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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년세계》잡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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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날짜 : 2021/02/04

전체 [ 10 ]

10    《로년세계》2021년 2호 댓글:  조회:800  추천:0  2021-02-04
9    아버지는 강한 사나이였다 댓글:  조회:551  추천:0  2021-02-04
아버지는 강한 사나이였다 장송심 지난해는 중국인민지원군이 보가위국의 기치를 높이 받들고 항미원조 전쟁에 참전한 지 70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 당년의 참전용사들을 찬미하는 주류 매체들의 목소리가 뜨겁게 달아오를수록, 그들에게 쏠리는 세인의 경모의 눈길이 훈훈하게 와닿을수록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가슴에 사무친다. 아버지는 오늘의 이 희열을 맛 보지도 못하고 2006년 8월 14일에 그 쇠돌같이 단단하고 강의하던 생명의 약동을 멈추셨다. 지난해에 어머니마저 보내고 나서 그동안 무심하게 흘려보낸 날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후회가 새삼 갈마들어 늦게나마 아쉬움을 달래보려고 이 글을 적어본다. 1932년 9월 15일, 심심산골인 지금의 룡정시 삼합진 평두산촌 농회 회장의 둘째아들로 태여난 아버지는 16세에 중국인민해방군에 입대하였다.  1948년 1월, 아직 애티도 벗지 못한 16세의 나어린 아버지는 전우들과 어깨 겯고 가렬처절한 동북해방의 전장에서 영용하게 적들과 싸웠다. 전우들과 함께 밤행군하다가 밀물처럼 몰려오는 졸음을 쫓으려고 하늘의 뭇별을 세다가 그래도 졸려서 땅바닥에 궁둥방아를 찧은 적이 몇번이였는지 모른다고 한다. 2년후, 동북이 승리적으로 해방되자 그 기쁨을 만긱할 겨를도 없이 아버지는 상부의 명령을 받들어 집에도 들리지 못한 채 곧장 항미원조 전쟁에 나가게 되였다. 18세에 부패장으로 승급한 아버지는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터에서 적들을 맹렬히 추격하다가 그만 적군의 눈 먼 폭탄에 맞아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시체가 산처럼 쌓인 전선에서 나젊은 아버지가 그렇게 이슬처럼 사라지는 게 하도 아쉬워서 전우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아버지를 구출하여 담가에 실어 후방병원으로 호송하였다. 병원에서 간신히 정신을 차린 아버지는 의사가 오른팔을 잘라야 한다고 제의하는데도 기어이 오른팔을 남겼다. 비록 그 때 남긴 후유증으로 나중에 오른손 엄지를 잘 쓰진 못했어도 그후로 몇십년 동안 수판알을 튕기며 보낸 아버지의 여생에 한몫했다 할 수 있는 무엇보다 소중한 오른팔이였다. 당시 심장 부근에 깊숙이 박힌 수십개의 파편들 그리고 병마로 아버지는 그 뒤로 쭉 육신의 아픔을 동반한 여생을 보내야 했다. 1952년, 부대에서 퇴역한 아버지는 연길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한어사범학원을 졸업하고 정책에 따라 당시 부모가 계시는 흑룡강성에 돌아가 호림현량식국에서 근무하게 되였다. 아버지는 입이 무척 무거운 편이였다. 아버지에게 중매를 서준 한마을의 이모마저 아버지가 영예군인이라는 사실을 감감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와 결혼한 뒤 흉터투성이인 아버지 몸을 보고 깜짝 놀란 어머니가 그 까닭을 물어보고 나서야 아버지가 일찍 영예군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고 하니 얼마나 깊숙이 숨겼는지 짐작할 수 있다. 결혼식이 끝나고 3일 뒤, 아버지는 곧 출근길에 올랐다. 직장이 집과 퍼그나 멀리 떨어진 외지에 있는 데다 뻐스마저 통하지 않다보니 단위 숙소에서 지내면서 한달에 한번 쯤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일년후, 어머니는 집에서 첫아이를 해산하게 되였다. 난산으로 죽은 아이를 낳고 피못에 정신을 잃고 쓰러진 어머니를 보고 그제서야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너의 집사람이 죽어가고 있으니 서둘러 집으로 오너라.”라는 전보문을 띄워보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품에 안고 넋을 놓고 펑펑 우는 바람에 어머니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얼굴이 눈물범벅이였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자식들은 여태껏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 고초를 겪고 나서 아버지는 그냥 이대로 두면 사랑하는 안해를 영영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조직에 전근을 신청했다. 일이 예상 대로 잘 풀리지 않자 결연히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연변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되였다. 몸에 박힌 파편들 때문에 남들처럼 힘든 농사일에 종사할 수 없었던지라 아버지는 얼마 뒤 촌부기원사업을 맡아하게 되였다. 그 무렵, 유치원 교원으로 있던 어머니가 촌의 부녀주임, 접생원 등 여러가지 일을 겸직하였기에 아버지가 집살림을 맡아할 때가 많았다. 아버지는 그렇게 남들은 상상할 수 없는 육신의 고통을 묵묵히 감내하면서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 어머니가 몸에 좋다는 보약을 그렇게 많이 대접했음에도 아버지는 그 뒤로 수술만 여섯번 받았고 급성간염, 페결핵, 페기종, 심장병 등 여러가지 병마에 시달리면서 일생을 보냈다. 내가 초중 3학년을 다닐 때 일로 기억하고 있다. 어머니를 따라 룡정시병원에 입원한 아버지를 보러 간 적 있는데 그 때 어머니는 의사선생님의 두 손을 꼭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애원했다. “선생님, 우리 애 아버지가 환갑까지라도 살 수 있게 어떻게든 잘 부탁드립니다.” 1991년 겨울, 내가 큰딸애를 낳느라고 병원에서 제왕절개수술을 받는 통에 아버지는 나의 산후조리를 맡게 된 어머니를 따라 연길로 오게 되였다. 마침 설 무렵이라 초담배가 떨어져 서시장에 갔던 아버지는 담배장사군들이 보이지 않자 담배쌈지까지 쓰레기통에 던지고는 “오늘부터 담배하고 인연을 끊는다.”고 다짐하셨는데 과연 그후로 담배를 한가치도 태우지 않았다. 나라에서는 전장터에서 피를 흘리며 싸운 아버지를 시종 잊지 않고 있었다. 1985년 7월, 항미원조에 참전한 부패장 이상의 참전군인들에게 리직휴양간부 대우를 주는 정책에 따라 아버지는 53세에 리직휴양로간부의 신분으로 첫 로임을 탈 수 있게 되였다. 아버지가 엮은 생명의 찬가, 비록 출세하여 만천하에 영예를 떨친 건 아니더라도 내 마음속에서 아버지는 진정한 사나이임이 틀림없다.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아야 했던 생의 마지막 나날에도, 페기종으로 쉴새없이 기침을 깇고 가래가 끓어올라 숨을 헐떡이면서도 아버지는 한번도 힘든 내색을 비치지 않고 생에 대한 애착을 놓지 않고 미래를 동경하셨다.  어떻게든 환갑나이까지는 버티게 해달라고 애원했던 어머니의 지극한 정성이 하늘을 울린 것일가? 아버지는 기적적으로 일흔 중반까지 우리 곁을 지켜주셨다. 가족에게 한량없는 사랑과 그리움을 남겨두고 75세에 유명을 달리하신 아버지, 생의 마지막까지 꿋꿋한 모습을 보여주신 아버지는 진정한 사나이였다.   
8    가을 들녘 댓글:  조회:506  추천:0  2021-02-04
가을 들녘 최화숙 써늘해진 가을바람이 립추를 보내고 립동을 맞이할 차비를 서두르고 있는 계절의 변화를 암시해준다. 가을이 깊어갈수록 짙푸른빛으로 높아가는 하늘에 그리움을 실은 엽서라도 한장 띄워보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갑자기 단풍잎 하나가 머리 우에 살폿이 내려앉는가 싶더니 그대로 발치에 미끄러져내린다. 가을은 사계절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만 자꾸 술렁대는 가을바람에 미처 채우지 못한 욕망 같은 게 불쑥불쑥 고개를 쳐들면서 이름 못할 허전함과 아쉬움이 가슴을 파고든다. 이런저런 생각에 잡혀 느릿느릿 걷던 나는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퇴근길에 어김없이 만나군 하는 그 다감한 풍경이 한눈에 안겨왔다. 고향의 사랑방인양 약국 앞 계단에 모여앉아 가슴깊이 담아둔 삶의 애환들을 하나하나 꺼내놓는, 언제든 반가운 동네 어머님들의 모습이다. 시든 떡잎처럼 주름진 얼굴로 먼발치에 있는 나를 어느새 알아보고 한마디씩 반갑게 말씀을 건네온다. 돌이켜보면 어머님들과 인연을 맺고 지낸 지도 강산이 한번 반 변할 만큼 긴 세월이 흘렀다. 조촐하게 미장원을 차리고 개업하던 날, 동네 어머님들이 찾아와 내 손을 잡아주며 그렇게 즐거워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한민족이라서 의사소통이 원활하여 이제는 원하는 머리스타일을 할 수 있게 되였다면서 반색하던 어머님들, 그 때부터 나의 미장원은 동네 어머님들이 오가며 다리쉼을 하고 담소를 나누는 동네 사랑방 노릇을 도맡게 되였다.  ‘이란댁’, ‘탕원댁’, ‘목릉댁’, ‘7층댁’, ‘가방끈’, ‘노랑머리’, ‘담배쟁이댁’ 그외에도 많은 호칭들을 익혀가면서 나는 저도 모르게 어릴 적 고향마을에서 할머니들이 ‘전라도댁’, ‘평안도댁’, ‘경상도댁’, ‘함경도댁’ 하며 서로를 부르던 호칭을 떠올리게 되였다. 거기에 개업 날 어머님들이 나에게 붙여준 ‘파마쟁이’란 호칭까지 모두 그렇게 정다울 수가 없었다. 그 때만 해도 어머님들은 참으로 곱고 젊어보였다. 봄이면 아들딸이 사보낸 새옷을 화사하게 차려입고 미장원에 들려 머리를 곱게 다듬고 삼삼오오 모여 꽃구경도 가고 문구, 탁구 치러 가는가 하면 부채춤을 추러 다니기도 하고 마작이나 화투놀이도 했다. 몇년 뒤, 스마트폰이 보급되자 멀리에 있는 자식들의 얼굴을 보려고 뻐스를 타고 조선족문화관에 찾아가 무료로 가르쳐주는 스마트폰사용법을 익히던 어머님들이였다.  8년간의 한국생활을 접고 할빈이란 낯선 도시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갓마흔의 나이에 세살배기 작은딸을 돌보면서 한창 사춘기앓이를 하는 큰딸의 공부뒤바라지까지 하면서 일한다는 건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치는 일이였다. 그 때마다 나한테 위로가 되여준 건 어머님들의 살뜰한 관심과 보살핌이였다. 멀리 떠나간 자식들을 그리는 마음을 내게 쏟아붓는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봄이면 손수 들판에 나가 캐여 말쑥하게 다듬은 산나물을, 추석이면 송편을, 김장철이면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김장김치를, 동지날이면 팥죽에 동치미까지 가져다주는 어머님들의 사랑을 수년간 듬뿍 받았다. 집에 인터넷이 끊겨도, 수도꼭지가 고장나거나 열쇠를 잃어버려도, 지어 물세, 전기료 미납통지서가 날아오거나 자식들이 부쳐온 돈을 찾으러 은행에 갈 때도 먼저 나의 미장원에 들려 물어봐야 시름 놓던 어머님들, 파마를 곱게 하고 거울 앞에서 소녀처럼 다소곳이 미소를 머금던 어머님들, 어쩌다 끼니때에 맞춰 국수라도 끓여 대접하면 그렇게 행복해하던 어머님들, 가끔 명절날에 식당에 모시고 음식대접을 하면 맥주 한잔 기울이며 아리랑가락을 뽑던 귀여운 어머님들이였다. 할빈시조선족제1중학교 부근에 위치한 우리 동네는 아이들을 공부시키겠다고 방방곡곡에서 모여온 조선족들이 집거한 곳이다. 대개 젊은이들은 내지로, 외국으로 돈벌이를 떠나고 로인들이 남아 어린 손군을 키우고 있는 형국이다. 민들레 홑씨처럼 어디든 뿌리만 내리면 하나가 되여 서로 나누고 베풀기를 좋아하는 우리 민족, 미장원을 찾는 어머님들을 만나면서 감동으로 아침을 열고 감회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나날을 보내게 되였다. 그녀들과의 소통은 내게 더없이 소중한 인생공부가 되였다. 몇해전부터 파마약에 심한 알레르기반응을 보이게 되자 미장일을 계속한다는 건 무리였다. 부득이 미장원을 접고 한국에서 갖고 온 헤어로션이며 염색약들을 어머님들에게 다 나누어주었다. 이사하던 날, 이른새벽에 이사짐회사의 차를 불러다 짐을 옮기고 있는데 어느새 기미를 챘는지 어머님들이 잇달아 미장원 앞에 모여들었다. 저마다 두루마리종이며 세척제, 가루비누, 식용유에 과일까지 두 손 가득히 들고 온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감격에 목이 꺽 메였다.  자식들이 보내온 돈을 한푼이라도 아끼려고 채소마저 이삭을 주어 보태는 어머님들, 허리며 다리가 아프면 쑥뜸을 뜨고 파스를 붙이면서도 병원에 가기를 망설이는 어머님들이 비싸고 질 좋은 걸로만 골라 챙겨온 선물을 손에 쥐여주면서 애를 키우면서 열심히 사는 모습이 이쁘다고 등을 다독여주던 그 따뜻한 손길을 두고두고 잊을 수 없다.  그들 중 ‘이란댁’은 나의 미장원이 개업하던 날 찾아준 첫 손님이였다. 파란 웃옷에 연분홍 스카프를 두르고 갈색 모자까지 쓰고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들어오던 멋쟁이였다. 한번은 우연하게 길에서 만나 1원짜리 무우청을 사드린 적이 있다. 한족장사군이 우리를 번갈아 보더니 딸인가고 묻자 어머님은 서툰 중국말로 “맞소. 내 양딸이라오.” 하며 두 엄지를 척 내세웠다. 그후로 사이가 부쩍 가까워지게 되면서 어머님은 종종 미장원에 들려 파마기구에 앉은 먼지를 닦아주고 수건을 세탁기에 돌려주면서 나의 일손을 거들어주었다. 통원차에서 내리는 나의 작은딸을 대신 마중해주고 때로 저녁밥까지 안쳐놓은 ‘이란댁’은 모성애에 무척 목 마른 나에게 친정엄마처럼 살갑고 고마운 분이였다. 미장원을 그만두고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동안 나는 가끔씩 가슴이 답답하고 울적하군 했다. 그 때마다 동네에서 변함없이 나를 반겨주는 어머님들을 보면서 축 처진 몸과 마음을 추스르군 했다.  그렇게 내게 힘을 실어주던 어머님들이 가을이 깊어가자 다들 객지에 있는 자식들이 무척 그리운 모양이다. 겨울방학이면 한국에 있는 자식을 보러 간다며 빨간 고추를 실로 꿰여 창밖에 주렁주렁 내다는가 하면 고추떡을 찐다, 무우말랭이를 만든다, 각종 절임을 만든다며 분주히 돌아친다. 우리는 모두 신종코로나를 전승한 승리자들이라고 즐거워하던 어머님들이 요즘에는 한국에서 신종코로나가 꽤 말썽을 피운다며 그 곳에 있는 자식들 걱정에 마음을 졸인다. 참말로 이놈의 신종코로나가 지구촌 곳곳에서 여간만 큰 말썽을 부리는 게 아니다. 애들마냥 “우리 아들이 한국에 새집을 장만했다오.”, “우리 딸이 식당을 차렸다오.”, “우리 손주가 글쎄 아들을 보았다오.”, “우리 손녀가 중국말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였다오.”라고 하면서 자녀들의 자랑에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고 어깨를 들썽거리던 어머님들의 수심에 잠긴 얼굴은 오늘따라 자글자글 쏟아지는 가을해살에 주름살이 더 깊어보인다. 나는 일시 무슨 말로 위로하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였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큰딸이 결혼하고 외손녀가 태여나 할머니가 되자 나는 방학하기 바쁘게 작은딸과 함께 외손녀를 보러 한국으로 가군 했다. 이번 겨울방학에는 갈 수 있을지 희망이 묘연하니 조바심만 난다. 화상채팅으로 말을 번지기 시작한 외손녀가 “채인인 할머니 최고”라고 종알거리면서 죄꼬만 엄지를 척 내밀 때면 단박에 안아보고 싶은 마음에 눈물이 찔끔 나기까지 한다.  꽉 막혔던 배길과 하늘길이 다시 빠금히 열리고 있긴 해도 관련 수속이 까다롭기 이를 데 없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항공권가격에다 다른 비용까지 하면 한번 걸음을 걷는다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게다가 코로나바이러스에 로출될 가능성까지 커지니 더구나 발목이 잡힌다.  살같이 흘러간 세월 속에 온갖 비바람 속에서도 녀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진리를 몸소 보여준 어머님들, 그 꽃밭에 듬성듬성 생겨난 빈자리들이 나의 마음을 저민다. 홀로 손녀를 돌보느라 너무 힘들어 성격마저 과격해진 ‘욕쟁이’어머님, 한국으로 떠난 남편이 행방이 묘연해지자 어린 네 자식을 키우면서 삶에 부대끼다가 귀가 절벽이 되여버린 ‘귀머거리댁’어머님, 마흔을 넘긴 아들이 허구한 날 말썽만 피우니 그 뒤수습만 하다 돌아간 ‘통화댁’어머님, 그 밖에도 몇몇 어머님들은 이제 한줌의 꽃구름이 되여 어디론가 훨훨 날아가버렸다.   내 평생에 잘한 일을 꼽으라면 말기암환자였던 ‘설안댁’어머님에게 마지막으로 파마를 해드린 거라 할 수 있다. 그 날, 워낙에 겁약한 나는 밤잠을 설칠 만큼 큰 두려움을 이겨내고 아침 일찍 푹 고은 토종닭과 함께 파마기구를 챙겨들고 ‘설안댁’을 찾아갔다. 그녀의 동생 분이 출근하고 나니 방안에는 나와 환자 둘만 남았다. “어떻게 해드릴가요?” “최고로 곱게 해주게나. 봄이라 이제 꽃들도 필 텐데 머리를 이쁘게 하고 꽃구경 가고 싶네. 여직 뭐하고 살았는지 꽃구경 한번 제대로 못했지 뭐야…” 울음조차 힘없이 토해내던 어머님, 자꾸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어머님을 방석으로 받쳐준 뒤 파마를 곱게 말아놓고 나서 들고 온 닭곰을 꺼내여 살을 조금 찢어 입에 넣어드렸다. 힘겹게 입을 움씰거리며 한입 넘기는 둥 하던 어머님은 “자넨 이제 복 받을 게요. 마음이 착하니 딸들도 앞으로 다 잘될 거요.”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유난히 깔끔한 어머님을 위해 머리를 예쁘게 다듬어준 뒤 눈섭까지 정리해주었다. 문을 나서는 나에게 애에게 간식이라도 사주라면서 백원짜리 한장을 억지로 밀어주고는 내가 뿌리칠가 봐 문을 닫아버리던 어머님, 지금은 저 하늘의 한송이 꽃구름이 되였다…  손군이 대학시험을 칠 때도 신종코로나로 막힌 길이 트이지 않는다면 그래서 자식들이 오지 못하게 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에 매일 밤잠을 설친다는 어머님들, 신종코로나 때문에 한하늘 아래에서 살면서도 자유로이 오갈 수 없게 된 요즘이 정말 안타깝기만 하다. 이런 날들이 길어지면 년세가 많고 기운이 쇠약해진 어머님들은 얼마나 두렵고 불안해하실가. 지금 가로수 가지 끝에서 조락하는 잎새처럼 허전한 웃음을 짓고 있는 어머님들이 더없이 애처로워보인다.   요즘 들어 부모님을 모시고 자식을 키우면서 식구가 오손도손 살아간다는 게 허다한 젊은이들에게는 사치스러운 꿈으로 되였다. 그러니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려는 그들을 무작정 나무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혹여 로모와의 리별이 영원한 아픔으로 남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자기 삶을 영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그들의 처지리라. 그리고 뼈속까지 사무치는 그리움과 짙은 고독을 감내하면서도 자식들의 앞날이 훤하기만을 기원하는 건 이 세상 모든 어머님들의 공통된 마음일 것이다. 멀리서 ‘달래’어머님이 ‘콩나물댁’어머님과 ‘새각시댁’어머님의 부축을 받으며 자꾸 한쪽으로 기우려는 몸을 애써 지탱하며 꽃을 찾아드는 나비인양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저 훈훈한 풍경, 멀리 떨어져 지내는 자식들의 걱정을 덜어주려고 서로 다독이고 부축하며 살아가는 어머님들이야말로 가을 들녘에 피여나 은은한 향을 풍기는 국화꽃이 아닐가 싶다. 어머님들이 그리운 자식들과 재회할 그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부디 그 날까지 견뎌내기를 진심으로 바랄 따름이다.  
7    학부모회의 댓글:  조회:626  추천:0  2021-02-04
학부모회의  김명화 설을 쇠고 개학하기로 한 어린 손주가 다니는 조기교육반이 세계를 휩쓴 신종코로나 때문에 몇달 뒤로 미뤄지게 되였다. 개학을 앞두고 학부모회를 한다는 문자가 날아왔다. 아들며느리가 모두 직장에 출근하다보니 어린 손주를 조기교육반에 보내고 학부모회의에 참석하는 일은 순리 대로 예순을 지척에 두고 있는 나의 몫이 되였다. 아무튼 갓 세돌이 지난 손주의 학부모회의에 모처럼 참석하게 된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기분이 붕 뜬 아침이다. 애고사리 같은 손주의 보동보동한 손을 잡고 조기교육반 문 앞에 이르니 생기가 넘치는 젊은 선생님들이 웃음꽃이 활짝 핀 얼굴로 일찌감치 대문 앞까지 나와서 반갑게 기다리고 있었다. 저마끔 아이 손을 잡고 해맑게 웃으면서 회의실에 들어가는 숱한 젊은 엄마들 가운데 훤칠하고 멋진 남자가 량손에 하나씩 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이 유독 눈길을 끌었다. 알고보니 오누이쌍둥이를 둔 아빠란다. 오누이쌍둥이 아빠, 그러고 보니 나의 오빠도 오누이쌍둥이를 둔 아빠였는데… 그 남성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대학입학시험을 앞둔 고중 3학년 학부모회의에 오빠가 부모를 대신해서 참가한 일이 떠올랐다. 손꼽아 헤여보니 어언 40년전 일이다. 그 날은 마침 토요일이였는데 오전 수업을 마치고 나오니 아버지처럼 듬직한 오빠가 학교 식당 문 앞에서 막내동생인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시절, 우리 시골에는 소학교만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친구들이 적지 않았다. 남존녀비사상이 심했던 외할아버지가 외삼촌 둘만 야학공부를 시키는 바람에 어머니는 남동생들한테서 몰래 글을 배워서야 겨우 조선글을 뗄 수 있었다. 어려운 나날에 그렇게라도 글을 익혔기에 참군한 오빠나 외지에서 공부하는 이 막내딸이 보낸 편지도 술술 읽어내려갈 수 있었다. 작은외삼촌이 길녘에서 주어온 탄알을 가지고 놀다가 터져 비명에 목숨을 잃는 바람에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외할머니도 얼마 뒤 작은외삼촌을 따라 가버렸다. 해방후, 외할아버지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17살에 난 엄마를 시집 아니, 돈을 받고 시집이라고 보내놓고 외삼촌만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갔다며 어머니는 두고두고 외할아버지를 원망하셨다. 그렇게 중국에 남은 어머니는 생전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날을 이제나저제나 학수고대했다. 이제 한국에 가서 친정식구들을 만나게 되면 먼저 글을 가르쳐준 남동생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고 하셨다. 어머니의 고향집 마당에는 홍시나무 한그루가 있는데 홍시를 유난히 반기는 딸을 위해 해마다 설날이 되면 언 감은 꼭 사다가 찬물에 담가주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특별히 심은 거라고 하면서 아직도 있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평생 학교문에 들어서지 못한 게 여한으로 남아서 그랬던지 어머니는 일찍 아버지를 여읜 우리 4남매를 남들 부럽지 않게 모두 고중공부까지 시켰다. 우리들도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릴세라 한결같이 공부를 잘했다. 어린 자식들을 배불리 먹이고 공부뒤바라지를 하느라 밤낮없이 궂은일, 마른일 가리지 않고 하느라고 어머니는 한번도 우리네 학부모회의에 참가한 적이 없었다. 학부모회의를 앞둔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나를 사무실에 불러놓고 이렇게 단단히 일러주셨다. “김명화, 이번 학부모회의는 아주 중요하니 부모님께서 꼭 참가하셔야 한다. 알았지?” 나는 마지못해 머리를 끄덕였지만 동네에 있는 학교에 다닐 때조차 학부모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어머니가 20여리의 먼 시골길을 걸어서 학부모회의에 참석할 리 만무하다는 걸 마음속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학부모회의가 있던 날, 오전수업을 마치고 점심밥을 먹으려고 학교 식당에 가고 있는데 같이 가던 친구가 느닷없이 “명화, 너의 오빠야!”라고 웨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닌 게 아니라 오빠가 학교 식당 앞에서 우리를 보고 반갑게 웃고 있었다. 오빠를 보는 그 순간 나의 두 눈은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오빠가 “명화! 막내야!”라고 부르면서 내 쪽으로 걸어왔다. “오빠! 어떻게?” 나는 금시라도 두 눈에서 눈물이 굴러떨어질 것 같아 머리를 옆으로 살짝 돌렸다. “막내야, 학부모회의가 있다는 걸 왜 미리 알리지 않았어? 너의 담임선생님께서 널 칭찬하시더라. 문장을 잘 쓰고 랑송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린다구. 게다가 춤도 잘 추니 앞으로 사범학교를 나와 교원이 되면 좋겠다고 하시더라. 오빠도 너의 선생님과 같은 생각이란다.” 오빠는 이렇게 말하면서 호주머니에서 비타민C 한병과 돈 10원을 꺼내 나의 손에 쥐여주었다. “오빠, 올케한테 드려요. 난 괜찮아요.” 그 무렵, 올케는 오누이쌍둥이를 낳고 영양실조로 황달간염에 걸려 링게르주사를 맞고 있었고 어린 조카들은 우유를 사먹고 있는 힘든 형편이였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나로서는 오빠의 마음을 선뜻이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오빠는 호주머니에서 비타민C 한병을 꺼내 보여주면서 한병 더 있으니 걱정 말고 얼른 받으라고 밀어주었다. 걱정 반, 기대 반으로 반죽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토닥토닥 등을 다독여주는 오빠의 따뜻한 사랑 앞에서 나는 꿀 먹은 벙어리마냥 한마디 말도 못했다… 그 날, 오빠가 학부모회의에 기적처럼 나타나 나를 응원해준 덕분에 그 뒤로 매일매일 온몸에 힘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여느때보다 공부도 더 열심히 했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비타민C를 한알씩 챙겨먹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밤자습이 끝나면 과자로 허기를 달래면서 밤을 새며 공부를 한 덕분에 대학에 이어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는 꿈까지 이루었다. 세월이 덧없이 흘러 우리가 사는 이 고장에도 한국으로 출국하는 바람이 불어 너도나도 돈을 번다고 고향을 등지고 떠났다. 어느 날인가 갑자기 오빠한테서 전화가 왔다. “막내야! 한국어시험에만 합격되면 한국에 갈 수 있는 정책이 나왔다는구나. 네가 대신 알아보고 좀 등록해줄래? 더 늙기 전에 돈을 벌어서 아들을 장가 보내고 로후대책도 마련해야겠구나. 막내야, 부탁한다.” 나는 오빠의 부탁 대로 어렵사리 인터넷으로 한국어시험 등록을 마쳤다. 그 때까지만 해도 한국어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는데 오빠는 우리 한국어학과 선생님들마저 깜짝 놀랄 우수한 성적으로 시험에 합격되였다. 한국으로 떠나기 전날 밤에 오빠는 전화를 걸어와 회포에 잠긴 목소리로 속심말을 털어놓았다. “막내야, 고맙다! 네 덕분에 엄마가 꿈속에서도 그리워하던 한국에 가게 되였다. 이제 가서 자리를 잡게 되면 엄마의 고향 경상북도에 가서 엄마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외삼촌을 찾아뵐 거야. 생전이면 좋겠는데… 혹시 돌아가셨다면 산소에 찾아가 제사상을 올려 엄마의 마음을 전할 거야… 이제 돈을 많이 벌어올 테니 오빠 걱정 말아…” 그런데 막로동이 너무 고달팠던 걸가? 한국땅을 밟은 지 고작 26일 만에 오빠는 심장병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에 오르고야 말았다. 사랑하는 오누이쌍둥이 그리고 그동안 오빠를 아버지처럼 믿고 살아온 동생들과 작별인사 한마디도 없이… 이국땅의 반지하 세방에서 홀로 떠나야 했던 그 마지막 길이 얼마나 외롭고 쓸쓸하고 힘들고 억울했을가. 9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가끔 터미널이나 기차역, 공항 같은 데서 오빠와 닮은 모습의 사람을 보면 저도 모르게 “오빠!” 하고 부르면서 뒤쫓아가게 된다. 그리고 오빠의 친구 분들을 만나도 오빠 생각이 북받쳐올라 뜨거운 눈물을 훔친다… 그리운 고향에도 오빠가 돌아가신 후로 발길을 뚝 끊었다. 어머니와 오빠가 계시지 않는 고향은 이제는 추억으로만, 마음속으로만 그리워하는 곳으로 남게 되였다. 나의 학부모회의에 참석했던 오빠의 모습을 새삼 되새겨보게 한 손주의 학부모회의, 모든 게 방불히 어제 일인듯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고 어린아이처럼 사랑하는 오빠를 애 타게 부르면서 흐느끼고 싶은 심정이다. 전화할 때마다 언제나 “오, 우리 막내, 명화구나.”라며 아버지처럼 다정하게 불러주던 오빠의 그 목소리가 오늘따라 사무치게 그립다.
6    아버지 댓글:  조회:492  추천:0  2021-02-04
아버지 리미옥 어제밤 꿈에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도 어언 3년이 된다. 그동안 한번도 꿈에 나타난 적 없었는데 느닷없이 어제밤 꿈에 나타난 것이다. 나는 소스라치듯 잠에서 깨여나 마구 요동치는 가슴을 붙안고 한동안 꼼짝할 수도 없었다. 지난 상처가 다 아물었는가 싶었는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물 한 컵을 마신 다음 쏘파에 걸터앉았다. 가슴 속에서 일어난 방망이질이 이슥토록 가라앉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여직 마음속에 남아있는 걸가? 아니면 자괴감 같은 거라도 남아있는 걸가? 아버지는 그 곳에서 잘 계시는 걸가? 아직도 나에게 걱정의 대상으로 남아있는 아버지. 두번다시 뒤돌아보고 싶지 않는 그 지긋지긋하고 힘들었던 시간들… 40대 중반의 한창나이에 일손을 놓다싶이 한 아버지는 모아놓은 재산이나 로후대책 같은 건 전무한 상태였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학꿈을 접고 어린 나이에 한국행을 택할 때만 해도 나는 아버지한테 원망 같은 건 품어본 적 없었다. 단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나를 버리지 않고 키워준 사랑에 감사해하는 마음이 컸던 것 같다. 한국에 가서 몇년간 힘들게 벌어 아껴 모은 돈으로 아버지에게 아빠트 한채를 장만해드렸다. 그런데 그 아빠트가 나중에 아버지가 종종 나를 들먹이는 조건이 될 줄이야. 아버지는 무엇이든 필요한 게 있으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나에게 집을 팔겠다고 으름장을 놓군 했다.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치는 그 협박에 시달리다 못해 당신의 집이니 팔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고 해서야 잠시나마 그 시달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20대 후반에 들어서자 하나 둘 결혼하는 친한 친구들을 보면서 나도 하루빨리 아버지한테서 해탈되고 싶었다. 얼마 뒤 남편을 만나면서 나의 인생에도 차츰 변화가 일어나게 되였다.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을 받고 자란 남편은 나랑 많이 달랐다. 그런 남편의 사랑을 받으면서 나도 점점 밝게 변해갔다. 진정한 사랑이 어떤 건지, 가족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화목한 시댁 식구들을 보면서 점차 배워갔다. 그 무렵 아버지와 나의 관계는 날이 갈수록 팽팽해졌다. 아버지는 내가 결혼하게 되면 다달이 당신에게 보내던 생활비가 끊길가 봐 내심 걱정하는 눈치였다. 결혼을 앞두고 시댁에서 요즘 신부들의 로망이라는 다이아몬드, 황금, 진주 3 세트를 결혼례물로 나에게 선물했다. 너무나도 기쁘고 감격한 마음에 그걸 아버지한테 보여드렸더니 대뜸 “이걸 팔면 돈이 되냐?”고 묻는 것이였다. 별로 기대를 한 건 아니였지만 그런 아버지에게 서운한 나머지 화가 나고 허망한 기분마저 들었다. 상견례를 치를 때 시댁에서는 결혼례물로 한국돈 천만원을 우리 편으로 보내왔다. 엄마는 그 돈으로 새신랑한테 선물할 목걸이며 반지, 고급 양복 등을 갖추었다. 결혼식 전날 저녁, 나는 아버지에게 술상을 갖추어올리면서 앞으로 생활비는 계속 드릴 테지만 빈주먹으로 신접살림을 꾸며야 하니 도움을 드리는 데 한계가 있을 거라고 정중하게 말씀드렸다. 그러자 아버지는 시댁에서 보내온 그 천만원은 당신이 챙겨야겠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이였다. 그 돈은 신랑에게 줄 결혼례물을 장만하는 데 썼노라고 이실직고하자 당장 부모자식의 인연을 끊고 래일의 결혼식도 망쳐놓을 거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고모들이 한밤중에 한달음에 달려와서 설득을 해서야 간신히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다. 이튿날, 일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예쁜 모습을 보여야 할 날에 나는 눈이 퉁퉁 부은 채 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장에 들어섰다. 결혼식을 마치자마자 아버지는 이번에는 축의금을 모조리 내놓으라며 한바탕 야단을 치더니 아무 것도 얻지 못하자 그 자리로 연길로 돌아간다며 려행가방을 챙겨들었다. 낳아서 길러준 은혜도 모르는 후레자식이라고 나에게 갖은 욕설을 퍼부으면서 말이다. 수년간 쏟은 온정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마음이 더없이 허탈해났다. 그런데 고모들마저 당신들이 내놓은 축의금은 아버지한테 몽땅 주라면서 나를 달달 볶아댔다. 내가 시집 가고 나면 아버지가 살길이 막막해진다는 리유에서였다. 결국 아버지에게 한국돈 500만원을 넘기고 나서야 간신히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다. 결혼 첫날밤, 나는 펑펑 목놓아 울었다. 자식을 낳고 키워준 은혜를 갚으라고 핍박하는 부모가 어디 있을가. 자식이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되면 축복해주는 게 부모 마음일 텐데 하는 설음이 밀려들면서 억장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 남편은 말없이 나를 품에 껴안아주었다. 험난한 시련은 내가 임신한 뒤에도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의 알콜중독증세가 갈수록 심해져 새벽녘에도 우리 신혼집 문을 두드려대니 나는 무거운 몸으로 시도 때도 없이 술상을 갖춰드리느라 들볶여야 하였다. 알콜중독이 점점 심해지자 아버지는 환각증상이 나타나면서 눈앞에 헛것이 나타나고 불안증세도 보이고 있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병원치료를 한사코 거부했다. 임신 5개월차의 임신부인 나는 급기야 체중이 80근으로 떨어졌고 극심한 스트레스로 태아의 머리에 물이 차는 사태까지 맞게 되였다. 귀한 첫 손주를 보게 될 시댁에는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나 때문에 무고한 남편이 함께 시달림을 겪어야 하는 것만으로도 시댁을 대할 면목이 없었다. 시댁에서는 남편이 넌지시 귀띔을 해주었기에 우리의 상황을 대강 알고 계셨다. 시부모님은 송구해서 몸 둘 바를 몰라하는 나를 오히려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일단 안정을 취하면서 2주 동안 태아의 상태를 지켜봐야 한다는 의사의 분부에 따라 나는 남편과 상의하고 한국에 계시는 엄마 곁에 잠시 가있기로 했다. 그동안 아가를 위해서라도 출산전까지 아버지를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다행히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태아의 상태가 좋아지자 시름 놓고 남편이 있는 연길로 돌아왔다. 그렇게 조용히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면서 곧 있게 될 아가와의 만남을 학수고대하던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의 사망소식을 접하게 될 줄이야. 그 날은 마침 나의 생일날이였다. 아기가 태여나기 전에 차를 장만하기로 하고 우리 부부는 일찍 나가서 수속을 마쳤다. 점심은 내가 좋아하는 신선로를 먹기로 하고 나갈 차비를 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급촉하게 울렸다. 전화너머로 사촌올케의 목소리가 울리였다. “둘째삼촌(아버지)이 돌아가셨소.” 환갑나이도 안된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 것이다. 환각증세까지 보이며 나를 괴롭힐 때 어렴풋하게 불안감이 찾아왔지만 배속의 아가를 지키려고 당분간 련락을 끊었는데 결국 아버지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한 가슴 아린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사후 고인의 상태로 보아 돌아가신 지 하루이틀이 아닌 것 같다는 얘기를 전해들었을 때 나는 그만 눈물을 왈칵 쏟고 말았다. 흔히들 말하는 고독사였다. 아버지의 형제들로부터의 비난이 비발쳤다. 임신 9개월이 된 만삭의 몸으로 나는 쏟아지는 그 비난을 고스란히 감수해야 했다. 출산 예정일을 4주 앞두고 태아의 성장이 멈추면서 바로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의사의 분부 대로 아버지 장례식을 마치자마자 수술실에 실려들어갔다. 아이를 낳고 입원해있는 동안에도 친가에서 따뜻한 안부의 전화 한통 없었다. 아버지와 련계를 끊고 지내는 동안은 나에게도 퍼그나 쓸쓸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였는데… 이 아프고 답답한 마음을 어디에 하소연하랴…  지금도 아버지를 떠올리면 훈훈한 추억 한자락도 잡히는 게 없다. 나의 성장과정에 기억에 남을 만한 도움이나 조언 같은 걸 한번도 건넨 적 없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떠올리면 마음이 한산하고 숨이 막힌다. 마을에서 유일하게 고중에 입학하여 또래친구 부모님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을 때도 축하하기는커녕 집안형편을 살피지 않고 공부하겠다고 설치는 철 없는 아이 취급을 받았던 나였다. 그래도 아버지에 대한 련민의 마음은 한구석에 남아있다. 평생 쪼들리면서 살다가 술에 절어서 지내다가 아무 것도 이뤄놓은 것 없이, 가족에게 따뜻한 추억 한자락도 남겨주지 못한 채 스러져간 아버지의 인생이 너무나 안타깝기만 하다. 먼 후날, 나의 얘기에 귀를 기울여줄 만큼 훌쩍 자란 딸아이에게 늘 밝은 엄마에게도 어두운 턴넬 같은 힘든 길을 걸어온 시간들이 있었다고 들려준다면 딸애는 당시 이 엄마의 선택을 두고 어떻게 생각할가.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할 뿐이다.
5    춤으로 배우는 인생 댓글:  조회:497  추천:0  2021-02-04
춤으로 배우는 인생 김경희 정년퇴직하고 나서 매일 집에서 빈둥거리려니 하루하루가 너무 지루하고 무료하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심심풀이 삼아 집부근에 있는 춤교실에 다녀보고 싶었다. 등교한 첫날, 교실문을 열고 들어서니 알록달록한 무용복을 차려입은 녀인들이 눈부시게 안겨왔다. 나는 쑥스러워 맨 뒤줄 구석켠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걷기를 기초로 하는 춤동작은 얼핏 보기엔 간단한 것 같아도 일일이 기억하려니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게다가 일부러 뒤줄에 서다 나니 앞에 서있는 선생님의 동작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나는 앞줄의 학원 한명을 정해놓고 그녀의 춤동작을 따라하기로 했다. 대렬이 바뀌면서 앞쪽으로 나갈 때마다 수십쌍의 눈이 혹시 나만 여겨보는 게 아닌가 싶은 착각에 은근히 신경이 쓰이였다. 바싹 긴장하니 손발이 맞지 않고 몸까지 휘청거리였다. 거울에 비낀 나의 모습은 그야말로 꼴불견이였다. 선생님이 다가와 어깨의 힘을 빼라고 일러주는데도 몸이 도무지 따라주지 않아 못내 당황스러웠다. 선생님을 따라 하늘하늘 률동을 타는 학원들이 그저 부러울 따름이였다. 수업이 끝나고 나서 옷을 갈아입으면서 몸이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는다고 슬쩍 고민을 털어놓았더니 누구든 그런 과정을 거치기 마련이니 조급해하지 말라며 옆에 있던 학원들이 조언을 해주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조금은 위로가 되는듯 싶었다. 집에 돌아온 나는 오늘 춤교실에서 배웠던 춤동작을 한번 복습해보려고 거울에 마주섰다. 그런데 동작이 잘 떠오르지 않는 건 둘째 치고 억지로 떠오른 동작마저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모든 일엔 다 순서가 있다는데 어찌 단술에 배 부르랴. 하루하루 나아지겠지.’ 스스로 위안하며 몸을 천천히 움직여보았지만 여전히 그 상이 장상이였다. 이 때 친구 문화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어때? 춤은 배울 만하던?” “어이구, 말도 말아, 힘들어 죽겠어. 나만 못난 새끼오리 같은 게 얼마나 쑥스러웠다구.” “괜찮아. 나도 처음에는 그랬어. 그래도 일년치를 끊었는데 어쩌겠어. 울며 겨자 먹기로 다녔더니 반년 뒤부터 자세가 약간씩 잡히는 게 알리더라구. 그러니까 너도 꼭 잘해낼 수 있을 거야.” 밝고 씩씩하게 응원해주는 친구의 기운을 받으니 나의 목소리에도 조금 기운이 실렸다. “그래. 이왕 발을 들여놓았으니 열심히 해야지.” “남들과 비기느라 하지 말고 열심히 배워. 넌 워낙 춤을 좋아하니 잘할 수 있을 거야. 나한테 동영상이 몇개 있는데 보내줄 테니 눈으로라도 먼저 익혀두렴.” 잠시후, 문화가 조선춤 기본동작을 다룬 동영상을 보내왔다. 열어보니 춤사위가 우아하고 동작이 그다지 어려워보이지 않았다. 동영상을 거듭해서 보고 나서 큰 거울에 마주섰다. 그런데 첫 동작부터 제동이 걸릴 줄이야. 다시 동영상을 반복해서 연구하다가 될듯 싶어 해보았는데 이번에도 순리롭지 않았다. 슬슬 조바심이 일기 시작했다. 하긴 내 나이 쉰여섯이니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은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였다. 거기다 몸까지 뻣뻣하니 동작이 제대로 나올 수가 없었다. 마음을 다잡고 한나절이 되도록 역사질을 하니 그래도 서툴게나마 흉내를 낼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였다. 노루꼬리 만한 진보더라도 퍼그나 위안이 되였다. 팔을 많이 움직여서였을가, 그러는 사이에 지긋지긋하던 경추의 통증마저 가뭇없이 사라지니 자기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면서 열심히 하다 보면 잘해낼 수 있을 거라는 신심이 용솟음쳤다. 이튿날, 문화가 여벌로 둔 무용복이랑 줄 테니 만나자고 련락을 해왔다. 맛집에 도착하자 바람으로 문화는 가방에서 널직한 까만 바지와 자주색저고리, 하얀 무용신을 꺼내놓았는데 얼핏 보기에도 나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나한테 좀 널직하니 너에게는 딱 맞을 거야. 무용복을 차려입으면 기분이 좋아져 춤을 더 잘 배울 수 있을지도 몰라.” “고마워. 잘 입을게.” 이튿날, 무용복을 입고 무용신까지 신으니 과연 기분부터 확 달라졌다. 그 날 더욱 신바람이 나서 춤동작을 따라했고 집에 돌아와서도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기억을 더듬어가며 련습하였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남편이 맥주 한잔을 기울이고 나면 동작이 예뻐질 수도 있다며 롱담을 던지는 바람에 우리 부부는 오랜만에 배를 그러안고 웃었다. 나는 수업이 있는 날이면 하루도 거를세라 춤교실에 나갔다. 전날에 배운 동작을 반복해서 익히고 나서 새로운 동작을 배우는데 그 즈음이면 정력과 체력이 모두 슬슬 딸리였다. 몸이 심하게 힘든 날이면 집에 돌아와서도 춤동작이 잘 떠오르지 않았는데 그 때마다 저도 모르게 짜증이 났다. 그럴 때면 뭐든 배우려면 게으름을 부리지 말고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일찍 등교하여 다른 학원들에게 가르침을 청하군 했다. 내가 깨칠 때까지 차근차근 가르치면서 잊지 않고 응원도 해주는 학원들이 곁에 있어 너무 고마웠다. 하루는 사정 때문에 춤교실에 나가지 못했는데 다음날에 이어진 춤동작들을 전혀 따라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날은 갈대처럼 흔들리는 마음을 간신히 부여잡고 심드렁해져 대충 수업을 때웠다. 수업이 끝나자 춤을 가르쳐준 적 있는 선배가 나한테 다가와서 전날에 오지 않은 연유를 묻고 나서 춤을 제대로 배우려면 한동안은 춤을 일순위에 놓는 것이 좋다고 따끔하게 일깨워주었다. 선배의 조언을 새겨들은 나는 그 뒤로 하루도 빠질세라 꼬박꼬박 춤교실에 나갔다. 한달 가량 지나자 선생님의 동작을 무턱대고 따라하던 데로부터 자신의 춤자세를 살펴보면서 조금씩 조률을 할 수 있을 만큼 수준이 부쩍 늘었다. 물론 몸 따로 마음 따로여서 애간장이 타들어갈 때도 있었지만 호흡, 손발의 놀림, 춤사위에 골고루 신경을 쓰며 열심히 춤을 배워나갔다. 논 자취는 없어도 공부한 공은 남는다고 어느덧 춤동작 몇개를 제법 멋지게 다룰 수 있게 되자 서서히 춤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였다. 어느 날, 시조카에게 요즘 춤교실에 다닌다고 자랑했더니 한복을 가져다줄 테니 무용복으로 고쳐입으라면서 진달래색 한복 한벌을 가져왔다. 시조카의 배려가 참 고맙게 느껴지는 순간이였다. 나는 이튿날로 문화와 함께 서시장에 찾아가 그 한복에 어울리는 곤색과 보라색 저고리감을 하나씩 끊어 복장집에 맡기였다. 빨리 입어보고 싶은 마음에 이틀후면 찾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고맙게도 급한 것 같으니 먼저 해주겠다며 시원하게 대답해주었다. 기분이 붕 뜬 나는 시장을 돌다가 빨간 바탕에 자잘한 눈꽃 무늬가 돋친 저고리감까지 한벌 더 사서 복장점에 맡기였다. “넌 역시 춤을 좋아하는 게 맞구나. 난 춤교실에 다닌 지 반년이 되여서야 겨우 무용복을 한벌 갖추었는데. 넌 틀림없이 잘 배워낼 수 있을 거야.” 문화가 꿀물이 뚝뚝 떨어지는 달콤한 말로 응원을 보냈다. 추운 날씨에도 함께 시장을 돌면서 저고리감을 추천해주고 자기가 단골로 다니는 복장점을 소개해준 고마운 친구의 끈끈한 우정에 나는 마음이 더없이 따뜻해났다. 이틀후, 복장점에서 무용복을 찾아들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무용신에 받쳐신을 하얀 양말도 샀다. 예쁜 무용복을 차려입고 춤을 출 모습을 머리속에 떠올리면서 나는 무용복을 차려입고 사진을 찍어 가족 워이신 그룹에 올렸다. 어느새 둘째올케가 그걸 보고 이쁘다며 새것이나 다름없는 고급스러운 곤색치마가 있으니 가져다가 무용복으로 고쳐입으라고 하는 것이였다. 참으로 고맙고 반가운 일이였다. 다음날, 진달래색 치마에 보라색저고리를 받쳐입고 춤교실에 들어서니 학원들은 예쁘다면서 이구동성으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큰 거울에 비춰보니 확실히 나한테 잘 어울리는 차림새였다. 저도 모르게 자신감이 생기면서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피여올랐다. 수업을 앞두고 우리는 예전에 배운 내용을 한번 복습했는데 옷이 예뻐서 그랬던지 춤동작도 여느때보다 더 우아하고 예뻐보였다. 춤교실에서 배우는 춤동작은 날이 갈수록 배우기가 힘들어졌다. 다리를 들고 솟구치는 동작을 할 때면 다리가 후들거리고 땀방울이 송골송골 내돋쳤다. 선생님이 다가와 틀린 동작을 짚어주며 몇번이고 교정해주는데도 몸이 잘 따라주지 않았다. 그러자 또 수십쌍의 눈길이 나에게 쏠리는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리고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였다. ‘오늘의 부끄러움을 참고 견뎌야 배울 수 있다. 이제 몇년만 지나면 이 순간을 떠올리며 얼굴에 미소를 지을 날이 기필코 올 거야.’ 나는 슬며시 어금이를 깨물었다. 천부가 없으니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면 된다고 마음을 추슬렀다. 요즘 들어 춤이 나의 하루일과로 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나는 춤에 흠뻑 빠져있다. 학원들도 처음보다 몰라보게 나아졌다며 볼 때마다 고무와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참으로 친절하고 따뜻한 분들이다. 내가 힘들어하고 흔들릴 때마다 해주었던 그들의 고무와 격려는 나에게 보약이 되고 지팡이가 되여주었다. 집에 돌아와 춤동작을 익히다가 어려운 동작을 어렵사리 해낼 때면 나 자신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다. 작은 성적에도 만족할 줄 아는 것이 나의 행복비결이라고 할가. 두달을 넘어서자 나는 동영상을 보면서 〈노들강변〉 춤을 익혀냈고 몇가지 조선춤 기본동작도 소화해냈다. 이제 남은 몇가지 동작도 인내심을 갖고 차근차근 익혀나갈 것이다. 잠시는 고통이 동반되더라도 배움은 역시 즐거운 일임이 틀림없다. 나는 책을 보고 글을 쓰다가도 목덜미가 뻣뻣해나면 춤을 추군 한다. 반시간 가량 거울에 마주서서 춤 추는 그 시간 만큼은 하늘을 나는 기분이라고 할가. 가끔씩 “돈도 나오지 않는 춤을 배워서 뭐하냐? 그 시간이면 차라리 돈이나 벌겠다.”라며 권하는 친구들도 있다만 춤이 너무 좋다. 춤을 배우게 되면서 스스로 몸단장에 신경을 쓰게 되였고 성취감과 함께 즐거움을 만긱할 수 있어 너무 행복하다. 아직은 많이 서툴고 가끔씩 힘들 때도 있지만 흥겨운 가락이 나오면 저도 모르게 어깨를 들썩이게 된다. 전에는 쩍하면 침대에 몸을 맡기던 내가 이제는 수업이 없는 날이면 집에서 무용복을 입고 한시간 가량 춤련습을 하는데 그럴 때마다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행복의 엔돌핀이 용솟음쳐나오는 느낌이다. 매일 즐겁게 보내니 몸이 건강해지고 따라서 얼굴에도 생기가 넘쳐흐른다. 지난 30여년간 쭉 가정과 직장에만 충실해왔지만 요즘 들어 자신에게 속하는 행복을 찾아가는 과정도 역시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라는 걸 새삼 깨우치게 되였다. 춤교실은 우리 녀성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둘도 없는 아지트이다. 춤교실에 드나들면서 우리 부부 사이도 더욱 애틋해졌는가 하면 집안분위기도 한결 밝아지고 화기애애해졌다. 춤이라는 삶의 활력소가 나와 가족에게 행복의 깊이를 더해준 것이다. 생에 주어진 행복을 마음껏 누리지 못한다는 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일가? 남은 생에는 내가 원하는 걸 하나씩 찾아 즐기면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법을 익히려고 한다. 오늘은 춤교실에, 후날에는 노래교실, 랑송교실에 다니면서 더 늙기 전에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익히고 싶다. 오늘도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춤교실로 가는 길에 올랐다. 마음은 진작 춤교실에 날아가있다. 방불히 귀전에서는 흥겨운 가락이 울리고 눈앞에서는 우아한 춤사위가 어른거리는듯 싶다.
4    이순지년의 천륜지락 댓글:  조회:523  추천:0  2021-02-04
이순지년의 천륜지락 오성호 이 세상에 천륜지락 만한 즐거움이 없다고 한다. 이순의 나이에 귀여운 외손녀를 얻은 후로 가슴 벅찬 행복을 누리게 되면서 이 말의 의미를 심심히 깨닫게 되였다. 남자들은 사랑에 빠지면 바보가 된다더니 환갑나이가 된 내가 요즘 들어 딱 그런 기분이다. 황혼로맨스가 아니라 귀여운 외손녀한테 푹 빠져 천륜지락을 누리면서 그 즐거움에 흠뻑 취해 점점 행복한 바보가 되여가는 중이다. 외손녀가 태여난 후로 우리 량주는 외손녀의 해맑은 웃음에 홀랑 넘어가 날이 가는 줄도, 힘이 드는 줄도 모르고 그저 온 세상을 독차지한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내고 있다. 외손녀와 함께라면 그 즐거움의 끝을 알 수 없다. 아침에 잠에서 깨여나서부터 귀여운 외손녀는 우리에게 더없이 찬란한 웃음을 선물한다. 실눈을 짓고 캐득거리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 귀여운 모습에 우리 량주는 앞 다투어 외손녀를 안아주겠다고 야단법석을 떨어댄다. 나는 어떻게든 외손녀를 좀 웃겨보겠다고 사력을 다한다. 아무 것도 모르는 외손녀 앞에서 나의 18번 〈고향의 봄〉을 불러보기도 하고 얼씨구절씨구하며 어깨춤을 덩실대면 외손녀는 까만 두 눈이 올롱해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살짝 웃는다. 그러면 나는 더욱 흥이 나서 목청을 한껏 돋구고 팔다리에도 힘을 넣어 신나게 휘젓는다. 나중에 딸애가 찍어서 보여준 동영상을 보니 나의 그 우습강스러운 모습에 〈행복한 늙은 바보〉라는 제목을 붙이면 딱일 것 같았다. 그러나 가끔씩 섭섭할 때도 없는 건 아니다. 딸애는 내가 외손녀를 안을 때마다 잊지 않고 이렇게 한마디 건넨다. “아버지, 좀 조심스레 안아주세요.” 여리디여린 아기가 혹여 다칠가 봐 딸애는 한시도 시름을 놓지 못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알아, 걱정하지 말아.”라며 퉁명스레 대꾸한다. 품에 안은 외손녀를 내려놓을 때에도 딸애는 또 한바탕 잔소리를 퍼붓는다. “아버지, 좀 천천히 내려놓으세요.” 이렇게 매번 신경을 도사리는 딸애한테 섭섭한 마음이 들다 못해 저도 모르게 반발심까지 일어났다. ‘이건 해도해도 너무한 게 아닌가? 내가 뭘 어쩐다고? 외손녀를 아끼고 사랑하는 내 마음을 네가 뭐 안다고 그래.’ 그래도 나를 보며 방글방글 웃어주는 귀여운 외손녀를 봐서 화를 꾹꾹 눌러놓고 능청을 떨어댄다. “아가야, 넌 이 할아버지 마음을 잘 알지? 너는 이 할아버지와 언제나 한편이지? 그렇지?” 이렇게 ‘상처 입은’ 마음을 스스로 달래면서 딸애 앞에서 보란듯이 외손녀의 야들야들한 볼에 살짝 뽀뽀를 한다. 그러면 옆에 있던 안해가 외손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한다는 말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호호, 얘가 무슨 할아버지와 한편이겠어요? 제 엄마와 한편이지.” “그런가?” 번연한 답인 줄 알면서도 되묻다가 안해와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껄껄대며 멋적게 웃어버린다. 하긴 외손녀와 딸 그리고 나 사이에 무슨 편 같은 걸 가를 일이 있겠는가. 외손녀가 태여난 후로 우리 량주는 외손녀를 돌보는 한편 산후몸조리를 하는 딸애를 돌보느라 밤낮이 따로 없이 바삐 보내고 있다. 안해는 매일같이 외손녀와 딸애를 챙기느라 그들 옆에서 새우잠을 청하면서 하루도 편하게 쉬여본 적이 없다. 밤중에도 몇번씩 일어나 분유를 풀어 아기에게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느라 시름 놓고 잠을 청할 새마저 없다. 나도 덩달아 밤중에 여러번 일어나는 고역을 치러야 했는데 그 바람에 밤잠을 설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때가 수두룩하다. 한번은 외손녀를 품에 안고 달래다가 그 맵시로 쏘파에서 끄떡끄떡 졸고 있는 안해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게 되였다. 쌔근쌔근 단잠이 든 외손녀를 꼭 껴안은 손목에는 너덜너덜해진 파스가 붙어있었고 물집이 잡힌 입을 맥없이 헤벌리고 있는 그 모습을 보노라니 저도 모르게 마음이 짠해났다. 나는 딸애를 불러다가 외손녀를 안아가게 하고는 안해를 쏘파에 편히 눕힌 뒤 이불을 덮어주었다. 이렇게 매일 버겁도록 힘든 ‘전쟁’을 치르면서도 우리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날 줄 모른다. 외손녀의 귀여운 표정, 작은 몸짓 하나하나에 우리는 집안이 떠나갈듯 웃는다. 가끔은 리유없이 시물시물 웃을 때도 있다. 처음 리유식을 받아먹을 때 숟가락을 꼭 물고 놓지 않는 외손녀의 엉뚱한 모습에 폭소를 터뜨렸고 안해가 옆으로 눕혀놓고 기저귀를 바꿔주는데 “뽕”하고 방귀를 뀌고는 머리를 돌려 제 엉덩이를 돌아보는 모습이 능청스러워 배를 끌어안고 웃었다. 내가 안아주면 징징거리다가도 딸애가 안아주면 좋다고 들까불며 제 엄마의 어깨너머로 캐드득거리면서 숨박곡질하듯 나를 훔쳐보는 모습에는 맹랑해서 피씩 웃고 만다. 태여나서 5개월 가량 반듯이 누워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던 외손녀가 하루아침에 한다리를 들어 다른 다리 우에 포개놓고 어깨를 들썽거리더니 머리를 번쩍 추켜들고 엎치는 순간, 우리는 마치 대단한 기적이라도 일어난듯 박수를 치면서 “야, 만세! 우리 손녀 만세!” 하고 환호했다. 아픈 예방주사를 두대 맞고도 울지 않던 날에는 집안에 녀장부가 태여났다고 하면서 이제 커서 어떤 인물이 되려고 저럴가 하고 즐거운 상상에 잠겨보기도 했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금방 엄마가 된 딸애가 수술실에서 나오는 순간 나는 목이 메여 말없이 딸애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손녀가 태여난 기쁨이야 이루 다 말할 수 없지만 얼굴이 백지장같이 창백해진 딸애의 모습을 보니 한편으로 마음이 알알해났다. 이윽고 큰일을 해냈다며 손등을 다독여주니 딸애는 눈물을 글썽이며 울먹이였다. 내가 아기가 우리 이쁜 딸을 닮아 무척 귀엽다고 치하하자 파릿한 딸애의 얼굴에 금방 함박꽃웃음이 어리였다. 그 순간 만감이 교차하면서 저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났다.   나중에 딸애는 살폿이 웃으면서 우리 량주에게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아기가 저 보고 웃을 때면 기분이 참 좋아요. 아버지, 어머니도 전에 제가 웃으면 기분이 즐거웠지요? 참, 그 때 많이 웃어주지 못해서 너무 미안해요.” 그러면서 밤새 창작한 작품이라며 시 한수를 우리에게 보내왔다. 그 시를 그대로 적어본다.   엄마가 되여 엄마에게         엄마가 되여서야 떠올랐습니다 훌쩍 뛰며 신나하는 내 모습에 행복해하시는 엄마의 모습이   엄마가 되여서야 떠올랐습니다 풀이 죽어하는 내 모습에 안타까워하시는 엄마의 모습이   …   어린 외손녀가 딸애로 하여금 모성애의 진의와 부모 사랑을 새삼 깨우치게 한 모양이다. 우리는 딸애의 마음이 하도 갸륵하여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환갑나이의 우리를 세상 부러울 것 없는 행복한 ‘바보’로 만들어주고 슴슴하던 생활에 활력을 부여해줌과 아울러 몸과 마음을 젊어지게 해준 외손녀에게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매일 하많은 재롱을 우리에게 선물하는 아가야, 사랑하는 아가야, 지금처럼 쭉 무럭무럭 잘 자라다오!
3    꿈의 기도 댓글:  조회:486  추천:0  2021-02-04
꿈의 기도 고려화 나이가 들수록 나를 더욱더 무겁게 짓누르는 무게는 이미 과체중인 몸무게도 아니고 육아와 가게 일을 병행해 심신이 피페해지는 삶의 무게도 아니다. 예고없이 찾아오는 죽음의 무게, 그것이 제일 무겁고 두려울 뿐이다. 요즘 판타지드라마를 보면서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정말로 전후생이 존재한다면 아마도 죽음의 무게가 그리 무겁지도 덜 두려울지도 모르겠지만 예측 불가한 미지의 세계라서 그냥 희망사항에 그칠 뿐 그 무게와 두려움은 전혀 줄어들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직접 겪어보지 못한 이는 결코 리해하기 힘든, 심장이 멈춰버릴 듯한 숨 막힘에 눈물도 안 나오게 만드는 그 무게를 처음 실감하게 된 건 11년전이였다. 2009년 6월의 어느 날, 무더운 날씨임에도 그나마 카텐 사이로 솔솔 불어들어오는 바람 덕분에 집요하게 덮쳐드는 낮잠과 싱갱이질하던 중이였다. 집이라는 편안한 환경에서 하는 일이라 유치한 핑크색 잠옷 바람으로 컴퓨터 앞에서 가격 타협에 관한 일본 바이어의 메일 회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부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기다리는 회신은 안 오고 한국 전화번호가 액정에 떴다. 그 때까지만 해도 워이신이나 무료 국제전화 앱이 아닌 고가의 국제 전화비를 내면서 련락을 하던 세월이였다. 오랜만에 외국에서 오는 전화지만 이 시간대면 식당일에 한창 바쁜 엄마의 전화일 리 없고 한국에 간 지 1년이 되도록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채 놀고 있는 아버지의 전화일 거라는 추측에 얼굴부터 찡그리며 전화를 받았다. 그리 썩 반갑지 않은 간단한 겉치레 안부가 끝나자 아버지는 본론을 끄집어냈다. “누구한테서 들은 건데 산동 쪽에 좋은 약이 있대, 그거 사서 부쳐줘.” “또요? ” “이번이 마지막이야.” 거의 애원에 찬 힘없는 목소리였다. 매일같이 약을 드시기는 해도 약과 상극인 술을 하루도 빠짐없이 마신다고 엄마가 얼마전에 전화에서 늘어놓던 푸념이 떠올랐다. 낮에는 술을 마시고 쉬고 나서 저녁엔 몸을 혹사하며 힘들게 일하고 퇴근한 엄마한테 주정 아닌 주정을 한다는 아버지를 리해할 수 없었다. 담보로 망한 집안 꼴을 어떻게든 다시 일으켜보겠다고 출국을 했으면 열심히 일해서 보란듯이 귀국을 해도 모자랄 판에 술만 마시는 아버지가 야속했다. 크게 지장이 없는 병을 핑게로 일자리를 밥 먹듯이 바꾸며 거의 하루살이 인생을 살아가는 아버지 때문에 고생하는 엄마가 불쌍했다. 엄마에 대한 련민이 커질수록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굴린 눈덩이처럼 커져 이젠 약을 사서 부쳐주는 일도 싫어졌다. “아니, 아무리 좋은 약을 드시면 뭘 합니까? 술 마시면 그냥 심해지는데… 아버지는 엄마가 불쌍하지도 않습니까? 한평생 고생만 시키고 미안하지도 않냐구요? 그리고 이젠 나랑 사위한테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나도… 숨 좀 쉬자구요…” 결국 전화는 속사포같이 쏟아지는 나의 원망 섞인 잔소리로 막을 내리고 그 흔한 몸 건강하게 잘 지내라는 따뜻한 인사도 없이 끊어져버렸다. 누가 먼저 어떻게 끊었던지는 이젠 기억이 가물가물해져 확인할 길조차 없는 그번 통화가 우리 부녀지간의 마지막 통화가 돼버릴 줄 누가 알았으랴? 그 날 밤, 마지막 부탁이라던 애원에 섞인 아버지의 힘없는 목소리가 자꾸 메아리처럼 울려와 온밤 뒤척이다가 이튿날 결국 그 약을 주문했다. 며칠후, 그 약과 함께 신혼집 사진 몇장도 한국으로 보냈다. 졸업후, 잠간 출근하다가 남편이랑 같이 장사의 길로 들어선 지 2년도 안되여 길림시에 우리 둘의 힘으로 신혼집을 장만했다. 한국에 계시는 부모님은 우리의 신혼집을 무척이나 궁금해했다. 썩후에야 엄마한테서 전해들은 얘기인데 약과 신혼집 사진을 받고 나서 아버지는 약보다는 딸내미의 신혼집 사진을 더 반가워하셨단다. 친척, 친구들만 만나면 고이 간직한 사진을 꺼내보이며 애처럼 자랑을 늘어놓았단다. 그 당시엔 시내에 층집을 산 친척, 친구들이 거의 없었고 내 또래에 자기 힘으로 마련한 거라니 아버지는 더욱 뿌듯해하셨던 것 같다. 그런데 그게 아버지한테 해드린 마지막 효도가 될 줄은 몰랐다. 똑같은 일상에 지루함을 느낄 새도 없이 훌쩍 한달이 지나갔다. 7월 중순의 어느 날, 새벽에 엄마한테서 걸려온 전화에 비몽사몽이였던 나는 얼굴에 랭수 한그릇 맞은듯 잠을 확 깼다. 수화기 저편에서 아버지가 위독하다고 말씀하는 엄마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해서 응급실에 실려와서 이것저것 검사를 받던 과정에 혼수상태에 빠졌고 방금전 중환자실로 옮겨갔다고 했다. 신분증, 호구부 등 필요한 서류들과 옷 몇견지만 대충 챙기고 남동생과 함께 무작정 떠나기로 결정했다. 일단 려권부터 만들어야겠다는 생각 그리고 려권만 있으면 금방이라도 한국으로 날아갈 줄 알았던 어리석은 판단이였다. 그러나 려권이 나오기도 전에 아버지는 결국 돌아가셨다. 하지만 비보를 접하고 나서도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았다는 게 더 이상했다.  운명의 장난인지 한국에서 아버지를 화장하는 날이 마침 나의 27살 생일날이였다. 생애 제일 우울한 생일날, 난 결코 울지 않았다. 아버지의 골회함과의 첫 대면에도, 골회를 강에 뿌리러 가는 길에 기절하신 엄마의 모습에도, 흰가루가 되여 강물이 흐르는 대로 멀어져가는 아버지의 뒤모습이 아른거릴 때도 눈물은 결코 나오지 않았다. 문득 ‘나에게 아버지란 과연 어떤 존재였을가?’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내가 과연 아버지를 사랑하기는 했을가? 어릴 때부터 뭐든지 꾹 참고 견뎌내서 바늘로 찔러도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는 독종이 나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인 줄 알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란 걸 느끼게 되였다. 그 해, 인순이의 히트곡 〈아버지〉라는 노래를 들으면서 나는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눈물을 한순간에 펑펑 쏟아내고 말았다. 아버지와 나 사이를 설명해주는 마음에 와닿는 가사를 보고 또 보면서 나는 묵묵히 눈물을 훔치고 또 훔쳤다. 엄마는 아들을, 아버지는 이 딸을 더 이뻐해주셨단 걸 번연히 알면서도 어느 순간부터였던지 미운 감정이 한을 담은 담배연기처럼 슬슬 피여오르기 시작했음을 인정하기 싫었던 거였다. 본인의 잘못된 선택으로 아버지는 그 번듯한 직장에서 쫓겨나고 엄마 가게마저 말아먹었다. 결국 한국으로 돈벌이를 떠났던 엄마는 사기당해서 되돌아왔고 진에 있던 기와집은 진작에 팔아버렸는지라 다시 농촌으로 돌아와 평범한 농사일을 시작해야만 했었다. 그 때라도 툭툭 털어버리고 용기 내여 일어나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더라면 퍼그나 존경스러웠을 텐데 아버지는 결국 우리한테 나약함의 끝을 보여주고야 말았다. 역경은 친구를 시험해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더니 잘 나갈 때 들러붙던 친구들에 대한 배신감 그리고 담보받고 도망친 친구에 대한 분노를 술로 삭히면서 아버지는 결국 집식구들한테 화풀이하는 그런 구질구질한 삶을 살아가셨다. 일말의 희망도 엿볼 수 없는, 연기가 없는 전쟁터나 다름없는 집에 발을 들여놓는 그 순간부터 직격탄을 맞은듯 무너져내리는 느낌이였다. 빨리 그런 지긋지긋한 집구석을 벗어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 바로 공부였다. 일부러 집과 멀리 떨어진 대학을 선택하게 된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그렇게 싫어했던 아버지였는데 누군가의 입에서 아버지란 단어를 들을 때마다, 아버지를 다룬 노래를 들을 때마다, 아버지가 생전에 반기던 음식을 볼 때마다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펑펑 쏟아지는 건 무슨 영문일가? 그냥 물먹은 솜마냥 무거운 짐으로 느껴졌던 아버지의 빈자리는 생각보다 크게 다가왔다. 결혼식 때, 남들처럼 아버지의 손을 다정하게 잡고 결혼식장에 들어가는 그 흔한 장면을 연출할 수 없어서 먹먹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처음 집에 데려간다는 4년 사귄 남자친구가 한족이라는 소식에 아버지는 뒤산에서 오래오래 슬피 울었다고 한다. 딸에 대한 아버지의 그 애틋한 마음을 이제야 깨닫게 되여서 뒤늦은 후회가 갈마든다. 내가 금방 태여났을 때, 남존녀비 사상이 심했던 아버지는 딸이란 말에 얼굴 한번 들여다보지 않고 그대로 문을 박차고 술 마시러 갔다고 한다. 하지만 그 뒤로 아버지는 딸바보가 되여 친구와 동료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항상 내 자랑만 늘어놓았다.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알면서도 엄마 생일엔 작은 선물이라도 여러번 챙겨줬으면서 아버지 생일엔 생일을 축하한다는 간단한 메시지조차 보내주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난 엄동설한의 얼음물처럼 차가운 딸, 못된 딸이였을지도 모른다. 마지막 통화마저 비수 꽂힌 잔소리로 상처를 주었으니 후회에 숨통이 조여드는 듯한 그 후유증은 지독하게 오래도 갔다. 두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면서 부모의 심정, 부모의 립장을 차츰 리해할 수 있게 되였다. 자식들이 아플 때면 대신 아파주지 못해 안달이 나고 내 자식이 다른 집 애들보다 잘 입지 못하고 잘 먹지 못할 때면 누구보다 안타까운 게 부모 심정이 아닐가? 아버지도 분명 이런 심정이였을 것이다. 자기 때문에 가족 모두가 생활고를 겪는 현실 앞에 그걸 돌이키기엔 너무 무기력한 자신한테 화가 났을 것이고 가족 모두에게 더없는 죄책감으로 힘들었을 것이다. 가끔 소등후 카텐 사이를 용케 비집고 새여들어오는 가냘픈 달빛을 바라보면서 이런 부질없는 생각을 해보았다. 아버지가 사면팔방이 어둠으로 꽉 찬 마음이라는 작은 방에 갇힌 채 차가운 세멘트바닥에 앉아 좌절감에 빠져 방황할 때 내가 아버지의 은은한 달빛이 되여주었더라면,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자욱한 안개 속에서 소주병과 동무할 수밖에 없는 고독한 심정을 조금만 리해해줬더라면 그 이는 조금이라도 덜 외롭지 않았을가? 그 당시 모든 게 아버지 탓이라고 내몰지만 말고 이 또한 살면서 겪을 수 있는 좌절이라고 다독여줬더라면 결과는 조금이라도 달라지지 않았을가? 원망 대신 조금이라도 응원을 해줬더라면 아버지는 술을 덜 마셨을 테고 그러면 페와 간이 반 이상 하얗게 되도록 그 아픔을 못 느낄 정도로 무뎌지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가? 혹여 아버지가 아픈 걸 느꼈음에도 죄책감에 병원에 가보자는 말 한마디 못한 채 술을 마시면서 자신을 마비시켰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떠올리니 목이 메여와 하나 또 하나의 실면의 밤을 보내야만 했다. 무수한 실면 끝에 힘들게 잠들면 꼭 아버지가 꿈에 찾아온다. 호기심에 눈을 한웅큼 먹고 배가 아파서 데굴데굴 구르는데 아버지가 나타나는 꿈을 꾸었는가 하면 아무 말 없이 흐뭇하게 웃으시다 홀연히 사라지는 꿈도 꾸었다. 아버지는 과연 이 못난 딸을 용서했을가? 수없이 용서를 빌고 또 빌었지만 그것 또한 자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핑게가 아닌가 싶다. 그저 아버지가 저세상에서는 더 이상 아프지 말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할 뿐이다.
2    첫눈 댓글:  조회:458  추천:0  2021-02-04
첫눈 최준봉 흰 눈이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해변가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도시에 내리는 첫눈이다. 올해 첫눈은 여느 해보다도 푸근하게 내린다. 하늘의 선녀인양 하늘하늘 춤 추며 내리는 흰 눈이 어느덧 온 대지를 흰 비단으로 뒤덮어 산과 들은 어느새 곱게 소복단장을 하였다. 나는 창가에 앉아 창밖에서 쏟아지는 흰 눈을 하염없이 내다보았다. “눈이 내리는 게 그렇게 희한함둥?” 평소에 말수가 적은 안해가 나의 곁으로 다가오면서 한마디 건넸다. “희한하다기보다는 첫눈을 보니 어쩐지 마음이 설레는구만.” 안해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눈길이 마주치자 살며시 고개를 숙인다. 나는 안해의 손목을 슬며시 잡았다. “쯧쯧— 왜 이러시우? 주책 맞게스리. 그러다 애들이나 보면 어쩌려구.” 안해가 나의 손등을 찰싹 후려치면서 눈을 힐끔 흘겼다. “첫눈이 내리던 날 우리가 혼례를 치르던 일이 생각나우?”  “그럼요. 그게 엊그제 일 같은데 벌써 40년이 흘렀다니…” 먼산에 눈길을 주던 안해가 입을 열더니 말끝을 흐렸다. 우리 량주는 창가에 나란히 서서 밖에서 펑펑 쏟아지는 눈을 바라보며 추억의 쪽배에 몸을 실었다. 1975년 봄, 나는 부대에서 제대되여 룡정역에 배치받았다. 그 때 이미 30살을 앞둔 로총각인지라 나는 장가 비위가 부쩍 동했다. 그러나 만나본 처녀마다 이런저런 구실을 대면서 구차한 우리 집에 시집 오려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부대에서 갓 제대한 나는 살림집이 없었고 늙은 어머니마저 시골에 계셨으니 말이다. 그런데 한 처녀와의 우연한 만남으로 나는 진정한 사랑을 느낄 수 있게 되였다. 몸매가 늘씬하고 치렁치렁한 쌍태머리를 길게 드리운 함박꽃 같은 처녀였다. 첫 만남부터 나의 어려운 가정형편을 숨김없이 들려주었더니 처녀는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게 돈이예요. 사람만 좋으면 돼요.”라고 대답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고 보니 그녀는 인물도 예쁘지만 마음씨는 그보다 더 고운 속 깊은 처녀였다. 그후로 우리는 종종 만나서 사업과 리상을 담론하는 가운데 서로를 깊이 알아갔다. 어느 날, 우리는 라이라크향기가 물씬 풍기는 해란강강변을 따라 어깨나란히 거닐었다. 강변 곳곳에서 쌍쌍이 사랑을 속삭이는 청춘남녀들의 다정한 모습이 눈에 띄였다. 나는 용기를 북돋아 처녀에게 나의 진정을 고백했다. “동무를 안해로 삼고 싶소.” “저도 동무와 영원히 함께 하고 싶어요…”  처녀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그녀를 품에 와락 끌어안았다. 우리의 사랑을 축복이라도 하듯 그 날 따라 하늘의 뭇별들이 유난히 깜빡거리는가 하면 개울가에서는 개구리들이 구성지게 노래를 불러댔다. 우리 둘은 날을 거듭하면서 서로에 대한 진정을 확인해가면서 청춘의 멜로디를 엮어갔다. “사돈보기도 안한 애가 만날 총각하구 붙어다니다 사달이라도 치면 어떻게 할라구.” 장모님 되실 분이 그런 우리를 지켜보면서 걱정스레 던진 말씀이였다. 우리는 서둘러 사돈보기를 하고 그 해 10월 24일을 결혼날자로 정했다. 그런데 그 무렵 고민거리가 생겨났다. 마침 ‘문화대혁명’시기인지라 시집 가는 새색시가 너울을 쓰는 걸 자산계급의 썩어빠진 관습이라고 금지하던 형국이였다. 결혼식을 치르는 날에 새색시가 너울을 쓰지 못한다고 하니 못내 마음에 걸리였다. 대지에 가을자취가 채 가시지 않은 마가을, 우리는 예정 대로 결혼식을 올리였다. 그런데 그 날 따라 새벽부터 흰 눈발이 날리였다. 여느 해보다 일찌감치 내리는 첫눈이였다. 우리의 결혼식은 더없이 검소하게 치러졌다. 나는 부대에서 갖고 온 데트론군복에 철로에서 발급받은 작업용 구두를 받쳐신었다. 우리는 기차에서 내린 다음 뻐스도 통하지 않는 길에 올라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눈발이 굵어지더니 함박눈으로 이어져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우리 뒤로 두쌍의 발자국이 흰 눈밭에 나란히 도장을 찍어놓았고 새색시의 머리에는 흰 ‘비단너울’이 들씌워져있었다. 우리의 결혼을 축복해주기라도 하듯 하늘이 내려준 흰 눈이였다. “야, 곱다야. 오늘은 새색시가 흰 너울을 썼구만.”  “이런 눈은 30년에나 한번 내릴가 말가 하는 눈이라우. 이런 날 시집 오는 색시는 아들딸 쑥쑥 낳구 잘살 거라우.”  예로부터 잔치날에 눈이 오면 색시가 친정으로 돌아갈 길이 막혀 시집에 마음을 딱 붙이고 잘산다느니 하면서 하객들이 이구동성으로 찬탄하는 소리에 우리의 아쉬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순결한 흰 눈, 그건 안해에게 내려준 예쁜 ‘너울’이였고 우리의 결혼식을 축복하는 하늘의 선물이였다. 이렇게 첫눈을 맞으면서 들뜬 마음으로 장가 들고 시집 간 게 어제일 같은데 벌써 70 고개를 훌쩍 넘어섰다. 그동안 자식들도 모두 장성하여 잇달아 대학문을 나와서 가정을 이루었고 하나 둘 태여난 귀여운 손자, 손녀들도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으니 우리 량주는 이 세상에 부러울 게 없이 다복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이런 오늘의 우리를 축복해서 그 때 내려준 선물이였을가. 차마 즈려밟기조차 아쉬울 만큼 하얀 그 날의 첫눈,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 속의 첫눈이였다.
1    그대도 누군가에게 한줄기 빛이였기를 댓글:  조회:528  추천:0  2021-02-04
그대도 누군가에게 한줄기 빛이였기를 주련화 요즘 나는 15년째 이어오고 있던 직장생활을 접고 작은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주택가에 위치한 90여평방메터 되는 1층짜리 집을 임대하여 각종 생활용품과 식품들을 팔고 있는데 쉽게 말하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소매점이다. 가게는 내가 사는 곳과 걸어서 15분 거리에 위치해있는데 그 거리를 나는 매일이다싶이 유모차에 두살배기 둘째를 앉히고 걸어다닌다. 먼거리도 아닌데 굳이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리유를 짚으라면 자주 안아달라고 보채는 딸애를 달랠 수 있을뿐더러 유모차바구니에 도매해온 물건들을 싣고 다닐 수가 있어서이다. 또 한가지 빠뜨릴 수 없는 원인은 바로 내가 원하는 대로 속도조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영업이니 출근 때보다 훨씬 자유로울 거라고 부러워할지도 모르겠지만 매상은 꼭 쏟아붓는 정력과 정비례된다는 걸 가게를 경영하면서 알게 되였다.  8시에 문을 열어서 저녁 11시에 문을 닫을 때까지 꼼짝없이 가게를 지키고 있어야 하는 게 이 업종의 룰이다. 다른 가게들을 보면 보통 12시까지 영업을 하지만 아직은 어린 둘째 때문에 너무 늦은 시간까지 영업을 할 수가 없어서 11시로 시간을 정하게 되였다.  막로동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냥 쉬운 일이라고 여긴다면 그건 오산이다. 수요에 따라 음료수를 박스 채로 옮기고 배달하는 일이 비일비재인가 하면 10전을 가지고 흥정하는 나이 지긋한 할머니들과 입씨름을 하고 나면 온몸의 기가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다. 까짓 몇십전을 안 받는다고 병이 나느냐 라며 비꼬는 분들도 있겠지만 소매점 경영이 워낙에 티끌 모아 태산이 되는 벌이라 나 역시 한발작도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그 돈에서 첫째 학원비에 둘째 간식비까지 나오니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였다.  도매시장에 가야 할 때면 자리를 비운 사이 고객들이 가게에 들렸다 그냥 가는 게 두려워 유모차를 밀고 20분 되는 거리를 신나게 질주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아마 그 길을 자주 드나드는 분들이라면 한 중년의 녀자가 유모차를 끌고 머리칼을 날리면서 달리는 모습을 심심찮게 봤을 것이라 짐작된다.  다들 알다싶이 소매점은 저렴한 가격으로 남녀로소 불문하고 마음 놓고 소비할 수 있는 곳이거니와 갑질도 가능한 곳이다. 가끔은 내가 햇내기인 줄 알고 그 구멍을 노려 가짜 돈을 쓰러 오는 손님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데서 산 물건을 들고 와서 다짜고짜 물려달라고 어거지를 쓰는 어르신들도 있다. 인간관계가 사람을 이렇게 지치게 할 수도 있다는 걸 온몸으로 체감하면서 마음이 너덜너덜해질 때가 많았지만 그래도 마음을 따스하게 녹여주는 손님들도 있어 그 온정에 눈시울이 뜨거워난 적도 있었다. 이제 그 이야기들을 공유하려 한다.   첫번째 이야기 필요할 때마다 나는 가끔씩 20분 거리에 있는 시장에 가서 물건을 도매해온다. 가게에 나 혼자뿐인지라 유모차에 딸애를 앉히고 차바구니에 물건을 싣는 경우가 대부분이였다.  그 날도 시장에서 찐빵과 국수를 도매해서 유모차 바구니에 실었다. 다른 때 같으면 쉼없이 쫑알거렸을 딸애가 그 날 따라 웬지 너무 조용했다. 제대로 자지 못해서인지 딸애는 혼곤히 잠이 들어있었다. 유모차 덮개를 내리고 옷을 벗어서 배를 가려주다 어망결에 뒤에 멈춰서있는 검은 승용차 한대를 발견하고는 흠칫 놀랐다. 길은 좁고 그 시간이였으면 출근길일 수도 있는데 승용차 운전사는 그대로 멈춰선 채 유모차를 끌고 가던 생면부지의 한 녀성을 위해 자신의 보귀한 시간을 할애해주었던 것이다.   낯선 사람의 작은 배려에 가슴이 뭉클해지는 순간이였다. 고개를 살짝 내려 고마움을 전하고 나서 나는 갈길을 재촉했다. 그 날 따라 해빛이 유난히 따스했던 거로 기억된다.   두번째 이야기 몇년전, 워이신이 보급되면서 나는 틈만 나면 모멘트를 훑는 습관이 생겼다. 모멘트에 내 일상을 공유함과 아울러 지인들의 일상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이제 갓 두살을 넘긴 딸애는 아직도 새벽이면 한번씩 깨여나군 했는데 그 날도 이른새벽에 딸애를 달래서 자리에 눕히고 나니 잠이 말끔히 사라졌다. 뒤척거리다가 하는수없이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약간 이른 시간대였음에도 모멘트에는 새로운 내용이 떠있었다. 어딘가 낯선 프로필 사진이여서 클릭해보았더니 며칠전에 친구로 추가된 우유배달원이였다.  박스에 가득 담긴 생우유를 배경으로 손가락으로 ‘v’자를 하고 있는 30대 초반의 남자 모습이 카메라에 잡혀있었다. 얼굴이 크게 나온 걸로 보아 셀카임이 분명했다. 사진과 함께 “래일을 위해 분투하자!”라는 문구도 함께 적혀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한창 꿈나라에서 헤매고 있는 시간에 주소 대로 우유를 한병씩 배달하는 일도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니리라. 엘레베터가 있는 아빠트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을 경우 얼마나 많은 계단들을 오르내려야 할가? 무심코 그의 프로필 사진을 클릭해보았다. 돌이 갓 지나보이는 작은 꼬마와 환하게 웃는 부부가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였다. 한눈에도 무척 행복해보였다. 딸애가 곤히 잠든 시간에 기상해서 딸애의 뺨에 뽀뽀를 해주고 우유박스를 들고 아빠트단지 사이를 누비면서 우유를 배달하고 있을 남자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날씨가 춥든 덥든 하루도 거르지 않고 꾸준히 견지할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사진 속의 저 귀여운 꼬마 때문이였겠지? 딸애가 바스락 소리를 내면서 자세를 바꿔 누웠다. 배까지 내려온 이불을 꼼꼼히 여며주느라니 저도 모르게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진다. 말도 잘 번지지 못하지만 언제나 힘이 되여주고 날개가 되여주는 딸애의 존재로 또 활기찬 하루를 열어갈 힘이 생긴다.  그래 분투, 바로 그거야. 머리 속에 우유배달원의 모멘트 내용을 되새기면서 다시 잠을 청했다. 면목을 잘 모르는 사이지만 누군가로부터 기운을 받는 이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세번째 이야기 그 날도 거의 11시가 되는 시간에 가게일을 마감하고 나서 가로등 불빛을 온몸에 받으며 귀가하는 중이였다. 유모차에 앉은 딸애는 마냥 신나서 〈세상에서 엄마가 좋아〉라는 노래를 요청해왔다. 차량과 행인들이 한적해진 거리에서 발자국소리와 노래소리가 하모니를 이루면서 울려퍼져나갔다. 엄마가 되면 부끄러움도 사라진다더니 틀린 말이 아닌가 보다. 거리에서 고성방가를 하는 날이 오게 될 줄을 언제 상상이나 해보았겠는가! 문득 부패한 냄새가 코를 자극하기에 고개를 들었더니 쓰레기회수가 한창이였다. 한 중년남자가 아빠트단지 생활쓰레기 박스를 한곳에 모아놓고 쓰레기차에 싣고 있는 중이였다. 아마도 역한 냄새 때문에 이 늦은 시간대를 선택한 모양이다. 바로 그 때, 철 없는 딸애가 쫑알거렸다. “엄마, 냄새가 너무 고약해.” 다섯개나 되는 아빠트단지의 생활쓰레기를 한곳에 모아놓았으니 그 냄새가 코를 싸쥐게 하는 건 당연한 일이였다. 에돌아가려고 유모차바퀴를 돌리는데 중년남자의 핸드폰이 울렸다. 화상통화요청이였다.  줄느런하게 널려져있는 쓰레기통들이 화면에 잡히는 게 두려웠던지 남자는 내가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야밤에 낯선 이의 통화내용을 엿듣고저 했던 건 아니고 다만 거리가 한산해서 본의 아니게 그 통화내용이 내 귀에 전해졌던 것뿐이라고 덧붙이고 싶다.  “아빠, 언제 와요?” 애된 목소리로 보아 아마 딸애랑 비슷한 나이로 추정되는 어린아이였다.  “아빠 인차 갈게. 일이 거의 마무리되거든.” “올 때 잊지 말고 막대사탕 사와요.” “그럼, 꼭 사갈게.” 이어 중년녀자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일찍 들어와요. 너무 무리하지 말고…” “알았어, 인차 갈게.” “아직도 안 끝난겨?” 이어 석쉼한 로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끝나니 어머님 먼저 쉬세요.” 중년남자는 일부러 톤을 높여 명랑하게 대답했다. 수백개가 되는 쓰레기통을 보면서 한숨을 짓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문외한인 내가 어림짐작해도 한시간은 더 이어져야 할 작업량이였다. 통화를 끝내고 쓰레기통을 나르는 중년남자의 손놀림이 분명 빨라지고 있었다.  갑자기 누군가로부터 위로를 받는 느낌이 들었다. 가족들한테 보이기 싫은 쓰레기더미가 나에게도 분명히 있을 터였다. 다만 지켜야 할 사람이 있고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기에 아닌 척을 하면서 모지름을 쓰고 있었을 뿐이였다. 곰곰히 사고하고 나서 나나 그 중년남자나 이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가장중의 일원이라는 결론을 정리해냈다. ‘힘내세요.’ 나는 속으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나에게 하는 속삭임이기도 했다. 문득 이 시간대에 유모차를 끌고 나타난 생면부지의 중년녀인이 그 남자의 눈에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비쳤을가 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뭘 하는 사람인지, 이 시각에 왜 유모차를 끌고 그 자리에 나타났는지 그 남자는 알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남자가 이것 하나만은 알고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 역시 얼마전까지만 해도 가족을 위해 자식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음을… 사람은 때론 나를 닮은 사람이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로를 받게 되니까. 사랑이라고 쓰기에는 버겁고 관심이라고 쓰기에는 무언가 부족하지만 그래도 마냥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는 것들, 나는 그것들을 위로라고 부르고 싶다.   이 세상에는 태양처럼 이글거리지도, 열렬하지도 않지만 조용히 한줄기 빛으로 다가와 우리들을 따스하게 해주는 무언가가 있다. 그렇게 위로가 되여주는 것들이 있어서 참 고마운 세상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텅텅 비여있는 가슴을 채우려면 얼마 만큼의 사랑이 필요한가고.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조금이면 돼, 그게 정녕 위로라는 이름으로 다가갈 수만 있다면…” 나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작은 한줄기 위로가 되기를 바라면서 빛이 넘치는 따스한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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