들이 사비성을 포위공격하게 되자 백제의 의자왕과 대신들은 제 한목숨만을 건지려고 수도를 버리고 웅천(공주)으로 도망쳤다. 사비성은 7월 13일 적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였으며 의자왕은 싸우는 인민들을 배반하고 7월 18일 적에게 항복하고말았다. 이리하여 백제봉건왕조는 멸망하였다.     백제강점후 라당련합군은 고구려침공에 집중하였다. 당나라침략자들은 660년 말~662년에 고구려에 대한 대규모적인 무력침공을 감행하였다.       고구려인민들은 연개소문장군의 지휘밑에 적들의 침략을 짓부셔버리였다. 특히 고구려군은 662년 1월 당나라의 소정방, 방효태가 거느린 침략군과의 사수(합장강)격전에서 방효태와 그의 아들 13명을 포함한 1개 군단을 모조리 소멸하였다. 적장 소정방은 어찌나 혼쌀이 났던지 산속에 숨었다가 겨우 도망쳐 목숨을 건지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후 고구려내부의 정세는 연개소문이 죽은 후 급변하였다. 연개소문이 666년에 죽자 당나라는 그 기회에 고구려를 내부로부터 와해시키려고 기도하였으며 적들의 간교한 책동에 의하여 연개소문의 세 아들사이에는 권력싸움이 벌어지게 되였다. 연개소문이 죽은 뒤 대막리지자리를 차지하고 군사지휘권을 잡고있던 연남생은 권력싸움에서 밀리우게 되자 넓은 지역과 많은 군대를 끌고 당나라에 투항하는 반역행위를 감행하였으며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도 자기관하 12개성의 많은 주민들을 끌고 신라에 투항하였다. 고구려통치층안에서 일어난 추악한 권력싸움과 정치적혼란, 투항변절은 강력한 중앙집권적통치체제를 뒤흔들어놓았으며 나라의 방위력을 급격히 약화시켰다.   라당련합군은 668년 고구려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50만의 당나라침략군과 20만의 신라군은 륙지와 바다, 북쪽과 남쪽에서 물밀듯이 쓸어들었다.         당나라침략군의 주력은 반역자 연남생을 길잡이로 앞세우고 압록강을 건너 평양으로 공격하였고 남쪽에서는 류인궤가 거느린 당나라침략군과 신라군이 평양성으로 북상하였다. 이리하여 평양성은 668년 8월 수십만대군의 완전포위에 들게 되였다.       이 엄혹한 형편에서도 고구려인민들은 평양성을 지키기 위하여 결사적으로 싸웠으며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치렬한 공방전은 한달이상이나 계속되였다. 그러나 668년 9월 고구려군의 지휘를 맡았던 신성이 변절투항하였고 보장왕을 비롯한 봉건통치배들은 싸우는 인민들을 배반하고 투항하였다. 결국 근 1 000년간 동방대강국으로 위용을 떨치던 고구려는 무너지게 되였다.       고구려말기의 력사는 나라의 통수체제, 방위체제가 마비되고 국내의 단합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아무리 강대한 국력을 가진 나라라 하더라도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망하게 된다는것을 교훈으로 남기였다. 고구려가 무너진것은 힘이 약해서가 아니라 집권층안에서 일어난 추악한 권력싸움과 연개소문의 아들의 변절투항으로 강대한 자기의 힘을 제대로 발휘할수 없었기때문이며 라당련합군의 공격때문이였다.       결국 신라통치자들의 반역적인 외세의존행위로 하여 강대했던 고구려는 무너지고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던 삼국통일도 실현되지 못하였다. 당나라침략자들은 고구려가 무너지자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설인귀를 그 우두머리(안동도호)로 들여앉히였다. 그리고 그 밑에 9개의 도독부를 두어 동방침략의 거점으로 삼았다. 이때부터 고구려인민들은 강점자들을 자기 강토에서 몰아내기 위한 투쟁을 벌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669~676년 당나라강점군을 몰아내기 위한 삼국인민들의 단합된 투쟁 고구려가 무너진 후 당나라침략자들은 신라마저 집어삼킬 흉계를 로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정복전쟁을 기도하였다. 이리하여 온 나라 온 민족이 외세에게 먹히울수 있는 긴박한 정세가 조성되였다. 이것은 신라통치배들의 외세의존정책에 의해 빚어진 산물이였다.       이 엄혹한 시기에 세나라인민들은 힘을 합쳐 당나라침략군을 몰아내기 위한 투쟁에 일떠섰다. 이 투쟁은 본질에 있어서 외적에게 빼앗긴 자기의 령토와 겨레를 되찾기 위한 정의의 싸움이였다. 한편 이 시기 신라통치배들은 당나라가 처음의 《약속》과는 달리 고구려, 백제땅을 독차지하고 신라마저 먹으려는 조건에서 당나라침략군과의 싸움에 나서지 않을수 없었다.       이때에도 신라통치배들은 대동강이남지역까지만 차지하려고 하였다. 당나라강점군을 몰아내기 위한 세나라인민들의 투쟁은 669년경부터 시작되여 온 나라 각지에서 벌어졌다. 북방에서는 고구려항전군이 이르는 곳마다에서 당나라강점군에 대한 공세를 취하였다.       670년 3월 태대형 고연무가 지휘한 1만의 고구려항전군은 설오유가 지휘하는 1만의 신라군과 합세하여 압록강을 건너 옥골로 진출하여 적에게 큰 타격을 안기였으며 672년 8월에는 백수성에서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고 수천명의 목을 잘라버리였다.       고구려인민들의 투쟁은 압록강이남지역에서도 치렬하게 벌어졌다. 668년 말부터 각지에서 당나라강점자들을 반대하는 싸움을 힘있게 벌리고있던 고구려인민들은 평양에 설치되여있던 《안동도호부》를 669년경에 료동지방의 신성(중국 료녕성 무순부근)으로 쫓아버렸다. 한편 고구려의 수림성사람인 대형 검모잠은 항전부대를 조직하여 국모성을 중심으로 맹렬한 활동을 벌리였으며 남으로 진격하면서 당나라의 관리들을 처단하였다. 그리고 조선서해 사야도(소야도)에 피신해있던 보장왕의 서자 안승을 한성(장수산일대)에 데려다놓고 《고구려국》의 재건을 선포하였다.     남방에서는 백제인민들이 670년 7월 신라군과 함께 백제땅에서 당군을 격파하고 63개의 성을 탈환하였으며 672년 초에는 백제의 거의 전지역을 회복하였다. 669년 2월에 당나라침략군의 우두머리의 하나였던 리적이 자기 왕에게 보낸 보고에는 압록강이북지역에서 저들이 장악한 성은 14개뿐이라고 씌여있었다. 이것은 고구려군민들이 처음부터 완강한 투쟁을 벌려 강점자들에게 치명적타격을 주었으며 압록강이북의 많은 성들에 적들이 미치지 못하고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당나라통치배들은 수십만의 대군을 내몰아 675년경부터 새로운 공세를 기도하였다. 이때 세나라인민들은 과감한 투쟁을 벌려 적의 공세를 걸음마다 분쇄, 격파하였다.       신라군은 675년 9월 천성(례성강어구)에 침입한 당나라침략군 1 400명을 소탕하고 적선 40여척, 군마 1 000필을 로획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9월 말에는 매초성(경기도 양주)에 둥지를 틀고있던 20만의 당나라침략군을 공격하여 수만명을 살상포로하고 군마 3만여필과 수많은 군수물자들을 로획하는 전과를 이룩하였으며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지금의 강원도 덕원, 문천일대로 진출하였다.       675년 10월 이후에도 크고작은 18차례의 전투를 진행하여 6 000여명의 적을 소탕하고 수백마리의 군마를 로획하였다. 676년 11월 신라군은 기벌포(금강하구)에서 적장 설인귀가 거느린 당나라 수군과 22차에 걸치는 격전끝에 4 000여명을 소멸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후 적들은 압록강이남으로 더는 기여들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이처럼 세나라인민들은 669~676년간에 100여차의 전투를 벌려 당나라강점자들을 압록강이남지역에서 완전히 몰아내는데 성공하였다. 이것은 이 시기 민족의 위기를 극복해나가는데서 세나라인민들이 이룩한 큰 성과였다. 신라통치배들의 매국배족행위로 말미암아 세나라 전 강토가 당나라침략자들에게 강점당할 위기를 겪게 되였지만 애국적군민들은 희생적인 투쟁으로 적들을 압록강이남지역에서 몰아내고 위기를 극복하였다. 그러나 신라통치배들은 인민들의 투쟁에 편승하여 백제의 전지역과 고구려의 대동강이남지역을 차지한 다음 투쟁대오에서 떨어져나감으로써 또 하나의 큰 죄악을 저질렀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